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독립기념관 피드 http://sbook.allabout.co.kr/magazine/i815/feed/rss2 <![CDATA[정유년 신년사 ]]>         2017년 정유년 새해가 밝았습니다.새해에는 우리 대한민국의 앞길에 사랑과 평화가 더욱 깃들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리고 국민 여러분 모두가 새로운 꿈과 희망을 갖는 한 해가 되기를 기원합니다.올해는 독립기념관 개관 30년인 뜻깊은 해입니다. 1987년 온 국민의 성금으로 세워진 독립기념관의 사명은 전시·연구·교육을 통해 독립운동의 의미와 가치를 정립하고, 세상에 알리는 것입니다. 돌이켜 보면 지난 30년의 세월은 굳은 땅에 독립운동 정신의 뿌리를 내리는 성장 과정이었습니다. 출범 당시의 미숙함에서 벗어나 이제는 제자리를 잡아가고 있다고 하지만 아직도 채운 것보다는 채워야 할 것이 더 많다는 사실을, 저와 독립기념관 가족들은 가슴 깊이 새기고 있습니다.독립기념관은 개관 30년을 맞이하여 부족한 부분은 힘써 채우고, 새로운 도약을 이루겠다는 굳은 각오로 다음과 같은 사업을 추진하겠습니다.   첫째, 독립기념관의 7개의 상설전시관 중 제4전시관을 재개관하겠습니다. 2015년부터 시작된 7개 상설전시관의 제3차 전시교체 대주제는 ‘평화공감’입니다. 애국선열들이 전개한 한국의 독립운동은 단지 나라를 되찾기 위한 투쟁만이 아니라, 이 땅에서 궁극적으로 제국주의를 소멸시키기 위한 인도주의적 평화운동이었습니다. ‘평화 없는 자유 없고, 자유 없는 평화 없다’라는 신념은 독립운동가라면 누구나 지녔던 꿈이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제4전시관의 전시교체에서는 독립운동이 왜 평화운동이었는가, 독립운동이 인류 평화를 위해 무엇을 했는가, 독립운동이 미래의 평화를 위해 어떠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가 등이 주요 주제가 될 것입니다. 이번 전시교체는 독립운동이 평화운동으로 자리매김하고 또한 독립기념관이 명실공히 평화기념관으로 거듭나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둘째, 올해로 3년째인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편찬사업을 계획대로 추진해 나가겠습니다. 1994년부터 시작된 『한국독립운동사전』의 완결판인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은 1만5천여 명에 달하는 독립운동가들의 삶과 활동을 구체적으로 조명하고 독립운동의 역사를 집대성하는 방대한 작업입니다. 10만여 매의 원고가 30권의 책으로 발간될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은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년인 2019년부터 순차적으로 출간될 예정으로 독립운동의 진실을 밝히고 나아가 한국인의 자긍심을 드높이는 역사적 사업이 될 것입니다.     셋째, 한국독립운동사의 세계화를 위해 해외의 대학에서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강좌 개설을 추진하겠습니다. 독립기념관은 한국독립운동을 세계에 널리 알리기 위해 중국을 비롯해 러시아·일본·미국·유럽 등지에서 전시 및 학술교류를 진행해 왔습니다. 이제는 한걸음 더 나아가 프랑스·미국·러시아·일본·중국 등의 대학에서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강좌 개설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프랑스 파리7대학의 경우, 2017년 가을학기에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강좌를 개설하기로 했으며, 앞으로 대상 국가를 점차 늘려나갈 것입니다. 이와 함께 세계 각처에 산재한 국외 독립운동 사적지 보존 사업도 그 영역을 확대해 나갈 것입니다.     넷째, 다양한 교육프로그램을 통해 국민교육도장으로서 역할을 다하겠습니다. 초등학생부터 중등학생, 국군장병, 교사 등을 대상으로 ‘독립군체험학교’, ‘찾아가는 독립기념관’, ‘독도학교’, ‘교원연수’ 등 20여 개의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독립운동사교육 프로그램 및 교구재 보급 사업을 확대해 나라사랑정신 함양의 중심기관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겠습니다.     다섯째, 독립기념관의 상징인 ‘겨레의 집’ 리모델링사업을 올해 7월까지 완료하겠습니다. ‘겨레의 집’은 사무공간에서 관람객을 위한 체험?휴식 공간으로 바뀌어 독립기념관의 새로운 문화 환경을 만들어갈 것입니다.     여섯째, 독립기념관이 갖고 있는 자연환경을 더욱 편안하게 즐길 수 있도록 편의시설을 보강해 나가겠습니다. 백련못 및 단풍나무숲길, 야영장 그리고 순환보행로 곳곳에서 나무와 꽃과 조화를 이루는 시·어록비는 30년의 시간이 만든 아름다운 풍경입니다. 관람객의 소리에 귀 기울여 독립기념관을 아름다운 자연을 즐기면서 애국선열들의 나라사랑정신을 마음에 되새기는 휴식과 치유의 공간으로 가꾸어가겠습니다.독립기념관은 2017년 한 해도 변화의 시대에 발맞추면서 투철한 사명감과 투명한 윤리경영으로 대한민국 국민이 독립기념관에 부여한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국민 여러분의 깊은 관심과 따뜻한 성원을 부탁드립니다.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뜻하시는 일 모두 이루시기를 소망합니다. 윤주경 독립기념관장   ▲  윤주경 독립기념관장 ]]> Wed, 18 Jan 2017 18:44:40 +0000 0 <![CDATA[정유년 신년사 ]]>         2017년 정유년 새해가 밝았습니다.새해에는 우리 대한민국의 앞길에 사랑과 평화가 더욱 깃들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리고 국민 여러분 모두가 새로운 꿈과 희망을 갖는 한 해가 되기를 기원합니다.captionLorem Ipsum is simply dummy text of the printing and typesetting indus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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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고, 자유 없는 평화 없다’라는 신념은 독립운동가라면 누구나 지녔던 꿈이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제4전시관의 전시교체에서는 독립운동이 왜 평화운동이었는가, 독립운동이 인류 평화를 위해 무엇을 했는가, 독립운동이 미래의 평화를 위해 어떠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가 등이 주요 주제가 될 것입니다. 이번 전시교체는 독립운동이 평화운동으로 자리매김하고 또한 독립기념관이 명실공히 평화기념관으로 거듭나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둘째, 올해로 3년째인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편찬사업을 계획대로 추진해 나가겠습니다.  1994년부터 시작된 『한국독립운동사전』의 완결판인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은 1만5천여 명에 달하는 독립운동가들의 삶과 활동을 구체적으로 조명하고 독립운동의 역사를 집대성하는 방대한 작업입니다. 10만여 매의 원고가 30권의 책으로 발간될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은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년인 2019년부터 순차적으로 출간될 예정으로 독립운동의 진실을 밝히고 나아가 한국인의 자긍심을 드높이는 역사적 사업이 될 것입니다.     셋째, 한국독립운동사의 세계화를 위해 해외의 대학에서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강좌 개설을 추진하겠습니다. 독립기념관은 한국독립운동을 세계에 널리 알리기 위해 중국을 비롯해 러시아·일본·미국·유럽 등지에서 전시 및 학술교류를 진행해 왔습니다. 이제는 한걸음 더 나아가 프랑스·미국·러시아·일본·중국 등의 대학에서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강좌 개설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프랑스 파리7대학의 경우, 2017년 가을학기에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강좌를 개설하기로 했으며, 앞으로 대상 국가를 점차 늘려나갈 것입니다. 이와 함께 세계 각처에 산재한 국외 독립운동 사적지 보존 사업도 그 영역을 확대해 나갈 것입니다.     넷째, 다양한 교육프로그램을 통해 국민교육도장으로서 역할을 다하겠습니다. 초등학생부터 중등학생, 국군장병, 교사 등을 대상으로 ‘독립군체험학교’, ‘찾아가는 독립기념관’, ‘독도학교’, ‘교원연수’ 등 20여 개의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독립운동사교육 프로그램 및 교구재 보급 사업을 확대해 나라사랑정신 함양의 중심기관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겠습니다.     다섯째, 독립기념관의 상징인 ‘겨레의 집’ 리모델링사업을 올해 7월까지 완료하겠습니다. ‘겨레의 집’은 사무공간에서 관람객을 위한 체험?휴식 공간으로 바뀌어 독립기념관의 새로운 문화 환경을 만들어갈 것입니다.     여섯째, 독립기념관이 갖고 있는 자연환경을 더욱 편안하게 즐길 수 있도록 편의시설을 보강해 나가겠습니다. 백련못 및 단풍나무숲길, 야영장 그리고 순환보행로 곳곳에서 나무와 꽃과 조화를 이루는 시·어록비는 30년의 시간이 만든 아름다운 풍경입니다. 관람객의 소리에 귀 기울여 독립기념관을 아름다운 자연을 즐기면서 애국선열들의 나라사랑정신을 마음에 되새기는 휴식과 치유의 공간으로 가꾸어가겠습니다.독립기념관은 2017년 한 해도 변화의 시대에 발맞추면서 투철한 사명감과 투명한 윤리경영으로 대한민국 국민이 독립기념관에 부여한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국민 여러분의 깊은 관심과 따뜻한 성원을 부탁드립니다.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뜻하시는 일 모두 이루시기를 소망합니다. alt   ▲  윤주경 독립기념관장 ]]> Tue, 17 Jan 2017 16:01:19 +0000 1 <![CDATA[새해부터 달라지는 부동산 및 금융제도 ]]> 글 김태형 금융칼럼니스트새해부터 달라지는 부동산 및 금융제도 2017년은 붉은 닭의 해, 정유년(丁酉年)이다. 기대와 희망을 가득한 새해를 맞이하면 좋겠지만,  각종 사건사고들로 그 어느 때보다 무거운 마음이다. 특히 어두운 세계 전망으로 인해 역대 최저의 경제성장률이 예상되고 있어, 경제적으로 더욱 힘든 일 년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이에 조금이나마 현명하게 한 해를 나는 혜안을 갖기 위해 준비했다.  실생활에 유용한 정보를 제공하는 코너 ‘生生정보통’. 새해부터 달라지는 주요 부동산 및 금융제도를 소개한다.                    1. 임대소득세 요건 강화부동산 임대소득과 관련하여 바뀌는 것들이 몇 가지 있다. 좋은 점으로는 연 2천만 원 이하 주택임대소득에 대해 비과세 해주던 것이 2018년까지 연장될 예정이다. 영세 임대소득자의 경우 1~2채 정도로 주택임대사업을 운영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따라서 비과세 특례가 사라지고 나면 임대소득세 부담이 없었던 소형주택 다주택자는 부담이 커질 수 있다.2016년까지 주택 수 산정에서 전용 85㎡ 이하, 기준시가 3억 원 이하인 소형주택은 주택 수에 포함되지 않았지만 올해부터는 폐지된다. 임대료 계산은 2주택 이하의 경우, 보증금을 제외한 월세소득만을 계산한다. 반면 부부합산 3주택 이상일 경우, 전세로 임차를 주었다 하더라도 ¹간주임대료를 계산해 세금을 내야 한다. 전체 보증금 합계에서 3억 원을 제외한 금액 중 60%에 대해 1.8%(2016년 기준 정기예금이자율)를 계산한다. 즉 전세로 임대를 주는 경우 부담이 증가될 것으로 예상된다. 다만, 간주임대료 주택 산정 특례는 60㎡ 이하의 소형주택으로 축소된다. 이에 임대주택시장 역시 소형주택 위주로 양극화가 확대될 것으로 예상된다. ¹ 간주임대료: 부동산 소유자가 월정 임대료와는 별개로 전세금 또는 임대보증금을 받을 경우, 이에 일정한 이율을 곱하여 계산한 금액 2. 분양권 마이너스 프리미엄, 취득세 산정 시 반영분양권 매입을 통한 취득세 부과 기준이 분양가격에 상관없이 실질지출금액을 기준으로 적용된다. 현재 분양가격에 ²프리미엄을 주고 재구입한 경우, 이를 합산한 금액으로 취득세를 산정한다. 하지만 분양가격 이하로 매입했을 경우, 이른바 마이너스 프리미엄의 경우에는 분양가를 기준으로 취득세를 산정해왔다. 때문에 형평성에 맞지 않다는 지적을 받아왔다.이에 앞으로는 분양권 매입가격이 분양가격보다 낮을 경우, 실제지출금액 기준으로 취득가액을 산정한다. 취득세율은 취득가액 금액대별로 차등 적용된다. 주택가격 6억 원 이하는 1.1%의 취득세를 납부하지만 6억 원 초과~9억 원 이하는 2.2%, 9억 원 초과는 3.3%로 높아져 프리미엄을 합산한 금액이 6억 원을 초과한 경우에는 취득세 부담이 커진다. 전용 85㎡ 초과 중대형 취득자는 농어촌특별세 0.2%까지 추가 부담해야 한다.² 프리미엄: 분양권 혹은 분양가격과 매도가격의 차액 3. 개인의 세금 부담 커진다내년부터는 소득세 과표도 바뀐다. 먼저 소득세의 최고세율이 인상된다. 현행 소득세 최고세율 38%(과표 1억5000만 원 초과부터)에서 40%(과표 5억 원 초과부터)로 상향된다. 고소득자 또는 높은 양도차익에 따른 양도소득세의 세부담이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또한 연금계좌의 세제혜택도 축소될 예정이다. 연 납입액의 100%에 대해 400만 원까지 적용되던 공제한도가 소득수준에 따라 줄어든다. 총 급여 1억2천만 원 또는 종합소득금액 1억 원 초과자의 경우 300만 원까지만 세액공제 혜택이 가능하도록 바뀐다. 해당된다면 연 12만 원 정도 세제혜택이 줄어드는 셈이다. 세제적격연금 관련 세제혜택은 박근혜 정부 출범 이후 이미 한 차례 소득공제에서 세액공제로 바뀌면서 혜택이 줄어든 바 있다.이밖에도 저축성보험 비과세 납입한도가 축소 예정이라 비과세 금융상품들이 속속 자취를 감추고 있는 추세이며, 상속·증여세 신고세액에 대한 공제도 축소된다. 상속세는 3개월 이내, 증여세는 6개월 이내 자진신고하면 기존의 산출세액의 10% 공제에서 올해 7%로 축소된다. 4. 주택관련 제도 강화지난 2014년 8월 1년간 한시적으로 규제를 풀었던 ³주택담보인정비율(LTV)·⁴총부채상환비율(DTI)은 규제 완화 또한 7월 종료될 예정이다. 현재 한시적으로 규제를 풀어 기존 50~70%를 적용했던 LTV는 70%로, 50~60%인 DTI는 60%로 일괄 상향 조정되어 적용하고 있다.그 외 대표적인 정책 모기지론인 ‘디딤돌대출’의 요건 또한 까다로워진다. 디딤돌대출은 부부합산 연소득 600만 원 이하(생애 최초 주택구입자는 7000만 원)인 무주택 가구주가 5억 원 이하 주택을 살 때 최대 2억 원까지 대출해주는 대표적인 정책 모기지론이다. 가장 크게 바뀌는 부분은 DTI 기준 축소. DTI란 연소득 대비 대출 원리금 상환액 비율로 대출한도의 기준이 된다. 즉, DTI 비율이 축소되면 소득대비 받을 수 있는 대출한도 역시 줄어드는 원리다. 주택도시보증공사(HUG)에 따르면 디딤돌대출 DTI 기준이 2017년부터 80%에서 60%로 축소된다. 이는 2014년 규제 완화로 올해 말까지 디딤돌대출에 대한 DTI 규제를 완화했던 것을 연장하지 않은 조치다. 이에 따라 대출자가 받을 수 있는 디딤돌대출 한도 역시 20%가량 줄어들 것으로 예상된다. 실수요층 서민들의 내 집 마련 부담이 가중될 것으로 전망되는 이유다.³ 주택담보인정비율(Loan-To-Value ratio): 은행의 주택담보대출 취급 및 한도를 산정하는 기준의 하나. 주택가격에서 주택담보 대출금액을 어느 정도 허용하는지 나타내는 비율⁴ 총부채상환비율(Debt To Income ratio): 소득에서 금융부채 원리금 상환액이 차지하는 비율 김태형어떻게 돈을 버느냐보다 ‘무엇을 위해 돈을 버느냐’를 고민하는 금융칼럼니스트 겸 CFP(국제공인재무설계사). 한국경제신문, 연합뉴스 등 주요경제지 및 포털 등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으며, 각종 금융사와 전문교육기관에서 활발한 강연 활동을 펴고 있다. ]]> Tue, 17 Jan 2017 15:26:51 +0000 1 <![CDATA[혐오 사용법 ]]> 글 장근영 심리학자 혐오 사용법 혐오는 기쁨·슬픔·분노·두려움·놀라움과 함께 인간의 6대 기본감정에 속한다. 지난해 동안 SNS를 뜨겁게 달군 감정이 있다면 바로 ‘혐오’가 아닐까. 싫어한다는 말을 ‘극혐’이라고 표현하는가 하면, 싫어하는 유형 혹은 단체의 사람을 벌레라고 가리켜 ‘~충’이라고 일컫는 게 일종의 유행처럼 퍼졌다. ‘여혐(여성혐오)’ 논란이 일었고, 그에 맞서 ‘남혐(남성혐오)’도 떠올랐다. 끊임없이 새로운 혐오의 대상을 찾아 격렬하게 미워해온 2016년. 새해에는 이런 ‘혐오’의 감정을 좀 더 건강하게 사용하면 어떨까. 가장 빠르게 학습하는 생존본능 혐오가 우리의 본능적 감정이라는 건, 이 감정이 인류의 생존에 필요불가결한 역할을 해왔음을 의미한다. 누구나 한번쯤 어떤 음식을 먹고 체하거나 배탈이 난 경험이 있으리라. 한번 크게 탈이 나고 나면, 다음엔 그때 먹었던 음식을 생각하기만 해도 역겨워진다. 심리학에서는 이것을 ‘미각혐오 학습’이라 부른다. 사람을 포함한 모든 동물이 이렇듯 단 한 번 만에 무언가를 학습하는 경우는 혐오라는 감정을 느낄 때를 제외하고는 거의 없다. 혐오가 빨리 학습되는 이유는 간단하다. 기억하지 않으면 내 몸을 아프게 만드는 음식을 다시 먹게 되고, 결국 또 다시 목숨에 위협(?)을 느끼게 될 것이 아닌가. 이렇듯 혐오란 자신에게 해를 끼치는 대상에게 느끼는 가장 기본적인 정서다. 먹고 탈이 났던 음식이나, 나를 다치게 했던 물건이나 상황, 혹은 심리적으로 상처를 주는 사람에게 우리는 혐오를 느끼고 그것을 기피하게 된다. 이러한 감정을 느끼거나 배우지 못한 선조들이 멸종하는 동안, 혐오를 습득한 선조들은 살아남아 자손인 우리에게 생존의 비결을 남겼다.  ‘나’라는 정체성을 분명히 하는 방법 앞서 말했듯 혐오는 생존에 필수적인 감정이자, 본능이다. 그러나 인간이 사회적인 동물로 진화하면서 혐오는 그보다 더 많은 역할을 맡기 시작했다. 인류는 이제 단순한 생존을 넘어 자신이 누구인지 그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보통 ‘누구냐’는 질문에 ‘어디에 속한다’로 대답한다. 어디에 속하는지를 말하기 위해서는 ‘어디에는 속하지 않는지’ 인식해야 한다. 필자를 ‘40대 후반의 한국인 남자 심리학자’ 라고 정의한다면, 이 정체성 속에는 ①내가 45세 이전이 아닌 45세 이후 연령에 속하며 ②여자가 아닌 남자이고 ③다른 나라 사람이 아닌 한국 사람이자 ④사회학 또는 철학이 아닌 심리학을 업으로 삼는다는 뜻이다. 만약 어디에 ‘속하지 않는지’가 분명치 않으면 내가 어디에 ‘속해 있는지’도 흐릿해진다. 대한민국 땅에서 같은 한국인들끼리 발붙이고 있을 땐 내가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잘 느끼지 못하지만, 미국에 있으면 이를 뚜렷하게 인식하게 되는 점도 이와 마찬가지다. 즉, 내가 누구인지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내가 누구는 아닌지를 분명히 해야 한다. 둘 사이의 차이를 분명히 할수록 ‘나’라는 존재는 더욱 명확해진다. 여기서 차이를 분명히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바로 혐오다. 나와 다른 집단을 차별·배척·적대시하는 것. 인간에게 있어 혐오는 나와 남을 구분하고, 정체성을 분명히 하는 가장 강력한 방법이다.  위협을 느낄 때 더욱 커지는 혐오감 사회적 지위를 보장하는 방법으로도 혐오가 이용된다. 신분이 뚜렷이 구분되던 봉건사회에서는 당시 귀족이 평민이나 노비에 대해 혐오감을 거리낌 없이 드러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반대의 경우라면 처벌 대상이었다. 누군가를 대놓고 혐오할 수 있다는 건, 나와 상대가 다르다는 뜻일 뿐만 아니라 내가 상대보다 더 힘이 세거나 지위가 높음을 의미했던 것이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자존감이 낮고 자기 정체성이 뚜렷하지 않은 사람들일수록 혐오가 가장 매력적인 자기표현 수단이 되었다. 심리학자 무자퍼 셔리프(M. Sherif)의 실험을 살펴보자. 그는 미국 오클라호마에서 사는 청교도 집안의 12살짜리 백인 남자 아이 22명을 선정해, 이들을 독수리 부족과 방울뱀 부족으로 갈라놓았다. 그러자 고향·나이·인종·종교까지 같은 아이들이 단지 다른 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서로 혐오하며 다투기 시작했다. 여기서 더욱 흥미로운 사실은 두 집단이 갈등을 그치고 협력을 논할 때 나타났다. 화해를 극렬히 반대하는 아이들은 모두 자기 집단에서 그다지 인정받지 못하는 아이들이었다. 셔리프는 그 아이들의 심리를 이렇게 추론했다. ‘자신이 비록 소속 집단에서는 가장 낮은 지위이지만, 적어도 상대 집단보다는 우월하다’는 인식이 있다는 것. 그런데 화해를 하면 마지막 자존감마저 위협받게 되니 반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혐오를 올바로 사용하는 첫 번째 단계는 혐오의 원인을 파악하는 일이다. 혐오하는 대상이 있다면 내가 왜 혐오감을 느끼는지 생각해보자. 실질적으로 내게 어떠한 해를 끼치고 있나? 만약 아무런 해도 미치지 않는다면, 그 대상을 혐오하는 건 그저 감정을 소모하는 일일 뿐이다. 우리가 혐오감을 드러내기에 적절한 상황은 내 삶이 흔들리는, 내 존재가 위협 받는 경우여야 한다. 혹여 그동안 엉뚱한 대상을 혐오해온 것은 아닌지. 그렇다면 이제는 그 감정의 화살을 진정 혐오해야 할 대상으로 돌리는 것이 어떨까. 장근영 심리학자 겸 칼럼니스트. 연세대학교 심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국책연구소인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에서 활동하며 대학에선 매체심리학·발달심리학 등을 강의하고 있다. 저서로는 『심리학 오디세이』, 『팝콘심리학』 등이 있다. ]]> Tue, 17 Jan 2017 15:28:18 +0000 1 <![CDATA[볼거리, 배울거리 다채로운 겨울을 만나다 ]]> 글·사진 김초록 여행칼럼니스트   볼거리, 배울거리 다채로운 겨울을 만나다 전라북도 고창   정유년(丁酉年) 새해가 밝았다. 새 마음으로 힘차게 시작하는 정초, 몸과 마음에 신선한 기운을 불어넣기 위해 서해바다를 낀 전라북도 고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불어오는 겨울바람을 온몸으로 맞고 있는 대지에는 온통 흰 눈이 쌓였다. 마치 동화 속 한 장면 같은, 비산비야(非山非野)의 색다른 풍경을 두루 감상하며 마침내 다다른 곳은 ‘고창읍성(모양성, 사적 제145호)’이다. alt alt 겨울이 내린 고창읍성 둘러보기 눈 내린 고창읍성은 고즈넉했다. 발자국을 남기며 가만가만 둘러보기 시작했다. 조선 초기에 축조된 이곳은 우리나라에서 원형을 가장 잘 간직한 성으로 꼽힌다. 성 둘레에 튼튼하게 쌓아올린 석재는 대부분 자연석이다. 동·서·북에 3개의 문을 두고 적의 접근을 차단하기 위해 성벽의 일부를 네모지게 또는 반달꼴로 쌓은 것이 특징이다. 성문 앞에는 옹성(甕城)을 둘러쌓아 적으로부터 성문을 보호할 수 있도록 했다. 또한 주민들이 유사시에 성안으로 들어와 함께 싸우며 살 수 있도록 4개의 우물과 2개의 연못을 만들어 놓았다. 축성 당시 동헌과 객사 등 22동의 관아 건물이 있었으나, 화재로 대부분 소실되고 일부만 남아 있다. 현재 남아 있는 14동의 성곽 건물들은 1976년부터 복원·정비한 것들이다. 높이가 6미터에 달하는 성둑에 올라서면 고창읍내와 넓은 평야가 한눈에 들어온다. 고창읍성은 성곽 밖, 성벽 위, 성안 솔숲길 등을 선택하며 답사를 돌 수 있다. 특히 이곳에는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성밟기놀이가 있는데, ‘머리에 돌을 이고 성을 한 바퀴 돌면 다릿병이 낫고, 두 바퀴 돌면 무병장수하고, 세 바퀴 돌면 극락에 간다’는 이야기가 전설처럼 내려온다. 인적 드문 숲길을 거닐면 호젓하고 아름다움을 즐길 수 있는가 하면, 성곽을 따라 걸으면 시원스럽게 펼쳐진 읍내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고창읍성: 전라북도 고창군 고창읍 모양성로1 / 063-560-2710 alt 만세 함성과 판소리 울려 퍼지던 곳 고창읍성은 곳곳에 생각지 못한 역사를 품고 있다. 1919년 3월 21일 김승옥·오동균·김창규 등의 주도하에 고창청년회원, 고창보통학교 학생 2백여 명이 이곳 읍성 북치광장에 모여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3·1독립 만세 터’를 알리는 비석 앞에 서서 그날의 역사적 순간을 상상해 보았다. 하늘과 땅을 울리던 함성이 저 너머에서 메아리처럼 들려오는 듯해 눈을 떠보니, 바람소리만이 귓전을 스치고 있을 뿐이었다. 다른 한편에는 이 고장이 낳은 판소리의 대가 신재효의 고택이 자리하고 있다. 신재효는 이곳에서 춘향가·심청가·박타령·가루지기타령·토끼타령·적벽가 등 여섯 마당의 가사를 정리하고 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오늘날 고택 옆에는 한국의 판소리를 이해하고 체험할 수 있는 판소리박물관이 신재효의 정신을 이어가고 있다. alt 조상들의 지혜가 엿보이는 옛 무덤 고창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고인돌의 고장이기도 하다. 고인돌은 수 천 년 전의 공동묘지다. 몇 개의 받침돌 위에 한 개의 넓고 커다란 덮개돌을 얹어 놓은 선사시대의 무덤양식이다. 2천여 개에 달하는 고인돌은 고창을 세계 도시로 각인시켰다. 고인돌박물관에서는 선사시대의 생활상과 고인돌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일목요연하게 살펴볼 수 있다. 박물관에서 가까운 아산면 상갑리와 고창읍 매산리에는 고창군 일대에 흩어져 있는 고인돌 가운데 500여 기의 고인돌이 밀집해 있다. 고창 고인돌은 크기와 형태에 따라 북방식(탁자식)·남방식(바둑판식)·주형지석·위석식·지상석곽식 등으로 나뉜다. 특히 지상석곽식은 고창에서만 볼 수 있는 고인돌로 여러 장의 판석으로 무덤방을 만들었다. 많고 많은 고인돌 가운데 고창읍 도산리의 한 마을 뒤편에 서 있는 북방식 고인돌 한 기와 동양에서 가장 크다는 운곡 지석묘 한 기가 눈길을 끈다. 교과서에도 나오는 도산리 고인돌은 넓은 판석 2개를 세로로 세우고 그 위에 상석을 얹은 형태이다. 수천 년 역사를 침묵으로 보여주고 있다. 고인돌박물관에서 4km 거리에 있는 운곡 지석묘는 높이 5m, 둘레 16m, 무게는 무려 300여 톤에 달한다. 어떻게 만들어 옮겨왔는지 현대과학으로는 도저히 풀 수 없는 수수께끼다. 고창고인돌박물관: 전라북도 고창군 고창읍 고인돌공원길 74 / 063-560-8666 alt 고창이 배출한 인물 고창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미당(未堂) 서정주 시인이 있다. 서정주가 나고 자란 고향마을(질마재) 폐교 터엔 미당시문학관이 들어서 있다. 이곳엔 그가 남기고 간 시와 유품, 생전의 모습 등이 전시돼 있다. 서정주는 산문시 『질마재 신화』에서 이곳 선운리를 자세하게 써 놓았다. 총 45편으로 구성된 대표작이다. 이 시집은 우리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버린 한국의 전통적인 아름다움을 섬세하게 표현하고 있거니와 시구 곳곳에서 보이는 방언과 구어는 서정주 자신의 내밀한 경험과 상상력에서 나온 것이다. 서정주 생가에서 3km 남짓 떨어진 고창군 봉암리에는 대한민국 2대 부통령을 지냈으며 동아일보사와 고려대학교를 설립한 인촌(仁村) 김성수 생가가 있다. 남북으로 길게 이어진 대지 안에 낮은 담을 두르고 큰 집과 작은 집이 나란히 배치돼 있다. 집에 딸린 안채·사랑채·곳간·행랑채 등 여러 채의 건물은 규모가 어떤지를 보여준다. 친일 행위로 논란이 되기도 했던 김성수는 일제강점기 시절 민족개량주의를 주장했는데 오늘날 매우 의미심장한 말로 들린다. “식민통치에서 벗어나려면 조선인이 스스로 자각, 깨우쳐서 실력을 양성해야 한다. 기술을 배워서 익히고, 식품과 생산품을 자체 조달할 수 있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경제력을 키워야 한다.” 이밖에도 항일독립운동가 근촌(芹村) 백관수와 조선 영·정조 때의 실학자 이재(?齋) 황윤석도 고창이 배출한 걸출한 인물이다. 성내면 조동리와 덕산리에 있는 두 사람의 고택은 아직도 옛 시절을 그리워하는 뜻있는 분들의 발걸음이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황윤석은 문학·경제·종교·천문·지리·풍수·의학·언어 등에 능통했던 학자로서, 『이재난고』·『자지록』·『산뢰잡고』 등 300여 권에 이르는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 미당시문학관: 전라북도 고창군 부안면 질마재로 2-8 / 063-560-8058 alt 몸과 마음으로 보고 느끼다 ‘호남의 내금강’으로 불리는 선운산과 그 아래 포근히 안긴 선운사는 고창의 명소다. 변산과 곰소만을 사이에 두고 치솟은 선운산은 천왕봉·여래봉·인경봉 등 크고 작은 봉우리가 띠를 두르듯 이어져 있고 산자락 깊숙이 진흥굴과 도솔암 등 명소들이 박혀 있어 언제 찾아도 그윽한 맛을 풍긴다. 선운산은 도솔산이라 불리기도 한다. 불가의 도솔천에서 나온 말로, ‘미륵보살이 머문다’는 뜻이다. 선운(禪雲)이란 이름도 고찰 선운사에서 따온 것이다. 이번에는 내륙을 벗어나 바다로 가본다. 상하면 자룡리에 펼쳐진 구시포 해변. 물이 밀려 내려간 모래밭은 마치 사막 같다. 북쪽 방파제 뒤로 나 있는 너른 모래밭은 명사십리로 불린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아득하다. 바람이라도 불면 모래가 파도처럼 몰아친다. 구시포에서 명사십리 옆길을 따라 해리면 쪽으로 향했다. 궁산저수지가 보이는 삼거리에서 동호해변으로 우회전해 계속 가면 오른쪽에 해리염전이 보인다. 바둑판처럼 나누어진 염전의 허름한 소금창고들은 시간의 흐름마저 되돌린 듯 쓸쓸한 풍경이다. 여기서 해안도로를 따라 북쪽으로 올라가면 갯벌마을(서전마을)이 나온다. 물이 빠지면 1,200ha의 갯벌이 펼쳐지는 곳이다. 여느 갯벌과는 조금 다른데, 펄이 단단해 한번 발이 빠지면 좀처럼 잘 빠지지 않는다. 드넓은 이 갯벌에서는 연간 4,000여 톤의 바지락을 거둔어, 전국 최대 수확량을 자랑한다. 선운사: 전라북도 고창군 아산면 선운사로 250 / 063-561-1422 겨울의 고창은 볼거리, 배울거리가 다채롭다. 발걸음이 머무는 곳마다 나긋나긋 이야기를 들려주는 곳, 내려앉은 눈이 다 녹아버리기 전에 올 겨울은 전북 고창을 방문해보는 건 어떨까.  김초록 여행칼럼니스트 겸 수필가. 현재 『월간 비타민』, 『건설경제신문』, 『서울우유』, 『냉동공조신문』에 객원기자로 활동 중이다. 여행 저서로는 『여름 이야기』, 『7가지 테마가 있는 여행』 등이 있다. ]]> Tue, 17 Jan 2017 15:31:33 +0000 1 <![CDATA[독립기념관과 역사 ]]> 빛을 되찾은 1945년, 그리고 약 40여 년 뒤인 1987년 우리 민족의 국난극복사와 국가발전사를 연구하여 민족문화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올바른 국가관을 정립하기 위해 독립기념관이 건립되었다. 이후 또 시간이 흐른 지금, 독립기념관은 여전히 자리를 지키며 처음의 다짐을 이어가고 있다. 개관 30년, 독립기념관의 발자취를 한눈에 담았다. alt ]]> Tue, 17 Jan 2017 15:58:26 +0000 1 <![CDATA[조선의 마지막 황녀, 그녀의 진짜 모습 ]]> 글 편집실   조선의 마지막 황녀, 그녀의 진짜 모습 영화 <덕혜옹주>   최근 영화·드라마·소설 등 다양한 대중문화 영역에서 역사 콘텐츠가 활발하게 제작되고 있다. 이는 많은 사람들에게 역사인식을 환기하고, 역사는 지루하고 어렵다는 선입견을 바꾸는 계기로 작용하고 있다. 그러나 역사물에 대한 관심이 커져감과 동시에 ‘역사왜곡’ 문제도 잇따르고 있다. 작품 속 표현들을 있는 그대로의 역사적 사실로 여길 수 있다는 것. ‘진실 혹은 거짓’에서는 대중매체에서 다뤄지는 독립운동의 모습이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허구인지 짚어봄으로써 올바른 역사인식을 돕고자 한다. 그 첫 번째 선정작은 영화 <덕혜옹주>다. alt (왼쪽부터) 영화 덕혜옹주 속 덕혜옹주와 고종 / 실제 덕혜옹주의 모습 Q. ‘덕혜’라는 인물 설정은 어디까지가 사실일까? 덕혜는 고종이 늦은 나이에 얻은 고명딸이자, 조선의 마지막 옹주다. <덕혜옹주>에서처럼 어린 덕혜는 고종의 예쁨을 받으며 자랐다. 강제 퇴위 후 실의에 잠긴 고종에게 덕혜는 큰 위안이 되어 주었다. 고종이 승하한 뒤 덕혜옹주는 1925년 3월 24일 일제의 압박에 홀로 도쿄 유학을 떠나게 된다. 14세 나이에 낯선 이국땅에 발 디딘 그녀는 이후 어머니마저 여의고, 쓰시마 백작 소 다케유키와 혼인하여 딸 정혜를 낳았다. 결혼할 무렵에는 조현병(정신분열증)이 점차 심해졌다. 마침내 광복한 고국에 돌아온 것은 1962년. 51세 나이에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채였다. 일찍이 부모를 잃고 타국에서 홀로 지내온 세월, 그리고 정신병까지 그 삶에는 숱한 곡절이 있었다. alt Q. 조선인들을 위해 학교를 세운 옹주? 영화 속 덕혜옹주는 일본에서 지내는 동안 늘 조국을 그리워한다. 조선 어린이들을 위해 한글학교를 세우고, 보육원에서 직접 노래를 만드는 등 백성들을 향한 애틋한 마음이 잘 드러난다. 그러나 덕혜옹주가 세웠다는 한글학교는 사실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직접 작곡했다는 동요는 실제로 ‘쥐’라는 제목으로 당시 유행했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옹주가 쓴 시에 일본 작곡가들이 곡을 붙인 이 동요는 우리말이 아닌 일본어로 불렸으며, 정치적인 목적으로 보급된 것이었다. alt Q. 조선황실, 항일운동 위해 망명을 시도하다? <덕혜옹주>의 역사왜곡을 지적하는 사람들은 특히 조선황실의 망명 시도가 가장 심하다고 꼬집는다. 영화에서 덕혜옹주와 영친왕은 김장한과 독립운동가들의 도움으로 망명을 시도하다 실패하고 만다. 실제로는 어땠을까? 1927년 영친왕 내외가 세계 유람에 나섰을 때 독립운동가들은 이들이 상하이에 들른다는 소식을 입수, 영친왕을 납치해 독립운동에 합류시킬 계획을 세운다. 영화 속 장면은 이러한 역사적 기록을 변형해 만든 것이다. 실제로도 영친왕 납치 계획은 밀정의 밀고로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나 영화에서 보여진 것과는 달리 영친왕은 망명 의지는 고사하고 일제의 비호를 받으며 유럽 각국을 관광하며 호사스러운 여행을 이어갔다. 민중의 고통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안위만을 생각했던 것이다. alt (왼쪽부터) 영화 덕혜옹주 속 조선황실 / 실제 조선황실의 모습 Q. 황족에 대한 존경심 vs 배신감 황족들이 독립운동에 가담한 경우는 거의 없었다. 영화 속 덕혜옹주는 조선인들에게 존경 받는 인물로 그려졌지만, 실제로는 망국에 책임이 있는 조선황실이 일본에서 호의호식하는 것에 대한 반감이 높았다. 특히 영친왕은 일제에 순응해 안온한 삶을 영위한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그가 헤이그의 한 호텔에 묵고 있을 때, 독립운동 진영으로부터 한 편지를 받았다고 한다. ‘전하를 일제에서 탈환해 상하이나 노령으로 모시고 갈 계획도 세웠으나, 전하의 마음이 약하셔서 일본 군인을 앞세우고 다니며 구라파 여행만 즐기고 계시니 어찌 한심하지 않으리까!’ 그러나 영친왕은 일제가 패망한 뒤에도 당장의 생활에 급급할 뿐이었다. 광복이 오자, 일본 내각에 “아무쪼록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대우해줄 수는 없느냐”고 애걸했다는 증언도 있다. ]]> Tue, 17 Jan 2017 15:33:19 +0000 1 <![CDATA[춘천의병장으로 을미의병의 주역이 되다 ]]> 글 학예실   춘천의병장으로 을미의병의 주역이 되다 이소응(李昭應, 1852. 8. 7 ~ 1930. 3. 25)   독립기념관은 국가보훈처·광복회와 공동으로 이소응을 1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춘천의병장으로 백성들을 이끌었던 그는 을미의병에서 활약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alt alt 이소응 춘천의병을 이끈 항일의 선봉장 이소응은 1852년 강원도 춘천시 남면 강촌에서 태어났다. 7세 때 처음으로 한문을 배우기 시작하였고, 22세 때 유중교(柳重敎) 문하에 들어가 화서학파의 일원이 되었다. 이후 이소응은 유중교와 유중교의 재종질인 유인석을 스승으로 모시며 평생토록 각별한 인연을 맺었다. 1896년 1월 20일 이소응은 춘천의병의 의병장으로 추대되었다. 각 읍에 격문 ‘효고팔도열읍(曉告八道列邑)’을 보내 이를 통해 국모를 시해하고 단발을 강요하는 것을 꾸짖고, 나라의 원수들을 처단하기 위해 의병을 일으킨다는 뜻을 밝혔다. 그리고 1월 28일 개화정책에 앞장선 춘천관찰사 조인승을 잡아 처단하였다. 정부는 관찰사 처단 소식을 듣고 1개 중대를 급파하였다. 춘천의병은 2월 3일 가평에서 관군과 맞서 싸웠으나 패퇴하여 춘천으로 퇴각하였다. 이소응은 지평군수를 찾아가 원병을 요청하였지만, 오히려 구금되고 말았다. 다행히 유인석 휘하에서 활동하던 정익 등에 의해 구출된 후 제천으로 내려가 유인석이 이끌던 제천의병에 합류하였다. alt (왼쪽부터) 춘천의병의 본영이 있었던 관찰사 건물 터(현재 강원도청) / ‘효고팔도열읍(曉告八道列邑)’ alt 을미의병의 정신적 지주 유인석 서간도 망명과 순국 1898년 유인석을 따라 서간도로 건너간 이소응은 퉁화현 오도구로 망명하였다. 그해 여름 함께 망명했던 동지들과 항일의지를 다지는 의체(義諦)를 약정하였고, 10월에는 퉁화현 팔왕동(현 집안현 패왕조)으로 이주하였다. 1900년 말 의화단의 난이 일어나자, 그는 유인석과 함께 귀국하였다. 귀국 후 원주로 돌아와 지내다가 제천의 모정?남동막 등을 거쳐 1905년 공전리에 정착하였다. 이곳에서 화서학파의 존화양이(尊華攘夷) 정신을 담은 자양영당(紫陽影堂) 건립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경술국치로 인해 더 이상 국내에 머물 수 없게 되자, 1911년 다시 서간도로 망명하였다. 망명 후 회인현 대황구에 머무르다가 1915년 관전현 문화사 만구로 이주하였다. 1927년에는 근대화의 물결을 피해 강평현 제7구 민가둔으로 이사하였다. 이곳에서 존화양이의 의리를 지키며 살다가 1930년 79세의 나이로 순국하였다. 이소응의 유해는 1934년 제천으로 반장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활동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alt (왼쪽부터) 자양영당(紫陽影堂) / 이소응 묘소(제천시 봉양읍 공전리) ]]> Tue, 17 Jan 2017 15:50:33 +0000 1 <![CDATA[하나, 독립운동가 이신애 둘, 의친왕 탈출 사건 ]]> [우리가 몰랐던 이야기 하나] 글 김형목 독립기념관 책임연구위원   이신애, 독립운동으로 여성에게 자긍심을 일깨우다   3·1운동은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5월 말경에 이르러 거의 침체에 직면했다. 독립운동가들은 이러한 상황을 예상하고 이미 여러 비밀결사를 조직했다. 새로운 분위기를 조성하여 지속적인 시위운동을 전개하려는 의도였다.   alt이신애 경찰관주재소 앞에서 독립만세 소리가 고창되다 한성정부를 비롯한 상하이, 블라디보스토크 등 독립운동을 총괄하는 임시정부가 수립·통합되었다. 천장절에 즈음하여 10월 31일에는 연통단·중앙청년단·독립청년단·애국청년단 등과 연합한 청년들이 식민지배를 비판하는 전단을 동대문 밖에 살포했다. 서울 장안에는 다시 한 번 긴장감이 흘렀다. 이어 11월 28일 오후에는 안국동에 태극기와 ‘대한독립만세’라고 쓴 깃발이 올랐다. 바로 식민지배 최전선인 경찰관주재소 앞에서였다. 만세 함성과 아울러 지나가는 행인에게 선언서가 배포되었다. 당시 주인공은 이신애와 그의 동지인 박정선·정규식·박원식 등이었다. 일경들은 이들은 물론 이에 호응하는 행인들마저 모두 체포하였다. 소식은 입소문을 통해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독립만세운동은 스스로를 지탱하는 버팀목이다 배후 세력을 파악하기 위한 혹독한 고문과 심문이 시작되었다. “왜 독립만세를 불렀느냐?” 주동자로 지목된 이신애에게 협박과 회유가 오가며 취조가 이어졌다. 그럼에도 그녀는 전혀 주눅이 들지 않고 당당하게 맞섰다. 조금도 주저함 없이 독립운동에 대한 평소 입장을 밝혔다. 마치 심문자를 비웃기라도 하는 듯한 자세로. “우리들은 독립만세를 부른다고 해서 (당장) 독립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만세를 부르면 많은 사람들이 함께하여 하나 된 시위운동을 통해 독립을 이루리라 생각하였다.”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하여 독립만세를 제창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 아닌가. 무슨 이유와 설명이 필요한가? 당당한 태도에 오히려 취조하는 경찰이 당황할 정도였다.   이신애, 그녀는 누구인가 이신애는 1891년 1월 20일 평북 구성에서 장녀로 태어났다. 일찍이 기독교를 수용한 집안 분위기로 근대교육의 수혜를 받았다. 개성과 원산 여성교육의 요람지인 호수돈여학교과 성경여학교에서 수학하고, 이후 교사와 전도로 활동하면서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데 혼신을 다했다. 헌신적인 활동에 감격한 많은 학생과 교인들이 그녀를 따랐다. 이신애는 항일운동 투신을 결심한 후 여학교를 사직, 서울로 올라왔다. 3?1운동이 일어나자 동지들과 함께 적극 참여하였다. 이는 독립운동에 본격 투신하는 시발점이었다. 5월경에는 여성독립운동단체에 가입하여 활동했다.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 지원을 위한 독립운동자금 모집에도 열성적이었다. 동지들과 교류 및 소통은 점차 대담한 활동으로 이어졌다. 강우규가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를 처단하기 위해 서울에 왔을 때는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비록 이 의거는 실패하였으나 청소년들에게 항일의식을 북돋는 기폭제가 되었다. 식민당국자들이 우왕좌왕하던 10월 초순에는 항일비밀단체인 민족대동단에 입단하는 한편 식민지배의 실상을 폭로하는 선전활동에 나서기도 하였다. 민족대동단은 의친왕 이강을 상하이 망명시켜 망명정부를 수립하는 원대한 계획을 세웠다. 무사히 압록강을 건너 안둥(현 단둥)에 도착하는 듯 했으나, 끝내 계획은 실패하고 말았다. 이때 많은 단원들이 체포되면서 민족대동단은 위기에 직면했다. 이신애는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고자 동지들과 제2의 만세운동인 안국동 만세시위를 전개하다가 결국 체포되었다. 서대문형무소에서 미결수로 옥고를 치르던 중 이듬해, 3·1운동이 첫돌을 맞이했다. 이에 이신애는 유관순 등과 함께 옥중투쟁을 주도하였다. 모진 고문이 이어지는 등 무자비한 보복이 가해졌으나 결코 중단하지 않았다. 병보석 직후 유관순이 순국한 사실은 당시 얼마나 잔인한 고문이 자행되었는지 짐작케 한다. 이후로 옥중투쟁은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여성독립운동가들의 주요 투쟁방략 중 하나로 자리매김 하였다. 이신애는 징역 4년을 언도받고 복역하다가 출감했다. alt (왼쪽부터) 대동단사건 공판 광경 / 대동단 제2차 독립선언서 민족대동단 여성대표로 활약하다 ‘세계 개조의 민족자결은 천하에 드높고, 우리나라의 독립국과 자유의 소리는 나라 안에 울려 퍼진다. 3월 1일에 독립을 선언하고 4월 10일에 정부를 수립했으나 간악한 저 일본이 시세의 추이를 살피지 못한다. 오로지 표범과 이리의 야만성으로 무자비한 억압을 일삼았다. …(중략) 만일 일본이 끝내 뉘우침이 없으면 우리 민족은 부득이 3월 1일의 공약에 의하여 최후 1인까지 혈전을 불사한다.’ 민족대동단이 일제에 혈전을 불사한다는 선언이다. 이신애는 의친왕 이강과 총재인 김가진 등과 더불어 여성대표로서 역사 무대에 우뚝 섰다. 또한 여성뿐만 아니라 남자들도 민족대동단 단원으로 포섭하는 등 한민족 대동단결에 전력을 기울였다. 온갖 고초에도 전혀 흔들림 없이 오직 조국독립만을 최고의 가치로 생각하고 실천했다. 그녀의 인생역정이 아름다운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가 몰랐던 이야기 둘] 글 신현배 역사칼럼니스트   일제를 놀라게 한 의친왕 탈출 사건   의친왕 이강(1877-1955)은 고종의 다섯째 아들로, 어머니는 귀인 장씨다. 순종의 배다른 동생이자 영친왕의 배다른 형인 그는 영친왕의 어머니 귀비 엄씨의 견제로 1894년(고종 31년) 일본으로 갔다가, 1896년까지 영국·프랑·독일·러시아·이탈리아·미국 등을 전전했다. 그러던 1897년 고종이 대한제국 황제로 즉위하고, 미국 유학 중이던 이강은 1900년 ‘의친왕’에 책봉, 고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alt의천왕 이강 일제의 감시 속 탈출을 꾀하다 1905년 의친왕은 고국으로 돌아왔으나 일제의 감시 속에서 지냈다. 일제가 의친왕을 항일 의지가 높아 순종이나 영친왕보다 위험한 인물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그는 술로 세월을 보내며 감시를 따돌렸다. 대한제국이 멸망하면서 의친왕의 작위는 ‘이강 공(公)’으로 강등되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의친왕을 국내에서 탈출시켜 상하이로 망명시키기로 계획하였다. 이 일이 성공한다면 한일합방의 부당성을 해외에 알리고, 군자금을 모으는 데 도움이 되어 독립운동이 더욱 활발해지는 계기가 될 것이었다. 1919년 9월 임시정부는 공작원 이종욱을 비밀리에 서울로 보냈고, 그는 독립운동의 비밀조직인 대동단의 전협 단장을 만나 의친왕의 탈출 계획을 알렸다. 임무를 전달받은 전협은 대동단원 이재호가 의친왕과 가깝게 지내는 정운복과 친하다는 것을 알고 그를 통해 의친왕에게 접근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11월 9일 밤 11시, 공평동의 비밀 가옥에서 의친왕을 마주하였다. “우리는 전하를 상하이로 탈출시켜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독립운동을 하려고 합니다.” 전협의 말에 의친왕은 망설임 없이 제의를 받아들였다. “좋소. 임시정부로 가겠소.” 의친왕은 일제의 눈을 피하고자 턱에 수염을 붙이고 허름한 옷을 입어 변장했다. 인력거에 의친왕을 태운 전협은 새벽녘 경기도 고양군 은평면 구기리에 있는 다른 비밀 가옥으로 향했다. 대동단에서 의친왕의 탈출을 돕는 사람은 정남용과 이을규였다. 수색역에서 만주 안둥역까지 기차로 이동한 뒤 정남용은 서울로 돌아가고, 이을규가 의친왕을 상하이까지 모시기로 했다. 구기리의 비밀 가옥에서 의친왕은 두 사람에게 말했다. “우리 집안은 조선 왕조 500년 동안 주인 노릇을 했소. 2천만 백성들이 조선 독립을 위해 애쓰고 있는데, 주인이 모른 척할 수야 없지 않소? 일제는 고종 폐하를 독살했소. 따라서 그 원수를 갚지 않으면 안 되오. 나는 주인집의 한 사람으로서 조선 독립을 위해 보통 사람보다 열 배, 스무 배 더 노력할 것이오.” 이에 정남용이 말했다. “훌륭한 생각이십니다. 전하께서 강화 회의나 국제연맹에서 조선의 독립운동에 대해 증언하신다면, 일제의 무단정치가 잘못되었음이 만천하에 드러날 것입니다.” 의친왕은 망명을 떠나기 전 ‘조국 동포에게 전하는 마지막 말’인 『유고문(諭告文)』을 남겼다. ‘통곡하면서 우리 2천만 민중에게 고하노라. 이번 중국행은 하늘과 땅끝까지 이르는 깊은 원수를 갚으려 함이다. …민중은 한뜻으로 나와 함께 궐기하자.’ 일제의 고종 독살을 폭로하고 2천만 조국 동포에게 호소하는 내용이었다. 의친왕이 망명에 성공하면 이 유고문을 상하이와 서울에서 의친왕의 이름으로 동시에 뿌리기로 했다. alt대동단장 전협 일제에 충격을 안긴 사건으로 기억되다 11월 10일 오전 11시 의친왕 일행은 열차를 타고 수색역을 출발, 평양역으로 가 만주 안둥역행 열차로 바꿔 탔다. 그즈음 서울은 발칵 뒤집혀져 있었다. 일제는 의친왕이 사라진 것을 알고, 국내는 물론 일본?만주?시베리아?상하이까지 긴급 수배령을 내렸다. 의친왕 일행이 안둥역에 도착한 것은 11월 11일 오전 11시쯤. 접선 장소는 임시정부 교통국 역할을 하던 무역회사인 이륭양행(怡隆洋行)이었다. 안둥역에서 도보로 30분 거리에 있어 이곳에 닿으면 망명은 거의 성공적이었다. 이륭양행 소속의 배를 타고 상하이로 가기로 했던 것. 하지만 운이 따르지 않았다. 일경이 쫙 깔린 안둥역을 빠져 나오는데, 안둥역장이 의친왕의 얼굴을 알아본 것이다. “이강 전하 아니십니까. 안둥까지는 어쩐 일이십니까?” 변장에도 불구하고 얼굴을 알아보다니,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아, 아닙니다. 사람 잘못 보셨습니다.” 의친왕은 극구 부인했지만 그곳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뒤따라온 일경들은 의친왕과 정남용을 체포했다. 이을규는 간신히 역을 빠져 나갔지만 끝내 그도 붙잡히고 말았다. 의친왕 탈출 사건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하지만 이 사건은 일제를 놀라게 한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조선총독부 경무부장 지바는 조선총독부에서 간행한 『조선통치비화』에서 이 사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전하께서 만에 하나라도 상하이까지 탈출하시게 되었다면, 불온 조선인들은 기필코 전하를 받들어 독립운동에 더욱 기세를 올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조선 통치상 커다란 동요를 가져왔을 것이며, 세계 여론에도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위기일발 직전에 이를 막을 수 있어서 무엇보다도 국가를 위해 다행스런 일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신현배 역사와 전통문화에 대해 관심이 많은 역사칼럼니스트.  저서로는 역사 이야기 『엉뚱 별난 한국사』, 『엉뚱 별난 세계사』, 『2000년 서울 이야기』, 『세계사로 배우는 법 이야기』, 전통문화 이야기 『소중한 우리 문화 지식 여행』 시리즈 등이 있다.                ]]> Tue, 17 Jan 2017 15:53:01 +0000 1 <![CDATA[과거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 글 심용환 역사N교육연구소 소장   과거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학교를 가니 선생님이 군복을 입고 학생들을 가르친다. 독립군은 경성 시내를 몰래 오가며 활동을 벌이고 한편에서는 여성들이 위안부로 끌려간다.” 한 드라마에서 묘사된 일제강점기 모습이다. 시대상황에 대한 고증이 부족했다고 밖에 볼 수 없는 장면이다. 사실이 아니라곤 할 수 없지만 시대가 중첩되었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일본은 우리나라를 집어삼키고자 그 방법을 다양하게 바꾸어왔다. 육체를 억압하는가 하면, 온갖 회유와 세뇌로 정신을 지배하려 했으며, 우리 민족의 뿌리를 송두리째 흔들고자 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했던가. 우리는 일본이 대한민국을 어떻게 집어삼키려 해왔는지 보다 자세한 이해를 통해 앞으로의 미래에 같은 역사를 반복되지 않도록 명심해야 한다.             alt (왼쪽부터) 『황성신문』 창간호 / 초대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 / 일본 헌병대 1910년대 1910년부터 1919년 3·1운동 전까지 일명 ‘무단통치시대’에는 육군 장군이 총독으로 파견되고, 총독 밑에 경무총감과 정무총감이 있는 형식이었다. 총독으로 지낸 이들 대부분은 육군 출신으로 본국에서 막강한 정치적 역량을 발휘한 인물들이었다. 초대 총독인 데라우치 마사타케는 육군 장성 출신으로 이미 1901년 가쓰라 다로 내각에서 육군상을 지냈고, 1916년에는 본국 수상이 되어 시베리아 출병을 주도했다. 3·1운동 이후 문화통치를 주도했던 사이토 마코토 총독은 해군 제독 출신으로, 일본에서 외무대신·문부대신·총리대신을 역임했다. 1930년대 후반 민족말살통치를 자행했던 미나미 지로 총독 역시 와카쓰키 내각에서 육군대신을 역임, 관동군 사령관·만주국 전권대사·관동 장관 등을 지냈다. 1910년대는 이런 육군 군벌들의 스타일이 그대로 조선 식민통치에 적용된 시기다. 당시 ‘헌병경찰제’로 일반 경찰이 아닌 군인 경찰이 식민지를 운영했는데, 이들은 단순 치안뿐 아니라 세금 관리부터 민사소송, 심지어 마을 미풍양속까지 관여했다. 무엇보다 심각했던 것은 이들에게 ‘즉결처분권’과 ‘태형’이라는 권한이 주어졌다는 점이다. 영장 없이 체포하여 최대 4개월간 구금할 수 있는 권리를 준 것인데, 이로 인해 경찰에 의한 인권 유린의 전통이 시작됐다. 태형의 경우 하루 80대까지 때릴 수 있었다. 기록에 따르면 1911년에는 1만여 명, 3·1운동 직전에는 4만여 명이 태형을 당했다. 가로수를 꺾으면 5대, 웃통을 벗고 일하면 10대, 집 앞 청소를 안 하면 10대, 무허가로 개를 잡으면 40대, 학교림을 벌목할 경우 50대, 덜 익은 감을 판매할 경우 80대 등 강력한 군인 경찰 통치가 자행되었다.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도 보장되지 않았다. 『황성신문』, 『제국신문』 등 민족 신문들이 모두 폐간되었고 『대한매일신보』는 『매일신보』라는 이름으로 일제의 기관지가 되어 버렸다. alt (왼쪽부터) 친일파 이광수 / 민족적 경륜(『동아일보』, 1924년 1월) 1920년대 3·1운동의 영향으로 일제는 통치 방식의 전환을 모색할 수밖에 없었다. 다방면에서 이전과는 다른 행정조치가 내려졌다. 문관 총독도 임명이 가능하게 법을 손질하고, 헌병경찰제에서 보통경찰제로 전환하였다.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의 발행을 허가하여 일정 부분 언론의 자유를 보장했다. 또한 지방 행정기관인 도·부·군·면에 협의회를 설치하고, 투표를 통해 인사를 선발하는 등 부분적인 지방자치제를 실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는 기만적이었다. 문관 총독은 단 한 명도 임명된 사례가 없고 계속해서 육군 출신의 총독들이 부임했으며, 보통경찰제로 전환했지만 오히려 경찰의 숫자나 장비, 유지비가 증가하는 등 경찰을 통한 통치는 지속되었다. 신문은 발행을 허가하였으나 검열을 강화했다. 기사를 삭제하거나 정간 조치를 취하는 등 지속적인 언론탄압을 이어가다가 그마저도 결국 1940년대에 다시 폐간시켰다. 한편 문화통치시대에 일제가 가장 중점을 둔 사업은 ‘친일파 양산’이었다. 자치나 참정권 행사의 기회를 주는 등 우리 국민을 회유하여 원활한 식민통치를 꾀한 것이다. 이에 대표적으로 호응한 이 중 한 명이 이광수다. 상하이에서 『독립신문』의 주필을 맡고 있던 그는 일제에 포섭된 연인 허영숙과 재회하게 되면서 결국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등지고 귀국하였다. 이후 『동아일보』를 통해 조선 내에서 허(許)하는 범위 내에서 일대 정치적 결사를 조직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은 글 ‘민족적 경륜’을 발표했다. 이로써 일제 식민통치를 현실적으로 받아들이고 타협을 통해 자치권을 얻자는 자치론이 탄생했다. alt  (왼쪽부터) 친일파 최린 / 신간회 창립 1주년 기념사진(1928년 2월 15일)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이자 천도교 대표 인물인 최린 역시 비슷한 시기 일제에 회유되어 이광수와 같은 길을 걸었다. 참정권운동은 당시 독립운동을 주도하던 민족주의 진영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다. 이광수와 수양동우회를 비롯하여 상당한 역량을 보였던 소장파 민족주의자들이 자치론에 빠져들었기 때문이다. 결국 안재홍 등 비타협적 민족주의 노선은 새롭게 등장한 사회주의 독립노선과 연대하여 신간회를 창립하는 등 새로운 방향성을 모색해 나갔다. 그리고 자치론을 주장했던 이들은 1930년대로 들어서면서 사실상 모조리 친일파로 전락했다. alt (왼쪽부터) 일본어 강제 교육 / 신사 참배하는 한국인 학생들 1930~1940년대 1931년에는 만주사변이 일어났다. 관동군이 내각을 무시하고 독자적인 군사작전을 감행하여 만주를 장악,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푸이를 만주국 황제로 세우며 어용 정권이 세워졌다. 이후 1937년 중일전쟁 발발, 1941년에는 태평양전쟁이 시작되면서 상황은 급변하기 시작했다. 당시 파견된 미나미 지로 총독은 부임기간 동안 파격적인 정책 전환을 추구했다. 바로 황국신민화정책과 병참기지화정책의 추진이었다. ‘내선일체(內鮮一體)! 일본과 조선은 하나다!’ ‘일선동조(日鮮同祖)! 일본과 조선은 같은 조상을 두었다!’ 이러한 구호 아래 우리 민족은 천왕이 추진하는 대륙 침략에 참여해야 했다. 민족 차별은 기본이고, 교육제도부터 임금체계까지 모두 차별할 때는 언제고 하루아침에 ‘하나’가 되었다니! 일제는 이후 신화적·역사적 왜곡을 자행하였는데, 한 예로 일본 신화의 주인공인 아미테라스 오미카미의 못난 남동생이 단군이었다는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황국 신민으로서 황국신민서사를 암송해야 했으며, 신사 참배와 궁성 요배도 강요하였다. 또한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꾸는 창씨개명과 함께 조선어와 조선사 교육이 금지되었다. 동시에 전쟁이 본격화된 만큼 적극적인 공업화 정책을 펼쳐 나간다. 주로 한반도 북부 지방에 중공업 시설을 적극 유치하는 방식이었는데, 이는 군수 물자를 생산하기 위한 조치였다. 전쟁이 가속화될수록 수탈의 정도는 극심해졌다. 식량을 배급받아 끼니를 해결했고, 미곡은 제값을 받지 못하고 공출되었다. 일제는 무기 제작 등에 필요한 쇠붙이를 얻기 위해 쇠붙이 공출도 강행하였다. 부엌칼 하나를 제외하고는 모조리 몰수한다는 계획 하에 쇠로 된 살림살이라면 무조건 빼앗아갔다. 이러한 무지막지한 공출 대상에는 인력도 포함되었다. 징병·징용·위안부까지 끔찍한 인권 유린이 벌어졌다. alt (왼쪽부터) 독립기념관 기공식(1983년 8월 15일) / 독립기념관 전경 광복 이후 1945년 우리나라는 마침내 독립하였으나, 일본은 광복 이후에도 우리 역사를 날조하거나 은폐하고 자신들의 침략 사실을 미화·축소하는 등 역사왜곡을 그치지 않았다. 이러한 행태는 각종 교과서에 버젓이 적용되었다. 일본은 초·중·고교 역사 교과서에 우리나라의 고대사부터 근대사·현대사에 이르기까지 역사 전반을 왜곡 기술하였으며, 특히 가장 심하게 왜곡한 부분은 현대사였다. 예를 들어 한국 ‘침략’을 ‘진출’로, 신사 참배 ‘강요’를 ‘장려’ 등으로 왜곡 기술하는 식이었다. 또한 독립운동 탄압을 ‘치안유지 도모’로, 조선어 말살정책을 ‘조선어와 일본어를 공용어로 사용’ 등으로 호도하는 식이었다. 일본의 역사왜곡은 비단 우리나라에 국한되지 않고 과거 일본의 침탈로 큰 해를 입었던 아시아의 여러 나라도 포함되었다. 이에 1982년 7월 일본이 왜곡된 역사를 교과서에 싣는 것을 대대적으로 규탄·성토하는 ‘일본역사교과서왜곡사건’이 일어나면서 전국적으로 반일운동이 강하게 일어났다. 일본 정부는 역사왜곡 사실을 시정하겠다고 약속하면서 격랑을 가라앉히고자 했으나, 우리 국민들에게는 이 사건이 역사의식을 고취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1982년 8월 28일 독립기념관 건립 발기대회를 열었던 것. 독립기념관 건립은 민족의 자주와 독립을 지켜온 한민족의 역사를 유념하고자 광복 이후 계속 제의된 사안이었으나, 국내외 정세의 혼란으로 결실을 맺지 못하고 있었다. 다소 늦은 감이 없지 않았지만 일본의 역사왜곡이 불씨가 되어 광복 37년 만에 비로소 본격 추진하게 되었던 것이다. 국민의 정성어린 성금을 모아 마련한 자금으로 공사에 착수, 마침내 1987년 8월 15일 독립기념관이 개관하였다. 독립기념관은 이후 우리의 국난극복사와 국가발전사에 관한 자료를 수집·보존함으로써 민족문화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오늘날 전시·학술·교육·문화 등 다양한 사업을 통해 국민의 올바른 국가관 정립을 충실이 이행해왔다. 한국 독립운동은 한국인만의 독립운동사만이 아니라 세계인의 자유와 평화를 지키기 위해 싸운 반제국주의 투쟁의 역사였다. 일제강점기를 비롯하여 광복 이후에도 우리 역사와 민족정신은 끝없이 위협 받아왔다. 올해로 독립기념관이 개관 30년을 맞은 이 시점에서 우리는 다시금 우리 역사를 결코 잊지 않겠다는 의지를 다시 세워야 할 것이다. 심용환 성균관대학교 사범대학에서 역사교육학을 전공했다. 현재 팟캐스트 <진짜 역사 가짜 역사>를 통해 재미있고 올바른 역사 이야기를 전파하고 있으며, CBS와 공동으로 <심용환의 근현대사 똑바로 보기>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저서로는 『단박에 한국사』, 『역사 전쟁』이 있다. ]]> Tue, 17 Jan 2017 15:56:23 +0000 1 <![CDATA[양심의 소리에 귀 기울인 지식인 ]]> 글 이성주 역사칼럼니스트   양심의 소리에귀 기울인 지식인   “인간은 누구든 자신이 어떠한 삶을 살아나가는 것이 좋은가에 대해 진정한 자신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 이는 즉 양심의 소리다.” 갈수록 각박해져만 가는 우리 사회 속에서 ‘양심’이라는 단어는 사치스러운, 혹은 세상물정 모르는 순진한 소리로 전락했다. “양심을 따르라니, 누가 알아주기나 한다고?” 양심은 곧 손해라는 인식을 갖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여기 특별한 ‘일본인 변호사’의 이야기를 들려주고자 한다.   사회적 성공을 버리고 양심을 따르다 후세 다쓰지(布施辰治)는 촉망받는 변호사였다. 메이지대학을 졸업하고 법조인의 길을 걷던 그는 자타가 인정하는 성공한 인물이었다. “나는 변호사로서 세상에 인정받았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나의 활동 장소를 법정에서 사회로 옮기겠다.” 이 선언 이후 그의 인생은 하루아침에 나락으로 떨어졌다. ▲1932년 변호사 자격 박탈 ▲1933년 신문지법 위반으로 실형 3개월 선고 ▲1939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 선고, 변호사 등록 말소. 그는 일제의 반체제 인사로 낙인찍히며 온갖 고초를 겪었다. 앞서 언급한 선언 중 ‘법정에서 사회로’라는 말은 조선인들에 대한 자신의 신념을 행동으로 옮기겠다는 의지의 다른 표현이었다. 후세 다쓰지가 정부기록상 최초로 등장한 때는 1911년 경술국치 다음해다. 당시 명치법률학교(현 메이지대학)에서 재학 중이었던 그는 조선 청년들과 어울리게 되면서 일제가 조선에 저지르고 있는 만행에 대해 알게 된다. 이러한 영향으로 조선의 의병운동을 다룬 『조선독립운동에 대해 경의를 표함』이라는 논문을 발표, 이 일로 경찰에 끌려가 호된 취조를 받았다. 그렇게 고독한 투사의 행보가 시작을 알렸다. 1919년 일본에서 조선인 유학생들이 독립선언서와 결의문을 선포한 2·8독립선언이 일어났던 때의 일이다. 백관수를 포함한 11명의 유학생들이 기소되자, 후세 다쓰지가 그들의 변호사로 나섰다. “조선의 독립은 정당한 요구다.” 일본인으로서 자국의 뜻을 거스르고 독립운동의 정당성을 주장한 그의 변론은 파격 그 자체였다. 당시 그의 나이 40세였다. 이후에도 1923년 일왕암살사건을 주도한 박열 무료 변론, 관동대지진 당시 벌어진 조선인학살의 진상규명을 위한 자유법조단 구성, 조선총독부의 토지 수탈에 대항하는 변론 및 식민지 수탈정책 반대운동 등 거침없는 행보가 이어졌다. 제국주의 시대에 맞서 옳은 목소리를 높인 후세 다쓰지. 그는 ‘시대의 양심’으로 불리게 되었다.   양심의 소리는 되돌아온다 한국인도 아닌 일본인이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하고, 한국인을 위해 헌신했던 이유는 무얼까. 이쯤에서 서두에 밝힌 후세 다쓰지의 말을 다시 꺼낸다. “인간은 누구든 자신이 어떠한 삶을 살아나가는 것이 좋은가에 대해 진정한 자신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 이는 즉 양심의 소리다.” 그가 말한 ‘양심의 소리’. 그 소리의 시작은 어디였을까. 후세 다쓰지의 아버지는 춘추전국시대의 사상가 묵자(墨子)의 사상을 따랐다. 묵자는 한 마디로 ‘겸애(兼愛)’라 정의할 수 있다. 좀 더 쉽게 풀이하자면, ‘남을 위함이 곧 나를 위함이다’라는 말이다. 후세 다쓰지는 아버지의 영향으로 자연스레 그 사상을 받아들였다. 모든 인간을 똑같이 사랑하는 것. 자신을 사랑하듯 모든 사람을 사랑해야 세상이 이로워진다는 묵자의 뜻은 그에게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척도가 되었다. 양심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그 소리가 이끄는 대로 살리라 마음먹은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양심을 따르기보단 그것을 저버리는 게 이득이라는 인식이 강하게 뿌리내리기 시작했다. 양심의 소리를 외면해 자신의 안위를 살피는 것은 곧 능력으로 포장되고, 그런 ‘뻔뻔한’ 삶의 방식을 권하는 사회가 되어 버렸다. ‘양심’이라는 단어가 스스로를 돌아보는 용례가 아닌 타인을 향한 질책으로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양심의 소리는 언제가 됐든 결국 반향(反響)을 만나 스스로에게 되돌아온다. 후세 다쓰지는 일본 패망과 함께 변호사로 다시 복귀하게 되었다. 또한 조금 늦은 감이 있지만 2004년 우리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았다. 일제강점기 시절 그를 비난했던 일본은 이제 그를 시대의 양심이라 추앙하며 기리고 있다.   급하게 돌아가는 세상. 한 발 뒤처지면 타인에게 짓밟힌다는 강박은 여전히 우리의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다. 잰 걸음을 잠시 멈추고 우리 안의 목소리를 들어보자. 귀 기울이지 않으면 잘 들리지 않는 그 소리가 세상을 어떻게 이롭게 할 수 있는지 장담할 수는 없지만, 언제가 됐든 그 울림이 자신에게 되돌아온다는 사실만큼은 약속할 수 있다. 늘 그래왔다고, 우리 역사는 넌지시 전해주고 있지 않은가.  이성주 시나리오 작가 겸 역사칼럼니스트. 대중과 함께 호흡하는 글쓰기를 목표로 『조선의 민낯』, 『왕들의 부부싸움』과 같은 역사서를 출간한 바 있다. 최근에는 국제정치에 관련된 연구 및 집필에 열중하고 있다. 『전쟁으로 보는 국제정치』 시리즈 1, 2, 3권을 출간 중이다. ]]> Tue, 17 Jan 2017 15:59:27 +0000 1 <![CDATA[어둠 지나면 기필코 찾아오는 순간 ]]> 어둠 지나면 기필코 찾아오는 순간 어둠의 장막 서서히 걷히고 지평선 너머 태양이 선명하게 떠오릅니다.   고요한 세상을 깨우는 온기가 흰 눈으로 가득 뒤덮인 이곳에 그 따스한 손길을 내밉니다.   이제는 추위에 잔뜩 웅크렸던 몸 기지개 켜고 고개 들어야 할 때   어둔 밤 지나면 기필코 밝아오는 저 아침처럼 깜깜했던 시간 견디고 마침내 찾아온 눈부신 새 역사의 시작을 바라봅니다. ]]> Tue, 17 Jan 2017 16:00:39 +0000 1 <![CDATA[무르익은 가을과 말을 걸어오는 풍경 경상남도 거창군 ]]> 글 · 사진 김초록 여행칼럼니스트무르익은 가을과 말을 걸어오는 풍경경상남도 거창군조선 중기 석루(石樓) 이경전은 거창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푸른 산봉우리들 사방에 모였는데, 한 가닥 냇물이 동쪽으로 비스듬히 흐르도다.” 물씬 찾아온 가을의 기운이 넘실대는 곳, 거창으로 길을 나섰다. alt 암벽 동굴을 지나면 나타나는 곳거창으로 가는 길은 여러 갈래지만, 이번 여행은 전북 무주를 거쳐 간다. 숲과 계곡이 청정한 무주구천동에 들어서면 전라도와 경상도를 이어주는 나제통문이 기다린다. 나제통문은 암벽을 뚫은 석굴로 옛 신라와 백제가 국경을 이루던 곳이다. 신라의 김유신 장군이 드나들었다 하여 ‘통일문’으로도 불리며, 무주구천동 33경 가운데 제1경이다.나제통문이 드리운 그늘을 지나자, 높푸른 하늘과 환한 가을 햇살이 반겨준다. 갈색으로 타들어가는 산천 풍경을 바라보며 달려가다 보니 거창 땅 북상면에 다다랐다. 덕유산 끝자락에 올라앉은 전통사찰 송계사를 그냥 지나칠 수 없다. 향적봉 산행길의 관문으로 울창한 숲과 영취봉에서 시작한 맑은 물이 사시사철 흘러내리니 가히 절승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송계사 들머리인 숲옛마을엔 유서 깊은 볼거리도 많다. 갈계리 임씨고가·은진임씨 정려각·서간소루·갈계숲·갈천서당 등하나같이 사연이 곡진히 배어 있다.송계사: 경상남도 거창군 북상면 송계사길 321숲옛마을: 경상남도 거창군 북상면 송계로 738 / oldvil.go2vil.org         alt 나제통문 alt 송계사 alt 독립운동이 일어났던 덕유산 아랫마을마을을 빠져나와 남덕유산을 향해 들어가면 거창의 소금강으로 불리는 월성계곡이 나온다. 덕유산 삿갓골샘 물줄기가 동쪽으로 흘러내리면서 자연스레 생긴 계곡으로, 인적이 뜸하고 사철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특히 월성에서 황점으로 오르는 길 중간 지점에 있는 사선대는 월성계곡의 백미로 길손의 발길을 붙잡는다. 월성숲과 맑은 계곡이 있는 양지마을은 항일독립운동이 일어났던 곳이기도 하다. 1905년, 지금은 없어진 월성서당을 중심으로 을사늑약에 반대하는 북상면 출신 40여 명이 월성서당에 모여 항일의거를 결의하고, 조국과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 의병들은 1906년 문태수 의병진과 합류해 싸우는 한편 덕유산 의병에게 군수 물자를 전하기도 했다. 무주 고창골과 구천동 전투에서 일본군에 큰 승리를 거뒀지만, 1908년 박화기·박수기·유춘일 등 핵심 세력이 전사하면서 세가 꺾였다. 월성숲 한쪽엔 항일투쟁에 앞장섰던 의병들을 기리는 정자와 기념비가 서 있어 옛 항일정신 발자취를 되짚어 볼 수 있다. 남정네들의 의병운동에 자극을 받은 여인들은 나랏빚 청산에 나섰다. 1907년 2월 국채보상운동이 삽시간에 전국을 강타하자, 웅양면 산포리 오세동에 거주하는 연안이씨 부인들, 이현규 모친 정씨·이현규 부인 송씨·이준성 모친 하씨·이준홍 모친 전씨·이준문 숙모 김씨 등 17명은 19원 80전이라는 거금을 모았다. 이름조차 없었던 아낙네도 사회적인 책무에 결코 소홀하지 않았던 아름다운 이야기이다.거창의 독립만세운동은 월성 말고도 가조면·가북면·위천면에서도 활발하게 일어났다. 1919년 3월 20일 가조 출신인 김병직·어명준 등을 중심으로 부민 500여 명이 가조면 장기리에 모여 독립만세를 외치며 일본헌병분견소를 습격했다. 이어서 거창 장날인 22일에는 주민 3천여 명이 모여 만학정 앞에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만세 행렬은 거창읍내를 지나 살피재에서 더욱 더 기세를 높였다. 일본 헌병들은 이를 막고자 총탄으로 위협을 가했고 이 과정에서 일부 주민들이 체포돼 갖은 고문과 옥고를 치르다 순국하는 아픔을 겪었다. 가조면 소재지엔 이들 애국지사 11분의 영령을 모신 충의사와 거창 3·1운동기념탑이 세워져 있다.         alt 월성숲         alt국채보상운동 당시 연안이씨 부인들의 모금 관련 기사(<대한매일신보> 1907년 4월 13일자)alt충의사 alt 거창 3·1운동기념탑 alt 무주구천동을 빼닮은 수승대덕유산 정기가 뻗치는 위천면의 수승대는 언제 찾아도 좋은 명승이다. 무주구천동을 옮겨놓은 것 같은 빼어난 절경이 압권이다. 신라와 백제가 대립하던 삼국시대, 백제에서 신라로 가던 사신들을 배웅했던 곳으로, 처음에는 백제인들이 돌아오지 못할 것을 근심했다고 해서 근심 수(愁), 보낼 송(送)자를 써서 수송대(愁送臺)라고 했다가, 1543년 조선 중종 때 퇴계 이황이 이곳에 들렀다가 아름다운 경치를 보고 수승대(搜勝臺)로 이름을 고쳤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숲이 에워싸고 있는 계곡을 거슬러 오르면 거북처럼 생긴 거북바위(일명 암구대岩龜臺)가 나타난다. 남덕유산 월성계곡과 송계사 계곡에서 흘러내린 위천은 이곳 거북바위에서 잠시 숨을 고른 뒤 거창읍내를 가로질러 황강과 합천호에 이른 후 낙동강에 몸을 섞는다. 거북바위 표면에는 이황의 글과 거창의 이름난 선비인 임훈의 시를 비롯해 수많은 글귀가 빼곡하게 새겨져 있다. 아마도 십장생인 거북에 이름을 새기면 장수한다는 속설 때문이리라.수승대: 경남 거창군 위천면 황산1길 60-6 / 055-943-5383         alt수승대alt수승대 거북바위 alt 흙담길이 아름다운 황산마을황산마을은 돌담길과 전통 고가, 600년 된 느티나무가 어우러진 거창신씨 집성촌이다. 예부터 인근에서 손꼽히는 대지주들이 살던 곳으로, 등록문화재로 등재된 고즈넉한 흙담길을 따라 마을을 둘러보면 눈과 마음이 맑아진다. 오래된 친구처럼 편안하고 아늑하다. 낙엽 흩날리는 돌담길을 따라 느릿느릿 걷노라면 텅 빈 마음에 편안함이 들어앉는다.마을에 가지런히 자리 잡아 저마다 특색을 내세운 한옥 50여 채는 거의 대부분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건립된 것들로, 조선 말기와 일제강점기 지방 반가의 건축양식을 보여준다. 마을 입구에 서 있는 커다란 느티나무 앞으로는 맑은 시냇물이 흘러간다. 마을은 이 시내를 사이에 두고 동서로 갈리며, 시내 동쪽은 ‘동녘’이라 부르고 서쪽은 ‘큰땀’이라 부른다.황산마을: 경상남도 거창군 위천면 황산리 488-2         alt 황산마을         alt 황산마을 흙담길         alt 계곡과 폭포가 있는 두 골짜기 금원산은 거창의 진산이다. 덕유산에서 갈라져 나온 높은 산맥으로 바위와 계곡·폭포·자연휴양림까지 두루 갖추고 있어 가족 단위의 여행객들에게 제격이다. 휴양림 위쪽으로는 빼어난 경치를 자랑하는 두 골짜기가 있어 이 산의 멋을 더해주는데, 바로 성인골의 유안청계곡과 지장암에서 유래한 지재미골이다. 이곳의 이름에는 재미있는 전설들이 담겨있다. 유안청은 옛날 선비들(儒)이 세속을 떠나 책상(案)을 들고 이 산에 찾아 들어와 공부를 했다는 데서 유래했다고 하며, 금원산(金猿山)은 옛날 이 산에서 날뛰던 금빛 원숭이 한 마리를 한 도승이 잡아다 원암(猿岩)이라는 바위에 가두어 버린 데서 비롯했다고 전해진다. 거창읍에서 서북쪽으로 약 3㎞ 거리에 있는 건계정 계곡도 둘러볼 만하다. 건계정은 거창장씨 후손들이 세운 정자로 1970년에 중건된 것이다. 정자가 올라앉은 바위 구배석(龜背石) 옆으로 흐르는 계곡물이 힘차다. 정자 오른편 건흥산 정상에는 신라에 패망한 백제인들이 나라를 재건할 목적으로 쌓은 거열산성이 남아 있다. 산성으로 오르는 길은 제법 가파르지만 일단 산성에 이르면 조망이 아주 좋아 힘든 것도 잊게 된다.         alt유안청 폭포alt건계정alt구배석 아래 계곡 alt 전쟁의 상흔을 간직하다거창은 우리 역사에서 결코 지울 수 없는 큰 사건이 일어났던 곳이기도 하다. 바로 한국전쟁이 빚은 거창사건이다. 거창에서 산청 쪽으로 가다보면 신원면 소재지가 나오는데 이곳이 거창사건의 진원지다. 우리나라 현대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사건으로 일컬어지는 거창사건은 한국전쟁 중이던 1951년 2월 9일에서 11일까지 이곳 신원면에서 어린아이를 비롯해 수백 명의 마을 주민들이 일부 국군의 무분별한 총탄에 억울하게 희생당했던 참극의 역사다. 현재 추모공원에 추모문·합동묘역·위령탑·위패봉안각이 마련돼 있다.거창사건추모공원: 경남 거창군 신원면 신차로 2924 / www.geochang.go.kr/case/Index.do alt거창사건추모공원 내 합동묘역alt거창사건 위령탑 alt 가을의 한가운데 도달한 거창의 자연 속에는 오랜 전설과 역사가 얽혀 있다. 발길 닿는 곳마다 말을 걸어오는 거창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이 가을을 흠뻑 느껴보자. ]]> Thu, 28 Sep 2017 13:22:21 +0000 10 <![CDATA[독립기념관과 국내사적지 ]]> 한민족의 삶의 터전에는 독립이라는 시대적 소명을 안고 살아간 선열들의 흔적이 남아있다. 독립기념관은 국내 항일독립운동의 발자취를 찾아 사적지를 보존·관리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또한 관련 자료를 활용한 다양한 교육 사업을 통해 국민의 올바른 역사 인식 및 나라사랑정신 제고에 기여하고 있다. alt]]> Thu, 28 Sep 2017 10:59:01 +0000 10 <![CDATA[독립운동의 이면을 보다 영화 <아나키스트> ]]> 글 편집실독립운동의 이면을 보다<아나키스트>감독: 유영식주연: 장동건, 정준호, 김상중개봉일: 2000년 4월 29일‘최초의 한중합작영화’라는 타이틀을 내걸고 개봉했던 <아나키스트>. 최근 몇 해 동안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영화들이 흥행을 거둔 가운데, 이 영화가 재주목 받으며 그 타이틀이 바뀌고 있다. 바로 ‘의열단을 소재로 한 최초의 영화’라는 사실이다. Q. 영화를 통해 처음 등장한 의열단의 정체는?1920년 상하이. 일본군의 무차별한 한국인 학살이 자행된 간도참변으로 소년 상구(김인권)는 가족을 잃고 만다. 복수를 하기 위해 일본군 거처에 불을 지르려 했지만 이내 붙잡히고 말았고, 공개 처형장에서 죽음을 맞이할 위기에 처한다. 그때 의열단이 나타나 상구를 구출하면서, 이를 계기로 상구는 그들과 함께 의열단원이 되어 독립운동 활동에 나서게 된다.항일 무력독립운동단체 ‘의열단’의 이름은 ‘정의(正義)의 사(事)를 맹렬(猛烈)히 실행한다’는 뜻이다. 1919년 3·1운동 이후 일부 애국지사들은 일제의 무력에 대항해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무력을 통한 적극적인 투쟁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에 김대지·황상규·김원봉 등을 중심으로 의열단이 만들어진 것. 이들은 부산경찰서·밀양경찰서·조선총독부 등지에서 폭탄투척의거를 벌이는 등 1920년대에 활발한 무장투쟁 활동으로 뚜렷한 성과를 거두었다.         alt실제 의열단 단원들alt Q. 의열단은 호화로운 생활을 즐겼다?상구의 눈을 통해 바라본 의열단의 생활은 호화로워 보였다. 늘 세련되고 단정한 양복 차림을 유지하는 단원들은 특히 의거 전에 양복을 갖춰 입고 사진을 찍었다. 의거가 잘 마무리되면 와인과 맥주가 있는 파티장으로 향했다.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가로서 지내는 삶은 언제 목숨을 잃을지 모르는 불안한 생의 연장이었다. 의열단원은 물론, 독립운동가들은 의거를 치르기 전 단정한 모습으로 목에는 결의서를 걸고 사진을 찍었는데, 이는 죽음을 불사하는 최후의 결의를 다지는 것은 물론, 자신들의 항일운동을 기념하고 기록으로 남겨 후세에 남기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평소 혹은 의거 당일 말끔한 양복을 입었던 것은 일경의 감시를 피하기 위한 까닭도 있었다. 일종의 눈속임 역할을 했던 셈이다. alt의열단 단원 김상옥alt의거 직전 결의서를 목에 걸고 사진을 찍은 이봉창 Q. 마약에 중독된 독립운동가?세르게이(장동건)와 상구는 윤선생(정원중)의 지시를 받아 독립자금을 되찾아오기 위해 모스크바로 떠난다. 작전은 성공했으나 독립자금의 절반만 상구의 손에 들려오고 나머지는 세르게이가 갖고 잠적해버린다. 의열단은 수배 끝에 베이징의 아편 동굴에서 그를 찾아낸다.영화 속에서 세르게이는 아편 중독에 빠진 인물로 등장한다. 일제의 고문 후유증으로 인한 극심한 고통을 잊기 위해 아편에 의존하게 된 그의 모습은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영웅’이 아니다.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의 사인(死因) 가운데 상당수는 고문 후유증이다. 정신은 고매했을지언정 항일활동을 한 대가로 평생에 걸친 육체적인 고통이 뒤따랐다. 아편에 취해 흔들리는 세르게이의 모습은 나라와 민족을 위해 뛰어든 독립운동이 개인의 삶에는 어떠한 희생을 치르게 했는지를 보여준다. 그래서 더욱 선열들이 지키고자 한 뜻이 얼마나 숭고한 것인지, 그들이 짊어졌던 삶의 무게를 짐작하게 하며 우리를 숙연하게 만든다.          alt     Q. 독립운동가들 사이에 대립과 갈등이 있었다?이근(정준호)은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을 가리지 않는 냉정한 한명곤(김상중)의 방식에 불만을 갖는다. 한명곤은 이렇게 말한다. “최근 의열단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로 갈려 분열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한다는 건 너도 잘 알고 있을 거야. 무엇으로 그들을 단합시키고 적에 대한 분노를 일깨울 수가 있지?” 허무주의자 세르게이, 양반집안 출신 이근, 냉철한 사고를 가진 한명곤, 머슴 출신의 다혈질 돌석(이범수), 어리버리한 막내 상구까지. 영화 속에서 단원들이 저마다 캐릭터가 뚜렷한 것처럼, 실제로 의열단은 다양한 계층 출신이 모여 결성된 집단이었다. 같은 목표 아래 모였지만 구체적인 방향과 방식에 있어 의견의 차이를 극복하기란 쉽지 않았고, 때로는 일제가 아닌 한민족 간 이념 대립이 독립운동에 걸림돌이 되기도 했다. 이처럼 의열단, 나아가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에는 내부 화합을 이루는 일 또한 중요하게 작용했다.          alt     ]]> Thu, 28 Sep 2017 16:58:03 +0000 10 <![CDATA[서간도지역 항일무장투쟁의 개척자 채상덕 ]]> 글 학예실서간도지역 항일무장투쟁의 개척자채상덕(蔡相德, 1862~1925)독립기념관은 국가보훈처·광복회와 공동으로 채상덕을 10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황해도에서 태어나, 의병 출신으로서 남만주 일대 독립운동세력의 통합을 위해 힘쓴 그는많은 제자를 거느린 독립운동 지도자였다. alt 의병 참여와 독립의군부 활동1906년 스승인 최익현이 전북 태인에서 의병을 일으키자, 채상덕은 충남의 유학자 곽한일·이남규 등을 찾아가 의병을 일으켜달라고 호소하는 등 호남과 호서를 잇는 연합전선 구축에 나섰다.1912년 임병찬이 고종황제로부터 독립의군부(獨立義軍府)를 조직하라는 비밀 칙서를 받고 1913년 3월 전국적인 단체가 조직되는데, 채상덕은 임병찬과 함께 13명의 총대표 중 한 명으로 선출되었다. 1913년 5월 독립의군부는 일제에게 한국 침략의 부당성을 일깨우는 서한과 국권반환요구서를 보내기로 계획하였다. 하지만 거사 직전 일제에 발각되면서 독립의군부 지도부와 대원들이 대거 체포되었고, 채상덕은 압록강을 건너 남만주 관전현(寬甸縣)으로 망명하였다.         alt최익현(1906년)alt남만주 관전현 전경 남만주 독립운동 단체들의 통합 추진1920년 10월 일제는 청산리대첩에서 대패한 이후 대규모 병력을 만주로 파견하여 한인들을 살해하고 마을을 파괴하는 간도참변을 일으켰다. 이듬해 일제가 물러나자, 독립운동지도자들은 한인사회의 복구와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운동을 추진하였다. 그 결과, 1922년 8월 남만한족통일회의를 통해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가 결성되었다. 채상덕은 부총재로 선출되어 항일무장투쟁의 지속적인 활동을 위한 독립군기지 복원과 대한통의부 소속 의용군 양성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1923년 초, 대한통의부의 주요 간부들 사이에 이념적 갈등으로 대한의군부(大韓義軍府)를 조직하기에 이르렀고, 채상덕은 총재로 추대되어 대한의군부를 이끌었다.         alt 대한통의부 결성 보도기사(<독립신문> 1923년 3월 10일자)         alt남만한족통일회의 개최지인 환인현 마권자향 전경alt대한통의부 의용군 훈련 장면(1920년대) 참의부의 고마령 참변과 순국한편 대한통의부의 군사조직인 의용군 대원이었던 채찬·김원상 등은 1924년 5월 육군주만참의부를 조직하였다. 이들을 따라 참의부로 옮겨간 인물들 대부분은 채상덕의 제자와 부하들이었다. 1925년 3월 참의부의 주요 간부들은 집안현 고마령에서 국내진입작전을 계획하기 위한 군사회의를 개최하였다. 그러나 일제가 밀정으로부터 정보를 입수하고 대규모의 병력을 파견하여 회의장을 기습 공격하면서, 최석순을 비롯한 29명이 전사하고 많은 대원이 부상을 입었다. 이 소식을 들은 채상덕은 제자 이수흥에게 안중근과 같은 의열투쟁을 전개해줄 것을 부탁하였다. 그리고 “부하가 다 죽었으니 나 혼자 살아있을 면목이 어디 있겠느냐”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남기고 독약을 마셔 자결 순국하였다. 1926년 이수흥은 채상덕의 유언을 따라 김운용으로부터 권총 두 자루와 탄약 980발을 받고 국내로 들어와 서울 동소문파출소와 경기도 이천에 있는 백사면사무소·주재소 등을 기습 공격하는 의열투쟁을 전개하였다. 이수흥은 침략자 일제를 응징하던 중 1926년 11월 6일 체포되어 사형을 언도받고 1929년 2월 27일 순국하였다. 정부는 채상덕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alt참의부 대원들(1920년대)alt이수흥의 의열투쟁 장소(경기도 이천 백사면사무소와 주재소, 1928년) ]]> Thu, 28 Sep 2017 15:29:07 +0000 10 <![CDATA[하나,학생들을 이끌고 독립만세 대열에 서다 둘,독립운동에 기여한 무역 왕, 최봉준 ]]> [우리가 몰랐던 이야기 하나]글 김성은 대구한의대학교 교수학생들을 이끌고 대구3·8독립만세 시위대열에 서다 1919년 3월 8일 대구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이날 신명여학교(신명고등학교 전신)에서는 23세 젊은 여교사가 여학생들을 이끌고 독립만세시위에 앞장섰다. 그의 이름은 임봉선이었다. alt신명여학교 초창기 모습alt신명여학교alt신명여학교 내 신명3·1기념탑(1972년) 만세시위 참여를 권유받다이른바 서문시장 만세운동은 대구·경북 지역 독립선언서 배포 책임자인 이갑성에 의해 추진되었다. 그는 비밀리에 목사 이만집·조사 김태련·계성학교 교사 백남채 등을 만나 거사 계획을 세웠다. 3월 3일 독립선언서 200매가 이만집에게 전달되었고, 7일에 신명여학교 교사와 학생 등은 평양 숭실학교 학생 김무생과 김천 장로교회 전도사 박제원의 방문을 받았다. 이들은 교사와 학생들에게 서울과 평양에서 일어난 3·1운동과 여성들의 독립선언운동 참가 상황을 전하면서 만세시위에 적극 참여할 것을 권유하였다. 학생들을 이끌고 만세운동에 앞장서다본적 경북 칠곡군 인동면 진평동. 임봉선은 당시 대구 신명여학교 교사로 학교 기숙사에 거주하고 있었다. 신명여학교는 그녀의 지도 아래 50여 명이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였다. 임봉선은 남산정 학교 교문을 출발하여 남성정(현 중구 남성로 약전골목 제일교회 근처)으로 향했다. 학생들은 각자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행진하였다. 그러나 이미 첩보를 입수하고 경찰력을 증원한 남산정파출소가 시위대를 해산시켰다. 시위대 선두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던 임봉선은 현장에서 체포되어 징역 1년형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대구만세운동은 3월 8일에 시작하여 10일까지 연 사흘간 계속되었고, 3월 30일에 또다시 일어났다. 특히 만세운동 첫날인 3월 8일에는 무려 천여 명이 모여 대규모로 전개되었다. 그날은 대구의 장날로,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때를 이용하여 만세운동을 계획하였다. 집결지는 큰 장터 소금집 앞 빈터(현 섬유회관 정문 건너편 속칭 동산동 실골목 입구)였다.학생들과 함께 만세시위에 앞장서다거사 장소인 시장에 집결하기 위해서는 잠복한 사복형사들의 감시망을 피해야 했다. 일반 교인들은 모두 장꾼으로 변장하여 시장 안으로 들어갔고, 계성학교·신명여학교·성서학당·대구고등보통학교 등의 학생들은 동산의료원 솔밭 오솔길을 이용하였다. 계성학교 학생들은 흰 두루마기를 입고 동산의료원 솔밭 사이로 흩어져 들어가 거사 장소에 접근했다. 일부 신명여학교 학생들은 빨래하러 가는 척 대야에 헌 옷가지를 담아 들고 버들치 냇가로 내려갔다. 한편 대구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은 일본인 교장과 교사들의 감시를 피하느라 출발이 늦어졌다. 다급해진 학생들은 신작로를 피해 남산동 들판을 가로질렀다. 일부는 계산성당 앞으로, 일부는 동산의료원 솔밭 사이로 흩어져 집결지로 향했다.오후 3시경 천여 명의 군중이 시장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를 고창한 후 시위에 들어갔다. 시위대는 동산의료원 옆 선교사 거주 지역 사이로 난 좁은 숲길 넘어 현재의 대구백화점까지 진출하였다. 대구만세운동은 당시 남성정교회(현 제일교회)·남산정교회(현 남산교회)·서문교회의 목회자와 교인들, 계성학교·신명여학교·대구고등보통학교·성경학원의 교사 및 학생들과 수많은 시민들이 합세하여 일으킨 범시민적 항일독립운동이었다.평소 사람들의 눈길을 끌지 못했던 동산의료원 언덕 솔밭은 대구만세운동의 중요 비밀 통로 역할을 했다. 이제는 그때의 울창한 솔숲과 작은 오솔길이 사라졌지만, 2003년 ‘대구 3·1운동길’로 명명되어 대구만세운동의 현장을 보존하고 그 정신을 기리고 있다. ‘대구 3·1운동길’은 중구 골목투어 근대문화골목 코스를 따라 동산 청라언덕으로 이어지는 ‘90계단’이 특히 유명하다.3·1운동 현장이 근대 문화유산으로 계승되다 ‘동산’은 대구제일교회를 설립한 아담스(James E. Adams)와 동산병원(동산의료원의 전신)을 설립한 존슨(Woodbridge O. Johnson) 선교사가 1899년 달성 서씨 문중으로부터 매입한 작은 언덕이다. 선교사들은 사택·동산병원·신명여학교·계성학교 등을 설립하였다. ‘청라(靑蘿)’는 푸른 담쟁이를 가리키는 말로, 언덕 위에 붉은 벽돌로 지은 건물들이 푸른 담쟁이 넝쿨에 둘러싸여 청라언덕이라고 불렸다. 신명여학교는 1972년 10월 교내 소공원에 신명3·1기념탑을 건립하여 독립운동의 정신을 기리고 있다. 이는 지나간 과거사가 아니라 오늘날 학생들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교육현장으로 활용하기 위함이다. 정부에서는 임봉선의 공훈을 기리어 1983년 대통령 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alt임봉선alt대구 3·1운동길 90계단 [우리가 몰랐던 이야기 둘]글 신현배 역사칼럼니스트독립운동에 기여한 조선의 무역 왕, 최봉준최봉준은 1862년 함경북도 경흥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어머니를 여읜 그는 12살에 아버지마저 잃었다. 친척도, 돌봐줄 사람도 없었던 그는 몇몇 일행과 함께 돈 몇 푼이라도 벌기 위해 일자리를 찾아 얼어붙은 두만강을 건너 간도의 국자가로 갔다. 그곳에 가면 러시아 사람들이 농장에서 일할 노동자들을 뽑아 데려간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alt블라디보스토크의 한국인alt블라디보스토크 항구 빈손으로 헤맨 러시아에서 만난 행운우여곡절 끝에 노동자 소개소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문을 닫아 러시아인들이 철수한 뒤였다.“우리가 너무 늦게 왔나 봐. 어떻게든 일자리를 찾아야 하는데 이를 어쩌지?”“여기까지 왔는데 러시아 연해주로 가는 게 어때? 숲속으로 들어가면 러시아인들의 일터에서 나무 베는 일을 할 수 있을 거야.”최봉준은 일행과 함께 연해주로 향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강추위가 찾아와 숲에서 일하던 러시아인들이 모두 떠나고 없었다. 그들이 머물던 임시 숙소인 오두막은 텅텅 비어 있었다. 최봉준은 낙심한 채 숲에서 일행과 헤어진 후 마을을 찾아 헤맸다. 눈이 쌓여 길바닥은 몹시 미끄러웠다. 수없이 넘어지며 수십 리 길을 걷고 또 걸었다.어느덧 날은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그때 숲에서 ‘야린스키’라는 러시아 귀족을 만났다. 그는 최봉준의 딱한 사정을 듣고는 근처 자신의 별장에서 지내도록 했다. 이후 최봉준은 야린스키의 양아들이 되어 7년 동안 보살핌을 받으며 성장했다. 야린스키에게 러시아 말을 배웠고,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와 지식을 얻었다. 뿐만 아니라 야린스키가 죽은 뒤에는 그의 유언으로 별장과 농장을 물려받았다.생전 야린스키는 최봉준에게 ‘네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해라’, ‘목표를 분명히 세워라’, ‘할 수 있다고 믿으면 틀림없이 해낼 수 있다’ 등 여러 조언을 해주었다. 성인이 된 최봉준은 그가 남긴 교훈을 떠올리며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나는 조선인이지만 러시아에서 오래 살아 러시아 말을 할 줄 알아. 그리고 러시아 사정에 밝지. 조선과 러시아 간의 무역을 한다면 남들보다 잘할 수 있을 거야.’무역으로 성공해 독립운동에 기여하다무역업을 하기로 결심한 최봉준은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갔다. 그곳은 러시아의 이름난 군사 도시였다. 당시 러시아에서 펼친 남하정책으로 블라디보스토크에는 군인들이 많았다. 처음에는 러시아에서 달걀을 사 함경도에 파는 일을 하다가, 이윽고 러시아 군대로 눈길을 돌렸다. ‘블라디보스토크에는 수만 명의 러시아 군인들이 있어. 이들이 먹어치우는 쇠고기나 군화·군복을 만드는 쇠가죽의 양이 엄청날 거야. 우리 조선의 소를 러시아에 팔아 보자.’ 최봉준은 고향 경흥에서 10여 마리의 소를 사서 블라디보스토크의 러시아 군대에 팔기 시작했다. 이렇게 시작한 무역업은 점점 규모가 커져 수백 마리의 소를 러시아에 파는 정도가 되었다. 조선에서 소 한 마리를 30원에 주고 사면 러시아에서는 10배로 팔 수 있기에 이윤을 많이 남길 수 있었다.마침내 최봉준에게 떼돈을 벌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조선에서 소 전염병이 돌아 소 값이 10분의 1로 뚝 떨어진 것이다. 최봉준은 병든 소들을 싼 값에 사들인 후 수의사를 불러 병을 치료했다. 완치된 소는 러시아로 보내 제값을 받고 팔아 큰 이득을 취했다. 또한 해로를 통해 소를 한꺼번에 많이 실어 나를 수 있도록 일본의 대형 화물선을 여러 척 사들였다. 그리하여 다달이 1천여 마리의 소를 러시아에 팔 수 있었다. 그는 소뿐만 아니라 콩도 러시아에 수출했으며, 광목·비단·석유 그리고 여객 운송까지 도맡으면서 그야말로 돈방석에 앉게 되었다. 1898년경 함경도 성진항으로 귀국한 그는 ‘국제무역상사’를 차려 해외 각지의 비단과 양목 등을 쌓아 놓고 팔았다. 성진을 중심으로 원산·경흥과 블라디보스토크·부산·홍콩·상하이·일본 등을 잇는 조선의 무역 왕으로 자리를 잡은 것이다.최봉준은 천만 장자라 불릴 만큼 큰돈을 벌었지만 돈을 헛되이 쓰는 법이 없었다. 일제에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젊고 능력 있는 인재들을 양성하고자 했던 그는 러시아 한인 지역에 학교를 설립했다. 또한 조선인들에게 항일정신을 일깨울 신문사를 세워 운영했으며, 러시아로 망명한 독립운동가들을 돌봐주기도 했다. 특히 1909년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처단 당시에는 안중근의 변호사 비용과 가족의 생계지원에 발 벗고 나섰다. 최봉준은 1906년 러시아 연해주로 돌아갔는데, 안타깝게도 말년의 행적에 대해서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신현배역사와 전통문화에 대해 관심이 많은 역사칼럼니스트. 저서로는 역사 이야기 『엉뚱 별난 한국사』, 『엉뚱 별난 세계사』, 『2000년 서울 이야기』, 『세계사로 배우는 법 이야기』, 전통문화 이야기 『소중한 우리 문화 지식 여행』 시리즈 등이 있다. ]]> Thu, 28 Sep 2017 14:42:53 +0000 10 <![CDATA[삶이 역사가 된 영웅들의 흔적 ]]> 글 심용환 역사N교육연구소 소장삶이 역사가 된 영웅들의 흔적역사적으로 볼 때, 비범한 인물들은 자신이 살아온 삶의 흔적을 공간에 남겼다. 독립운동의 역사 속을 온몸으로 살다간 선열들이 후대를 통해 계속 기억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한말부터 일제 36년까지 고난의 시절, 전국 각지에서 지역의 경계를 넘나드는 각종 구국운동과 독립운동이 일어났다. 전국에 남겨진 사적지를 통해 그들의 삶을 떠올려 보자.            서울: 한말 구국운동의 중심지서울은 대한민국의 수도임은 물론 조선왕조 500년의 도읍지이기도 했다. 심지어 일제강점기에도 서울을 중심으로 식민통치가 자행되었기 때문에 어떤 지역보다 당시의 비극과 독립운동의 숨결을 생생히 느낄 수 있는 공간이다. 오늘날 낙원상가 일대인 인사동 그리고 북촌을 아우르는 지역은 한말 구국운동의 중심지이다. 이곳에는 1894년 개교한 최초의 근대식 초등교육기관인 교동초등학교, 흥선대원군이 머물렀던 운현궁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다. 사실 인사동 일대는 조선시대에 수많은 유명인사들이 머물던 곳이다. 고관대작의 커다란 집들이 몰려있었고, 조광조·이이 같은 유명한 유학자들이 인사동 골목을 거닐었었다. 급진개화파의 지도자이자 갑신정변을 이끌었던 박영효의 생가(현 경인미술관) 역시 이곳에 있다. 갑신정변 당시 화재로 인해 대저택이 파손되면서 안채만 남게 되었는데, 그마저도 일부는 남산골 한옥마을로 옮겨갔다. 위치상 흥선대원군의 저택과 박영효의 생가가 마주 보고 있다는 사실은 흥미를 자아낸다. 경인미술관은 헌법재판소 인근을 비롯하여 김옥균·홍영식 등의 급진개화파들이 이곳에 몰려 살면서 의기를 불태웠다는 것을 가늠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alt 북촌한옥마을 전경 alt인사동 거리alt운현궁 인천: 국민의 의지로 임시정부를 세운 곳인천은 부산·군산·목포·통영 등 일제강점기 대표적인 항구도시 가운데서도 강화도조약 당시 우선적으로 개항되었을 만큼 정치적·경제적 요충지였다. 인천을 대표하는 명소로는 자유공원이 있다. 1888년 만국공원이라는 이름으로 세워진 자유공원은 맥아더 공원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실제로 공원의 중앙에는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던 맥아더의 동상이 자리하고 있다. 동상이 세워진 것은 6·25전쟁 이후인 1957년으로, 그때부터 이곳은 맥아더와 인천상륙작전을 기리는 상징적인 공간이 되었다. 하지만 자유공원이 상징하는 역사적 사건은 이외에도 더 있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자유공원은 한성정부의 탄생과도 맥을 같이 한다. 3·1운동 이후 바로 이곳에 시민들이 모여 국민대회를 열었고 이 여파로 ‘한성정부’가 수립되었기 때문이다. 1919년 4월 세워진 한성정부는 대한국민의회·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와 더불어 선포되었다. 유일하게 인천과 서울에서 국민대회를 열고 직접 민의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정부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3개 정부의 통합 논의가 진행되고 최종적으로 상하이에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하기로 결정되었을 때 한성정부는 정통성을 인정받았다.자유공원은 ‘자유’ 혹은 ‘인천상륙작전’으로만 그 의미가 국한되어 기억되기에는 참으로 아쉬운 역사적 배경을 지니고 있다. 현재 자유공원에는 충혼탑을 비롯하여 석정루·연오정 등이 있고 인천 시가지와 항만, 시원한 바다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어 휴식의 공간으로 제격이다.         alt일제강점기 인천항alt자유공원의 맥아더 동상 천안: 독립을 향한 열망이 들끓었던 곳흔히 충청도 사람은 말과 행동이 느리고 속을 알 수 없다고들 한다. 그러나 독립운동사를 보면 이것이 편견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손꼽히는 독립운동가 중에는 충청도 출신이 많다. 유관순과 윤봉길 또한 충청도 사람으로 각각 3·1운동과 한인애국단 홍커우공원 의거의 선봉장으로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전라도를 기반으로 활동한 전봉준을 도와 마지막 동학농민운동의 열기를 끌어올렸던 손병희 역시 충청도 접주로서 활약한 인물이다. 동학농민운동의 경우 대부분의 사적지가 전라도 일대에 산재하지만, 2차 농민봉기 당시 일본군과 접전을 벌였던 우금치 고개는 충청남도 공주에 있다. 현재 천안에는 사적 제230호로 유관순 열사 유적이 있다. 유관순은 이화학당 학생으로 3·1운동 확산을 위해 무던한 노력했으며, 거사를 알리기 위해 전날 밤에는 매봉에 올라 봉화를 올리기도 했다. 마침내 거사 당일 아우내 장터에서 만세운동을 하며 선봉에 섰던 유관순은 동료 30여 명과 체포되었고, 끔찍한 고문으로 끝내 순국했다. 유관순 열사 유적지에는 이를 기리기 위한 기념비와 추모각, 복원된 생가와 기념관 등이 있다. 또한 봉화대와 봉화탑을 건립하여 매년 2월 마지막 날에 봉화를 올리는 행사를 진행해 유관순의 3·1운동 정신을 기리고 있다.         alt유관순alt유관순 열사 유적alt유관순 동상 안동: 선비에서 동등한 국민의 한 사람으로경상도에는 유교 문화와 불교 문화가 산재해 있다. 병산서원·도산서원·옥산서원 등 조선시대 유교 문화의 정수가 모두 경상도에 오롯이 보존되어 있고 부석사처럼 삼국시대부터 내려온 고찰까지 더하면 가히 한민족 역사의 핵심이라고 불릴만한 지역이다. 그간 많은 개발 사업이 있었지만 고택을 허물지 않고 그대로 옮겨 보존함으로써 역사관광지대를 형성하고 있다.임청각은 고성이씨 종택으로 조선시대 명문가로도 유명하다. 임청각이 인기 많은 관광지로 자리매김한 이유는 단지 명문가라서가 아니다. 독립운동가 이상룡을 배출했기 때문이다. 조선 후기 경상도는 다른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매우 보수적이고 전통 유지에 대한 고집이 강한 곳이었다. 이상룡 역시 처음에는 의병활동에 참여하며 국권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애국계몽운동을 거쳐 1907년 결성된 항일 비밀결사조직이자, 우리 역사 최초로 민주공화정을 표방한 신민회에 참여하였다. 1919년 3·1운동 이후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하여 국무령에 올랐다. 전통적인 선비에서 민주공화주의자로 변모했다는 점에서 이상룡의 행적은 특별한 역사로 기록될 만하다.         alt이상룡alt임청각 광주: 이념의 차이를 넘은 민족운동광주하면 1980년 5·18광주민주항쟁을 선두로 떠오르는데, 시대적으로 그보다 앞서 광주에 또 하나 잊어선 안 되는 역사가 있다. 바로 1929년 광주학생운동이다. 3·1운동 이후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가장 큰 규모로 발생한 민족적 저항운동이다. 1926년 순종이 승하하고, 민심은 3·1운동 같은 대규모 만세운동을 준비했으나 이를 예상한 일제의 철저한 차단으로 성공하지 못했다. 하지만 전화위복이 되어 이 일을 계기로 좌우합작을 이룰 수 있게 되었고, 신간회라는 단체가 탄생했다. 이념을 넘어 민족협동전선을 구축한 것이다. 신간회는 1929년 광주고보(현 광주제일고등학교) 학생들과 광주중학 일본인 학생들 간의 충돌이 민족운동으로 발전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했다. 광주제일고등학교는 이러한 광주학생운동의 발생지 중 한 곳이다. 현재 교내에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탑이 있어 후대에 그날의 영광을 일깨우고 있다.         alt광주제일고등학교 내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탑alt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 제주도: 바다 건너 함께 독립을 외치다 제주도에서도 항일운동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 섬이라는 지리적 특징과 더불어 오래도록 관광지의 이미지가 강했기 때문이다. 역사적 배경이라면 삼별초 최후의 항쟁이라든지 제주 4·3사건 같이 고려시대나 현대사와 관련되어 연상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제주도 법정사에서는 3·1운동이 일어나기 다섯 달 전에 항일무장투쟁이 벌어진 바 있다. 일본의 강제 수탈에 맞서 승려 김연일·방동화 등이 중심이 되어 신도와 민간인 400여 명이 일으킨 제주항일무장투쟁은 제주도 최초의 대규모 항일운동으로 기록되고 있다.         alt 법정사 항일운동 발상지 독립운동은 전국 방방곡곡에서 다양한 형태로 이루어졌다. 당시의 수많은 구국의 몸부림은 흔적으로 남아 오늘날 독립운동사적지로서 우리의 곁에 있다. 자신과 가족의 안락함보다 조국 광복이라는 대의를 위하여 치열한 불꽃처럼 살다간 고귀하고 아름다운 흔적으로!                    심용환성균관대학교 사범대학에서 역사교육학을 전공했다. 현재 팟캐스트 <진짜 역사 가짜 역사>를 통해 재미있고 올바른 역사 이야기를 전파하고 있으며, CBS와 공동으로 <심용환의 근현대사 똑바로 보기>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저서로는 『헌법의 상상력』, 『심용환의 역사토크』, 『단박에 한국사』 등이 있다. ]]> Thu, 28 Sep 2017 11:16:01 +0000 10 <![CDATA[세상사는 모두 남녀의 협력으로 이루어진다 ]]> 글 이성주 역사칼럼니스트세상사는 모두 남녀의 협력으로 이루어진다세상이 살기 어려워졌는지 ‘혐오’라는 단어가 심심치 않게 들려온다. 특히 남녀 사이에서 기인하는 혐오는 일상이 된 듯하다. 한쪽에선 페미니즘을 외치며 양성평등을 말하고, 또 반대편에선 여성에 대한 과도한 혜택 덕분에 남성들이 역차별을 당한다고 주장한다. 과연 어떤 게 진실일까? 성별을 뛰어넘은 독립운동가“조선 사람으로서 독립운동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오. 남자가 활동하는데, 여자가 못 할 이유가 있소?”한말 여성에 대한 교육이라곤 거의 전무하던 시절, 신여성으로서 당당히 독립운동사에 이름을 올린 독립운동의 대모 김마리아. 그녀의 독립운동은 남녀차별에 맞선 싸움이자, 남녀가 함께 나아갈 길을 도모하는 투쟁이었다. ▲1892년 6월 18일 황해도 장연군 출생 ▲1910년 정신여학교 수석 졸업 ▲1916년 동경여자학원 대학부 영문과 입학 ▲2·8독립선언을 준비했으나, 여학생의 명단은 빠짐. 이에 여성의 항일독립운동 참여에 대해 고민 ▲1919년 2월경 귀국하여 여성들의 궐기 요청. 이후 일본경찰에 체포 ▲이후 6개월간의 고문을 당한 후 출감 ▲1919년 9월 20여 명의 여성 지도자들을 모아 대한민국애국부인회 결성 ▲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전국적으로 확대하고,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자금 지원 ▲1923년 미국 유학. 10여 년간 사회학, 교육행정학 등 공부. 유학 중에도 근화회(槿花會)를 조직하는 등 민족정신을 고취시킴 ▲1932년 귀국 이후 교육활동 ▲1944년 3월 52세 일기로 세상을 떠남 2·8독립운동 당시 김마리아도 참여했지만, 정작 조선청년독립단 대표 11명의 이름 중 여성의 이름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녀의 고민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독립운동에서 여성의 역할론에 대해 진지한 성찰을 하게 되었다. 김마리아는 여성들의 참여를 더 확대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리하여 1919년 2월 기모노 허리띠에 독립선언문을 숨긴 채 귀국하여 지방을 순회하며 독립운동을 고취하는 데 앞장섰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3·1 운동이 시작되면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는 위기에 처하고 만다.“일본 사람들이 나를 얼마나 고문했는지, 물과 고춧가루를 코에 넣고 가마에 말아서 때리고 머리를 못 쓰게 해야 이런 운동을 안 한다고 시멘트 바닥에 구둣발로 머리를 차고….”모진 고문 속에서도 민족 독립에 대한 의지는 꺾일 줄 몰랐다. 독립을 향한 열망은 더욱 불타오르고 행동은 강철같이 단단해졌다. “김마리아 같은 여성 동지가 열 명만 있었던들 대한은 독립이 됐을 것이다.” 안창호가 남긴 이 말은 여느 남성 못지않았던 독립운동가 김마리아의 기개를 잘 보여준다.남녀가 함께 모색하는 성공의 길김마리아는 말했다. “남자가 활동하는데, 여자가 못 할 이유가 있소?”독립운동이란 대의 앞에 남녀 구별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러나 여성의 활동이 자유롭지 않았던 당시 사회 분위기를 본다면, 시대를 앞서나간 파격적인 주장이다. 김마리아는 여성도 남성 못지않게 독립에 대한 강한 의지와 실천력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 여성계의 희망이었다. 일본 경찰의 모진 고문과 회유 앞에서도 김마리아는 굳은 결기를 잃지 않았다. 지금으로 보자면 페미니스트의 사표(師表)라 말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김마리아는 재판관 앞에서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세상이란 모두 남녀가 협력해야만 성공하는 것이다. 좋은 가정은 부부가 협력해서 만들어지고, 좋은 나라 또한 남녀가 협력하는 것만으로도 만들어지는 것이다.”세상은 남자 혼자만으로 살아갈 수도, 여자들만으로 살아갈 수도 없다. 하물며 성패가 달린 일에서 남녀 구분이 가당키나 한 말일까? 좋은 가정은 부부가 협력해서 만들어지듯이 좋은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는 남녀 간의 협력이 필요하다는 주장. 너무도 당연한 말이지만, 지금의 우리 세대들이 잊어버린 말일 수도 있다.페미니즘(Feminism)의 사전적 의미는 여성이 남성과 같은 권리와 기회를 누려야 한다는 믿음과 목표 혹은 이를 위한 투쟁이라 말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봤을 때, 100여 년 전 김마리아의 삶은 진정한 페미니스트가 아닌가. 남자가 하는 일이라면 여자도 못 할 일은 없다는 당찬 포부. 나아가 더 큰 성공을 위해서는 남녀가 협력해야 가능하다는 선언까지.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는 남녀가 따로 없다는 말의 어간에는 여성의 능력을 인정하고, 이에 대한 정당한 평가가 필요하다는 말이 숨어 있다. 그리해야 남녀 간의 평등이 이루어지고 진정한 의미의 ‘협력’이 이루어지리라 믿은 것이다. 김마리아의 말처럼 세상은 남자만으로, 혹은 여자만으로 살아갈 수 없는 곳이니 말이다.                    이성주시나리오 작가 겸 역사칼럼니스트. 대중과 함께 호흡하는 글쓰기를 목표로 『조선의 민낯』, 『왕들의 부부싸움』과 같은 역사서를 출간한 바 있다. 최근에는 국제정치와 관련된 연구 및 집필에 열중하고 있다. 『전쟁으로 보는 국제정치』 시리즈 1, 2, 3권을 출간 중이다. ]]> Thu, 28 Sep 2017 10:36:12 +0000 10 <![CDATA[시간은 머물고 우리는 물드는 ]]> 시간은 머물고 우리는 물드는온 세상 빛이 여기에 다 모여 숨이 멎을 듯, 무어라 할 말조차 잊어버렸습니다.이곳은 어느 세상이기에이다지도 아름다운가요.꼭 잡은 손, 나란한 발걸음고운 얼굴을 하고 있는 단풍을 따라갈수록우리도 발그레 물들어 갑니다.자박자박 낙엽 소리만이 들리는 이곳모든 것은 멈추고 시간마저 머물다 갑니다. ]]> Thu, 28 Sep 2017 10:15:11 +0000 10 <![CDATA[잠들어 있는 역사를 깨우다 ]]> 글 김주용 독립기념관 선임연구위원잠들어 있는 역사를 깨우다8월 29일 이제는 기억하는 사람들이 드문, 경술국치일의 이른 아침. 햇볕이 없는데도 날씨는 후덥지근했다. 우한(武漢)의 더위를 온몸으로 체감하며 한국독립운동의 젊은 인재를 배출했던 중앙군사정치학교 우한분교(武漢分校)를 찾아 나섰다. 걸출한 한인 청년들을 양성한 우한분교 제2 황푸군관학교로 불린 우한분교는 무창구 해방로에 위치해 있었다. 후난성 우한실험소학교 내에 있어 경비원에게 양해를 구하고 건물에 들어섰다. 우한분교의 기록에 남아있는 한인청년들의 활동상은 아래와 같다. 중앙군사정치학교 우한분교는 ‘황푸군관학교 우한분교’라고도 한다. 광저우(廣州)에 있던 황푸군관학교는 국민당 지배지역이 확대됨에 따라 각지에 분교를 세웠다. 광시(廣西)에 난닝분교(南寧分校)·후난(湖南)에 창사분교(長沙分校)·후베이(湖北)에 우한분교 등이다. 우한분교는 1927년 2월 12일 양호서원에 설립되었다. 여기에 특별반이 설치되어 한국학생들을 받아들였고 200명 가까운 한인 학생이 군사훈련을 받았다. 이들의 입교과정은 분명하지 않지만, 일부 학생들의 명단은 정치과와 포병과에서 확인되고 있다. 당시 우한에서는 국민혁명군으로 북벌전에 참가하였던 한인 장교들이 우한분교 학생들과 함께 유악한국혁명청년회(留鄂韓國革命靑年會)를 조직하였다. 그 회원 명단에서 진공목·안동민 등 우한분교 학생 24명이 밝혀졌다. 그들은 졸업 후 국민혁명군 제2 방면군 장빠구이(張發奎) 부대에 배치되어 우한봉기에 참여하였다. 건물로 들어서자 애국교육기지라는 큰 간판과 함께 하늘 높이 치솟은 수목들이 낯선 이방인을 맞아주었다. 입간판에 적힌 설명문을 자세히 보니 2005년 복원공사를 시작해 2007년에 개관하였다는 사실이 명기되어 있었다. 우한분교는 2013년 전국중점문물단위로 지정되었는데, 우리나라로 치면 국가에서 직접 관리하는 근대문화재로 이해할 수 있겠다. 또한 그해 중국의 정치가이자 소설가인 궈모러(郭沫若)의 자녀들이 방문하였다는 사실도 밝히고 있었다. 실험소학교 내에 있지만 아이들은 보이지 않았다. 제법 정돈이 잘된 문화재였다. 임공재 사진작가는 건물 규모가 제법 커서 전체를 찍기 위해서는 주변의 큰 건물을 찾아야 한다고 했다. 한참을 분주하게 다녔지만 만족할 만한 장소를 찾지는 못한 듯했다. 한국의 젊은 청년들이 조국 광복을 위해 자신들을 단련시켰다는 사실을 알릴 수 있는 조그만 표지판이라도 부착했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다. 우리는 작지만 소중한 꿈을 꾸며 발길을 돌렸다. alt 중앙군사정치학교 우한분교 전경         alt 중앙군사정치학교 우한분교 총영사관에서 가진 훈훈한 다과시간이번에는 조선의용대 창설 장소를 찾아 나섰다. 조선의용대 창설 장소라는 사진 속 뒷배경은 사찰이었다. 나이든 중국 어르신들을 통해 정확한 위치를 알아보려고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허사였다. 허탈했다. 하지만 그만큼 쉽지 않은 것이 잊어버린 역사적 공간을 발굴하고 복원하는 일이리라. 이번 답사 일정 중 하나는 주우한 대한민국총영사관 방문이었다. 약속된 시간은 오후 3시, 조선의용대 창설 장소를 찾는 데 많은 시간을 허비하여 40분이 지나서야 공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당시 한광섭 총영사는 한국독립운동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우한에서 전개된 한국독립운동의 위상을 잘 알고 있었다. 총영사관 관계자는 간단한 티타임을 하면서 중국 창사(長沙)에 진출한 한국의 철강회사가 한국독립운동 사적지에 해마다 경비를 지원하고 싶다는 의사를 피력했었다고 말했다. 고맙고 감동스러운 일이 아닌가. 우리는 격한 감동을 주고받으며 이번 답사의 여정과 목적에 대해 설명했다. 어쩌면 저마다 독립군의 열기가 이 자리를 감싸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착각에 빠질 만큼 분위기는 사뭇 진지하기까지 했다. 답사 일주일이 되어간다. 일행들의 얼굴에 피로하고 지친 기색이 역력해 이만 일찍 철수하기로 했다. 오늘의 저녁 메뉴는 콩신차이(空心菜)라는 채소를 볶은 요리다. 후베이 사람들은 매운 것을 아주 좋아한다. 오죽했으면 ‘음식이 맵지 않을까봐 걱정된다’는 말이 생길 정도일까. 식사를 간단히 해결하고는 내일 답사할 장소를 점검하며 하루를 마무리했다.         alt조선의용대 창설지 추정 장소    alt조선의용대 성립 기념사진(1938년 10월 10일) 중일전쟁을 통해 본 한국독립운동의 희망다음날 아침. 호텔을 나와 조선민족전선연맹 본부로 차를 몰았다. 조선민족전선연맹은 1937년 김원봉·김성숙·유자명이 결성한 단체로 주소는 일본조계 813가(현 승리가) 15호였다. 당시에는 일본조계지였던 곳이다. 1937년 7월 7일 이른바 루거치우(蘆溝橋) 사건을 시작으로 전면적인 중일전쟁이 일어났다. 독립운동 진영은 중일전쟁을 지켜보면서 한국독립운동이 활성화될 수 있는 중요한 기회가 되리라 판단하였다. 전 세계적으로도 반파시즘 통일전선이 확산되었으며, 그에 영향을 받은 중국의 제2차 국공합작이 한국독립운동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것이다. 이러한 객관적인 정세는 독립운동 진영의 협동전선운동에 유리하게 작용하였고, 또한 독립운동 진영 자체 내에서도 모든 역량을 결집해 효과적인 항일투쟁에 임하자는 요구가 대두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민족주의 우파세력은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 민족주의 좌파세력은 조선민족전선연맹을 결성하였으며, 이로써 양측이 연합할 수 있는 조건이 형성되기에 이르렀다.조선민족전선연맹은 1937년 11월 한커우(漢口, 지금의 우한으로 통합)에서 김원봉의 조선민족혁명당·김성숙의 조선민족해방동맹·유자명의 조선혁명자연맹 등 3단체가 단체본위 조직원칙에 의거하여 조직한 민족주의 좌파세력의 연합전선이었다. 조선민족전선연맹 결성과정에서 김성숙은 먼저 무정부주의자 유자명과 통일전선의 조직 방식에 대해 협의하였다. 이들은 조선민족전선연맹을 결성할 때, 단체본위 조직원칙에 합의했다. 이는 세력이 약한 소단체의 특성상, 강대한 조직과 연합하는 과정에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데 보다 유리하기 때문이었다. 반면 김원봉은 기존의 단체를 해체하고 개인본위 조직원칙에 의거한 강력한 단일당 구성을 주장하였다. 조선민족혁명당이라는 강력한 조직을 이끌고 있던 김원봉으로서는 자신의 주도하에 단체를 흡수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에 대해 김성숙은 “당은 함께 못하더라도 우선 연합전선을 펴자”고 주장하였다. 당시 김구의 민족주의 우파계열이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로 결집하여 세력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김원봉 또한 이와 대등한 좌파 연합체 결성이 시급한 실정이었다. 이와 같은 김성숙의 설득과 김원봉의 양보로 단체본위의 원칙에 의거한 조선민족전선연맹이 조직될 수 있었다. alt 조선민족전선연맹 터 조사된 바 없는 독립운동가들의 옛 터전조선민족전선연맹은 우한으로 이동한 후 사무소를 한커우 일본조계 813가 15호에 설치하였고, 구성원들 대부분이 그곳에서 합숙하였다. 그 무렵 조선민족혁명당의 김원봉·박차정 부부, 조선청년전위동맹의 최창익·허정숙 부부, 조선민족해방동맹의 김규광·두군혜 부부, 조선혁명자연맹의 유자명·유칙충 부부 또한 모두 한커우에서 생활하였다. 특별훈련반 한인 졸업생들이 우한으로 온 후, 조선민족전선연맹 산하에는 200여 명에 가까운 조선혁명가들이 집결하였다.옛 대화가, 현재의 승리가는 잘 정돈되어 있었다. 어설픈 서양식 건물이 들어서 있는 승리가는 차 두 대가 지날 수 있는 정도의 폭이었다. 조선민족전선연맹 본부의 주소 15호를 찾았다. 다만 15호 건물은 없고, 21호로 통합되어 있었다. 3층 규모의 건물, 조선의용대의 창설 주역들은 무엇을 위해 이곳까지 왔을까. 주상복합형 건물로 2층에는 밖으로 대나무를 길게 빼고 빨래를 걸어놓은 모습이 이채로웠다. 누구도 와서 조사하지 않았던 곳, 역사가 잠들어 있는 곳. 이곳에서 위대한 독립운동가의 발자취를 찾아보려 한다.         alt 승리가 15호 거리 전경 다음호에 계속 ]]> Thu, 28 Sep 2017 16:14:18 +0000 10 <![CDATA[폭력을 키우는 방관자, 침묵은 ‘그만’ ]]> 글 이현수 일상심리 전문작가, 자유기고가폭력을 키우는 방관자, 침묵은 ‘그만’“내 딸을 죽인 사람은 바로 우리 반에 있습니다.”사고로 딸을 잃은 여교사는 봄방학을 앞둔 종업식 날, 아이들 앞에서 충격적인 이야기를 꺼낸다. 자신의 아이가 학생들에게 살해당했다는 것. 범인은 13살 중학생으로 형사적 처벌 대상이 아니었다. 그녀는 결국 사적 복수를 결의한다.미나토 가나에의 소설 『고백』의 내용이다. 잔인한 진실에 근접해가면서 고통으로 일그러지는 인간 심리를 세밀하게 묘사한다. 범인들에게 가하는 복수의 전개도 흥미롭지만, 날로 흉악해지는 청소년 범죄와 이로 인해 상처 입은 사람들의 고통을 반영한 점이 인상적이다. 최근 이와 맥락을 같이하는 사건이 우리나라에서 터졌다. 부산 여중생 집단 폭행 사건이다. 폭행은 부산 사상구 엄궁동의 인적이 드문 공장 인근에서 벌어졌다. 가해자가 폭행 당시 피해 여중생의 처참한 모습을 찍은 사진을 자랑스럽게 선배에게 전송한 것이 인터넷상에 퍼지면서 사건은 세상에 알려졌다. 폭행에 가담한 인원은 총 5명. 철골 자재·소주병·벽돌·쇠파이프·의자 등으로 피해자를 무참히 가격한 사실은 사회에 큰 충격과 분노를 안겼다.이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교육부 발표에 따르면 전국 초·중·고교의 2016년 학교폭력 심의 건수는 1만9천500여 건이었다. 이는 2015년의 1만7천749건보다 증가한 수치로, 학생 1천 명당 학교폭력 심의 건수는 2015년 2.72건에서 2016년 3.09건으로 13%나 증가한 상태다.방관적 태도와 공감 부족이 키운 학교폭력교내 선후배 간 폭력을 비롯해 학교폭력이 발생하는 주요 이유는 바로 폭력에 침묵하기 때문이다. 일명 ‘방관자 효과’다. 이는 1964년 뉴욕 퀸스 지역 주택가에서 제노비스라는 여성이 강도에게 살해당한 사건에서 유래했다. 제노비스는 강도에게 쫓기는 35분 동안 주변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12명의 목격자는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않았고, 결국 그녀는 강도에게 살해당하고 말았다. 주변에 사람이 많을수록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돕지 않게 되는데, 이러한 현상을 방관자 효과라고 한다. 학교폭력 역시 사람이 많은 학교 안에서 일어나는 경우가 많지만,1) 학생들은 이를 보고도 못 본체하고 침묵하여 폭력에 간접적으로 가담한다.또 하나는 공감능력의 결여다. 최근 성신여대 김동희 교수팀은 서울의 한 중학교 학생 416명을 분석한 결과, 학교폭력 현장의 방관자를 ‘괴롭힘에 가담하는 학생’, ‘아웃사이더’, ‘피해자를 옹호하는 학생’의 3가지 유형으로 나눴다. 이 중에서 공감능력이 낮을수록, 선생님과 관계가 안 좋을수록, 괴롭힘에 대한 걱정이 많을수록 폭력에 가담할 확률이 높았다. 반면, 피해자를 옹호하는 학생들은 상대적으로 자존심·공감능력·사회문제 해결능력이 높게 나타났다.해결책1. 개인: ‘핑크셔츠데이’를 본받자학교폭력을 멈출 중심 키워드는 방관자로 정의되는 주변 학생들에게 있다. 본인은 ‘나와는 상관 없는 일’이라며 단순히 구경만 한다고 해도 가해자의 폭력을 암묵적으로 동의하는 것이 되고, 상황을 악화시키는 데 기여한다. 또한 방관자 역시 정신적인 피해를 받는다. 폭력 현장을 목격하고도 애써 무시하는 경우, 우울·무력감·불안·두려움·죄책감 등 부정적인 심리 영향을 받으며, 자기효능감과 대인관계에도 악영향을 미친다.2) 주변에서 벌어지는 폭력은 결코 나와 상관없는 일이 아니며, 나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폭력을 멈추기 위해 행동해야 한다.핑크셔츠데이(Pink Shirt Day)를 참고해 보자. 캐나다에서 한 남학생은 분홍색 티셔츠를 입고 등교했는데, ‘동성애자처럼 보인다’는 이유로 따돌림을 당하기 시작했다. 이를 본 다른 학생은 두고 보지 않았다. 다음날 분홍색 티셔츠를 입고 등교한 것은 물론, 분홍색 티셔츠 50벌을 사서 친구들에게 나눠주며 입으라고 권유하는 등 따돌림을 막기 위해 ‘행동’했다. 이 일을 계기로 캐나다 전역은 신학기가 시작될 무렵 핑크셔츠데이를 지정해 교사와 학생은 물론 유명인, 총리에 이르기까지 하루 종일 핑크셔츠를 입으며 학교폭력 예방에 나서고 있다.해결책 2. 학교 및 제도: 방관자 중심의 예방 교육현재 우리나라의 학교폭력 대처는 제도적 개선이 절실한 상황이다. 학교폭력 피해자 심리치료 지원은 물론, 중립적인 외부 전문가의 활발한 개입 역시 미비한 실정. 가장 우선해야 하는 것은 방관자 중심의 폭력 예방 교육의 확대다.핀란드는 2011년 ‘키바 코울루(KiVa Koulu, 좋은 학교)’ 프로그램으로 학교폭력을 21~63%나 감소시켰다. 1990년대 심각한 학교폭력으로 골머리를 앓았던 핀란드는 2006년부터 2009년까지 현장 사례 분석을 통해 ‘방관자가 없어야 한다’는 결론을 얻었다. 이후 토의 수업·비디오 영상수업·소규모 그룹 활동·컴퓨터 게임 등으로 학생들이 흥미를 느끼며 학교폭력 예방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이끌었다. 집단따돌림으로 유명했던 영국 역시 방관자에 초점을 둔 교육 프로그램으로 학교폭력이 크게 줄었다. 미국은 유치원생을 대상으로 학교폭력 예방 교육을 의무화한 상태로, 폭력에 직면했을 때 이에 대응할 수 있도록 체험적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또 노르웨이는 학교폭력을 당하거나 목격할 경우, “그만해(Stop)”라고 외치도록 가르친다. 이 역시 학교폭력 감소 효과가 입증돼, 국내에서도 실시된 바 있다.“아이들은 싸우면서 큰다”는 말은 더 이상 가볍지 않다. 최근 트라우마치유센터 ‘사람마음’이 내담자 100명을 조사했는데, 그중 청소년기에 당한 학교폭력으로 방문한 이들의 상당수가 30~40대에 해당됐다. 수십 년이 지났는데도 학교폭력의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내 일이 아니라고 모른척하기엔 피해자의 상처가 너무도 깊고 오래 간다. 폭력 앞에 침묵을 깨고 분연히 나설 수 있어야 피해자의 고통을 줄이고, 더불어 나 자신의 고통도 줄일 수 있는 길임을 기억해야 한다. 1) 학교폭력 피해 장소는 교실 안, 복도, 운동장 등 주로 학교 안(67.1%)으로 조사되었다. (2017년 1차 학교폭력 실태조사, 교육부)2) 학교폭력에 대한 청소년의 방관적 태도가 자기효능감과 대인관계에 미치는 영향(청소년복지연구 제14권 제4호, 2012년) 이현수일상심리 전문작가 겸 자유기고가. 매일경제·고용노동부·한국무역보험공사·서울신용보증재단·삼성생명·현대모비스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전문가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 Thu, 28 Sep 2017 14:59:42 +0000 10 <![CDATA[과학·문화·생태·역사가 한 곳에 대전광역시 ]]> 글·사진 김초록 여행칼럼니스트 과학·문화·생태·역사가 한 곳에대전광역시 첨단 과학의 도시 대전은 너른 들판이 많아 예부터 ‘한밭’으로 불렸다. 산과 들, 호수가 길게 뻗어 감싸고 그 사이로 갑천·유등천·대전천이 차례로 만나 금강으로 흐르니 천혜의 삶터로 모자람 없는 도시다. 도심 곳곳에 들어선 문화시설과 피로를 씻어줄 온천, 그리고 결코 잊어서는 안 될 역사도 간직하고 있다. alt 움직이는 집, 살아 숨 쉬는 집경부고속도로 대전 나들목으로 나오면 2km 거리에 단아한 건축미를 자랑하는 동춘당(同春堂)이 있다. 조선 효종 때 대사헌·이조판서·병조판서를 지낸 송준길이 자신의 호를 따서 이름 붙인 건물로, 보물 제209호다. 늘 봄과 같다는 뜻의 동춘당은 무심히 보면 평범한 집이지만 그 구조를 하나하나 뜯어보면 예사롭지 않은 건물임을 알 수 있다. 동춘당은 햇빛·바람·공기의 흐름을 반영하여 지어졌다. 기후 변화를 받아들여 내·외부 구분을 허물었다. 그야말로 ‘움직이는 집’, ‘살아 있는 집’인 것이다. 정면 3칸 중 마루로 되어 있는 동쪽 2칸과 온돌로 되어 있는 서쪽 1칸, 그리고 온돌방 서쪽 벽면은 사생활을 보호하고 빛을 차단하는 역할을 한다. 서쪽 벽면에 채광과 환기를 위해 조그마한 창문이 나 있으며 북쪽 벽면에는 안채를 통해 음식을 나를 수 있도록 출입구가 따로 마련돼 있다. 건물을 떠받치는 4각형의 키 높은 주춧돌은 조선 후기의 건물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양식이다. 주택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굴뚝을 따로 만들지 않은 것도 특징이다. 다만 왼쪽 온돌방 아래에 연기 구멍을 뚫어 놓았다.동춘당 처마 밑에 걸린 현판은 송시열이 쓴 것이다. 그의 자취는 이곳에서 멀지 않은 우암사적공원에도 남아 있다. 송시열은 선조 40년(1607년) 충북 옥천군 이원면 구룡촌에서 태어나 3살에 스스로 문자를 터득하고, 7세에 형들의 글 읽는 소리를 듣고 이를 받아썼을 만큼 총명했다고 한다. 공원에는 송시열이 제자들을 불러들여 학문을 익혔던 남간정사(南澗精舍)를 비롯해 송시열의 문집과 연보 등을 보관한 장경각이 있다.동춘당: 대전광역시 대덕구 동춘당로 80우암사적공원: 대전광역시 동구 충정로 53         alt동춘당alt동춘당 안채 alt 우암사적공원 alt 백제의 자취가 서린 계족산대전 시민들이 즐겨 찾는 계족산은 산세가 유순하고 완만해 쉽게 오르내릴 수 있다. 대덕구와 동구의 경계를 이루는 산으로, 계족(鷄足)이라는 이름 그대로 사방으로 뻗은 능선들이 닭의 발을 닮았다. 계족산은 무엇보다 맨발로 거니는 황톳길이 유명하다. 황토의 감촉을 피부로 느끼고 황토에서 뿜어져 나오는 원적외선의 효능을 맛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아오며, 외국인 관광객에게도 명소로 소개되고 있다. 신발과 양말을 훌훌 벗고 맨발로 황톳길을 걷노라면 발바닥으로 전해지는 상쾌함이 온몸을 감싼다. 산등성이에는 계족산성과 삼림욕장이 있어 하루 나들이 코스로 알맞다. 백제시대에 쌓은 계족산성은 산 정상 동북쪽으로 약 1.3㎞ 거리에 있다. 둘레는 1,038m, 높이는 10.5m에 이른다. 백제가 멸망한 뒤 백제부흥군을 중심으로 신라군의 진로를 차단하는 역할을 했고, 청주로 올라가는 길목이어서 조선 말기엔 동학농민군의 근거지로 이용되기도 했다. 계족산 산행은 경부고속도로 아래, 고성 이씨 집성촌인 비래골에서 출발해 옥류각~절고개(황톳길 갈림길)~계족산성~황톳길~장동산림욕장 코스가 무난하다.         alt 계족산 황톳길 alt현대와 과거가 공존하는 원 도심권대전의 중심부인 대덕, 중구(동구 포함) 지역은 근현대 100년 역사를 간직한 대전에서도 가장 ‘핫’한 곳이다. 답답한 도심의 허파 구실을 하는 숲과 하천(갑천)이 있고 각종 박물관과 미술관·한밭수목원·국립중앙과학관·엑스포 과학공원·대전컨벤션센터 등의 관광지가 몰려 있다. 특히 근대문화유산인 옛 충남도청과 옛 대전형무소, 옛 동양척식주식회사 건물 등은 역사교육장으로 훌륭하다.1919년 조선총독부가 세운 옛 대전형무소는 안창호·여운형·박헌영·김창숙 등 독립운동가를 비롯한 6·25전쟁 애국지사와 양민들이 수감되고 학살되었던 장소다. 1980년대 민주화운동이 한창일 무렵에는 독재정권 타도를 외친 무수한 시민들이 수감되기도 했다. 공원으로 변모한 형무소 터엔 망루, 우물, 왕버들나무만이 남아 아픈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옛 충남도청 건물(현 도청은 내포신도시로 이전했다)은 대전에 남아 있는 근대 관청 건물 중에서 가장 오래됐다. 밝은 갈색의 스크래치 타일을 두른 건물 외벽은 화려하면서도 고풍스럽다. 요철(凹凸) 모양으로 파내어 장식한 1층 내부의 벽면과 곡선의 기둥, 기단의 각이 눈길을 끈다. 이 건물은 1937년 일본 시즈오카현의 청사 본관 외관과 비슷해서 1930년대 관공서 건축 양식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건물 내에 마련된 대전근현대사전시관에서 대전의 역사와 인물, 독립운동가의 활약상 등을 자세하게 살펴볼 수 있다.이번엔 생태체험장으로 인기 높은 한밭수목원으로 간다. 목련원·약용식물원·암석원·유실수원 등 19개의 테마 정원과 열대식물원을 갖추고 있는 한밭수목원은 대전 시가지를 관통하는 갑천과 이어져 있고 정부대전청사와도 가까워 청사 직원들은 물론 근처 아파트단지 주민들도 즐겨 찾는 명소이다. 가을을 맞아 생태체험 프로그램도 실시하고 있다. 11월까지 매 주말마다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다양한 숲 관련 프로그램을 진행한다.구 대전형무소 망루: 대전광역시 중구 대종로 471대전근현대사전시관: 대전광역시 중구 중앙로 101 / www.daejeon.go.kr/mor/main.do한밭수목원: 대전광역시 서구 둔산대로 157 / www.daejeon.go.kr/treegarden alt옛 대전형무소 터의 왕버들나무alt옛 대전형무소 터의 우물 alt옛 충남도청 건물alt옛 충남도청 건물 내부 alt 한밭수목원 alt 독립운동가의 자취가 서린 장태산대전 시가지 외곽에서는 장태산자연휴양림도 들러볼만한 명소다. 장태산 자락 30여 만 평에 조성된 사유림으로 인공림과 자연림에 둘러싸인 12km의 숲속 산책로가 일품이다. 휴양림을 따라 작은 계곡이 있고 장태산 전망을 내려다 볼 수 있는 스카이타워도 설치되어 있다.1970년대부터 조성된 장태산의 메타세쿼이아 숲은 독립운동가인 임창봉이 혼을 다해 가꾼 작품으로 우리나라 휴양림의 시초격이라 할 수 있다. 그는 한평생 나무를 사랑한 임업가였다. 사재를 털어 장태산 24여 만 평에 20만 그루의 나무를 심고 정성을 다해 가꿨다. 휴양림 들머리에는 임창봉의 흉상이 서 있다. 단풍이 들어 오묘한 색깔을 보여주는 메타세쿼이아는 아득한 옛날 공룡과 함께 살아온 ‘화석나무’로 알려져 있다. 높이 35m, 지름이 2m까지 자라는 메타세쿼이아로 길게 뻗은 숲길은 가슴 탁 트이는 상쾌함을 선사한다.장태산휴양림에서 가까운 곳엔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말을 남긴 독립운동가 신채호의 생가가 있다. 신채호는 국권을 일본에 빼앗기자 신민회 가입·국채보상운동 추진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쳤으며, 상하이에서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의정원 의원 및 전원위원회 위원장을 역임, 베이징에서는 의열단의 『조선혁명선언』을 작성하는 등 나라의 독립을 위해 헌신을 다했다. 1936년 뤼순 감옥에서 옥사하기까지 역작 『조선상고사』를 펴내는 등 우리 역사를 알리는 데에도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의 생가 터에는 옛 모습을 살린 생가와 유허비 및 동상이 세워져 있다.장태산자연휴양림: 대전광역시 서구 장안로 461 / www.jangtaesan.or.kr단재 신채호선생 생가지: 대전광역시 중구 단재로229번길 47 alt장태산휴양림 메타세쿼이아 숲alt임창봉 동상alt신채호 생가지 alt 을미의병이 일어났던 유성장터대전 외곽의 유성은 우리 역사에서 결코 잊어서는 안 될 항일의병의 현장이다. 유성장터가 그 현장으로, 당시 모습은 찾을 수 없지만 놀이터와 마을회관이 있는 장터공원에 기념비인 을미의병사적지가 세워져 있다. 1895년 9월 진잠현감을 역임한 문석봉이 주축이 되어 송근수·신응조·오형덕·김문주·송도순 등이 유성장터에서 항일의병을 일으켰다. 600여 명에 달하는 의병들은 회덕현 관아에서 무기를 탈취하여 이곳 유성장터에서 의병을 모집하고 공주부 공략을 목표로 삼아 진격했다.유성에는 독립운동가를 비롯해 나라를 위해 헌신한 분들이 잠든 대전현충원이 있고 여행의 피로를 씻어줄 유성온천도 지척이다. 이곳의 온천수는 지하 50∼400m의 화강암 단층대에서 분출되는 27~56℃ 정도의 약알칼리성 단순천으로 60여 종의 각종 성분이 함유돼 있어 온천 마니아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온천타운 주변으로 대규모 숙박시설이 자리해 있고 한쪽에 들어선 족욕체험장도 인기가 많다. 따끈한 온수에 발을 담그면 손발 냉증이 사라지고 혈압·당뇨병·비만 등 성인병에 효과가 있다고 알려져 멀리서도 일부러 찾아오는 명소가 됐다.유성장터: 대전광역시 유성구 어은로51번길 63유성온천지구: 대전광역시 유성구 온천로 59         alt유성의병사적지alt유성온천단지의 족욕체험장 ]]> Wed, 01 Nov 2017 15:18:13 +0000 11 <![CDATA[독립기념관과 나눔 활동 ]]> 독립기념관은 사회를 구성하는 일원으로서, 기부·교육·문화 등 다방면에 걸쳐 사회공헌활동을 실천하고 있다. 이러한 나눔 활동은 소외계층 및 일반 국민들에게 나라사랑정신을 함양하고 독립운동가·국가유공자 및 후손들의 자긍심을 제고하여, 보다 따뜻한 사회를 만드는 데 기여하고 있다. alt]]> Wed, 01 Nov 2017 15:08:55 +0000 11 <![CDATA[지옥섬에 얽힌 비극적인 역사 영화 <군함도> ]]> 글 편집실지옥섬에 얽힌 비극적인 역사영화 <군함도>감독: 류승완주연: 황정민, 소지섭, 송중기, 이정현, 김수안개봉일: 2017년 7월 26일일제강점기에 조선인이 군함도에 강제 징용되었다는 사실은 예능프로그램 ‘무한도전’에서 다뤄지면서 어느 정도 알려진 바다. 관련 책 또한 여러 차례 출판된 가운데, 올해는 이를 바탕으로 한 영화 <군함도>가 개봉하면서 또 한 번 ‘역사 고증’의 논란이 일었다. 영화 줄거리를 살펴보며 실제 역사를 되짚어보자. Q. 일본 근대화의 그늘에 우리의 끔찍한 역사가 있다?1945년, 일본에서 돈을 벌 수 있다는 말을 듣고 각기 사연을 품은 조선인들이 이 배에 오른다. 얼마쯤 시간이 흘렀을까. 짙은 안개를 뚫고 도착한 곳은 바로 군함도(하시마섬). 조선인들이 마주하게 된 이 섬에서의 삶은 상상 이상으로 잔혹했다.군함도는 1810년경 석탄이 발견된 이후로 1890년 미쓰비시사가 인수하여 본격적으로 석탄 채굴을 시작한 탄광섬이다. 섬 주변을 시멘트로 도배하고 고층 건물이 들어서 있는 모습이 일본군함과 형태가 비슷해 ‘군함도’라 불렸다. 석탄을 채굴하기 위해서는 1km가 넘고 온도가 45도를 웃도는 지하로 내려가야 했는데, 일제는 여기에 조선인들을 강제로 징용해 착취하기 시작했다. 일본 산업혁명의 그늘에 조선인들의 희생이 있었던 것이다.          alt Q. 실제 군함도의 조선인 징용자들의 삶은 어땠나?군함도에서 노역에 시달리는 조선인들은 지옥과도 같은 하루하루를 보낸다. 속옷 한 장만 입고 지하 갱도로 끌려가 온종일 석탄을 채굴하고, 제대로 된 식사조차 하지 못해 피골이 상접해간다.군함도의 조선인 강제 징용자들은 어둠으로 가득한 지하탄광에서 12시간, 많게는 16시간씩 일해야 했다. 식사라고는 콩찌꺼기로 만든 주먹밥 뿐. 이마저도 일을 하지 않으면 굶어야 했고, 잦은 학대와 고문까지 이어졌다. 채굴 작업은 목숨을 담보로 하는 일이었다. 유독가스와 바닷물이 수시로 분출되었고, 자칫 발화되어 폭파사고가 일어나기도 했다. 기록에 따르면 1943년부터 1945년까지 약 800명의 조선인들이 군함도에 끌려갔으며, 그중 122명 가량이 사고·질식·압사 등으로 사망했다.         alt군함도에 강제 징용되었던 조선인들alt Q. 군함도를 탈출한 조선인이 있었다?미국의 폭격으로 패색이 짙어진 일본은 군함도에서 저지른 만행을 은폐하기 위해 조선인들을 모두 갱도에 가두고 폭파하기로 한다. 이를 눈치 챈 광복군 소속 OSS 요원인 무영(송중기)은 사람들과 힘을 합쳐 군함도를 탈출하기로 하는데….군함도의 또 다른 이름은 ‘지옥섬’이다. 육지가 아닌 바다 한가운데 있는 섬이기에 그만큼 그곳을 벗어나기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영화에서처럼 대규모 탈출 시도는 없었지만, 끔찍한 생활에서 도망치고자 했던 사람들은 있었다. 다만 긍정적인 결말은 결코 아니었다. 군함도의 파도는 거칠었다. 바다에 뛰어들었다가 대부분 익사했고, 설사 운 좋게 육지에 도착한다고 해도 그곳은 일본 땅이었기에 희망이 없었다. 탈출 시도를 했다가 잡힌 사람들은 혹독한 매질과 고문을 당해야 했다. alt Q. 광복 이후 군함도는 어떻게 되었을까?군함도는 주요 에너지가 석탄에서 석유로 전환되면서 1974년 폐광되었고, 그곳에 거주하던 일본인들도 모두 떠나 무인도가 되었다. 2009년 일본 정부는 ‘일본 근대화의 상징’이자 ‘해저탄광 유적’으로서 군함도의 역사·문화적 가치를 내세워 관광지로 개발하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2015년에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하기에 이르렀다. 등재 과정에서 우리나라의 거센 반발에 부딪힌 일본은 군함도에서 벌어진 조선인 강제징용을 인정하고 이를 유네스코 등재 결정문에 명시하기로 약속했다가, 등재 결정이 나고 하루 만에 “강제 징용이 없었다”고 번복했다. 잘못을 인정하기는커녕 과거를 미화시키고 있는 것이다.군함도, 그 지옥의 섬에서 저질러진 만행은 시간이 흐르고 아무리 덮으려 한들 결코 잊히지 않을 것이다. 일본의 사죄는 기필코 이루어져야 한다.          alt군함도 ]]> Wed, 01 Nov 2017 15:47:06 +0000 11 <![CDATA[죽음으로 절조(節操)를 지킨 선비 이근주 ]]> 글 학예실죽음으로 절조(節操)를 지킨 선비이근주(李根周, 1860.2.3. ~ 1910.9.23.)독립기념관은 국가보훈처·광복회와 공동으로 이근주를 11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그는 왜적, 매국 무리들과 한 하늘 아래 삶을 사는 것을 거부하겠노라며 죽음을 통해 절조를 지킨 선비였다. alt 의병을 일으키다이근주는 1860년 2월 충청남도 홍성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다. 1895년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단발령이 내려지자 이근주는 분개하며 홍주 목사 이승우에게 의병을 일으킬 것을 권하였다. 김복한, 안병찬 등 지역의 유생들과 연합하여 홍주성 내 창의소를 설치하고 의병을 규합하였다. 그러나 창의소를 설치한 다음날인 1985년 12월 4일(음) 이승우가 배반하여 김복한 등 주요 인물들이 붙잡혀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근주는 어머니를 만나러 자리를 비웠기 때문에 화를 면하였지만, 홀로 무사한 것을 부끄러워하며 자수를 결심하였다. 그러나 노모와 형이 ‘자수는 훗날을 도모하는 것보다 못하다’고 만류하자 뜻을 꺾었다. 이후 1896년 청양 일대에서 전(前) 수군절도사 조의현과 함께 의병을 일으키기로 하였으나 조의현마저 붙잡히게 되어 의병을 일으키려는 그의 뜻은 끝내 좌절되었다.         alt이근주 초상화(국가보훈처 제공)alt명성황후 국장 행렬(1897년 11월)alt단발령 지령 항일사적을 편찬하다의병을 일으키려는 뜻은 좌절되었으나 이근주는 이에 굴하지 않고 제국주의 침략 과정과 나라 잃음의 설움을 많은 글 속에 담아냈다. 1895년 홍주의병의 과정을 기록한 『을미록』, 나라가 매국의 무리에 의해 더럽혀짐을 한탄한 『절의가』, 장부인 자신이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한탄만 하고 있음을 적은 『신년탄사』 등이 있다. 이외에도 을사늑약에 항거하여 자결한 민영환과 이설에 대한 애도시 등을 남겼다.         alt일제에 국권을 빼앗겼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하는 사람들(1910년 8월 29일)alt신년탄사(1910년, 이강세 제공)alt을미록(1895년, 이강세 제공) 목숨을 버리고 의를 따르다1910년 8월 강제병탄이 되자 자결로 일제의 침략에 항거하기로 결심한 이근주는 1910년 『태일자문답약초(泰一子問答略抄)』에서 ‘슬프고 분하며, 창피하고 부끄럽다’는 이유로 죽을 수밖에 없음을 전하였다. 이후 아버지의 묘소 앞 나무에 사학을 배척하고 정학을 지킨다는 뜻의 ‘존화양이 척사부정(尊華攘夷 斥邪扶正)’의 유언을 새기고 1910년 9월 자결하였다.이근주의 자결은 평소 삶의 자세로 삼았던 맹자의 ‘사생취의(捨生取義)’ 즉 목숨을 버리고 의를 취한다는 자신의 신념을 실천한 것이었다. 이근주와 함께 의병을 규합했던 김복한은 의로움을 취했으며 인을 이루었다고 그의 공적을 기렸다. 그의 죽음은 개인의 희생에 그치지 않고 후학들에게 나라사랑정신을 고취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정부는 이근주의 공적을 기리어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alt이근주 부친의 묘(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낙상리, 이강세 제공)alt태일자문답약초(이강세 제공) ]]> Wed, 01 Nov 2017 15:33:52 +0000 11 <![CDATA[하나, 3·1운동으로 여학생들을 이끈 이아주 둘, 조선 호랑이의 씨를 말리다 ]]> [우리가 몰랐던 이야기 하나]글 은예린 자유기고가 3·1운동으로 여학생들을 이끈 당찬 이아주 2년 후면 삼천리 금수강산을 만세 소리로 진동시켰던 감격의 3·1운동이 100주년을 맞이한다. 만세운동은 국외 한인사회로 파급되어 당시 외국인에게 ‘낮선 나라’ 한국을 알리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분위기는 중국은 물론 피압박 민족에게도 독립의 소중함을 절감시켰다. 3·1운동과 3·1운동정신에 주목해야 할 이유는 여기에서도 찾을 수 있다. 3·1운동에서 존재감을 드러낸 여성들 근대사회의 도래와 더불어 여성들은 사회구성원으로서 자각하기 시작했다. 종교계의 선교활동 중 여성교육은 든든한 밑거름이었다. 완만하나마 여성교육을 통한 각성과 자기혁신은 사회적인 활동으로 이어졌다. 이는 ‘닫힌 사회’에서 벗어나 새로운 가치관에 의한 사회질서 모색으로 이어졌다. 대한제국기 여성단체의 활동이나 국채보상운동 당시 여성들의 적극적인 동참은 이를 반증한다. 이러한 소중한 체험을 바탕으로 여성들은 3·1운동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신여성이나 여학생만이 아니라 전통적인 아낙네도 동참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alt 이아주(동아일보 제공) 식민지 노예교육의 모순을 인식하다   이아주(李娥珠)는 평안북도 강계 출신이다. 본관은 용인으로 아버지 이봉섭과 어머니 김해 김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다른 이름은 이아수(李娥洙)·이애주(李愛主) 등이다. 꿈 많은 어린 시절을 보냈던 강계는 국경지대로, 외부인들의 왕래가 빈번하여 자연스레 바깥 세계의 소식을 접할 기회가 많았다. 부모님도 상당히 개방적인 사고로 자녀들 교육에 열성적이었다.이아주는 18세에 서울로 올라와 기독교계를 대표하는 정신여학교에 입학하였다. 환경의 변화와 번화한 서울거리는 호기심을 자극했다. 자유로운 학교생활을 보냈으나 식민지 노예교육이 지닌 모순도 점차 인식하기 시작했다. 번민과 갈등에도 결코 학창생활에 한 치의 소홀함이 없었던 이아주. 오늘날 모범생이라 해도 손색이 없다.시위 현장에서 여학생들을 이끌다만세 함성이 서울 시내에 울려 퍼지던 그날, 이아주는 정신여학교 졸업반이었다. 3월 1일 대규모 만세시위가 있은 후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에 숨고르기를 하는 정적이 마치 폭풍전야와도 같았다. 3월 5일에 제2차 대규모 시위가 있다는 소식이 퍼지면서 교내는 만세운동과 관련된 소식으로 흥분과 긴장에 휩싸였다. 그녀는 친구들과 함께 이날 아침 9시부터 전개될 예정인 남대문역 부근의 만세시위에 참가하기로 결심했다.이아주는 남대문역에서 학생과 시민 등으로 구성된 대규모 시위대에 합류하였다. 독립기를 앞세우고 흔들면서 독립만세를 고창하는 시위 군중과 함께 과감하게 시가행진을 벌였다. 지나가는 시민들도 가세하는 등 독립에 대한 열망은 그 기세가 대단했다. 그녀는 동지들과 함께 30여 명의 여학생을 이끌고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면서 나아갔다. 너무도 감격스러워 눈물이 앞을 가렸으나 전혀 개의치 않았다. 곧 독립이 되리라는 기대로 충만해진 순간이었다. 질서정연한 시위대를 보면서 한민족의 위대함에 스스로 놀라기도 했다 alt 정신여학교 학생들 자유와 평화로운 독립국을 꿈꾸며일제는 광분하여 시위대 해산에 나섰다. 기마대를 동원한 폭력적인 방식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분노를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이아주는 동지들과 함께 현장에서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다. 경찰서 유치장은 이른바 주동자로 초만원이었다. 그곳에서는 민족적인 멸시와 모욕감을 주는 살인적인 취조가 기다리고 있었다. “너희들이 만세를 부른다고 독립이 될 줄 아느냐!” 일제 경찰은 윽박지르고, 음흉한 시선과 비아냥거림으로 참기 어려운 인격 모독을 안겼다. 이아주는 인내심을 발휘하면서 “언젠가는 꼭 그리고 반드시 될 줄 안다”고 답변하며 주저함이 없었다. 취조하던 일제 경찰은 그 기세에 눌려 약간 풀이 꺾였다.그녀는 경찰서 유치장을 거쳐 서대문감옥으로 넘겨졌다. 그곳에는 이미 많은 여성 독립운동가가 수감되어 있었다. 미술가로 알려진 나혜석을 비롯하여 어윤희·권애라·신관빈·심명철·신진심·강기정 등과 함께 예심판결을 받고 복역하였다. 고통스러운 감옥생활에도 서로 격려하며 내일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병문안 인연으로 김성수와 일가를 이루다이아주는 만세운동 가담 혐의로 6개월 징역형을 언도받고 1919년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았다. 1920년 2월 27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이른바 출판법 및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선고받았으나, 병으로 1920년 3월 22일에 가출옥했다.이아주가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했을 때 김성수가 문병을 왔는데, 이러한 인연으로 후일 일가를 이루게 되었다. 김성수는 대한민국 제2대 부통령이자, 한국 근현대사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그녀는 자녀 양육과 남편 뒷바라지에 알뜰한 내조자가 되었다. 만년에는 중풍과 뇌출혈로 고생하는 남편을 극진하게 간호하였다. 정부는 3·1운동에 참여했던 이아주의 공로를 인정하여 2005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alt 김성수 [우리가 몰랐던 이야기 둘]글 신현배 역사칼럼니스트조선 호랑이의 씨를 말린 야마모토 정호군1917년 11월 3일자 <매일신보>에는 이런 내용의 기사가 실렸다. 일본 고베의 ‘송창양행’이라는 회사의 사장 야마모토 타다자부로가 호랑이를 사냥하기 위해 원정대를 이끌고 조선 땅에 온다는 것이었다. 조선 땅에서 벌어진 일제의 호랑이 사냥거액을 들여가면서 이런 대규모 호랑이 사냥을 벌이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암울한 시대 상황과 경제 침체로 인해 사기가 꺾인 ‘일본제국 청년들의 사기를 드높이기 위해’서라는 것이다.다른 곳도 아닌 조선에서 호랑이를 사냥하기로 결정한 것은, 300여 년 전 임진왜란 때 조선으로 원정을 떠났던 선봉장 가토 기요마사의 영향이었다. 추위를 피해 북관(北關)에 대군이 머무를 때 그가 땅에 떨어진 군사들의 사기를 높이고자 대규모 호랑이 사냥을 계획했다는 것이다. 가토 기요마사 자신이 선봉으로 나서 큰 호랑이 한 마리를 거꾸러뜨리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쇠약해지는 군대의 기세를 다시 떨치도록 했다고 전해진다. 어릴 적 이 이야기를 들은 야마모토는 자신도 조선에서 호랑이를 사냥해 일본 청년들의 사기를 드높이겠노라 마음먹었다.호랑이 사냥에 나선 야마모토 정호군(征虎軍)은 1917년 11월 12일 부산항에 도착했다. 야마모토가 지휘하는 이 원정대는 호랑이를 잡기 위해 보름 동안 온 조선 땅을 누비고 다녔다. 특히 집중적으로 활동한 곳은 가토 기요마사가 호랑이 사냥을 했다고 전해지는 함경도 지방이었다. 야마모토 정호군의 선봉으로 나선 것은 다름 아닌 조선인이었다. 강용근·이윤회·최순원 등 당시 호랑이 사냥으로 이름을 떨치던 명포수들이었다. 사냥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호랑이를 포함해 표범·곰·멧돼지·노루 등 갖가지 동물들을 닥치는 대로 포획했다.야마모토 정호군은 12월이 되어 경성으로 올라왔다. 조선호텔에서 모임을 가졌는데, 해산식을 겸하여 호랑이 고기 특별 시식의 만찬이 열렸다. 조선총독부의 야마가타 이사부로 정무총감을 비롯하여 이하 각 부 장관·귀족·은행사 중역·신문기자 등이 참석한 가운데 사냥으로 잡아온 여러 동물들로 만든 요리가 선보여졌다. 가장 인기를 끈 것은 ‘천하일품의 진기한 요리’라고 칭해지는 호랑이 고기로, 사람들은 맛이 훌륭하다며 칭찬 일색이었다.조선 호랑이 사냥의 시작일본인이 조선 땅에서 조선인 명포수들을 앞세워 조선의 호랑이를 마구잡이로 사냥하고, 그것도 모자라 총독부 고위 관리들과 친일파 인사들을 모아 시식회까지 열었다니, 참으로 기막힌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로서는 그들의 행태에 분노가 치미는 게 당연하다.일본의 조선 호랑이 사냥은 임진왜란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중병에 걸려 몸져누운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으로 원정을 떠난 장수 나베시마 나오시게에게 다음의 편지를 보냈다.내가 몸져누운 지 1년이 되어간다. 듣자 하니 내 병을 고치는 데는 호랑이 고기가 명약이라지. 조선에만 있는 호랑이를 잡아 그 고기를 구워 먹으면 내 병이 씻은 듯이 낫는다는구나. 약으로 쓸 호랑이를 잡아 소금에 절여 보내거라.나베시마 나오시게는 편지를 받고 곧장 호랑이 사냥을 시작했다. 다른 일본인 장수들도 그를 따라 사냥에 나서 호랑이 고기를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보냈다.또 야마모토 정호군의 영감이 된 가토 기요마사는 1592년 6월 함경도에 진을 치고 있던 중 늙은 호랑이 한 마리가 나타나 막사를 휘젓고 다니는 것을 보고 창을 들고 나가 물리쳤다고 전해진다. 그때 호랑이가 물어 부러뜨렸다는 ‘편겸창’은 가토 기요마사의 상징으로, 현재는 구마모토 현에 있는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제국주의 야욕으로 드러나다기록에 따르면 일제강점기인 1915년부터 1942년까지 총97마리의 호랑이가 희생되었다. 1921년 경주 대덕산에서 사냥한 호랑이가 한반도 남쪽에서의 마지막 호랑이로 알려져 있다.조선 호랑이 사냥의 근본적인 이유는 소영웅주의·부의 과시·제국주의적 이데올로기의 확산이라 볼 수 있다. 야마모토 정호군은 조선 호랑이를 마구 죽이며 식민지 조선을 발판으로 중국과 러시아까지 침략하겠다는 제국주의의 야욕을 드러낸 것이다. 일제는 맹수로부터 사람들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대대적인 호랑이 사냥을 했다. 하지만 그 속에는 한민족과 함께 살아온 동물을 멸종시킴으로써 우리 민족의 정기를 빼앗겠다는 비열한 의도가 숨겨져 있었다. alt 호랑이 사냥꾼 신현배역사와 전통문화에 대해 관심이 많은 역사칼럼니스트. 저서로는 역사 이야기 『엉뚱 별난 한국사』, 『엉뚱 별난 세계사』, 『2000년 서울 이야기』, 『세계사로 배우는 법 이야기』, 전통문화 이야기 『소중한 우리 문화 지식 여행』 시리즈 등이 있다. ]]> Wed, 01 Nov 2017 15:29:16 +0000 11 <![CDATA[나눔을 통해 실천한 독립운동 ]]> 글 심용환 역사N교육연구소 소장나눔을 통해 실천한 독립운동독립운동 역시 돈이 드는 사업이다. 고종황제가 각종 의병운동자금을 은밀히 지원했던 일이나 신민회(1907)나 대한민국임시정부(1919)를 만들 때 안창호가 미주 지역에서 자금을 모금한 것이 결정적 기여를 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진 이야기이다. 즉 다양한 형태의 기부와 나눔이 있었기에 독립운동이 이어질 수 있었다. 자신의 재산을 기꺼이 헌납한 양반들이회영 일가의 헌신은 최근 들어 널리 알려졌다. 일제의 조선 병탄이 확실해지는 시점에 이회영 일가는 가족회의를 열고 모든 재산을 처분하여 자금을 모았다. 오늘날 300억 원에서 500억 원에 달하는 규모였다고 하니 당시 사회적 위치가 상당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회영을 비롯한 6형제와 식솔 50여 명은 마련한 자금을 들고 만주로 망명하였고,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는 등 서간도 지역의 독립운동 발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일제가 ‘독립운동은 천한 것들이나 하는 짓’이라며 비하하는 내용을 선전하고, 다수의 조선 양반들이 친일 작위를 받아들이며 일제에 순응하던 상황 속에서 이회영 일가의 망명은 적지 않은 사회적 여파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조선시대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상징과 같은 경주 최부자댁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든든한 자금줄이었다. 경주최씨 집안은 조선 후기 이앙법을 비롯한 신농법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대지주로 성공한 대표적인 가문이다. 큰 부를 이룬 만석꾼이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지만, 그보다도 ‘사방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며 어려운 이웃에게 베풀었던 선행들이 지금도 여전히 회자되고 있다. 최부자 12대손인 최준은 안희제를 통해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지원했던 인물이다. 당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민족기업인 백산상회, 무역선박회사인 이륭양행 등의 도움을 받아 국내에 정보를 전달하고 자금을 모금하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특히 백산상회를 이끌던 안희제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지원은 물론 재정 상태를 관할하는 등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 군자금을 지원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감당했다. 최준은 안희제를 도와 자금처 역할을 도맡았고, 그의 동생 최윤과 최완도 독립운동에 헌신했다.한편 자신의 선행을 철저히 숨긴 인물도 있었다. 임진왜란 당시 동인이었던 김성일의 13대손인 김용환은 평생을 노름에 빠져 기행을 일삼으며 지내 ‘파락호(破落戶)’라 불렸다. 아내가 아이를 낳는 순간에도 땅 700마지기를 노름으로 날리는가 하면, 집안 대대로 이어져 내려온 논밭 18만 평을 노름 때문에 한순간에 팔아먹기도 했다. 심지어 하나뿐인 딸이 시집을 갈 때 시댁에서 장롱을 사오라고 준 돈까지 노름판에서 다 써버린 일도 있었다. 그렇게 평생을 난봉꾼으로 손가락질 받은 김용환의 진실은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에야 비로소 밝혀졌다. 노름으로 모두 날려버린 줄 알았던 재산이 실은 만주 일대의 독립운동자금으로 쓰였던 것이다. 김용환은 일제의 눈을 피하기 위해 명문가의 종손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가문의 땅을 팔아먹는 등 겉으로는 온갖 파락호 노릇을 하면서 실제로는 막대한 자금을 독립운동을 위해 기부했다. 광복 후 1946년 세상을 떠난 김용환은 임종 무렵 “이제는 만주에 돈 보낸 사실을 이야기해도 되지 않겠느냐”는 친구의 말에도 “선비로서 당연히 할 일을 했을 뿐인데 이야기할 필요 없다”며 끝내 모든 사실을 숨긴 채 숨을 거두었다.1920년대 중반 만주에 설립된 독립운동단체 신민부의 자금을 모금하던 과정 중에도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다. 1927년 김병연은 밀양의 부자이자 자신의 아버지인 김태진에게 만주의 땅을 구입하자고 3,000원을 받아낸 후 신민부에 보냈다. 일명 '김병연' 사건으로, 그 금액은 신민부 역사상 단일 자금으로 최대 규모였다고 한다.나라의 위기 앞에서 일부 양반 가문은 자신의 재산을 내놓기를 망설이지 않았다. 그들의 헌신적인 행동은 독립운동의 불씨를 살리는 밀알이 되었다.         alt이회영alt김용환 alt경주 교동 최부자댁alt최준(오른쪽)과 동생 최윤 국채보상운동과 물산장려운동애국계몽운동 혹은 실력양성운동의 차원에서 역사에 기억될 만큼 전국 규모로 발전했던 모금도 있다. 1907년 대구 갑부 서상돈의 800원 쾌척으로 시작된 국채보상운동은 양기탁이 이끄는 <대한매일신보>의 적극적인 지원과<황성신문>, <제국신문>의 참여, 그리고 민중의 적극적인 참여로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당시 우리나라의 국가 채무 1,300만 원을 갚기 위한 모금운동이었다. 더불어 금주, 금연운동도 벌이면서 짧은 기간 동안 온 국민의 적극적인 참여를 이끌며 급속도로 성장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국채보상운동은 통감부의 방해로 실패했다. <대한매일신보> 사주였던 영국인 베델(Ernest Thomas Bethell)을 추방하고 발행인 양기탁을 기금 횡령 혐의로 고소하면서 운동을 무력화시켰기 때문이다. 국채보상운동은 그 규모와 더불어 부녀자들이 참여하는 등 여성들이 운동을 주도하며 경제구국운동을 벌였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국채보상운동 이후에는 물산장려운동이 있었다. 1920년 일제는 일본 자본의 한국 투자를 활성화하기 위해 회사령을 철폐하고, 1923년에는 관세를 철폐했다. 1927년에는 신은행령이 통과되면서 본국과 식민지 조선 간의 무역장벽이 사라졌다. 이를 통해 미쓰이, 미쓰비시 같은 거대 일본 자본이 본격적으로 식민지 조선에 진출하기 시작했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 조만식을 중심으로 평양에서 ‘물산장려운동’이 벌어졌다. 자금모금운동이라기보다는 일종의 국산품 애용운동으로 볼 수 있는데, 이를 통해 조선 산업을 보호하고 민족 자본의 축적을 도모하고자 했다. 국산품 애용 원칙을 만들고, 강연회나 선전행사를 통해 평양과 서울을 중심으로 활발히 전개하는 가운데 이때도 금주, 금연운동을 벌이면서 생활개혁운동도 함께 진행했다. 서울에서 주도된 민립대학설립운동이나 1920년대 후반부터 1930년대 초반에 활발했던 농촌 지역의 한글보급운동 또한 이런 활동의 연장선이었다. 직접적인 자금 모금과 더불어 국산품 구입, 재능기부 등 나눔 운동은 다양한 형태로 이루어졌다. 경제민족주의는 광복 이후 대한민국 역사에서도 상당한 위력을 발휘했다. 대표적인 예가 1997년 외환위기 당시 진행된 금모으기 운동이다. 국가적 위기를 국민들의 노력을 통해 극복하겠다는 의지가 국채보상운동 90년 후에 똑같은 형태로 발휘된 것이다.         alt양기탁alt<대한매일신보> alt조선물산장려회의 선전활동alt물산장려운동 광고 미주 지역의 독립운동자금 지원 운동하와이, 샌프란시스코로 대표되는 캘리포니아 그리고 멕시코 일대를 일컫는 미주 지역은 사탕수수 농장이 널리 분포되어 있는 지역으로, 많은 한인들이 농장 노동자로 이민을 갔던 곳이다. 1902년 12월 121명의 한인이 인천항을 떠났다. 24명이 신체검사에서 탈락하고 97명이 최초로 하와이에 도착했다. 1903년부터 1905년 이민이 중단될 때까지 하와이에 7,266명, 멕시코에 1,033명 등 8,000여 명에 이르는 한인들이 미주에 정착했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에는 본국의 보호를 받을 수 없게 되면서 자치 기구를 조직하며 생존을 도모해나갔다. 에오친목회, 공립협회 등을 창설하고 한인합성협회, 국민회 등을 거쳐 1910년 대한인국민회를 조직하기에 이르렀다. 대한인국민회를 비롯한 미주의 한인 조직은 독립운동의 주요 자금처였다. 1919년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의 자금은 8만5,000달러였는데 이중 절반이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위해 쓰였다고 한다. 하와이에서 결성된 박용만의 대조선국민군단의 경우, 파인애플 농장의 수익금과 지원금을 통해 7만8,642달러를 모았는데 이 중 2만200달러는 만주 및 연해주의 독립운동자금으로 보내졌다고 한다.여성들의 노력도 덧붙여졌다. 하와이의 여성독립운동단체 대한부인구제회가 1920년부터 1930년까지 대한군정서, 대한독립군 그리고 임시정부에 보낸 후원금은 20만 달러를 웃돈다. 이밖에 워싱턴에 설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외교담당기관인 구미위원부는 1920년대 초반 총수입의 15% 정도를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보냈고, 북미대한인국민회는 1941년부터 1945년 사이에 중경에 있는 대한민국임시정부와 광복군에 4만 달러의 후원금을 보내기도 했다. 당시 한인들의 열악했던 형편을 고려했을 때 결코 쉽지 않은 성과였다.         alt대한인국민회 하와이 지방총회(도산안창호기념관)alt대한부인구제회(1919년,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 독립운동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행위는 독립운동에서 가장 중요한 기초활동이었다. 수많은 지사와 독립을 염원하는 국민들의 자기 헌신이 있었기 때문에 독립운동사가 이어져 올 수 있었다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다. 심용환성균관대학교 사범대학에서 역사교육학을 전공했다. 현재 팟캐스트 <진짜 역사 가짜 역사>를 통해 재미있고 올바른 역사 이야기를 전파하고 있으며, CBS와 공동으로 <심용환의 근현대사 똑바로 보기>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저서로는 『헌법의 상상력』, 『심용환의 역사토크』, 『단박에 한국사』 등이 있다. ]]> Wed, 01 Nov 2017 15:15:30 +0000 11 <![CDATA[자유란 무엇인가 ]]> 글 이성주 역사칼럼니스트자유란 무엇인가항일독립운동의 영원한 횃불이자 겨레의 민족지도자 백범 김구. 명성황후를 시해한 일제에 분노를 참지 못했던 그는 약관의 나이에 일본인 쓰치다 조스케(土田壤亮)를 처단하면서 항일노선을 걷기 시작했다. 대개는 김구라고 하면 독립운동에 매진한 투사의 이미지만을 떠올리지만, 그는 독립 이후의 우리나라 대한민국을 어떻게 만들어 나가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이 누구보다도 깊었던 인물이다. 광복 이후 대한민국의 미래를 그린 민족지도자“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의 부력(富力)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强力)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너무도 유명한 말이다. 『백범일지』에 밝힌 김구가 원하는 대한민국의 모습이다. 그가 세상을 떠난지 70년 가까이 된 지금. 우리나라는 김구가 그토록 염원한 나라가 되었나.▲1876년 황해도 해주 출생 ▲1896년 치하포 주막에서 일본인 쓰치다 조스케 처단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 이후 의정원 의원·경무국장·내무총장·국무총리 대리·내무총장 겸 노동국 총판·임시정부 국무령·국무위원·국무위원회 주석 등을 역임 ▲1924년 만주 대한통의부 박희광을 통해 친일파 처단 및 주요공관 파괴 지휘 ▲한인애국단 조직. 이봉창·윤봉길 의거 지휘 ▲1945년 광복 이후 신탁통치 반대 운동, 미소공동위원회 반대 운동 추진▲1948년 1월 남북협상 참여 ▲1949년 6월 26일 안두희의 흉탄에 암살당함선생의 발자취는 곧 우리나라 독립의 역사다. 우리 민족에겐 자랑스러운 저항의 역사이지만, 일본에게는 이가 갈리는 ‘숙적’의 기록이자 패배의 역사라 할 수 있다. 당시 일제의 김구에 대한 평가는 그의 목에 내건 현상금으로 알 수 있다. ‘일제는 내 목에 1차로 20만 원, 2차로 60만 원을 내걸었다.’ 『백범일지』의 기록이다. 쌀 한 가마니가 20원 선이었던 시대를 감안하면, 지금은 60억 원 상당의 거액이 현상금으로 걸려 있었던 것이다. 60억 원. 일본에게 김구는 지워버리고 싶은 역사다. 자유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김구가 바라마지 않았던 우리나라에 대한 이야기는 수차례 회자된 바 있다. 그러나 그가 말한 ‘자유’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다. 광복한 조국, 이제 일본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우리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는 상황에서 김구는 자유에 대한 정의부터 다시 내렸다.“자유와 자유 아님이 구분되는 것은 개인의 자유를 속박하는 법이 어디서 나오느냐에 달렸다. 자유 있는 나라의 법은 국민의 자유로운 의사에서 나오고, 자유 없는 나라의 법은 국민 중의 어떤 한 개인 또는 한 계급에서 나온다. … 나는 우리나라가 독재의 나라가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독재의 나라에서는 정권에 참여하는 계급 하나를 제외하고는 다른 국민은 노예가 되고 마는 것이다.”자유와 자유 아님에 대한 역설. 빛을 되찾은 조국 땅에서 김구는 자유를 외쳤다. 자유가 법의 울타리 안에 있다면 그 법은 누구로부터 나오는가를 주목한 그는 대한민국이란 나라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명확히 알고 있었다.정치는 ‘권위에 의한 분배’란 말이 있다. 국민은 세금을 내고, 자신의 권한을 정부에 위임한다. 정부는 위임받은 권한으로 국민을 지키고, 국민 복지를 위해 힘써야 한다. 이는 상식과도 같은 진부한 이야기다. 그런데 이 당연한 사실을 몸으로 체감하는 이들이 얼마나 될까. 대한민국은 법치주의 국가이다. 이 법은 어디로부터 나오는가?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자유란 곧 의사결정 과정의 참여다. 작게는 우리 개인의 운명을 좌우하는 일이고, 크게는 국가의 운명을 결정한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투표다. 국민들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광장에서 의견을 직접 표현하기도 한다. 김구가 꿈꾼 자유는 ‘법의 탄생’에 얼마나 많은 국민들이 함께하는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고 있는 ‘법치주의 국가’ 대한민국에서 자유를 말하고 싶다면, 그 법이 어떻게 나왔는지, 우리의 의견이 얼마나 반영되었는지 자세히 들여다봐야 한다. 김구가 꿈꾸었던 국가가 도래한 오늘, 우리 스스로 이 자유를 얼마나 소홀히 대했는지 돌아봐야 할 때다.                    이성주시나리오 작가 겸 역사칼럼니스트. 대중과 함께 호흡하는 글쓰기를 목표로 『조선의 민낯』, 『왕들의 부부싸움』과 같은 역사서를 출간한 바 있다. 최근에는 국제정치와 관련된 연구 및 집필에 열중하고 있다. 『전쟁으로 보는 국제정치』 시리즈 1, 2, 3권을 출간 중이다. ]]> Wed, 01 Nov 2017 13:17:03 +0000 11 <![CDATA[이른 아침의 풍경 ]]> 이른 아침의 풍경어둠이 조금 길어진 겨울의 초입 어김없이 태양은 뜨고선새벽을 깨우며날은 시리게 밝아옵니다. 짙게 드리우던 안개 물러가고 나니흑성산 자락 아래한눈에 드러나는 푸른 지붕가만히 눈 감았던 한밤을 보내고햇빛에 세수하며 아침을 맞이합니다. ]]> Wed, 01 Nov 2017 11:39:58 +0000 11 <![CDATA[한국광복군 활동지를 찾기 위한 여정의 시작 ]]> 글 김주용 독립기념관 책임연구위원한국광복군 활동지를 찾기 위한 여정의 시작8월 31일 우한(武漢)을 떠나는 날. 결국 유명한 사적지인 황학루(黃鶴樓)는 끝내 보지 못했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아침 기차에 몸을 실어 푸양(阜陽)으로 향했다. 우리 일행은 기차를 타고 가면서 한국광복군 제3지대의 활동지인 안후이성(安徽省) 푸양과 린촨(臨川)에서 조사할 사적지에 대해 점검했다. 역사의 산증인을 만나 답사 의지를 다지다본격적인 답사에 앞서 이곳에서 활동했던 독립지사인 김우전 전 광복회장의 자택을 찾았다. 김우전 전 회장은 한국광복군의 산증인으로, 우리는 답사 의지를 다지기 위해 그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동지이자 독립투사였던 이성수의 안타까운 죽음과 일본의 비인간적인 태도에 비분강개하며 이야기를 하다가, 사진 몇 장과 자신이 작성한 조사보고서를 보여주면서 이번 실태조사의 성공을 기원했다. 그가 이토록 독립운동의 역사적 공간을 되찾는 데 열정을 바치게 된 것은 광복 후 김구와 함께 통일운동에 나섰기 때문이리라. 필자의 손을 힘껏 쥐는 김우전 전 회장의 손에서 통일에 대한 소망이 그대로 전달되었다.         한국광복군 제3지대, 그 역사의 시작으로1940년 9월 17일 중경에서 성립된 한국광복군은 이후 몇 차례 조직 개편이 진행되었다. 그중 푸양과 린촨에서 활동했던 제3지대는 중국에서 일본군과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었다. 우리는 이선자 부관장이 여러 해 전부터 조사해온 내용을 숙지하면서 이번에는 한국광복군 제3지대 본부에 조그마한 기념표식이라도 설치해야 한다고 재차 강조하며, 푸양 공항에 내렸다. 수속을 마치고 나오니 한족 기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차를 타고 도착한 호텔은 비가 와서 그런지 방 안에 에어컨이 나오는데도 습도가 높았다. 호텔을 나와 첫 번째로 찾은 곳은 한국광복군 제3지대 성립장소였다. 흐름상 한국광복군 간부훈련반이 설치되었던 린촨을 먼저 답사하는 것이 순서이나, 교통사정 등을 고려했을 때 푸양의 한국광복군 제3지대 성립 장소부터 가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이었다.1940년 9월 17일 한국광복군이 중경에서 창건되고, 총사령부가 곧 시안(西安)으로 이동하여 1941년 3개 지대 1개 분처가 편성되었다. 1942년 2월에는 지대의 명칭을 ‘징모분처(徵募分處)’라 하였다. 이때 징모 제6분처가 창설되었는데, 이것이 한국광복군 제3지대의 전신이다.         alt한국광복군 편제도alt한국광복군 제3지대 성립전례식alt한국광복군 제3지대 훈련 모습 징모 제6분처가 탄생하기까지징모 제6분처는 초모활동에서 성과를 거두었다. 시안을 떠나 산둥(山東)으로 이동하려 하였으나 일제의 방해와 산둥 방면의 상황이 불리하여 1943년 3월 푸양으로 진로를 바꾸어 본거지로 삼았다. 푸양은 일본군 점령지역과 근접해 있었고, 중국군 제10분교가 인접해 있었다. 이에 일본군 점령지역을 대상으로 한 초모활동에 유리한 지점이었으며, 중국군으로부터 협조가 가능하였다. 제6분처는 푸양을 중심으로 쉬저우(徐州)·꾸이더(歸德)·난징(南京) 등지에서 초모활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1944년 징병 및 학병들이 중국 전선으로 투입되자, 그들은 일본군을 탈출하여 푸양으로 집결하였다. 공작대원들이 초모해온 인원들과 일본군을 탈출한 한인사병들을 위해서 한국광복군 훈련반을 설치하고, 그들을 교육·훈련시켜 광복군에 편입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징모 제6분처의 인원이 증가되면서 제3지대 성립이 가능해졌다. 총사령 지청천은 이러한 상황을 군무부 및 통사부에 보고하면서 제3지대의 편성을 요청하였고, 그리하여 1945년 3월 17일 통사부가 제3지대의 편성을 승인하였다. 한국광복군 간부훈련반의 졸업생 가운데 푸양에 잔류한 김국주·이동진·윤창호·배경진·한성수·김이호·변영근·김용호·윤영무·차약도·김우전·김규열 등이 제3지대 창설의 주역이었다. 이들은 본부 요원과 신입대원의 교육 및 훈련을 담당했지만, 대부분 적의 점령지역으로 나가 초모공작을 전개하는 지하공작대원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당시 주임을 맡았던 김학규가 미군 OSS와의 합작문제로 여유가 없어 지대 편성이 곧바로 이어지지는 못하였다.김학규는 일찍이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고 양세봉이 이끄는 조선혁명군에서 참모장직을 수행하는 등 한국광복군 창설 주역 중 한 명이다. 이후 김학규와 중경에 파견된 간부들이 도착하여 제3지대가 편성되었다. 총사령부 고급참모인 이복원을 부지대장으로, 엄항섭을 정치지도원 겸 OSS훈련 책임자로, 박영준을 구대장으로 각각 임명·발령하였다. 이로써 제3지대는 1945년 6월 30일 푸양 중심지에 자리 잡은 푸양극장(푸양시 인민극장)에서 성립전례식을 거행하였다.옛 모습이 사라진 푸양극장 터32.90863N, 115.80725E. 푸양시 인민가 인민서로 2번지에 위치한 옛 푸양극장 터의 위도와 경도이다. 이선자 부관장이 미리 조사했던 옛 푸양극장 터에 도착한 우리는 건물 전경을 촬영하기 위해 타고 온 차를 잠시 다른 곳에 주차했다. 제3지대원들은 이곳 푸양극장에서 <탈출기>라는 제목으로 연극을 공연하기도 했다. 오늘날 ‘맨해튼’이라는 술집으로 변한 푸양극장은 원형이 많이 훼손되어 있었다. 그러나 역사적 현장에 직접 발을 디디니 1945년 6월의 뜨거운 함성이 그대로 들리는 듯 했다. 입구에는 ‘마약을 멀리하고 생명을 아끼자’라고 적힌 빨간색 현수막이 걸려있었다. 내부로는 들어가지 못했다. 임공재 사진작가는 제3지대 성립전례식 때 대원들이 푸양극장 밖에서 기념 촬영한 사진을 떠올리며 당시의 역사를 기억에서 소환하려고 열정적으로 카메라 셔터를 눌러댔다.옛 푸양극장을 제대로 찍기 위해 건물 앞으로 사람과 차가 지나가기를 기다렸지만 워낙 유동인구가 많은 곳이라 그 모습을 온전히 담아내기는 어려웠다. 이선자 부관장과 우리 일행은 푸양시와 협의하여 이곳에 제대로 된 표지판이나 표지석이라도 설치하는 것이 후대에 대한 책무라는 생각에 모두 동의했다. 물론 현실이 녹록하지는 않지만 말이다.가끔 한국 언론에도 보도되곤 했던 한국광복군 제3지대 성립장소에 대한 기념물 설치는 아직도 진행형이다. 우리는 다음으로 푸양의 한국광복군 제6징모처를 찾아 나섰다. 이선자 부관장이 미리 조사했다지만 다시 한 번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전날 비가 와서 그런지 길은 온통 진흙 범벅이었다. 흙탕물을 튀겨가며 비포장길을 달려 도착한 곳에서는 제6징모처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뒤늦게 찾아온 우리를 원망이라도 하듯 주변의 도랑만이 우리를 맞이했다. 허탈했지만, 한편으로는 욕심이 과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우전 전 광복회장이 생각났다. 이곳에서 린촨을 오갔을 그의 열정에 다시 한 번 경외심을 느꼈다. alt김학규와 엄항섭alt미국 전략사무국(OSS) 대원들과 김학규 alt 한국광복군 제3지대 성립장소 푸양극장 자리 일정을 마친 우리는 호텔로 복귀했다. 습기로 가득찬 숙소에 카피가루를 놓았다. 은은하게 향이 퍼지니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다음호에 계속 ]]> Wed, 01 Nov 2017 15:40:01 +0000 11 <![CDATA[연예인 따라잡기, 과연 병일까? ]]> 글 장근영 심리학자연예인 따라잡기, 과연 병일까?연예인은 유행의 아이콘이다. 그들이 입은 옷·화장·헤어스타일 등은 얼마 지나지 않아 길거리에서 자주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사람들은 연예인의 말투, 행동습관 등 일상생활 모습까지도 닮아간다. 최근 청소년, 청년층 사이에서 연예인을 따라하는 현상을 두고 해당 연예인의 이름을 붙여 ‘~병’이라고 부르고 있다. 아이유병, 강다니엘병, 설리병…. 그런데 이러한 ‘병명’이 과연 정말 병인 걸까? 인간은 가장 뛰어난 따라쟁이우리는 진공상태에서 성장하지 않는다. 내 모든 말과 행동은 누군가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1931년 미국 인디아나 대학교의 비교심리학자 켈로그(W. Kellogg)는 생후 6개월짜리 침팬지 ‘구아’를 입양해 실험을 했다. 당시 켈로그에게는 생후 10개월 된 아들 도널드가 있었는데, 구아를 아들과 똑같이 먹이고 입혀가며 키웠다. 침팬지가 인간과 동일한 환경에서 성장하면 어디까지 인간의 모습에 가까워질 수 있는지 알아보려는 의도였다. 실험은 실패했다. 특히 아들 도널드가 말을 하기 시작할 때쯤 문제가 심각해졌다. 도널드가 인간의 언어가 아니라 침팬지 구아의 꽥꽥거리는 울음소리를 따라하기 시작한 것이다.위의 실험은 침팬지보다 인간이 남을 더 잘 따라한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그렇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따라쟁이다. 따라하는 본능 덕에 인간은 무엇이든 그 어떤 동물보다도 빠르고 정확하게 배울 수 있고, 다양한 환경에서 더 잘 적응하고 번성할 수 있었다. 인간의 따라하는 본능이 대단한 이유 중의 하나는 따라할 대상을 선정하는 능력 때문이다. 즉 아무나 따라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생활에서 자주 보면서 자세하게 관찰할 수 있는 대상 가운데 자신이 가진 자원과 비슷한 것을 가진 자를 고르고, 그중에서도 주어진 환경에 가장 잘 적응하고 있는 자를 귀신같이 찾아내어 따라한다.치알디니(R. Cialdini)의 『설득의 심리학』에서는 NBA의 전설인 마이클 조던이 경기 전에 특정브랜드의 초코바를 3개씩 먹자 팀 내 모든 선수들이 전부 그 초코바를 먹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를 소개한다. 그 이전부터 그 팀의 몇몇 후보 선수들이 같은 초코바를 먹고 있었지만, 조던이 먹기 전까지는 아무도 그 초코바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이다.따라하는 건 병이 아닌 인류 번성의 바탕인간의 따라쟁이 성향이 가장 뚜렷하게 나타나는 때는 사춘기 이후 2차 성징을 거치며 신체적·사회적으로 큰 변화를 맞이하는 청소년기다. 이 시기에 따라함의 대상이 될 존재들을 ‘롤모델(Role model)’이라고 부른다. 우리 대부분이(아마도 전부가) 롤모델을 바라보며 성장했다. 주변에서 참고할 가치가 있는 누군가의 언행을 보고 따라하면서 그 속에서 더 나은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 이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발달과정이다.최근 예능프로그램 <효리네 민박>에 출연한 가수 아이유를 따라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입을 오물거리며 먹는 것이나, 쪼그려 앉기, 단 초콜릿을 좋아하는 모습 등 TV에 비춰진 아이유의 행동을 따라하는 사람들이 많아져 일명 ‘아이유병’이라는 말이 생겼다. 이제 ‘연예인 이름+병’은 인기의 척도라 해도 무방할 정도다. 이러한 현상은 이전에도 있었다. 4차원적인 엉뚱한 행동을 하는 ‘최강희병’과 웃을 때 한쪽 눈을 감는 ‘남상미병’ 등 시기만 다를 뿐 당대 인기 있는 연예인은 롤모델의 대상이 되곤 했다.다시 말하지만, 어떤 시대의 유명인이나 성공한 사람들을 따라하는 것은 최근 들어 새로 생긴 특이한 현상이 아니다. 지구상에 인류가 존재한 이래 지금까지 계속 유지된 본능이다. 그 덕분에 인류는 지금처럼 번성할 수 있었고, 자본주의사회의 소비와 성장 사이클을 만들어 냈으며, 시대의 변화에 맞춰 시대정신을 유효적절하게 교체하며 문화를 발전시켜 왔다.그러니까 문제는 유명인을 따라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런 행동을 마치 잘못된 질병인 것처럼 낙인찍는 요즘 세태다. 그런 식으로 따지자면 90년대 한국 남자들은 ‘최민수병’ 혹은 ‘주윤발병’ 환자들이었다. 당시 젊은 남자들의 표정이나 말투는 최민수의 것이었으며, 그들이 입은 얇은 바바리코트는 주윤발의 것이었다. 물론 모두가 최민수나 주윤발처럼 멋진 것도 아니었고, 스타가 되지도 않았다. 그건 현실에서 벗어난 잠깐의 소망충족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 시절엔 아무도 그걸 병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그저 누구나 거쳐 가는 한때의 몽상이자 열정이라고 이해했을 뿐이다.다른 사람들의 소망충족을 병이라며 비아냥댈 바에야 바람직한 롤모델을 찾아 그를 닮으려 노력하는 것이 자기발전에 도움이 될 것이다. 그 대상이 연예인이면 어떤가. 닮을 점이 있는 사람을 정하는 것은 저마다의 가치관에 따른 일이다. 다만 기왕 따라할 거라면 매력적인 겉모습뿐 아니라 바람직한 내면의 모습까지 자기 것으로 삼기를 바란다. 장근영심리학자 겸 칼럼니스트. 연세대학교 심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국책연구소인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에서 활동하며 대학에선 매체심리학?발달심리학 등을 강의하고 있다. 저서로는 『심리학 오디세이』, 『팝콘심리학』 등이 있다. ]]> Wed, 01 Nov 2017 16:10:21 +0000 11 <![CDATA[삼산이수(三山二水)의 고장 경상북도 김천시 ]]> 글·사진 김초록 여행칼럼니스트삼산이수(三山二水)의 고장경상북도 김천시진갈색 숲과 한낮의 건조한 공기, 아침저녁으로 느껴지는 맵찬 기운. 어느덧 김천에도 겨울이 찾아왔다. 김천은 경북 내륙의 중심이다. 경부고속도로나 중부내륙고속도로를 타면 수도권에서 2시간, 대구에서는 40분이면 닿는다. 여기에 경부고속철도까지 통과하니 과연 사통팔달의 도시다. alt 경북과 충북을 이어주는 추풍령구름도 쉬어 넘고 바람도 자고 간다는 추풍령이 도시를 아늑하게 감싸고 있으니 천혜의 삶터임이 틀림없다. 예부터 삼남지방(호남, 영남, 충청)의 풍부하고 다채로운 물산이 이곳으로 모여 들었으니, 이는 거미줄처럼 뚫린 도로망 덕택이다. 추풍령은 경북 김천시와 충북 영동군 사이, 우리나라 중부와 남부지방을 가르는 한 경계이며 백두대간에서 가장 낮은 고개다. 금강과 낙동강 물줄기를 나누는 분수령이기도 하다. 추풍령에서 가까운 직지사는 언제 찾아도 좋은 곳이다. 들머리의 숲길은 청신하기 그지없어 먼지에 찌든 도시민들의 가슴을 깨끗하게 씻어준다. 절을 감싸 두른 황악산(黃岳山)은 황학산(黃鶴山)으로도 불린다. 날개를 활짝 펴고 하늘을 나는 학처럼 생겼기 때문이다. 직지사는 신라 불교의 발상지로 418년(신라 눌지왕 2년)에 승려 아도화상이 창건했다. 고려 때 능여대사가 직접 자기 손으로 절터를 쟀다는 데서 이름이 유래했다고 전해지는데, 이는 전설일 뿐 직지(直指)는 본래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 見性成佛)’, 즉 ‘사람이 갖고 있는 참된 마음을 직관하면 부처의 깨달음에 도달한다’는 뜻이다. 직지사를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황악산은 숲이 울창하고 계곡이 깊어 산다운 기개를 제법 풍긴다. 산행에 자신 있다면 절 옆으로 난 등산로를 따라 정상에 올라가보는 것도 좋다. 가파른 산길이 끊임없이 이어지지만 군데군데 쉴만한 돌너덜과 폭포, 소가 나타나 지루함을 덜 수 있다. 시간에 쫓기지 않는다면 천천히 심호흡을 하면서 한 발 두 발 내디뎌볼 일이다. 정상에 오르면 지그재그로 이어진 백두대간이 시원스럽다. 직지사 들머리에는 조각 작품과 시비·장승·야외공연장·음악분수·어린이 놀이터·정자 등 각종 편의시설을 갖춘 직지문화공원이 있어, 산행이 아니어도 충분히 자연을 누릴 수 있다.직지사: 경상북도 김천시 대항면 직지사길 95직지문화공원: 경상북도 김천시 대항면 운수리 31-1         alt추풍령을 알리는 입석alt직지사 alt 독립운동가 여환옥의 고향 광명리 마을직지사에서 김천 시내를 거쳐 거창 방면 3번 국도를 한참 따라가면 경북유형문화재 제 46호에 제정된 정자 ‘방초정(芳草亭)’이 나온다. 연못가에 다소곳이 서 있는 2층 누각은 첫눈에 보기에도 외형이 아름답다. 1788년 『가례증해』를 저술한 이의조가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는 방초정은 구조가 특이하다. 2층 누각 중앙에 온돌방이 있는데, 1층에 아궁이가 있어 겨울철에 불을 땔 수 있는 독특한 구조로 되어 있다. 특히 2층은 문을 올리면 마루가 되고 내리면 방으로 쓸 수 있게 했다. 이는 방이 양 끝에 있는 여느 누각과 다르다. 연못 중앙에 있는 두 개의 섬은 누각과 어우러져 특별한 정원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방초정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원터마을에 가면 가례증해판목(家禮增解板木)을 보관한 숭례각(장서고)이 나온다. 이 판목은 1758년(영조 34년) 이의조가 관혼상제의 예법을 전국적으로 통일시키기 위해 주자(朱子) 4대예서(四大禮書) 가운데 <가례(家禮)>를 예를 들어 해설하고 서술을 첨가하여 1772년 총 10권의 초본(初本)으로 완성하였다. 총 475매(954면)의 목판으로 목각기법이 우수해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구성면 끝머리인 광명리에는 독립운동가 여환옥의 생가인 성산여씨 하회댁이 있다. 고택의 품격이 느껴지는 이 집은 원래 18세기 초 성산여씨(星山呂氏)인 여명주가 60여 칸 건물로 지었다고 전해진다. 여환옥은 어릴 때부터 6개 국어를 구사하는 등 똑똑하고 총명했으며, 집안 환경도 좋아 당시 김천에서 손꼽히는 부잣집 아들이었다. 이후 장성하여 1920년대부터 농수산물 위탁 판매업체에 감사직을 맡고 교육사업에도 손을 댔다. 특히 사비를 털어 생가에 광명강습소를 개설해 지역 청소년들에게 신교육을 가르쳤으니, 이는 독립을 앞당길 인재로 키우고자 함이었다. 여환옥은 1927년 집과 토지를 담보로 동양척식주식회사로부터 거액을 융자받아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전달했다. 여환옥은 이 밖에도 자신이 가진 재물을 조국 독립을 위해 아낌없이 썼다.방초정: 경상북도 김천시 구성면 상원리         alt방초정alt방초정 앞의 연못 육영사업의 어머니 최송설당3·1운동 이후 김천 사람들의 숙원사업은 김천고보 설립이었다. 10년간의 노력에도 결실을 맺지 못하다가, 최송설당이 평생을 모은 전재산 32만 원(현재 200억 원)을 쾌척하여 김천고보를 설립하였다. 거금을 어떻게 모았는지는 수수께끼 같은 전설만이 구전되고 있을 뿐이다. ‘나눔’을 통한 아름다운 행위는 암울한 식민시대를 밝히는 커다란 등대임에 분명하다. 여걸로서 살다간 족적은 오늘날 커다란 울림으로 다가온다.         alt숭례각alt여환옥 생가(성산여씨 하회댁)alt최송설당 동상(김천고등학교 송설역사관) alt 무흘구곡에 안긴 두 절집이번에는 3번 국도를 따라 증산면 소재지로 간다. 불령산에 둘러싸인 청암사는 신라 헌안왕 3년(859년)에 도선국사가 창건한 곳이다. 지금은 비구니 스님들이 수행을 쌓고 있다. 어떤 이는 이 절을 보고 ‘수줍음이 많은 절’이라 했다. 그만큼 고즈넉하고 고요하다는 의미일 게다. 일주문을 들어서면 아름드리 상록수가 숲을 이루고 있어 그윽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청암사는 참 정갈하다. 스님들이 손수 가꾼 텃밭이며 뜰이며 돌담 등이 정돈되어 편안한 인상을 준다.청암사에서 나와 수도암 쪽으로 올라간다. 높푸른 하늘과 청신한 숲을 바라보며 쉬엄쉬엄 계곡을 따라 얼마나 올랐을까, 불쑥 절경이 펼쳐진다. 달빛이 연못에 꽉 찬다는 만월담이다. 조선 중기 학자 정구는 성주군 수륜면에서 이곳 김천 증산면 수도리에 걸쳐 있는 계곡의 절승에 반해 ‘무흘구곡(武屹九曲)’이란 이름을 붙여두었으니 1곡부터 5곡은 성주에, 6곡부터 9곡은 이곳 수도계곡 일대에 드문드문 자리 잡고 있다. 수도계곡은 ‘김천의 강원도’라 불릴 정도로 맑은 물과 기암괴석, 울창한 숲이 압권이다. 소(沼)에 용이 살다가 하늘로 올라갔다고 전해지는 용소폭포는 수도계곡의 최대 비경이다.용소폭포에서 자동차로 10여 분쯤 올라가면 ‘하늘 아래 첫 동네’라 불리는 수도리마을이 나온다. 마을에서 수도암을 거쳐 김천의 남쪽 끝인 황점리로 가는 길이 나 있다. 해발 1천m의 임도 숲길을 걷는 맛이 각별하다. 수도암은 통일신라시대인 서기 859년 도선국사가 창건한 절집으로, 옛날 도선이 절터가 마음에 들어 7일간이나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법당인 대적광전 앞마당에 서면 연꽃을 닮은 가야산 상왕봉이 우뚝하다. 경내에는 석조 비로자나불좌상(보물 307호)·쌍탑·나한전 등이 있다.청암사: 경상북도 김천시 증산면 평촌2길 335-48 / www.chungamsa.org수도암: 경상북도 김천시 증산면 수도길 1438 alt청암사alt용소폭포 alt 수도암 alt 항일 독립운동가를 모신 남산공원과 자산공원김천 시민들이 즐겨 찾는 도심공원 두 곳에는 독립운동가 편강열과 이명균의 기념비가 있다. “내가 죽거든 만주 땅에 묻고 왜놈이 판을 치는 조국에 이장하지 말라.”1928년 12월 6일 항일의병으로 활약한 편강열이 일제의 모진 고문으로 병을 얻어 37세의 어린 나이에 순국하면서 남긴 유언이다. 그는 1907년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되자 16세의 어린 나이로 의병장 이강년의 휘하에 들어가 의병운동에 적극 나섰다. 남산공원은 일제강점기 당시 일제가 신사를 세우고 신사참배를 강요하던 곳으로, 나란히 선 군수 현감들의 공적비 옆에 편강열 기념비가 우뚝하다. 순국기념비 옆에는 여중룡의 순충비(殉忠碑)가 있다. 여중룡은 명성황후 시해 사건으로 김천에서 일어난 의병 활동을 주도했던 인물이다.남산공원과 마주하고 있는 자산공원 입구에는 이명균의 추모비가 있다. 김천시 구성면 상좌원에서 태어난 그는 우리나라가 국가 주권을 빼앗기자 전 재산을 처분해 독립운동 자금으로 보내고 일생을 항일운동에 바쳤다. 1919년 영남유림 대표로 파리장서에 서명했다가 검거돼 옥고를 치렀으며, 1920년에는 대한독립후원의용단을 조직해 군자금을 조달하는 임무를 맡기도 했다.남산공원: 경상북도 김천시 학새대길 5자산공원: 경상북도 김천시 성모길 179         alt편강열 열사 기념비alt여중룡 의사 순충비alt이명균 추모비 alt 초겨울의 김천에는 이파리가 떨어진 나무가 수두룩하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정말 중요한 것들에 집중할 수 있다. 산등성이의 맨언굴과 기암괴석, 그리고 이곳이 간직한 역사 말이다. ]]> Thu, 30 Nov 2017 16:57:46 +0000 12 <![CDATA[독립기념관과 국민 ]]> 국민의 성원에 힘입어 처음 문을 연 독립기념관은 오늘날까지도 많은 국민 여러분의 사랑으로 그 역사를 이어올 수 있었다. 그동안 일상 가까운 곳에서 한국 역사교육의 장이자, 문화·여가공간으로서 자리를 지켜온 독립기념관. 국민의 곁에서 친근한 벗으로서 함께해온 독립기념관의 모습을 담았다. alt]]> Thu, 30 Nov 2017 16:57:09 +0000 12 <![CDATA[유쾌하게 때로는 진지하게, 우리의 이야기는 계속된다 영화 <라듸오 데이즈> ]]> 글 편집실유쾌하게 때로는 진지하게, 우리의 이야기는 계속된다영화 <라듸오 데이즈>감독: 하기호주연: 류승범, 이종혁, 김사랑, 김뢰하, 오정세, 황보라, 고아성개봉일: 2008년 1월 31일뻔한 이야기는 가라! 흥겨운 재즈와 가슴 울리는 신파가 울려 퍼지는 혼돈의 시기. 경성에서 벌어진 유쾌, 통쾌한 라디오 ‘날’ 방송 이야기로 안내한다. Q. 우리나라 라디오의 역사는 언제부터일까?<라듸오 데이즈>는 당시 라디오 드라마 방송은 어떻게 했을까 하는 의문에서 시작되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라디오 드라마 제작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이 영화는 1930년대 경성(서울)을 배경으로 한다.실제로 조선총독부가 만든 경성방송국에서 국내 최초로 정규 라디오 방송을 시작한 것은 1927년 12월이다. 일상생활 속에서 라디오를 청취하던 사람들에게 라디오는 음악, 드라마 등 이전에는 없던 형태의 대중문화를 경험하게 하는 근대문화의 창구였다. 그러나 일제가 경성방송국을 설립한 이유는 라디오를 식민지 조선을 통치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라디오 방송의 모든 프로그램 편성 및 성격과 내용 등은 모두 일제의 규정 아래 정해졌다.         altalt일제강점기 경성방송국 Q. 신문물에 빠진 경성 사람들? 경성방송국 PD 로이드(류승범)는 시대와 역사에 관심이 없는 한량이다. 우연히 읽게 된 노봉알 작가(김뢰하)의 시나리오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한 그는 조선에서 전에 없던 라디오 드라마를 만들어 보기로 했다. 바로 남녀의 삼각관계 멜로를 담은 <사랑의 불꽃>이었다. 당대 최고의 재즈 가수 마리(김사랑)와 푼수 기생 명월(황보라), 아나운서 만철(오정세), 음향 효과 담당 K까지 영화 속에는 이들의 좌충우돌 사건사고와 함께 연신 흥겨운 스윙재즈가 흘러나온다. 흔히 상상하는 그 시절의 척박한 환경과는 거리가 다소 멀다. 1930년대 우리나라는 재즈·커피·구두 등 서구적 스타일의 유행과 함께 거리에는 소위 ‘모던보이’와 ‘모던걸’이 넘쳐 났다. 신문물의 급물살로 겉으로 보이는 조선의 모습은 많은 발전을 이룬 듯 보였다. 그러나 내면을 들여다보면 나라 잃은 민족으로 일본인들의 천대를 받아야 했고 가난한 독립운동가들이 일제에 맞서 투쟁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 시절 우리나라는 시대의 암울함과 신문물의 화려함이라는 모순된 요소가 뒤섞인 시기였다.         altalt1930년대 명동 거리 Q. 일제강점기 라디오 방송은 자유로웠다?방송이 인기를 얻어 사람들의 주목을 받게 되자, 일원들은 조선총독부의 개입을 받기 시작했다. 감시원이 방송 내용을 감시하는가 하면 작품 속 주인공이 돌연 일본 학도병이 되어 만주로 출정을 가는 것으로 전개를 바꾸기까지 한다. 이를 참지 못한 로이드는 수정되기 전 대본을 공수해오고, 배우들은 판자로 못을 박아 문을 막은 채로 방송을 시작한다.1919년 3·1운동 이후 일제는 강력한 식민지 탄압정책의 문제를 인식하고 한국인의 문화생활을 제한적으로 허용하도록 정책 방향을 바꾸었다. 그리하여 신문 발행이 가능해지고 라디오 방송도 개설되었다. 그러나 일제에 반하는 기사를 냈다가는 신문 발행이 중단되기 일쑤고, 라디오 방송은 철저히 일제의 검열을 거쳐 전파를 탔다. 일제의 유화정책은 식민통치 수단의 하나일 뿐, 우리 민족을 자신들의 통제 하에 두겠다는 목적에는 변함이 없었던 것이다.          alt Q. 거창한 시대정신이 있어야만 독립운동이다?K는 사실 독립단원이다. 10년간 성공한 거사가 하나도 없었던 그는 거리에 붙은 오디션 공고를 보고 음향효과에 지원하게 된다. “나 취직했다.” K는 라디오 방송국에서 일하게 된 사실을 동료들에게 알렸지만, 동료들은 그를 신념을 저버린 변절자로 취급한다.대개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들은 시대적 메시지를 담기 위해 무겁고, 진지하게 다뤄지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 영화 속 주인공들에게는 투철한 시대의식이 없다. 폭탄을 던지거나 총을 쏘지도 않는다. 그저 자신들이 기획한 대로, 자신들이 만들어낸 드라마를 방송해내고야 말겠다는 의지를 가졌을 뿐이다. 거창한 저항정신이나 국민의식은 아닐지라도, 외부의 압박에 지지 않고 ‘자신의 것’을 지켜내고자 했다는 점에서 등장인물들의 마음은 독립운동가와 크게 다르지 않다. 나의 것, 우리의 것을 지키겠다는 마음, 자유로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말하겠다는 마음, 그것만은 그들도 독립투사와 같지 않았을까. ]]> Thu, 30 Nov 2017 17:01:48 +0000 12 <![CDATA[조선총독을 처단하라! 노인들의 의열투쟁을 이끈 독립운동 지도자 ]]> 글 학예실조선총독을 처단하라!노인들의 의열투쟁을 이끈 독립운동 지도자김치보 金致寶, 1859.9.17. ~ (1941.11.18.)독립기념관은 국가보훈처·광복회와 공동으로 김치보를 12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그는 러시아 연해주 지역에서 노인들의 의열투쟁을 이끌며 독립운동에 이바지한 인물이다. alt 성명회 선언과 권업회 활동김치보(金致寶, 金致甫)는 1859년 9월 평안남도 평양에서 태어났다. 50세가 되던 1908년경 러시아 연해주로 이주하였고, 덕창국이라는 한약방을 운영하며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1910년 8월 나라가 일제에 강제병탄될 것이라는 소식이 전해지자 연해주 한인들은 합병 무효를 선언하고 병탄 반대 운동을 조직적으로 전개하기 위해 성명회를 결성하였다. 성명회는 각국 정부에 강제병탄 무효를 선언하는 전문을 보내는 한편, ‘일본의 침략과 탄압에 저항하기 위해 한국인들은 모든 힘과 수단을 다할 것’이라는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하여 일제와 끝까지 투쟁할 것임을 강조하였다. 김치보가 성명회 활동에 직접 참여했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성명회 선언서에 이름을 올린 것으로 보아 성명회와 직·간접적인 관계를 맺었던 것으로 보인다.성명회는 1910년 9월 일제의 압력으로 해산되었다. 그러나 성명회 선언서에 서명했던 인사들을 중심으로 성명회를 계승한 권업회를 결성하였고, 김치보는 통신부장에 선임되었다. 권업회는 <권업신문> 간행·교육진흥활동·독립운동자금 모집 등의 활동을 전개하는 등 연해주지역의 대표적인 항일독립운동단체였다.         alt러시아 연해주의 신한촌 전경alt성명회 선언서(1910년 8월)alt권업회 기관지 권업신문 대한국민노인동맹단을 이끌다제1차 세계대전 중 연해주지역의 한국 독립운동은 일제의 종용에 따른 러시아의 탄압 등으로 침체되었으나, 종전 후 활로를 모색하였다. 1919년 3·1운동 소식을 듣고 그해 3월 17일 연해주에서도 대규모 만세운동이 전개되며 독립운동이 활기를 띠게 되었다. 김치보는 1919년 3월 자신이 운영하는 신한촌 덕창국에서 청년들의 독립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대한국민노인동맹단을 조직하고, 단장으로 선출되었다. 대한국민노인동맹단은 46세 이상의 연령 제한을 두었을 뿐 남녀를 가리지 않고 회원을 모집하였다. 대한국민노인동맹단은 국내외에서 만세운동을 계획하는 한편, 블라디보스토크 주재 일본총영사관에 독립요구서를 제출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또 강우규를 국내에 파견해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를 처단하고자 하였다. 강우규의 의거는 실패했지만 국내외 우리 민족의 독립의지를 고취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연해주지역의 독립운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지자, 일제는 1920년 4월 기습적으로 연해주지역 독립운동단체에 공격을 감행했고 이때 주요 간부들이 붙잡히거나 도피하면서 대한국민노인동맹단은 사실상 해체되었다.         alt강우규 의거 당시 남대문역 인파alt강우규 alt 대한국민노인동맹단 명부(1919년 11월)         김치보의 행적은 1924년 이후 확인되지 않으며 1941년 별세하였다는 기록이 있지만 정확하지 않다. 정부는 김치보의 공적을 기리어 1996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Thu, 30 Nov 2017 16:58:33 +0000 12 <![CDATA[하나,여성독립운동가 이혜경의 인생역정 둘,손기정 선수와 일장기 말소 사건 ]]> [우리가 몰랐던 이야기 하나]글 윤정란 서강대학교 종교연구소 연구원여성독립운동가 이혜경의 인생역정이혜경은 1890년 1월 18일 황해도 해주에서 5남매 중 셋째 딸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국내 곳곳을 이사 다니면서 다양한 환경과 문화를 접하며 자랐고, 일본에서 유학하는 등 신여성으로 자랐다. 이는 여성독립운동가로서 성장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민족의식을 일깨우는 여교사가 되다아버지는 이창직, 어머니는 안재은이다. 부친 이창직은 한학에 뛰어난 실력을 갖춘 인물이었다. 그럼에도 새로운 변화와 문화에 매우 개방적이고 유연한 사고를 가졌다. 캐나다에서 온 선교사 게일(James Gale)과 성서 번역을 비롯하여 『천로역정』 등의 번역을 함께하였다. 이창직은 정치적 사건에 연루되어 일본 망명을 계기로 그곳에서 미국인 선교사를 만나 성서 번역에 종사하게 되었다.이후 이혜경 가족은 그녀의 외삼촌이 있는 황해도 소래로 이주하여 생활했다. 이창직은 귀국 후 게일의 어학선생 겸 통역사가 되어 서울과 원산 등지로 옮겨 다녔다. 이혜경은 그런 부모를 따라 이사하며 성장했고, 이러한 과정에서 다양한 환경과 문화를 접할 수 있었다. 이혜경의 『형사사건부』에 본적이 함경남도 원산부 상동 222번지로 되어 있는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1899년 게일이 서울 연동교회 목사가 되자 가족도 그를 따라 서울로 이주하였고, 언니 이원경과 함께 사립 연동학교(정신여학교)에 입학하여 제1회로 졸업했다. 부모님의 자식에 대한 교육열과 시세변화에 부응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졸업 후에는 일본으로 유학하여 1910년 도쿄여자학원 영문과를 졸업하는 신여성이 되었다. 귀국 후 모교인 정신여학교, 이어 함흥 영생여학교, 성진 보신학교 등에서 교사로 재직하다가 원산의 마르다윌슨신학교 교수가 되어 학생들을 가르치는 데 열정을 불태웠다.         alt 원산 마르다윌슨신학교 학생들         7형제애국단과 3·1운동 1909년 12월 이재명은 김정익·이동수 등과 함께 친일매국노 암살을 계획하여 명동성당에서 벨기에 황제 레오폴트 2세 추도식을 마치고 나오는 이완용을 단검으로 찔렀다. 이 사건으로 이완용은 복부와 어깨에 중상을 입었고, 이재명은 현장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다 체포되었다. 이혜경은 옥바라지를 하는 이재명의 부인 오인성을 돕기 위해 모금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였고, 고원섭·이자경·이인순·홍은희·최학현·이의순 등과 7형제애국단을 조직했다. 이는 민족선각자 양기탁·임치정 등과 연락을 취하여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기 위함이었다. 이혜경이 마르다윌슨신학교 교수로 재직할 당시 원산에도 대한독립만세로 천지가 진동했다. 원산 3·1운동 당시 이혜경은 연락책임을 맡았는데,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학생 김성국이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인 이갑성으로부터 받은 독립선언서 2통을 각각 정춘수 목사와 원산 배성학교 교장 이가순에게 비밀리에 전달하였다. 3월 1일 원산 장날에 일어난 3·1운동은 함경남도 각 지역의 만세시위를 촉발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막내 동생 이훈규는 당시 여주와 이천의 만세시위를 주도하다가 체포되어 순국하였다. 3·1운동 참여는 이혜경에게 모순된 식민지 현실을 직접 체험한 역사현장이자, 자신이 어떠한 영향력을 갖고 있는지 가늠하는 ‘시험대’였다.         alt3·1운동에 참여한 여학생들alt3·1운동으로 일본 경찰에 끌려가는 사람들 여성의 사회적인 존재성을 알리다3·1운동 직후 여성들은 전국 각 지역에서 항일여성운동단체 조직에 본격적인 시동을 걸었다. 전국 지부까지 둔 대표적인 단체로는 서울의 대한민국애국부인회와 평양의 대한애국부인회가 있었다. 전자는 1919년 10월 19일 김마리아의 숙소에서 여성계 대표 16명이 모여 조직되었다. 이들은 대부분 정신여학교 출신이었다. 이날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비밀회합을 통해 대한민국애국부인회 탄생과 임원 선임까지 급물살을 탔다. 회장은 김마리아, 부회장은 이혜경이 맡았다. 대한민국애국부인회의 활동 목적과 정신을 밝히는 취지서는 김마리아가, 본부 및 지부 규칙 등은 김마리아·이혜경·총무 및 편집장인 황애덕 세 사람이 함께 작성하였다. 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조직하고 활동한지 불과 한 달 남짓 만에 회원 수는 급증하였다. 이들은 하와이에도 지부를 설치하여 국외 항일세력과 연대를 도모하는 등 독립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또한 본부와 각 지부에서 모금된 약 6,000원이라는 거액의 군자금을 수합하여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보내기도 했다.대한민국애국부인회는 활동영역을 점차 넓혀가던 중 11월말 일제에 발각·체포되었다. 취조를 받은 사람은 총 52명, 43명은 불기소로 풀려나고 이혜경을 비롯한 9명만이 기소되었다. 이혜경은 2년 가까이 미결수로 있다가 재판에서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1921년 출옥 후 원산 마르다윌슨신학교에 복직하였다. 이후 김성국과 결혼하여 대구에 거주하면서 교회와 사회봉사로 일생을 보내다 1968년 1월 4일 세상을 떠났다. 1990년 정부는 이혜경의 공훈을 기리어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alt 대한민국애국부인회(왼쪽에서 세 번째가 이혜경) [우리가 몰랐던 이야기 둘]글 신현배 역사칼럼니스트손기정 선수와 일장기 말소 사건1936년 8월 9일은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경기가 열리는 날이었다. 심판이 시작 신호를 알리자, 세계 28개국 51명의 선수들이 힘차게 달리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는 손기정 선수와 남승룡 선수가 있었다. 이들은 나라를 빼앗긴 국민이었기 때문에 한국 대표로 올림픽에 나갈 수 없었다. 때문에 태극기가 아닌 일장기를 가슴에 달고 일본 대표로 경기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역전의 드라마를 기록한 손기정과 남승룡당시 강력한 우승 후보는 아르헨티나의 자바라 선수였다. 그는 경기 시작부터 앞으로 쑥쑥 나가 1등으로 달리고 있었다. 반환점에 이르러서도 순위는 바뀌지 않았다. 반환점까지 자바라의 기록은 1시간 8분, 손기정의 기록은 1시간 12분이었다. 4분이나 뒤쳐져 있을 동안 손기정은 4위권이 었고, 남승룡은 24위였다.하지만 후반부로 가면서 두 선수는 힘을 내기 시작했다. 남승룡은 비스마르크 언덕에서 무려 13명의 선수들을 제치며 끈질기게 쫓아왔고, 손기정은 32km 지점에서 영국의 하버와 함께 자바라를 앞질렀다. 한동안 하버와 나란히 달리던 손기정은 죽을 힘을 다해 뛰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하버마저 따돌리고 선두에 섰다. 하버는 따라잡으려 했지만 도저히 앞지를 수 없었다. 손기정은 달릴수록 속도를 더 올린 것이다. 결국 하버는 2위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지만, 이마저도 안심할 수 없었다. 어느새 많은 선수들을 제치고 3위에 선 남승룡이 무섭게 뒤쫓아 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손기정은 하버를 여유롭게 따돌리고 결승점이 보이는 베를린 경기장으로 들어섰다. 경기장 안은 함성으로 가득했다. 관중들은 열렬한 박수와 환호성으로 그를 맞이했다. 손기정은 마침내 1등으로 결승점에 들어왔다. 2시간 29분 19초 2, 세계신기록이었다.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경기에서 손기정은 1위를, 남승룡은 3위를 차지했다. 시상대에 올라 선 손기정과 남승룡의 눈에는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렀다. 승리했지만, 그들의 가슴에는 태극기 대신 일장기가 달려 있고 눈앞에는 태극기 아닌 일장기가 올라가고 있었다.         한국에도 전해진 감격의 소식한편, 8월 9일 밤 11시 서울 세종로 사거리에는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있었다. 그들은 장맛비가 쏟아지는데도 우산을 쓴 채 동아일보사 건물에 달린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생중계에 귀를 기울였다. 이 생중계는 일본 NHK 방송의 전파를 받아 경성방송국에서 진행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중계방송은 1시간 만에 중단되었다. 올림픽 중계방송은 저녁 6시 30분과 밤 11시에 각각 1시간밖에 하지 않았던 것이다. 사람들은 그럼에도 물러가지 않고 신문사 앞에 진을 치고 있었다. 혹시나 신문사에서 마라톤 경기 결과를 알려 주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다음날 새벽 2시가 가까워졌을 때 건물 2층 창문이 열렸다. 그리고 한 여자가 얼굴을 내밀더니 흥분한 목소리로 사람들을 향해 소리쳤다. “여러분, 기뻐해 주세요! 손기정 선수가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경기에서 우승했어요! 2시간 29분 19초 2, 세계 신기록이에요! 남승룡 선수도 3위를 차지했어요!” 사람들은 함성을 지르며 서로 얼싸안고 기뻐했다. “만세! 손기정 선수 만세!” “남승룡 선수 만세!” 손기정이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을 차지했다는 소식은 전국 방방곡곡에 전해졌다. <조선중앙일보>는 8월 10일 새벽 손기정의 우승을 알리는 호외를 발행했다. 모든 한국 사람들은 이 소식을 듣고 뛸 듯이 기뻐했다.         손기정의 가슴에 달린 일장기를 지우다일본의 여러 신문에도 손기정의 우승 소식과 함께 그의 사진이 실렸다. 사진 속에는 시상대에 선 손기정이 월계관을 쓴 채 올리브나무 화분을 들고 있었다. 운동복을 입은 손기정의 가슴에는 일장기가 달려 있었다. <조선중앙일보>의 기자 유해붕은 일본 신문에 실린 손기정의 사진을 보고 서글픔을 느꼈다. ‘손기정 선수의 가슴에 달린 국기가 일장기가 아닌 태극기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는 사진 속 일장기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이를 악물었다. ‘이 사진을 우리 신문에 실어야 하는데, 일장기를 달고 있는 사진을 그대로 내보낼 수 없어. 손기정 선수는 일본 사람이 아니라 우리 한국 사람이야.’ 유해붕 기자는 마침내 결심했다. 손기정의 가슴에 달린 일장기를 지워 신문에 내보내겠다고 말이다. <조선중앙일보> 8월 13일자 신문을 본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시상대에 선 손기정의 가슴 부분 일장기가 지워져 있었던 것이다. “머리에 월계관을 쓴 손기정 선수의 사진을 좀 봐. 가슴에 일장기가 없어.” “그렇군. 일장기가 감쪽같이 사라졌어. 아무래도 지워버린 모양이야.” 신문이 나왔지만 조선총독부에서는 이 사실을 모르는지 당장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그런데 <동아일보> 8월 25일자 신문에도 일장기를 지운 사진이 실렸다. 동아일보사 체육부 이길용 기자가 신문에 손기정 선수의 사진을 실으면서, 삽화 담당 직원인 화가 이상범을 시켜 그의 가슴에 있던 일장기를 지우게 한 것이다. 그제야 사태를 파악한 조선총독부는 발칵 뒤집혔다. “손기정 선수의 가슴에 일장기가 없잖아! 일장기를 일부러 지웠어!” 조선총독부는 일본 경찰을 동아일보사로 보내 이길용 기자, 이상범 화가를 비롯하여 신문사 간부들을 잡아들였다. 또한 <동아일보>에 무기정간 처분을 내리고 사장 송진우와 부사장 장덕수를 물러나게 했다. 조선총독부는 뒤늦게 <조선중앙일보>에도 일장기를 지운 사진이 실렸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리하여 유해붕 기자도 감옥에 갇혔고, 조선중앙일보사 사장 여운형도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았다. <조선중앙일보>는 자진 휴간했다가 결국 폐간되고 말았다.오늘날 ‘일장기 말소 사건’은 일제강점기에 민족의 울분을 표현하고 민족의 저항정신을 보여준 사건으로 평가받고 있다.         alt경기장에 들어오는 손기정과 환호하는 관중들alt손기정의 마라톤 우승 순간alt일장기가 지워진 사진 신현배역사와 전통문화에 대해 관심이 많은 역사칼럼니스트. 저서로는 역사 이야기 『엉뚱 별난 한국사』, 『엉뚱 별난 세계사』, 『2000년 서울 이야기』, 『세계사로 배우는 법 이야기』, 전통문화 이야기 『소중한 우리 문화 지식 여행』 시리즈 등이 있다. ]]> Fri, 01 Dec 2017 10:19:27 +0000 12 <![CDATA[보이지 않는 영웅의 모습 ]]> 글 심용환 역사N교육연구소 소장보이지 않는 영웅의 모습독립운동은 눈에 보이는 성과로 평가할 수 없다.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 저격에 성공했으나 남자현은 총독 암살에 실패했다. 김원봉이 이끈 의열단과 김구가 이끈 한인애국단은 위험을 무릅쓴 도전 끝에 몇몇 의사들이 거사에 성공했지만 그에 앞서 치러진 수많은 실패 역시 고귀하다. 우리는 독립운동의 전면에 나서 장렬히 산화한 위대한 영웅들을 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들을 도운 숨은 영웅들은 여전히 역사의 그늘 속에 가려져 있다. 파리장서운동과 윤현진1919년 고종황제의 갑작스런 서거는 3·1운동이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기독교·천도교·불교계는 연합하여 민족사에 중요한 분수령을 일구어내는 데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유교계도 3·1운동에 부응하고자 뒤늦게나마 활동에 나섰는데, 바로 ‘파리장서운동’이었다. 유림 대표 137명이 한국독립청원서를 만들어 파리강화회의에 보내기로 도모한 일이다. 대표적인 유교계열 독립운동가 김창숙은 한국독립청원서를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로 가져가 이를 영문으로 번역하고 한문 원본, 영문 번역본 각 3,000부를 인쇄하여 파리는 물론 중국, 그리고 국내에까지 배포하였다.윤현진은 당시 한국독립청원서를 우송하는 일과 영문 번역을 담당했던 인물이다. 그는 일본 유학 당시 조선유학생학우회의 총무를 역임, 학우회에서 발간하던 『학지광』에 글을 발표하는 등 일찍부터 민족애를 강하게 드러냈다. 유학 후에는 대동청년단에 참여하였고 파리장서운동에서도 중요한 조력자의 역할을 감당했다. 이후 대한민국임시정부 재무차장에 선임되어 재정문제 해결을 위해 발 벗고 나섰으며, 또한 개인 재산 상당액을 대한민국임시정부에 헌납하기도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1921년 서른 살의 나이에 숨을 거두게 되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장으로 장례가 치러졌다. 인재가 단 한 명이라도 귀했던 당시 더욱 안타까운 죽음이었다.         alt윤현진alt파리강화회의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표단alt한국독립청원서 이봉창, 윤봉길 의거에 도움을 준 두 사람백용성은 윤봉길을 상하이로 보내 홍커우공원 폭탄 투척 의거라는 독립운동사의 손꼽히는 쾌거를 이루는 데 기여했다. 다만 그를 윤봉길의 조력자 정도로만 언급하기에는 그가 남긴 족적이 인상 깊다.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에는 불교 대표가 2명 있었는데, 그중 한 명이 바로 백용성이다. 대중에 널리 알려진 한용운과 더불어 3·1운동을 이끈 민족의 선각자이자 한국 근대 불교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백용성은 불교의 분파라고 할 수 있는 대각교를 창시한 조사이자 일제강점기 대표적인 불교계 독립운동가다. 당시 일제가 다양한 방법으로 불교계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상황에서 백용성은 불교 개혁과 대중화를 위해 대각교운동을 전개하였다. “내가 깨닫고 남을 깨닫게 하자(自覺覺他)”백용성은 대승불교가 지향하는 ‘중생구제’라는 대의를 독립운동과 일체화시켰으며, 한국 불교의 고유한 측면인 호국불교적 성격 역시 같은 관점에서 해석하였다. 따라서 불교 개혁에 힘쓰는 한편, 또한 독립운동에도 매진한 것이다. 불경의 한글 번역을 위해 노력하고, 농업을 기반으로 자립경제를 구축하여 확보된 자금을 통해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지원하고자 무던히 애를 썼다. 그러던 중 윤봉길·김구와 연이 닿아 한인애국단 거사에 숨은 조력자로서 공헌하게 되었다.김홍일은 한국광복군 총참모장을 역임했던 인물이다. 우리나라 무장독립투쟁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 중 하나이다. 어린 시절부터 만주·연해주·중국 등지의 항일활동에서 활약한 그는 중국 국민당 산하 국민혁명군에 복무하면서 경력을 쌓았다. 특히 상하이의 병기공장 군기처에서 장교로 일할 당시 이봉창·윤봉길의 의거를 위해 폭탄을 준비해준 사람이 바로 김홍일이다. 1932년 1월 도쿄에서 일왕이 탄 마차를 향해 폭탄을 던진 이봉창 의거는 안타깝게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김홍일은 포기하지 않고 중국인 향차도(尙次導)를 통해 물통 폭탄과 도시락 폭탄 제조를 주도하였고, 이는 1932년 4월 홍커우공원에서 열린 상하이사변 승전기념식에서 벌어진 윤봉길 의거에 크게 기여했다. 당시 행사장에는 물통과 도시락 그리고 일본 국기만 들고 갈 수 있었기에, 도시락 폭탄·물통 폭탄을 만들자는 김홍일의 기지가 크게 발휘되었다.         alt백용성alt김홍일alt윤봉길 의거에 사용된 물통 폭탄 alt 김홍일(오른쪽)과 중국인 향차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살림꾼, 정정화정정화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안주인’과 다름없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고 대동단 총재로 추대된 시아버지 김가진, 그리고 남편 김의환은 독립운동을 위해 상하이로 망명하였다. 정정화 역시 함께했다. 이후로 광복을 맞이할 때까지 그녀의 인생은 대한민국임시정부와 궤를 같이 하였다. 초기 정정화는 독립운동자금 모금활동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6번이나 국내외를 넘나들며 자금 조달에 적극 임했다. 1935년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여당의 역할을 하던 한국국민당에 가입하여 공식적으로 활동하기도 했지만, 사실상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존속하던 20년의 기간 동안 그곳의 살림살이를 꾸려나갔다. 특히 1930년대 후반 중일전쟁이 터지면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충칭 등을 전전하던 어려운 시절에는 전적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임정요인들을 정성으로 보살폈다.그러던 중 1938년 5월 6일 한국독립당 결성을 위해 우익 3당의 대표들이 모여 회의하는 도중에 이운환이라는 청년이 권총으로 3당 대표를 암살하려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때 김구·유동열·지청천·현익철 등 중요 인물들이 총에 맞아 중경상을 입는 등 큰 피해를 입었다. 현익철은 이때 사망하고 김구와 유동열 등은 상아의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았다. 당시 정정화는 상아의원에서 이들이 회복하기까지 지극정성으로 보살폈다. 또한 초기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이끈 이동녕이 1940년 71세의 나이로 사망할 때까지 그의 곁에서 간호하며 임종을 지키기도 했다.정정화는 안살림만 담당한 것이 아니었다. 한국독립당 창립 당원으로서 남편 김의환과 함께 활동하였고, 한국독립당 여성 조직인 한국혁명여성동맹 간사로 선출되기도 하는 등 적극적인 대외활동을 벌였다. “국내외 부녀는 총단결하여 전민족해방운동과 남녀평등이 실현되는 민주주의 신공화국 건설에 적극 참가하여 분투하자.” 1943년 2월 한국애국부인회 재건대회 당시 정정화를 포함한 일원들이 주장한 내용이다. 한국애국부인회는 각종 매체를 통해 국내외 동포 여성들에게 민족적 각성을 촉구하며 독립운동 참여를 호소하였다. 의연금품을 모아 무력항쟁을 준비하고, 한국광복군을 위문하는 등 독립운동 지원 활동을 이어나갔다. 광복 이후 정정화의 삶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들이 그랬듯 결코 순탄치 않았다. 좌우 갈등이 심각해지는 상황에서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했으며 이승만 정부가 제안한 도지사급 감찰위원의 자리도 마다했다. 한국전쟁 도중에는 안재홍·조소앙 등의 여러 민족주의자들과 남편 김의한이 함께 납북되었고 이러한 사정으로 정정화는 부역죄로 투옥, 두 번이나 옥살이를 하는 등 말할 수 없는 고초와 수모를 겪기도 했다.          alt정정화와 외아들 김자동alt정정화 가족(김의환, 정정화, 김자동)alt한국혁명여성동맹 창립기념(1940년 6월 17일, 왼쪽에서 두 번째가 정정화) 누군가가 앞장서서 싸운다면 누군가는 스포트라이트 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다른 궂은일을 감당해야 한다. 독립투쟁을 도운 숨은 조력자. 그들은 그저 조력자가 아니라, 또 다른 독립운동가다. 그것이 우리가 얼굴과 이름이 잘 알려지지 않은 이들을 오래도록 기억해야 하는 이유다. 심용환성균관대학교 사범대학에서 역사교육학을 전공했다. 현재 팟캐스트 <진짜 역사 가짜 역사>를 통해 재미있고 올바른 역사 이야기를 전파하고 있으며, CBS와 공동으로 <심용환의 근현대사 똑바로 보기>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저서로는 『헌법의 상상력』, 『심용환의 역사토크』, 『단박에 한국사』 등이 있다. ]]> Fri, 01 Dec 2017 10:16:36 +0000 12 <![CDATA[분노하지 않는다는 건 사랑하지 않는 것 ]]> 글 이성주 역사칼럼니스트분노하지 않는다는 건 사랑하지 않는 것대한민국 언론사 최초의 종군기자이자, 최초의 순직기자는 누구일까? 그 기록은 1920년으로 거슬러 올라가 장덕준에 이른다. <동아일보> 기자 신분으로 훈춘사건을 취재하던 도중 행방불명된 장덕준. 그의 이야기는 언론인의 존재 이유를 말해준다. 참된 언론인의 표본▲1892년 황해도 재령 출신 ▲1914년 <평양일일신문> 신문부 주간으로 활동 ▲1915년 일본 유학 ▲1920년 김성수, 이상협 등과 함께 <동아일보> 창간에 참여 ▲1920년 11월 훈춘사건 취재 도중 행방불명‘권력의 감시견(WatchDog)’현대 언론학에서는 언론(言論)의 역할을 이렇게 표현하곤 한다. 언론이 입법·사법·행정에 이은 제4부라 불리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언론은 자칫 부패할 수 있는 권력을 감시하며, 이들이 올바로 작동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짖는’ 존재다. 권력은 자신을 비판하는 무리를 제거하려는 속성을 가진다. 이는 시대를 뛰어넘어 동서고금의 진리이다. 장덕준은 진정한 언론인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온몸으로 증명한 인물이다. 불과 스물아홉 짧은 생을 살다 갔지만, 그가 남긴 족적은 크고도 깊었다. 그는 일본에서 유학하던 중 신문 발간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깨닫고 이를 실천하고자 계획을 마련했다. 3·1운동이 일어나 던 때 김성수와 함께 인재 양성에 기여하고자 조선 학생들의 외국 유학을 돕는 단체 ‘육영회’ 설립을 추진했고, 이후에는 <동아일보> 창간에 힘을 기울였다.우여곡절 끝에 어렵게 시작했지만, <동아일보>는 오래지 않아 일제의 강압으로 정간되었다. 장덕준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코 펜을 놓지 않았고, 취재수첩을 항시 몸에 지니고 다녔다. 옆에서 지켜보던 이들의 증언은 한결같았다.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불의에 맞서 싸우고, 취재했으며, 글을 썼다’는 것. 피를 토했다는 말은 비유가 아닌 실제였다. 장덕준은 천형(天刑) 같은 폐결핵을 앓았다. 흥분하면 피를 토하기 일쑤였다. 이런 몸 상태라면 기자생활을 접고 요양을 해야 마땅하건만 그는 끝까지 취재일선에서 물러서지 않았다.장덕준이란 이름 석 자는 훈춘사건(琿春事件)을 통해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1920년 봉오동 전투에서 참패한 일본군은 중국 마적단과 내통해 고의로 일본 관공서를 습격하고, 이를 핑계로 만주에 있던 조선인 3만여 명을 학살하였다. 장덕준은 이를 취재하기 위해 만주로 떠났다. 신문은 정간된 상태였지만, 그의 발걸음을 멈추게 할 수는 없었다. 그는 곧장 간도 현장으로 달려가 첫 기사를 내보냈다.‘빨간 핏덩이만 가지고 나의 동포를 해하는 자가 누구이냐고 쫓아와보니 우리가 상상하던 바와 조금도 틀리지 않는다.’계속해서 우리 동포의 참상과 일본군의 잔학성을 취재하던 어느 날, 장덕준에게 일본인 몇 명이 찾아왔고 그들을 따라 밖으로 나선 이후로 장덕준의 소식은 영영 끊어져 버렸다. 그렇게 그는 우리 언론사상 첫 순직기자가 되었다. 당시 나이 스물아홉이었다.분노로 증명한 애정장덕준의 기자 정신은 오늘날의 언론환경과는 맞지 않는 모습이 분명 있다. 그는 언제나 혈기가 끓어 넘쳤고, 민족의 비극 앞에서 언론인이기 이전에 한국인으로서 글을 쓰고 불의에 맞섰다. <동아일보> 창간 다음날인 1920년 4월 2일자부터 10일 넘게 ‘조선소요에 대한 일본여론을 비평함’이란 논설을 보면 장덕준을 현대 기준의 불편부당(不偏不黨)한 언론인이라고 보기에는 어렵다. 그는 민족을 대변하는 기자였기 때문이다.그러나 오늘날 언론과 국민은 장덕준의 행적을 눈여겨봐야 할 것이다. 장덕준은 기사를 쓸 때 ‘발’로 썼다. 책상 앞에 앉아 사색과 통찰로 글을 쓰는 게 아니라, 현장에 뛰어들어 날 것 그대로 부딪힌 분노와 아픔을 글로 옮긴 것이다. 그는 때때로 주변 기자들에게 “그따위 소리를 하고도 나라를 위한다는 놈이라 할 수 있느냐”며 힐난했고, 분에 못 이겨 의자를 집어던지기도 했다.장덕준의 ‘분노’가 부럽다. 요즘 세상을 바라보면, 공공의 일을 두고 분노하는 이들을 보기가 어렵다. 하나둘 목소리가 모여야 겨우 남의 의견에 자신의 뜻을 보태 말하는 정도다. 분노라는 건 대상에 대한 애정이 없으면 발현되기 힘든 감정이다. 장덕준의 분노는 우리 민족에 대한 사랑에서 비롯된 감정이었다. 사랑하기에 누구보다 분개하고, 안타까워하고, 아파했던 것이다.언론의 공정성에 대해 많이 회자되는 요즘이다. 공정성을 논할 수 있다는 건 그만큼 우리 사회가 성숙해졌다는 것. 이는 ‘공정성’에 앞서 ‘민족의 대변자’로 살아야 했던 언론환경을 거쳐 왔기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장덕준의 인생으로 보자면, 분노하지 않는다는 건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한 불의로부터 느끼는 분노는 행동으로 실현할 때 그 사랑이 증명된다. 사회의 부조리와 불합리에 분노하고 이 분노를 행동으로 옮긴다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분명 더 나아지리라.                         이성주시나리오 작가 겸 역사칼럼니스트. 대중과 함께 호흡하는 글쓰기를 목표로 『조선의 민낯』, 『왕들의 부부싸움』과 같은 역사서를 출간한 바 있다. 최근에는 국제정치와 관련된 연구 및 집필에 열중하고 있다. 『전쟁으로 보는 국제정치』 시리즈 1, 2, 3권을 출간 중이다. ]]> Fri, 01 Dec 2017 10:14:53 +0000 12 <![CDATA[새하얀 발자국 남기며 ]]> 새하얀 발자국 남기며흰 눈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내립니다.늘 보던 장소도 새로이흰 옷으로 갈아입었습니다.찬바람에 양 볼은 차갑고장갑 낀 두 손은 따듯하고눈 내리는 풍경에 마음은 포근합니다.설국의 독립기념관이 겨울 새하얀 발자국을 남기고픈 곳이 생겼습니다. ]]> Thu, 30 Nov 2017 16:12:19 +0000 12 <![CDATA[한국광복군 훈련반에 가다 ]]> 글 김주용 독립기념관 책임연구위원한국광복군 훈련반에 가다이른 아침 우리 일행을 태운 차는 푸양(阜陽)에서 한 시간 거리에 위치한 한국광복군 훈련반이 있었던 곳을 향해 빠르게 달렸다. 우리는 한국광복군 제3지대 훈련 장소인 린촨소학교로 향했다. 학도병에서 탈출한 청년들의 훈련소 린촨소학교는 한국광복군 훈련반이 임시로 훈련했던 장소다. 그래서인지 좌표 33.06815N, 115.25196E 지금은 린촨제일중학교로 바뀐 린촨소학교에 도착하자 과거 일본군 학도병으로 징집됐다가 탈출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군인 한국광복군에 몸담고자 했던 20대 청년들의 패기가 온몸으로 느껴졌다.한국광복군 훈련반은 안후이성(安徽省) 푸양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던 징모 제6분처에서 설치 운영한 ‘임시훈련소’였다. 한국광복군 징모 제6분처는 푸양을 중심으로 초모활동을 전개하면서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그 성과로 인해 한국광복군 훈련반을 만들어 중국군 제10전구 사령관 탕인보(湯恩佰)와 교섭한 결과, 푸양 근처 린촨(臨川)에 있는 중앙육군군관학교 제10분교 간부 훈련반에 한국광복군 훈련반을 특설하였다. 그리고 이곳에서 초모한 인원과 일본군에서 탈출한 학도병을 입교시켜 훈련시켰다.한국광복군 훈련반의 입교는 일시에 이루어진 게 아니었다. 우선 푸양에 집결해 있는 인원부터 입교시켜 1944년 5월부터 교육과 훈련을 실시하였고, 이후 초모되거나 탈출한 인원들을 곧바로 린촨으로 데려와 추가 입교시켰다. 대표적으로 장준하·김준엽 등의 학도병들이 있었다.장준하는 일본군 학도병으로 끌려갔다가 탈출하여 광복을 맞이하기까지의 항일투쟁기를 기록한 『돌베개』를 남겼다. 책 내용 중 등장하는 린촨에서의 생활을 살펴보자.우리가 떠밀려 들어간 곳은 중국 중앙군관학교 린촨분교로서, 그 안에 한국광복군 훈련반이 특별히 부설되어 있었다. 이 훈련반엔 김학규가 주임으로 있었으며, 이평산·진경성 두 교관이 주임을 돕고 있었다. 약 4개월 전에 설치되었다고 했다. 일본군에 징병되어 중국지역으로 파견 오는 한국 청년들의 수가 많아졌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공작 계획을 수립하였다. 이에 우리 임시정부와 광복군 총사령부로부터 명을 받은 김학규가 안후이성 푸양이란 곳에 주재하면서 약 1년 전부터 각종 공작을 폈으며, 탈출 학병 외에도 한국 청년들을 모병하여 상당수가 되자 이곳 린촨분교에 정식으로 군사훈련을 요청하여 특설한 것이 이 훈련반이었다. 그동안 한국 청년은 80여 명이나 집결하였다. 계속적인 모병 공작과 격증하는 탈출 학병으로 해서 훈련반은 열을 띠었다.『돌베개』 138~139쪽 내용 中  alt 한국광복군 훈련반 제1기 졸업사진         한국광복군 훈련반에서 한국광복군 제3지대까지조국 독립에 대한 열정 하나만을 가지고 일본군을 탈출했던 장준하를 비롯한 젊은 한국 청년들은 이곳 린촨에서 조국애를 담금질했다. 한국광복군 훈련반의 교육과 훈련은 주로 징모 제6분처의 기간요원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군사훈련은 중국군 교관과 중앙육군군관학교 출신의 징모 제6분처 간부인 신송식이 맡아 실시하였는데, 주로 도수훈련(徒手訓練)이 이루어졌다. 정신교육은 김학규를 비롯한 신송식·조편주·이평산 등이 담당하였다. 김학규는 한국 독립운동사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연혁 및 건국강령을, 사회주의 운동과 연관이 있던 이평산과 난징(南京)에서 <일본동맹통신> 기자로 근무했던 조편주 등은 세계혁명사 및 항일투쟁정신과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정신교육을 실시하였다.한국광복군 훈련반에서의 교육은 1944년 5월 중순부터 11월까지 5개월에 걸쳐 진행되었고, 입교생 전원 48명이 졸업하였다. 정확한 이유는 파악되지 않았지만, 이후 한국광복군 훈련반은 폐쇄되었다. 이들은 한국광복군 훈련반을 졸업한 후 모두 광복군으로 편입하였다. 이들 중 36명은 광복군총사령부가 있는 충칭(重慶)으로 향했고, 푸양에 잔류한 12명은 후일 광복군 제3지대 창설의 바탕이 되었다. 전날 답사한 푸양에서 성립된 한국광복군 제3지대가 그렇게 탄생한 것이다.         alt왼쪽부터 노능서, 김준엽, 장준하alt한국광복군 제3지대 주둔지 터 흔적은 사라지고 터만 남은 사적지에서이선자 부관장이 학교 측에 연락한 뒤 우리는 서둘러 학교 운동장으로 향했다. 마치 이곳이 한국광복군 훈련반의 훈련 장소 그대로인 듯한 착각이 들었다. 정문에서 화단을 지나 과학관 뒤에 훈련반 숙소가 있다고 했다. 지금 학생 기숙사 옆의 공터가 당시 한국광복군들이 훈련한 후 지친 몸을 잠시 누일 수 있었던 숙소였다는 사실은 실감이 잘 나지 않았다. 조국을 되찾고자 이를 악물고 훈련했던 청년들의 숙소가 현재 공터로 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십 년이 지나 찾은 곳에서 이는 사치스러운 생각이었다. 장준하는 한국광복군 훈련반 전우들이 모두 모국어를 사용해 이곳에 왔을 때 마치 고국에 온 듯한 착각을 했다고 하였다. 그만큼 조국을 찾고자 했던 열의가 가득했던 곳이다. 한국광복군 훈련반의 훈련 장소는 지금 린촨제일중학교의 운동장이었다. 정문에서 과학관을 지나 오른쪽에 보이는 잔디 운동장이 그곳이다. 노천에 탁구대가 있는 것이 특이했다. 10개 정도의 농구대가 있었다. 한국에서는 보기 드문 장면이었다. 임공재 사진작가는 학교 전경을 찍기 위해 인근에서 가장 높은 곳을 찾아 나섰다. 지금 독립기념관 사진실에 있는 많은 사진은 임공재 사진작가의 열정으로 탄생했다. 우리는 학교 관계자들에게 한국광복군 훈련반 훈련 장소에 기념비를 설치하여 한중 애국주의 교육 장소로 활용할 것을 건의하였다. 2003년에 건립된 기념비가 철거된 상황 속에서 답사단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안이었다. 관계자들은 좋은 의견이라고 했지만, 언제 설립될 지는 알 수 없다고 답했다. 늦은 점심을 간단히 먹고 푸양으로 돌아와서 이번 답사에 대해 정리했다. 답사는 ‘길에 대한 예의’라고도 한다. 하지만 무작정 길만 걸어서는 그곳에 머물렀던 선열들의 역사를 캐기가 쉽지 않다. 이번 답사 역시 준비는 하였지만 정말 만족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는지 자문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푸양과 린촨에서 젊음을 태워 조국을 밝히려 했던 독립운동가들의 열정이 지금 대한민국의 젊은이들에게도 전해지기를 기대해 본다.         alt 린촨제일중학교 운동장         상하이에서의 새 출발상하이는 한국인들에게 소중한 곳이다. 이곳에서 대한민국 국호가 탄생했기 때문이다. 2019년은 3·1운동 100주년이자 대한민국임시정부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한국독립운동사에서 3·1운동은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실현한 한민족의 역동적 표현의 결과물로서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온 민족이 들고 일어난 거대한 함성이자, 역사의 큰 물줄기를 바꿔놓은 대역사였다. 뿐만 아니라 지역적 한계를 극복하고 남녀노소·계급 등의 차별을 잠식한, 세계 민족운동사에 보기 드문 감동드라마다. 세계 각국의 언론은 3·1운동에 대해 예사롭지 않은 관심을 표하였다. 이처럼 3·1운동이 보여준 성숙한 민의(民意)는 1919년 4월 11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성립으로 이어졌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3·1운동의 적장자(嫡長子)이다.10월 14일 12시 10분경 필자는 오대록 박사·김영장 연구원·임공재 사진작가와 한 팀이 되어 상하이 푸둥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임공재 사진작가와 한 몸인 사진용 사다리를 마지막 짐으로 찾고 우리 일행은 준비된 차에 올라 상하이 답사의 첫발을 내디뎠다. 15시 15분. 우리는 마침내 마당로(馬當路)에 위치한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청사에 도착했다. 이번호를 끝으로 새로운 독립운동사적지 조사를 통해 다시 찾아오겠습니다.그동안 애독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Thu, 30 Nov 2017 16:59:14 +0000 12 <![CDATA[잘 몰라서 생기는 선입견 다문화 가정, 이제는 껴안을 때 ]]> 글 이현수 일상심리 전문작가, 자유기고가잘 몰라서 생기는 선입견다문화 가정, 이제는 껴안을 때캄보디아인 반말리 씨는 한국인 남편과 일주일 째 냉전 중이다. 명절날 시댁에서 벌어진 일이 문제였다. 반말리 씨가 시부모님의 밥을 가장 나중에 퍼내자, 시어머니가 버럭 화를 냈다. “이렇게 대접하는 경우가 어디 있니?” 남편마저 시어머니와 동조하며 나무라자, 반말리 씨는 억울하다는 반응이었다. “저는 시부모님을 공경하기에 그렇게 한 것이에요.”반말리 씨의 고향 캄보디아에서는 밥솥 아래쪽의 밥이 가장 맛있다고 하여 웃어른의 밥을 나중에 푸는 예절이 있다. 즉, 위의 사례는 문화의 차이에서 비롯된 해프닝인 것이다. 여전히 차가운 시선을 받는 다문화 가정대한민국은 이미 ‘다문화 사회’에 진입 중이다. 유엔미래보고서는 2050년에 우리나라 전체 가정 중 다문화 가정의 비중이 21.3%에 이를 것으로 전망했다. 통계청이 지난 8월 31일 발표한 2016년 인구주택총조사에 따르면 현재 다문화 가구원은 96만 3천 명으로 100만 명에 이미 육박했고, 다문화 학생도 지난 4월 기준 11만 명에 달했다. 100명 중 2명은 다문화학생인 셈이다.그러나 사회 인식과 제도는 아직 이러한 추세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2010년 이주여성에 대한 가정폭력 실태조사에 따르면 무려 69.1%가 신체적·정서적·경제적 폭력과 학대 등을 경험했으며 이로 인해 해체된 가정도 상당수다. 다문화 가정폭력 검거 건수 역시 매년 큰 폭으로 증가하고 있고, 다문화 가정의 자녀 역시 차별당하고 있다. 서울시교육청의 발표 자료에 따르면, 사회적 냉대로 학업을 중단하는 다문화 학생 비율이 일반 학생보다 2배 가까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세계의 문화와 언어는 다종다양하다. 서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이루어진 만남은 불협화음이 날 수밖에 없다. 다문화 가정의 경우 맞선에서 계약서 작성까지 빠르게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그만큼 부작용이 예상되는 수순이다. 또 한편으로 다문화 가정이 아닌 일반 가정에서는 타문화에 대해 공부할 기회가 없어 근거 없는 편견이 생기거나 불합리한 오해를 하기 쉽다.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한 이주여성은 크게는 제사상 준비부터 작게는 과일 깎는 방법까지 본인의 나라와 판이하다며 놀라움을 금치 못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에서는 집안 어른을 찾아뵙고 인사를 드릴 때 절을 하는데, 베트남에서는 죽은 사람에게만 절을 할 수 있다고 여겨 살아있는 사람에게는 절을 하지 않는다. 또 한국에서는 국그릇을 오른쪽, 밥그릇을 왼쪽에 놓지만 캄보디아에서는 그 반대로 한다. 이처럼 이주여성이 아무리 정성을 다해 시부모를 봉양하려 해도 태생적으로 문화가 다르니 오해가 생기기 쉽다. 그렇다면 이러한 편견과 오해를 줄일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1. 가정에서다문화 가정 내에서 심각한 갈등이 발생하면 관련 기관에서 적극적으로 상담을 받고 가족구성원 간에 터놓고 대화하며 갈등의 원인을 찾아야 한다. 이러한 과정은 고부갈등·부부갈등 해소에도 도움이 되고, 이로써 이전보다 돈독한 사이로 발전할 수 있다. 다문화 가정 상담과 한국어 통역을 지원하는 다문화가족센터는 전국 217개소를 운영하고 있다. 또 다문화가족지원포털 ‘다누리’에서는 주요 문화 차이에 대한 온라인 정보를 제공하고 있으니 적극 활용하자.2. 국가에서이제까지는 관련 정책이 이주여성의 초기 정착에 초점을 맞추었지만, 이제부터는 중·장기적 방향에서 ‘통합’을 염두에 두는 방향으로 바뀌어야 한다. 국내 정착 관련 제도 이외에 자녀 양육, 남편과 시댁에 의한 가정폭력, 남편의 사별로 인한 한부모 가족화, 취학자녀의 차별 해결 등의 문제에 대비하기 위한 구체적인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 또한, 다문화 주민과 일반 주민 간의 대화 프로그램 운영의 확대로 편견과 고정관념을 줄여야 한다.3. 학교에서 조사에 따르면 다문화 학생 비율이 높은 학교는 일반 학교보다 전출률이 2배 이상 높다. 실제로 서울의 한 초등학교에서는 다문화 학생이 많다는 이유로 대거 전출시키는 경우까지 있었다. 다문화 학생과 일반 학생 간 돈독한 관계 형성을 위한 노력으로 다문화어린이도서관 ‘모두’의 사례를 들 수 있다. 이곳에서는 다문화 도서는 물론 대학생과 1:1 언어 멘토 연결해주기·세계 각국 전통 의상 입어보기·새해 풍습 및 다국적 음식 만들어보기 등 다양한 체험행사를 열어 학생들이 다문화 가정과 학생에 대한 선입견을 자연스레 지우도록 하고 있다.4. 사회에서일본의 주류회사인 산토리의 중국 진출 실패 경험을 보자. 산토리는 현지 문화를 반영하지 않은 채 맥주를 판매했다가 기대 실적의 20%에 불과한 판매량을 보이며 쓴맛을 보았다. 이후 청량감이 높고 알코올 도수가 낮은 제품을 선호하는 중국 소비자의 취향을 반영해 제품을 다시 판매하자, 다음해에는 맥주 판매량 최다 기업으로 부상했다. 기업이 수출 제품 현지화에 성공하기 위한 중요한 조건 중 하나는 그 나라의 문화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두 가지 문화에 노출되어 성장한 다문화 학생은 이러한 점에서 유리하며, 장차 무역 관련 사업에서 큰 잠재력을 가진다.조선시대 최고의 과학자로 불리는 장영실의 뛰어난 업적은 유명하지만, 그가 지금으로 치면 다문화 가정 자녀였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장영실의 아버지는 원나라 사람이었고, 어머니는 부산 동래현 출신이다. 고대사 연구로 저명한 일본 작가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가 세계를 제패한 원동력으로 타민족을 끌어안은 포용성을 꼽았다. 다문화 가정이 전체의 38%를 차지하는 미국 역시 다양한 민족의 조화를 이루어 초강대국으로 자리 잡았다. 이렇듯 다문화는 ‘흠’이 아닌 ‘힘’이다. 우리 사회가 풍성해지고, 국가가 성장하는 길이라는 것을 알고 이제 그만 색안경을 벗고 바라보아야 한다. 이현수일상심리 전문작가 겸 자유기고가. 매일경제·고용노동부·한국무역보험공사·서울신용보증재단·삼성생명·현대모비스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전문가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 Thu, 30 Nov 2017 17:02:24 +0000 12 <![CDATA[겨울바다의 서정 - 충청남도 태안 - ]]> 글·사진 김초록 여행칼럼니스트 겨울바다의 서정 - 충청남도 태안 -  이름에서부터 평안함이 깃든 고장, 태안(泰安)으로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다. 원유 유출 사고의 어두운 과거는 아직 완전하게 치유되지 않았지만, 동쪽을 제외한 3면의 바다가 만들어낸 아름다운 자연 풍경은 태안을 봄·여름 가릴 것 없이 주목받는 여행지로 탈바꿈시켰다. 무술년, 첫 여행의 시작은 태안반도의 최남단 영목항에서부터다. 오감을 만족시키는 영목항태안에는 유난히 해변이 많다. 같은 바다를 따라 만들어졌지만, 저마다 가진 풍경은 각양각색이다.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는 지난해 12월 서해를 테마로 한 걷기여행길 10선을 선정했다. 그중 한 곳이 태안 해변길, 샛별길이다. 총 7개의 코스로 구성된 샛별길은 최북단 학암포에서 가장 남쪽에 위치한 영목항까지, 끊일 듯 끊어지지 않는 120km의 긴 리아스식 해안을 따라 조성되었다. 태안 여행의 출발지로 영목항을 선정한 이유는 바로 이점 때문이다.영목항의 바다 건너로는 원산도·효자도·추섬·빼섬·삼형제 바위가 보이고 좌측으로는 만선의 꿈을 품은 배들이 힘차게 물살을 가르며 나아간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탁 트이는 풍경이다. 서해 물고기들의 산란지인 천수만의 길목을 지키는 영목항은 수산업이 발달하여 바지락·소라·고동·우럭·농어 등 다양한 어종을 부담 없는 가격에 즐길 수 있을 뿐 아니라 배낚시의 포인트가 산재해 있어, 안흥항과 함께 태안반도 내 손꼽히는 낚시터 중 하나다. 낚시에 관심이 있다면 뱃길을 따라 바다로 나가 보는 것을 추천한다. 월척의 손맛을 느낄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alt영목항  이름도 어여쁜 태안반도의 해변들태안에는 해변이 유난히 많은데, 바람아래·장돌·장삼·운여·샛별·꽃지·몽산포 등 지명이 독특하고 재미있다. 영목항을 출발하여 77번 국도를 따라 이동하다 보면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곳은 바로 운여해변이다. 바위에 부딪히는 파도가 만들어 내는 포말이 마치 구름 같다 해서 운여(雲礖)라는 이름 붙은 이곳은 제방 안쪽에 호수처럼 고인 바닷물과 수면에 비치는 솔숲이 아름다워 사진동호인들의 출사 장소로도 유명하다. 특히 낙조가 환상적인데, 물때와 날씨를 잘 맞춰야 운 좋게 볼 수 있다.꽃지해변은 태안반도의 해변 중 으뜸으로 꼽힌다. 황포항에서 10㎞ 정도 떨어진 이곳에는 잘 단장된 해변공원이 아기자기한 산책코스를 이룬다. 또한 해 질 무렵 할미바위와 할아비바위 사이로 붉게 피어나는 아름다운 낙조를 감상할 수 있어 보는 이들에게 잔잔한 감동을 선사한다. 인근에 위치한 안면도자연휴양림도 연계해 둘러볼만하다. 2㎞에 달하는 소나무숲 산책로는 솔향을 맡으며 삼림욕을 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다. 휴양림 내에 식수된 수령 100년의 안면송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좋은 소나무로 알려져 있다.  alt운여해변과 해송alt안면자연휴양림  독립운동가 문양목이 태어난 몽산포몽산포해변은 태안8경에 이름을 올릴 정도로 수려한 경치를 자랑한다. 40~50년생 소나무가 빼곡히 들어찬 솔숲엔 오토캠핑장이 갖춰져 있어 가족 단위의 여행객들에게 특히 안성맞춤이다.몽산포는 태안의 대표 독립운동가 문양목의 출생지이기도 하다. 77번 도로를 타고 남면 소재지를 향해 남쪽으로 달리다보면 문양목 생가터로 가는 안내판을 찾아볼 수 있다. 문양목은 1869년 6월, 바다가 펼쳐진 이곳에서 태어나 1894년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했다. 을사늑약 체결 후인 1905년에는 하와이로 건너가 항일운동을 펼쳤으며, 1940년 12월 25일 서거하기까지 언론 활동과 교육 사업에 매진하였다. 국권회복을 위한 조직인 대동보국회(大同保國會)는 문양목의 언론활동에 기폭제가 됐는데, 특히 기관지 <대동공보>를 발행해 국내외 동포들의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안타깝게도 광복을 보지 못하고 생을 마감했지만 오직 조국 독립을 위해 평생을 바친 그의 구국정신은 오늘날에도 큰 교감이 되고 있다.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403호로 지정된 문양목의 생가터는 현재 정비 중에 있다.  alt몽산포해변 근처 문양목 사당            세계 어디에 견줘도 뒤지지 않는 절경 해안길을 따라 한참 달리면 안흥항에 다다른다. 내항과 외항으로 나눠져 있는 안흥항은 해산물 집산지이자 유람선이 떠나는 곳이다. 꽃게를 비롯해 갑오징어·갈치·우럭·대하 등 잡히는 어종도 다양하다. 외항 바로 옆에 붙어있는 작은 섬 마도는 바위 절벽으로 이루어져 경치가 아름답고 등대와 방파제가 있어 낚시꾼들이 자주 찾는다. 외항에서 유람선을 타면 ‘서해의 소금강’이라 불리는 안흥8경을 둘러 볼 수 있다. 유람선은 안흥항을 출발해 죽도-목개도-정족도-가의도-광장각-마도-신진도를 둘러보고 다시 안흥항으로 돌아온다.안흥항에서 길은 조개 모양으로 빙 둘러서 이어진다. 영화 촬영지로 잘 알려진 갈음이해변을 거쳐 근흥면 소재지를 지나면 파도리·어은돌·만리포·천리포·백리포로 쭉 해변이 이어진다. 사람들로 붐비는 해변이 싫다면 파도리해변과 어은돌해변이 제격이다. 만리포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한결 호젓한 시간을 보낼 수 있다. 인근에 돌을 가공해 만든 해옥(海玉)전시장도 있다. 해옥은 파도리해변에 널린 자연석 조약돌을 가공해 만든 것으로 반지나 팔찌, 열쇠고리, 조명기구 등 액세서리와 가구류에 두루 쓰인다.해변이라고 해서 바다만 보라는 법은 없다. 천리포해변은 수목원으로도 유명하다. 1만 2천여 종의 다양한 식물이 자라고 있는 천리포수목원은 국내 최초의 민간 수목원이자 국제수목학회에서 ‘세계의 아름다운 수목원’으로 지정했을 정도로 잘 가꿔져 있다. 한겨울에도 푸른 나무들을 볼 수 있어 휑한 가슴을 달래준다. 또 천리포항 앞에는 닭이 날개를 펴고 있는 모양과 닮은 두 개의 닭섬이 있는데, 그중 하나인 섬닭섬은 썰물 때 뭍과 연결되어 장관을 연출한다.천리포에서 더 북쪽에 위치한 신두리해변에는 자잘한 모래 알갱이들이 쌓여 거대한 언덕을 이룬 해안사구가 볼거리다. 바닷바람이 불어오면 모래가 날려 뿌연 잿빛을 띄는데, 사막을 연상시키는 모습이 이국적이기까지 하다. 또 사구 깊숙한 곳의 두웅습지에서는 잘 보존된 습지 생태계를 살펴볼 수 있다. 이곳은 습지 보호 국제 협약인 람사르 협약에 등록된 보호지역으로, 금개구리·맹꽁이·표범장지뱀·갯방풍 등 보존가치가 뛰어난 양서류와 수서곤충들이 살아가는 터전이다.  alt안흥항alt해옥전시장에 전시되어 있는 가공된 해옥  민족대표 이종일의 고향마을신두리에서 북쪽으로 올라가다 보면 원북면 반계리 마을에 위치한 독립운동가 이종일의 생가를 알리는 입간판이 보인다. 1858년 11월 이곳 반계리 마을에서 태어난 그는 16세에 문과에 급제할 정도로 총명함을 타고났다. 1882년 사절단의 일원으로 일본을 다녀와 그곳의 개화된 문물을 깨우치게 되는데, 1898년에는 최초의 한글신문인 <제국신문>을 창간하였다. 이때부터 대한자강회·대한협회·조선국문연구회 등 단체를 조직해 구국운동에 뛰어들었다. 이후 경향 각지의 7개 학교장을 지내면서 교육사업에 전념하였다. 또한 1919년 3·1운동 당시 민족 대표 33인 중 한 사람으로서 오세창·권동진·최린 등과 함께 독립선언서에 뜻을 모으기도 했다.복원된 이종일 생가는 6칸 겹집의 L자형 목조 초가집으로 건넌방·대청·윗방·안방이 각 1칸씩 있고, 부엌을 2칸 두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사당과 기념관이 별도로 마련돼 있다.  alt복원된 이종일 생가  alt이종일 동상 태안반도는 아직 원유 유출 사고라는 어두운 과거에서 완전하게 치유되지 않았다. 그러나 주말이면 태안해안국립공원은 외지에서 온 차량들로 쉴 새 없다. 여기에는 침체됐던 태안 관광을 활성화시키고자 하는 각계각층의 노력이 한몫했다. 우리의 꾸준한 관심이 태안의 깨끗했던 옛 모습을 되돌려 놓기를 바라며 이 겨울 태안 바다를 바라본다. ]]> Tue, 02 Jan 2018 16:24:06 +0000 13 <![CDATA[의열단의 종로경찰서 투탄의거 ]]>  의열단의 종로경찰서 투탄의거               대한민국 독립운동사를 장식한 이달의 주요 역사적 사건을 한눈에 살펴보자. 그 첫 번째 주제는 무장투쟁으로 일제에 대항한 의열단이다. 95년 전 1월, 의열단원 김상옥은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져 일제에 우리 민족의 굳은 독립의지를 알렸다. 일제의 심장부에 비수를 꽂은 이 사건은 꺼져가던 항일의지에 불을 지핀 사건이었다. alt]]> Tue, 02 Jan 2018 14:40:57 +0000 13 <![CDATA[한국독립운동의 숨은 조력자! 대한민국임시정부를 후원한 미국인 선교사 ]]>  글 학예실 한국독립운동의 숨은 조력자!대한민국임시정부를 후원한 미국인 선교사 조지 애쉬모어 피치George Ashmore Fitch, 費吾生1883.01.23. ~ 1979.01.20. 독립기념관은 국가보훈처·광복회와 공동으로 조지 애쉬모어 피치를 2018년 1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애쉬모어는 1920년 한인구제회 이사를 역임하였으며,1932년 한인애국단 의거 직후 김구 일행에게 피신처를 제공하였다. 이후 1944년 한국광복군과 미군 OSS부대의 합동작전을 추천하는 등우리나라의 독립운동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하였다. alt               조지 피치 부자의 한국 독립운동 지원조지 애쉬모어 피치는 1883년 1월 중국 쑤저우(蘇州)에서 장로교회 목사인 조지 필드 피치의 아들로 태어났다. 교육을 위해 미국으로 건너가 1909년 뉴욕에 있는 컬럼비아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목사가 되어 중국으로 돌아왔다.애쉬모어는 중국 상하이에서 YMCA 간사로 활동하면서 아버지와 함께 한국의 독립운동을 간접 지원하였다. 1918년에는 주중 미국대사 예정자 환영행사에 여운형을 초대하여 한국 문제에 대해 대화를 나눌 수 있도록 중재하였고, 1919년에는 미국에서 설립된 한인구제회가 모금활동에 어려움을 겪자 대한적십자사를 통해 구호품과 의연금을 모집하였다. 또한 상하이에 설립된 한인학교 ‘인성학교’가 재정적인 어려움에 처하자 적극적인 모금활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alt애쉬모어 일가(1897년)alt상하이 YMCA 간사 시절의 애쉬모어 / 애쉬모어의 부인 제랄딘 피치  alt프랑스 조계 언론사에 보낸 애쉬모어의 편지alt애쉬모어 자택 생활이 기록된 백범일지  애쉬모어 피치 부부와 한국 독립운동애쉬모어는 1932년 4월 윤봉길의 상하이 홍커우공원 투탄의거 직후 피신해 온 김구·엄항섭·안공근·김철을 자신의 자택에 숨겨주었으며, 일본의 포위망이 좁혀오자 부인 제랄딘과 함께 상하이에서 탈출할 수 있도록 도왔다. 한편 안창호의 체포 소식을 듣고 프랑스 조계지 언론사와 경찰서장에게 ‘프랑스 조계지에서 일본 경찰의 불법적인 한국인 체포와 탄압을 방조하는 것은 프랑스 혁명정신을 포기하는 것’이라고 질타하며 프랑스인들의 각성을 요구하는 서한을 보냈다.애쉬모어의 부인 제랄딘은 1941년 미국에서 한미협회의 후견인으로 활동하며,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제적 승인을 위해 노력하였다. 1944년 애쉬모어는 일본과 전쟁에서 한국광복군을 활용하면 미국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보고서를 작성하여 한국광복군 제2지대와 OSS부대의 합동작전이 성사되도록 도왔다.애쉬모어는 한국의 독립운동을 지원한 공로를 인정받아 1952년 1월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문화공로훈장을, 1968년 3월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았다. 은퇴 이후 미국 캘리포니아주 클레몬트 자택에서 여생을 보낸 애쉬모어는 1979년 96세의 나이로 운명하였다.  alt중국 연안 방문 당시 마오쩌둥과 애쉬모어(1940년)alt경교장에서 김구와 피치부부가 함께 찍은 사진(1948년, 백범김구기념관 제공) alt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문화공로훈장을 수여받는 애쉬모어(1952년)]]> Thu, 04 Jan 2018 10:23:49 +0000 13 <![CDATA[한국인 징용자들을 희생시킨 우키시마호 침몰 사건 ]]> 글 신현배 역사칼럼리스트 한국인 징용자들을 희생시킨우키시마호 침몰 사건  일제강점기 한국인들은 일제의 군수물자 보급을 위해 여러 곳으로 징용되었다. 우키시마호를 타고 시모키타반도로 끌려간 이들도 그중 하나였다. 그러나 광복을 맞아 부산항으로 돌아오던 그들은 그리웠던 고국의 땅을 밟지 못한 채 억울한 죽음을 맞이해야 했다. 일제가 남겨놓은 또 하나의 비극이었다. 한국인 징용자를 싣고 돌아오던 우키시마호1945년 8월 22일 오후 10시, 일본 북동쪽에 있는 아오모리현 시모키타반도 오미나토항구에서는 4,730톤급의 배 한 척이 출항했다. 일본 해군 소속 군함인 우키시마호였다.우키시마호는 원래 1937년 만들어진 오사카 상선 소속의 화물선으로 오키나와 항로나 태평양 항로를 주로 운항하던 중 태평양 전쟁을 앞둔 1941년 군에 징발되어 군용선으로 이용되었다. 우키시마호에는 일제에 의해 강제로 징용되었던 한국인 노동자 수천 명과 그 가족, 그리고 승무원인 일본 해군 병사들이 타고 있었다. 일본의 패전으로 광복을 맞이하자 고국으로 돌아가는 배에 몸을 실은 것이다.이들이 끌려갔던 곳은 시모키타반도였다. 이곳은 해협이 산기슭까지 들어와 절벽을 이룬 산악 지대로, 군사적 요충지였다. 오미나토 해군 본부는 이곳에 비행기 활주로와 격납고·지하 탄약저장고·항만 및 방공호를 건설했다. 이후 미군의 일본 본토 공격에 맞서기 위해 시모키타반도를 군수기지사령부로 조성하기 시작했다. 외부 지원 없이 석 달 동안 적의 공격에 버틸 만한 무기·탄약·식량·의약품 등의 군수 물자를 전국에서 거둬들였다. 군수 물자의 안전한 수송과 보관을 위해서는 철도·터널·부두·비행장 건설 공사가 시급했는데, 이에 수많은 한국인 징용자들이 동원되었다.그러던 중 1945년 8월 15일 일제의 무조건 항복으로 전쟁이 끝나자 일제는 한국인 징용자들을 강제 송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것은 한국인들이 폭동을 일으킬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사흘 뒤인 8월 18일, 오미나토 해군 본부는 한국인 징용자들과 그 가족을 우키시마호에 태워 부산으로 출항했다. 오미나토에서 부산까지는 1,574㎞로 시속 22㎞로 가면 사흘쯤 걸리는 거리였다. 부산을 향해 나아가던 우키시마호는 8월 24일 오후 5시쯤 방향을 바꿔 일본 해안선을 따라 남하하다 마이즈루 앞바다로 들어왔다. 그리고 해안에서 300m쯤 떨어진 곳에 이르러 멈춰 섰고, “쾅! 쾅! 쾅!” 하는 갑작스러운 폭발음과 함께 침몰했다. 이때가 8월 24일 오후 5시 20분쯤이었다.  alt강제징용자 승선 장면alt한국인 강제징용자의 철도 노동 모습  우키시마호 침몰 이면에 밝혀지지 못한 진실 사건이 일어난 지 일주일이 지난 9월 1일, 우키시마호의 도리우리 함장은 사건의 경위를 밝혔다. “한국인 노동자들을 부산으로 실어 나르던 우키시마호가 사고를 당해, 한국인 노동자 3,725명 가운데 524명, 일본인 승무원 255명 가운데 25명이 사망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사망자 수는 정확한 것이 아니었다. 승선 명부가 아니라 미리 신청받은 사람들의 숫자였기 때문이다. 생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 명부에 이름을 올리지 않고 그냥 승선한 사람이 무려 5,000여 명이나 되고, 사망자 수도 발표와는 달리 수천 명에 달했다.우키시마호 침몰 사건의 원인은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일본 정부는 미군이 바다에 설치한 기뢰(바다 지뢰)에 닿아 배가 폭발, 침몰했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이 주장은 설득력이 없었다. 우키시마호는 완전히 멈춰 서 있을 때 폭발했기 때문이다. 또 목격자들에 따르면 기뢰에 의한 폭발일 경우에는 물기둥이 50~60m 쯤 치솟는데, 사건 현장에서는 물기둥이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헤엄을 쳐서 육지까지 10분밖에 걸리지 않는 곳에 미군이 기뢰를 설치할 이유가 없고, 배가 폭발하기 10분 전에 일본 해군 병사 300여 명이 보트를 타고 탈출했다고 하여 일본 정부의 주장은 신빙성을 잃었다.우리나라에서는 우키시마호 침몰 원인을 ‘자폭설’로 보고 있다. 즉 일본 해군이 배에 폭탄을 설치하여 이를 침몰시켰다는 것이다. 우키시마호의 출항을 앞두고 승무원인 일본 해군 병사들은 한국으로 가는 것을 몹시 꺼려하고 두려워했다고 한다. 부산에 갔다가 한국인 징용자들에게 보복을 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본 해군 병사들은 배를 폭파해 한국인 징용자들을 고국에 돌아가지 못하게 했다는 것이다.우키시마호가 오미나토항을 출발할 무렵, 일본 해군 병사들이 갑판 위에 모여 있었는데 그때 해군 중위 한 사람이 갑자기 “일본군이 배 안에 폭탄을 설치했다!”고 소리치며 바다로 뛰어내렸다고 한다. 또한 배의 폭발 소리도 ‘자폭설’이 진실임을 증명하고 있다. 배의 폭발 소리가 “쾅! 쾅! 쾅!” 세 번이나 크게 들렸는데, 기뢰에 의한 폭발이라면 “쾅!” 하고 한 번으로 그쳤을 것이다.1945년 8월 22일 오후 7시 20분 오미나토 해군 본부는 우키시마호 함장에게 비밀문서를 보냈다. 그 문서에는 ‘지금 출항하는 배 말고는 운항을 금하라. 폭발물을 처리하라’고 적혀 있었다. 2016년 발견된 일본군부의 이 문서는 우키시마로 침몰 사건을 고의로 일으켰다는 결정적 단서가 되고 있다. 신현배역사와 전통문화에 대해 관심이 많은 역사칼럼리스트. 저서로는 역사 이야기 <엉뚱 별난 한국사>, <엉뚱 별난 세계사>, <2000년 서울 이야기>, <세계사로 배우는 법 이야기>, 전통문화 이야기<소중한 우리 문화 지식 여행>시리즈 등이 있다. ]]> Thu, 04 Jan 2018 11:41:20 +0000 13 <![CDATA[좌절은 실패가 아니다 포기가 곧 실패다 ]]> 글 이성주 역사칼럼니스트  좌절은 실패가 아니다포기가 곧 실패다  1907년 고종은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보낸다. 경술국치 직전 국제사회에 조선의 목소리로, 조선의 주장을 내뱉으려 했지만 일제의 방해로 이 시도는 무산되고 만다. 헤이그 특사 사건과 등치되는 ‘기억’으로 우리에게는 이준(李儁)이라는 이름이 남아있다. 우리의 기억 속에 이상설은 헤이그에 이준 열사와 함께한 특사 정도로만 남아 있지만, 그는 국운(國運)이 기울던 시기 일제에 항거해 독립운동의 초석을 남긴 인물이다.  실패로 쌓아올린 기억들 ▲독립운동가 이상설 ▲1870년 충북 진천군 출생 ▲1894년 조선 마지막 과거에 급제 ▲1905년 을사늑약 당시 고종에게 ‘망할 바에는 죽는 게 낫다’는 내용의 상소를 올림 ▲1907년 고종의 밀명을 받고 헤이그에 특사로 파견 ▲1910년 13도의군을 편성, 고종의 망명을 시도했으나 실패 ▲연해주와 간도 등의 한인들을 규합하여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성명회(聲明會) 조직 ▲1914년 최초의 망명정부인 대한 광복군정부를 만듦 ▲1917년 4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남 이상설은 1894년 25세의 나이로 조선의 마지막 과거시험인 갑오문과에 급제하여 출사를 했지만, 나라는 이미 망국(亡國)의 길로 나아가고 있었다. 1905년 을사늑약을 온몸으로 막아서며, 고종에게 다섯 차례나 상소를 올렸다. 전제왕조 국가에서 임금에게 ‘차라리 죽는 게 낫다’는 극언(極言)을 할 정도로 결기에 넘쳤다. 실제로 이상설은 이후 국권회복운동에 나서자는 연설을 한 뒤 땅에 머리를 찧어 자결을 시도하기도 했다. 이후 헤이그 특사로서 네덜란드로 향했지만, 일제의 방해로 회의장에 들어가지 못하고 기자회견을 하는 게 고작이었다.1910년에는 유인석, 이범윤 등과 함께 연해주 방면에서 의병을 규합 ‘13도의군’을 편성하고 고종의 망명을 시도했지만, 실패에 그치고 말았다. 이후 연해주와 간도에 있던 한인들을 규합해 성명회(聲明會)를 조직하고, 독립의 결의를 담은 취지문을 발표했다. 그리고 미국·러시아·청나라 등에 일본의 침략 만행을 규탄하는 성명서를 보냈다. 이에 반발한 일본은 러시아에 성명회 주요 인물들의 체포를 요구하였고, 이상설을 비롯한 13도의군 42명이 체포되었다. 이후 블라디보스토크로 귀환해 권업회 의장으로 있으면서 <권업신문>을 발간, 반일투쟁을 위한 경제력 배양에 힘썼다. 이를 통해 1914년 경술국치 이후 최초로 망명정부인 대한광복군정부가 들어섰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상설은 순국했다. 그의 인생은 계속된 시도와 실패 사이의 어딘가에 있었다.  포기하면 실패조차 없다 “조국 광복을 이루지 못했으니, 몸과 유품은 불태우고 제사도 지내지 말라.” 이상설이 숨을 거두기 전 남긴 말이다. 유언대로 그의 유해와 문고는 모두 불 속으로 사라졌다. 연부역강(年富力强)한 48세 나이로, 채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만리타향에서 한 줌의 재로 사라진 이상설. 그의 인생을 되짚어 보는 이유는 우리에게 보여준 ‘울림’ 때문이다. 구한말의 격동기에 조선의 마지막 과거 급제자로 세상에 나온 이상설은 나라를 일으켜 세우기 위해 끊임없이 몸을 던졌다. 일본의 야욕이 한반도 전체에 뻗어가는 것을 막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럼에도 이상설은 계속해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그러나 개인의 ‘노력’으로 극복할 수 없는 거대한 시대의 흐름 앞에서 그는 무너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힘을 내 목소리를 높였다. 고종이 망명을 시도했던 부분이나, 3·1 운동 이전에 대한광복군정부를 세운 대목만 봐도 그가 얼마나 치열하게 저항했는지 알 수 있다. 이건 일제에 대한 저항이 아니라 ‘운명’에 대한 저항이라고 보는 게 더 정확하다. 그는 계속 실패했고, 그럼에도 또 다시 일어났다.이상설의 삶 전반에는 분명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고민해야 할 대목이 있다. 경제위기와 청년실업, 북핵 위기 등등 우리를 둘러싼 환경 중 어느 하나 녹록치 않은 것이 없다. 언제부터인가 세상은 우울감에 가득 찬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희망보다는 절망을, 도전보다는 포기를 말한다. 어차피 안 될 걸 알기에 움직이지 않겠다는 말은 과연 합리적인 선택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저 무조건 노력해야 한다는 고답적인 말을 하려는 게 아니다. 다만 자신이 진정 목표로 하는 한 가지를 위해 몇 번이고 세상과 부딪히기를 망설이지 않는 삶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18세기의 대표적인 계몽 사상가 볼테르는 “인간은 무엇인가 되고자 하는 순간 자유가 된다”고 말했다. 1914년 그날, 대한민국의 독립을 그 누가 쉬이 생각했을까. 암담한 세상 가운데 이상설은 끊임없이 독립을 위해 몸을 던지고 실패하기를 반복했다. 그러나 그의 일생은 독립을 향한 열망 속에서 자유를 찾은 과정이 아니었을까. 이성주시나리오 작가 겸 역사칼럼니스트. 대중과 함께 호흡하는 글쓰기를 목표로 <조선의 민낯>, <왕들의 부부싸움>과 같은 역사서를 출간한 바 있다. 최근에는 국제정치와 관련된 연구 및 집필에 열중하고 있다. <전쟁으로 보는 국제정치> 시리즈 1, 2, 3권을 출간 중이다. ]]> Tue, 02 Jan 2018 14:16:23 +0000 13 <![CDATA[새해의 아침이 밝아오면 ]]> 새해의 아침이 밝아오면  산등성이 너머로부터 새해는 밝아옵니다.오랜 세월에도 초심을 잃지 않은 모습은무척이나 반갑습니다.독립기념관 한가운데 우뚝 선 겨레의 탑은새 시대를 염원하던 우리의 두 손과 닮아희망을 담은 소망 하나 함께 빌어보았습니다.새해의 일출은 언제나대한민국 오천 년 역사를 지켜온작은 시작이었습니다. ]]> Tue, 02 Jan 2018 13:56:25 +0000 13 <![CDATA[민족의 투사 각시탈의 전설이 되다 ]]> 글 권경률 역사칼럼니스트 민족의 투사각시탈의 전설이 되다 김상옥 종로경찰서 투탄 의거1923. 1. 12 매월 대한민국의 광복과 관련된 핵심 사건을 선정하여 그 치열했던 역사의 순간을 재구성해보고자 한다. 다시 만난 그날, 첫 번째 이야기는 김상옥의 종로경찰서 투탄과 최후의 시가전이다. 1923년 1월 서울 한복판에서 벌어진 대담한 의열투쟁. 일제를 두려움에 떨게 만든 '각시탈’의 전설 속으로 들어가 보자. 경성을 발칵 뒤집은 폭탄쾅! 종로통에서 터져 나온 굉음이 고요하던 경성의 밤하늘을 뒤흔들었다. 놀랍게도 일제 폭압의 상징, 종로경찰서였다.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이 붙들려가고 수많은 독립운동가와 가족들이 고문으로 신음한 그 폭력과 억압의 장소에 폭탄이 날아든 것이다. 폭탄은 창틀에 맞고 앞마당에서 폭발했다. 파편이 사방으로 튀면서 부상자가 속출했다. 유리창은 박살나고 벽 일부가 무너졌다. 폭발 현장으로 구경꾼들이 삼삼오오 몰려들었다. 넋이 나가있던 순사들은 이내 호각을 불며 야단법석을 떨었다. 범인은 어느새 종적을 감췄다.이튿날 경성 시내에서는 대대적인 검문이 벌어졌다. 감히 시내 한복판에서, 그것도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지다니, 일본 경찰로서는 참을 수 없는 도발이었다. 반면 한국인들은 쉬쉬하면서도 내심 통쾌해했다. 종로경찰서는 독립운동가는 물론 일반인들도 치를 떨 만큼 악명이 높았다. 그런 곳에 폭탄이 터졌으니 쾌거가 아닌가. 소문은 경성을 넘어 전국 방방곡곡으로 퍼져나갔다. 꺼져가던 항일투쟁의 의지가 다시 불타오를 조짐이었다.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조선총독부는 긴박하게 움직였다. 사이토 마코토 총독의 지시로 마루야마 경무국장이 사건 현장으로 급파되었고, 우마노 경찰부장은 직접 수사본부를 지휘하며 범인 검거를 닦달했다. 난다 긴다 하는 고등계 형사와 밀정들이 속속 합류하고, 감시망도 이중삼중으로 가동되었다. 일제의 정보수집과 사찰 활동으로 포위망이 조여들면서 범인의 정체가 서서히 밝혀졌다. 종로경찰서에 회심의 폭탄을 던진 주인공은 김상옥이었다.  alt김상옥alt종로경찰서 (1920년대)alt종로경찰서 폭탄투척 관련 기사(1923년 <조선일보>) 실패로 돌아간 조선총독 암살 작전 김상옥은 동대문 일대에서 잘 나가던 ‘영덕철물점’ 사장이었다. 어린 시절, 집안 형편이 어려워 대장간에서 일하면서도 교회 야학을 다니면서 배움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렇게 열심히 살아오며 20대의 이른 나이에 철물공장을 세워 자수성가했다. 종업원은 수십 명에 달했고, 전국에 거래처를 확보했다. 하지만 1919년 3·1운동은 김상옥의 인생을 바꿔놓았다. 그는 조선 사람들의 독립정신과 저항 의지를 드높이고자 사재를 털어 지하신문 <혁신공보>를 발행했다. 그러나 이로 인해 종로경찰서로 끌려가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40여 일 만에 풀려났다.3·1운동의 물결이 휩쓸고 지나간 후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은 노선 갈등을 겪었다. 그중 김상옥의 선택은 무력투쟁이었다. 종로경찰서와의 악연은 그를 투사로 만들었다. 1919년 12월 김상옥이 결성한 암살단은 일제 고위직과 민족반역자를 응징하는 조직이었다. 암살단은 북로군정서 김좌진 장군과 손잡고, 경성의 부호들을 접촉해 군자금을 모으는 한편 만주에서 폭탄과 총기를 들여와 거사를 도모하기로 했다. 이윽고 1920년 8월 기회가 왔다. 미국 상하 양원 의원단이 한국을 방문한 것이다.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와 국내 독립운동단체들은 미국 의원단에게 조선 민중의 독립 염원을 알려 인도적인 지원을 받고자 했다. 그러나 미국과 일본 사이에는 1905년부터 가쓰라-태프트밀약이 맺어져 있었다. 일본은 미국이 통치하는 필리핀을 침략하지 않고, 미국도 한반도에서 일본의 지배적 지위를 인정한다는 내용이었다.반면 김상옥과 암살단은 미국 의원단 환영행사를 열 때 사이토 마코토 총독과 일제 고관, 친일 인사들을 암살하려고 했다. 문제는 일본 경찰의 예비 검속이었다. 그들은 행사 전날 불령선인들을 대대적으로 연행했다. 김상옥은 도망쳤고 동료들은 잡혀갔으며, 시가전을 방불케 하던 암살계획도 무산되고 말았다.  일제를 몰아낼 유일한 무기, 의열단 더 이상 국내에 머물 수 없게 된 김상옥은 상하이로 건너가 김원봉이 이끄는 의열단에 가입했다. 1919년 11월 중국 지린성에서 결성된 의열단은 정의로운 폭력으로 빼앗긴 나라와 자유를 되찾는 것을 목적에 두었다. 이는 신채호가 쓴 강령 ‘조선혁명선언’에 잘 드러난다.폭력은 우리 혁명의 유일한 무기다. 우리는 민중 속에 가서 민중과 손잡고 암살, 파괴, 폭동 등 끊임없는 폭력으로써 강도 일본의 통치를 타도하고 우리 생활에 불합리한 제도를 개조해 인류가 인류를 압박하지 못하며, 사회가 사회를 수탈하지 못하는 이상적 조선을 건설할지니라.의열단은 1920년 제1차 암살파괴계획을 세우고 최신식 폭탄과 무기들을 국내로 밀반입했다. 폭력의 대상은 조선총독·관리·매국노·정탐꾼·적의 시설물 등으로 규정했다. 거사 총지휘를 맡은 곽재기 등이 체포되는 바람에 본래 목적을 달성하지는 못했지만, 얼마 뒤 박재혁이 부산경찰서, 최수봉이 밀양경찰서에 폭탄을 던져 이를 만회했다. 이듬해에는 김익상이 조선총독부에 들어가 폭탄 2개를 투척하고 유유히 사라졌다. 식민통치의 심장부를 보란 듯이 습격한 것이다. 1922년 3월엔 독립운동의무대를 상하이로 옮겨 암살 작전을 펼쳤다. 의열단은 일제에게 공포 그 자체였다.김상옥의 차례가 돌아온 것은 그해 11월이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와의 합동작전이었다. 임정 재무총장 이시영은 의열단장 김원봉에게 국내에서 폭탄 투척과 요인 암살 등 의열투쟁을 벌여 동포들의 독립정신을 일깨우고 활동자금을 모아달라고 요청했다. 그들은 이 작전의 적임자로 김상옥을 지목했다. 그는 화물열차 석탄 더미에 몸을 숨기고 경성으로 잠입했다. 종로경찰서에 던진 폭탄은 날카로운 귀환 인사였던 셈이다. alt단재 신채호의 조선혁명선언  alt일제에게 두려움을 심어준 의열단 최후의 시가전, 전설이 된 투사 1923년 1월 17일 새벽 5시. 김상옥은 거사를 앞두고 일찍 눈을 떴다. ‘문화정치’라는 미명 아래 사이토 마코토 총독은 겉으론 조선인의 자유를 보장하고 차별을 없앤다면서 뒤로는 경찰을 대대적으로 늘리는 등 감시와 폭압을 강화했다. 이 때문에 친일파, 개량주의자가 득세하고 독립운동은 날로 위축되고 있었다. 김상옥은 저격을 다짐하며 권총을 어루만졌다. 그때 마당 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일본 경찰이 틀림없었다. 그들은 누이 부부를 불러낸 다음 김상옥의 방으로 다가왔다. 곧이어 고막을 찢는 총소리가 경성의 새벽공기를 갈랐다. ‘17일 오전 5시 경에 경성 시내 00동 모의 집에 무기를 가진 범인이 잠복한 것을 알고 경관 수 명이 그를 체포하기 위해 이르렀다. 범인과 충돌하여 종로서의 다무라 순사는 권총에 맞아 현장에서 즉사하고 종로서 이마세 경부는 중상, 동대문서 우메다 경부보는 경상을 당하였으며 범인은 현장에서 도주했다.’<동아일보> 1923년 1월 19일자 일본 경찰은 김상옥의 무예와 사격술이 얼마나 뛰어난지 몰랐다. 그는 순식간에 체포조를 쓰러뜨리고 눈 쌓인 남산으로 도주했다. 경찰 수백 명이 포위하고 추격전을 펼쳤지만 소용없었다. 그는 산중에서 펄펄 날아다녔고 끝내 포위망을 뚫어 탈출에 성공했다.스님으로 변장하고 산에서 내려온 김상옥은 동상에 걸린 발을 치료하기 위해 효제동 이혜수의 집에 은신했다. 그러나 서신을 전달하는 과정에서 은신처가 새어나가고 말았다. 1923년 1월 22일 우마노 경찰부장이 지휘하는 무장경관 400명이 집을 겹겹이 에워쌌다. 김상옥은 벽장에 숨었다가 형사를 사살하고 뛰쳐나갔다. 담을 뛰어넘고 지붕 위를 날아다니며 경찰부대와 시가전을 벌였다. 3시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탄환이 떨어지고 막다른 골목에 몰렸다. 그는 동상으로 썩어가는 엄지발가락을 떼어내고 마지막 총탄 1발을 자신의 머리에 겨눴다. “대한독립만세!” 피 끓는 절규와 함께 김상옥은 불굴의 생애를 스스로 거둬들였다. 몸에는 무려 11개의 총상이 나 있었다.              alt암살단 수령 김상옥 사건 종결 기사(1921년 <조선일보>)alt서양화가 구본웅의 효제동 격전 시화alt김상옥 의사가 사용한 7연발 권총 모델 alt김상옥 장례식 관련 기사(1923년 <동아일보>)alt마로니에공원에 위치한 김상옥 의사 동상                     김상옥의 신출귀몰한 활약은 만화와 드라마의 주인공으로 널리 알려진 <각시탈>의 모티프가 되었다. 2016년 개봉한 영화 <밀정>의 강렬한 도입부 장면 역시 김상옥의 최후를 바탕으로 재구성된 것이다. 오늘날 종로4가 효제초등학교 앞길은 ‘김상옥로’라고 이름 붙었다. 영화와도 같은 삶을 살았던 영웅 김상옥. 그의 존재는 우리 가슴에 먹먹하게 이어지고 있다. 권경률역사칼럼니스트. 서강대학교에서 역사학을 공부했다. 칼럼 ‘사극 속 역사인물’을 연재하고 팟캐스트 ‘역사채널 권경률’을 진행한다. 저서로는 <조선을 새롭게 하라>, <조선을 만든 위험한 말들> 등을 출간했으며, 영상물 <시시콜콜 한국사 어워즈>도 선보이고 있다. ]]> Thu, 04 Jan 2018 13:20:34 +0000 13 <![CDATA[밀려드는 서구열강과 무너지는 조선 왕조 ]]>  글 박영규 작가 밀려드는 서구 열강과무너지는 조선 왕조 국난에서 벗어나고자 온 국민이 나섰던 감격의 그 날 1919년 3월 1일. 3·1운동이 어언 100주년을 눈앞에 두고 있다. 이를 기념하여 월간 <독립기념관>은 ‘겨레의 함성, 독립의 희망’을 통해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역사를 다루고자 한다.  서구열강의 침탈과 몰락으로 치닫는 중국 1875년, 일본이 운요호사건을 일으켜 강화도조약을 맺은 이후 조선은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동학농민혁명을 거치며 국력이 극도로 쇠약해졌다. 그런 가운데 일본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승리하며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였고, 급기야 을사늑약과 경술국치를 단행하며 조선을 식민지로 전락시켰다. 이렇듯 일본이 조선을 식민국으로 만든 35년 동안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는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제국주의의 선봉에 선 영국은 발칸반도에서 밀려난 오스만투르크(터키)를 압박하며 유럽에서의 영향력을 확대하였을 뿐 아니라 아프리카로 진출하여 이집트를 차지하는가 하면, 네덜란드와 보어전쟁을 일으켜 아프리카 종단정책을 완성했다. 또한 영국 빅토리아여왕은 인도의 황제를 겸하였으며, 아프가니스탄과 버마(미얀마)까지 장악하며 그야말로 ‘해가 지지 않는’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한편, 북유럽의 최강국 러시아는 남하정책과 동진정책에 박차를 가하여 오스만투르크의 영향력이 약화된 발칸반도에 대한 입김을 강화했고, 중앙아시아의 메르브를 차지했다. 또한 동진을 지속하여 중국의 요동 지역을 차지하는 한편, 한국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영국과 미국의 후원 아래 성장한 신흥강국 일본과의 전쟁에서 패배하면서 그 기세는 급속도로 줄어들었다.프랑스 또한 이 시기에 침략정책을 가속화하고 있었다. 프랑스는 아프리카에서 튀니지를 점유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고, 마다가스카르를 차지하기도 했다, 아시아에 대한 공략도 지속하여 베트남과 라오스를 지배하기까지 이르렀다. 또한 오스만투르크와 전쟁을 치러 유럽에서의 영향력도 확대해 나갔다. 유럽대륙에서 러시아와 프랑스의 영향력이 확대되자, 독일은 이를 견제하기 위해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과 이탈리아를 끌어들여 3국 동맹을 맺었다. 이때 독일 역시 아프리카에서 카메룬과 위투(케냐)를 차지하며 제국주의의 길을 걷고 있었다. 유럽의 제국들이 아프리카와 아시아에 대한 침략에 혈안이 되어 있는 동안 미국 역시 이러한 조류에 편승하여 일본과 가쓰라-태프트밀약을 맺고 필리핀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서구열강은 이렇듯 아프리카와 아시아에 대한 침략 정책을 강화해가면서 중국에 대한 공략도 지속해 나갔다. 이로 인해 중국의 혼란은 가중되고 있었다. 특히 영국은 아편전쟁을 일으켜 중국 대륙을 지배하고 있던 청나라의 국가 기강을 뒤흔들었고, 이를 기점으로 황실의 권위는 무너지고 관료 사회는 혼란에 빠졌으며, 민중의 불안은 심화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기독교의 영향을 받아 일어난 태평천국의 난에 의한 내전이 14년 동안이나 지속되면서 청나라의 혼란상은 극에 달했다.이런 혼란을 틈타 밀려든 서구열강은 온갖 불평등 조약을 맺어 이권 챙기기에 혈안이 되었다. 그로 인해 청나라의 국가 체계는 무너져 관리들의 횡포와 착취가 일상화되었으며, 생존의 기로에 선 민중들은 곳곳에서 민란을 일으켰다. 청나라는 이러한 위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양무운동을 벌여 스스로 강해져야 한다는 자강(自强)의 길을 모색하기에 이른다. 이에 따라 군대의 조직과 무기를 개선하고 서구 문물을 배우기 위해 유학생을 확충하였다. 또한 군수공장, 광산과 철도, 전신 시설, 방직 사업 등을 발전시켜 근대화로 나아가려 했다. 하지만 중국의 정치사회제도를 그대로 둔 채 서양의 기계 문명만을 받아들이려는 ‘중체서용’의 한계에 부딪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결국 청나라는 쇠락을 거쳐 망국을 향해 치달았다.  가쓰라-태프트밀약 : 1905년 일본과 미국이 체결한 밀약. 필리핀과 조선을 미국과 일본이 나누어 지배한다는 내용이다. 이를 통해 일본은 조선 침략을 위한 국제적인 명분을 획득하였으며 이후 을사늑약을 통해 조선의 외교권을 침탈하였다.              alt침략한 일본인을 바라보는 중국인들alt청을 둘러싼 당시의 국제정세를 묘사한 그림 alt만주로 침략한 일본군  제국주의의 깃발을 든 일본, 가차 없이 짓밟히는 조선조선은 순조가 즉위한 이래 헌종과 철종을 거치면서 60여 년 동안 세도정치가 횡행하여 국가 기강은 무너지고 탐관오리가 판을 쳐 백성들의 삶은 한층 피폐하고 곤궁해졌다. 그런 가운데 12살의 어린 고종이 즉위하고 흥선대원군이 섭정을 맡아 혁신을 감행한 끝에 세도정치는 사라졌지만, 세계의 흐름에 역행하여 쇄국 일변도의 정책을 구사하는 바람에 변화의 시기를 놓쳤다. 그렇게 10년이 흐른 뒤에 흥선대원군이 밀려나자, 신문명을 받아들여 국가를 혁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른바 개화당으로 불린 이 혁신 세력은 일본의 변화와 발전에 주목했다. 하지만 일본은 개화당의 바람처럼 조선의 혁신을 원했던 것이 아니라 침략의 기회를 엿보던 중이었다.일본은 미국에 강제적인 개항을 당하고 불평등 조약에 따라 문호를 개방했지만, 스스로 메이지유신을 단행하여 시대의 변화에 보조를 맞췄다. 일본은 서양의 기계화된 문물을 수입하고, 고루하고 폐쇄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신문명 중심의 국가 체계를 형성한 덕분에 혁신적인 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 하지만 일본 역시 서구열강의 제국주의적 팽창 정책을 고스란히 수입하여 주변의 약소국에 대한 침략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일본 제국주의의 첫 번째 제물은 류큐·타이완·한국 등 약소국들이었다. 일본은 메이지유신의 성공으로 서구화 작업에 소기의 성과를 거두자, 곧장 류큐와 타이완, 그리고 한국에 대한 정벌 계획을 세우고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다. 일본은 류쿠·타이완·한국 순으로 국력이 약한 곳부터 정벌을 감행한 후에 중국 대륙을 정벌하려는 야망을 품고 있었고, 마침내 1874년 5월에 타이완을 기습 공격한다. 이때 일본은 비록 타이완 정벌에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류큐에 대한 지배권을 차지하는 데 성공했다. 이에 고무된 일본은 조선 정벌의 교두보를 확보하기 위해 운요호사건을 일으킨다.일본이 불법으로 강화도 해협에 군함 운요호를 진입시키자, 조선은 불법 침입한 운요호에 대한 포격을 가했고, 일본은 이를 빌미로 함선을 동원하여 무력시위를 하며 전쟁 위협을 가했다. 이에 놀란 조선은 결국 일본의 의도대로 불평등 조약인 강화도조약을 체결하여 개항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일본의 도발적인 행위는 미국이 일본을 개항시키기 위해 행한 수법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강화도조약 후 조선은 개화정책을 실시하는 과정에서 구식군대의 반발로 일어난 임오군란을 겪으면서 청나라 군대를 끌어들였다. 이후 청나라의 간섭과 지배가 강화되자, 이를 벗어나기 위한 급진세력의 갑신정변이 발발했다.하지만 갑신정변이 삼일천하로 실패하자, 조선은 더 이상의 개혁 정책을 추진하지 못하고 10년의 허송세월을 보냈다. 그 10년 동안 조선 백성의 삶은 더욱 피폐해졌고, 탐관오리의 횡포는 심화되었으며, 국가 기강은 날로 약화되었다. 결국, 탐관오리의 횡포를 참지 못한 농민들이 봉기하여 동학농민혁명이 전개되었고, 무능한 조정은 이를 진압하기 위해 청나라 군대를 다시 불러들였다. 갑신정변 후 청일 간에 맺어진 톈진조약에 따라 자동으로 개입한 일본군이 조선으로 밀려왔으며, 그것은 청일전쟁으로 이어졌다. 청일전쟁에 승리한 일본은 조선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였다. 조선 조정이 이에 반발하여 러시아의 힘을 빌리려 하자, 일본은 조선의 핵심 권력인 명성황후를 시해하였고, 이에 놀란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몸을 피하는 사태가 발발하였다. 하지만 그것은 러시아의 영향력을 강화하는 한편, 국가 조직의 마비 상태로 이어졌다.그러나 일본은 결코 조선 정벌에 대한 열망을 버리지 않았다. 일본은 영국과 미국의 비호 아래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에 비견되는 러일전쟁을 일으켰고, 결국 이 전쟁마저 승리했다. 이후 조선에 대한 일본의 침략은 거침이 없었다. 을사늑약을 강제하여 행정을 장악하고 외교권을 빼앗았으며, 통감정치를 통해 식민화 작업을 가속화했다. 그리고 군대를 해산하고 국권을 강탈하여 조선을 완전히 식민지로 전락시켰다.일본이 조선을 차지하는 과정에서 조선인들은 처절한 투쟁을 전개한다. 1907년 군대 해산 이후 전국적으로 의병이 일어나 치열한 저항을 지속하였고, 안중근에 의해 일본의 실력자 이토 히로부미가 격살되기도 한다. 또한 지식인들은 신민회와 같은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계몽운동과 독립운동을 전개한다. 하지만 일본은 막강한 무력으로 조선인들의 저항을 무참히 짓밟으며 결국 식민통치를 시작하였다.  다음호에 계속  alt강화도 해협에 진입한 운요호alt운요호사건을 빌미로 인천에 상륙하는 일본군 alt갑신정변과 텐진조약으로 말미암은 청일 강화조약 체결 alt러시아 공사관의 고종과 순종alt일장기가 게양된 근정전 박영규1996년 <한 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을 내면서 저술활동을 시작하여. 1998년 중편소설 <식물도감 만드는 시간>으로 문예중앙신인상을 수상하면서 소설가로 등단했다. 문학, 철학, 역사 분야에 걸쳐 저술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대표적인 역사서로는 <한 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 <한 권으로 읽는 일제강점실록> 등이 있다. ]]> Thu, 04 Jan 2018 14:59:12 +0000 13 <![CDATA[프랑스 대혁명과 그 이후 ]]> 글 고종환 아주대학교 외래교수 프랑스 대혁명과 그 이후  alt 마라의 죽음(1793, 자크 루이 다비드(J. L. David), 루브르) 그림을 보면 역사가 보인다. 명화 속에 숨겨진 세계의 독립운동사와 국난극복사를 살펴보는 ‘명화로 보는 세계사’. 그 첫 번째 작품은 자크 루이 다비드의 <마라의 죽음>이다. 다비드는 왜 이런 그림을 그렸을까?혁명과 관련 있는 그림은 많지만, 그중에서도 <마라의 죽음>은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과 견주어도 손색없을 정도로 유명한 작품이다. 이 그림은 프랑스 대혁명 발발 이후 4년이 지난 어느 날, 당시 혁명파이자 좌파 정치인(자코뱅파) 리더 중 한 명이었던 마라가 자신의 욕실에서 암살당한 모습을 보여주는 그림이다. 우리는 이 그림을 통해 대혁명 이후 매우 혼란했었던 18세기 말, 프랑스 정치계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다.자크 루이 다비드는 프랑스 회화의 간판스타로 화가로서는 물론, 정치가로서도 프랑스 정계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프랑스 대혁명 때에는 좌파 정치인들이 주류였던 ‘자코뱅파’의 일원이 되어 직접 활동하기까지 했다. 이와 같은 정치적 행보를 통해 대혁명 후 혁명파와 좌파의 리더 중 한 명인 마라와 매우 친밀한 관계를 갖게 됐다. 마라의 암살은 다비드는 물론, 모든 혁명파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가져다줬다. 마라와 함께 했던 정치인들은 그의 죽음을 최대한 영웅적으로 묘사할 필요성을 느꼈고, 평소 마라와 친밀했던 다비드에게 그림을 의뢰했던 것이다. 그런 의도에 부합하여 다비드는 암살당한 마라의 모습을 최대한 평온하고 엄숙한 모습으로, 마치 성인의 죽음처럼 묘사했다. 또한 죽는 순간까지도 왼손에는 편지를, 오른손에는 펜을 든 모습으로 그려, 마치 죽음의 순간에도 프랑스 국민들을 위해 애쓴 듯한 모습으로 멋지게 그렸다. 그래서 이 그림은 만약 <마라의 죽음>이라는 제목이 없다면 한 남자가 무엇인가 열심히 일하다가 깜박 잠이든 모습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바로 그런 정치적 의도 하에 최대한 마라를 영웅적으로 미화했기 때문이다.  프랑스 대혁명 후 불어온 피바람 대혁명 후 프랑스 정계는 혁명을 주도하며 강경한 정책을 주장하던 좌파(자코뱅파)와 온건한 개혁을 주장하던 우파(지롱드파)로 나누어져 갈등을 빚고 있었다. 그중 당시 사람들의 초미의 관심사는 바로 국왕 루이 16세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의 처리 문제였다. 기득권 계층에 대한 프랑스 국민들의 원성이 하늘을 찌르던 시절이었고, 게다가 국왕부부는 반혁명과 구체제의 상징이었기 때문에 처벌에는 모두 동의했지만 문제는 처형방법이었다. 급진파인 좌파진영에서는 반드시 공개처형을 하자는 입장이었고, 온건파인 우파 진영에서는 그냥 감옥에 가두자는 입장이었다.이처럼 국왕 부부의 처벌방식을 놓고 대립 중이던 1791년 6월 20일, 모든 프랑스 국민들을 수치스럽게 만드는 사건이 발생한다. 바로 그 유명한 ‘바렌 도피 사건’이다. 국왕부부가 한밤중에 튈르리 궁을 빠져나와 왕비의 고향인 오스트리아로 몰래 탈출하려다 국경 근방인 바렌 지역에서 붙잡혀 다시 파리로 압송된 이 사건으로 인해 국왕이 조국과 국민들을 버렸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모든 프랑스 국민들의 큰 분노를 샀다. 결국 이들의 처벌은 국민공회의 투표로 판가름 나게 됐는데, 국왕 부부의 해외도피가 결정적 역할을 하면서 전격적으로 공개처형이 결정되게 된다.1793년 1월 21일, 루이 16세가 공포정치의 상징인 기요틴(단두대)에 의해 공개처형을 당하고, 같은 해 10월 16일은 마리 앙투아네트의 공개처형이 수많은 인파가 몰려든 가운데 혁명광장에서 이루어졌다. 이처럼 온건파 정치인들과 기득권 계층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국왕 루이 16세를 공개적으로 처형했기 때문에 그들의 불만은 대단했다. 이런 혼란한 상황에서 온건파와 기득권 계층은 국왕의 처형을 공개적으로 주도했던 급진파 정치인들에 대한 위해를 끊임없이 계획하게 됐다. 결국 급진파 정치인 리더 그룹의 인물 중 가장 서민들에게 관심이 많아서 ‘시민의 친구’라는 별명까지 있었던 마라에게 접근했던 것이다. 즉 여러 급진파 정치인들 중 가난하고 불행한 서민을 통해서 가장 접근이 용이했던 마라를 암살 타깃으로 정했고, 마라가 관심을 보일만 한 가녀린 여인이었던 샤를로트 코르데를 통해 국왕이 처형된 같은 해 여름, 마라의 욕실에서 그를 암살하게 됐던 것이다. 고종환한국 프랑스문화학회의 재무이사이자, 아주대학교와 경상대학교 외래교수. 프랑스 문화와 예술, 서양연극사, 광고이미지 등을 강의하고 있다. 대표 저서로는 <한권으로 읽는 연극의역사>와 <오페라로 배우는 역사와 문화>, <글로벌 다문화교육>이 있다. ]]> Thu, 04 Jan 2018 13:00:59 +0000 13 <![CDATA[호떡집 화재에 담긴 시대의 아픔 ]]> 글 윤덕노 음식문화평론가 호떡집 화재에 담긴 시대의 아픔  호들갑을 떨며 시끄럽게 소란 피우는 사람을 면박 줄 때 흔히 “호떡집에 불났냐?”라고 말한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꽤 인정머리 없는 표현이다. 호떡집이든 무엇이든 집에 불이 나면 함께 걱정하고 안타까워해 주는 게 인지상정이다. 하지만 호떡집의 화재에서만큼은 연민보다 희화화된 빈정거림이 앞선다. 왜 그럴까?  상류층의 별미이자 귀한 음식이었던 호떡‘호떡집에 불났다’라는 표현이 생겨난 시기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그 배경을 추적해 보면 흥미로운 역사적 사실은 물론 일제강점기 우리 민족이 겪어야 했던 아픈 시대상까지 엿볼 수 있다.호떡은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중국에서 전해진 음식이다. 일제강점기 화교들이 만들어 팔면서 널리 퍼졌다. 우리나라에서 호떡이 본격적으로 인기를 끌기 시작한 시기는 1920년대부터다. 지금의 서울시청에 해당하는 경성부 재무국의 조사 자료에 따르면, 1924년 경성에는 설렁탕집이 100여 곳이었던 반면 호떡집은 150곳을 웃돌았다. 호떡이 얼마나 유행했는지를 짐작해 볼 수 있는 대목이다.호떡의 인기 요인은 역사적인 맥락에서 추측해볼 수 있다. 호떡은 본래 중국 음식이 아니라 중앙아시아의 서역, 흉노의 음식이다. 그 때문에 이름도 서역을 뜻하는 터럭 호(胡)자를 써서 호떡이다. 외국에서 전해진 귀한 음식이었을 뿐 아니라 귀한 밀가루로 만들었으니 한나라와 당나라에서도 호떡은 상류층의 별미이자 귀한 식품이었을 것이다. 청나라 때의 문헌인 <이십사사 통속연의(二十四史 通俗演義)>에 따르면 당 현종과 양귀비도 시장에서 호떡을 사다 즐겨 먹었다는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우리나라에서도 조선 중기 이후 여러 문헌에서 호떡(胡餠)과 관련된 대목을 찾아볼 수 있는데, 특히 세종실록에는 대마도주에게 선물로 호떡으로 추정되는 음식인 소병(燒餠)을 두 상자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이렇게 왕족과 귀족의 별미였으니, 1920년대 화교가 호떡을 만들어 팔자 인기는 분명 폭발적이었을 것이다. 이런 호떡을 두고 왜 ‘호떡집에 불났냐?’라는 표현이 생겨났을까?  호떡집 화재와 민족 갈등 1920년대 발간된 신문을 살펴보면 호떡집의 화재 기사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호떡은 화덕에서 만드니 기본적으로 불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호떡집 수도 설렁탕집보다 두 배 가까이 되었으니 화재 발생빈도도 그만큼 높았다. 즉, 당시 신문에 호떡집 화재 기사가 많았던 것이 ‘호떡집에 불났냐?’라는 말이 생기게 된 배경이자 표면적인 이유가 된 셈이다. 그러나 점포에 불이 나면 누구라도 시끄러울 수밖에 없다. 그 속에 빈정거림이 들어간 이유는 당시의 시대적 맥락을 통해 이해할 수 있다.한국에서는 중국말을 저속하게 흉내 낼 때 “솰라솰라” 떠든다고 하며 시끄럽다고 말한다. 중국에서도 마찬가지다. 한국인은 “후구리 뚜구리” 시끄럽다고 한다. 의미가 통하지 않는 언어는 상대방에게 소음일 뿐이다.그렇지 않아도 시끄럽게 들렸을 호떡집 주인의 중국말이 생활터전이 불타는 상황에서는 또 얼마나 소란스러웠을까? 불을 끄려 악을 쓰며 외쳤겠지만 별 도움은 받지 못했을 것이다. 이 무렵 호떡집이 우리에게는 썩 좋은 이미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당시의 신문을 보면 호떡집에 관한 부정적인 기사가 많은데, 호떡집에서 아편을 팔다 적발됐다거나 호떡을 미끼로 인신매매를 했다는 등의 내용이 대다수를 이룬다.(동아일보/1929.07.11./호떡장사는 부업, 아편밀수가 주업) 남의 나라에 와서 일자리를 차지하고 돈 벌어 가며 악행(?)을 일삼는 ‘왕서방’에 대한 사회적 반감이 대단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갈등이 빚어낸 결과가 바로 만주의 한인 폭행 사건인 만보산사건과 1927년과 1931년 두 차례에 걸쳐 일어난 조선 내 화교 배척사건이다. 그러나 이들의 이면에는 만주에 세력을 형성한 중국과 조선의 반일 공동전선을 분열시키려는 일제의 치밀한 음모가 숨어있었다. 이를 통해 일제는 만주를 대륙침탈의 발판으로 삼고 국제적으로는 자신들의 침략 명분을 세우고자 하였다. 겨울철 간식으로 으뜸인 호떡, 그리고 쉽게 뱉는 “호떡집에 불났냐?”라는 말 속에는 일제강점기 암울했던 시절의 흔적이 묻어 있다. 일상 속 쉽게 지나치는 음식 속에 숨겨진 의미들을 다시금 새겨보아야 하겠다. 만보산사건: 1931년 7월 중국 지린성에 위치한 만보산 지역에서 이퉁강 수로 개척을 두고 이주한인 농민과 중국 농민 사이에 일어났던 충돌 사건. 이후 인천을 필두로 경성·원산·평양 등에서 중국인 배척운동이 일어났다. 윤덕노 음식문화평론가1984년 매일경제신문사에 입사해 20여 년간 기자 생활을 하면서 특파원 활동, 출장, 연수 등으로 미국과 중국을 비롯한 다양한 나라에 머물렀다. 음식에 관심이 많아 관련 자료를 수집해온 결과, 음식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주요 저서로는 <음식잡학사전>, <신의 선물 밥>, <붕어빵에도 족보가 있다> 등이 있다.]]> Thu, 04 Jan 2018 12:00:42 +0000 13 <![CDATA[천변만화(千變萬化)의 멋 - 부산광역시 - ]]> 글·사진 김초록 여행칼럼니스트 천변만화(千變萬化)의 멋 - 부산광역시 -  도시 부산으로부터 겨울의 자취가 슬그머니 물러나고 있다. 오랜 역사만큼이나 다채로운 볼거리를 지닌 도시, 부산으로 발걸음을 옮겨보았다. 여행은 멸치와 미역의 주산지이자 부산의 동쪽 끝인 기장에서 시작한다.절경의 해안 길에서 만난 유적기장의 끝머리에 위치한 임랑해변은 고요하다. 임랑(林浪)이라는 이름은 아름다운 송림(松林)과 달빛에 반짝이는 은빛 파랑(波浪)에서 한 글자씩 따서 지었다고 한다. 바다를 따라 1㎞가량 넓게 깔린 고운 모래사장은 푸른 노송과 어우러져 한 폭의 수채화 같은 정경을 보여준다. 옛사람들은 해변 좌측에 위치한 임랑천에서 노닐다가 밤이 되면 조각배를 타고 송림 위에 뜬 달을 구경하며 즐거운 한때를 보냈다고 한다.인근에는 신라 문무왕 13년(673년)에 원효대사가 창건한 고찰 장안사가 있다. 보물 제1771호로 지정된 장안사의 대웅전은 부산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다포식 건축물이다. 사찰 뒤편으로는 그윽한 대나무숲 길과 계곡 길이 펼쳐져 있어 호젓한 시간을 보낼 수 있다. 이밖에도 임랑해변 한쪽에는 오영수의 작품 <갯마을>의 실제 무대로 강송정과 느티나무·당집 등이 남아있는 학리마을이 자리 잡고 있어 소설을 접해본 이들에게 깊은 여운을 준다. alt임랑해변alt장안사 경내 alt대변항alt장안사 뒤편 대나무숲 길   바다와 어우러져 만들어낸 풍경해안 길을 따라 남쪽으로 이동하다 보면 멸치와 기장미역의 주산지인 대변항을 만나볼 수 있다. 동해와 남해가 만나는 지점에 위치한 대변항에서는 바다가 준 싱싱한 해산물을 사계절 언제 찾아도 맛볼 수 있다. 그중에서도 으뜸은 멸치다. 어선들은 보통 새벽 5시경에 출어하여 오전 9시가 되면 배 안 가득 멸치를 싣고 돌아오는데, 이때부터 이른바 ‘멸치 털기’가 시작된다. 멸치 잡는 그물인 ‘후리’를 일사불란하게 털어내는 장면을 지켜보노라면 숨어 있던 에너지가 온몸으로 퍼지는 느낌을 받는다. 멸치 이외에도 이곳의 주산물인 기장미역은 국을 여러 번 끓여도 흐물흐물해지지 않고 쫄깃한 맛과 향이 그대로 살아있는 것이 특징이다. 잎이 두껍고 넓으며 파릇한 빛깔에 윤기가 자르르 흘러 어디에 내놔도 높은 값에 팔린다. 기장을 방문했다면 놓치지 말고 챙겨볼 만한 특산품이다.대변항에서 해운대 쪽으로 가다 보면 이름도 모양도 특이한 등대가 줄줄이 나타난다. 월드컵기념등대·장승등대·닭볏등대·젖병등대 등은 어디에서 바라보아도 푸른 바다와 어우러져 멋진 정경을 연출한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월드컵기념등대다. 2002년 월드컵 공인구를 품고 우뚝 서 있는 월드컵기념등대는 공원으로 조성되어 월드컵 전반의 역사 이외에도 당시 참가국에 대한 정보와 우리나라 대표팀의 명단·성적 등을 전시하고 있다. 다음으로 젖병등대는 큰 젖병과 작은 젖병이 나란히 서 있는데, 큰 젖병은 등대고 작은 젖병은 우체통이다. 이 등대는 OECD 국가 중 출산율이 가장 낮은 우리나라의 출산을 장려하고자 세웠다.해안을 따라 펼쳐진 각양각색의 등대 퍼레이드가 끝날 즈음이면 하얀 속살을 드러낸 바위 위로 웅장한 규모를 자랑하는 사찰 하나를 만나게 된다. 바로 해동용궁사다. 이 고찰은 고려 우왕 2년(1376년)에 나옹화상이 창건하였고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으나 1930년대 들어 복원되었다. 108장수계단과 사찰로 들어가는 절벽 위 돌다리에는 오랜 세월이 쌓여 만들어낸 경건함이 흐른다. 발아래로는 파도가 용틀임하고 경내에 서면 동해가 시원스레 바라보인다. 풍광이 워낙 뛰어나서 금방 발길을 돌리기가 아쉬울 정도다. alt해동용궁사alt몰운대에서 바라본 바다  낙조가 아름다운 다대포해수욕장과 몰운대부산하면 빼놓고 생각할 수 없는 것이 바로 해수욕장이다. 추운 겨울철에도 해수욕장을 찾는 여행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최근 들어 각광 받고 있는 장소는 바로 다대포이다. 부산의 서쪽 끝머리에 펼쳐진 다대포는 아름다운 낙조와 더불어 최근 부산지하철 1호선이 해수욕장 바로 앞까지 연장되면서 누구나 쉽게 찾아갈 수 있는 핫 플레이스로 등극했다. 다대포를 방문했다면 빼놓지 말고 가봐야 할 곳이 바로 몰운대이다. 16세기까지만 해도 몰운도라는 섬이었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낙동강에서 내려오는 흙과 모래가 퇴적돼 육지와 연결되면서 육계도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이후 구름이나 안개가 낀 날에는 그 모습을 잘 볼 수 없다고 해서 몰운대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삼락강변길에서 시작해 몰운대로 이어지는 해안 산책로는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지역 명소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 몸을 바친 영령들구덕산과 엄광산으로 둘러싸인 중앙공원은 부산 시민들의 휴식처이자 대표적인 사적 테마공원이다. 부산·경남 출신 전몰장병과 일제에 맞서 항일운동을 한 독립운동가들을 모시고 있는 이곳에는 후손들에게 나라의 소중함을 널리 알리고자 충혼탑·4·19위령탑·광복기념관·해군전승비·시민헌장비·중앙공원비 등을 배치해 놓았다. 6·25전쟁 때 판자촌을 이루었던 대청산을 공원으로 꾸며놓은 곳으로 부산의 아름다운 야경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어 더욱 유명해졌다.먼저 광복기념관에 들러본다. 1876년 부산항 개항 이후부터 1945년 광복을 맞이할 때까지, 일본의 침략에 항거한 부산 지역의 독립운동가와 역사적 유물·부산항일 학생운동과 일신여학교의 3·1운동 관련 자료들이 전시돼 있다. 전시관 2층에는 순국선열과 애국지사의 숭고한 업적을 기리고 나라사랑의 산 교육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위패봉안소를 마련해두었다. 광복기념관 옆에는 웅장한 규모의 충혼탑이 자리 잡고 있다. 충혼탑은 1945년 8월 15일 우리나라가 광복을 맞이한 이후 나라를 위해 싸우다 장렬하게 산화한 부산 출신 국군장병과 경찰관을 비롯한 애국 용사들의 영령들을 모시고 있다.이밖에도 중앙공원엔 부산지역 항일 독립투쟁사에 큰 족적을 남긴 최천택의 기념비가 있다. 1886년 6월 부산 동구 좌천동에서 태어난 최천택은 독립운동가이자 사회운동가로, 일제에 항거하고 청년운동과 신간회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54차례나 구속됐다. 광복을 옥중에서 맞이할 정도로 평생을 독립운동에 헌신했지만 부산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아 아쉬움이 컸는데 2003년 건국훈장애족장 서훈을 받으면서 재조명되기 시작했다. 