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만난 그날

한국인의 피 속에 흐르는
뜨거운 함성

한국인의 피 속에 흐르는<BR />뜨거운 함성

글 권경률 역사칼럼니스트

 

한국인의 피 속에 흐르는

뜨거운 함성 


매월 독립운동과 관련된 핵심사건을 선정하여 그 치열했던 역사의 순간을 재구성하고자 한다. 다시 만난 그날, 세 번째 이야기는 대한민국 독립의 기초가 된 위대한 독립선언, 3·1운동이다. 지금부터 그 쩌렁쩌렁한 만세 소리에 귀 기울여 보자.


세계만방에 울려 퍼진 독립선언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종로 탑골공원에 청년학생들이 모여들었다. 경신학교 졸업생 정재용이 팔각정에 올라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최남선이 기초하고 보성사에서 인쇄하여 전날 배포한 3·1독립선언서였다. 청중들은 약속한 대로 갖고 나온 태극기를 높이 들고 합창했다.

 

“오등은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 이로써 세계만방에 고하야 인류평등의 대의를 극명하며, 자손만대에 고하야 민족자존의 정당한 권리를 영유케 하노라.”
“대한독립만세! 조선독립만세!”

 

같은 시간, 함께 거사를 준비해온 민족대표들도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을 외친 후 경찰에 체포되었다. 그러나 봇물 터진 함성은 그칠 줄을 몰랐다. 탑골공원의 청년학생들이 시가행진을 시작하자 인파는 순식간에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고종황제의 장례에 참석하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이들이 합류한 것이다.
이날 오전에는 고종황제가 일제의 사주로 살해당했다는 전단이 뿌려졌다. 파리강화회의에 일제의 식민지배를 거부한다는 메시지를 전하려다 독살됐다는 내용이었다. 그 전단이 오후에는 3·1독립선언서로 바뀌었다. 일제의 만행에 분개한 사람들은 우리의 독립의지를 세계만방에 떨치겠다는 듯 목 놓아 만세를 부르짖었다.

 

“오늘은 조선에서 위대한 날이었다. 오후 2시를 기해 중학교 이상의 모든 학교가 일제에 항거해 수업을 거부했다. 나는 창문으로 긴 행렬이 궁궐 모퉁이를 돌아 행진하는 것을 직접 볼 수 있었다. 학생들은 손을 높이 들고 모자를 흔들며 만세를 외쳤다. 거리의 사람들이 동참하면서 그 기운찬 외침은 도시 전체에 울려 퍼졌다.”

 

이는 미국 선교사 마티 윌콕스 노블이 목격한 3·1운동에 대한 기록이다. 그는 3·1운동이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하는 각국 대표들에게 한국인의 독립의지를 오롯이 전달할 것이라고 보았다. 국내외 각지에서 독립선언을 준비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한편 3·1운동은 고종황제의 죽음에 대한 백성들의 슬픔과 분노가 굽이치며 터져 나오는 분출구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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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독립선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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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독립선언서 낭독 순간을 재현한 탑골공원 부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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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화관에 모인 민족대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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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학생들의 만세시위(1919)

민족자결주의와 고종독살설

1910년 대한제국을 삼킨 일제는 폭압적인 통치에 나섰다. 토지조사사업을 빙자해 경제의 생명인 경작지와 산림·철도·광산·어장을 강탈하는가 하면 각종 세금을 늘려 한국인의 피를 빨아먹었다. 또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를 억압했으며 말을 듣지 않으면 멋대로 구속·고문하여 목숨을 빼앗았다. 일제의 등쌀에 한국인은 발 디딜 곳을 잃고 간도와 시베리아·중국 등지로 내몰려 떠돌아야 했다.
숨 막히는 현실 속에서도 독립운동가들은 절망하지 않았다. 의병활동과 애국계몽운동을 이어가며 분주히 움직였다. 희망의 단서는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함께 나타났다. 윌슨 대통령은 종전에 즈음하여 ‘평화원칙 14개조’를 발표했다. 국제 평화체제를 구축하려는 목적이었는데, 그중 하나가 민족자결주의였다. 이는 식민지 문제에 있어서 통치하는 정부의 주장과 통치받는 국민의 뜻을 동등하게 취급한다는 원칙으로, 식민지 국민이 독립의지를 천명하면 국제사회가 도와준다는 내용이었다.
이에 따라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단을 파견하는 문제가 현안으로 떠올랐다. 여운형을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은 신한청년당을 조직하여 영어가 유창한 김규식을 대표로 뽑아 파리로 급파했다. 한편으론 김철·장덕수 등을 각각 서울과 도쿄로 잠입시켜 국내외에서 독립선언을 모색했다. 파리강화회의에서 목소리를 높이려면 국제사회에 이목을 끌어야 했기 때문이다.
국내에서의 움직임을 본격화한 것은 1919년 1월 하순부터였다. 천도교 간부인 최린·오세창·권동진이 교령 손병희를 만나 승낙을 받아냈고 기독교·불교 등 종교계를 상대로도 교섭을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천도교 15인·기독교 16인·불교 2인이 참여하는 민족대표 33인이 확정되었다. 한편 일본에서는 한국인 유학생들이 2월 8일 도쿄 YMCA 강당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며 3·1운동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3·1운동 준비가 일사천리로 진행된 데는 고종황제의 죽음도 큰 영향을 끼쳤다. 1919년 1월 21일 새벽 고종이 뇌출혈로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일제는 그의 사망 사실을 감췄다가 23일에야 발표하였고, 사망시각도 조작했음이 세간에 드러났다. 이와 같은 일제의 의심스러운 태도는 고종독살설로 이어졌다.
고종황제의 죽음은 일제 치하 한국인들을 격앙시키며 3·1운동의 길로 이끌어 갔다. 일제에 대한 분노가 뭉게뭉게 피어오르며 두려움도 잊게 만들었다. 이는 서울 한복판에서 독립선언이라는 거사를 굴러가게 한 원동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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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슨 미국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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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독립운동의 주역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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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황제와 원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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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황제의 장례 행렬

