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드 http://sbook.allabout.co.kr/magazine/soho/feed/rss2 <![CDATA[통찰과 구현, 예술이 세계를 공유하는 방식 ]]>         학생 시절 교과서에 까맣게 줄 쳐가며 외웠던 예술사조가 스쳐 간다. 바로크, 신고전주의, 낭만주의, 사실주의, 인상주의… 당시의 세계를 가장 직관적으로 포착해내는 방식은 예술이다. 예술 작품 간 관계성을 찾고 또 각각의 작품 속에서 시대와의 연결점을 발견할 때 비로소 온전한 하나의 세계가 보인다. 바로 그것이 사조이고 예술작품들이 공유하는 웅대한 전제다.  빈 Wien 사회와 예술1900년경, 세기가 바뀌는 순간의 유럽에서는 20세기 현대라고 하는 완전히 새로운 패러다임을 창출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지적 혁명이 일어났다. 그중 가장 영향력 있고 파급 효과가 뛰어난 그룹이 오스트리아의 빈Wien에서 출현했다. 1900년경의 빈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중심지로 오랜 전통이 자리 잡은 정체된 공간이었다. 새로운 예술이 번성하기 어려운 조건이었음에도 이 시기 빈에서는 여러 학문과 예술에서 20세기를 주도할 위대한 선구자들이 대거 출현했다. 철학자 비트겐슈타인,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 소설가 슈니츨러와 호프만슈탈, 음악가 구스타프 말러와 쇤베르크, 화가 클림트와 에곤 실레 그리고 코코슈카 등이 빈의 문화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오스트리아는 19개의 민족과 12개 국가로 이루어진, 유럽에서 가장 복합적인 사회였다. 더욱이 수도인 빈은 그런 오스트리아 사회의 결정적 축소판이었다.이런 사회적 배경에서 탄생한 빈의 예술 역시 복합적이고 다양한 양상을 띠고 있었다. 이 시기 빈 예술계에서 가장 주도적인 위치에 있었던 ‘빈 분리파(Wiener Sezession)’ 또한 빈 사회의 복합성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빈 예술의 참다운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시대적 상황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전제되어야 하고, 이를 바탕으로 다양한 배경 간의 관계를 파악해야 한다. 이 시대의 예술은 다른 장르와 밀접한 영향관계를 주고받는 가운데 문학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는 점에서 이 시기 문학을 이해하는 데에도 기여하게 될 것이다.   그림 속의 빈 모더니즘19세기 이전은 합리주의자들의 독무대였다. 합리주의자들은 이성을 중시하고 감성은 무시했다. 합리주의와 경험주의를 통합하려 했던 18세기 철학자 이마누엘 칸트도 “도덕적 판단에서 감성은 배제하고 이성을 활용해야 한다”고 했다. 역사의 주도권은 ‘보편 개념이 실재한다’고 믿는 이상주의자들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회화에서는 이상적이고 보편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한 작품만이 예술로 인정받았다.솔직하고 직접적인 감각의 표현은 상스러운 것으로 치부되었다. 빈의 모더니즘 화가들은 보편적 미를 추구하는 기존 예술에 반기를 들고 과거의 모든 예술 양식으로부터 자신을 ‘분리’했다. 예술 아카데미의 족쇄를 벗어 던진 빈 분리파 화가들은 물었다. 창작에 있어 불편한 감정들은 숨겨야 하는 것인가. 예술은 이상적인 아름다움만을 추구해야 하는가. 그렇다면 과연 보편적인 아름다움이란 존재하는가.  alt   회화에서의 빈Wien모더니즘은 구스타프 클림트와 에곤 쉴레 등으로 대변된다. 이들은 기존의 주류 예술 양식과 결별을 선언하며 빈 분리파를 결성하였고, 파리의 모더니즘 경향과 발맞춰 표현주의 작품으로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클림트의 작품은 관능적인 여성 이미지와 찬란한 황금빛, 화려한 색채를 특징으로 했다. 그는 성(性)과 사랑, 죽음에 대한 풍성하고도 수수께끼 같은 알레고리로 많은 사람을 매혹했다. 빈의 중심 사상가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의 시작빈 분리파 화가들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인물은 프로이트다. 빈의 예술가들은 살롱을 통해 프로이트와 교류했다. 인간의 내면과 감정 표현에 몰두한 빈 표현주의 화가들은 프로이트의 무의식 이론과 마음의 작동 원리를 설명한 모델에 관심을 보였다.프로이트는 경험 과학의 영역에서 인간의 마음을 연구하며 이전까지는 관심의 대상이 아니던 무의식을 수면 위로 끌어올린다.또한, 그는 무의식적 동기가 우리 행위의 숨겨진 기반임을 임상을 통해 내보이며, 압제된 무의식이 정신병의 근원이라고 했다. 물론 프로이트가 마음의 과학에 관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할 수 있었던 데는 에른스트 마흐와 로키탄스키가 다져놓은 토양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당시 미술평론가들은 클림트의 작품을 두고 “프로이트의 이론을 강렬하게 보여주는 시각적 표현”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alt  과학과 예술, 융합의 시대‘빈 1900’ 시대의 경험론과 실증주의에 기반을 둔 과학적 아이디어가 화가들의 작품 활동에만 영향을 준 것은 아니다. 미술사학자 알로이스 리글은 과학에서 얻은 통찰을 미술 비평에 접목했다. 바로 독일의 생리학자이자 물리학자인 헤르만 폰 헬름홀츠의 연구에서였다.빈Wien 1900 그때를 만나다인간의 시각 시스템이 정보에 의존하기 보다는 기억에 기반을 둔 무의식적 추론 과정을 통해 영상을 재구성한다는 헬름홀츠의 연구 결과에 영향을 받아, 리글은 미술 평론에 새로운 견해를 첨가하게 된다. 훗날 곰브리치가 ‘관람자의 몫’이라 부르게 되는 것으로, 예술이 독립적인 작품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관람자가 작품을 해석하는 행위까지 포함한다는 내용이다.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미술사학자로 평가되는 곰브리치는 “기억이 미술의 지각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고 말하며, ‘순수한 눈’ 같은 것은 없다고 확신했다.현대의 인지심리학자 크리스 프리스는 “우리가 물질 세계에 직접 접근하는 것처럼 느낄지 모르지만 그것은 우리 뇌가 빚어낸 환상”이란 헬름홀츠의 통찰을 요약했다. 에릭 캔델의 말로 바꾸자면 “우리는 동시에 두 세계에 사는 것이며, 현재 진행되고 있는 시각 경험은 두 세계의 대화인 셈”이다.  alt  모더니즘이라는 새로운 차원을 제시한 ‘빈 1900’은 과학과 예술이 자유롭게 교류하며 대화했던 시기였으며, 오늘날 ‘빈 1900’의 정신을 이어받은 후예들이 ‘신경 미학’이라는 분야를 탄생시켰다. 신경과학의 발전에 힘입어 이제 우리는 감정을 담당하는 편도체와 이성적 사고를 담당하는 전두엽이 어떻게 연결되고 어떤 영향을 주고받는지 알아가기 시작했다. 감성이 없으면 이성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실험 결과 앞에서 합리주의는 더는 설 자리가 없었다. 이성과 감성은 협력한다. 과학은 예술을 닮고, 오스카 와일드의 말을 빌어 “자연은 예술을 모방한다”. ]]> Wed, 03 Feb 2016 17:49:35 +0000 1 <![CDATA[새로운 세계를 열어가는 영화감독 박찬욱의 서재 ]]>        Heading 2 Text Goes HereLorem Ipsum is simply dummy text of the printing and typesetting industry. Lorem Ipsum has been the industry's standard dummy text ever since the 1500s, when an unknown printer took a galley of type and scrambled it to make a type specimen book.]]> Wed, 03 Feb 2016 17:57:21 +0000 1 <![CDATA[변해야 할 것은 시대가 아니라 우리이다 ]]> SPECIAL변해야 할 것은 시대가 아니라 우리이다 Heading 2 Text Goes HereLorem Ipsum is simply dummy text of the printing and typesetting industry. Lorem Ipsum has been the industry's standard dummy text ever since the 1500s, when an unknown printer took a galley of type and scrambled it to make a type specimen book.]]> Wed, 03 Feb 2016 18:10:27 +0000 1 <![CDATA[묵묵하게 찬란하게 배우 박소담 ]]> SPECIAL묵묵하게 찬란하게배우 박소담 Heading 2 Text Goes HereLorem Ipsum is simply dummy text of the printing and typesetting industry. Lorem Ipsum has been the industry's standard dummy text ever since the 1500s, when an unknown printer took a galley of type and scrambled it to make a type specimen book.]]> Wed, 03 Feb 2016 18:12:02 +0000 1 <![CDATA[난해하고 혼란스럽지만 흥미롭고 새로운 ]]> SPECIAL난해하고 혼란스럽지만흥미롭고 새로운 Heading 2 Text Goes HereLorem Ipsum is simply dummy text of the printing and typesetting industry. Lorem Ipsum has been the industry's standard dummy text ever since the 1500s, when an unknown printer took a galley of type and scrambled it to make a type specimen book.]]> Wed, 03 Feb 2016 18:22:50 +0000 1 <![CDATA[독일에서 온 편지 한 통 피아니스트 김태형 ]]> SPECIAL독일에서 온 편지 한 통피아니스트 김태형 Heading 2 Text Goes HereLorem Ipsum is simply dummy text of the printing and typesetting industry. Lorem Ipsum has been the industry's standard dummy text ever since the 1500s, when an unknown printer took a galley of type and scrambled it to make a type specimen book.]]> Wed, 03 Feb 2016 18:23:37 +0000 1 <![CDATA[2015년도 학위수여식 개최와 2016학년도 입학식 ]]> SPECIALINPUT SUBJECT Heading 2 Text Goes HereLorem Ipsum is simply dummy text of the printing and typesetting industry. Lorem Ipsum has been the industry's standard dummy text ever since the 1500s, when an unknown printer took a galley of type and scrambled it to make a type specimen book.]]> Wed, 03 Feb 2016 18:27:23 +0000 1 <![CDATA[테스트 1 ]]> SPECIAL테스트 1 Lorem Ipsum is simply dummy text of the printing and typesetting industry. Lorem Ipsum has been the industry's standard dummy text ever since the 1500s, when an unknown printer took a galley of type and scrambled it to make a type specimen book. Lorem ipsum dolor sit amet, consectetur adipiscing elit. Vivamus leo ante, consectetur sit amet vulputate vel, dapibus sit amet lectus. alt alt                   alt                    ]]> Fri, 20 May 2016 10:52:49 +0000 2 <![CDATA[나의 유령작가 시절 ]]> SPECIAL 나의 유령작가 시절 글. 김경주 이십 대 후반 처음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이 되어 데뷔 후 몇 년간 청탁이 거의 없는 채 지냈다. 