최천택은 1919년 들불처럼 떨치고 일어난 3·1운동을 돕기 위해 독립신문 등사에 참여했는가 하면, 1920년에는 독립운동가 박재혁과 함께 영화 ‘암살’의 모티브가 된 부산경찰서 폭파를 주도하기도 했다. alt충혼탑alt광복기념관alt최천택 기념비 도시에 어린 독립운동가의 흔적부산 독립운동사에서 박차정과 안희제를 빼놓을 수 없다. 1910년 부산 동래구 복천동에서 태어난 박차정은 1924년 5월 조선소년동맹 동래지부에 가입하면서 독립운동에 처음 참여하였다. ‘대륙의 들꽃’이라고 불릴 정도로 그녀의 독립운동 의지는 대단했다. 동래여자고등학교의 전신인 일신여학교 시절부터 학생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해 여러 차례 체포됐고 이후 중국으로 건너가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녀는 1939년 2월 중국 장시성 곤륜산에서 벌어진 전투에 여성대원으로 참가했다가 총상을 입어 그 후유증으로 광복을 눈앞에 둔 1944년 세상을 떠났다. 박차정의 생가는 현재 동래구 명륜동 98번지에 복원되었다.경남 의령 출신 안희제는 1907년에 구포에 구명학교를 세우고 의령에 의신학교와 창남학교를 설립하여 청소년들을 가르쳤다. 1909년 10월에는 서상일 등 80여 명의 동지와 함께 비밀 청년결사인 대동청년당을 창설했으며, 1914년에는 백산상회를 설립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였고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독립운동자금을 조달하였다. 백산상회가 있던 중구 동광동에 가면 그의 독립정신을 기리기 위해 기념관을 만들어 유품과 관련 기록들을 전시하고 있으며 용두산공원에 흉상을 세워 그의 높은 뜻을 기리고 있다. alt박차정 생가  alt백산기념관 ]]> Thu, 01 Feb 2018 16:08:36 +0000 14 <![CDATA[전 국민이 힘을 모아 국권침탈에 맞선 국채보상운동 ]]>  전 국민이 힘을 모아 국권침탈에 맞선 국채보상운동 대한민국 독립운동사를 장식한 이달의 주요 역사적 사건을 한눈에 살펴보자.2월의 주제는 바로 국채보상운동이다. 1910년 경술국치에 앞서 일제는 대한제국의 재정을 예속화하기 위해 강제차관 공세를 펼쳤다. 이에 반발한 한국인들은 국채 탕감을 위해 전국적 규모의 자발적 모금활동을 벌여 이를 극복하고자 하였다.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벌어진 범국민적 국권회복운동이었다. alt]]> Thu, 01 Feb 2018 15:43:35 +0000 14 <![CDATA[중국과 러시아를 누비며 무장투쟁을 지원하다 김규면 ]]>  글 학예실 중국과 러시아를 누비며무장투쟁한 대한신민단 단장 김규면金圭冕1880.03.12. ~ 1969.02.02.독립기념관은 국가보훈처·광복회와 공동으로 김규면을 2018년 2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김규면은 무장투쟁 부대를 만들어 독립운동을 이끌어간 지도자였으며, 일관되게 제국주의 타도와 약소민족의 해방을 위해 헌신한 반제국주의 전선의 혁명가였다. alt 선교사로 활동하며 항일무장투쟁을 준비하다1880년 함북 경흥에서 태어난 김규면은 1900년 초 서울로 올라와 육군무관학교를 졸업했으나 함경도 출신들을 차별하는 일제의 정책으로 무관의 꿈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던 중 생업을 위해 이주한 원산에서 캐나다 출신 선교사 펜윅을 만나 기독교에 입교하게 된다. 1907년 가족들과 훈춘으로 망명한 김규면은 대한기독교회 소속 목사로 만주와 연해주를 오가며 선교활동을 펼쳐 나가는 한편 이동휘·김성무 등과 함께 동림무관학교를 설립하여 독립군양성에도 힘썼다. 1915년 대한기독교회가 일제의 종교탄압에 굴복하자 김규면은 만주와 연해주 일대의 교인들을 모아 독립교회인 ‘대한성리교’를 만들었다. 이후 1917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태평양서원을 설립하여 독립자금 마련과 만주와 연해주에서 활동하는 독립운동 단체들의 연락을 담당하였다. 1918년 무렵에는 일본군이 시베리아를 침략하자 대한성리교 교인들을 중심으로 항일무장단체의 조직을 준비하였다. 그는 7개월 동안의 준비를 거쳐 1919년 3월 12일 조국의 완전독립과 민족의 대동단결을 목표로 대한신민단을 창설하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하여 활동하다김규면은 1922년 러시아 정부가 연해주에서 활동하던 한인무장부대를 해산시키자 중국 상하이로 건너갔다. 1924년 4월에는 상하이 프랑스 조계에서 윤자영 등과 함께 상해청년동맹회을 조직하고 잡지 <한인청년>을 출판하였으며, 1924년 5월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교통총장 대리로 임명되어 러시아 정부와의 자금지원 교섭 임무를 담당했다. 1925년에는 사회주의자동맹을 조직하여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로 나뉜 독립운동 세력의 통합을 위해 노력하였다.김규면은 1927년 장제스가 사회주의자를 탄압하자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동양서적 판매원으로 일하며 연해주 지역의 빨치산 위원회를 지원하였다. 1933년 소비에트 연해주위원회 비서의 체포 위협을 피해 모스크바로 이주한 김규면은 1969년 향년 88세의 나이로 순국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고인의 공적을 기려 200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alt김규면(1920년대)alt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 전경(1918년) alt블라디보스토크에서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찍은 사진(1920년)  alt일본군과의 전투 내용이 기록된 자필 원고 『이만전쟁』(1922년)   alt김규면을 교통총장 대리로 임명한다는 내용을 다룬 기사(1924년 <신한민보>)alt자필 회고록 『노병 김규면 비망록』 alt김규면과 아들 김호둔alt모스크바 노보데비치 수도원에 위치한 김규면의 묘소 alt말년의 김규면과 독립운동가들        ]]> Thu, 01 Feb 2018 17:47:44 +0000 14 <![CDATA[일제는 숭례문을 왜 허물려고 했을까? ]]> 글 신현배 역사칼럼리스트 일제는 숭례문을왜 허물려고 했을까?조선 건국과 함께 세워진 숭례문은 오랜 세월 동안 수차례의 위협을 받아왔다. 특히 1908년 이토 히로부미가 서울로 일본의 황태자 다이쇼를 초청했던 때에는 심지어 건물 전체가 허물어질 위기를 겪는다. 다행히 조선 사람들의 반발로 그 목숨은 부지하였으나 서쪽과 동쪽 성벽을 잃고 두 날개를 잃은 모양이 되고야 말았다. alt숭례문(1900년)   한양의 얼굴, 숭례문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는 도읍지를 한양으로 옮겼을 때 도성을 쌓고 동서남북 사방에 흥인지문·돈의문·숭례문·숙정문을 두었다. 그 가운데서도 한양 도성의 사대문 가운데 남쪽에 있어 남대문이라고도 불리는 숭례문은 도성의 정문으로, 한양을 대표하는 얼굴이었다.숭례문은 1398년(태조 7년) 2월에 처음 세워졌다. 그런데 숭례문의 지대가 낮아서 볼품이 없다는 의견이 많아 1447년(세종 29년) 8월에 고쳐 지었다. 지대를 돋우고 그 위에 돌을 쌓아 문루를 세운 것이다. 그 후 1479년(성종 10년)에 이르러 숭례문의 문루가 또다시 기울어져 대대적인 보수공사가 추진되었다. 한양을 대표하는 얼굴치고는 태어나면서부터 우여곡절이 많았던 셈이다.숭례문의 이름은 유교에서 사람이 지켜야 할 다섯 가지 도리라고 하는 ‘인(仁)·의(義)·예(禮)·지(智)·신(信)’에서 비롯되었다. 그 가운데 ‘예’는 오행에서 남쪽을 뜻하기 때문에 사대문 중에 남대문은 이를 붙여 숭례문이라 한 것이다. 즉 숭례문은 예를 숭상하는 문이라는 뜻으로 조선이동방예의지국임을 나타낸 이름이라고 할 수 있다. 사연이 담긴 숭례문 현판한편 숭례문의 현판은 다른 문들과는 달리 세로로 쓰여 있다. 그것은 숭례문이 중국 사신을 맞아들이던 문이라서 귀한 손님을 서서 맞이함이 예의에 맞다 하여 세로로 써 놓았다고 한다. 또 다른 이유는 숭례문의 ‘예(禮)’자에 관련이 있다. 예 자는 오행으로 ‘화(火)’, 즉 불에 해당한다. 그리고 ‘숭례문’의 ‘숭(崇)’자는 예서(隸書)로 불꽃이 치솟는 모양이다. 따라서 현판 글씨를 세로로 써서 불이 타오르는형상을 나타낸 것이다. 그리하여 서울 남쪽 관악산의 불기운을 맞불로써 막을 수 있다고 믿었다. 이는 서울 도성에서 화재가 일어나는 것을 미리 막아 보자는 뜻이었다.숭례문 현판의 이름 석 자를 쓴 사람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태종 때의 명필이었던 공조참판 신색이라거나 중종 때의 명필이었던 공조판서 유진동이라는 설도 있지만 많은 사람들은 이 글씨의 주인공을 세종의 형인 양녕대군이라 보고 있다. 『태종실록』에는 태종이 경복궁 안에 경회루를 짓고 그 현판 글씨를 양녕대군에게 쓰게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만큼 양녕대군은 어려서부터 명필로 소문이 자자했다. 숭례문의 현판 글씨는 단숨에 휘두른 활달한 필적이 특징이다. 뒷날 명필로 이름을 떨친 추사 김정희가 과천에서 서울로 드나들 때 숭례문 앞에 서서 현판 글씨를 황홀하게 바라보았을 정도였다. 임진왜란 때는 이 숭례문 현판이 감쪽같이 사라지기도 했다.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현판을 새로 써서 달았는데, 다는 족족 현판이 떨어지는 것이었다. 그러던 광해군 때에는 서울 도성 안에서 이런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청파역 아래 배다리 밑에서 밤마다 괴상한 빛이 새어나온대.”“그게 정말이야? 도깨비불인가?”사람들은 궁금증을 견디다 못해 어느 날 밤, 청파역 아래 배다리 밑으로 몰려갔다. 그러자 거기에 있는 웅덩이에서 한 줄기 빛이 새어 나와 숭례문 쪽으로 뻗치고 있었다. 사람들은 이상히 여겨 웅덩이를 파 보았다. 그랬더니 거기에 임진왜란 때 사라졌던 숭례문 현판이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 현판을 꺼내 숭례문에 달았는데, 그 뒤로는 떨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alt숭례문(현재)   사라질 위기를 겪어온 숭례문1908년에는 숭례문이 헐릴 뻔하기도 했다. 조선 통감 이토 히로부미가 서울로 일본의 황태자 다이쇼를 초청했는데, 그 전에 일본 공사 하야시 곤스케가 외부대신 이하영을 찾아와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이었다. “숭례문을 헐어야겠소. 대포로 쏘아서…”“방금 뭐라고 하셨소?”“숭례문을 헐어야겠다고 했소. 10월에 우리 일본 황태자 전하께서 조선을 방문하시는데, 어찌 숭례문 밑으로 걸어 들어가시게 할 수 있겠소?”“그걸 말이라고 하시오? 숭례문은 서울 도성의 정문이오. 절대 그렇게 할 수 없소.” 이하영은 기가 막혀 하야시를 빤히 쳐다보았다. 일제는 숭례문을 헐겠다고 했지만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조선 사람들이 벌떼같이 일어나 반대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본 황태자는 숭례문의 서쪽 성벽을 헐고 큰길을 내서 마차를 타고 지나갔다. 다음 해에는 동쪽 성벽도 헐고 큰 길을 내어 숭례문은 두 날개를 잃은 새 모양이 되었다. 숭례문은 일제에 의해 여러 차례 모진 수모를 겪긴 했지만 임진왜란·병자호란 때도 불에 타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런데 2008년 2월 10일 어처구니없는 화재가 발생하여 숭례문이 불타 버리고 말았다. 그리하여 5년 2개월 20일에 걸친 복원 공사가 진행되었고, 2013년 5월 4일 준공 기념식을 가짐으로써 원형대로 복구하였다.  신현배역사와 전통문화에 대해 관심이 많은 역사칼럼리스트. 저서로는 역사 이야기 <엉뚱 별난 한국사>, <엉뚱 별난 세계사>, <2000년 서울 이야기>, <세계사로 배우는 법 이야기>, 전통문화 이야기<소중한 우리 문화 지식 여행>시리즈 등이 있다.]]> Thu, 01 Feb 2018 17:25:11 +0000 14 <![CDATA[내가 청년이 되어야지, 젊은이에게 노인이 되라고 할 수는 없잖나? ]]> 글 이성주 역사칼럼니스트  내가 청년이 되어야지,젊은이에게 노인이 되라고할 수는 없잖나?  이상재 하면 떠오르는 말들이 많다. 독설·언어유희·대쪽·촌철살인 등. 엄혹했던 일제강점기 시절 민족의 독립을 위해 모든 걸 바친 민족의 지도자였지만, 비장함이나 결연함보다 여유와 유머가 넘쳐났던 이로 기억되고 있다. 만약 이 여유와 유머가 시답잖은 길거리 객담(客談)이었다면 그에 대한 기억이 이렇게 오래도록 우리들 머릿속에 자리 잡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의 여유와 웃음 뒤에는 민족에 대한 애정, 그리고 선비로서의 담대함이 자리하고 있었다. 청년 이상재▲독립운동가 이상재  ▲1850년 10월 26일 충청남도 서천군 출생  ▲1881년 신사유람단의 일원  ▲1884년 우정국 주사(主事)에 발령  ▲갑신정변에 가담했으나 실패하여 낙향  ▲1887년 6월 미국공사관 2등 서기관으로 워싱턴 D.C에서 근무  ▲1896년 2월 내각 총서(內閣總書)와 중추원 1등 의관(議官)으로 임명  ▲만민공동회 주도  ▲1905년 을사늑약 직후 광무황제의 부탁을 받고 의정부참찬에 임명  ▲1913년 황성 YMCA 총무에 취임  ▲조선총독부에 맞서 YMCA 청년회를 지켜냄  ▲3·1운동 이후 만세 사건의 배후로 지목되어 투옥되었다가 석방됨 이상재의 일생은 구한말의 격동기 속에서 민족의 생존을 위한 활로 모색과 투신의 시간이었다. 한학을 공부해 과거 시험에 응시했으나 이미 부패할 대로 부패한 양반들의 매관매직 풍토로 낙방을 하게 됐고 그길로 과거의 뜻을 접었다. 그러나 인재는 주머니 속의 못 같은 것이라 이상재는 곧 세상에 나와 몸을 일으키게 된다.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일본을 경험한 그는 뒤이어 미국으로 건너가 서기관으로 근무하였다. 아관파천으로 민족의 자존심이 무너졌을 때는 고종을 보필하며, 쓰러져 가는 나라를 일으켜 세우려 갖은 애를 다 썼다. 만민공동회와 독립협회 활동이 바로 그것이다.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대한제국은 을사늑약과 경술국치를 당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이상재는 일제에 굴복하지 않고 항거했다. 여기서 주목해 봐야 할 건 그의 꼿꼿한 성품이다.기독교 신자이면서도 당당하게 기독교를 비판하고, 당대의 권력자들 앞에서도 전혀 주눅 들지 않고 소신 있는 발언을 주로 했다. 일례로 일본인들이 대포나 기관총을 보여주며 자랑을 하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과연 대일본제국이 문명한 나라임을 알겠습니다. 다만, 성경에서 칼로 흥한 자는 칼로 망한다 했으니 그것이 걱정이올시다.”  꼰대와 아재 사이이상재는 말년에 자신을 소개할 때 ‘청년’이란 말을 이름 앞에 꼭 붙였다. 그리곤 청년들과 스스럼없이 대화했다. 주변에서는 이런 그의 행동을 만류하며, 젊은이들에게 너무 허물없이 다가가면 만만하게 보인다는 말을 했다. 이때 그가 남긴 대답이 과연 걸작이다.“내가 청년이 되어야지, 젊은이들에게 노인이 되라고 할 수는 없잖나? 내가 청년이 되어야 청년이 더 청년 노릇을 할 수 있는 것일세.”오늘날의 한국은 초 갈등 사회다. 남녀 간의 갈등·지역 간의 갈등·계층 간의 갈등 그리고 요즘 들어 부쩍 심해진 세대 간의 갈등. 인터넷상에서는 아재 개그가 넘쳐나고, “내가 예전에 말이야...”로 시작되는 왕년의 이야기를 꺼내면 여지없이 ‘꼰대’로 몰린다. 나이 든 것도 서러운데, 이제 꼰대라고 무시까지 받는다. 이는 비단 젊다고 피해갈 문제가 아니다. 각 세대에게는 자신만의 시대를 관통하는 아픔이 있다. 우리 세대가 이해하지 못하는 아픔은 노소를 불문하고 모두 가지고 있다. 당연히 ‘우리’는 그 아픔을 이해할 수 없다. 이해의 간극이 곧 오해가 되고, 오해는 세대 간의 틈을 더더욱 벌려 놓는다. 빈곤의 악순환과 같은 고리를 끊을 방법이 뭘까? 그 해답에 바로 이상재가 있다.  이해받으려만 하지 말고, 상대를 이해하려 노력해보는 건 어떨까? 칠순의 나이에도 청년들과 어울리는 걸 주저하지 않았던 이상재. 그는 운명하는 그 순간까지 ‘청년’으로 살았다. 인터넷 농담 중에 ‘꼰대가 되느니 아재가 되겠다.’란 말이 있다. 꼰대가 돼 뒤에서 손가락질 받기보다는 차라리 아재가 돼 ‘썰렁하다’는 핀잔을 받는 게 낫다는 뜻이다. 아재 개그는 희화화의 대상이 아니라 청년에게 다가가는 아재들의 ‘노력’이 될 수도 있다. 칠순이 넘은 나이에도 청년으로 살았던 이상재의 모습을 되새기며 우리 모두 ‘꼰대’가 되기보다 아재가 되도록 노력해 보자. 이성주시나리오 작가 겸 역사칼럼니스트. 대중과 함께 호흡하는 글쓰기를 목표로 <조선의 민낯>, <왕들의 부부싸움>과 같은 역사서를 출간한 바 있다. 최근에는 국제정치와 관련된 연구 및 집필에 열중하고 있다. <전쟁으로 보는 국제정치> 시리즈 1, 2, 3권을 출간 중이다. ]]> Thu, 01 Feb 2018 15:11:57 +0000 14 <![CDATA[겨울 지나가는 무렵의 독립기념관에는 ]]> 겨울 지나가는 무렵의독립기념관에는 겨울 지나가는 무렵의 독립기념관에는 하얀 눈이 소복하게 쌓여 갑니다.  뽀드득 소리와 함께 걸어온 길돌아보니 정겨운 발자국이 남아있었습니다. 아름다운 오늘의 이 풍경을 위해고된 길 걸어낸 순국선열의 발자취를 교훈 삼아내일을 향해 나아가겠습니다. ]]> Thu, 01 Feb 2018 15:01:02 +0000 14 <![CDATA[나라를 지키기 위해 담배를 끊고 가락지를 빼다 ]]> 글 권경률 역사칼럼니스트 나라를 지키기 위해담배를 끊고 가락지를 빼다 국채보상운동1907.02 ~ 1908.07 매월 광복과 관련된 핵심사건을 선정하여 그 치열했던 역사의 순간을 재구성하고자 한다. 다시 만난 그날, 두 번째 이야기는 1907년 2월 거국적으로 번진 국채보상운동이다. 일제의 경제 침략에 맞서 온 국민이 단합해 뜻을 모은 모금 현장으로 들어가 보자. 매월 온 국민이 참여한 기적의 모금운동‘우리 정부가 급히 발전하고자 (일본에서) 들여온 빚이 거금 1,300만 원이라. 이집트는 영국과 프랑스의 돈을 빌렸다가 일 처리가 좋지 못해 결국 식민지가 되고 말았다. 국민 된 사람으로서 교훈으로 삼아야 할 일이로다. 우리 2천만 동포들이 1원씩 낸다면 2,000만 원이요, 50전씩 낸다면 1,000만 원이니 백성들이 나랏빚을 갚는 일이 어찌 불가능하리오.’ 1907년 2월 22일 국민 스스로 나랏빚을 갚자는 ‘국채보상기성회의 창립취지문’이 발표되었다. 이 호소는 <대한매일신문>·<황성신문> 등이 발 빠르게 보도하며 전국 방방곡곡 퍼져나갔다. 대구에서 물꼬를 튼 국채보상운동이 거대한 물결을 이루며 온 나라를 뒤덮는 순간이었다. 남녀노소·빈부귀천 따지지 않고 국민 모두가 이 거국적인 모금운동에 동참했다. 남자들은 궐련 담배를 끊고 그 돈으로 나랏빚을 갚는 데 나섰고 여자들도 비녀와 가락지를 빼고 쌀 한 줌씩 아껴 성금을 모았다. 아이들 또한 제 부모를 따라 코 묻은 세뱃돈이나 용돈을 내놓았다. ‘2월 24일 서울 상사동 이씨 부인이 패물을 팔아 새 돈 2환을 보태다. 3월 1일 김석자 등이 매일 아침밥과 저녁밥을 반 그릇으로 줄여 석 달분 값 2원 70전을 보내다.’<대한매일신보> 의연금 현황 기사 나라를 지키는 모금운동에는 신분의 구별도 없었다. 서울 북촌과 생선 시장의 인력거꾼들은 고된 노동의 대가를 아낌없이 납부했다. 기생조합에서도 비록 천한 일을 하나 나라의 의무를 저버릴 수 없다며 동참했다. 머슴·가마꾼·백정 등 하층민들도 십시일반 품삯을 모아 성금 접수처로 달려갔다. 짚신 삼는 노인은 두부 비지로 끼니를 때우면서도 무려 2원을 냈다. 쌀 한 말 값이 1원 80전 하던 시절이었으니 가난한 이에게는 거금이 아닐 수 없었다. 또 다리 밑의 거지는 몸을 다쳐 구걸하는 처지임에도 주머니의 돈을 모두 내놓았다. 홀로 두 자식을 키우는 과부 역시 편지와 함께 쌈짓돈을 보냈다.하층민과 빈자들까지 나서는 판에 부유한 상류층이 가만있을 수 있었을까. 광무황제는 국채보상운동의 취지에 공감해 즐겨 피우던 담배를 끊고 세자의 혼례까지 연기했다. 궁궐 안의 관리들도 황제의 뜻에 따라 모금운동에 참여했다. 장안의 갑부들도 두터운 지갑을 열었고 일본 유학생들은 금연동맹을 맺어 의연금에 보탰다.당시 독자가 가장 많았던 <대한매일신보>에는 이 거국적인 모금에 관한 미담이 차고 넘쳤다. 충주 사람들은 의연금을 갖고 서울로 가다가 어느 고갯길에서 도적 떼를 만났다. 도적 두목이 칼을 휘두르며 위협했지만 그들은 돈을 내놓기는커녕 국채보상의 취지를 설득했다. 부끄러움을 느낀 두목은 오히려 제 호주머니를 털어 성금을 맡기고 물러갔다. 이 밖에도 소 판 돈 10원을 기꺼이 쾌척한 농민·집을 팔아 셋집으로 옮기면서 그 차액을 낸 일가족의 이야기가 회자되었다. <황성신문>의 사설은 국채보상운동의 열기를 경이롭게 바라보았다. ‘며칠 되지 않았는데도 응하는 자 구름 같아서 시정의 상인들은 머리와 힘으로 번 돈을 바치고 노동자 일꾼들은 다릿심으로 번 돈을 바쳐 오히려 남보다 뒤질세라 두려워한다니 실로 우리 국민이 이처럼 즐겨 응할 줄 요량조차 못하였으며 실로 우리 국민에게 이처럼 굳센 힘이 있는 줄 뜻하지 않았음이로다.’ 이렇게 1907년 5월까지 4만여 명이 모금에 참여했고 의연금도 230만 원 이상 쌓였다. 국채보상운동에 온 국민의 간절한 뜻이 모이면서 하나의 거대한 힘이 형성되고 있었다. 대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참여하고자 한 진정한 의미의 국민운동이었다. 그렇다면 그 첫걸음은 어떻게 뗐을까? alt국채보상기성회 창립취지문 (1907년 <대한매일신보>)alt의연금 영수증  일본에 맞서 민족자강의 길로1905년 러일전쟁에 승리하자 일본은 강제로 을사늑약을 체결하면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고 사실상의 속국으로 만들었다. 나아가 국권을 완전히 강탈하기 위해 일제는 집요하고 치밀하게 움직였다. 그 가운데 핵심이 경제 주권을 무너뜨리는 일이었다. 그들은 빚쟁이가 되어 주인을 집에서 내쫓는 책략을 썼다. 나랏빚이 늘어난 것은 이 때문이다.일본 통감부에서는 대한제국의 산업기반을 조성한다며 건물을 짓고 도로를 닦고 항구를 넓히는 데 나섰다. 사실 그것은 일제 통치기구가 들어설 건물이고, 일본산 제품을 전국 방방곡곡 나르는 도로이며, 우리나라의 곡식과 광물을 싣고 나갈 항구였다. 그들은 본국으로부터 차관을 들여와 이 사업들을 추진했고 국채는 대한제국 정부에 떠넘겼다. 1907년 기준 대한제국이 일제에 진 빚은 1,300만 원에 달했다. 당시 정부의 연간 재정수입이 1,319만 원, 지출이 1,395만 원이었으니 국채가 한 해 예산과 맞먹었다. 대한제국은 이 어마어마한 빚을 갚고 싶어도 그럴 능력이 없었다. 빚쟁이 일본은 어업권·삼림벌채권·석탄채굴권 등 노른자위 특권을 빼앗으며 차압의 강도를 높여나갔다. 대구에서 애국계몽운동에 앞장서던 상인 서상돈과 전직 관리 김광제는 이런 상황을 우려했다. 그들은 이곳에 광문사를 세우고 교육출판 사업을 벌이고 있었다. 두 사람은 빚 때문에 나라를 빼앗기는 국가적 위기를 간파했다. 1907년 2월 서상돈과 김광제는 공동명의로 국채보상운동 취지서를 돌리고 모금운동을 호소했다. “우리가 감히 이 일을 시작하면서 피눈물로 호소하노니, 대한의 모든 국민들이 말로 혹은 글로 서로 전하고 알려 모르는 이가 한 사람도 없게 해주시기 바랍니다. 기필코 우리 힘으로 우리 강토를 보존할 수 있도록 뜻을 모읍시다.” 국채보상운동의 실천방안으로 맨 먼저 한 일은 단연회(斷煙會), 곧 담배 끊는 모임을 만드는 것이었다. 담배를 세달만 끊고 아낀 돈으로 나랏빚을 갚자는 이야기였다. 국채보상 한다면서 왜 담배를 못 잡아먹어 안달이었을까? 담배가 건강에 해롭기는 하지만 당시에는 이 사실이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문제는 담배의 경제학이었다. 그 무렵 한국에서는 서양식으로 종이에 말아 피는 궐련 담배가 유행했다. 이 새로운 담배의 판매권은 일본 상인들이 갖고 있었다. 그들은 부산과 대구에 담배공장을 차리고 일본에서 들여온 원료로 궐련을 생산해 팔았으며, 이로 인해 거금이 일본으로 흘러 들어갔다. 대구의 거상 서상돈이 담배 끊기를 국채보상운동과 연계한 이유다.국채보상운동은 결국 경제 주권을 수호하고자 하는 움직임이었다. 제힘으로 빚을 갚고 잘살아보자는 민족자강정신이 깔려있었다. 그 취지에 온 국민이 공감하여 한뜻으로 모금운동을 펼치자 일제는 당황했다. 이제 조금만 더 밀어붙이면 국권을 빼앗을 수 있는데 뜻밖의 암초를 만난 것이다. ‘이들의 목적은 현재 조선이 안고 있는 국채 1,300만 원을 갚는 데 있다고 하나, 실제 내용은 우리 일본에서 벗어나 독립하려는 배일운동(排日運動)입니다.’ 당시 통감부 경찰책임자가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에게 올린 보고 내용이다. 전직 총리대신이자 을사늑약의 주모자로 대한제국을 삼키려는 그에게 국채보상운동은 분명 걸림돌이었다. 무엇보다 위험한 점은 한국인들을 단합시키고 있다는 것이었다. 통감부는 이 운동의 신뢰성을 떨어뜨리고 구심점을 제거하기 위해 간교한 방해 공작을 꾸몄다.  alt서상돈alt충남 보령에 위치한 김광제 동상공원 alt서상돈과 김광제의 국채보상운동 취지서(1907년 <대한매일신보>) alt단연상채광고가(담배를 끊어 나랏빚을 갚자는 노래)  국난을 극복하는 단합의 힘일제는 1907년부터 일진회 등을 동원해 국채보상운동을 흔들었다. 국민이 나라의 빚을 갚는 것은 불가능하며 이 모금운동이 어리석은 짓이라는 소문을 퍼뜨렸다. 또 국채보상운동을 대서특필하고 의연금 모금에 앞장선 <대한매일신보>를 저격했다. 신문사 사장 베델과 총무 양기탁에게 아무 증거도 없이 국채보상금 횡령혐의를 뒤집어씌웠다. 영국인 베델은 추방 위기에 몰렸고 양기탁은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다. 뒤에 무죄가 밝혀지긴 했지만 타격은 컸다. 1908년 이후 국채보상운동의 열기는 식어버렸다. 악의적인 소문들이 나돌면서 성금 내는 사람의 숫자가 줄어들었다. <대한매일신보>도 1909년 베델의 죽음과 함께 항일투쟁 논조를 잃었다. 대한 사람들의 피땀 어린 의연금은 일제의 손아귀에 들어가고 말았다.국채보상운동은 결과적으로 실패했다. 하지만 그 과정을 살펴보면 결코 실패가 아니다. 우리 역사에 지워지지 않는 큼직한 발자국을 남겼기 때문이다. 그것은 범국민적인 구국운동이었으며 일본의 경제 침략에 맞서 온 국민의 단합을 이루어냈다. 남녀노소·빈부귀천 따지지 않고 대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참여하고자 했다. 신분제 사회에서 국민국가로 나아가는 때에 뜻깊은 역사적 경험을 한 것이다. 이 경험은 3.1운동을 비롯해 일제 강점기 항일투쟁의 밑거름이 되었다. 가깝게는 1997년 IMF 외환위기 당시 ‘금 모으기 운동’으로 국민을 이끈 나침반이기도 했다.또 근대적 여성운동의 시초였다. 의연금을 모으는 평화적인 저항 방식은 여성이 참여할 수 있는 길을 넓혔다. 남자들이 담배와 술을 끊어 돈을 모았다면 여자들은 밥을 줄이고 반찬값을 아꼈다. 이 밖에도 가락지나 비녀를 빼서 의연금에 보탰다. 자신만의 방식으로 국민의 의무를 다함으로써, 국민으로서 차별받지 않는 권리를 찾으려 한 것이다. 2017년 10월 국채보상운동 기록물 2,472건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 국채보상운동 취지문·수기·영수증·장부·언론 보도 등이다. 나라를 빼앗으려는 일제의 차관 공세에 맞서 전 국민의 25%가 자발적으로 모금에 참여한 주인의식이 이제 세계의 자랑거리로 떠올랐다. 한국인에게는 힘을 합쳐 국난을 극복해온 역사가 있다. 국민의 뜻을 하나로 모으면 어떤 시련도 물리칠 수 있다는 자신감은 바로 이런 점에서 나온다.  altIMF 외환위기 당시 금 모으기 운동 모습(1997년)alt대구 진골목에 위치한 국채보상운동 이야기가 담긴 벽화 alt유네스코에 등재된 국채보상운동 기록물]]> Thu, 01 Feb 2018 21:27:08 +0000 14 <![CDATA[을사늑약과 들불처럼 번져간 의병 전쟁 ]]>  글 박영규 작가 을사늑약과들불처럼 번져간 의병전쟁국난에서 벗어나고자 온 국민이 나섰던 감격의 그날 1919년 3월 1일. 3·1운동이 일어난 지 어언 100주년을 눈앞에 두고 있다. 이를 기념하여 월간 『독립기념관』은 2019년 3월까지 ‘겨레의 함성, 독립의 희망’을 통해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역사를 다루고자 한다.  일제의 불법적인 을사늑약1905년 11월 17일, 일제는 한국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제로 박탈하는 을사늑약을 체결했다. 을사늑약은 러일전쟁 발발 직후인 1904년 2월 23일에 강제로 체결된 한일의정서를 기반으로 하고 있었다. 당시 일본은 한국에 불법적으로 군대를 상륙시키고 대한제국의 행정을 장악하였으며, 그해 8월 22일엔 국권 강탈의 서막이 된 제1차 한일협약을 체결하여 재정과 외교의 실권을 박탈했다. 또한 1905년 2월에는 독도를 군사 기지로 이용하기 위해 시마네현의 다케시마라는 명칭으로 편입시키는 영토 침략을 감행했다. 편입 이전까지 독도는 1900년에 황제의 칙령으로 ‘석도(石島)’라는 이름으로 울릉도에 예속되어 있었다. 영토 편입을 통해 일본은 러시아와 해상전에서 지리적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이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1905년 7월 27일 미국과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고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인정하는 대신 일본의 한반도 지배를 묵인한다는 미국의 약속을 얻어냈다. 그해 8월 12일엔 1902년에 이어 영국과 제2차 영일동맹을 맺고 일본의 한반도 보호국화에 대해 양해를 얻어냈다.이렇듯 일제는 한국을 식민화하기 위한 철저한 준비를 마친 후, 광무황제를 협박하여 늑약을 체결하려 하였다. 하지만 광무황제가 이를 완강하게 거부하자 을사오적 권중현·이근택·이완용·이지용·박제순을 앞세워 강행했다.하지만 이 조약을 체결한 박제순은 광무황제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은 바도 없고, 비준도 받지 못했다. 따라서 이 조약은 당연히 무효였다. 그러나 일본은 이 조약을 근거로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통감부를 두어 행정을 마비시켰으며, 전국의 지방 행정까지 모두 장악하여 감독하였다.을사늑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이 퍼지자, <황성신문>의 주필을 맡고 있던 장지연은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라는 사설을 통해 일제의 침략행위와 오적의 매국행위를 강력하게 규탄하였다. 광무황제는 미국인 황실 고문 헐버트를 통해 이 조약의 무효를 선언하였고, 국민들도 일제히 궐기하여 조약의 무효를 주장하였다.  alt한일의정서 체결 기념사진alt을사오적(권중현·이근택·이완용·이지용·박제순) alt을사늑약 전문alt시일야방성대곡(1905년 <황성신문>)          들불처럼 번져간 의병운동을사늑약으로 한국인의 반일 감정은 극도로 달아올랐고, 그것은 결국 전국 각지에서 벌어진 의병운동으로 이어졌다. 의병이 가장 먼저 일어난 곳은 강원도 원주 동부의 주천이었다. 이곳은 을미의병 당시 유인석이 의병을 일으킨 곳이었는데, 당시 유인석 휘하에서 활동하던 원용선과 박정수 등이 주축이 되어 다시 의병진을 꾸리고자 했다. 하지만 의병진을 편성하자마자 원주의 진위대와 일진회의 공격을 받아 흩어지고 말았다.이후 충청남도 홍주에서는 민종식과 안병찬이 의병을 일으켰다. 안병찬이 1906년 3월 수천 명의 홍주 의병을 규합하여 홍주성을 공략했으나 실패로 돌아갔고, 다시 민종식이 5월에 재차 공격하여 마침내 점령에 성공했다. 이후 의병들은 홍주성에서 12일 동안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나 일본군의 화력에 밀려 결국 패배하고 말았다.홍주성 패전 다음 달인 1906년 6월에는 전라도 태인의 무성서원에서 최익현이 70대의 노구를 이끌고 의병을 일으켰다. 최익현의 의병 부대는 정읍·순창·담양으로 진출하였고, 이후 전주와 남원의 진위대와 일전을 벌여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에 최익현과 의병들은 자국 군대와 싸우는 것을 피하려고 진군을 망설였고, 그 사이에 진위대의 급습을 받아 패전하고 말았다.한편, 경상도에서는 신돌석과 정환직이 영해와 산남에서 의병을 일으켜 활약하고 있었다. 신돌석은 1906년 4월에 영해에서 의병을 일으킨 뒤, 정환직의 산남 의병과 연합하여 동해안 일대에서 항일전쟁을 벌였다. 신돌석 의병의 규모는 3,000명이 넘는 대부대였고, 전술 능력도 뛰어나 일본군을 몹시 괴롭혔다. 또한 정환직의 아들 정용기는 영천일대로 진출하여 수천 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항일전쟁을 수행했다. 경주에서도 유시연이 의병대를 꾸려 항일투쟁을 이끌었다. 이때 경기 지역에서는 죽산과 안성을 기반으로 박석여의 의병 부대가 일어났고, 양평과 여주에서는 이범주 의병 부대가 활약했다. 또한 강원도 양구와 홍천에서는 각각 최도환과 박장호가 의병을 일으켜 항전하였다.이렇듯 전국 각처에서 크고 작은 의병 부대가 활동하는 가운데, 1907년 8월 1일 우리나라 군대의 해산령이 떨어졌다. 이에 해산된 군인들이 의병운동에 가담하면서 항일 투쟁의 양상은 크게 달라졌다. 유생 출신의 의병대장이 대다수였던 상황에서 군인 출신 의병대장들의 등장으로 전력이 크게 향상되었고, 조직력과 무기를 다루는 능력도 훨씬 좋아졌다. 또한 종래에 의병과 진위대가 서로 총칼을 겨누었던 양상도 사라져 항일투쟁의 대오가 훨씬 안정되었다.원주 진위대 출신 민긍호·박준성·손재규 등은 각각 의병부대를 일으켜 강원도·충청도·경기도 일원에서 항일투쟁을 이끌었고, 강화 진위대 출신 군인들은 연기우를 주축으로 임진강 유역의 포천과 연천 일대에서 항전하였다.여기에 기존에 활동하던 신돌석·이강년 등은 경상도 북부 지역에서 활동하였고, 호남 지역은 장성에서 기삼연·나주에서 전해산·함평에서 김태원과 심남일·무주에서 문태수·임실에서 이석용이 의병 부대를 이끌고 항일 투쟁을 전개해나갔다. 한편, 충청도와 전라도 접경지 지역인 공주·회덕 등에서는 김동신의 의병 부대가 활약했다.경기 북부 지역과 황해도·평안도·함경도 등에서도 의병운동이 일어났다. 경기도 장단의 김수민 의병 부대는 황해도 일대까지 넘나들며 항일 전쟁을 수행했고, 평산에서 일어난 박정빈과 이진룡 부대도 황해도를 오가며 전투를 벌였다. 평안도에서는 김여석 의병 부대가 덕천과 맹산을 중심으로 활동했고, 채응언은 함경도와 평안도의 접경지역에서 활약했다. 함경도에서는 홍범도와 차도선이 삼수와 갑산을 중심으로 산포수와 광산노동자를 규합하여 의병활동을 했으며, 경원에서는 최재형·이범윤·엄인섭·안중근 등이 의병 부대를 이끌고 있었다. alt홍주성 수복 기록화alt신돌석 전투 기록화alt일본경찰에 체포된 채응언  전국 의병 부대의 연합이렇듯 전국 모든 지역에서 의병이 일어남에 따라, 1908년 무렵엔 전국의 의병 부대가 연합하여 서울 진공작전을 계획하기도 했다. 이 작전을 추진한 인물은 관동의병장을 맡고 있던 이인영이었다. 이인영은 전국의 의병 부대를 연합하자는 격문을 돌렸고, 이에 호응한 각 도의 의병들이 양주의 대진소로 모여들었다. 양주에 모인 의병은 총 48진으로 병력 규모는 1만 명에 달했다. 이후 이인영을 총대장으로 13도창의군이 결성되었고, 마침내 1908년 1월에 서울진공작전이 이뤄졌다. 이 작전의 선봉은 강화도 의병대장 허위였다. 그는 300여 명의 선발대를 이끌고 동대문 밖 30리 지점까지 진출하였다. 그러나 이곳에서 일본군의 매복에 걸려 패퇴하였고, 결국 13도창의군의 서울진공작전도 실패하고 말았다. 이후 의병들은 곳곳에서 일본군과 유격전을 벌이며 항전했으나 전력의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패퇴하거나 해산되었다. 그 과정에서 의병 부대를 이끌던 의병대장들이 체포되거나 자결하였고, 13도창의군 총대장을 맡고 있던 이인영도 1909년 6월에 황간에서 체포되었다. alt13도창의군 총대장 이인영alt13도창의군 서울 진격전 모형   서울진공작전을 기점으로 일본군은 의병에 대한 초토화 작전을 수행하였고, 이른바 ‘남한대토벌작전’이라는 이름으로 두 달에 걸쳐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본군은 전국 각지의 촌락을 습격하여 주민들을 무차별 살육하였다. 이와 같은 상황에도 의병들은 연해주와 간도 지역을 옮겨가며 항전을 지속하였고, 이후 독립군으로 전환되어 광복전쟁을 수행하는 중추세력으로 성장하였다.  박영규1996년 <한 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을 내면서 저술활동을 시작하여, 1998년 중편소설 <식물도감 만드는 시간>으로 문예중앙신인상을 수상하면서 소설가로 등단했다. 문학, 철학, 역사 분야에 걸쳐 저술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대표적인 역사서로는 <한 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 <한 권으로 읽는 일제강점실록> 등이 있다. ]]> Thu, 01 Feb 2018 20:08:25 +0000 14 <![CDATA[1808년 5월 3일의 학살로 보는 에스파냐 민중들의 저항 ]]> 글 고종환 아주대학교 외래교수 1808년 5월 3일의 학살로 보는 에스파냐 민중들의 저항  alt 1808년 5월 3일의 학살(1814, 프란시스코 데 고야(Francisco Jose de Goya y Lucientes),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에스파냐 대표 화가 프란시스코 데 고야가 그린 유명한 그림들 중 대중들에게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을 꼽으라면 아마도 <1808년 5월 3일의 학살>을 말할 것이다. 한눈에 봐도 비극적인 상황이라는 것을 알 수 있도록 바닥에는 이미 피를 흥건히 흘리는 시체가 있고, 그 뒤로 보이는사람들도 잔뜩 겁에 질린 모습을 하고 있다.그러나 그림 한가운데 흰옷을 입은 남자만이 죽음에 맞서, 영웅처럼 당당한 모습을 하고 있어서 더욱 궁금증을 자아낸다. 금방이라도 불을 뿜을 것 같은 총을 들고 있는 군인들은 누구이고, 용기에 차서 당당히 군인들에게 맞서고 있는 흰옷의 주인공은 또 누구인가. 그리고 저 사람들은 도대체 무슨 큰 죄를 지었기에 총살을 당하는 것인가. 프란시스코 데 고야(1746-1828)는 누구인가?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반, 에스파냐 미술계를 대표했던 고야는 그의 다양한 그림들만큼이나 변화무쌍한 삶을 살았던 화가였다. 에스파냐 남부의 소도시인 사라고사에서 그림공부를 시작한 고야는 이탈리아의 나폴리와 로마에서의 유학을 마친 후, 29세인 1775년부터 에스파냐 궁정에서 화가로 명성을 날린다. 기세를 탄 고야는 40세가 되던 해에 꿈에도 그리던 자리인 국왕 카를로스 3세 전속 화가라는 명예를 얻게 된다. 카를로스 3세의 사망으로 잠시 흔들렸지만, 이어진 카를로스 4세 치하에서도 전속 화가의 자리를 유지하던 고야는 1799년, 드디어 모든 에스파냐 화가들의 로망인 수석 궁정화가의 자리까지 올랐다.<1808년 5월 3일의 학살>은 사건이 발생한 지 6년이 지난 1814년, 고야가 청력을 잃은 지 20여 년이 지난 그의 나이 68세에 그린 그림이다. 왕실전속 화가임에도 불구하고 왕실의 무능과 부패에 진저리치던 고야는 에스파냐를 침공한 프랑스군에 호의적이었다. 이것이 빌미가 되어 훗날 프랑스군이 물러간 후 더 이상 조국에서 살 수 없게 된 고야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프랑스의 서부 도시 보르도로 망명하여 죽을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에스파냐에서 화가로서 모든 영화를 누렸지만, 청력을 상실하고 일종의 우울증을 겪었으며 망명 생활에 지쳐 조국을 그리워했을 만큼 고야의 말년은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1808년 5월 3일의 학살> 당시 무슨 일이 있었는가?그림의 배경은 마드리드지만 총을 든 사람들은 프랑스 군인들이며 총살을 당하는 사람들은 마드리드 민중들이었다. 왜 프랑스 군인들이 남의 나라에 와서 민중들을 총살하는 것일까? 이 그림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에스파냐 왕실과 프랑스 공화정의 관계를 먼저 알아야 한다.당시 국왕 카를로스 4세와 그의 아들 페르난도 왕자 그리고 왕비를 등에 업은 실세 총리였던 마누엘 고도이가 권력다툼을 벌이면서 왕실은 물론 에스파냐 전체가 매우 혼란스러웠다. 이런 권력다툼에 신물이 난 민중들은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 군대가 들어오자 마치 해방군이라도 온것처럼 환영했다. 프랑스 군대가 왕비를 애인으로 두고 국정을 농단하던 총리를 내치고 왕자를 후원하여 에스파냐를 정상화한 뒤 돌아가리라 믿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프랑스의 생각은 애당초 달랐다.나폴레옹은 마드리드를 접수한 후, 자신의 친형 조제프 보나파르트를 새로운 국왕으로 선임한다. 그가 바로 호세 1세였다. 1808년 5월 3일의 학살이 벌어지기 하루 전인 5월 2일, 마드리드 궁 앞에는 수많은 민중들이 몰려들었다. 프랑스에 의해 강제 망명길에 오르는 왕실 가족들을 보기 위해서였다. 그들을 태운 마차가 하나둘 떠나면서 민중들이 동요와 분노로 들끓기 시작했고, 끝내 반프랑스 시위로 번져나갔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민중들의 시위를 용인하지 않았고, 자신의 부대 중 가장 용맹한 기마부대를 투입하여 이를 진압하게 했다. 이들의 출현은 마드리드 민중들을 더욱 자극하고야 말았다. 결국 이날 살해되고 체포된 인원만 약 400여 명이 넘었고, 그중 가장 극렬하게 저항한 주동자들을 체포해서 그다음 날인 5월 3일에 모두 총살했다. 그래서 고야는 이 그림의 제목을 <1808년 5월 3일의 학살>이라 붙이게 되었다. 고종환한국 프랑스문화학회의 재무이사이자, 아주대학교와 경상대학교 외래교수. 프랑스 문화와 예술, 서양연극사, 광고이미지 등을 강의하고 있다. 대표 저서로는 <한권으로 읽는 연극의역사>와 <오페라로 배우는 역사와 문화>, <글로벌 다문화교육>이 있다.]]> Thu, 01 Feb 2018 20:57:03 +0000 14 <![CDATA[떡국에 담긴 그 시절 그 이야기 ]]> 글 윤덕노 음식문화평론가 떡국에 담긴 그 시절 그 이야기  설날 하면 으레 가장 먼저 떠올리는 음식은 바로 떡국이다. 물론 지역에 따라 만두도 함께 먹지만, 만두가 고려 때 전해진 외래 음식이라는 점에서 떡국이야말로 전통적인 설 명절 음식일 것이다. 오랜 옛날부터 설날 대표 음식으로 떡국을 챙겨 먹었을 것 같지만, 그렇게 만만한 음식도 아니었다. 귀해서 아무나 먹지 못했던 시절이 있었고, 어렵사리 마련하고도 마음 놓고 먹지 못했던 때도 있었다. 설날 떡국에 어떤 역사와 사연이 담겼을까? 설날의 유래와 떡국의 역사설날에 떡국을 먹기 시작한 건 언제부터였을까? 그 해답을 찾기 위해 질문을 살짝 바꿔보자. 언제부터 설날을 명절로 쇠었을까? 다소 애매하지만 음력 1월 1일이 설날이라면 2,100년 전부터로 유추해볼 수 있다. 지금 쓰는 음력인 태음태양력의 기초가 되는 태초력이 기원전 104년에 정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새해가 설날이라면 이야기가 또 달라진다.기원전 10세기에는 주력(周歷)에 따라 동짓날이 새해 첫날이었고 기원전 3세기 진시황 때는 전욱력을 썼으니 10월 상달이 새해의 시작이었다. 한편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양력으로 따져보면 우리는 1896년, 일본은 1876년부터 새해가 달라졌다. 이때부터 서양 달력인 그레고리력을 채택했기 때문이다.예로부터 사람들은 해가 바뀐 것을 기념해 음식을 먹었다. 동지팥죽과 상달 고사떡이 모두 옛날 달력으로 새해 음식이다. 그런 면에서 떡국은 음력 설날에 먹어야 맞다. 유래가 이러니 떡국 역시 약 2,000년 전쯤부터 먹었을 것이다. 그러나 시대적인 배경을 유추해보면, 조상이 왕이었다면 모를까 귀족이나 양반 정도로는 어림없었을 만큼 쌀은 그렇게 만만한 곡식이 아니었다. 한반도에 쌀이 전해진 것은 먼 옛날이지만 고려 때만 해도 진짜 부자나 귀족 아니면 쌀밥을 못 먹었다. 평민이 쌀밥을 먹게 된 것은 조선시대 중후반 이후부터다.그럼에도 최대 명절인 설날만큼은 어렵게 떡을 장만했다 해도 모두가 떡국을 먹을 수 있었던 것은 빨라야 조선 초쯤이다. 보통은 쌀이 아닌 다른 곡식으로 떡을 빚었을 것이다. 그 때문에 우리에게 떡국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 명절 아니면 쉽게 먹을 수 없었기에 설날에야 비로소 풍년을 기원하고 일 년 동안의 무사 평안과 건강을 빌며 떡국을 끓였다. 압박과 설움의 설날 떡국쌀이 풍부해진 조선 후기 이후부터 떡국은 이제 백성들 누구나 먹는 명절 음식이 됐다. 그러나 현대로 접어들며 다시 한번 설날 떡국에 시련이 닥친다. 1927년의 신문기사에서는 아이들에게 설날 떡국을 한 그릇이라도 먹이려는 가난한 어머니의 아픔이 보인다. ‘설날은 다가오고 어린것에게 떡국 한 그릇 먹일 수 없는 형편이었다. 아이에게 떡국 한 숟가락이라도 먹이고 싶어 전당포 문이 닫히기 전에 떡 사고 간장 사서 설 아침 준비를 하겠다는 생각으로 빨아 다듬은 옥양목 치마 한 벌을 전당포에 맡겼다. “이십 전이라도 주시오” 이 말을 들은 전당포 주인이 “치마를 얻다 쓰느냐”고 하면서도 놓고 가라며 삼십 전을 내주었다.’ <동아일보> 1927년 2월 3일 자 가난한 사람이야 시대를 막론하고 있게 마련이지만 일제강점기에 설날 떡국조차 먹기 힘들었던 이유는 굳이 가난 때문만은 아니었다. 설날을 구정이라며 일제가 쇠지 못하게 했기 때문이다. 일제의 탄압이 한창 기승을 부리던 1938년, 신문기사를 보면 설날을 명절로 지내지 못하게 하려고 일부러 부역을 동원하고 동네 청소를 시켰다. 1940년 전북 임실에서는 아예 면사무소 직원을 총동원해 설날 떡을 만들지 못하도록 감시하기도 했다.우리의 전통 명절을 없애기 위해 일제는 갖은 짓을 다 했는데, 그렇지 않더라도 강점기 시절의 조선 백성은 설날 떡국 끓여 먹기가 만만치 않았다. 바로 한반도에서 엄청난 양의 쌀을 빼앗아 갔기 때문이다. 경술국치의 해인 1910년의 통계에 따르면, 그해 쌀 총생산량 1,000만 석 중 5%에 해당하는 54만 석을 일본이 가져갔다. 그러다 중일전쟁 이후인 1939년에는 조선미곡 통제령을 발령하여 쌀 공출제도를 실시하였다. 그 결과 1941년에는 쌀 생산량 2,152만 석 중 43%를 빼앗아갔고, 2차 대전 막바지인 1944년은 1,891만 석 중 63.8%를 수탈했다. 한반도에서 수확한 쌀 3분의 2를 가져간 것이다. 부족한 식량은 만주에서 조를 비롯한 잡곡을 들여와 채웠으니 감자, 고구마, 옥수수 등으로 끼니를 해결해야 했다. 설날 떡국은 우리의 역사에 있어 많은 사연을 담고 있는 명절 음식이다. 한 살을 더 먹는다는 핑계로 기피해왔던 떡국. 새해 설날부터는 온 가족 모두 둘러앉아 떡국을 먹으며 그 이면에 숨겨져 있던 이야기들을 음미해보는 것은 어떨까. 윤덕노 음식문화평론가1984년 매일경제신문사에 입사해 20여 년간 기자 생활을 하면서 특파원 활동, 출장, 연수 등으로 미국과 중국을 비롯한 다양한 나라에 머물렀다. 음식에 관심이 많아 관련 자료를 수집해온 결과, 음식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주요 저서로는 <음식잡학사전>, <신의 선물 밥>, <붕어빵에도 족보가 있다> 등이 있다. ]]> Thu, 01 Feb 2018 21:12:01 +0000 14 <![CDATA[물이 시작되는 고장 -전라북도 장수- ]]> 글·사진 김초록 여행칼럼니스트  물이 시작되는 고장 -전라북도 장수- 산이 높고 골이 깊어 전라북도의 지붕이자 남쪽의 개마고원이라 불리는 장수는 천 리에 이르는 금강이 시작되는 곳이다. 그래서인지 어딜 가나 수려한 경관을 자랑하는 명소가 기다리고 있다. 여정의 시작은 이 고장 끝머리에 있는 토옥동 계곡에서 시작한다. 남덕유산 한 자락인 삿갓봉을 옆에 끼고 깊숙이 들어간 토옥동은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장수의 보물 같은 곳이다. 우리말 연구에 평생을 바친 애국자토옥동 계곡에 위치한 들머리마을 한복판에는 우리말과 글을 지키는데 평생을 바친 건재 정인승의 기념관이 있다. 이곳에서는 유품을 비롯해 그와 관련된 다양한자 료들을 자세하게 살펴볼 수 있으며, 그 옆으로는 영정을 모신 사당과 동상이 서 있다.정인승은 1935년 조선어연구회를 창립하고 한글 큰사전 편찬과 학회 기관지인 <한글> 편집에 관여하는 등 우리말 연구를 통해 항일애국운동을 펼쳐나갔다. 이후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체포돼 3년 동안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일제강점기 “한글을 비롯한 국학의 연구는 단순히 학문적 차원의 문제만이 아니라 민족적 차원의 문제다.”라고 설파했던 선생의 뿌리깊은 나라사랑은 오늘날까지도 귀감이 되고 있다.계북면 소재지에서 나와 천천면 구신마을에 잠시 들러본다. ‘섶밭들산촌생태마을’로도 불리는 이 마을은 소박하면서도 따뜻한 자연경관을 자랑한다. 수분령의 뜬봉샘에서 발원한 깨끗한 물줄기가 마을길을 따라 내려오니 천연기념물인 수달을 비롯해 보호 수종인 쏘가리·꺾지·버들치·쉬리·돌고기들이 지천이다. 또한 봄철 고사리·취나물·더덕·도라지·잔대 등 산나물들이 풍성하게 자라 봄기운을 만끽하려는 관광객들이 몰려드는 생태관광지로 인기를 끌고 있다.  alt정인승 기념관alt정인승 기념관 내부 모습alt섶밭들산촌생태마을의 황토집  논개가 태어난 주촌마을장수를 빛낸 여러 인물이 있겠지만 그중에서도 논개는 단연 돋보인다. 천천면에서 육십령 쪽으로 가다 대곡호를 지나 4㎞쯤 거슬러 올라가면 논개가 태어난 장계면 대곡리 주촌마을에 이른다. 임진왜란 때 왜장을 끌어안고 진주의 남강으로 몸을 던진 논개를 기리기 위해 마을 한쪽에는 생가와 논개동상·사적불망비각·유허비 등이 설치되어 있다. 특히 ‘一’자형 초가로 복원된 논개 생가에는 그녀의 초상과 침구·책들이 놓여 있고 마당과 마루는 옛 모습을 그대로 살려놓았다. 마을 입구에는 논개를 낳기 위해 공을 들였다는 서낭당이 남아 있는데, 그 앞에서는 정초마다 제수를 차려놓고 마을의 안녕을 비는 산신제를 지낸다고 한다.한편 주촌마을은 농촌진흥청에서 지정한 농촌전통테마마을이기도 하다. 논개 생가지 투어 이외에도 김장체험·이엉 얹기·고구마 캐기 등 연중 다양한 체험행사가 열리며, 굴피와 죽데기로 만든 전통가옥의 숙박시설은 도시에선 느끼지 못했던 색다른 경험을 제공한다. 또한 마을 주민들이 직접 가꾸고 만든 콩·청국장·오미자·도토리묵 등 농특산물을 싼값에 구입할 수 있다.  alt논개의 생가alt유허비   장안산이 숨겨놓은 영험한 계곡주촌마을에서 바라보는 장안산의 풍채는 우람하고 훤칠하다. 일반인들에게는 생소한 이곳은 산 좀 탄다는 사람들에겐 백두대간과 호남정맥을 연결하는 줄기라 하여 100대 명산으로 꼽힐 만큼 남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산정상에 서면 남쪽으로 중봉·하봉이 솟아 있고 북으로는 덕유산 줄기가 아득한데 눈을 멀리 주면 백두대간의 큰 산줄기와 지리산의 웅장한 모습도 시야에 들어온다. 장안산은 그 깊은 줄기에 아름다운 계곡도 만들어 놓았다. 그 첫 번째는 바로 지지계곡이다.동화호가 있는 번암면 죽림리에서 지지리를 지나 장계면 대곡리까지 이어지는 지지계곡은 길이가 무려 10㎞ 달한다. 천혜의 자연이 내어놓은 맑은 물은 거친 물소리를 내며 바위를 타고 넘는데, 계곡과 나란히 이어지는 찻길을 따라가다 마음 끌리는 곳에 차를 세우고 자리를 잡으면 거기가 바로 천국이다.장안산에는 지지계곡 이외에도 또 하나의 걸출한 자연미를 뽐내는 곳이 있으니 바로 덕산계곡이다. 용림댐 건설로 예전에 비해 멋은 많이 줄어들었지만, 장안산 상류에서 내려온 물줄기가 죽산리 쪽으로 내달리다 중간쯤 골짜기에서 S자를 그리며 흐르는 모습은 여전히 웅장하고 아름답다. 이곳이 바로 덕산계곡 최고의 비경으로 손꼽히는 용소로, 암반을 타고 내려온 폭포수가 거대한 절구통처럼 움푹 들어간 바위 홈에 시퍼런 계곡물을 가득 담으니 천하절경이다. 장수 출신 황희정승이 이곳 용소에서 목욕재계하고 천지신명께 간절한 기도를 드린 끝에 재상에 올랐다는 전설도 이어져 오고 있다.지지계곡과 이어진 동화호 아래에는 민족대표 33인으로 3·1운동을 주도했던 백용성의 생가지가 마련되어 있다. 호국불교·전통불교 실천에 앞장섰던 백용성은 일제의 친일 불교정책에 저항하는 등 근대불교가 자리를 잡는데 큰 공을 세웠다. 이곳에서는 목조로 지은 생가를 비롯해 백용성의 유품을 소장한 용성기념관·여래탱화와 조사탱화를 봉안한 용성교육관·대웅보전·요사채·누각 등을 만나볼 수 있다.  alt백용성 생가alt백용성 기념관alt덕산계곡 아랫용소alt장안산 계곡물이 모여 만든 동화호  금강과 섬진강의 시작 뜬봉샘장수읍내에서 남원 방향 19번 국도를 따라가다 수분령휴게소 조금 못미처 우측 원수분마을로 접어들면 뜬봉샘으로 가는 산길이 나온다. 뜬봉샘은 금강의 발원지로 이곳에서 솟아오른 물줄기는 실개천인 강태등골을 타고 1.5km를 흘러 수분천으로 이어진다. 이후 장수읍 용머리마을에서 섬진강의 물줄기인 팔공산 북쪽 계곡물과 만나게 된다. 산을 사이에 두고 서쪽은 섬진강 동쪽은 금강 수계로 나뉘는 데, 이곳이 바로 수분령이다.해발 539m의 수분령은 예부터 한양으로 가려면 반드시 넘어야 하는 고갯길이었다. 마을에서 뜬봉샘까지는 2㎞ 거리로, 태조 이성계가 백일기도 끝에 조선의 건국을 계시 받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한편 최근 뜬봉샘을 찾는 발길이 이어지자 장수군에서는 생태공원을 조성하여 다양한 시설을 들여놓았다. 그중에서도 금강사랑 물체험관은 관내에서 부상을 입고 구조됐거나 주민들로부터 위탁받은 다양한 멸종위기 야생동식물을 보호하는 치료소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alt뜬봉샘 들머리의 원수분마을alt금강과 섬진강의 발원지인 뜬봉샘  다양한 볼거리가 있는 장수읍내뜬봉샘에서 차로 15분을 달려 도착한 장수 읍내에서는 1407년 창건되어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향교로 유명한 장수향교를 만나볼 수 있다. 경내에 들어서자마자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들머리에 서 있는 하마비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이곳을 지나는 사람은 누구든지 말에서 내려야 한다는 글이 적혀 있다. 보물로 지정된 대성전은 앞면 3칸과 옆면 3칸에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 볼만한데 큰 사찰의 대웅전을 연상케 한다. 앞면 가운데에 단 여닫이문이며 우물 정(井)자 모양의 창·지붕 처마를 받친 공포 등 겉모양이 무척이나 화려하게 꾸며져 있다.이외에도 장수군청 앞에 있는 의암송도 볼만하다. 천연기념물 제397호로 지정된 이 소나무는 16세기 후반 당시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최경회가 의암 논개와 함께 심은 것이라 한다. 400년 이상의 수령을 자랑하는 의암송은 원줄기가 왼쪽으로 꼬여 수평을 이룬 모양새가 특징이다.  alt보물로 지정된 장수향교의 대성전alt장수향교 들머리에 서 있는 하마비 ]]> Wed, 28 Feb 2018 11:24:11 +0000 15 <![CDATA[3·1운동 ]]> alt]]> Wed, 28 Feb 2018 11:05:38 +0000 15 <![CDATA[3·1운동을 성공적으로 이끈 학생지도자 ]]> 글 학예실  3·1운동을 성공적으로 이끈학생지도자 독립기념관은 국가보훈처·광복회와 공동으로 김원벽을 2018년 3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김원벽은 두 차례의 학생 만세운동을 주도하여 3·1운동을 성공적으로 이끈 학생지도자였다. alt 연희전문학교 학생으로 3·1운동 참여를 권유받다김원벽은 황해도 은율에서 태어났다. 1914년 서울로 올라와 경신학교에서 수학하였고, 숭실전문학교를 거쳐 연희전문학교로 진학하였다. 1919년 2월에는 박희도(朴熙道)·이갑성(李甲成)·강기덕(康基德)·김형기(金炯璣) 등과 만나 전문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만세운동을 계획하였다.그러던 와중에 김원벽은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이었던 박희도로부터 독립선언서 발표 계획을 전해 듣고 동참하기로 결정하였다. 2월 25일 정동교회 이필주(李弼柱) 목사의 사무실에 모여, 3월 1일은 중등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진행하고 전문학교 학생 대표들은 제2차 만세운동을 주도하기로 결의하였다.2월 28일 승동교회에 다시 모인 학생대표들은 이갑성으로부터 전달받은 독립선언서를 나누어 가졌다. 이 자리에서 전문학교 학생들은 3월 5일 남대문역(현 서울역)에서 제2차 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결정했다. 학생대표로 3·1운동을 이끌다1919년 3월 1일, 김원벽과 학생대표들은 오후 2시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 낭독이 있을 것이라는 소식을 전하였다. 동시에 제2차 만세운동의 계획을 말하고, 전문학교 학생들은 3월 1일 시위에 가급적 참여를 자제해달라고 요청했다.3월 4일 김원벽은 학생대표들과 배재고등보통학교 기숙사에 모여, 3월 5일 오전 9시 남대문역 앞에서 집결하기로 결정하였다. 이튿날 김원벽은 인력거를 타고 ‘조선독립’이라 쓴 깃발을 흔들며 집결지로 나아갔다. 학생들의 만세소리를 듣고 모여든 군중들은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숭례문을 거쳐 대한문·종로 보신각으로 나아갔다. 하지만 김원벽은 일본 경찰들에게 붙잡혀 2년간 옥고를 치렀다.이후 모교인 연희전문학교와 <신생활사>·<시대일보사> 등에서 재직하던 김원벽은 독립을 보지 못한 채, 1928년 향년 35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하였다. 정부는 1962년 김원벽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alt김원벽alt연희전문학교 전경(1918년)alt김원벽에게 3·1운동 참여를 권유한 박희도(좌)와 이갑성(우, 1920년)    alt제2차 만세운동 계획을 상의한 정동교회alt김원벽이 학생대표들과 모여 자주 모임을 가졌던 승동교회  alt김원벽이 제2차 만세운동을 주도했던 남대문역 광장     alt덕수궁 앞 만세운동 장면 alt김원벽 재판 기록alt김원벽 출옥 보도기사 ]]> Wed, 28 Feb 2018 11:39:38 +0000 15 <![CDATA[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경주 최부자 ]]> 글 신현배 역사칼럼니스트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경주 최부자 조선시대에 가장 널리 알려진 부자는 경주 최씨 집안이다. 신라 말의 이름난 문장가인 최치원의 후손으로, 17대손인 최진립과 그의 아들 최동량 때부터 큰 재산을 모아 28대손인 최준에 이르기까지 12대에 걸쳐 무려 300여 년 동안 조선 최고의 부자로 명성을 누렸다. ‘부자는 3대를 넘기기 힘들다’는 말도 있지만 이처럼 오랜 세월 동안 재산과 명성을 지켜낼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그것은 최부잣집 대대로 내려오는 6가지 가훈이 있었기 때문이다. 부와 명성을 지켜낸 6가지 가훈경주 최부잣집의 가훈 6가지 중 첫 번째는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의 벼슬은 하지 말라’로 이 안에는 큰 뜻이 숨겨져 있다. 조선시대는 양반사회로 신분을 유지해야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따라서 최소 소과인 사마시 즉 생원과나 진사과에 급제해야 했다. 반대로 벼슬이 높아지면 권력을 탐하게 되는데, 이때 투쟁에 휘말리면 보복을 당해 가문이 몰락하기 마련이다. 이런 점을 경계하여 부와 권력을 함께 가질 수 없음을 가르쳤다.두 번째 가훈은 ‘재물을 모으되 만 석 이상을 모으지 말라’이다. ‘돈이 돈을 번다’는 말도 있듯이 욕심을 부렸다면 최씨 집안은 더 많은 재물을 모았을 것이다. 그런데 만 석 이상을 모으지 말라고 한 것은 그 이상의 재물을 소작인들에게 돌려주기 위해서였다. 다른 땅주인들은 수확물의 70-80퍼센트를 소작료로 받는 반면, 최부잣집에서는 50퍼센트나 그 이하로 받았다. 그래서 누가 토지를 내놓는다고 하면 앞 다투어 최부잣집에 소개해 매입을 권유했다고 한다.세 번째 가훈은 ‘손님이 찾아오면 후하게 대접하라’이다. 조선시대에도 주막이나 객사 등의 숙박시설이 마련되어 있었지만 부잣집에 들러 하룻밤 신세를 지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최부잣집은 조선 팔도에 소문이 자자하여 경상도 지방을 여행하는 사람들이 꼭 한 번씩 들러 무료로 숙식을 제공받았다. 최부잣집은 일 년에 소작료를 쌀 3천 석쯤을 거두어들였는데, 그 중에서 1천 석은 집안 식구들의 양식으로 썼고 나머지 2천 석은 손님 접대와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데 사용했다고 한다.네 번째 가훈은 ‘흉년에는 땅을 사지 말라’이다. 흉년이 들면 사람들은 굶주림을 면하려고 싼 값에 땅을 내놓았다. 심지어 쌀 한 말에 논 한 마지기를 넘기는 경우도 있었는데, 부자들은 이때가 재산을 늘리기 좋은 기회라며 헐값에 땅을 사들였다. 그러나 최부잣집에서는 이를 사람의 도리가 아니라며 철저히 금했다. 남의 약점을 이용해 재산을 늘리면 원한을 사게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다섯 번째 가훈은 ‘며느리들은 시집온 뒤 3년 동안 무명옷을 입어라’이다. 최부잣집 사람들은 근검절약 정신이 투철했다. 그래서 보릿고개 때에는 쌀밥을 지어 먹지 않았고 은수저도 사용하지 않았다. 또한 집안 살림을 맡은 여자들에겐 근검절약 정신이 몸에 배도록 철저히 교육 하였고 시집온 며느리에게는 3년 동안 무명옷을 입혔다.마지막 여섯 번째 가훈은 ‘사방 백 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이다. 최부잣집에서는 손님을 대접하는 것 이외에도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일에 앞장섰는데 사방 백 리 안의 사람들을 고향 사람으로 보아 거두어 보살폈다. 경주를 중심으로 사방 백 리라고 하면 동쪽으로 감포·서쪽으로 영천·남쪽으로 울산·북쪽으로 포항에 이르는 지역이다.이렇게 이웃들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덕을 베풀었기에 경주 최부잣집만은 활빈당의 습격으로부터 피해 갈 수 있었다.  alt 최준  독립을 위해 가산을 헌납하다‘마지막 최부자’로 알려진 최준은 경주 최부잣집 28대손이다. 1914년 어느 날, 그의 집에 안희제가 찾아왔다. 안희제는 만주에서 3년 동안 항일투쟁을 한 독립운동가로 자신의 호를 따서 이름붙인 ‘백산상회’를 부산에 세웠다. 이 회사를 통해 독립자금을 마련하여 해외에 있는 독립운동가들에게 자금을 조달할 계획이었다. 일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많은 자본이 필요했기에 안희제는 최준을 찾아가 도움을 청하였고 수락을 받아낼 수 있었다.백산상회는 1919년 ‘백산무역주식회사’로 이름을 바꾸었는데, 1927년 해산 때까지 이익금의 대부분이 상하이와 만주 등지로 보내졌다. 이 일은 전적으로 안희제가 맡았다. 그 뒤 안희제는 1942년 일제에 붙잡혀 모진 고문을 받다가 이듬해 8월에 순국하였다.광복 뒤 최준은 백범 김구의 요청으로 서울 경교장에서 그를 만나게 되었다. 김구는 최준에게 낡은 장부를 꺼내 보여주며 이렇게 말했다. “최 선생, 그 동안 수고가 많으셨어요. 가산을 탕진하면서까지 저희 임시정부에 독립운동 자금을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3천만 동포가 최 선생의 공로를 치하하여 우러러볼 거예요. 이 장부는 상하이임시정부에 자금을 보내 준 사람들과 그 자금 내역을 기록한 명세서예요.” 최준은 장부를 들여다보았다. 자신이 안희제에게 건넨 돈과 장부의 기록은 한 푼의 오차도 없이 일치했다. 최준은 이런 사실을 확인하고 경교장 2층 마루로 나가 안희제의 무덤이 있는 남쪽을 향해 절을 하며 목 놓아 울었다. “백산, 나를 용서해 주게. 내가 자네에게 건네준 돈의 절반이라도 상하이임시정부에 전해지면 다행이라 여겼는데……. 미안하네 그려.” 최준은 눈물을 펑펑 흘리며 안희제에게 용서를 빌었다고 한다. 그 뒤 그는 가산을 정리하여 대구지역에 대학교를 설립할 때 모두 기부했다. 이 대학교가 지금의 영남대학교이다. 경주 최부잣집의 모든 재산은 이렇게 사회에 환원되었다. alt안희제alt백산무역회사에서 최준에게 보낸 대차대조표(1919)  신현배역사와 전통문화에 대해 관심이 많은 역사칼럼리스트. 저서로는 역사 이야기 『엉뚱 별난 한국사』, 『엉뚱 별난 세계사』, 『2000년 서울 이야기』, 『세계사로 배우는 법 이야기』, 전통문화 이야기 『소중한 우리 문화 지식 여행』 시리즈 등이 있다. ]]> Wed, 28 Feb 2018 11:31:57 +0000 15 <![CDATA[우리는 우리다운 자긍심을 가져야 한다 ]]> 글 이성주 역사칼럼니스트  우리는 우리다운자긍심을 가져야 한다  위당(爲堂) 정인보는 독립운동가로서도 유명하지만, 역사학자로서 남긴 발자취가 더 크다. 그는 나라를 빼앗긴 상태에서 그 ‘정신’까지도 일본에 빼앗겨 흐릿해져만 가는 민족 정체성을 보며 이를 확립해야지만 독립을 이루어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에 일제강점기 역사연구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어 조선인들의 마음에 민족적 자긍심을 심어주고자 한평생을 다 바친 겨레의 스승이었다. 조선인의 ‘얼’을 찾아서▲독립운동가 정인보  ▲1893년 5월 6일 출생  ▲1912년 상하이로 건너가 독립운동단체이자 무역회사 ‘동제사’ 설립  ▲귀국 후 연희전문학교에서 강의  ▲<동아일보>에 ‘5천 년간 조선의 얼’이라는 역사연구 연재  ▲1948년 대한민국 초대 감찰위원장 취임  ▲1950년 6·25전쟁 발발 직후 납북  ▲이후 생사 미확인 명문가로 꼽히는 동래 정씨 집안에서 태어난 정인보는 어려서부터 한학을 배웠고, 이후 양명학자인 이건방의 문하에서 실학을 공부했다. 그러나 국권을 빼앗긴 상황에서 계속 학문에 정진한다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판단한 그는 18살이 되던 해 상하이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투신한다. 전 재산을 털어 독립운동에 뛰어들었으나, 갑작스러운 부인의 사망 소식에 귀국하여 비밀리에 활동하다 여러 차례 옥고를 치렀다.이후 정인보는 연희전문학교·협성학교·불교중앙학림 등에서 후배 양성을 통해 민족의 역량 강화에 힘쓰는 한편 <동아일보>·<시대일보>의 논설위원으로 민족의 정기를 고무하는 논설을 펴 민족계몽운동을 주도하였다.한편 정인보를 이야기 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게 바로 정약용과의 관계다. 학문의 실용성과 민족의식 고취를 위해 노력했던 그에게 실학과 실학의 대표 주자였던 정약용은 일생의 연구과제였다. 그 결과가 바로 『여유당 전서』 간행이었다. “역사의 줄기를 찾는 것은 역사의 밑바닥에서 천추만대를 일관하는 ‘얼’을 찾는 작업이며, 역사가는 낱낱이 역사적 사실을 탐구하여 궁극적으로는 역사의 뼈대인 ‘얼’의 큰 줄기를 찾아야 한다.” 정인보는 국권을 빼앗긴 상황에서 민족의 ‘얼’까지 빼앗긴다면 독립은 요원하다고 믿었다. 그러나 민족의 얼을 되찾는다면 독립을 또한 쟁취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에 역사연구를 통해 일제에 의해 빼앗긴 민족의 얼을 되찾고자 하였다. 이후 삼국과 왜의 역학관계를 중심으로 광개토왕릉비문을 독자적으로 해석해 낸 그는 지속적인 역사연구를 통해 국권을 빼앗긴 한국인들의 민족적 자긍심을 고취해 나갔다.  자긍심은 우리에게서 온다국제 경기가 열릴 때마다 인터넷상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가 바로 ‘국뽕’이다. 국가와 히로뽕의 합성어인 이 단어는 지나친 애국심 조장에 대한 반발적 표현이다. 이 국뽕이 나오게 된 근원을 따져보면 그 안에는 근대 동양 문화권의 자존심이 숨겨져 있다.19세기 말 한·중·일 삼국은 탈아입구에 매진했다. 각 나라의 실정과는 무관하게 앞 다투어 서양 문명을 받아들였고, 지금까지와는 다른 기준으로 세상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동양 문화권은 자연스럽게 서양 문명에 대한 근원적인 열패감을 가지게 되었다. 이후 민족·문화·인종·음식·언어 등 국가와 관련 있는 모든 것들을 타국과 비교하여 우월하다는 걸 끊임없이 확인받으려는 습성이 생겨났고, 이는 현재의 ‘국뽕’으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즉 국뽕의 핵심은 ‘타인으로부터의 확인’이다. 그러나 스스로 우월하다고 믿는다면, 이걸 확인받을 이유가 있을까?자긍심이란 말을 풀어보면, 스스로 자신의 가치나 능력을 믿는 당당한 마음이라고 할 수 있다. 자긍심의 어디에도 ‘타인으로부터의 확인’은 없다. 정인보가 말한, 독립을 위한 자긍심은 바로 스스로 우리 민족의 가치와 능력을 믿고 당당히 가슴을 내미는 자세였을 것이다.1945년 광복 이후 70년 이상의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우리 민족이 내놓은 성과는 전 세계가 주목할 만한 수준이다. 독립 이후 전 세계 최빈국이었던 나라가 이제 거래 규모로만 보면, 전 세계 7위권의 경제대국이 됐다. 우리의 성장을 확인하고픈 마음 혹은 타인에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은 잘 안다. 그러나 진정한 성공은 타인의 인정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스스로 우리의 성과와 가치를 믿는 것이 진짜 성공이고 또 진정한 실력일 것이다.  이성주시나리오 작가 겸 역사칼럼니스트. 대중과 함께 호흡하는 글쓰기를 목표로 『조선의 민낯』, 『왕들의 부부싸움』과 같은 역사서를 출간한 바 있다. 최근에는 국제정치와 관련된 연구 및 집필에 열중하고 있다. 『전쟁으로 보는 국제정치』 시리즈 1, 2, 3권을 출간 중이다. ]]> Wed, 28 Feb 2018 10:15:11 +0000 15 <![CDATA[그날의 함성 ]]> 그날의 함성 힘차게 구르는 발사납게 나부끼는 태극기그리고 대지를 울리는 함성“대한독립만세!” 눈앞에 펼쳐지는 3·1운동 열기로가슴은 다시 벅차오릅니다. 독립을 염원하던 그날의 함성은100년이 다가오는 오늘날까지도잊혀지지 않을 기억으로 남아후대까지 영원히 이어져 갈 것입니다. “대한독립만세!”]]> Wed, 28 Feb 2018 10:04:09 +0000 15 <![CDATA[한국인의 피 속에 흐르는 뜨거운 함성 ]]> 글 권경률 역사칼럼니스트  한국인의 피 속에 흐르는뜨거운 함성  매월 독립운동과 관련된 핵심사건을 선정하여 그 치열했던 역사의 순간을 재구성하고자 한다. 다시 만난 그날, 세 번째 이야기는 대한민국 독립의 기초가 된 위대한 독립선언, 3·1운동이다. 지금부터 그 쩌렁쩌렁한 만세 소리에 귀 기울여 보자. 세계만방에 울려 퍼진 독립선언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종로 탑골공원에 청년학생들이 모여들었다. 경신학교 졸업생 정재용이 팔각정에 올라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최남선이 기초하고 보성사에서 인쇄하여 전날 배포한 3·1독립선언서였다. 청중들은 약속한 대로 갖고 나온 태극기를 높이 들고 합창했다. “오등은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 이로써 세계만방에 고하야 인류평등의 대의를 극명하며, 자손만대에 고하야 민족자존의 정당한 권리를 영유케 하노라.”“대한독립만세! 조선독립만세!” 같은 시간, 함께 거사를 준비해온 민족대표들도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을 외친 후 경찰에 체포되었다. 그러나 봇물 터진 함성은 그칠 줄을 몰랐다. 탑골공원의 청년학생들이 시가행진을 시작하자 인파는 순식간에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고종황제의 장례에 참석하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이들이 합류한 것이다.이날 오전에는 고종황제가 일제의 사주로 살해당했다는 전단이 뿌려졌다. 파리강화회의에 일제의 식민지배를 거부한다는 메시지를 전하려다 독살됐다는 내용이었다. 그 전단이 오후에는 3·1독립선언서로 바뀌었다. 일제의 만행에 분개한 사람들은 우리의 독립의지를 세계만방에 떨치겠다는 듯 목 놓아 만세를 부르짖었다. “오늘은 조선에서 위대한 날이었다. 오후 2시를 기해 중학교 이상의 모든 학교가 일제에 항거해 수업을 거부했다. 나는 창문으로 긴 행렬이 궁궐 모퉁이를 돌아 행진하는 것을 직접 볼 수 있었다. 학생들은 손을 높이 들고 모자를 흔들며 만세를 외쳤다. 거리의 사람들이 동참하면서 그 기운찬 외침은 도시 전체에 울려 퍼졌다.” 이는 미국 선교사 마티 윌콕스 노블이 목격한 3·1운동에 대한 기록이다. 그는 3·1운동이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하는 각국 대표들에게 한국인의 독립의지를 오롯이 전달할 것이라고 보았다. 국내외 각지에서 독립선언을 준비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한편 3·1운동은 고종황제의 죽음에 대한 백성들의 슬픔과 분노가 굽이치며 터져 나오는 분출구이기도 했다.  alt3·1독립선언서alt3·1독립선언서 낭독 순간을 재현한 탑골공원 부조  alt태화관에 모인 민족대표들alt여학생들의 만세시위(1919) 민족자결주의와 고종독살설1910년 대한제국을 삼킨 일제는 폭압적인 통치에 나섰다. 토지조사사업을 빙자해 경제의 생명인 경작지와 산림·철도·광산·어장을 강탈하는가 하면 각종 세금을 늘려 한국인의 피를 빨아먹었다. 또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를 억압했으며 말을 듣지 않으면 멋대로 구속·고문하여 목숨을 빼앗았다. 일제의 등쌀에 한국인은 발 디딜 곳을 잃고 간도와 시베리아·중국 등지로 내몰려 떠돌아야 했다.숨 막히는 현실 속에서도 독립운동가들은 절망하지 않았다. 의병활동과 애국계몽운동을 이어가며 분주히 움직였다. 희망의 단서는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함께 나타났다. 윌슨 대통령은 종전에 즈음하여 ‘평화원칙 14개조’를 발표했다. 국제 평화체제를 구축하려는 목적이었는데, 그중 하나가 민족자결주의였다. 이는 식민지 문제에 있어서 통치하는 정부의 주장과 통치받는 국민의 뜻을 동등하게 취급한다는 원칙으로, 식민지 국민이 독립의지를 천명하면 국제사회가 도와준다는 내용이었다.이에 따라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단을 파견하는 문제가 현안으로 떠올랐다. 여운형을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은 신한청년당을 조직하여 영어가 유창한 김규식을 대표로 뽑아 파리로 급파했다. 한편으론 김철·장덕수 등을 각각 서울과 도쿄로 잠입시켜 국내외에서 독립선언을 모색했다. 파리강화회의에서 목소리를 높이려면 국제사회에 이목을 끌어야 했기 때문이다.국내에서의 움직임을 본격화한 것은 1919년 1월 하순부터였다. 천도교 간부인 최린·오세창·권동진이 교령 손병희를 만나 승낙을 받아냈고 기독교·불교 등 종교계를 상대로도 교섭을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천도교 15인·기독교 16인·불교 2인이 참여하는 민족대표 33인이 확정되었다. 한편 일본에서는 한국인 유학생들이 2월 8일 도쿄 YMCA 강당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며 3·1운동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3·1운동 준비가 일사천리로 진행된 데는 고종황제의 죽음도 큰 영향을 끼쳤다. 1919년 1월 21일 새벽 고종이 뇌출혈로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일제는 그의 사망 사실을 감췄다가 23일에야 발표하였고, 사망시각도 조작했음이 세간에 드러났다. 이와 같은 일제의 의심스러운 태도는 고종독살설로 이어졌다.고종황제의 죽음은 일제 치하 한국인들을 격앙시키며 3·1운동의 길로 이끌어 갔다. 일제에 대한 분노가 뭉게뭉게 피어오르며 두려움도 잊게 만들었다. 이는 서울 한복판에서 독립선언이라는 거사를 굴러가게 한 원동력이었다.  alt윌슨 미국 대통령alt2·8 독립운동의 주역들alt고종황제와 원로들alt고종황제의 장례 행렬  대한민국 건국의 기초가 된 핏빛 역사3월 1일, 서울에서 타오른 독립선언의 불길은 전국 방방곡곡 번져갔다. 지방의 만세운동은 몇 가지 특색이 있었다. 규모가 큰 시위 날짜는 대부분 지역 장날과 일치했다. 또 같은 장소에서 5일 혹은 10일 간격으로 되풀이해 일어났다. 만세운동은 어디서나 폭력을 쓰지 않고 평화롭게 펼쳐졌다. 하지만 3월 중순 이후로는 비극적인 양상이 나타났다.만세운동 초반 일제는 주먹과 몽둥이를 써서 시위대를 진압하는 정도에 머물렀다. 이후 시위세력이 확산되자 잔혹한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아무런 무장도 하지 않은 민간인들에게 총칼을 겨눈 것이다. 일본 경찰과 헌병대가 칼을 휘두르고 무차별 발포하면서 사상자가 쏟아져 나왔다.4월 1일 천안 아우내장터에서는 이화여고보 2학년 유관순과 각 지역 대표들이 주도하는 만세시위가 있었다. 인근 주민 3천여 명이 참여할 만큼 성황을 이루었다. 그러나 질서 정연하게 이뤄진 비폭력적인 시위는 일본 경찰과 헌병들의 총칼에 아수라장으로 변하고 말았다. 이날 주민 19명이 목숨을 잃었는데 여기에는 유관순의 부모도 포함돼 있었다.현장에서 체포된 유관순은 모진 고문과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저항했다. 1심에서 징역 5년형을 선고받고 악명 높은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됐지만 그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독방에 갇혀서도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싸웠다. 이듬해인 1920년 유관순은 모진 고문 끝에 옥중에서 숨을 거두었다. 당시 유언처럼 남긴 한탄이 짙은 여운을 남긴다. “나라에 바칠 목숨이 하나뿐인 게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 만세운동에 대한 일제의 광분은 급기야 양민들을 학살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4월 15일 수원 교외에 자리한 화성군 제암리에 일본 헌병대가 들이닥쳤다. 그들은 4월 5일 발안장터 시위 과정에서 일어난 살인 진압을 사과하겠다며 주민들을 제암교회에 모이게 했다.발안장터 시위는 제암리 이장 안종후와 교회 청년들이 주도한 거사였다. 만세 소리에 놀란 일본 경찰과 헌병들은 총에 착검을 하고 시위대를 위협했다. 이때 선두에 섰던 교회 청년 김순하가 일본 헌병의 칼을 맞고 쓰러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후 제암리마을 사람들은 매일 밤 뒷산에 봉화를 올려 일제에 대한 항거 의지를 드러내고 있었다.마을 남자들을 솎아낸 일본 헌병대는 사과는 커녕 야만적인 학살작전을 개시했다. 교회당 정문과 창문에 못을 박고 미리 준비해간 석유를 뿌려 불을 질렀다. 교회당 안에 갇혀있던 남자 21명이 불에 타 죽었고, 그들을 찾으러 온 여자 2명은 바깥에서 칼에 맞아 죽었다. 학살 소식을 들은 캐나다 선교사 프랭크 스코필드는 카메라를 매고 현장으로 달려갔다. 예배당 한복판에는 동그랗게 모여 기도를 하다가 함께 불타버린 시신들이 엉켜 있었다. 스코필드는 ‘수원에서의 잔학행위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해 전 세계에 제암리 학살 사건을 알렸다.1919년 전국을 휩쓴 독립선언과 만세시위를 통틀어 오늘날 3·1운동이라고 부른다. 통계를 살펴보면 집회횟수 1,542회·참가인원 202만 3,289명·사망자 7,509명·부상자 1만 5,961명·체포자 4만 6,948명에 이른다. 물론 이 숫자는 통계에 잡힌 것들일 뿐이다. 드러나지 않은 시위까지 합치면 2,000회는 거뜬히 넘지 않았을까.잔혹하고 야만적인 일제의 탄압에도 한국인은 불굴의 독립의지를 떨쳐 보였다. 비록 힘의 논리에 밀려 당시 국제사회에서 인정받진 못했지만 그 정신은 대한민국 독립의 기초가 되었다. 3·1운동의 그 뜨거운 역사는 지금도 한국인의 피 속에 흐르고 있다.  alt일본 헌병대에 의해 불탄 제암리마을alt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된 유관순alt제암리 만행 보도기사 권경률역사칼럼니스트서강대학교에서 역사학을 공부했다. 칼럼 ‘사극 속 역사인물’을 연재하고 팟캐스트 ‘역사채널 권경률’을 진행한다. 저서로는 『조선을 새롭게 하라』, 『조선을 만든 위험한 말들』 등을 출간했으며, 영상물 『시시콜콜 한국사 어워즈』도 선보이고 있다. ]]> Wed, 28 Feb 2018 10:42:44 +0000 15 <![CDATA[대한민국임시정부의 탄생 ]]> 글 박영규 작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탄생 국난에서 벗어나고자 온 국민이 나섰던 감격의 그 날 1919년 3월 1일. 3·1운동이 어언 100주년을 눈앞에 두고 있다. 이를 기념하여 월간 『독립기념관』은 2019년 3월까지 ‘겨레의 함성, 독립의 희망’을 통해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역사를 다루고자 한다. alt 대동단결선언문(1917)   3·1운동 그리고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1910년대 초반 우리나라의 독립운동 세력은 국내외에 걸쳐 독자적으로 활동하였다. 이에 세력들 간의 소통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고 효과적인 연합활동 또한 기대할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여 유기적이고 효율적인 독립운동을 벌이기 위해 1917년 ‘대동단결선언’이 있었다. 발기인은 상하이에서 활동하고 있던 신규식이었고 박은식·신채호·윤세복·조소앙·신석우·한진교·박용만 등이 참가하여 함께 뜻을 모았다.대동단결선언문에서는 순종의 주권 포기 행위를 국민에게 양도하는 것으로 해석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이 타당함을 밝혔다. 또한 일제의 국권 침탈로 인해 해외에서의 주권 행사가 필수불가결한 선택임을 덧붙였다. 대동단결선언문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대한 의지가 반영된 최초 문건이었던 셈이다.이 선언은 해외 동포들에게 널리 알려졌으나 곧바로 대한민국임시정부 구성단계로 이어지지 못했다. 그런 가운데 1919년 국내에서는 3·1운동이 일어났다. 일제는 한국의 평화적인 시위대를 무력으로 진압하는 폭력적인 행위를 자행하였고 이 사건을 두고 세계의 여론은 들끓기 시작했다. 영국이나 프랑스의 언론은 한국의 독립운동을 매우 깊게 다루었고, 미국 의회에서도 이 문제를 제기하였다. 해외에서 활동하던 독립투사들은 이러한 기류에 고무되어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박차를 가했다. 그만큼 3·1운동은 독립에 대한 민족적 열망을 피부로 느끼게 한 커다란 사건이었다.이후 상하이·연해주·미국 등 해외는 물론이고 국내에서도 7개의 임시정부가 만들어졌다. 그 중 조선민국임시정부를 비롯해 고려공화국·간도임시정부·신한민국정부는 전단을 통해 임시정부 수립을 공표하였으나 구체적인 내용은 남아 있지 않다. 이런 이유로 상하이임시정부·한성임시정부·노령(러시아)임시정부 등 3개의 임시정부에 대해서만 그 내막이 알려져 있다.   alt 일제의 만행을 다룬 외국신문 보도기사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통합과정대한민국임시정부 탄생은 한성임시정부·상하이임시정부·노령임시정부의 통합에서 비롯되었다. 3·1운동 이후 여러 개의 임시정부가 동시다발적으로 만들어지자 이를 하나로 결합하려는 노력이 이뤄졌다. 하지만 대한민국임시정부 출범 간에는 다소간의 진통이 있었는데, 3개 임시정부의 구성을 살펴보면 그 원인을 자연스럽게 파악할 수 있다.먼저 노령임시정부란 러시아령에 설치한 정부란 뜻으로 이를 이끌고 있던 인물은 이동휘였다. 노령임시정부의 정식 명칭은 ‘대한국민의회’로 그 뿌리는 1907년 대한제국의 군대해산 직후 연해주에 망명한 의병 조직이었다. 이들은 1910년에 13도 의군을 조직하고 유인석을 도총재로 추대했다. 이후 도총재 명의로 고종에게 연해주로 망명하여 망명정부를 수립할 것을 상소하기도 했다.당시 실질적으로 13도 의군을 이끌고 있던 인물은 이상설과 이동휘였다. 이들은 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해 노력했고 1914년에 이르러 시베리아에서만 2만 명이 넘는 군대를 훈련시킬 능력을 갖추게 되었다. 13도 의군이 바라던 것은 러일전쟁으로, 러시아와 함께 연합군을 형성하여 일제를 공격한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이후 이상설을 정통령으로 삼고 대한광복군정부를 조직하였으나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함께 모든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게 되었다. 러시아와 일본이 연합군에 가담하여 한 배를 타는 바람에 어떠한 군사 활동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 가운데 이상설은 상하이로 떠났고 조직은 이동휘의 지휘 아래 움직이게 되었다.그러나 1차 대전 중 러시아의 상황은 급변했다. 1917년 11월에 볼셰비키혁명이 일어나 소비에트 연방이 구축되면서 급격히 공산화가 진행되었다. 이에 이동휘는 소련의 힘을 이용하기 위해 ‘한인사회당’을 조직했다. 이후 흩어졌던 의병을 결집하여 시베리아에 출동한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기도 했다.1918년에 1차 세계대전이 종결되고, 이듬해 3·1운동이 벌어지자 이동휘는 ‘대한국민의회’를 만들어 임시정부를 자처하고 나섰다. 이때 국민의회에서 발표한 행정부 인사의 면면을 보자면 다음과 같다. 대통령 손병희·부통령 박영효·국민총리 이승만·탁지총장 윤현진·군무총장 이동휘·내무총장 안창호·산업총장 남형우·참모총창 유동열·강화대사 김규식 등이었다.노령임시정부가 이런 내용을 발표한 때가 3월 17일이었다. 3개의 대한민국임시정부 중 가장 발이 빨랐던 셈이다.한편, 대한민국임시정부 설립에 관한 논의는 상하이에서도 이뤄졌다. 상하이임시정부를 주도하고 있던 인물은 이동녕이었다. 그는 상하이 지역의 세력을 규합하여 4월 11일에 임시의정원을 조직하고 이틀 뒤인 4월 13일에 내각을 발표했다. 상하이임시정부의 행정을 맡은 인물을 살펴보면 의정원 의장 이동녕·국무총리 이승만·내무 안창호·외무 김규식·법무 이시영·재무 최재형·군무 이동휘·교통임시총장 문창범이었다.그리고 가장 늦게 발족한 한성임시정부는 3·1운동이 진행 중인 3월 초 이교헌·윤이병 등이 제의하여 수립을 결의하였고 몇 번의 모임을 거친 후인 4월 23일 봉춘관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선포문을 발표하였다. 이때 발표된 내각 인사의 면면을 보면 집정관총재 이승만·국무총리총재 이동휘·외무 박용만·내무 이동녕·군무 노백린·재무 이시영·법무 신규식·학무 김규식·교통 문창범·노동 안창호·참모부총장 유동열 등이었다.3개 임시정부의 내각 인사를 살펴보면 이승만·이동녕·이동휘 이 세 사람이 핵심 인물임을 알 수 있다. 서열을 보면 이승만이 1순위고 다음으로 이동녕과 이동휘 순이었다. 나이로 보자면 이동녕이 가장 많고 다음으로 이동휘·이승만이었다. 하지만 명성이나 영향력 면에선 이승만이 단연 앞섰다.   alt이동녕·이동휘·이승만alt대한국민의회 선언서alt연해주 한국인 분포도(1912)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탄생대한민국임시정부 중에 가장 유연하고 합리적인 쪽은 상하이임시정부였다. 상하이임시정부는 우선 노령임시정부에 결합을 제의했고 전체적인 내각의 구성에 대해서는 한성임시정부의 내용을 존중하겠다는 자세였다. 대신 임시정부를 상하이에 두는 성과를 얻어냈다. 그러나 이에 대해 노령임시정부는 강력하게 반발했다. 유명 인사 중심의 한성임시정부 내각안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동휘를 제외하곤 국내에서 크게 명성을 얻은 인물이 없었지만 무력 항일투쟁을 주도할만한 힘이 노령임시정부에 있었기 때문이다.하지만 노령임시정부의 대표 격인 이동휘는 자신이 한성임시정부의 총리로 내정된 것에 만족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통합에 동참했다. 덕분에 3개의 임시정부는 합의를 통해 통합되는 모양새를 갖추는 데 성공했다. 그럼에도 노령임시정부 쪽 인물들 대부분은 이동휘의 행동에 반발하는 상황이었고 특히 내각 명단에 함께 포함되어 있던 문창범과 최재형조차 참여를 거부했다. 이렇듯 노령임시정부의 불만이 팽배했지만 해외 망명지라는 난관을 가까스로 극복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는 극적으로 탄생할 수 있었다.   alt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   박영규1996년 『한 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을 내면서 저술활동을 시작하여. 1998년 중편소설 『식물도감 만드는 시간』으로 문예중앙신인상을 수상하면서 소설가로 등단했다. 문학, 철학, 역사 분야에 걸쳐 저술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대표적인 역사서로는 『한 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한 권으로 읽는 일제강점실록』 등이 있다. ]]> Wed, 28 Feb 2018 13:13:30 +0000 15 <![CDATA[프랑스 대혁명을 촉발한 테니스 코트의 선서 ]]> 글 고종환 아주대학교 외래교수  프랑스 대혁명을 촉발한테니스 코트의 선서  alt 테니스 코트의 선서 (1791, 자크 루이 다비드(Jacques Louis David), 베르사유궁)  매년 7월 14일은 우리나라의 광복절에 해당하는 ‘프랑스 대혁명’을 기념하는 날로 프랑스 전역에서 불꽃놀이를 비롯한 다양한 행사가 열린다.  무슨 일이 벌어졌었기에 이날을 매년 기념하고 있는 걸까? 1789년 7월 14일, 프랑스 구체제의 상징으로 군림하던 바스티유 감옥이 분노한 프랑스 시민들에게 함락되었고, 이 습격은 프랑스 대혁명으로 이어졌다. 루이 14세 이후 이어져 오던 전제정치는 시민들의 힘에 의해 종말을 맞이하게 되었다.  alt 바스티유 습격(1789, 장피에르 루이 로랑 위엘(Jean-Pierre Houel), 프랑스 국립도서관)   당시 무슨 일이 있었는가?바스티유 감옥은 1370년 백년전쟁 당시 영국으로부터 파리를 방어할 목적으로 샤를 5세가 건립한 요새로, 이후 오랜 세월에 걸쳐 순차적으로 증축하여 완성되었다. 8개의 탑으로 둘러싸인 직사각형 모양의 건축물로 길이 68m·너비 27m·높이 24m의 요새였던 바스티유 감옥은 17세기 루이 13세 시절부터 일반 범죄자를 비롯해 개신교도와 같은 종교인들과 금서를 저술·출판한 이들을 주로 수감했다.사실 분노한 시민들이 바스티유 감옥을 공격했던 것은 이와는 관련이 없는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하나는 바스티유 감옥에 정부의 무기와 탄약이 보관되어 있다는 점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전제정치에 저항하다 붙잡힌 억울한 정치범들이 많다는 것이었다. 이밖에도 루이 16세의 명령으로 근교에 주둔해 있던 무장한 정부군이 시민들을 강제진압하기 위해 파리로 들어온다는 소문이 돌았고, 이것이시발점이 되어 1만여 명의 시민들이 바스티유 감옥으로 향했던 것이다.그러나 기대했던 사실과는 달리 감옥 안에는 보관된 무기가 없었고 정치범도 수용되어 있지 않았다. 하지만 이 사건은 프랑스 대혁명의 기폭제로 작용하여 바스티유 감옥 습격과 파리 시민들의 저항 소식은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전국의 가난한 농민들을 선두로 시민들은 각 지역의 성을 공격·방화해나가기 시작했고, 프랑스 전역은 순식간에 혁명의 도가니로 바뀌었다. 왜 테니스 코트인가?그림은 프랑스 대혁명 직전인 6월 20일을 배경으로, 특권계층에 대한 과세 문제를 둘러싸고 벌어졌던 사건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당시 프랑스는 거듭된 전쟁과 기근으로 경제가 파탄 날 지경에 이르렀다. 이를 보충하기 위해 그동안 면세 대상이었던 제1신분이었던 성직자와 제2신분이었던 귀족에게 과세를 부과할 수밖에 없었다.이를 위해 루이 16세는 1614년 이후 열리지 않았던 ‘삼부회’를 175년 만에 소집하였다.삼부회란 제1~3신분의 대표들이 모여서 국가의 중요한 일을 결정하는 회의를 말한다. 1789년 회의에서는 제3신분이었던 시민 610명이 영국식 의회제도인 1인 1표제를 주장하였으나 성직자인 제1신분 300명과 제2신분 귀족 291명이 이에 반발하면서 신분 간의 대립이 발생하였다.원래 세 신분은 각각 300명 정도였다. 그러나 1년 전 재무부 장관이었던 네케르의 제안에 따라 제3신분이 두 배로 늘어나게 되면서 이러한 양상이 펼쳐지게 된 것이다.신분 간 갈등이 지속되자 6월 17일, 미라보가 이끄는 제3신분은 집회를 열고 스스로를 국민을 대표하는 ‘국민의회’라고 칭하였다. 이와 같은 행보에 제1신분과 제2신분의 일부 귀족들도 국민의회에 점차 합류하기 시작했다. 위협을 느낀 국왕의 동생 아르투아 백작 등 강경파는 국왕을 재촉하여 제3신분들이 모여 있던 회의장을 전격 폐쇄하기에 이른다. 이에 6월 20일, 국민의회는 회의장을 베르사유 궁전의 테니스코트 건물로 옮겨 자신들의 요구가 승인되어 헌법으로 제정될 때까지는 의회를 해산하지 않겠다고 선서한다. 그 장면이 바로 이 그림이다. 테니스 코트의 선서는 절대왕권의 종말과 주권재민의 출발을 선언한 위대한 사건이었다.  고종환한국 프랑스문화학회의 재무이사이자, 아주대학교와 경상대학교 외래교수. 프랑스 문화와예술, 서양연극사, 광고이미지 등을 강의하고 있다. 대표 저서로는 <한권으로 읽는 연극의역사>와 <오페라로 배우는 역사와 문화>, <글로벌 다문화교육>이 있다. ]]> Wed, 28 Feb 2018 19:25:39 +0000 15 <![CDATA[봄나물은 삶과 마음을 달래주는 호생초(護生草) ]]> 글 윤덕노 음식문화평론가  봄나물은 삶과 마음을 달래주는 호생초(護生草)  사람 팔자처럼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것 중에는 음식 팔자도 있다. 우리가 즐겨 먹는 대부분의 길거리 음식은 과거에 부자들만 즐겨 먹던 고급 음식이었다. 예컨대 떡볶이도 조선 말기의 조리서 『시의전서』에서 소개하고 있는 ‘떡찜’이라는 궁중 음식에서 비롯됐고 순대와 곱창도 고대에는 상류층에서만 먹을 수 있었던 특식이었다. 반면 예전 같으면 보릿고개와 같은 춘궁기에 허기진 배를 달래려 먹었던 것들이 오늘날에는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나물 대신 약초를 캐오리다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절기로는 벌써 입춘이 지나 봄으로 접어들었지만 아직도 연일 영하권의 날씨를 맴돌고 있다. 계속되는 추위에 몸에 힘이 없고 나른해질 땐 제철 봄나물로 식탁 위를 채워보는 건 어떨까. 예로부터 봄에 먹는 냉이·달래·씀바귀는 약초라고 했다. “산채는 일렀으니 봄나물 캐어 먹세 / 고들빼기 씀바귀며 소루쟁이 물쑥이라 / 달래김치 냉잇국은 비위를 깨치나니 / 본초를 상고하여 약재를 캐오리다” 다산 정약용의 둘째 아들 정학유가 지은 『농가월령가』의 한구절이다. 봄나물을 캐러 가면서 한의학서인 『본초강목』을 참고해 나물이 아닌 약재를 캐오겠다고 했다. 겨우내 땅속에 남았다가 언 땅을 뚫고 싹을 틔울 정도의 생명력이니 보약이 아닐 수 없다. 약초를 캐오겠다는 『농가월령가』의 봄나물 노래가 빈말이 아닌 이유다.봄나물에는 여러 종류가 있지만 그중에서도 냉이로 끓인 국을 백세(百歲)국이라고도 불렀다. 이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성질을 가지고 있는 냉이가 오장을 이롭게 하여 장수를 누리게 할 만큼 신체에 이롭고 또한 100살이 된 노인도 부담 없이 먹을 만큼 소화도 잘된다는 데서 유래했다.한편 봄나물은 어려운 시기를 버텨낼 수 있게 한 큰 힘이 되기도 했다. 봄에 양식이 떨어졌을 때 지천으로 널린 나물을 캐다가 죽을 끓여 먹으면 거뜬히 춘궁기를 넘길 수 있었다. 이에 옛사람들은 봄나물을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풀이라 하여 호생초(護生草)라 불렀다. 일제강점기 때 조선총독부에서는 아예 그런 나물 종류만 골라 『조선의 구황작물(朝鮮の救荒植物)』이라는 책까지 펴냈다. 한반도에서 수확한 쌀을 절반 가까이 수탈해 가면서 조선 사람들의 굶주림을 염려해 빈곤한 사람을 구제하기 위함이라는 발간 목적이 가소롭기 그지없다. 팍팍한 심신을 달래 줄 곤드레밥영양이 넘쳐 비만으로 고민하는 현대인들에게 다이어트 식단으로 환영받고 있는 곤드레도 가난한 서민을 굶주림으로 부터 지켜낸 호생초 중 하나다. 강원도 산골 오지마을의 화전민들에게 쌀은 이미 부족하기 그지없었고, 그나마 구할 수 있는 감자·옥수수 등의 양식마저 바닥나면 산나물인 곤드레를 따다 주린 배를 채웠다. 민요인 정선아리랑에 당시의 모습이 잘 그려져 있다. “한치 뒷산의 곤드레 딱죽이 임의 맛만 같다면 / 올 같은 흉년에도 봄 살아나지 /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날 넘겨주게” 가사 속 ‘한치 뒷산’은 강원도 정선군 동면에 있는 산의 지명이고 ‘곤드레 딱죽이’는 산나물의 이름이다. 가사는 거친 산나물이지만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는 것과 같아서 맛있게만 먹는다면 흉년에도 굶어 죽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사실 현재 우리가 먹는 곤드레밥은 옛날 화전민들이 먹던 것과는 차이가 있다. 지금은 쌀밥에 곤드레를 넣어 양념장에 비벼 먹지만 과거에는 곤드레와 콩나물을 잘게 잘라 섞은 뒤죽을 쑤어 먹었다. 지금은 별미로 또 참살이 식품으로 인기가 높지만 예전 산골 사람들에게는 춘궁기를 굶지 않고 버텨낼 수 있게 하는 생명줄이었다.매일 먹는 반찬들 뒤로하고 오늘 저녁 식탁에는 향긋한 봄나물 요리를 준비해보는 건 어떨까. 오랜 시간 동안 우리의 곁을 지켜온 모습 그대로 지친 우리의 몸과 마음을 달래줄 것이다.  윤덕노음식문화평론가. 1984년 매일경제신문사에 입사해 20여 년간 기자 생활을 하면서 특파원 활동, 출장, 연수 등으로 미국과 중국을 비롯한 다양한 나라에 머물렀다. 음식에 관심이 많아 관련 자료를 수집해온 결과, 음식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주요 저서로는 <음식잡학사전>, <신의 선물 밥>, <붕어빵에도 족보가 있다> 등이 있다. ]]> Wed, 28 Feb 2018 19:29:26 +0000 15 <![CDATA[산과 강 그리고 계곡이 어우러지다 -충청북도 영동- ]]> 글·사진 김초록 여행칼럼니스트  산과 강 그리고계곡이 어우러지다-충청북도 영동- 때 묻지 않은 자연을 품은 영동은 천태산·민주지산·삼도봉·백화산과 같은 험준한 산으로 둘러싸인 땅이다. 이러한 산간지형은 곳곳에 강과 계곡·소·폭포를 만들어 절경을 빚어낸다. 천혜의 풍경에 유구한 역사와 체험·배울 거리가 더해져 영동여행의 가치를 더하고 있다.        금강산을 옮겨놓은 듯한 한천팔경 영동여행은 경북 김천과 경계를 이룬 황간에서 시작한다. 첫 번째로 만나볼 여행지는 바로 6·25전쟁의 상흔이 남아 있는 노근리. 이곳은 북한군 공격에 밀려 후퇴하던 미군이 민간인에게 기관총을 난사해 수백 명의 희생자를 낳은 학살 현장으로, 쌍굴다리에는 총알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 인근으로는 당시의 참상을 기억하기 위해 평화공원이 조성되어있으며, 공원 안으로는 평화기념관과 희생자위령탑·교육관 등이 설립되어 있다.이번엔 해발 407미터의 월류봉에 올라보자. 한천팔경의 하나인 이 기묘한 모양의 산봉우리는 동서로 6개의 봉우리가 어우러져 능선을 이루는데, 북쪽은 냇물을 따라 깎아 세운 듯한 절벽이고 남쪽은 완만한 경사 지대다. 한천팔경의 자태는 월류봉의 가진 여러 면모를 이르데, 제1경부터 8경까지의 풍경은 아름답기로 소문난 중국의 계림을 연상케 할 만큼 수려하다.월류봉 아래로 흐르는 맑고 우렁찬 물줄기는 금강으로 향한다. 경상도·전라도·충청도를 가르는 삼도봉과 민주지산에서 발원한 초강천의 한 갈래다. 초강천은 물이 맑고 차기로 유명한 물한계곡을 이루고 다시 추풍령 계곡물과 만나 월류봉으로 흘러든다. 오랜 세월에 걸쳐 만들어진 강변 백사장은 사철 독특한 모습을 보여준다.월류봉 아래에는 우암 송시열이 머물렀던 한천정사가 있다. 송시열은 병자호란 직후인 32세가 되던 해부터 한천정사에서 많은 날을 보냈는데, 아침마다 월류봉 중턱의 샘까지 오르내렸다고 한다. 한편 한천팔경이라는 이름은 이곳 한천정사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alt빼어난 풍광을 자랑하는 월류봉alt6·25전쟁의 아픔이 남아있는 노근리 쌍굴다리alt송시열이 머물렀던 한천정사   봄이 찾아온 석천계곡과 반야사 월류봉을 벗어나 길을 따라가다 보면 울창한 수풀이 우거진 석천계곡과 반야사에 닿게 된다. 계곡을 따라 오도카니 들어선 반야사는 신라 성덕왕 19년에 상원 스님이 창건한 천년고찰이다. 경내의 삼층석탑과 배롱나무 두 그루가 절집 특유의 고요함을 더해준다. 옆으로 난 석천 길을 따라 깊숙이 들어가면 문수전으로 올라가는 가파른 길이 보인다. 깎아지른 절벽 꼭대기에 올라앉은 문수전은 백화산의 기개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최고의 조망 장소다. 남북으로 뻗은 날카로운 주능선 양옆으로 호랑이 꼬리 같은 계곡이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진다. 더할 나위 없는 절경이다.  alt울창한 수풀이 인상적인 석천계곡alt백화산 자락에 안긴 반야사alt문수전에서 본 훤칠한 산줄기와 깊은 계곡   학산을 지키는 철새와 ‘독립문 나무’  용화에서 양산 쪽으로 가다 보면 학산면 봉림리의 작은 시골 마을을 만나게 된다. 골목으로 돌아서면 눈길을 사로잡는 고택이 있으니 바로 성위제 가옥이다. 안채와 사당·담장은 기와집이고 사랑채·광채·문간채는 초가로 돼 꽤나 멋스럽다. 대문 앞에 연자방아가 있고 대문채로 들어가면 널찍한 안마당이 나온다. 사랑채에는 두 칸의 온돌방과 한 칸의 골방이 있으며 골방 뒤로 아궁이가 있는 부엌이 있다. 방 사이에는 미닫이문을 두어 방을 구획했고 사랑방의 뒷문을 열면 흙벽 사이로 안채의 부엌문이 보이는데 이 문으로 드나들 수 있도록 했다.봄마다 찾아오는 수백 마리의 왜가리와 백로 떼는 이 마을의 반가운 손님이다. 마을 뒷산 소나무와 참나무 숲에 보금자리를 틀고 지내다 찬바람이 부는 9월경 떠나 이듬해 다시 찾는다. 왜가리와 백로는 마을의 자랑거리이자 영물로, 많이 날아오는 해는 풍년이 든다고 전해진다.미촌마을에서 3㎞ 떨어져 있는 박계리 마을 입구엔 수령 350년 이상 된 독특한 생김새의 느티나무 한 그루가 우뚝 서 있다. 일명 ‘독립군 나무’로 불리는 이 나무에 유독 관심이 쏠리는 까닭은 3·1운동 때 서울에서 남부지방으로 독립선언문을 전달하는 데 결정적인 공을 세웠기 때문이다. 사연인 즉, 일제강점기 전국 각지에 흩어져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에게 가장 어려운 일은 조직 구성원 간의 원활한 연락이었다. 이때 한양과 지방을 잇는 길목에 자리한 이 나무를 연락책 삼아 일본 순사의 유무와 독립군의 활동 정보를 주고받았다. 늠름한 마을의 수호신인 이 나무는 오늘도 그 깊은 사연을 간직한 채 하늘을 우러르고 있다.  alt성위제 가옥alt백로서식지를 알리는 비석alt박계리 마을에 위치한 독립군 나무   애국지사의 고장 영동영동은 많은 애국지사를 배출한 충절의 고장으로 유명하다. 해마다 3·1절과 광복절에는 관내 여기저기서 독립운동 정신을 되새기는 기념행사가 열린다. 양산초등학교 내의 3·1독립운동기념탑을 필두로 지내리의 3·1독립의거기념비, 영동체육관 앞 독립유공자 기념탑, 영동읍 3·1운동기념비 등 국권 회복과 선열들의 숭고한 독립정신을 계승·발전시키기 위해 곳곳에 기념비를 세웠다.영동을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운데는 대표적인 인물로는 심석재 송병순이 있다. 그는 경술국치 때 순국한 애국열사로 우암 송시열의 후손이자 대전 회덕 출신 애국지사인 송병선의 동생으로, 형을 따라 구국 활동에 전념하다 순국 자결한 인물이다. 이를 기리기 위해 영동역 광장에 선생의 동상이 건립되어 있다.  alt영동 읍내에 위치한 3·1운동 기념비alt영동역 광장에 건립된 송병순 동상   금강이 만든 양산팔경양산이 아름다운 까닭은 사철 마르지 않는 금강을 끼고 있기 때문이다. 금강은 주변을 따라 굽이굽이 흐르며 양산팔경을 빚어냈다.영국사는 그중 제1경이다. 절을 에워싼 천태산은 ‘충북의 설악’이라 일컬어질 만큼 수림이 울창하고 산세가 빼어나다. 영국사로 쉬엄쉬엄 오르다 보면 암반을 타고 내리는 3단폭포가 나타난다. 폭포 앞에서 숨을 고르고 다시 야트막한 고개 하나를 넘으면 천태산을 베게 삼고 누워 있는 영국사의 전경이 한눈에 잡힌다. 절 앞에 버티고 서 있는 은행나무는 이 절의 역사를 짐작케 한다. 높이 35m, 둘레 11m의 우람한 몸체도 놀랍거니와 사방으로 뻗어나간 가지와 땅 위로 드러나 비틀린 뿌리는 가히 장관이다. 이 은행나무는 천재지변이나 나라에 큰 변고가 있을 때 소 울음소리를 내며 운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영국사 이외에도 해넘이가 아름다운 비봉산, 강변의 높다란 대 위에 노송과 정자가 어우러진 강선대, 시인 묵객들의 쉼터였던 함벽당 등이 어우러져 아름다운 자태를 뽐낸다. 팔경에는 들지 않지만 양산 중심지인 송호리 강변의 송림도 빼놓을 수 없다. 수천 그루의 소나무가 들어차 있는 솔밭은 삼림욕을 즐기기에 적격이다.  alt 천태산 들머리에 있는 영국사  난계 박연의 고향옥계폭포 가까이에는 우리나라 3대 악성으로 꼽히는 난계 박연의 영정을 모신 난계사당이 있다. 심천면 고당리에서 태어난 박연은 조선 세종 때 석경·편경과 같은 아악기를 만들고 악서를 편찬하는 등 우리 국악 발전에 많은 공헌을 했다. 사당 외에 난계국악박물관·천고각·국악기체험전수관 등 박연과 국악기를 소재로 한 다양한 시설이 모여 있다. 세계에서 가장 큰 북으로 기네스북에 등재된 천고는 울림판 지름이 5.54m, 무게는 7t에 이른다. ]]> Wed, 04 Apr 2018 10:04:19 +0000 16 <![CDATA[지도를 통해 바라본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 alt]]> Wed, 04 Apr 2018 11:26:13 +0000 16 <![CDATA[대한민국임시정부의 살림꾼 ]]> 글 학예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살림꾼 독립기념관은 국가보훈처·광복회와 공동으로 윤현진을 2018년 4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윤현진은 조선유학생학우회와 신아동맹당의 핵심 인물로서 항일운동에 앞장섰으며,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재무차장으로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진정한 애국지사였다. alt 일본 유학 중 항일 운동에 참여하다1892년 경남 양산에서 태어난 윤현진은 어린 시절부터 한학을 수학하였고, 15세에는 신학문을 배우기 위해 구포 구명학교에 입학하였다. 1909년 중국 상하이와 베이징을 탐방한 뒤 체계적인 근대학문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게 된다.22세가 되던 1914년에 윤현진은 일본 메이지대학 법학과에 입학했다. 이후 조선유학생학우회의 임원으로 활동하며 신 지식인층을 중심으로 전개된 반일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또한 반제국주의 비밀결사단체인 신아동맹당에 가입하여 집회와 연설·서적 배포와 같은 다양한 형태의 활동을 통해 항일운동을 이어나갔다.1916년 고국으로 돌아온 윤현진은 상하이로 망명하기 전까지 약 3년 동안 대동청년단과 백산무역주식회사·의춘상행·기미육영회 등과 관계를 맺고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비밀결사운동과 경제적 자립운동·교육운동에 앞장섰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살림을 도맡다1919년 3·1운동 직후 상하이로 망명한 윤현진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내무위원으로 선정되어,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경상도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이후 국내의 항일세력과의 협력을 위해 의용단을 조직하고, <독립신문>의 발기인으로 참여하는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였다.1921년 2월에는 재무총장 이시영과 함께 재무차장으로 선임되어 임시정부의 살림살이를 도맡았다. 차장급 인사들을 대표하던 윤현진은 의견이 대립하여 분열하는 상황에도 임시정부의 혁신과 개조를 위해 노력하였다.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인 윤현진은 1921년 9월 과로로 인해 29세의 젊은 나이로 순국하였다. 장례식은 국장으로 치러졌으며, 안창호를 비롯해 그의 죽음을 안타깝게 여긴 160여 명의 내빈이 참석하였다. 정부는 윤현진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alt일본 유학시절의 윤현진(1910년대)alt구포 구명학교 개교식 기념사진(1907.09.09)alt조선유학생학우회 기관지 『학지광』  alt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원 기념사진(1919.10.11) alt국장으로 치러진 윤현진의 장례식(1921)alt한글로 새겨진 윤현진의 비석 ]]> Wed, 04 Apr 2018 10:22:21 +0000 16 <![CDATA[덕진풍 다리풍으로 불리던 전화 백범 김구를 살리다 ]]> 글 신현배 역사칼럼니스트  덕진풍 다리풍으로 불리던 전화 백범 김구를 살리다 우리나라에 전화가 처음 들어온 것은 1882년 3월이었다. 청나라 시찰단으로 갔던 유학생 상운이 귀국할 때 전화기 두 대를 가져와 첫 시험 통화가 이루어졌다. 뒤이은 1896년 궁궐 내부에는 궁중 전화기 9대가 설치되었으며, 인천 감리영까지 연결됐다.그런데 이 전화 때문에 백범 김구의 생명을 구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 이야기에는 어떤 내막이 담겨있었을까? 김구를 살린 전화기 1896년 만 20세의 김구는 황해도 안악군 치아포의 여관 겸 주막에서 머물던 중 일본인 쓰치다 조스케의 거친 행동에 분개하여 그를 살해한다. 직후 필기도구를 가져오라고 하여, 다음과 같은 내용의 포고문을 써 사람들이 오고 가는 길거리에 붙였다. ‘무참히 살해된 국모의 원수를 갚기 위해 해주 백운방 텃골 김창수가 이 왜인을 죽였다.’ 사건 3달 뒤, 그는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인천 감리영으로 옮겨졌다. 당시 인천 감리영에는 외국인 관련 사건을 재판하는 특별 재판소가 있었다. 감옥에 갇힌 김구는 경무청에서 심문을 받았다. 인천감리이자 경무관인 김윤정이 그에게 물었다. “너는 안악의 치하포에서 왜인을 죽인 일이 있느냐?”“그렇소. 우리 국모의 원수를 갚기 위해 왜인 한 명을 때려죽였소.” 일제는 김구에게 살인강도라는 죄명으로 사형선고를 내렸다. 고종황제의 재가가 떨어지면 곧장 목숨을 잃게 될 긴박한 순간이었다. 이에 법무대신은 사형수 명단을 가지고 고종의 집무실로 향했고 별 이의 없이 결재가 내려졌다. 그때 입시했던 승지 가운데 한 명이 서류를 들여다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김창수의 죄명이 바로 국모보수, 국모의 원수를 갚았다는 내용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를 이상히 여긴 승지는 심문서를 다시 고종에게로 가져갔다. 이를 천천히 살핀 고종은 곧바로 어전회의를 열었다. “김창수는 국모의 원수를 갚겠다며 왜인을 죽였다 하오. 그런 사람을 사형에 처할 수야 없지 않겠소? 김창수의 사형을 정지토록 하라.” 결국 고종은 어전회의에서 김구의 사형집행을 정지하기로 결정하였고, 인천 감리영으로 직접 전화를 걸어 이 사실을 알렸다. 김구는 정말 운이 좋았다. 『백범일지』에 따르면, 서울과 인천 사이에 장거리 전화가 설치된 것은 불과 사흘 전이었다. 전화 한 통이 김구의 목숨을 살린 셈이었다. 개통이 나흘만 늦었어도 고종은 김구를 살리지 못했으리라.  우리나라에 들어온 전화기의 역사우리나라에 전화가 처음 들어왔을 때 전화기를 덕진풍·다리풍·전어통 등으로 불렀다. 덕진풍과 다리풍은 텔레폰(telephone)이라는 영어 발음을 한자로 적은 것이고 전어통은 ‘대화를 전달해 주는 장치’라는 뜻의 한자어다.한편 전화는 1896년 첫 도입 이후 1902년 3월 20일 서울과 인천 사이에 시외전화가 가설되었고, 같은 해 6월에는 시내 교환 전화가 개통되었다. 당시만 해도 전기와 전화는 낯설고 기괴한 물건이었다. 전국에 가뭄이 들자 사람들은 “하늘의 전기 바람이 비구름을 말리고, 땅의 덕진 바람이 땅 위의 물을 말린다.”며 전기와 전화를 멀리했다. 따라서 1902년 전화 가입자는 24명뿐이었는데, 그 가운데 22명이 일본인이었고 2명만이 한국인이었다.고종은 전화를 많이 사용했던 것으로 유명했다. 덕수궁 함녕전 대청마루에는 전화기가 놓여있었는데, 고종은 이를 이용해 신하들에게 업무지시를 하였다. 이때 신하들은 곧바로 전화를 받지 않고 관복으로 환복 후 전화기를 향해 큰절을 올린 뒤 두 손으로 공손히 수화기를 들어 귀에 갖다 댔다. 물론 내시가 미리 전화 받을 시각을 알려주었기에 관복을 입고 고종의 전화를 기다릴 수 있었다.대신들은 황제가 전화를 거는 것은 권위와 체신을 떨어뜨리는 일이라며 이를 만류했지만 듣지 않았다. 고종은 대왕대비인 신정왕후릉이 있는 동구릉까지 임시로 전화를 가설했다. 참배하러 가기엔 너무 멀어 아침저녁으로 전화로 곡을 하기 위해서였다.1907년 고종은 헤이그 특사 사건으로 일제에 의해 강제로 퇴위를 당했다. 뒤를 이어 순종이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순종도 아버지인 고종만큼 전화를 많이 사용했다. 순종은 창덕궁과 덕수궁 사이에 전화를 가설했다. 그리고 하루에 4번씩 덕수궁에 있는 고종에게 전화로 문안을 올렸다. 1919년 고종이 세상을 떠나자 순종은 덕수궁에 차린 혼전과 고종의 능인 홍릉에 직통전화를 놓았다. 그리고 상복을 차려입고 수시로 전화로 곡을 했다. 아버지의 문상방법을 그대로 물려받았던 것이다.  alt회선 교환방식의 전화 교환기alt대한제국의 전화기   신현배역사와 전통문화에 대해 관심이 많은 역사칼럼리스트. 저서로는 역사 이야기 『엉뚱 별난 한국사』, 『엉뚱 별난 세계사』, 『2000년 서울 이야기』, 『세계사로 배우는 법 이야기』,  전통문화 이야기 『소중한 우리 문화 지식 여행』 시리즈 등이 있다. ]]> Wed, 04 Apr 2018 10:12:51 +0000 16 <![CDATA[일제강점기,대한민국의 독립과 여성 인권의 신장을 외치다 ]]> 글 이성주 역사칼럼니스트  일제강점기, 대한민국의 독립과여성 인권의 신장을 외치다 독립운동사에서 차미리사에 대한 기록은 뚜렷하지 않다. 여성 독립운동가에 대한 조명이 박했던 만큼 평가에 대해 아쉬운 부분이 많다. 미투(Me Too)운동의 열기가 사회 곳곳을 훑고 지나가는 이때 차미리사의 이야기를 한 번 소개 해보고자 한다. 엄혹했던 일제강점기, 교육운동을 통해 대한민국의 독립과 여성 인권 해방에 힘쓴 그녀는 진정한 혁명가였다.현실을 바라보는 냉정한 시선▲독립운동가 차미리사 ▲1878년 8월 21일 서울 출생 ▲17세에 결혼하였으나 2년 만에 사별 ▲개신교에 입회하여 미리사(Mellisa)라는 세례명을 받음 ▲1901년 헐버트 선교사의 소개로 중국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유학 ▲1907년 하와이에서 한인 노동자를 위한 사회봉사 활동 전개 ▲1908년 ‘한국부인회’ 결성 ▲평안남도에 ‘대동고아원’ 설립 ▲1912년 귀국 후 배화학당에서 교사 겸 선교사로 활동하며 여성운동과 독립운동에 투신 ▲1920년 여성운동가들과 함께 ‘조선여자교육회’ 조직 ▲1934년 재단법인 근화학원 설립(오늘날의 덕성여중·여고·여대의 전신) 몰락한 양반가의 귀한 막내딸로 태어나 시집간 지 2년 만에 과부가 된 인생. 여기까지만 보면 박복하다는 말이 절로 나올 것이다. 그러나 차미리사의 인생은 이때부터 시작됐다. 중국과 미국 유학을 통해 변화된 세상의 모습을 목격한 그녀는 빼앗긴 조국·천시 받는 여성·배우지 못한 동포를 보며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정했다. 바로 조선 여성들의 교육을 위한 투신이었다. “조선 여자에게는 지금 무엇보다도 직업 교육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부인해방이니 가정개량이니 하지만 다 제 손으로 제 밥을 찾기 전에는해결이 아니 될 것입니다.” 하지만 차미리사는 교육자 역할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그로 인해 인생은 순탄치 않았는데, 이는 그녀가 설립한 학교인 근화학원(1934년 차미리사가 설립한 학교로, 근화(槿花)는 국화(國花)인 무궁화를 의미한다)이라는 이름에서 쉽게 유추해볼 수 있다. 차미리사는 총독부로부터 압력을 받았고, 결국 학교 이름도 덕성(德成)으로 바꿨다. 종국에 가서는 창씨개명을 반대한다는 이유로 갖은 협박에 시달렸고 재단 이사장 자리에서도 물러났다. 독립운동과 여성운동 그리고 교육운동에 매진한 차미리사의 삶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에피소드다. 제 손으로 제 밥을 찾는다는 것차미리사가 조선여자교육회 설립과 함께 주장했던 것 중 하나는 바로 여성들에 대한 실업교육이었다. 고매한 이상을 설파한 여권운동도 따지고 보면 남녀 간의 권력구도, 즉 경제력을 기반으로 한 남녀의 권력차이에서 나온다고 보았던 것이다. 따라서 여성이 단순히 남성의 보조적인 역할이 아닌, 주체적인 한 개인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노동을 하고, 실용적인 기술을 배우고 익혀 직업을 가져야 한다는 걸 강조했다. “살되, 네 생명을 살아라. 생각하되, 네 생각으로 하여라. 알되, 네가 깨달아 알아라.” 지금 터져 나오고 있는 미투 운동을 두고 포스트 가부장제로 나아가는 진통이라고 평가하는 사람도 있고 그동안 억눌려 왔던 여성 차별과 성적 억압의 폭발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다. 그러나 그 근원을 더듬어 올라가보면 본질은 바로 갑을관계에서 나오는 ‘권력의 횡포’로 볼 수 있다. 과거와는 달리 여성의 사회 참여가 활발해지면서 양성평등의 시대란 말이 나오고 있지만 아직도 보이지 않는 차별의 벽이 있다는 건 모두 다 인정하는 사실이다.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사회 전체가 인식의 틀을 바꿔야 한다. 더 이상 여자는 거래의 대상도 남자의 부속품도 아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남녀 임금 차이가 존재하는 게 이 사회다. 불과 10여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여사원을 두고 ‘직장의 꽃’이라 불렀고, 일부 직종에서는 여성들에게만 유니폼을 입혔던 것이 이 나라다. 사회적 인식의 틀이 변하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이 시간을 단축시킬 수 있는 방법은 남성이나 사회 구성원들에게 생각을 바꾸라고 교육시키는 것도 있지만, 세상이 바뀐 모습을 보여주는 게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여성이 경제적 주체로 우뚝 서고, 경제적으로 독립하는 순간 남녀 간의 권력관계는 균형을 이룰 것이다.  이성주시나리오 작가 겸 역사칼럼니스트. 대중과 함께 호흡하는 글쓰기를 목표로 『조선의 민낯』, 『왕들의 부부싸움』과 같은 역사서를 출간한 바 있다. 최근에는 국제정치와 관련된 연구 및 집필에 열중하고 있다. 『전쟁으로 보는 국제정치』 시리즈 1, 2, 3권을 출간 중이다. ]]> Wed, 04 Apr 2018 10:45:30 +0000 16 <![CDATA[만개하는 사월의 꽃처럼 ]]> 만개하는 사월의 꽃처럼 바람이 불면 조금씩 흔들리고눈비가 몰아치면 차가운 땅을지붕 삼아 가만히 웅크렸습니다. 가슴 속에 뜨거운 무언가가치밀고 솟구치고 꿈틀거려도 이 혹독한 겨울을 참아내고 나면심술궂은 운명을 견뎌내고 나면아픔과 그리움 꾹꾹 눌러 삼켰습니다. 고통을 견뎌낸 순간에야 비로소,만개하는 사월의 꽃처럼우리는 화려하게 피어날 것입니다. ]]> Wed, 04 Apr 2018 09:56:39 +0000 16 <![CDATA[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굽이굽이 이어진 통합의 길 ]]> 글 권경률 역사칼럼니스트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굽이굽이 이어진 통합의 길 매월 대한민국의 광복과 관련된 핵심사건을 선정하여 그 치열했던 역사의 순간을 재구성하고자 한다. 다시 만난 그날, 네 번째 이야기는 민주주의의 새 시대를 연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이다. 지금부터 자주독립을 위한 통합운동의 역사를 함께 만나보자.  국호를 정하고 임시헌장을 채택하다  1919년 4월 10일 저녁, 상하이 프랑스 조계의 한 양옥집으로 분주한 발걸음이 이어졌다. 신한청년당 등 상하이 독립지사들이 조직한 임시의정원의 첫 회의를 여는 순간이었다. 이동녕 의장이 개회를 선언하자 29명의 대표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토의에 들어갔다.새 나라의 국호는 ‘대한민국(大韓民國)’으로 정해졌다. 관제는 ‘국무총리제’로 하고 내각 구성에 착수했다. 국무총리 이승만, 내무총장 안창호, 외무총장 김규식, 군무총장 이동휘, 법무총장 이시영, 재무총장 최재형, 교통총장 문창범이 그 자리에서 선출되었다. 이어서 조소앙이 기초한 대한민국 임시헌장이 안건으로 올라왔다. 밤새도록 열띤 토의가 벌어졌다. “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한다. 제2조 대한민국은 임시정부가 임시의정원의 결의에 의해 통치한다. 제3조 대한민국 인민은 남녀와 귀천, 빈부와 계급 없이 일체 평등하다….” 의견이 엇갈리는 대목들도 있었다. 대한제국의 구 황실을 놓고 이견이 나왔지만 우대하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또한 본국에서 조직한 임시정부에 대해서도 함께 할 수 있는 길을 찾기로 결정했다. 임시의정원 회의는 이튿날 아침까지 이어졌고 1919년 4월 11일 드디어 대한민국의 헌법 격인 임시헌장이 제정되었다. 3·1운동의 함성이 바다를 건너와 상하이에서 결실을 맺은 것이다.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서울의 한성임시정부·러시아 연해주의 대한국민의회 등을 통합하고, 1919년 9월 대통령제를 채택했다. 초대 대통령에는 미국에서 활동하며 외교역량을 발휘해온 이승만이 추대되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임시정부를 이끈 인물은 안창호였다. 그는 출신과 이념, 입장이 제각기 다른 독립지사들을 설득하며 조직을 정비해나갔다. 당시 안창호와 신채호가 나눴다는 대화는 통합 임시정부의 성격을 담고 있어 흥미롭다. 안창호 : “단재, 당신은 조직의 결정을 따를 각오가 되어 있소?”신채호 : “그렇습니다.”안창호 : “그렇다면 당신이 볼 때 이승만이 조직의 결정을 따를 사람이라고 생각하오?”신채호 : “아닙니다.”안창호 : “자 그럼 우리가 모두 단결하여 임시정부를 세우려면 누가 양보해야겠소?”  alt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1919년)alt1919년 4월에 11일에 제정된 대한민국 임시헌장alt초창기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이끈 안창호alt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으로 추대된 이승만   마침내 이뤄낸 좌우 연립정부 안창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임시정부는 커다란 위기를 맞았다. 대통령 이승만과 국무총리 이동휘로 대표되는 좌우간의 불거진 대립이 1921년 요인들의 집단 탈퇴로 이어진 것이다. 이를 계기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개조할 것이냐 재창조할 것이냐 등을 놓고 설왕설래가 이어졌다. 이 혼란을 잠재우면서 임시정부의 고삐를 쥔 사람이 바로 김구다.1919년 상하이로 망명한 그는 경무국장과 내무총장을 거쳐 1926년 새로이 도입한 최고위직인 국무령에 취임했다. 이후 김구는 일제의 탄압과 고질화된 재정난에 시달리면서도 임시정부를 부둥켜안고 활로를 모색했다. 고심 끝에 1931년 한인애국단을 조직하고 일제의 수뇌부 암살작전을 펼쳐나갔다.1932년 1월 8일 이봉창 의사는 일본 도쿄 사쿠라다문 앞에서 히로히토 일왕의 마차 행렬을 향해 폭탄을 던졌다. 곧이어 4월 29일에는 윤봉길 의사가 상하이 홍커우공원에서 열린 일제의 전승 축하잔치에 물통 폭탄을 투척했다. 시라카와 요시노리 대장을 필두로 침략전쟁의 사령탑을 대거 처단했다. 한인애국단 활동을 통해 김구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존재감을 부각하려 했고 의도는 적중했다. 먼저 미국에 있는 한인단체로부터 성금이 몰려들었다. 또한 일제의 침략에 곤경을 겪던 중국 기관들도 자금을 대고 지원에 나섰다. 심지어 중국의 국민당 정부까지 한인 독립운동을 돕겠다며 팔을 걷어붙였다. 김구는 난징의 중국 중앙군사학교에서 장개석 총통과 협상을 벌여 한국 청년들이 뤄양 군관학교에서 교육받을 수 있게 했다.임시정부의 활약만큼 일제의 탄압도 한층 거세졌다. 일본의 군경은 프랑스 조계까지 들어와 한국인들을 마구잡이로 검거하였고 이에 위기를 느낀 임시정부는 근거지를 항저우로 옮겨야 했다. 1937년 중일전쟁이 터지고 일본군이 중국 국민당 정부의 수도 난징을 공격하자 임시정부도 머나먼 피난길에 올랐다. 창사·광저우·류저우·치장을 거쳐 충칭까지 이어지는 유랑생활은 고단했다.한편 1938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창사에 머물고 있을 무렵 민족진영만이라도 통합하자는 의견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임시정부를 주도하던 한국국민당의 김구와 조완구, 조선혁명당의 지청천과 현익철, 한국독립당의 홍진과 조소앙 그밖에 몇몇 사람이 난무팅(楠木廳) 2층집에 모였다. 회의를 이어가던 중 괴한이 침입해 권총을 난사했다. 이 총격으로 김구가 심장 근처에 탄환을 맞고 입원했으며, 현익철은 목숨을 잃었다. 범인은 체포됐지만 타격이 컸다.그럼에도 통합 논의는 꾸준히 이어졌다. 1939년 치장에서는 김구와 김원봉이 공동 서명한 좌우합작 성명서가 나왔다. 이어서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양측을 크게 통합하기 위해 7당 회의가 열렸다. 그러나 막판에 사회주의 계열이 빠져나가면서 통합 협상은 결렬되었다. 이듬해 임시의정원 초대 의장을 맡았던 이동녕이 세상을 떠났다. 그는 임시정부 산하의 3당만이라도 합치라는 유언을 남겼고 1940년 5월 통합 한국독립당이 탄생했다.임시정부는 이후 1940년 9월 충칭에 청사를 마련하고 얼마 후 김구 주석 단일지도체제를 출범시켰다. 중경은 중국 국민당 정부가 전시 수도로 삼은 곳이었다. 이곳에서 임시정부는 오랜 세월 준비해온 광복군을 창설했다. 광복군은 국내를 비롯해 만주 등 각지에서 모여든 장정들로 구성되었으며, 그중에는 일본군으로 끌려갔다가 탈출해서 동참하는 청년들도 적지 않았다. 그들은 총사령관 지청천, 1지대장 김원봉, 2지대장 이범석, 3지대장 김학규의 지휘 아래 훈련에 돌입했다.그 무렵 중경은 일본군의 공습에 시달리고 있었다. 임시정부 초기 청사 두 곳도 화재로 큰 피해를 입었다. 이에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41년 12월 진주만 기습공격에 대응해 일본에 선전포고했다. 1943년 11월에는 미국·영국·중국이 카이로에서 대한민국의 독립을 보장하는 선언서에 서명했다. 일본과 제대로 맞서 투쟁하는 것은 물론 머지않을 독립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한민족 차원의 통합을 다시 한번 추진해볼 필요가 있었다.끈질긴 통합 노력이 빛을 본 것은 1944년 4월의 일이었다. 우익인 광복진선(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과 좌익인 민족전선(조선민족전선연맹)이 마침내 힘을 합치기로 결의한 것이다. 4월 22일에 열린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좌우 연립정부가 구성되었다. 이를 통해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모든 정파가 참여하는 통합정부로 거듭날 수 있었다.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와 무정부주의자가 고루 목소리를 내면서 임시정부의 위상도 높아졌다. 좌우 연립정부는 1945년 일제가 패망하고 환국할 때까지 유지되었다. 이 통합의 성공적 경험은 자연스레 해방 후 분단된 조국의 통일을 지향하게 되었다.  alt임시정부를 지탱하며 통합의 길을 걷게 한 김구alt상하이 홍커우공원 의거 직후 연행되는 윤봉길 의사  alt항저우에 위치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alt한국광복군 성립 전례식   독립과 통일의 제단에 나를 바쳐 달라1945년 8월 임시정부 주석 김구는 산시성(陝西省)에서 광복군의 특수훈련을 점검하고 있었다. 국내 진공작전을 위한 최종 테스트였다. 그는 젊은 전사들의 열정과 노력에 만족감을 표시하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8월 15일 일본의 항복 소식은 희소식이 아니었다. 『백범일지』에 따르면 김구는 이 사건에 대해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지는 느낌이었다’라고 회고하고 있다. 비록 일본의 패전이 확정되고 민족은 해방을 맞았지만, 김구가 열망한 것은 단순한 광복이 아닌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일궈낸 자주독립이었다.불길한 예감은 빗나가지 않았다. 해방된 이 땅에는 3·8선이 그어지고, 남과 북에는 각각 미군과 소련군이 진주했다. 임시정부는 9월 3일 “새 정부는 반드시 독립국가, 민주정부, 균등사회를 원칙으로 해야 하며, 과도정권이 들어설 때까지 임시정부를 유지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서울에 들어선 미군정은 충칭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주권기관으로 인정하지 않았다.1945년 11월 23일 임시정부 요인들은 C-47 미군 수송기를 타고 꿈에 그리던 고국 땅을 밟았지만 동포들은 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미군정은 좌우 연립이라는 임시정부의 색깔을 우려해 철저히 무시하려고 한 것이다. 그럼에도 임시정부 환국 소식은 곧 전국 방방곡곡 퍼져나갔고 12월 19일에 열린 개선대회에서 뜨거운 환영을 받았다. 강대국들은 부인했지만 3,000만 동포는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인정하고 새 나라의 희망으로 여겼다. 그러나 강대국들의 신탁통치 결정과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 움직임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대의는 빛을 바래갔다.중국에서 좌우 연립정부의 산파 노릇을 한 김구는 이번에도 남북협상을 제의하기 위해 3·8선을 넘어갔다. 평양에서 회담을 열어 통일의 바람을 일으키려 한 것이다. 이 뜨거운 노력에도 불구하고 남과 북에는 단독정부가 들어섰고, 김구도 저격범이 쏜 흉탄에 쓰러지고 말았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고….” 오늘날 대한민국 헌법은 임시정부의 법통에서 출발한다. 그렇다면 한국인이 계승해야 할 법통이란 무엇일까? “독립과 통일의 제단에 나를 바쳐 달라”고 한 임시정부 국무위원 조소앙의 유언이 떠오른다. 그들에게는 독립이 곧 통합이요, 통합이 바로 통일이었다. 내년이면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다. 임시정부가 남긴 미완의 숙제를 돌아볼 시간이다. 권경률역사칼럼니스트. 서강대학교에서 역사학을 공부했다. 칼럼 ‘사극 속 역사인물’을 연재하고 팟캐스트 ‘역사채널 권경률’을 진행한다. 저서로는 『조선을 새롭게 하라』·『조선을 만든 위험한 말들』 등을 출간했으며, 영상물 <시시콜콜 한국사 어워즈>도 선보이고 있다. ]]> Wed, 04 Apr 2018 10:30:16 +0000 16 <![CDATA[무장 독립 투쟁의 중심, 신흥무관학교 ]]> 글 박영규  무장 독립 투쟁의 중심, 신흥무관학교 국난에서 벗어나고자 온 국민이 나섰던 감격의 그날 1919년 3월 1일. 3·1운동이 일어난 지 어언 100주년을 눈앞에 두고 있다. 이를 기념하여 월간 『독립기념관』은 2019년 3월까지 ‘겨레의 함성, 독립의 희망’을 통해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역사를 다루고자 한다. 독립군 기지 설립을 위해 만주로 나아가다신흥무관학교는 신민회가 만주 독립군 기지 건설의 일환으로 만든 군사학교다. 이를 위해 이동녕·이회영·장유순·이관식 등을 만주에 파견하여 답사한 끝에 1910년 7월, 남만주 지역의 봉천성 유하현 삼원보 추가가에 부지를 확정하였다. 이후 서울로 돌아온 그들은 가족들을 이끌고 탈출을 시도했다.먼저 이회영은 자신의 형제들과 함께 가산을 모두 정리하여 자금을 확보한 후 60여 명의 가족과 친척을 대동하고 만주로의 대탈출을 감행했다.이외에도 이상룡·김창환·이동녕·여준·이탁 등 각 도의 신민회 대표들도 가족을 거느리고 삼원보로 이주했다. 그리고 1911년 4월, 3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삼원보 고산자에서 군중대회를 열고 독립 기지 건설을 결의함과 동시에 다음과 같은 5가지 원칙을 세웠다. 첫째, 민단적 자치기관의 성격을 띤 경학사를 조직할 것.둘째, 전투적인 도의에 입각한 질서와 풍기를 확립할 것.셋째, 개농주의(모두 농사를 짓는다)에 입각한 생계 방도를 세울 것.넷째, 학교를 설립, 주경야독의 신념을 고취할 것.다섯째, 기성 군인과 군관을 재훈련하여 기간 간부로 삼고, 애국 청년을 수용해 국가의 동량 인재를 육성할 것.  alt신흥무관학교가 설립된 만주 유하현 삼원보alt유하현 삼원보 추가가 신흥강습소 터   신흥무관학교 설립의 토대를 다지다결의 직후 신민회는 ‘경학사’를 조직하고, 사장에 이철영, 부사장에 이상룡, 서무에 김동삼과 이원일, 학문에 이광과 여준, 재무에 이휘림과 김자순, 조사에 황만영과 박건, 조직에 주진수와 김창무, 외무에 송덕규와 정선백을 선임했다. 경학사는 외면적으로는 농사를 짓고 교육하는 회사 조직처럼 보였으나 실제로는 신민회의 해외 정치조직 역할을 담당했다. 또한 부설기관으로 신흥강습소를 설립하여 인재 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소장에는 이동녕이 선입되었고·교관은 대한제국 무관학교 출신인 김창환·남상복·이장녕·이세영·이관직 등이 맡았으며, 개교 첫 해에 40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하는 성과를 내기도 했다. 이후 통화현 제6구 합니하로 이전하게 되었는데, 삼원보가 너무 번잡하여 이목이 집중된다는 것이 이유였다. 새 부지비용은 이회영의 형 이석영이 전답 6,000석을 팔아 부담하였다.한편, 경학사 운영은 원만치 못했다. 개농주의에 따라 주민 전체가 농토를 개간했지만 수차례에 걸친 서리로 인해 큰 피해를 입게 되었고, 이는 곧 운영난으로 이어졌다. 이에 신민회는 경학사를 해체하고 새로운 조직인 부민단을 창설했다. 이는 경학사보다 더욱 정치적인 기관으로, 조직을 중앙과 지방으로 나누고, 각 지역을 10호·100호·1000호 단위로 나눠 패·구·지방으로 구분하였다. 패에는 패장(牌長) 또는 십가장(十家長), 구에는 백가장(百家長), 지방에는 천가장(千家長)을 각 1명씩 두었다. 이후 부민단은 부민회로 이름을 변경하고 조직을 확대하였는데, 그 특징은 대표자대회에서 결의한 내용들을 통해 파악해 볼 수 있다. 첫째, 부민단을 정부의 기능을 가진 보다 넓은 범위를 의미하는 부민회로 고칠 것.둘째, 동포간의 소송 사건을 담당할 검찰과 사판제도를 둘 것.셋째, 각 지방의 교육 기관은 해당 지방의 능력에 맡기고 군사 간부 양성 기구인 신흥학교의 경비는 일체 본관에서 책임질 것.넷째, 흉작과 인명 손실을 극복하고 조국 광복의 달성에 매진할 것. 한편 1913년 5월 신흥중학교로 개칭한 신흥강습소는 중학반과 군사반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중학반은 폐지하여 지방중학에 인계하고 군사반만 유지하였다. 이후 신흥중학교는 1919년 5월3일에 신흥무관학교로 개명되면서 본격적인 무관 양성기관으로 자리매김 했다. 이후 일본 육사 출신 지청천을 비롯하여 윈난 사관학교 출신 이범석 등이 교관으로 재직하면서 학교의 명성은 점점 올라갔다. 하지만 신흥무관학교의 유지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학교 설립 이후 2년간 지속된 대흉작으로 재정난을 겪어야 했고, 학생들 사이에 출신 지역을 바탕으로 한 갈등이 심화되어 피살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또한 마적들의 습격으로 교감을 맡고 있던 윤기섭을 비롯하여 교관과 학생들이 납치당하는 등 악재가 이어졌고 1920년 8월, 끝내 폐교 사태를 맞이하고 말았다.비록 신흥무관학교는 사라졌지만, 그간 이 학교를 졸업한 학생 2,000여 명은 항일 무장 투쟁의 선봉에 섰다. 청산리전투와 봉오동전투의 핵심들이 모두 신흥무관학교 출신이었고 김좌진의 북로군정서,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서간도 지역의 독립무장단체 서로군정서 등에도 상당수의 출신들이 포진하고 있었다.  alt신흥무관학교 학생들이 백서농장에서 일하는 모습alt1919년 신흥무관학교 교관이었던 지청천과 이범석   이회영 독립운동의 주춧돌이 되다1932년 11월 18일, <만주일보>에 수상한 노인이 중국 다롄의 수상경찰서에서 목을 매어 사망했다는 기사가 실렸다. 세간에서는 그가 이회영이라는 소문이 돌았고, 이 기사를 접한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는 그 노인을 독립운동의 중대 인물이라고 보도했다. 경찰서는 그 사실을 부인했지만 신문들의 추측대로 그 노인은 바로 이회영이었다. 또한 자살한 것이 아니라 고문에 의해 희생된 것이었다. 우당 이회영, 독립운동의 대부였고, 독립운동의 주춧돌을 놓았던 그는 이항복의 후손으로 조선 선비의 기개를 널리 떨친 선각이었다.청년 시절,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에 참여한 이회영은 을사늑약 이후에는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기 위해 만주에 서전서숙을 세워 무력 항쟁의 기반을 다지기도 했다. 이후 신민회에 가담하여 김구·이동녕·양기탁·이동휘 등과 함께 만주에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할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1910년 한일합병이 이뤄지자, 형제들과 가족 60여 명과 함께 만주로 망명하여 무장독립운동의 중심이 된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했다.하지만 이회영은 임시정부 수립부터는 동생 이시영 등과 다른 길을 택했다. 3·1운동 이후 이시영·김구·안창호 등이 주축이 되어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세우고자 했을 때, 이회영은 권력 투쟁으로 임시정부가 제대로 꾸려지지 않을 것을 염려하며 반대했다. 예상대로 계파간의 알력과 갈등으로 인한 권력 투쟁으로 몸살을 앓았다. 그때마다 이회영은 자신과 뜻을 같이했던 신채호와 함께 진영의 화합을 위해 임시정부의 조정자 역할을 자처했다. 그럼에도 내부의 투쟁이 치열해져 조직이 사분오열되자 이회영은 임시정부와의 결별을 선택했다.이후 그는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을 결성하여 활동하였다. 아나키스트로서의 활동은 더욱 가속화되었는데, 1928년에는 아시아 각국의 아나키스트들의 연합체인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에 한국의 독립과 무정부주의 운동 지원을 호소하기도 했다.한편 비교적 안전지대였던 상하이 조계 지역에서 활동을 이어가던 이회영은 1932년 11월, 거점 확보와 관동군 사령관 무토 암살을 위해 60대의 노구를 이끌고 만주행을 감행했다. 하지만 그의 잠입은 상하이에서 일본의 밀정 노릇을 하고 있던 연충렬과 이규서에 의해 다롄 경찰에 보고된 상태였다. 그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던 이회영은 일제의 경찰들에게 체포되어 모진 고문 끝에 죽음에 이르고 말았다.  alt 우당 이회영   이회영은 민족주의자이자 동시에 인본주의자였다. 스스로 집안의 노비를 해방하여 동등하게 대우했고, 독립을 이루되 만인이 평등하고 폭력적인 정부의 지배를 받지 않는 세상을 꿈꾸었다. 따라서 그가 택한 무정부주의자의 삶은 곧 개인의 자유를 억압받지 않는 세상을 꿈꾼, 이상주의에 대한 표현이었던 것이다.  박영규1996년 『한 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을 내면서 저술활동을 시작하여. 1998년 중편소설 『식물도감 만드는 시간』으로 문예중앙신인상을 수상하면서 소설가로 등단했다. 문학, 철학, 역사 분야에 걸쳐 저술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대표적인 역사서로는 『한 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 『한 권으로 읽는 일제강점실록』 등이 있다. ]]> Wed, 04 Apr 2018 10:25:51 +0000 16 <![CDATA[자유의 여신은 민중들을 어디로 이끄는가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 글 고종환 아주대학교 외래교수  자유의 여신은 민중들을 어디로 이끄는가<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루브르박물관에서 가장 많은 관람객의 시선을 끄는 두 개의 그림이 있다. 바로 <모나리자>와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이다. 프랑스에서는 지폐와 우표의 도안으로 사용될 만큼 ‘자유의 여신’이 차지하는 위상은 대단하다. 영국으로부터 프랑스를 구한 잔 다르크가 보수를 대표하는 여인이라면, 자유의 여신은 진보를 대신한다. 그래서 프랑스 국민에게 혁명을 이끄는 이 여인의 모습은 익숙하고 또 상징적이다. alt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1830, 외젠 들라크루아(Eugène Delacroix), 루브르박물관)   프랑스 대혁명을 묘사한 그림이 아니다?<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을 두고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부분이 있다. 바로 그림이 프랑스 대혁명을 묘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전면에 있는 자유의 여신이 프랑스를 상징하는 삼색기를 들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바로잡자면 1830년 7월 혁명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 혁명은 1830년 7월 28일부터 30일까지 3일 동안 파리에서 일어났던 혁명으로, 단 3일뿐이지만 천하를 흔들었다하여 ‘영광의 3일’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1824년 루이 18세에 이어 왕위에 오른 샤를 10세는 언론과 선거권을 제한하는 칙령을 발표하는 등 다시 왕정 시대로 돌아가려는 왕정복고를 시도한다. 1830년 5월 총선거에서 이를 지지하지 않는 반대세력이 대거 의회에 진출하게 되지만 국왕은 의회를 해체하고 재선거를 실시한다. 하지만 연이은 재선거에서 조차 같은 결과가 나오자 다양한 방법으로 반대파들을 탄압하기에 이른다. 이에 맞서 일어난 혁명이 ‘7월 혁명’이다. 부르주아·노동자·학생 등 많은 프랑스 시민들이 혁명의 대열에 동참했다. 특히 7월 28일부터 30일까지의 기간은 혁명이 최고조에 달했던 시기로 앞서 말한 영광의 3일에 해당한다.  민중들은 어디로 향하는가?  낭만주의 작가들은 특정 사건에 화가 개인의 감정과 상상력을 첨가하여 그렸는데, 들라크루아의 작품인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에서도 그 특징이 잘 드러나 있다. 즉 혁명의 정신과 대의에 동의하는 뜻을 담아 그림으로써 7월 혁명을 기리고자 했다.그림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삼색기를 높이든 자유의 여신이 민중들을 이끌고 어딘가로 가고 있는 모습이다. 자유의 여신과 민중들은 어디로 가려는 것일까? 또 자유의 여신이 민중을 이끄는 곳은 어디일까? 그림을 자세히 보면 어린 소년 옆에 나무기둥이 있다. 샤를 10세의 군인들은 노동자와 시민들이 왕궁으로 쳐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노트르담 성당 부근과 파리 중심인 마레 지역에 집중적으로 바리케이드를 설치했는데, 그림 속 나무기둥은 바로 바리케이드를 의미하며, 동시에 무너져가는 샤를 10세 정부를 상징한다.시민들의 발밑에는 바리케이드와 함께 화려한 복장을 한 사람도 보인다. 이들은 샤를 10세와 그의 왕정복고를 지지하던 기득권, 즉 귀족을 의미한다. 마찬가지로 귀족을 밟고 진격한다는 것은 낡은 봉건체제, 혹은 왕정복고의 종말을 뜻한다.비록 들라크루아는 혁명의 일선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자유의 여신과 소년이 민중을 이끌고 왕궁 앞 바리케이드까지 인도하는 그림을 통해 시민군의 승리를 염원했다. 그래서 그림의 원제는 <바리케이드로 민중을 이끄는 자유>였다.들라크루아는 낭만주의의 대가답게 혁명의 상황에 자신의 상상력을 덧붙여 인상적인 장면으로 재탄생 시켰다. 이에 관한 내용은 그가 형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엿볼 수 있다. “나는 근대적 주제인 바리케이드를 그리기 시작했다. 비록 내가 부당한 정권에 맞서 직접 싸우고 승리하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국가를 위해서 그릴 것이다.”  alt샤를 10세(1825, 프랑수아 제라르 (François Baron Pascal Simon Gérard), 프라도 미술관) 고종환한국 프랑스문화학회의 재무이사이자, 아주대학교와 경상대학교 외래교수. 프랑스 문화와 예술, 서양연극사, 광고이미지 등을 강의하고 있다. 대표 저서로는 『한권으로 읽는 연극의역사』와 『오페라로 배우는 역사와 문화』·『글로벌 다문화교육』이 있다. ]]> Wed, 04 Apr 2018 10:33:13 +0000 16 <![CDATA[한국 명란과 일본 멘타이코의 뿌리 ]]> 글 윤덕노 음식문화평론가  한국 명란과 일본 멘타이코의 뿌리 우리가 즐겨먹는 파스타 메뉴를 살펴보면 명란을 주재료로 한 스파게티를 심심치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성게 알이나 철갑상어 알로 만든 정통 스파게티 못지않게 품격 있는 맛을 자랑하는 명란 스파게티. 누가 이런 기발한 발상을 했을까? 일본인의 명란 사랑뜻밖에도 명란 스파게티가 개발된 곳은 이탈리아나 명란젓의 본고장인 우리나라도 아닌 일본이다. 1967년 도쿄 중심가 시부야의 스파게티 전문점에서 처음 판매했는데, 일본인 입맛에 맞았는지 젊은이들 사이에서 순식간에 인기를 얻었다. 그러다 최근 다시 주목받기 시작하면서 우리나라에 전해졌다.사실, 명란 스파게티는 일본 NHK 교향악단 단원의 향수 때문에 생겨난 요리다. 어느 날 이 음악가는 자신이 이탈리아 유학 시절에 먹던 캐비아 스파게티가 그리워졌다. 당시 일본에는 값비싼 캐비아를 가지고 만든 스파게티가 없었기에 직접 캐비아 통조림을 사서 단골 전문점을 찾아가 주인한테 특별히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다행히 현지만큼은 못해도 향수를 달래줄 정도는 됐던 모양이다. 이후로도 이따금 식당을 찾아 캐비아 스파게티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는데, 단골손님이니 들어주기는 했지만 레스토랑 주인도 유럽에서도 3대 진미로 꼽는 식품인 캐비아가 무척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만들게 된 것이 바로 명란 스파게티다.캐비아 대신 명란을 넣은 스파게티를 맛본 음악가도 만족했고, 시험 삼아 먹어 본 고객들에게서도 호평을 받았다. 이후 레스토랑 주인은 음악가의 양해를 얻어 아예 메뉴로 개발했다. 그 결과 일본에서 유행했고 이어 지금은 우리를 비롯한 다른 나라에서도 인기를 얻고 있다. 한국을 제외한 다른 곳에서는 명란을 뜻하는 일본말인 멘타이코(明太子) 스파게티 내지는 도쿄 스타일 캐비아 스파게티(tokyo style fish roe pasta)로 불리며 대표적인 일본식 스파게티가 됐다.그런데 스파게티와 명란젓을 접목시킨 것을 보면 일본 사람도 우리처럼 명란젓을 꽤나 좋아하는 모양이다. 통계를 보면 일본의 명란젓 소비량은 연간 약 3만 톤으로 1인당 일 년에 12번 정도는 명란젓을 먹는다고 한다. 전체 인구로 계산한 숫자니까 성인만 놓고 보면 최소 한 달에 두세 번 내지 서너 번은 명란젓을 먹는다는 계산이 나오니 어떻게 보면 한국인보다 더 많이 명란젓을 소비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일본 사람들 언제부터 이렇게 명란젓을 즐겨 먹게 되었을까?  일제 강점기 명란 맛을 안 일본일본 사람들은 원래 전통적으로 명란을 먹지 않았다. 과거 일본에서는 명태가 잡히지 않았기 때문인데 그래서인지 명태와 비슷한 대구 알은 먹었어도 명태 알은 먹지 않았다.일본인이 명란을 먹게 된 것은 일제강점기부터다. 히구치 이즈하라라는 순사가 우리나라 사람이 명란젓 먹는 것을 보고 일본으로 가져가 상품으로 개발했다. 명태도 아닌 알만 연간 1,500t을 가져갔다고 하니 일제 강점기의 강압적인 분위기와 막강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조선의 명란을 거의 싹쓸이해 갔던 것으로 보인다.일본의 명란 수입은 2차 대전 패망 직후 한때 중단됐다가 1949년 카와하라 토시오라는 사업가가 조선 땅에서 먹던 명란 맛을 잊지 못해 후쿠오카에서 다시 명란을 수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60년대 신칸센이 생기면서 백화점에 명란을 선물용으로 납품하기 시작했고, 일본 전역으로 퍼져나가게 되었다. 이것이 후쿠오카 명란이 유명해지게 된 배경이다. 그 결과 명란은 한국어 이름보다 일본어인 멘타이코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뿐만 아니라 명란 스파게티는 물론 명란젓에 마요네즈를 섞어 캐비아처럼 빵에 발라 먹는 명란 크림, 샐러드에 뿌리는 명란 후레이크 등 명란을 활용해 개발한 다양한 일본 상품들이 세계로 뻗어 나가고 있다. 심지어 이제는 우리나라에서도 명란 대신 멘타이코 라는 이름으로 백화점 진열대의 한 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했을 정도다. 멘다이코로 둔갑한 명란을 먹으며 드는 생각 하나. 그동안 우리는 남이 가진 것만 귀하게 여기고 부러워했을 뿐 정작 우리가 가진 소중한 것을 가꾸고 발전시킬 생각은 못 해온 게 아닐까? 김치나 인삼 등 우리의 것들이 우후죽순 다른 이름으로 팔려가고 있는 요즘. 우리가 가진 것들에 대해 한 번쯤 되짚어보는 건 어떨까? 어쩌면 수많은 문제의 답은 우리 안에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윤덕노음식문화평론가. 1984년 매일경제신문사에 입사해 20여 년간 기자 생활을 하면서 특파원 활동·출장·연수 등으로 미국과 중국을 비롯한 다양한 나라에 머물렀다. 음식에 관심이 많아 관련 자료를 수집해온 결과, 음식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주요 저서로는 『음식잡학사전』·『신의 선물 밥』·『붕어빵에도 족보가 있다』 등이 있다. ]]> Wed, 04 Apr 2018 10:36:32 +0000 16 <![CDATA[생명을 깨우는 봄의 대지 ]]> 글·사진 김초록 여행칼럼니스트  생명을 깨우는 봄의 대지-경기도 안산- 깊어가는 봄, 경기도 안산으로 간다. 자연·문화·역사·공업의 도시인 안산은 크게 시내권과 대부도권으로 나뉘어 있다. 대부도는 방조제 건설과 함께 뭍처럼 왕래가 잦은 섬 아닌 섬이 되었다. 이곳의 북쪽에는 황금산(168m)이 솟아 있고 주변으로는 선감도·불탄도·풍도·중육도·미육도·말육도 등 17개의 유·무인도를 거느리고 있다.안산의 얼굴, 대부도와 시화호시흥 오이도와 대부도 방아머리를 잇는 시화방조제는 총 연장 12.7km의 웅장함을 자랑한다. 건설 계획 수립 당시, 그 거대한 규모로 인해 세간의 이목이 집중되었던 시화방조제는 여의도 면적의 60배에 달하는 1만 7,300ha의 토지와 1억 8,000만 톤의 넓은 호수를 만들어냈다. 방조제를 따라 들어선 길 옆으로는 자전거전용도로가 나 있다. 바람에 묻어오는 갯내음을 맡으며 힘차게 페달을 밟아보자. 차선과 분리되어 있어 안심하고 라이딩을 즐길 수 있다. 한쪽에는 휴게소·공원·달전망대 등 다양한 매력을 갖춘 시화호조력발전소도 들어서 있다. 이름처럼 달을 닮은 전망대는 시화방조제와 탁 트인 서해 풍경을 한눈에 감상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다. 유리 바닥으로 된 높이 75m의 관람로 일부 구간은 아찔한 재미를 더해준다. 방조제의 끝 무렵에서 서쪽길을 따라 올라가면 방아머리 선착장이 나온다. 이곳에선 바다낚시도 즐길 수 있는데, 주로 망둥어나 새끼 장어가 잡힌다. 남측 간척지에 펼쳐진 바다향기테마파크에서 봄 향기를 맡아보는 것도 좋다. 여의도공원 면적의 5배에 달하는 이곳엔 연푸른 갈대와 꽃·습지·수로·정자 등이 어우러져 계절의 정취를 제대로 즐길 수 있다.   테마파크를 둘러본 후 다시 대부해솔길을 따라 구봉도로 가보자. 아름다운 봉우리가 아홉 개 있다 하여 구봉도라 이름 붙은 이 섬은 대부도에 있는 7개의 해솔길 중 제1코스 구간이다. 방아머리 음식거리를 거쳐 섬으로 들어서면 수채화 같은 풍경이 펼쳐진다. 이곳에서는 서해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일몰과 노을을 볼 수 있어, 섬 특유의 낭만과 서정을 만끽할 수 있다. 좌대낚시터로 붐비는 들머리 저수지를 지나 잘 단장된 산책로를 따라 걷다보면 애달픈 사연을 지닌 선돌과 물맛 좋기로 이름난 천영물약수터 그리고 80여년 된 소나무가 숲을 이룬 구봉솔밭이 여행자들을 반긴다. 섬 끝머리에 있는 낙조전망대는 하나의 멋진 예술작품이다. 빨간 등대와 지는 해를 형상화한 조형물 앞에 서면 가슴이 탁 트이는 느낌을 받게 될 것이다.   alt방조제에서 바라본 시화호alt구봉도 낙조전망대에서 본 일몰alt대부 바다향기테마파크  하루가 짧은 체험 가득한 섬구봉도에서 나와 대부도 남쪽에 위치한 탄도항으로 발길을 옮겨보자.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누에섬은 안산 9경의 하나로 하루 2번, 4시간씩 바닷길이 열려 들어갈 수 있다. 길게 이어진 바닷길 양쪽은 천혜의 개펄로 바지락·모시조개 등 해산물이 지천이다. 국내 최초로 해상에 설치한 풍력발전기는 또 다른 볼거리다. 이 발전기는 연간 207만 4,974kW의 전기를 생산하는데, 이는 500여 가구가 1년간 사용할 수있는 양이다. 이밖에 지상 3층 규모의 전망대도 있다. 이곳에 올라 바라보는 주변 경치는 그림처럼 아름답다. 탄도항 입구 안산어촌민속박물관은 서해안 갯벌과 어촌 어업에 관한 자료 등이 전시돼 있어 아이들의 배움터로 그만이다. 대부도는 이색체험을 즐길 수 있는 여행지로도 유명하다. 대부남동에 들어선 베르아델승마클럽은 조선시대부터 말을 키우고 조련하던 곳이다. 110개의 마방과 마장마 트랙을 갖추었을 뿐 아니라 여타의 제반시설 또한 구비되어 있어 숙식을 하면서 승마를 배울 수 있다. 인근에는 100년 역사의 동주염전도 있다. 일제강점기 때부터 천일염을 생산해온 곳으로, 이곳에서 생산되는 이른바 ‘깸파리소금’은 미네랄 함량이 월등하고 염화나트륨 함유량이 극히 적어 단맛이 감돌 정도라고 한다. 유리미술관과 야외 유리조각공원·유리공예체험장·작가 작업실·생태섬·맥아트미술관·유리공예 시연장 등을 갖춘 ‘유리섬’도 빼놓을 수 없는 관광지다. 세계 유리공예의 메카인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무라노섬을 꿈꾸며 만든 이곳에서는 공예전문가와 함께 유리를 가지고 다양한 소품을 만들어 볼 수 있다. 시연장에선 장인들이 하루 3번(토요일 4번), 30분씩 유리공예 제작 과정을 보여준다. 이밖에 국내외 종이 작가들의 작품을 직접 볼 수 있는 종이미술관과 고급 와인을 직접 빚고 전시, 판매하는 그랑꼬또 와이너리(그린영농조합)도 인기다.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자연학습장도 준비돼 있다. 시화호 지구에 만들어진 갈대습지공원은 살아있는 생태체험장이다. 오염 물질을 걸러내는 갈대·줄풀·부들·고랭이 같은 수생 식물과 조류와 곤충·야생동물이 서식하는 인공 생태공원으로 꾸며져 있다. 한편 안산은 외국인이 가장 많이 거주하는 지역이기도 하다. 한국 속 작은 세계, 안산 다문화특구는 그렇게 생겨났다. 원곡동 다문화거리에는 외국인만을 위한 외국인주민센터 이외에도 은행이름을 한자로 새로 다는 등, 새로운 문화에 발맞춰 변화하고 있다. 세계 각국의 다양한 음식을 맛볼 수 있는 음식거리는 연일 복작거린다. 새로운 안산 9경 중 하나로 주목받고 있을 정도로 다양한 눈요깃거리가 가득하다.  alt동주염전에서 소금을 긁어모으는 아이들alt알록달록한 유리섬 풍경alt외국어 간판이 즐비한 안산 원곡동 다문화거리  독립운동의 거센 진원지, 안산안산에 있는 상록수공원에서는 독립운동의 자취를 살펴볼 수 있다. 작가 심훈이 쓴 소설 ‘상록수’의 실제 모델인 최용신이 아이들을 가르치며 독립운동을 했던 곳으로 유명하다.  심훈은 최용신과 관련된 내용을 자세히 알아보기 위해 이곳을 세 차례 찾았다고 한다. 행정구역상 안산시 단원구 본오동으로 안산 사람들에게는 커다란 자부심을 깆게 하는 상징적인 장소다. 지하철 상록수역과 행정관청인 상록구가 생긴 것만 봐도 이를 짐작케 한다. 공원 야트막한 동산에 들어선 최용신기념관(옛 샘골강습소 자리)은 일제강점기 시절, 농촌계몽운동을 펼쳤던 여성 독립운동가 최용신을 기리기 위해 건립됐다. 내부에는 상설전시실과 강당·교육실·체험전시실을 갖추고 있다. 그 옆으로는 그녀가 농촌 복음화를 위해 야학을 운영했던 샘골교회와 최용신의 묘소가 자리하고 있다. 최용신은 함경남도 태생으로 가난과 무지로 일제의 핍박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농민들을 깨우치기 위해 협성신학교를 중퇴하고 이곳 샘골로 들어와 문맹퇴치와 애국심을 심어주는 계몽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정부에서는 그녀의 공훈을 기려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또한 안산은 1920년을 전후해 일제의 식민 통치에 대한 저항이 강하게 일어난 곳이다. 최용신을 필두로 유익수·윤병소·홍순칠·윤동욱·김병권·이봉문 등이 선두에 서서 태극기를 휘두르며 일제에 항거했다. 일제에 의해 저질러진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은 안산 지역의 의병들을 한데 모으는 기폭제가 됐다. 그 당시 의병 활동에 참가한 지역 주민이 약 4,000여 명에 이르렀다.와동체육공원에서는 3·1운동을 주도한 와리마을의 대지주 홍순칠의 자취를 확인 할 수 있다. 그는 42세의 나이에 독립운동에 참가한다. 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촉발됐다는 소식을 들은 홍순칠은 이웃사람들을 불러 모아 자신의 사랑방에서 태극기 3,000여 개를 만들어 대규모 시위에 나섰다. 하지만 이 일로 일제에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로 끌려가 6개월간 옥고를 치러야 했다. 출옥 후 고문 후유증으로 13년 동안 병고를 치르다 향년 55세 일기로 숨을 거뒀다. 와동체육공원에는 그의 자취가 담긴 공적비가 세워져 있다. alt단층 한옥양식의 최용신기념관alt최용신이 야학을 운영했던 샘골교회alt와동체육공원에 설립된 홍순칠 공적비]]> Mon, 30 Apr 2018 14:51:49 +0000 17 <![CDATA[방정환의 일생과 함께 살펴보는 어린이날 ]]> alt]]> Mon, 30 Apr 2018 17:57:18 +0000 17 <![CDATA[가족이 함께한 독립운동, 명문가를 이루다 ]]> 글 학예실  가족이 함께한 독립운동, 명문가를 이루다  독립기념관은 국가보훈처·광복회와 공동으로 신건식과 오건해 부부를 2018년 5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신건식과 오건해는 부부 독립운동가였을 뿐 아니라 딸 신순호와 사위 박영준, 형 신규식과 사돈 박찬익까지 모두 독립운동을 하여 조국의 독립에 크게 기여하였다. alt독립운동 명문가의 뜻을 이어가다신건식은 청주 상당산성 동쪽에 위치한 고령 신씨, 일명 산동 신씨 문중에서 태어났다. 이들은 독립유공자 13명을 배출한 명문가로, 산동삼재(山東三才)라 일컫는 신규식·신채호·신백우가 힘을 합쳐 문중 청년들의 개화를 위해 노력을 다하였다. 이에 신건식 또한 형 신규식이 세운 덕남사숙에서 공부하였고, 이후 상경하여 육군무관학교와 한성외국어학교를 졸업하였다.1911년에는 형 신규식과 함께 상하이로 망명하여, 항저우에 있는 저장성 의약전문학교에서 수학하였다. 1년 뒤 상하이로 돌아온 신건식은 신규식과 박은식 등과 조직한 독립운동 단체 동제사에 참여하여 신환(申桓)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였다. 1928년에는 난징 중앙육군군관학교 외과주임으로 근무하면서 인근에 거주하던 한인 동포와 독립운동가들의 숙식을 지원하였다.한편 1939년 임시의정원회의에서 신건식은 충청도의원으로 선출되며 본격적으로 임시정부 활동에 박차를 가하였다. 이듬해인 1940년 9월에는 한국광복군 창설 직후 중국군사위원회에서 한국광복군의 자율적인 활동을 제한하던 ‘한국광복군행동 9개 준승’ 폐지를 여러 차례 요구하여, 임시정부와 한국광복군의 자주성 회복을 위해 노력하였고, 1943년에는 임시정부 재무부 차장을 맡아 예산과 재정분야 전문가로 활동하였다. 임시정부 요인을 보살피다오건해는 1894년 오우석과 홍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청주 인근 현도면 부근이 그녀의 친정으로 알려져 있고, 그러던 중 인접 지역에 거주하던 신건식과 혼인한 것으로 추정한다. 신건식은 단신으로 상하이로 망명하였는데, 딸 신순호에 의하면 4세가 되던 해에 중국으로 건너가 온 가족이 함께 살았다고 한다.한편 오건해는 임시정부 안살림과 독립운동가 뒷바라지에 정성을 다하였다. 1938년 5월 김구가 창사에서 총격을 당한 ‘남목청사건’때에는 입원 이후부터 회복할 때까지 봉양을 맡았다. 또한 1940년 화평로 청사와 1945년 연화지 청사가 폭격을 당해 사돈인 박찬익 등 많은 독립운동가가 부상을 당했을 때에도 오건해는 딸 신순호와 함께 이들의 회복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이밖에도 1940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독립운동 지원을 위한 한국혁명여성동맹이 창립되자 이에 참가하였고, 1942년부터 한국독립당 당원으로도 활동하였다. 이처럼 오건해는 단지 뒷바라지에 그치지 않고, 독립운동 단체에 적극 참여하며 남편 신건식과 함께 독립을 위해 헌신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부부의 공적을 기려 신건식에게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오건해에게는 2017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alt신건식과 오건해 가족사진(왼쪽부터 오건해, 신순호. 신건식)alt동제사 활동 시절 신규식과 신건식(왼쪽부터 신성모, 신규식, 신건식) alt대한민국 임시정원 제34회 기념사진(1942년)alt한국혁명여성동맹 창립 기념사진(1940년) ]]> Wed, 02 May 2018 10:06:13 +0000 17 <![CDATA[우산을 쓰면 몰매를 맞는다? ]]> 글 신현배 역사칼럼리스트  우산을 쓰면 몰매를 맞는다?  우산은 본래 햇볕을 가리는 데 쓰는 양산에서 비롯되었다. 우산이라는 뜻의 단어 ‘엄브렐러’가 그늘을 의미하는 라틴어 ‘움브라’에서 비롯되었다는 것만 보아도 잘 알 수 있다. 전 세계를 아우른 우산의 역사최초의 우산은 오늘날 이라크에 속하는 아카드에서 BC 2334~2279년경인 사르곤 왕 때에 발명되었다. 그의 승전비에는 전쟁터로 나가는 왕의 머리 위에 시종이 커다란 우산을 씌워 주는 장면이 새겨져 있다. 이때의 우산은 햇볕이 뜨거운 고대 중동에서 강렬한 태양으로부터 고귀한 왕의 몸을 보호해 주기 위해 고안된 것이다. 고대 아시리아나 이집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중국에서는 기원전 6세기경 우산이 발명되었다. 놀랍게도 오늘날의 우산처럼 접고 펼 수 있는 금속제 양산이었다. 게다가 양산의 기능을 넘어 진짜 비를 막기 위해 기름 먹인 종이에 대나무 살을 대어 만든 우산도 있었다.  유럽에서 비를 피하기 위해 우산이 처음 사용된 것은 18세기경부터였다. 영국의 이름난 여행가 조나스 한웨이가 페르시아에 갔다가 중국에서 전래된 우산을 처음 본 것이다. 그는 이 우산을 영국으로 가져와 우산을 쓴 채 런던 거리를 누비고 다녔다. 그러자 우산을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은 조나스 한웨이를 미친 사람이라고 손가락질했다. 그럼에도 아랑곳없이 해가 뜨나 비가 오나 꼭 우산을 쓰고 다녔다. 마부들은 그를 눈엣가시처럼 여겼다. 사람들은 비가 오면 꼭 마차를 부르는데, 우산이 널리 보급되면 자신들의 생계에 큰 위협이 되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비 오는 날 조나스 한웨이를 길에서 발견하면 일부러 그에게 접근해 흙탕물을 튀겼다고 한다. 이후로도 그는 30년 동안 꿋꿋하게 쓰고 다녔고 그제야 사람들은 우산을 사는 것이 마차를 부르는 것보다 더 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후 19세기 중엽에 와서 신사가 우산을 쓰고 다니는 것이 크게 유행할 만큼 널리 보급되었다. 오늘날과 같은 박쥐 모양의 우산을 만든 것도 조나스 한웨이다. 영국에서는 그의 이름을 따서 ‘한웨이즈’라 불렀다.  우산 때문에 매질을 당해야 했던 선교사들우리나라 개화기 때 있었던 일이다. 오랫동안 가물다가 비가 내린 어느 날이었다. 장대같이 굵은 비는 마른 땅을 적셔주고 있었고, 여느 때와 다름없이 미국인 선교사는 우산을 쓰고 거리로 나섰다. 그러던 중 그는 파랗게 질려 걸음을 멈추었다. 험상궂은 표정의 남자가 자기 앞을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이내 선교사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며 벼락처럼 고함을 질렀다. 고함 소리를 듣고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들은 선교사가 쓴 우산을 보더니 이내 노기 띤 얼굴로 저마다 한마디씩 덧붙였다. “당신이 사람이야? 하늘이 가뭄으로 고생하는 백성들을 불쌍하게 생각해서 오랜만에 귀한 비를 내려주시는데, 하늘이 주는 복을 가리고 있어? 당신 같은 인간은 혼 좀 나야 해!”“하늘이 주는 복을 일부러 가려?”“사람의 탈을 쓰고 그런 몹쓸 짓을 하다니. 천벌을 받고 싶어?”“아무리 외국인이라도 너무하잖아. 매를 맞아야 정신을 차리겠어?”“어이쿠! 왜들 이러십니까? 때, 때리지 말고 말로 하세요.” 선교사는 서투른 조선말로 떠듬떠듬 말했지만 사람들은 듣지 않았다. 오랜 가뭄 끝에 비가 오는 날 우산을 썼다는 죄로 몰매를 맞은 것이다. 이튿날 이 일은 <독립신문>에 실렸다. 이런 일은 계속 일어났고 자주 기사로 실렸다. 그 뒤부터 선교사들은 한동안 비가 오는 날에는 우산을 쓰고 외출하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 우리나라 사람들은 오랜 가뭄 끝에 하늘에서 내린 비를 신성하게 여겼다. 그 비를 우산으로 막는 것은 하늘에 대한 예의가 아닐뿐더러, 내려주는 복을 막는다고 생각했다. 우리 민족은 오랜 옛날부터 농사를 지어 왔기 때문에 하늘의 뜻에 거스르지 않고 순종하며 살기를 바랐다. 그렇다고 비를 몽땅 맞은 것도 아니었다. 도롱이를 입거나 삿갓을 써서 최소한으로 비를 피하며 농사일을 이어갔다.  우산의 대중화에 앞장 선 여학생들한편 우리나라에서 우산이 대중화된 것은 여학생들 때문이었다고 한다. 예로부터 우리나라 여성들은 외출할 때 쓰개치마를 머리에 썼다. 그런데 1911년 배화학당에서는 여학생들에게 이를 사용하지 못하게 하자 많은 여학생들이 얼굴을 드러낸 채 다닐 수 없다며 학교를 그만두었다. 이에 학교에서는 여학생들에게 검정 우산을 나누어 주어, 얼굴을 가리고 다닐 수 있게 해 주었다. 이때 부터 우산은 여학생들은 물론 부녀자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얼굴을 가리는 역할에다가 비가 올 때는 우산으로, 햇볕이 따사로울 때는 양산의 역할까지 해주었기 때문이다.우산 하면 생각나는 일이 하나 있다. 2017년 광복절 아침에 문재인 대통령이 백범 김구의 묘역을 찾았다. 그날 비가 내렸으나 대통령은 우산을 쓰지 않고 헌화와 참배를 진행했다. 그 이유는 독립지사에 대한 예를 갖추기 위해서였다. 현직 대통령이 광복절 기념식 전에 임시정부 요인을 참배한 것은 그날이 처음이었다.  alt조나스 한웨이alt개화기의 우산 쓴 모습   신현배역사와 전통문화에 대해 관심이 많은 역사칼럼리스트. 저서로는 역사 이야기 『엉뚱 별난 한국사』, 『엉뚱 별난 세계사』, 『2000년 서울 이야기』, 『세계사로 배우는 법 이야기』,  전통문화 이야기 『소중한 우리 문화 지식 여행』 시리즈 등이 있다. ]]> Mon, 30 Apr 2018 15:07:24 +0000 17 <![CDATA[여자가 한 사람의 인간으로 자립할 수 있는 방법은? ]]> 글 이성주 역사칼럼니스트  여자가 한 사람의 인간으로자립할 수 있는 방법은?  미투운동·펜스룰 등의 여성주의 운동과 관련된 사건이 광풍처럼 휘몰아치며 대한민국이 들끓었다. 차별과 억압에 눌려왔던 여성들의 눈물과 분노가 봇물 터지듯 쏟아진 얼마간이었다. 역사는 개혁과 반동의 끊임없는 협주다. 여성들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남성들의 볼멘소리가 튀어나왔고, 두 목소리는 이제 불협화음을 넘어 파열음을 내고 있다. 이 파열음이 잘못됐다는 건 아니다. 역사는 언제나 충돌과 파열음을 배경으로 움직인다. 다만, 우리가 기억해야할 한 명의 여성이 있었음을 말하고 싶을 뿐이다. 성적인 자유를 외친 진정한 페미니스트▲독립운동가·페미니스트·언론인 정칠성 ▲1897년 대구 출생 ▲7살에 기녀가 되어 한남권번에서 금죽(錦竹)이라는 기명으로 활동 ▲3·1운동에 참여한 이후 총독부의 눈을 피해 일본으로 유학을 갔다가 사회주의 사상을 접함 ▲귀국 후 나혜석 등과 함께 <신여자지>의 필진으로 활동 ▲1923년 물산장려운동 참여 ▲1925년 일본에서 여성해방을 목적으로 조선여성단체인 ‘삼월회’ 결성 ▲1926년 남편 신철과 이혼 ▲1927년 ‘근우회’ 창설 ▲1929년 광주학생운동에 연루되어 투옥 이후 각종 파업과 시위에 참여했다는 명목으로 체포와 석방을 반복  정칠성의 인생은 한 편의 드라마라 말해도 손색없다. 유년시절 기녀로 키워졌으며, 책을 좋아해 일본 유학까지 갔다왔다. 이후 사회주의 사상에 심취해 여성이라는 이유로 운명처럼 받아들여야 했던 ‘억압’을 타파하겠다고 결심한 후 온몸으로 이를 실천했다. 압권은 알렉산드라 콜론타이(Aleksandra Mikhailovna Kollontai)의 사상을 그대로 받아들여 실천했다는 대목이다. 소련의 정치인이자 페미니스트 운동가이며, 소설가였던 알렉산드라 콜론타이는 ‘사랑과 섹스는 무관하며 사랑 없이도 섹스가 가능하다’라고 주장하며 성욕 자유론·성욕 존중론을 전면에 내세웠다. 정칠성은 이러한 사상을 조선에 소개했다. 아직도 성리학의 뿌리가 남아있던 당시 사회에 파문을 일으켰다. 더 충격적인 건 남편 신철과의 관계이다. 당시 신철은 정칠성의 동지였던 정종명과 동거를 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정칠성은 신철과의 동지적 관계를 유지했다. 결국에는 이혼을 하며 남녀관계는 끝냈지만, 사상적으로 뜻이 잘 맞는 친구이자 동지로서의 관계는 이어갔다. 사르트르와 보부아르의 계약 결혼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각각 프랑스 철학자와 페미니즘의 대모인 두 사람은 무려 50년간 계약 결혼을 유지했는데, 계약 조건 중에는 서로 사랑하고 관계를 지키는 동시에 다른 사람과 사랑에 빠지는 것을 서로 허락한다는 항목이 있었다. 1920년대 이런 관계를 생각하고 실천했다는 것 자체가 파격이다. 한마디로 정칠성은 시대의 이단아였다.엄혹한 시대에 온몸을 내던졌던 신여성그녀의 인생철학과 사상을 단 하나로 정리할 수 있는 게 바로 근우회(槿友會)다. 당시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로 갈라져 있던 독립운동의 주체들이 서로 힘을 합치는 방향으로 의견을 모으면서 여성운동가들 역시 좌우를 초월해 한자리에 모이게 된다. 그렇게 설립된 단체가 바로 근우회다. 정칠성은 주요 멤버로 활동하며 조선 여성의 지위 향상을 도모하기 위해 애썼다. 당시 사회주의 계열 여성운동을 전개하던 이들은 여성의 ‘경제적 자립’을 최우선 목표로 삼았다. 이는 정칠성이 주장한 신여성의 정의와도 맞닿아 있다. “남성과 사회로부터 여자가 한 사람의 인간으로 자립하기 위해선, 여자의 자립심, 자립 의지, 그리고 경제적 독립이 있어야 한다.” 정칠성은 남성우월주의가 당연했던 20세기 초의 조선 땅에서 여성도 한 사람의 인간임을 부르짖고, 그 독립을 위해 해야 할 일을 외쳤으며, 몸소 이를 실천했다. 단순히 성적인 자유를 일탈로 바라보는 주변의 따가운 시선을 무시하고 이에서 비롯되는 정치적인 힘을 바탕으로 남녀평등을 넘어서 결혼과 가정 그리고 가족에게서의 해방까지 생각했다. 그래야만 독립적인 여성으로 완성될 수 있다고 믿었다. 지금 우리 사회에 부는 페미니즘 운동과 여성을 둘러싼 억압과 차별에 대한 개선 움직임은 어쩌면, 1920년대부터 시작된 독립운동가들의 유산을 이어받은 결과일 수도 있다. 지금의 페미니즘이 어떤 식으로 변해갈지 모른다. 다만, 페미니즘이 진정한 양성평등을 목표로 하는 것이라면 정칠성이 말했듯이 여성의 자립심·자립 의지 그리고 경제적 독립이 있어야 가능하다는 걸 말하고 싶다. 여성이 한 명의 주체로서, 이 사회의 구성원으로 살아가는 데 필요한 건 그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다.  이성주시나리오 작가 겸 역사칼럼니스트. 대중과 함께 호흡하는 글쓰기를 목표로 『조선의 민낯』, 『왕들의 부부싸움』과 같은 역사서를 출간한 바 있다. 최근에는 국제정치와 관련된 연구 및 집필에 열중하고 있다. 『전쟁으로 보는 국제정치』 시리즈 1, 2, 3권을 출간 중이다. ]]> Mon, 30 Apr 2018 11:50:16 +0000 17 <![CDATA[봄볕이 드리우는 곳 ]]> 봄볕이 드리우는 곳 봄이 불쑥 고개를 내미는가 싶더니꽃샘추위의 성화에 못 이겨제 자리를 내어 주었습니다.  몇 번의 추위를 더 견딘 뒤에야완연하게 따뜻한 계절이 돌아왔습니다.이제 이른 아침을 밝히는 햇빛도‘봄볕’이라 부름이 어색하지 않습니다.봄볕이 드리우는 곳,웅크렸던 봉오리가 저마다의 꽃잎을 피우고노랗게 바랜 이파리가 초록으로 물들며찬란하게 빛날 내일을 준비합니다. ]]> Mon, 30 Apr 2018 11:06:00 +0000 17 <![CDATA[어린이날에 깃든 독립운동 방정환이 일군 내일의 희망 ]]> 글 권경률 역사칼럼니스트  어린이날에 깃든 독립운동방정환이 일군 내일의 희망   매월 대한민국의 광복과 관련된 핵심사건을 선정하여 그 치열했던 역사의 순간을 재구성하고자 한다. 이번 달에는 독립의 씨를 뿌리고 희망을 일구려 한 어린이날 이야기다. 독립운동가 방정환은 어째서 어린이운동에 헌신했을까? 어린이를 내려다보지 말고 쳐다봐 주시오1923년 5월 1일 서울 종로 천도교 교당으로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예정된 시간이 되자 상기된 표정의 스물다섯 청년, 방정환이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무대로 나아갔다. 아동들의 해맑은 환호성과 함께 교당 안으로 웃음꽃이 활짝 피어났다. 단상에 오른 그는 기뻐하며 이렇게 외쳤다. “여러분! 오늘은 즐거운 날입니다. 지금부터 어린이날 잔치를 시작하겠습니다.” 방정환은 1920년에 발표한 동시 ‘어린이 노래 : 불 켜는 이’에서 처음 ‘어린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어리지만 엄연한 사람’이라는 뜻으로 아동들에게 인격을 부여하고자 했다. 그동안 아이들을 ‘애놈’, ‘새끼’라고 낮춰 부르면서 귀찮게 여기던 세태에 반기를 든 것이다. 이것이 최초의 어린이날 행사를 마련한 이유였다. 어린이날은 한 해 전인 1922년에 제정되었으나 그 취지를 알리기 위해 1년 뒤 잔치를 연 것이다. “어린이를 내려다보지 말고 쳐다봐 주시오. 어린이에게 존댓말을 쓰고 늘 부드럽게 대해 주시오. 어린이를 꾸짖을 때는 성만 내지 말고 자세히 타일러 주시오.” 이 행사를 통해 방정환은 경술국치의 불행한 운명을 내일의 희망인 어린이를 길러내는 일로서 만이 극복해 낼 수 있다고 간절히 호소했다. 10년 뒤를 내다보며 독립의 씨앗을 뿌리고 싹을 키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어린이를 인격적으로 대우하고, 아동들의 부당노동을 철폐하며, 마음껏 놀고 배울 여건을 조성해야 한다고 역설했다.최초의 행사 이후 그의 뜻은 차츰 공감을 얻어나갔다. 제3회 행사는 개별 참석자들뿐 아니라 학교에서 단체로 함께 참여하며 대성황을 이뤘다. 방정환이 작사한 어린이날 노래가 울려 퍼지자 행사장을 가득 메운 아이들은 목이 터져라 따라 불렀다. “기쁘구나! 오늘날 5월 1일은 / 우리들 어린이의 명절날일세 / 복된 목숨 길이 품고 뛰어노는 날 / 오늘이 어린이날!” 행사가 끝나고, 방정환은 행사 참여자들과 함께 거리행진에 나섰다. 아이들은 이리저리 뛰어다니면서 전단을 돌렸다. 무려 12만 장의 전단이 경성 시내에 뿌려지며 열띤 분위기를 자아냈다. 행인들은 손뼉을 치면서 호응했다. 조선인의 마음에 ‘어린이’가 새겨지는 순간이었다.일제강점이라는 엄혹한 이 시기에 방정환은 왜 어린이운동을 펼치게 된 걸까? 1920년대에 우리나라는 한층 정교하고 악랄해진 일제의 강압통치로 인해 좌절감이 팽배하고 있었다. 독립운동가들은 나라 밖에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무장투쟁의 길을 모색했다. 이 때문에 방정환의 어린이운동은 비판에 직면했다. 총칼 들고 맞서도 모자랄 판에 한가롭게 아이들과 놀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가 걸어온 길을 살펴보면 이 어린이운동이 철학과 비전을 갖춘 또 하나의 독립운동이었음을 알 수 있다.  alt방정환alt최초의 어린이날 행사 포스터(1923.05.01) 어린이 인권이 담긴 사랑의 선물, 어린이날1899년 서울에서 태어난 방정환은 신식교육을 받고 자라났다. 그러던 중 사업실패로 집안이  망하는 바람에 학교를 중퇴하고 돈벌이에 나서기도 했지만, 토론 연설 모임인 ‘소년입지회’를 조직하며 불우한 환경 속에서도 반듯한 젊은이로 성장했다.이후 ‘천도교청년회’에 가입한 방정환은 1917년 천도교 교주 손병희의 딸 손용화와 결혼하면서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했다. 그는 나라를 걱정하는 뜻있는 젊은이들을 모아 ‘청년구락부’를 결성했다. 일본 경찰의 감시망을 피하기 위해 취미활동을 하는 구락부, 즉 클럽으로 위장한 것이다. 실제로는 산에서 밤을 따고 연극을 공연한다는 핑계로 모여 시국에 대해 의논했다.1919년, 손병희가 민족대표 33인의 주축이 되어 독립선언을 준비하자 방정환은 장인의 곁에서 거사를 도왔다. 3월 1일 독립선언과 만세시위로 민족대표들이 잡혀 들어가고 청년구락부 회장단이 고문으로 목숨을 잃는 가운데 그 또한 3·1운동의 실상을 널리 알리는 데 매진했다. 집에서 등사기로 <조선독립신문>을 인쇄해 청년구락부 회원들과 함께 밤새 배달했다.낌새를 챈 일본 경찰은 방정환의 집을 포위하여 수색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그는 민첩하게 대응했다. 등사기와 신문을 마당에 있는 우물에 넣어 증거를 없앤 것이다. 경찰은 그러나 방정환을 잡아들이고 일주일간 온갖 고문을 가하였다. 이를 악문 채 그는 자백을 거부했다. 석방된 후에도 일본 경찰은 방정환을 요주의 인물로 찍고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다.이즈음의 일제는 한 손에는 채찍과 다른 손엔 당근을 들고 독립운동 와해 작전을 펼치고 있었다. 잔혹한 탄압과 교묘한 회유가 이어지면서 국내에서의 저항은 날이 갈수록 힘겨워졌다. 방정환은 고민했다. 이런 현실에서 나라와 민족을 위해 내가 할 일은 무엇일까? 마침내 그는 어린이를 떠올렸다. 독립의 씨앗을 뿌리고 싹을 건강하게 키우는 어린이운동 말이다.어린이운동은 원래 천도교와 관련이 깊었다. 천도교의 전신인 동학은 사회적 약자의 종교였다.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동학의 ‘인내천(人乃天)’ 사상은 여성과 빈자 등 억압당하고 천대받는 사람들을 보듬었다. 그 연장선상에 아이들이 있었다. “아이를 때리는 것은 하느님을 때리는 것이다.” 동학 2대 교주 최시형이 교도들에게 내린 지침이었다. 뒤이어 천도교에서도 아이들을 어른과 달리 순결한 영혼을 지닌 존재로 바라봤다. 이러한 관점은 서구의 자유주의 사조와 만나며 어린이의 인권 개념으로 발전했다. 김기전·이돈화 등 천도교 이론가들은 아이들을 인격적으로 대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를 실행에 옮긴 것이 바로 방정환이다. 1920년 그는 일본 도요대학에 입학해 아동문학과 아동심리를 공부했다. 이후 방정환은 경성과 도쿄를 바삐 오가면서 활동했다. 1921년에는 ‘천도교소년회’를 설치하고 운동회와 소풍 등 어린이를 위한 프로그램들을 풍부하게 제공했다. 또 마땅한 읽을거리가 없는 아이들을 안타깝게 여긴 나머지 세계명작동화집을 번안해서 출판하기도 했다. “학대받고 짓밟히고, 차갑고 어두운 가운데 자라는 불쌍한 어린 영을 위하여 그윽이 동정하고 아끼는 사랑의 첫 선물로 나는 이 책을 짰습니다.” 동화집 머리말에 방정환이 밝힌 출간의 변이다. 제목도 『사랑의 선물』이라고 지었는데 안에는 <신데렐라>, <잠자는 숲 속의 공주> 등이 수록되었다. 개벽사에서 펴낸 이 번안 동화집은 1920년대 내내 큰 인기를 끌었다. 아이들 눈높이에 맞춰 쉽고 재미나게 쓴 덕분이었다. 그는 또 동시 <형제별>, 소년소설 <만년셔츠>, 탐정소설 <칠칠단의 비밀> 등 다양한 작품들을 발표하며 아동문학가로서 입지를 다졌다.또한 방정환은 탁월한 동화구연가이기도 했다. 그가 천도교 교당에서 동화구연회를 열면 입장권 1,000매를 발행해도 늘 2,000명 이상 몰려와 돌아가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고 한다. 어린이운동 행사도 선전포스터에 ‘방정환씨 참석’이라는 문구가 들어가기만 하면 어김없이 만석이 되었다. 아이들은 물론 어른들도 방정환의 동화구연에 매료되었다. 잡지 <개벽>의 주간이었던 이돈화는 그를 자기 방에 불러 못 나가게 문을 잠가 놓고 동화구연에 귀를 기울였다고 한다.방정환의 어린이운동이 각계각층의 호응을 얻으면서 동참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주위로 모여들었다. 1923년 3월 손진태·정순철·고한승·진장섭·정병기 등 일본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아동문예연구회 ‘색동회’가 결성되었다. 이 과정에서 방정환의 제안에 따라 어린이날 잔치를 준비하기로 했다. 어린이 인권을 널리 알리자는 취지였다.방정환은 천도교소년회, 불교소년회, 조선소년군 등 40여 개 소년단체와 협의하여 1923년 4월 ‘조선소년운동협회’를 조직했고 이들은 5월 1일에 열린 최초의 어린이날 행사를 주관했다. 1925년 제3회 어린이날 행사에는 전국에서 30여만 명이 참석했다. 소년단체 수도 무려 220개에 이르렀다. 일제 강점기의 어린이운동은 그렇게 절정으로 치달았다.  alt1919년 제작된 <조선독립신문>의 모습alt방정환이 펴낸 『사랑의 선물』 광고alt어린이날 행사를 구상한 방정환과 색동회 회원들  총칼 들고 싸우는 것만 독립운동이 아니다어린이날의 성공적인 개최에 만족하지 않고 방정환은 그 활동 영역을 넓혀나갔다. 1923년에 창간한 <어린이>는 그가 마지막 순간까지 애정과 심혈을 쏟은 소년소녀잡지였다. 이 잡지를 통해 어린이들에게 민족혼을 일깨워주고자 했다. 뿐만 아니라 기라성 같은 아동문학가들을 발굴하여 거장으로 육성하기도 했다.윤극영이 작사, 작곡한 동요 ‘반달’은 1924년 <어린이>에 발표된 작품이다.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엔’으로 시작한 노랫말은 ‘샛별이 등대란다 길을 찾아라’로 끝맺는다. 나라를 빼앗긴 어린이들에게 꿈과 용기를 심어주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이밖에도 동요 ‘퐁당퐁당’, ‘옹달샘’, ‘기찻길 옆 오막살이’ 등으로 유명한 윤석중을 비롯해 아동문학의 거장 이원수도 <어린이>가 배출한 인물이었다. 창간 초기 <어린이>는 거저 준다고 해도 보지 않던 잡지였다. 하지만 192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는 독자가 10만여 명에 육박했는데, 당시 경성 인구가 30만 명 수준이었고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발행 부수가 5만 부 정도였음을 감안하면 놀라운 성과가 아닐 수 없다. 이는 온갖 고생을 마다하지 않고 기꺼이 헌신한 방정환의 노력 덕분이었다.그의 열정은 끝이 없었다. 1928년에는 20여개 국가에서 그림·사진·동요·동화·아동극 등의 작품을 받아 ‘세계아동예술전람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잡지 출간과 병행하여 무려 4년 간 준비한 행사였다. 자신의 몸을 혹사하는 바람에 방정환의 건강은 점점 나빠졌다. 병이 악화되어 얼굴이 붓고 코피도 자주 흘렸다. 결국 1931년 7월 23일 방정환은 3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alt소년소녀잡지 <어린이>의 모습(1923년)alt세계아동예술전람회 특집호로 간행된 타블로이드 신문 <어린이세상>  살아생전 그는 입버릇처럼 “10년 후의 조선을 생각하자”고 말했다. 일제의 폭압에도 희망을 잃지 않고 어린이를 잘 키우면 독립을 이룰 수 있다는 뜻이었다. 독립은 본질적으로 나라와 민족이 스스로 일어나는 일이다. 총칼 들고 싸우는 것만이 해답은 아니다. 각계각층에서 씨를 뿌리고 싹을 틔워야 만이 이뤄진다. 5월 5일 어린이날은 방정환에게 있어 무엇보다 중요한 독립운동이었다.         권경률역사칼럼니스트. 서강대학교에서 역사학을 공부했다. 칼럼 ‘사극 속 역사인물’을 연재하고 팟캐스트 ‘역사채널 권경률’을 진행한다. 저서로는 『조선을 새롭게 하라』·『조선을 만든 위험한 말들』 등을 출간했으며, 영상물 <시시콜콜 한국사 어워즈>도 선보이고 있다. ]]> Mon, 30 Apr 2018 14:31:21 +0000 17 <![CDATA[봉오동과 청산리에서의 대승, 그리고 경신참변 ]]> 글 박영규  봉오동과 청산리에서의 대승,그리고 경신참변 국난에서 벗어나고자 온 국민이 나섰던 감격의 그 날 1919년 3월 1일. 3·1운동이 어언 100주년을 눈앞에 두고 있다. 이를 기념하여 월간 『독립기념관』은 2019년 3월까지 ‘겨레의 함성, 독립의 희망’을 통해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역사를 다루고자 한다. 독립군의 첫 번째 대승, 봉오동전투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 이후, 중국으로 망명한 독립운동가들은 간도 일대를 기준으로 무장투쟁을 위한 독립운동기지 건설에 박차를 가했다. 1910년대 말에 이르러 이 지역에는 50개가 넘는 무장 독립단체가 조직되었고, 3·1운동을 기점으로 그 역량은 더욱 강화되었다. 그러자 독립단체들은 국내진입작전을 계획하고 본격적인 무장 투쟁을 전개하여, 함경도와 평안북도에 위치한 일본 헌병감시소·주재소 등에 큰 타격을 주었다. 이에 일제는 1920년 5월부터 대대적인 독립군 토벌전에 나섰다. 이를 간파한 홍범도는 자신이 사령관으로 있던 대한북로독군부군과 이흥수가 이끌던 신민단 부대를 연합하여 일본군 공략 계획을 수립했다. 당시 대한북로독군부군에는 홍범도가 조직한 대한독립군과 최진동의 군무도독부, 그리고 안무가 이끌고 있던 대한국민회군 등이 결합해 있었다. 여기에 신민단 부대까지 더해졌으니, 독립군의 군세도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독립군에 대한 정보가 부족했던 월강추격대대는 자신들이 호랑이 아가리 속에 들어온 것도 모른 채 일거에 소탕할 생각에 빠져 있었다. 그들은 이내 사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봉오동의 한 가운데로 진입했고, 독립군은 일본군을 에워싼 채 공격을 개시했다. 기습공격에 당황한 야스카와 소좌와 그의 부하들은 이리저리 날뛰며 도주하기에 바빴고, 결국 완패를 당하고 말았다. 3시간의 전투가 끝난 후, 월강추격대대 병력 중 절반이 넘는 157명이 전사했고, 나머지 대원들도 모두 부상을 입었다. 이에 비해 독립군 전사자는 4명에 불과했고, 부상자도 2명뿐이었다. 일본군 최정예부대와의 첫 대결은 독립군의 대승으로 마무리되었다.  alt봉오동 기념비alt봉오동전투 보도기사 (<동아일보> 1920.06.20)alt홍범도  연이은 청산리전투에서의 승리 대패 소식을 접한 일본 군부는 1920년 8월에 ‘간도지방 불령선인 초토화계획’을 수립하고 1만 8,000여 명의 군대를 간도로 파견했다. 그러자 독립군은 백두산 일대로 근거지를 이동하여 간도 화룡현 지역에 집결했다. 이곳에는 대한독립군을 비롯해 군무도독부·의군부·신민단·의민단·국민회군·한민회·광복단·북로군정서 등이 여러 독립군 단체가 망라해 있었다. 이 소식을 접한 일본군은 독립군을 일시에 토벌하기 위해 5,000여명의 전투부대를 급파하여 공격해왔다. 하지만 일본군의 움직임은 이미 포착된 상황이었다. 첩보를 접한 북로군정서 사령관 김좌진은 홍범도와 함께 연합전선을 형성하여 일본군을 맞이할 준비를 마쳤다.선봉대는 봉오동에서 대패했던 야스카와 소좌의 부대였다. 그는 보병 1개 중대를 지휘하며 청산리 골짜기의 백운평으로 진입해왔지만 매복해있던 북로군정서의 공격을 받아 불과 20여 분만에 전멸하고 말았다.이후 10여 회에 걸친 전투에서도 독립군은 대승을 거뒀다.하지만 일본군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패전에 대한 앙갚음으로 간도 지역의 한인들을 무차별로 학살한 경신참변을 일으켰다. 그 피해 상황은 참담했다. 1920년 10월과 11월에 걸쳐 일어난 이 사건으로 희생자는 무려 3,693명에 달했고, 이밖에도 가옥 3,288채와 학교 41개교, 교회 16곳이 소실되었다. 또 지역 범위도 혼춘·왕청·화룡·연길·유하·흥경·관천·영안 등 일대 8개현에 걸쳐 있었다. 일본군은 그야말로 간도 지역을 초토화시켜 독립군의 뿌리를 뽑고자 했던 것이다.  alt청산리 마을 전경alt청산리 전적비 청산리전투의 영웅 백야 김좌진1930년 1월 24일, 고려공산청년회 소속 청년 두 사람이 한족총연합회 주석에게 총격을 가해 사망케 한 사건이 발생했다. 피격된 이는 놀랍게도 청산리전투를 승리로 이끈 독립군의 영웅, 백야 김좌진이었다. 당시 간도의 한인 사회에는 김좌진이 일제와 타협하여 간첩활동을 벌이고 있으며, 공금을 유용하여 사익을 챙기고 있다는 헛소문이 돌았다. 또한 사회주의 계열과 민족주의 계열로 나뉘어 갈등이 심화되었던 상황에서 이들 양 진영을 하나로 규합하는데 주력했던 그가 사회주의 계열의 청년들 입장에서는 배신자로 비쳤는지도 모른다. 김좌진이 40대의 창창한 나이로 망명지에서 허망하게 죽자, 만주의 한인 사회는 위대한 지도자를 잃은 슬픔에 잠겼다. 그의 장례는 사회장으로 치러졌고, 장례에 참석한 중국인들은 고려의 왕이 죽었다고 애도했다고 한다. 한인 사회는 물론 중국인의 가슴에도 영웅으로 남은 김좌진은 어릴 때부터 남다른 데가 있었다. 그가 17살이던 1905년, 자신의 집 노비들을 모두 해방시켜 재산을 떼어주는 혁신적인 면모를 보였고 2년 뒤인 1907년에는 90여 칸으로 된 자신의 집을 개조하여 호명학교를 세웠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21살 때인 1909년에 기호흥학회라는 장학재단을 마련하였으며 안창호 등과 서북학회를 세우고 오성학교를 설립하여 교감 생활을 하였다. 그러던 중 1911년엔 북간도에 독립군 사관학교 설치를 위해 모금 활동을 벌이다 일제에 발각되어, 2년 반 동안 옥살이를 하기도 했다. 출소 뒤에는 대한광복단을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이 모든 일이 김좌진이 20대까지 한 일들이다. 믿기지 않을 정도로 조숙한 행동들이었다. 그러나 30대의 그 또한 대단했다. 31살이 되던 1919년 김좌진은 북로군정서 사단장과 사관연성소 소장을 겸했다. 북로군정서는 서일을 총재로 김좌진·이장녕·김규식·이범석 등이 주축이 되어 형성된 북간도 최대 무장독립단체였다. 이 북로군정서와 함께 33세의 김좌진은 청산리대첩을 승리로 이끌었다. 하지만 이후 벌어진 경신참변으로 인해 러시아 지역으로 피신해야 했고, 이 과정에서 다른 무장독립단체들과 결합하여 대한독립군단을 결성하기도 하지만 자유시참변으로 엄청난 타격을 입었다. 게다가 그동안 그를 이끌어 주고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던 서일마저 목숨을 끊었다.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김좌진은 한동안 후유증에 시달렸지만, 다시 일어나 독립군 재건에 나섰다. 1925년, 신민부 창설에 가담하여 군사위원장과 사령관을 겸하였고, 김혁 등과 성동사관학교를 열어 부교장에 취임했다. 그 무렵,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김좌진를 국무위원으로 임명했지만, 그는 오로지 독립군 양성에만 몰두했다. 그리고 마흔이 되던 1928년엔 조소앙·조봉암·홍진·장건상 등과 함께 한국유일독립당 조직에 가담했으며, 이어 한족총연합회 주석이 되었다. 이렇듯 김좌진은 10대에서 30대까지, 오직 독립운동에 투신하며 자신의 일을 묵묵히 해왔다. 하지만 1920년대 후반의 독립운동 세력은 좌익과 우익의 치열한 사상투쟁이 전개되고 있었고, 김좌진은 그들을 하나로 규합하여 결집하는데 주력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오해와 갈등이 지속되었고, 이는 결국 그를 죽음으로 이끌고 말았다.  “김좌진 장군은 칠 척 거구에 만인을 위압하는 태산과 같은 위엄과 형형한 안광, 그리고 도도한 웅변력을 가진 진정한 영웅호걸이었다.” (이범석) “당신도 총에 맞고, 나도 총에 맞았는데, 왜 나 혼자 살아서 오늘날 이 꼴을 본단 말이오. 당신은 영혼이 되시어 동포를 이끌어가는 나를 보호해주시오. 그리고 땅 밑에서 당신과 만날 때, 우리 둘이서 그 옛날 서대문감옥에서 하던 말을 다시 말해봅시다.” (김구) 김좌진의 사망 소식은 서울에 남아있던 아내 오숙근에게 전해졌다. 그녀는 일제의 감시망을 피해 은밀히 간도로 가서 남편의 유해를 수습하였다. 김좌진은 7척 장신이라고 할 정도로 키가 크고 거구였다고 알려져 있으며, 또한 대단한 대식가였다고 한다. 그에 대한 기록은 이범석의 회고록과 김구의 추도사를 통해 찾아볼 수 있다. 김좌진, 그는 대한민국의 독립에 모든 걸 바친 겨레의 영웅이었다.  alt김좌진alt김좌진의 사회장 모습(1930년)   박영규1996년 『한 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을 내면서 저술활동을 시작하여. 1998년 중편소설 『식물도감 만드는 시간』으로 문예중앙신인상을 수상하면서 소설가로 등단했다. 문학, 철학, 역사 분야에 걸쳐 저술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대표적인 역사서로는 『한 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 『한 권으로 읽는 일제강점실록』 등이 있다. ]]> Mon, 30 Apr 2018 15:17:37 +0000 17 <![CDATA[출산을 위한 두 나라의 전쟁과 화해 ]]> 글 고종환 아주대학교 외래교수  출산을 위한두 나라의 전쟁과 화해 2018년 현재 대한민국의 인구는 5,178만여 명이다. 과거에 비해 인구가 늘었지만 정부는 출산율 저하에 따른 생산인구의 감소를 걱정하고 있다. 18세기 말 영국의 경제학 맬더스는 저서 『인구론』을 통해 인구증가에 따른 인류 생존의 위기를 경고했었다. 반면 지금의 우리 사회는 생산인구 감소로 인한 경제적 악영향을 염려하고 있다. 그렇다면 지금으로부터 수천 년 전 로마를 비롯한 고대 사회에서 인구증가와 감소는 국력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alt 사비니 여인들의 중재(1799, 자크루이 다비드(Jacques-Louis David), 루브르 박물관)   여인들이 전쟁에 끼어든 이유는? <사비니 여인들의 중재>에서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는 건 무엇보다도 두 진영 사이에 선 여인들과 갓난아기의 모습이다. 중앙에 서서 싸움을 말리는 여인은 사비니 부족의 공주인 헤르실리아이고 오른쪽에 창을 높이 들고 던지려는 사람은 남편인 로마의 로물루스, 그리고 맞은편에서 방패를 들고 있는 사람이 바로 친정아버지인 타티우스다. 즉 그림은 로마와 사비니가 한창 전투에 열중하고 있는 한복판에 여인들을 그려 넣은 것이다. 사비니 여인들이 목숨을 걸고 끼어들었던 이유는 바로 전쟁을 중지시키기 위해서였다. 여인들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이 친정인 사비니인들과 현재 자신들이 남편인 로마인들이 서로 목숨을 걸고 싸우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헤르실리아를 비롯한 사비니 여인들의 용기 있는 행동으로 인해 로마와 사비니의 전쟁은 중단되었다. 이는 로마의 로물루스와 사비니의 타티우스 간의 평화협정 체결로 이어졌고, 양측은 공동 집권체제를 이루고 평화의 시대를 열어가게 되었다. 자크 루이 다비드의 <사비니 여인들의 중재>는 바로 그 역사적인 장면을 실감나게 묘사해내고 있다.   과거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건국신화에 따르면, 형제간의 권력투쟁에서 최후의 승자가 된 로물루스는 로마의 최고 지배자가 되었다. 당시 그에게는 한 가지 큰 걱정거리가 있었는데, 전쟁도 식량부족도 아닌 바로 출산을 할 수 있는 여자의 수가 남자에 비해 너무나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고대 사회에서 강하고 큰 국가를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많은 수의 국민들을 갖추어야 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이웃 부족이나 국가와의 전쟁에서 승리해야 했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전투에 나설 수 있는 남자들을 확보하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그러므로 여자가 부족하다는 것은 곧 용사를 낳을 사람이 부족하다는 것을 의미했기에 현대 사회에 비해 고대 사회에서는 더욱더 심각한 문제였던 것이다.고심 끝에 로물루스가 생각해낸 방법은 바로 여성의 숫자가 풍부한 이웃 부족인 사비니에서 이를 충족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새로 발견된 넵티누스(그리스의 포세이돈)신전 앞에서 축제를 열 것이니 함께 먹고 마시고 즐기자”며 사비니 사람들 중에서도 특히 여성들을 로마로 초대하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사비니 여인들을 납치하기 위한 로물루스의 속임수였다. 많은 사비니 사람들은 아무런 의심도 없이 축제에 참가했다. 분위기가 한창 무르익었을 무렵, 로물루스가 보낸 신호에 맞춰 로마 병사들은 사비니 사람들을 죽이고 여인들을 납치하기 시작했다. 당시의 상황을 그린 게 바로 아래에 있는 니콜라 푸생의 그림, <사비니 여인들의 납치>다.  alt 사비니 여인들의 납치(1640, 니콜라 푸생(Nicolas Poussin), 루브르 박물관)  그림에서처럼 축제를 즐기러 로마에 왔다가 기습으로 피해를 입은 사비니 부족은 빼앗긴 여인들을 다시 찾으러 로마로 쳐들어왔고, 결국 뺏긴 자와 빼앗은 자 간의 치열한 전쟁이 벌어졌다. 그 상황을 보다 못한 사비니 여인들이 중재에 나서는 게 바로 <사비니 여인들의 중재>인 것이다.  고종환한국 프랑스문화학회의 재무이사이자, 아주대학교와 경상대학교 외래교수. 프랑스 문화와 예술, 서양연극사, 광고이미지 등을 강의하고 있다. 대표 저서로는 『한권으로 읽는 연극의역사』와 『오페라로 배우는 역사와 문화』·『글로벌 다문화교육』이 있다. ]]> Mon, 30 Apr 2018 15:23:16 +0000 17 <![CDATA[콩밥에 담긴 우리네 삶과 눈물 ]]> 글 윤덕노 음식문화평론가  콩밥에 담긴 우리네 삶과 눈물         콩밥 먹는다는 말의 역사콩밥이 왜 감옥의 상징 음식이 됐는지는 대부분이  옛날 교도소에서 콩밥을 제공했기 때문으로 안다. 하지만 이제는 한참이나 지난 이야기에 불과하다. 속어가 통용되는 것과는 달리 교도소에서는 1986년 콩값이 급등하면서 재소자 급식기준이 쌀과 보리 각각 50%로 바뀌었다. 현재는 100% 쌀밥을 제공하고 있다. 이전까지는 쌀의 비중이 점점 늘어 쌀 90%, 보리 10%의 잡곡밥이 제공되다가 2014년 상반기부터 완전 백미로 바뀐 것이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역시 보리가 쌀보다 비싸졌기 때문이다. 그러니 먹는 밥의 종류로 교도소에 간다는 말을 제대로 하려면 이제 콩밥 먹는다는 말 대신 쌀밥 먹는다고 해야 정확한 표현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부정적 의미로 쓰이는 것을 보면 한국인의 무의식 속에는 콩밥에 대한 이미지가 무척 강하게 심겨 있는 게 아닌가 싶다. 1986년 이전에는 도대체 어떻게 콩밥을 제공했기에 “콩밥 먹는다”는 말이 생겨났을까.1957년의 교도소 재소자 급식규정을 보면 쌀 30%, 보리 50%, 콩 20%를 섞은 잡곡밥이 정량이었다. 쌀보다는 잡곡의 비중이 훨씬 높기도 하고 또 밥을 지었을 때 각 낱알의 크기를 고려하면 콩이 산술적인 비중보다 훨씬 높게 느껴졌을 것 같기도 하다. 그렇다고 해도 콩밥 먹는다는 말이 생겨날 정도로 비중이 절대적으로 높았던 것은 아니었다.  일제강점기의 콩밥콩밥 먹는다는 표현이 본격적으로 생겨난 것은 일제강점기 때다. 당시 수감자들의 급식을 보면 왜 이런 표현이 생겼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1936년 형무소 식단표를 보면 급식규정이 쌀 10%, 콩 40%, 좁쌀 50%로 구성돼 있다. 이런 비율이라면 급식규정대로 제대로 밥을 지었다고 해도 콩 덩어리에 쌀과 좁쌀 몇 톨이 붙어있는 수준이었을 것이다. 이를 짧게는 몇 개월에서 길게는 몇 년씩 먹어야 한다면 먹는다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고역이었을 것이다. 그러니 콩밥 먹는다는 표현이 생겨난 것으로 짐작이 되는데 옛날 감옥에서는 왜 하필 콩밥을 먹였을까? 음식 종류가 제한된 교도소에서 가격 뿐 아니라 재소자의 영양도 고려하여 콩밥을 식사로 제공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상당히 인간적인 접근이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감옥에서 그렇게 휴머니즘이 넘쳐났을 리 없다. 콩밥이 얼마나 형편없는 식사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는 글이 있다. 1936년 4월 25일자 <조선중앙일보>에 실려 있는 콩밥이라는 제목의 동시다. 표현방법이 상당히 낯설고 거칠지만, 어쨌든 콩밥이라면 진저리를 치는 아이들의 심정과 1930년대 일제 강점 당시, 일반인들의 인식을 엿볼 수 있다. “콩밥을 보면 넌더리가 나요. 밤낮 우리는 내가 제일 싫어하는 콩밥만 지어요. ‘엄마, 나 콩밥 먹기 싫어, 쌀밥 지어, 응?’하고 졸랐더니 엄마는 ‘없는 집 자식이 쌀밥이 뭐냐. 어서 못 먹겠니?’하고 부지깽이를 들고 나오셨어요. 나는 꿈쩍도 못하고 안 넘어가는 콩밥을 억지로 넘겼지요. 해마다 쌀농사는 짓는데 밤낮 왜 우리는 콩밥만 먹을까요?” 1924년 5월 11일자 <시대일보> 기사에도 콩밥 이야기가 실려 있다. 평양형무소에서 배급량을 줄이는 바람에 일하던 죄수들이 배를 곯아 졸도했다는 기사로, 콩을 섞는 대신에 좁쌀로 지은 조밥을 제공했더니 기절을 할 정도로 그 양이 적어졌다는 내용이다. 감옥에서 왜 콩밥을 제공했는지를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이 무렵 일제는 한반도의 쌀을 수탈해 가는 대신에 만주에서 콩과 조를 들여와 공급했다. 바꿔 말하자면 밥의 양을 늘리는데 값싸고 양 많기로 콩을 대신할 작물이 없었던 것이다. 콩밥 먹는다는 표현 하나에도 일제강점기의 아픔이 스며있다. alt 윤덕노음식문화평론가. 1984년 매일경제신문사에 입사해 20여 년간 기자 생활을 하면서 특파원 활동·출장·연수 등으로 미국과 중국을 비롯한 다양한 나라에 머물렀다. 음식에 관심이 많아 관련 자료를 수집해온 결과, 음식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주요 저서로는 『음식잡학사전』·『신의 선물 밥』·『붕어빵에도 족보가 있다』 등이 있다. ]]> Mon, 30 Apr 2018 15:45:09 +0000 17 <![CDATA[물길 따라 역사가 흐르는 곳 ]]> 글·사진 김초록 여행칼럼니스트  물길 따라 역사가 흐르는 곳-충청북도 충주-  호수에 둘러싸인 도시, 충주. 충주는 예부터 ‘중원(中原)’이라고 불렸는데, 이는 국토의 한 가운데 위치하고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니 삼국시대에 이곳이 군사적 거점이었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백제에서 고구려가, 그리고 다시 신라가 충주를 차지했다. 특히 신라는 고구려로부터 한강 하류 지역을 빼앗은 뒤 ‘중원소경’을 세우고 대가야 사람들을 이주시켰다. 충주의 역사는 이렇게 시작했다. 아이의 마음으로 독립을 노래하다먼저 탄금대로 간다. 탄금대는 신라 진흥왕 시절, 우리나라 3대 악성(樂聖)중 하나로 알려진 우륵(于勒)이 가야금을 연주했던 곳이다. ‘탄금대’라는 이름도 그렇게 생겨났다. 우륵은 남한강이 바로 보이는 이곳 바위에 걸터앉아 가야금을 탔다. 그 아름다운 소리에 이끌린 사람들이 모여 마을을 이루었다는 전설도 있다. 조선 시대 탄금대는 임진왜란의 격전지였다. 당시 신립 장군은 남한강 언덕에 위치한 절벽을 12번이나 오르내리며, 병사들에게 힘을 불어넣고 뜨거워진 활시위를 강물에 식혔다고 한다. 그래서 절벽의 이름은 ‘열두대’다.탄금대 아랫마을, 칠금동에 독립운동가 권태응 선생의 생가가 있다. 권태응 선생은 동요집 『감자꽃』과 동시 ‘도토리들’·‘산샘물’·‘달팽이’·‘고추밭’·‘옹달샘’ 등 주옥같은 작품을 남기며 우리나라 아동문학사를 이끌었다. 올해는 권태응 선생의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로, 이를 기념하여 충주에서는 동요제를 열기도 했다. 탄금대 들머리와 생가터에 선생의 대표작인 ‘감자꽃’ 노래비가 서 있다. 오래된 노랫말엔 순수한 동심과 함께 독립에 대한 염원이 서려 있다.권태응 선생은 어린 시절, 한학자인 할아버지로부터 한문을 배웠다. 충주 공립보통학교와 경성제일고보(현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와세다대학 문학과에 입학했지만, 동창 염홍섭과 함께 항일운동을 하다가 경찰에 연행되어 1학년도 채 마치지 못하고 퇴학을 당해야만 했다. 이후 재일 유학생들을 규합해 독서회를 조직, 본격적으로 항일운동에 투신하다가 다시 붙잡혔다. 옥고를 치르던 그는 폐결핵을 얻어 이듬해 풀려났다. 1939년의 일이었다. 선생은 아픈 몸을 이끌고 충주로 내려와 농사를 지었는데, 이때부터 동요 창작에 매진하며 많은 작품을 발표했다. 이내 나라는 독립을 맞았지만, 그 감격은 오래가지 못하였다. 한국전쟁이 일어나고 다시 병세가 나빠진 것이다. 결국 1951년 3월 28일, 권태응 선생은 34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alt우륵이 가야금을 탔던 탄금대 전망대alt권태응 선생 생가터에 있는 감자꽃 노래비 독립운동사에서 충주를 알린 사람들권태응 선생 외에도 충주 출신의 독립운동가들이 많이 있다. 우근 류자명과 그의 외사촌 자형으로 충주농고 설립에 앞장섰던 정운익·개성 3·1운동의 주역 권애라·어윤희 선생이 대표적이다.1919년 3·1운동 당시 충주 간이농업학교 교사로 있던 류자명 선생은 학생들과 만세시위운동을 계획했다가 일본 경찰에게 발각되어 중국 상하이로 망명했다. 비록 만세시위에는 실패했지만 선생은 좌절하지 않고 중국에서 항일투쟁을 이어갔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 임시의정원 충청도 대표의원으로 선출되었으며 동방피압박민족연합회·조선혁명자연맹·남화한인청년연맹에서 흐트러진 민족의식을 다잡았다. 중국에서 광복을 맞이한 그는 조국으로의 귀국을 서둘렀지만 곧바로 발발한 한국전쟁 때문에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소태면 출신의 어윤희 선생은 개성 3·1운동을 주도했던 인물이다. 그는 어린 나이에 부모와 남편을 잃은 뒤 고향을 떠난 기독교에 입문했다. 1919년 3월 1일 개성 시내에서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다가 일본 경찰에게 들켜 서대문형무소에서 1년 넘게 옥고를 치렀다. 옥중에서도 유관순 선생과 함께 3·1운동 1주년 기념 만세운동을 벌이면서 투쟁을 멈추지 않았다.충주지역의 3·1운동은 식민 지배에 저항하는 민족 독립운동으로서 민족의 위기를 극복하고자 했던 실천운동이었다. 충주 시내 충인동 옛 장터(누리장터)에서 관아공원까지 이르는 길은 3·1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던 곳이다. 당시 충청북도 도 장관이 공립보통학교(현 교현초등학교) 강당에 충주 시민들을 모아 놓고 겁박하며 만세운동 저지 연설을 했던 일은 유명하다. 관아공원, 그 역사적 현장에는 지금도 일제강점기 식민수탈기관 역할을 했던 옛 조선식산은행이 남아 있다. 그리고 대소원면 대소리에는 충주 지역 독립운동가를 추모하는 독립유공자 추모비가 있다.   alt독립운동이 일어났던 관아공원alt관아공원 옆에는 옛 조선식산은행 건물이 남아 있다alt대소원면 대소리에 세워놓은 충주 지역 독립유공자 추모비   신라의 중심, 그곳에 세워진 미려한 석탑탄금대교를 건너 올라가다 보면 중앙탑 사적공원이 있다. 공원에는 신라의 석탑 중 가장 길이가 길다는 탑평리칠층석탑이 있다. 일명 ‘중앙탑’이라고도 불리는 이 탑은 충주가 국토의 중앙에 있음을 증명하는 유산이다. 전설에 의하면 같은 보폭을 가진 두 사람을 남과 북에서 동시에 출발시켜 두 사람이 만난 곳에 탑을 세워둔 것이라 한다. 그러니까 탑이 세워진 자리야말로 신라의 가장 ‘중심’이 되는 것이다.중앙탑이 있는 곳은 드넓은 공원이다. 잔디밭 사이로 각종 조각품들이 전시돼 있고 옆으로는 조정대회가 한창인 탄금호가 펼쳐진다. 중앙탑에서 5분 거리에 ‘중원고구려비’가 있다. 이는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유일한 고구려비로, 5세기 무렵 장수왕이 남한강 유역을 개척하면서 세운 것이라 한다. 사각기둥 형태인 비의 네 면 중 세 면에서 글씨를 발견할 수 있는데, 마모가 심해 판독할 수 있는 글자는 200여 자에 불과하다. 고구려비임이 알려지기 전, 마을 아낙네들이 빨래판으로 썼기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건립 연대에 대한 의견은 분분하지만 비문에 보이는 ‘십이월삼일갑인(十二月三日甲寅)’이란 간지와 날짜를 고려했을 때 449년(장수왕 37년)으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중원고구려비는 보존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에 따라 옆에 새로 들어선 전시관 안으로 옮겨졌다.중원고구려비를 본 뒤 목계교를 건넌다. 다리 밑으로 남한강이 유유히 흘러간다. 목계교 앞은 먼 옛날 목계나루터가 있던 곳이다. 목계에서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에 이르는 강을 따라 수많은 뗏목과 물산이 오갔다. 뱃길이라 서울 사흘 목계나루에아흐레 나흘 찾아 박가분 파는가을볕도 서러운 방물장수 되라네 충주 출신의 신경림 시인은 목계나루에 대한 감상을 이렇게 표현했다. 그러나 시간이 너무 많이 흐른 까닭일까? 현재 목계나루 주변에 옛 자취는 찾아볼 수 없다.  alt국토의 중앙을 알리는 탑평리칠층석탑alt미륵사지에 남아있는 석불입상alt조정대회가 열리는 탄금호는 충주 시민들의 휴식처다alt내륙의 바다로 불리는 충주호  마의태자가 월악산에 절을 지은 이유충주호는 충주 여행의 핵심이다. 충주호 인근에 있는 여러 개의 나루(충주나루·월악나루·청풍나루·장회나루)에서 유람선을 타면 된다. 38km의 긴 물길을 미끄러지듯 달려나가는 대형 유람선 안에서 호수 밖 풍경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제법 벅찬 기분이 든다.충주호에서 수산면을 거쳐 36번 국도를 타고 충주 방향으로 가면 월악산국립공원이 있다. 웅장한 월악산을 사이에 두고 가르마처럼 펼쳐진 두 계곡이 있으니, ‘용하구곡’과 ‘송계계곡’이 바로 그것이다. 돌돌 흘러내리는 맑은 계곡물이 탁해진 마음마저 씻어낸다. 송계계곡 안에 있는 자연대·월광폭포·학소대·망폭대·수경대 등은 설악산 한 귀퉁이를 옮겨놓은 듯 유려하고 아름답다. 월악교에서 송계로 빠지는 597번 지방도는 월악산국립공원을 지나 수안보온천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송계계곡 위쪽에는 신라 마의태자의 전설이 내려오는 미륵사지가 있다. 마의태자는 고려의 왕건에게 자리를 빼앗긴 뒤 금강산으로 들어가 살았는데, 경주를 떠나 금강산으로 가던 중 한동안 월악산에 머물면서 미륵사를 세웠다고 한다. 현재 절의 모습은 간데없고, 5층 석탑과 석불입상을 비롯해 석등·3층 석탑·커다란 돌 거북만이 있을 뿐이다. 절터 뒤쪽으로 문경과 이어지는 하늘재 고개가 있다. 하늘과 맞닿아 있다고 하여 붙은 이름이라고는 하나 높지는 않다. 새소리·바람소리·물소리를 음악 삼아 느리게 길을 따라 오르니 힘겨운 세상살이가 아득하게 느껴진다. 지난날, 나라를 잃고 고개를 넘었던 마의태자 또한 이곳의 호젓함에 이끌려 미륵사를 세웠으리라. 좁은 길가 사이로 폐위된 태자의 설움이 소복이 묻어난다. ]]> Thu, 31 May 2018 14:24:21 +0000 18 <![CDATA[무장독립투쟁 그리고 청산리대첩에서의 승리 ]]> alt]]> Thu, 31 May 2018 14:15:41 +0000 18 <![CDATA[일제강점기 미주한인사회를 이끈 지도자 이대위 ]]> 글 학예실  일제강점기 미주한인사회를 이끈 지도자 이대위  이대위는 일제강점기 초기 미주이민사회 형성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는 미주한인사회의 지도자로서 비록 강한 카리스마를 지니지는 못했지만, 오로지 공익만을 위해 묵묵히 봉사하며 우리 독립운동사에 공적을 남겼다.       alt 미주 한인사회의 초석을 마련하다이대위는 1878년 평안남도 강서군에서 태어나 평양에서 중등교육을 마쳤다. 미국 유학 이전에 대한 기록이 많지는 않으나 1890년대 기독교를 수용하고 숭실학당에서 중등교육을 수학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고등교육과 신앙에 대한 필요성을 절감하고 미국 유학을 결심하였다.이대위는 1903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그리고 안창호와 함께 한인 친목회를 결성하였다. 샌프란시스코 내 동포들에게 어려운 일이 생기면 친목회 회원들이 힘을 보태 도울 수 있도록 한 것이다. 1905년 이주 동포들이 늘어나면서 친목회는 공립협회로 확대·개편되었다.1905년 6월, 이대위는 학업에 정진하기 위해 포틀랜드 중학교에 입학하였다. 당시 공립협회의 직임은 맡지 않았으나 신민회 조직을 준비하는 안창호에게 도움을 주었다.1908년 샌프란시스코로 돌아온 이대위는 캘리포니아 대학교에 입학한다. 이 시기부터 공립협회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학업과 사회활동을 병행하였다. 공립협회는 1909년 국민회로 개편되고 1910년 대한인국민회로 재탄생했는데, 이대위는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의 부회장 겸 총무로 활동했다. 또한 「신한민보」와 「대도」에 민족정신을 고취하고 기독교 신앙을 강조하는 논설을 발표하기도 했다.  미주 한인단체 지도자로 헌신하다1913년 4월 이대위는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대한인국민회 회장으로 활동하면서 무엇보다 미주 한인 동포 권리 보호에 앞장섰다. 같은 해 6월, 캘리포니아 농장에서 한인 노동자가 축출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일본공사관은 사건에 개입해 미국과 직접 교섭하고자 했다. 이대위는 미국 국무장관에게 일본과의 교섭을 중지하라는 전보를 보낸다. 재미 한인은 경술국치 이전에 미국에 왔으므로 일본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는 것이 그의 이유였다. 미국 정부는 이대위의 요청을 수락하였다. 이것은 미주한인의 법적 지위와 국적 문제 해결에 있어 매우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이후에도 이대위는 여러 차례 북미지방총회장으로 재임하였다. 동시에 도덕심과 학문 함양을 위한 잡지와 신문의 역할을 강조하며 꾸준히 언론활동을 전개해 갔다. 「신한민보」의 편집과 발간에 참여하며 영문과 한문서적의 글을 번역·연재하기도 하였다. 1915년에는 한글식자기를 개발하였는데, 이는 이대위의 가장 큰 업적 중 하나로 꼽힌다. 덕분에 출판이 더욱 용이해짐은 물론, 미주 한인사회 출판문화의 발전을 가져왔다. 이 외에도 학생양성소와 국어학교를 설립하여 미주 한인 교육에 이바지하였다.1919년 국외에서 활동하는 지도급 독립운동가 39인이 서명한 대한독립선언서(무오독립선언서)가 발표되었다. 미주에서는 이승만·안창호·박용만·이대위 4인의 서명이 이루어졌다. 이를 통해 미주에서 이대위가 차지했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1995년 정부는 미주 한인사회를 위해 헌신한 이대위의 공적을 기려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alt젊은 시절의 이대위alt대한인군민회 기념사진(1913), 오른쪽 세 번째가 이대위다.alt이대위가 워싱턴의 노동부 담당자에게 보낸 문서, 한인 입국문제에 대한 도움을 요청하고 있다. 이처럼 이대위는 한인동포들의 미주 입국과 정착을 도왔다.   alt클래어몬트 학생양성소 교사들과 함께 있는 이대위.(윗줄 두번째)클래어몬트 학생양성소는 미주 공립협회가 민족주의 교육의 장려를 위해 1908년 설립한 한인 공립학교다.alt「신한민보」특별 포고문(1918.11.28.)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북미지방총회는 윌슨 대통령에게 승전치하서를 보내고 시국문제에 대한 건의서를 중앙총회에 제출했다.alt이대위 부고 기사 (동아일보 1928.07.27.)]]> Thu, 31 May 2018 14:44:13 +0000 18 <![CDATA[일제에 맞선 부자(富者) 나무 석송령 ]]> 글 신현배 역사칼럼리스트  일제에 맞선 부자(富者) 나무 석송령   나이는 조금씩 다를지라도, 마을마다 지혜로운 어르신을 모시듯 극진히 대접하는 고목들이 있다. 오래된 나무는 사람보다 더 길고 두터운 역사를 가지고 있으므로, 그들은 때때로 마을의 전설이 되기도 한다.  소나무에게 재산을 물려준 농부경상북도 예천군 감천면 천향리 석평 마을에 이수목이란 농부가 있었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농사를 지어왔으므로 손이 매우 귀했다. 그러나 이수목은 환갑을 넘긴 나이까지 자식이 없어 고민했다. 대를 이어 논밭을 물려받을 이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1927년의 어느 무더운 날, 이수목은 집에서 연신 부채질을 하다 마을 어귀에 있는 소나무로 향했다. 소나무의 그늘 밑에서 더위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5백여 년 전, 마을에 큰 홍수가 났을 때 개천을 따라 떠내려왔다던 어린 소나무는 어느새 우람하게 자라 높이 10m, 둘레 4.2m, 그늘 면적 324평에 이르는 고목이 되었다.이수목이 이 오래된 소나무 밑에 누워 잠을 청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말소리가 들려왔다. “걱정하지 말아라!” 깜짝 놀라 눈을 뜨고 주위를 두리번거렸지만 나무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누가 나무에 올라가 있는 것이 아닌가 싶어 나무 위를 올려다보아도 사람은커녕 새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걱정하지 말아라!” 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소나무였다. 소나무가 말을 한 것이다. 소나무의 외침을 듣고 이수목이 까무러치듯 놀랐을 때, 그는 잠에서 깨어났다. 이상한 꿈이었다. 하지만 소나무는 분명 그의 걱정을 알고 있었다. 이수목은 생각했다. ‘소나무는 내 재산을 자신에게 물려달라고 한 거야. 나는 자식이 없으니까, 소나무에게 재산을 물려주면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지.’ 그는 당장 군청으로 달려가 자신의 논밭을 소나무 앞으로 돌리는 등기 이전 절차를 밟았다. ‘석송령(石松靈)’ 이수목 노인 소유의 토지 1,191평을 물려받아 토지 대장에 오른 새 주인의 이름이었다. 주민등록번호 3750-00248의 늙은 소나무였다. 이리하여 석송령은 해마다 재산세를 내게 되었다. 사실 이수목 노인은 단지 자식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소나무에게 재산을 물려준 것이 아니다. 마을 소나무에게 재산을 주면, 그것이 마을의 공동재산이 되어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는 소나무에게 재산을 상속한 뒤 세상을 떠났다. 그 뒤 마을 사람들은 ‘석송계’를 만들어서 이를 관리하며, 해마다 음력 정월 열 나흗날 자시(하오 11시부터 상오 1시까지)에 소나무를 위한 제사를 올렸다. 그리고 이수목의 바람처럼 석송령 소유 논밭에서 얻어지는 수익금은 마을 학생들을 돕는 장학금으로 사용되었다.  역사를 지킨 터줏대감들석송령은 일제강점기에 일제에 맞선 용감한 소나무로도 유명하다. 어느 날 일제는 마을에 있는 석송령을 베어 없애기로 했다. 소나무를 베어내어 민족정기를 말살하고, 벤 나무는 일본 군함을 만드는 재료로 쓰기 위함이었다. 일본 순사들은 나무를 벨 톱을 자전거에 싣고 인부들을 거느리며 마을로 향했다. 마을 인근 개울을 건너려는 찰나 갑자기 자전거가 쓰러지더니 핸들이 부러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자전거와 함께 넘어진 일본 순사는 그 자리에서 목이 부러져 죽고 말았다. 남은 인부들은 그 모습을 보고 기겁을 하며 달아났다. 그 일이 있은 뒤로 일제는 소나무를 함부로 베지 못했다고 한다. 한국전쟁 때는 비행기 폭격을 피해 소나무 밑으로 피신한 사람들이 피해를 입지 않고 무사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덕분에 석송령은 논밭을 가진 부자 소나무이자, 마을 사람들을 지킨 신령한 소나무로 알려지게 되었다.이처럼 석송령을 비롯해 우리나라에 있는 오래된 나무들이 마을을 지켰다는 전설은 심심치 않게 내려온다. 특히 나라에 큰일이 생겼을 때 이를 미리 알려주었다는 나무들이 있다.천연기념물 제30호인 경기도 양평의 용문사 은행나무는 소리를 내어 나라의 큰 일을 미리 알렸다. 광복 직전에는 두 달을 울었고, 한국전쟁 전에는 50일 동안 울었다고 하는데 울음소리가 어찌나 큰지 10리 밖에서도 들렸다고 한다. 이뿐만이 아니다. 4·19 혁명, 5·16 군사 정변이 있기 전에도 나무는 서럽게 울어댔다. 고종이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는 커다란 가지가 느닷없이 부러졌다고 하니 과연 신성한 나무가 아닐 수 없다.소리로 나랏일을 미리 알려준 나무는 이밖에도 많이 있다. 천연기념물 365호인 충청남도 금산의 보석사 은행나무는 광복과 한국전쟁을 앞두고 소리 내어 울었으며, 1992년 극심한 가뭄 또한 소리로 예고했다. 천연기념물 175호 경상북도 안동의 용계리 은행나무도 1910년 한일 강제 병합과 1950년 한국전쟁, 1979년 10·26 사건에 소리를 낸 것으로 유명하다. 마을에 병마가 퍼지거나 날이 가물어도 울었다고 한다. 강화도 전등사 은행나무는 나라에 변고가 생기던 해에는 열매를 맺지 않고 밤새워 울었다. 병인년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로 쳐들어오기 전날 밤이나 일본의 운요호 사건, 강화도 조약 때 나무의 울음소리는 마을을 메웠다. 천연기념물 76호 강원도 영월의 하송리 은행나무는 소리가 아닌 제 가지를 부러뜨림으로써 ‘일’을 알려왔다. 또한, 천연기념물 349호로 지정된 강원도 영월의 광천리 관음송은 나라에 큰일이 생길 때마다 껍질이 검게 변했다고 한다. 마을에 있는 오래된 나무는 ‘오래’의 시간만큼 마을을 지키며 우리의 다난한 역사를 함께 해왔다. 이들 나무가 일제로부터 저 스스로를 지키고, 나라의 변고를 미리 알렸던 것은 역사 속에서 기뻐하고 슬퍼하는, 혹은 저항하고 스러졌던 이들을 모두 지켜 본 터줏대감으로서의 책임감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alt 석송령(출처:국가문화유산포털)   신현배역사와 전통문화에 대해 관심이 많은 역사칼럼리스트. 저서로는 역사 이야기 『엉뚱 별난 한국사』, 『엉뚱 별난 세계사』, 『2000년 서울 이야기』, 『세계사로 배우는 법 이야기』,  전통문화 이야기 『소중한 우리 문화 지식 여행』 시리즈 등이 있다. ]]> Thu, 31 May 2018 14:32:02 +0000 18 <![CDATA[현실에 살지 말고 역사에 살라! ]]> 글 이성주 역사칼럼니스트  현실에 살지 말고 역사에 살라!  수많은 독립운동가의 삶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한 편의 ‘드라마’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격동기 한가운데 민족을 위해 온몸을 내던졌으니 극적일 수밖에. 그리고 그들의 드라마는 대부분 비극으로 끝을 맺는다. 그러나 김준엽 총장은 다르다. 그는 비극으로 시작한 인생을 희극으로 끝낸, 독립운동가로서는 보기 드문 해피엔딩의 주인공이었다.  청년 독립군 학자가 되다▲독립운동가·교육자 김준엽 ▲1920년 평안북도 강계 출생 ▲1944년 일본 게이오 대학 동양사학과 2학년 재학 중 강제징집 ▲일본군이 중국 내지에 주둔하자 단독 탈영. 장준하 합류 후 충칭에 위치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이동 ▲광복군 소속 이범석 장군의 부관으로 활약 ▲장준하 등과 함께 국내 진공 작정의 특공부대로 차출. 훈련 중 광복 ▲1949년 고려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부임 ▲1982년 고려대학교 총장 취임 ▲1985년 총장 사임 ▲2011년 6월 7일 타계(他界)  김준엽은 태평양 전쟁 말기, 일본이 총력전을 펼치던 당시 학도병으로 차출되었다가 목숨을 건 탈영에 성공한다. 곧바로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가서 광복군에 합류, 독립의 꿈을 키웠으나 일제가 예상보다 빨리 패망하는 바람에 그 뜻을 다 이루지 못하였다. 미처 풀어내지 못한 ‘뜻’은 해방된 조국에서 다시금 기회를 맞이한다. 역사학자가 되어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한 것이다. 광복 이후 후학양성에 힘쓰던 김준엽은 1982년 고려대학교 총장에 부임한다. 총장 부임 당시의 일화는 그의 소탈한 면모를 드러내기에 충분하다. 총장 취임식 당일, 김준엽은 서무과 직원에게 행사장 위치를 물었고, 직원은 “오늘은 우리가 총장 취임식 때문에 정신이 없다”고 대꾸했다. 이에 김준엽은 자신이 그 총장이라고 대답했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가 있다. 또 학생운동이 치열했던 시기, 그는 권력에 굴복하지 않고 학생과 그들의 신념을 지켰다. 학생운동을 주도한 학생을 제적하란 정부의 압력을 정면에서 거부했고, 학교 안에서 시위가 벌어질 때는 “학생 제군들 다치지 마라!”며 학생회관 앞에 구급차를 대기시켜 놓기도 했다. 다친 학생들을 병원으로 후송시킨 뒤 다음날까지 그 곁을 지킨 일도 있었다. 정부는 이런 김준엽에게 12번이나 공직을 제안했다. 장관은 물론 총리직 제안도 있었으나 김준엽은 이를 거절했다. 학자로서 양심을 지키기 위함이었다. “모든 사람들이 다 입각을 하는데, 나 같은 사람도 하나쯤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현실에 살지 말고 역사에 살라!김준엽이 권력의 압박에 의해 총장직을 사퇴했을 때, 고려대 학생들은 총장 사임 반대 시위를 벌였다. 그것은 김준엽이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장면이기도 했다.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어떻게 김준엽은 권력의 유혹과 압력을 이겨내며, 많은 이들에게 존경받는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일까? 그는 말한다. “현실에 살지 말고 역사에 살라. 역사의 신을 믿어라. 긴 역사를 볼 때 정의와 선과 진리는 반드시 승리한다.” 범인(凡人)들은 호구지책(糊口之策)으로 하루를 살아내는 것조차 힘겹다. 현실을 충실히 살아가는 것은 중요하지만, 그릇된 현실과 타협하는 비겁한 태도와 혼동해서는 안 된다. ‘좋은 게 좋은 것이고, 세상은 둥글둥글하게 살아야 한다’는 마법의 논리.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몇 번이고 맞닥뜨리게 되는 유혹이다. 하지만 김준엽은 당장 내가 처해 있는 현재가 아니라 미래를 내다봤다. 오늘, 혹은 이 순간은 내일이면 흔적 없이 사라질 어제가 아니라 역사의 한 장면으로 남게 될 터. 김준엽은 역사에 기록될 오늘 하루와 그 하루를 올바르게 만들기 위한 가장 좋은 선택을 고민했다. 그것이야 말로 시대의 스승 김준엽을 만든 원동력이었다. 기나긴 역사 앞에서 정의와 진실은 언제나 승리했다. 김준엽은 역사를 믿었고, 그 믿음 덕분에 사람들의 시선과 권력에도 아랑곳 않고 딸깍발이 인생을 살아갈 수 있었다. 논어(論語)의 마지막 구절은 이렇다. ‘천명을 알지 못하면 군자가 될 수 없다’ 오늘을 사는 사람들에게 천명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삶의 목표이자 이상, 또는 기준이라 할 만한 것이다. 김준엽에게 삶의 기준은 ‘역사’였다. 당장 오늘 하루를 편하게 보내기 위해 세상과 타협한다면 그 같은 안이한 타협이 모여서 얼룩진 역사를 만들 수도 있었다. 근시안적인 삶이 아니라 멀리 내다본다면, 정의와 진리가 언젠가 승리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마침내 삶은 빛날 것이다. 범인(凡人)에게는 가혹한 요구일 수도 있지만, 일제강점기에 역사를 믿고 온몸을 던져 싸웠던 독립투사들도 시작은 평범했다. 그 삶을 믿어보자.  이성주시나리오 작가 겸 역사칼럼니스트. 대중과 함께 호흡하는 글쓰기를 목표로 『조선의 민낯』, 『왕들의 부부싸움』과 같은 역사서를 출간한 바 있다. 최근에는 국제정치와 관련된 연구 및 집필에 열중하고 있다. 『전쟁으로 보는 국제정치』 시리즈 1, 2, 3권을 출간 중이다. ]]> Thu, 31 May 2018 13:55:27 +0000 18 <![CDATA[가장 푸르른 하늘 아래서 ]]> 가장 푸르른 하늘 아래서  간밤에 비가 세차게 쏟아지더니언제 그랬냐는 듯밝아오는 아침을 따라날이 맑게 개었습니다. 가장 푸르다는 비 온 다음날의 하늘처럼지난 인고의 시간을 견뎌온 우리의 역사도이제야 파랗게 빛이 납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총알이 빗발치는 우리의 치열한 역사를온몸으로 부딪쳐 냈던 이들의 희생,그리고 그들이 우리에게 남긴 오늘의 맑은 하늘과 그 청명함을 닮은 순국선열의 기개를. ]]> Thu, 31 May 2018 13:44:13 +0000 18 <![CDATA[치열한 전투 끝에 남은 미완의 희망 ]]> 글 권경률 역사칼럼니스트  치열한 전투 끝에 남은미완의 희망  매월 대한민국의 광복과 관련된 핵심사건을 선정하여 그 치열했던 역사의 순간을 재구성하고자 한다. 다시 만난 그날, 이번 회는 봉오동전투와 청산리대첩으로 말미암아 시작된 독립전쟁 이야기다. 중국 동북지역·러시아 연해주에서 피어오른 항일무장투쟁의 열기 속으로 들어가 보자. 마침내 오른 독립전쟁의 서막, 봉오동전투독립군을 쫓아 두만강을 건넌 일본군은 어느새 지린성 봉오동에 접어들었다. 일본군은 함경도에 주둔한 19사단 소속 월강추격대였다. 독립군은 산중에 매복하여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았다. 1920년 6월 7일 봉오동 계곡의 아침은 긴장감으로 팽팽하게 부풀어 올랐다. 일제 강점 10년. 바야흐로 독립전쟁의 서막이 오르는 순간이었다.중국과의 외교적 마찰을 우려하면서도 일본군이 국경을 넘어 추격에 나선 것은 그만큼 독립군을 눈엣가시로 여겼기 때문이다. 1919년 조선의 독립 의지를 만방에 떨친 3·1운동의 여파로 중국 동북지역 일대에서는 한인(韓人) 독립군 부대가 들불처럼 일어났다. 이듬해가 되자 독립군은 수시로 국내 진공 작전을 펼치면서 일제의 식민통치에 균열을 일으켰고, 일본군은 이를 더 이상 묵과할 수 없다는 판단 아래 독립군을 소멸하고자 추적 작전을 감행했다.300여 명의 월강추격대는 훈련이 잘 돼 있고 최신무기를 갖춘 정규군대였다. 그들이 볼 때 독립군은 형편없는 오합지졸이었을 것이다. 일본군은 험준한 산림지대를 거침없이 진군했다. 독립군은 사전에 일본군의 동선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고 골짜기마다 병력을 숨겨 놓았다.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독립군을 필두로 최진동의 군무도독부·안무의 대한국민군·이흥수의 대한신민단 등이 연합부대를 꾸려 단단히 벼르고 있었다.봉오동은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면 지형의 이점이 큰 천연요새였다. 일본군이 아무것도 모르고 매복지대로 들어서자 독립군의 총기가 일제히 불을 뿜었다. 우거진 산림에서 쏟아지는 탄환에 추격대원들은 속수무책으로 쓰러졌다. 반격을 가하고 싶어도 총탄이 어디서 날아오는지 종잡을 수 없었다. 결국, 일본군은 처참한 패배를 맛보았다. 일본군은 157명이 사살 당했고, 나머지도 대부분 부상을 입었다. 반면 독립군 측 피해는 전사 4명, 중상 2명에 그쳤다.   alt봉오동전투 기록화(출처: 문화콘텐츠닷컴)alt봉오동과 청산리대첩에서 독립군을 지휘하여 승리로 이끈 홍범도 장군  전쟁이 희망이 되다, 청산리대첩봉오동전투는 독립군 연합부대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났다. 소식은 삽시간에 퍼져나가 항일무장투쟁의 기세를 북돋웠다. 이렇게 되자 일제는 중국 동북지역 일대 독립군을 뿌리 뽑으려는 음모를 꾸몄다. 이른바 ‘간도 불령선인 초토 계획’을 세웠다. 간도는 두만강과 압록강의 건너편으로 조선과 인접한 지역인데, 19세기 후반부터 이곳에 한국인들이 대거 이주해 살고 있었다.음모는 곧바로 실행에 옮겨졌다. 1920년 10월 2일 일본 측에 매수된 중국 마적단이 훈춘의 일본 영사관을 습격하고 일본인 13명을 처단했다. 이 자작극을 빌미로 일제는 직접 마적을 토벌하겠다며 2만 대군을 편성해 중국 영토인 간도를 무단으로 침범했다. 일본군 병력이 북간도와 서간도를 포위하자 독립군은 민간인 피해를 우려해 백두산 부근 산악지대로 이동했다. 약 2천 명의 독립군이 화룡현 이도구와 삼도구에 집결한 가운데 김좌진이 지휘하는 북로군정서가 산기슭 마을인 청산리에 진을 쳤다. 북로군정서는 그해 자체적으로 사관을 양성하고 연해주에서 무기를 들여오며 정예부대로 거듭나는 중이었다.독립군 소재를 파악한 일본군은 아즈마 지대를 앞세워 쳐들어왔다. 1920년 10월 21일, 일본군이 청산리 계곡에 모습을 드러냈다. 김좌진은 계곡에서 가장 폭이 좁고 절벽이 가파른 백운평 골짜기를 싸움터로 정하고, 북로군정서 병력을 둘로 나눠 각각 절벽 위와 산기슭에 매복시켰다.오전 9시쯤 일본군이 골짜기 중앙에 이르자 김좌진 부대의 소총과 기관총이 집중사격을 퍼부었다. 적의 선봉대는 전멸을 면치 못했고, 뒤따라온 본대도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일본군은 대포 등 중화기를 앞세워 반격에 나섰다. 보병과 기병이 측면공격을 시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미 지형의 이점을 틀어쥔 독립군을 어찌할 수는 없었다. 전세가 기울어지자 일본군은 전사자 300여 명을 남긴 채 일단 물러났다.전투는 26일까지 계속되었다. 북로군정서는 백운평에 이어 천수평·어랑촌·맹개골·만기구·쉬구·천보산 등지에서 연전연승을 거뒀다.전력이 밀리다 보니 위기의 순간도 찾아왔다. 어랑촌에서는 적의 주력부대가 퍼붓는 공격에 중과부적으로 고전했다. 김좌진 부대가 유리한 지형을 차지하고 조준 사격을 했지만, 일본군은 악착같이 밀고 올라왔다. 처절한 혈전이 거듭되는 가운데 가뭄의 단비처럼 구원군이 나타났다. 홍범도가 이끄는 독립군 연합부대가 완루구에서 적군을 물리치고 어랑촌으로 달려온 것이다. 앞뒤로 독립군을 맞게 된 일본군이 막대한 피해를 입고 주춤하는 사이에 독립군은 포위를 뚫고 탈출할 수 있었다.화룡현 청산리 일대에서 독립군 부대는 서로 힘을 모아 일본군에 대승을 거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일본군의 인명 손실은 전사자 1천200여 명, 부상자 2천100여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언론인이자 역사가였던 박은식은 청산리 대첩의 전과를 이렇게 평가했다. “우리 한국인들은 물론 중국인과 유럽인들도 환호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으니 세계적으로 미증유의 기묘한 신공이다.”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일제와의 전쟁이 필연적이라고 독립지사들이 부르짖었지만, 의구심도 있었다. 무력으로 일본군을 제압할 수 있을까? 하지만 봉오동과 청산리에서의 승리는 우리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항일무장투쟁은 어느새 독립의 희망으로 떠올랐다.  alt청산리대첩 기록화alt항일무장투쟁의 지도자 김좌진 장군 항일무장투쟁에 사무친 민간인 대학살, 경신참변그러나 항일무장투쟁의 이면에는 민간인의 희생이 있었다. 청산리대첩의 빛나는 전공도 일제가 저지른 보복과 학살에 퇴색됐다. 1920년 10월 간도를 침범한 일본군은 독립군 토벌과 병행하여 한인사회를 초토화했다. 간도 전역의 한인촌락들을 습격하여 닥치는 대로 사람들을 죽이고 가옥·학교·교회들을 불태웠다. 이를 ‘경신참변’이라 부른다.경신참변의 실상은 말로 형용하기 어려울 만큼 잔혹했다. 일본군은 독립군을 도운 벌이라며 한인 주민들을 일렬로 세워놓고 사격연습을 하듯 총을 쏘아댔다. 당시 간도에서 활동했던 캐나다인 선교사 마틴은 그 광경을 글로 남긴 바 있다. “무릇 남자는 노인과 어린애를 막론하고 그 자리에서 총살했다. 숨이 끊어지지 않았으면 섶에 불을 붙여 그 몸 위로 던졌다. 죽어가는 사람이 아픔을 못 견뎌 펄펄 뛰며 비명을 질렀다. 이처럼 잔인하게 살해하면서도 사망자의 부모처자로 하여금 지켜보게 했다.” 또 용정촌 동북쪽의 한인 기독교 마을인 장암동에서는 40대 이상 남자 33명을 묶어서 교회당 안에 밀어 넣고 불을 질렀다고 한다.이 참혹한 광기는 1921년 4월까지 기승을 부렸다. 경신참변 당시 피해가 얼마나 되었는지 정확히 파악하기는 힘들다. 다만 일제의 만행이 극심했던 1920년 10~11월에 훈춘·왕청·화룡·연길·유하·흥경·관전·영안 등 8개 현에서 발생한 한인 피해는 기록이 전해진다. 피살 인원 3천600여 명· 체포 인원 170여 명·부녀자 강간 70여 건·소실된 가옥 3천200여 채·소실된 학교 41채·소실된 교회 16채였다.일제가 이런 만행을 저지른 까닭은 한인사회가 항일무장투쟁의 근거지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1905년 즈음부터 중국 동북지역로 간 독립지사들은 한인촌락·자치조직·학교 등을 만들면서 십시일반 돈을 모으고 인재를 길러 독립전쟁을 준비했다. 특히 신흥무관학교는 1920년까지 2천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해 항일무장투쟁의 산실로 자리매김했다. 일제는 바로 그 기반을 무너뜨리려 한 것이다.  alt경신참변 당시 살해 위기에 몰린 주민들alt경신참변으로 학살된 한인들alt1920년대 중국 동북지역에서 일본군이 저지른 만행  광복군과 조선의용군이 남긴 미완의 숙원중국 동북지역 독립군 부대는 일본군의 탄압을 피해 러시아 연해주로 들어갔다. 독립군은 러시아에 의해 건국된 극동공화국의 원조를 받아 전열을 정비하고자 했다. 그러나 1921년 봄, 자유시에서 한인 무장단체는 러시아의 정치적 갈등으로 인해 내분에 휘말렸다. 이때 독립군은 극동공화국군 등으로부터 공격을 받고 큰 타격을 입었는데, 이 사건이 바로 자유시참변이다.독립군 중 일부는 중국 동북지역 본거지로 돌아왔지만 세력이 약화된 상태였다. 하지만 다시 근거지를 구축하기 시작하여 통의부를 비롯해 독립군을 재건했다. 항일무장투쟁이 다시 도약한 것은 1920년대 후반 민족유일당 운동이 펼쳐지면서부터였다. 지역과 이념을 뛰어넘어 독립운동을 통합하자는 움직임 속에서 조선혁명군과 한국독립군이 창설되어 활약을 펼쳤다.1930년대 이곳 항일무장투쟁은 ‘한중연합’이라는 특색을 띤다. 1931년 9월 일제가 본격적인 대륙침략 전쟁을 일으키고 괴뢰 만주국을 세우자 중국군은 한인 독립군과 손잡고 대항하였다. 양세봉이 지휘하는 조선혁명군이 일본군과 만주국군을 격파한 영릉가전투(1932), 이청천의 한국독립군이 일본군 75연대와 수송부대를 무찌른 대전자령대첩(1933) 모두 한중 연합작전이었다. 하지만 일본군의 벽은 너무 높았다.중국 동북지역의 한인 독립운동 부대들은 1930년대 중반 이후 점차 동북항일연군에 흡수되었다. 동북항일연군은 중국공산당이 주도한 군사조직으로서 한인 독립군이 대거 합류했다. 그중 한 사람이 20대의 김일성이다. 당시 그는 정치위원과 부대장을 맡고 있었다. 동북항일연군은 일본군이 대대적인 공세에 나서자 1940년 러시아 연해주로 향했고, 그곳에서 88특별여단으로 편성되어 광복을 맞았다.중국 관내에서는 1938년, 의열단의 김원봉이 조선의용대를 조직하여 항일무장투쟁의 바통을 이어받았다. 조선의용대는 중일전쟁 기간 중 중국군과 함께 항일전선을 구축하였고, 특히 일본군 포로 심문과 반일 선전활동에 나섰다. 1940년대 들어서 김원봉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합류하자 조선의용대는 둘로 나뉘었다. 그중 일부는 임시정부 산하 광복군의 주력부대로 활동했다.1945년 일제의 패망과 함께 꿈에 그리던 광복이 찾아왔다. 일제 강점기 항일무장투쟁의 전통을 계승한 광복군과 조선의용군은 독립국가의 기반이 되고자 했다. 그러나 조국을 향한 그들의 행군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열강에게 가로막히고 말았다. 봉오동전투와 청산리대첩으로 막이 오른 독립전쟁은 분단의 그늘 속에서 마침표를 찍지 못하고 미완으로 남겨졌다. 그 얽히고설킨 역사의 실타래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alt1930년대 한인 사회주의 전사들이 활약한 동북항일연군alt김원봉의 주도로 1938년 중국 한커우에서 조직된 조선의용대alt미국 OSS에서 훈련받으며 국내 진공작전을 준비한 광복군   권경률역사칼럼니스트. 서강대학교에서 역사학을 공부했다. 칼럼 ‘사극 속 역사인물’을 연재하고 팟캐스트 ‘역사채널 권경률’을 진행한다. 저서로는 『조선을 새롭게 하라』·『조선을 만든 위험한 말들』 등을 출간했으며, 영상물 <시시콜콜 한국사 어워즈>도 선보이고 있다. ]]> Thu, 31 May 2018 15:01:02 +0000 18 <![CDATA[암흑의 1910년을 밝히다 별이 된 독립투사들 ]]> 글 박영규  암흑의 1910년을 밝히다 별이 된 독립투사들  국난에서 벗어나고자 온 국민이 나섰던 감격의 그 날 1919년 3월 1일. 3·1운동이  100주년을 눈앞에 두고 있다. 이를 기념하여 월간 『독립기념관』은 2019년 3월까지 ‘겨레의 함성, 독립의 희망’을 통해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역사를 다루고자 한다.         1910년대 일찍이 독립운동에 나섰던 선구자들이 있다. 나철과 강우규, 이상설이 바로 그들이다. 비록 세 사람은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한 채 눈을 감아야 했지만, 시대를 밝히는 별이 되어 후대의 많은 독립운동가에게 영향을 미쳤다.  조국의 독립을 종교로 일군, 나철 1916년 음력 8월 구월산에서 단식하며 수도에 정진하던 한 남자가 호흡을 조절하여 스스로 절명의 길을 택했다. 그의 이름은 나철. 민족종교 대종교의 교주이자 독립운동가였다.나철의 본관은 나주로 호는 홍암, 본명은 인영이다. 1863년 전라남도 보성에서 태어나 29살에 문과에 급제하여 관리가 되었다. 그러나 19세기 말의 조선은 국권 침탈의 위기에 처해있었다. 나철은 기꺼이 구국 활동에 나섰다. 을사늑약을 주도한 을사오적을 척결하기 위해 조직 활동을 하다가 10년의 유배형을 선고받기도 했다.1909년 1월 15일, 나철은 『삼일신고』와 『신사기』 등의 책에서 영향을 받아 단군교를 창시한다. 단군교에는 독립 활동에 뜻을 가지고 있었던 식자층이 대거 참여하였고, 나철은 교주인 도사교로 추대되었다. 일제의 견제와 개입으로 친일 성향의 교도들이 생겨나자 교명을 대종교로 바꾸었다. 그러나 일제는 탄압을 멈추지 않았다. 이에 대종교는 북간도 삼도구에 지사를 설립하며 교단의 중심축을 간도로 옮기는 작업에 착수한다. 1914년 마침내 백두산 북쪽 청파호 부근에 교단 본부를 마련하였다.대종교는 점차 교인과 세력을 늘려갔다. 위협을 느낀 일제는 1915년 ‘포고규칙’을 만들어 대종교에 대한 노골적인 탄압을 가해왔다. 그리고 이듬해, 나철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탄압에 대한 항의의 표시였다. 제자들에게는 계속해서 독립운동에 전념해달라는 유서를 남겼다.일제강점기 대종교는 종교단체이자 독립운동 조직이었다. 기실 나철이 대종교의 전신인 단군교를 창시한 것도 독립투쟁의 일환이었다. 나철의 죽음 이후 대종교는 더욱 적극적인 활동을 펼쳤는데 교인이 30만 명에 이를 정도였다. 신규식·박은식·신채호·김좌진·이범석 등 당시 독립운동의 주축을 담당하던 인물들도 대종교에 소속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독립운동에 전념하라’는 나철의 유언은 수십만 교인들을 향한 것이자 독립운동가들에게 전하는 마지막 당부가 되었다.   alt나철alt중국 지린성 화룡현 용성향(현 부흥진) 삼종사(서일, 나철, 김교현) 묘역  수류탄을 든 백발의 우국지사, 강우규1919년 9월 2일, 제3대 총독 사이토 마코토가 부임을 위해 남대문 정거장에 도착했다. 그가 막 마차에 오르는 순간 수류탄 한 발이 마차를 향해 날아들었다. 이어 수류탄 파편에 수십 명이 목숨을 잃거나 상해를 입었다. 불행하게도 암살 대상이었던 사이토는 무사했다.사건을 일으킨 인물은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 노인단의 지린성지부장, 강우규였다. 1855년 평안남도 덕천에서 태어난 그는 사이토 암살을 시도했을 당시 이미 환갑을 훌쩍 넘긴 백발의 노인이었다. 강우규의 원래 직업은 한의사였으며, 때때로 동네 아이들을 모아 유학을 가르치기도 했다. 그러나 을사늑약 이후 북간도로 망명하여 남은 생을 독립운동에 투신했다.1915년 강우규는 라오허강 주변의 농토를 개척하여 한인촌을 건설했다. 1917년에는 지린성 동화현에 광동중학교를 설립하고 교육자로 활동했다. 3·1운동 이후 독립의 기운이 무르익자 강우규는 새로 부임하는 총독을 암살할 계획을 세운다. 그는 한반도로 잠입하여 사이토 총독을 향해 수류탄을 던졌다. 행렬은 만신창이가 되었지만 총독은 죽지 않았다. 대신 정무총감이 부상을 입고, 총독의 수행원과 경찰이 죽거나 다쳤다. 사건 현장을 빠져나온 강우규는 동지 오태영의 소개로 장익규·임승화 등의 집에 숨어 지낸다. 하지만 총독부의 고등계 형사이자 일제 앞잡이였던 김태석에게 꼬리를 밟혀 거사 15일 만에 수감되었다. 총독부 고등법원에서는 그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1920년 11월 29일 강우규는 서대문 형무소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재판 중에도 강우규는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당당했다. 자신의 행위는 나라를 빼앗은 도둑들에 대한 응징으로서 정당했으며, 그 어떤 잘못도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 사형을 당하기 직전 그는 시 한 편을 남겼다. 단두대상에 홀로서니춘풍이 감도는구나.몸이 있으나 나라가 없으니어찌 감회가 없으리오.  alt강우규alt강우규 의거 L.A Times 삽화  뜨겁게 타올랐던 조국광복의 염원, 이상설 이상설은 고종의 헤이그 특사 3인 중 한 사람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1871년에 태어나 1894년 전시 병과로 급제하여 관직에 나왔다. 이후 성균관 교수와 탁지부 재무관을 거치면서 신학문을 접하고 일본의 조선 병탄을 저지하는 일에 앞장섰다.1904년에 일본이 황무지 개간권을 요구하자 이상설은 국권침탈이라며 이를 강력하게 반대했다. 대한협동회의 회장직을 맡게 된 뒤에는 더욱 적극적으로 반일운동에 나섰다. 1905년 법부협판과 의정부참찬 벼슬에 오른 이상설은 을사늑약을 반대하면서 을사오적의 처벌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노력이 무색하게도 을사늑약이 체결되었고, 이상설은 자결을 시도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906년 영의정에 임명되어 한 달 남짓 정치에 가담하고는 물러났다.이상설은 외국에서 독립운동을 하기로 결심하고 상하이와 블라디보스토크 등지에 머무르다 간도 용정촌으로 갔다. 그곳에서 서전서숙을 설립, 항일민족운동과 교육에 전념했다. 이내 서전서숙은 일제의 탄압에 의해 문을 닫아야만 했다.이 무렵 고종은 헤이그에서 개최되는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정사로 임명된 이상설은 이준, 이위종과 함께 헤이그로 갔으나 일본의 방해로 회의에 참석할 수 없었다. 이상설은 일본의 한국 침탈을 규탄하는 호소문을 발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이그 특사의 회의 참석은 허락되지 않았다. 이후 이상설은 미국으로 건너가 미주 한인 교포들의 단합을 촉구했다.1909년, 이상설은 다시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러시아와 중국 동북지역의 점이지대에 거주지를 마련하고 한흥동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며 연해주의 한인들을 결속시켰다. 나아가 일제에 대한 무력 저항을 위해 연해주 주변의 의병을 규합하여 13도의군을 편성했다. 이 내용을 고종에게 올리며 고종의 러시아 망명을 촉구하기도 했다. 이 일로 이상설은 연해주 외곽의 니콜리스크로 추방되었는데, 일제가 러시아 정부에 이상설을 체포하도록 압력을 넣은 결과였다.1911년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온 이상설은 권업회를 조직, 「권업신문」을 발간하는 한편 한인학교를 확대하며 적극적인 활동을 이어갔다. 그리고 마침내 최초의 망명정부라 할 수 있는 대한 광복군정부를 세우고 정통령에 피선되었다. 하지만 1914년에 발발한 1차 세계대전 때문에 광복군정부의 활동엔 많은 제약이 따랐다. 결국 권업회는 러시아 정부에 의해 해산되고 광복군정부도 해체되었다. 이후 상하이로 가 신한혁명당을 조직하는 데 일조하며 본부장에 선임되었지만, 이도 오래가지 못하였다. 건강이 나빠져 병석에 눕게 된 것이다. 1917년, 이상설은 결국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사망하였다.  alt이상설alt서전서숙(1908.09.)alt헤이그특사가 평화회의 의장과 각국 대표에게 보낸 공고사(1907.06.27.)   박영규1996년 『한 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을 내면서 저술활동을 시작하여. 1998년 중편소설 『식물도감 만드는 시간』으로 문예중앙신인상을 수상하면서 소설가로 등단했다. 문학, 철학, 역사 분야에 걸쳐 저술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대표적인 역사서로는 『한 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 『한 권으로 읽는 일제강점실록』 등이 있다. ]]> Thu, 31 May 2018 14:55:19 +0000 18 <![CDATA[무너진 도시와 일으킨 자존심 ]]> 글 고종환 아주대학교 외래교수  무너진 도시와일으킨 자존심  가슴을 훤히 드러내고 반쯤 무릎을 꿇은 채 앉아 있는 여인·그녀의 무릎 밑으로 보이는 시신의 한쪽 팔·뒤에서 승리의 깃발을 흔드는 군인. <미솔롱기의 폐허 위에 선 그리스>는 그림만 보고서는 쉽게 그 내용을 짐작할 수 없다. 이름에 등장하는 ‘그리스’는 흔적도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외젠 들라크루아를 아는 사람이라면 그림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여인의 모습에서 낯익은 이미지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alt 미솔롱기의 폐허 위에 선 그리스(1826, 외젠 들라크루아(Eugène Delacroix), 보르도 미술관)  여인과 그리스는 도대체 어떤 관계인가?외젠 들라크루아는 낭만주의 회화의 대표적인 화가로, 비슷한 시기 활동했던 제리코(T. Géricault, 1791-1824)의 영향을 받았다. 자크 루이 다비드로 대표되던 신고전주의 미술에 반기를 들면서 등장한 낭만주의 회화는 무엇보다 화가의 상상력을 이용한 감성의 표현을 중요하게 여겼다. 들라크루아도 마찬가지. 그는 역사적 진실을 기반으로 자신의 상상력을 덧붙여 현실감 넘치면서도 은유적인 그림을 그려냈다. 그렇게 탄생한 대표작이 바로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이다. 그림은 1830년 7월 혁명을 배경으로, 프랑스 국기를 든 여인이 힘차게 민중들을 이끌고 앞으로 나아가는 장면을 담고 있다. 여기서 여인은 민주주의의 ‘자유’를 상징한다. 그리고 <미솔롱기의 폐허 위에 선 그리스> 속 여인의 강인함은 자유의 여신과 닮아 있다. 이미 4년 전 들라크루아는 자유의 여신을 탄생시켰던 것이다.  alt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1830, 외젠 들라크루아(Eugène Delacroix), 루브르미술관)  그림은 1825년 터키군의 점령에 맞서 싸웠던 그리스 미솔롱기 지역의 독립전쟁을 주제로 한다. 당시 그리스 시민들은 터키군에 대항해 1년 정도를 버티다가, 그 또한 힘들어지자 광산을 폭파시켜 자멸했다. 여인이 밟고 있는 돌무더기 폐허는 바로 그때의 잔해들이다. 들라크루아는 무너진 폐허 속에 홀로 서 있는 여인의 이미지를 통해 비록 터키에 패배했지만, 끝까지 자존심과 신념을 지켰던 그리스인들의 고결한 정신을 표현하고자 했다.  미솔롱기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나미솔롱기(Missolonghi)는 아테네 북서쪽 210km 지점에 위치한 인구 약 23만여 명의 자그마한 항구도시다. 역사적으로는 독립전쟁 당시 그리스인의 영웅적 항전지로서 이름이 높다. 특히 1822년 터키군대에 포위된 뒤, 1826년 여자와 노인을 포함한 약 3.000여 명의 시민들이 폭사할 때까지 도시를 사수했던 그리스 국민들의 곧은 자존심을 상징하는 곳이기도 하다.비잔티움 제국이 멸망하고 도래한 오스만투르크 제국(터키) 시대. 당시 그리스는 투르크인의 지배를 받았다. 그리고 그리스인들은 독립을 얻기 위해 저항하고 좌절하기를 반복해야만 했다. 1814년 독립을 목적으로 하는 비밀결사가 만들어지고, 1821년 오스만투르크에 대한 반란이 일어났으며, 1822년 1월에는 그리스의 독립이 선언되었다. 그러나 오스만투르크는 그리스의 독립투쟁에 맞서 더욱 심한 탄압과 보복 학살을 자행했다.1825년 4월부터 투르크 군대가 포위하던 미솔롱기는 이듬해 4월에 함락되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유럽 각국에서는 터키를 향한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나아가 그리스 저항군을 자처하며 전쟁터에 뛰어드는 이들도 있었다.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 바이런(Byron, 1788-1824)이 대표적이다. 그는 평소 그리스를 좋아했는데, 그리스의 수비군으로 항전하다가 1824년 4월 말라리아로 병사했다. 미솔롱기에는 그의 동상(像)과 기념비가 남아 있다.들라크루아가 가장 존경하던 문학인이 바로 바이런이었다. 그래서 그림 <미솔롱기의 폐허 위에 선 그리스>는 그리스 독립에 대한 헌사임은 물론 바이런을 향한 존경과 애도였다.  고종환한국 프랑스문화학회의 재무이사이자, 아주대학교와 경상대학교 외래교수. 프랑스 문화와 예술, 서양연극사, 광고이미지 등을 강의하고 있다. 대표 저서로는 『한권으로 읽는 연극의역사』와 『오페라로 배우는 역사와 문화』·『글로벌 다문화교육』이 있다. ]]> Thu, 31 May 2018 15:08:06 +0000 18 <![CDATA[못생긴 생선의 반란 ]]> 글 윤덕노 음식문화평론가  못생긴 생선의 반란  못생겨도 맛은 좋아. 아귀를 보면 옛날 광고 문구가 생각난다. 아귀는 과연 보기에 예쁘지는 않지만, 깊은 바다에 사는 심해성의 흰 살 생선으로서 지방과 콜레스테롤이 적어 저칼로리 고급 어종으로 인기를 누리고 있다. 하지만 불과 수십 년 전까지만 해도 아귀는 못생겼다는 이유로 구박때기 신세를 면치 못했던 생선이었다.  배고픈 귀신을 닮은 생선아귀(餓鬼)의 이름은 ‘배고픈 귀신’이란 뜻이다. 몸통에 큰 입이 바로 붙어있는데, 마치 귀신이 배고파 울부짖는 것 같다고 하여 그렇게 불렸다. 지나치게 욕심을 부리다가 지옥에 떨어진 귀신은 산더미처럼 불룩한 배와 바늘구멍만큼 작은 목구멍을 벌로 받았다. 음식을 삼킬 수 없으니 언제나 배가 고프다.옛날 사람들은 아귀의 흉물스러운 외형 때문에 잡아도 먹을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래서 바닷가에서는 ‘물텀벙’이라고 불렀다. 잡으면 재수가 없다고 해서 바로 바다에 던져 버렸는데 이때 ‘텀벙’ 소리가 나며 떨어졌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이처럼 어부들이 아예 생선 축에도 끼워주지 않았으니 어찌 보면 아귀는 못생겼다는 말보다 더 서러운 구박을 받고 살아온 셈이다.아귀 구박의 역사는 생각보다 뿌리 깊고 광범위하다. 200여 년 전 기록에서도 아귀에 대한 평가는 박하기만 하다. 정조대의 문인 이학규는 영남지방을 여행하면서 현지음식을 소개했는데, 영남 바닷가 마을에서는 괴상한 생선을 먹는다며 몇몇 생선의 이름을 기록했다. 여기에 아귀도 포함되어 있다. 그는 아귀를 ‘커다란 입이 몸뚱이에 바로 붙어 있으며 이름은 아귀어(餓鬼魚)이고 현지에서는 물꿩(水雉)이라 부른다’고 설명했다. 그리고는 이런 말을 덧붙였다. “먹는 음식치고는 참 구차하다.” 그 옛날 아귀가 얼마나 바람직하지 못한 생선 취급을 받았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동서양 대부분의 나라에서 아귀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이유는 오로지 못생겼기 때문에. 아귀를 부르는 세계 각국의 ‘이름’에서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 영국에서는 웅크린 모습이 후드를 뒤집어쓴 중세 수도승을 닮았다고 하여 ‘몽크피쉬(Monkfish)’라 불렸다. 프랑스에서는 입 큰 생선이라는 의미의 중세어로 ‘롯데(Lotte)’란 이름이 붙었다. 중국은 두꺼비를 닮은 물고기라는 뜻의 ‘하마어’ 이름들이 이러하니, 다른 나라에서도 아귀는 선뜻 입에 댈 수 없는 생선이었다.  굶주림은 귀신도 잡아먹게 만든다요리의 재료로 아귀가 유명세를 탄 것은 ‘아귀찜’이 알려지기 시작한 1970년대 무렵이었다. 아귀찜의 원조에 대해서는 여러 이야기가 있지만, 마산에서 아귀를 이용해 북어찜처럼 콩나물과 미나리·마늘·고춧가루 등의 양념과 함께 찜으로 요리한 것을 시초로 보는 견해가 많다.하지만 본격적으로 아귀를 먹기 시작한 건 그 이전, 한국전쟁 때였다. 한국전쟁 당시 부산은 최대의 피난지였다. 많은 사람들이 부산으로 몰려들었다. 전쟁 직전인 1949년 약 47만 명이었던 부산 인구는 전쟁 이듬해(1951년) 84만 명으로 두 배 가까이 늘어났다. 이는 공식 통계를 기반으로 한 수치일 뿐, 실제 거주 인구는 훨씬 많았을 것이라 추정하고 있다. 갑자기 불어난 인구에 사람들은 먹고 살길이 막막했다. 기습공격으로 시작된 전쟁이기 때문에 전시에 대비한 비축물량도 충분하지 않았다. 원조물자가 들어오기는 했지만, 그 역시 턱없이 부족했다. 사람들은 곯은 배를 채우기 위해서 먹을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먹었다. 예전에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것들까지. 그중 하나가 아귀였다. 아귀는 잡히면 재수가 없다고 다시 물속에 던져 버릴 정도로 천대받던 생선이었지만 전쟁 통에는 그마저도 없어서 먹지를 못 했다. 이때 아귀의 담백한 맛이 각광을 받으면서 사람들이 아귀를 맛있는 식용 생선으로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전쟁과 굶주림을 이기지 못해 잡아먹었던 ‘귀신’은 생각보다 맛있었다. 이제 아귀는 별미로 사랑받고 있다. 영양소도 풍부한데다가 살부터 아가미·내장·껍질까지 모두 먹을 수 있어 보양식 노릇도 톡톡히 하고 있다. 그 옛날 아귀를 다시 바닷속에 던져버렸던 어부들이 아귀의 맛을 단 한 번이라도 봤다면 마음을 바꾸지 않았을까?  alt 윤덕노음식문화평론가. 1984년 매일경제신문사에 입사해 20여 년간 기자 생활을 하면서 특파원 활동·출장·연수 등으로 미국과 중국을 비롯한 다양한 나라에 머물렀다. 음식에 관심이 많아 관련 자료를 수집해온 결과, 음식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주요 저서로는 『음식잡학사전』·『신의 선물 밥』·『붕어빵에도 족보가 있다』 등이 있다. ]]> Thu, 31 May 2018 15:13:33 +0000 18 <![CDATA[그 여름,평화의 바람이 분다 ]]> 글·사진 김초록 여행칼럼니스트  그 여름, 평화의 바람이 분다-경기도 김포-  여름이다. 눈이 부시도록 뜨거운 햇빛에 절로 인상이 찌푸려지고, 새벽 내내 저물지 않는 열대야에 잠 못 이루는 계절. 무더위를 식혀줄 시원한 바람 한 점이 그리워 김포로 갔다. 북녘땅과 사이좋게 마주 보고 있는 김포에는 요즘 평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alt 생태계가 살아있는 장릉 숲속길   도심 속 자연이 숨 쉬는 곳, 김포김포 여행은 장릉에서 시작한다. 장릉은 조선 제16대 임금인 인조의 부모 원종과 부인 인헌왕후 구씨가 잠들어 있는 무덤이다. 1970년 사적 제202호로 지정됐다. 매표소 옆의 역사문화관에 먼저 들른 다음 본격적인 탐방길에 나섰다.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조선 왕릉은 모두 40기로 이 중 31기(12개소)가 경기도에 있다.장릉은 왕릉과 왕비릉이 나란히 있는 쌍릉인데, 능을 기준으로 왕우비좌(王右妃左, 왕은 오른쪽에 왕비는 왼쪽에 안치한다)에 따라 배치됐다. 능을 바라보는 위치에서 왼쪽이 왕릉, 오른쪽이 왕비의 능인 것이다. 장릉이 있는 숲은 자연 생태가 고스란히 살아있어 연신 맑은 공기를 내뿜는다. 도심의 허파라 부름이 어색하지 않다. 때때로 산책로엔 원앙(천연기념물 제327호)과 수리부엉이(천연기념물 제324-2호)가 날아들고 소나무, 졸참나무 등 수목이 짙은 그늘을 드리운다. 장릉 재실 앞에 있는 저수지는 다양한 수생식물이 자라는 자연학습장이다. 푸른 장릉산과 어우러져 풍광이 수려함은 물론 장릉산을 한 바퀴 돌아보는 800m 둘레길에는 전통 정자와 벤치·운동기구·전망대 등 편의시설이 잘 갖춰져 있다.  아련한 학창시절의 기억임진강을 옆에 둔 김포시 대곶면 신안리, 조용한 마을 한편에 교육박물관이 있다. 박물관을 관리하는 김동선 관장과 이인숙 관장은 부부로 두 사람 모두 30여 년간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그래서일까. 박물관에는 부부가 어린 제자들과 함께 만든 추억이 차곡차곡 담겨 있다. 지금은 찾아보기 힘든 교육 용구들과 학용품도 있다. 덕분에 이곳을 찾은 아이들은 신선한 체험을, 어른들은 아련한 추억을 안는다.김동선 관장은 1996년 아내를 위해 교육박물관을 설립했다. 이인숙 관장이 교사로 재직 중에 사고로 시력을 잃으면서 더 이상 아이들을 가르칠 수 없게 된 것이다. 김동선 관장은 아내의 아픈 마음을 달래고자 수년간의 교육 자료를 모아 박물관을 개관했다. 이 작은 박물관은 교사로서 살아온 그의 총체이자 부부의 진심이었다.인성교육관·교육사료관·농경문화관으로 나뉜 박물관 안에는 누군가의 손때가 묻은 물건들로 가득하다. 일제강점기의 풍금·색이 바랜 교과서·옛날 농기구·병아리 우리·앉은뱅이책상 까지. 이들은 저마다의 사연을 간직한 채 박물관 한 구석을 묵묵히 지키고 있다.  김포를 뒤흔든 그 날의 대포소리교육박물관에서 1분 거리에 덕포진(德浦鎭, 사적 제292호)이 있다. 진(鎭)은 우리말로 군사기지란 뜻이다. 조선시대에 덕포진과 임진강 건너 강화도는 유독 외적의 침입이 잦았다. 조선군은 이곳에서 두 차례의 승리를 거뒀다. 물론 패배의 기록도 남아 있다. 선조는 덕포진 앞바다를 따라 피란을 갔고, 프랑스 해군은 덕포진에 진을 치고 조선군을 공격했다. 1871년 미국의 상선 제너럴셔먼호가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 평양에서 통상을 요구하다가 평양 주민들에 의해 불에 타버린 사건도 있었다. 이는 신미양요의 빌미가 되었다. 당시 미국은 5척의 군함을 이끌고 강화도 초지진을 점령했다.오늘날, 몇 개의 초 진지(陣地)만이 남아 역사의 현장을 증명하고 있다. 바닷가 언덕에는 전투가 한창일 당시 무섭게 불을 뿜어댔을 포대(砲臺)의 흔적이 있다. 12개의 포대는 임진강과 강화도를 날카롭게 주시하는 모양새인데, 여기엔 바닷길로 침입해 오는 적을 포로 쏘아 바다에서 섬멸하겠다는 우리 군의 전략이 숨어 있다. 포병을 지휘하고 각 포대에 공급할 불씨를 실어 날랐던 파수청도 비록 터뿐이지만, 남아있다. 1980년 덕포진을 발굴 조사하면서 덩달아 발견되었다고 한다. 포와 포탄·주춧돌·화덕 자리·상평통보 등 귀중한 유물까지 함께 출토되었다.덕포진 바로 위에는 바다로 돌출된 지형의 손돌목(孫乭項)이 있다. 이곳은 옛날 인천 앞바다에서 서울 마포나루까지 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했던 길목으로 ‘손돌’이란 사람에게서 그 이름을 따와 지었다. 손돌은 고려시대 인물로 몽고가 고려를 침입했을 당시 고종의 피난길에 동행했다. 고종이 강화도로 피난할 때 뱃길을 잡은 사람이 바로 그인 것이다. 험한 뱃길에 불안을 느낀 왕이 손돌의 목을 베려하자 그는 살려달라는 애원 대신 물 위에 작은 바가지를 띄웠다. 바가지를 따라가면 강화도에 무사히 도착할 것이라는 말과 함께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한 왕은 그제야 자신이 경솔했음을 깨닫는다. 왕는 손돌의 장사를 후하게 치러준 뒤 사당을 세워 억울한 넋을 위로했다. 덕포진 끝머리에 손돌의 묘소가 있다.  alt 강화도를 바라보고 있는 덕포진 포대  공원과 산, 전망대에서 만끽하는 힐링덕포진에서 강화 쪽으로 가다 보면 김포국제조각공원과애기봉을 알리는 입간판을 발견할 수 있다. 문수산 기슭의 김포국제조각공원에는 국내외 저명작가 30인의 조각작품이 전시돼 있다. 수목이 우거진 공원의 산책로를 따라 걷노라면 절로 사색에 빠져든다. 도시에서 맛보기 힘든, 오로지 나만을 위한 시간이다. 조각공원 끝머리 팔각정에 오르면 김포평야와 한강이 시원스레 펼쳐져 있다.공원 내 물썰매장과 야외수영장이 많은 사람들로 붐빈다.조각공원에서 나와 애기봉으로 향한다. 우리나라 서북부휴전선 일대엔 북한 땅을 볼 수 있는 3개의 전망대가 있다. 그중 애기봉은 북한의 개풍군을 정면에서 마주할 수있는 유일한 전망대다. 애기봉이란 이름에도 절절한 사연이 있다. 병자호란 때 평양감사가 산봉우리로 끌려가 억울한 죽음을 당했다. 기생 ‘애기’는 죽은 평양감사를 그리워하다 죽었는데, 이곳에 그녀의 넋이 서려 있어 애기봉이란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어디 조선시대뿐이랴.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때에도 이곳에선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그리고 머잖아 전쟁의 아픔을 위로하듯 평화생태공원으로 재탄생 했다. 입구까지만 출입이 허용되는 것이 못내 아쉽지만 애기봉 전망대에서 내려다보이는 풍경에 금세 마음이 녹아내린다. 북녘땅을 휘돌아 나오는 임진강,그리고 김포와 강화도 사이를 가르는 염하강이 한강 하구(조강)로 내리닫는 모습이 장관을 이룬다.문수산은 김포에서 가장 높은 명산으로 사철 경치가 아름다워 ‘김포의 금강’이라 불린다. 조망도 탁월해 한강과 삼각산은 물론 서쪽 먼 곳 인천 앞바다가 가물거린다. 맑은날에는 개성의 송악산까지 볼 수 있다고 한다. 산행 기점은 문수산 삼림욕장이다. 오밀조밀 이어진 완만한 산길은염하강과 한강 하구, 그리고 북녘땅을 바라보며 정상으로 뻗어 있다. 해가 이우는 저녁 무렵에는 염하강으로 스러지는 낙조를 덤으로 즐길 수도 있다. 문수산 자락에는1694년에 만들어진 문수산성(사전 제139호)이 있다. 문수산성은 강화 갑곶진과 함께 바다로 들어오는 외적을 막기위해 쌓은 성으로 ‘문수사’라는 절에서 이름을 따왔다. 축성 당시 북문과 서문, 남문이 있었으나 안타깝게도 병인36양요 때 모두 불타버렸다고 한다. 현재는 북문과 남문을복원하고 성곽도 새롭게 단장하여 볼만하다. 산을 오르다보면 발아래로 펼쳐진 길쭉한 성곽이 시선을 붙잡는다.  alt문수산 전망대alt김포국제조각공원에 있는 물놀이장     평화를 염원하며 걷는 길김포의 끝, 강화도와 마주 보는 초지대교 머리에 낭만과활력이 넘치는 대명포구가 있다. 서해에서 잡히는 각종수산물이 모이는 어업전진기지로 포구 한쪽으로 수산물시장과 어판장·횟집·함상공원 등이 자리한다. 함상공원에는 1944년 미국에서 건조돼 2차 세계대전과 월남전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상륙함(운봉함)을 전시해 놓았는데직접 배에 들어가 내부 구조를 살펴볼 수 있도록 했다.대명포구는 6.5㎞나 되는 평화누리길의 기점이기도 하다.평화누리길은 경기 북부 DMZ 일대의 안보관광지 및 자연생태계를 보며 걸을 수 있는 도보여행 길이다. 현재는김포-고양-파주-연천을 잇는 12개 코스(총연장 180㎞)가열려 있다. 덕포진 둘레길은 대명항에서 문수산성 남문까지 이어지는 14.9㎞의 길 중 일부 구간(대명항-김포함상공원-덕포진-덕포마을-범선카페-대명항)으로 때 묻지 않은 자연과 분단의 상흔을 고스란히 간직한 곳이다.  alt서해 어업전진기지인 대명항    alt철책 옆으로 난 덕포진 둘레길      역사의 벽에 새겨진 숭고한 이름들김포 독립운동기념관으로 간다. 이곳은 김포 지역의 독립운동가를 기리기 위해 지난 2013년 삼일절에 맞춰 개관했다. 김포 지역 3·1독립만세운동은 양촌 오라니 장터와월곶 군하리 장터(통진향교 일대)에서 일어났다. 1919년3월 24일과 25일, 고촌 신곡리 출신 김정의 지사에 의해이틀간 이어졌던 고촌 만세운동도 빼놓을 수 없다.김포 항일운동에 관한 짧은 영상을 감상한 뒤 본격적인전시 관람을 시작했다. 전시는 ‘1919년, 기미년을 기억하다’·‘김포평야, 만세 소리가 퍼지다’·‘호국과 애국의 고장김포’·‘김포의 항일의병’·‘독립을 일궈낸 김포의 항일운동’·‘추모의 벽’·‘기획전시실’의 순서로 이어졌다.전시관 안의 빛바랜 태극기에서 치열했던 독립운동의 열기를 느낄 수 있었다. 일본 육군 기록문서·애국열사의 형확정통지서·판결문·신상카드 등 사소하지만 그래서 더애틋한 물건들에서 그날의 흔적을 발견한다.이내 애국선열의 넋을 기리는 추모의 벽 앞에 섰다. 다들약속이나 한 듯 엄숙한 표정으로 벽을 바라본다. 김포의유관순이라 불리는 이살눔·파고다공원과 김포를 오가며만세운동을 주도한 박충서·독립 의지를 탁월한 지도력으로 승화시킨 김정의·국채보상운동과 신간회 활동에 참여한 박용희 목사 등. 추모의 벽을 채운 수많은 선열들의 숭고한 애국정신이 마음을 잔잔하게 울린다.이살눔은 김포 독립운동의 산증인이었다. 당시 33살의 늦깎이 학생이었던 그녀는 월곶 군하리 장터에 모인 수백명의 군중에게 태극기를 배부하고 그들과 함께 독립을 외쳤다. 이 일로 6개월의 징역을 선고받았다. 서대문형무소에서 출소한 뒤 그녀는 다시 고향 김포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1948년 62살의 나이로 숨을 거둘 때까지 여전도사로 목회자의 삶을 살았다. 정부에서는 뒤늦게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92년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했다. 월곶면 고막리 푸른언덕교회에는 이살눔을 기리는 조촐하지만 다부진 기념비가 서있다. “님은 1919년 통진교회 전도사로 월곶지역 3·1만세 사건을 주도하여 옥고를 치르셨습니다. 민족 해방을 몸으로실천한 님의 민족혼을 기리기 위해 이 비를 만듭니다.” - 2003년 8·15 광복절 푸른언덕모임  alt 김포 독립운동기념관 전경 ]]> Thu, 28 Jun 2018 21:10:42 +0000 19 <![CDATA[1910년대 독립운동을 이끈 대한광복회 ]]> alt]]> Thu, 28 Jun 2018 21:09:24 +0000 19 <![CDATA[임시정부를 지키며 독립의 토대를 마련한 여성 독립운동가 ]]> 글 학예실  임시정부를 지키며 독립의 토대를 마련한 여성 독립운동가  연미당은 임시정부의 여성 독립운동가로서 임시정부 요인들을 지원하고 그들의 안위를 위해 헌신했다. 특히 중국 내 여성 동포들의 각성을 촉구하며 여성 독립운동계 통합에 앞장섰던 선구자적 인물이라 할만하다. alt  민족통일전선 형성을 위해 노력하다연미당의 본명은 연충효로, 1908년 7월 15일 북간도 룽징(龍井)에서 태어났다. 중국 세관에 근무하던 부친의 근무지 이동에 따라 상하이(上海) 인성학교에서 민족교육을 받고, 진장(晋江) 여자중학교에서 수학하였다. 부친 연병환을 비롯한 연씨 형제 모두가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는데, 이러한 집안 분위기가 연미당에게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1927년 3월 연미당은 만 19세의 나이로 엄항섭과 결혼하였다. 엄항섭은 3·1운동 이후 상하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에 참여한 인물로, 부친 연병환과 친분관계가 있던 것으로 추정된다. 연미당·엄항섭 부부는 독립운동 세력 단결을 위해 힘썼는데, 1927년 11월 중국 관내지역 청년단체들과 함께 중국본부한인청년동맹 결성에 참여하였다. 1928년 9월에는 재중국한인청년동맹 상하이지부 결성에 따라 각각 청년동맹과 청년여자동맹에서 활약하였다. 연미당은 1930년 8월 한인여자청년동맹 창립에 참여하였는데, 임시정부 독립운동을 지원하고 상하이 거주 교민들의 단합을 위해 노력하였다. 1932년에는 한인여자청년동맹 임시위원으로 선출되어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독립운동 중심지에서 활약하다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거가 일어나자 일본 경찰은 임시정부 요인들을 비롯한 한인 독립운동가에 대한 검거와 수색을 대대적으로 진행하였다. 주도 인물이었던 남편 엄항섭이 먼저 피신하고, 연미당과 임시정부 요인들도 자싱(嘉興)으로 이주하였다. 상하이를 떠난 엄항섭은 임시정부와 중국정부 간의 연락 임무를 맡고, 연미당은 남편을 대신해 임시정부 요인들을 모시며 피신생활에 들어갔다.연미당은 1938년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를 결성하여 선전과 홍보활동에 주력하였다. 중국 선전공작대와 함께 활동하였는데, 일본군 내 한국인 병사 모집과 함께 군인을 대상으로 하는 위문공연과 선전·홍보활동에 주력하였다. 특히 연극이나 무용 등은 여성대원들에 의해 기획되었다. 연미당의 맏딸 엄기선도 어린 나이에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에 참가하였다. 1940년대 민족통일전선에 대한 분위기가 고조되자 여성들은 적극적인 행동에 나섰고, 1943년 2월 23일 한국애국부인회 재건대회가 개최되었다. 연미당은 조직부 주임을 맡아 실질적으로 조직을 운영하였는데, 방송을 통해 국내외 여성 동포들의 각성과 분발을 촉구하거나 광복군으로 들어올 것을 권유하였다.연미당은 남편을 대신하여 자녀들을 교육하고 양육한 실질적 가장이었고, 항일투쟁전선에 뛰어든 독립운동가였다. 정부는 독립을 위해 헌신한 연미당의 공적을 기려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alt광복 이후 연미당의 모습alt연미당과 엄항섭의 결혼식(1927)연미당과 엄항섭은 많은 애국지사들의 축하를 받으며 결혼식을 올렸다. 사진에는 이시영·이동녕·김구·안창호 등 임시정부 주요 인사들의 모습이 보인다.  alt자싱으로 피신한 임시정부 요인들과 연미당(1932)(상단 우측 두번째가 엄항섭, 세번째가 김구, 하단 우측 두번째가 연미당) alt한국혁명여성동맹 창립기념 사진(1940.06.17.)1940년 한국혁명여성동맹은 전 세계 피압박민족 여성들과의 연계 분투를 목적으로 결성되었다.연미당은 이 동맹에서 임원은 맡지 않고 측면에서 지원하였다.(상단 우측 세번째가 연미당)  alt한국애국부인회 재건 선언서(1943)여성으로서 민족통일전선운동에 적극 동참하기 위해 애국부인회를 재건하고 대한독립과 민족해방을 완성하자는 선언서를 발표하였다. ]]> Thu, 28 Jun 2018 21:13:20 +0000 19 <![CDATA[광복의 순간, 태극기 휘날리며 ]]> 글 신현배 역사칼럼리스트   광복의 순간, 태극기 휘날리며  1945년 8월 15일 정오, 라디오에서 히로히토 일왕의힘없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무조건 항복.일본이 항복을 선언했단 말에 사람들은 태극기를 들고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광복의순간, 그들의 손에서 나부끼는 태극기는 태극의 모양도4괘의 위치도 모두 제각각이었다. alt 해방 직후 조선총독부 앞 풍경   태극기가 어떻게 생겼는지 아시오?사실 사람들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거리행진을 한 날은 광복 당일이 아니라 하루 뒤인 8월 16일이었다. 그때만 해도 라디오가 있는 집이 드물었기 때문에 대부분의사람들은 히로히토 일왕의 방송이 있은 지 하루가 지나서야 뒤늦게 소식을 전해 들을 수 있었다.광복의 기쁨과 함께 거리를 메운 사람들의 손에는 태극기가 들려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태극기의 모양이 서로 달랐다. 누군가는 이렇게 묻기도 했다. “태극기가 어떻게 생겼는지 아시오?” 당시 사람들은 태극기를 정확히 알지 못했다. 신문사들도 광복을 보도하며 노인을 찾아가 태극기의 모양을 물을 정도였다. 1942년 임시정부에서 태극기를 공식 국기로 제정하며 이름을 ‘태극기’로 확정하고 모양 또한 통일시켰지만, 일제의 감시 때문에 많은 국민들에게 알려지지는 못하였다. 지금과 같은 모양의 태극기를 정식 국기로 채택한 것은 1949년 3월 25일, 대한민국 정부의 ‘국기시정위원회’에서였다.그래서 광복의 순간, 거리를 수놓은 태극기 물결은 각양각색으로 빛났다. 일장기 위에 먹물로 태극무늬와 4괘또는 8괘를 그려 넣은 태극기·물감이 없어 수를 놓아 만든 태극기·흰색 무명천에 밥그릇을 엎어 놓고 그린 태극기·이불 홑청을 떼어내어 만든 태극기까지. 그런가 하면3·1운동 때 사용한 태극기를 고이 간직했다가 들고나온사람도 있었다. 저마다 다른 태극기를 들고 있었지만 아무도 문제 삼지 않았다. 국기는 달라도 조국에 대한 마음은 같았을 터. 모두 자신만의 태극기를 손에 쥐고 광복의기쁨을 마음껏 누렸다.  태극기가 있어야 할 자리조선총독부에서 근무하던 한국인 이승호는 일본의 항복방송을 들으며 총독부 건물에서 정문을 바라보았다. 정문에는 일장기가 걸려 있었다. 그는 생각했다. ‘일장기를 떼어내고 태극기를 걸어야겠다.’ 하지만 이승호 역시 태극기의 정확한 모양을 알지 못하였다. 번뜩 서대문에 있는 독립문이 생각났다. 독립문은조선의 자주독립을 기원하며 세운 것으로, 건물 꼭대기엔 태극기가 새겨져 있었다. 이승호는 독립문으로 달려가 종이에 태극기의 모양을 그대로 베꼈다. 총독부로 돌아와 한국인 동료 전예용·손정준·최반 등과 함께 커다란광목에 그 모양을 옮겨 그렸다. 그리고는 총독부 정문 앞에 자신들이 만든 태극기를 걸어두었는데, 이것이 바로해방 후 서울에 최초로 내걸린 태극기다.하지만 그들의 태극기는 금방 내려졌다. 8월 광복 후, 9월이 지나도록 일본인들이 총독부를 떠나지 않았기 때문. 총독부 정문에는 여전히 일장기가 걸려 있었다.1945년 9월 9일 하지 중장을 비롯한 미군이 한국에 도착했다. 그날 오후 4시에 조선 총독부 제1 회의실에서는 조선 총독의 항복 조인식이 열렸다. 아베 조선 총독은 하지중장과 미군 대표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항복 문서에 서명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총독부 건물 앞의 일장기는 자취를 감추었다. 그리고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은 태극기가아닌 미국의 성조기였다. 미군정 시대가 열린 것이다.그로부터 3년 뒤인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나서야 태극기는 당당히 제 자리에서 펄럭일 수 있었다.  alt 총독부 광장의 게양대에서 일장기가 내려지는 순간(1945.09.09.)   신현배역사와 전통문화에 대해 관심이 많은 역사칼럼리스트. 저서로는 역사 이야기 『엉뚱 별난 한국사』, 『엉뚱 별난 세계사』, 『2000년 서울 이야기』, 『세계사로 배우는 법 이야기』,  전통문화 이야기 『소중한 우리 문화 지식 여행』 시리즈 등이 있다. ]]> Thu, 28 Jun 2018 21:12:04 +0000 19 <![CDATA[영원한 쾌락과 죽음 ]]> 글 이성주 역사칼럼니스트  영원한 쾌락과 죽음  목숨을 걸고 일왕에게 수류탄을 던진 이봉창 의사(義士). 사람들은 이봉창 의사가 독립운동가로서 특별한 삶을 살았을 거라 생각하지만, 사실 그의 평생은 평범하기 그지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구는 백범일지에서 이봉창과 그의 삶에 대한 자신의 소회를 이렇게 밝힌다. “나는 그의 위대한 인생관을 보고 감동의 눈물이 벅차오름을 금할 길이 없다”라고. 평범한 젊은이에 불과했던 이봉창의 무엇이 김구를 그토록 감동시켰던 것일까?  일제강점기 어떤 젊은이의 일생▲독립운동가 이봉창 ▲1900년 8월 10일 경성 출생 ▲1915년 문창소학교 졸업 ▲경성부 일본인 상점에 취직, 이후 상점 점원과 막노동 전전 ▲1917년 무라타 약국 취직 ▲1918년 철도청 용산철도국 기차 운전 견습생으로 취직 ▲1925년 오사카 도착. 일본인의 양자가 되어 기노시타 쇼조(木下昌藏)란 이름으로 생활 ▲1928년 히로히토 일왕의 즉위식을 구경하러 교토에 갔다가 한글 편지를 갖고 있다는 이유로 체포, 11일간 구류 ▲1931년 상하이에서 임시정부와 접촉 ▲1932년 1월 8일, 관병식을 참관하고 돌아가던 히로히토 일왕에게 수류탄을 투척 ▲1932년 10월 10일 사형집행. 32세의 나이로 순국 이봉창의 약력에서 특별한 것은 없다. 너무나 잘 알려진 수류탄 투척 사건을 제외하면 일제강점기를 살았던 평범한 청년의 모습이다. 취직을 하고 차별대우와 적은 월급에 분노하고 다시 새 일자리를 찾으러 다니는 등, 젊은 시절 생계를 위한 방황도 엿보인다. 주로 일본인이 운영하는 상점과 공공기관, 회사에서 일했고 마침내 일본인의 양자로 입적되기에 이른다. 그는 일본에서 기노시타 쇼조란 이름으로 생활하며 일본인 행세를 했다. 수준급의 일본어를 구사하고 의식적으로 일본인의 행동을 쫓으며 그들의 습성을 몸에 익혔으니 정말 ‘일본인’과 다름없었다. 상하이로 갈 때도 이봉창은 일본식 이름을 썼다. 그곳에서 이봉창은 일인 인쇄소 점원이자 봉급을 타면 술이나 마시는 건달일 뿐이었다.이처럼 별 볼 일 없는 일본인 행세를 한 덕분에 이봉창은 일왕에게 수류탄을 던질 수 있었다. 아무도 그를 독립운동가라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도리어 임시정부와 한인애국단 사람에게 의심을 샀다. 유창한 일본어를 구사하고 일본식 옷을 입고 다니는 이봉창을 ‘왜늙은이’라 부를 정도였다. 1932년 1월 이봉창은 일왕을 향해 수류탄을 던졌다. 지극히 평범했던, 오히려 일본인이나 건달로 오해를 샀던 젊은이가 의사가 되는 순간이었다.  삶이 만든 최고의 발명, 죽음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지난 31년 동안 육신의 쾌락은 대강 맛보았습니다. 이제는 영원한 쾌락을 꿈꾸며 우리 독립 사업에 헌신할 목적으로 상하이에 왔습니다.” 이봉창은 김구에게 자신이 상하이로 온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그는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었다. 김구 역시 이봉창의 독립사상과 진심에 큰 감명을 받았다. 제아무리 절절한 진심을 가지고 있다 하여도 죽음을 각오하기란 쉽지 않은 법. 그런 만큼 죽음이 가지는 힘 또한 대단하다.우리는 죽음을 잊고 살아간다. 삶과는 별개의 사건으로 죽음을 인식하는 것이다. 그러나 삶과 죽음은 하나다. 비록 진부한 명언 같을지라도 그 사실엔 변함이 없다. 그러니 죽음에 구태여 부정적인 의미를 부여할 필요도, 두려워할 필요도 없다. 스스로 목숨을 끊으라는 얘기가 아니다. 단지 죽음을 똑바로 응시하라는 것이다. 애플의 창업자 스티브 잡스는 “죽음은 우리 모두의 숙명입니다.…(중략)…죽음은 삶이 만든 최고의 발명이니까요. 죽음은 변화를 만들어 냅니다”라고 말했다. 삶이 만들어낸 최고의 발명, 죽음. 삶이 유한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유한한 자원을 효과적으로, 그리고 나 자신을 위해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고민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더 ‘잘’ 살 수 있게 되는 것이다.사람들은 늘 미지의 것을 두려워한다. 죽음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죽음은 언제나 우리 곁에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 당연한 사실에 두려워하는 대신 능동적으로 활용할 줄 알아야 한다. 삶이 유한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더 나은 사람이 되고자 자신을 채찍질하고, 죽음을 각오하거나 삶의 모든 에너지를 끌어모아 도전한다. 이봉창도 그랬다. 그저 평범한 청년에 불과했던 개인이 일왕에게 수류탄을 투척한 의사로 거듭날 수 있었던 데에는 죽음을 불사른 각오가 있었다. 그만큼 죽음은 강했다. 그가 말한 ‘영원한 쾌락’ 역시 죽음의 다른 이름이었으리라.  이성주시나리오 작가 겸 역사칼럼니스트. 대중과 함께 호흡하는 글쓰기를 목표로 『조선의 민낯』, 『왕들의 부부싸움』과 같은 역사서를 출간한 바 있다. 최근에는 국제정치와 관련된 연구 및 집필에 열중하고 있다. 『전쟁으로 보는 국제정치』 시리즈 1, 2, 3권을 출간 중이다. ]]> Thu, 28 Jun 2018 21:08:13 +0000 19 <![CDATA[여름날의 미소 ]]> 여름날의 미소  얄미운 더위를 피해그늘 아래로 숨어든 날,잔뜩 얼굴을 찌푸린 채로연신 손부채질만 하던 날. 한여름의 뙤약볕이 내리쬐는너른 마당은 아이들 차지입니다.등과 이마에 송골송골 땀방울을 매달고는더운 줄도 모르는지아니면 더워도 괜찮은 것인지쉼 없이 뛰고, 뒹굴고, 웃습니다. 어느새 아이들을 바라보는어른들의 구겨진 얼굴에도미소가 찾아옵니다. 여전히 여름은 뜨겁지만그 천진한 웃음소리 따라그 세찬 발걸음 따라나지막하게 콧노래를 흥얼거립니다. ]]> Thu, 28 Jun 2018 21:04:55 +0000 19 <![CDATA[대한광복회 독립전쟁의 신호탄을 쏘다 ]]> 글 권경률 역사칼럼니스트  대한광복회독립전쟁의 신호탄을 쏘다  매월 대한민국의 광복과 관련된 핵심사건을선정하여 그 치열했던 역사의 순간을재구성하고자 한다. 다시 만난 그날, 이번 회는1910년대 의병 조직과 계몽운동 조직이 힘을모았던 비밀결사, 대한광복회 편이다. 의열투쟁과독립전쟁의 시초가 된 그들의 투혼을 만나보자. alt친일 부호들을 응징하고 국권회복 의연금을 모은 독립운동가 채기중alt대한광복회 총사령 박상진alt대한광복회 부사령을 거쳐 독립전쟁의 영웅이 된 김좌진 장군    1910년대 조선을 강타한 친일 부호 습격 사건 “지식이 있는 자는 서로 충정을 알리고 단결하여 본회가 의로운 깃발을 들어 올릴 때를 기다려라. 그리고 재물이 있는 자는 각기 의무를 다하고 저축하여 본회의요구에 응하라. 나라는 회복할 것이요, 적은 멸망할 것이요, 공적은 길이 남을 것이다.” 1917년 조선의 부호들에게 의문의 편지가 도착했다. 편지에는 위 내용이 담긴 포고문과 함께 재산 규모에 따라 할당 금액을 적은 ‘특별배당금증’이 동봉되어 있었다. 전국 부호들의 거주지와 재산 규모까지, 치밀하게조사한 흔적이 역력했다. 그러나 일제의 식민 지배에편승해 부를 쌓아가던 친일 부호들은 의연금을 낼 마음이 없었다.신고를 받은 일본 경찰은 수사에 착수했다. 편지는 경성·대전·신의주 등 국내를 비롯해 중국 안동·봉천 등지에서 부쳐졌다. 발신지가 한두 군데가 아니다 보니추적이 쉽지 않았다. 경찰이 수사에 애를 먹는 사이 친일 부호들을 충격에 빠뜨린 사건이 터진다. 일명 친일부호 습격 사건. 1917년 1월 10일 칠곡의 대부호 장승원이 괴한의 습격으로 총에 맞아 중상을 입고 사망한 것이다. 그는 대한제국 시절 경상북도 관찰사를 지내면서일제에 협조를 해온 인물이었다. 그의 대문에는 경고문한 통이 붙어있었다. “오로지 광복을 외치는 것은 하늘과 사람이 모두 도리에 부합하는 일이다. 너의 큰 죄를 꾸짖고 우리 동포에게 경고를 주노라.” 독립운동을 돕지 않으면 응징을 내리겠다는 엄중한 경고였다. 습격 사건은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12월 13일에는 문경 부호 조시영이, 12월 20일엔 안동 부호 안승국이 재물을 빼앗겼다. 독립자금을 내달라는 편지를 받았으나 응하지 않았던 자들이었다. 장승원의 대문 앞에 붙어있던 경고문은 단순 엄포가 아니었던 셈이다.1910년 국권을 완전히 빼앗긴 이래, 국내 항일투쟁은 침체의 수렁에 빠져있었다. 그런 와중 친일파를 처단하는이들의 대담한 활동은 반전을 예고했다.사태가 일파만파 커지자 일본 공안 당국에는 비상이 걸렸다. 대대적인 인원을 투입해 용의자 색출에 나섰고, 사건에 대한 세간의 관심도 뜨겁게 달아올랐다. 과연 괴한의정체는 무엇인가? 사건은 미궁에 빠지는 듯했다.  의병 조직과 계몽운동 조직이 힘을 모으다1915년 7월 15일(음력), 대구 달성공원에 행락객들이 삼삼오오 모여들었다. 개중엔 한복 저고리에 갓을 쓴 유생도있었고, 양복 정장과 단발머리가 말쑥한 신사들도 적지않았다. 그들은 나무 그늘에 모여 앉아 시낭송회를 열었다. 이윽고 주최자로 보이는 30대 초반의 남자가 일어나운을 뗐다. 뜻밖에도 그의 입에서는 시와는 전혀 다른 말이 흘러나왔다. “조국을 회복하고 적을 물리치고 동포를 구하는 일은 실로 하늘이 내린 우리의 책무이자, 자손에게 물려주더라도하지 않을 수 없는 우리의 임무입니다. 국외 동포들과 국내 동지들을 상응시키고 외교적으로 일본을 고립시킨다면 도모할 때가 올 것입니다.”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한가로운 시낭송회로 가장하기는 했으나, 사실 이 회합은 비밀결사를 결성하는 자리였다. 대한제국 때부터 반목해온 의병 진영과 계몽운동세력이 힘을 합쳤다. 영주를 근거지로 활동한 풍기광복단과 대구의 조선국권회복단, 달성친목회 등이 바로 그들이다. 그렇게 독립이라는 공동의 목표 아래 ‘대한광복회’가출범했다.총사령에는 회합을 주도했던 박상진이 추대되었다. 그는양반 명문가 출신으로 16세 때부터 영남을 대표하는 의병장 허위에게 유학을 배웠다. 20대 초반에는 양정의숙에들어가 법률과 경제 등 신학문에 눈을 떴다. 이는 박상진이 의병 진영과 계몽운동 세력을 아우르며 대한광복회 결성에 앞장설 수 있었던 배경이 되었다.1908년 13도 창의군의 선봉에서 일본군과 싸워온 스승허위가 붙잡혀 처형당하고 1910년 나라마저 완전히 국권을 상실하자, 박상진은 판사의 꿈을 접고 중국으로 떠났다. 당시 대륙에서는 군주정을 무너뜨리고 공화정을 세우는 대격변, 신해혁명이 일어나고 있었다. 현지에서 혁명을 목격하고 영감을 얻은 박상진은 조국 광복의 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국내에서 비밀 결사를 결성, 자금을모으고 봉기를 준비하는 한편 중국 동북지역과 러시아 연해주에 독립군 기지를 건설한다는 것이 그림의 골자였다.박상진은 계획을 점검하고자 서간도에 정착한 허위의 형,허겸을 찾아갔다. 신흥무관학교를 이끄는 신민회 인사들을 소개받기 위해서였다. 덕분에 그는 이시영, 주진수 등과 교류하며 광복회의 청사진을 구체화할 수 있었다.그러나 대한광복회를 조직하는 일은 생각만큼 간단하지않았다. 먼저 국내에서 의병 조직과 계몽운동 조직을 규합해야 했다. 국권 회복이라는 같은 목표를 가지고 있었지만 둘 사이의 간극은 꽤나 컸다. 유학자 중심의 의병들이 복벽(復?), 즉 왕실 재건을 꿈꾼 반면에 신학문을 공부한 계몽운동가들은 국민 중심의 공화제를 지향했다.그러나 1910년대에 접어들면서 의병과 계몽운동 중 어떤세력도 국내에 발을 붙일 수가 없었다. 일제는 경술국치를 전후해 대대적인 토벌 작전을 펼치며 조선 땅에서 의병의 씨를 말렸다. 계몽운동도 이른바 ‘105인 사건’으로일망타진되어 간신히 명맥만 유지하는 실정이었다. 이제정치적 이견은 중요하지 않았다. 독립의 대의를 바라보고힘을 모으는 일만이 살길이었다.박상진은 의병 진영에서 우재룡과 권영만을 영입, 지휘장으로 임명했다. 스승 허위의 휘하에서 일본군과 싸웠던 맹장들이었다. 또 경상도 지부장 채기중, 충청도 지부장 김한종도 의병 출신이었다. 계몽운동 세력에서는 이관구·최준·김재열 등이 참여했다. 뒤에 영입한 김좌진도 계몽주의 지식인 인사였다. 이처럼 대한광복회는 지역과 사상을 망라하며 조직의 형태를 나갔다.국외 독립군 기지는 중국 지린에 뒀다. 길림(지린)광복회는 중국 동북지역과 러시아 연해주 동포들을 모아 독립군으로 길러냈다. 자체적으로 토지를 경작함으로써 한인들의 경제적 자립 또한 도모했다. 초대 책임자는 황해도 의병장 이진룡. 그는 대한광복회 부사령이자 만주지부장으로서 길림광복회를 이끌었으나 1916년 일제 공안당국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이진룡의 후임으로 들어온 이가 바로 김좌진이다. 국내에서 독립군 자금을 모으고 군사전략을 연구한 김좌진은 박상진과 김한종 등의 절대적인 신임을 얻어 1917년 지린으로 향했다. 대한광복회의 독립군양성이라는 중대한 임무를 짊어지고 먼 길을 떠난 것이다. 그것은 김좌진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다.  alt 의병과 계몽운동 세력이 힘을 합쳐 대한광복회를 결성한 대구 달성공원(1910)    독립전쟁의 신호탄을 쏘다1915년 12월 24일 새벽, 공금 8,700원이 사라졌다. 경주 일대에서 거둔 토지세로 행낭에 담아 마차로 운송 중인 돈이었다. 일본 경찰은 비상선을 치고 즉시 수색에 들어갔으나 범인을 찾을 길이 없었다. 워낙 수수께끼 같은 사건이라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에서도 대서특필했다. “마부는 새벽 바람이 몹시 차가운 고로 방한구를 입고 마차 앞에서 채찍질에 여념이 없었다. 무열왕릉 근처 언덕을 올라갈 때 바람이 더 심하게 불어서 마차 승객도 외투에 몸을 묻었다. 마차가 아화 방면을 향해 진행하는데 별안간 뒤에서 덜컹덜컹하는 소리가 들렸다. 마차 문이 열려있어 살펴보니 같이 오던 손님도, 행낭 속의 공금도 간곳이 없었다.” 훗날에야 사건의 진실이 밝혀졌다. 대한광복회 지휘장 우재룡과 권영만의 소행이었다. 권영만은 대구 병원에 치료를 받으러 간다며 마차에 올라탔고, 우재룡은 경주와 아화 길목에 장애물을 설치해 마차의 속도를 줄였다. 마차가 적당히 느려졌을 때, 권영만은 행낭을 찢어 공금을 훔친 뒤 우재룡과 함께 종적을 감춰버렸다.공금 수송 마차 습격은 대한광복회의 전술 중 하나였다.일제의 세금을 탈취해 식민 지배에 타격을 입히고 독립군 자금도 손에 넣겠다는 것이 그들의 목표였다. 당시 광복회원들이 가장 심혈을 기울이 사업은 군자금 확보였다.독립군을 양성하고 무기를 마련하려면 많은 돈이 들었다.전국의 부호들에게 의연금을 요청한 것도 마찬가지 이유에서였다.국내외에 조직망을 갖추고 있었던 광복회는 지부와 연락거점을 동원해 의연금 모금에 나섰다. 각지에서 부호들의재산 규모를 조사해 금액을 배당하고 다른 곳에서 포고문과 특별배당금증이 담긴 편지를 발송했다. 그러나 모금액은 기대에 훨씬 못 미쳤다. 협조하는 부호들이 있기는 했지만 금액이 적었고, 친일로 기울어진 이들은 당국에 밀고하기도 했다.이에 대한광복회는 방침을 바꿨다. 친일 부호들을 응징하기로 한 것이다. 먼저 경상도 지부장 채기중을 중심으로비밀결사가 움직였다. 1917년 11월 칠곡 부호 장승원을 습격함에 이어 차례대로 조시영과 안승국을 처단했다. 이듬해 1월에는 충청도 지부장 김한종이 나섰다. 응징의 대상은 충청남도 아산의 도고면장 박용하. 박용하는 면민을 학대하여 원성이 높았는데, 광복회의 편지를 일본 헌병대에밀고한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광복회원들은 기밀누설의 책임을 물어 권총으로 박용하를 처단하고 경고문을 붙였다.하지만 이 거사로 인해 광복회는 꼬리를 밟히게 된다.사건 수사를 맡은 천안 헌병대는 관내 부호들이 받은 불온 편지 대부분이 경성에서 부쳐졌다는 사실에 주목했다.경성과 인천을 자주 왕래하던 장두환이 먼저 수사망에 걸려들었다. 그가 체포되면서 비밀결사의 실체가 드러나기시작했다. 총사령 박상진과 지부장 채기중, 김한종 등이잇따라 검거되었다.1921년 이들 대한광복회 요인에 대한 사형이 집행되었다.그러나 일제와 친일 부호들을 공포에 떨게 했던 비밀결사의 투혼을 사라지지 않았다. 우재룡과 권영만을 비롯한남은 회원들은 광복단 결사대를 꾸려 의열 투쟁을 이어갔다. 중국 동북지역에 파견된 김좌진은 북로군정서의 사령관이 되어 청산리대첩을 일구고 본격적인 독립전쟁의 막을 올렸다. 대한광복회의 정신은 김원봉의 의열단과 김구의 한인애국단으로까지 이어졌다. 마치 신호탄을 쏘아 올리듯, 대한광복회는 수많은 독립군 활동과 독립전쟁의 계기가 되었다.  alt 박상진의 사형 집행을 보도한 기사(동아일보, 1921. 08. 13.)   권경률역사칼럼니스트. 서강대학교에서 역사학을 공부했다. 칼럼 ‘사극 속 역사인물’을 연재하고 팟캐스트 ‘역사채널 권경률’을 진행한다. 저서로는 『조선을 새롭게 하라』·『조선을 만든 위험한 말들』 등을 출간했으며, 영상물 <시시콜콜 한국사 어워즈>도 선보이고 있다. ]]> Thu, 28 Jun 2018 21:16:14 +0000 19 <![CDATA[한국 독립운동사, 비극과 갈등의 기록 ]]> 글 박영규  한국독립운동사,비극과갈등의 기록  시베리아에 위치한 아무르 주 스보보드니. 이곳은본래 알렉세예프스크라고 불렸으나 러시아 혁명 이후개칭되었다. 스보보드니는 러시아어로 ‘자유’를 의미했기때문에 1920년대 한국인들에게는 자유시라는 이름이 더익숙했다. 1921년 6월 28일, 스보보드니에서 극동공화국과이르쿠츠크파 독립군이 독립군들을 사살하는 사건이발생한다. 자유시 참변이었다. alt 자유시 전경   한국 독립군이 러시아로 향한 이유1918년 11월, 세계대전에 대한 미국과 독일 간 단독 휴전이 이루어진 이후 1919년부터 파리강화회의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1917년 러시아에서는 혁명이 일어났고, 동북아시아는 일제의 팽창정책에 의해 분쟁이 계속되는 중이었다.일제는 대륙 진출을 위해 간도참변 및 간도지역 독립군을 상대로 한 청산리전투를 일으켰다. 간도에 있던 우리독립군들은 일제의 초토화 작전에 밀려 러시아 지역으로몸을 피해야 했다. 그들은 러시아로 이동 중 우선 중국 헤이룽장성 밀산에 집결하였다. 밀산에 모인 독립군은 서일과 김좌진이 이끌던 북로군정서를 비롯하여 지청천의 한국 독립군·홍범도의 대한독립군·구춘선의 간도 국민회·김성배의 대한신민회·이범윤의 의군부와 광복단·김국초의 혈성단·최명록의 도독부·김소래의 야단·이규의 대한정의군정사·김백일의 군비단 등 총 12개 집단이었다. 이들은 밀산에서 청산리전투 이후 흩어졌던 독립군을 재조직하였다. 독립군은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러시아 혁명정부 간 밀약에 따라 보급을 받기 위해 이듬해 자유시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극동공화국이 제공한철도를 타고 하바로프스크를 거쳐 서북방으로 갔다. 장거리를 이동한 끝에 아무르 강변의 스보보드니, 즉 자유시에 도착했다.  alt고려혁명군정의회 선포문(자유시 군변에 대하여) 자유시 참변에 대한 일반의 오해를 없애기 위해 전후 형편과 경과를 밝히고 있다.   누가 자유시의 독립군을 지휘할 것인가자유시에는 이미 극동공화국 지역에 머무르던 한인이 독립군을 조직하여 주둔해 있었다. 이들 모두는 고려공산당 소속이었는데 고려공산당은 다시 두 부류로 나뉘었다. 러시아 지역의 독립 세력 중 가장 명망이 높았던 이동휘가 상하이에서 먼저 만든 고려공산당과 그의 라이벌이었던 문창범·여운형이 대한국민의회를 중심으로 만든고려공산당이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이동휘의 고려공산당을 상하이파, 문창범과 여운형의 고려공산당을 이르쿠츠크파라고 불렀다. 두 파벌은 군대를 병합하는 과정에서 통수권을 두고 갈등했다. 상하이파의 핵심부대인 니항군을 이끌던 박일리아는 극동공화국 군부와 먼저 접촉했다. 그는 상하이파 인물인 박창은을 총사령관으로 하여 자유시에 집결한 한인 부대들을 지휘하도록 했다. 하지만 이르쿠츠크파의 자유대대와 대한국민의회는 그를사령관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결국 박창은은 총사령관직을 사임했고, 극동공화국은 다시 상하이파 지지자인 그리고리예프를 연대장, 박일리아를 군정위원장으로 임명하였다. 간도의 독립군 사단인 대한독립군단을 비롯한모든 한인군단에 대한 지휘를 담당토록 한 것이다. 이에자유대대가 끝까지 불응하자 그리고리예프는 자유대대의 장교들을 체포하고 무기를 압수한 뒤 지방수비대로강제 편입시켰다.고려공산당 파벌 싸움은 상하이파의 승리로 끝나는 듯했다. 그러나 자유대대의 오하묵과 최고려는 이르쿠츠크에 자리한 코민테른(제3인터내셔널, 국제공산당) 동양비서부를 찾아가서 자신들의 처지를 설명하고 군권을 되찾을 수 있도록 도와 달라 하소연했다. 상하이파가 극동공화국과 친분이 두터웠다면 이르쿠츠크파는 이르쿠츠크 코민테른과 가까웠던 것이다. 이르쿠츠크 코민테른은동양비서부를 통해 임시 고려군정회를 조직하고 군대를내주었다. 고려군정회의 총사령관은 갈란다리시빌리, 부사령관은 오하묵이었다. 군정위원으로는 이르쿠츠크파의 일원인 김하석과 채성룡이 임명됐다. 갈란다리시빌리는 자신이 고려군정회의 총사령관임을 주장하며 극동공화국에 주둔한 모든 한인 부대에 대해 자유시로 출두할것을 명령했다. 대세가 뒤집혔음을 직감한 대한독립군단의 홍범도 등은 자유시로 집결했으나 상하이파 부대를통솔하던 박일리아 등은 응하지 않았다. 이에 갈란다리시빌리는 그리고리예프 군대를 포위하여 압박했고 결국그리고리예프는 투항하고 말았다. 그러나 박일리아는 끝까지 고려군정회의 명령에 불응했다. 이에 갈란다리시빌리는 박일리아의 사할린의용대를 무장해제하기로 결정,공격을 지시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독립군이 사살되었다. 1천여 명에 이르던 부대원 중 864명이 무장해제 되어 체포됐다. 이후 홍범도·안무·지청천 등이 이끌던 대한독립군단 소속 대원들은 붉은 군대에 편입되어 이르쿠츠크로 이동하였으나 무장해제 되었다.  alt국민대표회 분쟁의 건. 조선인 국민대표회에서 개조파와 창조파, 유지파 간의 분쟁을 적은 문건의 일부이다. 총 6면으로 되어있다.   혼란의 임시정부, 위기의 독립운동자유시 참변은 한국독립운동사의 가장 뼈아픈 사건 중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이 일로 수천 명의 항일 독립부대가 사라지고, 홍범도와 같은 뛰어난 무장들을 잃었다. 다행히 김좌진·김규식·이범석·김홍일 등은 이만에서 발길을 돌린 덕분에 참변의 화를 피할 수 있었다. 대한독립군단이 와해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독립군단의 총재 서일은 책임을 통감하고 밀산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같은 시기,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도 내부 갈등으로 혼란에 빠져 있었다.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1920년 12월 미국에서 상하이로 밀항하여 취임했는데, 이후 러시아 연해주 동포 사회를 이끌고 있던 이동휘와 대립각을 세웠다. 이동휘는 이승만의 외교 중심 독립운동에 반대하며 총리직을 사임했고, 마찬가지로 이승만의 노선에 반대의사를 갖고 있었던 신채호도 임시정부에서 이탈했다. 이승만은 임시정부의 혼란을 수습하기힘들다고 판단, 미국으로 돌아가 버렸다.임시정부 내의 갈등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1921년 임시정부는 레닌으로부터 100만 루블의 군자금 지원을 약속받았다. 그러나 그중 40만 루블을 수령한 이동휘가 임시정부에 자금을 보내지 않았다. 이에 김구는 레닌의 돈을 수령한 이동휘 일파를 추격하여 김립을 암살하고 이동휘를 포함한 사회주의 세력을 임시정부에서 추방하기에 이른다.1923년 임시정부는 조직 재정비를 목적으로 국민대표회의를 개최했다. 회의엔 200여 명의 지역 대표들이 참석하여 임시정부의 존립을 두고 논쟁을 벌였다. 그들은 크게 창조파와 개조파로 나뉘어 대립했다. 창조파는 임시정부의 해체와 재건을 주장했으나 개조파는 임시정부를개혁하는 선에서 마무리하기를 원했다. 양쪽은 끝내 합의를 보지 못하였고, 내무총장을 맡고 있던 김구는 국민대표회의를 해산시켰다.이후로도 임시정부는 여러 차례 난관에 부딪쳤다. 미국으로 간 이승만은 다시 상하이로 돌아오지 않았고 결국에는 탄핵되어 대통령 직에서 내쫓겼다. 박은식이 임시대통령을 맡아 국무령제를 채택, 초대 국무령으로 이상룡이 임명되었으나 내각 형성에 실패하여 사퇴하였다.임시정부를 이끌던 실질적인 지도자 이동녕이 잠시 국무령을 맡았다가 홍진이 이어 받았지만 마찬가지로 내각 조직에는 실패하고 말았다. 결국 임시정부는 김구에의해 간신히 유지되는 형국이 되고 말았다.임시정부는 1919년 4월 11일 수립 이후 가장 힘든 시기를 겪고 있었다. 정부 요인들은 하나 둘 떠나가고, 내각조차 조직할 수 없는 지경에 처했다. 재정 상태까지 최악으로 치달으니 끼니도 해결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외교 활동도 거의 전무했고, 국내와의 연결망도 무너졌다. 비밀행정조직망 또한 파괴된 상태였다. 이렇듯 1920년대 임시정부는 나날이 쪼그라들어갔다.  alt이승만 상하이 도착 환영식장(1920.12.28.)이승만은 1919년 9월 임시정부 대통령에 임명되고 1920년 12월 5일 상하이에 도착했다.   박영규1996년 『한 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을 내면서 저술활동을 시작하여. 1998년 중편소설 『식물도감 만드는 시간』으로 문예중앙신인상을 수상하면서 소설가로 등단했다. 문학, 철학, 역사 분야에 걸쳐 저술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대표적인 역사서로는 『한 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 『한 권으로 읽는 일제강점실록』 등이 있다. ]]> Thu, 28 Jun 2018 21:14:56 +0000 19 <![CDATA[기나긴 독립전쟁의 시작 ]]> 글 고종환 아주대학교 외래교수  기나긴 독립전쟁의 시작  1568년부터 1648년까지 네덜란드는 에스파냐(스페인)에맞서 독립전쟁을 펼쳤다. ‘네덜란드 80년 전쟁’이란 또다른 이름처럼 전쟁은 80년 동안이나 계속되었고, 마침내네덜란드는 독립을 거머쥐었다. 그리고 종교와 세금은 네덜란드 독립전쟁이 심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alt 성상을 파괴하는 칼뱅주의자(1588, 프란스 호겐베르크(Frans Hogenberg), 국립 포 성 미술관)    네덜란드, 그리고 벨기에의 독립네덜란드 독립전쟁 당시 북부 7개 주와 남부의 10개 주는 힘을 합쳐 스페인에 대항했다. 북부와 남부의 차이는 종교였는데, 북부에는 주로 개신교도들이 살고 있었던 반면 남부엔 가톨릭 신자가 많았다. 전쟁이 장기화되자 남부 10개 주는 ‘아라 동맹’을 맺고 철수한다. 그러나 북부 지역의 독립 의지는매우 강력했다. 그들은 1579년 1월 29일, ‘생명·피·물자를 바쳐 권리와 자유를 지킴에 있어 마치 하나의 주가 된 것처럼결합할 것’을 결의하고 더욱 치열한 투쟁에 돌입하게 된다.위트레흐트 동맹(Treaties of Utrecht)이 독립국 네덜란드의 모태가 되었다. 북부의 주들은 동맹을 맺어 끝까지 투쟁한 끝에 ‘독립’이라는 값진 결과를 얻어낼 수 있었다. 1581년7월에 독립을 선언함으로써 네덜란드연방공화국이 탄생하였다. 그러나 남부 지역은 여전히 스페인의 지배를 받았다 .독립전쟁도 지루하리만큼 더디게 이어지고 있었다. 1648년에 이르러서야 ‘베스트팔렌 조약’이 성사되며 네덜란드연방공화국은 국제적인 승인을 얻는다.남부 지역은 1839년에 정식국가가 됐는데 이 나라가 바로벨기에다.  가톨릭을 거부하는 자에게는 오직 죽음뿐독립전쟁을 통해 네덜란드가 얻고자 했던 자유에는 종교의자유도 포함되어 있었다. 