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3 독립기념관 9월호
끝나지 않은 독립운동

‘항일문학’은 독립운동이며
‘항일문학가’는 독립운동가이다

 

글 이계형 (국민대학교 교양대학 교수)

 

“펜은 칼보다 강하다.” 이는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많이 회자하는 말 가운데 하나다. 

이 말은 영국의 작가 에드워드 불워 리턴(Edward Bulwer Lytton)이 1839년에 발표한 역사 희극 <리슐리외 또는 모략>(Richelieu; Or the Conspiracy)에서 처음 사용했다. 

희곡 속 리슐리외는 프랑스 국왕 루이 13세(1601~1643) 때 재상으로 활동한 실존 인물이다. 

리슐리외는 적을 상대로 무기를 휘두를 수 없게 되자, 침착한 목소리로 하인에게 “펜은 칼보다 강하네. 칼을 치우게. 국가는 칼 없이도 구할 수 있네.”라는 대사를 읊었다고 한다.

일제의 엄혹했던 식민지 시기에 한국의 작가들 역시 시·소설·동요·비평 등을 통해 민족의식을 일깨우거나 식민 통치를 비판하며 저항 의지를 표출했다. 

그들 가운데는 독립운동에 직접 뛰어든 이가 많지 않았지만, 저항 의식만큼은 그에 못지않았다. 

그들 작품이 한국 문학사에서 ‘항일문학’이라는 유형으로 분류되는 것만으로도 그 가치를 인정받은 것과 마찬가지이다.


alt
 

민족의식 고취에 큰 영향을 끼친 대표적 항일문학가들

‘항일문학’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대표적인 인물로 한용운(1879~1944)·조명희(1894~1938)·이상화(1901~1943)·심훈(1901~1936)·이육사(1904~1944)·윤동주(1917~1945) 등을 떠올릴 것이다. 그런데 모두가 하나 같이 광복을 맞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한용운은 「님의 침묵」·「님」·「당신을 보았습니다」 등을 통해 국권 회복에 대한 열망과 저항 의지를 담아냈다. 1928년 소련으로 망명한 조명희는 「짓밟힌 고려」를 발표하여 일제에 대한 분노와 적개심을 강렬히 표현하였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시인 이상화는 대구 3·1운동을 주도하였고, 「금강송가」·「역천」·「이별」 등의 저항시들을 쏟아냈다. 
하지만 그는 평생의 소원이었던 빼앗긴 들의 봄날을 보지 못했다. 심훈의 대표작인 「그날이 오면」은 3·1운동 기념일에 발표되었지만, 일제의 검열로 세상에 빛을 보지 못하였다가 사후 1949년에서야 유고집으로 공식 발표되었다.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의 C. M. 바우라(C. M. Bowra) 교수는 심훈의 「그날이 오면」을 두고 세계 저항시의 본보기라는 극찬하기도 했다. 윤동주는 지식인으로서 식민지를 살아가야만 했던 자신의 성찰과 양심의 고뇌를 「서시」·「십자가」·「또 다른 고향」 등의 시에 담았다. 
독립운동가이자 문학가였던 이들의 작품은 당대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데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탄 사건’(1927)과 ‘대구격문 사건’(1930) 등으로 3년여의 옥고를 치른 이육사는 「광야」·「꽃」·「절정」 등을 통해 민족혼을 고취하는가 하면 독립에 대한 염원과 자신의 굳은 저항 의지를 담아냈다. 국문학자면서 시조 시인이었던 이병기(1891~1968)·이희승(1896~1989) 등은 조선어학회사건으로 옥고를 치렀다. 「성북동 비둘기」의 시인 김광섭(1904~1977)은 중동중학교 교사로 근무하면서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다가 1941년 2월 체포되어 2년 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었을 때, 「벌」이란 작품을 통해 당당한 저항 의지를 드러냈다.


alt

『님의 침묵』 재판본(좌), 『그날이 오면』 초판본(우)

