겨레의 함성 독립의 희망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탄생

INPUT SUBJECT

글 박영규 작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탄생


국난에서 벗어나고자 온 국민이 나섰던 감격의 그 날 1919년 3월 1일. 3·1운동이 어언 100주년을 눈앞에 두고 있다. 이를 기념하여 월간 『독립기념관』은 2019년 3월까지 ‘겨레의 함성, 독립의 희망’을 통해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역사를 다루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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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단결선언문(1917)

 

 

3·1운동 그리고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

1910년대 초반 우리나라의 독립운동 세력은 국내외에 걸쳐 독자적으로 활동하였다. 이에 세력들 간의 소통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고 효과적인 연합활동 또한 기대할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여 유기적이고 효율적인 독립운동을 벌이기 위해 1917년 ‘대동단결선언’이 있었다. 발기인은 상하이에서 활동하고 있던 신규식이었고 박은식·신채호·윤세복·조소앙·신석우·한진교·박용만 등이 참가하여 함께 뜻을 모았다.

대동단결선언문에서는 순종의 주권 포기 행위를 국민에게 양도하는 것으로 해석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이 타당함을 밝혔다. 또한 일제의 국권 침탈로 인해 해외에서의 주권 행사가 필수불가결한 선택임을 덧붙였다. 대동단결선언문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대한 의지가 반영된 최초 문건이었던 셈이다.

이 선언은 해외 동포들에게 널리 알려졌으나 곧바로 대한민국임시정부 구성단계로 이어지지 못했다. 그런 가운데 1919년 국내에서는 3·1운동이 일어났다. 일제는 한국의 평화적인 시위대를 무력으로 진압하는 폭력적인 행위를 자행하였고 이 사건을 두고 세계의 여론은 들끓기 시작했다. 영국이나 프랑스의 언론은 한국의 독립운동을 매우 깊게 다루었고, 미국 의회에서도 이 문제를 제기하였다. 해외에서 활동하던 독립투사들은 이러한 기류에 고무되어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박차를 가했다. 그만큼 3·1운동은 독립에 대한 민족적 열망을 피부로 느끼게 한 커다란 사건이었다.

이후 상하이·연해주·미국 등 해외는 물론이고 국내에서도 7개의 임시정부가 만들어졌다. 그 중 조선민국임시정부를 비롯해 고려공화국·간도임시정부·신한민국정부는 전단을 통해 임시정부 수립을 공표하였으나 구체적인 내용은 남아 있지 않다. 이런 이유로 상하이임시정부·한성임시정부·노령(러시아)임시정부 등 3개의 임시정부에 대해서만 그 내막이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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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만행을 다룬 외국신문 보도기사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통합과정

대한민국임시정부 탄생은 한성임시정부·상하이임시정부·노령임시정부의 통합에서 비롯되었다. 3·1운동 이후 여러 개의 임시정부가 동시다발적으로 만들어지자 이를 하나로 결합하려는 노력이 이뤄졌다. 하지만 대한민국임시정부 출범 간에는 다소간의 진통이 있었는데, 3개 임시정부의 구성을 살펴보면 그 원인을 자연스럽게 파악할 수 있다.

먼저 노령임시정부란 러시아령에 설치한 정부란 뜻으로 이를 이끌고 있던 인물은 이동휘였다. 노령임시정부의 정식 명칭은 ‘대한국민의회’로 그 뿌리는 1907년 대한제국의 군대해산 직후 연해주에 망명한 의병 조직이었다. 이들은 1910년에 13도 의군을 조직하고 유인석을 도총재로 추대했다. 이후 도총재 명의로 고종에게 연해주로 망명하여 망명정부를 수립할 것을 상소하기도 했다.

당시 실질적으로 13도 의군을 이끌고 있던 인물은 이상설과 이동휘였다. 이들은 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해 노력했고 1914년에 이르러 시베리아에서만 2만 명이 넘는 군대를 훈련시킬 능력을 갖추게 되었다. 13도 의군이 바라던 것은 러일전쟁으로, 러시아와 함께 연합군을 형성하여 일제를 공격한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이후 이상설을 정통령으로 삼고 대한광복군정부를 조직하였으나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함께 모든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게 되었다. 러시아와 일본이 연합군에 가담하여 한 배를 타는 바람에 어떠한 군사 활동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 가운데 이상설은 상하이로 떠났고 조직은 이동휘의 지휘 아래 움직이게 되었다.

