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학생 시절 교과서에 까맣게 줄 쳐가며 외웠던 예술사조가 스쳐 간다. 바로크, 신고전주의, 낭만주의, 사실주의, 인상주의… 당시의 세계를 가장 직관적으로 포착해내는 방식은 예술이다. 예술 작품 간 관계성을 찾고 또 각각의 작품 속에서 시대와의 연결점을 발견할 때 비로소 온전한 하나의 세계가 보인다. 바로 그것이 사조이고 예술작품들이 공유하는 웅대한 전제다.
빈 Wien 사회와 예술
1900년경, 세기가 바뀌는 순간의 유럽에서는 20세기 현대라고 하는 완전히 새로운 패러다임을 창출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지적 혁명이 일어났다. 그중 가장 영향력 있고 파급 효과가 뛰어난 그룹이 오스트리아의 빈Wien에서 출현했다. 1900년경의 빈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중심지로 오랜 전통이 자리 잡은 정체된 공간이었다. 새로운 예술이 번성하기 어려운 조건이었음에도 이 시기 빈에서는 여러 학문과 예술에서 20세기를 주도할 위대한 선구자들이 대거 출현했다. 철학자 비트겐슈타인,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 소설가 슈니츨러와 호프만슈탈, 음악가 구스타프 말러와 쇤베르크, 화가 클림트와 에곤 실레 그리고 코코슈카 등이 빈의 문화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오스트리아는 19개의 민족과 12개 국가로 이루어진, 유럽에서 가장 복합적인 사회였다. 더욱이 수도인 빈은 그런 오스트리아 사회의 결정적 축소판이었다.이런 사회적 배경에서 탄생한 빈의 예술 역시 복합적이고 다양한 양상을 띠고 있었다. 이 시기 빈 예술계에서 가장 주도적인 위치에 있었던 ‘빈 분리파(Wiener Sezession)’ 또한 빈 사회의 복합성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빈 예술의 참다운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시대적 상황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전제되어야 하고, 이를 바탕으로 다양한 배경 간의 관계를 파악해야 한다. 이 시대의 예술은 다른 장르와 밀접한 영향관계를 주고받는 가운데 문학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는 점에서 이 시기 문학을 이해하는 데에도 기여하게 될 것이다.
그림 속의 빈 모더니즘
19세기 이전은 합리주의자들의 독무대였다. 합리주의자들은 이성을 중시하고 감성은 무시했다. 합리주의와 경험주의를 통합하려 했던 18세기 철학자 이마누엘 칸트도 “도덕적 판단에서 감성은 배제하고 이성을 활용해야 한다”고 했다. 역사의 주도권은 ‘보편 개념이 실재한다’고 믿는 이상주의자들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회화에서는 이상적이고 보편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한 작품만이 예술로 인정받았다.솔직하고 직접적인 감각의 표현은 상스러운 것으로 치부되었다. 빈의 모더니즘 화가들은 보편적 미를 추구하는 기존 예술에 반기를 들고 과거의 모든 예술 양식으로부터 자신을 ‘분리’했다. 예술 아카데미의 족쇄를 벗어 던진 빈 분리파 화가들은 물었다. 창작에 있어 불편한 감정들은 숨겨야 하는 것인가. 예술은 이상적인 아름다움만을 추구해야 하는가. 그렇다면 과연 보편적인 아름다움이란 존재하는가.

회화에서의 빈Wien
모더니즘은 구스타프 클림트와 에곤 쉴레 등으로 대변된다. 이들은 기존의 주류 예술 양식과 결별을 선언하며 빈 분리파를 결성하였고, 파리의 모더니즘 경향과 발맞춰 표현주의 작품으로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클림트의 작품은 관능적인 여성 이미지와 찬란한 황금빛, 화려한 색채를 특징으로 했다. 그는 성(性)과 사랑, 죽음에 대한 풍성하고도 수수께끼 같은 알레고리로 많은 사람을 매혹했다.
빈의 중심 사상가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의 시작
빈 분리파 화가들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인물은 프로이트다. 빈의 예술가들은 살롱을 통해 프로이트와 교류했다. 인간의 내면과 감정 표현에 몰두한 빈 표현주의 화가들은 프로이트의 무의식 이론과 마음의 작동 원리를 설명한 모델에 관심을 보였다.프로이트는 경험 과학의 영역에서 인간의 마음을 연구하며 이전까지는 관심의 대상이 아니던 무의식을 수면 위로 끌어올린다.
또한, 그는 무의식적 동기가 우리 행위의 숨겨진 기반임을 임상을 통해 내보이며, 압제된 무의식이 정신병의 근원이라고 했다. 물론 프로이트가 마음의 과학에 관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할 수 있었던 데는 에른스트 마흐와 로키탄스키가 다져놓은 토양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당시 미술평론가들은 클림트의 작품을 두고 “프로이트의 이론을 강렬하게 보여주는 시각적 표현”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과학과 예술, 융합의 시대
‘빈 1900’ 시대의 경험론과 실증주의에 기반을 둔 과학적 아이디어가 화가들의 작품 활동에만 영향을 준 것은 아니다. 미술사학자 알로이스 리글은 과학에서 얻은 통찰을 미술 비평에 접목했다. 바로 독일의 생리학자이자 물리학자인 헤르만 폰 헬름홀츠의 연구에서였다.
빈Wien 1900 그때를 만나다
인간의 시각 시스템이 정보에 의존하기 보다는 기억에 기반을 둔 무의식적 추론 과정을 통해 영상을 재구성한다는 헬름홀츠의 연구 결과에 영향을 받아, 리글은 미술 평론에 새로운 견해를 첨가하게 된다. 훗날 곰브리치가 ‘관람자의 몫’이라 부르게 되는 것으로, 예술이 독립적인 작품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관람자가 작품을 해석하는 행위까지 포함한다는 내용이다.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미술사학자로 평가되는 곰브리치는 “기억이 미술의 지각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고 말하며, ‘순수한 눈’ 같은 것은 없다고 확신했다.
현대의 인지심리학자 크리스 프리스는 “우리가 물질 세계에 직접 접근하는 것처럼 느낄지 모르지만 그것은 우리 뇌가 빚어낸 환상”이란 헬름홀츠의 통찰을 요약했다. 에릭 캔델의 말로 바꾸자면 “우리는 동시에 두 세계에 사는 것이며, 현재 진행되고 있는 시각 경험은 두 세계의 대화인 셈”이다.

모더니즘이라는 새로운 차원을 제시한 ‘빈 1900’은 과학과 예술이 자유롭게 교류하며 대화했던 시기였으며, 오늘날 ‘빈 1900’의 정신을 이어받은 후예들이 ‘신경 미학’이라는 분야를 탄생시켰다. 신경과학의 발전에 힘입어 이제 우리는 감정을 담당하는 편도체와 이성적 사고를 담당하는 전두엽이 어떻게 연결되고 어떤 영향을 주고받는지 알아가기 시작했다. 감성이 없으면 이성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실험 결과 앞에서 합리주의는 더는 설 자리가 없었다. 이성과 감성은 협력한다. 과학은 예술을 닮고, 오스카 와일드의 말을 빌어 “자연은 예술을 모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