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체절명의 한국사
대제국 수나라,
살수에서 수장되다

글 김종성 역사작가
대제국 수나라,
살수에서 수장되다

살수대첩 전시 모형(전쟁기념관 제공)
수나라의 야심 찬 꿈
612년에 수나라 양제(수양제)는 고구려 침략군을 두 방향으로 파견했다. 육군은 랴오둥(요동)반도를 지나 평양성으로 향하고, 수군은 산둥반도에서 바다를 건너 평양성으로 가도록 했다. 이때 수군은 육군이 고구려 땅에서 먹을 군량미를 운반했다. 육군은 고구려에 갈 때까지는 각자가 등에 맨 식량을 먹고, 고구려에 도착한 뒤에는 수군이 제공하는 식량을 먹기로 돼 있었다. 그런데 병력 규모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수나라 역사를 기록한 『수서』 ‘양제본기’에 따르면 육군의 전투 병력은 113만이었다. 하지만 “물자를 공급하고 수송하는 인원수는 1배였다”고 한다. 전투병력 113만 외에, 그와 비슷한 규모의 비전투병력이 물자 공급과 수송을 담당했던 것이다. 한편, 수군은 최소 5만에서 10만 명이었다. 그래서 『수서』는 이 병력을 200만으로 부른다. 어찌나 병력이 많았던지, 육군 전체가 출발하는 데만 40일이 걸렸다. 동아시아 최강국인 수나라가 200만이라는 대군을 동원해 국운을 건 일대 모험을 벌인 것이다. 그들이 모험을 감수했던 것은 고구려가 걸림돌이 됐기 때문이다. 수나라의 권위를 인정하고 굴복하라는 요구를 고구려가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다.
서기 304년, 유목민들인 흉노족·선비족·갈족·저족·강족이 북중국을 점령한 뒤부터 중국 대륙은 근 3백 년간 대혼란에 빠졌다. 이를 수습하고 589년에 중국을 통일한 나라가 바로 수나라다. 그런데 수나라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또 다른 과제에 도전했다. 한나라(기원전 202~서기 8년) 때의 영광을 회복하고자 했던 것이다. 한사군이라 불린 네 개의 군을 고조선 땅에 설치한 것에서 나타나듯, 한나라는 이웃나라들을 형식적으로나마 자국 행정구역에 포함하려고 시도했다. 수양제가 대군을 동원해 고구려 점령을 시도한 것은 한사군의 영광을 재현하고 고구려를 자국 행정구역에 편입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수양제의 시도는 무위로 끝났다. 612년의 제1차 침공에 실패한 그는 613년에 제2차 침공, 614년에 제3차 침공을 거듭 감행했지만,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다. 제4차도 계획했지만, 그것은 사전에 포기했다. 막강한 수나라가 이렇게까지 꼬이게 된 것은 612년 제1차 전쟁에서 참패를 당했기 때문이다.
수나라 장군 우중문에게 주는 시
수나라의 제1차 침공에 맞서 고구려 영양태왕(고구려 군주의 정식 명칭은 태왕)은 을지문덕에게 육상 방어를 맡기고, 동생인 고건무(훗날의 영류태왕)에게는 해상 방어를 맡겼다. 한편, 적군이 식량을 약탈할 경우에 대비해 백성과 곡물을 주요 지역의 성으로 옮겨두었다. 생활에 지장을 받는 일이기는 했지만, 백성과 귀족들이 중앙정부의 지휘를 잘 따라주었기에 고구려는 침략군에 맞서 총력전을 전개할 수 있었다.
수양제는 자신만만했다. 고구려가 어떻게 나오든 간에 200만 대군을 막기는 힘들 것이라 생각했다. 당연히 자신이 이길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해로를 따라 평양에 도착한 수나라 수군은 고건무의 유인 작전에 휘말려 평양성을 함부로 침입했다. 고구려군이 도읍을 포기한 줄 알고 성내에 들어간 수나라 군대는 곳곳에 매복한 병사들의 공격을 받고 대패했다. 그들이 갖고 온 양곡 수송선도 공격을 받고 침몰했다. 육군이 먹을 군량미가 바닷속에 가라앉은 것이다. 어찌할 수 없게 된 수나라 수군 사령관 래호아는 작은 배를 타고 홀로 도주해 바다에서 대기했다. 수양제의 작전이 틀어지기 시작했다.
