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김형목(사단법인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이사)
김숙자는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재학 시절 3·1운동이 일어나자 탑골공원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친 독립운동가이다. 이후 고향인 평안북도 영변으로 돌아가 교사로 근무하며 학생들에게 독립사상을 고취시킨 그는 항일언론인이자 국사학자로 활동하며 날카로운 논설로 일제에 맞선 장도빈과 1920년 7월 결혼하였다. 두 사람은 민족의 존엄을 세우기 위해 각자의 자리에서 분연히 투쟁하였다.

김숙자와 장도빈
‘대한독립만세’를 소리 높혀 외치다
3·1운동 100주년을 계기로 여성독립운동사 연구가 가속화되어 잘 알려지지 않은 여성 인물과 사료들이 발굴되고 있다. 그 일환으로 우리 역사무대에 새롭게 등장한 대표적인 인물이 있다. 바로 항일언론인이자 국사학자로 널리 알려진 장도빈의 아내 김숙자다. 1894년 태어난 김숙자는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재학 중에 동료 60여 명을 이끌고 만세운동에 참여한 독립운동가이다. 경성여고보는 1908년 한국 최초로 설립된 관립 여학교인 한성고등여학교의 후신으로, 1910년대 당시 조선총독부가 직할하던 유일한 여자고등보통학교였다. 경성여고보 시절 25세 만학도였던 그는 리더십을 발휘하여 학우들 사이에서 단연 군계일학이었다.
당시 YMCA 간사였던 박희도에게 독립운동 소식을 전해 들은 그는 본과생 최은희, 이양전과 사범과생 최정숙, 강평국, 고수선, 이선경 등과 함께 취침 시간을 이용하여 태극기를 만들었다. 1919년 3월 1일 오전 담장을 넘어 날아온 독립선언서가 운동장에 뿌려졌고 학교는 초비상이 걸렸다. 긴급 교직원회의가 열리고 학생들은 귀가를 봉쇄당한 채 외출이 금지되었다. 오후 2시 경성여고보에서 500여 미터 떨어진 탑골공원에 퍼진 만세소리는 천지를 진동하였다. 이에 경성여고보 전교생들은 학교대문을 부수고 쏟아져 나와 ‘대한독립만세’를 소리 높혀 외쳤다. 이날 32명의 경성여고보생들이 일제 경찰에 연행되었다.그러나 김숙자는 굴하지 않고 3월 5일 펼쳐진 남대문역(현 서울역) 2차 시위에 다시 참가하였다. 경성여고보 기숙생 전원 70여 명은 이날 새벽 사감의 눈을 피해 기숙사를 빠져나와 시위에 참여하였다. 이때 경성여고보생들은 ‘일편단심’을 의미하는 빨간 머리띠를 수천 개 만들어 경성고보생들에게 전달하여 학교에서 사용하도록 하였다. 두 차례에 걸친 경성여고보생 만세시위는 당시 장안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
실천적 여성운동가로서 역사무대에 등장하다
조선총독부는 경성여고보 전교생이 1차 만세시위에 참가한 사실에 경악하였고, 3월 10일을 기하여 경성지역에 임시휴교령을 내렸다. 신민화 교육이 실패했음을 보여준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향후 있을 학생운동을 막으려는 조치였으나 오히려 만세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김숙자는 고향인 평안북도 영변으로 돌아가 비밀결사체인 대한애국부인회 평북조직책으로 활약하다가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체포될 당시 그는 임신 7개월이었다. 『매일신보』 1921년 6월 24일자 ‘여자 정치범 검거, 독립운동의 거괴(巨魁) 김숙자’라는 기사에서 활약상을 엿볼 수 있다. 이 기사에는 ‘김숙자는 독립운동 군자금을 비밀리 모집하다가 체포되었다’라는 내용이 담겨있다.
한편 김숙자는 독립운동가 집안 출신의 재원이었다. 아버지 김준찬은 광복군 사건으로 투옥한 독립운동가였다. 남동생 김응원은 임시정부의 국내 조직인 연통제 책임자로 활약하면서 의열단에서 활동해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김숙자는 석방된 이후에도 YWCA를 통한 여성운동활동가로서 여성지위향상과 양성평등권을 위한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김숙자 체포 기사, 『매일신보』 (1921.6.24.)