고향으로 내려가서 백수로 살았다. 어머니 옆에서 마늘이나 까주고 자전거 타고 뚝방이나 돌아다니면서 도서관에 다녔다. 어느 날 시립도서관 옥상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데 옆 사람이 불을 빌리며 물었다. 작년 국사 과목 기출문제 좀 빌릴 수 없느냐고. 잉? 무슨 국사? 모두들 공무원 시험 준비하는 사람들끼리 묻지 않아도 연대감을 표현하며 살고 있었다.  나는 도서관에서 시집을 열심히 읽었다. 우울이 몰려왔다. 어떤 프랑스 작가의 말이 자주 떠올랐다. 욕망은 현실에 의해 모욕당한다는. 그래도 내가 배운 것으로 먹고 살고 싶었다. 나는 독학으로 독서와 글쓰기를 해왔고 그런 것들로 먹고 살 수 있기를 바랐다. 글 쓰고 사는 삶이 아니면 다른 종류의 삶은 간지러워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스물아홉의 나이에 서울로 다시 짐을 싸서 올라왔다. 흑석동 달동네 개척교회 기도방을 임시로 빌려 월세 20만 원짜리로 버티기 시작했다. 새벽엔 지하철 신문도 돌리고 주말엔 경마장 신문도 돌리고 휴학을 하고 학비를 벌기 위해 친구들과 명절엔 참기름 공장도 다녔다. 유령작가가 되어 갔다. 기업인이나 유명인 대필이나 자서전 작업을 했고 신생 영화사에 취업해서 말도 안 되는 시나리오 작업 같은 것도 했다. 독립영화사들은 등은 토닥거려주지만 밥은 잘 안주더라. 아무튼 글로 쓰는 거면 닥치는 대로 썼다. alt                            소문 듣고 찾아오거나 부탁하는 사람도 많아졌다. 유령작가지만 조금씩 루트를 뚫고 청탁이 오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목사입니다. 멋진 기도문 하나 부탁해요.’ ‘선거 카피 좀 부탁해요.’ 같은. 그 시절의 경험은 지금까지 내가 유령작가로 내 정체를 질문해 오는 데 궁리가 된다. 실제로 생존을 위해 야설작가나 대필작가로 활동하던 무렵부터 실존을 위해 시인이 되고 나서도 다양한 필명으로 여기저기 지면에 글을 발표하는 자유(?)를 누리고 있는 나는 내 이름을 지우고 글을 쓰고 발표하는 것에 익숙하다. 자신의 이름이 없던 시절부터, 자신이 이름이 불필요한 지점까지의 외로운 글쓰기가 조금은 필요해 보이는 시절이니까. 고스트라이터는 이름 없이 문체만으로 살아남을 수도 있지만, 문체마저도 문장 깊이 숨길 수 있는 무명의 재능을 믿는 자이다. 여하튼 무슨 일이 있어도 누가 알아봐 주지 않아도 나는 글쓰기의 현장에 있었다. 릴케가 말테의 수기에 이런 글을 쓴 것을 기억한다. ‘나는 파리. 이 도시에 글을 쓰기 위해 왔다.’ 야설작가로 몇 년 동안 만 오천 매 정도의 글을 썼다. 인육을 벗기고 핥고 빨고 때리고 훔치고 도망가는 게 서사였다. 애인과 고향의 가족에겐 첫 야설 제목을 따서 현재 ‘보충수업 교사’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수십 개의 필명으로 잡지사에 원고를 투고하기도 했다. 가끔 시를 쓰며 훌쩍였다. 시가 나로부터 외로워져갔다. 이러다가 평균치의 삶도 누리지 못한 채 끝장날 수도 있다는 생각이 자주 들었다. 하지만 좌절하지 않고 글을 계속 써 나갔다. 많은 월세방을 전전하며 서울을 둥둥 떠다녔다. 여행하듯 보트피플처럼. 배낭과 밥상, 타자기, 연필이면 작가에겐 소재는 충분하다. 많은 사람들로부터 가난을 들었고 사랑을 들었다. 삶이 가난해지거나 우스워지는 순간은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하고 있을 때라는 믿음이 생겼다. 그때 내 소망 중 하나는 욕조를 하나 갖는 것이었고 그곳으로 들어가 잠시 쉬기만 한다면 나는 어떤 종류의 글도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 Fri, 20 May 2016 14:28:38 +0000 2 <![CDATA[우연의 시공간에 아로새기다 ]]> SPECIAL우연의 시공간에아로새기다 글. 최윤지 다니엘 켈만이 쓴 <나와 카민스키>에는 노년의 화가 카민스키가 등장한다. 그는 젊은 시절 한 전시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그 졸작에는 ‘시력을 잃은 화가의 그림’이라는 부제가 덧붙여졌다. 카민스키는 일약 스타덤에 올라 작품값은 천정부지로 치솟았으며 유명세를 치렀다. 그러나 그는 장님이 아니었다. 졸지에 작가 카민스키는 세상에서 장님이 되어버리고 만다. 이런 카민스키를 뒤쫓는 인물이 등장하는데 전기 작가가 되기로 결심한 쵤너이다. 쵤너는 카민스키의 삶을 윤색하고 재배열하여 전기를 쓰고자 한다. 카민스키가 죽은 직후 전기를 출판한 쵤너는 그의 사후 명성에 일조한 영광을 자신에게 돌리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다.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명성의 두 가지 일면을 알 수 있다. 첫 번째로는 명성을 얻기 위해 대단한 업적을 성취하는 것이 전부는 아니라는 점이다. 사람들의 판타지를 자극하는 매혹적인 이야기의 주인공들이 명성을 얻는다. 두 번째는 인간의 가슴에 감동을 주는 것은 시공간적 우연으로 인한 것인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예술가의 삶이 윤색되는 동안 전기에 기록되는 것은 그의 삶이 어떤 사건들로 인하여 그런 삶이 될 수밖에 없는가이다. 거꾸로 생각해보면 삶은 우연한 사건들로 인해 이루어져 있다. 우연과 재능이 제멋대로 해석되어 명성을 낳는 것이다.예를 들어 변호사였던 괴테가 친구의 약혼녀 샤를로테에게 첫눈에 반해 짝사랑에 빠지지 않았더라면, 비슷한 상황에 처한 다른 친구가 자살하고 말았다는 소식을 듣지 않았더라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막스 브로트가 친구의 유언에 충실한 나머지 그의 모든 작품을 불태웠더라면 우리는 카프카라는 작가를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잭슨 폴록이 알코올 중독 치료를 위해 정신분석 전문의를 찾아가 융 학파의 심리치료를 경험하지 못했더라면 ‘액션 페인팅’은 탄생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고, 코카인 중독에 빠져 그래피티를 휘갈기던 젊은 장 미쉘 바스키아가 애니나 노제이를 만날 수 없었더라면 그의 작품은 지하철 벽면을 장식한 채 낡아갔을지도 모른다. 명성의 첫 번째 측면을 다시 한 번 살펴보자면, 예술가의 인생 혹은 작품은 창작 과정이나 삶의 운명에 예사롭지 않은 사건들이 존재할 때 대중의 판타지가 된다. 예술가의 고통이 그러하다. 탐정 소설과 사이언스 픽션의 발명자인 에드거 앨런 포는 평생 가난과 불안, 우울증, 술, 마약에 시달렸다. 그는 스물여섯 살에 열세 살의 사촌동생인 버지니아 클렘과 결혼했는데, 버지니아는 결핵을 앓았지만 가난으로 인해 외투 한 장으로 몸을 덥힐 수밖에 없었고 5년 후 생을 마감한다. 가장 많이 알려진 포의 시 <갈가마귀>에서는 애인 리노어의 죽음을 추모하던 한 남자가 갈가마귀의 방문을 받는다. 연인과 사랑, 희망에 대한 질문들에 갈가마귀는 “nevermore”라는 단어만을 반복할 뿐이다. “더 이상은 없어, 이젠 끝이야.” 포는 우울증과 정신착란 사이를 오가다가 마흔 살에 행려병자로 병원에 끌려가 죽음을 맞이하고 말았다.존재로부터의 도피는 위대한 작품을 만들어내는 힘인지도 모른다. 버지니아 울프는 매우 예민한 성격으로 어머니가 죽었을 때부터 정신질환 증세를 보였다. 그녀는 어린 시절에 의붓오빠에게 성추행을 당한 경험이 있어 평생 몸과 성에 대한 병적인 수치심을 지니고 있었다. 그녀는 <댈러웨이 부인>, <자기만의 방> 등의 작품을 통해 의식의 흐름 기법을 탄생시키고 모더니즘과 페미니즘의 정전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시간이 더해갈수록 자신의 정신질환을 견딜 수 없었던 그녀는 결국 코트 주머니에 돌을 넣고 강물로 걸어 들어가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실비아 플라스 또한 오븐에 머리를 박고 자살하여 유명해졌다. 세 번째 자살 시도였다. 그녀는 자신의 삶을 투영한 자전적 소설 <벨 자>에 우울증이 심했던 뉴욕에서의 삶이 가져다 준 정신분열증과 그로 인한 입원 등 악몽과 같았던 시간들을 담아낸 바 있다.명성을 가져다주는 또 다른 요인으로 희소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아름답고 훌륭한 것이나 위대한 것을 칭송하는 행위는 명성을 만든다. 그리고 명성은 또다시 그러한 찬미를 만들어낸다. 예를 들자면 반 고흐는 스스로 귀를 자른 광기로도 유명하지만 기록적인 작품 판매가로도 유명하다. 1987년에는 일본 야스다 해상화재보험이 런던 크리스티 경매에서 <해바라기 15송이>를 8,200만 달러에 사들여 세계를 놀라게 했고, 1990년에는 다이쇼와 제지회사가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가셰 박사의 초상>을 8,250만 달러에 사들여 다시 한 번 당시 최고 경매가를 경신했다. 재정적 이익을 목적으로 하건 미학적 쾌락을 목적으로 하건 간에, 이런 소식은 천재성에 대한 환상을 갖게 하는 데에 어느 정도 일조한다. 하지만 고흐를 비롯한 천재들은 열등감을 딛고 일어서기 위해서 더 큰 노력을 기울인 사람들이다. ]]> Mon, 23 May 2016 13:39:17 +0000 2 <![CDATA[황사 ]]>                  중국, 몽골에서 바람을 타고 날아오는 흙먼지를 뜻하는 황사는 ‘삼국사기’에도 등장할 만큼 오래된 현상이다. 하지만 중국의 급격한 산업화와 사막화로 인해 인체에 유해한 각종 중금속이 함께 넘어오면서 황사의 유해함은 날로 심해지고 있다. 최근에는 미세먼지까지 가세해 ‘맑은 공기’가 그야말로 ‘귀한 손님’이 되었다. 얼마 전 BGF가 중국 내몽고자치구에 위치한 쿠부치 사막에 가서 나무심기 활동을 펼친 것도 황사를 막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아직도 “황사가 위험 해봤자지”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정리_편집실             alt alt alt 황사와 미세먼지는 비염, 꽃가루 알레르기, 천식, 안구건조, 안구결막 등 다양한 형태의 병을 유발시킨다(100% 황사와 미세먼지 때문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필자는 지금 태어나서 처음 결막염에 걸렸다). 실제 황사 발생 후 3일까지 천식 질환 진료 건수는 황사가 발생하지 않는 날의 평균 진료 건수보다 약 16~35% 증가한다고 한다. 세계보건기구(WHO)에 따르면, 매년 대기오염으로 인해 300만 명이 죽음에 이른다. 덴마크의 한 연구진은 미세먼지는 10마이크로그램(㎍) 상승할 때마다 폐암 발병 위험이 22% 증가하고, 초미세먼지의 경우 5㎍ 상승에도 18%나 증가한다고 발표했다.     미세먼지는 자연 발생한 황사와는 달리 인간이 만들어낸 대기오염 물질로, 화석연료 사용, 공장 매연, 자동차 배출가스 등이 원인이다. 입자 크기가 10마이크로미터(㎛) 이하의 PM10(미세먼지)과 입자 크기 2.5마이크로미터(㎛) 이하의 PM2.5(초미세먼지)로 구분된다.  ]]> Mon, 23 May 2016 17:27:59 +0000 2 <![CDATA[할 수 있는 것 하기 ]]> 할 수 있는 것 하기 “처음엔 작가라고 불리는 게 이상하고 싫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냥 쑥스러웠던 것 같다. 내 작업을 봐주는 사람들이 있는데 정작 나는 나를 작가로 생각하지 못했던 거다.”‘작가로 불리는 것’에 대해 물었을 때 그가 그랬다. 유독 내켜하거나 유독 기꺼워하는 대신 다른 말을 하던 때와 똑같이 말했다. ‘할 수 있는 것 (재밌게) 하기’로 시작해서 ‘할 수 있는 것 (잘) 하기’를 하고, ‘할 수 있는 것 (할 수 있는 데까지) (하고 싶은 만큼) 하기’로 마음을 먹은, 작가 김희천. 글.김송요    alt             틈틈이, 튼튼히.“호연지기로 일상에서 구원의 이미지를 찍으리라 했지만 도리어 그때마다 일상이 구원을 받았다.”                            건축과에 다니는 중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학기 중에는 워낙 바쁜데 사진은 간단한 장비로도, 이동 중에도 할 수 있는 취미란 장점이 있었다. 굳이 사진을 찍고 모은 건 거기서 포착한 현상들이 가리키는 징후를 찾고 싶기 때문이었다. 사귀던 친구가 종말론에 관심이 많아서 항상 “2012년 말에 세계는 멸망할 것”이라고 했다. 정말 세계가 멸망하면 난 뭘 할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카메라를 들고 다니기로 했다. 멸망이나 종말이 한순간에 일어나는 일은 아닐 것 같고 분명 이미 망해가는 징조가 곳곳에 존재할 거란 생각이 들었다. 2013년 캐논 미래작가상을 받고 전시를 하게 되면서 ‘내가 사진을 작업으로서 보여줘야 하는 거구나’ 싶었다. 막상 마야 문명이 경고한 2012년 12월 21일, 멸망의 날에는 아무것도 찍지 않았다. 밖에 나가면 위험하다고 해서. 영상 작업을 한 건 그 뒤다. 친구와 상봉동에 있는 공간 ‘반지하’에서 프로젝트를 할 기회가 생겼다. 영화제의 이벤트인 ‘관객과의 대화’를 해 보고 싶었고 그러려면 영상이 있어야 되니까 만들었다. 