수나라 육군도 난관에 봉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육군은 중국대륙과 만주를 가르는 요하를 건넌 뒤 고구려 전방인 요동성을 공격했다. 하지만 완강한 저항에 부딪혀 전투가 장기화됐다. 그러던 중 고구려군이 항복 의사를 밝혔지만, 수나라군의 지휘체계 때문에 이는 실현되지 않았다. 수양제는 현장 지휘관에게 전권을 부여하지 않았다. 그래서 현장 지휘관은 이 사실을 보고하기 위해 황제에게 전령을 파견해야 했다. 요하는 건넜지만 요동성에는 도착하지 않은 수양제에게 보고하러 간 사이 고구려군은 전열을 재정비했고, 항복은 없었던 일이 됐다. 수나라군은 계속해서 요동성에 발이 묶여야 했다.
조급해진 수양제는 돌파구를 모색했다. 별동대 30만을 선발해 평양성을 직공 하는 방안을 생각해냈다. 고구려 전방도 뚫지 못하면서 후방을 기습할 길을 강구한 것이다. 바로 이때부터 명장 을지문덕의 역량이 발휘됐다. 육군 사령관인 그는 본격 전투에 앞서 적진 교란에 나섰다. 대담하게도 홀로 말을 타고 수나라 별동대 군영에 들어갔다. 항복하겠다며 들어가서 수나라 장군 우중문을 만난 그는 병사들이 몹시 지쳐 있다는 사실을 파악했다. 그리고 병사들을 좀 더 지치게 만들 필요성을 절감했다. 을지문덕을 돌려보낸 우중문은 생포하거나 죽이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했다. 전황이 꼬인 상황에서 고구려 사령관이 생포되거나 죽임을 당하면, 전세가 한쪽으로 기울 수도 있었다. 뒤늦게 이를 깨달은 우중문은 병사들을 급파해 “할 말이 있으니 다시 돌아오라”고 을지문덕에게 요청했다. 하지만 을지문덕은 핑계를 대며 사양한 뒤, 후대에 두고두고 남을 편지 한 통을 우중문 부하들에게 쥐어 주었다. ‘여수장우중문시(與隋將于仲文試)’. 우리말로 ‘수나라 장군 우중문에게 주는 시’로 번역되는 이 시는 “신비한 책략은 하늘의 이치를 다했고/오묘한 전략은 땅의 이치마저 다했네/전승의 공로 이미 높고 높으니/만족함을 알고 그대 돌아가기를 원하노라”라는 네 구절로 돼 있다. 할 만큼 한 것 같으니 이제 그만 돌아가라는, 치켜세워주는 듯하다가 조롱으로 끝내는 시다.
시를 받아든 우중문은 흥분을 참지 못했다. 30만 대군을 동원해 을지문덕 추격에 나섰다. 을지문덕은 조금 싸우다가 곧바로 도주하는 방식으로 적군을 계속해서 남쪽으로 유인했다. 하루에 일곱 번씩이나 전투하다가 달아난 적도 있었다. 수나라 군대의 보급선이 길어지도록 유도한 것이다. 을지문덕을 쫓는 데 급급했던 우중문은 살수(청천강)에서 배를 타고 강을 건넌 뒤 평양성까지 다다랐다. 그제야 군량미 문제를 걱정하게 된 그는 회군을 결정했지만, 이미 너무 늦은 뒤였다. 우중문이 꼬리를 보이자 을지문덕은 별동대를 추격하는 한편, 특공대가 수나라 군대를 앞질러 살수에 가 있도록 했다. 모래주머니로 살수의 강물을 막아놓고, 수나라 군대가 타고 갈 선박들을 치워버리기 위해서였다.
살수에 도착한 우중문은 선박이 없어진 사실을 알았지만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강에 물이 별로 없어 건너는 데 문제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을지문덕 부대에 쫓기면서 강이 말라버린 이유를 깊이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래서 걸어서 도강하기로 결심했다. 이 부대가 강 중간쯤 건넜을 때, 을지문덕은 막았던 강물을 탁 틔웠다. 거센 강물이 수나라 군대를 뒤엎었고, 그들의 전열은 흐트러졌다. 이 틈을 놓치지 않고 고구려군이 총공격을 개시했다. 처음에 30만이었던 수나라 별동대 중에서 전투 후 살아남은 숫자는 3천도 안 됐다.
30만 병력을 살수에서 잃은 수양제는 전의를 상실하고 철군을 명령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꼬이기 시작한 수나라는 6년 뒤인 618년, 결국 멸망했다. 중국 통일 29년 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진 것이다. 한나라의 영광을 재현해 동아시아를 자국 행정구역에 편입시키고자 했던 수나라의 꿈은 영양태왕·을지문덕·고건무와 고구려인들의 총력전에 부딪혀 살수에서 수장되고 말았다. 당시 동아시아는 중동의 오리엔트 문명권에 이어 세계 2위 문명권이었다. 세계사가 공정하게 기록됐다면, 세계 2대 문명권에서 발생한 이 위대한 전쟁을 세계인 대다수가 모를 수 없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