중국에서 신문·잡지를 발행하여 일제의 식민 통치를 폭로하다

1919년 3·1운동 이후 독립운동의 주 무대였던 중국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은 『진단』(震壇, 1920), 『천고』(天鼓, 1921), 『광명』(光明, 1921) 등의 신문·잡지를 중국어로 창간했고, 이는 창간하기 시작한 이래로 광복 때까지 계속 늘어나 200여 종이 넘었다. 중국이 서양 열강의 침략으로 반식민지가 된 상황에서 한국의 독립운동계가 그 나라의 지식인들과의 연대와 도움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독립운동가들은 중국어 신문과 잡지를 통해 일제의 식민 통치를 폭로하고 국내 독립운동의 상황을 전하는가 하면 수많은 항일문학 작품을 실었다. 특히 작가 미상의 「조선의용대」라는 시에는 무력 항쟁을 통해 일제를 몰아내겠다는 항일 의지를 알려 중국인들로부터 공감대를 얻어냈다. 조선의용대원 이두산의 「방가」(放歌)는 항일문학의 역작이라 평가받았다. 한국청년전지공작대가 중국 내 선전 활동을 위해 만든 「아리랑」, 「한국용사」, 「국경의 밤」 등의 항일 극의 대본 역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일제의 의해 압수·폐기된 항일문학 작품들

조선총독부는 이미 통감부 시기에 ‘신문지법’(1907.7)과 ‘출판법’(1909.2)을 공포하여 일제강점기 내내 식민지 조선에서 생산한 신문·잡지·출판·음반·연극·영화 등 전 분야에 걸쳐 탄압·통제하였다. 일제는 이를 근거로 한민족의 독립운동은 물론 일제의 식민 통치 비판·내선 융화 저해·민족 상황 비관 등과 관련한 것은 절대 불허하였다. 
이에 1920년대 이후 매년 불허가로 차압·삭제 등을 당한 건수는 평균 1,500건에 달할 정도였다. 1928년부터 1941년까지 판매 금지 처분된 책은 2,820여 종에 달했다. 당시 국내에서 발행된 금서는 188종으로 대부분 치안유지법 위반·풍속 사건·출판법 위반 등의 이유에서였다. 특히 민족주의를 고취하는 내용이라든가 사회주의를 선전하는 것은 거의 예외 없이 삭제되었다. 심지어 ‘현재 조선의 사회제도를 저주하여 조선인의 비애를 강조’한 것 또한 그 대상이 되었다. 
『빈처』나 『운수 좋은 날』 단편소설로 잘 알려진 현진건(1900~1943)의 단편집 『조선의 얼골』은 1940년 일제에 의해 ‘치안’ 상의 이유로 압수처분을 받았다. 변영로(1898~1961)는 1924년 첫 시집 『조선의 마음』을 발표하였는데, 조선총독부가 내용이 불온하다 하여 시집은 발행과 동시에 압수·폐기 처분되었다. 그는 1940년대 절망감 속에서도 선비적 절개와 지조를 지키면서 여러 작품을 남겼고, 이는 광복 이후에 발표되었다. 
일제의 이러한 조치는 『어린이』(1923.3. 창간), 『학생』(1929.3. 창간) 등 청소년 잡지도 예외는 아니었다. 『학생』은 창간한 지 불과 18개월 만에 식민지 지배 정책에 맞서고 민족독립운동을 조장한다고 하여 강제 폐간되었다. 잡지에 발표된 동시·동요 등은 일제의 날 선 검열을 피하고자 비유적·상징적 또는 우회적으로 일제에 항거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대표적인 작가로 강소천·이일래·주요섭·심훈 등을 꼽을 수 있다. 이들은 여러 작품을 통해 청소년들에게 민족혼을 불어넣거나 힘찬 기상을 북돋워 주었다. 동화 작가 마해송(1905~1966)은 창작동화 「토끼와 원숭이」를 『어린이』(1931년 7월호)에 연재하여 조선을 침략한 일제와 주변국 간의 문제를 동물 나라로 의인화하여 묘사하였다가 글이 삭제되거나 원고를 압수당하였다. 그는 광복 이후 이 작품을 완성하였다.


alt

『어린이』 창간호(좌), 『학생』 창간호(우)

