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터전: 미주 편

현순의 3·1운동 소식 전파와
대한인국민회의 대응

현순의 3·1운동 소식 전파와 <BR />대한인국민회의 대응


글 홍선표 나라역사연구소 소장


현순의 3·1운동 소식 전파와 

대한인국민회의 대응


Ⅲ. 3·1운동의 발발과 재미 한인의 독립운동 ①



1919년에 들어서 재미 한인의 독립운동 열기는 계속 고조되었으나 파리강화회의에 한인 대표로 이승만과 정한경을 파견하는 일은 뜻대로 풀리지 않았다. 그런데 파리강화회의 대표 파견 추진활동에 대한 세부 내용은 중앙총회에만 알리고 전 미주 한인들에게는 비밀로 하였다. 파리행 전망이 처음부터 모호한 상황에서 일일이 전 미주 한인들에게 알릴 때 혹 실망감으로 독립운동의 열기가 냉각될지 모를 우려 때문이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San Francisco Examiner 3월 3일 자 보도로 이승만·정한경의 여권 신청이 미 국무부로부터 거절되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그동안 비공개로 일관했던 중앙총회는 더 이상 추진 과정을 숨길 수 없었다. 그러나 향후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를 두고 무척 난감해했다. 크게 고조된 독립운동의 열기가 급속히 냉각될 것이 분명했지만 뚜렷한 대책이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걱정으로 가득 차 있을 때 3월 9일 상하이에서 현순의 전보가 중앙총회와 하와이지방총회에 내도하였다. 국내에서 3·1운동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린 것이다.

3·1운동의 발발과 중앙총회의 활동방침

국내 3·1운동의 발발 소식은 미주 한인사회를 진동시켰다. 3·1운동 소식을 정리해 보도한 『신한민보』 3월 13일 자 「호외」는 “장쾌하여도 이렇게 장쾌하고 신기하여도 이렇게 신기한 일은 진실로 무엇에 비할 데 없으니 기쁨에 겨운 우리는 눈물을 뿌렸노라”고 그 벅찬 심정을 표현하였다. 

그동안 한인 대표 파견활동과 특별의연금 모금활동을 추진해 미주 한인사회의 중추기관으로 활동한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의 임무는 더욱 막중해졌다. 중앙총회장 안창호는 3월 9일 상하이에서 전보를 받은 당일 오전 11시, 가장 먼저 중앙총회 부회장이자 대표원 임시의장, 그리고 사무원인 백일규와 협의하고 독립선언 이후의 방침을 결정하였다. 첫째, 이승만·정한경·서재필과 북미 및 멕시코의 각 지방 한인사회에 독립 선언 소식을 전보로 발송할 것, 둘째, San Francisco Examiner와 San Francisco Chronicle 등 미국 언론에 3·1운동의 발발 소식을 알릴 것, 셋째, 중앙총회 임시협의회를 상항한인교회에서 개최하기로 정했다. 3월 9일 저녁 7시 30분 상항한인교회에서 개최한 임시협의회는 샌프란시스코와 그 인근 재류 사람들이 거의 다 모일 정도로 성황을 이루었다. 참석자들은 기쁨에 겨운 눈물을 뿌리며 미친 듯이 만세를 불렀다. 그 소리가 마치 천지를 진동할 정도였다. 안창호가 겨우 자리를 정돈시키고, 3·1운동 이후 재미 한인이 취해야 할 세 가지 방향을 제시하였다. 첫째, 개개인이 독립의 각오와 일치된 행동을 가질 것, 둘째, 미국 각 언론·잡지나 종교계에 3·1운동 소식과 기독교 박해 사실 등 한국의 사정을 미국 국민에게 널리 알려 동정을 얻고 한인의 활동에 많은 도움을 얻도록 할 것, 셋째, 이러한 일을 감당하기 위해 북미·하와이·멕시코 재류 동포들이 재정공급의 책임을 다할 것이라 했다.

그런 후, 임시협의회는 6가지의 의안을 의결했다. 그중 중요 내용은 ‘평화회의 파견 대표자 이승만·정한경이 여행권을 얻지 못할 경우 서재필을 파견할 것, 만일 여행권 세 장을 얻을 경우 서재필·이승만·정한경 3씨를 파송할 것, 미국 각 종교계와 및 각 단체에 교섭하여 대한 독립에 대한 동정을 얻도록 하고 이를 위한 교섭위원으로 윤병구·정인과를 선정할 것, 태극기를 제작해 판매하고 때마다 사용하게 할 것’ 등이었다.  