 

대한민국 건국의 기초가 된 핏빛 역사

3월 1일, 서울에서 타오른 독립선언의 불길은 전국 방방곡곡 번져갔다. 지방의 만세운동은 몇 가지 특색이 있었다. 규모가 큰 시위 날짜는 대부분 지역 장날과 일치했다. 또 같은 장소에서 5일 혹은 10일 간격으로 되풀이해 일어났다. 만세운동은 어디서나 폭력을 쓰지 않고 평화롭게 펼쳐졌다. 하지만 3월 중순 이후로는 비극적인 양상이 나타났다.
만세운동 초반 일제는 주먹과 몽둥이를 써서 시위대를 진압하는 정도에 머물렀다. 이후 시위세력이 확산되자 잔혹한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아무런 무장도 하지 않은 민간인들에게 총칼을 겨눈 것이다. 일본 경찰과 헌병대가 칼을 휘두르고 무차별 발포하면서 사상자가 쏟아져 나왔다.
4월 1일 천안 아우내장터에서는 이화여고보 2학년 유관순과 각 지역 대표들이 주도하는 만세시위가 있었다. 인근 주민 3천여 명이 참여할 만큼 성황을 이루었다. 그러나 질서 정연하게 이뤄진 비폭력적인 시위는 일본 경찰과 헌병들의 총칼에 아수라장으로 변하고 말았다. 이날 주민 19명이 목숨을 잃었는데 여기에는 유관순의 부모도 포함돼 있었다.
현장에서 체포된 유관순은 모진 고문과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저항했다. 1심에서 징역 5년형을 선고받고 악명 높은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됐지만 그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독방에 갇혀서도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싸웠다. 이듬해인 1920년 유관순은 모진 고문 끝에 옥중에서 숨을 거두었다. 당시 유언처럼 남긴 한탄이 짙은 여운을 남긴다.

 

“나라에 바칠 목숨이 하나뿐인 게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

 

만세운동에 대한 일제의 광분은 급기야 양민들을 학살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4월 15일 수원 교외에 자리한 화성군 제암리에 일본 헌병대가 들이닥쳤다. 그들은 4월 5일 발안장터 시위 과정에서 일어난 살인 진압을 사과하겠다며 주민들을 제암교회에 모이게 했다.
발안장터 시위는 제암리 이장 안종후와 교회 청년들이 주도한 거사였다. 만세 소리에 놀란 일본 경찰과 헌병들은 총에 착검을 하고 시위대를 위협했다. 이때 선두에 섰던 교회 청년 김순하가 일본 헌병의 칼을 맞고 쓰러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후 제암리마을 사람들은 매일 밤 뒷산에 봉화를 올려 일제에 대한 항거 의지를 드러내고 있었다.
마을 남자들을 솎아낸 일본 헌병대는 사과는 커녕 야만적인 학살작전을 개시했다. 교회당 정문과 창문에 못을 박고 미리 준비해간 석유를 뿌려 불을 질렀다. 교회당 안에 갇혀있던 남자 21명이 불에 타 죽었고, 그들을 찾으러 온 여자 2명은 바깥에서 칼에 맞아 죽었다. 학살 소식을 들은 캐나다 선교사 프랭크 스코필드는 카메라를 매고 현장으로 달려갔다. 예배당 한복판에는 동그랗게 모여 기도를 하다가 함께 불타버린 시신들이 엉켜 있었다. 스코필드는 ‘수원에서의 잔학행위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해 전 세계에 제암리 학살 사건을 알렸다.
1919년 전국을 휩쓴 독립선언과 만세시위를 통틀어 오늘날 3·1운동이라고 부른다. 통계를 살펴보면 집회횟수 1,542회·참가인원 202만 3,289명·사망자 7,509명·부상자 1만 5,961명·체포자 4만 6,948명에 이른다. 물론 이 숫자는 통계에 잡힌 것들일 뿐이다. 드러나지 않은 시위까지 합치면 2,000회는 거뜬히 넘지 않았을까.
잔혹하고 야만적인 일제의 탄압에도 한국인은 불굴의 독립의지를 떨쳐 보였다. 비록 힘의 논리에 밀려 당시 국제사회에서 인정받진 못했지만 그 정신은 대한민국 독립의 기초가 되었다. 3·1운동의 그 뜨거운 역사는 지금도 한국인의 피 속에 흐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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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헌병대에 의해 불탄 제암리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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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된 유관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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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암리 만행 보도기사


권경률역사칼럼니스트

서강대학교에서 역사학을 공부했다. 칼럼 ‘사극 속 역사인물’을 연재하고 팟캐스트 ‘역사채널 권경률’을 진행한다. 저서로는 『조선을 새롭게 하라』, 『조선을 만든 위험한 말들』 등을 출간했으며, 영상물 『시시콜콜 한국사 어워즈』도 선보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