저항 의지를 다지며 절필·은둔하다

1930년대 말부터는 치욕의 친일문학, 특히 일제가 민족말살정책을 펼치던 시기에 ‘총후(銃後; 전쟁터가 아닌 후방을 뜻함) 문단’이 세상을 온통 까맣게 물들였다. 이러한 친일문학은 국내 한국인들에게 친일을 강요하거나, 일제의 침략 전쟁, 황민화 정책 등을 고무·찬양하는 내용이 일색이었다. 대표적인 작가로 최남선·이광수·주요한·채만식·김동인·서정주·박영희·노천명·백철·유치진 등을 꼽을 수 있다. 이들의 친일 행적에 대해서는 세인(世人)들로부터 역사적·사회적인 비판을 받고 있다. 
이와 달리 내선일체·동조동본(同祖同本)·정신대(挺身隊) 징발·신사 참배·일본어 강제 사용·창씨개명·공물 헌납·학병 강제 모집 등에 시달리던 문인 중에는 붓을 꺾거나, 낙향하여 술과 독서로 울분을 풀거나, 언젠가 광복을 고대하며 ‘피로 쓴 글’을 서랍 속에 쌓아두었다. 이를 두고 ‘소극적 저항’이라고 하지만, 그들 나름의 무저항 운동이나 다름 아니었다. 
오상순(1894~1963)·홍사용(1900~1947) 등은 낙향 혹은 유랑하며 자신들의 지조를 지켰다. 「모란이 피기까지는」의 시인 김영랑(1903~1950)은 「독(毒)을 품고」라는 저항 시를 쓰고는 고향 강진에 파묻혀 지냈고, 김동리(1913~1995)는 경상도에서 독서로 소일하였으며, 조지훈(1920~1968)·박두진(1916~1998)·박목월(1915~1978) 등은 『청록집(靑鹿集)』에 실을 시 창작에만 전념하였다. 주요섭(1902~1972) 역시 1944년 중국 베이징에서 추방되어 고향인 평양에 칩거하면서 절필하였다. 그는 광복 후 첫 단편소설 「입을 열어 말하라」를 발표하여 일제 말기의 강요당한 침묵을 깨뜨렸다. 
김일엽(1896~1971)은 나혜석·김명순 등과 함께 여성 해방론과 자유 연애론을 주장하고, 여성의 의식 계몽을 주장하는 글과 강연을 하다가 1933년 출가한 이후 20여 년 동안 절필하였다. 「파초」로 널리 알려진 김동명(1900~1968)은 민족 언어로 더는 시를 쓸 수 없는 식민지 지식인으로서의 한계에 부딪히자, 1942년 「술 노래」와 「광인」을 끝으로 절필하였다. 소설가 황순원 역시 1940년 「늪」을 발표한 이후 절필하였다. 그의 대표적 작품 중 하나인 「독 짓는 늙은이」는 1942년부터 1945년 사이에 썼지만, 집안 다락방에 감춰두었다가 1950년에서야 발표하였다. 시인 정지용(1902~1950)은 1941년 마지막 시집 『백록담』을 출간하고는 1942년 절필했다. 


일제강점기에 적지 않은 시인과 소설가 등이 글로써 일제의 식민 통치에 맞섰고 민족의식을 고취하는가 하면 저항 의지를 다졌다. 

이러한 힘을 알고 있던 일제는 이들의 시나 소설을 검열하였고 압수·폐기까지 하였다. 

일제 말 조선어 폐지·창씨개명 등 민족말살정책에 호응하여 문학가 대부분이 친일의 길을 걸을 때, 민족주의 작가들은 일제의 탄압 속에서 절필하거나 은둔하였다. 

그런데 앞서 언급한 작가 중에 독립유공자로 포상을 받은 이는 한용운·이육사·조명희·윤동주·김광섭·이병기·이희승·김영랑·주요섭·이상화 등 뿐이다.

 이들은 ‘항일문학’ 작가로서 공훈을 인정받았다기보다는 3·1운동, 의열 활동, 조선어학회사건 등과 연관되었기 때문이다. 

항일문학 작가들의 행동을 ‘소극적 저항’이라고 규정하기도 하지만, 그들이 실지 독립운동에 뛰어들어 옥고를 치르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그 자체로 넓은 범위에서 ‘독립운동’으로 봐야 할 것이다. 

그들에게는 펜이 칼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alt

(왼쪽부터)조지훈, 박목월, 박두진(좌), 『청록집(靑鹿集)』 초판 (1946)(우)

SNS제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