그게 시작이다. 촬영한 영상과 엮어내는 요소는 지금의 서울을 표현하는 데 적합하단 생각이 들어 사용한 것들이다. 3D 인터페이스도, 푸티지도 그렇다. 필요조건이긴 하지만 충분조건은 아닌 거다.움짤을 파일로 저장하지는 않는다. 막상 저장하면 다신 안 보게 된다.             alt             데굴데굴 데모험 빙고가 끝나고 나면 모든 대화는 휘발하고 빙고판에 적힌 단어들만 남게 됩니다. 그 후 취합된 빙고판 질문들의 기록은 어떻게 읽히게 될까요? 결국 작가뿐만 아니라 관객 모두도 시험에 들게 하는 GV입니다. ‘데굴데굴 데모험’은 최근 ‘뉴 스킨’ 전시에서도 진행했다. 일종의 관객과의 대화다. 방식을 설명하자면, 우선 영상을 보면서 관객들이 빙고판에다 관객과의 대화 시간에 작가가 사용할 법한 단어를 생각해서 적는다. 그리고 그 단어를 듣기 위한 질문을 하는 거다. 관객과의 대화에 ‘듣고 싶은 말을 듣기 위해 질문을 하는’ 속성이 있다고 생각했고, 빙고 게임이 그걸 보여줄 수 있는 방식이라고 생각했다. 노골적으로 특정 단어를 말하게끔 하는 질문을 하고, 일부러 답을 피해 에둘러 대답을 하며 관객과 말 그대로 게임을 할 수 있을 거라 기대했다. 막상 해 보니 게임을 하기 보다는 작품에 대한 진지한 질문이 많이 나왔고, 빙고 완성까지 인고의 시간이 필요했다.첫 번째 우승자는 친한 친구였는데 질문을 하나도 하지 않고 빙고를 완성했다. ‘이를테면’, ‘말하자면’ 같은, 내 말버릇만으로. 그때 ‘음, 역시 잘못 만든 게임이구나’ 했다. 어떤 관객은 빙고판에 ‘로맨틱’을 적었다. 그분은 내가 ‘로맨틱’이라고 말할 것 같았을까? (‘로맨틱, 성공적’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닐까.) 어, 그럴 것 같다.             alt <바벨> 바벨 스크린처럼 납작해진 세계와 디폴트 3D 인체모델처럼 움직이지만 이미 죽은 사람들, 닿을 수 없지만 금방이라도 ‘세상은 망할 것’이라며 겁을 주는 징조를 통해 이 세상이 이미 제대로 망해볼 기회도 얻지 못한 채 애매하게 망한 껍데기는 아닐까 생각해본다. 영상 작업을 통해 온라인과 오프라인, 그 경계나 벌어진 사이 같은 걸 보여준다. 개인적 사건들과 관계가 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땐, 데이터로 남은 아버지의 흔적은 볼 수 있지만 실제 아버지는 계시지 않다는 데서 오는 감정들이 있었다. 장거리 연애를 한 애인과 헤어졌을 땐 일 년 반 가까이 온라인을 통해 이어진 만남이 ‘순수한 온라인 경험’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한국은 온라인과 오프라인이 섞이고 합쳐져 있는 나라니까 그게 꽤 생경한 느낌이었다. 나 자신의 경험에서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틈을 발견하고, 내가 어디 위치하고 있는지 질문하면서 작업이 이어졌다.< 바벨 >이 아르헨티나 여자친구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이라 자연스럽게 스페인어를 쓰게 됐다. 내레이션을 입혀 보니 스페인어가 거리감을 잘 만들어 준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어 특유의 리듬이나 높낮이가 주는 재미도 있고. 영어처럼 쉽게 알아들을 순 없되 자막과 음성이 아예 따로 논다는 느낌은 없어야 할 것 같아서 일부러 영어와 비슷하거나 자막과 매치해서 뜻을 추측할 수 있는 단어를 집어넣기도 했다. 스페인어는 앞으로 더 사용할 수도 있지만 일부러 계속 고집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altaltalt      <Soulseek / Pegging / Air-twerkging>  Soulseek / Pegging / Air-twerking 우리 세대의 삶은 mp3와 같고, 세상은 가상을 열화 구현해놓은 것이다. 그리고 그 가상은 거세된 사람들에게 남은 비효율적인(인간적인) 요소들을 통해 ‘리얼리티’를 추구한다. 2012년 군대를 전역하고 멀리 떠나고 싶어서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 갔다. 흔히 한국 반대편에 아르헨티나가 있다고들 하니까. 거기서 만난 친구들 중에 스스로 작가라고 얘기하는 사람이 많았다. 취미로든 뭐든 재밌는 것들을 했다. 당시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작은 갤러리가 많았는데, 친구들과 어울려 놀면서 그 공간들이 만들어내는 일에 참여하는 경험을 했다. 돌아와서 ‘반지하’를 만나게 되면서 나도 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사실 아르헨티나에 가지 않았어도 언젠가 작업을 하긴 했을 것 같다. 아르헨티나에서의 경험이 이를테면 ‘반지하와 뭔갈 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데 영향을 미쳤을 수 있지만 작업 자체에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내 작업은 평소 이야기해야 하지만 이야기되지 않는다고 느꼈던 것들이 개인적인 경험으로 다가왔던 순간을 말한 것이니까. 물론 출발점이나 스타트 방식이 달랐다면 과정과 결과도 지금과 달랐을 수 있다. 공간을 만나지 못해서 사람들에게 작업을 보여주지 못했을 수도 있고, 관객과의 대화를 목표로 하지 않으니 매체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alt <랠리> 랠리 시선의 주체는 무슨, 우리는 시선의 대상도 되지 못하는 병신들인데. 커먼센터에서 개인전 ‘랠리’를 열었을 땐 전시가 이뤄지는 환경에 대해 고민했다. 창문을 떼고 공간을 다 비우는 것이 유치하고 뻔한 수법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장치를 통해 사람들이 전시에 이입할 ‘틈’을 발견하고, 그것에 대해 얘기하면 좋을 거라고 생각했다. 전시를 보러 가는 길, 작업이 놓여 있는 공간, 전시를 보는 환경, 그리고 거기서 벗어나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상상했다. <랠리>에 주요하게 등장한 게 전면이 유리로 된 파사드다 보니 영상 속과 전시 공간을 연결지은 게 아니냐는 물음도 있었는데 그렇지는 않다.  alt <랠리> ⓒ이원섭  작업을 특수한 환경에서 또는 특수한 방식으로 보여주곤 했다. 그래서 도리어 특수한 것이 없는 공간에서 전시를 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점차 이전처럼 성격을 타는 전시만이 아니라 다양한 기획과 공간에서 작업을 보여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중성적인 화이트큐브에서 전시를 할 땐 어떻게 보여줘야 할지, 어떤 전략을 짜야 할지 고민해야 할 것 같다.요즘은 작업을 한다기보단 작업을 할 준비를 하고 있다. 올해도 두세 군데의 전시에 참여할 예정이다. 전시에서 보여드릴 것은 새로운 작업일 수도 있고 기존 작업일 수도 있다. 일부러 쥐어짜내는 편은 아니어서 무언가 됐을 때 알려드리려 생각 중이다. 10년, 20년 뒤의 계획도 마찬가지다. ‘작업을 하게 되면 열심히 하고, 안 하게 되면 그때 하고 있는 거 열심히 해야지’하고 있다. input image ]]> Tue, 31 May 2016 16:37:41 +0000 2 <![CDATA[스마트폰과 사람, 제대로 연결하기 ]]> SPECIAL스마트폰과 사람, 제대로 연결하기 alt 스마트폰이 세상에 변화를 끼친 지 십 년 정도가 흘렀다. 과거 인터넷은 책상 위에서만 존재했지만 지금은 손바닥 위에서 펼쳐진다. 사람들은 스마트폰을 손에 쥔 채 뉴스를 보고 책을 읽고 SNS를 쓴다. 똑똑하고 편리한 세상이다. 그런 이점이 있지만 함께 문제점도 뒤따르고 있다. 그 문제에 대해서, 그리고 이 급격한 변화를 대응하는 법에 대해서 생각해볼 차례다. alt스마트폰 시대의 뚜렷한 양면성 십 년 전만 하더라도 지하철에서 종이신문을 읽는 사람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구독료도 없고 종이를 펴지 않아도 인터넷으로 뉴스를 보여주는 손쉬운 스마트폰이 손 안에 때문이다. 스마트폰은 그만큼 편리하다. 콘텐츠를 활용하는 비용도 상대적으로 저렴하다. 매체가 갖는 근본적인 장점이다.  요즘은 스마트폰으로 다채로운 소통도 가능하다. SNS라고 이름 붙여진 소셜네트워크가 생겨난 덕분이다. 인터넷으로 연결되는 이 사회적 연결만은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이라도 다양한 방식으로 대화할 수 있게 만들어 준다. 즉 소통의 범위를 넓히고 세상을 하나로 만드는 데 기여한다. 보다 빠르고 손쉬운 소통으로서의 진화. 스마트폰이 창출한 또 다른 업적이다.  그러나 문제점은, 이 모든 장점과 대비된다. 상대적으로 저렴하게 콘텐츠를 활용할 수 있다는 장점은 콘텐츠의 질적 하락이라는 단점을 불러온다. 우후죽순으로 범람하는 인터넷 언론 매체는 경쟁에 휘말리다보니 저질 기사를 마구 범람한다. 검색어에 치중한 낚시 기사, 선정성 기사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사람들도 이제 더 이상 콘텐츠를 돈 주고 사야 하는 작업물이라는 인식을 갖지 못한다. SNS 역시 뚜렷한 장점이 단점을 가져온다. 넓은 소통은 가능해졌을지 몰라도, 보다 깊이 있는 소통은 불가능해졌다. 대면하는 소통이 아니다 보니 마음이 아닌 문자와 사진을 주고받으며 얕은 소통으로 관계를 쌓는다.   alt스마트한 세상의 Key는 인식의 변화   스마트폰으로 인해 야기하는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선, 결국 사람들의 태도 변화가 중요하다. 스마트폰 콘텐츠가 손쉽게 읽거나 들을 수 있다고 해서 그 콘텐츠의 값어치를 함부로 폄하하거나 측정해서는 안 된다. 매체마다 고유한 성격이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지하고 스마트폰에 범람하는 콘텐츠를 적절하게 선별할 수 있다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  스마트폰 콘텐츠를 대중과 연결해주는 중재자 역할을 맡는 사람들의 노력도 당연히 뒷받침되어야 한다. 가령 포털 홈페이지를 관리하는 편집자를 중재자의 예로 들 수 있다. 책이나 뉴스 등과 같은 분야에서 보다 질 좋은 콘텐츠가 정당한 대우를 받을 수 있도록 비용을 측정하는 시스템을 마련하거나 대중에게 우선 노출될수록 엄격한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 물론 콘텐츠를 만드는 사람들은 보다 질 좋은 콘텐츠를 마련하는 데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 ‘스마트폰 콘텐츠는 대충 봐도 된다’는 사람들의 편견을 없애도록 말이다.  SNS와 같은 소통망도 마찬가지다. 모든 관계를 SNS를 바탕으로 진행할 것이 아니라, 현실적인 관계를 바탕으로 보조적인 역할을 처리하는 관점에서 SNS를 활용해야 한다. 또한 SNS가 가상의 공간이 아닌 현실 속에서 연장된 공간이라는 점을 분명히 인지하고 에티켓을 지켜야 한다. SNS은 사적인 공간을 넘어 누구나 확인할 수 있는 공간으로 확장되고 있기 때문에 자신이 SNS에 글을 쓰고 있다면 그 글이 불러올 파장에 대해서 먼저 깊이 생각해보아야 한다.                   스마트한 미래를 적극적으로 대비할 때 앞으로도 스마트폰의 하드웨어 및 소프트웨어는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있다. 각종 애플리케이션을 활용함으로써 우리의 생활은 상상하기 어려운 수준으로 다양화되고 있다. 이미 인공지능과 같은 프로그램이 스마트폰에 탑재되는 상황까지 도래했다. 급격한 변화는, 따라서 현재진행형이다. 지금 우리가 스마트폰에 대해 장단점을 확실하게 구분하지 못하고, 대응하지 않는다면 문제점은 날이 갈수록 확대될 것이다. 정보의 빈부격차도 더 커질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금 깨달아야 한다. 감정도 없고 온기도 없는 이 차가운 기계가 미치는 영향력에 대해서 말이다. 스마트폰으로 읽고 쓰는 세상은 분명 피한다고 피할 수가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스마트폰 시대를 이롭게 만들어야 한다. 충분히 알고, 적극적으로 대비하면서 말이다.질 좋은 뉴스가 스마트폰의 스크린 안에서 보기 좋게 리스트로 정리되어 있고, 시중에 출판되는 책과 다르지 않은 양서를 손으로 넘겨볼 수 있으며, 따뜻하고 아름다운 말들이 SNS에서 오고가는 세상은 상상만 해도 좋다. 그런 세상을 현실로 옮기는 과정은 마음먹기에 달렸으므로 또한 어렵지 않다. 사람들이 노력하고 정부 차원에서 적절한 통제가 가능하다면 스마트폰으로 읽고 쓰는 세상은 우리에게 다채로운 삶의 경험을 선사할 것이다. Tip 기업들이 스마트폰 독서 환경에 대처하는 자세최근 출판사들은 더 나은 모바일 독서 환경을 만들기 위해 많은 실험을 진행 중입니다. 스크린 환경에 적합한 책 표지를 디자인 하고, 이메일 광고, 페이스북 포스팅 등의 마케팅 자료들을 스마트폰에서 읽도록 최적화하고 있습니다. 어떤 출판사들은 비행기, 호텔 등에서 e-book으로의 접속을 무료로 제공하기도 합니다. 