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3 독립기념관 9월호
기념관이 발굴한 독립운동가

은율군수 처단 의거에 참여한

황윤상

 

글 독립기념관 독립운동가 자료발굴TF팀

 

독립기념관은 2018년부터 독립운동가를 발굴하여 국가보훈부에 유공자로 포상 추천하고 있다. 

국가와 국민을 위해 희생한 분을 존중하고 기억하는 정부의 의지와 국민적 관심을 담은 것이다. 

2023년 매월 독립기념관이 발굴한 독립운동가를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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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살대원이 은신하던 구월산 

“임시정부의 이름으로 너를 처단한다”

1920년 8월 15일 자정 무렵, 황해도 은율군 군수 최병혁은 집 거실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이때 누군가 거칠게 문을 두드리며 군수를 만나게 해달라고 소리를 질렀다. 최병혁은 너무 늦은 시간이라 내일 다시 오라며 방문을 거절했다. 그러나 정체불명의 청년은 담장을 뛰어넘어 거실 가까이 다가와 “임시정부의 명령으로 너를 처단한다”고 하며 군수의 오른쪽 가슴 위를 겨냥하였다. 총성이 울리고 군수 최병혁은 그 자리에서 즉사하였다. 청년은 대한독립단원 이지표였다.

같은 시간 다른 대한독립단원 셋은 은율군 참사 고학륜의 집에 들이닥쳤다. 그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으나 명중시키지 못했다. 놀란 고학륜은 뒷문으로 달아나 주재소로 달려갔다. 일본 순사는 청년들을 추적하며 발포하고 몸싸움까지 한 끝에 겨우 한 사람만 붙잡을 수 있었다.

이들은 만주 류허현에 근거를 둔 대한독립단(단장 조맹선) 단원들이었다. 대장격인 이명서는 조맹선의 명령에 따라 친일 한국인과 관공리를 암살하고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8월 12일 은율군에 도착한 이들 암살대원은 셋으로 나누어 두 반은 각각 최병혁과 고학륜 암살, 나머지 한 반은 주재소 인근에 잠복하다가 출동하는 일경을 공격하기로 계획하고 실행에 옮겼다. 

1920년대 만주의 독립운동단체에서 암살대원을 파견해 친일 성향의 한국인 관공리와 부호를 처단하는 사건은 심심치 않게 일어났다. 이로 인해 서북지역의 일제 통치기관은 치명타를 입었고 친일 한국인의 행동도 위축되었다. 만주와 접경한 평북지역에서는 관공리와 친일 한국인이 경찰의 보호 없이 바깥출입을 하지 못했고, 면장과 면서기들이 사직서를 제출하고 출근하지 않아 면사무소 업무가 중단되는 일도 종종 있었다. 

이번 의거의 처단 대상인 은율군수 최병혁은 황해도 해주 출신으로, 1902년 황해도 관찰부 주사로 출사했다. 대한제국기에는 한직을 전전했으나, 경술국치 이후 1911년 황해도 신계군수로 승진했고 1912년 한국병합기념장, 1915년 다이쇼[大正]천황 즉위기념 대례기념장을 서훈받은 대표적 친일파였다. 1917년 은율군수로 부임하여 은율군청년회의 설립을 방해하고 지역 공립보통학교에서 한국인 직원을 배제했을 뿐 아니라 1919년 은율읍에서 일어난 만세운동 때 시위에 참가한 군중을 향해 “천시(天時)도 알지 못하는 망동”이라며 해산을 종용하였다. 그래서 지역 주민들에게 ‘고약한 군수’라는 비난이 자자한 터였다.

은율군수가 독립단원에게 피살되었다는 소식은 일파만파로 퍼져나갔다. 황해도 경찰부에서는 보안과장·고등과장을 현지에 파견하고 신천·안악·장련·송화·장연 등 5개 경찰서 인력을 동원하여 범인의 행적을 쫓았다. 9월 9일 신천군 초리면 구월산 기슭의 민가에 암살대원들이 은신했다는 정보를 접한 수색대는 10일 오전 3시경 그 부근을 포위했다. 3시간에 걸친 공방전 끝에 암살대원 9명 중 이명서·박기수·이지표·주의환·원사현 등 5명이 순국하고, 고두환·김정욱·박중서·민양기 등 4명이 중경상을 입은 채 체포되었다. 