그러나 1차 대전 중 러시아의 상황은 급변했다. 1917년 11월에 볼셰비키혁명이 일어나 소비에트 연방이 구축되면서 급격히 공산화가 진행되었다. 이에 이동휘는 소련의 힘을 이용하기 위해 ‘한인사회당’을 조직했다. 이후 흩어졌던 의병을 결집하여 시베리아에 출동한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기도 했다.

1918년에 1차 세계대전이 종결되고, 이듬해 3·1운동이 벌어지자 이동휘는 ‘대한국민의회’를 만들어 임시정부를 자처하고 나섰다. 이때 국민의회에서 발표한 행정부 인사의 면면을 보자면 다음과 같다. 대통령 손병희·부통령 박영효·국민총리 이승만·탁지총장 윤현진·군무총장 이동휘·내무총장 안창호·산업총장 남형우·참모총창 유동열·강화대사 김규식 등이었다.노령임시정부가 이런 내용을 발표한 때가 3월 17일이었다. 3개의 대한민국임시정부 중 가장 발이 빨랐던 셈이다.

한편, 대한민국임시정부 설립에 관한 논의는 상하이에서도 이뤄졌다. 상하이임시정부를 주도하고 있던 인물은 이동녕이었다. 그는 상하이 지역의 세력을 규합하여 4월 11일에 임시의정원을 조직하고 이틀 뒤인 4월 13일에 내각을 발표했다. 상하이임시정부의 행정을 맡은 인물을 살펴보면 의정원 의장 이동녕·국무총리 이승만·내무 안창호·외무 김규식·법무 이시영·재무 최재형·군무 이동휘·교통임시총장 문창범이었다.

그리고 가장 늦게 발족한 한성임시정부는 3·1운동이 진행 중인 3월 초 이교헌·윤이병 등이 제의하여 수립을 결의하였고 몇 번의 모임을 거친 후인 4월 23일 봉춘관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선포문을 발표하였다. 이때 발표된 내각 인사의 면면을 보면 집정관총재 이승만·국무총리총재 이동휘·외무 박용만·내무 이동녕·군무 노백린·재무 이시영·법무 신규식·학무 김규식·교통 문창범·노동 안창호·참모부총장 유동열 등이었다.

3개 임시정부의 내각 인사를 살펴보면 이승만·이동녕·이동휘 이 세 사람이 핵심 인물임을 알 수 있다. 서열을 보면 이승만이 1순위고 다음으로 이동녕과 이동휘 순이었다. 나이로 보자면 이동녕이 가장 많고 다음으로 이동휘·이승만이었다. 하지만 명성이나 영향력 면에선 이승만이 단연 앞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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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녕·이동휘·이승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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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국민의회 선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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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해주 한국인 분포도(1912)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탄생

대한민국임시정부 중에 가장 유연하고 합리적인 쪽은 상하이임시정부였다. 상하이임시정부는 우선 노령임시정부에 결합을 제의했고 전체적인 내각의 구성에 대해서는 한성임시정부의 내용을 존중하겠다는 자세였다. 대신 임시정부를 상하이에 두는 성과를 얻어냈다. 그러나 이에 대해 노령임시정부는 강력하게 반발했다. 유명 인사 중심의 한성임시정부 내각안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동휘를 제외하곤 국내에서 크게 명성을 얻은 인물이 없었지만 무력 항일투쟁을 주도할만한 힘이 노령임시정부에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노령임시정부의 대표 격인 이동휘는 자신이 한성임시정부의 총리로 내정된 것에 만족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통합에 동참했다. 덕분에 3개의 임시정부는 합의를 통해 통합되는 모양새를 갖추는 데 성공했다. 그럼에도 노령임시정부 쪽 인물들 대부분은 이동휘의 행동에 반발하는 상황이었고 특히 내각 명단에 함께 포함되어 있던 문창범과 최재형조차 참여를 거부했다. 이렇듯 노령임시정부의 불만이 팽배했지만 해외 망명지라는 난관을 가까스로 극복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는 극적으로 탄생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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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

 

 


박영규

1996년 『한 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을 내면서 저술활동을 시작하여. 1998년 중편소설 『식물도감 만드는 시간』으로 문예중앙신인상을 수상하면서 소설가로 등단했다.

문학, 철학, 역사 분야에 걸쳐 저술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대표적인 역사서로는 『한 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한 권으로 읽는 일제강점실록』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