또한 아마존, 구글, 애플 그리고 반스 앤 노블 역시 모두 스마트폰 앱을 통해 읽을 책을 제공합니다. 자동으로 모든 장치들을 같은 계정으로 연계해서 사용자가 e-book을 열면 전날 읽었던 마지막 페이지를 자동으로 띄워줍니다. 아마존과 구글은 최근 스마트폰 스크린에 최적화 시켜 읽기 쉽게 디자인된 전자책 독자 맞춤용 폰트까지 소개했다고 하니, 기업들의 노력이 얼마나 섬세한지 확인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 Mon, 11 Jul 2016 15:23:49 +0000 5 <![CDATA[모던 경성을 만나다 ]]>    Heading 2 Text Goes HereLorem Ipsum is simply dummy text of the printing and typesetting industry. Lorem Ipsum has been the industry's standard dummy text ever since the 1500s, when an unknown printer took a galley of type and scrambled it to make a type specimen book.]]> Tue, 03 Jan 2017 17:32:27 +0000 6 <![CDATA[정유년 신년사 ]]>          2017년 정유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새해에는 우리 대한민국의 앞길에 사랑과 평화가 더욱 깃들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리고 국민 여러분 모두가 새로운 꿈과 희망을 갖는 한 해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올해는 독립기념관 개관 30년인 뜻깊은 해입니다. 1987년 온 국민의 성금으로 세워진 독립기념관의 사명은 전시·연구·교육을 통해 독립운동의 의미와 가치를 정립하고, 세상에 알리는 것입니다. 돌이켜 보면 지난 30년의 세월은 굳은 땅에 독립운동 정신의 뿌리를 내리는 성장 과정이었습니다. 출범 당시의 미숙함에서 벗어나 이제는 제자리를 잡아가고 있다고 하지만 아직도 채운 것보다는 채워야 할 것이 더 많다는 사실을, 저와 독립기념관 가족들은 가슴 깊이 새기고 있습니다. 독립기념관은 개관 30년을 맞이하여 부족한 부분은 힘써 채우고, 새로운 도약을 이루겠다는 굳은 각오로 다음과 같은 사업을 추진하겠습니다.   첫째, 독립기념관의 7개의 상설전시관 중 제4전시관을 재개관하겠습니다. 2015년부터 시작된 7개 상설전시관의 제3차 전시교체 대주제는 ‘평화공감’입니다. 애국선열들이 전개한 한국의 독립운동은 단지 나라를 되찾기 위한 투쟁만이 아니라, 이 땅에서 궁극적으로 제국주의를 소멸시키기 위한 인도주의적 평화운동이었습니다. ‘평화 없는 자유 없고, 자유 없는 평화 없다’라는 신념은 독립운동가라면 누구나 지녔던 꿈이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제4전시관의 전시교체에서는 독립운동이 왜 평화운동이었는가, 독립운동이 인류 평화를 위해 무엇을 했는가, 독립운동이 미래의 평화를 위해 어떠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가 등이 주요 주제가 될 것입니다. 이번 전시교체는 독립운동이 평화운동으로 자리매김하고 또한 독립기념관이 명실공히 평화기념관으로 거듭나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둘째, 올해로 3년째인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편찬사업을 계획대로 추진해 나가겠습니다.   1994년부터 시작된 ?한국독립운동사전?의 완결판인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은 1만5천여 명에 달하는 독립운동가들의 삶과 활동을 구체적으로 조명하고 독립운동의 역사를 집대성하는 방대한 작업입니다. 10만여 매의 원고가 30권의 책으로 발간될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은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년인 2019년부터 순차적으로 출간될 예정으로 독립운동의 진실을 밝히고 나아가 한국인의 자긍심을 드높이는 역사적 사업이 될 것입니다.        셋째, 한국독립운동사의 세계화를 위해 해외의 대학에서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강좌 개설을 추진하겠습니다. 독립기념관은 한국독립운동을 세계에 널리 알리기 위해 중국을 비롯해 러시아·일본·미국·유럽 등지에서 전시 및 학술교류를 진행해 왔습니다. 이제는 한걸음 더 나아가 프랑스·미국·러시아·일본·중국 등의 대학에서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강좌 개설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프랑스 파리7대학의 경우, 2017년 가을학기에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강좌를 개설하기로 했으며, 앞으로 대상 국가를 점차 늘려나갈 것입니다. 이와 함께 세계 각처에 산재한 국외 독립운동 사적지 보존 사업도 그 영역을 확대해 나갈 것입니다.        넷째, 다양한 교육프로그램을 통해 국민교육도장으로서 역할을 다하겠습니다. 초등학생부터 중등학생, 국군장병, 교사 등을 대상으로 ‘독립군체험학교’, ‘찾아가는 독립기념관’, ‘독도학교’, ‘교원연수’ 등 20여 개의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독립운동사교육 프로그램 및 교구재 보급 사업을 확대해 나라사랑정신 함양의 중심기관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겠습니다.        다섯째, 독립기념관의 상징인 ‘겨레의 집’ 리모델링사업을 올해 7월까지 완료하겠습니다. ‘겨레의 집’은 사무공간에서 관람객을 위한 체험?휴식 공간으로 바뀌어 독립기념관의 새로운 문화 환경을 만들어갈 것입니다.        여섯째, 독립기념관이 갖고 있는 자연환경을 더욱 편안하게 즐길 수 있도록 편의시설을 보강해 나가겠습니다. 백련못 및 단풍나무숲길, 야영장 그리고 순환보행로 곳곳에서 나무와 꽃과 조화를 이루는 시·어록비는 30년의 시간이 만든 아름다운 풍경입니다. 관람객의 소리에 귀 기울여 독립기념관을 아름다운 자연을 즐기면서 애국선열들의 나라사랑정신을 마음에 되새기는 휴식과 치유의 공간으로 가꾸어가겠습니다. 독립기념관은 2017년 한 해도 변화의 시대에 발맞추면서 투철한 사명감과 투명한 윤리경영으로 대한민국 국민이 독립기념관에 부여한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국민 여러분의 깊은 관심과 따뜻한 성원을 부탁드립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뜻하시는 일 모두 이루시기를 소망합니다.  alt   ▲  윤주경 독립기념관장 ]]> Fri, 06 Jan 2017 10:47:32 +0000 7 <![CDATA[기념관 산책 ]]>        어둠 지나면기필코 찾아오는 순간어둠의 장막 서서히 걷히고지평선 너머 태양이 선명하게 떠오릅니다.   고요한 세상을 깨우는 온기가흰 눈으로 가득 뒤덮인 이곳에그 따스한 손길을 내밉니다.   이제는 추위에 잔뜩 웅크렸던 몸기지개 켜고 고개 들어야 할 때   어둔 밤 지나면 기필코 밝아오는 저 아침처럼깜깜했던 시간 견디고 마침내 찾아온눈부신 새 역사의 시작을 바라봅니다.]]> Fri, 06 Jan 2017 16:19:55 +0000 7 <![CDATA[양심의 소리에 귀 기울인 지식인 ]]>        글 이성주 역사칼럼니스트   양심의 소리에 귀 기울인 지식인   “인간은 누구든 자신이 어떠한 삶을 살아나가는 것이 좋은가에 대해 진정한 자신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 이는 즉 양심의 소리다.”갈수록 각박해져만 가는 우리 사회 속에서 ‘양심’이라는 단어는 사치스러운, 혹은 세상물정 모르는 순진한 소리로 전락했다. “양심을 따르라니, 누가 알아주기나 한다고?” 양심은 곧 손해라는 인식을 갖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여기 특별한 ‘일본인 변호사’의 이야기를 들려주고자 한다.   사회적 성공을 버리고 양심을 따르다후세 다쓰지(布施辰治)는 촉망받는 변호사였다. 메이지대학을 졸업하고 법조인의 길을 걷던 그는 자타가 인정하는 성공한 인물이었다. “나는 변호사로서 세상에 인정받았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나의 활동 장소를 법정에서 사회로 옮기겠다.” 이 선언 이후 그의 인생은 하루아침에 나락으로 떨어졌다.▲1932년 변호사 자격 박탈 ▲1933년 신문지법 위반으로 실형 3개월 선고 ▲1939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 선고, 변호사 등록 말소. 그는 일제의 반체제 인사로 낙인찍히며 온갖 고초를 겪었다. 앞서 언급한 선언 중 ‘법정에서 사회로’라는 말은 조선인들에 대한 자신의 신념을 행동으로 옮기겠다는 의지의 다른 표현이었다. 후세 다쓰지가 정부기록상 최초로 등장한 때는 1911년 경술국치 다음해다. 당시 명치법률학교(현 메이지대학)에서 재학 중이었던 그는 조선 청년들과 어울리게 되면서 일제가 조선에 저지르고 있는 만행에 대해 알게 된다. 이러한 영향으로 조선의 의병운동을 다룬 『조선독립운동에 대해 경의를 표함』이라는 논문을 발표, 이 일로 경찰에 끌려가 호된 취조를 받았다. 그렇게 고독한 투사의 행보가 시작을 알렸다.1919년 일본에서 조선인 유학생들이 독립선언서와 결의문을 선포한 2·8독립선언이 일어났던 때의 일이다. 백관수를 포함한 11명의 유학생들이 기소되자, 후세 다쓰지가 그들의 변호사로 나섰다. “조선의 독립은 정당한 요구다.” 일본인으로서 자국의 뜻을 거스르고 독립운동의 정당성을 주장한 그의 변론은 파격 그 자체였다. 당시 그의 나이 40세였다.이후에도 1923년 일왕암살사건을 주도한 박열 무료 변론, 관동대지진 당시 벌어진 조선인학살의 진상규명을 위한 자유법조단 구성, 조선총독부의 토지 수탈에 대항하는 변론 및 식민지 수탈정책 반대운동 등 거침없는 행보가 이어졌다. 제국주의 시대에 맞서 옳은 목소리를 높인 후세 다쓰지. 그는 ‘시대의 양심’으로 불리게 되었다.   양심의 소리는 되돌아온다한국인도 아닌 일본인이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하고, 한국인을 위해 헌신했던 이유는 무얼까. 이쯤에서 서두에 밝힌 후세 다쓰지의 말을 다시 꺼낸다. “인간은 누구든 자신이 어떠한 삶을 살아나가는 것이 좋은가에 대해 진정한 자신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 이는 즉 양심의 소리다.” 그가 말한 ‘양심의 소리’. 그 소리의 시작은 어디였을까. 후세 다쓰지의 아버지는 춘추전국시대의 사상가 묵자(墨子)의 사상을 따랐다. 묵자는 한 마디로 ‘겸애(兼愛)’라 정의할 수 있다. 좀 더 쉽게 풀이하자면, ‘남을 위함이 곧 나를 위함이다’라는 말이다. 후세 다쓰지는 아버지의 영향으로 자연스레 그 사상을 받아들였다. 모든 인간을 똑같이 사랑하는 것. 자신을 사랑하듯 모든 사람을 사랑해야 세상이 이로워진다는 묵자의 뜻은 그에게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척도가 되었다. 양심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그 소리가 이끄는 대로 살리라 마음먹은 것이다.언제부터인가 우리는 양심을 따르기보단 그것을 저버리는 게 이득이라는 인식이 강하게 뿌리내리기 시작했다. 양심의 소리를 외면해 자신의 안위를 살피는 것은 곧 능력으로 포장되고, 그런 ‘뻔뻔한’ 삶의 방식을 권하는 사회가 되어 버렸다. ‘양심’이라는 단어가 스스로를 돌아보는 용례가 아닌 타인을 향한 질책으로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그러나 양심의 소리는 언제가 됐든 결국 반향(反響)을 만나 스스로에게 되돌아온다. 후세 다쓰지는 일본 패망과 함께 변호사로 다시 복귀하게 되었다. 또한 조금 늦은 감이 있지만 2004년 우리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았다. 일제강점기 시절 그를 비난했던 일본은 이제 그를 시대의 양심이라 추앙하며 기리고 있다.   급하게 돌아가는 세상. 한 발 뒤처지면 타인에게 짓밟힌다는 강박은 여전히 우리의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다. 잰 걸음을 잠시 멈추고 우리 안의 목소리를 들어보자. 귀 기울이지 않으면 잘 들리지 않는 그 소리가 세상을 어떻게 이롭게 할 수 있는지 장담할 수는 없지만, 언제가 됐든 그 울림이 자신에게 되돌아온다는 사실만큼은 약속할 수 있다. 늘 그래왔다고, 우리 역사는 넌지시 전해주고 있지 않은가. + 이성주시나리오 작가 겸 역사칼럼니스트. 대중과 함께 호흡하는 글쓰기를 목표로 『조선의 민낯』, 『왕들의 부부싸움』과 같은 역사서를 출간한 바 있다. 최근에는 국제정치에 관련된 연구 및 집필에 열중하고 있다. 