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오늘 세계의 그날
원산총파업과 대공황

글 강응천 기획집단 문사철 대표, 역사저술가
원산총파업과 대공황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 경제는 장기 호황을 누렸다. 일제가 한국에서 문화정치를 펼치고 산업화를 추진했던 것도 그러한 조건 덕분이었다. 경제 호황의 중심에는 세계 자본주의 중심국가로 떠오른 미국이 있었다. 전쟁터였던 서유럽과 달리 빠르게 회복한 미국 경제는 1922년부터 상승 국면으로 들어갔다. 전쟁 중 얻은 이익으로 자본이 넘쳐나 서유럽과 중남미로 수출하고 내구 소비재 및 건축 산업과 내수도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그러나 1920년대 내내 실업률은 5% 이상을 유지했고, 면방직·석탄 등의 산업은 불황을 면치 못했다. 세계 농업도 과잉 생산으로 만성적 불황에 빠졌다. 넘쳐나는 자본은 주식 투자와 부동산 투기를 부추겼다. 1920년대 말에는 이 모든 경제 상황이 대공황을 향해 치닫기 시작했다.

원산총파업의 현장(1929)

한국 최초의 연대 파업, 원산총파업
1920년대 세계 경제의 호황은 식민지 한국에서도 산업화를 촉진했다. 그러나 일제가 주도하는 산업화는 외국 자본과 한국인 노동자 사이에 민족 모순과 계급 모순이 중첩된 갈등을 키울 뿐이었다. 1929년 1월, 원산노동연합회(이하 원산노련) 소속 노동조합의 2,200여 명 노동자가 총파업에 돌입했다. 22일에는 원산두량노동조합과 해륙노동조합이, 24일에는 원산중사조합과 원산제면노동조합이 파업에 들어갔고, 27일에는 양복직공조합, 28일에는 우차부조합과 인쇄직공조합이 잇달아 파업에 가담했다.총파업의 발단은 1928년 가을 영국인 소유의 라이징선석유회사에서 일본인 감독관이 한국인 노동자를 구타한 사건이었다. 그때 120여 명의 노동자가 일본인 감독관의 파면과 처우 개선을 요구하며 파업을 벌였다. 사건 발생 후 회사 측은 노동자들의 요구를 받아들였으나, 약속한 3개월이 지나도 약속을 이행하지 않는 바람에 1929년 1월 14일 다시 파업이 일어났다. 이에 원산노련이 파업을 지원하자, 원산 지역 자본가들의 모임인 원산상업회의소가 부두 노동자 450명을 해고하고, 외지에서 대체 노동자를 모집하는 대응 조치에 나섰다. 게다가 일본 경찰은 원산노련 간부를 구속하고, 함흥 보병대에서 약 300여 명의 군인까지 동원해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면서 노동자들을 압박했다.원산총파업은 한국 역사상 최초의 연대 파업이었다. 그 이전에도 개별 사업장에서 임금 인상 등을 요구하며 일어난 파업은 많았다. 그러나 노동조합이 다른 사업장 문제에 개입해 한 지역 노동자들 전체가 연대 파업을 벌인 것은 원산이 처음이다. 개별 사업장 단위의 경제투쟁이 노동계급의 해방과 민족해방을 목표로 하는 정치투쟁으로까지 나아가는 계기가 마련된 것이다. 원산 총파업을 돕기 위한 나라 안팎의 움직임도 활발했다. 부산노우회, 수원노동조합 등 100여 개 단체가 지원품을 보내고, 일본에서는 동조 파업의 움직임까지 나타나는 등 국제적으로 관심이 확산되었다.

