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이계형(국민대학교 교양대학 교수)
“위안부는 전시 성폭력 피해자가 아니다.” 지난 7월 독일 베를린시 미테구를 방문하여 ‘평화의 소녀상’ 철거를 주장한 이른바 ‘위안부사기청산연대’ 소속의 한국 극보수 인사들이 내뱉은 말이다. 이들은 ‘평화의 소녀상’은 한일관계뿐만 아니라 국제관계도 악화시키는 원흉이며, 소녀상 설치는 아무런 이익도 낳지 않고, 오히려 갈등과 증오만 부추긴다고 주장하였다. 과연 그들의 주장이 옳은지 그리고 정의로운 일이었는지 묻고자 한다.
진실의 민낯이 드러나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불거진 것은 1990년대부터이다. 광복 후 45년 만이니 늦어도 한참 늦은 셈이다. 그런데 이를 되짚어보면 그럴 만도 하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은 지긋지긋한 전쟁에서 겨우 벗어나 꿈에 그리던 고향을 찾았지만, ‘일본군과 놀다 온 더러운 여자’라는 오해와 편견에 그저 모든 것을 가슴에 묻은 채 고향을 떠나 타지에서 살아가야 했다. 그들 가운데 철저히 버림받아 갈 곳도, 할 수 있는 일도 없어 기구하게도 주한미군 위안부가 된 이들도 있었다. 겨우 10대 후반부터 20대 초반 나이었으니 산목숨 그렇게 살아가야 했을 것이다.
1990년 11월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제기해 오던 37개 여성단체가 연합한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가 조직된 후 1991년 8월 14일 김학순 할머니가 자신이 위안부 피해자였다며 이를 최초로 공개 증언하면서 만천하에 진실의 민낯이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이후 국내는 물론 필리핀·네덜란드 등 세계 각지에서 증언이 잇따랐다. 이를 기려 2012년 12월 ‘제11차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아시아연대회의’에서 ‘8월 14일’을 ‘세계 위안부의 날’로 지정하였고, 우리나라 정부는 2018년 이날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로 정하고 국가기념일로 지정하였다.
미국에 건립된 ‘위안부 피해자 기림비’
공개 증언 이후 1992년 1월 일본대사관 앞에서 수요집회가 시작되었고, 1993년 8월 일본의 고노 관방장관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강제성뿐만 아니라 일본군이 직간접적으로 관여했다며 사과하였다(이른바 고노 담화). 그뿐만 아니라 유엔인권위원회는 보고서에 일본군 ‘위안부’를 ‘성노예’로 정의하였고 이후 통용되었다. 이는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이 자신들이 당한 끔찍한 ‘성노예’ 경험을 미국의 여러 대학과 단체에서 증언하면서 미국인들을 움직인 결과였다. 그들은 일본군의 포악한 성폭력에 여성의 인권이 무참히 짓밟혔다는 사실에 공감하며 피해 할머니들의 호소에 동참하였다.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피해 할머니들이 고령화하여 더는 공개 증언이 어렵게 되면서 2010년대부터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하였다. 이때 처음으로 2010년 10월 미국 뉴저지주 팰리세이드파크시 도서관 내에 ‘위안부 피해자 기림비(‘Comfort Women’ memoria)’가 세워졌다. 하지만 그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일본 정부는 거세게 반발하였고 집요하게 이를 막았다. 한때는 시의회 통과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목소리도 전해졌다. 그럴수록 한인뿐 아니라 중국인·일본인·유대인 단체가 연대하였고, 결국 시 당국은 기림비가 미국 시민들의 주도로 세워졌다는 이유로 일본 측 요구를 거절하면서 첫 결실을 보게 되었다.
팰리세이드파크시는 그러한 문제를 한일 간 다툼에 따른 정치적인 목적이 아닌 여성의 인권 문제라는 교육적 가치로 판단하였다. 그런 만큼 동판에는 ‘1930년대부터 1945년까지 일본 제국주의 정부 군대에 납치된 20만 명 이상의 여성과 소녀들을 기린다’라는 문구와 함께 ‘인류에 대한 두려운 범죄를 절대 잊지 말자’라는 다짐이 새겨졌다. 이후 이 문구가 새겨진 여러 기림비가 뉴욕 낫소(Nassau) 카운티 시내 아이젠하워 공원(2012.6), 뉴저지주 버겐카운티 트리니티 에피스코팔 교회(2013.3), 버지니아주 페어팩스 카운티 정부청사(2014.5) 등에도 건립되었다. 이를 통해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군의 성노예와 인신매매로 희생된 여성들을 기리고 전 세계에서 일어나는 인신매매와 인권 유린을 상기시키고자 한 것이다. 전쟁이 일어나는 어느 국가든지 여전히 반복되는 문제라는 데 공감하고 정치적인 접근이 아닌 여성의 인권과 존엄의 시각에서 문제의 심각성을 바라보았다.