이 같은 결정은 곧 부분 변경되어 먼저 파리강화회의의 새 대표였던 서재필 대신 윤병구로 변경되었고, 종교계의 교섭위원은 윤병구 대신 민찬호가 추천되었다. 

하와이지방총회 총회장 이종관은 안창호에게 보낸 3월 9일 자 전보에서 이번 외교의 전권을 중앙총회장에게 맡기겠다고 알렸다. 이로써 중앙총회의 권위와 역할은 더욱 막강해졌다. 『신한민보』는 3·1운동의 소식을 신속히 보도하고자 매주 1회에서 3회로 증간 발행하기로 하고 이를 위해 새 편집인으로 이살음 목사를 추가했다.


독립의연금 모금운동과 대외 특파위원 파견

중앙총회는 3월 13일 임시협의회에서 의결한 내용을 근거로 12개의 재정 모금 규정을 제정해 공표했다. 독립운동을 위한 특별의연금의 명칭을 ‘독립의연’으로 정했고 중앙총회의 지휘 아래 모금운동을 전개하기로 했다. 4월부터 무슨 수입이든지 매월 또는 매 주일 수입의 20분의 1을 거두는 ‘21례’를 신설했다. 6월부터는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징세령에 의거 인구세와 애국금 모집에도 착수했다. 그 외 미주 한인의 등록사업을 실시해 인구 조사활동을 병행하기로 하였다. 인구조사사업은 대한인국민회가 처음 시도하는 것으로 단순한 인구조사 외에 독립의연 자금을 효과적으로 모금하기 위한 의도도 담겨 있었다. 

중앙총회는 1919년 국제정세의 급변에 대응하기 위해 뉴욕과 파리에 한인 대표 파견을 추진한 것 외에 다방면으로 특파위원을 선정해 파견하였다. 다양한 각도에서 독립운동을 추진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가장 먼저 선임된 특파위원은 1919년 1월 4~5일 임시국민대회 때 본국 파송 비밀특파위원으로 선정된 여운홍이다. 그는 1월 11일 임명된 후 활동 여비로 300달러를 받아 2월 1일 도쿄를 거쳐 2월 18일 서울로 들어갔다. 그는 귀국하기 전 헐버트와 협의하여 파리강화회의에서 한국 독립 문제를 호소하기 위해 국내에서 1백만 명의 서명을 받는 운동을 추진하려 했는데, 이미 2·8독립선언과 3·1운동이 준비되고 있는 사실을 알고 중단했다. 

안창호는 1919년 1월 4일 임시국민대회 때 하와이 순방계획을 확정했다. 그런 후 해외 전체 한인의 대동단결을 추진하는 것으로 계획을 변경해 3월 5일 정인과·황진남과 함께 원동특파원이 되어 4월 1일 샌프란시스코를 떠나 상하이로 갔다. 그밖에 3월 15일 중앙총회는 군사상 준비를 목적으로 박용만·노백린을 원동특파위원으로 선정하였다.

독립의연금 모금운동을 활발히 추진하기 위한 미주 특파위원도 임명했다. 1919년 3월 17일 캘리포니아주를 비롯한 미국 9개 주의 한인 동포들에게 정신적·물질적으로 일치 단합을 꾀하고 독립의연을 모집할 특파위원으로 김정진(‘김호’의 옛 이름)을 임명하였다. 4월 4일 중국인 대상으로 독립의연을 모금하기 위해 김영훈·홍언·강영각·임정구를 화교위원으로 임명했고, 5월 15일 특별의연금 모금활동과 한인사회의 정돈을 위해 특파전권위원으로 강영소·황사용을 하와이로 파견했다. 그 외 미주 각 지방에서 활동할 독립의연 수전위원(收錢委員)들을 임명하였다. 이처럼 3·1운동 직후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는 대대적인 ‘독립의연’ 모금운동과 선전활동의 일환으로 특파위원들을 선정해 국내는 물론 중국과 하와이 그리고 미국 본토로 파견하였다.


alt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에 공포한 「3·1 독립선언 포고문」(1919.03.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