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리 편집실
대통합을 꿈꾼 대한통의부 총재 김동삼
김동삼은 1878년 경북 안동시 임하면 천전리에서 태어났다. 1907년 협동학교를 설립하고 신민회·대동청년단에서 애국계몽운동을 펼쳤으며, 대한제국이 멸망하자 만주로 망명했다. 1911년 삼원보에 정착하여 경학사 사장 이상룡을 도와 독립운동기지 건설에 힘을 쏟았다. 1914년 백서농장의 장주가 되었으며, 1919년 서로군정서 참모장에 취임했다. 1922년 6월 서간도 일대 간도참변으로 무너진 동포사회와 독립군을 추슬러 남만통일회를 주도하고 대한통군부를 탄생시켰다. 8월 30일 대한통군부가 대한통의부로 확대·개편되자 총장이 되어 이를 이끌었다. 1923년 1월 상하이 국민대표회의에 서로군정서 대표로 참여한 그는 이 회의에서 의장으로 선출되어 독립운동단체 통합에 힘썼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후 정의부와 민족 유일당운동촉성회를 이끌며 독립운동단체의 통일에 힘을 기울였다.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북만주에서 활동을 모색하던 중 1931년 10월 하얼빈 일본총영사관에 체포되었다. 평양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서울 서대문형무소로 옮겨져 옥고를 치르는 동안 몸은 병들었지만, 의지와 기개는 꺾이지 않았다. 독립운동가로서 감옥에서 최후를 맞는 것이 ‘과분한 죽음’이라고 여긴 그는 1937년 4월 13일 옥중에 순국했다. 1962년 정부는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김동삼 생가 터
대한통의부 총재로 활약한 김동삼이 태어난 곳으로, 현재는 외형이 많이 바뀌었으나 일부 구조는 그대로이다.
주소 : 경북 안동시 임하면 내앞길 7-7

김동삼 생가 터 입구(위) / 김동삼 생가 터 전경(아래)
무장투쟁에 앞장선 대한통의부 사령장 신팔균
신팔균은 1882년 충북 진천에서 전형적인 무관 집안의 후예로 출생했다. 1904년 육군무관학교를 졸업하고 시위대 장교로서 왕실 안위를 책임졌다. 1907년 8월 군대가 강제로 해산되었으나 군직에 종사하고 있었다. 1909년 고향인 충북 진천군 이곡면 노곡리(현 이월면 노원리) 강당고개에 있는 보명학교 강사로 자주 출근하여 후진양성에 힘썼으며, 1909년 대동청년단에 가입하여 활동했다. 1910년 국권이 강탈당하자 동생 신가균과 신필균에게 보명학교 운영을 맡겼다. 이후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전념했다. 1918년 만주의 지도자로서 동지 38인과 함께 「대한독립선언서」를 발표하기도 했다. 1919년 3·1운동 후 서로군정서에 참여하고 독립군 양성에 전력을 기울였고, 1920년 12월 밀산에서 만들어진 대한독립군에 참가했다. 1922년 대한통의부가 조직되자 이에 참여했으며, 1924년 대한통의부 사령관에 취임하여 무장투쟁에 앞장섰다. 대한통의부 부대의 전투력 향상을 위해 훈련하던 중 중국군의 습격을 받아 1924년 7월 2일 전사했다. 1963년 정부는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신팔균 순국지_홍승수고 절벽바위
대한통의부 사령관 신팔균이 순국한 곳으로, 이 일대는 현재 왕청문 홍승저수지로 변하였다.
주소 : 요녕성 신빈현 왕청문 홍승수고 절벽바위

대한통의부가 머물렀던 이도구 마을(2011)(위) / 신팔균 순국지 _홍승수고 절벽바위(2011)(아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