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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을 읽어드립니다

미완의 실록, 더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다
『광해군일기』

글. 김진실 국립중앙박물관 고고역사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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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초본과 정초본이 함께 남아 전해지는 유일한 실록

실록은 승정원일기, 시정기(여러 관청의 기록), 사관의 사초 등을 종합해 초초본, 중초본을 만든 뒤 최종 편집본인 정초본을 만듭니다. 그 뒤에 초초본과 중초본은 ‘세초’라는 과정을 거쳐 내용을 지웁니다. 그래서 실록의 편찬 작업이 끝나면 세초연洗草宴을 벌여 축하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광해군일기』는 원래라면 세초로 씻겨 없어졌어야 할 중초본이 남아 전해집니다. 중초본은 삭제할 부분을 붉은색 먹으로 칠하거나 덧붙인 종이 등으로 편집점을 표시해둔 것이 특징입니다. 중초본과 정초본을 비교하면 어떤 내용이 산락되었는지를 알 수 있는 셈입니다. 실록의 편집 단계를 실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광해군일기』는 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그렇다면 중초본에서 어떤 내용을 지우고 추가해 정초본으로 만들었을까요? 한 가지 예를 들어볼까요? 인조는 광해군을 폐위시킨 명분을 대명의리 배신, 폐모살제로 꼽았습니다. 따라서 『광해군일기』의 편집 방향은 그런 명분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졌다고 유추해볼 수 있습니다. 1621년 후금과의 외교를 두고 “어찌 화친하고자 하는 것이겠느냐”라는 광해군의 발언을 삭제하기 위해 붉은 먹으로 칠해두었고, 이는 정초본에서 삭제되어 있습니다. 광해군을 일컬어 ‘폐주廢主’라고 하는 사평에는 그 비판의 날이 더욱 적나라하기도 합니다. 이는 인조대 편찬 작업에 참여한 사람이 첨입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광해군에 대해 “인륜을 저버린 혼군昏君”이라는 평가와 “전란을 수습하고 실리외교를 추구한 왕”이라는 상반된 평가가 뒤따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활자본이 아닌 등사본으로 남아 있는 유일한 실록

『광해군일기』는 1624년 편찬에 착수한 지 약 10년 만인 1633년에 완성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인조대 초반의 대내외적 부침 때문이었습니다. 임진왜란 이후 고질적인 재정 문제와 이괄의 난, 정묘호란 등을 거치면서 실록을 편찬할 인적, 물적 여력이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결국 10여 년에 걸쳐 정초본을 완성했지만 이를 활자로 찍어내지 못한 채 정초본 2부를 등사하고 중초본과 함께 나누어 봉안하기로 결정하면서 편찬 작업이 마무리되었습니다. 중초본은 따로 64책으로 꾸며 태백산 사고에 보관했고, 정초본 2부는 강화도 정족산 사고와 적상산 사고에 나누어 보관했습니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광해군일기』는 이 중 적상산 사고에 보관돼 있던 정초본 중 1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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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었던 인물이 생존해 있는 가운데 편찬된 유일한 실록

광해군은 폐위된 이후 약 18년을 더 살다 죽었습니다. 단종인 노산군이나 연산군이 폐위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죽음에 이른 것과는 대조적입니다. 폐위된 이후 광해군 삶에 대한 기록은 『인조실록』에 드문드문 남아 있습니다. 인조가 유배 생활을 하던 광해군에게 철마다 음식과 의복 등을 종종 보냈고, 강화도에서 제주도로 유배지를 옮겨간 것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광해군이 본인의 실록이 편찬된 사실을 알았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유배 생활 속 중앙 정계의 소식을 듣기란 어려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광해군은 폐위된 이후 왕비였던 부인 유씨, 폐세자가 된 아들 부부의 죽음을 겪고도 살아남았습니다. 어떠한 희망이 있었을지도 모르고, 그저 죽지도 살지도 못한 채 체념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광해군이 남긴 개인 기록이 없기 때문에 아쉬운 부분이 많습니다. 정묘호란, 병자호란의 소식을 전해 들은 광해군의 심정이 어떠했을지, 인조가 보내온 옷과 음식을 보고 어떤 반응을 보였을지 등 상상 속에 남겨야 할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다만 우리는 『광해군일기』를 통해 광해군의 면면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미완으로 남았지만, 우리에게 더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는 『광해군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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