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몰랐던 이야기
저울처럼 평등한 사회를 위해!
백정의 형평운동

글 신현배 역사칼럼니스트
저울처럼 평등한 사회를 위해!
백정의 형평운동
조선시대 백정은 가축을 도살하거나 가죽신 따위를 만들어 파는 천민계층이었다. 더러는 망나니가 되어 사형 집행을 맡기도 했다. 조선 사회는 백정에게 꽤나 가혹했는데, 이는 일제강점기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1920년대 초, 드디어 백정들이 ‘평등’을 외치기 시작했다. 형평운동이었다.

형평사 제6회 전선 정기대회 포스터
조선의 가장 천한 사람들, 백정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백정은 군역의 의무를 지지 않는 일반 농민을 의미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들어 고려시대의 천민계층인 ‘화척’을 가리키는 말로 바뀌었다. 화척은 여진·거란족 등 북방 민족의 후예로 유랑생활을 하며 소·돼지를 도살하고 고리와 가죽신을 만드는 일을 하며 생계를 잇는 사람들이었다. 세종대에 이들을 양인으로 대우해 주고자 백정이라 부르게 했다. 천민은 나라에 세금을 내지 않으니 화척도 양인 신분으로 우대해 세금을 거두어들일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는 일반 농민들의 불만을 샀다. 그들은 ‘신백정’ 이라는 말로 화척과 자신들의 계급을 철저히 구분했다. 그렇게 백정이란 칭호는 도살업을 하는 천한 사람을 일컫는 말로 굳어졌다. 백정은 법적으론 양인 계층이었지만 정부로부터 가혹한 통제와 탄압을 받았다. 정부는 백정이 고려 때 유랑생활을 하며 민가를 습격해 노략질했다는 이유를 들어 이들을 특정 지역에 모여 살게 했다. 또한 별도의 호적을 만들어 출생·사망·도망의 내용을 기록해 임금에게 보고하도록 했다. 다른 지역에 가고자 할 때는 반드시 통행증을 발급받아야 했다.
백정에게는 형벌도 엄격하게 적용됐다. 정부의 허락 없이 가축을 도살하면 장형 100대, 유형 3,000리, 몸에 먹물을 넣는 벌을 내렸고 그 가족은 역마을이나 역참의 노비로 삼았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백정에 대한 일반 백성들의 시선도 좋지 못했다. 심한 멸시와 천대는 물론이고 좋은 옷을 입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백정은 아무리 돈이 많아도 명주 비단옷을 입을 수 없었으며 두루마기와 털모자를 쓰는 것도 금지되었다. 갓·망건·가죽신도 허용되지 않았고 댓개비로 엮은 갓의 한 종류인 패랭이를 쓰고 다녀야만 했다. 혼례와 상례도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치르지 못했다. 혼인할 때 신랑은 말 대신 소를, 신부는 가마 대신 널빤지를 탔다. 그래서 사람들은 백정 집안의 결혼을 ‘쇠등 장가, 널빤지 시집’이라고 불렀다.
신부는 비녀를 꽂아 머리를 올릴 수 없었다. 초상이 났을 때도 상여를 쓰지 못했고 묘지도 별도로 잡았다. 이뿐만이 아니다. 백정은 일반 백성들 앞에서 술과 담배가 금지되어 있었다. 양인에게 먼저 인사하고 존댓말을 써야 했는데 상대가 어린아이일지라도 굽실거리며 말을 높여야 했다. 백정은 양인 아이를 ‘도련님’, ‘애기씨’ 등의 호칭으로 불렀고 젊은 사람은 ‘서방님’, 늙은 사람은 ‘생원님’이라 했다. 자신을 소인이라 낮춰 부르는 것은 당연했다.
백정이 꿈꾼 해방 사회
1894년 갑오개혁으로 신분제가 폐지되었지만 백정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과 차별은 달라지지 않았다. 백정 집안과는 혼인 하지 않으려 했으며 한마을에 사는 것조차 꺼렸다.
일제강점기 백정들은 일제의 차별 정책으로 말미암아 다시 고통과 시련을 겪는다. 일제는 백정을 호적에 올리면서 ‘도한(屠漢)’이라고 기재하거나 붉은 점을 찍도록 했다. 호적에서마저 백정임을 드러내도록 한 것이다. 일본이 이러한 차별정책을 펼친 이유는 간단했다. 일본에서도 백정은 천한 계층이었기 때문이다.
이 시기 백정의 자녀들은 공립학교에 입학이 허락되지 않았고 사립학교에 들어가더라도 다른 학부모들의 따가운 눈총을 받았다. 더러는 백정의 아이를 퇴학시키라고 학교에 압력을 넣기도 했다. 동급생들도 돌을 던지며 아이를 괴롭혔다. 이발소와 목욕탕에서는 백정을 받지 않는다며 그들을 쫓아내는 일도 종종 있었다.
차별과 천대가 계속되자 참다못한 백정들이 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1923년 5월 경상남도 진주에서 백정들의 조합인 ‘형평사’를 결성한 것. ‘형평(衡平)’이란 수평으로 된 저울을 의미한다. 그들은 저울처럼 평등한 사회를 꿈꾸며 ‘백정 신분 해방 운동’으로서의 형평운동을 전개했다. 전국에 있는 백정들의 수는 약 40만 명. 이들은 형평사와 형평운동에 열렬한 지지를 보냈다. 형평운동은 금세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형평사 조직의 갯수도 늘어나 1931년에는 분사가 166개나 되었다.
그러나 형평운동은 일제의 탄압으로 민족 해방 운동과 독립운동의 형태로 더 나아가지 못하였다. 1935년 ‘대동사’로 조직의 이름을 바꾸면서 이익 단체에 머무르는 데 그쳤다.
성과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1930년대에 호적에서 백정 신분 표시가 삭제되고 백정 자녀의 공립학교 입학이 허용되었다. 제도적 차별의 일부가 철폐되면서 형평운동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셈이 됐다.
신현배
역사와 전통문화에 대해 관심이 많은 역사칼럼니스트. 저서로는 역사 이야기 『엉뚱 별난 한국사』, 『엉뚱 별난 세계사』, 『2000년 서울 이야기』, 『세계사로 배우는 법 이야기』, 전통문화 이야기 『소중한 우리 문화 지식 여행』 시리즈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