대한독립단 황해지단의 지원

조사가 진행되자 사건은 의외로 확대되었다. 최병혁이 암살된 8월 15일 이후 암살대원이 체포된 9월 10일까지 한 달여에 걸친 행적이 밝혀지면서 ‘공범’ 43명이 검거되었다. 이들은 대한독립단 황해지단 단원들이다. 1920년 음력 1월 설립된 황해지단은 본부와 연락을 주고받으며 비밀리에 그 활동을 지원했다. 음력 6월 주요 간부인 정순경이 체포되어 활동이 위축됐으나 이번 은율군수 처단사건을 통해 건재함이 확인되었다. 
1920년대 독립군의 주된 활동방식인 게릴라식 활동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국내 주민의 전폭적인 지지와 지원이 필수적이다. 은신처 제공·식량 공급·자금 조달은 기본이고, 길 안내·망보기와 같은 활동 보조뿐 아니라 여차하면 독립군과 함께 직접 전투를 수행하는 역할도 주민들의 몫이었다. 황해지단에서는 단원 변춘식과 박중서를 평북 박천에 파견하여, 압록강을 건너 들어온 암살대원을 맞이하고 은율까지 길을 안내하게 하였다. 8월 12일 그들이 은율에 도착하자 단원 황윤상의 집에서 모임을 갖고 최병혁과 고학륜 처단을 위한 계획을 논의하며 단원 각자가 맡을 역할을 분담하였다.  


홍원택: 이지표를 군수의 집까지 안내 

김영섭: 원사현·고두환을 고학륜의 집까지 안내 

이현규: 이명서·주의환을 주재소 내문까지 안내 

박능묵: 민양기·박기수를 안내하여 주재소 인근 잠복할 곳으로 안내 

박형진: 암살 수행 이후 집합 장소인 마을 어귀 조밭에서 망보기 

정연우: 1920.8.17.~18. 자택에 암살대원 은닉 

박창호: 1920.8.19.~21. 자택에 암살대원 은닉 

최광국: 1920.8.24.~25. 자택에 암살대원 은닉 

이종성: 1920.8.25.~26. 형 이종문의 집에 암살대원 은닉 

최관용: 1920.8.27.~28. 자택에 암살대원 은닉 

양민석: 1920.8.29.~30. 자택에 암살대원 은닉 

강응종: 1920.8.31.~9.1. 자택에 암살대원 은닉 

우종서: 1920.9.3.~4. 자택에 암살대원 은닉 

노성우: 1920.9.7.~9. 자택에 암살대원 은닉 

이항진·이성룡: 독립운동자금 모집 방법 논의 

차기순·김영근: 자금 500원을 마련해 연초·짚신·모자 등 물품과 여비 조달 

김창현·이만영·김종수·박성행·이승준·최명현·김영조·김종수 등 기타 활동 지원


박중서와 김정욱은 9월 9일 암살대원이 체포될 때 그들과 함께 직접 교전에 참여했다. 특히 박중서는 총상을 입고 반신불수가 되었다. 이들의 활동을 말 한마디, 글 한 줄로 표현하면 소소하게 보일 수 있지만 그들에게는 본인과 가족들의 생존을 담보로 한 결단이었다. 그들의 지원이 없었다면 은율군수 처단은 성공할 수 없었을 것이며, 그것 자체로도 충분히 독립운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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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율군수를 사살한 독립단원 예심 결정, 『동아일보』 (1921.07.20.)(좌), 황윤상 선생의 출옥 기사, 『동아일보』 (1922.07.10.)(우)

한민족 일반의 동감

1921년 8월 19일 해주지방법원에서 이 사건 관련자 중 기소된 30명에 대한 판결 공판이 진행되었다. 암살대원 중 민양기에게 사형, 고두환에게 무기징역, 그들의 행동을 적극 지원한 박중서와 변춘식에게 징역 13년, 김정욱에게 징역 10년, 그 외 황해지단원들에게는 징역 3년에서 징역 1년 6월이 언도되었다. 
황해지단원 중 한 사람은 최후 변론에서 이같이 말했다. “조선이 일본에 합병된 이후 총독부의 압박정치에 불만을 가진 이는 나뿐이 아니다. 조선민족 일반이 모두 동감할 것이라 생각한다.” 그들이 생존을 걸고 은율군수 처단에 참여한 심정을 대변한 말이다. 
독립운동가 자료발굴TF팀에서는 이 활동의 참여자 중 10명을 포상 추천하고, 2020년 황윤상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황윤상은 대한독립단 황해지단의 일원으로, 1920년 8월 12일 자택에서 암살대원과 다른 지단원들과 함께 은율군수 처단 계획을 논의하였고, 이로 인해 징역 1년 6월을 언도받아 해주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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