당시 스페인은 가톨릭을 강요했다. 서기 712년 스페인에 유입된 이슬람은 금세 거의 모든지역을 지배했다. 이에 위협을 느낀 스페인은 이슬람을 몰아내고자 더욱 순수한 가톨릭을 사수하게 된다. 중세 네덜란드는 칼뱅주의와 개혁교회, 즉 개신교가 성행했는데 이러한 흐름은 북유럽을 중심으로 빠르게 확산되는 중이었다. 그러나 스페인은 물리적 탄압을 동원, 자신들이 지배하는 네덜란드에서도 가톨릭으로의 종교적 통일을 강제했다.가톨릭을 거부하는 자에게는 오직 죽음만이 있을 뿐, 신교도에 관용을 주장하는 것 역시 반역으로 간주하였다.네덜란드 개신교인들이 바란 것은 단지 종교적 자유였다.그러나 16세기 네덜란드를 지배하던 펠리페 2세는 잔인한공포정치를 통해 그들을 강제 굴복시켰다. 설상가상으로종교적 이단 심판까지 도입하려 했다. 강한 탄압은 강한 저항을 부르는 법. 펠리페 2세와 종교탄압에 반발하는 옥외집회가 일어났다. 집회에서 칼뱅파 신교도들은 성상파괴운동을 전개했다. 16세기 판화가 프란스 호겐베르크의 작품 <성상을 파괴하는 칼뱅주의자>에 당시의 상황이 잘 드러나 있다. 사람들은 우상숭배를 거부하며 교회를 장식하고 있던성화와 조각들을 부쉈고, 교회에는 아무런 장식도 없는 하얀 회벽만이 남았다. 성상파괴운동이 확대되면서 스페인에대한 네덜란드인의 저항은 점차 무장투쟁으로 번져갔다.  알바 공작과 ‘1할 세’당시 네덜란드에는 중개무역과 모직물 산업으로 부를 축적한 상공업인들이 많았다. 이들은 칼뱅주의와 개혁교회를지지했다. 노동으로 부를 쌓는 것은 잘못이 아닌 신의 뜻이라는 칼뱅 사상의 내용은 상인들을 경도시키기에 충분했던 것이다.같은 시기 펠리페 2세는 전쟁경비를 충당할 목적으로 상공업자에게 높은 세금을 부과했다. 이에 네덜란드의 상공업자들과 개신교도들은 자치권을 요구하며 스페인 탄압에저항하기 시작한다. 펠리페 2세는 이들을 저지하기 위해 자신의 최측근이자 장수인 알바 공작(Duke of Alba)과 군대를 파견, 네덜란드에 처절한 피바람을 일으켰다.사실 독립전쟁 초기, 네덜란드는 상당한 고전을 겪고 있었다. 스페인에 대항하려는 세력이 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1571년 알바 공작이 스페인 의회의 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1할 세’를 실시하자 투쟁의 양상이 바뀌었다. 1할세는 모든 판매수익과 토지수익에 1할의 세금을 부과하는세금정책인데, 이 정책이 네덜란드인으로 하여금 참았던화를 폭발케 했다. 네덜란드 안에 있던 가톨릭 신자들마저불만을 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바 공작은 무자비한탄압을 이어갔고, 신교들을 비롯한 많은 네덜란드인이 살해 당했다. 이것은 네덜란드의 독립전쟁을 더욱 과격하게만들었다.  고종환한국 프랑스문화학회의 재무이사이자, 아주대학교와 경상대학교 외래교수. 프랑스 문화와 예술, 서양연극사, 광고이미지 등을 강의하고 있다. 대표 저서로는 『한권으로 읽는 연극의역사』와 『오페라로 배우는 역사와 문화』·『글로벌 다문화교육』이 있다. ]]> Thu, 28 Jun 2018 21:17:30 +0000 19 <![CDATA[건빵 한 봉지의 기억과 위로 ]]> 글 윤덕노 음식문화평론가  건빵 한 봉지의기억과 위로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비록 군대를 다녀오지않았더라도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건빵에 대한 추억 하나쯤은 가지고 있을 것이다. 대표적인군 간식이자 국민 간식으로 사랑받았던 건빵언제부터 우리가 건빵을 먹었는지 시간을 더듬어가다 보면 민족의 아픈 수난사가 자리하고 있다.  제국주의와 식민 역사의 산물군대에서 먹는 간식으로 알려져 있는 만큼 건빵의 역사는우리 국군의 역사와 흐름을 같이 할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보다 훨씬 더 깊고 오래된 뿌리를 지닌다.한국전쟁 무렵만 해도 국군은 건빵조차 제대로 먹지 못했는데 당시 육군참모총장을 지낸 백선엽 장군은 그 시절을 이렇게 회고한다. “한국전쟁이 난 후 국군에게 건빵이 지급됐지만,양이 부족했고 품질 또한 좋지 않았다.”-중앙일보, 2010.11.19. 이종찬 장군의 육군참모총장 재임 기간은 1951년 6월 23일부터 1952년 7월 2일까지로, 그의 회고에 의하면 한국전쟁이 가장 치열했을 시기에 남한에서는 건빵도 제대로 생산할수 없는 실정이었다. 전쟁 중이라서가 아니라 그 무렵 우리나라에는 건빵을 생산할 기술이 없었다.애당초 건빵은 일본 음식이었다. 침략전쟁을 위해 서양의비스킷을 본 따 만든 전투식량이 바로 건빵이었다. 일본 내전과 러일전쟁, 청일전쟁, 그리고 중일전쟁을 거치면서 지금과 같은 형태의 건빵이 완성됐다.우리나라에 건빵이 처음 들어온 시기도 일제강점기다.1930년 조선 주둔 일본군에게 건빵이 지급됐다는 기록이있다. 조선에서 건빵을 만들어 군에 납품한 뒤 남은 물량은전시물자로 비축해뒀는데, 광복 직후 경기도에 일제가 남겨둔 건빵만 해도 1,600가마니나 되었다고 한다.건빵이 언제부터 국군에 지급됐는지 알 수 있는 정확한 자료는 없다. 다만 백선엽 장군의 회고에서 드러나듯 초기 국군은 건빵마저 넉넉하게 받지 못했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일제가 남긴 비축물량에 더해 소량 생산된 건빵이 전부였기때문이다. 대단한 요리도 아니고 고작 건빵 하나 제대로 생산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다른산업과 마찬가지로 제과제빵 공장 역시 주요 기술직은 일본인이 담당하였으니, 해방 후 일본인이 물러간 자리에는 빈공장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건빵으로 보는 민족의 고난 극복사그래서일까? 그즈음 건빵은 제법 귀한 대접을 받았다. 1953년 경향신문에는 삼군합동 위령제에 참석한 2사단장이 장병들로부터 각출한 돈과 건빵을 전사자 유가족에게 여비로나누어주었다는 기사가 있다. 1954년 동아일보에도 상이용사에게 건빵을 위문품으로 지급했다는 기사가 나온다. 군대안에서도 없어서 먹지 못 하는 건빵이었지만 그조차 아끼고아껴 다친 전우와 전사한 전우의 유가족들에게 위문품으로전달한 것이다.건빵이 대량 생산되기 시작한 것은 한국전쟁 후반으로 추정된다. 일제강점기 건빵 공장에서 일한 경험이 있는 함창희가 동립산업을 설립, 미국의 원조로 밀가루를 받아 대구에서 건빵을 만들었다. 수복 후에는 영등포에 더 큰 공장을 짓고 건빵을 대량으로 생산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동립산업은 일제가 남긴 적산인 모리나가 제과 건빵 공장을불하받아 건빵과 설탕 등 식료품을 생산했는데, 1950년대후반에는 전군에 군용 건빵을 독점 납품하기도 했다. 1956년 국립영상제작소에서 만든 ‘우리의 공업’이라는 공보 영상에는 국군장병의 야전 양식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건빵을 연간 6,200만 봉지나 생산한다면서 당시 주요 공업 생산품목으로 홍보할 정도였으니, 참으로 격세지감이 느껴진다. 일본의 건빵이 침략전쟁을 목표로 한 제국주의가 만들어낸결과물이라면 우리에게 건빵은 시련과 고난 극복의 상징이었다. 그것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쳐, 전쟁 직후 남겨진 유가족의 쓰라린 마음마저 끌어안았다. 저마다 건빵에추억 하나씩을 새겨 넣듯, 우리 민족사에서도 건빵에 대한기억은 특별할 수밖에 없다. 폐허와 백지의 상태에서 현재의 우리를 만들어낸 저력이 녹아 있으니 말이다.  alt 윤덕노음식문화평론가. 1984년 매일경제신문사에 입사해 20여 년간 기자 생활을 하면서 특파원 활동·출장·연수 등으로 미국과 중국을 비롯한 다양한 나라에 머물렀다. 음식에 관심이 많아 관련 자료를 수집해온 결과, 음식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주요 저서로는 『음식잡학사전』·『신의 선물 밥』·『붕어빵에도 족보가 있다』 등이 있다. ]]> Thu, 28 Jun 2018 21:18:37 +0000 19 <![CDATA[아름다운 자연 속 삶의 흔적을 보다 충청남도 홍성 ]]> 글·사진 김초록 여행칼럼니스트아름다운 자연 속 삶의 흔적을 보다충청남도 홍성겨울 정경에 하루쯤 푹 파묻히고 싶은 이들에게 충남 홍성은 더없이 좋은 장소다. 전망 좋은 산과 탁 트인 바다, 싱싱한 해산물이 있는 포구, 곳곳에 남아 있는 역사의 혼, 이 모든 것들을 함께 즐기고 볼 수 있는 은혜로운 땅이기 때문이다. 일찍이 홍성은 예산·당진·서산과 함께 내포(內浦)의 중심 고을을 자처해왔다. 내포는 가야산 앞뒤에 있는 열 고을을 일컫는데, 작가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충청도에서는 내포가 가장 좋은 곳’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안은 홍주성먼저 읍내부터 가보기로 한다. 읍내의 볼거리는 단연 홍주성이다. 축성 연도를 알 수 없어 아쉽지만 한때의 규모를 말해주듯 위풍당당함을 잃지 않고 있다. 유적이 으레 그렇듯 세월의 부침은 어쩔 수 없는지 1,772m에 달하던 성 길이는 810m로 절반 이상 줄어들었고, 성내 관아 건물이 35동에 이르렀으나 지금은 조양문·홍주아문·안회당(동헌)·여하정 등만 남아 있다. 군청 건물 뒤에 있는 안회당(安懷堂, 사적 제231호)은 흥선대원군 시절에 개축한 건물로 그나마 원형이 잘 보존돼 있다. 홍주목의 동헌으로, 동헌이라는 이름 대신 쓰고 있는 안회당은 논어에서 유래된 말로 ‘노인을 편히 모시고 벗을 믿음으로 사귀며 연소자를 사랑해야 한다’는 뜻이 있다. 1870년(고종 7년) 4월에 상량해 정교한 기술로 지은 22칸의 이 목조건물은 투박하면서도 기품이 서려 있다.안회당 뒤뜰에 자리 잡고 연못을 둔 여하정도 눈길을 끈다. 1896년(고종 33년) 홍주목사 이승우가 건립한 육각형의 아담한 정자로, 안회당에서 집무를 본 뒤 휴식을 취하던 곳이다. 철따라 독특한 모습을 보여주는데 여름엔 연못에 핀 연꽃이 환상적이다. 군청 정면에 우람하게 서있는 홍주아문은 1870년 당시 홍주목사 한응필이 홍주성을 대대적으로 보수하면서 이 성의 동문인 조양문을 지으며 세운 것이다. 원래 10칸 반 규모의 내삼문과 남과 북으로 담장을 대신했던 큰 건물이 있었는데, 3·1운동 당시 홍성의 만세사건을 진압시키기 위해 들어온 일본군에 의해 허물어져버렸다.홍주성: 충남 홍성군 홍성읍 오관리 200-2 / 041-630-1226 alt (위) 안회당 (아래 왼쪽부터) 여하정 / 홍주아문                         홍성을 빛낸 두 명의 애국자읍내를 벗어나 결성면 성곡리 쪽으로 가면 만해 한용운의 생가지를 만날 수 있다. 1879년에 태어난 한용운은 6세부터 한학을 배워 익힐 정도로 신동소리를 들었으며, 26세에 강원도 백담사에 들어가 불교와 인연을 맺는다. 1919년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 독립선언서를 낭독했으며, 신간회(新幹會)를 결성해 학생 의거와 전국적인 민족운동의 바탕을 마련하기도 했다. 생가는 앞면 3칸, 옆면 2칸 규모의 초가인데 양 옆으로 1칸씩 더 달아 광과 헛간으로 사용했고, 울타리는 싸리나무로 둘렀다. 생가 앞에는 한용운 동상이 서있었다. 한 손을 내밀고 선 모습이 마치 우리 후손들의 발걸음을 기다리고 있었던 듯하다. 현재 이곳에는 한용운의 위패와 영정을 모신 사당 만해사가 있고, 만해문학체험관에서 만해의 일생을 더듬어 볼 수 있는 유물 60여 점을 관람할 수 있다. 특히 체험관 뒤편에는 민족시비공원이 조성돼 있어, 숲길을 산책하며 큰 돌에 새겨진 시를 감상할 수 있다. 한용운은 1926년 시집 ‘님의 침묵’을 내면서 저항 문학에도 앞장섰다. 매년 10월에는 이곳에서 한용운을 추모하는 만해제가 열린다. 차로 10분 정도 이동하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백야 김좌진 장군의 생가가 있다. 평생을 항일전투에 몸 바쳤던 김좌진. 그를 말하자면 1920년 10월 일본군을 무찌른 청산리대첩을 빼놓을 수 없다. 청산리대첩은 봉오동전투와 함께 독립전쟁 사상 최대의 승리로 꼽힌다. 생가는 안채와 사랑채·광·마구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안채에는 부엌과 아랫방, 윗방이 있고 통 칸으로 된 대청이 딸려 있다. 마당 한쪽에는 우물이 있고, 생가 뒤편에는 사당 백야사가 자리를 잡고 있다. 매년 음력 12월 25일에 제향을 올린단다. 동시대에 태어나 조국 독립을 위해 일생을 바친 두 사람. 오늘날 홍성의 역사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한용운선생생가지: 충남 홍성군 결성면 318번길 83김좌진장군생가지: 충남 홍성군 갈산면 백야로 546번길 12 / 041-634-6952 alt(왼쪽부터) 김좌진 생가에 걸려 있는 김좌진 초상 / 한용운 생가                         선조들이 먼저 알아본 홍성의 명산홍성에 오면 기개 넘치는 산을 구경하는 것을 잊지 말자. 억새밭으로 유명한 오서산과 전망이 빼어난 용봉산이 바로 그것이다. ‘서해의 등대산’으로 불리는 오서산은 고기잡이에 나선 어부들에게 등대 역할을 해왔다고 한다. 오랜 옛날부터 천수만을 지나던 고깃배들은 오서산을 바라보며 방향을 잡았다. 시원하게 펼쳐진 조망도 일품이다. 맑은 날이면 안면도와 천수만 일대의 여러 섬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덕산온천 방면에 솟은 용봉산은 용의 몸집에 봉황의 머리를 닮았다고 해서 이름 붙여졌다. 해발 381m로 그리 높지 않아 가족 산행지로 아주 좋다. 산 전체가 기묘한 바위산으로 이루어져 산세가 수려해 ‘작은 금강산’으로 불린다. 다산 정약용은 일찍이 용봉산의 절경에 감탄해 ‘용봉사에 들러(過龍鳳寺)’라는 시를 남기기도 했다.‘서해의 지역이라 명산은 적고 / 기름진 넓은 들만 깔리었는데 / 뜻밖에도 본질을 탈바꿈하여 / 머리 빗고 몸 씻어 평지에 나와 / 뭇 봉우리 드높이 솟았으니 / 가팔라 투박한 살 털어버렸네 / 가녀린 꼴 금세 곧 소멸할 것 같은데 / 험난하여 또다시 삼엄한 느낌 / 놀란 기럭 고개를 높이 쳐들고 / 별난 귀신 엿보다 도로 엎드려 / 아첨하는 간신은 참소 올리고 / 경망한 아녀자가 독기 품은 듯 / 생김새 그야말로 특이하구나’용봉산을 오르다 보면 중턱에 있는 용봉사에서 잠시 쉴 수 있는데, 호젓함이 물씬 풍긴다. 용봉사 위로 시선을 쳐들자 홍성 신경리 마애석불(보물 제355호)이 온화한 표정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오서산: 충남 홍성군 장곡면 장곡길 438번길 540 / 041-630-1425용봉산: 충남 홍성군 용봉산 3길 / 041-630-1784 alt용봉산 병풍바위alt홍성 신경리 마애석불                         생생한 삶의 향기가 나는 곳홍성은 천수만과 맞닿아 있다. 드넓게 펼쳐진 천수만을 따라가면 서해안의 대표적인 수산물 집산지인 남당항이 나온다. 비릿한 내음을 콧속 깊숙이 들이마시며 남당항에 들어섰다. 바다의 냄새는 여행의 설렘을 느끼는 도구가 되기도 한다. 특히 항구는 한겨울일지라도 계절을 가리지 않고 생생하게 살아있는 삶의 현장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곳이다. 소규모어항이지만 남당항에는 새조개·키조개·대하·꽃게·광어·우럭 등등 충남 서해의 대표적인 수산물 먹거리가 가득하다. 이곳에서 나는 생물은 하나같이 싱싱하다. 포구 바로 앞이 물고기의 산란터인 천수만인 까닭이다. 특히 매년 한겨울인 12월부터 2월까지는 이곳 남당항에서 새조개 축제가 열린다. 제철을 맞아 살이 통통하게 오른 새조개를 마음껏 맛볼 수 있는 기회다. 천수만으로 길게 뻗은 방파제에 물이 빠지자 끝없는 갯벌이 드러났다. 남당항에서 해안을 따라 서산 쪽으로 올라가다보면 어사포구-속동전망대-궁리항이 차례로 나타난다. 어사포구와 궁리항 중간에 있는 속동전망대는 바다를 한눈에 담기에 제격이다. 마을 정보화센터 앞에 2층으로 된 전망대와 목재 데크가 조성되어 있다. 이곳을 가장 유명하게 만든 것은 일몰이다. 해안선 너머로 지는 석양을 뱃머리 모양의 전망대에서 바라보자면 이때만큼은 누구나 시인이 된다. 홍성에서 빼놓을 수 없는 풍경 중 하나다.남당항: 충남 홍성군 서부면 남당항로 213번길 25-62속동전망대: 충남 홍성군 서부면 남당항로 689 alt (왼쪽부터) 남당항 / 서해의 대표적인 수산물이 가득한 남당항 alt 속동전망대에서 바라본 갯벌             멀리서 보는 홍성은 아름다운 자연경관에 둘러쌓여 있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오랜 세월 우리 선조들이 남기고 간 삶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또한 지금도 새로운 삶의 흔적을 남기고 있는 홍성, 그 흔적에 동참해보는 것은 어떨까.                         김초록여행칼럼니스트 겸 수필가. 현재 『월간 비타민』, 『건설경제신문』, 『서울우유』, 『냉동공조신문』에 객원기자로 활동 중이다.여행 저서로는 『여름 이야기』, 『7가지 테마가 있는 여행』 등이 있다. ]]> Wed, 01 Feb 2017 18:31:31 +0000 2 <![CDATA[독립기념관과 독립운동가 ]]> 빼앗긴 주권을 되찾아오고 그 상처 위에 다시 태어난 우리나라, 대한민국. 혹자는 우리의 역사를 기적이라 말한다. 그러나 이 기적은 우연의 산물이 아닌 인간의 의지가 모여 빚어낸 결과물이다. 독립기념관은 독립운동가의 삶을 발굴하고 기록하여 널리 알리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다. 우리에게 ‘독립’이란 필연과도 같은 기적을 안겨준 이들의 헌신을 잊지 않기 위해.             alt]]> Tue, 31 Jan 2017 17:21:49 +0000 2 <![CDATA[동료인가 적인가, 밝혀지지 않은 정체 영화 <밀정> ]]> 글 편집실동료인가 적인가, 밝혀지지 않은 정체영화 <밀정><밀정>은 일제강점기에 활동했던 무장독립운동단체 의열단의 폭탄 테러 작전을 그린 영화다. 나라를 잃은 시기, 일제가 심어 놓은 ‘밀정’은 같은 민족임에도 서로를 믿지 못하고 의심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내 옆에 있는 사람은 과연 동료인가 적인가. 영화는 내내 친일과 반일 사이의 경계를 넘나들며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Q. 영화 속 폭탄 밀수 작전은 역사적 사실인가?1923년 3월 경기도 경찰부 소속 황옥 경부와 의열단이 조선총독부·동양척식회사·경찰서 등 일제 주요 기관을 파괴하기 위해 헝가리 혁명가인 폭탄 제조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중국에서 국내로 폭탄 36개를 반입하다가 발각된 사건이 있었다. <밀정>은 바로 이 ‘황옥 경부 폭탄 사건’을 모티브로 만들어졌다. 영화에서는 여러 어려움 끝에 마침내 고위 경찰들이 참석한 연회장에서 폭탄을 폭발시키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사실은 다르다. 경성까지 폭탄을 반입하는 데 성공했던 이들은 거사 전에 발각되어 폭탄 압수는 물론이고, 황옥을 포함해 의거에 가담한 단원 모두 검거되었다.        alt<밀정> 속 의열단alt의열단(항일무장독립운동단체)             Q. 등장인물들의 실제 모델은 누구인가?영화의 중심 내용 중 하나는 이정출(송강호)이 일제의 끄나풀인지 아니면 의열단원인지에 있다. 이정출은 실제로 황옥 경부 폭탄 사건에 비밀리에 가담했다는 소문이 나돌았던 황옥이 모델이다. 조선인 출신인 황옥은 조선총독부 경무국 경부 자리에 오른 인물로, 경무국장의 지시를 받아 의열단원 김시현에게 접근해 폭탄 계획에 함께했다.김시현은 <밀정>에서 김우진(공유)이라는 인물로 나온다. 김우진은 이정출이 일부러 자신에게 접촉한 것을 알았으며, 두 사람은 도자기 밀수 사업으로 친분을 쌓았다. 실제로도 김시현은 의열단에 잠입한 황옥의 의도를 눈치 채고, 그와 아편 밀수를 계획하며 가까이 지냈다. 그외에도 조회령(신성록)은 김재진·연계순(한지민)은 여성 의열단원 현계옥·김장옥(박희순)은 황옥 경부 폭탄 사건이 일어나기 전 1923년 1월 12일 종로경찰서투탄의거를 일으킨 김상옥을 모델로 했다. 또한 영화에 잠깐 등장했지만 강렬한 존재감을 보여준 의열단장 정태산(이병헌)은 실제 의열단장이었던 김원봉에서 비롯된 인물이다.        alt<밀정> 속 이정출(황옥)과 김우진(김시현)alt황옥 경부 폭탄 사건 당시 재판 받는 황옥(왼쪽)과 김시현(한국민족문화대백과)             Q. 일제강점기에 스파이가 존재했다?폭탄을 싣고 가는 열차 안에서 김우진은 일경의 포위망이 좁혀오는 가운데, 자신들의 계획을 외부로 흘리고 있는 ‘밀정’이 누구인지 찾기 시작한다.남의 사정을 은밀히 정탐해 알아내는 사람. ‘밀정’은 ‘스파이’나 ‘첩자’ 등의 단어가 생기기 훨씬 이전인 일제강점기에 등장했다. 일제는 독립운동 세력에 밀정을 심어 이들의 계획을 사전에 파악해 잡아들이고 세력을 분열시키고자 했다. 실제로 황옥 경부 폭탄 사건은 의열단원 김재진의 밀고로 실패하고 말았던 사건이다. 이처럼 독립운동에 몸담던 항일 인사들 사이에서도 변절자가 나오는 등 밀정이라는 일제의 계략은 민족 간 대립과 갈등이 불거지게 만들었다.      alt                 Q. 황옥은 독립운동가 or 친일파?황옥은 경찰부 직속 도경부에 특채로 입성, 고등과에서 높은 성과를 올리던 인물이다. 황옥 경부 폭탄 사건으로 검거된 황옥은 재판과정에서 "경찰 관리로서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노력했다. 성공하면 경시(警視)로 승진도 시켜주리라고 믿었다"고 주장했다. 당시 일제 경찰 조직에서 조선인은 대개 경부까지 올랐을 뿐, 경시로 승진하는 일은 아주 이례적이었다. 그는 형을 언도 받고 2년 뒤 가출옥했다. 이 과정에서 아직까지 그가 밀정인지 아닌지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한편으로는 광복 이후 김원봉이 황옥을 의열단원이라고 증명했다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그가 의열단을 도운 동기를 규정할 만한 이렇다 할 사료가 남지 않았기에 정확한 확인이 어렵다는 게 학계의 설명이다. ‘의열단의 저지하기 위해 일제가 심은 밀정’ 또는 ‘일경을 가장한 의열단원’, 황옥의 정체는 여전히 밝혀지지 않았다.                 alt          ]]> Wed, 01 Feb 2017 18:30:18 +0000 2 <![CDATA[조국의 독립에 앞장선 몽골의 슈바이처 ]]> 글 학예실 / 그림 얌스조국의 독립에 앞장선몽골의 슈바이처이태준(李泰俊, 1883. 11. 21 ~ 1921. 2)독립기념관은 국가보훈처·광복회와 공동으로 이태준을 2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경남 함안에서 출생한 이태준은 1907년 10월 1일 세브란스의학교에서 재학하던 중 안창호를 만나 신민회의 자매단체이자 비밀청년단체인 청년학우회(靑年學友會)에 가입하면서 항일운동에 뛰어들게 된다.             alt                         중국으로의 망명1911년 말 일제는 이른바 ‘105인 사건’을 조작하여 독립운동가들을 대대적으로 검거하였다. 이태준의 친구이자 스승인 김필순이 연루되어 피체될 위기에 처하게 되자, 두 사람은 중국 망명을 계획했다. 1911년 12월 31일 김필순을 먼저 기차에 태워 떠나보내고 이태준은 병원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이미 자신과 김필순의 중국 망명 계획에 대한 소문이 널리 퍼져있었다. 그는 즉시 평양행 기차를 타고 부랴부랴 중국 망명길에 올랐다.국내 탈출에 성공한 이태준은 중국 난징(南京)에 도착했으나, 여비가 끊어진 데다 언어장벽으로 많은 어려움이 뒤따랐다. 다행히 중국인 기독교도의 도움으로 기독회의원(基督會醫院)에 의사로 취직했다. 그러나 그의 회고에 따르면 당시 아주 지루한 시간을 보냈다.         alt 세브란스의학교             alt (왼쪽부터) 이태준 / 이태준을 포함한 세브란스의학교 2회 졸업생(뒷줄 왼쪽 네 번째)                         몽골 이주와 항일혁명 활동1914년 이태준은 비밀군관학교를 설립한다는 김규식을 따라 몽골로 떠났다. 고륜(庫倫,현 울란바토르)에 도착해 한국에서 약속한 자금을 기다렸지만 끝내 오지 않았다. 이에 김규식은 서양인을 대상으로 가죽 판매 사업을 시작했고, 이태준은 병원 동의의국(同義醫局)을 개업했다.당시 병에 걸리면 기도를 드리고 주문을 외우는 등 미신에 의존한 치료법만을 알고 있던 몽골인들 사이에서 근대적 의술은 큰 인기를 얻었다. 특히 이들 대부분이 감염되어 있던 성병인 화류병(花柳病)을 근절시키자, 몽골인들은 ‘까우리(高麗)의사’로 부르던 이태준을 ‘신인(神人)’ 또는 ‘여래불(如來佛)’처럼 여겼다. 1919년 7월 몽골국왕 보그드 칸(Bogd Khan)은 그 공로를 인정하여 제1등급에 해당하는 국가훈장을 수여하였다. 몽골에서 두터운 신뢰를 쌓은 이태준은 중국 장가구(張家口)와 고륜 사이를 오가는 독립운동가들에게 숙식과 교통을 비롯한 편의를 제공했다. 신한청년당 대표로 파리강화회의에 파견되는 김규식에게는 2천 원의 운동자금을 지원하기도 했다. 1920년 이태준은 한인사회당의 비밀당원으로 소비에트정부가 대한민국임시정부에게 지원한 40만 루블 상당의 금괴 중 12만 루블을 상하이로 운송하게 되었다. 김립이 갖고 온 자금이 고륜에 도착하자, 이를 김립 8만 루블·이태준 4만 루블로 나누어 차례로 운송하기로 했다. 1차분 8만 루블은 이태준의 도움으로 고륜-장가구-베이징을 거쳐 1920년 상하이로 운반하는 데 성공했다. 이태준은 베이징에서 김원봉을 만나 의열단에 가입, 당시 의열단에게 절실했던 폭탄제조자 마쟈르를 소개하기도 했다. 이후 다시 고륜으로 돌아가 남은 4만 루블을 운송하고자 했다. 그러나 러시아 백위파 운게른 부대를 피해 은밀하게 이동하던 중 발각되고 말았다. 고륜으로 압송되어 가택연금에 처해진 그는 결국 총살되어 순국했다. 그의 나이 불과 38세였다. 정부는 1990년 고인의 활동을 기리어 그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하였다.        alt몽골 울란바토르에 건립된 이태준 기념공원(국가보훈처 제공)alt이태준 기념공원 내 이태준 기념관(국가보훈처 제공)             alt이태준의 몽골 국가훈장 수여 내용이 실린 『독립신문』 기사   ]]> Wed, 01 Feb 2017 11:10:38 +0000 2 <![CDATA[하나, 민간외교관 김순애 둘, 여성의병장 윤희순 ]]> [우리가 몰랐던 이야기 하나]글 김형목 독립기념관 책임연구위원김순애, 민간외교관으로 독립운동에 헌신하다“30여 개 동맹국이 모두 우리의 우군이 되어 원수 일본을 타도하고 있다. 정히 이러한 시기에 있어서 임시정부 소재지에 있는 혁명 여성들은 당파별이나 사상별을 묻지 않고 일치단결하여 애국부인회를 재건함으로써 국내와 세계만방에 산재한 우리 일천 오백만 애국여성의 총단결의 제일성이며, 삼천만 대중이 쇠와 같이 뭉쳐서 원수 일본을 타도하고 대한 독립과 민족해방 완성에 제일보를 삼으려 한다.”- 1943년 2월 한국애국부인회의 재건 선언문 中 -암울한 일제강점기 국외에서 조국 광복을 위하여 헌신한 여성들이 있었다. 이들은 재능에 따라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다. 그중 김순애는 출중한 어학 실력을 바탕으로 독립운동에 매진한 대표적인 여성독립운동가이자 민족교육가였다.                         민족의식을 일깨우다김순애는 1889년 5월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 송천리에서 태어났다. 증조부는 송천으로 낙향한 후 황무지 개간과 가축 사육 등으로 부를 축적하였고, 아버지는 이를 기반으로 황해도를 대표하는 자산가가 되었다. 일찍이 기독교를 수용한 아버지는 마을에 교회와 학교를 설립하는 등 자녀들 교육에 남다른 관심을 기울였다. 이는 그녀가 중등교육을 받는 데 든든한 밑거름이 되었다. 김순애는 고향에서 초등교육을 받은 후 상경하여 정신여학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부산으로 내려가 교사로 재직하였다. 오빠 김필순을 비롯한 형제들은 서울에서 많은 애국지사와 밀접한 교류를 가졌는데, 형제들의 형향으로 그녀도 우리 민족이 당면한 현실을 인식하고 강한 민족의식을 가지게 되었다. 식민지 노예교육이 강화되자, 김순애는 학생들에게 우리 역사와 지리를 비밀리에 가르치는 등 민족교육에 적극적이었다. 이를 탐지한 일경에 의해 체포될 위기에 처하자 오빠와 함께 만주로 망명하였다.      alt김순애alt정신여학교 3회 졸업 기념사진(1909년, 뒷줄 오른쪽 2번째)                         김규식과 영원한 동반자가 되다이후 상하이를 거쳐 난징 명덕여자학원에 입학하여 수학하던 중, 형부인 서병호의 중매로 평생 동지인 김규식과 결혼한다. 망명지에서의 결혼은 운명적인 동시에 평생 뜻을 같이 하는 동지적 결합을 의미했다. 두 내외는 곧바로 상하이로 근거지를 옮겨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제1차 세계대전 종전으로 당시 국제정세는 요동치고 있었다. 여운형·조소앙·김철 등은 상황을 예의주시하면서 신한청년단을 조직하였다. 김순애 부부는 망설임 없이 여기에 가입·활동에 나섰다. 이때 파리에서 강화회의가 열린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다. 신한청년단은 강화회의에 파견할 대표로 김규식을 선정하였다. 그리하여 김순애와 김규식은 상하이 부두에서 생사를 넘나드는 이별 아닌 이별을 맞았다. 남편의 파견과 동시에 김순애는 선우혁·김철 등과 국내로 파견되어 대대적인 독립운동 전개와 독립자금 지원 요청을 임무로 맡아 수행했다. 그리고 1919년 2월 부산에서 백신영·김마리아·함태영 등을 만나 파리강화회의에 한국대표를 파견한 소식을 전하였다. 이에 그들은 한국인의 독립의지를 만천하에 알리는 독립운동을 전개하도록 요청했다.              alt                김규식과 김순애(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지원하다한편 종교인이자 독립운동가였던 함태영은 국내에서 이미 종교계를 중심으로 3?1운동이 계획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임순애 역시 거기에 동참하겠다고 하자, 그는 ‘그러다 잘못되면 파리에 가 있는 남편 김규식의 사기에 영향을 미칠 것이고, 그러면 민족의 대업 완수에 지장이 있을 것’이라 설득해 3·1운동을 목전에 두고 그녀가 다시 상하이로 돌아가도록 하였다. 이후 김순애는 이화숙·이선실·오의순 등과 함께 조국 독립에 대한 여성들의 참여를 독려하기 위한 일환으로 대한애국부인회를 조직했다. 회장으로 선출되어 선전활동과 독립자금 모금에 전력을 기울였다. 또한 서병호·이희경·안창호 등과 대한적십자사를 조직하였는데. 이는 독립전쟁에 시급한 현안인 간호원 양성과 임시정부의 국제적 위상을 강화하려는 의도였다.              alt                상하이 애국부인회에서 대한애국부인회에 보낸 문서                                 민간외교관으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다김순애는 중국에서 효과적인 독립운동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중국과의 연대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에 직접 학교를 찾아가 한중문제를 연설하는 등 중국 청소년들에게 한국이 처한 현실을 널리 알렸다. 1930년대 한중 연대는 이러한 역사적인 배경과 무관하지 않았다. 미국의원단 방문 시에는 한국부인회를 대표하여 한국의 독립을 호소했다.1922년 상하이에서는 다나카 저격 미수사건으로 미국인 스나이더 부인이 유탄에 맞아 사망하는 불의의 사고가 발생하였다. 이는 임시정부의 위상을 추락시킬 수 있는 불상사였다. 그녀는 영문으로 간절한 애도의 뜻과 기념품을 남편에게 전달했다. 스나이더는 “고상하고 혁혁한 귀회의 결의를 나는 늘 기억할 것이며, 이를 세상에 알리는 동시에 귀회에게 감사해마지 않습니다”라는 답장을 보내왔다. 가해자에게 호의와 감사를 보낼 수 있도록 한 외교적인 수완은 독립운동사가 찬란한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대동단결만이 독립운동의 초석이다임시정부는 운동노선을 둘러싸고 내홍에 휩싸였다. 그녀는 수습을 위해 대한애국부인회 회장을 미련 없이 사임하고, 남편 김규식과 함께 임시정부를 유지하는 데 혼신을 다했다. 1930년 한인여자청년동맹 결성이나 1943년 한국애국부인회 재건 등은 이러한 목적을 관철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김순애는 대동단결이 독립운동의 가장 견고한 기반임을 거듭 밝혔다.광복 후 귀국한 뒤로는 통일된 대한민국 수립운동에 참여했다. 그리고 1946년에 모교인 정신여자중고등학교 재단이사장, 1948년에는 평이사로 있다가 1962년 사임하였다. 그는 재임 중에도 항상 독립정신을 강조하는 참다운 교육가였다.                         [우리가 몰랐던 이야기 둘]글 신현배 역사칼럼니스트의병 노래를 지어 부른 여성의병장, 윤희순윤희순은 의병장이자 독립운동가다. 서울에서 윤익상의 딸로 태어나 16세에 유제원과 결혼했다. 시아버지 유홍석이 춘천 일대에서 의병을 일으키자 의병을 돕는 일에 발 벗고 나섰으며, 그들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안사람 의병 노래’, ‘방어장’ 등 의병 노래를 짓기도 하였다.                         alt윤희순alt의병가사집alt 안사람 의병대를 만들다1907년 의병항쟁 때 유홍석이 다시 의병을 일으키자 윤희순 역시 가만히 있지 않았다. 유인석의 부인을 비롯한 친척 부녀자들과 마을 여자들을 끌어 모아 서른 명쯤 앞에서 그녀는 큰 소리로 말했다. “이제부터는 우리 안사람들이 나서야 합니다! ‘안사람 의병대’를 만들어 우리도 의병과 함께 싸웁시다. 의병들은 지금 무기와 양식이 부족해 전투를 치르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서 자금을 거둬들이고 의병들의 뒷바라지를 합시다. 그리고 그들과 더불어 군사훈련도 받읍시다.” 그렇게 안사람 의병대가 만들어졌다. 여자 의병들은 마을을 돌아다니며 의병 자금을 거두었다. 69명의 부녀자들에게 받은 돈은 모두 350냥이었다. 이것으로 놋쇠와 구리를 사, 무기와 탄약을 직접 만들었다. 쇠똥과 찰흙을 섞어 화약도 만들었다. 또한 남자 의병들과 더불어 고된 훈련에도 임했다. 윤희순은 안사람 의병대장으로서 훈련을 받을 때 의병들에게 자신이 지은 의병 노래를 부르게 해 사기를 북돋웠다.역경 속에서도 멈추지 않은 독립운동1910년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뒤에는 가족을 따라 만주로 갔다. 이듬해에는 만주의 환인현 보락보진에 동창학교의 분교인 ‘노학당’을 세우고, 이곳에서 교장으로 지내며 독립운동을 했다.연설을 굉장히 잘했던 윤희순은 ‘연설 잘하는 윤 교장’이란 별명을 얻었다. 그녀는 마을마다 돌아다니며 조선 사람과 중국 사람들에게 자기가 지은 노래를 가르치고 일본에 반대하는 연설을 했다. “왜놈들은 조선뿐 아니라 중국까지도 집어삼키려 합니다. 우리 조선 사람들은 왜놈들을 몰아내기 위해 목숨을 내놓겠습니다. 그러니 중국 사람들은 우리에게 양식과 터전을 주십시오.” 연설을 들은 사람들은 감동을 받아 독립운동 자금을 내놓기도 했다.만주에서는 불행한 일들이 잇달아 생겼다. 1913년 12월 시아버지 유홍석이 병에 걸려 세상을 뜨더니, 2년 뒤에는 남편 유제원이 일경에 붙잡혀 심한 고문으로 목숨을 잃었다. 얼마 뒤에는 일제의 압박으로 노학당이 문을 닫게 되었다.연거푸 닥쳐오는 시련과 고난에도 윤희순은 독립운동을 그만두지 않았다. 유돈상·유교상 등 아들들과 함께 대한독립단에 가입, 독립자금을 모으고 비밀문서를 전하는 등 활발하게 활동했다. 온 식구가 독립운동을 하기에 그녀의 가족은 ‘가족 부대’라고 불리기도 했다. 한 많은 인생을 노래에 담다어느새 환갑을 훌쩍 넘긴 노인이 된 그녀는 1923년 1월 15일 밤,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였다. ‘고향을 떠나온 지 어언 10년이 넘었구나. 나라 잃은 설움이 이다지도 서러울까. 어느 때나 해방이 되어 고향에 갈 수 있을까. 슬프고도 슬프도다. 이 내 신세 슬프도다.’ 한숨을 푹푹 쉬며 신세타령을 하던 그녀는 그 마음을 그대로 옮겨 ‘신세타령’이라는 노래를 만들었다.우리 조선 어디 가고 왜놈들이 득세하나우리 임금 어디 가고 왜놈 대장 활개 치나우리 의병 어디 가고 왜놈 군대 득세하니이 내 몸이 어이할꼬 어디 간들 반겨줄까어디 간들 오라 할까 가는 곳이 내 집이요가는 곳이 내 땅이라 슬프고도 슬프도다슬프고도 서러운 이 노래를 듣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조선 사람이 없었다. 1935년 윤희순의 맏아들 유돈상이 일경에 붙잡혔다. 만주 푸순(撫順)에서 조선독립단을 다시 만들어 활동하던 중, 처남인 음성국과 함께 옥에 갇힌 것이다. 그는 모진 고문 끝에 그해 7월 19일 숨을 거두었다. 맏아들마저 세상을 떠나자 윤희순은 원통하고 분하여 견딜 수가 없었다.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해주 윤씨 일생록』을 남겼다. 자신의 삶을 기록하고 자손들에게 훈계하는 말을 적은 글이었다.‘너희들은 우리 조상이 얼마나 큰 고생을 했는지 생각하고, 돈과 권력에 눈이 어두워지면 안 된다. 사람의 도리가 무엇인지 생각하고, 하지 말아야 할 일은 절대로 하지 마라. 충효 정신을 결코 잊어선 안 된다.’윤희순은 자손들에게 당부한 뒤 일체 식사를 하지 않았다. 그리고 1935년 8월 1일 76세의 나이로 한 많은 생애를 마쳤다.                         신현배역사와 전통문화에 대해 관심이 많은 역사칼럼니스트. 저서로는 역사 이야기 『엉뚱 별난 한국사』, 『엉뚱 별난 세계사』, 『2000년 서울 이야기』, 『세계사로 배우는 법 이야기』, 전통문화 이야기 『소중한 우리 문화 지식 여행』 시리즈 등이 있다. ]]> Wed, 01 Feb 2017 14:41:04 +0000 2 <![CDATA[개인의 삶이 모여 역사를 이루다 ]]> 글 심용환 역사N교육연구소 소장개인의 삶이 모여 역사를 이루다역사는 사람이 만들어가는 이야기다. 국토와 국가주권을 잃어버린 일제강점기 시절 우리 역사가 끊어지지 않고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은 독립운동가들의 결단과 헌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온몸으로 써내려간 역사는 오늘에 이르러 우리 민족만의 이야기, 독립운동사로 기록되고 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실현조선 최고의 명문가 출신인 이회영은 전 재산을 팔아 여섯 형제와 일가족 전체를 이끌고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위해 헌신한 인물이다. 국외 항일운동 전반에 관여한 바, 특히 신민회 창설을 주도, 신흥무관학교 건립이라는 업적을 남겼다. 1907년 일본은 정미7조약을 통해 사실상 조선의 내정을 완벽하게 장악했다. 바로 그해에 비밀결사조직인 신민회(新民會)가 탄생했다. 이회영을 비롯하여 이시영·이상룡·김동삼·김대락 등 신민회 회원들 중에는 당시 부유한 계층의 사람들이 많았다. 이들은 개인 집안의 재산을 정리하여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였다.신민회와 관련해서는 두 가지를 주목해야 한다. 첫째는 입헌군주제가 아닌 공화주의를 최초로 표방한 점이다. 5백 년을 넘게 이어온 조선왕조의 역사와 대한제국 황제의 존재를 생각했을 때, 국민이 국가의 대표를 직접 선출하는 체제를 지향한다는 것은 당시 충격적인 발상이었다. 둘째는 독립전쟁론에 의거하여 만주에 독립군 양성기관인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한 점이다.이회영은 형제들을 설득해 오늘날 기준으로 약 600억 원에 이르는 재산을 급매하고, 가족 수십 명을 이끌고 만주로 망명했다. 만주 추가가라는 지역에 정착이 어려워지자, 당시 중국 최고 지배자였던 위안스카이(袁世凱)와 직접 담판하여 삼원보 지역을 얻어낸다. 이후 이곳에 독립운동기지를 세우고 수많은 독립운동가와 함께 경학사·부민단 등 자치단체를 조직하는 한편, 신흥무관학교를 세운다. 약 2천여 명의 독립군이 이곳에서 훈련을 받았으며, 신흥무관학교는 이후 북로군정서·서로군정서 성립과 1920년대 봉오동전투·청산리대첩에도 크게 기여했다. alt이회영alt신흥무관학교 학생들과 백서농장 광경                       무력투쟁의 상징, 김원봉과 의열단‘정의로운 일을 맹렬히 실행하자’. 1919년 11월 김원봉은 지린성(吉林省])에서 무력독립운동단체 의열단을 결성했다. 당시 만주와 중국 관내지역에 있는 여러 독립운동단체가 소극적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있다고 판단한 그는 암살과 파괴 등 직접적인 무력투쟁을 통해 독립을 쟁취하고자 했다.1920년 의열단은 첫 번째 활동으로 ‘제1차 암살 파괴 계획(밀양·진영폭탄반입사건)’을 모의,  단원 전원이 식민지 주요 기관에 대한 폭파 및 총독부 주요 인사들에 대한 처단 작업을 준비한다. 4월에 폭탄 3개, 5월에 폭탄 13개·권총 2정·탄환 10발을 국내에 반입하였고, 10여 명이 국내에 잠입해 서울·부산·마산·밀양 등에서 거사를 준비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밀정의 제보로 거사를 불과 며칠 앞두고 의열단원 20명이 검거되고 폭탄을 전부 압수당하면서 실패하고 만다.좌절도 잠시, 그해 9월 14일 상하이에서 출발한 단원 박재혁이 부산경찰서에서 폭탄을 터뜨려 건물을 폭파하고 부산경찰서 서장 하시모토를 처단했다. 이어 12월 27일에는 친구 김상윤의 권유로 의열단에 입단한 밀양 출신 최수봉이 폭탄 2개를 밀양경찰서에 투척, 건물 일부를 파손하였다. 이외에도 의열단은 1921년 기계노동자 출신 김익상이 활약한 조선총독부 폭탄 투척 의거, 1922년 김익상·오성륜·이종암이 육군 대장 다나까 기이치를 암살하려고 한 황포탄 의거, 1923년 제2차 암살 파괴 계획, 1924년 도쿄 니주바시 폭탄투척 사건, 1926년 동양척식주식회사 및 조선식산은행 폭탄투척 의거 등 독립을 위한 적극적인 투쟁을 이어나갔다. 의열단이 계획한 거사는 성공하기보다는 실패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에 대항하여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이어나간 투쟁은 우리 국민들 가슴에 독립이란 희망의 불씨를 태우게 했다. 이름 그대로 정의를 맹렬히 실행에 옮겼던 의열단, 이들의 목숨을 건 투철한 독립정신은 1920년대 독립운동사의 한 축을 형성했다.alt김원봉alt의열단원 나석주의 동양척식주식회사투탄의거를 다룬 기사(『동아일보』 1927년 1월 13일자, 국사편찬위원회 제공)alt의열단(항일무장독립운동단체)                          나라와 민족을 생각한 진정한 군인한국독립군이 일제에 맞서 싸운 독립전쟁 가운데 1920년 6월 봉오동전투·1920년 10월 청산리대첩·1933년 대전자령전투는 독립전쟁사의 기념비적 전투로 기록되고 있다. 이중 대전자령전투는 1930년대 무장독립운동을 이끌었던 지청천이 세운 업적이다. 그는 군인 지도자로서 북만주에서 활동하며 쌍성보전투·대전자령전투·흥경성전투·사도하자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1930년 7월 동삼성 길림에서 홍진 등과 함께 한국독립당을 조직한 지청천은 산하에 한국독립군을 편성하고 여기서 총사령관을 맡아 독립전쟁을 총지휘했다. 다음해 1931년 9월, 일제가 만주사변을 도발하면서 그는 중국군과 합세해 한중연합군을 결성하였다. 한국독립군은 중국호로군과 활동을 같이 했다. 지청천이 이끌던 부대는 보통 4백~5백 명으로, 이 시기 가장 인상적인 승전이 바로 대전자령전투였다. 당시 중국군 2천 명, 한국독립군 5백 명이 산림지대에 매복했다가 일본군 행렬이 산중턱에 이르렀을 때 전투를 시작해 4시간 만에 거의 전멸시켰다. 군벌 3천 벌·대포와 박격포 10문·소총 1천5백 정·군량 등 군수물자 쟁탈 부문에서 한국독립군은 무장독립운동사 최대의 성과를 거두었다. 당시 전투 상당수가 일제의 괴뢰국인 만주군과의 싸움이었는데, 대전자령전투의 경우 일본군을 대상으로 승리를 거둔 전투였기 때문에 더욱 의미가 있었다. 특히 일제는 만주국을 앞세워 본격적인 대륙침략과 한국독립운동 세력을 탄압하는 상황이었다.지청천은 광복을 맞은 뒤에는 혼란스러운 대한민국을 다시 바로 세우기 위해 노력했다. 그 원동력이 청년에게 있음을 강조하며 대동청년단을 결성하는 등 조국재건에 앞장섰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조국과 국민에 대한 생각뿐이었던 지청천, 그는 진정한 군인이었다.        alt지청천alt한국광복군 총사령관으로 임명 받고 있는 지청천alt한국독립당 창당 기념사진(1940년 5월)                          여성혁명가 남자현독립운동에는 남성들뿐만 아니라 여성의 활약도 주목해야 한다. 한국 여성독립운동가들은 민족수난의 시기에 구국정신을 발휘하였으나 남성독립운동가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관련 연구나 발굴이 부족한 상황이다.남자현은 기독교인으로 ‘여걸 남자현 선생’으로 불리며 의열투쟁, 계몽운동 등 만주 지역을 기반으로 그 어떤 남성독립운동가 못지않게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을 펼쳤다. 남자현은 불과 24세에 홍구동전투로 남편 김영주를 일찍이 여의었다. 당시 첫 아이를 임신한 그녀는 시어머니를 봉양하며 지내다가 1907년 친정아버지 남정한과 함께 의병궐기에 참여하면서 역사의 전면에 등장했다. 3·1운동 당시 남대문교회를 중심으로 만세시위에 참여하였으며, 경상도 만세시위 조직을 책임 맡는 등 독립운동을 활발히 전개해 나갔다. 이후 1910년 만주 삼원보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와 서로군정서를 비롯한 서간도 독립운동의 중심지에서 활약했다. 1927년에는 조선총독 암살을 계획, 김문거로부터 권총 1자루와 탄환 8발을 받고 서울로 잠입했으나 때를 잡지 못하고 만주로 돌아가기도 하였다.남자현의 유명한 일화 중 하나는 1931년 국제연맹이 침략진상을 파악하기 위해 리턴조사단을 파견하던 당시의 일이다. 그녀는 소식을 듣고 왼손 무명지 두 마디를 잘라 혈서 ‘조선독립원(朝鮮獨立願)’를 쓰고, 이를 잘린 손가락 마디와 함께 조사단에 전달해 일제의 만행을 호소하였다.이후 1933년 만주국 건국 1주년 기념식장에서 일본 고위 관료 암살에 착수한 그녀는 밀정의 밀고로 결국 일경에 검거되어 옥고를 치렀다. 남자현은 성치 못한 몸으로 출소하여 만 60세에 조선독립만세를 부르며 세상을 떠난다. 유언에 따라 가지고 있던 돈 200원은 1947년 서울운동장에서 김구에게 전달되었다.        alt남자현alt남자현의 임종을 지켜보는 아들과 손자(독립혈사 제2권)             독립운동가 개개인의 삶은 모여서 오늘의 대한민국을 이룬 역사가 되었다. 이들 역사적 영웅은 계급·성별·국적을 가리지 않고 다양한 계층 넘나들며 곳곳에서 등장하는 등, 저마다의 방식으로 독립 쟁취를 위해 행동했다. 세세한 활동 시기도 지역도 방식도 다양했지만 이들이 하나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독립’이라는 시대적 소명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심용환성균관대학교 사범대학에서 역사교육을 전공했다. 현재 팟캐스트 <진짜 역사 가짜 역사>를 통해 재미있고 올바른 역사 이야기를 전파하고 있으며, CBS와 공동으로 <심용환의 근현대사 똑바로 보기>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저서로는 『단박에 한국사』,『역사 전쟁』이 있다. ]]> Tue, 31 Jan 2017 17:19:48 +0000 2 <![CDATA[인내천(人乃天), 나 자신을 하늘로 삼는 믿음 ]]> 글 이성주 역사칼럼니스트인내천(人乃天), 나 자신을 하늘로 삼는 믿음 “사람이 곧 하늘이다.”손병희는 우리가 익히 그 이름을 들어봤을 독립운동가다.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의 지도자로 3·1독립선언을 이끌었던 독립운동의 거목이다. 대중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3·1운동은 손병희를 주축으로 한 천도교 15인, 이승훈을 대표로 한 기독교인 16인, 한용운을 포함한 2인의 불교인들이 모여 이룬 성과였다. 기독교와 불교에 대해서는 종교인이 아니더라도 일정 수준의 배경지식이 있겠지만, 상대적으로 천도교(天道敎)는 낯선 대목이 분명 존재한다. 그렇다면, 이렇게 말하면 어떨까? ‘손병희가 동학을 계승해 발전시킨 한국의 종교’라고 말이다.망나니에서 민족지도자로 다시 태어나다▲동학농민운동 당시 남접의 전봉준군과 호응해 북접의 총지휘자로 활약 ▲1902년 24명의 동학 청년들을 일본에 유학 보내 선진문물 수용 적극 장려 ▲국민계몽운동 분위기에 발맞춰 1907년 보성학교와 동덕학교를 비롯해 수십 개의 남녀학교를 인수, 신설해 교육 사업을 주도 ▲ 신도들이 한 줌의 쌀을 내는 성미법(誠米法)을 통해 재정난 타개, 그 자금으로 3·1운동 주도 ▲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을 이끌고 독립선언 주도여기까지만 보면 손병희는 부족함 없는 완벽한 민족지도자다. 그러나 유년시절을 살펴보면, 성년이 되어 민족지도자로 활동할 수 있을 것이란 예상은 어불성설이었다. 그의 어린 시절은 좋게 표현한다면 질풍노도, 성장통의 시간이라 말할 수 있지만 그보단 망나니에 가까운 생활이었기 때문이다. 충북 청주에서 아전생활을 하던 아버지 손두흥과 첩인 최씨 사이에서 태어난 손병희는 적서차별이 당연했던 시기에서 서얼(庶孼)로 태어난 것에 분노해 아버지에게 따질 정도였다. 아무리 공부해도 과거조차 보지 못하는데 공부를 하면 무엇하냐며 기초적인 한문만 떼고 나선 글공부를 접었다. 이후엔 술 푸념과 싸움질, 도박으로 세월을 보냈고, 급기야는 할 일 없는 건달들을 모아 우두머리 짓까지 하고 다녔다. 하지만 그렇다고 생각 없는 파락호는 아니었다. 아버지 심부름으로 관가의 공금을 전달하던 길에 굶어 죽어가는 이를 보자 그 돈으로 밥을 사 먹이고, 수신사(修信使)가 역졸의 머리털을 말꼬리에 묶고 오는 것을 보고는 사람을 이처럼 천대하느냐 항의하며 낫으로 말꼬리를 자를 정도로 의협심이 남달랐다.그러던 1882년 손병희에게 개과천선의 기회가 왔다. 엄밀히 말하자면 의미 없는 인생에서 삶의 의미를 찾았다고 해야 할까? 바로 동학(東學)을 접하게 된 것이다. 동학의 창시자인 최제우가 내세운 시천주(侍天主, 하느님을 내 마음에 모신다), 이를 심화시켜 2대 교주인 최시형이 내세운 사인여천(事人如天, 사람을 하늘같이 섬겨라) 사상은 차별과 억압의 굴레에 신음하던 손병희에게는 다름 아닌 ‘복음’이었다.나 스스로를 존중한다는 것2대 교주 최시형이 처형당한 후 동학의 도통을 이어받은 손병희는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한 후 ‘인내천(人乃天)’을 전면에 내세웠다. 종교적인 해석을 배제하더라도 그 의미는 일반인들에게 쉽게 전달된다. ‘사람이 곧 하늘이다’.천도교의 중심 교리가 된 인내천은 인간은 누구나 신이 될 수 있고, 누구나 평등하다는 의미의 다른 말이다. 신분제 사회의 끄트머리, 그리고 형식적으로 신분제 사회를 갓 벗어난 구한말, 일제강점기에 이러한 사상은 가히 혁명적인 일이었다. 조선의 조정과 기득권 세력들이 외세를 끌어들여 동학교도들을 탄압하던 때를 지나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에 이르러 천도교는 교세를 확장할 수 있었다. 차별과 억압으로 점철된 암흑 속에서 천도교의 등장은 한 줄기 빛이 되어주었다. 그리고 손병희는 확장된 교세를 가지고 독립운동에 나설 수 있었다. 광복 이후 민주주의 시대에 살고 있는 오늘, 우리는 그때보다 지금이 평등한 사회가 되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돈·외모·학벌 등 우리는 어느 때보다 높은 차별의 벽을 세우며 살고 있다. 계급을 나누고, 타인의 시선으로 나의 가치가 증명되며 남을 쉽게 정의내리는 것에 익숙해지게 됐다. 그 결과 우리는 사회가 말하는 어떤 ‘기준’에 따라 사람의 등급을 나누고 그 기준에 맞춘 시선으로 상대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여기서 인간의 존엄성은 찾아볼 수 없다. 겉으로는 자유와 평등을 말하지만, 이미 우리는 스스로 계층과 계급을 인정하고 있다.이는 우리가 타인을 바라보는 것은 물론이고, 우리가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내가 곧 하늘이란 생각을 한 적이 있는가? 종교적인 의미의 하늘을 말하는 게 아니다. 스스로를 존중하고 사랑해 보았느냐는 것이다.모든 세상 사람들은 평등하고, 그 안에 나는 다른 사람과 똑같은 사람이다. 나는 하늘이고,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존재라는 ‘믿음’을 품어보자. 손병희는 자기 자신을 포함해 모든 사람이 존중 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고 믿었다. 그 믿음이 있었기에 천도교를 이끌었으며 3·1운동의 선두에 설 수 있었던 것이다.차별의 시선으로 정의한 내 존재에 나약해지고 있는가? 주변의 눈치를 보며 하고 싶은 일을 망설이고 있는가? 내가 곧 하늘이다. 나의 존재가치는 나 스스로 정의할 수 있다. 그저 자신을 존중하고 ‘나’라는 존재를 믿고 앞으로 나아가면 될 뿐이다. 우리가 곧 하늘이다.                         이성주시나리오 작가 겸 역사칼럼니스트. 대중과 함께 호흡하는 글쓰기를 목표로 『조선의 민낯』, 『왕들의 부부싸움』과 같은 역사서를 출간한 바 있다. 최근에는 국제정치와 관련된 연구 및 집필에 열중하고 있다. 『전쟁으로 보는 국제정치』 시리즈 1, 2, 3권을 출간 중이다. ]]> Tue, 31 Jan 2017 17:38:29 +0000 2 <![CDATA[봄을 재촉하는 경적소리 ]]> 봄을 재촉하는경적 소리눈부시게 새하얀 설경 속녹음에 묻혀 있는 열차 한 대당장이라도 바퀴를 구르며 박차고 나올 듯그 모습이 생생합니다.북적대며 열차에 몸을 싣던 사람들은 간데없고고된 세월의 흔적만 간직한 채 덩그러니 남아있는 무궁화호 열차얼어붙은 흰 눈 다 녹아내리고 나면경적을 울리며 다시 달릴까 싶어꾸물거리는 봄을 재촉할 그 힘찬 소리가울려 퍼지는 그날을 기다려 봅니다. ]]> Tue, 31 Jan 2017 16:56:34 +0000 2 <![CDATA[부모 자식 사이의 갈등, 자율성 존중이 필요하다 ]]> 글 이현수 일상심리 전문작가, 자유기고가부모 자식 사이의 갈등, 자율성 존중이 필요하다“집안에서 대화를 하지 않아요. 아예 서로 투명인간 취급을 합니다." 가족과 대화를 단절했다는 한 30대 청년의 말이다. 그는 자신의 진로에 간섭하는 아버지와 심하게 다툰 후 아버지를 포함한 가족 전부와 2년째 대화를 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한국건강가정진흥원에 따르면, 가족 내 갈등 고민으로 가정상담센터를 찾는 인구가 2009년 9만4021명에서 2014년 16만7888명으로 급증했다. 갈수록 골이 깊어져만 가는 부모와 자식 사이, 어떻게 하면 다시 가까워질 수 있을까.             자율성의 중요성 인식하기자율성은 인간에게 매우 중요한 요소로, 이를 침해 당한 사람은 심각한 부작용(위협감이나 긴장, 불쾌감, 좌절과 짜증, 타인을 향한 무관심, 공격적인 반응, 무기력)을 보인다. 부모가 자녀에게 멘토를 자처하다가 오히려 상처를 주는 이유는 자녀에게도 자율성을 보장해야 한다는 사실을 잊고 지나치게 간섭하기 때문이다.극단적인 예로 최근 맨부커상을 받고 뉴욕타임스에 ‘올해 최고의 책 10권’에 선정되기도 했던 작가 한강의 소설 『채식주의자』를 참고할 수 있다. 주인공 영혜가 육식을 거부하자, 그녀의 가족은 ‘저대로 두면 몸 상할 텐데’ 하고 ‘걱정’하면서 자꾸만 고기를 권한다. 급기야 아버지는 참다못해 영혜의 입에 억지로 고기를 쑤셔 넣는다. ‘자식의 행복을 위해서는 자식의 인생에 개입할 수 있다’는 잘못된 신념의 폭력성을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한국사회에 만연한 자율성 침해에 대한 무감각성을 극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렇듯 자율성을 침해하는 행동은 오히려 갈등을 증폭시킨다. 자녀의 인생은 부모가 아닌 자녀의 것이다. 부모 자식 간 갈등 해소의 출발점은 자율성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태도다.             제대로 된 대화법으로 대화하기Step1. 경청이 이해를 부른다당신의 자녀는1. 공부를 어떻게 하고 있나요?2. 친구 관계는 어떤가요?3. 즐겨 하는 취미가 있나요?4. 목표는 무엇이죠?5. 부모님이 어떤 불만과 기대를 갖는지 아나요?위와 같이 부모는 자녀와 관련하여 많은 질문을 받는다. 만약 이러한 질문에 확실하고 자세하게 대답하지 못한다면, 그동안 자녀의 이야기를 제대로 듣지 않았다는 방증일 수 있다. 최근 일주일간의 대화를 되짚어 봤을 때 ‘내 입장에서의 일방적인 지시가 대화의 60% 이상을 차지한다’고 생각하는 부모라면, 지금부터라도 자녀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일이 필요하다.진정한 경청은 자녀의 이야기를 다 듣기도 전에 내 이야기를 펼치는 것이 아니다. 자녀의 이야기에 참견하거나 말을 끊지 않고 제대로 귀 기울여주는 것이다. 북아메리카 해안지대의 인디언 부족들은 회의를 할 때 ‘인디언 토킹스틱’이라고 부르는 나무 막대를 사용하는데, 이 막대기를 쥔 사람이 발언하고 있을 때는 누구도 말을 끊어서는 안 된다고 한다. 이처럼 자녀와 대화할 때는 인디언 토킹스틱을 건넸다고 생각하는 게 어떨까. 자녀의 말이 다 끝날 때까지 인내심 있게 경청하면 상호 간의 신뢰와 친밀감을 증진하는 것은 물론, 자녀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도록 격려하는 효과를 낳을 것이다.Step2. 갈등 상황에서는 I message로 표현하자I message는 상황에 대한 서술을 자신의 방향으로 치환해서 표현하는 방법이다. ‘나는~’으로 시작하는 이 표현법은 ‘네가 ~를 해서 내 마음은 ~하다’와 같은 방식으로, 자신의 입장을 기준으로 어떻게 상황을 판단했는지 상대에게 알린다. 반면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너는 ~안 하니’, ‘너는 ~해라’ 등의 You message 표현법은 자녀의 감정을 부정적으로 자극하고 부모가 자율성에 간섭한다는 인상을 주기 좋은 대화 방식이다. You message가 아닌 I message 표현법으로 대화하는 것은 갈등을 줄이는 좋은 방법이다.부모를 향한 ‘부정성 효과’ 고려하기 부모 자식 간 갈등을 해결하는 데는 자녀들에게도 주어진 과제가 있다. 부정성 효과(Negativity effect)를 인정하고 부모의 마음을 이해하는 것이다. 부정성 효과란 부정적 특징이 긍정적 특징보다 강렬하게 인식하는 것을 뜻하는 심리학 용어다. 다시 말해, 인간은 속상한 일은 반복해서 곱씹지만 즐거운 경험은 당연하게 생각하거나 쉽게 잊어버리는 경향이 있다는 얘기다. 부정성 효과는 인간의 생존본능과도 관련이 있는데, 이는 원시시대부터 인간이 포식자와 마주친 일, 떫은 과일을 잘못 채집한 기억과 같은 부정적인 경험을 오랫동안 기억하는 것이 생존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기 때문이라는 추측이 있다. 자녀가 부모를 평가하는 과정도 이 부정성 효과라는 인간의 본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자녀들은 부모가 잘 해줬던 것보다는 못해줬던 것을 더 확실하게, 오랫동안 기억하기 때문이다. 자녀들은 자신이 부모로부터 갖는 이 부정성 효과의 존재를 충분히 인정하고, 이를 없애려는 노력을 통해 부모를 이해할 수 있다.인간에게는 스스로의 가치관과 목표를 수호하고 싶은 ‘독립정신’, 즉 자율성이 있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고 해도 지켜줘야 할 상대만의 영역이 있다. 서로가 독립적인 부분을 존중하여 ‘따로 또 같이’ 행동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렇다면 부모와 자녀는 관계를 한층 더 회복하고 갈등을 줄여나갈 수 있을 것이다.                         이현수일상심리 전문작가 겸 자유기고가. 매일경제·고용노동부·한국무역보험공사·서울신용보증재단·삼성생명·현대모비스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전문가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Wed, 01 Feb 2017 18:32:43 +0000 2 <![CDATA[멀리 돌아 가까이서 찾다 ]]> 글 김주용 독립기념관 선임연구위원멀리 돌아 가까이서 찾다김상윤 기념비에 대한 상념에 젖어 있을 때 차는 벌써 취안저우(泉州) 시내에 들어왔다. 볶음밥으로 점심을 간단하게 해결하고 저녁에는 삼겹살로 일행들의 배를 채우겠다고 공언했다. 다음 행선지는 정화암(본명 정현섭)의 자서전 『이 조국 어디로 갈 것인가』에 나오는 취안저우 중산공원(中山公园)이었다. 드디어 찾은 여명고급중학교의 옛터시내 한복판에 있는 이곳은 ‘일화(日貨)배척운동’ 등 시민대회가 개최되었던 곳이다. 정화암은 이강과 이기환의 체포로 불만이 팽배해진 취안저우지역 중국인들의 불만을 항일로 승화시키기 위해 일본인 선원을 체포하여 중산공원에서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에 대한 규탄대회를 개최한 바 있다.차가 중산북로 초입을 지나는 순간 왼쪽으로 여명직업대학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아차 싶었다. 저것이 여명고급중학교의 후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300여 미터 뒤에 차를 멈추고 조영일씨에게 확인을 부탁했다. 권오수 선생은 카메라에 연신 중산공원을 담았고, 조원기 연구원도 큰 덩치에 작아 보이는 비디오카메라를 들고 전문가처럼 이리저리 돌려가며 찍고 있었다. 30분 정도 지났을까. 조영일씨가 허겁지겁 중산공원 쪽으로 왔다. 예상대로 여명직업대학이 여명고급중학교의 후신이 맞다고 했다.확인을 위해 우리는 곧바로 학교로 향했다. 학교 정문 앞에는 취안저우 시문물관리위원회에서 1984년 6월에 건립한 ‘천주여명고중유지(泉州黎明高中遺趾)’ 기념비가 떡하니 버티고 서있었다. 여명고급중학교의 옛 건물을 어렵게 찾았다는 안도감이 몰려 왔다. 경비는 친절하게도 교문 진입을 허락했다. 교문에 들어서자 큰 고목이 정면에 버티고 있었다. ‘학교의 역사가 나다’ 라고 외치는 듯한 형상이었다. 오른쪽에는 여명교학루(敎學樓)가 오래된 건물의 풍채를 뽐내고 있었다. 이곳 어딘가에 유자명을 비롯하여 유서, 정치화 등 한인 교사들의 체취가 온기를 머금고 있는 것 같았다. 우리는 한참을 교내에서 서성거렸다.이렇게 취안저우의 악천후를 뚫고 공식 답사의 첫날이 끝나가고 있었다. 약속대로 일행을 삼겹살 구이 집으로 안내했다. 중국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즐겨 먹는 음식은 우화로우(五花肉)라고 하는 삼겹살이다. 김영일 가이드가 시내에서 삼겹살 구이를 파는 집을 찾았다. 주인은 한족이었고, 다행스럽게도 이곳에서 파는 우화로우는 김치 삼겹살이었다. 비를 맞아가며 김상윤 기념비를 찾아 나섰던 일을 회상했다. 그렇게 푸젠성(福建省) 취안저우의 밤은 깊어 갔다.         alt취안저우 중산공원(中山公园)alt천주여명고중유지(泉州黎明高中遺趾) 기념비 한국 아나키스트들의 활동지를 찾아 나서다다음날 아침, 우리는 일정을 점검했다. 취안저우 민단에 관한 답사인데, 걱정이 앞섰다. 한국 아나키즘 운동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던 정화암 등은 민단을 조직해 한중연합체제를 운영하고자 했다.민단편련처(民團編練處)는 중국 공산당과 직접 관련이 없기 때문에 사무소가 온전할 것 같지 않았다. 지금까지 경험으로 봤을 땐 민국(民國) 시기 공산당 관련 사적은 그런대로 잘 보존되었지만 그밖의 것은 다소 소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실낱같은 희망을 안고 숙소를 나섰다.정화암은 전라북도 김제 출신으로 1919년 3·1운동에 참가한 이후 1921년 10월 중국 베이징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1924년부터는 이회영·신채호 등과 교류하면서 독립운동 방략에 대해 깊이 고민하였다. 무력투쟁을 통해서만이 독립을 쟁취할 수 있다고 판단한 그는 군자금 모집에 열성을 기울였다. 이러한 가운데 독립운동의 평생 동지 백정기가 결핵으로 입원하게 되고, 정화암은 그의 치료비를 구하기 위해 취안저우로 오게 되었다. 그 과정을 그의 회고록 『이 조국 어디로 갈 것인가』를 통해 살펴보자.1929년 11월 나는 취안저우에 도착하여 그들과 진지하게 방안을 논의하였다. 우선 며칠 동안은 1928년 봄에 민단에서 같이 일을 했던 관계로 그곳 동지들의 도움을 어느 정도 받을 수 있었지만 그들로부터 오랫동안 혜택을 기대할 수는 없었다. 그러던 중 그곳 동지들의 권유에 따라 일본의 만행을 규탄하는 강연을 하기로 했다. 마침 당시의 그곳은 제남사건(濟南事件) 이후 반일사상이 팽배하던 때라 그곳 동지들이나 주민들은 우리 민족의 반일운동의 현실, 특히 3·1운동과 광주학생운동의 진상을 밝히고 그 후의 민족운동 실태를 알고자 하던 때다.정화암은 취안저우 어느 곳에서나 항일 강연을 했다. 취안저우에서 민단사무처를 운영하던 경험이 그대로 표출된 것이다.         alt정화암alt정화암 회고록 『이 조국 어디로 갈 것인가』alt정화암 육성 증언 릴 테이프 답은 가까이에 있다우리 일행은 정화암의 활동무대를 그리면서 정화암이 운영했던 민단사무처를 찾아 나섰다. 취안저우는 아주 오래된 역사문화도시다. 푸젠성의 동남해에 위치하고 있고, 아열대기후에 속하기 때문에 여름에 갑자기 돌풍이 불거나 비가 오는 스콜 현상이 자주 일어난다. 먼저 천추도서관에 도착했다. 신분증을 제시하고 들어가, 한국독립운동과 민단 관련 자료를 찾았지만 쉽지 않았다. 시간 제약으로 더 오래 있지 못하고 곧 다음 행선지인 천주화교역사박물관으로 향했다. 그러나 이곳에서도 만족할만한 자료는 찾지 못했다.이렇다 할 문헌자료가 없을 때 가장 확실한 조사방법은 탐문이다. 특히 나이 많은 현지 지식인을 찾는 게 급선무다. 민단편련처는 정화암·이정규·이을규 등이 중국인 진망산 등과 활동했던 한중합작처다. 따라서 이곳을 찾아내는 일은 한국독립운동의 잊혀 있던 부분을 복원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셈이다.나이 많은 분들에게 취안저우의 민단에 대해 문의하던 가운데 뜻밖에도 취안저우 행정공서가 바로 우리가 묵고 있는 숙소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우연치고는 기막힌 필연 아닌가. 이성대주점, 그곳이 바로 민단편련처 사무실이었다. 지금은 옛 모습이 남아 있지 않지만 많은 이들이 이곳을 알고 있었다. 취안저우에서 보낸 이틀간의 답사는 이렇게 끝이 났다. alt 이성대주점(옛 취안저우 민단편련처) 고랑도와 이강의 악연이번 답사는 비와 동행한 답사였다. 무엇보다도 광저우는 파란 하늘을 허락하지 않았으며, 푸젠성 취안저우는 스콜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다행히 샤먼(厦門)은 화창하게 갠 맑은 하늘로 우리를 맞이해 주었다.다음날 오후 2시, 고랑도로 가는 선착장에 도착했다. 그야말로 인산인해였다. 왕복표를 구입한 후 배에 오르기 위해 줄을 섰다. 두 개 층으로 구성된 배는 한번에 300명 이상을 태웠다. 2층에는 1위안을 주면 앉을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상술이 돋보이는 대목이었다. 5분 정도 지나 배는 고랑도에 도착했다. 그곳도 유람을 온 사람들로 섬 전체가 북적였다. 이제 우리가 찾아갈 곳은 독립운동가 이강이 체포 구금되었던 샤먼 일본영사관 감옥 건물이었다.다음호에 계속 ]]> Mon, 06 Feb 2017 14:46:47 +0000 2 <![CDATA[산청의 오래된 푸름 -경상남도 산청- ]]> 글·사진 김초록 여행칼럼니스트  산청의 오래된 푸름-경상남도 산청-  산고수청(山高水淸). 유독 산이 높고 물이 맑다고 하여 산청이라 불렸다. 지리산과 황매산의 정기가 흐르고, 경호강이 비껴 달리며 단계천과 덕천강이 만나 남강으로 흘러드니 과연 산과 물의 고장이라 불릴 만하다. alt 으뜸 조망지로 꼽히는 정취암  문익점과 성철스님의 산청먼저 우리나라에서 목화를 처음 재배한 문익점 면화시배지로 갔다. 공민왕 12년(1363)에 중국 사신으로 갔던 문익점은 귀국길에 면화씨를 가져왔고, 장인 정익천과 함께 이곳에서 시험 재배에 성공했다. 한국의 목화가 시작된 유서 깊은 곳이다. 시배지 옆의 목면시배유지전시관에서 베틀과 물레, 면화의 종류를 비롯해 목화솜에서 씨앗을 빼내고 솜 타기·고치말기·실잣기 등을 거쳐 베틀로 옷감을 짜내는 자세한 공정을 볼 수 있다. 시배유지 안에 문익점 선생의 효행을 기리는 삼우당 효자비와 업적을 기리는 부민각(富民閣)이 있다.산청에서 빼놓을 수 없는 또 한 명의 인물은 바로 현대불교의 선승, 성철스님(1912~1993)이다. 시배지에서 약 1㎞가량 떨어진 곳에 성철스님의 생가터(겁외사)가 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는 유명한 명언을 남긴 그였다. 이 단순하고 당연한 진리는 물질문명이 삶을 옥죄는 현대사회에 깊은 통찰을 던진다. 겁외사(劫外寺)는 ‘시간과 공간 밖에 있는 절’이란 뜻으로 성철스님의 사상이 잘 드러난다. 대웅전·선방·누각·요사채 등이 가지런히 늘어선 사이로 성철스님의 유품을 모아놓은 포영당(泡影堂), 유학자 아버지의 아호를 딴 율은재(栗隱齋), 성철스님의 일대기를 전시하고 있는 성철스님기념관이 있다.  오래된 마을의 소박한 행복산청 외곽에 있는 남사예담촌은 고가와 흙담길, 고목이 어우러진 소박하고 정겨운 마을이다. 예담은 ‘옛담’에서 빌려온 이름으로, 그 옛날 선비들의 예와 풍류에 대한 마을 사람들의 존경이 담겨 있다.초가집 굴뚝에서 하얀 연기가 피어오르고, 집을 지키는 강아지가 달려 나와 방문객을 맞고, 이따금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새어 나오는 곳. 남사예담촌 구석구석 따뜻함이 묻어난다. 수령 700년을 헤아리는 매화나무 원정매와 630년이 된 감나무, X자로 뻗어 올라간 회화나무 등 다부진 고목들이 마을의 역사를 대변한다. 흙담길은 회화나무가 장식하고 있다. 고대 주나라 때 세 그루의 회화나무를 심고 각 나무에 한 사람씩 앉아 조정 일을 논했다고 한다. 그래서 회화나무는 학자수 또는 출세수라 불린다. 마을 옆으로 흐르는 냇물(사수당)과 용이 승천했다는 설화가 서린 ‘용소’도 볼만하다. 마을 입구에 있는 물레방아와 방앗간은 조상의 지혜를 엿보게 한다. 이외에도 이순신 장군이 묵었던 이사재와 이윤형의 효심을 기리고자 세운 사효재가 있다. 이윤형은 숙종 대의 사람으로 화적의 칼을 몸으로 막아낸 뒤 아버지를 구하고 죽었다고 한다. 사효재 마당에는 500살이 넘은 향나무가 있다.남사마을에는 도시민들을 위한 각종 프로그램이 준비되어 있다. 서당체험·전통혼례체험·천연 염색체험·꿀벌치기·민물고기 잡기·굴렁쇠 돌리기·제기차기·돌담길 걷기 등 어른과 아이들이 함께 즐길 수 있는 체험으로 가득하다. 한옥에서 숙박과 식사도 가능하니 산청에서 특별한 추억을 만들길 원하는 사람에게 추천한다.  alt 남사예담촌의 흙담길  구국의 염원이 담긴 편지마을 뒤쪽으로 유림독립기념관이 있다. 다른 곳에 비하면 인근이 다소 한산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마을에 독립기념관이 있는지조차 모르는 방문객들이 대다수다.일제강점기 산청에도 독립운동의 열기는 타올랐다. 이곳 단성면과 신등면 일대에서 특히 거셌다. 오죽했으면 서부 경남에서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낸 곳이라는 아픈 기록을 갖게 되었을까. 독립운동은 사람들이 모이기 쉬운 장터에서 주로 일어났는데, 현 단성장터와 단계장터, 산청장터 등지가 대표적이었다. 이밖에 단성공립보통학교(현 단성초등학교)에서도 독립운동이 있었다. 지리산 자락의 대원사와 벽계암은 일본 토벌대와 교전을 벌인 현장으로 유명하다. 신안면 진태마을 출신의 박동의(1867~1908) 대장은 지리산 일대를 넘나들며 수차례 전투를 치렀다. 나중에는 그 범위를 넓혀 하동·함양·합천·거창·진주·구례·광양·남원 등지에서도 일제와 맞섰다. 오부면 오부마을 출신의 민용호(1869~1922) 대장 또한 지리산을 넘어 경기도·강원도·만주까지 올라가 의병 활동을 했다. 금서면 특리에 민용호 대장이 살았던 집이 남아 있다.유림독립기념관에는 고문 체험실을 비롯해 산청 관내 독립운동가들의 면면을 살펴볼 수 있는 다양한 자료가 전시돼 있다. 파리장서 동판 모형이나 파리장서의 의의 등 유림의 독립운동 또한 비중 있게 다뤄지고 있다. 파리장서운동은 산청 단성면 출신의 면우 곽종석(1846~1919) 선생과 유림 대표 137인이 이끌었다. 그들은 구국의 염원을 담아 장서(藏書)를 쓰고 김창숙 등 10명이 중국 상하이에서 편지를 3개 국어로 번역해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파리평화회의장으로 보냈다. 비록 그 염원은 회의장에 완전히 전달되지 못했지만, 마을 한쪽에 세워진 ‘파리장서기념탑’은 그들의 정신을 현재까지 전하고 있다. 기념탑은 민족 암흑기에 파리장서운동에 투신한 유림의 충효 정신을 담아내고자 소나무와 대나무의 형상으로 제작되었다.  alt남사예담촌에 있는 유림독립기념관alt곽종석 선생의 친필편지  지리산 기슭에 서린 선비의 노래남사예담촌에서 지리산 쪽으로 깊숙이 들어가면 한 쌍의 삼층석탑(보물 제72호, 73호)이 나란한 단속사지를 발견할 수 있다. 단속사(斷俗寺). 속세와 인연을 끊는다는 뜻이다. 3층 석탑 앞에는 당간지주가 있고, 가장 오래된 매화나무 정당매가 세월을 견디고 있다.36시천면 소재지로 간다. 영남을 대표하는 유학자로 잘 알려진 남명 조식(1501~1572) 선생의 유적지에 잠시 들르기로 했다. 이곳에는 조식이 후학을 양성했던 산천재(山天齋)와 신도비·조식의 묘소·남명기념관·남명석상을 비롯해 선생의 학문과 정신을 기리기 위해 제자들이 세운 덕천서원(德川書院)이 있다. 산천재는 조식이 61세 때 지리산 자락의 덕산으로 자리를 옮기며 지은 서재인데, 단정하고 아담한 외관에 기둥마다 조식 선생의 시구가 적혀 있다. 서원 한쪽에는 조식의 문집이 보관된 작은 집이 있고, 조금 떨어진 곳에 그의 묘소가 있다.덕천강(59번 국도)을 따라 밤머리재를 넘어 산청읍내로 간다. 가는 길에 있는 내원사와 대원사도 그냥 지나치기엔 아쉽다. 지리산 품안에 안긴 내원사 한쪽으로 흐르는 계곡물이 거울처럼 맑다. 천왕봉에서 발원한 이 물은 내원사를 지나 그 아래 대포숲과 송정숲에 이른 다음 덕천강과 만난다. 내원사에서 3km 거리, 지리산 자락에 있는 대원사는 신라 진흥왕 때 연기조사가 창건한 절로 비구니들의 참선 도량이다. 대원사 위로 열린 계곡길(유평계곡)을 따라가다 보면 세신대·용소·무재치기폭포·선녀탕·옥녀탕 등 무더위를 날려줄 볼거리가 가득하다.  한의학의 본고장, 산청산청읍내에서 동쪽 밤머리재를 넘어, 경호강을 뒤로하고 차황면 쪽으로 20여 분쯤 달리다 보면 산청과 합천 경계에 걸쳐 있는 황매산(해발 1,108m)을 발견할 수 있다. 하봉·중봉·상봉 등 세 봉우리가 불쑥 솟은 산 정상은 마치 호수에 매화가 떠 있는 것 같다고 하여 ‘수중매’라고도 불린다. 정상에서 바라보는 푸른 합천호와 산청땅 차황면의 산과 들, 그리고 아득한 지리산이 한 폭의 그림 같다.물 맑고 골 깊은 산청은 한의학의 본고장이기도 하다. 『동의보감』의 저자 허준을 위시한 유이태와 초삼 형제는 이곳에서 의술을 펼쳤다. 조선 숙종 때 어의를 지냈던 유이태는 거창에서 태어났지만 외가가 있는 산읍(지금의 산청군 생초면)으로 옮겨와 의술 활동을 했다. 그래서 왕산 필봉 자락 동의보감촌에는 한의학과 관련된 다양한 시설들이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한의학 전문 박물관인 한의학박물관·한방테마공원·족욕체험장·허준순례길·산청약초관·한방자연휴양림 등이 있다. 한방테마공원은 음양오행설과 인체 형상을 바탕으로 꾸며졌다. 돌로 만든 거울 석경과 귀감이 되는 글자를 새긴 바위라는 뜻의 귀감석, 복을 담아내는 솔인 복석정도 볼 수 있다. 넓은 평지 위엔 기(氣) 체험과 명상을 즐길 수 있는 동의전이 우뚝 서 있다.귀로에는 신등면 댕성산 머리에 올라앉은 정취암에 가보는 것도 좋겠다. 해인사의 말사로 기암절벽과 숲이 둘러싸고 있어 그윽한 기운이 감돈다. 암자 앞으로 펼쳐지는 산천 풍경이 제법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듯하다.  alt남명 조식이 후학을 길렀던 산천재alt동의보감촌에 조성된 한방테마공원 ]]> Tue, 31 Jul 2018 09:59:25 +0000 20 <![CDATA[광복이 밝히는 8월의 어둠 경술국치 ]]> alt]]> Tue, 31 Jul 2018 14:48:04 +0000 20 <![CDATA[북로군정서를 조직하고 청산리대첩 승리를 일궈낸 대종교 지도자 김교헌 ]]> 글 학예실  북로군정서를 조직하고 청산리대첩 승리를 일궈낸 대종교 지도자 김교헌  김교헌은 민족사학 권위자이자 대종교 2대 교주로 활동하며우리 민족의 기틀을 바로잡고 무장투쟁의 영웅들을 지도했다.묵묵히 제 길을 걸어온 애국자요, 참된 조선사람이었다는당대의 평가처럼 김교헌은 오로지 민족만을 위한 삶을 살았다. alt 대종교에 입교하여 민족사관을 정립하다김교헌은 1867년 7월 경기도 수원에서 4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885년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예조참의(禮曹參議),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 등 여러 관직을 지냈고,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만민공동회에 참여하였다. 1906년에는 동래감리 겸 부산항재판소판사로 재직할 당시 일제의 경제침략에 맞서다가 통감부의 압력과 친일파의 모함으로 해직되었다. 이는 김교헌의 항일의식이 더 고취되는 계기가 되었다.1910년 대종교에 입교한 김교헌은 총본사의 요직을 맡으며, 민족종교로서 대종교 이론을 체계화하는 데 기여하였다. 1914년에는 대종교의 역사적 연원을 연구한『신단실기(神檀實記)』와 단군민족 역사서인 『신단민사(神檀民史)』를 저술하였다. 김교헌은 단군과 대종교의근본을 역사적으로 규명하고, 민족사의 정통성을 체계적으로 정립하고자 노력하였다.  대종교 제2대 교주로 활약하며 무장투쟁을 이끌다1916년 김교헌은 나철의 뒤를 이어 대종교 제2대 교주에 취임하였고, 일제의 탄압을 피해 만주 화룡현(和龍縣) 대종교 총본사로 망명하였다. 이후 민족학교를 설립하여 민족교육에 앞장섰으며, 교세를 크게 확장하였다.또한 1919년 2월 만주 지린에서 독립운동가 39인 명의로 발표된 대한독립선언서에 제일 먼저 이름을 올렸다.김교헌은 대종교도를 중심으로 구성된 무장독립단체북로군정서의 결성과 활동을 지도하였다. 이에 북로군정서군은 1920년 10월 청산리대첩에서 큰 승리를 거둘수 있었다. 전투에서 패배한 일제는 대종교도를 무차별학살하였고, 이로 인해 대종교의 독립운동 기반이 약화되었다. 김교헌은 본부를 영안현(永安縣)으로 옮겨 재건을 준비하였으나, 1923년 11월 18일 병으로 순국하였다. 정부는 김교헌의 공적을 기려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alt대종교 입교 이후의 김교헌alt대한독립선언서(1919.02.)만주 지린에서 발표된 대한독립선언서(‘무오독립선언서’라고도불림)로, 무장혈전을 통한 독립을 주장한 유일한 독립선언서이다.김교헌이 첫 번째로 서명하였다.  alt대종교 만주 영고탑에서 14회 중광절 기념(1922)중광절은 대종교의 사대경절 중 하나로 나철의 대종교 조직을기리는 날이다.alt「독립신문」에 실린 김교헌 별세 기사(1924.01.19.)김교헌의 생애를 간략하게 기술하고 있다.   ]]> Tue, 31 Jul 2018 13:30:08 +0000 20 <![CDATA[여성 독립운동가로 살아간다는 것 ]]> 글 윤정란 서강대학교 교수   여성 독립운동가로 살아간다는 것   이혜련은 미주의 대표적 여성독립운동가다. 그녀의 본관은안성(安城)으로, 안혜련·헬렌 안(Helen Ahn)·이헬렌 등의이름을 사용했다. 그리고 안창호의 활발했던 독립운동배경에는 열렬한 지지와 숭고한 희생을 아끼지 않았던아내이자 동지, 이혜련이 있었다. alt 이혜련 가족사진(1925~1926년경)   도산 안창호와의 결혼과 미국 이주 이혜련은 1884년 4월 21일 평안남도 강서군에서 서당 훈장인 이석관의 장녀로 출생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가정교육에 엄격하면서도 개방적인 사고를 지닌인물이었다. 1897년, 13세의 이혜련은 안창호를 만나약혼했다. 2년 후인 15세에는 정신여학교에 입학하여근대교육을 받았으며 17세에 졸업했다. 1902년, 서울제중원에서 마침내 안창호와 부부의 인연을 맺었다.주례는 선교사 밀러(Miller, Frederick Scheiblim)가맡았다. 밀러는 1866년 미국 펜실베니아에서 출생, 피츠버그대학(1889)과 유니언 신학교(1892)를 졸업한 인물인데, 1892년에 부인 안나 밀러(Anna Reinecke)와 함께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로 한국에 왔다. 1892년 서울에서 예수교학당(경신학교) 책임자로 활동하며 교명을 민로아학당으로 고치고 1901년 다시구세학당으로 교명을 바꾸었다. 이 시기안창호는 구세학당에 입학해서 밀러로부터 근대교육 수혜를 받았다. 1902년 이혜련은 남편 안창호와 함께 당시 미지의 세계나 다름없었던 미국으로 갔다. 그녀는 주로 샌프란시스코와 로스앤젤레스에 거주하면서 가사를 도맡고 안창호의 독립운동을 도왔다. 이듬해 로스앤젤레스에서 중국인이 경영하는 학교인자혜사업(慈惠事業)에 통학했다.1907년 1월경 안창호가 국사를 위해 환국하기로 했을 때 23세의 이혜련은 적극적인 지지와 격려를아끼지 않았다. 안창호가 미주를떠나 독립운동에 매진하는 동안그녀는 백인 집을 청소하고 빨래, 요리 등 집안일을해주며 생계를 이어갔다. 또한 장남 안필립과 함께과일가게를 운영하기도 했다.   미국에서 여성독립운동을 전개하다 1910년 8월, 대한제국은 일제에 의해 식민지로 전락했다. 그러나 이혜련은 좌절하지 않고 안창호의 독립운동을 돕는 데 보다 적극적으로 나섰다. 먼저 1919년 3·1운동 이후, 3월 28일 로스앤젤레스에서 부인친애회 조직에 가담하였다. 부인친애회에는 이혜련을 비롯해 임메불·박순애·김혜원 등이 주요 인사들로 있었다. 조직의 목적은 한인 여성들의 생활 개선을 통한 독립운동 지원. 그리하여 절대로 일제의 상품을 사용하지 않았으며 매주 화요일과 금요일에는고기를 먹지 않도록 했다. 이렇게 절약된 돈은 독립자금에 보태기로 했다. 1919년 8월 5일,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조직된 미국한인 여성들의 단체를 통합하여 대한여자애국단이결성되었다. 부인친애회는 대한여자애국단의 로스앤젤레스 지부로 활동했다. 이혜련은 지부의 재무를담당하며 독립자금 모금에 앞장섰다. 단원들은 물론한인 여성들의 자발적 참여로 모금 활동은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의연금은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로 보내져 독립운동을 지속하는 밑거름이 되었다.한편 이혜련은 김마리아가 로스앤젤레스로 갔을 당시, 교포 지도자들과 함께 그녀를 찾아가 위로의 말을 전하고 교분을 나누기도 했다. 윤봉길 의거 직후안창호는 일본 영사관 경찰에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되었다. 수감 중 병보석으로 석방되었으나 결국 그후유증을 이기지 못하고 사망하는 비운을 겪는다. 이에 이혜련은 남편의 죽음에 대한 비탄과 슬픔을 잊고자 더욱 독립운동에 매진하였다. 1944년에는 대한여자애국단 총부단 위원을 맡았으며, 재미 한인전후구제회의 회원으로 활동하는 등 조국광복을 위한 대업에 동참하는 여장부의 면모를 보였다.   대한여자애국단 총단장, 이혜련 1946년 1월 6일, 이혜련은 대한여자애국단 제6대 총단장에 임명되었다. 이즈음 쿠바에 있는 한인들이 노동금지를 당하고 극심한 생활난을 호소하며 구제를요청해왔다. 이때 대한여자애국단은 지부별 구제금모금에 나섰고, 총 121달러를 지원하였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이혜련은 피난민을 돕기 위해적십자와 한국구제회(Korea Relief Society)를 조직했다. 이들은 고국으로 옷가지·약품·담요 등의 구호물품을 보냈다.1962년 이혜련은 대한여자애국단 창립 43주년 기념일을 맞아 그 공로를 인정받으며 기념품을 증정받았다. 1969년 4월 21일, 이혜련은 미국에서 눈을 감았다. 그리고 1973년 11월 10일, 도산 95회 탄신 및 흥사단창립 60주년을 기념하여 망우리 공동묘지에 안장되어 있던 도산의 유해와 미국에서 사망한 이혜련의 유해를 서울 도산공원으로 모셔와 이장했다. 이혜련은 일제강점기부터 광복 직후, 한국전쟁에 이르기까지 조국과 민족을 위해 활발한 활동을 이어온여성독립운동가였다. 독립운동가 안창호의 곁에는이혜련이 있었고, 여성독립운동조직 중심에도 이혜련은 있었다. 2008년 정부에서는 이러한 이혜련의공로를 인정하여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 Tue, 31 Jul 2018 14:24:12 +0000 20 <![CDATA[생과 사는 인생의 일면이다 ]]> 글 이성주 역사칼럼니스트  생과 사는인생의 일면이다  한국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말할 때 빠지지 않고 언급되는 인물이 있다. 바로 우당 이회영 선생이다. 이회영 선생과 그의 가문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모든 것을 내걸었던 그야말로 진정한 ‘명문가’였다. 부와 명예, 편안하고 안락한 일상까지. 누리고 있는 것들을 내려놓기란 쉽지 않았을 터. 그리고 그들이 조국에 바쳤던 ‘모든 것’에는 죽음도 포함되어 있었다.  투신(投身)이란 무엇인가▲독립운동가 우당 이회영 ▲1867년 3월 17일 서울 출생 ▲1896년 항일 의병 자금 조달을 목적으로 삼포농장 경영 ▲1905년 을사늑약 체결 후 이상설 등과 함께 을사늑약 철회 무효화 운동 전개 ▲1910년 만주 망명 ▲1912년 독립군 지도자 양성을 위한 신흥강습소(훗날 신흥무관학교로 개칭) 설립 ▲1918년 광무황제 국외 망명 시도 및 실패 ▲1919년 4월 동생 이시영과 함께 대한민국임시의정원 회의에 의원으로 참가. 1912년 임정 탈퇴까지 활동 ▲1924년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 설립에 참여. 비밀 결사조직 다물단·아나키스트 독립운동 단체 항일구국연맹·흑색공포단 등 조직 및 활동 ▲1932년 11월 일본 경찰에 체포. 혹독한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옥사 이회영과 그 형제들은 임진왜란 당시 국난극복에 앞장섰던 백사 이항복의 10대 후손이다. 이들 가문은 8대를 이어 판서를 배출한 명문 중 명문이었다. 1910년 경술국치 후 이회영의 6형제가 한자리에 모였다. 나라가 망했는데 가만히 있을 수 없다는 결심에서였다. 우선 재산을 처분했다. 그들은 조선에서도 손꼽히는 재력가였는데, 당시 처분한 재산의 금액만 하더라도 6백억 원에 이르렀다. 1910년 12월, 형제들은 식솔 59명과 함께 중국으로 떠났다. 그리고는 처분한 재산으로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이회영의 나이 44살 때의 일이었다. 이회영과 형제들에게 ‘투신(投身)’은 삶 자체였다. 독립운동 8년 만에 그 많던 재산은 바닥을 보였고, ‘일주일에 세 번 밥을 하면 운수가 대통한다’는 농담을 던질 정도로 빈곤에 시달렸다. 형제의 최후는 더욱 참담했다. 6형제 중 5명이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이회영의 동생 이시영만이 고국으로 와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을 지냈으나, 그나마도 이승만 대통령의 전횡에 반대하며 사임하고 말았다. 조선시대부터 가문 대대로 내려온 곧고 단단한 절개는 변함없었다.  형제의 선택과 죽음죽음은 우리로 하여금 삶의 유한함을 깨닫게 한다. 대개 죽음은 불길한 것, 두려운 것, 피해야 할 것으로 여겨지지만 삶과 죽음은 하나요, 죽음 그 자체가 삶이니 결코 피할 수가 없다. 이회영 역시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말한다. “생(生)과 사(死)는 다 같이 인생의 일면인데 사(死)를 두려워해 가지고 무슨 일을 하겠는가.” 인생이란 무엇인가. 이쯤에서 다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인생은 B(Birth)와 D(Death) 사이의 C(Choice)다”라는 프랑스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의 말처럼, 인생이란 삶과 죽음 사이를 이루는 수많은 선택의 총합이다. 그리고 이 선택을 도와주는 길잡이가 바로 ‘죽음’인 것이다. 선택을 앞두고 갈팡질팡하는 중이라면 당장 내일의 죽음을 떠올려 보라. 내가 내일 죽는다면 지금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선택을 후회한다면? 혹은 선택이 좋은 결과를 내지 못한다면? 질문에 대한 이회영의 답은 명쾌하다. “이루고 못 이루고는 하늘에 맡기고 사명과 의무를 다하려다가 죽는 것이 얼마나 떳떳하고 가치 있는가.”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고 한다. 해야 할 노력을 다했다면 그다음은 하늘에 맡기자. 설사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더라도 스스로 자신의 사명을 깨닫고 온전히 투신했다면 그 자체로도 충분히 아름답다. 이회영 선생과 형제들의 삶이 바로 그 증거다. 100여 년 전 나라 잃은 슬픔과 원한을 가슴에 품고 조국 독립에 모든 것을 바쳤던 고고한 뜻과 혼은 지금까지 이어져 오며 우리에게 강렬한 울림을 전한다. 비록 눈에 보일 만한 뜻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사명과 의무를 다한 형제들의 인생은 많은 사람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죽음은 삶의 끝이 아니다. 삶과 죽음은 언제나 사이좋게 동행한다.  이성주최근에는 국제정치와 관련된 연구 및 집필에 열중하고 있다. 『전쟁으로 보는 국제정치』 시리즈 1, 2, 3권을 출간 중이다. 시나리오 작가 겸 역사칼럼니스트. 대중과 함께 호흡하는 글쓰기를 목표로 『조선의 민낯』, 『왕들의 부부싸움』과 같은 역사서를 출간한 바 있다. ]]> Tue, 31 Jul 2018 11:42:31 +0000 20 <![CDATA[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무궁화 無窮花이름처럼 ‘영원’을 바랐으나서럽게 저물던 때가 있었습니다.민족의 수난사 속에서나라꽃이라고 어찌 무사할 수 있었을까요. 그 척박한 현실을 딛고다시 꽃봉오리를 틔워냈습니다. 8월 광복의 빛이 드리우는 곳에대한민국의 미래가 시작되는 곳에다시,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 Tue, 31 Jul 2018 11:33:01 +0000 20 <![CDATA[길이 끝나는 곳에서길은 다시 시작되리 경술국치 ]]> 글 권경률 역사칼럼니스트  길이 끝나는 곳에서길은 다시 시작되리경술국치  매월 대한민국의 광복과 관련된핵심사건을 선정하여 그 치열했던역사의 순간을 재구성하고자 한다.다시 만난 그날, 이번 달의 주제는망국의 아픔이 배어있는 ‘경술국치’다. 자결과 독립전쟁, 그리고 매국.일제의 강제병탄이 빚은 그들의엇갈린 선택을 만나보자.  1910년 8월 29일, 나라가 망하다“한국 황제 폐하와 일본국 황제 폐하는 양국 간의 특수하고 친밀한 관계를 회고하여 상호 행복을 증진하며 동양의 평화를 영원히 확보하려는 바,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한국을 일본국에 병합해야 한다고 확신하여 양국 간에 병합조약을 체결하기로 결의하고 일본국황제 폐하는 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 한국 황제 폐하는내각 총리대신 이완용을 전권위원으로 임명한다.” 1910년 8월 22일. 총리대신 이완용은 대한제국 어전회의를 소집했다. 참석을 강요당한 융희황제도 마지못해회의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 자리에서 내각 대신들은나라를 일제에 병합한다는 안건을 상정해 의결했고, 이완용은 그날부로 데라우치 통감을 만나 8개 조항으로이뤄진 조약을 체결하기에 이른다. “제1조 한국 황제 폐하는 한국 정부에 관한 일체의 통치권을 완전하고도 영구히 일본국 황제 폐하에게 양여한다. 제2조 일본국 황제 폐하는 전조의 양여를 수락하고한국을 일본국에 병합함을 승낙한다.…(중략)…제8조본 조약은 일본국 황제 폐하와 한국 황제 폐하의 재가를거친 것으로 공포일로부터 시행한다.” 그렇게 ‘한일병합조약’이 조인되었다. 일본 통감 데라우치와 한국 총리대신 이완용 등이 사전에 조율한 결과였다. 일제는 헌병과 경찰을 총동원하여 공포 분위기를조성하고 대신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조약이라이름 붙기는 했지만 사실상 강제병탄이었다.조약은 한국인의 반발과 저항을 우려해 공식 선포될 때까지 비밀에 부쳐졌다. 언론에 재갈을 물리고 사회단체에 족쇄를 채웠다. 이미 낌새를 알아챈 원로대신들도구금당했다. 마침내 8월 29일, 병합 포고가 나붙었다.나라가 망했다.경술국치(庚戌國恥). 경술년에 일어난 나라의 치욕이란뜻이었다. 대한제국을 포함해 518년간 지속해온 조선은역사상 유례없는 국권피탈(國權被奪)로 문을 닫았다.  alt나라를 팔아 거부가 된 이완용alt병탄조약 체결을 위해 총리대신 이완용을 전권위원에 임명하는 칙서alt1910년 8월 29일자 조선총독부 관보에 게재된 병탄조약  훗날 다시 만나보자, 나의 사랑 한반도야경술국치가 당장 거국적인 항쟁을 불러일으키지는 않았다. 일제가 강제병탄을 치밀하게 준비하면서 저항세력을철저히 짓밟은 탓이었다.1905년 일본은 러일전쟁에서 승리하면서 본격적인 한반도 병탄에 착수한다. 1905년 을사늑약, 1907년 광무황제의 강제퇴위와 한일신협약을 거쳐 한국은 외교·사법·국방 등 실질적인 국권을 상실하고 껍데기만 남게 되었다.망국의 서글픈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졌다. 1909년이 되자 일본은 강제병탄에 앞서 노골적인 폭압에 나섰다. 먼저‘남한대토벌작전’으로 조선 항일 의병의 씨를 말리고자했다. 목을 베고 총살하는 것도 모자라 유해를 가마솥에넣어 삶기도 했다. 처참하고 잔혹한 살육이 이뤄졌다. 그해 10월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고, 12월에는 이재명이 총리대신 이완용을 습격해 중상을 입히면서 강제병탄 음모는 주춤하는 듯했다. 그러나 일제는 이를 빌미로안창호 등 신민회 인사들을 잡아들이고 애국계몽운동에대한 감시를 강화함으로써 일찍이 저항의 싹을 잘라냈다.1910년 5월 일본 육군대신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신임 통감에 부임하면서 폭압은 극으로 치달았다. 통감부는 「황성신문」·「대한신문」·「대한매일신보」 등에 대해 발행정지와 판매금지 조처를 내렸다. 또 1만 명이 넘는 헌병과경찰을 각지에 배치하고 일본군 2개 사단으로 무력을 과시했다. 강도가 입을 틀어막고 총칼을 들이댄 격이었다.공포 분위기가 무르익자 데라우치 통감은 일본에서 짜온시나리오대로 ‘한일병합조약’을 비밀리에 관철했다. 강제병탄을 포고한 8월 29일. 일제는 대대적인 축하행사를 열었다. 거리에 아치를 세우고 오색등을 달았으며 집마다일장기를 게양하도록 했다. 일진회를 비롯한 친일단체들을 앞장세워 덕수궁 등지에서 만세를 부르기도 했다.대다수 한국인들은 경술국치에 망연자실했다. 기우는 국세에 망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설마 하던 일이그예 일어나고 만 것이다. “나는 어안이 벙벙하였다. 이 일은 내 평생에 처음이었을뿐더러 한민족의 역사를 보자면 몇 천 년에 한 번도 있기드문 것이다. 나에게는 이런 경우에 응하는 감정의 길을가진 적이 없었다. 단지 눈앞이 캄캄하고 전신에 맥이 풀릴 뿐이었다.” 이 무렵 청년기에 접어든 소설가 이광수는 당시의 심경을이렇게 고백한다. 민족적 울분이 차올랐으나 하루아침에망국의 국민이 된 사람들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랐다. 통곡하고 자결하는 이도 있었고, 누군가는 제 몸과 마음을 던져 앞길을 열어나갔다.시인 황현은 경술국치 직후 스스로 목숨을 끊으며 다음과 같은 내용의 절명시(絶命詩)를 남겼다. 새와 짐승도 슬피 울고 강산도 찡그리네무궁화 이 나라가 이젠 망해버렸네가을 등불 아래 책 덮고 지난 역사 생각하니인간 세상에 글 아는 사람 노릇 어렵기만 하구나 1864년부터 1910년까지 조선 개화기 풍경을 지식인의 눈으로 서술한 황현의 저작 『매천야록』도 그의 죽음과 함께 미완의 비극으로 끝을 맺었다. 비록 재야의 유생이었지만 나름대로 망국에 대한 책임을 지려 했던 것으로 여겨진다.일본이 힘으로 나라를 빼앗았으니 나라를 되찾으려면 더 큰 힘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힘을 기르기 위해 국경을 넘었다. 중국과 러시아로 향했고, 더러는 태평양과 대서양을 건너기도 했다.1910년 항일 비밀결사 신민회는 국권회복의 최고전략으로 ‘독립전쟁’을 선택한다. 국외에 무관학교와 독립군 기지를 건설하기로 한 것이다. 임무를 맡고 망명길에 오른 안창호는 조국을 떠나면서 ‘거국가(去國歌)’라는 노래를 남겼다. 간다 간다 나는 간다 너를 두고 나는 간다 …(중략)…부디부디 잘 있거라 훗날 다시 만나보자나의 사랑 한반도야  alt 경술국치를 맞아 지식인의 책임을 통감하고 자결을 택한 매천 황현 선생  나라를 판 대가와 나라 잃은 고통한편 친일파는 나라를 판 대가로 온갖 부귀영화를 누렸다. 한국인으로서 강제병탄에 가장 큰 공을 세운 인물은 이완용이다. 그는 을사5적·정미7적·경술국적에 모두 이름을 올렸다.이완용은 1910년 일제의 한국 병탄을 도운 공으로 은사금(恩賜金) 15만 원(현재 가치 30억 원)을 하사받았다. 1907년 광무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키고 한일신협약을 맺을 때도 10만 원(현재 가치 20억 원)을 수령한 바 있으니, 나라를 팔고 어마어마한 액수의 돈을 챙긴 셈이다. 황현의 『매천야록』에 따르면 이토 히로부미는 1905년 을사늑약을 성사시키기 위해 엄청난 양의 매수공작금을 풀었다고 한다. 이완용의 몫이 적었을 리 없었다.거금을 손에 넣은 그는 부안·김제·군산 일대의 비옥한 논밭을 사들였다. 일제강점기 초 이완용이 가지고 있는 땅의 면적만 해도 여의도 2배 크기에 이를 정도였다. 이후 시세에 따라 토지를 팔아 나갔는데 덕분에 이완용은 1920년대 중반 경성 최대의 현금 부자로 떠올랐다. 세간에선 그가 보유하고 있는 현금의 액수가 300만 원이나 된다는 이야기도 나돌았다. 당시 300만 원이란 현재 가치 600억 원에 해당하는 엄청난 액수였다.이뿐만이 아니다. 일제는 강제병탄 이후 대한제국 고관대작들에게 귀족 작위를 주었다. 이완용·박제순·송병준을 비롯한 76명이 후작·백작·자작·남작에 임명되었다. 이는 친일 행위에 대한 논공행상의 의미도 있었지만 명사들을 회유하는 수단이기도 했다. 대부분 일본을 등에 업고 귀족으로 거듭나는 가운데 개중에는 작위를 거절하거나 반납한 사람도 있었다.귀족은 단순한 명예직이 아니었다. 친일파 귀족들은 막대한 특혜 속에서 부를 쌓아갔다. 예컨대 국유 미개간지나 임야를 거의 무상으로 불하받았는데, 그 땅을 제삼자에게 매각해 차익을 남기는 경우도 있었다. 뇌물로 받은 돈도 제법 쏠쏠했다. 그들은 일제가 비춘 한 줄기 빛에 매달려 호의호식했다.이에 반해 국권 피탈의 그림자는 민초들의 삶을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몰아넣었다. 일제는 국권을 빼앗자마자 전국적인 토지조사사업에 착수했다. 이 과정에서 지주가 신고한 소유권만을 인정하고 소작농의 관습적인 권리들은 박탈했다. 농민들은 조상 대대로 농사짓던 땅을 하루아침에 빼앗기고, 정처 없이 떠도는 유랑의 운명에 놓였다. 그들의 고달픈 발길은 국경 너머 간도로, 이역만리 시베리아로 이어졌다.일제는 자칭 ‘합법적으로’ 강탈한 토지를 국유지로 편입시키거나 일본인에게 헐값에 팔았다. 토지뿐 아니라 산림·광산·어장 등 돈 되는 것엔 어김없이 일제의 손길이 뻗쳤다. 서민들은 날이 갈수록 늘어나는 잡다한 세금에 눌려 신음했고, 민족자본은 쏟아지는 일본 상품에 파묻혀 매장됐다. 피압박민의 억울한 사정은 이루 말할 수 없었지만 토로할 곳이 마땅치 않았다.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까지 모두 빼앗겼기 때문이다.거리에 깔린 헌병과 경찰은 불령선인(不逞鮮人)을 색출했다. ‘말 안 듣는 조선 사람’은 무조건 잡아들여 거꾸로 매달고, 채찍질하고, 인두로 지지고, 손발톱 밑을 바늘로 찌르는 악형을 가했다. 감방에서 목숨을 잃는 자가 부지기수였으며 요행히 살아서 옥문을 나서더라도 종신 불구가 되었다.“찍도 짹도 못하게 각 방면의 속박과 압제를 받아 삼천리가 일개 대감옥이 되었고 우리 민족은 강도 손안의 사용품이 되고 말았다.”신채호는 나라 잃은 민족의 처지를 비통하게 읊조렸다. 동시에 참혹한 현실이 새 시대를 부르는 기폭제가 될 것이라 기대했다. 신채호가 기초한 ‘조선혁명선언’은 바로 그 치욕의 역사에서 길어 올린 것이다.조선 혁명을 위해 일제와 맞서 싸운 의열투쟁과 독립전쟁은 고통에 빠진 한국인에게 굽이치는 광복의 여정을 제시했다. 망국의 설움과 치욕은 지난 역사를 성찰하고 새로운 희망을 찾아내는 출발점이었다. 길이 끝난 곳에서 곧 길은 다시 시작되었다.  alt 강제병탄과 함께 전국적으로 실시된 토지조사사업   권경률역사칼럼니스트. 서강대학교에서 역사학을 공부했다. 칼럼 ‘사극 속 역사인물’을 연재하고 팟캐스트 ‘역사채널 권경률’을 진행한다. 저서로는 『조선을 새롭게 하라』·『조선을 만든 위험한 말들』 등을 출간했으며, 영상물 <시시콜콜 한국사 어워즈>도 선보이고 있다. ]]> Tue, 31 Jul 2018 13:48:51 +0000 20 <![CDATA[다시 시작된 외침 대한독립만세 ]]> 글 박영규  다시 시작된 외침대한독립만세  1926년 4월 25일. 대한제국 융희황제가 사망했다. 1907년 헤이그 특사 파견으로 광무황제가 강제 퇴위되면서억지로 황제 자리에 올랐던 그였다. 망국의 황제로서 치욕과 굴종의 세월을 살다 끝내 53세로 눈을 감았다. 융희황제가 생을 마감했던 1926년, 한국에는 다시금 만세운동의 기운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다시 피어난 독립의 열망, 6·10만세운동1917년, 볼셰비키 혁명의 성공 이후 전 세계적으로 공산주의운동이 확산되고 있었다. 1926년, 이 여파는 한국에까지 미쳤다. 독립 세력은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계열로 분열되었고, 무장독립운동도 청산리대첩을 정점으로 내리막길을 걸었다. 또한 임시정부 내에서도 민족주의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 간의 정치적 대립이 심각해졌다. 물산장려운동과 민립대학설립운동은 문화정책이라는 복병에 밀려 자리를 잃어갔다. 이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 분열을 극복하고 항일전선을 통일하여 민족의 힘을 하나로 결집해야 한다는 각성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었다.이런 상황에서 4월 28일, 송학선의거가 발생한다. 송학선은 스스로 안중근과 같은 인물이 되길 갈망하며 사이토 총독 암살 계획을 세운 인물이다. 그는 융희황제 서거 후 사이토가 조문할 때 거사를 결행하기로 결심하고 4월 28일에 창덕궁과 이어지는 금호문으로 갔다. 오후 1시가 넘은 시각, 송학선은 일본인 3명이 탄 자동차가 금호문으로 들어오는 것을 발견했다. 차에 탄 인물이 사이토 총독이라는 판단 아래 송학선은 곧바로 차에 뛰어올라 그들을 칼로 찔렀다. 하지만 차에 타고 있던 이들은 사이토 총독이 아닌 경성부회 평의원 다카야마와 사토, 이케다 등이었다. 비록 송학선은 사이토 총독 암살에 실패했지만, 송학선 의거는 한국인들에게 항일운동에 대한 투쟁 의지를 고조시키기에 충분했다.시위운동을 먼저 기획한 쪽은 사회주의 세력이었다. 조선공산당 상하이부는 융희황제가 사망하기 전에 대중시위운동을 일으킬 계획을 세우고 그해 5월 1일 노동절을 디데이로 잡았다. 그러다 계획을 수정하여 3·1운동과 같은 만세운동으로 전환하고자 했다. 이들은 천도교 세력과 민족주의자·학생·청년을 총망라해 ‘대한독립당’이라는 중립적 개념의 단체를 결성했다. 대한독립당은 융희황제의 인산날을 기해 만세시위를 벌일 계획을 세웠다.총독부는 이러한 움직임을 감지하고 있었다. 이미 광무황제의 인산일에 3·1운동이라는 홍역을 치른 경험이 있던 터라 총독부와 일본경찰, 그리고 헌병대는 천도교와 공산당의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일본에게 먼저 꼬리가 잡힌 쪽은 공산당 세력이었다. 6월 초까지 상하이에서 격문과 자금을 전달하기로 되어 있었지만 오지 않았고, 결국 기다리고 있던 박래원이 체포되고 말았다. 이로 인해 조선공산당과 천도교의 합동 만세운동은 실패로 돌아갔다.다행히 학생 조직은 일본경찰에게 발각되지 않았다. 덕분에 각 지역으로 격문을 운송하는 데도 성공할 수 있었다. 그리고 6월 10일. 학생들을 중심으로 서울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약 5~6백 명의 학생들은 격렬한 시위운동을 전개하였고, 그 과정에서 2백 명이 넘는 학생들이 체포되었다.지방에서도 산발적으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전북 고창보통학교에서는 어린 학생들이 만세운동을 이끌었고, 인천 만국공원에서는 수십 명의 청년들을 중심으로 시위가 있었다. 그러나 학생 시위는 시민들의 큰 호응을 얻지는 못하였다. 그 한계를 안타깝게 여긴 또 다른 학생 조직이 다시 만세운동 계획을 세운다. 배재고보생 문창모를 비롯한 기독교 계통의 학생들이 그 주인공이었다. 하지만 격문을 인쇄하는 중에 일본경찰에게 발각되어 문창모와 핵심 인물들이 모두 체포되었다.결국 6·10만세운동은 총독부와 일본경찰, 헌병의 철저한 감시 때문에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만세운동의 준비 과정에서 사회주의 세력과 민족주의 세력의 결합이 이루어졌고, 그것은 다시 사상에 관계없이 독립을 위해 하나로 뭉치자는 민족유일당운동의 촉매제가 되었다. 민족유일당운동은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의 결합체로서 훗날 ‘신간회’ 결성이라는 결실을 얻게 된다.  alt돈화문을 지나고 있는 광무황제 국장 행렬alt금호문(1926.04.)alt송학선 의사 사형 순국 보도(「동아일보」, 1927.05.22.)  광주학생운동, 그 당찬 움직임의 시작11월 3일. 이날은 단군이 조선을 처음 세운 개전철이다. 그리고 일본에게 11월 3일은 4대절 중 하나인 명치절이었다. 묘한 우연이었다. 1929년 11월 3일, 전국적으로 명치절 기념식이 거행되었고 신사참배가 이어졌다. 이때 광주의 광주고등보통학교(광주고보) 학생들이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대대적인 항일 시위를 벌였다. 이른바 광주학생운동의 서막이었다.물론 이전에도 광주에서는 한국 학생들의 시위가 종종 벌어지곤 했다. 11월 3일 시작된 학생운동의 직접적인 원인은 10월 30일, 그러니까 닷새 전 벌어진 사건 때문이었다. 그날 오후 5시 30분경, 나주역에서 한일 학생들 간에 충돌이 발생했다. 충돌을 야기한 쪽은 일본인 중학생들. 그들은 나주역에서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광주여고보) 학생인 박기옥·이금자·이광춘 등에게 모욕적인 말들을 쏟아내며 댕기 머리를 잡아당기는 폭력을 행사했다. 이에 격분한 박기옥의 사촌 동생 박준채가 일본인 중학생들과 싸움을 벌였다. 박준채는 광주고보 2학년생이었다. 소식을 듣고 달려온 경찰이 일본인 학생들과 함께 박준채를 구타하고, 지켜보던 한국인 학생 십여 명이 가세하면서 싸움이 커졌다. 이날 싸움은 적당한 선에서 마무리되었으나 문제는 이틀 뒤인 11월 1일 일본인 중학생 네댓 명이 광주고보에 도전장을 던지면서부터 시작됐다. 일본인 중학생과 광주고보 학생 간의 싸움은 한층 거세졌다. 양쪽 학교 교사들이 중재를 위해 나섰으나 이들 또한 점차 갈등 양상을 보였다.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한 교사와 경찰이 통학 열차에 동행했다. 전남 도지사까지 나서서 양쪽 학교 교장에게 통학생들을 엄격하게 감독할 것을 지시하였다. 그러나 이미 광주의 한국인 학생들은 일본인의 오만하고 차별적인 행동을 더 이상 지켜볼 수 없다고 판단, 조직적인 저항을 결심한 상태였다.11월 3일 오전 11시경에 광주우편국 앞에서 광주고보 학생들과 일본인 중학생 사이에 패싸움이 일어났다. 그 과정에서 한국 학생 최쌍현이 단도에 찔려 안면 부상을 입었다. 소식을 전해 들은 광주고보 학생들이 일본인 중학생들을 쫓아가 구타하였고, 광주중학생 백여 명 또한 유도교사의 인솔 아래 목도와 단도를 들고 싸움판에 가세했다. 이에 광주고보는 물론이고 광주농업학교 학생들까지 몰려와 대대적인 싸움판이 벌어졌다. 이 사건으로 양쪽 모두 10여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광주고보 학생들은 더 이상 차별과 모욕을 견딜 수 없었다. 그들은 집회를 통해 가두시위를 결행하기로 결정한다. 가두시위에 참여한 학생 수는 3백여 명. 경찰의 진압에 대비해 목봉이나 목검을 준비하는 학생들도 있었다.시위를 주도한 학생들 대다수는 독서회 회원들이었다. 광주 학생들 사이에서는 이미 1926년 결성된 ‘성진회’라는 항일 비밀결사가 있었다. 이들은 일본 경찰에게 조직이 발각될 것을 염려해 스스로 성진회를 해체하고 대신 학교마다 독서회를 만들어 비밀결사의 성격을 유지했다. 1928년에는 광주고보와 광주농업학교 등의 동맹휴업을 이끌기도 했다.가두시위에 나선 광주고보 학생들은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시가지를 누볐고,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광주농업학교 학생들도 대열에 합류했다. 시위대는 광주중학교를 습격할 계획이었으나 이미 소방대·경찰·재향군인들이 방어막을 형성하고 있던 탓에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학생들의 행진은 계속되었다. 광주사범학교와 광주여고보 학생들까지 합세했다. 광주 시민들은 거리로 나와 학생들을 지지하며 박수를 보냈다. 경찰은 뒤늦게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시위대에 해산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학생들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시위 행렬을 이어갔다. 광주고보 학생들은 학교 강당에 집결하여 이후의 행동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alt광주학생의거 격문alt광주학생의거 당시 학생들 검문검색(1929)  전국에 울려 퍼진 청년의 만세 소리시위 과정에서 광주고보 학생 39명과 광주농업학교 학생 1명이 구속되었다. 전라남도 당국은 우선 3일간의 임시 휴교령을 내렸다. 그런 다음 학생들에게 압력을 행사하며 시위 중단을 요청했다. 그러나 학생들의 투쟁 의지는 꺼질 줄을 몰랐다. 광주 청년 조직까지 가세하며 투쟁은 보다 조직적이고 치밀하게 전개되어갔다. 단순히 학생들만의 항일투쟁을 넘어 민족적 저항운동으로 번지기 시작한 것이다.광주고보 학생들은 11월 12일에 재차 가두시위에 나서며 광주여고보와 광주사범학교 학생들의 참여를 촉구했지만, 이미 두 학교 학생들은 감금된 상태라 움직일 수 없었다. 다행히 광주농업학교 학생 중 백여 명 정도가 학교를 뚫고 나와 시위 행렬에 동참했다. 학생들의 맹렬한 저항이 이어지는 동안 경찰은 선두에 있는 학생들을 무차별적으로 구타하여 체포한 뒤 모두 구속해 버렸다. 체포된 학생은 광주고보 190여 명과 광주농업학교 60여 명을 포함해 총 250여 명이었다. 또한 광주고보 학생 300여 명과 광주여고보 학생 17명은 무기정학 처분을 당했다. 광주여고보 학생들은 무기정학 조치의 부당함을 항의하며 동맹휴교를 결정했고, 이에 학교 당국은 무기정학생을 64명으로 늘렸다. 광주사범학교에서도 학생 38명에게 퇴학이 내려졌다.학생들에 대한 탄압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광주고보 170여 명이 광주형무소에 갇혔다가 재판을 받았는데, 그중 55명이 구속되었다. 1930년 1월 9일, 학생들은 2학기 시험에 백지동맹으로 항거했고, 이 일로 17명이 퇴학 처분을 받았다. 백지동맹이 계속되자 학교 당국은 다시 48명의 학생을 퇴학시켰다. 이후로도 퇴학 사태는 계속 이어졌고 광주여고보에서도 백지동맹을 계획하다 발각되어 2명이 퇴학당했다.서울의 학생 시위는 12월 2일과 3일 양일간에 걸쳐 격문이 유포된 후, 12월 5일부터 본격화되었다. 5일에 경성제이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이, 7일에는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이 교내 시위를 시작했다. 이후 서울 시내 대다수의 학교가 가두시위에 가담했는데, 1월 15일에는 5천여 명의 학생들이 서울 시가지를 행진하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일제는 경찰 7백여 명을 동원하여 무자비한 진압에 들어갔다. 그러나 학생 시위는 전국으로 번져갔고, 개성·대전·부산·진주·평양·신의주·함흥 등 국내는 물론 중국 간도에서도 대대적인 학생 시위가 이어졌다. 당시 시위에 참여한 학교는 전국적으로 194개교에 이르렀으며, 참여 학생은 5만4천여 명, 이로 인한 퇴학 처분자가 582명, 무기정학이 2,330명, 경찰에 연행된 학생이 1,642명이었다.광주학생운동을 비롯한 학생만세운동은 비록 그 주체가 학생들로 국한되기는 하였으나 3·1운동 이후 10년 만에 전개된 대대적인 항일운동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깊다. 또한 한국인들의 독립의지를 새롭게 확인할 수 있었던 일대 사건이었다.  alt 광주학생의거 당시 연행되는 학생들(1930)   박영규1996년 『한 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을 내면서 저술활동을 시작하여. 1998년 중편소설 『식물도감 만드는 시간』으로 문예중앙신인상을 수상하면서 소설가로 등단했다. 문학, 철학, 역사 분야에 걸쳐 저술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대표적인 역사서로는 『한 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 『한 권으로 읽는 일제강점실록』 등이 있다. ]]> Tue, 31 Jul 2018 13:38:16 +0000 20 <![CDATA[피의 일요일과 제1차 러시아 혁명 ]]> 글 고종환 아주대학교 외래교수  피의 일요일과 제1차 러시아 혁명  러시아 문학계에 톨스토이가 있고 음악계에 쇼스타코비치가 있다면 미술계에는 일리야 레핀(1844~1930, Iiya Yefimovich Repin)이 있었다. 19세기 러시아 사실주의의 거장이라는 수식어처럼, 일리야 레핀은 자신이 목도한 러시아의 모순을 대단히 사실적으로 그려냈다. 그의 그림엔 단순한 사실 이상의 ‘현실’이 있었다. alt 볼가 강의 배를 끄는 인부들(1870~1873, 일리야 레핀(Ilya Yefimovich Repin),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이 한 장의 그림은 왜 충격적인가?1873년 일리야 레핀은 한 점의 그림을 완성한다. 훗날 레핀의 상징과도 같아진 <불가 강의 배를 끄는 인부들>은 그가 20대 후반에 여행을 하다가 직접 목격한 광경을 바탕으로 그려졌다. 그림은 초췌한 얼굴을 한 11명의 인부들이 힘겹게 배를 끌어 뭍으로 이동시키는 모습을 보여준다.실제로 19세기 후반만 해도 러시아에서는 육지에 인접한 바다나 강에서 배를 이동시킬 때 사람들의 머리와 배에 끈을 묶고 배를 끌어 운반하는 방법이 일반적이었다. 이런 인간착취에 가까운 방법은 증기선이 발명된 뒤에도 오랫동안 이용되다 20세기 초반에 가서야 중지되었다.레핀은 러시아 민중들의 사실적인 모습을 화폭에 담아 차르(Tsar, 최고 통치자, 황제)가 다스리던 제정 러시아의 열악한 실상을 전 세계에 고발했다. 이를 위해 사용된 장치가 바로 큰 배 뒤로 보이는 연기다. 그림을 자세히 보면 배의 뒤쪽으로 희미한 연기가 것이 피어오르고 있는데, 이것은 증기선이 내뿜는 증기다. 즉, 증기선이 개발되어 운항되던 시대에도 제정 러시아는 가난한 인부들에게 혹독한 육체노동을 강요하며 배를 끌게 했던 것이다. 그림에서처럼 몸으로 큰 배를 끄는 사람들 대부분은 가난한 농노들과 노동자들이었다.  러시아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러시아 역사에서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초는 개혁과 반동개혁이 반복해 일어나던 시기였다. 개혁정책과 반동개혁정책으로 인해 1905년과 1917년 두 차례의 러시아 혁명이 발발하기도 했다. 20세기 초, 차르(황제)가 지배하던 제정 러시아는 심각한 사회문제를 안고 있었다. 특히 실업자의 증가와 함께 장시간 노동, 저임금으로 고생하던 농노 및 노동자들의 불만은 폭발 직전이었다. 이러한 사회적 불만에 더해 1904~1905년, 만주와 한국의 지배권을 놓고 일본과 벌인 제국주의 싸움, ‘러일전쟁’에서의 패배는 많은 러시아인들의 자존심에 큰 상처를 남겼고, 결국 1905년 제1차 러시아 혁명으로 비화됐다.19세기 말 국가 주도로 산업화가 추진되면서 전통적인 농업 국가였던 러시아에서도 노동계급이 새로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당시 재무대신 세르게이 비테(Sergei Witte)가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부설하고 탄광과 유전을 개발하는 등 의욕적으로 산업화를 추진한 데 힘입어 노동자계급의 수는 20세기 초반 약 300만 명에 이를 정도로 급속히 증가했다. 하지만 산업화가 시작되어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고 해도 농노는 물론 노동자들도 가난의 굴레를 벗어날 수는 없었다. 매일 열심히 일해도 가난을 면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알게 된 농노들과 노동자들의 불만이 커져갔고, 불만은 결국 러시아를 다스리는 차르를 향할 수밖에 없었다.러시아 전제정치의 근본적 변화는 불가능하다는 개혁가들의 예상과는 달리 20세기 초반 예기치 않게 혁명이 발생한다. 역사는 이를 ‘제1차 러시아 혁명’ 혹은 ‘1905년 혁명’이라고 불렀는데, 불을 당긴 것은 러일전쟁의 패배 분위기에서 터졌던 이른바 ‘피의 일요일 사건(1905년 1월 22일)’이었다. 오랜 시간 중노동과 열악한 임금으로 고통받던 사람들은 극심한 가난과 배고픔에 지친 나머지 황제에게 직접 탄원하기 위해 한겨울의 매서운 추위에도 불구하고 페테르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광장과 거리를 가득 메웠다. 이들이 한목소리로 외친 것은 8시간 노동과 최저임금제였다. 시위대는 차르의 초상화를 든 노동자들이 중심이 되어 황제가 있는 왕궁(겨울궁전이라 불린)으로 향했다. 왕궁 경비병들의 발포로 시위 첫날에만 3천 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왕궁 경비대의 무자비한 발포는 19세기 중반 이래 차르 정부의 반동개혁정치의 여파로 누적된 문제들과 연속적인 전쟁 패배(크림전쟁과 러일전쟁 등)로 고조되어있던 러시아인들의 불만에 기름을 부은 격이 됐다. 이어 전국의 도시에서는 노동자들의 동맹파업, 농노들의 폭동, 소수민족의 반란까지 일어났다. 페테르그라드에서 시작된 시위가 경비대의 무자비한 발포 이후 모스크바를 비롯한 전국 각지로 퍼지며 제1차 러시아혁명이 일어났다. 모스크바에서는 대규모 무장봉기로까지 발전했다. 차르였던 니콜라이 2세가 국민의 기본권 인정, 선거에 의한 제헌의회 창설 등을 약속하는 ‘10월 선언’을 발표했지만, 노동자들과 농노들의 투쟁은 그해 12월까지 이어졌다. 시위대의 수는 모스크바에서만 무려 5만 명을 넘어섰다.20세기 초반 제정 러시아를 위기로 몰고 갔던 제1차 러시아 혁명은 차르의 군대가 효과적인 진압 작전을 펼치고, 혁명세력들의 내부 분열이 겹치면서 같은 해 12월 19일 종언을 고한다. 제1차 러시아 혁명은 제정 러시아를 뒤집지는 못했지만 다음 해인 1906년 5월, 러시아 역사상 처음으로 간접선거에 의한 민선 의회인 ‘두마(Duma)’의 창설을 이끌어냈다.  고종환한국 프랑스문화학회의 재무이사이자, 아주대학교와 경상대학교 외래교수. 프랑스 문화와 예술, 서양연극사, 광고이미지 등을 강의하고 있다. 대표 저서로는 『한권으로 읽는 연극의역사』와 『오페라로 배우는 역사와 문화』·『글로벌 다문화교육』이 있다. ]]> Tue, 31 Jul 2018 13:59:54 +0000 20 <![CDATA[복날의 묘약 삼계탕 ]]> 글 윤덕노 음식문화평론가  복날의 묘약삼계탕  삼계탕은 우리나라 전통 보양식이다. 무더위가 찾아듦과 동시에 절로 그 시원한 맛을 찾게 되니, 여름철 삼복더위에 삼계탕 한 그릇 먹지 않고 지나가면 서운하다는 사람도 적지 않다. 더운 날 뜨거운 음식이라니. 이열치열이라고들 하지만 무더위에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삼계탕 국물을 마시며 “시원하다”는 감탄사를 내뱉는 일은 여전히 어색하다. 그런데 왜 하필 삼계탕이었을까? 언제부터 삼계탕은 여름철 대표 보양식이 되었을까?  부자에게만 허락된 특별식복날의 국민 보양식, 삼계탕. 복날이 아니더라도 언제든 사 먹을 수 있고, 남녀노소 누구나 부담 없이 즐길 수 있으니 국민 보양식이란 수식어가 어색하지 않다. 하지만 삼계탕 대중화의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1970년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삼계탕은 부자들만 먹을 수 있는 특별 보양식에 가까웠다. 그들은 주로 병을 앓고 난 뒤나 삼복더위에 몸이 쇠약해졌을 때 기력을 보충하기 위해 삼계탕을 먹었다.삼계탕이 이처럼 귀한 대접을 받은 이유는 닭보다도 ‘인삼’ 때문이었다. 지금은 인삼이 흔하지만, 과거 개성인삼과 고려인삼은 비싸고 드문 약재였다. 약으로나 먹을 뿐이지 음식에 함부로 넣을 수 있는 식재료가 아니었던 것이다. 당시 대다수의 서민들은 인삼을 넣지 않은 영계백숙으로 몸보신을 했다.삼계탕이 얼마나 귀한 음식이었는지는 기록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1924년, 중추원에서 한국인의 생활풍속을 조사한 자료집에 따르면 여름철 암탉의 배에 인삼을 넣어 우려낸 국물을 정력 약으로 마시는데 중산층 이상에서 마시는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19세기 말, 사상의학의 대가 이제마는 『동의수세보원』에서 ‘소음인의 치료에는 닭과 인삼이 효과가 있다’며 양기(陽氣)를 보충하는 치료 약으로 삼계탕을 처방했다고 기록하고 있다.삼계탕의 뿌리는 다시 18세기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조선 영조 대 궁중 화가 변상벽이 닭 그림을 그렸다. 부모 닭이 병아리를 거느린다는 뜻의 자웅장추(雌雄將雛) 그림이었다. 그림엔 시 한 수가 같이 적혀 있다.“흰털 검은 뼈로 홀로 무리 중에 우뚝하니, 기질은 비록 다르다 하나 5덕(德)이 남아 있다. 의가(醫家)에서 방법을 듣고 신묘한 약을 달여야겠는데, 아마 인삼과 백출과 함께해야 기이한 공훈을 세우겠지.”삼계탕을 ‘신묘한 약’이라 일컬으며 인삼과 백출을 함께 섞으면 기이한 효과가 난다고 적혀 있다. 그러니까 옛사람들에게 삼계탕은 신비한 힘을 가진 묘약이나 다름없었던 것이다.1970년, 양계산업과 인삼재배기술이 발달하면서 닭과 인삼이 비교적 저렴해진 뒤에야 누구나 삼계탕을 먹을 수 있었다.  복날 보양식의 필요충분조건단지 닭과 인삼이 귀하다는 이유로 삼계탕이 신비한 묘약이라 불렸던 건 아니었다. 삼계탕은 동양 철학과 의학에서 말하는 ‘양’의 기운이 풍부한 음식으로서 기력 보충에 제법 효과가 있었다.삼계탕의 기본 재료는 닭고기. 『주역』에서 닭은 양의 기운이 넘치는 새라고 나온다. 삼계탕을 끓일 때 쓰이는 닭은 그중에서도 어린 ‘영계’로, 명나라 의학서인 『본초강목』에서는 영계가 쇠약해진 양기를 되살린다고 서술하고 있다. 그 때문에 삼계탕을 먹으면 기운 보충뿐만 아니라 마른 사람도 몸에 살이 오르고 피부에 탄력이 생기며 아무리 추운 겨울 날씨에도 추운 줄을 모른다는 것.더군다나 인삼은 몸을 덥혀주는 양의 기운이 강한 약재다. 닭과 인삼이 어울렸으니 양기가 상승하는 것은 당연지사. 삼계탕이 보양식으로 사랑받는 이유였다.그런데 왜 하필 더운 여름, 복날의 보양식이었을까? 여기엔 다양한 해석이 있다. 복날은 세상이 양기로 가득 차 있지만, 내면에는 음의 기운이 일어나 양의 기운이 엎드려 숨어버리는 날로 ‘엎드릴 복(伏)’자를 써서 복날이라 하는 것인데, 이런 날에 삼계탕을 먹어 음기를 다스려야 한다는 것이다.매년 돌아오는 복날 이열치열을 이유로 습관처럼 먹었던 삼계탕. 알고 보면 삼계탕은 동양철학과 약식동원의 오묘한 원리가 녹아 있는 과학적인 음식인 셈이다.  윤덕노음식문화평론가. 1984년 매일경제신문사에 입사해 20여 년간 기자 생활을 하면서 특파원 활동·출장·연수 등으로 미국과 중국을 비롯한 다양한 나라에 머물렀다. 음식에 관심이 많아 관련 자료를 수집해온 결과, 음식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주요 저서로는 『음식잡학사전』·『신의 선물 밥』·『붕어빵에도 족보가 있다』 등이 있다. ]]> Tue, 31 Jul 2018 14:08:19 +0000 20 <![CDATA[도심 속 둘레길 여행 여행에 숨은 역사]]> 글·사진 김초록 여행칼럼니스트도심 속둘레길 여행- 아차산·용마산·망우산 -      긴 여름이 지나고 성큼 가을이 다가왔다.가을은 산이 아름다운 계절이다.서울과 경기도 구리에 걸쳐 넓게 뻗은 아차산은역사와 자연이 함께하는 에너지 충전소다.산맥의 기(氣)가 좋아 인근 주민들은 아차산 덕분에큰 복을 누린다고 말한다.서울 둘레길 코스로 한나절이면 산을 둘러볼 수있으니 아차산의 좋은 기운으로여름내 지친 몸과 마음을 치유해보자.  alt빼어난 전망을 자랑하는 아차산삼국의 역사가 살아 숨 쉬는 곳한강 줄기가 한눈에 보이는 해발 285m의 야트막한 산은 입지가 빼어나 예부터 군사 주둔지로 중요한 구실을 했다. 삼국시대에는 한강 유역 지배권을 놓고 고구려·백제·신라가 치열하게 맞부딪쳤던 역사의 현장이었다. 구리 시내 한복판에 서있는 광개토대왕 동상과 비석 모형이 아차산 일대의 파란 많은 역사를 증언한다. 광개토대왕(재위 기간 391년~412년)은 탄탄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영토를 확장하며 고구려의 국력을 동아시아 일대에 크게 떨쳤다. 신라를 도와 왜적의 침입에 맞서기도 했다. 동상은 높이 4.05m, 너비 2.7m의 청동입상으로 관모를 쓰고 있으며 오른손에는 태양을 상징하는 세발까마귀, 즉 삼족오가 새겨진 알을 들고 있다. 높이 6.39m, 너비 2m에 달하는 광개토대왕비엔 힘찬 필체의 44행 1,775자가 음각돼 있는데, 이는 동양 최대의 크기를 자랑한다.산행 코스는 다양하지만, 이번에는 한강변 워커힐호텔에서 구리시로 넘어가는 검문소 주변 우미내 마을 주차장에서 시작하는 것을 선택했다. 여기서 정상까지는 약 2시간 정도가 소요된다. 산들머리 한쪽에 고구려 대장간 마을이 있다. 이곳엔 고구려 보루와 토기, 철기와 같은 유물들이 전시돼 있다. 고구려의 역사와 문화를 체계적으로 관람할 수 있는 일종의 박물관인 셈이다. 학생들에게는 더 없이 좋은 학습공간이다. 각종 영화와 드라마 촬영지로도 유명하니, 어쩐지 풍경이 낯설지 않다.이곳에서 산길을 따라 10여 분쯤 오르면 온달장군과 평강공주의 애틋한 사랑이 어린 온달샘(약수터)이 나온다. 약수터와 멀지 않은 곳에 온달이 가지고 놀았다는 공깃돌 바위가 있다. 다시 조금 더 오르면 아차산성과 정상으로 이어지는 능선길이 모습을 드러낸다. 돌과 흙으로 단단하게 쌓은 아차산성(사적 제234호)은 한강을 사이에 두고 맞은편 남쪽에 있는 풍납토성과 함께 백제의 운명을 좌우했던 중요한 군사시설이었다. 475년, 고구려 장수왕이 백제를 정벌할 때 백제 개로왕을 사로잡은 곳으로 관련 유물 1,000여 점이 출토되기도 했다. 산성은 멀리서 보면 작은 언덕 정도로 느껴지지만 실제로는 길이 1㎞, 높이 10m의 제법 규모가 있는 시설이다.아차산성은 많은 이름을 가지고 있다. 아단성(阿旦城)·아차성(峨嵯城)·장한성(長漢城)·광장성(廣壯城) 등. 이들 이름과 능선을 따라 들어선 크고 작은 고분들은 그 당시 백제·신라·고구려가 한강을 중심으로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다는 사실을 짐작하게 한다.아차산성에서 정상을 향해 조금 더 올라가면 팔각정(전망대)이 있다. 이곳에서는 서울 강·남북은 물론 한강 줄기와 중랑천, 왕숙천이 훤히 내려다보인다. 팔각정 뒤 해돋이 광장 옆으로는 산길이 뚫려 있다. 여기에서 정상까지는 15분 정도가 걸린다. 팔각정에서 능선 아래쪽 길을 더듬어 내려오면 대성암을 발견할 수 있다. 본래 이름은 범굴사라고 한다. 대웅전 뒤편, 암벽을 다듬어 만든 암각문에는 당시 절의 재산목록과 시주한 사람들의 명단, 논과 밭의 단위가 그대로 적혀 있어 암자의 역사를 헤아리게 한다. 대성암 동쪽 바위산 화강암 위에 선 삼층석탑은백제 양식으로 만들어진 고려시대 석탑이다. 의상대사가 수련했다고 전해지는 천연 암굴도 가까이에 있다.아차산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능선 일대에 남아 있는 보루다. 475년, 고구려가 한성백제를 멸망시킨 후 한강 유역으로 진출하면서 남한지역을 공략하기 위해 쌓은 군사시설이다. 1990년대부터 아차산에선 20여 개의 고구려 보루가 발견되었고 이 중 17개가 사적으로 지정됐다. alt광개토대왕 동상alt아차산 입구에 있는 고구려 대장간 마을 한강을 따라 나란한 산아차산 건너편의 용마산은 서울 중랑구 면목동에 속한다. 산 능선이 망우리 공원(묘지)과 중곡동을 거쳐 어린이대공원 후문까지 이어져 있어 종주가 가능하다. 갖가지 수목들과 산허리를 따라 늘어선 암벽이 예사롭지 않다. 곳곳에 체육시설이 있어 운동을 겸해 산을 오르는 사람도 많다. 일출명소로도 유명한데, 새벽 산행을 하는 사람들이 낮보다 더 많을 정도다. 깔딱고개에서 보이는 조망이 시원하다. 아득하게 펼쳐진 서울 시내와 북한산-도봉산-수락산-불암산으로 이어지는 스카이라인이 한눈에 잡힌다. 아차산을 지나 용마산까지 향하는 등산로는 대부분 경사가 완만하므로 가족 산행과 야간산행에도 안성맞춤이다. 해가 질 무렵 간단한 음료와 먹을거리를 배낭에 챙겨 넣고 랜턴 불빛을 따라 산을 오르다 보면, 해맞이 광장 또는 제1·2 헬기장에서 아름다운 서울의 야경이 반긴다.용마산은 망우산과도 이어져 있다. 해발 282m의 망우산은 중랑구 망우동과 면목동, 경기도 구리시에 걸쳐 있다. 아차산, 용마산에 비해 경치도 뒤지지 않는다. 등산로에 설치된 전망대 너머로 서울의 동쪽을 향해 굽이쳐 흐르는 한강과 시원스레 펼쳐진 남산·불암산·수락산·도봉산·북한산·경기도 남양주 일원이 보인다.망우산은 망우리 공원(후에 ‘사색의 길’로 바뀌었다)의 망우리 공동묘지로 더 잘 알려져 있다. 1933년 일제에 의해 공동묘지가 되어버렸던 이곳은 공원화 작업을 통해 현재는 녹지공간과 쉼터로 거듭났다. 1973년 2만 8,500여 기의 분묘가 가득 찰 정도였으나 이후 이장과 납골을 장려하면서 지금은 7,900여 기의 묘만 남아있다고 한다. 한국 내셔널 트러스트에서는 망우리 공원을 ‘꼭 지켜야 할 자연문화유산 6곳’ 중 하나로 선정하기도 했다. 무섭고 으스스했던 공동묘지가 우리 근현대 역사문화의 산실로 다시 태어났다.공원을 따라가는 순환길(둘레길) 양쪽으로 크고 작은 묘들이 보인다. 한 시대를 살다간 사람들의 사연이 궁금하다. 소파 방정환·만해 한용운·서동일·오세창·문일평·오기만·서광조·서동일·오재영·유상규 등 독립지사와 함께 소설가 계용묵·화가 이중섭·작곡가 채동선·순조의 맏딸 명온공주·가수 차중락·야구선수 이영민·시인 박인환·의사 지석영과 같은 낯익은 인물들의 묘소가 있다. 각 묘소 앞에는 망자의 일대기를 엿볼 수 있는 연보비가 세워져 있다. alt아차산 능선에서 바라본 용마산 봉우리alt아차산 해맞이 광장 망우리 공원에 잠든 독립운동가소파(小波) 방정환(1899~1931)은 ‘어린이’라는 용어를 처음 만들어 널리 쓰이게 한 위인이다. 그는 서울 종로구 당주동에서 태어나 보성전문학교를 나왔다. 현재 당주동 길가에는 ‘소파 방정환 선생 나신 곳’이라고 적힌 표지석이 있다. 방정환은 33세의 짧은 생을 보내며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 우리나라 최초의 어린이 문화운동단체 ‘색동회’를 창립하고, 1923년 5월 1일을 어린이날로 지정해 행사를 치렀다. 색동회의 창립은 훗날 어린이날 제정의 기폭제가 됐다. 그가 어린이 운동에 발 벗고 나섰던 때는 일제의 압박이 거셌던 시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정환은 친구들과 뜻을 모아 ‘경성청년구락부’모임을 만들고 독립의 희망을 싹틔웠다.방정환의 묘, 비석 앞면에는 ‘동심여선(童心如仙)’, 뒷면엔 ‘동무들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다. 연보비(年譜碑)에는 그의 ‘어린이날의 약속’ 중 일부가 새겨졌다.어린이의 생활을 항상 즐겁게 해 주십시오. 어린이는 항상 칭찬해가며 기르십시오. 어린이의 몸을 자주 주의해 살펴 주십시오. 어린이에게 책을 늘 읽히십시오. 희망을 위하여, 내일을 위하여 다 같이 어린이를 잘 키웁시다.위창(葦滄) 오세창(1864~1953)은 3·1운동을 이끈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으로 당대 최고의 서예가로도 이름을 날렸다. 그는 백범 김구 선생의 장례 위원장을 맡는 등 존경받는 국가 원로 지도자로 활동했다.호암(湖岩) 문일평(1888~1939)은 일제강점기 사학자이자 언론인이며 교육자였다. 그는 역사 속에서 민족정신을 찾아내어 이를 통해 독립을 이룰 수 있다고 믿었다. 1920년대 후반부터는 조선일보에 근무하면서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대중적으로 소개하는 글을 썼다.태허(太虛) 유상규(1897~1936)는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도산 안창호의 비서로 일했다. 경성의학전문학교 부속 병원 의사이자 독립운동가로서 많은 업적을 남기기도 했다. 그의 묘 연보비에는 『도산 안창호』를 쓴 춘원 이광수의 글 일부가 있다.도산의 우정을 그대로 배운 사람이 있었으니 그것은 유상규였다. 유상규는 상하이에서 도산을 위해 도산의 아들 모양으로 헌신적으로 힘을 썼다. 그는 귀국해 경성 의학 전문학교 강사로 외과에 있는 동안과 사퇴 후의 모든 시간을 남을 돕기에 바쳤다.우미내 마을에서 구리 시내 방면으로 46번 국도를 타고 교문사거리를 지나면 9개의 능이 모셔진 동구릉(사적 제193호)이 나온다. 조선왕조를 세운 태조의 건원릉을 비롯해 현릉·목릉·휘릉·숭릉·혜릉·원릉·유릉·경릉이 모두 모여 있으니 역사의 부침을 한눈에 볼 수 있다. 묘역 주변은 온통 나무로 둘러싸여 제법 아늑한 느낌을 준다.능과 능을 이어주는 오솔길은 새소리를 들으며 걷기에그만이다. 태조의 건원릉은 조선왕릉 중 유일하게 봉분이 억새풀로 덮여 있다.동구릉에서 가까운 곳에 구리한강시민공원이 있다. 어느새 가을을 알리는 코스모스가 장관을 이룬다. 한강을 따라 자전거도로와 산책로가 나 있고, 야구장·잔디광장·정자·실개천·소나무 동산 등이 어우러져 있으니 가족 나들이 코스로 제격이다. alt소파 방정환 묘소alt걷기 좋은 동구릉 산책로alt코스모스가 피어있는 구리한강시민공원 ]]> Thu, 30 Aug 2018 19:46:09 +0000 21 <![CDATA[대한민국 최초 국군의 탄생 한국광복군 한눈에 보는 역사]]> alt]]> Thu, 30 Aug 2018 17:31:12 +0000 21 <![CDATA[무장독립투쟁을 견지한 군인 대한민국 공군창설의 주역 최용덕 이달의 독립운동가]]> 글 학예실무장독립투쟁을 견지한 군인 대한민국공군창설의 주역 최용덕 무장독립투쟁을 벌이며 일본과 맞서 싸우던 시대.최용덕은 일찍이 공군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전투기 조종사가 되어 조국의 하늘을 지켰다. 마침내 대한민국 공군이 창설되면서그는 우리 공군의 상징이 되었다. alt 독립운동에 참여하여 무장투쟁을 준비하다1898년 최용덕은 군의관이었던 최익환과 태안이씨 사이에서 3남으로 태어났다. 1910년 유학을 위해 베이징으로 건너가 근대학문을 수학하고, 난위엔 육군군관학교에 입학해 체계적인 군사훈련을 받았다. 1916년 졸업 후 돤치루이가 창설한 참전군 제2사단에서 근무하였는데, 이러한 경험은 최용덕이 무장투쟁을 전개하는 동안 큰 자산이 되었다.1919년 3·1운동 소식을 접한 최용덕은 독립운동에 뜻을 품고 대한독립청년단에 참여하여 베이징 일대 한인들을 규합하였다. 또한 의열단에서 1923년 김상옥 의사 의거를 위한 폭탄 확보와 운반에 조력하는 등 주요한 역할을 맡았다. 1924년에는 북경한교동지회를 조직하고 기관지 『앞잡이』를 발간하는 등 독립운동의 외연 확장을 위해 노력했다.공군으로 활약하며 무장투쟁을 이끌다최용덕은 대한독립청년단에서 함께 활동하던 서왈보의 영향으로 공군의 필요성을 인지하고, 육군군관학교 졸업 후 바오딩 항공학교에 입학하여 비행사가 되었다. 1924년에는 우페이푸 군벌의 전투기 조종사로 활약하며 일제에 맞서 싸웠다. 또 1934년 신한독립당 창단에 참여하고 중앙집행위원으로 활동하며 지속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했다.한국광복군 창설 이후, 최용덕은 1942년과 1943년 각각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총무처장과 참모처장을 맡아 한국광복군의 운영과 실무를 책임졌다. 전투기 조종사 인력을 양성하고 비행기 구입 운동을 추진하는 등 공군 창설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면서 광복 후 대한민국 공군 창설의 주역이 되었다. 정부는 최용덕의 공적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alt공군 참모총장 시절 최용덕의 모습alt중국 공군으로 활약하고 있는 최용덕을 소개하는 기사 (「동아일보」, 1927.10.02.) alt『화랑도 통계 조선군사보감』에 실린 최용덕 친필 제자(題字)(1948.08.08.)alt공군사관학교 교장시절 기념사진 ]]> Fri, 31 Aug 2018 00:16:20 +0000 21 <![CDATA[아주 오래된 사진의 기억 우리가 몰랐던 이야기]]>     글 신현배 역사칼럼니스트아주 오래된 사진의 기억   1860년경 사신 이의익은 베이징에 있는사진관을 방문했다. 러시아 사람이 운영하는 사진관이었는데, 그는 이곳에서 자신의초상사진을 찍은 뒤 사진을 가지고조선으로 돌아왔다. 우리나라 최초의초상사진이었다. alt일제강점기 큰 인기를 끈 안중근 사진 엽서에는 하얼빈 의거 직후 붙잡힌 안중근의 사진이 많이 쓰였다     조선을 찍기 시작하다우리나라에 본격적으로 사진 기술이 들어와 보급되기 시작한 때는 1880년대다. 그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이의익의 경우처럼 사신과 역관 해외 시찰단 등이 외국을 갔다가 찍어온 초상사진이 대부분이었다. 1871년 신미양요가 있을 당시 미국 해병대와 종군 사진반이 강화도에 상륙해 전투 장면을 찍은 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기록사진이었다.1880년대 이후가 되어서야 개화기 선구자들에 의해 조선에 사진관이 들어섰다. 그 시기 사진관은 ‘촬영국’이란 이름으로 불렸는데 1884년 2월 14일 자 「한성순보」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지난 여름 저동에 사는 우후(도병마사 밑의 무관직)를 지낸 김용원이 일본인 사진사 혼다 슈노스케를 초빙해서 촬영국을 설치했다. 금년 봄에는 마동에 사는 외무아문 주사를 지낸 지운영 또한 촬영국을 설치했다. 그는 일본에 가서 사진술을 배워 왔으며 그 기술이 정교했다.황철이란 사람 또한 이 시기 사진사로 활동했다. 황철은 기사에 언급된 김용원·지운영과 함께 초상사진의 시대를 열었다. 그는 중국에서 사진술을 배우고 돌아와 1883년 서울 대안동 자신의 집 사랑채 겸 서재에 촬영국을 차리고 사진을 찍었다.그러나 사진관은 1884년 갑신정변 이후 모두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수구 세력들이 사진관을 없애고 사진 촬영을 금했기 때문이다. 동시에 이들은 사진과 관련해 터무니없는 소문을 퍼뜨렸다. 이를테면 ‘사진기는 영혼을 뺏는 기계다’, ‘부부가 사진을 찍으면 반드시 사별한다’, ‘어린아이를 납치하여 삶아 먹은 뒤, 그 눈알을 뽑아 사진기에 박아 쓴다’ 따위의 괴담이었다.1894년 청일전쟁 이후 우리나라에 다시 하나둘씩 사진관이 생겨나기 시작했으나 대다수가 일본인이 운영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처음에 일본인만을 대상으로 하다가 곧 우리나라 왕실이나 귀족 등으로 고객층을 넓혀갔다.대한제국 사진사 김규진1900년대 들어 우리나라 사람도 사진관을 열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김규진이다. 김규진은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의 서화 스승으로, 궁내부 시종원 시종장을 지냈던 인물이다. 그는 일본에서 사진술을 배운 뒤, 대한제국 황실의 전속 사진사가 되었다. 그리고 1907년 8월 17일 석정동(현 서울 소공동) 자신의 집 사랑채에 ‘천연당’이라는 사진관을 차렸다. 1907년 8월 20일에는 「대한매일신보」에 ‘석정동에 사진관을 개업하여 크고 작은 각종 사진을 싼값에 촬영해 주니 많은 이용 바란다’는 내용의 광고도 실었다. 천연당은 문을 열자마자 큰 인기를 끌었다. 개업 이듬해 설을 전후해서는 1,000여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사진을 찍고 갔다.김규진은 아이디어가 풍부한 사람이었다. 여성 손님들을 끌고자 최초로 여성 전용 촬영장을 만들었고, 촬영도 여성 사진사에게 맡겼다. 그래서 천연당은 기생들이 가장 많이 찾는 사진관이기도 했다. 1913년에는 인공조명 시설을 만들어 밤낮, 또는 날씨를 가리지 않고 언제든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했다. 또 새로운 인화법을 도입해 보다 높은 품질의 사진을 뽑아냈다. 무엇보다 김규진은 사진사로서 자신의 직업에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사진을 대지에 붙여 고객에게 줄 때마다 ‘대한제국 사진사 김규진’이란 문구를 반드시 적어 주었다고 한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연당은 경영난을 겪었다. 고객들이 외상으로 사진을 찍고 그 값을 치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김규진은 「대한매일신보」에 ‘제발 사진 대금을 보내 달라’는 광고를 내기도 했다. 결국 천연당은 경영난을 이겨내지 못하고 문을 닫아야만 했다.천연당을 시작으로 우리나라 사람들이 운영하는 사진관이 많이 생겨났다. 사진관을 이용하는 고객도 늘어났고, 사진사는 잘 나가는 신종직업으로 인기를 끌었다. 사람들에게 사진은 더 이상 영혼을 빼앗는 기계가 아니었다.사진엽서 속 ‘충신 안중근’사진이 대중화됨에 따라 사진엽서도 불티나게 팔렸다. 그 중 가장 인기가 많았던 것이 ‘충신 안중근’의 사진엽서다. 엽서에는 안중근 의사가 쇠줄에 묶인 채 여순 감옥의 문 앞에 서 있거나 앉아 있는 사진이 실려 있었다. 안중근 사진엽서는 안중근을 숭모하는 우리나라 사람들 사이에서 유행처럼 번져갔다. 얼마나 인기가 많았는지 일제가 ‘치안 방해죄’를 이유로 안중근 사진엽서의 판매를 금지할 정도였다.사실 안중근 사진엽서를 처음 만들어 판 건 일본인 사진사들이었다. 이들은 안중근이 일본의 거물 정치가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이후, 한국인과 일본인 모두 안중근의 얼굴을 궁금해 하고 있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그리하여 안중근의 사진이 담긴 엽서를 판다면 상업적으로 크게 성공하리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일본인 사진사들의 상술에 의해 ‘이토 암살자 안중근’이란 문구와 함께 판매되던 사진엽서는 ‘충신 안중근’이란 이름으로 바꿔 제작되어 국내외 한국인들에게 닿았고, 오히려 안중근에 대한 존경과 독립의지를 불어 넣는 계기가 되었다. 그렇게 안중근의 사진엽서 한 장은 사람들의 마음을 뜨겁게 울렸다. 신현배역사와 전통문화에 대해 관심이 많은 역사칼럼니스트. 저서로는 역사 이야기 『엉뚱 별난 한국사』, 『엉뚱 별난 세계사』, 『2000년 서울 이야기』, 『세계사로 배우는 법 이야기』, 전통문화 이야기 『소중한 우리 문화 지식 여행』 시리즈 등이 있다. ]]> Thu, 30 Aug 2018 23:01:13 +0000 21 <![CDATA[충서(忠恕)의 도(道) 역사에서 찾은 오늘]]> 글 이성주 역사칼럼니스트충서(忠恕)의 도(道) “그는 일본인을 거의 영국인만큼이나 싫어하였다. 그는 자신이 직접 상하이로 가서 '죽음의 화물' 선적을 감독하였다. 그는 돈 한 푼 받지 않고 오로지 동정심에 한국을 도와주었다. 한국인 테러리스트들은 몇 년 동안 그의 배로 돌아다녔으며, 위험할 때는 그의 집에 숨었다.”(독립운동가 김산의 회고록 『아리랑』 中) 한국 독립운동가들의 수호자이자 숨은 조력자였던 그, 조지 루이스 쇼의 이야기다. 푸른 눈의 독립운동가▲독립운동가·사업가 조지 루이스 쇼(George Lewis Shaw) ▲1880년 중국 푸젠성 푸저우(福州) 출생 ▲아버지의 뒤를 이어 무역업 종사 ▲1919년 조지 루이스 쇼의 이륭양행 건물 2층에 대한민국임시정부 교통국 지부 설치. 본격적으로 한국 독립운동에 투신 ▲1919년 11월 의친왕의 망명 계획 지원 ▲1920년 7월 일본에 의해 체포. 4개월 만에 보석으로 석방 ▲1921년 1월 임시정부로부터 공로훈장(금색공로장) 수훈 ▲1943년 11월 사망조지 루이스 쇼는 아일랜드계 영국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내 역시 일본인이었다. 가족관계만 보자면 어째서 그가 한국 독립운동을 지원한 것인지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쇼는 누구보다 독립운동에 열정적이었다. 자신의 회사 이륭양행(怡隆洋行) 2층을 기꺼이 임시정부 비밀 정보국으로 내주었고, 백범 김구 선생을 비롯해 수많은 독립지사들의 탈출을 도왔다. 독립운동에 필요한 군자금과 폭탄, 정보 등을 전달하기도 했다. 우리에게 쇼는 푸른 눈의 독립지사였지만 일본에게는 달랐다. 그야말로 눈엣가시였다. 일본은 계략을 세워 쇼를 체포한다. 그러나 영국인이었던 그는 4개월 만에 석방되었다. 쇼는 상하이로 돌아와 조선의 독립을 위해 희생할 수 있어 자랑스럽다며 한국인 독립운동가 못지않은 포부를 보였다.일본은 쇼의 독립운동에 갖은 방해 공작을 펼쳤다. 이륭양행의 경쟁사를 지원하거나 일본인인 쇼의 처남을 이용해 이륭양행의 인수를 시도한 적도 있었다. 이러한 압박에도 불구하고 쇼는 굴하지 않았다. 회사경영과 독립운동 지원도 계속되었다. 1938년 독립운동가이자 사업가로서 끝까지 이륭양행을 지키고자 했던 쇼의 노력은 경영난을 이기지 못하고 회사의 매각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1943년, 63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다.공자의 진리를 실천했던 이방인한국과는 아무런 인연도 없었던 쇼가 한국의 독립을 위해 발 벗고 나선 이유는 무엇일까? 답은 의외로 단순했다. 아일랜드계 영국인이라는 ‘출신’ 때문이었다. 12세기 아일랜드는 영국의 침략으로 속국이 되었고, 영국의 지배는 700년간 이어졌다. 1919년 시작된 독립전쟁은 1922년 남부 26개 주가 북아일랜드 공화국으로 독립하면서 끝을 맺었다. 쇼는 외세의 침탈과 지배가 주는 ‘아픔’을 알고 있었다. 동시에 그는 공자가 전하고자 했던 진리를 가장 잘 실천한 인물이기도 했다. 『논어』 이인(里人) 편에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삼(參)아! 나의 도(道)는 한 가지 이치로 만 가지 일을 꿰뚫고 있다.” 이에 증자(曾子)는, “예”라고 대답을 한다. 공자가 나가자, 제자들이 증자에게 묻는다. “선생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신 겁니까?”증자가 대답하였다. “선생님의 도(道)는 충(忠)과 서(恕)일 뿐이다.”여기서 충(忠)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충성의 개념이 아닌 ‘자기에게 진실을 다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서(恕)는 ‘헤아려 동정하다’는 의미다. 즉 공자가 말하는 ‘충과 서의 도’는 “자기가 싫은 것을 남에게 시키지 말라”는 한 마디로 정리된다. 마찬가지로 『논어』에서 언급되는 ‘능근취비(能近取譬)’는 공자 사상의 핵심으로서 자신의 처지를 통해 타인의 처지를 유추해 낸다는 뜻과 일맥상통한다. 쇼는 제 나라의 처지를 통해 타국의 아픔에 공감했다. 고향에서 일어났던 일이 동양의 작은 나라에서 똑같이 일어나고 있는 형국을 보며 그는 자신의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자신이 싫은 것은 남도 싫어할 것을 알고 있었다. 조국을 잃는 일은 누구에게나 절망적이었다.때때로 현대사회에서 유교 문화는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유교의 근간인 공자 사상은 되새겨볼 만 하다. 그것은 어렵고 딱딱한 학문이 아니다. 나의 처지를 생각해 다른 사람의 처지를 고민하고, 내가 하기 싫은 일을 남에게 강요하지 않는 것. 이 단순하고도 당연한 ‘진리’를 말하고자 했을 뿐이다. 말로는 간단해 보이지만 실천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90여 년 전, 푸른 눈동자를 가진 이방인은 공자의 진리를 제 삶으로서 실천해 보였다. 이성주시나리오 작가 겸 역사칼럼니스트. 대중과 함께 호흡하는 글쓰기를 목표로 『조선의 민낯』, 『왕들의 부부싸움』과 같은 역사서를 출간한 바 있다. 최근에는 국제정치와 관련된 연구 및 집필에 열중하고 있다. 『전쟁으로 보는 국제정치』 시리즈 1, 2, 3권을 출간 중이다. ]]> Thu, 30 Aug 2018 22:39:23 +0000 21 <![CDATA[일상의 발견 기념관 산책]]> 일상의 발견아직도 덥다는 볼멘소리를 하며넝쿨 그늘 아래 앉았습니다.목덜미에 맺힌 땀을 손으로 닦아내고고단한 한숨을 몰아쉽니다.분홍으로 물든 무궁화와 대롱대롱 매달린 조롱박그 틈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가느다란 볕옅지만 제법 선선함을 머금은 바람잎사귀가 저들끼리 부딪치는 소리마치 꿈처럼 아득하게 빛나는 고요입니다.매일 스치던 풍경인데새삼스러울 일 없는 익숙한 순간인데왜 이제야 알았을까요.유난했던 무더위의 끝자락에서그렇게 가을을 발견합니다.]]> Thu, 30 Aug 2018 16:58:06 +0000 21 <![CDATA[대륙에서 조국으로! 한국광복군의 진군 다시 만난 그날]]> 글 권경률 역사칼럼니스트대륙에서 조국으로! 한국광복군의 진군 매월 대한민국의 광복과 관련된 핵심사건을 선정하여그 치열했던 역사의 순간을 재구성하고자 한다.다시 만난 그날, 이번 달의 주제는 ‘한국광복군’이다.그들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정규군대로서 조국을 되찾기 위해중국에서 고군분투했다. 일본군으로 끌려갔던 학도병들 또한광복군으로 거듭나며 또 다른 투쟁의 시작을 알렸다. alt한국광복군총사령부 성립전례식의 개회를 선포하는 김구alt한국광복군총사령부 성립전례식 기념사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숙원1940년 9월 17일. 가릉빈관은 이른 아침부터 뜨거운 열기에 휩싸였다. 중국 국민당정부의 전시 수도 충칭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한국광복군총사령부 성립전례식’을 거행하는 날이었다. 식은 일본군의 공습을 피해 오전 7시에 열렸는데, 이른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대성황을 이루었다. 임시정부 인사들은 물론 중국기관 요인들·각국 외교 사절들·언론사 취재진을 포함해 약 200여 명이 참석했다.“대한민국임시정부는 원년에 정부가 공포한 군사조직법에 의거하여 중화민국 총통 장개석 원수의 특별 허락으로 중화민국 영토 내에서 광복군을 조직하고 대한민국 22년 9월 17일 한국광복군총사령부를 창립함을 선언한다.”이틀 전인 9월 15일, 김구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 겸 한국광복군창설위원회 위원장 자격으로 위와 같은 내용의 ‘광복군 선언문’을 발표했다. 임시정부의 숙원이었던 국군 창설의 기치를 본격적으로 든 것이다. 전례식은 한국광복군의 공식 출범을 뜻했다. ‘광복조국(光復祖國)’의 네 글자가 새겨진 광복군 기가 식장에 등장했다. 단상에 올라선 총사령관 지청천 장군이 말했다.“중국 곳곳에 산재한 우리 열혈청년들이 광복군이 성립된다는 소식을 듣고 바람에 구름 밀리듯이 일제히 몰려들고 있소. 조국과 민족의 해방 여부가 광복군이 목적을 관철하는 데 달렸으니 동지 동포는 인력·정력·물력을 군으로 집중하여 주시오.”지청천은 일제강점기 독립전쟁의 전설적인 인물이었다. 일본육군사관학교를 나와 1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에 복무했으나,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서간도로 탈출해 독립전쟁을 이끌었다. 1920년대 서로군정서, 1930년대에는 한국독립군을 지휘했으며, 북만주 대전자령 등지에서 중국 항일군과 연합해 일본군에 대승을 거두기도 했다. 지청천은 한국광복군 창설에도 크게 기여했다. 1939년 10월, 대한민국임시정부 군무장에 선출되면서 광복군 조직을 위한 계획 수립에 나섰고, 계획서는 중국 총통인 장개석에게 전달됐다. 광복군이 대륙에서 활동하기 위해서는 중국 정부의 승인과 협조가 필수적이었다. 장개석은 중국군의 대일 항전에 동참한다는 조건을 내걸며 한국광복군을 승인했다.이후 한국광복군 창설에 속도가 붙었다. 1940년 8월엔 총사령부도 구성되었다. 총사령관 지청천·참모장 이범석·부관처장 황학수·참모 김학규 등 독립전쟁의 주역들이 망라되었다. 그러나 전례식 당일 단상에 선 지청천의 마음은 무거웠다. 한국광복군의 조직이라고는 달랑 총사령부뿐이었고, 먼 길을 가는데 앞서 중국이 발목을 붙잡았기 때문이다. 중국군사위원회는 각지 군사 장관들에게 광복군 활동을 단속하란 지시를 내렸다. 중국 국민당 군부는 한국광복군을 자신들의 지휘 아래 두려고 했다.이 문제를 풀고 독자적인 작전권을 인정받고자 임시정부 주석 김구와 지청천은 교섭에 나섰다. 지청천은 장개석의 일본육사 1년 후배로서 친분이 있었다. 하지만 1914년 봄, 김원봉 휘하의 조선의용대 주력부대가 화북으로 건너가 중국 공산당 팔로군에 합류하면서 상황은 악화되었다. 그간 조선의용대와 함께 한중연합 작전을 펼쳐온 중국 국민당 본부는 충격을 받았고, 한국광복군에게 그 불똥이 튀었다. 장개석은 한국광복군을 중국군사위원회에 귀속시켰다. 여기에 9개 행동규칙이 설정됨에 따라 자체 군사 활동 및 작전지휘가 어려워졌다. alt한국광복군 배지(왼쪽부터 총사령부·제2지대·제3지대 순)alt한국청년전지공작대가 광복군에 합류하면서 편성된 제5지대(1941.01.) 일본군 학도병, 한국광복군이 되다광복군의 선결과제는 초모(招募), 즉 병력을 모집하는 일이었다. 1940년 11월 한국광복군 총사령부는 섬서성 시안으로 옮겨갔는데, 이곳은 화북의 일본군과 대치하는 최전방 기지였다. 당시 화북 지역에 거주하는 한국인은 약 20만 명. 시안 총사령부는 이들을 대상으로 모집 활동을 펼치기로 했다.지청천은 중국과의 교섭을 위해 중경에 남아있었으므로 황학수가 시안에서 총사령관 대리를 맡았다. 그는 대한제국 군인 출신의 노장이었다. 이미 전년부터 군사특파원으로 파견되어 시안에 거점을 마련한 상태였다. 황학수는 광복군 제1지대·제2지대·제3지대를 편성하고 초모활동에 주력했다. 각지에 징모분처(徵募分處)를 운영하며 병력을 채워갔다. 기존에 있던 한국인 군사단체를 설득하여 광복군으로 끌어들이는 일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1941년 1월 무정부주의 계열의 한국청년전지공작대가 합류하였다. 이들 200여 명의 인원이 들어오면서 한국광복군에는 제5지대가 새로 편성되었다. 1942년 5월에는 조선의용대 본부병력이 제1지대로 편입됐다. 조선의용대의 좌익 주력부대는 화북으로 갔지만 일부 인원은 남아있었던 것이다.시안 총사령부는 1942년 9월에 충칭으로 돌아왔다. 맨주먹으로 시작했으나 금세 완전한 군대 조직을 갖춰나갔다. 이제 전황의 변화를 반영해 광복군을 재정비할 필요가 있었다.1941년 12월 7일 일본이 진주만을 공습하면서 태평양 전쟁이 발발했다. 미국의 참전에 따라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2월 10일 대일선전포고를 했다.“한국 전체 인민은 이미 반침략 전선에 참가하여 1개 전투 단위가 되어있으며 축심국(軸心國 : 일본·독일·이탈리아 등)에 대하여 선전(宣戰)한다. 왜구를 한국과 중국, 서태평양에서 완전 구축(驅逐)하기 위하여 최후 승리까지 혈전한다.”미국 태평양 함대를 궤멸시킨 일제는 아시아태평양 전역을 파죽지세로 공격했다. 그러나 미국은 1942년 6월 미드웨이해전에서 일본 항공모함과 공습부대를 격파하며 대대적인 반격에 나섰다. 전세역전에 고무된 임시정부도 공세로 전환하였다.한국광복군은 일본군을 흔드는 공격적인 초모에 들어갔다. 중국에 파견된 일본 군대와 그 점령지에는 한국인들도 적지 않았다. 그들을 회유하여 광복군에 가담하도록 하면 적군의 사기가 떨어짐은 물론 아군의 전력도 증강시킬 수 있었다. 특히 1943년부터는 안휘성 부양에서 징모분처를 운영한 제3지대 김학규 장군의 활약이 눈부셨다. 일제는 전황이 불리해지자 1944년 1월과 2월, 약 두 달에 걸쳐 한국인 학도병 수천 명을 강제 징집해 전선으로 내몰았다. 국내와 일본에서 공부를 하다 끌려온 학도병들은 전선에서 탈출을 시도했고, 김학규는 이들에게 광복군이 되는 길을 열어주었다. 당시 안후이성 린취안에는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 분교가 있었는데 그는 여기에 ‘한국광복군간부훈련반’을 개설하고 일본군에서 빠져나온 한국인 학도병들을 모아 군사훈련과 정신무장을 시켰다. 식민지 조선에서 태어난 학도병들은 이곳에서 처음으로 태극기를 우러러보며 애국가를 불렀다고 한다. 간부훈련반에서 3~5개월 교육을 받은 후 희망하는 임무에 따라 한국광복군에 배치되었다. 이 가운데는 위험한 임무를 맡아 적지에 잠입하는 공작대원도 있었고, 파수꾼을 자임하며 충칭 임시정부를 찾아가는 병력도 있었다.한성수 대원은 초모공작대에 지원해 1944년 가을, 적의 소굴인 상하이로 밀파되었다. 조장인 그는 각고의 노력 끝에 한국인 10여 명을 포섭했으나 누군가의 밀고로 일본 특무기관에 붙잡혔다. 한성수는 일본 군법회의장에서 사형선고를 받으며 말했다.“나는 한국인이다. 너희는 일본어를 국어라 하지만 나에게는 국어가 아니고 원수의 말이다. 나의 국어는 오직 한국말뿐이다.”대한민국임시정부를 찾아간 병력은 70일 동안 6천 리를 걸어 1945년 1월 31일 충칭에 도착했다. 김구는 엄동설한에 고생한 학도병 출신 젊은이들을 직접 맞이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학도병들의 극적인 탈출과 귀환은 국제적 뉴스가 되었고 임시정부의 위상을 드높였다. alt미국 OSS 책임자 도노반 장군을 만나 한미연합작전을 협의한 김구 주석과 지청천 총사령관(1945. 08. 07.)(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제공)alt국내잠입 특공작전을 함께 준비한 광복군 제2지대 간부들과미국 OSS 요원들 (앞줄 가운데가 이범석 장군) 한국광복군 국내잠입작전의 ‘만약’1944년 가을 태평양전쟁은 끝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미군은 일본 본토를 향해 나아갔다. 일본군은 사이판·이오지마·오키나와 등지에서 옥쇄를 감행하며 본토 방어에 안간힘을 썼지만 패배를 직감하고 있었다.임시정부는 미국·영국·중국 등과 함께 연합국의 일원으로 인정받아 한국의 독립을 주도하는 한편 미래 수권세력이 되고자 했다. 1944년 9월 중국군사위원회의 9개 행동규칙이 폐지되면서 제약을 벗은 광복군은 적극적으로 군사작전을 모색했다.1944년 10월 미국 OSS(전략첩보기구)가 윈난성 쿤밍에 본부를 설치했다는 정보가 입수되자 당시 2지대장을 맡고 있던 이범석 장군이 움직였다. 한국광복군이 OSS의 특공훈련을 받고 잠수함으로 국내에 잠입해 연합군의 진주를 지원하는, 일명 ‘독수리작전’이 세워진 것이다. 1945년 5월 시안의 제2지대가 먼저 훈련에 돌입했다. 침투·암살·파괴·정보수집 등 미국 특공대의 훈련과목을 속성으로 익혀야 했으므로 결코 쉽지 않은 작전이었다. 훈련생 대부분은 국내 실정에 밝은 학도병 출신들이었는데, 그들은 불과 석 달 만에 숙련된 모습을 보이며 미국 교관들을 놀라게 했다.8월 4일, 제2지대의 훈련이 완료되자 김구 주석은 시안으로 갔다. 그는 8월 7일 OSS의 도노반 소장과 만나 한미연합 작전을 협의하고 이튿날 대원들의 특공훈련을 참관했다. 이제 모든 준비가 끝났다. 김구는 그리운 조국에 광복군을 투입할 날만 손꼽아 기다렸다. 기대도 잠시, 8월 10일 일본 천황이 무조건 항복을 수락했다는 급보가 날아들었다. 결국 작전은 실행에 옮겨지지 못했다. 김구는 절망했다. ‘독립(獨立)’은 스스로 일어서는 것이다. 만약 우리 힘으로 조국을 되찾지 못한다면 새 나라의 앞날 또한 장담할 수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광복군의 특공작전 무산은 애석한 일이었다. 일제의 항복에 모두가 기쁨의 만세를 외칠 때 그가 홀로 통곡한 이유다.그 아쉬움 때문이었을까? 1945년 말 임시정부 요인들이 미군 수송기를 타고 환국할 당시 지청천 총사령관은 중국에 남는 것을 선택했다. 대신 확군(擴軍)에 열중했다.일본군 포로를 포함한 대륙의 한국인들을 끌어모아 10만 대군을 만들어 조국으로 진군하겠다는 것. 실제로 수만 명이 결집했지만, 지청천의 계획은 끝내 실현되지 못했다. 남한에 진주한 미군정 당국이 한국광복군의 공식입국을 거부하며 개인 자격으로의 입국만을 허가했기 때문이다. 1946년 5월 16일, 결국 지청천은 한국광복군의 해산을 선언했다.임시정부와 광복군의 개별 귀국과 함께 한반도는 혼란에 빠졌다. 극심한 이념 대립 속에서 일제의 잔재도 청산하지 못한 채 분단으로 치달았다. 새 정부 수립과 건군(建軍)의 주체를 바로 세우지 못한 것이 천추의 한이었다.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만약 김구의 바람대로 한국광복군이 국내잠입 작전에 성공했다면, 그래서 임시정부가 연합군의 일원으로 개선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권경률역사칼럼니스트. 서강대학교에서 역사학을 공부했다. 칼럼 ‘사극 속 역사인물’을 연재하고 팟캐스트 ‘역사채널 권경률’을 진행한다. 저서로는 『조선을 새롭게 하라』, 『조선을 만든 위험한 말들』 등을 출간했으며, 영상물 『시시콜콜 한국사 어워즈』도 선보이고 있다. ]]> Fri, 31 Aug 2018 01:38:18 +0000 21 <![CDATA[1920년대, 시대의 빛 독립투사들 ① 겨레의 함성, 독립의 희망]]> 글 박영규 작가1920년대, 시대의 빛 독립투사들 ① 1920년대 혼란의 일제강점기.어디를 가도 어둠뿐이었던 조국의 현실에서의지할 단 하나의 빛은 독립운동가들이었다.그들은 각기 다른 자리에서 다른 방식으로독립운동을 했지만, 가슴에 품은독립의 염원만큼은 누구하나 다르지 않았다. alt일제의 침략을 다룬 역사서 『한국통사』alt『한국통사』에 대응하기 위해 일제가 펴낸 역사서 『조선사』alt박은식 서거 보도기사(「중화보」, 1925.11.04.) 민족사를 정립한 독립운동의 큰 별, 박은식1925년 11월 1일, 상하이에서 2대 대통령 박은식이 생을 마감했다. 사망원인은 인후염이었다. 학자이자 언론인이었고,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였으며, 계몽운동가이자 정치가였던 박은식.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큰 별이 저무는 순간이었다.박은식은 1859년 황해도 황주군, 아버지 박용호와 어머니 노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릴 땐 유학을 공부하면서 과거를 준비했다. 하지만 곧 회의를 느끼며 과거 준비를 포기하고는 전국을 떠돌아다녔다. 그 과정에서 정약용의 제자 신기용과 정관섭을 찾아가 정약용의 학문을 접하게 된다.1882년 한양으로 상경하여 임오군란을 경험하고 고종에게 시무책을 올리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후 실망한 나머지 낙향하여 성리학에 매진하였고, 어머니의 뜻에 따라 향시에 응시해서 특선으로 뽑힌 뒤 1888년부터 1894년까지 능참봉 생활을 했다. 당시 박은식은 비록 종9품 한직 능참봉에 불과했지만, 그의 학문적 명성은 황해도는 물론이고 한양에까지 알려졌다.그러나 독립협회의 사상을 접하면서 새로운 도전을 하게 된다. 그전까지 고수하던 위정척사사상을 버리고 개화사상가로 거듭나게 된 것이다. 1898년에는 본격적으로 독립협회에 가입하고 만민공동회 간부로 활동하기도 했다. 또한 장지연과 함께 「황성신문」의 공동주필을 맡아 활동했다. 독립협회 해산 후에는 한성사범학교의 교수를 지냈다.박은식은 1907년 신민회에 가입했다. 당시 신민회는 항일 비밀결사였는데, 그는 신민회 서북지회의 중심인물로서 서북지회에서 발행하는 「서북학회월보」의 주필로 있었다. 그런 가운데 강제병합이 이루어지면서 그의 저서 『겸곡문고』·『학규신론』·『왕양명실기』 등은 모두 금서로 지정되었다. 「황성신문」과 「서북학회월보」도 폐간되었다.결국 망명을 결심하게 된 박은식은 1911년 4월, 만주 환인현으로 탈출했다. 그곳에서 대종교 신도 윤세복의 집에 머물며 대종교의 사상을 받아들였고 본격적으로 역사서 집필에 매진했다. 이때 쓴 책이 『동명성왕일기』·『발해태조건국기』·『몽배금태조』·『명림답부전』·『천개소문전』·『대동고대사론』 등이다.1912년에는 상하이로 가서 신규식 등과 함께 동제사를조직한 후 박달학원 설립에 참여했다. 또 1914년 홍콩에서 중국어잡지 「향강」의 주간으로 있었다. 하지만 「향강」은 당시 중국의 권력자였던 위안스카이의 정치를 비판하다가 폐간당하고 말았다. 다시 상하이로 돌아온 박은식은 그의 역작으로 알려진 『한국통사』를 집필하였고, 이후 『안중근전』과 『이순신전』을 연달아 저술했다. 무엇보다 『한국통사』는 중국은 물론 미국과 러시아 등지에 흩어져 있던 동포들에게 널리 읽혔으며, 국내에도 비밀리에 보급되어 당대 지식인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다. 일제는 『한국통사』에 대응하기 위해 많은 인력을 동원하여 『조선사』 37권을 펴내기도 했다.박은식은 저술 활동뿐만 아니라 정치 활동도 활발히 전개했다. 이상설·신규식 등과 신한혁명을 조직하고, 신규식과는 대동보국단을 조직해 단장으로 활약했다. 3·1운동 소식을 접하고는 대한국민노인동맹단을 결성하여 지도자가 되었으며, 강우규를 국내로 잠입시켜 사이토 총독에게 폭탄을 투척하도록 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당시에는 원로로서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한국독립운동지혈사』를 집필·간행함으로써 또 하나의 역작을 남겼다.『한국독립운동지혈사』는 갑신정변이 있던 1884년부터 책이 간행된 1920년까지의 항일무쟁투쟁사를 정리한다. 특히 3·1운동이 중점적으로 서술되어있다. 박은식은 책을 통해 3·1운동이 1884년 이후 지속된 독립운동의 총체적 봉기라 정의하며, 이는 결국 일제 패망과 한국 독립 쟁취의 밑거름이 될 것이라 주장한다.그러나 독립운동은 희망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독립운동계 전체를 뒤덮은 극도의 혼란 속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또한 갈등과 분열에 시달렸다. 박은식은 이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부단히 애를 썼다. 임시정부 기관지인 「독립신문」의 사장을 지냈고, 1924년에는 임시정부 의정원이 이승만 대통령의 유고안을 통과시킴에 따라 임시정부 국무총리 겸 대통령 대리를 맡게 되었다. 이후 대통령제 폐지와 함께 국무령 중심의 내각책임제 개헌을 실시하면서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이 무렵 박은식은 병마에 시달리고 있었다. 죽음을 앞둔 순간, 그는 독립 쟁취의 목적 달성을 위해 모든 동포가 단결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alt노백린alt박은식alt레드우드 비행학교 훈련생과 교관들 사진(1920)alt최초의 한국인 비행사 6인 공군 독립군단 양성의 꿈을 꾼 노백린1926년 1월 22일, 대한민국임시정부 국장이 치러졌다. 임시정부 참모총장으로 있으며 독립군 육성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던 노백린의 장례였다. 그는 대한제국의 군인으로, 계몽사상가로, 그리고 다시 비행사로 활동하며 우리 독립운동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대개 노백린이 지병으로 사망했다고 알고 있으나, 일각에서는 임시정부의 처참한 현실을 비관한 나머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말도 있었다.1875년 황해도에서 유학자 노병균의 3남으로 태어난 노백린은 1895년 관비 유학생으로 뽑혀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다. 1900년 일본군 소위로 임관한 뒤 한국무관학교 보병과 교관을 지냈고, 육군연성학교에서도 교관으로 있었다. 러일전쟁 때는 일본군으로 종군하기도 했다. 하지만 1907년 정미7조약이 체결된 후 일본이 군대해산을 감행하자 이를 반대하며 신민회에 가담했다. 독립운동에 투신하기 시작한 것이다. 1910년 미국으로 건너가 박용만과 함께 국민군단을 창설하여 독립군을 양성하였고, 강제병합 이후에는 고향에서 계몽운동을 하며 학교 설립을 추진했다. 금광 및 피혁 등의 사업에 뛰어든 적도 있었으나 실패했다. 1914년 다시 미국으로 건너간 노백린은 항공 학교를 설립하고 하와이 국민군단의 비행사 훈련을 담당했다.3·1운동은 노백린을 크게 고무시켰다. 상하이로 간 노백린은 임시정부 창설에 참여하고 군무부 총장이 되었다. 또 미국 하와이와 샌프란시스코 등지에서 공군 독립군 양성에 투신하며 한인 최초의 비행사 양성소를 설립했다. 1923년까지 양성소의 졸업생은 77명에 달하였다.반면 1920년대 임시정부의 상황은 점점 나빠졌다. 상하이 내부 독립운동 단체는 좌우익 및 아나키스트로 분열되어 싸웠으며, 이승만과 안창호 등의 지도부도 갈등을 겪는 중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노백린은 국무총리로 추대되었다. 1923년 1월의 일이었다. 이듬해 박은식 내각에서는 군무총장과 교통총장을 겸하기도 했다. 재정 형편도 엉망이었다. 요원들의 한 끼 식사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였고, 싸구려 중국 호떡으로 곯은 배를 달래는 날들이늘었다. 노백린은 임시정부의 현실에 안타까움을 느끼고 미국으로 갔다. 그곳에서 구미위원회 외교 위원을 활동하며 소련에서 돌파구를 찾고자 했지만 이렇다 할 성과를 이루지는 못하였다.그리고 1926년 1월 22일, 노백린은 상하이의 허름한 골방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박영규1996년 『한 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을 내면서 저술활동을 시작하여, 1998년 중편소설 『식물도감 만드는 시간』으로 문예중앙신인상을 수상하면서 소설가로 등단했다. 문학, 철학, 역사 분야에 걸쳐 저술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대표적인 역사서로는 『한 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 · 『한 권으로 읽는 일제강점실록』 등이 있다. ]]> Fri, 31 Aug 2018 00:54:50 +0000 21 <![CDATA[유전병이 불러온 제2차 러시아 혁명 명화로 보는 세계사]]> 글 고종환 아주대학교 외래교수유전병이 불러온제2차 러시아 혁명 혁명은 한 나라의 운명을 뒤흔드는 일대 사건이며 역사다. 프랑스 대혁명이나 미국혁명,제1차 러시아 혁명 등. 모든 혁명의 배경에는 정치적·경제적 혼란과 함께지배계급에 대한 국민적 분노가 반드시 동반되었다. 단, 제2차 러시아 혁명은 조금 달랐다.혈우병과 괴승의 등장에서부터 혁명은 시작되었다. alt니콜라이2세와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여(女) 대공의 결혼식1894, 일리야 레핀(Ilya Yefimovich Repin), 국립 러시아 박물관 러시아 최고 권력자가 된 괴승제정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몰락 뒤에는 혈우병과 라스푸틴(Grigorii Efimovich Rasputin, 1872~1916)이라는 괴승이 있었다. 니콜라이 2세가 허수아비 황제 노릇을 하는 동안 라스푸틴은 권력을 가지고 정치를 농락했다. 이에 분노한 민중들에 의해 러시아 왕조(로마노프)가 무너지게 된 것이다. 이후 레닌이 주도하는 볼셰비키 혁명으로 소비에트 연방이 탄생하고 황제와 그 가족들은 폐위와 구금을 거쳐 종국에는 총살당하면서 역사에서 자취를 감추었다.라스푸틴의 농락은 그렇다 치더라도 혈우병과 혁명이 어떤 연관이 있는 것인지 의아할 수도 있다. 혈우병은 상처가 나면 피가 잘 멎지 않는 병이다. 니콜라이 2세와 표도로브나 여 대공의 결혼으로 혈우병이 러시아에 들어왔다.러시아 혈통인 니콜라이 2세와 달리 황후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는 유럽 왕족들의 할머니라 불리는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외손녀였다. 빅토리아 여왕의 9명의 자녀들은 모두 유럽 주요 국가의 왕실과 결혼했는데 그중 알렉산드라는 둘째 딸이 낳은 손녀였다. 빅토리아 여왕은 혈우병을 가지고 있었다. 알렉산드라와 니콜라이 2세가 결혼을 하면서 혈우병이 러시아의 황태자에게까지 유전된 것이다. 혈우병의 가장 큰 특징이자 비극은 아들에게 병이 유전되는 것. 니콜라이 2세와 알렉산드라는 4명의 공주 끝에 결혼 10년만인 1904년에 어렵사리 아들 알렉세이를 얻었지만, 그는 지독한 병에 시달려야 했다. 당시 의학 기술로는 혈우병을 고치기가 힘들었다. 그러니 황후의 걱정과 고통도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터. 그런 황후에게 접근한 이가 바로 라스푸틴이다. 라스푸틴은 러시아정교회 사제의 신분과 예언자, 그리고 의사로서 시골에서 인기를 끌던 인물이었다. 놀랍게도 그는 신비한 주술을 사용해 왕자의 혈우병 증세를 완화시켰고, 이 일로 황제와 황후의 전폭적인 지지와 신뢰를 얻었다. 라스푸틴은 금세 러시아 정계 최고 실권자로 등극했다. 권력을 등에 업은 라스푸틴의 기행과 전횡은 정치와 사회를 망라하는 것이었다. 국민들은 분노했다. 점차 라스푸틴을 넘어 러시아 왕조에게까지 미치게 된 민중의 분노는 제2차 러시아 혁명의 계기 중 하나가 되었다. alt라스푸틴에게 농락당하는 황제와 황후를 조롱·비판하는 카툰 제2차 러시아 혁명과 사회주의 정권 수립니콜라이 2세의 가장 큰 정치적 실책은 제1차 세계대전 참전이었다. 신하들의 조언을 무시하고 괴승 라스푸틴에게 정치를 맡긴 결과였다.제1차 세계대전 참전은 러시아로서 아무것도 얻지 못한, 막대한 재정지출만을 불러온 잘못된 선택이었다. 당시 러시아의 수도였던 페트로그라드는 밀가루 반입량이 절반으로 줄어들면서 국민들에게 식량을 배급해야 할 만큼 큰 어려움에 빠졌다. 1917년 3월(러시아력 2월), 식량 배급마저 중단되자 화가 난 민중들은 영하 20도의 추위에도 불구하고 빵을 요구하며 시위에 돌입했다. 빵과 우유를 요구하는 여성 노동자들의 시위 행렬에 공감한 다른 노동자와 농민이 동참하였고, 여기에 명분 없는 전쟁에서 패하고 돌아와 러시아에 대한 뿌리 깊은 원망을 가지고 있던 군인들도 가세했다. 순식간에 시위는 무력혁명으로 발전했다. 심상찮은 시위대의 규모와 위세에 놀란 당국이 경찰과 군대를 동원, 발포를 포함한 강경진압을 단행하였다. 이로 인한 사망자만 수백 명에 달하면서 민중들의 분노는 더욱 거세졌다. 시위대의 기세는 점차 고조되어 전국적인 양상을 띠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1905년 제1차 러시아 혁명에 이은 1917년 제2차 러시아 혁명이다.러시아 정국의 혼란 속에서 레닌은 자신이 이끄는 볼셰비키와 함께 11월(러시아력 10월) 무장혁명을 일으켜 마침내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정권을 수립했다. 볼셰비키는 10월 26일에 열린 제2차 소비에트 대회에서 노동자·농민 소비에트 정부의 수립을 선포하는 것으로 러시아 혁명을 완성했다. 고종환한국 프랑스문화학회의 재무이사이자, 아주대학교와 경상대학교 외래교수. 프랑스 문화와 예술, 서양연극사, 광고이미지 등을 강의하고 있다. 대표 저서로는 『한권으로 읽는 연극의 역사』와 『오페라로 배우는 역사와 문화』, 『글로벌 다문화교육』이 있다. ]]> Fri, 31 Aug 2018 01:45:40 +0000 21 <![CDATA[미꾸라지의 승천 한 접시의 추억]]> 글 윤덕노 음식문화평론가미꾸라지의 승천 조선시대 추어탕은 점잖은 사람은 거들떠보지 않던 음식이었다.얼마나 미천한 음식이었는지 남들 앞에서 체면치레를 하느라 대놓고 먹지도 못할 정도였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추어탕 맛집에는사람들이 붐비고, 몸보신을 한다며 금세 한 그릇을 비워낸다.‘미꾸라지 용 됐다’는 우리의 속담처럼 추어탕은 볼품없는 미꾸라지를 일순간 용으로 만들어버렸다. 일제강점기 추어탕의 이미지 변신조선시대 문헌에서 추어탕에 관한 기록은 많지 않다. 19세기 초 서유구가 쓴 『난호어목지』에 고기는 기름진 것이 맛있다며 시골 사람들, 즉 야인(野人)들이 잡아서 국을 끓이는데 특이한 맛이란 설명이 나온다. 야인들이 먹는 특이한 맛의 국이 바로 추어탕이었다. 마찬가지로 19세기 중엽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에는 두부에 미꾸라지를 넣어 끓인 추두부탕이 있는데 부쳐 먹거나 탕으로 끓여 먹는다면서 맛이 매우 기름지며 한양에서는 천민인 반인(伴人) 사이에서나 성행한다고 나와 있다. 당시 반인은 관노는 아니지만 성균관 소속의 노비 신분으로 백정만큼 천한 취급을 받던 이들이었다. 이처럼 조선시대 추어탕은 천민, 또는 꼭지패라 불리는 청계천 거지나 먹는 천하디 천한 음식이었다.그러나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추어탕은 이미지 변신에 성공한다. 문헌에 추어탕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도 이즈음이었다. 근대 잡지 『별건곤』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나온다.전날에는 선술집은 대개 하급 노동자들만먹는 곳이요, 소위 행세깨나 하는 사람들은 별로 가지를 않았지만 지금은 경제가 곤란한 까닭이라 할지 계급 사상의 타파라 할지 노동자는 고사하고 말쑥한 소위 신사들이 전날 요리 집이나 앉는 술집 다니듯이 보통으로 다닌다.1920년대 경성에는 꽤 많은 선술집이 생겨났다. 그리고 이곳에서 추어탕을 팔았다. 조선 말기 문인이자 일제강점기에 언론인으로 활동한 최영년은 1925년에 발간한 『해동죽지』에서 전국의 명물 음식으로 황해도 연안의 추어탕을 꼽기도 했다. 연안에는 미꾸라지가 많아 가을 서리가 내릴 즈음이면 미꾸라지를 넣고 두부를 만드는데, 이것을 가늘게 잘라 생강과 후추를 넣고 끓여 먹으면 맛이 좋다는 것이다. 1924년에 나온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이라는 요리책에도 추어탕 끓이는 법이 등장한다.일제강점기 추어탕은 경성 시내 선술집에서 쉽게 접하고 누구나 먹을 수 있는 대중식으로 거듭났다. 드디어 사람들이 미천한 미꾸라지의 진가를 알아보기 시작한 것이다.추어탕이 흥할 수밖에 없는 이유조선시대 추어탕이 박한 대접을 받았다고는 하나 양반가 사람들이 아예 입에도 대지 않았던 건 아니다. 깊은 밤, 양반집 마님들은 사랑채에 머무는 서방님에게 은밀한 야식으로 미꾸라지와 두부를 넣고 끓인 추어탕을 대접했다. 평소에는 천한 음식이라 무시하면서도 한밤중이면 남들의 눈에 띄지 않게 몰래 추어탕을 먹었던 것이다. 드러내놓고 먹기에 점잖지 못한 음식이라는 핑계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추어탕이 야식으로 사랑받았던 이유는 정력에 좋다는 믿음 때문이었다.미꾸라지는 힘이 넘치는 생선으로, 추어탕이 스태미나 음식임은 당연한 일. 가을에 특히 영양이 넘치고 맛있기 때문에 가을 추(秋)자를 써서 추어라지만, 본래 옛날식 표기는 힘이 매우 좋다는 의미의 우두머리 추(酋)자를 쓴 추어(酋魚)였다. 중국에서는 ‘작은 미꾸라지 한 마리가 큰 파도를 뒤엎는다’는 속담이 있을 정도였다. 그래서 농부들은 종종 미꾸라지를 ‘수중 인삼’이라 불렀다. 일본에서는 미꾸라지 한 마리를 장어 한 마리에 비하기도 했다. 이렇게 한중일 세 나라 모두가 인정하는 미꾸라지의 보양 효과니, 제아무리 체면이 아쉬운 양반이라 하더라도 먹지 않고는 못 배겼을 것이다.1920년대를 전후로 추어탕이 천민 음식에서 일반 보양식으로 신분 상승을 하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해석이 다양하다. 뛰어난 보양 효과 때문일 수도 있고, 『별건곤』의 기록처럼 일제강점기 경제난이나 시대변화에 따른 계급 사상의 타파 등 사회현상과의 관련성도 배제할 수 없다. 어찌 됐든 일제강점기 많은 사람들이 추어탕을 먹었다. 멸시받던 미꾸라지가 진짜 ‘용’이 되어 승천하는 순간이었다. 윤덕노음식문화평론가. 1984년 매일경제신문사에 입사해 20여 년간 기자 생활을 하면서 특파원 활동, 출장, 연수 등으로 미국과 중국을 비롯한 다양한 나라에 머물렀다. 음식에 관심이 많아 관련 자료를 수집해온 결과, 음식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주요 저서로는 『음식잡학사전』, 『신의 선물 밥』, 『붕어빵에도 족보가 있다』 등이 있다. ]]> Fri, 31 Aug 2018 02:18:09 +0000 21 <![CDATA[당진을 가다 가을에 닿다 여행에 숨은 역사]]> 글 사진 김초록 여행칼럼니스트당진을 가다 가을에 닿다-충청남도 당진- 가을이 깊었다. 충청남도 당진은 포구·산·바다·섬을 모두 가지고 있어 가을의 면면을 모두 둘러볼 수 있는 좋은 여행지다. 어디 자연뿐이랴. 최초로 학생만세운동이 일어난 곳도 당진이고, 한국 천주교가 뿌리내린 곳도 바로 당진이다. 어쩌면 아직도 발견하지 못한 당진의 또 다른 구석이 있을지도 모른다.그래서 다시 당진으로 간다.               대호방조제 옆으로 펼쳐진 개펄과 습지         독립운동가 심훈 선생의 발자취충남 여행은 서해안고속국도 서해대교를 지나 송악나들목을 빠져나오면서부터 시작된다. 북부 해안길을 따라 조금 가다보면 필경사를 알리는 입간판이 나타난다. 필경사는 우리나라 농촌계몽소설의 대표작 『상록수』를 쓴 심훈(1901~1936) 선생의 옛집이다. 송악면 부곡리 상록초등학교 뒤편에 있다. 1933년 심훈은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당진으로 내려와 이듬해 필경사를 지었다. 그는 이곳에서 한동안 아버지와 함께 살면서 여러 작품을 썼다. 초가로 만들어진 가옥 앞에는 심훈의 일대기와 손때 묻은 원고·호적·신문원고·사진·책상 등이 전시된 기념관이 있다. 앞뜰에는 ‘그날이 오면’ 시비(詩碑)가 우두커니 서 있다.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은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 칠 그날이이 목숨 끊기기 전에 와 주기만 할 양이면…(중략)…우렁찬 그 소리를 한번이라도 듣기만 하면그 자리에 꺼꾸러져도 눈을 감겠소이다심훈은 농촌계몽운동의 하나인 브나로드 운동에도 참여해 문맹 퇴치에 앞장섰다. 브나로드(v narod)는 러시아어로 ‘민중 속으로 가자’는 의미다. 제정 러시아 말기의 지식인들이 주로 사용했다. 그들 역시 민중의 의식을 깨우쳐 이상 사회를 건설하고자 했다. alt한진포구alt왜목마을 앞바다    맛과 멋이 있는 가을 포구아산만을 끼고 있는 38번 국도는 당진 끝머리 도비도를 지나 서산으로 내닫는다. 국도 주변으로 포구들이 줄줄이 이어지고, 그 사이로 부곡공단 철강단지가 거대한 위용을 뽐낸다.공단 우측에 있는 작은 어촌 마을로 갔다. 한진포구다. 30여 년 전만 해도 당진 쌀을 실은 70~80톤 규모의 대형어선이 정박했던 곳이지만 아쉽게도 지금 그 모습은 자취를 감추었다. 포구 앞 개펄 밭이 제법 넓다. 한때 바지락·피뿔고등·박하지게·낙지·준치·민어·삼치·숭어·꽃게 등 해산물이 지천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아산만과 삽교천 방조제가 만들어지면서 이 또한 옛일이 돼버렸다. 포구에는 몇 척의 어선만이 보인다. 그 앞에 서니 감회가 남다르다.푸른 바다가 손짓하고 서해대교의 대형 주탑 2개가 아득하게 보인다. 한진포구에서 조금 더 올라가면 휴양공원을 둔 안섬포구가 나타난다. 안섬은 원래 섬이었으나 간척사업으로 육지가 됐다. 이곳에서는 돌아오는 봄마다 어민들의 안녕과 풍어를 비는 안섬당굿(충청남도 무형문화재 제35호)이 열린다. 약 350년 전부터 해왔다고 하니, 마을의 역사도 꽤 깊은 모양이다. 안섬 앞에도 개펄이 있다. 개펄에서 바지락과 조개를 캐는 사람들이 더러 보인다. 안섬포구와 가깝게 붙어 있는 성구미포구는 청강단지가 확장되면서 옛 모습을 잃었다. 아름다운 포구였다는 기억만이 있을 뿐이다. “성구미 가서 돈 자랑 마라”는 말을 농담처럼 주고받던 시절이 있었는데 세월은 이렇듯 정겹던 풍경마저지워버렸다. 당진 4경의 하나인 석문방조제길로 간다. 곧게 뻗은 방조제길이 10여 분간 이어진다. 끝머리에 다다르니 작은 포구 하나가 나타난다. 마섬포구다. 마섬포구는 당진의 포구 중에서 비교적 덜 알려졌지만 최근 입소문을 타고 찾는 여행객들이 늘었단다. 넓고 푸른 서해를 감상할 수 있는 데다가 일몰 명소로도 유명하다. 석문방조제를 지나면 장고항과 용무치포구가 있다. 왜목항도 코앞이다. 장고항은 포구의 모습이 장고를 닮았다고 하여 붙은 이름으로, 실치 주산지로도 잘 알려져 있다. 장고항 앞 용무치에 개펄 체험장이 있다. 호미로 벌을 조금만 뒤져도 조약돌 같은 바지락과 조개류가 올라온다. 왜목마을에서는 해수욕과 일출, 일몰을 모두 즐길 수 있다. 특히 마을 뒤편에 있는 석문산에서 바라보는 일출과 일몰은 더욱 입체적이다. alt대호지면 천의리는 4·4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던 곳이다당진을 수놓았던 태극기 행렬왜목마을 앞을 지난 38번 국도는 대호방조제로 이어진다. 방조제 앞 간척지는 드넓은 습지로 이루어져 있는데, 철새들이 날아드는 생태계의 보고다. 방조제 끝에 도비도, 즉 농어촌휴양단지가 있다. 해수탕·숙박시설·전망대·음식점·산책로까지 모두 갖추고 있어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다.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난지도에 가기로 했다. 여객선은 도비도를 출발해 대조도-소조도-비경도-우무도를 거쳐 난지도에 닿는다. 난지도는 큰 섬인 대난지도와 작은 섬 소난지도로 나뉘어 있다.소난지도는 구한말 을사늑약에 반기를 든 사람들이 대일항쟁을 펼쳤던 곳이다. 1908년 3월 15일 일본군의 대대적인 기습공격으로 100여 명에 이르는 의병들이 이곳에서 전사했다. 섬 동쪽 끝 바닷가에 왜군과 싸우다 순국한 의병들을 모신 의병총이 있다. 우리 역사에서 해상 도서가 항일투쟁의 근거지가 된 것은 소난지도가 유일하다. 그래서 의병항쟁 추모탑을 건립해 그 뜻깊은 역사를 널리 전하고 있다. 문화재청은 지난해 의병총을 등록문화재로 지정했다.이밖에도 당진 곳곳에서 의병 활동이 일어났다. 면천공립보통학교에서 있었던 3·10 만세운동은 학생 주도로 이루어진 최초의 독립만세운동이었다. 당시 16세에 불과했던 면천보통초등학교 학생들은 면천면 동문 밖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학교 교문까지 행진했다. 광주학생항일운동보다 10년이나 앞선 것이었으니 역사적 의의가 크다. 현재 학교는 사라지고 학생독립만세운동기념탑만이 그날의 상황을 어렴풋이 전하고 있다. 면천 학생들의 항일운동은 4·4 독립만세운동으로의 기폭제가 됐다.4·4 독립만세운동은 대호지 천의장터에서 일어났다. 남주원·이두하·남계창·남상직·남상락 등 지식인들이 서울 파고다공원에서 항일투쟁을 벌이다가 당진으로 귀향하여 독립운동을 이어간 것이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 대호지면사무소에 모인 사람들은 태극기를 들고 정미면 천의장터까지 걸어갔다. 이인정 대호지면장이 주축이 되어 마을 유림들을 이끌었고, 동학 농민 혁명에 참여했던 천도교인들까지 합세하면서 대규모 만세운동으로 발전했다. 이때 구속되거나 입건된 애국지사만 200명이 넘었다고 하니 과연 3·1운동의 효시로 꼽힐 만 하다. 그때 사용된 태극기는 사료적 가치를 인정받아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현재 천안 독립기념관에 전시 중이다. 1919년 4·4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다 체포된 독립운동가 남상락(1892~1943)의 부인이 직접 흰색 명주 천에 색실로 수를 높아 만들었다고 한다.당진시에서는 대호지 천의장터에서 일어난 4·4 독립만세운동을 기리기 위해 정미면 천의리에 창의사(倡義使)를 짓고 순국한 선열들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또 왜경주재소가 있던 자리에는 4·4 독립운동 기념탑과 독립운동가 남상락의 태극기 모형을 제작해 놓았다. 매해 4월 4일에는 기념탑을 중심으로 만세운동 재현 행사가 열린다. 여전히 당진에서는 해마다 태극기가 휘날리고 있었다. alt현대 미술작품을 전시하고 있는 아미미술관그리고 놓치면 아쉬운 곳들당진 정미면 안국사지(安國寺址)에는 고려시대 석불 입상 3점(국가지정 보물 100호)과 석탑(국가지정 보물 101호)이 있다. 안국사는 백제 말에 창건돼 고려 때 번성했던 사찰로 추정하고 있다. 은봉산과 봉화산으로 둘러싸인 그윽한 정취가 일품이다.당진의 명산인 아미산에 올라보는 것도 좋다. 아미산은 당진 남쪽 면천에 우뚝 솟아 다불산과 몽산으로 양 날개를 펼친 듯 능선을 이루고 있다. 이 3개의 산은 아미산 정상을 기준으로 이어져 있어 아기자기한 산행을 즐기기에 적당하다. 산 아래에 산의 이름을 딴 아미미술관이 있다. 폐교된 학교를 미술관으로 탈바꿈시킨 공간이다. 연중 다양한 현대미술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미술관 뒤로는 소나무 숲길이 있고, 너른 잔디운동장까지 갖추고 있어 관람 후 산책이 자연스럽다.송악읍 기지시리는 국가무형문화재 제75호인 기지시 줄다리기가 400여 년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마을에 있는 기지시 줄다리기 박물관에서 관련 유물과 역사 기록 등을 살펴볼 수 있다. 합덕제는 조선시대 3대 저수지 중 하나로, 당진 6개 마을에 물을 댈 만큼 규모가 크다. 인근에 위치한 합덕수리민속박물관은 한국 수리 시설의 역사를 알 수 있는 훌륭한 교육시설이다. 당진 사람들이 사용한 농경 기구를 기증받아 전시해놓았고 합덕 방죽의 축조 과정 또한 미니어처로 설명하고 있다.논 옆으로 뻗은 방죽길은 힐링하기 좋은 산책로다. 당진은 한국 천주교가 처음 뿌리를 내린 곳으로도 유명하다. 한국 가톨릭교회 최초의 사제 김대건 신부가 태어난 솔뫼성지를 비롯해 최초의 교구청인 신리성지, 순교지인 해미성지와 갈매못성지, 합덕성당 등을 둘러볼 수 있다. 특히 솔뫼성지는 수백 년 된 소나무 숲과 김대건 신부의 생가·기념관·피정의 집 등이 있어 차분하게 자신을 돌아보는 사색의 장소로 좋다.]]> Mon, 01 Oct 2018 11:22:02 +0000 22 <![CDATA[언어에도 독립을 허하라 조선어학회 사건 한눈에 보는 역사]]> alt]]> Mon, 01 Oct 2018 19:38:28 +0000 22 <![CDATA[북간도로 망명하여 무장독립투쟁의 초석을 다진 독립운동가 현천묵 이달의 독립운동가]]>     글 학예실북간도로 망명하여무장독립투쟁의 초석을 다진독립운동가 현천묵   현천묵은 대종교인으로 활동하며 오랫동안 무장독립투쟁을견지하였으나, 그는 특출난 종교인도 군인도 아니었다.대신 그는 소통에 능한 리더였다. 종교로써 사람들을 아우르고독립운동단체를 통합할 수 있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alt교육을 통한 구국운동에 앞장서다현천묵은 1862년 함경북도 경성군에서 태어나, 유년 시절부터 꾸준히 한문을 수학하였다. 학업에 대한 관심은교육으로 이어져 1906년부터 민족교육의 산실인 보성학교 학감과 교감을 맡는다. 현천묵은 학생들의 자긍심을 일깨우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고, 1908년에는 대한협회 경성지회장으로 선출되며 지역의 교육발전을 위한 기반을 만들어갔다.대한협회 함경북도 경성지회는 의병을 지원하거나 군자금을 조달하며 항일전을 이끌었다. 계속된 일제의 탄압으로 1910년 전후의 활동은 점차 위축되었고, 현천묵은 대종교 수용을 통해 항일 의지를 되살리고자 하였다. 이후 포교활동과 새로운 활동 근거지를 찾아 북간도로 망명하였다. 망명 후에도 대종교에서 설립한 교육기관의 교장을 맡아 북간도 한인사회의 민족교육을 이어갔다.북간도 무장독립투쟁을 이끌다1919년 현천묵은 이주한인의 규합을 위해 중광단 조직에 힘을 보탰다. 더 조직적인 무장투쟁이 필요하다는 의견에 따라 결국 총재 서일을 중심으로 대한정의단이 조직되었다. 현천묵은 50대 후반에 부총재를 맡아 무장투쟁의 선봉에 섰다. 이후 북로군정서로 이름을 바꾸고,1920년 10월 홍범도 부대와 연합하여 청산리전투에서큰 승리를 거두었다.일제는 패전을 설욕하기 위해 한인들을 무자비하게 살해하였는데, 이에 책임을 통감한 총재 서일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서일에 이어 현천묵이 북로군정서의 총재를 맡았다. 현천묵이 이끄는 북로군정서는 직접 투쟁보다대종교 포교와 독립운동단체 통합에 앞장섰다. 현천묵은1925년 신민부가 만들어지기까지 독립운동단체 통합에나섰고, 1928년 66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정부는 현천묵의 공적을 기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alt『대한협회회보』 제7호에 실린현천묵 관련 내용(1924.11.16.)alt북로군성서 사관양성소 졸업식과 졸업증서 (1920.07.) alt북로군정서에서 사용한 무기류(1920.07.)alt독립운동단체 통합에 관한신한민보 기사 (1923.12.20.) ]]> Mon, 01 Oct 2018 14:03:41 +0000 22 <![CDATA[그 옛날 걸음의 의미 우리가 몰랐던 이야기]]>  글 신현배 역사칼럼니스트그 옛날 걸음의 의미   자동차·기차·비행기 등. 지금이야 다양한 교통수단이 발달해 편리하게 이동할 수 있지만 옛날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먼 길도 걸어서 다녔다. 그래서일까? 그 옛날 잘 걷는다는 것은 제법 유용한 특기이자 장점이었다. alt빠른 걸음으로 출셋길에 오른 이용익          걷는 것이 직업인 사람들서울에서 부산까지 가려면 얼마나 걸릴까? 가는 방법은 다양하지만 KTX를 기준으로 하면 보통 2시간 30분이 소요된다. 그러나 옛 사람들은 제 다리에만 의지한 채 20일을 걸었다. 여간 고생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이렇게 수일을 걸어야 하는 일이 있을 때 사람들은 반드시 괴나리봇짐을 챙겼다. 괴나리봇짐은 여정에 필요한 물건들을 넣은 작은 봇짐이다. 서울로 과거를 보러 떠나는 선비들의 봇짐에는 노잣돈·종이·먹·붓·벼루·좁쌀책 등이 들어 있었다. 좁쌀책은 지도와 병이 났을 때의 응급처치법이 담긴 책이다. 소매에 넣고 언제든 펼쳐볼 수 있도록 아주 작게 만들어졌다. 여기에 짚신을 매달면 괴나리봇짐이 완성되었다. 짚신은 하루 이틀만 신어도 닳아버리기 때문에 여분의 신이 꼭 필요했다.걷는 것이 이동의 전부였던 시절, 걷는 것을 전문으로 하는 직업도 있었다. 고려시대에는 황급한 일이 발생하면 편지나 문서를 들려 달리게 하거나 입으로 전하도록 하는 ‘비각’이 있었다. 이들은 하루에 보통 100리를 달렸다. 비각은 떠나기 전에 가느다란 노끈으로 팔을 단단히 묶었다. 얼마나 세게 묶었는지 피가 통하지 않을 정도였다. 노끈을 풀지 못하도록 매듭지어진 곳에 도장까지 찍어두었다. 팔의 아픔을 느끼게 해서 걸음을 재촉시키기 위함이었다. 이러한 습속을 ‘봉비’라고 한다. 봉비는 원시적인 통신 수단으로 중국에서 비롯되었다. 『고려사』에는 고려 의종 때 무신의 난을 일으킨 정중부가 군사로 뽑혀 서울로 올라갈 적에 느낀 봉비의 고충이 기록되어 있다. 재상 최홍재는 키가 크고 힘이 센 정중부의 팔이 꽁꽁 묶여 있는 것을 보고 그것을 풀어 위로해주었다고 한다. 또 정중부를 왕의 근위병인 공학금군에 임명하였다.개화기에는 사주인이라고 해서 낙향한 권신의 집과 서울 본가를 오가며 심부름을 하던 사설 비각이 있었다. 이들도 팔을 베로 묶어 통증을 느끼도록 했다. 눈에 띄는 것은 팔을 베로 묶은 다음 그 속에 일종의 신분증명서인 신표를 넣었다는 점이다. 신표에는 ‘교동 아무개 재상 댁 사주인이다’라고 적혀 있었다. 그것만 있으면 어디든 무사통과했고 관가에서 숙식을 제공받을 수 있었다.가난한 물장수는 어떻게 출셋길에 올랐나조선 말, 비각 출신은 아니지만 빠른 걸음 덕분에 출세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이용익이다. 이용익은 한말의 정치가로 황실 재정을 담당했던 인물이다. 어느 날 명성황후의 조카 민영익이 명성황후를 찾아와 말했다.“중전마마, 물장수 가운데 걸음이 무척 빠른 사람이 있습니다. 500리 길을 11시간 만에 간다고 합니다.”“그게 정말인가? 500리라면 보통 5~6일이 걸릴 텐데.”“보통 사람이라면 그렇지요. 하지만 그 물장수는 전라도 전주에서 한양까지 11시간 만에 올라왔답니다.”명성황후는 고종에게 이 물장수 이야기를 전했다. 고종 역시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이에 명성황후는 그를 시험해보자고 제안했다.“전주 감사에게 봉서를 내리시고, 그 답서를 물장수에게 시켜 한양으로 가져오게 하는 겁니다. 답서에는 반드시 물장수가 전주 감영을 출발한 시간을 적어 보내라 하고요.”고종은 명성황후가 시킨 대로 전주 감사에게 부채 1,000개를 만들어 바치라는 내용의 봉서를 내렸다. 그리고 걸음이 빠르다는 물장수를 시켜 한양으로 답서를 보내라 분부했다. 전주 감사는 물장수가 전주 감영을 출발할 때 시간을 적어 보냈다. 오전 7시였다. 답서가 궁궐에 도착한 시각은 당일 오후 6시. 소문은 틀리지 않았다. 정말로 그는 전주에서 한양까지 11시간 만에 도착했다. 이 물장수가 바로 함경북도 명천의 가난한 말 장수의 아들 이용익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걸음이 빨라 말꼬리를 잡고 뛰었다고 한다.명성황후가 임오군란을 피해 경기도 장호원으로 피난을 갔을 당시, 이용익의 특기가 발휘되었다. 그는 고종이 명성황후에게 보내는 편지와 답신을 신속하게 배달했다. 명성황후는 감사의 의미로 그에게 정6품 감관 벼슬을 내렸다. 그 뒤에도 이용익은 고종과 명성황후의 신임을 받으며 탁지대신·군부대신을 맡는 등 출셋길을 걸었다.독립을 향해 걷고, 또 걷다빠른 걸음 하면 생각나는 독립운동가들이 있다. 먼저 강원도 춘천 출신의 독립운동가 박유덕이다. 그는 기미년 3·1 만세운동 때 춘천 경찰서 순사였다. 3·1 만세운동으로 수십 명이 경찰서에 잡혀 오자 그들을 모두 풀어주고 만주로 달아나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그로부터 10년 뒤인 1929년, 박유덕은 다시 국내로 돌아와 만세운동 10주년을 기념하며 화천에서 대대적인 만세운동 계획을 세운다. 수천 장의 격문을 뿌리는 거사를 모의하다가 발각, 서울로 피신했으나 일경에게 붙잡히고 말았다.그런데 박유덕에 관한 눈에 띄는 기록이 있다. 한 번도 차를 이용하지 않고 전국을 도보로만 다녔다는 것. 그는 하루에 250리를 걷는 준족으로 서울에서 진주까지 3일 만에 걸어 주파했다고 한다.한편 독립운동가 안경신은 1920년 임신한 몸으로 광복군 총영 결사대에 참가하고, 평양 시내 일제 통치기관에 폭탄을 터뜨리기 위해 국내로 잠입했다. 그는 장덕진·박태열 등의 동지와 함께 1920년 5월 도보로 상하이를 출발하여 8월 1일 평양에 도착했다.이들은 모두 조국의 광복을 위해 먼 길을 걷는 수고도 기꺼이 감수했다. 일제의 삼엄한 경계망을 뚫고 두 다리에 의존하여 국내외를 걸어 다녔을 독립운동가들을 생각하니 절로 고개가 숙여질 뿐이다. 독립운동가에게도 잘 걷는다는 것은 중요한 임무였던 셈이다. 신현배역사와 전통문화에 대해 관심이 많은 역사칼럼니스트. 저서로는 역사 이야기 『엉뚱 별난 한국사』, 『엉뚱 별난 세계사』, 『2000년 서울 이야기』, 『세계사로 배우는 법 이야기』, 전통문화 이야기 『소중한 우리 문화 지식 여행』 시리즈 등이 있다.]]> Mon, 01 Oct 2018 13:12:45 +0000 22 <![CDATA[실천의 힘, 길영희 역사에서 찾은 오늘]]> 글 이성주 역사칼럼니스트실천의 힘, 길영희 독립운동가의 삶이란 대개 고단하고 힘들다. 그러나 독립운동가 길영희 선생의 일화를 듣고 있노라면 슬그머니 미소가 떠오른다. 그가 순탄하게 살았다는 의미가 아니다. 자신의 철학을 삶으로 실천했다는 것. 그리고 후학들에게 삶의 성취를 남겨주었다는 것. 이 정도면 꽤 성공한 인생이 아닐까? 생각과 일치한 삶을 살다▲ 독립운동가·교육자 길영희 ▲ 1900년 평안북도 희천 출생 ▲ 평양고등보통학교 졸업 후 경성의학전문학교 입학 ▲ 1919년 3·1 만세운동에 학생 대표로 참여하다 투옥 ▲ 3·1 만세운동을 이유로 경성의학전문학교에서 퇴학. 배재고등보통학교 편입 ▲ 1929년 히로시마고등사범학교 졸업 ▲ 3·1 만세운동 참여 이력 때문에 공립학교에서 임용 거절. 배제고등보통학교와 경신학교 교사로 부임 ▲ 1938년 인천에 ‘후생농장’ 건설. 청년들을 대상으로 강습회를 여는 등 농촌계몽운동에 투신 ▲ 1954년 인천 제물포 고등학교 설립. 교장 겸임 ▲ 1962년 정년퇴임 후 충청남도 덕산에 가르실 농민학교 설립 ▲ 1984년 3월 1일 사망3·1운동·안창호·교육이 세 개의 단어는 길영희의 삶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학생대표로 3·1운동에 참여한 이력은 평생 그를 쫓아다녔다. 일제강점기에는 사회생활조차 힘들 정도로 큰 압박이 되었다. 학교에서 쫓겨나고 취업도 어려웠다. 그러나 길영희는 3·1운동에 참여한 일을 결코 후회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외려 독립의 의지를 강하게 북돋을 뿐이었다. 창씨개명에 대한 압력 또한 끝까지 견뎌냈다.길영희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이 바로 안창호 선생이다. 그는 안창호의 가르침에 따라 독립운동에서 교육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유한흥국(流汗興國), 즉 땀 흘려 일하여 나라를 일으키자는 교육 목표를 세웠다. 후생농장을 열어 성인 교육에 매진하기 시작했다. 해방 후에도 민족교육에 전념하며 학생들을 가르쳤다. 1954년 설립된 제물포 고등학교는 이러한 노력과 철학의 총체이다. 길영희는 초대교장으로 취임한 뒤 다시금 자신의 교육철학을 되새겼다.“학식은 사회의 등불, 양식은 민족의 소금”제물포 고등학교의 교훈(校訓)이었다. 학교는 대한민국 최초 무감독 시험을 시행했다. 길영희는 유한흥국의 교육목표에 따라 학교 도서관을 지을 때는 직접 벽돌을 나르며 구슬땀을 흘렸다. 철학에 모자람 없는 삶을 살았던 셈이다.양심의 1점은 부정의 100점보다 명예롭다지금도 제물포 고등학교에서는 무감독 시험을 치른다. 이때 학생들은 “양심의 1점은 부정의 100점보다 명예롭다”라는 선언을 한다. 1956년부터 이어온 전통이다.길영희는 철학을 생각으로만 남겨두지 않고 삶으로 실천했다. 일제강점기 일본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를 고민하던 그는 ‘교육’에서 해답을 찾았다. 이때부터 민족교육에 모든 것을 내던졌다. 물론 단순히 책상 앞에 앉아 지식을 쌓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었다. 길영희는 땀 흘려 일해 나라를 발전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실천했다.‘실천의 힘’이란 말이 있다. 아무리 좋은 계획을 세워도 실천에 옮기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냉정히 말해 세상에 해내지 못할 만큼 어려운 일은 없다. 마라톤을 예로 들어보자. 42.195㎞의 거리를 계속 달려야 끝이 나는 운동, 마라톤. 전문 마라토너의 경우 완주를 위해 2시간 내내 달려야만 한다. 거꾸로 말하면 달리기만 하면 된다. 그저 달려서 골인 지점에 닿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마라톤에 쉽게 도전하지 못하는 것일까? 간단하다. 힘들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면서 맞닥뜨리는 수많은 과제와 도전들은 생각보다 쉽다. 원리나 기술은 앞서 도전했던 사람들의 경험을 통해 알 수 있다. 문제는 그다음,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과정’에 있다. 여기엔 고통이 수반된다. 고통을 받아들이겠다는 단단한 마음만 있다면 삶에서 어려운 일은 없다.길영희를 비롯한 많은 독립운동가의 삶이 그랬다. 옳은 길이라는 믿음만으로 ‘그냥’ 했다. 고통을 감내하겠다는 각오가 선 다음에 남은 것은 실천뿐. 중요한 것은 이 실천이 교훈이 되어 후대에 남겨졌다는 사실이다. 제물포 고등학교에서 처음 시작한 무감독 시험이 60년의 전통이 된 것처럼, 한 사람의 철학이 행동이 되고 그 행동이 문화와 정신이 되어 수십 년을 이어왔다. 어쩌면 인생은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보다 쉬운 지도 모르겠다. 이성주시나리오 작가 겸 역사칼럼니스트. 대중과 함께 호흡하는 글쓰기를 목표로 『조선의 민낯』, 『왕들의 부부싸움』과 같은 역사서를 출간한 바 있다. 최근에는 국제정치와 관련된 연구 및 집필에 열중하고 있다. 『전쟁으로 보는 국제정치』 시리즈 1, 2, 3권을 출간 중이다.        ]]> Mon, 01 Oct 2018 10:43:36 +0000 22 <![CDATA[물드는 계절 ]]> 물드는 계절바스락지친 발끝에서 부서지는 낙엽 소리를 듣고서야가을이 왔음을 알았습니다.단풍은 무채색의 도시를 가장 예쁜 색으로 물들이고사람들은 그 아래서 저마다의 이야기를 풀어놓습니다.문득 걸음을 멈추고 친구에게 전화를 겁니다.오랜만이다. 잘 지냈지?친구와의 오래된 추억들을 쏟아내며 집으로 가는 길가을이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단풍도, 도시도, 그리고 희미하게 바랬던 추억마저선명하게 물드는 계절이니까요.]]> Mon, 01 Oct 2018 09:32:53 +0000 22 <![CDATA[가장 심모원려(深謀遠慮)한 독립운동 다시 만난 그날]]> 글 권경률 역사칼럼니스트가장 심모원려(深謀遠慮)한독립운동 매월 대한민국의 광복과 관련된 핵심사건을 선정하여 그 치열했던 역사의 순간을 재구성하고자 한다. 다시 만난 그날, 이번 달의 주제는 ‘조선어학회 사건’이다. 조선어학회는우리 말과 글을 연구하며 한글 보급에 힘썼다. 그리고일제는 이들의 한글운동에 ‘유죄’를 선고했다. alt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고초를 겪은 지도자들alt조선어학회의 주역 최현배 선생alt한글운동을 펼치다 순국한 이윤재 선생민족 말살에 맞서다 고초를 겪은 한글운동1942년 10월 1일 이윤재·한징·최현배·이극로 등 조선어학회 회원 11명이 일본 경찰에 붙잡혀 함흥으로 끌려갔다. 우여곡절 끝에 『조선어대사전』 원고를 출판사에 넘기고 편찬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는데 날벼락을 맞은 격이었다.발단은 사소했다. 7월 함흥 영생여학교 학생이 기차에서 조선말을 사용하다가 경찰에 적발되었다. 당시 일제는 태평양전쟁의 광기에 사로잡혀 조선인을 철저히 복종시키고자 ‘민족말살정책’을 강화하는 중이었다. 겉으론 ‘황국신민(皇國臣民)’, ‘내선일체(內鮮一體)’를 운운하며 우대하는 듯 보였지만 실상은 폭압이었다. 공공장소에서 조선말을 쓰는 일조차 문제 삼았고 어린 여학생이라고 해서 봐주는 법도 없었다.여학생은 함흥 홍원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았다. 형사들은 불온사상을 점검한다며 그의 일기장까지 들추었다. 어떻게든 꼬투리를 잡아 사건을 키울 속셈이었다. 결국 여학생이 다니던 학교의 교사였던 정태진이 수사망에 걸려들었다. 학생들의 민족의식을 고취했다는 것이 수사의 이유였다. 공교롭게도 정태진은 『조선어대사전』 편찬에 관여하고 있었다. 일본 경찰은 그를 심문해 조선어학회가 민족주의자 ‘소굴’이며 독립운동을 도모하고 있다는 진술을 받아냈다. 기다렸다는 듯 조선어학회에 일제의 마수가 뻗었다. 사실 이것은 잘 짜인 각본에 따라 진행된 기획 수사였다. 일제는 진즉 조선어학회를 주시하고 있었다.조선어학회에는 3·1운동 및 임시정부 관계자·대종교 신자·신간회 회원·피압박민족대회 참가자 등 사상범으로 분류된 인물들이 대거 포진하고 있었다. 그들이 한다는 한글운동 또한 일제로선 눈엣가시였다. 민족정신을 말살해야 하는데 오히려 북돋우고 있었으니 말이다.1942년 10월에 불어 닥친 검거 열풍은 이듬해 4월까지 이어졌다. 도합 33명이 붙잡혔고, 48명이 조사를 받았다. 회원이고 후원자고 가리지 않았다. 죄목은 ‘치안유지법 위반’ 일본 경찰은 조선어학회에 내란 혐의를 뒤집어씌우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취조와 심문에 능한 악질 형사들이 투입되었다. 매일같이 이어지는 혹독한 고문 속에서 함흥 홍원경찰서는 신음과 비명 소리로 아비규환을 이루었다. 1945년 10월 10일 자 『매일신보』는 그 고초를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두 팔을 묶어 천정 대들보에 매달았다. 형사 여럿이서 죽검으로 매타작을 했다. 동지끼리 맞세워 놓고 때리라고 강박하기도 했다. 콧구멍에 주전자를 대고 물을 붓는 등 야만적인 고문이 그칠 줄을 몰랐다. 선생들은 한참씩 까무러쳤다가 깨어나곤 했다.경찰은 『조선어대사전』의 원고를 증거랍시고 들이밀며 집요하게 캐물었다. 예컨대 태극기를 ‘대한제국의 국기’, 창덕궁을 ‘대한제국 황제 순종이 거처하던 궁궐’로 풀이했는데 그게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한국 독립을 추구한 것이라는 식이었다.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기소된 사람은 모두 16명. 그 가운데 이윤재와 한징은 고문 후유증을 이기지 못하고 옥중에서 운명했다. 11명은 예심과 공판을 거쳐 유죄판결을 받았다. 그 판결문에서 조선어학회와 한글운동에 대한 일제의 본심이 읽힌다.‘이 운동은 민족 어문의 정리·통일·보급을 도모하는 민족 문화운동인 동시에 가장 심모원려(深謀遠慮)한 민족운동의 점진 형태다.’ alt한글보급을 위해 펴낸 교재들alt등록문화재로 지정된 『조선말큰사전』 원고 alt조선어 표준어 사정 제3독회를 마치고(1933)alt해방 후에 간행된 『조선말큰사전』 조선어학회, 한글을 정리하고 통일하고 보급하다구한말에 한글을 연구하고 후학을 양성한 주시경은 이 일이 국가의 흥망성쇠와 직결된다고 말했다.“자기 나라의 말과 글을 도외시하면 나라의 바탕은 날로 쇠퇴할 것이요, 나라의 바탕이 날로 쇠퇴하면 나라 형세를 회복할 가망이 없을 것이다. 이에 우리나라의 말과 글을 강구하여 이것을 고치고 바로잡아 장려하는 것이 오늘의 시급히 해야 할 일이다.”나라를 잃었는데 언어까지 잃게 되면 민족 정체성을 상실하는 것은 물론 영원히 독립을 쟁취할 수 없다고, 주시경은 경고했다. 최현배를 비롯한 주시경의 제자들은 스승의 뜻을 이어받아 1921년 ‘조선어연구회’를 결성했다. 조선어학회의 전신이 된 단체였다.조선어연구회는 철자법을 연구하면서 동인지를 간행했다. 1926년에는 ‘가갸날’을 만들어 훈민정음 창제를 기념했으며 1928년부터 ‘한글날’로 바꿔 불렀다. 그러나 연구 위주 활동으로는 조선어를 말살하려는 일제의 음모를 저지하기 어려웠다. 언어 독립운동의 차원에서 조직적으로 사업을 추진할 필요가 있었다.조선어연구회는 이극로 등의 활동가들이 합류하면서 1931년 ‘조선어학회’로 거듭났다. 조선어의 연구 및 통일, 보급을 위한 중추기관으로 발전한 것이다. 조선어학회가 야심 차게 추진한 첫 사업은 맞춤법 통일이었다. 그 무렵 한글 맞춤법은 쓰는 곳에 따라 제각각이었기 때문에 나라를 대표하는 언어가 되고자 한다면 이것의 해결이 급선무였다. ‘한글 맞춤법 통일안’ 마련을 위해 3년에 걸쳐 125차례의 회의가 열렸다. 1933년 10월 조선어학회 임시총회에서 통일안이 통과되었고, 곧이어 한글날에 반포됐다. 맞춤법 통일안은 ‘표준말을 소리대로 적되 어법에 맞도록 함’을 원칙으로 삼았다. ‘중류사회에서 쓰는 서울말’을 표준말로 정한 뒤 띄어쓰기 등의 규정을 자세히 설명했다. 통일안은 지식인들로부터 많은 지지를 얻으며 신문·잡지·단행본 등에 쓰이기 시작했다.1936년 한글날에는 ‘조선어 표준말 사정안’을 발표했다. 이를 위해 1934년 사정위원회를 설치해 표준어와 표준철자를 검토하고 학교·언론사·문필가 등 500여 곳에 발송해 여론을 취합했다. 지역과 이념을 떠나 조선인 전체의 의견을 망라한 것이다. 1940년에는 ‘외래어 표기법 통일안’도 나왔다. 국내는 물론 외국 음성학 연구단체의 자문까지 구하며 정성을 들인 결과였다.조선어학회는 맞춤법·표준말·외래어의 기준을 제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일반인에게 보급하는 일에도 앞장섰다. 정리와 통일 작업을 완료했다고 해도 사람들이 쓰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었기 때문이다. 새롭게 정비한 한글은 한국인의 삶 속에 있어야 했다.회원들은 한글강습회를 열었다. 청년회·학교·종교단체 등의 외부강습회에서도 한글 강연을 했다. 노동야학과 농민학교의 한글 교육도 지원했다. 동아일보의 브나로드운동, 조선일보의 문자보급운동 또한 한글운동 차원에서 함께 이뤄졌다. 조선어학회 내에 한글교정부를 설치해 교정을 요청한 사람들의 글을 새 기준에 맞게 고쳐주기도 했다.한글 교재로는 후일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옥사한 이윤재의 『한글공부』(1931)가 사랑을 받았다. 기관지 『한글』에서도 한글 교재를 상세히 해설했다. 뿐만 아니라 혼자서도 한글을 체계적으로 배울 수 있는 단계별 공통교과서도 계획했다. 계획의 실현을 위해 조선어학회 부설 출판사를 설립했지만 고질적인 경영난과 일제 탄압으로 원하는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조선어학회는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1936년 조선어학회는 한글통일 사업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자 본격적인 사전 편찬에 나섰다. 먼저 1928년에 조직한 ‘조선어사전편찬회’의 업무를 인수하고 1937년부터 어휘를 수집했다. 수십 명의 편찬위원이 열정적으로 작업에 매달렸다. 전문용어는 학자들에게 의뢰하는 등 정확성을 높이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1939년 초 어휘 풀이를 대부분 완료했다. 11년간 수집하고 풀이하며 서술해온 대사업이 드디어 종착역에 다다른 순간이었다.조선어학회는 1940년 조선총독부에 16만 개의 어휘와 3천 장의 삽화로 이루어진 『조선어대사전』의 출판을 신청했다. 일부 삭제와 정정이라는 조건이 붙긴 했어도 허가를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 사전 원고는 꼼꼼한 수정을 거쳐 1942년 출판사에 넘어갔다. 그러나 그해 10월에 터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사전 편찬이 중단되고 말았다. 피땀 어린 원고 또한 일제에 의해 압수당하는 바람에 그 행방이 묘연해졌다.우리말을 떠나서는 하루 한때라도 살 수 없다역사가 박은식은 나라의 구성요소를 정신적인 ‘혼(魂)’과 물질적인 ‘백(魄)’으로 나누고, 혼이 멸하지 않으면 백도 망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는 식민지의 민족문화 보존이라는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지적이다. 박은식이 말한 ‘혼’을 국학, 그중에서도 한글운동이 일깨웠다.독립이란 겉으로는 나라의 주권을 지키는 일이지만 그 속은 민족문화 수호의 양상을 띤다. 국권을 회복해도 고유의 말글을 상실하면 사실상 독립으로 보기 어려웠다. 일본어가 ‘국어’였던 일제강점기. 강점이 길어질수록 조선어는 뒷전으로 밀려났다. 어린 세대가 한글사용의 기회를 잃을수록 민족의식이 옅어지는 건 불가피했다. 나중에는 독립운동을 하러 떠나는 청년들도 눈에 띄게 줄었다고 한다.이러한 현실에서 독립지사들이 조선어학회로 모여든 건 당연한 일이었다. 한글을 바로 세워야 민족정신이 살아나고 독립의지가 솟구치기 때문이었다. 조선어학회가 온갖 악조건과 탄압 속에서도 굽히지 않고 한글운동을 펼쳐나간 이유였다.그런 의미에서 한글운동은 독립운동의 귀감이 되었다. 단지 민족문화를 고수했기 때문만이 아니다. 조선어학회는 고유의 말을 계승하면서도 시대가 변화함에 따라 창조적으로 발전했다. 한글 맞춤법 통일안·조선어 표준말 사정안·외래어 표기법 통일안 등은 해방 후 한국사회의 미래를 여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그리고 10월, 사라진 『조선어대사전』 원고가 서울역 창고에서 발견되었다. 조선어학회는 1949년 한글학회로 이름을 바꾸고 1957년까지 『큰사전』 여섯 권을 간행했다. 천신만고 끝에 우리말 대사전 편찬이라는 사명을 완수한 것이다. 그 지난한 역사가 알알이 맺혀 있는 사전의 머리말은 언제 읽어도 뭉클하다.‘조선말은 우리의 무수한 조상들이 잇고 이어 보태고 다듬어서 우리에게 물려 준 거룩한 보배다. 그러므로 우리말은 우리 겨레가 가진 정신적 및 물질적 재산의 총목록이라 할 수 있으니 우리는 이 말을 떠나서는 하루 한때라도 살 수 없는 것이다.’ 권경률역사칼럼니스트. 서강대학교에서 역사학을 공부했다. 칼럼 ‘사극 속 역사인물’을 연재하고 팟캐스트 ‘역사채널 권경률’을 진행한다. 저서로는 『조선을 새롭게 하라』, 『조선을 만든 위험한 말들』 등을 출간했으며, 영상물 『시시콜콜 한국사 어워즈』도 선보이고 있다.]]> Mon, 01 Oct 2018 15:20:39 +0000 22 <![CDATA[1920년대, 시대의 빛 독립투사들 ② 겨레의 함성, 독립의 희망]]>     글 박영규 작가1920년대, 시대의 빛독립투사들 ②   1920년대 혼란의 일제강점기. 어디를 가도 어둠뿐이었던 조국의 현실에서 의지할단 하나의 빛은 독립운동가들이었다. 그들은 각기 다른 자리에서 다른 방식으로 독립운동을 했지만, 가슴에 품은 독립의 염원만큼은 누구하나 다르지 않았다.   alt월남 이상재alt만민공동회에서 연설하는 이상재alt이상재 사회장 장례식(한국은행 앞)계몽운동의 주춧돌 이상재1927년 4월 7일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사회장이 치러졌다. 월남 이상재의 장례식이었다. 이상재는 청년 시절엔 개화파 인물이었으나 갑신정변 실패 후, 낙향하여 농사를 지었다. 그리고 1887년 박정양이 내각에 돌아오면서 다시 관직에 몸담았다. 박정양이 미국 전권대사로 갈 적에는 2등서기관을 수행하였고, 귀국 한 뒤에는 관직에서 물러나 외교관들의 친목단체인 정동구락부에서 활동했다. 이어 법부참사관과 학부아문 참의 등을 지냈다. 학부 참의 시절인 1894년에 신교육령을 반포하여 소학교·중학교·사범학교·외국어학교 등 신교육제도를 마련하는데 공헌했다.1896년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일이 발생하고 친일 정권이 힘을 잃자 이상재는 의정부 총무국장으로서 탐관오리 척결에 앞장섰다. 또한 서재필, 윤치호 등과 함께 독립협회 창설에 가담했다. 만민공동회의 의장과 사회를 맡아 조직을 이끌었는데, 이를 계기로 탄핵되어 경무청에 구금되었다. 이후 황국협회 등의 방해로 독립협회마저 해산되자 이상재는 다시 낙향을 선택했다.1901년 이른바 개혁당 사건이 일어났다. 이 일로 이상재는 아들 이승인과 함께 붙잡혀 투옥되었다. 감옥에서 이승만의 권유로 기독교를 접하고 개신교인이 되었다. 출옥 후에는 ‘초갓집교회’를 설립하기도 했다.1905년 을사늑약이 있은 후 이상재는 광무황제(고종)의 부탁으로 의정부참찬 벼슬을 지냈다. 그러나 2년 뒤인 1907년 군대가 해산됨에 따라 관직에서 물러났다. 한일강제병합이 있은 후에도 일본은 이상재에게 작위와 관직을 제안했지만 거절하였고, 언론과 기독교단체에서 주로 활동했다. 당시 이상재는 대표적인 기독교 단체라 할 수 있는 YMCA에 있었다. 그곳에서 조선기독교청년회 전국연합회를 조직하고, 1920년에는 해당 단체의 회장까지 맡으면서 계몽운동을 이끌었다. 민립대학설립운동에도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이상재는 주도적으로 민립대학 기성회 출범을 도모하였지만 일제의 방해로 실패하고 말았다. 그럼에도 그는 좌절하지 않고 사회운동을 지속했다. 1925년 4월 전국 기자대회 의장이 되었으며 2년 뒤인 1927년에는 총체적 민족운동단체인 신간회 회장에 추대되었다.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이상재는 서울의 전세방에서 병사했다. 네 명의 아들 중 막내 승준만이 아버지의 임종을 지켰다. 다른 아들들은 모두 이상재보다 먼저 눈을 감았기 때문이다. 특히 차남 승인은 개혁당 사건 당시 이상재와 함께 체포되어 고문을 받아 후유증으로 사망했다.마지막으로 이상재의 풍자와 재치를 엿볼 수 있는 일화 하나를 소개하고자 한다. 한일강제병합 후 이상재는 총독부가 개최한 미술전람회에서 을사오적 이완용과 박제순 등을 마주하게 되었다. 이상재가 말했다.“대감들은 동경으로 이사 가셔야 하겠습니다.”느닷없는 말에 이완용과 박제순은 영문을 몰랐다. 그러자 이상재가 덧붙였다.“대감들은 나라 망하게 하는 데 선수가 아니십니까? 그러니 일본으로 이사 가면 일본이 망할 것 아닙니까?” alt남강 이승훈(남강문화재단 제공)alt이승훈 동상(1930.05.03.)alt평안북도 정주군 갈산면 오산에 설립된 오산학교 전경(1915, 남강문화재단 제공)민족운동의 요람, 오산학교를 설립한 이승훈1907년 도산 안창호는 평양에서 민중의 자각을 일깨우는 연설을 진행했다. 그리고 이 연설에 감동을 받은 어느 사업가가 그해 11월 24일, 오산학교라는 중등교육기관을 세운다. 유기상점과 공장을 운영하는 갑부 이승훈이었다. 이승훈의 어린 시절은 불우했다. 1864년 태어나 생후 8개월 만에 어머니를 잃었다. 그리고 10살에 아버지마저 잃으며 고아가 되었다. 이후 유기점의 사환으로 들어가 장사를 배웠다. 16살 때부터는 평안도와 황해도를 떠돌면서 행상을 했다. 1887년 24살이 되던 해에 철산에 살던 오희순에게 돈을 빌려 유기공장을 세우고 유기상점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사업은 제법 번창하는 듯했으나 1894년과 1895년에 걸쳐 지속된 청일전쟁으로 공장과 상점이 모두 무너져 버렸다. 그는 다시 오희순에게 돈을 빌려 공장과 상점을 일으키고 사업을 확장했다. 어느새 이승훈의 사업 영역은 유기공장뿐 아니라 무역업과 운송업으로 확대되었고, 석유와 종이, 양약 등을 거래하며 큰 수익을 올렸다. 덕분에 전국에서 손꼽히는 부자가 되었다. 그러나 1904년 러일전쟁 발발과 함께 군수사업에 돈을 댔다가 전쟁이 예상보다 빨리 끝나는 바람에 큰 손해를 입고 낙향했다.몇 년간의 은둔 생활 후, 이승훈은 1907년 헤이그 특사 파견과 평양에서 접한 안창호의 연설을 계기로 민족운동에 뛰어들 결심을 한다. 그 첫 번째 사업이 바로 교육운동이다. 이승훈은 한국 민중을 자각시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교육이 우선시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초등교육기관인 강명의숙에 이어 중학교인 오산학교를 설립했다. 오산학교에는 조만식, 윤기섭 등이 교사 또는 교장으로 재직하며 많은 인재들을 양성해냈다. 또한 독립운동 비밀결사인 신민회에 참여하여 평안북도 총관이 되었으며, 항일청년단체 청년학우회의 발기인으로 활동하기도 했다.그런 가운데 한일강제병합이 단행되었다. 1911년 황해도 신천 지방에서 안중근의 사촌동생 안명근이 무관학교 설립을 위한 자금을 모집하려다가 발각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일명 안악사건. 이 일에 연루되어 있던 이승훈은 관련인물 160여 명과 함께 검거, 제주도에서 유배생활을 하게 된다. 잇따라 발생한 105인 사건으로 징역 10년 형을 선고받았으나 1915년 가석방되었다.이승훈은 옥고를 치르는 동안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출옥한 뒤에는 50이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평양신학교에 진학하였고, 기독교 장로가 되어 기독교 지도자의 길을 걸었다. 3·1운동 당시 이승훈은 기독교측 대표로서 민족대표 33인에 이름을 올렸으며 3·1운동 주모자로 지목되어 3년 동안 마포형무소에서 복역했다.1922년 감옥에서 나온 이승훈은 이상재와 함께 조선교육협회를 만들고 민립대학설립운동에 앞장섰다. 조만식과 물산장려운동을 이끈 장본인이기도 하다.한편 자신의 마을인 용동을 중심으로 이상촌 건설의 계획을 세우고 ‘자면회’라는 조직을 만들었다. 자면회는 근면·청결·책임 등의 정신을 내세우며 농지개량·연료개량·협동생산·협동노동·소득증대를 목표로 했다. 이를 위해 용동 주변 7개 마을과 연계하여 협동조합과 소비조합을 결성했다.오산학교는 이승훈이 3·1운동으로 투옥될 당시 일제에 의해 폐교되었으나, 1920년 9월 다시 문을 열어 200여 명의 학생들을 받아들였다. 이승훈은 1925년 오산학교를 재단법인으로 인가받고 초대 이사장이 되었다.이후로도 이승훈은 1930년에 생을 마감할 때까지 꾸준히 민족운동과 교육운동에 투신했다. 그는 죽기 전 자신의 유골을 해부하여 학생들의 학습에 이용할 수 있도록 생리학 표본으로 만들어달란 유언을 남겼지만 일제의 방해로 실현되지는 못하였다. 박영규1996년 『한 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을 내면서 저술활동을 시작하여, 1998년 중편소설 『식물도감 만드는 시간』으로 문예중앙신인상을 수상하면서 소설가로 등단했다. 문학, 철학, 역사 분야에 걸쳐 저술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대표적인 역사서로는 『한 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 · 『한 권으로 읽는 일제강점실록』 등이 있다.]]> Mon, 01 Oct 2018 14:49:34 +0000 22 <![CDATA[명화로 보는 세계사 글 고종환 아주대학교 외래교수]]>     글 고종환 아주대학교 외래교수  노동자, 역사의 주인공이 되다프랑스 2월 혁명 화가 오노레 도미에는 19세기 프랑스를 살았다. 이 시기 프랑스는 정치·사회적으로 가장 큰 격변을 겪고 있었으므로, 그가 풍자화를 그리게 된 것은 선택이 아니라 운명인지도 모르겠다. 대개의 풍자화가 그러하듯 오노레 도미에의 그림에도 시대를 향한 냉소와 비판이 있다. 동시에 혁명의 주체가 되는 소시민들을 따뜻하게 응시했다. 그의 풍자화가 특별한 이유였다. alt봉기  1860, 오노레 도미에(Honoré Daumier), 필립스 컬렉션, 워싱턴DC19세기 프랑스 사회와 풍자화오노레 도미에는 프랑스 풍자화의 대가로 알려져 있다. 가장 유명한 작품으로는 <삼등열차>가 있다. 그는 1830년 잡지 『라 카리카튀르(La Caricature)』 창간에 관여하고 그 지면에 풍자만화를 게재하면서부터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같은 해 국왕 루이 필립을 비판하는 정치만화를 기고하였다가 6개월의 금고형을 선고받고 투옥되었는데, 2개월은 감옥에서 보내고 나머지 4개월은 정신병원에 감금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오노레 도미에는 풍자화 작업을 멈추지 않았다. 이에 당국은 모든 신문과 잡지에 도미에의 정치풍자 캐리커처를 전면 금지했다.풍자화의 전통은 고대부터 있었지만 정치 풍자화가 미술의 장르로 자리 잡은 것은 오노레 도미에가 활발히 활동했던 19세기 프랑스에서였다. 19세기 프랑스는 혁명의 나라이자 신문과 잡지의 나라였다. 산업화와 도시화로 급변하는 사회 속에서 사람들은 새로운 소식을 빠르게 얻기 위해 신문과 잡지를 읽었다. 게다가 1789년 프랑스 대혁명에 이어 1830년 7월 혁명, 1848년 2월 혁명 등 급격한 사회변화를 겪었으니, 풍자화의 발전은 당연한 일이었다.프랑스 2월 혁명은 어떻게 유럽을 바꿨나프랑스의 영웅 나폴레옹이 세인트헬레나섬으로 유배를 간 사이 프랑스에 맞서던 몇몇 나라들은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에 모여 ‘빈 체제’를 결성한다. 체제의 핵심은 유럽에서 시민들이 주도하는 자유주의를 허용하지 말고 절대왕정을 유지하자는 것. 그러나 이들의 약속은 유럽 전역에 흐르는 혁명의 물줄기를 거스를 순 없었다.1830년 7월 혁명으로 왕이 된 루이 필립은 권력의 정점을 맛본 뒤 자신을 권좌에 올려준 시민들의 열망을 꺾고 다시 왕정복고로 회귀하고자 했다. 크게 실망한 프랑스 민중들은 루이 필립에 대항하는 새로운 혁명을 시도하는데, 그것이 바로 1948년 일어난 2월 혁명이다.가장 먼저 루이 필립의 입헌군주제에 대해 프랑스 노동자 계급이 강한 저항을 보였다. 저항은 계급투쟁 성격의 노동운동으로 확산되었고, 여기에 산업자본가들도 합세해 공정한 선거권 확대를 요구하며 나섰다. 2월 혁명의 시작이었다. 결국 루이 필립은 프랑스를 떠나 영국으로 망명했다. 시민의 힘으로 왕이 되었던 그는 다시 시민 혁명에 의해 권좌에서 내려오게 된 것이다. 또 혁명 후 보통선거 제도가 도입돼 노동자와 농민 계층의 남성도 선거권을 가지게 되었다.2월 혁명의 가장 큰 의미는 유럽 자유주의 혁명의 신호탄이 됐다는 점이다. 같은 해 3월, 오스트리아에서 빈 폭동이 발생해 왕궁과 국회가 공격당했고, 프로이센에서도 전국적 형태를 띤 혁명이 일어났다. 이탈리아에서는 민족주의 운동이 발생하여 새로운 공화국 설립까지 이어졌으나 오스트리아의 개입으로 진압되었다. 마찬가지로 동유럽에서도 자유주의 및 민족주의 운동이 광범위하게 전개되었는데, 특히 헝가리가 가장 거셌다. 오스트리아의 지배하에 있던 헝가리는 프랑스와 오스트리아가 혁명으로 몸살을 앓는 동안 1849년 독립을 쟁취한다.이처럼 프랑스 2월 혁명은 프랑스 주변국들은 물론이고 강대국의 억압 아래 놓여 독립을 염원했던 동유럽 국가들에까지 혁명의 단초를 제공했다.노동자를 보는 오노레 도미에의 눈오노레 도미에는 1860년경 52세의 나이에 <봉기>를 완성했다. 이는 그가 중년에 겪었던 1948년 2월 혁명을 회상하며 그린 것이다. <봉기>를 보면 연상되는 그림이 있다. 바로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이다.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에서 들라크루아가 투사적인 여인을 전면에 내세웠다면, 도미에는 평범하고 가난한 소시민을 앞세웠다. 꼬질꼬질한 흰 옷과 모자, 다소 겁에 질린 표정. 불끈 주먹을 쥔 오른손을 위로 쳐든 사나이는 폭력적이라기보다 마치 자신의 절박한 처지를 호소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그렇다면 사나이의 정체는 무엇일까? 어떤 사람이기에 시위대의 가장 앞에 서 있는 것일까? 그는 그저 가난한 노동자였다. 역사에서 단 한 번도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던 사람. 그림 <봉기>에는 이들 노동자를 향한 도미에의 애정이 잘 드러나 있다. 오노레 도미에의 그림은 말한다. 이제 노동자가 역사의 주인공으로 등장했다고. 고종환한국 프랑스문화학회의 재무이사이자, 아주대학교와 경상대학교 외래교수. 프랑스 문화와 예술, 서양연극사, 광고이미지 등을 강의하고 있다. 대표 저서로는 『한권으로 읽는 연극의 역사』와 『오페라로 배우는 역사와 문화』, 『글로벌 다문화교육』이 있다.]]> Mon, 01 Oct 2018 16:36:17 +0000 22 <![CDATA[낙지의 맛있는 위로 한 접시의 추억]]>     글 윤덕노 음식문화평론가낙지의 맛있는 위로 가을 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해산물로 전어와 대하가 있다. 옛날 사람들은여기에 낙지를 빼놓지 않았다. 낙지는 갯벌의 산삼이라 불리며보양음식으로 사랑받았다. 먹으면 기운이 솟는 다는 낙지. 서민들의들끓는 애환을 달래고 힘이 되어준 것도 이 여덟 다리를 가진 산삼이었다 우리 민족의 뿌리 깊은 낙지 사랑우리나라 사람들은 낙지를 정말 좋아한다. 일단 먹는 방법도 다양하다. 낙지볶음·낙지회·낙지 탕탕·낙지 호롱이·낙지 연포탕 등 당장 생각나는 요리법만 해도 여러 개다. 중국이나 일본은 문어와 낙지를 구분하지 않는 반면 우리는 문어와 낙지, 심지어는 주꾸미까지 세분화했다. 그만큼 우리가 낙지, 또는 해산물을 좋아하기 때문일 것이다.우리 낙지 사랑의 역사는 꽤 뿌리가 깊다. 조선 후기 다산 정약용은 전라남도 강진에서 유배 생활을 하며 다음과 같은 내용의 시 ‘탐진어가(耽津漁歌)’를 남겼다."어촌 마을에서는 모두 낙지로 국을 끓여 먹으며,붉은 새우와 맛 조개는 쳐주지도 않는다."바다의 참맛을 아는 바닷가 사람들이 대하나 맛 조개 따위는 쳐주지도 않고 낙지를 최고로 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흑산도로 귀양을 간 정약용의 형 정약전 또한 ‘자산어보(玆山魚譜)’에서 ‘낙지는 사람의 원기를 돋운다’며, ‘낙지를 먹으면 쓰러져 가는 소도 일으켜 세운다는 소리가 있다’고 설명했다. 두 형제의 낙지 예찬이 이만저만이 아닌 셈이다.『홍길동 전』을 쓴 허균은 미식가로도 유명했다. 그는 도문대작이라고 하여 팔도의 맛있는 음식을 품평한 글을 남겼다. 여기에 낙지에 대한 평가는 고작 한 줄뿐이다. 낙지는 서해안에서 잡히는데, 맛 좋은 것이 너무 잘 알려져 있기 때문에 특별히 자세히 적을 필요가 없다며 평론을 생략한 것이다. 즉, ‘두말하면 잔소리란’ 얘기다.우리나라 사람들이 유별나게 낙지를 좋아했던 이유는 우리 바다에서 잡히는 낙지가 특별히 더 맛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먼 옛날부터 한반도 낙지는 특산품으로 이름을 떨치며 발해와 당나라와의 교역품목에서 빠지지 않았다.무교동 낙지와 조방낙지많은 낙지 요리 중에서도 아마 가장 많은 사랑을 받는 것은 ‘낙지볶음’일 것이다. 그리고 낙지볶음의 양대 산맥을 이루는 것이 서울 무교동 낙지와 부산 조방낙지다. 이들 낙지요리는 무엇보다 우리 근현대사의 희로애락을 담고 있다.부산의 명물, 조방낙지의 ‘조방’은 낙지와는 전혀 상관없는 조선방직(朝鮮紡織)의 준말이다. 방직공장의 이름이 낙지에 붙다니, 이 어울리지 않는 조합은 일본에 의해 만들어졌다. 일제강점기 부산시 동구 범일동 자유시장 자리에 조선방직이라는 회사가 있었다. 조선방직은 1917년 일본인이 세운 회사로, 가혹한 노동조건과 노동탄압으로 악명높았다. 그리고 공장 옆에는 낙지볶음 골목이 있었다. 조선방직에서 근무하던 조선인 노동자들은 퇴근 후 이곳에서 끼니를 때웠다. 자유시장이 들어선 후에는 외지 상인들이 낙지볶음으로 요기를 했다. 이들이 각자의 생업 터전으로 돌아가 입소문을 내면서 전국적으로 조방낙지가 유명세를 탔다.무교동 낙지는 서울 무교동과 서린동 일대에 있던 낙지 골목 때문에 생겨난 말이다. 지금이야 재개발로 많이 사라졌다지만 이곳 역시 좁은 골목 사이로 낙지볶음집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었다. 특히 1970~80년대에는 대학생과 월급쟁이들의 집합장소였다. 통기타와 청바지로 상징되던 그 시절의 젊은이들은 매콤한 낙지볶음을 안주 삼아 찌그러진 양은 술잔에 막걸리를 담아 마셨다. 사실 이 일대는 조선시대부터 음식점이 발달한 곳으로 과거를 보러 온 선비들이 여기서 숙식을 해결하곤 했다. 1990년대까지 서울의 대표적인 음식 거리였으니, 이곳에 추억을 묻은 이들도 많을 터였다.일제강점기 방직공장 노동자들의 고된 노동과 시장 상인들의 치열한 하루, 그리고 1970~80년대 젊은이들의 추억까지. 낙지가 서민음식이라 불린 이유는 단지 서민들이 즐겨 먹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낙지에는 그 시절 눈물 나게 맵고 쫀득쫀득 고소한 낙지볶음의 맛을 닮은 서민들의 애환이 있다.올가을에는 낙지볶음을 추천한다. 제철을 맞아 맛있기도 하지만, 여전히 녹녹치 않은 세상살이를 헤쳐나갈 힘을 얻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윤덕노음식문화평론가. 1984년 매일경제신문사에 입사해 20여 년간 기자 생활을 하면서 특파원 활동, 출장, 연수 등으로 미국과 중국을 비롯한 다양한 나라에 머물렀다. 음식에 관심이 많아 관련 자료를 수집해온 결과, 음식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주요 저서로는 『음식잡학사전』, 『신의 선물 밥』, 『붕어빵에도 족보가 있다』 등이 있다.]]> Mon, 01 Oct 2018 17:01:48 +0000 22 <![CDATA[몸과 마음으로 만나는 늦가을의 풍치 여행에 숨은 역사]]> 글 사진 김초록 여행칼럼니스트몸과 마음으로만나는늦가을의 풍치-경상북도 상주- 어느덧 가을이 저문다. 천지사방에 색색의 가을빛을 흩뿌렸던 생명들은 겨울 준비에 여념이 없다. 백두대간 동쪽 자락에 안긴 상주도 벌써 겨울 채비에 들어갔다. 상주는 어딜 가나 산과 골이 앞을 막아서니, 두 가닥 혹은 한 가닥 길이 그사이를 가로지르며 빼어난 경치를 선물한다. alt산·강·들을 벗삼아 걷기 좋은 낙동강길alt상주에서 생산되는 감은 품질이 좋기로 유명하다 상주의 명물을 찾아서상주 여행은 중부내륙고속도로 함창·점촌 나들목에서 시작한다. 지도를 펴면 이곳에 명주박물관이 있다. 상주는 예부터 ‘삼백의 고장’이라 불릴 만큼 삼백이 유명했다. 삼백이란 흰색을 띤 특산물, 즉 쌀과 목화, 누에고치 등을 일컫는다. 요즘은 목화 대신 곶감이 상주 농가의 주요 소득원이다. 우리나라 곶감의 60%가 상주에서 난다고 하니 효자 노릇을 제대로 하고 있는 셈이다명주박물관은 친환경 섬유 소재인 명주를 널리 알리기 위해 만든 시설이다. 누에고치가 실이 되고, 다시 실이 명주(비단)가 되는 과정을 전시하고 있다. 명주 섬유는 누에고치에서 뽑아낸 단백질이 주성분인데 보습성이 뛰어나 정전기 방지와 세균 번식 억제·자외선 차단·피부보호에 좋다. 명주 주산지로 알려진 함창읍에는 박물관을 비롯해 명주 판매장·명주제품 체험장·장수직물공장·홍보전시관을 둔 명주테마파크가 있다.명주박물관에서 5분 거리에 독립운동사적지가 있다. 함창읍 태봉리 109-1번지 일대. 이곳은 일제의 국권침탈에 맞서 의병들이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던 곳이다. 이른바 태봉전투다. 당시 일본군 병참부대가 주둔했던 곳이지만 지금은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다. 의병들은 일본군의 서슬 퍼런 무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제방을 사이에 둔 채 치열한 접전을 벌였다. 두 차례에 걸친 싸움 끝에 일본군에게 제방을 빼앗기고 군세에 밀려 퇴각하고 말았다. alt낙동강변에 있는 퇴강성당alt경천대 전망대에서 내려다보이는 낙동강1234 낙동강 1,300리 물길, 상주에 닿다강원도 태백 황지에서 시작하는 낙동강 1,300리 물길은 상주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다. 그 유장한 물길을 따라간다. 낙동강 물길이 시작되는 사벌면은 예천·문경과 닿아있다. 삼국시대 초 사벌국이 있던 곳이기도 하다. 낙동강은 상주 땅을 적시며 숱한 비경을 만들어 놓는다.퇴강리 낙동강변에 자리한 퇴강성당은 경부 북부 지방의 대표적 성당으로, 1956년에 지어졌다. 화려하기보단 검소하고 정갈한 시골성당에 가깝다. 작은 성당 주변으로 고즈넉한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낙동강을 굽어보는 비경, 경천대도 지척에 있다. 경천대경상북도 상주소통하다로 가기 전에 충의사에 잠시 들렀다.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으로 활약한 정기룡 장군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육지의 이순신’이라 불렸다고 하니 얼마나 대단한 인물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사당 옆에는 유물전시관이 있어 그의 사상과 일생을 더듬어볼 수 있다.경천대는 하늘이 내린 선물이다. 우거진 노송과 깎아지른 절벽, 기이한 모양의 암석, 그 아래 흐르는 강물까지 과연 절경이라 할만하다. 자천대(自天臺)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는데, 이는 곧 하늘이 만들었다는 뜻이다. 강 건너 모래사장이 볕을 받아 반짝인다. 정기룡 장군이 그의 용마와 함께 뛰놀던 곳이란다. 또 경천대 한쪽에는 정기룡 장군이 바위를 파서 만들었다는 말 먹이통(구유통)이 남아 있다. 경천대 전체를 보려면 전망대에 올라야 한다. 3층짜리 팔각정 전망대에서 경천대와 낙동강을 바라보노라면 탄성이 절로 나온다. 문득 안동 하회마을의 부용대와 예천 회룡포가 떠오르기도 하지만 마을과 강이 빚어내는 자연미는 그보다 훨씬 빼어나다.도보길(MRF 이야기 길)도 뚫렸다. 낙동강을 따라 이어진 길은 산길과 강길, 들길이 어우러져 걷는 재미가 있다. 낙동강 상주보 쪽에서 도남서원을 지나 비봉산을 끼고 경천대-매협리(낙동강 둑길)-상풍교-퇴강리(퇴강성당)-낙동강 700리 표지석으로 이어지는 강변길은 그 자체가 한 폭 그림과 같다. 특히 비봉산 정상의 전망대로 오르는 길이 장관이다. 발아래 흐르는 낙동강을 따라 걷다 보면 금세 정상을 마주한다.경천대 근방에 자전거 박물관과 국립낙동강생물자원관이 있다. 자전거는 곶감과 함께 상주의 명물로 꼽힌다. 상주는 지역 전체가 평평한 분지 지형이기 때문에 자전거를 타고 달리기에 적당하다. 도심 외곽 자전거 전용도로엔 재생고무 매트까지 깔려 있다. 자전거 보급률과 수송 분담률도 단연 전국 1위다. 버스와 택시가 드문 이유도 여기에 있다. 박물관에는 다양한 종류의 자전거가 전시돼 있다. 목마에 바퀴를 달아 페달 없이 땅을 치며 나아가는 세계 최초의 자전거 드라이지네와 첫 페달식 자전거인 맥밀런자전거, 의류 상표로 눈에 익은 오디너리 등 희귀품 수십여 점이 있다. 그러나 자전거는 보는 것이 아니라 타는 것. 자전거 박물관답게 이곳에서는 자전거 무료 대여 서비스도 운영하고 있다.국립낙동강생물자원관은 규모가 꽤 크다. 환경부 산하 담수생물 전문 연구기관으로 유전자원은행 구축·유용자원 배양기술 확보·맞춤형 바이오산업 지원 등 생물자원의 수장과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상주보 아래 있는 ‘나각산 숨소리길’도 근사하다. 길은 나각산과 낙단보, 낙동강 역사이야기관으로 이어진다. 속리산에서 뻗은 산줄기가 낙동리 마을에 이르러 뾰족한 산을 만들었는데, 그것이 바로 나각산이다. 산의 형상이 소라를 닮았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 나각산 테라스 전망대에 서서 바라보는 낙동리 들판이 시원스럽다. alt상주 남산근린공원에 있는 항일독립의거기념탑alt노음산 자락에 있는 고찰, 남장사 임진왜란과 독립운동의 현장상주 시내 한복판엔 임진왜란에서 활약한 곽재우 장군과 무명용사를 기리는 충렬사와 비각, 기념관이 있다. 이곳에서 조선군과 왜군 주력부대가 처음 맞닥뜨렸다고 한다. 전쟁의 유물을 전시하고 있는 임란기념관과 당시 순국한 열사들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충렬사)에서 잠시 참배의 시간을 가졌다.상주 독립운동은 이안면 소암리와 화북면 장암리, 운흥리, 화서면 신봉리 지역을 중심으로 일어났다. 상주에도 수백 명의 독립운동가가 체포되고 옥고를 치른 아픈 역사가 있다. 상주 시내 남산근린공원에는 1919년 3월 23일 상주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을 기리는 ‘항일독립의거기념탑’이 있다.보은과 상주를 잇는 25번 국도변에 있는 오래된 사찰로 향한다. 남장사다. 정확히 말하면 남장마을 노음산 밑에 있는 절이다. 철조비로자나불좌상과 목각탱이 있는 보광전이 유명하다. 남장사를 병풍처럼 두른 노음산은 갑장산, 천봉산과 함께 상주 3악으로 불린다. 잔디 깔린 절 마당에 서니 풍경이 소리처럼 들려온다.공검면 양정리의 공검지는 삼한시대에 쌓은 수리시설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라 한다. 이곳 사람들은 ‘공갈못’이라 부르곤 한다. 제천 의림지, 밀양 수산제와 함께 조선시대 3대 저수지로 꼽히는 데다가 보존도 잘 돼 있어 람사르 습지 등록을 추진 중에 있다. 둑길을 거닐며 연못을 감상할 수 있는 것도 이곳만의 매력이다. alt푸른 기운이 감도는 맥문동 솔숲속리산의 정기를 받은 은혜로운 땅충북 보은과 상주에 걸쳐 속리산이 있다. 속리산에는 수많은 봉우리가 있지만 그중에서도 장각폭포에서 장각계곡을 지나 천왕봉(해발 1057m)→문장대(1054m)를 잇는 장쾌한 능선이 압권이다. 특히 높이가 6m나 되는 장강폭포는 장강계곡을 쩌렁쩌렁 울리며 눈길을 사로잡는다. 폭포수가 떨어지는 용소(龍沼)는 금방이라도 용이 나올 것만 같다. 그 옆에 단정하게 자리 잡은 정자 금란정(金蘭亭)마저 본래 거기 있었던 것처럼 잘 어울린다.장강폭포에서 길을 따라 동네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가면 커다란 7층석탑을 발견할 수 있다. 마을 이름을 따 상오리 7층석탑(보물 제683호)이라 부른다. 과거 절이 있었던 자리지만 지금은 사라지고, 석탑만이 남아 흔적을 대신한다. 속리산 들머리의 맥문동 솔숲도 볼만하다. 꽃이 모두 져버린 것이 못내 아쉽기는 해도 코끝에 머무는 솔향이 향기롭다. 지그재그로 이어진 숲 산책로를 걷는 것만으로도 심신이 안정된다.조선 중기에 써진 『정감록』에는 상주시 화북면을 십승지지(十勝之地) 중 하나로 꼽는다. 이 안전하고 살기 좋은 땅에는 한말 국권회복과 독립을 위해 애쓴 의병들의위패를 모시는 광복의사단이 있다. 이강년·이용엽·이원재·이성범·이용회·이원녕·김재갑·홍종흠 등 8인의 의병들이 화북 일대의 독립만세 운동을 주도했다. 1894년 운강 이강년 선생이 의병장으로서 문경 동학군을 이끌며 동학농민운동에 참여했고, 이성범·이용회·김재갑·홍종흠은 3·1 운동 당시 독립만세를 외치다가 일본경찰에 체포돼 옥고를 치렀다. 또 이원녕은 아우 이한영과 함께 이웃한 문경 지방에서 창의군의 군자금 조달에 헌신했다.]]> Wed, 31 Oct 2018 17:18:28 +0000 23 <![CDATA[잊지 않겠습니다 순국선열의 희생과 정신 한눈에 보는 역사]]> alt]]> Wed, 31 Oct 2018 19:24:06 +0000 23 <![CDATA[어등산에서 일경총탄에 순국한 호남창의대 의병장 조경환 이달의 독립운동가]]>     글 학예실어등산에서 일경총탄에 순국한호남창의대 의병장 조경환 구한말 호남지역은 의병 활동의 중심지였다. 여기에는 일본군에 맞서 활발한 투쟁을 벌인 의병장의 역할이 컸다. 김준에서부터 김원국과 박용식까지. 그리고 이들 사이를 이으며 호남지역 의병항쟁의 명맥을 계승한 사람이 바로 조경환이다. alt국권수호를 위해 의병이 되다조경환은 유년시절부터 꾸준히 유학에 정진하다가 전국을 돌며 조선 정국을 살폈다고 전해진다. 귀향 후에는 서당을 개설하여 후학을 양성한 것으로 추정된다.1907년 8월 대한제국 군대가 강제 해산되며 일본의 국권 침탈이 본격화되자 조경환도 국권수호를 위한 적극적인 활동을 결심하였다.당시 호남지역 의병전쟁을 이끌던 김준 의병장은 조경환을 찾아와 시국 현안을 논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조경환이 의병 참여를 결정하였다. 1907년 12월 김준 의진(義陳)에 합류하여 좌익장(左翼將)을 맡고, 호남지역에서 벌어진 수많은 전투를 주도하였다. 또한 여러 의병이 연합한 전투에서도 선봉장을 맡아 큰 활약을 펼쳤다.호남지역 의병투쟁을 이끌다1908년 4월 일본군과 교전 중에 김준 의병장이 전사하자 조경환은 흩어진 의병을 수습, 재정비에 나섰다. 이에 전라북도에서 활동하던 전수용 의병장도 힘을 보태며, 2백여 명의 의병이 조경환을 중심으로 결사투쟁을 준비하였다. 조경환 의진은 도통장 박용식, 선봉장 김원국 등으로 구성되어 전라남도 각지에서 일본 군경에 맹렬히 맞서 싸웠다.한편 일본군은 어등산 일대를 수색하며 포위망을 좁혀갔고, 1909년 1월 두 시간여 교전 끝에 조경환을 비롯한 20여 명의 의병이 전사했다. 당시 조경환은 총상을 입은 상황에서도 의병의 이름이 적힌 종이를 불태우며 의병들을 지키고 숨을 거두었다고 전해진다. 정부는 조경환의 공적을 기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alt대천 조경환 영전.alt해산 전수용 의병장.alt조경환 의진 활동 기사(『대한매일신보』, 1908.12.25.) alt조경환 의진 활동 기사(『대한매일신보』, 1909.01.16.)alt『진중일지 陣中日誌』의 조경환 관련 내용. (토지주택박물관 제공) ]]> Wed, 31 Oct 2018 13:44:56 +0000 23 <![CDATA[저울처럼 평등한 사회를 위해! 백정의 형평운동 우리가 몰랐던 이야기]]>     글 신현배 역사칼럼니스트저울처럼 평등한 사회를 위해!백정의 형평운동   조선시대 백정은 가축을 도살하거나 가죽신 따위를 만들어 파는 천민계층이었다. 더러는 망나니가 되어 사형 집행을 맡기도 했다. 조선 사회는 백정에게 꽤나 가혹했는데, 이는 일제강점기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1920년대 초, 드디어 백정들이 ‘평등’을 외치기 시작했다. 형평운동이었다. alt형평사 제6회 전선 정기대회 포스터조선의 가장 천한 사람들, 백정고려시대까지만 해도 백정은 군역의 의무를 지지 않는 일반 농민을 의미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들어 고려시대의 천민계층인 ‘화척’을 가리키는 말로 바뀌었다. 화척은 여진·거란족 등 북방 민족의 후예로 유랑생활을 하며 소·돼지를 도살하고 고리와 가죽신을 만드는 일을 하며 생계를 잇는 사람들이었다. 세종대에 이들을 양인으로 대우해 주고자 백정이라 부르게 했다. 천민은 나라에 세금을 내지 않으니 화척도 양인 신분으로 우대해 세금을 거두어들일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는 일반 농민들의 불만을 샀다. 그들은 ‘신백정’ 이라는 말로 화척과 자신들의 계급을 철저히 구분했다. 그렇게 백정이란 칭호는 도살업을 하는 천한 사람을 일컫는 말로 굳어졌다. 백정은 법적으론 양인 계층이었지만 정부로부터 가혹한 통제와 탄압을 받았다. 정부는 백정이 고려 때 유랑생활을 하며 민가를 습격해 노략질했다는 이유를 들어 이들을 특정 지역에 모여 살게 했다. 또한 별도의 호적을 만들어 출생·사망·도망의 내용을 기록해 임금에게 보고하도록 했다. 다른 지역에 가고자 할 때는 반드시 통행증을 발급받아야 했다.백정에게는 형벌도 엄격하게 적용됐다. 정부의 허락 없이 가축을 도살하면 장형 100대, 유형 3,000리, 몸에 먹물을 넣는 벌을 내렸고 그 가족은 역마을이나 역참의 노비로 삼았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백정에 대한 일반 백성들의 시선도 좋지 못했다. 심한 멸시와 천대는 물론이고 좋은 옷을 입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백정은 아무리 돈이 많아도 명주 비단옷을 입을 수 없었으며 두루마기와 털모자를 쓰는 것도 금지되었다. 갓·망건·가죽신도 허용되지 않았고 댓개비로 엮은 갓의 한 종류인 패랭이를 쓰고 다녀야만 했다. 혼례와 상례도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치르지 못했다. 혼인할 때 신랑은 말 대신 소를, 신부는 가마 대신 널빤지를 탔다. 그래서 사람들은 백정 집안의 결혼을 ‘쇠등 장가, 널빤지 시집’이라고 불렀다.신부는 비녀를 꽂아 머리를 올릴 수 없었다. 초상이 났을 때도 상여를 쓰지 못했고 묘지도 별도로 잡았다. 이뿐만이 아니다. 백정은 일반 백성들 앞에서 술과 담배가 금지되어 있었다. 양인에게 먼저 인사하고 존댓말을 써야 했는데 상대가 어린아이일지라도 굽실거리며 말을 높여야 했다. 백정은 양인 아이를 ‘도련님’, ‘애기씨’ 등의 호칭으로 불렀고 젊은 사람은 ‘서방님’, 늙은 사람은 ‘생원님’이라 했다. 자신을 소인이라 낮춰 부르는 것은 당연했다.백정이 꿈꾼 해방 사회1894년 갑오개혁으로 신분제가 폐지되었지만 백정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과 차별은 달라지지 않았다. 백정 집안과는 혼인 하지 않으려 했으며 한마을에 사는 것조차 꺼렸다.일제강점기 백정들은 일제의 차별 정책으로 말미암아 다시 고통과 시련을 겪는다. 일제는 백정을 호적에 올리면서 ‘도한(屠漢)’이라고 기재하거나 붉은 점을 찍도록 했다. 호적에서마저 백정임을 드러내도록 한 것이다. 일본이 이러한 차별정책을 펼친 이유는 간단했다. 일본에서도 백정은 천한 계층이었기 때문이다.이 시기 백정의 자녀들은 공립학교에 입학이 허락되지 않았고 사립학교에 들어가더라도 다른 학부모들의 따가운 눈총을 받았다. 더러는 백정의 아이를 퇴학시키라고 학교에 압력을 넣기도 했다. 동급생들도 돌을 던지며 아이를 괴롭혔다. 이발소와 목욕탕에서는 백정을 받지 않는다며 그들을 쫓아내는 일도 종종 있었다.차별과 천대가 계속되자 참다못한 백정들이 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1923년 5월 경상남도 진주에서 백정들의 조합인 ‘형평사’를 결성한 것. ‘형평(衡平)’이란 수평으로 된 저울을 의미한다. 그들은 저울처럼 평등한 사회를 꿈꾸며 ‘백정 신분 해방 운동’으로서의 형평운동을 전개했다. 전국에 있는 백정들의 수는 약 40만 명. 이들은 형평사와 형평운동에 열렬한 지지를 보냈다. 형평운동은 금세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형평사 조직의 갯수도 늘어나 1931년에는 분사가 166개나 되었다.그러나 형평운동은 일제의 탄압으로 민족 해방 운동과 독립운동의 형태로 더 나아가지 못하였다. 1935년 ‘대동사’로 조직의 이름을 바꾸면서 이익 단체에 머무르는 데 그쳤다.성과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1930년대에 호적에서 백정 신분 표시가 삭제되고 백정 자녀의 공립학교 입학이 허용되었다. 제도적 차별의 일부가 철폐되면서 형평운동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셈이 됐다. 신현배역사와 전통문화에 대해 관심이 많은 역사칼럼니스트. 저서로는 역사 이야기 『엉뚱 별난 한국사』, 『엉뚱 별난 세계사』, 『2000년 서울 이야기』, 『세계사로 배우는 법 이야기』, 전통문화 이야기 『소중한 우리 문화 지식 여행』 시리즈 등이 있다.]]> Wed, 31 Oct 2018 16:29:34 +0000 23 <![CDATA[김산이 선택한 운명 역사에서 찾은 오늘]]> 글 이성주 역사칼럼니스트김산이 선택한 운명 김산(金山)이란 이름은 낯설다. 당연하다. 그는 독립운동가로서 거창한 성취를 보인 것도 아니었고, 민족주의자로 시작해 아나키스트와 사회주의자로 활동한 이력 때문에 한때는 그 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잊혀가는 이름을 세상에 알린 건 미국인 작가 님 웨일스(Nym Wales)가 쓴 한 권의 책이었다. 바로 『아리랑의 노래 Song of Arirang』다. 지워진 이름의 혁명가▲ 독립운동가 김산 ▲ 1905년 평안북도 용천 출생 ▲ 1919년 중학생 신분으로 3·1운동에 참가. 일본 경찰에 체포 구류 ▲ 1920년 중국으로 건너가 신흥무관학교 입학 ▲ 상하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독립신문』 발행에 참여 ▲ 1921년 중국 황포 군관학교와 중산대학 경제학과에서 수학. 의열단 가입 ▲ 고려공산당 이르쿠츠크파 베이징 지부 입당. 공산당 청년동맹 가입 ▲ 1925년 중국대혁명 참여 ▲ 1928년부터 홍콩·상하이·베이징 등지에서 활동 ▲ 1936년 상하이에서 조선민족해방동맹 창설 ▲ 1938년 중국공산당에 의해 일본 간첩의 누명을 쓰고 체포, 처형우리민족이 겪은 고난의 시간 속에 쓰러지고 묻힌 이름들이 많다. 그 같은 무명의 영웅들은 우리민족의 역사와 비슷한 인생역정을 겪었다. 다만 ‘김산’에게 다른 것이 있다면 그의 이야기가 책으로 나왔다는 것, 그래서 마침내 후대에 전달될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김산은 1937년 중국 옌안에서 미국인 작가 님 웨일스를 만났다. 님 웨일스는 한국의 독립운동가 김산을 인터뷰했고, 그의 이야기에 많은 감명을 받았다. 이렇게 해서 『아리랑의 노래』가 탄생했다.“조선에 민요가 하나 있다. 그것은 고통받는 민중들의 뜨거운 가슴에서 우러나온 아름다운 옛 노래다. 심금을 울려 주는 아름다운 선율에는 슬픔이 담겨 있듯이, 이것도 슬픈 노래다. 조선이 그렇게 오랫동안 비극적이었듯이 이 노래도 비극적이기 때문이다.”님 웨일스는 김산을 두고 ‘현대의 지성을 소유한 실천적 지성인’이라 격찬했다. 김산은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반드시 실천한 인물이었다. 3·1운동을 통해 민족적 현실을 깨닫고 민족주의자가 되어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또한 민족과 국가를 뛰어넘은 평등한 사회를 꿈꾸며 사회주의 혁명에 동참하기도 했다. 자신이 배우고, 몸으로 체득한 것이라면 기어코 실천에 옮겼던 이가 김산이었다.이 세상에 나보다 더 중요한 게 있을까?아나키즘(Anarchism)을 설명할 때 ‘무정부주의’란 말을 쓰곤 한다. 그러나 아나키즘의 정확한 의미는 ‘지배하는 이가 없음’이다. 단어의 어원을 따져보면 이는 더욱 명확해진다. 고대 그리스의 작가 호머와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아나키(Anarchie)를 ‘지도자가 없는’, ‘키잡이가 없는 선원’이라고 해석했다. 사회주의든 민주주의든 국가의 형태가 만들어지면 반드시 지배계층과 피지배계층으로 나뉘기 때문에 이들은 국가나 정부를 인정하지 않았다. 현대와 같이 복잡한 사회구조를 가지는 국가에서 보면 과격하게 여겨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사회가 아니라 개인을 본다면 어떨까? 동양의 대표적인 아나키 양주(楊朱)2)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내 터럭 하나를 뽑아 천하에 이익이 되더라도 하지 않겠다.”천하에 이익이 되는 일이라 할지라도 결코 ‘나의’ 털은 뽑지 않겠다는 양주. 이는 춘추전국시대 당시 대의명분을 내세우며 백성들을 전쟁터로 내몰았던 권력자들을 비판하는 것이기도 하다. 털 하나가 살갗이 되고, 살갗이 팔다리가 된다. 조직을 위해 나를 희생하지 않겠다는 논리는 자칫 이기주의와 개인주의로 비칠 수도 있지만, 조직이 개인에게 대의명분을 내세워 희생을 강요하는 것은 과연 옳은가 생각해 볼 필요도 있다.사회 전체로 보았을 때 아나키즘과 양주의 주장은 급진적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개인에게는 다르다. 어떤 조직이든 지배와 피지배의 구조는 형성되기 마련이고, 구조 안에서 개인은 다양한 명분으로 희생된다. 비판적 분석이나 정당한 논리 없이 단지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는 명분으로부터 벗어나는 것. 거기서부터 건전한 사회와 독립적인 개인이 만들어지는 게 아닐까?김산도 그랬다. 그는 특정한 명분이나 조직에 함몰되지 않고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독립운동의 방향을 향해 나아갔다. 그에게 독립운동은 시대와 국가가 만든 우연이 아니라 자신이 선택한 운명이었다. 이성주시나리오 작가 겸 역사칼럼니스트. 대중과 함께 호흡하는 글쓰기를 목표로 『조선의 민낯』, 『왕들의 부부싸움』과 같은 역사서를 출간한 바 있다. 최근에는 국제정치와 관련된 연구 및 집필에 열중하고 있다. 『전쟁으로 보는 국제정치』 시리즈 1, 2, 3권을 출간 중이다.]]> Wed, 31 Oct 2018 18:08:21 +0000 23 <![CDATA[소풍 기념관 산책]]> 소풍밝아오는 새해를 바라보며또 다른 희망을 그렸던 것이바로 어제의 일만 같은데금세 오늘이 왔습니다.실수와 후회, 이별 따위는저무는 가을에 맡기고오늘은 떠나봅시다.비록 떠나는 것보다머무름이 익숙한 당신이지만모든 일에는 ‘때’가 있는 법.볕은 따뜻하고바람은 시원하니소중한 사람이 곁에 있고자꾸만 웃음이 나니오늘은 소풍 떠나기딱 좋은 때입니다.]]> Tue, 30 Oct 2018 19:41:48 +0000 23 <![CDATA[순국선열의 날, 다시 부르는 그 이름 다시 만난 그날]]>     글 권경률 역사칼럼니스트순국선열의 날, 다시 부르는 그 이름   매월 대한민국의 광복과 관련된핵심사건을 선정해 그 치열했던역사의 순간을 재구성하고자 한다. 다시 만난 그날, 이번 달의 주제는‘순국선열의 날’이다. 순국선열의 날은 나라를 위해목숨 바친 이들의 희생과 정신을기리기 위해 1939년 제정되었다. 그 고귀하고 뜨거운 죽음이응어리진 삼천리강산을 만나보자. alt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 환국기념(1945.11.)순국선열의 날, 11월 17일의 의미학창 시절 조회시간에는 언제나 국민의례가 있었다. 여기서 국기에 대한 경례, 애국가 제창과 함께 빠지지 않는 순서가 바로 순국선열에 대한 묵념이다. 순국선열(殉國先烈)이란 일제의 침략에 맞서 항일투쟁과 독립운동에 헌신한 인물들을 일컫는다. 11월 17일 순국선열의 날은 그 숭고한 뜻을 기리는 날이다.“매년 11월 17일을 모든 동포가 함께 추모할 순국선열 기념일로 정하자는 지청천 등 의원 6명의 제안에 대하여 대한민국 21년(1939년) 11월 21일 의정원 회의에서 원안대로 통과시키기로 의결한다.”대한민국임시정부 공보, 1940.02.01.1939년 순국선열의 날이 처음 제정됐다. 1919년 중국 상하이에서 출범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일제의 압박과 중일전쟁 발발로 소재지를 빈번히 옮겨야 했다. 항주·남경·장사·광주·유주를 거쳐 임시정부가 그해 머문 곳은 사천성의 기강이라는 곳이었다. 모진 가시밭길 속에서도 임시정부는 꿋꿋이 활동을 이어나갔다.1939년 11월 21일 제31회 의정원 회의에 조금 특별한 안건이 올라왔다. 지청천, 차리석 등이 ‘순국선열공동기념일(殉國先烈共同記念日)’을 제안한 것이다.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친 위인을 기리는 일은 당연했지만 개인이 하기에는 어려움이 따랐고, 신원조차 확인할 수 없는 무명의 선열들도 많았다. 지청천을 비롯한 6인의 의원들은 1년 중 하루를 정해 그들을 공동으로 기념하자고 했다. 임시정부의 어려운 여건과 이름 없는 선열의 존재를 두루 감안한 결과였다. 그렇다면 공동기념일은 언제로 해야 할까?“순국한 분들은 망하게 된 나라를 구하기 위하여 혹은 망한 국가를 다시 회복하기 위하여 목숨을 걸었으니 나라가 망하던 때의 1일을 기념일로 정하는 것이 합당하다. 다만, 경술년 8월 29일의 병합 발표는 이미 껍데기만 남은 국가의 종말을 고하였을 뿐이다. 사실상 을사년 11월 17일의 늑약으로 나라의 운명이 결정되었기에 이날을 순국선열공동기념일로 삼는 바이다.”대한민국임시정부 공보, 1940.02.01.순국선열의 날이 11월 17일로 정해진 이유다. 을사늑약을 실질적인 망국(亡國)이라 여기고 순국의 근원으로 본 것이다. 순국선열공동기념일 제정 후 대한민국임시정부는 광복이 될 때까지 이국땅에서 추모 행사를 계속했다.1945년 8월 15일 일제가 패망하자 순국선열을 기리는 뜨거운 마음은 국내로 이어졌다. 그해 12월 23일 서울운동장에서는 대규모 순국선열추념대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이루어진 김구 임시정부 주석의 추모연설은 그 어느 때보다 뜻깊었다.“우리가 지난 40여 년간 일제의 부림을 당했을지언정 하루라도 저들의 시대라 일컬을 수 없음은 오직 순국선열들이 끼치신 피 향내가 항상 이 나라의 기운을 이룬 까닭이오. 수많은 선열들이 아니런들 우리가 무엇으로써 서리오. 삼천리 토양 알알 그대로 가히 순국선열들의 열혈이 응어리진 것임을 생각하면서 이 땅을 디딜 때 지난날의 한과 새로운 감회가 가슴에 막혀서 어찌할 줄을 몰랐었나이다.”자유신문, 1945. 12. 24. alt신채호와 박자혜의 결혼사진alt남자현 여성 독립운동가들에게 바치는 마음의 훈장오늘날 순국선열은 법적으로 일제의 국권침탈(國權侵奪) 전후로부터 1945년 8월 14일까지 국내외에서 일제의 국권침탈을 반대하거나 독립운동을 위하여 일제에 항거하다가 그 반대나 항거로 인하여 순국한 자로서, 그 공로로 건국훈장(建國勳章)·건국포장(建國褒章) 또는 대통령 표창을 받은 자를 가리킨다.순국선열은 (똑같이 활동했으나 광복을 기준으로 생존해 있는) 애국지사와 더불어 우리나라의 자주성과 독립성을 상징하는 인물들이다. 을사늑약에 비분강개해 자결한 민영환, 헤이그 특사로서 현지에서 분사한 이준, 대한제국 군대해산에 죽음으로 맞선 박승환,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안중근, 상하이에서 침략자들에게 폭탄을 던진 윤봉길 등이 광복 직후 순국선열로 회자되었다.최근 들어 알려지지 않은 순국선열 발굴에 대한 움직임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영화 <암살>과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에서 직접 총을 들고 싸우는 여인들의 모습이 그려지면서 여성 독립운동가도 재조명되는 추세다.과거 여성 독립운동가라 하면 사람들이 떠올리는 것은 유관순뿐이었다. 그러나 실제 독립운동에는 남성과 여성의 구분이 없었다. 남편과 자식의 뒷바라지는 물론 목숨을 내걸고 무장투쟁의 한복판에 뛰어든 여성들도 수두룩했다.만주에서 활동하던 남자현은 1933년 일본 관동군 사령관 무토 노부요시를 암살하기 위해 권총과 폭탄을 몸에 숨기고 가다 경찰에게 붙잡혔다. 당시 그녀는 의병 활동 중에 전사한 남편의 피 묻은 옷을 껴입고 있었다고 한다. 남자현은 일본영사관 감옥으로 끌려가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풀려나자마자 세상을 떠났다. 향년 62세였다.박차정은 국내에서 여성운동에 앞장서다가 1930년 중국으로 망명해 의열단장 김원봉을 만났다. 이듬해 두 사람은 혼인을 올리고 부부 독립운동가의 길을 걸었다. 그는 조선혁명간부학교·민족혁명당·조선의용대 등에서 활동하며 남편과 함께 굵직한 족적들을 남겼다. 그리고 1939년 중국 곤륜산 전투에서 큰 부상을 입고 그 후유증으로 숨졌다.윤희순은 의병장 남편과 시아버지를 뒷바라지하며 여성의병대를 조직했다. 그곳에서 군사훈련과 함께 탄약제조소를 운영하며 의병들에게 탄약을 공급했다. 우리나라의 국권이 일제에 넘어가자 가족을 데리고 만주로 건너갔다. 만주에서 윤희순이 한 일은 독립자금 조달이었다. 1935년 그는 마찬가지로 독립운동가였던 아들과 함께 죽음을 맞는다.박자혜는 조선총독부 병원의 간호사였다. 1919년 3·1운동 때 일본경찰의 총칼에 맞은 조선인들을 목격하고 간호사 독립운동 단체인 간우회를 조직했다. 그는 중국으로 유학을 갔다가 신채호와 결혼했다. 남편과 떨어져 두 아들을 키우며 힘들게 생계를 이으면서도, 1926년 의열단원 나석주의 동양척식회사 의거를 돕는 등 독립운동에 가담했다.그 시기 여성 독립운동가들은 남성보다 두세 배의 삶을 살았다. 항일투쟁과는 별개로 어머니·아내·며느리·주부 노릇을 모두 해내야 했기 때문이다. 독립운동가 남편을 둔 이들은 가정경제까지 책임져야 했다. 그럼에도 그 노력과 수고를 인정받고 순국선열로 불리는 여인들은 많지 않다.지금까지 국가보훈처에 선정한 독립유공자는 1만4000명이 넘는다. 이 가운데 여성은 약 270여 명으로 전체 2% 수준에 불과하다. 수많은 여인들이 임시정부의 살림을 도맡고, 독립자금을 마련하고, 도피자를 숨겨주었지만 공식기록이 없어 독립유공자가 되지 못했다.훈장 하나 받지 못하고 잠들어 있는 여성 독립운동가들에게 이제라도 한 사람 한 사람 마음의 훈장을 달아드릴 차례였다. 11월 17일 순국선열의 날은 그래야만 하는 날인지도 몰랐다. alt안중근alt홍범도 모든 무명의 순국자가 이름을 찾는 그날까지순국선열의 날은 1997년 국가기념일로 지정된 이후 매년 정부 주관 추모행사가 열리고 있다. 독립운동가들의 형형한 눈빛과 절절한 목소리는 해마다 그리움으로 되살아난다.“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두었다가 우리나라가 주권을 되찾거든 고국으로 옮겨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힘쓸 것이다. 대한독립의 함성이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안중근은 유언과 다름없는 소망을 남기고 1910년 3월 26일 의연한 모습으로 형장에 섰다. 그로부터 108년이 지난 지금, 그의 유해는 아직도 귀환하지 못했다. 실은 뼈조차 찾지 못하는 실정이다. 단지 묵념으로 순국선열의 정신을 기리는 데 그쳐서는 안 되는 이유다. 해야 할 일이 많다.봉오동전투를 승리로 이끌며 독립전쟁의 서막을 연 홍범도 역시 고국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1937년 홍범도는 스탈린의 강제이주 정책에 따라 중앙아시아행 열차에 몸을 실었고, 그가 마지막으로 정착한 곳은 카자흐스탄의 크질오르다였다. 독립전쟁의 영웅은 어느 소도시의 고려인 소극장에서 경비를 서며 남은 평생을 보냈다. 그렇게 ‘백두산 호랑이’는 아직 이역만리 공동묘지에 잠들어 있다.어디 그뿐인가. 타국의 산과 들에서 조국독립을 위해 싸웠던 수많은 무명씨의 죽음에 오늘날 한국인은 빚을 지고 산다. 하나하나 붙잡고 그 이름을 소리 내어 불러주고 싶지만 알 수 없는, 그래서 더 가슴에 사무치는 아무개들. 그들이 단 한 명이라도 더 제 이름을 찾을 수 있도록 우리가 소매를 걷어붙이고 나서야 할 때다.‘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는 김춘수의 시처럼 우리가 대한독립에 목숨 바친 선열의 이름을 부를 때, 그들은 마침내 꽃이 되었다. 11월 17일 순국선열의 날,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그 고귀한 죽음들이 꽃보다 아름답게 피어나길 바란다. 권경률역사칼럼니스트. 서강대학교에서 역사학을 공부했다. 칼럼 ‘사극 속 역사인물’을 연재하고 팟캐스트 ‘역사채널 권경률’을 진행한다. 저서로는 『조선을 새롭게 하라』, 『조선을 만든 위험한 말들』 등을 출간했으며, 영상물 『시시콜콜 한국사 어워즈』도 선보이고 있다.]]> Wed, 31 Oct 2018 10:02:41 +0000 23 <![CDATA[요동치는 세계와 전쟁광이 된 일제 겨레의 함성, 독립의 희망]]> 글 박영규 작가요동치는 세계와 전쟁광이 된 일제 1930년대에 이르러 국제정세가 다시금 뒤흔들렸다. 주범은 다름 아닌 독일과 일본이었다. 독일은 유럽 국가들을 하나둘씩 장악하며 세력을 넓혀 갔고, 일본 또한 아시아에서 같은 작업을 진행 중이었다. 이들은 삽시간에 전 세계를 전쟁터로 만들었다. alt6대 총독을 지낸 우가키 가즈시게                                 7대 총독을 지낸 미나미 지로          1930년대 세계를 덮친 침략전쟁독일은 1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후 국제조약에서 불리한 처지가 됐다. 이에 불만을 품은 독일 국민들은 과거의 영화를 기대하며 나치와 히틀러를 선택했다. 히틀러는 가장 민주적인 헌법으로 평가됐던 바이마르 헌법을 폐기하고 스스로 총통에 올라 1인 독재정권을 수립했다. 주변 약소국에 대한 침략 정책도 함께 세워졌다. 독일은 먼저 오스트리아를 병합하고 폴란드를 침공하여 유럽전쟁을 일으킨 뒤 북유럽의 노르웨이·네덜란드·벨기에 등을 장악했다. 이어 침략전쟁에 박차를 가하며 프랑스로 진주하였다. 그들은 파리에 무혈입성하여 허수아비 정권으로 하여금 비시정권을 수립하도록 했다. 독일에 나라를 빼앗긴 유럽 각국들은 영국으로 건너가 망명정부를 형성하고 독일에 대항했다. 이처럼 유럽 전역이 독일에 의해 전쟁터로 전락하는 동안 미국은 중립을 선언하고 방관의 자세를 취했다. 아직 대공황의 후유증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이 시기 일본 역시 전쟁광이 되어 중국 대륙으로 전선을 확대하고 있었다. 일본은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를 장악하고 청나라의 허수아비 황제 푸이를 앞세워 만주국을 세웠다. 이후 여러 차례 중국 침략의 기회를 엿보던 그들은 상하이를 점령하는 데 성공한다. 특히 상하이 홍커우에서 일어난 윤봉길 폭탄 투척 의거를 빌미로 중국에 대한 본격적인 침략 전쟁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일본 내 전쟁을 반대하는 온건 세력들이 목소리를 내면서 일본 군부는 쉽게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다. 이에 급진 세력이 총리를 암살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일본은 계속해서 전쟁에 집착하였고 결국 중일전쟁이 발발하고 만다.당시 한국은 일본 우가키 가즈시게(宇垣一成)와 미나미 지로(南次?), 두 총독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우가키는 이미 1927년에 임시로 조선총독을 대리한 적이 있었다. 그는 육군대신을 지낸 후 육군대장으로 예편하여 1931년 다시 제6대 조선총독이 되었다. 미나미는 조선군 사령관 출신으로 1936년 제7대 총독에 부임했다. alt이봉창 선서 장면(1931)alt윤봉길 의거 직후 기념식장(1932) / 조선혁명군 총사령관 양세봉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설운 피난살이이 무렵 독립운동 단체는 어려움에 처해 있었다. 일본이 만주를 장악하는 바람에 더 이상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할 수 없었고, 상하이까지 뻗친 일본군의 손길을 피해 피난을 떠나야만 했다.어려운 상황에서도 독립군의 저항은 계속되었다. 1932년 1월 한국애국단 소속 이봉창이 도쿄 사쿠라다몬 앞에서 일본왕 히로히토에게 수류탄을 투척하여 일본 내각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같은 해 3월에는 조선혁명군 총사령관 양세봉이 중국의용군과 합작해 만주 신빈현에서 일본군을 대파했다. 한인애국단의 최흥식과 유상근이 다롄(大?)으로 들어가 만주 일본 대사관을 공격하려다 실패한 일도 있었다. 그로부터 며칠 뒤, 마찬가지로 한인애국단 소속인 윤봉길이 상하이 홍커우 공원에서 열린 상하이사변 승리 축하연 행사장에서 폭탄을 던졌다. 이 일로 일본군 장성과 주요인사 10여 명이 죽거나 다쳤다. 사건은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중국 국민당 당수 장제스는 중국군 백만 대군이 하지 못한 일을 윤봉길이 해냈다며 임시정부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 공언하였다. 반면 프랑스는 자신들 조차지에 머물고 있던 임시정부 요인들을 체포하여 일본 경찰에 넘기는데 혈안이 되었다.안창호 또한 미처 피신하지 못하고 붙잡히는 상황이 전개되기도 했다. 상하이를 떠난 임시정부는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며 피난 생활을 지속했다.윤봉길 의거는 독립군에게 역경을 안겨 주었지만 동시에 새로운 활로를 여는 계기가 되었다. 조선혁명군과 중국의용군이 연합, 의거에 고무된 이들 한중연합군은 만주에서 일본군과 만주군 연합군을 공격해 흥경성을 점령했고, 백정기·이강훈·이원훈 등은 주중 일본공사 아리요시를 암살하려다 실패해 검거되었다. 한편 임시정부의 주석이었던 김구는 장제스에게 뤄양군관학교 한인훈련반 설치를 약속받고 5천 원의 지원금을 받는 등 중국의 적극적인 지원을 이끌어냈다.그러나 일본군의 대대적인 공략으로 임시정부와 독립군은 나날이 궁지에 몰렸다. 1934년 조선혁명군 총사령관 양세봉이 일본군에 의해 피살되는가 하면, 항저우를 떠난 임시정부는 다시 후난성 창사와 광저우를 거쳐 중국국민당 본부가 있던 충칭으로 향했다.피난살이가 이어지는 가운데 임시정부 내부에서도 균열이 일었다. 요인들은 뿔뿔이 흩어지기 일쑤였고 파벌 싸움은 격화되어 임시정부를 등지는 인사들도 생겨났다. 설상가상으로 내부 반란까지 일어나 임정 요인인 현익철이 죽고 김구와 유동열이 중상을 입었다. 1940년 9월 충칭에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간판을 정식으로 내걸고서야 힘겨웠던 피난살이가 끝이 났다. 이때 중국 국민정부는 충칭 교외에 한인촌을 건설할 수 있도록 배려하였고, 덕분에 임시정부 요인들과 구성원을 비롯한 가족들까지 거주지를 확보할 수 있었다.하지만 임시정부가 피난하며 옮겨다니는 동안 독립운동 1세대 거목들을 차례대로 잃었다. 이회영·이동휘·신채호·김동삼·안창호·양기탁·이동녕 등 그 이름만으로도 ‘독립’ 두 글자를 연상시키는 독립운동 지도자들이 대거 명을 달리했던 것이다. 그들은 한국 독립운동의 주춧돌이었고, 젊은 열사들의 별이었으며, 암흑 속에 갇힌 한민중의 촛불이었다.그러나 세월의 풍파를 빗기지 못하고 일제의 탄압과 총칼에 제 육신을 내주며 차가운 이역 땅, 또는 감옥에서 생을 마감해야만 했다. alt황국신민서사 강요전단alt창씨개명 권유 강연회alt창씨개명이 되어 성명이 제적된 호적 나라를 빼앗기고 이름을 빼앗기다국내 사정도 척박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국내 지식인들 중 일부는 일제의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변절을 선택하기도 했다. 미나미는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내선일체를 강조하며 조선민족말살정책을 강력하게 밀어붙였다. 국민총력운동과 국민정신총동원운동을 전개하면서 한국 청년들을 전쟁터로 내몰았다. 모든 행사에서 ‘황국신민서사’를 제창하도록 강요한 것도 그였다.미나미의 민족말살정책은 1940년 2월 절정에 이른다. 한국인들로 하여금 일본식 성씨를 만들고 이름을 바꾸도록 하는, 이른바 창씨개명 작업을 실시한 것이다. 미나미는 창씨개명이 한국인과 일본인을 동등하게 대하기 위함이라고 했지만 실제로는 한국인의 민족의식을 없애려는 술책에 불과했다.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꾸었더라도 한국인과 일본인을 명확히 구분하여 대우했고 호적상으로도 한국인과 일본인 사이의 차별은 유효했다.따라서 창씨개명의 진짜 목적은 한국인의 뿌리를 없애버리고 일본의 종노릇을 하기 위한 것에 더 가까웠다.한국인 대다수는 미나미의 거짓말에 쉽게 속지 않았다. 당시 자발적으로 창씨개명을 한 한국인은 고작 7.6% 한국인들이 창씨개명을 거부하자 일본은 학생과 직장인에 대한 강제 창씨개명을 진행하고 유명 인사와 권력을 앞세워 압박과 회유를 반복했다. 이를 통해 전 국민의 80%가 일본식 이름을 갖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창씨개명 대신 자결을 선택하는 이들도 있었다. 미나미는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사람들의 호주와 성씨를 강제로 바꾸었다. 형식적으로 모든 한국인이 창시개명을 한 꼴이 되어버린 것이다. 박영규1996년 『한 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을 내면서 저술활동을 시작하여, 1998년 중편소설 『식물도감 만드는 시간』으로 문예중앙신인상을 수상하면서 소설가로 등단했다. 문학, 철학, 역사 분야에 걸쳐 저술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대표적인 역사서로는 『한 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 · 『한 권으로 읽는 일제강점실록』 등이 있다.]]> Wed, 31 Oct 2018 11:30:44 +0000 23 <![CDATA[영국 절대왕정에 맞선 미국의 독립전쟁 명화로 보는 세계사]]> 글 고종환 아주대학교 외래교수영국 절대왕정에 맞선미국의 독립전쟁 존 트럼벌은 미국의 역사 화가로, 그의 작품 중 가장 유명한 것이 바로 <미국 독립 선언>이다. 때때로 그림은 <1776년 4월 필라델피아 독립 선언>이란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그림이 어떤 이름을 가지고 있느냐보다 중요한 것이 상징성이다. 미국 국회의사당 복도와 예일대학교 미술관에 같은 그림이 걸려있는 건 우연이 아니었다. alt미국 독립 선언  1820, 존 트럼벌(John Trumbul), 워싱턴 DC 미국 국회의사당독립국가 미국의 탄생독립 선언이라는 제목이 암시하는 것처럼 그림은 미국 13개 주가 모여 독립을 쟁취하는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1776년 7월 4일 미국은 독립을 선언했다. 영국의 절대왕정에 맞서 기나긴 식민지 역사에 마침표를 찍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독립선언문에 이날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1775년 제2차 대륙회의에서 벤자민 프랭클린·존 애담스·로저 셔먼·로버트 리빙스턴·토마스 제퍼슨 등 5인이 미국 독립선언서의 기초를 작성했다. 그림의 중앙을 차지하고 있는 인물들이 바로 그들이다.특히 붉은색 조끼를 입고 가장 앞에 서 있는 사람이 토마스 제퍼슨인데, 그는 독립선언서 초안의 대부분을 작성했다. 사실상 미국 독립에서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었다. 후에 미국의 제3대 대통령을 지내기도 했다.그러나 선언이 곧바로 독립을 의미하진 않았다. 독립 선언이 있고서도 약 8년간의 투쟁을 거친 끝에 1783년 9월 3일 파리조약에서 비로소 독립을 인정받았다.홍차가 가져다준 미국의 독립미국 독립전쟁의 정식 명칭은 ‘미국 혁명전쟁’ 종교개혁의 일익을 담당했던 청교도들이 영국 절대주의에 도전해 민주주의를 쟁취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당시 영국은 18세기 중반까지 북아메리카에 13곳의 식민지를 두고 자원획득을 위한 이권 지대로 관리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새로운 강자로 부상한 프랑스가 식민지를 개척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영국과 프랑스는 식민지를 두고 경쟁하는 구도가 됐다. 영국에 대한 미국의 저항이 시작된 것도 이즈음부터였다.영국은 프랑스와의 전쟁을 본격화했다. 동시에 전쟁 비용의 충당이 급선무로 떠올랐다. 이를 위해 영국은 미국인들에게 많은 세금을 부과하였고, 과중한 세금에 부담을 느낀 미국인들은 반발했다. 1773년 일어난 ‘보스턴 차 사건’에서 영국에 대한 미국인들의 반발을 확인할 수 있다. 사건의 시작은 인도산 홍차였다. 당시 인도산 홍차가 미국인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었는데, 영국은 재정난 해소를 위해 자국 동인도 회사에 인도산 홍차를 면세로 판매할 수 있는 단독권리를 주었다. 이는 미국 상인의 몰락을 뜻하는 것이기도 했다. 미국 상인들은 크게 분노하며 보스턴 항구에 정박 중이던 영국 상선을 습격, 이윽고 홍차 상자 300여 개를 바다에 던져 버렸다. 영국이 영국군 4개 연대를 보내는 것으로 사건을 일단락되었지만, 이후 영국이 손해배상 및 보스턴 항구의 폐쇄를 결정하자 미국인들의 반영감정은 극에 달했다. 1775년 4월 결국 미국인과 영국인 사이에 무력충돌이 발생하고 만다. 메사추세츠 렉싱턴에서 영국군과 식민지 민병대 사이에 갈등이 일어난 것. 이 일로 발생한 사상자만 200여 명이었다고 한다. 미국인들의 저항이 심화되자 이들 대표는 독립전쟁을 결의하고 조지 워싱턴을 총사령관으로 하는 연합군을 편성했다. 1776년 7월 4일, 13개 주 대표들은 필라델피아에 모여 토마스 제퍼슨의 주도로 완성한 독립선언문을 만장일치로 채택했는데, 이것이 바로 그림의 내용이 되는 사건이다.영국은 1777년 ‘세라토가 전투’에서 식민지 독립군에 패하면서 수세에 몰렸다. 특히 앙숙이었던 프랑스가 개입하고, 1780년에는 믿었던 러시아마저 중립을 선포하면서 국제무대에서 고립되고 만다. 러시아의 중립 선포는 미국을 지원한다는 의미와 다름없었다. 영국은 전열을 정비해 영국군 최대 거점인 버지니아의 요크타운으로 이동, 본국에서 오는 지원군을 기다리며 최후의 결전에 대비했다. 1781년 미국 조지 워싱턴 사령관과 프랑스 로샹보 장군이 이끄는 미프연합군 1만 5천 명과 영국의 찰스 콘월리스 장군의 7천 명 군사가 맞섰다. 그러나 영국은 내륙에서 공격해 오는 미국군과 해상을 봉쇄한 프랑스군에 꼼짝없이 갇혀버렸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무기와 식량부족에 시달리며 그해 10월 19일 항복을 선언했다. 이로써 ‘요크타운 전투’는 막을 내렸다.요크타운 전투는 1773년 보스턴 차 사건에서 촉발된 미국 독립전쟁을 사실상 종결짓는 전투였다. 그리고 1783년, 파리강화조약에 의해 미국 식민지 13개 주는 마침내 영국에서 독립하여 미국으로서 새로운 역사를 시작했다. 미합중국은 1787년에 헌법을 제정하고 1790년 사령관이었던 조지 워싱턴을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하면서 완전한 국가의 모습을 갖추었다. 고종환한국 프랑스문화학회의 재무이사이자, 아주대학교와 경상대학교 외래교수. 프랑스 문화와 예술, 서양연극사, 광고이미지 등을 강의하고 있다. 대표 저서로는 『한권으로 읽는 연극의 역사』와 『오페라로 배우는 역사와 문화』, 『글로벌 다문화교육』이 있다. ]]> Wed, 31 Oct 2018 09:35:28 +0000 23 <![CDATA[조선의 갈치예찬 한 접시의 추억]]> 글 윤덕노 음식문화평론가조선의 갈치예찬 70여 년 전 유행한 대중가요<빈대떡 신사>에는이런 가사가 있다.“돈 없으면 집에 가서빈대떡이나 부쳐 먹지”아마 당시 빈대떡은 돈이없어도 먹을 수 있는전형적인 서민 음식이었던모양이다.조선시대에도 빈대떡역할을 하던 음식이 있었다.바로 갈치다.갈치는 서민들의 씁쓸한입맛을 다독여주며찬거리로 많은 사랑을 받았는데,얼마나 인기가 많았는지엉뚱한 오해를 사기도 했다. 조선시대 서민의 대표 음식, 갈치18세기 중반, 한양 사람들 사이에서는 돈이 떨어졌을 땐 집에 가서 빈대떡, 아니 갈치나 구워 먹으라는 속담이 돌았다.정조대 실학자 서유구가 우리나라 수산물의 이름과 실태를기록한 『난호어목지』에도 비슷한 얘기가 등장한다. 한양에서는 돈을 낭비하고 싶지 않거든 소금에 절인 갈치를 사란말이 있다는 것이다. 아마 이 무렵 갈치는 한양에서 가장 흔한 생선 중 하나였던 듯하다.규장각 검서관을 지낸 이덕무는 『아정유고』에서 당시 한양의 생활상을 읊었는데, 인상적인 것은 종로 육의전의 풍경을 묘사한 대목이다.거리 좌우에 늘어선 수많은 상점온갖 물건이 산처럼 쌓여 헤아리기도 어렵네비단가게에 울긋불긋 널린 건모두 능라와 금수이고어물가게에는 싱싱한 생선이 두텁게 살쪘으니갈치 농어 준치 쏘가리 숭어 붕어 잉어라네그렇게 갈치는 저잣거리를 찾는 한양 사람들의 입맛을 유혹했다. 무엇보다 갈치는 소금에 절여 운반할 수 있었기 때문에 현지에서 잡아 올린 뒤 돈이 될 만한 좋은 것은 서울로올려보내곤 했다. 이에 정약용은 오히려 어촌에서 갈치 한번 먹기가 힘이 든다는 글을 남겼다.“싱싱한 갈치와 좋은 준치는모두 한성으로 올려보내고 촌마을에는가끔씩 새우젓 파는 소리만 들린다.”좋은 갈치는 모두 한양에 몰려 있으니 한양에서 파는 갈치의가격도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구한말 관청에 물품을 납품하던 지규식은 『하재일기』에서 일꾼에게 술값으로 1냥 5전을 지급하는데 그중 1냥은 안주인 갈치값이라 언급한 적도있다. 당시 한 냥의 가치가 어느 정도였는지 정확히 알 수는없지만 밤에 참외 1냥 어치를 사 먹었다고 한 것을 보면 갈치값이 그다지 비싸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게다가 조선은 갈치가 많이 잡히기로 유명했다. 일 년 열두달 모두 갈치의 ‘철’이었다. 『임원경제지』에는 동해와 서해,남해에서 모두 갈치를 잡는데 계절에 따라 많이 잡히는 지역이 다르다고 설명했다.많이 잡히고, 소금에 절여 장기간 보관이 가능하고, 값도 싼데다가 맛까지 좋으니, 조선시대에 갈치는 사랑할 수밖에없는 생선이었다.‘치’생선과 ‘어’생선의 차이너무 흔해진 나머지 갈치는 뜻하지 않은 오해를 받기도 했다. 사실 갈치뿐만 아니라 멸치·꽁치·가물치 등 이름에 ‘치’가 들어가는 생선들이 무더기로 받았던 오해였다. 한자로 물고기 ‘어(魚)’ 자가 들어가는 생선은 고급 어종인 반면 한글 ‘치’로 끝나는 생선은 저급이라는 것. 그래서 이들 ‘치’자생선은 제사상에도 올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근거 없는 헛소문이다. 이밖에도 생선의 이름과 관련한 다양한 설이 있지만 사실 ‘어’와 ‘치’의 이름에는 그다지 큰 의미가 없다. ‘어’는 생선의 한자 표기, ‘치’는 한글 표기일 뿐이다. 순 한글 생선 이름은 대개 ‘치’·‘이’·‘미’로 끝난다.정약용은 『아언각비』에서 우리말의 어원을 밝혔는데 여기에 생선 이름과 관련한 내용도 등장한다. 그는 우리말 생선이름에는 ‘치’ 자가 들어간다면서 준치·날치·갈치·멸치 등을 예로 들었다. 국립수산과학원의 연구논문에서도 ‘치’로 끝나는 생선 이름은 예부터 우리 조상들이 자주 먹거나 봐왔던 친숙한 어류라고 밝히고 있다. 오랫동안 즐겨 먹던 음식이기 때문에 한자어 대신 생활에서 많이 쓰이는 우리말 고유어가 남아있는 것이지 결코 낮잡거나 생선의 급을 구분짓기 위한 이름이 아니었다.갈치를 대단히 좋아했던 조선시대 사람들이 갈치가 저급생선이라는 소문을 들었다면 코웃음을 쳤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게다가 요즘은 남획으로 귀한 몸이 된 지 오래인데, 갈치가 꽤 억울해 했을 법도 하다.오해와 편견에도 불구하고 오늘도 갈치는 누군가의 식탁위에 올라 밥도둑 노릇을 했을 터다. 비싸서 자주 접하지 못하는 음식만이 고급이랴. 조선시대부터 서민들의 밥상을 지켜온 갈치의 친숙한 맛과 자태도 충분히 고급스럽다. 윤덕노음식문화평론가. 1984년 매일경제신문사에 입사해 20여 년간 기자 생활을 하면서 특파원활동, 출장, 연수 등으로 미국과 중국을 비롯한 다양한 나라에 머물렀다. 음식에 관심이 많아관련 자료를 수집해온 결과, 음식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주요 저서로는『음식잡학사전』, 『신의 선물 밥』, 『붕어빵에도 족보가 있다』 등이 있다. ]]> Tue, 30 Oct 2018 20:00:24 +0000 23 <![CDATA[성곽의 꽃 건축의 백미 여행에 숨은 역사]]>     글 사진 김초록 여행칼럼니스트성곽의 꽃 건축의 백미 -수원 화성- 1797년 정조는 완공된 수원성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참으로 아름답고 장대하다. 다만 사치스러워 보일까 두려워한다. 미려한 아름다움은 적에게 위엄을 보여준다.” 수원 화성을 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정조와 같은 생각을 할 것이다. 이 아름답고 수려한 성곽은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alt견고함이 엿보이는 팔달문alt비상사태를 알리는 역할을 하던 봉수대. 일종의 통신 시설이다 과학과 실학이 녹아든 화성화성은 수원 도심 한복판에 솟아난 팔달산을 중심으로 5.7㎞에 걸쳐있다. 대개 위압감과 단절, 부조화를 보여주는 여타 성들과는 달리 화성은 어디서 보나 주변 지형과 조화로운 풍경을 만들어낸다. 화성을 한 바퀴 돌아보는 데는 3시간 남짓이 걸린다. 출입구인 4개 성문, 팔달문·화서문·장안문·창룡문이 있고 포루와 돈대·노대·수문·암문·적대·치성·공심돈·봉돈·장대 등 다양한 구조물이 적절히 배치돼 있다. 과학적으로 지어진 이들 구조물은 적의 공격을 효율적으로 방어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성곽길에 있는 포루(동일포루, 동포루 등)는 적의 공격에 대비해 화포를 감추고 위와 아래에서 한꺼번에 쏘도록 설계됐다. 성안을 이동하는 아군의 동향을 적이 알지 못하도록 하는 대기시설이다. 화성에는 모두 6개의 포루가 있으며 역할은 거의 같다.봉돈은 봉화를 올리는 통신 시설이다. 성벽 일부를 밖으로 빼내고 성벽보다 더 높게 다섯 개의 커다란 화두(굴뚝)를 두었다. 화성 봉돈은 현존하는 봉화 시설 중 가장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는다. 낮에는 연기를 피우고 밤에는 불빛으로 급한 일을 전했다. 5개 화두 중 평소에는 1개만 사용하다가 적이 나타나면 2개, 경계에 접근하면 3개, 경계를 침범하면 4개, 적과 접전 시에는 5개의 봉화를 올려 비상사태를 알렸다고 한다.출입구인 창룡문은 화성의 동쪽 문으로 규모와 형식이 화성의 서쪽 문인 화서문과 거의 비슷하다. 구조는 안과 밖이 이중인 무지개문(일명 옹성)으로 구축돼 있다. 옹성은 성문에 접근한 적군을 뒤쪽에서 공격하기 위해 성문 앞에 한 겹 더 성문을 쌓아 이중으로 지킬 수 있도록 한 시설이다.팔달문(보물 제402호)은 화성의 남쪽, 장안문의 반대쪽에 있는 문이다. 가지런히 쌓은 축대 위에 날아갈 듯한 2층 지붕의 누각을 올려서 만들었다. 나지막한 단층 지붕들이 맞닿은 곳, 높은 석축 위에 세운 누각은 웅장한 자태로 사람들의 눈길을 끈다. 팔달문을 둘러본 다음 야트막한 성곽길을 따라 서북쪽으로 가면 수원 화성의 하이라이트와도 같은 서장대(화성장대)가 모습을 드러낸다. 서장대는 동쪽의 동장재(연무대)와 함께 그 당시 군사들을 지휘하던 곳이다. 정조대왕이 사도세자의 능인 화산릉에 참배하러 왔다 이곳에서 직접 군사훈련과 불꽃놀이를 참관했다고 전해진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누각은 사방을 조망할 수 있도록 벽을 설치하지 않았으며 뒤쪽에는 기와를 써서 조형미를 살렸다.서장대에서 서북각루를 지나면 이내 화서문(보물 제403호)에 이른다. 석축으로 된 무지개 모양의 문 위에 단층 문루가 세워져 있다. 팔달문이나 장안문과는 달리 문 전면에 벽돌로 쌓은 반월형 옹성이 터진 모양으로 설치돼 있다. 문루 안 중앙에는 마루를 깔았으며 팔작지붕을 더해 우아한 멋을 더했다. 장안문은 위풍당당한 장수의 모습을 닮았다. 화성의 북쪽 문으로 사실상 화성의 정문이나 다름없다. 서울의 숭례문보다 크고 형태는 팔달문과 흡사하다. 장안문 한가운데 나 있는 옹성에 구멍 다섯 개가 뚫린 일종의 물탱크를 설치해 적이 성문에 불을 놓는 것을 대비했다. alt용연 위로 보이는 화성 성곽alt수원 3·1운동이 시작되었던 방화수류정 수원 독립운동의 뿌리화성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르는 개천, 수원천이 그 안을 관통하고 있다. 개천의 북쪽 수문인 화홍문은 동쪽 언덕 위에 있는 정자(방화수류정)와 어우러져 근사한 경관을 만들어낸다. 화홍문은 7개의 홍예문을 내고 그 위에 2층 누각을 올린 형태다. 수문 위로 사람이 다닐 수 있도록 통로를 만들어 두었으며, 화홍문 좌우 팔각기둥에는 해태상이 앉아 있다.방화수류정(訪華隨柳亭). 꽃을 찾고 버드나무를 따라 노닌다는 뜻이다. 당대 명문장가였던 척제 이서구 선생이 상량문을 쓰고, 송하 조윤형 선생이 현판을 썼다. 정자 안 북쪽에는 국왕과 군신들의 자리를 배치하고, 남쪽으로는 일반 사람들의 술상을 가운데 두고 마주 앉게 했다. 방화수류정의 아름다움은 화성 건축 보고서인 『화성성역의궤』에도 잘 나타나 있다.“이곳에 이르면 산과 들이 만나고 물이 돌아 흘러 대천에 이르니 여기야말로 동북 모퉁이의 요해처”방화수류정을 표현한 말이다. 이곳에 올라서면 멀리 팔달산이 한눈에 들어오고, ‘용연(龍淵)’이라 불리는 아름다운 연못이 내려다보인다.방화수류정은 수원 3·1운동의 발원지이기도 하다. 1919년 3월 1일 오후 8시경, 이곳에서 700m 정도 떨어진 봉수대로 수원면 사람들이 모였다. 횃불을 밝히고 독립만세를 외치기 위함이었다. 횃불 함성은 방화수류정 일대를 뜨겁게 달구었다. 기록에 의하면 바로 옆 용연이 이리저리 움직이는 불빛들로 인해 마치 용이 꿈틀거리듯 일렁거렸다고 한다. 이 횃불 행렬은 3·1운동 최초로 등장한 야간 ‘불꽃 시위’였다. 원래는 수원면 삼일학당(현 삼일공업고등학교) 교정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방화수류정-북문(장안문)-종로 네거리-남문(팔달문)의 순서로 거리 행진을 펼칠 예정이었지만 일본에 발각되는 바람에 급히 횃불 시위로 바뀐 것이라는 기록도 있다. 방화수류정 횃불 시위는 수원 지역 학교 교사와 소작농, 20세 안팎의 청년 학생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네들은 팔달산 서장대와 연무대로 몰려가 만세를 불렀다. 운동을 주도한 교사와 학생들은 일본 경찰에게 붙들려갔고 취조 과정에서 수원 만세운동을 처음부터 계획한 인물이 민족대표 48인 중 한 명인 김세환(1889~1945)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수원면 삼일여학교 학감이었던 김세환은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심어준 남다른 교육운동가였다.한편 수원 독립운동사에서 삼일학당은 산 역사나 다름없다. 1903년 5월 7일 삼일학당은 수원 보시동(현 북수동) 작은 초가집 교회로 시작했다. 일제로부터 교과서를 빼앗기고, 3·1운동을 연상시킨다는 이유로 학교 이름을 ‘삼일(三一)’로 바꾸라고 탄압받았다. 폐교 위기까지 겪은 우여곡절 많은 근대 교육기관이다. 삼일학교를 설립한 수원 출신 독립운동가 임면수(1874~1930)는 말했다.“삼일학원이 어서어서 알아야 한다. 우리가 너무도 모른다. 어서 배워서 알아야 한다. 국가 독립을 위한 일꾼이 되어야 한다.” (삼일학교 80년사)임면수 선생은 1907년 수원 지역 국채보상운동을 이끈 주인공이다. 그는 구한말 국권을 되찾으려는 일념으로 독립협회·상동청년학원·신민회 등 애국 단체와 교류했다. 또한 여성교육을 위해 자신의 집터와 토지, 과수원을 삼일여학교(현 매향여중고)에 내놓기도 했다. 이후 만주로 건너가 신흥무관학교 분교인 양성중학교 교장으로 재직하며 독립군을 양성하고, 부민단 결사대 대원으로 활약하는 등 평생을 항일투쟁에 바쳤다. 수원시청 앞 올림픽 공원에는 한 손에 책을 든 모습의 임면수 선생 동상이 있다. 수원박물관 정원에 그의 묘비가 있으며 묘소는 대전 현충원에 있다.방화수류정을 지나면 군사 훈련을 지휘하던 팔작지붕 형태의 동장대(연무대)가 나타나고 이어서 화성에서 가장 독특한 건물로 꼽히는 공심돈(空心墩)이 모습을 드러낸다. 연무대는 군사들이 무예를 연마하고 훈련했던 곳이다. 돈(墩)은 적의 동태를 감시하거나 공격할 때 이용하는 망루, 또는 초소 같은 곳인데 안엔 나선형 계단이 설치돼 있다. 멀리서 보면 꼭 벌집통 같은 요새다. 외벽에는 여러 개의 총구멍을 뚫어서 적을 공격할 수 있도록 했다. 건물 내부 한쪽엔 온돌방을 만들어 군사들의 숙소로 이용했다. alt수원 자혜의원의 전신인 봉수당화성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행궁수원 화성 안에 있는 행궁(사적 제478호)은 임금이 전란을 피해 잠시 머무르거나 지방을 순시할 때 임시로 묵던 거처다. 화성을 축적할 당시 함께 지은 건물로, 정조는 아버지의 능을 참배하러 가는 길에 이곳에 잠시 머무르며 앞날을 걱정했다고 한다. 조선시대 이곳에는 총 33동 577칸에 이르는 규모의 건물이 있었지만, 일제강점기에 대부분 훼손되고 말았다. 복원을 마친 행궁에는 정조의 어진을 모신 화령전,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베풀었던 봉수당, 정조가 노후를 꿈꾸며 지은 노래당 등이 있다. 이밖에도 장락당·낙남헌·복내당·득중정·유여택·외정리소 등이 남아 옛 자취를 더듬어 보게 한다.이중 봉수당(奉壽堂)은 화성 행궁의 정전으로 일제강점기에 기생들의 위생 검사를 실시했던 자혜의원(慈惠醫院)의 전신이 된 곳이다. 기생들은 일제의 위생 검사에 항거하는 뜻으로 이곳에서 만세운동을 벌였다. 1910년 일본은 조선인에게 자애로운 은혜를 베푼다는 미명 아래 전국 주요 지역에 자혜의원을 설치했다. 그러나 급하게 설치한 탓에 의원은 인력과 약품의 부족으로 난항을 겪었다. 수원 지역 자혜의원 자리는 본래 화성의 연무대였다. 그러나 읍내에서 거리가 멀고 난방시설 및 공간 협소 등의 이유를 들며 화령전으로 옮기게 되었는데, 화령전 정전의 오른쪽 어정 앞의 전사청(典祀廳)과 그 부속 건물, 좌측의 풍화당(風化堂)등 3동을 병원 건물로 활용했다. 이후 자혜의원은 다시 봉수당으로 이전되었다. 일제는 화성 행궁의 정전이던 봉수당을 병원 본관으로 활용함으로써 조선의 몰락을 상징적으로 알리고자 하였다.이처럼 일제강점기 아픈 역사와 함께해온 화성행궁은 규모와 건축구조, 기능 면에서 특출한 면모를 보이는 건축물로 평가받고 있다.]]> Thu, 29 Nov 2018 13:53:53 +0000 24 <![CDATA[대한남아로서 할 일을 하고 미련 없어 떠나가오, 한인애국단 한눈에 보는 역사]]> 독립운동사를 장식한 이달의 주요 역사적 사건을 한눈에 살펴보자. 12월의 주제는 한인애국단이다. 한인애국단의 활동은 1920년대 중반 이후 침체되어 있던 임시정부와 한인독립운동 진영 활동에 커다란 전환점을 마련했다. alt]]> Thu, 29 Nov 2018 17:58:43 +0000 24 <![CDATA[광복을 눈앞에 두고 옥사 순국한 한인애국단원 유상근 이달의 독립운동가]]>     글 학예실광복을 눈앞에 두고 옥사 순국한한인애국단원 유상근   이봉창과 윤봉길이 그랬던 것처럼 유상근도 한인애국단원으로서 제 목숨을 바칠 거사를 준비했다. 그러나 계획했던 거사는 끝내 실행에 옮기지 못하였고, 광복을 하루 앞둔 날 옥중에서 순국했다. 유상근의 삶은 비극적이었지만, 그의 독립운동은 결코 실패하지 않았다. alt김구를 만나 한인애국단원이 되다유상근은 강원도 통천에서 태어나, 어려서 한학을 배우고 통천공립보통학교에서 4년간 수학하였다. 집안 사정이 어려워지며 만주 여러 곳으로 거처를 옮기는데, 화룡현 이모부 댁에 머물다가 상하이로 건너간 것으로 전해진다.상하이 이주 후 취직을 도와줄 사람을 만나기 위해 인성학교를 찾게 되었다. 인성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던 신기섭을 통해 대한교민단을 알게 되고 그 과정에서 김구를 만났다. 이후 김구가 취직을 도왔으나 형편이 나아지지 않자 홍콩 등지를 돌며 인삼장사를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1932년 1월 유상근은 김구의 지시를 받아 상하이로 돌아오고, 교민들의 치안을 담당하는 대한교민단 의경대 활동을 시작하였다. 하지만 같은 해 2월 27일 의경대 활동을 그만두는데, 이는 유상근이 2월 24일 한인애국단에 가입하고 거사를 준비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한인애국단 거사에 참여하다1932년 일제의 만주 침략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한 중국 정부는 국제연맹에 소송을 제기하여 해결하려 하였고, 국제연맹은 같은 해 2월부터 만주로 조사단을 파견할 예정이었다. 김구는 조사단을 맞이하는 일본 고위 관료를 처단할 계획을 수립하고, 유상근과 최흥식을 다렌으로 보내 의거를 준비하였다. 하지만 거사 2일 전 최흥식이 김구에게 보낸 서신이 발각되는 바람에 유상근과 최흥식 모두 일제에 붙잡히고 말았다. 일제는 한인애국단이 국제연맹 조사단을 공격하려 한 것으로 왜곡 보도하였고, 이에 김구는 「한인애국단선언」을 발표하며 유상근을 비롯한 한인애국단의 목적이 국제연맹 조사단 공격이 아니라 일본 고위관료 처단에 있음을 분명히 밝혔다. 유상근은 다렌 법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후 뤼순감옥으로 이감되었다. 그리고 광복을 하루 앞둔 1945년 8월 14일 순국하고 만다. 이에 정부는 유상근의 공적을 기려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alt유상근 자필 이력서한인애국단에 입단하며 쓴 자필 이력서alt김구와 함께 찍은 한인애국단 입단 기념사진(1932)alt『한민 韓民』에 실린 유상근 관련 기사]]> Thu, 29 Nov 2018 14:18:35 +0000 24 <![CDATA[일제가 금지한 놀이 석전 우리가 몰랐던 이야기]]>     글 신현배 역사칼럼니스트일제가 금지한 놀이 석전   석전(石戰)은 한자 풀이 그대로 돌싸움을 의미한다. 이는 우리의 전통놀이로 대개 음력 정월 대보름이나단오를 전후해 마을 대항 석전이 치러졌다. 개천이나 고개, 큰길을 사이에 두고 두 편으로 나누어 돌을던지면서 승부를 겨루는 것이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일본에게는 석전만큼 두려운 놀이가 없었다. 석전, 싸움인가 놀이인가구한말 언더우드 선교사가 우리나라에 온 지 얼마 안 됐을 때의 일이다. 하루는 그가 친구를 만나기 위해 집을나섰는데 공터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무슨 일이지?’언더우드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사람들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때였다. 커다란 함성과 함께 갑자기 반대편에서 돌이 비 오듯 날아들었다. 언더우드는 기절할 듯이 놀랐다. 그리고는 돌을 피해 부리나케 달아나기 시작했다. 금방이라도 돌이 머리 위에 떨어질 것 같아 등에는 식은땀이 흘렀다.언더우드가 그날 목격한 것은 석전(石戰), 즉 돌싸움 현장이었다. 당시 돌싸움에는 수백 명의 장정이 참여했는데, 서로 돌을 던져 싸우는 투석전과 몽둥이를 들고 싸우는 육박전으로 나뉘었다. 맨 앞줄에 투석꾼이 서고,그 뒤에 육박전을 하는 이들이 섰다. 싸움이 시작되면함성과 함께 상대편을 향해 돌을 던지며 전진했다. 양쪽 진영을 향해 돌이 쏟아지고, 날아오는 돌에 맞은 사람들의 비명이 사방에서 터지곤 했다. 싸움은 꽤 치열했다. 돌에 맞아 살이 터지고 뼈가 부러지는 부상자가속출했다. 심지어 머리를 정통으로 맞아 죽는 경우도적지 않았다. 그러나 사람이 죽더라도 살인죄로 처벌받지 않았다. 수백 명, 수천 명이 한꺼번에 던지는 돌에 맞아 죽은 것이니 어느 돌에 맞아 죽었는지 알 수 없었기때문이다.석전에는 어른들뿐만 아니라 아이들도 참여했다. 아이들의 돌싸움이 시작되면 “개똥아!”, “덕재야!”하며 제 자식을 찾는 어머니들의 애타는 절규가 들려왔다.석전은 쉽게 끝나는 법이 없었다. 돌과 몽둥이 들고 맞붙어 다들 악착같이 싸웠다. 몇 시간이나 계속되는 긴싸움 끝에 한쪽이 달아나면 그것으로 승부가 끝났다. 싸움이 길어질 양이면 씨름이나 택견으로 승부를 가렸다.예부터 석전은 서울 만리재 고개를 사이에 두고 벌어지는 것이 가장 유명했다. 참여하는 인원만 9천여 명에 달했고 구경꾼은 수만 명이었다.『동국세시기』에 따르면 이 석전은 서울의 흥인문(동대문)·돈의문(서대문)·숭례문(남대문) 등 삼문(三門) 밖에거주하는 사람들과 애오개(아현) 일대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두 패로 나누어 행해졌다고 한다. 싸움은 좀처럼끝나지 않았는데, 양편에서 사생결단으로 싸운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삼문 밖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이기면 그해 경기도에 풍년이 들고, 애오개 일대에 거주하는사람들이 이기면 다른 지방에 풍년이 든다는 속설이 있었던 것. 그래서 애오개 사람들을 이기게 하려고 용산·마포 등 이웃 동네 사람들이 합세하기도 했다.일본은 왜 석전을 무서워했을까?우리나라 석전의 기원은 고구려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중국 문헌 『수서』의 ‘동이전’, 「고구려조」에 의하면 석전은 고구려의 정초 풍습이었다고 한다. 해마다 고구려왕은 패수에 가서 석전을 구경했다. 옷을 입은 채로 강물에들어가 신하들을 두 패로 나눈 뒤, 그들이 벌이는 돌싸움을 지켜보았다. 당시 고구려에서 석전이 얼마나 성행했는지 알 수 있다. 실제로 고구려 명장 을지문덕이 살수(청천강)에서 수나라 대군을 무찔렀을 때, 돌팔매질이 화살만큼 큰 위력을 발휘했다.고려시대에 와서도 석전은 군사 분야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고려 군대에는 돌을 주무기로 삼아 적군을공격하는 ‘석투군’또는 ‘척석군’이 있었다. 이 부대의 병사들은 돌팔매질로 왜구들을 소탕했다.조선시대 와서도 석전은 전투수단으로 널리 쓰였다. 태조 이성계는 척석전(돌싸움) 부대를 만들었고, 태종 이방원 역시 석전을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 오죽하면 이질을심하게 앓았을 때도 아픈 몸을 이끌고 병사들의 돌싸움훈련을 지켜봤을 정도였다.석전은 전쟁에서 쓸모가 많았다. 1510년(중종 5년) 삼포왜란 때 석전군으로 난동을 부리는 왜인들을 제압했으며, 1593년(선조 26년) 임진왜란 때는 석전군을 동원해행주산성에서 왜군을 무찔렀다.석전은 우리 민족의 오래된 전통놀이였지만, 일제강점기 일본이 보기에 이는 매우 위험하고 위협적이었다. 집단 놀이로서 참여 규모가 큰데다 전투의 성격을 띠고 있었기 때문이다. 1909년 평안도 순천에서 일본 경찰과 주민들의 충돌로 7명의 일본인이 조선인이 던진 돌에 맞아죽은 사건이 있었다. 이런 사건까지 겪고 나니 일제는 더이상 석전을 전통 놀이로 가벼이 여길 수 없었다. 그리하여 1912년 3월, 일제는 ‘경찰범 처벌 규칙’을 제정해 석전을 금지했다. 항일 투쟁을 조직화하려는 이들에 대한 처벌 규정을 만들면서 ‘돌싸움, 기타 위험한 놀이를 하거나하게 한 자, 또는 가로에서 공기총·새총 따위를 가지고놀거나 놀게 한 자’를 처벌 대상에 넣었던 것이다.일제는 조선인이 언제고 돌로 자신들을 공격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시달렸다. 단순한 놀이가 항일로 이어질것을 두려워한 것이다. 그렇게 우리의 전통 놀이 석전은자취를 감추었다. 신현배역사와 전통문화에 대해 관심이 많은 역사칼럼니스트. 저서로는 역사 이야기 『엉뚱 별난한국사』, 『엉뚱 별난 세계사』, 『2000년 서울 이야기』, 『세계사로 배우는 법 이야기』, 전통문화이야기 『소중한 우리 문화 지식 여행』 시리즈 등이 있다.]]> Thu, 29 Nov 2018 14:36:12 +0000 24 <![CDATA[우리의 철학은 오직 직각적(直覺的) 생활철학이 있을 뿐 역사에서 찾은 오늘]]>    글 이성주 역사칼럼니스트우리의 철학은 오직 직각적(直覺的) 생활철학이 있을 뿐 최근 인터넷상엔 ‘가짜뉴스’가 판을 치고, 기자를 ‘기레기’라 부르는 현상은 일상이 됐다. 과연 언론과 기자들의 수난시대라 불릴만하다. 그리고 여기 일제강점기를 살았던 참된 언론인이 있다. 바로 신언준 선생이다. 그는 언론인으로서 자신의 본분을 잊지 않으며 조국 독립에 앞장섰다. 엄혹한 시대를 산 언론인 신언준의 투쟁철학▲ 1904년 11월 평안남도 평원 출생 ▲ 1918년 정주 오산학교 입학 ▲ 1919년 3월 31일 태극기를 앞세우고 만세 시위운동 전개 ▲ 1923년 중국 망명 ▲ 1924년 3월 10일 상하이에서 독립운동단체 청년동맹회 조직 ▲ 1926년 상하이 지역 학생 독립운동단체 통합. 한인학우회 결성 ▲ 1927년 12월 7일 대독립당 결성 ▲ 1929년부터 10여 년간 『동아일보』 상하이, 남경 특파원으로 활동 ▲ 1938년 폐결핵으로 사망신언준은 격동기 지식인의 삶을 살았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는 ‘신념이 있는’ 지식인으로 살았다. 민족정신 배양으로 유명한 오산학교에 입학했고, 3·1운동의 뜻에 동참하기 위해 태극기를 들고 길거리로 뛰쳐나왔다. 졸업 후에는 중국으로 망명하여 임시정부 산하의 대한교민단에서 독립운동가 및 교민 자녀들의 교육을 담당했다. 물론 이렇게만 본다면 민족교육에 전념한 교육자 같지만, 무엇보다 그는 ‘언론인’이었다.“우리의 철학은 오직 직각적(直覺的) 생활철학이 있을 뿐이오, 오직 투쟁철학이 있을 뿐이다. 생활의 실내용(實內容)을 모르고 공상적인 안락과 평화에 심취된 개인이나 민족은 반드시 생존의 위급(危急)으로 후회막급한 일이 있는 바이다.”신언준이 발표한 「투쟁철학」의 한 구절이다. 철학이란 단순히 추상적인 말장난이 아닌 실생활에서 찾아지는 생활철학이라 역설한 그는 민족 독립을 위한 투쟁철학을 말했다. 독립을 향한 절절한 마음이 전해지지 않는가? 놀라운 것은 철학을 행동으로 보여줬다는 사실이다.참 언론인의 자세란 무엇인가1929년 세계대공황 이후 전 세계는 각자도생의 길을 걸었다. 이 시기 일본은 ‘침략’으로 위기를 타개하고자 했다. 그들은 자국의 농촌을 돌며 만주로 이주를 권했고, 그 결과 만주에 수많은 일본인이 등장하게 되었다. 문제는 이미 그곳엔 한국인과 중국인이 있었다는 것이다.1931년 7월 2일 중국 지린성 창춘현(長春縣) 만보산(萬寶山) 지역 한국인과 중국인들이 수로를 사이에 두고 갈등을 빚었다. 이것이 바로 ‘만보산 수로 사건’이다. 갈등의 배후엔 일본이 있었다. 