소양과 도리를 바탕으로 학문에 전념하다
김숙자의 남편 장도빈은 1888년 10월 22일 평안남도 중화군 상원면 신읍리에서 장봉구(張鳳九)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결성이며, 호는 산운(汕耘)이다. 그는 할아버지 장제국(張濟國)의 높은 교육열로 인해 어릴 때부터 엄격한 전통교육을 받았다. 이는 사대부로서 소양을 쌓는 동시에 훗날 국학연구에 진력할 수 있는 중요한 지적 토양분이 되었다. 도빈의 총명함과 비범한 재주에 놀란 주위 사람들은 그를 신동이라 불렀다. 5세에 한시를 지을 만큼 학문적인 능력이 탁월하였고, 1893년 백일장에서 발군의 실력을 발휘한 그는 유생들 사이 단연 돋보이는 존재로 이르렀다. 더불어 학문적 능력뿐만 아니라 인간으로서 올바른 도리와 소양을 강조한 할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고자 노력하였다.
도빈이 수학에 전념하는 동안 국내·외 정세는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삼남지방에서 시작된 동학농민혁명의 불길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고, 그의 고향에도 개화 바람이 불기 시작하였다. 특히 개신교는 선교사업의 일환으로 의료사업과 근대교육을 전국 각지에 보급하기 위한 노력을 하였고, 정부도 부국강병을 위한 시무책으로 근대교육 시행을 거듭 천명하였다.
근대교육 수혜로 현실을 직시하다
1903년 15세가 된 도빈은 변화하는 시대 분위기에 부응하고자 먼저 평양감사를 찾아갔다. 감사는 그를 격려하며 한성사범학교 입학 권유와 동시에 추천서를 써주었고, 그 길로 상경한 도빈은 한성사범학교 입학시험에 응시하여 합격하였다. 신학문에 대한 그의 열정은 향학열을 고취시키는 요인이 되었고, 재학 중 상동청년학원 교사로 활동하며 우리나라 역사학에 열중하였다. 1907년 4월 경북 성주공립보통학교 부교원 판임관 7급으로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은 그는 풍전등화 같은 위기의식을 느끼며 학문에 몰두하는 한편 국권회복방책을 강구하였다. 국채보상운동 동참은 국권수호를 위한 일환이었다. 도빈은 서우학회 기관지에 기고문을 투고하는 등 근대교육에 대한 높은 관심을 보였다. 대한매일신보사 기자 겸 논설위원으로도 활약한 그는 보성법률전문학교 야간부에 입학하여 법률을 공부하는 등 분주한 나날을 보냈다.
단재의 독립정신과 역사의식에 감화되어 한국고대사 연구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그가 쓴 논설은 민족문화의 우수성, 민족의 독립문제, 교육의 중요성 등을 주요 내용으로 다루었고 그에 따른 적절한 방향성도 제시하였다. 도빈은 ‘역사상 우수한 문화를 지닌 국가는 번성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더불어 대한제국 부흥을 위한 요인으로 신의심 공고, 영혼 중시, 단결심 환기, 모험심 진작, 인종의 확장 등을 제시하였다.
웅대한 고대역사 무대를 답사하다
도빈은 국망 이후 국권회복을 위한 활동을 모색하다가 1912년 망명길에 올랐다. 북간도를 대표하는 민족교육기관인 명동학교에서 짧은 기간 교사로 재직한 그는 연해주로 이동하여 독립운동가 이상설, 정재관, 이갑 등과 교류하였다. 이듬해 겨울 도빈은 도산 안창호에게 미국행 초청 편지와 여비를 받았으나 신경쇠약 증세로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북간도와 연해주지역에서 펼친 교육과 언론 활동은 도빈이 세계사적 흐름을 이해하는 데 든든한 밑거름이었다. 고구려와 발해 등의 유적지 답사는 한국고대사에 대한 관심을 고취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신병 치료를 위해 귀국한 그는 국사 연구에 몰두하여 1916년 최초 저서인 『국사』를 출간하였다. 이는 자신의 역사인식을 정리하는 이정표적인 역작이었다. 그는 민족교육의 산실인 평안북도 정주 오산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당시 가장 중요한 문제는 학생들에게 올바른 민족정신을 심어줄 민족교육이었다.