『전쟁으로 보는 국제정치』 시리즈 1, 2, 3권을 출간 중이다. ]]> Fri, 06 Jan 2017 16:23:44 +0000 7 <![CDATA[독립기념관 연혁 ]]>     빛을 되찾은 1945년, 그리고 약 40여 년 뒤인 1987년 우리 민족의 국난극복사와 국가발전사를 연구하여 민족문화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올바른 국가관을 정립하기 위해 독립기념관이 건립되었다. 이후 또 시간이 흐른 지금, 독립기념관은 여전히 자리를 지키며 처음의 다짐을 이어가고 있다. 개관 30년, 독립기념관의 발자취를 한눈에 담았다. alt ]]> Fri, 06 Jan 2017 17:26:27 +0000 7 <![CDATA[과거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        글 심용환 역사N교육연구소 소장   과거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학교를 가니 선생님이 군복을 입고 학생들을 가르친다. 독립군은 경성 시내를 몰래 오가며 활동을 벌이고 한편에서는 여성들이 위안부로 끌려간다.” 한 드라마에서 묘사된 일제강점기 모습이다. 시대상황에 대한 고증이 부족했다고 밖에 볼 수 없는 장면이다. 사실이 아니라곤 할 수 없지만 시대가 중첩되었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일본은 우리나라를 집어삼키고자 그 방법을 다양하게 바꾸어왔다. 육체를 억압하는가 하면, 온갖 회유와 세뇌로 정신을 지배하려 했으며, 우리 민족의 뿌리를 송두리째 흔들고자 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했던가. 우리는 일본이 대한민국을 어떻게 집어삼키려 해왔는지 보다 자세한 이해를 통해 앞으로의 미래에 같은 역사를 반복되지 않도록 명심해야 한다.             alt 이미지캡션(왼쪽부터)_ 『황성신문』 창간호 / 초대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 / 일본 헌병대 1910년대 1910년부터 1919년 3·1운동 전까지 일명 ‘무단통치시대’에는 육군 장군이 총독으로 파견되고, 총독 밑에 경무총감과 정무총감이 있는 형식이었다. 총독으로 지낸 이들 대부분은 육군 출신으로 본국에서 막강한 정치적 역량을 발휘한 인물들이었다. 초대 총독인 데라우치 마사타케는 육군 장성 출신으로 이미 1901년 가쓰라 다로 내각에서 육군상을 지냈고, 1916년에는 본국 수상이 되어 시베리아 출병을 주도했다. 3·1운동 이후 문화통치를 주도했던 사이토 마코토 총독은 해군 제독 출신으로, 일본에서 외무대신·문부대신·총리대신을 역임했다. 1930년대 후반 민족말살통치를 자행했던 미나미 지로 총독 역시 와카쓰키 내각에서 육군대신을 역임, 관동군 사령관·만주국 전권대사·관동 장관 등을 지냈다. 1910년대는 이런 육군 군벌들의 스타일이 그대로 조선 식민통치에 적용된 시기다. 당시 ‘헌병경찰제’로 일반 경찰이 아닌 군인 경찰이 식민지를 운영했는데, 이들은 단순 치안뿐 아니라 세금 관리부터 민사소송, 심지어 마을 미풍양속까지 관여했다. 무엇보다 심각했던 것은 이들에게 ‘즉결처분권’과 ‘태형’이라는 권한이 주어졌다는 점이다. 영장 없이 체포하여 최대 4개월간 구금할 수 있는 권리를 준 것인데, 이로 인해 경찰에 의한 인권 유린의 전통이 시작됐다. 태형의 경우 하루 80대까지 때릴 수 있었다. 기록에 따르면 1911년에는 1만여 명, 3·1운동 직전에는 4만여 명이 태형을 당했다. 가로수를 꺾으면 5대, 웃통을 벗고 일하면 10대, 집 앞 청소를 안 하면 10대, 무허가로 개를 잡으면 40대, 학교림을 벌목할 경우 50대, 덜 익은 감을 판매할 경우 80대 등 강력한 군인 경찰 통치가 자행되었다.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도 보장되지 않았다. 『황성신문』, 『제국신문』 등 민족 신문들이 모두 폐간되었고 『대한매일신보』는 『매일신보』라는 이름으로 일제의 기관지가 되어 버렸다. alt 이미지 캡션(왼쪽부터)_친일파 이광수 / 민족적 경륜(『동아일보』, 1924년 1월) 1920년대 3·1운동의 영향으로 일제는 통치 방식의 전환을 모색할 수밖에 없었다. 다방면에서 이전과는 다른 행정조치가 내려졌다. 문관 총독도 임명이 가능하게 법을 손질하고, 헌병경찰제에서 보통경찰제로 전환하였다.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의 발행을 허가하여 일정 부분 언론의 자유를 보장했다. 또한 지방 행정기관인 도·부·군·면에 협의회를 설치하고, 투표를 통해 인사를 선발하는 등 부분적인 지방자치제를 실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는 기만적이었다. 문관 총독은 단 한 명도 임명된 사례가 없고 계속해서 육군 출신의 총독들이 부임했으며, 보통경찰제로 전환했지만 오히려 경찰의 숫자나 장비, 유지비가 증가하는 등 경찰을 통한 통치는 지속되었다. 신문은 발행을 허가하였으나 검열을 강화했다. 기사를 삭제하거나 정간 조치를 취하는 등 지속적인 언론탄압을 이어가다가 그마저도 결국 1940년대에 다시 폐간시켰다. 한편 문화통치시대에 일제가 가장 중점을 둔 사업은 ‘친일파 양산’이었다. 자치나 참정권 행사의 기회를 주는 등 우리 국민을 회유하여 원활한 식민통치를 꾀한 것이다. 이에 대표적으로 호응한 이 중 한 명이 이광수다. 상하이에서 『독립신문』의 주필을 맡고 있던 그는 일제에 포섭된 연인 허영숙과 재회하게 되면서 결국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등지고 귀국하였다. 이후 『동아일보』를 통해 조선 내에서 허(許)하는 범위 내에서 일대 정치적 결사를 조직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은 글 ‘민족적 경륜’을 발표했다. 이로써 일제 식민통치를 현실적으로 받아들이고 타협을 통해 자치권을 얻자는 자치론이 탄생했다. alt  이미지 캡션 (왼쪽부터)_친일파 최린 / 신간회 창립 1주년 기념사진(1928년 2월 15일)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이자 천도교 대표 인물인 최린 역시 비슷한 시기 일제에 회유되어 이광수와 같은 길을 걸었다. 참정권운동은 당시 독립운동을 주도하던 민족주의 진영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다. 이광수와 수양동우회를 비롯하여 상당한 역량을 보였던 소장파 민족주의자들이 자치론에 빠져들었기 때문이다. 결국 안재홍 등 비타협적 민족주의 노선은 새롭게 등장한 사회주의 독립노선과 연대하여 신간회를 창립하는 등 새로운 방향성을 모색해 나갔다. 그리고 자치론을 주장했던 이들은 1930년대로 들어서면서 사실상 모조리 친일파로 전락했다. alt 이미지캡션(왼쪽부터)_일본어 강제 교육 / 신사 참배하는 한국인 학생들 1930~1940년대 1931년에는 만주사변이 일어났다. 관동군이 내각을 무시하고 독자적인 군사작전을 감행하여 만주를 장악,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푸이를 만주국 황제로 세우며 어용 정권이 세워졌다. 이후 1937년 중일전쟁 발발, 1941년에는 태평양전쟁이 시작되면서 상황은 급변하기 시작했다. 당시 파견된 미나미 지로 총독은 부임기간 동안 파격적인 정책 전환을 추구했다. 바로 황국신민화정책과 병참기지화정책의 추진이었다. ‘내선일체(內鮮一體)! 일본과 조선은 하나다!’ ‘일선동조(日鮮同祖)! 일본과 조선은 같은 조상을 두었다!’ 이러한 구호 아래 우리 민족은 천왕이 추진하는 대륙 침략에 참여해야 했다. 민족 차별은 기본이고, 교육제도부터 임금체계까지 모두 차별할 때는 언제고 하루아침에 ‘하나’가 되었다니! 일제는 이후 신화적·역사적 왜곡을 자행하였는데, 한 예로 일본 신화의 주인공인 아미테라스 오미카미의 못난 남동생이 단군이었다는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황국 신민으로서 황국신민서사를 암송해야 했으며, 신사 참배와 궁성 요배도 강요하였다. 또한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꾸는 창씨개명과 함께 조선어와 조선사 교육이 금지되었다. 동시에 전쟁이 본격화된 만큼 적극적인 공업화 정책을 펼쳐 나간다. 주로 한반도 북부 지방에 중공업 시설을 적극 유치하는 방식이었는데, 이는 군수 물자를 생산하기 위한 조치였다. 전쟁이 가속화될수록 수탈의 정도는 극심해졌다. 식량을 배급받아 끼니를 해결했고, 미곡은 제값을 받지 못하고 공출되었다. 일제는 무기 제작 등에 필요한 쇠붙이를 얻기 위해 쇠붙이 공출도 강행하였다. 부엌칼 하나를 제외하고는 모조리 몰수한다는 계획 하에 쇠로 된 살림살이라면 무조건 빼앗아갔다. 이러한 무지막지한 공출 대상에는 인력도 포함되었다. 징병·징용·위안부까지 끔찍한 인권 유린이 벌어졌다. alt 이미지 캡션(왼쪽부터)_독립기념관 기공식(1983년 8월 15일) / 독립기념관 전경 광복 이후 1945년 우리나라는 마침내 독립하였으나, 일본은 광복 이후에도 우리 역사를 날조하거나 은폐하고 자신들의 침략 사실을 미화·축소하는 등 역사왜곡을 그치지 않았다. 이러한 행태는 각종 교과서에 버젓이 적용되었다. 일본은 초·중·고교 역사 교과서에 우리나라의 고대사부터 근대사·현대사에 이르기까지 역사 전반을 왜곡 기술하였으며, 특히 가장 심하게 왜곡한 부분은 현대사였다. 예를 들어 한국 ‘침략’을 ‘진출’로, 신사 참배 ‘강요’를 ‘장려’ 등으로 왜곡 기술하는 식이었다. 또한 독립운동 탄압을 ‘치안유지 도모’로, 조선어 말살정책을 ‘조선어와 일본어를 공용어로 사용’ 등으로 호도하는 식이었다. 일본의 역사왜곡은 비단 우리나라에 국한되지 않고 과거 일본의 침탈로 큰 해를 입었던 아시아의 여러 나라도 포함되었다. 이에 1982년 7월 일본이 왜곡된 역사를 교과서에 싣는 것을 대대적으로 규탄·성토하는 ‘일본역사교과서왜곡사건’이 일어나면서 전국적으로 반일운동이 강하게 일어났다. 일본 정부는 역사왜곡 사실을 시정하겠다고 약속하면서 격랑을 가라앉히고자 했으나, 우리 국민들에게는 이 사건이 역사의식을 고취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1982년 8월 28일 독립기념관 건립 발기대회를 열었던 것. 독립기념관 건립은 민족의 자주와 독립을 지켜온 한민족의 역사를 유념하고자 광복 이후 계속 제의된 사안이었으나, 국내외 정세의 혼란으로 결실을 맺지 못하고 있었다. 다소 늦은 감이 없지 않았지만 일본의 역사왜곡이 불씨가 되어 광복 37년 만에 비로소 본격 추진하게 되었던 것이다. 국민의 정성어린 성금을 모아 마련한 자금으로 공사에 착수, 마침내 1987년 8월 15일 독립기념관이 개관하였다. 독립기념관은 이후 우리의 국난극복사와 국가발전사에 관한 자료를 수집·보존함으로써 민족문화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오늘날 전시·학술·교육·문화 등 다양한 사업을 통해 국민의 올바른 국가관 정립을 충실이 이행해왔다. 한국 독립운동은 한국인만의 독립운동사만이 아니라 세계인의 자유와 평화를 지키기 위해 싸운 반제국주의 투쟁의 역사였다. 일제강점기를 비롯하여 광복 이후에도 우리 역사와 민족정신은 끝없이 위협 받아왔다. 올해로 독립기념관이 개관 30년을 맞은 이 시점에서 우리는 다시금 우리 역사를 결코 잊지 않겠다는 의지를 다시 세워야 할 것이다. 심용환 성균관대학교 사범대학에서 역사교육학을 전공했다. 현재 팟캐스트 <진짜 역사 가짜 역사>를 통해 재미있고 올바른 역사 이야기를 전파하고 있으며, CBS와 공동으로 <심용환의 근현대사 똑바로 보기>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저서로는 『단박에 한국사』, 『역사 전쟁』이 있다. ]]> Mon, 09 Jan 2017 14:15:49 +0000 7 <![CDATA[이신애, 독립운동으로 여성에게 자긍심을 일깨우다 ]]> [우리가 몰랐던 이야기 하나] 글 김형목 독립기념관 책임연구위원   이신애, 독립운동으로 여성에게 자긍심을 일깨우다   3·1운동은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5월 말경에 이르러 거의 침체에 직면했다. 독립운동가들은 이러한 상황을 예상하고 이미 여러 비밀결사를 조직했다. 새로운 분위기를 조성하여 지속적인 시위운동을 전개하려는 의도였다.   alt -이신애 경찰관주재소 앞에서 독립만세 소리가 고창되다 한성정부를 비롯한 상하이, 블라디보스토크 등 독립운동을 총괄하는 임시정부가 수립·통합되었다. 천장절에 즈음하여 10월 31일에는 연통단·중앙청년단·독립청년단·애국청년단 등과 연합한 청년들이 식민지배를 비판하는 전단을 동대문 밖에 살포했다. 서울 장안에는 다시 한 번 긴장감이 흘렀다. 이어 11월 28일 오후에는 안국동에 태극기와 ‘대한독립만세’라고 쓴 깃발이 올랐다. 바로 식민지배 최전선인 경찰관주재소 앞에서였다. 만세 함성과 아울러 지나가는 행인에게 선언서가 배포되었다. 당시 주인공은 이신애와 그의 동지인 박정선·정규식·박원식 등이었다. 일경들은 이들은 물론 이에 호응하는 행인들마저 모두 체포하였다. 소식은 입소문을 통해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독립만세운동은 스스로를 지탱하는 버팀목이다 배후 세력을 파악하기 위한 혹독한 고문과 심문이 시작되었다. “왜 독립만세를 불렀느냐?” 주동자로 지목된 이신애에게 협박과 회유가 오가며 취조가 이어졌다. 그럼에도 그녀는 전혀 주눅이 들지 않고 당당하게 맞섰다. 