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하지만 귀한 음식 ‘쑥밥’
글 _ 황인철 산부인과 과장진료과목 _ 산전관리, 고위험임신, 정밀초음파
아마 20년도 더 된 이야기 같다. 산부인과 전공의를 마치고 경상북도 구미의 대학병원에서 첫 근무를 시작하였다. 서울에서 태어나 모든 것을 서울에서 해결해 온 나로서는 지방의 생활이 매우 특별한 경험이었는데 홀로되신 어머니까지 모시고 같이 살게 된 현실은 그 특별함에 더 특별함을 더하는 삶의 시작이었다. 일단 사투리가 매우 낯설었다. 대한민국의 국민은 다 똑같고 모두 통하는 줄 알았는데 언어소통이 안된다는 것을 처음 깨달았다.
대한민국의 또 다른 세상
“할머니, 어디가 아프세요?” “배가 아래께 부터 우리하게 아파” 아래께, 우리하게, 뭐 할머니의 표정을 보면 어렴풋이 감은 잡히긴 하는데 손짓 발짓 다해가면서 이야기하던 외국인의 느낌이라고 할까? 그냥 대한민국 안에 속해있는 또 다른 나라에서 일하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사람 사는 곳이 다 그렇듯 하루하루 날이 지날수록 나는 대한민국의 또 다른 나라의 시민이 되어 가고 있었고 적응은 그야말로 합격이었다.
변화의 시작, 쑥 캐기
이렇게 합격점을 받은 나와는 달리 모시고 온 어머니는 영 적응을 못하셨다. 말 수도 무척 줄었고 자꾸 서울로 가자는 말만 하시는 어린아이가 되어 간다고 할까? 동네 어르신들이 계시는 곳에 모셔다드려도 한 시간이 채 못되어 집에 돌아오시고 하루 종일 방에 틀어박혀 TV만 보셨다. 그 연세에 낯선 타지의 공간은 어머니에게 매우 힘든 현실이었던 것 같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 집에 큰 변화가 찾아왔다. 우울증을 앓던 어머니에게 새로운 취미가 생겼으니 바로 뒷산 오르기, 아니 뒷산을 오르면서 쑥 캐기라고 할까? 집에만 있지 말고 뒷산이라도 산책하라고 어머니의 등을 억지로 떠밀었지만 절대로 안 가신다고 버티던 어머니를 무너뜨린 것이 바로 뒷동산 지천에 널린 쑥이다.
쑥마니 어머니
어린 시절 생각이 나셨는지 초록한 쑥을 보신 어머니는 그 순간부터 모든 것이 달라지셨다. 늘 어둠이 보였던 얼굴은 쑥의 초록한 모습처럼 생기를 되찾았으며 식사량도 점점 늘어나게 되셨다. 물론 매일 같이 늘어나는 한 자루씩의 쑥은 우리 집의 공간을 점점 차지하는 불청객이었지만 이것저것 따질 것이 아니기에 어머니에게 쑥마니라는 새로운 별명까지 붙여드리고 나는 어머니의 쑥 캐는 취미를 계속 응원하였다. 쑥은 우리집 밥상에 매일 올라왔다. 쑥떡, 쑥된장국은 기본이고 쑥전, 쑥버무리, 심지어는 쑥을 말려 덖은 다음 쑥차까지 마셔봤으니 이미 나는 곰에서 웅녀로 몇 번이고 될 만큼의 쑥을 먹었던 것 같다.
진한 쑥 향의 쑥밥
그리고 이런 쑥 요리에 정점을 찍은 것이 지금 이야기하고 싶은 쑥밥이다. 노지에서 딴 쑥의 거친 줄기를 자르고 깨끗이 씻어 밥 위에 앉힌 쑥밥은 정말 진한 쑥 향을 지닌 색다른 별미였다. 쑥밥을 먹고 출근한 날 나의 입에는 은은항 쑥 향이 천연 향수처럼 하루 종일 맴돌았는데 이런 향기는 나에게 어머니가 건강하다는 일종의 부적과도 같은 소중한 향기였다.
나와, 어머니와 쑥
어머니와 쑥의 추억도 이제는 20년이 지났다. 하루에 한 자루씩 쑥을 캐시던 건강한 어머니는 수년 전부터 치매를 앓고 계신다. 하루하루 시간이 지날수록 어머니의 머릿속 지우개는 점점 그 범위를 넓혀가고 있다. 문득 쑥으로 시작한 쑥밥에서 쑥차로 끝나는 한 끼가 어머니의 우울증을 싹 고쳤듯이 점점 잃어가는 어머니의 기억을 찾는 귀한 약이 되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불현듯 든다. 어버이날에는 쑥밥으로 어머니의 기억을 한 번 꼬셔봐야겠다.
재료
쑥 한줌, 불린 쌀, 들기름 1큰술, 표고버섯 5개, 조선간장 1큰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