일본은 먼저 자릴 잡은 한국인과 중국인이 일본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 양국 주민 간의 사이를 갈라놓고 이를 빌미로 만주를 침략하려 했다.신언준은 일찍이 일본의 계략을 간파하고 취재에 들어갔다. 그리고 「만보산 문제와 중국 측 방침」이라는 제목의 전문을 『동아일보』에 보냈다. 뒤이어 「2천만 동포에게 고함-민족적 이해를 타산하여 허무한 선전에 속지 말라」는 사설을 『동아일보』에 실으며 만보산 사건에 섣불리 행동하지 말 것을 당부했다. 그리고 만보산 사건의 진실을 중국 언론에 적극적으로 알림으로써 중국인의 반한(反韓)여론을 항일여론으로 돌려세웠다.최근 우리 사회를 시끄럽게 하는 이슈 중 하나는 ‘가짜뉴스’다. 사람들은 기자와 뉴스를 믿지 못하고 언론사의 이름부터 확인하기 바쁘다. 소문과 진실을 판단하는 것은 개인의 몫이요, 객관적 사실 전달이 언론의 책임이란 격언은 무색해져 버렸다.엄혹했던 시기 신언준의 활동은 언론의 사명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진실을 보도한 덕분에 일본의 간교한 계략을 무산시키고, 자칫 오해로 갈라설 뻔했던 한국과 중국의 관계도 회복할 수 있었다. 이게 바로 언론의 힘, 참된 언론인의 힘이 아닐까?우리는 신언준과 같은 언론인이 있었기 때문에 빛을 볼 수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언론은 진실을 보도하고, 사회의 공기(公器)로서 행동해야 한다는 당연한 진리는 이젠 어렵기만 한 숙제가 됐다. 물론 진실은 언제나 간단하고 간단할수록 지키는 것이 어려운 법이다. 그러나 지키기 어려운 것을 지키는 사람들은 분명 존재했고, 그들은 역사에 기록되었다. 오늘을 살아가는 언론인들이 이 사실을 잊지 않길 바란다. 이성주시나리오 작가 겸 역사칼럼니스트. 대중과 함께 호흡하는 글쓰기를 목표로 『조선의 민낯』, 『왕들의 부부싸움』과 같은 역사서를 출간한 바 있다. 최근에는 국제정치와 관련된 연구 및 집필에 열중하고 있다. 『전쟁으로 보는 국제정치』 시리즈 1, 2, 3권을 출간 중이다.   ]]> Thu, 29 Nov 2018 13:25:33 +0000 24 <![CDATA[끝과 시작 기념관 산책]]>     끝과 시작한 해의 마지막입니다.시간은 빠르고비록 나는 느릴지라도저물어가는 계절 앞에서슬퍼하지 마세요.옷깃 사이로 스미는 찬바람에겨울더러 야속하다원망하지 마세요.온통 하얗게 눈으로 뒤덮인세상을 보고 있노라면적막과, 또 그보다 무거운 추억이짙게 내려앉은 풍경을 본다면다 괜찮아질 거예요.겨울은 내년까지 이어질 것이고,그래서 겨울은 올해의 끝이지만새해의 시작이기도 하니까마지막이라 아쉬워 마세요.]]> Thu, 29 Nov 2018 13:02:03 +0000 24 <![CDATA[독립운동을 소생시킨 임시정부의 승부수 다시 만난 그날]]>     글 권경률 역사칼럼니스트독립운동을 소생시킨임시정부의 승부수   매월 대한민국의 광복과 관련된핵심사건을 선정해 그 치열했던역사의 순간을 재구성하고자 한다.다시 만난 그날, 이번 달에는의로운 목숨을 바쳐 위기에 빠진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구하고한국인의 독립정신과 저항 의식을전 세계에 알린 ‘한인애국단’이다. alt태극기 앞에 선 이봉창(1931. 12. 13.)alt이봉창 의거 이후 일본 동경 경시청 앞에서 의거현장을 검증하는 일본 경찰 김구, 임시정부 문지기에서 독립운동 간판으로“몸뚱이와 그림자만 벗하는 신세로 잠은 정청에서 자고 식사는 직업을 가진 동포들의 집에 다니며 걸식하고 지내니 거지도 상거지였다.” (백범일지)1930년대 초, 상하이 임시정부는 문을 닫을 판국이었다. 1920년대 극심한 좌우 갈등을 겪으며 몇몇 인사들이 나가버렸고, 살림 또한 어려워져 청사 월세도 내지 못했다. 당시 임시정부 국무위원이었던 김구는 텅 빈 보경리 청사에서 어떻게 해야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되살릴 수 있을지 고민을 거듭했다.1931년 임시정부 국무회의는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특무공작’에 나서기로 결의했다. 일제의 만행에 맞서 그 원흉을 암살하고 침략 기지를 파괴하는 방법으로 독립정신 및 저항 의식을 고취시키고자 한 것이다. 특무공작의 전권은 김구가 맡았다.어떤 일이든 자금이 있어야 굴러가는 법. 백범은 우선 미국·하와이·멕시코·쿠바 등지의 동포들에게 편지를 써서 성금을 요청했다. 미주 동포들은 임시정부가 미덥지 않았으나 김구가 끈질기게 편지를 보내며 어려운 사정을 알리자 마음을 열고 돈을 모아주었다.김구는 모인 성금을 가지고 ‘한인애국단’을 조직했다.1931년 12월 13일 김구는 단원 이봉창과 함께 안공근의 집에서 선서식을 가졌다. 이는 한인애국단의 실질적 출범이나 다름없었다. 이봉창에게 중국 측 병기창에서 구한 폭탄 2개와 약간의 돈을 주었다. 이윽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이봉창을 바라보는 김구의 표정이 처연했다. 이봉창이 웃으며 말했다.“저는 영원한 쾌락을 향유하러 떠나는 터이니 우리 기쁜 얼굴로 이 사진을 찍읍시다.”1932년 1월 8일 이봉창은 도쿄 한복판에서 일왕에게 폭탄을 투척했다. 계획했던 폭살에는 실패했지만 세상을 놀라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4월 29일에는 윤봉길이 상하이 홍커우공원에서 열린 일왕 탄생 기념식 단상을 향해 폭탄을 던졌다. 시라카와 요시노리 일본 해군대장을 포함해 침략의 원흉들이 쓰러졌다. 잇따른 폭탄투척에 일제는 간담이 서늘했다.한인애국단 수장 김구는 일본 외무성·일본군·사령부·조선총독부의 공동현상금 60만 원이 걸린 귀한 몸이 되었다. 임시정부 문지기를 자처했던 그는 한인애국단을 계기로 우리 독립운동의 간판으로 떠올랐다. alt한인애국단의 활동을 기록한 『도왜실기』alt윤봉길의 도시락 폭탄 중국인의 마음을 돌린 한인애국단백범 김구와 임시정부가 한인애국단을 조직한 데는 일제의 이간질로 한중 간 민족감정이 악화한 사정도 크게 작용했다.1931년 5월 중국 지린성 창춘 만보산에서 수로개설 문제를 둘러싸고 한인들과 중국 농민들 사이에 분규가 일어났다. 7월 1일 중국 농민 수백 명이 한인이 개설한 수로를 파괴하자 일본 영사 경찰은 신민을 보호한다며 출동해 발포했다. 이른바 ‘만보산 사건’이다. 다행히 인명피해는 크지 않았지만 만주 침략의 구실을 찾던 일제는 마치 한인들이 큰 피해를 입은 양 허위보도 했다. 중국 당국이 만주에 사는 한인들을 박해하고 쫓아낸다는 헛소문까지 퍼뜨렸다. 일제의 이간질에 국내에서도 소요가 일어났다. 전국 방방곡곡 불이 났다. 한국에 있는 수많은 중국인 상점과 가옥들이 습격당하고 불에 탔다. 이 과정에서 100여 명이 넘는 화교들이 목숨을 잃었는데 특이한 점은 평양에서만 94명이 살해당했다는 것이다. 일제의 사주를 받은 폭도들이 벌인 짓이었다.조선총독부는 기다렸다는 듯 한국에 거주하는 중국인의 피해 상황을 상세히 밝혔다. 이에 따라 중국에서도 반한(反韓) 감정이 들끓었다. 상하이 전차 및 버스의 한국인 검표원들이 중국 노동자들에게 폭행을 당했다. 일본이 의도했던 대로 한일 양국의 민족감정은 극악으로 치달았다.만주는 상황이 더 나빴다. 일본 관동군은 조선인 보호를 명분으로 군사행동에 나섰다. 우선 9월 18일 봉천(현재 선양) 교외의 유조구에서 남만주 철도 일부를 폭파하고 중국군의 소행인 것처럼 일을 꾸몄다. 일본은 대대적인 공세를 벌인 끝에 결국 만주 전역을 장악했다. 만주사변이었다.일제가 청나라 마지막 황제 푸이를 내세워 만주국을 건설하는 동안 동북 군벌 장학량의 군대는 뿔뿔이 흩어져 산적이 되거나 유격전을 펼쳤다. 그들은 만주 일대 조선인들에게 분풀이를 했다. 이듬해 초까지 400여 명을 사살하고 곳곳에서 방화와 약탈을 저질렀다. 일본은 한국인 피해 상황을 선전하며 계속해서 이간질에 열을 올렸다.한국과 중국 간의 관계가 나빠지자 중국에서 활동하는 우리 독립운동가들은 곤경에 빠졌다. 중국 당국의 협조 없이는 무장투쟁도, 대중조직도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독립운동을 지속하려면 일제의 야욕을 응징하는 한편 중국인들을 동지로 끌어들일 필요가 있었다.김구와 임시정부가 한인애국단을 조직하고 암살과 파괴 등의 특무공작을 펼친 이유다. 1932년 이봉창 의거가 일어나자 과연 중국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일제의 만주침략에 분노하고 있던 중국인들은 의거에 흥분했다. 국민당 기관지인 『민국일보』는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한국인 이봉창이 일왕을 저격했으나 불행히도 적중하지 못했다.”불행부중(不幸不中). 불행히도 적중하지 못했다는 제목은 유행처럼 번져나가 여러 신문사에서 사용했다. 용감한 한국인의 의거가 흐뭇하면서도 성공하지 못해 애석한 중국인의 심중을 대변한 말이었다. 한국과 한국인을 바라보는 중국인의 눈길도 한결 부드러워졌다. 동병상련(同病相憐)이 아니겠는가.반면 일제는 분노했다. ‘천황폐하’에 위해를 가하는 것도 모자라 공개적으로 모욕하다니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상하이 주둔 일본군이 움직였다. 『민국일보』를 비롯해 ‘불행부중’의 제목을 쓴 신문사들을 습격했다. 중국의 장제스 정부도 이들 신문에 폐쇄조치를 내렸다. 당시 그는 공산당 척결이 급선무라고 생각했으므로 일본과는 가급적 잘 지내려고 했다. 그럼에도 일본군은 기어이 군사행동에 나섰다. 일본 해군은 만주를 손에 넣은 육군과의 경쟁에서 밀린다고 여겼다. 그들은 상하이 침공을 계획하고 억지 명분을 만들었다. 중국 신문의 이봉창 의거 보도를 트집 잡는 것에 더해 일본인 승려 피살 사건까지 조작했다. 그리고 1월 28일, 10만 병력과 비행대를 동원해 상하이로 갔다. 이것이 바로 ‘상하이사변’이다. 일본군은 민간인 거주지를 무차별적으로 폭격하는 등 온갖 만행을 저질렀다. 중국군 30만 명이 약 1개월간 맞서 싸웠으나 버티지 못하고 물러났다. 상하이가 일본군에 점령당한 상태에서 서구 국가들의 중재로 협상이 이뤄졌다. 일왕 탄생 기념일인 4월 29일에 정전협정을 조인했다.이날 상하이 홍커우공원에서 열린 행사는 승전 축하 잔치이기도 했다. 일본인들은 주최 측의 지시로 도시락과 물통, 국기를 준비하여 행사에 참석했다. 중국인들로서는 자존심이 무척 상했을 터였다. 그런데 이 자리에서 윤봉길이 물통 폭탄을 터뜨려 침략의 원흉을 응징한 것이다. 얼마나 통쾌했겠는가.사실 의거에 쓰인 물통 폭탄은 중국 측 병기창에서 만든 것이었다. 김구는 행사 준비물 공고를 보고 물통 폭탄과 도시락 폭탄을 고안했다. 제작은 지난번처럼 병기창에 의뢰했다. 중국 측은 이봉창 의거 당시 폭탄의 위력이 약해 실패한 전례를 떠올렸다. 그들은 상하이 패전의 치욕을 갚기 위해서라도 이번에는 강력한 폭탄을 만들어 한국인의 거사를 돕고자 했다. 폭탄 제작을 마친 병기창에서는 폭탄 실험에 김구를 초빙해 참관토록 했다. 실험은 만족스러웠다.윤봉길 의거로 일본군 사령관 시라카와 요시노리 등이 죽자 중국 지도자 장제스도 기뻐했다. 그는 중국 군관학교 순회강연에서 윤봉길을 이렇게 격찬했다.“중국군 30만 명이 못한 일을 한국 젊은이가 혼자 해냈다.”장제스는 본래 한국의 독립운동에 관심이 없었으나 목숨까지 던지는 한인애국단의 활동을 보고 큰 감명을 받았다. 그렇게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국외 독립운동은 바야흐로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alt                                                        한인애국단 이봉창alt한인애국단 윤봉길                                                         활기를 되찾은 임시정부와 독립운동한인애국단 활동은 중국을 비롯한 전 세계에 우리나라의 존재감을 떨쳤다. 한국인들에게는 독립정신과 저항의식을 일깨웠고 독립운동가들에게는 승리에 대한 열정과 자신감을 키워주었다. 미주 동포사회는 흥분의 도가니였다. 해외에서 임시정부로 성금이 답지했다. 중국 민간단체들도 도움을 보탰다. 청사 월세도 못내 독촉에 시달리던 임시정부로선 숨통이 트인 셈이다.한인애국단 활동은 중국을 비롯한 전 세계에 우리나라의 존재감을 떨쳤다. 한국인들에게는 독립정신과 저항의식을 일깨웠고 독립운동가들에게는 승리에 대한 열정과 자신감을 키워주었다. 미주 동포사회는 흥분의 도가니였다. 해외에서 임시정부로 성금이 답지했다. 중국 민간단체들도 도움을 보탰다. 청사 월세도 못내 독촉에 시달리던 임시정부로선 숨통이 트인 셈이다.일제는 중국 내 점령지에서 독립운동가 색출에 혈안이 되었다. 도산 안창호를 비롯해 많은 독립운동가가 붙잡혀 국내로 송환되었다. 임시정부도 쫓기듯 상하이를 떠나 대장정에 돌입했다. 항저우·난징·우한·창사·광저우·류저우·치장을 거쳐 1940년 충칭에 안착할 때까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난과 역경이 이어졌다.장제스는 국민당 정부에 김구를 보호하라는 특별지시를 내렸다. 이후 임시정부 요인과 가족들이 근거지를 옮길 때마다 중국 국민당 정부에서 차량과 숙식을 제공했다. 1933년 5월 김구는 난징에서 장제스를 면담했다. 이 자리에서 그는 “일제의 대륙 침략 교량을 (우리가) 파괴할 테니 충분한 자금을 대달라”고 요청했다. 일본은 한중 공동의 적이므로 한인애국단을 활용할 수 있는 돈줄이 돼달라는 것이었다. 장제스는 특무공작도 좋지만 앞으로 군인이 필요할 것이라며 한국인 군관 양성을 제안했다. 김구는 그의 제안을 수락하고 중국중앙군관학교 뤄양분교에 한인특별반을 만들기로 합의했다. 임시정부는 만주에 사람을 파견해 옛 독립군들과 접촉했다. 지청천·이범석·오광선·김창환 등이 부하들을 이끌고 합류했다. 중국 관내의 조선 청년들도 끌어 모았다. 독립운동의 차세대 주역들에게 배움과 훈련 기회를 마련해준 것이다.임시정부는 인재를 양성하고 통합을 일구며 다음 시대를 열어갔다. 한인애국단이 목숨 바쳐 한국 독립운동을 소생시키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양손에 폭탄을 들고 환하게 웃고 있는 이봉창 의사. 태극기를 배경으로 앞을 지긋이 바라보는 윤봉길 의사. 빛바랜 사진 속의 그 웃음, 그 눈빛이 시리도록 눈에 밟히는 이유다. 권경률역사칼럼니스트. 서강대학교에서 역사학을 공부했다. 칼럼 ‘사극 속 역사인물’을 연재하고 팟캐스트 ‘역사채널 권경률’을 진행한다. 저서로는 『조선을 새롭게 하라』, 『조선을 만든 위험한 말들』 등을 출간했으며, 영상물 『시시콜콜 한국사 어워즈』도 선보이고 있다.]]> Thu, 29 Nov 2018 15:47:52 +0000 24 <![CDATA[이봉창과 윤봉길 일제의 심장을 저격하다 겨레의 함성, 독립의 희망]]> 글 박영규 작가이봉창과 윤봉길 일제의 심장을 저격하다 1932년 두 차례의 굉음이 울렸다. 폭탄이었다.일본인들은 흩어지거나 다쳤다. 난데없는 폭탄에 놀란 것은 일제만이 아니었다. 전 세계가 일제의 심장을 향해 폭탄을 던지는두 한국인 청년에 주목했다. alt일왕을 처단하기 위해일본에 도착한 이봉창의사가 정세와 상황을김구에게 알린 편지 / 윤봉길 의사의홍커우공원 폭탄투척의거 『대판매일신문』 호외(1932.04.29.) / 법정으로 가는 이봉창1932년, 일제를 뒤흔든 두 개의 폭탄1932년 1월 8일 11시, 일제의 심장부인 도쿄 경시청 앞에서 폭탄이 터졌다. 폭탄은 만주 괴뢰국의 황제 푸이와 함께 관병식을 마치고 돌아가던 일왕 히로히토를 향했다.그러나 안타깝게도 히로히토까지 미치지 못하고 궁내대신이 탄 마차 옆에 떨어졌다. 호위병들은 순식간에 일어난 일왕 처단시도에 허겁지겁 범인을 색출하려 들었다.그리고 군중 속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조선독립만세를부르짖는 청년을 발견했다. 그는 체포를 자처하며 자신이 한인애국단원 이봉창이라고 밝혔다.사건은 일본 열도를 뒤흔들었다. 중국 언론에서는 대서특필로 다뤘다. 중국 국민당의 기관지 『민국일보』는 ‘한국인 이봉창이 일왕을 저격했으나 불행히도 명중시키지못했다’고 보도했다. 일제를 꽤나 자극하는 보도였다. 이에 일제는 군대와 경찰을 동원해 『민국일보』를 습격, 파괴했다. 이어 중국 정부에 공식적으로 항의하였다. 그도성에 차지 않았던지 급기야 상하이를 공격하기에 이르렀고, 중국군 또한 적극적으로 대응하면서 상하이사변이 터졌다. 상하이사변은 훗날 중일전쟁을 촉발하게 된다. 그만큼 이봉창 의거가 불러온 파급력은 대단한 것이었다. 이봉창 의거 직후 일본 경찰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주석이자 한인애국단을 운영하고 있는 ‘김구’를 잡는 데혈안이 되었다.1932년 4월 29일, 이봉창의 도쿄 의거가 있은 지 4개월이 채 되지 않은 날에 다시금 폭음이 터져 나왔다. 이번에는 상하이였다. 그날 상하이 홍커우공원에서는 일왕 히로히토의 생일축하식(천장절)과 상하이사변 전승 기념행사가 열리고 있었다. 11시에 시작된 행사가 끝나갈 무렵, 물통 모양의 폭탄이 행사장 안으로 날아들었다. 이미천장절 행사는 끝나고 상하이교민회가 준비한 축하연만남겨둔 시각이었으므로 다른 나라의 외교관이나 손님들은 빠져나간 뒤였다. 상하이사변 승리를 기념하는 식이거행되고 일본국가인 기미가요가 울려 퍼지는 순간 요란한 폭음과 함께 폭탄이 터졌다. 폭탄은 단상의 경축대 위에 명중하였다. 상하이 파견군 총사령관 시라카와 요시노리 육군대장은 약 한 달 뒤 사망하였고 일본 거류민단장 가와바타 사다쓰구는 다음날 사망하였다. 중국 총영사 무라이는 폭탄 파편에 중상을 입었다. 제3함대 사령관노무라 기치사부로 중장은 실명했다. 또 제9사단장 우에다 켄키치 중장은 다리를 절단해야 했고, 중국공사 시게마쓰 마모루도 이때 입은 중상으로 다리를 절었다.폭탄을 던진 사람은 마찬가지로 한인애국단 소속 윤봉길이었다. 윤봉길 의거는 세계 신문들의 중대 뉴스로 보도됐다. 중국 국민정부 주석 장제스는 중국의 백만 군대가 해내지 못한 일을 해냈다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또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가치와 역할을 인정하고 본격적인 지원에 나섰다. 중국에 얹혀살던 임시정부로서는천군만마를 얻은 격이었다. 의거 소식을 들은 한인 교민들의 지원도 이어졌다. alt이봉창alt김구 선생과윤봉길alt백정기·윤봉길·이봉창 의사효창공원 유골안치(1946)alt윤봉길이 쓴『농민독본』김구가 만난 청년들이봉창과 윤봉길은 일본으로부터 갖은 고문을 받은 뒤에가혹하게 처형됐다. 이봉창은 비밀재판을 통해 1932년9월 30일 사형 선고를 받고 이치가야 형무소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는 재판정에서 자신을 심문하는 대심원에게 “나는 너희 임금을 상대하는 사람이거늘 어찌감히 나에게 무례하게 구느냐”고 호통을 치기도 했다.한편 윤봉길은 1932년 5월 25일 상하이 파견 일본 군법회의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뒤 1932년 12월 18일 가나자와 육군구금소로 이송되었다가 다음날 아침 7시 27분에이시카와현 가나자와시 미쓰고우시야마 서북 골짜기에서 형틀에 묶인 채로 총살당했다. 윤봉길은 사형 직전 마지막으로 남길 말이 없느냐는 질문에 “사형은 이미 각오했으므로 하등 말할 바가 없다”며 담담한 태도를 보였다.두 의사는 봉분도 없이 매장되었다가 김구·이광훈·박열 등 독립투사들과 재일동포들의 노력으로 1946년에야 환국할 수 있었다. 그들은 효창공원 삼의사 묘소에 백정기 의사와 함께 안장됐다.목숨을 던져 스스로 독립운동의 불씨가 되었던 이봉창과 윤봉길의 삶을 간략하게나마 정리하고자 한다.먼저 이봉창은 1900년 지금의 서울 용산에 해당하는 한성부 용산방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이진규는 건축업과 운수업을 했다. 아버지의 사업이 그런대로 잘 됐기 때문에 이봉창의 어린 시절은 순탄했다. 서당을 다닌 후에는 용산 문창소학교를 다녔다. 그러나 아버지가 첩을 얻어 생활하는 바람에 나중에는 학비 지원을 받을 수 없게 되었다. 소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인이 경영하는 과자가게에서 점원으로 일했다. 19살이 되던 해에는 남만철도회사 용산정차장 고용원으로 취직했다. 3·1운동 이후 친형 용태와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막노동을 하며 생계를 이었다. 이봉창은 고된 막노동 생활에서 각기병에 걸려 고생했다. 병 때문에 일을 할 수 없는 처지에 이르렀고 다행히 친구의 도움을 받아 1년 동안 쉬면서 요양에 전념할 수 있었다. 그즈음 이봉창은 독서에 빠져있었는데, 이를 통해 독립운동에 대한 의지를 키웠다. 그는 여비가 마련되자마자 상하이로 갔다. 그곳에서 안중근의 동생 안공근의 주선으로 김구를 만났다. 김구는 여러 차례 이봉창을 시험한 끝에 그를 한인애국단 단원으로 받아들이고 히로히토 처단 계획의 실행자로 선택했다. 그렇게 이봉창은 거사를 위해 다시 일본으로 갔다.이봉창 의거가 실패하고 김구가 선택한 또 다른 사람이 바로 윤봉길이었다. 윤봉길은 1908년 충청남도 덕산군 현내면 시량리에서 윤황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비교적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11살이던 1918년에 덕산보통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듬해 3·1운동이 일어나자 식민지 노예교육을 받지 않겠다며 학교를 자퇴하고 한학을 공부했다. 1921년에는 유학자 성주록이 세운 서당 오치서숙에 들어가 8년간 수학하고 졸업했다. 윤봉길은 오치서숙 시절에 『오추』·『옥수』·『임추』 등의 시집을 발간할 정도로 문학에 열정을 쏟았다.오치서숙 졸업 후 윤봉길은 농촌운동에 뛰어들었다. 농촌계몽운동·농촌부흥운동·야학·독서회 등에 투신하며 『농민독본』 등 3권의 책을 저술했다. 『농민독본』은 농민구제와 농촌부흥을 위해 자주·자립정신을 일깨우는 내용을 담고 있다.1930년 ‘장부가 뜻을 품고 집을 나서면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는 글귀를 남기고 중국으로 갔다. 그 뒤를 따라붙은 일본 경찰에 붙잡혀 45일간 투옥되는 일도 있었다. 감옥에서 풀려난 윤봉길은 만주로 망명한 후 다시 상하이로 향했다. 그는 상하이에서 채소 장사를 하며 기회를 엿보다 마침내 1931년 겨울, 김구를 만나 한인애국단에 가입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듬해 윤봉길 의거가 일어났다. 박영규1996년 『한 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을 내면서 저술활동을 시작하여, 1998년 중편소설 『식물도감 만드는 시간』으로 문예중앙신인상을 수상하면서 소설가로 등단했다. 문학, 철학, 역사 분야에 걸쳐 저술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대표적인 역사서로는 『한 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 · 『한 권으로 읽는 일제강점실록』 등이 있다. alt alt alt ]]> Thu, 29 Nov 2018 15:10:42 +0000 24 <![CDATA[왕권신수설과 청교도 혁명 명화로 보는 세계사]]>     글 고종환 아주대학교 외래교수왕권신수설과 청교도 혁명   왕권신수설이란 국왕의 권한은 인간이 아닌 신(神)으로부터 나온다는 정치이론으로유럽 절대주의 시대를 뒷받침해 온 정치사상이다. 영국 스튜어트 왕가의 찰스 1세도 바로이 왕권신수설의 신봉자였다. 신의 권한을 부여받은 그는 마치 자신이 신이라도 된 것처럼 행동했다.의회와 소통하지 않았으며 모든 것을 독단적으로 결정했다. alt          사냥 나온 찰스 1세1635, 안토니 반 다이크(Anthony Van Dyck), 루브르 박물관alt말 조련사와 함께한 찰스 1세1633, 안토니 반 다이크(Anthony Van Dyck), 루브르 박물관 동물도 인정한 왕권신수설?왕권신수설에 의하면 군주는 오로지 신에게만 책임이 있으므로 백성이나 신하들에 대해서는 어떠한 책임도 질 필요가 없었다. 또한 왕권은 신이 내린 것으로서 언제나 법 위에 있으니, 왕은 법의 지배를 받지 않았다. 찰스 1세가 의회를 무시하고 오만할 수 있었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는 ‘신’의 권한을 가진 자신이 평범한 일반인들과 구태여 의논을 할 필요가 없다고 여겼다. 인간은 물론 길거리에 지나가는 동물조차도 자신을 신으로 모시며 고개 숙이고 경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루벤스의 제자, 화가 안토니 반 다이크는 이러한 찰스 1세의 오만함과 불통을 그림으로 표현했다. 반 다이크는 찰스 1세를 그리면서 흔히 국왕의 권력을 상징하는 왕관이나 망토 등의 화려한 장식 대신 특이하게 백마를 그려 넣었다. 두 그림 모두 찰스 1세와 함께 나란히 백마가 등장한다. 찰스 1세는 그림의 중심을 차지하며 기세등등하고 호방한 모습으로 표현된다. 백마는 고개를 살짝 숙이고 마부는 찰스 1세를 올려다본다. 마부와 백마 모두 찰스 1세를 경배하고 있는 것이다. 대개 군주의 초상화에 등장하는 말이나 사냥개는 그 주인의 뛰어난 혈통과 신분을 암시하는데, 그중에서도 백마는 최고의 혈통을 상징한다. 반 다이크는 좋은 혈통의 백마마저도 고개를 숙인 그림을 통해 모든 인간과 동물들이 자신을 경배해야 한다는 찰스 1세의 그릇된 믿음을 풍자하고자 했다.청교도 혁명의 원인으로 전쟁과 세금 증세, 의회와의 대립 등 다양한 요인이 꼽히지만, 왕권신수설을 신봉한 군주도 적잖은 영향을 미쳤음을 부인할 순 없다. 물론 근본적 원인을 따지자면 찰스 1세 이전으로 돌아가야 한다.대영제국의 토대를 마련한 엘리자베스 1세가 왕위를 이을 후손 없이 죽자 스코틀랜드 왕가 출신이 대를 잇는다. 그가 찰스 1세의 아버지인 제임스 1세다. 당시 영국은 의회가 권력을 잡고 있었기 때문에 의회 승인 없이 국왕이 독단적으로 입법과 증세를 결정할 수 없었다. 그러나 제임스 1세 또한 왕권신수설을 믿으며 의회를 무시했다.그리고 찰스 1세는 부친보다 더 깊게 왕권신수설에 빠져들며 독재의 길을 걸었다.청교도 혁명을 촉발한 세금찰스 1세의 독단적인 정치활동에 맞서던 반대파는 1649년 1월 30일 마침내 런던시민들이 보는 앞에서 찰스 1세를 공개 처형했다. 이를 청교도 혁명이라고 한다. 찰스 1세와 대립한 의회파가 영국의 칼뱅파인 청교도였기 때문에 청교도 혁명이라 불리게 됐다. 처형장에서 찰스 1세는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나는 이제 부패한 나라에서 영원히 변치 않는 나라로 간다. 이 세상의 어지러움이여, 안녕히.”그는 마지막까지 왕권신수설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청교도 혁명은 왜 일어났을까? 1628년, 찰스 1세는 에스파냐 등 주변 나라와 전쟁을 지속하면서 전쟁 자금을 충당하기 위해 국민들에게 많은 세금을 부과했다. 의회는 강제 과세에 대항하고 국민 권리를 수호하고자 하원의원들이 중심이 되어 강제 과세 제한과 국민의 각종 자유권 보장을 요구하는 ‘권리청원’을 국왕에게 제출했다. 권리청원은 주권을 다시 의회로 옮겨오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찰스 1세는 일단 동의의 제스처를 취했지만 다음 해인 1629년에 갑자기 의회를 해산하고 9명의 의원을 체포했다.당시 영국은 중산층 계급의 성장과 함께 절대 왕정을 공격하는 청교도들이 하원에서 큰 세력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니 찰스 1세의 독재에 대한 불만도 커질 수밖에 없었다. 찰스 1세와 의회의 관계는 점점 파국으로 치달았다. 결국 1642년 8월, 국왕을 따르는 왕당파와 반대파인 의회파 사이에 전쟁이 발발했다. 초기 왕당파가 우세를 보였으나 젠트리 출신 올리버 크롬웰의 철기군이 맹활약하면서 의회파가 승리를 거머쥐었다. 의회파는 찰스 1세를 생포한다. 여기까지가 1차 전쟁이다. 그러나 전쟁 후 의회파는 국왕과의 화해를 원하는 장로파와 끝까지 항전을 주장하는 독립파로 나뉘어 갈등했다. 이 사이 감금되어 있던 왕은 탈출을 시도, 스코틀랜드와 조약을 맺고 1648년 2차 전쟁을 일으켰지만 결과는 전과 다르지 않았다. 다시 체포된 찰스 1세는 1649년 처형당했다. 고종환한국 프랑스문화학회의 재무이사이자, 아주대학교와 경상대학교 외래교수. 프랑스 문화와 예술, 서양연극사, 광고이미지 등을 강의하고 있다. 대표 저서로는 『한권으로 읽는 연극의 역사』와 『오페라로 배우는 역사와 문화』, 『글로벌 다문화교육』이 있다.]]> Thu, 29 Nov 2018 16:18:40 +0000 24 <![CDATA[전쟁과 부대찌개 한 접시의 추억]]>     글 윤덕노 음식문화평론가전쟁과 부대찌개   어려운 시절 먹었던 음식은 종종 향수로 남는다. 일종의 추억 같은 것이다. 부대찌개도 그렇다. 한국전쟁 직후 미군 부대에서 나온 햄과 소시지를 넣어 만든 찌개. 그러나 부대찌개의 유래를 말하는 한국 사람들의 마음은 조금 묘하다. 미군 부대 고기를 얻어먹고 살았다는 불편함과 먹고살 만해진 지금 그 시절을 추억으로 회상할 수 있다는 안도감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다. 부대찌개의 유행은 경제발전의 산물사람들은 부대찌개를 단단히 오해하고 있다. 부대찌개는 어렵고 가난한 사람들이 먹던 음식이 아니다. 그 시절 햄과 소시지를 넣은 부대찌개를 먹은 사람들이라면 단연 ‘특권층’이었다. 미국 PX 물품인 햄과 소시지, 베이컨은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거나 속된 말로 양키 물건을 파는 암거래 상을 통해서나 구할 수 있었다. 양담배 한 갑을 얻으면 몰래 자랑하고 아껴 피우던 때였다. 하물며 햄이나 소시지는 오죽했으랴.우리나라 사람들이 본격적으로 부대찌개를 먹기 시작한 시점은 한국전쟁 직후가 아닌 1970~80년대였다. 시기적으로 우리나라 경제가 한창 발전할 때였고, 더 이상 미국 PX에서 빼낸 물건을 탐내지 않았다. 이전까지 부대찌개는 음식의 실체만 있을 뿐 특정 이름으로 불리지 않았다. PX에서 몰래 빼 온 고기로 만든 음식이라고 공공연하게 광고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미제 물건 단속이 엄격하게 이루어지던 시절이었으니, 부대고기로 끓인 찌개라는 사실이 발각되면 고기도 압수당하고 벌금까지 물어야 했다. ‘부대찌개’라는 이름은 역설적으로 미군 부대 고기가 아닌 국산 햄과 소시지를 찌개에 넣기 시작한 70~80년대 이후부터 쓰였다. 이 무렵, 국내 육가공 산업이 발달하면서 품질이 좋아짐은 물론 관련 시장도 연평균 25% 이상의 상승세를 보였다. 장기간 보관이 가능하고 가격이 저렴한 통조림 햄이 등장하면서 부대찌개는 친숙하고 흔한 음식이 된 것이다.부대찌개는 어디에나 있다미군 부대에서 나온 고기로 만든 음식은 본래 ‘존슨탕’이라고 불렸다. 부대찌개도 여기에 포함된다. 존슨탕이라는 이름은 당시 미국의 대통령이었던 ‘존슨’으로부터 따왔다. 존슨 대통령의 재임 기간이 1963년부터 1969년까지였고, 그가 한국을 방문한 해가 1967년이었으니 존슨탕이라는 이름도 그 무렵에 만들어졌을 것이라 추측한다. 부대고기를 넣고 만든 찌개의 탄생을 1960년대로 보는 이유다.혹자는 부대찌개라는 이름에 거부감을 표하기도 한다. 미군 부대에서 몰래 가져온 고기로 만든 음식이라는 유래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 누군가에게 부대찌개는 어려웠던 시절과 그 시절을 극복해낸 자부심과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눈물 젖은 빵을 잊지 못하는 것처럼 가장 힘들었던 날먹었던 부대찌개의 맛을 추억하는 것이리라.세계 각국에도 부대찌개 역할을 하는 음식들이 있다. 오바마 미국 전 대통령이 좋아했다는 스팸 주먹밥, ‘하와이안 무스비’도 하와이 주둔 미군 부대의 부대고기를 가지고 만든 음식이다. 마찬가지로 미군부대가 주둔한 일본 오키나와에도 두부와 채소, 스팸과 소시지를 넣고 볶은 ‘찬푸르’라는 음식이 부대 요리로 사랑받았다. 이탈리아의 카르보나라 크림 파스타 또한 부대 음식에서 발전한 것이라는 설이 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로마 시민들이 이탈리아 주둔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우유와 달걀, 베이컨을 가지고 만들었다는 것이다. 카르보나라 역시 부대찌개와 비슷하게 1980년대 이후 유행을 탔다.전쟁을 겪은 어느 나라에나 부대찌개는 있었다. 그리고 부대찌개에는 김치와 햄 등 온갖 재료를 넣은 그 요리법처럼 전쟁의 상처를 겪어내고, 치열하게 살아내고, 극복해낸 사람들의 다난한 역사가 있었다. 어쩌면 부대찌개는 전쟁이라는 고난을 딛고 일어선 사람들을 위한 훈장 같은 음식인지도 몰랐다. 윤덕노음식문화평론가. 1984년 매일경제신문사에 입사해 20여 년간 기자 생활을 하면서 특파원 활동, 출장, 연수 등으로 미국과 중국을 비롯한 다양한 나라에 머물렀다. 음식에 관심이 많아 관련 자료를 수집해온 결과, 음식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주요 저서로는 『음식잡학사전』, 『신의 선물 밥』, 『붕어빵에도 족보가 있다』 등이 있다.]]> Thu, 29 Nov 2018 16:43:33 +0000 24 <![CDATA[여성 독립운동가의 이름을 되찾다 어느 독립운동가의 초상]]>     글 심옥주 한국여성독립운동연구소 소장여성 독립운동가의이름을 되찾다 우리 독립운동사의 어떤 사건, 또는 날들을 들여다보아도 그곳엔 여성이 있었다. 그리고 오늘, 그들의 역사가 다시 시작된다. alt국내외 미주에서 독립운동을 펼친 여성 독립운동가 차인재의 묘잃어버린 기억의 흔적을 더듬다우연한 기회에 미주지역 여성 독립운동가의 흔적과 마주했다. 여러 도시를 방문하면서 연구자도 만나고 후손도 만났지만,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곳은 공교롭게도 ‘묘지’였다. 생전을 볼 수 없었던 사람들의 묘지, 묘비에는 출생지를 표기한 글귀와 함께 곱게 한복을 차려입은 사진이 있었다. ‘본적 조선 경성’, ‘김해 김씨’ 그리고 원적 주소까지. 너무 늦게 찾아온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그동안 역사는 여성 독립운동가의 이야기는 잊은 채로 흘렀다. 1910년 국권을 상실한 이래 1945년 광복을 맞기까지 우리 민족은 독립을 향한 끊임없는저항을 이어왔다. 멀고 먼 타지에서도 독립의 열망이 들끓었다. 죽음의 순간에도 고국을 그리워하며 대한인임을 가슴에 새겼던 수많은 민초 가운데 한국 여성의 잃어버린 역사와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alt대한독립여자선언서alt숭의여학교의 송죽결사대alt경기도 안성만세, 기생만세운동 참여 기사여학생, 교사, 상인, 기생, 양반 여성… 만세운동의 주역들일제를 향한 민초들의 저항은 3·1운동을 기점으로 분출되었다. 3·1운동은 신분과 지역·연령·성별·직업을 뛰어넘는 일치된 민족운동이었다. 일본을 비롯한 만주와 중국 등 국외에서 전초 활동이 시작됐다. 독립선언서가 도화선이 되어 3·1운동은 전국으로 확산됐다. 1918년 11월 「무오독립선언서」와 1919년 2월8일 「2·8 독립선언서」에 이어 1919년 2월에 만들어진 「대한독립여자선언서」에서 여성은 확고한 독립 의지를 드러냈다. 김인종·김숙경·김오경·고순경·김숙원·최영자·박봉희·이정숙에 의해 작성된 연서가 만주, 노령 등 국내외 동포사회에 전달되었다. 「대한독립여자선언서」는 대한민국 부인 동포의 정신 자각을 성명하는 선언으로 일본 침략의 부당함과 국권 침탈의 불합리함을 알리고, 국가위기 속에서 여성의 적극적인 참여와 분발을 호소했다.1919년 3월 9일 자 『매일신보』에는 「기후(其後)의 소요(逍遙), 평안남도 평양(平壤), 여학생이 만세」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평양 신양리 미국 사람의집에 여학생 약  200명이 모여 만세를 부르고, 오후 3시 쯤 일천 명의 군중이 몰려 있는 것을 보병이 발견했다는 내용이었다. 1919년 4월 3일 자 신문에는 「경기도 안성(安城), 여기서도 시위, 삼십 일에 또, 기생들도 만세」란 제목의 기사가 실리기도 했다. 이처럼 3·1운동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은 ‘여성’이었다. 그들은 지역과 신분의 경계를 넘어서 항일의 목소리를 높였다.미국 선교사 언더우드, 아펜젤러, 스크랜턴 부인 등이 조선에 들어와 여성교육기관을 설립했다. 1886년 서울 이화학당을 시작으로 정신여학교 등 조선 곳곳에 여성을 가르치는 학교가 들어서면서 그동안 불모지나 다름없었던 한국 여성교육이 확대되었다. 조선에 학교를 세운 이들은 비록 피부색이 다른 이방인이었으나 ‘제2의 조선인’이라는 표현이 아깝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우리 민족을 위한 선교와 봉사활동을 진행하고 근대 여성 교육기관까지 설립하였으니 말이다. 근대식 여성교육은 한국여성의 구국의식을 일깨우는 데 크게 기여했다.1919년 3·1운동에서 여학생은 각 지역 소통창구 역할을 담당했다. 3월 1일부터 4월 8일까지 전개된 여학생 만세시위를 살펴보면 3월 1일에는 보성여학교(선천)·숭의여학교(평양)·루씨여학교(원산)·경성여고보(서울)·정신여학교(서울)에서, 3월 2일부터 11일 사이에는 영생여학교(함흥)·호수돈여학교(개성)·신명여학교(대구)·수피아여학교(광주)·보신여학교(김책)·일신여학교(부산)에서 시위가이루어졌다. 3월 12일부터 4월 8일까지 약 한 달 동안에는 기전여학교(전주)·의신여학교(마산)·영명여학교(공주)·의정여학교(해주)·정명여학교(목표)에서 여학생 시위가 전개되었으니, 전국 방방곡곡 여학생의 나라사랑 행진이 이어진 셈이다.여학생과 지식인은 만세시위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비밀회합과 비밀결사대활동을 주도했다. ‘호수돈여학교의 비밀결사대’와 ‘숭의여학교 송죽결사대’가 대표적이다. 이외에도 기생·상인·농민·양반 등 너 나 할 것 없이 여성구국의지는 독립의 열망으로 표출되었다.   alt한국혁명여성동맹 창립 기념(1940.06.17.)alt근화회를 조직한 김마리아  대한 여성의 이름으로 독립을 외치다국권침탈 후 일제의 침략이 가속화되는 가운데 여성구국운동은 지방에서 전국으로 확산, 풀뿌리 운동의 발전된 형태로 뻗어 나갔다. 3·1운동을 기점으로 여성구국운동이 주목받은 것은 사실이나, 이미 그 이전부터 의병운동과 국채보상운동을 통해 여성의 활약이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의병장 윤희순과 안사람의병단, 여성국채보상운동은 여성구국의지가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환경적 토대가 되었다. 국가와 여성의 관계, 독립의 이유, 자유를 향한 저항…. 그것은 당시 여성이 갈구했던 희망의 메시지였음이 틀림없다.나라(國家)라는 것은 한 사람 한 사람의 집적(集積)이다. 곧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자유와 권리를 가진연후에 미루어 그 나라의 자유를 보전할 수 있다.『대한조선독립회 회보』 7호 중이처럼 여성이 자신의 의지를 피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교육의 영향이 있었다. 또한 해외 유학길에 오른 김란사·김마리아·차경신 등 많은 여성지식인의 도전은 일본, 중국, 미국 등 해외에서 여성애국단체가 조직되는 계기가 되었다. 1928년 2월, 광복의 염원을 품은 여학생들이 미국 뉴욕에 모여 무궁화 꽃의 의미를 담은 ‘근화회(槿花會)’를 조직했다. 김마리아와 황에스더·이선행·우영빈·안헬른 등이 중심이 된 근화회는 대동단결과 재미 한인사회를 향한 메시지를 전달했다. 또『신한민보』에 그 활동이 소개되며 조선 여성의 의기 있는 외침을 일축했다.상해 임시정부의 여성들은 임시정부의 상징적 의미가 퇴색되지 않도록 남편을 보좌하며 안살림을 꾸렸다. 임정 요인 부인들로 구성된 한국혁명여성동맹과 상해한인애국부인회 등은 자녀교육을 위해 유치원을 설립하여 운영했다. 만주와 간도, 연해주, 중국 일대에서 활약한 여성도 있다. 안경신(광복군 총영)·권기옥(항공사령부)·오희옥(5지대)·정영(2지대)·박차정(조선의용대 부녀복무단장) 등은 알려진 일부에 불과하다. 독립군과 함께한 무명의 여성 독립운동가들은 훨씬 더 많다. 그들은 무장투쟁의 적지에도 독립운동을 지원, 독립자금을 전달하거나 직접 총과 칼을 들고 일제와 싸웠다.3·1운동 100년, 여성 독립운동가의 이름을 되찾다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2019년, 우리는 여성 독립운동가의 이름을 찾아가는 과정에 있다. 독립운동의 현장에서 소리 없이 묵묵히 헌신했던 여성 독립운동가 중 얼마나 많은 수가 역사의 기억에 남겨져 있을까?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제창에 힘입어 자유와 독립의 열망을 외쳤던 평화의 메시지는 오늘에야 메아리가 되어 돌아오고 있다. 잊었던 여성 독립운동가, 그 이름을 되찾기 위한 걸음은 이제 시작이다.]]> Mon, 07 Jan 2019 11:56:20 +0000 25 <![CDATA[신여성의 일상다반사 史소한 이야기]]>       근대 여성잡지의 탄생 문자가 매체의 전부였던 시절, 1920~1930년대는 신문과 잡지의 위상이 대단했다. 이에 따라 다양한 독자층을 대상으로 한 잡지들이 쏟아져 나왔는데 여성도 예외일 수 없었다. 과거와 달리 배우고, 읽고 쓸 줄 아는 여성들이 늘어나면서 그들은 잡지를 읽었고 때때로 필자로 참여하기도 했다. 잡지 발행 초기 여성의 계몽을 촉구하는 논설이 주로 실어졌던 것에 반해 1930년대로 갈수록 흥미와 오락을 목적으로 한 기사가 늘어났다. 이 시기 여성잡지는 비록 여성문제를 심도있게 다루지 못하였고 대부분의 필진이 남성이라는 한계가 있었으나, 그렇더라도 당시 여성 담론과 문화가 논의되던 거의 유일한 장(場)이나 다름없었다. alt]]> Mon, 07 Jan 2019 23:32:05 +0000 25 <![CDATA[아우내 장터에서 만세 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 유관순 이달의 독립운동가]]>     글 학예실아우내 장터에서 만세 운동을 주도한독립운동가   독립기념관은 국가보훈처 및 광복회와 공동으로 유관순을 2019년 1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유관순은 3·1운동에 참여함은 물론 천안 아우내 장터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다 붙잡혀 열여덟 어린 나이에 옥중 순국하였다. alt학생 시위대와 만세 운동에 참여하다유관순은 1902년 충남 천안에서 5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개신교로 개종한 일가친척과 계몽운동에 힘쓰던 부친의 영향을 받아 어려서부터 신앙심과 민족의식을 중시하였다. 1915년 4월, 선교사의 주선으로 서울 이화학당 보통과에 편입하게 되었다. 1918년 국제 정세가 재편되는 상황 속에서 국내외 항일운동 세력들은 조선 독립의 당위성을 알리기 위한 활동을 준비했다. 서울의 학생들도 학교 대표를 선임하여 만세 운동을 추진하였는데, 유관순도 학당 내 비밀결사조직 ‘이문회’를 통해 상황을 접하고 이화학당 학생 시위대를 조직하기에 이른다. 1919년 3월 1일 유관순과 학생 시위대는 교장의 만류를 뿌리치고 만세 운동 한복판으로 뛰어들었다. 점차 많은 학생들이 참여하면서 만세 운동의 규모가 커지자, 조선총독부는 학생들의 만세 운동 참여를 막기 위해 임시휴교령을 내렸다.고향에서 만세 운동을 주도하다1919년 3월 15일 임시휴교령으로 학교가 문을 닫자, 유관순은 고향에서 만세 운동을 추진하기 위해 독립선언서를 숨겨 천안으로 향했다. 우선 동네 어른들께 서울의 3·1운동소식을 알리고, 부친의 도움으로 지역 유지들과 대규모 만세 운동을 논의할 수 있었다. 4월 1일 유관순은 밤새 만든 태극기를 나눠주며 만세 운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북돋아주었다. 함께 만세 운동을 준비한 조인원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뒤, 3천여 명의 군중은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시위가 점차 확산되자 일제는 시위 운동자들을 탄압했다. 안타깝게도 부친 유중권을 비롯한 19명이 목숨을 잃고 유관순과 시위 주동자들은 천안헌병대로 압송되었다. 서대문형무소로 이감된 유관순은 갖은 고문과 탄압에 굴하지 않고 계속해서 옥중 만세를 불렀다. 그러나 고문 후유증과 영양실조를 이기지 못하고 1920년 9월 28일 18살의 나이로 순국하고 말았다. 정부는 유관순의 공적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alt유관순 영정alt유관순과 이화학당 학생들(1915)/유관순 수형기록카드(1919)alt초기 이화학당(1886)]]> Mon, 07 Jan 2019 18:51:02 +0000 25 <![CDATA[김상옥, 경성천지를 뒤흔들다 자료로 읽는 역사]]>     글 김경미 자료부김상옥, 경성천지를 뒤흔들다김상옥 의거와 신문 어느 한밤 중 홀로 경찰과 맞붙어 싸우던 김상옥 의거의 생생한 현장을 전한 건 몇 장의 신문기사였다. alt김상옥 사건을 보도하는 『조선일보』기사(1923.03.16.)김상옥 의거의 진상을 알린 신문신출귀몰하게 몸을 숨기다가 경관을 만나서는 용맹스럽게 최후 일각까지 교전하다가 오명의 사상을 내고 몸을 마치어1923년 3월 16일 자 『조선일보』 기사이다. 이어지는 내용을 읽어보면, 2016년에 개봉한 영화 <밀정>의 처음장면이 떠오른다. 경성의 주택가에서 일본 경찰에게 포위되어 총격전을 벌이다 마침내 한 발 남은 총알로 자신의 머리를 쏘아 자결하는 의열단원 김장옥.본년 일월 십이일 오후 여덟 시 사십 분 경에 시내 종로경찰서에다가 돌연히 폭탄을 던져서 평온한 듯한 경성은 다시금 흉흉하게 되고 신경과민한 경관의 가슴을 서늘하게 하던 사건이 발생한 후 경찰 당국에서 범인을 수색하던 중 그 후 일월 십칠일 오전 다섯 시에 시내 삼판통(三坂通)에서 다시 총소리가 나자 종로경찰서 전촌(田村) 경사는 현장에서 총살을 당하고 계속하여 금뢰(今瀨) 종로서 사법계주임과 매전(梅田) 동대문서 고등계 주임이 중상을 당하게 한 후에 범인은 남산을 넘어 교묘하게 자취를 감추었으나 필경에 경관의 귀에 또 들리게 되어 이십이일 새벽에 시내효제동(孝悌洞)에서 다시 발견되어 세 시간 이상이나 경관과 같이 교전하다가 총알은 다하고 기운은 진하여 마침내 참사한 김상옥(金相玉)의 사건은 자세히 아는 바이나 보도의 자유가 없는 조선의 신문이라 검사의 손이 끝난 오늘에야 겨우 발표되게 되었기로 보도하노라3면 전체를 차지한 기사는 영화 속 김장옥의 모티브가 된 독립군 김상옥에 대하여 1월 17일의 “최초 교전의 광경”부터 1월 22일 “제2차의 대격전” 끝에 순국하기까지의 사실을 생생하게 전한다. 또 하나의 한글 민간신문인 『동아일보』에서도 3월 15일자 호외로 김상옥의 기사를 실었다. 우리가 김상옥 의사의 얼굴과 활동상을 알수 있었던 것은 그의 유일한 사진과 함께 사건을 보도했던 신문이 있었기 때문이다. alt                                                                   김상옥을 이름 대신 범인으로 지칭하며 사건을 보도한                                                                   『동아일보』기사 (1923.01.23.) alt김상옥 추도식 기사 일부(1923.03.10.)김상옥의 이름 대신 ‘○○○’라는 복자를 사용했다 1월의 사건은 왜 3월 신문에 실렸을까?일제강점기에 한글로 된 민간신문이 발행된 것은 3·1운동이 일어난 다음해였다. 1910년 일제는 한국을 강제 병합하면서 한글 민간신문을 모두 폐간해 버렸고, 한글 신문은총독부의 기관지인 『매일신보』만 있었다. 1919년 3·1운동으로 한국인이 전국 각지에서 일어나 일본의 식민통치를 부정하며 독립을 외치자, 총독부는 한국인의 저항을 무마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제한적인 언론의 자유를 허용하기로 하였다. 그에 따라 1920년 『동아일보』·『조선일보』·『시사신문』의 3개 민간신문이 발간되었다. (『시사신문』은 1921년 폐간) 하지만 총독부는 민간신문을 허용한 후 검열을 행하여 신문기사를 철저히 통제하였다.검열을 위해 신문은 매호 발행할 때마다 관계 기관인 총독부 경무국에 2부를 제출하도록 되어 있었다. 검열을 통한 사전통제에는 간담·주의·경고·금지의 4단계가 있었다. 그 중 ‘금지’는 신문기사의 게재 금지 조치를 하는 경우로서, 사안이 가장 중대한 것에 대하여 발령하였다. 금지 명령을 위반하는 신문은 발매와 반포 금지 및 차압,압수 등의 행정처분에 부치며, 경우에 따라서는 사법처분을 당하기도 하였다. 이미 제작된 지면에 대한 사후처분으로는 삭제·발매금지(압수)·발행정지(정간)·발행금지(폐간)의 4단계가 있었다. 그 중 ‘삭제’는 문제가 된 기사의 일부 혹은 전부를 삭제한 후 인쇄하여 배포할 수 있도록 한 것이고, ‘압수’는 인쇄된 신문 전부를 압수해 가는 조치였다.앞에서 인용한 기사의 끄트머리에는 지난 1월의 사건을 3월에 와서 김상옥의 이름을 밝혀 보도하는 이유가 그동안 김상옥 사건에 대한 총독부 경무국의 게재 금지명령 때문이었음을 은근히 알리고 있다. 김상옥 사건은 각 총격사건 발생 후 하루 이틀 뒤에나 경찰 당국에서 발표한 일부 내용만 보도할 수 있었고, 이름 등을 밝히지 못하게 하여 ‘범인’으로만 칭하였다. 3월 15일 오전에 게재금지가 해제됨에 따라 동아일보는 3월 15일 자 호외로, 조선일보는 3월 16일자로 김상옥의 사진과 함께 사건 내용을 상세하게 보도했던 것이다.게재 금지가 해제되기 전인 『동아일보』 1월 23일 자 기사는 “순사 총살범, 어제 새벽 효제동에서 수색대와 격투 후 피살”이라는 제목으로 김상옥 의사가 총격전 끝에 순국한 사건을 보도하였다. 물론 기사에 이름은 없이 ‘범인’으로 지칭하였다. 그런데 신문지면의 왼쪽 상단의 기사가 삭제되어 있다. 경찰부 발표를 따르면서도 무언가 검열에 걸려 사후처분을 당했던 흔적이다. 또 『동아일보』3월 10일 자에는 “○○○씨 추도”라는 제목으로 중국 상하이에서 2월 17일 오후 2시 삼일당에 모여 ○○○씨 추도식을 했다는 기사가 실렸다. 이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들이 김상옥 의사의 추도식을 거행한 일로, 기사에서는 검열에 걸리는 것을 피하기 위해 ‘복자’를 사용한 것이다. ‘복자’는 발매금지로 예측되는 용어를 ‘○○○’이나‘XXX ’로 숨기는 조치를 말한다.『동아일보』는 사건 1년 뒤인 1924년 4월 8일 한식날 김의사의 묘소에서 그의 어머니가 통곡하는 모습을 담은 사진과 함께 “죽으러 왜 왔더냐”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그러나 이 기사는 일제가 신문 배포를 금지하는 ‘압수’ 처분을 내려 독자들에게 전달되지 못했다. 사건이 일어난지 1년이 지났지만 김상옥 의사의 의열활동은 한국인에게는 잊지 않아야 할 사건이었고 총독부 당국으로서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사건이었던 것이다.]]> Mon, 07 Jan 2019 20:14:56 +0000 25 <![CDATA[안창호의 아내가 아니다 이혜련이다 역사를 만든 사람]]>     글 임영대 역사작가안창호의 아내가 아니다이혜련이다   이혜련(李惠鍊)은 1884년에 안창호와 같은 평안남도 강서군에서 태어났다. 한성부 정신여학교에서 신학문을 배우고 1902년에 안창호와 결혼 후 미국으로 이주했다. 안창호와 함께 공립협회를 결성하고 대한인국민회ㆍ부인친애회ㆍ대한여자애국단 등에 참여해서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1969년에 사망했고 2008년에는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았다. 독립운동사에서 발견한 여성우리가 알고 있는 독립운동가는 대부분은 남성이다. ‘유관순’을 제외한 여성 독립운동가의 이름을 한 명도 댈 수 없는사람도 많을 터. 그러나 우리 민족의 절반에 가까운 여성들은 독립운동에 참여하지 않았을까? 그저 민중 A로 남성들이 가져오는 독립을 기다리기만 했을까? 그렇지 않다. 20세기초는 남성 중심의 시대였으니만큼 여성들이 정치와 군사 전면에 나서 광복군을 이끌거나 임시정부를 지도할 수는 없었지만, 지도자 격 남성들이 독립운동에 집중할 수 있었던 기반에는 여성의 노력과 희생이 있었다.이혜련의 아버지는 옛 교육을 대표하는 서당 훈장이었다. 딸에게 신학문을 가르칠 생각이 없었으나 사위였던 안창호의 간청으로 끝내 허락했다. 이혜련은 안창호의 여동생과함께 신학문을 배웠다. 안창호와 결혼한 뒤 곧바로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넉넉하지 않은 살림을 감내하면서 버티던 중 잠시 다녀오겠다던 남편은 고국에 가서 돌아오지 않았다.‘당신이 힘들다는 것은 아오. 하지만 나라를 빼앗기고 고난을 겪는 동포를 두고 어떻게 나만 편안히 미국에 있겠소? 나는 우리 동포들을 버릴 수 없소.’ 라는 내용의 편지가 왔어요. 도저히 가족 곁으로 돌아오라고 할 수가 없었지요.남편 안창호가 한국, 중국, 미국을 오가며 독립운동에 매진하는 동안 이혜련은 집을 비운 남편을 대신해 가정을 돌보았다. 혼자서 다섯 자녀를 키워냈을 뿐 아니라 한인 부인단체를 조직해 독립운동 후원을 위한 온갖 활동을 전개했다.누군가는 해야만 했던 후방 지원독립운동에 가장 필요한 지원은 돈이다. 임시정부나 광복군, 독립운동가의 개인적인 활동에서 돈은 언제나 필요했다. 안창호는 이 문제에 있어서 확고한 방침을 가지고 있었다.전쟁을 가능케 하는 것은 무엇이요. 곧 무기와 전술이요, 또한 무기와 전술보다도 일층 필요한 것은 무기를 사용할 군자금이외다. 군비가 있고 군인이 있은 후에야 비로소 작전계획이 있나니, 군인 없는 무기를 누가 사용하며, 군자 없는 전술을 무엇으로 활용하리오.당시 막대한 돈을 안정적으로 모을 수 있는 곳은 미국뿐이었다. 안창호는 연통제를 통해 국내에서 자금을 모집했으나, 이는 일제의 탄압을 피해야 한다는 현실적 한계에 부딪혔고 중국에 거주하는 한인들도 주 거주지역인 만주가 일제 침략에 직면하자 임시정부 지원이 어려워졌다.이혜련은 미국에 거주하는 한인 부인들과 함께 성금을 모아 남편에게, 혹은 임시정부에 보냈다. 독립운동가 이갑의 치료비 모금부터 임시정부 정기 후원금, 중일전쟁이 발발한 후로는 항일 동지라고 할 수 있는 중국군을 지원하는 모금도 벌였다.나라와 독립을 위해 앞서 싸우는 사람은 반드시 있어야한다. 어떤 일이든 원하는 만큼 성과를 얻으려면 잠시 시간날 때 힘을 보태는 사람보다 전적으로 투쟁에 전념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한 것이다. 앞서 투쟁하는 사람이 있다면 뒤에서 돕는 누군가도 있는 법이다. 이혜련은 독립운동가 안창호의 아내로서 남편을 내조하는 일에 그치지 않고 동포들에게 단결을 호소하며 실제적인 지원 활동을 펼쳤다. 이혜련을 비롯한 부인회원들이 모아 보낸 독립자금이 있었던 덕분에 임시정부는 일본을 상대로 갖가지 투쟁을 벌일 수 있었다.임시정부나 무장투쟁 활동에 참여하는 등 이혜련보다 적극적으로 독립 전선에 뛰어든 여성은 많았다. 그러나 여성 독립운동의 기반 또한 이혜련과 같은 이들이 모은 독립자금이었다.현재 우리 사회는 선두에서 깃발을 휘날리는 사람만을 주목한다. 뒤에서 이를 지원하는 사람은 상대적으로 덜 중요하게 여기는 풍토가 은연 중에 남아있는 것이다. 단 한 명의 스타를 위해 그 뒤에서 노력하는 수많은 사람이 있음을 우리 모두 잊지 말아야 한다.]]> Mon, 07 Jan 2019 10:43:24 +0000 25 <![CDATA[여성과 독립운동 우리가 만난 얼굴]]> 여성과 독립운동               국가보훈처에 등록된 독립유공자 중 여성의 비율 2%. 그보다 많은 여성들이 독립운동에 힘을 보탰음에도 역사의 기억은 초라한 숫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땅 속 깊은 곳에서 나무를 지탱하는 뿌리처럼, 미처 시선이 닿지 못한 역사 한 자락에서 독립의 싹을 틔어온 여성 독립운동가의 삶을 되새깁니다. 이제야 그들의 역사를 바라봅니다. alt]]> Mon, 07 Jan 2019 21:53:32 +0000 25 <![CDATA[하와이 이민과 한인사회의 형성 한국인의 터전]]>     글 홍선표 나라역사연구소 소장하와이 이민과 한인사회의 형성① 미주 한인사회의 형성과 독립운동 기반 구축 한국독립운동의 역사를제대로 알기란 쉽지 않다. 활동 범위가 무척 다양하고 양도 방대하기 때문이다. 한국독립운동의 역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올바르게 알리기 위해 본 시리즈를 기획했다. 특히 그동안 많이 알려지지 않았던 미주지역 한인을 중심으로 그들의 삶과 독립운동을 조명하고자 한다.     alt최초의 하와이 이민선 갤릭호   공식 이민 이전의 도미(渡美)1882년 5월 조미수호조약 체결 직후 한국인들이 미국에 정착하기 시작했다. 보빙사의 일원으로 미국에 갔다가 유학을 목적으로 정착한 유길준을 비롯해 갑신정변 실패로 미국에 망명한 박영효·서광범·서재필 등이 이 시기에 미국으로 갔다. 미국 이민국에서 발표한 것에 따르면 1894년부터 1902년까지 미국에 입국한 한국인의 수는 약 200여 명이다. 이들 가운데 샌프란시스코로 입국한 수는 145명이고, 이중 89명은 인삼상인이며 나머지 44명은 유학생이었다고 한다. 인삼상인들은 중국인이 많이 모여 사는 캘리포니아 주와 워싱턴 주에서 주로 활동했다. 나중에는 호놀룰루와 뉴욕, 쿠바의 하바나까지 진출해 장사에 열을 올렸다. 인삼상인들이 미주로 진출한 까닭은 인삼 판매 수익이 높았기 때문이다. 또 1896년부터 1900년까지 주한 미국공사를 지낸 이범진과 상하이에서 홍삼무역을 관장하던 민영익의 적극적인 비호도 영향을 미쳤다. 1871년 주미 조선공사관 보고에 따르면 당시 미국 유학생들은 21명이었다. 이들 대부분은 유학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갔으나 김헌식과 신성구처럼 미국에 정착하는 경우도 있었다. 갑신정변 실패로 미국에 망명한 서재필은 1890년 6월 19일 자로 한국인 최초미국 시민권자가 되었고, 뒤이어 1892년 11월 18일 서광범이 미국 시민권을 얻었다.이처럼 공식 이민 이전 한국인들은 미주 각지로 진출해 활동하였으며, 몇몇은 미국에 정착하거나 시민권을 얻기도 했다. 그런데 이들의 미국 진출은 집단적이고 계획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상업이나 유학을 목적으로 한 한시적인 이동에 그쳤다. 그 수도 매우 적은 데다가 분산되어 있어, 집단 활동을 통해 민족 정체성을 확보할만한 여건도 형성되지 않았다. alt초창기 이민가정 형성과 한인사회 발전에 기여한 사진신부들미주 한인사회의 시작한국인들의 본격적인 미주(美洲) 진출이 시작된 것은 1903년 1월 13일 102명의 한인들이 대한제국 유민원에서 발급한 집조를 받아 호놀룰루에 도착하면서부터다. 이때부터 1905년 8월 8일 하와이 이민이 공식 중단될 때까지 7,921명이 하와이로 건너갔다. 이들은 하와이섬·마우이섬·오아후섬·카우아이섬 등 4개 섬에 산재한 30여 곳의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했다. 사탕수수 농장 1개소에는 많게는 500~600명에서부터 적게는 몇십 명씩 분산 고용되었다. 임금은 하루 10시간 노동 기준으로 남자가 65센트, 여자와 아이들은 50센트 수준이었다. 이렇게 한 달 평균 25일 중노동을 하고나서 그들이 받은 월급은 고작 16달러에 불과했다. 고된 노동과 농장주의 불합리한 요구에 시달리는 가운데 한인들은 자신들의 사회를 형성해갔다.이와 별개로 멕시코 이민은 1905년 4월 4일 인천항을 떠나 5월 9일 멕시코 살리나크루스에 1,033명의 한인들이 도착하면서 시작됐다. 멕시코 이민자들은 베라크루스·유카탄·메리다 등지 20여 곳 농장에서 일했다. 이들의 이민생활은 하와이보다 더 열악했다. 고된 노동조건은 물론이거니와 4년간 가혹한 계약노동에 묶여 있었다. 한국인들은 하와이 내에만 머물지 않았다. 1903년에서 1910년 사이 하와이에서미 국 본토로 이주한 수는 약 2,000여 명이었고 한국으로 되돌아 간 사람도 1,000여 명에 달했다. 미국 본토로 이주한 동기는 사탕농장보다 탄광이나 철도 건설 등 도시 노동자의 임금이 더 후했기 때문이다. 샌프란시스코·로스앤젤레스·솔트레이크·덴버 등미국 각지에 한인사회가 형성됐다.1905년 8월 이민이 중단된 뒤에는 사진신부와 유학생들이 미국으로 건너갔다. 1910년 11월 28일 최초의 사진신부 최사라가 호놀룰루에 도착한 이래 1924년 미국 정부에 의해 동양인 이민이 완전히 중단될 때까지 하와이에 도착한 한국인의 수는 951명이었다. 115명의 한국인들은 다시 미국 본토로 갔다. 이 시기 입국한 한국인 중 약800여 명이 사진신부였으며 나머지는 대부분 유학생들이었다. 사진신부의 등장과 함께 한인들은 새로운 가족 공동체를 꾸릴 수 있었고, 덕분에 한인사회도 활기를 띠었다. 해방 직전까지 하와이에 6,000여 명, 미국 본토에 1,700여 명, 멕시코와 쿠바에 850여 명 등 총 8,550여 명의 한인들이 미주지역에 자릴 잡았다. 이들은 1만 명도 채 되지 않는 극소수 민족으로서 한인사회를 형성하고 나라를 위한 구국활동에 앞장섰다.]]> Mon, 07 Jan 2019 20:31:49 +0000 25 <![CDATA[100년의 기억과 미래의 100년 끝나지 않은 독립운동]]>     글 이계형 국민대학교 특임교수100년의 기억과 미래의 100년   1945년 우리 민족은 광복을 맞았지만, 독립운동은 끝나지 않았다. 여전히 미완으로 남은 사건, 해결되지 못한문제, 기억해야만 하는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끝나지 않은 독립운동은 독립운동사를 과거에 머문 역사가 아닌 현재의 문제로 다루며, 오늘도 신문 한쪽을 차지하고 있는 독립운동 이슈를 소개한다. altalt(왼쪽)3·1독립선언서 (오른쪽)대한민국임시정부 환국 기념독립운동사에서 특별한 2019년2019년 기해년 새해가 밝았다.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뜻깊지 않은 해가 없겠지만 올해는 그 어느 때보다 남다르다. 3·1운동이 일어나고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된 지100년이 되는 해이기 때문이다. 김원봉이 중국 길림에 의열단을 조직한 날도 100년이 되었다. 안중근 의거와 이재명 의거는 110주년을, 광주학생운동은 90주년을 맞이했다. 이은찬·이인영 의병장 순국 110주년, 민족대표 33인중 한 사람이었던 양한묵 선생이 떠난 지 100주년이 되었다. 만주 독립군 이의준·이수흥·유택수 선생은 90주년, 남궁억·문일평·신흥식·오영선 선생 등은 60주년, 백범김구 선생이 서거한 지도 벌써 70주년이다. 그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은 일이 없다. 그래도 이 가운데 가장 의미 있는 사건을 꼽으라면 단연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일 것이다. 둘은 서로에게 원인이자 결과로서, 하나로 얽혀있기에 불가분하다.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를 계승하다3·1운동 독립선언문은 “오등(吾等)은 자(玆)에 아조선(我朝鮮)의 독립국(獨立國)임과 조선인(朝鮮人)의 자주민(自主民)임을 선언(宣言)하노라”는 구절로 시작한다. 독립선언서의 전문을 알지 못하더라도 한 번쯤 들어봄직한 구절이다. 우리나라가 일제로부터 독립하였으며, 억압받던 한국인들은 자주민이 되었다는 사실을 대내외에 선언한다는 내용이다. 그 결과로 1919년 4월 11일 대한민국임시정부가 탄생했다. 같은 해 9월 출범한 통합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임시헌법 전문에 “아(我) 대한인민은 아국(我國)이 독립국임과 아민족(我民族)이 자유민임을 선언하였도다”라는 구절을 넣었다. 이는 몇 가지 부분에서 의미가 크다.가장 먼저 독립을 선언한 주체가 달라졌다. 민족대표 33인을 가리켰던 좁은 의미의 ‘오등’이 5천여 년 동안 이 땅에 살아온 후손으로서의 ‘대한인민’으로 확대되었다. 민족대표 33인은 3·1운동 당시 독립선언서와 독립통고서에 서명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3·1운동을 기획·조직함은 물론, 운동이 점화되는 데 기폭제 역할을했다. 그러나 실제 운동을 이끈 것은 이 땅의 민중이었다. 10년 동안 일제의 폭압 정치를 몸소 느끼고 고통받아 온 민중은 진정한 독립을 갈망하였고, 이에 일제의 총탄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독립만세’를 외칠수 있었다. 그러므로 대한인민은 독립 선언의 주체라 할만하다. 그래서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바꾸고 ‘민주공화제’를 전면에 내세울 수 있었다.무엇보다 눈여겨 봐야 할 것은 시제가 다르다는 점이다. 독립선언서에는 ‘선언한다’는 현재형이 쓰였지만 임시헌법에는 ‘선언하였도다’라는 과거형이 등장한다. 3·1운동에서 ‘독립’을 선언하였기 때문에 새로운 정부가 필요하며, 그것이 ‘대한민국임시정부’라는 논리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1948년 헌법 전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겼다.“우리들 대한국민은 기미 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이제 민주 독립 국가를 재건함에…(후략)…”그로부터 40여 년이 지난 1987년 10월 지금의 헌법 전문에도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관한 언급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우리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중략)…을 계승하고”대한민국의 미래 100년을 위하여그럼에도 2008년 이후 지난 10여 년간 대한민국은 ‘광복절’과 ‘건국절’ 논쟁으로 시끄러웠다. 해방을 맞이한 1945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1948년. 둘 사이 3년의 간극이 있지만 공교롭게도 일자가 8월 15일로 같아 생긴 일이다. 이는 이념 논쟁으로 비화하여 1919년 설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지를 두고 다투기도 했다.2019년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기념관을 만들자는 의견이 제기됐다. 2015년11월,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건립준비위원회가 발족되었지만 그뿐이었다. 지난 정부가 기념관 건립에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하면서 때를 놓치고 말았다.2017년 7월 정권이 바뀌고 2018년 1월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건립위원회가 정식 출범했다. 지난해 말에는 서대문형무소, 독립문 등 근·현대유적이 밀집한 부지에 ‘국립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관’ 건립 계획이 승인됐다. 2019년 100주년을 맞추지 못한 안타까움이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매우 고무적인 성과다. 기념관 건립은 2021년 8월 완료를 목표로 추진 중이다.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관의 성공적인 마무리를 기원하며, 이를 통해 소모적인 논쟁을 중단하고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바로 세워 3·1운동의 진정한 독립정신을 계승하는 미래100년을 내다봤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 또한 가져본다.]]> Mon, 07 Jan 2019 16:30:01 +0000 25 <![CDATA[제국의 길, 식민지의 길 우리의 오늘 세계의 그날]]>     글 강응천 기획집단 문사철 대표, 역사저술가제국의 길, 식민지의 길   1876년 조선은 강화도에서 일본과 ‘조일수호조규’를 맺었다. 흔히 강화도 조약으로 불리는 이 약속의 시작은 이렇다. “조선은 자주국이다” 언뜻 문제가 없는 듯 보이지만 일본의 속내는 달랐다. 이는 조선에 드리워진 청의 간섭을 떼어내기 위한 조약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동시에 조선을 지배하겠다는 야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 시기 세계의 운명은 지배하거나 지배당하거나, 단 둘뿐인 것처럼 보였다. alt강화도 조약 체결 모습역사를 바꾼 과학 기술1876년은 역사에서 손꼽히는 위대한 발명이 이루어진 해이다. 그해 3월 10일 미국의 발명가 알렉산더 그라함 벨이 역사상 처음으로 전화기를 발명했다. 전기 장치를 통해 사람의 목소리를 먼 곳까지 실어 보내는 획기적인 장치였다. 벨이 전화기에 대고 처음 한 말은 “와트슨 군, 이리 오게. 할 말이 있어”였다고 한다. 천재 토마스 에디슨은 이듬해 소리를 저장했다가 아무 때나 들을 수 있는 축음기를 발명했다. 다시 2년 뒤에는 전기를 이용해 어둠을 밝히는 전등도 만들었다. 독일 의사 로베르트 코흐는 1876년에 동물의 전염병을 유발하는 탄저균을 발견했고, 5년 뒤 프랑스 화학자 루이 파스퇴르가 탄저균을 퇴치할 수 있는 백신을 발명했다. 코흐는 이후에도 결핵균, 콜레라균 등의 세균을 잇달아 발견하며 1905년 노벨 생리학·의학상을 수상했다.과학기술의 눈부신 발전은 인류에게 분명 축복이었다. 그러나 당시 축복은 소수의 인류에게만 허락됐다. 서유럽에서 시작한 과학기술혁명의 혜택을 세계 모든 인류가 누리기까진 시간이 필요했고, 무엇보다 과학기술의 발전은 서유럽 사람들에게 자신감을 넘어선 자만심을 불어넣었다. 때때로 과학기술은 주변 국가를 착취하고 점령하는 도구로 이용되었는데, 서유럽인들은 과학의 발견을 항해와 군사에 적용해 아메리카를 지나 아시아까지 진출했다. 이를 ‘서세동점(西勢東漸)’이라고 한다. 서쪽의 유럽이 동쪽 아시아 각지를 차례로 지배한다는 뜻이다.일본, 유럽과 같은 꿈을 꾸다1876년은 사실상 서세동점이 완료된 해였다. 마지막까지 나라의 문을 걸어 잠그고 있던 조선이 마침내 개항했기 때문이다. 물론 서세동점의 측면에서 보자면 조선의 개항은 조금 다르다. 조선을 개항시킨 것은 유럽이 아닌 일본이었다. 그러나 일본의 엘리트 세력은 타이완에 이어 조선을 점령한 자신들을 유럽이라고 생각했다. 일본 근대화의 아버지라 불리는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는 ‘탈아입구(脫亞入歐)’란 말로 그 같은 개념을 정립했다. 탈아입구. 아시아를 벗어나 유럽으로 들어간다는 의미였다.1854년 일본 역시 미국에 의해 개항 당했다. 에도막부가 매튜 페리 제독이 이끄는 미국 함대에 맥없이 굴복하고 나라의 문을 열자 일본의 사무라이들은 분노했다. 그들은 막부와 서양 세력을 한꺼번에 타도하기 위해 일어났다. 그러나 막부를 토벌하는 과정에서 서양 세력을 몰아내고 과거로 돌아가는 것만이 정답이 아니란 사실을 깨달았다. 오히려 서양의 앞선 과학기술을 받아들이고 산업화의 길로 나아가야 일본의 번영을 기약할 수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리하여 일본 근대화 세력은 막부를 몰아내고 천황 중심의 근대화 정책인 ‘메이지 유신’을 단행했다. 문제는 이 다음이었다. 일본은 아시아의 후진성을 벗어나 서구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하기 위해서는 유럽이 그리했듯 식민지를 확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대상이 된 나라가 바로 타이완과 조선이다. 1876년 조선의 개항이 1854년 일본의 개항과 같은 방식으로 이루어진 데는 바로 이 같은 배경이 있다. 일본은 아시아 국가면서도 그렇지 않은, 침략적이고 식민 지배지향적인 나라로 잘못 성장하고 있었다. alt일본이 한국에 세운 동양척식주식회사, 영국의 동인도회사를 본떠 만들었다해가 지지 않는 대영제국16세기 말 이래 서세동점의 선두주자는 단연 영국이었다. 일본 역시도 영국을 가장 닮고자 했다. 영국은 1776년 미국이 독립하며 아메리카 대륙을 잃은 뒤에도 지속해서 식민지를 개척하며 마침내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을 건설했다. 일부 자료에 의하면 대영제국이 세계 중 가장 많은 인명을 살상한 정치 세력이라고 한다. ‘신사의 나라’라는별명과는 매우 동떨어진 역사가 아닐 수 없다. 물론 대영제국이 제국주의 국가 중 가장 잔인했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워낙 오랜 기간 넓은 지역과 많은 인구를 통치하다보니 얻게 된 불명예스러운 수치일 것이다.1876년 영국은 그동안 동인도회사를 통해 간접 지배를 해오던 인도를 영국 여왕의 통치 아래 두기로 결정했다. 인도는 일부 영국의 인정을 받는 토호들 외에 나라전역이 영국의 직접 지배 아래 들어가 형식적 독립 국가의 지위마저 상실했다. 영국은 식민지 작업을 마무리한뒤 1877년 1월 1일 빅토리아 여왕에게 인도제국 황제의관을 씌워 주었다. 본국 대영제국에서는 ‘여왕(Queen)’이면서도 식민지에서는 ‘황제(Empress)’라 불리는 희한한 지배자가 탄생한 셈이다. 황제의 지배를 직접 받게 된 인도제국은 오늘날의 인도부터 파키스탄·방글라데시·미얀마 등지까지 엄청난 지역을 포괄하게 되었다. 이들 가운데 어떤 지역도 한반도보다 작은 곳은 없다. 인도의 운명은 조선의 미래와 다름없었다. 일본은 조선과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며 식민 지배의 기회를 호시탐탐 엿보고 있었다. 어디 일본과 청뿐이었을까? 러시아·미국·영국·프랑스 등 어느 한 나라도 경계의 눈을 뗄 수 없었다. alt터키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그리고 오스만제국의 선택조선이 인도와 같은 비극을 피하기 위해서는 어떤 선택을 해야 했을까? 이 시기 일부 우국지사들은 일본을 바라보았다. 조선도 일본의 메이지 유신처럼 개혁을 통해 부국강병을 이루고 서구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들을 ‘개화파’라 불렀다. 그러나 개화파가 보지 못한 것이 있었다. 일본과 같은 길을 가려면 반드시 ‘침략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일본은 조선을 침략의 대상으로 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일본의 본색을 꿰뚫어 보지 못한 대가는 1884년 갑신정변에서 뼈아픈 실패로 남고 말았다. 1876년 터키는 조선의 길도, 일본의 길도 아닌 다른 선택을 했다. 그해 12월 3일 터키의 오스만제국이 아시아 최초로 헌법을 공포한 것이다. 오스만제국은 17, 18세기아시아를 비롯한 아프리카, 유럽 세 대륙을 호령하던 강대국이었으나, 빠른 과학 기술의 발전을 따라잡지 못하고 19세기 들어서는 서유럽에 밀리기 시작했다. 위협을 느낀 오스만제국이 생각해 낸 자구책이 바로 전제군주국에서 입헌군주국으로의 변화였다. 1876년 오스만제국의 새로운 술탄으로 등극한 압둘 하미드 2세는 벨기에와 프로이센 헌법의 영향을 받은 헌법을 공포했다. 아시아최초의 헌법이었다. 아시아에서 가장 앞서 근대화를 이뤘다는 일본도 메이지 유신의 권위 때문에 헌법을 만들 생각은 못하고 있었다. 오스만제국의 헌법은 내각 구성과 상원의원 임명을 술탄의 권한으로 남겨 놓으면서도 하원의원의 선출, 사법부의 독립, 국민의 자유와 공무 담임권 및 피선거권 등은 인정했다. 이런 방법으로라도 국가에 활력을 주지 않으면 서구 열강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기 어렵다는 판단 아래 결단을 내린 것이다.그러나 아시아 최초 헌법이 몰락하는 오스만제국을 완전히 구하지는 못했다. 그들은 식민지로 굴러떨어지지는 않았지만,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가 패전국이 되고 말았다. 영국·프랑스·러시아 등 승전국은 눈엣가시와도 같던 오스만제국에 온갖 제재를 가하며 국제사회에서 고립시켰다. 결국 오스만제국은 몰락했다. 그렇다고 해서 터키가 망한 것은 아니었다. 오스만제국이무너진 자리에 터키 땅을 차지한 새 주인은 외세가 아닌 터키인에 의해 세워진 터키민주공화국이었다. 오스만제국의 위대한 군인이었던 케말 아타튀르크가 새로운 공화국의 국부(國父)가 되었다. 입헌군주국이 오스만제국을 끝까지 지키지는 못했지만, 민주공화국으로 거듭나는 밑거름이 되었다는 데 많은 사람들이 동의한다.이처럼 1876년은 개항과 함께 시작된 수많은 불확실성이 조선이라는 ‘은둔의 국가’에 던져졌다. 어떤 이는 유교의 전통을 고수하며 외세를 물리치자 외쳤고 또 어떤 이는 일본과 같은 개혁을 통해 부국강병을 이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1876년의 세계정세를 보자면 둘다 정답이라 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전통만을 사수하자니 일본과 외세의 힘은 너무 강하고, 일본의 길을 따르자니 올바르지 않음은 물론 조선에게는 너무 늦은 때였다. 터키처럼 입헌군주국으로 나아가는 것은 가능했을까? 불가능을 이야기하기에는 섣부르지만, 다만 그 후 터키의 역사에 비춰보았을 때 결국은 애국지사와 민(民)이 얼마나 힘을 모을 수 있었느냐가 관건이었을 것이다.]]> Mon, 07 Jan 2019 20:49:45 +0000 25 <![CDATA[지금은 겨울이야, 강릉 이 땅의 숨결]]>     글·사진 임운석 여행작가지금은 겨울이야, 강릉   겨울 바다는 소슬하다. 여름 바다의 뜨거운 열정과 다른 그 무엇이 그윽한 까닭이다. 김남조 시인은 <겨울 바다>에서 ‘미지(未知)의 새’를 보고자 했으나 ‘보고 싶던 새들은 죽고없었네’라고 했다. 허무한 상념들이 꽁꽁 얼어붙을 것 같은 차디찬 바다 앞에 서서 다가올 새날의 희망을 세어보고 싶다. 지금은 겨울 바다가 있는 강릉으로 떠나볼 때다. alt겨울바다의 낭만을 즐기기 좋은 경포 해변정동진 바다 앞에 서서강릉의 바다는 주문진에서 시작한다. 해안을 따라 북쪽으로 향하면 연곡·하평 해변을 지나 사천·순포·순긋·사근진 해변을 거처 경포 해변과 송정 해변까지 연결된다. 강릉항을 지나면서 백사장은 자취를 감춘다. 대신 해안도로와 철로가 동해의 거친 숨소리를 들으며 쉼 없이 질주한다. 그 가운데 “서울 광화문에서 볼 때 정동 쪽에 있다”하여 정동진이라 부르는 정동진역이 있다. 이 역은 세계에서 바다와 가장 가까운 역이다. 1995년에 방영된 드라마 <모래시계>의 배경으로 알려졌다. 음유시인이 읊어주는 듯한 저음의 노랫소리와 가슴을 울리는 클래식의 앙상블은 사랑과 이별, 환희와 슬픔, 희망과 절망의 올무에 걸린 채 살아가는 인생을 닮았다. 더욱이 온기라곤 찾아볼 수 없는 시퍼런 바다를 걷던 주인공의 모습은 처절한 외로움 앞에 선 인간의 모습을 보는 듯했다. 하지만 절망의 깊은 한숨 뒤에 희망의 태양이 떠오를 것을 우리는 믿는다. 겨울 정동진 해변이 매력적인 이유도 그 믿음 때문이다.해뜨기 전 이른 아침, 정동진 해변에는 여명보다 한발 앞서 도착한 이들이 있다. 망망한 바다 앞에서 발을 동동 구르는 그들은 해돋이를 사진에 담기 위해 새벽을 달려온 열혈 사진가들과 새 희망의 축포를 가슴으로 쏘아 올리려는 여행자들이다. 7시가 지나자 날이 밝아온다. 태양도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붉은 태양이 온세상을 붉게 물들인다. 시나브로 시간이 흐른다. 선홍색의 태양은 온화한 빛을 발하며 따사롭게 사람들의 얼굴을 비춘다. 연인들은 손을 맞잡은 채 온몸으로 바람을 맞는다. 바람이 드셀수록 남자의 품은 더 넓어진다. 태양은 그들을 축복하듯 더 높이 떠오른다.소리 없는 언약식을 마친 연인들. 그들의 발걸음이 도착한 곳은 정동진 해변 모래시계공원에 자리한 시계박물관이다. 추운 날씨 탓에 몸 녹일 곳을 찾던 터였다.기차를 개조해 만든 시계박물관에는 시계의 변천사와 동서양의 희귀한 시계 등을 한자리에 전시한다. 여러 전시물 가운데 작은 회중시계 앞에 발걸음이 멈춘다. 타이타닉호 공식 침몰 시각을 알려주는 세계 유일의 회중시계다. 회중시계 내부에는 딸의 행운을 기원하는 문구가새겨져 있다.사랑하는 나의 딸 노라에게, 리머릭 방문을 기억하며, 펜실베이니아로 돌아가기까지 하나님의 가호와 은총이 함께 하기를.1912년 4월 11일 사랑하는 엄마로부터.하나님의 가호였을까? 그녀는 제10호 탈출 보트를타고 무사히 피신했다. 하지만 탈출 보트가 타이타닉호에서 내려지는 순간, 바닷물에 의해 시계가 멈춰 섰다. 바다에 빠진 시계는 완전히 부식되었지만 외형은 금으로 제작되어 보존될 수 있었다. alt로스팅한 커피를 맛볼 수 있는 보헤미안 박이추 커피공장강릉 커피의 진수는 이곳에서몇 해 전부터 강릉에는 횟집 간판보다 커피숍 간판이 눈에 더 많이 띈다. 언제부터인가 강릉은 우리나라 커피의 성지가 되었는데, 유명한 커피집들이 강릉에 많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 중심에 안목 해변이 있다. 강릉항과 맞닿은 안목 해변은 강릉의 ‘길 카페’로 통한다. 독특한 개성과 맛을 앞세운 지역 커피집과 유명 브랜드 커피숍이 진검승부를 펼치고 있어 취향에 따라 커피를 선택하기 좋다.2000년대 초반에 문을 연 보헤미안 박이추 커피공장은 강릉 커피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다. 자타가 공인하는 커피 1세대, 박이추 선생은 우리나라 최초로 로스팅 문화를 보급한 장본인이다. 박이추 선생이 처음 강릉에 문을 연 커피숍이 강릉 영진 해변 앞에 있다. 목요일 오전 8시부터 오후 5시와 금요일~일요일 오전 8시부터 오후 3시까지만 문을 연다(월~수요일 휴무). 박이추 선생의 커피 맛을 보려면 경포 해변에 위치한 매장을 찾는 편이 좋다. 연중무휴로 저녁 10시까지 문을 연다. 강릉 사천 해변에 자리한 박이추 커피공장도 찾아보자. 이곳 매장은 카페와 로스팅 공장이 연결되어 커피 로스팅 과정을 직접 볼 수 있고 매장 안팎으로 커피 향이 그윽하다.2002년에 문을 연 테라로사 역시 은은한 커피향으로 입소문 난 곳이다. 전국에 14개 직영 매장을 보유한 테라로사는 원래 커피를 볶아 카페, 호텔, 레스토랑 등에 공급하는 로스팅 공장이었다. 그러다가 소문을 듣고 커피 맛을 보려는 손님들이 늘어나면서 카페를 겸하게 됐다. 요즘은 독특한 인테리어에 브런치, 디너까지 겸하면서 더욱 인기를 얻고 있다. 공장이 있는 본점은 남강릉IC 인근에 있고, 임당과 사천 해변에서도 같은 맛과 향을 즐길 수 있다.기왕 커피 향에 취했다면 커피 박물관도 지나칠 수 없다. 이곳에는 인류 최초의 커피인 오스만튀르크의 커피부터 고종황제가 즐겼다는 ‘양탕국’ 커피까지, 커피의 역사는 물론 커피 제조 과정도 살펴볼 수 있다. 수백년 된 로스팅 기계와 수백만 원을 호가하는 고가의 찻잔 등 7천여 점의 소장품 가운데 2백여 점을 순환 전시한다. 특히 야외 온실에서는 커피나무에 열린 커피콩도 확인할 수 있어 좋은 추억이 될 게다. 건축학적으로 의의가 있는 오죽헌 안채커피 향이 머무는 곳마다 명소 가득강릉을 찾는 사람들 가운데 절반 이상은 수도권에서 온 여행자들이다. 2시간 남짓하면 닿을 수 있는 곳인 데다, 명소가 많아서다. 게다가 대부분의 명소가 경포호 주변에 운집해 있으니 이동에도 편리하다. 동선을 따라 ‘경포해변~경포호~참소리 축음기·에디슨과학박물관~경포대~허균·허난설헌 생가터~강릉선교장~오죽헌’ 순으로 돌아보면 좋다.경포 해변은 우리나라 3대 해변으로 손꼽히는 곳이다. 차디찬 바닷바람을 피해 솔숲 길을 걷도록 조성해 놓았다. 비릿한 바닷내음과 솔향이 어우러져 걷기 좋다. 참소리 축음기·에디슨과학박물관은 찬바람에 언듯한 몸을 녹이면서 클래식을 감상할 수 있는 곳이다. 설립자 손성목 관장이 소년 시절 선친으로부터 받은 콜롬비아 축음기를 비롯해 한평생 수집한 희귀한 축음기가 전시돼 있다. 특히 에디슨의 3,500여 발명품 가운데 대표적인 축음기, 전구, 영사기 등 2,000여 점의 발명품이 전시된 세계 최대의 에디슨과학박물관이다. 본관 2층 음악 감상실에 가면 큐레이터의 설명과 함께 직접 소리를 감상할 수 있다. 경포대에 올라 경포호와 경포 해변을 한눈에 조망하는 것도 권할만하다. 옛 묵객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았던 곳이다. 다음은 허난설헌의 생가터다. 허난설헌은 『홍길동전』의 저자인 허균의 누나로 한 많은 삶을 살다간 천재 시인이었다. 강릉에서는 예로부터 백두대간에서 내려온 석간수로 차를 우렸다고 한다. 이곳에서는 그 차향을 즐기며 몸을 녹이기에도 그만이다. 선교장은 300여 년 동안 지켜온 한옥의 아름다운 자태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뜨끈한 한옥아랫목에 몸을 누인 채 특별한 하룻밤을 보낼 수 있도록 한옥스테이를 운영한다. 우리나라 주택 가운데 가장 오래된 건물로 알려진 오죽헌은 율곡 이이 선생이 태어난 곳이다. 오죽헌 안채 대청마루에 앉아 강릉 여행을 되짚어본다. 길지 않은 여정 동안 강릉에 발 도장을 찍었다. 발걸음이 머문 곳마다 혹한을 이기는 사철 푸른 소나무가 있었다. 또 봄을 기약하는 앙상한 자연의 민낯도 마주했다. 인간에게 가장 공평한 것이 있다면 ‘시간’이다. 비록 지금은 생명이 멈춘 듯한 겨울 한가운데 서 있지만, 춥지만 않은 까닭은 2019년에 거는 기대 때문일 것이다.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새날을 기약하며 겨울 강릉 여행을 마무리한다.]]> Mon, 07 Jan 2019 21:26:12 +0000 25 <![CDATA[역사의 변곡점을 만든 청년들 어느 독립운동가의 초상]]>     글 김정인 춘천교육대학교 교수역사의 변곡점을 만든 청년들   청년이란 개념은 19세기 후반에 등장했다. 1897년 미국 감리교 한국선교회가 조직한 단체 이름이 바로 대한중앙청년회였다. 이듬해부터는『독립신문』에 청년이란 단어가 등장했다. 10대 학생부터 30대 초반까지의 젊은이를 가리키는 청년이란 말이 널리 퍼진 것은 을사늑약이 체결될 무렵이었다. 이때부터 청년은 나라를 지키거나 되찾기 위해 제일 먼저 계몽되어야 하는 세대로 주목을 받았다. 혈기 넘치는 청년들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3·1운동, 청년의 발견3·1운동에서 청년은 시위를 촉발하고 확산시킨 주역이었다. 3월 1일 첫날부터 청년들은 서울·평양·진남포·안주·진남포·의주·선천·원산에서 학생으로서, 종교인으로서, 혹은 민중으로서 만세시위를 주도하고 적극 참여했다. 전국으로 만세시위가 확산되는 과정에서는 비밀결사를 만들어 항쟁했다. 결사단·혈성단·조치원청년단·철혈청년단이 대표적인 청년비밀결사들이다. 경상남도 창녕군 영산면에서는 3월 11일 20대의 천도교 청년인 구중회의 주도로 24명이 결사단을 조직했다. 3월 13일 오후 2시에는 그중 23명이 모여 ‘정의를 위해서는 물불을 가리지 않을 것이며 대한독립을 한사코 전취할 것을 맹세’하는 「결사단원맹서서」에 서명했다. 그리고 거리에서 태극기를 나누어 주고 독립만세를 부르며 만세시위를 단행했다. 경기도 부천군 용유면에서 3월 하순 결성한 혈성단은 20대 농촌 청년들이 조직한 비밀결사였다. 이들은 태극기와 격문을 제작한 다음 동지를 규합해 3월 28일 용유면 관청리 광장에서 태극기를 들고 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위를 주도했다. 또 경기도 조치원 청년들은 3월 1일 서울에서 시위를 목격하고 비밀결사를 조직했는데 이것이 바로 조치원청년단이다. 조치원 장날인 3월 30일 조치원시장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했다. 철혈청년단은 4월 평안남도 평양에서 청년들이 만든 비밀결사로「임시정부 선포문」, 「국민대회 취지서」 등 임시정부 관련 문건들을 인쇄해 평양과 주변 지역에 배포했다. alt조선청년총동맹 창립 기사(『동아일보』, 1924.04.21.)청년운동시대, 사회주의에 뛰어들다3·1운동 이후 청년은 신시대를 이끌어갈 주인공이라는 기대를 한몸에 받았다. 청년은 사회를 개조하고 계몽하는 문화운동의 선봉대이자 신문명 건설자였다. 또한 청년은 민족과 사회의 운명 자체와 동일시되었다. ‘조선의 현재와 미래는 청년에게 있다’는 것이다. 청년에 대한 기대는 청년운동에 대한 기대이기도 했다. ‘지방에 교육열을 완성하도록 하고 신사상을 확립하도록 하며 경제적 권리를 회복하게 하는 모든 운동의 중심이 곧 청년이며 청년단체’이기 때문이었다. 3·1운동 후 제한적이나마 결사의 자유가 허용되자 청년회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1920년에서 1921년 사이에만 1,300개 이상의 청년회가 생겨났다. 청년회 설립 붐이 한창이던 1920년 12월에는 최초의 전국적인 청년운동단체인 조선청년회연합회를 창립했다.1920년대 초반부터 사회주의가 확산되자 청년은 시대 변화에 민감한 세대답게 이를 빠르게 수용했다.1922년 10월에 결성한 무산청년회는 사회주의적 개념인 ‘무산’을 청년회 이름에 붙인 것인데, 무산청년회가 내놓은 「무산청년선언문」에 따르면 무산청년은 ‘먹지 아니면 살아갈 수 없으면서 먹으려 해도 먹을 수 없는 재산 없는 청년’을 뜻했다. 당시 사회주의는 유행성 감기처럼 번져갔다. “입으로 사회주의를 말하지 않으면” 시대에 뒤떨어진다는 평을 받을 정도였다. 사회주의에 푹 빠진 청년들을 그때는 ‘마르크스보이’, ‘엥겔스걸’이라고 불렀다. 1925년 조선공산당 창당에 관여한 박헌영·김단야·임원근이 마르크스보이로 유명했다. 모두 20대 중반의 청년들이었다. 엥겔스걸로 불린 여성 사회주의자들이 1924년에 만든 최초의 단체는 조선여성동우회였다. 여기에 참가한 박원희·허정숙·정칠성·정종명 등도 모두 20대 중후반이었다. 남녀 사회주의자 간의 연애는 ‘붉은 연애’라고 불렀다. 앞서 나온 임원근과 허정숙도 붉은 연애의 주인공이었다.1920년대 중반에 오면 사회주의는 청년운동의 대세로 자리 잡았다. 1924년 4월 조선청년회연합회와 서울청년회, 신흥청년동맹 등 전국의 223개 청년운동단체가 결집한 조선청년총동맹이 창립했다. ‘대중을 본위로 한 신사회를 건설하고 조선 민중해방운동의 선구가 될 것’임을 앞세운 조선청년총동맹의 결성은 ‘청년운동의 통일을 상징하는 동시에 민족주의적 운동에서 사회주의적 무산계급운동으로 청년운동이 전환했음을 보여준다’는 평을 받았다.   alt박재혁alt윤봉길alt최수봉alt김익상의열과 애국의 청년, 일본의 심장을 겨누다청년들은 국외에서도 운동단체를 조직하여 활동했다. 이들은 조선총독부와 집회허가를 두고 신경전을 벌이던 국내와는 차원이 다른 싸움을 했다. 총을 쏘거나 폭탄을 던지며 목숨을 건 의열투쟁을 전개했다. 1919년 11월 만주 지린에서 22세의 김원봉이 의열단을 조직했다. 의열에서 ‘의’는 정의를, ‘열’은 맹렬함을 뜻했다. 정의를 맹렬히 실현하고자 한 의열단은 암살과 파괴의 방법으로 독립운동을 펼쳤다. 20대 청년이 주축을 이룬 의열단의 활약은 대단했다. 부산경찰서에 들어가 경찰서장에게 폭탄을 던진 박재혁, 밀양경찰서 안에 폭탄을 던진 최수봉, 조선총독부에 들어가 폭탄을 던지고 유유히 사라진 김익상은 거사 당시 모두 20대 중반의 청년이었다.한인애국단원으로 1932년에 의열투쟁을 벌인 이봉창과 윤봉길 역시 청년이었다. 이봉창은 1932년 1월 8일 일본 도쿄에서 궁성으로 돌아가던 일왕을 향해 수류탄을 투척했다. 그가 사형 선고를 받고 그해 10월 10일 이치가야 형무소에서 교수형에 처해질 때 나이는 33세였다. 윤봉길은 1932년 4월 29일 상하이 훙커우공원에서 거행된 일본의 전승기념 겸 일왕 히로히토의 생일을 기념하는 천장절 기념식장에 폭탄을 던졌다. 그는 고향인 충청남도 예산에서 19세부터 야학을 설치하고 농민독본을 집필하는 등 농촌계몽운동에 매진했다. 23세가 되던 1930년에는 독립운동에 투신하고자 ‘대장부가 집을 떠나 뜻을 이루기 전에는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다’는 글을 남기고 중국으로 망명했다. 마침내 뜻을 이뤄 훙커우공원에서 폭탄을 던져 시라카와 요시노리 사령관을 비롯한 일본 요인 7명을 사상케 한 윤봉길은 현장에서 체포되어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리고 같은 해 12월 19일 가나자와 육군형무소 공병 작업장에서 총살당했다. 당시 그의 나이는 25세였다. 이봉창과 윤봉길의 활약은 역사의 변곡점을 만들었다. 중국 국민당 정부를 이끄는 장제스는 임시정부 국무령인 김구와 회담을 갖고 임시정부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를 표명했다.윤봉길의 말에 따르면, 의열투쟁은 한국인의 각성을 촉구하고 세계에 한국인의 존재를 알리기 위한 투쟁이었다. 또한 일본 정치인들과 국민들에게 공포감을 조성해 결국 식민통치를 포기하게 만들겠다는 의지를 품고 있었다. 의열단과 한인애국단은 무차별 살상을 의도하거나 실행한 적이 없었다. 그들의 표적은 적의 수뇌부였지 무고한 민간인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청년들이 의열투쟁을 통해 바란 목표는 독립을 이루어 인류 평화에 기여하는 데 있었다. alt부민관 의거의 주역들. 왼쪽부터 강윤국·조문기·유만수불사조의 청년 정신, 저항의 불씨를 잇다중일전쟁이 터지면서 조선총독부의 감시와 탄압은 더욱 심해졌다. 1920년대에 청년의 기상을 떨쳤던 지식인들은 하나둘씩 일본의 편에 섰다. 청년들은 선배들의 전향과 변절에 반발했다. 윤치호가 자신이 회장으로 있던 중앙기독교청년회를 친일단체로 변질시키려 하자, 청년회원들은 투서 방식으로 전향을 비판했다. 나아가 청년들은 현실에 좌절하지 않고 독립의 희망을 전했다. 비밀리에 전단지를 만들어 전국 곳곳에서 “우리 조선을 세우자, 조선 청년아, 싸워라”라고 독려했다. 중일전쟁 이후 치안유지법 위반자 중에는 청년이 압도적 다수를 차지했다.이어 아시아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청년들 사이에서 무장독립을 지향하는 풍조가 나타났다. 일본군에 끌려가 전사하는 개죽음을 피하고자 무장투쟁을 꿈꾸며 만주로 건너간 청년도 있었다. 전국 각지 깊은 산에서는 징병과 징용을 피해 올라간 청년들이 무장훈련을 했다. 일본의 침략전쟁에 사람도 물자도 강제동원 당해야 했던 암울한 시절, 청년들은 의열투쟁을 계속했다. 1945년 7월 24일, 서울 한복판에 자리한 부민관에서 폭발음이 들렸다. 조문기·유만수·강윤국이 연단 밑에 설치한 시한폭탄이 터지면서 친일파 박춘금이 주최한 아시아민족분격대회가 중단되었다. 해방을 목전에 둔 그 순간까지 한시도 저항의 불씨를 꺼뜨리지 않았던 불사조의 청년 정신을 보여준 거사였다.]]> Thu, 31 Jan 2019 14:05:08 +0000 26 <![CDATA[언제나 청년은 있었다 史소한 이야기]]>     청년으로 보는 역사   역사의 어느 시대를 들여다보아도 청년은 있었고, 그들은 저항했다. 전통적 규범과 가치관, 기성세대의 권위와 산물, 사회의 부조리, 억압 위에서 새로운 세계를 꿈꿨다. 그래서 언제나 혁명의 중심에는 청년이 있었다. 일제강점기 젊은 독립운동가가 독립을 외치고, 1980년대 대학생이 민주화를 외쳤던 것처럼 오늘날 청년은 촛불을 들었다. 근대적 개념의 ‘청년’이 탄생한 뒤로 청년의 역사는 우리 근현대사나 다름없었다.특히 전쟁 직후 역사적으로 가장 보수적이며 절망적인 사회에서 청년들은 기성세대와 대비되는 자신들만의 문화를 형성했다. 서양에서부터 시작된 이러한 움직임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50년대부터 1960년대, 1970년대를 거쳐 한국전쟁의 여파가 남아있는 우리나라에 정착했다. 청년문화라는 용어는 대개 이 시기 히피로 대표되는 청년들의 일탈을 일컫는다. 지금까지도 청년들의 문화는 주류가 아닌 부분문화, 즉 서브컬처로 분류되고 있는데 이는 시대를 지배하는 가치관과 흐름에 반(反)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청년의 반항과 기성세대와의 갈등 사이에서 사회의 변화가 시작되는 것이다. alt]]> Thu, 31 Jan 2019 11:54:18 +0000 26 <![CDATA[2·8독립선언의 열기를 국내로 전파한 김마리아 이달의 독립운동가]]>     글 전시부2·8독립선언의 열기를 국내로 전파한 김마리아   독립기념관은 국가보훈처 및 광복회와 공동으로 김마리아를 2019년 2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김마리아는 일본 유학 중 2·8독립선언에 참여,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한국으로 돌아와 만세운동의 열기를 확산시키고 이후 여성독립운동 단체를 통해 활발한 독립운동 활동을 이어갔다. alt일본 도쿄에서 2·8독립선언에 참여하다김마리아는 1892년 황해도 광산에서 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계몽운동과 구국 활동에 힘쓰던 집안의 영향으로 일찍부터 민족의식을 키웠다. 부친이 세운 소래학교와 서울 정신여학교에서 수학하였으며, 졸업 후에는 교사가 되어 교육계몽운동에 앞장섰다. 1910년대 일제 침탈이 본격화되자 독립의 기틀 마련을 위해 1914년 일본 유학길에 오른다. 1918년 국제 정세가 재편되는 상황에서 이듬해 파리강화회의 개최 소식이 알려지자 재일한인유학생들은 조선 독립의 당위성을 알리기 위한 2·8독립선언을 준비하기에 이른다. 1919년 2월 8일 김마리아는 도쿄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열린 독립선언대회에서 일제의 식민지 정책을 규탄하였고, 이후 일본경시청에 연행되어 일주일간 취조를 받았다. 김마리아는 도쿄에서의 독립운동 기세를 국내로 확산시키기 위해 2월 17일 현해탄을 건너 조국으로 향하였다.여성 독립운동 활성화에 기여하다김마리아는 독립선언문을 감춘 채 조국으로 돌아와 거족적 독립운동을 촉구하고, 여성의 독립운동 참여를 독려하기 위해 전국 곳곳을 누볐다. 그러던 중 3·1운동 소식을 듣고 후속 활동 논의를 위해 서울에 도착하였지만 3·1운동 배후 세력으로 지목되어 일경에 붙잡혔다. 6개월 후 출감한 김마리아는 대한민국 애국부인회에 참여하여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조달하는 등 여성 독립운동 활성화를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하지만 조직원의 배신으로 다시 일경에 체포되고 이듬해 5월 혹독한 고문으로 병을 얻은 채 출감하였다. 중국 상하이로 망명한 김마리아는 상하이 대한애국부인회 활동에 힘을 보탰고,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선출되어 임시정부의 다양한 활동을 지원하는 등 다방면에서 큰 활약을 펼쳤다. 1923년에는 미국 유학을 떠나 여성 독립운동단체 근화회(槿花會)를 조직하는 등 독립을 위한 노력을 이어나갔다. 정부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일생을 바친 김마리아의 공적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alt2·8독립선언이 진행된 도쿄 조선기독교청년회관의 모습alt신문에 실린 2·8독립선언 기사(『독립신문』, 1919.08.26.) alt 2·8독립선언서 (1919.02.08.)alt미국 파크 대학 시절 김마리아의 사진 alt원산의 마르타 윌슨 여자신학원에서 강의하던 시절의 김마리아로, 앞줄 왼쪽 끝에서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alt유학을 마치고 조국으로 돌아온 김마리아 ]]> Thu, 31 Jan 2019 12:19:54 +0000 26 <![CDATA[조선 청년, 적의 심장부에서 조국의 독립을 외치다 자료로 읽는 역사]]>     글 김경미 자료부조선 청년, 적의 심장부에서조국의 독립을 외치다2·8독립선언과 도쿄 유학생의 삶   3·1운동에 한 달 앞서 독립만세를 외쳤던 사람들이 있다. 바로 일본의 조선인 유학생들이다. 그들은 한반도도 아닌 일본의 중심, 도쿄에서 당당히 대한의 독립을 선언했다. alt2·8독립선언의 주역들alt동경조선인유학생학우회가 개최한 춘계육상운동회 기념사진(1917.04.08.) 일본을 물들인 조선 청년들의 외침1919년 2월 8일, 제국 일본의 수도 도쿄에는 보기 드문 눈이 펄펄 내렸다. 오후 2시, 간다(神田)에 있는 조선기독교청년회관은 조선인 유학생들로 발 디딜 틈 없이 가득 찼다. 단상에는 비단 천에 쓴 독립선언서가 걸리고, 조선청년독립단의 이름으로 조선독립 선언식이 거행되었다. 먼저 독립선언서가 낭독되고, 이어 독립을 이룰 때까지 일제에 대해 영원히 혈전을 벌이겠다는 결의문이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와 함께 채택되었다. 3시 50분, 모임을 감시하던 사복경찰의 연락을 받고 출동한 경관대에 학생들은 맨손으로 저항하다 차디찬 눈길을 맨발로 끌려갔다.관할서인 니시간다(西神田)경찰서의 취조 결과,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대표자 11인 중 도쿄 유학생의 독립선언을 외국 언론에 알리는 임무를 맡고 중국으로 떠난 이광수를 제외한 10명이 도쿄지방재판소 검사국으로 송치되었다. 이후 불기소로 풀려난 최근우 외에 재판 결과 9명은 출판법 위반으로 9개월과 7개월 15일의 금고형을 선고받고 도쿄감옥에 투옥되었다. 이 사건이 바로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적의 심장부에서 조국의 독립을 외쳤던 도쿄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이다. “사진01”은 감옥에 갇혔던 2·8독립선언 대표자들이 모두 출소한 뒤인 1920년 4월경에 찍은 것이다. 가운뎃줄이 그들로, 왼쪽부터 최팔용·윤창석·김철수·백관수·서춘·김도연·송계백이다. 송계백은 7개월 15일형을 받았으나 복역 중 병으로 형 집행정지가 되어 1919년12월 25일부터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요양 중이었고, 다른 사람들은 9개월 형을 받아 3월 26일 만기 출감했다. 7개월 15일 형으로 2월 9일 만기가 되어 앞서 출옥한 김상덕과 이종근은 사진에 없다. 김상덕은 출옥 후 중국으로 떠나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에 합류했다. 투옥을 피한 이광수와 최근우는 이미 1919년 4월 11일 임시정부 수립 때부터 의정원 의원 등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출옥한 대표자들과 함께 사진을 찍은 사람들은 독립선언 준비를 도우며 대표자들이 체포된 뒤에도 제2차로 운동을 계속 진행하고자 했던 학생들이다. alt조선학회 기념사진(1920.04.)alt『학지광』 제13호 (1917.7.19.)alt <표> 2·8독립선언 대표자의 인적사항(일본 경찰의 1919년 2월 10일 보고서)조선인 유학생의 삶과 고민2·8독립선언에 참여한 이들은 청운의 뜻을 품고 공부를 하기 위해 현해탄을 건너 이역만리 일본 땅까지 간조선 청년들이었다. 식민지가 된 조선에 고등교육기관이 제대로 없었던 상황에서 근대적인 국가로 성장하여 조선을 침탈한 일본은 새로운 지식의 보고였다. 1918년 말 현재 재일조선인 유학생 총 수는 769명이었고 그 가운데 642명이 도쿄에 거주했다. 도쿄 유학을 떠나는 청년들은 대개 고향에서 출발하여 아침 일찍 경성역에서 급행열차를 타고 저녁에 부산역에 도착했다. 관부연락선으로 갈아타고 다음 날 아침 시모노세키항에 내려 도쿄행 열차를 탔다. 30여 시간이 걸려 이튿날 밤 도쿄역에 도착하면 기다리고 있던 고향 또는 학교 선배들이 안내해 주는 숙소에서 도쿄의 첫날밤을 보냈다. 이들은 일본어와 영어, 수학을 익히고 대학 진학에 필요한 학력취득을 위해 세이소쿠(正則)영어학교와 같은 중등학교에서 1년 가량 공부한 후 와세다(早稻田)대학·게이오(慶應)대학·메이지(明治)대학 등에 입학했다.유학생 중에는 집에서 매달 학비를 보내주어 한 달에 10원 하는 하숙비를 내고 책도 사 볼 여유가 있는 사람도 있었지만, 간신히 여비만 마련하여 도쿄에 와서 식비가 싼 조선총독부 유학생 감독부 기숙사에 머물며 고학으로 학업을 이어가는 사람도 많았다. 이들은 일본학생과 경쟁하며 자신의 실력을 기르고 세계의 사상·정치적 동향을 파악하는 능력을 갖추고자 했다. 전 세계의 소식을 쉽게 접할 수 있는 도쿄에서, 그들은 멸망한 조국이 어떠한 길로 나아가야 하며 자신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고자 했다.이러한 열망을 충족시켜 주고 학교에서는 채워지지 않는 동료애를 느낄 수 있는 장이 되었던 곳이 유학생단체였다. 대표적인 것이 동경조선유학생학우회로, 유학생 모두 반드시 이 단체에 가입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학우회는 웅변회·졸업생 축하회·신도래학생 환영회·운동회 등의 행사를 개최하였다. 특히 많은 학생들이 한자리에 모여 유쾌하고 재미있게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운동회에는 전 유학생들이 큰 관심을 갖고 참가하였다. 학우회는 이러한 행사뿐 아니라 기관지 『학지광(學之光)』을 발간하여 유학생들에게 신사상을 보급함과 더불어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학술단체였지만 일종의 비밀결사로 일본 경찰에서 조선인 단체 중 가장 위험한 모임이라고 보았던 조선학회에는 이광수·김철수·김도연·서춘 등 2·8독립선언 대표자들이 참가하여 활동했다.이러한 유학생들의 움직임 하나하나는 일본 경찰의 감시 대상이었다. 이들이 발표한 글이나 연설 내용은 철저하게 분석되었다. <표>에서 볼 수 있듯이 2·8독립선언의 대표자들은 배일사상의 정도에 따라 갑호(甲號)와 을호(乙號)로 분류된 요시찰 조선인으로, 경찰에 의해 직간접적으로 철저한 감시 하에 놓여 있었다. 이러한 감시 속에서도 이들은 조국의 독립을 이루어 볼 기회를 포착하게 되자, “민족을 구제할 자는 동경에 유학하는 우리 청년들”이라고 선언하였다. 이들 청년의 외침은 한반도를 비롯하여 한민족이 사는 곳이면 어디든 “대한독립만세”가 울려 퍼졌던 1919년의 문을 열었다.]]> Thu, 31 Jan 2019 15:01:11 +0000 26 <![CDATA[민족과 인간을 사랑한 청년 강상호 역사를 만든 사람]]> 글 임영대 역사작가민족과 인간을 사랑한청년 강상호 강상호는 경상남도 진주에서 1887년에 명문 양반 가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럼에도 주어진 신분과 유복한 삶을 누리기만 하지 않았다. 20살 나이에 진주에서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하였으며, 32살 때는 진주지역 만세운동을 이끌었다. 36살이 되는 해에는 형평사를 창립하여 심각한 사회적 차별에 시달리는 백정들을 도왔다.진주노동공제회와 14개나 되는 시민단체에서 활동하였고, 40세에 신간회 진주지회 감사를 맡았다. 1957년 사망, 2005년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 받았다. 장엄한 학생대중이여! 궐기하자! 굳세게 싸우라!막대한 재산이 있고 지역에서 존경받는 명문가 출신 청년이라고 하면 민중을 위한 삶과는 거리가 먼 인생을 살기 쉽다. 소위 있는 집 자식들이 타인을 돌아보지 않고 자신, 또는 자신과 비슷한 계급 출신자만을 위해 사는 건 오늘날이나 예전이나 흔한 일이다. 하지만 흔한 일이었다고 해서 모두가 그랬던 건 아니다. 자신보다 상황이 나쁜 타인을 돕고 나라를 구제하는 데 물려받은 재산과 사회적인 지위를 이용한 이들도 많았다. 강상호는 진주에서도 유명한 천석꾼에 양반집 아들이었다. 부친은 정3품 통정대부 벼슬까지 지냈다. 비록 나라가 기울어서 아들인 강상호는 옛날처럼 과거도 볼 수 없고 출세하기도 어려워졌지만, 고향에서 존경받으며 살기엔 어려움이 없었다. 그러나 강상호는 조용히 삶을 즐기지 않았다. 일본의 손아귀에서 무너져가는 나라를 다시 일으키고, 다른 사람들이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도록 싸웠다. 강상호가 처음 사회 활동을 시작한 건 그가 스무 살 되던 해인 1907년, 국채보상운동의 참여였다."나라가 일본에 진 빚이 1,300만 원입니다. 나라에는 그만한 돈이 없고, 빚을 갚지 못하면 이 나라는 남의 손에 넘어가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동포들이 담배를 끊고 술을 끊어 돈을 모은다면 석 달 안에 그 빚을 갚을 수 있습니다. 모두 동참합시다."안타깝게도 국채보상운동은 실패로 돌아갔다. 위협을 느낀 일제가 주동자인 양기탁에게 모금한 돈을 횡령했다는 누명을 씌웠기 때문이다. 이미 한국에 뻗치고 있는 자신들의 권력을 이용해 한국 정부가 추가로 빚을 지게 했다. 참가자들의 의기는 높았지만, 실패할 수밖에 없는 운동이었다.쓰러지지 않는 청년의 힘강상호는 민족을 위한 자신의 첫 싸움이 실패한 뒤에도 주저앉지 않았다. 1919년, 그가 32살이 되던 해에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이번에도 강상호는 적극적으로 운동에 뛰어들었다. 사람들을 모아 만세를 부를 날짜를 정하고, 예정일인 3월 10일 진주 장날에 모인 사람들과 함께 만세운동을 전개했다. 일제는 강상호를 붙잡아 ‘보안법 위반’이라는 명목으로 징역 6개월을 선고했다."사람은 모두 똑같은 사람입니다. 백정도 사람이고 양반도 사람입니다. 인간은 저울처럼 평등합니다. 백정들의 생활을 개선하지 않는 것은 위선이며, 조선인들끼리 차별하고 탄압하는 것은 결국 일본의 식민통치를 돕는 어리석은 일입니다."만세운동 이후 강상호가 관심을 가진 문제는 백정 차별이다. 도축업에 종사하는 백정들은 조선시대부터 제대로 된 사람 취급을 받지 못했다. 법적으로 신분제가 폐지된 뒤에도 백정에 대한 사회적 차별은 계속 유지됐다. 백정은 일반인들과 어울리지 못했다. 일반 학부모들이 제 아이를 백정과 함께 공부시킬 수 없다고 반발하여 아무리 돈이 있는 백정이라 할지라도 아이를 학교에 보내지 못했다. 일반인과 다툼이라도 벌어질 양이면 경찰은 무조건 백정 잘못으로 몰아갔다. 사랑과 평화를 전한다는 교회 예배조차도 백정은 일반 신자들과 따로 보아야만 했다. 서양 선교사도 그 악습을 이길 수 없었다. 심지어 살인사건까지 일어났다. 진주 청년 몇사람이 백정에게 개를 잡으라고 시켰으나 백정은 이를 거절했다. 그러자 청년들은 건방지다는 이유로 백정을 때려죽였다. 사건에 대해 일본 경찰은 아무런 처벌도 내리지 않았다. 강상호는 이 모습을 똑똑히 보았다. 강상호가 백정을 위해 나섰다. 백정의 아이를 자신의 양자로 들여 호적을 바꾼 다음 학교에 보내주었으며, ‘형평사’를 조직해서 전국에 백정 차별이 잘못되었음을 알렸다. 구습에 따르는 사람들이 강상호를 비난하며 ‘신백정’이라 불렀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형평사 운동은 우리 역사상 최초의 인권운동이었다. 그러나 강상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인식은 쉽사리 바뀌지 않았다. 우리 사회에서 백정이라는 개념과 사회적 차별이 완전히 사라진 건 한국전쟁과 산업화로 사회구조가 송두리째 바뀐 뒤였다.민족을 위해 투쟁하는 동안 강상호는 많은 재산을 잃었다. 사회운동에 돈을 아끼지 않았고, 고향 마을 전체 세금을 10년이나 대납해 주었으니 재산이 줄어든 것은 당연했다. 해방 이후 자식들을 교육시킬 돈도 없을 정도였다. 1957년 강상호가 죽었을 때 진주 시내에는 전국에서 모여든 백정들로 가득했다. 덕분에 장례는 9일장으로 치러졌다. 20살 약관의 나이부터 민족을 위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바친 영원한 청년에 대한 깊고도 깊은 애도였다.]]> Thu, 31 Jan 2019 13:56:03 +0000 26 <![CDATA[시대의 희망 청년, 청년의 희망 독립 우리가 만난 얼굴]]> 시대의 희망 청년 청년의 희망 독립 alt         ]]> Wed, 30 Jan 2019 19:27:06 +0000 26 <![CDATA[한인 단체의 결성과 통합 기운 한국인의 터전]]>     글 홍선표 나라역사연구소 소장한인 단체의 결성과 통합 기운   초기 한인 이민자들은 대개 농장 단위로 분산되어 생활하였다. 분산된 농장에서 한인들은 10여 명 이상이 모인 곳에동회(洞會)를 조직했다. 한인들 간의 질서와 친목, 그리고 상호부조와 권익 신장을 도모하기 위함이었다. 동회는 대개주민 회의에서 투표로 선정하는 동장과 동장을 보좌하는 총무, 서기, 사찰 등으로 구성되었으며, 자치 규정을 정해 자치활동을 전개했다. 즉, 친목을 강화하고, 부녀자들을 존중하고 보호하며, 도박·음주와 부정한 행위를 금지하였다. 규율을 위반한 자에게는 1~2달러의 벌금을 부과하는 시행규칙도 있었다. alt에와친목회에서 주관한 광무황제탄신기념행사(1907)하와이 내 민족운동 단체농장 단위별로 결성된 동회 외에 민족운동을 목적으로 하는 정치적인 단체들이 하와이와 미국 본토에서 결성되었다. 하와이 내 최초의 정치 단체는 1903년 8월 호놀룰루에 설립된 신민회(新民會)이다. 안정수·윤병구·홍승하 등이 참여했다. 구국을 위한 동족 단결과 민지계발, 국정쇄신을 목적으로 설립하였으나 설립이념인 ‘신민’과 ‘국정쇄신’이 대한제국 정부를 전복하려는 반역 집단이라는 오해를 불러일으켜 1904년 4월 해체되었다.신민회 해체 이후 오하우섬 에와농장에서 노동하던 정원명·윤병구·김성권·이만춘·김규섭 등이 에와친목회를 결성하였다. 공식 명칭은 ‘예와친목회(禮?親睦會)’인데 농장 이름을 따서 편의상 에와친목회로 부른다. 설립 목적은 항일운동을 위한 일화(日貨) 배척과 동족 간의친목과 권익 보호였다. 초대 회장은 정원명이고 백일규가서기를 맡았다. 에와친목회는 공립협회의『공립신보』를 부러워했다. 백일규, 조영노 등 6명이 연명으로 『공립신보』에 보낸「기서」(1905.12.21)에 따르면 “오직 신문은 실로 사람의 큰귀와 눈이라 신문을 박람하면 세계에 듣지 못하던 바를들으며 보지 못하던 바를 본다” 하고 “그런데 지금 우리한인들은 신문을 보기보다 주색잡기의 장으로 가서 시간을 낭비한다”는 한탄의 글을 남겼다. 언론의 필요성을 절감했던 에와친목회는 하와이 한인 단체 처음으로 1906년 5월 1일 『친목회보』를 발간했다.에와친목회 결성 이후 하와이 각지에서 한인 단체들이 우후죽순 생겼다. 와이파후공동회(1906.3, 안원규)·혈성단(1906.5, 공덕화)·자강회(1906.6, 고석주·손창희)·공진회(1906.12, 민찬호)·노소동맹회(1907.2, 정병섭)·의성회(1907.2, 임재규)·국민동맹회(1907.3, 채극여)·국민단합회(1907.7, 김이원)·신간회(1907.7, 김성옥)·실지회(1907.7, 박승렬)·부흥회(1907.8, 전백현)·전흥협회(1907.9, 김익성) 등 약 24개의 단체와 지회들이 대동단결과 항일운동을 목적으로 결성되었다. alt공립협회 창립회원(앞줄 왼쪽부터 송석준·이강·안창호, 뒷줄 임준기·정재관)미국 본토의 한인 단체미국 본토에서 처음으로 한인 단체가 결성된 것은 1902년 9월 4일 유학을 목적으로 한국을 떠나 10월 14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안창호에 의해서다. 그는 이대위·김성무·박영순 등과 1903년 9월 22일 환난상부 및 생활개선을 목적으로 샌프란시스코에 상항친목회를 설립했다.하와이에서 한인들이 대거 미 본토로 이거해 오고 1905년 1월부터 샌프란시스코의 백인 미국인들이 일본인 배척운동을 전개하며 동양인을 압박하자 보다 조직적인 자치기관이 필요해졌다. 그런데다 1905년부터 일본이 호놀룰루 주재 일본총영사를 대한제국 명예총영사로 임명하여 미주 한인들을 통제하고 동년 4월 한인들의 하와이 이민마저 금지하려 하자 민족운동을 위한 단체가 필요했다. 이런 상황에서 한인들은 1905년 4월 5일 샌프란시스코에서 항일운동과 환난상부를 목적으로 공립협회를결성했다. 초대 총회장은 안창호가 맡았고 송석준·임준기·이강·임치정 등이 참여했다. 공립협회는 자치기관이자 항일민족단체로서 샌프란시스코에 본부를 필두로 리버사이드·레드랜드·로스앤젤레스·락스프링스·솔트레이크시티·새크라멘토·핸포드·프레스노 등지에 지부를 결성하여 북미 최대의 단체로 발전하였다. 자체 기관지로 1905년 4월 22일 창간한 『공립신보』가 있다.공립협회 결성 직후인 1905년 12월 9일 캘리포니아주의 파사디나에서 구국을 위한 교육운동을 목적으로 대동교육회가 결성되었다. 회장은 이병호, 총무는 장경이맡았다. 대동교육회는 1907년 1월 교육과 함께 실업을 장려해 나라의 국권을 보존한다는 취지로 대동보국회로 재편되었다. 1907년 10월 3일 기관지로 『대동공보』를 발행하였고, 7개의 지방연회를 가지는 등 공립협회와 쌍벽을 이루었다. 1907년 7월 25일 뉴욕에서 안정수·신성구·서필순·이원익 등이 동족상조와 항일운동을 목적으로 공제회를 결성했다. 공제회는 동년 8월 헤이그에서 특사 활동을 마치고 뉴욕에 온 이상설과 이위종을 환영하였고 일본 영사의 한인 감독권을 배제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동년 11월24일 시애틀에서 이정실·김익제·박용하 등이 항일 구국을 목적으로 취지서를 발표하고 동맹신흥회를 결성했다.한인 단체의 통합 기운하와이와 미국 본토의 한인 단체들은 을사늑약과 일본의 통감통치, 헤이그 특사 활동을 구실로 광무황제를 강제퇴위시킨 일련의 치욕스러운 사건들을 지켜보면서 항일구국을 위한 단체 통합과 새로운 민족운동의 필요성을 절감하기 시작하였다. 그러한 움직임은 하와이 내 한인 단체 통합운동의 기운을 불러일으켰고, 미국 본토에서는 대한신민회 조직을 발기하는 움직임으로 나타났다.]]> Thu, 31 Jan 2019 15:54:01 +0000 26 <![CDATA[포상을 받은, 받지 못한 그리고 잘못 포상된 독립운동가 끝나지 않은 독립운동]]>     글 이계형 국민대학교 특임교수포상을 받은, 받지 못한그리고 잘못 포상된 독립운동가 1945년 우리 민족은 광복을 맞았지만, 독립운동은 끝나지 않았다. 여전히 미완으로 남은 사건, 해결되지 못한 문제, 기억해야만 하는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끝나지 않은 독립운동은 독립운동사를 과거에 머문 역사가 아닌 현재의 문제로 다루며, 오늘도 신문 한쪽을 차지하고 있는 독립운동 및 일제강점 이슈를 소개한다. alt제79회 순국선열의 날 기념식에서 이루어진 독립운동가 포상(국가보훈처 제공)해방 후 친일파 청산과 독립운동가 포상1945년 8월 해방 후 우리 역사에서 가장 안타까운 것은 스스로 정부를 수립하지 못하고 독립을 위해 헌신한 분들을 대우하지 않은 것, 그리고 친일파를 단죄하지 못한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미·소간의 냉전체제 속에서 남과 북으로 분단된 한반도는 3년이 지나서야 이념을 달리하는 각기 다른 정부를 세웠다. 1948년 9월, 늦게나마 친일파 처단을 위해 국회에서 ‘반민족행위처벌법’을 제정하고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를 구성했지만, 안타깝게도 1년도 채 되지 않아 와해되고 말았다. 미군정 이후 대거 등용된 친일파가 반공세력으로 변신에 성공한 뒤 이승만의 정권장악과 유지에 핵심적 역할을 한 결과였다.독립운동가 포상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정부수립 후 1949년 4월 ‘건국공로훈장령’이 제정되고 대통령 이승만과 부통령 이시영이 최초로 최고 등급인 1등급을 수여 받은 것을 마지막으로, 10여 년 동안 이승만 정권하에서 더 이상의 포상은 없었다. 친일파 처단이 미완성으로 끝맺은 것과 상통하는 부분이다.아이러니하게도 1962년 군사쿠데타로 권력을 쥔 박정희 정권에 의해 독립운동가 포상이 이뤄졌다. 이는 조선시대 효종과도 비교된다. 소현세자가 죽고 왕위에 오른 효종은 왕권의 발생 가치가 법통에 어긋난다는 거센 반발에 부딪혔다. 그는 궁리 끝에 병자호란의 원수인 청나라에 대한 복수로 북벌론을 제기하여 당시 백성의 호응을 얻고 불안한 왕권을 안정시켰다. 박정희는 정권 발생 가치의 하자뿐만 아니라 자신의 친일 경력까지 감추고자 민족주의를 전면에 내세웠다. 독립운동의 의미를 강조하고, 독립운동가 포상도 재계한 것이다.1962년 문교부 산하 국사편찬위원회의 주관으로 김구·안중근·윤봉길 등 204명이 포상을 받았다. 이후 1963년 내각사무처, 1968년 총무처를 거쳐 1977년 비로소 지금의 국가보훈처가 주관 부처로서 독립운동가를 포상하고 있다. 또한 1967년 2월 상훈법이 제정되어 독립운동가뿐만 아니라 국가유공자 전반에 걸쳐 포상이 이뤄졌다. 이때 건국공로훈장은 등급별로 차등을 두어 건국훈장·대한민국장·대통령장·국민장 등으로 구분되었다. 1990년 1월에는 상훈법이 개정되어 국민장이 독립장으로 바뀌었고 애국장, 애족장 등 훈장 등급이 증설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이외에도 건국포장과 대통령표창을 포함하여 모두 7개 등급으로 나뉘어 포상이 이뤄지고 있다.독립운동가 포상은 1962년·1963년·1968년·1980년·1982년·1986년에 비정기적으로 진행되었다. 1963년 제3공화국 출범, 1968년 3선 개헌, 1980년 5·18민주화운동, 1982년 일본의 역사 교과서 왜곡 파동, 1986년 대통령직선제 개헌 문제 등이 제기된 것과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1990년 이후 매년 3·1절과 광복절 그리고 경우에 따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기념일(4.13)*이나 순국선열의 날(11.17)에도 포상이 실시되었다. 그 결과 2019년 1월까지 전체 포상된 독립유공자는 15,180명에 달한다. alt김원봉과 아내 박차정의 결혼기념 사진우리가 외면했던 독립운동가그런데 15,180명에는 누구나 독립운동가로 알고 있는 인물들이 적지 않게 빠져 있다. 몇 해 전 개봉된 영화 <암살>(2015, 최동훈 감독)은 1,200만 명, <밀정>(2016, 김지운 감독)은 750만 명이 관람하며 큰 인기를 끌었다. 이들 영화는 김원봉이 이끈 의열단 활동을 그린다. 영화를 통해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주목받은 김원봉은 포상을 받은독립운동가가 아니다. 1948년 친일파 정권이 활개 치던 상황에서 월북하여 북한 정권에 참여했다는 이유 때문이다. 결국 그는 1958년 김일성에 의해 숙청되면서 남과 북 모두에게 외면을 받는 독립운동가로 남았다. 얼마 전 개봉한영화 <말모이>(2019, 엄유나 감독)의 실제 주인공 이극로는 백과사전에 한글학자·북한의 정치인이라 규정되어 있다. 그는 1942년 10월 ‘조선어학회사건’으로 검거되어 징역 6년을 선고받고 함흥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1945년 8월 광복을 맞아 풀려났다. 하지만 1948년 월북한 뒤로 북한에서 활동하였다는 이유로 독립운동가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 정부가 독립유공자를 “일제의 국권침탈(1895년) 전후로부터 1945년 8월 14일까지 국내외에서 일제의 국권침탈을 반대하거나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항거한 인물”로 규정한 것을 스스로 저버리는 것이 아닌가 싶다.이뿐만 아니다. 독립운동을 하였지만 문서자료가남아 있지 않거나 정부가 정한 포상 기준이 너무 엄격하여 대상에 포함되지 못한 경우도 많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 2018년 4월 정부는 포상 심사 기준을 개정했다. 이는 ▲ 3개월로 되어 있던 최소 수형·옥고 기준을 폐지하여 3개월 이하라도 독립운동으로 인해 옥고를 치른 경우▲ 독립운동 참여 때문에 퇴학을 당한 경우 ▲ 실형을 받지 않았더라도 적극적인 독립운동 활동 내용이 분명한 경우 등이 골자다. 이는 매우 고무적인 일이지만, 사료 입증이 되지 않아 서훈 심사에서 번번이 탈락하여 독립운동가로 인정을 받지 못하는 경우를 가리는 것도 풀어야 할또 하나의 숙제이다. 이외에도 한 사람의 공적을 놓고 두사람에게 이중으로 포상하게 된 소위 ‘가짜 독립운동가’문제, 새롭게 친일 경력이 드러난 포상 독립운동가 등의 삭훈(削勳) 문제 또한 엄격히 해야 한다.공정하고 형평성 있는 포상 심사는 독립운동가의 숭고한 정신과 행동을 우리에게 보여줄 수 있는 객관적인 지표가 된다. 독립운동가는 자연스럽게 국민 누구나 존경하고 기리는 인물이 되어야 한다. 나를 중심으로 살아가고, 자꾸만 이타심이 작아지는 지금의 우리에게 위대한 독립운동가의 고아한 기상과 바른 정의는 끊임없이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지난해까지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기념일을 4월 13일로 보고 기념식을 거행해왔으나, 2019년부터 임시정부가 국호와 임시헌장을 제정하고 내각을 구성한 4월 11일로 변경되었다.]]> Thu, 31 Jan 2019 15:21:30 +0000 26 <![CDATA[제국주의 시대의 개막과 갑신정변 우리의 오늘 세계의 그날]]>     글 강응천 기획집단 문사철 대표, 역사저술가제국주의 시대의 개막과 갑신정변 1884년 베를린 궁전에 13개국의 유럽 열강들이 모여 식민지를 나누고 있을 때, 조선에서는 김옥균을 비롯한 젊은 관료들을 중심으로 일종의 혁명이 모의되고 있었다. 그들은 조선의 자주독립과 근대화를 꿈꿨으나 롤러코스터를 탄 듯 거세게 흔들리는 국제정세 속에서 정변은 3일 만에 막을 내려버렸다. alt오리엔트 특급 열차 운행 광고 포스터오리엔트 특급과 베를린 회의1883년 독일의 다임러가 가솔린을 원료로 사용하는 내연기관을 개발했다. 그동안 동력기관으로 사용되던 증기기관은 외연기관이었는데, 엔진의 외부에서 동력이 공급되기 때문에 열 손실이 크다는 단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에 반해 내연기관은 실린더의 내부에서 연료를 연소시켜 생긴 가스의 팽창력으로 피스톤을 움직이는 원동기이다. 따라서 내연기관은 외연기관보다 열효율이 훨씬 더 좋다. 다임러의 가솔린 엔진이 최초의 내연기관이었던 것은 아니다. 이미 1860년 에티엔 르누아르가 전기로 점화하는 내연기관을 발명한 바 있었다. 1867년에는 니콜라우스 오토가 상업적 가치를 지닌 내연기관을 개발했다. 그러나 르누아르와 오토의 엔진은 석탄 가스를 원료로 사용하기 때문에 수송용으로 적합하지 않았다. 다임러의 가솔린 엔진은 그 같은 문제를 극복했다는 점에서 획기적이었다. 다임러는 나아가 1885년 벤츠와 함께 이 엔진을 장착한 오토바이와 자동차를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가솔린 엔진을 장착한 자동차에 뒤질세라 기차의 발전도 가속 페달을 밟았다. 다임러가 가솔린 내연기관을 개발하던 그해, 유럽 최초의 대륙 횡단 특급열차가 프랑스 파리에서 첫 기적을 울렸다. 벨기에의 사업가 조르주 나겔마케르가 개발한 열차는 장거리 여행에 대비해 침대차·식당차·흡연실·숙녀용 객실을 두루 갖추고 있었다. 뮌헨·빈·부다페스트·부쿠레슈티를 지나 불가리아 바르나 항에 이르는 2,740㎞의 여정을 소화한 뒤 기선에 실려 오스만 제국의 이스탄불까지 갔다. 훗날 이스탄불까지도 철로를 따라 달리게 될 이 열차가 바로 애거서 크리스티의 추리소설로도 유명한 ‘오리엔트 특급’이다. 급격히 발전하는 과학기술이 유럽과 아시아를 하나로 묶고 있었던 것이다.서유럽을 중심으로 세계화가 빠르게 진행되는 가운데, 1884년 독일제국의 심장부인 베를린 궁전에 13개국 서유럽 열강이 모였다. 아프리카에서 영토 확장에 골몰하던 열강들이 대륙 중심부에 있는 콩고를 두고 충돌이 벌어지자 이를 해결하기 위해 머리를 맞댄 것이다. 쟁점은 콩고만이 아니었다. 사실상 이집트를 공동으로 통치하고 있던 영국과 프랑스는 독점적 지위를 놓고 다투었다. 결국 영국에 밀려난 프랑스는 알제리 등 서아프리카로 눈을 돌렸고, 이에 따라 다른 나라도 경쟁적으로 아프리카 땅따먹기에 뛰어들었다. 독일 수상 비스마르크는 우발적이고 불필요한 충돌을 피하면서 땅을 나눠 가지기 위해 베를린 회의를 주선한 것이다. 그래서 베를린 회의는 자본주의가 제국주의로 나아가는 신호탄으로 불린다. 제국주의란 무엇인가? 아프리카를 포함한 세계 전역을 식민지와 세력권으로 완전히 나누어 가진 열강과 그들의 시대를 가리키는 말이다. 1880년대에 그 시대가 열리고 있었다. alt갑신정변의 주역들. 왼쪽부터 박영효·홍영식·서재필· 김옥균삼일천하로 끝난 갑신정변그런 시기에 조선에서는 자주적 근대화를 지향하며 갑신정변이 일어났다. 김옥균·홍영식·박영효 등 개화 정책을 추진해 온 젊은 관료들이 정변을 일으켜 보수 세력을 추방했다. 그들은 불과 16년 전 일본에서 일어난 메이지유신을 모델로 삼았다. 그러나 16년의 세월은 메이지 유신과 갑신정변 사이에 근본적인 차이를 가져왔다. 산업화에 성공해 서유럽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된 일본은 조선의 개화파를 돕는 척하면서 조선을 식민지로 삼으려는 계획을 진척시켰다. 서유럽 열강과 같은 제국주의 국가로의 변신을 꾀했던 것이다.갑신정변의 주역들은 수구 세력인 민씨 정권을 전복하기 위해 일본에 도움을 요청했다. 일본도 나름의 속셈을 갖고 이들의 요청에 응했다. 1884년 10월 17일, 우정국 낙성식 축하연회장 근처에서 치솟은 불길을 신호로 민씨 정권의 중진인 민영익이 공격당하고 민영목·민태호·조영하 등이 차례로 살해되었다. 개화파는 새 정부를 수립, 14개 항의 정강을 공포했다. 문벌을 폐지해 인민 평등의 권리를 세우고, 능력에 따라 관리를 임명한다는 혁신적인 내용이 담겼다. 지조법을 개혁해 관리의 부정을 막고 백성을 보호하며 국가재정을 넉넉히 한다는 경제 개혁도 포함되었다. 나아가 대신과 참찬이 매일 합문 내의 의정소에 모여 정령을 의결하고 반포하는 방안은 영국과 같은 입헌군주제를 추구한 것으로 평가받을 수 있다. 그러나 민씨 세력의 요청으로 청국이 출동, 일본 군대가 재빨리 발을 빼는 바람에 정변은 삼일천하로 끝나고 말았다. 정변의 주역들은 죽거나 일본, 미국 등으로 망명했다. alt베를린 회의 이후 아프리카 대륙의 식민지 지도세계, 롤러코스터를 타다갑신정변이 실패한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무엇보다 일본의 본색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그에 의존한 것이 가장 크다. 당시 일본이 걷고 있던 제국주의의 길은 베를린 회의에서 더욱 뚜렷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갑신정변의 뒤처리를 놓고 청과 일본이 옥신각신하던 1885년, 베를린에 모인 13개 열강은 합의문을 도출했다.합의문에 따르면 유럽 열강은 앞으로 아프리카에서 서로 전쟁을 하지 않기로 하고, 대신 한 나라가 특정 지역을 차지하면 다른 나라는 그것을 인정하기로 했다. 이 같은 합의를 바탕으로 영국은 이집트와 수단의 영유권을 확보한 데 이어 그 남쪽의 케냐·로디지아·남아프리카로 이어지는 남북 띠를 형성할 계획을 세웠다. 한편 프랑스는 알제리를 비롯해 적도 이북 아프리카의 서부를 차지하기로 했다. 베를린 회의의 주최국 독일은 케냐 일부와 서남아프리카로 진출했다. 아프리카를 식탁 위에 올려놓고 유럽 열강이 나이프와 포크를 들고 나눠 먹는 꼴이었다. 아프리카에는 원주민 부족들의 자연적 경계를 무시한 채 유럽 국가들이 마음대로 그은 경계선이 생겨나고 있었다.가솔린 자동차가 거리를 달리고 특급 열차가 대륙을 가로지를 때 세계는 현기증 나는 제국주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그 현란한 속도와 변화의 변주곡을 잘 표현하는 발명품이 1884년 미국의 코니아일랜드에 등장했다. 사람을 싣고 허공을 뱅뱅 돌며 질주하는 놀이기구였다. 사업가 라 마커스 톰슨이 ‘롤러코스터’라는 이름을 붙여 특허를 낸 이 기구는 꽈배기처럼 꼬인 궤도를 돌면서 솟구치기도 하고 뒤집히기도 하며 탑승객의 혼을 쏙 빼놓았다. 그런데도 탑승객은 기구에서 떨어지지 않으니 신통방통한 노릇이었다. 톰슨에겐 ‘중력의 아버지’라는 애칭이 선사되었다. 롤러코스터는 19세기 과학기술혁명의 성과를 대중오락에 적용해 대성공을 거둔 상품이었다. 1880년대 중반에 롤러코스터를 즐길 수 있는 사람은 미국과 유럽의 유한 계층에 국한되었다. 그들이 이끄는 세계는 롤러코스터처럼 온 세상을 뒤집어 놓으며 질주했다. 제국주의 시대의 개막은 유럽인에게 현기증이 날 만큼 신나는 세상을 보여주었지만,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대다수 주민에게는 아찔한 위기의 나날들로 다가왔다. alt현대 디자인의 아버지이자 미술 공예 운동을 이끈 윌리엄 모리스갑신정변의 주역들이 보지 못한 것유럽인이라고 해서 모두 다 제국주의 시대의 휘황한 전망을 즐길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아시아, 아프리카에 식민지를 개척하며 제국주의로 나아가는 주역은 사업가, 정치인, 군인 등 상류층에 속하는 사람들이었다. 노동자, 농민, 소상인 등 중하층을 이루는 대다수는 자본주의 발전의 과실을 넉넉히 누리지 못했다. 유럽이 이룩한 급속한 산업화는 분명 그들이 열심히 일한 덕분이었지만, 그들이 일한 만큼의 대가를 받는다고 할 수는 없었다.이 같은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을 폭로하고 노동자들의 투쟁을 선도한 사람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사람이 칼 마르크스다. 그는 1883년 세상을 떠났다. 마르크스의 저서와 사상은 그가 죽은 뒤에 더 유명해졌고, 유럽 곳곳으로 그의 이름을 내건 혁명운동이 번져 갔다. 물론 마르크스주의가 자본주의 사회를 극복하려는 사상의 전부는 아니었다. 1884년 영국 런던에서 사회주의동맹을 결성한 시인이자 공예가 윌리엄 모리스도 노동자들의 처지를 개선하고 세상을 바꾸려 한 혁명가 중 한 사람이었다.모리스는 예술가임에도 불구하고 정치에 적극 참여하는 이유를 자신이 믿는 예술 사상을 실현하기 위해서라고 밝혔다. 그에게 예술은 인간 노동의 즐거움을 표현하는 것이고, 건전한 예술은 제작자와 향유자 모두에게 행복을 주는 것이었다. 모리스는 진정한 예술은 민중에 의해, 민중을 위해 만들어진 예술이라면서 예술을 민중의 노동 자체로 보았다. 그는 이러한 생각을 바탕으로 미술 공예 운동의 중심에 섰다. 기계로 만든 제품에 반대하며 고딕 양식을 되살리고 중세 길드의 수공업 방식으로 돌아가 노동과 예술이 일치하는 사회를 만들자고 외쳤다. 모리스는 벽지·타일·스테인드글라스·가구·책 등 누구나 사용하는 생활 주변의 사물을 예술의 대상으로 삼았다. 이처럼 생활과 예술을 일치시키는 예술 사상과 실천 때문에 지금도 그는 현대 디자인의 아버지로 불리고 있다.그러나 장인 공동체라 할 수 있는 모리스의 회사에도 문제는 있었다. 그의 회사에서 일하는 100여 명의 노동자 또한 장시간 노동과 저임금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모리스는 노동자가 아름다운 집에서 아름다운 책을 읽으며 살아가는 모습을 꿈꾸었지만, 자신이 고용한 노동자들에게조차 그 꿈을 이루어 주지 못했던 것이다. 그만큼 1880년대 유럽의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아직 봉건 왕조에 머물러있던 조선에서 막 근대의 꿈을 꾸기 시작한 갑신정변의 주역들이 유럽의 그런 속사정을 알 수 있었겠는가? 조선에서 가장 선진적인 교양과 지식을 갖춘 엘리트조차 제국주의의 속살은커녕 겉모습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가운데 1880년대의 세계는 롤러코스터처럼 질주하고 있었다.]]> Thu, 31 Jan 2019 16:21:32 +0000 26 <![CDATA[마지막 빛을 발한 스타를 찾아 : 영월 이 땅의 숨결]]>     글·사진 임운석 여행작가 마지막 빛을 발한 스타를 찾아 : 영월  영월은 긴 세월 동안 변방이었다. 사람들의 발길이 잘 닿지 않는 곳이었던 만큼 마지막 선택의 기로에 선 사람들이 영월을 찾았다. 실존 인물인 조선 6대 임금 단종과 영화 <라디오 스타>의 주인공 ‘최곤’이 그들이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그들은 사라지고 없지만, 흔적들은 여전히 남아 옛이야기를 들려준다. alt영월, 청령포를 둘러싼 서강이 꽁꽁 얼어붙었다  alt감정이 없는 밀랍인형에 불과하지만, 단종의 비통함이 느껴진다  alt이리저리 구불구불 자란 아름다운 천년의 소나무숲 뒤로 어소가 있다  비운의 스타, 조선 6대 임금 단종자고 일어나니 스타가 된 것이 아니라, 자고 일어나 보니 왕이 된 열한 살의 아이가 있었다. 조선 제6대 왕인 단종이다. 어린 임금의 등장으로 조선왕조는 사실상 권력의 공백기를 맞았다. 야심 찬 숙부 수양대군은 이때를놓치지 않고 왕위 찬탈에 나선다. 조카 단종을 상왕 자리에 앉힌 뒤 권력을 독차지한 것이다. 이후엔 왕좌를공고히 하기 위해 인륜을 저버린다. 단종을 노산군으로 강봉하고 청령포로 유배 보낸 것이다. 그때 단종의 나이는 고작 열여섯이었다.영월을 휘감아 도는 서강의 물길이 청령포에서 마침내 얼어붙었다. 꽁꽁 얼어붙은 강에선 관광객을 실어나르는 나룻배도 깊은 동면을 취할 수밖에. 그래서 청령포엔 깊은 고요함만이 감돈다. 청령포는 동·남·북 삼면이 서강의 물길에 에워싸인 형국이다. 나머지 한 면인 서쪽은 깎아지른 절벽 지형이다. 그러니 배가 아니고서야 청령포에 발을 디디기는 아예 포기해야 한다. 철옹성처럼 쉬이 접근할 수 없는 이곳, 창살 없는 감옥임에 틀림없다. 그런 청령포지만 겨울에 찾으니 흰 눈이 내린풍경이 마치 하얀 솜이불처럼 따뜻하게 보여 단종의 비애가 마음에서 조금 가신다.나루터를 출발한 배가 아주 천천히 회전한다. 회전할 때 약간의 엔진 소리가 들리더니 곧 잠잠해진다. 잠시 엉덩이를 붙이자마자 배는 청령포에 도착한다. 배에서 내려 울창한 솔숲 속으로 들어서자 별천지에 온 듯 기분이 상쾌하다. 여행자에게는 아름다운 풍경이겠지만 유배된 단종에게는 한낱 추운 겨울날의 적막함이었으리라. 청령포에 터를 잡은 소나무들은 짧게는 수십 년 길게는 수백 년에 이르는 거목들이다. 주변 소나무 중 유독 한 그루에 눈이 간다. 허리를 90도로 꺾은 채 어소를 향해 절하는 듯한 모습 때문이다. 나무가 휘어져 향한 곳은 단종이 유배 중에 기거한 어소다. 어소에는 단종의 유배 생활상을 짐작할 수 있도록 꾸며놓았다. 앉아서 글을 읽는 단종과 건넌방에서 머리를 조아린 채 우두커니 서 있는 내시처럼 보이는 밀랍인형이다. 감정이 없는 인형에 불과하건만 그걸 보노라면 비통함이 느껴진다. 단종의 심중을 조금이라도 헤아릴 듯하다.어소를 등지고 발길을 옮기면 솔숲 사이에 유난히 키가 큰 600여 년 된 거목을 마주한다. 단종의 곁에서고생하는 모습을 직접 보고(觀·볼 관) 그의 오열하는 소리(音·소리 음)를 직접 들었던 나무라 하여 ‘관음송(觀音松 천연기념물 제349호)’이라 부른다. 청령포에는 단종이 자주 찾은 곳이 있다. 청령포에서 가장 높은 육육봉이다. 노산대(魯山臺)라 불리며 망향탑이 있는 그곳이다. 80m 높이의 깎아지른 벼랑 꼭대기에서 그는 한양 쪽을 바라보며 자주 눈물지었을 것이다. 아래로는 서강이 멀리로는 눈 덮인 영월이 그림처럼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여행자의 눈에는 빼어난 절경이다. 하지만 유배생활을 하던 어린 임금에게는 아름다운 풍경이 오히려 안타까운 그리움만 쌓이게 하는 절망의 단애이자 통곡의 절벽이었을 것이다.과거의 시간에서 빠져나오듯 청령포를 뒤로 하고 나루터 앞에 선다. 멀지 않은 곳에 왕방연의 시조비가 있다. 청령포에서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곳이다.천만 리 머나먼 길에 고운 님 여의옵고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 안 같아야 울어 밤길 예놋다단종 애사는 장릉에서 끝을 맺는다. 이곳은 청령포에서 자동차로 5분여 거리에 위치한다. 2009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어 더욱 뜻깊은 곳이다.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왕좌를 빼앗기고 청령포에서 비통한 시간을 보내다 꽃다운 나이 17세가 되던 해에 죽임을 당한 단종. 그 주검조차 어느 한곳에 정착할 수 없었다. 급기야 차디찬 서강에 버린 듯 띄워졌지만, 그 누구도 앞장서서 시신을 수습하지 않았다. 서슬 퍼런 당시 조정의 후환이 두려워서 아무도 시신을 거들떠보지 않은 것이다. 이때 호장 엄흥도가 목숨을 내놓는 심정으로 단종의 시신을 수습해 이곳에 암매장했다. 이후 단종이 노산대군을 거쳐 다시 단종으로 추복되고 능의 이름인 능호를 장릉으로 정한 것은 사후 240여 년이 지난 뒤 숙종 24년(1698)에 이르러서다.장릉은 임금의 능임에도 다른 조선왕릉에 비해 규모가 작은 편이다. 능을 보호하기 위해 봉분 뒤에 병풍처럼 둘러 세우는 병풍석과 난간석도 세우지 않았다. 석물 또한 단출하다. 특이한 점은 문인석과 석마가 각 한 쌍씩 있으나 무인석과 석마는 존재하지 않는다. 반면 다른 능에서 찾아볼 수 없는 배식단사가 있다. 이것은 단종에게 충절을 다한 신하들의 위패를 모시기 위한 것으로 정려비·기적비·정자 등이다. 정려비는 단종의 시신을 거두어 장례를 치른 충신 엄흥도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영조 때 세운 비각이다. alt영화 <라디오 스타>의 흔적이 가장 많이 남아있는 청록다방  alt라디오 박물관의 앤티크 라디오에서 아날로그 감성을 느낄 수 있다  alt보조관측실에서 관측하고 있는 모습  아날로그의 감성이 노래를 타고 흐른다이준익 감독이 연출하고 안성기, 박중훈이 호흡을 맞춘 영화 <라디오 스타>는 개봉한 지 13년이 지났지만, 꾸준히 사랑받고 있다. 작품성과 배우들의 연기력이 돋보인 데다 아날로그 감성을 그리워하는 팬들 덕분이다.영화는 관객들의 환호성과 화려한 조명으로 시작한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은 지난날의 영광일 뿐이다. 한때 가수왕을 지냈던 최곤(박중훈 분)은 대마초, 폭행 사건 등에 연루되어 미사리 카페촌을 전전하는 신세가 됐다. 그런 그에게 부모처럼 따라다니며 시시콜콜한 것까지 다 챙겨주는 매니저 박민수(안성기 분)가 있다. 박민수는 최곤을 설득해 영월의 작은 방송국에 라디오 DJ 자리를 소개한다. 하지만 최곤은 제 마음대로 방송을 진행하는 것도 모자라 방송 중에 다방에서 커피를 배달시키기도 한다. 결국 전 스태프들이 혀를 내두른다. 이 같은 최곤의 좌충우돌 막무가내 라디오 방송은 시간이 갈수록 심해진다. 그런데 그 속에서 잔잔한 감동이 묻어나온다. 이준익 감독이 “영화를 편집하면서 13번을 울었다”고 고백할 정도로 감동적인 영화다.영화는 영월읍내와 외곽지에서 주로 촬영했다. 읍내에서 촬영한 곳 가운데 청록다방이 있다. 이곳에 가면 촬영 당시 모습을 담은 사진과 이준익 감독·안성기·박중훈 등의 친필 사인이 남아 있다. 달걀노른자를 띄워주는 쌍화차가 인기 메뉴다. 영화에 등장했던 인쇄소·세탁소·철물점·중국집·미용실 등도 가깝게 모여 있다. 외각 촬영지로는 봉래산 정상에 있는 별마루천문대가 있다. 천문대에서 우주망원경으로 안드로메다를 보면서 박민수가 최곤에게 명대사를 남긴다.곤아 너 아냐. 별은 말이지, 자기 혼자서 빛나는 별은 거의 없어. 별은 모두 빛을 받아서 반사하는 거야.야간에 천문대에서 내려다보면 영월을 밝힌 조명들이 하늘의 별처럼 아름답다. 천문대에선 천문 관측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낮에는 태양을 밤에는 별자리를 관측한다. 영화에 등장했던 방송국은 원래 KBS 영월방송국이었는데 지금은 라디오 스타 박물관으로 문을 열었다. 박물관에 전시된 앤티크 라디오에서 아날로그 감성을 느껴볼 수 있다. DJ·프로듀서·작가·엔지니어 등 라디오 방송 관련 직업도 체험할 수 있다.]]> Thu, 31 Jan 2019 17:31:40 +0000 26 <![CDATA[억압에 대한 항거 민중의 연대와 투쟁 어느 독립운동가의 초상]]>     글 김정인 춘천교육대학교 교수억압에 대한 항거민중의 연대와 투쟁   전국적으로 독립만세의 외침이 이어졌던 1919년 3월. 역사는 가장 앞에 선 몇몇의 인물만을 기록할 뿐이지만 사실 만세운동의 참여자 대다수는 농민과 노동자, 즉 평범한 우리 민중이었다. 그들은 누구보다 절실한 마음으로 만세운동에 힘을 보탰고, 또 누구보다 열렬히 억압과 맞서 싸웠다. "이 삼천리강토를 일본의 통치에 맡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니, 부득불 우리들은 폭력을 써서라도 독립을 하지 않으면 아니 되겠으므로 이번 기회는 세계평화를 위해서 각 약소국가가 독립을 한다 하므로 이러한 행동을 취하게 된 것이다. 수백만 대중이 모두 궐기해서 진력하므로 결국은 목적을 달성하리라 믿으며, 그러므로 절대 독립 사상은 버릴 수가 없다."만세시위에 나선 노동자와 농민1919년 3월 17일 경상북도 안동군 예안면에서 일어난 만세시위에서 주재소를 파괴하고 구금자를 탈환하는 데 앞장섰던 농민 조수인의 주장이다. 이처럼 민중은 자신들이 만세를 불러야 독립이 된다는 생각, 그리고 자신들의 힘으로 일본인들을 내쫓아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만세시위에 나섰다.도시의 노동자들도 움직였다. 서울에서는 3월 2일 노동자들이 학생들과 함께 만세시위에 참여한 이후 출근을 거부하는 풍토가 생겨났다. 3월 10일 이후에는 평소의 10%에 불과한 노동자만 출근해 공장들이 제대로 돌아가지 못했다. 3월 하순 들어 많은 사람이 검거되며 만세시위가 주춤해지자 노동자들이 나섰다. 3월 22일에는 노동자대회가 열려 노동자들이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했다. 3월 26, 27일에 전차 종업원, 남만주철도주식회사 경성관리국 노동자들이 동맹파업을 단행하고 거리에서 만세시위를 벌였다. 이처럼 서울만이 아니라 평양, 진남포, 부산, 군산 등 공장이 집중된 도시에서 노동자들의 동맹파업이 일어났다.농촌에서는 농민들이 만세시위를 조직했고 적극 참여했다. 3월 말에 이르러서는 폭력투쟁에 나서는 농민들이 많아졌다. 폭력투쟁은 대체로 시위 과정에서 자행된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에 따른 방어적 조치였다. 하지만 처음부터 계획적이고 공세적으로 폭력투쟁을 벌이기도 했다. 1919년 4월 1일 경기도 안성에서는 ‘순사주재소, 면사무소, 우편소 등을 파괴하라, 일본인을 내쫓아라, 여러분은 돌 또는 몽둥이를 지참하여 투쟁하라’는 지도부의 지침에 따라 원곡면과 양성면 시위대가 주재소에 불을 지르고 우편소를 파괴하고 면사무소를 습격했다.노동자와 농민은 자신들의 삶을 옥죄는 현실을 극복하고자 만세시위에 나섰다. 이름 없는 민초인 그들에게 독립은 자신들을 고통의 나락에서 건져 줄 희망의 빛이었다. 민중에게 스스로 나서서 함께 싸운 3·1운동의 경험은 큰 자산이었다. 이후 농민들은 각종 농민단체를 만들고 소작쟁의를 벌이며 암태도 소작쟁의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노동쟁의를 벌였으며 원산총파업의 역사를 남겼다. alt암태도 소작인 항쟁 기념탑 (신안군청 제공)농민의 승리, 암태도 소작쟁의1923년 가을 전라남도 신안군 암태도 농민들은 지주들에게 고율인 소작료의 인하를 요구했다. 서태석의 주도로 암태소작인회를 결성하고 소작료 인하를 요구했으나 지주 문재철이 거부하면서 소작쟁의가 발발했다.이듬해 봄인 3월 27일 암태소작인회는 암태청년회, 암태부인회와 함께암태면민대회를 열었다. 이날 지주 측과 소작인 측 사이에 충돌이 발생하면서 소작인회 간부 13명이 구속되었다. 6월 3일 암태소작인회는 암태청년회, 암태부인회와 함께 면민대회를 열어 구속자 석방 운동을 결의했다. 다음날부터 암태도 면민 400여 명이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8일까지 철야농성을 벌였다.결국 구속자 모두가 재판에 회부되자 암태면민 500여 명은 다시 7월 8일부터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 마당에서 아사동맹을 맺고 단식투쟁을 벌였다. 암태도 소작쟁의가 점점 확대되자 암태소작인회를 지지하는 전국적 움직임도 활발해졌다. 목포 지역 노동단체와 청년단체들은 쟁의자금과 식량을 지원하고 소작농민을 지지 성원하는 여론을 조성해 지주에게 압력을 가했다. 암태도라는 섬에서 일어난 소작쟁의에 전국 각지는 물론 해외에서까지 성원하고 나섰다.그런데 암태면민들이 6박 7일의 단식투쟁을 마치고 암태도로 돌아온 7월 14일 구속자 13명이 바로 광주형무소로 이송되는 사태가 일어났다. 암태면민들은 분노하며 광주형무소 앞에서 원정시위을 벌일 것을 결의했다. 그러자 목포경찰서장은 이들을 만류하는 한편, 문재철을 만나 양보를 종용했다. 경찰이 중재에 나선 것은 암태도 소작농민들의 용감한 투쟁 소식이 널리 알려지면서 연대 차원의 소작쟁의가 일어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마침내 8월 30일 목포경찰서장실에서 지주인 문재철과 소작인회 대표 박복영이 만나 소작료를 인하하고 고소를 취하하는 데에 합의했다. 소작농민의 승리로 일단락된 것이다. alt총파업을 전개한 원산노동자들(1929)alt원산 총파업 응원 대연설회 전단 연대의 힘을 보여준 노동쟁의, 원산총파업1929년에 일어난 원산총파업은 함경남도 원산이라는 지역에서 지역연맹체인 원산노동연합회의 주도로 일어났다. 원산노동연합회는 1925년 11월에 창립했는데, 2,000여 명이 넘는 회원을 가지고 있었다. 원산노동연합회는 결성 직후부터 1927년까지 3년 동안 26건의 파업을 지도하여 모두 승리로 이끌었다.원산총파업은 1928년 9월 라이징 선 석유회사 문평제유공장 노동자들이 일으킨 파업이 발단이 되어 일어났다. 문평제유공장 노동자들은 일본인 감독 코다마(兒玉)가 한국인 노동자를 구타한 사건이 발생하자 코다마의 파면을 포함한 5개 항의 요구조건을 내걸고 20일간 파업했다. 회사 측은 이에 굴복해 3개월 안에 해결할 것을 약속했다. 이후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을 조직했고, 원산노동연합회에 가입했다.1929년 새해 들어 문평제유노동조합은 회사 측이 약속을 지키지 않자 다시 파업을 결의했다. 이때부터 원산노동연합회가 파업을 이끌었다. 원산노동연합회 산하 단체들이 문평제유회사의 화물을 취급하지 않기로 결의하자 자본가 단체인 원산상업회의소는 원산노동연합회 회원을 고용하지 않겠다고 맞섰다. 1929년 1월 22일 원산노동연합회는 산하 단체의 파업 참여 의사는 해당 단체에 일임하되, 다음날인 23일부터 총파업에 들어갈 것을 결정했다. 그러자 원산노동연합회 소속 노동조합 대부분이 자발적으로 파업에 참가했다. 경찰은 모든 집회와 전단지 배포를 금지했다. 일본인들은 재향군인과 소방대원을 내세워 비상경계를 섰다. 경찰이 증강되었고 군인들도 비상경계에 가담했다. 원산노동연합회는 지구전에 들어갔다. 원산총파업 소식이 국내외에 알려지면서 각지로부터 파업자금이 답지했고 격려 전보와 편지가 쏟아졌다. 각지의 노동조합이나 노동연맹이 파견한 위문단과 조사단도 속속 원산을 찾았다. 멀리 해외에서도 쟁의기금을 보내왔다.원산이라는 지역을 넘어 전국적·국제적 연대의식이 형성되며 총파업이 주목을 받자, 경찰의 대응은 한층 강경해졌다. 원산노동연합회 산하 노동조합들을 압수수색하고 경찰을 동원해 2,000여 명의 원산노동연합회 회원 가정을 일일이 돌아다니며 식량과 가옥상태 등도 조사했다. 끝내는 원산노동연합회 주요 간부들을 체포했다. 원산상업회의소도 원산노동연합회의 박멸을 주장하며 함남노동회라는 어용단체까지 설립했다. 2월 중순이 되자 파업단의 식량이 떨어졌다. 원산노동연합회 소속 노동자들은 금주·금연은 물론 하루에 2끼를 먹는 절약투쟁을 벌였다.마침내 한국인 자본가들은 원산노동연합회의 요구조건을 승인한 후 노동자의 복귀를 요구했다. 원산노동연합회 역시 한국인 상회와 상점에 속한 노동자에게 복귀를 명령했다. 그런데 장기 파업에 지치고 원산노동연합회의 복귀 명령에 불만을 품은 노동자들이 4월 1일과 3일에 함남노동회를 습격했다. 이를 빌미로 원산에는 무장경관과 기마헌병이 증파되었고 수색과 검거가 잇따랐다. 결국 4월 6일 원산노동연합회는 파업 종결을 선언했다. 암태도 소작쟁의처럼 승리하지는 못했지만, 원산이라는 지역에서 원산노동연합회라는 노동단체를 중심으로 노동자들이 80여 일이 넘게 뭉쳐 싸운 총파업은 유례없는 경험이었다.암태도 소작쟁의를 이끈 암태소작인회 서태석, 원산총파업의 지도자인 원산노동연합회의 김경식은 조선노농총동맹의 초대 중앙위원이었다. 조선노농총동맹은 3·1운동 이후 활발해진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을 기반으로 1924년 4월에 탄생한 전국 조직이었다. 조선노농총동맹은 1927년 조선노동총동맹과 조선농민총동맹으로 분화했다. 암태도와 원산이라는 지역에서 일어난 민중운동이 전국적이고 국제적인 주목을 받게 된 것은 그들을 대표하는 전국 조직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Fri, 22 Feb 2019 16:22:58 +0000 27 <![CDATA[서민의 시장 풍속도 史소한 이야기]]>     서민의 시장 풍속도-근대시장의 출현-   시장은 본래 물건을 사고파는 곳이지만, 개방적이며 많은 사람들과 물건이 모이는 특징 때문에 그 시절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공간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시장을 찾은 사람들의 옷차림, 유행하는 물건, 시장 안에서 주고받는 언어 등에서 시대를 읽어내는 것이다. 지난 역사 안에서 시장의 형태와 거래방식은 숱하게 바뀌었지만, 평범한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친숙한 풍경만큼은 여전하다.삼국시대 물물교환을 거쳐, 고려시대 정기적으로 열리는 시장인 향시가 생겨났고 조선시대 들어 5일장과 같은 장시의 형태로 발달했다. 시장이 본격적인 상업의 공간으로 기능하기 시작한 것은 조선 후기였다.장시의 수가 늘어났고, 상인들도 많은 수익을 올렸다. 기존에는 재배하고 남은 곡물을 갖다 파는 수준에 그쳤다면 이 시기부터 팔기 위한 상품을 재배하고 공산품을 만들었다. 일제강점기 근대화와 함께 시장도 변화했다. 외국에서 들어온 물건들이 시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시장에 대한 일본의 통제도 있었다. 여기에 백화점까지 등장하면서 일제강점기 전통시장 상권은 큰 위기를 맞는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에도 시장은 있다. 일제강점기 일본은 정찰제를 강행했지만 아직도 시장에서는 ‘에누리’와 ‘덤’ 문화가 성행하고, 늘어나는 대형 마트와 백화점의 위협에 흔들린 적도 많았지만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그렇게 시장은 ‘서민들의 공간’이라는 명맥을 꿋꿋하게이어가는 중이었다. alt]]> Fri, 22 Feb 2019 15:12:25 +0000 27 <![CDATA[3·1 독립선언을 주도한 민족의 지도자 손병희 이달의 독립운동가]]> 글 전시부3·1독립선언을 주도한민족의 지도자 손병희 독립기념관은 국가보훈처 및 광복회와 공동으로 손병희를 2019년 3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손병희는 천도교를 이끌고 교육을 통한 계몽운동에 힘썼다. 또한 1919년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3·1운동 추진에 앞장섰다. alt민족종교 지도자로 활약하다손병희는 1861년 충북 청원에서 의조 손두흥과 경주 최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서얼 출신이라는 이유로 차별을 받으며 자랐고, 불합리한 신분제도를 비판하며 청년기를 보냈다. 그러던 중, 만민평등(萬民平等)을 추구하는 동학의 취지를 받아들여 1882년 입도를 결정하였다. 이후 제2대 교주인 해월(海月) 최시형의 가르침을 받아 역량을 키우고, 동학농민운동에서 호서지역 전투를 이끌며 동학의 중심 인물로 성장했다.1897년 동학 제3대 교주로 취임한 손병희는 교단 정비와 교세 확장에 힘썼다. 1901년에는 변화하는 세계정세를 살피고 관군의 추격을 피하려고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일본의 근대화를 확인한 손병희는 우리 민족도 근대문명에 대한 수용이 필요함을 깨닫고, 이후 일본 유학을 주선하거나 교도들에게 흑의단발(黑衣斷髮)을 지시하는 등 개화를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다.3·1독립선언을 주도하다1905년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하고, 1906년 귀국하여 본격적인 구국 활동에 나선다. 이후 학교에 의연금을 지원하거나 인쇄소를 설립하는 등 교육의 근대화를 위한 노력을 이어갔고, 1910년에는 보성학교와 동덕여학교를 비롯한 수십 개의 학교를 운영하여 인재양성을 위한 활동으로 확대해갔다.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을 전후하여 독립운동 지도자들은 세계정세의 변화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자 하였다. 손병희 등 천도교 지도자들 역시 우리 민족의 자주독립 정당성을 알리기 위한 독립선언을 준비하였다. 기독교와 불교 등 종교계 지도자들과 교섭하여 대중화와 일원화, 비폭력화를 원칙으로 세우고, 천도교계 인쇄소에서 독립선언서를 제작하여 전국에 배포하였다. 1919년 3월 1일 손병희를 비롯한 민족대표들이 태화관에 참석한 가운데 독립선언식이 거행되었고, 이는 전 국민적 3·1만세운동으로 점차 확산되어 만방에 자주독립 의지를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손병희와 민족대표들은 독립선언식 이후 일경에 체포되었고, 손병희는 수감 중에 얻은 병으로 1922년 순국하고 말았다. 정부는 천도교인을 넘어서 민족 지도자의 길을 간 손병희의 공적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altalt『황성신문』에 게재된 손병희 관련 논설(1906.02.14.) 손병희가 귀국 이후 교육 사업에 전념할 것으로 추측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alt해월 최시형. 동학 제2대교주로, 손병희에게 의암이라는 도호를 주었다alt한복을 입은 손병희 alt일본 망명 당시 동학 간부들과의 기념사진(1904)손병희는 관군의 추격을 피하고 세계정세 변화를 살피기 위해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오른쪽 첫 번째가 손병희 alt3·1운동 민족대표 47인 재판 기록철(1920.10.) 독립선언 이후 민족대표들은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alt손병희 장례 행렬 ]]> Fri, 22 Feb 2019 15:53:22 +0000 27 <![CDATA[3·1운동의 청년들 세계를 향해 한국인의 독립의지를 알리다 자료로 읽는 역사]]>     글 김경미 자료부3·1운동의 청년들 세계를 향해한국인의 독립의지를 알리다3·1운동과 유럽 유학생   1919년 3월 1일, 전 세계를 향해 한국독립의 정당성과 한국인의 독립 의지를 알리는 만세 소리가 울려 퍼졌다. 민족대표들이 독립을 선언하고 일본경찰에 체포된 후, 서울의 파고다공원에서 시작된 만세 시위를 주도한 것은 젊은 학생들이었다. 이들은 3월 5일 남대문역(지금의 서울역) 앞에서 대대적인 만세 시위를 벌여 3·1운동이 전국으로 퍼져나가도록 했다. alt‘사진01’은 바로 연희전문 학생 정석해가 3·1독립선언서를 등사판으로 찍어 고향인 평안북도 철산의 유봉영에게보냈던 독립선언서이다. 선언서 여백에 “유감(遺憾)은 철산 왜 사람 없어?”라는 정석해의 필적이 남아있어, 긴박한 상황에서도 한반도 전역에서 독립만세 소리가 울리기를 바란 그의 절실함이 느껴진다.유럽으로 간 한국의 청년들젊음의 열정을 바쳐 3·1운동에 뛰어들었던 학생들은 무차별적인 일본 경찰의 검거에 쫓기게 되었다. 정석해는 3월 13일 고향으로 갔다가 그곳에서도 안전하지 않아 닷새만인 18일 압록강을 건너 만주 안동현으로 피신했다. 정석해 뿐 아니라 중국으로 넘어간 학생들은 대개 베이징을 거쳐 1919년 4월 11일에 설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있는 상하이로 향했다. 상하이에서 학생들은 바로 독립운동에 뛰어들기도 했지만, 일부 임시정부 어른들은 젊은이들은 우선 공부를 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역설하기도 하고, 또 자신들도 좀 더 공부하고 싶은 꿈이 있어서 학업을 계속할 수 있는 길을 찾았다. 중국의 대학에 진학하는학생들이 많았지만, 중국의 대학에서 가르치는 서양의 학문을 그 본고장에서 직접 배우고 싶었던 학생들도 있었다. 이들에게 서구로 갈 수 있는 길을 열어준 것이 중국에서 운영하던 유법검학회(留法儉學會)였다.유법검학회는 중국 학생들이 프랑스에 유학하여노동을 하면서 학비를 벌어 공부할 수 있도록 만든 단체이다. 1919년 3월 17일 최초로 상하이에서 출발한 이후1920년 12월까지 20여 차례에 걸쳐 약 2천 명에 달하는 중국 학생들이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다. 일찍이 중국으로 망명하여 중국의 혁명세력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던 신규식은 한국 학생들이 유법검학회에 들어갈 수 있도록 주선했다. 한국 학생들은 중국인 유학생 틈에 끼어중국에서 내준 호조(護照:여권)를 갖고 상하이를 출발하여 프랑스 마르세이유로 가는 배를 탈 수 있게 되었다. 이로부터 임시정부에서는 구미로 유학을 가려는 학생을 모아 중국 측에 추천하여, 1919년 11월 26일부터 1920년 12월 14일까지 8회에 걸쳐 총 65인이 파리에 도착했다.파리에는 파리강화회의에 참가하여 한국인의 자주독립 의사를 알리기 위해 김규식이 설치한 임시정부 파리위원부가 있었다. 파리에 도착한 후 일부 학생은 미주, 독일, 영국, 스위스로 가고 나머지는 파리에 정착했다. 당시 파리위원부를 맡고 있던 황기환은 프랑스 주재 미국 대사관과 교섭하여 미국으로 가려는 학생을 도와주기도 하고, 프랑스에 머물기로 한 학생을 파리 북쪽 보베에 있는 학교에 소개하여 프랑스어를 배울 수 있도록 했다. 정석해는 1920년 12월 14일 파리에 도착하여 보베고등학교에서 프랑스어를 배웠고, 생활의 어려움 때문에 생활비가 좀 덜 드는 독일로 가서 뷔르츠부르크 대학에 입학했다. alt고학을 딛고 조국의 독립을 호소하다유럽에서 학업을 시작한 학생들은 노동을 하지 않으면 생활을 할 수 없는 고학생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럼에도 이들은 기회만 있으면 조국의 독립을 위한 활동을 펼쳤다. 유럽 사회에 일본의 잔혹한 식민지 지배를 고발하며 한국 독립의 정당성을 역설했다. 그러한 활동 중 국내 신문에 여러 번 보도되어 비교적 잘 알려지게 된 것이 1927년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세계피압박민족대회에 참가한 일이다. 1927년 2월 10일부터 14일까지 5일간 열린 대회에는 세계 각국에서 124개의 단체와 147명의 대표가 참가했다. 한국대표단은 독일 유학생인 이극로·황우일·이의경과 프랑스 유학생인 김법린으로 구성되었고, 마침 유럽을 여행하던 변호사 허헌이 신문기자 대표로 합류하였다. 유학생 중 이의경과 김법린은 3·1운동에 참여한 청년들이었다. 김법린은 승려로 불교중앙학림에서 수학하다가 3·1운동에 참여했고, 상하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다 1920년 10월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다. 그는 1926년 7월 고학으로 파리 소르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대학원에서 공부했다. 이의경은 오늘날 『압록강은 흐른다』로 유명한 이미륵으로, 경성의학전문학교 3학년에 다니던 중 3·1운동에 참여하고 1920년 봄 상하이를 출발하여 파리를 거쳐 바로 독일로 갔다. 1921년 뷔르츠부르크 대학교 의학부에 입학했다가 1925년에는 뮌헨대학교 생물학부로 옮겨 1928년에는 이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게 된다.피압박민족대회에서 김법린은 대회 첫날 「한국에서 일본제국주의 식민지정책에 관한 보고서」를 발표했고, 대표단은 「한국대표단의 결의안」을 회의에 제출했다. 그 외에 「한국문제(The Korean Problem)」라는 문건을 각국 대표와 신문기자들에게 배포했다. 일제의 지배하에 신음하고 있는 한국의 실정을 국제사회에 호소하기 위한 것으로, 일본은 무력으로 더 이상 한국을 지배할 수 없으며 일본에 대한 투쟁만이 한국인의 자유와 생명을 지키는 마지막이자 유일한 대안이라는 점을 분명히 밝혔다.이러한 유럽 유학생들의 활동은 한국 역사와 문화에 대한 자부심, 조국과 민족에 대한 사랑, 조국의 독립을 위해 국제적 움직임을 기민하게 포착하여 활용하고자 했던 그들의 의지와 노력을 보여준다. 일본 식민지 지배의 부당성과 한국민족의 독립의 당위성을 전 세계에 알림으로써 조국의 독립을 되찾으려는 3·1운동의 외침은 청년들이 있는 곳 어디서나 끊임없이 울려 퍼졌다. 청년들은 3·1운동의 경험을 가슴에 간직하고 시대가 자신에게 부과한 의무를 다하고자 했다.]]> Fri, 22 Feb 2019 17:27:02 +0000 27 <![CDATA[뭉치어라 작인들아 뭉치어라 굳세게 뭉치어라 역사를 만든 사람]]>     글 임영대 역사작가뭉치어라 작인들아뭉치어라 굳세게 뭉치어라-서태석(徐邰晳)-   서태석은 전라남도 무안군 암태도(현 신안군)에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비참한 식민지의 현실을 깨닫고 3·1운동에도 참가했다. 과도한 소작료에서 고향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소작인회를 결성하고 지주를 상대로 투쟁하여 소작료를 인하하는 데 성공했다. 그 뒤 독립운동에 본격적으로 참여하다가 일제에 의해 투옥되었고 그 후유증으로 해방을 보지 못하고 사망하였다. 2003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훈하고 2008년에 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암태도의 청년 면장서태석은 암태도에서 잘 알려진 똑똑한 청년이었다. 어려서부터 서당에서 한학을 익히고, 한의학에도 일가견이 있어 1901년에 괴질이 유행했을 때는 많은 사람을 구하기도 했다. 명석한 그는 28세였던 1912년부터 7년 동안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암태면장으로 일했다. 왕조시대의 관습이 살아있는 식민지 시기, 면장은 어엿한 공무원이자 섬에서 가장 높은 ‘나리’였다. 서태석은 얼마든지 편하게 살 수있는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면장’은 오늘날 젊은이들이 생각하는 단순한 공무원이 아니었다. 일제 식민통치기구의 최말단으로 식민정책을 실행하는 앞잡이였다. 총독부에서 내린 지시는 도지사와 군수를 거쳐 면장에 의해 실제 집행되었다. 서태석이 면장을 지낸 지 7년이 되던 해에 3·1운동이 일어났다. 그는 점점 사정이 나빠지는 식민지 현실을 보고, 그해에 면장을 그만두었다. 그리고 3·1운동 1주년에 목포에 나가 태극기와 「대한독립 1주년 경고문」을 배포하다가 붙잡혀 1년 동안 수감되었다."이 땅은 우리의 땅인데 누가 주인 노릇을 하는가!"서태석은 석방 후 러시아 연해주에서 사회주의 사상을 접했다. 그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암태도 농민들의 복리를 위해 1923년 8월 암태소작인회를 결성하고 본격적인 소작쟁의를 주도했다.소작농도 사람이다암태도의 상황은 점점 나빠지고 있었다. 지주들은 통상적으로 수확량의 5할을 소작료로 받았는데, 총독부가 쌀값을 의도적으로 낮추자 암태도 지주들은 소작료를 7~8할로 올려 그 손해를 메우려고 했다. 농민들이 부담할 수 있는 선을 넘어선 요구였다. 이에 암태도 농민들은 1923년 8월, 암태소작인회를 결성하고 과도한 소작료를 4할로 낮춰달라고 요구했다. 다른 암태도 지주들은 그 요구를 받아들였으나 가장 많은 땅을 가지고 있던 친일 지주, 문재철이라는 자가 이를 거부했다. 그리하여 본격적인 소작쟁의가 시작되었다.뭉치어라 작인들아 뭉치어라 우리들의 부르짖음 하늘이 안다 뭉치어라 작인들아 뭉치어라 마음껏 굳세게 뭉치어라 이 뼈가 닳게 일하여도 살 수 없거늘 놀고먹는 지주들은 누구의 덕인가 그들의 몸에 빛난 옷은 우리의 땀이요 그들이 입에 맞는 음식은 우리의 피로다 봄 동산에 좋은 꽃 지주의 물건 가을밤에 밝은 달도 우리는 싫다협상이 결렬되자 암태소작인회는 소작료 납부를 거부했다. 문재철은 폭력배를 동원해 소작료 납부를 독촉했고 양측은 여러 차례에 걸쳐 물리적 충돌까지 빚었다. 대립이 길어지면서 일제 경찰까지 개입했다. 경찰은 당연히 지주 문재철을 편들었고, 폭력행위 발생에 대한 책임을 물으며 소작쟁의에 앞장선 서태석을 비롯한 농민들 수십명을 체포했다. 이제 투쟁은 모든 도민의 몫이 되었다. 암태청년회, 암태부인회도 나섰다. 면민대회를 개최해 암태도 주민들의 단합된 의지를 알리고, 목포경찰서와 법원에서 시위를 벌였다. 아사동맹을 맺어 단식투쟁도 전개했다.섬에서 벌인 투쟁은 섬 안에서 끝난다. 하지만 육지에서 벌인 투쟁은 언론을 통해 신속하게 퍼져나갔다. 전국에서 암태도 농민들에게동조하는 강연회와 모금이 벌어졌고 한국인 변호사들도 재판에 회부된 농민들을 위해 무료로 변론하겠다고 나섰다. 일제 당국은 당황했다. 작은 섬에서 일어난 ‘별 것 아닌 소작쟁의’가 전국으로 확산되어 항일운동의 핵이 될 기미를 보이자 일제가 직접 중재에 나섰다. 8월30일, 목포경찰서 서장실에서 지주 문재철과 농민 대표인 암태청년회장 박복영이 마침내 합의를 보았다. 소작료는 암태도 농민들의 희망대로 4할로 내려갔다. 그동안 쌍방이 진행한 고발은 상호 취하하고, 미납한 소작료는 3년에 걸쳐 상환하며, 문재철은 소작인회에 기부금을 내고, 쟁의 중에 넘어뜨린 문재철 부친의 송덕비는 소작인들이 복구하는 조건이 덧붙었다.소작쟁의는 이렇게 끝났지만, 서태석의 독립운동은 끝나지 않았다. 서태석은 그 뒤로도 서울과 주변 섬을 오가며 독립운동을 했고, 그러던 중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일제의 잔혹한 고문은 서태석에게 육체적인 상처 외에 정신분열증(조현병)이라는 마음의 상처도 남겼다. 농민들을 위해 애쓰던, 민중을 위한 독립운동가는 결국 암태도 인근 압해도에서 논두렁에 쓰러져 쓸쓸히 숨을 거두었다. 해방을 겨우 2년 남겨둔 날이었다.]]> Fri, 22 Feb 2019 16:48:19 +0000 27 <![CDATA[민중,투쟁하다 우리가 만난 얼굴]]> 민중, 투쟁하다 그들은 평범했습니다. 끈질긴 가난과 고된 노동에 시달렸습니다. 때때로 가족이나 이웃과 어울리며 웃기도 했습니다. 역사는 이들을 ‘민중’이라 기록했습니다. 민중은 시대의 억압 아래 놓여 투쟁의 운명을 짊어지고 있었습니다. 과도한 소작료와 저임금 노동 앞에서 그들은 이제 가만히 있지 않겠노라 선언했습니다. 또 나라를 빼앗긴 설움을 삼키며 만세운동에 뛰어들었습니다. 시대를 밝힌 혁명의 빛, 그것은 민중이 만들어낸 것입니다. alt]]> Fri, 22 Feb 2019 14:08:23 +0000 27 <![CDATA[포츠머스강화회의와 미주 한인의 국제외교활동 한국인의 터전]]>     글 홍선표 나라역사연구소 소장포츠머스강화회의와 미주 한인의 국제외교활동   미주한인사회에 국권회복을 위해 각종민족운동 단체가 본격적으로 설립될 때는 전 호에서 언급했듯이 1905년부터다. 1904년 2월 러일전쟁이 발발, 1905년 5월 러시아의 발틱함대가 동해에서 일본군 연합함대에 의해 대패한 후 미국의 중재로 러일강화회의가 일어났다. 또한 같은 시기 강화회의에 이어 일본이 보호국화한다는 구실을 내세워 강압으로 을사늑약을 체결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했다. alt윤병구와 이승만이 독립청원서를 제출했던 새거모아 힐 전경1905년 미주 한인의 희망, 러일강화회의국제적으로 매우 민감한 시기였던 1905년, 미주한인들은 민족운동 단체를 본격적으로 설립하기에 앞서 국제외교활동에 적극 나섰다. 미국의 루스벨트(TheodoreRoosevelt) 대통령이 1905년 7월 2일, 8월 뉴햄프셔주 포츠머스에서 러일강화회의(1905.08.~09.)를 개최한다고 발표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미국의 중재로 이루어질 러일강화회의 소식에 하와이 한인들은 이때를 대한제국의 주권을 회복할 절호의 기회로 간주했다. 때마침 육군장관 태프트(William H. Taft)가 80여 명을 대동하고 동아시아로 가는 도중 7월 14일 호놀룰루에 약 10시간 정도 머무는 일이 일어났다. 그는 루스벨트의 명을 받아 일본 수상 가쓰라타로(桂太郞)와 밀약을 추진하기 위해 가는 길이었다.태프트가 호놀룰루에 잠시 체류할 것이라는 소식을미리 안 하와이 한인들은 7월 12일 에와농장에서 긴급 임시공동회를 개최하고 임시 한인 대표로 윤병구를 선출하였다. 임시공동회는 하와이의 김이제(회장)와 김호연(서기), 미국 본토 공립협회의 송석준(총무)으로 구성되었는데 미국과 하와이 간 연합 조직의 형태였다. 따라서 이번 임시공동회는 하와이 측만의 단독 행사가 아닌 미국 본토의 공립협회와 연합해 추진하는 공동 활동인 셈이었다.윤병구는 하와이 감리교 감독 와드맨(J. W. Wadman)과 하와이 총독 앳킨슨(A.T.Atkinson)의 도움으로 태프트와 접견하고 그로부터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날 수 있는 소개장을 받았다. 그러자 하와이 한인들은 7월 15일 러일강화회의에 파견할 한인 대표로 윤병구를 선정하였다. 영어에 능통했던 윤병구는 당시 기독교 지도자로 활동하면서 하와이 한인들의 신망을 얻고 있었다. 임시공동회는 윤병구외에 이승만도 한인 대표로 선정하였다. 이승만은 1904년11월 28일 유학차 미국으로 가는 도중 잠시 호놀룰루에 들렀을 때 윤병구를 비롯해 하와이 한인들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은 바 있었고, 조지워싱턴대학교에 입학해 공부 중이었다.윤병구는 1905년 7월 19일 알라메다호를 타고 호놀룰루 항구를 떠나 미국 동부로 향했다. 7월 31일 워싱턴DC에서 이승만을 만난 후 다시 필라델피아의 서재필을 찾아갔다. 윤병구가 미리 준비해 온 독립청원서를 다듬고 거사 진행을 논의하기 위함이었다. 윤병구가 준비한 독립청원서는 ‘Petition from the Koreans of Hawaii toRoosevelt(하와이 거주 한인들이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보내는 청원서)’였다. 그 내용은 미 대통령의 중재로 러일강화회의 때에 한국의 주권을 보장해 달라는 것이었다.윤병구와 이승만은 8월 4일 뉴욕주 롱아일랜드의 오이스트 베이에 있는 새거모아 힐(Sagamore Hill)로 찾아가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났다. 약 30분간의 짧은 접견 시간동안 두 사람은 방문 목적을 설명하고 가지고 간 청원서를 직접 전달하였다. 그런데 루스벨트는 내용을 잠깐 읽어본후 워싱턴DC에 있는 대한제국 공사관을 통해 미 국무부로 정식 제출해 달라는 말만 남긴 채 청원서를 다시 돌려주었다. 루스벨트는 윤병구와 이승만이 당도하기 전인 7월31일 자 전보를 통해 태프트와 가쓰라 사이에 체결된 밀약사실을 알고 있었다. 태프트-가쓰라 밀약이란 일본이 필리핀에 대한 미국의 이익을 묵인해 주는 대신 미국 또한 대한제국을 보호국화하려는 일본의 야심에 동의해 주는 것이었다. 이런 때에 윤병구·이승만이 1882년 5월 조인된 조미수호조약을 근거로 미국 정부에 도움을 요청하려 했으니, 루스벨트는 그 어떤 협조도 하지 않았다. 게다가 워싱턴DC 주재 공사관 대리공사 김윤정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사실상 장악하고 있던 일본 정부의 사주를 받고 두 사람이 미국 정부에 제출하려는 독립청원서의 접수마저 거부하였다. 이렇게 해서 윤병구·이승만의 국제외교 노력은 아무런 소득 없이 끝나고 말았다.그러나 윤병구·이승만의 국제외교활동은 성패 여부를 떠나 결코 의미 없는 일이 아니었다. 『뉴욕 타임스』1905년 8월 4일 자와 5일 자, 『워싱턴 타임스』 8월 4일 자,『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 8월 18일 자 등 미국의 주요 언론에서 두 사람의 활동과 행적을 자세하게 보도한 것이다. 이러한 보도는 미국 사회에 한국의 주권문제를 국제 정치 화제로 부각시켰다.첫 외교활동의 실패와 을사늑약이승만은 학업을 위해 다시 워싱턴DC로 돌아갔다. 하와이로 향하던 윤병구는 1905년 11월 17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해 머물던 때에 국내에서 을사늑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러던 중 주미 일본대사의 망언까지 듣게 되었다. 당시 주미 일본대사였던 다카히라 고고로(高坪小五郞)는 현지 신문 기자들과의 대담에서 “한국은 독립이 못 될 나라이다. 이번 ‘을사조약’은 대한제국 정부가 복종하여 평화스럽게 체결된 것”이라고 말했다. 윤병구는 12월15일 샌프란시스코 언론 기자들을 상대로 을사늑약은 일본의 창끝에서 이루어진 강압적인 조약이며 대한제국을 보호국화해야 한다는 일본의 논리는 사실상 대한제국을 강제 합병하기 위한 계책이라고 반박했다.러일강화회의를 둘러싸고 하와이 한인사회가 보여준 국제외교활동은 국내는 물론 국외의 한인사회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렇지만 윤병구와 이승만이 활동하기 이전부터 미일 간의 밀약으로 대한제국을 보호국화 시키려는 일본의 술책과 이를 묵인한 미국의 태도로 두 사람의 외교활동은 큰 성과를 거둘 수 없었다. 더구나 대한제국 정부도 일본의 집요한 간섭으로 아무런 대외활동도 할 수 없는 암울한 상황이었다. 이런 때에 정부 차원이 아닌 민간 차원에서 국제외교를 추진한 것은 하와이를 비롯한 미주 한인들의 강렬한 민족의식을 엿볼 수 있는 국권회복운동이었다.]]> Fri, 22 Feb 2019 18:11:15 +0000 27 <![CDATA[독립운동 관련 기념사업회 (법인)의 현황과 과제 끝나지 않은 독립운동]]>     글 이계형 국민대학교 특임교수독립운동 관련 기념사업회(법인)의 현황과 과제   1945년 우리 민족은 광복을 맞았지만, 독립운동은 끝나지 않았다. 여전히 미완으로 남은 사건, 해결되지 못한 문제, 기억해야만 하는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끝나지 않은 독립운동은 독립운동사를 과거에 머문 역사가 아닌 현재의 문제로 다루며, 오늘도 신문 한쪽을 차지하고 있는 독립운동 및 일제강점 이슈를 소개한다. 소외받는 독립운동사2019년, 올해가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의미 있는 해라고 하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가 100주년이 되기 때문이다. 신문·방송 매체뿐만 아니라 여러 관련 기관들이 연일 이와 관련한 기사를 쏟아내고 특집극, 다큐 등을 방송하며 기념행사도 다채롭게 준비 중이다. 의미 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지금처럼 국민들이 독립운동에 높은 관심을 가질 때 한 번쯤 되새겨 봐야 할 것이 있다. 그동안 한국 근대사에서 한국 독립운동사는 소외되어 왔다. 간혹 신문 기사와 방송 뉴스에 학생들이 안중근 의사와 윤봉길 의사가 어떤 독립운동을 했는지 혼동한다는 이야기가 등장하곤 한다. 일반인들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정부가 독립운동 단체나 독립운동가 선양을 위한 사업을 게을리 했기 때문은 결코 아니다. 이를 주관하는 국가보훈처나 독립기념관에서는 다양한 사업을 통해 국민들에게 독립운동의 가치와 독립운동가들의 정신을 기리고 있다. 하지만 기관들의 노력에 비해 일반인들이나 학생들의 관심이 부족하고 정보에 대한 공유가 적은 것이 현실이다.기념사업회의 역할그렇기 때문에 정부 주도의 독립운동 선양 사업을 뒷받침 할 수 있는 민간인 단체의 역할이 중요하다. 독립운동 관련 기념사업회가 가장 대표적인 민간인 단체로 국가보훈처에 등록되어 있다. 국가보훈처는 1995년부터 재단·사단법인 형태의 비영리 법인을 허가해주고 있는데, 그 대상은 일제의 국권침탈 전후로 국내·외에서 항거, 순국하거나 그 사실이 있는 독립유공자에 대한 기념사업을 하고자 하는 자이다. ‘매헌 윤봉길 의사 기념사업회’, ‘도산 안창호 선생 기념사업회’와 같이 ‘○○○ 의사·선생 기념사업회’ 등의 이름으로 운영되는 단체들이다.2019년 2월 현재 국가보훈처의 허가를 받은 순국선열, 애국지사와 관련한 법인 기념사업회는 모두 121개(재단 7개, 사단 114개)이다. 독립운동가 77명, 단체는 43개이다. 사무소 주소지별로는 서울 62개·경기 15개·전북 9개·경북 9개·경남 6개·전남 4개·부산 4개·충남 3개·충북 3개·대구 2개·울산 2개·광주 1개·대전 1개 등으로 분포되어 있다. 연대별로 설립 상황을 보면, 1955년 2월 일성이준열사기념사업회가 처음으로 만들어진 이후 1960년대 1개·1970년대 5개·1980년대 6개·1990년대 16개·2000년대 46개·2010년대 42개가 등록되었다. 2000년대에 들어 증가 추세다. 이는 기념사업회의 설립 일자가 아닌 법인 등록일자로 정리한 수치이다. 가령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는 1949년 8월에 설립되었지만, 1992년 7월 임의단체에서 사단법인으로 등록되었다.독립운동가 77명을 공훈별로 살펴보면, 2018년 11월 현재 대한민국장 17명/30(5)명·대통령장 16명/92(11)명·독립장 27명/821(35)명·애국장 11명/4315(4)명·애족장 3명/5682(12)명·건국포장 3명/1270(3)명 등이다(‘/’ 아래 숫자는 전체 인원이고 ( )는 외국인 수). 대한민국장은 건국훈장에서 가장 높은 등급인데, 외국인을 제외한 독립운동가 대부분을 대상으로 한 기념사업회가 설립되어 있다. 다만 최익현·조소앙 등의 기념사업회는 법인으로 등록되지 않았고, 이승훈은 문화재단 형태로 운영되고 있다. 안타깝게도 민영환·임병직·조병세·오동진 등의 기념사업회는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 다음 등급인 대통령장은 18.5% 정도이며, 외국인 중에서는 유일하게 베델선생기념사업회가 있다. 지난해 2018년 11월에서야 석오이동녕선생선양회 발기인대회가 개최되었다. 이하 독립장이 0.3%, 애국장이 0.02%에 불과하여 무의미할 정도이다. 43개의 기념사업회는 지역별·운동별로 설립되었다. 이 가운데 3·1동지회, 3·1여성동지회, 민족대표33인기념사업회 등 3·1운동 관련 단체가 가장 많고, 다음으로는 의병 관련 기념사업회가 많다. 독립운동 단체 중심의 기념사업회는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등이고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 등 지역 출신의 독립운동가들을 선양하기 위한 기념사업회가 활동하고 있다.‘기념사업회’의 주요 사업은 순국선열과 애국지사의 탄신·의거·순국일 등에 대한 추모·기념식에 집중되는 경향이 강하다. 이는 정부 보조금이 추모제나 기념식에 치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마저도 단체별로 선별적으로 이뤄지며 액수도 그리 많지 않다. ‘의사(義士)’들의 뜻을 후대에 기리는 문화행사나 이를 학술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한 연구발표 등은 언감생심이다. 그렇다 보니 재단이나 현충시설인 기념관 외에는 다채로운 행사를 기획하기 어렵고 대부분 자비로 운영하는 열악한 실정이다. 기념사업회도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심해지고 있는 상황인 것이다. 기념사업회 측은 허가를 내준 정부의 지원을 바라고, 정부 측은 지원에 대한 법적 근거가 없다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다.어떻게 활성화할 것인가기념사업회는 여러 독립운동가와 독립운동 단체를 기리기 위해 만들어졌으며 전국에 걸쳐 있다. 이러한 점에서 기념사업회가 국민들에게 한 발짝 더 다가가 독립운동의 의미를 알릴 수 있는 단체임에는 틀림없다. 이에 기념사업회의 문제점을 살펴 어떻게 활성화할 것인지 방안을 찾아야 한다.먼저 정부 측은 법률을 수정해서라도 기념사업회 지원을 늘려야 한다.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진 몇몇 독립운동가 혹은 단체 중심의 기념행사에 그쳐서는 안 된다. 오히려 기념사업회를 늘려 다양한 독립운동의 선양 사업이 이루어져야 한다. 둘째, 기념사업회 측은 특정 독립운동가의 업적만 내세우는 것을 지양해야 한다. 독립운동가별로 기념식을 치르기보다는 기념일에 맞춰 관련 기념사업회가 공동으로 기념행사를 하는 방안도 고려할 수 있을 것이다. 가령 청산리·봉오동전투 100주년을 기념하는 내년(2020년)에는 김좌진, 홍범도, 최운산 등의 기념사업회가 공동으로 기념행사를 개최하는 것은 어떨까 생각해 본다. 셋째, 기념사업회 사무소가 서울에 편중된 것도 해결되어야 한다. 지역에서 운영되고 있는 기념사업회의 경우, 지자체의 재정 지원을 받거나 보훈처에서 참관하여 사업 활성화를 도모하고 있다. 독립운동가 출신지 혹은 활동지에 기념사업회가 꾸려져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기념사업회의 행사는 기존 방식에서 탈피해야 한다. 청년층이나 학생들까지도 아우를 수 있는 문화행사로 바뀌어야 한다. 그래야만 독립운동의 정신을 계속해서 이어나갈 수 있는 것이다.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이하여 우리는 그 자체의 행사만을 주목하고 있다. 정부와 기념사업회는 ‘독립운동 선양 사업’이라는 같은 목표를 가지고 있지만, 안타깝게도 그들의 시선은 점차 다른 곳을 향하고 있는 듯하다. 그 의미를 더 드높이고 지속하기 위해서는 독립운동 관련 사업을 전반적으로 되돌아보고, 문제점을 점검하여 개선해야 한다. 의미 있는 100주년을 맞이하여, 가치 있는 앞으로의 100주년이 되기 위해서는 독립운동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나보다는 우리를 위해 큰 가치를 생각할 때이다. 그리고 대중의 관심을 생각하고 바라본다.]]> Fri, 22 Feb 2019 16:59:23 +0000 27 <![CDATA[잃어버린 10년과 동학농민운동 우리의 오늘 세계의 그날]]>     글 강응천 기획집단 문사철 대표, 역사저술가잃어버린 10년과동학농민운동   1884년 자주적 근대화를 시도한 갑신정변이 실패한 뒤 조선 왕조는 활력을 잃어버렸다. 일본의 지원에 의존했던 급진개화파는 민중의신뢰를 상실하고, 청군을 불러들여 위기를 넘긴 수구 세력은 원칙도 소신도 없이 기득권을 지키는 데 급급했다. 열강의 검은 손길은 점점 더 조선의 목을 죄어 왔다. 청과 일본이 엎치락뒤치락하는 가운데 부동항을 찾는 러시아도 틈새를 파고들었다. 부패하고 무능한 권력과 탐욕스러운 외세가 조선을 사지로 몰아가던 1894년,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던 농민들이 일어났다. ‘보국안민(輔國安民)’의 기치를 들고 일어난 동학농민군과 조선의민중에게 갑신정변 실패 이후의 세월은 잃어버린 10년이었다. alt호모 에렉투스의 두개골 alt오토 릴리엔탈과 그가 세계 최초로 발명한 비행기 '글라이더'가 그려진 우표인류, 날아오르다1891년, 네덜란드의 해부학자이자 지질학자인 뒤부아는 인도네시아 자와섬의 솔로강 유역에서 중대한 발견을 했다. 아래턱뼈 조각과 두개골, 넓적다리뼈로 이루어진 고인류의 화석을 찾아낸 것이다. 뒤부아가 이 화석에 붙인 이름은 ‘피테칸트로푸스 에렉투스(직립한 원숭이 사람)’였다. 원숭이과 짐승에서 인간으로 발전하는 진화의 중간 단계에 있는 화석이라는 뜻이다. 화석은 작은 두뇌, 송곳니가 겹쳐 있는 치아 등 유인원의 특성뿐 아니라 현생인류와비슷한 특징도 가지고 있었다. 완전한 직립 자세로 걸어다녔으리라 추측하게 하는 넓적다리뼈가 그중 하나였다. 훗날 이 화석은 유인원이 아니라 고인류라는 사실이 밝혀져 ‘자와 원인(原人)’으로 불리고 ‘호모 에렉투스’라는 학명을 얻었다. 오늘날 지구상에 존재하는 인류는 현생인류인 호모 사피엔스뿐이지만 옛날에는 자와 원인, 네안데르탈인 등 우리와는 다른 종(種)의 인류들이 살고 있었던 것이다. 다양한 요인이 작용하는 진화 과정에서 이들 다른인류는 모두 멸종하고 우리만 살아남았다.호모 사피엔스를 유일한 인류로 살아남게 한 요인은 무엇일까? 많은 학자들이 생각하고 학습하는 능력을 이야기한다. 인간은 특유의 사고력을 통해 자연의 세계를 탐구하고 모방해왔으며, 끝내는 자연을 극복하고 이용한다. 호모 에렉투스라는 인류 진화의 연결 고리가 발견된 1891년, 자연을 모방하고 이를 뛰어넘는 인간의 능력은 또 한 번의 신기원을  이룩했다. 하늘을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새의 모습을 관찰하고 연구한 끝에 마침내 인간 스스로 하늘을 날아올라 중력의 법칙을 극복하게 된 것이다. 비행은 인류의 숙원이었다.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신화의 주인공 이카로스를 통해 그 꿈을 꾸었고, 르네상스의 천재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비행체의 과학적 원리에 접근했다. 마침내 꿈을 현실로 바꾼 주인공은 독일의 공학자 오토 릴리엔탈이었다. 그는 오랫동안 새의 비행을 관찰한 끝에 1889년 새가 하늘을 나는 과학적 원리를 책으로 펴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양쪽에 10m 길이의 날개를 단 비행체를 만들었다. 아직 동력이 될 모터는 달지 않았다. 이 비행체는 기류의 흐름을 읽고 팔다리를 이용해 무게중심을 잡으며 활강하는 방식으로 하늘을 날았다. 공중을 미끄러지듯 난다고 해서 이 최초의 비행체에는 ‘글라이더’라는 이름이 붙었다. alt필리핀 사회 개혁 운동을 이끈 호세 리살 alt여성참정권운동을 주도한 뉴질랜드의 여성운동가 케이트 셰퍼드인류의 공존을 향하여멸종한 다른 인류에 비해 현생인류가 우월했던 또 한 가지는 언어 능력이었다. 고도로 발달한 발성 기관에서 나오는 다양한 음성 기호들은 수많은 사람 사이에 공감대를 형성하고, 학습을 통해 얻은 지식을 빠른 속도로 전파하는 마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사람들의 공감 능력을 증진하고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를 발달시켰다. 그러나 역사 속에서 인류는 스스로 공동체의 범위를 좁히고 같은 인류끼리 차별하거나 적대하는 잘못을 범해 왔다. 좀 더 빨리 발달한 국가가 후진국을 침략하고 지배하는 제국주의는 그러한 잘못의 최신 버전이었다. 그런가 하면 육체적으로 힘이 세다는 이유만으로 남성이 여성 위에 군림하는 남성우월주의는 그러한 잘못의 가장 오랜 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같은 신구의 불평등은 현생인류를 살아남게 만든 공감 능력에 위배되는 현상이었다.1890년대에는 이러한 반인륜적인 불평등 상태를 극복하려는 인류의 노력에도 조금씩 시동이 걸렸다. 제국주의의 식민 통치에 저항하는 움직임은 세계 곳곳에서 일어났다. 1892년에는 필리핀의 호세 리살이라는 젊은이가 이 움직임에 동참했다. 필리핀은 에스파냐의 탐험가 마젤란이 그곳에 도착한 이래 300여 년 동안 에스파냐의 식민 통치를 받아 왔다. 호세 리살은 마닐라에서 비폭력 단체인 필리핀민족동맹을 만들고 사회 개혁 운동을 벌여 나갔다. 그는 이미 10년 전 에스파냐 유학 시절부터 필리핀 유학생 단체의 지도자로 활동하며 자신의 조국은 필리핀이라고 외쳐 온 혁명가였다. 에스파냐 식민 정부는 리살을 다피탄섬으로 추방했으나 그가 뿌린 반제국주의투쟁의 씨앗은 결코 죽지 않았다.남녀평등을 향한 인류의 오랜 노력은 1893년 들어 중대한 결실을 맺었다. 그해 11월 23일 뉴질랜드에서 세계 최초로 여성이 투표권을 행사한 총선거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여성 투표권자의 약 65%가 투표에 참여했다. 1793년 프랑스 여성운동가 올랭프 드 구주는 “여성이 단두대에 오를 권리가 있다면 의정 단상에도 오를 권리가 있다”는 말을 남긴 채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로부터 정확히 100년 만에 여성참정권운동의 위대한 승리가 실현된 것이다. 승리의 주역은 1870년대부터 뉴질랜드의 여성운동을 주도한 케이트 셰퍼드였다. 남성 의원들은 여성이 있어야 할 곳은 가정이라고 비아냥거렸다. 셰퍼드는 여성도 남성처럼 법률의 영향을 받는 시민이므로 당연히 입법 과정에 참여해야 한다고 맞섰다. 나아가 여성은 남성에게 없는 섬세함으로 정치 구조에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잠자고 있던 ‘세상의 절반’을 깨워 남녀가 공존하고 협력하며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나갈 발판이 마련된 것이다. alt동학농민군 백산봉기 기록화조선의 운명, 하와이의 운명공존을 향한 인류의 투쟁은 1890년대의 한반도도 비껴가지 않았다. 1894년에 일어난 동학농민운동은 두 가지 점에서 세계사의 흐름과 코드를 맞추고 있다. 동학농민군의 조직적 기반이 된 동학은 각급 교단의 지도자를 뽑을 때 여성 교도에게 남성 교도와 동등한 선거권을 주었다. 뉴질랜드처럼 국가적 차원에서 참정권을 준 것은 아니지만 여성에게 투표권을 준 사례로는 세계적으로도 매우 앞선 것이었다.동학농민운동은 1892년 혹세무민의 죄로 처형당한 동학 교주 최제우의 억울함을 풀고 동학을 합법화하라는 요구로부터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주로 동학교도가 참여했으나 점차 탐관오리들의 수탈에 분노한 일반 농민의 참여가 두드러지고 외세를 몰아내자는 구호도 등장했다. 1894년 2월에는 전라도 고부군수 조병갑의 가혹한 수탈에 맞선 민란이 일어났다. 사태를 진정시키기 위해 파견된 안핵사 이용태가 부당한 탄압을 가하자 민란은 농민군의 봉기로 확대되었다. 그들은 황토현에서 관군을 전멸시킨 데 이어 5월 말에는 호남의 중심인 전주성마저 점령하기에 이르렀다. 농민군의 기세에 놀란 정부는 강화조약을 제안하는 한편 청에 농민군 진압을 위한 군대 파견을 요청했다. 청이 이에 호응해 군대를 파견하자 일본도 자국민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인천항에 자국 군대를 들여보냈다. 농민군은 청·일 군대가 조선 땅에 주둔할 명분을 없애기 위해 정부와 화약을 맺고 전주성을 비워주었다. 그러나 일본군은 철수하기는커녕 경복궁을 점령해 자국에 유리한 개혁을강요하고, 청군을 공격해 청일전쟁을 일으켰다. 뒤늦게 실수를 깨달은 농민군은 다시 봉기했으나 이제는 정부군뿐 아니라 일본군을 상대로도 전쟁을 벌여야 했다. 결과는 참담한 패배였다. 농민군의 지도자 전봉준은 체포되어 사형당하고,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조선에 대한 정치·경제적 침략을 더욱 강화해 나갔다.같은 시기 태평양 한가운데 있는 아름다운 섬 하와이에도 비극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하와이왕국을 통째로 차지하려는 미국 사탕수수 업자들의 선동으로 쿠데타가 일어난 것이다. 하와이왕국은 1875년 이미 미국을 제외한 어떤 나라와도 외교관계를 맺지 않는다는 조약을 맺고 사실상 미국의 속령이 된 바 있었다. 하와이왕국의 마지막 왕인 릴리우칼라니 여왕은 이에 강력히 저항했다. 그러자 미국인들이 해군의 도움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왕국을 무너뜨리고 백인들의 하와이공화국을 탄생시킨 것이다. 4년 뒤인 1898년 7월 4일 하와이는 결국 미국에 병합되고 말았다. 우리가 연인들의 이별가로만 알고 있는 <알로하 오에>는 릴리우칼라니 여왕이 비통한 심정으로 하와이에 이별을 고하는 노래였다.희망은 살아 있다청일전쟁을 마무리하고 조선을 일본의 손아귀로 움켜쥐기 위한 시모노세키조약은 1895년 4월 17일 체결되었다. 그보다 조금 앞선 4월 8일, 난센이 이끄는 프람(Fram)호 북극탐험대가 북위 86° 14´ 지점에 닿았다. 20여 일 동안 개썰매와 카약을 타고 북쪽으로 달린 끝에 북극을 정복한 것이다. 프람호는 난센이 직접 설계해 건조한 배로, 전진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뿐인 인류를 분열과 대립으로 몰아넣는 제국주의의 광풍 속에서도 하늘을 날고 미지의 세계를 개척하는 인류의 꿈은 포기할 줄 모르는 사람들에 의해 하나둘 현실이 되고 있었다. 세기말의 혼돈이 계속되는 중에도 인류의 희망은 아직 살아 있었다.]]> Fri, 22 Feb 2019 19:07:04 +0000 27 <![CDATA[오래된 시간을 잇는 길 화성 이 땅의 숨결]]>     글·사진 임운석 여행작가오래된 시간을 잇는 길-화성- 경기도 서남단에 자리한 화성시. 오산, 수원, 안산, 평택과 이웃하고 경기 북부지역을 제외한 경기도 대부분의 지역에서 1시간이면 충분히 닿는 거리에 위치한다. 화성을 여행하려면 동선을 효율적으로 짜는 것이 포인트다. 이번 화성 여행은 융건릉을 시작으로 제암리 3·1운동 순국유적지를 거쳐 바다가 품은 아름다운 섬 제부도로 떠나본다. alt융건릉으로 들어서는 초입에 소나무숲이 깊다alt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융릉 전각 과거는 쉼이 되고, 현재는 문화가 되다첫 여행지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융릉과 건릉이다. 융릉은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를 합장한 능이고, 건릉은 조선 제22대 임금 정조와 효의왕후 김씨의 합장릉이다. 이른 아침인 탓에 능을 찾은 사람은 많지 않다. 숲길에는 호젓한 정취가 감돈다. 키를 가늠하기 어려운 소나무들이 하늘을 떠받들 듯 높다랗게 자랐다. 산새들의 지저귐에 숲이 깨어나고, 찬연한 아침 햇살에 간밤의 이슬은 증발한다. 뒤따르는 이나 앞서는 이가 없으니 홀로 걷는 듯하다. 장중한 숲의 풍광은 영화 <사도>에 고스란히 담겼었다. 그 덕분에 영화가 개봉된 이후 찾는 사람이 늘었다고 한다. 능원 깊은 곳에 이르자 길은 두 갈래로 나뉜다. 오른쪽은 융릉, 반대쪽은 건릉이다.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 당연히 아버지 능인 융릉부터 찾는다. 사후에 장조로 추존된 사도세자는 신분이 변함에 따라 무덤 역시 묘, 원, 능으로 한 단계씩 격상됐으니 사나 죽으나 시류에 따라 격변하는 것은 변함없어 보인다. 융릉은 정자각과 능의 배치가 다른 조선 왕릉과 차이가 있다. 일반적으로 정자각과 능은 일직선에 위치하지만, 융릉은 능에서 조금 비켜섰다. 뒤주에서 죽은 아버지를 위해 그리했다고 한다. 융릉을 뒤로하고 건릉으로 발길을 옮긴다. 이곳 역시 숲이 깊다. 한 줌의 빛이 솔잎에 부딪혀 바늘처럼 예리하게 흩어져 꽂힌다. 수백 년 전의 역사가 고요히 숨죽인 능원은 더 이상 왕의 전유물이 아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휴식과 치유의 숲이다. alt화성 제암리 학살사건을 촬영하는 스코필드 선교사 조형물제암리 3·1운동 순국 유적과거가 세월에 묻히면 옛날이 되지만 기억한다면 역사가 된다. 그런 의미에서 역사를 되짚어보는 여행은 특별하다. 올해는 3·1만세운동 100년이 되는 해다. 경기도 화성에서 기록으로 남은 3·1만세운동의 흔적이 있다. 융건릉에서 발안 방면으로 향하면 발안삼거리에 이른다. 발안천이 흐르는 곳에 제암리 3·1운동 순국기념관이 있다. 두렁바위라 불리는 이곳은 1919년 3·1만세운동이 격렬하게 일어난 곳이다. 그날을 기억이라도 하듯 길가에는 태극기가 휘날린다. 제암리문화관을 지나자 3·1운동 순국기념탑이 마중을 나온다. 탑이 서 있는 자리는 100년 전 제암리교회가 있던 곳이다. 탑 주변에는 3·1 운동 순국기념관과 23인 순국묘지 및 상징 조각물, 3·1 정신교육관, 스코필드 선교사 동상 등이 조성되어 있다.스코필드 선교사는 한국을 조국처럼 아끼고 사랑한 캐나다 선교사였다. 그가 우리 땅에 발을 디딘 것은 1916년 11월 캐나다장로회 선교사로 파송을 받으면서다. 선교사인 동시에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세균학 교수로 부임한 그는 3·1만세운동 사진을 찍고 취재한 외국인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때 촬영한 사진을 여러 해외 언론에 기사와 함께 투고해 일제의 만행을 폭로했다. 특히 화성 제암리교회 방화·학살 사건을 해외에 알리는데 가장 큰 역할을 했다.제암리 학살사건은 제암리 주민들이 발안장터에서 격렬한 만세운동을 벌이자 만세운동 주모자 명단을 입수한 일본 헌병 30여 명이 4월 15일 오후 2시경 제암리교회에 주민을 감금시키고 교회에 불을 지른 후, 교회를 향하여 무차별 총격을 가하여 23명을 학살하고 가옥 30여 채를 불태운 사건이다.기념관은 제1, 2전시실로 나뉜다. 제1전시실에는 1919년 화성지역에서 전개된 3·1만세운동의 배경과 전개 과정 그리고 4월 15일 일본 군경에 의한 제암·고주리 학살, 유가족들의 증언, 그 후의 기록들을 사진과 유물, 인터뷰 영상으로 전시하고 있다. 출토유물은 유해 발굴지에서 함께 출토된 단추, 깨진 병, 교회 건물 잔해들이 대부분이다. 안타깝게도 사체는 교회 건물이 불타 무너지면서 뒤엉켜 붙어 신원 확인이 불가능했다고 한다. 제2전시실에는 ‘학살, 끝나지 않은 역사’를 주제로 기획전 ‘제노사이드(Genocide: 국민·인종·민족·종교집단을 전체 혹은 부분적으로 파괴할 의도를 가지고 실행된 행위)’가 열리고 있다. 사진과 기록들을 천천히 돌아보는 동안 인류의 어두운 단면과 비극이 극명하게 드러나 마음이 무겁다. alt산책하기 좋은 제부도 제비꼬리길alt제부도의 상징처럼 자리한 꽃게alt빨간 등대는 제부도의 랜드마크이다화성의 명품 걷기 길을 만나다수도권에서 가까운 섬이라 하면 제부도가 먼저 떠오른다. 그만큼 사람들이 많이 찾는 예쁜 섬이다. 제부도는 육지와 다리로 연결돼 있지 않지만 ‘모세의 기적’이라 부르는 바다 갈라짐 현상으로 차량이 오갈 수 있다. 그래서 섬인 것을 어색하게 느끼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항상 갈라지는 것이 아니니 섬이라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제부도에는 제비꼬리길이 있다. 다녀온 사람마다 명품길이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운다. 제부도선착장에서 출발해 해안 데크길을 지나 탑재산 능선을 따라 출발지로 되돌아오는 코스다. 총거리가 약 2km 안팎으로 걷기에 수월한 데다 1시간 정도면 바다와 숲길을 모두 즐길 수 있다. 이 점이 제비꼬리길을 명품길의 반열에 올렸다.제부도를 코앞에 두고 모세의 기적을 기다린다. 육안으로 보기엔 물이 빠진 것 같지만 입도를 막은 바리케이드는 아직 요지부동이다. 안전을 확인하고 나서야 바리케이드가 올라간다. 길게 늘어선 차량이 순식간에 섬에 빨려 들어가듯 이동한다. 현대판 모세의 기적은 걷거나 마차를 타지 않고 자동차로 이동한다. 육지에서 엑소더스를 시작한 사람들은 일제히 차 창문을 내린다. 바닷바람을 쐬기 위해서다. 제부도는 육지와 2km 남짓 떨어졌지만 바람의 맛이 다르다. 육지 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상쾌하다. 찰싹거리는 낮은 파도는 수런거리고 갈매기들은 편대로 축하비행을 한다.제비꼬리길은 제부도선착장 등대주차장에서 출발한다. 여행자들은 의례히 붉은 등대에서 기념사진을 남긴다. 그리곤 방파제에 잇댄 낙조전망대에서 서해를 가슴에 품는다. 이제 본격적인 걷기에 나선다. 나무데크가 설치된 해안산책로는 900m 정도 이어진다. 만약 해질녘이라면 붉게 물든 서해를 벗하며 걸을 수 있다. 아직 일몰을 보기엔 이른 시각. 몇 걸음 가지 않아 포토존과 전망대가 보이고, 쉼터 의자가 놓였다. 잔잔한 해수면을 따라 수평선이 아득하다. 정적을 깨는 얄미운 녀석은 갈매기다. 새우깡에 길들었는지 사람만 보면 ‘꽥꽥’ 고함을 지르며 저공비행을 한다. 산책로에는 제부도와 화성을 상징하는 다양한 조형물들이 설치돼 있다. 제부도에 서식하는 생물들, 제부도에 얽힌 전설들, 갯벌의 신비 등 소소한 읽을거리가 있어 가다서기를 반복한다. 어느덧 산책로는 제부도 남쪽에 자리한 제부도해수욕장에 닿는다. 밀가루보다 더 고운 모래가 해안가에 뒤덮였다. 그 앞으로 자갈과 갯벌이 바다와 한 몸이 되었다. 바다와 마주한 도로변에는 음식점들이 줄 서듯 이어져 있다. 대부분 바지락칼국수와 조개구이, 회를 취급한다. 먼발치에서 호객할 뿐 가까이 오지는 않는다. 탑재산 숲길에 들기 전, 도로변에 있는 제부도 아트파크를 먼저 찾았다. 제부도 아트파크는 컨테이너 6개로 구성된 전시·조망·휴게·공연이 모두 가능한 복합문화공간이다. 운이 좋으면 수준 높은 공연이나 작품을 무료로 감상할 수도 있다고 하니 노려볼만하다. 무엇보다 서해의 감성과 감각적인 건축물이 조화를 이뤄 지역의 명소다.다시 제비꼬리길에 올라섰다. 길은 이전과 다른 숲길 산책로다. 탑재산은 해발 66m로 나지막하다. 해송이 우거져 조망은 좋지 않지만 숲 특유의 상쾌함은 바다에서 느낄 수 없는 묘미다. 탑재산전망대에 이르자 숲길이 막바지에 이른다. 제부도선착장은 물론이고 제부도 진입로가 한눈에 들어온다.여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하루의 마감이 일몰에 있듯, 여행의 마감 역시 일몰 감상으로 마침표를 찍으련다. 제부도 일몰 포인트는 궁평항과 전곡항 어느 곳이든 괜찮다. 두 곳 모두 서해의 낭만이 고스란히 녹아 있으니. 전곡항은 요트와 보트가 접안해 이국적인 멋이 흐르고, 궁평항은 포구의 서정미가 가슴에 깊이 아로새겨질 것이다.]]> Fri, 22 Feb 2019 19:31:10 +0000 27 <![CDATA[재외동포 독립운동의 터전을 일구다 어느 독립운동가의 초상]]> 글 김정인 춘천교육대학교 교수재외동포 독립운동의 터전을 일구다 19세기 이래 많은 한국인이 기회의 땅을 찾아 만주로, 미국으로, 연해주로 떠났다. 그들은 이역만리에 살면서 자발적 결사체를 만들고 독립운동을 펼쳤다. 1910년대에 북간도에서는 간민교육회와 그것을 발전시킨 간민회, 서간도에서는 경학사와 그것을 계승한 부민단, 연해주에서는 권업회, 미국에서는 대한인국민회 등이 자치를 도모하며 독립운동에 나섰다. alt간민교육회 제2회 교원강습회 기념사진alt신흥무관학교가 있었던 만주 유하현 삼원보 만주, 무장투쟁의 배후지만주로의 이주는 19세기부터 시작되었다. 1910년대에는 만주 이주가 급격히 늘었다. 1912년에 약 24만 명이 만주에 살고 있었는데, 7년 만인 1919년에는 43만 명으로 두 배 가까이 증가했다. 만주에 몰려든 한인들은 마을을 이루고 한국적 방식으로 농사를 짓고 고국의 생활 방식을 유지하며 살았다.북간도에서는 명동학교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이 1910년 북간도 한인의 자치와 경제력 향상을 도모하고자 간민자치회를 결성했다. 중국 관리의 요구로 ‘자치’를 빼고 이름을 간민교육회로 바꾼 뒤에는 중국 관청의 허가를 얻어 합법적으로 활동했다. 간민교육회는 북간도 각지에 지회를 두고 도로와 위생 사업을 전개하고 농촌 경제 활성화를 위해 식산회를 조직했다. 그리고 한인으로부터 교육 회비를 걷어 명동학교 등을 운영했다. 기관지인『교육보』를 발행했으며 야학을 열어 문맹 퇴치 운동을 전개했다.1913년 4월 간민교육회가 간민회로 개편되었다. 간민회는 국자가에 총본부를 설치한 후 연길현·화룡현·왕청현 등에 지방총회를 두었으며 지방총회 산하에는 지회를 설치했다. 간민회는 중국 관리가 한인에 관한 행정을 처리할 때 협의기구 역할을 하면서 세금 징수, 호구조사 등의 업무를 맡았다. 하지만 위안스카이 대총통이 자치 기관의 철폐를 명령하면서 창립한 지 1년 만인 1914년 3월에 해산되었다.서간도에서는 신민회의 주도로 1910년을 전후하여 한인 대이주 계획과 함께 독립운동기지 건설운동이 추진되었다. 먼저 1911년 늦봄 이회영·이시영 형제와 이동녕·이상룡 등은 서간도 싼위안푸에 자치기관인 경학사를 설립했다. 서간도 이주가 꾸준히 증가하자 독립운동가들은 1915년 말 혹은 1916년 초에 경학사를 확대한 부민단이란 이주민 통합자치기관을 결성했다. ‘부민단’은 부여의 유민이 다시 일어나 결성한 단체라는 뜻을 갖고 있었다. 부민단은 중앙부서와 지방 조직을 마련하여 한인 자치를 담당하고, 한인 사회에서 일어나는 분쟁은 물론 중국인 혹은 관청과의 분쟁 사건을 맡아 처리했다. 부민단의 가장 중요한 사업은 신흥무관학교 운영이었다. 신흥무관학교는 1911년 봄에 신흥강습소라는 이름으로 창설되어 1920년 8월 간도참변으로 폐교될 때까지 약 3,500여 명의 졸업생을 길러냈다. 부민단은 1919년 4월 한족회로 개편될 때까지 한국인이 거주하던 서간도 전 지역을 망라한 자치기관으로 활약했다. alt안창호와 공립협회 동지들(가운데가 안창호, 1906)alt대한인국민회 회원들(샌프란시스코 대한인국민회 본부, 1913) 미국, 해외 한인을 아우르는 결사를 꿈꾸다한인이 가장 먼저 정착한 미국 땅은 하와이였다. 1903년 1월 13일 102명의 한인이 호놀룰루에 도착했다. 하와이에서는 1903년 8월에 신민회를 조직한 이래 많은 자발적 결사체가 설립되었다. 1907년에는 24개의 자발적 결사체와 동회 대표 30여 명이 호놀룰루에서 회의를 갖고 통합단체인 한인합성협회를 조직했다. 샌프란시스코에서도 자발적 결사체가 생겨났다. 1903년 9월 23일 안창호 주도로 친목회가 만들어졌다. 이 친목회를 발판으로 1905년 4월 공립협회가 창립했다. 공립협회는 1907년까지 샌프란시스코를 중심으로 로스앤젤레스 등 6개 지역에 지방회를 설립했다. 1909년 2월에는 한인합성협회와 공립협회가 합동해 국민회를 발족시켰다.국민회는 한인 사회를 대표하고 한인을 보호하는 자치정부임을 자처했다. 조직은 총회와 지방회로 구성하고 본토에는 북미지방총회를, 하와이에는 하와이지방총회를 두었다. 이듬해인 1910년 2월에 대동보국회와 통합한 국민회는 5월에 이름을 대한인국민회로 바꿨다. 미국 한인의 최고 기관으로 수립된 대한인국민회 역시 자치 정부 역할을 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먼저 대한인국민회는 “국가인민을 대표하는 총기관”으로서의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설립을 서둘렀다. 1911년 8월 발족한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는 ‘국민회를 통할한 기관이요 한 나라 정체로 말하면 일체 법령을 발하는 중앙정부’를 자처했다.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는 만주, 연해주 등을 포함하여 116개의 지방회를 두었다. 1912년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는 결성 선포식을 가지며 다음과 같은 선포문을 발표했다."우리는 나라가 없으니 아직 국가 자치는 의논할 여지가 없거니와 우리의 단체를 무형한 정부로 인정하고 자치제도를 실시하여 일반 동포가 단체 안에서 자치제도의 실습을 받으면 장래 국가 건설에 공헌이 될 것이다."1913년 7월 12일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는 헌장을 개정하여 제1조에 “본회는 대한국민으로 성립하여 대한인국민회라고 칭함”이라 규정했다. 대한인국민회가 대한국민을 기반으로 한 자치정부임을 선포한 것이다. 1914년 4월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는 소재지인 캘리포니아주 정부의 허락을 얻어 명실상부한 한인자치기관으로서 활동했다. 대한인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 역시 하와이주 정부의 인가를 얻어 자치기관으로 활동했다. 대한인국민회는 미주 한인의 자치정부를 자임하는 동시에 ‘정신상의 민주주의 국가’ 즉, 무형국가론을 제기하면서 임시정부 수립운동을 펼쳤다. 비록 해외 한인을 아우르는 자치정부로서의 임시정부라는 위상을 확보하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미주 한인에게 대한인국민회는 독립과 민주주의 국가 건설을 향해 나가는 무형정부의 역할을 했다. alt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린 3·1절 1주년 기념식(1920)alt권업회에서 발행한 기관지 『권업신문』 연해주, 최초의 임시정부를 만든 자치의 힘한국인이 러시아 연해주 지방으로 건너가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중반이었다. 1900년 무렵에는 10만 명이 넘는 한인이 연해주에 살았다. 1937년 스탈린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할 무렵에는 18만 명이라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연해주에 터전을 잡고 있었다.연해주 한인사회는 마을별로 자치 기구를 만들어 자치를 실시했다. 블라디보스토크의 교외에 있던 신한촌에서는 신한촌민회가 자치를 실시했다. 신한촌 사람들은 본래 블라디보스토크 중심지에 있던 개척리에 살았다. 이때는 한민회를 결성하여 자치를 실시했다. 1911년 블라디보스토크 서북쪽에 자리한 신개척리로 옮긴 후에 그곳을 신한촌이라 명명하고 한민회를 신한촌민회로 개편했다. 신한촌민회는 독립운동가 20인을 평의원으로 선출해 그들이 사업과 예산 등을 심의하고 임원을 선출하도록 했다.1911년 12월 신한촌에서 권업회가 결성되었다. 권업회는 연해주에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한다는 목표를 갖고 출범한 결사체였다. ‘권업’이란 말은 무장조직을 목표로 한다는 사실을 숨긴 채 러시아 당국의 공인을 받기 위해 내세운 이름이었다. 권업회를 대표하는 실질적 운영자인 의사부 의장에는 이상설, 부의장에는 이종호가 선출되었다. 중앙조직을 정비한 권업회는 연해주 전역에 걸쳐 지회와 분사무소를 설치했다.권업회는 한인 자율의 공동체인 신한촌민회와 달리 합법적인 자치 기관으로서 한인 관련 행정 사무를 취급했다. 토지의 조차와 귀화 등의 처리도 그들의 몫이었다. 때로는 수백 호의 한인을 집단 이주시켜 도처에 한인 개척지를 만들기도 했다. 또한 권업회는 교육 사업에 중점을 두었다. 신한촌에 있던 계동학교를 한민학교로 개편해 연해주 한인의 중추 교육 기관으로 만들었다. 독립군을 양성하는 사업은 러시아 당국의 눈을 피해 비밀리에 수행했다. 권업회는 러시아가 아닌 만주의 나자구에 대전학교를 설립했다. 이어 밀산부를 비롯한 여러 곳에 조차지를 마련하고 군영지로 활용했다. 1912년 4월 22일에는 기관지인 『권업신문』을 창간해 연해주는 물론 서·북간도와 미국 등지의 한인 사회에 보급했다. 권업회는 1914년 봄 대한광복군정부 결성을 서둘렀다. 이상설을 대통령, 이동휘를 부통령으로 추대한 임시정부를 세워 독립군의 항일투쟁을 통일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1914년 9월 제1차 세계대전에서 러시아의 동맹국이었던 일본의 요구로 권업회는 강제해산당했고 지도자들은 추방당했다. 이후 한인자치공동체의 강한 전통 속에서 1917년에 결성된 전로한족회중앙총회가 1919년 2월 25일에 대한국민의회를 조직함으로써 임시정부 수립의 꿈을 이뤘다.만주, 미국, 연해주로 건너간 한인들은 여건이 허락되는 한, 자발적 결사체를 결성하고 한인 자치를 실시하고자 했다. 이렇게 어렵게 만든 한인 자치 단체의 운명은 스스로의 선택이 아니라 그들이 터를 잡고 있는 중국, 미국, 러시아의 내정과 외교에 의해 결정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럼에도 해방이 될 때까지 한인이 존재하는 곳이면 어디든 한인만의 자치를 도모하며 독립운동의 터전을 일구려는 노력이 간단없이 이어졌다.]]> Fri, 29 Mar 2019 10:22:01 +0000 28 <![CDATA[가려진 역사 지워진 이야기 史소한 이야기]]>     가려진 역사 지워진 이름들-일제강점기 강제동원의 실태-   일제강점기 많은 한국인이 독립운동의 소명과 생계의 이유를 갖고 해외로 갔다. 그러나 자의가 아닌 강제에 의해 고향을 떠나야 했던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일본은 1938년, 중일전쟁이 길어지자 국방을 목적으로 한 인적 및 물적 자원의 조달을 위해 ‘국가총동원법’을 제정했다. 이후 한국인들은 일자리 알선에 속아 또는 납치와 인신매매 등의 방식으로 탄광 및 군수산업 현장에 강제동원 됐다. 피해자 중 일부는 일본을 비롯한 해외로 끌려가 하루 12시간 고된 노동에 시달렸다. 안전사고에 노출되어 있었고, 턱없이 적은임금은 그마저도 강제 저축되었다. 노무자뿐만 아니라 군인과 군무원, 일본군 위안부와 여자근로정신대 등 여성을 대상으로 한 강제동원도 이루어졌다.강제동원의 역사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타지에서 열악한 노동에 시달리다 죽은 이들은 아직도 고향 땅을 밟지 못했고, 당시 한국인 노동자를 동원했던 일본 기업에 대한 피해자 손해배상 문제도 긴 싸움을 이어가고 있다. 일본은 자신의 부끄러운 역사를 숨기는 데 급급할 뿐이다. 명예롭고 빛나는 역사에 가려져 있는 동안 하나 둘 피해자의 이름은 지워졌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기억해야만 한다. 강제동원은 사소한 이야기가 아니라 그 무엇보다 중요한 현재이다. alt]]> Fri, 29 Mar 2019 10:48:33 +0000 28 <![CDATA[한국 독립운동의 스승 안창호 이달의 독립운동가]]>     글 전시부한국 독립운동의 스승안창호   독립기념관은 국가보훈처 및 광복회와 공동으로 안창호를 2019년 4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안창호는 미주 한인사회를 이끌며 구국활동을 전개하고 임시정부 국무총리 서리를 지냈다. 이후에도 독립운동 단체의 통합을 주장하며 민주주의 국가 형성에 앞장섰다. alt한인공동체의 지도자로 인정받다도산(島山) 안창호는 1878년 11월 9일 평안남도 강서군 초리면 칠리 봉상도(일명 도롱섬)에서 안흥국(安興國)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서당에서 한문을 공부하던 안창호는 청일전쟁을 목격하며 큰 충격을 받았고, 서울에서 선교사 밀러를 만나 민노아학당에 입학하게 되었다. 신학문을 3년간 수학한 뒤, 그는 독립협회의 민권운동에 참여하면서 국가가 나아갈 길을 모색하고 국민교육의 중요성을 절감했다. 독립협회 해체 후 교육과 전교활동에 전념하면서 본격적인 교육학 공부를 결심, 1902년 이혜련과 혼인한 다음날 함께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안창호는 한인들의 생활태도와 여건을 개선하고 한인친목회를 결성해 해외에 거주하는 우리 동포들이 단합할 수 있도록 노력했다. 리버사이드의 오렌지농장 노동자들에게도 “오렌지 한 개를 따더라도 정성껏 따는 것이 나라를 위하는 일이다”라고 강조하며 한인에 대한 신용을 높이는 데 힘썼고, 점차 한인사회의 지도자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1905년 4월에는 동지들과 함께 조국 광복을 사업목표로 한 정치단체인 공립협회를 창립했다. 안창호를 초대회장으로 한 공립협회는 각지에 지방회를 확대해 나갔고, 『공립신보』를 통해 국내외 소식을 알리는 등 구국사업을 전개하면서 미주 한인사회를 대표하는 대한인국민회로 발전했다.독립운동의 기반을 다지고 민족통합에 헌신하다안창호는 귀국하여 대성학교를 설립하고 청년학우회를 조직하는 등 다방면의 민족운동과 함께 항일비밀결사 신민회 활동을 통해 국권회복을 전개했다. 그러나 1910년 경술국치(庚戌國恥) 후 국내에서의 독립운동 전개가 어려워지자 1911년 미국으로 돌아와 활로를 모색했다. 먼저 대한인국민회의 조직을 미주뿐만 아니라 시베리아, 연해주, 만주 등지로 확대하는 한편 흥사단을 설립해 독립운동의 조직과 기반을 마련했다.3·1운동 이후 수립된 상하이 임시정부의 국무총리 서리 겸 내무총장으로 취임한 안창호는 독립운동 세력의 통일을 역설하며 임시정부의 체계를 세우고 임시정부 통합을 이끌었다. 임시정부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독립운동단체의 통합과 이상촌 건설운동에 매진했다.1932년 윤봉길 의거와 관련하여 연행된 후 2년 6개월 동안 옥고를 치른 안창호는 동우회 사건으로 다시 수감되며 지병 악화로 1938년 3월 10일 순국했다. 정부는 민주주의적 민족국가의 수립을 위해 헌신한 안창호의 공적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alt안창호가 미국 유학을 위해 받은 대한제국 발행 집조(여권)(1902)alt대성학교 학생들과 교사들(1909) alt캘리포니아 리버사이드 오렌지 농장에서 오렌지를 수확하는 안창호(1912)alt동우회 사건으로 붙잡히기 전 안창호(1936) ]]> Fri, 29 Mar 2019 11:38:50 +0000 28 <![CDATA[미국 사회에 한국이 독립국임을 알린 미주 한인들 자료로 읽는 역사]]>     글 김경미 자료부미국 사회에한국이 독립국임을 알린미주 한인들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 미주 지역의 독립운동 조국에서 3·1운동이 일어나고 임시정부가 수립된다는 소식을 들은 미주의 한인들은 일제의 불법적인 식민통치와 식민지 한국의 실상을 알리고, 3·1운동으로 나타난 한국의 독립과 새로운 독립국가 건설의 열망을 전 미국 사회에 전파하고자 했다. alt<사진01> 하와이 대한독립선언서(국가지정기록물 제12호)독립을 선언하고 정부를 수립하다3·1독립선언의 함성이 조선 전국을 울리고 나라 밖으로 퍼져나가는 가운데, 중국 상하이에서는 나라를 떠나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이 모여 정부 수립을 준비하고 있었다. 독립을 선언하였으니 정부를 조직하는 일은 당연한 순서였다. 1919년 4월 10일 오후 10시, 상하이의 프랑스조계 김신부로(金神父路, 오늘날 瑞金路)의 한 양옥집에서 29명의 의원들이 회의를 시작했다. 먼저 회의의 이름을 ‘임시의정원’으로 정했다. 이는 정부의 입법기관으로서 정부를 조직하고 헌법을 제정할 임무를 지녔다. 의정원을 이끌어갈 사람들은 무기명 단기식 투표(이름을 밝히지 않고 한 사람의 이름만 써내는 것)로, 의장은 이동녕, 부의장은 손정도, 서기는 이광수와 백남칠을 선출했다. 이어 임시정부에 대한 토의를 진행하는 중에 자정이 지났다.날이 바뀌고, 나라 이름은 ‘대한민국’으로 정했다. 정부조직은 국무총리를 수반으로 국무원에 내무·외무·법무·재무·군무·교통의 6부를 두기로 하고 내각 구성원 선발에 들어갔다. 국무총리는 이승만에 대한 찬반 논란을 벌이다 그 자리에서 추천된 다른 후보자들과 함께 무기명 단기식 투표를 진행하여 이승만이 당선됐다. 내무총장 안창호, 외무총장 김규식, 교통총장 문창범은 각각에 대한 동의와 재청으로 결정되었고, 재무총장 최재형, 군무총장 이동휘, 법무총장 이시영은 각각 추천된 후보자 세 사람 중 투표로 결정됐다.다음에는 헌법인 ‘대한민국임시헌장’을 제정했다. 심사안을 검토할 심사위원으로 신익희, 이광수, 조소앙 세 사람을 뽑아 심사보고를 하도록 하고, 다시 회의를 통해 몇 개 조항을 개정한 후 임시헌장을 의결했다. 임시헌장에는 서두에 헌법 전문 형식의 선포문을 두어, 임시정부가 3·1운동과 국민의 신의로 수립되었으며 완전한 자주독립을 후대에 전하기 위해 임시헌장을 선포한다는 뜻을 밝혔다. 10개 조로 구성된 임시헌장은 국체와 정체, 기본권 등에 관한 규정을 담았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이라는 제1조이다.마지막으로 선서문과 정강을 채택했다. 선서문에서는 3·1운동을 찬양하고 임시정부가 국토 광복의 사명을 이행할 것임을 다짐했고, 정강으로는 민족·국가·인류의 평등을 널리 알리고 절대독립을 맹세코 도모할 것 등 6개 항을 정했다. 이상으로 임시의정원 제1회 회의를 마치고 나니, 시간은 4월 11일 오전 10시였다. 3·1운동에서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한 후 40여 일 만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됨으로써, 독립국인 ‘대한민국’을 자주적인 국민이 다스리는 ‘민주공화국’이 성립하게 된 것이다.하와이 대한독립선언서<사진01>의 「대한독립선언서」는 바로 3·1독립선언부터 임시정부 수립에 이르기까지의 사실을 한 장의 포스터에 담고 있다. 가운데에는 3·1운동의 민족대표가 준비하여 보성사에서 인쇄한 ‘3·1독립선언서’, 아래에는 임시정부에서 발행한 ‘대한민국임시정부 성립 선포문’의 원본이 재인쇄되어 있다. 한자로 쓴 ‘대한독립선언서(大韓獨立宣言書)’는 영어(The Proclamation of KoreanIndependence)로도 쓰여 있으며, 단군기원으로 표시한 ‘기원 4252년 3월 1일(紀元 四二五二年 三月一日)’의 날짜도 서기 연도와 영어(1919 AFTER NOON MARCH FIRST)가 함께 쓰여 있다.무궁화꽃 무늬로 화려하게 장식된 이 대한독립선언서는 미국 하와이의 여성단체인 ‘대한부인구제회(theKorean Ladies' Relief Society)’에서 만든 것이다. 3·1운동의 소식이 전해지자 하와이 각 지방의 여성대표 41명은 1919년 4월 1일 호놀룰루에 모여 대한부인구제회를 결성했다. 이들은 첫 사업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와 3·1운동의 민족대표 33인을 재정적으로 지원하는 기금을 모으기 위해 독립선언서를 재인쇄하여 판매하기로 하고, 350달러를 들여 호놀룰루 애드버타이저 출판사(Honolulu Advertiser Publishing Company)에서 약 61×79㎝ 크기의 포스터 3,000장을 컬러 인쇄했다. 3·1독립선언서와 민족대표 33인의 명단, 임시정부의 각료 명단과 임시헌장을 한 장에 담은 대한독립선언서는 한국인뿐 아니라 미국인들에게도 팔렸으며, 판매 수익금 2,200달러 중에서 800달러는 임시정부 국무총리 이승만이 워싱턴에 설립한 구미위원부로 보냈다. 이후에도 대한부인구제회는 떡과 엿을 만들어 파는 등의 모금 활동을 벌여 임시정부와 구미위원부를 지원했다. alt<사진02> 제1 차 한인회의(First Korean Congress) 표지와 속표지.제1차 한인회의의 회의록으로, 영문으로 만들어 미국사회에 널리 홍보했다. 1,000부 중 500부는 무상으로 한인과 미국의 각 기관과 단체에 보내고, 나머지는 1달러씩 받고 팔았다. 다음의 사진(03~07)들은 이 회의록에 수록된 것이다alt<사진03> 리틀극장 앞의 참가자들 alt<사진04> 리틀극장에서 독립기념관까지의 시가행진alt<사진05> 독립기념관 앞에 도착한 참가자들 alt<사진06> 1776년 미국 독립선언이 이루어진 방에서의 서재필alt<사진07> 조지 워싱턴이 헌법 서명을 주재하며 앉았던 의자에 앉아있는 이승만alt<사진08> 시가행진 때 사용했던 태극기. 대나무 깃대에 구리로 만든 화살촉 모양의 깃봉이 달려 있으며, 서재필기념재단에서 한국 독립기념관에 기증하였다 필라델피아 제1차 한인회의한편 미주 본토의 한인들은 조국에서 3·1운동이 일어나고 임시정부가 수립된다는 소식이 들리던 무렵, 미국 사회를 향해 대규모의 선전외교활동에 나섰다. 서재필과 이승만은 1919년 4월 14일부터 16일까지 필라델피아에서 제1차 한인회의(First Korean Congress, 일명 한인자유대회)를 개최했다. 필라델피아는 미국이 1776년 7월 4일 독립선언을 했던 독립기념관(Independence Hall)이 있는 곳으로서, 한국의 3·1독립선언은 미국 독립선언의 기억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다. 당시 필라델피아에서 인쇄와 문방구점(Philip Jaisohn & Company)을 운영하는 성공한 사업가로 활동하고 있던 서재필은 이번 회의의 의장으로 선출되어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활동을 주도했다. 한말 갑신정변에 참여했다가 실패하고 미국으로 망명하여 의사로 생활했으며, 잠시 한국에 돌아와 『독립신문』과 독립협회를 만들어 개화운동을 전개하다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던 그는 3·1운동을 계기로 독립운동의 전면에 나섰던 것이다.필라델피아 시내 리틀극장(The Little Theatre)에서 진행된 제1차 한인회의에는 약 150명의 한인이 참가했다. 당시 북미 한인의 숫자가 약 1,500명에 불과했음을 감안할 때 상당수의 사람이 참석한 것으로, 그들 중 많은 수가 미국 중·동부 지역의 유학생들이었다. 회의는 3일간 매일 오전 오후로 나뉘어 진행됐다. 오전 9시30분부터 필라델피아 성삼위일체(Holy Trinity) 교회의 톰킨스(Floyd W. Tomkins) 목사, 오하이오주 오벌린(Oberlin) 대학 밀러(Herbert A. Miller) 교수, 필라델피아『이브닝 레저(Evening Ledger)』지의 베네딕트(George Benedict) 기자 등 미국 사회 유력 인사들의 초청 강연이 있었다. 오후 1시 30분부터 주제별로 각위원회가 준비한 결의문과 호소문에 대한 발표 및 토의가 이어졌다. 결의문과 호소문은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보내는 결의문」, 「워싱턴의 미국 적십자본부에 보내는 호소문」, 「미국 국민에게 보내는 호소문」, 「한국인의 목표와 열망」, 「일본의 지각있는 국민에게 보내는 결의문」,「미국 대통령과 파리강화회의에 보내는 청원서」 등이다.16일 마지막 회의를 마친 후 4시 정각에 참석자들은 태극기와 미국 국기를 양손에 들고 독립기념관을 향해 시가행진을 시작했으며, 필라델피아시에서 제공한 1개 예비군 소대와 악대가 선두에서 행렬을 이끌었다. 독립기념관에 도착한 일행은 미국의 독립선언서와 헌법이 서명되었던 방으로 들어갔고 당시의 의자와 탁자, 잉크병이 그대로 놓여있는 그곳에서 임시정부의 대표자로 선임된 이승만이 3·1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이어 함께 만세삼창을 한 후 방을 나와 1776년 미국의 독립선언을 알렸던 ‘자유의 종’을 오른손으로 쓰다듬으며 그 옆을 지났다. 독립기념관 앞에서의 기념촬영을 끝으로, 1919년 4월 16일 오후 5시 제1차 한인회의는 3일간의 모든 일정을 마치고 막을 내렸다.한인회의는 필라델피아시 당국의 협조와 함께 신문사에서도 적극적으로 여론을 일으켜 주었다. 16일자『필라델피아 레코드(Philadelphia Record)』지에서는「한국의 독립」이라는 제목으로 “한국은 독립을 얻을 자격이 있으며, 우리는 그들이 독립을 얻기를 바란다”는 사설을 실었고, 17일 자에는 대회 마지막 날 시가행진과 독립선언 행사를 상세하게 보도했다. 제1차 한인회의의 성과는 한국의 독립문제를 알리고 지원할 ‘필라델피아 한국통신부’와 ‘한국친우회’의 결성으로 이어졌다.그들이 떠난 조국으로부터 지구 반 바퀴를 돌아 닿는 곳에 살고 있던 미주 한인들은 3·1독립선언에 이어 임시정부가 수립된 것에 고무되어, 조국의 완전한 독립을 위해 자신들이 실천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독립운동을 재정적으로 지원하는 일, 미국 사회에 여론을 불러일으키는 일을 행동목표로 정하고, 스스로 부과한 책임과 의무를 다하고자 했다.]]> Fri, 29 Mar 2019 13:22:18 +0000 28 <![CDATA[백미대왕 김종림의 비행 역사를 만든 사람]]>     글 임영대 역사작가백미대왕 김종림의 비행 김종림은 1906년에 미국으로 이주하여 철도 건설 노동자로 일하다가 캘리포니아에서 벼농사를 시작하였다. 벼농사로 막대한 돈을 번 김종림은 임시정부가 미국에서 한 해 동안 거둔 독립의연금의 10%를 혼자서 낼 정도로 독립운동 지원에 열의를 보였고, 순전히 혼자 힘으로 항공학교를 세워 독립전쟁을 위한 비행사를 양성하였다. 1973년에 사망하였고 200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2009년에 대전 국립현충원으로 봉환되었다. 비행기로 민심을 격발하고 장래 국내의 대폭발을 일으키기 위함이라이민을 꿈꾸는 사람은 지금도 많다. 하지만 오늘날 행해지는 이민 대부분은 개인의 행복을 위한 선택이다. 학업, 취업, 여행 등 본인이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외국에서 새로운 삶의 기회를 찾는다.20세기 초에는 그러지 못했다. 당시 한국은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해있었다. 러시아와 중국과 일본이 한반도를 노렸고,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제국주의 시대를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했다. 하지만 우리는 힘이 없었다. 유학을 목적으로 출국한 이들은 나라를 위해 하나라도 더 배우고 익히려 했다. 빈궁한 생활에서 벗어나겠다며 이주한 이들도 조국 독립에 피땀 흘려 번 돈을 헌납했다. 백미대왕(Rice King) 김종림은 그중에서도 가장 선두에 섰던 사람 중 하나다. 김종림이 본격적으로 벼농사를 짓기 시작한 시기는 1차 세계대전으로 곡물 가격이 크게 오른 때였다. 큰돈을 번 김종림은 농지를 넓혀 사업을 확장하는 동시에, 자신이 번 돈을 조국과 동포를 위해 기꺼이 내놓았다. 그가 가장 심혈을 쏟은 사업은 조종사 양성이었다."앞으로의 전쟁은 하늘을 지배하는 자에게 승리가 있습니다. 독립전쟁을 위해서는 우리에게도 공군이 있어야 하며, 궁극적인 목표는 일본 도쿄 폭격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젊은 조종사들을 많이 양성해야 합니다."상하이 임시정부 초대 군무총장이었던 노백린은 하와이 등 재미 한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지역을 순회하며 이렇게 강연했다. 이미 1913년에 미국 지부가 창립될 시점부터 흥사단과 관계하고 있던 김종림은 1920년 초에 노백린을 만나면서 자신이 번 돈을 제대로 쓸 곳을 찾았다.해방된 조국의 하늘을 위하여김종림은 자신의 농장이 있던 캘리포니아 북부 윌로우스(Willows) 지역의 40에이커(약 162,000㎡) 토지를 비행학교 설립부지로 기부했다. 그리고 설립 자금으로 2만 달러를 내놓았다. 훈련에 쓸 비행기를 구입하고 미국인 비행 교관을 고용했으며 매년 들어가는 운영비 3만 달러 역시 자신이 부담하기로 했다. 학생들의 숙식비와 수업료도 그가 맡았다.학교가 문을 연 것은 1920년 2월 20일이었다. 그 전해에 샌프란시스코 인접 도시인 레드우드(Redwood)에서 문을 열었던 레드우드 비행학교의 미국인 교관과 한인 졸업생들, 그리고 미국 내 다른 비행학교에서 비행기를 배운 이들이 교관으로 초빙되었다.김종림은 이 학교의 총재를, 노백린은 총무를 맡았다. 이 외에도 여러 한인이 학교 운영에 참여했으며, 흥사단 이사장 안창호도 비행기에 의지와 집념이 있어서 학교를 자주 찾았다. 개교하던 시점에 입교한 학생 숫자는 15명이었지만 3월에는 24명, 6월에는 30명으로 늘어났다."비행사 중에 다친 사람이 있을 때는 두려움도 없지 않으나, 다시 정신을 가다듬고 비행기에 올라 태평양에 높이 떠서 쥐 같은 왜왕의 머리를 부술 예상을 느낄 때는 대한공화국 만만세 소리가 절로 나온다."한인들에게는 실로 자랑스럽고 희망찬 일이었지만, 비행학교 주변에 거주하는 미국인들은 추락사고를 염려했는지 비행학교 운영에 부정적이었다. 그래도 학생들은 장차 조국 광복에 보탬이 되리라는 확신을 품고 최선을 다해 조종을 익혔다. 1920년 7월 7일에 첫 졸업식이 있었고, 우병옥, 오림하, 이용선, 이초 등 4명이 졸업 후 교관으로 특채되었다.그러나 비행학교는 출발 직후부터 난관을 겪어야 했다. 학교 후원자인 김종림은 쌀농사를 통해 수입을 얻었다. 그런데 1918년 1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전쟁 중 올랐던 쌀값이 급락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1920년 가을에 몰아닥친 폭풍우가 하필이면 추수 전의 윌로우스를 강타했다. 한 해 수확을 모조리 잃은 김종림은 엄청난 타격을 받았고, 당연히 비행학교 운영에도 심각한 지장이 생겼다. 김종림의 사업이 회복되지 못하면서 큰 후원자를 잃은 윌로우스 비행학교는 끝내 문을 닫았다.학교가 문을 닫은 뒤에도 하늘을 날아 조국을 되찾겠다는 꿈은 모두의 마음속에서 이어졌다. 뿔뿔이 흩어진 교육생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오늘날 대한민국 공군도 공식적인 창설 연원을 윌로우스 비행학교로 두고 있다.김종림 역시 이후에도 한인공동회, 조선의용대 미주후원회, 북미지방동지회 등에 계속 관여하면서 조국 광복과 민족의 발전을 위해 꾸준히 노력했다. 태평양전쟁 때는 두 아들을 전선에 보내고 자신도 주방위군에 입대하였다. 1971년에는 외무부 장관 명의의 표창장을 받았으며, 평화로운 만년과 함께 눈을 감았다.]]> Fri, 29 Mar 2019 09:47:34 +0000 28 <![CDATA[세계로 간 한국인들 우리가 만난 얼굴]]>     세계로 간 한국인들   일제강점기 해외로 간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고향을 뒤로한 채 낯선 땅으로 향하는 열차와 배에 몸을 실었습니다. 식민지 조국에서의 삶만큼이나 타지에서의 생활은 녹록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버텼던 이유는 다시 만날 가족과 돌아갈 나라가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대한독립만세의 외침은 해외에서도 너울거렸습니다. 고향을 향한 사무친 그리움을 딛고 독립의 염원은 자라났습니다. alt]]> Thu, 28 Mar 2019 16:34:45 +0000 28 <![CDATA[공립협회의 신민회 결성과 해외 독립군기지 개척 한국인의 터전 : 미주 편]]>     글 홍선표 나라역사연구소 소장공립협회의 신민회 결성과해외 독립군기지 개척   하와이와 북미의 한인들이 추진한 포츠머스강화회의 국제외교는 비록 성과는 바로 나타나지 않았으나 민간 주도의 국제외교를 처음으로 시도한 점에서 큰 의의가 있었다. 그리고 국권회복을 간절히 바라는 국내외 한인들에게 적지 않은 반응을 일으켰다. 이 가운데 샌프란시스코에 본부를 둔 공립협회는 매우 활발한 움직임을 보였다. alt공립협회 창립 위원(앞줄 왼쪽부터 송석준·이강·안창호, 뒷줄 왼쪽부터 임준기·정재관)대한신민회의 발기을사늑약 이후 대한제국에 망국의 암운이 점차 짙어지자 공립협회는 피동적인 ‘백성’이 아닌 주체적인 ‘국민’된 신분만이 위기에 빠진 국권을 회복시킬 수 있다며 공화주의 사상으로 무장하기 시작했다. 즉, 국권회복의 주체가 계몽의 대상으로 간주한 ‘백성’이 아니라 주권을 가진 ‘국민’이 될 때 국권회복을 이룰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이때의 국권회복은 국민이 주체가 된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는 꿈이었다. 이러한 꿈은 1906년부터 제기되다 1907년 1월 초 대한신민회의 발기로 그 윤곽을 드러냈다.대한신민회(大韓新民會)는 1907년 1월 초 캘리포니아주 리버사이드에서 안창호·이강·임준기·신달윤·박영순·이재수 등 공립협회 요인들이 발기한 조직이다. 참여자들은 구체적인 설립 방향과 내용을 담은 「대한신민회취지서」, 「대한신민회의 구성」, 「대한신민회통용장정」을 작성했다. 대한신민회를 발기한 것은 국내에 공립협회 지부를 설립하기 위한 방안에서 나왔으나 단순히 지부 설립만 의도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국민(新民)’에 의한 부강한 문명국가를 꿈꾸며 추진되었다. 대한신민회의 설립 취지를 보면 ‘새로운 사상(신사상)’으로 ‘새로운 단체(신단체)’를 만들어 장차 ‘새로운 국가(신국)’를 건설하기 위함이라 했다. 이에 따라 국민과 산업을 새롭게 탈바꿈(유신)해 자유문명국을 수립하는 데 설립 목적을 두었다. 새로운 국가인 자유문명국이란 바로 공화주의 정치체제를 갖춘 자주독립국의 건설을 의미한다. 이런 원대한 꿈을 이루기 위해 공립협회는 일본의 태극학회, 해삼위의 흥학회, 국내의 대한자강회·서우학회·기독청년회 등과 일치단결해 중추적인 역할을 감당하기로 계획하였다.비밀결사 신민회의 결성공립협회의 원대한 포부는 1907년 1월 공립협회 회장 안창호를 전권위원으로 삼아 국내로 파견하면서 본격 추진되었다. 안창호는 1907년 2월 20일 국내에 들어와 대한신민회의 기본 방침에 따라 양기탁·이동휘·이종호·이갑·전덕기·이동녕 등과 신민회를 조직하는 데 주력했다. 국내에서 설립하기로 한 신민회는 조선통감부의 엄격한 통제에서 벗어나고자 비밀결사 형태로 추진되었고, 1908년 1월에 가서야 그 조직을 완성할 수 있었다. 신민회의 설립이 힘들었던 것은 공립협회와 신민회 간의 위상 정립 문제, 새로운 국가 건설 방향인 공화제 수립 문제, 비밀결사의 여부 문제 등을 둘러싸고 국내 인사들과 오해와 갈등이 있었기 때문이다.신민회 창립을 추진할 때인 1907년의 국내 상황은 격심해진 일본의 침략과 통제로 대한제국 정부와 한국민들이 제대로 숨쉬기조차 어려울 정도였다. 1907년 헤이그 특사사건으로 그해 7월 광무황제를 강제 퇴위시키면서 나온 정미7조약(07.24.), 언론 탄압을 위해 만든 신문지법(07.25.), 집회와 결사의 자유를 금지한 보안법(07.27.), 그리고 항일무장투쟁을 막기 위한 군대 해산령(07.31.) 등 강력한 조치들이 잇달아 발표된 것이다.국내 상황이 날로 악화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립협회는 더 많은 인재와 요인들을 국내로 파견하였다. 1907년 국내로 파견된 인물은 안창호 외에 락스프링스지방회장 황국일(06.11.), 이강(08.27.), 이재명(10.09.), 오대영(10.16.), 임치정(10.25.)이었다. 신민회가 창립될 때인 1908년 1월에는 이교담·김성무가 파견되었고, 이후 서기풍·김병록·노형찬·백원보 그리고 장인환과 함께 스티븐스를 처단해 재판받은 전명운도 파견되었다. 공립협회가 합성협회와 통합하고 국민회 북미지방총회로 개편된 직후인 1909년 4월에는 북미지방총회장 정재관과 헤이그 특사 이상설이 원동지방 전권위원으로 파견되었다.연해주 진출과 독립군기지 개척1907년부터 1909년에 걸쳐 공립협회의 주요 요인들이 국내와 연해주로 파견된 것은 국내 신민회 결성과 활동을 돕기 위한 것과 아울러 연해주 각지에 공립협회의 활동지대를 확장하기 위함이었다. 특히 연해주에 집중한 이유는 광무황제 강제 퇴위와 군대 해산령 이후 제기된 새로운 독립군기지 건설을 위한 신민회의 방략과도 맞물려 있었다. 그러한 신민회의 목적은 1911년 일제의 조작으로 일어난 소위 105인 사건의 심문 과정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이밖에도 이재명은 샌프란시스코에서 일어난 장인환·전명운의 스티븐스 처단 의거에 힘입어 국적(國賊) 이완용을 처단하는 데 앞장섰다. 이는 국내 민중들에게 당시 미주 한인들의 강렬한 항일투쟁 의지를 잘 보여준 사건이었다. 연해주로 파견된 공립협회 요인 중 이강과 김성무는 블라디보스토크를 중심으로 활동하며 공립협회의 활동 영역을 확장시켰다. 이강은 1908년 3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최봉준과 『해조신문』 발간에 참여한 후 그해 9월 29일 수청(빠르티잔스크)에 공립협회 수청지방회를 설립하였다. 이를 토대로 1911년 1월 12개의 지방회를 가진 대한인국민회 수청지방총회가 만들어졌다. 1909년 1월 7일 김성무는 이강과 함께 블라디보스토크에 공립협회 지방회를 만들었는데 이후 이것은 1911년 10월 9개의 지방회를 거느린 시베리아지방총회로 발전하였다. 공립협회는 1908년 10월 21일 본사를 블라디보스토크에 두고 미국과 하와이에 지부를 가진 아세아실업주식회사를 설립했다. 이 회사는 국민회 설립 이후 1909년 3월 태동실업주식회사로 변경되었는데, 회사 설립은 공립협회가 추진한 독립군기지 개척에 투자하기 위함이었다. 독립군기지 개척계획은 1910년 7월 안창호·이갑·유동열·신채호·이강·이종호 등이 독일 조계지 청도에서 결의한 이후 길림성 밀산부의 봉밀산을 중심으로 본격화 되었다. 봉밀산의 독립군기지 개척사업은 거듭된 흉년과 자금 부족으로 그 성과를 보지 못했다. 그러나 독립군 기지 개척사업은 공립협회가 신민회 결성과 연해주에서 추진한 공립협회 지부 확장과 마찬가지로 독립된 새로운 자유문명국을 건설하는 원대한 꿈을 이루기 위한 노력의 연장선이었다. ]]> Fri, 29 Mar 2019 13:49:21 +0000 28 <![CDATA[일제 식민지 잔재와 청산의 현주소 끝나지 않은 독립운동]]>     글 이계형 국민대학교 특임교수일제 식민지 잔재와 청산의 현주소   1945년 우리 민족은 광복을 맞았지만, 독립운동은 끝나지 않았다. 여전히 미완으로 남은 사건, 해결되지 못한 문제, 기억해야만 하는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끝나지 않은 독립운동은 독립운동사를 과거에 머문 역사가 아닌 현재의 문제로 다루며, 오늘도 신문 한쪽을 차지하고 있는 독립운동 및 일제강점 이슈를 소개한다. 우리 삶에 침투한 식민 잔재요즈음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독립운동을 새롭게 조명하려는 노력과 함께 식민지 잔재를 청산하려는 움직임도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일제의 35년간 식민통치가 우리에게 씻을 수 없는 고통과 상처를 주었는데, 아직도 그 잔재가 사회 곳곳에 남아있다는 반성이기도 하다. 수십 년간 제대로 매듭짓지 못한 친일 잔재는 유형, 무형으로 도처에 남아있다. 일제가 동화정책을 실시하며 한민족을 말살시키려 했기에 더욱 그렇다. 일제는 한국사를 왜곡시키고 일본사를 강요하였으며 한글을 가르치지 않고 한국어를 금지하는 대신 일본어로 채웠다. 한국의 역사는 일본에 비해 열등하기 때문에 자신들의 지배가 당연하며 오히려 한국에 행운이라는 약육강식의 이론을 내면화시켰다.1945년 8월, 일제 패망 이후 우리에게 해방이 찾아왔다. 할 일이 산적했다. 크게는 독립된 자주 국가도 세워야 했고 친일파를 단죄해야 했으며 작게는 일제 식민지의 잔재를 청산해야만 했다. 하지만 무엇 하나 제대로 처리되지 못한 채, 인적 요소는 물론 제도와 운영 방식, 정치·문화 등 식민지의 잔재는 한국 현대사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쳤다. 그것은 무의식중에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침투하여 삶의 일부가 되었으므로 겉으로 드러난 친일파를 청산하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었다. 양옥·양장·양복·양파 등 새로운 서양의 것에 ‘양(洋)’자를 붙여 우리의 것과 구분하려 하였지만, 서양 문물은 의외로 폭넓고 강력했다. 우리 의식주를 포함한 사회 전반에 영향을 끼친 것만 봐도 그렇다.특히 언어에 대한 영향력이 컸다. 쉬운 예로, 벤또(弁?べんとう, 도시락), 사라(皿さら, 접시), 요지(楊枝ようじ, 이쑤시개), 쓰메끼리(爪切りつめきり, 손톱깎이), 바께쓰(バケツ, 양동이) 등과 같은 단어들은 꽤 흔하게 쓰인다. 일제의 ‘조선어’ 말살에 맞서 한글학자들은 사전을 편찬하거나 ‘맞춤법통일안’ 등을 연구, 발표하였다. 그렇지만 일제가 서구의 새로운 개념을 도입하여 번역한 것을 그대로 차용한 것 또한 적지 않았다. 그것을 대체할 우리의 언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건축이나 언론 등 일부 분야에서는 일본어가 자연스럽게 쓰이고 있다. 노가다(공사판 노동자), 하시라(기둥), 하리(보), 렝가(벽돌), 고대(흙칼) 등과 사쓰마와리(경찰서 순회), 야마(요지), 미다시(제목), 우라까이(베끼기), 반까이(만회 보도) 등이 대표적이다. alt1970년대 국민학교 애국조회 장면(민족문제연구소 제공)alt일제강점기 애국조회(민족문제연구소 제공) 교육 현장의 식민 잔재와 교육계의 노력더욱 심각한 것은 한국의 미래를 짊어지고 나아갈 학생들의 교육 현장에 식민지 잔재가 적지 않다는 것이다. 일제의 군국주의식 교육 문화가 한동안 한국의 교육계를 장악한 적도 있다. 학교의 병영화(교련)와 상명하달의 불평등한 교육 구조 등. 이것들은 특히 박정희 군사독재 시기에 더욱 고착화 되었다. 학교는 국가의 통제를 잘 따르는 기관이어야 하며 규율과 규칙에 순종하고 상벌로 대열 이탈을 막아 ‘조국과 민족’에 충성을 다하는 학생을 길러내야 했다. 오죽했으면 당시에 만들어진 국민교육헌장의 첫머리가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라는 말로 시작했을까?이러한 군국주의식 교육 문화는 그동안 자정노력을 통해 극복되어 왔다. ‘천황에게 충성하는 황국신민’이라는 뜻의 ‘국민학교’가 51년 만에 ‘초등학교’로 바뀌었고, 애국조례, 학교장 훈화, ‘차렷·경례’ 등의 문화도 사라지고 있다. 많이 늦기는 했어도 교육계가 적극 나서서 식민 잔재를 청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 남아 있는 잔재들이 많다. 해방된 지 70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친일 경력자가 작사·작곡한 교가가 불린다. 심지어 일본 군가풍의 교가를 사용하는 곳도 있다. 일제강점기에 강조되기 시작한 ‘근면·성실·협동’의 훈육적인 구호도 교훈으로 사용되고 있다. 교복 역시 일제강점기 획일적으로 학생을 강제하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았으나, 그 문화는 지금도 변함없다. 일률성과 규제에 그 어느 시기보다 민감한 청소년들에게 교복은 더할 나위 없는 구속과 통제의 상징일 뿐이다. 일본인과 한국인 학교를 구분하기 위해 붙여진 ○○제일고·○○동중학교·○○서중학교의 명칭도 바꿔야 할 것이다. 중국에서는 1945년 해방 이후 일제가 사용한 ‘유치원’이라는 용어 대신에 ‘유아원’으로 바꾸었는데 우리는 지금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민족을 넘어 세계로, 우리 문화의 힘고려시대에 원나라로부터 100년 가까이 내정 간섭을 받은 때가 있었다. 당시 몽골족의 변발과 호복(胡服)이 고려 지배층 사이에서 유행하였다. 공민왕이 자주적인 국권을 회복하고자 반원 정책을 추진하여 몽골풍을 폐지하기도 하였지만, 그 흔적은 현재 우리 주변에서도 찾을 수 있다. 상대를 낮춰 부를 때 쓰는 ‘○○치’라는 단어가 그러한 예인데, 벼슬아치·양아치·장사치 등이다. 본디 몽골에서는 ‘○○치’가 사람을 표현하는 말이라 한다. 문화접변은 어쩔 수 없다고 하지만 일제강점기의 문화는 식민 문화였고 한민족을 말살하기 위해 일제가 강제한 측면이 강하다. 이것은 힘에 의한 문화전파이며, 어쩔 수 없는 수용이었다. 이러한 강제성 때문에 그 잔재를 청산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지금 세계는 타 문화의 영향을 받기도 하고, 우리의 문화를 전파하기도 한다. 이러한 문화 교류는 자주적이며 능동적이다. 특히 지금 우리 문화는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2018년 우리나라 아이돌 그룹 방탄소년단(BTS)은 빌보드 200에서 1위를 한 바 있으며, 전 세계적으로 2천만이 넘는 팬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자주적이며 창조적인 민족이다. 일제로부터 피동적이고 강제적으로 수용했던 문화를 우리의 것으로 다시 창조해야 한다.]]> Fri, 29 Mar 2019 11:06:25 +0000 28 <![CDATA[세기말의 억눌린 꿈과 만민공동회 우리의 오늘 세계의 그날]]>     글 강응천 기획집단 문사철 대표, 역사저술가세기말의 억눌린 꿈과만민공동회   서울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옆에 있는 독립문이 정확히 어떤 ‘독립’을 상징하는지 아는 한국인은 많지 않다. 대개는 일제강점기 유산인 서대문형무소 옆에 있으니 당연히 일본으로부터의 독립이라고 생각한다. 독립문은 1896년 독립협회가 중국에 대한 사대의 상징인 영은문을 헐고 그 자리에 짓기 시작한 기념물이다. 그렇다고 해서 독립문이 꼭 중국에 대한 독립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당시 조선을 둘러싼 열강의 이권 다툼은 극에 달해 있었다. 일국의 국왕인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해 정무를 볼 정도였다. 독립문에는 이처럼 위기에 처한 조선을 열강의 야욕으로부터 지키고 자유로운 나라로 일으켜 세우겠다는 비원(悲願)이 깃들어 있었다. alt만민공동회 민중대회 기록화alt청나라 변법자강운동을 이끈 캉유웨이 자주적 근대화의 길1897년 2월 20일 고종은 독립협회의 요청에 부응해 경운궁(덕수궁)으로 돌아갔다. 그곳에서 자주독립국을 위한 구상을 마무리한 뒤, 그해 10월 12일 국호를 대한으로 바꾸고 황제 자리에 올랐다. 그로부터 한 달이 지난 11월 20일 독립문도 완공되었다. 그러나 선언만으로 독립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었다. 러시아는 부산 앞바다의 절영도를 조차하겠다며 고종을 압박해 왔고 일본, 미국 등의 경제 침탈도 심해졌다. 이러한 위기 상황에서 정부가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자 독립협회는 민중과 함께 진정한 독립을 위해 궐기하기로 결심했다. 한국 최초의 근대적 대중 집회인 만민공동회는 그렇게 막이 올랐다. 만민공동회는 1898년 3월 10일 오후 2시 종로에서 열렸다. 모든 사람의 예상을 뒤엎고 1만 명이 넘는 민중이 참여했다. 이 집회에서 정치인으로 데뷔한 이승만을 비롯해 수많은 인사가 연단에 올라 러시아를 비난했다. 민중의 엄청난 열기에 놀란 러시아는 절영도를 조차하려는 계획을 일단 철회했다. 비록 일시적이었지만 대한제국, 독립협회, 열강 모두에게 민중의 힘을 절감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같은 시기 이웃 청나라에서는 변법자강운동이라는 자주적 근대화 개혁이 전국을 휩쓸고 있었다. 27살의 젊은 황제 광서제가 발탁한 캉유웨이, 딴스퉁, 량치차오 등 젊은 관료들이 일으킨 바람이었다. 캉유웨이는 청나라가 중대한 갈림길에 서 있다며 개혁만이 살길이라고 광서제를 설득했다. 그는 유럽의 폴란드가 주변 열강에게 야금야금 분할 당하다가 마침내 지도에서 사라진 것을 상기시켰다. 청나라의 운명도 그와 같이 되지 말라는 법이 없다면서 사태의 심각성을 알린 것이다. 캉유웨이가 개혁의 모범으로 삼은 나라는 일본이었다. 일본이 메이지유신을 단행하면서 서구의 근대 문물을 받아들여 강대국으로 탈바꿈하고 있으니, 청나라도 그 예를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본이 서양의 헌법 체계를 받아들이면서도 천황 체제를 유지했듯이, 청나라도 전통 유교와 황제 체제 아래 개혁을 적극적으로 추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변법자강의 뜻을 알리는 광서제의 담화문이 발표되고 광업과 상업 등 산업을 일으킬 관청이 속속 설치되었다. 서구의 기술을 받아들일 인재를 키우기 위해 국립대학인 경사대학당도 들어섰다. 청나라가 자주적 근대화를 시도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1842년 아편전쟁의 쓴맛을 본 뒤로 1860년대부터 쯩궈판, 리홍장 등을 중심으로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자는 양무운동을 벌인 바 있었다. 하지만 중국의 낡은 제도를 그대로 둔 채 군수산업을 중심으로 펼친 개혁은 1884년 프랑스, 1895년 일본과 벌인 전쟁에서 연이어 패함에 따라 빛을 잃고 말았다. 이에 제도 자체를 뜯어고쳐 서양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한다는 취지로 시작된 것이 변법자강운동이었다.안타깝게도 만민공동회와 변법자강운동은 비슷한 길을 갔다. 민중의 참여로 소기의 성과를 거두는 듯하던 만민공동회는 정부 내 기득권 세력의 반발로 애초의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고종은 독립협회가 황제 권력을 부정하는 공화제를 추진한다는 일부 관료들의 모함에 넘어가 독립협회를 해산하고 개혁을 중단시켰다. 변법자강운동의 적은 어린 광서제를 대신해 나라를 통치해 오던 서태후와 그녀를 둘러싼 수구 세력이었다. 결국 서태후의 반격에 의해 변법자강운동은 성과 없이 막을 내리고 청나라는 점점 더 열강들의 먹잇감으로 전락해 갔다. alt미국의 메인호가 침몰하는 모습을 그린 기록화alt필리핀 5페소 주화에 있던 아기날도(2017년 보니파시오로 바뀌었다) 독립의 길만민공동회는 대한제국이 열강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것을 막아 보려는 안간힘이었다. 바로 그 시기에 식민지 체험이 얼마나 뼈아프고 지긋지긋한 것인지 잘 보여주는 사건이 지구 반대편에서 일어났다. 1898년 12월 10일, 라틴아메리카에서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에스파냐의 식민지 쿠바가 마침내 독립한 것이다. 물론 독립이 저절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1895년 2월부터 에스파냐를 상대로 치열한 독립전쟁을 벌인 끝에 얻어낸 소중한 결실이었다.독립을 이룩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지만 독립을 지키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쿠바는 독립하자마자 새로운 위협에 직면했다. 쿠바가 에스파냐를 상대로 한 독립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미국의 결정적인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1898년 2월 15일 쿠바의 아바나항에 정박 중이던 미국 군함 메인호가 원인 불명의 폭발로 가라앉자, 미국은 에스파냐에 선전포고하고 쿠바와 함께 싸웠다. 그러나 정작 쿠바가 독립하자 이번에는 미국이 쿠바에 세력을 뻗으려 했다. 미국은 질서 회복과 학교·도로·교량 등의 건설을 내세워 쿠바에 군대와 기업을 진출시키고, 이 나라를 자신의 보호국으로 만들려는 계획을 진행했다. 쿠바가 완전한 독립으로 가는 길은 아직 멀고도 험난했다.이듬해 1월 23일 이번에는 아시아에서 또 하나의 에스파냐 식민지가 독립을 선포했다. 혁명의회가 헌법을 승인함에 따라 필리핀이 아시아 최초의 공화국으로 독립한 것이다. 혁명정부의 대통령으로 선출된 아기날도는 1892년 필리핀의 완전한 독립을 주장하며 마닐라에서 결성된 혁명 조직 카티푸난의 지도자였다. 카티푸난은 1896년 노동자와 농민이 대다수인 10만 명의 회원을 확보하고 에스파냐에 대해 무력 투쟁을 벌이는 필리핀혁명을 일으켰다. 혁명 과정에서 아기날도는 필리핀의 독립을 선언하고, 이듬해 3월 혁명정부의 수반이 되었다. 아기날도는 필리핀 총독 프리모 데 리베라의 회유책에 말려들어 잠시 홍콩으로 망명하기도 했지만, 1898년 4월 에스파냐와 미국 사이에 전쟁이 터지자 즉시 귀국했다. 그리고 미국과 힘을 합쳐 에스파냐와 싸운 끝에 혁명의회를 구성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에스파냐와 전쟁을 벌인 미국의 속셈은 쿠바와 필리핀에서 서로 다르지 않았다. 미국은 에스파냐와 종전 협상을 하면서 괌, 푸에르토리코와 더불어 필리핀을 에스파냐로부터 양도받았다. 결국 미국이 아기날도와 힘을 합쳐 에스파냐와 싸운 것은 필리핀에서 에스파냐 세력을 제거하기 위함이었지 필리핀을 해방시킬 목적은 아니었던 것이다. 아시아 최초의 공화국으로 우뚝 선 필리핀은 에스파냐의 식민 지배를 종식했지만, 하루아침에 동맹국에서 침략자로 돌변한 미국과 새로운 전쟁을 치를 위기를 맞았다. 쿠바가 그랬던 것처럼 필리핀이 완전 독립으로 가는 길은 쉽지 않았다. 쿠바와 필리핀의 사례가 대한제국에 주는 교훈은 분명했다. 가능하면 처음부터 강대국의 식민지가 되는 길은 피해야 한다는 것이다. 감언이설에 속아 넘어가든, 힘에서 밀리든, 일단 한 번 지배를 받게 되면 독립을 쟁취하기까지 치러야 하는 대가는 상상 이상이었다. 더욱이 수천 년간 독립을 유지해 온 한국인에게 남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고통은 쿠바나 필리핀보다 훨씬 더 클 것이 틀림없었다. 꿈은 이루어진다?만민공동회와 변법자강운동이 좌절하고 쿠바와 필리핀의 독립에 브레이크가 걸린 상태에서 19세기는 저물었다. 바로 그때 독일의 한 의사가 지금까지 없던 충격적인 책을 세상에 내놓았다. 지그문트 프로이트라는 의사가 발표한 책의 제목은 『꿈의 해석』. 그동안 꿈에 대한 해석이 없지는 않았지만, 대개는 미래에 대한 예지 따위가 담긴 신비로운 현상으로 보는 데 그치곤 했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꿈의 연구를 통해 인간의 심리 세계를 체계적으로 분석하고 꿈을 무의식의 활동으로 보는 파격적 결론에 도달했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꿈은 억압되고 억제된 소원의 위장된 성취이다. 다시 말해 인간이 의식적으로는 차마 드러내 놓고 추구하지 못하는 은밀한 욕망을 꿈속에서 표출한다는 것이다. 이 같은 프로이트의 진단은 그동안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무의식의 세계에 메스를 들이대어 인간이라는 존재의 복잡한 본질에 한 걸음 더 다가갔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의 주장대로라면 밝고 떳떳한 모습으로 포장된 의식은 인간의 정신세계에서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그러한 의식 이면에 어둡고 은밀하지만 솔직한 모습의 거대한 무의식이 똬리를 틀고 있는 셈이다. 20세기 벽두에 나타난『꿈의 해석』은 세기 전환기의 인류 사회에 대한 은유도 제공한다. 당시 세계를 이끌고 있던 열강들은 밝고 진보적인 세계에 대한 전망을 제시하며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억눌리고 왜곡된 식민지와 종속국 민중의 욕망이 거대한 규모로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의 억눌린 욕망이 떳떳한 시민권을 얻을 때까지 피로 얼룩진 인류 사회의 백일몽은 계속될 것이었다.]]> Fri, 29 Mar 2019 14:17:25 +0000 28 <![CDATA[봄에 취하다 천년고도 경주 이 땅의 숨결]]>     글·사진 임운석 여행작가봄에 취하다천년고도 경주   봄볕에 고양이처럼 축 늘어진 시간의 흔적들. 볕은 따습고, 바람은 훈훈하다. 4월 어느 날, 경주는 봄기운으로 충만하다. 꽃비가 휘날리는 봄날이다. 천년고도 경주는 예나 지금이나 봄나들이 명소로 손꼽힌다. 특히 요즘은 서쪽에서 불어오는 미세먼지를 피해 한반도 동쪽에 자리한 경주에 여행자들이 모여들고 있다. 이른바 ‘미피족(미세먼지를 피해 떠나는 사람들)’이다. 시야가 탁 트인 맑은 봄날이라면 만사를 제쳐두고 경주로 떠나야겠다. alt경주 보문호의 낭만을 더하는 오리배alt대릉원 담장에서 여행을 기록하는 여행자 경주 보문호, 아름다운 봄을 예찬하다경주는 낯설지 않은 곳이다. 수학여행·소풍·MT·수련회·신혼여행 등 경주를 여행했던 이유는 세대·성별에 따라 각양각색이다. 그래서일까, 경주에 발을 디디는 순간 기억 저편에 숨어 있던 크고 작은 기억의 편린들이 퍼즐을 맞추듯 멋진 집으로 완성된다. 그것이 아름다운 추억이든 그렇지 않든, 경주는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새로운 봄을 선사한다. 1998년에 개봉했던 영화 <해피 투게더>는 당시 역대급 스타였던 장국영, 양조위가 주연해 화제가 되었다. 영화의 원제는 ‘춘광사설(春光乍洩)’이다. ‘잠깐 비치는 봄 햇살’을 뜻한다. 영화가 담고 있는 참 의미는 ‘사랑은 인생에서 구름 사이로 잠깐 비치는 봄 햇살처럼 지나가 버린다’라는 메시지이다. 봄 한가운데 있지만 너무나 짧아서 깨닫지 못하다가 뒤늦게 봄이 지나갔음을 눈치채듯, 사랑받을 때 사랑을 알지 못하고 사랑이 떠나갔을 때 아쉬워하는 게 인생인 것이다.산수유꽃이 겨울과의 이별이라면, 벚꽃은 봄꽃의 대명사이다.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보문호는 2015년 ‘한국관광의 별’에 선정됐었다.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가 선정하는 최고의 영예를 거머쥔 것이다. 경주의 대표적인 관광단지라는 점에서 솔직히 늦은 감이 있다. 보문호는 경주에서 대릉원 주변과 함께 봄을 만끽하기에 가장 좋은 곳이다. 호수에는 바람이 강해 분홍빛 꽃송이가 눈발처럼 휘날린다. 보문호를 찾는 사람들은 해마다 다르지만 변하지 않는 게 있다. 보문호를 유유히 오가는 오리배와 아름드리 벚나무가 그렇다. 보문호 전 구간에 자전거 라이딩 코스가 조성되어 있다. 총거리 6.1km에 이른다. 이 중에서 현대호텔·콩코드호텔·조선호텔을 잇는 3.2km의 코스는 호수를 따라 이어진다. 주변 경관이 아름다운 것은 물론이고 자전거 전용도로여서 안전하다. 자전거는 보문호 관광단지 상가에서 빌릴 수 있다. alt울창하게 조성된 대릉원 소나무숲한철 꽃보다 사철 소나무가 매력적인 대릉원보문호에서 10km가량 떨어진 대릉원은 경주 고분군들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고 넓다. 공원처럼 잘 조성된 능원을 따라 곱게 핀 벚꽃도 아름답지만 하늘을 덮을 정도로 무성한 소나무도 매력적이다. 무엇보다 여행자들이 쉼과 여유를 챙길 수 있어 좋다. 숲이 깊은 탓에 나무 밑동 주변에는 아직 봄기운이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했지만, 길섶에는 봄의 울림이 전해진다. 산책길을 걷노라면 소나무의 위엄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마치 호위무사의 보호를 받으며 걷는 기분이랄까. 대릉원 깊숙이 들어가면 소나무가 비켜서고 매화나무, 산수유나무, 벚나무가 연이어 모습을 드러낸다. 곧이어 하늘이 열리고 나지막한 기와 담장 뒤에 곤히 잠든 것처럼 보이는 능이 보인다. 신라 제13대 왕인 미추왕릉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미추왕은 재위 23년 만에 대릉에 장사지냈다’ 하였다. 그래서 이곳을 ‘대릉원’이라 부른다. 대릉원의 주인이 미추왕인 것이 밝혀지지 않았을 때는 이곳을 ‘죽릉’ 또는 ‘죽장릉’이라 불렀다. 이곳에 유독 대나무가 많은 이유가 그 때문이다. 미추왕릉을 지나면 발굴 당시 금관과 천마도 등 수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던 천마총이 기다린다. 대릉원을 거닐다 보면 ‘공원 산책을 온 게 아닌가?’하고 착각할 수 있는데 천마총은 내부를 관람할 수 있어 그런 생각을 일소한다. 내부에는 천마도를 비롯한 다양한 부장품들이 전시돼 있다. 지난해 여름에 재개관한 덕분에 전시기법이 앞서간다.대릉원을 벗어나 내남네거리에서 황남파출소 방향으로 경주의 핫 플레이스 황리단길이 이어진다. 이 거리는 불과 2년 전만 해도 문화재 보존지역으로 묶여 건물의 증·개축이 어려웠다. 그런 탓에 점집이 난무하던 경주의 대표적인 낙후지역이었다. 그러다가 옛 건물은 그대로 유지한 채 개성 넘치는 카페와 음식점, 공방 등이 하나둘씩 들어서기 시작하더니 경주의 새로운 명물 거리로 자리 잡았다. SNS에 소문난 곳으로는 오픈 전부터 줄 서서 기다리는 ‘기와양과점’, 외국인들의 입맛을 놀라게 한 ‘987 PIZZA@BEER’, 이색기념품을 판매하는 ‘배리삼릉공원’, 한복대여점 ‘경주한복판’ 등이 있다. alt신라건축의 정수, 첨성대alt경주 반월성과 첨성대 앞에 조성된 꽃밭과 능들 봄꽃 따라 흐르는 소경황리단길을 벗어나면 화사한 꽃들이 물 흐르듯 느린 풍경을 자아낸다. 발걸음은 온화한 봄날의 소경들을 따라 이어진다. 첨성대 주변에는 샛노란 유채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첨성대를 가리켜 ‘우주를 향한 신라인의 창’이라 부른다. 즉 신라인들의 세계관과 우주관이 응집된 건축물이란 뜻이다. 옛 신라인들은 첨성대에서 밤하늘의 별을 헤아리고 국운을 점쳤으리라. 그것은 우주를 향한 동경이었을 수도,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방편이었을 수도 있다. 그 목적이 무엇이든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것은 우주에 대한 호기심이 아닐까.내친김에 계림을 거쳐 반월성까지 돌아본다. 향긋한 유채꽃 향이 벚꽃 향과 버무려져서 봄기운을 돋운다. 계림은 왕버들, 느티나무 등 고목이 울창한 숲이다. 원래는 시림(始林)이라 하였으나 김씨의 시조 김알지가 이 숲에서 태어날 때 ‘숲에서 닭이 알렸다’라고 해 계림(鷄林)이라 부르게 되었다.숲을 나서면 오른쪽에 토성으로 지어진 반월성이 있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파사왕 22년에 금성 동남쪽에 성을 쌓아 월성이라 불렀다’고 전한다. 성을 중심으로 궁전이 자리했다지만 지금 남은 것은 조선 시대에 축조된 석빙고뿐이다.가파른 비탈을 내려서면 국립경주박물관에 닿는다. 외관에서 신라 화랑의 기백이 느껴진다. 흔히 에밀레종으로 알려진 성덕대왕신종도 여기서 볼 수 있다. 실내에 전시된 유물들 역시 허투루 볼 게 아니다. 천년왕국이니 그 속에 감춰뒀던 역사가 얼마나 많겠는가. 국보와 보물을 챙겨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alt경주 동궁과 월지는 주경보다 야경이 특히 아름답다낮과 밤이 다른 신라의 봄천년을 이어온 왕실의 권위는 밤에도 불을 꺼트리지 않는다. 동궁과 월지는 해 질 녘에 찾아야 제격이다. 흔히 동궁과 월지를 ‘안압지’로 알고 있다. 학교에서 그렇게 배웠다. 안압지(雁鴨池)는 신라 멸망 이후 시인 묵객들이 폐허가 된 연못을 보며 ‘화려했던 궁궐은 간데없고 기러기와 오리만 날아든다’라며 시를 읊음으로써 기러기 ‘안(雁)’자와 오리 ‘압(鴨)’자를 써서 ‘안압지’라 부른 것이다. 그러던 것이 1980년 월지표시 토기 파편이 발견된 이후 2011년부터 동궁과 월지로 이름을 고쳐 부르고 있다. 쇠락과 폐허의 상징이었던 곳이 다시 부흥의 역사를 맞은 셈이다.동궁과 월지는 물 흐름을 따라 걷는 게 좋다. 매표소를 지나 오른쪽으로 방향을 잡은 뒤 물길을 따라 걸어가면 된다. 졸졸졸 흐르던 물은 월지에 담겨 새로운 세상과 조우한다. 고즈넉한 야경은 호수에 그림자를 만들고 작은 바람에 일렁인다. 조명이 변할 때마다 연못의 색도 따라 변한다. 낮과 밤이 다른 신라의 봄은 그렇게 깊어 간다.한편, 대릉원 일원에서는 여행자들의 편의를 위해 비단벌레 전기자동차가 운행 중이다. 계림·최씨고택·교촌마을·월정교·꽃단지 등을 경유해 약 2.9km를 돌아본다. 걸음이 불편한 어르신들과 아이들에게 권할만하다.]]> Fri, 29 Mar 2019 15:01:51 +0000 28 <![CDATA[손으로! 돈으로! 어느 독립운동가의 초상]]>     글 김정인 춘천교육대학교 교수손으로! 돈으로!   독립운동가들은 기꺼이 나라에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바쳤다. 그들의 모든 것에는 재산도 포함되었다. 생계를 위해서든, 독립운동을 위해서든 자금은 필요했기에, 소위 돈을 가진 독립운동가는 일제의 감시를 피해 국내외 활동 기지로 자금을 보냈다. 조선 제일의 부자에서 빈털터리가 되었지만, 그들은 조금도 아까워하지 않았다. 대한사람으로서의 품격 있는 삶대한민국 임시정부 기관지인 『독립신문』은 1920년 12월 25일 자에서 ‘대한사람이 남자나 여자나 한 사람도 빠지지 말고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해야할 일’여섯 가지를 제시했다.1. 달마다 얼마씩 돈을 내시오.2. 돈을 내기 위하여 한 가지 직업을 가지고 부지런히 돈을 버시오.3. 날마다 한 사람씩 당신과 같이 돈을 낼 사람을 얻으시오.4. 나랏일을 위하여 몸을 바친 이를 돕고 그의 가족을 도우시오.5. 당신이 청년이거든 곧 학교에 들어가시오. 학교에 갈 처지가 못 되거든 통신교수를 받든지 기타의 방법으로 힘 있는 국민이 되기 위하여 공부를 시작하시오.6. 당신이 애국자거든 대독립당을 세우기 위하여 힘쓰시오. 머리로 말고 손으로 돈으로.나라를 잃은 대한사람에게 독립을 위한 고귀한 삶의 길을 제시하며 마지막에 ‘손으로, 돈으로’를 강조한 점이 눈에 띈다. 하지만 그 길은 누구나 갈 수 없는 가시밭길이었다. 이처럼 자신의 몸은 물론 자신이 가진 재산마저 아낌없이 내놓으며 독립운동에 헌신하고 비극적인 죽음을 맞은 독립운동가들을 떠올려 본다. alt러시아 우수리스크에 있는 최재형기념관alt최재형(오른쪽)과 그의 형(왼쪽), 조카(가운데) 최재형, 국권회복을 위해 총을 든 사업가최재형은 노비 출신으로 1860년 함경북도 경원에서 출생했다. 9살이 되던 해에 극심한 흉년을 견디지 못하고 가족이 러시아 연해주로 이주했다. 그는 러시아 학교에 다니던 중 가출해 한동안 상선의 선원으로 살았다. 당시 최재형은 ‘표트르 세메노비츠’라는 러시아 이름을 썼다. 17살 때부터 장사를 시작해 돈을 모아 대농장을 경영했다. 또한 군납 회사를 설립하는 등 여러 사업에 잇달아 성공하면서 한인사업가로 명성을 날렸다.최재형은 연해주 한인을 이끄는 지도자로도 활약했다. 1895년부터 한인촌인 얀치혜남도소의 책임 관리직인 도헌을 맡아 13년을 일했다. 이때는 무엇보다 학교 설립에 힘썼다. 소학교는 물론 고등소학교도 설립해 졸업생 중 우등생 1명을 매년 러시아 각지로 유학 보냈다.을사조약 체결로 국운이 기울자 최재형은 이범윤과 함께 의병부대를 조직했다. 1908년 4월에는 이범윤, 이위종, 엄인섭, 안중근 등과 함께 의병부대인 동의회를 조직해 총장에 추대되었다. 의병부대 운영자금 대부분은 그의 주머니로부터 나왔다. 하지만 1909년 무렵부터는 의병부대를 이끌고 국내진공작전을 펼치는 대신 계몽운동에 나섰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발간되던 『대동공보』가 재정난으로 폐간될 위기에 처하자 이를 인수해 사장으로 취임했다.그는 대한제국이 멸망하고 연해주에서 한인결사체인 권업회가 출범하면서 총재로 선출되었다. 1919년 3월 연해주에서 출범한 임시정부인 대한국민의회에서는 외교부장에 임명되었다. 곧이어 4월 11일 상하이에서 탄생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초대 재무총장에도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대신 항일 빨치산 부대에 비밀리에 무기를 공급하기 시작했다. 1920년 3월니콜라예프스크에서 한러 연합부대가 일본군을 섬멸하는 니항사건이 일어났다. 이를 빌미로 일본이 군대를 증파했다. 일본군은 한인 독립운동을 섬멸할 계획으로 독립운동가들을 체포했다. 이때 잡혀 이송 도중인 4월 7일 탈주를 시도했다가 총격을 받아 운명했다. alt우당 이회영alt백서농장에서 일하는 신흥무관학교 학생들 이회영, 푸른 청춘의 기백으로 몸을 사르다이회영은 1867년 서울에서 대대로 높은 벼슬을 한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그는 대한제국이 기울어갈 무렵 국권회복운동에 뛰어들었다. 1907년 상동학원 학감으로 취임해 교육운동에 힘쓰며 안창호, 양기탁, 이동녕, 신채호 등과 비밀결사인 신민회를 조직했다. 신민회는 교육과 산업의 진흥에 앞장서면서 국외에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는 일을 도모했다.이회영은 대한제국이 망하자 곧바로 독립운동 기지 건설에 뛰어들었다. 1910년 12월 그를 포함한 여섯 형제와 가족 등 40여 명이 한겨울 삭풍을 뚫고 만주로 망명했다. 이때 이회영의 형제들은 오늘날로 치면 약 600억 원에 달하는 재산을 처분해 독립운동 기지 건설 자금을 마련했다. 이회영은 한인의 자치결사체인 경학사를 조직했고 독립군 양성을 위한 신흥강습소를 세웠다. 신흥강습소는 신흥무관학교로 이름을 바꿔 1920년까지 독립군을 양성했다.1919년 3·1운동이 일어날 무렵 이회영은 중국 관내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그러나 4월 11일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될 때 참여하지 않았다. 6형제 중 막내인 이시영만이 임시정부에 참여해 초대 법무총장에 선출되었다. 이회영은 임시정부가 아니라 독립운동본부를 조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을규, 이정규, 유자명과 등과 함께 아나키즘운동에 뛰어들었다. 중국 후난성에 이상마을을 건립하는 실험에 참여했고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을 조직했다. 또한 중국 아나키스트들과 연대해 상하이에 노동대학을 설립했다. 의열투쟁에도 나섰는데, 신흥무관학교 출신들로 다물단을 조직해 밀정 암살 등의 활동을 펼쳤다. 1930년에는 상하이에서 아나키스트 조직인 남화한인청년연맹을 결성했다.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중국, 일본의 아나키스트들과는 항일구국연맹을 결성하고 산하에 의열투쟁단체인 흑색공포단을 조직했다. 흑색공포단은 톈진에서 군수물자를 적재한 일본 기선을 폭파하고 일본영사관에 폭탄을 투척했다.중국 대륙을 누비던 이회영의 삶은 마지막까지 치열했다. 그는 만주로 가 일본의 괴뢰정부 ‘만주국’의 전권대사인 무토 노부요시 관동군사령관을 암살해 새로운 독립운동의 기운을 일으키고자 했다. 하지만 밀정의 밀고로 다롄에 도착하자마자 검거되었다. 결국 66세의 ‘청년’ 이회영은 모진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1932년 11월 17일 숨을 거두고 말았다. alt독립운동 자금 제공처였던 백산상회alt안희제 안희제, 민족을 위해 필요한 돈이라면 기꺼이!안희제는 1885년 경상남도 의령군에서 태어났다. 그는 대한제국이 흥망의 기로에 설 무렵인 20대에 상경해 보성전문학교 경제과와 양정의숙 경제과를 다녔다. 재학 중 영남지방 유지들과 교남교육회를 조직해 사립학교 설립에 힘썼다. 동래에 구명학교, 의령에 의산학교와 창남학교를 설립했다.안희제는 대한제국이 망하자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했다. 그는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다시 귀국해 부산에 백산상회를 설립했다. 곧이어 서울, 대구, 안동, 원산은 물론 만주의 펑톈 등지에 지점을 설치했다. 백산상회와 그 지점들은 독립운동의 거점이자 자금 제공처였다.3·1운동 이후 안희제는 비밀리에 독립운동 자금을 모아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보냈다. 언론 활동에도 뛰어들었다. 『동아일보』의 창립 발기인으로 참여했고 부산지국장으로도 활동했다. 1926년에는 최남선이 창간한 『시대일보』를 인수, 『중외일보』로 명의를 변경해 발행했다. 부산에서도 유지로서 부산상업회의소 부회장 등을 맡으며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부산고등보통학교의 설립을 추진했고 부산청년회 간부로 활동했다.1930년대에 들어와 안희제는 만주로 눈을 돌렸다. 그는 사업을 정리하고 만주 동경성 일대에 토지를 구입했다. 그곳에 발해농장을 설립하고 수로를 개설한 후 농가 3백여 호를 유치했다. 1934년 대종교 3세 교주 윤세복을 비롯한 간부들과 대종교 총본사가 동경성으로 옮겨왔다. 안희제는 1911년에 입교한 대종교 지도자였다. 1942년 11월 경찰은 윤세복을 비롯한 21명의 국내외 대종교 지도자들을 일제히 검거했다. 이때 안희제는 고향에 돌아와 있었는데, 곧 경찰에 체포되어 만주 목단강성 경무청으로 이송되었다. 1943년 8월 3일 고문으로 인한 후유증이 심각해 병보석으로 출감하였으나, 출감 3시간 만에 병원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명문가의 후예 혹은 성공한 사업가로 평생을 안온하게 살 수 있었던 최재형, 이회영, 안희제. 하지만 그들은 자신의 재산을 민족과 독립의 대의를 위해 아낌없이 내놓았다. 하나 밖에 없는 자신의 목숨도 기꺼이 내놓았다. 그들의 치열한 삶은 민족을 위한 죽음으로 막을 내렸다. 그들은 대한사람으로서 한 치의 부끄럼 없는 품격 있는 삶을 살았다.]]> Mon, 29 Apr 2019 14:12:14 +0000 29 <![CDATA[일제강점기 부자의 선택 史소한 이야기]]>     일제강점기부자의 선택-노블레스 오블리주와 친일-   1910년 한일강제병합으로 주권을 잃고 식민지로 전락해버린 조국 안에서 사람들은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독립운동과 친일. 그것은 특히 조선 명문가에서 태어나 대대로 높은 명예와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던 소위 부자들에게 더 어려운 질문이었다. 그들은 자신의 높은 사회적 지위로 말미암아 일제에 적당히 협력한다면 얼마든지 잘살 수 있었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정말 ‘잘’사는 것일까? 그리고 여기 잘살기 위해 각기 다른 선택을 한 사람들이 있다.이회영은 앞서 9대가 조선의 높은 벼슬을 지낸 명문가의 자손이었다. 경술국치 이후 형제들과 뜻을 모아 독립운동에 투신하기로 결심하고 중국으로 망명했다. 이때 가문의 재산을 모두 처분하였는데, 처분한 재산은 독립운동에 쓰였다. 반대로 민영휘는 한말 상류층으로 일제에 협력하며 그 공으로 자작 작위를 받았다. 그는 정치뿐만 아니라 경제계까지 진출하여 많은 재산을 축적했다. 극심한 가난에 시달리며 타지에서 목숨을 잃은 이회영과 달린 민영휘는 더 큰 부자가 되어 대대손손 부를 누렸으니, 선택의 대가는 유독 이회영에게만 혹독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사람들은 민영휘의 삶을 잘살았다고 하지 않는다. 대신 이회영과 그 형제들에게 존경을 보낸다. 독립운동과 친일에 대한 역사의 평가는 가난보다 혹독했다. alt]]> Mon, 29 Apr 2019 13:07:20 +0000 29 <![CDATA[민족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독립운동가 부부 김규식·김순애 이달의 독립운동가]]>     글 전시부민족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독립운동가 부부 김규식·김순애   독립기념관은 국가보훈처 및 광복회와공동으로 김규식·김순애 부부를 2019년 5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독립운동을 위해 중국으로 망명한 김규식과  김순애는 1919년 결혼식을 올리고 각각 임시정부와 여성독립운동단체에서 구국활동을 전개했다 alt김규식, 민족의 독립과 단결에 헌신하다김규식은 1881년 1월 29일 경남 동래에서 양반 관리의 자제로 태어났다. 부친의 유배로 선교사 언더우드가 세운 고아학당에서 신학문을 교육받았고, 독립협회 활동과 『독립신문』 제작에 참여하여 국제정세에 대한 안목을 키웠다. 1897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우수한 성적으로 로녹대학(Roanoke College)을 졸업한 후, 귀국하여 계몽운동을 벌였지만 국내에서의 독립운동은 점차 어려워졌다. 이에 김규식은 적극적인 항일 투쟁을 위해 1913년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였다. 그는 동제사(同濟社)와 박달학원을 중심으로 민족교육을 펼치며 민족의식과 독립의지를 키웠고, 대동단결선언을 발표하며 독립운동 세력 통합을 통한 임시정부 수립을 제의하였다.외국어에 능통했던 김규식은 1919년 초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 대표로 파리강화회의에 파견되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이후에는 외무총장 자격으로 일제 침략 및 식민지 통치의 실상과 한국 독립의 당위성을 세계에 알렸다. 이후 열강에의 선전활동과 약소 피압박 국가 간의 연합 등 다양한 독립 외교 방안을 모색하는 한편 임시정부의 단결과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을 이끌어내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독립운동전선에 있지 않을 때는 교육활동에 매진하였다.1945년 8월 15일 광복 후, 임시정부의 부주석이었던 김규식은 김구 등과 함께 귀국하여 남북 단독정부 수립을 막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1950년 6·25 전쟁 중에 납북되어 그해 12월 10일, 평북 만포진 부근에서 서거하였다.김순애, 여성독립운동단체를 조직하고 이끌다김순애는 1889년 5월 12일 황해도 장연군01대구면 송천리에서 출생하였다. 정신여학교에서 신학문을 공부한 김순애는 민족계몽을 위해 교육활동을 펼치다 일제의 감시가 심해지자 오빠 김필순과 함께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1919년 1월 김필순과 막역했던 독립운동가 김규식과 결혼한 후 신한청년당에 가입하였고 한국의 독립을 주장하기 위해 파견된 민족대표의 활동자금 모집과 독립운동 봉기 촉구에 주력하였다.김순애는 여성의 독립운동 참여와 지원을 목적으로 상하이에서 대한애국부인회를 조직하고 국내외 애국부인회와 긴밀하게 연계하며 활동하였다. 대한애국부인회는 독립운동가들의 뒷바라지와 함께 임시정부로 독립운동 자금 전달, 태극기 제작과 보급 활동 등을 통하여 우리 민족의 독립의지를 전파하였다. 또한 독립전쟁을 대비해 대한적십자회를 재건하여 많은 간호원을 양성하고 한국독립운동 선전활동을 펴는 데에도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였다.지속적인 임시정부 재정 지원 활동과 함께 김순애는 한국독립당 산하 여성독립운동단체인 한인여자청년동맹을 결성하고, 한국애국부인회 재건대회를 통하여 여성 민족통일전선을 형성하는 등 항일여성독립운동을 이끌었다. 나아가 재중자유한인대회에 참여하여 민족의 완전한 독립과 임시정부 중심의 독립운동을 주장하였다. 1945년 조국 광복을 맞이한 이후, 김규식과 함께 귀국해 여성교육에 공헌했던 김순애는 1976년 5월 17일 영면하였다.정부는 민족의 독립과 통합을 위해 헌신한 부부의 공적을 기려 1977년 김순애에게 독립장을, 1989년 김규식에게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alt김규식과 김순애의 결혼식(1919)alt대한민국 임시정부 환국 기념(충칭 임시정부 청사, 1945.11.03.)alt파리평화회의에 파견된 대표단(1919) alt대한애국부인회 회원들(1943)alt중앙청에서 연설하는 김규식(1946.12.)alt젊은 시절의 김순애]]> Mon, 29 Apr 2019 16:56:07 +0000 29 <![CDATA[잘살려면 어린이를 위하라! 새 조선의 일꾼은 어린이! 자료로 읽는 역사]]>     글 김경미 자료부잘살려면 어린이를 위하라!새 조선의 일꾼은 어린이!일제강점기 「어린이날」의 풍경   “오월 일일이 왔다. 조선에서 처음으로 어린이에게도 사람의 권리를 주는 동시에 사람의 대우를 하자고 떠드는 날이 돌아왔다.” 처음으로 조선 전국에서 어린이날을 축복한 1923년 5월 1일, 『동아일보』는 이와 같은 머리말로 어린이날을 알리는 기사를 실었다. alt01) 5월 1일 어린이날 포스터(1925, 『동아일보』 기사)alt02) 5월 첫 일요일 어린이날 포스터(1933, 『조선중앙일보』 기사)alt03) 5월 첫 일요일 어린이날 포스터(1932)어린이와 어린이날의 탄생우리나라에 어린이날이 처음 등장한 것은 1922년 5월1일 천도교소년회가 창립 1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어린이의 날’ 행사에서였다. 행사는 “10년 후의 조선을 생각(慮)하라”는 구호를 내세우고 기념식, 선전지 배포, 시가행진, 축하회로 진행되었는데, 이는 이후 어린이날 행사의 기본틀이 되었다. 1923년 4월 17일 서울에서 천도교소년회를 비롯한 소년운동단체가 모여 ‘조선소년운동협회’를 결성하고 매년 5월 1일을 조선의 어린이날로 정했다. 이로부터 조선 전국 규모의 어린이날이 시작되었다.일제강점하에서 어린이날의 시작은 어린이 인권에 대한 계몽운동의 하나였다. 당시 아이들은 ‘애녀석’·‘어린애’·‘아해놈’이라 불리며 압박에 짓눌려 말 한 마디, 소리 한 번 자유롭게 하지 못하던 처지에 있었다. ‘어린이’라는 말을 처음으로 쓴 방정환은 ‘늙은이’나 ‘젊은이’의 호칭과 동격으로 어린이들도 인격을 지닌 존재로서 높여 부르고자 한 것이다.1923년 5월 1일 서울 경운동 천도교당에서 거행된 어린이날 기념식에서는 다음과 같은 「소년운동 선언문」이 낭독되었다.1. 어린이를 재래의 윤리적 억압으로부터 해방하여 그들에게 대한 완전한 인격적 예우를 허하게 하라.2. 어린이를 재래의 경제적 억압으로부터 해방하여 만14세 이하의 그들에게 대한 무상 또는 유상의 노동을 폐하게 하라.3 . 어린이 그들이 고요히 배우고 즐거이 놀기에 족할 각양의 가정 또는 사회적 시설을 행하게 하라.이러한 어린이의 해방은 마땅히 이루어져야 하는 일이었으나, 일제강점이라는 상황 속에서 특히 강조된 점은 “젊은이나 늙은이는 이미 희망이 없으므로 오직 미래를 담당할 어린이에게 희망을 걸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어린이는 한 집안의 미래와 더불어 민족의 미래를 살려야 할 존재였다. 이는 자료01~03의 어린이날 포스터 속 “잘살려면 어린이를 위하라!!”, “새 조선의 일꾼은 어린이!!”, “희망을 살리자! 내일을 살리자!!”라는 구호에 잘 나타나 있다.5월 1일로 정했던 어린이날은 1928년부터는 5월 첫 일요일로 날짜를 바꾸었다. 5월 1일이 노동절, 즉 메이데이와 같은 날이라 경찰 당국에서 집회를 금지하여 행사에 곤란을 겪고, 학교에서는 아이들이 모임에 나가지 못하도록 하여 어려움이 많았기 때문이다. 1931년부터는 ‘조선어린이날 중앙준비회’가 구성되어 어린이날 행사를 준비했다. alt04) 부형모자용 선전지(1932)alt05) 어린이날 노래 선전지(1932)alt06) 소년소녀의 결의문 선전지(1932) alt07) 자전거 등 탈 것에 다는 종이 기(1929~1930년경)alt08) 기행렬 때 어린이들이 드는종이 기(1925)alt09) 『동아일보』에 실린 어린이날 행사 사진(1932). 위 사진은휘문고등보통학교 운동장에서 열린 기념식이며, 아래 사진은소년소녀 기행렬 모습이다어린이날의 풍경그럼 어린이날 행사는 어떻게 진행되었을까. 일제강점기 어린이날을 대표하는 이미지로 자리 잡은 자료03의 포스터를 따라 1932년의 어린이날로 돌아가 보자.1932년 첫 일요일은 마침 1일이었다. 메이데이와 겹치는 바람에 경찰 당국과 날짜 문제로 오래 승강이를 벌이다 간신히 행사를 열수 있게 됐고, 출판 허가도 받았다. 포스터와 선전지, 어린이날 기 등이 전국 각 지역 소년단체에 발송되었고, 기념식과 기행렬 등 여러 행사의 준비도 마쳤다. 학교와 시장, 정거장과 같이 사람이 많이 다니는 곳에 포스터를 붙였다. 안국동네거리와 종로 등 시내 주요 장소에 선전탑을 세우고 축등도 달았다. 각 가정에는 “어린이날”과 “복(福)”자를 쓴 자그마한 복등을 걸도록 했다.어린이날인 5월 1일, 새벽 5시부터 서울 시내 각처에서 어린이날을 알리는 소년군의 나팔 소리가 울렸다. 동시에 소년단체 회원들이 총동원되어 집마다 ‘부형모자용 선전지’[자료04]를 돌렸다. 어린이날 행사에서는 무엇보다 부모를 비롯한 어른들의 어린이에 대한 인권 의식을 일깨우는 것이 중요했다. 이를 위해 사용된것이 선전지로, 선전지에는 “어린이는 어른보다 더 새로운 사람입니다” 등의 5가지 유념할 사항이 적혀있고, 이것을 벽에 붙여두고 자주 읽으라는 당부도 써 놓았다.어린이날 의식은 계동에 있는 휘문고등보통학교 구장에서 거행되었다. 각 소년단체는 단체 기와 함께 “희망의 꽃은 어린이!”, “모이자, 배우자, 일하자!”, “소년의무교육을 실시하자!” 등의 표어를 쓴 큰 기를 들었다. 소년소녀들은 각각 ‘어린이날 기’를 들고 식장에 모여들었다. 조선소년군과 소년척후대에서 군악과 나팔을 울리고 장내외를 경비했다. 오전 11시 안정복의 사회로 개회식이 선언되자 소년군의 주악과 나팔이 울리고 참가자 일동은 소리 높여 ‘어린이날 노래’를 합창했다. 1925년부터 부르던 어린이날 노래는 스코틀랜드 민요 멜로디에 맞춰 지은 ‘야구가’에 방정환이 다음과 같은 노랫말을 지어 넣은 것이었다.1 절 기쁘고나 오늘날 5월 1일은 / 우리들 어린이의 명절날 일세 / 복된 목숨 길이 품고 뛰어 오는 날 / 오늘이 어린이의 날후렴만세 만세를 같이 부르며 / 앞으로 앞으로 나아갑시다 / 아름다운 목소리와 기쁜 맘으로 / 노래를 부르며 가세2 절 기쁘고나 오늘날 5월 1일은 / 반도 정기 타고난 우리 어린이 / 길이길이 뻗어날 새 목숨 품고 / 즐겁게 뛰어노는 날어린이날 날짜가 바뀌면서 가사 중 “5월 1일”은“어린이날”로, 후렴의 “만세 만세를 같이 부르며”는 “동무여 동무여 손을 잡고서”로 바뀌었다.[자료05] 다음 중앙준비회를 대표한 정홍교의 인사말에 이어 내빈으로 동아일보사 편집국장인 이광수가 간단한 축사를 했다. 그리고 소년대표 정세호가 나와 “지금 어른보다 더 새롭고 영특한 사람이 되기 위해 모든 새것을 배우기에 힘쓰자” 등 5개 조항이 적힌 「결의문」[자료06]을 낭독했다. 다시 어린이날 노래를 합창하고 어린이날 만세 삼창을 한 후 식을 마쳤다.이어서 어린이날 행사의 하이라이트인 기행렬이 시작되었다. 어린이들이 줄을 지어 어린이날 기를 흔들며 어린이날 노래를 목이 터지도록 부르면서 서울 중심가를 행진하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단체별로 표어 기와 단체 기를앞세우고 악대와 나팔수로 행렬을 조직한 다음 식장에서 출발해 돈화문-수은동(현 종로구 묘동)-종로2정목(종로2가)-종로사거리-황금정(현 을지로)사거리-경성부청(현서울도서관) 앞-동아일보사 앞-종로사거리-견지동-안국동네거리-재동네거리를 돌았다. 소년소녀들은 다시 식장으로 돌아와 만세 삼창을 하고 해산했다.어린이날 축하회에는 어린이를 위한 연예공연과 함께 어른들을 위한 계몽프로그램도 마련되었다. 어린이날 당일 저녁 7시 반부터 경운동의 천도교기념관과 견지동의 시천교당에서 어린이 대회가 열려 동요, 무용, 동화극으로 어린이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했다. 다음날인 5월 2일 저녁 7시 반 같은 장소에서 열린 부형모자대회에서는 소년문제에 관한 강연과 연극, 무용, 음악 등의 프로그램이 진행되었다.어린이날을 축하하는 부대행사도 다채롭게 진행되었다. 행사에 참여하는 상점에서는 어린이 물건을 특별할인 해주고, 사진관에서는 어린이 사진을 반액에 찍어주며, 병원은 어린이에 대해 무료 건강진단을 해주었다. 조선인이 운영하는 회사들은 포스터 등 행사에 필요한 물품을 기증하고 금일봉을 제공하며 행사를 지원했다.[자료03~07]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는 사설과 상세한 보도 기사로 어린이날 행사를 널리 알림으로써 전국적으로 소년운동과 어린이날의 뜻을 전파하고 운동에 동참할 것을 격려했다.어린이날 행사에 대한 일제의 탄압이와 같이 어린이날 행사가 해마다 전국적으로 성황을 이루자 조선총독부 당국에서는 비상하게 주의를 기울였다. 서울의 기념식장에는 종로경찰서 형사와 기마경관까지 출동하여 단속했으며, 소년단체에서 들고 있는 기를 조사해 쓰인 문구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끌어내렸고, 기념사가 중간에 금지당하거나 축사를 하러 온 내빈이 아예 단에 오르지 못 하는 일도 있었다. 기행렬 때는 수백 명의 정·사복 경관이 따라다니며 경계를 폈다. 1925년 기행렬용 어린이날 기는 “무엇이나 붉은색이라면 사지를 벌벌 떠는 경찰당국”에서 불온한 붉은색을 썼다고 사용을 불허하였다.[자료08]지방에서의 억압은 더욱 심하여 각지 경찰서에서 어린이날 행렬과 선전문 살포, 강연회를 금지 또는 제한하였으며 서울에서 사용 허가가 난 선전지를 압수하는 일도 빈번했다. 느닷없이 금지당한 행사를 진행하려다 소년단체 회원들이 검거, 취조를 당하는 일도 있었다.결국 1937년에는 어린이날 기념식 외 모든 행사를 완전히 금지당했으며, 1938년부터는 기념식도 열 수 없었다. 전국의 소년단체가 참가하여 조선 민족의 명절로 거행되던 어린이날 행사는 조선총독부에서 주도하는 ‘아동애호주간’이 대신했다. 미래를 짊어질 희망으로서 어린이의 인권 의식을 일깨우던 어린이날은 각 가정에서 어린이를 데리고 창경원이나 덕수궁에 놀러가는 날이 되었다.]]> Mon, 29 Apr 2019 14:42:58 +0000 29 <![CDATA[파락호 김용환의 진실 역사를 만든 사람]]>     글 임영대 역사작가파락호 김용환의 진실   김용환은 경상북도 안동에서 제일가는 명가 중 하나인 의성 김씨, 김성일 가문의 종손이다. 명문대가의 후예로 막대한 부와 사회적 지위를 누렸지만, 도박에 빠져 ‘파락호’라는 비난을 샀다. 그러나 이는 배후에서 진행하던 독립운동을 감추기 위한 위장 수단에 불과했다. 김용환은 해방 후 종갓집을 말아먹은 종손으로 쓸쓸하게 숨을 거뒀다. 대한민국은 1995년, 그의 딸 김후웅에게 아버지의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며 그 공을 기렸다 새벽 몽둥이야!밤새 진행되는 도박판에서 한참 열기가 올랐다. 문전옥답이, 대대로 내려온 가문의 저택이 노름 밑천이 되어 순식간에 사라지기 일쑤였다. 패를 돌릴 때 으뜸패가 손에 들어오는가, 아닌가에 따라서 승패가 갈렸다. 오늘은 그에게 운이 없는 날이었다. 기껏 쥔 패는 모조리 최하급이었고, 앞에 쌓아두고 있던 밑천은 전부 다른 사람들 앞으로 옮겨갔다. 마침내 손에 한 푼도 남지 않은 빈털터리가 되자 그는 시원스레 냉수를 들이켠 뒤 호기롭게 외쳤다."새벽 몽둥이야!"다음 순간 손에 몽둥이를 움켜쥔 건장한 사내 20여 명이 방문을 박차고 뛰어 들어왔다. 둘러앉아 있던 노름꾼들이 혼비백산한 사이 사내들은 널려 있는 판돈을 모조리 보자기에 쓸어 담아 줄행랑을 쳤다. 패거리를 불러들인 장본인은 느긋하게 자리를 떠나 사라졌다."집안 망신이나 시키는 저 난봉꾼 놈!"판돈을 빼앗긴 노름꾼들이 뒤에서 욕지거리를 퍼부었다. 밤낮으로 노름에 빠져 살면서 대대로 내려온 재산과 사돈댁에서 보내온 딸의 혼수비용까지 말아먹은 저 상대가 바로 학봉 김성일 가문의 종손, 김용환이었기 때문이다."집안에 ‘학봉(김성일)’과 ‘난봉’이라는 두 봉황이 나왔으니, 그만하면 충분한 게 아닌가?"김용환은 한때 의병에도 참가하고 독립자금을 모아 만주로 보내는 활동도 했다. 하지만 일본 경찰에 3번이나 체포된 후로는 활동을 접었다. 그리고 노름에 빠졌다.당사자가 죽고 나서야 밝혀진 진실김용환은 유서 깊은 종갓집의 종손으로서 큰 집과 막대한 전답을 물려받았다. 안동 일대에서 열리는 노름판에는 김용환이 빠지지 않았다. 전 재산이 노름판에서 사라지는 일이 수시로 벌어졌다. 차마 종가가 망하는 모습을 지켜볼 수 없었던 일가친척들은 몇 차례나 돈을 모아 집과 논밭을 다시 사주었다. 하지만 결과는 매번 같았다. 땅문서는 노름판에서 사라졌고, 심지어 외동딸을 시집보낼 혼수 비용도 남아 있질 않았다. 사돈댁이 장롱을 사라고 보내준 돈조차 그의 손에서 사라졌다. 외동딸은 할머니가 쓰던 낡은 장롱을 가지고 울면서 시집을 갔다. 노름에 빠진 아버지는 딸이 시집가는 날에도 어디론가 사라져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이런 지경이었으니 김용환이 집안을 말아먹은 파락호 소리를 듣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그러나 여기에는 엄청난 반전이 있었다. 도박은 도박 자금으로 위장해 만주에 돈을 보내기 위한 김용환의 술책이었다. 일제를 속이기 위해 연기한 것이다. 독립운동에 나선 것은 사실상 김용환의 가문 전체였다. 김용환의 재종조부(할아버지의 사촌) 김희락은 을미의병으로 싸우다 1896년에 일본군에게 총살당했고, 사촌 동생의 죽음을 눈앞에서 본 김용환의 조부 김흥락은 모든 제자와 일가친척을 데리고 떨쳐 일어섰다. 김흥락의 제자 7백 명 중 독립운동으로 훈장을 받은 사람은 60명. 의성 김씨 문중 전체에서 독립운동가 훈장을 받은 사람은 27명이나 되고, 이중 김흥락이 속한 김성일 직계 혈통에서만 11명이 나왔다. 이런 가문의 후예인 김용환이 진짜 도박에 빠진 난봉꾼일 리 없었다.김용환의 처가 역시 뒤지지 않았다. 장인 이중업은 독립운동을 위해 중국으로 가다가 죽었고, 장모 김락은 3·1운동 때 독립만세를 부르다가 일본 경찰의 고문으로 시력을 잃었다. 딸의 장롱 사건도 마찬가지였다. 처분할 수 있는 재산이라면 모두 처분해서 만주로 보내고 있던 김용환은 사돈댁이 보낸 딸의 혼수비용도 만주로 보냈다. 딸의 결혼식 날에 나타나지 않았던 것도 첩보를 입수한 일본 경찰에 구금되어 갇혀 있던 탓이었다."자네, 이제는 만주에 돈 보낸 사실을 밝혀도 되지 않겠나?""선비로서 마땅히 할 일을 했을 뿐인데 무엇을 드러낸단 말인가."끝내 그 많던 재산은 사라지고, 하나뿐인 딸에게도 미움을 받았다. 해방이 왔을 때 김용환은 이미 주변 사람들에게 손가락질당하는 존재가 되어 있었다. 해방 이듬해, 모든 진실을 알고 있던 독립운동 동지 하중환(河中煥)이 찾아와 사실을 밝히라고 설득했으나 김용환은 임종의 자리에서조차 굳게 입을 다물었다. 선비로서 살아가야 하는 삶을 살았을 뿐인 노인의 당당한 마지막이었다.]]> Mon, 29 Apr 2019 13:41:58 +0000 29 <![CDATA[양반의 도의 부자의 품격 우리가 만난 얼굴]]> 양반의도의부자의품격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 높은 사회적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를 뜻하는 말입니다. 일제강점기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인물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명예와 지위, 또는 부를 내던지고 독립운동에 투신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더 쉽고 편한 선택을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구태여 어렵고 힘든 길을 걸었습니다. 물론 사회적 책임감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조국을 잃는다는 건 누구에게나 슬픈 일이었고, 독립을 향한 열망은 모두에게 간절했습니다. 가문의 명성과 높은 벼슬, 많은 재산이 아니었더라도 그들은 독립운동을 했을 것입니다. alt         ]]> Mon, 29 Apr 2019 11:28:19 +0000 29 <![CDATA[통합과 새 진로를 위한 1908년의 미주 한인사회 한국인의 터전:미주 편]]>     글 홍선표 나라역사연구소 소장통합과 새 진로를 위한1908년의 미주 한인사회   1908년 미주 한인사회에는 두 가지 중요한 일이 있었다. 하나는 해외 최초의 의열투쟁인 장인환·전명운의 스티븐스 처단의거이고, 또 하나는 독립운동의 방향과 방략을 논의한 북미애국동지대표회다. 이들 사건은 일본의 통감 정치로 풍전등화의 대한제국을 직시한 미주 한인들의 위기의식 속에서 일어났다. alt스티븐스를 처단한 장인환(오른쪽)과 전명운(왼쪽) 의사alt북미애국동지대표회를 보도한 덴버 『데일리 뉴스』(1908.07.13.) 장인환·전명운 의사의 스티븐스 처단의거대한제국을 병합할 목적으로 일본 정부의 특별 사절로 워싱턴에 파견된 대한제국 외교고문 스티븐스(D. W. Stevens)는 1908년 3월 20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직후 신문기자들과 회견을 가졌다. 회견 요지는 일본이 대한제국을 보호한 후로 한국에 유익한 일이 많아졌고, 농민들과 백성들이 대한제국 정부의 학대를 받지 않아 일본의 조치를 환영한다는 것이다. 회견 내용은 3월 21일자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에 크게 보도되었다.일본의 보호국화를 정당화하고 일본의 대한정책을 미화한 스티븐스의 망언 소식에 샌프란시스코 한인들은 분노했다. 3월 22일 공립협회와 대동보국회는 합동으로 즉각 임시공동회를 개최하고 대책을 논의해 대동보국회에서 이학현·문양목을, 공립협회에서 정재관·최유섭(최정익의 이명)을 한인 대표로 선정했다. 그리고 스티븐스가 투숙한 페어몬트호텔로 찾아가 신문에 보도된 망언의 해명과 정정을 요구했다. 그러나 스티븐스는 오히려 대한제국 정부의 잘못된 정책들을 거론하며 일본이 한국을 보호국화 하지 않았더라면 러시아가 그 자리를 대신했을 것이라고 극언했다. 4인 대표는 분을 삭이지 못하고 호텔 로비 구석에서 그를 집단 구타하고 돌아와 회원들에게 전말을 알렸다.모든 사실을 지켜보고 있었던 장인환과 전명운은 그 다음 날인 3월 23일 오전 9시 30분경 워싱턴DC행 대륙 횡단 철도를 타기 위해 일본총영사 고이케 초조(小池張造)와 함께 샌프란시스코의 페리부두 앞에 도착한 스티븐스를 처단했다. 두 사람이 사전에 약속하고 나간 것은 아니었지만 공교롭게도 비슷한 시각에 페리부두에서 스티븐스를 기다리다 거의 동시에 행동하였다. 먼저 전명운이 숨겨놓은 권총을 꺼내 발사했으나 불발하자 달려들어 격투가 일어났다. 그 뒤를 이어 장인환이 권총을 쏘아 첫발은 스티븐스와 엉켜져 있던 전명운의 어깨를 관통했고 다음 2발은 스티븐스의 오른편 어깨뼈와 복부를 명중시켰다. 두 사람은 현장에서 체포되어 샌프란시스코 경찰법원에 기소되었고 스티븐스는 긴급 후송되었으나 3월 25일 사망했다.의거 소식을 전해 들은 공립협회와 대동보국회는 3월 23일 밤 9시 30분 한인교회에서 제2차 임시공동회를 개최했다. 회의 결과 법정투쟁을 대비한 재판후원회를 결성하기로 하고 재판정권위원으로 최유섭·김명일·정재관·이일(이상 공립협회), 문양목·이용하·백일규(이상 대동보국회) 등 7인을 선정했다. 재무로는 문양목과 김명일이 선임되었다. 그리고 재판을 돕기 위한 대대적인 의연금 모금 활동을 전개할 것을 결의했다.두 의사의 희생적인 의거의 영향력은 전 미주는 물론 일본과 중국까지 미쳤다. 1908년 3월부터 9월까지 상항 한인 임시공동회가 보고한 재정결산서를 보면 북미 3,919달러, 하와이 1,961달러, 중국 103달러, 일본 47달러 등 의연금 수입이 총 6,052달러였다. 재정 지출은 변호사비 2,000달러 등을 포함해 총 3,347달러였는데 이는 총수입의 55%였다. 당시 공립협회나 대동보국회의 1년 예산이 약 1,600∼2,000달러인 것과 비교할 때 의연금 모금 운동이 얼마나 뜨거웠는지 짐작된다. 다음으로 대동보국회와 공립협회가 임시공동회를 개최해 통일된 활동에 자극받아 두 단체의 여성들이 합동으로 한국부인회를 설립해 후원 활동을 전개했다.장인환·전명운 의거는 풍전등화의 국권을 지키는데 너와 내가 따로 없다는 인식을 심어주었다. 이러한 강렬한 민족의식은 미주 한인사회의 통합을 촉진하는 계기를 만들었다.두 의사에 대한 재판은 아일랜드계 미국인 변호사 코그란(Nathan C. Coghlan), 바렛(John J. Barret), 페랄(Robert Ferral)이 맡았다. 이들의 적극적인 변호에 힘입어 전명운은 1908년 6월 27일 증거불충분으로 가석방되었다. 장인환은 동년 12월 23일 사형을 면한 대신 ‘애국적 환상에 의한 2급 살인죄’로 25년 금고형을 받아 샌쿠엔틴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는 10년 동안 모범수로 생활한 데다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의 적극적인 가석방운동에 힘입어 1919년 1월 출옥했다.북미애국동지대표회의 개최장인환·전명운 의거의 재판이 한창 진행될 때인 1908년 7월 11일부터 15일까지 콜로라도주 덴버에서 북미애국동지대표회가 개최되었다. 원래 이 대회는 의거가 있기 전, 1908년 1월 박용만과 이관수 등 덴버의 한인들이 계획한 것으로 당초 그해 6월 10일에 예정되어 있었다. 6월 10일은 미국 민주당 대통령 후보 선출을 위한 전당대회가 덴버에서 개최되는 날이었다. 민주당 전당대회를 기회로 한국 독립문제를 만방에 알리고 한국 독립을 지키기 위한 한인 단체들의 규합과 향후 방략을 논의할 목적으로 대회를 준비한 것이다.그런데 대회 개최는 순조롭지 않았다. 무엇보다 참석해야 할 한인들의 참가가 여의치 않았다. 그리하여 일시 중단되었으나, 마침내 7월 11일부터 5일간 8차에 걸쳐 회의를 개최하게 되었다. 대회의 주 의제는 각 지방의 한인 단체들의 통합과 조국 독립운동을 위한 방략 수립이었다. 주요 참석자는 박용만, 이관용, 윤병구, 이승만, 김헌식 등 36명이다. 한인들뿐만 아니라 콜로라도주 하원의원 크랜스톤(Earl M. Cranston)과 와론 등 저명 미국인들도 참석해 연설하였다.북미애국동지대표회는 먼저 미주 한인사회에 통합의 기운을 불러일으켜 안 그래도 두 의사의 의거로 확산된 통합 열기를 더욱 고조시켰다. 이는 그 이듬해 최초의 통합단체인 국민회 출범으로 이어졌다. 다음으로 1909년 6월 박용만의 주도로 네브래스카에 해외 한인 최초의 군사학교인 한인소년병학교 설립에 영향을 주었다. 이 같은 군사학교 설립은 전 미주 한인사회뿐만 아니라 만주와 연해주의 해외 한인사회에 강력한 항일 무장투쟁 의식을 고조시킨 매우 의미 있는 성과였다.]]> Mon, 29 Apr 2019 17:29:04 +0000 29 <![CDATA[돌아오지 못한 독립운동가들 끝나지 않은 독립운동]]>     글 이계형 국민대학교 특임교수돌아오지 못한 독립운동가들   1945년 우리 민족은 광복을 맞았지만, 독립운동은 끝나지 않았다. 여전히 미완으로 남은 사건, 해결되지 못한 문제, 기억해야만하는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끝나지 않은 독립운동은 독립운동사를 과거에 머문 역사가 아닌 현재의 문제로 다루며, 오늘도 신문 한쪽을 차지하고 있는 독립운동 및 일제강점 이슈를 소개한다. alt계봉우, 황운정 지사의 유해 봉환(2019.04.22, 국가보훈처 제공)아직도 돌아오지 못한 독립운동가들독립운동가라 함은 통상 1895년부터 1945년 8월 해방 이전까지 일제의 식민통치에 맞서 한민족의 독립을 위해 헌신했던 분들을 말한다. 2019년 4월 현재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15,454명의 독립운동가가 훈·포장을 받았다. 하지만 이 가운데는 중국·일본·미주 등 국외에서 활동하다가 미처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하시고 이국에서 숨을 거둔 분들이 적지 않다. 그렇다면 이분들의 유해는 해방 후 고국으로 봉환되었을까?이분들 중에는 해방되기 전 고국으로 유해를 모셔온 경우도 있고, 타국의 공동묘지 등에 묻히거나 돌아가신 분의 유언대로 화장하여 그곳에 뿌려지기도 하였다. 그마저도 여의치 않았던 경우에는 해방 이후 민간단체, 국가보훈처, 유족 등에 의해 유해가 고국에 모셔졌다. 그렇지만 유해 소재가 파악되었어도 여러 이유로 모셔오지 못하거나 자료가 발굴되지 않아 독립운동가로 인정받지 못해 봉환하지 못하는 일도 있다. 가장 안타까운 경우는 유해 봉환이 너무 늦어져 소재를 파악할 수 없거나, 도시개발로 묘지가 유실되어 도저히 모셔오지 못하는 분들일 것이다.김좌진은 1930년 1월 공산주의자 박상실에게 암살당한 후 임시로 흑룡강성 해림에 안치되었다. 이후 1933년 부인 오숙근이 일제의 감시를 피해 유해를 수습하여 고향인 충청남도 홍성에 안장하였다. 1936년 2월 다롄의 뤼순감옥에서 순국한 신채호는 “생전에 조국광복을 못 볼진대 왜놈들의 발끝에 채이지 않게 유골을 화장하여 바다에 띄워 달라”고 유언했지만, 그를 기리고자 했던 유족들의 뜻에 따라 어릴 적 살았던 고드미마을에 안장되었다. 1917년 3월 러시아 우수리스크에서 순국한 이상설은 “조국 광복을 이루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나니 어찌 고혼인들 조국에 돌아갈 수 있으랴”는 유언에 따라 화장한 뒤에 수이푼강에 뿌려졌다.독립운동가 유해 봉환 현황과 어려움국외에서 활동하다 미처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하고 순국하신 분들의 유해는 모두 485위에 달한다(2017년 12월 기준). 그 가운데 해방 이후 국외에 묻혔던 독립운동가들 유해가 봉환된 것은 2019년 4월 현재 139위 정도로 28.7%에 불과하다.독립운동가의 첫 유해 봉환은 김구의 주도로 민간분야에서 이루어졌다. 당시 결성된 유해봉환추진위원회가 1946년 6월 일본에서 순국한 윤봉길·이봉창·백정기 등 유해 3위를 수습, 효창원에 안장한 것이 시작이다. 그로부터 2년 뒤 1948년 8월 중국으로부터 이동녕·차리석·민병길 등과 곽낙원·김준례·김인 등 여섯 유해가 봉환되었다. 1963년에는 네덜란드에서 이준의 유해가 56년 만에 돌아와 수유리에 안장되었다.이후 이렇다 할 유해 봉환이 없다가 1975년부터 원호처(국가보훈처 전신)가 유족을 중심으로 독립운동가 유해 봉환 사업을 담당하면서 꾸준히 사업이 이어지고 있다. 이로써 1975년 미국에서 장인환·현순, 일본에서 서상한 등이 봉환되었고, 1980년대 후반에는 중국의 개방화 이후 독립운동가들의 유해 귀환 운동이 활발해졌다. 1990년 10월 중국 동북지방에 안장되었던 이상룡·이승화·이봉희·이광민 등의 유해가 봉환되었다. 1987년 제9차 개헌 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 계승’이 천명된 이후, 1993년 8월 국가보훈처는 상하이 만국공묘에 안장되어 있던 박은식·신규식·노백린·김인전·안태국 등 5위의 유해를 봉환하였다. 이후 지금까지도 국외의 독립운동가 유해 봉환 사업은 계속되고 있는데, 2019년 4월 22일, 문재인 대통령의 카자흐스탄 방문을 계기로 그곳에 묻힌 계봉우와 황운정의 유해가 국내로 돌아왔다.순국하신 곳에 묻혀 소재 파악이 되는 대표적인 독립운동가는 러시아의 이위종(상트페테르부르크 우즈벤스크 묘지), 카자흐스탄의 홍범도(크즐오르다), 중국 만주의 나철·김교헌·서일(화룡현 청호대), 고향 용정에 묻힌 윤동주·송몽규(용정 동쪽 외곽의 ‘영국더기’ 동산) 등이다. 이런 경우 현지 한인 동포들의 정신적 구심점이 되거나 그분들의 이름을 딴 거리가 만들어져 그분들의 뜻을 기리기도 한다.유해를 찾지 못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 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返葬)해 다오.”라고 유언을 남긴 안중근의 유해는 지금까지도 찾지 못하고 있다. 가장 안타까운 경우 중에 하나이다. 그가 순국한 지 120주년이 다 되어 가고 국권이 회복된 지도 70여 년이 지났는데도 말이다. 그렇다고 유해 봉환 노력에 소홀했던 것은 아니었다. 1946년에 이봉창 등의 유해를 모시고 와 효창공원에 안장할 당시, 그의 유해 봉환은 순탄하게 추진되지 못하였다.중국 국민당의 장제스는 우리 독립운동가들의 유해 발굴에 호의적이었다. 그렇지만 국공내전에서 패한 이후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6·25전쟁, 냉전 등으로 중국과의 원만한 교류가 어려워지면서 유해 봉환마저 막히고 말았다. 그나마 1970년대에 중국과 우호 관계를 유지하던 북한의 주도로 유해 발굴을 벌였고, 1986년에는 대규모 유해 발굴단이 꾸려져 조사가 이뤄졌지만 허사였다.그 뒤 2006년 남북공동조사단이 안중근 유해 매장지로 유력한 둥산포·원보산·뤼순감옥 박물관 부지 등을 조사하고, 2008년 두 번째로 남북 공동으로 발굴 사업을 진행하였지만 끝내 유해를 찾지 못했다. 남북관계가 다시 해빙무드로 들어선 2018년 8월, 문재인 대통령이 북한과 공동으로 안중근 의사 유해 발굴을 추진하겠다는 의지를 밝혔지만 중국의 협조 등 여러 여건이 아직은 충분치 못하다.이처럼 정부가 적극 나서서 다른 독립운동가들의 유해도 찾고 있지만 여의치 않다. 유해의 소재지를 찾지 못하거나 도시개발로 유실된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중국 상하이에 묻혔던 오영선이나 안중근의 모친과 동생 안정근, 항저우의 공동묘지에 묻힌 김철, 충칭 화상산에 묻힌 송병조·이달, 연해주의 최시형 등은 그 흔적조차 찾지 못하고 있다. ‘사회주의자’로 낙인 되어 뒤늦은 1995년에서야 서훈을 받은 이동휘도 그러한 경우이다. 그는 1935년 1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서 순국한 뒤 그곳의 프토라야 레초카 공원묘지에 묻혔지만 도시개발로 공원묘지와 함께 흔적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1950년 6·25전쟁 당시 납북된 김규식·조소앙·유동열 등 독립운동가의 묘소 15위는 다행히 북한에 남아 있다.