조금도 주저함 없이 독립운동에 대한 평소 입장을 밝혔다. 마치 심문자를 비웃기라도 하는 듯한 자세로. “우리들은 독립만세를 부른다고 해서 (당장) 독립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만세를 부르면 많은 사람들이 함께하여 하나 된 시위운동을 통해 독립을 이루리라 생각하였다.”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하여 독립만세를 제창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 아닌가. 무슨 이유와 설명이 필요한가? 당당한 태도에 오히려 취조하는 경찰이 당황할 정도였다.   이신애, 그녀는 누구인가 이신애는 1891년 1월 20일 평북 구성에서 장녀로 태어났다. 일찍이 기독교를 수용한 집안 분위기로 근대교육의 수혜를 받았다. 개성과 원산 여성교육의 요람지인 호수돈여학교과 성경여학교에서 수학하고, 이후 교사와 전도로 활동하면서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데 혼신을 다했다. 헌신적인 활동에 감격한 많은 학생과 교인들이 그녀를 따랐다. 이신애는 항일운동 투신을 결심한 후 여학교를 사직, 서울로 올라왔다. 3?1운동이 일어나자 동지들과 함께 적극 참여하였다. 이는 독립운동에 본격 투신하는 시발점이었다. 5월경에는 여성독립운동단체에 가입하여 활동했다.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 지원을 위한 독립운동자금 모집에도 열성적이었다. 동지들과 교류 및 소통은 점차 대담한 활동으로 이어졌다. 강우규가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를 처단하기 위해 서울에 왔을 때는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비록 이 의거는 실패하였으나 청소년들에게 항일의식을 북돋는 기폭제가 되었다. 식민당국자들이 우왕좌왕하던 10월 초순에는 항일비밀단체인 민족대동단에 입단하는 한편 식민지배의 실상을 폭로하는 선전활동에 나서기도 하였다. 민족대동단은 의친왕 이강을 상하이 망명시켜 망명정부를 수립하는 원대한 계획을 세웠다. 무사히 압록강을 건너 안둥(현 단둥)에 도착하는 듯 했으나, 끝내 계획은 실패하고 말았다. 이때 많은 단원들이 체포되면서 민족대동단은 위기에 직면했다. 이신애는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고자 동지들과 제2의 만세운동인 안국동 만세시위를 전개하다가 결국 체포되었다. 서대문형무소에서 미결수로 옥고를 치르던 중 이듬해, 3·1운동이 첫돌을 맞이했다. 이에 이신애는 유관순 등과 함께 옥중투쟁을 주도하였다. 모진 고문이 이어지는 등 무자비한 보복이 가해졌으나 결코 중단하지 않았다. 병보석 직후 유관순이 순국한 사실은 당시 얼마나 잔인한 고문이 자행되었는지 짐작케 한다. 이후로 옥중투쟁은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여성독립운동가들의 주요 투쟁방략 중 하나로 자리매김 하였다. 이신애는 징역 4년을 언도받고 복역하다가 출감했다. alt 이미지캡션(왼쪽부터)_대동단사건 공판 광경 / 대동단 제2차 독립선언서 민족대동단 여성대표로 활약하다 ‘세계 개조의 민족자결은 천하에 드높고, 우리나라의 독립국과 자유의 소리는 나라 안에 울려 퍼진다. 3월 1일에 독립을 선언하고 4월 10일에 정부를 수립했으나 간악한 저 일본이 시세의 추이를 살피지 못한다. 오로지 표범과 이리의 야만성으로 무자비한 억압을 일삼았다. …(중략) 만일 일본이 끝내 뉘우침이 없으면 우리 민족은 부득이 3월 1일의 공약에 의하여 최후 1인까지 혈전을 불사한다.’ 민족대동단이 일제에 혈전을 불사한다는 선언이다. 이신애는 의친왕 이강과 총재인 김가진 등과 더불어 여성대표로서 역사 무대에 우뚝 섰다. 또한 여성뿐만 아니라 남자들도 민족대동단 단원으로 포섭하는 등 한민족 대동단결에 전력을 기울였다. 온갖 고초에도 전혀 흔들림 없이 오직 조국독립만을 최고의 가치로 생각하고 실천했다. 그녀의 인생역정이 아름다운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가 몰랐던 이야기 둘] 글 신현배 역사칼럼니스트   일제를 놀라게 한 의친왕 탈출 사건   의친왕 이강(1877-1955)은 고종의 다섯째 아들로, 어머니는 귀인 장씨다. 순종의 배다른 동생이자 영친왕의 배다른 형인 그는 영친왕의 어머니 귀비 엄씨의 견제로 1894년(고종 31년) 일본으로 갔다가, 1896년까지 영국?프랑?독일?러시아?이탈리아?미국 등을 전전했다. 그러던 1897년 고종이 대한제국 황제로 즉위하고, 미국 유학 중이던 이강은 1900년 ‘의친왕’에 책봉, 고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alt   의친왕 이강 일제의 감시 속 탈출을 꾀하다 1905년 의친왕은 고국으로 돌아왔으나 일제의 감시 속에서 지냈다. 일제가 의친왕을 항일 의지가 높아 순종이나 영친왕보다 위험한 인물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그는 술로 세월을 보내며 감시를 따돌렸다. 대한제국이 멸망하면서 의친왕의 작위는 ‘이강 공(公)’으로 강등되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의친왕을 국내에서 탈출시켜 상하이로 망명시키기로 계획하였다. 이 일이 성공한다면 한일합방의 부당성을 해외에 알리고, 군자금을 모으는 데 도움이 되어 독립운동이 더욱 활발해지는 계기가 될 것이었다. 1919년 9월 임시정부는 공작원 이종욱을 비밀리에 서울로 보냈고, 그는 독립운동의 비밀조직인 대동단의 전협 단장을 만나 의친왕의 탈출 계획을 알렸다. 임무를 전달받은 전협은 대동단원 이재호가 의친왕과 가깝게 지내는 정운복과 친하다는 것을 알고 그를 통해 의친왕에게 접근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11월 9일 밤 11시, 공평동의 비밀 가옥에서 의친왕을 마주하였다. “우리는 전하를 상하이로 탈출시켜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독립운동을 하려고 합니다.” 전협의 말에 의친왕은 망설임 없이 제의를 받아들였다. “좋소. 임시정부로 가겠소.” 의친왕은 일제의 눈을 피하고자 턱에 수염을 붙이고 허름한 옷을 입어 변장했다. 인력거에 의친왕을 태운 전협은 새벽녘 경기도 고양군 은평면 구기리에 있는 다른 비밀 가옥으로 향했다. 대동단에서 의친왕의 탈출을 돕는 사람은 정남용과 이을규였다. 수색역에서 만주 안둥역까지 기차로 이동한 뒤 정남용은 서울로 돌아가고, 이을규가 의친왕을 상하이까지 모시기로 했다. 구기리의 비밀 가옥에서 의친왕은 두 사람에게 말했다. “우리 집안은 조선 왕조 500년 동안 주인 노릇을 했소. 2천만 백성들이 조선 독립을 위해 애쓰고 있는데, 주인이 모른 척할 수야 없지 않소? 일제는 고종 폐하를 독살했소. 따라서 그 원수를 갚지 않으면 안 되오. 나는 주인집의 한 사람으로서 조선 독립을 위해 보통 사람보다 열 배, 스무 배 더 노력할 것이오.” 이에 정남용이 말했다. “훌륭한 생각이십니다. 전하께서 강화 회의나 국제연맹에서 조선의 독립운동에 대해 증언하신다면, 일제의 무단정치가 잘못되었음이 만천하에 드러날 것입니다.” 의친왕은 망명을 떠나기 전 ‘조국 동포에게 전하는 마지막 말’인 『유고문(諭告文)』을 남겼다. ‘통곡하면서 우리 2천만 민중에게 고하노라. 이번 중국행은 하늘과 땅끝까지 이르는 깊은 원수를 갚으려 함이다. …민중은 한뜻으로 나와 함께 궐기하자.’ 일제의 고종 독살을 폭로하고 2천만 조국 동포에게 호소하는 내용이었다. 의친왕이 망명에 성공하면 이 유고문을 상하이와 서울에서 의친왕의 이름으로 동시에 뿌리기로 했다. alt 대동단장 전협 일제에 충격을 안긴 사건으로 기억되다 11월 10일 오전 11시 의친왕 일행은 열차를 타고 수색역을 출발, 평양역으로 가 만주 안둥역행 열차로 바꿔 탔다. 그즈음 서울은 발칵 뒤집혀져 있었다. 일제는 의친왕이 사라진 것을 알고, 국내는 물론 일본?만주?시베리아?상하이까지 긴급 수배령을 내렸다. 의친왕 일행이 안둥역에 도착한 것은 11월 11일 오전 11시쯤. 접선 장소는 임시정부 교통국 역할을 하던 무역회사인 이륭양행(怡隆洋行)이었다. 안둥역에서 도보로 30분 거리에 있어 이곳에 닿으면 망명은 거의 성공적이었다. 이륭양행 소속의 배를 타고 상하이로 가기로 했던 것. 하지만 운이 따르지 않았다. 일경이 쫙 깔린 안둥역을 빠져 나오는데, 안둥역장이 의친왕의 얼굴을 알아본 것이다. “이강 전하 아니십니까. 안둥까지는 어쩐 일이십니까?” 변장에도 불구하고 얼굴을 알아보다니,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아, 아닙니다. 사람 잘못 보셨습니다.” 의친왕은 극구 부인했지만 그곳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뒤따라온 일경들은 의친왕과 정남용을 체포했다. 이을규는 간신히 역을 빠져 나갔지만 끝내 그도 붙잡히고 말았다. 의친왕 탈출 사건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하지만 이 사건은 일제를 놀라게 한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조선총독부 경무부장 지바는 조선총독부에서 간행한 『조선통치비화』에서 이 사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전하께서 만에 하나라도 상하이까지 탈출하시게 되었다면, 불온 조선인들은 기필코 전하를 받들어 독립운동에 더욱 기세를 올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조선 통치상 커다란 동요를 가져왔을 것이며, 세계 여론에도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위기일발 직전에 이를 막을 수 있어서 무엇보다도 국가를 위해 다행스런 일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신현배 역사와 전통문화에 대해 관심이 많은 역사칼럼니스트. 저서로는 역사 이야기 『엉뚱 별난 한국사』, 『엉뚱 별난 세계사』, 『2000년 서울 이야기』, 『세계사로 배우는 법 이야기』, 전통문화 이야기 『소중한 우리 문화 지식 여행』 시리즈 등이 있다. ]]> Mon, 09 Jan 2017 14:19:26 +0000 7 <![CDATA[춘천의병장으로 을미의병의 주역이 되다 ]]> 글 학예실   춘천의병장으로 을미의병의 주역이 되다 이소응(李昭應, 1852. 8. 7 ~ 1930. 3. 25)   독립기념관은 국가보훈처?광복회와 공동으로 이소응을 1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춘천의병장으로 백성들을 이끌었던 그는 을미의병에서 활약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alt alt 춘천의병을 이끈 항일의 선봉장 이소응은 1852년 강원도 춘천시 남면 강촌에서 태어났다. 7세 때 처음으로 한문을 배우기 시작하였고, 22세 때 유중교(柳重敎) 문하에 들어가 화서학파의 일원이 되었다. 이후 이소응은 유중교와 유중교의 재종질인 유인석을 스승으로 모시며 평생토록 각별한 인연을 맺었다. 1896년 1월 20일 이소응은 춘천의병의 의병장으로 추대되었다. 각 읍에 격문 ‘효고팔도열읍(曉告八道列邑)’을 보내 이를 통해 국모를 시해하고 단발을 강요하는 것을 꾸짖고, 나라의 원수들을 처단하기 위해 의병을 일으킨다는 뜻을 밝혔다. 그리고 1월 28일 개화정책에 앞장선 춘천관찰사 조인승을 잡아 처단하였다. 정부는 관찰사 처단 소식을 듣고 1개 중대를 급파하였다. 춘천의병은 2월 3일 가평에서 관군과 맞서 싸웠으나 패퇴하여 춘천으로 퇴각하였다. 이소응은 지평군수를 찾아가 원병을 요청하였지만, 오히려 구금되고 말았다. 다행히 유인석 휘하에서 활동하던 정익 등에 의해 구출된 후 제천으로 내려가 유인석이 이끌던 제천의병에 합류하였다. 이소응 alt 이미지캡션(왼쪽부터)_춘천의병의 본영이 있었던 관찰사 건물 터(현재 강원도청) / ‘효고팔도열읍(曉告八道列邑)’ alt 서간도 망명과 순국 1898년 유인석을 따라 서간도로 건너간 이소응은 퉁화현 오도구로 망명하였다. 그해 여름 함께 망명했던 동지들과 항일의지를 다지는 의체(義諦)를 약정하였고, 10월에는 퉁화현 팔왕동(현 집안현 패왕조)으로 이주하였다. 1900년 말 의화단의 난이 일어나자, 그는 유인석과 함께 귀국하였다. 귀국 후 원주로 돌아와 지내다가 제천의 모정?남동막 등을 거쳐 1905년 공전리에 정착하였다. 이곳에서 화서학파의 존화양이(尊華攘夷) 정신을 담은 자양영당(紫陽影堂) 건립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경술국치로 인해 더 이상 국내에 머물 수 없게 되자, 1911년 다시 서간도로 망명하였다. 망명 후 회인현 대황구에 머무르다가 1915년 관전현 문화사 만구로 이주하였다. 1927년에는 근대화의 물결을 피해 강평현 제7구 민가둔으로 이사하였다. 이곳에서 존화양이의 의리를 지키며 살다가 1930년 79세의 나이로 순국하였다. 