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독립운동가
전 재산을 바쳐
독립전쟁의 기반을 개척한 선구자
이석영

독립전쟁의 기반을 개척한 선구자
이석영
이석영(李石榮)
1855~1934
서울
건국훈장 애국장(1991)


저동(苧洞) 일대 6형제의 생가(우당기념관 제공)

독립운동 기지 개척을 위하여 서간도 망명길에 오르다
이석영은 백사 이항복(白沙 李恒福)의 10대 손으로 1855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30세가 되던 1885년 과거에 급제한 그는 승지(承旨)를 비롯한 요직을 지내며 고종을 보필하다가, 1904년 벼슬을 사양하고 관직에서 물러났다.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되는 가운데 동생 이회영이 국권수호운동에 나서자 이석영은 남산 쌍회정을 모임 장소로 제공하며 이회영의 활동을 지원하였다. 국외 무관학교 건립을 위해 서간도를 답사하고 온 이회영이 경술국치 직후 이석영에게 망명을 제안했고, 이석영은 형제들과 뜻을 모아 전 재산을 처분하고 일가족 60여 명과 서간도 망명길에 올랐다. 가문 차원에서 이루어진 이들의 집단 망명에는 이석영의 경제적 뒷받침이 큰 역할을 하였다.

서간도 시종기(우당기념관 제공)


신흥교우보(新興校友報) 제2호(독립기념관 소장)
신흥무관학교 설립을 재정 지원하여 독립전쟁의 기반을 마련하다
중국 서간도 삼원보(三源堡) 추가가(鄒家街)에 정착한 이석영 6형제는 독립군 기지 건설에 착수하였다. 이석영은 1911년 4월 한인 자치 기관인 경학사 설립에 참여하였다. 같은 해 6월 이석영의 자금 지원으로 독립군 사관 양성 학교인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를 개교하였다. 이석영은 1912년 신흥강습소를 합니하(哈泥河)로 이전하여 중등 과정을 신설하는 등 교세 확장을 지원하였으며, 교주(校主)를 맡아 학교 경영에 나서기도 하였다.
일제의 탄압으로 1920년 신흥무관학교가 폐교되자 이석영은 서간도를 떠나 베이징, 상하이 등지를 전전하며 생활하였다. 독립군 양성에 일생을 바친 이석영은 노후에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리다 1934년 상하이 빈민가에서 80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정부는 선생의 공을 기리어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영석 이석영 씨 상해 객창에서 영면」(『동아일보』 1934.02.28.)(국사편찬위원회 제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