아메리칸유니언뱅크 앞에 줄을 선 시민들

일본이 제시한 류탸오후 사건의 증거들.
일본은 중국을 공격하기 위해 류탸오후 사건을 위조했다

미국의 작가 어니스트 헤밍웨이
(Ernest Hemingway)
전 세계에 드리운 대공황의 검은 그림자
원산총파업은 전 세계적인 노동운동의 폭발로 이어지지 못했다. 세계 경제 자체가 폭발해 버렸기 때문이다. 원산총파업이 일어난 그해 1929년 10월 24일은 목요일이었다. 뉴욕 증시의 주가가 일순간 폭락하면서 전례 없는 대공황이 미국을 덮친 뒤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역사는 그날을 ‘검은 목요일’로 기억하고 있다. 1년 반이 지난 1931년 6월에는 뉴욕의 거대 은행 아메리칸유니언뱅크가 문을 닫았다. 은행 앞에는 수백 명의 예금자가 몰려들어 “내 돈 내놓아라!”며 아우성을 쳤다. 하지만 그들의 목소리엔 힘이 없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을 제치고 세계 최강의 경제 대국에 오른 미국은 1920년대에 폭발적인 경제성장을 이뤘다.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려고 전 세계에서 이민자들이 몰려들고, 제네럴 모터스 같은 미국 기업의 주식가격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사람들은 빚을 내서 너도나도 주식시장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주식가격은 실제 가치 이상으로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고, 마침내 한계점에 이르러 펑 하고 터져버렸다.
주식에 거품이 있다는 사실을 안 사람들이 주식을 내놓자, 주가는 순식간에 폭락하고, 빚을 내 주식을 산 사람들은 파산자가 됐다. 이들이 소비할 여력을 잃어 상품이 팔리지 않자, 기업들이 공장 가동을 중단하면서 실업자가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실업자의 증가는 소비를 위축시켜 더 많은 공장이 문을 닫기에 이르렀다. 대공황 발생 1년 만에 은행 1,300여 곳이 문을 닫아 예금자들은 알거지가 됐고, 은행 직원들조차 실업자가 됐다. 이어 수많은 공장이 도산해 실업률 16.3%, 실업자 수 800만 명으로 최악의 기록을 잇달아 갱신했다.
대공황의 여파는 미국에 투자한 유럽 기업에도 미쳐 연쇄 도산으로 실업자를 쏟아냈고, 유럽 열강의 영향 아래 있는 아시아·아프리카의 식민지들도 연쇄적으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대공황의 그림자는 이어 아시아의 일본과 그 식민지들에도 드리웠다.
아시아 전쟁의 서막이 오르다, 만주사변
일본은 세계 대공황으로 인한 경제 난국을 타개하는 길을 전쟁에서 찾았다. 펑톈 주둔 일본 관동군은 지난 9월 18일 만주 철도가 지나는 펑톈 외곽의 류탸오후 철교를 몰래 폭파한 뒤, 이를 중국군 소행으로 몰아붙여 일제히 공습과 포격을 퍼부었다. 일본군이 펑톈과 지린성의 주요 지역을 손에 넣자, 중국 민중은 상하이를 중심으로 대규모 항일 집회를 개최하고, 일본 상품 배척 운동을 전개했다. 이른바 ‘만주사변’이 발발한 것이다. 이 사건은 1937년 중일전쟁, 1941년 태평양전쟁으로 이어지면서 1945년까지 아시아와 태평양 전역을 15년 전쟁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 참화의 시작이 되었다.
일본의 만주 침략은 만주 시장을 독점적으로 확보해 장차 대륙 진출을 위한 전진 기지를 만들려는 속셈에 의해 이루어졌다. 대공황의 여파에 허덕이는 미국과 유럽 여러 나라는 이 같은 일본의 행위를 방치할 수밖에 없었다. 그에 따라 만주를 무대로 활동해 온 한국과 중국의 항일운동 세력은 큰 타격을 받았다. 원산총파업을 비롯해 일본의 약탈 자본에 대한 대대적인 항거에 들어갔던 한국의 노동자들에게도 전쟁은 심각한 위기로 다가왔다. 일본은 1920년대의 문화 정치를 거두어들이고 식민지 탄압을 강화하는 데 만주사변을 이용했다. 대공황은 이렇게 한국에도 커다란 위기로 다가오고 있었다.