독립운동가의 유해 봉환 사업은 단기간에 끝날 성질의 것이 아니다. 흔적을 찾을 수 없이 완전히 사라진 경우는 어쩔 수 없다 할지라도 소재 파악이 제대로 안 되었다면 끝까지 파헤쳐야 할 것이다. 독립운동가와 가족들이 지금도 여전히 우리가 알지 못하는 세상 어느 곳에 흩어져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특히 중국 동북지방과 러시아 연해주 지역에서 치열한 항일무장투쟁 속에서 숨져간 독립군들의 유해도 찾아 위령지라도 세워야 할 것이다. 또 하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유해를 봉환해 올지라도 그곳에 표석이나 기념시설 등을 설치해야 하며, 모셔오지 못하는 경우에는 유실되지 않도록 지속적인 관심과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이것이 바로 독립운동의 완성이며 독립운동가들이 꿈꾸었던 근대적 국민국가의 이상과 의미를 현재의 시점에서 다시 생각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우리 민족의 자존심과 정체성은 더욱 빛날 것이며, 미래지향적 역사 인식과 가치관이 창조될 것이다.]]> Mon, 29 Apr 2019 17:05:45 +0000 29 <![CDATA[제국주의 일본의 등장과 을사늑약 우리의 오늘 세계의 그날]]>     글 강응천 기획집단 문사철 대표, 역사저술가제국주의 일본의 등장과을사늑약   욱일기(旭日旗). 일본 군대가 상징으로 사용하는 깃발의 이름이다. 일장기의 태양 무늬에서 퍼져나가는 햇살 무늬를 형상화한 그 모양처럼 20세기 초의 일본군은 무섭게 뻗어 나갔다. 1895년 동아시아의 중심 국가로 군림해 온 청을 황해에 가라앉히더니, 10년 뒤에는 유럽 열강인 러시아를 대한해협에서 침몰시켰다. alt러일전쟁을 위해 부산에 진주한 일본군자본주의는 유럽에만 있다?러일전쟁은 제국주의 열강 사이에 벌어지던 숨 막히는 영토 분할 전쟁의 동아시아판 클라이맥스였다. 일본은 영국과 미국의 은밀한 후원 아래 동아시아에서 러시아를 견제함으로써 실력을 검증받았다. 애당초 세계는 러시아의 승리를 점쳤으나, 결과는 아시아의 ‘떠오르는 태양’ 일본의 승리였다. 유럽의 침략에 고통받던 아시아인은 일본의 승리에 환호했다. 그러나 일본은 그들의 기대처럼 유럽의 제국주의에 맞서는 아시아의 수호자가 아니었다. 지리적으로만 아시아에 속할 뿐 일본도 유럽 열강과 다름없이 식민지를 탐하는 제국주의를 지향하고 있었다. 러일전쟁 직후 대한제국에 강요한 ‘을사늑약’은 그와 같은 일본의 정체를 잘 보여주는 역사적사건이었다.러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던 1905년,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가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이라는 책을 썼다. 그는 이 책에서 자본주의 탄생의 비밀을 탐구하고자 했다. 베버가 그러한 목적의식 아래 던진 질문은 왜 자본주의가 오로지 유럽에서만 나타나는가 하는 것이었다. 치밀한 탐구를 통해 그가 얻은 결론은 책 제목에 명시적으로 나타나 있다. 소명 의식에 사로잡힌 금욕적이고 근면한 프로테스탄트, 즉 개신교도의 정신이 자본주의를 낳았다는 것이다.베버는 자본주의의 발전을 이룬 곳에는 개신교도의 비율이 상당히 높았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그리하여 개신교와 자본주의의 관계를 살핀 결과 개신교도들이 소명 의식을 갖고 근검절약한 덕분에 자본주의의 발전을 가져올 수 있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그러나 같은 해에 제국주의 국가로 떠오른 일본은 최소한 두 가지 측면에서 베버의 결론과 상충한다. 첫째 일본은 유럽국가가 아니면서도 자본주의 국가로 성공했다. 둘째 일본은 개신교가 전혀 뿌리내리지 못했는데도 자본주의를 발전시켰다. 그리고 마침내 유럽의 자본주의 국가와 맞붙어 승리를 쟁취한 최초의 아시아 국가로 떠올랐다.유럽 자본주의 국가를 제압한 아시아 자본주의 국가 일본러일전쟁의 발단은 1895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을 러시아, 독일, 프랑스가 견제하고 나선 ‘삼국간섭’이었다. 일본이 랴오둥반도와 만주 일대를 차지하자, 러시아를 비롯한 세 나라가 이를 가로막으면서 불씨가 일기 시작한 것이다. 일본은 자국의 중국 진출을 저지하는 러시아에게 만주를 양보하는 대신 한반도는 자신이 갖겠다는 절충안을 제시했다. 그러나 러시아는 이마저 거절했다. 게다가 대한제국의 외교는 일본보다 러시아로 기울고 있었다. 일본은 중국과 한반도에서 배제될지 모른다는 위기감에 사로잡힌 끝에 전쟁을 통해 중국 진출의 돌파구를 마련하기로 결정했다. 러시아의 야심을 경계하고 있던 영국과 미국은 은밀하게 일본을 지원하고 나섰다.1904년 초, 일본은 러시아에 개전을 선언하고 러시아 조차지인 랴오둥반도의 뤼순항을 점령했다. 이후 전장은 육지로 옮겨져 수십만 명의 양국 병력이 충돌했다. 전투마다 수만 명씩 희생자가 나오는 가운데, 승세는 일본이 잡아 나갔다. 러시아가 기우는 전세를 뒤집기 위해 세계 최강을 자랑하는 발틱함대를 출동시켰으나, 지구 반 바퀴를 돌아온 발틱함대는 대한해협에서 일본 해군의 기습을 받아 물귀신이 되고 말았다. 이로써 1년 넘게 지속된 러일전쟁은 많은 사람의 예상을 깨고 일본의 승리로 귀결되고 말았다.러일전쟁의 승리로 일본은 한반도는 물론 만주에 대한 진출권까지 확보했다. 근대 이후 아시아 국가로는 처음으로 유럽 국가를 무력으로 꺾고 제국주의 대열에 올라선 것이다. 일본열도는 승전의 기쁨으로 열광의 도가니가 되었다. 그러나 흥분한 것은 일본만이 아니었다. 많은 아시아인이 일본의 승리를 자신의 승리로 받아들이며 기뻐했다.아시아의 승리에 열광한 아시아인들중국의 혁명가 쑨원은 일본이 러시아에 승리하자 아시아 민족은 독립에 대한 커다란 희망을 품게 되었다고 말했다. 인도의 독립운동가 네루도 “일본이 유럽의 가장 강대한 한 나라에 대해 승리했는데, 인도라고 못 하겠는가?”라고 한껏 고무되었다. 아시아뿐만이 아니다. 러시아의 침략에 시달리던 폴란드, 핀란드 등 유럽의 약소국가 지도자들도 러시아가 패배한 덕에 독립을 쟁취할 수 있게 됐다며 일본에 고마움을 표시했다.이 같은 반응은 러일전쟁의 결과가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과 맞아떨어지는 부분이 있었기 때문에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가장 큰 문제는 한국인 중에도 비슷한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지용 같은 친일파가 은밀히 일본의 승리를 바라며 전쟁 자금을 헌납하고, 일부는 일본 첩자로까지 활약한 것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안중근을 비롯한 개화파 애국지사조차 처음에는 일본의 승리를 백인종에 대한 황인종의 승리로 보고 이를 반겼다. 그들은 일본의 승전을 계기로 동양 평화가 이루어지기를 기대했다. 물론 이러한 기대는 일본이 아시아 민족의 해방 대신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에 대한 식민 지배로 발걸음을 옮김에 따라 지독한 배신감으로 바뀌어 갔다. alt가쓰라-태프트 밀약을 체결한 일본 내각총리대신 가쓰라 다로(왼쪽)와 미국의 육군장관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오른쪽)alt을사늑약 전문 제국주의에 피부색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러일전쟁은 러시아와 일본이 미국의 포츠머스에서 강화조약을 맺음에 따라 종결되었다. 포츠머스조약 체결 직전 일본은 자신을 후원했던 미국, 영국과 비밀조약을 맺었다. 이 비밀조약은 러일전쟁 이후 동아시아 국제 질서의 틀을 짠 것으로,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미국과 일본은 1905년 7월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고 필리핀과 대한제국에 대한 각자의 권리를 인정했다. 일본은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인정하고 필리핀에 대해 어떤 침략적 의도도 갖지 않는다고 약속했다. 그에 대한 반대급부로 미국도 러일전쟁의 논리적 귀결로서 일본이 대한제국의 보호권을 확립하는 데 찬성하고, 일본의 한국 지배가 극동 평화에 이바지할 것이라고 축원했다. 그 다음 달 영국과 일본은 제2차 영일동맹을 맺었다. 그때 일본은 “한국에서 정치·군사 및 경제상의 탁월한 이익을 옹호·증진하기 위해 정당하고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지도·감리 및 보호 조치를 한국에서 집행할 권리”를 인정받았다.1905년 11월 18일 새벽 경운궁(지금의 덕수궁) 중명전에서 체결된 ‘을사늑약’은 이러한 국제적 밀약의 산물이었다. 조약의 핵심 내용은 일본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다는 것과 일본인 통감을 두어 정치에도 간섭한다는 것이었다. 한 나라의 주권은 외교권과 군사권이 핵심이다. 그런데 그중 하나인 외교권을 일본에 빼앗김으로써 사실상 국권을 상실한 대한제국은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락했다.을사늑약을 배후에서 지휘한 일본인은 이토 히로부미이고, 그의 책략에 부응해 국권을 팔아넘긴 한국인은 학부대신 이완용을 비롯한 다섯 명의 고관대작이었다. 그들을 ‘을사오적’이라 한다. 소식을 전해 들은 백성은 을사오적을 처단하라고 외치며 분노로 들끓었고, 양반들은 을사늑약 파기를 주장하는 상소를 줄지어 올렸다. 상가는 철시 투쟁을 벌이고, 학생들은 동맹휴학에 나섰다. 일본의 배신에 치를 떤 개화파 지식인 안중근은 자신이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국권회복운동에 투신했다. 1909년 10월 26일 그가 하얼빈역에서 처단한 사람은 을사늑약의 주역으로 이후 조선통감을 맡아 침략의 최전선에 나섰던 이토 히로부미였다.스모그의 시대1905년이 일본에게는 아시아의 패권 국가로 발돋움하는 욱일승천의 해였다면, 한국에게는 을사늑약과 함께 사실상 식민지의 치욕이 시작된 해였다고 할 수 있다. 한국의 앞날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시계(視界) 제로의 상황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바로 그해 최고의 자본주의 선진국인 영국에서 나타난 새로운 현상은 마치 그와 같은 한국의 암울한 상황을 표현하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영국의 수도 런던은 예로부터 안개가 많이 끼기로 유명한 도시였다. 매캐하고 뿌연 연기가 런던을 뒤덮으면서 대기를 혼탁하게 하고 차량과 보행자를 위협하고 있었다. 1905년 런던에서 열린 공중위생회의에서는 이 같은 새로운 대기 현상을 일컫는 ‘스모그(smog)’라는 신조어가 등장했다. 스모그는 연기(smoke)와 안개(fog)의 합성어로, 런던처럼 매캐하고 뿌연 연기가 안개와 함께 온 도시를 뒤덮는 현상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스모그의 원천은 자본주의 산업 발전의 상징인 공장의 굴뚝에서 뿜어져 나오는 연기였다. 세계 자본주의의 수도인 런던에서 그러한 굴뚝 연기는 한때 산업혁명을 상징하는 광경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공장이 점점 더 많이 건설되고 석탄 소비가 늘어나자, 석탄이 타면서 나온 매연이 안개와 혼합돼 시민의 건강과 안전을 위협하게 된 것이다.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라는 암울한 조건에서 스모그의 시대를 맞이할 채비를 거의 마치고 있었다.]]> Mon, 29 Apr 2019 17:46:11 +0000 29 <![CDATA[찬란한 5월의 어느 날 광주 시간여행 이 땅의 숨결]]>     글·사진 임운석 여행작가찬란한 5월의 어느 날광주 시간여행   시간 여행은 과거의 흔적이나 이야기를 되짚어보는 여행이다. 멋진 풍광이나 특별한 이벤트는 없지만 옛것을 보고 듣고 느끼기에 부족하지 않다. 그래서 시대의 가치와 정신을 배우는 게 이 여행의 묘미다. 광주 양림동은 100여 년 전 근대문화의 정취가 오롯이 남아 있다. 근대 건축물에 감춰진 오래된 향기를 찾아 광주를 다녀왔다. alt선교사들의 사랑을 확인할 수 있는 양림동alt정크 아트존으로 변한 펭귄마을alt1904년 광주에서 최초로 설립된 양림교회. 현 예배당은 1954년에 지은 것이다   광주의 예루살렘, 양림동 서양촌광주광역시 양림동은 야트막한 언덕배기인 양림산 아래에 자리한다. 양림산은 예나 지금이나 나무가 많아 실록이 짙고 깊다. 옛날에는 읍성 밖에 자리한 터라 전염병에 걸려 죽은 시체들이 있던 곳이다.양림동에 근대 문화유산이 오늘날까지 잘 보존될 수 있었던 까닭은 선교사들의 활동 덕분이다. 1904년, 미국 남장로회 소속 선교사 유진 벨(한국명 배유지, 1868~1925)과 클레멘트 C. 오웬(한국명 오원, 1867~1909)이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선교사들이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면서 광주 사람들은 양림동을 ‘서양촌’이라 불렀고, 선교사들과 기독교 신자들은 ‘광주의 예루살렘’이라 부르기 시작했다.양림동 여행은 관광안내소인 ‘양림마을 이야기관’에서 출발하는 게 좋다. 여기서 스탬프 투어를 위한 안내지도를 제공한다. 본격적인 투어에 앞서 양림쌀롱을 찾아보자. 여행자 라운지로 활용되는 이곳은 오래된 한옥을 개조해 1930년대 앤티크 가구와 소품들로 꾸며 놓았다. 400여 권에 달하는 여행 서적도 구비돼 있으며 모던한 의상도 대여한다.펭귄마을 역시 양림동의 핫 플레이스 가운데 하나다. 양림동에서도 가장 낙후된 곳이었지만 지금은 전국에서 찾아온 사람들로 북적인다. 300m 정도 되는 좁은 골목길 담벼락에 70~80년대에 사용하던 생활용품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멈춰버린 벽시계, 1980년 이후 멈춰버린 달력, 찌그러진 밥그릇, 소화기를 재활용해서 만든 펭귄 등 빈터나 담장마다 박물관을 옮겨놓은 것 같다.양림동 한가운데 자리한 양림교회는 1904년 12월 25일에 세워진 교회다. 지금의 교회당은 1954년에 지은 것으로 붉은 벽돌에서 예스러움이 묻어난다. 교회당 옆에 오웬기념각이 있다. 이 건물은 유진 벨 선교사와 함께 의료 선교사로 광주에 들어온 오웬 선교사를 기념해 세워졌다. 오웬 선교사는 목회와 의료봉사를 병행했는데, 과중한 업무 탓에 광주에 부임한지 5년 만인 1909년, 급성폐렴으로 세상을 떠났다. 오웬기념각은 예배당이 부족해 마음 아파했던 그의 뜻에 따라 미국에서 친척들이 보낸 기금으로 1914년에 건립했다. 회색 벽돌을 네덜란드 식으로 쌓아 이국적인 느낌이다. 기념각은 예배와 교회 행사에 활용됐으며, 특히 크리스마스에는 지역민들을 초대해 축제를 여는 등 문화의 장으로 사용됐다. alt색감이 돋보이는 선교사 사택한국을 사랑한 푸른 눈의 이방인들양림동에는 희생과 봉사를 몸소 실천한 헌신적인 인물들이 많다. 광주기독병원의 2대 원장이자 의사였던 로버트 M. 윌슨(한국명 우일선) 선교사가 대표적이다. 1905년 워싱턴대학교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은 그는 의료선교사로 광주를 찾은 이후 한센병 환자들을 따뜻하게 보살폈다. 그를 ‘성자에 가까운 분’이라 칭송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그가 살던 가옥은 현재 우일선 가옥이라 불리며 양림동을 찾는 여행자들이 꼭 한 번 들르는 명소가 됐다. 우일선 선교사 사택은 1920년대에 지은 것으로 추정한다. 광주에 현존하는 서양식 주택으로는 가장 오래됐다. 1층에 거실, 가족실, 다용도실, 부엌, 욕실이 있고, 2층에 침실이 있으며, 지하에는 창고와 보일러실이 있다. 오웬기념각과 같은 회색 벽돌을 네덜란드 식으로 쌓았다. 정면, 측면 어디서 보더라도 서양식 가옥 특유의 멋이 느껴진다.엘리자베스 셰핑(한국명 서서평) 여사와 최흥종 목사 역시 한센병 환자들의 자활에 헌신한 인물이다. 그 가운데 최흥종 목사는 젊은 시절 한때 건달 생활을 하며 방황하던 중 선교사들의 희생정신에 감화되어 기독교인이 됐다. 이후 제중원에 들어가서 한센병 환자를 치료하는 일에 헌신했다. 그러다가 1911년에 땅을 무상으로 기증해 국내 최초의 한센병 환자 수용 시설인 광주나병원을 설립했다. 그 이후에도 그는 목회를 지속하며 한센병 환자 치료에 일생을 바쳤다. alt유진 벨 선교사를 기념하는 배유지기념예배당광주 여성의 자긍심, 수피아여학교양림동은 여성 교육의 요람이기도 하지만 수난의 현장이기도 하다. 유진 벨 선교사가 1908년에 설립한 수피아여학교(현 수피아여중고)는 1919년 3·1만세운동으로 일시 폐교됐고,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으로 무기한 휴교 됐으며, 1937년 신사참배 거부로 폐교를 맞았다. 학교가 다시 문을 연 것은 1945년에 이르러서다.우일선 가옥에서 수피아여학교로 가는 길목에 단출한 서양식 건물이 눈에 띈다. 원래 커티스메모리얼홀이라 부르던 곳으로 지금은 배유지기념예배당이라 부른다. 선교사들이 예배를 드리기 위해 1921년에 지었다. 그 아래에 ‘대한독립만세’를 큰소리로 외치는 듯한 형상의 광주 3·1만세운동 기념 동상이 있다. 동상 뒷면에는 만세운동에 참여한 23명의 이름이 적혀있다. 수피아여학교 교사와 학생 중 옥고를 치른 인물들이다. 그중에는 일본 헌병이 휘두르던 칼에 왼팔이 잘리자 오른손으로 태극기를 흔들었던 윤형숙과 광주 YWCA와 민주화 운동을 이끈 ‘광주의 어머니’ 조아라 여사, 독립과 여성 운동에 평생을 바친 김마리아 여사 등의 이름도 있다. 그들은 광주인의 자긍심을 일깨워줄 만한 인물들이다.수피아여학교 수피아홀과 윈스브로우홀에도 이야기가 깃들어 있다. 수피아홀은 이 학교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서 현재 역사관으로 사용 중이다. 그 아래 3층짜리 붉은 건물은 윈스브로우홀이다. 1927년, 미국 남장로회 윈스브로우 여사를 주축으로 설립된 부인조력회에서 ‘생일 헌금’ 5만 달러를 헌금해 지었다. 정면 중앙 출입구를 중심으로 좌우대칭을 이뤄 안정감이 느껴진다. 정문 오른쪽에 매달린 무쇠종이 추억을 소환하듯 ‘땡땡땡’ 수업 시간을 알린다. 현재 교사로 사용 중이라 내부는 관람할 수 없다.호남신학대학교를 지나 사직공원에 오르면 전망 타워가 있다. 양림동은 물론이고 서쪽에 영산강, 동쪽에 무등산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alt생후 3년 만에 생을 마감한 선교사 자녀의 묘비양림동이 잔잔한 울림으로 남는 이유호남신학대학교에 가면 작은 숲길이 있다. 숲길은 윌슨길, 오웬길, 프레스톤길, 카딩톤길, 시핑길 등 선교사들의 이름을 딴 산책길이다. 어떤 길을 걸어도 길의 종착지는 선교사 묘원으로 이어진다. 유진 벨 선교사 및 오웬 선교사를 포함해 스물두 명의 선교사와 그의 가족들이 안식한 곳이다. 개중에 작은 무덤은 꽃도 피어보지 못한 채 천국으로 간 어린 자녀들의 무덤이다.이곳에 묻힌 선교사들의 공통점은 최고 엘리트 코스를 밟은 장래가 촉망된 청년들이라는 점과 안정된 삶을 포기하고 낯선 이국땅에서 평생을 헌신한 데 있다. 그들은 낯선 문화에 적응하기보다 그것을 뛰어넘었다. 그들은 천형이라며 가족에게마저 버림받은 한센병 환자의 손을 잡아줬으며,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빈민을 제 가족처럼 거둬들였다. 그리고 고아들의 부모가 되길 자처했다. ‘조선의 테레사’라 불린 서서평 선교사는 대학을 세우고, 대한간호협회를 창립해 세계간호협회에 가입시키는 등 낙후된 의료 환경개선을 위해 한평생을 바쳤지만, 정작 자신은 반쪽짜리 담요와 동전 몇 개, 그리고 강냉이 두 홉만을 남긴 채 1934년 풍토병과 영양실조로 세상을 떠났다.시간 여행에는 아름다운 풍광이나 가슴 설레는 체험은 없다. 그러나 마음 한편에 잔잔한 울림이 있다. 선교사의 사랑과 희생, 봉사와 나눔에 가슴이 따뜻해 진다.]]> Mon, 29 Apr 2019 18:06:23 +0000 29 <![CDATA[마음의 고향, 봄이 오는 진천을 찾아서 충청북도 진천 ]]> 글·사진 김초록 여행칼럼니스트마음의 고향, 봄이 오는 진천을 찾아서충청북도 진천어느새 봄기운이 스멀스멀 퍼지고 있는 이즘, 꽁꽁 얼어붙었던 대지가 새싹들의 반란으로 화들짝 깨어나고 있다. 충북 진천은 성큼 다가온 새봄을 만끽하기 좋은 고장이다. 일찍이 생거진천(生居鎭川)이라 해서 사람이 살아가기에 아주 적합하다고 알려져 왔다. 지금도 진천을 고향으로 둔 사람들의 자부심은 대단한데, ‘재해를 모르는 살기 좋은 고을’이라느니, ‘태고 적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깨끗한 땅’이라는 말들이 자주 오르내리는 걸 보면 이를 짐작할 수 있다.                         백곡호를 따라가며 보라중부고속도로 진천 나들목에서 진천 읍내를 거쳐 성환 방면(34번 도로)으로 5분쯤 가면 종 모양으로 지어진 진천종박물관이 나타난다.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종박물관으로 종의 탄생과 의미·흥미로운 설화·종의 역사 등을 자세하게 살펴볼 수 있다. 전시실로 들어가면 현존하는 범종 가운데 가장 큰 성덕대왕신종과 가장 오래된 상원사 동종을 비롯해 모양과 제작기법이 제각각인 국내외 각종 종들이 펼쳐져 있는데, 문양 탁본과 음향 감상, 타종 등 종으로 해볼 수 있는 다양한 체험이 가능하다.박물관과 관람 후에는 경치가 좋아서 낚시꾼들이 많이 찾는 풍광 수려한 백곡호를 끼고 달린다. 안성 방면 백곡면 소재지로 들어서니 가톨릭 박해·순교지인 배티성지가 기다리고 있다. 천주교 박해 당시 교인들이 이곳에 몸을 피했는데, 최양업 신부(세례명 토마스)가 세운 우리나라 최초의 신학교 조선교구신학교가 둥지를 튼 유서 깊은 현장이다. 경내에는 최 신부를 기리는 기념관(성당)과 교우촌, 순교자 무덤 등이 남아 있어 연중 많은 순례객들이 찾아온다. 천주교 신자가 아니더라도 고요함과 경건함이 흐르는 순례길(오솔길)을 따라 걸어봄직하다. 진천종박물관: 충북 진천군 진천읍 백곡로 1504-12 / 043-539-3627배티성지: 충북 진천군 백곡면 배티로 663-13 / 043-533-5710         alt진천종박물관alt배티성지 천 년의 전설이 담긴 돌다리이번엔 백곡면에서 문백면으로 넘어간다. 구곡리, 일명 굴티마을에 들어서면 붉은 돌로 만들어진 독특한 다리 하나가 나온다. 여기 사람들은 이 다리를 ‘농다리’라 부른다. 진천 들판을 가로지르는 미호천(渼湖川)은 구곡리를 거치면서 이른바 상산8경(常山八景)이란 아름다운 경관을 자아내고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농다리다. 온갖 자연재해를 거뜬히 이겨내고 오늘도 그 견고함을 자랑하는 농다리는 깊은 세월의 값진 흔적이 아닐 수 없다. 만든 지 1000년(14세기 고려 말)이 넘었다는 이 ‘신비의 다리’는 자연석으로 만들어진 우리나라에서 가장 길고 오래된 돌다리다. 암돌과 숫돌을 엇갈리게 끼워 맞춘 모양이 꼭 지네 같아 ‘지네다리’란 별명도 갖고 있다. 원래는 100m(스물여덟 칸) 정도 되는 길이였으나 긴 세월이 흐르는 동안 깎이고 패여 지금은 93m(스물 네 칸) 정도만 남아 있다. 돌과 돌이 서로 잡아당기도록 정교하게 쌓고, 작은 돌로 세운 교각은 토목공학적으로 매우 우수하다는 평을 얻었다.이 농다리에는 별난 전설이 전해져 내려온다. 고려 고종 때 임행 장군이 구산동(현재 구곡리) 앞 세금천(洗錦川)에서 눈보라가 치는 겨울아침에 세수를 하는데 한 젊은 부인이 친정아버님의 부고를 듣고 차가운 개울을 건너려고 하자, 부인의 효심에 감탄하여 용마를 타고 하루아침에 이 다리를 완성했다는 내용이다. 이 다리는 그 후로 나라에 변고가 있을 때마다 큰 소리로 울었고, 특히 임진왜란과 한일 강제병탄 당시엔 며칠간을 울어 마을 사람들이 밤잠을 설쳤다고 한다.농다리를 건너 야트막한 산을 하나 넘어가면 푸른 물을 담은 초평저수지가 나타난다. 진천에서 가장 넓은 저수지라는 이곳은 나지막한 구릉성 산지에 둘러싸여 있다. 저수지 안에는 수초섬, 큰섬 등 작은 섬들이 떠 있어 가만가만 그것들을 감상하기에 좋다. 농다리에서 시작해 초평호를 따라 구름다리까지 이어지는 1.7㎞의 트래킹코스(수변탐방로)도 걸어볼 만하다.진천 농다리: 충북 진천군 문백면 구곡리 601-32         alt alt 위 진천 농다리아래 초평호 역사를 바꾼 김유신을 만나다진천 읍내에서 10분 정도 떨어진 곳에는 삼국통일이란 위업을 이룩한 흥무대왕 김유신 장군의 흔적이 남아있다. 읍내 군청 앞 삼거리에서 천안 쪽으로 가다보면 장군의 영정을 모신 길상사가 나오고, 이어 4km쯤 더 들어가면 그의 탄생지가 나온다. 흥무대왕은 김유신이 죽어서 받은 시호다. 신라 진평왕 17년(595) 진천 태수였던 김서현과 어머니 만명 부인 사이에 태어난 김유신 장군은 이곳에서 나고 자라 화랑이 됐고, 낭비성 싸움에 출전하는 등 신라군의 사기를 북돋웠다.장군 생가로 가기 전, 길상사부터 들러보는 게 순서일 것 같다. 길상사에 들어서면 먼저 오른쪽 끝으로 김유신 장군에게 올리는 제실(祭室)이 보인다. 제실과 사적비를 지나면 홍살문을 통과해 외삼문과 내삼문으로 들어가는 구조다. 내삼문은 흥무전으로 들어가는 마지막 관문. 흥무전에는 장우성이 그린 김유신 장군 영정과 흥무왕 사적비가 세워져 있다. 스치듯 감상하기보다 구조물 하나하나의 의미를 되새기면서 그 역사를 찬찬히 둘러볼 일이다.김유신 장군이 태어난 상계리 계양마을 뒷산은 장군의 태(胎)가 묻혔다 해서 태령산(胎靈山)이라 불린다. 김유신 장군은 이곳에서 태어나 훗날 삼국을 통일했는데, 일설에는 태령산에 태를 묻을 때 용이 내려와 태를 가지고 승천했다고 한다. 이런 연유로 태령산은 ‘태룡산’으로 불리기도 한다. 생가 터에는 장군의 업적을 기리는 비석 유허비가 있고 김유신 장군이 소년 시절 말을 달리며 활쏘기 연습을 했다는 치마대(馳馬臺, 치마바위)가 있다. 산길을 따라 태령산 꼭대기에 오르면 태실을 볼 수 있다. 태실은 아기가 태어날 때 나온 태를 따로 보관한 시설을 말한다. 김유신 장군 태실은 자연석으로 둥글게 기단을 쌓고 봉토를 마련하였으며 태령산 꼭대기를 따라 돌담을 산성처럼 쌓아 신성한 구역임을 표시하였다.진천 길상사: 충북 진천군 진천읍 문진로 1411-38김유신 탄생지: 충북 진천군 진천읍 김유신길 170-4 / 043-539-3840         alt alt 위 진천 길상사아래 김유신 탄생지 예사롭지 않은 절집과 독립운동가의 생가 김유신 장군 탄생지에서 길을 따라 계속 가면 그 끝에 보탑사가 나온다. 보탑사를 에두른 앞산은 그 모양새가 마치 연꽃 같아 산 이름도 보련산이란다. 보탑사는 쇠못 하나 쓰지 않은 순수한 목탑으로, 그 규모나 가치 면에서 많은 얘깃거리를 지니고 있다. 우리나라 고건축 분야의 최고 전문가들이 만들어낸 작품으로 강원도 산 붉은 소나무 8t 트럭 150대 분량의 목재를 전통기법대로 짜맞추어 올렸고, 상륜부는 심을 박아 힘을 지탱하게 했으며, 외부는 5mm의 순동으로 제작했는데 여기에 들어간 구리만도 4t이 넘었다고 한다. 또한 내부는 1층에서 3층까지 계단으로 오르내릴 수 있게 배려하였다.한편 보탑사 방문을 마치고 읍내로 돌아 나오다 문백면 봉죽리로 접어들면 조선시대 가사문학의 대가인 송강 정철의 위패와 영정을 모신 정송강사에 닿게 된다. 이정표가 있어 길을 잃을 염려는 없다. 송강 정철은 고산 윤선도와 함께 우리 국문학사에 큰 획을 그은 인물로 강원·전라·함경도 관찰사를 지내면서 ‘관동별곡’·‘사미인곡’·‘성산별곡’·‘속미인곡’ 등 수없이 많은 불후의 명작을 낳았다.진천은 또한 독립운동가 이상설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읍내에서 가까운 산직마을에 가면 그의 생가가 있는데, 앞면 3칸, 옆면 1칸 규모에 흙벽돌과 진흙으로 지은 집이다. 이시영·이규형 등과 함께 신학문을 공부했던 이상설은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서 조선이 독립국임을 알리고자 고종의 밀서를 가지고 갔으나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그러나 1917년 연해주에서 생애를 마칠 때까지도 조국의 앞날을 위해 헌신했다. 생가에 있는 그의 동상은 젊었을 적 모습 그대로 늠름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보탑사: 충북 진천군 진천읍 김유신길 641  / 043-533-0206정송강사: 충청북도 진천군 문백면 송강로 523 / 043-532-0878이상설 생가: 충북 진천군 진천읍 이상설안길 10 승열사 / 043-539-3114         alt 정송강사 alt보탑사alt독립운동가 이상설 동상alt 세월의 변화를 꿋꿋이 견뎌낸 술도가진천땅을 돌아다니다 보면 세월의 더께가 켜켜이 쌓인 건축물을 여럿 만날 수 있다. 1930년에 건립된 덕산양조장, 세왕주조도 그 중 하나다. 양조장 건물로는 유일하게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단층의 함석지붕 목조건축물이다. 백두산에서 전나무를 가져와 지었다는데, 과연 그래서인지 오랜 세월의 굴레에도 원형을 잃지 않고 있다. 자연을 최대한 활용한 건물로 내부로 바람이 잘 통할 수 있도록 통풍구를 따로 마련했다. 건물 앞에는 측백나무를 심어 해충을 방지하고 나무로 된 구조물이 썩는 것을 막고자 했다. 3대째 가업을 이어 전통주를 생산하고 있는데, 술도가에 들어가면 들큼한 누룩 냄새와 술 익는 냄새가 진동한다.세왕주조: 충청북도 진천군 덕산면 초금로 712 / 043-536-3567         alt 덕산양조장             진천은 어딘지 모르게 마치 고향을 찾은 듯 마음을 편하게 만드는 매력이 있는 곳이다. 처음 발 딛는 곳이라고 해서 당황할 필요는 없다. 발길 움직이는 대로, 멈추는 대로 둘러보면 될 일이다. 이곳에서는 찬찬히 눈을 녹이는 햇살처럼 시간마저 천천히 흐르니까.                         김초록여행칼럼니스트 겸 수필가. 현재 『월간 비타민』, 『건설경제신문』, 『서울우유』, 『냉동공조신문』에 객원기자로 활동 중이다. 여행 저서로는 『여름 이야기』, 『7가지 테마가 있는 여행』 등이 있다. ]]> Fri, 03 Mar 2017 16:41:13 +0000 3 <![CDATA[독립기념관과 세계 ]]> 한국의 독립운동은 비단 한반도 안에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우리 민족은 중국·러시아·일본 등 세계 곳곳에 뿌리를 내렸고, 그들이 발 딛은 곳이 곧 독립운동의 무대가 되었다. 독립기념관은 국외독립운동사적지를 찾아 머나 먼 이국땅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애쓴 선열들의 업적과 그 숭고한 정신을 기리고 있다. alt]]> Fri, 03 Mar 2017 11:38:40 +0000 3 <![CDATA[잊었던 역사 속 영웅을 조명하다 영화 <암살> ]]> 글 편집실잊었던 역사 속 영웅을 조명하다영화 <암살>감독: 최동훈주연: 전지현, 이정재, 하정우개봉일: 2015년 7월 22일<암살>은 1930년대 친일파 암살 작전을 펼치는 독립운동가들에 대해 다룬 영화다. 총 180억 원 규모의 블록버스터로, 화려한 라인업과 탄탄한 연출로 천만 영화 대열에 합류하며 흥행에 성공했다. 특히 작품 속 등장인물들은 당대 역사에서 실존했던 인물들과 비교해보는 재미가 있어 더욱 주목 받았다.                         Q. 안옥윤의 실제 모델은 저격수?등장인물들 가운데 단연 눈에 띄는 인물 중 하나는 바로 안옥윤(전지현)이다. 안옥윤은 실존 인물은 아니지만, 여성 독립운동가 남자현을 모티브로 탄생된 캐릭터다. ‘여자 안중근’, ‘독립군의 어머니’라 불린 남자현은 총을 주로 다루는 저격수는 아니었으나, 남성 독립운동가 못지않게 무장투쟁으로 일제에 맞선 인물이다. 안옥윤이 간도참변에서 어머니를 잃은 상처를 간직하고 있다면, 남자현은 의병전쟁으로 남편을 여읜 아픔이 있었다. 이는 그녀가 독립운동에 투신하게 된 계기가 되어 사이토 마코토 총독 주살 계획, 『조선독립원』 혈서 작성 등 독립운동사에 길이 남을 발자취를 남겼다. <암살>에서 안옥윤의 활약은 남성 독립운동가 중심에서 주목받지 못했던 여성 독립운동가의 존재를 다시금 조명하는 계기가 되었다.         alt<암살> 속 저격수 안옥윤alt안옥윤의 실제 모델 남자현                         Q. 속사포가 나온 신흥무관학교는 어디?“나 이대 나온 여자야” 이전에 “나 신흥무관학교 나온 남자야”가 있었다. 일명 ‘속사포’로 등장한 추상욱(조진웅)은 자신이 신흥무관학교 마지막 졸업생 출신이라며 자랑스럽게 말한다.신흥무관학교는 1910년대 만주에서 설립된 일제강점기 최대의 독립군양성기관으로, 이곳을 졸업한 약 3,500명의 독립투사들은 청산리대첩 등 독립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우며 독립전선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영화 속 등장인물이자 실존 인물인 김원봉도 신흥무관학교 출신이다. 당시 신흥무관학교에서는 군사훈련뿐 아니라 역사·국어·과학 등 다양한 공부를 가르쳤는데, 이는 독립된 이후 나라를 이끌어갈 민족 지도자를 키우기 위해서였다. 오늘날 내로라하는 대학교와 같은 엘리트 양성소라고 할 수 있으니, 속사포가 어깨를 으쓱했을 만하다.  alt              <암살> 속 신흥무관학교 출신 독립운동가 추상욱                        Q. 새롭게 주목 받은 독립운동가, 김원봉의 정체는?영화에서 김원봉(조승우)은 김구(김홍파)와 함께 친일파 암살을 모의한다. 김원봉은 이후 영화 <밀정>에서 이병헌이 맡아 재등장하면서 더욱 주목을 받았다. 일제강점기 당시 일제가 김원봉의 현상금으로 내건 금액은 100만 원으로 김구에게 걸렸던 현상금 60만 원보다도 훨씬 높은 금액이었다. 지금으로 따지면 무려 320억 원에 달하는 거금이라고 하니, 그의 활약이 얼마나 컸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고 의열단을 결성한 그는 국내의 일제수탈수단을 파괴하고 일제 요인들을 암살하는 등 활발한 독립운동을 벌였다. 그럼에도 20년간 단 한 차례도 잡힌 적이 없을 정도로 신출귀몰했기에 일제는 그를 잡아들이지 못해 안달을 부렸다.이처럼 많은 업적을 남겼음에도 김원봉에 대해 잘 알려지지 않았던 까닭은 그가 광복 이후 월북했다는 이유 때문이다. 김원봉은 북한에서 줄곧 통일을 주장하다가 1957년 김일성에게 숙청되었으며, 밀양에 남아있던 네 형제들도 6·25전쟁 과정에서 처형당했다.         alt<암살> 속 김원봉alt김원봉                         Q. 실제 변절자의 최후는 어땠을까?“그때 왜 동지들을 배신했어?” “몰랐으니깐. 해방될지 몰랐으니깐!”이 대사는 광복 후 안옥윤이 변절자 염석진(이정재)을 처단하기 직전에 나눈 대화다. 한때는 누구보다 열성적인 독립투사였던 염석진은 일제의 고문에 굴복해 밀정으로 돌아서게 된다. 광복 후 고위급 경찰이 된 염석진은 반민특위 재판에 서게 되지만 증거불충분으로 무죄를 선고 받는다, 그러나 “염석진이 밀정이면 죽이라”는 16년 전 임무를 따른 안옥윤과 명우의 총에 맞게 된다.염석진이란 캐릭터는 특히 친일파 노덕술의 행적과 비슷한 점이 많다. 노덕술은 일제강점기 고등계 형사를 지내며 많은 독립운동가들을 투옥시켜 잔인하게 고문한 인물고, 반민족특위에 회부되었지만 반민족특위 해체로 풀려나 경찰직으로 복귀했다. 광복 이후에도 그는 오랫동안 고위 인사로 지내며 호의호식하다가 생을 마감했다. 영화 속 변절자와 실존했던 친일파의 판이한 결말은 안타까운 현실이다.         alt<암살> 속 변절자 염석진alt친일파 노덕술 ]]> Fri, 03 Mar 2017 19:45:11 +0000 3 <![CDATA[조선이 독립국임과 조선인이 자주민임을 세계에 알린 민족대표 ]]> 글 학예실조선이 독립국임과 조선인이 자주민임을 세계에 알린 민족대표권병덕(權秉悳, 1868. 4. 25~1943. 7. 13)독립기념관은 국가보훈처·광복회와 공동으로 권병덕을 3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권병덕은 충북 청주군 미원면 성화동에 위치한 외가에서 태어났다. 독실한 동학 도인이자 천도교 신자로, 충실한 신앙생활을 하는 동시에 많은 신도들을 이끌고 항일운동에 앞장선 인물이었다. alt 동학과 천도교에 입교하여 활동하다권병덕은 1885년 4월 임규호의 권유로 동학에 입교하였고, 1886년 2월에는 최시형에게 가르침을 받아 청주접주가 되었다. 1894년 동학의 2차 봉기 때 도인(道人) 3만여 명을 이끌고 참여했으나, 일본군과 관군, 민보군에게 패퇴하였다. 이후 1906년 1월 김연국과 함께 손병희가 이끌던 천도교에 입교하여 천도교단 정비와 교세의 신장을 위해 활동했다. 그러나 얼마 가지 못해 이듬해 12월 김연국과 손병희의 갈등을 계기로 시천교로 옮겨갔다. 관도사(觀道師)·봉도(奉道)의 지위에 올라, 시천교인의 지침서인 『교인필지(敎人必知)』를 저술하였다.그러나 시천교의 교권 장악을 둘러싼 내부분열이 일어나자, 1916년 이근상·손필규 등과 함께 천도교로 돌아온 그는 이후 장석승례(丈席承禮)·도사(道師)에 임명되어 천도교를 기반으로 점진적인 사회 변화와 민족운동의 역량을 신장하고자 노력하였다.         alt 권병덕 가족사진 민족대표로 독립선언식에 참여하다1918년 말 천도교 내에서는 국외에서 전개된 독립운동과 민족자결주의의 영향을 받아 행정자치 청원→독립청원→독립선언의 순서로 독립운동을 진행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천도교 인물들은 기독교의 이승훈·함태영, 불교의 한용운 등과 협의하여 독립선언서 제작과 민족대표 선정 등에 대해 협의하였다.1919년 2월 21일 권병덕은 손병희로부터 독립선언 참여 제의를 받고 이에 흔쾌히 찬성했다. 24일부터 26일까지 독립선언서 제작 및 배포하고, 조선총독에게 보내는 청원서, 파리강화회의의 각국 대표자에게 보내는 건의서에 서명하였다. 그리고 다가온 3월 1일 민족대표 33인과 함께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하였다. 독립선언식 직후 피체된 권병덕은 보안법 위반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2년 형을 언도받아 1921년 11월 4일 만기 출옥했다. 당시 그는 <동아일보>와의 인터뷰를 통해 민족의 사랑과 단결을 촉구하였다.         alt태화관alt권병덕의 서대문형무소 수형기록카드(국사편찬위원회) 천도교 통합과 민족의식 고취를 위해 노력하다1921년에서 1922년까지 천도교 내부에서는 개량적 문화운동을 추진하던 구파와 혁신운동을 추진하는 신파 사이에 분쟁이 야기되었다. 권병덕은 구파와 신파의 분쟁을 조정하며 천도교 내 통합을 위해 애썼다. 그러나 1922년 말 천도교 신파가 ‘천도교 연합회’를 설립하여 분립하자, 천도교를 탈퇴, 수운교와 상제교에 들어가 활동했다. 1927년 이후에는 신간회에서 활동하다가 신간회가 해체되자 다시 천도교 구파로 돌아왔다.1930년대 중반 이후 권병덕은 우리 역사를 서술하며 민족의식을 고취하고자 노력했다. 1935년 『이조전란사(李朝戰亂史)』를 간행하였고, 1938년에는 독립운동가들의 의열투쟁의 역사를 담은 『조선총사(朝鮮總史)』를 발간하려다가 소위 출판법에 의해 삭제 처분을 받았다.권병덕은 민족의식 고취를 위한 역사 서술에 심혈을 기울이던 중 1943년 7월 13일 오후 경성부 신설정 자택에서 향년 76세로 별세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적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alt조선총사(朝鮮總史)』 원고본alt천도교의 역사를 정리한 권병덕 자필 원고본 ]]> Fri, 03 Mar 2017 18:59:27 +0000 3 <![CDATA[하나, 안중근의 영원한 반려자, 김아려 여사 둘, 일제 병기창으로 끌려간 두 범종의 운명 ]]> [우리가 몰랐던 이야기 하나]글 김형목 독립기념관 책임연구위원안중근의 영원한 반려자, 김아려 여사예수를 찬미하오.우리들은 이 이슬과도 같은 허무한 세상에서 천주의 안배로 배필이 되고 다시 주님의 명으로 이제 헤어지게 되었으나, 또 머지않아 주님의 은혜로 천당 영복의 땅에서 영원에 모이려 하오. 반드시 감정에 괴로워함이 없이 주님의 안배만을 믿고 신앙을 열심히 하고 어머님에게 효도를 다하고 두 동생과 화목하여 자식의 교육에 힘쓰며 세상에 처하여 심신을 평안히 하고 후세 영원의 즐거움을 바랄 뿐이오. 장남 분도(세례명)를 신부가 되게 하려고 나는 마음을 결정하고 믿고 있으니 그리 알고 반드시 잊지 말고 특히 천주께 바치어 후세에 신부가 되게 하시오.많고 많은 말을 천당에서 기쁘고 즐겁게 만나보고 상세히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것을 믿고 또 바랄 뿐이오.1910년 경술 2월 14일장부 도마(토마스多默) 올림 alt순국 직전의 안중근alt김아려 여사와 자녀 사진 유언에서 ‘인간 안중근’을 보다3월 26일은 하얼빈 의거의 주역 안중근 의사가 차디찬 뤼순감옥에서 순국한 날로, 최소한 한국인이라면 꼭 기억해야 하는 날이다. 1910년 그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기 전 그가 부인에게 남긴 유언은 ‘인간 안중근’의 진정한 면모를 보여준다.안중근은 생을 마감하는 순간에도 감히 누구도 모방할 수 없는 의연한 자세를 유지했다. 장남 분도를 꼭 신부로 키우라는 완곡한 부탁도 한다. 어머니께 효도하고 형제들과 화목한 생활을 강조하는 평범한 남편이었다. 이승에서 못다 이룬 꿈은 천당에서 자세히 이야기하자는 맹세도 잊지 않았다. 그가 진정 무엇을 위하여 하얼빈 의거를 결행했는지 그대로 보여주는 눈물겨운 대목이다. 가슴 뭉클하면서도 담담하게 써내려간 편지는 읽는 이의 심금을 울린다.안중근의 반려자가 되다오늘을 살아가는 한국인 중 상당수는 안중근 부인이 김아려(金亞麗)라는 사실을 잘 알지 못한다. 기록도 단편적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과연 그녀는 어떠한 인물인가. 1878년 황해도 재령군 향반(鄕班)인 김홍섭 딸로 태어난 김아려는 일찍이 천주교를 수용하는 등 비교적 자유분방한 분위기 속에서 자랐다. 1894년 1살 연하인 안중근과 백년가약을 맺어 슬하에 1녀 2남을 두었다.시집살이는 만만치 않았다. 시아버지 안태훈과 남편은 동학농민군 진압을 위해 출전했다. 살림살이는 고스란히 시어머니 조마리아와 그녀의 몫이었다. 독실한 신앙생활은 온갖 어려움을 이겨내는 정신적인 지주였으며, 시어머니의 따뜻한 인정과 배려는 자신감·자긍심으로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든든한 밑거름이 되었다. 남편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다남편 안중근은 항상 새로운 변화에 부응하려는 다양한 활동에 앞장섰다. 파격적인 행보로 천주교단이나 외국인 신부와 갈등을 일으키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진남포로 이사하고는 삼흥학교를 설립, 돈의학교를 인수·운영하는 등 교육구국운동에 노력했다. 삼흥학교가 재정난에 직면했을 때는 처남인 김능권(金能權)이 경제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던 1907년 대구에서 시작된 국채보상운동은 국내는 물론 국외 한인사회로 급속하게 파급되었다. 안중근은 가족들에게도 참여를 권장하였다. 민족자본 육성을 위한 그의 경제활동은 이러한 인식과 무관하지 않았다. 시어머니, 동서와 함께 김아려도 시집오면서 가져온 패물을 내놓을 만큼 열성적으로 나섰다.일제의 탄압으로 국내에서 활동이 불가능해지자, 안중근은 망명길에 올랐다. 그리고 마침내 1909년 10월 26일 오전, 일제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하얼빈 역두에서 저격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이때부터 김아려는 자식들 양육은 물론 가족들 생계까지 책임지는 숙명을 맞이했다. 결국 이듬해 3월 26일 뤼순감옥에서 안중근은 순국했다. 시신조차 수습하지 못하는 참담한 현실이었다. 2월 14일을 기억해야 할 이유이후로도 일제의 추적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집요했다. 김아려와 가족들은 러시아와 중국 곳곳으로 옮겨 다니며 추적을 피하는 ‘하루살이’ 같은 삶을 살았다. 그 가운데 장남이 일제에 독살되는 등 사무치는 아픔을 겪었지만 그럼에도 피난살이는 계속 이어졌다.더욱이 작은 아들은 강제로 국내에 압송되어 이토 히로부미의 아들 분키치에게 아버지의 죄를 사죄하고 ‘의형제’를 맺는 퍼포먼스에 속수무책 동원되었다. 당시 언론은 이를 특종으로 보도하는 등 각색·연출하는 데 혈안이 되었다. 김아려는 이 비극적인 소식에도 전혀 굴하지 않고 늘 냉철한 지혜를 발휘하는 ‘어머니’였다.1945년 8월 가슴 벅찬 광복이 찾아왔다. 그러나 김아려는 귀국하지 못한 채 이듬해 중국에서 쓸쓸하게 생을 마감했다. 남편과 함께 무덤조차 확인되지 못하고 영영 고혼(孤魂)으로 남고 만 것이다.지난 2월 14일 많은 청춘남녀들이 이날을 ‘발렌타인 데이’라며 서로에게 사랑의 눈길을 보냈을 것이다. 이 같은 현실을 비난하거나 탓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107년 전 그날은 안중근 의사가 사형선고를 받고 아내에게 애틋한 유언을 남겼던 날이라는 것 또한 기억했으면 한다.                         [우리가 몰랐던 이야기 둘]글 신현배 역사칼럼니스트일제 병기창으로 끌려간 두 범종의 운명1937년 중국을 침략하고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미·영 연합군의 반격으로 벼랑 끝에 몰리게 되었다. 패색이 짙어지자 전쟁 물자를 조달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일제는 ‘총후(銃後)의 정신 협력’이라며 강제적인 금속류 공출령을 내렸다.              alt공출명령서alt태평양전쟁 당시 공출된 그릇들 쇠붙이 공출로 수난 받은 범종친일 단체나 친일 불교계 인사 등 조선총독부의 앞잡이들을 내세워 일반 가정집의 밥그릇·수저·제기·가마솥·다리미·요강은 물론이고, 사찰과 교회의 동종·철불·기타 금속류를 강제로 빼앗아갔다. 물론 쇠붙이를 녹여 무기를 만들 심산이었다. 일제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모아들인 쇠붙이는 그들이 해외에 세운 병기창 가운데 하나인 인천 부평의 ‘인천육군조병창’으로 보내졌다. 그곳은 1940년 4월에 세워진 무기 공장으로, 매달 소총 4천 정·소총 탄환 70만 발·총검 2만 정·포탄 3만 발·군도 2천 정·군 차량 200대가 생산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때는 일본군을 대표하는 무기 공장이기도 했다.공출되는 쇠붙이 중에서도 범종(梵鐘)은 크기가 상당해서 특히 수난을 많이 받았다. 공출 대상 1호로 가장 먼저 일제 병기창으로 빼앗겨 갔다. 서울 중심가인 종로에 있는 보신각 종도 수탈 대상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일제 앞잡이들은 종로 네거리 종각에 걸려 있는 이 종을 눈독 들였다. 1944년 8월 12일 국민총력경성연맹 회장이란 자가 전체 조선연맹 사무총장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건의서를 보냈다.‘결전 하에 금속류를 모으는 일이 계속 강화되고 있는 이때에, 일반 대중은 정신(挺身) 협력의 의기를 나타내야 함에도 불구하고, 종로의 보신각 종, 총독부 청사 안의 동상 등이 아직도 그대로 놓여있으니 이게 말이 되는가? 그밖에 서울 시내에 있는 사찰·교회 등에도 여전히 금속류가 많이 남아 있다고 여겨지는 바, 그것들을 바로 공출해야 할 것이다.’보신각 종은 일제 병기창으로 끌려가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이 종은 조선총독부가 1934년 8월 보물로 지정한 문화재였다. 그러니 함부로 공출 대상에 넣을 수는 없었다. 잘못 건드렸다가는 한민족의 민심을 크게 자극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보신각 종은 간신히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일제 병기창에서 무사히 돌아온 종절에 있는 범종들은 대부분 일제 병기창에 끌려가 최후를 맞이해야 했다. 그러나 그 가운데는 위기를 넘기고 다시 절로 돌아온 범종도 있었다. 충남 공주시 계룡면 중장리에 있는 갑사의 동종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이 동종은 보물 제478호로, 1584년(선조 17년) 만들어졌다. 국왕의 만수무강을 축원하며 제작되었는데, 음통이 없고 용뉴가 두 마리 용으로 되어 있는 등 중국종과 한국종의 양식이 혼합되어 있다. 이 동종이 만들어지기 한 해 전인 1583년에는 북방 오랑캐인 여진족의 대추장 니탕개가 난을 일으켜, 경기도 아래 3도의 큰 종들이 무기를 만들기 위해 모두 공출되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이듬해인 1584년 동종이 절대적으로 부족하여 갑사 동종이 새롭게 만들어진 것이다.갑사 동종은 일제강점기에 다른 종들과 마찬가지로 군수물자로 공출되었으나 그 운명이 판이하게 달랐다. 병기창까지 끌려갔다가 용광로에 들어가지 않고 광복 후에 무사히 갑사로 돌아왔으니 말이다. 그야말로 장수의 복을 타고난 종이었다.운명이 바뀐 동종과 철종강화도의 전등사 범종은 비슷한 시기에 병기창으로 끌려가 영영 돌아오지 못했다. 대신 중국산 철종인 ‘송나라 범종’이 전등사로 왔다고 하니 그 사연이 재미있다. 8·15 광복을 맞이하자, 전등사 주지 스님은 강제로 공출 당한 동종의 안부가 궁금했다. ‘우리 동종이 일제 병기창으로 끌려가서 용광로 속에 들어갔을까? 해방이 되었으니 혹시 녹이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지 않을까?’ 그는 인천 부평의 인천육군조병창을 찾아갔다. 조병창 마당에는 미처 무기로 만들지 못한 쇠붙이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주지 스님은 며칠을 뒤졌지만 전등사 동종을 찾지 못했다. 동종은 이미 용광로 속에 들어가 버린 것이었다. 대신 낯선 중국산 철종을 하나 찾았다. 종에 새겨진 명문에는 ‘중국 북송 소성 4년(1097년) 하남성의 백암산 숭명사에 봉안되었다’고 써있었다. 그러니까 송나라 범종이 중국 땅에서 강제로 공출 당해 바다 건너 인천 부평의 무기 공장으로 온 것이다. 주지 스님은 본래의 동종 대신 이 철종을 가져와 전등사 종으로 삼았다. 이 종이 바로 뒷날 보물 제393호로 지정된 ‘전등사 범종’이다. 우리나라 것이 아니고 송나라 때 만들어진 중국 종으로, 재질이 동종이 아니라 철제라는 점이 이채롭다. 높이 1.64미터, 입지름 1미터로 고개 숙인 금강초롱 모양을 한 전형적인 중국종 양식이다. 음통이 없고 용뉴가 두 마리 용으로 되어 있으며 유곽과 종루도 없다.인천광역시립박물관에도 중국산 철제 범종 3점이 있다. 초대 관장 이경성이 광복 후에 인천육군조병창에서 찾아내어 박물관으로 옮겨온 것이다. 중국 원나라·송나라·명나라 때 각각 만들어진 커다란 범종으로, 인천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현재 박물관 야외전시장에 나란히 전시되어 있다.                         신현배역사와 전통문화에 대해 관심이 많은 역사칼럼니스트. 저서로는 역사 이야기 『엉뚱 별난 한국사』, 『엉뚱 별난 세계사』, 『2000년 서울 이야기』, 『세계사로 배우는 법 이야기』, 전통문화 이야기 『소중한 우리 문화 지식 여행』 시리즈 등이 있다. ]]> Fri, 03 Mar 2017 17:52:24 +0000 3 <![CDATA[세계무대에서 독립을 외치다 ]]> 글 심용환 역사N교육연구소 소장 세계무대에서 독립을 외치다19세기 말 개항 초기 일본을 방문한 박대양은 서구식 사교장이자 일본 근대화의 상징인 로쿠메이칸(鹿鳴館)에서의 무도회 경험을 이렇게 설명한 바 있다. ‘남녀가 차례가 없고 존비가 없음이 극도에 이르렀으니, 매우 더러워 할만하다.’ 외국문화에 대한 거부감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러나 이러한 부정적인 시선도 잠시, 세계는 곧 ‘기회’로 다가왔다.민영환은 모스크바 횡단열차를 타고 러시아를 방문해 선진 문물을 견문했고, 홍종우는 조선인 최초로 프랑스 유학을 떠났으며,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나혜석은 세계 여행을 통해 예술적 영감을 얻었다. 하지만 세계는 결코 낭만적인 의미의 기회로만 작용하지는 않았다. 일제의 침략으로 고국을 떠나야 했던 많은 한인들에게 세계는 ‘생존’의 기회였기 때문이다.                         만주 벌판에서 독립운동의 근간을 세우다한인들의 이주는 용정·둔화·훈춘 등 주로 간도지역에 집중됐다. 주로 가족 단위로 이주했기 때문에 자연스레 여러 민족교육기관이 들어섰다. 이상설은 서전서숙(瑞甸書塾)을, 김약연은 명동학교를 세웠다. 특히 대종교가 뿌리를 내리게 되면서 서일·김좌진 등을 중심으로 결성된 독립운동단체 중광단(重光團)은 북로군정서로 개편되어 청산리대첩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이밖에도 대한독립군·대한신민단 등 3·1운동 이후로 독립군단만 50여 개가 만들어졌다.삼원보·고동하·합니하 등 서간도지역은 주로 신민회에 의해서 개척되었다. 경학사·부민단 같은 자치단체가 형성되기도 했다. 가장 의미 있는 성과는 대규모 독립군 양성을 이끈 독립군양성기관 신흥무관학교였다. 물론 만주 일대에 만들어진 한인 단체나 독립군 조직은 셀 수 없이 많았다. 서간도지역에만 70여 개의 단체가 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1920년 한 해만 해도 국내진공작전·유격전이 1,700여 건, 1921년 602건, 1922년 397건, 1923년 454건이 벌어졌다. 이 와중에 봉오동전투·청산리대첩 등에서 혁혁한 성과를 일구기도 했다. 특히 1921년부터 상하이 임시정부 내 갈등이 심해지고, 간도참변·자유시참변 등 만주 일대에서의 독립운동이 상당한 위기에 처함에도 불구하고 이런 기록적인 수치가 나왔다는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운 노력이었다. alt서전서숙alt명동학교(규암 김약연 기념사업회)            망명지 연해주에서 성장한 항일 의병러시아에서도 많은 한인들이 삶의 터전을 마련해 나갔다. 그중 연해주는 아시아 패권 확보를 위한 전진기지로, 농업에 뛰어난 한인들의 이용가치가 높았다. 그리하여 러시아의 적극적인 후원 하에 많은 한인들이 이주할 수 있었고 그만큼 독립운동을 위한 망명도 급증했다. 1910년 무렵에 약 20만 명, 1917년에 22만5,000명이 극동지역 전체에 거주하였고, 그중 무려 19만 명이 연해주에서 살았으니 실로 어마어마한 이민 행렬이었다.만주에 비해 연해주는 무기 구매에 유리한 측면이 많았다. 이에 연해주 독립군은 러시아제 5연발총을 소지하는 등 상대적으로 강력한 화기로 무장할 수 있었다. 이미 1907년경 의병이 무려 약 4,000명 정도 편성되었고 1908년에는 국내진공작전까지 시도했다. 전제익·안중근·엄인섭·장석회 등은 무산, 경성까지 남하를 시도하기도 했다. 하지만 안중근의 개인 고백을 통해서 볼 수 있듯 의병 수준의 조잡함, 통솔 체계의 한계 등으로 인해 초기 활동은 그다지 큰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이후 13도의군, 성명회(聲明會) 등을 거치며 연해주 독립운동은 성숙 단계로 접어든다. 1911년 블라디보스토크에 연해주를 대표하는 독립운동단체 권업회(勸業會)가 만들어지고, 우수리스크·하바롭스크·니콜라옙스크·이만 등지에 지회를 설치하면서 효과적으로 한인들을 규합한 것이다. 1913년에는 2,600명, 1914년에는 8,579명까지 회원이 크게 늘어나 이후 권업회는 대한광복군정부를 세우는 등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alt성명회 취지서(항일독립운동가단체연합회)    alt한말 의병 모습                         주요 자금처로 활약한 미주의 독립운동미주(美洲) 지역은 하와이와 샌프란시스코로 대표되는 캘리포니아 그리고 멕시코 일대를 일컫는다. 이곳에는 사탕수수 농장이 널리 분포되어 있고 농장 노동자로 한인들이 이민을 갔던 곳이기 때문에 엄밀히 말해 지리적 개념은 아니다.1902년 12월 인천항을 떠난 한인 97명이 하와이에 발을 디뎠다. 1903년부터 1905년 이민이 중단될 때까지 하와이에 7,266명, 멕시코에 1,033명 등 8,000여 명이 미주에 정착했다. 1910년 기준으로 하와이에는 4,000명가량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그 중 약 4분의1은 귀국, 절반은 미국 본토로 이주하면서 샌프란시스코와 로스앤젤레스는 물론 콜로라도·네브레스카 등지에도 정착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920년대 미주 지역에 둥지를 튼 한인은 9,000명에 육박했고, 1945년 광복 당시에는 1만 명 내외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미주 지역의 한인들은 당초 약속된 대한제국 정부의 보증과는 다르게 극도로 열악한 환경에서 고된 사탕수수 농사를 해야 했다. 더구나 1905년 이후 본국의 보호 자체가 사라지게 되면서 자치기구를 조직해 생존을 도모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내몰렸다. 이에 따라 에오친목회·공립협회 등이 만들어지고 한인합성협회·국민회(國民會) 등을 거쳐 1910년 대한인국민회가 만들어지기에 이르렀다. 대한인국민회는 사실상 준정부조직으로, 샌프란시스코에 본부를 두고 북미·하와이·만주·시베리아에 지방 총회를 두는 등 산하에 116개의 지방회를 두었다.대한인국민회를 비롯한 미주의 한인 조직은 독립운동의 주요 자금처였다. 1919년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의 자금은 8만5,000달러였는데 이 중 절반이 임시정부를 위해 쓰였다. 하와이에서 결성된 박용만의 대조선국민군단의 경우 파인애플 농장의 수익금과 지원금을 통해 7만8,642달러를 모으는데, 이 중 2만200달러는 만주 및 연해주의 독립운동자금으로 송금했다. 구미위원부의 경우 1920년대 초반 총수입 약 15만 달러의 15% 정도를 임시정부에 보내기도 하였다.위와 같이 독립운동을 벌이는 동안 한인들은 생존을 위해 만주·연해주·미주 등지에서 삶의 터전을 일구었다. 만주와 연해주의 경우 한반도와 가까웠기 때문에 주로 활발한 무장투쟁이 이루어졌다. 다만, 연해주는 러시아가 무너지고 공산주의 국가 소련이 들어서면서 항일운동의 성격이 바뀌기도 했다. 이에 반해 미주 지역은 물리적인 제약이 있었기 때문에 직접 투쟁보다는 주로 자금 지원 형태로 활발한 활동이 벌어졌다.         alt국민회 하와이 지방총회(1909년, 국가보훈처 제공)alt대한인국민회 지방총회 경축행사(1915년, 하와이)                         국제사회에서 독립의 목소리를 높이다어떻게 독립할 것인가. 독립의 방략을 둔 고민은 치열하게 이어졌으며 시기와 때에 따라 계속해서 변화·발전했다. 1919년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민족자결주의의 바람이 불 때 ‘외교를 통한 독립 방략’이 크게 유행하기도 하였다. “각 민족은 정치적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있으며, 다른 민족의 간섭을 받을 수 없다.” 당시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Thomas Woodrow Wilson)이 민족자결주의를 주장하며 식민지의 독립을 시사하는 듯한 발언이 세계를 강타하면서, 그 결과 국내에서는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으로 이어졌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외교활동에 유리한 지역으로 상하이를 선정했으며 강력한 외교독립론자인 이승만을 대통령에 선임하기도 했다. 이후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파견하고, 구미위원부를 세우는 등 미국에서의 외교활동에 주력하였다. 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미국을 비롯한 연합국은 패전국의 식민지만 해방시키는 등 민족자결주의를 관철시키려는 의지가 없었다. 이에 외교독립론에 의지한 독립활동은 수년을 채 가지 못하고 실패하고 말았다. 이후 독립운동사에 다시 외교활동이 활발해지기 시작한 때는 1940년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미국이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에 승리하기 위해 식민지 독립운동가들에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다. 결국 자국의 이해관계만을 우선으로 생각하는 냉정한 국제관계의 논리가 독립운동사에 큰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alt미국 제28대 대통령 우드로 윌슨alt파리강화회의에 참가한 김규식(앞줄 오른쪽, 1919년)             생존을 위해 건너간 머나먼 타국에서 우리 민족은 희망의 씨앗을 뿌렸다. 몸은 비록 떨어져 있을지언정 한시도 민족의 정체성을 잊지 않았으며, 오히려 세계무대를 통해 우리의 독립 의지를 더욱 드높였다.                        심용환성균관대학교 사범대학에서 역사교육학을 전공했다. 현재 팟캐스트 <진짜 역사 가짜 역사>를 통해 재미있고 올바른 역사 이야기를 전파하고 있으며, CBS와 공동으로 <심용환의 근현대사 똑바로 보기>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저서로는 『단박에 한국사』, 『역사 전쟁』이 있다. ]]> Fri, 03 Mar 2017 16:02:47 +0000 3 <![CDATA[우리 민족이 살길 ‘정직’ ]]> 글 이성주 역사칼럼니스트우리 민족이 살길 ‘정직’ 도산 안창호를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강남 금싸라기 땅 한가운데 자리 잡은 도산공원을 떠올리면 그의 업적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도산공원에서도 특히 그곳에 세워진 안창호 기념비에 있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도산 안창호는 일제의 침략에서 민족의 자주와 독립을 쟁취하기 위하여 60평생을 구국 운동에 바친 위대한 애국자, 한국 민족을 인류의 모범이 되는 최고의 민족으로 완성하기 위하여 부단한 자아 혁신과 국민의 품격 향상을 힘쓴 민중 교화의 교육자, 무실역생과 인격 혁명과 대공주의의 사상으로 민족의 지표와 역사의 진로를 밝힌 탁월한 사상가, 이상촌 건립과 사회개혁과 산업 진흥과 교육 건설로 백년대계의 경륜을 보여준 훌륭한 선각자, 진실과 사랑의 실천으로 위대한 인격을 갈고닦아 국민의 사표가 된 뛰어난 지도자, 그는 겨레의 등불이요, 이 나라의 자랑이다.”민족과 함께한 59년▲서당에서 한학을 배우다 신식학문에 눈을 뜨고 상경해 기독교도가 됨 ▲1897년 독립협회 가입 ▲1899년 고향인 평안남도 강서(江西)에 점진학교를 세우고 황무지 개척사업에 투신 ▲1902년 신학문을 받아들이고자 미국행, 노동을 하면서 초등 과정부터 공부 ▲한일 강제병탄 소식을 듣고 귀국, 이후 항일비밀결사단체 신민회 조직 및 평양에 대성학교 설립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 사건에 연루된 혐의로 투옥, 이후 미국 망명 ▲1913년 흥사단 조직 ▲3·1운동 직후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임시정부의 내무국장·국무총리대리·노동총장 역임 ▲윤봉길 의거를 비롯한 수많은 독립운동 활동을 이유로 투옥과 석방을 반복안창호의 인생은 그야말로 한평생 오로지 민족의 자주독립을 위해 온몸을 투신했다고 밖에 달리 표현할 말이 없다. 그가 독립을 위해 외세와 싸웠다는 것 외에도 특히 눈여겨봐야 할 활동이 있다. 바로 교육을 통한 우리 민족의 실력 향상에 큰 관심을 가졌다는 사실이다. 소위 말하는 ‘실력양성론’이다. 안창호는 이 때문에 임시정부 내에 있던 급진 무장투쟁파와 갈등을 빚기도 했지만, 끝까지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또한 이러한 실력양성론은 실력을 키워 우리 민족을 개조하자는 ‘민족개조론’으로 이어지게 되었다.“동포 여러분, 여러분께서는 살아생전에 할 일이 있다면 무슨 일이라고 생각하시겠습니까? 저라면 한 마디로 말하겠습니다. 즉, 사람이라면 날로 새로워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문으로는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중국 고전 예기 대학 편에 나오는 말인데, 사람은 나날이 하루하루가 새로워져야 한다는 뜻으로 우리 민족도 이 모양으로 날로 새로워져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나는 이 새로워진다는 말을 ‘개조’라는 말로 바꾸어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이는 안창호가 임시정부 총리대리로 선출됐을 때 행한 연설 중 일부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이 이 민족개조를 위해 그가 제일 첫머리에 내세웠던 실천방법이 바로 ‘정직’이란 것이다. 그때도 지금도 살길은 하나다안창호가 민족교육 사업에 뜻을 두기 시작하면서 학생들에게 가장 강조했던 한 가지가 바로 ‘정직’이었다. “생도의 가장 큰 죄는 거짓말, 속이는 일이다. 죽더라도 거짓이 없으라.” 그는 우리 민족이 쇠퇴해 굴욕적인 한일 강제병탄을 당한 이유를 민족의 잘못된 습성 때문이라 말했고, 이 습성을 딱 두 가지로 정리했다. ‘거짓말’, ‘거짓행동’. 거짓말이 횡행하다 보면 서로를 믿지 못하게 되고, 믿지 못하면 단결하지 못하게 되고, 그 결과 일본에게 병탄되는 치욕을 겪게 됐다는 것이다. 이는 경험에서 나온 뼈저린 교훈이었다. 안창호는 갑신정변 이래로 만민공동회, 독립협회 등 여러 독립운동결사체를 조직했지만 3년 이상 버틴 조직은 하나도 없었다. 그는 원인을 거짓에서 찾았다. 이는 빈말이나 허울 좋은 구호가 아니다. 안창호 필생의 사업이었던 흥사단 단원의 선발기준 첫 번째는 ‘거짓 없는 사람’이었다(나머지 하나는 조화로운 사람이었다).초등학교 도덕교과서에나 나올 법한 고색창연한 교훈이지만, 지금 이 글을 읽는 사람들 중 자신 있게 스스로를 정직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아니, 굳이 거기까지 갈 필요도 없다. 신문 사회면이나 9시 뉴스를 보면 나오는 수많은 사건사고들을 보자. 남을 속이지 않고, 스스로에게 정직했다면 아마 신문과 방송은 망했을 것이다. 수많은 사건사고의 시작은 ‘거짓’에서 시작됐다. 그리고 그 거짓은 우리 사회를 점차 오염시켰고, 정직한 사람들조차도 ‘정직하게 사는 게 멍청하게 사는 것’이라는 인식을 가지게 만들었다. 그리고 우리 자신도 스스로에게 정직한 태도를 버리는 일을 ‘현실과의 타협’, ‘영리하게 사는 법’이라며 합리화하게 되었다. 우리가 얼마나 정직하지 못했는지는 ‘김영란법’만 봐도 알 수 있다. 얼마나 거짓이 횡행했으면, 공직자들의 밥 먹는 것까지 국가가 나서서 단속하려 할까? 안창호가 100여 년 전 우리 민족의 살길이라며 설파한 ‘정직’이란 한 단어. 이 한 단어를 지금까지도 제대로 실천하지 못하고 있는 우리. 지금 우리에게는 거창한 주장이나 신념, 윤리 도덕 따위는 필요치 않을 것 같다. ‘정직’ 그 한 글자의 무게를 곱씹어 본다면 말이다.                         이성주시나리오 작가 겸 역사칼럼니스트. 대중과 함께 호흡하는 글쓰기를 목표로 『조선의 민낯』, 『왕들의 부부싸움』과 같은 역사서를 출간한 바 있다. 최근에는 국제정치와 관련된 연구 및 집필에 열중하고 있다. 『전쟁으로 보는 국제정치』 시리즈 1, 2, 3권을 출간 중이다. ]]> Thu, 02 Mar 2017 19:09:32 +0000 3 <![CDATA[3월의 그날처럼 ]]> 3월의 그날처럼때 묻지 않은 하얀 바탕에 그려진대자연의 진리와 민족의 이상태극기는 이제 대한민국을 넘어 세계의 평화를 말합니다.태극기 물결이 거리를 수놓았던그날도 오늘처럼 눈부시게 화창했을까요.불어오는 바람에 힘차게 휘날리는태극기 나뭇잎은온 세계가 들었던 그날의 함성이 되어이 내 가슴에 펄럭입니다. ]]> Thu, 02 Mar 2017 19:03:15 +0000 3 <![CDATA[최소한으로 최대 만족을 추구하는 삶 ]]> 글 장근영 심리학자 최소한으로 최대 만족을 추구하는 삶 보다 풍족하고 보다 화려하게 살아가려는 삶의 풍조는 지났다. 2017년 한 해를 관통할 떠오르는 키워드 중 하나는 바로 ‘미니멀리즘(Minimalism)’이다. 버리고 비움으로써 최소한의 요소로 단순함과 간결함을 추구하는 미니멀리즘은 사회 전방위적으로 불고 있는 트렌드다.오늘을 사느냐 내일을 준비하느냐미니멀리즘은 사실 아주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원시인 시절의 인류는 모두 유목민이었고, 유목민은 미니멀리스트일 수밖에 없었다. 음식을 오래 보관할 수 없었기에 그날 구한 음식은 며칠 이내로 전부 먹어치워야 했고, 내가 다 먹을 수 없다면 주변 사람과 나누는 것이 당연했다. 음식만이 아니라 옷이나 도구 같은 생활에 필요한 물품도 나눴다. 동료에게 나누어준 것들은 언젠가 다시 나에게 보답으로 돌아올 것이니 ‘인적 저장’이라고 할 수 있었다. 지금도 정기적으로 거주지를 옮겨가며 살아가는 유목민들은 세간이 조금 늘어나기는 했어도 미니멀리즘의 삶의 양식을 유지하며 살아간다. 천막 하나에 들어갈 수 있는 물건에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니 말이다.인류가 물질에 집착을 보이기 시작한 건 농경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다.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Yuval Noah Harari)는 저서 『사피엔스』에서 ‘유목 인류는 당장 내일이나 다음 달을 바라봤지만, 농경 인류는 내년, 내후년을 바라보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농경 인류의 전망은 점차 후손이 살아갈 미래까지 확장되었다. 인류는 한 해 동안 먹고 남을 만큼의 곡물을 수확해놓고서도 만족하지 못했고, 몇 년간의 식량이 창고에 쌓여있어도 불안해졌다. 높고 단단한 성곽을 건축하기 시작한 건 그 불안감을 달래고 쌓아놓은 재산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미래를 내다보게 되자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는 삶이 시작된 것이었다. 특히 화폐가 만들어지면서 인류의 저장욕구는 끝없이 팽창했고, 희생할 현재의 비중은 더욱 무거워졌다. 오늘날 현대인이 안고 있는 불행의 근원이 만들어진 시점이다.물론 그 와중에도 이 모든 것이 부질없는 짓이라고 일갈하는 현인들이 있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디오게네스는 삶의 본질은 선한 마음이며 재산·명성·외모 따위는 아무 의미가 없다고 봤다. 그는 집을 버리고 길거리에서 하루 벌어 하루 먹는 삶을 살며 행복을 즐겼다. 동양의 현인들도 행복과 평화의 본질은 물질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무소유의 삶’이라고 오래 전부터 이야기해왔다. 그러나 세상은 현인들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았다. 우리는 ‘개미와 베짱이’ 이야기를 잘 알고 있다. 추운 겨울을 대비해 오늘을 희생하며 최대한 양식을 쌓아놓은 맥시멀리스트(Maximalist) 개미는 풍족한 겨울을 맞이하고, 현재에 충실하며 당장의 행복을 추구한 미니멀리스트 베짱이는 춥고 배고픈 겨울을 보내야 했다. 세상이 우리를 그렇게 가르친 건, 미래를 담보로 잡는 것이 지금 현재의 ‘개미’들을 통제하는 데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본질과 핵심에 집중하다하루하루 고생해가며 돈을 벌어 미래를 위한 무언가를 축적해놓는 삶을 당연하게 여겨왔던 사람들이 왜 지금 와서 미니멀리스트의 삶을 돌아보는 걸까?먼저 미니멀리즘이란 개념 자체는 물질적 풍요와 동시에 인류를 멸망시킬 제3차 세계대전에 대한 두려움이 공존하던 1960년대에 시작되었다. 하지만 최근의 미니멀리즘은 2011년 동일본대지진을 겪은 일본에서 기원한다. 당시 9.0규모의 지진은 핵발전소 폭발과 함께 지진해일까지 불러와 도호쿠 지방 전체를 폐허로 만들었다. 그동안 쌓아올린 모든 재물들은 층격에 부서져 날카로운 파편으로 변했고, 이는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인간 따위의 미래 준비나 계획은 자연의 힘 앞에서 그저 부질없을 뿐이라는 사실에 대해 통렬한 자각이 이어졌다. 그리하여 앞으로 같은 일이 벌어졌을 때를 대비해서 현재를 즐겁게 사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것만을 소유하자는 태도가 만들어진 것이다.미니멀리즘은 내핍이나 절약과는 전혀 다르다. 최초의 미니멀리스트 중 한 명인 디오게네스가 쾌락주의자였음을 잊지 마시라. 미니멀리즘은 핵심과 본질에 집중하려는 태도다. 삶에서 추구하는 미니멀리즘이 만족과 행복을 느끼는 데 필요한 핵심만 남기고 나머지는 비우려는 생활방식인 것처럼, 업무에서의 미니멀리즘은 불필요한 잡일을 전부 제거하고 핵심 과제에 집중하려는 직장 문화다. 좋은 글이나 말의 기준이 ‘더 이상 버릴 군더더기가 없음’인 것도 결국 미니멀리즘이다. “하지 않을 것을 선택하는 것은 할 것을 선택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하다”던 스티브 잡스의 말은 미니멀리즘적 태도를 잘 보여주는 사례다.미니멀리즘의 유행은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꽤 의미 있게 다가온다. 무언가의 ‘실천’이 곧 그것을 위한 무언가의 ‘구입’이라고 믿는 소비 문화. 쉽게 말해, 유목민의 삶을 지향하고자 유행한 캠핑을 캠핑장비 수집병으로 변질시킨 소위 ‘장비병’의 나라, 기획안 속에 담긴 아이디어보다 그 문서의 글자체나 편집에 강박적으로 집착하는 이 ‘비효율’의 나라에서 핵심이 무엇인지를 고민하는 건 결코 나쁜 일이 아니니까. 미니멀리즘은 삶에서 중요한 건 물건이 아니라 사람이고, 언제 올지 모르는 미래를 위한 희생보다 현재를 충실하게 살아가는 삶이 가치 있다는 진리를 되새기게 만든다.                        장근영심리학자 겸 칼럼니스트. 연세대학교 심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국책연구소인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에서 활동하며 대학에선 매체심리학?발달심리학 등을 강의하고 있다. 저서로는 『심리학 오디세이』, 『팝콘심리학』 등이 있다. ]]> Thu, 02 Mar 2017 19:19:18 +0000 3 <![CDATA[이강의 구금지 샤먼(廈門)일본영사관 건물 ]]> 글 김주용 독립기념관 선임연구위원이강의 구금지샤먼(廈門)일본영사관 건물부두에서 내리자 그야말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수많은 인파들이 구랑위(鼓浪屿)의 아름다움에 취해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러댔다. 일행은 너무 갈증이 나서 그랬는지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야자수 음료 노점상 앞에서 나를 바라보았다. 그래 여기 와서 이정도 호사(?)는 누릴 만하지. 흔쾌히 노점상에게 80위안을 지불하고 일행에게 음료를 나누어 주었다. 각자 하나씩 자연산 야자수를 손에 들고 시원하게 들이키는 모습을 보면서 열흘 동안 답사했던 일행의 노고가 조금이라도 해소되었으면 하고 바랐다.             구랑위에서 샤먼 일본영사관을 방문하다우리보다도 훨씬 이전에 이곳을 무대로 독립운동을 전개했던 유기석은 구랑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산 위에는 많은 괴석이 툭 튀어나와 경치를 돋보이게 하고, 특히 아름다우며 항구에는 옥외 대포가 설치되어 이곳이 해상 요충지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항구는 넓고 물은 깊어서, 수천 톤의 증기선을 직접 부두에 댈 수 있었다. (중략) 만일 샤먼(厦門)을 구룡(九龍)에 비유한다면 구랑위는 바로 홍콩과 매우 닮았다. 비록 구랑위의 경치가 이렇게 아름다울지라도 그곳은 가난한 민중이 거주할 수 있는 곳이 못되어 절대 다수의 주민은 소위 ‘고급중국인’ 즉 자본가와 매판계급에 속하였다.우리는 다시 움직였다. 곳곳에 웨딩사진을 찍으러 온 예비 신혼부부들이 눈에 띄었다. 일본영사관은 영국영사관 부근에 있었다. 2층 붉은 벽돌로 지어진 샤먼 일본영사관은 대지 300평 규모에 연건평 100평 정도의 건물을 포함하고 있다. 건물 1층에 널려 있는 빨래를 보고 지금도 주민이 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영사관 내부는 각자 맡은 임무를 열심히 수행하느라 분주했다. 한쪽에는 이강이 체포된 후 수감되었던 ‘샤먼 일본영사관 경찰감옥’이라는 표지석이 떡 버티고 서 있었다. 중국인 여학생 두 명이 우리 일행에게 다가와 어디에서 왔냐고 물었다.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의아하게 생각하는 것 같아, 이곳에 한국인 독립운동가들이 수감되었던 장소여서 조사를 나왔다고 하자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고향이 안후이성(安徽省)이라던 두 여학생은 다시 우리와 멀어졌다.         alt 샤먼 일본영사관 경찰감옥 표지석 미국에서 러시아, 중국까지 세계를 누빈 삶이곳에 수감되었던 이강은 어떤 인물인가. 이강은 의친왕의 이름이기도 하지만 이번에 소개할 인물은 샤먼 일본영사관에 수감되었던 독립운동가로, 평안남도 용강군 봉산면 황산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1902년 미주개발회사(美洲開發會社)에서 추진하는 이민 모집에 합류해 하와이 소재 영어학교에서 수학하고 이듬해 샌프란시스코로 유학을 떠났다가 그곳에서 안창호를 만났다. 이를 계기로 안창호·정재관 등과 함께 1904년 교민단체인 공립회(共立協會)를 창설했고, 1905년 11월에는 동지들과 함께 <공립신문(共立新聞)>을 창간하여 주필이 되었다.또한 1907년 초에는 안창호와 신민회(新民會)를 창립하기로 하고 안창호를 먼저 귀국시킨 뒤, 그도 귀국하여 양기탁을 중심으로 국내 동지들과 함께 1907년 4월 국권회복을 위한 비밀결사단체 신민회를 창립하였다.그리고 이강은 몇 달 후에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신민회 블라디보스토크 지회를 설치하였다. 1909년 2월에는 신민회의 합법적 외곽단체로서 미주지역에서 종래의 공립협회가 확대 개편되어 재미주 대한인국민회(Korean National Association)가 조직되자, 정재관 등과 함께 이에 보조를 맞추어 재로대한인국민회(在露大韓人國民會)를 조직해 각 지방과 지회를 설치하고 독립사상을 고취시켰다. 또한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동지들과 함께 <해조신문(海潮新聞)>을 창간, 편집 논설기자로 활동했으며 후에 <대동공보(大東共報)>로 이름을 바꾼 뒤에도 편집책임을 맡았다. 이강은 1909년 10월 이토 히로부미 처단 계획이 대동공보사에서 수립될 때 그도 참석하여,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 포살의 특공대로 하얼빈에 나갔을 때 안중근과 대동공보사 사이의 연락을 담당하였다. 안중근 의거가 성공한 후에는 그의 구명을 위한 영국인 변호사를 구하기 위해 베이징에 파견되어 활동하였다.<대동공보>가 일본영사관의 압력으로 정간 당하자, 이강은 시베리아 치타(Chita)로 가서 다시 <정교보(正敎報)>라는 신문을 발행하며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데 힘썼다. 1919년 9월 러시아 노령(露領)에서 파견된 강우규가 조선 총독 사이토 마코토에게 폭탄을 투척한 사건이 일어났을 땐 연루자로 지목되어 일경에 체포, 서울로 압송되어 약 50일간 구금되었다. 1919년 말 석방되자, 바로 상하이로 탈출해 안창호를 만나 임시정부에 참여하였다. 의정원(議政院) 부의장 및 의장을 역임했으며, 흥사단(興士團)운동에 진력하여 흥사단 원동지방위원회(興士團遠東地方委員會)를 설치하였다.그러나 일제의 세력이 양쯔강(長江) 일대까지 뻗치게 되자, 상하이를 떠나 남중국 방면으로 갔다. 이강이 머무른 태백산상회는 1927년경부터 푸젠성(福建省) 샤먼의 안창호의 흥사단 계통 사람인 정(鄭)씨가 차린 가게로 인삼과 홍삼을 팔고 있었으며, 동시에 독립운동가들의 연락 장소 역할도 했다. 이강은 당시 임시정부의 부의장직에 있었지만 생활이 너무 어려워 인삼을 구해다 팔며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러던 1928년 일경이 사주한 대만 사람이 태백산상회를 습격해 납치된 이강은 샤먼 일본영사관 감옥에서 수감하게 되었다.샤먼 일본영사관을 조사한 우리는 다시 선착장으로 갔다. 시간은 벌써 저녁 6시가 다되어가고 있었다. 영사관 촬영과 구랑위의 풍경에 푹 빠져 시간가는 줄 몰랐다. 배를 다시 타고 시내로 돌아왔다. 내일을 기약하며 샤먼에서의 후덥지근한 밤은 그렇게 깊어갔다.         alt이강alt이강 가족사진alt이강이 안창호에게 보낸 편지 무더위 속에서 이강 활동지를 찾아 헤매다다음날 평소보다 조금 늦은 9시경부터 이강이 활동했던 태백산상회의 흔적을 찾아 나섰다. 그 장소는 바로 중산로(中上路)였다. 100년 전 건물들로 즐비한 중산로에서 태백산상회를 아는 이를 찾기란 ‘한강에서 바늘 찾기’와 같았다. 주로 나이 많은 중국인들을 탐문대상으로 삼았지만 허사였다. 상업가이자 화교은행이 있던 터를 알려주는 분들이 있었지만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조원기 연구원은 연신 이마의 땀을 닦으며, 광저우의 더위는 샤먼의 무더운 날씨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했다. 큰 성과 없이 이강의 활동지를 찾지 못한 우리는 지친 몸을 이끌고 그늘에서 잠시 숨을 돌렸다. 답사의 방향성에 문제가 있음을 직시하고 다시 탐문에 나섰지만 몸만 고되고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샤먼에서의 한국독립운동사적지 찾기는 이렇게 막을 내리고 있었다. 좀 더 철저하게 아니 좁은 지역을 세밀하게 조사하는 방향으로 사적지 조사가 변모해야 할 것 같다.         alt 샤먼 중산로 이번호를 끝으로 광저우와 푸젠성의 사적지 답사기는 끝을 맺는다. 다음호부터는 후난성(湖南省) 창사와 푸양(?陽)등 대한민국임시정부와 한국광복군의 활동 무대에 대한 답사기를 연재한다.다음호에 계속 ]]> Fri, 03 Mar 2017 19:28:00 +0000 3 <![CDATA[총과 펜을 함께 들었으나 요절하고 만 문화예술인 어느 독립운동가의 초상]]>     글 김정인 춘천교육대학교 교수총과 펜을 함께 들었으나요절하고 만 문화예술인   문화와 예술은 문화이고 예술일 뿐이다? 그렇지 않았다. 문화와 예술 역시 시대를 비껴갈 수 없었다. 일제시기에는 문화와 예술을 무기로 항일의 정신을 고취한 문학가와 예술가들이 있었다. 그들의 시와 노래, 소설과 영화에는 독립의 의지와 희망이 녹아 있었다. 그리고 독립 정신을 고취하는 데 그치지 않고 몸소 독립운동에 뛰어든 문학가와 예술가도 있었다. 그들 중 결국 독립의 ‘그날’을 보지 못하고 요절한 세 사람을 떠올려 본다. alt심훈 사진 (당진시청 제공)alt『조선일보』에 연재하다가 일제의 검열로 중단당한 소설 「동방의 애인」 (당진시청 제공)alt시 「그날이 오면」 일제 검열 원고(당진시청 제공) 심훈, 그날이 오면심훈은 1901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10세가 되던 해에 나라를 잃었다. 30대에 접어들면서는 독립을 염원하는 절절한 심정으로 「그날이 오면」이라는 시를 지었다. 하지만 “이 목숨이 끊기기 전에 와 주기만”을 바랐던 독립을 보지 못하고 36세의 나이로 요절하고 말았다.심훈의 삶에서 3·1운동의 경험은 각별했다. 1919년 3월 1일 경성고등보통학교를 다니던 심훈은 탑골공원에 열린 독립선언식에 참여했다. 3월 5일에는 강기덕, 김원벽, 한위건 등 전문학교 학생들이 주도한 남대문역 만세시위에 참여했다. 이 날 체포된 심훈은 그해 11월 6일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6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은 후 석방되었다.심훈은 출옥한 후 망명을 선택했다. 만주를 거쳐 베이징으로 건너가 신채호와 이회영을 만났다. 당시 두 사람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외교 독립 노선을 비판하며 무장투쟁을 통한 절대독립론을 주장하고 있었다. 베이징에 머무르던 심훈은 이후 상하이, 난징을 거쳐 항저우에서 저장대학을 다녔다.1923년 귀국한 심훈은 사회인으로서 언론인과 예술가의 길을 동시에 걸었다. 동아일보에 기자로 입사했고 연극단체인 극문회를 조직해 활동했다. 또한 기자 조직인 철필구락부에 참여해 언론자유운동을 벌였다. 결국 조선총독부가 철필구락부 탄압에 나서면서 동아일보를 퇴사해야 했다.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영화를 공부하고 귀국해 「먼동이 틀 때」라는 영화를 제작해 성공을 거두었다.시를 짓고 연극과 영화 활동을 벌이던 심훈은 조선일보에서 다시 기자로 일하면서 「동방의 애인」, 「불사조」라는 소설을 연재했으나 검열에 걸려 중단되고 말았다. 조선일보를 사직한 후에는 경성방송국에서 잠시 근무했다가 부모가 살고 있던 충청남도 당진에서 집필에 몰두했다. 다시 서울로 올라와 잠시 조선중앙일보 학예부장으로 활동했으나 곧 그만두고 「영원한 미소」, 「직녀성」, 「상록수」 등의 소설을 써서 신문에 연재했다.1936년 심훈은 대중적 인기를 끌었던 연재소설 「상록수」를 영화로 만드는 일에 착수했다. 하지만 제작에 이르지는 못했다. 「상록수」를 단행본으로 출판하는 일에도 나섰으나 장티푸스에 걸리고 말았다. 1936년 9월 16일 오전 8시, 심훈은 병을 이기지 못하고 경성제국대학 부속병원에서 36세의 나이로 요절하고 말았다.1945년 8월 15일, 마침내 심훈이 갈망하던 ‘그날’이 왔다. 조선총독부의 검열로 빛을 보지 못했던 심훈의 시집 『그날이 오면』도 세상에 나왔다. alt나운규 사진alt영화 「아리랑」의 한 장면alt나운규의 영화 「아리랑」이 상영되었던 단성사나운규, 아리랑 고개를 넘지 못하다나운규는 1902년 함경북도 회령에서 태어났다. 25살이 되던 1926년 10월 1일, 그가 주연으로 출연하며 직접 제작한 영화 「아리랑」이 단성사에서 개봉했다. 「아리랑」은 농촌 청년 영진과 지주의 심부름꾼인 오기호의 갈등을 그렸다. 사람들은 영화를 보며 영진을 자신과 같은 한국 민중으로, 오기호를 지배자인 일본으로 읽었다. 영진이 오기호를 낫으로 쓰러뜨리고 일본 순사에게 끌려갈 때 마을 사람들이 아리랑을 부르며 배웅하는 장면에서 관객들도 모두 일어나 아리랑을 불렀다. 한국인들은 현실에서 함부로 내뱉을 수 없는 자신의 처지나 생각을 「아리랑」에서 읽어내며 열광했다. 6개월 동안 110만명이 「아리랑」을 봤다. 이 때가 나운규 삶의 절정기였다. 이후 10년간 찬사와 비난을 받으며 영화 출연과 제작에 몰두했던 그는 1937년 폐결핵을 이기지 못하고 심훈처럼 36세의 나이에 요절하고 말았다.나운규 역시 17살의 나이로 3·1운동을 경험했다. 당시 그는 회령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간도에 자리한 명동중학에 다니고 있었다. 회령의 만세시위에 참여하고 경찰의 수배를 피해 연해주로 망명했다. 다시 북간도로 와서는 국민회 소속 독립군에 가입했다. 이 때 회령과 청진을 잇는 철도인 회청선 7호 터널의 폭파를 시도했다가 미수에 그쳤다. 1년여 간 독립군 생활을 한 끝에 20대 초반의 청년 나운규는 총을 내려놓고 공부를 더 하겠다는 일념으로 서울로 향했다. 하지만 ‘청회선 7호 터널 폭파 미수사건’으로 체포되어 보안법 위반으로 2년 형을 선고받고 청진형무소에서 복역했다.1923년 3월 출소한 나운규는 총을 들지도 공부를 하지도 않고 제3의 길을 걸었다. 함흥에서 조직된 극단인 예림회에서 연극배우로 활동했다. 다시 부산에 내려가서는 조선키네마주식회사 소속 단역 배우로 활동했다. 이때 연기력을 인정받아 영화 「심청전」에서 처음으로 주연인 심봉사역을 맡았다. 연기파 배우로서 입지를 다진 나운규는 직접 영화 제작에 나섰다. 그가 제작한 첫 번째 영화가 바로 「아리랑」이다. 「아리랑」에 이어 「풍운아」가 대성공을 거두며 승승장구하던 그는 1927년 나운규프로덕션을 창립했다. 나운규프로덕션은 독립군 활약 시절의 경험을 그린 「사랑을 찾아서」를 비롯해 제작한 영화마다 성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동료들과 갈등을 빚으며 나운규프로덕션은 해체되고 말았다. 이후에는 프롤레타리아 연극을 제작하기도 하고 일본의 국수주의자 도야마 미츠루가 제작한 영화에 출연하는 등 갈팡질팡하는 행보를 보여 많은 사람을 안타깝게 만들었다.나운규는 영화 「임자없는 나룻배」에 출연, 성공을 거두면서 재기에 성공하는 듯했으나 폐결핵으로 병마에 시달리는 몸이 되었다. 주사를 맞아 가며 제작해 1937년 1월 20일 단성사에서 개봉한 영화 「오몽녀」도 흥행에 성공했다. 하지만 폐결핵을 이기지 못하고 그해 8월 9일 36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오몽녀」는 그의 마지막 작품이 되고 말았다. alt이육사 사진(이육사문학관 제공)alt서대문형무소 수감 당시 신원카드(1934.06.20.) (이육사문학관 제공)alt육사시집 초판본(1946, 서울출판사)(이육사문학관 제공)이육사, 광야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이육사는 1904년 경상북도 안동에서 태어났다. 20대부터 의열단원으로 활약한 이래 죽음에 이를 때까지 10번이 넘게 체포를 당했다. 그리고 40세의 나이에 일본 경찰에 의해 중국 베이징으로 끌려가 급사하고 말았다.1925년 20대의 청년 이육사는 형 이원기, 동생 이원유와 함께 의열단에 가담했다. 1919년 가을 중국 지린에서 결성된 의열단은 당시 베이징으로 이동해 활동하고 있었다. 이육사는 베이징을 왕래하며 국내정세를 보고하고 군자금을 전달하는 임무를 맡았다. 1927년 10월 18일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이 일어나자 이육사는 형제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경찰이 세 형제를 주모자로 조작하려 혹독하게 고문했다. 1929년 2월, 폭파사건의 주모자인 장진홍이 1년 4개월만에 체포되었다. 이후 이육사와 형제들도 풀려났지만 고문 후유증으로 병을 얻고 말았다.1931년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이육사는 중국으로 건너가 김원봉의 의열단에 다시 합류했다. 1932년 10월 의열단은 난징에 전위혁명가 양성을 위한 군관학교인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설치했다. 이육사도 이 학교에 입교해 6개월 동안 교육을 받은 후 이듬해에 귀국해 비밀지령을 수행했다. 1934년 5월 서울에서 경찰에 체포되었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났다.이육사는 1930년에 시 「말」을 발표하면서 문인으로 등단했다. 그의 문필 활동의 절정기는 1930년대 중반이었다. 이 때 건강이 악화되자 문필 활동에 전념했다. 신문과 잡지에 정치논설은 물론 시와 산문, 그리고 문학평론 등을 활발히 발표했다.아시아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이육사는 아픈 몸을 이끌고 다시 중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도모했다. 어머니가 사망한 이듬해인 1943년 일시 귀국했다가 서울에서 다시 체포되어 베이징으로 이송되었다. 그리고 1944년 1월 16일 새벽 5시 베이징에서 40세의 나이로 쓸쓸한 죽음을 맞이했다. ‘지금 눈 나리고 매화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라고 노래했듯이 이육사는 목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아픈 몸을 이끌고 독립의 밀알이 되고자 했다.]]> Tue, 28 May 2019 17:30:08 +0000 30 <![CDATA[식민지 예술가의 자화상 史소한 이야기]]>     식민지 예술가의 자화상시인으로 살펴보는 일제강점기 예술가의 삶   식민지 예술가로 살아간다는 것. 그것은 수많은 고민과 성찰을 동반했다. 민족적 양심을 지킬 것인가 친일을 할 것인가. 삶뿐만 아니라 예술에서도 자신만의 정답을 찾아야만 했다. 다른 이념과 문화가 뒤섞인 경계의 시대에서 그들은 정체성의 혼란을 겪었다. 한국인으로 태어나 식민지 국민이 되고, 다시 일본에서 한국인 유학생으로 지내며 예술가로서는 물론 한 인간으로서의 의미조차 명확히 하지 못했다. 네 명의 시인이 있다. 그들에게도 식민지 조국이 던지는 질문은 유효했다. 이 암울하고 혼란한 시대를 어떻게 살아가야 하며 어떤 예술을 해야 하는지를 말이다. 그들은 같은 질문에 다른 대답을 했다. 시로써 끊임없이 저항하고 투쟁했던 시인부터 일본을 위해 펜을 들었던 시인까지. 삶과 예술은 반드시 일치할 수 없었고, 친일 시인에 대한 문학적 평가와 역사적 평가 사이의 괴리 또한 남아 있지만 여기서는 역사 안에서의 그들의 선택만을 다루려 한다. 이들의 각기 다른 선택과 작품들을 통해 일제강점기 예술가의 삶을 살펴보자. alt]]> Tue, 28 May 2019 15:58:51 +0000 30 <![CDATA[민족의 희망을 노래한 독립투사 한용운 이달의 독립운동가]]>     글 전시부민족의 희망을 노래한독립투사 한용운 독립기념관은 국가보훈처 및 광복회와 공동으로 한용운을 2019년 6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한용운은 출가 후 불교의 근대화에 기여했으며,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으로 3·1운동을 이끌었다. 또한 민족의식을 투영한 문학 활동을 전개, 「님의 침묵」을 비롯해 많은 대표작을 남겼다. alt불교 개혁과 3·1 독립운동을 이끌다한용운은 1879년 8월 29일 충청남도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에서 태어나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하고 부친으로부터 의인들의 기개를 전해 들으며 자랐다. 동학농민운동과 의병 봉기를 목격한 후 속리사, 백담사 등 여러 곳을 전전하며 고뇌하던 한용운은 불교사상을 탐구하여 1904년경 출가한 이후 변질된 한국불교의 개혁을 추진했다. 1913년 개혁방안을 제시한 지침서로 『조선불교유신론(朝鮮佛敎維新論)』을 발행하였고 난해한 불경의 연구와 주해, 승려교육을 위한 교재와 불교잡지 『유심(惟心)』 간행 등을 통해 불교 근대화와 대중화에 기여하였다. 한편, 친일 승려를 규탄하고 계몽활동을 펼치며 해외로 망명한 독립운동가들과 조국의 장래를 논의하는 등 민족의식 고취에도 힘썼다.1919년 종교계를 중심으로 추진된 3·1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한용운은 민족대표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3월 1일 오후 2시 종로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식을 이끌었다. 이로 인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후에는 「조선독립에 대한 감상」을 집필하여 조선독립의 정당성을 설파하였다.올곧은 독립투사, 민족의 희망을 노래하다한용운은 1921년 출옥한 뒤 불교혁신운동과 함께 민족운동, 물산장려운동 지원, 민족교육을 위한 사립대학 건립운동 등 다방면에서 활동하였다. 1931년에 잡지 『불교(佛敎)』를 인수하여 불교 대중화와 민중계몽운동을 펼쳤고, 6·10만세운동 이후 좌우합작 단체로 결성된 신간회의 경성지회장으로 활동하며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키기 위한 민중대회에 참여하였으며, 여성해방운동과 농민운동에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 아울러 1926년 민족의 희망을 노래한 시들을 모아 『님의 침묵』이라는 시집을 발간하고 시와 소설 등 많은 문학작품을 통해 그의 민족정신을 구현하였는데, 이로써 한용운은 한국문학사에서 대표적인 근대시인이자 저항시인으로 평가받고 있다.한용운은 1933년 서울 성북동에 심우장(尋牛莊)이라는 집을 짓고 여생을 보냈다. 남향에 위치한 총독부 청사를 향하는 것이 싫어 끝내 동북 방향으로 틀어서 지은 심우장에서 집필 활동과 함께 창씨개명 반대운동, 조선인 학병출정 반대운동을 펼쳤던 한용운은 1944년 6월 29일 입적하여 전통 불교 의식에 따라 화장된 후 망우리묘지에 안장되었다. 정부는 민족대표로 3·1운동에 앞장서고 불교개혁을 통한 사회개혁과 독립투쟁에 헌신한 한용운의 공적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alt3·1독립선언서(1919, 보성사판)alt한용운 수형기록표1919.03.01. 독립선언식 후 붙잡혀 수감되었을 당시의 사진이 담겨 있다. alt『님의 침묵』 재판본(1952, 한성도서주식회사 발행)한용운은 독립의 희망과 민족정신을 담은 시 88편을 담아 시집 『님의 침묵』을 발간하였다.alt한용운alt심우장의 현재 모습]]> Wed, 29 May 2019 10:44:50 +0000 30 <![CDATA[그 소년은 보통학교에서 무엇을 배웠을까? 자료로 읽는 역사]]>     글 김경미 자료부그 소년은 보통학교에서 무엇을 배웠을까?일제강점기 초등학생의 학교생활   조선인은 보다 나은 삶을 위해 보통학교에 진학했지만, 학교에서는 조선인을 철저한 천황의 신민으로 만들고자 했다. 1930년대에 보통학교를 다녔던 정덕기 님이 독립기념관에 기증해 주신 자료를 중심으로 일제강점기 초등학생의 학교생활을 살펴보고자 한다. altaltaltalt altaltaltalt alt자료01) 1930년대 보통학교에서 사용했던 교과서보통학교에서는 국정교과서제를 시행하여 거의 모든교과가 조선총독부에서 편찬한 교과서를 사용했으며, 5-6학년 산술과 습자 교과서는 일본 문부성에서 편찬한 일본의 심상소학교용을 사용했다.소년의 학교생활충청남도 부여군 초촌면에 살던 소년은 10살이 되던해 이웃 석성면에 있는 석성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다. 모든 면(面)에 보통학교 1개를 두는 ‘1면1교제’가 시작되었지만, 소년이 사는 초촌면에는 아직 학교가 없었다. 소년이 보통학교에 입학한 1932년 조선의 보통학교 전체 학생 수는 513,786명으로 취학률은 17.8%였다. 학령 아동 5명 중 1명도 학교에 갈 수 없을 때였으니, 소년은 선택된 소수의 집단에 속했다고 할 수 있다.3·1운동 이후 조선 사회에서는 교육열이 높아져 되도록 자식들을 보통학교에 보내고자 했으나, 학교의 수용인원이 부족하여 입학지원자들은 경쟁을 해야 했다. 입학시험은 일종의 지능검사에 가까운 것으로, 예를 들면 그림책을 들고 계란이 몇 개인가를 물어보는 방식이었다. 1932년에는 입학지원자 127,364명 중 입학자는 103,866명으로 합격률은 81.6%였다.보통학교에서는 수업료를 받았기 때문에 학교를 다니는 데는 가정의 경제적 여건이 영향을 미쳤다. 매월50전~1원 이내의 수업료를 포함하여 1932년 보통학교학생 1인당 1년 교육비는 책값, 기타 제 잡비를 통틀어 11원 80전이 들었다. 당시 쌀 한 가마니 가격은 17원이었다. 1920년대 말의 세계대공황의 영향으로 농촌생활이 궁핍해져 중퇴하는 학생도 적지 않았다. 독립기념관에 기증된 2학년부터 5학년까지 소년의 통신부(성적표)를 보면, 2학년 초에 52명이었던 반 학생 수가 5학년 말에는 44명으로 줄었다. alt자료02) 보통학교 5학년 통신부(1936)매년 통신부에는 1-3학기의 학업성적, 조행(操行),출결 상황과 학년 말 종합점수, 신체 상황을 기록했다. 학업성적은 모든 교과목에 대해 10점 만점에 6점부터 평가하고 총점을 내어 학급 석차를 매겼다. 조행은 우(優),양(良), 가(可) 또는 갑(甲), 을(乙), 병(丙) 3단계로 평가했다.보통학교의 입학식은 4월이었다. 입학한 첫날 소년이 가장 먼저 배운 것은 교사의 호명에 대답하는 방법이었다. 교사가 소년의 이름을 부르면, 그는 큰 소리로 ‘하이(はい, 네)’하고 대답해야 했다. 그리고는 교사의 뒤를 따라다니며 변소와 운동장, 화단 등 학교 시설물의 이름을 일본어로 익히는 연습을 했다. 입학한 후 10일 동안은 교실에 들어가지 않고 운동장에서 차려, 쉬어, 앞으로나란히, 바로 등의 일본어 호령에 따라 집합 정렬하는 훈련을 반복했다. 일본식 한자 읽는 방법으로 불리기 시작한 소년의 이름을 비롯해 소년의 눈에 보이는 모든 사물과 행동이 일본어로 다시 태어났다.보통학교 교육은 매년 4월 1일부터 다음 해 3월 31일까지를 한 학년으로 하여 1년 3학기 제로 운영됐다. 1학년 때 배우는 교과목은 수신, 국어, 조선어, 산술,창가·체조였다. 소년의 학교에는 교장을 포함하여 일본인 교사가 2명, 조선인 교사가 4명 있었지만, 조선어외 모든 교과는 일본어로 가르쳤으므로 소년이 무엇보다도 빨리 익혀야 하는 것은 ‘국어’인 일본어였다. 국어는 매주 10시간이었으며 2학년부터는 더 늘어나 12시간이 되었다가 5학년부터는 9시간이 되었다. 이에 비해 조선어는 1학년에 5시간이었다가 3학년부터는 3시간, 5학년부터는 2시간으로 줄었다.교과과정 중 수업 시간은 국어가 가장 많았지만, 가장 중시된 것은 수신(修身)이라는 도덕 교과였다. 1학년 수신 교과서의 처음에는 학교 교실과 가정에서 지켜야 할 예절을 그림으로 보여주다가, 일본어를 조금 익힐 무렵에 배우게 되는 뒷부분에는 그림과 함께 “천황폐하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존귀한 분입니다. 천황폐하는 우리나라를 다스려 주십니다.”, “일장기는 우리나라의 국기입니다”라는 글도 쓰여 있었다. 소년은 글을 암송하며 천황에 대해 90도로 허리를 굽혀 인사하는 최경례를 복습하고 ‘국기(國旗)’와 ‘군기(軍旗)’를 대하는 마음가짐도 갖추어야 했다.    altalt 자료03) 보통학교 조선어과 3학년 시험문제(1934)二. □中에 文字를 너으시오. 神武天皇이 卽位하신 날이 □□□□에 당함으로, 이날을□□□로 定하고, 왼나라가 誠心껏 □□하는 것이올시다.조선어과의 시험문제로, 일본의 초대 천황인신무천황(神武天皇)이 즉위한 2월 11일이 기원절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지 확인하는 문제이다. 조선어과는 조선인 아동에게 천황 이데올로기를 주입하는 도구로도 활용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나 1938년부터는 조선어과가 선택과목이 됨으로써 이마저도 폐지되고 말았다.자료04) 심상소학 산술서 제6학년 아동용』(1921) 중 응용문제 14번(1)대정11년은 신무천황 즉위 기원 2582년으로서력 1922년이다. 대정20년은 서력 몇 년인가. 또 서력1년은 신무천황 즉위 기원 몇 년인가.(2)세계대전은 대정3년에 시작하여 동8년에 끝났다. 서력 몇 년부터 몇 년까지 계속되었는가.(3)명치45년 7월 30일 명치천황 붕어하여, 동일 금상천황 즉위하시어 대정으로 개원되었다. 혹 공채(公債)증서에 명치55년 6월 양도라고 쓰여있다. 이는 대정 몇 년에 해당하는가.(4)서력 연수가 4로 나누어지는 해는 윤년이다. 대정12년은 평년인가 윤년인가. 대정13년은 어떤가.(5)정7각형의 각의 합은 10직각이다. 하나의 각은 몇 도인가.(5)의 일반적인 산술문제에 비해 (1)~(4)의 문제는 산술을 연습하면서 천황이 다스리는 일본 국민으로서의 시간관념을 익히도록 하는 문제이기도 했다.3학년부터는 ‘도화(圖畫)’를 새로 배우고, 4학년부터는 ‘이과’와 함께 ‘직업’ 교과를 배우기 시작했다. 직업과는 1929년부터 보통학교에 도입된 교과로, 초등교육에서 직업 훈련을 강화하여 학생들이 학교를 졸업하면 바로 생업에 종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조선총독부는 피폐해진 농가를 살리겠다고 1932년부터 농촌진흥운동을 시작하여 농민의 자력갱생(自力更生)을 강조했다. 농민이 8할인 조선의 보통학교에서는 대부분 집단 농장과 같은 실습 시설을 갖추고 교사들이 학생을 지도했다. 소년의 5학년 직업과 시험문제를 보면, “학교원(學校園)에서 재배하는 작물을 아는 만큼 써라”라는 질문에 대해 “1. 토마토 2. 가지 3. ? 4. 칸나 5. 오이 6. 참외 7. 볏모(苗) 8. 나팔꽃 9. 호박 10. 콩 11. 무우 12. 감자”라고 답을 썼을 만큼 다양한 농작물을 재배했다.5학년과 6학년에서는 지리와 국사를 일주일에 2시간씩 배웠다. 지리 교과서는 “우리나라는 아시아주의 동부에 있으며, 일본열도와 조선반도로 이루어져 있다”는 말로 시작되어, 소년이 사는 조선은 일본의 한 지방으로 취급됐다. 조선이 속한 일본은 아시아주에서 가장 부강한 나라이자 세계의 주요국 중 하나라며 소년에게 ‘일본 국민’으로서의 자부심을 불어넣었다.국사 교과서에서 조선은 일본 역사의 흐름 속에서 조선지방의 역사로 취급되었을 뿐 아니라, 고대에는 중국과 일본에 종속되었고 이후 고려와 조선은 중국의 속국이었던 것으로 기술되었다. 이러한 점은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된 것이 당연한 일이라는 이미지를 갖게했다. “명치천황은 아버지가 자식을 생각하듯 깊은 애정으로 조선 인민의 행복을 생각하여” 조선을 병합했으며, 이때부터 조선의 산업이 발전하고 신민(臣民)의 안녕과 행복이 증진됐다며 일본의 조선 통치를 찬양했다. 이제 소년은 일본 국민이면서 동시에 열등한 역사를 지닌 식민지인이기도 한 존재가 되었다.황국신민 교육을 받다소년이 6학년이 되었던 1937년 7월에 일본은 중일전쟁을 일으켜 본격적으로 대륙침략을 시작했다. 조선은 인적, 물적으로 전쟁을 뒷받침하는 기지가 되어야 했다. 학생들은 “대일본제국의 신민으로 천황폐하께 충의를 다하겠다”고 맹세하는 황국신민서사를 암송하여 매일 아침조회에서 큰 소리로 외치고, 목검을 들고 하는 일본식 체조인 황국신민체조도 반복해서 훈련했다. 매월 6일은 학교애국일로 정해져, ‘국기’인 일장기를 게양하고 ‘국가’인 기미가요를 부르고 천황이 있는 동쪽을 향해 절을 하는 동방요배를 하는 등의 의식을 거행한 후 신사 참배를 했다.이와 같이 일본이 일으킨 전쟁에 조선이 휘말려가기 시작할 때, 소년이 보통학교의 마지막 학년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배워야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6학년 수신 교과서에서는 “국민의 천황에 대한 충성은 최고의 도덕”이라고 하며, 「우미유카바(바다에 가면)」를 인용한다. “바다에 가면 물에 잠긴 주검, 산에 가면 풀이 무성한 주검, 천황의 곁에서 죽는다면, 결코 되돌아보지 않으리.” 이는 천황에게 죽음으로 충성을 맹세하는 일본의 옛 시가로, 1937년에 군가로 만들어져 기미가요 다음의 ‘제2의 국가’로 불리게 된다. 노래는 6학년 국어 교과서의 마지막 단원에서 다시 인용되어 소년에게 천황을 신으로 우러러 받들고 부모같이 생각해 모시면서 목숨을 바쳐 충성할 것을 강조하며 이른바 ‘국어’ 교육의 마지막을 장식했다. altalt 자료05) 『보통학교 우량대전과 제6학년 후기』(1937)보통학교 각 학년 전 교과의 참고서를 한권에 담은 전과는 2학년부터 전·후기용이 따로 있었다. 이 전과는 1937년 10월에 경성에 있는 박문서관에서 나온 것으로, 표지에 군기인 욱일기(旭日旗)와 총칼을 들고 전진하는 병사들의 그림이 선명하다.자료06) 보통학교 졸업증서(1938)소년은 1938년 3월 31일 자로 보통학교 6개년간의 전 교과를 이수했음을 증명하는 졸업증서를 받았다. 소년이 보통학교에서 6년간 배운 것은 “자력갱생하는 농민이 돼라”는 생활교육과 함께 “일본인이 되어 천황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치라”는 죽음의 교육이었다. 그런데 소년이 마지막으로 보통학교를 다닌 1937학년도는 그러한 죽음의 교육이 노골적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해에 불과했다. 자료01 중 『보통학교 도화첩』(정일균 님 기증) 외 모든 자료는 정덕기 님 기증 자료입니다. 독립기념관의 연구와 전시, 교육을 위해 자료를 기증해 주신 여러분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참고박완서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웅진출판, 1992.오성철 ) 『식민지 초등교육의 형성』, 교육과학사, 2000.한국교육개발원 ) 『한국 근대 학교교육 100년사 연구(II) -일제시대의 학교교육』, 한국교육개발원, 1997.]]> Tue, 28 May 2019 18:11:50 +0000 30 <![CDATA[한형석이 부르는 독립의 노래 역사를 만든 사람]]>     글 임영대 역사작가한형석이 부르는독립의 노래   한형석은 1910년에 부산에서 독립운동가 한흥교의 4남 3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1915년에 상하이에서 처음 아버지를 대면하고, 1948년까지 귀국하지 않고 중국에 머무르면서 독립운동에 매진하였다. 학교 교사, 중국 정부군공작대장, 광복군 제2지대선전부장 등으로 복무했으며 해방 이후에는 귀국하여 방송, 연극, 학계 등에서 두루 활동하였다. 1977년에 건국 포장,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다 alt부산 서구에 있는 먼구름 한형석길(부산광역시 서구청 제공)독립문의 자유종이 울릴 때까지 싸우러 나가세음악은 단순히 귀를 즐겁게 하고 삶을 풍요롭게 하는 수단이 아니다. 연극 역시 그저 보고 즐기기 위한 도락만이 아니다. 때때로 음악은 그 선율과 가사를 통해 부르는 이의 사기를 높이는 도구가 되고, 연극은 관객을 계몽하고 단결시킨다. 한형석은 상하이 신화예술대학에서 음악을 처음 배웠다. 그리고 1939년 10월에 충칭에서 한국청년전지공작대 예술부장에 취임하면서 군가를 작곡, 본격적으로 음악을 이용한 독립운동에 나서기 시작한다. 이 시기 「한국행진곡(韓國行進曲)」, 「항전가곡(抗戰歌曲)」을 작곡했으며 「국경의 밤」과 한국 최초의 오페라 「아리랑」 등 항일의식을 담은 가극도 상연하였다. 1940년에는 중국군 간부교육 교관으로 일했다. 1941년 1월 한국청년전지공작대가 모두 광복군 제5지대로 편입되었는데, 『광복군가집』 1, 2집의 발간과 「국기가(國旗歌)」, 「광복군 제2지대가」, 「압록강행진곡」, 「조국행진곡」 등 항일가곡 100여 곡의 작곡이 모두 이 시기에 이루어졌다."신 대한국 독립군의 백 만 용사야. 조국의 부르심을 네가 아느냐. 삼천리 삼천만의 우리 동포들. 건질 이 너와 나로다. 나가 나가 싸우러 나가. 독립문의 자유종이 울릴 때까지 싸우러 나가세. 나가 나가 싸우러 나가. 나가 나가 싸우러 나가. 독립문의 자유종이 울릴 때까지 싸우러 나가세."1944년 광복군 제2지대 선전대장으로 복무하면서도 작곡과 가극 상연을 멈추지 않았다. 한형석이 만든 노래와 가극은 항일전선에 나선 용사들의 항일의식을 고취하고, 광복군은 물론 중국인들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다.끝나지 않는 민족의 선율한형석을 비롯한 독립운동가의 노력 덕분에 마침내 해방이 왔다. 그러나 한형석은 곧바로 귀국하지 않고, 고국으로 돌아가는 동포들을 돕기 위해 교포 귀국 사무를 맡아 일했다. 3년 뒤인 1948년 9월이 되어서야 고국 땅을 밟을수 있었다. 33년 만의 귀국이었다. 돌아와서도 한형석은 손에서 음악을 놓지 않았다. 귀국하자마자 1년간 서울중앙방송국의 촉탁 방송위원을 지냈고, 부산에서 문화극장과 자유아동극장 대표를 역임했다. 부산대학교 문리대학 교수로 20년을 재임하고, 다시 강사로 14년을 더 학생들을 가르쳤다. 특히 한국전쟁 종전 후 문을 연 자유아동극장에서는 2년여 동안 500회나 되는 공연을 선보이며 12만여 명의 아동에게 무료관람을 제공했다. 밤에는 색동야학원이라는 야학을 열어 생계를 위해 일하는 아이 80~90명에게 공부를 가르쳐주기도 했다. 극장과 야학당에 들어가는 비용은 모두 자비였다."처참한 전화로서 점증하는 최대의 사회문제로 국가민족의 장래에 암영을 던지는 걸식아동, 부랑아동, 고아원 아동과 일반 실학아동의 교도를 위하여 본 극장은 극장교실로 무료공개하여 세인이 다음 세대 주인공의 정신적 주식물을 제공할 것이며 암담한 거리에서 방랑하는 천사에게 활기 있는 광명의 앞길을 선도하여 이 민족의 병든 새싹에게 비타민이 되기를 바란다. 백원의 야서보다 더 신속한 효과를 거둘 수 있는 교육영화를 비롯해 환등·음악·아동극·무용·인형극 등으로 아동의 지식계몽과 정서교육에 이 아동극장은 그 발휘할 기능의 범위는 광대하다. 이러한 일은 원칙적으로 국가가 설립 운영할 것이나 막연히 그날을 기다릴 수 없어 미력이나마 합하고 기울여서 우선 뜻을 같이하는 몇몇 동지의 협력 결속으로 이 시급하고도 다잡한 사업에 첫 길을 들어가려고 한다."민족을 위해 바친 공헌에 보답이 없을 리는 없다. 한형석은 1970년 5월에 제13회 눌원문화상을 받았다. 1977년 12월에는 건국포장,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다. 그리고 1996년 6월 14일에 부산 자택에서 향년 87세로 눈을 감았다. 그러나 한형석을 기리는 움직임은 사후에도 계속되었다. 2002년 가곡집 『잊을 수 없는 선율』이 발행된데 이어, 2004년 6월14일 옛 지인과 유족을 중심으로 ‘먼구름 한형석 선생 추모사업회’가 만들어졌다. 광복 60주년이었던 2005년 8월 16일에는 한형석이 한때 단장을 맡았던 한울림합창단이 기념 음악회 ‘대륙에 묻힌 이름: 항일 독립운동 음악가 한형석’을 부산문화회관 중강당에서 열었다. 그 이듬해에는 부산 근대역사관에서 한형석을 주제로 특별 기획전이 개최되었다. 부산시는 자유아동극장 터를 지나는 도로를 ‘먼구름 한형석 길’로 명명하여 한형석을 기리고 있다.]]> Wed, 29 May 2019 10:58:32 +0000 30 <![CDATA[시대를 보는 예술가의 눈 우리가 만난 얼굴]]>     시대를 보는예술가의 눈 예술에는 시대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술가 개인의 작업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예술가는 한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이므로, 의도하든 그렇지 않았든 시대를 보는 예술가의 시선이 스몄습니다. 일제강점기 예술가들은 식민지 조국의 현실 앞에서 ‘어떤’ 예술을 해야 하는지 치열하게 고민했습니다. 여기에 누군가는 일제를 향해 펜 끝을 겨누며 저항했고, 또 누군가는 카메라 렌즈에 민족의 아픔을 담아냈습니다. 누군가의 예술은 일제 협력의 도구로 이용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술은 다시 시대를 기록하는 역사가 되었습니다. alt ]]> Tue, 28 May 2019 15:25:44 +0000 30 <![CDATA[미주 한인사회의 통합과 대한인국민회 결성 한국인의 터전:미주 편]]>     글 홍선표 나라역사연구소 소장미주 한인사회의 통합과대한인국민회 결성   1908년 미주 한인사회에 장인환·전명운의 스티븐스 처단의거와 덴버의 북미애국동지대표회로 국권을 지키기 위한 노력이 전개될 때 미주 한인들은 내부의 결속과 통합에 전념하였다. 그러한 노력은 하와이에서 처음으로 합성협회의 결성으로 결실을 맺었고, 그 이후 전 미주 최초의 통합 단체인 국민회 탄생으로 이어졌다. alt합성협회장정하와이 최초의 통합 단체 합성협회의 결성1905년 11월 을사늑약 체결 이후 국권이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진 것을 초조하게 바라보던 하와이 한인들은 자신들이 사는 지역을 중심으로 각종 단체를 결성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1907년까지 25여 개의 각종 단체가 우후죽순 만들어져 제각기 국권회복을 위한 노력을 전개하였다.하와이 한인들은 대한제국이 최초이자 마지막인 헤이그 특사 파견을 통한 국제외교를 시행한 후 그 일로 광무황제가 일본 정부의 압박으로 강제퇴위되는 상황을 보자 분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07년 8월 하와이 24개 단체 대표 30명은 호놀룰루에서 5일간 대표대회를 열었다. 하와이 한인사회가 지금의 분산된 상태로는 기울어져 가는 국권을 바로잡을 수 없다고 판단하고 새로운 단체를 만들어 향후 활동을 개척해 나가기 위함이었다. 절박한 시국상황 속에 개최한 한인 대표대회는 마침내 1907년 9월 1일 합동발기문을 발표하였다. 하와이 이민사회 최초로 통합 단체인 합성협회(合成協會)를 탄생시킨 것이다.합성협회취지서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설립 의도를 분명히 밝히고 있다. 즉, 지금의 시국상황은 도저히 참기 어려운 지경이니 우리 한국인(韓民)이 스스로 독립정신으로 생존을 지키기 위해 모든 단체들이 일치단결해 하나의 단체인 합성협회를 만드니 이 단체를 통해 국권을 만회하고 동포의 환난을 구제하고 교육에 힘써 문명독립을 이루려 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취지에 따라 합성협회는 설립 목적을 “포와 동포가 국권을 회복하기 위하여 합심 협력하여 환난을 상구(相救)하며 교육을 발달케 함”으로 정했다.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정치, 종교, 지위, 직업을 막론하고 국민된 의무를 지키고 일치단결하여 학업과 동포의 공익을 위해 힘을 다하는 것으로 정했다.합성협회의 초대 총회장은 임정수가 맡았고 정원명이 그 뒤를 이었다. 부총회장은 안원규를 필두로 이내수가 이어 갔다. 설립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합성협회는 하와이 전체에 47개 지방회가 설립되었고 회원 수는 1,051명이나 되었다. 이는 성인 전체 3,800여 명 중 거의1/3에 육박하여 하와이 한인들의 호응도는 매우 높았다. alt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 임원진(1909)미주 한인사회 최초의 통합 단체 국민회의 탄생하와이에서 통합 단체인 합성협회가 결성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북미의 한인들은 그동안 별 움직임이 없었다가 1908년 3월 장인환·전명운 의사의 스티븐스 처단의거를 계기로 하와이의 한인들과 공동 활동을 전개하면서 합성협회와의 통합을 모색하였다. 무엇보다 항일역량을 집중할 필요성이 크게 제기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를 적극 추진한 단체는 샌프란시스코에 본부를 둔 공립협회였다.공립협회는 하와이 합성협회와 적극적인 통합을 시도하여 1908년 10월 23일 마침내 양측 대표자를 통해 합동발기문을 기초하고 11월 30일 이를 발표하였다.“우리의 국권이 쇠퇴한 원인을 살펴보면 정부는 당파와 알력이 심하여 국가에 충성하지 못하였고 백성은 전제정치에 눌려서 규합되지 못한 까닭이며 이것을 뉘우치는 오늘에 우리는 조국을 위하여 마음을 합하고 역량을 집중할 것이다.조국의 운명이 위태한 이때를 당하여 해외 동포가 사방에서 부르짖는 것이 단체 합동과 역량 집중이며 미주와 하와이 단체들의 합동 추진이 우리의 급선무이다.”이상의 합동발기문을 통해 공립협회와 합성협회는 자체 조직을 해소하고 합동한 후 새로운 통합 단체로 국민회를 설립하기로 결의했다. 합동 일자는 1909년 2월1일로 정했다. 이로써 1903년 1월 13일 한인들이 하와이에 첫발을 내디딘 이래 그동안 하와이와 북미에서 한인사회를 형성하며 독자활동을 전개하던 미주 한인사회에서 처음으로 양 지역을 통합한 새 단체로 국민회가 탄생하였다. 합동 발기에 참가한 인물은 합성협회에서 고석주, 김성권, 민찬호, 이내수, 강영소, 한재명, 안원규 등 7명이고 공립협회는 최정익, 이대위, 강영대, 안석중, 황사용, 이경의 등 6명이다.국민회는 설립 목적을 “교육과 실업을 진발하며 자유와 평등을 제창하여 동포의 영예를 증진케 하며 조국의 독립을 광복케 함”에 두었다. 합성협회에서 제기된 조국 독립과 교육 진흥 외에 실업 방면을 새로 추가한 것이었다.국민회가 조직되자 공립협회는 국민회 북미지방총회(초대 총회장 정재관)로, 합성협회는 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초대 총회장 이내수)로 바뀌었다. 본부 조직으로 중앙총회를 두어 양 지방총회를 통할하게 하였고 지방총회 아래에 지방회를 두었다. 이에 따라 합성협회에서 발간하던 『한인합성신보』는 『신한국보』로, 공립협회의 『공립신보』는 『신한민보』로 각각 그 이름을 바꾸어 발행하였다.1910년 2월 10일 하와이와 북미에서 독자활동을 하던 전흥협회와 대동보국회가 새로 국민회에 합류하자 기존의 국민회의 이름을 대한인국민회로 바꾸었다. 이로써 미주 한인사회는 1921년 하와이지방총회가 하와이 대한인교민단으로 변경해 대한인국민회에서 떨어져 나갈 때까지 대한인국민회의 기치 아래 하나로 통합되었다.대한인국민회는 미주 한인사회의 통합 단체로만 조직되거나 활동하지 않았다. 공립협회 때부터 만주와 시베리아에서 지방회 설립을 추진한 영향으로 대한인국민회는 북미와 하와이 외에 만주와 시베리아까지 지방총회를 설립하였다. 대한인국민회는 1914년 7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때까지 4개의 지방총회와 116개의 지방회를 거느린 역대 최대의 조직으로 발전하였다. 또 국망 이후 사실상 가정부(假政府)의 역할을 담당하면서 미주 한인사회를 지도하였다.]]> Wed, 29 May 2019 11:18:04 +0000 30 <![CDATA[독립운동가와 친일파를 함께 기리는 국립현충원 끝나지 않은 독립운동]]>     글 이계형 국민대학교 특임교수독립운동가와 친일파를 함께 기리는국립현충원   1945년 우리 민족은 광복을 맞았지만, 독립운동은 끝나지 않았다. 여전히 미완으로 남은 사건, 해결되지 못한 문제, 기억해야만 하는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끝나지 않은 독립운동은 독립운동사를 과거에 머문 역사가 아닌 현재의 문제로 다루며, 오늘도 신문 한쪽을 차지하고 있는 독립운동 및 일제강점 이슈를 소개한다. alt국립서울현충원 임시정부요인 묘역(대한민국역사박물관 제공)현충원과 독립운동가의 묘지6월은 ‘호국보훈의 달’로, ‘나라를 지킨다’는 뜻의 ‘호국(護國)’과 그러한 ‘공훈에 보답한다’는 ‘보훈(報勳)’을 의미로 추념하는 달이다.  6월 6일 ‘현충일’, 6월 25일 ‘6·25전쟁’을 비롯하여 2002년 6월 ‘제2연평해전’까지 더하여 희생한 분들을 기리고자 하는 것이다. 이 가운데 가장 뜻깊은 날은 법정공휴일로 지정된 현충일일 것이다. 이날은 조기가 게양되고 국립서울현충원이나 국립대전현충원에서 대통령과 3부 요인이 참석한 가운데 추념식이 거행되는데 오전 10시 사이렌 발령과 동시에 조포를 쏘기도 한다.그런데 종종 국립현충원에 친일반민족행위자가 안장되었다며 이장을 촉구하는 시민단체의 성명이 발표되고 신문·방송에서 이 같은 문제점을 지적하기도 한다. 왜 이런 문제가 불거졌을까? 이는 서울시 동작구 흑석동에 위치한 국립서울현충원이 본래 국군묘지였기때문이다. 1955년 5월, ‘육탄십용사현충비’가 세워지고 같은 해 7월 국군묘지가 조성되어, 이곳에 장군으로 예편한 일제강점기 일본군 혹은 만주국 간도특설대 출신자들이 적지 않게 묻혔다. 다음 해인 1956년 4월에는 6월 6일을 ‘현충기념일’로 제정하였다. 이런 이유로 그해 처음으로 치러진 현충일에는 순국선열이 포함되지 않았다. 육해공군 전몰장병합동추도식이 거행되었을 뿐이다. 이날에는 모든 가무음곡이 금지되었고 댄스홀과 카바레의 영업을 중지했다.추념식에서 순국선열이 빠진 것은 국군묘지에 독립운동가들의 유해가 안장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정부 차원에서 별도로 독립운동가 묘역이나 순국선열을 기념하는 날을 지정한 것도 아니었다. 해방 이후 순국선열의 기념행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이 1945년 12월 23일 개최한 ‘순국선열추념대회’가 처음이었고, 다음 해부터는 임시정부가 기념해온 ‘11월 17일’에 맞춰 행사가 거행되었다. 하지만 이는 정부 차원이 아닌 민간단체 차원에서 이뤄진 것이다. 1958년 7월, 국회에서 현충일과 별도로 국치일인 ‘8월 29일’을 ‘순국선열의 날’로 제정할 것을 정부에 건의하였지만 그뿐이었다.1962년부터 순국선열들을 다 함께 모실 수 있는 국립묘지를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지만, 1965년 3월 국군묘지가 국립묘지로 승격하는 것에 그쳤다. 그렇다면 국립묘지가 조성되기 전까지 독립운동가들의 유해는 어디에 모셔졌을까? 해방 이후 독립유공자 포상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으니 묘지가 조성되었을 리 만무했지만 말이다. 그 때문인지 국립묘지 외에 독립운동가들이 묻혀 있는 곳은 효창공원, 망우리묘지공원, 강북구 우이동 독립지사 묘역 등으로 흩어져 있다.해방 직후 김구 주도하에 일본에서 봉환된 이봉창·윤봉길·백정기 등의 유해가 1946년 6월 효창공원에 안장되었다. 그 뒤 1948년 8월 이곳에 임시정부 요인이었던 이동녕·조성환·차리석 등의 유해가 중국에서 봉환되어 모셔졌고 1949년 6월에는 김구도 이곳에 묻혔다. 서울과 구리에 걸쳐있는 망우리묘지공원은 1933년 ‘경성부립묘지’로 조성된 것인데 일제강점기에 돌아가신 독립운동가뿐만 아니라 근현대사의 유명 인사들의 묘소가 있다. 이곳에는 안창호와 그의 제자이자 비서였던 유상규, 흥사단 단원 문명훤과 한용운을 비롯한 오세창·문일평·방정환·오기만·서광조·서동일·오재영 등이 묻혔다. 이곳은 한동안 방치되다가 2012년 한용운 묘소가 등록문화재로 등록된 이후 모두 9위의 묘소가 국가에 의해 보존·관리되고 있다. 안창호 묘소는 1970년 11월 도산공원으로 옮겨졌다. 북한산 자락에 있는 우이동 독립운동가 묘역에는 1907년 7월, 헤이그 밀사로 갔다가 순국한 이준 열사를 비롯해 손병희·이시영·신익희·김창숙·여운형 등과 광복군 합동 묘소 등 모두 16위가 모셔져 있다. 이준 등 6명의 묘소는 2012년에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같은 곳에 안장된 독립운동가와 친일파국군묘지에 독립운동가들이 함께 안장된 것은 1962년부터 박정희 정권이 독립유공자 포상을 재개하고 ‘국가수호자특별원호법안’을 공포한 이후이다. 비록 1970년에 중단되었지만 이때 ‘순국선열의 날’이 국가기념일로 지정되었다. 법안에 따라 1963년 3월, 독립장을 수여 받은 김재근이 다음 해에 유명을 달리하며 최초로 국군묘지에 안장되었다. 그 뒤 이곳에 독립운동가들의 유해가 묻혔다. 친일파들이 묻힌 곳에 독립운동가들이 안장된 셈이다. 당시에는 친일문제가 사회적인 이슈로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에 이의를 제기하는 일은 없었다. 어찌 됐든 그 뒤 국군묘지가 국립공원으로 승격되면서 1965년 6월, 제10회 현충일에는 전몰장병과 더불어 순국선열들의 추모식도 함께 치러졌다.국립묘지에는 공동묘지, 혹은 선산에 묻혔던 독립운동가의 유해가 애국지사 묘역에 이장되거나 작고한 분들이 안장되었다. 북간도에서 15만 원 탈취 사건을 주도한 철혈광복단의 윤준희·임국정·한상호 등의 유해가 1966년 11월 국립묘지로 이장되었다. 그들이 1921년8월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하여 관할 공동묘지에 묻힌지 40여 년 만의 일이었다. 강우규의 유해도 이곳에서1954년 수유리로 이장된 이후 1967년에 국립묘지로 모셔졌다. 6·25전쟁 당시 총살된 신석구는 1968년 9월 유해 대신 유품이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1933년 하얼빈에 묻혔던 남자현의 경우처럼 묘소를 찾지 못해 허묘만 모셔진 경우도 있다. 2019년 5월 현재 이곳에는 독립유공자 218위가 안장되어 있다. 또한 1993년 8월에는 박은식·신규식·노백린·김인전·안태국 등의 유해가 상하이의 만국공묘에서 봉환되면서 서울현충원에 임시정부 묘역이 별도로 조성되어 현재까지 19위가 모셔져 있다.그런데 1987년 6월 항쟁 이후 민주화의 진전과 함께 친일청산 문제가 다시 대두되면서 현충원에 안장된 친일반민족행위자의 묘소 이장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하였다. 1993년에 작고한 임시정부의 마지막 비서장 조경한은 “내가 죽거든 친일파들이 묻혀 있는 국립묘지가 아니라 동지들이 묻혀 있는 효창공원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길 정도였다. 하지만 그의 유해는 유언과 달리 국립서울현충원의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되었다가 임시정부 묘역으로 옮겨졌다. 이후 독립운동가들 가운데 친일경력이 드러난 경우, 서훈이 취소되고 현충원에서 쫓겨나기도 하였다.하지만 여전히 국립서울현충원에 7명, 국립대전현충원에 4명의 친일파 유해가 안장되어 있다. 이들은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 포함된 사람들로, 대개 현충원 장군묘역에 묻혀있다. 특히 서울현충원의 경우, 친일파가 묻힌 ‘장군 제2 묘역’ 아래에 ‘애국지사 묘역’이 조성되어 있어서 숭고한 분들의 공간에 누가 되고 있다.국립현충원에 조성된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의 묘를 강제로 이장할 수 있는 방법은 현재로서는 없다. 이들이 6·25전쟁 등에 기여했기 때문에 안장 자격이 취소되지 않는 한 강제로 이장할 수 없는 현행법 때문이다. 2016년 이들을 국립묘지에서 퇴출하기 위한 법안이 발의되었지만 수년째 논의만 되고 있다. 하루빨리 국립묘지 공간의 영예성을 회복해야 한다. 이것은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을 추모하고 그분들께 감사하는 ‘호국보훈’의 의미를 되새기는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모든 현충 시설에 새겨져 있는 “여기는 민족의 얼이 서린 곳, 조국과 함께 영원히 가는 이들, 해와 달이 이 언덕을 보호하리라”는 글귀가 더욱 빛을 발하길 기대해본다.]]> Wed, 29 May 2019 11:03:05 +0000 30 <![CDATA[경술국치와 민국의 탄생 우리의 오늘 세계의 그날]]>     글 강응천 기획집단 문사철 대표, 역사저술가경술국치와 민국의 탄생   1912년 4월 15일 새벽 2시 20분경, 그때까지 볼 수 없었던 최악의 선박사고가 일어났다. 하느님도 침몰시킬 수 없는 배라고 선전하던 세계 최대의 초호화 유람선인 타이타닉호가 뉴욕으로 가는 도중 북대서양 뉴펀들랜드 근해에서 빙산과 충돌해 차가운 바닷속으로 가라앉았다. 미국에서 새 인생을 열어갈 꿈에 벅찼던 사람들이 배와 운명을 함께했다. 승무원을 포함해 배에 타고 있던 약 2,340명 가운데 생존자는 겨우745명. 이 비극은 1년 반 전 침몰한 동아시아의 유서 깊은 왕조를 떠올리게 한다. 왕조의 이름은 대한제국이었다. alt타이타닉호의 모습서쪽엔 대영제국, 동쪽엔 대일본제국대한제국이 멸망한 것은 1910년 8월 29일이었다. 이로써 한반도는 아시아의 ‘떠오르는 태양’ 대일본제국의 특별행정구역으로 편입되었다. 동방에 대일본제국이 있었다면 서방에는 ‘해가 지지 않는’ 대영제국이 있었다. 그해 5월 31일 대영제국은 남아프리카에 보유하고있던 트란스발, 오렌지자유국 등 4개의 식민지를 하나로 합쳐 영연방 내의 남아프리카연방으로 재조직했다. 영국은 일찍이 이곳에서 네덜란드계 청교도 이주민인 보어인과 분쟁을 겪다가 1899년부터 시작된 보어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남아프리카의 주인이 되었다.일본은 1890년 2월 대일본제국 헌법을 공포했다. ‘제국’은 단어 뜻대로만 풀면 황제가 다스리는 나라이지만, 현실에서는 영국·미국·프랑스 등 열강처럼 국외에 식민지를 거느리는 대국을 의미한다. 대일본제국이 획득한 첫 번째 식민지는 1895년 청일전쟁 후 시모노세키조약에 따라 청으로부터 떼어낸 타이완. 일본은 이곳에 총독부를 설치하고 대한제국을 식민지로 삼기 위한 예행연습을 충실히 진행해왔다. 일본제국의 두 번째 식민지는 1905년 러일전쟁 후 포츠머스조약에 따라 러시아로부터 떼어낸 사할린섬의 북위 50도 이남 지역이었다. 이곳에는 타이완과 달리 1907년 3월 가라후토청이라는 행정조직을 설치해 통치했다. 가라후토는 사할린섬을 가리키는 일본 말이다. 그리고 1910년에 편입된 새로운 식민지는 타이완이나 사할린섬과는 차원이 다른 곳이었다. 수천 년의 역사를 이어오던 문명국가가 통째로 식민지가 된 것이었으니까. alt조선의 초대 총독을 지낸 데라우치 마사타케alt일제가 조선에 세운 식민 통치기구인 조선총독부 통째로 식민지가 된 문명국가오랜 문명을 자랑하던 나라를 통째로 삼킨 일본은 특별한 식민 정책을 마련했다. 그것은 오랜 기간에 걸쳐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을 건설한 영국의 다소 방만하고 느슨한 방식이 아니라 짧은 시간에 일사불란하게 몰아치는 속도전이었다.대한제국의 공식 명칭은 ‘대한국’이었다. 국권 피탈과 더불어 그 이름은 지구상에서 사라졌다. 일본은 자국 영토로 편입된 한반도의 지역 명칭을 ‘조선’이라 부르기로 했다. 국권 피탈에 협력한 친일파들은 조선 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에게 ‘한국’이라는 칭호만은 유지하게 해 달라고 간청했지만, 나라가 사라진 마당에 ‘국(國)’은 가당치 않다며 거절당했다. 일본의 『중외상업신보』는 1면 중앙에 대문짝만하게 한반도의 지도를 싣고 1,248만 4,621명의 인구를 지닌 새 영토의 획득을 축하했다. 일제는 을사늑약에 따라 설치했던 통감부를 폐지하고, 그보다 훨씬 더 강력한 기구인 조선총독부를 식민지 통치 기구로 설치했다. 초대 조선 총독에는 국권탈취의 행동대장인 데라우치 통감이 임명되어 1910년 10월 1일부터 조선총독부를 가동했다. 데라우치는 한국을 병합하던 날 밤, “가토 기요마사, 고니시 유키나가가 살아있다면 오늘 밤 이 달을 어떻게 보았을까?”라는 시를 한 수 지었다고 한다.한반도의 최고 통수권자인 조선 총독은 일본의육·해군 대장 가운데서 선임되고 일본 천황에 직속되었다. 그는 한반도에 주둔하는 일본 육·해군을 통솔해 한반도의 방위를 맡고, 한국의 모든 정무를 총괄하는 권한과 책임을 보유했다. 또한 천황의 특별한 위임에 따라 총독부령을 공포할 수 있고, 벌칙도 내릴 수 있으며, 법률에 준하는 명령을 내릴 수도 있었다. 한마디로 특별한 식민지의 최고 통치자로서 폭넓고 강력한 권한을 한 손에 쥐었던 것이다.총독의 자문기관인 중추원에는 의장 밑에 부의장·고문·서기관 등을 두었다. 한국인도 의장만 아니면 3년 임기로 중추원에 들어갈 수 있으나, 그것은 친일 인사를 우대하는 명예직에 지나지 않았다. 한국인은 또한 특별임용령에 따라 조선총독부 소속 관청의 문관에 임명될 수도 있었으나, 그 수가 매우 적고 일본인 관리에 비해 차별 대우를 받았다. 한반도 전역에는 일본군 2개 보병 사단, 헌병 및 경찰 약 4만 명, 헌병보조원 2만여 명이 배치되어 데라우치 총독의 강압 통치를 뒷받침할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이로써 대한국은 타이타닉호가 대서양 밑으로 가라앉은 것처럼 역사의 바다 밑으로 가라앉았다. 타이타닉호는 다시 떠오르지 못했지만 대한국은 언젠가는 다시 솟구쳐 오를 저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다시 역사의 전면으로 부상할 때 그것은 더 이상 ‘제국’이 아닐 것이었다. 대한국은 같은 영토, 같은 국민을 아우르지만 전혀 다른 성격을 가진 ‘민국’으로 역사의 무대에 재등장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alt400년 만에 모습을 드러낸 잉카제국의 유적, 마추픽추다시 모습 드러낸 마추픽추대한제국이 사라진 직후인 1911년, 지구 반대편에서 이미 오래전에 사라졌던 잉카제국의 유적이 나타났다. 약 400년 동안 사람 눈에 띄지 않던 잉카제국의 유적 마추픽추가 미국의 역사학자 하이럼 빙엄에 의해 재발견된 것이다. 페루 남부 쿠스코시 북서쪽 우루밤바 계곡에 있는 마추픽추는 나이 든 봉우리라는 뜻으로, 산자락에서는 그 모습을 볼 수 없어 ‘공중 도시’라고도 불린다. 잉카인은 16세기 후반 그 깊숙한 오지로 들어가 200t이 넘는 거석과 인티와타나라고 불리는 태양의 신전 등으로 이루어진 고도의 문명을 건설했다. 그들이 잉카제국을 등지고 마추픽추로 들어간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다. 에스파냐 침략자들에게 잉카제국이 유린당할 때 피신한 것이 아닐까 추측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확인할 길은 없다.대한제국이 ‘제국’으로는 부활할 수 없는 것처럼 잉카제국과 아즈텍제국 역시 부활할 수 없었다. 아시아보다 훨씬 더 일찍 유럽인의 침략에 유린당한 라틴아메리카에서는 19세기 들어 새로운 독립 국가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옛 아즈텍제국의 땅에서 1821년 독립한 멕시코도 그중 하나였다. 그러나 오랜 식민 지배가 심어 놓은 극심한 빈부 격차와 독재는 멕시코 사람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었다. 마추픽추가 발견될 무렵 멕시코에서는 이 같은 식민 유산을 청산하고 진정한 공화국을 건설하기 위한 혁명이 일어났다. 혁명의 두 지도자 판초 비야와 에밀리아노 사파타는 30년간 군림해온 독재자 디아즈를 몰아내고 마데로를 새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비야는 북부에서 정부군 요새를 습격하고, 사파타는 남부에서 지방의 카시크(농촌의 정계 거물)들에 맞서면서 혁명의 불길은 순식간에 타올랐다.멕시코혁명은 대한제국이 식민지 조선으로 전락하던 시기에 지구 반대편을 뒤흔든 역사적 대사건이었다. 그것은 분명 한국인이 식민 지배를 극복하고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겪어야 할 일들의 일단을 미리 보여주고 있었다. alt중국의 신해혁명을 이끈 쑨원중화민국과 대한민국멕시코혁명이 절정으로 치닫던 1911년 10월, 식민지 조선의 바로 이웃에서도 경천동지할 사건이 터졌다. 중국에서 ‘멸만흥한(滅滿興漢, 만주족을 멸하고 한족을 부흥시키자)’의 기치를 든 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쑨원이 이끄는 혁명세력은 우창에서 무장봉기를 일으킨 뒤 전국적으로 세력을 넓혀 갔다. 만주족이 통치하는 청 왕조는 1842년 아편전쟁에서 패한 뒤 무기력하게 서양 세력에 휘둘려왔다. 이에 중국 민중 사이에서는 이민족인 청 왕조를 몰아내고 한족의 새 나라를 세우자는 운동이 점차 세를 얻어왔던 것이다. 1911년이 신해년이었으므로 이 혁명을 ‘신해혁명’이라 한다.1912년 1월 1일, 난징에 모인 혁명군은 공화제 국가인 중화민국 수립을 선포하고 쑨원을 임시 대총통에 임명했다. 쑨원은 취임사에서 “청 왕조를 끝장내고 민족, 영토, 군정, 내치, 재정의 통일을 이루어내겠다”고 새 나라의 청사진을 밝혔다. 수천 년 동안 중국 대륙을 지배해 온 청 왕조는 곧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갔다.쑨원은 일찍부터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서양 의학을 배워 신지식을 습득한 입지전적 인물이었다. 그는 봉건 왕조인 청나라가 남아 있는 한 중국의 미래는 없다고 보고 혁명운동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국내 활동이 어려워지자 일본으로 망명한 뒤 중국동맹회를 결성해 혁명운동을 지도해왔다. 새 나라의 이름을 ‘중화민국’이라고 지은 것도 쑨원이었다. 여기서 ‘민국’은 유럽의 시민혁명세력이 왕국을 폐지하고 세운 공화국(Republic)과 비슷한 뜻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쑨원이 ‘공화국’이라는 말 대신 ‘민국’을 사용한 데는 18, 19세기에 성립한 유럽의 공화국들보다 더 ‘민(民)’의 주권을 강조하려는 뜻이 담겨 있었다.1919년 중국 상하이에서 출범한 한국인의 임시정부가 ‘대한민국’이란 국호를 택한 뜻도 다르지 않았다. ‘민국’에는 민을 주권자로 하는 공화국, 즉 민주공화국의 정신이 깃들어 있었던 것이다.]]> Wed, 29 May 2019 14:31:07 +0000 30 <![CDATA[이맘때 걷고 싶은 길 문경새재길 이 땅의 숨결]]>     글·사진 임운석 여행작가이맘때 걷고 싶은 길문경새재길   문경새재는 영주 ‘죽령’, 영동 ‘추풍령’과 함께 조선시대 3대 고갯길로 꼽힌다. 당시 문경새재는 영남에서 한양으로 가는가장 빠른 길이었다. 입신양명을 꿈꾸는 선비, 봇짐을 메고 다녔던 보부상 등 수많은 나그네가 이 길을 오갔다. 오늘날 문경새재는 걷기 좋은 흙길로 다시 태어나 한국인들이 꼭 가봐야 할 ‘한국관광 100선’에 선정됐다. alt제1관문 앞 너른 들에 핀 토끼풀문경새재 웬 고개인가?예부터 영남에서 한양으로 가는 길을 영남대로라 했다. 한양과 부산 동래를 잇는 약 380km의 이 길에는 높고 낮은 고개가 여럿 있었다. 그중에서 가장 높은 고개가 문경새재였다. ‘새재’라는 이름은 ‘고개를 넘으려면 새조차 한번 쉬었다 가야 할 만큼 높고 험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또 다른 뜻으로 ‘새로운 고개’, ‘하늘재와 이화령 사이(새, 間)의 고개(岾)’라는 뜻도 있다. 어느 것이 옳고 그르냐를 따지는 일은 무의미해 보인다. 중요한 것은 조령산과 주흘산 사이에 있는 문경새재가 가장 험준하고 높은 고개였다는 점이다.영남에서 한양까지 가는 길이 문경새재만 있는 게 아니다. 죽령과 추풍령이 더 있었다. 그런데 한양으로 과거 보러 가던 선비들은 유독 문경새재만을 고집했다고한다. 죽령을 넘으면 과거에서 죽죽 미끄러지고, 추풍령을 넘으면 추풍낙엽처럼 과거에서 떨어진다는 속설 때문이었다. 과거시험을 봐야 했던 선비 입장에서는 설령 속설이라 하더라도 따르고 싶었을 것이다. 게다가 문경새재의 문경(聞慶)은 ‘경사스러운 소식을 듣는다’는 의미를 담고 있었으니, 입신양명을 꿈꾸던 선비들에게 문경새재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 코스였다.역사와 함께한 문경새재문경새재는 군사적으로 활용도가 매우 높았다. 임진왜란이 있기 전 새재에 성을 쌓아 방비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온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하지만 그 의견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왜군은 높고 험준한 문경새재를 힘겹게 넘어야 했다. 하지만 조선 관군의 저항은 없었다. 영남대로에서 별다른 전투 없이 비교적 수월하게 통과한 왜군은 충주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치고 있던 신립 장군을 만나 격전을 치른다. 전투에서 승리를 거머쥔 왜군은 한양까지 거침없이 진격해 올라갔다. 이후 충주에서 봉기한 의병장 신충원이 문경새재 제2관문 지점을 차단하고 기습 공격하기도 했었다.‘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는 속담이 있다. 하지만 소를 잃고서라도 외양간을 제대로 고친다면 훗날 똑같은 실수는 범하지 않을 터. 임진왜란에서 왜군에게 호되게 당한 조선은 제2관문인 조곡관(1594년, 선조 27년)을 가장 먼저 세운다. 뒤를 이어 1708년 숙종 34년에 제3관문인 조령관과 제1관문인 주흘관이 차례로 세워졌다.산업화가 한창이던 1970년대, 영남과 충주를 잇는 국도를 개발하면서 문경새재가 없어질 위기에 놓였다. 때마침 박정희 전 대통령이 국도건설계획을 확인하기 위해 문경새재를 찾았는데 ‘새재 길은 훼손하지 말 것을 지시했다’고 한다. 이로써 문경새재는 한해에 100만 명 이상이 다녀가는 자연 친화적인 걷기 좋은 길로 남을 수 있었다. alt문경새재의 인기를 반영하듯 큼직하게 지어진 옛길박물관alt옛길박물관의 실내전시관alt문경새재 제1관문으로 향하는 길목, 봄날의 푸름이 가득하다누구나 걷고 싶은 문경새재 과거길험준한 문경새재 고갯길은 이제 누구나 찾고 싶고, 걷고 싶은 아름다운 옛길로 인기가 높다. 길 이름은 ‘문경새재 과거길’이다. 제1관문 주흘관을 출발해 제3관문 조령관을 보고 되돌아오는 6.3km 구간이다.은행나무 가로수 길을 따라 걸어가면 잔디마당 한가운데 옛길박물관이 있다. 기와를 이은 한옥 풍의 건축물인데 규모가 상당하다. 1~2층 전시실에는 옛길을 테마로 각종 자료와 유물을 전시해 놓았다. 쉽게 볼 수 없는 옛길 관련 자료들이므로 시간을 충분히 내어 돌아봐도 좋은 곳이다.박물관을 뒤로하고 곧은길을 따라 걷는다. ‘문경새재 과거길’이라 쓰인 표지석 앞에 이른다. 표지석은 길의 역사와 유명세를 고스란히 표현해 주듯 늠름하다. 그 뒤로 독수리가 날개를 펼친 듯한 모양의 성곽과 주흘관이 자리한다. 웅장한 규모에서 위용이 느껴진다. 크기가 일정한 화강암을 벽돌을 쌓듯 차곡차곡 쌓아 올린 모습에서 견고함이 엿보인다.주흘관은 문경새재 3개의 관문 중 옛 모습을 가장 잘 보존하고 있다. 관문 뒤편 현판에는 ‘영남제일관(嶺南第一關)’이라 적혀 있다. 2·3관문과 다른 점이라면 개울물을 흘려보내는 수구문(水口門)과 적의 침입을 방어할 목적으로 성 주위에 물로 둘러싼 해자(垓字)가 있다는 것이다.성안에 발을 들이자 아늑한 느낌이 감돈다. 안전이 확보됐다는 확신일 것이다. 또한 단단하게 다져진 황톳길에서 느껴지는 자연의 숨결 덕분이다. 길을 걸으며 흙의 질감을 느끼고 싶은 사람들은 신발까지 벗어들고 맨발로 걷는다. 발 씻는 곳이 마련돼 있으니 가능한 일이다. 길은 대여섯 명이 나란히 걸어도 될 만큼 널찍하고 완만하다. 몸도 마음도 편안하게 느릿느릿 걷기에 좋다. 대신 아기자기한 옛길의 정취를 느낄 수 없어 못내 아쉽다. altKBS촬영장은 조선시대가 배경인 사극촬영에 주로 사용된다alt조선시대 경상감사가 업무 인수인계를 했던 교귀정alt조선 후기에 세워진 국내 유일의 순수한글 비석볼거리 풍성, 걷는 재미 쏠쏠문경새재 과거길 한편에는 KBS 사극 촬영장이 있다. 드라마 <태조 왕건>을 촬영하기 위해 지었다가 새로운 드라마를 촬영할 때마다 거듭 시설을 보완해오면서 <대왕 세종>, <천추태후> 등 수많은 사극 드라마를 탄생시켰다. 광화문, 근정전, 사대부 가옥 등 조선시대 건물이 주류를 이룬다.사극 촬영장을 나서서 2관문으로 향한다. 시나브로 다가오는 계절의 변화는 숲길에서 더욱 잘 느껴진다. 이전까지 곧았던 길은 똬리를 틀 듯 구불구불 이어지고 길섶에는 소나무, 굴참나무, 전나무, 층층나무 등 다양한 종류의 나무들이 푸르디푸르다. 이어서 나지막한 경사길이 계속된다. 경사진 길 아래에는 계곡물이 흐른다. 길이 굽으면 계곡도 굽고 길이 곧으면 계곡도 곧은 물길을 내어준다. 산새가 숲길에서 노래하면 물길에서는 시냇물 소리가 새소리에 맞춰 리듬을 더한다.신록에 흠뻑 취해 발걸음을 옮겨 도착한 곳은 조령원 터다. 고려와 조선시대에 출장 중인 관리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던 곳이다. 문경새재에는 조령원을 포함해 동화원, 신혜원까지 3곳의 원이 설치·운영되었다고 한다. 지난 1977년 문경시가 조령원 터를 두 차례에 걸쳐 발굴조사 한 결과 와편, 토기편, 어망추, 철채 화살촉, 마구류 등 원 터임을 입증할만한 다양한 유물이 출토됐다. 과거 문경새재를 오가던 나그네에게는 절대 없어서는 안 될 곳이었지만 오늘날의 모습은 휑하니 터만 남아 쓸쓸하기 그지없다.조령원 터 가까운 곳에 옛길로 접어드는 길이 있다. 숲속으로 이어진 길은 지금까지와 다른 옛길의 정취가 오롯이 남아 있다. 길 맛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은 일부러 옛길만 좇는다고 한다. 투박하고 거친 옛길을 원한다면 잠시 옆길로 새는 것도 좋겠다.타박타박 길을 걷노라니 어느덧 교귀정에 닿는다. 산속 숲길에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규모가 큰 정자다. 교귀정은 조선시대 전임 관찰사가 후임 관찰사에게 관인과 병부를 인수인계하는 교인식이 열렸던 곳이다.숲속에 ‘산불됴심’이라 적힌 비석이 눈에 띈다. 맞춤법이 틀린 게 아니라 한글 창제 이래 구한말까지 세워진 비석 중에서 유일하게 한글로만 새겨진 비석이다.드디어 제2관문인 조곡관에 닿는다. 조곡관을 지나면 길은 더욱 숲과 가까워진다. 대신 사람의 발걸음은 하나둘씩 줄어든다. 탐방객 대부분이 조곡관까지 걷고 되돌아가기 때문이다. 길 가장자리에 시비를 줄지어 세워놓았다. 여러 시인묵객들이 세상을 관조하며 읊었을 다양한 시들이 걷는 이의 발목을 부여잡고 인생무상을 노래한다.제3관문인 조령관과 가까워질수록 길은 숲으로 빨려 들듯 이어진다. 어느덧 문경새재 과거길의 종착지에 다다른다. 제3관문 조령관이다. 이 문만 지나면 충북 괴산 땅이다. 자박자박 걷는 걸음걸음마다 새로운 사연들이 흩뿌려진다. 문경새재는 지금도 발길에 소리 없이 다져지고 있지 않을까.]]> Wed, 29 May 2019 15:12:39 +0000 30 <![CDATA[우리는 한국의 독립과 자유를 원한다! 어느 독립운동가의 초상]]>     글 김정인 춘천교육대학교 교수우리는 한국의 독립과 자유를 원한다!   한국에서 선교사로 활동하던 프랭크 스코필드는 3·1운동 직후 일본 하라 수상을 만난 자리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일본의 지배를 받던 시절, 세계 곳곳에는 스코필드처럼 한국의 독립과 자유를 바라며 한국의 독립운동을 지원했던 외국인들이 있었다. 그중 2019년 현재 서훈을 받은 외국인 독립유공자는 모두 70명이다. 그들은 자신이 갖추고 있던 능력을 발휘해 힘껏 한국의 독립운동을 도왔다. alt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alt제암리 방화 학살로 파괴된 민가alt제암리 사건에 관한 스코필드 보고서 스코필드, 3·1운동의 목격자이자 증언자스코필드(F. W. Schofield)는 영국 출신으로 10대 말 홀로 캐나다로 이주해 농장에서 일하며 토론토대학에서 세균학을 전공했다. 그가 한국 땅을 밟은 것은 1916년, 28살이 되던 해였다. 캐나다선교회 선교사로서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교장 애비슨의 초청으로 들어와 세균학을 강의했다.1919년 2월 28일 세브란스병원 직원으로 3월 1일 독립선언식을 준비하던 민족대표 이갑성이 스코필드를 찾아왔다. 이갑성은 그에게 독립선언서를 보여주며 다음날로 예정된 독립선언식 소식을 알렸다. 이갑성은 3월 1일 오전에도 다시 스코필드를 찾아와 만세시위를 사진으로 남겨 달라 부탁했다. 그날 오후 스코필드는 거리로 나가 서울의 만세시위 현장을 생생하게 필름에 담았다.1919년 4월 15일 경기도 수원군 제암리에서 일본군이 끔찍한 학살을 저질렀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29명이 목숨을 잃었다. 제암리 학살 사건은 다음날인 4월 16일에 수원군 내 수촌리에서 일어난 일본군의 만행을 조사하러 나온 미국 영사 커티스 일행에 의해 우연히 발견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스코필드는 4월 18일 제암리를 찾아 현장 사진을 찍고 「제암리의 대학살 보고서」를 남겼다. 수촌리 학살에 대해서도 「수촌리 만행 보고서」를 남겼다. 그는 이 보고서들을 비밀리에 선교본부에 보냈고, 중국 상하이에서 발행되던 영자신문 『상하이 가제트』 5월 27일 자에 제암리와 수촌리 학살과 관련해 익명으로 투고했다.스코필드는 서울의 만세시위를 기록하고 일본군의 학살을 폭로하는 활동과 함께 조선총독부의 반인권적 탄압에 대해 항의하는 활동을 펼쳤다. 만세시위로 투옥된 세브란스병원 간호사 노순경을 면회하고는 조선총독부를 찾아가 열악한 감옥 환경을 개선하고 잔혹한 고문 행위를 중지할 것을 요구했다. 그해 8월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800여 명의 선교사 앞에서 조선총독부의 만행을 비판하는 연설을 했고, 하라 수상을 만나 일본의 식민 통치를 비판했다.스코필드는 1920년 3월 세브란스에서의 근무 계약 기간이 만료되면서 본국인 캐나다로 돌아갔다. 이후에도 그는 한국 언론에 글을 실어 “조선은 나의 고향과 같이 생각됩니다”, “나는 ‘캐나다인’이라기보다 ‘조선인’이라고 생각됩니다”라며 한국에 대한 애정을 표현했다. 해방이 되고 스코필드는 1958년 한국에 들어왔다. 이후 언론을 통해 한국문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발언하는 한편 교육자로서의 삶을 살다가 1970년 4월 12일 81세의 나이로 영면했다. alt후세 다쓰지(외손자 오이시 스스무 제공)alt한복을 입은 후세 다쓰지(1926)(외손자 오이시 스스무 제공)alt조선공산당 사건 변호를 위해 경성에 오는 포시진치(후세 다쓰지)의 소식을 전하는 기사(『중외일보』, 1927.04.29.)후세 다쓰지, 독립과 인권을 위한 변론“살아야 한다면 민중과 함께, 죽어야 한다면 민중을 위해”일본인 변호사로서 한국 독립운동과 민중운동 관련 재판에서 변론에 앞장섰던 후세 다쓰지(布施辰治)의 묘비명이다. 일본 미야기현 출신으로 23살이 되던 해인 1903년부터 변호사로 활동하던 후세는 한국이 식민지가 된 직후부터 한국 문제에 관심을 보였다. 1911년 ‘조선의 독립운동에 경의를 표함’이라는 글을 발표해 검사국의 취조를 받았다. 1919년 2·8독립선언서 발표로 검거된 최팔용, 백관수 등 9명에 대한 출판법 위반사건에서는 2심 변호인으로 활약했다. 1920년 ‘민중 변호사’로 살아가겠다는 선언을 담은 ‘자기 혁명의 고백’을 발표하면서 한국인과 타이완인을 위한 사건에도 직접 나설 것임을 천명했다.후세는 1923년 한국인 유학생 사상단체인 북성회 회원들과 함께 하기순회 강연회에 참여하기 위해 처음 한국을 방문했다. 한여름, 남부 각지의 강연회에 참여하면서도 경성지방법원에서 열린 의열단원 김시현 재판의 변호사로 활약했다. 그가 다시 일본으로 돌아갔을 무렵 간토대지진이 일어났고 이때 수천 명의 한국인이 학살당하는 비극이 발생했다. 후세는 한국인 학살 사건을 조사하고 고발하는 자유법조단을 이끌었다. 또한 의열단원 김지섭의 ‘폭발물취제벌칙위반사건’과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대역사건’의 변론을 맡았다. 후세는 1926년에는 두 번째로 한국을 방문하면서 일본인으로서 간토대지진에 대해 사죄와 책임을 통감한다는 내용을 담은 사죄문을 작성해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에 보냈다. 또한 전라남도 나주군 궁삼면으로 내려가 농민들과 동양척식주식회사 간의 토지 분쟁 사건을 조사했다. 1927년에는 한국을 오가며 이인, 김병로, 허헌 등 한국인 변호사들과 함께 조선공산당 사건을 변론했다. 한국의 독립운동과 한국인의 인권을 위해 발 벗고 뛰었던 후세는 한국 독립이 세계 평화의 문제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조선 문제는 결코 조선에만 한정된 문제가 아니다. 조선 문제는 동양의 발칸 문제이다. 조선은 세계 평화와 혼란을 좌우하는 하는 열쇠이다. 전 세계의 문제이면서 인류의 문제이다.”1930년대 일본에 파시즘이 본격적으로 발흥하면서 후세에게 고통스러운 시간들이 찾아왔다. 1932년에는 법정을 모독했다는 이유로 징계재판을 받고 변호사 자격을 박탈당했다. 1933년에는 신문지법과 우편법 위반으로 기소되어 금고 3개월의 실형을 살았다. 1939년 다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 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이때 변호사 등록이 말소되었다. 고난의 세월 끝에 후세는 일본 패전 후 변호사로 복귀했다. 이후 재일 한국인의 권리를 찾는데 더욱 앞장섰다. 1953년 7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재일 한국인의 권리와 인권에 관련된 사건들의 변호를 담당하는 등 ‘한국인의 영원한 동지’로 살았다. alt쑹메이링alt카이로회담에 통역관으로 참석한 쑹메이링alt대한민국 임시정부 환국 환송연(1945.11.04.)쑹메이링, 한국의 독립을 지원한 퍼스트레이디쑹메이링(宋美齡)은 중국 국민당 정부를 이끈 장제스의 부인이었다. 1897년 감리교 목사 출신의 사업가인 찰리 쑹의 여섯 자녀 중 넷째로 태어난 그는 1908년 11살의 나이로 미국 유학을 갔다. 웨슬리안대학을 거쳐 웰즐리대학을 졸업하고 1917년에 귀국했다. 그리고 10년간 YWCA 등에서 활동하다 1927년 장제스와 결혼했다. 이후 쑹메이링은 장제스의 개인비서, 통역관 겸 외교고문으로 수완을 발휘했다.쑹메이링은 한국 독립운동에도 관심을 보이며 후원했다. 그 성원에 답하듯 중일전쟁 중에 미국의 한인 여성단체인 대한애국부인회가 쑹메이링에게 군사의연금을 전달하기도 했다. 쑹메이링은 충칭에서 임시정부와 광복군이 활동할 때 자신이 대표로 있는 부녀지도위원회를 통해 중국 돈으로 10만 원을 기부했다.쑹메이링은 무엇보다 카이로회담에서 한국 독립을 위해 크게 공헌했다. 1943년 장제스를 대신해 미국을 방문했고, 그해 11월에 카이로에서 열린 미국, 영국, 중국의 정상회담에 장제스와 동행했다. 11월 23일 저녁에는 루스벨트와 그의 보좌관 홉킨스, 그리고 장제스와 쑹메이링이 만찬을 함께 했다. 만찬과 함께 밤 11시까지 이어진 회의에서 장제스는 일본이 패망한 후에 한국이 자유와 독립을 획득할 수 있도록 하자고 제안하며 루스벨트를 설득했다. 이때 영어를 하지 못하는 장제스를 위해 쑹메이링이 적극적으로 교섭에 나섰다. 장제스는 카이로회담을 마치고 귀국 후에 “나는 영어를 전혀 모릅니다. 무슨 일이든 부인이 나서서 처리했습니다. 그녀가 없었다면 절대로 이번 회담의 성공은 없었을 것입니다”라며 쑹메이링의 역할을 높이 평가했다. 이날 중국과 미국 정상 간의 합의는 영국의 반대라는 난관을 뚫고 결국 카이로 선언에 담겼다.1945년 8월 마침내 일본이 패망하고 임시정부는 환국을 앞두게 되었다. 1945년 11월 4일 장제스는 임시정부를 환송하는 연회를 베풀었다. 이 때 함께 참석한 쑹메이링은 귀국 비용에 보태라고 10만 달러를 전했다. 임시정부가 중국 땅을 떠날 때까지 후원자의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던 것이다.쑹메이링은 국공내전에서 국민당 정부가 패하면서 타이완으로 이주했다. 타이완에서는 퍼스트레이디의 역할에 그치지 않고 입법의원을 하는 등 독자적인 정치활동을 펼쳤고 대미외교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말년에는 타이완과 미국을 오가며 살다 107세를 일기로 2003년에 세상을 떠났다.]]> Wed, 26 Jun 2019 14:17:37 +0000 31 <![CDATA[서양인 조선에 터를 잡다 史소한 이야기]]>     서양인 조선에 터를 잡다개항기 조선의 서양인 마을서울 정동   개항 후 조선에 서양인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조선인에게 푸른 눈을 가진 그들이 낯설 듯, 그들에게도 조선은 낯선 땅이었다. 다른 생활방식과 문화에 적잖은 혼란을 겪은 서양인들은 조선 안에 자신들만의 터전을 만들었다. 현재 서울시 중구, 덕수궁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정동’이 바로 그곳이다. 초대 주조선미국전권공사 루시어스 하우드 푸트가 정착한 것이 시작이었다. 그는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이듬해 서울에 도착, 명성황후의 친족인 민계호의 사저(정동 10번지)를 구입해 미국공사관과 관저로 사용했다. 미국을 시작으로 영국, 러시아, 프랑스 등의 공사관이 잇달아 들어서고, 공관 인근에 민간 서양인들이 자리를 잡으면서 정동은 금세 서양인 거리로 변모했다.이 때문에 정동은 개항기 조선에서 근대문물의 중심지이자 전파지 역할을 했다. 건물은 서양 각국의 건축양식으로 지어졌고, 커피를 대접하는 손탁호텔이 생겼으며, 배재학당과 이화학당은 각각 최초의 근대교육기관과 근대여성고등교육기관으로서 한국의 많은 지도자를 배출했다.현재 정동은 덕수궁 돌담길로 대표되는 서울의 관광지로 더 유명하다. 정동을 서양인 마을로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다만 외국공관, 영사관, 선교기관 등 근대 건축물들이 남아 그 시절의 흔적을 대신하고 있을 뿐이다. alt]]> Wed, 26 Jun 2019 10:38:21 +0000 31 <![CDATA[독립운동을 이끈 항일민족운동의 선구자 이동휘 이달의 독립운동가]]>     글 전시부독립운동을 이끈항일민족운동의 선구자 이동휘   독립기념관은 국가보훈처 및 광복회와 공동으로 이동휘를 2019년 7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국내에서 학교를 설립하고 계몽운동을 전개하던 이동휘는 북간도 이주 후 한인 최초의 사회주의 정당을 조직하고 사회주의 독립운동을 이끌었다. alt계몽운동 지도자로 활약하다이동휘는 1873년 함경남도 단천에서 태어나 한학을 공부하였고, 1890년 아버지의 주선으로 하급관리 통인이 되었다. 1896년 관직을 포기하고 상경한 이동휘는 무관학교에 입학하여 근대 군사교육을 받았다. 졸업 후에는 참위와 삼남검사관을 거쳐 강화도 진위대장으로 임명되었다. 일찍이 근대교육에 관심을 가졌던 이동휘는 일본의 침탈이 본격화되자 군직을 사임하고 보창학교를 설립해 계몽운동을 통한 국권회복운동에 앞장섰다.계몽운동에 대한 탄압 속에서도 비밀결사 단체인 신민회를 통해 민중계몽과 실력양성에 힘썼다. 관서·관북 지역에서 계몽운동을 주도하던 서북학회의 임시회장을 맡아 지회와 학교설립운동을 전개하고 기관지를 발간하였다. 이동휘는 애국계몽운동의 지도자로 활약하였지만, 일제의 주요 감시대상이 되어 수차례 체포되면서 국내 활동에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사회주의 독립운동을 주도하다새로운 독립운동 방략을 전개하기 위해 북간도로 이주한 이동휘는 한인사회 근대교육 보급을 위해 힘쓰는 한편, 항일운동단체를 규합하여 대일무력항쟁을 준비하기 위해 대한광복군정부를 세웠다. 또한 사회주의의 수용이 성공적인 독립운동 방략이 될 것이라 판단하고, 1918년 4월 최초의 한인 사회주의 정당인 한인사회당 창당에 나섰다. 한인사회당은 기관지를 발행하고 반일·반전 선전활동을 전개하는 등 사회주의 독립운동의 대중화를 위해 힘썼다. 특히 군사학교를 설립하고 무장투쟁단체인 적위대를 편성하여 무력항쟁을 위한 기반을 갖추었다.1919년 이동휘는 독립운동 세력의 통합을 위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총리로 취임하였고, 1920년에는 한인사회당을 고려공산당으로 개칭하고 사회주의 독립운동을 주도해갔다. 이후에도 적기단과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에 관여하던 이동휘는 국제혁명운동희생자후원회(MOPR) 활동을 전개하던 중 1935년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정부는 독립운동에 전 생애를 바친 이동휘의 공적을 기려 1995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alt이동휘(李東輝)1873.06.20. ~ 1935.01.31.함경남도 단천건국훈장 대통령장(1995)alt이동휘 가족사진(1911)이동휘 부부와 부친 이승교, 1남 3녀의 자녀들을 찍은 사진이다. 이동휘 가족은 부친을 비롯하여 자녀들까지 3대에 걸쳐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alt강화진위대 기념사진1903년 5월 강화도 진위대장에 부임한 이동휘는 일찍이 계몽운동에 관심을 가지고, 군직과 계몽단체 활동을 병행하였다 alt황병길과 이동휘이동휘는 황병길과 함께 훈춘지역을 근거로 연해주의 무장단체들과 교류하였다alt대한민국 임시정부 및 임시의정원 신년축하식(1921.01.01.)신년을 맞아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과 임시의정원 의원이 한자리에서 찍은 사진이다alt국제혁명운동희생자후원회(MOPR) 기념사진(1932.10.12.)하바로브스크에서 열린 국제혁명운동희생자후원회의 대회 기념사진으로, 이날 이동휘는 훈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Wed, 26 Jun 2019 13:48:13 +0000 31 <![CDATA[중등학교 학생들의 아주 특별한 추억 자료로 읽는 역사]]>     글 김경미 자료부중등학교 학생들의아주 특별한 추억일제강점기 중등학생의 수학여행   “수학여행이란 무엇이오. 쉽게 말하면 즉 이론으로 배운 것을 실지로 보아 넓히기 위하여 여행함이올시다...지리에 승지강산(勝地江山)이며 사학에 미술고적과 인정풍속을 실탐(實探)하여 증명코자 할진대 아마도 여행 놓고는 구하여 얻을 곳이 없는 줄 아나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행처럼 필요하고 유익한 것이 없음을 확신하나이다.” -『동아일보』 中 alt보성중학교(보성고등보통학교) 수학여행 기념사진 모음 (『보성중학교 제31회졸업기념 사진첩』, 1940) alt『보통학교국어독본 권12』(1937) 제5과 「금강산」alt학생들의 수학여행 사진-금강산 구룡연alt『보통학교국어독본 권7』(1933) 제3과 「동경구경」 alt전북공립고등여학교(전주여자고등보통학교) 수학여행 사진-궁성 앞 (『전북공립고등여학교 수학여행기념 사진첩』, 1938)alt광주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 수학여행 기념사진 모음 (『광주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 제4회 졸업기념 사진첩』, 1934) 조선의 중등학교에서 수학여행이 일반화되기 시작하던 1920년, 경주로 수학여행을 다녀온 한 학생은 『동아일보』에 기고한 여행기에서 지리와 역사 교과에서 배운 이론을 여행을 통해 실제로 확인할 수 있다는 수학여행의 교육적 의미를 강조했다. 종종 수학여행의 문제점을 둘러싸고 논쟁이 벌어져 학부모의 경제적 부담이나 주마간산식 여행 일정 등 수학여행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지만, 1930년대에 들어와서는 국내 도시 중심에서 일본과 만주로 여행지가 확대됐다. 그렇다면 여행을 떠난 학생들이 확인할 수 있었던, 학교에서 글로 배운 지식과 실사회에서 눈으로 본 실제 사이의 거리는 얼마나 되었을까.소수만이 누렸던 수학여행의 추억한 중학교의 1940년도 졸업앨범에는 학생들이 5년간 재학 중에 다녀온 여행의 흔적들이 한 페이지에 담겨있다.(자료01) 인기 있는 수학여행지였던 국내의 경주, 금강산,개성, 그리고 일본의 도쿄, 교토, 나라 등의 풍경과 함께 기차 출입구 층계에 매달리고 창문 밖으로 몸을 내밀어 손을 흔드는 학생들의 신나고 환한 얼굴이 가득하다.당시 수학여행은 근대 문명을 상징하는 기차의 노선을 따라 일정이 짜였다. 비용을 아끼기 위해 50% 이상의 학생단체 할인을 해주는 가장 운임이 싼 3등 칸 기차를 탔으며, 여러 날 걸리는 여행은 출발과 도착뿐 아니라 이동할 때 야간열차를 이용하여 전 일정의 거의 반을 기차에서 숙박을 해결하는 고된 일정이었다. 그럼에도 수학여행은 학생들에게 “학교에 입학해서 졸업할 때까지의 소원”이라 할 만큼 “하루가 천추(千秋)같이 기다려지는” 행사였다.사실 수학여행은 중등학교에 다닐 수 있는 소수가 누릴 수 있는 혜택이었다. 자료01의 1940년도 졸업생이 학교에 입학했던 1935년의 경우, 중등학교 재학생수는 총 39,238명으로 인구 1만 명당 18.5명에 해당한다. 초등·중등·고등교육 기관의 학생 수 구성비가 각각 94.5%, 5.1%, 0.4%였으니, 고등교육뿐 아니라 중등교육도 극소수를 대상으로 한 엘리트 교육이었다. 중등학교에는 인문계 학교인 수업연한 5년의 고등보통학교와 수업연한 4년의 여자고등보통학교가 있었으며, 이들 학교는 1938년 4월부터 각각 중학교와 고등여학교로 바뀌게 된다. 실업학교로 수업연한 3~5년인 공업학교, 농업학교, 상업학교, 수산학교, 직업학교가 있었고, 또 수업연한 5~6년의 사범학교가 있었다. 이 중등학교 학생 중여학생은 여자고등보통학교생 6,047명과 실업학교생 689명, 사범학교생 205명 등 총 6,947명에 불과했다.당시 조선사회의 경제적 여건에서 여행은 쉽지 않은 경험이었다. 특히 일본이나 만주로의 수학여행은 10일이상의 일정에 여행비용이 30-40원 정도 필요했다. 당시 일반 교원의 월급이 30원 정도였으니 대부분 가계에 상당한 부담이 되는 금액이었다. 학교에서는 학부모의 부담을 덜기 위해 매월 3-4원 정도의 수업료를 낼 때 20전-1원정도의 수학여행비를 적립하도록 하여 모아두는 방식을 채택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전에는 조선총독부의 학무당국에서 5할이 여행을 가면 허락했는데 지금은 8할이 아니면 허락하지 않는다”는 신문 기사를 통해 여행에 참가하지 못하는 학생도 상당수였음을 알 수 있다.금강산의 절경과 경주의 천 년 역사그럼 자료01 의 학생들처럼 1930년 후반에 수학여행을갔던 학생들의 주요 수학여행지를 따라가 보기로 하자.자료01의 왼쪽 아래에 있는 두 장의 사진은 금강산 수학여행 사진이다. 금강산은 이들이 보통학교 때 배웠던 『보통학교국어(일본어)독본』에서 “숭고신비, 웅대호장, 실로 산악미의 극치”라고 묘사됐던 곳이다. 뛰어난 경관을 지닌 금강산은 일제가 조선 제일의 관광지로 개발하여, 1914년 서울과 원산을 잇는 경원선 철도가 완성되고 1931년에는 철원과 내금강 사이에 전철이 완전 개통됐다. 1932년에는 안변에서 경원선과 연결되는 동해북부선이 고성까지 이어졌다. 따라서 수학여행단은 경원선을 타고 철원에서 금강산전기철도로 갈아탄 뒤 내금강 역에서 내려 금강산 여행을 시작했다. 장안사, 명경대, 만폭동 등 내금강을 구경하고는 비로봉을 넘어 외금강 쪽으로 가서 구룡연, 만물상 등을 돌아본 후 온정리의 외금강 역에서 동해북부선을 탔다. 그리고 안변에서 경원선으로 갈아타고 경성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자료03에서 볼 수 있듯이 구룡연 폭포 앞에서 교복 차림에 등산용 지팡이를 들고 단체사진을 찍은 학생들은 아마 아침 일찍 여관을 나와 비로봉을 넘었을 것이다. 이 학생들이 자신의 몸으로 직접 오르며 눈으로 확인한 금강산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자료01의 왼쪽 윗부분에는 경주의 첨성대와 석굴암 앞의 단체사진이 있다. 경주는 일제가 조선과 일본의 고대사를 연결하기 위해 여러 문화유적에 대한 학술조사를 벌인 결과 ‘신라 천 년의 도읍지’로서 관광지가 된 곳이다. 1918년에는 대구에서 포항까지 연결하는 경편철도인 경동선이 개설됐고 이와 함께 개설된 서악에서 경주까지의 지선은 1919년에 이르러 불국사까지도 연결했다. 이제 경주로 수학여행을 가려면 경부선의 대구역에서 경주행 경편기차로 갈아타고 경주역에 내리면 됐다. 경주에서는 도보로 이동하면서 첨성대, 안압지, 왕릉 등을 보고나서, 경편철도로 경주역에서 불국사역으로 이동하여 토함산에 올라가 석굴암을 보고 내려와 불국사를 관람했다. 그리고는 불국사역에서 경주까지 경편열차를 타고 대구역으로 돌아갔다.이들이 보통학교 4학년 때 배운 『보통학교국어독본』의 석굴암 기행문에는 “이런 훌륭한 조각을 남긴 사람의 이름이 전하지 않는 것은 실로 아쉬운 일이다. 천이백 년의 옛날에 이 정도의 미술을 갖고 있던 신라의 문화는 분명히 진보하고 있었던 것”이라 하여, 경주는 현재 식민지로 몰락한 조선의 사라진 과거의 영광을 보여주는 곳으로 기술됐다. 한 학생은 여행기에서 “천 년 전의 문화가 이렇게도 발전했을까? 그렇다면, 옛날의 문화 발달은 지금 어느 곳으로 자취를 감추었을까?”라고 묻기도 했다. 그러나 1933년 봄에 경주로 수학여행을 간 경성제이고등보통학교 학생 황수영은 경주에서 다보탑과 처음 대면한 순간 석탑의 아름다움에 압도되어 이후 신라미술 연구의 길을 걷게 된다.일본 수학여행이 남긴 것들자료01의 대다수 사진은 일본 수학여행의 사진들이다. 중등학교의 일본 수학여행은 대개 히로시마, 오사카, 나라, 나고야, 도쿄, 교토, 가마쿠라, 닛코 등 일본의 주요 도시들을 차례로 방문하면서 일본의 역사적 인물을 모신 궁전과 신사, 근대시설 및 거리, 일본의 자연환경 등을 견학하는 것으로 짜였다.학생들이 일본 수학여행에서 이용한 교통수단은 자료01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기차를 비롯하여 ‘관부연락선’, 승합자동차 외에 등산케이블카와 공중케이블카(로프웨이)도 있다. 부산과 시모노세키를 잇는 정기 여객선인 ‘관부연락선’은 경부선이 개통된 1905년에 개통되어 일본의 철도와 연결됐다. ‘관부연락선’으로 시모노세키에 상륙한 학생들은 기차로 도시에서 도시로 이동했다. 도시 내에서는 승합자동차에 나눠 타고 이동하는 경우도 있는데, 1939년 보성중학교 학생들은 교토 시내에서 히에이산의 엔락쿠지에 다녀오면서 등산케이블카와 공중케이블카를 타는 경험도 했다. 자료01의 사진은 이와 같은 일본의 발달된 교통수단도 수학여행의 중요한 기억으로 남았음을 보여준다.일본 수학여행의 방문지 중에서 가장 중요한 곳은 천황이 거주하는 도쿄의 궁성 앞이었다. 보통학교 4학년 때 배웠던 『보통학교국어독본』의 도쿄구경 기행문에서 주인공이 아침에 집을 나와 가장 먼저 간 곳이 궁성이었고, 그 앞에서 주인공은 공손하게 궁성을 향해 절을 했다. 그리고는 궁성 앞 광장에서 갑옷투구로 무장하고 말에 올라타 궁성을 지키고 있는 난공(楠公)의 동상을 보게 된다.(자료04) 교과서에서처럼 수학여행단은 도쿄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천황이 사는 궁성을 찾아 절을 하고, 궁성의 니주바시(二重橋)를 배경으로 단체사진을 찍었다.(자료05) 그리고는 광장에 있는 쿠스노키 마사시게(楠木正成) 동상 앞에서 설명을 들었을 것이다. 그는 일본역사상 가장 대표적인 충신으로, 학생들이 『보통학교국어독본』과 『보통학교국사』 등을 통해 보통학교 때부터 반복해서 배웠던 인물이다. 자료01의 사진에도 오른쪽 위 니주바시 앞의 단체사진과 함께 그 아래 동그란 사진 속에 쿠스노키의 동상이 있다.수학여행에서 찍은 사진은 학생들의 졸업앨범에 실려 영원히 그들의 기억에 남도록 했다. 여러 장의 기념사진 중 여행을 대표하는 사진으로 졸업앨범에 실린 것은 니주바시 앞의 단체사진이었다.(자료06) 일본 수학여행에서 눈으로 확인한 모든 것이 수렴해야 하는 곳은 바로 천황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는 도쿄의 궁성 앞이었던 것이다.당시 학생들의 일본 수학여행기를 보면, 일본의 휘황찬란한 근대도시의 네온사인 아래서 ‘촌뜨기’가 되어 주눅이 든 학생도 있었고, 오랜 역사와 근대 문명을 겸비하고 천황을 정점으로 하는 일사불란한 일본의 모습에 황국신민의 일원이라는 자부심을 갖게 된 학생도 있었다. 그런데 같은 경험을 하면서도 식민지인에 대한 차별과 멸시를 생생하게 몸으로 느낀 학생도 있었다. 1937년 수학여행을 다녀온 전주고등보통학교 5학년생들은 전교생 앞의 보고회에서 동조동근(同祖同根)에 근거한 내선일체를 가르쳤던 학교의 교육은 기만이었음을 실제로 견문했다고 폭로했다. 춘천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한 학생은 상록회라는 조직사건에 대한 경찰 당국의 조사에서 일본 수학여행의 경험이 일본인에 대한 반감과 민족사상 고취의 한 계기가 되었다고 진술했다.]]> Wed, 26 Jun 2019 14:52:26 +0000 31 <![CDATA[지구반대편의 독립운동가 역사를 만든 사람]]>     글 임영대 역사작가지구반대편의 독립운동가   플로이드 윌리엄스 톰킨스는 1850년에 뉴욕에서 태어났다.하버드 대학을 졸업한 뒤 목회자가 되었고, 필라델피아에서 성직자로 명성을 얻었다. 그러던 중 3·1운동을 맞아 서재필과 함께 한국친우회(League of Friends of Korea)를 설립해 미국 정부에 한국 독립 지원을 청원하는 등 독립운동을 도왔다. 1932년에 사망하고 201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다. alt플로이드 윌리엄스 톰킨스가 기조연설을 했던 필라델피아 제1차 한인회의나는 여러분이 추구하는 독립과 자유에 대한 투쟁이 반드시 성공하리라는 신념이 있습니다나와 직접 관련이 없는 다른 나라 사람들을 위해 힘쓰기는 쉽지 않다. 더구나 그 나라가 국경을 맞댄 이웃 나라도 아니고, 지구 반대편에 있는 존재도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이라면 더 그렇다. 선교사는 다를 수도 있다. 선교사는 새로운 신자를 찾아 보통의 사람이라면 가지 않을 낯설고 험한 나라로 떠나는 고생을 무릅쓴다. 그리고 그곳 사람들을 위해 자신이 할 수있는 일을 찾는다.많은 서양 선교사가 한국에 왔다.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 호머 헐버트 등. 그들은 선교를 위해 한국을 찾았으나 한국인들이 일본의 압제로 고난을 겪고 있는 것을 보고 최선을 다해 한국의 독립을 도왔다. 그러나 톰킨스 목사의 사례는 조금 다르다. 그는 미국 본토, 그것도 대서양에 면한 필라델피아에 살면서 목회를 운영했다. 한국과는 가장 멀리 떨어진 곳에 산 셈이다. 한국과 아무런 접점도 없던 톰킨스가 한국의 독립운동을 도운 건 순전히 호의였다."잔악한 짓이 벌어지는 곳에서 중립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자기 누이가 깡패에게 강간당하고 있는 상황에서 자기 방의 옷장 속에 숨어서 하나님께 누이를 구해달라고 기도하는, 그런 종류의 크리스천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깡패를 두들겨 패서 누이를 구한 후 옷장 안에 들어가기도 하는 크리스천이 돼야 합니다."톰킨스는 일본의 한국 통치를 잔악한 짓으로 보고, 한국의 독립을 기꺼이 도왔다. 그 인연을 만든 건 서재필을 비롯한 한국인들이었다.당신들을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하겠습니다톰킨스 목사가 처음 한국 독립운동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3·1운동 직후 1919년 4월 14일부터 16일까지 필라델피아 리틀 시어터(Little Theater)에서 열린 ‘제1차 한인회의’에서였다. 톰킨스 목사와 서재필이 함께 결성한 한국친우회는 미국 내 21개 도시에서 대표들을 모아 한국 독립을 도와 달라고 미국 정부에 청원했다. 이 자리에서 톰킨스 목사는 기조연설을 맡았다."일본 정부는 강압적이고 잔인한 방식으로 대한의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하고 있다. 한국친우회는 미국이 주장하는 평등한 권리와 자유의 가치가 약소국에도 보장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우리가 한국의 독립을 지지하는 이유다."이뿐만 아니라 톰킨스 목사는 한국친우회의 발기인이자 초대 회장으로서 그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920년당시 미국 대통령이던 우드로 윌슨에게 한국이 왜 일본으로부터 독립해야 하는지 필요성을 알리는 편지를 보내는가 하면, 1923년에는 관동대지진을 틈타 벌어진 일제의 조선인대학살을 미국 의회에 폭로하기도 했다.그러나 이러한 노력이 무상하게도 미국 정부는 계속 일본의 식민 지배를 방관했다. 당시 일본은 1차 세계대전에서 영국 및 미국과 연합해 독일과 싸웠고, 미국 정부는 일본을 같은 편으로 인식했다. 이후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을 거쳐 일본의 침략적 태도가 미국에 위협이 됨을 깨달은 뒤에야 미국정부도 일본을 경계하게 되었다.톰킨스 목사는 한국친우회에서 함께 활동한 조지 노리스, 셀던 스펜서 등 6명의 미국인과 함께 한국정부로부터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았다. 서재필은 톰킨스 목사를 가리켜 “자유와 독립을 얻기 위해 잘 무장된 군인들로 구성된 몇 개의 연대와도 맞먹을 수 있을 만큼 중요한 인물”이라고 묘사했다.비록 한국에는 와본 적도 없고 일본의 패망과 함께 찾아온 한국의 광복을 직접 보지도 못했지만, 도움을 받은 한국에서는 톰킨스를 잊지 않았다. 2015년 한국은 그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했다. 3·1운동 100주년이 되는 올해에는 톰킨스 목사의 증손자인 플로이드 윌리엄스 톰킨스 3세를 한국으로 초청해 훈장과 함께 깊고도 큰 감사를 표했다.]]> Wed, 26 Jun 2019 11:53:27 +0000 31 <![CDATA[한국인과 같은 꿈을 꾼 이방인들 우리가 만난 얼굴]]>     한국인과 같은 꿈을 꾼이방인들   제국주의의 파도가 전 세계를 삼켜버리고 있던 그때, 한국의 ‘독립’은 단지 한국인들만의 바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비록 한국인과 인종이 다르고, 언어가 다르고, 국적이 달랐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독립운동가가 되길 자처했습니다. 폭력의 시대 속에서 자유와 평화를 열망했고, 그것은 한국도 똑같이 누려야 할 인류 공통의 권리였습니다. 한국인만큼 한국을 사랑하고, 한국인과 같은 꿈을 꾼 외국인들. 한국의 역사에 남겨진 그 이방인들의 발자취를 따라가 봅니다. alt]]> Wed, 26 Jun 2019 10:24:12 +0000 31 <![CDATA[해외 한인사회 최초의 군사학교 헤이스팅스 한인소년병학교 한국인의 터전:미주 편]]>     글 홍선표 나라역사연구소 소장해외 한인사회 최초의 군사학교헤이스팅스 한인소년병학교   해외 한인사회 최초로 세워진 군사학교는 1909년 6월 미국 네브래스카주 헤이스팅스(Hastings)에서 박용만(朴容萬)의 주도로 설립한 한인소년병학교이다. 1914년까지 운영된 이 군사학교는 미주를 비롯한 1910년대 해외 한인들에게 강력한 항일무장투쟁의 독립정신 고취와 군인양성운동을 촉발했다. alt한인소년병학교를 설립한 박용만alt한인소년병학교의 군사훈련 모습 한인소년병학교의 설립과 운영헤이스팅스에 군사학교를 설립하는 계획은 1905년 2월 미국에 도착한 박용만이 1908년 7월 덴버에서 북미애국동지대표회(1908.07.11.~14.)를 개최하면서 수립되었다. 이 대회에서 군사학교 설립안이 가결되자 그는 박처후, 임동식, 조진찬, 김장호 등과 군인양성을 위한 세부 작업에 착수하였다. 그리고 네브래스카주 정부와 커니시와의 교섭을 통해 설립 허가를 받아내어 1909년 6월 초순, 마침내 커니시의 조진찬 농장에서 한인소년병학교를 시작했다. 입학생은 14세의 김용성부터 50세가 넘는 조진찬까지 13명이었다.한인소년병학교(Young Koreans'Military School)는 1909년 국망이라는 절박한 위기감 속에 설립되었기 때문에 강력한 항일무장투쟁을 교육목표로 삼았다. 그러나 태평양 건너 미국이라는 지역적 거리 때문에 당장의 군사 지도자 양성보다 미래 독립운동을 위한 민족 지도자와 민족의 일꾼을 양성하는 데 주력하였다. 소년병학교는 헤이스팅스대학의 지원으로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대학 재무이사인 존슨(P. L. Johnson)이 한인소년병학교의 설립 소식을 듣고 헤이스팅스대학의 기숙사와 시설물을 훈련장소로 제공한 것이다. 이렇게 제공한 데는 기독교 대학인 헤이스팅스대학을 통해 한인 청년들을 전도해 장차 동양 선교의 방편으로 삼겠다는 선교정신이 있었다. 1910년 봄, 헤이스팅스대학으로부터 20에이커의 농장을 임대받아 경작하자 소년병학교의 운영은 한결 나아졌다. 그 결과 1910년 6월 제2기 개학 때는 전보다 두 배 많은 26명의 한인 청년들이 입소해 훈련을 받았다.한인소년병학교는 하기방학을 이용해 운영했다. 생도들은 헤이스팅스를 비롯해 인근의 도시에서 유학하는 학생들이었다. 이들은 평소 학교에서 공부하다가 6월 초 여름방학이 되면 한인소년병학교에 입소하여 군사훈련을 받았다. 가을학기 개학을 앞둔 8월에 교육 과정을 마쳤다. 한인소년병학교의 첫 졸업식은 1911년 8월 거행되었다. 이 때 13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이듬해 졸업식에도 13명을 배출했으나 그 이후의 기록이 없어 전체 졸업생 수는 파악하기가 어렵다. 1909년 개교 이후부터 폐교되는 1914년까지 소년병학교에 등록된 생도 수는 중복된 인원을 포함하여 170여 명이었고 그 가운데 졸업생 수는 약 40여 명 정도인 것으로 보인다.한인소년병학교의 교육과 영향한인소년병학교의 교육 과정은 미국의 근대식 군사학교를 모방해 엄격한 규율을 갖추었다. 생도들은 소대와 중대로 편성되어 박용만을 중심으로 군사교관인 김장호와 이종철의 지도하에 군사훈련을 받았다. 교과목은 독립전쟁에 필요한 군사학과 군사조련은 물론 역사, 지리, 과학, 영어, 국어, 한문, 성서 등으로 이루어졌다. 그 외 육상반, 야구반, 연극반 등을 운영하며 과외활동도 했다. 이러한 교육 과목과 내용은 한인소년병학교가 군사교육과 군사훈련에만 주력한 것이 아니라 나라를 되찾고 독립된 새 국가를 건설할 민족의 지도자와 인재를 양성하기 위함이었음을 잘 보여준다.생도들의 일과는 고되고 벅찼다. 오전에는 농장에 나가 일을 하였고, 오후에는 군사훈련을 받았으며, 저녁에는 교실에서 공부하였다. 매주 일요일에는 헤이스팅스대학을 후원하는 헤이스팅스 제일장로교회에 나가 예배드리고 성경을 공부하였다. 오전 야외활동부터 저녁 교과 수업까지, 여간한 체력과 정신력이 아니고서는 버티기 어려울 만큼 빡빡한 일정이었다. 그러나 모든 진행은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이루어졌다. 때문에 한인 생도들은 힘든 내색없이 오히려 즐거운 마음으로 참여했다. 더구나 교육을 통해 일깨운 일본에 의해 빼앗긴 나라를 되찾아야 한다는 강렬한 민족의식은 고된 훈련과 교육과정을 이겨내는 힘이 되었다.한인소년병학교를 설립한 박용만은 학교 유지를 위한 경비 마련은 물론 헤이스팅스 인근 지역의 한인들을 결속시키기 위해 1909년 네브래스카 대한인거류민회를 만들었다. 대한인거류민회를 통해 매년 1인당 3달러의 인두세를 내게 하고 거둔 금액 중 100달러를 학교 운영비로 썼다. 그 외 농장이나 탄광에서 힘들게 일하던 한인 노동자들이 학교를 후원해 주었다.한인소년병학교는 교장이던 박용만이 1912년 12월 대한인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의 초청으로 하와이로 떠나면서 어려워졌다. 1914년 2월 조진찬, 백일규, 박처후 등 29명의 이름으로 소년병학교유지단을 조직해 각계의 도움을 요청하기도 했으나, 학교 운영에 큰 역할을 맡았던 박처후와 백일규가 헤이스팅스를 떠나면서 힘을 잃었다. 그런데다 고등학교 졸업 후 학생들이 타지역의 대학교로 진학하면서 입학할 학생도 급격히 감소하였다. 이런 연유로 1914년 8월 4일 한인소년병학교 설립 6주년 기념만찬회를 끝으로 한인소년병학교는 폐교하였다.  소년병학교의 설립은 전 미주 한인사회에 군인양성운동을 촉발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1909년 11월 17일 멕시코의 대한인국민회 메리다지방회에서 이근영이 숭무학교(崇武學校)를 설립한 것을 시작으로 캘리포니아주 롬폭의 의용훈련대(1910.08.), 마우이섬의 대동공진단(1910.07.)과 이를 기반으로 설립한 하와이지방총회의 연무부(1910.11.), 캔자스시티의 소년병학원(1910.11.), 와이오밍주 슈피리어의 청년병학원(1910.12.) 등이 연달아 설립되어 1910년대 군사교육의 붐을 일으켰다.한편 한인소년병학교를 통해 길러진 청년 인재들은 이후 한국독립운동계와 미주 한인사회에 중추적인 인물로 활약했다. 설립자 박용만을 비롯해 박처후, 김장호, 정희원, 정한경, 김현구, 유일한, 김용성 등은 미주와 고국 땅에서 항일무장투쟁의 독립정신을 가진 독립운동가로, 언론인으로, 외교인으로, 그리고 학자와 실업가로 민족의 독립과 미래를 위해 헌신했다.]]> Wed, 26 Jun 2019 15:44:32 +0000 31 <![CDATA[제헌절에 친일파 청산문제를 되돌아보다 끝나지 않은 독립운동]]>     글 이계형 국민대학교 특임교수제헌절에 친일파 청산문제를 되돌아보다   1945년 우리 민족은 광복을 맞았지만, 독립운동은 끝나지 않았다. 여전히 미완으로 남은 사건, 해결되지 못한문제, 기억해야만 하는 역사가 있기때문이다. 끝나지 않은 독립운동은 독립운동사를 과거에 머문 역사가 아닌 현재의 문제로 다루며, 오늘도 신문 한쪽을 차지하고 있는 독립운동 및 일제강점기 이슈를 소개한다. 이념 갈등과 청산되지 않은 역사얼마 전 퇴역군인 모임인 재향군인회 회원들이 광복회로 몰려가 시위를 벌였다. 광복회가 의열단 단장 김원봉의 서훈을 추진하고, 국군 창군 원로이자 6·25전쟁 영웅인 백선엽 장군을 모독했다는 이유에서였다. 백선엽은 1943년 4월에 만주군 소위로 임관한 뒤, 간도특설대에서 장교로 근무하며 만주지역 항일무장 독립 세력을 탄압한 인물이다. 이에 대통령소속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는 2009년에 그를 친일파로 규정하였다. 그가 지금도 살아있으니 생존하는 친일파 중 몇 안되는 사람인 셈이다.왜 우리는 친일파 문제에 과민하게 반응하는 것일까? 광복한 지 70여 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친일파’라는 화두는 여전히 뜨거운 논점과 쟁점이 되고 있다. 이는 미완으로 끝난 ‘친일파 청산’이 보수와 진보 사이의 ‘이념 대립’으로 전이되었기 때문이다.1948년 5·10 총선거로 탄생한 제헌국회는 정부를 수립하자마자 ‘반민족행위 처벌법’을 통과시켰다. 이는 일제강점기 반민족행위와 친일행적을 조사하고처벌하기 위해 제정한 것으로, 해당 법에 따라 ‘반민족행위 특별 조사위원회(반민특위)’가 결성되었다. 어느 정파에도 소속하지 않은 무소속 의원이 85석이라는 가장 많은 의석을 차지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하지만 그결과는 참담했다. 친일과 지주 세력을 정치적 기반으로 삼았던 이승만 정권과 집권 여당의 노골적인 방해와 공작 때문에 단 한 명도 법적 처벌을 받지 않은 채 흐지부지 끝나고 말았다. ‘역사의 정의’가 무너진 것이다. 해방후 독립운동의 역사적 규명과 독립운동가에 대한 적절한 보상은커녕, 일제강점기에 대한 철저한 반성과 처벌조차 이루어지지 못했다.해방 정국은 친일 청산보다는 반공 이념으로 도배되었다. 미국과 소련이 한반도 38선을 경계로 주둔하면서 남북은 민주주의와 공산주의 이념 대립의 장으로, 냉전의 화약고로 변했다. 친일세력은 반공주의자로 ‘화려한’ 변신을 하고 독재 권력에 기생하며 막대한 자본력을 이용해 우리 사회의 굳건한 기득권 세력으로 자리 잡아갔다. 그러면서 친일 청산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갔다. 끝내 우리 사회는 한쪽 날개를 잃은 것이다. 언론인이자 역사학자인 리영희는 1994년에 펴낸 평론집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라는 책에서 “8·15 광복이후 근 반세기 동안 이 나라는 오른쪽은 신성하고 왼쪽은 악하다는 위대한 착각 속에 살아왔다”며 한국 사회에 만연한 맹목적 반공과 냉전 수구적 사고를 질타했다. 당시 극단적인 우편향의 대한민국 사회를 표현한 것이다.갈등 대신 협력이 필요할 때그로부터 20여 년이 지났다. 한국 사회에 달라진 점이있을까? 대한민국의 갈등지수 가운데 이념 갈등이 최고인 것을 보면, 오히려 이념 갈등은 더 심해진 듯하다. 근래에는 진보와 보수라는 단어가 좌·우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친일=독재=보수’라는 일련의 선과 ‘독립운동=민주화운동=진보’라는 선은 평행하게 대립하고있다. 그런데 우리 사회의 진보와 보수의 개념은 일반론적이지 않다. 전 세계적으로 보수는 민족주의와 국익을 우선하지만, 대한민국의 보수는 자신을 우선시한다. 그래서 오히려 진보가 ‘진정한 보수’로 보여 지기도 한다. 대한민국에는 진정한 진보와 보수가 없다. 대한민국의 사회 정의를 구현하고 국격의 가치를 더 높이려면 건전한 보수와 진보가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리는 두 축(軸)으로 바로 서야 할 것이다. 둘은 갈등이 아닌 협력 관계, 보완적인 관계로 정립되어야 한다.이를 위해서는 소모적인 논쟁이 대한민국을 가르는 것도 경계해야 하지만, 친일 청산 문제로 편이 갈리는 것도 지양해야 한다. 친일 문제를 덮고 넘어가자는 얘기는 아니다. 1949년 미완으로 끝난 친일 청산문제는 2005년 5월 대통령 직속 기관으로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가 출범하면서 관심을 모았다. 진상규명위원회는 활동이 종료된 2009년 11월까지 1,006명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했다. 거의 같은 시기에 비영리 연구단체 민족문제연구소가 펴낸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 4,776명보다 훨씬 적은 수이다. 최소한 정부차원에서 규정한 ‘1,006명’의 과오는 밝히고, 우리 사회는 함께 반성해야 한다.반성은 자기 자신의 상태나 행위를 돌아보는 일이다. 이를 통하여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고, 부족한 부분을 채워나가는 것이 발전일 것이다. 제헌절에 친일파 청산 문제를 되돌아보며, 진정한 반성을 통하여 우리 사회의 긍정적인 발전을 생각해 본다.]]> Wed, 26 Jun 2019 15:25:46 +0000 31 <![CDATA[3·1운동과 진정한 20세기의 시작 우리의 오늘 세계의 그날]]> 글 강응천 기획집단 문사철 대표, 역사저술가3·1운동과 진정한 20세기의 시작 1918년 제국주의 열강 간의 대충돌인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났다. 세계대전 중이던 1917년 러시아는 사회주의혁명을 일으켜 자본주의 체제에서 빠져나갔다. 러시아는 열강들의 간섭전쟁을 막아내며 동방 식민지·종속국들과의 협력에서 생존을 모색했다. 세계대전을 통해 신흥 강국으로 떠오른 미국의 윌슨 대통령도 민족자결주의 원칙을 선언해 식민지 민중에게 독립의 희망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모든 식민지가 아닌 패전국 식민지에게만 적용되었다. 영국을 도운 아랍 국가들이 패전국인 오스만제국으로부터 독립을 얻은 것처럼 말이다. 인도는 자치를 허용하겠다는 영국의 약속을 믿고 참전해 싸웠지만, 승전국인 영국은 인도의 독립을 허용하지 않았다. 한국인에게는 안타깝게도 일본은 승전국에 속했다. 덕분에 일본은 한국의 독립운동을 억누르고 중국 침략을 가속화할 수 있었다. 세계대전의 종식과 사회주의 러시아의 등장으로 세계는 진정한 의미에서 20세기를 시작했지만, 한국인이 갈 길은 아직도 멀었다. alt1918년 12월 27일 자 『매일신보』에 실린 독감 기사세계대전보다 맹렬했던 서반아 독감1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 전쟁터에서 발생한 ‘서반아(에스파냐) 독감’이 전 세계를 강타했다. 1918년 9월부터 3개월 동안 감기, 폐렴으로 죽은 사람이 2,000만 명을 넘었다. 한국에서도 서울에서 첫 환자가 발생한 이래 인천·대구·평양·원산·개성 등지로 계속 번져나가면서 엄청난 사망자가 발생했다. 에스파냐의 의학 전문 학술지 『자마』에는 「한국에서 확산되는 인플루엔자」라는 연구보고서가 실렸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독감의 “발원지는 시베리아이고 철길을 따라 확산”되었다.조선총독부는 그해 12월 말 현재 742만 2,113명의 한국인 환자가 발생해 13만 9,128명이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국내에 들어와 있는 일본인, 중국인 등을 합치면 사망자는 14만 518명에 이르렀다. 농촌에서는 들녘의 익은 벼를 거두지 못할 정도로 상여 행렬이 끊이지 않았고, 각급 학교는 일제히 휴교해야 했다.1918년 12월 27일 자 『매일신보』가 로이터 통신을 거쳐 보도한 『타임스』 기사에 따르면 “유행성 감기로 3개월간의 사망자가 600만 명이고, 5년간의 대전쟁에는 2,000만 명이 사망했으므로 이번 감기가 전쟁보다 다섯 곱절이나 맹렬”한 셈이었다.실제로 그해 8월과 10월 사이 ‘서반아 독감’으로 사망한 미군 수가 2만 4,000명인데, 제1차 세계대전에서 사망하거나 부상당한 미군의 수는 3만 4,000명이었다. 엄청난 피해가 아닐 수 없었다. ‘서반아 독감’이 격전지를 중심으로 빠르게 번져 나가면서 젊은 병사들이 밀집해 있는 부대 막사가 바이러스 확산에 좋은 환경을 제공했던 것으로 분석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을 앞당긴 결정적인 요인이 ‘서반아 독감’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이처럼 영국, 프랑스, 독일을 휩쓴 ‘서반아 독감’은 에스파냐를 초토화하고 북아메리카와 아시아까지 확산되었다. 특히 알래스카와 캐나다를 비롯한 북아메리카 대부분의 지역은 죽음의 땅이 되었다. ‘서반아 독감’은 ‘1918년의 대재앙’으로 불리면서 중세 흑사병의 공포를 20세기 벽두의 세계에 몰아오고 있었다. alt종로의 만세시위 군중alt덕수궁 앞 만세시위alt파리강화회의에 파견된 민족 대표단전쟁과 독감을 뚫고 울려 퍼진 만세 함성수천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세계대전과 인플루엔자도 새로운 시대가 오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러시아혁명과 민족자결주의에 고무되어 해방과 혁명을 외치는 함성이 전후 세계를 뒤덮기 시작했다.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30분 서울 파고다공원에서 울려 퍼지기 시작한 ‘대한독립만세’의 함성은 그 신호탄이었다. 그것은 한국이 일본에 병합된 지 9년 만에 식민지의 설움이 분출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남녀노소, 양반, 천민을 가리지 않고 모두 목 놓아 만세를 부르면서 한국인의 독립 의지를 온 세상에 알렸다.그날 아침 일찍부터 서울의 종로와 서대문 거리에는 격문이 살포됐다. 오후 2시까지 파고다공원에 오기로 했던 민족 대표들이 나타나지 않자, 학생 대표 정재용이 팔각정 위에 올라가 힘차게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낭독이 끝나자 군중들은 파고다공원 뒷문으로 달려나가면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종로 1가로 진출한 시위대는 남대문역, 정동, 덕수궁, 광화문, 서소문 등으로 몰려다니며 만세를 불렀다. 시위대는 거리에 있는 시민들의 합류를 권유했고, 이에 시민들이 함께 만세를 부르며 행진을 계속했다. 상인들은 가게 문을 닫고, 수업을 받던 학생들도 거리로 나와 시위에 동참했다. 만세시위는 일제 경찰의 강력한 폭력 진압에 맞서 서울뿐 아니라 평양, 진남포, 안주, 의주, 선천, 원산 등지에서 동시에 전개됐다. 9년간 억눌려 온 분노가 용암처럼 전국을 휘감아 돌았다.3·1만세운동의 기폭제는 해외에서 먼저 터졌다. 1918년 여운형 등 젊은 독립운동가들은 신한청년단을 결성해 전후 세계 질서가 논의되는 파리강화회의(1919년 1월)에 김규식을 파견했다. 그러나 승전국들은 일본의 편을 들며 식민지 한국의 대표를 외면했다. 독립운동 세력은 민족의 의지를 알리는 주체적인 방법을 모색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던 중 1919년 2월 8일, 일본 도쿄에서 유학생들이 「독립선언서」를 발표했다. 이는 국내에도 영향을 미쳤다. 손병희(천도교), 이승훈(기독교), 한용운(불교) 등 종교계 대표들을 비롯한 지도자들이 비밀 회동을 갖고 고종의 장례식 기간에 맞춰 만세시위를 준비했다.그러나 민족대표 33인은 파고다공원 시위가 폭동의 우려가 있다며 거사 전날 태화관으로 회동 장소를 긴급 변경했다. 그리고 3월 1일 오후 2시경 그곳에서 만세 삼창을 한 뒤 일본 경찰에 자수했다. 민족대표들은 시위 지도를 포기했으나 학생, 시민 등 일반 민중은 포기하지 않고 만세운동에 나선 것이다. 나라 전체의 운명이 이름 없는 민중의 손에 맡겨진 전무후무한 상황 속에서 만세 소리는 점점 더 커져 나갔다. alt1919년 5월 4일 시작된 중국의 5·4운동을 기념하는 칭다오 5·4광장대륙을 뒤흔든 함성파리강화회의에는 중국도 대표단을 파견했다. 그들은 식민지 한국과는 달리 당당히 승전국의 일원으로 참가해 패전국 독일이 점령하고 있던 산둥반도를 되돌려 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영국, 미국, 프랑스 등 서양 열강은 자신들의 반식민지로 전락했던 중국을 우습게 보았다. 그들은 중국의 요구를 거절하고 오히려 일본의 21개조 요구를 받아들여 산둥반도를 일본에 넘기기로 결정했다. 21개조는 일본이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고 세계대전에 참전하면서 독일이 갖고 있던 중국 내의 이권을 모두 자신들에게 넘기라는 요구였다.이 소식이 알려지자 중국 사람들은 크게 술렁이기 시작했다. 1919년 5월 4일 산둥반도의 중심 도시인 칭다오를 시작으로 열강의 침략과 무기력한 정부에 항의하는 시위가 일어났다. 베이징의 톈안먼광장에서도 베이징대학 학생들을 중심으로 약 3,000명이 모여 파리강화회의의 굴욕적인 결정을 격렬하게 성토했다. 시위 학생들은 “조약 서명을 거절하라!”, “죽음을 걸고 칭다오를 되찾자!”, “밖으로 주권을 쟁취하고, 안으로는 매국노를 징벌하자!”라는 구호를 외치며 파리강화회의를 규탄했다.학생들은 특히 친일파 관료인 차오니린, 장종샹, 루쭝위를 매국노로 지목하고 이들을 처단할 것을 요구했다. 차오니린은 1915년 일본이 요구한 21개조를 중국 정부가 받아들이는 조약에 서명하게 한 대표적인 친일파 관료였다. 학생들은 구호를 외치는 데 그치지 않고 차오니린의 집으로 몰려가 집에 불을 질렀고, 그 자리에 있던 주일공사 장종샹을 붙잡아 집단 폭행을 가했다. 군대가 출동해 시위를 진압했지만, 이튿날인 5월 5일부터 베이징을 비롯한 전국에서 동조 시위가 이어졌다. 6월 들어서는 공업지대인 상하이까지 시위가 번져 노동자들이 총파업을 벌이고 상인들이 철시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중국 정부는 일단 친일파 관료 3명을 해직시키고, 파리강화회의 결정에도 서명을 거부하겠다고 밝혔다. 그동안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 앞에 속수무책으로 당해온 중국이 민중의 힘으로 모처럼 기력을 되찾을 조짐을 보인 것이다. 한반도에 이어 중국에서도 진정한 20세기의 동이 트고 있었다. alt베르사유 궁전에서 열린 파리강화회의. 이때 베르사유조약이 체결되었다갈 길은 아직 멀었다한국인과 중국인을 분노케 한 파리강화회의가 1919년 6월 28일 베르사유조약 체결과 함께 막을 내렸다. 이 조약으로 독일은 많은 영토를 잃고 고액의 배상금을 물어야 하는 처지에 몰렸다. 독일 영토 가운데 알자스와 로렌은 프랑스, 북부는 벨기에와 덴마크, 동부는 폴란드에 할양되었다. 독일의 군사력은 병력 10만 이하로 제한되고 탱크, 잠수함, 항공기 같은 장비의 생산이 금지되었다. 또 독일에게는 약 330억 달러에 달하는 가혹한 배상금이 부과되었다. 영국 대표로 참석한 저명한 경제학자 케인스에 따르면 이 액수는 독일 경제를 붕괴시킬 정도로 가혹한 것이었다. 독일은 전쟁을 일으킨 주범이니만큼 그처럼 가혹한 징벌이 내려지는 게 어쩌면 당연했다. 그러나 한국, 중국, 인도 등은 패전국도 아닌데 가혹한 운명을 받아 들여야 했다. 한국과 중국의 산둥반도를 비롯한 적도 이북 태평양 지역의 식민지는 일본, 남태평양과 아프리카 일부는 영국이 차지하기로 결론이 내려졌다. 또한 콩고 이북 아프리카의 식민지는 프랑스가 차지하기로 했다. 결국 베르사유조약은 열강들끼리의 영토 분할을 재조정했을 뿐 식민지·종속국들 앞에 놓인 가시밭길은 여전했다. 진정한 20세기는 그들의 민족해방운동과 함께 열릴 수밖에 없었다.]]> Wed, 26 Jun 2019 16:00:01 +0000 31 <![CDATA[더위쯤은 쉽게 잊을 수 있다 동해바다여행 이 땅의 숨결]]>     글·사진 임운석 여행작가더위쯤은 쉽게 잊을 수 있다동해 바다여행   짙푸른 바다가 더위쯤은 쉽게 날려버리는 그곳. 시름과 더위는 잊은 채 즐거운 추억 쌓기에 좋은 그곳. 해변들이 줄지어 있어 여름에 더 반가운 그곳은 동해바다와 맞닿은 강원도 동해시다. 뜨거운 한낮을 바다에서 보냈다면 해 질 녘에는 묵호동 논골담길 골목 속으로 발을 들인다. 지역 주민들의 애환이 벽화에 고스란히 녹아든 까닭에 감동과 웃음이 넘친다. alt망상해변을 찾은 수많은 피서 인파alt피서지로 그만인 천곡동굴 맏형다운 풍모를 지닌 망상해변바다로 가자, 바다로 가자생각만 해도 속이 시원한 바다로 가자한창 더위로 꼼짝 못하는여름 한철은 바다에서 살자강소천 시인의 시 「바다로 가자」의 한 대목이다. 시인의 노래처럼 무더운 여름에는 바다가 옳다. 여름바다에는 청춘들의 만남과 이별이 있고, 그 간극 사이로 바닷가 사람들의 희로애락이 파도와 함께 밀려왔다 밀려간다.시원한 동해를 벗하고 바다열차가 달리는 지점에 망상해변이 있다. 망상해변은 우리나라 여러 해변 가운데 접근하기 편리한 해변으로 유명하다. 가까운 곳에 영동선 망상역과 동해고속도로 망상 나들목이 있어서다. ‘망상’은 ‘복되고 길한 일을 바란다’라는 뜻을 가졌다. 복을 비는 망상의 뜻때문일까, 망상해변은 자랑거리가 많다. 그중 으뜸은 순백에 가까운 백사장일 게다. 선글라스가 없으면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새하얀 백사장이 끝없이 펼쳐진 풍광이라니. 그 광활함을 마주해보지 못했다면 실감할 수 없으리라. 그리고 수심 깊은 동해의 여러 해변에 비해 망상해변은 100m까지도 수심 1m 내외로 나직해 온 가족이 물놀이를 즐기기에 안성맞춤이다. 망상해변을 중심으로 크고 작은 해변이 이어진 것도 특이하다. 주수천을 시작으로 북쪽에 도직해변과 기곡해변이 있고, 남쪽 마상천을 끝으로 노봉해변이 자리한다. 각각의 해변을 합치면 4km가 넘는다. 이중 절반 이상이 망상해변이다. 규모 면에서 단연 압도적이다.서해가 감성과 낭만이라면 동해는 도전과 젊음의 아이콘이다. 역동적인 동해는 주민들이 순종해야 할 대상인 동시에 극복해야 할 대상이었다. 거칠고 척박한 해안가에서 살아남기 위한 주민들의 몸부림도 치열했다. 방풍 목적으로 조성한 송림이 해안가 주민들의 지친 삶을 대변해주는 듯하다.요즘은 송림의 목적이 좀 더 다양해졌다. 캠핑장으로 활용되는 것이다. 편리한 캠핑을 원한다면 망상오토캠핑장을 권한다. 이곳은 국내 최초의 자동차 전용 캠핑장으로 문을 열었다. 임대형 캐러밴과 통나무로 지은 캐빈하우스, 아메리칸 코티지 등 여행의 목적이나 용도에 따라 다양한 시설을 갖추고 있다. 특히 캠핑카나 통나무집에서 맞이하는 한여름 밤은 잊지 못할 추억이 될 것이다. 그뿐인가. 해수욕은 물론이고 주변에 관광지가 모여 있어 베이스캠프로도 손색이 없다. 주변에서 챙겨볼 만한 곳은 천곡동굴이다. 총길이 1,400m의 석회암 천연동굴인 이곳은 천장이 낮고 돌출 암석이 많아서 반드시 안전모를 착용해야 한다. 한여름에도 평균 온도가 16°C 정도이니 동굴 안에선 냉장고에 들어선 것처럼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피서지로 이만한 곳이 또 있을까. alt기암괴석이 조화로운 추암해변alt묵호항 활선어판매센터에서는 관광지보다 저렴하게 회를 즐길 수 있다 줄줄이 이어진 해변, 취향 따라 선택해마상천을 건너 일출로를 따라 달리면 대진해변에 닿는다. 육지와 기나긴 시간을 함께했던 마상천이 바다여행을 시작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비교적 파도가 일정하게 밀려와서 서핑 마니아들에게는 이미 소문난 서핑 명소다. 백사장은 500m가 조금 넘는 규모다. 바닷속이 훤히 들여다 보일 정도로 물이 맑아 모래에 콕 박혀 있는 조개를 줍듯이 잡을 수 있다. 조개잡이에는 특별한 도구가 필요 없다. 물놀이를 하다가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면 뭔가 느낌이 올 것이다. 그때 주워 담으면 그만이다. 직접 잡은 조개를 넣어 끓인 라면은 임금님 수라상이 부럽지 않다.좀 더 작고 한적한 해변을 찾는다면 남쪽으로 1.5km 정도 더 내려가 보라. 백사장 규모가 300m가 채 되지 않는 어달해변이 기다린다. 바다 맞은편에 어달산과 오학산이 자리해 아늑한 기분마저 드는 곳이다. 어달산 아래엔 횟집들이 초저녁부터 불야성을 이룬다. 생선회를 즐기고 싶다면 꼭 챙겨 볼 일이다. 좀 더 저렴하게 횟감을 구입하고 싶다면 묵호항 활선어판매센터를 권한다. 어판장에서 직접 생선을 선택한 후 회까지 떠주는 방식으로 저렴한 편이다. 센터 옆에 자리한 수변공원에서 바다를 배경 삼아 회를 맛볼 수 있으니 특별한 추억은 덤이다.어달해변에서 더 남쪽으로 내려가면 외지인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해변이 있다. 천곡항 북쪽에 자리한 고불개해변과 한섬해변, 감추산 남쪽의 감추해변이 그곳이다. 특히 감추해변은 백사장 길이가 300m에 불과한 작은 해변이지만 맑은 물과 얕은 수심 덕분에 가족단위 피서객들에게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곳이다. 해변을 둘러싸고 있는 야트막한 산은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져 있어 보는 이마다 탄성을 터트린다. 게다가 손맛을 즐기려는 낚시객들에겐 인기 있는 낚시 스폿이다.동해의 마지막 해변은 삼척과 이웃한 추암해변이다. 이곳 추암(촛대바위)은 한때 정규 방송의 시작과 종료를 알리던 애국가 배경 영상으로 등장해 유명해졌다. 지금은 그 영상을 볼 수 없지만 가늘고 기다란 추암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장엄한 일출 장면만큼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아름답다. alt다닥다닥 작은 집들이 어깨를 맞댄 묵호마을alt희망을 싣고 나르는 할아버지 벽화 삶의 애환을 그리다묵호동 비탈진 곳에 자리한 논골담길은 묵호항에서 묵호등대까지 이르는 골목이다. 골목 담벼락마다 지역 주민의 생활 모습과 인생 이야기가 그려져 있어 걷는 내내 웃음을 짓게 한다. 마을 가장 높은 곳에는 묵호항 등대가 있다. 1963년 6월 8일 첫 불을 밝힌 후 지금껏 변함없이 불을 밝히는 고마운 길잡이다. 묵호항 등대는 영화 「파랑주의보」, 「인어공주」, 「연풍연가」 등 많은 영화와 드라마의 배경으로 등장했다.등대에 오르는 길은 여러 갈래다. 차를 타고 가려면 창호초등학교를 지나 ‘해맞이길’을 따라 올라야 하고, 걸어가려면 묵호항 수변공원에서 ‘등대오름길’과 묵호시장에서 논골길을 따라 좁다란 골목길로 이어지는 논골 1길부터 3길 중 하나를 선택하면 된다. 묵호항이 문을 연 건 1941년이다. 강원 산간에서 캔 무연탄을 실어 나르기 위해 조성한 것인데 시간이 지나 어항까지 갖추게 되면서 동해안 중심 항구로 부상했다. 그러다 보니 1960~1970년대에는 전국에서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 그 당시 묵호항은 한밤에도 대낮처럼 밝았다고 한다. 집어등(集魚燈)을 밝힌 오징어잡이 고깃배 덕분이다. 항구는 늘 분주했고 사람들은 밤낮없이 항구를 오갔다. 동네 똥개도 만 원짜리를 물고 다닌다는 말도 그때 나왔다. 하지만 1980년대 동해항이 개항하면서 쇠퇴하기 시작했다. 고기잡이배가 들어오면 품삯을 받은 선원들이 즐겨 찾았던 실비집은 건물만 남긴 채 옛 흔적은 사라졌다. 빨간 고무 대야에 넘쳐나던 각종 해산물과 집마다 빨래처럼 생선을 널어 말리던 덕장의 풍경도 이제는 추억거리가 됐다. 그 옛날의 풍경이 이제 논골담길 골목에 벽화로 그려졌다. 논골담길을 찾는 이들은 그 흔적을 따라 마을 안으로 발을 들인다. 마을을 구석구석 돌며 모든 벽화를 꼼꼼히 챙겨 보고 싶다면 계획을 세워 오르는 것이 좋다.등대오름길은 마을에서 가장 먼저 벽화가 그려진 곳이다. 좁디좁은 골목길은 포장은 됐지만 해삼 등껍질처럼 울퉁불퉁 제멋대로 생겨먹었다. 간간이 보이는 덕장에는 생선이 꾸덕꾸덕 말라간다. 동해 묵호다운 풍경이다.옛것을 담은 등대오름길과 달리 논골1길부터 3길은 묵호의 현재와 추억이 그려졌다. 거친 바다를 가르는 ‘묵호호 벽화’는 세상을 향한 묵호의 소리 없는 외침이다. 비탈진 골목길에 그려진 수레 끄는 할아버지 벽화에는 형형색색의 풍선을 그려놓았다. 힘든 길이지만 웃음을 잃지 않는 할아버지의 모습에서 희망이 엿보인다. 논골담길은 좁고 가파른 골목의 연속이다. 그래서 단숨에 오르기 쉽지 않다. 중간에 쉬어 갈 수 있는 쉼터가 여럿 있으니 땀도 식히고 다리도 쉬어본다. 쉼터에서 바다를 향해 앉아 쉬노라니 갈매기가 날아와 아무도 모르는 묵호이야기를 전해줄 것만 같다.]]> Wed, 26 Jun 2019 16:20:38 +0000 31 <![CDATA[어느 독립운동가의 초상 독립전쟁, 무장으로 일군 자주독립의 희망]]> 글 김정인 춘천교육대학교 교수독립전쟁, 무장으로 일군자주독립의 희망   1919년 3·1운동이 일어났다. 만주에 많은 독립군 부대가 만들어졌다. 대한제국기에 군인이었거나 의병장이었던 이들이 지휘부가 되어 독립군 부대를 통솔했고, 봉오동과 청산리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그들은 3·1운동의 경험을 공유하며 새로운 길을 찾고 있던 한국인들에게 독립전쟁으로 자주독립을 쟁취할 수 있다는 희망을 심어주었다.  alt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원 포고 제1호 1920년, 독립전쟁의 해3·1운동이 보여준 독립의 열망은 만주에서 수많은 무장단체의 결성으로 이어졌다. 이는 19세기부터 일궈 온 한인사회를 기반으로 1910년대에 축적한 역량이 결집된 결과이기도 했다. 독립운동가들은 만주에서 군자금과 장병을 모집하고, 무기, 식량, 군복 등을 마련하고 사관을 양성하고 병영을 건설하는 등 독립군기지 건설에 힘썼다. 이를 바탕으로 1919년 무렵 만주에서는 크고 작은 독립군 부대가 활동했다. 북간도에서는 안무를 총사령으로 하는 대한국민회군, 김좌진을 사령관으로 하는 대한군정서,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최진동의 대한군무도독부, 김규면의 대한신민단 등이 자리하고 있었다. 서간도에는 이청천을 사령관으로 하는 서로군정서를 비롯해 대한독립단, 대한독립군비총단 등이 있었다.1920년 1월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국무원 포고 제1호’로 ‘독립전쟁 원년’을 선포했다. 임시정부가 독립전쟁에 나설 것을 천명하자 곧 국내외에서 즉각적인 개전을 압박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3월 2일 이동휘는 임시의정원에서 독립운동의 최후 수단인 전쟁을 개시해 승리하기 위해 임시정부가 해야 할 준비사항 14개 항을 담은 시정방침을 발표했다. 3월 30일에는 윤기섭 등 5인이 ‘군사에 관한 건의안’을 임시의정원에 제출했다. 건의안은 5월 중 적당한 시기에 군사회의를 소집하고 만주로 군사업무와 관련한 기관들을 옮기며 10~20개의 보병연대를 편성하고 사관과 준사관 약 1,000명을 양성해 1920년 안에 전쟁을 개시한다는 계획을 담고 있었다. 즉각적인 개선론인 셈이었다. 이렇듯 임시정부가 독립전쟁을 선포할 무렵 만주에서는 활발한 국내진공작전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일본 경찰 기록에 따르면 독립군 부대들은 1920년에만 1,600여 회의 국내진공을 시도했다. alt봉오동 전투 승전 보도기사(『독립신문』, 1920.06.29.)   alt마적들에게 파괴된 훈춘(혼춘) 시가지 alt청산리 대첩 기록화(1920.10.)   독립군의 승리,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 임시정부가 독립전쟁의 원년으로 선포한 1920년 5월 북간도에서 최진동의 대한군무도독부와 안무의 대한국민회군, 홍범도의 대한독립군이 연합해 대한북로독군부를 조직했다. 최진동이 사령관을, 안무는 그의 부관을 맡았다. 홍범도는 군사지휘권을 갖는 북로사령부장에 임명되었다. 대한북로독군부가 화룡현 봉오동에 근거지를 설치하고 있을 무렵, 국내진공작전을 펼친 대한신민단을 추격하던 일본군 1개 대대가 두만강을 건너 봉오동에 들어왔다. 6월 7일 오전 봉오동에서는 대한북로독군부와 일본군이 전투를 벌였고 지형을 잘 알고 있었던 대한북로독군부는 이를 이용하여 일본군을 격퇴했다.봉오동 전투 이후 일본군은 본격적인 독립군 ‘토벌’에 나섰다. 1920년 8월 독립군을 초토화한다며 소위 ‘간도지방불령선인초토계획’을 수립했다. 그리고 일본군의 간도 출병의 명분을 마련하고자 ‘훈춘사건’을 일으켰다. 중국인 마적을 매수해 훈춘의 민가와 일본영사관을 습격하도록 한 것이다. 그리고 일본 정부는 곧바로 군대를 간도에 출병시켰다. 간도 출병을 예상하고 있던 독립군 부대들은 아직 일본군과 정규전을 하기에 역부족이었기 때문에 전면전을 피하고자 8월 하순부터 본거지를 이동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10월 중순에 회의를 열어 전투를 피하되, 만일 공격한다면 깊은 산속으로 유인해 유격전으로 기습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그리고 마침내 독립군과 일본군은 청산리 일대에서 일전을 벌였다. 이때 전투에 나선 독립군 부대로는 김좌진의 대한군정서와 북간도에서 활동하던 독립군 부대를 망라해 홍범도가 이끌던 연합부대가 있었다.청산리 전투는 1920년 10월 21일 김좌진의 대한군정서가 백운평에서 전투를 벌이며 시작되었다. 대한군정서는 백운평에 이어 천수평에서 일본군을 물리쳤다. 완루구에서는 홍범도의 연합부대가 전투를 벌였다. 어랑촌에서는 김좌진과 홍범도가 이끄는 독립군들이 함께 지형의 유리함을 이용해 일본군의 공격을 방어하고 전력을 보존할 수 있었다.  alt대한군무도독부 부장 최진동alt대한국민회군 총사령 안무alt대한독립군 총사령 홍범도alt대한군정서 사령관 김좌진 승리를 이끈 독립군 지휘부1920년 독립전쟁의 해에 봉오동과 청산리에서 승리를 이끌어낸 독립군 지휘부에는 최진동, 안무, 홍범도, 그리고 김좌진 등이 있었다. 봉오동 전투를 지휘한 최진동은 함경북도 온성 출신으로 일찍이 만주로 건너가서 중국 국적을 획득하고 중국군에 들어가 활동했다. 대한군무도독부를 결성할 무렵 그는 봉오동에서 재산도 있고 명성도 높은 유력자였다. 집에 장벽을 쌓고 사방에 포대를 지어놓고 자위단을 설치했던 토호였다. 3·1운동이 일어나자 그는 재산을 들여 독립군 부대인 대한군무도독부를 결성했다.대한국민회군을 이끌었고 대한북로독군부에서 최진동을 보좌했던 안무는 1883년생으로 함경북도 경성군 출신이다. 그는 대한제국 진위대 병사로 출발해 하사관과 교련관양성소를 거쳐 함경북도 무산 등지에서 교련관으로 근무했다.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된 이후에는 함경북도의 사립학교들에서 체육교사를 지냈다. 1910년 대한제국이 멸망하자 안무는 만주로 망명했다. 북간도에서 활동하던 중 1919년 대한국민회 산하의 대한국민회군 300여 명을 거느린 사령관에 취임했다.홍범도는 1868년생으로 평안남도 양덕에서 태어났다. 그는 19살이 되던 해인 1887년 평양의 친군서영에 입대해 3년간 군대생활을 한 후 광산노동자로 살았다. 1893년부터 1907년까지 14년 동안은 삼수, 갑산, 풍산, 북청 일대에서 포수 생활을 했다. 1907년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되자 함경도와 평안도 일대의 포수와 청년 200여 명을 모아 북청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홍범도 의병부대는 1910년 봄에 간도로 망명할 때까지 함경도 일대에서 유격전을 벌이며 일본군과 끈질기게 싸웠다. 간도로 망명한 후에도 국내진공작전을 벌이는 등 의병투쟁을 이어갔으나 결국 전력 소진으로 해산하고 말았다. 홍범도는 1913년 연해주로 망명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노동회를 조직하고 군자금을 모았다. 3·1운동 직후인 1919년 5월 홍범도는 다시 북간도로 건너와 200여 명 규모의 독립군부대인 대한독립군을 창설했다. 그리고 국경에 자리한 혜산진의 일본군 수비대 공격을 시작으로 연이은 국내진공작전을 펼쳤다. 대한독립군은 안정적인 무기와 병참 보급을 위해 간도의 한인 자치결사체인 대한국민회 산하로 들어갔다.김좌진은 1889년생으로 충청남도 홍성군 출신이다. 서울에서 무관학교를 다녔으나 1907년 군대가 해산되자 고향으로 내려와 호명학교를 설립하고 기호흥학회에 가입하는 등 계몽운동에 힘썼다. 대한제국이 망하자 만주에 독립군기지를 건설하기 위한 군자금 모금 활동을 벌이다가 구속되어 수감생활을 했다. 출옥 후 대한광복회 만주사령관에 임명되었다. 군자금 모집 혐의로 다시 체포되었으나 면소판정을 받고 풀려났다. 군자금 모집을 계속하던 중 경찰에 포착되자 만주로 건너갔다. 김좌진은 3·1운동 직후 대한독립선언서를 발표할 때 서명자의 한 사람으로 참석했다. 또한 대종교에서 만든 자치결사체인 대한정의단의 군사책임자가 되었다. 대한정의단은 독립군 부대로서 대한군정회를 조직했다. 1919년 10월 대한정의단과 대한군정회를 통합해 대한군정부를 만들 때 사령부를 맡았다. 대한군정부는 임시정부 산하의 군사기관으로 공인되면서 이름을 대한군정서로 변경했다.]]> Tue, 30 Jul 2019 15:10:35 +0000 32 <![CDATA[史소한 이야기 조국을 사랑한 의로운 민중들]]> 조국을 사랑한 의로운 민중들한눈에 살펴보는 의병 의병은 나라에 외적이 침입하여 위급할 때 국가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민중 스스로 외적과 싸우는 민간의 군대를 말한다. 한국은 침략을 당한 역사가 깊으므로 의병의 역사 또한 길었다.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민중들은 제 가족과 마을을 지키기 위해 싸웠고,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의 의병들도 난국을 타개하겠다며 스스로 일어났다.1895년 을미사변 이후 극대화되어 있던 사람들의 반감과 분노는 ‘단발령’을 계기로 터져 나왔다. 국모를 시해하고 조선의 전통마저 말살하려는 일본의 조치에 가장 먼저 움직인 것은 유생들이었다. 각지의 유생들은 들고일어나 일본인이 많이 거주하는 국내 지역을 공격했다. 이는 시작에 불과할 뿐, 일제의 침략이 가속화되면서 의병 활동도 활발해졌다. 의병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신분 또한 유생에서 농민, 노동자 등 일반 민중으로 확대되었다. 의병 활동은 1910년 국권침탈을 전후로 활발하게 전개되었으나 일본의 계속되는 탄압과 말살 작전으로 국내에서의 근거지를 잃고 말았다. 이때 만주와 러시아 등지로 갔던 이들 중 일부가 독립군을 조직, 본격적인 항일무장투쟁의 시작을 알렸다.강한 무기도 없고, 체계적인 군사훈련도 받지 못한 민간인들의 무장투쟁이 실패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질 것을 알면서도 싸움을 멈추지 않았던 그날의 의병들은 말했다. “일본의 노예로 사느니 자유민으로 죽는 것이 낫다”라고. alt]]> Tue, 30 Jul 2019 15:09:06 +0000 32 <![CDATA[이달의 독립운동가 민족과 국가를 위해 살다 간 지도자 김구]]> 글 전시부    민족과 국가를 위해 살다 간 지도자 김 구   독립기념관은 국가보훈처 및 광복회와 공동으로 김구를 2019년 8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국내에서 애국계몽운동을 이끌던 김구는 3·1운동 이후 상하이로 망명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지도자로 활약하며 독립운동에 전 생애를 바쳤다. alt다양한 활동을 모색하며 독립운동가로 거듭나다김구는 1876년 8월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다. 17세가 되던 해에 과거에 응시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이듬해인 1893년 동학에 들어간 그는 동학농민전쟁에서 황해도 지역 동학군 선봉장으로 활약했다. 이후 유학자 고능선에게 한학을 배우면서 중국을 왕래하던 중, 1896년 3월 황해도 안악의 치하포에서 명성황후 시해에 대한 복수 의거로 일본인 쓰치다를 처단했다. 이 때문에 2년간 옥고를 치르다가 1898년 탈옥하여 공주 마곡사 등지에서 승려로 지냈다. 이후 애국계몽운동에 매진한 김구는 ‘교육을 통해 나라를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교육 사업에 힘을 쏟았다. 1908년에는 황해도 지역 교육계몽단체인 해서교육총회를 조직하고 학무총감으로 추대되었다. 한편 비밀결사 단체인 신민회에도 가담했으나 또다시 옥고를 치러야 했다. 이때 옥중에서 호를 ‘백범(白凡)’으로 삼으며 ‘평범한 사람들에게까지도 나라사랑 정신을 고취하겠다’며 독립운동에 대한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대한민국 임시정부 지도자로 활약하다44세가 되던 1919년 3·1운동 직후 중국으로 망명한 김구는 상하이에 위치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합류했다. 이후 경무국장으로서 임시정부 요인 경호 등을 맡았고 내무총장과 국무령, 국무위원 등을 맡아 임시정부를 이끌어 갔다. 하지만 임시정부 안팎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이 계속되면서 점차 침체에 빠지자 최소 인원으로 최대 효과를 거두고자 특무공작을 계획하고 한인애국단을 결성했다. 이어서 이봉창·윤봉길 의거 등을 주도하며 한국인의 독립의지를 당당히 알렸다.김구는 일본군의 중국 침략으로 중국 여러 도시를 옮겨 다니다가 65세인 1940년 충칭에 정착하여 임시정부 최고 지도자인 주석으로 활동했다. 충칭에서 그는 임시정부의 조직과 체제를 정비하는 한편, 독립운동의 역량을 하나로 모으고자 좌우통합을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또한 1940년 9월 한국광복군을 창설하고 국내진입작전을 추진했다. 충칭에서 광복을 맞이한 후 1945년 11월 환국한 그는 좌우 남북 대립이 심화되자 하나 된 조국을 위해 노력을 계속하다가 1949년 6월 26일 서거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alt김구(金九) 1876.08.29. ~ 1949.06.26.   alt김구 가족사진(1922)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시절 촬영한 가족사진으로 왼쪽부터 김구, 큰아들 김인, 아내 최준례의 모습이 보인다alt김구가 머물던 마곡사 건물 탈옥한 김구가 6개월간 은거한 마곡사 건물로, 현재는 ‘백범당’이라 부르고 있다               alt대한민국 임시정부 대일선전성명서(1941.12.10.) 대일선전성명서에는 대한민국이 연합군의 일원이 되어 일본과 맞서 싸우겠다는 내용이 있으며, 좌측 하단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김구와 외무부장 조소앙의 도장이 보인다 alt김구 서명문 태극기 김구가 선교 활동을 하던 벨기에 신부에게 전한 태극기로 조국 광복을 위한 노력을 독려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alt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 환국 기념사진(1945.11.) 김구를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들이 광복 직후인 1945년 11월 3일 귀국을 앞두고 중국 충칭 임시정부 청사 앞에서 촬영한 사진이다   ]]> Tue, 30 Jul 2019 15:26:39 +0000 32 <![CDATA[자료로 읽는 역사 독립운동자금을 모아라!]]> 글 김경미 자료부 학예연구관독립운동자금을 모아라!영수증으로 보는 미주 한인들의 독립운동 어떤 사람이 나에게 “어떻게 죽기를 원하는가?” 물으면, 나의 최대 소원은 독립이 성공한 후 본국에 들어가 입성식(入城式)을 하고 죽는 것이며, 작은 소망은 미주·하와이 동포들을 만나보고 돌아오다 비행기 위에서 죽으면 시신을 아래로 던져, 산중에 떨어지면 짐승들의 뱃속에, 바다 가운데 떨어지면 물고기 뱃속에 영원히 잠드는 것이다. 『백범일지』 中   alt 01. 대한민국공채표(독립공채)(1920.06.28.)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자금을 대표하는 일명 독립공채로, 주차구미위원부에서 발행한 100달러 대한민국공채표이다. 구미위원부의 ‘공채권조례’에서는 10달러, 25달러, 50달러, 100달러, 1,000달러 등 5종의 공채표를 발행한다고 했으나, 임시정부에 보고한 문서에는 500달러를 포함한 6종으로 되어있다. 독립기념관 소장자료에는 5달러 공채표도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고락을 같이했던 김구는 『백범일지』를 마무리 하며, 죽기 전의 작은 소망이 미주·하와이 동포들을 만나보는 것이라 기록했다. 오랜 기간 임시정부를 유지할 수 있도록 재정적 뒷받침을 해 준 미주 한인들에게 고마움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하와이 노동이민으로 시작하여 미주에 정착한 한인들은 독자적인 한인사회를 유지·발전시키는 한편 조국의 독립운동을 돕는데 헌신적이었다. 국민과 떨어져 나라 밖에 자리 잡은 임시정부에게 미주의 한인사회는 다른 국외 한인사회보다 수적으로는 훨씬 적었으나 재정적으로는 가장 큰 의지처가 됐다.         alt02. 한민국인구세 영수증(1919.09.25.) 대한민국 1년도(1919년) 대한민국 인구세 1달러를 납부한 박술이에게 1919년 9월 25일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수세총위원 백일규의 명의로 발급한 영수증이다. 박술이는 그즈음의 주소가 와이오밍주 슈퍼리오로 되어 있어 그곳의 석탄광에서 일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그는 부인, 4남매와 몬타나주 부트에 거주하며 대한인국민회 몬타나 지방회 수전위원 등으로 활동했다alt03. 애국금 영수증 양식에 발급한 광복군후원금 영수증(1941.03.01.) 이 자료는 애국금 영수증 양식에서 ‘애국금’ 윗부분에 ‘광복군후원금’이라는 도장을 찍고 1941년 3월 1일 대한인국민회 중앙상무부 총무인 김병연의 명의로 발급한 광복군후원금 영수증이다. 광복군후원금은 1940년 9월에 중국 충칭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식군대로 조직된 한국광복군을 지원하기 위한의연금이다. 50센트를 낸 박광세는 자료02의 인구세를 냈던 박술이의 아들이다. 박광세는 동생인 찬세와 각각 50센트의 광복군후원금을 냈으며, 두 형제는 이후 미일전쟁에서 지원병으로 복무하게 된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재정 수입임시정부는 수립 직후 국민에 대한 조세 성격의 인구세, 자발적 헌금인 애국금, 대내외 공채 발매 등 세 가지를 재정 수입의 근간으로 삼았다. 먼저 인구세를 보면, 1919년 6월 15일 임시정부령 제3호로 ‘임시징세령’과 ‘인구세시행세칙’을 정했다. 국내외 만 20세 이상의 남녀 모든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국민개납주의(國民皆納主義)를 원칙으로, 국외에서는 거류민 자치단체가 징수사무를 집행하도록 했다. 미주 지역에서는 미주 최대의 한인단체인 대한인국민회(이하 국민회)의 중앙총회에 수세사무를 위임했다. 이때의 인구세 영수증(자료02)에는 국민회 중앙총회의 인구세 징수가 임시정부의 법령에 의거한 것임이 명시되어 있다. 국민회 중앙총회는 1919년에 총 1,122달러의 인구세를 징수했다. 1인당 1달러 정액이었으므로 모두 1,122명이 국민으로서 인구세를 낸 것이 된다.인구세와 함께 임시정부에서는 개인의 의연에 의한 애국금수합제도를 마련했다. 임시정부 재무총장 명의의 신표(信標)를 가진 애국금수합위원들을 국내외로 파견했으며, 미주에는 국민회 중앙총회에 ‘애국금수합위원 신표 제50호’를 발급하여 애국금 모집을 위임했다. 국민회 중앙총회에서 발급하던 애국금 수합증 양식(자료03)에는 “반만년 피로 지킨 조국이요 억만 대 후손의 자유의 낙원일 국토를 광복하려는 외교비와 군사비를 위하여 전력하라”고 하며 국민회 중앙총회에 관할지방의 애국금 수합사무를 지시하는 1919년 6월 21일 자 임시정부 재무총장 최재형의 명령이 인쇄되어 있다. 국민회 중앙총회에서는 미주와 멕시코 두 곳에서 8월 30일부터 모금 활동을 시작하기로 하여 1919년에 18,686.23달러의 애국금을 모았다.임시정부는 또한 재정의 근본 재원으로 독립공채를 발행하기로 하여, 공채의 명칭을 ‘대한민국원년 독립공채’로 정하고 1919년 12월 1일 공채를 발행했다. 이에 앞서 임시정부의 임시대통령 이승만은 미국 워싱턴에 설치한 구미주차한국위원부(이하 구미위원부)에서 ‘대한민국 공채표’를 발행하고 있었다. 임시정부는 국민회에 위임했던 애국금 제도를 폐지하고 구미위원부의 공채표 판매로 대신하기로 했다. 구미위원부에서는 미주 전 지역을 북미서방, 북미동방, 멕시코, 하와이의 4구역으로 나누어 공채표를 발매했다. 공채금은 4기로 나누어 낼 수 있었으며, 공채금을 내면 영수증(자료04)을 주고 공채금을 다 납부했을 때 그 사실을 증명하는 증서로 해당 금액의 공채표(자료01)를 주었다.          alt04. 공채금 영수증(사본)(1920.12.03.) 멕시코 구역 탐피코 지방에 사는 백곤차가 공채금 10달러를 제1~2기조로 낸 것에 대해, 대한민국 2년(1920년) 12월 3일 주차구미위원부 장재 현순의 명의로 발급한 영수증이다. 백곤차는 대한인국민회 탐피코 지방회에서 활동하던 김익주의 부인으로, 1905년 가족이민으로 멕시코에 이주했다. 독립기념관 소장자료에는 백곤차의 맏아들인 김동철의 40달러 공채금 영수증도 있다 alt    05. 독립의연 영수증(1919.05.02.) 독립의연으로 15달러를 낸 최응칠에게 1919년 5월 2일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재무 강영소의 명의로 발급한 영수증이다. 1916년에 학생 신분으로 도미한 최응칠은 1919년 5월 26일에는 국민회 중앙총회에서 독립의연 모집과 인구등록을 위해 각 지방에 파출소를 설치할 때 유타주 쏠렉 지방 파출위원으로 서임됐다미주 한인들, 독립을 위해 힘과 돈을 모으다미주 한인 단체들은 위와 같은 임시정부의 재정정책과 관련된 모금뿐 아니라 독립운동을 지원하기 위한 다양한 명목의 의연금을 모금했다. 대표적인 것으로 3·1운동 직후와 중일전쟁이 미일전쟁으로 치닫던 시기의 의연금 모집을 살펴보기로 하자.3·1운동이 전국적으로 발발한 사실이 미주에 알려지자 한인사회에서는 3·1운동을 지원하고 독립운동을 추진하기 위해 대대적인 의연금 모집운동을 전개했다. 3월 13일에 열린 국민회 중앙총회 임시위원회에서는 “북미, 하와이, 멕시코 동포의 이번 대한독립단 응원에 대한 책임은 재정 공급이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하며, 이번 의연을 ‘독립의연’이라고 이름하고 각 지역에 임시파출소를 설치하여 의연금을 모으기로 했다. 독립의연 영수증(자료05)에는 “왜놈들이 우리의 애국 여학생의 팔을 칼로 자르던 참상”을 보여주는 삽화와 “우리는 자유를 위하여 마지막 방울의 피가 흐르기까지 싸우기로 결심”, “우리는 장래 자손에게 비참과 치욕을 끼쳐주지 않고 영원한 자유행복을 유전하기로 결심”이라는 각오가 실렸다. 1919년에 모집된 독립의연은 42,625달러였으며, 이 해에 국민회에서 임시정부로 송금한 30,600달러에는 임시정부의 위임을 받아 징수한 인구세와 애국금 총 19,808달러 외에 자체 모금이었던 독립의연도 포함되어 있었다.1937년 7월에 발발한 중일전쟁이 확대되고 임시정부가 1940년 충칭으로 옮긴 후 한국광복군도 창설되었다. 미주 한인사회에서는 단체별로 이루어지던 독립운동 지원활동을 통일하기 위해 1941년 4월 해외한족대회를 개최하고 재미한족연합위원회(이하 연합회)를 결성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지원금을 비롯하여 독립운동에 사용할 모든 재정을 ‘독립금’이라 칭하고, 모든 독립금은 연합회로 납부하기로 했다. 연합회가 발행한 독립금예약서(자료06)에는 “1941년 12월 11일에 한국 임시정부는 대일선전을 포고하였으므로 나는 재정과 성력을 바쳐서 조선독립이 실현될 때까지 독립금을 예약하고 필납키를 맹세함”이라는 문구가 쓰여 있으며, 매달 낼 금액과 총액을 적게 되어 있다. 연합회는 예약서를 작성한 사람이 독립금을 낼 때마다 독립금 영수증을 발급했다. 1941년 5월부터 1948년 말까지 연합회의 독립금 수입은 149,482달러였고, 그중 58,202달러를 임시정부 후원금으로 사용했다.임시정부의 재정수입 상황을 보면, 성립 초기 국내에서 반입된 자금을 제외하면 수입금 대부분은 미주에서의 후원금이었다. 미주의 한인들은 조국의 국권 회복을 자신의 경제적 지위를 향상시키는 일보다도 더 큰 과제로 생각하고, 27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임시정부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alt06. 독립금예약서(1942.01.30.)  하와이 호놀룰루에 사는 전경무가 1942년 1월 30일 매달 12달러 50센트씩 총 150달러의 독립금을 재미한족연합위원회에 내겠다고 한 예약서이다. 독립기념관 소장자료에는 이 예약서와 함께 정경무가 12달러 50센트씩 독립금을 낸 영수증 총 7장이 있다. 전경무는 당시 연합회의 하와이의사부 의원으로 활동했으며, 광복 후 올림픽대책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선임되어 한국이 런던올림픽에 참가할 수 있도록 외교활동을 하던 중 비행기 사고로 순직했다    ※ 자료는 전명운기념사업회, 허영희, 최영보, 전인(Bassil I. Dunn) 님이 기증해 주신 것입니다. 독립기념관의 연구와 전시, 교육을 위해 소중한 자료를 기증해 주신 여러분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독립기념관 전시관에서 다음의 자료를 실물로 보실 수 있습니다.  - 자료01 (제6관 새나라세우기)  - 자료05 (제7관 특별기획전시실, 8월 11일까지) 참고고정휴 「대한민국임시정부와 미주지역 독립운동 - 재정문제를 중심으로」, 한국근대사학회 편,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 80주년기념논문집(상)』,  국가보훈처, 1999.윤대원 「대한민국임시정부 전반기(1919-1932)의 재정제도와 운영」, 한국근대사학회 편,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 80주년기념논문집(상)』,  국가보훈처, 1999.]]> Tue, 30 Jul 2019 15:12:56 +0000 32 <![CDATA[역사를 만든 사람 백마를 탄 김장군 김경천]]> 글 임영대 역사작가백마를 탄 김장군김경천 김경천의 본명은 김광서(金光瑞)로 1888년 함경남도 북청에서 무관 김정우의 아들로 태어났다. 일본 유학파인 부친과 마찬가지로 일본으로 가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고, 졸업 후 일본군 장교로 임관했다. 3·1운동 후에는 일본군을 탈영하여 독립전쟁에 뛰어들었다. 수많은 싸움을 치르며 용명을 떨쳤으나 말년에는 소련 당국에 의해 강제수용소에 갇혀 시베리아 얼음 속에서 쓸쓸히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8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여 그 넋을 기렸다.               alt김경천과 그의 아내 유정화   나는 유학생이었다가 일본 장교가 되었다. 아아, 나의 앞길은 이다지도 변화가 많은 것일까.김경천은 대대로 군무에 종사한 무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집안의 가풍을 따라 그 역시 무관이 되기를 꿈꾸었고, 이를 위해 일본 유학을 갔다. 당시 조선 무관 중 가장 엘리트라고 하면 당연히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유학한 이들이었다. 부친 김정우 역시 일본에서 유학하고 대한제국 육군 군기창장으로 재직하였으며, 아들의 꿈을 지원해주었다. 김경천은 1904년 황실유학생단 일원으로 유학하여 일본육군사관학교 23기생으로 입교했다."6백 수십 명의 일본 학도가 처음으로 약소국 사람인 내가 입학한 것을 기이하게 여긴다. 나는 형형한 눈으로 그들을 보며 한마디 말이라도 함부로 아니하고 코웃음은 고사하고 그들한테 행동으로도 녹록지 않음을 보여준다."언젠가는 재건될 한국군의 간성이 되겠다는 일념으로 이들이 힘든 교육을 견디고 있는 사이 이변이 일어났다. 경술국치로 국권이 완전히 일본에 넘어간 것이다. 조선인 유학생들은 혼란스러웠다. 학교를 그만두고 돌아갈 것인가, 일본군 장교가 될 것인가. 몇몇 생도들은 퇴교를 택했다. 그러나 김경천을 비롯한 대다수는 잔류했다. 원수인 일본의 군대이지만, 독립전쟁에 활용할 수 있는 군사지식을 배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1911년 일본군 기병 소위로 임관한 김경천은 후배인 조선인 장교들과 친목회를 조직했다. 이들은 비록 일본군 내에서일지언정 조선인으로서의 의식을 잊지 않도록 했다. 더러는 먼저 일본군을 떠나기도 했지만 김경천은 때를 기다렸다. 아는 벗들이 나더러 칼을 빼시오, 인제는 별수 없으니 칼을 빼시오 하며 여럿이 권한다.때를 기다리며 일본군에 복무하던 김경천은 중위가 되었다. 그때 도쿄에서 조선인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이 있었다. 여기에 감명을 받은 김경천은 병가를 내고 귀국하여 조국의 형편을 살폈다. 그리고 3·1운동의 현장을 보았다. 3년 후배인 지청천(이청천)은 5월 하순에 귀국했다."동대문 안 부인병원 앞으로 청년단이 가서 만세를 부르니 그 간호부들이 모두 울면서 만세로 응답함은 나의 마음을 더욱 분하게 한다. …청년회관에 있을 때도 아는 벗들이 나더러 칼을 빼시오, 인제는 별수 없으니 칼을 빼시오 하며 여럿이 권한다."김경천은 만세운동을 목격하고 마침내 일본군을 벗어날 때가 되었다고 판단했다. 주변 시선을 속이기 위해 낮에는 당구장, 밤에는 술집을 전전하다가 그해 6월 지청천과 함께 압록강을 넘어 마침내 독립 대열에 합류했다.당연히 일본군에서는 난리가 났으나 두 사람은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었다. 그리고 만주에서 대한독립청년당과 신흥무관학교 등에 들어가 활동하며 자신들이 익힌 군사지식을 동포 청년들에게 가르쳤다. 1920년에는 무기를 구입하기 위해 러시아령 연해주로 갔는데, 이 여행이 김경천의 명성을 불후의 것으로 만들었다.당시 연해주는 적백내전의 여파로 혼란에 빠져 있었다. 짜르 통치를 무너뜨린 적군과 구체제 복귀를 외치는 백군이 싸우고, 여기에 이권을 확보하려는 일본이 끼어들어 백군의 편을 들었다. 치안이 무너진 틈을 타 마적들도 날뛰었다. 일본군은 조선인과 러시아 주민들이 항일운동을 벌이지 못하도록 무기를 압수하고 마적들을 부추겼다. 김경천은 동포들을 학살하는 마적을 물리치기 위해 의병대를 조직하여 분투했다. 그리고 마적, 마적이나 다름없는 백군, 일본군을 상대로 연전연승하며 용명을 떨쳤다.적의 적은 아군이라 할 수 있었다. 김경천은 러시아 적군과 손을 잡고 일본군과 백군을 상대로 한층 더 가열한 혈전을 벌였다. 독립군의 규모 확대와 무장 확충도 진행했다. ‘백마를 탄 김장군’의 명성은 끝을 모르고 올라갔다. 『동아일보』가 김경천을 찾아가 인터뷰하고 지면에 게재했을 정도였다.그러나 나라 없는 군대는 오래갈 수 없었다. 백군을 완전히 제압하고 일본군이 철수하자 적군 사령부는 한인 독립군을 해산시켰다. 김경천은 총을 놓아야 했고, 1936년에는 일본 간첩이라는 혐의를 받고 강제수용소에 투옥됐다. 1939년 형기를 마치고 잠시 석방되었지만 1년도 되지 않아 다시 수감되었다. 시베리아에 있는 강제수용소로 이감된 김경천은 1942년 그곳에서 생을  마쳤다.김경천이 투쟁에 나선 기간은 불과 2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 2년간 쌓은 업적은 전설이 되었다. 백마를 타고 만주를 누비는 김장군의 이미지는 영원히 남았다. 건국훈장 대통령장 외에도 국가보훈처는 2003년 6월의 독립운동가로, 전쟁기념관은 2016년 1월의 호국인물로 김경천을 선정하여 독립을 위해 싸운 군인으로서의 업적을 기렸다.]]> Tue, 30 Jul 2019 15:07:31 +0000 32 <![CDATA[치열한 생존과 죽음 우리가 만난 얼굴]]> 치열한 생존과 죽음 치열할 수밖에 없는 시대였습니다. 일제의 감시와 탄압 속에서 치열하게 생존했고, 죽음을 각오한 채로 치열하게 싸웠습니다. 군사력은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제대로 된 훈련도 받지 못했고 신식 무기도 없었습니다. 어쩌면 패배가 당연한 전쟁에 나선 이유는 단 하나, 독립이었습니다. 당장의 승리가 아니더라도 이 기나긴 전쟁의 끝에서 마침내 ‘대한독립만세’의 함성이 울려 퍼질 것을 알기에 멈출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총칼을 들고 누구보다 치열하게 생존과 죽음을 넘나들었습니다. alt  ]]> Tue, 30 Jul 2019 14:44:24 +0000 32 <![CDATA[한국인의 터전: 미주 편 하와이 한인사회의 군인 양성 대조선국민군단의 결성]]> 글 홍선표 나라역사연구소 소장하와이 한인사회의 군인 양성 대조선국민군단의 결성1910년대 재미 한인의 군사·외교운동2 하와이로 간 박용만은 헤이스팅스에서 한인소년병학교를 운영한 경험을 바탕으로 대조선국민군단을 조직하고 ‘산넘어병학교(兵學校)’를 설립했다. 비록 운영의 어려움을 겪으며 학교는 개교 3년 만에 사실상의 폐교를 맞았지만, 당시 한인사회에 항일무장투쟁의 필요성과 상무주의 정신을 고취하기에는 충분했다. alt대조선국민군단 낙성식(1914.08.29.) 박용만의 하와이행과 군인양성 준비네브래스카 헤이스팅스에서 한인소년병학교를 설립한 박용만은 1912년 11월 8일부터 30일까지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제1회 대표원 의회에 참석하고, 하와이지방총회장 박상하와 함께 12월 6일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했다. 박용만이 하와이로 간 이유는 그 스스로 하와이로 가기를 원한 데다 하와이 한인들의 초청이 있었기 때문이다.하와이에서 박용만은 『신한국보』 주필에 취임해 언론 활동에 나섰고 총회장 박상하의 적극적인 후원 속에서 하와이지방총회의 자치규정 개정과 법인화를 추진하였다. 그 결과 회원 의무금 제도가 신설되어 재정을 든든히 하였고, 1913년 6월 9일 하와이 정부로부터 법인 인허증을 받았다. 1913년 8월 그는 『신한국보』의 명칭을 『국민보』로 바꾸고 다방면에서 하와이 한인사회를 이끌었다. 박용만은 네브래스카에서 축적한 군인양성의 경험을 하와이 한인사회에 접목했다. 1913년 9월 이승만이 교장으로 있던 한인중앙학원에 광무군인 출신 태병선과 함께 교관으로 나서 학생들의 군사훈련과 군사체조를 담당했다. 이렇게 훈련받은 학생들은 중앙학원 학도대란 이름으로 국민회 창설 5주년 기념식 때 분열식에도 참가했다.한편 경술국치 이후 군인양성을 추진하던 하와이지방총회는 기존 연무부의 조직을 이용해 1914년 2월 2일 국민회 설립 5주년 기념식 때 호놀룰루 시내에서 성대한 군 분열식을 거행하였다. 분열식에는 250여 명의 광무군인 출신들로 주축을 이루어 해군대, 군대, 학도대, 적십자대란 명칭으로 한인들이 참여했다. 분열식 직후 하와이지방총회는 3개 중대와 적십자대로 편제한 군단을 조직하기로 하고 초대 사령관으로 박종수를 선임했다. 이때의 군단은 정식 군단 조직이라 부를 수 없는 임시방편과 같은 것이었지만 하와이 한인들은 이때부터 박용만을 군단장으로 부르는 등 군단 조직에 눈뜨기 시작했다. 박용만은 군단 조직을 위한 작업에 박차를 가했다. 이런 때에 박종수가 1914년 4월 8일 파인애플 회사인 ‘립비 앤 모넬(Libby&Monell)’과 975에이커의 파인애플 경작계약을 맺고 박용만의 군단 지원을 약속하였다. 계약한 경작지 가운데 카할루우는 호놀룰루에서 약 13마일 떨어진 곳으로 삼면이 구릉으로 둘러싸여 외부에 쉽게 노출되지 않아 군사훈련에 적합하였다. 박종수의 후원으로 안원규, 이치경 등 하와이 내 한인들의 후원도 잇달았고 하와이지방총회(총회장 김종학)에서도 적극적으로 후원하였다 박용만은 1914년 5월부터 장정용 기숙사 건립에 착수하는 동시에 농장에서 일하며 군사훈련에 동참할 학생 모집에 착수하였다. 그리하여 1914년 8월 29일 오후 7시 160여 명의 학생과 500여 명의 축하객이 참석한 가운데 오아후섬 카할루우 농장에서 대조선국민군단 낙성식을 거행했다. 공식 출범일을 국치일인 8월 29일에 맞춘 것은 독립전쟁으로 반드시 나라를 되찾겠다는 우리민족의 확고한 의지를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낙성식을 마친 대조선국민군단은 그 다음날인 8월 30일 ‘산넘어병학교’를 개교하면서 본격적인 군인양성 교육에 들어갔다.대조선국민군단의 조직과 영향대조선국민군단은 사령부, ‘산넘어병학교’, 별동대로 구성된다. 사령부는 단장 박용만, 부관 태병선·구종곤, 서기 백운기, 장재 최순서와 경리부(부장 노훈, 부관 박승선), 의료부(부장 홍종훈·윤희중)로 구성되었다. ‘산넘어병학교’는 교장 박용만, 대대장 박종수, 부대대장 최찬영, 정교 정명렬을 중심으로 교장실과 4개 중대의 훈련대, 군악대, 피복창, 제피소로 구성되었다. 1916년 12월 노백린이 조명하·조명구와 함께 하와이로 온 후에는 그를 중심으로 별동대를 만들었다. 별동대는 장차 원동 즉 간도 지역에 군사학교를 설립할 계획으로 만든 특별 조직이었다.대조선국민군단에 참여한 지도급 인물들은 대부분 대한인국민회에서 활동한 경력을 갖고 있었다. 참가한 학생들은 1915년 3월 당시 218명이었고 그 가운데 광무 군인 출신이 75명이었다. 학생 중에는 생계유지를 위해 입학한 사람도 많았다. 학생들의 일과는 오전 4시 기상하여 5시 식사 후 오전 7시부터 9시까지 2시간 동안, 다시 오후 1시부터 5시까지 파인애플 농장에서 일하는 순서로 짜였다. 그 사이인 오전 9시부터 11시까지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그리고 저녁 7시부터 산술, 지리, 한문, 한글, 『군인수지』, 어학(영어, 일어) 등 학과 공부를 했다. 그러나 매일 이른 아침부터 시작되는 노동 때문에 저녁 학과 수업은 제대로 이루어지기 어려웠다. 대조선국민군단의 운영을 어렵게 한 것은 재정 문제였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1915년 10월 카후쿠의 제당 회사와 계약을 맺었다. 농장에 나가는 대신 공장에서 일한 학생들은 자신의 수입(월수입 약 21달러) 중 70% 이상을 군단에 냈는데 그럼에도 군단 운영은 쉽지 않았다. 힘든 노동 속에서 학생들은 매일 오전 4시 30분 기상해 5시에 조반을 먹고 5시 30분부터 오후 4시 30분까지 일했고 오후 6시 30분부터 8시 30분까지 학과 공부에 매진했다. 매일 고된 노동의 피곤함을 무릅쓰고 학과 수업을 받는 학생들의 열정과 열의는 대단했다. 하지만 고된 일과를 견디지 못하고 떠나는 학생들도 있었다. 박용만은 군단의 조직과 운영을 안정시키고 활성화하기 위해 의연금 모집 활동을 전개하는 한편 국내외 한인들과 교섭하였다. 대외 교섭의 성과로는 박용만을 만난 장일환이 1917년 3월 23일 백세빈, 배민수 등과 평양에서 조선국민회를 결성한 것을 들 수 있다. 그런데 1916년 들어서 군단에 대한 하와이 내 일부 한인들의 반대 여론과 하와이주재 일본총영사관의 방해공작, 하와이 정부의 압박 등으로 군단 운영이 어려워지면서 1917년이 되면 사실상 폐쇄되고 만다. 네브래스카에서 하와이로 이어진 박용만의 군인양성의 꿈은 하와이에서 오래가지 못했지만 3·1운동 직후 그가 만주와 연해주, 그리고 북경에 간 뒤에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되었다. 또 그가 뿌린 항일무장투쟁의 씨앗은 미주 한인들에게 상무주의 정신을 고취해 1920년 노백린의 윌로스 비행학교 설립에 큰 영향을 주었다. ]]> Tue, 30 Jul 2019 15:33:36 +0000 32 <![CDATA[끝나지 않은 독립운동 국외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와 그 후손들에 대한‘국적법’ 예우]]>   글 이계형 국민대학교 특임교수국외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와그 후손들에 대한 ‘국적법’ 예우1945년 우리 민족은 광복을 맞았지만, 독립운동은 끝나지 않았다. 여전히 미완으로 남은 사건, 해결되지 못한 문제, 기억해야만 하는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끝나지 않은 독립운동은 독립운동사를 과거에 머문 역사가 아닌 현재의 문제로 다루며, 오늘도 신문 한쪽을 차지하고 있는 독립운동 및 일제강점 이슈를 소개한다. 비로소 조국으로 돌아온 독립운동가의 후손들2019년에 들어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한 국외 독립운동가 후손들에 관한 기사를 자주 접한다. 올해 3월까지만 해도 39명이 새롭게 국적을 취득했다. 이는 대한민국 국민이 되는 요건을 정한 ‘국적법’에 의한 것이다.  독립을 하고 74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야 그들이 겨우 국적을 취득하게 된 이유와 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경술국치 후 국내에서 활동하던 많은 독립운동가들은 독립운동기지 개척과 무장투쟁을 목적으로 두만강과 압록강을 건넜다. 그리고 이들은 만주, 연해주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이어갔다. 그 가운데는 사망하여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거나, 해방 후 남북으로 분단된 상황에서 고향으로 돌아갈 기회를 놓치기도 하였다. 특히 중국이 공산화되면서 귀환길이 가로막혀 적지 않은 독립운동가와 가족이 중국인으로 살아가야 했다.이후 40여 년이 지난 1992년, 한중수교가 이뤄지면서 비로소 그들의 귀환이 가능해졌다. 세월이 흐른 만큼 세상을 떠난 독립운동가보다 그 유가족의 귀환이 먼저 이루어졌다. 1989년 1월 독립운동가 김동삼의 유족이 최초로 영주 귀국하였다. 정부는 ‘국적판정’이라는 절차를 통해 그들이 대한민국 국민임을 인정했다. 1994년 12월에는 광복 50주년을 맞아 독립유공자와 그 유족 또는 가족의 생활 안정과 복지향상을 목적으로 하는 ‘독립유공자예우에 관한 법률’을 별도 제정하였다. 그들의 영예로운 생활을 유지·보장할 수 있는 실질적인 보상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취지에서였다.하지만 ‘국적판정’은 영주 귀국이 소수에게만 적용되어 동포사회에 불만을 초래했다. 그뿐만 아니라 본래 거주하던 나라의 공민을 우리 국민으로 취급하여 외교적 마찰을 일으켰다. 이에 1997년, 우리 정부는 특별히 중국과 러시아 동포를 외국인으로 간주해 귀화나 국적회복을 통해 대한민국 국민이 될 수 있도록 법을 바꾸었다. 2010년 개정된 ‘국적법’에서는 독립유공자 후손의 경우 그들의 배우자나 직계비속 등은 나이에 상관없이 언제든지 국적회복을 신청할 수 있고, 복수국적도 허용되었다. 2018년 12월 ‘국적법 시행령’이 개정되면서 법무부 장관의 국적회복 허가 후에 재외공관장 앞에서 국민선서 제창 및 국적회복 증서를 받으면 즉시 대한민국 국적회복이 허가되었다. 정부는 이들의 정착을 돕기 위한 지원금도 지급하고 있다. 2019년 6월 현재까지 독립유공자 후손 1,900여 명이 대한민국 국적을 획득하였다. 그들의 이전 국적은 중국이 90% 이상으로 압도적이고, 그다음으로 러시아가 많다. 우즈베키스탄·쿠바·카자흐스탄·미국·우크라이나·투르크메니스탄·일본·캐나다 출신도 있다. 아쉬운 것은 대한민국 국민이 되었지만, 정착이 어려워 원래 살던 나라로 되돌아가는 후손도 적지 않다는 점이다. 후손들에 대한 예우를 다시 한번 생각해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국적을 잃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독립유공자의 국적법 회복은 이보다 더뎠다. 1912년 3월, 일제가 조선의 호적을 정리하려고 제정한 ‘조선민사령’ 때문이다. 해방 이후 정부는 ‘조선민사령’을 근거로 대한민국 국적을 부여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독립운동을 위해 일제 치하 시기 중국이나 연해주 등지로 망명한 독립운동가들은 무국적자가 되고 말았다. 그 후손들 또한 재산상속은 물론 교육 혜택과 직업 선택의 기회도 얻지 못하는 ‘법적 사생아’가 되었다.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사학자·언론인으로 활동하며 민족의식 고취에 힘썼던 단재 신채호가 대표적인 경우이다. 신채호는 1910년 4월 중국으로 망명하였기 때문에 당시 호적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1936년 2월 뤼순감옥에서 한 많은 생을 마감하고, 유골은 고향인 청주 남성면으로 귀향했지만 ‘무국적자’라는 이유로 매장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해방 후 정부는 이 문제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1962년 3월, 신채호에게 건국공로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여전히 대한민국 국민이 아닌 무국적자였다. 1978년 그의 묘소 옆에 사당을 지어 영정을 봉안하고 기념관이 세워지는 동안에도 국적회복을 위한 노력은 없었다. 신채호의 후손은 외가 호적에 이름을 올린 채 살다가 대법원 청원을 통해 ‘신채호’라는 이름 석 자를 큰아들 신수범(사망) 호적에 올렸다. 그러나 호적등본은 큰아버지 이름으로만 뗄 수 있었다.신채호뿐만 아니라 독립운동가 상당수가 같은 문제를 안고 있다. 나라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 분들이 일제가 만든 제도 때문에 독립 후에 국적 없는 유령이 된 것이다. 이상룡·홍범도·김규식·이상설 등을 비롯한 300여 명의 독립운동가가 무국적·무호적 상태였다. 1932년 6월, 생을 마감한 이상룡은 1911년 1월 서간도로 망명하여 활동했다. 그로부터 80년 만인 1990년에 그의 유해가 중국 흑룡강성에서 고국으로 돌아왔지만, 여전히 무국적자 신분을 벗어나지 못했다.2005년 8월, 한나라당 임인배 의원을 비롯한 여야 의원 20명의 서명을 받아 ‘국적법 일부개정법률안’을 내놓았다. 핵심 골자는 ‘순국선열로서 일제 통치하에서 국적을 갖지 않거나 외국의 국적을 보유한 상태로 사망한 자에 대해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한 것으로 간주한다’는 내용이다. 또한 열린우리당 김원웅 의원 등 여야 의원 38명도 ‘국적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주된 내용은 ‘독립운동에 기여한 조선인으로서 일제 때 무국적 상태로 있다가 1945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전에 사망한 자는 대한민국 국적을 가진 자로 본다’는 것이다. 두 법안은 국적회복 대상을 무국적자로 할 것인지, 국외 국적자까지 포함할 것인지에 대한 약간의 차이만 있을 뿐 근본 취지는 같았다. 그러나 법은 해를 넘겨 자동 폐기됐다. 이미 법적으로 독립운동가를 우리국민으로 여겨왔으며 사망자에게 소급해서 국적을 부여하는 일은 ‘국적법’ 체계를 뒤흔들 수 있다는 법조계의 주장이 강했기 때문이다. 정부도 조선족·고려족 등의 국적 문제로 비화할 것을 우려했다.그리하여 정부는 2009년 2월, ‘독립유공자예우에 관한 법률에 의한 가족관계등록 사무처리규칙’을 제정하여 무국적 독립운동가들도 ‘가족관계등록부(옛 호적부)’에 등재될 수 있도록 하였다. ‘국적법’을 개정하는 것보다 쉬운 방법을 택한 것이다. 당시 국가보훈처는 가족관계등록부는 생존해 있는 사람을 기준으로 작성되는 것이지만, 법 개정을 통해 “현재까지 등록부가 존재하지 않은 독립유공자들이 등록부를 만들 수 있도록 하여 명예선양과 그 후손들의 자긍심 고취 등의 효과가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며 의미를 강조했다. 이에 2009년 4월 신채호·이상룡 등 62명의 독립운동가가 가족관계등록부를 통해 해방 64년 만에 대한민국 국적을 부여받았다. 그렇다고 모든 문제가 풀린 것은 아니다. 아직도 무국적의 독립운동가가 있고, ‘국적법’이 개정되지 못해 경술국치 이전 독립운동가의 재산권을 후손들이 행사하지 못하고 있다.신채호의 며느리 이덕남의 말이 묘한 여운을 남긴다. “친일파들은 당시 조선의 귀족이었잖아요? 국적도 있고 호적도 척척 올리고 후손들에게 물려줄 땅도 수십만 평에 이르죠. 친일파 재산을 환수해도 한이 안 풀리는데, 있는 땅에서 조상의 넋을 기리며 살고 싶은 이 소망마저 짓밟히니 정말 이민이라도 가고 싶습니다.” 일본으로부터 독립했지만, 아직도 일제시기의 법령에서는 독립하지 못했다는 씁쓸한 감정을 지울 수 없다. ]]> Tue, 30 Jul 2019 15:32:22 +0000 32 <![CDATA[우리의 오늘 세계의 그날 신간회와 민족통일전선의 시대]]>     글 강응천 기획집단 문사철 대표, 역사저술가신간회와 민족통일전선의 시대  침략과 압제에 저항하는 사람들은 가능한 한 모든 힘을 모아야 한다. 한국, 중국, 인도 등 식민지와 반식민지의 반제국주의 운동 세력은 1920년대 들어 이념과 종교를 넘어 광범위한 통일전선을 모색했다. 중국이 국공합작을 성사시켰고, 인도가 힌두교와 이슬람교의 제휴를 실현했다. 동방의 민족주의 세력과 연대해 고립을 벗어나려던 소련은 국공합작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이러한 통일전선의 흐름은 한국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1927년 비타협적인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이 독립과 사회 개혁을 위해 힘을 합쳐 결성한 신간회가 그것이었다.                alt두 진영을 하나로 만드는 운동, 민족통일전선인종 간의 대립 이상으로 20세기 세계를 어둡게 만든 것은 계층 간, 계급 간 대립이었다. 그러한 대립은 식민지의 독립운동에도 영향을 미쳐 좌익 사회주의 진영과 우익 민족주의 진영의 분열을 낳았다. 1927년 2월 15일 서울기독교청년회관(YMCA) 강당에서 창립된 신간회는 그러한 진영 간 대립을 극복하고 독립운동에 힘을 모으려는 시도였다. 신간회는 회장 이상재, 부회장 홍명희 등 주로 명망 있는 민족주의자를 지도부로 추대하고 사회주의자들이 각 단위 조직에 대거 참여함으로써 민족통일전선을 이룩했다. 강령으로는 “정치적·경제적 각성을 촉진함, 단결을 공고히 함, 기회주의를 일체 부인함” 등을 채택했다. 신간회가 결성된 가장 중요한 배경으로는 민족주의자 내부에 대두된 자치운동을 꼽을 수 있다. 1920년대 초반 물산장려운동과 민립대학설립운동이 실패하자 송진우, 최린, 최남선 등 일부 타협적 민족주의자들이 일제와 협조하는 자치운동으로 돌아섰다. 자치운동은 일본의 조선 지배를 인정하고 일본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정치운동을 전개하자는 것으로, 사실상 조선의 독립을 포기한 운동이었다. 이에 민족주의 진영 내부에서 반발이 일어나 안재홍, 홍명희 등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이 사회주의자와 연합을 추진해 6·10만세운동을 거치면서 신간회의 결성에 이르게 된 것이다.alt신간회 창립 1주년 기념사진(1928.02.15.)두 진영을 하나로 만드는 운동, 민족통일전선인종 간의 대립 이상으로 20세기 세계를 어둡게 만든 것은 계층 간, 계급 간 대립이었다. 그러한 대립은 식민지의 독립운동에도 영향을 미쳐 좌익 사회주의 진영과 우익 민족주의 진영의 분열을 낳았다. 1927년 2월 15일 서울기독교청년회관(YMCA) 강당에서 창립된 신간회는 그러한 진영 간 대립을 극복하고 독립운동에 힘을 모으려는 시도였다. 신간회는 회장 이상재, 부회장 홍명희 등 주로 명망 있는 민족주의자를 지도부로 추대하고 사회주의자들이 각 단위 조직에 대거 참여함으로써 민족통일전선을 이룩했다. 강령으로는 “정치적·경제적 각성을 촉진함, 단결을 공고히 함, 기회주의를 일체 부인함” 등을 채택했다. 신간회가 결성된 가장 중요한 배경으로는 민족주의자 내부에 대두된 자치운동을 꼽을 수 있다. 1920년대 초반 물산장려운동과 민립대학설립운동이 실패하자 송진우, 최린, 최남선 등 일부 타협적 민족주의자들이 일제와 협조하는 자치운동으로 돌아섰다. 자치운동은 일본의 조선 지배를 인정하고 일본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정치운동을 전개하자는 것으로, 사실상 조선의 독립을 포기한 운동이었다. 이에 민족주의 진영 내부에서 반발이 일어나 안재홍, 홍명희 등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이 사회주의자와 연합을 추진해 6·10만세운동을 거치면서 신간회의 결성에 이르게 된 것이다.alt쑨원에 이어 중국국민당 지도자가 된 장제스. 반공주의자였던 장제스가 공산당을 불법화하면서 국공합작이 결렬되었다               흔들리는 민족통일전선의 원조, 국공합작아시아 민족통일전선의 원조는 중국의 국공합작이었다. 제국주의 열강과 봉건 군벌에 맞서 반제반봉건 운동을 펼치던 중국의 정치세력은 국민당과 공산당으로 나뉘어 있었다. 쑨원이 이끄는 국민당은 민족주의 정당이고 천두슈, 리다자오 등이 이끄는 공산당은 사회주의 정당이었다. 1921년 창당한 공산당은 그해 일제와 군벌을 타도하고 민족혁명을 이룬다는 취지로 국민당과 합작하기로 결정했다. 여기에는 식민지해방투쟁에서 민족주의 세력의 역할을 인정한 소련의 입장도 반영됐다. 국민당도 제국주의와 군벌에 반대하는 노선을 걷던 참이라 이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1924년 1월 국민당은 소련과의 연대, 공산당 포용, 농민과 노동자 원조라는 정강을 채택해 공산당과 협력을 공식화했다. 그에 따라 리다자오, 마오쩌둥 등 공산당원이 당적을 유지한 채 국민당에 입당해 주요 간부직을 맡음으로써 중국판 민족통일전선인 국공합작이 성사되었다. 그러나 국공합작의 길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한국에서도 민족통일전선 조직인 신간회가 출범한 1927년 바로 그해에 국공합작은 파탄을 맞이했다. 쑨원이 사망한 뒤 국민당의 지도자가 된 장제스는 반공주의자였다. 그해 3월 공산당과 상하이 노동자들은 군벌이 장악하고 있던 상하이를 해방하고 장제스의 입성을 열렬히 환영했다. 그러나 공산당 세력이 커지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장제스는 노동자 무장대와 총공회(노조)를 해산시키고, 공산당을 불법화하는 정변을 단행했다. 이후 중국 전역에서 공산당 사냥이 시작됐고, 리다자오마저 베이징에서 군벌 장쭤린에게 잡혀 죽임을 당했다. 당시 우한에는 공산당과 국민당 좌파가 협력해 세운 국민당 정부가 있었으나, 장제스는 난징에 새로운 정부를 세우고 우한정부를 압박했다. 이에 왕자오밍 등 우한의 국민당 세력마저 반공으로 돌아서자, 마오쩌둥이 이끄는 공산당 세력은 국민당에 대한 무력 반격에 나섰다. 3년 넘게 이어오던 국민당과 공산당의 국공합작이 파탄으로 끝나고, 양측은 무력을 동원한 내전에 돌입했다. 그해 8월 1일 난창에서 공산당 군대와 국민당 군대 간에 최초의 교전이 일어났다. 일주일 뒤에는 추수철을 맞아 후난성, 장시성 일대에서 공산당이 대대적인 추수 봉기를 일으키기도 했다. 장제스는 우한정부를 흡수해 난징에 단일정부를 세우고 대대적인 공산당 토벌을 벌였다. 잇따른 봉기에서 대패한 공산당은 저장성 징강산으로 숨어들어 훗날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그래도 아시아는 민족해방을 위해 싸운다중국에서 민족통일전선의 예기치 않은 분열이 일어났지만, 제국주의 침략에 맞서 싸우는 아시아 여러 민족의 해방투쟁은 그칠 줄 몰랐다. 제국주의에 비해 힘이 약한 민족해방 세력들이 여러 형태로 힘을 합치는 민족통일전선도 계속 확산되었다. 1928년 인도의 민족 지도자 네루는 인종, 종교, 계층 등의 분열을 극복하고 인도독립연맹을 결성했다. 그리고 영국에 대한 독립운동을 더욱 거세게 벌여나갈 것을 안팎에 엄숙히 선포했다. 인도는 제1차 세계대전 때 영국 편에서 참전했고, 영국은 그 대가로 자치권을 보장하겠다고 약속했다. 인도는 총 110만 명의 병력을 투입하며 전력을 다해 영국을 도왔다. 그러나 세계대전 이후 영국은 자치권 인정을 차일피일 미루면서 인도인들의 반감을 불러왔다. 인도독립연맹은 그러한 인도인의 불만이 결집된 결과였다. 네루는 인도독립연맹을 토대로 세력을 결집해 민족운동의 최고기관인 인도국민회의 의장에 진출했다. 그는 비폭력평화주의자인 간디와는 달리 독립을 위해서는 다소 폭력적인 운동도 불가피하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네루를 중심으로 한 인도의 독립운동 세력은 영국과 타협 없는 투쟁을 벌여 나갔다. 네덜란드의 식민지인 인도네시아에서도 독립운동의 전열이 재정비되었다. 1927년 젊은 독립운동가 수카르노를 수반으로 한 인도네시아국민연합이 출범한 것이다. 인도네시아에서는 그동안 한편에서는 이슬람 세력을 중심으로, 다른 한편에서는 공산당을 비롯한 사회주의 세력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이 전개되어 왔다. 그러나 힘의 분산으로 인해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인도네시아국민연합은 수카르노가 민족주의 깃발을 내걸고 그 아래에 민족주의 세력, 이슬람 세력, 사회주의 세력을 모두 아우르는 조직으로 탄생했다. 이처럼 인도네시아의 독립 역량을 결집한 국민연합은 곧 국민당으로 전환해 네덜란드를 상대로 본격적인 정치투쟁을 벌여 나갔다.유럽은 질병의 공포와 맞서 싸운다1928년, 영국의 세균학자 알렉산더 플레밍은 병균을 죽이는 기적의 항생물질 페니실린을 발견, 의학혁명에 시동을 걸었다. 플레밍은 포도상구균을 연구하던 중 우연히 페니실리움 노타툼(Penicillium notatum)이라는 푸른곰팡이를 관찰하게 되었다. 그는 푸른곰팡이 근처에 포도상구균이 유독 보이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여긴 끝에 푸른곰팡이가 포도상구균을 죽이는 항생물질을 분비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플레밍은 이 물질을 페니실린이라 이름 붙이고, 푸른곰팡이를 배양해 각종 세균을 접종했다. 그 결과 페니실린이 모든 세균에 효과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폐렴, 매독, 임질, 디프테리아, 성홍열에 효과가 있음을 증명해냈다. 플레밍이 페니실린을 발견한 것은 우연이지만, 그는 이미 10년 전부터 항균물질을 연구해왔다. 런던대학교 성메리병원에 근무하던 1918년, 세균에 감염된 환자들의 치료 방법을 연구한 것이 출발점이었다. 1921년에 항균물질인 라이소자임(Lysozyme)을 발견하고, 이듬해 「조직과 분비물에서 발견된 놀랄 만한 항균물질」이란 논문을 영국학술원에 발표했다. 그러한 연구 성과가 쌓여 페니실린의 위대한 발견이 이루어진 것이다. 플레밍은 페니실린이 임상적으로 얼마나 사용 가능한지를 꾸준히 실험해 나갔다. 살아 있는 동물, 즉 실험용 쥐와 토끼에 주사해 그 부작용을 살피고 페니실린의 추출과 농축을 위한 방법을 개발했다. 그 후 페니실린은 인체 조직이나 면역 체계에 해를 끼치지 않는 효과적인 항생물질로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 아시아의 수많은 인류가 유럽의 제국주의 지배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싸우고 있을 때, 바로 그 유럽의 실험실에서는 인류를 질병의 공포에서 해방시킬 의학혁명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 두 가지 ‘해방’이 하나의 흐름으로 합류하는 것은, 1920년대에는 아직 요원한 일이었다.]]> Tue, 30 Jul 2019 15:34:58 +0000 32 <![CDATA[이 땅의 숨결 원도심, 바다, 야경을 아우르다 창원의 재발견]]> 글·사진 임운석 여행작가원도심, 바다, 야경을 아우르다창원의 재발견   2010년 창원, 마산, 진해가 통합해 창원시가 출범했다. 창원은 의창구, 성산구로 나뉘었고, 마산은 마산회원구와 마산합포구로, 진해는 진해구로 이름표를 고쳐 달았다. 통합 창원시 내에 5개의 구가 생긴 셈이다. 옛 마산의 원도심, 해안 산책로에서 만나는 바다, 도심 속 공원의 야경이 어우러진 창원을 소개한다. alt문신예술골목에 그려진 문신의 자화상   alt지역 작가들의 작품이 전시되는 아트센터   옛 모습 그대로 창동예술촌 골목길 창원시 통합, 8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아직도 마산 사람들은 옛 마산을 그리워한다. 마산 토박이들이 특히 그렇다. 마산이 역사와 의미가 남달리 깊은 곳이라는 증거다. 마산은 19세기 말에 개항장이었으며, 1960~1970년대에는 3·15의거와 부마민주항쟁이 일어난 민주화운동의 발상지였다. 1970~1980년대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수출자유지역이 조성돼 산업화를 견인하는 공업도시였다. 이처럼 오랜 세월 동안 애증이 교차하다 보니 쉽게 그 이름을 놔버리지 못했으리라.왜 그들은 마산을 그렇게도 붙잡고 싶을까? 궁금한 생각에 옛 마산의 향수가 고스란히 묻어 있다는 거리를 찾았다. 구마산이라 불리는 곳이다.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의 조계지가 있던 신마산 지역(지금의 반월, 월영, 중앙동 일대)과 반대되는 곳으로 지금의 오동동, 창동, 노산동 지역이다. 도시는 생성-성장-팽창-쇠락한다. 또 쇠락기를 맞은 도시는 다른 곳으로 확장해가는 속성이 있다.  그런 탓에 원도심은 옛 영화를 간직한 채 잊히기 마련이다. 구마산의 중심이었던 창동도 예외는 아니었다.창동은 조선시대 조창이 있던 곳이다. 관원과 상인이 오가는 상권의 노른자위였다. 그 이름이 오늘날 창동이 됐다. 골목마다 풍성한 이야기가 있는 것도 오랜 역사에 기인한다. 쇠락의 기운이 한창일 때 창동에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때는 봄바람이 불기 시작한 2011년 3월이다. 창원시가 창동의 빈 점포 50곳을 임차해 문화예술인에게 무상으로 임대해주고 창동예술촌을 형성한 것이다.창동예술촌 여행은 상상길에서 시작한다. 불종거리에서 부림시장까지 155m 거리에는 외국인 2만 3천여 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 보도블록이 있다. 그 길을 따라 왼쪽 골목길 입구에 ‘250년 길’이라 적힌 이정표가 눈에 띈다. 창동에 조창이 들어선 것을 기념한 것이다. 반대편에는 조각가 문신의 작품에서 모티브한 붉은색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골목길을 따라 들어가면 길 가운데 아고라광장과 창동예술아트센터가 보인다. 다양한 공연과 퍼포먼스가 펼쳐지고 지역 작가들의 전시회가 기획된다. 창동예술골목은 1950~1980년대를 추억하는 마산예술흔적골목, 작은 공방들과 옷가게 등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에꼴드창동골목, 공예 거리로 꾸며진 문신예술골목으로 나뉜다. 네댓 사람이 함께 걸으면 비좁을 것 같은 골목이지만 아기자기한 공방과 갤러리, 오랫동안 한자리에서 창동을 지켜온 저력 있는 가게들이 손님을 반긴다. 게다가 골목마다 개성 넘치는 미술작품들이 설치돼 있어 갤러리를 걷는 듯하다. 특히 문신예술골목을 지나 3·15가족나무골목으로 들어서면 형형색색 화사한 화분들이 발걸음을 더욱 가볍게 한다.창동에 왔다면 들러볼 맛집이 있다. 부림시장의 떡볶이, 진한 멸치국물 맛이 일품인 버들국수, 겨자에 김밥을 찍어 먹는 창동분식, 옥수수식빵이 맛있는 코아양과, 빠다빵이 유명한 고려당이 그곳이다. 마산의 역사와 지역민들의 삶이 서린 음식골목도 있다. 지친 서민들이 하루를 마감하며 술잔을 주고받았던 통술골목과 족발골목, 마산의 대표 음식인 아귀찜골목이다. 창동은 옛 마산의 얽히고설킨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듯 여행자에게 말을 걸어온다. 문화예술로 거듭난 창동에 온 것을 환영한다고.            alt섬의 정취가 느껴지는 저도 비치로드   alt발아래 바다가 보이는 저도 콰이강의 다리 스카이워크   콰이강의 다리 건너면 섬이 잇댄다, 저도 비치로드창동예술촌이 옛 마산의 역사와 예술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라면 그림 같은 자연풍광을 만날 수 있는 곳도 있다. 마산합포구 구산면에 위치한 ‘저도(猪島)’라 불리는 섬이다. ‘돼지가 누워있는 형상’을 닮아 그리 부른다.저도가 사람들에게 입소문을 타기 시작한 것은 저도와 육지를 연결하는 다리 때문이다. 다리는 모두 2개다. 아래에 붉은색 다리는 1987년 완공된 것으로 영화 「콰이강의 다리」에 나온 다리를 닮았다 하여 ‘콰이강의 다리’로 불린다. 사랑하는 사람끼리 손을 잡고 다리를 건너면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믿거나 말거나 한 이야기가 전해온다. 다리 초입에 하트모양의 조형물과 포토존이 있는 이유다. 두 번째 다리는 콰이강의 다리가 보행전용으로 사용되자, 2004년에 완공한 것이다. 괭이갈매기를 형상화한 아치곡선이 특징이다. 저도 주민들과 창원시는 콰이강의 다리 상판의 콘크리트 바닥을 걷어내고 특수 제작된 강화유리를 설치한 뒤 지난해 3월 ‘저도 콰이강의 다리 스카이워크’라는 이름으로 재개장했다. 야간에는 LED조명을 밝혀 은하수를 걷는 듯한 신비로운 경험을 할 수 있도록 꾸몄다. 그 결과 개장 후 약 1년 2개월 만에 100만 명이 찾는 창원 제일의 명소가 됐다.유리보호용 덧신을 신고 다리를 건너본다. 13.5m 아래에 바닷물이 일렁인다. 때마침 어선이 바닷물을 가르며 다리 밑을 지난다. 흔치 않은 특별한 볼거리에 사람들이 탄성을 터트린다. 다리를 건너 섬에 발을 디디자 어촌마을 특유의 정취가 느껴진다. 비치로드는 저도 해안선과 등산로를 잇는 6.5km둘레길이다. 코스는 가장 짧은 1코스(3.7km, 1시간 30분), 해안데크로드 전 구간을 걷는 2코스(4.7km, 2시간), 바다와 산길을 잇는 3코스(6.5km, 3시간)로 나뉜다. 숲길은 여느 트레킹 코스와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다만 숲길 여기저기 벤치가 놓여 있어 쉬어가기 좋고, 숲에서 흘러내리는 계곡물소리와 바닷소리, 갈매기소리가 어우러지는 게 특징이다. 그렇다고 실망하긴 이르다. 비치로드의 진짜 매력은 제1전망대 이후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숲길에서 느낄 수 없었던 장쾌한 풍광과 남해 바다를 점점이 수놓고 있는 아련한 섬들까지. 안내 팻말에 적힌 대로 거제, 고성은 물론이고 낯선 이름의 섬들을 찾아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제2전망대를 지나 제3전망대부터는 해안을 따라 걷는 데크로드 구간이다. 탁 트인 바다, 흰색 바둑돌처럼 촘촘히 뜬 굴양식 부표, 간간히 오가는 어선들이 저도 비치로드의 아름다움을 완성한다. alt열대야를 잠재우는 용지호수의 무빙보트   alt용지호수공원의 핫스폿 슈퍼문      밤을 잊은 도시 여행자를 위한 용지호수공원옛 마산이 역사와 문화의 결정판이라면 옛 창원은 산업화, 계획도시의 표본이다. 시원하게 뚫린 창원대로를 중심으로 대기업 공장이 비행기 격납고처럼 널찍하게 자리하고, 창원시청 로터리 주변 번화가는 서울 강남도 울고 갈 판이다. 게다가 경남 최초 시내면세점인 대동면세점과 100여 개의 브랜드와 호텔, 대형마트 등 편의시설이 입점해 있는 시티세븐까지 있으니 도시문화를 향유하고 싶은 여행자들에게는 꿀잼 가득한 곳이다.현대적인 도심에 쉼터로 자리매김한 곳이 용지호수공원이다. 주말은 물론이고 평일 저녁에도 연인들의 데이트 발걸음이 이어진다. 공원을 즐기는 방법은 세 가지다.첫째, 호수를 따라 1km 남짓한 산책로를 걷는다. 곳곳에 벤치가 있어 쉬어가기에도 그만이다. 더위를 피하고 싶다면 산책로를 벗어나 숲속으로 들어가 보자. 발을 씻을 수 있는 편의시설이 완비된 발지압장과 해병대 상남훈련대 기념탑 주변에는 뙤약볕을 피할 수 있는 숲이 있다. 그늘진 잔디밭에 돗자리를 깔고 망중한을 즐겨도 좋고, 조각공원에 버금가는 수준 높은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잔디광장을 거닐어도 괜찮다.둘째, 호수 자체를 즐긴다. 창원의 명물 무빙보트를 타고 더위와 시름을 잊는 것이다. 무빙보트는 누구나 간단한 설명만으로 조작이 가능한 8인승 전기 충전식 보트다. 탑승객 스스로 배를 운전할 수 있어 연인들은 단둘이 보트에 올라 프러포즈를 하는 등 이벤트 공간으로도 활용한다. 친구나 가족모임을 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들은 미리 준비해온 음식을 나눠 먹으며 색다른 추억을 만들어 간다.셋째, 낮보다 밤을 즐긴다. 열대야가 기승을 부린다면 더더욱 용지호수공원을 찾아볼 일이다. 물·빛·음악이 선보이는 환상적인 분수 쇼가 펼쳐지고 야간경관조명은 열대야를 잠재운다. LED조명을 밝힌 무빙보트를 타거나 환상적인 슈퍼문을 배경으로 인생사진을 남기는 것도 잊지말자. ]]> Tue, 30 Jul 2019 15:36:35 +0000 32 <![CDATA[독립을 위한 투쟁 남녀노소가 따로 없다 어느 독립운동가의 초상]]> 글 김정인 춘천교육대학교 교수독립을 위한 투쟁남녀노소가 따로 없다 의열투쟁 하면 흔히 혈기 왕성한 청년의 활약을 떠올린다. 의열투쟁의 주인공이 대부분 청년인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독립을 바라는 마음에 남녀노소가 따로 있을 수 없듯이, 독립을 위한 투쟁에도 남녀노소가 따로 있지 않았다. 강우규와 남자현, 그들은 환갑이 넘은 나이에 식민권력을 향해 의열투쟁을 감행한 노인이었다.     alt대한국민노인동맹단 명부  독립투쟁에 나이는 필요 없다한반도가 만세 소리로 가득했던 1919년 3월 26일, 러시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서 독립운동 단체가 탄생했다. ‘살날이 많지 않기에 더욱 독립이 간절했던’ 노인들이 60세의 김치보를 단장으로 하는 대한국민노인동맹단(이하 노인동맹단)을 만들었다. 노인동맹단은 46세 이상이라는 나이 제한을 두었을 뿐 회원 자격은 남녀를 가리지 않았다. 3·1운동의 열기가 서서히 식어갈 무렵 노인동맹단은 만세시위와 외교투쟁을 벌였다. 먼저 1919년 5월 경성에 들어와 만세시위를 감행했다. 노인동맹단은 독립운동가 이동휘의 아버지인 이승교를 비롯한 7명을 경성으로 파견했다. 그들은 일본에 보내는 문서 2통, 취지서 수백 매를 들고 경성에 들어와 5월 31일 오전 11시 종로 보신각 앞에 나타났다. 그리고 연설을 하고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경찰에 체포되었으나 이승교, 정치윤은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추방당했고 안태순, 윤여옥, 차대유 등은 실형을 선고받고 서대문감옥에 수감되었다. 한편, 노인동맹단은 1919년 6월 25일 블라디보스토크 주재 일본 총영사관에 강문백과 연병우를 보내 단장 김치보 외 20명이 연명한 독립요구서를 제출하는 등 외교투쟁을 전개했다. alt강우규alt강우규 의거 『LA Times』 삽화alt강우규 의거지(현재 서울역 광장)청년에게 희망을 주고자청년에게 희망을 주고자 노인동맹단은 만세시위와 외교투쟁과 함께 의열투쟁을 감행했다. 3·1운동으로 하세가와 총독이 물러나고 새로 총독이 부임한다는 소식에 그를 저격하기로 한 것이다. 64세의 강우규가 나서기로 했다.  강우규는 1855년생이다. 평안남도 덕천군 무릉면 제남리에서 태어났다. 20대 말에 함경남도 홍원으로 이주해 잡화상을 경영했다. 이때 비록 나이는 18살이나 어렸지만 그가 믿고 따랐던 이동휘의 영향으로 영명학교와 교회를 세우는 등 계몽운동에 앞장섰다. 강우규는 1910년 대한제국이 망하자 망명을 결심했다. 이듬해 봄, 북간도의 두도구로 이주한 후 만주와 연해주 등을 돌아다니다 1915년 연해주 하바롭스크에 정착했다. 1917년에는 다시 길림성 요하현으로 이주해 러시아와의 접경 지역에 신흥동이라는 마을을 개척했다. 신흥동은 100여 호가 넘는 한인마을로 자리 잡으면서 독립군의 주요 근거지 역할을 하게 된다. 강우규는 이곳에서 광동학교를 열어 교장으로 활동했다. 1919년 3월 4일 3·1운동 소식을 들은 강우규는 신흥동에서 400~500명을 모아 만세시위를 벌였다. 4월에는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이승교 등 노인동맹단 간부들을 만났다. 강우규는 노인동맹단이 결성 직후 단원 모집을 위해 파견한 전단위원을 통해 노인동맹단에 가입한 것으로 보인다.   1919년 6월 14일 강우규는 수류탄 1개를 품고 에치고마루라는 일본배를 타고 원산에 들어왔다. 강우규가 경성에 나타난 것은 8월 5일이었다. 그로부터 1주일 후인 8월 12일 사이토 마코토를 새로운 총독으로 임명한다는 발표가 났다. 그가 부임하는 날짜, 즉 거사일은 9월 2일이었다. 강우규는 신문에 난 사이토의 사진을 오려 얼굴을 익혔다. 8월 26일에는 남대문역 부근 여인숙으로 거처를 옮기고 역 주변을 답사하며 본격적인 준비에 나섰다. 1919년 9월 2일 오후 5시, 사이토 총독 일행이 탄 기차가 남대문역에 도착했다. 환영 행사를 마친 사이토가 마차를 타고 총독관저로 향하는 순간, 강우규는 총독의 가슴을 향해 힘껏 수류탄을 던졌다. 사이토는 비껴갔지만 폭탄의 위력에 37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그는 현장에서 체포되지 않았으나 보름 후인 9월 17일 순사인 김태석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1920년 5월 27일 경성고등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되었고 그해 11월 29일 서대문감옥에서 65세의 나이로 죽음을 맞이했다. 생을 마감하던 순간 강우규는 사이토 총독에게 폭탄을 던진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내가 죽어서 청년들의 가슴에 조그마한 충격이라도 줄 수 있다면 그것은 내가 소원하는 일이다. 자신의 몸을 던져 청년에게 독립의 의지를 심어주고자 했던 노인 강우규, 그야말로 진정한 ‘청년’이었다. alt남자현alt남자현의 임종을 지키고 있는 가족들alt당시 하얼빈 주재 일본총영사관 터(현재 화원소학교) 언젠가 독립은 반드시 온다! 61세의 나이로 폭탄테러를 감행했던 남자현은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만일 너의 생전에 독립을 보지 못하면 너의 자손에게 똑같은 유언을 하여 내가 남긴 돈을 독립 축하금으로 바치도록 하라.  언젠가 반드시 독립이 될 것이니, 자신의 몸은 비록 세상에 없지만 남겨 놓은 돈으로라도 독립을 함께 축하하고 싶다는 간절함이 담긴 유언이다. 남자현은 1872년생으로 경상북도 영양군 석보면 지경리에서 유학자인 남정한의 막내딸로 태어났다. 19살이 되던 해에 경상북도 영양군 석보면 답곡리에 사는 김영주와 결혼했다. 하지만 남편은 을미의병이 일어났을 때 김도현의진에 속해 싸우다 이듬해 전사했다. 이후 남자현은 유복자를 기르며 직접 길쌈과 농사를 지어 생계를 유지했다. 남자현은 40대 중반의 나이인 1917년 친인척들이 망명해 있는 만주로 건너갈 준비에 들어갔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났을 때 남자현은 경성에 있었다. 이때 기독교인으로서 남대문교회를 중심으로 한 만세시위 계획에 참여했다. 그리고 아들 내외와 만주로 망명을 떠났다.    만주에서 남자현은 서로군정서와 통의부에 이어 정의부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주로 독립운동가를 후원하고 교육계몽에 힘쓰며 의열투쟁을 펼쳤다. 1926년 정의부 주도로 만든 조선혁명자후원회에는 발기인과 중앙위원으로 참여했다. 1927년 안창호를 비롯한 300여 명의 독립운동가가 중국 경찰에 체포되어 이 중 47명이 길림감옥에 갇혔을 때는 옥바라지를 하며 구명운동을 펼쳤다. 길림여자교육회 부흥을 위한 총회를 준비하고 사회를 보는 등 여성 교육과 계몽 활동에도 참여했다. 54세가 되던 1927년 4월에는 국내에 잠입해 경성에서 사이토 총독을 저격할 계획을 세웠으나 시도에 그치고 말았다. 1931년 10월 만주 지역 독립운동계의 최고 지도자 김동삼이 체포되어 하얼빈 주재 일본총영사관에 구금되었다. 남자현은 그의 친척으로 위장해 면회를 다니며 연락책 역할을 했다. 김동삼이 신의주로 호송될 때는 구출 작전을 준비했으나 갑자기 날짜가 바뀌면서 실패하고 말았다.남자현은 환갑이 되던 해인 1932년에는 홀로 외교투쟁을 벌였다. 그해 9월 일본의 만주 침략을 조사하기 위해 리튼을 단장으로 한 국제연맹조사단이 파견되었다. 남자현은 왼손 무명지 두 마디를 잘라 ‘한국독립원(韓國獨立願)’이라는 다섯 글자의 혈서를 써서 리튼조사단에 전달하고자 했으나 실패했다. 이듬해에는 다시 의열투쟁을 계획했다. 만주에 파견된 일본 전권대사인 무토 노부요시를 처단할 계획을 세웠다. 거사 예정일은 만주국 1주년 행사가 열리는 3월 1일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2월 27일 무기를 전달받고 행사장이 있는 신경으로 떠나려다 하얼빈 교외에서 체포되고 말았다.  하얼빈 일본총영사관 감옥에 갇힌 남자현은 단식 투쟁을 벌였다. 이로 인해 사경을 헤매게 되면서 결국 보석으로 석방되었으나 며칠 만인 8월 22일 숨을 거두고 말았다. 남자현은 죽기 전 중국 돈 200원을 독립이 되면 축하금으로 내놓으라고 유언했다. 이 돈은 해방이 되고 1946년 3월 1일 서울운동장에서 거행된 삼일절 기념식에서 김구와 이승만에게 전달되었다. 1933년 8월 22일 61세의 나이로 세상을 뜨는 순간 ‘여걸’이자 ‘전율할 노파’로 불리던 남자현은 마지막으로 ‘독립은 정신으로 이루어지니라’는 말을 남겼다. ]]> Mon, 09 Sep 2019 15:22:27 +0000 33 <![CDATA[조선의 마지막 선비들 史소한 이야기]]> 조선의 마지막 선비들 조선시대 선비는 많은 신분과 역할을 가졌다. 양반이었으며, 지식인이었고, 문인이자 정치가였다. 그리고 국권을 잃고 무너져가는 조선에서 그들은 독립운동가였다. 본래 선비는 성인의 글을 읽고 탐구하는 일을 제 책임으로 여겼지만, 외세의 침략으로 나라가 어려운데 책에서 답을 찾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었다. 그래서 그들은 책 대신 독립선언문을 읽었으며 붓을 내려놓고 총칼을 들었다. 국내에서의 독립운동이 쉽지 않자 선비의 신분을 벗어던지고 해외로 망명하는 이도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선비의 본분을 완전히 저버린 것은 아니었다. 유학자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창숙은 “성인의 글을 읽고도 그가 시대를 구하려 한 뜻을 얻으려 하지 않는다면 이는 거짓 선비다”라고 말했다. 글을 읽는 이유 또한 시대를 구하기 위함이므로, 독립운동의 그것은 선비의 본질과 다르지 않았다.마을에서 가장 나이 들고 지혜로운 노인을 큰 어른으로 모시듯, 일제강점기에 큰 어른 역할을 했던 것은 조선의 마지막을 지킨 선비들이었다. 물론 그들 중 일부는 경술국치와 함께 자결로써 저항하기도 하였으나, 나라를 향한 올곧은 절개는 후손들에게 귀감이 되기에 충분했다. altalt ]]> Mon, 09 Sep 2019 15:14:26 +0000 33 <![CDATA[일본군과 맞서 싸운 한국광복군 총사령 지청천 이달의 독립운동가]]> 글 전시부일본군과 맞서 싸운한국광복군 총사령 지청천 독립기념관은 국가보훈처 및 광복회와 공동으로 지청천을 2019년 9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지청천은 3·1운동을 계기로 독립운동에 투신, 신흥무관학교에서 독립군을 양성하고 한국광복군 총사령을 역임하는 등 우리 독립군의 선봉에서 활약했다. altalt 근대 군사기술을 습득하고 항일무장투쟁의 길에 들어서다지청천은 1888년 1월 25일 서울 삼청동에서 태어났다. 관명은 석규(錫奎)이고 아명은 수봉(壽鳳)이다. 어린 시절 서당에서 전통 한문을 배우다가 신식 학문을 배우기 위해 배재학당에 입학했고, 황성기독교청년회에 참여하면서 민족의식을 길렀다. 일제의 침략에 맞서 군인이 되기로 결심하고 1908년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1909년 9월 통감부의 압력으로 대한제국 군부가 폐지되고 학교도 문을 닫으면서 지청천은 일본 육군유년학교로 유학을 떠났다. 유학 도중 1910년 8월 경술국치(庚戌國恥)를 당하자 일본 육사 예비 과정에 있던 한인 유학생 사이에서는 학업을 지속하는 것을 둘러싼 동요가 일어났다. 지청천은 근대적 군사훈련을 습득한 뒤 일본군을 탈출해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기로 결심하고 끝까지 학업을 이어 나갔다.  일본 육군유년학교를 거쳐 1914년 5월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육군 중위로 재임하던 그는 1919년 국내에서 일어난 3·1운동 소식을 듣고 독립운동에 참여할 기회가 왔다고 생각하였다. 이에 국내로 돌아와 남만주로 망명하여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몸을 담았다. 이때 지청천은 일본군의 추적을 따돌리기 위해 이름을 청천(靑天)으로 바꾸었으며, 성도 흔하지 않아 남의 눈에 띄기 쉬운 지씨(池氏)에서 어머니의 성을 따른 이씨(李氏)로 고쳤다. 총사령으로 항일무장투쟁의 선봉에 서다남만주로 망명한 지청천은 서간도 유하현에 있는 신흥무관학교에서 교관으로 활약하였다. 신식 군사교육을 받은 교관이 부임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입학 지원자들이 증가하였다. 그러나 1920년 일제가 만주 독립군을 탄압하면서 신흥무관학교가 폐쇄되자 지청천은 재학생을 주축으로 결성된 서로군정서 병력을 이끌고 러시아로 이동했다가 만주로 다시 돌아왔다. 정의부 군사위원장과 총사령 등을 겸하며 독립군을 이끌었고 1928년에는 정의부, 참의부, 신민부 등 3부 통합운동에 노력하였다. 1930년에 한국독립군을 조직하고 총사령에 부임한 그는 1931년 일제가 만주를 침략하자 중국항일의용군과 연대하여 일본 간도파견군과 만주 전역에서 전투를 펼쳤다. 그중 1933년 6월 중국항일의용군과 연합하여 일본군 ‘간도임시파견대’를 상대로 큰 승리를 거둔 대전자령 전투는 ‘군수물자 노획’이라는 측면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거둔 최대 성과였다. 중국 관내로 활동 근거지를 옮긴 지청천은 1937년 중일전쟁 발발 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군무장 등을 맡았다. 1940년 9월 충칭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군으로 창설된 한국광복군 총사령으로 취임하였다. 지청천은 사병모집과 훈련, 선전과 정보 수집을 이끌었고 연합군과 합작하여 인면전구공대 파견, 독수리 작전 등을 추진하였다. 그의 장남 달수와 차녀 복영도 한국광복군의 일원으로 활동하였다. 1947년 4월 환국한 그는 1948년 5월 총선거에서 전국 최다득표로 제헌국회의원에 당선되었고 1948년 8월 수립된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초대 무임소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2대 국회의원, 국방위원장 등으로 활동하다가 1957년 1월 세상을 떠났다. 대한민국 정부는 평생을 무장투쟁과 독립전쟁에 헌신한 지청천의 공로를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alt지청천(池靑天)1888.01.25. ~ 1957.01.15.서울건국훈장 대통령장(1962)   alt  alt일본 육군사관학교 한국인 유학생 단체 사진 일본 육군유년학교를 거쳐 1912년 12월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제26기생으로 입교하였다. 1914년 여름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6개월간의 견습사관 생활을 마치고 같은 해 12월 일본 육군 소위로 임관하였다alt   alt대전자령 전투에 관한 조선군사령부 발표(『조선중앙일보』, 1933.07.09.) (국립중앙도서관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제공) 대전자령 전투에서 간도 임시파병대는 막대한 인적, 물적 손실을 입었으나 조선군 사령부는 부상 병대 2명, 화물 자동차 1대 소실 등으로 피해를 축소해 발표하였다alt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성립 전례식 후 한중 대표들의 기념사진  1940년 9월 17일 충칭 자링빈관에서 열린 성립전례식에는 총사령부 직원을 비롯해 임시정부 요인들과 의정원 의원, 한국독립당 인사들, 그리고 중국 각 기관을 대표하는 인사와 충칭 외교사절 및 신문사 대표 등이 참석했다alt지청천 총사령과 왕계현, 김학규 한국광복군 총사령 지청천과 총사령부 부관 왕계현(왼쪽), 제3지대장 김학규(오른쪽)의 사진이다]]> Mon, 09 Sep 2019 15:31:22 +0000 33 <![CDATA[백 년 전 한국인의 국경 넘나들기 자료로 읽는 역사]]> 글 김경미 자료부 학예연구관백 년 전 한국인의 국경 넘나들기집조, 여권, 여행증서, 호조 여권은 한 나라의 정부가 발행하는 것으로, 외국에 가려는 사람에게 그가 자국의 국민임을 증명하며 외국 정부에 보호를 의뢰하는 문서이다. 외국을 여행하는 데 이러한 여행권 제도가 만들어진 것은, 각 국가 사이의 국경이 분명하게 그어지고 ‘국민’과 ‘외국인’을 구별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대한제국의 신민이었던 한국인들은 국제사회에서 자신을 증명해 줄 국가를 잃었을 때 자신을 누구라고 말하며 국경을 넘었을까? alt안창호의 대한제국 집조(1902.08.09.)alt김도삼의 하와이 이민 대한제국 집조(1904.06.07.) 안창호의 대한제국 집조안창호는 미국 유학을 위해 1902년 9월 4일, 갓 결혼한 이혜련과 인천항을 떠났다. 이때 그가 가진 여권은 대한제국의 외교업무를 담당하는 부서인 외부(外部)에서 1902년 8월 9일 제51호로 발급한 ‘집조(執照)’였다.자료01 집조는 원래 관청에서 발급하는 증명 서류를 통칭하는 일반 명사이지만, 한국에 여행권제도가 처음 도입되었을 때 여행권 역시 여행자의 신분을 관청에서 확인해 주는 증명서의 한 종류로서 집조라는 명칭을 사용한 듯하다. 집조에는 “본국 평안도 평양에 사는 사인(士人) 안창호가 인천항을 통해 미국 워싱턴 등지로 가려 한다”며, 안창호가 대한제국의 신민이라는 사실을 증명하고 그가 미국으로 여행하는 데 편의를 보아달라는 요청이 담겨있다. 그런데 자료01에서 볼 수 있듯이 한문으로 쓰인 집조가 미국에서 어떻게 통할 수 있을까? 집조의 뒷면에는 서울에 있던 주한 미국 총영사관에서 1902년 8월 23일 자로 집조의 소지자인 대한제국 신민 안창호에게 발행해 준 비자가 영문 타이프로 찍혀있다. 같은 날 총영사관에서는 안창호의 집조를 영어로 번역하고, 제52호로 발급된 이혜련의 집조가 안창호와 동행하는 부인의 것이라는 사실을 첨부한 문서도 발급해 주었다. 안창호는 이러한 증명서를 갖고 일본에서 미국을 향해 태평양을 건넜다. 미국에 도착한 그의 집조에는 2개의 미국 이민국 인장이 찍혔다. 1902년 10월 7일 자로 밴쿠버의 미국 이민국에서 찍은 것과 1902년 10월 14일 자로 샌프란시스코항 미국 이민국에서 찍은 것이다. 이를 볼 때, 안창호는 홍콩-요코하마-밴쿠버 노선을 운행하던 캐나다퍼시픽기선회사의 증기선을 타고 캐나다 밴쿠버를 거쳐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갔음을 알 수 있다. 당시 밴쿠버에는 미국 이민국 직원이 주재하며 캐나다를 통해 미국으로 가는 여행자들의 입국 심사를 했다. 이곳에서 ‘대한제국의 신민 안창호’로서 입국허가를 받은 후 다시 샌프란시스코에서 최종 입국허가를 받았던 것이다. 이 안창호의 집조는 1918년 8월 27일 멕시코 방문 후 미국으로 재입국 허가를 받을 때 마지막으로 사용되었다.김도삼의 하와이 이민 대한제국 집조한국인들이 여권을 가지고 대규모로 해외로 나간 것은 1900년 초의 하와이 노동이민이었다.  1903년 1월 13일 첫 이민선 갤릭호로부터 1905년 8월 8일 마지막 배 몽골리아호까지 11개의 증기선을 타고 64회에 걸쳐 총 7,415명의 이민자가 호놀룰루항에 도착했다. 자료02는 그 이민자 중 한 사람인 김도삼의 집조이다. 1904년 6월 7일 대한제국 외부에서 발행한 이 집조에는 오른쪽에 한문, 왼쪽에 영문과 불문이 있다. 1903년 11월 대한제국 외부에서는 그동안 한문으로만 인쇄했던 집조를 바꾸어 영어와 불어 번역본도 함께 인쇄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집조에는 평안도 삼화군에 사는 김도삼이 인천항을 통해 미국 하와이 등지로 가고자 하며 김도삼은 37세이고 처 1명과 아들 2명을 동반한다는 내용이 한문본에만 적혀있다. 그래도 “The Imperial Korean(대한제국)”이라는 영문을 통해서, 하와이의 이민국 담당자는 집조 소지자가 한국인(Korean)이라는 사실은 확인할 수 있었을 것이다. 미국 이민국의 입항 명단에는 한국인 김도삼(37세)과 김도삼 아들 1(5세), 김도삼 아들 2(1세), 김도삼 부인(29세)이 1904년 7월 11일 아메리카마루를 타고 호놀룰루항에 도착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집조에는 미국 이민국의 입국 확인 도장이 아무것도 찍혀있지 않지만, 그들은 무사히 하와이의 땅을 밟고 새로운 생활을 시작했던 것이다. alt강희근의 사진신부 일본제국해외여권(1917.02.07.)alt김정극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여행증서(1920.04.22.)alt안창호의 중화민국 호조(1929.02.01.)alt   강희근의 사진신부 일본제국해외여권김도삼은 부인과 자식을 동반한 가족이민이었으나, 대다수의 하와이 이민자는 독신 남자였다. 당시의 입항 명단에서 확인된 6,739명 중 총각은 2,143명, 홀아비가 1,554명, 결혼을 했으나 혼자 온 사람이 2,214명, 그리고 부인, 자녀와 같이 온 세대주가 363명이었다. 1908년 미국과 일본 간의 협정으로 이민자의 가족만 미국 정착이 허가되자 이 기회를 이용하여 한국인들도 가족을 데려오거나 사진을 보고 결혼을 하는 ‘사진신부’를 맞이하여 가정을 꾸리게 되었다. 1910년부터 1924년 사이에 약 800명의 사진신부가 하와이로 이민을 갔다. 1917년 경상남도 창원군에 사는 강형준의 차녀로 18세 1개월 된 강희근도 사진신부로 하와이로 가는 배를 탔다. 강희근이 갖고 있던 여권자료03은 그를 부인으로 초청한 이명섭이 하와이 호놀룰루 일본 영사관에서 신청한 것으로 일본제국 외무대신의 명의로 발급되었다.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박탈당한 을사늑약 후인 1906년부터 이미 여권 발행권을 갖지 못했고, 국권을 상실한 후 한국 내의 여권 발급업무는 일본 외무성을 대리하여 조선총독부가 담당했다. 강희근은 그가 살고 있던 경상남도의 경무부에서 여권을 받았다. 1917년 2월 7일에 발급된 여권은 ‘이민전용여권’으로 ‘이민(移民)’이라 쓰인 도장이 찍혀있으며 “결혼을 위해 미국령 하와이로 간다”고 적혀있다. 소지자의 인적사항은 주소와 가족관계, 연령 뿐 아니라 신장이 5척 2촌 2부이며 얼굴이 둥글고 눈이 작고 입이 작으며 눈썹이 엷고 머리카락이 짙다는 등 특히 얼굴의 특징이 자세하게 기록됐다. 소지자 본인의 이름은 자필로 쓰게 되어 있는데, 여권에는 한자로 쓴 이름 아래에 도장이 찍혀있다. 1910년 10월의 「외국여권규칙」에 의하면 직접 서명할 수 없는 사람은 대서하게 하고 본인이 인감도장을 찍도록 규정했다. 여권의 다른 면에는 영문과 불문이 인쇄되어 있으며, 영문 인쇄 면에 일문으로 기록된 내용이 모두 영어로 옮겨져 있다. 미국 입국 조건을 갖춘 이 여권의 하단에는 1917년 4월 2일 자 호놀룰루 입국 허가 인장이 찍혀있다. 강희근은 비록 ‘일본제국 신민’으로 하와이에 입국하여 결혼생활을 시작했지만, 그로부터 2년 후인 1919년 한국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대한독립운동금’으로 10달러의 의연금을 내며 고국의 독립운동을 지원했다.김정극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여행증서1919년 3·1운동 후 중국 상하이에 설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해외에 있는 한인들을 대표하는 정부로서 여행권을 발급했다. 자료04는 1920년 4월 22일 대한민국 외무총장 대리 차장 정인과의 이름으로 발행된 여행증서 제14호로, 김정극이 미국 유학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나이 25세, 주소 평안북도 용천군, 직업 학업 등의 내용과 함께 김정극의 사진이 붙어있다. 1915년 독일에서부터 시작된 여권 사진은 소지자의 외모를 기술하는 대신 사진으로 증명할 수 있도록 했다. 증서에는 영어와 불어, 러시아어 번역 면이 있지만, 영어 번역 면에 정인과의 영문 사인과 발행 날짜만 적혀 있을 뿐 김정극에 대한 정보는 빈칸으로 남아있다.제1차 세계대전 후 각 나라에서 여행권제도가 강화되면서 임시정부에서 발행한 이 여행증서가 국제적으로 인정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김정극은 5월에 프랑스를 거쳐 미국으로 가게 되는데, 1920년에 학생들이 임시정부의 주선으로 중국에서 운영하던 유법검학회의 일원으로 중국 여권인 호조(護照)를 발급받아 상하이에서 프랑스로 갔던 경로를 따랐을 것으로 추측된다. 김정극은 대서양을 건너 뉴욕에 상륙하여 1931년 4월 말까지 10여 년간 미국에 체류하며 독립운동 활동을 했다.안창호의 중화민국 호조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후 중국에서 활동하던 안창호는 1923년 7월 중화민국 국적을 취득하고, 호조를 발급받아 1924년 말 미국으로 갔다. 1926년 5월 중국 상하이로 돌아온 안창호는 1929년 2월 1일 자로 상하이에 있는 중화민국 외교부 장쑤(江蘇) 지점에서 다시 호조를 발급받았다.자료05 필리핀을 방문하여 독립운동 기지 개척을 위한 이상촌을 물색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필리핀은 미국의 식민지로서 미국은 식민지에서도 여행권제도를 실시하고 있었다. 이 중화민국 호조는 총 24면으로 표지에 국명이 표시된 책자형 여권이다. 1920년 10월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된 「여권에 관한 국제회의」에서 여권의 형식을 통일하기로 한 뒤, 각국의 여권은 낱장형에서 오늘날과 같은 책자형으로 바뀌었다. 1면에는 중화민국 외교부에서 안창호의 중국식 이름인 ‘晏彰昊(안창호)’에게 필리핀 여행을 위해 호조를 발급한다고 쓰여 있고, 2면에는 안창호의 사진과 함께 그의 인적사항이 “나이 51세, 직업 교원, 출생지 장쑤, 국적 중화민국, 신장 5척 8촌”으로 기록되었다. 5면의 영어 번역 면에는 1면과 2면의 내용이 기입되어 있다. 안창호는 ‘중화민국 국민’의 신분으로 1929년 2월 9일 상하이에서 미국 배를 타고 필리핀의 마닐라 항에 도착하여 3월 30일까지 50여 일간 필리핀 각지를 시찰하고 중국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1932년 상하이에서 윤봉길 의거가 일어났을 때 갑자기 체포된 안창호는 더 이상 중화민국 국민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국내로 압송되었다.100년 전 한국인들이 사용했던 집조, 여권, 여행증서, 호조 등의 여행권에는 대한제국의 신민이었던 그들이 나라를 잃고 일본제국 신민, 중화민국 국민으로 자신의 신분을 바꾸며 국경을 넘어야 했던 모습이 담겨있다. 또한 그 속에는 그들이 언제나 한국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가며 한국인으로서의 자신을 잊지 않았다는 사실도 담겨있다. ※ 자료는 안수산(Susan Ahn Cuddy), 김성구(Ethan S. Kiehm), 강희근, 김신 님이 기증해 주셨습니다. 독립기념관의 연구와 전시, 교육을 위해 소중한 자료를 기증해 주신 여러분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참고김도형 「도산 안창호의 ‘여행권’을 통해 본 독립운동 행적」, 『한국독립운동사연구』 52, 2015. 김도형 「한국 근대 여행권(여권) 제도의 성립과 추이」, 『한국근현대사연구』 77, 2016.이덕희 『하와이 이민 100년 그들은 어떻게 살았나?』, 중앙M&B, 2003. ]]> Mon, 09 Sep 2019 15:24:31 +0000 33 <![CDATA[임시 정부를 이끈 큰 어른, 이동녕 역사를 만든 사람]]> 글 임영대 역사작가임시 정부를 이끈 큰 어른, 이동녕이동녕은 1869년 충청남도 목천군(현재 천안시)에서 태어났다. 189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구국 운동에 합류하여 교육을 통한 계몽과 인재 양성에 힘썼으며, 일제의 탄압으로 활동이 어려워지자 만주로 옮겨 교육사업을 계속하였다. 신흥무관학교를 세워 독립군 양성에도 손을 뻗쳤고, 3·1운동 이후에는 초대 임시의정원 의장으로 임시정부에 참여하였다. 1940년에 사망하고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받았다.   alt이동녕 1869.10.06.~1940.03.13.충청남도 천안건국훈장 대통령장(1962)     자강과 개화만이 이 나라가 살길이다이동녕은 전형적인 양반 가문 출신으로, 그의 부친 이병옥은 지방관을 역임했다. 5세 때부터 서당에서 한학을 익혔는데, 주변에서 신동 소리를 들을 정도로 뛰어난 재주를 보였다. 1892년, 24세가 되던 해에는 진사 시험에 합격하여 선비로서 능력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당시 한반도는 세계적인 제국주의 시대에 휘말려 급변하는 중이었다. 전통적인 출세의 계단이었던 과거제도는 폐지되고 개화사상이 들어왔다. 양반 중에는 새로운 시대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세상이 망했다며 개탄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이동녕은 달랐다.이동녕은 부친과 함께 원산으로 가서 육영사업을 하며 신학문을 전파했고, 28세 때는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개화와 민권을 추구하는 구국운동에 참여했다. 독립협회가 주최한 만민공동회 활동에서도 앞에 나서서 투쟁했고, 그러다 투옥되는 고난도 겪었다. 7개월의 감옥 생활을 마치고 출옥한 이동녕은 『제국신문』에 「민족자강의 방도」라는 사설을 실으며 언론인 활동을 시작했다. 또한, 본격적인 민족주의 사상을 세워나갔다.자강을 급히 서두르지 않으면 반드시 나라는 강대국에 침략당할 위기를 맞게 될 것이다. 그것을 면하려면 먼저 세계의 발전에 발맞추어 개화를 힘써 실천해야 한다.이동녕은 이상재, 전덕기 등과 함께 YMCA기독운동을 전개했다. 일제의 침략이 심해지자 청년회를 결성하여 항일운동을 벌였고, 을사늑약 반대 시위를 벌이다가 다시 투옥되었다. 이로써 국내에서는 일제의 압제로 인해 활동에 한계가 왔음을 깨닫고 만주로 망명하였다.이민족 전제의 학대와 억압을 해탈하고 대한 민주의 자립을 선포하노라 이동녕이 처음 만주로 나간 때는 1906년, 38세 때였다. 북간도 용정촌으로 이주한 그는 이상설 등의 동지와 함께 최초의 항일 민족교육기관인 서전서숙을 설립했다. 서전서숙은 이상설이 헤이그에 밀사로 파견된 이듬해 폐숙하였으나, 이동녕은 신민회, 청년학우회, 교육단, 대성학교, 오산학교 등의 설립에 관여하면서 교육자로서의 활동을 지속했다.1910년 경술국치로 국권이 완전히 일본에게 넘어가자 더 이상 국내에서 민족교육을 할 수 없게 된 이동녕은 다시 만주로 가서 국권 회복을 위한 노력을 이어갔다. 그는 요녕성 삼원보로 이주하여 우리 민족의 자치기관인 경학사와 독립군 양성기관인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했다. 또 동포들의 풍요로운 삶을 위해 권업회를 조직하고,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대한광복군정부도 수립하였다. 신문 발간을 통해 동포들에게 독립사상도 고취했다.1914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만주와 러시아에서의 독립운동이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그러나 이동녕은 동포들을 가르치고 격려하며 때를 기다렸고, 마침내 1919년 2월 1일 대종교 조직을 중심으로 한 대한독립선언서가 발표됐다. 우리 민족 최초의 독립선언서였다.국민본령(國民本領)을 자각한 독립임을 기억할 것이며, 동양평화를 보장하고 인류평등을 실시하기 위한 자립인 것을 명심할 것이며, 황천의 명령을 크게 받들어 일절(一切) 사망(邪網)에서 해탈하는 건국인 것을 확신하여, 육탄혈전(肉彈血戰)으로 독립을 완성할지어다.독립선언서 발표를 계기로 중국, 러시아 등지에 흩어져 있는 독립운동가를 하나로 모아 통합적인 독립투쟁을 시작하니 이것이 바로 상하이 임시정부의 시작이었다. 이동녕은 임시의정원 초대의장으로 선출되어 임시정부의 국호, 헌법, 관제 제정을 주도하였으며 미국에서 돌아오지 않는 이승만 대신 국무총리에도 취임하였다. 이후로도 내무총장, 국무총리, 군무총장, 대통령 직권대행, 의정원 의장, 국무위원회 주석, 법무총장 등을 역임하며 임시정부 운영에 최선을 다했다. 임시정부의 내분도 훌륭히 수습하였다.김구와 함께 한국독립당을 조직, 이사장으로도 추대되었으며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를 후원하기도 했다. 