『국사』(1916)_국립한글박물관 제공
출판활동과 역사대중화에 앞장서다
3·1운동 이후 상경한 도빈은 문화계몽운동 일환으로 한성도서주식회사를 설립하여 운영하였다. 그는 출판부장으로 잡지 『서울』과 『학생계』 의 편집주간을 맡으며 실질적인 운영을 이끌었다. 한성도서주식회사는 ‘우리의 진보와 문화의 증장(增長)을 위하여 시종 노력하기를 자임하노라’라는 목표로 출발하였다. 『조선지광』 발행도 그와 같은 의도에서 비롯되었다. 출판을 통한 민족정신 앙양은 그의 초지일관된 의지였다. 이와 더불어 역사연구도 병행하였다. 식민사가들의 한국사 왜곡과 날조는 그를 더욱 자극하였고, 관심분야인 한국고대사 중 특히 단군조선에 집중하였다. 그는 고대 조선인의 민족혼을 내세우며, 『삼국사기』에 인용된 『고기』를 역사서로 해석하는 등 단군실재론을 강조하였다.
초기 대표적인 저서는 『국사』를 비롯하여 『국사년표』(1917), 『조선역사요령』(1923), 『조선위인전』(1925), 『조선영웅전』(1925), 『조선사대전』(1928), 『조선역사사화』(1932) 등이었다. 이와 병행하여 신문과 잡지 등에도 역사 관련 글을 기고하며 역사대중화에 나섰다. 그는 민족문화 발달과 문무쌍전에 의한 국력신장을 극찬하는 등 식민지하 왜곡된 한국사 복원에 노력하였다. 이는 만주사변 이후 식민지배정책 강화에 맞서 민족정신을 일깨우려는 한 방편이었다. 1931년부터 『동아일보』가 대대적으로 선전하고 전개한 조선고적보존운동은 이러한 배경에서 출발하였다. 1932년 9월 도빈은 『조선사』 연재를 위해 사적지 답사를 떠났다. 수원, 공주, 부여, 경주 등지를 답사하며 사라져가는 역사현장을 안타까운 심정을 시로 표현하기도 하였다. 또한 ‘한국 통사에 대한 관심은 타율적인 식민주의사관을 극복하고 주체적인 민족주의사관 정립에 있다’고 전하였다. 현재까지 알려진 그의 저서는 62종과 유고 4종 등으로 근대 역사학자 중 가장 많은 역사서를 남겼다. 주된 관심사는 오로지 역사에 나타난 애국심 여부였다.
후세를 위한 한국사 연구와 교육에 매진하다
광복 직후 도빈은 자주적인 독립국가 수립에 매진하였다. 대한국민총회와 대한독립애국금헌성회 참여 등은 역사발전의 원동력이 세계문화의 수용과 교육식산의 발전이라는 자신의 진화론을 관철하려는 소박한 소망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자주적인 대한민국정부 수립을 위한 활동의 일환으로 『민중일보』를 창간하는 한편 우익 진영 세력 결집에 나섰다. 전국문인협회 참여도 이러한 의도 속에서 이루어졌다.
도빈은 건국실천원양성소와 육군사관학교에 출강하여 올바른 민족혼을 알리기 위한 국사교육 보급에도 앞장섰다. 초대 단국대학 학장으로서 민족대학 설립을 위해 혼신을 기울였다. 특히 ‘민족혼을 부활시키는 일이야말로 식민지잔재를 청산하여 진정한 조국광복의 위업을 달성하는 시초’라고 고지하였다. 순국열사봉건회 활동에 적극적인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그는 홍명희, 정인보, 조소앙, 조완구 등과 선열전기편찬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선열들에 대한 추모사업은 안중근의거와 3·1운동을 소재로 한 연극으로 이어졌다. 또한 이준열사추념기념대회 발기인으로 참여하며 민족혼을 일깨우는데 노력한 도빈은 선열들의 훌륭한 발자취를 기록하고자 한국사료연구회 조직에도 앞장섰다.
광복과 전쟁 이후 공사다망한 환경에도 그의 국사연구는 지속되었다. 단군성적호유회 고문직 수락은 자신의 기나긴 한국사연구를 후세에게 올바르게 전하려는 의도였다. 어쩌면 단군은 갖은 압박과 고난에도 자신을 스스로 지키는 수호신이었는지도 모른다. 이처럼 도빈에게 한국사 연구와 교육은 미래지향적인 한민족 운명을 일깨우는 길라잡이였다. 정부는 장도빈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민중일보』(1945.9.24)_대한민국역사박물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