전 세계에 세워진 ‘평화의 소녀상’
2011년 12월 14일 수요집회 1,000회(20년)를 맞아 ‘평화의 소녀상(이하 소녀상)’이 일본대사관 앞에 처음 제작·설치됐다. 이후 소녀상은 국내뿐 아니라 전 세계로 확산되었다. 2013년 7월 미국 캘리포니아 글렌데일 시립 중앙도서관 앞에 처음으로 세워졌다. 그곳은 19세기 말 20세기 초 아르메니아인 백만여 명이 희생된 곳인 만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고통에 공감하여 국경을 넘는 기억의 연대가 만들어낸 것이다. 이어 미시간주의 사우스필드의 한인문화회관(2014.8.)과 캐나다 토론토시 한인회관(2015.11) 앞에 소녀상이 세워졌다.
이를 기회로 한국 정부는 일본에 압박 강도를 높여나갔다. 특히 독일 메르켈 총리뿐 아니라 영국 여왕 등 세계 각국의 정상들에게 일본군 ‘위안부’ 관련 만행을 알려 일본을 압박하였다. 이에 일본 측에서 먼저 협상을 제안해 왔다. 그러한 결과로 2015년 12월 박근혜 정부와 일본 아베 내각 간에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최종적·불가역적으로 종결되었음이 선포되었다. 이는 일본 정부가 ‘위안부’의 강제성과 법적 책임을 인정하지 않은 것이었기에 피해자들은 물론 국내의 반발은 거셌다. 더욱이 기림비(소녀상 포함) 철거와 성노예 삭제 등의 이면 합의가 있었다는 데 비판 여론이 격화하였다. 이는 되레 미국 이외에도 호주, 독일까지도 소녀상 건립이 확산하는 계기가 되었다. 호주 시드니 애쉬필드 교회(2016.8), 독일 남부 레겐스부르크시 인근 비젠트(2017.3), 조지아주 브록헤이분 블랙번 매번공원(2017.6), 뉴욕 맨해튼 뉴욕한인회관(2017.10) 등이 대표적인 곳이다. 소녀상은 아니지만 ‘위안부’ 동상이 상하이 한중평화의 상(2016.10)과 샌프란시스코 세인트 메리스 스퀘어공원(2017.9) 등지에 세워졌다.
특히 스퀘어공원 동상은 샌프란시스코 지역에 거주하는 한국·중국·필리핀·네덜란드 등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 위안부 피해를 본 13개 국가의 커뮤니티들이 연합해 건립한 것이다. 샌프란시스코시가 자매결연을 한 일본 오사카시와 절연하면서까지 얻어낸 성과였다. 더욱이 샌프란시스코 시의회가 ‘위안부 기림비 건립과 전 세계 여성과 소녀에 대한 인신매매 중단에 대해 지역사회에 교육할 것을 촉구’하는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통과한 뒤의 결과여서 의미가 컸다. 이 동상은 2019년 8월 일제의 정신적 침략을 상징하는 남산 조선신궁 터 부근에도 건립되어 의미를 더했다. 동판에는 ‘(침묵을 깨고 용감하게 증언한) 이들은 성폭력을 전쟁의 전략으로 이용하는 것은 정부에 책임을 물어야 하는 반인륜 범죄에 해당한다는 세계적인 선언을 끌어냈다. 이 여성들과 전 세계에 걸친 성폭력 및 성을 목적으로 한 인신매매 근절 노력에 이 기림비를 바친다’라고 쓰여 있다.
여성 인권과 존엄을 상징하다
2021년 2월 램지어 하버드대 로스쿨 교수가 “위안부는 전쟁의 피해자가 아닌 자발적인 성 노동자, 매춘부였다”라고 막말을 하여 떠들썩했다. 또한 국내 유력 보수 일간지는 2021년 10월 ‘한일 관계가 파탄 나면 더 좋다. (…) 위안부 문제는 현 집권 세력에 가성비 좋은 국내 정치용 비즈니스가 됐다. (…) 일본은 반격에 나섰고 미국도 주춤했다’라며 악의적이고 왜곡된 보도를 쏟아냈다. 이러한 연속선상에서 국내의 극보수 단체가 독일에서 ‘소녀상’ 철거를 주장하였다.
기림비와 소녀상은 오늘날 전 세계인들이 주목하여 전시 성범죄 희생자들의 고통을 기억하는 공간이자 여성 인권과 존엄·평화를 염원하는 대상이 되었다. 소녀상은 더는 한일 간의 외교 문제가 아니며 국내의 좌우 이념 문제가 아니다. 한때 국가가 없어 그들을 지켜주지 못했다. 그러한 민족이 독립하여 새로운 국가를 세웠다면 그들을 보듬어 안아야 하고, 그렇게 만든 상대 국가에 사죄와 용서를 받아내는 것이 마땅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