일제의 중국 침략이 본격화될 무렵 이동녕은 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께 충칭으로 탈출, 임시정부의 4번째 주석이 되었다. 이때 이동녕의 나이 71세. 그는 일흔의 나이에도 굴하지 않고 임시정부를 이끌었으나 이듬해 폐렴으로 눈을 감았다. 이동녕의 장례는 임시정부 최초의 국장으로 거행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해방 후 건국공로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여 이동녕의 공을 기렸다.]]> Mon, 09 Sep 2019 15:13:19 +0000 33 <![CDATA[나라를 지킨 백발의 독립운동가 우리가 만난 얼굴]]> 나라를 지킨 백발의 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중에는 노인도 있었습니다. 내 나라가 힘을 잃고 스러져가는 과정을 모두 목격한 그들은 ‘독립’의 가치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세월을 따라 나이 든다 하여도 독립을 바라는 마음은 늙지 않기에, 백발의 독립운동가들은 청년 못지않은 기개를 가지고 치열하게 싸웠습니다. 그들은 오늘이 아니라 미래를 위해 싸웠는지도 모릅니다. 내 나라 대한민국의 역사가 미래에도 계속 이어질 수 있도록, 그래서 미래를 지탱할 나의 후손에게 조국의 진정한 의미를 전할 수 있도록. 그렇게 삶의 마지막 불꽃을 피워냈습니다. alt  ]]> Mon, 09 Sep 2019 13:40:11 +0000 33 <![CDATA[1917년 박용만의 뉴욕 소약국민동맹회의 참가와 외교활동 한국인의 터전]]> 글 홍선표 나라역사연구소 소장1917년 박용만의뉴욕 소약국민동맹회의 참가와 외교활동1910년대 재미 한인의 군사·외교운동 3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인 1917년 10월, 미주한인사회는 뉴욕에서 약소민족의 대의를 모아 대전 종결 이후를 대비할 목적으로 최초의 국제회의인 소약국민동맹회의가 개최된다는 소식에 고무되어 박용만을 대표로 보냈다. 박용만은 명연설로 식민지 한국인의 참상과 일본의 불법적인 식민통치 실상을 알려 대회 참가자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었다. 나아가 미주 한인들은 한국독립을 위한 국제정치 변화에 대한 안목을 점차 넓혀 나갔다.   alt소약국민동맹회의를 개최한 뉴욕 맥알핀 호텔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 이후 한반도는 긴 침묵과 함께 깊은 암흑에 빠졌다. 그런 가운데 1911년 신해혁명,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1917년 러시아혁명의 발발로 1910년대 국제사회는 격변의 소용돌이에 빠져들었다. 급변하는 국제정세 속에 재빨리 대응한 쪽은 약소국 민족들이었다. 1917년 6월 뉴욕에서 소약국민동맹회(회장 F. C. Howe)를 결성한 것이다. 설립 목적은 전 세계 약소민족들을 위한 항구적인 의회를 설립해 장차 있을 국제회의 때 약소민족들의 발언권과 정당한 제 권리를 확보하기 위함이었다. 이를 위해 그해 10월 29일부터 31일까지 소약국민동맹회의를 개최하기로 하였다. 재미 한인사회는 뉴욕에 소약국민동맹회가 결성되었다는 소식을 『American Leader』의 사설 「Small Nations Leagued Together」(1917. 06. 28.)로 알게 되었다.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장 이대위는 7월 7일 해당 잡지사에 소약국민동맹회에 대해 문의했으나 잘 모른다고 회신해서 더 이상 진행하지 못했다.대한인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에서 박용만을 대표로 선출그러던 중에 하와이지방총회장 안현경이 1917년 10월 11일 자로 이대위에게 보낸 공문에서 귀 총회와 상의하지 못하고 박용만을 소약국민동맹회의 대표로 선정해 보내니 참조해 줄 것을 알렸다. 대회 소식을 기다려왔던 이대위는 이 공문을 받고 무척 난감했으나 이미 하와이에서 대표를 선정해 출발시켰다고 하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한인소년병학교와 대조선국민군단의 설립, 『신한민보』·『신한국보』·『국민보』의 주필,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부회장 등으로 활동한 박용만(1881~1928)을 소약국민동맹회의 한인 대표로 천거한 사람은 이승만이었다. 평소 외교의 중요성을 알고 이를 중시했던 이승만이 직접 나서지 않고 항일무장투쟁론을 주장해 온 박용만을 대표로 내세운 것은 무엇때문인가. 그 이유에 대해 명확히 드러난 것은 없다. 1917년 당시 이승만은 대외 직책이 하와이지방총회의 서기 겸 재무이자 한인여학원 경영자였으나 실질적으로 하와이 한인사회를 지도하고 있었다. 이런 그가 박용만을 천거한 것은 1915년 내부 충돌로 소원했던 박용만 지지자들을 포용해 하와이 한인사회를 재결집시키려는 의도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어떤 이유로 박용만을 천거했든 간에 이번 일로 하와이 내 이승만의 입지는 더욱 단단해졌다. 소약국민동맹회의 대표 파견을 위해 이승만이 추진한 의연금 모금활동에 전 하와이 한인들이 한마음으로 참여하였다. 그 결과 당초 계획한 500달러를 훨씬 초과해 2,000여 달러를 모금하였다. 이는 이승만 스스로도 예상하지 못한 큰 호응이었다. 박용만을 외교대표로 뽑으면서 이승만이나 이승만 지지자들로 구성된 하와이지방총회나 명분과 실리를 모두 챙기는 성과를 거둔 것이다. 박용만은 호놀룰루를 떠나 10월 24일 샌프란시스코, 10월 27일 뉴욕에 도착했다. 그는 이번 국제대회 참가를 위해 면밀하게 연설문을 작성하였고 하와이만의 대표가 아닌 해외 전체 200만 한인을 위한 대표자로 활동했다.박용만의 명연설과 의의박용만은 10월 29일 뉴욕 맥알핀 호텔에서 열린 개회식 첫날 다섯 번째로 등단해 연설했다. 그의 연설은 25개 참가국 대표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길 만큼 명연설이었다. 그는 연설에서 한국인의 모든 행복과 자유를 무자비하게 빼앗아간 일본 정복자들의 진실을 고발하고 싶다고 했다. 그러면서 한국인은 수렁에 빠진 민족의 구원을 스스로 해결해 나갈 것이고 일본이 자행한 불법적인 병합은 한국인에게 새로운 국가 건설의 기회를 준 것으로 설명했다.“일본은 옛 군주주의 체제의 국가를 전복해 주었는데 이것은 어쩌면 한국인들이 준비되었을 때 민주적이고 자유로운 새 정부를 만들기 위한 미래의 일들을 애석하게도 일본이 일부 대신해 주었을 뿐이라는 심정을 전합니다.”박용만은 세계 자유 민주주의를 실현하는데 일본은 매우 위험한 나라라고 주장했다. 한국인들에게 진정한 자유와 독립이 필요한 만큼 세계 약소민족들에게 정당한 생존권을 주지 않는다면 전 세계에 항구적인 평화는 결코 오지 않을 것이라고도 했다. 102년 전에 행한 그의 연설은 참가한 약소국 민족 대표들을 감동시켰다. 『The Survey』는 1917년 11월 10일 자 「Through Liberty to World Peace」란 기사에서 박용만의 연설에 특별히 감사를 표했다. 그리고 한국인을 비롯해 아일랜드인, 핀란드인, 인도인, 리투아니아인, 러시아계 폴란드인의 대표들이 참석하지 않았다면 이번 대회는 완전히 그 목적에서 실패했을 것이라며 한국인 박용만의 활동을 높이 평가하였다.   대회를 마친 박용만은 12월 8일 샌프란시스코에서 개최한 환영 행사 때 “우리가 이 동맹회에 참여함으로 갑자기 한국의 독립을 얻어올 것이 아니로되, 어느 날이든지 한국이 독립하려면 실력은 있다 치더라도 외교, 군사의 활동을 진행함이 필요하다”고 연설했다. 외교의 중요성을 역설한 그의 연설은 그동안 항일무장투쟁론에 주력했던 그간의 이력을 감안할 때 매우 진전된 의식 변화였다. 1910년대 들어 처음으로 국제회의에 참가한 경험은 이후 재미 한인들에게 국제정세 변화에 대한 안목을 키워주었고 제1차 세계대전 종결 직후 급변하는 국제정세에 신속히 대응하는 소중한 밑거름이 되었다. ]]> Mon, 09 Sep 2019 15:33:51 +0000 33 <![CDATA[어느 독립운동가의 일그러진 초상 끝나지 않은 독립운동]]> 글 이계형 국민대학교 특임교수어느 독립운동가의 일그러진 초상 1945년 우리 민족은 광복을 맞았지만, 독립운동은 끝나지 않았다. 여전히 미완으로 남은 사건, 해결되지 못한 문제, 기억해야만 하는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끝나지 않은 독립운동은 독립운동사를 과거에 머문 역사가 아닌 현재의 문제로 다루며, 오늘도 신문 한쪽을 차지하고 있는 독립운동 및 일제강점 이슈를 소개한다.     alt영화 <암살>에서 일제의 밀정으로 등장하는 염석진   독립운동가 곁에는 밀정이 있었다2015년 <암살>이란 영화가 개봉했다. 독립운동 관련 영화를 이렇게 흥미롭게 만들 수 있구나 하는 것을 새삼 느꼈다. 일제강점기 친일파 암살단과 이들을 쫓는 작전이 보는 이로 하여금 긴장을 놓지 않게 했고, 재미까지 더하여 1,200만 명이 관람했다. 특히 일제의 밀정 염석진이 반민족행위로 재판을 받을 때,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며 윗옷을 벗어 재끼고 뱉어낸 마지막 대사가 긴 여운을 남겼다.“내 몸속에 일본 놈들의 총알이 여섯 개나 박혀 있습니다. 1911년 경성에서 데라우치 총독 암살 때 총 맞은 자리입니다. 구멍이 두 개지요? 여긴 22년 상해 황포탄에서, 27년 하바롭스크에서, 32년 이쯔고 폭파사건 때, 그리고 심장 옆은 33년 전에! 내가 동지 셋을 팔았다고 하셨는데, 그 친구들 제가 직접 뽑았습니다! 그 젊은 청춘들이 어떤 심정이었는지 아십니까? 여러분은 모릅니다! 내가 어떤 심정으로 그들을 보냈는지! 그건 죽음을 불사하는 항전의 걸음이었습니다, 재판장님!”반성은커녕 본인이 억울하다고 호소한 염석진에게 방청객들은 욕을 하고 고무신을 던졌다. 염석진이 죽는 순간까지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은 것이다. 한때는 독립군이었지만 죽음에 직면한 순간, 신념 따위를 저버리고 가장 초라한 자신의 초상과 맞닥뜨린 뒤 일제의 밀정이 되었다. 변절과 동시에 밀정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 죽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살기 위해서는 계속 밀정 노릇을 해야만 했다. 사전적으로 밀정이란, ‘적국·가상적국·적대 집단 등에 들어가 몰래 또는 공인되지 않은 방법으로 정보를 수집하거나 전복 활동 등을 하는 자’로 정의하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얼마나 많은 밀정이 있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렇지만 독립운동단체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밀정이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 수가 많았다. 그래서 국내에서 군자금을 모집하여 상하이 임시정부로 보내려고 했지만 제대로 전달되지 못한 경우가 태반이었다. 독립군이 일본군을 습격하기도 전에 계획이 탄로 나 실패하는 일도 부지기수였고, 수많은 독립운동가가 일본 군경에 피체되어 옥고를 치르기 일쑤였다. 밀정은 어떻게 독립유공자가 되었나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은 올해, 독립운동과 관련된 영화나 방송이 특히 많이 제작, 방영되고 있다. 그런데 한 방송사가 이와 대척점에 있는 밀정에 주목한 프로그램을 제작하여 내보면서 사회에 적지 않은 충격을 던져주고 있다. 일본과 중국 기밀문서를 분석하여 895명의 밀정 혐의자 실명을 공개한 것이다. 물론 이들 모두의 실체를 확인한 것은 아니며, 그렇게 하는 것 또한 거의 불가능하다. 당시 여러 개의 가명을 썼고, 대부분의 밀정은 첩보 활동을 전개하여 드러나지 않은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더욱이 해방 이후에는 신분세탁을 했기 때문에 밀정이었는지 알 수 없었던 측면도 있다. 밀정 가운데에는 처음부터 일제에 고용돼 월급을 받는 이들도 있었지만, 독립운동을 하다가 일제의 회유에 변절한 사람들도 있었다. 안중근 의사의 동지였던 우덕순, 김좌진 장군의 비서, 의열단장 김원봉의 부하, 봉오동전투의 주역인 홍범도의 수하 등이 대표적이고 심지어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에서도 존재했다. 상하이에 독립운동가보다 밀정의 숫자가 더 많았다고도 한다. 물론 이들 가운데는 실제 밀정이었는지에 대한 논란이 있는 인물도 있다. 그런데 더욱 충격적인 것은 이들 상당수가 독립유공자로 포상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서훈 심사가 부실하고 친일 청산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던 1960년대에 포상을 받은 경우도 있지만, 1990년대에도 이러한 사례가 있다. 그렇다고 관련 부처나 심사를 담당했던 전문가들의 책임이라 묻기도 어렵다. 자료가 발굴되지 않아 독립유공자 선정 과정에서 결격 사유를 찾거나 밀정이라는 것을 밝히는 것이 쉽지 않았던 이유가 분명하기에 그렇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일제와 싸우다 목숨을 잃은 독립운동가는 15만 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되지만, 현재 독립유공자로 인정된 것은 1만 5,000여 명에 불과하다. 그러다 보니 정부가 독립유공자 발굴에 소홀하지 않았느냐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중복 포상되거나 친일 경력자도 독립유공자에 포함되어 있다는 지적도 있다. 그러나 정부 입장에서는 언제, 어디서, 어떤 자료가 나올지 모르는 상황에 마냥 심사를 미룰 수도 없다. 정부는 좀 더 많은 독립유공자를 발굴해야 하고 그만큼 검증도 철저해야 하는 이중 부담을 안고 있는 것이다. 분명한 사실은 새로운 자료들이 발굴되어 독립유공자의 결격 문제가 제기될 가능성은 언제든지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때그때 사안에 따라 임기응변식으로 대응한다면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 막는 격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이에 대한 적절한 대응 매뉴얼이 필요하다. 사전에 정부 차원에서 팀을 꾸려 독립유공자에 대한 철저한 검증이 있어야겠고, 친일 문제가 발견되면 적법한 절차에 따라 서훈을 박탈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준 마련이 시급하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원칙을 세워야 논란을 잠재울 수 있다. 자칫 행정소송에 휘말릴 수도 있지만, 문제점이 발견되었어도 판단을 미루거나 분명한 의견을 제시하지 않는다면 비판은 더욱더 커질 게 자명하다. 독립운동가들이 바라던 자주독립의 대한민국이 존재하는 만큼 이들의 공훈은 지금을 살아가는 후손들에게 귀감이 되어야 하고 역사적으로 보다 분명해야 한다. 이는 전체 독립유공자의 명예, 신뢰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 Mon, 09 Sep 2019 15:32:38 +0000 33 <![CDATA[원산총파업과 대공황 우리의 오늘 세계의 그날]]> 글 강응천 기획집단 문사철 대표, 역사저술가원산총파업과 대공황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 경제는 장기 호황을 누렸다. 일제가 한국에서 문화정치를 펼치고 산업화를 추진했던 것도 그러한 조건 덕분이었다. 경제 호황의 중심에는 세계 자본주의 중심국가로 떠오른 미국이 있었다. 전쟁터였던 서유럽과 달리 빠르게 회복한 미국 경제는 1922년부터 상승 국면으로 들어갔다. 전쟁 중 얻은 이익으로 자본이 넘쳐나 서유럽과 중남미로 수출하고 내구 소비재 및 건축 산업과 내수도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그러나 1920년대 내내 실업률은 5% 이상을 유지했고, 면방직·석탄 등의 산업은 불황을 면치 못했다. 세계 농업도 과잉 생산으로 만성적 불황에 빠졌다. 넘쳐나는 자본은 주식 투자와 부동산 투기를 부추겼다. 1920년대 말에는 이 모든 경제 상황이 대공황을 향해 치닫기 시작했다. alt원산총파업의 현장(1929)alt원산총파업 응원 대연설회 전단    한국 최초의 연대 파업, 원산총파업1920년대 세계 경제의 호황은 식민지 한국에서도 산업화를 촉진했다. 그러나 일제가 주도하는 산업화는 외국 자본과 한국인 노동자 사이에 민족 모순과 계급 모순이 중첩된 갈등을 키울 뿐이었다. 1929년 1월, 원산노동연합회(이하 원산노련) 소속 노동조합의 2,200여 명 노동자가 총파업에 돌입했다. 22일에는 원산두량노동조합과 해륙노동조합이, 24일에는 원산중사조합과 원산제면노동조합이 파업에 들어갔고, 27일에는 양복직공조합, 28일에는 우차부조합과 인쇄직공조합이 잇달아 파업에 가담했다.총파업의 발단은 1928년 가을 영국인 소유의 라이징선석유회사에서 일본인 감독관이 한국인 노동자를 구타한 사건이었다. 그때 120여 명의 노동자가 일본인 감독관의 파면과 처우 개선을 요구하며 파업을 벌였다. 사건 발생 후 회사 측은 노동자들의 요구를 받아들였으나, 약속한 3개월이 지나도 약속을 이행하지 않는 바람에 1929년 1월 14일 다시 파업이 일어났다. 이에 원산노련이 파업을 지원하자, 원산 지역 자본가들의 모임인 원산상업회의소가 부두 노동자 450명을 해고하고, 외지에서 대체 노동자를 모집하는 대응 조치에 나섰다. 게다가 일본 경찰은 원산노련 간부를 구속하고, 함흥 보병대에서 약 300여 명의 군인까지 동원해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면서 노동자들을 압박했다.원산총파업은 한국 역사상 최초의 연대 파업이었다. 그 이전에도 개별 사업장에서 임금 인상 등을 요구하며 일어난 파업은 많았다. 그러나 노동조합이 다른 사업장 문제에 개입해 한 지역 노동자들 전체가 연대 파업을 벌인 것은 원산이 처음이다. 개별 사업장 단위의 경제투쟁이 노동계급의 해방과 민족해방을 목표로 하는 정치투쟁으로까지 나아가는 계기가 마련된 것이다. 원산 총파업을 돕기 위한 나라 안팎의 움직임도 활발했다. 부산노우회, 수원노동조합 등 100여 개 단체가 지원품을 보내고, 일본에서는 동조 파업의 움직임까지 나타나는 등 국제적으로 관심이 확산되었다. alt아메리칸유니언뱅크 앞에 줄을 선 시민들alt일본이 제시한 류탸오후 사건의 증거들. 일본은 중국을 공격하기 위해 류탸오후 사건을 위조했다alt미국의 작가 어니스트 헤밍웨이(Ernest Hemingway) 전 세계에 드리운 대공황의 검은 그림자원산총파업은 전 세계적인 노동운동의 폭발로 이어지지 못했다. 세계 경제 자체가 폭발해 버렸기 때문이다. 원산총파업이 일어난 그해 1929년 10월 24일은 목요일이었다. 뉴욕 증시의 주가가 일순간 폭락하면서 전례 없는 대공황이 미국을 덮친 뒤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역사는 그날을 ‘검은 목요일’로 기억하고 있다. 1년 반이 지난 1931년 6월에는 뉴욕의 거대 은행 아메리칸유니언뱅크가 문을 닫았다. 은행 앞에는 수백 명의 예금자가 몰려들어 “내 돈 내놓아라!”며 아우성을 쳤다. 하지만 그들의 목소리엔 힘이 없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을 제치고 세계 최강의 경제 대국에 오른 미국은 1920년대에 폭발적인 경제성장을 이뤘다.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려고 전 세계에서 이민자들이 몰려들고, 제네럴 모터스 같은 미국 기업의 주식가격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사람들은 빚을 내서 너도나도 주식시장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주식가격은 실제 가치 이상으로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고, 마침내 한계점에 이르러 펑 하고 터져버렸다.주식에 거품이 있다는 사실을 안 사람들이 주식을 내놓자, 주가는 순식간에 폭락하고, 빚을 내 주식을 산 사람들은 파산자가 됐다. 이들이 소비할 여력을 잃어 상품이 팔리지 않자, 기업들이 공장 가동을 중단하면서 실업자가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실업자의 증가는 소비를 위축시켜 더 많은 공장이 문을 닫기에 이르렀다. 대공황 발생 1년 만에 은행 1,300여 곳이 문을 닫아 예금자들은 알거지가 됐고, 은행 직원들조차 실업자가 됐다. 이어 수많은 공장이 도산해 실업률 16.3%, 실업자 수 800만 명으로 최악의 기록을 잇달아 갱신했다. 대공황의 여파는 미국에 투자한 유럽 기업에도 미쳐 연쇄 도산으로 실업자를 쏟아냈고, 유럽 열강의 영향 아래 있는 아시아·아프리카의 식민지들도 연쇄적으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대공황의 그림자는 이어 아시아의 일본과 그 식민지들에도 드리웠다.아시아 전쟁의 서막이 오르다, 만주사변일본은 세계 대공황으로 인한 경제 난국을 타개하는 길을 전쟁에서 찾았다. 펑톈 주둔 일본 관동군은 지난 9월 18일 만주 철도가 지나는 펑톈 외곽의 류탸오후 철교를 몰래 폭파한 뒤, 이를 중국군 소행으로 몰아붙여 일제히 공습과 포격을 퍼부었다. 일본군이 펑톈과 지린성의 주요 지역을 손에 넣자, 중국 민중은 상하이를 중심으로 대규모 항일 집회를 개최하고, 일본 상품 배척 운동을 전개했다. 이른바 ‘만주사변’이 발발한 것이다. 이 사건은 1937년 중일전쟁, 1941년 태평양전쟁으로 이어지면서 1945년까지 아시아와 태평양 전역을 15년 전쟁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 참화의 시작이 되었다. 일본의 만주 침략은 만주 시장을 독점적으로 확보해 장차 대륙 진출을 위한 전진 기지를 만들려는 속셈에 의해 이루어졌다. 대공황의 여파에 허덕이는 미국과 유럽 여러 나라는 이 같은 일본의 행위를 방치할 수밖에 없었다. 그에 따라 만주를 무대로 활동해 온 한국과 중국의 항일운동 세력은 큰 타격을 받았다. 원산총파업을 비롯해 일본의 약탈 자본에 대한 대대적인 항거에 들어갔던 한국의 노동자들에게도 전쟁은 심각한 위기로 다가왔다. 일본은 1920년대의 문화 정치를 거두어들이고 식민지 탄압을 강화하는 데 만주사변을 이용했다. 대공황은 이렇게 한국에도 커다란 위기로 다가오고 있었다.공황기에 그들은 어떻게 살았을까?대공황은 사람들의 삶을 어떻게 바꿔 놓고 있었을까? 대공황의 중심지 미국에서는 실업자가 거리로 쏟아져 나오고 노숙자가 늘어나 대도시 곳곳에 무료 급식소가 생겼다. 1931년 크리스마스에는 뉴욕시 한 급식소 앞에 수백 미터에 달하는 행렬이 빵 한 조각을 얻어먹기 위해 줄을 섰다. 1932년 7월에는 수도 워싱턴에 허름한 옷차림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어느덧 모인 인원은 무려 2만 5,000여 명. 이들은 1924년에 퇴역한 군인들로 자신들을 ‘보너스 군대’라고 불렀다. 퇴역 당시 정부에서 이들에게 군 복무 기간만큼 사회에서 일했다면 벌었을 임금을 1945년까지 보너스로 지급하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공황으로 살기 어려워진 퇴역 군인들은 보너스를 앞당겨 지급해 달라고 요구했다. 정부가 이 요구를 거절하자 백악관으로 모여든 것이다. 그들이 길거리에 천막을 치고 노숙 투쟁에 들어가자 정부는 군대를 동원하기로 했다. 맥아더 장군이 이끄는 폭동 진압 부대는 최루탄과 곤봉을 휘둘러 100여 명의 사상자를 내며 보너스 군대를 워싱턴에서 몰아냈다. 한편 대공황 여파로 남성 노동자들이 직장을 잃고 실업자 신세가 되면서 여자들의 발언권이 높아지는 현상도 나타났다. 그동안 결혼한 여성이 직업을 갖는 것에 반대하는 여론이 높았지만, 남성 가장이 실직하자 전업주부였던 아내들이 생계를 위해 취업 전선에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특히 흑인 여성은 가정부, 사무원, 의류 공장 노동자 같은 일자리를 남성들에 비해 쉽게 얻었다. 그에 따라 가정 안에서 여성들의 발언권이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져, 대공황이 여권 신장에 기여하는 역설적인 상황이 벌어졌다. 당신들은 모두 잃어버린 세대미국 작가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소설 『해는 또다시 떠오른다』의 서문에서 여성 작가 스타인에게 “당신들은 모두 잃어버린 세대”라는 말을 들었다고 밝힌다. 그 후 1920년대를 풍미했던 젊은 작가들은 모두 ‘잃어버린 세대’로 불리게 되었다.잃어버린 세대는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상처받고 가치관의 혼란을 느꼈다. 그리고 고국에 정착하지 못하고 유럽, 특히 파리를 전전하며 쾌락적인 삶을 탐닉했다. 『해는 또다시 떠오른다』의 주인공인 사진기자 제이크는 부상으로 성불구자가 된 뒤, 영국 간호사 브레트와 만족할 수 없는 사랑에 빠져 프랑스와 에스파냐를 떠돈다. 잃어버린 세대의 초상이었다.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1925), 더스 패서스의 『맨해튼역』(1925), 포크너의 『음향과 분노』(1929) 등은 1920년대 경제 호황 때 욕망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다 파멸해가는 미국인의 모습을 잃어버린 세대의 시선으로 그린 걸작이다. 잃어버린 세대는 대공황이라는 재난 앞에서 방황을 멈춰야 했다. 헤밍웨이는 1929년에 발표한 또 다른 소설 『무기여 잘 있거라』에서 자신이 길을 잃은 원인을 통찰하고 있다. 주인공 프레더릭 헨리는 국가를 위해 전쟁에 뛰어들었지만 부상과 스파이라는 누명만 뒤집어썼다. 그는 무기를 던져버리고 스위스로 도망간다. 그에게 환멸을 안겨준 것은 애국심, 명예 같은 헛된 가치를 유포해 개인의 삶을 유린하는 국가 체제였다. 헤밍웨이는 그러한 체제에 도전해 10여 년에 걸친 잃어버림을 청산할 태세를 갖춘 것처럼 보였다. 잃어버린 세대가 호황기 사람들의 파멸을 경고해 왔다면, 대공황 세대는 그 파멸의 원인을 냉정한 시선으로 찾아 나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 Mon, 09 Sep 2019 16:13:37 +0000 33 <![CDATA[가을 앞에서 노래하는 음유시인을 만나다 김광석 다시 그리기 길 이 땅의 숨결]]> 글·사진 임운석 여행작가가을 앞에서 노래하는 음유시인을 만나다김광석 다시 그리기 길 대구 방천시장과 맞닿은 좁은 골목길. 신천대로의 높다란 옹벽에 기대어 이어진 그 골목길에 우리나라 최초 대중가수의 이름을 딴 길이 있다. 가수 김광석을 주인공으로 한 길이다. 김광석은 서른세 살 젊은 나이에 세상을 등졌지만, 아직도 우리는 그를 떠나보내지 않은 것 같다. 최소한 그 길에서만큼은. 아니 어쩌면 그는 한 번도 우리 곁을 떠난 적이 없는 건 아닐까. 그의 노래와 목소리가 아직도 우리 가슴에 남아 있다. alt가을의 운치가 더하는 김광석 다시 그리기 길alt김광석 다시 그리기 길에 자리한 흑백사진관 음유시인, 시대의 아픔과 상처를 치유하다방천시장과 신천대로가 맞닿은 골목길. 그곳에 가면 김광석의 생전 모습과 그의 노래를 보고 들을 수 있다. ‘김광석 거리’ 혹은 ‘김광석 길’이라 부르는 이곳의 정식명칭은 ‘김광석 다시 그리기 길’이다. 여기서 ‘그리기’란 ‘그린다’라는 의미와 ‘그리워하다’라는 두 가지 뜻을 가지고 있다. 이곳에 김광석 거리가 조성된 이유는 김광석이 거리가 있는 대구 대봉동에서 태어나 다섯 살까지 살았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교편을 접고 사업차 상경하게 되자 그 역시 가족들과 함께 이사를 했다. ‘노래를 찾는 사람들’, ‘동물원’ 등에서 보컬을 지낸 뒤 솔로로 나선 그는 김민기의 도움으로 학전소극장에서 1,000회가 넘는 공연을 마치게 된다. 이후로 통기타 가수로서 입지를 굳혔다. 하지만 그의 마지막은 자신의 노래 ‘서른 즈음에’처럼 짧고 외로웠다. 1996년 1월 6일, 33년의 삶을 스스로 마감한 것이다. 김광석의 노래를 즐겨 듣는 사람들에겐 듣는 이유가 분명하다. 그는 슬픔을 노래하되 통속적이지 않고, 우울함을 노래하되 과장하지 않으며, 희망을 노래하되 상투적이지 않다. 많은 청춘이 일명 ‘아홉 앓이’를 경험하며 성장한다. 그중 스물아홉과 서른 즘에 찾아오는 아홉 앓이가 유난스럽지 않던가. 그들에게 노래 ‘서른 즈음’은 절망에서 희망으로 이끄는 등대 같은 곡이었다. 또 ‘이등병의 편지’는 군 입대를 앞둔 20대 청춘들에게 가슴을 울리는 눈물의 편지였다. 하지만 그의 노래는 방황하는 청춘에게만 효험(?)이 있는 게 아니었다. ‘일어나 일어나 다시 한 번 해보는 거야…’라며 힘을 북돋아 준 노래, ‘일어나’는 좌절과 낙심으로 점철된 이 세상 모든 중년들에게 재기를 꿈꾸게 했고, 지난날을 담담한 감성으로 회고하듯 부른 ‘어느 60대 노부부의 이야기’는 추억을 먹고 사는 나이든 부모세대까지 끌어안았다.그의 노래가 이처럼 시대의 아픔과 상처를 치유하는 음악으로 여겨진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 번째는 감성을 촉촉이 적시는 노랫말이고, 두 번째는 내유외강과 같은 잔잔한 곡이다. 그리고 세 번째는 허무한 것 같지만 카랑카랑한 힘이 돋보이는 목소리이며 마지막 네 번째는 무대를 휘어잡는 조용한 카리스마다. 가을의 길목에 접어든 이맘때 대구 대봉동 방천시장 골목에는 그 노래들이 조용히 흘러나온다.방천시장과 김광석의 운명적 만남 조선시대 전국 3대 시장은 평양장·강경장·서문장이고, 대구의 3대 시장은 서문·칠성·방천시장이었다. 방천시장은 대구 도심을 남북으로 흐르는 신천의 수성교 옆에 자리한 재래시장이다. 1960년대 이후에는 떡전, 싸전으로 유명세를 떨쳤다. 싸전이란 쌀을 비롯한 곡물을 파는 가게를 뜻하는 대구 사투리다. 방천시장은 그때부터 1,000여 개의 가게가 문전성시를 이루며 호황을 누렸다. 그러나 원도심에서 외곽으로 개발중심축이 옮겨가자 시장은 나날이 쇠퇴해 급기야 존립 자체가 어려워졌다. 그러던 2009년 무렵, 방천시장을 살리자는 민·관의 바람에 따라 방천시장 활성화 계획이 문화체육관광부의 ‘문전성시’ 공모사업에 선정됐다. 이를 시작으로 상주예술가와 프로그램 참여 작가가 선정됐고 2010년에 벽화를 비롯한 다양한 예술작품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현재 350m 길이의 골목은 김광석의 노래와 이미지에서 모티브한 작품 70여 점과 야외공연장 등으로 채워졌다.   alt손영복 작가의 작품 ‘사랑했지만’ 뒤로 김광석 다시 그리기 길이 이어진다  김광석의 노래가 물결처럼 흐르는 거리신천을 따라 물 흐르듯 이어진 신천대로에 차량들의 질주가 시원하다. 그 옆 한갓진 옹벽에 기댄 김광석 거리 앞에 서면 직선으로 곧게 뻗은 골목이 한눈에 다 들어온다. 골목 들머리엔 기타를 치며 노래하는 김광석 조형물 ‘사랑했지만’이 있다. 손영복 작가가 2010년에 제작한 설치작품이다. 거친 브론즈의 질감을 살린 이 작품은 청춘의 고뇌를 토해내듯 노래하는 김광석의 모습과 잘 어울린다. 그래서인지 이 거리를 찾은 대부분의 사람이 사진 한 장쯤 찍고 가는 포토존이다. 그 뒤로 방천시장과 김광석에 대한 기록들이 이어진다. 난 책을 접어놓으며 창문을 열어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 잊혀져간 꿈들을 다시 만나고파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 가사 中골목에 들어서면 활짝 웃는 김광석을 먼저 만난다. 미소년 같은 웃음 속에 굵은 주름들이 자글거린다. 골목에는 ‘사랑했지만’, ‘먼지가 되어’, ‘서른 즈음에’, ‘이등병의 편지’, ‘거리에서’,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 ‘일어나’ 등 그의 노래가 물결처럼 흘러내린다. 감성적이고 호소력 짙은 그의 목소리가 골목을 가득 채우기도 하고 텅 비게도 한다. 한 발 두 발 골목을 걷노라면 나도 모르게 노래를 따라 부르게 된다. 그 순간 노래의 감정에 온몸이 흠뻑 젖어 있는 나를 발견한다. 음악의 특별한 매력에 빠진 것이다. 박재근 작가는 벽화 제목과 소재를 김광석의 노래 제목에서 따왔다. ‘어느 60대 노부부의 이야기’가 그것인데 모델은 방천시장 상인 부부라고 한다. 사람들은 실물 크기로 제작된 김광석 조형물과 사진 찍기를 즐긴다. 실제 김광석이 그랬듯 조형물도 흔쾌히 어깨를 내어주고 환하게 웃는다. 164cm의 작은 키 덕분에 누구와 어깨동무를 해도 어색하지 않다. 벽면 한켠에 자물쇠도 걸어놓았다. 사랑과 추억을 간직하고픈 이들이 마음을 다해 걸어 놓았으리라. 그 뒤로 야외공연장이 있다. 버스킹 공연과 김광석 추모 공연 등 다양한 문화공연이 열린다. ‘응팔이’ 세대를 위한 추억 소환 아이템들도 많다. 갤러그, 테트리스 등 쪼그려 앉아서 해야 제맛인 게임들이 가게 앞에 줄 서듯 자리한다. 교련복과 검정 교복을 입고 사진을 찍는 가게, 액세서리, 수공예품을 파는 가게들도 문전성시다. 포장마차 주인행세를 하는 김광석의 벽화도 있다. 황현호 작가의 ‘석이네 포차’가 그것이다. 손님을 향해 환하게 웃으며 술안주를 건네는 표정이 인상적이다. 포장마차 벽화 옆에는 조선일보에 연재된 박광수 작가의 ‘광수생각’ 중 김광석을 주제로 한 작품을 그대로 벽화로 옮겼다. 사람들이 왜 김광석을 좋아하는지 그리고 그의 음악을 왜 듣고 부르는지 그 이유가 두 편의 만화에 잘 담겨 있다. “형, 소주 안주로 제일 좋은 게 뭔 줄 알아요?”“그건 말이에요. 김광석의 노래예요. 소주 안주로는 김광석 노래가 최고라고요.”김광석 거리 끝자락에 ‘김광석 스토리하우스’가 있다. 지상 2층, 지하 1층 규모로 메모리얼존, 내 거실, MD 스토어 등으로 꾸며져 있다. 자필 악보와 수첩 등 김광석의 삶과 작품세계를 엿볼 수 있는 유품들이 1,000여 점에 이른다. 전시된 사진 중에는 코흘리개 유년 시절부터 교회 성가대에서 활동하던 중·고등학생 시절, 딸과 함께 찍은 사진 등 가족이 아니면 쉽게 볼 수 없는 것들이 많아 팬이라면 꼭 한번 찾아볼 만하다. 평소 철학책을 즐겨 읽었던 그였기에 남겨진 메모에는 삶과 세상을 바라보는 숱한 상념들이 빼곡하게 남아 있다. 감수성 짙은 노랫말 역시 그 상념에서 나온 것이다. 입장료 2,000원,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운영한다. alt노래하는 김광석 조형물alt활짝 웃고 있는 모습의 김광석 벽화alt김광석의 생애를 들여다보는 김광석 스토리하우스]]> Mon, 09 Sep 2019 16:15:00 +0000 33 <![CDATA[지식의 힘으로 독립을 이루고자 어느 독립운동가의 초상]]>     글 김정인 춘천교육대학교 교수지식의 힘으로독립을 이루고자 독립을 위해선 군인과 무력만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교육자는 미래 독립 세대를 양성하려는 염원으로 큰 배움을 위한 대학을 만들고자 했다. 언론인들은 조선총독부의 언론 탄압을 고발하며 식민지배의 부당함에 항거했다. 조선총독부는 무엇보다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빚어내는 말과 글을 지키려 한 국어학자들을 두려워했다. 결국 조선총독부는 조선어학회 사건을 조작해 그들을 탄압했다. 지식인들도 펜을 들고 단체를 조직하고 집회를 열어 식민지배에 저항하며 독립을 꿈꿨다. alt조선민립대학기성회 창립총회 기념사진 (1923.03.30.)alt경성제국대학(1924) 민립대학기성회: 큰 배움이 독립의 힘이다1919년에 부임한 사이토 총독은 1922년 2월 「조선교육령」을 개정했다. 여기에는 대학 설립에 관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 큰 배움이 독립의 힘이 될 거라 생각한 지식인들은 조선교육령 개정이 기정사실화되자 곧바로 민립대학설립운동에 들어갔다.조선교육협회 주도로 이상재를 비롯한 각계 인사 47명이 발기인으로 참여해 조선민립대학기성준비회를 조직했다. 1922년 3월 29일 조선민립대학기성회 창립총회가 열릴 때까지 서울을 비롯한 전국 170여 군에서 1,000여 명의 유지들이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설립계획서’에 따르면 조선민립대학기성회가 추진한 민립대학은 종합대학을 지향했다. 처음에는 400만 원을 모금해 법과, 문과, 경제과, 이과 등 4개 학과와 대학예과를 개설할 예정이었다. 다음으로 300만 원을 모금해 공과를, 다시 300만 원을 모금해 의과와 농과를 설치하고자 했다.이상재를 위원장으로 선출한 조선민립대학기성회는 1,000만 원 모금을 목표로 ‘한민족 1,000만이 한 사람에 2원씩’이라는 구호를 내세웠다. 그런데 기금을 바로 내는 것이 아니라 먼저 문서로 약정을 하는 방식이라 실제 돈을 모으는 일은 쉽지 않았다. 게다가 1923년 여름에는 물난리가 났고, 가을에는 일본의 간토(關東) 대지진의 여파로 인한 경제공황이 닥쳤다. 이듬해에도 남부 지방은 가뭄을, 북부 지방은 홍수를 겪었다. 이런 상황에서 기금 모금을 추진하기 어려웠다. 여기에 조선총독부 당국이 기금 출연자에 대한 협박과 감시에 나서면서 민립대학 설립운동은 기세가 꺾이고 말았다. 조선총독부는 민립대학설립운동에 자극받아 관립대학인 경성제국대학의 문을 서둘러 열었다. 이로써 해방이 될 때까지 조선에 대학은 단 하나, 경성제국대학만이 존립했고 우리 손으로 대학을 세워 지식인을 길러내고자 한 꿈은 실현되지 못했다.언론집회압박탄핵회: 자유를 위한 연대 조선총독부는 한글 신문과 잡지를 엄격히 검열하고 통제했다. 더 나아가 언론인 탄압도 불사했다. 1922년 8월 마루야마 쓰루키치(丸山鶴吉) 경무국장은 언론사 대표들을 소집해 불온한 언론에 대해서는 사법처리하겠다고 경고했다. 얼마 후 잡지 『신생활』과 『신천지』를 만드는 언론인들이 사회주의 사상과 반일사상을 고취했다는 이유로 검거되어 재판을 받았다. 명백한 언론 탄압에 언론인들은 펜을 들어 ‘문화가 발달한 곳에서는 언론이 존중되고 문화가 유치하면 언론을 학대한다’며 조선총독부가 내세우는 ‘문화정치’의 기만성을 폭로했다.   1922년의 『신생활』과 『신천지』 필화사건에 이어 1924년에는 조선총독부와 언론인들이 정면충돌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해 4월 박춘금이 주도하는 친일단체 각파유지연맹이 『동아일보』 사장 송진우와 이사인 김성수를 협박한 일이 벌어졌다. 조선총독부는 각파유지연맹을 비호했다. 이어 각파유지연맹이 일본으로 건너가려는 노동자들에게 돈을 갈취하는 사건이 일어나면서 조선노농총동맹과 조선청년총동맹은 이를 규탄하는 집회를 열고자 했으나 조선총독부가 이번에도 금지시켰다. 이에 분노한 언론인들은 노동운동, 청년운동 지도자들과 함께 언론과 집회의 자유를 주장하며 연대했다.  마침내 1924년 6월 7일 언론인은 물론 청년단체·노동단체·여성단체·교육단체·형평단체 등 31개 단체 대표 100여 명이 연대해 언론집회압박탄핵회(이하, 탄핵회)를 결성하고 조선총독부의 언론과 집회 탄압에 “적극적으로 항거”할 것을 결의했다. 탄핵회는 다음날 곧바로 5명의 탄핵실행조사위원을 선정하고 언론 및 집회 관련 압박에 대한 실태 조사에 들어갔다. 그리고 실태 조사를 바탕으로 6월 20일 천도교당에서 언론집회압박탄핵대회를 갖고자 했다. 경찰은 또다시 집회 금지를 통보했고 이 사실을 모르고 대회장에 몰려온 사람들은 거세게 항의했다. 탄핵회는 6월 28일 대표자 회의를 열어 언론 및 집회에 대한 압박사례 실태 조사 결과를 보고받고 국내외에서 7월 20일을 기해 일제히 언론 집회 압박을 탄핵하기 위한 연설회와 시위를 벌일 것을 결정했다. 그날 다음과 같은 결의문이 채택되었다.   언론은 생존의 표현이요 집회는 그 충동이라. 우리의 생명이 여기에 있고, 우리의 향상이 여기에 있다. 만일 우리의 언론과 집회를 압박하는 자 있다 하면 그것은 우리의 생존권을 박해하는 자이다. 현하의 조선총독부는 직접적으로 우리의 언론을 압박하며 집회를 억제한다. 그러므로 우리 민중은 우리의 생존을 위하여 당국의 이러한 횡포를 탄핵한다.하지만 7월 20일 연설회 및 시위 역시 경찰의 금지로 무산되었다. 이처럼 언론인들은 조선총독부의 최우선 감시대상인 지식인들이었다. 하지만 언론인들은 펜으로 저항하는 데 그치지 않고 사회운동 세력과 연대해 언론과 집회의 자유를 요구하는 행동을 감행했다.     alt조선어학회 사건 수난자 동지회(1949.06.12.)    조선어학회 사건: 말과 글의 힘을 두려워한 식민권력 우리의 말과 글을 스스로 지켜내야 했던 식민지 지배하에서 1921년 국어를 연구할 목적으로 장지영, 김윤경, 이윤재, 이극로, 최현배, 이병기 등이 조선어연구회를 창립했다. 조선어연구회는 1927년부터 기관지인 『한글』을 발간했고, 1929년부터는 조선어사전편찬위원회를 조직하여 사전 편찬을 위한 작업에 들어갔다. 1931년에는 이름을 조선어학회로 바꾸었으며 1933년에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발표했다.중일전쟁에 이어 아시아태평양전쟁이 일어날 무렵 조선총독부는 황국신민교육이라는 이름으로 한국인을 일본화하는 교육을 강제했다. 그들에게 우리말을 닦고 가다듬는 조선어학회는 눈엣가시였다. 1942년 9월 5일 함경남도 함흥에 자리한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 교사 정태진이 검거된 사건을 계기로 조선총독부는 조선어학회 사건을 조작했다. 함경남도 홍원경찰서는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 여학생의 일기장에서 “국어를 상용하는 자를 처벌했다”는 구절을 발견하고 이는 곧 일본어를 쓰면 처벌한다는 뜻이라며 반국가행위로 몰아갔다. 이 과정에서 한때 이 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조선어사전 편찬 작업을 하던 정태진이 걸려들었다. 홍원경찰서는 정태진에게 죄를 뒤집어씌우기 위해 고문을 가했다. 결국 강요에 못 이긴 정태진은 그들 요구대로 자백서를 썼다. 이 허위자백을 토대로 홍원경찰서는 조선어학회 관련자 검거에 나섰다. 33명이 체포되어 그중 29명이 구속되었다.조선어학회 관련자들은 처음부터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치안유지법 위반 증거가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홍원경찰서는 사회 명망가들을 일망타진하여 체포한 만큼 성과를 내야 했다. 홍원경찰서에는 농민조합사건을 다루며 무자비한 고문으로 여러 청년을 죽음으로 몰아가서, 사람 백정으로 불리던 형사들이 있었다. 이들은 4개월 동안 고문을 자행했다. 강요에 의한 허위자백의 내용이 제각각이니 고문은 계속되었다. 1년이 지난 1943년 9월 검찰은 16명을 “겉으로는 문화운동의 가면을 쓰고 조선 독립을 목적한 실력배양 단체”에서 활동했다는 이유로 치안유지법과 내란죄 위반으로 예심에 회부했다. 예심이 종료된 것은 1944년 9월 30일로 체포로부터 2년 가까운 시일이 걸렸다. 그동안 이윤재와 한징이 옥사했다. 1944년 12월 21일부터 1945년 1월 16일까지 진행된 재판의 결과 장현식을 제외하고는 모두 유죄 판결을 받았다. 이 중 6명은 집행유예로 석방되었고, 실형을 언도받은 사람들은 고등법원에 상고했으나 해방 이틀 전인 1945년 8월 13일에 기각되었다. 결국 그들은 독립이 되고서야 감옥 밖 햇볕을 쬘 수 있었다. alt   한글 맞춤법 통일안  alt   ]]> Fri, 04 Oct 2019 14:16:45 +0000 34 <![CDATA[커피를 마시는 지식인 지식인의 아지트, 다방 ]]> 커피를 마시는 지식인지식인의 아지트, 다방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거나 대화를 나누는 일은 이제 도시의 흔한 풍경이 되었지만, 일제강점기 다방으로 대표되던 근대식 찻집은 소위 배운 사람들의 공간이었다. 당시 근대문화의 대다수가 그러하듯 다방문화 또한 평범한 사람들은 엄두도 내지 못하는 ‘사치’로 여겨졌다. 그래서 다방에는 양복과 원피스를 차려입은 모던보이와 모던걸들이 넘쳐났다. 그들은 상급 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유학까지 다녀온 예술가 또는 지식인이었다.물론 다방의 손님들이 모두 돈이 많았던 것은 아니다. 식민지 지식인의 삶은 팍팍했다. 취업난에 시달렸고, 주머니는 가난했다. 지식인으로서, 조국을 잃은 국민으로서 부조리한 현실과 싸울 것인지, 타협할 것인지 선택해야 하는 순간을 번번이 마주해야 했다. 그럼에도 그들은 곯은 배를 움켜쥐고 다방으로 와서 한 끼 식사보다 비싼 커피를 마셨다. 그곳에서 예술과 철학을 이야기하거나, 때때로 자신의 무력감을 토로했다. 그 시절 다방은 지식을 나누는 장이자, 무력한 식민지 지식인의 우울한 표정이었다. alt]]> Fri, 04 Oct 2019 13:56:33 +0000 34 <![CDATA[동양평화와 대한독립에 헌신한 대한국인 안중근 이달의 독립운동가]]> 글 전시부동양평화와 대한독립에 헌신한대한국인 안중근 독립기념관은 국가보훈처 및 광복회와 공동으로 안중근을 2019년 10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안중근은 하얼빈역에서 한국 침략을 주도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alt 애국계몽운동으로 나라의 힘을 회복하고자 노력하다안중근은 1879년 9월 2월(음력 7월 16일)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고, 아명은 응칠(應七)이다. 아버지가 천주교에 입교하면서 안중근도 아버지를 따라 세례를 받고 세례명을 도마(Thomas)로 하였다. 안중근은 어려서 할아버지에게 조선역사와 유교경전을 배우며 민족의식을 키웠다. 유학자이면서 근대 신문물을 수용했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개화적 사고도 지닐 수 있었다. 또 1905년 일제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탈한 을사늑약이 체결된 후 해외로 나가 국권회복의 길을 모색하던 안중근은 국내로 돌아와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서우학회에 가입한 뒤 삼흥학교와 돈의학교를 운영했으며, 1907년 2월 국채보상운동이 시작되자 국채보상기성회 관서지부를 조직해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애국계몽운동을 통한 국권회복에 힘쓰던 그는 일제에 의한 광무황제 강제 퇴위와 대한제국 군대 해산 등을 보면서 국내 항일운동에 한계를 느끼고 국외 독립전쟁에 참여하기로 결심, 러시아 연해주로 망명하였다.의병 참모중장으로서 독립전쟁에 나서다북간도를 거쳐 연해주에 도착한 안중근은 동의회 산하 의병부대의 우영장(右營將)을 맡아 1908년 여름 두 차례의 국내진공작전을 이끌었다. 또한 얀치헤(煙秋)에서 동지들과 동의단지회를 결성하고 조국 독립에 헌신할 것을 맹세하였다. 그러던 중 초대 통감을 지낸 이토 히로부미가 1909년 9월 만주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대한제국을 침략하고 동양의 평화를 깨뜨린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기로 결심하였다. 의거 준비를 마친 안중근은 10월 26일 하얼빈역에 도착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였다. 러시아 헌병에 체포된 안중근은 뤼순(旅順)에 위치한 일본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으로 송치되어 여섯 차례 재판을 받았다. 법정에서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의 15가지 죄를 지적하고, 자신의 의거를 대한의군 참모중장의 자격으로 적장 이토를 처단한 것이라고 주장했으나 일본 법원은 사형을 선고하였다. 안중근은 공소하지 않고 옥중에서 자신의 자서전인 『안응칠역사』와 거사 이유를 담은 『동양평화론』을 저술하다가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 뤼순감옥에서 사형 순국하였다. 정부는 안중근의 공훈을 기려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alt안중근(安重根)1879.09.02. ~ 1910.03.26.황해도 해주건국훈장 대한민국장(1962)     alt단지동맹 결성 과정이 실린 ‘만고의사 안중근전(9)’(『권업신문』, 1914.08.23.) 계봉우는 『권업신문』에 1914년 6월 28일부터 8월 29일까지 ‘만고의사 안중근전’을 연재하였다. 8월 23일 안중근전에는 단지동맹과 동의단지회 취지서의 내용이 나온다alt동양평화론 일본 군국제국주의 침략자가 축출되고 한국이 독립되면, 동양에는 영원한 평화가 지속될 것이며, 그러기 위해선 한(韓)·청(淸) 양 국민이 일치단결해야 함을 강조했다. 동아시아의 평화를 위해 평소 생각하던 구체적 방안을 기술하였으나 사형 집행이 당겨지면서 미완성으로 남았다        alt  어머니가 지어 보낸 옷을 입고 있는 안중근 1910년 3월 26일 사형 집행되기 5분 전에 촬영한 사진이다. 안중근의 어머니는 “사형이 되거든 당당하게 죽음을 해 속히 하느님 앞으로 가라”는 편지와 함께 수의를 지어 보냈다alt뤼순감옥에서 빌렘 신부, 두 동생(정근, 공근)과 면회하는 안중근   1910년 3월 10일경에 동생과 신부와 면회하며 유언을 전달했다  ]]> Fri, 04 Oct 2019 15:44:50 +0000 34 <![CDATA[사진 사가시오 우리의 잊지 못할 기념물 자료로 읽는 역사]]> 글 김경미 자료부 학예연구관사진 사가시오우리의 잊지 못할 기념물안중근 사진엽서  엽서는 근대의 새로운 통신수단으로 간편하고 값싸게 이용할 수 있어서 안부나 간단한 용건을 주고받는데 널리 사용됐다. 대중성과 실용성을 지닌 엽서에 사진이 덧붙여진 그림엽서는 그 시각적 효과에 의해 선전·홍보의 도구로 활용되고 상품성도 지녔다. 사진엽서는 1900년을 전후하여 전 세계적으로 유행하기 시작하여, 관제엽서 뿐 아니라 개인이나 단체가 만든 엽서도 활발하게 제작됐다.   alt01. 안중근 단지혈서 엽서   안중근 의거와 안중근 엽서의 성행1910년 3월 26일 안중근 의사가 여순감옥에서 순국하자마자 안중근 사진의 상품적 가치를 감지한 일본인 사진업자들은 발 빠르게 안중근 사진엽서를 대량 제작하여 판매했다. 쇠사슬에 묶여 무릎을 꿇려 앉은 모습에 안중근을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범죄자’로 부각시킨 것이었다. 하지만 엽서를 사려는 사람들이 앞을 다투어 몰려들자, 한국통감부는 급히 치안방해라 하여 판매를 금지했다.이러한 안중근 사진엽서는 일본의 거물급 정치가를 처단한 안중근이 도대체 누구이며, 어떻게 생겼는지 알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궁금증과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것이었다. 이후 안중근이 지키고자 했던 나라는 독립을 잃었지만, 안중근 의거와 그 정신을 명확한 이미지로 전달하기 위한 사진엽서가 만들어진다. 그 대표적인 것이 독립기념관에서 유일본으로 소장하고 있는 ‘안중근 단지혈서 엽서’(자료01)이다. ‘대한의사안중근공혈서(大韓義士安重根公血書)’라는 제목을 단 엽서의 한 가운데에는 ‘대한독립(大韓獨立)’ 4자를 혈서로 쓴 태극기가 있고, 그 옆에 단지동맹의 피로 쓴 글이라는 설명이 활자로 인쇄되어 있다. 태극기 아래에는 안중근이 의거에 사용한 권총과 단지한 손가락 사진이 있으며, 엽서의 네 귀에는 4종의 안중근 사진이 수록됐다. 이 엽서는 한 장의 화면에서, 안 의사가 나라를 지키기 위한 최후의 방법으로 의열활동을 선택하고 그 실천에 몸을 바치는 과정을 보여준다.안중근은 1908년 7월 의병의 국내 진공작전에 실패한 후, 1909년 2월 연해주 연추 하리에서 동지 11명과 함께 왼손 무명지 첫마디를 잘라 단지동맹을 맺고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칠 것을 맹세했다. 이때의 혈서 태극기와 손가락은 안중근이 옥중에서 유언한 대로 동생 안정근이 동맹동지에게서 찾아 보관했다. 혈서 태극기는 이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창간된 『권업신문』의  1914년 8월 23일 자에 그 사진이 실렸으며, 사진은 엽서 속의 것과 같은 것이다.이토를 처단하기 위해 하얼빈에 도착한 안중근은 1909년 10월 23일 아침에 우덕순, 유동하와 함께 중국인 사진관을 찾아 의거 결행 기념 촬영을 했다.자료02 엽서 왼쪽 위의 안중근 사진은 이 기념사진에서 잘라 낸 것이거나 같은 장소에서 같은 모습으로 촬영된 것으로, 의거 3일 전 몸을 바쳐 나라를 구하겠다는 안 의사의 결의를 상징한다.10월 26일 오전 9시 30분경 안중근은 하얼빈역에 도착한 이토를 향해 의거를 행동에 옮겼다. 오른쪽 3발이 이토에게 명중했고, 수행원 세 사람이 왼쪽에서 각각 한 발씩 총을 맞았다. 이토는 폐를 관통한 두 발의 총알이 치명상이 되어 곧 절명했다. 엽서에 있는 ‘안 의사의 단총’ 사진은 재판에 제출된 증거품 사진(자료03) 중 맨 위의 것이다. 안중근은 바로 러시아 헌병에게 체포됐다. 엽서 오른쪽 위의 안중근 사진은 체포된 후 의거 결행 당시의 복장 그대로 촬영된 것이다. 겹코트를 입고 사냥꾼들이 쓰는 모양의 모자를 쓴 모습으로, 의거를 성공적으로 이루어낸 안 의사의 당당한 모습을 보여준다.안중근은 하얼빈 일본총영사관에 인계됐고, 여순의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았다. 오른쪽 아래의 안중근 사진은 안응칠(安應七)이라는 명찰을 달고 단지한 손가락이 잘 보이도록 촬영된 것으로, 옥중에서 1개월 정도 지난 후의 모습이다. 왼쪽 아래의 안중근 사진은 옥중에서 돌담을 배경으로 의자에 앉은 자세로 촬영된 전신사진(자료04)의 일부이다. alt02. 안중근과 우덕순, 유동하의 의거 결행 기념사진(1909.10.23.)     alt03. 안중근 의거 시 사용된 권총안 의사가 사용한 총은 32구경 7연발의 브라우닝 모델 1900(총기번호 262336)으로, 벨기에 총기회사인 파브리크 나시오날(FM)사가 존 브라우닝의 설계도에 따라 생산한 반자동식 권총이다. 가운데는 조도선의 총인 스미스 웨슨(S&W) 리볼버 모델이며, 아래는 우덕순의 총으로 안 의사의 것과 동일한 모델(총기번호 263975)이다alt04. 옥중에서 돌담을 배경으로 의자에 앉은 자세로 촬영한 모습 한국인에게 안중근 사진엽서가 갖는 의미이와 같이 안 의사의 의거와 관련된 사진을 모아 만들어진 단지혈서 엽서를 누가 언제 제작했는지에 대한 정보는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혈서 태극기 사진이 실렸던 『권업신문』의 「만고의사 안중근전」 중에서 단지동맹의 날짜가 엽서 내용과 일치한다는 점, 다음에 소개할 ‘안중근 의사 5종 사진엽서’에 사용된 활자가 혈서 엽서의 것과 유사하다는 점 등을 볼 때, 안 의사의 순국 후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주한 안정근과 그곳의 독립운동가들이 중심이 되어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크다.1913년 말과 1914년 초에 걸쳐 『권업신문』에는 「사진 사가시오, 우리의 잊지 못할 기념물」이라는 제목으로, 안중근이 하얼빈 정거장에서 이토를 죽일 때의 모양과 여순 옥중에서 유언하던 사실을 기록한 사진 등 4종의 엽서를 판매한다는 기사가 실렸다. 안중근 전기 간행 경비를 마련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블라디보스토크 일본총영사관을 통해 안중근 사진엽서 5종으로 외무성에 보고되었고, 그 실체는 관련 문서에 첨부된 이미지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자료05)이 안중근 그림엽서 5종 세트와 거의 동일한 것으로, 같은 시기에 안정근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기부금을 모으기 위해 비매품으로 제작했다는 엽서 세트도 있다. 이 엽서는 자료05-2에서 안중근의 사진 아래에 안중근의 단총 사진이 추가된 점과 05-2와 05-3에 있는 설명 문구가 활자로 인쇄되면서 내용이 조금 간략해졌다는 차이만 있다. 이 엽서 세트는 1914년 1월 초에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500매, 하와이에 300매가 보내졌다고 한다.이러한 사진엽서가 제작·판매되었던 1913년 말과 1914년 초의 시점은 러일전쟁 10주년을 맞이하여 러시아에서는 일본에 대한 복수심이 절정에 달하여 다시 개전할 조짐이 있던 때였다. 블라디보스토크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은 이러한 분위기를 이용하여 독립전쟁을 준비하며 군자금을 모집하고자 했다. 안중근 사진엽서는 안중근 의거의 현장과 죽음을 앞둔 안 의사의 결연한 모습을 보여주며, 나라를 잃고 해외를 떠돌아야 했던 한인들에게 조국독립의 의지를 다짐하도록 하는 소장 기념품이었다. alt5-2. 하얼빈 정거장에서 이토와 러시아 대신이 만나는 장면의거 현장의 사진으로 사진 왼쪽 위에 안중근 의사의 사진이 삽입되어 있고, “하얼빈 정거장에서 이등과 아라사 대신이 만나는데 안 의사는 기회를 기다림”이라는 설명이 쓰여 있다alt5-3. 안 의사가 여순 감옥에서 두 아우와 홍 신부를 만나는 장면1910년 3월 10일경 옥중에서 정근, 공근 두 아우, 빌렘 홍 신부와 면회하는 장면을 찍은 사진이다. “안 의사 중근공이 여순구 옥중에서 두 아우와  홍 신부에게 유언하는 모양(나 죽은 후에 나의 시체는 어느 때든지 나라가 회복되기 전에는 본국에 반장하지 말고 속히 독립의 소식으로 나의 영혼을 위로하게 하라)”는 설명이 쓰여 있다 alt5-1. 안중근 의사와 이토 히로부미 ‘대한의사 안중근공’과 ‘통감 일본인 이등박문’의 사진을 상하로 놓았다. 안 의사 사진 좌우에는 ‘捨生取義 殺身成仁 安公一擧 天地皆振’(목숨을 버리고 의를 좇았으며, 몸을 희생하여 인을 이루었네. 안공의 의거에 천지가 다 진동했네)라는 글이 적혀있다. 이 글은 천황제를 반대하다가 대역무도죄인으로 몰려 1911년 1월 24일 처형된 일본인 고토쿠 슈스이(幸德秋水)가 쓴 안 의사를 기리는 글 중 ‘안군(安君)’을 ‘안공(安公)’으로만 바꾼 것이다alt5-4. 대한의사 안중근공 안중근 의사의 사진 3가지로, “하얼빈에서 잡히기 전 모양”, “하얼빈정거장에서 잡힐 때 모양”, “여순구 옥중에 있은 지 한 달 후 모양”이라는 설명이 달려 있다. 위의 사진 왼쪽에는 ‘身在三韓名萬國 生無百世死千秋’(몸은 한국에 있어도 그 이름은 만방에 떨쳤네. 살아서 백 년을 못가지만 죽어서 천년을 가리라)라는 시구가 있다. 이는 중국의 위안스카이가 안중근 의사의 순국을 애도하는 시라고 알려져 있다.alt5-5. 대한충의사 안중근 의사의 좌우로 충정공 민영환과 헤이그밀사 이준의 사진이 나란히 있다(『권업신문』의 4종은 이 엽서를 포함하지 않은 것일 수 있다) <사진 하나 더 보기>양주은의 사진엽서 미국 샌프란스시코 대한인국민회에서 활동하던 양주은이 1913년 3월 27일 안창호에게 보낸 사진엽서이다. 그가 모아서 벽에 붙여놓은 안중근, 장인환, 민영환, 이재명 등의 자료를 함께 사진으로 찍어 개인용 엽서로 만든 것으로 보인다. 안중근 의사의 사진은 옥중에서 약간 초췌한 모습으로 단지한 손이 잘 보이게 가슴에 얹은 모습이다. 이 사진은 원래 ‘이등공을 암살한 안중근’이란 제목하에 “한인은 고래로부터 암살의 맹약으로서 무명지를 절단하는 옛 관습이 있다. 오른손(왼손의 잘못)을 촬영한 것이다”라는 비하의 문구가 일본어로 넣어져 엽서로 판매됐다. 그런데 양주은 엽서 속의 사진은 고토쿠 슈스이의 찬사(자료05-1 참고)가 적혀 있는 것으로, 샌프란시스코에서 발행되던 『신한민보』 1910년 3월 30일 자에 게재되기도 했다. altalt ※ 안중근 단지혈서 엽서는 곽영리님, 양주은 엽서는 안수산(Susan Ahn Cuddy)님이 기증해 주셨습니다. 독립기념관의 연구와 전시, 교육을 위해 소중한 자료를 기증해 주신 여러분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참고김호일 편, 『대한국인 안중근 - 사진과 유묵으로 본 안중근 의사의 삶과 꿈』, 안중근의사숭모회, 2010. 윤병석, 「안중근의 사진」, 『한국독립운동사연구』 37, 2010. 이경민, 『경성, 사진에 박히다 - 사진으로 읽는 한국 근대 문화사』, 산책자, 2008. ]]> Fri, 04 Oct 2019 14:57:09 +0000 34 <![CDATA[겨레의 정신과 생명 우리말을 지킨 최현배 역사를 만든 사람]]> 글 임영대 역사작가겨레의 정신과 생명우리말을 지킨 최현배 최현배는 1894년 경상남도 울산에서 태어났다. 서울 한성고등학교, 히로시마고등사범학교, 교토제국대학 및 동 대학교 대학원을 거쳐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취임하였으나 흥업구락부 사건과 조선어학회 사건을 겪으면서 해임, 투옥되었다. 해방 이후에는 문교부 편수국장, 연희대학교 교수, 한글학회 이사장 등을 역임하며 교과서 제정과 한글 전용 운동 등에 진력하였다. 1962년에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독립장을 수여 하였으며 1970년에 노환으로 사망하였다.     alt최현배1894.10.19.~1970.03.23.경상남도 울산건국훈장 독립장(1962)   등 뒤엔 반만년 역사를 지고, 앞에는 무궁한 장래를 가진 조선겨레의 한 사람으로서1910년대에 일본 유학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최현배는 그 어려운 일본 유학을 관비로 다녀왔고, 일본 최고의 명문대학인 교토제국대학에서 교육학을 전공하여 대학원까지 졸업했다. 이만한 학력이면 일본에서도 최상위 지식인에 해당했다.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최현배는 갓 설립된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학교)의 교수로 취임했다. 최현배가 담당한 강의 과목은 철학과 조선어였다. 이는 한성고등학교 재학 시절 주시경이 직접 운영하던 조선어학강습원을 다니면서 국어학과 문법을 이수한 데서 비롯되었다.제국대학 유학생 출신에 교수까지 되었으니 얼마든지 일본에 협력하면서 평안한 삶을 누릴 수 있었지만, 최현배는 우리말과 글을 지키는 힘든 길을 자처했다.말은 그 겨레의 정신이요 생명이라, 정신이 없는 몸뚱이가 살아갈 수 없으며, 흥해갈 수 없음도, 또한 당연의 사세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리하여, 이 세상에는 말이 쇠함을 따라 그 임자인 겨레가 쇠하며, 말이 망함을 따라 그 임자인 겨레가 또한 망함을 나타내는 실례가 없지 아니하니, 만주 말과 만주 겨레가 곧 그것이다.주시경에게 우리말을 지켜야 할 이유를 배운 최현배를 비롯한 제자들은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일제가 3·1운동의 충격을 완화하기 위해 시작한 이른바 ‘문화통치’를 계기로, 이들은 본격적인 한글 운동을 전개하였다.우리말에 조선심이 있고, 조선혼이 있다한글운동의 시초는 1921년에 문을 연 ‘조선어연구회’였다. 최현배는 귀국 직후인 1926년부터 이 모임에 참여하였고, 1929년에는 조선어사전 편찬위원회 준비위원과 집행위원으로 활동했다. 1930년에는 연구회 간사로도 선정되었다. 다음 해에 조선어연구회는 조선어학회로 개명한다. 이후 최현배는 적극적으로 우리말의 체계화와 이를 통한 민족의식의 고취에 주력했다. 언어는 곧 민족의 상징이며, 자신의 말을 가지고 있는 한 민족은 절대로 소멸하지 않는다는 게 그의 신념이었다.혈통·생활 근거지·언어·민족 특질·역사가 다르기 때문에 민족의 구별이 생긴 것이며, 민족이 소멸할 이(理)가 없다.이 시기 최현배는 정력적인 집필활동을 펼쳤다. 동래고등보통학교 교사로 잠시 재직하던 1920년부터 짓기 시작한 『우리말본』(1929)을 정리하여 낸 것을 시작으로, 『중등 조선말본』(1934), 『한글의 바른 길』(1937) 등이 그 결과물이다.이게 전부가 아니다. 최현배는 1931년부터 「외래어 표기법 통일안」 심의위원을 맡아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으며, 1935년부터는 조선어 표준말 사정위원 및 수정위원으로도 활동했다.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제정하는 회의가 총 123회에 걸쳐 열렸고, 433시간이 소요되었는데, 최현배는 이렇게 많은 회의에 한 번도 빠지지 않았다.슬프게도 최현배와 조선어학회가 우리말에 숨을 불어넣던 시기는 일제가 허울뿐인 문화통치를 폐기하고 ‘조선어’와 ‘조선 민족’을 말살하는 민족말살정책을 본격화하면서 끝이 났다. 일제는 최현배를 비롯한 조선어학회에서 활동하는 학자들이 ‘조선어 교육을 통해 독립의식을 고취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총 33인에 달하는 학자들을 투옥했다. 이것이 바로 1942년에 벌어진 ‘조선어학회 사건’이다.최현배는 다른 독립운동 사건인 흥업구락부 사건에 연루된 탓에 1938년에 이미 연희전문학교 교수 자리를 내려놓은 상태였다. 여기에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징역형을 선고받으면서 해방이 되는 날까지 갇혀 있게 된다.해방이 오자 우리말을 살리려는 최현배의 움직임에도 자유가 왔다. 조선어학회는 한글학회가 되었고, 최현배는 미군정청 편수국장이 되어 국어 교과서 제작 관련 행정을 담당하였다. 전쟁 때문에 정부가 부산으로 피난 갔을 때도 문교부(교육부) 편수국장을 맡았다. 최현배의 연구 성과가 교과서 제작에만 들어간 것은 아니었다. 한글을 로마자로 표기하는 법, 외래어를 한글로 표기하는 법도 모두 최현배의 이론을 따랐다.전쟁이 끝나고 연희대학교(연세대학교) 교수로 복직한 뒤에도 한글을 위한 최현배의 노력은 끝나지 않았다. 1953년에 한글학회 이사장을 맡아 1970년에 사망할 때까지 중심을 지켰으며, 가로쓰기 체계를 확립하고 일본어 잔재를 청산하면서 우리말을 되찾는 데 공헌하였다. 오늘날 우리가 우리말을 사용할 수 있는 데는 세종대왕 못지않게 최현배의 역할이 크다. ]]> Fri, 04 Oct 2019 13:35:05 +0000 34 <![CDATA[식민지 지식인의 몫 우리가 만난 얼굴]]>     식민지 지식인의 몫  식민지 지식인으로 살아간다는 일은 쉽지 않았습니다. 아니, 식민지 지식인이 자신의 지식을 올바르게 사용하는 일이 가장 어려웠습니다. 그들은 남보다 아는 것이 많았지만 지식의 방향이 항상 옳은 곳만을 가리키진 않았습니다. 친일과 타협, 혹은 시대에 대한 무관심에서 지식인으로서의 제 몫을 찾는 이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누군가는 우리민족의 정신을 지키기 위해 공부하고 연구했습니다. 교육과 배움에서 독립을 찾았고, 신문과 잡지에 민족을 대변하는 목소리를 냈습니다. 나라의 독립을 위해 제 지식을 사용하는 것이야말로 식민지 지식인의 몫, 즉 책임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alt]]> Fri, 04 Oct 2019 10:37:55 +0000 34 <![CDATA[제1차 세계대전의 종결과 국제회의 대표 파견 한국인의 터전]]> 글 홍선표 나라역사연구소 소장제1차 세계대전의 종결과국제회의 대표 파견1910년대 재미 한인의 군사·외교운동 4 1918년 11월 11일 종전 선언으로 제1차 세계대전의 막이 내리자 국제사회는 향후 있을 파리강화회의에 모든 관심을 기울였다. 전쟁을 승리로 이끈 미국 윌슨 대통령의 14개조 평화조건이 앞으로 어떻게 이행되고 적용될 것인가는 승전국 연합국과 패전국은 물론 전 세계 약소민족들에게 초미의 관심사로 다가왔다. 이런 때에 뉴욕에서 제2차 소약국민동맹회의가 개최되자 미주 한인들은 향후 있을 파리강화회의를 대비하며 외교활동에 나섰다. 이대위·안창호의 한인대표 파견 추진1918년 11월 12일 뉴욕의 김헌식은 북미지방총회장 이대위에게 향후 있을 제2차 뉴욕 소약국민동맹회의에 대표 파견을 논의하자고 제의했다. 안 그래도 국제정세의 변화를 주목하던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장 이대위는 김헌식의 제안을 받고 11월 14일 특별임원회를 개최해 윌슨 대통령에게 민주주의의 승리를 축하하는 전보 발송, 중앙총회의 지휘하에 시국문제의 주관과 특별의연금 모금활동 등을 의결했다. 그는 “이번 대전쟁에서 연합국과 미국의 승리는 곧 윌슨 대통령의 민주주의 승리니 세계 각 민족은 모두 자기 의향에 의지하여 그 운명을 결단하는 동시에 자유를 얻는 민족이 많을 것이라” 보고 이때를 이용해 소약국민동맹회의와 파리강화회의까지 우리의 외교활동을 시험해 볼 것을 제안했다.이대위는 11월 15일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장 안창호에게 소약국민동맹회의와 파리강화회의를 대비한 한인 대표자 파견을 공식 제안했다. 이 같은 제안은 1917년 당시 하와이지방총회의 선제 행동으로 대표 파견의 기회를 놓친 것을 의식한 기민한 행동이었다.안창호는 이대위의 공문을 받고 가장 먼저 정한경에게 서신(1918.11.18.)을 보냈다. “제 생각에는 우리가 윌슨 대통령에게 교섭을 함으로 오늘 무슨 효험이 없을 줄 아오나 세상 사람들이 자기들의 자유와 평등을 위하여 말하는 이때에 우리만 가만히 있으면 독립을 원치 아니하는 이와 같을 지라. 우리의 뜻을 발표하는 것은 가하는 듯하오이다. 형께서 이에 대하여 의견을 말씀하여 주소서.” 그런 후 이번 국제회의에 정한경을 대표로 파견하고 싶다하고 소약국민동맹회가 어떤 곳인지를 물었다. 이미 안창호의 마음속에는 정한경을 이번 국제회의 한인 대표로 점찍고 시국문제에 대한 그의 의향을 물은 것이었다.정한경(1891~1985)은 어떤 인물인가. 1909년 6월 박용만이 만든 헤이스팅스 한인소년병학교에 참가해 일찍이 상무주의 독립정신을 갖추었고 네브래스카주 커니사범학교와 주립대학교 졸업(1917) 후 노스웨스턴대학교 경제학과에 조교로 재직 중에 있었다. 그는 1915년 2월 샌프란시스코에서 개막된 만국박람회 때 일장 연설로 주변을 놀라게 한 적이 있는데, 이때 처음 안창호를 만났다. 네브래스카에서 공부할 때 한인학생동맹 회장으로 활동하였고 중국인 유학생 잡지 『The Chinese Students Monthly』에 기고하는 등 뛰어난 언변과 대외 활동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또 그는 대전 종결이 선언된 1918년 11월 11일 재미 한인 동포들에게 보낸 장문의 영문 편지에서 한인 대표자를 뽑아 국제회의를 대비할 것을 촉구하기도 했다. 이때 그는 영어 구사력과 탁월한 지식을 소유한 이승만을 한인 대표자로 추천하였다. 안창호가 젊은 정한경에게 가장 먼저 시국문제를 협의하고 대표로 천거하고 싶다 한 것은 그만한 자질을 갖춘 인물로 보았기 때문이었다.           alt1918년 뉴욕 소약국민동맹회의 개최 전단지   소약국민동맹회의 한인대표이승만·민찬호·정한경의 선출과 선전·외교활동안창호는 1918년 11월 25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시국문제 논의를 위한 중앙총회 임시협의회를 개최했다. 임시협의회는 “파리강화회의와 소약국민동맹회의에 한인 대표자의 파견은 대한인 전체 민족의 대사건”으로 간주하고 7가지 사안을 의결했다. 그중 주요 의결 내용은 중앙총회에서 향후 있을 모든 외교문제를 총괄하고, 이승만· 민찬호·정한경을 한인 대표자로 선택해 소약국민동맹회의에 보내되 정한경은 파리강화회의 대표자로 선정한다는 것이었다. 이 같은 의결 내용은 『신한민보』 11월 28일 자 호외로 공포되었다.소약국민동맹회의는 1918년 12월 14일부터 15일까지 이틀간 뉴욕 맥알핀 호텔에서 개최되었다. 1917년에 이은 두 번째 국제회의였다. 하와이 정부의 미허가로 아직 출발하지 못한 이승만을 제외한 한인 대표 민찬호와 정한경은 12월 10일부터 19일까지 뉴욕에 체류하며 대회 참가와 함께 선전활동에 주력했다. 두 사람은 이승만·정한경·민찬호의 이름으로 미국 윌슨 대통령과 상원을 대상으로 독립청원서를 보냈고 언론을 상대로 한 선전활동에도 매진했다. 한편 1918년 11월 중순경 뉴욕에서 결성한 신한회는 김헌식을 한인 대표로 소약국민동맹회의에 보냈는데, 김헌식은 이번 대회의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하지만 대회 기간 내내 대한인국민회 대표와 신한회 대표 간 유기적인 교류나 협조는 없었다. 제2차 뉴욕 소약국민동맹회의에는 24개국 약소민족 대표들이 참가했으나 과거 1차 때보다 미국 언론의 주목을 덜 받았다. 대회를 주관한 회장 하우(Frederic C. Howe)가 약소국 대표의 강화회의 출석권 교섭을 위해 대회 개최 전 파리로 건너간 데다 국제 여론의 관심사가 온통 파리에서 있을 강화회의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중에 일본에서 발행된 『Japan Advertiser』(1918.12.18.)와 『대판조일신문』(1918.12.15./12.18.) 등에서 한국인 대표의 소약국민동맹회의 참가활동 사실을 보도하였다. 이 같은 보도는 당시 국제정세 변화에 주목하며 장차 2·8독립운동을 모색하던 재일 한국인 유학생들에게 일정한 영향을 주었다.대한인국민회의 소약국민동맹회의 참가는 파리강화회의 외교를 위한 사전 작업의 일환이었다. 따라서 이틀 만에 끝난 소약국민동맹회의 종결 직후 최대의 관심사는 파리에서의 외교활동이었다. 그런데 파리 파견 대표자로 정한경만 선정된 데 대해 미주 한인사회 곳곳에서 왜 이승만과 같은 인물을 대표로 뽑지 않았는가에 대한 문의가 대한인국민회로 쏟아졌다. 이러한 여론에 직면한 안창호는 1918년 12월 23~24일 임시협의회를 개최해 7인(임정구, 황사선, 최진하, 최응선, 이건영[백일규], 송창균, 홍언)의 임시위원회를 조직하고 임시국민대회 개최 건과 아울러 파리강화회의 대표자로 이승만을 추가하는 것으로 의결했다. 이승만을 추가 선정한 것은 그를 국제외교의 적임자로 본 때문도 있었겠지만 그 이면에는 이승만을 지지하는 하와이지방총회와 북미의 한인들을 결집하기 위한 의도 때문이었다. 모처럼 다가온 기회를 이용해 중앙총회를 중심으로 미주 한인사회를 단결시키고 그 힘으로 한인 대표파견을 위한 특별의연금 모금활동을 성공적으로 추진하기 위함이었다.        ]]> Fri, 04 Oct 2019 16:08:42 +0000 34 <![CDATA[한글학자 독립운동가 그들이 지키고자 했던 것은? 끝나지 않은 독립운동]]> 글 이계형 국민대학교 특임교수한글학자 독립운동가그들이 지키고자 했던 것은? 1945년 우리 민족은 광복을 맞았지만, 독립운동은 끝나지 않았다. 여전히 미완으로 남은 사건, 해결되지 못한 문제, 기억해야만 하는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끝나지 않은 독립운동은 독립운동사를 과거에 머문 역사가 아닌 현재의 문제로 다루며, 오늘도 신문 한쪽을 차지하고 있는 독립운동 및 일제강점 이슈를 소개한다. 한글로 나라를 지켰던 사람들10월은 정부가 정한 ‘문화의 달’이다. 한글날이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닌가 한다. 문자는 특정 사회의 문화 성숙도를 나타낼 뿐만 아니라, 축적된 문화를 보존하고 전달하는 중요한 도구의 하나다. 올해가 한글날 제정 91주년이라고 하지만 면밀히 따져보면 1926년 11월 조선어연구회(조선어학회 전신)가 ‘가갸날’을 제정한 이후부터이기 때문에 93주년이 옳다. ‘한글날’의 배경에는 경술국치 이전 구국운동의 일환으로 한글을 연구했고, 이후에는 한글을 민족의 목숨처럼 여겨 지키고자 했던 한글학자들이 있었다. 1908년 8월, 한말 주시경은 우리말과 글의 연구·통일·발전을 목표로 국어연구학회를 조직하였다. 그는 나라의 바탕을 보존하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이 국어인데, 이를 도외시한다면 나라의 바탕은 날로 쇠퇴할 것이므로 결국 나라 형세를 회복할 가망이 없어질 것이라는 우려에서 학회를 만든 것이다. 그의 뜻은 그가 운영한 강습회를 거쳐 간 이들에게 이어졌고, 목숨까지 잃어 가면서 지켜냈다. 김두봉·최현배·이극로·이희승·이윤재·한징 등이 대표적인 한글학자이다.국어연구학회는 경술국치 이후 ‘국어’를 사용하지 못해 ‘배달말·글모음’으로 바뀐 뒤 ‘한글모’로 되었다가 1921년 12월 다시 조선어연구회로 바뀌었다. 조선연구회가 1931년 1월 조선어학회(현 한글학회)로 이름을 달리한 이후 한글 연구가 본격화하였다. 조선어학회는 한글 맞춤법 통일안, 외래어 표기법을 발표하고 표준말을 사정하고 조선어 사전을 편찬하고자 하였다. 일제의 한글 탄압이 거세질수록 한글학자들은 더욱 이에 매달렸다. 이윤재는 “말과 글은 민족과 운명을 같이한다.”라며 “일제가 조선의 글과 말을 없애 동화정책을 쓰고 있으니 우리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우리글과 우리말을 아끼고 다듬어 길이 후세에 전해야 한다. 말과 글이 없어져 민족이 없어진 가까운 예로 만주족이 있지 않은가. 우리가 우리의 말과 글에 대한 글을 써 두고 조선어사전을 편찬해 두면, 불행한 일이 있더라도 후에 이것을 근거하여 제 글과 말을 찾아 되살아날 수도 있을 것이다.”라고 하면서 이를 민족운동이라 했다. 당장에 독립이 되지 않고 뒤늦을지라도 한글 사전이 있으면 말과 글을 되살려 민족을 다시금 일으켜 세울 수 있으니 민족운동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최현배는 그의 대표적인 저서 『우리말본』(1937) 머리말에서 “한 겨레의 문화 창조는 언어로 이뤄진다. 한글은 줄잡아도 반만년 동안 우리 역사의 창조적 역할을 해왔고 이제 한글 말본[문법]을 닦아 온전한 체계를 세우는 것은 뒷사람들의 영원한 창조 활동의 바른길을 닦는 것이며 찬란한 문화건설의 터전을 마련하는 것이다”라며 책 출판의 의미를 두었다. 우리 민족이 비록 일제의 식민지하에 있는 처지이지만, 우리의 문화와 정신을 계승하고 빛나게 하는데 한글 연구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부분이다.한글 연구보다는 혁명의 길로 나섰던 주시경의 수제자 김두봉도 한글 사랑만큼은 식지 않았다. 김구의 부인 최준례가 사망하였을 때 비문을 새기면서 생몰년을 ‘ㄹㄴㄴㄴ해 ㄷ달 ㅊㅈ날[4222년 3월 19일] 남, 대한민국 ㅂ해 ㄱ달 ㄱ날[1924년 1월 1일] 죽음’이라 썼다. 또한 그는 김원봉이 조선의용대를 창설할 당시 평소 주장한 바와 같이 풀어쓰기로 ‘ㅈㅗㅅㅓㄴUㅣㅛㅇㄷㅐ[조선의용대]’라 썼다.해방 후 한글학자들의 노력과 오늘날의 한글이러한 의지를 가진 한글학자들이었기 때문에 ‘한글이 목숨이다’라고 외치면서 1942년 10월 조선어학회 사건 당시 갖은 고문과 핍박에도 견뎌낼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이때 33명이 검거되었지만 이극로·이윤재·최현배·이희승·정인승·정태진·김양수·김도연·이우식·이중화·김법린·이인·한징·정열모·장지영·장현식 등 16명만 기소 처분을 받았다. 그런데 재판이 진행 중일 때 그만 이윤재와 한징이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1944년 9월 예심 재판부는 “고유 언어는 민족의식을 양성하는 것이므로 조선어학회의 사전편찬은 조선민족정신을 유지하는 민족운동의 형태다”라며, 이극로·최현배·이희승·정인승 등에게 ‘내란죄’를 적용하여 실형을 선고하였다. 이들은 불복하여 상고하였지만 1945년 1월 경성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형이 확정되었다. 함흥형무소에서 복역 중 그해 8월 해방되면서 감옥에서 나올 수 있었다. 3년 가까운 감옥 생활로 심신이 지쳤을 법도 한데 이들은 곧장 상경하여 독립된 새나라 문화 창달을 위해 조선어학회를 재건하였다. 한글학자들은 가장 먼저 한글을 다시 ‘국어’로 부활시키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일제강점기 동안 한글 사용이 금지되고 일본어만을 쓰도록 강요되었기 때문에 학교는 물론 가정에서도 한글을 가르치지 않아 학생들 대부분이 한글을 읽고 쓸 줄 몰랐다. 설사 학교에서 한글을 배웠다 할지라도 그 시절 학생 수가 많지도 않아서 이를 깨우친 사람이 극히 적었다. 하지만 생사고락을 같이했던 한글학자들은 각자의 이념에 따라 남북을 택했다. 이극로는 1948년 남한 단독선거에 반대하는 남북협상파 일행으로 평양을 방문한 뒤 그곳에 눌러앉았다. 올해 1월에 개봉한 영화 <말모이>의 주인공이다. 그는 북한에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 부위원장 등 여러 직책을 맡기도 했지만 오로지 우리말 연구에만 전념했다. 그 결과 1966년 이극로가 주도한 것이 오늘날 북한의 표준어인 문화어가 되었다. 남한에서는 최현배와 이희승이 한글 연구에 심혈을 기울였다. 최현배는 한글 전용을 원칙으로 삼고 일본어의 한글화 작업과 더불어 한자말이 아닌 ‘우리말 도로 찾기’ 운동을 벌여 나갔다. 물론 그동안 중단되었던 한글 사전 편찬도 추진하였으며 한글 맞춤법을 더욱 발전시켰다. 그 결과 오늘에까지 전해지는 순우리말이 있다. 홀수, 짝수, 지름, 반지름, 도시락, 건널목뿐만 아니라 동물·식물 이름도 그렇다. 물론 이와 달리 이희승은 한글, 한자 병서를 주장하기도 하였지만, 한글 발전에 큰 공헌을 한 것은 물론이다. 그런데 요즈음 한글학자들이 목숨과 같이 지키고자 했던 한글이 망가지고 있다. 표기만 한글이지 외래어를 그대로 쓰는 경우가 넘쳐난다. 영어 간판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서울 명동의 길거리를 걷다 보면 어느 나라인지 종잡을 수 없다. 외국어 학술 용어나 단어를 무비판적으로 사용한다. 그 뜻을 모르는 사람은 무슨 의미인지 찾아봐야 한다. 신조어와 줄임말 또한 편리성만을 따져 마구 쓴다. 한글화하여 사용하는 북한에서 사용하는 용어에 대해서는 낯설어하고 촌스러워하기도 한다. 이러한 비판 의식은 한글날을 맞아 여러 매체에서 문제로 지적하지만 그때뿐이다. 전문 용어일지라도 이를 우리말로 바꿀 수 없는 것인지 반문해야 한다. 한글학자들이 이러한 세태를 보고자 목숨까지 내놓고 한글을 지키려 한 것을 아니었을 것이기에 더욱 그렇다. ]]> Fri, 04 Oct 2019 15:49:43 +0000 34 <![CDATA[윤봉길 의거와 파시즘의 시대 우리의 오늘 세계의 그날]]> 글 강응천 기획집단 문사철 대표, 역사저술가윤봉길 의거와파시즘의 시대 1930년대는 대공황과 함께 시작됐다. 경제 대공황은 정치와 사회의 공황으로 이어졌다. 그 결과 유럽에서는 인권과 민주주의를 통째로 부정하는 무시무시한 정치 세력이 등장했다. 이탈리아의 파시스트는 국수주의와 인종주의를 정면으로 내걸었고, 독일 나치스도 전쟁 배상금에 지친 국민을 유혹하기 시작했다. 아시아에는 일본 군국주의의 그림자가 점점 더 짙게 드리우고 있었다.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은 국공합작이 깨진 뒤 사활을 건 대결을 벌이고 있었지만, 다가오는 일본군 앞에서는 더 이상 그럴 여유가 없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중국을 무대로 펼쳐지던 한국의 독립운동 세력도 풍전등화의 처지로 몰렸다. 바로 그때 상하이 훙커우공원에서 항일 의지를 재확인하는 폭탄이 터졌다.   alt01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공원 폭탄투척 의거 대판조일신문 호외(1932.04.29.)   일제를 폭파시킨 한국 청년1932년 4월 29일 오전 11시 50분경, 20대 청년 윤봉길이 중국 상하이 훙커우공원에서 열린 일본 천황 생일과 전승을 축하하는 기념식장에 폭탄을 투척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기념식장에 일본 국가가 울려 퍼지는 순간 윤봉길이 단상을 향해 물통 폭탄을 던지면서 중국 주둔 일본군 총사령관인 시라카와 대장과 상하이 일본인 거류단장 가와바타가 즉사하고, 제3함대 사령관 노무라, 제9사단장 우에다 등 일본인 10여 명이 다쳤다. 사건 직후 윤봉길은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윤봉길은 1931년 김구가 상하이에서 조직한 한인애국단 소속이었다. 1932년 1월에는 역시 한인애국단 소속의 이봉창이 도쿄에서 천황을 향해 폭탄을 던졌으나 불발로 끝났다. 당시 중국 언론은 이봉창의 거사실패에 아쉬움을 표했다. 일본은 이를 구실삼아 무력으로 상하이를 점령한 다음 훙커우공원에서 기념식을 진행하다 윤봉길의 폭탄을 받았던 것이다. 일본의 만주와 상하이 침략으로 일본에 적대감을 갖고 있던 중국 언론은 윤봉길의 의거에 일제히 환호를 보냈다. 중국국민당의 지도자 장제스는 중국의 4억 인구가 하지 못한 일을 한국 청년 한 명이 해냈다며 한국에 대한 연대와 지지를 표명했다. 일본이 만주를 무력 점령해 허수아비인 만주국을 수립한 것은 대공황 위기를 대륙 침략으로 타개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러한 일본의 야욕에 맞서 중국인과 한국인의 연대 투쟁이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한 상황에서 윤봉길 의거가 갖는 의미는 매우 컸다. 장제스의 말처럼 이후 일본에 맞서는 중국인과 한국인의 연대 투쟁은 더욱 가속화되었다.파시즘이란 무엇인가독일의 나치즘, 일본의 군국주의 같은 전체주의의 원조는 이탈리아의 파시즘이었다. 이탈리아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영국, 프랑스, 미국의 연합군 편에 가담해 참전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뒤 이탈리아에 떨어진 승전의 결과물은 미미했다. 거기에 경기 불황이 닥치자 점차 국민의 불만이 쌓여 갔다. 바로 그때 무솔리니라는 정치인이 나타나 국민들에게 부강했던 옛 로마의 추억을 자극하며 선동 정치를 시작했다. 1922년 10월 검은셔츠단을 이끌고 로마로 진군해 수상 자리에 오른 무솔리니는 노동운동과 사회주의운동을 무력으로 탄압하고 전체주의 통치를 시작했다. 무솔리니 세력을 가리키는 파시스트는 ‘묶음’을 뜻하는 ‘파쇼’라는 말에서 왔다. 다양한 이해관계를 가진 사회 계층을 하나로 묶는다는 전체주의 이념을 잘 표현하는 말이다.파시스트의 진가는 1923년 토리노의 노동운동을 무자비하게 진압하는 과정에서 드러났다. 피아트 자동차 공장을 비롯해 30여 개의 대기업이 밀집해 있는 토리노의 노동자들은 부도덕한 자본가들을 몰아내고 자신들이 공장을 직접 경영하겠다고 나섰다. 피아트에서는 실제로 노동자들이 스스로 경영하며 자체 생산을 시작하기도 했다. 그러자 기업가들과 중산층은 급진적인 노동운동에 맞서 무솔리니의 선동에 귀 기울이게 되었다. 바로 그때 무솔리니 수상의 지령을 받은 검은셔츠단이 피아트 공장을 습격해 노동자들을 닥치는 대로 끌어냈다. 이처럼 파시즘은 경기 불황에 대한 기업가와 중산층의 불안에 편승해 권력을 잡고 노동운동과 사회주의에 대한 공격으로 세력을 불려 나갔다. 파시즘의 민족주의적 선동 아래 인권과 민주주의는 설 자리를 잃어 갔다. 독일, 일본으로 퍼져 나간 파시즘이 유럽과 아시아를 향해 침략의 이빨을 드러내면서 인류는 그들과 생존을 건 싸움을 각오하지 않을 수 없었다. alt나치 경례를 하고 있는 히틀러alt현재 독일 아우토반. 아우토반은 히틀러의 경제 부흥 계획 중 일부였다 나치의 등장과 유럽의 위기독일판 파시스트인 나치스가 권력을 잡은 것은 1934년의 일이었다. 나치스의 지도자 히틀러는 1933년 독일 수상의 자리에 오른 뒤 얼마 안 돼 민주적인 바이마르공화국을 폐지했다. 그는 제3제국을 선언하고 스스로 총통 자리에 올라 강력한 독재 권력을 구축했다.국가주의 정당인 나치스를 이끄는 히틀러가 총통에 취임하자 독일 국민은 열띤 환호를 보냈다. 히틀러는 세계대전 이후 독일이 국제사회로부터 부당한 대우를 받아왔다며 이를 바로잡겠다고 공언했다. 그뿐 아니라 1929년 미국 뉴욕에서 시작돼 전 세계를 덮친 경제대공황으로 허덕이고 있는 기업과 국민에게 신속한 경제 부흥을 약속해 열광적인 호응을 끌어냈다. 그는 군용 자동차와 탱크 등 중장비 군수공업에 집중적으로 투자해, 실업자를 흡수하고 국가 경제를 빠른 시일 안에 호황으로 이끌겠다고 장담했다. 또한 튼튼하고 값싼 국민차를 생산해 1가구당 1대씩 소유할 수 있게 해주겠다는 약속으로 박탈감에 빠졌던 독일 국민의 기대를 부풀렸다. 히틀러가 비상대권을 부여받고 착공시킨 라이히스 아우토반(독일제국 자동차도로) 역시 히틀러 표 경제 부흥 계획의 중요한 일부였다. 히틀러는 이 건설 사업으로 실업자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해 경제를 살린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거기에는 재군비를 앞두고 군대를 신속히 이동시킬 도로를 마련한다는 속셈도 있었다.이 같은 국가 주도형 경제 부흥의 추진과 국민의 지지를 바탕으로 히틀러는 베르사유조약을 파기하고 재군비를 선언했다. 베르사유조약은 제1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독일에 대해 엄격한 군비 제한을 규정하고 있었다. 나치스가 이를 정면으로 위배하고 나서면서 유럽은 또다시 대규모 전쟁에 휘말릴 수도 있는 위기 상황으로 빠져들었다.우생학, 나치스 정책의 기반이 되다배타적 인종주의에 기반을 두고 있는 나치스의 집권은 유사 과학인 우생학을 부추기는 결과를 가져왔다. 히틀러는 1935년 9월 15일 뉘른베르크의 나치 전당대회에서 승인한 법률에 따라 유대인의 시민권을 박탈했다. 이 같은 정치적 광기에 편승해 인종주의 정책의 바탕이 되는 우생학도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다. 우생학의 선구자는 19세기 영국 과학자 골턴이었다. 그는 『유전적 천재』(1869)에서 명사(名士)인 남성과 부유한 여성이 결혼하면 천부적 재능을 지닌 종족을 만들 수 있다고 제안했다. 이후 다윈의 진화론을 이용해 우생학에 과학의 외피를 씌운 사회진화론이 등장했다. 이러한 우생학은 20세기 초반부터 대부분 국가에서 공식 채택됐다. 특히 미국에서는 간질 환자, 저능아, 정신박약자의 결혼을 금지한 결혼규제법(1896), 범죄자와 정신병자에 대해 생식 기능을 제거하는 단종법(1907), 유럽인의 이민을 저지하기 위한 이민법(1924) 등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1926년에 설립된 미국 우생학회는 상류계급이 우월한 유전적 재능을 가졌기 때문에 부와 사회적 지위를 갖게 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독일의 나치스는 바로 이러한 우생학을 근거로 인종위생연구소를 세워 유대인, 집시 등 소수 민족과 동성애자, 장애인 등을 격리하고 박해했다.  이토록 반인륜적인 우생학이 주목받게 된 배경은 무엇일까? 유전이 인간의 사회적 행동을 결정한다고 전제하면, 하층민을 생물학적 열등자로 몰아 사회악의 모든 책임을 그들에게 전가해 상류층의 기득권을 지킬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공황 이후 미국에서는 우생학의 근거가 흔들리고 있었다. 백인 상류층이 하류층 이민자들과 함께 공짜로 빵을 배급받으려는 상황에서 특정 인종이 생물학적으로 우월하다는 주장은 더 이상 설득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반면 독일에서는 나치스의 비호를 받으며 우생학이 점점 더 영향력을 넓혀 가고 있었다.   alt나치스 정권 수립 이후 독일을 떠나 미국으로 망명한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잇따른 지식인의 망명나치스의 광기 어린 인종주의는 독일의 수많은 지식인을 나라 밖으로 내몰았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상대성 원리를 발견해 현대 과학의 신천지를 개척하고 1921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천재 과학자였다. 그가 1934년 독일을 떠났다. 과학 연구 때문이 아니라 출신 민족과 사회사상 때문이다. 아인슈타인은 유대인으로서 유대인 민족주의인 시오니즘을 지지해 왔다. 그런데 나치스 정권이 들어서 유대인을 박해하기 시작하자 독일을 떠나 미국의 프린스턴 고등연구소 교수로 취임해 통일장 이론 연구에 박차를 가했다. 미국의 청신하고 개방적인 분위기는 그의 과학 연구에 날개를 달아주었다. 막스 호르크하이머는 1930년 독일 프랑크푸르트대학에 사회연구소를 설립해 마르크스주의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결합한 사회 이론을 연구하던 젊은 사회학자였다. 그도 조국인 독일을 떠났다. 그는 유대인이 아니지만 그의 학문은 나치 독일과 화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마르크스와 프로이트를 모두 이단시하는 나치즘 때문에 호르크하이머는 정든 교정을 떠나 스위스로 이주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그도 아인슈타인처럼 미국에 정착했다. 호르크하이머의 학문적 동지인 헤르베르트 마르쿠제도 그를 좇아 스위스 제네바로 망명했다. 그들과 함께 이른바 프랑크푸르트학파를 형성하고 있던 테오도르 아도르노도 곧 나치스의 압박을 견뎌내지 못하고 조국을 등졌다. 그들은 몸으로 경험한 나치의 인종주의에 대한 깊은 성찰에다 개방적인 미국 사회학의 세례를 받아 새로운 사회 이론을 내놓게 된다. 나치스의 독일은 국수주의적인 정책으로 단시일 내에 국민의 지지를 이끌어내고 국력을 키우는 데는 성공했다. 그러나 바로 그와 같은 국수주의와 연결된 전체주의와 인종주의로 말미암아 최고의 두뇌들을 유출시킴으로써 다가오는 세계대전에서 패배할 이유를 스스로 만들어 가고 있었던 셈이다.    ]]> Fri, 04 Oct 2019 16:29:37 +0000 34 <![CDATA[가을이 머무는 곳 강원도 정선 이 땅의 숨결]]> 글·사진 임운석 여행작가가을이 머무는 곳강원도 정선  바람의 세미한 노랫소리를 들어보았는가? 바람에 나부끼는 형언할 수 없는 억새의 찬란한 몸짓을 보았는가? 정선은 첩첩산중 굽이굽이마다 아리랑의 운율이 함께 흐른다. 자동차도 힘겨워 ‘부릉부릉’ 용트림을 하듯 산 능선을 넘는다. 바람을 가르다 가도 어느 순간 바람과 함께 날아오른다. 무르익어가는 가을과 벗할 수 있는 곳. 주체할 수 없는 이끌림에 의해 가을이 머무는 곳, 정선 땅을 밟는다.             alt민둥산 정상부에 펼쳐진 억새평원의 장관alt억새사이 산책로를 걷는 것만으로도 충만한 가을을 느낄 수 있다 대한민국 억새 1번지, 민둥산고속도로에서 빠져나온 지 1시간가량이 지났다. 그제야 비로소 민둥산 들머리에 닿을 수 있었다. 그나마 길이 좋은 요즘이니 1시간이지 호랑이 담배 피우던 그 시절이라면 ‘세월아 네월아’ 걷고 또 걸어야 도착했을 법하다. 도로가 지금처럼 구석구석 놓이지 않았을 때 정선은 강원도의 대표적인 오지였다. 구불구불한 산길을 따라 달리다 보면 자동차 핸들 꺾는 재미가 있다. 첩첩산중 정선 여행의 묘미다. 정선의 대표적인 민요인 정선아리랑이 불리기 시작한 것은 고려 왕조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하던 때다. 고려왕조를 섬기던 정치 세력이 조선 개국 세력에 밀려 정선으로 숨어든 것이다. 그들은 지난날의 권력을 회상하며 가족과 고향을 그리워한 심정을 한시로 읊었는데 그것이 정선아리랑의 노랫말이 되었다 한다. 노랫말에 지은이의 심정이 묻어 있다. 타관객리 외로이 난사람 괄세를 마라옛일을 추억하고 시름없이 있노라니눈앞에 왼갖 것이 모두 시름뿐이라어느덧 민둥산(1,117m) 들머리인 증산초등학교 앞에 도착한다.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되는 지점이다. 민둥산의 옛 이름은 ‘한치뒷산’이다. 정선아리랑에도 ‘한치뒷산’이 등장한다. 정선군 남면에 한치마을이 있는데 마을 뒷산이 민둥산이었다. 그래서 한치뒷산이라 불렀다. 민둥산 등산을 위해서는 왕복 9km를 4시간 정도 쉼 없이 걸어야 한다. 짧은 코스는 아니지만 등산로가 잘 놓여 있어 무난하다. 무엇보다 억새를 벗 삼아 걷기 때문에 고되거나 길게 느껴지지 않는다. 2019년 민둥산억새꽃축제는 11월 10일까지 민둥산 일원에서 열린다. 민둥산 통제소를 지나 갈림길 앞에 등산객을 맞이하듯 쉼터가 기다리고 있다.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나무 벤치에 앉는다. 산뜻한 가을 공기 맛이 예사롭지 않다. 자세를 가다듬고 깊이 숨을 들이쉰다. 맑은 공기 속에 생명의 기운이 담긴 것일까, 온몸이 후끈하다. 도시의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깨끗한 공기.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몸이 먼저 느끼는 것을 보면 몸은 자연을 향해있는 듯하다. 산길을 걷는 동안 거미줄처럼 엉켰던 몸과 마음이 질서정연하게 교통정리를 시작한다. 왜 현대인들이 갈급한 마음으로 산을 찾는지 이유를 알법하다. 생명 안에 답이 있음을 알기에 생명의 근원을 찾아 헤매는 것이 아닐까. 정상부까지 등산로가 잘 놓여 있어 평소에 잊고 살았던 삶의 파편들을 한 조각씩 모으고 정리하기 그만이다. 걷기 좋은 만큼 가족 단위 탐방객들이 많이 눈에 띈다. 초등학생 꼬마부터 할머니까지,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누며 산길을 걷는 모습이 정겹다. 40분 정도 오르자 바람결이 강하다. 주위는 막힘이 없다. 하늘을 가리고 있던 울창한 숲길이 끝난 것이다. 덕분에 파란 하늘을 마주한다. 곧이어 정상부에 도착한다. 정상에는 새로운 세상이 기다리고 있다. 거친 숨을 토하며 자박자박 걸어오는 등산객들을 어머니처럼 넉넉한 품으로 맞아준다. 그리고 그들을 품는다. 민둥산은 대한민국 억새 1번지임에 분명하다. 산 전체가 온통 억새로 뒤덮여 억새의 향연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다. 단풍이 뇌쇄적인 색채의 아름다움이라면 억새는 바람과 함께 상처 난 곳을 매만져주는 어머니의 손길처럼 아늑하다. 화려하게 치장한 미인은 아니지만 청초한 민낯처럼 순수하다. 산 전체가 은빛 억새로 화사하게 변할 때 바람과 함께 춤이라도 춘다면, 지나친 상상일까. 그런들 어떠랴. 민둥산 억새가 이미 내 마음속에 들어온 것을.   alt밤섬을 향해 날고 있는 짚와이어 체험자들   아찔함의 최고봉 정선아리힐스 짚라인 짚와이어는 패러글라이딩처럼 하늘을 난다는 점과 번지점프처럼 줄에 매달려 뛰어내린다는 점이 비슷하다. 무엇보다 안전성이 보장되어 키 134cm 이상이면 누구나 도전해 볼 수 있다는 것이 최대 장점이다. 덕분에 정선에서 꼭 체험해볼 만한 액티비티로 인기를 얻고 있다. 짚와이어 체험을 하려면 출발지점인 병방산 정상에 위치한 아리힐스를 찾아야 한다. 이곳에는 짚와이어 외에도 ‘하늘을 걷는다’는 뜻의 스카이워크가 설치되어 있다. 583m의 절벽 끝에 길이 11m의 U자형 철골 투명 유리 구조물을 벼랑 밖으로 돌출 시켜 놓았다. 바닥은 투명 안전유리로 마감했다. 유리를 밟고 서면 발아래에 낭떠러지가 내려다보인다. 아찔하다. 태곳적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듯한 밤섬과 그것을 휘감아 도는 동강이 흐른다.스카이워크보다 더 높은 곳에 짚와이어 체험장이 있다. 우선 높이에 압도당한다. 아래 착지점까지 325.5m,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설치된 짚와이어다. 바람을 막아주는 시설이 없다 보니 체감 높이는 더 높게 느껴진다. 출발대에 올라 안전장비를 착용하면 극도의 긴장감이 찾아온다. 아찔한 높이에서 외줄에 의지한 채 날아갈 생각에 오금이 저리고 머릿속이 흰 도화지처럼 하얗게 변한다. 드디어 낙하할 준비가 끝났다. ‘출발’ 구호와 함께 체험자가 비명을 지른다. 그리곤 공중에 매달린다. 비명은 메아리가 되어 병방산 주변을 공허하게 맴돈다. 순간적으로 유체이탈이라도 경험한 듯 정신이 몽롱하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 숨 막히는 긴장감은 출발 순간에 최고점을 찍는다. 이후부터는 하늘을 나는 특별한 체험 시간이다. 한 마리 새가 된 기분이다. 한반도를 닮은 밤섬이 목젖처럼 대롱대롱 매달린 것처럼 보인다. 개미보다 작게만 느껴졌던 사람들이 조금씩 커지면서 체험은 마무리된다.         alt황금들녘을 달리는 레일바이크alt여치의 꿈 카페와 어름치 카페를 오가는 풍경열차 레일을 따라 달리며 느끼는 정선의 진수레일바이크는 폐철로를 달리며 정선의 아름다움을 오롯이 즐길 수 있는 여행이다. 정선에선 필수 여행 코스로 통한다. 우리나라 곳곳에 레일바이크가 운영되고 있지만, 그 원조는 정선이다. 구절리역에서 아우라지역까지 7.2km를 시속 15~30km의 속도로 운행한다. 가을옷으로 한껏 멋을 낸 정선의 산과 들녘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고 동강을 따라 이어진 철길은 평온함과 아찔함이 반복된다.바이크가 ‘싱싱싱’ 바람을 가른다. 속도감에 기분마저 상쾌하다. 힘껏 페달을 밟자 다리에 묵직한 힘이 전달된다. 그때쯤 어두운 터널로 빨려든다. 음산한 기운이 몸을 덮치지만 잠시 후 화려한 조명이 눈에 들어온다. 별천지가 따로 없다. 터널엔 천연 에코(echo) 음향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정선아아아아~ 사랑해해해해’하며 목청 놓아 사랑을 고백하는 연인도 있고, 구성진 정선아리랑을 멋들어지게 한가락씩 뽑아내는 어르신도 있다. 어떤 소리든 누구의 말이든 소리의 끝자락은 메아리가 되어 되돌아온다. 터널을 벗어나자 화려한 조명 쇼도 막을 내린다. 이후부터는 힘들이지 않아도 손쉽게 달릴 수 있는 내리막 구간이다. 다리가 가벼우니 몸도 한결 수월하다.1시간 남짓 힘차게 페달을 밟다 보니 다리가 무겁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마음은 한결 가볍다. 둘만의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 아우라지역에 도착한다. 출발한 곳으로 되돌아가려면 풍경열차를 이용하면 된다.레일바이크는 인터넷으로 예약해야 기다리지 않고 바로 탑승할 수 있다. 출발역에는 ‘여치의 꿈’ 카페가 도착역에는 ‘어름치 카페’가 운영 중이다. 정선엔 먹거리도 풍성하다. 토속음식을 맛보고 싶다면 정선 5일장을 찾아보길 권한다. 잎사귀가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이 마치 술 취한 사람이 좌우로 흔들리는 것처럼 보인다 하여 이름 붙여진 곤드레나물을 비롯해 각종 산나물이 시장 골목마다 가득하다. ‘후루룩’ 빨리 먹다가 콧등을 쳤다는 콧등치기 국수, 올챙이를 꼭 닮은 올챙이국수, 구수한 메밀전과 수수부꾸미도 맛나다. 2일, 7일에 장이 서면 정선아리랑 공연을 비롯해 볼거리도 많다. 상설시장도 함께 운영한다.   alt정선 사람들의 애환이 깃든 곤드레 나물밥  ]]> Fri, 04 Oct 2019 16:55:42 +0000 34 <![CDATA[학생, 독립투쟁의 주역으로 나서다 ]]> 글 김정인 춘천교육대학교 교수학생, 독립투쟁의 주역으로 나서다   학생운동은 민족 차별에 분노한 학생이 거리로 나선 3·1운동에서 처음 등장했다. 3·1운동 이후 학생들은 독서회와 같은 비밀결사를 만들어 활동하고 학교 문제와 민족 문제 해결을 요구하며 동맹휴학의 시대를 열었다. 1926년에는 순종의 인산일을 맞아 6·10만세운동을 일으켰다. 3·1운동과 6·10만세운동의 주역으로, 1920년대 내내 전국 곳곳에서 동맹휴학을 벌였던 학생운동은 1929년 광주학생운동으로 정점에 이르렀다. alt광주학생운동의 동기가 된 두 여학생 (이광춘, 박기옥)alt학교 정문을 지키고 선 경찰 (『동아일보』, 1929.12.28.) 민족 차별에 분노하고 저항하다전국적 학생시위로 번져간 광주학생운동의 발단은 민족차별이었다. 1929년 10월 30일 나주에서 광주로 통학하는 기차 안에서 일본인 남학생이 한국인 여학생의 갈래머리를 잡아당기며 성희롱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으로 한국인 학생과 일본인 학생 간에 시비가 일어나자 경찰은 일방적으로 한국인 학생의 뺨을 때렸다. 다음날 기차 안에서 한국인 학생들은 일본인 학생에게 사과를 요구했다. 일본인 학생이 거절하면서 다시 싸움이 일어났다. 이번에도 일본인 차장과 승객이 한국인 학생에게 모욕을 주었다.며칠 후인 11월 3일 메이지 천황의 탄생을 기념한다는 천장절 기념식과 함께 전남 지역 누에고치 생산 6만 석 돌파를 기념하는 행사가 열렸다. 이날 행사에는 광주지역 학생들이 동원되었다. 그런데 일본인 학생들이 거리를 활보하며 한국인 학생들에게 행패를 부렸다. 이로 인해 시내 곳곳에서 충돌이 일어났다. 광주역에서는 수십 명이 다치는 일이 발생했다. 한국인 학생들은 광주고등보통학교 체육관에서 긴급학생총회를 개최하고 각목과 곤봉으로 무장한 채 일본인 학생들이 다니는 광주중학교로 행진했다. 경찰이 이를 막고 해산시켰다.조선총독부의 대응은 차별적이고 강경했다. 광주의 모든 학교에 휴교령을 내렸고 70여 명에 이르는 한국인 학생들을 긴급 체포했다. 조선총독부의 일방적인 처사에 한국인들은 크게 분노했다. 병원에 입원한 학생들까지 강제 연행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여론이 들끓었다. 전국 각지로부터 연대의 움직임이 일었다. 서울의 사회단체들은 진상 조사를 위해 광주에 조사원을 파견했다. 신간회는 허헌, 황상규, 김병로 등의 지도부를 파견하여 진상을 조사했다. 조선학생과학연구회는 박일과 권유근, 중앙청년동맹에서는 부건, 조선학생회에서는 이한성 등을 파견했다. 권유근, 박일, 부건은 함께 11월 6일 광주로 내려가 조선일보 광주지국, 광주일보를 방문하고 다음날인 11월 7일 조선공산청년회 전남책임자이자 전남청년연맹 위원장인 장석천과 조선청년총동맹 집행위원이자 광주청년동맹 간부인 강영석을 만났다. 이 만남에서는 서울의 중등학교 학생들이 연합시위운동을 일으켜 광주학생운동을 전국화하자는데 합의를 이뤘다. 이 계획을 추진하기 위해 강영석은 권유근과 함께 그날 밤 서울로 상경했다. alt광주학생운동 당시 교내에 게시된 격문alt광주학생운동 당시 경찰과 대치 중인 학생들(『중외일보』, 1930.01.08.) 광주에서 서울로광주에 남은 장석천은 학생비밀결사인 독서회를 지도하던 독서회중앙부 책임비서인 장재성과 함께 학생 석방을 요구하는 제2의 시위를 준비하는 투쟁본부를 꾸렸다. 시위 날짜는 광주 장날이자 다시 학교 문을 여는 11월 12일로 정했다.11월 12일 광주고등보통학교에서는 독서 회원들이 나서 구속 학생 석방을 요구하며 거리로 나서자고 선동했다. 학생들은 시위 대오를 꾸려 각목과 곤봉으로 무장한 채 교문 밖으로 나왔다. 이들이 향한 곳은 광주형무소였다. “구속학생 석방하라”는 구호를 외치고 “학생 대중아, 궐기하자”, “조선 민중아, 궐기하자” 등이 쓰인 전단지를 배포했다. 광주농업학교생 200여 명도 동참했다. 전남사범학교와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은 교문에서 제지당해 동참하지 못했다. 광주형무소 앞에서 대기하던 경찰은 학생들을 포위하고 체포에 들어갔다. 이날 장재성을 비롯한 투쟁본부 간부 대부분이 체포되었다. 이날 시위는 조선총독부의 보도 통제로 당장에는 알려지지 않았다.신간회를 비롯한 서울의 운동단체들이 2차 시위 소식을 전해들은 건 며칠 후였다. 11월 16일 광주를 탈출하여 서울로 잠입한 장석천이 신간회 본부를 방문하여 광주 상황을 알렸다. 그는 조선청년동맹과도 접촉했다. 조선청년동맹과 조선학생전위동맹은 격문을 준비했고, 12월 초 서울 시내 학교에 배포되었다. 비밀결사인 독서회들은 맹휴운동도 준비했다.12월 5일 경성제이고보가 제일 먼저 맹휴에 들어갔다. 이어 12월 6일 중동학교, 12월 7일 경성제일고보 등 서울 시내 학교에서 잇달아 맹휴가 일어났다. 맹휴운동은 12월 9일의 연합시위로 발전했다. 이날 시위에는 경신학교를 선두로 보성고등보통학교, 중앙고등보통학교, 휘문고등보통학교, 남대문상업학교 등이 참여했다. 다음날에도 시위는 계속되었다. 12월 10일에는 휘문고보,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 근화여학교, 협성실업학교, 기독교청년학관, 배재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이 시위에 나섰다. 11일에는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 경성여자상업학교, 동덕여고보, 실천여학교, 정신여학교 등 여학교 학생들이 맹휴를 선언하자 학교 당국은 즉시 휴교를 단행했다. 이처럼 12월 13일까지 이어진 시위와 맹휴운동에는 30개 남녀 전문학교와 중등학교는 물론 각종학교, 보통학교 학생 1만 2천여 명이 참여했다. 1,400여 명이 체포되어 그중 45명이 구속되었고 조선총독부는 12월 13일에 조기방학을 단행했다. 하지만 광주에서 서울로 확산된 학생시위는 12월 중순까지 중등학교가 있던 개성, 동래, 원산, 춘천, 평양, 함흥 등으로 번져 나갔다.   alt동맹휴학을 보도하는 기사(『동아일보』, 1929)   여학생 시위, 다시 전국화를 촉발하다서울에서는 1930년 1월 초순 학교별로 개학이 이루어졌다. 1월 9일경부터 서울에서는 여학생들을 중심으로 다시 시위운동을 논의했다.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 4학년생인 최복순은 1929년 12월 시위 당시 조기 방학으로 이화여고보가 시위운동을 못한 것을 아쉬워하며 김진현, 최윤숙과 함께 근우회 서무부장인 허정숙을 찾아가 이 문제를 상의했다. 이 자리에서는 3학기 개학일인 1월 15일에 서울 시내 여학교가 일제히 맹휴와 시위를 전개하기로 뜻을 모았다. 이화여고보 기숙사에 운동본부를 차리고 깃발과 격문을 제작하는 등 시위를 준비했다. 깃발에는 “학교는 경찰의 침입에 반대하라, 식민지교육정책을 전폐하라, 광주학생사건에 대해 분개하라, 학생 희생자를 석방하라, 일본의 야만정책에 반대하라, 각 학교의 퇴학자를 복교시켜라” 등의 격문을 적어 넣었다. 또한 “제국주의 타도 만세, 약소민족 해방 만세”가 쓰인 붉은 기도 준비되었다. 여학생들의 시위 준비 소식에 휘문고보를 비롯한 남학생들도 가담을 결정했다.1월 15일 아침 9시 30분에서 10시경까지 거의 동시에 실천여학교를 필두로 근화여학교, 이화여고보, 배화여고보, 경성보육학교, 태화여학교, 동덕여자고보, 정신여학교, 경성여자미술학교, 휘문고보, 경신학교, 중동학교, 배재고보, 보성전문학교까지 14개 남녀학교가 시위운동을 전개했다. 다음날에는 전날 시위에 참가하지 않았던 숙명여고보, 경성여자상업학교, 진명여고보에서도 시위가 일어났다. 시위는 나흘간 이어졌는데 18개 학교에서 7천 명의 학생이 참여했다.1930년 1월 15일의 서울 학생시위는 ‘여학생연합시위’로 불릴 만큼 여학생들이 적극적으로 앞장섰다. 조선총독부의 조사에 따르면, 시위에 참가한 대부분 여학교에서 전교생이 참가했다. 경찰은 1929년 12월 1차 시위 당시 주동자들이 검거되고 경계가 엄중한 가운데 1월 15일 서울 한복판에서 다시 여학생 주도의 연합시위가 일어나자 단순한 학생운동이 아니라며 소요죄를 적용하겠다는 방침을 세웠다. 1930년 1월 여학생이 주도한 연합시위로 다시 전국에서 학생시위가 일어나 3월까지 이어졌다. 특히 3월 1일을 전후해서는 3·1운동 11주년을 겸해 학생시위가 전국에서 일어났고 보통학교 학생들도 많이 참여했다.1930년 봄까지 이어진 광주학생운동에는 북으로는 함북 회령, 남으로는 전남 제주까지 전국 13도에서 280여 개 학교가 참여했다. 참가학생은 연인원 5만 4천 명에 달했다. 당시 중등학교급 이상 학생은 8만 9천 명이었다. 광주학생운동으로 구속된 학생은 1,642명이었다. 시위 주동자 혹은 가담자로 퇴학당한 학생이 582명, 무기정학 당한 학생은 2,330명에 달했다.   alt광주학생운동 공판 모습  ]]> Thu, 31 Oct 2019 11:34:55 +0000 35 <![CDATA[학교 다녀오겠습니다 ]]> 학교 다녀오겠습니다일제강점기의 학교생활 개화의 바람은 교육에도 불어 닥쳤다. 신학문과 신문물로 무장한 외국인들을 중심으로 조선에도 신교육기관으로서의 ‘학교’가 설립되기 시작했다. 새로운 공간에는 새로운 지식이 있었다. 한글을 배우고 간단한 산술을 익혔으며, 이름 모를 시인의 시를 읊거나 낯선 형태로 흘겨 쓴 외국어를 공부하기도 했다.사람들은 교육의 힘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일제는 이제 막 글을 익히는 어린 아이들에게 교육으로써 식민지 신민의 ‘덕목’을 주입했다. 한국인이 아닌 일본의 충성스러운 신민으로 키우고자 한 것이다. 그래서 그 시절 학교에서 아이들의 웃음소리 대신 황국신민서사를 외는 소리가 가득했고, 선생님과 군인의 경계는 모호하기만 했다.반대로 교육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했던 교육자도 있었다. 그들은 학생에게 말했다. 배워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배워야 내 나라를 독립으로 이끌 수 있다고. 일제가 학교에서 황국신민을 길러내고 있을 때, 또 다른 학교에서는 독립 의식을 품은 조선인이 자라났다. alt]]> Thu, 31 Oct 2019 11:34:02 +0000 35 <![CDATA[민족혼을 지켜낸 역사가 박은식 ]]> 글 전시부민족혼을 지켜낸역사가 박은식독립기념관은 국가보훈처 및 광복회와 공동으로 박은식을 2019년 11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박은식은 『한국통사』와 『한국독립운동지혈사』 등의 역사서를 편찬하며 민족혼으로서의 우리 역사를 지키고 알리는 데 크게 기여했다. alt 언론·교육 등 여러 방면에서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다박은식은 1859년 9월 30일 황해도 황주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운영하는 서당에서 한학을 익힌 그는 정약용의 학맥을 이은 문인들과 교류하며 실학과 양명학 등을 접하고 현실적·개혁적 사고를 가진 유학자로 성장하였다. 이와 함께 위정척사론의 대가인 화서학파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연구하며 외세의 침략에 대항하여 민족 자주와 독립을 지켜야 한다는 사상을 키워갔다. 1898년 독립협회 가입을 시작으로 민족운동에 투신한 박은식은『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주필로 활동하고 『서북학회월보』 등에도 각종 논설을 발표하며 언론을 통한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또 서북협성학교, 오성학교 교장을 맡아 실력양성운동에도 힘을 쏟았다. 이처럼 언론과 교육 부문을 중심으로 애국계몽운동에 앞장선 박은식은 비밀결사 단체인 신민회에도 참여하며 다양한 방면에서 국권수호를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민족정신 고취와독립운동 통합에 앞장서다 1910년 8월 일제가 한국을 강점하자 1911년 5월 중국으로 망명한 박은식은 만주에서 민족혼이 담긴 역사서를 저술하였다. 중국 관내로 활동 무대를 옮겨 1912년 상하이에서 동제사를 결성하고 총재를 맡아 독립운동 기반 조성에 매진하였다. 또한, 역사를 보존하는 것이 나라를 지키는 것이라는 일념으로 역사서 저술도 이어나가 1915년 『한국통사』를 간행하였다. 1917년에는 독립운동가 14명 중 한 사람으로 「대동단결선언」을 발표하여 독립운동 세력의 단결을 촉구하였다.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합류한 박은식은 『독립신문』 발행과 임시사료편찬위원회가 주관하는 『조일관계사료집』 편찬에 참여했다. 역사가로서도 활동을 계속하며 1920년에는 『한국독립운동지혈사』를 발간하였다. 한편 1923년 국민대표회의 이후 무력화된 임시정부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1925년 3월 제2대 대통령으로 선출된 그는 헌법 개정 등을 단행하며 임시정부 정상화에 힘을 쏟았다. 역사가이자 독립운동가 원로로서 활동하던 중 건강이 악화되어 1925년 11월 66세를 일기로 서거하였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alt박은식(朴殷植)1859.09.30. ~ 1925.11.01.황해도 황주건국훈장 대통령장(1962)   alt대동고대사론(大東古代史論, 1911) 중국 망명 후 서간도 환인현에 있는 윤세복의 집에 머물며 저술한 역사서이다. 박은식은 한민족을 포함한 고대 동방민족을 단군 조선에 뿌리를 둔 대동민족이란 개념으로 정리하였고, 백두산을 중심으로 만주와 한반도 일대를 대동민족의 활동 영역으로 규정하였다(박기정(朴箕貞)은 박은식이 중국에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종사할 때 사용한 이름 중 하나이다)alt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 1920) 3·1운동 소식을 듣고 자료를 모아 발간한 역사서이다. 1884년 갑신정변부터 1920년 독립군의 무장투쟁까지 일제 침략에 저항한 모습들을 서술하였다. 박은식은 이 책에서 1884년 이래 동학농민전쟁, 의병전쟁 등을 통해 축적된 민족적 역량이 3·1운동을 계기로 폭발했다고 평가하였다alt대동단결선언(1917.07.)[등록문화재 제652호] 1917년 7월 상하이에서 독립운동가 14명의 일원으로 발표한 선언서이다. 주권을 민족의 고유한 것으로 규정하고, 1910년 8월 경술국치로 주권이 소멸된 것이 아니라 순종이 포기한 주권이 국민에게 이어진 것이라고 밝혔다. 또 주권의 권리와 의무를 행사하기 위해 임시정부의 수립을 제의하였다 alt한국통사(韓國痛史, 1915) 중국 상하이에서 발간한 역사서이다. 1864년 흥선대원군 집정부터 1911년 105인 사건까지 일제 침략을 중심으로 서술하였다. 박은식은 이 책을 통해 아픈 역사의 교훈을 되새기고, 그 토대 위에서 독립투쟁의 정신을 고취시키고자 하였다alt박은식 서거 소식과 유언을 전한 독립신문 호외(1925.11.02.) ]]> Thu, 31 Oct 2019 11:38:05 +0000 35 <![CDATA[혈죽의 노래 ]]> 글 김경미 자료부 학예연구관혈죽의 노래 1905년의 을사늑약으로 나라가 멸망할 위기에 처하자 국민의 실력을 양성하여 국권을 회복하려는 애국계몽운동이 전개됐다. 「민영환 혈죽도」는 민영환의 순국이 불러일으킨 항일의식과 대나무가 갖는 충절의 이미지가 겹쳐지면서, 국민의 애국심을 고취하는 구국의 아이콘으로서 다양한 인쇄물로 제작되어 널리 보급됐다.   alt민영환 혈죽도  혈죽, 충절과 구국의 아이콘이 되다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상소를 올리며 저항하던 민영환은 11월 30일 오전 6시 의관(醫官) 이완식의 집에서 단도로 목을 찔러 자결했다. 1906년 7월 4일, 그가 자결할 때 입었던 피 묻은 옷과 칼을 모셔 둔 마루방에서 유족이 네 줄기의 푸른 대나무가 자란 것을 발견했다. 민영환이 자결한 지 7개월여가 지나는 동안, 일본의 ‘보호국’이 된 한국에 통감부가 설치되고 이토 히로부미가 통감으로 취임하여 일제의 통감정치가 시작되던 때였다. 제보를 받은 『대한매일신보』에서는 바로 7월 5일 자에 「녹죽이 저절로 자라남[綠竹自生]」이라는 기사를 싣고, 민영환의 녹죽(綠竹)을 정몽주의 선죽(善竹)에 견주며 대의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절개와 충성을 나타낸다고 보도했다. 『제국신문』과 『황성신문』에서도 이 놀라운 사실을 「충성을 다해 흘린 피가 대나무 순이 됨[忠血成筍]」, 「대의를 위해 목숨 바쳐 지킨 절개가 대나무가 됨[大節爲竹]」이라는 제목으로 연이어 실었다. 7월 7일 자 『황성신문』의 논설 「피는 푸르고 대나무는 무성함[血碧碧竹??]」에서 녹죽을 ‘혈죽(血竹)’이라 부르면서, 혈죽은 민영환의 충절(忠節)을 담은 구국의 아이콘이 됐다.   alt『대한매일신보』에 실린 혈죽도(1906.07.17.)  alt『공립신보』에 실린 「민충정공혈죽」(1906.08.25.)   신문과 교과서를 차지한 혈죽의 이미지이후 각 신문에는 혈죽을 소재로 한 시가가 끊임없이 실렸으며, 『대한매일신보』 7월 17일 자에는 그림도 등장하게 된다.자료02 신문사에서는 혈죽을 기념하기 위해 사진 촬영을 했지만 사진을 신문에 인쇄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화가 양기훈에게 한 폭의 대나무 그림을 청탁했다. 이를 목판에 새겨, 광고를 싣던 4면을 모두 비우고 혈죽도를 인쇄한 것이다. 화면의 오른쪽에는 “이 그림을 인쇄하여 널리 펴내니 ‘충절’을 애모하는 여러분들은 즐겨 감상하며 칭송하라”고 그림을 실은 취지를 밝혔다. 미국에서 발행되던 『공립신보』(1906.08.25.)에서도 『대한매일신보』의 그림과 같은 「민충정공혈죽」을 실었다.자료03가늘지만 꼿꼿한 가지에 하늘을 향해 치솟아 오르는 날카로운 잎사귀가 민영환의 충절을 나타내는 듯한 양기훈의 그림은 다시 그려져 별도로 인쇄되기도 했다. 양기훈의 낙관이 찍혀 있는 「민충정공 혈죽도」 목판화(국립현대미술관 등 소장)는 『대한매일신보』의 그림과 비슷하지만 길이는 더 길고 폭은 좁다. 찬(讚, 그림 옆에 써넣은 글)은 먹으로 찍었으나 대나무 부분은 청묵으로 찍어서 엷게 보인다. 독립기념관이 소장한 자료01은 「민충정공 혈죽도」와 그림은 같으나 낙관은 없고 찬의 내용이 다르다. 당시 혈죽도를 인쇄하여 파는 사람도 있었다는 신문기사를 볼 때, 양기훈의 그림을 원화로 하여 찬을 붙인 혈죽도 목판화가 유행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혈죽도는 교육구국운동의 장이었던 사립학교의 교과서에도 실렸다. 1907년 5월 5일에 발행된 『유년필독(幼年必讀)』은 관료이자 사학자인 현채가 저술한 역사·지리 교과서로, 권3의 제26과 「혈죽가(血竹歌) 2」 단원에 「민영환혈죽도」가 있다.자료04 『유년필독』 속표지의 표제를 쓴 당대 최고의 화가 안중식이 삽화도 담당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안중식은 앞서 『대한자강회월보』 제8호(1907.02.25.)에 「민충정공혈죽」을 그리기도 했다.자료05 ‘혈죽’과 ‘민영환 유상(遺像)’이 함께 그려진 교과서에는 혈죽가가 실려, 2천만 백성이 민영환의 충절을 본받아 국권회복에 나설 것을 노래했다. 슬프도다, 슬프도다 / 우리 국민 슬프도다 저버렸네, 저버렸네 / 민충정(閔忠正)을 저버렸네 한칼로 순국하던 / 정충대절(精忠大節) 그 영혼구원명명(九原冥冥) 저 가운데 / 우리 국민 굽어보네(제25과 혈죽가 1)삼천리 강토 이 나라/ 이천만 동포 이 백성우리 눈물 저 대[竹]에 뿌려 / 대한중흥(大韓中興) 어서 해 보세 노예(奴?)되지 말고 / 국권회복(國權回復)하세국치민욕(國恥民辱) 어서 씻어 / 지하함소(地下含笑) 우리 민공(閔公) (제26과 혈죽가 2) 유년필독은 소학교용이었지만, 유년부터 노인까지 전 국민이 애독한 국민적 교과서였다. 유년필독에는 교사용 참고도서인 『유년필독석의(幼年必讀釋義)』도 있었다. 해당 단원에는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가 한국에 와서 여러 대신을 위협하여 “보호신약(保護新約)을 늑성(勒成)”했다고 기술하고, 민영환이 순국 때 남긴 ‘한국인민에게 보내는 유서’와 ‘각국 공사관에 보내는 유서’의 전문을 실었다. 1908년 7월에 발간된 역사과 교과서인 『초등대한역사(初等大韓歷史)』는 정인호가 편집한 것으로, 제123절 「청청혈죽(靑靑血竹)」 단원에 「민충정공영환의 혈죽도」가 있다.자료06 이 삽화는 사진자료07을 그대로 그림으로 새겨 인쇄한 것이다. 교과서의 글에는 “민공의 혈죽이 2천만 동포를 깨우쳐 독립정신을 생겨나게 하였다”고 썼다.   alt『유년필독』 권3에 실린 「민영환혈죽도」(1907.05.05.)alt『대한자강회월보』에 실린 「민충정공혈죽」(1907.02.25.)   금지된 혈죽의 노래전국적으로 애국계몽운동이 펼쳐지는 가운데, 통감부에서는 친일내각을 통해 일련의 법령을 공포했다. 1907년 7월에 반포된 「광무신문지법」은 한국인 명의로 발행되는 신문에 대한 사전 검열을 법제화하고, 새로 신문을 낼 때 내부대신의 허가를 받도록 했다. 1908년 4월에는 법의 일부를 개정하여 미국과 러시아의 한국인 교포가 발행하는 신문뿐 아니라, 영국인 베델을 발행인으로 하여 규제를 피할 수 있었던 『대한매일신보』도 단속대상에 포함시켰다. 1908년 8월의 「사립학교령」에서는 제6조에 교과서 규제 조항을 두어, 사립학교에서는 학부 편찬도서나 학부 검정도서만을 사용하고 그 이외의 도서를 교과서로 사용할 경우에는 학부대신의 허가를 받도록 규정했다. 이와 함께 「교과용도서 검정규정」이 만들어져, 새로 출간되는 교과서를 검정하고, 이미 간행된 교과서도 검정을 받도록 했다. 1909년 2월에는 「출판법」을 제정하여 발매·반포 목적의 출판물은 사전 허가를 받아야 하며 이미 출판된 저작물도 발매·반포를 금지할 수 있도록 규정했다. 그 결과 『유년필독』, 『유년필독석의』, 『초등대한역사』는 ‘치안의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발매·반포가 금지됐다. 한편 ‘학부의 검정’을 통과한 교과서에는 민영환이 죽음으로 항거했던 을사늑약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됐다.이 전쟁[러일전쟁]이 일어나자 조정이 동양의 평화를 확립하기 위하여 우리나라의 부강을 협조한다는 뜻으로 일본과 조약을 맺어 양국의 친밀한 교의(交誼)를 협정하니 이를 을사오조약(乙巳五條約)이라 한다. (『초등본국약사(初等本國略史) 2』(1909.09.30.), 『신찬초등역사(新撰初等歷史) 권3』(1910.04.05.))이른바 한국의 부강을 협조하기 위한 것이라는 일제의 ‘근대적’인 ‘법령’의 지배하에서, 한국인의 국권회복을 위한 노력은 ‘양국의 친밀을 해치는 불법’으로 탄압을 받았다. 민영환이 순국한 지 5년째가 되던 해에 한국은 ‘보호국’에서 ‘식민지’가 되고 말았다.   alt『초등대한역사』에 실린 「민충정공영환의 혈죽도」(1908.07.)alt민영환과 혈죽 사진    애국계몽단체인 대한구락부에서는 일본인이 운영하는 키쿠다 마코토(菊田眞) 사진관에 의뢰하여 혈죽 사진을 촬영했다. 이 사진은 1906년 7월 15일에 찍은 혈죽 사진 위에 민영환의 초상사진을 메달리온(메달과 같은 원형 모양) 형식으로 붙이고 그 전체를 다시 복제 촬영한 것이다. 사진은 두꺼운 판지에 인쇄됐으며 서울 모교(毛橋, 현 무교동)에 있던 기쿠타 마코토 사진관 마크가 압인으로 새겨져 있어, 판매용 기념품으로 제작됐음을 알 수 있다. 사진은 『독립기념관』 10월호에서 소개한 「양주은의 사진엽서」 속에도 있다   우리가 몰랐던 이야기민영환이 순국할 당시 겨우 7세, 2세였던 장남 범식과 차남 장식은 독일과 프랑스에서 유학했다. 민장식에 관한 일제의 비밀문서 기록을 보면, 그는 1921년 2월에 중국 상하이에서 중국 학생들과 같이 중화민국여권을 갖고 프랑스로 갔다. 소르본 대학 문과대학에 재학했던 민장식은 1926년 12월에는 독일 베를린에서 유학 중에 동아일보사와 귀국해 있던 형 범식에게 통신을 보냈다. 다음 해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릴 예정인 약소민족대회(피압박민족대회)와 박람회에 약소피지배 민족의 역사와 정치상의 학대·차별을 증명하는 자료로 출품하기 위해 을사늑약 때 순국한 아버지 민영환의 혈의 등을 보내 달라는 것이었다. 이때 대회 주최 측에서 보낸 대회 참가 권유서를 번역하여 실었던 『조선일보』 1926년 12월 14일 자 기사는 차압처분을 받았다. 또한 대회 참가를 논의하려던 사회단체와 신문관계자들의 간담회는 금지되었다. ※ 독립기념관 홈페이지에서 자료01의 이미지와 함께 찬의 번역문을 볼 수 있습니다.  ① 독립기념관 홈페이지 → ② 자료(독립기념관 독립운동정보시스템) → ③ 소장자료 사진집 → ④ 독립운동가의 글과 그림※ 자료는 최원리, 정낙평, 안수산(Suan Ahn Cuddy)님이 기증해 주셨습니다. 독립기념관의 연구와 전시, 교육을 위해 소중한 자료를 기증해 주신 여러분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참고국립중앙박물관, 『근대 서화, 봄 새벽을 깨우다』 (전시도록), 2019. 국립현대미술관, 『대한제국의 미술 - 빛의 길을 꿈꾸다』 (전시도록), 2018.민명기, 『죽지 않는 혼』, 중앙북스, 2018. 최열, 「혈죽의 노래, 계정 민영환」, 『내일을 여는 역사』 49, 2012. 홍선웅, 『한국근대판화사』, 미술문화, 2014. ]]> Thu, 31 Oct 2019 11:35:43 +0000 35 <![CDATA[광주학생항일운동의 불씨가 되다 ]]> 글 임영대 역사작가광주학생항일운동의불씨가 되다   박준채는 광주고등보통학교 2학년이던 1929년에 사촌누이 박기옥을 희롱하는 일본인 학생과 충돌하여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촉발한 주역이다. 이후 와세다 대학을 졸업하고 은행원을 거쳐 교육자가 되었다. 조선대학교 법대 교수, 학장, 여대 학장, 대학원장 등을 지내고, 5·18 민주항쟁 때에는 조선대 시국양심선언에 관여했다. 광주학생독립운동 동지회 이사, 광복회 회원 등을 역임하며 광주학생운동의 정신을 알리는 데 노력하였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alt박준채1914.06.28.~2001.03.07.전라남도 나주건국훈장 애족장(1990)  장엄한 학생대중이여! 궐기하자! 굳세게 싸우라!1929년 10월 30일, 광주에서 나주로 가는 통학 열차에서 일본인 중학생이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여학생들의 댕기머리를 잡아당기며 희롱했다. 이에 박준채를 비롯한 조선인 남학생들이 항의하자 일본인 학생은 사과를 거부하고 ‘조센징(조선인)’이라는 모욕적인 언사를 내뱉었다. 상황은 곧바로 충돌로 치달았다.이들의 싸움은 둘만의 문제로 끝나지 않았다. 이미 광주 학생들은 나라를 빼앗긴 서러움과 함께 조선을 비하하고 일본을 격상하는 교육과정, 조선인 학생에 대한 일본인 교사들의 습관화된 차별, 평소 조선과 조선인에 대한 멸시를 숨기지 않는 일본인 학생들을 향한 누적된 증오를 갖고 있었다. 이것이 박준채와 일본인 학생의 갈등을 계기로 일시에 터져 나왔다. 패싸움이 벌어졌다.사태에 불을 지핀 건 공정하지 못한 해결 과정이었다. 싸움이 벌어진다는 신고를 받고 출동한 일본 경찰은 조선인 학생들만 구타했다. 일단 양쪽 모두 연행을 했던 경찰은 일본 학생들을 몰래 석방하고 조선인 학생들만을 구속했다. 신문에는 조선인 학생들을 비난하는 기사가 실렸다. 평소 일본 당국의 차별대우에 분개하고 있던 학생들에게 이런 노골적인 차별 대우는 불에 기름을 끼얹은 격이었다. 광주 시내 여러 학교가 잇달아 시위를 벌였고, 각급 사회단체들도 합세했다. 그리고 여기서 학생들에게 보내는 선언문이 나왔다.장엄한 학생대중이여! 최후까지 우리들의 슬로건을 지지하라! 그리하여 궐기하자! 싸우자! 굳세게 싸우라!… 조선인 본위의 교육제도를 확립시켜라! 식민지 노예 교육제도를 철폐하라! 민족문화와 사회과학연구의 자유를 획득하자! 전국 학생대표 회의를 개최하라!쓰러지지 않는 청년의 힘일제 당국은 학생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관련자 수백 명을 체포하고, 시위에 참여한 학생을 모조리 무기정학 시켰다. 학교도 무기한 휴교 처분을 내려 학생들이 모이지 못하도록 했다. 신문에서도 해당 사건을 보도하지 못하게 했다. 그럼에도 학생들의 의기는 꺾이지 않았다. 일제의 탄압으로는 사람들이 직접 전하는 소식까지는 막지 못했고, 강제휴학과 방학으로도 전국에 있는 학생과 시민들이 힘을 합쳐 일어나는 것을 완전히 차단할 수 없었다.피가 있는 조선 ○○적 학생제군! 용감하게 싸우자, 시위운동, 스트라이크. 전국학생사건에 대한 학교 당국 및 포악한 조선총독정치 폭로연설회 등 모든 수단과 방법으로써 자유와 정의를 위해 교내에서 투쟁하여 일본제국주의의 간성까지 육박하자.광주 학생들과 힘을 합치기 위해 전국에서 벌어진 동조는 맹렬했다. 194개에 달하는 학교에서 시위 또는 동맹휴학이 일어났으며, 참가한 학생은 5만 4천여 명에 달했다. 참가한 학생들은 일제의 탄압을 받아 그중 582명이 퇴학당하고 2,330명이 무기정학을 당하였다. 체포된 학생 1,642명 중에는 최고 징역 5년의 실형을 받은 사례도 있었다.이 거대한 운동에 불을 댕긴 장본인이었던 박준채는 시위 둘째 날인 11월 4일에 경찰에 체포되었고, 다행히 연소자라는 이유로 기소유예 처분을 받아 한 달 뒤에 석방되었으나 재학하고 있던 광주고등보통학교에서는 퇴학당했다.이후 박준채는 서울에 있는 양정고등보통학교(현재 목동에 있는 양정중고등학교)로 전학하여 학업을 이어나갔다. 이 학교는 1905년에 순헌황귀비 엄씨의 조카 엄준익이 세운 우리나라 최초의 민족사학으로, 왕실의 후원을 받는 민족학교였다. 그만큼 민족의식도 높았고, 3·1운동에서부터 광주학생운동, 조선어학회사건에 이르기까지 항일운동 대열에도 솔선하는 학교였다.박준채와 직접 관련은 없지만, 양정고등보통학교는 민족의식을 드높이는 수단으로 체육활동에도 주력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마라톤 우승을 이룬 손기정 선수가 이 학교 5학년이었고, 동메달을 수상한 남승룡 선수는 졸업생이었다.박준채는 양정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 대학을 졸업하였으며, 귀국한 뒤에는 잠시 은행에서 일하다가 해방 이후 조선대학교 법대 교수, 학장, 여대 학장, 대학원장을 역임하며 1988년까지 30년 가까이 재직하였다.사촌 누나 박기옥과 함께 일제강점기 광주학생항일운동의 주역으로 평가받았으며, 그 공을 인정받아 1962년에 대통령 표창, 1988년에 국민훈장 석류장,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이후 2001년 3월 7일에 노환으로 사망하였다. ]]> Thu, 31 Oct 2019 11:32:43 +0000 35 <![CDATA[독립운동가의 미래를 그리며 ]]> 독립운동가의 미래를 그리며 교실에 앉아 수업을 듣거나, 친구들과 웃고 떠드는 평범한 학생의 일상 대신 독립운동을 선택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학교는 더 이상 올바른 배움의 장이 아니었고, 학교 담장 밖 거리에서 부딪치고 싸워가며 얻은 것들이야말로 미래를 바꿀 진정한 지식이었습니다. 3월의 뜨거운 만세 함성 속에도, 총탄이 빗발치는 무장투쟁의 현장에서도 눈빛을 반짝였던 소년과 소녀들. 그들은 척박한 역사를 딛고 서서 희망찬 미래를 그리며, 그렇게 어른이 되었습니다. alt]]> Thu, 31 Oct 2019 11:31:36 +0000 35 <![CDATA[뉴욕 신한회의 결성과 독립청원 외교활동 ]]> 글 홍선표 나라역사연구소 소장뉴욕 신한회의 결성과독립청원 외교활동1910년대 재미 한인의 군사·외교운동5 제1차 세계대전 종결 직후 뉴욕 한인들은 국제정세의 변화에 주목하고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재미한인사회의 중심지인 미국 서부의 캘리포니아에 비해 뉴욕에는 주변 인근 지역을 다 포함해도 30~40명 정도에 불과할 정도로 한인 수가 적었지만, 뉴욕 한인들은 소약국민동맹회의는 물론 미국 의회와 정부를 상대로 활발한 독립청원 외교활동을 전개했다. 미국 동부에서 일어난 이 같은 외교활동은 2·8운동과 3·1운동의 서막을 여는 역사적인 불씨가 되었다. 신한회의 결성뉴욕 한인들은 제1차 세계대전 종결 직전부터 국제정세의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여러 방안을 모색했다. 1917년 10월 뉴욕에서 결성된 소약국민동맹회가 대전 종결 직후 제2차 대회를 개최할 것이라는 점과 그 뒤를 이어 파리에서 강화회의가 개최될 것이라는 점을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연유로 김헌식은 대전 종결이 선포된 다음날인 1918년 11월 12일 북미지방총회장 이대위에게 가장 먼저 소약국민동맹회의에 한인 대표자를 파견할 것을 제안했다. 그의 제안을 받은 이대위는 외교는 중앙총회가 나설 일임을 내세워 불응하고 중앙총회장 안창호에게 한인 대표자 파견 문제를 위임했다. 대한인국민회측에서 별 호응이 없자 김헌식과 신성구 등 18명의 뉴욕 한인들은 독자 활동에 나섰다. 한국 독립을 호소하고 추진할 방편으로 1918년 11월 중순경 신한회(The New Korea Association)를 결성한 것이다. 신한회의 조직은 회장 신성구, 서기 조병옥, 외무원 김헌식·이원익으로 구성되었다.신한회의 독립청원 외교신한회는 결성 때부터 독립운동을 위한 의연금 모금활동에 착수하였다. 그해 12월까지 모금한 금액은 약 900달러였다. 이는 한인들의 수를 감안할 때 결코 적지 않은 금액으로 뉴욕 한인들의 뜨거운 열성을 잘 보여준다.신한회는 11월 30일 특별회를 개최하고 만장일치로 12개 항의 독립청원서를 채택하였다. 청원서의 주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한국의 국토가 일본에 강압적으로 병합되어 한국인이 피정복의 인종으로 전락된 것은 부당하고 불법적이다. 둘째, 탐욕 때문에 약한 이웃 나라를 파멸시키는 제국주의는 연합국의 승리로 파괴되었다. 셋째, 미국 정부와 국민 그리고 전쟁에 승리한 연합국은 윌슨 대통령이 주창한 약소민족에 대한 민족자결의 대원칙을 지지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강한 이웃 나라인 일본에 의해 축적된 상처와 부정함에 대해 분노를 표현하며, 한국의 현 상황과 한국인의 분노에 대해 짧지만 구체적인 내용을 준비해 이를 미국의 대통령과 상·하원 외교위원회, 그리고 파리강화회의 미국 대표단에게 제출한다.신한회를 대표한 신성구와 김헌식은 독립청원서를 12월 2일 자 공문에 첨부해 12월 3일 미국 상원 외교위원장 로지(Henry C. Lodge)를 찾아가 전달하려 했다. 그런데 로지는 국무부에 제출해 줄 것과 외교위원회 위원 대부분이 이런 문건을 받아줄 수 없을 것이라는 구실을 들어 접수를 거절했다. 두 사람은 다시 미 국무부를 찾아갔으나 여기서도 거절당하자 파리에서 강화회의 미국대표단을 이끌고 있는 국무장관 랜싱(Robert Lansing)에게 문건을 우송했다.독립청원 외교활동에 대한 미국 언론의 보도와 확산미국 의회와 정부를 상대로 신한회가 한국 독립을 호소한 청원서를 전달했다는 사실은 1918년 12월 4일 자 연합통신을 통해 즉각 전 세계로 보도되었다. 보도 내용은 “한국은 미국 정부를 향하여 한미조약에 의거, 한국의 독립을 보호하며 일본의 통치권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고 하는 청원서를 제출”했다는 것이었다. 『워싱턴 타임스』는 12월 6일 자 기사 “Want Demand Made for Independence of Korea”에서 재미 한인들이 일본 지배하의 한국을 독립시키기 위해 윌슨 대통령과 미 상원 외교위원회에 호소했다고 전했다. 그리고 1882년의 한미조약을 상기할 때 미국은 도덕적으로 한국의 독립 주권을 보호할 모든 수단을 강구해야 한다는 한국인의 주장을 실었다. 한편 샌프란시스코에서 발행되는 일본인 신문 『일미보』는 12월 5일 자 기사에서 한국인의 독립청원활동은 경거망동한 짓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신한회의 독립청원 외교활동이 미국 내 각 언론에서 보도되자 『신한민보』 편집자 홍언은 1918년 12월 12일 자 논설에서 “일미보의 ‘한국 독립 제창’을 비평한 것을 논박함”이란 글을 실었다. 그는 이번 “재미 한인의 독립 제창이 워싱턴 연합통신의 전보로부터 세계를 진동”하고 “마른하늘에 벽력이 떨어졌다” 할 만큼 놀라운 사건으로 간주했다. 그런 후 『일미보』에 대해 2회에 걸쳐 세세하게 반박하면서 이번 신한회의 외교활동은 “8년간 받아온 천고의 대 치욕을 씻으려고 일본에 대하여 선전서(선전포고서)를 걸어놓은 것”과 같다고 높이 평가했다.신한회의 독립청원 외교활동은 태평양을 건너 일본 내 영자 신문과 일본인 신문에도 보도되었다. 먼저 『The Japan Advertiser』는 1918년 12월 15일 자 “Koreans Agitate for Independence”에서 재미 한인들이 미국 의회와 정부에 독립청원서를 제출한 사실을 처음으로 알렸다. 이어서 1919년 1월 18일 자에 “Korean Independence”란 제목으로 미국 내 한인 단체가 민족자결의 원칙을 한국인에게도 적용해달라는 결의안을 채택해 윌슨 대통령과 파리강화회의 미국 대표단, 그리고 미 의회 외교위원회까지 발송했다고 보도했다. 여기서 한인 단체라 함은 신한회를 의미한다. 일본 신문에서 보도된 신한회의 외교활동 소식은 그 직후 추가된 이승만·정한경의 파리행 추진활동 소식과 함께 재일 유학생의 2·8독립선언, 나아가 국내 3·1운동 준비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신한회는 미국 의회와 정부를 상대로 한 외교활동 외에 1918년 12월 제2차 소약국민동맹회의 때 대한인국민회의 대표단과 별도로 한인 대표를 파견했다. 신한회의 한인 대표는 외무원 김헌식이었는데 그는 소약국민동맹회의에서 선출한 7인의 집행위원 중 한 사람으로 뽑힐 정도로 활발하게 활동했다. 이후 신한회는 회원 일부가 기존 대한인국민회로 입회하면서 조직이 와해되자 1919년 말경 대한인독립단(단장 김헌식, The Korean Independence League)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alt김헌식, 신성구, 이원익 이름으로 작성된 신한회 공문(1918.12.02.)    ]]> Thu, 31 Oct 2019 12:52:12 +0000 35 <![CDATA[윤동주와 북간도 국외독립운동사적지 왜곡 ]]> 글 이계형 국민대학교 특임교수윤동주와 북간도 국외독립운동사적지 왜곡 1945년 우리 민족은 광복을 맞았지만, 독립운동은 끝나지 않았다. 여전히 미완으로 남은 사건, 해결되지 못한 문제, 기억해야만 하는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끝나지 않은 독립운동은 독립운동사를 과거에 머문 역사가 아닌 현재의 문제로 다루며, 오늘도 신문 한쪽을 차지하고 있는 독립운동 및 일제강점 이슈를 소개한다. alt윤동주alt용정시에 있는 윤동주 생가 세계에 흩어져 있는 우리 독립운동사적지한국의 독립운동은 초기부터 국내에 한정되지 않았다. 국외에서 독립운동의 전개는 1910년 8월 대한제국이 멸망한 후부터 더욱 확대되었다. 연해주와 미주 외에 중국 동북지역인 서간도와 북간도, 그리고 관내의 베이징과 상하이에 이르기까지 독립운동의 거점이 마련되면서 많은 지사들이 집결하는 독립운동의 중심지로 자리매김하였다. 그런 만큼 우리 독립운동사적지는 전 세계에 흩어져 있다. 현재 국외독립운동사적지는 1,050곳(2018년 12월 기준)으로 집계된다. 한중수교 이후 역사학자들은 학술적인 취지에서 중국 답사를 진행하고 여러 책들을 펴냈다. 1995년에는 한국독립유공자협회의 지원을 받아 처음으로 만주의 독립운동사적지 조사가 이뤄졌다. 그 뒤 독립기념관에서 2002년 국외사적지를 전수 조사하였고, 이후 지금까지 지역별로 『국외독립운동사적지 실태조사 보고서』를 발간하고 있다. 이는 새롭게 사적지를 발굴하는 것이기도 하고, 기존 사적지의 실태를 확인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이를 토대로 여러 기관이나 단체에서 국외사적지 탐방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개인들이 찾기도 한다.한국의 국외 독립운동과 관련한 표지석이나 기념비가 세워진 곳은 많지 않다. 게다가 이를 보존하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다. 해당 국가의 이해와 도움 없이는 안 되거니와 대한민국 정부의 지속적인 관심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 대부분의 사적지가 중국에 분포하는데, 이를 발굴하고 보존하는 일은 한·중 관계에 따라 좌우되기 일쑤다. 2015년 중국 충칭의 한국광복군 총사령부가 도시개발로 헐렸다가 2019년 4월 복원되었다.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하얼빈역 근처에 자리한 안중근의사기념관은 역사를 새롭게 보수공사 하는 과정에서도 살아남았다.윤동주 사적지의 훼손과 역사 왜곡조선족들이 많이 살고 있는 동북지역의 경우는 상황이 다르다. 한중 관계에 따라 기념 비석이 세워졌다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최근 윤동주와 관련한 사적지의 훼손은 국외 독립운동사적지 훼손의 대표적 사례이다. 연변조선족자치주 용정시에는 대성중학교 옛터에 용정중학교가 자리하고 있다. 1946년 대성중학교에 윤동주가 다녔던 광명중학교를 비롯하여 동흥·은진·명신·광명 등의 6개 중학교가 통합되었다. 그곳에 1993년 한국의 해외한민족연구소와 동아일보사가 비용을 함께 부담하여 윤동주의 ‘서시’를 새긴 시비가 세워졌고, 다음 해에는 용정시 정부와 해외한민족연구소가 주선하여 금성출판사의 지원으로 대성중학교를 옛 모습 그대로 복원하고 기념관으로 꾸몄다.하지만 지금은 ‘룡정중학전람관’이란 간판이 내걸리고 그 주변으로 담장이 처져있다. 윤동주 시비도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더욱이 용정중학교 내 한국인의 출입조차 금지되었으며, 중국 당국은 CCTV로 이를 감시하고 있다. 담장 안의 ‘별의 시인 윤동주(星的詩人 尹東柱)’라 새겨져 있던 흉상은 ‘중국 조선족 유명한 시인 윤동주’라 바뀌었다. 윤동주를 대놓고 ‘중국 조선족 시인’으로 소개하고 있는 것이다. 비단 이곳만이 아니다. 명동촌에 있는 윤동주 생가 입구에는 ‘중국 조선족 애국시인 윤동주 생가’라고 새겨진 안내석이 세워져 있다. 안에는 그의 작품이 중국어로 전시되어 있다. 그곳을 찾는 사람들이 대부분 한국인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중국에서 발간되는 책 중에 그를 ‘중국에서 출생한 조선 이민 2세대 시인(尹?柱是在中?出生的朝?移民第二代?人)’이라며 아예 조선족 작가로 소개하기도 한다. 윤동주가 이곳에 살게 된 것은 그의 증조부 윤재옥이 함경북도 종성군 동풍면 상장포에 살다가 1886년 두만강을 건너 북간도 자동으로 이주하면서부터이다. 그 뒤 조부 윤하현이 명동촌으로 옮겨와 살기 시작하였다. 부친 윤영석이 그곳에서 터전을 일구고 있던 김약연의 누이동생과 결혼하여 1917년 12월에 난 아들이 윤동주이다. 그러니 윤동주는 전 생애의 절반인 14년을 명동촌과 용정에서 산 셈이다.‘조선족’이란 명칭은 1954년 이후 중국에서 태어난 한국인을 지칭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윤동주를 중국 국적의 조선족이라 할 수 있을까? 중국 정부가 굳이 윤동주를 ‘조선족’으로 만들려는 의도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여기에도 동북공정과 역사공정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는 중국 국적을 취득하지도 않았다. 1944년 3월 일본의 교토지방재판소가 윤동주에게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 형을 선고받을 당시 판결문에도 그의 본적은 함경북도였다.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우리나라 교육부가 2019년 3월 발행한 초등학교 6학년 『도덕』 국정 교과서에 실린 윤동주에 관한 기술이다. 이에 따르면 “독립을 향한 열망과 자신에 대한 반성을 많은 작품에 남기고 떠난 재외 동포 시인, 바로 윤동주입니다”라고 소개하고 있다. 중국 정부가 윤동주를 ‘조선족’이라 한 것과 맥이 통한다는 생각에 당혹스럽다. 중국 정부가 내세우는 것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에서다. 이는 분명 국외에 있는 대한민국 사적지를 해당국에서 정치적으로 악용하고 있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정부 차원에서 적극 나서서 외교적으로 풀어야 할 숙제이다. 여름방학이면 한국의 대학생을 비롯하여 많은 단체가 방문하는 국외 독립운동사적지의 일번지는 단연 대성학교 터와 명동촌이다. 이제는 대성중학교 정문조차 넘을 수 없고, 명동촌에서는 자랑스러운 우리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이며 천재 시인 윤동주를 ‘조선족 시인’으로 대해야만 한다. 우리 아이들에게 윤동주는 중국인이라고 말해주어야 하는 날이 올 지도 모른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바랐던 그의 시구절에, 나라 밖에서 목숨을 걸고 독립운동을 했던 분들에게 오늘 유난히 파란 하늘에 한없이 부끄럽다. ]]> Thu, 31 Oct 2019 12:45:27 +0000 35 <![CDATA[제2차 세계대전과 친일파 전성시대 ]]> 글 강응천 기획집단 문사철 대표, 역사저술가제2차 세계대전과친일파 전성시대 두 차례의 세계대전은 모두 우리가 일본의 식민 지배를 받고 있는 동안 일어났다. 연합국의 승리로 끝난 제1차 세계대전은 우리 민족에게 독립의 희망을 안겨주었다. 3·1운동은 그런 흐름 속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일본이 추축국의 일원으로 참전한 제2차 세계대전은 우리 민족에게도 암울한 그림자를 던졌다. 일본은 총동원령을 내리고 한민족 말살정책을 펼쳤다. 지식인들은 대거 친일의 대열에 합류했다. 한국인이 과연 하나의 민족으로 살아남을 수 있을지, 절체절명의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alt   지구를 감싸고도는 불온한 공기1940년 스웨덴 연구원 캘린더가 온실효과를 가져오는 온실가스의 성질을 밝혀냈다. 온실효과란 대기 중의 이산화탄소 등이 마치 온실의 비닐이나 유리처럼 지구 표면의 온도를 높이는 현상을 말한다. 온실가스는 지구로 들어오는 짧은 파장의 가시광선과 적외선을 통과시키고, 지구로부터 복사되는 긴 파장의 적외선을 흡수한다. 이렇게 흡수돼 지구 밖으로 달아나지 못한 적외선이 지구 전체에 온실효과를 일으킨다. 산업화로 인해 이산화탄소뿐 아니라 메탄, 염화불화탄소(프레온) 등이 배출되면서 생태계가 파괴되고 인류의 생존이 위협받을 수 있다는 위기감이 지구를 감싸고돌기 시작했다.바로 그런 시기에 독일, 일본, 이탈리아 등 파시스트 국가들은 세계를 향한 침략의 발걸음을 재촉했다. 독일과 이탈리아는 에스파냐 내전에 개입해 인민전선을 붕괴시켰고, 일본은 중국으로 쳐들어갔다. 미국, 영국, 프랑스는 그들의 총구가 자신들이 아닌 소련으로 향하도록 외교적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독일은 1939년 소련과 불가침조약을 맺고 전 세계를 경악시켰다. 영국과 프랑스의 독일에 대한 유화정책은 파탄을 맞았다. 파시즘에 반대해 온 유럽의 좌익 세력도 큰 충격에 빠졌다. 소련의 중립을 이끌어낸 독일은 마음먹고 서쪽으로 진격할 조건을 마련했다. 세계는 이전보다 더 큰 세계대전의 소용돌이로 빠져들고 있었다.   alt독일이 유대인에 대한 학살을 자행했던 폴란드의 아우슈비츠 수용소   이것이 세계대전이다1939년 독일은 전차부대와 공군을 동원한 전격전 전술로 단숨에 체코와 폴란드를 점령했다. 독일은 점령지 곳곳에 수용소를 짓고 폴란드인과 유대인을 수용한 뒤 집단 학살을 자행해 유럽을 공포에 몰아넣었다. 히틀러의 나치스는 ‘열등한 폴란드인과 유대인이 독일의 순수한 혈통을 더럽히고 있으므로 멸종시켜야 한다’는 대중 선동을 펼쳤다.독일군의 전격전은 이에 그치지 않았다. 1940년 4월 덴마크와 노르웨이는 의표를 찌른 전격전의 희생양이 됐다. 이때부터 독일의 목표는 영국을 포함한 유럽 전체를 대상으로 한다는 것이 밝혀졌다. 5월에는 프랑스가 믿어 의심치 않던 마지노 방어선조차 돌파당했고, 이 틈을 노린 이탈리아의 공격으로 남부 지역을 내주고 말았다. 결국 프랑스는 1940년 6월 14일 수도 파리마저 함락당해 독일군 앞에 무릎을 꿇었다. 독일은 프랑스 본국의 약 2/3를 점령하고 남부의 나머지 지역을 비시의 페탱 정부에 맡겼다. 비시 정권은 제3공화국 헌법을 폐지하고 파쇼적인 신헌법을 공포했다. 탈출한 드골은 런던에서 대독일 항전을 위한 자유프랑스위원회를 결성했다. 독일은 이어 영국 본토 상륙작전을 선언하고 제공권을 장악하기 위한 공습을 영국 곳곳에 가했다.상황이 이렇게 되자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은 더 이상 방관할 수 없다고 판단해 참전을 선언했다. 1941년 3월이었다. 이로써 이미 아시아에서 벌어지고 있는 중일전쟁과 소련·핀란드전쟁을 묶어 전 세계를 무대로 하는 세계대전이 현실로 다가왔다. 전쟁의 원인 가운데 하나는 제1차 세계대전의 승전국들이 패전국인 독일과 이탈리아에 대해 지나치게 가혹한 제재를 가한 것이었다. 독일은 모든 식민지를 빼앗기고 과중한 배상금을 지불해야 했다. 특히 1929년 대공황이 유럽을 덮치자 실업자가 넘쳐나게 된 독일의 불만은 극에 달해 있었다.독일은 영국에 대한 공습전인 브리튼전투에서 영국 공군을 제압하는 것이 여의치 않자, 일단 영국 상륙 작전을 미루고 전선을 동쪽으로 돌려 소련을 침공했다. 이로써 제2차 세계대전은 자본주의 국가와 사회주의 국가가 벌이는 최초의 전면전으로까지 확대되었다.   alt일본의 진주만 공습으로 불타고 있는 미국 전함   진주만을 기억하라!1941년 12월 7일 일본군이 하와이 진주만의 미국 해군 기지를 선전포고 없이 기습 공격했다. 일본 전투기와 폭격기 350대는 오전 7시 55분 기습 공격을 펼쳐 미국의 순양함 3척과 구축함 3척 등 다수의 함정과 180대가 넘는 항공기를 파괴하고 3,000여 명의 사상자를 냈다. 또 같은 날 타이완 기지의 일본 폭격기들은 필리핀에 있는 클라크와 이바 군용 비행장을 공격해 수많은 미군 항공기를 파손시켰다. 일본은 동시에 인도네시아, 미얀마 등 동남아시아로 진격, 전선을 확대해 세계를 상대로 전쟁에 돌입했다.뜻밖의 기습을 당한 미국은 처음에는 적잖이 당황했지만, 신속히 전열을 정비하고 반격에 나섰다. 미국 의회는 8일 신속하게 일본에 선전포고하고, 루스벨트 미 대통령은 “진주만을 기억하라!”며 미국인의 애국심을 고취했다. 일본이 미국을 기습한 이유에 대한 가장 유력한 설은 중일전쟁의 장기화와 미국, 영국 등의 개입에 대한 돌파구를 찾기 위해 전면전을 감행했다는 것이다. 일본은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키면서 단기간에 승리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4년이 지나도록 전선은 교착 상태에 빠졌고, 전쟁을 계속 수행하기 위해서는 석유, 고무 같은 천연자원 확보를 위해 인도차이나반도를 점령하는 것이 불가피해졌다. 또한 미국이 고철과 석유의 일본 수출을 전면 금지하고, 영국도 일본의 세력 확장에 제동을 걸자 이들과 전면전을 선택하는 것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는 것이다. 일본은 진주만을 공격하면서 이 전쟁을 아시아 대 미국과 유럽의 구도로 몰아가려 했다. 여기에는 ‘대동아공영권’을 내세워 스스로 아시아의 맹주가 되겠다는 의도가 담겨 있다. 그러나 이는 일본이 점령지에서 인적, 물적 수탈을 원활히 하기 위한 속임수일 뿐이었다. 미국과 영국을 상대로 전면전을 벌인 일본이 승리하려면, 유럽 전선에서 독일이 소련을 무너뜨리고 영국과 미국에 총공세를 펴야 할 터였다. 바야흐로 세계대전은 유럽과 아시아 태평양을 하나의 전선으로 묶어 전개되었다.   alt홍난파가 쓴 친일의 글(『매일신보』, 1940.07.07.)   한민족이 살아남을 수 있을까태평양전쟁이 일어난 지 6일째 되던 날, 서울 부민관에서 임전보국전선대회라는 것이 열렸다. 대회에는 1,000여 명이 참가해 “황국신민으로서 황도 정신을 선양하고, 사상 통일을 기한다”며 친일 활동을 다짐했다. 이 대회의 단장은 3·1운동의 민족 대표 33인 중 한 명인 최린, 고문은 『독립신문』 사장을 지낸 윤치호 등이었다.친일 신드롬은 문화계도 강타했다. 회화봉공(繪畵奉公), 화필보국(畵筆報國)을 내세우며 일본 군국주의를 찬양하고 국방 기금을 마련하는 전람회도 개최됐다. 이런 미술계의 움직임에는 조선미술가협회의 창설을 주도하고 〈금비녀 헌납도〉를 그린 김은호가 앞장섰다. 음악가들도 일제의 침략 전쟁을 미화하는 노래를 만들었다. 〈정의의 개가〉를 작곡한 홍난파와 〈후지산을 바라보며〉의 곡을 쓴 현제명이 대표적이다. 특히 홍난파는 1940년 7월 7일 『매일신보』에 “우리의 모든 힘과 기량을 기울여서 황국신민으로서 음악 보국 운동에 용왕매진(勇往邁進)할 것을 마음속에 스스로 기약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라는 친일의 글을 실었다.문단에서는 1939년에 이광수, 최재서, 박영희 등이 조선문인협회를 결성해 내선일체(‘일본과 조선은 하나’라는 뜻)를 표방하며 친일 문학 활동을 전개했다. 이광수는 1938년 한국인이 스스로 일본인과 같은 성으로 바꾸는 창씨개명을 해 민족의 지위를 올리자고 주장하기도 했다. 모윤숙, 노천명 등 여류 문인도 조선임전보국단에 가입해 공출, 헌금 등 전쟁 협력 활동을 펼쳤다. 교육계의 대표적인 친일 인사 김활란 이화여전 교장은 1938년 애국여자단을 만들어 친일 활동을 벌였다.민족지를 표방한 언론들도 친일 행각에 나섰다. 1938년 일제가 조선지원병령을 공포하자, 『조선일보』는 이 법령이 “내선일체의 정신으로 종래 조선 민중이 국민으로서 의무를 다하지 못하고 있던 병역 의무의 제일 단계를 실시케 하는 것”이라면서 “황국신민으로 그 누가 감격치 아니하며 그 누가 감사치 아니하랴”라고 흥분했다. 『동아일보』도 “황국신민으로서 감사하며 본분을 다하자”는 선동에 나섰다.불교계는 1937년에 “조선 불교를 대동단결 시켜 국민정신 진흥 운동에 앞장세우자”는 모임을 갖고 일본군을 위문하는 등의 친일 행사를 벌였다. 천도교는 청년단이 앞장서고, 유교는 조선유림연합회를 결성해 친일 행각을 벌였다. 기독교계도 남장로선교회 등 일부는 신사참배를 거부했지만, 대부분은 일찍부터 신사참배에 참여했다.친일파는 한일병합 이전부터 있었지만, 그 수가 늘어나면서 적극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것은 1937년 중일전쟁 무렵의 일이다. 일제가 대륙 침략을 본격화하면서 인적·물적으로 한국인의 협조가 필요해지자 친일파를 적극적으로 양성하기 시작했고, 일부 한국인이 이에 호응해 민족을 팔아 자신의 이익을 챙겼다.일제는 일선동조론(일본과 조선의 조상이 같다는 논리)을 내세워 한국인도 일본인과 똑같이 황국신민이 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내선일체 구호, 창씨개명 운동이 바로 황국신민화 정책의 일환이었다. 한국인을 지구상에서 없애고 일본인으로 흡수하겠다는 민족말살정책인데, 한국 최고의 지성인들이 그에 감사하며 동족을 전쟁 노예로 바쳤다. 한민족은 일제의 물리적 수탈 못지않게 무서운 친일파들의 지적, 문화적 변절에 의해 최악의 생존 위기를 맞고 있었다.   alt대표적 친일 문학가 이광수   그래도 희망은 있다전쟁과 식민 지배의 광풍은 로켓 개발, 우생학 등 과학기술의 도움을 받았다. 그러나 과학기술이 이 같은 인류 파괴에 동원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1943년 네덜란드의 캄펜 병원에서 이루어진 최초의 인공신장 이식 수술은 인류에게 한 줄기 빛을 선사했다. 네덜란드의 젊은 의사 콜프가 요독증 말기로 고생하는 스크리버를 위해 셀로판지로 만든 반투막을 사용해 수동 정화 장치를 마련해준 것이다. 이 수술의 성공은 몸 밖의 기구가 인간의 장기를 대신해 생명 활동을 연장시킬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 주었다.같은 해 우크라이나 태생 미국 생화학자 왁스먼이 결핵 치료에 효과적인 항생물질 스트렙토마이신을 발견했다. 그동안 결핵균은 페니실린에도 끄떡없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방선균류인 스트렙토미케스 그리세우스로부터 추출한 스트렙토마이신에는 매우 민감하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스트렙토마이신은 페니실린 발견 이후 개발된 최초의 항균제로서, 결핵균뿐 아니라 장티푸스균 같은 세균도 없앨 수 있어 항균 치료에 많은 기여를 했다. 인류가 절멸할 것 같은 위기 속에서도 희망은 꺾이지 않고 있었다. ]]> Thu, 31 Oct 2019 12:56:44 +0000 35 <![CDATA[가을이 깊은 어느 날 볕 좋은 밀양 여행 ]]> 글·사진 임운석 여행작가가을이 깊은 어느 날볕 좋은 밀양 여행 나날이 깊어간다. 아니 깊어간다는 표현보다 밀려난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그것은 가을이다. 가을의 끝자락인 11월은 다시 올 수 없는 2019년의 마지막 가을이다. 그래서일까. 남은 시간이 더 소중하게 느껴진다. 얼마 남지 않았지만 가을의 끝을 잡고 싶은 마음에 찾은 곳이 있다. 볕이 빈틈없이 빼곡히 내리쬐는 밀양(密陽)이다.   alt만추의 위양지   늦가을의 몸부림, 밀양의 추색밀양은 교통의 요충지다. 경상남도 동북지역에 위치해 대구·울산·부산광역시와 창원시에서 1시간이면 밀양에 닿는다. 오랜 역사와 전통이 고스란히 남아 있어 예나 지금이나 경상도 제일의 당일치기 여행지로 손꼽힌다. 요즘은 서울에서도 당일치기 여행이 가능하다. 2시간 남짓한 시간이면 KTX가 서울과 밀양을 연결해준다.밀양에서 가장 먼저 찾은 곳 위양지. 계절의 변화를 실감할 수 있는 곳이다. 원래 이름은 양량지(陽良池)였는데 어느 틈엔가 위양지(位良池)로 둔갑했다. ‘양민을 위한 연못’이란 뜻이다. 밀양에는 김제 벽골제, 제천 의림지와 함께 삼한시대 3대 농업 저수지 중 하나인 수산제가 있다. 그만큼 고대부터 농업이 발달했다. 위양지 역시 농사를 위해 조성된 저수지로써 통일신라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위양지가 세상에 알려진 것은 ‘봄날의 눈꽃’이라 불리는 이팝나무꽃 때문이다. 싱그러운 새순 위에 소담스럽게 내려앉은 새하얀 꽃잎이 겨울 눈꽃처럼 아름답다. 이팝나무꽃은 5월이 절정이다. 그때가 되면 때를 놓치지 않으려는 사람들로 위양지가 몸살을 앓기도 한다. 그다음 순서를 꼽으라면 만추다.위양지를 에두른 산책로에는 왕버드나무와 소나무가 울창하다. 왕버드나무의 단풍은 노랗거나 붉은 색으로 물든다. 사철 푸른 소나무와 조화롭다. 봄날의 싱그러움과 다른, 가을의 완숙미가 느껴진다. 숙고의 계절에 딱 어울리는 풍광이다.위양지의 풍경을 완성하는 것은 완재정이다. 1900년에 안동 권씨 문중이 지은 정자인데 위양지 가운데 자리한 섬 한가운데 자리를 틀고 앉아있다. 지금은 섬에 다리가 놓여 누구나 쉽게 완재정을 돌아볼 수 있지만 옛날에는 배를 타야만 했다. 빼어난 풍광을 오롯이 혼자서 독차지하다가 이제는 여러 사람과 공유하게 된 셈이다. 이 또한 위양지의 이름(양민을 위한 연못)과 그럴싸하게 어울린다. 완재정에서 보는 풍광은 위양지 둘레에서 보는 것과 사뭇 다르다. 계절의 한가운데 서 있는 느낌이랄까. 주변을 돌아보니 위양지는 농사만 짓기엔 아깝다. 농사보다는 시절을 즐기는 풍류가 어울려 보인다.위양지를 찾을 때 거울처럼 잔잔하기를 기대했다. 하지만 늦가을 11월의 위양지에는 바람이 주인행세를 한다. alt완재정을 향해 자란 왕버드나무alt수많은 돌이 모여 있는 만어사 너덜지대 해넘이 밀양을 빛나게 하는 삼랑진의 특별한 곳밀양에는 유난히 너덜지대가 많다. 대표적인 곳이 만어산 암괴류(천연기념물 제528호)다. 만어산은 산 중턱에 자리한 사찰의 이름 만어사에서 이름을 따왔다. 만어사는 울퉁불퉁 제멋대로 생겨먹은 돌덩이들을 물고기로 여겨 ‘만 마리의 물고기(萬漁)’라는 뜻이다.주차장에서 몇 걸음을 옮기는데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산기슭에서 골짜기를 따라 산꼭대기까지 크고 작은 돌들이 누가 쏟아 놓은 것처럼 널브러져 있다. 마치 산사태가 난 듯 아주 위협적이다. 규모는 폭이 약 100m, 길이가 약 500m라고 한다. 돌의 모습은 흡사 연어 떼가 강물을 거슬러 오르는 장면처럼 보인다. 만어(萬漁)라고 부르는 이유를 짐작하겠다. 도대체 이 많은 돌은 어디서 왔을까? 보는 이마다 궁금증에 고개를 갸웃거린다.믿기 어려운 현상에는 언제나 전설이 따라붙기 마련. 그 유래도 다양하다. 『동국여지승람』과 『택리지』에는 동해 용왕의 아들 이야기가 전해온다. 옛날 옛적 동해 용왕의 아들이 자신이 단명할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살 방법을 수소문하던 중에 낙동강 건너 무척산에 신통한 스님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한걸음에 찾아 지혜를 구하자, 스님은 ‘가다가 멈추는 곳이 인연이 있는 곳’이라며 알쏭달쏭한 말을 해줬다.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용왕의 아들이 길을 떠나자 그 뒤를 수많은 물고기 떼가 뒤따랐다. 얼마를 갔을까, 그들이 멈춘 곳은 만어사가 있는 만어산 기슭이었다. 그 뒤에 용왕의 아들은 미륵바위로 변했고, 그를 따르던 수많은 물고기 떼는 크고 작은 돌이 됐다고 한다. 물론 믿거나 말거나 하는 전설이다.   alt조선 3대 누각으로 손꼽히는 영남루   고색창연한 영남루에 올라밀양에 왔다면 반드시 찾는 곳이 영남루다. 흔히들 ‘영남루는 밀양 여행의 알파, 오메가’라 부른다. 시내에 자리해 교통이 편리한 데다 야경이 빼어나 마지막 여행지로도 손색이 없다.영남루는 밀양강을 잇댄 절벽에 자리한다. 강 건너편에서 본 풍광은 밀양 제일이다. 짙푸른 대나무가 선비의 지조를 자랑하듯 울창하고, 오른편에는 울긋불긋한 단풍이 계절의 끝을 향해 밀양강과 함께 유수한다. 물길은 삼랑진에 이르러 낙동강으로 흘러들겠지만 홍엽의 단풍은 바람결에 나뒹굴며 겨울을 맞을 것이다.영남루에 오르는 길, 후문 쪽에 작곡가 박시춘 선생의 옛집이 복원돼 있다. 선생은 <신라의 달밤>, <이별의 부산정거장>, <굳세어라 금순아> 등 엄청난 곡을 남겼는데 모두 3,000곡이 넘는다. 선생의 대표작들이 골목 어귀 분위기를 구슬프게도 활기차게도 한다.후문으로 들면 영남루가 한눈에 들어온다. 진주 촉석루, 평양 부벽루와 함께 ‘조선 3대 누각’으로 불릴 만한 풍모다. 정면 5칸, 측면 4칸에 2층에는 팔작지붕을 얹어 기품을 더했다. 본루인 영남루를 중심으로 양옆에 날개를 펼치듯 동서로 부속 건물을 두어 전체 규모를 키웠다. 동편 건물은 능파당이고 서편 건물은 침류각이다. 그중 침류각은 본루와 높이를 다르게 해 지붕이 계단처럼 이어진다. 입체감과 율동감을 살린 디자인이다. 기둥은 높고 그 간격은 매우 넓다. 한 아름이 넘는 기둥이 모두 56개에 달한다. 기둥은 붉게 채색되어 있지만 오랜 역사를 보여주듯 색이 바랬다. 더군다나 밑부분은 나뭇결이 그대로 드러났다. 긴 세월을 소리 없이 보여주고 있다. alt이증석이 11세 때 쓴 영남제일루alt아랑을 애도하는 아랑각 능파당을 통해 영남루에 오른다. 면적이 워낙 넓어 누각 가운데까지 빛이 들지 못한다. 사방이 탁 트여 있어 바람이 쉼 없이 오간다. 영남루가 한여름에 피서지로 인기 있는 이유다. 주변 경관을 살피고 나니 시선이 대형 편액에 꽂힌다. 밀양강 쪽에 걸린 영남루(嶺南樓)는 1843년 이현석이 7세 때, 영남제일루(嶺南第一樓)는 이현석의 형 이증석이 11세 때 썼다. 이들은 영남루를 중수한 밀양 부사 이인재의 첫째와 둘째 아들이다. 어리광을 부릴 나이에 좌중을 압도할만한 힘찬 글을 썼다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영남루 바깥 북쪽 처마에도 세 개의 대형 편액이 나란히 걸려 있다. 부드러우면서도 힘이 있는 ‘영남루(嶺南樓)’ 글씨는 당대 명필 송하 조윤형의 글씨고, 좌측 큰 고을이란 뜻의 ‘강좌웅부(江左雄府)’와 영남지방의 아름다운 누각이란 뜻의 ‘교남명루(嶠南名樓)’ 글씨는 이유원이 쓴 것이다. 글씨에서 기백과 절제미가 느껴진다. 2층 마루에서 볼만한 것은 편액뿐만이 아니다. 천장에 그려놓은 고색창연한 그림들이 민속화를 보는 듯 화려해 눈을 쉽게 뗄 수 없다. 영남루는 원래 신라 5대 사찰 중 하나였던 영남사의 종각이 있던 범루였다. 고려 때 와서 절은 소실되고 범루만 남은 것을 공민왕 14년(1365)에 새로 지어 영남루라 이름을 지었다. 조선 시대 들어와서도 소실과 중수를 반복하다가 헌종 10년(1844)에 지금의 모습으로 재건했다.영남루 후문을 나서 강 쪽으로 내려가면 아랑각이 나온다. 조선 명종(1534~1567) 때 밀양부사의 외동딸이었던 아랑은 열여덟 살 때 유모의 꾐에 빠져 영남루로 달구경 나왔다가 구실아치에게 봉변을 당하게 되자 밀양강에 투신했다. 이후 아랑의 억울한 죽음을 슬퍼하며 시신을 발견한 대밭에 아랑각을 세웠다. 내려온 길을 되짚어 올라가면 밀양읍성으로 이어진 솔숲길이 나온다. 밀양읍성은 밀양 시내를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곳으로 전망이 장쾌하다. 성곽 높은 곳에 자리한 무봉대가 전망대 역할을 한다.바람을 맞으며 풍경을 내려다본다. 밀양의 명소를 밟았던 하루를 되돌아보니 그 시간들이 참 느슨했다. 그래서 더 유유자적할 수 있었다. 볕 좋은 날 밀양을 찾은 것은 행운이었다. ]]> Thu, 31 Oct 2019 12:57:52 +0000 35 <![CDATA[종교인이 함께 이룬 독립의 꿈 ]]> 글 김정인 춘천교육대학교 교수종교인이 함께 이룬독립운동의 꿈   민족대표 33인, 그들은 3·1운동의 기획자였다. 민족대표 33인은 천도교 15명, 기독교 16명, 불교 2명으로 모두 종교 지도자로 이루어졌다. 1910년대 조선총독부는 한국인의 정치, 사회 활동을 허용하지 않았다. 해외로 망명하지 않은 지식인들은 종교계나 교육계에서 활동했다. 그들이 바로 3·1운동의 주역으로 나선 것이다. 3·1운동 이후에도 종교인들은 민족운동에서 주요 세력으로 활약했다. 무장투쟁에 나섰던 대종교도 있었다. alt민족대표 독립선언 기록화(태화관)3·1운동의 기획자, 민족대표1918년 말 제1차 세계대전의 전후 처리를 위한 파리강화회의 개최를 목전에두고 지식인들은 세계정세를 예의주시하며 독립운동을 모색하고 있었다. 그런데 1919년 1월 18일 파리강화회의가 개막한 사흘 후인 1월 21일에 고종이 급사했다. 도쿄에서 ‘2·8독립선언’을 준비하던 유학생들은 독립선언 준비 소식을 알리고자 송계백을 국내에 밀파했다. 국내외적 상황이 한국인의 독립 열망을 세계에 알릴 호기라고 판단한 종교계는 본격적인 독립운동 모의에 나섰다.제일 먼저 천도교가 연대에 기반한 독립운동을 제안했다. 천도교 창건자인 손병희와 그의 측근인 권동진, 오세창, 1910년 국망 직후 천도교에 입교해 보성고등보통학교 교장을 맡고 있던 최린이 주모자였다. 그들은 1919년 1월 말부터 본격적으로 움직였다. 연대를 위한 연락 실무는 최린이 맡았다. 최린이 제일 먼저 기독교 장로로서 평안북도 정주에 거주하는 이승훈과접촉을 시도했다. 이승훈은 2월 11일에 상경해 천도교의 독립운동 계획을듣고는 동참할 뜻을 밝혔다. 당시 기독교는 중앙집권적 단일조직인 천도교와 달리 장로교와 감리교로 양분되어 있었다. 이승훈은 장로교와 감리교 간의 연대를 시도했다. 그는 평안북도 선천과 평안남도 평양에서 기독교 지도자들과 접촉한 후 상경해 서울의 기독교 지도자들을 만났다.천도교와 기독교의 연대가 성사된 것은 2월 24일이었다. 양측은 3월 1일 오후 2시에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기로 합의했다. 독립선언서는 천도교에서 인쇄하고 지방에서도 천도교인과 기독교인들이 서울의 독립선언식 일시에 맞춰 독립선언식을 갖도록 독려하기로 했다. 또한, 민족대표는 천도교와 기독교에서 각각 선정하되, 불교와도 연대하기로 결정했다.최린은 그날 밤 신흥사 승려인 한용운을 만나 연대를 요청했다. 1월 말부터최린에게 독립의사를 비쳤던 한용운은 즉시 승낙했다. 한용운의 주선으로해인사 승려인 백용성의 동의도 받았다. 마침내 천도교, 기독교, 불교의 연대가 성사된 것이다.2월 27일과 2월 28일에는 민족대표 선정, 독립선언서 인쇄와 배포 등구체적인 진행과 관련한 연대 활동이 펼쳐졌다. 2월 27일에 종교계는 민족대표를 최종 선정했다. 천도교가 경영하는 보성사에서는 기미독립선언서 2만 1천 매가 인쇄되었다. 2월 28일의 독립선언서의 배포 역시 종교계의 연대를 통해 이루어졌다. 천도교는 북부 지방을 중심으로 배포에 나섰다. 기독교는 학생들을 통해 서울에 배포했고 연락이 닿는 지역에도 보냈다. 불교계에서 한용운이 나서 서울과 남부 지방에 배포했다. 그날 밤 처음으로 천도교·기독교·불교 지도자, 즉 민족대표 중 23명이 손병희의 집에 모였다. 민족대표들은 3월 1일 학생들이 독립선언식 예정 장소인 탑골공원에 집결한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들이 체포될 경우 폭동이 일어날 것이라 우려하며 장소를 태화관으로 변경했다.3월 1일 오후 2시 민족대표 중 29인이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식을 가졌다. 민족대표들은 조선총독부에 독립선언식 거행 소식을 알리고 한용운의연설을 듣고 만세삼창을 불렀다. 곧 헌병과 경찰 80여 명이 태화관에 나타나 민족대표들을 체포했다. alt2·8 독립선언 당시 동경 YMCA단원이었던 송계백alt일본 망명 시절의 권동진(왼쪽)과오세창(오른쪽) 종교 연대를 이끌어 낸 손병희, 이승훈, 한용운천도교, 기독교, 불교 연대의 주역은 손병희, 이승훈, 한용운 등 3인이었다. 손병희는 민족대표를 이끈 천도교 지도자로서 1894년 동학농민전쟁에서 농민군을 이끌었던 동학 지도자다. 이후 동학 3대 교주가 되어 동학의 근대화를 추구하며 이름을 천도교로 바꿨다. 1910년 대한제국이 멸망하자, 많은 사람이 동학에 뿌리를 둔 천도교에 몰려들어 1919년 무렵 천도교인은 100만 명에 달했다. 손병희는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태화관에서 민족대표들과 함께 독립선언식을 거행한 후 경찰에 체포되었다. 그는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고 서대문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1919년 11월에 뇌출혈로 쓰러졌다. 하지만 병보석은 계속 기각되었고 1920년 10월 20일에야 출감할 수 있었다. 끝내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1922년 5월 19일 서거했다. 손병희는 천도교가 조직과 재정을 동원해 3·1운동을 기획하는 데 앞장서도록 이끌었던 민족대표의 지도자로서 사실상 3·1운동으로 자신의 삶을 마감하는 희생을 치렀다.이승훈은 기독교 장로이자 자산가였다. 어릴 적 부모를 모두 잃고 10세에 유기상점 점원을 시작으로 생활전선에 뛰어들어 이후 부자가 되었다. 1907년 안창호의 권고로 비밀결사인 신민회에 가입했고, 이후 오산학교와 태극서관, 자기회사 등을 설립했다. 1911년 2월에는 안중근의 사촌 동생 안명근이 독립군자금을 모금하다 검거된 ‘안악사건’에 연루되어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이듬해 조선총독부가 ‘테라우치 총독 암살 미수 사건’을 조작해 105명을 기소한 ‘105인 사건’이 일어났는데, 이승훈은 주모자로 지목돼 다시 서울로 압송되어 징역 6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19년 2월 천도교의 독립운동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이고 감리교와 장로교를 아울러 기독교 지도자들을 결집했다. 3월 1일 오후 2시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경무총감부로 호송되어 징역 3년을 선고받고 서대문감옥과 경성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그리고 민족대표 가운데 가장 늦은 1922년 7월 21일에 출옥했다.한용운은 1904년경 출가해 승려 생활을 시작했다. 1910년대에는 불교의 친일화에 반대하며 한국불교의 개혁방안을 제시한 『조선불교유신론』을 발간하는 등 불교의 혁신운동을 이끌었다. 1919년 2월 24일 최린으로부터 기독교와 연합해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기로 했다는 소식을 듣고 백용성과 함께 민족대표에 가담했다. 2월 28일에는 독립선언서를 서울과 남부 지방에 배포했다. 3월 1일 태화관에서 열린 독립선언식에서 “오늘 우리가 집합한 것은 조선의 독립을 선언하기 위한 것으로 자못 영광스러운 날이며, 우리는 민족대표로서 이와 같은 선언을 하게 되어 그 책임이 중하니 금후 공동 협심하여 조선독립을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내용의 연설을 하고 만세삼창을 선창했다. 경찰에 체포되어 서대문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경성지방법원 검사장의 요구로 「조선 독립에 대한 감상」이란 논설을 집필해 제출했다. 징역 3년을 선고받아 서대문감옥에서 옥고를 치른 뒤 1921년 12월 22일 감옥 문을 나왔다. alt천도교 지도자 손병희alt기독교계 대표 이승훈alt대종교 간부 나철민족운동을 펼친 종교들 3·1운동을 선도적으로 이끌었던 천도교는 3·1운동 이후 민족진영을 이끄는 주류로 부상했다. 1920년대 천도교는 교단의 민주주의적 운영을 이끌어 내며 천도교청년회를 중심으로 문화계몽운동에 앞장섰다. 『개벽』, 『어린이』, 『신여성』, 『학생』, 『농민』 등의 잡지를 발간했고 청년운동, 소년운동, 학생운동, 여성운동, 농민운동을 전개했다. 이후 천도교는 신파와 구파로 분화되었는데 구파는 6·10만세운동과 신간회에 참여했고 신파는 조선농민사를 조직해 농민운동을 펼쳤다. 3·1운동 이후 기독교는 사회운동의 일환으로 물산장려운동, 농촌계몽운동 등에 뛰어들었다. 1930년대에는 신사참배를 강요하는 조선총독부와 충돌했는데 끝까지 신사참배를 거부한 기독교인들은 탄압을 받았다. 불교는 청년을 중심으로 조선불교유신회를 결성하고 불교 개혁과 대중화 운동을 펼치며 민족정신을 고취했다.한편 나철이 1909년 창건한 대종교는 대한제국이 멸망하자 만주로 본부를 이전했다. 그곳에 살던 많은 한인이 대종교에 입교했다. 대종교는 만주에 학교를 세우고 단군 사상을 전파하며 중광단이라는 무장단체를 결성했다. 중광단은 3·1운동 이후 만주지방에 흩어져 있던 대종교인을 규합해 대한정의단으로 개편했다. 대한정의단은 대한군정서를 거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지시에 따라 서일을 총재로, 김좌진을 총사령관으로 하는 북로군정서로 확대 개편되었다. 1920년 북로군정서는 청산리대첩을 승리로 이끌었다.alt불교계 대표 한용운]]> Thu, 28 Nov 2019 17:10:33 +0000 36 <![CDATA[독립운동의 성지가 되다 ]]> 독립운동의 성지가 되다독립운동사적지가 된 종교 건물 일제강점기 사찰, 교회, 성당 등 종교적 목적을 위해 세워진 건물은 비단 종교인들에게만 특별하지 않았다. 언제든 독립만세 소리가 울려 퍼지고 어디든 의거의 현장이 되었던 그 시절, 종교 건축물도 우리 독립운동사에 제 공간을 내주었다. 그곳엔 종교인이기 이전에 내 나라를 사랑하는 국민이자, 독립운동가였던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종교적 공간 안에서 교리를 공부하고 설파하는 종교 활동과 동시에 나라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며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길거리에서 힘차게 독립만세를 외치던 누군가는 일제의 탄압을 피해 가까운 교회, 또는 산속 깊은 곳에 있는 절로 숨어들었다. 도심 한가운데 위치한 성당 앞에서는 매국노를 향한 날카로운 애국의 비수가 날아들었다. 그리고 어느 작은 마을의 교회는 학살의 현장이 되어 터만 남긴 채 사라졌다.우리 독립운동사에서 종교 건축물은 기도나 불공의 종교 활동보다도 독립운동가의 소속 단체, 독립운동에 대한 기록으로 더 많이 남아 있다. 그렇게 종교의 성지는 독립운동의 성지가 되었다. alt]]> Thu, 28 Nov 2019 17:04:48 +0000 36 <![CDATA[상하이의거로 한국인의 독립의지를 세계에 알린 청년 윤봉길 ]]> 글 전시부상하이의거로 한국인의 독립의지를세계에 알린 청년 윤봉길 독립기념관은 국가보훈처 및 광복회와 공동으로 윤봉길을 2019년 12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농촌계몽운동을 전개하던 윤봉길은 1930년 중국으로 망명, 1932년 김구가 조직한 한인애국단에 가입하고 의거를 결행하였다. altaltaltaltaltaltalt농촌계몽과 농촌개혁에 앞장서다윤봉길은 1908년 6월 21일 충청남도 예산에서 태어났다. 1918년 덕산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나 1919년 3·1운동이일어나자 식민지 교육을 거부하며 학교를 자퇴하였다. 이후 1921년 매곡 성주록이 운영하는 오치서숙에서 한학을 수학하였다. 전통교육을 받으면서 민족잡지인『동아일보』와 『개벽』 등을 구독하며 민족의식을 키웠다.윤봉길은 1926년 야학당을 개설해한글을 가르치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농촌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1927년에는 한글 교육과 민족의식 고취를 위해 『농민독본』을 집필하여 교재로 사용하였다.1928년에는 일제하 피폐해진 농촌을 부흥시키고자 부흥원을 건립하고 이듬해에는 월진회를 조직하여 농촌개혁을 추진하였다.상하이의거를 결행해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다농촌계몽이 성공하려면 민족이 먼저 독립되어야 한다는 식민지의 현실을 깨달은윤봉길은 1930년 3월 ‘대장부가 집을 떠나 뜻을 이루기 전에는 살아서 돌아오지않는다(丈夫出家生不還)’는 편지를 남기고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중국 다롄과 칭다오를 거쳐 상하이에 도착한 윤봉길은김구를 만나 독립운동에 참여할 뜻을 전달하였다. 그리고 1932년 4월 29일에 훙커우공원에서 일왕의 생일인 천장절과 일본의 상하이 침략 승리 기념식이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투탄의거를 결심한 후 한인애국단에 가입하였다.4월 29일, 윤봉길은 훙커우공원에서열린 기념식에 참석하여 일본 국가 연주가 끝나갈 무렵 단상 위로 폭탄을 던졌다.윤봉길의 의거는 세계 각지에 보도되어한국인의 독립의지를 알렸으며, 만보산사건 등으로 갈등을 겪던 한국과 중국이 힘을 합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중국국민당 정부가 한국 독립운동을 지원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윤봉길은 총살 순국하였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62년에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alt윤봉길(尹奉吉)1908.06.21. ~ 1932.12.19.충청남도 예산건국훈장 대한민국장(1962) alt『농민독본』제2권 계몽 편에 수록된 조선지도_보물 제568호윤봉길은 1927년 농촌운동 교재로 ‘계몽 편’, ‘농민 편’, ‘한글 편’으로 구성한『농민독본』세 권을 저술하였다. ‘백두산’, ‘낙심말라’, ‘조선지도’ 등의 글에서 농촌계몽과민족의식 고취를 위해 저술한 책임을 알 수 있다 alt월진회 창립 취지서_보물 제568호1929년 4월 23일 윤봉길은 농촌을 구제하고 농촌 진흥을 목표로 월진회를창립하였다. 윤봉길은 중국으로 망명하며 월진회 공금 60원을 사용하였는데,칭다오에서 일하며 번 월급을 고향으로 보내 공금을 갚았다alt윤봉길의 한인애국단 가입 선서문alt한인애국단장 김구와 단원 윤봉길윤봉길은 의거 3일 전인 4월 26일 개인적 차원의 의거가 아니라 한민족의 의사를대변한 것을 알리기 위해 한인애국단에 가입하였다]]> Thu, 28 Nov 2019 17:18:19 +0000 36 <![CDATA[장정長征 6천 리 ]]> 글 김경미 자료부 학예연구관혈죽의 노래한국광복군이 된 학병(學兵)의 수기, 「장정」과 「돌베개」 일본군 학병으로 중국 전선에 배치되었다가 탈출하여 한국광복군이 된 세 사람은 1945년 8월 20일경 중국 산동성 유현(?縣)의 어느 사진관에서 함께 사진을 찍었다.(자료01) 조국의 광복을 맞은 그들이 군복에 전투화를 신고 카빈 소총을 든 무장한 모습으로 카메라 앞에 선 것은 무엇 때문일까? 김준엽과 장준하가 기록한 『장정(1987년)』과 『돌베개(1971년)』를 따라 장정 6천 리의 길을 걸어가 보자. alt세 사람의 한국광복군 국내정진대원(1945.8.20.경)왼쪽부터 노능서, 김준엽, 장준하alt한국광복군훈련반 제1기 졸업기념(1944.10.22.)앞줄 오른쪽 두 번째가 장준하, 다섯 번째가 노능서,두 번째 줄 오른쪽 첫 번째가 김준엽, 일곱 번째가 징모 제6분처 주임인 김학규 장군 6천 리 길을 걸어 독립군이 된 청년들김준엽은 1920년 평안북도 강계 출신으로 일본 게이오대학 재학 중 학병에 징집됐다. 장준하는 1918년 평안북도 의주 출신으로 일본신학대학, 노능서는 평안남도 용강 출신으로 일본중앙대학 학생이었다. 1944년 1월 20일 평양에 있는 일본군 39여단에 입대한 이들은 검은 학생복을 벗고 카키색 일본 군복으로 갈아입었다. 일제가 1941년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후 부족한 병력을 보충하기 위해 제정 공포한 1943년 10월 20일의 「육군특별지원병 임시채용규칙」은 전문대학 재학 이상의 조선인 청년을 대상으로 한 것으로, 명목만 ‘지원병’이었지 실질적으로 강제징병과 다를 바 없었다.평양에서 약 3주를 보낸 후 김준엽 등은 2월 13일 기차로 평양을 출발하여 2월 16일 중국 서주(徐州)의 츠카다(柄田)부대에 도착, 간단한 훈련을 받은 뒤 각지에 배치됐다. 그리고 김준엽은 3월 29일, 노능서는 5월 18일, 장준하는 7월 7일 부대를 탈출했다. 당시 탈출에 실패하면 감옥으로 가거나 사형에 처해질 수도 있는 전시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학병들은 일제의 총알받이로 죽느니 독립군 진영에 가담하겠다는 의지를 갖고 탈출을 감행했다.중국 땅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한국광복군이 있다는 사실은 학병들의 탈출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일본군이 점령한 지역이라도 그것은 점[도시]과 선[철도]에 불과했고 그 바깥에는 중국군이 게릴라활동을 하고 있었으므로, 그들은 중국군을 통해 광복군으로 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김준엽은 탈출 4시간 만에 중국유격대를 만났고, 장준하는 탈출한 지 사흘 만에 동료 3명과 함께 같은 유격대에 도착했다. 이들은 일본 군복을 벗어버리고 중국군의 청색 군복에 청천백일(靑天白日)의 휘장이 붙은 군모를 쓰고 항일투쟁에 참여하게 됐다.우리는 목욕을 마치고 군복을 입었다. 서로서로를 돌아보며 새 결의를 다짐했다. 모두 새사람이 되었다. 진정 우리는 새사람이 되어야만 했다. 조국광복, 이 깊고 긴 강처럼, 크고 깊고 긴 일을 마침내 나는 찾아낸 것이다. 이제 우리는 떳떳한 조국의 아들이 다시 되었다.(장준하, 『돌베개』)이들은 7월 28일 대한민국 임시정부(이하 임정)와 한국광복군이 있는 중경을 향해 6천 리 장정의 길에 올랐다. 중국유격대는 릴레이식으로, 한 유격대에서 다른 유격대로 이들을 호송해주었다. 일본군의 경계가 삼엄한 철로를 넘으며 불볕 같은 8월의 태양 아래, 나무 하나 없는 끝없는 평원을 날마다 120리 내지 150리를 걸었다. 9월 10일 안휘성 임천(臨泉)의 어느 부대의 영문 앞에 도착하니 중국 군복차림의 청년들이 쏟아져 나와 이들을 반겼다.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 임천분교에 특설된 한국광복군훈련반(韓光班, 한광반)의 한국 청년들이었다.1940년 9월에 임정의 정식군대로 창설된 한국광복군은 초모공작을 통해 부대원을 모집했다. 모집된 사람들은 현지 중국군관학교 분교에서 훈련을 받게 한 후 광복군에 입대시켰다. 한광반은 안휘성 부양(阜陽)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던 징모 제6분처(뒤의 광복군 제3지대)에서 설치한 임시훈련소였다. 주된 훈련은 도수훈련(제식훈련)과 함께 정신교육으로 한국독립운동사와 임시정부의 연혁 및 건국강령 등의 강의였다. 교육 기간은 4개월이었고, 김준엽 등은 이미 시작된 훈련에 참가하여 2개월여 만인 11월에 졸업했다. 학병 33명을 포함한 48명의 졸업생은 중앙군관학교 교장 장중정(蔣中正, 장개석)의 명의로 된 졸업장과 중국 육군소위의 임명장을 받았다. 자료02는 한광반 제1기 졸업기념 사진이다. 중국 군복을 입은 김준엽, 장준하와 함께 노능서의 얼굴도 보인다.김준엽을 비롯한 학병 25명 등 53명의 일행은 11월 22일 임천을 출발하여 다시 장정을 계속했다. 혹한의 한겨울에 제비도 넘지 못한다는 파촉령(巴蜀嶺)을 넘으며 70일간의 행군 끝에 1945년 1월 31일 드디어 중경의 임정 청사 앞에 도착했다.“혹시 저것이…” 하는 반문 끝에 내 눈에 들어와 움직이는 것은 휘날리는 기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피가 뛰었다. 혈관이 좁아졌다. 우리는 걸음을 재촉해서 다가갔다…그렇다. 그것은 태극기였다.(장준하, 『돌베개』)김구 임정 주석과 지청천 광복군총사령의 환영을 받은 이들에게 광복군의 새 군복이 지급됐다. 청색의 중국 군복이기는 했으나 이제 진정한 조국의 독립군의 모습이 됐다. 나라가 망한 뒤에 태어나 일제의 식민지 교육을 가장 철저히 받은 세대의 청년들이 일본 군대를 탈출하여 6천 리 길을 걸어 항일 광복군이 된 일은 한민족의 혼이 살아있음을 보여주는 증거였다. 한국광복군의 마지막 작전, 독수리작전김준엽 등 19명(학병 10명과 비학병 9명)은 광복군과 미국의 특수공작기관인 전략첩보국(OSS: Office of Strategic Service)의 한반도침투를 위한 연합작전에 지원하여, 4월 29일 이범석 장군이 이끄는 서안(西安)의 광복군 제2지대로 떠났다.서안에 가서 OSS의 훈련을 받고 왜적의 점령하에 있는 조국으로 침투한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다…이 시대에 태어난 우리 젊은이들이 해야 할 일은 마땅히 총칼로 왜놈들을 구축하는 일일 것이고, 나부터 그 선봉에 서야만 한다고 믿었다.(김준엽, 『장정』)임정은 연합국의 외교적 승인을 얻은 후, 연합군의 일원으로 대일전에 참가해 자력으로 해방에 동참하려 했다. 독수리작전(Eagle Project)으로 알려진 광복군과 OSS의 합동작전은 그 구체적인 성과로, 임정은 이를 계기로 미국의 원조를 얻어내고 교전단체로서 승인받고자 하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김준엽 등은 서안 교외 두곡(杜曲)에 있는 광복군 제2지대의 본부에 도착하여, 새로운 군복으로 갈아입었다. 미국 군복이었고 신발도 미군화였다. 다만 미군과 다른 것은 미군모에 태극기 휘장이 붙어있는 것이었다. 전 대원들에게 미제 카빈총도 지급되었다. 5월부터 OSS에서 파견된 미국인 교관들에 의해 특수공작훈련이 시작되었다. 제2지대원 125명 중 우선 50명이 선발되어 제1기 훈련에 돌입했다. 훈련은 첩보공작에 중점울 두었으며, ‘첩보훈련반’과 ‘통신반’으로 나뉘어 실시됐다. 1기생 훈련은 3개월만인 7월 말에 완료되고, 국내 침투 계획이 작성됐다.8월 7일에는 두곡의 광복군 제2지대 본부에서 한미 양측 대표들의 한반도 진입작전을 위한 회담이 열렸다. 한국 측의 김구 주석, 지청천 총사령, 이범석 지대장, 엄항섭 선전부장, 미국 측의 OSS 총책임자 도노반 소장과 OSS 중국지부 요원들이 참석했다. 자료03은 회담을 마치고 광복군 제2지대 정문으로 걸어 나오는 김구 주석과 도노반 장군을 촬영한 것이다. 광복군이 조국 해방에 일익을 담당할 수 있는 길이 열리던 순간이었다.그러나 국내잠입 준비를 완료하고 출발 명령을 기다리고 있던 중, 8월 10일 일본이 항복을 통보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독수리작전은 변경되었고, 임정과 광복군 수뇌부는 OSS 훈련을 받은 광복군을 ‘국내정진군(國內挺進軍)’으로 편성하여 국내에 진입시키고자 했다. 미군의 협력을 얻어 일본군의 무장을 해제하고 치안을 유지하여 건국의 기틀을 다지기 위한 조치였다. 김준엽, 장준하, 노능서는 이범석 장군과 함께 정진군 선발대로 OSS 작전팀 18명과 서울로 가는 C-46 수송기에 올랐다. 이들은 8월 18일 새벽 6시에 서안을 출발하여 6시간의 비행 끝에 12시 여의도비행장에 착륙했다. 그러나 본국의 지시를 받지 못한 일본군의 위협 속에 다음날 중국으로 귀환해야 했다.비행기는 착륙한 지 28시간여 만인 8월 19일 오후 4시 30분에 여의도비행장을 이륙하여 귀환하던 중 연료 부족으로 중국 산동성 유현비행장에 불시착했다. 비행장은 그때까지도 일본군의  관장 하에 있었으나, 8월 15일 일왕이 항복 방송을 하자자마 중국유격대가 재빠르게 진주하여 유현 성내는 완전히 중국군 지배하에 있었다. 마침 이범석 장군의 옛 친구였던 유격대 사령관의 도움을 받으며 그들은 8일간 유현에 머물렀다. 자료04는 8월 27일 오전 10시경 유현비행장을 떠나기 전 일행 22명과 중국군 요인들이 비행기 앞에서 함께 찍은 사진이다.국내에도 미리 광복군이 진입해 있었더라면 여의도에서 맥없이 우리가 발길을 돌리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기막힌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김준엽, 『장정』)세 사람의 사진은 바로 이때 찍은 것이다.(자료01) 국내로 재진입하라는 명령이 떨어지기를 기대하며 초조한 심정으로 유현에 머무는 동안 찍은 기념사진이었다. 사진기 앞에서 선 그들은 미군 군복 차림에 각반을 부착한 전투화를 신고 카빈총을 들었을 뿐 아니라 각자의 군용장구도 착용하고 있다. 피스톨 벨트(pistol belt, 권총과 구급낭, 수통 등을 허리에 둘러 운반할 수 있도록 한 벨트)에 노능서는 나침반을 넣어 보관하는 주머니를 달았으며, 김준엽은 응급 처치가 필요할 때 사용하는 구급낭을 차고 있다. 장준하는 군사용 지도를 보관하는 지도 가방으로 보이는 숄더백을 메고 있다. 또 이들은 허리에 권총집을 휴대했다. 이러한 무장한 모습은 당장이라도 국내정진의 길에 오르기를 염원한 그들의 마음을 담은 것일까.서안으로 복귀한 정진대가 다시 한반도에 진입할 수 있는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광복군도 떳떳한 승리의 군대로 조국에 개선해서 발언권을 가지고 국내 치안을 주도해보려는 꿈도 함께 사라졌다. 그러나 비록 성과를 올리지는 못했지만, 광복군과 OSS의 협력이 가능했던 것은 스스로의 힘으로 조국을 독립시키기 위해 목숨을 내버릴 각오로 가득 찬 청년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alt중국 서안 제2지대 본부에서 김구 주석과도노반 장군(1945.08.07.)뒤는 왼쪽부터 엄항섭 선전부장, 지청천 총사령, 이범석 제2지대장alt산동성 유현비행장에서 광복군 국내정진대원과 미국 OSS대원, 중국군요인들(1945.08.27.)사진 하단 도형 중 □가 장준하, △가 노능서, X가 김준엽, ○가 이범석 ]]> Thu, 28 Nov 2019 17:12:36 +0000 36 <![CDATA[불교계 독립운동을 이끈 큰스님 백초월 ]]> 글 임영대 역사작가불교계 독립운동을 이끈큰스님 백초월   백초월은 1878년 경상남도 고성군에서 태어났다. 1890년, 지리산 영원사로 출가하여 스님이 되었는데, 30대의 젊은 나이에 고승이라 불릴 정도로 빠르게 도를 터득하였다. 그러던 중 지리산 일대에서 활동하는 의병들과 접촉하고,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3·1운동 때는 민족대표 33인이었던 한용운과 백용성이 체포된 후, 그 뒤를 이었다. 꾸준하게 독립운동을 펼치던 백초월은 1944년 옥중 순국하였다. 1986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alt백초월1878.02.17.~1944.06.29.경상남도 고성건국훈장 애국장(1990)독립만 된다면 이 몸이 부서져 없어져도 좋다대부분의 종교가 현세의 평안보다는 죽은 뒤의 삶에 관심을 쏟는다. 불교나기독교도 핵심적인 본래 교리는 죽은 뒤 누리는 즐거움에 관한 것이지, 살아서 정치적 활동을 벌이도록 권하는 게 아니다. 요즈음 종교단체가 정치적인목소리를 내는 활동을 하고 있지만, 이 또한 교단 자체가 움직이는 건 아니다. 어디까지나 구성원 중 일부가 하는 행동이다.그런 까닭에 일신상의 안위만 따진다면 독립운동에 참여할 필요가 없는 직업 중 하나가 종교인이다. 자기가 조금만 마음을 다르게 먹는다면, 편안하게 지낼 수 있기 때문이다. 현실 정치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종교적 원칙은 식민통치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일 수 있다. 게다가 죽은 뒤의 삶에 관심을두는 교리는 식민통치에 저항하기보다 힘든 현실이라 할지라도 그저 참고견디도록 세뇌하는 역할을 맡을 수도 있었다.일제도 이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일찍이 조선 종교계를 억압하며일본의 통제에 따르도록 했다. 불교는 서양 계통 종교가 아니고 한국과 일본에 모두 퍼져 있었으므로, 일제는 불교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동화를 노렸다.일본에 기반을 두고 있는 불교 종파들은 한국으로 넘어와 전도했고, 경술국치 다음 해인 1911년에는 ‘사찰령(寺刹令)’을 반포하여 전국의 모든 불교사찰을 총독부의 직접 통제 아래 두었다.일본의 통제는 철저했다. 주요 사찰의 주지를 총독부가 직접 임명할 뿐아니라 결혼하지 않는 승려들을 일본 불교의 관습대로 결혼을 강제하는 등,한국 불교계를 무너뜨리려는 압박을 계속했다. 그리고 순응만 하면 권력과부를 안겨주었다. 그러나 한국 불교에는 호국불교의 전통이 있었다. 일제에순응하는 승려들이 있는가 하면 한용운처럼 저항하는 승려도 많았다. 백초월이 그들 중 한 사람이었다."삼각산 마루에, 새벽빗 비쵤제,네 보앗냐 보아, 그리던 태극기를,네가 보앗나냐, 죽온 줄 알앗던, 우리 태극기를,오늘 다시 보앗네, 자유의 바람에, 태극기 날니네,이천만 동포야, 만세를 불러라, 다시 산 태극기를 위해,만세만세, 다시 산 대한국…."번갯불 번쩍할 때 바늘귀를 꿰어야 한다불교 학교인 중앙학림(명진학교)의 교장으로 재직하던 백초월은 3·1운동즈음부터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을 이끄는 지도자가 되었다. 체포된 한용운과 백용성을 이어 불교계 독립운동을 이끌면서 그해 7월에는 항일신문인『혁신공보』를 발간하여 상하이 임시정부에 보냈다. 임시정부에 대한 지원을 위해 각처의 사찰에서 기부금을 모으기도 했다. 그리하여 11월 재차 발표된 독립선언서에 민족대표로 이름을 올렸다.마찬가지로 승려인 신상완이 전국 승려들을 모아 군사조직을 편성하고 항일전선에 나가고자 할 때, 백초월은 그의 의용승군 조직에 자금을 후원하였다. 비록 조직을 수립하는 도중 일제 경찰에 적발되어 결과를 보지는 못했지만, 과거 나라를 위해 일어선 승병의 정신을 다시 한번 보여준 장한 시도였다."이놈아 밥을 치면 떡밖에 더 되겠느냐.아무리 행패를 부리더라도, 계란 가지고 삼각산을 쳐도삼각산이 없어질 리 없다.…너희 왜놈들이 미쳐서 남의 나라 땅을 강점하고 있는 것이지내가 왜 미쳤단 말이냐, 너희가 미쳤지."이 같은 독립운동을 하면서 무사할 수는 없었다. 백초월은 몇 차례나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지독한 고문을 받았다. 이때 몸과 마음이 무척 상했다. 체포 당시 정신이상자 행세를 하여 풀려난 적도 있었다.수시로 체포되는 고난을 겪으면서도 백초월은 투쟁을 멈추지 않았다.학교와 포교당에서 계속 독립정신을 고취하며 후학을 양성하였고, ‘도는 종교를 통합하는 종교’라는 명목으로 항일운동 비밀결사인 일심교를 조직, 전파하였다. 독립에 뜻을 둔 많이 이들이 여기에 참여하며 백초월과 함께 투쟁에 나섰다.일본의 눈을 피해 은밀한 투쟁을 지속하던 백초월은 포교당에서 가르치던 신도가 일본군 군용 열차에 ‘대한독립만세’라고 낙서를 한 사건에 연루되어 1939년 다시 체포, 투옥되었다. 그리고 해방을 보지 못하고 1944년 옥에서 순국하고 말았다. 백초월의 유해는 수감되어 있던 청주교도소 공동묘지에 매장되었으나, 안타깝게도 한국전쟁 때 유실되었다. 그러나 백초월이벌인 치열한 독립운동을 많은 사람이 기억했고, 정부는 백초월에게 두 차례에 걸쳐 훈장을 추서하며 그 공을 기렸다.]]> Thu, 28 Nov 2019 16:54:24 +0000 36 <![CDATA[종교는 달라도 독립을 향한 믿음은 같으므로 ]]> 종교는 달라도독립을 향한 믿음은 같으므로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는 일에 종교인도 예외일 순 없었습니다. 비록 다른 종교를 가지고 있을지라도 다 같은 한국인이었기에, 그들은 신과 교리를 초월해 ‘독립’의 한마음으로 손을 맞잡았습니다. 대한독립만세의 뜨거운 외침, 그 불씨를 지핀 것은 민족대표 33인에 이름을 올렸던 손병희와 한용운, 이승훈 등의 종교 지도자들이었고, 먼 이국땅에서 일제에 맞서 당당히 승리를 거머쥐었던 청산리전투 뒤에는 물심양면으로 독립군을 지원한 대종교가 있었습니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했던 종교인. 종교에 대한 그들의 믿음은 달랐지만, 독립을 향한 믿음만은 같았습니다. alt]]> Thu, 28 Nov 2019 16:39:16 +0000 36 <![CDATA[대한인국민회 한인 대표의 파리행 추진과 위임통치 청원 ]]> 글 홍선표 나라역사연구소 소장대한인국민회 한인 대표의파리행 추진과 위임통치 청원1910년대 재미 한인의 군사·외교운동6 제1차 세계대전 종결 직후 대한인국민회는 중앙총회를 중심으로 외교활동에 나섰다. 뉴욕 소약국민동맹회의에 참가한 이후 당면 과제는 파리에서 열리는 강화회의에 참석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한인 대표를 파리로 보내는 일은 쉽지 않았다. 대한인국민회는 임시국민대회를 개최해 내부 문제들을 정비하고 파리행을 재추진하였다.  임시국민대회의 개최와 파리행 재추진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는 파리행 문제 등 중차대한 시국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임시국민대회를 열었다. 1919년 1월 4일부터 6일까지 3일간 샌프란시스코 북미지방총회관에서 개최한 국민대회는 북미 각 지방 대표들이 참가한 큰 대회로 대회 결과 중앙총회의 대외 위상을 급격히 제고시켰다.하와이에 있던 이승만은 소약국민동맹회의 대표이자 파리행 대표로 선정되었으나 미국 본토행 수속이 늦어져 1919년 1월 15일에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도착 당일 중앙총회 부회장 백일규의 주관으로 이승만 환영회를 성대하게 베풀었는데 이때 이승만은 제1차 뉴욕 소약국민동맹회의 때 박용만을 대표로 보내고 남은 의연금 1,119달러 50센트를 백일규에게 건네주었다. 중앙총회의 권위를 인정하겠다는 하와이지방총회의 뜻이 담겨 있었다.중앙총회는 뉴욕 소약국민동맹회의와 파리강화회의에 대표자 파견을 추진하면서 특별의연금 모금운동을 추진해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파리로 건너가는 일은 조금도 진척되지 않았다. 한인 대표의 파리행 여권 발급을 미국과 영국이 처음부터 철저히 막고 있었고, 여기에 일본 정부의 공작까지 더해 진척되지 않았다. 미국 정부는 일본의 내정 문제에 간섭한다는 인상을 주지 않으려고 한국의 독립 문제에 대해 철저히 외면했다. 때문에 파리강화회의 때 윌슨이 주창한 민족자결주의는 패전국의 약소민족 중 일부에만 적용되었다. 국제정세는 변하고 있었으나 냉엄한 제국주의적 현실은 그대로였다.정한경은 1919년 2월 5일 중앙총회장 안창호에게 보낸 서신에서 파리로 가는 것이 비관적이라고 보고했다. 해결 방안으로 2월 중순 미국에 오는 윌슨 대통령에게 한국 사정을 호소하는데 전력을 다하기로 했다. 중앙총회는 모처럼 일어난 독립운동의 뜨거운 열기가 파리행의 중단으로 냉각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어떻게든 대표자 파견활동을 계속 추진해 소기의 성과를 거두고 싶었다.파리로 가는 일은 진척되지 않았으나 한인 대표의 파견 추진활동은 미국 언론에 보도되었다. 1918년 11월 27일 자 『San Francisco Examiner』와 12월 25일 자 『New York Herald』는 한인 대표 3인이 파리행을 추진 중이라는 사실과 한국인의 독립청원활동을 간략히 소개하였다. 이러한 보도는 도쿄의 『The Japan Advertiser』 1월 22일 자와 『만조보(萬朝報)』 1919년 1월 18일 자 및 1월 24일 자에 그대로 보도되었다. 이 같은 보도는 제1차 세계대전 직후 국제정세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던 도쿄의 재일 한국인 유학생들에게 앞서 신한회의 독립청원활동 소식과 함께 큰 자극을 주었다. 그리하여 2·8독립선언 준비에 박차를 가하게 했고 그것은 국내 3·1운동 준비에도 동력을 제공했다.위임통치 청원 이승만과 정한경은 1919년 1월 25일 파리강화회의에서 국제연맹이 창설된다는 소식을 접하고 국제연맹을 통한 독립방안을 모색하였다. 그동안 정한경은 1918년 11월 25일 자와 12월 10일 자에 윌슨 대통령과 미국 상원에 청원서를 보냈고 또다시 윌슨 대통령에게 보내는 세 번째 청원서(1919.02.25.)를 이승만과 연명해 1919년 3월 3일 미국 백악관에 보냈다. 그리고  2월 25일 파리에서 귀국한 대통령과의 면담을 신청했다. 면담은 불가능하고 대신 파리에 가 있는 미 국무부 장관 랜싱에게 청원서를 보내라는 회신(3월 7일)을 받았다. 이때 작성한 청원서는 앞의 두 청원서의 내용과 동일하나 단 하나, 한국의 독립문제를 국제연맹에 위임해 달라는 내용이 새로 첨가된 것이었다. 후일 이승만·정한경에게 비난이 집중된 ‘위임통치(mandatory)’ 청원이었다.이승만·정한경이 한국을 국제연맹의 보호 속에 두어 중립국으로 만들고 싶다고 한 위임통치 제안은 정한경이 안창호에게 보낸 1919년 2월 20일 자 편지에서 밝히고 있었다. 또 3월 6일 자로 이승만·정한경 두 사람의 이름으로 안창호에게 보낸 서신에서도 한국을 국제연맹의 ‘위임통치’ 아래 둘 것을 제안하였다. 이러한 제안에 대해 백일규는 제3차 임시위원회에 제출해 논의에 부쳤다. 안창호는 3월 7일 자로 정한경에게 보낸 「통첩」에서 “한국 독립을 운동하다가 실패하거든 한국문제를 국제연맹 중에 이부(移付)할 것을 청원”할 것을 지령하였다. 이로 보면 위임통치 청원은 이승만·정한경의 독단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중앙총회와 논의된 것이었다. 그런데 3·1운동이 발발해 ‘절대 독립’이 대세가 되자 위임통치 청원은 설 자리를 잃었다. 이런 가운데 상하이에서 수립된 임시정부 내 일부 독립운동가들은 위임통치 청원을 민족의 대의에 반하는 행위로 간주하고 이를 주장한 이승만과 정한경을 거세게 몰아붙였다.저간의 사정을 잘 알고 있던 이승만·정한경의 입장에서 보면 여간 억울하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 중앙총회나 이승만·정한경은 위임통치 청원이 최선은 아니었지만 나름 차선의 외교방책으로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이 문제에 관여했던 안창호나 백일규 등 중앙총회의 관계자들은 위임통치의 논란에서 벗어난 대신 이승만과 정한경은 이 일로 큰 오해를 받아 적지 않은 곤욕을 치러야 했다.파리행 시도가 막히고 위임통치 청원으로 독립운동의 새 돌파구를 뚫어야 하는 어려운 처지에 직면하고 있을 때, 미주 한인들은 3월 9일 상하이에 있는 현순으로부터 3·1운동 발발 소식을 접했다. 미주 한인사회에 미증유의 독립운동 열기가 또다시 분출되기 시작했다.alt한인 대표의 파리행을 보도한 『The Japan Advertiser』 1919년 1월 22일 자 기사]]> Thu, 28 Nov 2019 17:26:23 +0000 36 <![CDATA[독립운동은 통일운동으로 이어져야 한다 ]]> 글 이계형 국민대학교 특임교수독립운동은 통일운동으로이어져야 한다 1945년 우리 민족은 광복을 맞았지만, 독립운동은 끝나지 않았다. 여전히 미완으로 남은 사건, 해결되지 못한 문제, 기억해야만 하는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끝나지 않은 독립운동은 독립운동사를 과거에 머문 역사가 아닌 현재의 문제로 다루며, 오늘도 신문 한쪽을 차지하고 있는 독립운동 및 일제강점 이슈를 소개한다. 우리가 해결해야 하는 미완의 역사해방 직후인 1945년 9월, 연합군사령관 맥아더가 북위 38선을 경계로 ‘미소분할점령책’을 발표했다. 이로부터 한반도가 남북으로 분단되었으니 벌써 70년이 훌쩍 지났다. 우리 역사는 고구려·백제·신라의 삼국시대를 지나 발해와 신라의 남북국으로 재편되었고, 후삼국을 거쳐 고려로 통합되었다. 비록 발해 영토를 상실했지만, 고려가 들어서면서 발해 유민들을 받아들여 진정한 통일국가의 시대를 열었다. 천자국, 황제국을 자처한 고려의 태조 왕건이 하늘의 뜻을 받아들였다는 뜻의 ‘천수(天授)’를 연호로 정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이후 우리 역사는 하나의 국가로 존재해왔다. 1910년 8월, 경술국치를 당하기 이전까지는 말이다. 하지만 일제 35년간의 식민통치를 당한 뒤 미·소 강대국 사이의 냉전 시작과 더불어 38선을 경계로 한반도는 남과 북으로 갈렸다. 고려가 건국된 이후 1천 년 만에 처음 벌어진 일이다. 우리의 역사를 5천 년이라 한다면, 상당히 긴 시간이 흐른 시점이었다.긴 호흡으로 우리 역사를 본다면 남과 북이 하나가 될 것은 자명할 것이다. 그렇지만 통일 국가를 이루기 위해 잠시도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는 것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역사적 사명이다. 우리를 강제로 침략한 일제를 탓할 수도 있고 미·소 간의 책임이라 물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우리 스스로가 해결해야만 하는 민족 문제이다.통일된 조국이라는 이정표 따라해방 직후 국외에서 풍찬노숙(風餐露宿)하며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던 인사들이 국내로 속속 돌아왔다. 이승만은 미국 뉴욕에서, 김구는 중국 충칭에서 남한으로 돌아왔고 소련의 지지를 받던 김일성은 북한에 모습을 드러냈다. 새로운 나라가 세워질 것이라는 기대는 1945년 9월 7일, 미군정이 공포한 「미군정 포고령 1호」에 의해 꺾였다. 미군정이 ‘38도선 이남의 조선과 조선인에 대하여 미군정을 시작한다’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김구가 이끌던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끝내 대한민국 정부 자격을 인정받지 못했고, 요인들은 개인 자격으로 환국해야만 했다.엎친 데 덮친 격으로 1945년 12월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에서 한반도를 미·영·중·소 4개국의 신탁통치하에 둔다는 안이 발표되었다. 크게 소용돌이치는 정국 속에서 김구는 제2의 독립운동을 천명하고 임시정부의 역할을 재삼 강조하였다. 김구는 내무장관 신익희에게 「국자(國字)」 제1호, 2호의 임시정부 포고문을 발령케 했다. 이는 미군정의 모든 한인 관리와 경찰들은 임시정부의 명령에 따를 것을 선포하는 내용으로 미군정과 정면 대치하는 조처였다. 서울의 많은 경찰서장이 김구를 찾아와 충성을 맹세하기도 하였다. 이후 임시정부는 전면에서 반탁운동을 전개하였다. 일제로부터 35년간의 식민통치를 받다가 독립하였는데 또다시 열강의 신탁통치를 받을 수 없다는 강력한 저항이었다.이는 곧 임시정부 통일운동의 시작이었다. 1945년 12월 19일 오전 11시 서울운동장에서 거행된 대한민국 임시정부 환영회에서 불린 환영합창가에서도 통일 국가의 염원과 의지를 읽을 수 있다.1. 원수를 물리치고 맹군이 왔건만은 우리의 오직 한 길 아직도 멀었던가. 국토가 반쪽이 나고 정당이 서로 분분 통일업신 독립 없다. 통일 만세, 통일 만만세.2. 30년 혁명투사 유일의 임시정부 그들이 돌아오니 인민이 마지하여 인제는 바른 키를 돌리자. 자주독립 독립업신 해방 없다. 통일 만세, 통일 만만세.하지만 정국은 김구의 의지와는 반대로 흘러갔다. 한국의 임시정부 수립을 원조할 목적에서 설치된 미소공동위원회가 성과를 내지 못하고 1947년 10월 해체되자, 유엔은 그해 11월에 임시한국위원단을 구성하였다. 그 감시하에 남북한 총선거를 실시하기로 결정하였으나, 1948년 1월 소련에 의해 UN한국임시위원단의 입북이 거부되면서 남한만의 총선거 실시로 귀결되고 말았다. 이에 김구는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맹렬히 반대하며 비장한 목소리로, “삼천만 자매 형제여…(중략)…현시(現時)에 있어서 나의 유일한 염원은 삼천만 동포와 손목 잡고 통일된 조국, 독립된 조국의 건설을 위하여 공동 분투하는 것뿐이다. 이 육신을 조국이 수요(需要)한다면 당장에라도 제단에 바치겠다.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에 구차한 내 한 몸의 안일을 취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삼천만 동포에게 읍고함」).한반도 분단이 고착화될 위기에 처하자 김구는 “우리가 살길은 자주독립 한길뿐이다!”라며 반대하는 사람들을 뿌리치고 1948년 4월 19일, 방북을 결행하였다. 김구 등 남한대표단은 평양 모란봉극장에서 개최된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하였다. 본회의장 단상에는 태극기가 게양되었고 애국가가 울려 퍼졌다. 당시만 해도 북한에서도 태극기와 애국가를 국기와 국가로 인정하였다. 남북연석회의에서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 반대를 천명하고 미·소 양군이 철수한 뒤에 전조선정치회의를 소집하여 직접 비밀투표로 통일정부를 수립하자는데 협의하였지만 이는 실현되지 못했다. 김구는 빈손으로 돌아왔고 1948년 남과 북에 이념을 달리하는 정부가 각기 수립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당시 김구는 서산대사의 다음과 같은 시구를 즐겨 썼다고 한다. 踏雪野中去  눈에 덮인 들판을 걸을 때에는不須胡亂行  함부로 어지러이 걷지 마라今日我行跡  금일 내가 걸었던 흔적이遂作後人程  뒷사람들에게 하나의 이정표가 될 것이니.해방 후 70여 년 이어진 남북 분단, 70세 노구의 독립운동가가 걱정했던 ‘뒷사람들’이 어느새 현재의 우리가 되었다. 김구는 뒷사람들에게 ‘통일’이라는 명확한 목표와 방향의 이정표를 남겼다. 독립은 반드시 하나 된 조국의 독립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가 걸었던 위대한 흔적을 따라 그가 제시한 통일된 조국이라는 이정표를 향해 걷고, 때로는 뛰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도 ‘뒷사람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이정표를 남겨야 할 것이다.]]> Thu, 28 Nov 2019 17:21:08 +0000 36 <![CDATA[1945년 연대기 ]]> 글 강응천 기획집단 문사철 대표, 역사저술가1945년 연대기 인류가 이겼다. 사상 최악의 반인륜 범죄 집단을 이끌고 광기의 전쟁을 일으킨 독일과 일본이 연합군에 항복함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은 막을 내렸다. 대량살상무기를 동원한 전쟁이 어떤 정치적 목적에도 복무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인류는 평화의 가치를 재발견하고 새로운 세계 질서를 설계해 나갔다. 그러한 설계도의 한쪽 구석에는 36년의 일제 식민 지배로부터 벗어난 한국의 미래도 자리 잡고 있었다.  alt해방 직후 조선총독부 앞 풍경독일과 일본의 항복1943년 11월 이란의 테헤란에 모인 미국·영국·소련 등 연합국은 스탈린의 주장에 따라 북프랑스 상륙작전에 합의했다. 이듬해 6월 미국 아이젠하워 장군이 이끄는 연합군은 프랑스의 노르망디 해안에 상륙, 독일의 점령 아래 놓여 있던 프랑스를 수복해 나갔다. 소련도 동부전선에서 나치 독일을 거세게 밀어붙였다.전세가 기울어가는 가운데 연합국 수뇌들은 전후 처리 문제를 더욱 긴밀하게 논의해 나갔다. 논의의 초점은 두 차례나 전쟁을 도발한 독일이 다시는 전쟁을 하지 못하도록 하는 방안과 아직도 항복하지 않고 있는 일본을 어떻게 제압할 것인가로 모아졌다. 1945년 2월 크림반도의 얄타에 모인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 처칠 영국 수상, 스탈린 소련 원수는 큰 틀에서 합의점을 찾았다. 전쟁을 일으킨 독일의 영토를 축소할 뿐 아니라 동독과 서독으로 분할해 전쟁 능력 자체를 영원히 제거한다는 것이었다. 또 독일이 항복한 뒤에는 소련이 병력을 동쪽으로 돌려 아시아에서 일본과의 전쟁에 참여해야 한다는 내용도 포함돼 있다.막대한 물량을 보유한 미국은 서부 전선에 무제한 폭격을 가하면서 베를린으로 압박해 들어갔고, 소련도 반대편에서 베를린을 항해 진격했다. 1945년 4월 말, 양국 군대는 중부 유럽의 엘베강에서 만나 하이파이브를 주고받았다. 그해 5월, 독일에게 더 이상 희망이 없음을 확인한 히틀러는 베를린 관저 지하에서 자살함으로써 전쟁 범죄의 책임을 회피했다. 독일은 연합군에게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연합국은 얄타협정에 따라 항복한 독일을 동서로 나누고 서쪽은 미군, 동쪽은 소련군이 맡아 독일군을 무장해제시켜 나갔다. 또 동쪽 블라디보스토크에서는 소련군이 만주와 한반도를 향해 남하할 준비를 진행시켰다. 태평양전쟁 초기에 승승장구하던 일본의 기세가 결정적으로 꺾이게 된 계기는 미드웨이해전이었다. 일본은 진주만 공격으로 기선을 제압한 상태에서 미국의 해군력을 초토화하기 위해 태평양 한가운데 있는 미드웨이 해군기지를 총공격했다. 이 공격에는 항공모함 4척과 소형 항공모함 3척, 수상 비행기를 탑재한 항공모함 2척, 전함 11척, 순양함 15척, 구축함 44척, 잠수함 15척 등 진주만 공격 때보다 훨씬 많은 군사력이 동원됐다. 그러나 일본이 이 운명의 해전에서 대패함에 따라 전세는 급격히 기울었다. 1945년 7월 26일 독일의 포츠담에 모인 미·영·중·소 수뇌들은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권고했다. 일본이 이를 거부하자 미국은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사흘 뒤에는 소련군이 만주와 한반도의 일본군을 공격하기 시작하고, 미국은 나가사키에 또 한 방의 원자폭탄을 떨어뜨렸다. 나가사키에서만 4만 명이 죽고 도시의 절반이 파괴되었다. 사망자가 10만 명에 이를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자 전 세계는 역사상 최초로 등장한 원자폭탄의 가공할 위력에 전율했다.미국의 원자폭탄 공격으로 일본은 사실상 전쟁을 수행할 능력을 상실했다. 일본이 더 이상 전쟁을 수행할 수 없게 된 또 하나의 원인은 소련의 대일전 참전이었다. 소련군은 파죽지세로 연해주를 넘어 한국과 만주의 국경 지대뿐 아니라 동해상에서 청진, 원산 등의 항구에 맹렬한 폭격을 퍼부었다. 독일이 이미 항복해 연합국의 모든 병력이 일본을 겨냥하고 있는 상황도 일본의 목을 조르고 있었다. 일본 수뇌부는 항복을 결정하고 연합국과 막후교섭에 들어갔다. 한·중·일 3국의 입장에서 볼 때는 1931년 만주침략으로 시작된 ‘15년전쟁’이 막을 내리고 있었다.alt미국 전함에서 항복 문서에 서명을 하고 있는 일본 외상절대무기의 등장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인류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실전 투하된 원자폭탄은 그로부터 불과 20여 일 전인 1945년 7월 16일 탄생했다. 그날 미국의 뉴멕시코주 로스앨러모스에서 세계 최초의 원자폭탄 실험이 성공했다. 실험에 참여한 물리학자 페르미는 원자탄의 엄청난 위력에 놀라면서도 “핵폭발 순간에 천 개의 태양보다 밝다”라며 감격했다고 한다.맨해튼계획으로 불린 원자폭탄 실험은 그동안 진행돼온 각국의 핵 개발 경쟁의 산물이었다. 원자폭탄 개발은 1938년 독일 과학자 오토 한이 우라늄 핵의 연쇄 반응을 발견하면서 시작되었다. 1939년 9월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각국은 물리학자들을 동원해 핵분열을 무기 개발에 이용하기 위한 연구 작업에 뛰어들었다. 먼저 독일이 하이젠베르크를 주축으로 우라늄협회를 결성했다. 영국도 1940년 모드위원회를 신설해 핵무기 개발에 착수했다. 미국은 독일이 원자탄을 개발할지 모른다는 위기의식에서 뒤늦게 개발에 합류했다. 1942년 6월 미국은 수많은 과학자와 기술자를 동원해 맨해튼계획을 비밀리에 신속히 추진시켰다. 미 육군의 그로브스 장군이 계획의 총책임을, 로렌스와 콤프턴이 과학 기술 부문의 책임을 맡았다.단 며칠 사이에 수십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원자폭탄은 이처럼 세계 최고의 두뇌들이 집결한 첨단 과학 연구의 산물이었다. ‘절대무기’의 등장은 인류가 다시는 세계대전을 일으키지 말아야 할 절대 이유가 되었다.alt1945년 8월 9일 일본 나가사키에 원자폭탄 투하 당시 모습다시는 일어나지 말아야 할 전쟁제2차 세계대전 참가국은 연합국 측 49개국, 동맹국 측 8개국이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광복군이 국내진공작전을 개시하기 직전에 일본군이 항복해 승전국 자격을 인정받지 못했다. 중립국은 스위스 등 6개국이었다.60개국에 육박하는 참전국이 동원한 병력은 총 1억 1,000만 명에 이르고, 그 가운데 2,700만 명이 죽었다. 놀라운 것은 민간인 희생자도 그에 못지않게 많다는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과 비교해 동원 병력은 약 2배, 전사자는 약 5배, 민간인 희생자는 약 50배에 이르렀다. 유럽에서는 사생결단의 혈전을 벌인 독일과 소련의 희생자가 가장 많았다. 특히 소련은 민간인을 포함한 사망자가 2,000만 명(전사자 1,360만 명)으로 전 인구의 약 1/10을 잃었다. 독일인 사망자는 550만 명(전사자 500만 명)으로 역시 전 인구의 약 1/10에 이르렀다. 일본은 250만 명(전사자 185만 명)으로 전 인구의 약 1/40을 잃고, 중국인은 1,300만 명이 죽었다.이러한 통계를 볼 때 제2차 세계대전의 가장 큰 특징은 민간인 희생자가 두드러지게 많다는 점이다. 그렇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나치스의 인종주의였다. 민간인 희생자 가운데 유대인이 약 500만 명을 차지하고 있는데, 이 숫자는 나치스의 지배를 받은 유대인의 약 70%에 해당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또 한 가지 이유는 제1차 세계대전 때 총력전 개념이 등장하면서 전쟁이 민간인을 배제하지 않는 대량 살육전으로 비화한 것을 꼽을 수 있다. 유럽 각국과 미국이 과학 기술에 많은 투자를 하고 군수산업을 육성한 결과 원자폭탄을 비롯해 가공할 살상력을 지닌 폭탄과 탱크, 전투기 등이 쏟아져 나왔다. 그로 인해 대량 살육의 피해는 더욱 증폭되었다. 주택과 산업 시설 등 재산상의 피해는 미처 헤아리기 어려운 천문학적 규모에 이르렀다. 승전국과 패전국을 가리지 않고 발생하는 이 같은 피해 상황을 보고도 누가 전쟁을 통해 정치적 목적을 이루려 하겠는가?alt제2차 세계대전으로 폐허가 된독일 베를린 거리어떻게 살아갈 것인가1944년, 미국 연합국과 소련을 포함한 44개국 대표들이 뉴햄프셔주 브레턴우즈에 모였다. 1930년 이래 각국이 평가절하 경쟁을 벌이는 바람에 야기된 통화 가치의 불안정을 해소하기 위한 회의였다. 44개국 대표들은 전후 세계 금융 질서를 새로 세우기 위한 국제 통화 제도를 도입하는 데 합의했다.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 경제의 기본 틀을 이루게 된 브레턴우즈 합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세계 각국의 통화 가치는 미국 달러를 기준으로 일정하게 유지하는 고정환율제를 채택하되, 근본적인 불균형이 있을 때만 변경하도록 한다. 기준이 되는 미국 달러는 금 1온스(약 28g)당 35달러로 정했다. 아울러 새 국제 통화 제도를 관장하는 기구로 국제통화기금(IMF)과 국제부흥개발은행(IBRD, 별칭 세계은행)을 두기로 했다. IMF는 원조가 시급한 나라에 공급될 장기 자본을 마련하고, IBRD는 환율 안정과 국제수지의 불균형을 바로잡는 데 필요한 금융 지원을 담당하게 되었다.세계 각국이 미국 달러로 자유롭게 무역을 하되 이 같은 자유무역의 안정성을 뒷받침하기 위해 각국의 화폐 가치를 달러 기준으로 고정한다는 것이다. 전세계 금의 대부분을 보유하고 있던 미국은 각국이 무역으로 벌어들인 달러를 가져오면 언제든 금으로 바꿔 주었다. IMF와 IBRD는 미국 중심의 세계 경제가 원활하게 돌아가도록 지원하는 금융기관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전쟁이 끝난 뒤 1960년대까지 이어진 세계 자본주의의 황금시대는 이처럼 미국이 큰형님 노릇을 확실하게 하는 자유무역체제 속에서 가능했다.해방은 하루뿐이었다!미국과 소련이 주도하는 전후 세계 질서에서 한국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해방 한국의 최대 현안은 38선이었다. 미국은 8월 10일경 정책 실무자들이 다급하게 획정한 것을 소련이 받아들였다고 설명했다. 한 민족의 운명을 좌우할 중대 결정이 일개 실무진의 임의적 판단에 의해 내려졌다는 설명은 무책임해 보인다. 그러나 한반도에 대해 완벽한 계획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 미국과 소련의 분할 점령으로 한국 현대사가 시작되었다는 것은 안타깝지만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이와 관련해 운명의 8월 10일경 관련 당사국들의 움직임이 주목되고 있다. 연합국은 포츠담선언에서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고, 일본은 한국과 타이완만은 놓치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8월 9일 나가사키에 두 번째 원폭이 떨어지고 소련이 참전하자, 이튿날 일본은 포츠담선언을 받아들일 뜻을 밝혔다. 그리고 미국을 상대로 한 일본의 화평 공작이 본격화됐다. 공산 소련보다는 미국 쪽과 협상하는 것이 그나마 일본이 덜 죽는 길이었다.소련군이 한반도로 밀고 내려오자 조선총독부는 더욱 다급했다. 아베 총독은 소련의 서울 점령을 기정사실로 보고 좌익 계열이던 여운형에게 질서 유지와 자신들의 안전을 위탁했다. 그러나 미국을 상대로 한 일본의 화평 공작은 헛되지 않았다. 8월 22일 서울이 포함된 38선 이남을 미군이 점령한다는 방침이 아베 총독에게 전해지자, 조선총독부는 다시 한국인을 상대로 치안 유지에 나섰다. 서울에 들어간 미군은 식민 통치 기구를 그대로 활용하고 친일파를 등용했다. 중도파 정치인 안재홍은 “해방은 (항복 선언 이튿날이던) 8월 16일 하루뿐이었다”라고 잘라 말했다. 강대국 중심의 냉혹한 국제 질서 속에서 민족의 독립과 통일을 이룬다는 험난한 과제가 한민족의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alt광복 후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한 좌우 합작에 앞장섰던 여운형]]> Thu, 28 Nov 2019 17:29:33 +0000 36 <![CDATA[백제의 마지막 도읍지 충남 부여 ]]> 글·사진 임운석 여행작가백제의 마지막 도읍지충남 부여 충남 부여 사람들은 금강을 백마강이라 부른다. ‘백제에서 가장 큰 강’이란 뜻이다. 백마강은 백제의 마지막 수도인 사비성이 있던 부소산을 휘감아 돈다. 삼천궁녀로 잘 알려진 부소산 낙화암에 오르면 백제의 눈물이 흐르듯 수천 년 동안 이어져 온 백마강의 유구한 흐름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지금은 유모차가 다닐 수 있는 산책로로 가꾸어졌지만 분명코 백제의 역사가 부소산 곳곳에 흩어져 있다. alt백제문화단지에 가면 사비성의 문화적 우월성을 느낄 수 있다부흥과 패망이 교차하는 곳백제는 위례성을 첫 도읍지로 정한 뒤 웅진성을 거쳐 사비성을 세 번째 도읍지(백제 성왕 16년(538))로 건설했다. 사비성이 왕조의 마지막 도읍지가 될 거라는 사실은 누구도 알지 못했을 게다.부여 여행에서 빼놓지 말아야 할 곳이 국립부여박물관이다. 여러 전시물을 통해서 역사의 큰 흐름을 일목요연하게 꿸 수 있기 때문이다. 박물관은 4개의 전시실로 나뉘며 전시유물만 1천여 점이 넘는다. 그중 백미는 백제 금동대향로(국보 제287호)이다. 이것은 사비시대를 대표하는 유물로서 1993년 부여 능산리에서 출토됐다. 아래에는 용이 연꽃 봉우리를 물고 있고 위에는 봉황이 가슴을 한껏 부풀려 위엄을 과시한다. 백제 장인들의 뛰어난 예술적 재능을 엿볼 수 있는 최고의 수작이다.박물관을 나와 백제초등학교를 따라 돌아가면 정림사지에 이른다. 정림사지는 사비도성의 중앙에 위치했던 절터다. 도심에 세워진 절로는 동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꼽힌다. 현재 남은 것은 연지와 8.3m에 이르는 5층 석탑, 그리고 석불좌상 등이다. 넓은 부지에 덩그러니 홀로 선 석탑이 폐망한 왕조의 멈춰버린 시계추를 보는 것처럼 비탄하다. 매표소 오른쪽에는 정림사지에서 출토된 다양한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는 정림사지박물관이 있다.정림사지에서 500m 거리에 부소산성이 있다. 부여의 중심에 자리한 부소산은 106m의 나지막한 산이지만 산성이 축조될 만큼 군사적으로 중요한 곳이다. 하지만 전쟁이 없는 평소에는 왕실 정원으로 사용되어 왕자들의 휴식처라는 뜻의 ‘태자골’이라 불렸다. 백제 성왕(?~554)이 538년 웅진에서 사비로 천도하면서 쌓은 토성과 통일신라 때 성을 에워싸고 연결해 다시 쌓은 토성이 남아 있다. 산 정상부에 오르면 백마강이 한눈에 펼쳐지고 부여 읍내를 발아래 둘만큼 조망이 좋다.  alt멈춰버린 시계를 보는 듯한 정림사지5층석탑alt백제 말 세 충신을 모신 부소산성의 삼충사 역사의 흔적을 밟으며 걷는 산책부소산 산책은 부소산문에서 출발한다. 사시사철 푸른 소나무가 우거진 부소산은 맑은 공기와 시원한 풍경이 인심 넉넉한 부여 사람의 모습을 빼닮은 넉넉한 공원이다. 산책로를 따라 들어서서 왼편으로 향하면 부여동헌과 부여객사가 있다. 백제 땅에 조선인이 터를 잡았는데 5칸짜리 동헌이 큰형님 집에 더부살이하듯 조심스럽게 자리를 펴고 앉았다. 산성이라고 해서 산능선을 따라 걷는 길이라고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유모차를 밀고 온 사람도 보이고, 엄마 아빠 손을 잡고 온 아이도 있다. 그만큼 길이 수월하고 걷기 좋다.삼충사에서 발길이 멈춘다. 백제의 세 충신인 성충, 흥수, 계백을 기리는 사당이다. 일제 말기 조선총독부는 현재 삼충사 터에 일본 왕이 직접 참배하는 214천㎡ (6만5천여 평)에 이르는 ‘부여신궁’을 지을 계획을 세웠다고 한다. 부여에 도쿄 신궁과 비슷한 규모의 신궁을 지어 ‘황민화 작업’에 박차를 가하려는 의도였다. 공사가 한창 진행되던 중 독립을 맞이했고 결과적으로 신궁공사는 중단되었다. 천만다행이다. 이후 1957년 그 터에 삼충사를 지었다. 삼충신 중에서 흥수는 나당연합군이 공격해오자 백제의 멸망을 예견하듯 백마강과 지금의 옥천군 식장산 주변인 탄현을 지킬 것을 간청하였다. 하지만 돌아온 결과는 왕과 대신들의 외면뿐이었다.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계백 장군은 황산벌(오늘날 논산)에서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군에 맞서 싸우다 전사했다. 결론적으로 당나라는 백마강을, 신라는 탄현을 함락함으로써 백제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터만 남아 옛 모습을 찾아볼 수 없어 삼충사를 돌아보고 다시 산책로를 따라나선다. 이어 도착한 영일루 터에는 원래 계룡산 연천봉에서 떠오르는 해를 맞이하던 영일대가 있었다. 지금 것은 조선 고종 때 세운 관아문 ‘집홍정’으로 1964년에 이곳으로 옮긴 뒤 영일루라 부른다. 누각 안쪽에 걸린 ‘인빈출일(寅賓出日)’ 현판은 ‘삼가 공경하는 마음으로 해를 맞는다’는 뜻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주변에 잡목이 많아서 일출을 볼 수 없다. 영일루에서 몇 걸음 안 가 군창지가 보인다. 군대에서 쓸 식량을 비축해두었던 창고 터로 부소산성의 중심부에 해당한다. 소나무가 우거져 옛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부소산은 백제 때 ‘솔뫼’라고 부를 정도로 소나무가 많았다고 한다. 지금도 오래된 소나무가 하늘을 향해 높게 자라고 있지만 백제시대의 나무가 아니다. 백제가 멸망할 때 부여는 7일 동안 화염에 휩싸였다고 한다. 부소산의 소나무도 그때 모두 타버렸다가 이후 북미산 리기다소나무와 한국산 소나무를 심어 지금처럼 다시 울창해졌다.부소산을 걷다 보면 군데군데 흙더미가 길게 이어진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토성의 흔적이다. 부소산성은 군창지와 사자루의 산봉우리를 머리띠를 두르듯 쌓은 테뫼식 산성과 이를 둘러싸고 있는 포곡식 산성이 혼합된 복합식 산성이다. 포곡식 산성만이 백제시대의 것이고, 나머지 두 테뫼식 산성은 통일신라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눈 덮인 구릉을 따라 수혈병영지와 반월루가 모습을 드러낸다. 반월루는 일출을 보던 영일루와 정반대 방향에 있다. 누각에 서면 부여 읍내와 구들래 들판, 백마강이 한눈에 들어온다. 잡목에 가린 영일루의 풍경과 비교된다. 멸망한 왕조의 안타까움 때문일까. 빛과 생명의 상징인 일출보다 어둠의 이미지가 강한 달을 더 잘 볼 수 있으니 말이다.alt낙화암 위쪽 절벽 봉우리에 있는 백화정절개를 지킨 백제여인들을 기리기 위한 정자다백마강이 한눈에, 낙화암 백화정에 오르다  낙화암 앞에 서면 누구나 의자왕(?~660)과 삼천궁녀를 떠올린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의자왕은 삼천궁녀와 놀아난 방탕한 왕이다. 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역사의식이 낳은 결과물이다. 즉, 삼국을 통일한 승전국인 신라의 입장에서 역사를 기술한 결과 정치적 논리에 의해 의자왕을 폄하했다는 것이 역사학자들의 공통된 입장이다. 「삼국사기」는 의자왕에 대해서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에게 우애가 있어 사람들이 해동의 증자라 일컬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집권 초기 외교와 군사력을 안정시키고 권력 기반을 다져 민심을 얻었다고 한다.삼천궁녀 역시 근거 없이 조작된 것이란 주장이 지배적이다. 나당연합군에게 패해 수도가 함락되자 적군에게 쫓긴 부여의 수많은 여인이 부소산 정상으로 도망쳐 지금의 낙화암에서 백마강으로 뛰어내렸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낙화암을 찾는 연세 지긋한 어르신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달빛 어린 낙화암의 그늘 속에서 불러보자 삼천궁녀를~’ 하고 <백마강>을 흥얼거린다. 낙화암 정상에는 1929년에 세운 백화정이 있다. 강물 소리를 따라 더 내려가면 고란사와 백제 임금이 고란초를 띄워 마셨다는 고란약수가 있다. 약수를 마시면 3년 젊어진다고 해서일까. 많은 사람이 두세 번은 족히 마신다. 발길을 돌려 부소산 서문으로 내려와 구드레나루터까지 다녀오면 부소산 산책이 마무리된다.alt부소산성은 어린아이를 동반한 가족여행객들도 충분히 산책하듯 거닐 수 있다.부활한 백제를 만나다백제문화단지는 1400여 년 전 백제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역사복합문화단지다. 조성기간만 17년이 걸렸으니볼거리와 체험거리가 무궁무진한 것은 당연할 터. 매표소를 지나면 백제 사비궁의 정전인 천정전과 서궁, 동궁이 펼쳐진다. 천정전은 왕의 즉위의례, 신년 행사 등 굵직굵직한 국가의식을 거행하던 곳이라서 그런지 위엄이 넘친다. 지금껏 봐왔던 조선의 궁궐과 다르게 화려한 것이 특징이다. 서궁의 무덕전에서는 백제시대 복식을 체험해볼 수 있다. 왕이 입던 용포와 장군의 갑옷, 문관이 입던 옷 등 다양한 복식이 준비되어 있다. 사비궁 오른쪽에는 성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백제 위덕왕(525∼598)14년에 창건한 절이 있다. 경내에는 대웅전과 오층목탑 등이 복원되어 있는데 목탑의 높이는 38m에 이른다.백제문화단지에는 백제인들의 실생활을 살펴볼수 있다. 사비궁을 지나 언덕 아래에 조성된 생활문화마을과 위례성마을이 그곳이다. 귀족 가옥은 황산별 전투로 잘 알려진 계백장군의 집을 재현해 놓았다. 서민들가옥에서는 염색, 목공, 압화 등 체험거리가 다양하다.]]> Thu, 28 Nov 2019 17:31:44 +0000 36 <![CDATA[한 명의 청년과 다섯 번의 도전 ]]> alt]]> Tue, 07 Jan 2020 15:01:23 +0000 37 <![CDATA[1930년대 조선에서 일어난 집념의 조선총독 처단 시도 ]]> 글 윤소영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학술연구부장1930년대 조선에서 일어난집념의 조선총독 처단 시도 조안득의 우가키 가즈시게 총독 처단 의거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관료들은 남산에 있는 조선신궁에 참배하여 새해를 맞이했다. 1936년 1월 1일, 이 날을 이용하여 당시 제6대 조선총독으로 있었던 우가키 가즈시게를 처단하려 했던 청년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조안득. 그러나 역사는 그를 기억하지 못했다. 2020년의 새해를 맞이하며, 조안득의 독립운동 족적을 따라가 본다.일제강점기 한국 침략의 수장을 노린 의열투쟁의 계보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국권 피탈을 저지하지 못하고 중과부적인 상황에서 한국독립을 달성하기 위해 선택된 방식 중 하나가 의열투쟁이었다. 그중 한국 침략의 수장인 일제의 최고 고관을 목표로 한 의열투쟁은 1909년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처단 의거와 함께 1919년 사이토 마코토 총독 처단을 기도한 강우규 의거, 1926년 송학선의 사이토 마코토 총독 처단 미수 의거 등이 잘 알려져 있다. 그렇지만 그 후에는 어떠했을까? 일반적으로 우리는 1930년대 중반부터 1945년까지 일제의 끝을 모르는 군국주의적 팽창 도발로 탄압과 통제가 극심했기 때문에, 국내에서 독립운동은 거의 이루어질 수 없었다고 생각한다.그러나 1935년 국내에서 또 한 번의 조선총독 처단 의열투쟁이 일어났다. 그것도 무려 다섯 차례에 걸쳐 집요하게 시도되었다. 그 무대는 고양군 신공덕리 58번지에 있던 용일양조소로, 처단 대상은 제6대 총독인 우가키 가즈시게(宇垣一成, 1868~1956)였다. 거사를 주도한 인물은 일제강점기 국내에서 태어나 ‘식민지 교육’을 받은 가난한 하층민 청년 조안득이었다. 그는 1925년 치안유지법 제정 후 더욱 촘촘해진 일제의 사찰망에도 걸리지 않을 정도로 지극히 ‘평범한’ 인물이었다. alt조안득이 살았던 어성정의 집1930년대 조선과 우가키 가즈시게 총독우가키 가즈시게는 1890년 육군사관학교를 제1기생으로 졸업하고 1924년 육군 대신에 취임했다. 1927년 정우회 정권이 수립되자 육군 대신을 사직하고 사이토 마코토 총독을 대신하여 임시총독대리로 조선에 부임했다. 재임 기간은 1927년 4월부터 1927년 10월까지 사이토 총독이 워싱턴군축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미국 출장을 간 사이였다. 우가키의 정치 성향은 일본의 군인칙유에 명시된 것처럼 일왕에 대한 절대복종이었다. 그는 메이지유신 이래 조슈 군벌 세력이 일본 전체를 좌지우지하는 것에 비판적이었는데, ‘천황주의’ 이데올로기를 가진 일본군 내부의 우익 청년 장교들은 이러한 성향의 우가키를 내각 총리로 추대하여 1931년 3월 20일 이른바 ‘3월사건’이라 불리는 쿠데타를 모의한 적도 있다. 이런 와중에 우가키는 일본 내의 구설수를 피해 조선총독직을 수락하고 1931년부터 1936년까지 제6대 총독에 재임하게 된 것이다. 당시 국내는 1929년 광주학생운동의 전국적인 확산과 1930년 1월 부산 방직공장 노동자 파업, 1930년 8월 평양 고무공장 노동자 파업이 일어나고, 조선노동총동맹과 조선농민총동맹의 산하단체가 증가하는 등 대중단체운동이 격화했다. 1931년부터 1935년까지 혁명적 농업조합운동 관련 사건은 103건(4,121명), 혁명적 노동조합사건은 70건(1,759명)에 달했다.당시 일제 식민지배에 대한 저항을 탄압하는 법적 장치는 치안유지법이었다. 이에 따르면 조선독립을 기도하는 운동은 조선에 대한 일본 지배를 배제하는 것이며, ‘천황통치권’ 하의 제국영토의 일부를 그 통치권으로부터 분리하는 것이므로 ‘정치의 변혁’(제령 제7호), ‘국체변혁’(치안유지법)에 해당한다”고 하여 탄압했다. 법은 1928년 6월 29일 개정되어, 국체변혁과 사유재산제도를 부인할 것을 목적으로 결사를 조직한 자에게 최고형 사형이 구형되도록 했다. 1930년대 전반의 독립운동은 사형을 각오한 투쟁이 아닐 수 없었다.우가키는 부임 전, 조선의 상황에 대해 관계는 침체되어 있고, 인민은 음울하며 사업은 부진한 상황이라 진단했다. 이 공기를 일신하지 않으면 조선의 장래는 낙관할 수 없다고 일기에 적었다.(『宇垣一成日記』 2, 1931.06.25.) 그래서 정치적 슬로건으로 내세운 것이 ‘내선융화’, ‘농공병진’, ‘농촌진흥’이다. 그렇지만 정책적 효과는 미미했다.1930년대 전반 조선의 상황은 불경기와 실업자 증가, 토막민 증가로 요약된다. 『조선급만주』 1933년 1월호 「조선에 소용돌이치는 실업자 무리」 기사에 따르면 경기불황에 디플레이션이 가중되어 총체적 난국인 상황에서 실업자가 폭증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alt 조안득 의거의 처단 대상이었던 제6대 조선총독 우가키 가즈시게 조안득 의거는 어떻게 세상에 알려졌을까조안득 의거 사건이 발각된 계기는 1935년 말, 용산경찰서 형사가 용일양조소 부근 이발소에서 어떤 이가 폭탄을 가지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용일양조소의 노동자를 조사하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그러나 인물을 특정하지 못하고 요시찰 인물 중에서도 의심 가는 이가 없어 속수무책이던 일경은 1935년 12월 28일 얼굴에 상처를 입은 사람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마침내 조안득(조득렬) 외 6명을 우가키 암살 미수사건으로 체포했다. 일경 측은 사건의 중대성에 비추어 즉시 보도 통제를 단행했다.사건이 일반에 공개된 것은 1936년 8월 18일 자 신문을 통해서다. 우가키 총독이 이임하고 관련 보도 금지가 해금되었기 때문이다. 『경성일보』, 『매일신보』, 『동아일보』, 『조선중앙일보』 등이 기사를 게재했지만, 특히 눈길을 끈 것은 『동아일보』의 2면에 걸친 상세한 호외이다. 조안득을 비롯한 관련 인물의 사진과 조안득의 부인, 조안득의 주거, 용일양조소 사진 등 관련 사진이 풍부하게 활용된 기사였다. 다른 신문사와 달리 이 같은 자세한 보도가 가능했던 이유는 당시 취재기자였던 우승규(禹昇圭)의 활약 덕분이다. 우승규는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청년당원으로 활동하다가 1931년 귀국하여 여러 신문사의 기자를 전전했다. 그 자신이 일제 요주의 인물로서 사찰 받는 입장이었던 것이다. 우승규는 용산경찰서를 출입하다 우연히 조안득의 검거 소식을 듣고, 자비를 들여 조안득의 조선총독암살미수사건을 조사했다. 우승규 기자의 활약으로 밝혀진 조안득과 그의 거사 내용은 이랬다. alt우승규가 취재·보도한 조안득 의거 기사(『동아일보』, 1936.08.18.)평범한 청년과 의열운동가 사이조안득은 수원에서 과부의 세 아들 중 막내로 태어났다. 1930년대 초 가족 모두가 서울로 이사 와서 큰형 수복은 간장 회사 영업사원으로, 둘째 형 천복은 지방행정학회 인쇄 직공으로, 조안득은 용일양조소 배달부로 일했다. 그러나 경제 불황의 여파로 두 형 모두 실직하고 말았다. 조안득이 홀어머니와 조카들의 생계까지 책임져야 하는 상황에서 그의 아내 서금순(徐今順, 당시 19세)은 일본인 가정에서 가정부로 일했다. 『동아일보』에 실린 조안득의 어성정(御成町)의 집 또한 여러 개의 쪽방으로 이루어진 보잘것없는 주택의 한 칸에 불과했다. 조안득과 그 가족의 삶은 1930년대 전반기 ‘식민지 조선’의 비참함을 그대로 대변하고 있었다.조안득은 안중근 의거와 송학선 의거를 염두에 두고 우가키 총독 처단 의거를 준비했다. 그는 용일양조소의 수석 서기이자 공산주의 사상을 가진 이금진으로부터 사상적 영향을 받으면서도 점진적인 노동운동보다 급진적인 의열투쟁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일제 측 조사 자료에 의하면 조안득이 1935년 9월경, 조선신궁이 있는 남산에서 조선인 거리와 대비되는 휘황찬란한 일본인 거리를 내려다보고 한층 더 조선통치에 반감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하얼빈 역두에서 이등공을 암살한 안중근을 모범으로’ 삼아 폭발물을 사용하여 조선총독 처단을 결심하게 되었다.먼저 용일양조소의 술을 배달받아 주점을 운영하는 인진명(47)에게 물고기를 잡고 싶다고 거짓말을 하여 다이너마이트와 도화선을 요청했다. 인진명은 중석광산(重石鑛山)의 화약취급 주임이었다. 이에 인진명은 성냥의 유황으로 간단한 폭탄을 만들 수 있다고 알려주었고, 조안득은 유리병을 활용해 10월 말경까지 총 4개의 폭탄을 제조했다. 유리병은 아내 서금순이 일본인 가정에서 얻어온 빈 병을 재활용한 것이었다.조안득은 총 다섯 차례 총독 처단을 시도했다. 첫 번째로 1935년 10월 14일 대구에서 열린 조선군사단 대항연습을 참관하고 경성역으로 돌아오는 우가키 총독의 처단을 계획했으나 인진명에게 도화선을 받지 못해 미처 시도할 수 없었다. 두 번째는 1935년 10월 16일, 총독부 고관들이 동대문 밖을 통해 이동한다는 이야길 듣고 실행에 옮기려다 경계가 심해 실패했다. 세 번째는 11월 18일 도쿄에 갔다가 귀성하는 우가키 총독을 노렸다. 이때 그는 사전에 용일양조소 배달부 최영진(30), 서부지점 배달부 구승회(26) 및 윤학수(28)를 동지로 포섭하고 이들의 도움을 받아 폭탄을 갖고 경성역에 잠복하면서 귀빈실을 지켜봤다. 그러나 총독의 부인이 병환 중이어서 직접 플랫폼에서 자동차를 타고 철도우편국 옆 수하물 출입구로 빠져나가는 바람에 실패했다. 다시 12월 14일, 신문에서 우가키 총독이 오후 2시 52분 온양온천에서 경성역으로 돌아온다는 소식을 본 조안득은 두 번째로 만든 폭탄 세 개를 가지고 경성역으로 갔다. 그리고 남대문통 세브란스병원 통용문 철책 부근 보도 위에 서서 폭탄을 던질 기회를 엿보았다. 그러나 안개가 심하고 경계가 삼엄하여 실패하고 말았다. 계속되는 실패로 이러다가 아무것도 안 될 것이라 생각한 그는 마지막 계획을 세웠다. 1936년 1월 1일, 총독이 반드시 남산 조선신궁을 참배할 것이라 보고, 자신의 집 위에 있는 조선신궁 가는 길에서 의거를 결행하기로 한 것이다. 신궁 가는 길 어귀에서 실패할 경우, 인근 잔디밭에 불을 지르고 경계망이 어지러워질 즈음에 기어코 총독을 죽이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12월 28일 새벽에 체포되고 만 것이다.일제 당국은 조안득의 폭탄을 압수해 그 위력을 실험했는데, 폭탄은 10간 정도의 범위까지 파멸시킬 정도로 강력했다. 조안득은 10년 형을 받았다가 다시 7년 6월형으로 감형받았다. 그의 이후 행적에 대해서는 다음의 기사를 주목할 만하다.다시 옥문에서 나온 그들에게 현실은 너무나 차디차서 ‘처’는 간데없고 생계는 막연하고 사회에서 버림받고 경찰의 감시는 아직도 거세었다. 하는 수 없이 조안득 씨는 해방 전 해 노무자 모집에 응모하여 북해도로 건너가 왜놈의 노예로서 철도부설공사를 비롯하여 자유 노동에 종사하다가 1945년 11월에 그리운 고국으로 다시 찾아왔다. …(중략)… 해방이 와도 장안에 떠나갈 것 같은 만세와 환호성 속에서도 오늘날까지 누구 하나 그들을 돌보아주는 사람은 없었다. 생활의 곤경은 예나 이제나 다름없이 궁핍했다. (「여기에 있다. 버림받은 애국자」, 『한성일보』, 1950.06.03.)조안득은 독립운동에 투신하고 감옥살이를 한 뒤 세상으로 나왔지만, 일제의 감시망 속에서 1944년에 훗카이도 철도노동자로 전전하다 기사의 제목처럼 ‘버림받은 애국자’로 해방을 맞이했다. 기자가 소감을 묻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그때 우리는 누구의 지시나 명령을 받은 것이 아니고 우리들의 곤란한 생활은 왜놈 때문이라는 복받치는 반감 그대로 27세 내외의 젊은 청년끼리 거사를 계획했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알아주는 사람도 없고 다만 옛일을 회상하면서 평생을 묵묵히 노동자로서 조국에 바칠 뿐입니다. 생활고요? 그야 나만이 못 뚫는 수난인가요. 다수의 동포 형제들이 참고 참아 나가야할 현실이 아니겠습니까?그의 술회는 우리에게 깊은 감회를 남긴다. 조안득은 ‘정의’를 ‘맹렬하게’ 실천한 의열운동가였다. 그러나 자신의 행동을 ‘의거’라 주장하지 않았고, 공을 다투지도 않았다. 역사가 자신을 기억해주지 않음에 섭섭해하지도 않았다. 단지 역사의 불의에 눈감지 않고 의로움을 실천한, 그 자신은 평범하다고 했지만, 결코 ‘평범하지 않은’ 청년이었다. 여전히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독립운동가가 많다. 조안득의 의거가 안중근 의거, 강우규 의거, 송학선 의거를 잇는 일제 고관 처단의 ‘의열투쟁’임을 기억하고 되새기는 것은 오롯이 우리 국민의 몫이다. alt조안득이 제작한 폭탄 이미지]]> Tue, 07 Jan 2020 15:00:35 +0000 37 <![CDATA[2020년, 기념하고 기억해야 할 독립운동 ]]> 글 이계형 국민대학교 특임교수2020년,기념하고 기억해야 할독립운동 1945년 우리 민족은 광복을 맞았지만, 독립운동은 끝나지 않았다. 여전히 미완으로 남은 사건, 해결되지 못한 문제, 기억해야만 하는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끝나지 않은 독립운동은 독립운동사를 과거에 머문 역사가 아닌 현재의 문제로 다루며, 오늘도 신문 한쪽을 차지하고 있는 독립운동 및 일제강점 이슈를 소개한다. 100주년을 맞이하는 우리들의 자세2019년은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었다. 이를 맞아 정부 차원에서 ‘100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를 결성하여 여러 행사를 총괄 추진하였고, 지자체 혹은 여러 기관에서도 기념행사나 특별전을 개최하며 국민들에게 감동을 선사하였다. 또 관련한 사적지에 기념물·조형물 등이 새롭게 조성되기도 하였다. 3·1운동은 일제 식민 통치 10년 만에 전 인민이 한마음으로 항거한 독립운동이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현재 대한민국 법통성의 시작이 되었다는 점 때문에 그러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그 가운데 아쉬운 부분도 남는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100년’은 한 시대를 마감하고 새로운 시대를 여는 주기로서 새로운 의미를 갖는다. 다만 ‘100주년’ 행사 중에서 잘된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이 있을 것이다. 전자는 활성화해야 하고 후자는 채워 넣어야 한다. 앞으로 독립운동과 관련한 100주년 행사가 줄을 이을 것이기 때문이다. 작년과 같이 정부가 적극 나설 정도로 규모가 큰 정도는 아닐지라도 말이다. 어쨌든 큰 행사를 치른 만큼 명암이 존재하는 것은 분명한 것이고 이에 대한 문제점을 짚어보고 해결 방안을 찾아가는 것도 필요하다 생각한다. 우선적으로 지적하고 싶은 것은 시민들의 적극적인 참여하에 기획부터 시행까지 이뤄진 사업이 많지 않았다는 점이다. 100주년 사업의 목적이 모든 국민이 독립정신을 일깨우고 기리는데 있다는 측면에서 아쉬움이 남는다. 특히 지자체의 행사는 규모가 확대되었을 뿐, 새로운 부분이 적었다. 이를 지역의 화합 차원으로 승화시켰으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요즈음 건설된 신도시에는 고향이 다른 수많은 사람이 같은 공간에서 생활하다 보니 소속감이나 지역공동체 의식이 적다. 이를 하나로 묶어 주는 것이 자랑스러운 지역사이다. 지역사를 어떻게 기리고 보존하며, 자랑할 것인지를 고민하는 과정에서 지역공동체는 더 단단해진다. 주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도 줄을 이었을 것이다. 또한, 비슷한 지자체 행사에 차별화가 될 수도 있다.두 번째로는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가려 100주년을 맞이한 다른 독립운동이 소외된 경우도 있었다. 우선 3·1운동 이후 만주에는 수많은 독립군이 조직되어 활동했지만, 이는 별로 주목을 받지 못했다. 2·8독립선언, 신흥무관학교 개교, 민족대표 양한묵 순국, 강우규 의거, 안중근 의거 110주년 행사도 상대적으로 관심을 얻지 못했다. 돌아오는 100주년, 어떻게 기념하고 기억할 것인가2020년을 맞아 올해 기념하고 기억해야 할 독립운동 이야기를 통해 앞선 문제점의 해결 방안을 모색하고자 한다. 가장 먼저 봉오동(1920.06.)과 청산리전투(1920.10.)가 100주년을 맞이한다. 3·1운동 후 만주에서 조직되었던 50여 개의 독립군이 연합해 국내진공작전을 벌이는가 하면, 임시정부가 선포한 ‘독립전쟁의 해’를 맞아 독립군이 정규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일에 대해서 그 역사적 가치는 두말할 필요가 없다. 다만 예년처럼 두 영웅에게만 초점이 맞춰져 행사나 사업이 진행되지는 않을까 하는 염려가 있다. 대부분의 사람이 홍범도와 김좌진은 알고 있지만, 봉오동전투에서 봉오동을 일군 사람들은 잘 알지 못한다. 여러 독립군 단체가 연합하여 승리한 전투이지만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도 드물다.이보다도 안타까운 것은 봉오동·청산리전투 전후 일제가 보복 차원에서 1921년 4월까지 만주 한인 마을을 방화·약탈하고 한인들을 학살한 사건에 대해서 아는 이가 많지 않다는 점이다. 1920년 10월과 11월, 두 달 사이에만 약 3,600여 명이 학살당했고 150여 명이 검거되었으며 가옥 3,500여 채, 학교 60여 개소, 교회 20여 개소 및 양곡 6만여 석이 소각되었음에도 말이다. 이를 ‘간도참변’, ‘간도대학살’, ‘경신참변’이라 한다.봉오동·청산리전투 100주년 기념사업회가 정부 예산을 받아 많은 행사를 기획하고 있다고 한다. 의미 있는 행사가 될 거라 기대하면서도 예전과 같이 특정인을 기리는 행사를 지양하기를 바란다. 다양한 사업을 통해 두 전투의 역사적 가치뿐만 아니라 독립군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하다가 희생당한 이들도 기억해야 한다. 개별 기념사업회 차원에서 사업을 진행하기 보다는 통합하여 공동 운영하는 방안도 고려해봄직하다. 이외에도 외교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다. 중국과의 관계로 봉오동과 청산리 전적지에 접근조차 곤란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예전 기념 시설도 방치되어 있다. 중국과의 외교적 채널을 통해 개선해 나가야 할 부분이다. 아울러 ‘간도참변’에서 희생당한 이들의 추모비 건립도 추진했으면 한다.2020년에 ‘100년’을 기념하고 기억해야 할 것들이 더 있다. 인물로는 최재형이 있다. 그는 연해주 우수리스크에서 활동하다가 일본군의 ‘4월참변’에 총살로 희생당했다. 유관순은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했고, 사이토 총독을 폭살하려던 강우규는 순국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지만 의병장 채응언 의진에서 활동했던 안광조는 평양형무소에서 사형 순국했다. 군자금 모금·친일관리 처단 등의 활동을 펼친 대한독립단 특파대장 이명서는 전사 순국했다. 『동아일보』 장덕준 기자는 만주의 훈춘사건 취재 중 간도 용정에서 일본 경찰에 피살되었다. 이들을 기리는 데는 업적의 크고 작음이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영화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2008)의 모티브가 되었던 철혈광복단의 ‘15만 원 탈취 사건’도 어느덧 100년이 되었다.100년이 된 단체, 기관도 있다. 대한체육회(옛 조선체육회)·대한정구협회(옛 조선정구협회)의 설립이 그러하다. 『조선일보』·『동아일보』 등도 1920년에 창간되어 일제강점기에 민족지로서 역할했다. 3·1운동의 실패로 인한 실망과 궁핍한 삶에 불안 등 퇴폐적인 상황 속에서 탄생한 『폐허』와 민족의식 고취에 역점을 둔 대표적인 종합잡지 『개벽』의 창간도 100년이 되었다.어느 사건이나 단체이든지 ‘100년’이 되었다는 것은 그 자체로 역사이다. 다만 기려야 할 것인지 반성해야 할 것인지는 우리의 판단이고 몫일 것이다. 더불어 2020년은 일제에 의해 식민지가 된 지 110년이 되는 해이다. 누가 책임을 져야 하는지, 왜, 어떻게 그리되었는지에 대한 충분한 반성과 질책, 비판이 있어야 한다. 이와 달리 독립운동과 관련한 인물, 사건 단체 등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일련의 과정은 다시 돌아오는 100년 후의 중요한 역사가 될 것이다. 독립운동사는 이 나라가 존재하는 한 교훈이 되어야 하고 독립운동가들은 영원히 기려야 할 선한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앞에서 살폈지만 올해에는 감옥에서, 사형장에서, 전장에서 숨을 거둔 독립운동가의 순국 100년이 많다. 이들 가운데는 대중에게 알려지지 않거나 기념사업회가 없어서 어느 누구에 의해서도 기려지지 못하는 분들도 있다. 2019년 의미 있게 100주년을 치른 경험을 바탕으로 잊힌 독립운동가들에 대해 어떻게 기념하고 기억할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2020년 올 한 해가 그 시험대가 되었으면 한다. 지금 우리가 독립된 나라에 살 수 있는 것은 그들의 숭고했던 100년 전 희생의 역사 덕분이며, 돌아올 100년 후 내 후손이 살아갈 나라가 어떤 나라일지는 지금 우리의 몫이기 때문이다. ]]> Tue, 07 Jan 2020 15:14:33 +0000 37 <![CDATA[고종의 밀지와 함께 의병을 일으킨 산남의진 대장 정용기 ]]> 글 독립기념관 전시부고종의 밀지와 함께의병을 일으킨산남의진 대장 정용기 정용기(鄭鏞基)1862.12.13. ~ 1907.09.02.경상북도 영천건국훈장 독립장(1962) 독립기념관은 국가보훈처 및 광복회와 공동으로 정용기를 2020년 1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정용기는 경상북도 영천에서 의병 부대 ‘산남의진’을 조직하여 일본군과 맞서 싸우며 항쟁했다. 고종황제의 뜻을 받들어 의병을 일으키다정용기는 1862년 충절가문으로 알려진 영일정씨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는 넉넉지 못한 집안 형편으로 인해 공부를 하지 못하고 이곳저곳을 다녀야 했지만, 1887년 아버지 정환직(鄭煥直)이 벼슬에 오르자 함께 상경하였다.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되며 대한제국이 외교권을 박탈당하자 고종은 정환직을 불러, 군주를 대신하여 장수가 적에게 맞선 중국 고사 ‘화천지수(華泉之水)’에 대해 이야기하며 밀지(密旨)를 내렸다. 이후 정환직이 관직에서 물러나자 정용기도 함께 의병을 일으킬 준비를 하였다.1906년 영천으로 간 정용기는 영천창의소를 설치하여 의병을 모으기 시작하였고, 권세가를 비롯한 각종 통문이나 격려문을 지어 의병으로 나설 것을 호소하였다. 같은 해 2월 정용기는 의병 1,000여 명의 추대로 의병 대장이 되었고, 영남지역 의진이라는 뜻의 ‘산남의진(山南義陣)’을 이름으로 정하여 본격적인 항쟁을 준비하였다. alt『산남창의지(山南倡義誌)』 중 정환직이 고종에게 밀지를 받는 부분alt의병의 무기들 alt『진중일지』 중 입암전투 관련 내용산남의진 대장으로 의병투쟁을 이끌다1906년 4월 아버지 정환직이 경주에 구금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정용기는 급히 경주로 향했지만, 이는 산남의진을 막기 위한 관군의 계략이었다. 결국 정용기는 경주진위대에 체포되어 대구경무소에 구금되었고, 대장을 잃은 산남의진은 활동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해산되었다. 4개월이 지나서야 풀려난 정용기는 ‘일제가 만든 외채를 국민의 손으로 갚자’는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하여 영천군 국채보상단연회의 회장으로 활동하였다. 1907년 봄 정용기는 산남의진을 다시 조직하였고, 소규모 지역 의병부터 군인 출신까지 많은 이들이 뜻을 함께하였다. 7월부터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산남의진은 포항 청하와 영천 자양 등지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9월 포항 죽장으로 이동하여 입암계곡에서 전투를 벌이던 중 일본군에게 역습을 당해 정용기를 비롯한 많은 의병이 전사하고 말았다. 정부는 정용기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alt국채보상운동 관련 내용(『대한매일신보』, 1907.02.21.) alt짐망화천지수(朕望華泉之水)전세비alt충효재(忠孝齎) alt]]> Tue, 07 Jan 2020 15:03:12 +0000 37 <![CDATA[김구가 안창호 목사에게 써 준 유묵 ]]> 글 독립기념관 자료부김구가 안창호 목사에게써 준 유묵 安昌鎬先生雅正誓海魚龍動盟山草木知回甲之日 於秦淮隱庽 書忠武公李舜臣詩一句 以作紀念白凡金九안창호 선생께바다에 맹세하니 물고기와 용이 감동하고산에 맹세하니 초목이 알아주네회갑 날에 진회의 은거지에서 충무공 이순신의 시 한 구로 기념하다.백범 김구 김구(金九, 1876~1949)가 중국 난징(南京)에 숨어살던 1936년에 자신의 환갑을 맞아 하와이에 있는 안창호(安昌鎬, 1885~1966) 목사에게 써서 보낸 휘호이다.김구는 1932년 윤봉길 의거 후 일제 경찰의 추격을 피해 상하이를 떠나 항저우와 하이옌을 거쳐 난징에 은거했다. 김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이하 임정)의 행정수반인 국무령에 취임한 후 임정의 재정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미주동포들의재정 지원을 요청하는 ‘편지정책’을 펼쳤다. 임정의 상황을 설명하고 동정을 구하는 진심 어린 편지에 미주동포들은 감동하여 회답을 보내왔다.1936년 난징에서 환갑을 맞이한 김구는 임정의 활동을 지원해 준 미주동포들에게 고마움을 표시하기 위해 충무공 이순신(李舜臣)의 시 한 구절을 써서 보냈다. 이순신이 임진왜란 때 지은 「진중음(陣中吟)」 8구(天步西門遠 君儲北地危孤臣憂國日 壯士樹勳時 誓海魚龍動 盟山草木知 讐夷如盡滅 雖死不爲辭) 중 2구이다. 이순신이 소장했던 쌍룡검(雙龍劒)의 칼날에 새겨진 명문 중에도 “盟山誓海意(산에 맹세하고 바다에 맹세하다)”라는 글귀가 있었다고 한다. alt39.50×166.00, 39.00×166.00JANE C. Ahn 기증]]> Tue, 07 Jan 2020 14:59:36 +0000 37 <![CDATA[오늘, 당신의 소원은 무엇입니까? ]]> 오늘, 당신의 소원은 무엇입니까? 당신의 소원은 무엇입니까?김구는 대답합니다.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독립이라고.그는 식민지 조국의 현실 앞에서간절히 독립을 소원했습니다.현재의 고난을 극복하는 일,더 살 만한 내일을 그리는 일,무릇 소원이란 나은 미래를 꿈꾸는희망의 다른 말이 아닐까요?그렇다면 올해, 오늘,당신의 희망은 무엇입니까? ]]> Tue, 07 Jan 2020 14:58:44 +0000 37 <![CDATA[현순의 3·1운동 소식 전파와 대한인국민회의 대응 ]]> 글 홍선표 나라역사연구소 소장현순의 3·1운동 소식 전파와 대한인국민회의 대응 Ⅲ. 3·1운동의 발발과 재미 한인의 독립운동 ① 1919년에 들어서 재미 한인의 독립운동 열기는 계속 고조되었으나 파리강화회의에 한인 대표로 이승만과 정한경을 파견하는 일은 뜻대로 풀리지 않았다. 그런데 파리강화회의 대표 파견 추진활동에 대한 세부 내용은 중앙총회에만 알리고 전 미주 한인들에게는 비밀로 하였다. 파리행 전망이 처음부터 모호한 상황에서 일일이 전 미주 한인들에게 알릴 때 혹 실망감으로 독립운동의 열기가 냉각될지 모를 우려 때문이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San Francisco Examiner 3월 3일 자 보도로 이승만·정한경의 여권 신청이 미 국무부로부터 거절되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그동안 비공개로 일관했던 중앙총회는 더 이상 추진 과정을 숨길 수 없었다. 그러나 향후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를 두고 무척 난감해했다. 크게 고조된 독립운동의 열기가 급속히 냉각될 것이 분명했지만 뚜렷한 대책이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걱정으로 가득 차 있을 때 3월 9일 상하이에서 현순의 전보가 중앙총회와 하와이지방총회에 내도하였다. 국내에서 3·1운동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린 것이다. 3·1운동의 발발과 중앙총회의 활동방침국내 3·1운동의 발발 소식은 미주 한인사회를 진동시켰다. 3·1운동 소식을 정리해 보도한 『신한민보』 3월 13일 자 「호외」는 “장쾌하여도 이렇게 장쾌하고 신기하여도 이렇게 신기한 일은 진실로 무엇에 비할 데 없으니 기쁨에 겨운 우리는 눈물을 뿌렸노라”고 그 벅찬 심정을 표현하였다. 그동안 한인 대표 파견활동과 특별의연금 모금활동을 추진해 미주 한인사회의 중추기관으로 활동한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의 임무는 더욱 막중해졌다. 중앙총회장 안창호는 3월 9일 상하이에서 전보를 받은 당일 오전 11시, 가장 먼저 중앙총회 부회장이자 대표원 임시의장, 그리고 사무원인 백일규와 협의하고 독립선언 이후의 방침을 결정하였다. 첫째, 이승만·정한경·서재필과 북미 및 멕시코의 각 지방 한인사회에 독립 선언 소식을 전보로 발송할 것, 둘째, San Francisco Examiner와 San Francisco Chronicle 등 미국 언론에 3·1운동의 발발 소식을 알릴 것, 셋째, 중앙총회 임시협의회를 상항한인교회에서 개최하기로 정했다. 3월 9일 저녁 7시 30분 상항한인교회에서 개최한 임시협의회는 샌프란시스코와 그 인근 재류 사람들이 거의 다 모일 정도로 성황을 이루었다. 참석자들은 기쁨에 겨운 눈물을 뿌리며 미친 듯이 만세를 불렀다. 그 소리가 마치 천지를 진동할 정도였다. 안창호가 겨우 자리를 정돈시키고, 3·1운동 이후 재미 한인이 취해야 할 세 가지 방향을 제시하였다. 첫째, 개개인이 독립의 각오와 일치된 행동을 가질 것, 둘째, 미국 각 언론·잡지나 종교계에 3·1운동 소식과 기독교 박해 사실 등 한국의 사정을 미국 국민에게 널리 알려 동정을 얻고 한인의 활동에 많은 도움을 얻도록 할 것, 셋째, 이러한 일을 감당하기 위해 북미·하와이·멕시코 재류 동포들이 재정공급의 책임을 다할 것이라 했다.그런 후, 임시협의회는 6가지의 의안을 의결했다. 그중 중요 내용은 ‘평화회의 파견 대표자 이승만·정한경이 여행권을 얻지 못할 경우 서재필을 파견할 것, 만일 여행권 세 장을 얻을 경우 서재필·이승만·정한경 3씨를 파송할 것, 미국 각 종교계와 및 각 단체에 교섭하여 대한 독립에 대한 동정을 얻도록 하고 이를 위한 교섭위원으로 윤병구·정인과를 선정할 것, 태극기를 제작해 판매하고 때마다 사용하게 할 것’ 등이었다.  이 같은 결정은 곧 부분 변경되어 먼저 파리강화회의의 새 대표였던 서재필 대신 윤병구로 변경되었고, 종교계의 교섭위원은 윤병구 대신 민찬호가 추천되었다. 하와이지방총회 총회장 이종관은 안창호에게 보낸 3월 9일 자 전보에서 이번 외교의 전권을 중앙총회장에게 맡기겠다고 알렸다. 이로써 중앙총회의 권위와 역할은 더욱 막강해졌다. 『신한민보』는 3·1운동의 소식을 신속히 보도하고자 매주 1회에서 3회로 증간 발행하기로 하고 이를 위해 새 편집인으로 이살음 목사를 추가했다. 독립의연금 모금운동과 대외 특파위원 파견중앙총회는 3월 13일 임시협의회에서 의결한 내용을 근거로 12개의 재정 모금 규정을 제정해 공표했다. 독립운동을 위한 특별의연금의 명칭을 ‘독립의연’으로 정했고 중앙총회의 지휘 아래 모금운동을 전개하기로 했다. 4월부터 무슨 수입이든지 매월 또는 매 주일 수입의 20분의 1을 거두는 ‘21례’를 신설했다. 6월부터는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징세령에 의거 인구세와 애국금 모집에도 착수했다. 그 외 미주 한인의 등록사업을 실시해 인구 조사활동을 병행하기로 하였다. 인구조사사업은 대한인국민회가 처음 시도하는 것으로 단순한 인구조사 외에 독립의연 자금을 효과적으로 모금하기 위한 의도도 담겨 있었다. 중앙총회는 1919년 국제정세의 급변에 대응하기 위해 뉴욕과 파리에 한인 대표 파견을 추진한 것 외에 다방면으로 특파위원을 선정해 파견하였다. 다양한 각도에서 독립운동을 추진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가장 먼저 선임된 특파위원은 1919년 1월 4~5일 임시국민대회 때 본국 파송 비밀특파위원으로 선정된 여운홍이다. 그는 1월 11일 임명된 후 활동 여비로 300달러를 받아 2월 1일 도쿄를 거쳐 2월 18일 서울로 들어갔다. 그는 귀국하기 전 헐버트와 협의하여 파리강화회의에서 한국 독립 문제를 호소하기 위해 국내에서 1백만 명의 서명을 받는 운동을 추진하려 했는데, 이미 2·8독립선언과 3·1운동이 준비되고 있는 사실을 알고 중단했다. 안창호는 1919년 1월 4일 임시국민대회 때 하와이 순방계획을 확정했다. 그런 후 해외 전체 한인의 대동단결을 추진하는 것으로 계획을 변경해 3월 5일 정인과·황진남과 함께 원동특파원이 되어 4월 1일 샌프란시스코를 떠나 상하이로 갔다. 그밖에 3월 15일 중앙총회는 군사상 준비를 목적으로 박용만·노백린을 원동특파위원으로 선정하였다.독립의연금 모금운동을 활발히 추진하기 위한 미주 특파위원도 임명했다. 1919년 3월 17일 캘리포니아주를 비롯한 미국 9개 주의 한인 동포들에게 정신적·물질적으로 일치 단합을 꾀하고 독립의연을 모집할 특파위원으로 김정진(‘김호’의 옛 이름)을 임명하였다. 4월 4일 중국인 대상으로 독립의연을 모금하기 위해 김영훈·홍언·강영각·임정구를 화교위원으로 임명했고, 5월 15일 특별의연금 모금활동과 한인사회의 정돈을 위해 특파전권위원으로 강영소·황사용을 하와이로 파견했다. 그 외 미주 각 지방에서 활동할 독립의연 수전위원(收錢委員)들을 임명하였다. 이처럼 3·1운동 직후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는 대대적인 ‘독립의연’ 모금운동과 선전활동의 일환으로 특파위원들을 선정해 국내는 물론 중국과 하와이 그리고 미국 본토로 파견하였다. alt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에 공포한 「3·1 독립선언 포고문」(1919.03.09.)]]> Tue, 07 Jan 2020 15:16:10 +0000 37 <![CDATA[김순애, 김규식의 자유와 평화 ]]> 글 김형목 사단법인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이사김순애, 김규식의자유와 평화 최근 들어 남북한 사이 화해 분위기가 다시 경색되고 있다. ‘솔로몬의 지혜’를 발휘했던 선각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임이 절실한 오늘날이다. 김순애와 김규식은 평생 독립운동에 스스럼없이 온몸을 던졌던 선각자들이다. 해방 이후에는 남북분단 체제를 막는 것만이 진정한 독립이라 생각하고 실천하였다. 이들 부부가 살아온 가시밭길 같은 인생 항로는 무한한 신뢰에서 가능했다. alt김순애와 김규식의 결혼사진(1919)alt젊은 시절의 김순애 김순애, 근대교육 수혜로 민족의식을 일깨우다김순애는 1889년 5월 12일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 송천리에서 아버지 김성섬과 어머니 안성은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광산으로 서울의 명문가 집안이었다. 증조부는 낙향 후 황무지 개간과 가축 사육 등으로 경제적인 부를 축적하여 ‘김참판댁’이라 불렸다. 아버지도 ‘만석꾼’이라 불릴만큼 대단한 자산가였다. 일찍이 서양선교사와 인연을 맺은 서상륜·서경조 형제는 이곳에 개신교를 전파했다. 이때 그의 아버지와 큰오빠도 개신교를 받아들이고, 마을에 교회와 학교를 설립하는 등 민중계몽과 민족교육에 매진하였다.김순애는 고향에서 초등교육을 받은 뒤 어머니, 오빠 김필순과 함께 서울로 가서 정신여학교에 입학하였다. 김필순은 세브란스의학교에 다니며 안창호를 비롯한 많은 애국지사와 밀접하게 교류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민족의식과 현실 인식을 심화하며 자연스럽게 나라사랑 정신을 형성하였다. 민족교육의 수혜로, 김순애의 집안은 독립운동가를 다수 배출한 명문가로 자리매김하였다. 둘째 오빠 김윤오는 서우학회 발기인, 셋째 오빠 김필순은 중국 동북지역과 내몽고 치치하얼에서 독립운동자금 및 기지를 제공했다. 언니 김구례의 남편 서병호는 신한청년단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 여동생 김필례는 YWCA 창설자이자 민족교육을 실천한 교육운동가, 조카 김마리아는 대한민국애국부인회장 등을 역임한 여성독립운동가이다.정신여학교(연동여학교 후신)는 선교사업의 일환으로 설립되었으나 민족의식을 일깨우는 근대여성교육의 ‘메카’였다. 한국 역사와 지리 등을 통해 나라를 생각하는 동시에 올바른 여성을 양성시켜야 한다는 책임감도 갖게 되었다. 엄격한 기숙사 생활에도 동생 김필례와 함께 있어 그 어려움과 외로움을 이겨낼 수 있었다. 김순애는 1909년 졸업하고 부산 초량소학교 교사로 부임했다. 그곳에서 학생들에게 한국사를 비밀리에 가르치는 등 항일의식 고취에 남다른 노력을 기울였다. 이를 탐지한 일본 경찰에 의해 체포될 위기에 놓이자, 오빠 김필순과 함께 중국 동북지역으로 망명했다. 김규식, 불우한 가정환경을 나라사랑으로 이겨내다우사 김규식은 1881년 아버지 김지성과 어머니 경주 이씨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경남 동래부에서 무역 업무를 담당한 아버지는 일본 상인의 횡포를 비판하는 상소문을 올렸다가 유배형에 처해졌다. 4세가 되던 해 어머니와 함께 서울로 올라갔으나, 얼마 후 어머니마저 사망하여 큰아버지에게 맡겨졌다. 큰아버지는 김규식의 양육이 어려워지자 그를 선교사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의 양자로 입양시켰다. 이후 할아버지·할머니·아버지가 연이어 사망하며 천애 고아 신세가 되고 말았다. 선교사 부부는 김규식에게 친아들과 같은 헌신적인 사랑을 베풀었다. 그 역시 불우한 환경에 굴하지 않고 관립영어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는 등 학문적인 열정을 보였다.생계를 위해 독립신문사에 입사한 뒤 영어사무원과 취재기자로 활동하였다. 이어 언더우드의 도움으로 미국 로녹대학에서 유학하며, 한글의 우수성과 한국을 알리는 많은 기고문을 썼다. 특히 영어·프랑스어·라틴어 등 어학에서 출중한 실력을 발휘했다. 러일전쟁의 발발과 일본의 승리를 예견할 만큼 국제정세에도 밝았다. 프린스턴대학에서 영문학 석사학위를 받고, 러일전쟁이 발발한 직후 귀국하였다. 그리고 YMCA학관·배재학당·경신학교 등 기독교계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항일의식을 일깨웠다. 김규식은 교육가로서뿐만 아니라 국권회복을 위한 계몽활동도 병행하는 ‘청년운동가’로서 명성을 날렸다.‘105인사건’으로 국내 활동이 여의치 않자 1913년 상하이로 망명했다. 12월에는 신규식과 박달학원을 설립하여 한인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며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이듬해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즈음하여 몽골 울란바토르에 군관학교 설립을 계획했다. 설립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동분서주하였으나 실행되지 못했다. 국내에 있던 아내가 외몽골에서 가족과 함께 생활하다가 폐병으로 사망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1917년 7월에는 김성(金成)이라는 이름으로 ‘대동단결선언’에 참여하며 국내외 독립운동 세력의 통합과 단결을 촉구하였다. 김규식은 독립운동가로서 다양한 이명을 사용하기로도 유명하다. 영원한 동반자 김규식과 부부가 되다한편 김순애는 상하이를 거쳐 난징 명덕여자학원에서 수학했다. 재학 중 형부 서병호의 중매로 평생 동지가 될 김규식과 1919년 1월 조촐한 결혼식을 치렀다. 김규식은 김순애의 오빠 김필순과 막역한 친구이자 동지이기도 했다. 망명지에서의 결혼은 운명적이나 뜻을 같이하는 동지적 결합을 의미한다. 김순애는 곧장 김규식과 상하이로 근거지를 옮겨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제1차 세계대전 종전으로 국제정세는 요동쳤다. 여운형·조소앙·김철 등은 상황을 예의 주시하면서 신한청년단을 조직하였다. 부부는 망설이지 않고 가입하여 직접 활동에 나섰다. 이때 파리에서 강화회의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신한청년단은 강화회의 파견 대표로 김규식을 선정하였다. 파견 목적은 일제 식민지 통치 실상의 폭로와 한민족 독립 염원을 세계만방에 알리는 데 있었다.상하이 부두에서 신혼부부는 생과 사를 넘나드는 이별 아닌 이별을 했다. 동시에 김순애는 선우혁·김철 등과 국내로 파견되어 대대적인 독립운동 전개와 독립자금 지원을 요청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1919년 2월 부산에 도착하여 백신영, 대구에서 김마리아, 광주에서 김필례, 서울에서 함태영, 평양에서 김애희(송죽결사대 김경희의 동생) 등을 만나 파리강화회의에 한국 대표를 파견한 소식을 전하였다. 또한 이에 호응하는 방안으로써 한국인 독립의지를 만천하에 알리는 독립운동을 펼치도록 요청했다. 자신의 임무에 혼신을 다하다김순애는 함태영으로부터 이미 종교계를 중심으로 3·1운동이 계획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러다 잘못되면 파리에 있는 김규식의 사기에 영향을 미칠 것이고, 그러면 민족 대업 완수에 지장이 있을 것”이라는 주장에 따라 3·1운동을 목전에 두고 오빠가 있는 헤이룽장성으로 돌아갔다. 그곳에서 만세시위를 추진하다가 일본영사관에 감금되었으나, 중국인 관원의 도움을 받아 상하이로 무사히 탈출했다.김순애는 조국독립에 여성 참여를 독려하기 위한 일환으로 이화숙·이선실·오의순·박인선 등과 함께 대한애국부인회를 조직했다. 회장으로 피선된 그녀는 선전활동과 독립자금 모금에 전력을 기울였다. 또한 서병호·이희경·안창호 등과 대한적십자사를 조직하여 독립전쟁에 시급한 현안인 간호원 양성과 임시정부의 국제적인 위상을 강화하고자 했다. 이듬해 부설기관인 간호원양성소에서 간호원을 배출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김순애는 김규식이 파리로 떠난 후 그의 장남인 김진동을 장자커우에서 데려와 정성을 다해 양육하며 절친한 사이가 되었다.한편 파리강화회의 대표로 참석한 김규식은 파리한국통신부를 개설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외무총장으로서 한국독립에 관한 청원서와 「한국독립과 평화」라는 홍보물 등을 배포했다. 이러한 대표단의 활동에도 불구하고 열강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 한국인의 요구를 철저히 외면했다. 김규식은 파리주재 외교관을 초청하여 한국인의 독립 열망을 알렸다. 그러나 결국 파리위원부 임무를 이관룡에게 위임하고 미국을 거쳐 상하이로 되돌아왔다. 미국에서는 순회강연회 등을 통해 막대한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국제관계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다김규식은 태평양회의와 극동피압박민족대회 대표 파견에 적극적이었다. 민족대회에는 총 144명이 참가하였는데, 이중 한국인이 50여 명이나 되었다. 김규식은 레닌을 만나 한국독립운동 지원을 약속받았으나, 레닌 사망과 국제정세 변화로 성공하지 못했다. 한중호조사 창립 2주년즈음하여 「3·1정신과 5·4운동정신」을 발행해 한중 연대를 강조하였다. 김순애는 중국에서 효과적인 독립운동 추진을 위해서는 중국과의 연대가 중요함을 알고, 실천하였다. 직접 중국인학교를 찾아가 한중문제를 연설하는 등 중국인 청소년에게 한국이 처한 현실을 널리 알렸다. 1930년대 한중 연대는 이러한 배경과 무관하지 않았다. 미국의원단 방문 시에는 한국부인회를 대표해 한국독립을 호소하였다.다나카저격미수사건으로 상하이에서 미국인 스나이더 부인이 유탄에 맞아 사망하는 유감천만한 일이 발생하였다. 이는 임시정부의 위상을 추락시킬 수 있는 불상사였으나, 김순애는 영문으로 간절한 애도의 뜻과 함께 기념품을 스나이더에게 전달했다. 스나이더는 “고상하고 혁혁한 귀회의 결의를 나는 늘 기억할 것이며, 이를 세상에 알리는 동시에 귀회에 대하여 감사해 마지않습니다”라는 내용의 답장을 보내왔다. 가해자에게 호의와 감사를 보낼 수 있도록 한 외교적 수완은 독립운동사에서 찬란한 빛을 발했다. alt파리평화회의에 파견된 대표단. 앞줄 오른쪽 끝이 김규식(1919) 대동단결만이 독립운동의 초석이다임시정부는 운동노선을 둘러싸고 내홍에 휩싸였다. 민족유일당운동도 온전한 결실을 맺지 못한 채 분열되었다. 김규식은 이념적인 대립을 뛰어넘어 대동단결을 호소했다. 1935년 난징에서 민족통일전선의 5당 통합인 민족혁명당 창당은 그의 노력으로 가능할 수 있었다. 충칭에 안착한 후 김구와 김원봉은 좌우 통합에 합의하여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한 연대와 통합이 이루어졌다. 쓰촨대학에서 후학을 양성하던 김규식은 임시정부에 합류했다. 이어 민족혁명당 중앙위원회 주석으로 선출되었으며, 임시정부 부주석에 취임함으로써 대통합에 성공했다. 이러한 노력은 일제 패망과 함께 해방을 맞이하는 에너지원이 되었다.김순애는 분열된 독립운동 세력의 통합을 위해 대한애국부인회 회장을 사임하고 남편과 같이 임시정부를 유지하는 데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1930년 한국독립당 산하 한인여자청년동맹 결성이나 1943년 한국애국부인회 재건 등은 이러한 목적을 관철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대동단결이 독립운동의 가장 견고한 기반임을 거듭 밝혔다. 「자유한인대회 선언문」에서는 “한국은 마땅히 독립국이 되어야 하고 한민족은 마땅히 자유민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들 부부의 염원은 인류의 보편적 가치인 완전한 자유와 평화에 있었다. alt대한애국부인회 회원들. 왼쪽부터 최선화, 김현주, 김순애, 권기옥, 방순희(1943)]]> Tue, 07 Jan 2020 15:15:17 +0000 37 <![CDATA[대제국 수나라, 살수에서 수장되다 ]]> 글 김종성 역사작가대제국 수나라,살수에서 수장되다 1840년 아편전쟁에서 유럽 열강이 청나라를 꺾은 뒤로, 세계사는 유럽 중심으로 쓰여지기 시작했다. 역사학자이자 경제학자인 안드레 군더 프랑크는 『리오리엔트』에서 “19세기에 유럽 중심적 세계관이 발명되어 전파”됐다는 말로 이 현상을 설명한다. 이렇게 유럽인의 시각으로 역사가 조명되다 보니, 유럽 외부에서 발생한 고대의 위대한 사건들은 현대인들의 주목을 받을 기회가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612년에 고구려가 수나라를 격퇴한 역사적인 사건도 그랬다. alt살수대첩 전시 모형(전쟁기념관 제공) 수나라의 야심 찬 꿈612년에 수나라 양제(수양제)는 고구려 침략군을 두 방향으로 파견했다. 육군은 랴오둥(요동)반도를 지나 평양성으로 향하고, 수군은 산둥반도에서 바다를 건너 평양성으로 가도록 했다. 이때 수군은 육군이 고구려 땅에서 먹을 군량미를 운반했다. 육군은 고구려에 갈 때까지는 각자가 등에 맨 식량을 먹고, 고구려에 도착한 뒤에는 수군이 제공하는 식량을 먹기로 돼 있었다. 그런데 병력 규모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수나라 역사를 기록한 『수서』 ‘양제본기’에 따르면 육군의 전투 병력은 113만이었다. 하지만 “물자를 공급하고 수송하는 인원수는 1배였다”고 한다. 전투병력 113만 외에, 그와 비슷한 규모의 비전투병력이 물자 공급과 수송을 담당했던 것이다. 한편, 수군은 최소 5만에서 10만 명이었다. 그래서 『수서』는 이 병력을 200만으로 부른다. 어찌나 병력이 많았던지, 육군 전체가 출발하는 데만 40일이 걸렸다. 동아시아 최강국인 수나라가 200만이라는 대군을 동원해 국운을 건 일대 모험을 벌인 것이다. 그들이 모험을 감수했던 것은 고구려가 걸림돌이 됐기 때문이다. 수나라의 권위를 인정하고 굴복하라는 요구를 고구려가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다. 서기 304년, 유목민들인 흉노족·선비족·갈족·저족·강족이 북중국을 점령한 뒤부터 중국 대륙은 근 3백 년간 대혼란에 빠졌다. 이를 수습하고 589년에 중국을 통일한 나라가 바로 수나라다. 그런데 수나라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또 다른 과제에 도전했다. 한나라(기원전 202~서기 8년) 때의 영광을 회복하고자 했던 것이다. 한사군이라 불린 네 개의 군을 고조선 땅에 설치한 것에서 나타나듯, 한나라는 이웃나라들을 형식적으로나마 자국 행정구역에 포함하려고 시도했다. 수양제가 대군을 동원해 고구려 점령을 시도한 것은 한사군의 영광을 재현하고 고구려를 자국 행정구역에 편입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수양제의 시도는 무위로 끝났다. 612년의 제1차 침공에 실패한 그는 613년에 제2차 침공, 614년에 제3차 침공을 거듭 감행했지만,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다. 제4차도 계획했지만, 그것은 사전에 포기했다. 막강한 수나라가 이렇게까지 꼬이게 된 것은 612년 제1차 전쟁에서 참패를 당했기 때문이다.  수나라 장군 우중문에게 주는 시수나라의 제1차 침공에 맞서 고구려 영양태왕(고구려 군주의 정식 명칭은 태왕)은 을지문덕에게 육상 방어를 맡기고, 동생인 고건무(훗날의 영류태왕)에게는 해상 방어를 맡겼다. 한편, 적군이 식량을 약탈할 경우에 대비해 백성과 곡물을 주요 지역의 성으로 옮겨두었다. 생활에 지장을 받는 일이기는 했지만, 백성과 귀족들이 중앙정부의 지휘를 잘 따라주었기에 고구려는 침략군에 맞서 총력전을 전개할 수 있었다. 수양제는 자신만만했다. 고구려가 어떻게 나오든 간에 200만 대군을 막기는 힘들 것이라 생각했다. 당연히 자신이 이길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해로를 따라 평양에 도착한 수나라 수군은 고건무의 유인 작전에 휘말려 평양성을 함부로 침입했다. 고구려군이 도읍을 포기한 줄 알고 성내에 들어간 수나라 군대는 곳곳에 매복한 병사들의 공격을 받고 대패했다. 그들이 갖고 온 양곡 수송선도 공격을 받고 침몰했다. 육군이 먹을 군량미가 바닷속에 가라앉은 것이다. 어찌할 수 없게 된 수나라 수군 사령관 래호아는 작은 배를 타고 홀로 도주해 바다에서 대기했다. 수양제의 작전이 틀어지기 시작했다. 수나라 육군도 난관에 봉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육군은 중국대륙과 만주를 가르는 요하를 건넌 뒤 고구려 전방인 요동성을 공격했다. 하지만 완강한 저항에 부딪혀 전투가 장기화됐다. 그러던 중 고구려군이 항복 의사를 밝혔지만, 수나라군의 지휘체계 때문에 이는 실현되지 않았다. 수양제는 현장 지휘관에게 전권을 부여하지 않았다. 그래서 현장 지휘관은 이 사실을 보고하기 위해 황제에게 전령을 파견해야 했다. 요하는 건넜지만 요동성에는 도착하지 않은 수양제에게 보고하러 간 사이 고구려군은 전열을 재정비했고, 항복은 없었던 일이 됐다. 수나라군은 계속해서 요동성에 발이 묶여야 했다. 조급해진 수양제는 돌파구를 모색했다. 별동대 30만을 선발해 평양성을 직공 하는 방안을 생각해냈다. 고구려 전방도 뚫지 못하면서 후방을 기습할 길을 강구한 것이다. 바로 이때부터 명장 을지문덕의 역량이 발휘됐다. 육군 사령관인 그는 본격 전투에 앞서 적진 교란에 나섰다. 대담하게도 홀로 말을 타고 수나라 별동대 군영에 들어갔다. 항복하겠다며 들어가서 수나라 장군 우중문을 만난 그는 병사들이 몹시 지쳐 있다는 사실을 파악했다. 그리고 병사들을 좀 더 지치게 만들 필요성을 절감했다. 을지문덕을 돌려보낸 우중문은 생포하거나 죽이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했다. 전황이 꼬인 상황에서 고구려 사령관이 생포되거나 죽임을 당하면, 전세가 한쪽으로 기울 수도 있었다. 뒤늦게 이를 깨달은 우중문은 병사들을 급파해 “할 말이 있으니 다시 돌아오라”고 을지문덕에게 요청했다. 하지만 을지문덕은 핑계를 대며 사양한 뒤, 후대에 두고두고 남을 편지 한 통을 우중문 부하들에게 쥐어 주었다. ‘여수장우중문시(與隋將于仲文試)’. 우리말로 ‘수나라 장군 우중문에게 주는 시’로 번역되는 이 시는 “신비한 책략은 하늘의 이치를 다했고/오묘한 전략은 땅의 이치마저 다했네/전승의 공로 이미 높고 높으니/만족함을 알고 그대 돌아가기를 원하노라”라는 네 구절로 돼 있다. 할 만큼 한 것 같으니 이제 그만 돌아가라는, 치켜세워주는 듯하다가 조롱으로 끝내는 시다. 시를 받아든 우중문은 흥분을 참지 못했다. 30만 대군을 동원해 을지문덕 추격에 나섰다. 을지문덕은 조금 싸우다가 곧바로 도주하는 방식으로 적군을 계속해서 남쪽으로 유인했다. 하루에 일곱 번씩이나 전투하다가 달아난 적도 있었다. 수나라 군대의 보급선이 길어지도록 유도한 것이다. 을지문덕을 쫓는 데 급급했던 우중문은 살수(청천강)에서 배를 타고 강을 건넌 뒤 평양성까지 다다랐다. 그제야 군량미 문제를 걱정하게 된 그는 회군을 결정했지만, 이미 너무 늦은 뒤였다. 우중문이 꼬리를 보이자 을지문덕은 별동대를 추격하는 한편, 특공대가 수나라 군대를 앞질러 살수에 가 있도록 했다. 모래주머니로 살수의 강물을 막아놓고, 수나라 군대가 타고 갈 선박들을 치워버리기 위해서였다. 살수에 도착한 우중문은 선박이 없어진 사실을 알았지만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강에 물이 별로 없어 건너는 데 문제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을지문덕 부대에 쫓기면서 강이 말라버린 이유를 깊이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래서 걸어서 도강하기로 결심했다. 이 부대가 강 중간쯤 건넜을 때, 을지문덕은 막았던 강물을 탁 틔웠다. 거센 강물이 수나라 군대를 뒤엎었고, 그들의 전열은 흐트러졌다. 이 틈을 놓치지 않고 고구려군이 총공격을 개시했다. 처음에 30만이었던 수나라 별동대 중에서 전투 후 살아남은 숫자는 3천도 안 됐다. 30만 병력을 살수에서 잃은 수양제는 전의를 상실하고 철군을 명령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꼬이기 시작한 수나라는 6년 뒤인 618년, 결국 멸망했다. 중국 통일 29년 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진 것이다. 한나라의 영광을 재현해 동아시아를 자국 행정구역에 편입시키고자 했던 수나라의 꿈은 영양태왕·을지문덕·고건무와 고구려인들의 총력전에 부딪혀 살수에서 수장되고 말았다. 당시 동아시아는 중동의 오리엔트 문명권에 이어 세계 2위 문명권이었다. 세계사가 공정하게 기록됐다면, 세계 2대 문명권에서 발생한 이 위대한 전쟁을 세계인 대다수가 모를 수 없었을 것이다. ]]> Tue, 07 Jan 2020 15:16:49 +0000 37 <![CDATA[45일간의 짧은 전쟁 그 역사의 흔적 고립무원의 남한산성 ]]> 글·사진 임운석 여행작가45일간의 짧은 전쟁그 역사의 흔적고립무원의 남한산성 고립되어 구원을 받을 데가 없다는 뜻의 고립무원(孤立無援). 우리는 삶을 통해 고립무원과 같은 경우를 시시때때로 경험한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문제 한가운데 놓였을 때, 내 생각의 틀에 갇혔을 때, 혹은 억울한 누명에 휘둘릴 때도 그렇다. 인간의 삶이란 고립무원의 연속인지도 모를 일이다. 380년 전에도 구원의 손길이 전무했던 곳이 있었다. 병자호란(1636.12.~1637.01.)의 중심지였던 남한산성이다. 혹독한 추위 속에서 삶과 죽음이 반복되는 45일의 항쟁. 그 능멸과 치욕의 순간들이 지금은 눈에 뒤덮였지만, 역사는 우리네 삶을 통해 반복되고 있다. 소설 『남한산성』과 함께 그곳으로 문학기행을 떠나본다.  alt남한산성 행궁의 정문인 한남루 서울의 마지막 보루, 난공불락의 요새 남한산성남한산성을 배경으로 역사를 재조명한 작품들은 많다. 그 가운데 소설 『남한산성』은 ‘우리말을 예술로 승화시켰다’라고 평가받는 김훈 작가의 소설이다. 김훈 작가는 독자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첫 장을 넘긴 이후부터 마지막 장까지 책을 손에서 놓을 수 없을 만큼 몰입시켰다. 병자호란과 남한산성에서의 항쟁, 익히 잘 알고 있는 역사적 사실이다. 그럼에도 김훈 특유의 냉혹한 문체는 독사에게 물려 온몸에 독이 퍼지는 것처럼 가슴을 아프게 했다. 소설 속에서 역사는 이미 끝난 과거가 아니었다. 역사의 톱니바퀴는 지금도 여전히 회전하면서 현재를 지배한다. 미래 또한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예로부터 경기도에는 수도 서울을 방어하는 네 곳의 요새가 있었다. 그중 하나가 동쪽 요새인 광주의 남한산성이다. 남한산성이 자리한 남한산(해발 535m)은 여러 지역에 걸쳐 있다. 넓게는 서울 송파구와 경기도 하남시, 좁게는 광주시와 성남시를 연결한다. 약 7km에 이르는 남한산성은 대부분 광주시 남한산성면 산성리에 속한다. 서울에서 약 24km 떨어진 곳이다. 광주시는 약 80%가 산이며 평야는 20%에 지나지 않는다. 산골짜기에는 물이 많아 하천을 형성하였는데 물길은 한강으로 흘러간다. 남한산성은 삼국시대 패권을 결정짓는 주요 거점이었다. 백제 시조 온조대왕(미상~28)의 사당인 숭열전이 산성에 있는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 민족은 남한산성에서 여러 차례 국난을 이겨나갔다. 고려의 대몽항쟁이 대표적이다. 조선시대 들어서는 인조(1595~1649)가 남한산성을 대대적으로 수축했다. 집권 2년 차인 1624년부터 1626년의 일이다. 그 결과 성의 둘레가 6,297보, 옹성 3개, 대문 4개, 암문 16개, 우물 80개 등에 달했다. 왕이 거처할 227칸의 행궁도 함께 지었다. 조선의 역대 왕들은 여주에 있는 영릉에 참배 갈 때 남한산성 행궁에 머물며 군사훈련을 시키기도 하였다. 이처럼 조선시대 남한산성은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도성을 지키는 보장지로 인식되었고, 유사시 예비 수도 역할을 담당하였다. 남한산성은 병자호란을 통해 제 역할을 다했다. 병자호란 당시 왕을 비롯한 조정 대신들이 남한산성에 피신하여 청의 13만 대군에 맞서 45일간 항전하였다. 소설에서는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그해 겨울은 일찍 와서 오래 머물렀다. 강들은 먼 하류까지 옥빛으로 얼어붙었고, 언 강이 터지면서 골짜기가 울렸다. 그해 눈은 메말라서 버스럭거렸다. 겨우내 가루눈이 내렸고, 눈이 걷힌 날 하늘은 찢어질 듯 팽팽했다. 그해 바람은 빠르고 날카로웠다. 습기가 빠져서 가벼운 바람은 결마다 날이 서 있었고 토막 없이 길게 이어졌다. 칼바람이 능선을 타고 올라가면 눈 덮인 봉우리에서 회오리가 일었다. 긴 바람 속에서 마른 나무들이 길게 울었다. 주린 노루들이 마을로 내려오다가 눈구덩이에 빠져서 얼어 죽었다. 새들은 돌멩이처럼 나무에서 떨어졌고, 물고기들은 강바닥의 뻘 속으로 파고들었다. 사람 피와 말 피가 눈에 스며 얼었고, 그 위에 또 눈이 내렸다. 임금은 남한산성에 있었다.” 김훈의  『남한산성』 중(학고재 출판, 2007) alt눈 덮인 산 능선에 칼바람이 숨죽이고 몸을 숨긴 것 같다alt암문은 비밀스러운 문으로 적의 눈에 띄지 않게 만들어졌다. 사진은 서암문이다 alt성곽 뒤로 남한산 능선이 앙상한 공룡의 등뼈처럼 흘러간다alt추위에 봄이 더 기다려지는 것은 비단 나무만이 아닐 것이다 새하얀 눈으로는 치욕의 역사를 덮을 수 없다 남한산성 트레킹은 모두 5개 코스다. 각자 체력이나 시간 여건에 따라 선택하면 된다. 1코스는 문화재와 성곽길을 즐기기 좋은 코스로, 3.8km 구간에 80분 정도 소요된다. 산성종로(로터리)에서 출발~북문~서문~수어장대~영춘정~남문을 거쳐 산성종로(로터리)로 복귀한다. 2코스는 가장 짧은 구간이다. 산성종로(로터리)에서 영월정~숭열전~수어장대~서문~국청사를 지나 산성종로에 이르는 2.9km에 60분 남짓 걸리는 구간이다. 5코스는 성곽을 일주하는 코스다. 7.7km 구간에 3시간 30분 이상 소요된다.모든 코스의 시작 지점이라 할 수 있는 산성종로(로터리)는 언제나 붐빈다. 주변에 식당이 많다. 수도권의 대표적인 나들이 명소로 알려진 까닭이다. 길을 나서서 처음 도착한 곳은 북문이다. 정조 3년(1779) 성곽을 개보수한 뒤 전승문(全勝門)이라 하였다. 다시는 병자호란과 같은 치욕을 당하지 말자는 뜻이다. 북문 성곽을 따라 서문으로 가는 길은 1km가량 걸린다. 길이 가파르다. 특히 눈이 내린 다음 날에는 아이젠이 필수다. 성곽 아랫길로 가면 좀 더 수월하다. 서문 못미처 성 밖으로 돌출된 옹성이 있다. 옹성에 서면 한강과 하남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이어 우익문(右翼門)이라 불리는 서문에 도착한다. 인조가 이 문을 통해 삼전도에서 청에 무릎을 꿇었다. 성곽은 험준한 주변 산세에 기대어 튼튼하게 지어졌다. 성벽은 종이 한 장도 허락하지 않을 기세다. 인조가 제대로 몸을 숨긴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하지만 추위와 배고픔, 아니 그보다 더 무서운 고립감과 공포감은 임금을 성 밖으로 끌어내고야 말았다. 성문지기처럼 서 있는 느티나무가 쓸쓸하고 애잔해 보이는 것은 삼전도의 눈물을 알기 때문일까. 발걸음을 재촉해 서장대라 불리는 수어장대에 이른다. 인조 2년(1624) 남한산성을 수축할 당시 4개의 장대가 있었는데 현재 유일하게 남은 장대다. 45일간의 항전 기간 중 인조가 이곳에서 직접 군사를 지휘하였다고 전한다. 당시에는 단층 누각이었으나 영조 27년(1751)에 2층으로 증축하고 ‘수어장대’라는 편액을 걸었다. 성곽을 따라 1km 남짓 걸어가면 지화문(至和門)인 남문이다. 남한산성의 사대문 중 규모가 가장 웅장하다. 병자호란이 닥치자 인조가 서울을 버리고 이 문을 통과해 성으로 들어갔다. 남한산성은 난공불락의 요새임이 분명하다. 축조 이래 단 한 번도 적군을 안으로 들이지 않은 철옹성이다. 다만 시대를 읽지 못하는 위정자들이 화를 자초하여 숨어들었고 겁에 질려 스스로 나왔을 뿐. 역사의 오물은 눈으로 덮인 듯 보이지만, 봄이 오면 금세 드러나고 만다. 고립무원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alt인조가 청에 항복하기 위해 나갔던 우익문alt인조가 군사를 지휘했던 수어장대 alt다시는 치욕스러운 역사를 되풀이 하지 말자는 뜻으로 지은 전승문 편액alt인조가 한양을 버리고 남한산성으로 입성한 지화문 ]]> Tue, 07 Jan 2020 15:18:23 +0000 37 <![CDATA[하늘을 나는 독립운동가들 한인비행사양성소의 독립운동 ]]> alt]]> Fri, 31 Jan 2020 17:29:53 +0000 38 <![CDATA[독립의 꿈을 싣고 하늘을 날다 ]]> 글 홍윤정 심산김창숙기념관 학예실장독립의 꿈을 싣고하늘을 날다윌로우스 비행학교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인 1920년 2월 20일, 미국 캘리포니아 윌로우스에서 한국인들에게는 참으로 벅찬 역사적 사건이 일어났다. 일본 제국주의에 조국을 빼앗긴 한국인들이 이역만리 미국 땅에서 한국인을 위한 비행학교를 설립한 것이다. 당시 미주 한인들은 이 학교의 이름을 “비행기 학교”라고 불렀고, 한국독립운동사는 최초의 한인비행사양성소라고 표현해왔다. 비행학교는 상하이의 『독립신문』, 『윌로우스 데일리 저널』 및 일본의 사찰 기록, 독립운동가의 증언 등을 토대로 연구가 진행되어 올해 창군 71년을 맞는 공군의 기원으로 자리매김했다. 이국땅에 세워진 한국 최초의 비행학교비행학교의 설립은 이역만리 미주 한인들뿐만 아니라 식민치하에 있던 한국인들의 투철한 항일정신과 민족주의정신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독립운동이다. 비행학교는 20세기 초 제1차 세계대전을 통해 향후 전쟁에서는 비행전투력이 승패를 좌우할 것이라는 전 인류적 인식을 수용한 미주 한인들이 일본과의 독립전쟁에서 반드시 승리하여 빼앗긴 조국을 회복하겠다는 염원을 실현시킨 것이었다. 미주 한인사회는 19세기 가뭄과 국내 정치의 혼란 속에서 정든 고향과 조국을 떠나 새로운 미지의 세계로 나아가야 했던 이주민들을 근간으로 하고 있다. 이들은 조국으로부터 보호받지 못했으며, 국외에서 1905년 외교권 상실의 직격탄을 맞아 국망의 수치를 느끼는 한편 자신을 지켜줄 조국의 간절함을 체험했다. 이러한 이주 한인들의 조국회복을 위한 헌신의 결정체가 바로 이 비행학교인 것이다.미주의 한인들은 1920년대 미국 사회의 엄격한 민족적 차별을 견뎌내며 자주적으로 일본과의 독립전쟁에 투입될 한국인 전투 비행사, 즉 독립공군 양성을 위한 비행학교를 설립했다. 비행술은 지금도 그러하지만 당시에는 인류 문명 최첨단 그 자체였다.1920년대 미국 곳곳에서 사설 비행학교가 운영되었는데, 윌로우스의 ‘비행기 학교’도 그중 하나였다. 우리는 종종 역사에서 영웅을 만나곤 한다. 비행학교 설립과 운영에도 그러한 영웅들이 있다. 학교 설립에 가장 큰 공을 세운 인물은 이민으로 조국을 떠나야 했던 미주 한인 전체였다. 그리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군무총장으로 비행학교 설립에 군사전문가로서 역량을 발휘한 노백린 장군, 학교의 부지와 비행기 및 운영자금을 조달했던 라이스 킹 김종림, 대한인국민회 총무로 비행학교 운영을 책임졌던 곽림대와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아낌없는 지원을 보냈던 국무총리 이동휘, 노동국 총판 안창호도 비행학교의 영웅들이다. 그러나 이들의 뛰어난 리더십과 통찰력도 미주 한인사회라는 기반이 없었더라면 한국인을 위한 한국인에 의한 최초의 비행학교 설립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20년을 독립전쟁 원년으로 선포하고 일본과의 독립전쟁에서 승리해 국권을 회복하겠다는 의지를 표방했다. 그리고 그해 2월 20일 독립전쟁의 승패를 좌우할 독립공군을 양성하는 비행학교가 독립운동이 이루어지던 해외 한인사회 중 국내와 물리적으로 가장 먼 미주에 실현된 것은 여러 가지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3·1운동 이후 국내외 각지에 수립된 임시정부는 9월 11일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통합되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각지의 독립군을 군대로 수용했다. 그리고 육군 안에 비행대를 편성하여 선전 활동에 투입하고자 했다. 1919년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실질적 운영을 맡았던 안창호의 일기를 통해 비행기 구입 등에 대한 임시정부의 의지를 확인할 수 있다. 윌로우스의 비행학교 설립이 구체화될 때 임시정부의 국무총리는 이동휘였는데, 대통령 이승만이 미국에 머물고 있었기 때문에 국무총리가 임시정부에서 실질적 지도력을 발휘했다. 국무총리 이동휘와 노동국 총판 안창호는 상하이에서, 군무총장이던 노백린은 윌로우스에서 군사전문가로서 비행학교 설립에 관여하였다. 비행학교는 윌로우스 한인 300명을 편제한 군대와 함께 운영되었으므로, 비행학교와 군단은 독립전쟁 원년을 표방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미주 한인사회 기반 위에 설립한 군대로 해석할 수 있다. alt최초의 한국인 비행사 6인과 노백린(1920)독립전쟁에 대한 노백린의 신념 노백린은 일본과의 독립전쟁에서 승리하는 것만이 독립을 쟁취하는 것이라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1919년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총장에 선임되었을 당시에는 임시정부가 수립된 상하이가 아닌 하와이에서 독립군양성에 매진 중이었다. 군무총장 선임 후 임시대통령 이승만을 만나기 위해 미국 본토로 이동했다. 노백린은 1895년 우리나라 최초의 국비유학생으로, 일본육군사관학교에서 수학하고 대한제국 군인으로 복무한 현장경험을 가진 군사전문가였다. 그는 숭무주의에 입각하여, 우리나라와 중국 등 동양의 둔전제적 군사제도에 관한 전문가로서 의무병제를 주장해 왔다. 유학 시절 유학생 잡지 『친목회회보』에 중국의 둔전제에 관한 소논문을 실었고, 『서우』에도 의무병제를 다룬 프랑스 역사서 「애국정신담」을 번역·연재하여 의무병제에 대한 신념을 피력했다. 독립군 양성에도 둔전제와 의무병제를 적용, 윌로우스에서 한인 전체를 군사 조직으로 편제하고 군사훈련을 실시했는데, 이를 지휘할 사관과 비행사를 양성하는 곳이 비행학교였다. 노백린은 군무총장으로 상하이에 부임한 이후에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한인 전체를 군대로 편성해야 한다고 주장하는등 독립전쟁의 근간은 의무병제여야 한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진 군인이자 대한민국 임시정부 관료였다. 비행학교 운영과 설립에 관여했던 곽림대의 회상에 의하면 1920년 1월 하와이에서 미주 본토로 이동했던 노백린을 만나 함께 윌로우스에 가서 군단과 비행학교를 설립했다고 한다. 이를 통해 노백린은 일본과 ‘거국일치 결사전’을 치르려 했고, 노백린을 따라 윌로우스 비행학교에 입학한 항생들의 전언에 따르면 그의 ‘거국일치 결사전’의 내용은 비행기를 타고 일본 황궁으로날아가는 것이었다. alt대한민국 임시정부군무총장 노백린alt비행학교 운영을 담당한 대한인국민회 총무 곽림대비행학교의 운영과 한인들의 지원 1920년 2월 20일 노백린, 김종림, 곽림대 등은 윌로우스와 미주 한인사회의 지원으로 독립군단(일명 호국독립군단, 노백린군단)과 비행학교를 설립하고 실제로 수업을 시작했다. 2월 캘리포니아 교육국으로부터 퀸스디스트릭트 건물을 빌렸다. 해당 학교는 이민자를 위한 학교였으나 당시에는 폐교된 상태였다. 6월에는 구입한 2대의 비행기가 비행학교에 도착했다. 비행학교에서 사용한 비행기는 미국 스탠다드사의 스탠다드J-1기종이었다. 이는 1916년부터 생산된 최첨단 훈련기종으로 당시 6,000불 정도를 호가하던 비행기였다. 비행기 구입과 학교 부지 등 운영자금은 김종림이 부담했고, 대한인국민회에서도 매달 600불씩 군단과 비행학교를 지원했다. 따로 후원을 위한 모금도 진행했다. 군단과 부지는 당시 한인사회에서 한국인은 토지를 소유할 수 없었기 때문에 김종림이 빌린 40에이커의 부지에서 시작되었다. 김종림은 군단과 비행학교 설립을위해 40에이커의 부지 외에 20,000불의 초기 자금을 대고, 매달 3,000불의 군단과 학교 운영자금도 지원하였다. 윌로우스 비행학교는 레드우드 비행학교의 교관이었던 프랭크 브라이언트를 초빙하고, 한국인 비행사이용선, 오림하, 이초, 노정민, 박낙선, 우병옥을 교관으로 채용해 학생들에게 교련, 전술과 전략, 비행술, 비행기 수리와 관리, 무선전신학, 영어 등을 가르쳤다. 군무총장 노백린은 군단과 비행학교가 설립되던 2월부터 상하이의 국무총리 이동휘에게 미주의 군대 설립과 비행학교 준비 상황을 알리고 지휘를 받았다. 김종림 등 한인들은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캘리포니아에서 쌀농사로 부를 축적했다. 그것이 비행학교를 운영하는 재정적 기반이 되었다. 박용만과 노백린 등 군사전문가들은 미주에서 독립군을 양성해왔다. 1920년 초 3·1운동으로 고무된 캘리포니아 한인들은 쌀농사 성공으로 마련된 경제적 토대 위에 고조된 독립운동의 열기를 모아 독립군 양성의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마침 상하이로 부임하는 길에 캘리포니아를 들른 노백린을 통해 군단 설립이 구체화 되었다. 독립운동사에서 한인사회를 바탕으로 독립군을 양성하고, 독립군을 이끌 사관학교를 설립하는 것은 무장독립투쟁의 일반적인 경향이었다. 윌로우스 군단은 한인 300여 명을 군사조직으로 편제해 군사교육을 실시했다. 비행학교는 비행사를 양성하기 위한 사관학교였다. alt윌로우스 비행학교 현재 모습alt윌로우스 비행학교 활주로 현재 모습폐교 후에도 이어진 독립전쟁의 꿈 『신한민보』에 의하면 노백린이 상하이로 떠난 후 윌로우스 군단은 해체되고, 비행학교는 비행가양성사와 비행가양성소로 계승되어 이듬해 4월경까지 유지된 것으로 보인다. 임시정부의 군무총장이자 군사전문가인 노백린이 편제했던 군단이 노백린 부재 후 바로 폐쇄되고 비행기학교만이 비행가양성사와 비행기양성소로 계승되었다는사실은 당시 윌로우스 한인사회에 노백린 외에 군사전문가가 없었음과 남은 한인들도 군단을 유지할 의지와 재정적 기반을 갖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김종림과 곽림대 등은 비행가양성사와 비행사양성소를 통해 15명의 청년에게 비행술을 교육했다. 41명의 사원을 갖춘 비행사양성소는 졸업자들에게 임시정부 비행사로 1년 이상 근무하게 하는 의무복무제도를 적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비행사양성소는 존립기한으로 정했던 2년을 제대로 채우지 못하고 해산된 것으로 보인다. 『신한민보』에 미주 한인들에게 학생들의 비행 연습을 위한 비행기 수리와 재정적 지원을 호소하는 기사들이 게재되었다. 그러나 쌀농사 실패로 경제적 파산을 맞은 한인사회는 비행기 수리비 등을 마련하지 못했고, 비행사 지망생이었던 박희성의 추락사고가 발생하는 등 윌로우스 한인사회는 비행사양성을 위한 기반을 상실하고 말았다. 그럼에도 비행사를 지망했던 한국청년들은 대한인비행가구락부(K.A.C.,Korean Aviation Circle)와 청년혈성단, 한국독립공군 등 또 다른 조직과 함께 독립전쟁에 비행사로 참여할 꿈을 계속해서 키워나갔다. 그리고 이들 중 박희성과 이용근은 1921년 7월 18일 임시정부의 육군비행병 소위로 임관되었고, 김자중은 국제비행사가 되어 동삼성 장작림의 항공대에서 활약하였다. 1920년 2월 20일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미국 캘리포니아주 윌로우스에서 우리 한인들은 극심한 민족차별을 견뎌내면서 독립공군을 양성해 독립전쟁에서 승리하여 조국을 되찾겠다는 의지를 보여주었다. 그들은 조국에서 살 수 없어 조국을 떠난 이민자들이었지만, 조국의 존재가 누구보다 간절한 한국인들이기도 했기에 조국 광복의 꿈을 위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독립공군 양성에 쏟아부었다. 그 헌신으로 풍요로움을 누리는 우리는 그들이 꿈꾸던 조국의 미래를 실현해 나가고 있는지 자문해 보아야할 때라고 생각한다.]]> Fri, 31 Jan 2020 17:18:48 +0000 38 <![CDATA[친일파 제정 음악상·문학상· 학술상 등에 대한 이유 있는 항변 ]]> 글 이계형 국민대학교 특임교수친일파 제정 음악상·문학상·학술상 등에 대한이유 있는 항변 1945년 우리 민족은 광복을 맞았지만, 독립운동은 끝나지 않았다. 여전히 미완으로 남은 사건, 해결되지 못한 문제, 기억해야만 하는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끝나지 않은 독립운동은 독립운동사를 과거에 머문 역사가 아닌 현재의 문제로 다루며, 오늘도 신문 한쪽을 차지하고 있는 독립운동 및 일제강점 이슈를 소개한다.친일파의 이름을 딴 상과 수상 거부 2020년 1월, 김금희 작가의 이상문학상 거부 소식은 문학계에 신선한 충격을 안겨주었다. 우수상을 받는 조건으로 작품 저작권을 출판사에 3년 동안 넘긴다는 내용의 계약서를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작가의 노고와 권리를 존중하지 않는 문학상은 거부하겠다는 뜻에서였다. 마찬가지로 우수상을 받은 최은영·이기호 작가도 이에 동참했다. 2013년에는 현대문학상수상자 황정은 작가(소설 부문)와 신형철 문학평론가(평론 부문)가 수상을 거부해 파문이 일었다. 이는 『현대문학』 2013년 9월호에 박근혜 대통령의 수필이 실리고, 일부 작가들의 글 게재가 거부되자 젊은 문인들이 해당 문예지에 기고를 거부한 연장선에서 불거진 것이었다. 이러한 문학상 거부는 쉽지 않은 결정인 만큼 그들의 용기가 문학상을 더 나은 방향으로 개선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와 더불어 우리가 한 번쯤 생각하고 관심을 가져야할 문제가 있다. 친일파를 기리기 위해 제정된 문학상·학술상·음악상 등에 관한 이야기다. 사회의 비판 여론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이러한 상들이 버젓이 수여 되고 있다. 동인문학상·조연현문학상·인촌상·용재학술상·난파음악상 등이 대표적이다. 김동인·조연현·김성수·백낙준·홍난파 등의 인물들과 관련이 깊은 상이다. 그리고 이들은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가 인정한 친일파들이다.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는 2005년 5월부터 2009년 11월까지 일제강점기 아래 친일반민족행위와 관련한 국내외 자료를 수집하고 친일반민족행위 조사 대상자를 선정해 조사하는 한편 친일반민족행위 관련 사료를 편찬하는 활동을 했던 대통령 소속 위원회였다. 위 인물들은 친일 경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해방 후 친일 청산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가운데 정부로부터 국민훈장·문화훈장, 심지어대한민국 공로 훈장을 받기도 하였다. 