공황기에 그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대공황은 사람들의 삶을 어떻게 바꿔 놓고 있었을까? 대공황의 중심지 미국에서는 실업자가 거리로 쏟아져 나오고 노숙자가 늘어나 대도시 곳곳에 무료 급식소가 생겼다. 1931년 크리스마스에는 뉴욕시 한 급식소 앞에 수백 미터에 달하는 행렬이 빵 한 조각을 얻어먹기 위해 줄을 섰다. 1932년 7월에는 수도 워싱턴에 허름한 옷차림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어느덧 모인 인원은 무려 2만 5,000여 명. 이들은 1924년에 퇴역한 군인들로 자신들을 ‘보너스 군대’라고 불렀다. 퇴역 당시 정부에서 이들에게 군 복무 기간만큼 사회에서 일했다면 벌었을 임금을 1945년까지 보너스로 지급하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공황으로 살기 어려워진 퇴역 군인들은 보너스를 앞당겨 지급해 달라고 요구했다. 정부가 이 요구를 거절하자 백악관으로 모여든 것이다. 그들이 길거리에 천막을 치고 노숙 투쟁에 들어가자 정부는 군대를 동원하기로 했다. 맥아더 장군이 이끄는 폭동 진압 부대는 최루탄과 곤봉을 휘둘러 100여 명의 사상자를 내며 보너스 군대를 워싱턴에서 몰아냈다.
한편 대공황 여파로 남성 노동자들이 직장을 잃고 실업자 신세가 되면서 여자들의 발언권이 높아지는 현상도 나타났다. 그동안 결혼한 여성이 직업을 갖는 것에 반대하는 여론이 높았지만, 남성 가장이 실직하자 전업주부였던 아내들이 생계를 위해 취업 전선에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특히 흑인 여성은 가정부, 사무원, 의류 공장 노동자 같은 일자리를 남성들에 비해 쉽게 얻었다. 그에 따라 가정 안에서 여성들의 발언권이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져, 대공황이 여권 신장에 기여하는 역설적인 상황이 벌어졌다.
당신들은 모두 잃어버린 세대
미국 작가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소설 『해는 또다시 떠오른다』의 서문에서 여성 작가 스타인에게 “당신들은 모두 잃어버린 세대”라는 말을 들었다고 밝힌다. 그 후 1920년대를 풍미했던 젊은 작가들은 모두 ‘잃어버린 세대’로 불리게 되었다.잃어버린 세대는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상처받고 가치관의 혼란을 느꼈다. 그리고 고국에 정착하지 못하고 유럽, 특히 파리를 전전하며 쾌락적인 삶을 탐닉했다. 『해는 또다시 떠오른다』의 주인공인 사진기자 제이크는 부상으로 성불구자가 된 뒤, 영국 간호사 브레트와 만족할 수 없는 사랑에 빠져 프랑스와 에스파냐를 떠돈다. 잃어버린 세대의 초상이었다.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1925), 더스 패서스의 『맨해튼역』(1925), 포크너의 『음향과 분노』(1929) 등은 1920년대 경제 호황 때 욕망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다 파멸해가는 미국인의 모습을 잃어버린 세대의 시선으로 그린 걸작이다. 잃어버린 세대는 대공황이라는 재난 앞에서 방황을 멈춰야 했다. 헤밍웨이는 1929년에 발표한 또 다른 소설 『무기여 잘 있거라』에서 자신이 길을 잃은 원인을 통찰하고 있다. 주인공 프레더릭 헨리는 국가를 위해 전쟁에 뛰어들었지만 부상과 스파이라는 누명만 뒤집어썼다. 그는 무기를 던져버리고 스위스로 도망간다. 그에게 환멸을 안겨준 것은 애국심, 명예 같은 헛된 가치를 유포해 개인의 삶을 유린하는 국가 체제였다. 헤밍웨이는 그러한 체제에 도전해 10여 년에 걸친 잃어버림을 청산할 태세를 갖춘 것처럼 보였다. 잃어버린 세대가 호황기 사람들의 파멸을 경고해 왔다면, 대공황 세대는 그 파멸의 원인을 냉정한 시선으로 찾아 나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