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이 된 소년에게 전하는

박물관의 인사

글. 김민회 KBS PD

KBS 역사스페셜 <박물관은 살아있다>를 제작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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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프로그램은 KBS 홈페이지 또는 웨이브(wavve)에서 다시보기가 가능합니다.




축적된 시간 속 경험의 변화

박물관에 관한 나의 가장 오래된 기억은 국립광주박물관이다. 초등학생 때 소풍으로 떠난 그날의 박물관은, 그러나 내게 그다지 인상 깊은 곳이 아니었던 것 같다. 선사인들이 음식을 담아 보관했다던 흙으로 만든 그릇보다는 어머니의 김밥이 담긴 플라스틱 도시락 통이 더 소중했기 때문이었을까.

물론 박물관의 잘못도, 그렇다고 어린아이의 잘못도 아니었을 것이다. 박물관은 박물관의 역할에 충실했고, 어린아이는 어린아이의 본능에 충실했을 거다. 그래서 그날 박물관의 풍경은 흐릿하고 대신 박물관으로 향하던 버스에서의 멀미, 친구들마다 다른 모양의 김밥, 파란 잔디밭 위에서의 점심 식사, 행렬의 시작과 끝을 지키던 선생님들의 목소리만 생생하게 남아 있다.

그리고 2021년, 나는 KBS 다큐멘터리 를 제작하면서 다시 박물관을 찾았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시작해 국립경주박물관, 국립부여박물관, 국립춘천박물관 그리고 국립광주박물관까지, 놀라웠다. 박물관이 이토록 흥미로운 이야기로 가득한 공간이었다는 사실이.

그동안 박물관이 많이 변한 걸까? 물론 소풍날의 박물관에는 감은사로 들어가는 VR 체험관도, 경천사지 십층석탑을 설명해주는 안내 로봇 큐아이도, 정조대왕의 행차를 웅장하게 보여주는 디지털 실감 영상관도 없었다. 하지만 그때에도 주먹도끼는, 고구려 고분벽화는, 고려청자는, 달항아리는, 책가도는 있었으니까 박물관은 변한 것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무엇이 변한 걸까?

국립광주박물관 잔디밭에서 김밥을 먹던 초등학생이 N년 차의 직장인이 되기까지, 그 시간에는 개인적이면서도 보편적인 경험들이 쌓였다. 그날 함께 소풍을 떠났던 친구들 역시 저마다 그러할 것이다. 그러니까 시간과 함께 쌓인 개인적인 경험들이 인류의 축적된 보편적인 경험과 만나 감응하는 것이 내가 박물관에서 찾은 변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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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천수만 가지 이야기 발굴의 보고寶庫

<UHD 역사스페셜-박물관은 살아있다>를 제작하면서 가장 고민했던 것은 프로그램의 제목이었다. <박물관‘이’ 살아있다> 혹은 <박물관‘은’ 살아있다>에서 선택해야 하는 제법 진지한 고민이었다. 그리고 내가 <박물관‘은’ 살아있다>로 결정한 것은 <박물관‘은’ 살아있다>가 <박물관‘이’ 살아있다>보다 조금 더 수용자의 역할을 요구하는 제목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박물관은 저절로 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수용자의 의지, 경험, 물음만큼 대응해서 살아난다고 할까. 물론 주변에서는 유명한 영화 제목을 따라 하지 않으려는 선택으로 받아들이고 있지만 말이다.

취재를 위해 박물관을 찾을 때마다 여러 생각이 들었다. ‘박물관의 유물마다 걸려 있는 안내문이 너무 작은 것은 아닐까? 박물관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어떤 유물을 선택해서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을까? 이름과 소재, 연대와 국적 표기만으로 유물을 알기에 충분한 걸까? 박물관에서 어떤 이야기를 어디까지 들려주었을 때 사람들은 더 알고 싶은 욕망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갈까? 사람들은 박물관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고 무엇을 얻어가야 할까?’

그래서 나는 를 통해 박물관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박물관을 찾는 사람들 사이의 공간을 넓혀주고 싶었다. “박물관의 시작은 왜 주먹도끼일까?”라는 물음에 대한 답을 40여 년 전 한 주한미군 병사의 우연하고도 위대한 발견에서 찾았고, 뒷면밖에 볼 수 없던 청동거울의 앞면에서 청동기인들의 신성한 기도를 들었다. 아름다운 고려청자에 숨은 이름 모를 뱃사람들의 비극적인 죽음, 그리고 굴곡진 삶의 모습이 그대로 담긴 달항아리의 이야기를 함께 비교하며 듣기도 했다. 그렇게 박물관에 놓인 작은 안내문의 한계를 넘어, 감히 공급자의 고민과 수용자의 적극성이 만나는 공간을 만들어주고 싶었다. 물론 그 작업이 성공했는지 실패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누군가 <박물관은 살아있다>를 보고 박물관에서 안내문에 숨은 이야기를 ‘발굴’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면 나는 그것으로 충분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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