이소응의 유해는 1934년 제천으로 반장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활동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을미의병의 정신적 지주 유인석 alt 이미지캡션(왼쪽부터)_자양영당(紫陽影堂) / 이소응 묘소(제천시 봉양읍 공전리) ]]> Mon, 09 Jan 2017 14:21:45 +0000 7 <![CDATA[조선의 마지막 황녀, 그녀의 진짜 모습 영화 <덕혜옹주> ]]>        글 편집실   조선의 마지막 황녀, 그녀의 진짜 모습 영화 <덕혜옹주>   최근 영화?드라마?소설 등 다양한 대중문화 영역에서 역사 콘텐츠가 활발하게 제작되고 있다. 이는 많은 사람들에게 역사인식을 환기하고, 역사는 지루하고 어렵다는 선입견을 바꾸는 계기로 작용하고 있다. 그러나 역사물에 대한 관심이 커져감과 동시에 ‘역사왜곡’ 문제도 잇따르고 있다. 작품 속 표현들을 있는 그대로의 역사적 사실로 여길 수 있다는 것. ‘진실 혹은 거짓’에서는 대중매체에서 다뤄지는 독립운동의 모습이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허구인지 짚어봄으로써 올바른 역사인식을 돕고자 한다. 그 첫 번째 선정작은 영화 <덕혜옹주>다. alt 이미지캡션(왼쪽부터)_영화 덕혜옹주 속 덕혜옹주와 고종 / 실제 덕혜옹주의 모습 Q. ‘덕혜’라는 인물 설정은 어디까지가 사실일까? 덕혜는 고종이 늦은 나이에 얻은 고명딸이자, 조선의 마지막 옹주다. <덕혜옹주>에서처럼 어린 덕혜는 고종의 예쁨을 받으며 자랐다. 강제 퇴위 후 실의에 잠긴 고종에게 덕혜는 큰 위안이 되어 주었다. 고종이 승하한 뒤 덕혜옹주는 1925년 3월 24일 일제의 압박에 홀로 도쿄 유학을 떠나게 된다. 14세 나이에 낯선 이국땅에 발 디딘 그녀는 이후 어머니마저 여의고, 쓰시마 백작 소 다케유키와 혼인하여 딸 정혜를 낳았다. 결혼할 무렵에는 조현병(정신분열증)이 점차 심해졌다. 마침내 광복한 고국에 돌아온 것은 1962년. 51세 나이에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채였다. 일찍이 부모를 잃고 타국에서 홀로 지내온 세월, 그리고 정신병까지 그 삶에는 숱한 곡절이 있었다. alt Q. 조선인들을 위해 학교를 세운 옹주? 영화 속 덕혜옹주는 일본에서 지내는 동안 늘 조국을 그리워한다. 조선 어린이들을 위해 한글학교를 세우고, 보육원에서 직접 노래를 만드는 등 백성들을 향한 애틋한 마음이 잘 드러난다. 그러나 덕혜옹주가 세웠다는 한글학교는 사실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직접 작곡했다는 동요는 실제로 ‘쥐’라는 제목으로 당시 유행했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옹주가 쓴 시에 일본 작곡가들이 곡을 붙인 이 동요는 우리말이 아닌 일본어로 불렸으며, 정치적인 목적으로 보급된 것이었다. alt Q. 조선황실, 항일운동 위해 망명을 시도하다? <덕혜옹주>의 역사왜곡을 지적하는 사람들은 특히 조선황실의 망명 시도가 가장 심하다고 꼬집는다. 영화에서 덕혜옹주와 영친왕은 김장한과 독립운동가들의 도움으로 망명을 시도하다 실패하고 만다. 실제로는 어땠을까? 1927년 영친왕 내외가 세계 유람에 나섰을 때 독립운동가들은 이들이 상하이에 들른다는 소식을 입수, 영친왕을 납치해 독립운동에 합류시킬 계획을 세운다. 영화 속 장면은 이러한 역사적 기록을 변형해 만든 것이다. 실제로도 영친왕 납치 계획은 밀정의 밀고로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나 영화에서 보여진 것과는 달리 영친왕은 망명 의지는 고사하고 일제의 비호를 받으며 유럽 각국을 관광하며 호사스러운 여행을 이어갔다. 민중의 고통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안위만을 생각했던 것이다. alt 이미지캡션(왼쪽부터)_영화 덕혜옹주 속 조선황실 / 실제 조선황실의 모습 Q. 황족에 대한 존경심 vs 배신감 황족들이 독립운동에 가담한 경우는 거의 없었다. 영화 속 덕혜옹주는 조선인들에게 존경 받는 인물로 그려졌지만, 실제로는 망국에 책임이 있는 조선황실이 일본에서 호의호식하는 것에 대한 반감이 높았다. 특히 영친왕은 일제에 순응해 안온한 삶을 영위한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그가 헤이그의 한 호텔에 묵고 있을 때, 독립운동 진영으로부터 한 편지를 받았다고 한다. ‘전하를 일제에서 탈환해 상하이나 노령으로 모시고 갈 계획도 세웠으나, 전하의 마음이 약하셔서 일본 군인을 앞세우고 다니며 구라파 여행만 즐기고 계시니 어찌 한심하지 않으리까!’ 그러나 영친왕은 일제가 패망한 뒤에도 당장의 생활에 급급할 뿐이었다. 광복이 오자, 일본 내각에 “아무쪼록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대우해줄 수는 없느냐”고 애걸했다는 증언도 있다. ]]> Mon, 09 Jan 2017 14:22:47 +0000 7 <![CDATA[볼거리, 배울거리 다채로운 겨울을 만나다 전라북도 고창 ]]>        글·사진 김초록 여행칼럼니스트   볼거리, 배울거리 다채로운 겨울을 만나다 전라북도 고창   정유년(丁酉年) 새해가 밝았다. 새 마음으로 힘차게 시작하는 정초, 몸과 마음에 신선한 기운을 불어넣기 위해 서해바다를 낀 전라북도 고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불어오는 겨울바람을 온몸으로 맞고 있는 대지에는 온통 흰 눈이 쌓였다. 마치 동화 속 한 장면 같은, 비산비야(非山非野)의 색다른 풍경을 두루 감상하며 마침내 다다른 곳은 ‘고창읍성(모양성, 사적 제145호)’이다. alt alt 겨울이 내린 고창읍성 둘러보기 눈 내린 고창읍성은 고즈넉했다. 발자국을 남기며 가만가만 둘러보기 시작했다. 조선 초기에 축조된 이곳은 우리나라에서 원형을 가장 잘 간직한 성으로 꼽힌다. 성 둘레에 튼튼하게 쌓아올린 석재는 대부분 자연석이다. 동·서·북에 3개의 문을 두고 적의 접근을 차단하기 위해 성벽의 일부를 네모지게 또는 반달꼴로 쌓은 것이 특징이다. 성문 앞에는 옹성(甕城)을 둘러쌓아 적으로부터 성문을 보호할 수 있도록 했다. 또한 주민들이 유사시에 성안으로 들어와 함께 싸우며 살 수 있도록 4개의 우물과 2개의 연못을 만들어 놓았다. 축성 당시 동헌과 객사 등 22동의 관아 건물이 있었으나, 화재로 대부분 소실되고 일부만 남아 있다. 현재 남아 있는 14동의 성곽 건물들은 1976년부터 복원?정비한 것들이다. 높이가 6미터에 달하는 성둑에 올라서면 고창읍내와 넓은 평야가 한눈에 들어온다. 고창읍성은 성곽 밖, 성벽 위, 성안 솔숲길 등을 선택하며 답사를 돌 수 있다. 특히 이곳에는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성밟기놀이가 있는데, ‘머리에 돌을 이고 성을 한 바퀴 돌면 다릿병이 낫고, 두 바퀴 돌면 무병장수하고, 세 바퀴 돌면 극락에 간다’는 이야기가 전설처럼 내려온다. 인적 드문 숲길을 거닐면 호젓하고 아름다움을 즐길 수 있는가 하면, 성곽을 따라 걸으면 시원스럽게 펼쳐진 읍내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고창읍성: 전라북도 고창군 고창읍 모양성로1 / 063-560-2710 alt 만세 함성과 판소리 울려 퍼지던 곳 고창읍성은 곳곳에 생각지 못한 역사를 품고 있다. 1919년 3월 21일 김승옥?오동균?김창규 등의 주도하에 고창청년회원, 고창보통학교 학생 2백여 명이 이곳 읍성 북치광장에 모여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3·1독립 만세 터’를 알리는 비석 앞에 서서 그날의 역사적 순간을 상상해 보았다. 하늘과 땅을 울리던 함성이 저 너머에서 메아리처럼 들려오는 듯해 눈을 떠보니, 바람소리만이 귓전을 스치고 있을 뿐이었다. 다른 한편에는 이 고장이 낳은 판소리의 대가 신재효의 고택이 자리하고 있다. 신재효는 이곳에서 춘향가·심청가·박타령·가루지기타령·토끼타령·적벽가 등 여섯 마당의 가사를 정리하고 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오늘날 고택 옆에는 한국의 판소리를 이해하고 체험할 수 있는 판소리박물관이 신재효의 정신을 이어가고 있다. alt 조상들의 지혜가 엿보이는 옛 무덤 고창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고인돌의 고장이기도 하다. 고인돌은 수 천 년 전의 공동묘지다. 몇 개의 받침돌 위에 한 개의 넓고 커다란 덮개돌을 얹어 놓은 선사시대의 무덤양식이다. 2천여 개에 달하는 고인돌은 고창을 세계 도시로 각인시켰다. 고인돌박물관에서는 선사시대의 생활상과 고인돌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일목요연하게 살펴볼 수 있다. 박물관에서 가까운 아산면 상갑리와 고창읍 매산리에는 고창군 일대에 흩어져 있는 고인돌 가운데 500여 기의 고인돌이 밀집해 있다. 고창 고인돌은 크기와 형태에 따라 북방식(탁자식)·남방식(바둑판식)·주형지석·위석식·지상석곽식 등으로 나뉜다. 특히 지상석곽식은 고창에서만 볼 수 있는 고인돌로 여러 장의 판석으로 무덤방을 만들었다. 많고 많은 고인돌 가운데 고창읍 도산리의 한 마을 뒤편에 서 있는 북방식 고인돌 한 기와 동양에서 가장 크다는 운곡 지석묘 한 기가 눈길을 끈다. 교과서에도 나오는 도산리 고인돌은 넓은 판석 2개를 세로로 세우고 그 위에 상석을 얹은 형태이다. 수천 년 역사를 침묵으로 보여주고 있다. 고인돌박물관에서 4km 거리에 있는 운곡 지석묘는 높이 5m, 둘레 16m, 무게는 무려 300여 톤에 달한다. 어떻게 만들어 옮겨왔는지 현대과학으로는 도저히 풀 수 없는 수수께끼다. 고창고인돌박물관: 전라북도 고창군 고창읍 고인돌공원길 74 / 063-560-8666 alt 고창이 배출한 인물 고창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미당(未堂) 서정주 시인이 있다. 서정주가 나고 자란 고향마을(질마재) 폐교 터엔 미당시문학관이 들어서 있다. 이곳엔 그가 남기고 간 시와 유품, 생전의 모습 등이 전시돼 있다. 서정주는 산문시 『질마재 신화』에서 이곳 선운리를 자세하게 써 놓았다. 총 45편으로 구성된 대표작이다. 이 시집은 우리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버린 한국의 전통적인 아름다움을 섬세하게 표현하고 있거니와 시구 곳곳에서 보이는 방언과 구어는 서정주 자신의 내밀한 경험과 상상력에서 나온 것이다. 서정주 생가에서 3km 남짓 떨어진 고창군 봉암리에는 대한민국 2대 부통령을 지냈으며 동아일보사와 고려대학교를 설립한 인촌(仁村) 김성수 생가가 있다. 남북으로 길게 이어진 대지 안에 낮은 담을 두르고 큰 집과 작은 집이 나란히 배치돼 있다. 집에 딸린 안채·사랑채·곳간·행랑채 등 여러 채의 건물은 규모가 어떤지를 보여준다. 친일 행위로 논란이 되기도 했던 김성수는 일제강점기 시절 민족개량주의를 주장했는데 오늘날 매우 의미심장한 말로 들린다. “식민통치에서 벗어나려면 조선인이 스스로 자각, 깨우쳐서 실력을 양성해야 한다. 기술을 배워서 익히고, 식품과 생산품을 자체 조달할 수 있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경제력을 키워야 한다.” 이밖에도 항일독립운동가 근촌(芹村) 백관수와 조선 영?정조 때의 실학자 이재(?齋) 황윤석도 고창이 배출한 걸출한 인물이다. 성내면 조동리와 덕산리에 있는 두 사람의 고택은 아직도 옛 시절을 그리워하는 뜻있는 분들의 발걸음이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황윤석은 문학·경제·종교·천문·지리·풍수·의학·언어 등에 능통했던 학자로서, 『이재난고』?『자지록』?『산뢰잡고』 등 300여 권에 이르는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 미당시문학관: 전라북도 고창군 부안면 질마재로 2-8 / 063-560-8058 alt 몸과 마음으로 보고 느끼다 ‘호남의 내금강’으로 불리는 선운산과 그 아래 포근히 안긴 선운사는 고창의 명소다. 변산과 곰소만을 사이에 두고 치솟은 선운산은 천왕봉?여래봉?인경봉 등 크고 작은 봉우리가 띠를 두르듯 이어져 있고 산자락 깊숙이 진흥굴과 도솔암 등 명소들이 박혀 있어 언제 찾아도 그윽한 맛을 풍긴다. 선운산은 도솔산이라 불리기도 한다. 불가의 도솔천에서 나온 말로, ‘미륵보살이 머문다’는 뜻이다. 선운(禪雲)이란 이름도 고찰 선운사에서 따온 것이다. 이번에는 내륙을 벗어나 바다로 가본다. 상하면 자룡리에 펼쳐진 구시포 해변. 물이 밀려 내려간 모래밭은 마치 사막 같다. 북쪽 방파제 뒤로 나 있는 너른 모래밭은 명사십리로 불린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아득하다. 바람이라도 불면 모래가 파도처럼 몰아친다. 구시포에서 명사십리 옆길을 따라 해리면 쪽으로 향했다. 궁산저수지가 보이는 삼거리에서 동호해변으로 우회전해 계속 가면 오른쪽에 해리염전이 보인다. 바둑판처럼 나누어진 염전의 허름한 소금창고들은 시간의 흐름마저 되돌린 듯 쓸쓸한 풍경이다. 여기서 해안도로를 따라 북쪽으로 올라가면 갯벌마을(서전마을)이 나온다. 물이 빠지면 1,200ha의 갯벌이 펼쳐지는 곳이다. 여느 갯벌과는 조금 다른데, 펄이 단단해 한번 발이 빠지면 좀처럼 잘 빠지지 않는다. 드넓은 이 갯벌에서는 연간 4,000여 톤의 바지락을 거둔어, 전국 최대 수확량을 자랑한다. 선운사: 전라북도 고창군 아산면 선운사로 250 / 063-561-1422 겨울의 고창은 볼거리, 배울거리가 다채롭다. 