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서 찾은 오늘

김산이 선택한 운명

김산이 선택한 운명



글 이성주 역사칼럼니스트


김산이 선택한 운명




김산(金山)이란 이름은 낯설다. 당연하다. 그는 독립운동가로서 거창한 성취를 보인 것도 아니었고, 민족주의자로 시작해 아나키스트와 사회주의자로 활동한 이력 때문에 한때는 그 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잊혀가는 이름을 세상에 알린 건 미국인 작가 님 웨일스(Nym Wales)가 쓴 한 권의 책이었다. 바로 『아리랑의 노래 Song of Arirang』다.




지워진 이름의 혁명가

▲ 독립운동가 김산 ▲ 1905년 평안북도 용천 출생 ▲ 1919년 중학생 신분으로 3·1운동에 참가. 일본 경찰에 체포 구류 ▲ 1920년 중국으로 건너가 신흥무관학교 입학 ▲ 상하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독립신문』 발행에 참여 ▲ 1921년 중국 황포 군관학교와 중산대학 경제학과에서 수학. 의열단 가입 ▲ 고려공산당 이르쿠츠크파 베이징 지부 입당. 공산당 청년동맹 가입 ▲ 1925년 중국대혁명 참여 ▲ 1928년부터 홍콩·상하이·베이징 등지에서 활동 ▲ 1936년 상하이에서 조선민족해방동맹 창설 ▲ 1938년 중국공산당에 의해 일본 간첩의 누명을 쓰고 체포, 처형


우리민족이 겪은 고난의 시간 속에 쓰러지고 묻힌 이름들이 많다. 그 같은 무명의 영웅들은 우리민족의 역사와 비슷한 인생역정을 겪었다. 다만 ‘김산’에게 다른 것이 있다면 그의 이야기가 책으로 나왔다는 것, 그래서 마침내 후대에 전달될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김산은 1937년 중국 옌안에서 미국인 작가 님 웨일스를 만났다. 님 웨일스는 한국의 독립운동가 김산을 인터뷰했고, 그의 이야기에 많은 감명을 받았다. 이렇게 해서 『아리랑의 노래』가 탄생했다.


“조선에 민요가 하나 있다. 그것은 고통받는 민중들의 뜨거운 가슴에서 우러나온 아름다운 옛 노래다. 심금을 울려 주는 아름다운 선율에는 슬픔이 담겨 있듯이, 이것도 슬픈 노래다. 조선이 그렇게 오랫동안 비극적이었듯이 이 노래도 비극적이기 때문이다.”


님 웨일스는 김산을 두고 ‘현대의 지성을 소유한 실천적 지성인’이라 격찬했다. 김산은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반드시 실천한 인물이었다. 3·1운동을 통해 민족적 현실을 깨닫고 민족주의자가 되어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또한 민족과 국가를 뛰어넘은 평등한 사회를 꿈꾸며 사회주의 혁명에 동참하기도 했다. 자신이 배우고, 몸으로 체득한 것이라면 기어코 실천에 옮겼던 이가 김산이었다.


이 세상에 나보다 더 중요한 게 있을까?

아나키즘(Anarchism)을 설명할 때 ‘무정부주의’란 말을 쓰곤 한다. 그러나 아나키즘의 정확한 의미는 ‘지배하는 이가 없음’이다. 단어의 어원을 따져보면 이는 더욱 명확해진다. 고대 그리스의 작가 호머와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아나키(Anarchie)를 ‘지도자가 없는’, ‘키잡이가 없는 선원’이라고 해석했다. 사회주의든 민주주의든 국가의 형태가 만들어지면 반드시 지배계층과 피지배계층으로 나뉘기 때문에 이들은 국가나 정부를 인정하지 않았다. 현대와 같이 복잡한 사회구조를 가지는 국가에서 보면 과격하게 여겨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사회가 아니라 개인을 본다면 어떨까? 동양의 대표적인 아나키 양주(楊朱)2)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 터럭 하나를 뽑아 천하에 이익이 되더라도 하지 않겠다.”


천하에 이익이 되는 일이라 할지라도 결코 ‘나의’ 털은 뽑지 않겠다는 양주. 이는 춘추전국시대 당시 대의명분을 내세우며 백성들을 전쟁터로 내몰았던 권력자들을 비판하는 것이기도 하다. 털 하나가 살갗이 되고, 살갗이 팔다리가 된다. 조직을 위해 나를 희생하지 않겠다는 논리는 자칫 이기주의와 개인주의로 비칠 수도 있지만, 조직이 개인에게 대의명분을 내세워 희생을 강요하는 것은 과연 옳은가 생각해 볼 필요도 있다.사회 전체로 보았을 때 아나키즘과 양주의 주장은 급진적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개인에게는 다르다. 어떤 조직이든 지배와 피지배의 구조는 형성되기 마련이고, 구조 안에서 개인은 다양한 명분으로 희생된다. 비판적 분석이나 정당한 논리 없이 단지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는 명분으로부터 벗어나는 것. 거기서부터 건전한 사회와 독립적인 개인이 만들어지는 게 아닐까?

김산도 그랬다. 그는 특정한 명분이나 조직에 함몰되지 않고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독립운동의 방향을 향해 나아갔다. 그에게 독립운동은 시대와 국가가 만든 우연이 아니라 자신이 선택한 운명이었다.





이성주

시나리오 작가 겸 역사칼럼니스트. 대중과 함께 호흡하는 글쓰기를 목표로 『조선의 민낯』, 『왕들의 부부싸움』과 같은 역사서를 출간한 바 있다. 최근에는 국제정치와 관련된 연구 및 집필에 열중하고 있다. 『전쟁으로 보는 국제정치』 시리즈 1, 2, 3권을 출간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