가끔 이들 상을 거부한 인사가 나와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기도 했지만, 그때 뿐 행사는 계속 이어져 오고 있다. 가장 먼저 지적하고 싶은 것은 앞에서 언급한 상들 가운데 가장 권위 있다고 평가받는 인촌상이다. 오랫동안 ‘인촌상 수상자’라고 하면 대한민국 ‘문학을 대표하는 인물’로 인식되었다. 상을 받은 대부분의 인사도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러나 인촌 김성수는 친일 행적이 인정되어 지난 2018년 2월 독립운동가 서훈까지 취소된 인물이다. ‘인촌로’라는 이름의 도로명을 ‘고려대로’로 바꾸는 일도 있었다. 그런 만큼 인촌상의 위상을 높게만 볼 수 있는지 의문이다. 소설가 최인훈은 ‘어디까지나 공적인 이유’라고 했으나, 2001년 인촌상 문학 부문 수상을 거부했다. 몇 해 전에는 인촌상 수상자가 받은 상금 일부를 시민단체에 기부했다가 반납을 받기도 했다.또한, 『조선일보』는 사회의 비판적 여론에도 불구하고 동인문학상을 계속 주관하고 있다. 이에 작가 황석영·공선옥·고종석 등은 동인문학상 후보에 오른 것 자체에 이의를 제기하며 거부하였다. 물론 이는 김동인의 친일 문제보다는 조선일보사의 신문 보도 성향과 굴욕적인 선정 방식에 기인한 것이었다. 이외에도 2013년 9월 작곡가 류재준은 난파음악상 수상을 거부하였다. 그는 “친일 시비에서 자유롭지 못한 음악가의 이름으로 상을 받기도 싫었고 이전 수상자들중 존경받는 분들도 많지만,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분들도 일부 포함되어 있어 이 상의 공정성과 도덕성에 회의를 느꼈다”는 이유를 들었다. 용재학술상의 경우, 수상자로 선정된 성균관대 모 교수가 백낙준의 친일행적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돌연 선정을 취소하는 해프닝도 벌어졌다. 반대로 수상 제도 자체가 폐지되기도 하였다. 중앙일보사는 서정주가 친일 논란에 휩싸이고 민족문화협회와 많은 문인의 거센 항의가 잇따르자, 2001년부터 수상해 오던 미당문학상을 2017년 폐지하였다. 이들은 “정의를 벗어난 펜은 총보다 무서운 흉기가 되어 민족과 이웃을 겨누게 된다”면서 “인간의 삶을 떠난 문학적 업적이란 존재할 수 없으며 문학만이 역사적 평가에서 예외일 수 없다”고 못 박았다.공로를 기리기보다는 책임을 묻기를 이러한 사회적인 분위기에서도 친일파의 이름을 딴 상을 제정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최근 한국문인협회는 최남선의 육당문학상과 이광수의 춘원문학상을 신설하려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고 포기하였다. 그런데 동서문화사가 돌연 ‘육당학술상’과 ‘춘원문학상’을 제정하였다. 이외에도 한국일보사의 김기진 팔봉비평문학상, 통영시가 유치환을 기리기 위해 만든 청마문학상, 전라북도 군산시와 채만식기념사업회가 제정한 채만식문학상도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이들의 주장은 친일 행적 때문에 문학적 공로가 가려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친일파의 전형적 자기변명의 논리이다. 이외에도 살기 위해 어쩔 수없이 그랬다는 생계론,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친일을 했다는 식의 전민족범죄론, 유능한 인재를 친일로 매장하지 말고 다시 쓰자는 인재론 등의 친일 변론이있다. 공로가 있다 하여 친일 행적이 결코 정당화될 수는 없다. 이들을 기리는 상은 친일과 반민족 행위를 정당화시키는 일이다. 상을 고집하는 단체도 문제이지만, 계속해서 수상을 거부하는 인사들이 없다는 점이 안타깝다. 1944년 8월 나치 치하의 파리가 해방된 뒤 프랑스 임시정부는 부역자 숙청을 시작했다. 그러나 대상과 범위를 둘러싸고 격론이 벌어졌다. 특히 문인과 언론인의 처벌을 놓고는 관용론과 청산론이 충돌했다. 결국 청산론이 힘을 얻어 나치 동조 문인과 언론인 7명이 처형되었다. 소설가·시인·비평가·극작가·기자였던 젊은 천재 로베르 브라지야크도 그중 한 명이었다. 그의 재능을 아낀 문화계 인사들이 탄원서를 냈지만 그의 죽음을 막을 수는 없었다. 글 쓰는 문인과 언론인에게 더 엄중한 책임을 물은 것이다. 용기 있는 문인들이 ‘정의를 벗어난 펜이 총보다 무섭다’고 한 말이 다시 떠오른다.]]> Fri, 31 Jan 2020 17:34:54 +0000 38 <![CDATA[신사참배 강요를 단호히 거부한 선교사 조지 새넌 맥큔 ]]> 글 독립기념관 전시부신사참배 강요를 단호히 거부한 선교사조지 새넌 맥큔 alt조지 새넌 맥큔(George Shannon McCune, 윤산온*, 尹山溫)1873.12.15. ~ 1941.12.04.미국건국훈장 독립장(1963)* 조지 새넌 맥큔은 맥큔 또는 맥윤(McCune)이라는 영어 발음에서 윤(尹)을,새넌(Shannon)이란 영어 발음에서 산온(山溫)을 선택해 윤산온(尹山溫)이라는한국 이름을 사용하였다. 독립기념관은 국가보훈처 및 광복회와 공동으로 조지 새넌 맥큔을 2020년 2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조지 새넌 맥큔은 선교사로 입국해 3·1운동을 지원하고, 숭실전문학교 교장으로서 학생들에 대한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를 단호히 거부하였다. 한국에 선교사로 들어와 일제 무단통치의 실상을 폭로하다조지 새넌 맥큔(George Shannon McCune, 윤산온, 尹山溫)은 1873년 미국 펜실베니아주에서 태어났다. 파크대학을 졸업하고 미주리 주립대학에서 신학을 전공한 후 1905년 5월에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05년 9월 아내 헬렌 베일리 맥아피(HelenBailey McAfee)와 함께 선교사로 한국에 들어왔다. 평양에 자리를 잡은 그는 한국어를 공부하는 한편 숭실학교 교장인 윌리엄 베어드(William M. Baird)를 도와 한국인 학생을 가르치며 숭실학교와 교회에서 활동하였다. 1909년 9월 평안북도 선천의 신성학교 교장으로 부임하여 학생들의 자립과 자조를 위한 실업교육을 강화하였다. 그러던 중 1911년 일제가 평안도와 황해도 일대의 독립운동 세력을 탄압하기 위해 조작한 ‘105인 사건’에 자신과 신성학교 학생·교직원등이 연루되었다는 혐의를 받고 감시대상이 되었다. 맥큔은 이 사건을 미국 선교 본부에 보고하고, 일제의 무단통치 실상을 해외 언론에 알려 재판이 일제 의도대로 진행될 수 없게 하였다. alt‘105인 사건’ 판결문(필사본)(1912.09.28.)3·1운동을 지원하고 신사참배 강요를 거부하다 맥큔은 3·1운동이 일어나자, 만세운동에 참여한 학생들을 자신의 집으로 피신시키고 일제의 가택 수색을 거부하며 체포되지 않게 보호하였다. 그리고 3·1운동 당시 목격한 일제의 탄압을 미국 The Continent 잡지에 게재하여 일제의 만행을 폭로하였다. 이뿐 아니라 1920년 9월 1일 방한한 미국 의원단에 한국인의 독립 의지를 보이기 위해 선천경찰서에 폭탄을 던진 광복군총영 소속 신성학교 학생 박치의(朴治毅)가 사형 판결을 받자 이를 변호하였다. 일련의 일들을 통해 ‘극단적 배일자(排日者)’로 분류되어 일제의 감시를 받던 맥큔은 잠시 한국을 떠났다가 1928년 다시 돌아와 숭실중학교와 숭실전문학교의 교장직을 겸하였다. 교장으로 재임하던 중 일제가 신사참배를 계속 강요하자 1936년 1월18일 ‘기독교의 교리와 양심상 자신이 신사참배를 할 수 없을뿐만 아니라 학생들에게도 참배를 시킬 수 없다’는 최종 답변을 교육 당국에 제출하고 결국 교장직에서 파면당하였다. 미국으로 돌아간 맥큔은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를 비판하는 강연과 논설 기고 등을 지속하다 1941년 12월 서거하였다. 정부는 이러한 공훈을 기리어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alt맥큔 교장, 숭실학교 교직원 및 학생들(1933,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 제공)alt맥큔 교장과 숭실대학 관악대(1934,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 제공) alt숭실학교 교장 파면 기사(『조선중앙일보』, 1936.01.21., 대한민국신문아카이브 제공)alt맥큔의 편지가 시카고 잡지에 게재된 경위에 대한 기사(『신한민보』, 1919.04.19.) alt]]> Fri, 31 Jan 2020 15:44:14 +0000 38 <![CDATA[신규식의 교육과 독립 ]]> 글 독립기념관 자료부  신규식의 교육과 독립 敎育救國汕盧 申圭植 題贈교육으로 나라를 구하자.산로 신규식 드림 신규식(申圭植, 1880~1922)은 1909년 중동학교 제3대 교장시절 유묵을 남겼다. 유묵은 1995년 그의 손녀사위 김준엽이 독립기념관에 기증하였다. 신규식은 1905년 을사늑약에 분개하여 음독자살을 꾀하다가 시신경을 다쳐 오른쪽 눈이 흘겨보는 것처럼 되자 ‘예관(?觀)’이라는 호를 지어 주로 사용했다. 그러나 여기서는 ‘산로(汕盧)’라는 호를 쓰고 있다. 신규식은 육군무관학교(陸軍武官學校)를 졸업하고 구한국 군인의 신분으로 무력 항일투쟁을 전개하였으며, 무엇보다 인재 양성을 위한 교육을 중시했다.1909년 3월부터 중동야학교(中東夜學校, 중동학교의 전신)의 제3대 교장으로 재직하였다. 중국 망명 후에는 1913년 상하이에 박달학원(博達學院)을 설립하고, 청년들이 중국과 구미의 학교에서 유학할 수 있도록 주선하는 등 독립운동의 중추가 될 인재를 키우고자 했다.이 유묵은 신규식의 사위 민필호를 거쳐 손녀사위 김준엽에게 전해진 것이다. 민필호는 1911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신규식의 도움을 받아 박달학원 등에서공부했다. 신규식의 비서로 활동하면서 신규식의 외동딸 신명호와 결혼했다. 1940년 5월부터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김구의 판공실장으로 활동했으며,그의 장녀인 민영주도 판공실에서 근무했다. 학병이던 김준엽은 일본군부대를 탈출해 충칭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왔다. 1945년 4월 시안에서 한국광복군 제2지대장 이범석의 부관으로 미국의 전략첩보국(OSS: Office of Strategic Service)의 군사훈련을 받았다. 이때 이범석의 비서로 제2지대에서 함께 활동했던 민영주와 결혼했다. alt신규식의 유묵 44.4×46.8 김준엽 기증]]> Fri, 31 Jan 2020 16:24:06 +0000 38 <![CDATA[비상 ]]> 비상1920년 낯선 이국땅에 한인비행사양성소가 문을 열었습니다. 그들은 하늘을 나는 꿈을 꾸었습니다. 세찬 바람을 가로질러 독립된 조국의 하늘에 닿기를, 그 청명하게 빛나는 하늘을 자유롭게 날기를 꿈꾸었습니다. 겨레의 시련을 딛고 역사의 외면을 견디며 마침내 그들의 꿈은 힘차게 날아올랐습니다.]]> Thu, 30 Jan 2020 17:06:44 +0000 38 <![CDATA[3·1운동 직후 대한인국민회의 독립운동 ]]> 글 홍선표 나라역사연구소 소장3·1운동 직후 대한인국민회의 독립운동Ⅲ. 3·1운동의 발발과재미 한인의 독립운동 ② 3·1운동으로 미주 한인사회의 독립운동 열기는 크게 고조되었고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는 한인사회의 중심기관으로 독립운동을 주도했다. 중앙총회장 안창호가 해외 한인의 대동단결과 조직적인 독립운동을 위해 4월 1일 샌프란시스코를 떠나면서 중앙총회 부회장 백일규가 새 중앙총회장 윤병구가 선출된 10월 2일까지 중앙총회장 임시대리로서 독립운동을 이끌었다. 대내외 선전·외교활동과 일본물화배척운동 백일규는 1919년 4월 4일 15차 임시위원회에서 서재필·이승만·정한경이 추진하는 필라델피아 ‘제1차 한인회의’ 파견 대표로 민찬호와 윤병구를 선정해 파견했다. 현순의 전보(3월 29일 자)를 통해 ‘대한국민공화국 정부’ 수립 사실이 전해지자, 중앙총회는 4월 5일 미국·영국·프랑스·이탈리아의 4국 정부 수반과 대사에게 임정 수립 사실을 알렸다. 또 4월 10일에는 “각하께서는 세계의 자유와 공의를 주창하는바 우리는 우리 민족을 대표하여 우리 민족의 명의로 청원하나이다. 한국독립단은 임시정부를 조직하였는데 그 정부의 내각들은 다 고등한 학식과 능력이 있는 인물이라. 만일 독립을 승인하면 능히 공화정부를 유지하여 갈 수 있습니다”라 하여 한국의 독립을 호소했다. 이 같은 내용의 호소는 한국 민족은 능히 독립할 자격을 갖추고 있음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중앙총회는 임시정부 수립 경축일을 4월 15일로 정하고 북미 전 지방회에 통보했다. 하와이지방총회의 『국민보』 기자 승룡환이 『일포시사(日布時事)』에 한·중·일 3국의 협력으로 백인들을 배척하자는 글을 싣자 중앙총회는 하와이지방총회장 이종관에게 공문(1919.04.17.)을 보내, 그의 주장은 우리 민족의 의사와 반대되고 외교 진행에 방해되므로 조사해서 시정하라는 조치를 명했다. 일본과는 협력의 대상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밝힌 것이다. 중앙총회는 1919년 4월 21일 회의에서 항일운동의 표시로 일본물화(物貨)배척운동을 결의하고 공문 제205호(1919.04.25.)로 전 미주 한인들에게 일본물화배척운동을 촉구했다. 일본물화배척운동은 매매, 노동, 사업, 개인 간의 교제, 그리고 식물과 일용품에 이르기까지 정신부터 행동까지 일본인과의 거래를 완전히 배척하는 강력한 항일활동이었다.독립의연금 모금 운동과 재정지원 3·1운동 이후 대한인국민회의 독립의연금 모금 활동은 여러 활동 중 가장 역점을 둔 사업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 종결 직후인 1918년 11월 24일 뉴욕과 파리에 한인 대표를 보내기로 하면서 시작된 ‘특별의연금’ 모금 활동은 3·1운동 직후 ‘독립의연’이란 이름으로 더욱 활발해졌다. 그 외 ‘21례’, ‘애국금’, ‘인구세’, ‘공채금’ 등의 명목이 추가되어 다양한 모금 운동이 전개되었다. 중앙총회가 제1기(1918.11.24.~1919.12.15.)와 제2기(1919.12.16.~1920.07.01.)로 나누어 보고한 결산을 보면 먼저 제1기의 경우 총수입은 88,013.53달러, 총지출은 84,045.42달러였다. 총수입 중에는 미국인 7명이 낸 73달러와 중국인 화교 7,756.74달러를 포함한다. 다음 제2기의 경우 총수입 26,873.52달러, 총지출 26,790.34달러였다. 제1, 2기를 합하면 총수입 114,997.02달러, 총지출 110,835.76달러, 잔액 4,051.26달러가 된다. 제1기와 2기의 지출 내역을 보면 임시정부에 46,454.06달러, 구미위원부에 2,000달러, 파리의 김규식외교비로 4,000달러, 안창호·정인과·황진남 3인의 원동(상하이)대표 휴대금 3,000달러, 필라델피아통신부 8,100달러 등이다. 내역에 따르면 중앙총회는 전체 수입 중 40%를 임시정부로 보낸 것을 알 수 있다. 중앙총회가 밝힌 의연자는 외국인(미국인과 화교)을 제외하고 총 1,391명이다. 이는 제1기만을 기준으로 한 것인데 제2기의 경우 제1기 납부자와 중복되어 1기로만 한정한 수치이다. 이 수 안에는 일부 하와이 한인의 이름도 보인다. 한편 하와이의 경우 대한인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가 독자적으로 모금운동을 전개했다. 하와이지방총회가 발표한 재정결산서(1919.03.~10.31.)를 보면 총 2,907명의 의연자에 총수입 35,034.05달러, 총지출 34,565.49달러이다.지출 내역을 보면 워싱턴DC에 구미위원부를 설립해 활동 중인 이승만에게 22,000달러, 파리의 김규식에게 2,000달러, 중앙총회에 1,500달러, 상하이의 현순에게 1,360달러등이다. 전체 수입 중 약 63%를 이승만에게 집중적으로 보냈다. 이로 보아 하와이지방총회는 이승만의 외교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독립의연 모금운동을 추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밖에 이승만이 주도한 구미위원부가 독자적으로 모금한 실적도 있지만, 다음에 밝힌다.독립의연금 모금 운동의 가치 이상의 모금 활동과 실적을 감안할 때 멕시코를 포함한 1919년도 전 미주 한인 약 8,500명 가운데 약 4,298명이 참가했음을 알 수 있다. 절반 이상이 되는 수치이다. 여기에는 성인 남녀는 물론이고 어린 학생과 아이들까지 포함한다. 예컨대 안창호 집안의 경우 15살 장남 안필립이 3달러, 차남 필선이 1달러, 6세의 장녀 수산이 1달러를 의연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직후 한인들의 평균 임금은 하와이의 경우농장 노동자가 40~60달러, 북미의 경우 광산이나 철도 노동자가 70~90달러 전후였다. 당시 1달러는 2020년의 시세로 환산할 경우 약 15배의 가치가 되는데 중앙총회의 총수입 114,997달러는 현 시세로 약 173만 달러 정도다. 북미 한인 전체 인구가 약 2,500여 명이고 한인들의 평균 수입이대체로 영세했음을 감안할 때 매우 큰 금액이었다. 중앙총회에서 밝힌 3·1운동 시기 미주 한인사회 최대의 의연자는김종림(3,345달러), 신광희(1,245달러), 임준기(1,220달러), 김승길(1,010달러)이다. 모두 쌀 농장 경영자들이며, 상하이 임시정부로부터 의연 공로자로 표창 받았다. 1919년 4월 상하이에 모인 각계 각지의 독립운동가들이 임시정부를 새로 수립하고 정비하는데 사용한 막대한 금액은 바로 미주, 즉 북미의 한인들로부터 나왔다. 중앙총회의 재정결산이 이를 입증하고 있는 것이다. 3·1운동 직후 미주 한인사회의 독립운동은 독립의연금 모금 활동으로 크게 분출되고 있었다. alt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에서 발행한 독립의연금 증서(1919)]]> Fri, 31 Jan 2020 17:43:31 +0000 38 <![CDATA[한국독립운동을 지원한 장제스와 쑹메이링 ]]> 글 김형목 사단법인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이사한국독립운동을 지원한 장제스와 쑹메이링 장제스와 쑹메이링은 중국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역사적인 인물이다. 일제강점기 우리 임시정부가 국제적 힘을 쓰지 못하고 있을 때, 중국 최고 지도자 부부의 도움은 제법 든든했다. 마침내 국제회담에서 ‘한국독립’의 승인을 이끌어낸 것도 바로 이들 부부였다. 중화민국 최고 지도자 장제스가 되다 1911년 10월에 일어난 신해혁명으로 중국에는 공화국인중화민국이 수립되었다. 주권 의식을 가진 국민이 제대로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공화국의 운명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지도자 쑨원(孫文)과 정치적 타협으로 대총통 지위에 오른 위안스카이(袁世凱)가 혁명을 배반하고 황제제도를 부활시킨 것에서 공화혁명의 한계를 엿볼 수있다. 위안스카이가 갑자기 병사한 후, 군대를 소유한 군벌들이 각 지역을 나누어 통치하는 군벌시대가 도래했다. 군벌시대를 끝내고 통일된 국가의 수립은 중국혁명의 궁극적인 귀결점이었다. 1924년부터 1928년에 걸친 이른바 국민혁명은 국가적 통일을 일차적인 목표로 삼았다. 이러한 과정에서 최고 지도자로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 바로 장제스(蔣介石)이다. 그는 국민혁명의 출발점이 된 국공합작과 소련과 연합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비교적 적극적인 입장을 취했다. 장제스는 러시아의 재정적·군사적 지원으로 설립된 황푸군관학교의 교장이자, 이 학교 출신의 청년 장교들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국민혁명군의 총사령관이 되었다. 2년여 ‘통일전쟁’의 결과로, 1928년 6월 베이징(北京)에 입성함으로써 국가적 통일을 완수하는 대업을 달성했다. 마침내 이를 기반으로 중앙집권적통일 정부가 수립되었다. 난징(南京)을 수도로 하는 국민정부 탄생은 명실상부한 통일 정부를 의미한다. 1949년 대륙에서 패퇴하여 타이완으로 옮겨갈 때까지 장제스는난징 국민정부의 실질적인 최고 지도자로서 대륙을 호령하는 인물이었다.국제정세 밝은 쑹메이링이 등장하다 쑹메이링(宋美齡)은 1897년 상하이의 유복한 기업가 집안의 셋째 딸로 태어났다. 아버지 쑹쟈수(宋嘉樹)는 일찍이 미국에 유학하여 감리교 신학교를 졸업하였다. 선교사로 귀국한 이후 성경 번역·출판이나 제분업 등을 운영하여 상당한 부를 축적했다. 이에 쑹메이링은 일찍이 미국에 유학하여 명문 웨슬리대학교에서 당대 최고의 근대교육을 받았다. 쑹메이링의 이러한 경험은 사상이나 생활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그녀는 당대 서구의 최고 지식인들과 교류에 전혀 어려움이 없을 만큼 서구적 지식과 문화에매우 익숙하였다. 큰언니 쑹아이링(宋靄齡)은 중국 최고 재벌인 쿵샹시(孔詳熙)의 부인이 되었다. 둘째 언니 쑹칭링(宋慶齡)은 중국혁명의 아버지로서 신해혁명 이후 중화민국의 초대 임시대총통이었던 쑨원의 부인이다. 오빠 쑹즈원(宋子文)은 쑨원과 장제스의 주요한 협력자로 재정부장·외교부장·행정원장 등 고위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쑹메이링 세자매에 대해 흔히 “한 명은 돈, 한 명은 권력, 한 명은 중국을 사랑했다”고 이야기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들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후 서로 다른 인생 항로에 따라 만나지 못하는 이별의 아픔을 겪었다. 남북분단에 따른 이산가족의 아픔도 되새길 수 있는 부분이다. alt쑹메이링 세 자매alt장제스 주석부부의 인연을 맺다 유학에서 돌아온 1917년 이후 쑹메이링은 상하이 사교계의 가장 주목받는 여인 중 한 명으로 두각을 드러내었다. 1922년 형부인 쑨원 소개로 장제스를 만났다. 어머니 니쟈젼(倪佳珍)과 언니 쑹칭링의 반대에도 1927년 12월 결혼하여 최고 지도자의 부인이 되었다. 장제스가 1928년 무렵부터 1949년까지 대륙의 지도자로 군림하였으니 쑹메이링도 약 20년 동안 중국 퍼스트레이디였던 셈이다. 장제스와의 결혼은 정략결혼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쑹메이링은 장제스가 기왕의 결혼 관계를 모두 청산하고 자신과 결혼했기 때문에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였다. 장제스는 전통적인 기독교도인 쑹메이링 집안을 설득하기 위해 기독교로 개종할 만큼 절대적으로 그녀를 사랑했다. 평생 충실한 기독교도로서 종교적인 삶을 살았던 것은 이러한 인연에서 비롯되었다. 신앙생활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장제스에 대한 쑹메이링의 영향력은 대단했다. 장제스의 생애 중 가장 큰 위기인 1936년 12월의 시안(西安)사변이 일어났다. 그녀는 직접 현장으로 달려가 장제스를 억류하고 있던 장쉐량(張學良)과 협상을 중재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 과정에서 쑹메이링이 중국인들에게 존재감을 드러내었다.국민정부 총통으로 한국독립운동을 지원하다 한국독립운동에 대한 지원은 장제스가 황푸군관학교 교장으로서 한국인 청년들의 입학을 허용하면서 시작되었다. 1932년 4월 상하이의 윤봉길의거는 한중의 국제적인 연대를 알리는 시발점이었다. 그는 윤봉길의거를 “중국 백만 군인이 하지 못한 일을 한국 청년 한 사람이 해냈다”고 높이 평가했다. 그러나 표면적인 평가와 달리 직접적인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상하이 침공과 괴뢰정권 만주국 수립 등 복잡다단한 정세 변화는 커다란 걸림돌이었다. 윤봉길의거는 한국독립운동 세력에 대한 인식 변화를 불러오는 결정적인 계기였다. 이에 기반하여 지원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뉘어 비밀리에 진행되었다. 국민정부 조직부를 통한 임시정부 지원이 첫 번째이다. 두 번째는 중국국민당의 준군사 조직이었던 삼민주의역행사의 황푸군관학교 출신 김원봉 계열에 대한 지원이었다. 이중의 지원은 장제스의 한국독립운동에 대한 혼선을 초래하기도 했다. 장제스의 한국독립운동 지원은 임시정부가 1940년 충칭(重慶)으로 이전한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임시정부는 사실상 독자적 기반을 가지지 못한 채 장제스와 국민정부의지원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물론 국민정부의 지원 내막에는 약소민족에 대한 중국의 지원이라는 긍정적 의미만 있지 않았다. 당시 임시정부의 중점적인 활동 목표는 조국독립을 추진하는 데에 이바지할 수 있는 군사조직을 만드는 일이었다.이와 더불어 외교적 활동을 통하여 임시정부가 국제사회에서 승인을 받는 문제였다. 한국광복군 창설을 둘러싼 임시정부와 국민정부 사이에 벌어진 논의나 광복군의 운영 실태는 당시 상황을 그대로 보여준다. 한국독립운동에 대한 지원이라는 ‘중한호조’의 측면과 중국 내에서 활동하는 외국군에 대한 통제와 예속이라는 측면도 공존하고 있었다. 국민정부의 “한국광복군 행동9개준승”은 임시정부에 대한 독자적인 군사권 행사를 제한하는 독소조항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국 사이에 쌓인 신뢰로 ‘국내진공작전’을 추진하기도 하였으나 임시정부에 대한 외교적 승인 문제는 장제스와 국민정부 측에서 적극적인 승인보다는 소극적이고 관망하는 태도를 보였다. 이는 다른 열강, 특히 미국이나 러시아 등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현실적인 문제와 밀접한 연관성을 지닌다. 나아가 전후 한반도에서 영향력 확보와 임시정부에 대한 견제 및 통제라는 의도도 있었다.카이로회담에서 한국독립 승인을 이끌다 쑹메이링이 독자적으로 한국 독립운동에 이바지한 사실은 크게 드러나지 않는다. 장제스가 한국독립운동 지도자들과 만날 때 부인으로서 늘 배석하여 지지를 표명했다. 영어뿐만 아니라 외국어에 능통했던 까닭에 장제스의 정치 활동을 여러 측면에서 도왔다. 정부를 대표하여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를 만났던 그녀는 일제 침략의 부당함과 항일투쟁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중국 외국항공용병대 창설과 미국 참전을 이끌어냈다. 미국과 중국의 긴밀한 관계가 구축되면서 1937년 미국 잡지 time은 ‘세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여성’으로 그녀를 선정했다. 이어 1943년 루스벨트 대통령의 초청으로 의회 상하 양원 연석회의에서 중국 제1부인(First Lady) 신분으로 연설하였다. 당시 중국인으로는 최초, 외국 여성으로는 두 번째였다. 국제무대에서 그녀의 활동이 빛을 발하는 순간을 맞았다. 미국 대통령은 “선교사가 미국에 예수를 전했듯이 쑹메이링은 미국에 중국을 알렸다”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1943년 11월에 루스벨트 대통령의 제창으로 이집트에서 카이로회담이 개최되었다. 회의를 주도한 미국은 전후 아시아 지역의 국제관계 재정립에 중국의 주도권 회복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이에 ‘4대 강국’ 일원으로 참석한 장제스는 미국과 협력이 절실했다. 장제스는 회의에서 즉각적인 한국독립을 처음 주장하였다. 그런데 선언문 수정 과정에서 미국 측의 국제 공동관리(신탁통치) 주장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결국 장제스 주장과 루스벨트의 수정을 거쳐 ‘적당한 시기에(in due course)’라는 전제가 붙은 선언문이 채택되었다. 이는 한국독립에 대한 장제스의 지대한 관심과 적극적인 지지 덕분이었다. 물론 한국인이 염원하는 ‘절대 독립’이 아니었다는 한계는 아쉬운 대목이다. 그럼에도 국제회의에서 처음으로 즉각적인 독립을 주장한 인물은 장제스였다. 장제스와 쑹메이링이 한국독립을 위해 한 역할은 결코 가볍게 볼 수 없다. 쑹메이링은 장제스의 통역사 자격으로 참석했다. 그녀는능숙한 영어 실력으로 루스벨트나 처칠 등 세계 최고 지도자들과 회담에서 외교적 능력을 발휘하며, 세계적인 주목을 한 몸에 받았다. 장제스가 즉각적인 한국독립 문제를 거론한 부분은 한국독립에 대한 쑹메이링의 지지를 극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 아닐까. alt카이로회담에 참석한 장제스와 쑹메이링한국과 반공혈맹으로 돈독한 관계로 이어지다 일제 패망 후 1945년 11월 임시정부 요인들이 환국했다. 대대적인 환송연에 참석한 이들 부부는 임시정부 주석 김구에게 한국의 독립을 축하하며 적극적인 지지를 보냈다. 이러한 사실 또한 부부의 한국독립운동 지원 사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1953년 한국 정부는 장제스에게 최고 훈장인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수여하였다. 1966년에는 쑹메이링에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수여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처음으로 타이완을 방문하고 장제스와 ‘반공혈맹’의 관계를 돈독히 하던 때였다. 장제스와 쑹메이링 부부의 지원은 ‘국제적인 미아’ 신세였던 임시정부에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는 커다란 울림이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alt대한민국 임시정부 환국 환송연]]> Fri, 31 Jan 2020 17:40:50 +0000 38 <![CDATA[반목했던 연개소문과 양만춘, 적 앞에서 손잡다 ]]> 글 김종성 역사작가반목했던 연개소문과 양만춘, 적 앞에서 손잡다 고구려는 전쟁을  잘하는 나라였다. 그런 고구려에게 가장 힘겨웠던 상대는 마지막에 만난 당나라였다. 당나라는 그때까지 출현한 중국 왕조 중 ‘역대 최강’이었다. 당나라의 탄생과 고구려의 서수남진 정책 304년부터 5대 유목민이 북중국에 16개 왕조를 순차적으로 세우는 가운데, 기존의 중국 지배층은 양쯔강쪽으로 남하했다(5호 16국 시대). 이 혼란이 어느 정도 수습되면서 남중국과 북중국에 원칙상 각각 하나의 왕조만 존재하는 남북조시대가 이어지다가, 589년에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하고 618년에 당나라가 재통일을 이룩했다. 304년 이후의 대혼란을 거치면서 중국 문명의 중심부는 북중국 황허 유역에서 북중국 황허 및 남중국 양쯔강 유역으로 이원화됐다. 중국 문명권이 그만큼 확장된 것이다. 또 유목 문명이 유입되면서 농경 문명과 융합되는 현상도 나타났다. 북방 유목민(胡)의 문명과 한족 농경민(漢)의 문명이 융합된 이것을 역사학에서는 호한(胡漢) 문명이라고 부른다. 당나라는 이전보다 확장된 문명권을 지배했을 뿐 아니라, 이전 문명보다 우수한 호한 문명에 기초를 둔 나라였다. 진나라나 한나라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왕조였던 것이다. 그래서 당나라는 고구려가 그때까지 상대한 나라 중에서 가장 떨리는 적이었다. 고구려에 대패한 수나라가 멸망하자, 중국은 다시 분열됐다. 중국을 재통일하고 626년에 황제가 된 당나라 태종(당 태종) 이세민은 628년 초원지대 강자인 돌궐족을 격파하는 기염을 토했다. 631년에는 고구려에도 도발을 걸었다. 고구려가 수나라를 꺾은 것을 기념해 세운 경관(京觀)이란 조형물을 당나라 사신들의 손으로 파괴한 것이다. 이에 고구려 영류태왕(재위618~642년, 태왕이 정식 명칭)은 천리장성을 쌓아 침공에 대비하는 한편, 당나라에 태자를 보내 조공하면서 화친을 시도했다. 장수태왕 때인 427년 만주 국내성에서 한반도 평양성으로 천도한 것을 계기로 고구려는 서수남진(西守南進) 주의를 고수했다. 서수남진은 서쪽과는 현상을 유지하고 남쪽으로 진출을 꾀하는 전략이었다. 북중국에 북위라는 강대국이 등장하면서 5호 16국 시대가 남북조 시대로 넘어가자, 장수태왕은 서쪽 중국보다는 남쪽 한반도로 진출하는 쪽으로 생각을 전환했다. 아버지 광개토태왕의 서진주의를 폐기하고, 중국 진출을 보류한 것이다. 역사학자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고구려 역대 제왕들은 서진주의나 서남 동시공략 주의를 썼다”며, “서수남진 주의를 쓴 것은 장수태왕 때부터”라고 설명한다. 당 태종이 도발하는데도 영류태왕이 방어적으로 나온 이유는 바로 이 서수남진 주의 때문이다. 당나라가 세워지기 전인 612년에 수나라를 물리친 을지문덕은 서수남진 주의를 수정하자고 제안했다. 살수대첩의 여세를 몰아 중국을 공격하자는 것이었다. 지금은 전해지지 않지만 『조선상고사』에 인용된 『해상잡록』에는 을지문덕이 중국 정벌을 주장했다는 이야기가 소개돼 있다. 조선 후기 역사학자 겸 실학자인 안정복도 『동사강목』에서, 영양태왕이 을지문덕을 등용해 수양제를 추격했어야 하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아 기회를 놓쳤노라고 안타까워했다. 이처럼 영양태왕도 서수남진을 고수했다. 그의 동생인 영류태왕 역시 마찬가지였다.고구려, 안시성을 사수하다 서수남진을 고수한다고 해서, 당나라가 침략하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었다. 고구려가 전쟁을 원하지 않는데도 당나라는 자극을 가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평화가 아니었다. 고구려를 자국 행정구역에 편입하는 것이었다. 훗날 백제를 멸망시킨 뒤 웅진도독부를 설치하고, 고구려를 멸망시킨 뒤 안동도호부를 설치한 사실에서 나타나듯 당나라는 동아시아 국가들을 중국 행정구역에 끌어들이고 싶어 했다. 큰 나라는 도호부로, 작은 나라는 도독부로 만들고 싶어했다. 당 태종의 아들인 당 고종 때 안서도호부·안동도호부·안북도호부·안남도호부가 수립된 것은 그 목표가 어느 정도 달성됐음을 의미한다. 당나라가 이러한 의도를 갖고 고구려를 자극하니 서수남진을 고수한다 해서 평화가 유지되리란 보장은 없었다. 결국 당나라는 고구려를 침공했다. 645년 흔히 안시성 전투로 불리는 고구려·당나라 전쟁(고당전쟁)이 발발했다. 당나라군 10만과 거란 및 돌궐 지원부대 5만을 합한 15만 군대가 쳐들어왔다. 전투 초반에는 당나라가 우세했다. 당나라 군대는 고구려 서부전선의 개모성·비사성·요동성·백암성을 점령했다.고구려의 서쪽 담장을 상당 부분 허물어트린 것이다. 이 담장이 다 무너지면 만주평원을 가로질러 압록강에 도달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초반부터 상승세를 탄 당나라 군대는 고구려 서부전선의 또 다른 요충지인 안시성을 상대로 충력을 집중했다. 직접 지휘봉을 잡은 황제 이세민은 양만춘이 지키는 안시성의 공략에 혼신을 기울였다. 평양성 실권자 연개소문이 15만 병력을 파견하며 안시성을 지원했지만, 해당 부대는 적군에 패하거나 투항했다. 이로써 안시성의 고립은 날이 갈수록 심화되었다. 안시성이 무너지면 고구려 조정이 기댈 곳은 안시성과 평양성의 중간인 오골성뿐이었다. 오골성마저 무너지면 평양성도 위험했다. 그러나 이세민 군대는 평양성은 물론이고 오골성에도 가지 못했다. 안시성이 지뢰가 되어 발길을 돌려야 했기 때문이다. 당나라군이 압도적 공격을 가해도 안시성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당나라가 토산을 쌓으면 안시성은 성벽을 더 높였다. 당나라는 성벽 파괴용 무기인 충거와 포거를 사용했고, 고구려는 무너진 데를 다시 목책으로 메웠다. 이런 식으로 하루 6~7차례 전투가 벌어졌지만, 안시성 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당태종은 ‘안시성을 내려다보면서 공격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60일간 주야로 연인원 50만을 투입해 거대한 토산을 쌓았다. 그러나 토산이 완공되던 날, 산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무너지지 않은 곳에 올라 공격을 벌인 쪽은 당나라가 아닌 고구려군이었다. 이런 와중에 날씨마저 쌀쌀해지고 군량미도 부족해지자 당태종은 철군을 결심했다. 고구려 서부전선을 상당 부분 무너트린 데 만족하고 안시성에서 회군한 것이다.『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 따르면 당 태종이 철군할때 양만춘이 성벽에 올라 “잘 가시라”고 인사하고, 당 태종은 비단 100필을 선물하면서 “당신들 대단하다”고 경의를 표했다고 한다. 이 같은 대승리에 힘입어 연개소문은 고구려의 위용을 과시할 수 있었다.고구려를 승리로 이끈 세 가지 당나라가 그때까지 등장한 동아시아 국가 중 역대 최강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고구려의 승리는 일반의 예상을 깨는 위업이었다. 고구려가 위대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비결 세 가지는 다음과 같다. 첫째, 당나라 침공 3년 전에 서수남진을 폐기하고 남수서진(南守西進)을 채택한 것이 항전 태세를 튼튼히 하는 데 도움이 됐다. 642년에 고구려 국가전략이 ‘백제·신라와는 현상을 유지하고, 당나라와는 정면 대결하는 쪽’으로 180도 뒤바뀐 것이다. 고구려 서부의 토착 귀족인 연개소문이 쿠데타를 일으킨 일이 대전환의 계기가 됐다.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연개소문이) 장수태왕 이래로 철석같았던 서수남진 정책을 남수서진 정책으로  바꾸었다”라고 설명했다. 둘째, 연개소문의 쿠데타 이후 귀족연합체가 타파되고 중앙 권력이 막강해지면서 당나라와의 총력전에 집중할 수 있었다. 전통적으로 고구려 태왕은 힘이 없었다. 나라를 주도하는 것은 지방분권적인 귀족들이었다. 연개소문은 영류태왕을 죽이고 보장태왕을 옹립한 뒤 귀족세력을 억누르고 강력한 권력을 구축했다. 강권 혹은 독재 정치가 바람직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645년 전쟁에서는 고구려를 지키는 힘이 됐다. 셋째, 자칫 쪼개질 수도 있었던 고구려인들의 일심단결이 대승리를 뒷받침했다. 쿠데타를 일으킨 연개소문은 왕족이 아닌 귀족이었다. 그래서 경쟁자인 여타귀족들이 그를 방해할 가능성이 없지 않았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양만춘도 연개소문 정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두 사람은 당나라 군대 앞에서 손을 잡았다. 연개소문이 안시성에 15만 구원군을 보낸 것, 양만춘이 당 태종과 끝까지 싸워 연개소문 정권을 지켜낸 것은 고구려인들이 적 앞에서 사심을 억눌렀음을 보여준다. 고구려 국가 전략이 수정되고 역대 최강 정권이 탄생했다. 여기에 고구려인들이 사심을 억누르며 단결하니 당 태종은 발길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중상을 입은 채로 귀국길에 나섰다. 전투 중에 화살을맞아 한쪽 눈을 실명한 것이다. 당 태종은 그렇게 쓸쓸히 귀국하여 병상에 누워 있다가 649년 50세 나이로 눈을 감았다. alt고구려와 당나라 전쟁의 전개]]> Fri, 31 Jan 2020 17:46:58 +0000 38 <![CDATA[그냥 제주여서 좋다 제주도 겨울 속 봄 여행 ]]> 글·사진 임운석 여행작가그냥 제주여서 좋다 제주도 겨울 속 봄 여행 누군가 그랬다. 추억을 하나둘씩 꺼내 보며 사는 사람은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더 짧은 사람이라고. 100세 시대라고 하지만 분명한 것은 청춘은 짧다는 것이다. 짧으면 10년, 길어야 20년 아닌가. 겨울에 봄날이더 그리운 까닭도, 넋두리처럼 그때를 그리워하는 이유도 짧은 청춘을 향한 애틋함 때문일 것이다. 봄날의 따뜻한 온기를 느끼러 제주도로 겨울 속 봄 여행을 떠나보면 어떨까. alt검은 돌담에 내려앉은 선혈 같은 동백꽃소녀가 남긴 선물, 위미 동백 군락지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 속에 그대 외로워 울지만 나 항상 그대 곁에 머물겠어요. 떠나지 않아요.” 이문세의 노래 <소녀> 중에서 고등학생 때였다. 카세트 플레이어를 밥 먹듯 항상 틀어놓은 까닭에 이문세 노래 테이프는 고무줄처럼 길게 늘어났다. 책상에 앉아 있었지만, 공부는 핑계일 뿐 머릿속에는 노래만 맴돌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청춘들이 그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게 아닐까. 청춘이라면 색깔만 다를 뿐 비슷한 궤적을 그리며 살고 있기에. 몇 해 전의 일이다. <응답하라! 1988>, <응답하라! 1994>,<건축학개론> 등 8090세대를 타깃으로 한 문화가 트렌드로 자리 잡았다. ‘그때를 아십니까’는 너무 먼 과거가 되었고, 7080세대 역시 중심세력에서 한 발짝 물러난 듯하다. 시간이 지나면 8090세대 역시 지금의 자리에서 물러나야 하겠지만, 그럼에도 누구에게나 꽃 같은 청춘의 시간은 아름다운 계절로 기억될 것이다. 황량한 겨울, 마음 한구석 뻥 뚫린 허공 속으로 찬바람이 불어온다면 동백꽃이 작은 위로가 될 수도 있다. 제주도 남쪽에는 봄을 부르는 동백꽃이 한창이다. 특히 서귀포시 남원읍 위미리에 있는 ‘위미 동백 군락지’가 유명하다. 이곳에 동백꽃을 심은 사람은 1875년 17세 꽃다운 나이에 위미리에 시집온 현병춘이다. 해초 캐기와 품팔이를 해근근이 모은 돈 35냥으로 황무지를 사들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살기 팍팍했던 그때 제주의 겨울바람은 몹시도 모질고 거칠었다. 어린 새댁 현병춘은 어떻게든 그 몹쓸 바람을 막아야 했으리라. 고민 끝에 한라산의 동백 씨앗을 따다가 정성껏 뿌렸다. 동백나무가 자라면 방풍림 역할을할 것이라 여긴 까닭이다. 그렇게 심었던 동백나무가 오늘날 울창한 동백 숲이 되었다. 현병춘은 떠났지만, 동백은 140년의 세월만큼 훌쩍 커버렸다. 그녀가 남긴 동백은 지금까지 우리들 곁에 머물며 꽃을 피운다. 17세 소녀가 남긴 선물인 셈이다. 동백꽃을 마주하면 찬바람에 움츠렸던 마음이 스르르 녹아내릴 것 같다. alt약 70m에 이르는 동백터널은 카멜리아힐의 으뜸 구간이다alt수많은 동백꽃에 이미 봄이 온 듯 착각 속으로 빠져든다애기동백, 젊음은 꽃보다 눈부시다 위미리 동백군락지 근처에 또 하나의 명소가 있다. 감귤밭 중앙에 조성된 애기동백 군락이다. 위미리에 심긴 동백꽃이 꽃송이 채 떨어진다면 애기동백은 꽃잎이 한 장씩떨어진다. 선혈 같은 동백꽃도 예쁘지만, 연분홍색 애기동백도 예쁘다. 수줍은 미소를 띤 소녀처럼 청순미가 전해진다. 애기동백은 원래 사유지에 조경을 목적으로 심었는데 입소문이 나면서 동백꽃 명소가 되었다. 이곳의 특징은 그림책에서 봄직한 핑크색 동백나무가 크리스마스트리 마냥 줄을 맞춰 선 모습이다. 바닥에 떨어진 꽃잎은 융단을 펼쳐놓은 것처럼 드넓다. 쉽사리 밟으며 지나가기가 미안하고 두렵기까지 하다. 숲속에 있으면 은은한 꽃내음이 버무려져 황홀감에 빠져든다. 여기저기서 꽃보다 예쁜 청춘들이 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다. 아무리 동백이 화사한들 젊음의 순간만큼 아름다울까. 알알이 영근 황금색 감귤밭 뒤로 애기동백꽃에 파묻힌 젊은 미소가 샘나게 눈부시다. alt겨울에도 싱그러운 티뮤지엄의 녹차밭사계절 푸른 찻잎의 꽃말은 추억 겨울 제주다운 풍경은 세 가지 색으로 갈음할 수 있다. 하양, 검정, 초록이다. 하얀색은 겨울 왕국이 부럽지 않을 설경이겠지만 한라산을 제외하면 영하로 떨어지는 곳을 찾기 어려우니 밤새 눈이 내려도 다음날 정오를 못 넘긴다. 그래서 제주의 하얀색은 늘 아쉽다. 검은색은 제주도의 돌 빛깔이다. 제주의 돌은 태곳적부터 제주와 운명을 같이하고 있다. 농담 차는 있지만 모두 검다. 검은색이 뽐내는 빼어난 전경을 보려고 위미항에서 자동차로 15분 거리에 있는 제지기오름에 오른다. 올레길6코스 구간인 이곳은 뭍사람보다 현지인들이 더 많이 찾는 곳이다. 일정에 쫓기는 여행자가 아니라면 여기서만큼은 제주 사람처럼 천천히 걸어보자. 해안을 따라 시커먼 돌로 담을 쌓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강한 바람을 피하기 위해 쌓은 돌담 안으로 지붕이 납작 엎드려 있다. 바람을 피하기 좋은 구조라지만 그런 건축적 의미보다 따뜻한 온기가 전해오는 감상적 의미가 더 크다. 빠른 걸음이었다면 지나쳤을 소소한 풍경에 발걸음이 더 느려진다. 정상까지는 15분 정도를 오른다. 탁 트인 전망이 펼쳐지자 탄성이 터진다. 아기자기한 보목포구와 태산처럼 우뚝 서 있는 섶섬이 장관이다. 서쪽은 조각천을 이어붙인 듯 검은 돌담이 이어지고 북쪽은 제주의 심장, 한라산이 보인다. ‘그냥 제주여서 좋다’는 말이 이래서 나왔나 싶다. 마지막 여정은 제주의 초록색을 만나러 가는 것이다. 동백잎이 사철 푸르듯 녹차밭도 그러하다. 녹차의 꽃말은 ‘추억’이다. 앞서 보낸 찬란했던 봄, 여름, 가을을 향한 그리움에서 비롯된 꽃말일까. 겨울에 보는 녹차밭의 푸름은 지난 계절의 추억을 소환하기에 부족하지 않아 보인다. 제주도는 일본 후지산, 중국 황산과 더불어 세계 3대 녹차재배 지역으로 꼽힌다. 제주도 중에서도 서귀포시 안덕면서광차밭이 유명하다. 이곳에 오설록 티뮤지엄이 있다. 2001년 우리나라 최초로 문을 연 차 박물관이다. 티뮤지엄의 자랑거리는 건축물은 물론이고 안팎의 빼어난 경관에 있다. 그 덕분에 세계적인 건축 전문사이트인 ‘디자인붐’이 선정한 세계 10대 미술관에 선정되었다. 오설록 티뮤지엄에서는 차 덖는 모습을 직접 볼 수 있다. 그윽한 향이 온몸을 휘감으면 차향에 기분까지 산뜻해진다. 뮤지엄 밖은 가볍게 산보를 즐기기 좋다. 삭막한 겨울에 초록 물결을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짧은 제주 여행을 통해 긴 겨울을 이겨낼 힘을 얻고 돌아간다. 또 하나의 추억을 만들며.   alt탐스럽게 영근 감귤alt드넓게 펼쳐진 오설록 녹차밭 alt제지기오름에서 섶섬이 내려다보인다alt세계 각국의 찻잔이 전시된 티뮤지엄]]> Fri, 31 Jan 2020 17:52:25 +0000 38 <![CDATA[오적을 살해하려는 사람이 어찌 나 혼자이겠느냐 ]]> alt]]> Mon, 02 Mar 2020 15:56:46 +0000 39 <![CDATA[한국의 흡혈귀와 구세주 ]]> 글 은예린 자유기고가 한국의 흡혈귀와 구세주오적암살단 의거1905년 을사늑약 체결로 한국은 외교권을 잃었다. 일본에 나라를 바치는 것이나 다름없었던 이 부당한 늑약에 찬성한 자는 다섯 명. 사람들은 이들을 ‘을사오적’이라 불렀다. 한국의 적은 한국인의 손으로 처단함이 마땅했다. 이듬해 한국에서 친일파를 두려움에 떨게 하는 비밀결사가 결성됐다. 오적암살단이었다.alt 을사오적 처단을 기도한 자신회 동지(1907) 부끄러운 역사의 한 페이지, 을사늑약과 을사오적그저 망각의 늪에 빠져 잊어버리고 싶지만, 잊을 수 없는 비참한 역사의 한 페이지를 떠올려 본다. 우리는 일본에게 반드시 반성과 사과를 받아야 한다. 1905년 쓸쓸한 가을, 조선의 역사를 관장하는 수레바퀴는 멈추고 말았다. 상상조차 하기 싫은 을사늑약이 체결된 것이다. 일본과 운명을 함께한 ‘을사오적’이 이에 협조하면서 한국이란 나라는 세계 지도에서 점차 사라지기 시작했다. 을사오적은 한국의 상류층 엘리트로, 부끄럽게도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바닥난 인물들이었다. 학부대신 이완용,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외부대신 박제순, 군부대신 이근택, 내부대신 이지용 등이 바로 파렴치한 주인공들이다. 이들은 일제가 강제로 국권을 빼앗는데 협조한 대가로 ‘조선귀족령’에 따라 일제 작위를 수여받았다. 그리고 그것에 상응하는 부와 명예, 권력을 평생 보장받았다. 그들이 누린 호의호식은 한국인의 눈물과 피, 고통과 바꾼 몫이었다. 이후 한국인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창살 없는 감옥” 속에서 살아야 하는 운명에 직면하였다. 나아가 협박과 강제에 의해 위안부로, 징용으로, 징병으로, 심지어 생체 실험 대상이 되어 인간 이하의 멸시와 학대를 견디며 피눈물 속에서 살았다.일제강점기에 사실상 일본인보다 우리 민족을 더 괴롭히고 부끄럽게 했던 금수와 같은 존재는 을사오적을 포함한 친일파들이었다. 그들은 일제에 대를 이어 충성을 맹세하며, 피를 나눈 민족의 가슴에 생채기를 냈다. 조국을 찾겠다고 목숨 바친 애국지사를 밀고하고 가혹하게 고문하는 등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이렇게 암울한 시대에 같은 민족이 서로 껴안고 힘을 모아도 부족했지만, 현실은 버겁기만 했다.이러한 현실 속에서 을사오적을 처단하기 위한 항일 비밀결사들이 결성되었다. 이른바 ‘오적암살단(五賊暗殺團)’과 ‘자신회(自新會)’이다. 이들은 1906년 조직되어 비록 짧은 시간 활동하고 사라져버렸지만, 나약한 조국을 향한 그들의 사랑과 애국심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alt을사늑약 전문alt금수회의’ 모형. 1908년 발행된 소설 『금수회의록』에 기반한다. 소설은 당대 사회를 비판하는 우화로, 을사늑약과 을사오적 및 일본을 규탄하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짧지만 긴 여운을 남긴 오적암살단의 활동, 기산도와 김석항의 애국충절오적암살단의 일원인 기산도, 김석항, 김일제, 나인영, 홍필주 등은 용기 내어 을사오적을 향해 칼을 던졌다. 그들의 목적은 오직 을사오적을 처단하여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는 데 있었다. 그러나 의로운 항거에도 을사오적은 승승장구했다. 역사적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었다. 당시 기산도는 을사오적 중 한 사람인 이근택의 집을 습격해 그의 가슴에 칼을 꽂았으나, 이근택은 중상에 그치며 치료 끝에 목숨을 부지했다. 체포된 기산도는 “오적을 살해하려는 사람이 어찌 나 혼자이겠느냐? 탄로 난 것이 그저 한스러울 뿐이다”라고 당당하게 자신의 굳은 의지를 밝혔다. 그는 김석항을 비롯한 인물들과 재판에 회부되어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석방되어 의병활동을 전개하고 임시정부의 군자금을 모으며 민족운동에 투신하다가 계속되는 옥고로 병사하고 말았다. 오적암살단을 지휘하던 김석항도 고문으로 옥사하는 비극을 맞았다.“…(전략)…충성심이 부족하여 국권을 회복하지 못하고 옥중에서 목숨이 다하게 되었다. 죽음을 맞이해도 눈을 감을 수가 없고 원통한 영혼은 떠나지 않으니 다시 국권의 회복과 역적들의 처단을 볼 것이다.”이는 김석항이 남긴 유언의 일부이다. 그는 죽음 앞에서도 오직 나라의 독립만을 외쳤다. 자신회 주춧돌 나인영과 동지들의 활동 1907년 2월 나인영과 오기호를 중심으로 비밀 항일결사대 자신회가 조직되었다. 자신회는 200여 명의 회원으로 이루어진 비밀결사체 중 하나였다. 이들의 을사오적 처단은 번번이 미수에 그쳤는데, 1907년 3월 25일 다시 거사를 계획한다. 을사오적을 포함, 궁내부대신인 이재극까지 육적을 처단하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강력한 무기로 호위하는 감시망 속에서 계획은 다시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자신회 회원인 이홍래가 그나마 권중현을 저격했으나 또한 실패했다.  을사오적 척살의거가 실패로 끝나자 재차 거사를 도모하고자 박대하 등에게 행동대원 모집을 지시하였다. 와중에 체포된 서창보(徐彰輔)는 의거 전말을 토로하였기 때문에 무고한 동지들만 고통을 당하는 위기에 봉착했다. 나인영과 오기호 등은 부득이 최동식(崔東植)을 시켜 자현장(自現狀)을 작성하게 하고 이광수와 김영채에게 뒷일을 부탁하였다. 그리고 4월 1일에 자현장과 관계문서를 휴대하고 최인식 등과 함께 평리원에 자수했다. 7월 3일 평리원에서 각각 유배형 10년과 5년을 선고받았으나 12월 27일 특사로 석방되었다.을사오적 척살의거는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매국대신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국민들 사이에서는 거사가 성공하지 못한 것을 분하게 생각하는 분위기가 팽배해졌다. 군대해산을 거부한 대한제국 군인들은 의병진에 합류하는 등 전술적인 변화와 더불어 항일전 선봉장으로서 역할을 자임하고 나섰다. 시민들도 상가를 철시하는 등 이에 동조하였다. 그리고 의열투쟁이 새로운 독립운동 방법론으로 정립되는 결정적인 계기를 맞았다. 정재홍 자결 순국, 박승환 자결 순국, 전명운·장인환의거, 안중근의거, 이재명의거 등은 이러한 정신을 계승하는 가운데 전개될 수 있었다.이후 나인영과 오기호 등은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고 독립운동의 기반을 다지기 위해 종교를 창시하는데, 그것이 대종교이다. 나인영이 바로 대종교 제1대 교주로 잘 알려진 나철이다. 민족 지도자들은 종교 차원을 넘어 항일 독립운동에 나서기 위해 대종교에 입교했다. 당시 독립운동가 중 대종교 관련 인사가 상당수였다. 나철, 김교헌, 윤세복 등은 교주로서 독립운동을 주도한 인물이다. 또한 서일, 박은식, 신채호, 이동녕, 이상룡, 이상설, 김좌진, 박찬익, 김두봉, 신규식, 안희제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우국지사와 독립운동가가 대종교인이었다.이밖에 자신회 회원 중 서정희를 비롯한 일부는 광주지역 3·1운동에 참여하였고, 일제치하에서 고생하는 우리 농민을 위해 계몽운동을 주도하며 끊임없이 독립운동을 전개해갔다. 나인영은 일제의 살벌한 감시 속에서 대종교 활동과 을사오적을 암살하려는 시도를 지속했으나 실패하고,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유서를 남긴 채 54세 나이로 자결했다. 하지만 만주벌에 든든한 토대를 마련한 대종교는 무장단체 중광단의 뿌리가 되었다. 중광단은 청산리전투에서 우리가 승리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alt자신회를 조직하고 대종교를 창시한 나인영(나철) 을사오적의 죽음과 오적암살단의 의의 오적암살단의 칼끝에서 빗겨난 을사오적은 당시로는 꽤 장수한 나이까지 살며 온갖 부귀영화를 누렸다. 이근택 55세, 이지용 59세, 박제순 59세, 이완용 69세, 그리고 이홍래의 저격을 피한 권중현은 무려 81세까지 살았다. 그들이 눈 감는 순간까지도 나약한 국민과 모진 고문을 견디며 목숨을 조국에 바쳤던 독립운동가는 운명의 심판을 기대했지만, 야속하게도 을사오적의 운명을 가른 선택은 성공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성공은 일제가 점령한 한국에서 그들이 살아있을 때까지만 유효했다.“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이다”라는 명언을 기억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역사의 심판을 지속하는 대화는 그들이 관 속에 들어간 후부터 지금까지 각종 역사서와 언론을 통해 ‘매국노’, ‘민족 반역자’, ‘친일파’라는 엄중한 비판으로 이어지고 있다. 호랑이는 죽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하지 않았던가?비록 오적암살단의 마지막이 자결과 사형으로 맺어지며 패배자처럼 보였을지라도, 그들의 기개는 을사오적을 비롯한 친일세력을 두려움에 떨게 했다. 그리고 우리 민족의 드높은 기상과 의지를 국내외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음을 표하고 싶다.무엇보다 의병운동과 동시에 계몽운동을 접목시킨 형태로 의열투쟁을 전개한 것은 그 의미가 특별하다. 을사오적 암살에는 실패했지만 이후 독립운동의 기반이자 중심 세력으로 성장하여 민족해방운동을 이끌었던 점에서 더욱 값진 활동이었다. alt을사오적(왼쪽부터 외부대신 박제순, 내부대신 이지용, 군부대신 이근택, 학부대신 이완용,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Mon, 02 Mar 2020 15:55:22 +0000 39 <![CDATA[외국인 한국독립운동가, 누구를 얼마나 알고 있는가? ]]> 글 이계형 국민대학교 교양대학 교수외국인 한국독립운동가, 누구를 얼마나 알고 있는가?1945년 우리 민족은 광복을 맞았지만, 독립운동은 끝나지 않았다. 여전히 미완으로 남은 사건, 해결되지 못한 문제, 기억해야만 하는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끝나지 않은 독립운동은 독립운동사를 과거에 머문 역사가 아닌 현재의 문제로 다루며, 오늘도 신문 한쪽을 차지하고 있는 독립운동 및 일제강점 이슈를 소개한다.우리가 몰랐던 푸른 눈의 독립운동가들지난 2월, 두 명의 외국인 한국독립운동가가 주목을 받았다. 하나는 마지막 외국인 생존 한국독립유공자였던 중국인 쑤징허(蘇景和)가 향년 102세로 별세했다는 소식이었고, 다른 하나는 ‘이달의 독립운동가’였던 맥큔이었다. 쑤징허는 1940년대 중국 난징(南京) 내 일본군의 동향을 수집하고 한국광복군의 모병·입대 청년 호송 등의 다양한 비밀임무를 수행한 공을 인정받아 1996년에 독립장을 받았다. 맥큔의 한국 이름은 윤산온인데, 1905년 9월 선교사로 한국에 건너와 3·1운동 지원, 신사참배 거부운동 등 한국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바를 인정받아 1963년 독립유공자가 되었다.이렇듯 정부로부터 서훈을 받은 외국인들이 적잖은데, 대부분의 국민들은 이들을 잘 모른다. 그리하여 한국독립유공자로 서훈받은 외국인들의 현황을 살피고, 이들을 대내외에 알리며 기릴 방안 몇 가지를 제안하고자 한다.외국인 한국독립운동가의 현황2020년 2월 현재 외국인 독립유공자는 모두 70명이다. 나라별로 중국 33명, 미국 21명, 영국 6명, 캐나다 5명, 아일랜드·일본 각 2명, 프랑스 1명 순이다. 건국훈장 훈격별로는 대한민국장 5명, 대통령장 11명, 독립장 34명, 애국장 4명, 애족장 13명, 건국포장 3명 등이다.외국인을 독립유공자로 처음 포상한 것은 1950년 삼일절을 맞아 주미한국대사관에서 우리나라 독립과 자유를 위해 희생적 봉사를 한 미국인 10명, 영국인 2명 등 12명에게 대한민국 최고훈장인 ‘태극훈장’을 수여하면서부터이다. 당시 1949년 4월 공포된 ‘건국공로훈장령’이 시행되고 있었지만 외국인의 경우에는 이를 따르지 않았다. 대상자는 헐버트·베델·스태거즈·밀러·알렌·모우리·해리스·윌리엄·더글라스·돌프·윌리엄스·러셀 등이었다. 이 가운데 일제의 한국 침략의 부당성을 호소하고 미국 의회에 일제 식민통치의 잔학성을 폭로한 헐버트, 영국 신문기자로 한국에 건너와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하고 일제 규탄 기사를 게재하였던 베델, 주한미국공사로서 한말 독립운동을 지원한 알렌, 3·1운동으로 옥고를 치른 모우리 등을 제외하고는 대개 이승만이 미국에서 활동할 당시 도움을 주었거나 임시정부 승인을 위해 애쓴 분들이다.이후부터는 ‘태극훈장’ 대신 ‘건국공로훈장’이 수여되었다. 캐나다 의료 선교사로 한국에서 활동하고 귀국 후 임시정부의 승인에 힘썼던 애비슨이 1952년 4월 외국인으로서는 처음 건국공로훈장을 받았다. 이어 1953년 11월, 대만의 장제스 총통이 뒤를 이었다. 당시 이 훈장을 받은 국내 인사는 이승만 대통령과 이시영 부통령 단둘 뿐일 정도로 그 수가 적었다.잠시 주춤하던 외국인 서훈은 10년이 지난 1963년, 중국 안둥의 ‘이륭양행’에 임시정부 교통국 사무소를 설치하여 독립운동을 지원한 쇼와 위에서 언급한 맥큔이 공훈을 인정받으면서 다시 이어졌다. 1966년에는 중국인 쑹메이링(宋美齡)·천궈푸(陳果夫)·천청(陳誠) 등이, 1968년에는 쑨원(孫文)·천치메이(陳其美)·천리푸(陳立夫)·뤼텐민(呂天民)·황쥐에(黃覺)·후한민(胡漢民)·장지(張繼)·린썬(林森)·류융야요(劉詠堯)·모덕후이(莫德惠)·황싱(黃興)·주칭란(朱慶瀾)·쑹자오런(宋敎仁)·장췬(張群)·궈타이치(郭泰棋)·마수리(馬樹禮)·탕지야오(唐繼堯)·다이리(戴笠)·그리어슨·스코필드·바커·피치·마틴 등 23명이 독립유공자로 선정되었다. 중국인들은 1910년대 초 신규식과 함께 동제사를 조직, 활동하였거나 국민당 출신으로 임시정부를 지원하고 광복군 창설·운영에 적극적으로 도움을 준 인물들이고, 서양인 대부분은 3·1운동과 관련한 경우이다.이후 외국인 독립유공자 서훈은 부정기적으로 이뤄졌다. 숫자도 크게 줄었다. 1969년에는 천주교 난징교구 총주교로서 한국독립운동을 후원하였던 위빈(于斌)이, 1970년에는 중국 국민정부 입법원장으로 임시정부 승인을 촉구하고 한중문화협회를 창립한 쑨커(孫科)가, 1977년에는 광복군 창설과 물자를 원조한 쉐웨(薛岳)·주자화(朱家?)가, 1980년에는 한중문화협회 간부였던 쓰투더(司徒德)·왕주이(汪竹一) 등이, 1996년에는 쑤징허와 1932년 윤봉길의거 후 김구의 피난을 도왔던 추푸청(?補成)이 독립유공자가 되었다. 1999년에는 제주도에서 도민들의 항일의식 고취에 힘썼던 도슨·스위니·라이언 등 천주교 신부들과 광복군을 지원하였던 후쭝난(胡宗南) 등이 선정되었다. 2004년에는 한국인 독립운동가를 변호하였던 일본인 후세 다쓰지(布施辰治), 2010년에는 군산에서 3·1운동을 주도하였던 린튼, 2014년에는 영국 신문기자로 취재한 내용을 책으로 발간하여 일제의 침략상을 세계에 알린 맥켄지 등이 공훈을 인정받았다. 2015년에는 광복 70주년을 맞아 10명이 대거 독립유공자에 선정되었다.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린 영국인 기자 스토리, 1919년 이후 외교 무대에서 한국의 독립운동을 적극 지원하거나 한국친우회를 조직, 활동한 톰킨스·벡·화이팅·토마스·구타펠·스펜서·마랭 등과 임시정부 승인과 한미협회 회장을 역임한 크롬웰 등이다. 2016년 독립운동가 김성숙의 부인이자 충칭에서 임시정부 외무부 부원으로 활동하였던 두쥔후이(杜君慧), 한국국민당·한국독립당 당원으로 활동하고 한국혁명여성동맹 창립에 참여하였던 리수전(李淑珍), 2018년 일본에서 박열과 함께 무정부주의 활동을 펼쳤던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까지 연이어 독립유공자가 되었다. 2019년도에는 해당자가 없었다.세계인이 도왔던 한국의 독립운동을 기억하는 법앞서 언급한 외국인 한국독립운동가들 가운데 국민들에게 잘 알려진 인물은 그리 많지 않다. 외국인 독립유공자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결과다. 이에 대한 문제점과 대안은 다음과 같다.첫째, 이들을 기리는 다양한 추모 행사를 개최했으면 한다. 1995년 8월에 해방 후 처음으로 외국인 독립유공자 합동 추모식이 열렸지만 일회성에 그쳤다. 이들을 기리는 추모 시설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외국인 독립유공자 가운데 국내에 묘지가 있는 인물은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묻힌 베델, 헐버트와 국립묘지에 있는 스코필드 3명뿐이다. 국립묘지에 위패만이라도 봉안하고 합동 추모 시설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둘째, 1992년부터 국가보훈처가 시행하고 있는 ‘이달의 독립운동가’ 12명 중에 외국인을 최소 한 명이라도 포함했으면 한다. 2013년 7월에서야 헐버트가 처음 선정되었고, 이후에도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된 외국인은 베델(2014.08.), 쇼(2015.04.), 스코필드(2016.03.), 피치(2018.01.), 맥큔(2020.02.) 등 다섯 명에 불과하다.셋째, 외국인 독립운동가의 독립운동 지원 활동을 알리는 단행본 편찬이나 논문 작성에 적극적인 재정 지원이 이뤄져야 한다. 이들과 관련한 논저는 몇몇 인물에 집중되어 있다. 대한민국장을 받은 5명 가운데 쑨원·장제스 정도의 저술이 있지만, 그것도 역서이다.넷째, 중국인 사회주의자로서 한국의 독립운동을 지원했거나 1930~1940년대 한중연합군 및 조선의용대와 함께 활동했던 중국군의 발굴도 적극적으로 이뤄져야 한다. 지금까지 독립유공자로 선정된 중국인들은 대개 국민당 출신들이다. 한국의 독립운동은 한반도를 넘어 전 세계에서 전개되었고, 해당국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했다. 우리의 독립을 돕기 위해 기꺼이 헌신적 봉사를 아끼지 않은 외국인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한국의 독립운동이 제국주의에 맞섰던 세계 평화운동의 하나였음을 보여주는 좋은 본보기이기 때문이다.]]> Mon, 02 Mar 2020 15:57:48 +0000 39 <![CDATA[민족대표 48인으로 3·1운동을 이끈 민족지도자 김세환 ]]> 글 독립기념관 전시부 민족대표 48인으로 3·1운동을 이끈 민족지도자 김세환김세환(金世煥)1889.11.18.~1945.09.26.경기도 수원건국훈장 독립장(1963)독립기념관은 국가보훈처 및 광복회와 공동으로 김세환을 2020년 3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김세환은 삼일여학교, 수원상업학교 등에서 민족교육에 힘썼으며 민족대표 48인으로서 수원의 3·1운동을 주도했다.alt김세환(金世煥)민족의식에 기초한 교육을 실시하다김세환은 1889년 11월 18일 경기도 수원에서 태어났다. 교회에 출석하여 기독교 신앙을 수용하였고, 교회를 통해 선교활동과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는 애국지사들의 지도를 받으며 자연스럽게 민족의식을 형성하였다. 1906년 한성외국어학교를 거쳐 일본 유학을 마친 후 1909년 말경 귀국하였다. 귀국한 후 수원상업강습소의 직조감독관으로 부임하고 교장과 교감을 겸임하여 근무하다가 1913년 밀러 선교사의 요청을 받아 삼일여학교의 교사 겸 학감으로 부임하였다. 그는 학교 건물 벽에 우리나라 지도를 조각하여 붙이는 등 학생들의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 시기 그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은 훗날 수원지역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로 성장하였다. alt김세환 가족사진alt수원학생친목회 화성팀 기념사진(1918) 수원 지역의 민족운동 지도자로 활약하다교회와 학교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김세환은 미국 윌슨 대통령이 선언한 민족자결주의를 듣고 이를 독립의 기회로 활용하고자 하였다. 박희도를 통해 3·1운동의 계획을 듣고 순회위원을 맡아 수원과 충청 일대 3·1운동을 기획, 준비 모임을 주도하였다. 3월 13일 일본 경찰에 체포된 김세환은 민족대표 48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재판을 받으며 법정에서도 조선독립의 당위성을 당당하게 역설하였다. 출감한 후 1923년 조선민립대학설립기성회 발기회에 수원지역 대표로 참여하였으며 신간회 수원지회 회장, 수원체육회 회장 등을 역임하며 수원지역의 민족운동을 대표하는 상징적 존재로 활동하였다. 1941년 수원상업학교를 설립하여 교육에 힘쓰다가 1945년 9월 26일 숨을 거두었다. 정부는 이러한 공훈을 기리어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alt공판을 받는 민족대표 48인(『동아일보』, 1920.07.12.)alt신간회 수원지회 임시대회 보도 기사(『동아일보』, 1928.08.22.)alt삼일여학교 김몌례 교사 송별회 기념사진(1916.08.24.)alt]]> Mon, 02 Mar 2020 15:59:07 +0000 39 <![CDATA[영광의 이름들 ]]> 글 독립기념관 자료부 영광의 이름들 1945년 11월 3, 4일경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이 중국 충칭(重慶)에서 고국으로 돌아오기 전에 감회를 적은 글이다. 제목은 신익희가 썼고 김구 주석을 비롯한 35명이 서명했다. 김구와 국무위원, 경위대원 등 29명은 11월 5일 충칭의 산호패 공항에서 두 대의 비행기를 타고 상하이로 출발했다. altalt]]> Mon, 02 Mar 2020 15:54:05 +0000 39 <![CDATA[역사를 바꾼 신념 ]]> 역사를 바꾼 신념 마음이란 강한 것이어서 온 마음을 다해 믿으면 이루어지기도 합니다.어쩌면 지난했던 역사는 믿음의 싸움이었는지도 모릅니다.을사늑약에 서명한 다섯 명의 대신은 한국의 멸망을 믿었습니다.제국주의 열강 아래서 약한 한국은 독립할 수 없다고.그러나 누군가는한국의 독립을 믿었습니다.우리 민족의 기상을 믿었고, 시대의 정의를 믿었습니다.그리고 마침내 더 강하고 옳은 신념이 역사를 바꾸었습니다. ]]> Mon, 02 Mar 2020 15:52:42 +0000 39 <![CDATA[미국 언론의 3·1운동 보도 ]]> 글 홍선표 나라역사연구소 소장 미국 언론의 3·1운동 보도Ⅲ. 3·1운동의 발발과 재미 한인의 독립운동 ③ 국내에서 민족 대표들이 비밀리에 3·1운동을 준비할 때 정동감리교회 목사 현순은 해외에서 외교와 통신을 담당할 목적으로 2월 23일 서울을 떠나 3월 1일 상하이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최창식, 신규식, 이광수, 신헌민, 김철 등과 교류하던 중 3월 4일 아침 국내 3·1운동 발발 소식을 들었다. 그 즉시 상하이 거류 한인들을 소집해 독립임시사무소를 설치하고 3·1운동 소식을 전 세계에 알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국내외 주요 한인 대표자들을 상하이로 불러 모아 향후 진로와 방책을 협의하고, 독립운동을 통할할 최고기관 설립을 모색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준비 작업이었다. 미국 언론의 3·1운동 보도와 확산현순의 전보는 3월 9일 새벽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와 호놀룰루의 하와이지방총회에 도착했다. 이 소식을 전달받은 중앙총회장 안창호는 3월 9일 오전 11시 중앙총회 임원진과 협의한 후 곧바로 미국의 각 언론사에 3·1운동 발발 소식을 알렸다. 그 결과 3월 10일부터 미국 전역의 주요 언론들은 3·1운동 발발 소식을 일제히 보도하기 시작했다.3·1운동 소식이 전파된 후 미국 언론들은 이후 국내의 통신원과 선교사들이 전한 소식을 기반으로 3·1운동의 세부 소식과 아울러 이를 무자비하게 탄압한 일제의 만행을 속속 보도하였다. 그러던 중 The Sacramento Bee (The Daily Bee의 후신)의 발행인 겸 편집장이자 연합통신(AP) 아시아 지국장이던 맥클래치(V. S. McClatchy; 1857~1938)가 3·1운동 영문 독립선언서를 가져와 처음 미국 언론에 알렸다. 당시 맥클래치는 부인과 함께 중국과 만주의 안동현을 거쳐 여행차 한국에 왔는데, 그때가 3월 3일부터 3월 6일이었다. 이 짧은 기간 동안 그는 한국에서 일어난 3·1운동의 실상을 직접 목격했다. 또 한국에서 활동 중인 구미의 여러 외국인을 만나 한국 정세에 관한 생생한 소식을 듣고 확인하였다.맥클래치는 서울에서 영문 독립선언서를 입수해 비밀리에 도쿄로 가지고 갔다. 도쿄에서 The Japan Advertiser와 연합통신사(AP)에 영문 독립선언서를 보도하도록 했으나 일본 당국의 삼엄한 검열 때문에 성사시키지 못했다. 그러다가 미국 본토로 가기 위해 하와이 호놀룰루에 잠시 체류하던 중 비밀리에 휴대한 영문 독립선언서를 현지 The Pacific Commercial Advertiser (Honolulu Advertiser의 전신)에 소개하였다. The Pacific Commercial Advertiser는 3월 28일 자에 처음으로 영문 독립선언서를 보도하였고, 아울러 맥클래치의 3·1운동 증언 내용을 1면 전면 기사로 실었다.The Pacific Commercial Advertiser가 ‘MANIFESTO’란 이름으로 처음 밝힌 영문 독립선언서는 이후 미국을 비롯해 전 세계에 배포된 영문 독립선언서의 원형이라 할 정도로 완벽한 문장이다. 이 영문 독립선언서가 누구에 의해 작성되어 어떻게 그에게 전달되었는지는 맥클래치 도 분명히 밝히지 않아 불분명하다. 그의 증언에 따르면 독립선언서가 해외로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총독부를 비롯한 일본 당국이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검열할 만큼 중요하게 여겼다고 한다.3·1독립선언서는 중국의 『민국일보』가 3월 9일 자에 처음으로 중국어로 된 선언서를 보도한 이후 『신문보』 3월 10일, 『익세보』 3월 11일, 『원동보』 3월 18일 순으로 중국 언론에 보도되었다. 『민국일보』 3월 28일 자에서 한국인들이 독립선언서를 한국어 외 영어, 러시아어, 중국어 등 4개의 언어로 만들어 배포했다고 한 것을 보면 적어도 초기엔 네 가지 언어로 작성되었고 이후 계속 번역된 것으로 보인다.맥클래치는 1919년 4월 2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자마자 AP통신을 이용해 전 미국 언론에 긴급으로 영문 독립선언서와 3·1운동의 실상을 알렸다. 그리고 미국 언론은 4월 3일 자부터 독립선언서의 원문을 소개하며 3·1운동의 실상을 비중 있게 보도하였다. 그의 영향 때문인지 4월부터 미국 언론의 한국독립운동 보도는 매우 활기를 띠었다. 맥클래치는 독립선언서를 널리 알린 것 외에 3·1운동의 실상을 담은 글을 작성해 San Francisco Examiner에 보냈다. San Francisco Examiner는 그의 글을 4월 6일 자 1면 전면에 실었다.맥클래치가 전한 영문 독립선언서와 3·1운동의 실상을 담은 기고문은 3·1운동 소식에 목말라 하던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에겐 최대의 희소식이었다. 『신한민보』는 4월 8일 그가 소개한 영문 독립선언서를 한국어로 번역해 처음으로 재미 한인사회에 소개하였다. 그런 후 San Francisco Examiner에 기고된 그의 글을 3회에 걸쳐 한국어로 번역해 소개하였다. 맥클래치의 활동은 당시 미국 언론뿐만 아니라 전 미주 한인사회에까지 영향을 미칠 정도로 컸다.한편 3월 29일 자 상하이 특별 전보로 ‘대한국민 공화정부’ 수립 사실이 하와이와 북미의 한인사회에 전해지자 대한인국민회는 곧바로 그 내용을 미국 언론에 알렸다. 미국 언론들은 3월 30일 자부터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사실을 시시각각 보도하기 시작했다. 임시정부 수립 보도는 영문 독립선언서의 보도와 같이 3·1운동이 단순한 일회성의 일시적인 독립운동이 아니라 장차 자주독립 국가를 건설하겠다는 한국인의 강한 열망과 의지를 전 세계에 알리는 좌표였다.alt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에 공포한 「3·1 독립선언 포고문」(1919.03.09.)미국 언론의 일본 야만성 폭로와 ‘3·1혁명’ 미국 언론들은 시시각각 전해지는 국내 3·1운동 소식에 주목하며 특히 일본 정부와 조선총독부의 사주를 받은 일본 군경의 무자비한 만행과 연약한 한국인 여학생들에 대한 야만 행위에 주의를 기울였다. 그리고 재한 미국 선교사들의 체포 소식과 그들에 대한 가혹행위, 특히 한국인 기독교인과 기독교회에 대한 일제의 만행에 관심을 갖고 집중 보도하였다. 이 가운데 The Washington Post 3월 15일 자에 평화로운 만세 시위에 참가한 한국인 여학생의 팔을 무자비하게 자른 일본의 만행을 폭로한 ‘Girl's Hands Cut Off’ 기사는 큰 반향을 일으켰다.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가 만든 독립의연금 영수증에 실린 팔이 잘린 채로 만세 시위를 하는 여학생의 그림은 이러한 보도에서 나왔다.미국 언론 보도에서 특별히 주목할 부분은 3·1운동의 비폭력적 평화 시위를 단순히 ‘Revolt(반항 또는 반란)’로 보지 않고 ‘Revolution(혁명)’으로 보도한 점이다. 즉, 한국인의 3·1독립운동을 일제 식민통치에 전면 항거한 거대한 혁명으로 간주했다. 이러한 미국 언론들의 시각은 오늘날 우리가 3·1운동을 어떤 자세로 바라보아야 하는지를 말해주는 것으로, 향후 3·1운동의 역사적 의의를 되새기고 평가하는 데 제대로 반영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Mon, 02 Mar 2020 16:03:44 +0000 39 <![CDATA[3·1운동 아이콘, 유관순의 부모님 유중권과 이소제를 아시나요 ]]> 글 김형목 사단법인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이사 3·1운동 아이콘, 유관순의 부모님 유중권과 이소제를 아시나요 3월이면 어김없이 떠오르는 인물이 있다. 바로 유관순이다. 열여덟 어린 나이에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다 옥사한 그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유관순의 부모님은 어떨까? 유중권과 이소제는 위대한 독립운동가 유관순의 부모이자, 그들 역시 독립운동에 헌신한 독립운동가였다. 101주년 3·1독립운동을 맞이하다2019년은 3·1독립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그날의 의미를 되새겼다. 다채로운 기념행사와 학술회의로 시대 변화에 부응한 역사 인식을 크게 심화시킬 수 있었다. 더불어 건전한 민주시민으로서 각자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다시 생각하는 결정적 계기였다. 자유와 독립을 향한 열정은 소수의 영웅만이 아니라 한민족이 혼연일체가 된 역사적인 산물이었다. 특히 여성독립운동가에 대한 재조명과 평가는 한국사를 새롭게 인식하는 에너지원으로 다가왔다. 3·1독립운동 결과는 민주공화제를 지향한 임시정부를 탄생시켰다. 임시정부는 독립운동 중추 기관으로서 일제와 투쟁하면서 민주주의 실행에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1948년 대한민국 수립은 어려운 투쟁을 극복한 한민족이 이룬 장엄한 서사시이다. 결국 3·1독립정신은 1세기가 지나 세계사 속에 우뚝 선 오늘날 대한민국의 든든한 정신적인 유산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친일세력 발호에 분개하다우리에게 유중권과 이소제 부부는 조금 생소한 인물이다. 이들은 3·1독립운동 아이콘, 유관순 열사의 부모님이다. 유관순 열사의 부모님은 관련 분야 연구자들만 알고 있는 정도여서, 그 이름은 약간 당혹스럽기까지 하다.아버지 유중권(1863~1919)은 충청남도 목천군 이동면 지령리에서 유빈기와 전주이씨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났다. 성장하여 청주한씨와 결혼하여 1897년 딸 유계출을 낳았으나, 출산 후 부인이 질병으로 사망하는 비운을 맞았다. 슬픔을 달래며 이소제(1875~1919)와 부부의 인연을 맺었다. 1899년에는 장남 유우석이 태어났다. 이어 유관순(1902~1920), 유인석(1904~1971), 유관석(1911~1944) 등을 낳아 다복한 가정을 이루었다.그는 양반이었지만, 경제적으로 그리 넉넉하지는 않았다. 경제적인 어려움에도 무기력한 생활에 안주하거나 돈을 버는데 몰두하지 않았다. 을사늑약 이후 친일세력인 일진회원 발호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이들은 일본인을 앞세워 토지 수탈과 더불어 아우내장터 유통권을 장악하는 등 온갖 행패를 서슴지 않았다. “일진회 목천군 지회장은 거리를 다니며 재물을 토색하고 북면에 사는 이 주사를 붙잡아 두드려 패서 금전과 미곡 등을 빼앗으니, 이 주사가 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칼로 목을 찔러 사경에 이르게 되었다”라는 신문 기사에서 당시 상황을 충분히 엿볼 수 있다. 더욱이 1907년 일본군은 의병 토벌을 구실로 주민들 집과 교회를 불태우는 동시에 사람들을 무참하게 살해했다. 유중권은 이 광경을 목격하면서 치를 떨었으나 별다른 대안이 없었다.아우내 지역 변화를 주도하다을사늑약 이후 식민지화에 대한 위기의식은 지역사회로 크게 확산되는 분위기였다. 서울에 거주하는 세력과 연계된 계몽론자들은 자강단체 지회 조직에 앞장섰다. 이들은 기호흥학회 지회 설립 인가에 노력을 기울였다. 본회는 유병필의 동의로 1908년 8월 통상회에서 시찰을 중지하고 설립을 인가했다. 임원과 조직 등을 보고하자, 9월 27일 특별총회를 통하여 지회장을 승인했다. 당시 지회원은 81명에 달할 정도로 컸다. 지회는 지회장, 부회장, 총무, 서기, 교육부, 재정부, 회계, 간사, 찬무원, 평의원 등으로 구성되었다.지회의 주요 활동은 역시 사립학교 설립에 의한 근대교육 보급과 강연회·연설회를 통한 민지 계발에 있었다. 목천 지역에도 1907년에 보성학교·진명학교·병진학교(후에 흥호학교로 바뀜) 등이 설립되었다. 유중권은 흥호학교 운영에 참여하는 한편 장남 유우석을 이 학교에 입학시켰다. 또한 국채보상운동에도 의연금을 내는 등 국권 회복에 남다른 관심을 보였다. 당시 목천군수는 흥호학교를 방문하여 “국가의 기초”란 연설로 임직원과 학생 등을 격려했다.한편 공주를 거점으로 활동한 케이블과 사애리시 등의 선교 활동도 이곳에서 시작되었다. 유관순 할아버지들은 이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한편 지령리교회를 세웠다. 유씨 일가는 가치관의 변화와 더불어 여성 인권에 관심을 보였다. 일가에게 근대교육은 국권을 회복하는 지름길로 인식되었다. 유관순이 영명여학교와 이화학당에서 근대학문의 수혜를 누릴 수 있었던 배경을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alt병천리 성공회 여자 성도(1910년대)alt케이블 선교사(앞줄 왼쪽에서 세 번째) alt지령리교회 신자들 국채보상운동 참여자 명단 (『대한매일신보』, 1907.08.16.)지방으로 확산되다서울·평양·정주·원산 등지에서 시작된 3·1독립운동은 지방으로 ‘쓰나미’처럼 파급되었다. 목천 지역에서는 3월 14일 목천보통학교 학생 120여 명이 교정에서 독립만세를 불렀다. 인근 천안 지역은 3월 20일 직산 양대리 시장에서 봉화를 올렸다. 광명학교 교사와 학생, 직산 금광 광부 등은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소리 높이 외쳤다. 27일에는 600~700명이 다시 직산 시장에서 시위행진을 감행하는 등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성환에서는 31일 밤에 수천 명이 모여 시장을 활보하는 등 독립에 대한 염원을 표출했다. 이러한 소식은 곧장 인근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아우내 만세운동은 홍일선·조인원·김교선·유중권·유중무 등에 의해 계획되고 있었다. 이들은 아우내 장날인 4월 1일을 만세시위 날로 정하여 각자 임무를 분담하였다. 한편 유관순은 이화학당 여학생으로 ‘5인 결사대’를 조직하여 서울에서 시위행렬에 가담했다. 휴교령과 함께 기숙사가 폐쇄되어 사촌 언니 유예도와 함께 기차로 3월 13일경 고향에 내려왔다. 그는 부모님과 숙부에게 서울 상황을 소상하게 알렸다. 그리고 사촌 언니와 여러 마을을 돌아다니며 주민들 참여를 권유하는 동시에 태극기 등을 만들었다. 유중권과 조인원 등은 3월 31일 저녁에 천안 길목인 수신면 산마루와 진천 고갯마루에 횃불을 올려 내일의 거사를 알리도록 했다.아우내 장터가 핏빛으로 변하다마침내 4월 초하룻날이 밝았다. 초봄이라 기온이 낮아 약간 쌀쌀한 날씨였다. 유중권과 이소제 부부를 비롯한 마을 주민들은 아침밥을 먹고 일찍 장터로 향했다. 정오가 조금 지났을 무렵 홍일선·김교선·이백하 등은 장터에 오는 주민들에게 독립만세를 부르도록 부탁했다. 장터를 떠나려는 사람들에게 참여를 적극적으로 권유하였다. “어디 가세요? 오늘 독립만세를 부릅니다. 장터를 떠나지 마세요.” 오후 1시경 ‘대한독립’이라고 쓴 큰 깃발을 앞세우고 태극기를 든 조인원이 나타났다. 그는 곧바로 쌀가마니에 올라서서 주머니에서 꺼낸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기 시작했다. 이어 유중권·유중무 형제와 조병호 등은 앞장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군중들은 태극기를 흔들며 호응함으로 만세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였다. 병천 헌병주재소 소장과 부하 등은 현장에 출동하여 해산을 종용하였으나 시위행렬은 멈추지 않았다. 헌병들이 시위대를 향해 발포를 시작하자 부상자가 속출했다.유관순은 헌병에게 달려들어 사격을 못 하도록 저지하였다. 시위대는 부상자에 대한 응급조치와 동시에 순국자의 시신을 주재소로 운구했다. 시위대 100여 명은 주재소에 도착하여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다시 외쳤다. 사상자 발생에 대한 항의와 구금자 석방을 요구하면서 유치장 벽을 파손했다. 이 과정에서 유중권은 헌병의 총검에 옆구리와 머리를 찔려 빈사 상태에 빠졌다. 유중무는 형을 업고 주재소로 가서 치료해달라며 항의했다.군중들이 주재소로 계속 몰려와 참여 인원이 3천여 명으로 증가했다. 시위대는 헌병의 탄약함을 잡아당기고 ‘소장을 죽이라’고 외치면서 소장을 끌어내려 안간힘을 썼다. 헌병이 권총을 몇 발 쏘며 저항하자 시위대는 피신하거나 주재소 반대편으로 이동하였다. 이에 헌병들은 시신을 주재소 밖으로 내던졌다. 만행에 격분한 유중무는 두루마기 끈을 풀어 헌병에게 항의하면서 형을 주재소 사무실로 옮기려고 했다. 헌병보조원이 이를 저지하려 하자 “너는 보조원을 몇십 년 하겠느냐?”며 질책하였다. 유관순도 아버지 중상을 확인하고 “자기 나라를 되찾으려고 정당한 일을 하는 데 어째서 총기를 사용하여 내 민족을 죽이느냐?”며 격렬하게 항의했다. 이소제도 주재소를 찾아가 불법적인 행위를 질책하다가 총탄에 희생되고 말았다. 이날 일제의 잔혹한 탄압은 다음을 통해 엿볼 수 있다.“1일 오후 1시 병천시장에서 약 3천 명의 군중이 구한국기를 선두에 세우고 독립운동을 개시하여 동지 헌병주재소에 내습하여 폭행을 극렬히 하고 그치지 않아 발포 해산했다. 다시 일어날 우려가 있어 헌병 하사 1명과 보병 장교 이하 6명이 급행하여 경계 중 오후 4시에 다시 주재소에 쇄도하여 철조망을 파괴하고 구내에 난입하여 소방기구를 탈취하여 고야마(小山) 헌병오장을 붙잡아 가려고 하며 격투 끝에 오장을 탈환하고 응원대의 협력하에 발포 해산시켰다.” 평화적인 시위를 일제는 총칼로 진압하는 야만성을 그대로 드러내었다. 만세운동을 진압한 후에도 탄압은 계속되어 주민들을 공포 속으로 내몰았다.alt병천 헌병주재소참된 삶이란 무엇인가중상을 입은 유중권은 집에서 치료를 받다가 다음날 4월 2일에 순국하였다. 부부의 아름다운 인연은 일제에 의한 참혹한 순국으로 이어지고 말았다. 불행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유관순은 부모님 순국을 현실로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주동자로 ‘낙인찍힌’ 현실에서 사촌 언니와 함께 일제 감시를 피해야만 하는 운명에 놓였다. 일제 군경은 수시로 찾아와 가족들을 괴롭혔다. 이제 자신조차 숨을 곳도 없었다.오빠 유우석은 공주 지역 만세운동을 주도하다가 공주 감옥에 구금되었다. 그곳에서 유관순과 유우석은 운명적으로 만났다. 남동생들은 할아버지마저 사망해 고아 신세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1920년 9월 유관순은 싸늘한 죽음으로 우리 곁을 떠났다. 무덤마저 사라져 원혼이 구천을 떠돌고 있다.흔히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유관순 일가는 이를 그대로 보여주는 전형이다. 외형상으로 너무나 정확한 표현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희생적인 인생 항로는 역사 무대에서 다시 빛을 발하고 있다.]]> Mon, 02 Mar 2020 16:00:11 +0000 39 <![CDATA[나당전쟁으로 한데 뭉친 한민족 ]]> 글 김종성 역사작가 나당전쟁으로 한데 뭉친 한민족 신라와 당나라는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킬 때는 손 잡았지만, 나중에는 반목하고 전쟁까지 벌였다. 역사는 이 일을 나당전쟁으로 기억한다. 이러한 갈등의 조짐은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멸망시킨 660년부터 나타났다. alt매소성전투 기록화(전쟁기념관 제공)당나라의 야심과 연합의 위기『삼국사기』 김유신 열전은 “당나라 사람들이 백제를 멸망시킨 뒤 사비성 언덕에 진영을 꾸리고 은밀히 신라 침공을 계획하고 있음을 (신라 조정이) 알게 됐다”고 말한다. 이에 대비해 신라에서는 태종무열왕 김춘추 주재하에 긴급회의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신라군을 백제 부흥군으로 변장 시켜 당나라군을 공격하자는 제안이 나왔다. 김유신은 여기에 동조하면서 “개는 주인을 무서워하지만, 주인이 제 다리를 밟으면 무는 법입니다. 어려움에 직면하여 어찌 자기 목숨을 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하며 군사행동을 제안했다. 이러한 움직임이 당나라 군영에 포착되고, 당나라군은 일부 병력만을 남긴 채 철군했다고 『삼국사기』는 말한다. 그래서 이때는 충돌이 발생하지 않았다.나당연합은 백제 멸망 12년 전인 648년에 신라 사신 김춘추와 당나라 태종(당 태종) 이세민의 합의로 결성됐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 편에 따르면, 이때 양측은 ‘평양 이남은 신라가, 이북은 당나라가 갖자’는 데 동의했다고 한다. 합의 당사자인 당 태종은 안시성전투의 부상으로 후유증을 앓다가 649년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660년에는 그의 아들 고종이 황제로 있었다. 당 태종이 사망한 뒤였지만, 여전히 양국의 약속은 유효했다. 그렇기 때문에 당나라는 백제 땅을 신라에게 넘겨야 했지만,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백제 고토를 넘기기는커녕, 도리어 신라 땅까지 빼앗을 움직임을 보였다. 그래서 신라 조정에서 선제공격론까지 나왔던 것이다.신라는 당나라가 신라 땅을 빼앗지 못하도록 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당나라가 백제에 도독부라는 행정관청을 설치하는 것까지는 막지 못했다. 당나라는 이런 식으로 형식상으로나마 백제 땅을 자국 행정구역에 포함시켰다. 물론 도독만 임명했을 뿐, 백제 유민들을 실질적으로 지배하지는 않았다. 백제 유민들은 토착 세력의 지배하에 놓였다. 그 뒤 당나라의 야욕이 신라를 향해 다시 표출됐다. 백제가 멸망하고 3년이 지난 663년, 당나라가 김춘추의 아들인 문무왕을 계림주대도독에 임명한 것이다. 할 수 있다면 신라 땅까지 빼앗았겠지만, 그것이 여의치 않았기에 계림주대도독을 임명하는 선에서 그쳤다. 이 같은 조치가 신라 국권에 영향을 주지는 않았으나, 당나라의 야심을 명확히 드러내는 일임은 분명했다.신라와 당나라의 충돌신라와 당나라는 상호 불신을 해소하지 못한 상태에서 또 한 번 나당연합을 가동했다. 668년 고구려 침공을 위해서였다. 연합의 재가동은 결국 고구려 멸망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백제 멸망 뒤에 그랬던 것처럼 이들의 동맹은 동요했다. 당나라는 고구려 땅에 도독부보다 한 단계 높은 도호부를 설치했다. 나아가 평양 이남을 신라에게 넘기겠다는 약속도 지키지 않았다. 이로 인한 긴장 상태가 양국관계를 험악하게 만들었고, 나당전쟁의 발발로 이어졌다.신라는 한민족을 통합하고 싶은 열망이 강했다. 그 열망이 아무리 강렬하다 해도 동아시아 최강 당나라의 벽부터 넘지 않으면 안 됐다. 당나라를 상대로 아무 때나 전쟁을 벌일 수는 없었다. 조건이 성취돼야 가능한 일이었다. 그 조건이 고구려 멸망 즈음에 당나라 서쪽에서 형성됐다. 티베트 고원의 움직임이 바로 그것이다. 당나라가 백제·고구려 침략에 눈을 돌린 사이, 티베트 고원의 토번 왕국은 당나라 서쪽의 토욕혼 같은 국가들을 공략하며 세력을 급속히 팽창시켜갔다. 토번의 기세는 고구려 멸망 즈음해서 한층 더 거세졌다.토번의 중앙아시아 공략이 당나라와 중동·유럽을 잇는 비단길(실크로드·오아시스길)을 위협했기 때문에 당나라는 토번을 경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기원전 2세기에 한나라가 개척한 비단길은 세계 최대 무역로로 성장하면서 중국의 번영을 가능하게 했다. 이 길을 빼앗기면 당나라의 국제적 지위가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당나라는 동쪽의 백제·고구려에 투입했던 역량의 상당 부분을 토번이 있는 서쪽으로 돌렸다. 고구려 멸망 이듬해인 669년에 안동도호부 도호 설인귀를 토번과의 전쟁에 차출한 것도 그 때문이다. 당나라가 서쪽으로 눈길을 돌리면서 신라는 좀 더 유리한 조건에서 나당전쟁을 일으킬 수 있었다.매소성전투에서 발휘된 한민족의 단결력나당전쟁은 676년 당나라가 고구려에 설치했던 안동도호부와 백제에 설치했던 웅진도독부를 한반도 밖으로 이동시킴에 따라 종결됐다. 안동도호부와 웅진도독부를 폐지하지 않고 한반도 밖으로 옮긴 것은 자국의 실패를 감추기 위한 상징적 조치였다. 이 조치로 인해 나당전쟁이 종결됐다고 볼 수 있지만, 전쟁의 발발 시점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670년에 신라의 선제 공격으로 발발했다는 견해가 우세하지만, 669년으로 보는 견해도 있고 671년이나 672년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고구려 멸망 뒤에 신라와 당나라 사이에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신라·고구려 유민 연합군 대 당나라·말갈·거란 연합군의 충돌이 잦았다. 이 때문에 ‘신라가 말갈군과 싸운 것도 나당전쟁의 범주에 넣을 수 있느냐’ 등의 문제를 놓고 학설이 대립하게 된 것이다. 어느 전투를 최초로 봐야 하는가를 두고는 논란이 벌어질 만하지만, 당나라·말갈·거란 연합군이 패배를 인정하고 철군하도록 만든 결정적 전투가 무엇인지에 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거의 없다. 전쟁의 향방을 가른 결정적 전투는 아주 명확히 기억되고 있다. 음력으로 문무왕 15년 9월 29일(양력 675년 10월 23일)의 매소성전투가 바로 그것이다. 매소성전투에서 당·말갈 연합군인 말갈족 추장 이근행의 20만 명 병력이 격파됐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 편은 “이근행이 군사 20만 명을 거느리고 매소성에 와서 주둔하므로 우리 군대가 공격해서 쫓아버리고 전마 3만 380필을 획득했으며, 그 밖의 병기를 얻은 것도 이와 비슷했다”라고 말한다. 당·말갈 연합군의 주력은 말갈군과 거란군이었다. 매소성전투는 이 연합군의 기를 꺾는 역할을 했다. 반면 영웅적인 희생들도 있었다. “말갈이 적목성을 에워싸니 현령 탈기가 백성을 거느리고 맞서 싸우다가 힘이 다하여 모두 함께 죽었다. 당나라 군대가 석현성을 포위하여 빼앗으니 현령 선백과 실모 등이 힘을 다해 싸우다가 죽었다”고 위 문무왕 편은 말한다. 나당전쟁에서 신라인들만 목숨 걸고 싸운 게 아니다. 고구려 부흥군도 힘을 다해 싸웠다. 부흥군의 뜻은 이뤄지지 않았지만, 여기서 발휘된 한민족의 단결력은 동아시아 최강 당나라를 한반도에서 더 많이 밀어내는 데 기여했다. 또한, 이 전쟁은 대조영이 고구려 멸망 30년 만인 698년에 발해를 세우고 고구려 고토 대부분을 수복하는 데도 간접적인 역할을 했다. 신라가 한반도에서 당나라를 추방하지 않았다면, 대조영은 건국 과정에서 당나라의 견제를 좀 더 많이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나당전쟁으로 인해 한반도와 만주에서 당나라의 영향력이 감소했고, 이것이 신라·발해의 남북국시대가 펼쳐지는 데 기여한 측면을 결코 간과할 수 없다.]]> Mon, 02 Mar 2020 16:04:41 +0000 39 <![CDATA[파스텔 색감으로 물들다 전남 구례 ]]> 글·사진 임운석 여행작가 파스텔 색감으로 물들다전남 구례 이맘때 구례에는 봄의 전령사 산수유가 흐드러지게 핀다. 은은한 색감에 향기마저 그윽해 정신이 아득하다. 그 가운데 ‘구름 속의 새처럼 평온하게 자리한 집’이 있으니 운조루다. 남도 지방의 대표적인 양반 가옥으로 200여 년이 넘는 세월만큼이나 많은 이야기가 켜켜이 쌓여 있다. 산수유꽃길을 따라 걸으며 운조루에 다녀왔다.alt개울을 따라 이어진 산수유나무봄볕에 뒤덮인 남녘 마을섬진강과 지리산 사이에 자리한 구례 산수유마을에는 3월 말부터 4월 중순까지 산수유꽃이 푸지게 피어난다. 주체할 수 없는 몽환적인 색채 덕분에 상춘객의 마음은 구름처럼 가벼워진다. 이 마을에는 산책하기 좋은 ‘꽃담길’이 있다. 산수유 꽃길을 따라 조성된 걷기 길로서 1코스는 약 2.6km, 2코스는 약 3.2km이다. 1코스에 비해 조금 더 긴 2코스는 산수유사랑공원 뒷길에 자리한 방호정(전남 문화재자료 제32호)을 돌아 평촌교를 지난다. 산수유사랑공원은 산수유의 유래와 효험 등을 살펴볼 수 있는 산수유문화관 뒤편에 자리한다. 공원은 산수유 꽃말인 ‘영원불멸의 사랑’을 주제로 조성되었다. 입구에 설치된 하트 모양의 문을 연인이 손잡고 지나가면 사랑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공원 정상부는 이 마을에서 전망이 가장 좋은 곳이다. 언덕 위에는 포토존과 거대한 산수유꽃 조형물이 있다. 방호정을 뒤로하고 평촌교를 건너면 마을 속으로 들어가는 고샅길이 열린다. 아득한 곳에 병풍처럼 에두른 지리산에는 아직도 잔설이 남아 있어 봄이 무색하다. 봄과 겨울이 공존하는 독특한 풍광 탓에 사진가들의 발걸음이 잦다. 대음교 못미처 발걸음을 멈춘다. 냇물과 넓은 암반 그리고 산수유꽃이 어우러져 장관이다. 산책로는 사시천을 따라 이어진다. 그 길을 따라 걸으면 어느새 반곡마을이다. 마을회관에서 걸어왔던 반대편 산책로를 따라 내려가면 꽃담길 2코스를 완주한 셈이다. 산수유마을은 어느 한 마을만의 이름이 아니다. 산수유꽃이 핀 산동면 모두가 산수유마을인 것이다. 수령이 1,000년에 달하는 산수유 시목(始木)이 있는 계척마을도 그냥 지나치기 아쉽다. 마을 앞 저수지를 돌아보고 견두산(775m) 마루에 올라 마을 전체를 조망해도 좋다. alt수백 년을 이어온 돌담길alt산수유꽃에 파묻힌 정자에서 노부부가 봄볕을 즐긴다 구름 속의 새처럼 숨어 사는 집, 운조루봄날의 꽃길 산책은 꽃내음이 물씬한 운조루로 향한다. 운조루는 조선 후기 무신 유이주(1726~1797) 선생이 1776년(영조 52)에 세운 집이다. 어린 시절 산에서 호랑이를 만나자 채찍으로 호랑이의 얼굴을 내리쳐 물리쳤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정도로 그는 기골이 장대한 장수였다. 건축에 남다른 식견을 보여 정조 때 대규모 건축 공사를 도맡아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그 경험을 토대로 선생은 조선 후기 대표 양반 가옥으로 평가받는 운조루를 구상했다. ‘운조루’는 ‘구름 속의 새처럼 숨어 사는 집’이라는 뜻과 ‘구름 위를 나는 새가 사는 빼어난 집’이라는 뜻을 가졌다. 하지만 원래 이름은 도연명의 칠언율시 ‘귀거래혜사(歸去來兮辭)’에서 머리글자를 따서 지은 것으로 전한다. 집안의 부를 상징하듯 18칸의 행랑채가 ‘ㅡ’자로 길게 이어지고, 솟을대문을 지나면 ‘ㅗ’자 모형의 사랑채와 ‘ㄷ’자 모양의 안채가 자리한다.누마루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보니운조루에 들어서니, 유이주 선생이 물리쳤다는 호랑이 뼈가 솟을대문에 걸려있다. 호랑이 뼈가 액운을 막는다는 주장에 따라 대문에 걸어둔 것이다. 대문에는 ‘입춘대길’ 글자도 큼지막하게 써 붙여 놓았다. 복을 가까이하고 재앙을 멀리하고 싶은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어 보인다. 대문을 지나자 큰사랑채와 오른편에 있는 아랫사랑채가 한눈에 들어온다. 큰사랑채는 막돌을 쌓아 기단을 만들고 그 위에 온돌방과 대청, 누마루를 지었다. 이 누마루의 이름이 운조루이다. 사랑채의 기단 높이는 최소한 1m. 중앙 계단을 따라 대청을 지나 누마루에 오르면 마당에서부터 2m 정도 높이에 올라선 셈이다. 시야가 높아지니 행랑채 너머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망루에 올라 군사를 호령했던 무관 출신 유이주 선생의 기개를 느낀다. 툇마루로 오르는 디딤은 돌이 아니라 통나무로 만들었다. 사생활 보호를 위해 하인들이 사랑채 안을 들여다보지 못하도록 미닫이 문지방 아래에 ‘머름’을 설치해 놓은 것도 우리 선조의 지혜이다. 누마루는 일반 가옥과 달리 처마가 깊어 추녀가 기둥 밖으로 많이 돌출되었다. 자칫 추녀가 처지는 것을 막기 위해 보조 기둥인 활주를 세웠다. 활주를 떠받친 주춧돌은 다른 주춧돌과 달리 8각 기둥을 세워 ‘하늘은 둥글고 땅은 모나다’는 뜻의 천원지방 사상을 표현했다. 기둥과 돌 간격이 조금 떠 있는데 이것은 습기에 취약한 나무를 보호하기 위해 소금을 뿌리고 기둥을 세운 흔적이다. 이것을 ‘소금버캐’라 부른다. alt인공연지 뒤로 운조루가 자리하고 그 뒤로 배산이 있다alt누마루인 운조루 작지만 큰 배려, 그것은 사랑이라큰사랑채와 아랫사랑채 사이에 중문을 통과하면 안채가 나온다. 마당 한가운데 놓여 있는 장독대가 여인들의 공간임을 대변해주는 듯하다. 안주인이 기거하는 안방, 며느리가 기거하는 건넌방, 음식을 조리하는 부엌과 보관하는 찬방, 곡식을 보관하는 곳간 등이 있다. 안채 대청마루 선반에는 가재도구들을 올려놓아 사람의 손이 여전히 닿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건넌방 벽면에 소박한 민화가 걸려 있다. 운조루에서는 주인장의 마음 깊은 배려를 느낄 수 있다. 첫 번째는 여성을 위한 배려다. 안채 건넌방에 2층 다락방을 만들어 밖에 나가지 않고서도 사랑채를 오가는 사람들을 볼 수 있도록 했다. 작은 창문에 지나지 않지만, 당시 여성들에게는 세상과 통하는 창이었다. 두 번째는 가난한 사람을 위한 배려다. 중문 사이에 있는 원통형의 뒤주에는 ‘누구나 뒤주를 열 수 있다’는 뜻의 타인능해(他人能解)라 적힌 글씨가 붙어 있다. 굶주린 사람들이 와서 쌀을 가져가도록 배려한 것이다. 일명 ‘가렛굴’이라 부르는 기단에 설치한 굴뚝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배려다. 굴뚝은 연기가 잘 빠지도록 지붕보다 높게 설치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끼니를 거르는 사람이 많았던 당시, 밥 짓는 연기가 멀리까지 피어오르면 가난한 사람들이 상실감을 느낄 것을 염려해 굴뚝을 기단에 설치한 것이다. 세 번째는 몸이 불편한 어른을 위한 배려다. 가마가 솟을대문을 지나 중문까지 곧바로 들어갈 수 있도록 기단에 경사면을 설치한 것이다. 운조루는 세월의 깊이만큼 배려와 과학이 곳곳에 깃들어 봄빛처럼 밝고 봄볕처럼 따뜻한 집임이 분명하다. alt솟을대문에서 바라본 큰사랑채, 기단이 꽤 높게 설치되어 있다alt누구나 열 수 있다는 타인능해 뒤주 ]]> Mon, 02 Mar 2020 16:06:02 +0000 39 <![CDATA[발걸음 재촉하는 다채로운 눈요기가 있는 곳 경기도 안성 ]]> 글·사진 김초록 여행칼럼니스트발걸음 재촉하는 다채로운 눈요기가 있는 곳경기도 안성계절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흘러간다. 봄기운 완연한 4월, 시나브로 새 옷으로 갈아입은 산과 들에서 풋풋한 내음이 풍겨오고 사람들은 한결 가벼워진 옷차림을 하고 있다. 이 좋은 날, 어디로 갈까 망설이다가, 화사한 꽃의 향연과 신명나는 놀이판이 있는 안성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alt 얼쑤! 흥겨운 남사당놀이 한판“어흠 어흠, 아따 밤중 가운데 사람이 많이 모였구나.”“아닌 밤중 사람이야 많건 적건 웬 영감이 남의 놀음처에 난가히 떠드시오.”안성 시내에서 조금 떨어져 자리한 안성맞춤랜드의 남사당공연장에서 공연이 한창이다. 매주 주말이면 이곳에서 안성시립남사당바우덕이풍물단이 흥겨운 잔치를 벌인다. 남사당놀이는 남자들로 구성된 유랑광대극으로, 유랑하는 예인들의 민속예능이다. 신명나는 음악과 함께 사회적 메시지를 풍자와 해학을 담아 전달하는 것이 특징인데, 꽹과리와 장구, 징 등 풍물을 쩌렁쩌렁 신명나게 울리며 갖가지 곡예와 재담을 선보인다. 특히 지난 2009년 유네스코 무형문화재로 지정되면서 명실공히 안성의 아이콘으로 자리 잡았다.남사당놀이는 풍물놀이(농악대)·버나(접시돌리기)·살판(땅재주 놀이)·어름(줄타기)·덧뵈기(탈놀이)·덜미(꼭두각시놀음)까지 총 여섯 마당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중에서도 3m 높이 외줄 위에서 아슬아슬한 묘기를 펼치는 ‘어름’은 남사당놀이의 백미다. 어름이라는 단어는 ‘줄 위를 걷듯이 조심스럽다’는 뜻에서 유래했다. 외줄을 타고 덩실덩실 춤추는 줄타기 묘기는 관객들에게 짜릿한 즐거움과 스릴을 선사한다. 둥글고 넓적하게 만든 가죽접시를 담뱃대나 기다란 나무로 돌리는 ‘버나놀이’와 남녀노소 모든 단원이 함께 출연하는 ‘풍물놀이’는 보는 이들의 어깨를 저절로 들썩이게 한다.안성맞춤랜드: 경기 안성시 보개면 남사당로 196-31 남사당전수관 / 031-678-2672 / www.anseong.go.kr/tour 천재 예인 바우덕이의 뒤를 잇다남사당놀이의 역사는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종 2년(1865) 흥선대원군은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각지의 농악대를 동원해 노래와 춤, 풍물 연주 등 갖가지 재주 부리기로 인부들의 흥을 돋웠다. 당시 유독 대원군의 눈에 띈 인물이 있었으니, 신기의 기예를 뽐낸 ‘바우덕이’였다. 50여 명의 농악대 단원 중 여성은 안성에서 온 바우덕이, 김암덕(金巖德) 단 한 명뿐이었다. 그녀의 나이 15세 때였다. 흥선대원군으로부터 정3품(당상관)을 하사받은 김암덕은 그동안 갈고닦은 모든 기예를 발휘해 경복궁 중건이 마무리될 때까지 인부들에게 힘을 불어넣어 주었다. 바우덕이가 없었다면 경복궁 중건이 제대로 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이 돌 정도로 당시 그녀의 영향력은 대단했다. 그러나 타고난 천재 예인은 23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해 많은 사람들을 안타깝게 했다. 안성 남사당놀이는 이렇게 바우덕이의 뒤를 이어 탄생했다.         alt남사당공연장alt바우덕이 동상 alt 남사당놀이 ‘어름’(안성시청 제공) alt 격렬했던 독립운동의 성지독립운동사에 있어 안성은 3·1운동의 3대 항쟁지라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1919년 3월 11일 보성전문학교 남진우와 선린상업학교 고원근이 학생들을 모아 양성공립보통학교 운동장에서 시위를 주도했고, 이후 안성 각 지역으로 만세운동이 급속히 퍼져나갔다. 읍내에서는 안성장터 상인들이 군청과 경찰서 일대를 돌며 시위를 전개했고, 이죽면(죽산면)에서는 죽산공립보통학교 양재욱·안재헌 등이 학생 50여 명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일죽면과 삼죽면 주민들은 면사무소와 주재소에 돌을 던지며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3·1운동기념관은 당시의 역사적 현장을 후세에 널리 알리고자 건립되었다. 안성은 경기도 내 가장 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지역이기도 한데, 기념관 야외에는 안성 지역 독립운동가의 넋을 위로하기 위한 사당 광복사가 마련돼 있다. 그 외에도 만세고개 기념비, 안성3·1운동 기념탑, 무궁화동산 등을 조성해 그들의 숭고한 뜻을 기리고 있다.기념관이 자리 잡은 만세고개 일원은 4·1만세항쟁의 집결지다. 최은식·이유석 등을 주축으로 약 1,000여 명의 주민들이 횃불을 들고 만세고개를 넘었던 그날, 극렬한 만세항쟁으로 일제를 몰아내고 ‘2일간의 해방’을 이루어냈다. 양성면까지 진출한 이들은 면사무소를 습격해 일장기를 비롯하여 각종 서류와 집기를 불태웠으며, 주재소·우편소·일본인 상점 등을 부쉈다. 일제는 4·1만세항쟁에 대한 보복으로 헌병대를 동원, 시위대를 체포해 잔인하게 고문·살해하고 가옥을 불태우는 등 만행을 저질렀다.안성 3·1운동기념관: 경기도 안성시 원곡면 만세로 868 / 031-678-2475 / www.anseong.go.kr/tourPortal/41 alt안성3·1운동 기념탑alt기념관 내 재현해놓은 고문방 및 수감방 alt 봄 경치에 둘러싸인 산사안성 시내에서 진천 방향 17번 국도를 따라가면 의적 임꺽정의 자취가 서린 칠장사가 나온다. 조선시대 대표적인 의적이었던 임꺽정은 백정 신분이었지만 수탈과 억압에 신음하는 민초들을 규합해 경기도와 황해도 일대에서 의적 활동을 전개했다. 선덕여왕 5년(636년)에 자장율사가 창건한 칠장사는 임꺽정의 스승 갖바치가 머물던 곳으로, 홍명희의 역사소설 『임꺽정』에서 조광조가 병해대사(갖바치)를 찾아가 세사(世事)를 논했던 곳이다. 절 뒤편에는 나한전이란 사찰이 있다. 암행어사 박문수가 과거를 보러가는 길에 이곳에서 기도를 드리고 꿈에 시험 문제가 나와 장원급제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래서 입시 때가 되면 수험생을 둔 부모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다. 칠장산에 칠장사가 있다면 안성 시내 남쪽 방면에 위치한 서운산에는 청룡사가 있다. 청룡사는 고려 원종 때 명본국사(明本國師)가 세운 절로 창건 당시에는 대장암(大藏庵)이란 이름이었다가, 1364년 나옹(懶翁)화상이 중창할 때 청룡이 구름을 타고 내려오는 것을 보고 이름을 청룡사로 바꾸었다고 전해진다. 청룡사는 남사당패의 근거지이기도 하다. 남사당패는 청룡사에서 겨울을 지낸 뒤 봄부터 가을까지 안성장터를 비롯해 전국을 돌아다니며 공연을 펼쳤다고 한다. 청룡저수지 들머리 야산에는 남사당패의 여자 꼭두쇠(우두머리)로 활약했던 바우덕이 묘가 있다. 칠장산과 서운산은 높이가 낮아 가족 산행지로 좋은데, 특히 서운산은 4월 말이면 철쭉이 활짝 꽃을 피워 봄철 분위기가 절정으로 무르익는다. 근처의 청룡저수지는 물결이 잔잔하여 수상스키와 모터보트 같은 수상레저를 즐기기에도 좋다.칠장사: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 칠장로 399-18 / 031-673-0776서운사: 경기도 안성시 미양면 역전길 5         alt칠장사 대웅전alt청룡사 대웅전 alt 안성 곳곳에 흩어진 다양한 볼거리안성은 관내에 두루 볼거리가 많다. 칠장사에서 그리 멀지 않은 죽주산성은 병자호란과 임진왜란 때 왜군과 맞서 싸웠던 격전지로 본성·외성·내성 등 세 겹으로 만들어진 돌성이다. 돌을 겹겹이 쌓아 올려 견고하고 자연미가 그대로 살아있다. 죽주산성은 삼남(충청도·전라도·경상도)과 서울을 이어주는 교통 요충지였는데, 고려시대에는 여러 차례 몽고군의 공격을 받기도 했다.천주교 순교성지 중 특히 들를 만한 곳은 미리내성지다. ‘미리내’는 밤이면 달빛 아래 불빛이 은하수처럼 보인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쌍령산과 시궁산이 아늑하게 감싼 3만여 평의 성지 안에는 한국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 신부의 경당과 성모성심당·103위 순교성인 기념관·십자가의 길 등이 있다. 성지를 다 둘러보는 데에는 1시간 이상이 소요된다.미리내성지 입구인 난실리 마을에는 조병화문학관도 있으니 함께 둘러보길 추천한다. 꿈과 사랑의 정신을 쉬운 일상의 언어로 표현해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던 조병화 시인은 이곳  편운재에 머물며 많은 작품을 썼다. 마을 사람들을 찬미하는 내용인 ‘우리 난실리’는 기교와 가식이 섞이지 않은 소박한 시로, 지금도 우리에게 잔잔한 울림을 전한다.이밖에도 안성은 고삼·금광·마둔 등 저수지가 많기로 유명해 낚시터 및 쉼터로 제격이다. 특히 고삼저수지는 규모가 가장 큰 곳으로 영화 <섬>의 촬영지이기도 하다. 고삼저수지의 은비늘 호수와 파란 하늘이 빚어내는 절묘한 풍경은 일상의 시름을 달래준다. 이외에 장독 수백 개가 펼쳐진 한옥에서 제철 유기농 밥상을 맛볼 수 있는 서일농원, 낙농체험·승마센터·소 방목장 체험을 재미있게 할 수 있는 안성팜랜드도 안성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다.죽주산성: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 매산리 / 031-678-2502미리내성지: 경기도 안성시 양성면 미리내성지로 420 / 031-674-1256 / www.mirinai.or.kr조병화문학관: 경기도 안성시 양성면 난실리 산337 / 031-674-0307 / www.poetcho.com alt죽주산성alt조병화문학관 alt 서일농원         alt 고삼저수지 alt 안성에는 무엇보다 다양한 눈요깃거리가 있어 발품 파는 재미가 있다. 하루 이틀 사이에 둘러보려면 열심히 발걸음을 재촉해야 한다. 추위는 다 지나갔으니, 이제는 가뿐한 몸만 이끌고 가면 될 일이다.                         김초록여행칼럼니스트 겸 수필가. 현재 『월간 비타민』, 『건설경제신문』, 『서울우유』, 『냉동공조신문』에 객원기자로 활동 중이다. 여행 저서로는 『여름 이야기』, 『7가지 테마가 있는 여행』 등이 있다. ]]> Mon, 03 Apr 2017 10:30:54 +0000 4 <![CDATA[독립기념관과 교육 ]]> 한국 독립운동사는 머리로만 이해하는 것이 아닌 가슴으로 느끼고 기억했을 때 비로소 그 가치가 있다. 독립기념관의 교육사업은 강의·체험·답사 등 다양한 방법으로 역사를 배우는 ‘살아있는 교육’과 사업 대상별로 세분화된 ‘맞춤형 교육’을 지향한다. 이를 통해 결과적으로 나라사랑정신·역사의식의 확산이라는 설립목적을 실현해 나가고 있다. alt]]> Fri, 31 Mar 2017 17:53:03 +0000 4 <![CDATA[부끄러웠던 미완의 청춘, 시(詩)로 남다 영화 <동주> ]]> 글 편집실부끄러웠던 미완의 청춘, 시(詩)로 남다영화 <동주>감독: 이준익주연: 강하늘, 박정민개봉일: 2016년 2월 17일나라를 잃어버린 한 청년이 있었다. 청년은 ‘쉽게’ 시를 쓰는 자신이 부끄러웠고, 부끄러워진 그는 다시 시를 썼다.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 윤동주. 그의 시는 익히 잘 알려져 있지만, 그의 삶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진 바 없었다. 이번에 다룰 작품은 윤동주의 생애를 다룬 영화 <동주>다.                         Q. 윤동주와 송몽규의 행적은 어디까지 일치할까?송몽규는 윤동주의 동갑내기 고종사촌으로 한 집에서 태어나 5살까지 함께 자랐다. 이후 중학교 3학년을 수료할 때까지 같은 학교, 같은 반에서 공부했고 연희전문학교에도 함께 입학해 4년 뒤 졸업해서는 나란히 일본 유학을 떠났다. 이처럼 실제 두 사람의 성장과정은 거의 일치했는데, 특히 어린 시절 『아이생활』, 『어린이』 등 잡지를 함께 구독하며 문학 방면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다는 점에서 공통분모가 있었다. 그러나 비슷한 환경 속에서 자랐으나 성격은 판이했다. “너는 시를 써라. 총은 내가 들게.” 영화 속 송몽규의 대사는 그와 윤동주의 차이점을 보여준다. 평소 유순하고 섬세한 감성을 지녔던 윤동주는 10대에 이르러 문학 활동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반면,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송몽규는 중학교 시절 중국 난징(南京)의 대한민국임시정부 군관학교에서 군사훈련을 받았고, 일본 유학 중 한국인 유학생을 모아 거사를 계획하는 등 직접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alt<동주> 속 윤동주와 송몽규alt윤동주alt송몽규             Q. 정지용 시인에게 많은 영향을 받은 윤동주?영화에서 윤동주는 이여진의 소개로 평소 존경하던 시인 정지용을 만나게 된다. 시인으로서 윤동주의 자질을 알아본 정지용은 스스로 “부끄럽다”고 말하는 그에게 “부끄러움을 아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야. 부끄러움을 모르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지”라며 일본 유학을 권한다. 실제로 둘 사이의 직접적인 교류 여부는 알 수 없으나 정지용이 윤동주의 정신적·문학적 스승이었다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다. 숭실중학교 시절 윤동주는 과장된 수식어를 배제한 쉬운 표현으로 감정을 진솔하게 드러내는 정지용의 시에 심취했다. 당시 그의 가방에 늘 정지용의 시집이 들어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처럼 정지용은 윤동주의 시세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42년 일본 유학을 간 윤동주는 도쿄 릿쿄대학(立教大学) 문학부 영문과에 입학했다가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学) 영문과로 편입했다. 이로써 두 사람은 같은 대학, 같은 과 선후배가 되었다. 현재 도시샤대학에는 두 사람의 시비가 나란히 세워져 있다.         altalt정지용 시인             Q. 윤동주의 시집 발간을 도운 인물은 일본인?영화에서 윤동주는 릿쿄대학 다카마쓰 교수와 쿠미의 도움으로 자신의 영문 시집을 낼 수 있다는 희망을 얻게 된다. 그러나 발간을 눈앞에 두고 쿠미와 함께 있던 자리에서 일경에 체포되고 만다. 영화에 등장하는 일본인 쿠미는 허구인물이다. 윤동주는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출간됨으로써 비로소 시인이 되었는데, 이는 연희전문학교에서 함께 수학한 동기 강처중과 후배 정병욱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윤동주는 졸업을 앞두고 그동안 쓴 작품들을 묶어 자필시고집(詩稿集)을 완성했다. 이것을 3부 만들어 한 부는 자신이 갖고, 나머지는 연희전문학교 영문과 교수 이양하와 후배 정병욱에게 전달했다. 그중 정병욱이 소장한 원고가 유일하게 보존되어 전해지게 된 것이다. 한편 강처중은 윤동주의 자선시집에서 제외된 시와 새로 쓴 시를 보관하고 있었다. 정병욱과 강처중은 각자 보관하던 것을 합쳐 마침내 1948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발간, 시인 윤동주를 세상에 알리게 되었다.         alt<동주> 속 연희전문학교 재학 시절의 윤동주·송몽규·강처중alt윤동주와 정병욱             Q. 후쿠오카 형무소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걸까?일본 유학 중 송몽규와 윤동주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일경에 체포되고,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수감 중 지속적으로 알 수 없는 주사를 맞으며 서서히 죽어간다. 실제 1945년 2월 16일 윤동주가 순국하고, 약 한 달 뒤 송몽규도 죽음을 맞이했다. 27세의 창창한 나이였다. 일제가 내놓은 윤동주의 사인은 뇌일혈. 그러나 다부진 체격에 건강했던 그가 수감된 지 1년이 되지 않아 병사했다는 사실은 분명 의심스럽다. 당숙 윤영춘은 시신을 수습하러 갔던 당시 면회했던 송몽규가 “저놈들이 주사를 맞으라고 해서 맞았더니 이 모양이 되었고, 동주도 이 모양으로….”라고 말했다며 증언한 바 있다. 일본인 문학평론가 고노 에이지(鴻農映二)는 의문의 주사가 당시 규슈제국대학에서 실험하던 ‘혈장 대용 생리식염수’일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했다. 긴 전쟁으로 수혈용 혈액이 부족했던 일제가 혈액 대체재를 찾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렇듯 관련 증거가 계속 제기되고 있지만 일본은 여전히 침묵하고 있다. 짧은 삶이었지만 윤동주는 식민지 지식인으로서 시를 통해 스스로를 성찰했다. 시를 쓰는 자신을 끊임없이 부끄러워하면서도 시로써 양심을 지키려 한 ‘저항시인’이었다.         alt<동주>에서 의문의 주사를 맞고 나오는 송몽규alt<동주> 속 수감 중인 윤동주 ]]> Mon, 03 Apr 2017 11:05:58 +0000 4 <![CDATA[대한민국임시정부와 한국광복군의 숨은 공로자 ]]> 글 학예실대한민국임시정부와 한국광복군의 숨은 공로자이상정(李相定, 1897. 6. 10~1947. 10. 27)독립기념관은 국가보훈처·광복회와 공동으로 이상정을 4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이상정은 중국 국민정부에 몸담았던 인물로 항일전선에 적극 참전했으며,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해 광복군 창설에도 기여하는 등 한중연대를 위해 힘썼다. alt 일본 유학에서 중국 망명까지대구에서 장남으로 출생, 호는 청남(晴南)·산은(汕隱)이다. 이상정의 4형제는 모두 한국 근대사에 족적을 남긴 인물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지은 민족시인 이상화가 둘째이며, 셋째 이상백은 역사학자이자 사회학자, 넷째 이상오는 수렵가이자 저술가다.이상정은 1910년대 초 일본 유학으로 역사학·미술·상업·군사학 등을 배웠다. 특히 예비군사교육기관의 성격을 가진 성성중학교에서 수학한 경험은 훗날 그가 중국군에 복무할 수 있는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1917년경 국내로 돌아온 이상정은 대구 계성학교 미술 교사로 재직했고, 1920년대 초에는 정주의 오산학교와 평양의 광성고보 등에서 교편을 잡았다. 1925년 중국 망명을 결심한 그는 서울 남대문역에서 중국으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실으며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망명 이듬해에는 한국 최초의 여성비행사인 독립운동가 권기옥과 연을 맺어 결혼하게 되었다. 두 사람은 광복될 때까지 내몽고와 베이징(北京)·상하이(上海)·난징(南京)·충칭(重慶) 등 중국 대륙을 다니며 부부이자 동료로서 함께 독립운동을 하였다.         alt 이상정 고택(대구시 중구 계산동 소재)         alt이상정 가족사진(뒷줄 이상정, 앞줄 왼쪽부터 이상화·이상백·어머니 김신자·이상오, (소남이일우기념사업회 제공)alt망명길 기차 안에서 이상정이 작성한 ‘망명가’(소남이일우기념사업회 제공)alt왼쪽부터 이상화·권기옥·이상정(1937년, 권기옥기념사업회 제공) 한중연대 도모를 통한 항일활동중국으로 망명한 이상정은 중국군과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하여 항일전선의 선두에 섰다. 1926년 중국 허베이성(河北省)과 내몽고에서 펑위샹(馮玉祥) 군 참모부 막료로 근무한 것을 시작으로, 중일전쟁 이후에는 중국 국민정부 육군참모학교의 소장교관으로 취임하고 화중군사령부(華中軍司令部) 막료직을 겸하는 등 한중연대에 주력하였다. 또한 민족전선통일운동에도 적극적으로 나서 1937년 조선민족전선연맹의 출발을 주도하기도 했다. 1942년 8월에는 외무부 외교연구위원으로 선임되었고, 그해 10월 통합의정원 의원으로 선출되며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하였다. 이상정은 임시정부의 통합·개조를 주장했으며, 중국군이 ‘한국광복군 9개 행동준승’을 요구하는 등 한국광복군의 활동을 제약하려 할 때는 자주적 관점에서 이를 강력하게 비난하였다. 광복 직후에는 상하이로 가서 한인의 권익 보호에 진력하였다. 그러던 1947년 모친상을 당해 9월에 귀국하였으며, 다음달 뇌일혈로 별세하였다. 유고집으로 『표박기(飄泊記)』가 있어 생전 그가 보인 예술가적 면모를 살필 수 있다. 정부는 이상정의 공적을 기리어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alt중국군 복장의 이상정(권기옥기념사업회 제공)alt충칭 육군참모학교 교수 시절 이상정(가운데)과 권기옥(권기옥기념사업회 제공)alt제34차 임시의정원 의원 일동(1942년)]]> Mon, 03 Apr 2017 10:42:30 +0000 4 <![CDATA[하나, 애국부인회 서기로서 역할을 다하다 둘, 전염병을 쫓으려 한 웃지 못할 방책 ]]> [우리가 몰랐던 이야기 하나]글 조은경 독립기념관 학예연구사신의경, 대한민국애국부인회 서기로서 역할을 다하다고어에 이르기를 나라를 내 집같이 사랑하라 했거니와 가족으로서 제 집을 사랑하지 않으면 그 집이 완전할 수 없고 국민으로서 제 나라를 사랑하지 않으면 그 나라를 보존하기 어려운 것은 아무리 우부우부(愚夫愚婦)라 할지라도 널리 알 수 있다. 아! 우리 부인도 국민 중의 한 사람이다. 국권과 인권을 회복하려는 목표를 향해 전진하되 후퇴할 수는 없다. 의식 있는 부인은 용기를 분발해 그 이상에 상통함으로써 단합을 견고히 하고 일제히 찬동해 줄 것을 희망하는 바이다.- 대한민국애국부인회 설립 취지 - alt대구감옥소에서 가족에게 보낸 옥중 서신(1920년)alt1923년 대국감옥소 복역동지들(숫자 순서대로 김영순·황애덕·이혜경·신의경·장선희·이정숙·백신영·신마리아·유인경)             여성들이 모여 항일운동을 결집하다애국부인회 간부들은 나라사랑을 자신의 몸처럼 여기라는 굳은 신념을 갖고 군자금을 마련해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보냈다. 이러한 활동은 일경에 발각되어 1919년 11월 28일 애국부인회는 급습을 받았다. 무장경찰과 형사 10여 명은 정신여학교에 들어와 임원진을 강제로 연행하였다. 이 가운데 애국부인회 간부들은 첫째로 동지들의 이름을 팔지 말자, 둘째로 회의 내용을 누설하지 말자, 셋째로 어떠한 희생이라도 각오하고 책임은 간부들이 지자는 당찬 결의를 한다.굳건한 독립운동 의지를 밝히다굳은 각오는 피해를 줄일 수 있었다. 그럼에도 수많은 회원들이 잡혀갔다. 당시 조선총독부 고등경찰보고서에 따르면 검거된 회원은 세브란스 간호원 29명, 정신여학교 교원 11명, 동대문 부인병원 간호원 13명, 기타 27명 등 80명에 달하였다. 그중 간부는 회장 신마리아, 부회장 이혜경, 총무부장 황에스더, 서기 김영순·신의경, 재무부장 장선희, 적십자부장 이정숙, 결사대장 백신영 등이었다.검거되기 일주일 전 신의경은 외동딸이 잡혀갈 것을 염려하는 어머니의 말에 자신의 굳센 의지를 밝혔다. “어머니 지금 우리는 열강에 독립을 호소하고 나라를 찾을 때입니다. 국민 모두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고 나서야 합니다.”어머니의 백절불굴 정신을 계승하다신의경은 1897년 2월 21일 아버지 신정우와 어머니 신마리아 사이에 서울에서 태어났다. 정신여학교에 재학하던 그녀는 졸업 후엔 혁명운동에 몸 바치리라 결심했다. 어머니는 그녀의 은사이자 열렬한 후원자였다. “우리 어머니가 부유한 재산을 남겼더라면 다 방종했을 것이다. 일찍 어머니를 잃은 우리들은 갖가지 시련을 감내해야 했다. 어머니가 남기신 것은 자립심과 백절불굴의 정신이었다.”여성교육자 신마리아는 원래 광산 김씨지만 남편의 성을 따서 ‘신’씨가 되었다. 그녀는 정신여학교 졸업 후 모교의 학감으로 있으면서 성경과 수학을 가르치는 한편 여성교육과 교회봉사에 진력했다. 미국 유학으로 볼티모어여자의과대학(현 존스홉킨스 의과대학)에서 수학하여, 1900년 6월 한국 최초로 여의사가 된 박에스터(본명 김점동)가 신의경의 이모이기도 하다. 이러한 가족관계는 신의경이 일찍이 민족문제에 눈을 뜨게 된 요인이 되었다.수감 중에 어머니가 타계하다어릴 적부터 유달리 병치레가 잦던 외동딸 신의경이 구속되자 어머니와 할머니의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특히 정신여학교 교감이던 어머니는 교무실에서 금지옥엽으로 키운 딸과 사랑하는 제자들이 체포되는 상황을 지켜봐야 했다. 딸이 대구감옥소에 수감 중이던 1921년 6월, 어머니 신마리아는 49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신의경은 어머니의 죽음을 3개월 뒤 출소하고 나서야 알게 되고 실신하였다. 충격은 너무도 크게 다가왔으나 그녀는 고난 속에서도 굳은 신앙심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꿋꿋이 걸어 나갔다.신의경은 1922년 한국YWCA 발족 후 헌장제정위원, 1923년 서기, 1926년 부회장, 1927년부터 1934년까지는 연합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여성운동 활성화를 위한 일환으로 지방회 조직에도 전력을 기울였다. 한편 일제는 한일 기독교 일제화운동의 일환으로 기독교계에 압박을 가하고 지도여성들에게 각종 협력을 강요하였다. 신의경은 이에 1939년부터 모든 공직을 사임하고 은거생활에 들어갔다.광복 이후 좌우합작운동에 나서다신의경은 1946년 6월 홍은경·이숙경·박양무·김성실 등을 규합하여 독립된 조직체로서 한국YWCA 재건을 서둘렀다. 굳건한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한 여성단체의 면모를 확립하기 위해 특히 회관을 마련하는 데 주력했고, 바쁜 와중에도 입법위원으로 2년간 정치에 참여하였다.목숨을 걸고 혁명운동을 주도했던 신의경은 극우와 극좌의 대립에 편승하지 않았다. YWCA 내부에서는 “김구 선생과 같이 오로지 통일을 주장하며 중간노선을 걸었다”고 그녀를 공산당으로 모함하는 사람들도 있었으나, 전혀 굴하지 않고 자신의 소신에 따라 행동했다. 그녀는 YWCA 활동 외에도 대한예수교 장로회 여전도대회 회장·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 중앙위원 등을 지냈다. “사회로부터 고립, 박해와 곤욕 속에서도 두세 사람만 마음이 맞으면 못할 것이 없다”는 명언을 남긴 그녀는 1988년 1월 91세 나이로 세상과 작별을 고했다.                      [우리가 몰랐던 이야기 둘]글 신현배 역사칼럼니스트전염병을 쫓으려 한 사람들의 웃지 못할 방책1921년 4월 27일자 <동아일보>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경성부 위생계에서는 전염병을 예방할 목적으로, 병균 전파의 제1요인인 파리를 사들이게 되었다. 한 마리에 3리씩의 정가를 주고 1921년 4월 25일부터 사들이기 시작했는데, 파리를 팔러 온 사람들이 5백여 명에 이르렀고, 이들이 잡아온 파리는 무려 14만 마리였다.조선총독부 경성부 위생계는 이처럼 전염병을 예방할 목적으로 사람들로부터 파리를 사들이기 시작했는데, 이것은 예상치 못한 결과를 가져왔다. 파리에 매긴 값이 불러일으킨 변화파리는 콜레라·장티푸스·이질 등 무서운 전염병을 옮기는 해충이었기에 위생계의 계획은 파리를 돈을 주고 사들여 그 수를 줄이려 한 것이었다. 그런데 첫날 접수를 받아 보니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파리를 팔기 위해 몰려들었다. 덕분에 위생계 관리들은 사람들을 맞느라 다른 일을 할 수 없었고, 예상보다 많은 돈이 파리를 사들이는 데 들어갔다.“이거 참 야단났습니다. 첫날이 이 정도라면 파리를 사려고 준비한 돈이 금세 바닥나겠어요.” “그럼 어쩌지? 파리를 사겠다고 광고를 다 했는데, 사람들에게 이제 그만 오라고 할 수도 없잖아.” “다른 방법을 찾아야죠. 차라리 파리 값을 크게 내리는 게 어떨까요? 한 마리에 3리씩 주던 것에서 1리씩 주는 거예요. 그러면 사람들이 덜 오지 않을까요?” “그래, 그 방법밖에 없겠어. 값을 내리는 거야.” 관리들은 머리를 맞댄 끝에 결정을 내렸다.다음날부터 위생계는 파리 한 마리 값을 1리로 내렸다. 그러나 그럼에도 별 소용이 없었다. 파리가 돈이 된다는 입소문이 퍼지면서 첫날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몰려드는 바람에, 오히려 예산보다 수십 배나 더 많은 돈을 지출하게 된 것이다. 결국 위생계는 파리를 사들이는 일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주민들의 항의가 빗발치고 있습니다. 파리를 사들인다고 실컷 광고해놓고 이틀 만에 그만두는 법이 어디 있느냐고 말입니다.” “이런, 그럼 어쩌지? 한 마리에 1리씩 쳐도 지출이 어마어마한데 말이야….” “할 수 없이 값을 더 내려야죠 뭐. 파리 한 홉에 5전씩 매기는 거예요.” 이리하여 위생계는 이전보다도 값을 더 내려 파리를 사들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값을 너무 내렸는지 파리를 팔러 오는 사람이 크게 줄어들었다. 위생계 관리들은 울상이 되었다.“이렇게 호응이 없으면 이 일을 계속 시행할 수 없는데….” “그렇다고 다시 예전 가격으로 올릴 수는 없잖아요. 차라리 이번 기회에 계몽운동으로 홍보 방식을 바꾸지요. ‘파리 잡아 병 쫓고 돈 버니, 누이 좋고 매부 좋다’ 하는 식으로 떠들면 사람들의 관심을 다시 끌 수 있지 않을까요?” “오, 그거 좋은 생각이야. 그러면 파리 값이 싸도 문제가 되지 않겠지.”위생계의 예상은 들어맞았다. 계몽운동은 큰 호응을 얻어 전국 각지로 퍼져 나갔고, 대대적인 파리박멸운동이 전개되었다. 어떤 도시에서는 현금으로 주지 않고 추첨권을 나눠주고 1등은 5원, 2등은 3원, 3등은 2원을 주는 식으로 등수별로 당첨자를 뽑아 상금을 지급하기도 했다.일본인이 기르는 고양이가 귀신 쫓는 방법이 되다1914년에는 조선에 성홍열이 기승을 부렸다. 한국인들은 이 전염병이 콜레라와 함께 일본인들이 갖고 들어온 병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일본인이 기르는 고양이를 죽여 그들을 저주하면, 그 일본인이 앓아눕게 되고 성홍열이 멀리 달아나리라 믿었다. 이에 사람들은 일본인이 사는 집에 숨어들어 앞다투어 고양이를 잡아 죽였다. 당시 고양이 학살죄로 일경에 붙잡혀온 사람이 백여 명이나 되었다. 그 뒤로 우리나라에 사는 일본인들은 집에서 고양이를 기르지 않게 되었다.1907년 경무청·경무서가 경시청·경찰서로, 경무관·총순·순검이 일본식인 경시·경부·순사로 이름이 바뀌고, 순사 주재소에 일본 순사가 근무하기 시작할 때의 일이다. 경상도 거창 깊은 산골에 사는 김신섭이라는 사람에게는 다섯 살 난 아들이 있었는데, 어느 날 학질에 걸려 버렸다. 그는 아들의 몸에 붙은 학질 귀신을 떼어내려고 참봉 댁을 찾아가 부탁을 했다. “참봉 어른, 학질 귀신은 놀라게 해야 몸에서 떨어진다면서요? 학질 귀신이 놀라 달아날 내용의 글을 몇 자 적어 주십시오. 그러면 그 글이 적힌 종이를 아들 녀석의 이마에 붙이겠습니다.”참봉은 알았다면서 종이에 이렇게 적었다. ‘거창 경찰서 안의 주재소 순사 후루카와 곤베’. 그는 일본 순사가 귀신보다 무서운 존재이기에, 학질 귀신도 순사라면 걸음아 나 살려라 하고 달아날 줄 알았던 것이다. 일본 순사는 한국인들 사이에서 악명이 높았다. 아무 죄도 없는 사람을 주재소로 끌고와 잔혹하게 고문하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일본 순사라는 이름만 들어도 겁에 질려 부리나케 달아났고, 우는 아이도 울음을 뚝 그쳤다. 이처럼 일제강점기 남도 지방에는 당시 가장 무서운 사람이었던 순사의 이름을 적어 돌림병 귀신을 쫓으려는 풍습이 널리 퍼져 있었다.                        신현배역사와 전통문화에 대해 관심이 많은 역사칼럼니스트. 저서로는 역사 이야기 『엉뚱 별난 한국사』, 『엉뚱 별난 세계사』, 『2000년 서울 이야기』, 『세계사로 배우는 법 이야기』, 전통문화 이야기 『소중한 우리 문화 지식 여행』 시리즈 등이 있다.        ]]> Mon, 03 Apr 2017 10:16:26 +0000 4 <![CDATA[교육, 어둠을 밝힌 등불이 되다 ]]> 글 심용환 역사N교육연구소 소장교육, 어둠을 밝힌 등불이 되다독립운동사는 교육운동사라고 일컬어도 될 만큼 ‘교육’은 구한말 위기부터 1945년 광복까지 우리나라가 당면한 가장 중요한 과제였다.1883년 한국 최초의 근대학교인 원산학사와 외국어교육기관 동문학(同文學) 등 사립교육기관이 세워진 것을 시작으로, 1895년 고종이 ‘교육입국조서’를 발표하여 한성사범학교·한성소학교 등이 설립되면서 국가 차원에서의 본격적인 근대교육이 시작되었다.                         한국 근대교육이 시작되다보빙사(報聘使)가 국내 최초로 미국 등 서방세계에 파견되면서 헐버트(Homer B. Hulbert)·길모어(George W. Gilmore)·번커(Bunker D. A) 등 미국 선교사들이 한국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이로써 1886년 상류층 자제를 대상으로 한 육영공원 탄생에 기여하는 등, 미국의 도움을 통해 각종 근대 문물을 도입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독립운동사에서 교육운동은 크게 3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 애국계몽운동의 차원에서 발전한 점이다. 즉, 교육운동은 독립운동의 일환이었다. 둘째, 개신교 선교사들이 주도한 점이다. 특히 여성교육의 발전은 기독교적 개화사상의 유입에 크게 힘입었다. 마지막으로 무관학교 설립을 활발하게 시도한 점이다. 독립운동에서 가장 중요한 역량은 군사였기 때문에 군사교육은 가장 중요한 과제 중 하나였다.         alt헐버트(Homer B. Hulbert)alt보빙사alt육영공원 수업 모습             국권 수호를 위한 교육운동을 전개하다20세기 초 국권 회복을 위해 일어난 애국계몽운동은 부국강병, 즉 나라가 강해져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믿었다. 주요 방법론으로 교육과 산업의 부흥을 주장했는데, 이는 근대교육을 기반으로 민족 경제의 기틀을 만들어 갈 수 있다고 본 것이었다. 이때 전국적으로 많은 학교가 세워졌는데, 무려 5,000여 개교나 운영되는 상황이었다. 1908년 일제가 ‘사립학교령’을 통해 이를 규제했음에도 불구하고, 1910년 강제병탄 당시에도 2,000개가 넘는 사립학교가 존재했다. 이중에는 특히 개신교 계열의 사립학교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1907년 초등교육기관 654개에 학생 수는 1만 명을 넘었고, 중등교육기관은 18개교, 1,591명이었다. 당시 공립학교가 60개교에 학생 수 2만 명 정도였으니 그 비중이 얼마나 큰지 가늠할 수 있다. 1910년을 기준으로 보아도 종교 계열 사립학교 800여 개교 가운데 천주교 46개, 불교 5개를 제외하면 모두 개신교 계열의 학교였다. 또한 이 시기 개신교는 선교사들의 영향력을 넘어 한국인들이 중심이 되어 자생적인 활동이 추진하기 시작했다. 1907년 평양 대부흥운동, 1909년 백만명구령운동과 같이 목회자를 중심으로 한 내세 지향적·전도 중심적 활동이 벌어지면서, 안창호로 대표되는 개신교 민족주의자들이 대거 등장해 구국운동에 생기를 불어넣었다. 비단 개신교 진영이 아니더라도 교육운동은 매우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서북학회·기호흥학회 등 학회를 조직해 애국계몽활동을 하고, 보창학교·대성학교·양정의숙·보성학교 등 여러 민족주의 계열 학교가 들어섰다. 이밖에도 회보와 잡지의 발행을 통한 다양한 구국활동이 진행되었다.         교육을 통해 여성의 권리 신장을 주장하다한국 근대사는 여성에 대한 이식이 바뀌는 시기이기도 했다. 여기에는 동학과 천주교 등 새로운 종교의 등장이 중요하게 작용했다. 동학은 첩을 거느릴 수 있는 축첩(蓄妾)제도를 공개적으로 반대하고, 여성의 재혼을 용인하는 등 여성문제에 적극적이었다. 또한 남녀가 동등하게 함께 입도식을 하는가 하면, 성별에 상관없이 서로를 ‘접장(接長)’이라는 존칭으로 불렀다. 천주교는 교리적으로 남녀평등을 가르쳤는데, 미사를 드릴 때 남녀가 동석할 수 있었다. 뒤늦게 유입된 개신교 역시 남녀가 함께 예배를 드릴 수 있었다. 개신교는 한국의 축첩제도와 여자가 다시 결혼하는 것을 제재하는 과부재가(寡婦再嫁)금지법을 반대했다.1886년 여성 선교사 스크랜턴(Mary F. Scranton)은 여성교육의 필요성을 설파하며 배재학당 옆에 이화학당을 설립했는데, 초기에는 학생 모집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다. 개신교 신자조차 자신의 딸을 학교에 보내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나마 모집한 학생들 중에는 교복이 손목·발목이 드러나 노출이 심하다는 이유로 자퇴하는 경우도 있었다. 학당은 고아 등을 모아 학생 수를 7명으로 간신히 늘렸다. 이후 명성황후가 ‘배꽃같이 순결하고 배같은 결실을 맺으라’는 뜻으로 ‘이화(梨花)’라는 이름을 지어주면서 이화학당은 비로소 정착할 수 있었다. 한편 1898년에는 서울 북촌에 사는 400여 명의 여성이 장옷(쓰개치마)을 벗어던지며 여성운동단체 ‘찬양회’를 조직했다. 이들은 독립협회가 주도한 만민공동회에 참여하여 식사를 제공하는 등 적극적인 활동을 벌였다. 이듬해에는 여성이 교육·정치에 참여하고 직업을 가질 권리를 요구하며 순성여학교를 세웠다. 이어 1908년 순종의 칙령으로 ‘고등여학교령’를 공포해 서울에 한성고등여학교(현 경기여자고등학교)가 설립되었으며, 개성에는 부자 과부 김정혜의 주도로 정화여학교가 설립되자 김진홍·이현준 등이 평생 모은 재산을 아낌없이 기부하였다.          alt백만명구령운동 중 평양에서 열린 부흥집회(한국기독교역사박물관 제공)alt스크랜턴(Mary F. Scranton)alt이화학당          무관학교 설립으로 광복군이 탄생하다대한제국이 무관학교를 설립했다거나, 대표적인 독립운동단체 신민회가 신흥무관학교를 세웠다는 이야기는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독립군 양성을 위한 활동은 훨씬 오래전부터 지속적으로 이어졌다. 대한민국임시정부하의 뛰어난 역량을 가진 독립운동가들은 개인 역량으로 독립군 양성 사업을 추진하기도 했다. 신규식이나 여운형은 중국의 우페이푸(吳佩孚) 등이 지휘하는 군벌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고, 한인 청년들이 군벌 산하 군사학교에서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환경을 마련했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임시정부는 군사 간부를 양성하기 위해 상하이에 육군무관학교를 세웠는데, 6개월간의 초급장교 양성과정에서 1920년 상반기 19명, 하반기 24명 배출을 끝으로 안타깝게 폐교했다. 임시정부 군무총장 노백린은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비행사양성소를 설립했으나 이 역시 비행대 편성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1919년 조직된 무장독립운동단체 의열단은 중국국민당과의 합작을 통해 돌파구를 마련하고자했다. 단원 상당수가 국민당과 함께 북벌에 참가했기에 국민당 입장에서도 김원봉과 의열단을 지원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판단이었다. 그리하여 장제스(蔣介石)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1932년 중국 난징에 ‘조선혁명간부학교’가 만들어졌다. 공식 명칭은 ‘중국국민당 군사위원회 간부 훈련반 제6대’로, 국민당의 단기간부훈련소 신설반인 것처럼 위장했다. 학교는 일본과 중국의 외교관계를 고려해 학교운영 사실을 철저히 비밀에 부쳤다. 설립 초기에는 중국 외교부와 육군참모본부, 심지어 군사위원회 판공청 당사자들조차 그 존재를 모를 정도였다. 만 3년간 운영된 조선혁명간부학교는 3기에 걸쳐 총 125명의 인재를 배출했다. 국민당은 그동안 매월 경상비 2,000~3,000원·수시 필요경비 1,000~1만 원·기타 운영비 400~1,000원 등 각종 운영자금 전액과 화기·탄약·피복 등을 지원했다. 학생들은 군사학뿐 아니라 별도 신설된 정치학, 자연과학을 포함해 경제학·사회학·철학·혁명학·물리학·화학·지리학까지 다양한 학문을 공부할 수 있었다.대한민국임시정부는 중일전쟁 이후 충칭(重慶)에 정착해 비로소 결실을 맺었다. 1940년 9월 17일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성립 전례식을 거행한 것이다. 임시정부·임시의정원·한국독립당 그리고 중국기관의 대표 인사들, 충칭에 있는 외교사절과 신문사 대표까지 2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한국광복군창설위원장은 김구, 총사령관은 지청천이 맡았다. 지청천은 신흥무관학교 교관 출신으로 만주 무장투쟁의 독립군을 양성하고, 1930년대에는 대전자령전투를 비롯해 북만주에서 중요한 전과를 올린 인물이었다. 교육으로 나라는 세운다는 이념은 이처럼 독립운동가들의 치열한 투쟁을 통해 다시 한 번 확인되었다.          alt여운형alt한국광복군총사령부 성립 전례식에서 연설 중인 김구alt지청천             망국의 시기 우리 민족은 고난과 역경을 극복하기 위한 방안으로 ‘교육’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배움에 대한 열정은 척박한 환경 속에서 더욱 뜨겁게 타올랐고, 이는 일제강점이란 어둠을 밝히는 등불이 되었다.                         심용환성균관대학교 사범대학에서 역사교육학을 전공했다. 현재 팟캐스트 <진짜 역사 가짜 역사>를 통해 재미있고 올바른 역사 이야기를 전파하고 있으며, CBS와 공동으로 <심용환의 근현대사 똑바로 보기>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저서로는 『단박에 한국사』, 『역사 전쟁』이 있다. ]]> Mon, 03 Apr 2017 10:05:21 +0000 4 <![CDATA[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 ]]> 글 이성주 역사칼럼니스트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신채호는 우리 민족을 대표하는 역사학자 중 한 사람이다.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라는 걸출한 역사서를 냈고, 독립운동 현장에서 조선의 광복을 위해 싸워왔던 행동하는 지식인, 단재(丹齋) 신채호. 비록 땅은 빼앗겼으나 우리의 민족적 의식만은 뺏기지 않겠노라 외쳤던 그는 ‘역사’라는 칼을 뽑아들고 일제와 맞서 싸운 ‘한민족 혼’의 수호자였다. 우리 민족의 혼을 지켜낸 56년▲<황성신문> 기자 활동 ▲1906년 <대한매일신보> 주필 ▲1907년 신민회 가입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참여 ▲1928년 타이완 지륭(基隆)에서 체포, 다롄(大連) 뤼순감옥에서 수감 ▲1936년 옥중에서 뇌일혈로 별세신채호는 을사늑약이 체결된 해인 1905년 성균관 박사가 되면서 국가로부터 총명함을 인정받았으나, 주권을 잃은 국가가 일제의 손아귀에 넘어가게 되자 곧바로 민족운동에 뛰어들었다. 다음은 신채호가 쓴 『역사와 애국심과의 관계』에서 발췌한 문장이다.‘오호라, 어떻게 하면 우리 이천만 동포의 귀에 애국이란 단어가 못이 박히도록 할까? 오직 역사로써 해야 할 것이다.’다른 독립운동가들이 총칼을 통한 무력투쟁 혹은 교육으로 독립을 쟁취하겠다고 결심했을 때, 신채호는 다소 생소하게도 ‘역사’를 통해 우리 민족의 독립을 찾으려 했다.1908년 <대한매일신보>에 연재된 ‘독사신론(讀史新論)’은 당시 식민사관을 비판하고 주체적인 민족주의 사관의 방향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우리 민족이 신채호에게 큰 빚을 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이전까지는 일본의 역사서를 번역하기 바빴던 것이 우리 역사학의 한계였는데, 그는 단군조선-부여-고구려로 이어지는 민족사관의 기틀을 다졌다. 일본의 억지주장인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과 같은 망언을 여지없이 논파해 버린 것은 물론, 근대사 연구의 토대를 마련하였다.신채호는 1135년 서경천도운동을 주장한 묘청을 자주적인 역사관을 가졌던 인물이라 평가하고, 이 묘청의 난을 진압한 김부식을 사대주의자로 정의내린 바 있다. 또한 ‘천하는 일정한 주인이 따로 없다’는 천하공물설(天下公物說)과 ‘누구라도 임금으로 섬길 수 있다’는 하사비군론(何事非君論)을 내세웠던 조선 전기의 사상가 정여립을 높이 평가했다는 점은, 그의 민족주의적 사관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러한 신채호의 생각을 담아낸 것이 바로 『조선상고사』다. 이 책은 그가 옥중에 있을 때 쓴 『조선사연구초(朝鮮史硏究草)』를 근간으로 한 저작이다.이처럼 신채호는 독립운동의 방법론으로 ‘역사’를 선택했고, 그것을 ‘무기’로 삼아 일제에 맞섰다.*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 일본의 야마토정권이 4세기 후반 한반도 남부지역에 진출해 백제·신라·가야를 지배하고, 가야에는 일본부(日本府)라는 기관을 두어 통치했다는 주장. 일본의 한국사 왜곡 사례 중 하나.오롯이 ‘내’가 중심인 나의 삶, 나의 역사를 지키는 일‘역사는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조선상고사』 첫머리에 적혀 있는 이 문구는 아주 유명한 말인데, 풀이하자면 ‘역사란 나와 나 아닌 것의 투쟁의 기록’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나’란 나 자신을 포함한 우리 사회와 우리 민족을 의미하고, ‘나 아닌 것’은 말 그대로 나와 대칭되는 존재들을 뜻한다.여기서 생각해 봐야할 부분이 있는데 ‘내 안에도 나와 내가 아닌 것이 있고, 나 아닌 것에도 나와 내가 아닌 것이 있다’는 점이다. 다소 어려운 말이지만 쉽게 말해, 역사의 주체가 되는 나와 내가 아닌 것들은 겉으로 보이지 않지만 끊임없이 움직인다는 뜻이다. ‘역사는 아와 비아의 투쟁’이라는 이 말은 신채호의 자주적 민족사관을 압축하여 보여준다.또한 이것은 우리 삶의 기준을 규정하는 데도 적용할 수 있다. 삶은 그 자체로 역사다. 즉, 우리는 지금 저마다 각각의 역사를 쓰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역사를 쓰는 데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하는 점은 무엇일까? 바로 주체가 되는 ‘나’를 바로세우는 일이다. 나의 지난 과거, 내가 살아온 방식, 나만의 삶의 철학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있는지 떠올려 보자. 우리는 대개 주변의 말이나 TV 혹은 인터넷에서 떠드는 말들을 아무런 의심 없이 받아들이고 있다. 정보를 얻는 것은 좋다. 그러나 ‘생각’을 빌려온다고 느껴본 적은 없는가? 스스로 판단하는 법을 잊어버리고, 그저 남들이 하는 그대로 따라 행동하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이켜 보자. ‘나’와 ‘내가 아닌 것’이 모호해진 요즘, 신채호의 시선으로 보자면 우리는 나와 내가 아닌 것의 싸움에서 지고 있고, 곧 내 역사를 빼앗기고 있다.나의 삶, 우리의 역사를 써내려가기 위해서는 그 중심이 되는 나와 우리의 정립이 가장 우선되어야 한다. 나를 잃어버린 채 ‘내가 아닌 것’을 받아들이고 그것에 휘둘린다면 나 없는 내 역사, 내가 아닌 나의 역사가 되어버린다는 사실을 우리는 깊이 인식하고 있어야 할 것이다.일본이 우리 국권을 강탈한 뒤 제일 먼저 했던 것 중 하나가 우리의 역사와 민족혼의 말살이었다. 크게 보면 한 국가의 역사와 민족성을 없애는 것이지만, 작게 보면 개개인의 역사와 개성을 말살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지금 우리는 우리의 역사와 개성을 빼앗기고 있는 중은 아닐까?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은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내면에서 조용히 진행되고 있다. ‘나’를 증명하고 찾는 일. 그것이 내 삶의 역사를 쓰는 첫걸음이란 걸 잊지 말자.                        이성주시나리오 작가 겸 역사칼럼니스트. 대중과 함께 호흡하는 글쓰기를 목표로 『조선의 민낯』, 『왕들의 부부싸움』과 같은 역사서를 출간한 바 있다. 최근에는 국제정치와 관련된 연구 및 집필에 열중하고 있다. 『전쟁으로 보는 국제정치』 시리즈 1, 2, 3권을 출간 중이다. ]]> Fri, 31 Mar 2017 15:47:09 +0000 4 <![CDATA[두 개의 봄 ]]> 두 개의 봄어디가 위고 어디가 아래인지호수를 사이에 두고똑같은 풍경이 펼쳐졌습니다.느릿하게 흐르는 하늘과 구름싱그러운 녹음은 푸르르고길게 이어진 돌다리 끝에는화사하게 핀 진달래가 시선을 훔칩니다.작은 것 어느 하나 다름없이땅 위에 하나 호수 아래 하나두 개의 봄이 왔습니다. ]]> Fri, 31 Mar 2017 15:43:51 +0000 4 <![CDATA[난무팅(楠木廳)의 슬픈 역사 속으로 ]]> 글 김주용 독립기념관 선임연구위원난무팅(楠木廳)의 슬픈 역사 속으로아침 7시, 이번 답사단의 구성원들이 인천공항 B카운트에 모두 모였다. 총 4인으로 이루어진 답사단에는 국가보훈처 주무관도 동행하였다. 바람직한 일이다. 뭐든 직접 눈으로 보고 실행에 옮기는 일이 가장 좋지 않은가. 11시 40분, 비행기는 시안(西安) 시엔안(咸安) 국제공항에 사뿐히 안착했다. 두곡진(杜曲鎭)을 답사한 지 2년 만이다. 그때와 마찬가지로 이선자 부관장이 공항에서 밝은 얼굴로 우리를 맞이해 주었다. 다시 시작된 실태조사를 앞두고이번 실태조사의 첫 번째 여정은 시안 두곡진에 세워진 한국광복군 제2지대 기념비정의 촬영이었다. 기념비정은 항상 개방되는 것은 아니라, 방문객이 올 때마다 관리인이 직접 대문을 열어주고 있다. 관람객들의 불만에 찬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 했다. 그러나 어찌 첫술에 배부르랴? 잘 정돈된 기념비정을 함께 공유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아쉬움을 달래야 했다. 우리는 두곡진에서의 촬영을 마치고 시안 시내로 이동한 바로 다음날 창사(長沙)로 출발했다. 시안에서 창사까지는 비행기로 약 1시간 30분 정도 소요되었다. 숙소에 도착했을 땐 오후 6시 30분이 훌쩍 넘었다. 간단하게 식사를 마친 뒤 이번 창사지역 답사의 첫 사적지인 조선혁명당 구지를 포함해 다른 사적지 조사에 대한 최종 점검을 마친 우리는 다음날을 위해 일찍 잠을 청했다.         alt난무팅(楠木廳) 안내 표지판alt난무팅 입구 난무팅에 얽힌 슬픈 역사날이 밝아오고 아침 해가 뜨거워지기 전 조선혁명당 구지(舊地), 현재는 대한민국임시정부(창사) 활동구지 진열관으로 거듭난 곳을 찾았다. 난무팅(楠木廳)을 찾아가는 길은 마치 미로 같았다. 옛 창사의 흔적이 시간을 머금고 그대로 멈춰진 느낌의 골목이었다. 마침내 난무팅에 다다르니 일찍 출근한 관리 책임자 탕민징(唐民景)이 답사단을 반갑게 맞이하였다. 독립기념관에서 초청되어 교육을 받았던 인지아니(尹佳旎)와 공지아(龔佳)도 밝은 미소로 인사를 건넸다. 흔히 ‘난무팅(楠木聽)’으로 불린 대한민국임시정부(창사) 활동구지는 2009년 조선혁명당 본부 건물을 해체하여 복원한 것이다. 1938년 초 지청천을 중심으로 한 조선혁명당이 본부로 사용했던 곳으로, 임시정부 요인들과 그 가족들의 거주지였다. 2층에는 조경한과 현익철이, 아래층에는 지청천·김학규·강홍대 등이 지냈다. 난무팅에는 슬픈 사연이 있다. 1938년 5월 7일 이곳에서 김구가 한국국민당·조선혁명당·한국독립당 재건파 등과 3당 통합 문제를 논의하다가 반대파에 피격당한 이른바 ‘난무팅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임시정부가 창사로 이전했을 당시 독립운동의 양상에는 새로운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독립운동 진영에서는 이를 민족 해방과 조국 광복의 기회로 판단했다. 우파 계열은 통합 및 단결을 위한 협동전선운동을 일으켜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을 이루고자 했는다. 이를 위해 김구가 이끄는 한국국민당·조소앙의 재건한국독립당·지청천의 조선혁명당 세 곳의 합당이 추진되었다. 3당의 합당은 한국국민당이 중심이 되어 이루어졌다. 당시 민족혁명당을 탈당한 지청천 계열은 조선혁명당을 창당하여 독자노선을 모색하고 있었고, 재건한국독립당 역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지 못하고 있었다. 조선혁명당과 재건한국독립당은 재정 여건이 열악하여 김구의 지원이 필요했고, 김구 또한 이들과 연합을 통해 독립운동 세력을 응집할 필요를 느끼고 있었다. 그리하여 1937년 초 난징(南京)에서 각 당의 대표인 송병조·홍진·지청천의 회담이 개최되었다. 이들은 공동선언서를 발표하여 임시정부를 옹호하고 강화하는 데 합의하였고, 미주지역 단체들에 지원을 요청함으로써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광복진선)를 결성하였다. 그러나 단체의 재편이 논의되는 과정에서 마찰이 발생했다. 당시 광복진선은 중일전쟁으로 일제가 난징을 점령하자 창사로 이동하였고, 조선혁명당이 본부로 정한 창사의 난무팅에서 3당이 합당에 대해 회의를 하고 있었다. 이때 조선혁명당 간부 출신 이운한이 회의장에 난입하여 총을 발사했다. 그가 쏜 총탄은 김구를 시작으로, 현익철·유동열·지청천을 차례로 맞췄다. 현익철은 그 자리에서 즉사하였고 김구 등은 인근 상아의원으로 이송되어 치료를 받았다. 중국 경찰은 이운한을 체포하였고, 곧 배후 인물이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후에 김구는 『백범일지』를 통해 이 사건에 대해 ‘3당 합당 과정에서 소외감을 느낀 강창제와 박창세 두 사람이 이운한을 이용한 것 같다’고 기록하였다. 슬픈 이야기지만 이것 역시 대한민국임시정부 역사의 한 페이지다. 이러한 사연을 아는지 모르는지 오늘날 많은 한국 관광객들이 난무팅을 들렀다 간다.   alt김구alt지청천alt유동열alt현익철 난무팅에서의 성공적인 답사를 마치며2009년 개관 이래 해마다 7~8만 명 정도의 한국인이 꾸준히 난무팅을 찾아오고 있다. 창자지에(張家界)에 가기 위해서는 대부분 창사 공항을 경유하기 때문에 이곳 여행사와 지방 관청에서 필수 여행코스 중 하나로 난무팅을 선정해 운영하고 있다. 어쩌면 한국의 독립운동사적지가 중국인들의 돈벌이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다는 비난을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발길이 끊어지면 결국 잊히게 되고, 그 역사는 우리에게서 영영 멀어져 버릴지도 모른다. 그러기에 그 비용이 그리 크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선생님, 전시 내용에 오류가 있네요.” 비디오 촬영을 하고 있던 조성진 연구원이 말했다. 찬찬히 들여다보니 한글 표기에 낯선 부분들이 많았다. 그동안 탕 주임에게 전시 내용에 대해서 수차례 이야기한 바 있는데, 이번에는 아주 긍정적인 답변이 돌아왔다. 우리에게는 광복 70주년이자 그들에게는 승전 70주년인 2015년의 전시 내용을 전면 교체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국가보훈처와 독립기념관을 비롯한 한국 관계기관의 많은 관심을 부탁하였다. 그리고 여기에 한마디 덧붙였다. “진티엔 워먼 이치 츠판바?(오늘 저녁에 함께 식사 가능하시죠?)” 고마웠다. 창사를 방문할 때마다 공동의 관심사를 통해 미래를 설계한다는 취지를 밝히곤 하는데, 상당 부분이 식사 시간에 이루어지는 것 같다. 우리는 알았다고 답변하고 김구가 피격 당시 이동했다던 창사 상아의원으로 향했다.         alt난무팅 진열관 내부alt난무팅 사건에 대한 김구의 편지 다음호에 계속 ]]> Mon, 03 Apr 2017 10:51:05 +0000 4 <![CDATA[甲 상사, 乙 부하의 궤도를 넘어서 ]]> 글 이현수 일상심리 전문작가, 자유기고가甲 상사, 乙 부하의 궤도를 넘어서“도통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어.” 업계에서 잔뼈가 굵은 박 부장은 입사한 지 얼마 안 된 김 사원만 보면 혀를 끌끌 찬다. 상사의 지시에 고분고분하지 않은 것은 물론, 가져오는 결과물은 영 마음에 들지 않아 늘 지적이 잇따른다. 김 사원 역시 속 끓기는 매한가지. 오늘도 퇴근 후 친구들과 술잔을 기울이며 “상사 때문에 일 못하겠다”고 속상함을 토로한다.하루 24시간 중 3분의 1 이상을 직장에서 보내는 현대인들에게 직장에서 받는 스트레스는 무시할 수 없는 고통이다. 이번 주제는 직장 내 상하관계에서 일어나는 갈등과 해결방안이다. 갈등 빚는 수직적 관계는 그만, 수평적 관계의 필요성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2016 사회조사’ 결과, 가정·직장·학교 등 일상생활 가운데 직장생활에서 받는 스트레스가 73.3%로 가장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 2013년부터는 업무와 연관된 스트레스로 인한 ‘외상 후 스트레스장애’가 산업재해에 포함되기도 했다. 이쯤 되면 직장 내 갈등에서 비롯되는 스트레스가 얼마나 심각한지 짐작이 갈 것이다. 특히 최근 대한상공회의소의 조사결과에 따르면, 직장 내 대인관계 갈등의 원인으로 ‘상명하복의 경직된 의사소통 체계’가 1순위로 꼽혔다.수평적인 직장문화가 대두된 지는 꽤 오래되었지만, 위의 조사결과에서 알 수 있듯 여전히 수직적인 직장문화를 유지하는 기업이 대다수를 차지한다. 수평적인 직장문화가 필요한 이유는 세 가지다. 첫째, 앞서 밝힌 직장 내 갈등의 해결이다. 해외는 물론 국내에서도 이를 위해 직장 내 수직적인 호칭을 없애는 기업이 늘어나는 추세다. 전 직원이 매니저, 프로 등 통일적인 호칭을 쓰거나, 아예 호칭을 없애버리고 이름 뒤에 ‘님’을 붙이기도 한다. 효과는 아주 긍정적이다. 취업 포털 잡코리아의 설문조사 결과에 의하면 직장인 10명 중 6명은 수평적 호칭제도가 조직문화 개선에 도움이 된다고 답했다.둘째는 산업체계 변화에 따른 적응이다. 과거에는 효율적인 관리가 필요한 제조업이 중심이었지만 이제는 창의성과 전문성이 필요한 산업분야를 중심으로 산업체계로 바뀌고 있다. 새로운 아이디어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기 위해서는 상명하복의 수직적인 구조가 아닌 누구나 자유롭게 의견을 낼 수 있는 수평적인 구조가 필요하다.셋째는 위기상황에 대한 신속한 대응이다. 의료계를 예로 들어보자. 조지프 핼리넌의 저서 『우리는 왜 실수를 하는가』에 따르면, 1980년대 초까지만 해도 미국에서는 마취의의 실수로 환자가 사망하는 사례가 빈번했다고 한다. 이는 당시 간호사 등 주변 의료진이 의사의 ‘실수를 지적’하는 것을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여겨 함부로 말할 수 없던 탓이었다. 이후 의료계가 의사의 권위를 적극 내려놓게 되자, 이전보다 마취사고 사망자가 무려 40배나 줄어들었다.이처럼 경직된 조직문화는 위기상황 발생 시 대처가 늦어 문제를 더욱 악화시킬 우려가 있다. 더욱이 갈수록 환경이 급변하는 현대사회에는 상황에 맞춰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수평적인 구조가 요구된다.직장 내 상하관계 갈등을 해결할 행동지침당장 회사 구조를 바꾸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회사구성원 개인 차원의 노력으로도 충분히 상하관계에서 비롯되는 갈등을 크게 줄일 수 있다. 상사와 부하직원 각각의 구체적인 행동요령을 알아보자.상사: ‘변혁적 리더십’으로 이끌자최근 많은 기업이 직급을 축소하고 호칭을 수평적으로 조율했지만, 이중에는 큰 효과를 보지 못한 곳도 있고 심지어 기존 방식으로 되돌아간 곳도 있다. 호칭도 중요하지만, 상사가 부하직원들에게 존중과 자율성을 부여하고 소통하는 리더십을 발휘하는 것이 근본적인 문제 해결을 위해 더 필요하다.중세시대 전설적 군주 아서 왕의 원탁회의 방식을 추천한다. 둥글게 둘러앉으면 상석(上席)의 개념이 사라지게 되는데, 이러한 작은 변화로도 원활한 대화에 큰 도움이 된다. 또한 아서 왕은 자신이 주축이 되어 회의를 이끌어가기보다는 주변의 참여를 독려했다. 이는 ‘변혁적 리더십’으로도 불리는데, 적절한 결론을 알고 있더라도 이를 먼저 밝히지 않고 구성원들이 생각한 바를 자유롭게 이야기하도록 두는 것이다. 이후 결론이 취합되면 의견을 내놓은 사람에게 성과에 대한 공로를 돌리고 자신은 한발 물러선다. 이는 언뜻 쉬워 보이지만, 자신에게 뻔히 보이는 답을 부하직원들이 어렵게 찾아가는 상황을 보고도 충고를 삼키기란 어렵다. 핵심은 답을 말하고 싶은 충동을 참는 데 있다.부하직원: 할 말은 하되 방식을 바꾸자수평적인 조직문화로 변화를 꾀하기 위해서는 부하직원 역시 ‘할 말은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직장 내 문화가 권위주의적이고 상명하복식이라면? 수평적인 조직문화가 오늘 당장 시행되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위계질서가 중시되는 문화 안에서도 내 의견을 전달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대놓고 “팀장님, 제 생각은 좀 다릅니다” 하고 내뱉는다면 이것이 야기하는 갈등 및 위험 부담이 본인에게 곧장 돌아올 것이다.이럴 땐 그 자리에서 곧장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기보단 시간을 두고 관찰하는 것이 필요하다. 권위를 강조하는 상사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면, ‘상사 관찰 일기’를 통해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시간을 두고 천천히 파악하자. 상사의 행동 양식을 관찰해 이를 기록함으로써 그가 어떤 부분에서 자신의 권위를 인정받고 싶어하는지, 어떤 상황에서 부하직원의 의견을 수용하는지 알아내고 적절한 때와 상황에 맞춰 의견을 내놓자.회사구성원 간 관계가 원활해야 기업도 발전한다. 상사든, 부하직원이든 직장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동료’라는 이름으로 묶인다. 조금만 참을성을 갖고 동료의 말에 귀 기울여보자. 분명 갈등을 해결할 실마리가 보일 것이다.                         이현수일상심리 전문작가 겸 자유기고가. 매일경제·고용노동부·한국무역보험공사·서울신용보증재단·삼성생명·현대모비스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전문가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 Mon, 03 Apr 2017 11:52:27 +0000 4 <![CDATA[일제강점기의 창, 신문 ]]> alt]]> Thu, 02 Apr 2020 14:49:43 +0000 40 <![CDATA[독립신문, 최초의 민간 신문 ]]> 글 김승태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소장독립신문,최초의 민간 신문『독립신문』 발간 4월 7일은 신문의 날이다. 그리고 이날은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 신문 『독립신문』이 창간된 날이기도 하다. 갑신정변 실패 후 미국으로 망명했던 서재필은 1895년 12월 귀국해 언론의 필요성을 인지하고 『독립신문』을 발간했다. 『독립신문』은 혼란스러운 국내 정세 속에서 정치적 견제와 탄압을 이기지 못하고 3년여 만에 폐간을 맞았으나, 당시 우리가 냈던 유일한 ‘목소리’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alt 『독립신문』(국문 제1호 1896.04.07, 영문 제2호 1896.04.09.) 서재필의 신문 발간 계획과 암살 위협서재필이 귀국하고 한 달이 채 되지 않은 1896년 1월 20일 일본인이 발행하던 『한성신보』에는 다음과 같은 서재필의 동정이 실렸다.“서재필 씨는 근자에 서양으로부터 귀국하였기 때문에 감개무량함을 참지 못하는 점이 많아, 여러 가지 계획을 세워야 되겠다고 하는 중에, 우선 제일착으로 영·한문의 신문을 발간할 생각이라고. 목적은 사회개량의 지도에 두고 또한 조선의 현상을 서양 각국에 알려야 되겠다고 한다.”『한성신보』는 을미사변에도 관여했던 일본인 아다치(安達謙藏)가 발행하던 신문인데, 일본 외무성의 기밀보조금으로 창간되었다. 이러한 보도가 나가자 일본공사를 비롯한 일본인들은 적극적으로 서재필의 신문 발행을 반대하고 나섰다. 일본공사 고무라(小村壽太郞)는 서재필을 만나 “조선은 미국과 다르고 민도(民度)가 뒤떨어지는 나라이니, 미국 사상인 민권주의 사상, 즉 데모크라시를 전파해서는 안 될 것”이라고 충고했다. 신문을 발행하여 미국의 사상인 민권·민주 사상을 전파하면, 나라가 어지럽게 될 것이라는 말이었다. 또 서재필이 신문 발행을 강행하면, 일본인들이 그를 암살할지도 모른다는 위협적인 언사도 서슴지 않았다. 서재필은 한 나라의 왕후를 암살한 자들이라면 자신을 죽이는 일쯤은 못할 것도 없으리라 생각했다. 그는 1월 31일 자신과 함께 신문을 발간하기로 약속한 윤치호를 만나 공포감을 털어놓았다.“아무래도 신문 발간 계획은 포기해야 할 것 같네. 일본인들이 신문을 발행하는 것을 그대로 두지 않을 것 같아. 그들은 한국이 두 개의 신문을 가질 만큼 발전되어 있지 않는 한, 그리고 그들의 『한성신보』가 존재해야 하는 한, 그 신문과 경쟁하려는 신문의 어떠한 시도도 단연코 분쇄해 버릴 것이라고 말했네. 일본의 의사에 반대하는 어떠한 행동을 하는 사람은 누구나 암살할 것이라고 은근히 암시했네. 그들은 나를 독약처럼 미워하지. 내가 며칠 전에 몇몇 한국 상인들에게 석유를 미국으로부터 직접 수입하는 것이 가격을 저렴하게 하여 소비자의 이익이 된다고 말했기 때문이네. 이곳에 나는 혼자라네. 미국 정부도 나를 지원하지 않을 것이고, 대한제국 정부나 민중도 일본인의 암살로부터 나를 보호할 수도 없고 하려고 하지도 않겠지. 내가 보호받지 못한 채 혼자라면, 나는 아무 일도 할 수 없네!”(『윤치호 일기』, 1896.01.31.)서재필의 말을 들은 윤치호는 크게 놀랐지만, 한편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신문이 내각의 지원을 받아 창간된다면, 일본인들은 그 신문이 반일적인 내용을 싣지 않도록 대신들을 위협해 계획을 무산시킬 것이라 생각했다. 같은 해 2월 2일, 윤치호는 사무실에서 유길준을 만나 서재필의 신문 발간 계획에 관해 이야기했다. 서재필이 일본인의 암살 위협을 받고 포기하려 한다는 말을 들은 유길준은 『한성신보』와 공동으로 발행하면 효과적일 것이라고 제안했다. 윤치호는 서재필이나 일본 측 모두 그것에 동의하지 않을 거라며 부정적인 대답을 내놓았다. 이 일로 윤치호는 신문이 서재필 개인의 사업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알게 됐다. 유길준과 그 일파가 신문이 자신들의 이익에 반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일본 측 압력을 받아 계획을 무산시켰다고 생각했다. alt독립협회 활동 당시 서재필의 집(1898)alt『독립신문』 발간 후 서재필 오늘날 한국이 가장 필요로 하는 일1896년 2월 11일 아관파천으로 김홍집 내각이 무너져 유길준이 망명하고, 박정양 내각이 들어섰다. 아관파천은 친러파가 주도했기 때문에 내각에 대한 일본의 압력도 사라졌다. 박정양 내각도 신문 발간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서재필이 전 내각의 유길준과 맺은 약속을 이행하고 신문을 발간하는 일을 적극적으로 후원하였다. 1896년 3월 13일, 서재필을 신문담당부서인 농공상부의 임시고문으로 임명한 것도 마찬가지 이유에서였다. 그리하여 서재필의 신문 발간 계획은 다시 활기를 띠었다. 그는 당시 서양인들이 발행하던 영문 잡지 『코리언 리포지토리』 1896년 3월호에 “오늘날 한국이 가장 필요로 하는 일(What Korea needs most)”이라는 제목의 글을 기고하여 국민과 정부관리의 소통 및 교육을 강조했다. “정부는 국민의 실정을 알아야 하고, 국민은 정부의 목적을 알아야 한다. 정부와 국민 상호간의 이해가 있도록 하기 위해서 쌍방에 대한 교육이 있을 뿐이다.…(중략)…교육 없이는 국민들이 정부의 좋은 의도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고, 교육 없이는 정부관리들이 결코 좋은 법률을 만들지 못할 것이다.”서재필은 국민과 정부관리 모두를 교육하는 가장 좋은 길은 신문 발간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1896년 4월 7일 정부에서 제공한 건물과 보조금으로 『독립신문』을 창간하였다. 서재필이 사장 겸 주필을 맡아 주로 국문판 사설과 영문판 사설을 집필하고, 주시경을 총무 겸 국문판 주필에 임명했다. 영문판 편집도 서재필이 직접 했다. 『독립신문』은 가로 22cm, 세로 33cm 크기의 4면으로 발행했는데, 3면까지는 순한글의 국문판, 4면은 영문판으로 편집하였다. 첫해에는 주 3회 발행하였고, 다음 해에는 격일간으로 발행하다가 셋째 해인 1898년 7월 1일 자부터는 일간 발행하였다. 처음에는 300부를 인쇄하였으나 1898년 말경에는 3,000부까지 부수가 늘어났다.서재필은 창간호 논설에서 오직 “조선만 위하여” 불편부당하고 차별 없는 공정한 보도를 약속하고, 정부와 백성의 의사소통을 도모하겠다고 밝혔다. 또 이 신문을 순한글로 발행하는 것은 남녀 상하 귀천 모두가 누구나 알아보기 쉽게 하기 위함이라고 서술했다. 국문판의 내용을 살펴보면 제1면에 대체로 논설과 신문사고(광고), 제2면에는 관보·외국통신·잡보, 제3면에는 물가·우체시간표·제물포 기선출입항시간표·광고 등을 실었다. 신문은 창간 3개월이 지난 1896년 7월 독립협회가 설립되고부터는 독립협회의 기관지 역할을 담당하며 국민에게 국가의 자주독립의식과 자주민권사상을 갖게 하는 국민계몽과 여론 형성에 크게 기여하였다.영문판은 외국인 독자 대상으로 사설(editorial), 국내 잡보(local items), 관보(official gazette), 최신전보(latest telegrames), 국내외 뉴스요약(digest of domestic and foreign news), 통신(communications), 의견 교환(exchanges) 등으로 구분해 편집하였다. 이를 통해 한국사정과 한국인의 주장을 세계에 알리는 데 공헌하였다. alt서재필에게 『독립신문』을 이어 받았던 윤치호alt『독립신문』의 주필로 활동했던 아펜젤러 독립신문, 3년 역사의 끝점차 『독립신문』의 논조가 외국의 국권침탈과 정부 탐관오리에게 비판적으로 변해가자 러시아와 일본의 항의를 받은 대한제국 정부는 서재필을 추방하고, 『독립신문』을 폐간하려 했다. 1897년 12월 서재필의 중추원 고문직 해고도 그 때문이었다. 그러자 서재필은 독립신문사의 모든 시설을 현금 5,000원에 내어놓고, 인수조건으로 자신이 지명하는 사람을 편집인으로 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하였다. 먼저 러시아 측이 좋은 조건으로 인수 의사를 밝혔지만, 서재필의 편집인 지명이라는 조건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서재필도 러시아에 인계하기보다는 차라리 굶는 편이 낫다고 생각해 이루어지지 않았다. 일본공사관 측도 인수 공작을 진행했지만, 대한제국 정부로 하여금 인수하여 폐간시키려던 계획과 상충하고 본국 정부도 거절하여 성사되지 못하였다. 대한제국 정부도 윤치호와 일본공사의 권고로 인수를 검토하였으나, 서재필이 추방되면 자연 폐간될 것으로 보고 응하지 않았다. 결국 서재필은 독립신문사의 소유권을 자신이 유지한 채 믿을만한 사람에게 맡겨 계속 발행하게 하는 방안을 채택했다.1898년 5월 6일 저녁 7시경 서재필은 윤치호를 찾았다. 윤치호에게 독립신문사를 맡기기 위해서였다. 서재필은 자신보다 2살 아래인 독립협회 동지 윤치호에게 말했다. “자네가 독립신문을 맡아주게. 국문판과 영문판 모두 말이네. 백성들을 위해서도, 자네 자신을 위해서도, 그리고 나를 위해서도 꼭 그렇게 해주게. 이것은 지금 정부 아래서 대신을 하는 것보다 더 큰 일이고 더 좋은 일이네. 러시아인들이 나에게 신문사를 1만 원에 팔라고 했지만, 신문사를 러시아인에게 팔기보다는 차라리 굶는 편이 낫지. 자네가 신문을 맡으면 정치와 사람들을 조심해야 하네. 신문을 맡아 1, 2년만 버텨주면 상황이 바뀔 걸세.”윤치호는 자신이 『독립신문』을 맡았을 때에도 그 명성을 유지할 수 있을지 걱정이었다. 국문판은 그런대로 할 수 있다 할지라도 영문판은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윤치호에게 서재필의 부탁은 부탁이기 전에 시대적 사명으로 느껴졌기 때문에 거절할 수 없었다. 1898년 5월 11일 마침내 윤치호는 독립신문사 인수계약서에 서명했다. 계약서에는 서재필 박사와 아펜젤러(Appengeller, H. G.) 목사, 윤치호가 1년간 편집자로 되어 있고, 연봉은 각각 600원, 360원, 720원이었다. 서재필이 편집자 겸 명목상 사장이 되었다. 아펜젤러는 영문판 편집을, 윤치호는 국문판 편집과 독립신문사의 실제적인 운영을 맡았다. 1898년 5월 서재필이 미국으로 돌아간 뒤 윤치호가 신문을 계속 발행했으나, 그해 10월부터 독립협회 활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되고 이에 대한 정부의 탄압이 시작되면서 신문도 다시 탄압 받았다. 결국 1898년 12월 윤치호가 회장으로 있던 독립협회는 해산을 당했다. 윤치호는 정부의 회유와 탄압을 이기지 못하고 1899년 1월 원산감리 겸 덕원부윤으로 부임했다. 『독립신문』의 주필은 아펜젤러가 맡게 되었다. 1899년 6월 신문사는 영국인 선교사 엠벌리(Emberley, H.)를 사장 겸 주필로 임명하고 아펜젤러가 동업자로 후퇴해 퇴세를 만회하려 하였지만 상황은 여의치 않았다. 더욱이 정부에서 같은 해 7월 독립신문사의 사옥 반환을 요구하였다. 이에 미국공사 알렌(Allen, H. N.)이 정부와 서재필 사이를 중재하고 나섰다. 결국 1899년 12월 24일, 서재필이 신문사의 사옥과 인쇄 시설 일체를 일금 4,000원에 정부에 양도하기로 타결되었다. 『독립신문』은 1899년 12월 4일 자로 종간호를 내고 폐간되었다. ]]> Thu, 02 Apr 2020 14:48:54 +0000 40 <![CDATA[독립유공자 후손 찾기 운동의 현주소 ]]> 글 이계형 국민대학교 교양대학 교수 독립유공자후손 찾기 운동의현주소 1945년 우리 민족은 광복을 맞았지만, 독립운동은 끝나지 않았다. 여전히 미완으로 남은 사건, 해결되지 못한 문제, 기억해야만 하는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끝나지 않은 독립운동은 독립운동사를 과거에 머문 역사가 아닌 현재의 문제로 다루며, 오늘도 신문 한쪽을 차지하고 있는 독립운동 및 일제강점 이슈를 소개한다. 전하지 못한 5949개의 훈장5949. 이 숫자는 2020년 3월 현재 독립유공자 15,931명 가운데 후손을 찾지 못해 훈장(건국훈장, 건국포장, 대통령표창)을 전수하지 못하고 있는 독립유공자들의 수이다. 이는 37.3%에 달하는 높은 비율이다. 우선 그 현황을 살펴보자. 서훈별로 보면 애국장(2,578명)이 가장 많고, 애족장(1,845명), 대통령표창(964명), 건국포장(383명), 독립장(173명) 순이다. 높은 등급의 대통령장(5명), 대한민국장(1명)도 있다. 계열로는 의병(1,644명)이 가장 많으며, 다음으로 만주 방면(1,634명), 3·1운동(1,464명), 국내 항일(555명), 미주 방면(176명), 노령 방면(96명), 학생운동(91명), 임시정부(78명), 중국 방면(78명), 의열투쟁(46명), 광복군(41명), 일본 방면(23명), 계몽운동(16명), 한국독립운동을 지원한 외국인(9명) 등의 순이다. 공훈록에 기록된 본적 기준해 지역별로 살펴보면 미상 1,434명(24.1%)을 제외하고 평북, 평남, 함남, 황해도 순이다. 북한지역 출신이 전체 51.7%에 해당하는 2,332명으로 과반수가 넘는다.독립유공자 서훈을 받는 숫자가 늘어날수록 후손을 찾지 못하는 비율 또한 높아지고 있다. 현재 5,949명을 대상으로 서훈을 받은 시기와 후손을 찾지 못한 경우를 분석하면 다음과 같다. 시작은 1963년으로, 당시 서훈을 받은 261명 가운데 후손을 찾지 못한 사람은 8.8%에 해당하는 23명이다. 그 뒤 1968년 24명/106명(22.6%), 1977년 3명/105명(2.9%)으로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았다. 1990년에는 역대 최고로 많은 3,629명이 서훈받았지만 후손을 찾지 못한 이는 162명으로 4.5%에 불과하다. 그런데 바로 다음 해부터 정부 차원의 발굴과 포상이 이루어지면서 1,119명 가운데 593명의 후손을 찾지 못하여 그 비율이 53%로 치솟았다. 더욱이 1995년부터 정부 주도의 발굴·포상이 상례화되자 비율은 점차 높아져 2015년에는 83.9%에 달했다. 이후 2019년 44.5%로 감소했으나, 여전히 낮은 숫자는 아니다. 이렇듯 독립유공자 후손을 찾지 못해 훈장과 포장을 전수하지 못하는 경우가 늘어나면서 각계각층의 비판도 적지 않았다. alt 흩어진 독립운동가의 후손을 찾아서1994년 12월 ‘독립유공자예우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고 순국선열 및 애국지사가 독립유공자로 예우받기 시작하면서부터 독립운동자 서훈을 전담하고 있는 국가보훈처가 여기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1995년부터는 독립유공자 발굴과 더불어 후손 찾기도 병행했지만, 상황은 녹록하지 않았다. 정부가 나섰다 하더라도 한국전쟁 등으로 사료가 소실되었고, 유족 상당수가 북한지역에 거주하며, 공적 증명 역시 유족의 몫이었기 때문이다. 후손 확인을 위해서는 본인들이 직접 족보·제적등본(가족관계증명서), 당안·호구부(중국 거주 시), 출생·사망증명서(외국 거주 시) 등 독립유공자와의 가족관계를 확인할 수 있는 객관적인 자료를 제출해야 한다.그 후 국가보훈처는 중앙 언론사와 행정자치부의 협조를 얻어 2005년 1월 ‘광복 6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당신도 독립유공자 후손입니다”라는 부제를 달아 독립운동가 유족 찾기 운동을 벌였다. 2006년에는 남한지역에 본적을 둔 사람들에 대해 일선 읍·면사무소의 협조를 얻어 제적부, 민적부, 호적등본 등을 추적하여 후손 확인 작업을 진행해나갔다. 이후 지청, 지자체 차원의 독립유공자 후손 찾기 운동도 적극적으로 이루어졌다. 독립유공자 후손 찾기 운동은 연중행사로 전개되며 어느 정도 성과를 보였다. 그러나 중국과 러시아 등에 거주하는 독립유공자와 그 유족은 거의 파악되지 않았다. 2005년 1월부터 재외공관의 도움을 받아 국가보훈처가 본격적인 외국 국적의 독립운동가 유족 찾기 사업을 벌였지만, 2006년 8월 말까지 찾은 이는 62명에 불과했다. 여전히 인력과 사료 부족 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이에 2010년 1월, 국민권익위원회는 재외 동포의 권익증진을 위해 중국·러시아 등 재외 동포에 대한 독립유공자 후손 찾기 운동을 적극적으로 펼칠 것을 권고했다.실상 ‘독립유공자 후손 찾기 운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된 것은 2014년부터다. 국가보훈처는 웹툰을 이용한 간단한 이벤트를 진행하였고, 각지의 지청들도 적극 협조했다. 하지만 본적·주소 등이 확인되지 않아 제적부 조회가 불가능하거나, 본적지가 북한지역이라 후손을 찾지 못하는 경우, 제적부가 소실되었거나 후손·친족이 없는 경우가 다반사여서 성과를 내기란 쉽지 않았다. 독립유공자 후손 찾기 운동의 진정한 의미2018년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이 인기리에 방영된 후, 독립운동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이 고무되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국가보훈처는 독립운동사 연구 전문가로 ‘독립유공자 후손 찾기 자문위원회’를 구성해 운영하는 한편, 독립운동 관련 단체와 업무협약 등을 통해 보다 적극적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남한이 본적인 독립유공자에 대해서는 2018년 2월부터 해당 읍·면사무소 등을 직접 방문하여 전수조사를 진행하였고, 전국 지방자치단체 등 3,700여 곳에 후손 찾기 포스터를 배부하였다. 또한 국가보훈처 누리집(www.mpva.go.kr) 공훈전자사료관에 ‘독립유공자 후손 찾기’를 추가하여 독립운동을 한 선대의 명단을 확인하고 후손 등록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국외 거주 후손의 경우 독립유공자의 3~4대로 선대의 독립운동 관련 사실을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국외 후손이 있다고 인지되더라도 시·공간적 제한과 후손이 한국어를 모르는 등 언어장벽으로 후손 관계 및 출생·사망증명서 등의 입증자료를 안내하고 진행하는 데 어려움이 많다. 이에 독립유공자 중 훈·포장 미전수자 명단을 해당 재외공관에 보내는가 하면 현지 한인 언론, 한인 단체 등과 협조체계를 강화하거나 부처 직원들이 직접 출장을 가서 확인하기도 하였다. 특히 중국,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 쿠바, 미주 등지에서 후손 찾기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다. 더욱 고무적인 일은 2019년 1월에 국가보훈처 공훈관리과에 ‘후손 찾기 전담팀’이 설치되었다는 점이다.이러한 노력에 힘입어 1995년부터 2019년 7월 말까지 9,671명에 달하는 후손을 찾아 훈포장이 전달되었다. 최근 실적을 보면, 2015년 80명, 2016년 61명, 2017년 87명, 2018년 249명, 2019년 7월 현재 168명 등으로 집계됐다. 이 가운데는 28년 만에 가족 품에 전달된 훈장도 있다. 최근 들어서는 포상 전수식이 독립유공자 포상 행사만큼이나 주목받고 있다. 독립유공자와 이들의 후손을 발굴, 포상하는 것은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는 데 매우 중요한 사업이다. 이들에게 명예를 세워줌으로써 국가 정체성을 찾는 일이기 때문이다. 미국은 큰 비용과 노력을 들여 자국 군인들의 유해를 끝까지 찾아내고 가족의 품으로 돌려보낸다. 이를 통해 국민들은 자연스럽게 국가에 대한 신뢰를 갖게 되고 국민적 일체감을 쌓아나간다. 조국을 위해 헌신한 국가유공자와 그 후손을 찾아 예우하는 것은 모든 국민들의 의무이자 국가의 책무이다. ]]> Thu, 02 Apr 2020 14:51:19 +0000 40 <![CDATA[독립군 부부에서 광복군 가족으로 오광선, 정현숙 ]]> 글 독립기념관 전시부 독립군 부부에서 광복군 가족으로오광선, 정현숙 독립기념관은 국가보훈처 및 광복회와 공동으로 오광선, 정현숙 부부를 2020년 4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오광선과 정현숙은 독립군 부부로, 이들 가족은 3대가 독립운동에 투신한 보기 드문 독립운동가 집안이었다. 아버지 오인수(1868~1935) 의병장을 이어 오광선과 그의 아내 정현숙은 중국으로 망명해 독립군 활동에 헌신하였고, 만주에서 태어난 그들의 두 딸 오희영(1925~1969, 1990년 애족장), 오희옥(1927~, 1990년 애족장)과 사위 신송식(1914~1973, 1963년 독립장) 역시 광복군 등에서 활동하며 조국 독립을 위해 노력했다. alt오광선(吳光鮮)1896.05.14.~1967.05.03.경기도 용인건국훈장 독립장(1962)alt정현숙(鄭賢淑)1900.03.13.~1992.08.01.경기도 용인건국훈장 애족장(1995) 무장투쟁의 한길을 걸어온 독립군 오광선오광선은 1896년 경기도 용인 원삼면에서 태어났으며, 1913년 이웃 마을 출신 정현숙과 결혼했다. 의병장이었던 부친의 영향으로 일찌감치 독립운동에 뜻을 품은 그는 1915년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이때 본명인 성묵(性?) 대신 ‘조선의 광복을 되찾겠다’라는 뜻의 광선(光鮮)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후 신흥무관학교에 입학, 1918년 졸업 후 신흥무관학교 교관으로 독립군 양성에 매진했다. 1920년대 초 대한독립군단 중대장으로 활동하던 중 자유시참변으로 인해 이르쿠츠크 군형무소에 수감되어 혹한의 고통을 겪은 후 가까스로 탈출했다. 1931년에는 한국독립군 중대장으로 임명되어 한중 연합의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며 대전자령전투 등 각종 항일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이후 관내로 이동하여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 낙양분교 한인특별반에서 군관양성활동을 펼쳤다. 1936년경에는 베이징으로 파견, 비밀공작 활동을 벌이던 중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2년간 옥고를 치렀으며, 광복 후에는 광복군 국내지대장 등을 맡았다. 정부는 이러한 공훈을 기리어 1962년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alt하얼빈 소재 일본총영사관에서 작성한 대한독립군단 명부(1925)alt광복 이후 효창공원에서 광복군 동지들과 함께 찍은 사진. 1열 우측이 오광선, 가운데가 지청천, 좌측은 사위 신송식(용인신문사 제공) 독립군을 키워낸 ‘만주의 어머니’ 정현숙 정현숙은 1900년 경기도 용인 이동면에서 태어났다. 남편 오광선이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던 이듬해인 1919년 남편의 뒤를 이어 만주로 망명길을 떠났다. 고국에 남긴 가족들의 안전을 우려해 본명 정산(正山) 대신에 현숙(賢淑)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만주 땅에서 화전을 일구는 곤궁한 생활 속에서도 독립군들을 뒷바라지해 주었기에 ‘만주의 어머니’라는 별명을 얻었다. 중일전쟁 발발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이 피난길에 오르자, 당시 일제에 체포된 남편 오광선을 대신해 3남매를 데리고 피난 생활에 합류했다. 이후 충칭 인근의 토교에 정착해 임시정부 요인 식구들과 함께 거주하며 임시정부 활동을 뒷바라지하였다. 이때 한국혁명여성동맹의 맹원이자 한국독립당의 당원으로서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그 영향을 받은 두 딸 역시 한국광복군에서 활동하였다. 정부는 정현숙의 이러한 공훈을 기리어 1995년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alt한국혁명여성동맹 창립 당시 정현숙의 모습(1940)alt차리석 회갑 기념사진에서 정현숙(4열)과 딸 오희옥(2열), 아들 오영걸(1열)의 모습(1941)alt 국립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있는 오광선·정현숙 합장묘(오주영 제공) alt]]> Thu, 02 Apr 2020 14:54:55 +0000 40 <![CDATA[아버지의 초상화 ]]> 글 독립기념관 자료부 아버지의 초상화 alt아들 김찬기가 그린 심산 김창숙의 초상16.50×27.00cm심산기념관 기증 1927년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되었던 김창숙(金昌淑, 1879~1962)의 모습을 둘째 아들 김찬기(金燦基, 1915~1945)가 그린 초상화이다. 김창숙은 3·1운동 직후 파리평화회의에 유림들의 장서를 보내기 위해 중국으로 건너간 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했으며 나석주를 국내에 밀파하여 동양척식회사와 조선식산은행을 폭파하도록 했다. 이 일로 1927년 6월 상하이에서 사건의 주동자로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되었다. 그는 재판에서 살인미수, 치안유지법, 폭발물취급령 위반 등의 죄목으로 14년의 징역형을 받고 대전형무소에 투옥되었다.이 그림을 그린 아들 김찬기는 1928년 진주고등보통학교 집단 수업 거부를 주도하고 1939년 왜관 사건과 관련하여 투옥되는 등의 항일활동을 펼쳤다. 일제의 감시를 받다가 1943년 아버지의 명을 받고 중국 충칭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갔다. 그곳에서 활동하던 중 1945년 해방을 맞았으나 환국을 앞두고 병으로 사망했다.그에 앞서 김창숙은 큰아들 김환기(金煥基, 1909~1927)를 독립운동 중에 잃었다. 김환기는 중국과 국내를 오가며 군자금을 모아 아버지를 돕다가 1927년 국내에서 체포되었다. 옥중 얻은 병으로 출옥 후 사망했다. ]]> Thu, 02 Apr 2020 14:48:09 +0000 40 <![CDATA[잇고 모이고 통하다 ]]> 잇고 모이고 통하다 여럿의 힘은 혼자보다 강합니다.독립을 바라는 그 간절한 마음이혼잣말로 남지 않도록더 많은 사람이 알고, 실천할 수 있도록독립운동가는 신문을 만들었습니다.신문은 잇고, 모았습니다.한국과 세계를,독립운동가와 민중을,역사와 독립을.신문이란 작은 광장 안에 모여든사람들은 함께 목소리를 냈습니다.혼자보다 강한 그 여럿의 힘으로대한독립만세를 외쳤습니다. ]]> Thu, 02 Apr 2020 14:46:06 +0000 40 <![CDATA[미주 한인의 3·1운동, 필라델피아 ‘제1차 한인회의’ ]]> 글 홍선표 나라역사연구소 소장 미주 한인의 3·1운동,필라델피아 ‘제1차 한인회의’ Ⅲ. 3·1운동의 발발과 재미 한인의 독립운동 ④ 3·1운동으로 나타난 한국인의 독립 열망을 미국 사회를 비롯한 전 세계로 알려야 한다는 생각은 대한인국민회와 전 미주 한인들의 절실한 바람이었다. 이런 때 파리강화회의 대표로 선정된 이승만과 정한경은 서재필과 협의하여 미국에서의 3·1운동을 처음으로 계획했다. 이승만이 3월 20일 자로 중앙총회장 안창호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이승만·정한경·서재필 세 사람은 장차 뉴욕에서 큰 연회를 열어 각국 신문기자들을 초청해 연설로써 한국인에 대한 큰 동정을 불러일으킬 생각이었다. 그러나 곧 계획이 바뀌어 이승만·정한경·서재필 명의로 작성된 3월 24일 자 청첩장에서 4월 14일부터 16일까지 필라델피아에서 ‘대한인총대표회의’를 개최하는 것으로 변경했다. 갑자기 계획을 변경한 배경에는 필라델피아에서 활동 중인 서재필의 영향이 크게 작용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제1차 한인회의’의 추진당초 대회 명칭은 ‘대한인총대표회의’로 계획했으나 대회 결과를 정리하면서 ‘제1차 한인회의’(The First Korean Congress, 일명 ‘한인자유대회’)로 규정했다. 이것은 미국 독립운동 때인 1774~1775년, 필라델피아에서 두 차례나 열린 식민지 ‘대륙회의(The Continental Congress)’를 본뜬 것으로, 과거 미국의 독립운동과 지금의 3·1운동을 동일한 대의를 지닌 것으로 봤기 때문이었다. 대회 개최 목적은 국내 3·1운동의 고귀한 뜻을 이어받아 전 세계에 일제의 불법적인 식민통치와 식민지 한국의 실상을 알리고, 한국 독립의 동정과 지지를 얻기 위함이었다.  ‘제1차 한인회의’는 급하게 준비되었다. 그런데다 한인들이 아주 적은 미국 동부지역에서 개최되는 지리적 요인 때문에 희망과 달리 많은 한인이 참석할 수 없었다. 하지만 대회는 매우 성공적이었다. 필라델피아 리틀극장에서 시작돼 3일 동안 이어진 대회의 참가자 수는 약 150명 정도였다. 이것은 당시 하와이와 멕시코를 제외하고 북미 한인의 수가 겨우 1,600여 명에 불과한 것을 감안할 때 결코 적은 수가 아니었다. 참가자들 대부분은 북미대한인유학생연맹 결성에 참여했던 미국 중·동부지역 한인 유학생들이었다. 필라델피아에서 대회를 개최하게 된 이유 중 하나는 서재필이었다. 서재필은 필라델피아에서 사회·경제적 기반을 잘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대회에 미친 영향도 아주 컸다. 실질적인 대회 기획이나 운영을 총괄하였으며, 대회를 성공적으로 진행시키기 위해 필요한 연사 초청이나 장소 선정, 미국 독립기념관으로의 시가행진과 이에 필요한 필라델피아시 측의 협조 등을 치밀하게 준비했다. 그리고 대회 의장으로서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회의를 주재했다. ‘제1차 한인회의’는 대회 행사를 주관한 이승만·정한경·서재필 외에 임병직·김현구·‘장기한’(장택상으로 보기도 함)이 간사로, 천세헌이 서기로 활동하였고 영어 속기를 위해 미국인 리글 씨가 고용되었다. 그 외 윤병구·민찬호·김현구·임병직·장택상·조병옥·유일한·김노디·민규식·천세헌·임초 등이 참석했다. 그러나 이번 대회는 한인들만을 위한 행사가 아니었다. 한·미인 연합으로 이루어진 최초의 국제적 대회였다. 한인들 외에 종교계, 교육계, 언론계 등 미국의 각 방면에서 활동 중인 주요 미국인들이 대회 주빈으로 참석했다. 이들 미국인은 성경 봉독, 기도, 축사, 강연, 증언 등의 순서를 맡아 대회의 보조자가 아닌 행사의 주역으로 참여했다. 대회 진행은 간간히 우리말도 담았으나 주로 영어로 진행하였고, 대회 결과물로 First Korean Congress란 책자를 만들어 미국 사회 요로에 배포했다. alt ‘제1차 한인회의’를 ‘자유를 위한 외침’으로 크게 보도한 The Philadelphia Press 기사(1919.04.17.) ‘제1차 한인회의’의 내용과 영향‘제1차 한인회의’는 오전에는 주로 초청 연사의 강연을 듣고, 오후에는 주제별로 작성한 결의문과 호소문을 발표, 토의하는 순서를 가졌다. 주제별 결의문과 호소문의 작성은 미리 선정된 기초위원을 통해 하도록 했는데, 이 일은 대회의 핵심 활동이었다. 작성한 6개의 결의문과 호소문은 ①「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보내는 결의문」, ②「워싱턴의 미국 적십자본부에 보내는 호소문」, ③「미국 국민에게 보내는 호소문」, ④「한국인의 목표와 열망」, ⑤「일본의 지각 있는 국민들에게 보내는 결의문」, ⑥「미국 대통령과 파리강화회의에 보내는 청원서」 등이다.각 결의문과 호소문에 나타난 일관된 관점은 독립된 한국을 민주주의와 기독교 정신에 바탕을 둔 미국식 공화제의 근대국가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한국인의 목표와 열망」에 담긴 10개조의 결의문은 기본적으로 미국식 대통령 중심제를 모델로 하면서, 내각책임제적 요소를 가미한 독립 국가 건설을 지향하였다. 즉, 새로 건설될 독립 정부는 대통령 1인에 대한 권력 집중을 제도적으로 방지하면서 능력 있는 각계 인사들이 참여하는 국민 주도의 민주주의를 제창했다. 그러면서 특별히 국민 교육을 강조했다. 이것은 독립 후 정치·경제적 여건을 감안해 일정 기간 민주주의를 위한 학습 과정이 필요하다고 본 것으로, 미국식 민주주의 방식을 답습한다고 하더라도 한국인의 형편과 실정에 맞추어 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제1차 한인회의’에서 제기된 한국인의 독립 열망은 필라델피아를 비롯한 미국의 주요 언론에 크게 보도되었다. 3·1운동 때부터 촉발된 미국 언론의 친한 동정 보도가 이번 대회를 계기로 더욱 확대되었다. ‘제1차 한인회의’ 마지막 날 참석자들은 당초 예정한 대로 필라델피아시 당국의 협조를 받아 양손에 한국과 미국의 국기를 들고 개최지인 리틀극장부터 미국 독립기념관까지 시가행진을 거행했다. 도착지인 독립기념관에서 대회 직전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경’으로 선임된 이승만의 3·1독립선언문 낭독과 만세삼창, 독립기념관 내부 관람과 단체 기념촬영 등으로 모든 일정을 마무리했다. ‘제1차 한인회의’의 영향은 미주 한인사회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을 축하하는 독립경축일로 이어졌다. 하와이의 경우 4월 12일을, 북미의 경우 4월 15일을 전 미주 한인의 독립경축일로 거행하였다. 무엇보다 이번 대회를 통해 미주 한인들은 물론 친한 미국인들로 하여금 전 미국을 향해 선전·외교활동을 본격화하도록 만들었다. 대회 직후 서재필은 필라델피아에 한국통신부를 조직해 선전 활동에 착수하였고, 이승만은 워싱턴DC에 구미위원부를 조직해 외교활동에 뛰어들었다. 톰킨스 목사를 주축으로 한 친한 미국인들은 필라델피아를 필두로 미국 각지에 한국친우회를 결성하였다. 3·1운동으로 거세게 불타오른 미주지역의 독립운동 열기는 한·미인 연합이라는 유례없는 국제적인 공조 속에서 미국과 전 세계로 확산되었다. ]]> Thu, 02 Apr 2020 14:58:11 +0000 40 <![CDATA[대한민국 임시정부 안살림꾼 정정화와 이를 도운 김의한 ]]> 글 김형목 사단법인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이사 대한민국 임시정부안살림꾼 정정화와 이를 도운 김의한 정정화는 일제강점기라는 척박한 역사에서 주어진 여성의 운명에 굴복하지 않고 끊임없이 공부하며 독립을 향해 나아갔다. 남편 김의한도 독립운동가 동지로서 그를 지지하고 존중했다. 이들 부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안팎에서 활약하며 우리 독립운동사를 이끌었다.  alt 중국 난징에서 김의한, 정정화, 아들 김자동(1935) 민족과 운명을 같이 하다러일전쟁에서 승기를 잡은 일제는 대한제국 식민지화를 위해 전력을 기울였다. 을사늑약과 군대해산으로 대한제국은 국제사회에서 완전히 고립된 ‘미아’의 존재로 전락했다. 일제 강점 이후 ‘복종과 순종’만이 절대 가치로 미화되거나 강요되는 분위기가 확산됐다. 여성의 경우, 대부분 가부장적 질서 속에서 가장(家長)의 결정에 따라 망명 사회 일원으로 살아가는 운명에 놓였다. 낯선 환경에의 적응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언어가 통하지 않는 현실은 이를 방증한다.그러나 정정화(본명 정묘희)는 모든 문제를 스스로 결정하고 행동으로 옮겼다. 빈궁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이하 임시정부)의 활동자금과 생계비 마련을 위해 연통제를 활용하여 세 차례나 국내 잠입했다. 이후에도 세 차례 더 감행하여 목숨 걸고 칠흑 같은 야음을 틈타 압록강을 건너 국내로 들어왔다. 조그마한 쪽배에 의지한 결행은 혈기왕성한 청년조차 상상할 수 없는 모험이었다. 정정화는 개의치 않고 자신이 선택한 길을 걸어 나갔다.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무수한 고초를 겪었으나 감내하기 힘든 난관도 장애물로 생각하지 않는 담대함을 보여주었다. 해방 후에는 민족통일과 민주화를 위해 노력했고, 한국전쟁 중 남편이 납북되는 아픔도 겪었다. alt 1920년대 정정화와 김의한 부부 인연으로 항일투쟁에 나서다철부지 소녀 정묘희는 동갑내기 김의한(金毅漢)과 1910년에 결혼했다. 남편 김의한은 대한제국 대신을 지낸 동농 김가진(金嘉鎭)의 셋째 아들이다. 3·1운동 중 비밀결사 단체인 조선민족대동단 총재로 활동하던 시아버지와 남편이 갑자기 사라졌다. 부자는 상하이로 망명해 국외 항일투쟁에 나선 것이다. 이들의 망명은 정정화의 운명을 완전히 뒤바꿔 놓은 ‘역사적인 사건’이었다.1920년 상하이 망명 당시 정정화는 시아버지를 모시고 남편을 도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삼종지도(三從之道)를 아녀자의 숭고한 미덕으로 알고 실천하는 ‘나약한’ 존재였다. 현지 조계지의 이방인 생활은 커다란 충격과 아울러 현실 인식을 일깨웠다. 다양한 경험과 신문·잡지를 통해 급변하는 국제정세를 분석하는 능력도 길렀다. 남편 김의한은 이를 지지하고 격려했으며, 섬세하게 배려했다. 정정화는 며느리나 범부 아내의 역할에 안주하지 않고, 한국독립운동사에서 여성의 지위와 역할을 한 단계 발전시킨 인물로 거듭났다. 요인들 생계를 위해 국내로 몰래 들어오다부부가 다시 만난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고단한 삶을 살아가는 지사들을 보며 생계유지가 가장 급선무로 떠올랐다. 현지에서 생계비를 마련하는 방법은 많지 않았다. 그리하여 정정화는 시아버지, 남편 등과 의논한 뒤 임시정부 밀령에 따라 국내 잠입을 결행했다. 상하이에서 이륭양행 배편을 이용해 단둥에 도착, 최석순(崔錫淳)의 도움으로 신의주에 이어 무사히 서울로 들어왔다. 기대와 달리 모금은 쉽지 않았다. 3·1운동 후 고조되던 민족의식은 기만적인 문화통치로 점차 퇴색되는 분위기였다. 독립운동자금을 내놓을 만한 자산가나 망명가는 만남조차 꺼리는 상황이었다. 결국 그는 일가 도움으로 모금한 돈을 가지고 잠입한 경로를 역순으로 다시 상하이로 향했다.1921년 늦은 봄 정정화는 두 번째로 국내 잠입을 시도했다. 맡은 임무를 성공리에 끝내고 상하이에 안착할 수 있었다. 그런 와중 친척 오빠 정필화가 임시정부 경무국에 체포·처단되는 쓰라린 비애를 맛보았다. 일제 회유에 따른 팽배한 불신감에 벌어진 일이었다. 상하이는 곤궁한 생활과 일제 감시의 눈초리가 도사리는 살벌한 곳이었다. 왕성한 독서로 정세 변화를 감지하다상하이에서 여성단체인 대한부인회가 조직되었다. 회원 대부분이 신식교육을 받은 신여성이었다. 그들은 돌발적인 행동과 오만함으로 교민사회에서 크게 호응받지 못하였다. 정정화는 이들과 일정한 거리를 두면서도 새로운 변화에 적응할 수 있는 역량을 키우는 데 게을리하지 않았다.성재 이시영(李始榮)과 세관 유인욱(柳寅旭)은 정정화에게 좋은 스승이었다. 성재는 한학과 역사서 등을 가져다주며 격려를 아끼지 않았고, 유인욱은 국제정세를 이해하기 위해 영어의 중요성을 일깨우며 큰 도움을 주었다. 정정화는 중국 고전을 접할 수 있는 신문이나 잡지 등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독학에 가까운 학습을 통해 스스로 시세 변화를 인식하고 분석할 수 있게 되었다.정정화는 다시 국내로 들어왔다. 네 번째였다. 이때 그는 아버지에게 미국으로의 유학을 요청했다. 평소 완고했던 아버지는 이를 흔쾌히 허락하였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시아버지의 사망으로 원대한 계획은 졸지에 무너지고 말았다. 비록 미국 유학은 좌절되었으나 학문에 대한 열정은 식지 않았다. 임시정부 요인을 돕던 정정화에게 국제정세에 대한 이해는 더욱 절실한 현안으로 다가왔다. 다섯 번째 국내 방문에서 그는 6개월 동안 친정집에 머물며 문학·역사와 관련된 서적을 읽었다. 방대한 독서는 정정화 자신의 ‘올바른’ 방향타를 모색하는 든든한 에너지원이었다. 임시정부 안살림꾼으로 자리매김하다상하이 생활은 하루 세 끼 식사를 거르지 않으면 행복한 정도였다. 식사는 주먹밥을 간신히 면하였고, 미역이나 김 따위는 드물어도 배추로 여러 가지 반찬을 해먹을 수 있었다. 의복은 주로 전통적인 중국 옷인 짱싼(長衫)을 입었다. 아주 값싼 천을 사서 직접 만들어 입었다. 구두나 운동화 등의 가죽·고무 제품은 감히 엄두도 내지 못했다. 대부분 짚신을 끌고 다녔다. 정정화가 중국 망명지에서 있었던 26년 동안 받은 선물 중 가장 특별한 선물은 ‘구두’였다.망명 생활에서 여성들은 자녀를 장래 독립운동가로 키우는 일을 ‘시대 소명’이자 책무로 여겼다. 인성학교나 3·1유치원 운영, 한글 교육 강조 등이 이러한 사실을 방증한다. 정정화는 가정에만 있지 않고 원로 독립운동가의 수발을 자청했다. 임시정부나 한국광복군과 관련된 대소사가 있으면 여성들을 이끌어 책임지고 치렀다. 김의한은 정정화와 매사 상의하여 결정할 만큼 아내의 의견을 존중하는 남편이었다. 이에 정정화는 남편에게 운동 노선, 대인관계에 대한 조언을 스스럼없이 하는 동지가 되었다.정정화는 천부적인 겸손함과 근면성을 가졌다. 주위 사람을 이해하고 포용하는 뛰어난 능력도 겸비하였다. 연속되는 피난살이에도 대가족이 공동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던 원천은 정정화와 같은 ‘종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백범의 어머니 곽낙원이나 부인 최준례와 관련된 일화는 심금을 울리기에 족하다. 이런 점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절반을 떠받친 여성’이라는 평가는 너무나도 당연하다. alt 김의한, 정정화, 아들 김자동의 귀국 1주년 사진(1947) 임시정부 생활사를 알리는 ‘민족 서사시’를 남기다임시정부에 관한 자료는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정리·발간되었다. 그러나 일상사에 관한 사료는 그 이면에 묻혀 크게 드러나지 않았다. 독립운동가의 생활사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그들의 숭고한 인생역정을 되짚는 귀중한 ‘문화유산’이다.조국에 대한 헌신과 이웃에 대한 배려로 집약되는 정정화의 참된 인생역정은 1987년 2월 발간된 『녹두꽃』에 그대로 녹아있다.“내가 임시 망명정부에 가담해서 항일투사들과 생사존몰(存沒)을 같이 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나의 사사로운 일에서 비롯되었다. 다만 민족을 대표하는 임시정부가 내게 할 일을 주었고, 내가 맡은 일을 했을 뿐이다. 주어지고 맡겨진 일을 모르는 체하고 내치는 재주가 내게는 없었던 탓이다.”(회고록 『녹두꽃』 서문 중)1998년 8월 이를 보완한 『장강일기』가 출판되었다. 『장강일기』는 임시정부 초기 운영한 연통제를 밝히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또 윤봉길 의거 후 임시정부가 감내한 대장정의 실상 복원에도 크게 도움이 되고 있다. 상하이를 떠나 항저우(杭州)→자싱(嘉興)→난징(南京)→광저우(廣州)→구이린(桂林)→치장(?江)→충칭(重慶)까지 이어지는 8년간의 장엄한 ‘민족 서사시’인 것이다. 이념 갈등을 통합의 길로 이끌다부부의 삶에서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통일단결의 정신이다. 이들은 중국 관내 한인 세력이 갈리고 찢기면서 이렇다 할 중심세력 없이 국제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함을 안타깝게 여겼다. 부부는 중국 관내와 옌안(延安)의 독립운동 세력이 좌우 이념을 넘어 하나로 합치기를 갈망했다. 시종일관 김구와 정치 노선을 함께하면서도 당파를 달리하는 김규식·최석순 가족과도 원만하게 지냈다. 한국독립당 일부 인사들이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던 김원봉에게도 편견 없이 대했다. 좌우통합을 바라보는 관점을 일견 평범하고 소박한 문제 같지만, 사람에 대한 넓은 아량과 무한한 신뢰감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김의한은 좌우통합을 추진하는 김구를 지지했다. 한국독립당 내 보수 인사가 이를 반대하며 의견을 달리할 때는 직접 설득에 나섰다. 부부는 해방 후에도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며 남북협상 통일 정부 수립에 동참했다. 이승만 정부는 정정화에게 도지사급 감찰위원을 제의했으나 단호하게 거절했다. 해방된 조국에서도 부부의 삶은 고단한 일상의 연속이었다. 그래도 외아들 김자동을 올곧게 키워 그 후손들도 민주화를 위한 여정에 동참하고 있다. alt한국전쟁 중 서울에서 정정화(1950)alt199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50주년 기념으로 공연된 연극 〈아, 정정화〉 역사 무대 주인공으로 부활하다1991년 11월 2일 운명한 정정화는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묘역에 안장되었다. 정정화 사망 직전인 1990년, 정부는 한국전쟁 때 납북되어 평양에서 사망한 남편 김의한에게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정정화의 삶은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준다. 2001년 국가보훈처와 독립기념관은 ‘8월의 독립운동가’로 정정화를 선정하였다. 1998년 8월 극단 민예는 극단창립 25주년과 대한민국 정부 수립 50주년 기념공연으로 정정화의 일대기를 다룬 연극 〈아, 정정화〉를 무대에 올렸다. 2001년 극단 독립극장이 〈아, 정정화〉를 〈치마〉라는 제목으로 바꾸어 공연했고, 이듬해 8월 도쿄와 오사카에서 〈치마〉의 공연이 열렸다. 모든 회차가 만석을 이룰 만큼 성황이었다. 공연이 끝난 후 민단과 조총련계는 일제히 출연진을 격려했다. 정정화의 공연이 좌우 이념을 뛰어넘는 계기가 된 것이다.평양 애국열사릉과 국립대전현충원에 따로 묻혀 있는 부부는 언제쯤 상봉할 수 있을까. 독립운동이 완성될 평화통일의 그 날이 기다려지는 이유다. ]]> Thu, 02 Apr 2020 14:52:57 +0000 40 <![CDATA[서희에게는 외교술에 더해 ‘알파’가 있었다 ]]> 글 김종성 역사작가 서희에게는외교술에 더해 ‘알파’가 있었다 926년 발해 멸망을 계기로 요동(만주)은 한민족의 손에서 멀어졌다. 이로써 우리 민족은 요동 및 중국과 힘든 경쟁을 펼쳐야 했다. 그런데 발해 멸망과 더불어 한민족을 힘들게 만든 또 하나의 요인이 있었다. 바로 동아시아 패권 구도의 변화다. alt 외교담판으로 거란의 침략을 물리친 서희(전쟁기념관 제공) 발해는 멸망하고 요동은 강해지다발해 멸망 이전만 해도 중국 최대 위협은 ‘베이징을 중심으로 시계 9~12시 방향’에서 나왔다. 이 방향에 있는 흉노족·티베트족·돌궐족 등이 중국에 대한 최대 위협이었다. 그러나 발해 멸망 이후에는 0~3시 방향에 있는 요나라·금나라·원나라·청나라가 중국을 위협했다. 이 때문에 10세기부터는 요동 땅이 더 강력해졌다. 당나라(618~907)가 서북쪽 유목 국가들을 약화시켰기 때문이기도 하고, 발해시대(698~926)에 요동의 경제력이 상승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발해 때 축적된 경제력을 바탕으로 발해 멸망 후 요동 왕조들이 강한 역량을 갖게 되었다.공교롭게도 한민족이 요동을 상실한 시점부터 요동이 강해졌기 때문에 요동과 맞닿은 한반도는 10세기부터 열악한 환경에 놓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성종 임금(재위 981~997)이 이끄는 고려왕조는 993년 제1차 요나라 침공과 함께 큰 위기에 직면했다. 거란족 요나라의 이 같은 군사행동은 요동 상실 후 한민족이 맞이한 최대 위기나 다름없었다.이 위기를 극복하는 데 기여한 일등 공신은 외교술의 귀재, 서희(942~998)다. 그는 적장 소손녕과 담판을 지으며 거란군을 철수시켰을 뿐만 아니라, 강동 6주까지 확보했다고 평가받는다. 그러나 단지 외교관의 말 한마디로 동아시아 최강국 군대의 발길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외교관의 힘은 언변과 판단력에서도 나오지만, 무엇보다 본국의 국력이나 객관적 정세가 중요하다. 서희의 담판을 뒷받침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었기에, 993년의 고려가 절체절명의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고 판단하는 게 합리적이다. 송나라 정복을 향한 요나라의 첫발, 고려 침공발해 멸망 후 요동 지배자가 된 요나라의 최종 목표는 중국 정복이었다. 그런데 중국 전역을 점령하자면, 한반도의 고려왕조와 압록강 주변의 여진족을 미리 제압해 두어야 했다. 고려와 여진족을 그냥 두고 중국 송나라(북송)를 침공했다가는 뒤통수를 맞을 수도 있었다. 그리하여 요나라는 993년 제1차 고려 침공을 감행했다. 이 침공은 고려와 송나라 연합, 고려와 여진족 연합의 차단을 위한 것이었다.『고려사』 성종 세가(성종 편)에 따르면, 고려는 방어군을 3개 군으로 편성한 뒤 박양유를 상군사에, 서희를 중군사에, 최량을 하군사에 임명했다. 송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온 적이 있는 외교관 서희가 중군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고려사』 서희 열전에는 아명이 서염윤인 서희는 경기도 이천의 호족인 서필의 아들이며 문과 급제자 출신이라고 나와 있다. 문과 출신인 서희가 군대를 지휘할 수 있었던 것은 고려 초부터 문관이 무관을 지휘하는 관행이 굳어진 결과였다.서희가 있는 고려군은 지금의 평안남도 안주시에 해당하는 안북도호부에 집결했다. 고려군이 평안북도와 남도를 가르는 청천강 바로 밑에 집결한 상태에서 선발대가 강 이북으로 파견됐다. 그러나 이 부대는 거란군에 대패했고, 고려는 충격에 빠졌다. 반대로, 거란군의 사기는 충천했다. 서희 열전에 따르면, 소손녕은 “아군 80만 명이 도착했다”며 세를 과시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고려 임금이 직접 와서 항복할 것을 요구했다. 요나라 역사서인 『요사』는 요나라의 다섯 도읍 중에서 상경·중경·동경의 장정 숫자가 도합 22만 6,100명 정도였다고 기술한다. 소손녕 군대는 신의주에서 직선으로 서북쪽 161㎞인 동경(지금의 랴오양)에서 동원된 부대였다. 동경에서만 동원된 병력이 80만일 수는 없었다. 역사학계는 이 병력을 6만 이하로 보고 있다. 그의 말은 허풍이었지만, 선발대의 대패를 보고받은 고려 조정은 깊은 공포에 빠졌다. 지방 귀족들의 군사력이 만만치 않았던 고려 전기에, 군주가 손쉽게 동원할 수 있는 중앙군 병력은 3만을 넘기 힘들었다. 그렇기 때문에 거란군이 6만 이하라 할지라도, 고려군한테는 상대하기 벅찬 일이었다. alt 강동 6주 지도 군사력보다 강한 서희의 외교력이 일로 고려 조정에서는 항복하자는 의견과 서경(평양) 이북을 떼어주자는 의견이 나왔다. 서희 열전에는 서희가 이런 의견들에 반대했다고 나온다. 그는 선발대가 패한 것에 불과하므로 제대로 싸워본 다음에 결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성종과 대신들은 기가 죽어 있었기 때문에 평양 이북을 떼어 주자는 의견으로 세가 기울었다. 서희의 주장이 먹히지 않는 상황. 그런데 이때, 기적이 일어났다. 안북에서 서북쪽으로 26㎞ 떨어진 안융진이란 군사기지에서 고려군이 뜻밖의 승리를 거둔 것이다. 또 다른 고려시대 역사서인 『고려사절요』는 “(소손녕이) 안융진을 공격했지만, 중랑장 대도수와 낭장 유방이 소손녕과 싸워 이겼다”고 전한다. 안융진은 1,200명 정도의 병력이 배치된 곳이었다. 이런 소규모 부대가 소손녕의 본진을 격파했으니, 부대원들이 얼마나 격렬히 항전했을지 짐작할 수 있다. 위의 ‘대도수’는 고려에 망명한 발해 왕자 대광현의 아들이다.안융진 전투는 고려 조정에 생기를 불어넣고, 서희의 어깨에 힘을 실어줬다. 동시에 거란군을 위축시켰다. 이런 분위기에서 서희와 소손녕의 그 유명한 담판이 시작됐다. 회담장에서 소손녕은 왕건 이래의 북진정책을 비판했다. 거란이 고구려 영토를 차지하고 있으니 고려가 북진정책을 폐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서희는 고려야말로 진정한 고구려 후계자이므로 요나라 땅의 일부도 고려 땅이라며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서희는 명분은 요나라에 넘기고 실리는 고려가 챙기는 방향으로 협상을 이끌었다. 결국 고려가 요나라를 황제국으로 받드는 대신, 요나라는 압록강 남쪽의 강동 6주에 대한 고려의 영유권을 인정해주는 쪽으로 협상을 마무리했다. 종종 서희가 이 회담에서 새로운 영토를 얻어온 것처럼 평가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강동 6주는 요나라 땅이 아니었다. 그래서 요나라가 양도할 수 없었다. 이곳은 여진족이 사는 땅으로, 강동 6주에 대한 고려의 영유권을 인정한다는 것은 고려가 여진족을 몰아내고 그 땅을 차지하는 것에 대해 요나라가 이의를 제기하지 않겠다는 의미였다.이런 합의가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서희가 요나라의 침략 동기를 간파했기 때문이다. 요나라는 고려를 멸망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고려가 송나라 및 여진족과 연대해 거란을 견제할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서 침략했다. 요나라의 목표는 송나라임을 간파한 서희는 ‘고려가 여진족을 공격하고 그 땅을 갖겠다’는 제안을 던졌다. 이는 여진족과 연대하지 않겠다는 의미로서 소손녕의 귀를 즐겁게 했다. 또 고려가 요나라를 황제국으로 받들겠다고 나서며 송나라와 관계를 끊겠다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이 역시 소손녕의 가슴을 울리는 말이었다. 결국 서희는 요나라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해주고, 강동 6주에 대한 군사행동을 합리화할 명분을 확보했던 것이다. 거란군은 돌아갔고, 고려는 평화를 되찾았다. 발해 유민이 포함된 안융진 병사들의 용감한 저항과 외교관 서희의 정세분석력 및 용기가 993년의 고려를 건져 올렸다. 한민족에서 떨어져 나간 요동이 더욱 강한 힘을 갖게 된 상황에서 요동 지배자 요나라의 침략을 받은 한민족은 그렇게 한숨을 돌렸다. ]]> Thu, 02 Apr 2020 14:59:14 +0000 40 <![CDATA[멈춰버린 시간 속으로 목포 시간여행 ]]> 글·사진 임운석 여행작가 멈춰버린 시간 속으로목포 시간여행 목포는 시간 여행자의 도시다. 속도가 미덕인 시대에 아날로그에 머물러 낮잠을 자는 것 같은 풍경들 뒤에는 100년 전 수난의 상흔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목포역에서 출발해 유달산까지, 시간의 퍼즐을 맞추듯 목포를 여행한다. alt 목포항에 정박한 어선 여행자 목포의 매력에 주목하다최근 트로트 가수 경연대회가 선풍적 인기를 얻고 있다. 감정을 촉촉이 적시기도 하고 흥에 겨워 박장대소하기도 하는 트로트가 요즘처럼 웃을 일 없는 사람들에게 재미를 선사하고 있다. 누구에게나 잊히지 않는 노래가 있다. 시간이 지나도 기억 한편에 자기만의 영역을 확보한 채 절대 밀려나지 않는 노래. 나에게는 트로트 〈목포의 눈물〉이 그렇다. 1935년 이난영 선생이 처음 부른 오래된 이 노래는 아버지께서 즐겨 부르시던 애창곡이었다. 남달리 기타와 전통가요를 즐기셨던 아버지는 기타 줄을 튕기며 감정을 토해내듯 노래하셨다.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며 삼학도 파도 깊이 숨어드는 때…….”노랫말에는 삼학도, 목포항, 노적봉, 유달산, 영산강이 줄줄이 등장한다. 각각의 장소들은 갑골문자처럼 각인되어 지금까지 기억 속에 선명히 남아 있다. 하지만 너무 어렸을 때라 노랫말의 의미는 고사하고 목포가 어딘지도 몰랐다. 그저 넋을 놓고 노래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듣고 따라 불렀다. 목포는 1897년 10월 개항했다. 부산, 원산, 인천이 일본의 강압에 의해 개항했다면 목포항은 대한제국 고종황제의 칙령에 따라 개항한 도시다. 하지만 그 배경을 보면 앞서 개항했던 항구들과 다르지 않다. 일본 주도하에 개발이 이루어진 까닭이다. 일제는 유달산을 중심으로 남쪽 지역에 자국민들이 거주하는 거류지를 개발했다. 필지를 사각형으로 나누고 넓은 도로망을 갖춘 바둑판 모양의 전형적인 계획도시였다. 반면 조선인들이 살던 유달산 동쪽은 거미줄보다 더 복잡했다. 다닥다닥 붙은 집들은 좁은 길과 함께 실타래처럼 엉켰고 심지어 돌아갈 길 없는 막다른 길도 많았다. 일제의 식민지배가 시작된 1910년 이후, 목포는 식민지 수탈의 중심지로 부상했다. 드넓은 호남평야에서 거둬들인 미곡과 면화는 탐식자 일제의 입맛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그 결과 목포항은 1930년대에 전국 3대 무역항으로 성장했으며, 도시 규모 역시 전국 6대 도시로 손꼽혔다. 하지만 광복 이후 목포의 성장은 가파르게 곤두박질쳤다. 산업화 시절 야당 도시라는 인식이 강했던 터라 보이지 않게 차별이 이어졌다. 게다가 국제항으로서의 매력을 상실한 목포항은 더는 지역 경제발전의 견인차가 될 수 없었다. 낙후된 지역을 벗어나려는 젊은이들의 ‘목포 엑소더스’ 열풍도 한몫 거들었다. 목포에 드리워진 쇠락의 그림자는 걷잡을 수 없이 짙어졌다. 그 결과 목포 원도심의 풍경은 1970년대로 고정되어 버렸다. 목포를 찾는 여행자들에게는 낡고 오래된 것이 오히려 독특한 매력 포인트다. 산업화시대 이후에 태어난 20대에게는 시간여행을 온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고, 그 이전 세대에게는 복고 여행의 묘미가 있다. alt유달산 기슭 온금동에서 바라본 목포항alt야경이 아름다운 목포 젊음의 거리alt만호동에는 근대문화재급 옛 건축물들 300여 채가 남아 있다 목포 여행은 낡고 오래된 것 들춰보기 목포역과 목포항을 잇는 만호동 거리를 찾았다. 태엽을 감아주지 않아 멈춰버린 시계처럼 거리는 옛 모습에 머물러 있었다. 영화 〈1987〉과 〈택시운전사〉의 거리 풍경을 고스란히 옮겨놓은 것 같다. 다른 점이 있다면 영화가 흉내 낼 수 없는 세월의 온기가 느껴진다고 할까. 원도심에는 문화재급 근대건축 300여 채가 남아 있다고 한다. 일본인들이 지은 것이니 100년이 더 지난 셈이다. 만호동 거리 풍경은 옛 모습 그대로 여행자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거리에서 시선을 올려다보면 유달산이 보이고, 가슴 깊이 숨을 들이켜면 짠 바닷냄새가 폐부 깊숙한 곳에 스며든다. 행인들의 질펀한 전라도 사투리와 항구에서 들려오는 뱃고동 소리가 무성영화 같은 장면에 활력을 더한다. 반듯반듯한 계획도시에서 밀려난 조선인들은 유달산 자락에 작은 집을 짓고 살았다. 하루하루 고된 노동으로 연명하듯 살아가는 그들에게 꿈이나 희망은 사전에나 나오는 말이었을 것이다. 그로부터 100년의 세월이 지났다. alt1970년대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목포 만호동 거리alt국가사적 제289호인 옛 일본 영사관, 현재 목포근대역사관으로 운영 중이다 목포는 설움을 딛고 환희에 차다목포의 랜드마크는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유달산이다. 유달산에 오르기에 앞서 노적봉에 닿았다. 노적봉은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의 지략이 드러난 곳이다. 당시 왜군보다 열세였던 조선 수군은 노적봉을 이엉으로 덮어 멀리서 보면 마치 군량미를 쌓아놓은 것처럼 보이도록 위장했다고 한다. 거짓 정보를 제공해 왜군의 사기를 꺾으려는 전략이었다. 이런 역사적 배경 탓일까? 일제는 유달산과 노적봉 사이에 도로를 내어 원래 하나였던 산을 두 동강이로 나누어 놓았다. 노적봉 맞은편 계단을 따라 유달산에 발을 내민다. 반복되는 계단 탓에 숨이 턱밑까지 차오른다. 해발 229m라는 높이가 무색하다. 하지만 들머리 부근과 일부 구간만 제외하면 나머지 구간은 어린아이도 쉽게 걸을 수 있는 길이다. 몸이 편해지자 봄기운이 잔뜩 오른 유달산의 이모저모가 오감으로 느껴진다. 낯익은 노래 〈목포의 눈물〉이 이난영 노래비에서 흘러나오고, 정오에 시각을 알렸던 오포대와 유선각에 오르자 목포 시가지와 푸른 다도해가 시원스레 펼쳐진다. 바닷물에 미끄러지듯 흘러가는 선박들이 한가롭기 그지없다. 400여 년 전에는 왜군이 이 바다를 짓밟았었다. 그리고 100년 전에는 일제가 주인 행세를 하며 이 땅에 군화 자국을 남겼다. 그러나 그 모든 아픔은 한낱 지나간 일이 되었다. 짧은 시간 목포를 돌아보면서 느꼈다. 목포는 옛 시간에 멈춰선 도시가 아니라 미래를 향해 한발 한발 전진하고 있는 생동감 있는 도시라는 사실을. 그 감격이 밀물처럼 가슴에 밀려온다. 목포의 설움이 아닌 목포의 환희로. alt유달산에서 바라본 목포 시내alt이순신 장군의 지략으로 왜군의 사기를 떨어뜨린 노적봉 ]]> Thu, 02 Apr 2020 15:00:19 +0000 40 <![CDATA[조선의 자매들이여 단결하라 ]]> alt]]> Thu, 07 May 2020 17:38:34 +0000 41 <![CDATA[희망찬 미래 향해 하나 된 여성 근우회의 탄생 ]]> 글 김혜진 경성대학교 강사 희망찬 미래 향해 하나 된 여성근우회의 탄생 근우회 창립과 활동 독립운동사에서 여성들은 다소간 소외돼 있었다. 여성에게는 아내, 또는 어머니라는 제한된 역할만이 주어졌고, 그것을 미덕으로 삼았다. 주어진 미덕을 벗어던지고 치열한 역사의 현장에 뛰어드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여성에 대한 시대의 부조리를 깨닫고 독립운동과 여성운동에 뛰어든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에게 해방은 조국의 미래이자, ‘나’라는 여성의 미래였다. alt 『조선일보』 1927년 6월 19일 자에 실린 근우회 발회식(1927.06.17.) 시세 변화를 자각한 여성들19세기 한반도에 근대라는 새로운 물결이 밀려들고, 일본은 제국주의를 기반으로 한 침략의 야욕을 드러냈다. 당시 한반도 여성들은 여성해방과 민족해방이라는 두 가지 과제를 가지게 되었는데, 이를 위해 여성 스스로 근대교육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고 여학교 설립에 앞장섰다. 이러한 근대교육을 바탕으로 여성들도 민족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다.1890년대 중후반 이후 여학교를 설립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독립신문』, 『제국신문』, 『황성신문』 등의 언론은 아동과 여성의 교육이 즉각적으로 시행되어야 함을 강조했다. 서울 북촌의 여성들을 중심으로 찬양회가 조직되었다. 이들은 여성교육의 중요성을 역설하며 순성여학교 설립을 계획했다. 초기에는 취지에 공감하여 뜻을 모으던 회원이 500여 명에 달할 만큼 관심이 뜨거웠으나, 안타깝게도 여성에 대한 사회적 편견이 농후했던 시대에서 상황과 운영의 문제로 순성여학교 설립은 여성교육사에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다만 여성들이 교육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행동에 나섰다는 것, 즉 여성해방의 문제를 스스로 인식했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1886년 설립된 이화학당은 우리나라 여성교육의 효시였다. 근대교육에 관한 법령이 제대로 마련되지 못한 현실에서 선교사들이 선교사업의 일환으로 여학교를 설립하였다. 이후 정신여학교·일신여학교·영화여학교·영명여학교 등이 설립되어 우리 여성교육 발전에 이바지했다. 개신교계 여학교의 운영은 여성들이 개신교에 우호적이었던 것과 무관하지 않다.을사늑약을 전후로 여학교 설립을 위한 다양한 여성단체가 만들어졌다. 여자교육회, 진명부인회 등이 대표적이다. 이와 더불어 여성 개인에 의한 여학교 설립도 확산되었는데, 숙명여학교와 진명여학교를 설립한 엄귀비와 정화여학교를 설립한 김정혜가 있다.여학교가 설립되면서 여성들도 근대교육의 혜택을 받게 되었다. 당시 여학교 입학은 가정이라는 울타리에서 벗어나 남성들과 동등하게 일상생활을 누릴 수 있음을 인정받는 특혜나 다름없었다. 여성들의 교육 수혜는 새로운 사회를 경험하는 생활 현장으로 다가왔고, 이들은 사회활동과 더불어 교사나 간호사 등 전문직으로도 진출하기 시작했다. 이로써 여성은 사회구성원이라는 든든한 밑거름이 되었다. alt 종로에서 만세운동을 하는 여학생들 나라의 주인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하다근대교육은 여성들에게 사회활동 참여와 함께 민족운동 주체로서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1907년 국채보상운동에의 적극적인 참여는 여성해방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국채보상 취지서가 발표되자 남성 주도에 격분한 여성들은 단체를 조직하는 등 사회적인 존재감을 드러냈다.“나라를 위하는 마음과 도리에 어찌 남녀가 다르리오. 부인들을 논외로 한다 하니 대저 여자는 나라 백성이 아니며 화육중일물(化育中一物)이 아니오.”이들은 남녀평등론에 의한 사회적 존재로서 역할 분담과 의무 수행을 주장했다. 국채보상운동은 여성이 참여하면서 한 차원 높은 국민운동의 형태로 전개되었다. 마침내 여성이 조직체를 만들어 국가적인 위기를 함께 극복할 수 있는 주역으로 등장한 계기였다. 국채보상운동에서의 경험은 사회적인 책임을 인식하는 한편 여성운동을 확산시키는 결정적인 밑거름이 되었다.이러한 각성을 바탕으로 여성들은 여성단체를 조직하고 구국항일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여학생을 비롯한 각계 여성들의 자발적인 3·1운동 참여가 이를 증명한다. 더욱이 「2·8독립선언서」, 「대한독립여자선언서」에서 드러나듯 이미 여성들도 남성과 동등한 국민의식을 갖고 있었다. 3·1운동 중 여성들의 활약이 돋보였던 만세운동을 살펴보면 개성 만세운동, 부산 일신여학교의 3·1운동, 아우내장터 만세운동 등이 있다. 여기서 여성종교인, 여교사, 여학생 등이 전면에 나서 활약했고, 이는 다양한 독립운동단체의 결집과 운동 방향을 모색하는 새로운 에너지원이 되었다.alt근우회 도쿄지회 격문(1928.05.20) 하나 된 여성단체를 조직하다 3·1운동으로 여성은 앞으로 전개될 독립운동에 남성과 동등한 국민의 자격으로 참여해야 한다는 인식을 정립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여성들의 독립의식을 고취할 수 있는 교육이 선행되어야 했다. 다양한 여성계몽단체가 만들어졌는데, 기독교 중심의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로 구분되었다. 기독교 여성들은 근대 지식과 교회를 바탕으로 교육계몽운동을 전개했다. 사회주의가 유입되면서 여성운동에도 변화가 일었다. 1924년 무산 여성의 해방을 규약과 강령으로 내세운 조선여성동우회가 등장하기도 했다.1926년은 일본 제국주의의 경제침탈이 노골화되고 잔혹한 폭압 정치가 이어지던 시기였는데 한민족의 독립운동은 사회주의 사상의 유입으로 좌우 노선이 나뉘어 그 역량이 분열되었다. 이에 민족지도자들을 중심으로 독립운동 재건을 위해 분열된 항일민족운동을 통합하자는 민족유일당운동이 활발해졌다. 1927년 2월, 그 결과로 신간회가 탄생했다. 그리고 이러한 움직임이 여성운동에 영향을 주어 만들어진 단체가 바로 근우회다.역사 있는 후부터 지금까지 인류사회에는 다종다양의 모순과 대립의 관계가 설립되었다. 유동무상하는 인간관계는 각 시대에 따라 혹은 이 부류에 유리하게 혹은 저 부류에 불리하게 되었나니 불리한 처지에 서게 된 민중은 그 시대의 설움을 한껏 받았다. 우리 여성은 각 시대를 통하여 가장 불리한 지위에 서 있어 왔다. 사회의 모순은 현대에 이르러 대규모화하여 절정에 달하였다.…(중략)…전쟁의 화는 갈수록 참담하여 가며 확대하여 가고 빈국과 죄악은 극도에 달하였다. 이 시대의 여성의 지위는 비록 부분적 향상이 있었다 할지라도 그것은 환상의 한 편에 불과하다. 조선에서는 여성의 지위가 일층 저열하다. 미처 청산하지 못한 구시대의 유물이 오히려 유력하게 남아 있는 그 위에 현대적 고통이 겹겹이 가하여졌다. 그런데 조선여성을 불리하게 하는 각종의 불합리는 그 본질에 있어 조선사회 전체를 괴롭게 하는 그것과 연결된 것이며…(중략)…그러나 일반만을 고조하여 특수를 망각해서는 안 된다. 고로 우리는 조선여성운동을 전개함에서 조선여성의 모든 특수점을 고려하여 여성 따로의 전체적 기관을 갖게 되었다니 이와 같은 조직으로서만 능히 현재의 조선여성을 유력하게 지도할 수 있는 것을 간파하였기 때문이다…(하략).   윗글은 근우회의 선언문으로, 여성층의 단결과 지위 향상을 목적으로 내걸었다. 근우회는 조선 여성들의 억압이 여전하며 현대에 이르러 그 정도가 절정에 이른 것은 일본의 지배를 받고 있기 때문으로 규정했다. 그러면서 조선 여성들이 처한 특수성을 고려해 여성들만의 하나 된 단체가 만들어져야 함을 피력했다.좌우를 떠나 여성들의 하나 된 단체를 지향하며 만들어진 근우회는 여성 계몽을 위해 다양한 여성교육을 실시했다. ① 여성의식 향상을 위한 강연회와 토론회 ② 회원모집 및 회원 간 친목을 위한 야유회, 체육대회, 척사(擲柶, 윷놀이)대회 등 ③ 여성의 기술교육을 위한 강습회 ④ 학교기부금이나 어려운 동포구제를 위한 사업 ⑤ 문맹 퇴치를 위한 부인야학 등이 대표적이다. 또한 기관지로 『근우』를 창간하여 여성운동의 발전 방향도 제시했다.근우회의 선언문과 강령, 활동은 여성을 ‘현모양처’로만 바라보았던 당시 사회에 대한 도전장이자 여성해방의 희망이었다. 나아가 여성들을 하나로 통합하려 했던 화합의 장이기도 했다. 그래서 근우회는 근대 여성운동에 활력을 불어넣고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특히 도쿄지회 조직은 해외와 정보 교류를 모색하는 등 소통을 위한 현장이었다. 근우회 행동강령◎ 여성에 대한 사회적·법률적인 일체의 차별을 철폐한다.◎ 일체의 봉건적인 인습과 미신을 타파한다.◎ 조혼을 폐지하고 결혼의 자유를 확립한다.◎ 인신매매 및 공창(公娼)을 폐지한다.◎ 농민 부인의 경제적 이익을 옹호한다.◎ 부인 노동의 임금 차별을 철폐하고 산전 및 산후 임금을 지불하도록 한다.◎ 부인 및 소년공(少年工)의 위험 노동 및 야근을 폐지한다. alt 근우회 기관지 『근우』(1929.05, 창간호) 서울 여학생 만세운동을 주도하다근우회의 주요 활동 중 하나는 여학생들의 동맹휴교에 대한 조사와 지원이다. 학생들은 사회적으로 불의한 사건이 터질 때마다 적극적으로 투쟁에 나섰는데, 그 때문에 일경의 감시와 탄압을 받아야 했다. 1927년 6월, 근우회는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 휴교 사건의 진상을 조사하다가 경찰의 제지를 받았다. 또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전국으로 확대되자 1930년 서울에서는 근우회의 주도하에 여학교 중심의 제2차 학생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서울 여학생 만세운동은 광주학생항일운동을 계기로 일어났으나, 여학생이 주도했다는 데에 의미가 있다.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을 비롯해 배재고등보통학교 학생들도 시위를 벌였다. 근화, 배화, 동덕, 정신 등의 여학생들도 만세시위에 참여했다. 일경은 시위에 참여한 여학생들을 마구잡이로 연행했으나 1930년 1월 15일 시작된 시위는 다음 날인 16일까지 이어졌다. 이 사건으로 만세시위를 주도한 근우회의 허정숙과 박차정이 기소되었다. 이때 근우회에 대한 일제의 탄압도 가중되어 활동에 어려움을 겪었다. 그리고 1931년 신간회가 해소되며 근우회도 같은 해 3월 31일 해소를 결의하게 되었다.근우회는 한국의 여성운동단체를 통합하고 단결하기 위해 설립된 최초의 단체로, 협동전선의 의미를 실천했다. 또한 여성들을 계몽해 사회의 구성원으로 활동할 수 있도록 여성교육 보급에 노력을 기울였고, 여성들의 모순된 현실을 타파하고 해결방안을 모색하며 사회적인 인식을 크게 변화시켰다. 근우회의 이 같은 정신과 활동은 현재를 살고 있는 여성들에게도 화합을 통한 진정한 여성 리더십을 일깨우는 희망의 등불이 되고 있다. alt 근우회 강령과 규약(1927) ]]> Thu, 07 May 2020 17:36:28 +0000 41 <![CDATA[독립운동가 의원들의 궤적을 통해 21대 후손 의원들에게 바란다 ]]> 글 이계형 국민대학교 교양대학 교수 독립운동가 의원들의 궤적을 통해 21대 후손 의원들에게 바란다 1945년 우리 민족은 광복을 맞았지만, 독립운동은 끝나지 않았다. 여전히 미완으로 남은 사건, 해결되지 못한 문제, 기억해야만 하는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끝나지 않은 독립운동은 독립운동사를 과거에 머문 역사가 아닌 현재의 문제로 다루며, 오늘도 신문 한쪽을 차지하고 있는 독립운동 및 일제강점 이슈를 소개한다. 해방 후, 제헌국회의 탄생2020년 4월 15일, 제21대 국회의원 선거가 치러졌다. 여야를 떠나 입후보한 독립운동가 후손들은 ‘독립정신’을 이어 지역 일꾼이 되겠다는 출마의 변을 토로하고, 자기 소속 정당의 후보 지지 유세에 동참했다. 어떤 후보들은 지역 내 대표적인 독립운동기념탑이나 독립운동가의 동상에서 출정식을 하기도 했다. 다른 한편으로 시민사회단체가 중심이 되어 친일청산을 위한 입법 활동에 의지가 없거나 역사 왜곡 발언을 한 후보자들에 대한 낙선운동을 전개하였다. 여전히 우리 사회에 독립운동과 친일이라는 화두가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라 할 것이다. 제헌국회와 제2회 국회의원을 지낸 독립운동가들의 면모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 독립운동가 후손 정치인들이 그들의 길을 따르거나 비판적으로 계승하여 더 나은 자취를 남길 수 있기 때문이다. 먼저 1948년 5월 10일, 200명의 제헌국회 의원들이 선출되었다(제주 2명 포함). 당시에는 남북협상파가 불참한 가운데 총선거가 시행되었기 때문에 유권자들의 선택은 매우 제한적이었다. 이들 가운데 2020년 4월 현재까지 정부로부터 독립유공자로 포상을 받은 분들은 28명으로 파악된다. 반면 반민족행위자의 피선거권을 박탈하였음에도 일제의 식민통치에 협력한 인물들 50여 명이나 당선되었다. 해방 직후 ‘독립’ 대 ‘친일’이라는 세력 구도가 ‘공산주의’ 대 ‘자유주의’라는 국제정치적 균열로 압도당한 결과였다. 독립운동가 중에는 현실적으로 남북협상을 반대한 사람들이 총선거에 임하였고, 한국민주당 후보가 가장 많이 당선되었다(이인·김준연·나용균·정광호·신현모·백남채·서상일·최윤동·김도연·장홍염). 한국민주당은 해방 당시 임시정부를 지지하였으나 점차 이승만의 단정론으로 기울며,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중추적 역할을 하였다. 그 결과 한국민주당은 이승만이 이끄는 ‘대한독립촉성국민회’의 55명(이 가운데 신익희·이범교·육홍균·김철·오석주)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29명의 의석을 확보하였다. 무소속 의원도 적지 않았다(홍순옥·연병호·이강우·구중회·오기열·최범술·배헌). 이외에도 대동청년당(지청천), 조선민족청년당(문시환), 조선공화당(김약수) 등이었다. 제헌국회는 가장 먼저 친일파 숙청을 위한 반민법 제정 논의를 진행하였다. 서상일·김상덕·홍순옥·연병호·배헌·오기열·장홍염·이석·김약수 등이 적극적으로 동참하였다. 이들 가운데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이하 반민특위)에서 위원장(김상덕), 재판관(홍순옥), 조사위원(오기열) 등으로 활동한 인물도 있었다. 반면에 정광호·김준연 등은 특별재판부 설치에 반대하였고, 나용균은 친일파 공소시효를 단축하고자 하였으며, 이인 같은 경우에는 단독정부를 지지하며 초대 법무부 장관을 역임하고 반민특위 위원장을 지냈지만, 이전과 달리 이승만 정권에 부합하여 이를 해체하는데 한몫하기도 했다. 이 외에 서상일은 이승만 독재 반대 투쟁을 전개하고 호헌동지회에 참여하였으며, 신현모는 도산선생기념사업회 이사를 지냈고, 김도연은 박정희의 5·16군사정변에 정치 활동을 중단하는가 하면 1965년 한일기본조약 비준을 반대하며 의원직을 사퇴하였다. 장홍염은 이승만 독재를 저지하였지만, 1963년에 박정희의 민주공화당에 입당하였다가 1967년에 탈당하여 3선개헌 반대 투쟁을 전개하였다. 제2대 국회의원 선거와 전쟁그 뒤 2년 동안의 제헌국회가 끝나고 1950년 5월 제2대 국회의원 선거가 치러졌다. 선출의석 수는 210석으로 10석 늘어났으며 경쟁률은 10.5대 1로(후보자가 2,209명) 역대 총선 중 가장 높았다. 각 지방의 유지들이 앞다투어 출마한 이유도 있었다. 아직은 정당정치가 뿌리내리지 못했던 터라 무소속 후보가 많았다. 이 시기에 이승만과의 정치적 갈등이 불거지자 신익희와 지청천 등은 ‘민주국민당’을 새롭게 출범시켰고, 이승만을 지지하던 세력들은 ‘대한국민당’을 창당하였다. 제헌 국회의원 선거와 달리 남북협상파의 선거 참여가 두드러졌다(장건상·오화영·조소앙). 그러나 국회에 진출한 독립운동가는 21명으로 제헌국회 때보다 적었다. 재선에 성공한 경우는 신익희·지청천·장홍염·연병호·육홍균 뿐이었다. 역시 무소속이 가장 많았고(서민호·장연송·김종회·장건상·오화영·안재홍·윤기섭·정일형·이종현), 민주국민당(이진수·신익희·김양수·고영완·장홍염·지청천), 대한국민당(이규갑·연병호·육홍균), 사회당(조소앙·조시원), 민족자주연맹(원세훈) 등의 순이었다. 하지만 며칠 뒤 발발한 6·25전쟁으로 미처 서울을 빠져나가지 못한 제헌의원 41명과 제2대 의원 24명(제헌의원 2명 제외)이 납북됐다. 공식 인정된 전체 납북자 수가 4,423명에 달하는데, 이 가운데 독립운동가 국회의원 홍순옥·정광호·이강우·구중회·김상덕·오기열(이상 제헌의원), 장연송·오화영·안재홍·윤기섭·조소앙·원세훈(이상 2대 의원) 등이 포함되어 있다. 김약수는 월북하였다. 이들은 제대로 국정을 펼치기도 전에 납북되고 만 것이다. 납북을 면한 독립운동가 국회의원들의 활동상을 간략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서민호는 거창양민학살사건 국회 조사 단장으로 활동하다 투옥되었고 1965년 한일협정에 반대하며 의원직을 사퇴하였다. 정일형은 줄곧 야당 국회의원으로 활동하였는데 그 또한 1965년 한일협정에 반대하여 의원직을 사퇴하였다. 김양수와 고영완은 이승만의 자유당을 견제하기 위해 민주당을 창당하는 데 힘을 보탰다. 이와 달리 이규갑은 이승만 정권에 참여하여 뒤이어 박정희의 민주공화당 고문을 역임하였으며, 이진수는 자유당에 입당하였다. 장건상은 한때 자유당에 입당했다가 탈퇴하여 호헌동지회에 참여하였고 1961년 5월 군사정변 당시 사상범으로 투옥되기도 하였다. 이를 통해 본다면, 독립운동가라 할지라도 해방 이후의 행보는 사뭇 달랐다. 정치권력을 쫓기도 했고, 독재 권력에 항거하다 투옥되는 고초를 겪기도 하였다. 이들에 대한 평가는 훗날 역사가들의 몫으로 남았다. 독립운동가 후손, 그리고 국회의원으로서의 길이번 21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인사들 가운데 독립운동가 후손들이 적지 않다. 독립운동가 후손이자 국회의원으로서 어떤 길을 걸어야 할 것인가? 훨씬 앞서 살았던 고경명과 고광순의 이야기가 이들에게 하나의 이정표가 되지 않을까 한다. 임진왜란 당시 고경명은 전남 담양에서 의병을 모집한 뒤 금산싸움에서 왜군과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그 뒤 310여 년이 지난 1907년에 그의 12대손인 고광순 또한 의병장으로 활동하던 중 전남 구례 연곡사에서 일본군에 맞서 싸우다 전사하였다. 선조가 나라가 외세에 어려움이 처했을 때 기꺼이 목숨을 바친 것처럼 후손 또한 그의 정신을 이은 것이다. 독립운동가 후손이 선대의 독립정신을 그대로 이어가기란 쉽지 않다. 물론 지금은 국망의 시대도 아니다. 누구나 존경하는 독립운동가의 후손이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어디에서나 귀감이 되어야 하고 반듯하게 살아야 하며 선대를 욕보이는 일은 절대 해서는 안 될 것이니 쉽지만은 않다. 어쩌면 숙명일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독립운동가의 후손으로 헌법기관인 국회의 의원이 되었다면 뭔가는 달라야 하지 않을까. 독립운동가 후손들의 복지 확대를 꾀해야 하며 독립정신의 맥을 잇는 통일운동에 앞장서야 하고 여야를 떠나 그들이 원했던 독립 국가의 발전을 위해서는 한목소리를 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보다 시급히 친일청산 4대 입법(▲ 친일망언 피해자 모욕 처벌 ▲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 환수 ▲ 친일반민족행위자 훈장 서훈 취소 ▲ 친일반민족행위자 국립묘지 이장)을 마무리해야 하고 올해 한국광복군 창설 80주년을 맞아 ‘국군의 날’을 새롭게 제정하는 것도 고려해 봄직하다. 독립운동가 후손 국회의원들의 활약을 기대해 본다. ]]> Thu, 07 May 2020 17:41:55 +0000 41 <![CDATA[광복을 위해 목숨을 바친 아버지와 두 아들 ]]> 글 독립기념관 전시부광복을 위해목숨을 바친아버지와 두 아들 독립기념관은 국가보훈처 및 광복회와 공동으로 유찬희, 유기석, 유기문 부자를 2020년 5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유찬희는 중국 북간도와 러시아 연해주 일대에서 한인사회 안정과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하였다. 아버지 유찬희의 독립정신을 이어받아 장남 유기석과 차남 유기문은 중국 관내를 거점으로 의열투쟁을 전개하였다. 정부는 세 부자의 공적을 기려 2008년 유기석에게 독립장을, 2010년 유찬희에게 독립장, 유기문에게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alt유찬희(柳纘熙)1884.08.08.~1930.02.13.황해도 금천건국훈장 독립장(2010)alt유기석(柳基石)1905.01.12.~1980.11.27.황해도 금천건국훈장 독립장(2008)alt유기문(柳基文)1910.~미상황해도 금천건국훈장 애족장(2010)한인사회 안정과 민족운동에 헌신한 유찬희유찬희는 1884년 8월 8일 황해도 금천에서 태어났다. 서북학회에 가입하여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다 국권침탈 후 탄압이 심해지자 1913년경 중국 연길현 쥐쯔제(局子街)로 망명하였다. 이곳에서 간민회(墾民會)에 참여해 한인 보호와 계몽에 힘쓰는 한편, 무역회사를 운영하며 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1919년 국내에서 3·1운동 소식이 전해지자 북간도 만세 운동을 주도하였고 조선독립기성총회와 충열대(忠烈隊)를 조직하여 자금 모집에 앞장섰다.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에도 참여하여 총기구입의원, 참모장, 재무부장을 차례로 맡아 독립군을 재정적·군수적으로 지원하였다. 이후 연해주를 거점으로 한인사회 안정과 민족의식 고취를 도모하다 1930년 서거하였다.alt 『30년 방랑기-유기석 회고록』(국가보훈처, 2010)에 수록된 가족사진. 왼쪽에서부터 어머니 이안라, 두 누이(신덕, 신영), 아버지 유찬희, 유기문, 유기석 순이다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아나키스트 유기석유찬희의 장남 유기석은 1905년 1월 12일 황해도 금천에서 출생하였다. 가족과 함께 이주하여 1919년 북간도의 만세운동에 가담하였던 그는 1920년 상하이로 건너왔다. 그곳에서 흥사단에 입단하여 원동위원부에서 활동하였고, 1924년 베이징 유학 중 아나키즘을 수용하며 독립운동의 사상적 방략으로 삼았다. 유기석은 1930년 상하이에서 유자명(柳子明) 등과 함께 남화한인청년연맹(南華韓人靑年聯盟)을 결성하고 본격적으로 의열투쟁에 나섰다. 그는 1932년 동생 유기문 등과 함께 톈진에서 일본총영사관과 일본군사령부를 파괴하는 ‘톈진투탄의거’를 결행하였고, 중일전쟁 발발 후인 1938년에는 일본군함 폭침과 상하이 지역 일본 책임자 처단 등을 전개하였다. 이후 한국광복군에 합류하여 난징에서 제3징모분처 대장으로 초모활동을 펼치고, 광복 후 집필과 후학양성에 힘쓰다 1980년 서거하였다. alt 제10회 흥사단 원동대회 기념사진(1924.02.18.) 형과 함께 의열투쟁에 투신한 유기문유찬희의 차남 유기문은 아버지를 따라 북간도와 연해주 등지에서 거주하며 학업을 마치고 1931년 중국 천저우에서 형인 유기석을 만나 아나키즘을 수용하였다. 남화한인청년연맹에 가입하여 의열투쟁조직인 흑색공포단(黑色恐怖團) 결성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1932년 12월 ‘톈진투탄의거’에 직접 참여하였다. 그는 유기석이 베이징에서 가져온 폭탄을 전이방(田理芳)과 함께 일본총영사관 관저와 일본 기선에 투척하여 한국인의 독립의지를 널리 알리고 항일의식을 고취하였다. 1935년 흑색공포단이 전개한 친일 변절자 처단 의거에 참여하는 등 의열투쟁을 이어나갔으나, 이후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다. alt유기석의 논설 「무산계급 예술신론」(『중외일보』, 1928.04.05., 국사편찬위원회 제공)alt1935년 친일 변절자 처단 의거 개정 관련 기사(『동아일보』, 1936.02.05.,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 Thu, 07 May 2020 17:41:10 +0000 41 <![CDATA[어느 독립운동가의 귀향 ]]> 글 독립기념관 자료부어느 독립운동가의 귀향alt 〈최익현 선생의 유해환국〉민족기록화(1976, 이의주 作)290.90 × 197.00cm한국문화예술진흥원 기증 최익현(崔益鉉)은 1906년 을사늑약을 반대하는 의병을 일으켜 항전하다가 체포되어 대마도에 유배되었다. 그림은 그가 단식 후 옥중 순국하여 1907년 1월 5일, 부산 초량에 유해로 환국하는 장면이다. 1976년 이의주 작가가 그린 민족기록화 <최익현 선생의 유해환국>으로, 관련 자료를 충실히 그림으로 재현하였다.작품의 시간적 배경은 최익현의 영구를 실은 배가 항구에 정박한 오전 8시경으로 추정된다. 하늘 오른 편에는 쌍무지개가 그려져 있는데, 실제로 최익현의 영구를 실은 배가 초량항에 도착했을 때 구름이 끼고 가랑비가 내리던 날씨여서 쌍무지개가 서남쪽으로 뻗었다고 한다. 작품의 중앙에서 빨간 깃발에 흰 글씨로 새겨진 만장과 그 만장 옆으로 상여꾼들이 이고 있는 최익현의 영구를 확인할 수 있다. 이날은 이른 아침부터 최익현의 가족들과 문중, 문인과 일반 시민들이 부둣가에 나와 기다렸으며, 상무사(商務社, 상업과 국제무역 업무를 관장하던 기관) 사원 1천여 명은 큰 상여를 갖추고 큰 글씨로 ‘춘추대의 일월고충(春秋大義 日月孤忠)’ 8자를 비단에 써서 간대에 걸고 나와 영접했다. 상무사 사무장 김영규 등이 영구를 옮기며 “이 배는 대한의 배요, 이 땅은 대한의 땅입니다”라고 울부짖으니 항구에 나와 있던 시민들이 모두 최익현을 외쳐 부르며 통곡하였다고 한다. 슬퍼하는 시민들의 모습도 작품에서 확인할 수 있다. ]]> Thu, 07 May 2020 17:35:21 +0000 41 <![CDATA[해방의 의미 ]]> 해방의 의미누구나 저마다의 희망을 안고 살아갑니다.일제강점기 우리 민족의 희망은 같았습니다.일제의 폭압에서 벗어나길다시, 내 나라의 독립된 역사가 시작되길.해방.그들은 암울한 오늘에서 해방을 꿈꿨습니다.그리고 그 시대를 살아가는여성들에게 해방의 의미는 남달랐습니다.식민 지배 아래 놓인 나라의 해방과 함께봉건적 관습에 억압받아온여성도 해방되어야 마땅했으니.여성들은 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습니다.대한독립만세를 부르고여성의 존재를 되새겼습니다.항일단체이자 여성 단체인근우회는 해방이라는 희망 위에서역사의 싹을 틔웠습니다.]]> Thu, 07 May 2020 17:34:33 +0000 41 <![CDATA[한국통신부와 한국친우회의 선전·외교활동 ]]> 글 홍선표 나라역사연구소 소장한국통신부와 한국친우회의 선전·외교활동 Ⅲ. 3·1운동의 발발과 재미 한인의 독립운동 ⑤ 필라델피아 ‘제1차 한인회의’를 계기로 불붙은 미주지역 독립운동은 서재필 주도하에 한국통신부와 한국친우회의 설립으로 이어졌다. 외국인을 대상으로 마땅한 선전홍보 기관이 없던 상황에서 한국통신부와 한국친우회의 설립은 미국은 물론 유럽 각국에까지 친한 여론을 형성하는 단초를 제공했다. 한국통신부의 설립과 활동3·1운동은 각계의 재미 한인들에게 독립운동을 촉발시켰다. 그동안 대한인국민회 중심으로 움직이던 독립운동의 불꽃은 각지 한인들과 친한 미국인들로 옮아갔다. 필라델피아에서 개최한 ‘제1차 한인회의’는 최초의 국제대회 형태로 열렸고, 그 영향은 한국통신부와 한국친우회의 결성으로 파급되었다.3·1운동 발발에 크게 감명받은 필라델피아의 서재필이 한국통신부를 설립했다. 설립 배경은 ‘제1차 한인회의’ 이튿날인 4월 15일 서재필의 제안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일본이 현재 미국에 막강한 통신사를 두고 한국의 실상에 대해 왜곡된 선전을 계속해 오고 있는데 이를 대항하기 위해선 조직적이고 항구적인 선전기관이 있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당시 일본은 영문판 연감과 각종 매체 등을 동원해 식민통치의 실상을 왜곡하고 있었다. 식민지 한국인들이 일본 정치인의 현명한 지도로 현대 문명의 혜택을 받아 행복해하고 있으며 일본 통치하에서 번영을 누리고 있다고 선전한 것이다. 서재필은 일본의 왜곡된 선전활동의 폐해를 깊이 인식하고 한국통신부 설립을 주장하였다. 3·1운동 후 선전활동의 중요성을 절감하고 있던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는 서재필의 통신부 설립 제안을 적극 받아들였다. 4월 19일 제20차 위원회의에서 중앙총회는 서재필을 외교고문으로 임명함과 동시에 필라델피아에 한국통신부 설립을 인준하고 재정지원을 약속했다.한국통신부는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아 4월 22일 필라델피아에서 활동을 개시했다. 조직은 부장 서재필을 비롯해 서기 박영로, 외교 협찬원(정한경, 구타펠, 체스터)으로 구성했다. 한국통신부의 활동 방향은 서재필이 4월 29일 중앙총회장 대리 백일규에게 밝힌 대로 첫째, 영문 책자 발간을 통한 출판선전활동, 둘째, 대중 집회를 통한 강연활동, 셋째, 미국인들에 의한 친한 단체 결성 지원활동이었다. 이를 근거로 가장 먼저 영문 책자 발간에 착수했다. 오하이오주의 북미대한인유학생연맹에서 발간하던 영문 잡지를 인수해 1919년 6월부터 Korea Review(『한국평론』)란 이름으로 발간해 미국 전역의 주요 기관과 단체, 언론 및 학교에 배포했다. 이 외에도 Little Martyrs of Korea, The Renaissance of Korea(Joseph W. Graves), The Renaissance of Korea(Nathaniel Peffer), Independence for Korea 등 영문서적을 발간해 배포했다. 한국통신부의 또 다른 활동은 서재필에 의해 추진된 강연활동이다. 서재필은 미국 전역에 걸쳐 강연활동을 전개했다. 1922년까지 3년여간 10만 명의 미국인들을 대상으로 약 300회의 강연활동이 이루어졌다. 1921년 3월 2일 뉴욕 시내 타운홀에서 개최한 3·1운동 제2주년 기념식은 약 1,300여 명의 사람들이 모인 가운데 서재필의 주도로 진행되었다. 이는 미국 동부 지역 한인들이 100여 명도 채 안 되는 상황에서 수많은 미국 사람이 모인 기념비적인 대회였다. 한국통신부의 활동은 Korea Review 1922년 7월호 발행을 끝으로 사실상 종결된다. 당초 서재필은 한국통신부를 항구적인 선전홍보기관으로 만들고 싶어 했다. 그러나 워싱턴군축회의 종결 직후 미주 한인사회의 독립운동 열기가 급격히 냉각되어 한국통신부를 유지할 재정이 원활하지 않았고, 그의 개인 사업마저 악화하여 활동을 중단하였다.한국통신부는 3년여의 짧은 활동으로 끝났지만, 3·1운동으로 나타난 한국 독립의 열망을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에 알림으로써, 식민통치의 실상을 은폐·왜곡하려던 일본 당국에는 매우 두려운 대상이 되었다. 또한, 일제강점기 미국인 등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세계 유일 한국인의 전문 선전홍보기관이었다는 점에서 존재 의의가 있다. alt 한국통신부에서 발행한 월간 영문 잡지 Korea Review (1919.06.) 한국친우회의 결성과 활동한국친우회의 설립 구상은 ‘제1차 한인회의’ 당시 서재필이 선전활동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통신부 설립 외에 미국인들을 대상으로 한 친한 여론 조성을 언급하면서 처음 제기되었다. 서재필의 제안에 톰킨스 목사가 적극 찬성하였고, 이에 두 사람은 1919년 5월 16일 밀러 교수, 베네딕트 기자 등과 함께 필라델피아에서 처음으로 한국친우회를 결성하였다. 이를 필두로 뉴욕, 보스톤, 워싱턴DC, 샌프란시스코 등 미국 전역 21개 지역에서 한국친우회가 결성되었다. 1920년 10월 26일 영국 런던, 1921년 5월 20일에는 프랑스 파리에서도 한국친우회가 결성되어 사실상 국제적인 친한 단체로 발전하였다.1919년 당시 한국이란 나라는 지구상에서 지워져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식민지 한국인을 돕기 위해 외국인들이 자발적으로 한국친우회를 결성한 일은, 오늘날에 비추어 볼 때 도저히 상상하기 어려운 활동이다. 이들 외국인이 한국친우회를 결성한 이유는 3·1운동으로 제기된 자유를 향한 한국인의 독립열망을 지지한 때문이었다. 그리고 한국인의 독립 열망을 무자비하게 짓밟는 일본 정부의 만행을 순수한 기독교 정신에서 규탄하고 동정·지원하기 위함이었다. 한국친우회가 미국 각지를 비롯해 유럽까지 확대될 수 있었던 데는 서재필을 비롯해 이승만과 정한경, 그리고 각 지역 한인 유학생들의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리고 헐버트·벡·화이팅 목사 등 일찍이 한국에서 활동한 바 있는 재한 미선교사들의 적극적인 활약도 큰 도움이 되었다. 한국친우회의 활동은 미국 언론에 친한 여론을 불러일으켰고 나아가 미국 의회까지 영향을 끼쳤다. 특히 필라델피아에서 처음으로 한국친우회를 결성하고 회장으로 활동한 톰킨스 목사는 1921년 11월에 개최된 워싱턴군축회의 때 한국대표단의 외교활동을 적극적으로 도와주었다. 또한, 그는 1923년 9월 관동대지진 당시 일어난 한인 대학살 문제를 미 국무장관 휴즈에게 공식으로 제기해 미국 정부를 움직이도록 했다.한국친우회의 활동은 1922년을 고비로 점차 쇠퇴하다 1923년 말경 사라졌다. 3·1운동이 가진 선전 재료로서의 가치가 점차 약화된 때문이었다. 그러나 수많은 대중 집회를 통해 결성된 순수 외국인 중심의 한국친우회는 국제적인 도움이 절실했던 한국인의 입장에서 천군만마와 같았다. 독립을 향한 한국인의 열망을 지지하고, 한민족의 핍박과 고통을 마음으로 동정하며 지원해 준 한국친우회는 오늘날 우리 한국인들이 절대 잊어서는 안 될 소중한 단체로서 잘 기억하고 발전시켜 가야 할 것이다. ]]> Thu, 07 May 2020 17:47:00 +0000 41 <![CDATA[최선화와 양우조 독립운동가 부부의 육아일기 ]]> 글 김형목 사단법인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이사 최선화와 양우조독립운동가 부부의육아일기 최선화와 양우조는 김구의 주례로 결혼식을 올리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약했다. 타국에 세워진 임시정부와 그 일원으로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일은 험난했지만, 그럼에도 사람들은 가정을 일구며 자신의 삶을 살아갔다. 최선화와 양우조 부부가 쓴 육아일기 『제시의 일기』는 이러한 임시정부 사람들의 절박하지만 일견 평범했던 삶을 기록하고 있다. ‘가정의 달’에 부부 독립운동가를 말하다여성독립운동가는 아내·며느리·어머니·동지로서 오늘날 ‘워킹맘’과 견주는 ‘슈퍼우먼’이었다. 그런데 중·고등학교 역사 교과서는 그중 아주 일부만을 언급할 뿐이다. 이들은 험난한 우리 근현대사의 주역이자 오늘날 대한민국의 터전을 가꾼 위인임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생계를 위해 경제활동은 물론 조국독립을 위한 막중한 역할도 마다하지 않았다.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려 국내로 잠입하는 모험도 감행했다. 이들의 희생정신은 독립운동을 견인하는 토대가 되었다. 독립운동 동지로서 맺어진 부부 인연은 아름다운 ‘들꽃’으로 탄생하는 벅찬 순간을 맞았다. 양우조, 외교활동으로 임시정부를 알리다양우조는 1897년 3월 평안남도 평양에서 아버지 양기영(楊基永)과 어머니 박씨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본명은 명진(明鎭)이며 호는 소벽(少碧)이다. 중국에서 활동할 때는 양소벽, 양묵(楊墨) 등 이명을 사용했다. 이외에도 데이비드 영(David J. Young)이라는 영문 이름을 썼다.여덟 살 때부터 서당에서 전통교육을 받았고, 1912년부터 1914년까지는 근대교육을 수학했다. 기독교 입교는 서양문화와 근대사회를 체험하는 계기가 되었다. 미국 유학길에 오른 양우조는 재미대한인국민회와 재미한인유학생회에 가입하여 활동했다. 이어 흥사단에 입단,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1929년 다시 상하이로 건너온 그는 안창호·이동녕·김구 등과 한국독립당에 참여하였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사찰특파원에 선임되었다. 혁신사를 창립해 교민사회 문화사업도 실시하였다. 이는 민족 정체성을 북돋는 활동의 일환이었다.이듬해 월간지 『한성(韓聲)』을 발행하는 한편, 『삼민주의』(1933)와 『손문학설』(1935) 등을 번역·출판했다. 그리고 임시정부 재무부 화남특파원으로서 임시정부 군자금 조달에 힘썼다. 한국광복군 결성 당시에는 총사령부 참사 겸 정훈처장으로 광복군 발전에 이바지했다. 국제사회에 임시정부를 알리는 일에도 열성적이었는데, 충칭 한국인기독교청년회 이사 겸 덕육지육부장으로 있다가 1946년 5월 귀국했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고, 이듬해 사망했다. alt 광저우에서 양우조(1932) 최선화, 독립운동에 나서다최선화(이명 최소정)는 인천에서 태어나 여학교에서 근대교육을 받으며 생장했다. 1931년 이화여전을 졸업하고 모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양우조를 소개받았다. 편지를 주고받으며 서로 애정을 확인한 두 사람은 결혼을 결심했다. 집안의 반대도 만만치 않았으나, 최선화의 할아버지가 결혼 성사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최선화는 상하이 간호전문학교 유학을 구실로 ‘통행증’을 받아 비교적 쉽게 중국으로 갔다. 1937년 3월, 김구의 주례로 진장 임시정부 청사에서 조촐한 결혼식을 올렸다. 이때부터 양우조의 독립운동에 대한 최선화의 내조도 시작되었다. 신혼생활은 낯선 광저우에서 보냈다.최선화는 흥사단에 가입한 후 임시정부에서 한국혁명여성동맹 준비위원으로 활동했다. 나중에는 한국애국부인회 서무부장으로 선출되었다. 남편 양우조가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본격적인 항일운동을 전개할 때 최선화는 이를 묵묵히 지원하며 동지로서 내조했다. 1991년 정부로부터 공훈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다. alt 최선화 양우조 부부(1937.03.22.) 임시정부 이면사를 섬세하게 기록하다『제시의 일기』는 최선화와 양우조가 쓴 육아일기로 당시 임시정부 가족들의 일상사와 인간적인 모습을 담은 귀중한 기록물이기도 하다. 중일전쟁 당시 일본의 공습을 피해 임시정부가 충칭으로 이동하는 긴박함과 위험을 시기별로 생생하고도 정확하게 기록했다. 그리고 암울한 질곡 속에서 독립을 염원하는 희망의 불씨도 확인할 수 있다.1938년 7월 4일 아침 10시 정각에 딸이 태어났다. 아기의 이름은 제시로, 영어 이름이다. 아기가 장차 성장했을 때 우리나라가 세계 속에서 당당하게 제 목소리를 내길 바라는 간절한 소망을 담았다. 8월 30일 일기에서 “오늘 비로소 얼굴을 마주하고 정면으로 제시를 안아줬다. 언제부터인지 제시는 스스로 머리와 목을 바로 세우고 있다”라고 적었다. 딸이 아팠을 때는 고향에 계신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연약한 자신의 모습을 언급하기도 했다.제시가 백일이 되는 10월 11일에는 백일잔치 대신 기념사진을 찍었다. 긴장감과 경제적인 궁핍함에서도 여러 사람으로부터 축하를 받을 수 있는 처지에 행복함을 표현하였다. ‘지극정성’이라면 지나친 표현일까. 어쨌든 딸에 대한 그들의 무한한 신뢰와 기대감은 이 같은 정성을 쏟을 수 있는 에너지원이었다.12월 15일 류저우에서 최선화와 임시정부 일행은 일본군 공습을 피해 천연동굴로 황급히 뛰어들었다. 곧이어 대대적인 공습이 이어졌다. 겁에 질린 일행이 머뭇거리며 동굴 밖으로 나오자 처참한 광경이 펼쳐졌다. 지내던 집 주변은 불바다를 이루고, 참혹하게 죽은 시신도 보였다. 일기에서는 무자비한 폭격으로 인류역사상 엄청난 참사가 일어났다고 언급했다. 동굴은 위험하다면서 숲속이나 나무 밑에 숨었던 피난민들은 저공비행을 하며 이루어진 기관총 난사에 대부분 사망했다. 시시각각으로 자행되는 공습으로 쉽게 불안감을 떨칠 수 없는 안타까운 상황이었다.불안한 피난 생활에도 때때로 망중한을 즐겼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전쟁으로부터 긴장감을 해소하려는 것이었다. 우리 식구 3명은 저녁에 공원으로 산보를 가려고 나오다가 용성중학교 여학생 주최로 ‘구망극사’에서 연극을 한다는 광고를 보았다. 흥미 있는 일이었다. 중국에 체류한 지 약 5년이 넘었지만 한 번도 중국의 연극은 본 적이 없었다.…(중략)…박수 소리를 들은 제시는 기분이 좋아 쉬지 않고 박수를 치며 재롱을 부려 옆에 앉은 손님들에게서 칭찬을 많이 들었다. 기다리는 동안 우리 제시가 대신 볼거리를 제공한 셈이다. 1940년 3월 14일 일기에는 하루 전 작고한 이동녕(李東寧)의 이야기가 나온다. 이동녕은 임시정부의 정신적 지주였기 때문에, 그의 죽음에 대한 교민들의 충격은 컸다. 최선화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제 생명이 우리에게 주는 의무를 완수하고 가신 석오 선생님, 그분의 든든하고 커다란 자리를 느끼게 되었다”는 고백에서 이러한 심정을 가늠할 수 있다. 그는 선생이 돌아가시면서도 화합을 유언으로 남기셨다고 말하며, 생전 독립을 볼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이동녕 선생님께서 독립의 서광이라도 보고 돌아가셨으면 좋았으리란 안타까움도 덧붙였다. 비통한 심정은 빈소를 뜬눈으로 지키다 귀가한 양우조도 마찬가지였다.일기에는 당시 한인들이 즐겨 부르던 노래 가사도 나온다. 가사는 망명 생활 중 한인들의 정서를 그대로 표현하는 동시에 진정한 염원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다.백두산이 높이 솟아 길이 지키고동해물과 탕하수 둘러 있는 곳생존 자유 얻기 위한 삼천만 강하고도 씩씩한 빛 띠고 있도다한 깃발 아래 힘 있게 뭉쳐용감히 나가 악마 같은 우리 원수쳐 물리치자!우리들은 삼천만의 대인 앞에서힘차게 싸우는 선봉이다.9월 13일, 치장에 유언비어가 난무했다. 양우조는 한국광복군 성립전례식 준비를 위해 충칭으로 떠났다. 한가위를 목전에 두고 둥근 보름달이 심란함을 더했다. 공습경보가 있어 최선화는 제시를 안고 들에 나가서 2시간 동안 괴로운 잠을 청하곤 했다. 이국땅에서의 피난 생활은 그의 여린 마음을 더욱 슬프게 만들었다. alt 최선화, 양우조 부부가 쓴 『제시의 일기』 중 일부. 제시가 백일을 맞았던 날의 기록이다 여권 신장에 앞장서다 최선화는 남편의 항일운동을 후원하고, 자녀를 양육하며 임시정부를 지원하는 와중에도 여성의 존재감을 알리는 활동을 지속했다. 특히 미주지역과 정보 교환에 적극적이었다.이 전시를 당한 한국 여성들은 반듯이 할 일을 위하여 한국애국부인회를 다시 건설하고자 오랫동안 활동한 결과로, 금년 일월 말에 완전한 조직을 마치고 1천5백만의 조선 여성은 지구의 어느 곳에 몸을 붙이고 있던지 “나는 한국의 여성이다. 나는 조국광복의 책임을 지고 있다. 왜적은 나의 원수다. 한국의 1천5백만 여성은 굳게 뭉치어서 국가를 독립시키고 민족을 해방시키자!” 하는 구호로 용전합시다. 이 소식을 널리 발표하시어 해외에 계시는 일반 동포의 성원이 크고 특별히 여성사회에 긴밀한 연락을 맺어서 우리의 목적을 달성하도록 지도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옵나이다. 대한민국 25년 2월 17일 최소정.   염원은 2년 후에 이루어졌다. 절박하고 간절한 소망이었던 조국 해방이 왔다. 1945년 8월 10일 일기에는 “상오 10시(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일본이 무조건으로 동맹국에 투항했다는 소식이 충칭에 도착한 것은 오늘, 10일 저녁 8시쯤이었다. 밖에서 들려오는 시끄러운 소리에 웬일인가 밖을 내다보니 사람들이 일본이 망했다고 한다. 이 소리를 듣는 순간, 정신이 아득해 오며 아무 생각도 들지 않는다. 가슴이 뛰고, 너무 어지러워 자리에 가서 잠시 누워야 할 정도였다. 이런 식으로 일본의 패망을 만나게 될 줄은 몰랐었다”며, “벅찬 감동이 다가오는 순간 현기증을 느낄 만큼 좋았다. 방송을 들으면 착잡한 생각에 밤잠을 이룰 수 없었다”라고 당시의 심정이 기록되어 있다.그러나 이어진 소식은 절망적이었다. 8월 13일의 순간적인 기쁨은 커다란 실망으로 되돌아왔다. 신탁통치에 관한 소식이 임시정부 가족들을 긴장시켰다. 바람과 달리 ‘진정한’ 해방은 아니었다. 더욱이 급변하는 시국으로 제시를 학교에 입학시키려던 계획도 중단되고 말았다. 독립운동가, 아내, 어머니 최선화귀국하는 일도 쉽지 않았다. 충칭에서 상하이로 이동한 뒤 1946년 4월 26일 귀국선에 올랐다. 그리고 29일 부산 앞바다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기나긴 ‘피난 생활’은 끝났어도 낯선 환경에 적응해야 하는 힘든 앞날이 남아 있었다. 약 10년간의 망명 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했지만 현실은 이상과 너무 멀었다.최선화는 독립운동가의 아내, 그리고 독립운동가 동지로서 제 역할에 충실했다. 또 다정다감한 어머니이기도 했다. 그는 비록 전투에 참여하는 등 역사 무대에서 크게 성과를 내지는 못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결코 과소평가해서는 안 될 것이다. alt]]> Thu, 07 May 2020 17:44:45 +0000 41 <![CDATA[강감찬, 동아시아를 지키다 ]]> 글 김종성 역사작가 강감찬,동아시아를 지키다 귀주대첩의 영웅 강감찬은 고려를 지킨 호국 영웅으로 평가받지만, 그가 실제로 역사에 미친 영향은 그보다 컸다. 강감찬의 활약은 한국사를 넘어 동아시아사에까지 뻗쳤다. 귀주대첩을 전후한 동아시아 정세를 통찰해 보면, 그가 한국의 명장이 아니라 동아시아의 명장이었음을 알 수 있다. alt 귀주대첩 민족기록화(전쟁기념관, 한국문화정보원 제공) 고려와 요나라의 긴 신경전강감찬은 고려 건국 30년 뒤인 948년 출생했다. 아버지 강궁진은 왕건을 도운 건국 주역이었다. 강감찬은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의 급성장을 지켜보며 성장했고, 35세 때 문과에 장원급제 했다. 현종 대에 정권 실세가 되었는데, 이때 그의 나이 60세 무렵이었다. 강감찬이 거란족을 격파한 것은 70세가 넘었을 때의 일이다. 문과 급제자인 그가 장군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문관이 무관을 지휘하는 관행 때문이었다. 글을 쓰는 것으로 말년을 보내다 8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강감찬 시대에 고려는 동아시아 신흥 강자인 요나라의 압력에 시달렸다. 요나라 입장에서는 중국의 송나라(북송)를 공략하자면 고려부터 제 편으로 만들어야 했다. 고려를 그냥 두고 남진을 했다가는 기습을 당할 수도 있었다. 그래서 993년, 제1차 침공을 단행했지만 안융진전투와 서희의 외교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대신 요나라는 고려와 송나라의 사대관계를 끊고 고려를 신하국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한편, 고려는 평안도 여진족을 몰아내고 강동 6주를 건설하는 것에 대한 요나라의 양해를 받아냈다. 그러면서도 고려는 송나라와 은밀히 접촉했다. 999년에는 일시적으로 양국관계가 회복됐다. 요나라는 불완전하게나마 고려를 신하국으로 두고, 1004년에 송나라를 침입해 형제국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매년 조공을 보내도록 했다. 중국 정복을 보류하되 매년 조공을 보내도록 함으로써 송나라가 딴 마음을 품을 가능성을 차단하려 했던 것이다.이러한 상황에서 1010년, 요나라는 제2차 고려 침공을 단행했다. 고려와 송나라의 관계를 확실히 끊어놓기 위함이었는데, 고려 현종으로부터 “친조(親朝)하겠다”는 약속을 받고 되돌아갔다. 신하국 군주가 황제국을 친히 찾아가 알현하는 것은 상당히 이례적으로, 외교적 굴욕이나 다름없었다. 국가 간에 맺은 이만한 약속이면 대개 지켜지기 마련이지만, 현종은 약속을 어겼다. 이는 요나라가 1014년, 1015년, 1017년 세 번에 걸쳐 고려를 침공한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고려는 녹록지 않았다. 요나라가 번번이 군대를 되돌리는 상황이 반복됐다. 요나라의 마지막 침공, 귀주대첩993년에 시작된 기나긴 장기전에 마침표를 찍은 것은 요나라의 제6차 침공이었다. 소배압 장군이 강동 6주의 반환과 고려 임금의 친조를 요구하며 10만 대군을 몰고 왔던 이 사건으로 지긋지긋한 대결 국면에 종지부를 찍었다. 일부 학술 논문과 백과사전 등은 제6차 침공이 1018년에 일어났다고 기록하지만, 『고려사』 현종세가(현종편)는 “(무오 9년 12월)무술일에 거란의 소배압이 10만 대군으로 침공하여 왔다”고 말하고 있다. 음력인 무오 9년 12월 10일(무술일)을 양력으로 환산하면 1019년 1월 18일이다.압록강 왼쪽 끝부분 의주에서 남쪽으로 6km 내려오면 해발 408m의 백마산이 있다. 이곳에 고려 최북단 군사기지인 흥화진이 자리했다. 흥화진을 점령해야 거란군의 남하가 가능했지만, 거란군은 실패했다. 그런데 실패했으면 철군해야 하거늘, 마음만 급한 나머지 흥화진을 그대로 둔 채 평양 쪽으로 남하했다. 남진하는 그들 앞에 삼교천이란 하천이 나타났다. 흥화진과 삼교천 나루까지는 약 8km. 거란족이 이 거리를 이동하는 동안 강감찬은 기발한 작전을 생각해냈다. 삼교천 나루에서 2km 떨어진 상류 지역에 제방을 쌓는 것이었다. 소가죽에 흙을 넣어 제방을 쌓고 하천물을 막자, 삼교천 나루에는 물이 거의 없게 됐다. 강감찬은 소가죽 제방이 있는 곳과 강 양쪽 두 야산에 군대를 배치했다. 이러한 준비는 거란군이 삼교천으로 이동하는 동안에 끝이 났다.삼교천 나루에 도착한 거란군은 아무런 눈치도 채지 못하고 무작정 도강했다. 거란군 상당수가 하천에 들어섰을 무렵, 강 양쪽에 매복해 있던 고려군이 일제히 봉화를 올렸다. 소가죽 제방 쪽에 보내는 ‘제방을 터뜨리라’는 신호였다. 거란군이 봉화를 보고 당황할 때, 거대한 하천물이 그들을 향해 밀려들었다. 거란군이 우왕좌왕하는 사이 강감찬은 공격 명령을 내렸다. 강 양쪽에 숨어 있던 고려군이 공격을 개시하고, 제방 쪽에 있던 고려군도 삼교천 나루로 진격했다. 하천에 갇힌 거란군을 향해 세 방향에서 공격을 개시한 것이다. 거란군의 대열이 흐트러지고, 결국 고려군이 승리를 거뒀다. 살아남은 거란군은 급한 나머지 흥화진 쪽으로 되돌아갔으나, 그곳에서 또다시 공격을 받았다.거란군은 압록강 쪽으로 철수했다가 전열을 정비해 다시 남하했다. 이번에는 고려군이 밀렸다. 거란군은 기세등등하게 평북과 평남의 경계인 청천강과 평남과 황해도의 경계인 대동강을 넘었다. 그러나 개경 근처에서 다시 후퇴하더니, 삼교천 인근인 귀주까지 물러가게 되었다. 이때 거란군은 고려군을 귀주 일대로 유인해 양쪽에서 협공하는 작전을 세웠다. 강감찬은 그 기미를 알아채고 오히려 거란군을 포위하며 공격에 들어갔다. 기상 조건도 고려군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바람이 고려군의 등을 밀어주었고, 하늘에서는 비까지 내렸다. 덕분에 고려군은 손쉽게 승리할 수 있었다. 10만 명이었던 거란군은 수천 명밖에 남지 않았다. 귀주대첩은 이렇게 역사의 한 장을 기록했다. 동아시아 세력 균형의 형성과 평화고려와 요나라의 대결은 그렇게 끝이 났다. 참패당한 요나라는 고려와 화친을 맺고, 고려와 송나라를 치기보다는 현상에 만족하기로 했다. 요나라가 더 이상 남하하지 않음에 따라 한반도와 만주, 중국에는 세력 균형이 형성됐다. 송나라도 강감찬 덕분에 전쟁을 피하게 된 것이다. 이때 형성된 세력 균형은 거란족이 약해지고 여진족이 강해진 뒤에도 계속 유지됐다. 훗날 동아시아 최강이 된 여진족도 한반도-만주-중국의 세력 균형을 깨지는 못했다. 이 구도는 몽골족 칭기즈칸이 등장하기 전까지 약 200년간 동아시아의 평화를 지탱했다. 강감찬을 고려를 지킨 호국 영웅에서 나아가 동아시아 평화를 지킨 국제적 명장으로 보는 이유다.1123년, 고려를 방문한 송나라 사신단 실무자 서긍은 귀국하여 작성한 『고려도경』이란 보고서에서 평소 민간에서 수행하다가 외침이 생기면 전쟁에 자원하는 고려 승군(재가화상)에 관해 설명하며 “이전에 거란군이 고려에 패배한 것도 바로 이들 때문이라고 한다”고 서술했다. 고려 승군들이 요나라와 전쟁에 자원해 전공을 세웠다는 것이다. 역사학자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승군의 내력을 모르면 고구려가 당나라 30만 대군을 물리친 원동력뿐 아니라 명림답부가 이끈 혁명군의 중심이나 강감찬이 거란을 격파한 요인을 알 수 없게 된다”고 말했다. 강감찬의 절묘한 전술과 더불어 그의 작전을 소화해준 승군, 관군의 실력이 동아시아 평화를 가져오고, 강감찬을 역사에 길이 남을 명장으로 만들어 주었다. ]]> Thu, 07 May 2020 17:47:46 +0000 41 <![CDATA[천상에 꽃이 피었네 소백산국립공원 ]]> 글·사진 임운석 여행작가 천상에 꽃이 피었네소백산국립공원 계절의 여왕 5월, 이맘때 소백산국립공원은 천상화원으로 탈바꿈한다. 코로나19 여파로 사회적 거리 두기가 일상이 된 요즘, 호젓한 숲길 속 천상화원을 감상해보는 것은 어떨까. 번잡한 도시, 답답한 일상을 벗어나고 싶다면 산만한 게 없을 테니. alt꽃 속에 파묻힌 등산객들alt난코스인 깔딱고개와 계단길 누구나 소백산을 찾을 이유가 있다소백산국립공원(비로봉 1,439m)은 당일치기 산행이 가능하다. 수도권에서 2시간 남짓한 곳에 있다. ‘소백산(小白山)’ 이름에서 눈여겨봐야 할 것은 흰 백(白)이다. 예부터 백은 ‘희다’, ‘높다’, ‘거룩하다’는 뜻을 가졌다. 일상에서 얻기 힘든 깨끗하고 맑은 에너지가 소백산에는 가득하다. 이것이 소백산을 자주 찾는 진짜 이유다. 소백산 정상에는 유난히 바람이 많다. 탁 트인 지형 탓이다. 특히 겨울에는 거침없이 불어오는 칼바람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성난 칼바람이 아무리 위세가 등등해도 따뜻한 봄볕 앞에서는 꼬리를 감출 수밖에 없는 법. 파릇파릇 새싹이 돋고 봉우리와 봉우리를 연결하는 능선에 신록이 물들기 시작하면 어김없이 화사한 꽃 잔치가 벌어진다. 소백산에는 수많은 꽃이 피었다가 지기를 반복한다. 그중에서 이맘때 꼭 챙겨봐야 할 꽃이 철쭉꽃이다. 국립공원 소백산에는 7개의 탐방코스가 있다. 그중 희방사코스가 대표적이다. 등산 초입부터 시원한 희방계곡과 폭포가 나서서 땀을 식혀주고, 연화봉까지 수풀이 하늘을 가려 뙤약볕을 피해 산세를 만끽할 수 있다.  장쾌한 물줄기, 희방폭포소백산국립공원의 대표 탐방코스인 희방사코스는 희방매표소에서 출발한다. 이곳에서 3km 정도를 오르면 연화봉 정상이다. 희방사코스의 매력은 시원한 물줄기로 유명한 희방폭포에 있다. 폭포까지 약간 가파른 길을 올라야 하지만 본격적인 등산에 앞서 몸을 풀기에 좋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폭포 소리가 점점 더 크게 들려온다. 아니나 다를까. 폭포 앞에 서면 하얀 물보라를 일으키며 시원한 물줄기가 곧추선 듯 하늘과 땅을 이어준다. 산에서 내려오는 물기둥 같다. 폭포가 떨어지는 가장자리는 깊이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물빛이 검푸르다. 등산객들은 소백산이 보여주는 첫 번째 장관에 정신이 팔려 사진 촬영에 여념 없다. 희방폭포 이후부터는 숨이 깔딱 넘어갈 만큼 난코스가 기다린다. 등산로에는 큰 바윗돌이 줄을 맞춰 징검다리처럼 놓여 있다. 한발 한발 오르는 다리에 힘이 들어가고 가슴은 더 많은 산소를 받아들이기 위해 가쁜 숨을 몰아쉰다. 잠시 멈춰 뒤를 돌아보니 꽤 올라왔다. 등산의 묘미는 빠른 걸음이 아니라 느리게 걷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모여 높은 고지에 올라서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깔딱고개’라는 이름보다 ‘느림고개’라고 부르는 게 옳겠다. 그동안 속도 때문에 놓치고 살았던 것을 회복하는 고개가 깔딱고개요, 느림고개다. 깔딱고개를 오르면 쉬어가기 좋은 곳에 벤치가 있다. 한고비를 넘겼으니 다시 힘을 내라는 뜻이려니 생각하고 좀 더 힘을 내어 올라본다. 깔딱고개를 안전하게 오르려면 등산 스틱이 필수다. 스틱은 체중을 분산시켜주고 비탈길이나 계곡 등지에서 균형을 잡는 데 도움이 된다. 무엇보다 돌길에서는 무릎보호에 특효이니 꼭 기억하자. alt수직으로 떨어지는 희방폭포alt바닥에 떨어진 연분홍색의 철쭉꽃 연분홍 철쭉꽃의 고운 자태숲은 변화무쌍하다. 좀 전까지 이어지던 비탈길은 어디 갔는지 찾아볼 수 없고 완만한 경사를 가볍게 오르내릴 수 있는 산책길이 이어진다. 희방폭포에서 1.4km 구간이다. 연화봉까지 남은 거리는 1.2km. 느린 것 같지만 한 걸음 한 걸음이 모여 절반을 오른 셈이다.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철쭉꽃도 이 구간부터 만난다. 도심에서 보는 핏빛의 붉은 철쭉이 아니라 진달래처럼 여리고 가냘픈 연분홍 철쭉꽃이다. 만개한 철쭉꽃이 환하게 웃기도 하고 땅바닥에 떨어져 밟히기도 한다. 그리고 다른 나뭇가지에 불시착한 채 꽃잎을 축 늘어뜨린 철쭉꽃도 있다. 밟고 지나가기에 미안해서 애써 다른 길로 돌아간다. 화려했던 짧은 시절을 보내고 땅바닥에 나뒹구는 모습이 애잔하다. 연화봉을 앞두고 마지막 고비가 닥친다. 평온의 숲길이 끝나고 다시 나무계단이 눈 앞에 펼쳐진 것이다. 이 구간만 지나면 드넓은 평전을 만날 수 있다. 등산길에 철쭉나무가 서로 뒤엉켜 꽃 터널이 되었다. 푸른 나뭇잎과 조화를 이룬 연분홍색 철쭉의 형언할 수 없는 고운 자태다. 꽃에 정신 팔려 힘든 것도 잊은 채 발걸음을 옮긴다. 어느 순간부터 하늘을 덮고 있던 나무가 사라지더니 드디어 하늘과 맞닿은 곳에 도착한다. 능선이 거침없이 이어진다.  alt연화봉 정상에서 바라본 풍경alt푸른 잎과 조화를 이룬 연봉 철쭉꽃 연화봉에 오르면 구름처럼 쉬어가리연화봉에는 짙은 안개가 자욱하다. 천상에 발길을 들인 것 같다. 먼발치에 국립천문대가 보이고 주변에는 녹색 융단을 깔아놓은 듯 푸르다. 비록 안개가 산 전체를 뒤덮었지만 부드러운 능선이 안개 속에 모습을 드러낸다. 연초록과 연분홍 철쭉꽃의 조화가 매력을 한껏 발산하고 있다. “엊그제 비가 많이 왔어요. 그래서 꽃이 많이 떨어졌어요. 더군다나 오늘은 안개 때문에 영 그림이 좋지 않네요.” 매년 철쭉꽃이 만개할 때마다 사진 촬영을 온다는 한 사진가가 오늘은 허탕이라며 볼멘 소리를 한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산이 높으니 구름도 안개도 이곳에서 쉬어 가는 것은 당연한 이치가 아닌가. 더군다나 안개는 불청객이 아니다. 철쭉꽃을 보기에는 이보다 편안한 빛이 없다. 강한 햇빛이 내리비쳤다면 연분홍색의 철쭉꽃은 허여멀겋게 탈색되어 볼품없었을 것이다. 제2연화봉 가는 길목에 소백산 국립천문대가 자리한다. 첨성대를 본뜬 천문대가 인상적이다. 깊은 숲속 어디선가 뻐꾸기의 노랫소리가 들린다. 우리나라 산에서 쉽게 들을 수 있는 새소리가 뻐꾸기 소리다. 길섶에는 민들레가 솜털 같은 홀씨를 머리에 이고 있다. 그늘진 곳에는 큰앵초꽃도 피었다. 큰앵초꽃은 5~6월경에 철쭉꽃과 함께 꽃망울을 터트린다. 발길을 돌려 등산했던 희방사로 하산 길을 잡는다. 등산은 언제나 아쉬움을 남긴다. 화창한 하늘 아래 춤추듯 위용을 뽐내는 소백산 주 능선을 보지 못한 것이다. 그런데도 하산하는 발걸음은 가볍다. 희고, 깨끗하고, 거룩한 에너지를 가슴에 담아가기 때문이다. 소백산은 언제나 우리에게 변함없는 너른 품으로 기억될 것이다. alt등산객들이 국립호텔이라 부르는 연화봉대피소alt연화봉 평전의 숲길 ]]> Thu, 07 May 2020 17:48:54 +0000 41 <![CDATA[독립군 양성에 힘쓰다 ]]> alt]]> Fri, 29 May 2020 15:19:29 +0000 42 <![CDATA[미주 최초의 독립군단 대조선국민군단 ]]> 글 김도훈 한국교원대학교 교수미주 최초의 독립군단대조선국민군단독립군 양성과 활약 2020년은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가 일어난 지 꼭 100년이 되는 해이다. 1920년 6월, 10월 일어난 두 전투는 1933년 대전자령전투와 함께 ‘독립군의 3대 대첩’으로 일컬어진다. 봉오동전투는 독립운동사에서 일제와 싸워 최초로 승리한 전투이고, 청산리전투는 최고의 전과를 거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 두 전투를 승리로 이끈 요인 중 하나는 전문적인 군사훈련을 받은 독립군의 활약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alt대조선국민군단 병영 낙성식 기념(1914) 한인소년병학교, 해외 최초의 군사학교 지금까지 독립군을 체계적으로 양성한 군사훈련 기관은 1911년 설립된 신흥무관학교의 전신인 ‘신흥강습소’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보다 앞서 독립군 양성을 먼저 주창하고 실천한 그룹이 있다. 그들은 한국과 가까운 만주나 러시아가 아니라 한국으로부터 10,000㎞ 이상 떨어져 있던 미주 한인들이었다. 미주에 한인사회가 형성된 것은 1903년부터 1905년까지 한인들이 하와이 사탕 농장 노동자로 이민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7,000여 명이 자리 잡은 미주 한인 중 가장 먼저 독립군 양성을 추진한 사람은 박용만이다. 박용만은 이승만, 안창호와 함께 미주 한인사회 3대 지도자이자 항일무장투쟁론을 주장한 대표적 인물이다. 1905년 2월 미국에 도착한 박용만은 네브래스카주에 자리를 잡고 군사학교 설립을 서둘렀다. 네브래스카주에 자리 잡은 이유는 이 지역 공립고등학교와 주립대학은 군사교육과 간부후보생(ROTC) 훈련 과정이 의무로 되어 있어 군사훈련을 실시하기에 적합하였기 때문이다. 1908년 7월 박용만은 ‘애국동지대표회’를 개최하고 미주·하와이·러시아 등지에서 파견된 대표자들과 국내외 통일 기관을 조직하고 군사학교 설립 안을 의결하였다. 이 의결을 근거로 1909년 6월 네브래스카주에 해외 최초의 한인군사학교인 ‘한인소년병학교(Military School for Korean Youth)’를 설립하였다. 한인소년병학교는 총 3년 과정으로, 여름방학 때 입소하여 8주 동안 군사훈련을 받는 하계 군사훈련 프로그램으로 운영되었다. 6년 동안 운영된 한인소년병학교는 170여 명의 학생을 배출하였다. 그러나 일본총영사의 항의 등으로 1914년 문을 닫고 말았다. 한인소년병학교는 만주의 신흥강습소는 물론 북미·하와이·멕시코 한인사회에도 영향을 끼쳤고, 1910년 해외 한인의 군인양성운동 확산에 기폭제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이 학교는 단기 군사훈련으로 운영되었다는 점에서 정규 군사학교와는 차이가 있다. alt미주에서 처음으로 독립군 양성을 추진한 박용만 미주에서 일어난 군인양성운동1910년 8월 일제의 한국강점 소식이 미주에 전해졌다. 미주 대한인국민회(1909년 2월 창립, 1910년 5월 개칭)는 북미와 하와이에서 각기 공동대회를 개최하여 ‘애국동맹단’과 ‘대동공진단’을 조직하고 항일운동방침을 결의하였다. 두 단체는 전보로 한국 황제에게 ‘강제병탄’ 거절을 요구하는 한편, 일왕에게도 합방 취소를 촉구하였다. 이어 만주와 러시아 등지에서 독립전쟁을 전개할 사관생도 양성을 의결하였다. 이에 따라 무예장려문을 발표하고 『체조요지』를 출판·배포하는 등 군사훈련을 적극적으로 실시하였다. 북미에서는 1910년 10월 대한인국민회가 운영하는 클레어몬트 학생양성소에 ‘군사훈련반’ 설치, 롬폭에 ‘의용훈련대’, 11월 캔자스에 ‘소년병학원’, 12월 와이오밍주 슈페리오에 ‘청년병학원’이 조직되어 매일 저녁 군사훈련을 실시하는 등 군인양성운동이 전개되었다. 하와이에서도 각 지역에 군인양성소를 조직하고 군사훈련을 시작하였다. 군인양성소 설립 후 1910년 11월에는 대동공진단이 군인양성소를 대한인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로 이관하였다. 하와이지방총회는 ‘연무부’를 조직하여 하와이 각 지역에 다수의 한인들이 거주하는 곳에서 한인 청년들을 중심으로 매일 저녁에 목총을 메고 군사훈련을 실시하였다. 이때 군사훈련에 참가한 한인들은 200여 명에 이르렀다.  alt대조선국민군단 사격훈련(하와이 호놀룰루) 하와이에 설립된 대조선국민군단박용만은 1912년 하와이지방총회 기관지인 『신한국보』 주필로 부임하였다. 그는 하와이지방총회 연무부 사업으로 추진하던 군인양성운동을 체계화하였다. 1913년 12월 하와이 한인 지도자들과 독립전쟁을 수행할 독립군단과 사관학교 설립을 합의하였다. 그 결과 1914년 6월 하와이 오하우섬 카훌루에 ‘대조선국민군단(이하 국민군단)’을 창설하고 군단 산하에 ‘대조선국민군단사관학교(Korean Military Academy, 이하 사관학교)’도 설치하여 독립군 양성을 본격화하였다.국민군단과 사관학교의 운영과 재정은 연무부에서 담당하였다. 박종수와 안원규 등은 1,500에이커에 달하는 농장 부지를 기부하였다. 그 규모는 300~400명의 군인을 수용할 수 있는 크기였다. 이를 기반으로 박용만은 하와이 군사령부로부터 군단 설립을 정식으로 인가받았다. 국민군단과 사관학교의 편제는 미국 군대를 모방한 근대적 군사조직이었다. 국민군단은 크게 군단, 병학교, 훈련소로 구성되었다. 이를 지원하기 위해 제복소, 별동대, 곡호수, 고수 등이 별도로 조직되었다. 군단은 사령부와 경리부로, 훈련소는 대대, 중대, 소대로 구성되었다. 박용만은 군단사령부 단장이자 병학교 교장을 맡았고, 박종수는 병학교 대대장이자 훈련소 대대장을 맡아 활동하였다. 별동대는 후일 대한민국임시정부 군무총장을 역임한 노백린이 맡았다.  100여 명으로 시작하여 많을 때는 300여 명에 이르렀던 국민군단은 이름 그대로 ‘국민군’이라는 이름으로 군단을 조직하려는 것이었고, 사관학교는 군단의 핵심이 될 사관을 양성하는 기관이었다. 국민군단 임원들은 군단에 기숙하면서 농장에서 노동을 하였고, 틈틈이 군사훈련과 학습을 실시하였다. 사관학교 학생들도 야외에서는 군사훈련을 받고, 교실에서는 군사학을 공부하였다. 다만 하와이 군사령부가 실제 군총 사용을 불허하자 군사훈련 때는 목총을 사용하였다. 사관학교의 교과 내용은 한인소년병학교의 교과 과정을 발전시킨 것이었고, 교재는 28종에 달하였다. 특히 1911년 박용만이 역술·간행한 『군인수지』는 사관학교의 주요 교재로 사용되었다. 국민군단과 사관학교에서는 박용만이 직접 작사한 「국민군가」와 「조선국가」를 애창하였다. 「국민군가」 가사는 후일 만주 등지에서 독립전쟁을 전개하기 위한 독립군 양성의 포부를 드러낸 것이었다. 흑룡강 맑은 물 남북만주 푸른 풀 넓은 들 우리 말 안장 벗겨라 국민군 군가 부르세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과 제정 러시아가 연합국에 가담하면서 국제 정세에 변화가 일어났다. 일본은 연합국의 일원으로 미국과 친밀한 유대관계를 바탕으로 미국에 국민군단의 활동 중단을 요청하였다. 이러한 시기에 외교론에 중점을 둔 이승만 세력과 무장투쟁론을 실천하려던 박용만 세력이 대립하자, 일제는 이 내분을 이용하여 박용만을 제거할 계획을 세웠다. 1915년 여름 일제는 주미 일본공사관을 통해 미국 국무장관에게 박용만의 군사 활동을 강력히 항의하였다. 일제의 항의를 받은 미국 국무장관은 내무부에 엄중 조사를 요구하였다. 미국 내무부는 다시 하와이 총독에게 박용만 등 국민군단 간부들의 무기 소유 여부, 일본에 대한 반일 선동 여부를 조사하라고 지시하였다. 이에 따라 하와이 정부는 대한인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에 승인하였던 특별경찰권을 취소하여 하와이 한인사회의 자치권을 박탈하였다. 이외에도 국민군단은 경제적으로도 곤란을 겪었다. 국민군단은 병농일치를 바탕한 둔전제를 기본 원리로 운영되었다. 그런데 이즈음 파인애플 농장의 불경기와 흉작 등으로 수입이 크게 감소되어 국민군단에서 사용하던 농장 계약이 만기되어도 연장할 수 없었다. 이에 따라 1916년 농장주의 압력으로 계약을 취소당해 1917년경 문을 닫게 되었다.  alt대조선국민군단 행진(하와이 호놀룰루)alt대조선국민군단 시가행진(호눌룰루, 1917) 대조선국민군단 이후1919년 3월 박용만은 호놀룰루에서 ‘대조선독립단’ 하와이지부를 설립하였다. 대조선독립단은 국내와 중국 등지의 독립군단과 통일을 꾀하기 위해 박용만이 통일군사정부를 염두에 둔 조직이었다. 이후 박용만은 러시아로 가서 대한국민군을 조직하고 국내외에 국민군을 조직하기 위해 힘썼다. 그러나 국내에 조직한 국민군이 일제에게 발각되는 바람에 국민군 조직도 실패로 돌아갔다. 이에 박용만은 1920년 다시 중국 베이징으로 거점을 옮겨 ‘군사통일회’를 조직하고 만주와 러시아에 사관학교를 설립하기 위해 다시 움직였다. 이때 대조선독립단에서는 국민군단 시절 적립하였던 20,000여 달러를 재정 후원하면서 박용만의 항일무장투쟁 활동을 지원하였다. 이러한 활동도 1928년 10월 박용만이 피살됨으로 인해 끝내 빛을 보지 못하였다. alt 하와이 호놀룰루에 있는 대조선국민국단 사관학교(1914) ]]> Thu, 28 May 2020 16:33:21 +0000 42 <![CDATA[반민특위 습격사건, 한국 현대사의 해악 ]]> 글 이계형 국민대학교 교양대학 교수 반민특위 습격사건,한국 현대사의 해악 6월은 ‘호국보훈의 달’이다. 이달엔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을 추모하는 현충일이 있고, 6·25전쟁, 제2연평해전에서 목숨을 잃거나 희생된 분들을 기념하고자 하는 데 의미가 있다. 대한민국이 존재하고 국민들이 자유와 평화를 만끽할 수 있는 것은 그분들의 숭고한 정신이 있었기에 가능했기 때문이다.  친일 민족 처벌 위한 반민특위 설치우리에겐 역사의 본보기로 삼아야 할 중요한 사건이 있다. 지금으로부터 70여 년 전의 일이다. 하나는 1949년 6월 26일 김구가 안두희 총에 맞아 사망한 사건이고, 다른 하나는 그 이전인 6월 6일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이하 반민특위)가 과거 친일 경찰들에 의해 습격을 당한 사건이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이승만 정권이 출범한 지 1년이 가까이 될 무렵이었다. 두 사건은 두 개처럼 보이지만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반민특위는 1948년 9월 일제강점기 친일 민족 반역자를 처벌하기 위해 제헌국회가 제정한 ‘반민족 행위 처벌에 관한 특별법(이하 반민법)’에 의해 조직되었다. 반민법은 제헌헌법 부칙 제101조 “단기 4278년(1945년) 8월 15일 이전의 악질적인 반민족행위자를 처벌하는 특별법을 제정할 수 있다”는 조항에 근거하였다. 그 뒤 특별조사위원회를 시작으로 특별재판부, 특별검찰부가 조직되어 1948년 10월 22일 반민특위(위원장 김상덕)가 설치되었다. 하지만 그 과정은 순탄치 못했다. 친일파들의 조직적이고 권력을 앞세운 저항이 만만치 않았던 것이다. 반민법 공포 그날 우익단체 한국반공단(단장 이종형)은 ‘반공구국총궐기 국민대회’를 열어 반민법을 주도한 소장파를 성토하였고, 친일 경찰 출신 노덕술·최난수 등은 반민법 제정을 주도한 의원들을 납치·살해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위협에 특위·특별검찰부 조사위원, 검찰관·조사관 등의 신변을 보호하고자 특경대가 설치될 정도였다. 그런데도 반민특위 요인의 협박과 테러 행위는 다양한 방식으로 자행되었다. 이승만 정부는 예산 배정과 사무실 미배정 등으로 반민특위의 발목을 잡았으며, 조사에 필요한 자료 요청도 거부하기 일쑤였다. 이승만 정권의 반민특위 와해 작전1949년 1월 특별조사위는 화신재벌 친일파 박흥식을 필두로 최린·이종형·이승우·노덕술·박종양·김연수·문명기·최남선·이광수·배정자 등을 체포하였다. 이에 이승만은 1949월 1월 〈반민족행위처벌법〉 시행 최소화 담화를 발표하고 그해 7월까지 국무회의에서 11회에 걸쳐 반민법 개정 논의를 거쳐 그 안을 국회에 제출하였다. 반민법 개정 요구는 특별검찰부·특별재판부 및 특경대를 폐지하는 것이었지만 궁극적으로 반민특위 자체를 와해시키고자 한 것이었다. 그해 2월에 이승만은 ‘반민법이 헌법에 위배’된다는 담화를 발표하는가 하면, 4월에는 ‘공소시효’ 단축안을 제안하기도 하였다. 특히 이승만은 친일 경찰 출신의 경찰 간부들이 구속되면서 정치적 위기에 내몰리자 “서울시 수사국장 노덕술을 치안 기술자”라며 정부가 보증해서라도 석방토록 하는가 하면 그를 체포·구금한 특별조사위원회 관계자의 의법을 처리하라고 지시하였다. 5월에는 반민특위 활동에 앞장선 국회의원 3명을 남로당의 프락치 활동을 했다는 혐의로 검거하였다(제1차 국회프락치사건). 6월에 접어들면서 이승만 정권은 반민특위를 와해시키기 위한 총공세를 펼쳤다. 우익단체 국민계몽대는 ‘빨갱이 의원’ 성토대회를 개최하고는 특별조사위원회로 몰려가 건물을 에워싸고 “공산주의자가 이 안에도 있으니 빨리 나와라”, “반민특위 내 공산당을 숙청하라”며 사무실로 침입하려 하였다. 위험에 처한 반민특위 직원들이 중부경찰서에 연락했지만 소용없었다. 반민특위가 나서서 6월 4일 배후 인물들을 체포·수감하자, 다음날 서울시경은 비상경계에 들어갔고 경찰국 산하 사찰과 직원 440여 명은 신분 보장을 요구하며 사표를 제출하는 것으로 갈등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반민특위와 경찰 당국이 정면충돌하는 양상이었다. 1949년 6월 6일 오전 8시, 서울시 중부경찰서 서장 윤기병의 지휘 아래 40여 명의 사복경찰들이 반민특위 사무실을 습격하였다. 특별조사위원·조사관·특별검찰관·특별재판관 등의 가택수색까지도 이뤄졌다. 특경대장 등 대원 30여 명이 중부서로 체포되었고 특별검찰관과 총장이 몸수색을 당했다. 사복경찰들은 특별재판부에서 투서·진정서철, 반민자 죄상 조사서, 출근부 등을 압수해갔다. 이른바 반민특위 습격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이는 이승만 정권이 반민특위를 와해시켜 친일파 숙청을 원천 봉쇄하려는 극단적 대응이었다. 특경대의 무장해제는 명분에 불과했다. 반민특위 해체 후 독재 정권 등장반민특위 습격사건 이후 정국은 극단적인 반공 정국으로 빨려 들어갔다. 반민특위 습격사건을 지휘한 내무차관 장경근은 연행한 특경대원·사무직원들에게 “반민특위는 빨갱이의 소굴이다”, “너희들은 언제 남로당에 가입했느냐”며 이를 기정사실화하였다. 이런 가운데 6월 22일 국회부의장 김약수 등이 국가보안법 위반 협의로 검거되는가 하면(제2차 국회프락치사건), 반민특위 활동을 적극 지지하며 친일파 숙청에 강경 발언을 쏟아 냈던 김구가 1949년 6월 29일 암살되었다. 이후 반민특위 활동은 급속히 위축되었고 와해 절차가 진행되었다. 1950년 6월 20일로 규정된 공소시효는 1949년 8월 31일로 앞당겨졌고 반민 피의자의 조사와 체포는 급격히 줄었다. 특별검찰부는 공소시효 마감일에 상당수의 반민 피의자를 기소유예 석방하여 특검 업무를 종료했다. 특별재판부는 9월 23일부터 보석 및 구류 취소 등으로 업무를 종료하였다. 더욱이 반민특위의 폐기 법안이 통과되면서 민족 반역자에 대한 처벌이 불가능해졌다. 또한 1951년 2월 ‘반민족 행위 재판기구 임시조직법’이 폐지되어 공소 계속 중인 사건은 모두 ‘공소 취소’되었고 반민법에 의한 판결도 모두 효력을 상실하였다. 반민특위는 어렵게 조성된 민족정기를 살릴 기회를 상실한 채 시효 만료로 문을 닫고 말았다. 이로써 민족정기는 굴절되었고 이승만을 정점으로 하는 친일 반민족 세력이 재등장하고 독재 권력을 낳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오늘날 한국 사회는 사회갈등지수가 OECD 국가 가운데 2위에서 4위 정도로 아주 높다. ‘갈등 공화국’이라 말하기도 한다. 이 때문에 생기는 갈등 비용은 한해 82조 원에서 246조 원에 이른다는 분석도 있다. 이러한 사회적 갈등은 지역·이념·빈부·남녀·세대 간에서 비롯된 것이다. 민주화 이전엔 지역 갈등이 컸지만 지금은 이념 갈등이 제일 크다. 이는 좌파와 우파, 진보와 보수 간의 대립에서 기인한 것인데 친일 문제도 한몫한다. 반민특위 습격사건은 그 불씨가 되었고 결국 반민특위를 좌절시켰다. 결국 민족 양심과 사회정의, 나아가서는 민족정기의 패배를 가져다주었다는 점에서 한국 현대사에 커다란 해악을 끼쳤다.  ]]> Thu, 28 May 2020 16:34:42 +0000 42 <![CDATA[간도와 연해주를 오가며 독립전쟁에 참여하다 임병극 ]]> 글 독립기념관 전시부간도와 연해주를 오가며독립전쟁에 참여하다임병극 임병극(林炳極)1885~미상평안도 독립기념관은 국가보훈처 및 광복회와 공동으로 임병극을 2020년 6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임병극은 만주에 망명해 간도와 연해주를 오가며 독립운동을 펼쳐나갔다. 그는 대한국민회군 지휘관으로 봉오동전투에 참여하였으며, 간도와 연해주 일대에서 대일항전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정부는 이러한 그의 공적을 기려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alt‘봉오동전투’ 승리 기사(『독립신문』 1920. 6. 22.) 대한국민회군 제2중대장으로 독립전쟁에 참여하다임병극은 1885년 평안도에서 태어났다. 1917년 북간도로 망명하여 대한국민회에 참여한 임병극은 외교실행위원으로 선임되어 중국 관·군의 협조를 얻기 위한 협상을 진행하였다. 한편 1920년 초 북간도 일대에서 활동하던 독립군단들이 통합을 모색한 결과 결성된 대한북로독군부에 임병극이 활동하던 대한국민회군도 동참하였다. 임병극은 대한북로독군부의 피복과장으로 선임되어 독립전쟁에 필요한 물자 조달을 책임졌다. 또한 대한국민회군 제2중대장으로 임명되어 독립전쟁의 일선에 나섰다. 1920년 6월 봉오동전투와 1920년 10월 청산리전투에서 임병극은 독립군 연합부대의 중간 지휘관으로서 일본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는 데 힘을 보탰다. alt독립군이 사용한 무기(1920년대)alt대한독립군비단의 연해주 군대파견 현황alt국민대표회의선언서(1923) 간도와 연해주를 오가며 대일항전을 전개하다청산리전투 후 임병극은 부하들과 백두산 서쪽의 안도현으로 이동하여 의용대를 조직하고 1921년 4월 말까지 국내 진입 작전을 전개하였다. 이후 근거지를 한·중 국경지대인 장백현으로 이동하여 대한독립군비단에 합류한 후에는 경호부장으로도 활동하였다. 1922년 중반 연해주로 이동한 후 그는 혈성단 및 한족공산당 등과 함께 고려혁명군을 조직하고 남부사령관으로 임명되어 국내 진입 작전을 시도하였다.1923년 초 대한민국 임시정부 개편과 독립운동 현안을 해결하기 위해 상하이에서 열린 국민대표회의에 고려혁명군 대표자격으로 참가하여 임시정부의 개편과 무장투쟁 실천을 주장하였다. 국민대표회의가 끝난 후 연해주·북만주를 거쳐 연길로 돌아온 그는 3·1운동 5주년에 맞춰 간도 일대의 일본영사관 파괴·친일파 암살 등 의열투쟁을 계획하였다. 일제의 감시가 심해지자 일제의 감시를 피해 지하활동을 이어가던 중 1924년 9월 중국군에 체포되어 징역 15년을 언도받았다. 간도와 연해주를 오가며 독립전쟁에 참여한 임병극의 공훈을 기리어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alt 중국군에 체포된 사실을 보도한 기사(『시대일보』 1924. 10. 8.) alt]]> Thu, 28 May 2020 16:34:10 +0000 42 <![CDATA[위안부 할머니의 미술 선생이 그린 그림 ]]> 글 독립기념관 자료부 위안부 할머니의 미술 선생이 그린 그림alt어린 소녀87.00 × 187.00cm이경신 기증alt일본 헌병에게 끌려가는 소녀148.00 × 134.00cm이경신 기증alt위안부로 희생된 할머니 모습90.00 × 107.50cm이경신 기증1993년부터 1997년까지 5년 동안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의 미술 선생이었던 이경신 작가의 작품이다. 이경신 작가는 미술 대학을 졸업한 후 할머니들이 모여 사는 나눔의 집을 찾아가 자원봉사로 미술 수업을 했다. 할머니들은 그림을 그리며 내면의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고통을 예술로 승화시켰다. 그림에는 과거의 끔찍한 상처를 스스로 치유하며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본질을 증언하는 할머니의 당당한 삶의 모습이 담겨있다. 이경신 작가는 할머니들과 함께한 미술 수업 이야기를 『못다 핀 꽃』이라는 책에 담기도 했다. 할머니들이 상처와 절망을 극복하기 위해 했던 모든 노력과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그림을 그리며 말하고자 한 바를 전하려고 했다.]]> Thu, 28 May 2020 16:32:20 +0000 42 <![CDATA[피와 맞바꾼 독립 ]]> 피와 맞바꾼 독립 그 시절 우리는 억압당할수록 움트고 있었습니다.지켜야 했습니다. 민족과 나라를. 그렇게 나라 뺏긴 설움은농부와 학생을 군인으로 만들었습니다.땅과 얼을 되찾기 위해선강해져야 했습니다.빼앗긴 국권을 찾기 위해 1910년부터 1945년까지 35년간일본에 무력으로 항쟁하였고, 어떠한 치욕 앞에도 굴하지 않았습니다.역사상 길이 남을 그날의 투쟁과 피로 맞바꾼 전사들의 독립정신은 가슴 깊이 빛나고 있습니다.영광의 피로 되찾은 이 땅에서값진 자유를 누리는 우리 가슴에는 아직도뜨거운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 Thu, 28 May 2020 16:30:56 +0000 42 <![CDATA[구미위원부의 설립과 활동(Ⅰ) ]]> 글 홍선표 나라역사연구소 소장 구미위원부의 설립과 활동(Ⅰ) Ⅳ. 3·1운동의 이후 재미 한인사회의 변화 ① 3·1운동 발발  후 그동안 대한인국민회 중심으로 이루어지던 한인사회에 새로운 단체와 조직들이 생겨나면서 변화의 바람이 일어났다. 미주 한인 최대의 자치기관으로 독립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하던 대한인국민회의 위상이 크게 흔들리면서 한인사회는 재편되기 시작했다. 그러한 변화의 중심에 이승만이 설립한 구미위원부가 있었다. 구미위원부의 설립3·1운동 발발 이후 최대의 수혜자를 꼽으라면 단연 이승만이다. 파리강화회의 파견 대표로 선정된 이승만의 파리행 계획은 미국의 여권 발급 불허로 무산되었으나, 3·1운동 발발 이후 그의 위상은 완전히 바뀌었다. 이승만은 상하이에서 특별대표로 활동한 현순으로부터 두 차례(4월 4일, 4월 15일)에 걸쳐 임시정부 수립과 ‘국무총리’ 선임 소식을 들었다. 그는 필라델피아 ‘제1차 한인회의’ 때 실제로 임시정부의 ‘국무총리’로 활동했다. 그런 가운데 이승만은 1919년 5월 말 국내에서 건너온 신흥우를 워싱턴 DC에서 만나 한성정부 선포 문건을 입수하고 자신이 집정관총재로 선출된 사실을 알았다. 한성정부는 서울에서 13도 대표들이 국민대회를 개최하여 조직하고 선포한 것으로 상하이나 블라디보스토크의 다른 어떤 임시정부보다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이승만은 6월 초부터 한성정부의 존재를 대내외에 알리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자신이 대한공화국의 대통령으로 선출된 사실을 미국을 비롯해 각국 정부에 알렸다. 한성정부의 ‘집정관총재’를 영어로 마땅히 번역할 말이 없는 상태에서 그는 자신을 ‘대통령(president)’으로 소개했다. 7월 4일에는 국내외 동포들에게 ‘대한민주국 임시집정관총재 선언서’를 발표해 한성정부의 정통성과 정부에 대한 복종 그리고 정부 유지를 위한 재정 의무를 촉구했다. 이어서 8월 13일 집정관총재 명의로 ‘국채표에 대한 포고문’을 발표하고 김규식·송헌주·이대위 세 사람으로 구성한 ‘재무위원회’ 설치를 공표했다. 이승만이 ‘재무위원회’를 설립하겠다고 한 것은 미주지역의 재정을 총괄하는 기관을 만들겠다는 구상이었다. 그런데 이승만은 8월 25일 집정관총재 직권으로 ‘대한민국특파 구미주찰위원부’ 즉 ‘구미위원부’ 출범을 공포했다. 이 날은 김규식이 8월 24일 워싱턴 DC에 도착한 다음 날이었다. 김규식은 파리강화회의 종결을 앞두고 새로운 진로를 모색하던 중 미국으로 건너가 활동하고 싶다는 요청(1919. 5. 25.)을 이승만에게 했는데 이승만의 화답으로 미국에 오게 되었다. 이승만이 당초 ‘재무위원회’에서 ‘구미위원부’로 명칭을 바꾼 것은 재정권 관할만을 내세울 때 대외 명분을 충족시키기 어렵다고 판단한 까닭으로 보인다. 미주 교민들로부터 안정적으로 독립운동자금을 거두기 위해 구미의 외교와 선전활동을 전담할 기구가 필요했던 것이다. alt 구미위원부에서 활동한 인물들(앞줄 왼쪽부터 남궁염·송헌주·이승만·김규식·신형호, 뒷줄 왼쪽에서 두 번째부터 임병직·김노디) 독립공채 판매와 조직 확대이승만은 구미위원부의 초기 조직을 위원장 김규식, 위원 이대위와 송헌주로 구성했고 기존의 파리 한국통신부와 필라델피아 한국통신부를 비롯해 1920년 6월 새로 신설한 런던사무소까지 편입해 산하의 부서로 편성했다. 외형적으로 볼 때 구미위원부는 구미지역 선전외교활동의 중심 기관으로 자리매김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과 함께 집정관총재가 되고 나아가 1919년 9월 통합된 임시정부에서 마침내 임시대통령으로 확정되면서 이승만의 대내외의 입지는 더욱 탄탄해졌다. 그의 비중과 역할이 커질수록 그동안 무형정부로 자처했던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의 입지는 국외 여러 민간단체의 하나로 크게 위축되었다. 그런 중에 이승만이 추진한 독립공채 발매 요구(1919. 9. 4.)에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가 반발해 애국금 모금을 강행하자 1919년 9월부터 중앙총회와 구미위원부 사이에 애국금-공채표 논쟁이 일어났다. 