발걸음이 머무는 곳마다 나긋나긋 이야기를 들려주는 곳, 내려앉은 눈이 다 녹아버리기 전에 올 겨울은 전북 고창을 방문해보는 건 어떨까. 김초록 여행칼럼니스트 겸 수필가. 현재 『월간 비타민』, 『건설경제신문』, 『서울우유』, 『냉동공조신문』에 객원기자로 활동 중이다. 여행 저서로는 『여름 이야기』, 『7가지 테마가 있는 여행』 등이 있다. 고창에서 방문하면 좋은 곳 체험형 힐링 공간, 상하농원 상하농원은 미래 한국 농촌의 모습을 보여주는 체험형 힐링 공간이다. 농업(1차 산업), 제조업(2차 산업), 서비스업(3차 산업)이 한데 어우러진 곳으로, 과일?빵?햄 등을 직접 만들어 볼 수 있고, 지역 특산물을 저렴한 가격에 살 수 있다. 그 외에도 동물들과 교감할 수 있는 동물 농장 및 레스토랑을 갖추고 있어 아이들을 둔 가족 나들이 장소로 좋다. 주소: 전라북도 고창군 상하면 상하농원길 11-23 / 문의: 1522-3698 ]]> Mon, 09 Jan 2017 14:23:48 +0000 7 <![CDATA[혐오 사용법 ]]>        글 장근영 심리학자혐오 사용법 혐오는 기쁨·슬픔·분노·두려움·놀라움과 함께 인간의 6대 기본감정에 속한다. 지난해 동안 SNS를 뜨겁게 달군 감정이 있다면 바로 ‘혐오’가 아닐까. 싫어한다는 말을 ‘극혐’이라고 표현하는가 하면, 싫어하는 유형 혹은 단체의 사람을 벌레라고 가리켜 ‘~충’이라고 일컫는 게 일종의 유행처럼 퍼졌다. ‘여혐(여성혐오)’ 논란이 일었고, 그에 맞서 ‘남혐(남성혐오)’도 떠올랐다. 끊임없이 새로운 혐오의 대상을 찾아 격렬하게 미워해온 2016년. 새해에는 이런 ‘혐오’의 감정을 좀 더 건강하게 사용하면 어떨까. 가장 빠르게 학습하는 생존본능 혐오가 우리의 본능적 감정이라는 건, 이 감정이 인류의 생존에 필요불가결한 역할을 해왔음을 의미한다. 누구나 한번쯤 어떤 음식을 먹고 체하거나 배탈이 난 경험이 있으리라. 한번 크게 탈이 나고 나면, 다음엔 그때 먹었던 음식을 생각하기만 해도 역겨워진다. 심리학에서는 이것을 ‘미각혐오 학습’이라 부른다. 사람을 포함한 모든 동물이 이렇듯 단 한 번 만에 무언가를 학습하는 경우는 혐오라는 감정을 느낄 때를 제외하고는 거의 없다. 혐오가 빨리 학습되는 이유는 간단하다. 기억하지 않으면 내 몸을 아프게 만드는 음식을 다시 먹게 되고, 결국 또 다시 목숨에 위협(?)을 느끼게 될 것이 아닌가. 이렇듯 혐오란 자신에게 해를 끼치는 대상에게 느끼는 가장 기본적인 정서다. 먹고 탈이 났던 음식이나, 나를 다치게 했던 물건이나 상황, 혹은 심리적으로 상처를 주는 사람에게 우리는 혐오를 느끼고 그것을 기피하게 된다. 이러한 감정을 느끼거나 배우지 못한 선조들이 멸종하는 동안, 혐오를 습득한 선조들은 살아남아 자손인 우리에게 생존의 비결을 남겼다.  ‘나’라는 정체성을 분명히 하는 방법 앞서 말했듯 혐오는 생존에 필수적인 감정이자, 본능이다. 그러나 인간이 사회적인 동물로 진화하면서 혐오는 그보다 더 많은 역할을 맡기 시작했다. 인류는 이제 단순한 생존을 넘어 자신이 누구인지 그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보통 ‘누구냐’는 질문에 ‘어디에 속한다’로 대답한다. 어디에 속하는지를 말하기 위해서는 ‘어디에는 속하지 않는지’ 인식해야 한다. 필자를 ‘40대 후반의 한국인 남자 심리학자’ 라고 정의한다면, 이 정체성 속에는 ①내가 45세 이전이 아닌 45세 이후 연령에 속하며 ②여자가 아닌 남자이고 ③다른 나라 사람이 아닌 한국 사람이자 ④사회학 또는 철학이 아닌 심리학을 업으로 삼는다는 뜻이다. 만약 어디에 ‘속하지 않는지’가 분명치 않으면 내가 어디에 ‘속해 있는지’도 흐릿해진다. 대한민국 땅에서 같은 한국인들끼리 발붙이고 있을 땐 내가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잘 느끼지 못하지만, 미국에 있으면 이를 뚜렷하게 인식하게 되는 점도 이와 마찬가지다. 즉, 내가 누구인지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내가 누구는 아닌지를 분명히 해야 한다. 둘 사이의 차이를 분명히 할수록 ‘나’라는 존재는 더욱 명확해진다. 여기서 차이를 분명히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바로 혐오다. 나와 다른 집단을 차별·배척·적대시하는 것. 인간에게 있어 혐오는 나와 남을 구분하고, 정체성을 분명히 하는 가장 강력한 방법이다.  위협을 느낄 때 더욱 커지는 혐오감 사회적 지위를 보장하는 방법으로도 혐오가 이용된다. 신분이 뚜렷이 구분되던 봉건사회에서는 당시 귀족이 평민이나 노비에 대해 혐오감을 거리낌 없이 드러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반대의 경우라면 처벌 대상이었다. 누군가를 대놓고 혐오할 수 있다는 건, 나와 상대가 다르다는 뜻일 뿐만 아니라 내가 상대보다 더 힘이 세거나 지위가 높음을 의미했던 것이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자존감이 낮고 자기 정체성이 뚜렷하지 않은 사람들일수록 혐오가 가장 매력적인 자기표현 수단이 되었다. 심리학자 무자퍼 셔리프(M. Sherif)의 실험을 살펴보자. 그는 미국 오클라호마에서 사는 청교도 집안의 12살짜리 백인 남자 아이 22명을 선정해, 이들을 독수리 부족과 방울뱀 부족으로 갈라놓았다. 그러자 고향·나이·인종·종교까지 같은 아이들이 단지 다른 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서로 혐오하며 다투기 시작했다. 여기서 더욱 흥미로운 사실은 두 집단이 갈등을 그치고 협력을 논할 때 나타났다. 화해를 극렬히 반대하는 아이들은 모두 자기 집단에서 그다지 인정받지 못하는 아이들이었다. 셔리프는 그 아이들의 심리를 이렇게 추론했다. ‘자신이 비록 소속 집단에서는 가장 낮은 지위이지만, 적어도 상대 집단보다는 우월하다’는 인식이 있다는 것. 그런데 화해를 하면 마지막 자존감마저 위협받게 되니 반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혐오를 올바로 사용하는 첫 번째 단계는 혐오의 원인을 파악하는 일이다. 혐오하는 대상이 있다면 내가 왜 혐오감을 느끼는지 생각해보자. 실질적으로 내게 어떠한 해를 끼치고 있나? 만약 아무런 해도 미치지 않는다면, 그 대상을 혐오하는 건 그저 감정을 소모하는 일일 뿐이다. 우리가 혐오감을 드러내기에 적절한 상황은 내 삶이 흔들리는, 내 존재가 위협 받는 경우여야 한다. 혹여 그동안 엉뚱한 대상을 혐오해온 것은 아닌지. 그렇다면 이제는 그 감정의 화살을 진정 혐오해야 할 대상으로 돌리는 것이 어떨까. + 장근영 심리학자 겸 칼럼니스트. 연세대학교 심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국책연구소인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에서 활동하며 대학에선 매체심리학·발달심리학 등을 강의하고 있다. 저서로는 『심리학 오디세이』, 『팝콘심리학』 등이 있다. ]]> Mon, 09 Jan 2017 14:27:41 +0000 7 <![CDATA[새해부터 달라지는 부동산 및 금융제도 ]]>        글 김태형 금융칼럼니스트새해부터 달라지는 부동산 및 금융제도 2017년은 붉은 닭의 해, 정유년(丁酉年)이다. 기대와 희망을 가득한 새해를 맞이하면 좋겠지만, 각종 사건사고들로 그 어느 때보다 무거운 마음이다. 특히 어두운 세계 전망으로 인해 역대 최저의 경제성장률이 예상되고 있어, 경제적으로 더욱 힘든 일 년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이에 조금이나마 현명하게 한 해를 나는 혜안을 갖기 위해 준비했다. 실생활에 유용한 정보를 제공하는 코너 ‘生生정보통’. 새해부터 달라지는 주요 부동산 및 금융제도를 소개한다. 1. 임대소득세 요건 강화 부동산 임대소득과 관련하여 바뀌는 것들이 몇 가지 있다. 좋은 점으로는 연 2천만 원 이하 주택임대소득에 대해 비과세 해주던 것이 2018년까지 연장될 예정이다. 영세 임대소득자의 경우 1~2채 정도로 주택임대사업을 운영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따라서 비과세 특례가 사라지고 나면 임대소득세 부담이 없었던 소형주택 다주택자는 부담이 커질 수 있다. 2016년까지 주택 수 산정에서 전용 85㎡ 이하, 기준시가 3억 원 이하인 소형주택은 주택 수에 포함되지 않았지만 올해부터는 폐지된다. 임대료 계산은 2주택 이하의 경우, 보증금을 제외한 월세소득만을 계산한다. 반면 부부합산 3주택 이상일 경우, 전세로 임차를 주었다 하더라도 간주임대료를 계산해 세금을 내야 한다. 전체 보증금 합계에서 3억 원을 제외한 금액 중 60%에 대해 1.8%(2016년 기준 정기예금이자율)를 계산한다. 즉 전세로 임대를 주는 경우 부담이 증가될 것으로 예상된다. 다만, 간주임대료 주택 산정 특례는 60㎡ 이하의 소형주택으로 축소된다. 이에 임대주택시장 역시 소형주택 위주로 양극화가 확대될 것으로 예상된다.   * 간주임대료: 부동산 소유자가 월정 임대료와는 별개로 전세금 또는 임대보증금을 받을 경우, 이에 일정한 이율을 곱하여 계산한 금액 2. 분양권 마이너스 프리미엄, 취득세 산정 시 반영 분양권 매입을 통한 취득세 부과 기준이 분양가격에 상관없이 실질지출금액을 기준으로 적용된다. 현재 분양가격에 프리미엄을 주고 재구입한 경우, 이를 합산한 금액으로 취득세를 산정한다. 하지만 분양가격 이하로 매입했을 경우, 이른바 마이너스 프리미엄의 경우에는 분양가를 기준으로 취득세를 산정해왔다. 때문에 형평성에 맞지 않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이에 앞으로는 분양권 매입가격이 분양가격보다 낮을 경우, 실제지출금액 기준으로 취득가액을 산정한다. 취득세율은 취득가액 금액대별로 차등 적용된다. 주택가격 6억 원 이하는 1.1%의 취득세를 납부하지만 6억 원 초과~9억 원 이하는 2.2%, 9억 원 초과는 3.3%로 높아져 프리미엄을 합산한 금액이 6억 원을 초과한 경우에는 취득세 부담이 커진다. 전용 85㎡ 초과 중대형 취득자는 농어촌특별세 0.2%까지 추가 부담해야 한다. * 프리미엄: 분양권 혹은 분양가격과 매도가격의 차액 3. 개인의 세금 부담 커진다 내년부터는 소득세 과표도 바뀐다. 먼저 소득세의 최고세율이 인상된다. 현행 소득세 최고세율 38%(과표 1억5000만 원 초과부터)에서 40%(과표 5억 원 초과부터)로 상향된다. 고소득자 또는 높은 양도차익에 따른 양도소득세의 세부담이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 또한 연금계좌의 세제혜택도 축소될 예정이다. 연 납입액의 100%에 대해 400만 원까지 적용되던 공제한도가 소득수준에 따라 줄어든다. 총 급여 1억2천만 원 또는 종합소득금액 1억 원 초과자의 경우 300만 원까지만 세액공제 혜택이 가능하도록 바뀐다. 해당된다면 연 12만 원 정도 세제혜택이 줄어드는 셈이다. 세제적격연금 관련 세제혜택은 박근혜 정부 출범 이후 이미 한 차례 소득공제에서 세액공제로 바뀌면서 혜택이 줄어든 바 있다. 이밖에도 저축성보험 비과세 납입한도가 축소 예정이라 비과세 금융상품들이 속속 자취를 감추고 있는 추세이며, 상속·증여세 신고세액에 대한 공제도 축소된다. 상속세는 3개월 이내, 증여세는 6개월 이내 자진신고하면 기존의 산출세액의 10% 공제에서 올해 7%로 축소된다. 4. 주택관련 제도 강화 지난 2014년 8월 1년간 한시적으로 규제를 풀었던 주택담보인정비율(LTV)·총부채상환비율(DTI)은 규제 완화 또한 7월 종료될 예정이다. 현재 한시적으로 규제를 풀어 기존 50~70%를 적용했던 LTV는 70%로, 50~60%인 DTI는 60%로 일괄 상향 조정되어 적용하고 있다. 그 외 대표적인 정책 모기지론인 ‘디딤돌대출’의 요건 또한 까다로워진다. 디딤돌대출은 부부합산 연소득 600만 원 이하(생애 최초 주택구입자는 7000만 원)인 무주택 가구주가 5억 원 이하 주택을 살 때 최대 2억 원까지 대출해주는 대표적인 정책 모기지론이다. 가장 크게 바뀌는 부분은 DTI 기준 축소. DTI란 연소득 대비 대출 원리금 상환액 비율로 대출한도의 기준이 된다. 즉, DTI 비율이 축소되면 소득대비 받을 수 있는 대출한도 역시 줄어드는 원리다. 주택도시보증공사(HUG)에 따르면 디딤돌대출 DTI 기준이 2017년부터 80%에서 60%로 축소된다. 이는 2014년 규제 완화로 올해 말까지 디딤돌대출에 대한 DTI 규제를 완화했던 것을 연장하지 않은 조치다. 이에 따라 대출자가 받을 수 있는 디딤돌대출 한도 역시 20%가량 줄어들 것으로 예상된다. 실수요층 서민들의 내 집 마련 부담이 가중될 것으로 전망되는 이유다. * 주택담보인정비율(Loan-To-Value ratio): 은행의 주택담보대출 취급 및 한도를 산정하는 기준의 하나. 주택가격에서 주택담보 대출금액을 어느 정도 허용하는지 나타내는 비율 * 총부채상환비율(Debt To Income ratio): 소득에서 금융부채 원리금 상환액이 차지하는 비율 + 김태형 어떻게 돈을 버느냐보다 ‘무엇을 위해 돈을 버느냐’를 고민하는 금융칼럼니스트 겸 CFP(국제공인재무설계사). 한국경제신문, 연합뉴스 등 주요경제지 및 포털 등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으며, 각종 금융사와 전문교육기관에서 활발한 강연 활동을 펴고 있다. ]]> Mon, 09 Jan 2017 14:28:51 +0000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