애국금-공채표 논쟁은 미주지역 재정권 관할을 둘러싼 중앙총회와 구미위원부 간의 알력으로 비추어질 수 있으나 중앙총회의 입장에서 볼 때 구미위원부는 상하이 임시정부로부터 설립 허가를 받지 않은 이승만의 임의 단체라는 불신이 밑바탕에 깔려 있었다. 임시정부 재무총장 이시영은 1920년 2월 24일 「재무부 훈령」 제1호를 공포하여 대한인국민회의 애국금 모금을 폐지하고 ‘독립공채’ 판매로 정리했고 이어서 3월 23일 전문에서 이승만에게 재정의 모든 업무를 구미위원부로 일임할 것임을 통보했다. 미주 한인사회의 재정관할권을 구미위원부로 넘기겠다는 것은 임시정부가 이승만이 설립한 구미위원부를 공식 인정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임정의 조치에 크게 고무된 이승만은 1920년 4월 10일 ‘주차구미위원부 공포서’, ‘공채조례’, ‘지방위원조례’를 작성해 공포했다. 이를 통해 구미위원부는 공채 판매 목표액을 30만 달러로 설정하고 각 지방에서 투표로 뽑은 지방위원과 시찰원으로 하여금 독립공채를 판매하는 것으로 정했다. 임정으로부터 재정관할권을 인정받은 구미위원부는 모금활동에 박차를 가했다. 먼저 재정 수입(1919. 9 ~ 1922. 4)을 보면 예납금·공채금·의연금 등 총 149,653달러이다. 재정 지출(1919. 12 ~ 1921. 8)의 경우 총 89,141달러인데 그중 임정 대통령공관과 위원부 사무실 35,677달러, 필라델피아 통신부 15,765달러, 파리통신부와 런던사무소 8,276달러, 임시정부 16,552달러를 지출했다. 주로 사무실 유지와 활동 경비, 각 통신부의 선전활동에 지출하였고 임정에 대한 지출은 전체 지출 중 18%에 불과하다. 임정 송금액을 놓고 볼 때 중앙총회가 1918년 11월부터 1920년 7월까지 총 지출한 110,835.76달러 중 40%인 46,454.06달러를 임정에 보낸 것과 비교하면 턱없이 적다. 구미위원부 위원장 김규식은 독립공채 판매로 모금한 돈을 가능한 임정에 보내려 했다. 그가 위원장으로 재직한 1920년 9월까지 임정으로 송금한 금액은 총 7,000달러인데 전체 송금액 16,552달러의 42%에 해당된다. 김규식은 위원장으로서의 소임을 다하기 위해 모금한 재정 관리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것은 구미위원부가 이승만의 사적인 기구가 아니라 임정의 공기관이라는 점을 주지시키기 위함이었다. 이러한 그의 활동 방침은 이승만에게 상관의 지시를 따르지 않는 독자행동으로 비추어져 김규식과 이승만 간의 갈등으로 점차 비화되었다. ‘지방위원조례’를 근거로 구미위원부는 산하 지방위원부의 조직을 확대했다. 지방위원부는 미국 본토 25곳, 하와이 11곳, 멕시코와 쿠바 6곳으로 알려지고 있으나 실제 제대로 운영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 Thu, 28 May 2020 16:36:25 +0000 42 <![CDATA[국경을 초월한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인생 항로 ]]> 글 김형목 사단법인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이사 국경을 초월한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인생 항로 1920년대 일본에서 독립운동을 펼친 박열. 일본 유학생들이 펴낸 잡지 「조선청년」에 ‘나는 개새끼로소이다’라고 시작되는 박열의 시가 실렸고, 그 시를 본 가네코 후미코는 그에게 반해 고백하게 된다. 그렇게 그들은 운명적인 사랑을 시작함과 동시에 평생의 동지가 된다. 그러나 1923년 칸토대지진 당시 일본 왕세자를 폭살하려 했다는 혐의를 받아 역사적인 재판을 받게 된다. alt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   /   영화 〈박열〉 포스터  영화로 역사 무대에 새롭게 등장하다 몇 년 전 영화 〈박열〉이 개봉되어 시민들에게 커다란 울림을 주었다. 자유로운 영혼으로 일제에 저항하다가 22년간 옥살이를 한 혁명가 박열과 그의 연인이자 영원한 동지인 일본인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에 관한 이야기였다. 기묘한 인생역정은 사람들에게 관심과 호기심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했다. 기모노를 입고 삐딱하게 의자에 앉은 남자와 그 무릎 사이에 비스듬히 앉아 무언가를 읽고 있는 여자의 모습은 충격적이다. 요즘에는 별로 신기한 장면은 아니나 약 100년 전에 사진이라는 사실에서 너무나 자유분방함을 그대로 보여준다. 더군다나 여자의 목덜미를 돌아 가슴에 놓인 남자의 손을 보면 더욱 그러하다. 남녀의 도발적인 자세는 어쩌면 일제 당국자를 비웃듯 의식적으로 연출하였다. alt 박열   /   가네코 후미코 한국에서 생활하다가 일본으로 돌아가다가네코는 1903년 1월 일본의 요코하마에서 출생하여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부모의 불화로 제때 호적에 이름조차 올리지도 못했다. 소학교 입학은 물론 마음대로 다닐 수 없는 고단한 삶이었다. 여덟 살 때 충북 청주에 사는 고모 양녀로 들어갔으나 사실상 하녀와 같은 힘든 나날을 보냈다. 정이 많은 한국인을 대하면서 가슴 찡한 감정을 느끼곤 했다. 3·1운동 당시 학대받던 한국인을 생각할 때면 연신 눈물을 흘렸다. 한국에서 지옥 같은 7년을 보내고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야 하는 처량한 신세였다.가네코는 고향에서 냉대 속에서 살았다. 이에 도쿄로 올라가 신문팔이, 인쇄소 직공, 식모 등의 일을 전전하였다. 어려운 처지에도 고학생들을 만나면 한없이 맑은 모습이었다. 그렇지만 마음속으로 불우하고 가난한 사람은 열심히 공부해도 큰 사람이 될 수 없다는 엄연한 현실을 알았다. 어린 시절부터 온갖 착취를 경험하면서 힘을 가진 강자에 대한 경멸은 점점 대담한 행동으로 이어졌다.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다 박열은 1902년 2월 경북 문경군 호서남면의 가난한 농가에서 1녀 3남 중 막내로 태어났다. 고향에서 공립보통학교를 수학한 후 일제강점기 최고의 명문인 경성고등보통학교에서 입학했다. 시골 출신의 경성고보 입학은 흔히 “개천에서 용 났다”고 이야기할 정도로 자신은 물론 집안의 대단한 경사였다. 가난한 형편에도 공부에 열중하는 그는 빈한한 집안을 일으킬 ‘희망봉’이었다. 재학 중 3·1운동에 연루되어 경성고보를 퇴학한 후 귀향하여 문경에서 친구들과 함께 4월 중순까지 만세시위를 이끌었다. 이러한 와중에 친구들로부터 일제의 가혹한 고문 소식을 전해 들었다. 향후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힘들다는 판단 아래 일본으로 건너갔다. 이후 학업과 노동을 병행하며 이른바 ‘불령선인(후테이센진)’들과 자주 어울렸다. 틈틈이 세이소쿠(正則) 영어학원에도 다니면서 사회 정세도 파악했다. 운명적인 만남으로 굳건한 동지가 되다이곳에서 반제국주의 자유사상을 가진 여성 가네코를 만나게 되었다. 그녀는 오뎅집에 일하면서 재일유학생들을 만났으며, 우연히 박열의 자작시를 읽고 강한 감동과 함께 그를 흠모하게 되었다. 박열의 〈개새끼〉라는 시는 가슴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켰다.나는 개새끼로소이다. 하늘을 보고 짖는달을 보고 짖는 보잘것없는 나는개새끼로소이다. 높은 양반의 가랑이에서뜨거운 것이 쏟아져 내가 목욕을 할 때  나도 그의 다리에다뜨거운 줄기를 뿜어대는 나는 개새끼로소이다. 여러 번 시를 읽고 읽어 틈이 날 때마다 낭송했다. 그럴 때마다 환상 속의 주인공을 자연스럽게 그리는 일이 빈번해졌다. 시를 쓴 박열이라는 주인공과 만남을 설레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기다렸다. 가네코는 “만약 사랑하는 사람이 없다면 서로 교제하자”고 단숨에 사랑을 고백하였다. 강자에게 대한 반감과 허무주의자를 자처하는 자유분방한 박열이 마냥 좋았다. 곧바로 동지로서 함께 살기 위하여 동거 생활을 시작한다. 별다른 거리낌이나 망설임이 전혀 없었다. 굳건한 동지적인 결합이 이루어지는 순간을 맞았다. 잡지 발행으로 자신들의 신념을 알리다당시 여명회·코스모 구락부·자유인연맹 등의 강연회 참여는 반제 자유사상과 아나키즘에 크게 공명하는 계기였다. 우선적인 과제는 자유를 향한 실천적인 행동 중 하나는 잡지 간행이었다. 조직·규율·권위를 거부하는 아나키즘을 표방한 잡지 발행에 중점을 두었다. 1922년에는 동지들과 함께 『뻔뻔스러운 조선인(太ぃ鮮人)』을 만들었다. 일본이 말하는 불령선인이 조금도 무례하고 뻔뻔하지 않다는 것을 알리기 위함이었다. 이듬해에는 아나키스트 항일단체인 불령사(不逞社)를 조직해 노동쟁의 후원과 민중강연회 참가 등의 대중활동을 펼쳤다. 불령사 설립 목적은 권력에 대한 저항을 주요한 목적으로 삼았다. 박열이 비밀리에 진행한 폭탄 입수도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려던 의도였다. 일본 ‘왕세자’ 결혼식장에 폭탄을 던지려는 계획은 칸토대지진으로 실행할 수 없었다. ‘선량한 한인을 보호한다’는 이유로 수천 명이 강제 연행될 때 이들도 검속되었다. 1923년 10월부터 1925년 6월까지 총 21회에 걸친 혹독한 신문조사를 받았다. 조사 과정에서 일왕을 폭살하기 위해 폭탄을 구입하려 했다고 당당히 밝혔다.  옥중 투쟁에서 당당하게 자신들 주장을 밝히다조선의 사대관모와 관복을 입고 법정에 출두해 반말투로 일왕의 죄를 밝혔다. 옥중에서 작성한 선언문인 〈음모론〉, 〈나의 선언〉, 〈불령선인으로부터 일본 권력자 계급에게 준다〉는 글을 낭독하는 법정투쟁을 벌였다. 1926년 3월 공판에서 이들은 사형을 선고받았다. 가네코는 판결 순간 “만세”를 외치며, “모든 것이 죄악이오. 허위요. 가식이다”라고 소리쳤다. 10일 만에 특별감형으로 무기징역으로 감행되었다.이들은 사형선고 1개월 전에 혼인서를 제출함으로써 영원히 삶과 죽음을 함께 하고자 결심하였다. 변론을 맡았던 후세 다츠지(布施辰治) 변호사는 선고 공판을 앞두고 옥중에서 혼인신고를 대신해 주었다. 둘은 역설적이지만 도쿄형무소에서 합법적인 부부가 되었다. 얼마 후 부부는 각각 지바형무소와 도치키형무소로 옮겨짐에 따라 이별해야 하는 운명이었다. 가네코는 가혹한 자신의 상처와 자유사상을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라는 책자에 고스란히 담았다. alt 박열 출옥 환영대회(아키타현 1945. 10. 27.) 자유를 향한 열정으로 동지애를 발휘하다그러던 중 1926년 7월 23일 가네코의 자살 소식이 전해졌다. 자살의 원인이나 방법도 알려지지 않은 타살의 의문 속에 시신은 교도소 측에 의해 서둘러 매장되었다. 재판 과정에서 “혹시 판결이 어긋나서 당신만 사형선고를 받는 일이 있더라고 나는 반드시 같이 죽을 것이요. 당신 홀로 죽게 만들지 않겠다”고 말했던 가네코이기에 죽음은 안타까울 수밖에 없었다. 유골은 옛 흑우회 동지들의 노력으로 발굴되어 우여곡절 속에서 4개월 만인 11월 5일 박열의 고향 선산인 문경군 팔령산(八靈山)에 묻혔다.이들 부부에게는 적지 일본에서 한국의 청년들과 함께 한 생애 마지막 몇 년이 가장 설레는 나날이었다. 가네코는 홀로 있는 감옥에서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여름밤 어슬렁어슬렁 모여든 젊은이들 그 모임을 생각하면 나도 그곳에 가고 싶어진다.하얀 깃, 짧은 겹옷에 헝클어진 머리카락 나와도 잘 어울리는 벗이 있었는데지금은 없는 벗의 유필(遺筆)을 곰곰이 떠올려 보아도, 생각나지 않네 벗이 한 말벗과 둘이서 일자리 찾아 헤맸지 여름날 긴자(銀座)의 돌길이여 1945년 12월 6일 도쿄에서 박열 석방을 환영하는 대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 옥중에서 박열을 감시했던 형무소 주임인 후지시다 이사부로(藤下伊一郞)는 자신의 죄를 뉘우치는 연설을 하였다.1946년 5월 박열은 백범 김구 선생의 부탁을 받아 3열사들의 유해송환 책임을 맡았다. 의열투쟁의 선봉에 섰다가 일본에 방치된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의사 등의 유해를 고국에 모셔오는 데 앞장섰다. alt 박열 귀국 환영 기념(1948. 8. 17.) ]]> Thu, 28 May 2020 16:35:21 +0000 42 <![CDATA[여진족과의 대결 ]]> 글 김종성 역사작가 여진족과의대결 고려를 군사적으로 위협한 국가는 크게 볼 때 세 나라다. 하나는 거란족 요나라, 하나는 여진족 금나라, 또 하나는 몽골족 원나라다. 이들은 다 북방 유목국가들이다. 이들과의 대결을 기준으로 고려시대 역사는 대체로 전기·중기·후기로 나뉜다.  말갈족의 지도자 김함보세 유목국가 중에서 큰 군사적 타격을 가하지 않으면서도 고려를 상대로 오래도록 수모와 시름을 안겨준 나라는 금나라다. 금나라를 세운 여진족은 고구려와 발해에 속했던 말갈족의 후예다. 오랫동안 한민족 지배를 받았던 이들은 926년 발해 멸망을 계기로 한민족의 통제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관계가 끊어진 것은 아니다. 하나의 고리를 매개로 한민족과 여진족의 관계는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었다. 그 고리는 신라인 김함보다. 김씨로서 신라 왕족이었던 김함보는 아버지 김행이 왕건의 통일전쟁에 협조하는 데 불만을 품었다. 김행은 930년 지금의 경북 안동에서 벌어진 고창전투 때 왕건과 함께 후백제군을 격파했다. 그 공으로 안동 권씨 성을 하사받았다. 안동 권씨의 시조가 된 것이다. 아버지 김행이 권행으로 바뀐 뒤 김함보는 말갈족 땅으로 망명했다. 김함보란 이름은 망명 뒤 사용한 한자 이름이다. 김함보는 말갈족 내부의 갈등을 해결하면서 그곳 지도자로 떠올랐다. 금나라 역사를 기록한 『금사』에 따르면, 그는 말갈족의 제도 개편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일약 영웅으로 떠올랐다. 그는 만주 북부의 말갈족 완안부를 거점으로 이 민족을 새롭게 개혁했다. 김함보에 의해 재편된 뒤로 이 민족은 종래의 말갈족과 구분하는 의미에서 여진족으로 불리게 됐다. 이 민족은 김함보 7대손인 아골타 때 금나라라는 강대국을 세웠다. 금나라는 김함보를 시조황제로 추대했다. 여진족 후예인 청나라 건륭제가 약 50명의 학자를 동원해 만주 역사를 정리한 『만주원류고』는 국호가 금나라로 정해진 것은 김씨의 자손이 세운 나라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이것은 오늘날 금나라 국호의 기원을 설명해주는 주요 학설 중 하나다.  고려와 여진족의 관례 흐름말갈족에서 여진족으로 변신한 뒤 이 민족은 고려와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거란족 요나라가 동아시아 최강국이던 시절, 여진족은 고려에 사대하고 고려를 상국(上國)으로 떠받들었다. 고려에 조공품을 보내고 회사(回賜)라는 이름의 반대급부를 받아 갔다. 고구려·발해 때처럼 한민족과 하나의 국가를 이루지는 않았지만, 상국과 신하국이라는 새로운 관계를 갖게 된 것이다. 그런데 완안부의 힘이 강해지면서 정세가 바뀌기 시작했다. 이들을 중심으로 여진족이 고려와 요나라의 국경을 교란하는 일이 잦아졌다. 이로 인해 안보 위협을 느낀 고려가 1033년 착공해서 1044년경 완공한 것이 바로 천리장성이다. 하지만 만리장성이 중국을 보호해주지 못했듯 천리장성도 고려를 지켜주지 못했다. 계속해서 세력을 확장한 완안부는 1097년에는 두만강 이남과 천리장성 이북까지 위협했다. 고려에 사대하는 이 지역 여진족 집단들을 자신들의 지배 아래 넣을 목적에서였다. 이에 대한 대응으로 나온 것이 예종(재위 1105~1122년) 때 벌어진 윤관의 여진족 정벌이다.  교과서나 백과사전에는 윤관의 정벌이 1107년 사건으로 기록돼 있다. 윤관의 정벌이 1107년 12월에 벌어졌다는 판단하에 그렇게 기술되고 있다. 하지만 『고려사』 예종세가(예종 편)에 따르면, 윤관의 정벌이 개시된 시점은 양력으로 1107년 12월이 아니라 음력으로 정해년 12월이었다. 이때의 정해년 12월 1일은 양력 1108년 1월 15일이다. 따라서 윤관의 정벌은 1107년이 아니라 1108년 사건이다. 『고려사』 축약판인 『고려사절요』에 따르면, 예종이 윤관에게 통솔권의 상징인 부월을 하사한 것은 정해년 12월 1일에서 3일 사이였다. 이 시점에 개시된 윤관의 원정은 여진족에 대한 고려의 정책 변화를 상징했다. 그전까지 고려는 여진족이 사대하는 조건으로 조공과 회사 형식의 물물교환 무역을 허용했다. 동아시아에서 상국과 신하국의 무역은 일반적으로 상국의 적자 무역이었다. 유목국가가 상국인 경우에는 그렇지 않았지만, 명나라 같은 농경국가가 상국인 경우에는 대체로 상국이 적자를 봤다. 상국들은 적게 조공 받고 많이 회사하는 방식으로 신하국의 충성을 이끌어냈다. 명나라에 적대적이었던 정도전 정권이 해마다 3번 조공하겠다고 우기고 명나라는 3년에 한 번만 하라고 요구한 것은 양국 무역이 명나라에 적자를 안기는 구조로 전개됐기 때문이다.  alt 고려사절요 윤관의 정벌이 가진 의미한편 농경민족과 유목민족의 무역은 대체로 농경민족의 적자 무역이었다. 이것은 농경민이 유목민의 침략을 막는 방편이었다. 고려와 여진족의 무역은 상국 대 신하국의 무역인 동시에 농경민 대 유목민의 무역이었다. 어느 면으로 보나 고려에 적자를 안길 수밖에 없었다. 고려는 이런 식으로 적자를 감내하면서 여진족의 도발을 막았다. 윤관의 정벌은 고려가 이 정책을 폐기했음을 뜻했다. 적자 무역으로 여진족을 달래기보다는 군사적 강공으로 굴복시키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이 전략은 대성공을 거뒀다. 윤관과 17만 대군은 천리장성 이북의 135개 여진족 촌락을 함락하고 그곳에 아홉 성을 축조했다. 지금의 읍 단위에 축조된 고대의 성은 성 안뿐 아니라 성 밖의 주변 지역도 함께 거느렸다. 그래서 성 1개를 차지하는 것은 지금의 군(郡) 1개를 차지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윤관의 정벌은 대성공이었지만 이것은 잠깐의 성공이었다. 동북 9성을 쌓은 그해에 고려군은 김함보의 7대손인 아골타에게 패했고, 이는 1109년에 동북 9성을 반환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그 뒤 고려는 더 이상 북진을 추진하지 않았다. 그래서 동북 9성 반환은 태조 왕건 이래의 북진정책을 포기한다는 의미를 띠었다. 이것은 여진족에게 날개를 달아주는 기능을 했다. 고려의 북진 가능성을 차단한 여진족은 완안부 중심으로 종족 통합을 이루고, 이를 발판으로 고려의 통제에서 벗어났다. 1115년에는 이들의 나라인 금나라가 건국됐다. 뒤이어 1117년에는 이들이 고려를 자국의 신하국으로 전락시키는 대역전이 발생했다. 고구려·발해 때는 한민족의 지배를 받고, 고려 건국 이후 2세기 동안은 한민족의 신하국으로 살았던 그들이 한민족과의 관계를 역전시키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서두에서 금나라를 두고 ‘커다란 군사적 타격을 가하지 않으면서도 고려를 상대로 오래도록 수모와 시름을 안겨준 나라’라고 말한 이유는 이 때문이다. 금나라를 상국으로 받든 약 1세기는 고려인들에게 그런 고통의 시기였다.  alt 귀주대첩 관련 ]]> Thu, 28 May 2020 16:37:29 +0000 42 <![CDATA[십승지지를 찾아서 생거 부안 ]]> 글·사진 임운석 여행작가 십승지지를 찾아서생거 부안 전라북도에 자리한 부안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넓은 곡창지대인 김제평야가 있는 김제와 바다의 보고 갯벌이 드넓게 펼쳐진 고창과 맞닿아 있다. 내륙과 바다를 모두 면하고 있으니 산물이 풍부하고 기온까지 온화하여 생거(生居), 즉 살기 좋은 곳으로 손꼽힌다. 염시초, 생거 부안“우리나라에서 가장 살기 좋은 곳이 어디냐?” 조선 제21대 임금 영조가 암행어사 박문수에게 물었다. 박문수는 주저 없이 대답했다.“어염시초(물고기·소금·땔나무)가 풍부해 부모를 봉양하기 좋은 생거 부안인 줄 아뢰옵니다.” 이런 까닭에 부안은 난리를 피해 몸을 보전할 수 있고 거주 환경이 좋은 십승지지에 이름을 올렸다. 그중 대표적인 곳이 부안군 보안면이다. 보안면에는 호암굴이라 불리는 큰 동굴이 있다. 난리에도 안전할 정도로 크고 깊은 이 동굴은 외부에서 쉽게 찾을 수 없을 정도로 깊은 곳에 숨어있다. 동굴을 찾아가는 길에는 잡풀과 나무가 무성하다. 하늘이 손바닥만큼 얼굴을 내밀면 그제야 울창한 대나무 숲이 나오고 그 뒤에 동굴이 있다. 동굴 안에서 피리 소리가 바람에 실려 온다. 전주에서 시조 소리를 공부하다가 부안에 귀촌한 김용구 선생이 피리를 연주 중이다. 그는 전북 무형문화재 34호 이수자로 시조와 가사를 수련하고 있다. “여기 사람들은 어질고 착해요. 살기 좋으니까 나 같은 사람도 부안에 자리를 잡았겠죠. 흔히 전주를 소리의 고장이라고 하는데 부안도 그에 못지않아요. 부안은 예로부터 해산물이 풍부하고 땔나무도 많았다고 하잖아요. 또 소금까지 생산됐으니 먹고사는 걱정은 없는 곳이죠.”마을 주민의 말에 따르면 마을에 110세가 넘은 할머니가 계신다고 한다. 직접 만나지는 못했지만, 주민들의 입을 통해 할머니의 장수 비결을 짐작할 수 있다. “여기 쌀로 밥을 지으면 보슬보슬하고 윤기가 흐르고 맛이 좋아요. 밥만 먹어도 고소하다니까요. 해풍을 맞고 자라서 병충해 발생이 적고 영양도 풍부해요. 특히 잡곡은 섬유소가 풍부해요. 영양소는 껍질에 죄다 모여 있잖아요. 그래서 껍질을 완전히 벗기지 않고 먹어요. 먹을 때 좀 깔끄럽기는 하지만 자꾸 먹다 보면 익숙해져요.” alt 호암굴 앞에 자리한 우동제 백년을 내다본 시대의 학자, 반계 유형원가까운 곳에 실학의 거목 반계 유형원(1622~1673) 유적지가 있다. 유형원의 아버지는 역적으로 몰려 죽임을 당했다. 그가 일찌감치 출세를 포기한 이유도 이 때문이 아닐까. 14살에 겪은 병자호란(1636, 인조 14)도 약소국의 설움을 뼈저리게 체험하는 시간이었을 게다. 그는 신세 한탄에 머물지 않고 은둔 개혁자의 삶을 선택했다. 우반동에 정착한 그는 수많은 책을 읽으며 이상 국가의 모델을 그려나갔다. 성리학은 물론 정치, 경제, 역사, 지리, 병법, 문학 등 어느 것 하나 섭렵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리하여 19년의 긴 집필 끝에 『반계수록(磻溪隧錄)』을 세상에 내놓았다. 국가 운영과 개혁에 대한 견해를 담은 책으로써 시대를 앞서 내다본 유형원의 역작이다. 하지만 생존할 당시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다가 성호 이익과 그의 제자 순암 안정복에 의해 세상에 알려지면서 1750년 영조(1694~1776)가 이 책을 간행하도록 허락했다. 이후 정조(1752~1800)는 유형원의 개혁안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그 결과물이 1796년에 축조된 수원화성이다. 『반계수록』 발표 126년 만의 일이다. 현재 보안면 우반동에는 유형원이 후학을 가르쳤던 반계서당(전라북도 기념물 제22호)이 있다. alt복원된 반계서당alt반계서당과 넓은 들녘 alt빛바랜 소금창고alt천연 미네랄이 풍부한 곰소염전 천일염 자연과 땀의 결정체, 소금30번 국도를 따라 채석강으로 향한다. 그 길목에 곰소항이 있다. 전라북도에서 유일하게 천일염을 생산하는 곳이다. 조선시대에는 천일염이 아닌 바닷물을 끓여 만드는 ‘화염(火鹽)’을 생산했다고 한다. 지금의 염전이 생긴 것은 1942년 일제가 부안지역을 군항(軍港)으로 만들고 제방과 도로를 건설하면서부터다. 이때 염전이 만들어졌으니까 70년이 지났다. 뜨거운 뙤약볕 아래에 빛바랜 소금창고가 흑백영화의 한 장면처럼 염전을 지키고 있다. 날이 뜨거워서 그런지 염전에는 사람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다. “목이 타들어 가도 우리는 한여름 뙤약볕이 고마워.” 소금창고에서 작업 중인 할아버지의 말이다. 그는 대를 이어 소금 아비를 하고 있단다. 오랜 세월 동안 해왔던 일이라 그런지 삽질이 젊은이 못지않다. 힘은 부족할지 몰라도 소금을 다루는 기술이 뛰어나 보인다. 그의 몸놀림은 춤을 추듯 일정한 리듬을 타고 있었다. “소금이 절로 나는 게 아닙니다. 햇볕·바람·사람 땀 냄새가 섞여야 소금꽃(소금 결정체)이 펴요. 비라도 와 봐요. 소금꽃이 다 녹아버리지. 바닷물을 두 번에 나눠서 증발지로 보내고 마지막으로 새벽부터 온종일 햇볕에 졸여져야 저녁에 하얀 소금꽃이 피는 거예요.” 정성 어린 땀과 시간이 모여 탄생한 천일염은 건강에 좋지 않은 염화나트륨은 낮지만, 칼슘·마그네슘·칼륨 등 천연 미네랄이 다량 함유되어 있다. 곰소항 인근에는 젓갈 전문점과 꽃게장 전문 맛집들이 문전성시를 이룬다. 곰소항의 풍부한 해산물과 곰소염전이 만든 합작품인 셈이다. 꽃게장에 밥을 비벼 먹으면 혀끝에 단맛과 고소한 맛이 오랫동안 배어난다. 미네랄이 풍부한 곰소 천일염이 햇볕과 바람에 졸여진 덕분이다. alt소금창고에서 작업 중인 박정길 할아버지alt 필수아미노산이 다량 함유되어 있는 꽃게장 부안 최고의 비경, 30번 국도에 이어져요즘은 사람들이 부안을 찾는 이유는 따로 있다. 30번 국도를 따라 변산반도의 비경을 보기 위해서다. 곰소항을 지나면 마동방조제와 모항갯벌해변이 이어지고, 그 길목에 서해안 3대 낙조로 꼽히는 솔섬 낙조가 있다. 낙조 감상은 전북학생해양수련원 바다에서 가능하다. 솔섬은 소나무 몇 그루가 자라는 작은 섬이다. 부안 최고의 절경은 역시 채석강이다. 채석강은 중국 당나라 시인 이태백이 배를 타고 술을 마시다가 강물에 뜬 달을 잡으려다 빠졌다는 채석강과 풍광이 닮아서 그리 불린다. 책 수만 권을 쌓아 놓은 것 같은 채석강은 세월이 켜켜이 쌓인 퇴적암 지대다. 역시 소문난 잔치에는 반드시 먹을 게 많다. 살기 좋은 부안은 그런 곳이다.  alt서해안 3대 낙조로 꼽히는 솔섬 낙조alt부안의 명소 채석강 ]]> Thu, 28 May 2020 16:38:37 +0000 42 <![CDATA[연해주에서 펼친 독립운동 ]]> alt]]> Mon, 29 Jun 2020 13:35:38 +0000 43 <![CDATA[러시아에서 조직된 항일의병부대 13도의군 ]]> 글 엄찬호 의암학회 회장, 강원대학교 아카이브센터 연구교수 러시아에서 조직된 항일의병부대13도의군 13도의군은 일제의 침략을 결사항전으로 막고자 하였던 의병들이 연해주에서 조직한 통합 군단이다. 1910년 7월 27일 연해주에서 ‘13도의군’이 결성되었고, 류인석이 도총재로 추대되었다. 통합 군단으로 편성된 13도의군은 대일항쟁을 위해 의병을 모으고 의병 명부를 작성하였으며 무기 구입에 주력하였다.alt의암 류인석 영정 한인의 연해주 이주와 의병한인의 러시아 이주는 1863년 겨울 함경도 농민 13호가 두만강을 건너 연해주(러시아의 프리모르스키 지구로 동해 연안 지방) 남부 지신허강 계곡에 정착하면서부터다. 그 뒤 1869년에 대흉년이 들면서 함경도 육진의 농민 6,500여 명이 기아에서 벗어나기 위해 필사의 몸부림으로 두만강을 건너 연해주에 정착하였다.당시 러시아는 한인의 이주를 환영하는 편이었다. 연해주 지역은 인구 밀도가 낮고 개발이 절실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 무렵 러시아는 ‘러시아인을 위한 러시아’라는 구호 아래 극동 개발에 박차를 가하며 러시아인의 연해주 이주를 적극적으로 장려하고 있었다. 연해주 지역에서 러시아인의 정착이 많이 늘어나는 가운데 한인들의 이주도 꾸준히 증가해 1908년경에는 이 지역 인구의 20%를 차지할 정도로 한인사회를 키워나갔다.당시 연해주 한인들은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했으나, 품삯을 벌기 위해 온 떠돌이 임금노동자나 납품업자들도 있었다. 그중 ‘뽀드라치크’라 불린 납품업자들은 러시아 군대와 관청에 쇠고기, 벽돌 등의 납품과 군부대시설 공사를 통해 부를 축적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축적된 자본은 항일투쟁의 중요한 밑거름이 되기도 하였다. 특히 한인사회의 지도자 최재형은 일찍이 연해주에서 상당한 부를 축적하여 의병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면서 구국의 뜻을 펼쳐 나갔다.한인사회의 형성과 함께 연해주 지역은 1910년 일제의 한국병탄을 전후해 해외 독립운동기지로 발전해 갔다.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인접한 지리적 이점과 북간도 지역보다 일제의 간섭과 탄압이 덜 미치던 연해주 지역은 독립운동기지로서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그리하여 러일전쟁 직후 간도 관리사였던 이범윤이 이곳에서 의병을 조직하여 항일투쟁을 시작하였고, 하얼빈 거사를 일으킨 안중근 의사의 동의단지회 결성도 연해주의병이 중심이었다. alt류인석 유묵 ‘위국투쟁’류인석의 연해주 이동과 13도의군전기의병기에 호좌의병을 이끌고 중부내륙지역에서 크게 이름을 떨쳤던 류인석은 1907년 광무황제의 강제 퇴위와 군대 해산 이후 연해주 망명을 결심하였다. 그는 일련의 국권 침탈 사건으로 일제의 침략이 극에 달하였다고 인식하여 더는 국내에서 항일투쟁을 지속하기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류인석은 지속적인 항일투쟁을 위해 새로운 활동 근거지를 모색하여 연해주로 망명하게 된 것이다.류인석은 부산에서 배를 타고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 후 연해주의병들의 근거지였던 연추(크라스키노)의 중별리로 옮겼다. 이곳에서 그는 연해주의병의 국내 진공을 지원하고 ‘의병 규칙’ 등을 제정해 항일의병의 전열을 재정비하고자 하였다. 연해주의병은 1906년 초 이범윤이 휘하 충의대를 이끌고 연해주로 망명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이때 최재형이 연해주 한인들로 하여금 이범윤부대에 의복과 식량 등을 제공할 것을 요청하는 신임장을 제공하고 의병을 도와주도록 권유하였다. 이렇게 이범윤은 최재형의 후원으로 연해주에서 의병진을 재편한 후 관북변경지역의 의병과 연계하여 국내 진공작전을 전개하고 있었다. 따라서 류인석은 이들과 연계함으로써 항일 전선을 공동으로 구축하기 위하여 연추로 이동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류인석이 연추에 도착하던 무렵에는 국내 진공작전이 실패로 돌아가고, 최재형과 이범윤 사이에서도 항일투쟁 노선을 둘러싼 갈등이 야기되어 항일투쟁이 일시 소강상태인 시기였다. 이에 류인석은 적극적으로 중재에 나서며 새로운 항일투쟁 방략을 마련하는 등 항일의병 세력을 하나로 통합하여 대규모 항일전 수행을 계획하였다. 즉 류인석은 국내외에 걸쳐 다양한 형태로 분산되어 있던 항일무장세력을 하나의 단체나 군단으로 통합시켜 합일된 민족의 힘으로 항일전을 전개하고자 하였다. 류인석의 의병 통합 구상은 그가 1908년 가을에 작성한 ‘의병 규칙’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데 그중 의병편제에 관한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각 읍마다 의리가 있고 처신이 바른 인물을 뽑아 읍총재로 삼아 그 진장을 지휘하게 하고, 각 도마다 덕망과 신의가 높아 한 도의 영수가 될 만한 자를 도총재로 삼아 도통령과 열읍의 총재를 관할하게 하며, 몇 명의 규찰을 파견하여 도내의 여러 진을 돌며 살피게 한다. 도통령과 열읍 총재는 그 지휘를 받아 어겨서는 안 된다. 또 여러 도에서 충의와 성심, 역량이 있고 덕망과 지위가 족히 13도의 인심이 열복할 만하고 거기에 향응할 수 있는 인물을 추대하여 13도도총재를 삼아 도통령과 각 도총재를 관할하게 한다. 도통령과 각 도총재는 그의 절제를 받아 감히 어기거나 틀려서는 안 된다. 도통령은 도총재에게 절제를 받아 도통령을 절제하고, 도통령은 각 읍의 진장을 절제함에 감히 어기거나 틀리게 해서는 안 된다.전국의 의병을 13도 도총재를 정점으로 하여 총재와 실제 지휘관인 통령의 이중 편제로 설정하도록 한 규정이다. 이 이중 편제는 ‘총 단위’와 ‘도총재’를 정점으로 한 13도의군의 편성 세목을 규정한 ‘의무 유통’에도 그대로 이어졌다.이와 같은 기틀 위에 항일투쟁을 수행하고 국내 진공작전을 보다 효율적으로 이루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국내외의 모든 의병이 같은 작전과 하나의 지휘 아래 움직일 수 있는 통합 의병기구가 요구되었다. 이에 류인석은 ‘의무 유통’을 제정하여 13도의군의 추진 계획을 구체적으로 거론하였다. alt류인석이 의병의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해 발표한 격문 『격고팔도열읍』 중 일부연해주에서 결성된 13도의군류인석은 헤이그 특사로 활동한 바 있던 이상설을 위시하여 이범윤, 이남기 등과 의논하며 연합의병 조직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그 결과 1910년 7월 27일 연해주 재구(차피고우)에서 ‘13도의군’이 결성되었고 류인석이 도총재로 추대되었다.13도의군의 조직편제로는 창의총재에 연해주와 간도에서 활약하던 이범윤, 장의총재에 함경도 의병장이던 이남기를 임명하여 창의군과 장의군으로 편제하였다. 그리고 도총소참모에 황해도 의병장이던 우병열, 도총소의원에 삼수·갑산 등지에서 의병활동을 전개하던 홍범도와 황해도 의병장이던 이진룡이 임명되었다. 나아가 국내에서 신민회를 주도하던 애국계몽계열의 안창호와 이갑까지 의원으로 참여하였고, 이상설은 외교 대원으로 추대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국내 조직에 있어 고을마다 총재·통령·참모·총무·소모·규찰·통신 등의 직책을 두어 전 민족이 단일 조직으로 계통화할 수 있도록 하였다. 13도의군이 결성된 후 도총재 류인석은 격문을 국내·외에 발송하여 전 국민의 의병 봉기를 촉구하였다. ‘경성 내외 13도열읍대소동포’를 수신자로 하여 발송된 ‘통고13도대소동포’는 시국 상항과 13도의군의 설립 과정에 대해 언급하고, 국민에게 의병 봉기를 촉구하면서 특히 국내 임원들이 적극적으로 동참하도록 당부하였다. 류인석은 전 국민이 의병 봉기에 참여해야 한다고 다음과 같이 호소하였다.“생각건대 일제 적의 무리가 매우 강하니, 1,000여 명의 의병으로는 일제에 대항하여 국권을 회복할 수 없는 것은 명백합니다. 반드시 2,000만 동포가 일심 일력을 이루고 함께 죽을 각오로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면 종사·강토·도맥이 회복될 수 있습니다.”이처럼 통합 군단으로 편성된 13도의군은 대일 의병항쟁을 위해 다각적인 준비에 착수하였다. 곧 13도의군은 의병항쟁을 위한 준비 작업으로 청국과 러시아에 사람을 파견하여 의병을 모으고 의병 명부를 작성하였으며, 무기 구입에 주력하였다. 창의총재 이범윤은 연해주의 포셋트만 부근에서 의병 수천 명을 모집하였고, 러시아 유력가로부터 무기를 사들여 간도·온성·종성을 경유, 경흥·웅기 방면으로 공격할 준비를 하였다. 또한 도총소의원 홍범도는 총기 500~600여 정을 사들이고 의병 1,000여 명을 모집한 후 8월 하순에 국내 진격을 계획하였다.그러나 13도의군이 본격적인 대일항전을 전개하기도 전 우리나라는 일제에 병탄되고 말았다. 일제는 한국병탄을 단행한 이후 가쓰라를 블라디보스토크에 파견하여 한인의 항일투쟁에 대해 러시아 정부에 엄중히 항의하고 아울러 주요 인사들을 체포하여 넘겨줄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따라 러시아 당국은 1910년 9월 11일 이상설·이규풍 등 13도의군 간부 20여 명을 체포하였다. 류인석은 이러한 러시아의 동향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고 사전에 피신하였고, 이범윤도 화를 면할 수 있었으나 결국 10월 22일 붙잡혀 이르쿠츠크로 압송되었다. 이로써 13도의군은 해체되었다. alt도총소의원 의병대장 홍범도 13도의군 결성지는 어디일까13도의군 결성지에 대하여 류인석은 ‘재구’에서 결성하였다고 기록하였는데, 이는 러시아 지명을 중국어로 차음하여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러시아 측 자료에는 13도의군의 결성지를 ‘암밤비’라고 하였다. 결성지명이 이처럼 다르게 나타나는 이유는 재구가 암밤비의 행정 구역에 속한 작은 마을이기 때문에 실제 재구에서 13도의군이 결성되었지만 러시아 측에서는 행정 지명상 이를 암밤비로 기록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러시아의 현대화 과정에서 지명 변화가 몇 차례 이루어져 현재 러시아의 어느 지역에 해당하는지 불분명하다. 대한제국 말 스러져 가던 나라를 구하고자 이국만리에서 끝까지 구국항쟁을 준비하던 13도의군은 우리 역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에 그 결성 장소를 찾기 위한 작업이 독립기념관을 비롯하여 몇몇 학자들에 의하여 여러 차례 시도되었지만 아직 명확하게 확인되지는 못하였다. 현재까지의 조사를 바탕으로 추정해 본다면 1937년도에 제작된 일본군 정보지도에 표기된 차피고우로 추정된다. 이 지도에는 차피고우와 함께 ‘마리코지나’라는 지명이 병기되어 있는데, 이 ‘마리코지나’는 ‘말루지노’의 일본식 표기로 생각되고 러시아 현지인의 증언에 의하면 말루지노는 현재 마루문카 강과 보로딘스키 강이 합류하는 곳이라고 한다. 따라서 현재 13도의군의 결성지로 추정되는 곳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크라스키노로 가는 도로 중 베르고보예 마을로 들어가는 중간 마루문카 강 일대의 분지로 추정된다. alt러시아 연해주에 있는 13도의군도총재 류인석 기념비alt서울국립현충원에 안장된 창의총재 이범윤 ]]> Mon, 29 Jun 2020 11:41:22 +0000 43 <![CDATA[독립군 승리 뒤에 가려진 일제의 대학살 ]]> 글 이계형 국민대학교 교양대학 교수독립군 승리 뒤에 가려진일제의 대학살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간도 봉오동에서 독립군이 일본군과 처음으로 맞붙어 최초의 승리를 거뒀다. 그 뒤에는 목숨을 내던진 독립군들의 굳센 각오뿐만 아니라 이주한인들의 헌신적인 노력이 있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alt4월 학살 희생자 추모탑 만주의 독립군들연해주에 살던 홍범도는 1937년 소련 정권의 고려인 강제 이주 정책에 따라 카자흐스탄으로 이주했고 그곳에 묻혔다. 이 또한 매우 의미 있는 일이지만 우리가 기억해야 함에도 잊고 지나치는 부분도 없지 않다. 전투에서의 승패는 지휘관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지만, 병사들의 희생과 그들을 도운 민간인들의 공 또한 적지 않다. 무엇보다 만주에 수많은 독립군이 조직될 수 있었던 것은 1860년대 이후 만주로 이주하여 삶의 터전을 일군 한인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1910년 8월 국치 이후 만주는 국내에서 의병운동과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던 독립운동가들이 그곳으로 망명하면서 독립운동기지로 변모하였다. 이들에 의해 만주에 수많은 민족학교가 설립되어 민족정신이 고양되었고 3·1 만세운동이 전개되었으며 이후 독립군 부대가 조직된 것이다.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1920년을 독립전쟁 원년으로 선포한 것도 영향을 미쳤다. 당시 임시정부는 “일제로부터 민족 해방과 조국 독립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적당한 시기에 독립전쟁을 전개하여 승리하는 것이 가장 확실하고 바른길이며, 최후 승리를 얻기까지 지구(持久)하기 위하여 독립전쟁을 준비하자”고 호소했다. 독립군들은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 국내 진공작전을 벌여 일제에 타격을 가하였다. 이들은 일제의 식민통치기관인 면사무소·경찰서·헌병분견소·주재소를 습격하거나 친일파들을 처단하였다. 상해 임시정부가 발행한 〈독립신문〉 제88호(1920년 12월 25일)에 따르면 이렇다. 1920년 3월부터 6월 초까지 독립군이 국내에 진입하여 유격전을 벌인 것이 32차례였고, 일제 군경들의 관서를 파괴한 것이 34개소에 달하였다고 한다. 일본군의 한인 학살일제는 장쭤린(張作霖) 만주 군벌까지 끌어들여 독립군을 토벌하고자 하였지만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하였다. 이런 가운데 1920년 6월 봉오동전투에서 대패한 일제는 대규모 정규군을 만주에 투입하여 만주 독립군을 소탕할 계획을 세웠다. 1920년 8월 이른바 ‘간도지역불령선인초토계획(間島地域不逞鮮人剿討計劃)’이었다. 이를 위해 일제는 훈춘사건을 조작하였다. 일제에 매수된 중국 마적들이 훈춘 주재 일본영사관을 불태우고 시부야(?谷) 경부의 가족 등 일본인 부녀자 9명이 살해하였다. 이를 빌미로 일제는 20,000여 명에 달하는 일본군을 만주로 진출시켰다. 그런데 일본군은 독립군 토벌 작전을 추진하던 중 되레 청산리전투에서 두 번째 패배를 맛봤다. 그 뒤 일본군은 보복 차원에서 간도의 한인 가옥·학교·교회 등에 방화를 저지르고 약탈하였으며 3,700여 명의 한인을 잔혹하게 죽였다. 그 결과 독립운동기지가 처참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이러한 일본군의 잔악상은 간도뿐만 아니라 러시아 연해주에서도 자행되었다. 1917년 11월 러시아혁명 이후 러시아에서는 혁명 세력인 볼셰비키 적군과 반대파 백군 간의 내전이 벌어졌다. 당시 백군을 지원하던 일본군은 적군에 큰 타격을 입었다. 이에 1920년 4월 일본군은 적군에 가담한 한인 독립운동가들을 색출한다며 무기를 압수하고 가택 수색을 자행하며 검거에 나섰다. 하지만 독립운동가들이 탈출한 뒤였다. 그런데도 일본군은 신한촌에 살던 무고한 300여 명 이상의 한인들을 체포한 뒤 학교 교실에 가두고서는 불태워 죽였다. 신한촌은 초토화되고 말았다. 일본군의 만행은 이에 그치지 않아 적지 않은 우수리스크의 한인들도 희생을 당했다. 이때 연해주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인 최재형도 일본군에 의해 사살되었다. 두 사건을 흔히들 ‘경신참변(혹 간도참변)’, ‘4월 참변’이라 한다. 하지만 이는 옳지 않다. ‘참변’이란 사전적 의미가 ‘뜻밖에 당하는 끔찍하고 비참한 재앙이나 사고’를 일컫기 때문이다. 두 참변 모두가 ‘뜻하지 않게 생긴 불행한 변고 또는 천재지변으로 인한 불행한 사고’가 아니다. 이는 명백히 일본군이 계획적으로 가혹하게 한인들을 죽인 ‘학살’이다. ‘간도학살’, ‘연해주학살’이란 표현이 적절하다고 본다.간도·연해주 한인들을 추모하며이들의 희생을 기리고자 간도학살 당시 가장 피해가 컸던 연길현 용지사 장암동 뒷산에 희생자들의 묘와 ‘장암동참안유지(獐岩洞慘案遺址)’라는 비석 하나가 덩그러니 세워져 있다. 연해주 우수리스크에는 러시아어로 “1920년 4월 4일부터 5일간 악조건을 무릅쓰고 간섭군(연합군)에 의해 빨치산 240명이 희생되었다”라고 새겨진 추모탑이 있다. 이는 간도학살과 연해주학살을 보여주는 비석과 추모탑이지만, 장암동에 국한된 것이고 한인만을 기리는 추모탑이 아니다. 더욱이 가장 피해가 컸던 블라디보스토크에는 이렇다 할 추모비 하나 없다. 올해 6월에도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기리는 여러 행사가 열렸다. 하지만 국내 어디에도 독립군으로 활동하였지만 이름 없이 숨졌거나 독립군을 지원하여 학살된 간도나 연해주 한인들을 기리는 추모비나 기념비는 없다. 100년 전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 승리에 빛을 더한 것은 이들이며, 이들 또한 독립운동가다. 이제 빛나는 승리를 위해 억울하게 희생된 이들의 영혼을 달래 줄 추모비나 기념비를 중국이나 연해주에 세울 수 없다면 대한민국 어느 한 곳에 하나쯤은 세워야 할 것이다. alt장암동참안유지(獐岩洞慘案遺址)]]> Mon, 29 Jun 2020 13:38:47 +0000 43 <![CDATA[미주 한인사회 부인운동의 개척자 강혜원 ]]> 글 독립기념관 전시부 미주 한인사회 부인운동의 개척자강혜원 강혜원(康蕙園)1885. 11. 21. ~ 1982. 5. 31.평안남도 평양건국훈장 애국장(1995) 강혜원은 평남 평양에서 아버지 강익보와 어머니 황마리아 사이에서 맏딸로 태어났다. 1905년, 아버지를 제외한 가족 모두가 함께 하와이로 노동이민을 떠났고 중노동에 시달려야 했다. 이후 강혜원은 미주 한인사회 부인운동을 개척해나가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재정을 지원하는 등 독립운동에 평생을 바쳤다. 온 가족이 함께한 독립운동강혜원을 비롯한 가족 5명은 미주 한인사회에서 독립운동을 이끈 주요 인물이다. 강혜원의 어머니 황마리아(1865~1937, 2017 애족장)는 하와이 한인사회 부인운동의 선구자로 대한인부인회를 이끌며 독립운동 의연금 모집을 위해 힘썼다. 남편 김성권(1875~1960, 2002 애족장)은 일본 유학생 출신으로 1904년 미국으로 이민하여 농장 노동자로 일하면서 하와이 한인 통합단체인 한인합성협회 조직에 가담하였고, 1919년 흥사단에 입단한 이래 1930년대 중반까지 흥사단 이사장 등을 지내며 평생 흥사단에 헌신하였다. 큰동생 강영승(1888~1987, 2016 애국장)은 미주 이주한인 중 최초 법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인물로 대한인국민회에서 활동하였으며, 강영승의 부인인 강원신(1887~1977, 1995 애족장)은 강혜원과 함께 대한여자애국단 등에서 활동하며 부인운동에 참여하였다. alt강혜원alt남편 김성권 미주 이민자의 삶강혜원은 평남 평양에서 아버지 강익보와 어머니 황마리아 사이에서 맏딸로 태어났다. 1905년, 새로운 삶을 개척하기 위한 어머니 황마리아의 의지로 아버지를 제외한 가족 모두가 함께 하와이로 이민, 사탕수수농장에 배치되어 중노동에 시달렸다. 이후 강혜원은 호놀룰루로 이주해 마노아벨리여학교에 입학했으나 비싼 수업료로 곧 그만두게 되었다.1913년 4월, 어머니와 함께 호놀룰루 대한인부인회를 조직한 것을 계기로 강혜원은 부인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고, 같은 해 김성권과 결혼하고 미국의 풍습대로 ‘김혜원’으로 성을 바꾸었다. 남편 김성권은 포도 따는 일과 상점 서기 등으로 일하고, 강혜원은 바느질과 자수로 생업을 도왔으나 아이들의 끼니를 제대로 챙기지 못할 정도로 어려운 생활을 이어갔다. alt강혜원의 자수 작품(1932) alt방고, 하와이 사탕수수농장 노동자들의 신분증(한국이민사박물관 제공) 미주 한인사회 부인운동을 개척1919년 고국에서의 3·1운동 소식이 들리자 미주 한인사회도 들썩였다. 마침 안창호가 다뉴바를 방문, 강혜원과의 만남이 이루어졌고 이를 계기로 1919년 3월 신한부인회를 결성, 강혜원이 총무로 선임되었다. 같은 해 8월에는 신한부인회를 비롯해 미주 여성단체를 통합하여 대한여자애국단이 결성되었고 강혜원은 초대 총단장으로 선임되었다. 대한여자애국단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재정 지원을 비롯해 대한인국민회 후원, 한인 구제사업 및 교육 등을 위해 활동을 이어나갔고, 강혜원은 대한여자애국단 총부와 지부의 주요 간부로 헌신하며 독립운동에 힘을 보탰다. 또한 흥사단원으로 가입하여 활동의 폭을 넓히기도 했다. 1982년 5월 31일 별세, 로스앤젤레스에 묻혔으나 2016년 남편 김성권의 유해와 함께 봉환되어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치되었다.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alt대한여자애국단원alt흥사단 건물 앞에서, 남편 및 흥사단 단우들과 함께 alt흥사단 입단원서(1922)alt]]> Mon, 29 Jun 2020 13:36:39 +0000 43 <![CDATA[1948년 첫 올림픽 출전과 런던으로의 여정 ]]> 글 독립기념관 자료부 1948년 첫 올림픽 출전과런던으로의 여정 alt 1948년 런던올림픽 선수촌 입촌식 1948년 런던올림픽은 우리가 국권을 회복하고 최초로 참가한 올림픽이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 전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올림픽 출전을 갈망하고 있었다. 당시 올림픽 참가를 위해서는 몇 가지 선결조건을 해결해야 했다. 이를 위해 ‘조선체육회’는 ‘올림픽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국내 경기단체가 구성되어 있는 육상, 농구, 복싱, 축구, 사이클, 역도 등 6개 경기단체를 각각 국제연맹에 가입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마지막 선결조건이었던 국제올림픽위원회(IOC) 회원국 등록 과정에서 많은 고난과 역경에 맞닥뜨리게 되었다. 올림픽대책위원회 부위원장이었던 전경무가 1947년 5월 스톡홀름 IOC 총회에 참석하기 위해 탑승한 비행기가 추락하여 사망하게 된다. 다급해진 올림픽대책위원회는 미국에 살고 있던 이원순에게 전문을 보내 전경무 대신 스톡홀름에 참석할 것을 당부하였다. 당시 미국 시민권이 없었던 이원순은 사제 여권을 만들어 영국 총영사관을 찾아가 입국사증을 발급받을 수 있었다. 이후 바로 스톡홀름으로 떠난 이원순은 IOC 가입 청원서를 제출하였고, 드디어 IOC 가입국이 되는 기쁨을 맛보게 되었다. 그러나 한국 선수단은 우리나라가 독립국으로서 정부수립을 선포하지 못했던 이유로, ‘미국육군군정청 외무처’에서 발급한 여행증명서를 가지고 출국하게 되었다.선수단의 결단식과 환영식은 1948년 6월 18일 국회의장 이승만 등과 내·외빈이 참석한 가운데 거행되었다. 6월 21일에는 종로 YMCA체육관에 집합하여 남대문을 거쳐 서울역까지 행진한 후 8시발 해방자호(解放者號)를 타고 부산으로 향하였다. 부산에서 배를 타고 후쿠오카를 거쳐 홍콩으로 이동한 후 두 그룹으로 나누어 1대는 7월 8일, 2대는 7월 11일에 런던에 도착하였다. 입촌식은 1대가 도착한 다음날인 7월 9일 억스브리지(Uxbridge) 선수촌에서 진행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첫 올림픽에 출전한 한국 선수단은 올림픽 기간 동안 넘치는 투지와 열정으로 경기에 임하였다. 그 결과 역도와 복싱에서 각각 1개씩 2개의 동메달을 획득하는 쾌거를 이뤘다. 경제가 어렵던 시절 성금으로 런던 여정에 필요한 경비를 마련하고자 했던 국민과 어렵게 만들어진 경비로 방콕, 뭄바이, 카이로, 로마, 암스테르담 등의 힘든 여정을 거쳐 런던으로 향하였던 한국 선수단 그들 모두에게 우리의 첫 올림픽은 고난이자 희망으로 기억되었을 것이다. alt 미국육군군정청 외무처 발행 여행증명서_런던올림픽 사이클 선수 황산웅 ]]> Mon, 29 Jun 2020 11:39:07 +0000 43 <![CDATA[희생과 정신이 하나 되어 ]]> 희생과 정신이 하나 되어예부터 우리 민족은 외세의 무수한 침략에도유구한 역사와 찬란한 문화를 면면히 이어왔습니다. 국가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나라와 민족을 위해 헌신한 민족의 지도자와  수많은 항일의병들.민족의 원수를 소탕하고우리의 전통을 지키는 것, 기꺼이 목숨 바쳐 싸울 것을 두려워 않던 의병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기억합니다.그들이 일생을 바쳐 염원한 독립. 그곳을 향해 묵묵히 걸었던 발자취에 담긴 애국애족의 사상과 이념은독립운동사에 영원히 기록될 것입니다.]]> Mon, 29 Jun 2020 11:35:19 +0000 43 <![CDATA[구미위원부의 설립과 활동(Ⅱ) ]]> 글 홍선표 나라역사연구소 소장구미위원부의 설립과 활동(Ⅱ) Ⅳ. 3·1운동의 이후 재미 한인사회의 변화 ② 구미위원부의 주요 활동구미위원부가 결성되던 1919년 8월은 3·1운동에 대한 미국 언론의 보도가 집중되어 친한 동정여론이 미국 전역으로 확산될 때였다. 이런 때에 미 의회는 1919년 6월 30일 스펜서(Selden P. Spencer) 상원의원에 의해 처음으로 한미관계의 입장을 국무부에 질의하는 결의안(제101호)을 제출하며 한국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기 시작했다. 구미위원부는 3·1운동 직후 한국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미 의회를 상대로 적극적인 교섭활동에 나섰다. 여기에는 법률 고문 돌프(Fred A. Dolph)와 선전원으로 활동한 헐버트(H. B. Hulbert)와 벡(S. A. Beck)의 활약이 컸다. 1920년 3월 미 의회는 한국과 아일랜드에 대한 독립동정안을 상정했는데 한국독립동정안이 34 대 46으로 아쉽게 부결되기도 했다. 상하이의 <독립신문>은 ‘미국 상원의 한국독립승인안’이란 논설(1920.3.30)에서 “국치 10년 이래 언제 한국문제가 세계의 여론에 오르내렸더뇨”라며 미 의회에서 한국독립문제가 상정된 데 대해 감격했다. 그 밖에 구미위원부는 미국 각지의 한국친우회를 결성하는 데 큰 힘을 보탰다. 다른 무엇보다 구미위원부가 중점을 둔 활동은 독립공채 발매를 통한 재정 수합과 수합한 재정을 임시정부 유지를 위한 지원을 비롯해 필라델피아와 파리의 한국통신부와 런던사무소의 선전활동을 돕는 데 사용했다. 구미위원부의 내부 갈등김규식이 초대 위원장으로 활동하던 1919년 8월부터 1920년 9월까지 구미위원부는 이승만이 간섭하고 주도했다기보다 김규식이 거의 모든 일을 주도했을 정도로 그에 의해 운영되었다. 즉, 김규식은 재정을 모금하는 일과 모금한 자금을 운용하는 일에 이승만의 지시를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처리했다. 이승만이 명목을 밝히지 않고 쓴 돈에 대해선 공사를 물어 지출 원칙을 지켰고 수합한 재정의 약 절반은 반드시 임시정부로 보냈다. 이것은 구미위원부가 임시정부의 한 기구라는 점을 인식한 김규식의 의지에서 나온 것이었다. 임정 대통령 이승만은 자신이 설립한 구미위원부가 김규식의 주도하에 운영되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이것은 구미위원부를 설립한 이승만의 당초 의도와 어긋나는 일이어서 두 사람 사이에 불신과 불화의 요인으로 싹트게 했다. 때문에 이승만은 1920년 4월 7일 구미위원부에 보낸 서신에서 구미위원부의 의결사항은 반드시 자신에게 보고하고 승인받으라고 지시했다. 위원장 김규식은 독자적인 결정권을 잃고 세세한 문제까지 보고해야 하는 상황에 빠진 것이다. 한편 이승만은 구미위원부 장재 송헌주가 자신의 지시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며 그를 불신했다. 구미위원부를 이끌어가는 김규식과 송헌주에 대한 불신은 이승만 외에 대한인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에서도 일어나고 있었다. 구미위원부가 만든 지방위원조례가 기존 국민회의 위상을 손상시킨다고 판단한 하와이지방총회는 독립공채 발매 등 재정관할권을 구미위원부의 지방위원부가 아닌 국민회가 장악해야 한다고 보았다. 더구나 하와이지방총회는 지방위원의 조례를 김규식과 송헌주가 주도해 만든 것인 양 오해해 구미위원부에 반감을 갖고 1920년 2월부터는 재정 지원을 하지 않았다. 다행히 송헌주가 1920년 7월 6일 하와이에 도착한 후 하와이지방총회장 이종관을 하와이지역 공동시찰로 임명하는 선에서 잘 무마했다. 하지만 이 일로 송헌주는 같은 해 7월 22일에 이승만으로부터 사임 요구를 받았고 여기에 아무 응답을 하지 않자 7월 30일 이승만은 그를 해임하였다. 김규식은 송헌주의 해임 소식에 격앙해 8월 7일자로 위원장 사임서를 이승만에게 제출했다. 김규식은 1920년 1월부터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어 3월에는 뇌종양 수술까지 받아 건강 상태가 좋지 않았다. 재정 수합도 뜻대로 되지 않아 구미위원부를 계획대로 꾸려가는 것조차 벅찬 상황이었다. 그런데다 위원장으로서의 독자적인 활동에 제약을 가하려는 이승만에 대한 불만도 쌓인 상태였다. 당초 김규식은 파리강화회의 때 못다 한 외교활동을 구미위원부를 통해 제2의 선전 외교활동으로 이어가려 했으나 국제연맹 창설을 주장한 윌슨 대통령이 1919년 9월 뇌졸중으로 쓰러진 이후 그의 활약을 기대하기 어려워졌다. 더욱이 1920년 3월 미 의회에서 미국의 국제연맹 참여를 최종 부결함으로써 더 이상 미국에서의 외교활동도 전망하기 어려웠다. 이런 마당에 송헌주 해임사건까지 터지자 그동안 쌓였던 불신과 불만이 위원장의 사임으로 나타났다. 결국 김규식은 1920년 10월 3일 장기 휴가를 명목으로 워싱턴 DC를 떠나 상하이로 돌아갔다. alt구미위원부 주역들(왼쪽부터 김규식, 이승만, 송헌주)임정의 구미위원부 폐지와 미주 한인사회의 분열이승만은 1920년 9월 28일 현순과 정한경을 구미위원부 새 위원으로 선임하였고, 김규식이 워싱턴을 떠나자 현순을 임시위원장 겸 장재(掌財 : 재무책임자)로 임명했다. 하지만 현순은 워싱턴 DC에 독자적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미대표부를 설립하고 미 국무부에 한국독립의 승인을 요구하다 마찰을 빚어 1921년 4월 이승만으로부터 해임되었다. 그 후임으로 이승만은 서재필을 임시위원장에 임명했으나 서재필은 워싱턴군축회의가 끝난 1922년 2월 사임을 발표하고 구미위원부에서 떠났다. 이렇게 되자 구미위원부는 더 이상 위원장이 없는 명목상의 조직으로 추락했다.워싱턴군축회의(1921. 11. 12. ∼ 1922. 2. 6.)가 끝난 뒤 임시정부를 비롯한 중국 관내 독립운동계는 대미 외교에 대한 불신과 회의론이 일어났다. 미주 한인사회에는 독립운동의 열기가 급격히 냉각됐고 재미 한인들의 경제 상황마저 악화되어 구미위원부는 임정 송금은커녕 자체 유지조차 힘들었다. 이런 가운데 중국 관내에 이승만을 불신하는 반임정 세력은 확장되었고, 그 영향은 임정 개조를 둘러싼 국민대표회의와 임정의 급격한 위상 추락으로 나타났다. 임시정부는 위상 추락의 원인을 대통령으로서 사태를 수습하지 못한 이승만에게 그 책임을 물었다. 1921년 8월까지 구미위원부가 정기적으로 자금을 송금할 때까지 임정은 문제를 제기하지 않다가 송금이 끊기고 임정의 위신마저 추락하게 되자 구미위원부와 이를 설립한 이승만에게 책임을 돌린 것이다. 이승만이 임정의 조치에 크게 반발하자 임시정부는 1925년 3월 10일 구미위원부 폐지명령을 공포하였고 3월 23일에는 이승만에 대한 대통령 면직 처분을 내렸다. 면직 사유는 이승만의 장기 궐석에 따른 대통령으로서의 역할 부재와 구미위원부의 사유화 때문이라 했다. 대통령직에서 면직 처분된 이승만은 임정의 폐지 명령에도 불구하고 1941년 4월 해외한족대회에서 새 외교기관으로 주미외교위원부를 설립할 때까지 구미위원부를 계속 유지 및 운영하며 임정의 폐지 명령에 반발했다. 임정의 면직 처분에 격분한 이승만의 지지세력인 하와이 교민단과 동지회는 1920년대 중반부터 반임정 세력으로 변모하였다가 1931년 9월 만주사변 이후 임정에 대해 유화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렇지만 구미위원부 폐지와 이승만의 대통령 면직 처분 이후 미주 한인사회는 1941년 4월 임정 봉대를 내세워 재미 한족연합위원회를 결성해 대동단결할 때까지 크게 이승만 지지세력과 반이승만세력, 그리고 두 세력에 가담하지 않은 독자적인 집단으로 나누어졌다.]]> Mon, 29 Jun 2020 13:40:44 +0000 43 <![CDATA[자유주의자 이회영과 워킹맘의 선구자 이은숙 ]]> 글 김형목 사단법인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자유주의자 이회영과 워킹맘의 선구자 이은숙애국계몽운동단체인 신민회의 회원이었던 이회영은 전 재산을 정리해 남만주(서간도) 류허현에 독립운동 기지를 개척하여 많은 독립군을 양성하였다. 이회영의 아내 이은숙 여사 또한 반세기 넘도록 만주와 중국을 전전하며 남편과 함께 독립운동의 최전선에 서 있었다. 전 재산을 바쳐 독립운동에 매진한 부부는 죽는 날까지 빈곤과 싸우며 살아야 했다.  alt우당 이회영 alt이은숙 여사(우당기념관 제공)국외독립운동기지 건설에 나서다 1910년 8월 대한제국은 역사 무대에서 사라지는 ‘국제적인 미아’ 신세였다. 제국주의 열강은 저들의 탐욕스러운 본질을 숨긴 채 일제의 야만적인 만행을 묵인했다. 삼천리 금수강산이라고 자화자찬하던 이 땅은 통곡 소리가 만연한 분위기였다. 문화민족임을 자부하던 한국인들은 이를 받아들이기에 너무나 괴로운 현실이었다. 재야 지식인과 전·현직 관료들의 순국과 자정에도 현실을 되돌리기에 역부족인 안타까운 메아리가 되었다. 그러나 중장기적인 입장에서 새로운 독립국가를 꿈꾸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들의 피눈물 나는 열정과 노력은 오늘날 대한민국을 일꾼 에너지원이라고 해도 결코 과장이 아니다. 왜놈 치하에서 구차한 삶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굴욕이라고 생각하고 실천한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우당(友堂) 이회영(李會榮)이다. 그는 국외독립운동기지 건설을 위하여 신민회 동지들과 더불어 광활한 만주벌로 향했다. 암울한 현실을 타개하기 위한 비장한 각오는 다음 글에서 돋보인다. “삼천리 기름진 강토는 도둑의 이빨에 씹혀 삼킨 바가 되었다. 반만년 신성한 한민족은 검은 잠방이의 야만족에게 노예가 되었으니 이는 천추에 치욕이요, 억울하고 분통할 뿐이다. 우리 이천만 동포는 총궐기하여 마지막 한 사람까지 왜적에 분투하여 조국을 되찾아야 한다.”시세 변화에 부응한 사회질서를 모색하다을사늑약을 전후로 식민지화에 대한 위기의식은 상상을 초월할 만큼 고조되는 분위기였다. 전·현직 관료나 재야세력은 순국이나 의병운동과 상소운동으로 이를 저지하는데 나섰다. 의지와 달리 일제의 회유와 억압은 너무나 집요했다. 사태를 관망하던 우당도 벼슬을 버리고 국권 수호에 몸을 던질 것을 단호하게 결심하였다. 상동교회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민족운동에 투신하여 동지들을 만났다. 인연은 변화에 부응하려는 인식 변화로 이어졌다.아전과 노비 등을 인격체로서 존대하는 동시에 신분 해방에 대한 관심과 실천에 앞장섰다. 적서 차별을 없애고 여성들 재혼을 장려하는 일에 적극적이었다. 누이를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재가 주선은 너무나 감동적이고 파격적이다. 찬반이 비등하는 상황에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 1908년 자신도 상동교회에서 이은숙과 재혼했다. 전통 명문가 출신이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린 자체만으로 대단한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그야말로 모든 기득권을 부정하고 오로지 평등한 사회 실현에 온 몸을 던졌다.치열하게 전개되던 의병전쟁이 점차 위력을 상실하자 신민회 동지들과 독립운동 근거지를 만주로 옮길 계획을 세웠다. 헤이그평화회의에 참석한 뒤 러시아 연해주로 망명한 이상설을 찾아가 새로운 돌파구를 모색했다. 대성학교·오산학교·협동학교 등에 인재를 양성할 적임자를 배치하는 한편 자신은 상동청년학원 학감이 되었다. 민족의식과 항일정신이 충만한 청소년 육성은 향후 독립운동을 줄기차게 전개하려는 의도와 맞물려 있었다.전 재산을 조국 광복에 투자하다이회영 형제는 조선시대 유명한 학자이자 관료인 이항복의 후손이다. 19세기 말기 이조판서·의정부 참찬 등을 지낸 이유승(李裕承)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이조판서 정순조의 딸이었다. 이른바 명문인 삼한갑족(三韓甲族, 대대로 문벌이 좋은 집안-필자주) 출신으로 돈독한 형제간 우애는 사람들에게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이유원 양자로 들어간 이석영은 양아버지에게 물려받은 많은 재산을 독립운동에 나선 형제들에게 흔쾌히 제공하였다. 이회영의 부인인 이은숙(李恩淑)의 회고록 《서간도 시종기》에는 망명 준비를 이렇게 회고했다. “여러 형제분이 일시에 합력하여 만주로 갈 준비를 하였다. 비밀리에 전답과 가옥·부동산을 방매(放賣)하는데 여러 집이 일시에 방매를 하느라 이 얼마나 극난하리오. 그때만 해도 여러 형제 집이 예전 대가(大家)의 범절로 남종 여비가 무수하여 하속(下屬)의 입을 막을 수 없는 데다 한편 조사는 심했다.”급매하다 보니 제값도 받을 수 없었다. 전 가산을 정리해 마련한 자금은 40여만 원으로 현재 돈으로 약 600억 원에 달하는 거금이었다. 형제 중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인물은 단연 우당이다.형인 건영(健榮)·석영(石榮)·철영(哲榮)과 아우인 시영(始榮)·호영(護榮) 가족과 심부름꾼 등 모두 60여 명이나 되었다. 일제의 삼엄한 감시망을 피해 북행길에 올라 무사히 압록강을 건넜다. 몰아치는 칼바람은 애간장 녹일 만큼 비수처럼 다가왔다. 그렇다고 중단할 수 없는 극한 상황에 내몰렸다. 목적지를 향하여 묵묵히 달려갈 수밖에 없었다. 난관을 뚫고 일가는 류허현 삼원보 부근 추가가에 외로운 둥지를 틀었다. 이곳은 유사시 피신에 좋은 지형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군사 훈련과 농사일을 함께 할 수 있는 환경을 두루 갖추고 있었다. 이상룡·김대락·김동삼 등 수많은 민족 지사들도 이곳으로 몰려왔다. 독립을 위한 본격적인 사업에 착수하였다. 우선적인 과제는 자치단체인 경학사 조직과 신흥강습소 설립이었다. 경학사는 이주 한인들 생활안정과 농업생산을 지도하는 등 한인사회 대동단결에 있었다. 중국정부의 부당한 간섭이나 수탈로부터 이주한인 보호는 궁극적인 취지였다. 우당은 중국 정부와 교섭을 통하여 한인들 토지소유권을 확보함으로 경제적인 안정에 크게 이바지했다. 동시에 중국인 옥수수 창고를 빌려 조촐한 개교식을 거행함으로 신흥무관학교 개막을 알렸다. 난공불락인 요새에 독립군 양성을 위한 노력은 결실로 이어지는 벅찬 감격적인 순간을 맞았다. 하지만 중일 양국의 관계 변화에 따라 ‘위험한 외줄타기’는 일상사였다. 난관을 극복하는 슬기로운 지혜는 한인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 에너지원이었다. 그 중심에는 항상 우당 형제들이 있었다. alt우당6형제 망명 직전 회의 장면 초상화(우당기념관 제공)자유와 평등을 향한 독립운동에 매진하다3·1운동 열기는 국내외 한인사회로 급속하게 파급되었다. 국제도시 상하이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과 더불어 독립운동을 지휘하는 중심지나 마찬가지였다. 이회영은 임시정부 수립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망명정부보다는 독립운동을 이끌 항일운동단체가 현실적으로 필요했다. 시대와 정세가 변했으니 이에 따른 운동론을 모색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강고한 일제에 대항하기 위해 한인들 대동단결은 우선적인 과제였다.우당은 “정부라는 조직과 근본적으로 다른 운동단체를 결성하자”라고 주장했다. 임시정부 조직 과정을 지켜보면서 더욱 절실하게 다가왔다. 인식 변화는 상하이 생활을 접고 베이징으로 생활 근거지를 옮기는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평생 동지인 동생 이시영이나 동지 이동녕과 길을 달리한 배경은 여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주위의 권고에도 오직 자신의 길을 묵묵히 걸었다.베이징에서 생활은 전혀 새롭게 전개되었다. 기관지를 발행하면서 패권을 추구하는 공산주의를 비판하였다. 상호부조를 위한 농민운동과 함께 구미의 정치제도에 대해 동지들과 많은 토론을 벌였다. 중국 뤼쉰(魯迅)이나 러시아인 에로센코 등과 자주 만났다. 소통과 교류는 국제적인 안목을 배가시키는 든든한 자양분이었다. 혁명을 꿈꾼 한인 청년들은 그의 사랑방으로 운집하였다. “사람은 자유롭고 평등한 생활을 목적으로 한다. 이를 위한 노력은 옳은 길이다”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신채호·이정규 등과 함께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을 결성하였다. 이를 위해 이상촌 건설에 매달리고 또 매달렸다.경제적인 곤궁으로 은거 생활도 마다하지 않았다. 새로운 독립운동 방향을 모색하던 그는 만주지역에서 독립운동을 조직화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비밀리 만주로 가는 도중 따롄수상경찰서에 붙잡혀 모진 고문으로 사망하였다. 자유와 평화를 위한 한 혁명가의 꿈이 좌절되는 안타까운 순간이었다. 하지만 우당의 꿈꾼 세계는 오늘날 대한민국을 이룬 초석이 되었다. alt신흥무관학교가 설립된 류허현 삼원보『서간도시종기』, 독립운동가의 인생 항로를 알리다이 책은 독립운동가이자 아나키스트인 이회영의 아내 이은숙이 쓴 육필본으로 7년 만에 탈고하였다. 역사적인 사료와 더불어 수필문학으로서 대단한 가치를 지닌다. 남편인 독립운동가 이회영과 주변인들의 행적을 꼼꼼하게 되짚어볼 수 있다. 특히 서간도로 이주하는 경로와 상황 등에 관한 기록은 백미 중 백미이다. 정정화 《장강일기》, 최선화 《제씨일기》 등과 더불어 독립운동가들 일상사는 이를 통하여 새롭게 조명되는 계기였다. 이은숙은 1889년 8월 8일 충남 공주에서 한산이씨 이덕규와 남양 홍씨의 외동딸로 출생했다. 1908년 우당 이회영과 상동교회에서 결혼한 후 1910년 식솔들과 함께 만주 서간도로 이주하였다. 1925년 홀로 국내로 돌아와 공장을 다니고 삯바느질을 하면서 생활비와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에 나섰다. 이회영 순국 이후 독립운동을 하던 아들 규창이 투옥되자 옥바라지를 하다가 신베이로 이주하는 등 일생을 독립운동 지원에 바쳤다. 독립운동가의 동지이자 아내로서, 어미로서 고단한 삶의 무게에도 전혀 좌절하지 않은 삶의 전형이었다. 이를 통하여 구술사와 삶의 궤적에 대한 기록이 정신적인 유산임을 다시 한번 일깨웠다. alt『서간도시종기』(우당기념관 제공)]]> Mon, 29 Jun 2020 13:39:51 +0000 43 <![CDATA[몽골의 침략과 대치 ]]> 글 김종성 역사작가몽골의 침략과 대치이 땅을 침략한 이민족들 중에서 가장 강력했던 것은 칭기즈칸의 몽골족이다. 이들은 유라시아 대륙에서 가장 짧은 시간에 가장 넓은 영토를 확보했다. 몽골 초원의 통일로 강력해진 이들은 동유럽과 동아시아를 잇는 초원을 말 달리며 유라시아 세계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그런데도 몽골족은 고려 땅에서는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용맹한 기세로 반격한 고려몽골 기병대는 지독하게 잔인하기로 유명했다. 이들의 말발굽이 지나간 곳이라면 주민들은 물론 도시와 가축까지 흔적 없이 사라지는 일이 많았다. 북중국과 만주에 걸쳤던 금나라 영토에서 1207년에 약 768만 호이던 호구 수가 몽골 침략 이후인 1230년대에 약 100만 호로 급감한 것은 몽골의 잔혹한 학살에 기인한다. 1호당 식구가 3~6명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북중국에서 희생됐을지 짐작할 수 있다. 전쟁의 혼란으로 인해 국가가 호구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에 1230년대 실제 호구 수는 100만 호보다 많았을 수도 있다. 그렇게 전 세계가 두려움에 떨고 있을 때 몽골인들을 의아하게 만든 민족이 있다. 바로 고려다. 고려는 42년 동안 몽골과 싸웠다. 몽골이 제1차 침공을 일으킨 해는 1231년, 특수부대 삼별초가 끝까지 저항하다가 고려 왕실과 몽골의 연합군에 의해 진압된 해는 1273년이다. 이 기나긴 세월 동안 고려는 몽골과의 전쟁에서 국체를 지켜내는 데 성공했다. alt『항몽전쟁 상상화』(전쟁기념관 소장)몽골군과 해양에서 대립하다몽골의 침략이 개시되자 무신정권 지도자 최우는 개경에서 강화도로 도읍을 옮겼다. 개경에서 가까운 바다에 항전의 거점을 마련하고 유목민이 친숙하지 않은 물 한가운데서 임금의 신병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유목민이라고 해서 해양을 무조건 두려워하는 것은 아니었다. 몽골군은 삼별초가 진압된 뒤인 1274년과 1281년에 고려군과 함께 일본 원정을 단행했다. 결국 실패했지만 이 일은 유목민과 해전이 마냥 동떨어진 것만은 아님을 보여준다. 몽골군은 1283년에 오늘날의 홍콩이 있는 광동(광둥) 지방에서 배를 타고 베트남 남부인 참파왕국에 상륙해 수도 인근을 점령했다. 현지 게릴라 부대를 감당할 능력이 없어 오래 주둔하지는 못했지만, 1283년 당시의 몽골군은 마치 해병대 상륙부대처럼 남중국해(난지나해)와 인도차이나를 누비고 다녔다. 하지만 무신정권이 강화도로 천도한 1232년은 몽골이 해양으로 눈을 돌릴 여력이 많지 않은 때였다.전쟁 중에 불경을 조각하다고려인들이 신앙을 매개로 국론을 통합한 것도 국난 극복에 기여했다. 몽골 대군을 목격한 고려인들은 이 국난을 극복하고자 팔만대장경 사업에 착수했다. 무신정권과 불교계는 ‘외적을 물리쳐 달라’는 소원을 담아 81,258개의 목판을 새겼다. 전쟁 중에 이런 사업이 진행될 수 있었던 것은 고려인들의 마음이 하나로 뭉쳐졌기 때문이었다. 당시 사람들도 과학적인 사고를 했다. 그들이라고 해서 목판에 새겨진 글자 자체가 신령한 힘을 발휘해 외적을 물리칠 것이라고 기대했을 리는 없다. 그런 미신적 사고를 품고 있었다면 애당초 강화 천도의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전쟁이라는 급박한 상황에서 정권과 불교계가 합심해 목판을 새기며 기원하는 모습은 백성들의 마음을 통일하고 그들을 심리적으로 안정시키는 효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았다. 전쟁 중에 민심을 안정시키는 것만큼 필승의 길도 없을 것이다. 팔만대장경 사업은 그런 효과를 낳을 만한 일이었다. 대장경 제작에 참여한 사람들은 글자 하나를 새길 때마다 정성껏 절을 올렸다고 한다. 세계 최강국의 침입으로 혼란스럽기 그지없는 상황에서도 이런 ‘태평한 일’이 일어났다는 것은 당시의 고려인들이 고도의 침착성과 철학적 사유를 바탕으로 비상 상황에 임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alt『고려군과 몽골군의 복식』에 나타난 몽골군의 복장(국립중앙박물관 소장)결사항전유라시아 최강의 군대를 무서워하지 않고 그 속으로 용감히 돌진하며 목숨을 내버리고 싸우는 이들이 있었다. 제1차 침공이 있었던 1231년부터 이런 이들이 몽골군을 교란했다. 그해에 몽골군은 희한한 상황을 목격했다. 누구라도 몽골군을 보면 멀찍이서 달아나야 하는데 그렇게 하기는커녕 도리어 몽골 대군 사이를 휘젓고 다니는 소수의 특공대가 있었다. 몽골군은 별다른 제지도 못한 채 속수무책으로 당해야 했다. 이 상황이 『고려사』 김경손 열전에 묘사돼 있다. 김경손은 고작 12명의 특공대를 이끌고 대군 사이를 휘젓고 다니며 몽골군을 두 차례나 퇴각시켰다. 이들은 지금의 평안도 국경지대인 정주성과 귀주성에서 몽골군을 괴롭혔다. 성 안에서 몽골군을 향해 화살을 날리는 게 아니라 성 밖으로 나가 교란 작전을 펼쳤다. 귀주성의 경우에는 이 특공대 때문에 퇴각했던 몽골군이 다시 돌아와 성을 몇 겹으로 포위했지만, 김경손의 고려군이 20일 이상 대항한 끝에 결국 막아낸 일이 있었다. 몽골군은 이 성을 포기하고 그냥 지나갈 수밖에 없었다. 전투 중에 김경손은 포탄이 이마를 스쳐가는 부상을 입었다. 부하들이 “자리를 피하시라”고 권했지만 “내가 움직이면 병사들의 마음도 움직인다”며 거절했다. 그는 부상 중에도 신출귀몰한 전법을 구사했고, 몽골군마저 “사람이 아니다”라며 감탄했다. 이런 활약은 고려군 전체에 자신감을 불어넣는 역할을 했다. 이 부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단서가 있다. 그것은 김경손이 항상 검정 옷을 입었다는 김경손 열전의 기록이다. 검정 옷 즉 조의(?衣)를 입거나 검정 허리띠를 착용한 사람들은 고구려 수행자 군단인 조의선인(?衣仙人)이나 신라 수행자 군단인 화랑을 계승하는 후계자들이었다. 고려를 방문한 송나라 사절단이 작성한 『고려도경』이란 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재가화상(在家和尙)이라 불린 이들은 평소에는 일반인처럼 생활하다가 비상시에는 전투에 자원했다. 이들은 일반 농민과 달리 평시에도 군사훈련을 받으며 종교적 사명감으로 스스로를 무장했다. 몽골군이 이 땅에 침입한 이후 벌어진 일들은 상식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고려 조정이 섬으로 들어가 육지를 지배하며 장기간의 항전체제를 갖추더니 그곳에서 전쟁 지휘뿐 아니라 불경 조각까지 했다. 전쟁 중임에도 불경을 한 글자 새길 때마다 절을 올렸다. 육지에서는 정규군이 아닌 소수의 수행자 군단이 몽골 진영을 교란하며 죽기를 각오하고 싸웠다. 몽골군이 보기에 고려 땅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곳이었다. 바로 그 ‘이해할 수 없음’이 고려가 세계 최강과의 전쟁에서 40년간이나 버텨낸 원동력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Mon, 29 Jun 2020 13:41:46 +0000 43 <![CDATA[시골 여행의 묘미 경상북도 예천 ]]> 글·사진 임운석 여행작가 시골 여행의 묘미 경상북도 예천 시골에는 도시에서 느낄 수 없는 여유가 있다. 아이가 어머니의 품을 그리워하듯, 도시에서 태어나 수십 년째 살고 있지만 마음의 고향은 언제나 시골을 향해 있다. 자박자박 고샅길을 걸으며 여유를 즐기고 느린 일상의 풍경들이 마음에 쉼표를 찍는 것, 이러한 소확행이 시골 여행의 묘미일 것이다. 그 묘미를 찾아 예천으로 떠난다.  alt예천 회룡포마을 섬이 되려다 멈춘 듯한 회룡포마을같은 풍경이라도 바라보는 눈높이가 달라지면 낯설게 느껴진다. 그러한 이유로 드론이 어른들의 장난감으로 일찌감치 자리매김하기도 했다. 인터넷 카페에서 드론 동호회는 이제 흔하디흔한 동호회가 되었다. 드론의 매력에 빠진 사람들은 그 재미를 좇아 휴일이면 드론을 창공으로 날려 보낸다. 우리나라에는 하늘 높이 나는 드론의 시선으로 풍경을 내려다볼 수 있는 곳이 몇 곳 있다. 일명 ‘물돌이 마을’로 알려진 안동 하회마을과 예천 회룡포마을이 대표적이다. 예천 회룡포는 명승 제16호로 지정된 곳으로 낙동강 지류인 내성천이 350도쯤 휘감아 흐르는 마을이다. 나머지 10도는 백화산 자락에 아슬아슬하게 붙어 있다. 거인이 아슬아슬한 그 부위를 한 삽 크게 떠내면 영락없이 섬이 됐을 것이다. 실제로 육지와 연결된 곳의 너비가 약 80m밖에 되지 않는다. 그 좁은 면적에 도로를 놓아 어렵사리 회룡포마을로 들고난다. 회룡포마을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이 있다. 내성천 건너편 비룡산 중턱에 자리한 ‘회룡대’가 그곳이다. 구절양장처럼 구불구불한 도로를 따라 달리면 장안사에 이른다. 이곳에 차를 세우고 200m 정도 산길을 오르면 회룡대에 닿는다. 예천을 대표하는 명승지인 만큼 찾는 사람이 많다. 가파른 계단을 오르면 짧은 산길 구간에 사랑의 자물쇠, 소원나무 등 아기자기한 볼거리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그 뒤를 이어 전망대인 회룡대가 자리한다. 맑은 물과 백사장, 주변을 둘러싼 높고 낮은 산과 너른 들판, 강 위에 뜬 섬과 같은 회룡포 마을이 한눈에 조망된다. 드론을 통해 하늘에서 보는 듯한 풍광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모내기를 끝낸 논에는 잔디처럼 푸른 벼가 머리를 치켜든 채 하늘바라기를 하고 반듯반듯한 논은 손바느질을 해놓은 밥상보처럼 정겹다. 논 앞에는 백사장이 드넓게 펼쳐져 있다. alt회룡포마을과 연결된 뿅뿅다리뿅뿅다리 건너 한적한 마을 속으로예부터 회룡포에 터를 잡은 이는 의성군에 살던 경주 김씨 일가였다. 일가의 식솔들이 하나둘씩 늘어나자 사람들은 이곳을 ‘의성포’라 불렀다. 연세 많은 어른이 회룡포보다 의성포가 친숙하다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그런데 15년 전부터 의성포를 회룡포라 고쳐 부르게 되었다. 이유인즉슨,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이 많아지면서 이곳이 의성군에 있는 지명으로 착각할 수 있다는 판단에 따라 회룡포라 고쳤다고 한다.회룡포 마을에 차를 타고 들어가려면 내성천을 가로지르는 경진교를 지나 동소리길로 진입해 9km를 더 달려야 한다. 하지만 걸어가는 길은 매우 간단하다. 회룡대를 내려와서 백사장에 놓인 뿅뿅다리를 건너면 된다. 뿅뿅다리는 건설 공사장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강철판을 이용해 만든 다리다. 마을 사람들은 구멍 사이로 물이 퐁퐁 솟는다고 하여 퐁퐁다리라 불렀으나, 1998년에 언론에서 뿅뿅으로 잘못 보도가 나간 뒤 뿅뿅다리로 불리게 되었다. 뿅뿅다리는 흔들다리처럼 아래위로 가볍게 흔들린다. 그런 탓에 약간 어질어질하지만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울렁울렁하는 게 재미있다. 강물은 투명하리만큼 깨끗하고 바닥은 하얀 모래로 가득하다. 바지를 걷으면 건널 수 있을 정도로 수심이 낮다. 해 질 녘 뿅뿅다리에 걸터앉아 강물에 발을 담그거나, 부드러운 모래로 채워진 백사장을 여유롭게 거닌다면 더 부러울 게 없겠다. 회룡포마을은 주말을 제외하면 한적하고 조용한 편이다. 호젓한 기분까지 들 정도이니 외딴섬에 여행 온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이처럼 한갓지다 보니 6·25전쟁 때도 큰 피해가 없었다고 한다. 더불어 이곳에는 마을 외곽을 따라 걷는 올레길이 조성돼 있다. 전망대에서 보던 회룡포마을의 속살을 들여다보는 기분과 평화로운 강변마을의 정취가 온몸에 전해질 것이다. alt회룡포마을 올레길alt예천 초간정 비현실적인 풍경 속에서 쉼표를 찍다회룡포마을을 뒤로하고 차로 30분 여분을 달려 초간정에 닿는다. 한적한 정자에 불과했던 이곳이 요즘 핫한 여행지가 되었다. 지난해 주말 사람들의 시선을 TV 화면 속으로 이끌었던 인기 드라마 <미스터 션사인>의 촬영지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드라마에선 한국의 아름다운 정자를 포함한 우리 고유의 정원 형태인 원림이 자주 등장하였다. 남녀 주인공이 사랑을 나누던 장소는 강가에 위치한 안동의 고산정이었다. “나랑 합시다. 러브”라는 명대사를 남긴 곳 역시 안동의 만휴정이었다. 또 여주인공의 집으로 등장한 함양의 정여창 고택과 예천의 초간정은 고택의 기품과 정자의 운치를 한껏 뽐내기에 충분하였다. 그중 예천에 자리한 초간정은 여주인공 애신(김태리 분)이 글을 읽거나 수를 놓으며 소일하던 곳으로 등장하였다.물이 좋은 고장답게 초간정은 개울가에 자리한다. 조선 중기 사간을 지낸 초간 권문해(1534-1591) 선생이 1582년에 세우고 심신을 수양하던 곳이다. 그는 오늘의 백과사전 격인 《대동운부군옥》을 편찬한 인물이다. 현존하는 건물은 1870년에 중창한 것이다.계곡물이 흐르는 높은 언덕 위에 사뿐히 내려앉은 듯한 정자의 모습은 비현실적인 풍경처럼 여겨진다. 한껏 치켜 올라간 처마는 비상하는 새처럼 우아하고 세월의 더께가 내려앉은 난간에는 오랜 세월의 흔적이 켜켜이 쌓였다. 울창한 소나무들과 기묘한 바위들도 초간정이 뿜어내는 비경에 한몫을 더하니 아득한 풍광이 실로 웅숭깊다. 개울을 건너 정자에 이른다. 이전과 다른 별세상이라고 하면 과한 표현일까. 다나한 한옥에서 운치와 기품이 느껴진다. 하지만 지금까지 본 것은 서론에 불과하다. 초간정의 진면목은 정자에 올라서야, 그리고 시원한 바람을 맞아봐야 알 수 있다. 세상 시름을 잊게 되는 무념무상의 순간이다. 정자에선 세 가지 오브제가 조화미를 뽐낸다. 난간과 기둥은 액자 틀이 되고 그 안에 노거송과 개울, 그리고 괴이한 기암들이 뒤섞여 조화를 이룬다. 모두 자연이 빚은 작품이다. 하지만 보면 볼수록 누군가가 계획을 한듯하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alt돌담 뒤로 저무는 해]]> Mon, 29 Jun 2020 13:42:30 +0000 43 <![CDATA[조선물산장려운동 조선 사람 조선 것 ]]> alt]]> Mon, 03 Aug 2020 19:06:12 +0000 44 <![CDATA[경제적 자립으로 조국광복을 꿈꾸다 ]]> 글 은예린 역사작가 경제적 자립으로조국광복을 꿈꾸다조선물산장려회 창립 국권 상실 이후 우리 경제는 일본 자본에 의해 잠식되어 갔다. 일본의 경제 침략에서 벗어나고자 하였던 민족적 자각은 3·1운동 직후 싹트기 시작하였고, 1920년대 초반에 전국적인 규모로 전개되었다. 그 시절 민족의 경제적 자립을 위하여 쌓은 단결된 의지와 단합된 힘은 오늘날 우리 민족의 경제 위기 상황에서 현명한 대응에 귀감이 되고 있다. alt 조선물산장려회 취지문 경제 자립이 국가 존립의 근간이다한 가정이 무너져서 가문이 몰락하고, 한 국가가 멸망하는 근본적 원인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예를 들어 18세기 이후 서양에 패권을 빼앗기기 전까지 찬란하고 거대한 역사를 안고 인류 4대 발명품을 탄생시킨 중국의 장엄한 역사를 돌아보자. 중국 역사상 가장 짧은 시간에 멸망한 나라는 바로 진(秦)과 수(隋)다. 두 나라가 멸망한 공통점은 바로 군주가 덕치(德治)가 아닌 잔인한 폭정으로 백성을 통치하고 무리한 토목공사를 일으켜 국가 재정을 낭비한 탓이다. 훗날 중국의 거대한 역사가 문을 닫을 때쯤 서태후의 사치와 향락이 도를 넘어섰고, 일제 식민지로 전락한 우리나라의 상황도 이와 흡사했다. 우리 민족이 36년이란 치욕스럽고 냉혹한 역사 속에 살아야 했던 출발점은 위정자들의 무분별한 국가 재정 낭비에서 비롯되었다. 자본주의 관념이 희박하였던 이들은 기득권 유지에 도취한 나머지 최소한의 책무마저 외면하였다. 오직 개인적인 부와 명예, 권력욕을 향한 사리사욕 추구에만 매달렸다. 외세에 아부하여 민초들의 권리와 존엄성, 노동력 등을 일제에 거의 무상으로 제공한 한심한 상황으로 이어졌다. “가지고 싶은 것을 사지 마라. 꼭 필요한 것만 사라. 작은 지출을 삼가라. 작은 구멍이 거대한 배를 침몰시킨다”는 벤저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의 명언은 가정 경제뿐만 아니라 크게는 국가의 존망에도 근본적인 원인임을 일깨워 준다. 적자생존, 약육강식을 만국공법으로 위장한 제국주의 열강은 수탈을 위한 침략을 근대문명 수혜로 강변하는 상황이었다. alt 조선물산장려회 총회(1923.05.02.)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 나서다꿈 많은 젊은 청년들을 학도병으로 또 강제 징용으로, 어린 소녀들을 종군위안부와 근로정신대로 내몰았다. 당시 민중들은 자신의 꿈을 펼칠 여건도, 꿈을 실현할 수 있는 환경도, 자신이 추구하는 미래의 희망도 사라진 암담한 시절이었다. 민족의 글도 읽을 수 없었고 언어도 사용할 수 없었으며, 오직 일본을 향한 짐승만도 못한 복종과 충성, 노예 같은 노동력을 착취당할 뿐이었다. 우리 민족은 암울한 상황에도 굴복하지 않고 자주독립을 향해 다양한 방법을 모색하고 있었다. 생존권이 위협받는 위기 상황을 극복하고 민족 정체성을 일깨우는 일은 너무나 시급한 현안으로 다가왔다. 일제의 극악무도한 민족분열정책에 맞서는 한편 조국의 광복을 향한 새로운 돌파구를 향해 각 계층에서 동참하려는 분위기였다. 무장투쟁, 외교활동, 민족정기를 세우기 위한 교육 활동 등은 시대 상황과 맞물려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한민족의 독립을 위한 경제적 자립을 추구하기 위한 노력도 결코 무시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조선물산장려회’에 주목해야 할 이유는 여기에 있다. alt 토산품 애용 부인회 강연회(1923.03.06.) 우리가 만든 것을 입고 쓰자 조선물산장려회는 1920년 평양과 1923년 서울에서 각각 조직된 단체로서 어둡고 힘든 식민지 시기 경제 상황과 이를 극복하려 노력한 소중한 역사적 산물이다. 조만식·오윤선·김동원·김보애 등 70여 인이 모여 조직하였으며, 1920년 12월 평양기독교청년회관에서 선전 강연회를 개최하며 물산장려운동을 전개하였다.아래는 조선물산장려회 취지문의 일부이다. “우리에게 먹을 것이 없고 입을 것이 없고 또 의지하여 살 것이 없으면 우리의 생활은 파괴될 것이라. 우리가 무슨 권리와 자유와 행복을 기대할 수 있으며 또 참으로 사람다운 발전을 희망할 수 있으리오. 우리 생활의 제일 조건은 곧 의식주의 문제, 즉 산업적 기초라. 이 산업적 기초가 파멸을 당하여 우리에게 남은 것이 없으며 그 아무것도 없는 우리가 사람으로 사람다운 생활을 하지 못할 것은 당연하지 아니한가.”  국권을 상실한 후 일제의 경제침략은 상상을 초월할 만큼 가혹하였다. 오늘날 다국적기업에 버금가는 일제의 자본에 의해 한민족의 경제권은 급속하게 무너져가고 있었다. 이러한 위기 상황에서 우리는 민족의 자각을 촉구하고 경제권을 유지하고자 노력하였다. 3·1운동 이후 한국인 기업이 설립되어 미약하게나마 한국인 자본가 계층이 형성되었다. 1920년대 들어 ‘회사령’이 폐지되자 일제의 자본은 본격적으로 국내에 들어왔다. 1923년 관세가 대부분 철폐되자 일제 상품이 대량으로 밀려들어왔다. 평양의 조선물산장려회는 취지서를 통해 경제 진흥, 사회 발전, 실업자 구제, 국산품 애용, 근검·절약 풍토 등을 내세웠다. 서울에서도 1922년 평양의 조직을 발판으로 조선청년회연합회는 이에 호응하며 적극적인 활동을 펼쳐나갔다. 각종 신문과 잡지를 통해 조선물산장려에 관한 표어를 모집하는 동시에 국산품 애용을 장려하기 위한 순회강연도 마련해 전국 곳곳을 누비고 다녔다. 이렇게 물산장려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한민족의 생활 속으로 침투하였다. 1923년에는 조선물산장려회의 전국적 조직체가 탄생하였다. 창립총회에는 사회활동가·교육자·종교인·경영인 등 각계각층의 다양한 민족지도자들이 이사로 선출되어 조직 운영과 활동 방향을 정립하였다. “내 살림, 내 것으로 보아라. 우리의 먹고 입고 쓰는 것이 다 우리의 손으로 만든 것이 아니었다. 이것이 세상에서 제일 무섭고 위태한 일인 줄을 오늘에야 우리는 깨달았다. 피가 있고 눈물이 있는 형제자매들아, 우리가 서로 붙잡고 서로 의지하며 살고서 볼일이다. 입어라 조선 사람이 짠 것을, 먹어라 조선 사람이 만든 것을, 써라 조선 사람이 지은 것을. 조선 사람, 조선 것.”위와 같이 조선물산장려회 궐기문에서는 민족의 경제 회복을 위한 강력한 활동 의지가 느껴진다. 조선인의 산업을 장려하고, 조선인이 만든 국산품을 애용하고, 조선인의 산업을 융성하게 하는 조선 물품 애용을 장려하고, 조선인의 경제적 기반을 개선하기 위한 목표를 확립하였다. 조선물산장려회는 계몽활동을 기획하여 전국적으로 가두행렬을 실시하고 조선 팔도의 특산 포(布)로 기를 만들어 내세우기로 뜻을 모았다. 경기도는 강화 반포(班布: 반베), 충청도는 한산 세저(細苧: 모시), 강원도는 철원 명주(明紬), 전라도는 전주 우초(牛?), 경상도는 안동 갈포(葛布: 삼베), 황해도는 해주 백목(白木), 평안도는 안주 고라(古羅), 함경도는 육진 환포(環布)로 제작하였다. 조선일보사와 동아일보사의 적극적인 보도로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조선청년연합회가 모집해 당선된 ‘내 살림은 내 것으로’, ‘조선 사람 조선 것’ 등의 표어는 민중들에게 각인되어 뜨거운 관심과 적극적인 참여로 이어졌다. 민중들은 거리에서 물산장려운동을 부르짖었고, 학생들은 학교에서 조선인이 만든 교복 착용을 권장하였다. 기생들까지도 이에 동참하는 등 대단한 기세였다. alt 조선물산장려회 평양 3개 단체 선전 행렬(1930.02.15.) 국민운동으로 승화되다서울에서 시작된 전국적 조직체 결성에 이어 강연회, 일간지를 통한 선전활동과 계몽활동으로 평양·대구·부산·광주·함흥 등 대도시를 비롯해 지방까지 파급되면서 그 호응도와 실천력은 뜨거워져 갔다. 특히 부녀자들의 열성적인 참여가 있었다. 서울의 부녀자들은 토산애용부인회를 조직했으며, 마산에서는 기생 40여 명이 동맹하여 토산품 장려운동을 벌였다. 평양부인회에서는 평양 조선물산장려회와 합동으로 국산품 애용운동도 펼쳐나갔다. 충북 영동청년회는 장날을 이용하여 포목기를 앞세우고 국악을 연주하며 수천 장의 전단을 뿌리면서 국산품 애용을 독려하였다. 그 외 평남 성천·경남 부산·전북 군산에서도 기생들이 앞장서 토산품 장려운동을 전개해나갔다. 또 조선물산장려회는 전국에 소비조합을 설치하여 경제생활의 개선을 추구하였다. 자급자족, 국산품 장려, 소비 절약, 금주, 금연 등을 실천 목표로 내세웠던 물산장려운동은 경제적인 자립을 위한 민족운동으로 전개되었다. 불행하게도 일제의 강한 감시와 살벌한 탄압이 이어졌다. 더욱이 국산품 가격이 급등하는 등 경영자와 상인들만 부유해진다는 비판도 사회적인 호응을 얻었다. 1923년 9월 칸토 대지진으로 사회적인 불안이 가중되면서 운동을 추진할 동력을 잃어버렸다. 조선총독부는 시국 불안을 구실로 탄압으로 일관하여 분위기를 반감시켰다. 계몽 강연 또한 일제의 분열 공작으로 소기의 성과를 거두기에 역부족이었다. 명맥만 유지하던 이 단체는 결국 1937년 중일전쟁 발발을 전후로 해체되고 말았다. alt 조선물산장려회 기관지 『산업계』 표지 코로나19 극복을 위한 대안으로박완서 작가의 소설 『미망』을 떠올려 보자. 이 소설은 19세기 후반부터 6·25전쟁까지 개성 지방의 거상 전처만 일가의 3대에 걸친 파란만장한 운명과 가족사를 통해 그 시대 상황과 민족의 생활 모습, 인간의 오욕 칠정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드라마로도 방영되어 화제가 되었던 이 작품 속 주인공의 역할과 물산장려운동 정신을 함께 반추해 보자.드라마 속 주인공 전태임은 일제의 탄압과 살벌한 감시 속에 개성 상권을 지키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인다. 일제와 맞서 싸우며 우리 물품을 지키고, 일본인의 상권이 자신의 지역에 유입되어 조선 민중이 현혹되지 않도록 하였다. 심지어 목숨을 잃을 위기까지 넘기면서 강인하게 일제에 맞서는 장면이 인상 깊다. 이러한 장면은 혼란스럽고 힘겨운 시절을 살았던 한민족의 단면과 같다. 경제 침탈에 물산장려운동으로 맞섰던 조선의 간디 조만식을 비롯한 민족 지도자와 서민들의 뼈아픈 고통을 대변하는 것 같았다. 우리는 국권을 상실한 36년 중 20여 년간 이어진 조선물산장려운동을 통해 위기 상황에서도 힘을 발휘해 대응하는 민족의 강인함을 느낄 수 있다. 비록 결과는 미흡하였으나 목표와 과정은 훌륭하였다. 1997년 IMF라는 미증유의 국가부도 사태에 직면하였을 때 ‘금 모으기 운동’을 통해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던 정신적 유산이 되었다. 이를 두고 세계인들은 부러움과 시샘이라는 이중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기도 하였다. 사회 구성원으로서 자기 역할에 충실한 책임감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자양분이다. 지구촌을 강타한 코로나19 바이러스는 전쟁보다 무서운 난리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결코 좌절하거나 회피해야 할 커다란 장애물이 아니다. 선조들의 참여를 통한 사회적인 책무는 밝은 미래를 위한 희망이라는 지혜를 발휘해보자. alt 조선물산장려회 포스터(1931.02.18.) ]]> Wed, 29 Jul 2020 10:32:38 +0000 44 <![CDATA[항일정신이 깃든 문화재 현판의 복원 ]]> 글 이계형 국민대학교 교양대학 교수 항일정신이 깃든 문화재 현판의 복원 현판은 건축물의 문이나 대청 위 또는 처마 밑에 글씨를 판에 새겨서 걸어 놓은 것을 말한다. 흔히 당호(堂號)라 하여 건물의 성격을 짐작하게 한다. 현판은 삼국시대부터 등장하는데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는 영주 부석사의 무량수전(無量壽殿)과 경북 안동의 안동웅부(安東雄府)의 현판으로 모두 공민왕의 글씨이다. 당호는 명필의 글을 받아서 널빤지에 새기는 것이 보통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도 의미가 크다. 근래 박정희 글씨로 새긴 현판을 두고 철거할 것인지 말지를 두고 논란이 이는데, 이를 밝혀 하나의 방안을 제시하고자 한다.alt 현충사 현판 박정희 전 대통령의 글씨박정희는 1961년 5·16군사정변으로 정권을 잡은 이후 1979년 10월에 피살당할 때까지 18년 넘게 권력을 독차지하였는데, 그가 누린 권력의 시간만큼이나 남긴 글씨도 많다. 1989년 10월 민족중흥회가 펴낸 박정희 휘호집 『위대한 생애』를 보면, 그는 전국에 1,200여 점의 글씨를 남겼다고 한다. 이 가운데 기념비·기념석으로 혹은 현판으로 제작된 것도 적지 않다. 박정희 글씨로 새겨진 대표적인 기념비로는 제주시 산천단 인근 도로변에 세워진 ‘五一六道路’(5·16도로, 1967), 추풍령 휴게소의 경부고속도로 준공 기념탑 전면에 새겨진 ‘서울부산간고속도로는 조국 근대화의 길이며 국토 통일의 길이다’(1970.07.), S&T모티브 부산 1공장 본관 앞의 ‘精密造兵’(정밀조병, 1971.04.), 서울 광진구 능동 서울어린이대공원 분수대 옆에 있는 ‘어린이는 내일의 주인공, 착하고 씩씩하며 슬기롭게 자라자’(1973.05.), 국가공무원인재개발원 진천 본원 광장에 있는 ‘내 일생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1974.05.), 남해고속도로 순천 방향 섬진강 휴게소에 있는 ‘호남남해고속도로 준공 기념탑’(1974.11.), 경북 안동댐 준공 당시 새겨진 ‘안동호’, ‘안동 다목적 준공 기념탑’(1976.11.), 안중근 의사 탄생 100돌을 기념해 세운 남산 안중근의사기념관의 ‘民族正氣의 殿堂’(민족정기의 전당, 1979.09.), 전북 남원의 ‘만인의총정화기념비’(1979.10.), 여의도 전경련빌딩 입구에 설치된 ‘創造 協同 繁榮’(창조 협동 번영, 1979.10.), 경남 통영 ‘한산대첩기념비’(1979) 등을 꼽을 수 있다. 현판이 문제가 되는 이유이러한 기념비와 기념석 등은 박정희 임기 동안에 마친 토목공사나 건축 준공식에 맞춰 조성된 것들로 크게 문제 될 것이 없을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박정희 글씨의 현판은 기념비와는 성격이 다르다. 박정희 현판은 당사(黨舍)·관공서·군 관련 신축 건물, 기념관, 교육관 등이나 사적지 내에 걸렸다. 문제 되는 것은 후자이다. 전자와 관련한 것은 시대가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없어지기도 하고 철거되기도 하였다. 현재 남은 대표적인 것으로는 경주 남산 동쪽의 중앙에 위치한 ‘統一殿(통일전)’과 그와 나란히 자리하고 있는 화랑교육원의 ‘화랑의 집’·‘화랑의 얼’, 현충사 밖에 신축한 충무수련원(현 충무교육원)의 ‘나라사랑’, 2군사령부 내 군법당의 ‘武烈寺(무열사)’, 공군 5236부대의 ‘유신문’, 경북대 개교 30주년 기념 본관의 ‘創造와 開拓(창조와 개척)’, 한글회관 준공 입구 ‘한글회관’ 등이다. 이러한 것들은 논란의 여지가 없지는 않지만 그리 크지도 않다.철거 문제로 종종 사회적 논쟁거리가 되는 것은 후자로 문화재 혹은 독립운동 관련 사적지의 현판이다. 2001년 11월에 민족정기소생회 회원들이 서울 종로 탑골공원 앞 정문에 걸려 있던 ‘삼일문’ 현판을 제거했다고 하여 징역 1년형을 구형 받았다. 문제가 된 ‘삼일문’ 현판은 1967년 12월 탑골공원을 중수하면서 만든 정문에 박정희가 한글로 쓴 것이다. 현재는 독립선언서에서 집자한 글씨로 제작된 ‘삼일문’ 현판이 걸려 있다. 2005년 3월에는 충남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에 있는 윤봉길 의사 사당인 충의사 현판 ‘忠義祠(충의사)’가 도끼로 부서졌다. 이 현판은 1968년 4월 사당이 건립되면서 박정희 글씨로 제작된 것이었다. 이를 부순 이는 특수 공용 물건 손상 등 혐의로 징역 6월을 선고받았다. 그 뒤 슬그머니 박정희 글씨 현판이 다시 내걸렸고 지금에 이르고 있다.  우리가 지켜낼 역사에 대한 고민사회적으로 논란이 크게 일었던 것은 ‘광화문’ 현판이었다. 일제가 조선총독부 건물을 신축하면서 광화문은 지금의 민속박물관 근처로 옮겨졌다가, 한국전쟁 당시 누각이 불타면서 현판도 사라지고 말았다. 그 뒤 1968년 12월 광화문이 복원되면서 박정희가 한글로 쓴 ‘광화문’ 현판이 내걸렸다. 이로부터 40년이 다 되어갈 무렵 2006년 12월 ‘경복궁 광화문 제모습찾기’가 선포된 이후 2010년 8월 광화문이 재건되었다. 이 과정에서 광화문 현판을 둘러싼 논쟁이 뜨거웠다. 박정희 현판을 그대로 달 것인지가 아니라, 한글로 할 것인지 문화재 복원 차원에서 한자로 한 것인지로 대립하였다. 결국은 중건 당시 훈련대장 임태영의 글씨를 복원한 ‘門化光(문화광)’ 현판이 걸렸다. 최근 2017년 9월에 이순신 가문의 15대 맏며느리이자 충무공기념사업회 대표인 최순선 씨가 충남 아산 현충사 사당에 걸려 있는 박정희 친필 현판 대신에 옛 사당의 숙종 사액 현판으로 교체할 것을 문화재청에 요청하였다가 거부된 일이 있었다. 당시 종가 측은 현판 교체가 이뤄질 때까지 충무공의 유물을 전시할 수 없다며 『난중일기』 원본과 충무공의 장검을 회수하기도 했지만 소용없었다. 숙종 사액 현판은 1706년 현충사 첫 건립 때 사당에 걸렸던 것으로,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사당이 헐리자 후손이 보관하다가 1932년 국민들이 성금을 모아 사당을 재건립하면서 다시 걸렸다. 이후 박정희가 1967년 현충사 성역화 사업을 벌이며 콘크리트로 한옥 양식을 본떠 새 사당을 짓고 현충사, 충의문, 충무문 등 3개의 문에 자신의 친필 현판을 걸었다. 이후 본래 현충사는 ‘구사당’으로 불리며 기능을 상실하였다.2020년 현재 문화재에 걸린 역대 대통령의 글씨는 모두 37곳(43건) 가운데 박정희 글씨는 28곳(34건)에 달한다. 임진왜란과 항일투쟁에 관련한 것이 15건으로 절반 가까이 된다. 이 밖에 8건은 충신 등의 유적, 2건은 외세에 대한 항전 유적 등이다. 그렇다고 이 모두를 철거하자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항일과 관련된 인물이나 유적은 우선 고려해야 한다. 박정희의 친일 행적이 밝혀지고 있는 상황에서 그와 같은 현판들은 부적절하기 때문이다. 그 외의 것들은 문화재의 가치와 역사성 등을 고증하여 적절하지 않으면 교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지난 6월 6일 제65회 현충일 기념행사가 대전현충원에서 치러졌다. 전두환의 글씨였던 ‘현충문’ 현판이 안중근의 글씨체로 교체되었다. 이는 유의미한 변화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 역사의 현장에 그들의 글씨가 또 다른 어떤 역사의 의미로 해석되지 않을까 고민해볼 때이다.]]> Mon, 03 Aug 2020 20:13:37 +0000 44 <![CDATA[전 재산을 바쳐 독립전쟁의 기반을 개척한 선구자 이석영 ]]> 글 독립기념관 전시부전 재산을 바쳐 독립전쟁의 기반을 개척한 선구자 이석영 이석영(李石榮)1855~1934서울건국훈장 애국장(1991) 독립기념관은 국가보훈처 및 광복회와 공동으로 이석영을 2020년 8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이석영은 경술국치 후 이회영·이시영 등 형제들과 전 재산을 처분하고 서간도로 망명하였다. 망명 후에는 한인 자치기관 경학사 설립에 참여하고, 독립군 사관 양성학교인 신흥무관학교 설립을 지원하여 독립전쟁의 토대를 마련하였다.alt이석영이석영 6형제의 독립운동이석영은 6형제 중 둘째로, 이석영을 비롯한 6형제 모두가 독립운동가로 포상을 받았다. 그중에서도 넷째 이회영(1867~1932, 1962 독립장)은 1907년 신민회를 결성해 국외 독립운동 기지 건설을 추진하였고, 아나키즘을 수용해 의열투쟁을 전개하였다. 다섯째 이시영(1869~1953, 1949 대한민국장)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 등으로 활약하였고,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을 지냈다. 6형제는 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권세와 재산을 포기하고 항일 독립운동의 길을 선택하여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표본을 보여주었다.alt 저동(苧洞) 일대 6형제의 생가(우당기념관 제공) alt 경학사 취지문(우당기념관 제공) 독립운동 기지 개척을 위하여 서간도 망명길에 오르다이석영은 백사 이항복(白沙 李恒福)의 10대 손으로 1855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30세가 되던 1885년 과거에 급제한 그는 승지(承旨)를 비롯한 요직을 지내며 고종을 보필하다가, 1904년 벼슬을 사양하고 관직에서 물러났다.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되는 가운데 동생 이회영이 국권수호운동에 나서자 이석영은 남산 쌍회정을 모임 장소로 제공하며 이회영의 활동을 지원하였다. 국외 무관학교 건립을 위해 서간도를 답사하고 온 이회영이 경술국치 직후 이석영에게 망명을 제안했고, 이석영은 형제들과 뜻을 모아 전 재산을 처분하고 일가족 60여 명과 서간도 망명길에 올랐다. 가문 차원에서 이루어진 이들의 집단 망명에는 이석영의 경제적 뒷받침이 큰 역할을 하였다. alt서간도 시종기(우당기념관 제공)alt서간도 재주 불령선인 조사(국사편찬위원회 제공)alt신흥교우보(新興校友報) 제2호(독립기념관 소장) 신흥무관학교 설립을 재정 지원하여 독립전쟁의 기반을 마련하다 중국 서간도 삼원보(三源堡) 추가가(鄒家街)에 정착한 이석영 6형제는 독립군 기지 건설에 착수하였다. 이석영은 1911년 4월 한인 자치 기관인 경학사 설립에 참여하였다. 같은 해 6월 이석영의 자금 지원으로 독립군 사관 양성 학교인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를 개교하였다. 이석영은 1912년 신흥강습소를 합니하(哈泥河)로 이전하여 중등 과정을 신설하는 등 교세 확장을 지원하였으며, 교주(校主)를 맡아 학교 경영에 나서기도 하였다. 일제의 탄압으로 1920년 신흥무관학교가 폐교되자 이석영은 서간도를 떠나 베이징, 상하이 등지를 전전하며 생활하였다. 독립군 양성에 일생을 바친 이석영은 노후에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리다 1934년 상하이 빈민가에서 80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정부는 선생의 공을 기리어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alt 「영석 이석영 씨 상해 객창에서 영면」(『동아일보』 1934.02.28.)(국사편찬위원회 제공) alt]]> Mon, 03 Aug 2020 20:12:05 +0000 44 <![CDATA[인종차별을 극복한 다이빙 영웅 새미 리(Sammy Lee) ]]> 글 유완식 독립기념관 자료부 학예연구관 인종차별을 극복한 다이빙 영웅 새미 리(Sammy Lee) alt 제24회 서울올림픽 당시, 새미 리의 게스트 카드(1988) 1948년 런던올림픽 당시 다이빙 10m 플랫폼에 출전하여 미국 대표팀에서 아시아계로는 처음으로 금메달을 딴 선수가 있었다. 바로 한인 이민 2세의 한국계 미국인 다이빙 선수였던 ‘새미 리(Sammy Lee)’였다. 새미 리는 런던 올림픽에 이어 1952년 헬싱키 올림픽에 출전하여 금메달을 따며 올림픽 다이빙 사상 최초의 2회 연속 금메달리스트가 되었다.그러나 다이빙 영웅에게도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을 극복해야만 했던 어려운 시절이 있었다. 1920년 켈리포니아주 프레즈노에서 하와이 사탕수수 이민자의 아들로 태어난 새미 리는 고교시절 유색인종에 대한 편견 및 인종차별에 대한 현실과 마주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2010년 미주동포후원재단이 수여했던 ‘자랑스러운 한국인상’ 수상 당시 새미 리의 수상소감에 나타난다. “그땐 인종차별이 심했습니다. 학교 친구들과 함께 식당에 가면 저만 제지를 당했고, 고등학교 졸업식 땐 무도회조차 참석할 수 없었습니다. 수영장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여, 우여곡절 끝에 수영장에 들어가 다이빙 연습을 할 수 있었습니다. 저의 수영 연습이 끝나면 물을 새로 받았습니다. 황인종은 더럽고 지저분하다는 이유로 말입니다.” 당시엔 유색인종의 수영장 입장이 일주일에 단 하루만 허용될 정도로 차별이 심했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새미 리는 수영장에 입장할 수 없는 날엔 물 대신 모래 위에서 점프하며 훈련을 거듭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쟁쟁한 미국 선수들을 제치고 대표 선수가 되었다. 인종차별이라는 큰 벽도 그가 세계적인 다이빙 영웅이 되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훗날 그는 LA 타임스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유색인종에 대한 편견은 나의 꿈을 막지 못했다. 오히려 나는 미국에서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기로 다짐하였다.”   인종차별을 극복하고 다이빙 영웅이 된 새미 리는 올림픽 출전 이후 대한민국과 자주 인연을 맺으며 대한민국 국가대표팀을 격려하였다. 그는 2010년과 2014년 대한민국 동계올림픽 유치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명예 홍보대사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2010년에는 한국인들에게 자신의 활동상을 알리기 위해 미국 대표로 올림픽 경기에 출전하면서 착용하였던 수영복 등 66점을 독립기념관에 직접 기증하였다. 이중 ‘1948년 런던올림픽 착용 수영복’ 등 6점이 등록문화재 제501호로 지정되었다. 한국계 뿐 아니라 아시아계 전체를 빛낸 자랑스러운 미국인으로 존경받던 새미 리는 2016년 12월 2일 폐렴 합병증으로 캘리포니아 뉴포트 비치의 자택에서 향년 96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백인들이 더 좋은 몸매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유색인종은 올림픽 다이빙 챔피언이 될 수 없다는 말을 듣고 너무 화가 나 그들이 틀렸다는 것을 입증해 보이고 싶었다.” 이 말은 2012년 제30회 런던올림픽 개막을 4일 앞둔 7월 23일 자 뉴욕타임스 특집호에 실린 것으로 1948년 런던올림픽 당시 미국 대표 새미 리가 남긴 메시지였다. 5피트 2인치(157cm)라는 작은 신장에도 불구하고 당시 백인들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다이빙에서 금메달을 목에 건 새미 리, 그는 차별이라는 벽을 의연하게 넘어선 진정한 영웅이었다.alt 런던올림픽 당시 ‘새미 리(Sammy Lee)’가 입었던 수영복(1948)[등록문화재 제501호] ]]> Wed, 29 Jul 2020 10:28:48 +0000 44 <![CDATA[지킨다는 것 ]]> 지킨다는 것 “우리 것을 쓰자.같은 값이면 다홍치마 무명베 두루마기와 무명치마우리가 만든 무명을 쓰자.”그렇게 한데 모여진 민중의 단결에도 우리는 일제의 거친 탄압에 후퇴해야만 했습니다.빛을 보지 못하고 뿌리 내린 단결이 이제와 다시 싹을 틔운 걸까요.새로 움튼 불매(不買)는 그날을 꼭 닮았습니다.오늘 우리가 먹고 입고 쓰는 것은 굳은 신념을 지켜내고 얻은 값진 대가임을 잊지 않겠습니다.내 것이, 내 것이 아니었던 그날을 가슴으로 기억하겠습니다.  ]]> Wed, 29 Jul 2020 10:23:21 +0000 44 <![CDATA[청년혈성단과 북미대한인유학생총회의 결성 ]]> 글 홍선표 나라역사연구소 소장청년혈성단과 북미대한인유학생총회의 결성 Ⅳ. 3·1운동 이후 재미 한인 사회의 변화 ③ 한인 청년들의 각성과 청년혈성단 결성3·1운동은 재미 한인 청년들의 심장에 독립운동의 불꽃을 타오르게 하였다. 1919년 5월 김정진, 최능진, 이용근, 최응선, 한장호 등 청년 23명은 피 흘려 독립을 쟁취하겠다는 굳은 의지를 보여주기 위해 샌프란시스코에 모였다. 이들은 “국혼이 있는 충의용감의 열혈 남녀를 단합하여 죽고 삶에 함께 함을 맹약하고 우리 독립 대사업을 기어이 이루기로 목적을 정하였나이다. 이러한 목적 아래 온갖 적당한 사업이면 무엇이든 행하여 보자 함이외다”라는 「청년혈성단취지서」를 발표하고 청년혈성단을 설립하였다. 청년혈성단은 4대 강령을 제정하였다. ‘새로 건설한 우리 공화정부를 위하여 혈성을 다 할 것’과 ‘대한인국민회의 주의 방침에 복종하며 특별 공헌할 것’이라 하여 3·1운동으로 새로 탄생한 임시정부와 독립운동에 앞장서고 있는 대한인국민회에 충성을 약속하였다. 그리고 ‘속히 우리 독립운동에 실용할 군사상·학술상 혹은 기예를 배울 것’과 ‘독립운동에 대하여 정의 인도를 무시하고 정신상이나 물질상으로 살도(殺道)하는 모든 해독물을 박멸할 것’이라 하여 독립운동에 필요한 군사상·학술상의 기예를 배워 정의와 인도를 해치는 모든 해독물을 박멸하겠다고 다짐하였다. 청년혈성단은 1919년 7월 14일부터 17일까지 3일간 버클리 한인학생양성소에서 발기인 대표회를 개최하였다. 대표회에서 이살음이 특별 연설을 했고 규칙을 제정하였으며 단장 황사선, 서기 신윤국으로 하는 내부 조직을 만들었다. 독립운동에 필요한 군사상·학술상의 기예를 배우겠다는 강령의 취지에 따라 단원들은 미국 내 비행학교와 미군 육군 항공대에 들어갔다. 먼저 이초, 이용근, 장병훈, 이용선, 한장호는 레드우드 비행학교에 입학하였고, 최자남은 미국 육군항공대에 들어가기 위해 샌디에이고 육군비행학교에 입교하였다. 군사상의 기예를 배워 장차 조국 독립에 헌신하겠다는 청년혈성단원들의 구국 열성은 본단에 참여하지 않고 있던 재미 한인 청년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오림하는 1919년 8월 스스로 레드우드 비행학교에 입학하였고, 노정민은 펜실베이니아주 애싱턴에 있는 미 해군 비행학교에, 우병옥은 디트로이트의 비행학교에, 박낙선은 리버사이드의 비행학교에 입학하였다. 청년혈성단은 본단의 설립 취지를 널리 알리기 위해 1919년 8월 17일 다뉴바에서 청년혈성단대회를 개최하였다. 이날 대회에 미국인들을 포함해 약 300명이 모였고 그 자리에서 청년혈성단의 정신과 목적 그리고 강령을 소개하였다. 또 ‘한국 혁명’이란 제목의 연극을 공연해 한국인의 독립정신을 고취하였다. 청년혈성단의 결성은 노백린이 1920년 2월 윌로스에 설립한 한인 비행학교의 설립에 큰 힘이 되었다. 비행술을 배우기 위해 레드우드 비행학교에 입학한 이초, 오림하, 이용근, 이용선, 한장호, 장병훈은 노백린의 독립전쟁론에 감화되어 졸업 후 윌로스 한인 비행학교의 교관으로 참여하였다. 노백린이 윌로스에 비행학교를 세울 수 있었던 것은 재미 한인들의 적극적인 재정 지원과 아울러 잘 준비된 항공 인력 자원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alt 시카고에서 개최된 제2회 북미대한인유학생총회 연회(1924.06.11~13.) 북미대한인유학생총회의 결성일제강점기 시기 한국인의 미국 유학은 거의 힘들었으나, 일제의 통제를 피한 미국 유학은 경술국치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그러다 3·1운동 이후부터 일제가 한국인의 해외 유학을 부분적으로 해제하면서 미국 유학은 급증하였다. 한인 유학생들의 도미가 이루어지자 유학생 단체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하였다. 처음으로 결성된 곳은 1912년 12월 시카고에서였다고 하나 그 실체가 분명하지 않다. 그러던 중에 1913년 6월 4일 네브래스카 주 헤스팅스에서 한인소년병학교를 설립해 운영하던 학생들이 헤스팅스대학에 모여 한인 학생대회를 개최하고 한인학생동맹(초대 의장 박처후)을 설립하였다. 최초의 유학생 단체로 알려진 한인학생동맹은 연 2회의 학생 영문잡지를 발간하기로 하고, 1914년 6월 『한인학생평론(The Korean Student`s Review)』을 창간하였다. 『한인학생평론』은 1916년까지 발간되고 종간되었는데, 이로 보아 한인학생동맹도 이때까지 유지한 것으로 보인다. 학생 단체가 다시 결성되는 때는 제1차 세계대전이 종결된 직후이다. 1918년 12월 30일 오하이오의 콜럼버스에 모인 학생들은 파리강화회의가 개최될 때 민족자결의 원칙이 약소민족들에게 적용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고 이를 대비하기 위한 방안으로 북미한인학생연맹(회장 이춘호)을 결성하였다. 그런 후 1919년 2월 11일 학생 영문잡지 발간을 위한 발기대회를 거쳐 1919년 3월 처음으로 『Freedom and Peace with Korea Under Japan』이라는 잡지를 발행하였다. 이것은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의 재정 지원을 받아 파리강화회의 기간 동안 한국의 독립 문제를 호소하기 위해 한시적으로 발행하는 것으로 5월까지 3회 발행되었다. 이후 서재필이 필라델피아에 한국통신부를 설립하자 같은 해 6월부터 『한국평론(Korea Review)』으로 다시 발간되었다. 이 일로 기존의 북미한인학생연맹은 유명무실해졌으나 『한국평론』의 편집과 발행은 서재필의 지도 아래 학생들이 맡았다.  3·1운동의 발발로 미주 한인사회에 독립운동의 열기가 고조되자 한인 유학생들은 전체 학생들을 결집하기 위한 단체 결성에 나섰다. 먼저 1919년 9월 26일 샌프란시스코에서 한인학생공동회를 열고 ‘학생연합회’(임시위원장 김현구)를 발기하였다. 이와 비슷한 시기에 시카고의 학생들은 ‘미주한인유학생회’(회장 곽림대)를 발기하였다. 두 단체가 거의 동시에 발기된 후 김현구와 곽림대는 상호 통합을 위한 시도를 펼쳐 1920년 4월 ‘대한인학생연합회’를 조직하기로 하고 헌장 기초안을 마련하였다. 헌장 기초안에 따르면 새로 신설될 학생 단체의 이름을 ‘대한인북미유학생회’로 정하였다. 또 본부를 캘리포니아에 두되 경우에 따라 이동할 수 있도록 했고 『대성』이란 학생 월보 발간도 계획하였다. 그러나 1920년 8월 25일까지 한정한 헌장 기초안에 대한 가부가 학생들의 참여 부족으로 확정되지 못하였다. 임시 총무였던 남궁염과 이용직은 1920년 11월 11일 「북미대한인유학생포고서」를 발표하고 전자의 대한인학생연합회의 헌장 기초안을 토대로 새 헌장을 만들어 전체 학생들의 동의를 구하였다. 그리하여 1921년 4월 30일 하와이·샌프란시스코·윌로스·로스앤젤레스·파크빌 등 11개 지역 학생 대표들이 뉴욕에서 임시총회를 열고 ‘북미대한인유학생총회’를 결성하였다. 초대 회장은 최다 득표를 얻은 이용직이 선출되었고 부회장은 차점자인 조병옥이 선정되었다. 북미대한인유학생총회는 국내의 정치·사회문제에 중립을 지키고 지덕의 수양과 친교를 설립 목적으로 한다고 하였다. 그렇지만 영문 월보 『The Korean Student Bulletin』(1922. 12.∼ 1941. 04.), 국문 잡지 『우라키』(1925∼1936), 격월간 영문 잡지 『The Free Korea』(1942. 04.∼1944. 04.) 등을 발간하고 1923년부터 매년 여름 정기적으로 유학생대회를 개최하며 독립정신을 일깨움으로써 광복 대업을 이루어가는 데 힘썼다. 3·1운동은 청년들의 각성을 불러일으켜 재미 한인사회에 독립운동의 저변과 다양성을 확대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 Mon, 03 Aug 2020 20:15:35 +0000 44 <![CDATA[영원한 독립군 김준엽과 동지 민영주 ]]> 글 김형목 사단법인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이사영원한 독립군 김준엽과 동지 민영주스무 살 초반 학병으로 징집된 김준엽은 중국 전선으로 보내져 일본군 경비중대에 배속된다. 이후 입대 전부터 준비하였던 주도면밀한 계획을 성사시켜 탈출에 성공하고, 염원하던 김구를 만난 뒤 이범석 장군의 부관이 되어 독립군 특수훈련을 받게 된다. 그리고 이 장군의 비서로 일하던 민영주와 인연이 되어 결혼까지 하게 된다.alt OSS 대원들(노능서, 김준엽, 장준하) 학도병에서 영원한 독립군으로 다시 태어나다 김준엽은 1920년 8월 26일 평안북도 강계에서 태어나 신의주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어릴 때부터 재주가 출중하여 주위 친구들로부터 많은 부러움을 받았다. 고등보통학교 시절부터 일제의 식민지배에 대한 비판적인 인식과 아울러 항일의식에 충만하였다. 왜곡된 현실을 타개하는 방안은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는 격언을 가슴에 새기고, 일본 유학길에 올라 게이오대학(慶應大學)에 입학하여 학업에 충실하였다.일제는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후 전선이 확대되자 인적·물적으로 부족한 상황으로 내몰렸다. 중등교육기관은 군사교육을 강화하는 등 ‘병영기지’나 다름없었다. 교련경연대회를 통하여 학생들에게 제국주의를 타도하고 새로운 국제 질서를 만들려는 성스러운 전쟁이라고 강변하는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이제 교육기관은 전쟁에 필요한 인적 자원을 육성하는 군수기지로 변질되었다. 학도지원병제 실시는 학생들을 전쟁터로 내몰기 위한 수단 중 하나였다. 만약 여기에 응하지 않을 경우에는 본인은 물론 가족 등에게 협박을 일삼았다.재학 중이던 1943년 한국인 학생 강제징병에 따라 학도병으로 끌려갔다. 학도병은 말만 자원입대일 뿐 강제징집이었다. 학병들은 출신끼리 모여 친일파 청산을 요구하면서 활발히 활동하였다. 김준엽은 지원할 때 이미 탈출을 결심하고 있었다. 중국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에서 탈출하여(학병탈출 제1호), 장준하 등과 함께 린취안(臨泉)을 거쳐 충칭(重慶)으로 가는 7개월에 걸친 6,000리 대장정에 돌입하였다. 일본군 검문을 통과하기 위해 중국인 농민이나 상인으로 위장한 채 밤을 이용한 고난에 찬 행진이었다. 무사히 충칭에 도착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광복군(총사령관 지청천) 일원이 되었다.altOSS 특수훈련을 앞두고국내정진군으로 항일운동 최전선에 나서다윤봉길 의거 이후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충칭에 안착할 때까지 8년간 중국 각처로 이동해야만 하는 운명이었다. 임시정부는 1940년 9월 17일 가릉빈관에서 한국광복군총사령부 성립전례를 거행하였다. 비로소 군대를 가진 정부로서 거듭나는 결정적인 계기를 맞았다. 총사령부는 11월에 시안으로 이전하여 4개 지대로 편성하는 등 인력 충원에 박차를 가하였다.장준하·노능서·김유길 등과 한국광복군 훈련반에서 정신교육과 군사훈련을 받았다.  군사훈련은 중국군 장교와 중국육군군관학교 출신 장교들이 담당하였다. 정신교육은 김학규·이평산·조평산 등이 맡았다. 한국독립운동사, 임시정부의 연혁과 건국 강령, 세계혁명사 등은 항일투쟁정신과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이들은 잡지를 간행하는 등 독립군으로서 자신감과 사명감을 일깨우는 데 앞장섰다. 학병은 대부분 중국어·일본어에 능통하였고, 영어를 구사하는 어학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제2지대 대원과 학병은 미군 첩보전략사무국(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과 국내 진공작전을 실시할 수 있는 굳건한 기초가 되었다.1945년 4월 말에는 19명의 동지들과 함께 OSS 훈련을 받기 위하여 시안의 제2지대와 합류하였다. 전세도 급박하게 돌아가 5월에 독일은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였다. 연합국은 포츠담에 모여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였으나 이를 묵살하자 미국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하였다. 마침내 일본이 무조건 항복함으로 한국인은 암울한 식민지배에서 벗어났다.이에 부응하여 임시정부는 광복군의 장래와 향후 대책을 강구하였다. 임시정부는 국내정진군(國內挺進軍)으로 편성하여 한반도에 진입시키기고자 결정하였다. 이는 일본군 무장을 해제하고 치안을 유지하여 건국의 기틀을 마련하려는 의도와 맞물려 있었다. 국내정진군은 OSS팀과 제2지대 대원으로 모두 94명이었다. 총지휘에는 이범석이 임명되었다. 이들 임무는 국내 질서유지, 일본군 무기 접수, 임시정부 귀국을 위한 기반 조성 등이었다. 한국인 파견 대원은 처음에 7명이 선발되었으나 비행기의 적재 무게 한계로 김준엽을 비롯한 이범석·장준하·노능서 등 4명과 미군 18명 등 모두 22명이었다. 8월 16일 처음으로 시안을 출발하여 한반도로 향하였으나 ‘가미가제 특공대’가 활동하고 있다는 정보에 따라 회항할 수밖에 없었다. 8월 18일 시안을 출발한 비행기는 12시경 여의도 비행장에 착륙하였다. 너무 벅찬 순간이었으나 희망은 좌절감으로 돌변하였다. 미국 극동군사령부의 종전 처리 지연으로 뜻대로 임무를 수행하기 어렵게 되었다. 이들 일행을 맞이한 것은 무장한 일본군이었다. 이들은 일행을 포위하고 서울 진입을 허용하지 않는 고압적인 자세였다. 이튿날 여의도 비행장을 이륙한 비행기는 중국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8월 20일 쿤밍 OSS 본부는 버드에게 즉시 서울에 다시 돌아가 설사 일본군에 의해 일시적으로 억류되는 한이 있더라도 한국에 머물도록 명령하였다. 그는 서울로 진입은 독수리작전 요원 22명 전원에 대한 ‘사형 집행’이나 다름없다고 주장하였다. 28일 독수리팀은 시안으로 복귀하여 국내진공작전은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이리하여 우리 힘으로 일본군을 몰아내고 자유로운 대한민국을 건국하려는 꿈도 좌절되는 순간이었다.『장정』에서 학도병 탈출기를 복원하다이 책은 해방 직후가 아닌 시절에 자신의 탈출기를 출판하였다. 총장 퇴임 후 가장 먼저 한 일은 회고록 집필이었다. 1944∼1945년 풍찬노숙(風餐露宿)했던 독립운동가들의 마지막 광경을 지켜본 지사는 당시에 대한 기록(『장정』의 1, 2권 ‘나의 광복군 시절’)을 남기는 일을 자신의 임무로 여겼다. 단순히 과거를 회고하기 위함이 아니고 새로운 시대 변화에 부응하여 청소년들에게 항일운동의 실상을 알리고 독립정신을 일깨우기 위함이었다. 당시는 유신정권과 군부 독재 정치로 민주주의라는 말조차 금기되는 참담한 현실에 직면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과거 식민 지배하에 조국의 광복을 위해 분투하였듯이 반독재 민주화투쟁에 매진한 결연한 의지의 표명이었다. 이후 지사는 학문 연구와 더불어 유신독재체제의 시퍼런 서슬 아래에서 반독재 민주화투쟁에 앞장섰다. 현실을 회피하거나 힘든 인생역정을 결코 외면하지 않는 진정한 학자였다. 다음은 교육자로서 독립정신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일갈이다. 군부독재정권의 국무총리직 제의를 단호하게 거절하면서 “나는 교육자다. 이 나라 민주주의를 외치다 투옥된 많은 학생이 아직도 감옥에 있다. 제자가 감옥에 있는데 스승이라는 자가 어떻게 그 정부의 총리가 될 수 있겠는가.” 이리하여 연구와 실천을 병행하는 자기 자신에 충실한 존경받는 인물로서 자리매김하였다.민영주 지사와 인연을 맺다민영주는 1923년 8월 5일 중국 상하이에서 독립운동가이며 임시정부 비서실장을 지낸 민필호(閔弼鎬)의 장녀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신규식의 비서로 임시정부의 외교업무를 보좌하고, 항일정신과 독립운동가의 활동을 국내와 만주·미주에 알리는 데 노력하였다. 이러한 분위기로 일찍부터 항일의식에 눈을 떴다.1940년 9월 17일 한국광복군 총사령부가 창설되자 광복군에 입대하였다. 1942년 1월에는 임시정부 내무부 부원으로 파견되어 근무했다. 충칭방송국(重慶放送局)을 통한 심리작전 요원으로 활동하였다. 1944년에는 한국독립당에 가입하여 임시정부 주석판공실 서기로 파견 근무하였다. 자기 역할에 충실한 지사의 활동은 임시정부 요인들에게 희망을 심어주었다.1945년 4월에 광복군 제2지대에 편입되어 복무하였다. 여성 광복군으로서 활동은 오늘날 여권신장을 이룬 조그마한 초석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김준엽 독립군과 백년가약을 약속한 든든한 후원자였다. 국내정진대에 편성되어 죽을지도 모르는 험지로 김준엽 지사가 과감하게 택할 수 있었던 용기는 여기에서 엿볼 수 있다. 민영주 지사는 1977년 건국포장을 수여받았으며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다. 현재 생존해 계시며 파주시 탄현면 자유로 요양병원에서 요양 중이다. 건강이 회복되어 지사님의 발자취가 새롭게 조명되기를 기대한다.alt 민영주 여사와 훈장 독립정신으로 후학 양성에 진력하다해방 이후 교육에 뜻을 두어 중국에 남아 1946년 중국국립 동방어문 전문학교의 한국어 강사를 시작으로 교육계에 발을 디뎠다. 1949년 난징(南京)의 국립중앙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하고, 1955년 국립타이완대학교 역사연구원을 수료하였다. 1949년부터 고려대학교 문리과대학 사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월간 『사상계』의 편집위원·주간 등을 역임하며 수많은 집필 활동을 하였다. 『한국공산주의운동사』, 『중국공산당사』, 『중국 최근세사』 등과 같은 역저도 저술하였다.  김준엽은 ‘현실에 살지 말고 역사에 살라’를 좌우명으로 삼았다. 후학들에게 이런 말도 남겼다. “역사의 신을 믿으라. 정의와 선과 진리는 반드시 승리한다.” 대학교 총장 시절에 학생들 보호에 남다른 노력은 독립정신을 실현한 화신이나 다름없는 존재였다.alt한미공동작전을 위한 OSS 양측 수뇌부]]> Mon, 03 Aug 2020 20:14:20 +0000 44 <![CDATA[배중손과 삼별초의 항쟁 ]]> 글 김종성 역사작가 배중손과 삼별초의 항쟁 몽골 기마대에 유라시아대륙이 무릎을 꿇고 팍스 타타리카(Pax Tatarica)*라는 새로운 세계질서가 수립되던 서기 13세기에도 고려왕조는 끝까지 국체를 유지하였다. 40년 항쟁 도중에 강화조약을 맺고 사대관계를 체결하기는 했지만, 한민족은 몽골의 지배에 끝까지 저항하였다. 한민족이 그런 기질을 발휘하는 데 기여한 인물과 집단 중 하나가 배중손과 삼별초다. *팍스 타타리카(Pax Tatarica)라틴어로 ‘몽골이 주도하는 평화’를 의미하는 이 말은 13~14세기에 몽골제국이 유라시아대륙 상당 부분을 지배할 당시 사회·문화·경제적으로 지역 간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정치적 안정과 질서를 되찾은 것을 의미한다. alt삼별초의 대몽항전 기록화배중손과 삼별초의 등장 배경삼별초의 지도자 배중손이 역사 기록에 등장하는 기간은 항몽 전쟁 막바지인 1270~1271년, 2년밖에 되지 않는다. 이 짧은 시간에 그는 삼별초를 이끌며 매우 굵직한 행적을 남겼다. 『고려사』 배중손 열전은 “배중손은 원종 때 여러 관직을 거쳐 장군에 이르렀다”는 말로 시작한다. 원종이 즉위한 연도이자 고려 왕실과 몽골이 강화조약을 체결한 1260년부터 배중손은 몇 단계 승진을 거쳐 장군 자리에 올랐다. 무인들이 쿠데타를 일으킨 1170년 무신정변 이후 고려에는 사실상 두 개의 정부가 공존하였다. 왕이 이끄는 조정과 무인들이 이끄는 무신정권이 그것이다. 그런데 고려와 몽골의 전쟁이 발발한 지 27년 뒤인 1258년에 김준이 최 씨 정권을 무너트리고 무신정권의 지도자가 되면서부터 무신정권과 조정은 타협을 모색하였다. 이런 상태에서 원종 임금이 무신정권과 함께 1260년의 강화조약을 성사시켰다. 하지만 이것은 최종적 의미의 평화조약이 아니었다. 몽골의 지배를 거부하는 전쟁은 1273년에야 최종적으로 종결되었다.몽골과 싸우던 시기에 고려의 수도는 개경이 아닌 강화도였다. 지금도 강화도에는 고려궁지(高麗宮址)라는 이름의 고려 궁터가 남아 있다. 1260년 조약 후에도 고려의 수도는 여전히 강화도였다. 당시만 해도 몽골인들이 바다에 약했기 때문에 강화도를 지키는 한 무신정권은 몽골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다. 그런데 원종은 1270년에 개경 환도를 단행하였다. 그는 몽골의 지지를 받았기 때문에 강화도보다 개경이 더 유리하였다. 배중손과 삼별초가 역사의 전면에 나선 것은 바로 이때였다. 배중손과 삼별초의 선택배중손 열전은 “원종 11년(1270년)에 국도를 개경으로 다시 옮길 당시 방을 붙여 일정한 기일 내에 모두 개경으로 돌아가라고 독촉하였지만, 삼별초는 딴 생각을 품고 복종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무신정권 특수부대인 삼별초가 독자적 노선을 표방한 것이다. 『고려사』에는 삼별초 말고도 마별초·야별초·전봉별초·별초도령 등의 부대가 등장한다. 별초는 지금으로 말하면 특수부대·결사대·선봉부대와 같다. 이 중에서 삼별초는 야별초를 확대·개편한 부대였다. 군사 부문의 역사를 정리해놓은  『고려사』 병지(兵志)는 이 제도가 최 씨 무신정권의 제2대 지도자인 최우(최이) 때 생겨났다고 말한다. “최우가 나라에 도적이 많음을 근심하여 용사들을 모아서 밤마다 순행시켜 폭행을 금지하였으니, 이것을 야별초라 불렀다. 그 후 도적이 각지에서 일어나자 … (중략) … 나중에는 좌우 별초로 나누게 되었다. 또 고려 사람으로서 몽골에서 도망쳐 돌아온 사람들을 모아 한 개 부대를 조직하여 신의군이라 하였는데, 이것들을 통틀어 삼별초라 하였다.”좌우 별초와 신의군으로 구성된 삼별초는 개경 환도를 거부하였다. 개경 환도는 항몽 전쟁의 포기를 의미하는 것이자 무신정권의 종말을 뜻하는 것이었다. 삼별초의 환도 거부에 대해, 원종은 삼별초 해산으로 응수하였다. 하지만 배중손은 이 조치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삼별초 병사들과 민간인들을 규합해 항몽 투쟁을 계속 이어갔다. 배중손 열전에 따르면 “나라를 도우려는 사람들은 모두 모이라”고 호소하였고, 이에 많은 사람이 적극적으로 호응하였다. 이는 1,000여 척의 배에 탑승할 만한 사람들이 삼별초에 합류하였다는 배중손 열전의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역사 속으로 사라진 꿈배중손과 삼별초는 강화도에서 항몽 전쟁을 지속하고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고 싶었다. 그들은 왕족인 왕온을 군주로 추대하여 새로운 정부를 구성하였고, 강화도를 수비하는 데 주력하였다. 하지만 왕명을 어길 수 없었던 삼별초 외의 병력이 이미 강화도를 떠난 뒤였다. 삼별초만으로 강화도를 지키는 게 무리라고 판단한 배중손과 삼별초는 새로운 근거지를 찾았다. 바로 전라도 진도였다. 이들은 강화도를 떠나 진도로 거점을 옮겼다. 배중손 열전에서는 이들이 강화도를 떠날 때 수많은 민간인과 재물을 실은 1,000여 척의 배가 뒤따랐다고 말한다. 신라의 장보고가 완도에서 꿈을 품었다면, 배중손과 삼별초는 진도에서 꿈을 품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들은 진도 인근 지역을 영향권 하에 두고 일종의 해상왕국을 세웠다. 배중손 열전은 “적들은 진도로 들어가 근거지로 삼고 인근 고을들을 노략질하였다”고 말한다. 삼별초가 ‘적’으로 표기된 것은  『고려사』를 편찬한 조선 정부가 삼별초를 반군으로 규정했기 때문이다. 무신정권에 대한 문신들의 불편한 시각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몽골은 삼별초의 왕국을 좌시하지 않았다. 1271년, 몽골은 원종과 연합해 진압군을 진도에 파견하였다. 배중손 열전은 삼별초 주력부대가 이 전투에서 패하였다고 설명한 뒤 “적장 김통정이 패잔병을 거느리고 탐라로 들어갔다”고 말한다. 배중손 열전에는 배중손의 최후가 자세히 언급되지 않았다. 김통정이 새로운 지휘자로 등장하였다는 점만 알려줄 뿐이다. 이는 진도 전투에서 배중손이 전사했음을 추정케 한다. 그가 투항했을 거라는 해석도 있지만, 그런 증거는 없으므로 삼별초 주력부대의 패전과 함께 배중손도 전사하였다고 보는 게 합리적인 해석이다. 배중손을 잃은 삼별초 잔여 부대는 2년 뒤 탐라에서 최종 공격을 받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항쟁의 역사적 의미1273년에 배중손과 삼별초가 패배하면서 42년간에 걸친 고려인들의 항몽 투쟁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들의 투쟁은 결국 실패하였지만, 관점을 달리해보면 결코 실패한 게 아니었다. 그들의 격렬한 저항은 몽골인들에게 강력한 인상을 심어주었다. 유라시아대륙 대부분의 민족이 몽골 앞에 무릎을 꿇는 상황에서도 배중손과 삼별초는 끝까지 싸우다 장렬히 전사한 것이다. 이 때문에 몽골은 고려인들에게 두려움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배중손과 삼별초가 몽골인들에게 부담을 안겨주었다는 점은 이후 친몽골파에 의해 제기된 입성론(入省論)이 몽골 조정에 의해 번번이 좌절된 데서도 나타난다. 입성론은 고려를 몽골의 1개의 성으로 만들자는 주장이었다. 중국인의 관점에서 기록된 몽골 원나라 역사서인 『원사』의 왕약 열전에 따르면, 몽골 정부는 “그렇게 해봐야 고려 백성들이 사납게 돌변하면 우리 힘만 소모하게 된다”며 입성론 논의를 중지시켰다. 배중손과 삼별초가 몽골인들에게 그런 인상을 심어주고 고려의 국권을 유지하는 데 기여했던 것이다. 배중손과 삼별초는 그 누구에도 맞서 싸우며 자기 땅을 지켜내는 한민족의 근성을 보여주는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alt강화 고려궁지]]> Mon, 03 Aug 2020 20:16:11 +0000 44 <![CDATA[칼의 노래 통영 바다에 퍼지다 ]]> 글·사진 임운석 여행작가칼의 노래통영 바다에 퍼지다통영은 250개의 크고 작은 섬을 품은 지역이다. ‘가지 많은 나무 바람 잦을 날 없다’는 말처럼 통영은 우리 역사와 그 궤를 같이해왔다. 특히 통영에서 가장 큰 섬으로 알려진 미륵도 정상에 오르면 1592년(선조25) 7월 8일 한산도 앞바다에서 조선 수군이 일본 수군을 대파한 한산도대첩의 현장을 내려다볼 수 있다. 한산도 수루에 올라 학익진을 펼쳤던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발자취를 따라 통영으로 향한다. alt 미륵산 전망대에서 바라본 한려수도 통영 쪽빛 바다를 한눈에초등학교를 ‘국민학교’라고 부르던 시절이 있었다. 그 무렵 교내에는 동상 서너 개가 항상 있었다. 그중 하나가 이순신 장군의 동상이었다. 이순신 장군의 동상은 경복궁 앞 광화문광장에서도 볼 수 있다. 그만큼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존경할만한 위대한 인물의 표상이다. 이순신(1545~1598) 장군은 임진왜란을 맞아 파죽지세로 밀려오는 왜적에 맞서 풍전등화와 같은 나라를 구한 민족의 영웅이다. 지혜롭고 총명하며 불의 앞에 물러서지 않는 충절의 상징이다. 통영은 진주대첩, 행주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 대첩인 한산도대첩이 일어난 역사의 현장이다. 한때 피비린내가 진동했을 바다는 이제 과거를 잊은 듯 아름다운 쪽빛으로 물들어 있다. 그 아름다운 풍경을 조망하고 싶다면 미륵도의 지붕 미륵산(458.4m)을 찾아볼 일이다. 미륵산에서는 한려해상국립공원이 한눈에 내려다보여 통영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필수 코스다. 여름에도 케이블카를 이용하면 손쉽게 오를 수 있으니 더위 걱정은 잠시 접어둬도 좋겠다. 이곳 케이블카는 길이가 무려 1,975m로 국내 최장이라 손꼽힌다. 승차장에서 하차장까지 10여 분 정도 외줄에 매달려 오르다 보면 시원한 풍경이 한눈에 담긴다. 이후 케이블카에서 내려 15분 정도 오르면 미륵산 정상이다. 나무데크가 설치되어 있어 큰 어려움 없이 정상에 오를 수 있다. 오르는 길목마다 한려수도 전망대, 통영항 전망대 등을 감상할 수 있는 전망 포인트가 있고, 통영이 낳은 소설가 박경리의 문학관과 묘소가 내려다보이는 쉼터도 있다. 주말에는 케이블카 이용객이 많은 편이니 되도록 오전 중에 이용하는 편이 좋다. 등산을 하고 싶다면 편도탑승권을 끊고 용화사를 들머리로 출발하면 된다. 이후 관음암, 도솔암을 거쳐 미륵산 정상에 도착한다. 크게 부담스럽지 않은 코스와 시간이다. 무엇보다 미륵산의 깊은 속내를 살펴볼 수 있어 더위를 잊은 채 많은 사람이 산을 오른다.  alt충무김밥거리에서 만난 통영 원조 충무김밥alt한산도 가는 길에 만난 거북등대alt한산도 제승당한산대첩의 중심지 한산도좀 더 가까이에서 이순신 장군과 호흡하고 싶다면 한산도 제승당을 찾아보자. 제승당은 임진왜란 당시 경상도·전라도·충청도 3도의 수군을 통솔하는 통제사인 이순신 장군이 삼도 수군을 지휘하던 진영이다. 그러니 한산대첩의 중심지나 다름없다. 먼저 한산도에 가려면 통영 시내에 있는 통영항 여객선 터미널에서 배를 이용해야 한다. 배를 타기 전에 충무김밥과 생수를 준비하면 간단히 한 끼를 해결할 수 있다. 전국 고속도로 휴게소는 물론이고 편의점에까지 진출한 충무김밥은 통영이 원조다. 김밥이 쉽게 상하는 것을 막기 위해 김밥과 속을 따로 차려내는 것이 충무김밥의 특징이다. 속 역시 꼴뚜기나 오징어, 어묵 등 현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식재료를 사용한다. 강구안에 충무김밥거리가 조성돼 있다. 통영군과 충무시는 1995년 통합하여 통영시가 되었지만, 충무김밥은 이름을 바꾸지 않고 옛 이름 그대로 부르고 있다. 배를 타고 가다가 한산 앞바다를 지키고 있는 거북등대를 지나면 제승당 선착장이 보인다. 선착장에서 제승당까지 가는 길은 여유롭다. 첫 관문인 대첩문을 지나면 깊은 숲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우거진 숲길을 마주한다. 이후 충무문을 지나면 제승당에 이른다. 건물은 1930년대에 중수한 뒤 1976년에 정비한 것이다. 제승당 실내에는 한산도대첩을 비롯한 여러 해전을 묘사한 그림들이 큼지막하게 걸려있다. 바다 쪽에는 적의 동정을 살피기 위한 수루가 있고 바다를 향한 처마 아래에는 교과서에 나오는 이순신 장군의 시조가 걸려있다. 시조를 곱씹으며 깊이 읊조려 본다.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홀로 앉아긴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하는 차에 어디서 일성호가는 남의 애를 끓나니시조는 고뇌하는 인간 이순신과 장군 이순신의 모습이 여러 갈래로 가지를 뻗어 시름하는 이순신의 모습으로 형상화된다. 김훈 작가 역시 그런 관점에서 소설을 쓰지 않았을까. 김훈 작가는 소설 『칼의 노래』에 등장하는 이순신 장군을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인물로 그려내지 않았다. 소설에서 이순신 장군은 인간적 고뇌와 갈등으로 힘들어하는 지극히 평범한 사내로 묘사되었다. 이순신 장군은 참혹하고 참담한 전장 중심에 서서 나라를 지켜내야 했고, 그가 감당해야 할 운명은 너무나 거대했고 난폭하였으며 치명적이었을 것이다. 김훈 작가가 묘사한 인간 이순신의 모습은 그러하다.alt적의 동정을 살피기 위한 제승당 수루alt제승당 내 이순신 장군 초상화alt강구안에 위치한 이순신공원수군 군사도시의 발자취한산도를 찾는 사람 중에는 망산(293.5m) 트레킹이 목적인 사람도 여럿 있다. 한산면 두억리에 있는 망산은 정상까지 약 3.9km이며 4시간 정도 걸린다. 등산로가 잘 정비되어 있고 구간마다 쉼터가 잘 조성돼 있다. 또 정상부에 있는 휴월정에 오르면 인근 섬이 손에 잡힐 듯 또렷하게 보인다. 한산도 탐방을 끝내고 다시 강구안에 도착한다. 이곳에서는 이순신 장군과 연계된 관광지를 돌아볼 수 있다. 먼저 이순신공원은 바다와 어우러진 수변공원으로 가볍게 산책하기에 좋다. 가슴이 뻥 뚫릴 정도로 시원한 풍경이 일품이다. 통영 여행의 허브인 문화마당에 가면 거북선 체험을 할 수 있다. 임진왜란 당시 사용했던 무기와 당시 수군들의 군복을 입어보는 체험 코너도 운영한다. 세병관은 1603년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으나 이후 삼도수군통제영의 객사로 이용되었다. 통영에는 이순신 장군의 흔적을 되짚어볼 만한 곳이 많다. 그 이유는 통영이 조선시대에 계획된 수군 군사도시라는 점이다. 여행은 ‘아는 만큼 느끼고 깨닫는다’고 한다. 통영을 방문할 때 군사도시로서의 역사적 가치를 알고 간다면 통영 여행이 더욱 깊이 있게 느껴질 것이다. alt이순신 장군 동상alt강구안 문화마당에 정박 중인 거북선 ]]> Mon, 03 Aug 2020 20:16:48 +0000 44 <![CDATA[일제의 조작극 105인 사건 ]]> alt]]> Thu, 27 Aug 2020 15:17:20 +0000 45 <![CDATA[일제 침략자들의 음모 ]]> 글 은예린 역사작가일제 침략자들의 음모 105인 사건 대중선동의 귀재인 나치 독일의 선전 장관 파울 괴벨스는 다음과 같은 끔찍한 어록을 남겼다. “우리가 어떤 나라에 쳐들어가면 그 나라 국민은 자동적으로 세 부류로 나눠지는데, 한쪽은 저항 세력(resistance), 다른 한쪽은 협력 세력(collaborator)이며, 그 사이에 머뭇거리는 대중(masses)이 있다”고 하였다. 괴벨스는 침략 대상국 국민들에게 자신들의 부가 약탈되는 것을 참고 견디게 하려면 대중이 저항 세력을 돕지 않고 협력 세력에 가담하도록 유도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일제, 한민족 말살정책을 펼치다불행하게도 우리 역사의 한 페이지인 일제강점기에도 괴벨스의 주장과 일치하는 현상이 일어나고 말았다. 안중근이나 이봉창 등과 같은 독립운동가들이 저항 세력으로, 이완용을 위시한 을사오적과 노덕술 등의 수많은 협력 세력이 존재하였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대중들은 온갖 착취와 혼란을 겪으며 힘들어하고 있었다. 지우고 싶지만 지울 수 없는 비참한 우리 역사의 치욕스러운 흙탕물은 일제 침략자들보다 그들에게 협력한 친일파의 매국행위였다. 같은 민족이 서로 끌어안고 보듬으며 일제를 물리치기엔 너무 버거운 현실이었다. 그럼에도 친일파는 오직 자신들의 출세와 기득권을 위해 조그마한 개인적인 양심마저 내팽개쳤다. 저들은 독립운동가들에게 같은 민족으로서 상상할 수 없는 잔혹한 고문도 서슴지 않았다.일제는 우리나라를 침략하면서 친일파들과 작당하여 경제적 침략과 더불어 정신적으로도 불구가 되도록 더러운 계략을 꾸미기 시작하였다. 식량과 토지의 강제적 약탈을 시작으로, 젊은이들의 노동력을 강제로 착취하고, 여성들을 전쟁에 동원하여 군인들의 희생양으로 삼았다. 심지어 사람을 의학 실험의 도구로 삼는 등 차마 인간으로서 상상할 수 없는 만행을 일삼았다. 이와 더불어 우리의 말과 글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민족말살정책을 병행하였다. 각종 사건을 조작하여 무고한 우리 민족을 고문하고 살인하는 행위는 다반사였다. alt105인 사건으로 압송되는 신민회원들(1911. 9.) 지록위마로서 공포 분위기를 조장하다지록위마(指鹿爲馬)라는 고사성어를 떠올려 보자.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고 하는 것이다. 곧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로 만들어 강압적으로 인정하게 하는 것을 뜻한다. 일제 침략 세력과 친일파는 진실이 아닌 사건을 조작하여 사실로 인정하도록 한민족을 괴롭혔다. 강제병합 직후 어수선한 상황에서 조작된 대표적인 사건은 ‘105인 사건(일명 데라우치 총독 암살미수사건)’이다. 일제는 처음에 식민지 근대화론을 펼치며 미개한 조선을 발전시키기 위한 일환으로 식민지배를 정당화하는 흑색선전을 반복적으로 강변하였다. 식민지 노예교육 등을 통하여 청소년들에게 이를 무의식중에 받아들이도록 대대적인 선전과 조작에 혈안이었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치밀하고 조직적으로 사건을 조작하여 대중들을 공포에 떨게 하였다. 폭압적인 공포 분위기 만연으로 한반도는 창살 없는 감옥이나 다름없었다. alt법정으로 끌려가는 신민회원 일제는 신민회 세력에 주시하다을사늑약 이후 서북지역은 신민회와 기독교인들을 중심으로 교육 계몽운동이 크게 확산되었다. 일제는 항일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사건을 조작하기에 이르렀다. 1910년 12월에는 군자금을 모금하다 잡힌 안명근의 사건을 확대·날조하는 등 서북지역 배일기독교인과 신민회 회원을 체포한 안악사건을 조작하였다. 대한제국의 최대 비밀결사단체인 신민회 조직을 탐지한 후 탄압하기 위한 105인 사건이다.신민회는 1907년 초에 안창호·양기탁·이승훈 등이 조직한 항일단체였다. 목적은 독립사상의 고취, 국민 역량의 배양, 청소년 교육, 민족 자본 육성 등을 통한 민족 실력 양성이었다. 일제는 총독을 암살하려 했다는 풍문을 조사하던 중 평양·선천·정주 등에서 기독교학교 교사와 학생 등이 총독을 암살하려 했다고 날조하였다.일제는 1910년 8월 이래 신민회 본부의 지휘로 다섯 차례에 걸쳐 ‘총독 암살 계획’이 추진되었다고 강변하였다. 평양·선천·정주 등 9개 도시에서 사건 날조에 필요한 자금과 무기를 구입하는 등 준비 작업을 수행하였다. 압록강철교 개통식 참석을 위한 데라우치 총독의 서북지방 방문을 계기로 대원들이 준비한 단총으로 총독 암살을 도모하였다고 암살미수죄 혐의를 뒤집어씌웠다. alt양기탁 / 임치정 / 선우훈 조작·날조로 105인 사건을 확대하다일제는 1911년 9월부터 총독 암살미수사건으로 윤치호·양기탁·임치정·이승훈·유동열·안태국 등 전국적으로 600여 명을 검거하였다. 각본에 맞추어 피의자들에게 진술을 강요하면서 잔인한 고문으로 허위 자백도 받아내었다. 이를 105인 사건이라 지칭함은 이 사건에 강제로 연루되었던 피의자 가운데 제1심에서 유죄 선고를 받은 사람이 105인이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조선음모사건(朝鮮陰謀事件)’·‘선천음모사건(宣川陰謀事件)’·‘신민회사건’이라고 불렸다. 영문으로는 ‘The Korean Conspiracy Case’라 하였다. 피의자 체포는 1911년 9월 3일부터였다. 평북 선천 신성중학교에서는 아침기도회를 마치고 각자 교실로 들어가려는 때에 경찰이 들이닥쳤다. 그들은 교사 7명과 학생 20명 등을 포승하고 수갑에 채워 서울로 압송하였다. 이를 기점으로 대대적인 검거선풍이 일어났다. 3개월이 지나 경무총감부 제1헌병대 유치장에서 본격적인 심문과 고문이 시작되었다. 악의에 찬 위협은 물론 곤봉으로 온몸을 무수히 때렸다. 고문을 받은 선우훈(鮮于燻)은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심문을 맡은 일경의 첫 마디가 ‘네놈은 혈기 있고 강력한 놈으로서 신민회원이다. 기독교 신자로 우리를 가리켜 왜놈, 왜놈 하면서 우리말을 무엇이든지 듣지 않고 서양 놈의 말이면 죽을 데라도 잘 가는 놈인 줄 안다. 너는 지난 석 달 동안 유치장에서 매일 성경을 읽고 통감부에서 어떠한 악형을 할지라도 불복하자는 결심을 했다는 것도 안다’고 하면서 주먹과 곤봉으로 마구 때렸다.” 고문은 갈수록 더욱 악독한 방법이 동원되었다. 고문의 종류는 70여 가지로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혹독하고 잔인하였다. 잠을 못 자게 하거나, 수 십 일을 굶긴 후 산해진미를 바라보게 하여 배고픈 고통을 참지 못해 옷 속의 솜을 뜯어먹거나 깔고 자던 썩은 짚을 씹어 삼키기도 했다는 고백이다. 또 지독한 냄새가 나는 약물을 코 안에 넣어 정신을 잃게 하였고, 온몸에 기름을 바른 후 불로 단근질하기 등이었다.일제는 고문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하여 여러 방법을 동원하였다. 극소수를 제외한 피의자들은 허위 자백을 할 수밖에 없었다. 고통을 받은 사람은 피의자들만이 아니라 가족들도 견디기 어려운 고초를 겪었다. 가장을 잃은 가정은 생활고로 집을 팔거나 가족들이 흩어지는 고통을 당하였다. 피의자 중 김근형(金根瀅)·정희순(鄭希淳)은 심문 과정에서 사망하였다. 암살 미수는 처음부터 없었던 일로 신민회를 무장 암살 단체로 몰아 일망타진하기 위한 일본이 꾸민 조작극이었다. 일제는 겉으로 공정성과 합리성을 내세웠지만, 사실상 그것은 날조된 연극과 같은 재판이었다. 이 사건은 담당 검사가 충분한 조사도 없이 구성한 의구심 짙은 사건에 불과했다. 판사들의 판결 또한 저들이 의도한 대로 편파적으로 진행되었다. 일본 측이 제시한 증거는 관련된 조선인들의 자백이었다.1912년 6월 경성지방법원에 선 123명의 순수한 한국인들의 참혹함은 누굴 원망해야 하는가? 이 사건을 규명하는 재판의 시작은 법정을 술렁이게 만들었다. 이들의 진술은 다음과 같았다. “기존의 증언은 진실이 아니오, 우리의 몸이 바로 그 증거요.”법정에 선 조선인들은 강요된 허위 자백임을 주장하며 반인륜적인 일제의 만행을 폭로하였으나 123명 중 105명은 유죄를 선고받게 된다. 사실이 아니지만 사실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사건이 되고 말았다. 다음은 ‘양기탁·임치정·주진수·안태국 등 16명의 보안법 위반 판결문’ 내용의 일부이다.“서간도에 단체적 이주를 기하고 조선 본토에서 상당히 자력(資力) 있는 다수 인민을 동지(서간도)에 이주시켜 토지를 구매하고 촌락을 만들어 신영토로 삼고, 학교 및 교회를 배설하고, 나아가 무관학교를 설립하고 문무(文武) 쌍전(雙全) 교육을 실시하여 기회를 타서 독립전쟁을 일으켜 구(舊) 한국의 국권을 회복하고자 하였다.”이를 통해 일제가 신민회의 국외 독립운동 근거지 건설과 무관학교 설립을 차단하기 위해 105인 사건을 조작한 사실을 알 수 있다. alt신민회 관계 인사 판결문(1911. 9.) 왜 일제는 허구적인 사건을 조작했을까일제는 강점 직후 자국의 ‘완전한 식민지’로 개편하기 위해 무소불위의 ‘무단통치(武斷統治)’를 자행하였고 국권 강탈에 대한 한국인들의 반일감정이 고조되는 분위기였다. 이에 일제는 예상되는 한인들의 항일민족운동 사전 차단을 당면한 최대 과제로서 인식하였다. 무장운동에 대한 토벌작전과 근대 법령 정비를 빙자한 애국계몽운동 탄압 등은 이러한 의도와 맞물려 있었다. 한국 강점을 전후하여 국내외에서 전개된 의열투쟁 등에 조직적인 비밀결사가 배후에 존재한다고 인식하였다.105인 사건을 조작한 이면에는 반일의식이 강한 서북지방 기독교 교세 확장 방지와 그들의 배후 세력인 미국 선교사들 축출에 있었다. 이는 미일 양국 사이에 심각한 외교분쟁으로 비화될 가능성과 무관하지 않았다. 다수 외국인 선교사를 연루시킴으로써 세계 언론의 주목을 받는 세계적 사건으로 확대되었다. 1910년 전후로 급속히 냉각되었던 양국의 관계 변화는 당시 국제질서 재편과 밀접한 연관성을 지닌다. 105인 사건 이후 신민회 조직은 일제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결코 와해되지 않았다. 회원들은 오히려 항일의식을 계승해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신민회 회원들이 3·1운동의 민족대표로서 참여한 것은 이를 방증한다. 이들 선각자가 보여준 백절불굴의 나라사랑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자. ]]> Thu, 27 Aug 2020 15:16:35 +0000 45 <![CDATA[한국광복군 창설 80주년을 맞아 '국군의 날' 의미를 되새기다 ]]> 글 이계형 국민대학교 교양대학 교수 한국광복군 창설 80주년을 맞아 ‘국군의 날’의미를 되새기다 지금으로부터 80년 전인 1940년 9월 17일, 중국의 임시 수도였던 충칭에서 한국광복군 총사령부가 창설되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1919년 4월 11일 상하이에 성립된 지 20여 년 만이었다. 임시정부의 정규군이었던 만큼 김구 주석은 “광복군은 한·중 두 나라의 독립을 회복하고자 공동의 적인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며 연합군의 일원으로 항전할 것을 목적으로 한다”며 창설 취지를 천명하였다. 대한민국의 국군의 날 제정한국광복군은 연합군인 영국군과 합동으로 인도-미얀마 전선에 참전하였고, 미군과 합작해 국내진공작전을 위한 OSS 특수훈련을 받기도 하였다. 하지만 광복 이후 한국광복군은 대한민국 국군의 정통성에서 밀려나 있었다. 1987년 제6공화국 헌법에서 대한민국이 임시정부의 법통성을 잇는다고 명시했지만 국군만은 그렇지 못했다. 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국군의 날’에 대한 논쟁이다.우리나라에서 국군의 날 제정은 해방 후 창군 과정과 밀접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1950년대 중반까지는 육·해·공 3군의 국군의 날이 각기 존재했다. 육군은 조선경비대가 창설된 1946년 1월 15일, 공군은 육군에서 독립한 1949년 10월 1일, 해군은 조선해안경비대의 모체인 해방병단이 창설된 1945년 11월 11일에 각기 기념식을 치렀다. 한국전쟁이 끝난 후인 1955년 8월, 육군은 제3사단이 38선을 돌파한 1950년 10월 1일을 기념일로 바꿨다. 1년 뒤인 1956년 9월, 정부는 각 군의 창설 기념일을 통합하여 ‘10월 1일’을 국군의 날로 정하였고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정부는 이에 대해서 3군 단일화, 국군의 사기, 국민의 국방 사상 함양, 재정 절약 등의 차원이라 했지만 국가의 방침인 반공주의의 일환이었다. 정권별 국군의 날에 대한 논쟁1995년 광복 50주년을 맞아 열린 국방군사연구소 국방학술대회에서 처음으로 국군의 정통성 문제가 거론되었다. 발제자로 나선 조항래 숙명여자대학교 교수는 “광복 후 미군정 시기에 한국군의 창설과 정통성 계승에 있어 우여곡절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한국군의 창군 인맥과 이념을 통해 볼 때 한국군은 광복군 이념을 계승하였기 때문에 정통성 또한 계승된 것이 너무 당연하다”며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였다. 그의 주장은 학술대회였던 만큼 사회적인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런데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면서 국군의 정통성 문제가 국군의 날 변경 논쟁으로 귀결되었다. 2000년 9월 한국광복군 창군 60주년 기념학술회의에서 김삼웅 대한매일 주필과 한시준 단국대학교 교수 등은 주제 발표를 통하여 “통일시대에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현행 국군의 날은 한국광복군 창군 기념일로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것은 ‘의병→독립군→광복군’으로 이어지는 우리 군의 역사적 정통성을 확립하기 위해서도 필요하다고 강조하였다. 정훈감 전 육군, 표명렬 군사평론가는 어느 일간지에 “광복군은 임시정부의 자랑스러운 정식 군대다. 때문에 국군의 날은 국군의 정신적 전통과 이미지 결정에 매우 중요한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며 이를 정상화하여 진정한 역사 바로 세우기를 다시 시작하자고 주장하였다. 김재홍 경기대 교수·오마이뉴스 논설주간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헌법 전문에 명시한 점만 보아도 최소한 임정의 광복군이 오늘 우리 ‘국군의 어버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라면서 같은 주장을 펼쳤다. 이 문제는 국회로까지 확산하였다. 2000년 10월 제16대 국회 국감장에서 박상규 의원(민주당)이 “38선을 돌파한 10월 1일을 국군의 날로 한 것은 군의 이념적 연원, 정통성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며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창설일을 포함해 항일 의병, 독립군, 광복군 등의 창설과 관계있는 날을 국군의 날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힘입어 그해 11월에는 처음으로 의원 21명이 국군의 날을 9월 17일로 변경할 것을 촉구하는 입법 청원을 하였지만 반대 목소리에 흐지부지되었다. 이러한 주장은 노무현 정권에서도 지속되었다. 2004년 국군의 날 변경을 주장하였던 예비역 장성이 재향군인회 등 여러 군 관련 단체로부터 제명될 뻔하기도 하였지만, 그 문제에 대한 다양한 의견들이 제기되었다. 그해 8월에는 여·야 의원들이 참여하는 ‘제2기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 모임’ 총회에서 국군의 날을 한국광복군 창설일로 변경하는 일을 9월 정기국회에서 통과시키기로 하였지만 관철하지 못했다. 다만 그해 계룡대에서 열린 56주년 국군의 날 기념식에서 광복군과 국방경비대 등 국군의 모태 부대들이 옛 복장으로 행진하여 국군의 정통성 회복 차원에서 의미가 있었다.이는 2005년 이후 노무현 정권 내내 반복되었다. 2005년에 평화재향군인회가 국군의 날 변경에 발 벗고 나서자 재향군인회는 이를 불법단체로 규정하고 ‘국군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궤변’이라고 비난했다. 2006년에는 시민단체도 국군의 날 변경에 한목소리를 내는가 하면, 여야 국회의원들이 ‘국군의 날 기념일 변경 촉구 결의안’을 발의했으나 이 또한 통과되지 못하였다. 반대 측 인사들은 10월 1일이 민족상잔과 치욕의 날이라는 데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민족상잔의 주범을 격퇴한 것이 왜 ‘치욕’인지 묻는가 하면, 이를 바꾸려 하는 것은 ‘북쪽의 심기’를 의식하는 것이라 주장하기도 하였다. 특히 군 관련 인사들은 10월 1일이 50년 이상 계속되어온 국군 기념일이라며 반발하였다. 한국광복군 창설에 대한 정통성2008년 이명박 정권이 들어선 뒤에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었다. 정부 차원에서 국군의 날을 광복군 창건일로 한다는 것에 거부감을 나타냈다. 1998년 건군 50주년 기념우표에 국군의 모습 대신 광복군과 백두산 천지를 그려 넣어 국군의 뿌리를 조명하고 국토수호라는 국군의 사명을 부각하였지만, 2008년 건군 60주년에는 육·해·공군의 모습만이 기념우표에 담겼다. 그런가 하면 그해 10월 1일 국군의 날 행사에서는 예전과 달리 행진 대열에서 광복군이 빠졌다. 보수 측 인사들은 국군의 날 변경 주장에 좌파 성향을 덧씌워 이념 공세로 변질시켰다. 그래서였는지 2010년 9월 한국광복군 창립 70주년 행사에서 국군의 날 개정을 촉구하는 정도로 그쳤다. 문재인 정권이 들어서면서 그러한 목소리는 다시 커졌지만 별다른 반향을 일으키지 못하고 있다. 2017년 8월 국방부 업무 보고 당시 문재인 대통령이 “국군의 날 변경을 검토해 볼 만하다”는 취지로 발언한 뒤에 10월 1일은 반공사상을 고취하고 분단을 고착화한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에 그해 10월 여당 국회의원들은 ‘국군의 날을 임시정부 광복군 창설일로 변경해야 한다’는 결의안을 냈지만, 야당 인사들이 독립 세력과 건국 세력을 편 가르기하고 소모적 갈등을 조장한다며 반발하면서 유야무야 되었다.다른 나라의 국군의 날은 독립된 날을 기념하거나 외세에 크게 항거한 날, 국가 정치 운영 형태가 바뀌는 날, 또는 정규군 형태의 국군이 만들어진 날 등을 기념일로 삼는다. 유럽 국가나 여느 선진국의 경우는 세계대전 승전 기념일, 혹은 국가 자체의 역사적인 날을 국군의 날로 정하였다. 특히 식민지를 경험한 폴란드는 1920년 바르샤바 전투에서 이긴 8월 15일을, 베트남은 까오방성(Cao Bang)의 숲에서 일본군에 맞서 선전 해방군이 조직된 날인 1944년 12월 22일을 국군의 날로 정하고 있다. 이들 나라는 대외 투쟁과 독립에 가치를 두고 있지만 우리나라는 이와 동떨어져 있다. 올해 2020년 8월 한국광복군 창설 80주년을 맞아 여당 국회의원이 또다시 ‘국군의 날 기념일 변경 촉구 결의안’을 발의했다. 벌써 다섯 번째이다. 1987년 제6공화국 헌법에서 대한민국이 임시정부의 법통성을 잇는다고 천명한 것처럼 대한민국 국군의 뿌리 역시 한국광복군에 있다. 이는 이념의 문제를 떠나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찾는 것이며 통일로 한 발짝 다가서는 길이다. 더는 이데올로기를 이용한 정치적 소용돌이에 한국광복군의 정통성이 퇴색되어서는 안 된다. ]]> Thu, 27 Aug 2020 15:21:34 +0000 45 <![CDATA[중국을 무대로 독립전쟁에 일생을 바친 광복군 지도자 채원개 ]]> 글 독립기념관 전시부중국을 무대로 독립전쟁에 일생을 바친 광복군 지도자 채원개alt 채원개(蔡元凱)1895. 3. 24. ~ 1974. 2. 16.평안남도 영원건국훈장 독립장(1968) 독립기념관은 국가보훈처 및 광복회와 공동으로 채원개를 2020년 9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채원개는 만주지역에서 독립군으로 활동하며 1925년 육군주만 참의부 군무위원으로 독립운동 단체의 통합에 힘썼다. 이후 중국 내에서 지속적으로 대일항전을 전개하였고, 1940년 설립된 한국광복군 총사령부의 참모처장, 총무처장, 제1지대장 등을 역임하며 광복군 지도자로 활약하였다. 만주에서 독립군 간부로 활동하다채원개는 1895년 평남 영원에서 태어났다. 서울의 오성학교(五星學校)에서 신학문을 배우던 중 학교가 폐교하자 1915년 조선보병대(朝鮮步兵隊)에 입대해 군사전술을 익혔다. 1919년 3·1운동을 통해 독립운동에 뜻을 품은 그는 만주로 망명하였다. 이어서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에 입단하여 압록강 일대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치렀고, 통의부(統義府)에도 가담하였다.1921년 국민대표회의 개최 소식이 전해지자 통의부(統義府) 대표로 상하이에 파견되었다. 1923년에는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 특별 회원으로 뤄양강무당(洛陽講武堂)에 입학하여 실전 경험을 쌓을 수 있었다. 이후 상하이로 돌아와 1925년 임시의정원 의원 활동을 펼치다가, 다시 만주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육군주만 참의부 군무위원으로 만주지역 독립운동 단체 규합에 앞장섰다. alt관동청 경무국에서 작성한 대한독립단 명부(1922. 2. 20.)alt『한국노병회 회헌』(1922)alt정의, 신민의 갈등과 내무총장의 조정(『시대일보』 1925. 6. 4.)alt간도총영사가 작성한 참의부 조사 문건(1926. 3. 17.) 대일항전을 전개하며 한국광복군 지도자로 활약하다채원개는 1927년 황푸군관학교에서 교관으로 재직하다가 1930년 중국군 작전참모로 전임하였다. 1930년대 들어 일제의 중국 침략이 본격화된 가운데, 중국군 독립 제4사 참모장 등 지휘관으로 복무하며 대일항전을 전개하였다. 중국군 복무 중에도 1934년 한국독립당 광동지부에 가입하며 독립운동에 참여하였고, 중일전쟁 발발 후 임시정부가 창사에서 광저우로 이동할 때 청사와 거처를 주선하는 등 임시정부 활동을 지원하였다.채원개는 중국 관내에서 군사간부로서 축적한 항일전 경험을 바탕으로 1940년 충칭에서 창설된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참모처장에 임명되었다. 이어서 총사령부 고급참모, 총무처장 등을 역임한 그는 광복군 제1지대장에 부임하여 대일전쟁을 준비하다가 1945년 광복을 맞이하였다. 중국을 무대로 독립전쟁에서 활약하며 독립운동에 일생을 바친 채원개의 공훈을 기리어 정부는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alt채원개 환송 기념(대한민국 역사박물관 기증)alt채원개와 김구(한중문화협회 제공) alt차리석 회갑 기념(1941. 9. 23.)alt한국광복군 제1지대alt전우 창간호(1945)alt]]> Thu, 27 Aug 2020 15:18:22 +0000 45 <![CDATA[한국광복군 창설 80주년을 즈음하여 ]]> 글 유완식 독립기념관 자료부 학예연구관 한국광복군 창설80주년을 즈음하여alt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성립 전례식 내빈 방명록(1940. 9. 17.) 한국광복군(이하 광복군)은 1940년 9월 17일, 중국 충칭(重慶)의 가릉빈관(嘉陵賓館)에서 열린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성립 전례식을 통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이하 임시정부) 직할 국군으로 창설되었다. 당시 독립운동 세력은 좌파와 우파로 분리되어 각각 독립운동을 추진하고 있었다. 좌파 계열의 최대 독립운동 세력이었던 김원봉의 조선의용대가 임시정부에 합류하였고, 임시정부가 조선의용대를 광복군 제1지대로 편성함으로써 드디어 좌우를 아우른 민족의 국군이 탄생하게 되었다.이듬해인 1941년 12월 8일, 일제의 진주만 공습으로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임시정부는 대일선전포고 후 연합군과 함께 대일전쟁을 전개하였다. 대표적인 것이 인도·미얀마 전선에서 영국군과의 공동작전을 위해 1943년 한국광복군 인면전구공작대(印緬戰區工作隊)라는 이름으로 광복군 대원들을 파견한 것이다.한편 임시정부는 미국 전략첩보국 OSS와의 국내진공작전, 일명 ‘독수리 작전(Eagle Project)’ 을 추진하기 위해 광복군 제2지대와 제3지대로 하여금 미군의 지휘 아래 OSS 특수훈련을 3개월 동안 받게 하였다. 마침내 8월 4일, 훈련을 모두 수료한 1기 훈련생들은 국내 진입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광복군은 국내 진입을 위해 대기하고 있던 중 일본의 항복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일본의 항복으로 해방은 되었으나 국내진공작전이 무산됨으로써 우리 손으로 독립을 이루지 못하게 되었다.광복 후 임시정부를 정부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미군정의 방침에 따라, 임시정부의 군대인 광복군 역시 개인 자격으로 환국하게 되었다. 결국 이듬해인 1946년 6월 광복군은 정식으로 해체를 선언하며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비록 광복 후 광복군은 해체되었으나 통위부(統衛部)의 초대 부장으로 임시정부 참모총장 출신 유동열이, 미군정에서 창설한 예비 국군인 국방경비대 사령관에 광복군 제2지대장 출신 송호성이 각각 임명되어 건군 작업에 참여하게 된다.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며 통위부의 모든 권한과 업무가 국방부로 이관되었다. 이를 총괄하는 국방부 초대 장관으로 광복군 출신 이범석 장군이 임명되었고 광복군 출신들이 국군의 주요 간부로 임명되었다. 또한 국방경비대 역시 대한민국 국군에 편입되면서 광복군 역시 자연스럽게 국군에 흡수되었다. 광복군은 대한제국 군대뿐만 아니라, 군대 해산 직후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과 독립군까지도 계승하여 독립군을 양성하고 항일전을 전개하는 등 나라를 되찾기 위한 활동을 계속하였다. 광복군 창설 80주년을 맞이하여 광복군의 독립정신이 독립운동사에서 갖는 역사적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alt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성립 전례식 후 한중 대표들 기념사진(1940. 9. 17.)]]> Thu, 27 Aug 2020 15:10:32 +0000 45 <![CDATA[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진 ]]> 그럼에도 불구하고전진 일제의 잔혹한 음모로 인해옥중에 갇힌 105명의 독립지사들이뼈와 살을 짓이기는 고문을 당하고온몸이 부서지는 고통 속에서수 날을 지새웠습니다.잠 못 이루는 날에는 되뇌었습니다.나라 잃은 설움보다 더한 치욕은 없다.그렇게 이를 악물고 견뎌냈습니다.준비한 독립전쟁이 무산되고 신민회가 해체되었지만 낙담하지 않았습니다.그곳은 포기의 자리가 아니었습니다.그리고 모두 무죄.민족을 탄압하기 위한 일제의 기만은그 무엇도 분열시키지 못했습니다.다시 걸음 할 곳이 선명해졌고뒤돌지 않고 전진했습니다.그날을 향해, 독립의 길로. ]]> Thu, 27 Aug 2020 15:09:36 +0000 45 <![CDATA[윌로스 한인비행학교의 설립과 활동(Ⅰ) ]]> 글 홍선표 나라역사연구소 소장 윌로스 한인비행학교의 설립과 활동(Ⅰ) Ⅳ. 3·1운동 이후 재미 한인 사회의 변화 ④ 제1차 세계대전 종결 직후 미주 한인들은 대한인국민회를 중심으로 뉴욕 소약국민동맹회의와 파리강화회의를 대비한 선전·외교활동에 주력하였다. 3·1운동 발발 이후에도 이러한 활동 방략은 계속되었는데, 이러한 때 노백린에 의해 군사운동이 일어났다. 한인비행학교의 설립1916년 12월 호놀룰루에 도착한 이래 박용만의 군사운동을 돕던 노백린이 3·1운동의 영향으로 한성 임시정부에서 군무부총장으로, 상하이의 통합 임시정부에서 군무총장으로 선임된 후 미주지역에 군사운동의 바람을 일으키면서 군사활동이 재개되었다. 노백린이 군사 분야의 총책임자인 군무총장으로 선임된 것은 구한말부터 정통 무관으로서의 풍부한 군사 경험을 갖고 있어서 향후 항일무장투쟁의 최적임자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노백린은 한성임시정부에서 군무부총장으로 선임된 소식을 듣고 1919년 8월 13일 집정관 총재로 선임된 이승만에게 장차 워싱턴 D.C.를 방문하겠다는 전보를 보냈다. 그런 후 그해 9월 11일 상하이 임시의정원에서 임시정부의 군무총장으로 선임된 사실을 통보받자 노백린은 하와이를 떠나 북미지역으로 향하였다. 미국에서 군무총장으로서 자신의 책무를 다한 후 상하이로 건너갈 생각이었다. 그는 1919년 9월 30일 호놀룰루를 떠나 10월 5일 밴쿠버에 도착하였고 곧 시애틀로 이동해 본격적인 미국 순방을 시작하였다.노백린은 미국 순방을 시작할 때 미주 한인 동포들에게 “우리가 갈 길은 곧은 길, 우리가 가질 목적은 한 목적, 우리는 그 길에 서서 그 목적을 향하고 나아갈 뿐이라. 끝에 한 사람이 남아 있기까지 한 방울 피마저 흘리기까지 아니 싸우지 못할 것이요 아니 다투지 못할 것이로다”라고 말한 후 “차라리 독립싸움에 죽은 자유혼”이 되자며 독립전쟁론을 설파하였다. 또한 그는 군무총장의 명의로 1920년 1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부 포고」 제1호를 공포하고 2,000만 명의 남녀는 일인까지 조직적이고 통일적으로 ‘광복군’이 되기를 맹세하고 결단하자고 호소하였다. 그의 호소에 감명받은 김종림·이재수·신광희 등 쌀 농장주들은 노백린을 도와 미국에서 군사활동을 추진하기로 결심하고 1920년 2월 20일 캘리포니아주 윌로스에 한인 비행학교를 설립하였다.육군 무관으로 활동한 노백린이 군사 경험이 전혀 없는 비행학교를 설립한 데는 재미 한인들의 준비된 역량이 있었기 때문이다. 먼저 1919년 5월 국내 3·1운동의 소식에 충격받은 한인 청년들이 독립운동을 준비할 목적으로 청년혈성단을 만든 후 비행술을 배우고 있었다. 청년혈성단은 독립의 대사업을 이루기 위해 새로 건설한 임시정부에 열성을 다해 충성할 것과 학술 또는 군사상의 기예를 배워 독립운동에 기여하겠다는 취지로 샌프란시스코에서 결성된 애국청년 단체였다. 청년혈성단에는 한인 청년 23명이 참여하였는데 이들 가운데 이용근·이용선·이초·장병훈·한장호는 레드우드 비행학교에 입학해 비행술을 배웠고 최자남은 미 해군 비행학교에 입대하였다. 이들이 비행학교에 입학한 것은 청년혈성단의 설립 취지에 따라 독립의 대사업을 위해 군사상의 기예를 배우기 위함이었다.  다음으로 미주한인사회는 제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새로운 군사 무기로 등장한 비행기의 가치와 비행 전술의 효과를 깊이 인식하고 비행사 양성이 장차 독립운동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판단하였다. 윤병구는 1919년 9월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장 취임식에서 “청년 중 자격 있는 자들을 우선 비행기 제조학과 무선 전신학, 그리고 최근의 전술전략을 배우도록 장려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신한민보』는 ‘한국 독립과 조종술’이란 사설(1920.6.4.)을 통해 공군력이야말로 근대 군사학 가운데 가장 필요한 요소 중 하나이고, 일본의 공군력이 미약한 상태에서 지금 우리가 먼저 한인 비행사를 양성한다면 장차 독립전쟁에서 승리하게 될 것이라고 전망하였다. 또한 노백린은 육군 무관 출신으로 비행기에 대해 문외한이었지만 비행사 양성이 향후 독립전쟁을 수행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최신 군사전술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새크라멘토의 미국 신문 기자들을 상대로 한 회견에서 그는 “군단 비행학교 설립의 목적은 한인 청년들에게 장차 한국이 일본으로부터 독립을 얻는데 도움이 될 비행술을 가르치기 위함”이라 하여 비행술을 한국 독립을 위한 최선의 수단으로 생각하였다. 이로 보면 노백린이 비행학교를 설립할 수 있었던 것은 비행학교를 설립하는 데 필요한 인적 자원의 확보, 쌀농사로 부를 축적한 김종림을 비롯한 북가주 지역의 한인들의 확고한 재정 지원, 여기에 비행술을 독립전쟁을 위한 최신 군사전술로 인식한 노백린과 재미한인사회의 호의적인 여론 등에 힘입었다고 할 수 있다. 한인비행학교의 교육과 운영윌로스 비행학교를 시작한 후 비행기가 도입되기 전까지 노백린은 주로 육상 군사훈련 위주로 교육하였다. 1920년 6월 22일 첫 번째 비행기를 도입하고 이틀 후 두 번째 비행기를 도입하였으며 이후 또 1대를 더 구입해 총 3대의 비행기를 갖추면서 본격적인 비행교육과 훈련에 들어갔다. 제대로 된 정규 비행훈련을 위해 레드우드비행학교의 책임자이자 교관으로 활동 중인 프랭크 브라이언트(Frank K. Bryant)를 초빙해 비행교육을 맡겼다. 레드우드 비행학교에서 비행술을 배운 장병훈·오림하·이용선·이초·이용근·한장호는 부교관으로 참여하였다. 이들 6명이 윌로스 비행학교에 참여한 것은 노백린이 1920년 2월 5일 직접 레드우드 비행학교를 방문해 그들을 격려하고 향후 계획을 공유하면서 이루어졌다. 윌로스에 비행학교를 처음 시작할 때 참가한 학생 수는 24명이었고, 한때 30명까지 증가되었으나 7월 비행사 양성소 개소식 때 25명을 유지하였다. 교사(校舍)는 플린트학교를 임시로 사용하였다가 폐교로 방치되어 있던 퀸스학교로 옮겼다. 교육 과정은 비행기를 구입해 본격적인 비행술을 가르치기 전까지 노백린에 의해 사격과 제식훈련 등 기초적인 군사훈련에 전념하였다. 그리고 기본 군사교육 외에 무선통신, 비행기 정비, 영어와 민족 교육도 병행하였다. 비행학교에 필요한 모든 재정은 쌀의 왕으로 불릴 정도로 쌀농사로 많은 돈을 번 김종림이 주로 담당하였다. 그는 비행학교를 위해 4만 에이커 규모의 부지를 제공하였고 비행기 구입과 교육을 위해 20,000달러의 재정을 부담하였다. 그 외 윌로스와 그 인근 지역에서 쌀농사를 하던 이재수, 신광희, 이암, 윤응호 등이 재정을 후원하였다. 김종림을 포함한 이들 후원자들은 1920년 7월 25일과 26일 비행가 양성사 장정과 비행가 양성사 취지서를 발표하여 조직적인 후원활동에 나섰다. alt 군사훈련을 받고 있는 비행학교 학생들 ]]> Thu, 27 Aug 2020 15:23:47 +0000 45 <![CDATA[독립전쟁 현장에서 영원한 동지가 된 김학규와 오광심 ]]> 글 김형목 사단법인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이사 독립전쟁 현장에서 영원한 동지가 된 김학규와 오광심  중국으로 망명해 교사 생활을 하며 학생들에게 민족의식과 항일의식을 심어주던 김학규는 교사 생활을 접고 무장투쟁에 뛰어들면서 오광심과 부부의 연을 맺게 된다. 이후 김학규와 오광심은 광복이 되는 순간까지 독립투쟁 최일선에서 함께 활약한다. 광복 이후에도 조국과 동포를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던 이들 부부에게 정부는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군사학을 배우며 독립군으로 성장하다김학규는 1900년 11월 평남 평원군 서해면에서 4남 2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 을사늑약과 경술국치 등을 직접 겪으면서 강한 항일의식을 가졌다. 일제의 강제 병합 즈음 중국 퉁화현에 정착하여 독립군 양성 요람지인 신흥무관학교에서 군사학을 배웠다. 이곳에서 배운 군사학은 후일 독립전쟁을 수행하는 든든한 정신적인 기반이 되었다.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한 후 서로군정서 한국의용대 소대장으로 교민 보호에 진력하였다. 이 단체는 류허현 고산자에서 독립전쟁을 수행하기 위하여 기존 단체를 중심으로 조직되었다. 1920년 6월 이후에는 국내진공작전을 전개하여 일본군과 교전하는 한편 친일파 등을 처단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 과정에서 독립전쟁의 실전경험을 쌓았다.일제는 독립군을 후원하는 한인 동포에 대한 무자비한 살육을 서슴지 않는 이른바 ‘경신대토벌’ 작전을 감행하였다. 일본군의 포위에서 탈출한 김학규는 펑톈의 영국인이 운영하는 문회고급중학에 입학·졸업하였다. 재학 시절에 집중적으로 공부한 중국어는 후일 항일투쟁을 전개할 때 중국군의 지도자들을 만나 협상하고 신임을 얻는 밑거름이 되었다. alt  오광심과 김학규 민족교육과 독립전쟁을 병행하다김학규는 1927년부터 류허현 동명학교 교사로서 한국인 청소년들에게 민족의식과 항일정신을 일깨웠다. 교육 활동은 항일투쟁 전선에서 이탈이 아니라 중장기적인 독립운동 노선이었다. 병식체조 등 군사교육으로 장차 독립군을 양성하려는 목적이었다. 문무쌍전에 입각한 민족교육은 항일적개심을 고취하기 위함이었다. 1929년부터 조선혁명당과 조선혁명군에 가담하여 독립전쟁 현장에 다시 나섰다. 조선혁명군 참모장으로서 흥경현전투와 쾌대무전투 등에서 승리를 견인할 수 있었다. 괴뢰정부 만주국 설립 즈음에 김학규는 중국의용군 사령관 당취오와 면담하여 한중연합에 의한 공동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할 수 있는 굳건한 토대를 마련하였다. 한중연합세력은 일본군과 치열하게 전투하여 신빈현과 영릉가 전투 등에서 일본군에게 커다란 타격을 주었다. 반면 일본군의 대대적인 공세로 조선혁명군도 큰 피해를 보았다. 이러한 위기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 중국 관내의 독립운동 단체에 원조를 요청하기로 결심한다. alt 한국광복군 제3지대장 시절의 김학규 한국광복군 지대장으로 최전선에서 활약하다김학규는 1935년 7월 민족혁명당 결성식에 조선혁명당 대표로 참여하여 중앙집행위원과 조선혁명당 만주지부장으로 임명되었다. 이듬해에는 중국 육군중앙군관학교 특별반에서 군사교리를 연구하고 군사훈련을 받았다. 중일전쟁을 계기로 분열된 독립운동 단체의 대단결을 촉구하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임시정부의 외곽단체인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 결성은 이러한 상황과 맞물려 진행되었다. 김학규는 임시정부의 군무부 군사위원회 위원으로 선임되어 독립전쟁에 대한 계획안, 군사 인재 양성을 위한 방안, 군사상 필요한 서적 연구와 편찬 등에 매달렸다.1940년 9월 17일에는 한국광복군이 충칭에서 창설되었다. 총사령부 참모장 대리로 임명된 후 시안에 사령부를 설치하고 적후방 공작을 추진하였다. 제3지대장에 임명되어 초모공작으로 많은 광복군을 확보할 수 있었다. 본부를 안후이성 푸양에 설치하여 중국군과 연락·협조로 선전공작과 정보공작 등을 실시하여 적군에게 많은 혼란을 주었다.한국광복군은 특히 태평양에서 일본과 교전하며 북진하던 미국과 공동작전을 펼칠 수 있도록 노력하였다. 미국도 항일전쟁을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독립운동 세력을 활용하고자 하였다. 1945년 1월부터 광복군과 미국전략첩보국의 합작훈련에 대한 교섭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제2지대장 이범석은 미국과 협력 작전을 교섭하였다. 협력 작전은 주로 한국 영토에 대한 첩보와 침투, 일본 본토에 대한 침투 등이었다. 한편 미군은 일본에서 탈출한 학병의 능력에 주목하였다. 김학규는 쿤밍으로 가서 미 제14항공대 사령관에게 한미공동작전에 관한 계획을 설명하여 세부 계획과 구체적인 실시 방안까지 합의를 보았다. 이리하여 미국으로부터 무기와 보급품 등을 지급받아 3개월 동안 군사훈련이 시작되었다. 주된 훈련은 무전훈련이었다. 독도법·암호문 해독법·폭발물 취급기술·요인납치·야간습격 등도 병행되었다. 안타깝게도 일본의 항복으로 결국 국내로 진격해보지 못한 채 해방을 맞이하게 되었다. alt 미국전략첩보국 대원들과 김학규 여성독립군으로 다시 태어나다오광심은 평안북도 선천군 신부면에서 1910년 3월 15일에 출생하였다. 어린 시절 부모를 따라 남만주로 이주하여 정의부에서 설립한 화흥중학 부설 사범과를 졸업하였다. 이듬해 한족회에서 설립한 배달학교와 류허현 삼원보의 동명중학 부설 여자초등학교에서 항일의식을 일깨우는 민족교육 시행에 노력하였다.1920년대 후반 남만주지역의 독립운동 세력은 국민부를 중심으로 통합되었다. 산하에 조선혁명당과 조선혁명군을 조직하여 대일항전을 본격화하였다. 오광심은 배달학교 교사로 근무하면서 조선혁명당에 참여·활동하다가 일제의 만주 침략을 목격하면서 교사를 그만두고 조선혁명군 사령부 군수처에서 근무하였다. 더불어 조선혁명군 유격대와 한중연합 항일전에서 지하 연락 활동을 전개하는 등 항일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이때 조선혁명군 참모장인 백파 김학규와 부부이자 영원한 동지로서 인연을 맺었다.일제의 만주침략과 만주국 설립으로 이곳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항일세력 활동은 상당히 위축되는 분위기였다. 조선혁명군의 대표로 선발된 남편은 농부로 변장하고 오광심은 남루한 농촌부인으로 꾸몄다. 문제는 현 상황에 대한 200여 쪽에 달하는 보고서를 어떻게 가지고 가느냐였다. 오광심은 검문검색에 발각되지 않도록 이를 전부 암기하여 보고했다는 이야기는 전설 같기만 하다. 단둥·칭따오·베이징 등지를 거쳐 난징에 도착한 부부는 조선혁명군의 대일항전 상황과 인력 및 물자 보급의 필요성 등을 역설하는 등 지원을 요청하였다. 광복군은 남자의 전유물이 아니다오광심은 1935년 7월 관내지역 독립운동 단체 사이 통일정당인 민족혁명당 결성에도 참여하여 부녀부 차장으로 활동하였다. 중국 관내지역을 이동하던 임시정부가 충칭에 안착한 후 한국광복군을 창설하자 총사령부에서 사무 및 선전사업을 담당하였다. 한국독립당의 외곽단체인 한국혁명여성동맹에도 함께 하였다. 광복군 총사령부가 시안으로 이동하자 시안으로 활동 근거지를 옮겨 여자 광복군 대원인 지복영·조순옥 등과 함께 기관지 『광복』 간행에 전념했다. 발간 목표는 ‘광복군의 사업 진행과 임무를 여러 동지·동포에게 소개하는 동시에 우리 혁명의 정확한 이론·전략·전술을 연구하고 토론하고자 한다’였다.1942년 2월에는 징모 제6분처의 대원으로 안후이성 푸양에서 지하공작을 통해 광복군의 모병 활동에 나섰다. 오광심은 한국광복군에 여성의 참여를 촉구하였다. 여성의 위대함을 망각하지 말자고 강조하면서 전통적인 여성상에서 벗어나자고 호소하였다.“광복군은 범 삼천만의 광복군이며 삼천만 가운데 일천오백만의 여성도 포함되어 있는 줄을 알아야 됩니다. 그러므로 광복군은 남자의 전유물이 아니요, 우리 여성의 광복군도 되오. 우리 여성들이 참가하지 아니하면 마치 사람으로 말하면 절름발이가 되고 수레로 말하면 외바퀴 수레가 되어 필경은 전진하지 못하고 쓰러지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 혁명을 위하여 또는 광복군의 전도를 위하여 우리 여성 자신의 권리와 임무를 위하여 이 위대한 광복군 사업에 용감히 참가합시다. 그리고 총과 폭탄을 들고 전선에 뛰어 나아가 우리 여성의 피가 압록강·두만강 연안에 흘리며 이 선혈 위에 민족의 자유화가 피고 여성의 평등 열매를 맺게 합시다.” 광복이 아닌 또 다른 족쇄는 현실이었다오광심은 광복 이후 상하이에서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주호판사처 처장으로 활동하는 남편을 도왔다. 한인 교포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안전한 귀국을 위한 다양한 노력도 병행하였다. 1946년에는 센양으로 가서 애국부인회를 조직하고 위원장으로 활동하다가 1948년 4월에 조국으로 돌아왔다. 귀국 전후로 국내 상황은 미소 강대국에 의한 냉전체제 격화로 분단을 향해 질주하고 있었다. 귀국 이후 김구와 함께 단독정부 수립 반대 노선과 통일국가 수립에 매진하였다. 친일파 처단을 위한 반민특위 활동에도 적극적이었다. 이승만과 친일민족반역자 세력은 한국독립당과 김구를 제거할 흉계를 꾸몄다. 이들은 안두희를 시켜 김구를 암살한 후 암살 배후자로 김학규를 체포하였다. 훗날 당시의 심경을 「혈루의 고백」에 고스란히 남겼다. 군사재판에서 징역 15년을 선고받고 억울한 옥살이를 하다가 한국전쟁 당시에 다행히 탈출하여 은거하다가 이승만정부가 붕괴된 이후에야 복권되었다. 오광심은 생활고를 견디다 못해 구걸해야 할 정도로 살림살이가 어려워졌다. 이들 부부는 철저히 파괴된 삶을 살았다. 부부에 대한 박용옥 교수의 평가는 매우 적절하고 아련하다. “젊은 날 조선혁명군으로 또한 한국광복군으로 대륙의 산하를 누비며 빛나는 활동을 하면서 조국 광복을 위해 찬란한 청춘을 송두리째 바쳤던 이들의 열정에 대해 해방된 조국은 아무것도 보답하지 않았다.” 그렇다. 오광심은 모든 고난을 감내하며 묵묵히 남편을 지킨 ‘수호신’이었다. 영원히 변치 않는 진정한 동지로서 말이다. 오광심이 남긴 자작 시에는 그녀의 조국 광복을 향한 열정이 따뜻하게 녹아있다. 비바람 세차고 눈보라 쌓여도님 향한 굳은 마음은 변할 길 없어라.님 향한 굳은 마음은 변할 길 없어라.어두운 밤길에 준령을 넘으며님 찾아가는 이 길은 멀기만 하여라.님 찾아가는 이 길은 멀기만 하여라.험난한 세파에 괴로움 많아도님 맞을 그날 위하여 끝까지 가리라.님 맞을 그날 위하여 끝까지 가리라.정부는 김학규에게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 오광심에게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alt 서울 현충원에 안장된 김학규와 오광심 ]]> Thu, 27 Aug 2020 15:22:52 +0000 45 <![CDATA[14세기 후반 위기의 시대 ]]> 글 김종성 역사작가 14세기 후반 위기의 시대 환절기가 되면 인체가 외부 바이러스에 취약해지듯, 국제질서의 과도기에는 국가가 외부 침략에 노출될 가능성이 커진다. 14세기 후반, 원나라의 세계 패권이 약해지면서 명나라가 동아시아 최강으로 떠오른 시절도 그러한 환절기였다. 이 시기에 외부 침략에 맞서 한민족을 지켜낸 사람들의 이야기를 살펴본다. 홍건적·왜구의 침략몽골 초원에서 출발해 중국대륙으로 옮겨간 몽골제국은 동아시아에서 명멸한 강대국들 중에서 역대 최강이었다. 강대국이었던 만큼 나라가 몰락할 때도 파장이 컸다. 원나라가 몰락하고 세계질서가 급변하던 시기에 동아시아는 일대 소용돌이에 휩쓸렸다. 소용돌이의 진원지인 중국대륙에서는 한족들의 반란으로 홍건적이라는 군사조직이 활개를 치고, 이런 속에서 주원장·장사성·진우량 같은 군웅들이 활약하였다. 이 흐름이 1368년 명나라 건국으로 이어지고, 원나라 왕실이 북쪽 초원으로 쫓겨 가는 사태를 초래하였다. 이로 인한 영향이 이웃 지역들에서도 나타났다. 한반도에서는 1392년에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세워졌다. 같은 해에 일본에서는 일왕이 2명 공존하던 분열의 시대가 끝나고 남북조 통일이라는 역사적 사건이 발생하였다. 오늘날 오키나와로 불리는 유구열도에서는 1406년에 삼국통일이 일어났다. 동아시아 전체적으로 국가 시스템이 동요하는 속에서 한민족은 두 방향의 외부 침략을 받았다. 대륙에서는 홍건적, 해양에서는 왜구가 한민족을 침략하였다. 몽골 정부군과 여진족 군소 집단들도 한민족을 위협했지만, 홍건적과 왜구의 침략이 대표적이었다. 이런 속에서도 한민족의 자기방어 시스템이 정상적으로 가동되었다. 1351년에 등극한 공민왕의 개혁도 이런 시스템에 기여하였다. 공민왕의 개혁으로 신진사대부라는 신흥 세력이 성장하고 이들이 결국 조선을 건국하게 되지만, 공민왕 때 형성된 새로운 기운은 한민족을 외부 침략으로부터 지켜주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그런 기운이 국가 시스템으로 편입됐기 때문에 이 시기에는 16세기 임진왜란이나 19세기 구한말 때처럼 민간의 의병이 나서지 않아도 되었다. 14세기의 외부 침략이 그 어느 때보다 심각했는데도 민간 의병에 의존할 필요가 없었다는 점은 이 시기에 공적인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했음을 보여주는 징표이다. 창에 찔리면서도 진격한 최영이러한 상황에서 정규군을 이끌고 외부 침략에 맞서며 영웅으로 급부상한 인물이 최영 장군이다. 그는 ‘금 보기를 돌 같이 하라’는 격언으로도 유명하지만, 『고려사』 최영 열전에 따르면 격언의 주인공은 따로 있었다. “최영이 16세 때 아버지가 죽기 전에 유언하기를 ‘너는 금 보기를 돌 같이 하라’고 하였다. 최영은 이 말을 깊이 간직하고 재물에 마음에 두지 않았다”고 최영 열전은 말한다.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재물에 마음을 두지 않는 대신, 그는 나라를 지키는 데 온 마음을 다하였다. 1316년에 무인 가문이 아닌 사대부 가문에서 출생한 최영은 양광도(경기·충청) 부대에서 근무하다가 왜구 격퇴에 공을 세워 임금 경호원인 우달치로 발탁되었다. 그는 홍건적의 침략으로부터 공민왕 정권을 지키는 데 공을 세웠다. 홍건적에 점령된 개경을 두 번이나 탈환했을 정도다. 공민왕은 반몽골 정책을 펼치기 전에 몽골의 요청으로 장사성 반란군을 토벌하는 데도 참가하였다. 이때 벌어진 수십 차례 전투에서 그는 지휘만 잘하는 장수가 아니라 전투도 잘하는 장수임을 입증하였다. 장사성 부대와의 전투에서는 몇 번이나 창에 찔리면서도 전투를 승리로 마무리하는 강인함을 발휘하였다. 국내에서 벌어진 왜구와의 전투에서도 그는 용감성을 보여줬다. 부하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고자 최선봉에서 돌진하다가 왜구 병사가 쏜 화살이 입술에 꽂혔는데도, 그는 태연하게 화살을 쏘아 그 병사를 쓰러트렸다.alt최영장군묘 입구에 있는 최영 장군의 상상화여진족 군단을 끌고 온 이성계이 시기에 고려 본토 출신인 최영과 쌍벽을 이루며 영웅으로 급부상한 인물은 이성계다. 최영과 달리 이성계는 고려 왕조의 주변부에 근거지를 뒀다. 이성계 가문은 몽골제국의 관할을 받던 철령 이북의 쌍성총관부에 거점을 두고 있다가 공민왕이 이곳을 수복할 때부터 고려왕조에 협력하였다. 이처럼 이성계와 최영은 출신지는 달랐지만, 외세 침략에 맞서 무패 전적을 기록하였다는 점에서는 동일하였다. 이성계 역시 홍건적으로부터 개경을 탈환하는 데 공을 세웠고, 공민왕을 폐위시키고자 몽골이 보낸 1만 군대도 격파하였다. 또 여진족과 왜구의 침략 역시 대파하였다. 우왕 때인 1380년에 왜구를 상대로 거둔 황산대첩은 유명하다. 최영이 고려 주류 출신이고 이성계가 비주류 출신이라는 점 외에 이들을 구별 짓는 또 다른 요인이 있다. 최영은 정규군을 기반으로 한 데 비해 이성계는 사병 부대를 기반으로 하였다는 점이 그것이다. 이성계의 근거지인 쌍성총관부가 여진족 거주지였으므로 그의 사병 부대는 여진족으로 구성될 수밖에 없었다. 여진족 사병을 보유한 이성계가 고려왕조에 충성하는 상황은 여진족 유력자들이 고려 왕실에 가담하도록 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음력으로 세종 19년 8월 7일 자(양력 1437년 9월 6일 자) 『세종실록』에 따르면, 이성계의 최측근인 여진족 이지란은 최소 500호 이상의 여진족 가구를 거느린 세력가였다. 이 외에 주매·금고시첩목아·허난두·최야오내 같은 10여 명의 이성계 측근들도 세력을 거느린 유력자들이었다. 고려 왕실에 대한 이성계의 충성이 여진족 유력자들의 고려 왕실 지지를 유도하였던 것이다. 고려 말에는 정규군 병력이 충분치 않았다. 혼란기에 노비로 전락하는 양인들이 많았고, 이들 중 일부는 귀족이나 유력자들의 사병으로 편입되었다. 이성계의 사병 부대는 고려 정규군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는 역할을 하였다. 사비 털어 민족을 지킨 최무선이 시기에 한민족 수호에 기여한 또 다른 결정적 요인은 고려 군사력을 발전시킨 화약 기술의 개발이다. 이 기술을 도입한 최무선에 관해 조선 『태조실록』의 최무선 졸기는 “천성적으로 기술과 머리가 좋고 계책이 많으며 병법을 말하기를 좋아하였다”고 말한다. 전쟁과 무기에 관심이 많아 청년기에 국영 군수공장인 군기시에 취직한 그는 화약 및 화포 국산화를 위해 40대 중반을 넘은 나이에 중국으로 유학을 떠나는 열정을 발휘하였다. 하지만 중국이 기술을 내줄 리 없었다. 그는 빈손으로 귀국하고 말았다. 원나라뿐 아니라 명나라에서도 기술을 얻을 길이 없었다. 고려 정부는 기술 국산화보다는 완제품 수입 쪽으로 생각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최무선의 집념은 빛을 발하였다. 그는 고려를 방문하는 중국인들을 직접 만나 화약 기술자를 수소문하였다. 정부에서도 이미 포기한 뒤였기 때문에 자기 비용을 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결국 중국인 기술자 이원(李元)을 찾은 그는 자기 집에서 옷과 음식을 제공하면서 수십 일간 기술을 배우는 데 성공하였다. 그런 다음 정부 관리들의 퇴짜를 맞으면서도 수없이 설득한 끝에 화통도감 설치를 관철시키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국산화에 성공한 화포는 1380년 진포 해전에서 왜구 선박 500척을 격파하는 데 기여하였다. 『삼국지』의 적벽대전 못지않은 대승이었다. 사비를 털어 화약 연구에 매진한 최무선의 눈물겨운 노력이 맺은 결실이었다. 14세기 후반의 한민족이 나라를 지킨 것은 한민족 구성원들이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열심히 싸웠기 때문에 가능하였으며, 우수한 인재의 활약도 적지 않게 작용하였다. 최영 같은 용감한 전사가 출현하고, 이성계가 여진족 군단을 끌어오고 최무선이 사비를 털어 신기술을 확보하는 등 우수한 인재가 시의적절하게 나타나 나라에 공헌한 것도 크게 작용하였던 것이다.alt전쟁기념관에 전시된 이성계의 오라산성 전투 상상화]]> Thu, 27 Aug 2020 15:25:08 +0000 45 <![CDATA[다시 쓰는 단양팔경 단양팔경 외전 ]]> 글·사진 임운석 여행작가다시 쓰는 단양팔경단양팔경 외전 “해 아래에는 새것이 없도다.” 지혜의 왕 솔로몬의 말이다. 여행도 그렇다. 어제까지는 핫스폿이었던 곳이 내일을 기약할 수 없다. 수백 년간 이어져 오던 명승지인 단양팔경도 다시 쓰여지기 시작하였다. 이른바 ‘단양팔경 외전(外傳)’이다.  alt 상공을 활공하는 패러글라이딩 새처럼 하늘을 나는 꿈이 현실로단양에는 남한강을 따라 수려한 경치 여덟 곳을 일컫는 ‘단양팔경’이 있다. 그 가운데 제1경은 고즈넉한 남한강에 홀연히 솟은 도담삼봉이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개국할 때 태조 이성계를 도왔던 정도전(1342~1398)은 자신의 호를 삼봉이라 지을 만큼 도담삼봉을 아끼고 사랑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삼봉 중 가운데 있는 봉우리에 정자를 짓고 시를 읊었다고 한다. 우열을 따질 수 없지만 이 같은 이유로 도담삼봉을 단양팔경의 으뜸으로 꼽는다. 그 뒤를 이어 문처럼 생긴 석문, 충주호에서 가장 아름다운 경치를 자랑하는 구담봉과 옥순봉, 그리고 선암계곡을 따라 이어진 하선암, 중선암, 상선암이 꼬리를 물고 경치를 뽐낸다. 하지만 세월 앞에 장사 없다고 하지 않던가. 단양팔경도 시대에 따라 외전(外傳)이 생겼다. alt 카페 ‘산’ 단양팔경 외전의 으뜸, 하늘에서 만나다그 으뜸은 해발 600m에 자리한 패러글라이딩 활공장에서 확인할 수 있다. 구불구불한 산길을 따라 달리면 하늘과 맞닿은 듯한 공터에 이른다. 누군가 이곳의 이름을 묻는다면 하늘공원이라 불러도 될 만큼 시야가 탁 트였다. 공터 끝자락엔 포토존이 설치되어 있어 가장 멋진 풍경을 사진에 담을 수 있다. 그곳에서 바라보는 단양의 풍경은 거침없고 막힘없다. 모두들 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다가도 “뛰어!” 하는 구령에 귀를 쫑긋 세운다. 소리의 진원지에서는 달팽이처럼 등짐을 짊어지고 뜀박질하는 패러글라이더가 보인다. 그리고 이어지는 외마디 비명 “으악!” 패러글라이더가 하늘을 날아간 이후 활공장엔 다시 평온이 깃든다. ‘새처럼 나는 기분은 어떨까?’ 하는 단순한 호기심에 이끌려 패러글라이딩 체험에 도전한다. 안전교육을 받고 교관의 지시에 따라 활주로 앞에 선다. 구경할 때와 비교할 수 없는 긴장감에 손에 땀이 마르지 않는다. 애써 태연한 척하지만, 긴장감은 쉽게 떨쳐버릴 수 없다. 교관이 기념사진을 찍어주는데 한쪽 입꼬리만 애써 끌어올려 사진을 찍는다. 드디어 이륙 준비가 끝났다. 등 뒤에 바짝 달라붙은 교관이 소리친다. 그 목소리는 칼날보다 예리하고 비수보다 날카로워 귓불을 찢을 듯 후벼 판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하늘이다. 하늘을 유영하듯 날고 있는 내 모습에 감격 또 감격한다. 겁에 질려 쫄깃쫄깃하던 심장은 짜릿한 쾌감으로 변한다. 분명히 말할 수 있다. 하늘을 난다는 것은 상상 이상으로 유쾌하다 것을, 바람을 가르는 것은 한없이 상쾌하다는 것을. 내 인생 최초의 비행은 성공이다. 패러글라이딩 활공 시간은 보통 15분 안팎이다. 숙련된 교관이 등 뒤에서 패러글라이딩을 조작해주기 때문에 체험자는 그냥 믿고 맡기면 된다. 적잖은 비용이라 부담스럽지만 평생에 한 번은 체험해볼 만하다. 패러글라이딩 활공장 한편에 있는 ‘카페 산’이 단양의 핫플레이스다. 하늘과 가장 가까운 카페라 불리는 이곳은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문 카페임이 분명하다. 커피는 물론이고 직접 구워내는 빵까지 입맛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alt만천하 스카이워크에서 바라본 단양천alt산기슭을 따라 하강하는 짚 와이어 하늘에서 보는 특별한 풍경과 짜릿함단양팔경 외전 제2경은 만천하 스카이워크다. 단양강 수면에서 80~90m 지점에 25m 높이로 세워진 전망대인데 이곳에서 보는 풍광이 압도적이다. 꽈배기처럼 배배 꼬여 하늘로 솟구친 전망대를 향해 한발 한발 오르면 발아래 전망이 조금씩 넓어진다. 전망대 꼭짓점에 이르면 허공을 향해 돌출한 전망대가 보인다. 전망대 바닥은 천 길 낭떠러지가 고스란히 보이도록 고강도 삼중 투명 강화유리를 설치해 놓았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하늘을 걷는 기분이다. 발끝에서부터 찌릿하게 전해지는 야릇한 느낌. 싫지만 미워할 수 없고, 두렵지만 외면할 수 없다. 힘들게 산을 오르지 않았지만 산 정상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장쾌한 풍경이다. 손에 잡힐 것 같은 단양 읍내와 멀리 소백산까지 또렷하게 조망된다. 만천하 스카이워크 아래에 짚 와이어가 있다. 과거 호주와 뉴질랜드 개척시대에 음식물이나 우편물 등을 전달하려고 설치했던 것이 오늘에 와서는 스릴을 맛보는 익스트림 레포츠로 자리 잡았다. 짚 와이어는 산기슭을 따라 980m 구간을 최고 속도 약 80km로 하강한다. 소요시간은 1분 남짓으로 눈 깜짝할 사이다. 1코스는 만학천봉과 환승장을, 2코스는 환승장과 주차장을 잇는다. alt단양강 수면에서 높이 20m 지점에 설치된 산책로alt수양개역사문화길의 핵심 구간인 잔도길 트레킹 그 이상의 감동중국의 항산 절벽에 설치된 가교를 뜻하는 ‘잔도’가 단양에도 있다. 단양강 잔도가 그것인데 단양팔경 외전 중 제3경이다. 공식 명칭은 ‘수양개역사문화길’이지만 전체 구간에서 백미인 이곳을 ‘잔도길’이라 부른다. 단양역에서 출발할 경우 상진대교를 건너 왼편에 잔도길 진입로가 보인다. 단양역에서 1km 남짓한 거리다. 종착지인 수양개선사유물전시관까지는 4.2km 가량 된다. 본격적인 잔도길은 상진대교와 철교를 지나면서부터다. 강물 위 깎아지른 절벽 20m 정도 위치에 보행 길이 설치되어 있다. 보기엔 아찔하지만 실제로 걸어보면 아름다운 풍경 덕분에 눈이 호사를 즐긴다. 잔잔한 수면에 물그림자를 드리운 잔도의 모습이 이국적이다. 도도히 흐르는 강물 위로 기암괴석의 물그림자가 춤추듯 일렁인다. 잔도 끝자락에 이르면 만천하 스카이워크로 연결된다. 여기서 1.5km 정도를 더 가면 이끼터널이다. 왕복 2개 차로 옆 비스듬한 벽면에 초록색 실크벽지를 붙여놓은 것 같은 이끼가 명물 중에 명물이다. 날씨가 습할수록 그 진가가 드러난다. 지난 긴 장맛 덕분에 이끼가 만개했다. 이끼터널을 지나면 수양개선사유물전시관에 이른다. 수양개선사유물전시관은 ‘선사와 역사를 잇는 고리’라는 콘셉트로 개관한 박물관이다. 1983년 충주댐 건설 당시 수몰지구 문화유적 가운데 구석기시대부터 마한시대까지의 유물을 전시한다. 유물전시관 뒤편엔 빼놓지 말고 챙겨봐야 할 단양팔경 외전 제4경이 있다. 수양개 빛터널이다. 길이 200m, 폭 5m 규모인데 국내 최초의 빛 터널이다.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져 방치되던 것을 2017년 4월 빛 터널로 개보수해 재개관했다. 해가 질 무렵이라면 야외에 조성된 인공 장미 군락지도 챙겨보자. 5만 송이에 이르는 인공 장미가 화사한 조명을 밝히며 색다른 풍경을 연출한다.alt야간에 즐기는 수양개빛터널]]> Thu, 27 Aug 2020 15:26:21 +0000 45 <![CDATA[승리의 역사 청산리전투 ]]> alt]]> Fri, 25 Sep 2020 16:31:35 +0000 46 <![CDATA[독립전쟁사의 금자탑 ]]> 글 은예린 역사작가 독립전쟁사의 금자탑 청산리전투일제에 의한 강제병합 이후 나라를 되찾기 위한 염원과 노력은 각계각층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만주와 연해주 등지로 망명한 이들은 장차 다가올 독립전쟁에 대비하여 독립군 기지 건설에 노력을 기울였다.독립군 양성의 요람, 무관학교가 설립되다독립군들의 독립전쟁을 실천하려는 계획은 신흥무관학교 설립과 운영으로 이어졌다.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은 훗날 항일 무장투쟁을 이끄는 주도적인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서간도는 망명 인사들에 의해 독립군 근거지로 새롭게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이에 국내외 청년들은 이곳으로 결집하는 등 조국의 독립을 향한 의지는 상상을 초월할 만큼 고조되는 분위기였다.  교육열이 높았던 재만 한인사회에서 문무를 겸비한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에 대한 신뢰는 대단하였다. 졸업생 중에는 압록강 대안인 서간도뿐만 아니라 두만강 대안의 북간도 지역의 민족학교에 파견되어 민족의식을 일깨우는 선구자로서 시대적인 책무에 혼신을 기울였다. 이들은 낮에는 학과를 가르치고 밤에는 한인 청년들에게 군사교육을 실시하는 등 독립전쟁에 만전을 다하였다. 졸업생들이 파견된 지역은 유사시에 독립군으로 재편될 예비군이 준비되어 있었다.북로군정서도 사관연성소를 설립하고 교관 이장녕·이범석·김홍국·최상 등과 함께 독립군 양성을 위한 군사훈련을 진행하였다. 상등병 이상 사관생들에게는 현대 전쟁의 전략전술 등 군사교육과 훈련을 병행하였다. 사관연성소 사관생 298명이 1920년 9월에 졸업한 직후 청산리로 이동하였다. 이들이 부르고 부르던 군가에는 불공대천의 원수 일제를 타도할 의지가 충분히 반영되었다.3·1운동 이후 독립군 세력이 결집하다국권 상실을 전후하여 간도와 연해주 지방으로 옮겨온 의병 출신의 지사와 교민들은 민족 독립을 위해 독립운동 단체를 결성하였다. 3·1운동 직후 독립군 세력은 대폭 강화되어 대담하게 국내 진입 작전까지 감행하였다. 1920년 6월 7일에 독립군을 추격하여 만주 허룽현(和龍縣) 봉오동 골짜기까지 침입한 일본군 1개 대대를 홍범도·최진동·안무 등이 지휘하는 대한북로독군부(大韓北路督軍府) 연합부대가 몰살시켰다. 봉오동전투에 큰 충격을 받은 일본군은 독립군과 독립운동가들을 토벌하는 이른바 ‘간도지역 불령선인 초토 계획’을 수립하였다. 만주 군벌 장쭤린(張作霖)은 일본군 파견 장교의 감시하에 중국군을 출동시켜 한국 독립군 토벌을 약속하였다. 그런데 중국 관헌의 간부 일부는 일본군의 강요에 굴복한 중국군의 독립군 토벌에 찬성하지 않았다. 한국인 교민단체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와 중국군 군영장 멍푸더(孟富德) 사이에 비밀 협정에 의한 타협이 성립되었다. 요지는 독립군 부대들이 근거지를 이동하여 일본군 눈에 띄지 않은 밀림지대로 이동하고 그 대신 독립군을 토벌하거나 추격하여 방해하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다. 이에 독립군단들은 8월 하순부터 근거지를 이동하였다. 옌지현(延吉縣) 명월구에서 활동하던 홍범도의 대한독립군이 먼저 근거지를 이동하여 9월 21일경에는 허룽현 이도구 어랑촌 부근에 도착하였다. 안무의 국민회군도 근거지를 이동하여 9월 말경에 이도구에 도착하였다. 봉오동에 근거지를 두었던 최진동의 군무도독부 독립군은 북방으로 이동하여 9월 말경에 나자구 지방에 도착하였다. 다른 독립군 부대 등도 근거지를 이동하여 이도구 부근으로 속속 도착하였다. 왕칭현(汪淸縣) 서대파에 근거지로 했던 북로군정서는 마지막으로 사관연성소 졸업식을 마친 다음 9월 17~18일 근거지를 이동하여 10월 12~13일에 허룽현 삼도구에 도착하였다. 일제는 직접 간도에 출병하여 독립군 토벌을 결정하였다. 주지하듯이 간도는 중국의 영토로 일본군은 간도에 출병할 구실이 없었다. 이에 마적단을 매수하여 10월 2일 훈춘(琿春)을 습격해서 일본영사관을 방화한 ‘훈춘사건’을 일으켰다. 이를 구실로 국제조약을 어기고 간도 출병을 단행하였다. 일본군이 동원한 총병력은 25,000여 명의 대규모 병력이었다. 일본군은 작전 목표를 2단계로 설정하였다. 제1단계는 1개월 이내에 독립군 무장대를 철저히 색출하고 토벌을 되풀이하여 독립군 전원을 섬멸한다는 내용이었다. 제2단계는 제1단계가 끝난 후로부터 다시 1개월 이내에 촌락에 잠복한 독립군과 민간인 독립운동가를 철저히 색출하려는 의도였다. 청산리 독립전쟁은 이러한 목적으로 출동한 일본군 아즈마(東)지대가 독립군 부대를 포위·섬멸하려는 수색작전에서 시작되었다.alt 독립기념관 경내에 있는 김좌진 어록비 적막한 가운데 총성이 울리다한편 김좌진 부대는 계속 일본군의 동태를 파악하면서 전쟁을 자제하려 하였다. 그러나 추적을 따돌릴 수 없다고 판단하여 일본군과 일전을 감행하기로 결정하였다. 결국 10월 21일 김좌진과 이범석의 지휘 아래 비전투원들과 전투요원들로 나누어 구성된 독립군 부대들은 청산리 백운평(白雲坪) 바로 위쪽의 고갯마루와 계곡 양쪽에 매복하여 전투태세를 갖추어 공격 준비를 시작하였다. 청산리계곡은 동서로 약 25㎞에 달하는 긴 계곡으로, 계곡 근처는 사람들의 이동이 힘들 만큼 험악한 삼림지대였다.오전 9시경 일본 측의 야스가와(安川)가 이끄는 부대가 계곡의 좁은 길을 따라 이범석 부대의 지점으로 들어섰다. 이 순간 독립군들은 일제사격을 가해 그들을 전멸시켰다. 다시 야마타(山田)가 지휘하는 본대가 그곳에 도착하면서 독립군과 치열한 총격전이 벌어졌지만, 유리한 지형을 이용한 우리 독립군의 승리였다. 결국 일본군은 200명이 넘는 전사자를 남기고 돌아서며 전투의 실패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뒤이어 김좌진은 이범석에게 패주하는 적을 뒤쫓지 말고 부대원을 이끌고 갑산촌(甲山村)으로 철수하라 지시하였다. 이때 이도구 완루구(完樓溝)에서는 홍범도 부대가 일본군의 공격을 받고 있었다. 홍범도 부대는 중앙으로 진격한 일본군의 한 부대를 공격한 후 일본군의 다른 부대를 비롯해 중앙의 일본군을 무너뜨리는 데 성공하였다.전투는 오후 늦게 시작되어 다음 날 새벽까지 이어졌고, 일본군 400여 명이 거의 전멸하였다. 22일 새벽 갑산촌에서 합류한 김좌진 부대와 그곳 주민들로부터 부근의 천수동(泉水洞)에 일본군 기병대가 머물고 있다는 정보를 듣고 그곳으로 이동하여 일본군 기병 중대를 파멸시켰다. 이때 김좌진은 일본군의 반격이 있으리라 예상하고 부대원을 어랑촌 부근의 고지로 이동시켜 공격해오는 일본군을 막아냈다. 부근에 있던 홍범도 부대도 김좌진 부대를 도와 일본군과 전투에 참가하여 치열한 전투를 벌이며 커다란 승리를 거두었다.이후에도 맹개골전투, 만기구전투, 쉬구전투, 천보산전투에서 승리를 거듭하였다. 독립군은 연일 벌어진 혈전에도 사기가 충천하여 ‘일당백’ 정신으로 선전하였다. 청산리 독립전쟁의 마지막 전투는 고동하에서 10월 25일 한밤중부터 26일 새벽까지 홍범도의 독립군이 야습해 온 일본군을 도리어 반격해 큰 타격을 주었다. 밀림전에 숙달된 홍범도 부대는 미리 매복하였다가 대대적인 반격으로 습격해온 일본군 2개 소대를 거의 전멸시켰다. 독립군은 10월 26일 낮부터 안투현(安圖縣) 방면으로 철수작전을 전개하여 청산리 독립전쟁은 일단 멈추게 되었다.1920년 10월 박영희·강화린·오상세·백종렬·김훈 등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은 북로군정서의 중견간부로서 청산리대첩에 참여하였다. 북로군정서 사관연성소 출신 200여 명으로 조직된 연성대는 대장 나중소(羅仲昭)와 부관 최준형(崔峻衡) 등의 일사불란한 지휘하에 혈전을 펼쳤다. 홍범도의 대한독립군과 함께 일본 정규군 1,200여 명을 사살한 청산리대첩은 신흥무관학교와 사관연성소에서 군사훈련을 받은 장교들이 지휘하여 이룬 쾌거였다. 한편 상하이 『독립신문』은 청산리 독립전쟁에서 일본군의 전사자에 대하여 ‘김좌진 부하 600명과 홍범도 부하 300명은 대소 전쟁 10여 회에 왜병을 격살한 자 1,200명’이라고 보도하였다. 북로군정서의 서일(徐一) 총재는 임시정부에 일본군 전사자를 약 1,250명으로 부상자를 약 200명으로 보고하였다. 중국의 『요동일일신문(遼東日日新聞)』은 일본군 전사자를 약 2,000명이라고 추산하였다. 반면 독립군 측의 피해는 전사자 약 130명과 부상자 약 220명이라고 보도하였다. alt홍범도 묘역alt북로군정서 서일 총재alt청산리 항일 전적비혈전(血戰)에 의한 독립운동의 중요성을 일깨우다 자랑스러운 청산리전투는 이제 100주년을 맞이한다. 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10여 차례 이어진 치열한 이 전투는 대한독립군과 북로군정서 등으로 구성된 연합 부대에 의한 우리의 빛나는 숨결이 담긴 대승리였다. 이 전투는 독립운동사에서 가장 빛나는 독립전쟁이었다. 일본군은 전투의 승리를 인정하기보다 강력한 보복을 단행하였다. 독립군에게 대패한 일본군은 잔인하고 끔찍한 방법을 동원하여 한인사회를 파괴하고 한인들을 무참하게 학살하였다. 이때 한족회 교육위원회 권기일과 삼광학교 교장 김동만이 순국하였다. 독립군과 한인사회에 대한 탄압을 더욱 강화하자 1920년 말 독립군 부대는 러시아 자유시로 옮겨갔다. 여기에서도 당시 국제 정세에 따른 러시아의 독립군 무장해제와 자유시에서의 독립군단들의 갈등으로 ‘자유시참변’이 일어나고 말았다.위기 상황에서도 독립군들은 다시 힘을 합쳐 독립운동 단체 통합에 힘을 모았다. 주목할 만한 일은 1922년 8월에 남만주 전체를 아우르는 통합군단인 대한통의부가 결성된 사실이다. 여기에 김동삼이 총장을 맡아 항일투쟁을 지속적으로 이어갔다. 독립군들은 험난하고 고단한 상황에서도 독립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고 혹독한 추위와 극심함 굶주림을 이겨내며 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이 모든 일은 나라의 광복을 위해 이름 없이 숨진 수많은 독립군과 그들의 승리를 위해 숨어서 희생을 마다하지 않은 민초들의 피와 눈물이 있었다.청산리대첩은 일본군의 간도 출병작전을 완전히 실패로 내몰아 저들을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한민족에게는 독립정신을 크게 고취하고 독립에 대한 희망과 확신을 심어주었다.alt 청산리 항일대첩 기념비 ]]> Fri, 25 Sep 2020 16:30:33 +0000 46 <![CDATA[개천절과 독립운동 그리고 현재적 의미 ]]> 글 이계형 국민대학교 교양대학 교수개천절과 독립운동 그리고 현재적 의미개천절이 국경일로 정해진 것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바로 다음 해인 1949년이다. 이때 3·1절, 제헌절, 광복절 등도 국가 법률로써 경축일로 정해졌다. 한글날은 2005년에 국경일로 승격되었다.개천절의 기원개천절은 우리나라에서 처음 하늘이 열린 날, 즉 개국·건국을 기념하여 제정한 국경일을 뜻한다. 국경일에 대해 의미를 모르는 이는 드물겠지만, 개천절에 대해서는 단순히 ‘단군이 고조선을 건국한 날’ 정도로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건국 신화에 등장하는 단군을 기리게 되었고, 지금 우리에 어떤 메시지를 던져주는가?단군의 정신으로 민족 고유의 종교가 된 것은 1909년 1월 15일 나철이 단군 대황조 신위를 모시고 제천 의식을 올린 뒤 단군교를 선포하면서다. 나철은 러일전쟁 이후 일제가 침략 야욕을 드러내자 관직을 그만두고 오기호·이기 등과 비밀결사 유신회를 조직하여 구국운동에 나섰다.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 일왕, 이토 히로부미, 오쿠마 시네노부 총리대신에게 조선 독립을 촉구하며 도쿄 궁성 앞에서 3일간 단식 항쟁을 벌이는가 하면, 국내로 돌아와 을사5적을 처단하려다 붙잡혀 유형 10년을 받기도 하였다. 나철은 날이 갈수록 일제의 침략 야욕이 거세지는 상황에 민족정신을 바로잡아 ‘보국안민(輔國安民)’과 ‘제인구세(濟人救世)’를 위하여 단군정신에 주목하였다. 이에 단군교를 창시하였고 1910년 국망이 닥쳐오자 대종교로 이름을 바꿨다. 1910년 당시 교인 수는 21,539명에 달했다. 이때 나철은 1909년 음력 10월 3일에 치렀던 개극절(開極節) 행사를 개천절로 바꾸었다. 우리나라 역사의 기원을 단군에서 출발하는 인식은 고려 후기 『삼국유사』와 『제왕운기』에서 시작되었다. 단군을 동국(東國)의 개국조로 여기는 역사 계승의식은 이때 형성되었다. 하지만 16세기에 사림세력이 등장하면서 단군보다는 기자 존숭이 강조되었다. 단군이 제일 먼저이지만 문헌으로 실증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그러다가 17세기 후반 중국 문명과 관련성을 탈피하려는 분위기 속에서 단군 인식에도 크게 변화하였다. 단군의 독자성을 강조하는 역사서술이 등장한 것이다. 세도정치기에 주춤했던 단군 인식은 한말에 자주자강을 위한 국민계몽 차원에서 단군이 다시 부각되었다. 조선의 유구한 역사와 독립성이 강조되면서 단군을 개국조로, 기자를 단군의 계승자로 위치 지었다. 특히 1904년부터 단군과 민족의식이 결합하여 강력한 민족주의 의식으로 확장되었고, 점차 우리 민족을 ‘단군의 자손’이라면서 혈연적 운명공동체로서 국망의 현실에 대처할 것을 요구하기 시작하였다. 이런 가운데 대종교가 탄생하였고 개천절 행사가 음력 10월 3일에 치러졌다. 일제의 개천절 탄압하지만 국망 이후 모든 것이 변했다. 일제는 단군 탄생을 ‘황당하고 기괴하여 믿을 수 없는 이야기’로 폄하하고, 대종교를 유사종교로 규정하였으며 개천절 행사도 금지하였다. 우리의 개천절 행사는 민족적 정체성 확인과 자주독립 의지를 고취하는 동력이었기 때문에 일제의 감시 대상이었다. 더욱이 만주사변 이후 일제의 동원·수탈정책과 민족말살정책 등에 개천절 행사 자체가 불가능하게 되었고, 그와 관련한 언론 보도는 거의 사라졌다. 대신 일제는 자신들의 건국신화를 절대적인 역사적 사실로 둔갑시켜 『일본서기』를 근거로, 2월 11일을 기원절로 제정하여 개국기념일로 공식화하였다. 이에 나철은 백두산 아래의 중국 허룽현(和龍縣) 청파호에 망명하여 포교를 계속하였고, 북간도 교민 1,0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개천절 행사를 치렀다. 이는 종교적 기념일을 넘어 범민족적인 행사로 민족의식을 고취하여 독립 의지를 다지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개천절 행사는 한인들이 사는 곳 어디에서든지 열려 웅변대회를 개최한다든지 마을에서는 떡을 쳐서 잔치를 베풀기도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19년 음력 10월 3일(양력 11월 24일)에 첫 개천절 행사를 개최하였다. 당시에는 이를 건국기원절이라 하였지만 개천절로 인식하였다. 다음 해부터 임시정부는 개천절을 3·1절과 함께 공식 국경일로 제정하여 북경로 예배당, 서장로 영파회관(寧坡會館), 삼일당(三一堂), 민국로 침례교회 등에서, 충칭으로 옮겨서는 중앙문화운동회관 등에서 행사를 개최하였다. 임시정부가 중국을 침략한 일본군을 피해 떠돌아다녀야 했던 시절에도 선상에서 개천절 행사를 치렀다. 해방 후에는 1945년 11월 귀국 길에 충칭과 상하이에서 임시정부 요인들이 개천절을 기념하였다. 행사 날에 안창호와 이동휘는 「송축사」와 「축사」를 통해 단군의 민족적 의미를 예찬하며 종교나 이념을 초월한 민족 단합의 의지를 되새겼다.광복의 기쁨은 국내의 개천절 행사에도 나타났다. 국민당 위원장 안재홍은 단기 연호를 사용하기로 하였고, 3,000만 명의 동포들에게 아무쪼록 힘써서 성조의 기업(基業)을 확수(確守)하여 불효자손이 되지 말자고 맹세하는가 하면, 국조 숭경(崇敬)의 사상을 고취하자며 단군전을 세우자는 분위기도 무르익었다. 이를 기회로 해방 후 처음으로 맞는 개천절 행사가 서울운동장에서 대대적으로 열렸다. 개천절을 대하는 자세1946년 미군정 아래, 개천절은 국경일로 지정되었지만 38선으로 남북이 분단되어 가자 동족 공영의 목표 아래 이해(利害)의 대치(對峙)를 극복하고 남북통일의 자주 정권 수립에 매진할 것을 강조하고 나섰다. 1947년 개천절에는 국토가 양단되었고 주권은 미군정에 있으며 우리 민족의 근화(權化)인 임시정부가 여전히 정당한 국권의 계승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비통함을 토로하면서 자주독립 즉 완전 독립을 위하여 3,000만 명이 다 같이 새로운 투쟁을 하자는 결의를 다지기도 하였다. 1948년 11월 한 민족이 두 개로 분단된 뒤 처음으로 맞이한 개천절은 휴무일로 정해졌지만, 지역별·기관별로 행사가 치러졌을 뿐 정부 차원에서 움직임은 없었다. 서울시 주최로 서울운동장에서 치러진 개천절 행사에 서울시장과 몇몇 장관들만 참석하였다. 어떤 메시지도 던져주지 못한 채 으레 기념식처럼 개천절 행사가 진행되었다. 그 뒤 1949년에는 음력을 양력으로 환산하기가 어렵고 양·음력을 떠나 ‘10월 3일’이 소중하다며 아무 관련 없는 양력 10월 3일을 개천절로 제정해버렸다. 당시 정부 차원의 개천절 행사가 강화도 참성단에서 개최되었지만 부통령·국회의장·국무총리의 대독 경축사만 있었다. 그 뒤 1950년대에는 중앙청 광장에서 3부 합동으로, 1960년대에는 시민회관·국립극장 등에서 국무총리 대독의 대통령 경축사가 낭독되었다. 1970년대 후반부터는 세종문화회관에서 치러졌고, 1988년 이후부터는 국무총리 경축사로 자리매김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정부 수립 이후 지금까지 대통령이 참석한 것은 1984~1985년 두 해뿐이다. 개천절은 우리나라의 5대 국경일 가운데 하나이지만 단군을 국조(國祖)가 아닌 대종교의 종교행사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단군의 기념일을 개천절로 기린 것은 단군이 국가의 시조에서 민족의 시조로 의미가 확장되어 국망 이후에는 우리 민족은 다 같은 자손이기 때문에 뭉쳐야 한다는 논리로 작동하였다. 광복 이후에는 분단국가가 아닌 통일을 염원하는 자리가 되었다. 북한에서도 개천절을 기념하고 있으니 민족이란 상상의 공동체를 하나로 묶는 중요한 날임을 모두 기억하는 것이다. 남과 북이 이견 없이 함께 공유하고 경축하는 날인만큼 통일을 향한 양국 교류의 기폭제로 삼으면 어떨까 한다.]]> Fri, 25 Sep 2020 16:37:14 +0000 46 <![CDATA[만주지역에서 독립군 양성에 힘쓴 박영희 ]]> 글 독립기념관 전시부만주지역에서독립군 양성에 힘쓴박영희alt 박영희(朴寧熙)1896. 12. 28. ~ 1930.충청남도 부여건국훈장 독립장(1977) 청산리전투 승리에 기여하다박영희는 1896년 충청남도 부여에서 태어났다. 망명 후 만주에서 활동할 당시에는 박두희(朴斗熙)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졌다. 고향에서 신명의숙을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와 휘문의숙을 다니던 그는 신명의숙 은사이자 훗날 신흥무관학교 교장을 역임한 이세영과 함께 1913년 만주로 망명하였다. 서간도 합니하(哈泥河)에 위치한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하여 군사지식을 습득하고 졸업 후에는 신흥무관학교 교관으로 부임하였다.1920년 무렵부터 독립군에 대한 일제의 감시가 심해지는 가운데, 박영희는 북로군정서 사령관인 김좌진의 부관 겸 사관연성소 학도단장으로 활동하며 독립전쟁을 이끌 정예군 양성에 매진하였다. 박영희의 지도 아래 사관연성소에서 1920년 9월 약 300여 명의 졸업생이 배출되었고, 이들은 교성대(敎成隊)로 편입되어 청산리전투의 주력군으로 활약했다. 박영희도 부관으로서 청산리전투에 참전하여 일본 정규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는데 기여하였다. alt 박영희 alt박영희가 학도단장으로 활동하였던 북로군정서(대한군정서) 사관연성소(1920) 독립군 양성에 힘쓰다청산리전투 이후 박영희는 일본군의 추격을 피하여 러시아로 이동했다가 자유시참변 이후 다시 만주로 돌아왔다. 1923년 무렵 북만주 소수분(小綏芬) 지역에 학술강습소를 열어 생도들을 모아 독립군을 양성하고, 상하이에서 발행한 잡지 『배달공론』에 「군사학강의」를 연재하며 군사지식 보급 활동을 이어나갔다. 1924년 대한독립군단에서 활동하던 그는 1925년 북만주 지역 독립운동 단체를 통합한 신민부가 조직되자 보안사령관으로 임명되어 군사부 위원장인 김좌진을 보좌하였다. 또한 신민부 산하의 독립군 간부양성기관인 성동사관학교 교관으로서 신민부 군사조직에 필요한 핵심 인재를 양성하였다. 이외에도 친일인사 처단, 국내 진입작전을 위한 특수 부대 파견활동에도 앞장선 박영희는 1930년 군자금 모집을 위해 러시아에서 첩보활동을 펼치다 순국하였다. 정부는 독립군 양성과 무장투쟁에 헌신한 그의 공훈을 기리며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alt박영희가 학술강습소를 열어 학술과 무술을 가르치고 있음을 전하는 『신한민보』 기사(1923. 10. 4.)alt박영희가 비밀지령을 받고 국내로 입국하였다는 소식이 담긴 『동아일보』 기사(1927. 2. 18.) alt『배달공론(倍達公論)』에 실린 「군사학강의」(1923. 9.)_고려대학교 도서관 소장alt박영희의 서명이 담긴 독립운동 선전문 「불온문서 우송의 건(不穩文書郵送ノ件)」(1925. 3. 4.)  alt]]> Fri, 25 Sep 2020 16:33:01 +0000 46 <![CDATA[한글 보존의 염원이 담긴 '조선말 큰 사전 원고' ]]> 글 유완식 독립기념관 자료부 학예연구관한글 보존의 염원이 담긴'조선말 큰 사전 원고'alt조선말 큰 사전 원고 1945년 9월 8일 경성역(현재 서울역) 조선운송 창고에서 의문의 원고 뭉치가 발견되었다. 이는 조선어학회에서 1929년부터 1942년까지 13년간 작성한 사전 원고의 최종 수정본인 「조선말 큰 사전 원고」였다. 이처럼 중요한 원고가 사라지게 된 배경은 1942년 10월 1일 식민지배 아래에서 우리말 연구와 정리·보급을 위해 사전 편찬 작업을 하던 조선어학회 회원들이 일제에 검거되면서 함경도 함흥과 홍원에서 투옥된 ‘조선어학회 사건’에 있었다.1929년 10월 108명의 각계 유지들은 우리말사전을 만들기 위하여 조선어사전편찬회를 조직하였다. 일제는 조선어사전편찬회 발기인 108명 모두가 민족주의 사상을 지녔다고 판단하고 이들을 강제 해산시키기 위하여 함흥학생사건을 꾸며냈다. 이어 조선어학회의 사전 편찬을 맡고 있는 정태진을 관련자로 검거하고 조선어학회가 독립운동을 목적으로 하고 있는 민족주의 단체라는 거짓 자백을 받아냈다. 이에 따라 33명이 내란죄로 기소 당하였다. 이들 중 16명은 기소되었고, 나머지 12명은 기소유예로 석방되었다. 기소된 16명 중 이윤재와 한징이 옥중에서 사망하고, 장지영·정열모 두 사람은 석방되어 최종 공판에 넘어간 사람은 12명이었다. 회원들이 검거되면서 사전 원고는 경찰에 압수당하여 함흥지방법원에서 진행된 재판에 증거물로 제출되었다. 회원들 중 징역형을 선고받은 4명이 항소를 하였는데, 경성고등법원으로 사건이 옮겨지면서 관련 서류와 증거물도 같이 서울로 보내졌다. 하지만 증거물 가운데  「조선말 큰 사전 원고」 뭉치가 들어 있던 상자는 경성고등법원에 전달되지 않았다. 그리고 경성고등법원은 광복 4일 전인 1945년 8월 12일에 상고 기각 판결을 내리게 된다. 이 사건으로 조선어학회는 강제로 해산되었다가 해방 후 조직을 정비한 뒤 1949년 9월에 ‘한글학회’로 이름을 바꾸었다. 광복이 되면서 함흥감옥에서 풀려난 학자들은 서울에 모여 경찰에 압수된 원고를 찾기 위하여 백방으로 수소문에 나섰다. 그러던 중 경성역 조선운송 창고에서 인부들과 함께 화물을 살펴보던 역장이 상자 속 원고 뭉치를 발견하고 학회 측에 이를 알리게 되었다. 한글학회는 이 원고를 바탕으로 1947년에 『조선말 큰 사전』 2권을 간행하고, 3권부터는 『큰 사전』이라는 이름으로 1957년까지 총 6권을 간행하였다. 「조선말 큰 사전 원고」는 총 17권으로 이중 12권은 한글학회에, 5권은 독립기념관에 보관 중이다. 또한 등록문화재 제524-2호와 국가지정기록물 제4호로 지정된 상태로, 보물 지정을 위한 조사가 진행되고 있다. 자칫 어둠 속에 묻혀 사장될 위기에 있었던 「조선말 큰 사전 원고」가 다시 빛을 볼 수 있었던 것은 일제강점기 조선어 말살 정책에 맞서 한글을 보존하고자 하였던 국어학자들의 염원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altalt 조선어학회 사건 관련 한글학회 회원들 ]]> Fri, 25 Sep 2020 16:29:42 +0000 46 <![CDATA[독립을 향한 결의 ]]> 독립을 향한 결의 삼천리 무궁화동산에 왜적이 침입하였으니피 흘려 싸워 적을 물리치고내 조국을 찾고야 말 것이다.뿔뿔이 흩어져서는 이길 수 없으니한데 뭉쳐 하나의 군대를 만들자.독립군들이여, 단결을 호소하노라.우리에게는 무장한 희생정신과적을 상대할 뛰어난 지략이 있다. 독립을 염원하고 투쟁을 지지하는 민족의 성원마저 탄탄하니쉼 없이 싸우겠노라.우리 땅 내 조국에서 왜적이 물러날 때까지. ]]> Fri, 25 Sep 2020 16:09:44 +0000 46 <![CDATA[윌로스 한인비행학교의 설립과 활동(2) ]]> 글 홍선표 나라역사연구소 소장윌로스 한인비행학교의 설립과 활동(2) Ⅳ. 3·1운동 이후 재미 한인 사회의 변화 ⑤ 3·1절 경축식 참가와 노백린의 꿈노백린이 윌로스에 한인비행학교를 설립하려 할 때 가장 큰 난관은 재정이나 인력의 부족이 아니라 주변 미국인 사회의 부정적인 편견과 반발이었다. 윌로스를 포함하여 14카운티보호협회 회장 밴 버나드(Van Bernard)는 한인들의 비행학교 설립을 일인들과 마찬가지로 장래 캘리포니아 백인사회를 위협할 화근으로 간주하고 강력히 비난하였다. 이에 노백린은 “군단의 설립 목적은 한인 청년들에게 장차 한국이 일본으로부터 독립을 얻는 데 도움이 될 비행술을 가르치기 위함”이라고 설명하고 난관을 극복하였다. 한인비행학교는 설립된 지 얼마 되지 않아 3·1운동 제1주년 행사에 참가하여 처음으로 한인사회와 미국사회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1920년 3월 1일 3·1운동 발발 1주년을 경축하기 위해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는 새크라멘토에 대대적인 기념행사를 추진하였다. 노백린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총장의 자격으로, 그리고 비행학교 학생들은 제복과 무장을 갖추어 ‘사관학생대’의 이름으로 참여하였다. 당초 행사 날 아침에 레드우드 비행학교에 재학 중인 한인 비행사와 교관 브라이언트가 특별 순서로 축하비행을 하는 것으로 계획하였으나 당일 많은 비로 취소되어 아쉬움을 주었다. 이날 기념행사에는 400여 명의 남녀들이 모였다. 노백린은 오전 1부 순서인 시가행진 때 중앙총회에서 마련한 자동차에 탑승하지 않고 20명의 ‘사관학생대’와 함께 도보 행진을 하였다. 오후 2부 행사 때는 10명의 비행학교 생도들이 3·1운동 때 만세시위로 희생을 당한 고국의 독립운동가들을 기리는 만세 춤을 선보였다.새크라멘토의 3·1절 제1주년 경축행사 때 ‘사관학생대’의 일원으로 참가한 최능익은 “나는 몇 날 전까지 교회 일을 보던 자이올시다. 동족의 속죄 구령에 힘을 다하는 일이나 총과 칼을 배우는 일이 다 하나님의 뜻에 합당할 줄로 생각하여 사관생도가 되었음”을 밝혔다. 그러면서 남의 도움을 바라지 않고 내 손으로 벌어서 생계와 훈련비를 충당해가며 독립을 위한 사업에 뛰어들었음을 밝혀 참석자들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  최능익의 언급대로 한인비행학교의 훈련 경비는 학생들 스스로가 부담해야 했다. 중앙총회는 비행학교에 재정을 지원하며 자체 사업으로 만들려 하였으나 예산 부족으로 계획으로만 그쳤다. 비행학교의 경비는 김종림 등 윌로스와 인근의 한인 실업가들의 지원으로 충당할 수밖에 없었다. 생도들은 일당 5달러 25센트를 받는 농장 노동으로 돈을 벌어 생계비와 훈련비를 충당하였고 노동하지 않는 날에는 노백린의 지도 속에 군사훈련을 받았다. 더구나 시급한 숙소도 마련되어 있지 않아서 준비가 될 때까지 노백린이나 학생들 모두 천막에서 지냈다. 열악한 상태에서 노동과 군사훈련을 병행하였으나 노백린의 포부는 매우 컸다. 1920년 6월 22일 첫 비행기가, 이틀 후 두 번째 비행기가 도입되자, 레드우드 비행학교 교관 브라이언트를 교관으로 초빙해 전문적인 비행훈련을 맡겼다. 1920년 5월 19일 노백린은 상하이의 국무총리 이동휘에게 보낸 편지에서 향후 지략을 갖춘 비행사를 양성하는 것은 물론 10대의 비행기를 구입해 독립전쟁에 활용할 비행대를 만들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그리고 중국 내 장차 한인비행학교를 설립할 꿈도 갖고 있었다. 대한인비행가양성소의 개소와 폐소노백린의 주도 하에 지상의 군사훈련과 비행훈련을 착수해 토대를 갖춘 비행학교는 1920년 7월 5일 ‘대한인비행학양성소’란 이름으로 성대한 개소식을 거행하였다. 비행학교를 시작할 때 특정된 이름도 없이 ‘노백린군단’, ‘사관학생대’, ‘사관양성소’, ‘한인비행학교’ 등으로 불렀으나 이제야 비로소 ‘대한인비행가양성소’란 정식 이름을 갖게 된 것이다. 200여 명이 참가한 개소식 때 교관 브라이언트와 오림하는 축하 비행을 하였다. 개소식을 마친 노백린은 군무총장의 직임을 다하기 위해 윌로스를 떠나 1921년 2월 2일 상하이로 갔다. 그의 후임으로 중앙총회 총무 곽림대가 임시 감독을 맡았다. 1920년 7월 25일 김종림은 송덕용·강영문·이재수·신광희 등과 비행가 양성사를 설립하여 총재가 되었고, 향후 2년 동안 비행가양성소의 유지와 발전을 돕는 데 앞장섰다. 레드우드 비행학교에서 비행술을 배운 후 교관으로 윌로스에 온 한장호는 7월 말경 교관과 학생 16명이 참가한 대한인비행가구락부(KAC)를 만들어 결속을 다졌다. 그런데 학교 운영을 맡은 곽림대가 최윤호와 함께 켄터키사관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1920년 9월 윌로스를 떠난 데다 그 해 10월 발생한 대홍수가 한인들의 쌀농사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인력의 부족에 재정 압박까지 가중되자 비행가양성소를 운영하기 어려워져 교관과 학생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그런 데다 비행사 자격증을 따기 위해 레드우드 비행학교에서 비행시험을 보던 박희성이 추락사를 겪고 중상을 입었다. 비행가양성사 총재로 비행학교의 실질적인 후원자였던 김종림은 1921년 4월 「청원서」를 북미지방총회장 최진하에게 보내 더 이상 비행가양성소를 운영할 수 없는 현실을 알리고 폐쇄하였다.alt 윌로스 비행학교의 훈련 생도들 비행학교 설립의 영향1920년을 독립전쟁의 해로 선포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노백린이 비행학교를 시작할 때부터 큰 관심을 갖고 지지를 보냈다. 1920년 3월 2일 개회한 임시의정원에서 국무총리 이동휘는 「대한민국임시정부시정방침」 14개항을 제시할 때 “미국에 기량이 우수한 청년을 선발 파견하여 비행기 제조와 비행 전술을 학습함”과 동시에 ‘비행기 대 편성’을 당면의 방침임을 밝혔다. 비행기를 활용한 독립전쟁의 방략을 임정이 처음으로 제시한 것이었다. 또 그는 노백린의 비행대 설립 구상에 적극 찬동을 표하고 이르쿠츠크 지방에 비행기를 활용한 군사훈련 계획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선전용으로 활용하기 위해 비행기와 비행사를 확보하려 하였던 노동총판 안창호는 당초 계획이 사정상 중단되자 김공집, 박현환 등 20여 명의 한인 청년들에게 비행술을 비롯한 군사학을 공부하도록 중국 광동정부와 교섭에 나섰다. 그 무엇보다 임시정부는 1921년 7월 18일자로 어려운 가운데서도 비행학교에서 훈련받고 비행사 자격증 딴 박희성과 이용근을 육군비행병 참위(소위)로 임관함으로써 그간 이루어낸 비행학교의 성과와 공로를 치하하였다. 3·1운동의 영향으로 윌로스에 한인비행학교를 설립하고 운영한 경험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군사정책 수립과 해방 후 공군 창설에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영향을 주었다. 첫째, 임정 군무(軍務)를 대표한 군무총장 노백린의 주도와 재미 한인들의 적극적인 협력과 성원 속에 순수 자력으로 비행학교를 설립·운영함으로써 임정은 향후 군사계획을 수립할 때 큰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다. 둘째, 비행학교 설립과 운영의 경험은 해방될 때까지 임시정부가 공군 건설의 꿈을 깊이 간직하고 추진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셋째, 해방 이전 독립운동가들이 꿈꾼 공군 건설의 열망은 해방 직후 대한민국 공군을 창설하는 역사적인 기원을 만들었다.  ]]> Fri, 25 Sep 2020 16:44:54 +0000 46 <![CDATA[혁명동지로서 부부가 된 이범석과 김마리아 ]]> 글 김형목 사단법인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이사 혁명동지로서 부부가 된 이범석과 김마리아 이범석과 김마리아가 처음 만나게 된 것은 연해주에서 고려혁명군 활동을 하면서였다. 둘은 처음부터 호감을 가진 사이는 아니었으나, 죽음을 각오하고 일본군에 대응하는 김마리아의 모습에 이범석은 호감을 갖기 시작하였다. 잠시 헤어졌다 만주에서 다시 만난 그들은 동지로서 부부가 되었고, 독립운동의 영원한 동지이자 인생의 동반자가 되었다. alt한국광복군 이범석 / 김마리아 유복한 가정에서 다재다능함을 보이다철기 이범석은 1900년 10월 20일 대한제국 한성부 용동에서 이문하(李文夏)와 연안 이씨 사이에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증조부 대에 충청남도 목천군으로 이주하였으나 아버지 대에 다시 서울로 상경하였다. 다른 이름은 이국근(李國根)·윤형권(尹衡權)·김광두(金光斗)·왕운산(王雲山)·왕모백(王慕白) 등이다.아버지는 농상공부 참의와 궁내부 참사관 등을 역임하였다. 이범석은 풍족한 가정환경과 개방적인 분위기 속에서 자랐으나 불행하게도 어머니를 일찍 여의게 되었다. 다행히 계모인 김해 김씨는 철부지 개구쟁이 이범석에게 무한한 사랑을 베풀었다. 김씨는 훗날 직접 이범석을 찾아가 격려와 거금의 독립자금을 아낌없이 주었다. 한편 개화사상에 감화된 아버지는 집안의 노비를 모두 해방시켰다. 아버지는 노비 정태규를 대한제국 육군으로 천거하여 군인이 되게 하였다.이범석은 군대해산에 저항하다가 처참하게 숨진 정태규 시신을 목격하고 항일운동 투신을 결심하였다. 강원도 이천공립보통학교로 전학·졸업한 후 1913년 경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재학 중에도 명랑한 성격과 글짓기나 운동 등 다재다능으로 단연 두각을 나타내었다. 반면 일본인 학생들은 그를 수시로 괴롭혔다. 말다툼이나 싸움을 하면 일본인 교사는 그에게 성질이 야만스러워 남을 존경할 줄 모른다는 모욕적인 언사를 서슴지 않았다. 새로운 군사학을 배우다1915년 여름 이범석은 재학 중 여름방학을 맞아 귀국한 여운형을 만났다. 어느 날 여운형을 찾아가 중국으로 망명 의사를 전하자 즉석에서 이를 수락한다. 아버지에게 중국 망명 의사를 피력하였으나 장남이라는 이유로 망명을 만류하였다. 이에 일본인 학생으로 가장하고 열차편으로 신의주에 도착한 후 압록강 철교를 도보로 건너 안둥현에 도착하였다. 중국인으로 위장하여 펭톈(奉天 )을 지나 무사히 상하이에 안착할 수 있었다. 매형 신석우 동지인 신규식과의 만남은 향후 독립전쟁을 현장에서 누비는 결정적인 계기였다.이범석은 신규식의 추천으로 윈난 육군강무학당 기병과에 12기로 입학하였다. 그를 포함한 배달무·김정·김세준 등은 배와 열차로 윈난강무학당에 도착하였다. 화교 이국근이라는 이름으로 입교한 후 학업에 정진하여 수석을 차지할 만큼 출중한 재질을 보였다. 1919년 수석 졸업을 기념하여 기병과 교관은 철기(鐵驥)라는 아호를 지어주었다. 졸업 이후 견습사관 재직 중 3·1운동 소식을 들었다. 곧 윈난성을 출발하여 6월 상하이에 도착하여 신규식을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들을 두루 만났다. 가을에는 신흥무관학교로 가서 김광서·신팔균·지청천 등과 독립군 간부 양성에 혼신의 힘을 다하였다. 1920년 이범석은 김좌진 장군이 이끄는 북로군정서 연성대장으로 청산리전투에 참전하였다. 우선적인 과제는 독립전쟁에서 위력을 발휘할 수 있는 최신형 무기 확보였다. 제1차 세계대전 종전 후 러시아를 떠나 자국으로 귀국하는 체코슬로바키아 군대(체코군단)가 무기를 팔겠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모금결사대 활동 등으로 체코군단으로부터 다량의 탄환과 소총, 포탄, 화약 등을 사들이는 한편 사관생도들 군사훈련을 강화할 수 있었다. 실전을 방불케 하는 군사교육 강화는 청산리대첩을 견인하는 에너지원이나 마찬가지였다. alt한국광복군 징모 제3분처 위원 환송 기념 청산리전투 현장을 이끌다당시 중일 양국은 항일무장활동을 두고 긴장된 관계였다. 중국군 멍푸더(孟富德)는 독립군 부대와 항일단체를 도로에서 멀리 떨어진 심산유곡으로 옮길 것을 요구하였다. 북로군정서는 사관연성소 수료식을 마치고 백두산 밀림지대를 향해 이동을 개시하였다. 다른 독립군 부대도 속속 허륭현 인근 지역으로 집결하였다. 1개월 도보로 10월 5일 지린성 허륭현 청산리에 도착하였다. 일본군이 청산리 주위를 포위하자 다른 독립군 부대와 협력하여 전투조직을 개편하였다. 총사령관 김좌진, 군정서 참모장 나중소, 사령관 부관 박영희 등으로 편성되었다. 북로군정서 연성대장 겸 중대장인 이범석은 1개 대대를 백운평 숲속의 지형에 매복시켰다. 첩보원으로부터 일본군이 도착한다는 소식을 접한 이범석은 주민들에게 ‘형편없는’ 독립군임을 증언하도록 지시하였다. 청산리대첩 신호탄인 백운평전투에서 날이 저물도록 격전하여 일본군의 선봉부대를 섬멸시켰다. 이어 천수동, 어랑촌, 만록구 등지로 부대를 이동하면서 일본군을 습격하여 커다란 전과를 올렸다. 승리의 감격할 순간도 갖지 못한 채 독립군 연합부대는 북쪽으로 이동하였다. 홍범도·서일·지청천·김좌진이 이끄는 독립군 연합부대는 러시아령 이만에 안착하였다. 1921년 2월 말경에 다시 자유시(알렉셰프스크)로 옮겨갔다. 이범석은 함께 가지 않아 자유시참변을 면할 수 있었다. 중국군에서 다양한 실전 경험을 쌓다만주에 도착한 후 동지들을 규합하여 고려혁명군을 조직하여 게릴라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고려혁명군결사대에서 활동하던 중 중국 공산군은 군벌 장쉐량 타도에 협조를 강력히 요청하였다. 결사대는 장쉐량의 토벌대를 크게 무찔러 장쉐량은 이범석에게 현상금을 내걸었다. 중공 측과 협력은 실패하여 일시 방랑생활에 들어갔다.이듬해 마잔산(馬占山)이 이끌던 중국 동북항일군 작전과장으로 취임하고 중국군 소장으로 임명되었다. 만주사변 이후 마잔산이 다시 그를 찾았다. 국방장관으로 승진한 마잔산이 고급 참모들과 함께 소련에서 군사시설을 시찰하고 돌아오던 중 이범석은 잠시 억류되기도 하였다.만주에서 무장항일활동의 한계에 직면하자 지청천 등과 함께 중국 관내로 활동 근거지를 옮겼다. 뤼양군관학교에 한국독립군 양성을 위한 한인특별반이 편성되자 교관으로 선임되었다. 그러나 일본군 밀정에게 탄로되어 일본의 항의로 한인특별반은 해산되었다. 중화민국 국민군에 다시 입대하여 기병연대장, 고급참모, 참모처장 등을 지냈다.국내진공작전을 주도하다1940년 9월 17일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대인 한국광복군이 결성되었다. 김구·지청천과 함께 광복군 창군에 참여하여 이후 한국광복군사령부 참모장과 제2지대장을 맡았다. 시안으로 건너가 광복을 맞이할 때까지 교육 훈련과 항일투쟁에 앞장섰다. 중국군 중장 윈처지(文朝藉) 강무학당 동기로 부대 편성에 그의 도움과 원조를 받았다. 특히 그는 일본군 포로수용소에서 한국인 포로를 선발해 광복군으로 편입에 도움을 주었다. 일본군 점령지에 광복군 공작원을 파견하여 초모공작과 정보 입수 및 선전을 위한 밀정 파견, 탈영하는 한국인 출신 병사들의 황하강 도하 등 도움을 받았다. 이러한 활동은 대원들의 사기를 진작시키는 든든한 밑거름이었다.연합군의 원조를 받기 위해 그는 미공군사령관 웨드마이어와 교섭을 시도하였다. 미첩보전략국 OSS와 합동훈련을 시도하면서 특수훈련에 참여하였다. 1945년 5월 시안 교외에서 이범석의 지휘를 받는 광복군 정진대가 OSS와 연합하여 국내진공을 위한 특수훈련을 받았다. 8월 일본의 패망 소식을 접하고 8월 18일 미군 중국전구 총사령관 고문 자격으로 비행기 편으로 김포공항에 입국하였다가 일본군에 의해 저지당하여 다시 상하이로 되돌아갔다. 정치 지도자로 일선에 나서다일본군의 저항으로 상하이로 되돌아온 뒤 그는 광복군의 잔여 사무 정리로 바쁜 나날을 보냈다. 일본군과 만주군 패잔병 등을 설득·귀순시켜 광복군에 편입시켰다. 한편 그는 각국의 발전 역사와 근대국가 건설에 필요한 관련된 서적을 구입·탐독하였다.1946년 6월 여의도 비행장에 도착한 이범석은 곧바로 청년단체 조직에 착수하였다. 그는 장준하에게 도움을 요청하자, 장준하는 김구의 비서직을 사퇴하고 민족청년단에 입단하였다. 경제적으로 어려움에 직면하자 미군정에 재정적 지원을 요청하였다. 광복군 활동과 투철한 반공주의 활동을 인정받아 미군정의 원조로 경제적인 빈궁함을 어느 정도 모면할 수 있었다.한편 김구·김성수 등이 주도한 신탁통치반대운동에는 다소 소극적인 입장이었다. 1948년 김구·김규식 등이 남북협상을 주장하자 그들과 결별하고 신익희 등과 단독정부 수립에 찬성하였다. 초대 국무총리와 국방부장관 등을 역임하였다. 이후 이승만 정부와 결별하고 야당 지도자로서 길을 걸었다. 저서로 항일운동 역정을 정리한 『우둥불』, 『방랑의 정열』, 『한국의 분노』, 『톰스크의 하늘 아래』 등이 있다.그는 1972년 심장병으로 사망하였다. 서울 남산 광장에서 성대한 국민장으로 거행되어 국립현충원 국가유공자 제2묘역에 안장되었다. 쌍권총 달인 김마리아는 영원한 동지였다김마리아(金?利亞)는 러시아 이름으로 마리야 옐레노브나 킴(Mariya Elenovna Kim)이다. 1908년에 일가족과 함께 러시아 프리모르스키 지방 프리모르스키 주 블라디보스토크에 재이주하였다. 1923년 소련 시베리아에서 고려혁명군 예하 정치공작대원에 입문하며 항일전투에 참여하였다. 니콜리스크에 있던 일본군이 기습해 온 일이 있었다. 그때 이범석은 적의 공격으로 불타는 사무실을 향해 비밀문서를 가져 나오기 위해 혼자 돌진해 들어가는 김마리아를 목격하였다. 특히 스파스크전투가 둘 사이를 연인으로 발전하는 전환점이었다. 이범석이 전력을 다해 강력한 요새 스파스크를 함락시킬 때 김마리아는 간호요원으로서 자원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녀는 “철기에게 무한한 매력을 느끼고 온 마음을 쏟아붓기 시작하였다”고 훗날 진솔하게 고백하였다.1925년 김마리아는 러시아를 탈출하였다. 인텔리인 친인척 대부분이 공산혁명정부에 의해 처형되자 김마리아는 숙청을 피해 철기를 찾아 나섰다. 재회에 한없는 반가움을 가지면서 김좌진과 조성환 후견으로 한 쌍의 ‘혁명동지의 결혼’이 이루어졌다. 결혼 후 철기는 하얼빈 근처로 이사한 후 고려혁명군 결사대를 조직하여 일제 관동군을 괴롭혔다. 이때 필요한 소총이나 수류탄 등 무기 구입은 유창한 러시아어를 바탕으로 그녀가 도맡았다.해방으로 국내에서 생활을 시작할 때 마리아는 철기에게 조용히 이야기하였다. “나는 고국의 말도 서툴고 고국의 풍속도 아는 것이 없소. 하지만 당신의 생활을 돌봐주고 당신이 시련과 유혹에 부딪치면 당신의 명예를 지켜주겠소.” 이 약속은 끝까지 지켜졌다. 마리아는 공무나 정치에 관해 한 번도 나서지 않았다. 딱 한 번 빼놓고. 철기가 한국전쟁 중 대만대사로 출국당하고 나서 이승만이 다시 장관으로 기용하려 할 때였다. 화가 난 마리아가 경무대로 가서 이승만에게 대들었다. “국외로 쫓아낼 때는 언제고 아쉬우니까 또 불러들이는 건 뭐냐”라고. 이 대통령은 야화로 남아 있는 유명한 한마디를 하였다. “내가 당하기는 하였으나 철기보다 그 아내가 훨씬 낫더군.”1970년 2월 마리아는 철기보다 2년 먼저 사망하였다. 철기는 몇 달 뒤 꿈에서 그녀를 보고는 한밤중에 일어나 마리아를 그리워하는 시를 쓴다.빈방 찬 이불에 잠 못 이루어이슬 맺힌 베란다에 달빛 기울고호수 같은 가을 하늘 밤은 5경남녘 연변에 가로등 가물가물이범석은 독립운동가 및 정치가로서 공과는 관점에 따라 다양하다. 회고록 중 『우둥불』은 자신의 활약상을 지나치게 미화한 측면도 분명하다. 이승만 정권에서 국무총리와 국방장관으로 역할도 마찬가지이다. 다만 생사를 넘나드는 극한 상황에서도 보여준 낭만과 여유는 새롭게 밝히고 평가해야 할 대목이 아닐까. alt독립운동 시절 이범석과 애견]]> Fri, 25 Sep 2020 16:44:10 +0000 46 <![CDATA[조선 전기의 왜구 침략 ]]> 글 김종성 역사작가 조선 전기의왜구 침략 한민족은 고려 말부터 새로운 안보 환경에 직면하였다. 이전에도 일본인 해적들이 있기는 했지만, 이 시기부터는 왜구의 침략이 유독 두드러졌다. 조선왕조는 왜구에 대한 대처법에 있어서 고려왕조와 차별성을 보였다.  원나라의 몰락과 왜구의 부각원(元)나라의 패권은 14세기 중후반부터 동요하였다. 이 징후는 대륙의 반란으로도 나타났지만 해적들의 부각으로도 표현되었다. 이 시기에 두드러진 활약상을 보인 해적이 바로 왜구였다. 동아시아에 대한 원나라의 패권이 공고해진 13세기 중후반 이후, 일본인들의 해외 활동은  위축되었다. 실패로 끝나기는 했지만 여몽연합군의 일본 원정도 일본인들을 위축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이처럼 원나라가 강할 때는 잠잠했던 일본인들이 그들의 세계 패권이 약해지는 조짐이 나타나자 머리를 들기 시작하였다. 이때부터가 왜구의 전성기다. 몽골 역사서인 『원사』의 순제본기(순제황제 편)에 따르면, 왜구의 활동이 본격화된 시점은 1358년이다. 한편, 명나라 학자 진건(陳建)이 편찬한 『황명자치통기』에 따르면 그 시점은 1350년이다. 이 시기 이후로 왜구가 두각을 보인 데는 이유가 더 있었다. 주원장이 또 다른 해적들을 집중 공략한 것과도 관련이 있다. 주원장이 표적으로 삼은 해적들은 오늘날의 상하이 남쪽 해역의 주산군도에 있었다. 이들에게 신경을 쓴 것은 이때만 해도 명나라 수도가 연경(북경·베이징)이 아닌 상하이 인근의 남경(난징)이었기 때문이다. 수도의 안전을 위해 주산군도 해적들을 공격하였던 것이다. 주산군도 해적에 대한 이 같은 집중적인 공략은 동아시아 바다에 대한 왜구의 지배권을 높여줬다. 왜구의 전성기는 명나라의 조력에 상당 부분 힘입은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alt 경기도 의정부시에 있는 신숙주묘 왜구에 대한 조선인들의 두려움조선이 세워지기 30~40년 전부터 부각된 왜구는 고려 말뿐 아니라 조선 초기에도 계속 동아시아 질서를 교란하였다. 동아시아 바다는 이들의 것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이로 인해 조선과 중국의 해안이 황폐화되었다. 연해 지방의 농민들은 곡식도 제대로 키울 수 없었다. 이들이 출현하는 지역적 범위도 매우 넓었다. 한반도 남부 해안뿐 아니라 황해도나 평안도의 해안에도 출몰하였다. 이들로 인한 공포심이 해안 지방에서만 나타난 것은 아니다. 지금의 전북 남원 같은 내륙 지방에도 공포심이 만연할 정도였다. 이런 분위기를 반영한 한문 소설이 철학자 김시습(1435~1493)의 『금오신화』에 수록된 ‘만복사 저포기’다. 남원에 사는 양씨 청년이 결혼을 목적으로 만복사에서 부처님에게 윷놀이(저포)를 제안하는 내용이 담긴 이 소설에는 양씨가 불상 뒤에 숨어 젊은 여성이 석가에게 글을 올리는 모습을 엿보는 장면이 나온다. 글에는 이런 대목이 있었다. 아무 고을 아무 곳에 사는 아무개가 아룁니다. 전에 변방의 방어가 무너져 왜구가 쳐들어왔을 때 칼날이 눈앞을 가득 채우고 봉화가 해마다 피어올랐습니다. 왜구들이 집들을 불살라 버리고 백성들을 노략질하니, 사람들은 동서로 달아나 숨고 사방으로 도망가기 바빴습니다. 이 와중에 친척과 하인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소녀는 냇버들처럼 연약한 몸으로 멀리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규방 깊숙이 숨어 끝까지 정절을 지키고 깨끗한 행실을 보전하면서 난리의 화를 면했습니다. 부모님께서는 딸자식이 정절을 지켜낸 것을 기특하게 여기시고 한적한 곳으로 피신시켜 임시로 초야에 묻혀 살게 하셨습니다. 그게 이미 3년이 되었습니다.소설이기는 하지만 당시의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다. 왜구에 대한 15세기 조선인들의 두려움을 보여주는 소설이다. 이런 왜구에 대해 고려 말에는 주로 군사적 대응을 강구하였다. 그 시대에 최영과 이성계 같은 명장이 떠오른 것도 왜구와의 전투에서였다. 이런 흐름은 조선 초기에도 어느 정도 이어졌다. 세종이 주상이지만 상왕인 태종 이방원이 군사권을 쥐고 있을 때인 1419년에 이종무에 의한 대마도 토벌이 단행된 것도 그런 흐름에 따른 것이었다.조선시대 왜구 대책의 차별성조선시대에는 왜구에 대한 군사적 대응에 한계가 있었다. 이는 신흥 강국인 명나라의 국제정책과 관련이 있다. 명나라는 여진족을 특히 경계하였다. 여진족이 과거에 금나라를 경영한 적이 있을 뿐 아니라, 몽골이 몰락한 후에 위협 세력으로 부각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명나라는 자국처럼 여진족의 위협을 안고 사는 조선을 여진족에 대한 토벌전쟁에 끌어들였다. 이로 인해 조선 전기의 동아시아 국제관계는 최강국인 명나라가 조선과 공동으로 여진족 군소 집단들을 토벌하면서 지역 안정을 유지하는 구도로 전개되었다. 이를 통해 명나라는 조선을 동맹관계에 묶어둘 뿐 아니라 여진족의 발호를 억제하는 외교적 성과를 거뒀다. 그런데 이 상황은 조선이 여진족 토벌에 국력을 과도하게 투입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었다. 이 때문에 조선왕조는 예전처럼 왜구와의 전투에 에너지를 많이 투입할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 외교의 틀을 짠 인물이 세조시대의 신숙주다. 세조(수양대군)가 즉위한 1455년 이후의 조선 외교는 사실상 신숙주의 작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음력으로 세조 6년 7월 27일자(양력 1460년 8월 13일자) 『세조실록』에는 신숙주가 경복궁 교태전에서 세조와 술을 마신 뒤 손을 잡고 걸어가면서 여진족 정벌에 관한 결단을 내리는 장면이 나온다. 또 『성종실록』에 수록된 ‘신숙주 졸기’에는 신숙주가 오랫동안 외교 주무부서인 예조를 관장했으며 사대교린으로 상징되는 외교정책이 그의 손에서 나왔다는 내용이 있다.  세조의 승인 하에 신숙주가 구상한 외교 전략은 명나라·여진족·일본·대마도에 대해 이른바 맞춤형 전략을 구사하는 것이었다. 명나라에 대해서는 사대를 하면서 동맹정책을 유지하고, 여진족에 대해서는 군사적 강공으로 압박정책을 구사하는 것이었다. 한편 일본과 대마도에 대해서는 경제적 회유책을 강구하였다. 1869년까지 대마도 지배자인 대마도주는 조선과 일본 양쪽에서 책봉을 받았다. 일례로, 세조 7년 8월 28일자(1461년 9월 30일자) 『세조실록』에는 조선 정부가 남쪽 속국의 의무를 다한 공로를 치하하면서 대마도주 종성직(宗成職)을 대마주 병마절도사로 책봉하는 한편 녹봉 지급에 관해 언급하는 내용이 나온다. 대마도는 한편으로는 일본의 대리인으로 조선을 상대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양쪽에서 책봉을 받고 경제적 실리를 챙기는 이중 전략을 구사하였다. 이런 속에서 조선은 일본과는 교린정책을 통해 대등관계를 추구하고, 대마도에 대해서는 책봉을 해주고 조공을 받는 동시에 회사(回賜)라는 이름의 반대급부를 제공하였다. 신숙주는 이 같은 구도를 공고히 함으로써 조공과 회사라는 물물교환을 통해 대마도·일본의 경제적 필요를 충족시켜주는 대신 이들이 왜구 단속에 신경을 쓰도록 만들었다. 대마도·일본의 정치권력을 지원해주는 대신 이들의 힘을 빌려 왜구를 억압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alt전쟁기념관에 전시된 왜구와 명나라군의 전투 모습을 담은 ‘왜구도권’조선 전기 태평성대의 배경신숙주의 구상은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그의 전략은 1592년 임진왜란 이전의 200년간 조선이 태평성대를 누리는 데 기여하였다. 조선 전기의 태평성대는 조선이 명나라와 함께 여진족을 압박하고 일본·대마도에 대한 경제적 회유로 왜구 발호를 억제하는 조건 위에서 유지되었다. 이렇게 조선 전기의 왜구 대책은 상당히 큰 그림 속에서 형성되었다. 고려 말처럼 군사적 강공책이 두드러지지 않는 대신 경제적 우위를 바탕으로 일본·대마도를 회유하고 이들의 힘을 빌려 왜구를 견제하면서 조선의 국제적 지위를 높이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자신감과 더불어 경제력이 뒷받침되어야 가능한 전략이었다.]]> Fri, 25 Sep 2020 16:46:27 +0000 46 <![CDATA[나만의 호젓한 여행 삽시도 둘레길 ]]> 글·사진 임운석 여행작가 나만의 호젓한 여행삽시도 둘레길 카페에서 즐기는 커피 한 잔, 친구들과의 수다, 경기장에서 목청껏 외치는 응원 등 사소한 것들이 고마운 것이었음을 우리는 그동안 깨닫지 못하였다. 사람들과 거리 두기가 일상화된 요즘, 언택트 여행이 트렌드로 자리 잡았다. 답답한 시공간을 벗어나 혼자 또는 둘이서 호젓한 섬 여행을 떠나보면 어떨까. 섬은 특별한 선물을 갖고 여행자를 기다릴 것이다. 서해의 외딴섬 삽시도에서 특별한 선물을 마음껏 만끽해본다.  alt바다에서 바라본 삽시도 이맘때 그 섬에 가는 이유충청남도 서해안에는 크고 작은 섬들이 많다. 섬들은 빛이 좋은 날 보석처럼 반짝이다가 해 질 녘이면 황금빛으로 변해 신비롭기까지 하다. 그중에서도 삽시도는 충남 서해안에서 세 번째로 큰 섬으로 섬의 면적이 3.8㎢, 해안선은 11km다. 삽시도는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섬의 모양이 화살이 꽂힌 활(弓)의 모양과 닮았다’고 해서 꽂을 ‘삽(揷)’, 화살 ‘시(矢)’를 써서 삽시도라 한다. 마한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다고 전해지며, 예부터 멸치가 많이 잡혔다. 보령에서 해상으로 13km 떨어진 삽시도는 대천항에서 배로 40분 정도 가면 도착한다.여름 성수기에는 관광객을 위한 민박이나 펜션, 식당 등을 운영하지만 주민 500여 명은 대부분 어업에 종사하고 있다. 주민들 가운데 선상 낚싯배를 운영하는 사람들도 많은데 삽시도 인근은 이미 오래전부터 낚시 포인트로 잘 알려져 있다. 주로 우럭, 노래미 등이 많이 잡힌다. 바다를 친구 삼아 세월을 낚는 낚시도 좋지만 이맘때 삽시도를 찾아야 할 특별한 이유가 있다. 조붓한 숲길과 탁 트인 바다를 거닐며 혼자만의 시간을 즐길 수 있는 둘레길을 걷기에 가장 좋은 계절이기 때문이다. 삽시도는 산림이 울창한 데다 바다를 면하고 있어 섬에서만 느낄 수 있는 독특한 매력이 가득하다. 삽시도 둘레길은 ‘윗마을 선착장’을 출발해 요강수~보리망골~거멀너머해수욕장~오천초삽시분교장~진너머해수욕장~면삽지~붕긋댕이~물망터~황금곰솔 군락지~섬창~수루미해수욕장~딱뚝머리~밤섬선착장~밤섬해수욕장 등을 거친다. 길이는 5.6km, 완주는 3~4시간 걸린다. alt예쁜 벽화가 그려진 마을alt고요한 진머리해수욕장 alt걷기 좋은 밤섬해수욕장alt이회영 / 신흥무관학교 학생들과 백서농장 광경내 마음에 화살이 날아왔다배가 긴 한숨을 토해내듯 승객들을 선착장에 내려놓는다. 코로나19 탓에 섬을 찾은 사람은 손으로 꼽을 만큼 몇 되지 않는다. 소일 삼아 선착장에 나와서 일과를 보내는 마을 어르신들도 요즘은 발길이 뜸하다고 한다. 타인과 일정 거리를 유지하고 접촉을 최소화하는 거리 두기가 일상으로 자리 잡은 듯하다. 삽시도 둘레길은 선착장에서 시작한다. 선착장을 지나 마을로 접어들자 예쁜 벽화가 섬 여행을 더욱 설레게 한다. 마을은 고요하다. 아니 적막하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 같다. 여행자들의 발길이 예전만 못하니 섬에서 장사하는 주민들도 그 수가 눈에 띄게 줄었다. 어부를 제외한 섬에서 펜션이나 장사를 하는 사람 대부분은 육지에 집을 두고 있으면서 출퇴근하는 경우가 많은데 요즘은 아예 섬을 찾지 않는다고 한다. 그렇다고 마냥 나쁜 것만은 아니다. 호젓한 섬 여행의 참모습 즐기려면 요즘이 가장 좋은 시기일 수도 있으니까. 마을을 벗어나 야트막한 언덕에 오르자 길게 이어진 진머리해수욕장이 한눈에 들어온다. 눈부신 백사장에는 곱디고운 은모래가 반짝인다. 삽시도에는 진머리해수욕장 외에도 거멀너머해수욕장, 밤섬해수욕장이 질 좋은 백사장과 청정해역을 자랑하고 있는 터라 지난해 여름까지 피서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특히 갯벌과 갯바위 틈에서 고동과 조개잡이가 가능해 가족 여행지로 인기가 높았다. alt기암괴석이 즐비한 면삽지숲, 길, 바람을 오르내리다면삽지로 향하는 솔숲에서는 삽시도 둘레길의 묘미를 즐길 수 있다. 솔숲을 걷는 동안 잔잔한 파도 소리를 배경음악 삼아 품격이 다른 도보여행이 가능하다. 중간중간 전망대와 쉼터가 있어 달팽이처럼 느릿느릿 쉬어가며 걷기에 좋다. 울창한 나뭇가지 사이로 파도가 밀려왔다가 밀려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파도는 바람에 예민하다. 강하게 바람이 몰아치면 바람은 파도를 만들고 파도는 하얀 거품을 일으켰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숲이 우거져 바다로 내려갈 수는 없지만 아득한 풍경을 먼 발치에서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행운이다. 한참 부서지는 파도를 바라보다 다시 걸음을 재촉한다. 산책로처럼 얌전하던 길이 어느 순간 비탈진 길로 변하더니 가파른 경사가 이어진다. 경사가 심한 곳에는 나무데크가 놓여 있어 위험하진 않다. 바다로 난 데크길을 따라 해안으로 내려가자 물망터가 나온다. 물망터는 밀물 때는 바닷물에 잠겨 있다가 썰물이 되면 맑은 생수가 나온다. 고여 있는 물을 재빨리 퍼내도 순식간에 맑은 물이 솟아나 웅덩이를 메워버린다. 예로부터 피부병 등에 효험이 뛰어나다고 알려져 많은 사람이 찾고 있다. 효험을 확인하려는 듯 사람들이 물을 떠 마시기도 한다. 사람이 살지 않는 면삽지는 하루 두 번 삽시도와 떨어져 섬이 된다. 그때를 제외하면 언제든지 면삽지를 찾아볼 수 있다. 면삽지에는 동글동글한 모양의 조약돌이 지천으로 널렸다. 수북이 쌓인 조약돌들은 파도에 쓸리며 자그락자그락 노래를 들려준다. 동글동글한 조약돌은 그 모양이 너무 예뻐 탐이 날 정도다. 면삽지에는 각양각색의 기암괴석과 해식동굴이 발달해 있다. 요즘 SNS에는 각종 동굴에서 찍은 사진들이 인기를 얻고 있다. 그러니 면삽지에서 동굴 인생 사진 하나쯤은 꼭 남겨봄 직하다.길은 다시 오르내림을 반복하다 나무가 우거진 숲으로 이어진다. 물론 바다를 조망하는 숲이다. 안타까운 것은 유난히 잦았던 바다의 불청객 태풍 탓에 잎이 많이 떨어졌다. 이윽고 길은 삽시도 최고봉인 붕굿뎅이(114.4m)에 이르고 연이어 사면을 따라 내려선다. 삽시도에는 황금소나무라 불리는 황금곰솔이 유명하다. 이것은 사시사철 푸르러야 할 솔잎이 푸르지 않고 황금색을 띠는 돌연변이종이다. 해 질 녘에 보면 또렷하게 황금색을 발한다고 한다. 현재 보령시 보호수(제2009-4-17-1호)로 지정되어 있다. 수령은 50년 정도로 높이는 8m 정도 된다. 황금곰솔은 해풍과 염분에 강해 바닷바람을 막아주는 방풍림으로 주로 심는다. 황금곰솔 군락지에서 밤섬해수욕장을 지나 밤섬 선착장에 닿으면 둘레길은 끝난다. 이후 점심께 대천행 배를 타고 섬을 나서면 된다. alt해식동굴alt황금곰솔이라 불리는 곰솔군락지 ]]> Fri, 25 Sep 2020 16:47:11 +0000 46 <![CDATA[최초의 순직 기자 장덕준 ]]> alt]]> Thu, 29 Oct 2020 11:33:29 +0000 47 <![CDATA[붓으로 독립을 외친 의로운 기자 ]]> 글 은예린 역사작가붓으로 독립을 외친 의로운 기자장덕준일제에 의해 강제병합된 이후 우리 민족은 끊임없이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해나갔다. 1919년 3월 1일 이후 전국 방방곡곡에서 남녀노소는 모두 한마음과 한뜻으로 뭉쳐 강력한 독립 의지를 나타냈다.  간도대학살 취재 중 행방불명되다자유와 독립에 대한 열망은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으로 이어졌다. 이때 대한민국 임시헌장 제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한다’고 선포하였다. 우리 민족의 자주독립과 민주주의에 대한 확고한 의지는 여기에 고스란히 반영되었다. 임시정부는 1920년을 ‘독립전쟁 원년’임을 선포하였다. 일제는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에 대한 보복으로 끔찍한 간도대학살(일명 경신참변)을 저지른다. 이를 취재하던 언론인 장덕준(張德俊)은 홀연히 우리 곁을 떠났다. 장덕준은 간도에서 일제의 한국인 학살 현장을 취재하던 중 갑자기 일제에 의해 자취를 감추고 만다. 그는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로 순직한 기자이다. 장덕준은 미국의원단이 중국을 방문하자 특파원으로 활동하며 일제의 불법적인 침략 행위를 알리면서 조국의 독립을 호소하였다. 동아일보사 기자인 그는 일제의 식민지배를 강력히 비판하고 나섰다. 장덕준은 1892년 6월 25일에 황해도 재령군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결성(結城)이며 호는 추송(秋松)으로 부친은 장붕도(張鵬道)이다. 동생 장덕수(張德秀)는 동아일보사 초대 주간이었고, 막냇동생 장덕진(張德震)은 독립운동 중 상하이에서 순국하였다. 장덕준은 1920년 4월 김성수·이상협 등과 『동아일보』 창간에 참여하여 발기위원이자 논설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사실상 장덕준이 기자로서 활동한 기간은 8개월 정도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언론계에 종사한 많은 기자 중에서 지금까지도 귀감이 되는 의로운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늘 “기자는 붓으로 항일하는 것을 본분으로 삼는다”며 언론을 통해 독립운동을 하겠다고 결심하고 실천한 열정적인 인물이었다. 더욱이 폐결핵을 앓으면서도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기질을 지닌 애국지사였다. alt 간도대학살로 희생된 동포들을 위한 합동 장례식 『동아일보』를 통해 식민정책을 비판하다장덕준은 일본 유학을 마치고 국내로 돌아와 김성수 등과 ‘육영회(育英會)’를 조직하였다. 목적은 인재 양성을 통한 조선 문화 발전이었다. 이는 1920년 3월 8일자로 조선총독부 고등경찰과에서 작성한 보고서에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다. 즉 조선 학생 중 품행이 단정하고 학력이 우수한 인물을 선발하여 외국으로 유학시키는 데 중점을 두었다. 불행하게도 육영회 목적을 달성하기에는 역부족인 현실이었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장덕준은 김성수 등과 뜻을 모아 『동아일보』 창간에 적극적이었다.창간 다음 날인 1920년 4월 2일자부터 4월 13일자까지 ‘조선 소요에 대한 일본 여론을 비평함’이라는 논설을 10회 발표하였다. 논설에서 일본인 교수 등이 제기한 조선자치론과 일시동인론(一視同仁論), 그리고 3·1운동을 왜곡 보도한 일본 언론과 여론 등을 강력하게 비판하고 나섰다.『동아일보』는 1920년 6월 5일자부터 6월 16일자까지 5차례에 걸쳐 황해도 재령·해주, 평안도 평양·진남포·강서·선천·의주·신의주 등지를 순회하며 ‘삼민생(三民生)’이라는 필명으로 기사를 발표하였다. 지방을 순회하면서 우리 민족의 처참함과 가난한 삶을 누구보다 절실하게 느꼈다. 일본인의 조선인 차별·학대·멸시, 모든 식민정책이 일본인 위주의 행정으로 개편된 현장을 폭로한 내용이었다. 국가보훈처는 “조사부장 장덕준이 1920년 6월 4일부터 5일간 해주에 머문다는 기사로 짐작해보아 ‘삼민생’이 장덕준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다.alt 대학살 당시 일본군의 한국인 참수 장면 미국의원단에게 일제의 불법 행위를 고발하다동아일보사는 외신으로 들어온 미국의원단의 동아시아 방문을 주시하였다. 이때 장덕준을 중국으로 보냈다. 1920년 여름 동아시아를 방문하는 미국의원단 취재가 목적이었다. 미국 상·하 양원 의원단 일행 100명(하원 44명, 상원 6명 및 그 가족들)으로 구성된 미국의원단은 7월 초 미국을 떠나 홍콩을 거쳐 8월 5일 상하이에 도착하였다. 이들은 중국을 거쳐 조선에 들어오려 하였다. 상하이에 위치해 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이들 일행을 통해 독립에 유리한 국제 여론을 형성하고자 노력하였다. 장덕준은 7월 말 베이징으로 가서 중국의 정세를 취재하였다. 장덕준은 베이징에서 미국의원단을 취재할 때 상하이에서 온 안창호의 도움을 받았다. 안창호는 8월 16일 여운형·황진남·장덕준과 함께 미국 하원 외교위원장 포터를 만나러 갔다. 포터는 한국 상황에 많은 관심을 표명하였다. 당시 국내 실정과 상하이를 연락하던 장덕준은 베이징에서 시찰단을 방문하였다. 이들은 임시헌법, 불평등한 한·일 관계, 일본인의 각종 불법 행위 등을 영문으로 만들어 일제 식민통치의 부당함을 알렸다.그는 8월 18일 미국인 스몰을 만나 인터뷰한 후 『동아일보』는 1면에 ‘미국 의원단을 환영하노라’는 논설 기사를 발표하였다. 인터뷰 기사에 의하면 스몰은 장덕준에게 임시정부에 대한 호의를 표하였다. 8월 24일 밤 의원단 일행을 태운 특별열차가 서울에 도착하였다. 의원단의 숙소로 정한 조선호텔 근처에서 군중들은 만세를 불렀다. 일제 경찰은 권총을 발사하며 약 100명을 곧바로 체포하는 민첩성을 보였다. 이를 목격한 의원단은 미국으로 돌아가 문제를 제기할 것임을 밝혔다. 조선총독부는 『동아일보』의 ‘대영(大英)과 인도(印度)’ 논설을 문제 삼아 신문 간행을 무기한 중지시켰다. 논설 내용은 영국이 인도에서 저지른 악행을 조선과 일제에 빗대어 작성한 글이었기에 식민당국자의 분노를 사고 말았다. 『동아일보』 정간은 1921년 1월 10일에 해제되어 2월 21일부터 다시 발행을 시작하였다. 당시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는 동시에 발행이 중단되고 있었다. 이때 불행하게도 만주의 훈춘(琿瑃)에서는 일본군이 한국인을 학살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일제는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에서 독립군들에게 대패하여 분개하는 분위기였다. 결국 일제는 보복으로 한국인을 무차별적으로 살인하였다. 어린 아이들을 포함한 약 5,000명에 가까운 한국인들이 끔찍하게 학살되었다. 잔인한 소식을 들은 장덕준은 건강 상태가 악화된 상태에서도 현지로 달려갔다. 외국에서 무참히 살육당한 한국인들을 애도하고 일제 만행에 분개하여 취재를 시작하였다. 암흑한 죽음의 땅에서 취재를 시작하였으나 일본인과 만난 후 행방이 묘연해졌다. 즉 일본인에 의해 피살되었을 가능성은 삼척동자도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이후 소식은 물론 행적조차 추적할 수 없는 장덕준은 당시 29세의 젊은 나이였다. 그는 우리 언론 사상 최초의 순직 기자가 되었다. 이는 위험을 무릅쓰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취재를 나선 장덕준의 ‘기자정신’이 만든 참변이었다. alt 언론인 장덕준 장덕준을 추모하다임시정부의 기관지인 『독립신문』은 일본군이 장덕준을 암살한 기사를 이렇게 보도하였다.“장덕준이 이에 대해 차마 견디지 못하고 적의 군대에 들어가 적의 상관을 보고 그러한 불인도(不人道)한 행위를 힐책하자 적측(일본군)은 그런 일이 없다고 말하면서 그러면 한번 함께 가서 보자고 약속하기에 무심히 여관에 돌아와서 잠이 들었는데, 밤중이 되어 일본군이 와서 말하기를 상관이 부르니 같이 가자고 하기에 장덕준은 의심이 들어 밤중이니 가지 않겠다고 하였으나 일본군은 말(馬)까지 가지고 다시 와서 가자고 강요해 하는 수 없이 따라간 것인데 그 후로는 종적을 알 수 없게 되었다.”1930년 4월 1일 『동아일보』 창간 10주년을 맞이하면서 장덕준의 추도식을 진행하였다. 또 1963년 대한민국 정부는 장덕준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세월이 흘러 1971년 기자협회 기자장을 제정하여 기자로서 용기와 사명감을 높이 평가하여 메달을 만들었으며, 그 메달 뒷면에 장덕준의 얼굴을 새겼다. 추도식에 참여한 김동진은 장덕준을 애도하며 “의에 대한 용기, 봉공의 정신, 이 귀한 교훈을 우리에게 끼친 데 대해서 나는 과거의 모든 의인보다도 그를 사모한다”고 말하였다. 1920년 4월 『동아일보』 창립 발기위원 겸 논설위원이었고, 미국의원단 중국방문 때 중국 베이징 특파원으로 파견되어 일제의 부당함을 혼신의 힘을 다하여 취재하며 불굴의 열정으로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였으며, 간도참변 당시 죽음의 땅으로 달려가 목숨을 걸고 한국인 대학살 실태를 취재하였던 의로운 기자 장덕준. 결국 일본군사령부를 방문하여 학살 진상을 추궁한 후 피살되어 29살의 짧지만 의로운 삶을 살았던 장덕준. 그의 삶은 나라를 잊은 우리 민족의 불행을 전 세계에 폭로하여 일제로부터 가난과 부당함에 숨도 못 쉬는 우리 민중을 구제하려 뛰어든 불꽃같은 삶이었다. 1964년 4월 30일 한국신문편집협회는 유공언론인 기념사업의 하나로 언론 발전에 공이 많은 언론인 5명을 선정하였다. 그렇게 선정된 5명을 신문회관에 초상화를 봉안하여 모든 언론인들의 귀감이 되도록 하였다. 독립신문을 창간한 서재필, 시일야방성대곡을 집필한 장지연, 대한매일신보 총무 양기탁, 대만 해협 취재도중 순직한 최병우 그리고 한 명이 독립군을 취재하다 일본인에 피살된 장덕준이었다. 김인승 화백이 그린 신문회관 강단에 봉단된 장덕준의 초상화는 여전히 젊고 패기에 찬 총명하고 강인한 모습이 살아서 숨 쉬는 듯하다. 그들 못지않게 목숨을 던져 붓으로 대항하며 독립운동을 단행한 장덕준을 대중들이 친숙하게 기억하지 못하는 듯해 아쉬운 마음이다. 올해는 독립전쟁사에서 금자탑인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 100주년이다. 우리 역사에서 잊을 수 없는 암울한 기억 속에 불행한 역사를 다시 반성하고 특히 생소한 독립운동가를 다시 조명해 그 활약상을 살펴보는 것도 뜻깊은 시간이 될 것이다.alt장덕준 기자 실종 보도기사(『독립신문』 1921. 10. 14.)]]> Thu, 29 Oct 2020 11:31:15 +0000 47 <![CDATA[‘순국선열의 날’ 역사적 의미와 제언 ]]> 글 이계형 국민대학교 교양대학 교수 ‘순국선열의 날’역사적 의미와 제언 매년 11월에는 독립운동과 관련하여 치러지는 학생독립운동기념일(11. 3.)과 ‘순국선열의 날’(11. 17.) 등의 법정기념일이 있다. 이 중 순국선열의 날의 경우 역사적 의미를 모르는 이들이 적잖아, 이를 되새기고 몇 가지 개선할 점을 제언하고자 한다.  1939년, 순국선열의 날 제정순국선열의 날은 국어사전에 ‘국권 회복을 위하여 헌신한 순국선열의 독립 정신과 희생정신을 후세에 길이 전하고 그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제정한 날’이라 정의되어 있다. 이날이 기념일로 제정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81년 전 대한민국 임시정부 시기이다. 1939년 11월 제31회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지청천·차리석 등이 전국 동포가 공동으로 기념할 ‘순국선열 공동 기념일’을 정하자고 제안하면서 비롯되었다. 당시 임시정부는 국치일, 3·1절, 건국절(개천절), 6·10만세일 등을 기념일로 정하여 순국선열을 별도로 추모하였다. 그런데 순국한 이들을 각기 기념하는 것은 번거롭고 무명 선열을 빠짐없이 알 수도 없기에 1년 중에 하루를 정하여 공동으로 기념하자는 취지였다.이에 다들 공감을 표하여 기념 일자를 정하였다. 순국한 이들은 국망을 전후로 그 수가 많고 망하게 된 국가를 구하거나 회복하기 위하여 용감히 싸우다가 순국한 것이므로, 국망 시기가 적당하다고 의견을 모았다. 다만 국가가 병탄된 1910년 8월 29일보다는 실질적으로 망국에 이른 ‘을사늑약’ 체결일인 ‘11월 17일’을 기념일로 정하였다. 그 뒤 1939년 12월 순국선열기념일이 공포되었다. 기념식은 개식→창가 애국가→국기에 향하여 최경례→식사→선열들의 사적 보고→창가 추도가→헌화→묵상→기념사→구호와 만세→폐식 등의 순으로 진행되었다. 이에 주목되는 바는 선열들의 사적 보고와 관련된 순국선열의 범위이다. 이에 임시정부는 순국선열의 범위를 13개 항으로 분류하면서 1895년 을미의병을 독립운동의 시작으로 보았고, 국내를 비롯하여 인접한 중국·러시아·일본부터 미국·유럽까지 제한을 두지 않았다. 또한 의병, 3·1운동, 의열투쟁, 무장투쟁 등을 아울러 이념과 노선을 폭넓게 반영하였다. 이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① 을미년(1895)에 민비가 왜적의 손에 돌아간 후 나라 원수를 갚기 위하여 의병을 일으켜 왜병과 싸우다가 돌아간 이들② 을사늑약(1905)이 체결되던 때를 전후하여 분하게 여겨 자결하여 돌아간 이들③ 정미년(1907)에 군대가 해산된 데 대하여 분하여 자살하며 또 의병을 일으켜 왜병과 맹렬히 싸우다가 돌아간 이들④ 경술년(1910)을 전후하여 최근까지 직접행동으로써 국적과 왜적을 암살하며 적의 시설을 파괴하다가 돌아간 이들⑤ 국제무대에 나아가 국가의 운명을 만회하려다가 뜻대로 되지 못한 것을 보고 자결하여 돌아간 이들⑥ 기미운동(3·1운동) 당시에 열렬히 시위운동을 하다가 돌아간 이들⑦ 무장하고 국내에 비밀리에 들어가 활동하다가 돌아간 이들⑧ 국외에서 왜병과 맹렬히 싸우다가 돌아간 이들⑨ 적에게 사로잡혀 사형을 받으며 또는 옥중 고초를 못 이겨 돌아간 이들⑩ 러시아령과 중국령이 있는 군대로 그곳 군대의 박해를 입어 돌아간 이들⑪ 국내와 만주와 러시아령과 동경에서 적의 학살을 당하여 돌아간 이들⑫ 주의 주장을 위하여 반대당에게 애매하게 돌아간 이들⑬ 일생에 국사를 위하여 고생을 한 결과 병들어 돌아간 이들 1950년, 순국선열의 날 기념식 중단광복 후에도 순국선열의 날에 대한 기념식은 이어졌다. 다만 첫 기념식은 임시정부 요인들이 모두 귀국한 1945년 12월 23일 서울운동장에서 순국선열 추념대회 형태로 진행되었다. 대회 총재는 임시정부 주석 김구, 위원장은 임시정부 내무부장 신익희였다. 국기 게양, 애국가 제창, 묵상에 뒤이어 김구 총재의 추념문을 정인보가 대독하였다. 1946년 이후에는 순국선열기념절준비위원회가 이를 주최하다가 1948년 정부 수립 이후에는 주최가 서울시로 바뀌면서 새롭게 제1회 기념식으로 치러졌다. 그 뒤 1950년 6·25전쟁 이후 중단되었다. 이승만 정권하에서 독립유공자 포상도 이뤄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임시정부의 독립정신을 잇는 순국선열의 날 행사조차도 거부당한 것을 보면 당시 얼마큼 독립운동의 가치가 훼손되었는지를 가늠할 수 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점은 1957년부터 정부가 1894년부터 1945년 8월 해방될 때까지 전사, 사형, 옥사한 순국선열 유가족에게 생계보조비를 지급하였다는 것이다. 그해 8월 29일 국치일에 애국동지원호회(현 한국독립동지회) 주최로 제1회 광복선열합동추도회를 개최한 이후 1964년까지 이어졌지만 날짜는 일정하지 않았다. 1958년에는 어느 국회의원이 ‘4월 17일’을 광복선열의 날로 제정하자는 건의안을 제출하였지만 “공휴일이 또 하나 는다는 생각이니 염불보다는 잿밥에 더 관심 있는 것이 아니냐”라는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박정희 정권이 들어선 뒤에도 정부 차원의 별다른 조치는 없었다. 1965년에 11월 17일에 맞춰 광복회 주최로 행사가 열렸지만, 1972년 10월 유신이 단행되면서 이마저도 중단되었다. 그리고 순국선열의 추모행사는 현충일 행사에 포함되었다. 이때부터 현충일 행사에 ‘호국영령’, ‘전몰장병’에 ‘순국선열’이 추가되었다. 이처럼 정부 차원에서 순국선열의 날 행사가 거부되자, 광복회 주최로 1974년부터 1977년까지 성북구 정릉동의 여래사 순국선열 사당에서 조촐한 순국선열 합동추모식이 개최되었다. 박정희 정권 말인 1978~1979년에 국립묘지 현충관에서 추모식이 열렸지만, 시작을 임시정부가 수립한 이후부터 산정하여 혼란을 야기하였다. 전두환 정권이 들어선 1980년에 순국선열유족회 주최로 기념식이 거행되었고, 1983년에는 행사가 ‘순국선열 합동추모제전’이란 이름으로 바뀌었다.1997년, 국가기념일로 재탄생한편 노태우 정권이 출범하면서 광복회를 비롯한 독립운동 관련 단체가 적극적으로 나서 순국선열의 날을 법정기념일로 복원·제정해 줄 것을 정부에 요구하였으나 번번이 거부되었다. 정부 측은 현충일과 중복되어 의의를 퇴색시킨다는 이유에서였다. 결국 기나긴 싸움 끝에 1997년 5월 김영삼 정권이 들어선 뒤 10년 만에 정부기념일로 제정·공포되었다. 이에 1997년 11월 17일 순국선열의 날 행사가 복원되었고 그 시점도 1939년 임정 의사록에 근거하여 제58회 기념식으로 확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2005년에는 광복 60주년을 기념하여 포상 기회가 3·1절과 8·15 광복절에 이어 11·17 순국선열의 날도 추가되었다.독립정신이 깃든 순국선열의 날 행사를 50여 년 만에 정부 차원에서 재개하였다는 점은 퍽 의미 있는 일이지만, 이를 더욱 뜻깊은 행사로 발전시켜야 하는 책무 또한 막중하다. 이에 몇 가지 제언을 하고자 한다. 먼저 독립운동 관련 국경일이나 순국선열의 날 등의 국가기념일은 행사 자체로 그칠 것이 아니라 애국선열의 독립정신을 기억하고 추모하는 축제의 장으로 거듭나야 한다. 두 번째는 순국선열의 범위를 넓혀야 한다. 국가보훈처는 독립운동 참여자 300만 명 중 15만 명을 순국선열로 추산하고 있지만 범위는 매우 제한적이다. 광복 이전 감옥에서 출소한 뒤 6개월 이내에 숨진 애국지사만을 순국선열로 인정하고 있다. 그 기간을 넘겨 후유증으로 혹은 전투 중 입은 상처로 숨졌지만 직접적인 사인을 밝힐 수 없는 경우에는 제외된다. 하지만 이러한 제한을 둘 필요가 있을까 한다. 순국선열의 날이 진정으로 순국선열의 독립정신과 희생정신을 후세에 길이 전하고 그 공훈을 기리는 기념일이 되기 위해서 말이다.]]> Thu, 29 Oct 2020 11:37:21 +0000 47 <![CDATA[대를 이어 죽음으로 일제에 항거한 아버지와 아들 유도발·유신영 ]]> 글 독립기념관 전시부 대를 이어 죽음으로 일제에 항거한 아버지와 아들 유도발·유신영 유도발(柳道發) 1832~1910 경상북도 안동건국훈장 독립장(1962) 유신영(柳臣榮) 1853~1919 경상북도 안동건국훈장 애국장(1991) 유도발·유신영 부자는 풍산(豊山)을 본관으로 하는 서애 유성룡의 10대, 11대 후손이다. 이 가문은 ‘충효졸성(忠孝拙誠)’을 집안의 중요한 가치로 삼았다. 충효(忠孝)는 나라에 대한 의리, 졸성(拙誠)은 자신을 겸손히 하며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삶의 태도이다. 유도발·유신영 부자는 일제의 침략과 식민지배에 맞서 대를 이어 자결 순절하였다. 이들은 나라의 위기 앞에서 집안의 가치인 ‘충효졸성’을 순절로 실천하였고, 이 실천은 독립운동의 토대가 되었다. 경술국치에 죽음으로 항거한 유도발1832년 경상북도 안동에서 태어난 유도발은 1895년 일본의 영향으로 복식을 간소하게 바꾸는 ‘변복령’을 거부하고 의성군 덕암리로 거처를 옮겼다. 이곳에서 스스로 숨어 지내겠다는 뜻으로 ‘회은(晦隱)’이라는 호를 짓고 은거를 시작하였다. 그러던 중 1910년 일제가 대한제국의 국권을 강제로 빼앗자 “충효의 의리상 구차하게 살 수 없다”면서 죽음으로 나라의 의리를 지키고 일제에 맞설 것을 결심하고 11월 11일 유서를 남기고 단식을 시작하였다. 그의 단식이 지역사회에 미칠 영향을 우려한 일본인 관리가 찾아왔지만 만남을 거부하고 단식을 계속 하였다. 결국 단식 17일째인 11월 27일 순국하였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62년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alt유도발의 유서 alt유도발이 단식 순국 의지를 표명한 시(1910. 11. 12.)죽음으로 독립정신을 일깨운 유신영1853년 경상북도 안동에서 유도발의 장남으로 태어난 유신영은 1895년 유인석 의진, 1896년 권세연 의진에 참여하였다. 아버지가 1910년 경술국치 때 단식 순국하자 아버지를 따라 자결하고자 하였으나 광무황제가 살아있어 국권이 반드시 회복될 것이며, 그 때 국가를 위해 할 일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죽음을 미뤘다. 그리고 속리산(일명 광하산)에 은거한다는 뜻으로 ‘하은(霞隱)’을 호로 짓고 일제 식민지배에 타협하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하였다. 그러나 1919년 광무황제가 서거하자 유신영은 주변 지인들에게 자신의 죽음이 일제에 대한 항거임을 밝히고 유림들과 문중의 독립운동에 동참을 당부하는 유서를 남긴 후 광무황제 인산날인 3월 3일 음독 순국하였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91년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alt유신영의 유서 alt회은유고(晦隱遺稿)_경상북도 독립운동기념관 제공alt하은유고(霞隱遺稿)_경상북도 독립운동기념관 제공 alt]]> Thu, 29 Oct 2020 11:34:50 +0000 47 <![CDATA[김지섭의 의열투쟁과 니주바시(二重橋) 투탄의거 ]]> 글 유완식 독립기념관 자료부 학예연구관 김지섭의 의열투쟁과 니주바시(二重橋) 투탄의거  alt 조선일보 호외(1924. 4. 24.) 추강(秋岡) 김지섭(金祉燮)은 1884년 7월 21일 경북 안동군 풍북면 오미동에서 김병규(金秉奎)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909년 8월 전주재판소 번역관보를 거친 뒤 같은 해 11월부터 금산재판소 통역생 겸 서기로 근무하였다. 이즈음 일제가 대한제국의 사법권을 강탈한 기유각서(己酉覺書)로 1909년 11월 법부가 폐지되고 통감부 사법청이 개설되었다. 이에 따라 김지섭은 대한제국 법부 소속이 아닌 통감부 재판소의 통역생 겸 서기가 되고 말았다.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로 일제에 강점된 후 금산군수로 있었던 홍범식(洪範植)이 자결 순국하였는데, 이 일은 김지섭이 1913년 1월 당시 영동재판소 통역생 겸 서기 자리를 그만두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이후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독립운동에 투신하기로 결심하고, 1922년 여름 중국 상하이에서 의열단에 가입하였다. 의열단은 1919년 11월 지린시에서 결성되었다. 1920년 베이징을 거쳐 상하이로 이동한 의열투쟁 단체로 침략의 책임자와 매국노 그리고 식민통치와 수탈 기관을 공격 대상으로 삼았다. 의열단은 본부를 상하이로 옮긴 뒤 대대적인 처단·파괴활동을 벌이기 시작하였다. 김지섭이 의열단에 가입하게 된 것이 바로 이 무렵이었다. 김지섭은 의열단에 가입하자마자 대규모 암살 파괴 공작에 참여하였다. 당시 의열단의 암살 파괴 공작은 김한(金翰)과 김시현(金始顯)을 중심으로 하는 두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이 두 계획은 모두 실패하였다. 김한은 1923년 1월 김상옥(金相玉) 의거 직후 이 사건에 연루되어 붙잡혔고, 김시현은 1923년 3월 밀정의 밀고로 유석현(劉錫鉉) 등 주동자들과 함께 체포되었다.1923년 9월에는 일본 도쿄 일대를 아수라장으로 만든 대지진인 ‘간토대지진’이 발생하였다. 당시 혼란 속에 폭동을 염려하였던 일제는 “조선인들이 폭동을 일으킬 것”이라는 소문을 퍼뜨려 수많은 조선인을 무차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 소식을 들은 의열단은 일제를 응징하여 동포들의 영혼을 위로하고 그 원수를 갚기 위해 거사를 추진하였다. 이때 1924년 초 도쿄에서 제국의회(帝國議會)가 열려 일본의 총리대신을 비롯해 여러 대신들과 조선총독이 참석한다는 소식을 듣고 그 공격 목표를 일본 제국의회로 정하였다. 제국의회에 폭탄을 던져 요인을 처단하고 조국 독립운동을 촉진시키는 데 목표를 두었다. 이어 파견 인물을 정하였는데 여기에 김지섭이 자원하였다.1923년 12월 20일 밤, 김지섭은 의열단 기밀부가 마련해 준 소형 폭탄 3개를 숨기고 미쓰이(三井)물산 소속의 화물선인 텐조야마마루(天城山丸)를 타고 상하이를 떠나 10일 뒤인 12월 30일 일본 후쿠오카(福岡)에 도착하였다. 그날 밤 배가 야와타(八幡) 제철소에 도착하자 뭍으로 내렸다. 1월 3일 밤 도쿄로 향하였고 5일 아침 도쿄 시나가와(品川) 역에 이르렀다. 이후 제국의회가 휴회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공격 대상을 일본 왕궁으로 바꾸었다. 그는 오후 7시 20분쯤 일본 왕궁으로 들어가는 입구인 니주바시(二重橋) 부근에 다다랐다. 마침 그 부근을 지키던 히비야(日比谷) 경찰서의 오카모토 시게요시(岡本繁榮) 순사가 검문하자 김지섭은 순사를 향해 폭탄 1개를 던졌다. 그리고 니주바시 쪽으로 달려가 다리를 건너려 하였다. 그러자 다리를 경계하고 있던 근위 보병 2명이 총검을 겨누며 다가왔고, 그는 이들을 향해 남아있던 폭탄 2개를 던졌다. 그가 던진 폭탄 2개는 니주바시 중앙에 떨어졌지만 모두 불발에 그쳤고 김지섭은 격투 끝에 붙잡혔다.그는 옥중에서도 “무죄 방면 아니면 사형을 언도하라”는 요구를 하며 일본 법정의 권위나 존재를 부정하였다. 1925년 8월 12일 공소심에서 무기징역이 선고되자 이후 더 이상의 재판을 스스로 거부하였다. 공소심 판결 직후 변호사가 의논도 없이 상고하자, 그는 8월 18일 이를 취소시켜 버렸다. 이후 일본 도쿄 시내의 이치가야 형무소로부터 도쿄 외곽의 치바(千葉) 형무소로 옮겨진 그는 1928년 2월 20일 갑자기 순국하였다. 투옥된 지 4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동생 김희섭의 부검 요청에 따라 2월 23일 촉탁의사 이즈시마(間島)의 입회하에 치바 의과대학병원에서 부검이 이루어졌다. 부검 결과 사인은 ‘뇌일혈’로 판명되었으나 의사조차 “뇌일혈은 분명한데, 기관지 출혈의 장소와 그 모양이 일반 통례와는 다를 뿐 아니라 거의 보지 못한 현상”이라는 소견을 내렸다. 결국 김지섭은 많은 의문을 남긴 채 순국하였다.김지섭의 니주바시 투탄의거는 비록 목표를 완전히 달성하지는 못하였지만 일제의 권위를 추락시켰고, 8년 뒤 이봉창의거로 이어지는 등 한국독립운동사에 있어 빛나는 의열투쟁으로 기억되고 있다. alt 추강 김지섭 ]]> Thu, 29 Oct 2020 11:30:28 +0000 47 <![CDATA[장덕준 선생을 추모하며 ]]> 장덕준 선생을추모하며 1920년 11월 어느 날 안개가 잦은 이른 아침, 낯모를 일본인에게 붙들려 나간 후 영영 소식이 끊기고 말았습니다.선생은 살아있는 동안에도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옳다고 생각한 일이라면 한 치의 망설임이 없었습니다.차마 보지 못할 장면을 목도한 뒤엔혈조에 뛰노는 의분을 참지 못하였고,목에 피가 마르도록 언쟁을 하며 불의 앞에 더 높이 타올랐습니다.일제의 악랄에 맞서 싸운선생의 투철한 기자정신을 잊지 않겠습니다. 치열하였던 그의 삶과 정신을 시대가 이어가길 다짐합니다. ]]> Thu, 29 Oct 2020 11:17:47 +0000 47 <![CDATA[대한인노동사회개진당 결성과 외교 후원 ]]> 글 홍선표 나라역사연구소 소장 대한인노동사회개진당 결성과 외교 후원 Ⅳ. 3·1운동 이후 재미 한인 사회의 변화 ⑥ 3·1운동 발발 이후 미주 한인사회에는 뜨거운 독립운동의 열정을 가진 사람들에 의하여 새로운 단체들이 설립되었다. 그 가운데 대한인노동사회개진당은 유럽에서 외교활동을 전개하던 조소앙의 외교활동을 돕는다는 명분으로 설립된 특별한 독립운동 단체이다.  조소앙의 유럽 외교활동조소앙은 1917년 8월 상하이에서 신규식과 함께 스톡홀롬에서 개최되는 국제사회주의자대회 참가를 위하여 조선사회당을 만들어 외교활동을 전개한 인물이다. 그런 그가 1919년 1월 파리강화회의가 열리자 김규식을 도와 외교활동을 추진하기 위하여 같은 해 5월 상하이를 떠나 6월 말경 파리로 건너갔다. 파리에 도착하였을 때 파리강화회의는 한국 문제에 대한 언급이나 논의도 없이 종결되는 시점이었다. 하지만 그는 김규식을 비롯하여 파리한국통신부에서 활동 중 이관용·황기환·김탕 등과 함께 유럽에서 선전 외교활동을 계속하였다. 1919년 8월 1일부터 9일까지 스위스 루체른에서 국제노동사회주의자대회(Lucerne International Labour and Socialist Conference: 일명 ‘만국사회당대회’)가 열리자 조소앙은 이관용과 함께 같은 해 7월 17일자로 대회 의장에게 참가 의사를 밝히고 대회에 참가하여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였다. 그런 노력의 결실로 본 대회는 한국의 독립을 승인하고 지지한다는 결의문을 만장일치로 채택하였다. 아울러 한국을 신생 국제연맹의 회원으로 가입시켜야 한다는 결의도 이끌어냈다. 국제회의에서 처음으로 한국 독립을 승인한 외교적 성과였다. 곧이어 조소앙은 같은 해 8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개최한 만국사회당 집행위원회에 참석하여 한국 독립 문제 실행 요구안을 제출하고 이를 통과시켰다. 대한인노동사회개진당의 결성미주 한인사회에 조소앙의 구미 외교활동 소식이 전해진 것은 1919년 말경 조소앙이 자신의 활동 상황을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이살음에게 알리고 후원을 요청하면서다. 당시 이살음은 『신한민보』 편집인으로 활동할 때였다. 그는 임용호와 임일을 비롯해 김호·문양목·이순기·임정구·송창균·전명운·이흥민·이범녕·장기영·김진형·김탁·최응선 등과 협의하여 그의 외교활동을 후원하는 방안을 모색하였다. 재미 한인들은 그의 후원을 계기로 노동을 통한 사회 발전을 도모할 목적으로 새로운 단체를 발기하기로 하였다. 발기자들은 1919년 12월 2일부터 3일까지 샌프란시스코에서 창립총회를 개최한 후 12월 7일 대한인노동사회개진당(Korean Labor Party: 이하 ‘노동사회개진당’)을 설립하였다. 설립 목적은 ‘일체 자결한 자주 민족의 세계적 신기운에 순응병진하여 노동·경제·정치·종교의 공동 협진’에 두었다. 즉 동포 남녀의 평등과 정의·인도로 자주 민족의 평화를 유지하고, 노동사회를 보호하되 의무와 권리를 똑같이 나누며, 농공어광(農工漁鑛)의 민중 이권을 지키기 위하여 대한국(大韓國)의 독립을 공고히 하는 동시에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대동건설에 협찬하는 것을 설립의 종지로 삼았다. 이러한 뜻을 실현하기 위한 방안으로 노동을 근작(勤作)하고 공제(共濟)를 계도(啓導)하며 사회를 개진(改進)하는 것으로 하였다. 노동사회개진당은 노동자 중심의 사회발전을 도모하기 위한 것으로 조소앙의 표현에 의하면 해외 최초로 결성한 한인 노동 정당이었다. 운영과 당원 입당은 자체의 헌규(憲規)와 세칙을 통해 시행되었고 건국기원절(음력 10월 3일), 독립선언일(3월 1일), 독립승인일(8월 9일), 본당 설립 기념일(12월 7일)을 본당의 주요 기념일로 제정했다. 스위스 루체른 대회에서 이루어낸 1919년 8월 9일의 독립승인일을 3·1독립선언일과 동격으로 기념한 것은 본당의 설립이 조소앙의 외교활동과 그의 사상을 적극 지지하고 수용한다는 것을 보여준다.노동사회개진당은 1919년 12월 7일 샌프란시스코 한인교회와 12월 13일 다뉴바 한인교회에서 제1차, 2차 선포식을 거행하며 대내외에 창립 사실을 알렸다. 임원은 수령 1인과 이사 9인으로 구성했고 초대 수령은 이살음이 맡았다. 회원은 당초 140여 명이었다가 1920년 이후 200여 명으로 증가하였다. 규정 보완을 위해 1920년 2월 26일 다뉴바에서 연합협의회를 개최하여 13개 조의 의안을 결정하였고, 그 해 3·1절 기념행사를 캘리포니아 남북 두 곳에서 당원 친목회를 겸해 개최하였다. 1920년 5월 17일 기존의 헌규와 규칙 등을 개정함에 따라 노동사회개진당은 고문부·집행부·공의부의 조직으로 재구성하였다. 당무는 집행부의 계획에 대해 공의부의 검토를 거쳐 집행부가 시행하는 체제로 하였고 고문부는 두 부서 간의 자문과 협찬을 맡았다. 고문부의 인물로는 서재필과 김규식을 찬성장으로, 조소앙과 송헌주를 대표원으로 선임하였고 공의부에는 전성룡·오충국·박희성·김순권을 임명하였다. 집행부는 수령 이살음, 총무 김정진(김호), 재무 이흥만, 외무 정한경, 업무 김종림로 구성하였다. 그밖에 지방임원을 도령위라 부르고 당원 10명 이상이 모이면 1당계로, 당계 2개 이상이 모이면 대당계라 하였다. 이에 따라 지방임원은 다뉴바대당계 도령위 장기영, 윌로스대당계 도령위 전명운, 새크라멘토 도령위 김찬일으로 선임하였다. 조소앙의 외교활동 후원과 『동무』 발간노동사회개진당은 유럽에 있는 조소앙의 외교활동을 돕는 데 역점을 두었다. 창립 직후부터 1920년 3월까지 조소앙에게 보낸 외교활동비는 2,200달러(프랑스화로 26,590프랑)였고, 그 이후의 송금까지 포함하면 총 2,500여 달러였다. 창립 초기부터 많은 금액을 송금할 수 있었던 것은 수령 이살음과 총무 김정진의 적극적인 의연금 모금활동과 여기에 적극 호응한 회원들의 열성 때문이었다.노동사회개진당은 자체 홍보와 활동 소식 등을 알리기 위해 1920년 7월 필사체로 된 『동무』를 발간하였다. 발간 취지에 따르면 지위고하나 빈부 차이를 불문하고 모든 평범한 사람을 다같이 ‘동무’라 할 것이며 『동무』는 바로 이런 ‘동무’를 돕기 위한 것이라 하였다. 이러한 취지에 따라 『동무』는 노동이나 사회문제에 대한 연구, 나아가 이와 관련된 수양과 생활에 역점을 두었다. 조소앙이 유럽에서 외교를 마치고 1920년 10월 페테르부르크를 거쳐 1921년 5월 베이징으로 돌아가면서 노동사회개진당의 활동은 약화되었다. 1923년 2월 본부를 샌프란시스코에서 로스앤젤레스로 옮긴 후 1924년 1월 1일 송구영신을 겸한 대회를 개최하였으나 이후 별다른 활동 없어 유명무실해졌다. 노동사회개진당은 3·1운동 직후 자주독립을 위한 외교활동에 목마른 재미한인들의 독립열정의 산물이자 노동을 신성시 하는 독립국가 건설을 꿈꾼 단체로 기억될 것이다. alt대한인노동사회개진당 당원증(1920. 1. 15.)]]> Thu, 29 Oct 2020 11:39:58 +0000 47 <![CDATA[유일한 부부 의병 강무경과 양방매 ]]> 글 김형목 사단법인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이사 유일한 부부 의병강무경과 양방매 일제의 침략이 나날이 심화되고 있을 당시 1908년, 강무경 의병장은 심남일 의병장과 함께 전남 함평에서 의병을 일으킨 뒤 전투 후유증에 시달렸다. 이때 영암으로 이동해 선비 양덕관 집에 머무르며 둘째 딸인 양방매에게 치료를 받았는데, 이것이 인연이 되어 둘은 부부의 연을 맺게 된다. 강무경의 만류에도 양방매는 그를 따라 항일전에 함께 나서며 1년여간 전투를 함께하였다. alt전북 무주 나제통문 입구에 세워진 강무경·양방매 부부 사적비 일제 침략에 맞서 의병에 나서다의병은 국가가 위태로운 상황에 직면했을 때 무력 항쟁으로 이를 타개하고자 재야 유생과 민중을 중심으로 조직되었다. 외세 침략이 빈번한 우리나라는 전통시대부터 ‘위국헌신과 향토 지킴이’로 국난극복을 위한 자기희생에 투철한 의병 활동이 이어졌다. 개항 이후 외세 침략이 강화되는 상황은 전통적인 가치관에서 벗어나 ‘민족자존과 자기 정체성’ 정립을 시대적인 소명으로 인식하는 결정적인 계기였다. 승패에 전연 개의치 않은 의병정신은 1895년부터 일제강점기 50여 년에 걸친 독립전쟁의 정신적인 자양분이었다고 해도 전혀 과언이 아니다.을미사변과 단발령은 일제의 야만적인 만행과 친일정권의 민낯을 그대로 드러내는 계기였다. 이 땅의 선각자와 민중은 현실 모순을 타개하고 외세를 몰아내는 데 분연히 떨쳐 일어났다. 최소한 ‘민족 자존심’을 일깨우고 지키려는 냉엄한 현실은 우리에게 무언가를 물어본다. 11월 17일은 이 땅 독립과 자유를 위해 민족제단에 목숨마저 초개처럼 던진 선조들을 기억해야 하는 순국기념일이다. 이들은 안락한 삶이나 명예와 너무나 거리가 먼 인생역정을 최고의 가치로 생각하고 실천하는 데 조그마한 주저함이 없었다. 전통과 근대적인 가치관이 혼재한 당시 부부 의병운동가 탄생은 분명 우리에게 충격적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들 부부의 존재를 제대로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기억의 망각에 갇혀 있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앞으로 부부 의병운동가의 치열한 흔적을 찾는 일은 계속되어야 마땅하다. alt강무경 동상과 건립기문이 인생 항로를 말하다전북 무주는 과거 심산유곡이었으나 이제 덕유산 국립공원으로 유명한 관광명소가 되었다. 나제통문은 삼국시대 신라와 백제의 국경 관문으로서 이를 중심으로 동쪽은 신라 땅이고 서쪽은 백제 땅이었다. 이러한 연유로 이곳은 신라와 백제 양국에게 전략적 요충지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지금도 통문을 경계로 행정구역상 무주군 소천리에 속하나 언어와 풍속 등이 너무나 다르다. 인근에 조성된 작은 공원에 자연경관과 어울리는 웅장한 동상 등은 눈여겨볼만하다. 동상의 주인공은 이곳 출신 강무경(姜武景) 의병장이다. 총을 든 의병이 턱수염을 기른 채 버티고 선 의연한 모습에서 범상치 않음을 느낀다. 동상 아래에는 ‘건립기문’과 ‘의병활동 요약’이 새겨져 있다. 동상 옆에는 동상의 주인공의 사적을 새긴 비석이 있다. 의병장 강무경상  건립기문과 의병활동 내용은 다음과 같다 .“조국이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했을 때 자신의 부귀영화보다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32세의 꽃다운 나이로 목숨을 바치신 강무경 의병장의 숭고한 애국애족정신을 후세에 기리고 자손만대에 이어갈 민족의 귀감으로 삼고자 55명의 동상건립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여기 동상을 건립하오니 소중하게 가꾸고 보존함으로써 민족 수난사의 횃불이 되어 다시는 조국강토에 이토록 슬픈 역사가 없기를 기원합니다.”강무경 의병장께서는 1879년 음력 4월 8일 무주군 설천면 소천리에서 태어났다. 사숙에서 전통교육을 받은 후 필묵상(筆墨商)으로 유학자들과 널리 교유하였다. 의병장 심남일(沈南一)과 함께 대일항쟁을 결의하고 의형제를 맺은 다음 김율(金律) 의진에 소속, 대일항전을 벌이던 중 1907년 김율이 전사하자 심남일을 대장으로 추대하고 그의 선봉장이 되었다.1908년 3월 7일부터 10월 27일까지 강진·장흥·남평·능주·영암·나주·해남 등지에서 9회에 걸쳐 전투에 참여하여 수많은 일본군을 살해하고 많은 수량의 무기를 노획하는 등 혁혁한 전과를 거양하였다. 그러다 신병 치료차 격전지였던 능주 풍치의 바위굴에서 은신하던 중 일본군에게 발각되어 1909년 8월 26일 체포되었으며, 동년 9월 2일 광주로 이송되었으나 동년 12월 15일 대구감옥소로 이감되었다. 1910년 32세의 꽃다운 나이로 천추의 한을 품고 순국하였다.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하였다.강무경 의병장의 다른 이름은 강윤수(姜尹秀)이다. 필묵상으로 살아가던 중 을사늑약에 분개하여 심남일·김준·김율 등과 협의하여 의병을 일으키기로 의기투합하였다. 군대해산 이후 심남일과 11월에 함평군 신광면에서 의거하여 심남일의 선봉장이 되었다. 심남일 의진은 이듬해 2월 신광면을 떠나 남평으로 행군하여 3월 강진군 오치동에서 적 수십 명을 살상하고 다수의 무기를 노획하였다. 심남일의 신출귀몰한 전략으로 일제 군경을 물리치면서 항간에는 이를 칭송하는 동요까지 생겨났다. “남일이 용마를 타고 / 산 밖으로 솟아오르면 / 현수는 풍운을 조화하여 / 공중으로 날아오른다”라는 명성이 자자하였다.이어 장흥 곽암, 남평 장담원과 반촌 등지에서 격전을 치러 전리품을 얻었다. 이후 장흥의 대치·해남 등지에서 접전하여 많은 전공을 올렸다. 이른바 남한대토벌작전으로 의병활동이 불가능하자 의병진을 해산하고 후일을 도모하였다. alt일제의 남한폭도대토벌 때 체포되어 대구감옥에 투옥된 호남의병장들(1909) 양방매 의병 홍일점으로 합류하다 양방매(梁芳梅, 1890~1986)는 전남 영암군 금정면 남송리에서 선비 남원 양공 덕관의 둘째 딸로 태어났다. 18세인 1908년 9월 구국의 일념에 불탔던 강무경 의병장을 남편으로 맞이하여 내조하였다. 1909년 3월부터는 남편의 부대에 가담해 장흥·보성·강진·해남·광양 등지 산악전에서 홍일점 의병으로 맹활약하였다. 그러던 중 1909년 음력 8월 26일 능주 풍치(風峙)에서 심남일과 함께 은신 중에 일본군에게 체포되었고, 함께 있던 양방매 부인은 나이 어린 여자라고 훈방되어 친가로 돌아간 후 평생을 숨어 살았다.그 후 강무경 의병장은 광주에서 대구감옥소로 끌려다니며 악형을 당하다가 1910년 음력 7월 32세 젊은 나이로 하늘에 사무치는 한을 품은 채 순국하였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고향 친척들은 형장으로 달려가 일본 순사들의 눈을 피하여 시신을 수습하고 5일간 야간을 이용해 고향땅 설천으로 운구하여 이남(伊南)마을 말굴재에 모셨다. 이후 1962년 3월 1일 건국공로훈장 국민장이 추서된 뒤 1973년 10월 31일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 애국지사묘역 124호에 안장하였다.한편 남편과 사별한 양방매 의병은 친가에서 일생을 수절하며 살다가 1986년 9월 28일 향년 96세로 한 많은 생을 마쳤다. 1986년 전남 영암 금정면 남송리 당치(堂峙)에 묻혔다가 1995년 10월 9일 자손들의 노력으로 국립묘지 남편 묘소에 합장되었다. 이에 1995년 광복 50주년을 맞아 빛나는 공적을 후대에 길이 전하고자 그 사적을 돌에 새겨 비를 세웠다. alt광주감옥 군산 분감 운명적인 만남으로 의병운동에 나서다한편 영암지역에서 의병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된 시점은 대한제국의 군대가 일제의 압력에 의해 강제 해산되면서였다. 목포의 일본인 상업회의소에서 전남 의병을 조속히 진압해 줄 것을 통감부에 호소하였다. 다른 지역 의병 활동의 기세가 약해진 후에도 최후까지 활발한 전투 활동을 지속하였다. 특히 함평에서 거의한 심남일 의진과 박사화 의진 등에 합류하여 의병활동을 전개한 인물들이 많았다. 이들은 일본 헌병대나 군대를 습격하여 전과를 올렸으나 대부분 전투 과정에서 순국하였다. 영암 의병 가운데 주목할 부분은 양방매처럼 여성의 몸으로 항쟁에 참여한 사실이다.강무경 의병장이 심남일과 함께 전남 함평에서 의병을 일으킨 뒤 1908년 영암으로 이동할 때였다. 일본군과 교전한 강무경은 전투 후유증으로 신열에 시달렸다. 평소 인연이 있던 영암 금정면의 선비 양덕관(梁德寬)의 집을 찾았다. 그곳에서 양덕관의 둘째 딸 양방매에게 치료를 받았다. 아버지는 두 사람이 좋은 배필이라고 생각하여 부부로서 인연을 맺어주었다.지극한 정성으로 원기를 회복한 강무경은 채비를 차리고 다시 의병활동에 나서려 하였다. 남편은 아내에게 “여자가 나설 데가 아니다”라며 집에 남아 있으리라고 간곡하게 만류하였다. 아내는 자신의 굳건한 뜻을 전혀 굽히지 않는 당당함을 보였다.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산다.” 부부 인연이 전통적인 가치관에서 뛰어넘어 동지로서 길을 걷는 역사적인 순간을 맞았다. 양방매는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남편을 따라 의병이 되어 항일전에 나섰다. 1909년 10월 9일 전남 화순군 능주면 바람재 바위굴에서 남편과 함께 일경에 체포될 때까지 1년여 동안 의병부대의 일원으로 장흥·보성·강진·해남·광양 등지까지 전남 동남부 일대 산악 지역을 무대로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특히 1909년 3월 8일에는 강무경 의병부대가 유인작전으로 협공을 벌여 다수의 일제 군경을 사살한 거성동 전투에도 참전하였다.이른바 남한대토벌작전으로 호남 의병에 대해 파상적 탄압을 가하던 때인 1909년 10월 9일 강무경과 함께 체포되어 광주형무소로 압송되었다. 남편은 대구감옥소로 이감되어 순국하였다. 반면 양방매는 어린 여성이 참작되어 석방되었다. 목숨을 걸고 남편을 따라간 양방매는 남편 사후 의병활동을 하다가 병사한 오빠 양성일의 딸을 기르며 오랜 세월을 숨죽이며 살았다. 1984년에야 비로소 그녀의 존재가 알려지는 가운데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된 남편의 묘소를 찾았다. 그로부터 2년 뒤인 9월 28일 96세의 나이로 서거하였다. 정부는 2005년 양방매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alt화승총 등 의병 무기류]]> Thu, 29 Oct 2020 11:38:08 +0000 47 <![CDATA[적장을 무너뜨린 두 기생 ]]> 글 김종성 역사작가 적장을 무너뜨린두 기생 임진왜란은 1231년에 1차 몽골 침략으로부터 361년 만에 발생한 초대형 국난이었다. 부산에 상륙한 왜군이 두만강변까지 진군하고 조정이 압록강변 의주까지 북상할 정도로 전국적 범위에서 일대 위기가 조성되었다. 풍전등화 같은 이 상황에서 관군뿐 아니라 일반 백성들도 팔을 걷어붙이고 의병 투쟁에 나섰다. 이 가운데 위험을 무릅쓰고 홀로 왜군에 뛰어든 두 사람이 있다. 평양 기생 계월향, 진주 기생 논개다.  평양의 계월향왜군은 16만 대군을 동원해 침공을 감행하였고, 당황한 조선군은 북쪽으로 밀리고 있었다. 선조 임금이 원성을 무릅쓰면서까지 한양을 떠나 북상해야만 하였다. 그런데 이때 의병들이 등장하여 상황을 바꿔놓았다. 조선의 백성들이 들고 일어나 왜군과 싸웠고, 이로 인해 왜군이 주춤하는 사이에 명나라 군대가 압록강을 넘어왔다. 평양성을 점령한 왜군이 우세를 점한 상황에서 조·명 연합군이 대치하게 된 이때 계월향이 등장한다.임진왜란은 양력으로 1592년 5월 23일(음력 4월 13일) 발발하였다. 평양성을 빼앗긴 것은 양력 7월이고, 되찾은 것은 이듬해 2월이다. 계월향이 역사 기록에 등장하는 것은 바로 이 기간이다. 평양 역사를 기록한 『평양지』에 따르면, 이 성을 빼앗길 당시 계월향은 성내에 있다가 왜군에 붙들렸다. 그 뒤 왜군 대장인 고니시 유키나가의 총애를 받는 일본 장수에게 넘겨졌다. 평양성 왜군의 중추 역할을 하였던 이 장군이 나이토 조안이라는 말도 있지만, 나이토 조안은 임진왜란이 끝나고 약 30년 뒤에 죽었다. 계월향을 붙들어둔 장수는 계월향과 같은 날에 죽었으므로 나이토 조안이 아닌 것으로 추측한다. 따라서 그 장수의 신상은 알 수 없다. 계월향 오빠의 평양 잠입계월향은 억류에서 벗어날 목적으로 일본 장수의 환심을 사기 위해 노력하였다. 1592년 연말로 추정되는 시점에 이르러 그는 상대를 안심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평양지』에 따르면, 그는 “친척이 보고 싶어요. 서문 쪽에 갔다 올게요”라고 말하고 외출을 하였다. 서문 성벽에 올라보니 성문 밖에서 백성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성내에 갇힌 가족의 생사를 확인하려고 모여든 사람들이었다. 계월향은 그들을 향해 “우리 오빠 어디 있소?” 하며 외쳤다. 이는 자기를 도와줄 남자를 찾는 외침이었다. 이때 한 남자가 백성들 틈에서 튀어나왔다. 일반 백성의 옷을 입은 이 남자는 계월향을 아는 척하며 성벽 쪽으로 다가섰다. 그는 평안도 용강현 출신으로 첩보 활동에 일가견이 있는 김경서 장군이었다. 김경서가 다가오자 계월향은 낮은 소리로 “저 좀 빼내주세요. 목숨을 다해 은혜를 갚을게요”라고 간청하였다. 김경서는 “나를 성 안으로 들여보내주시오”라고 부탁하였다. 계월향은 일본 군인들에게 “제 오빠이니 성문 좀 열어주세요”라고 요청하였다. 조선군 장수가 평양성에 잠입하는 순간이었다. alt곽재우 의병부대의 정암진 전투를 묘사한 상상화(전쟁기념관 전시) 적장을 쓰러뜨리다두 사람은 성 안에서 대화를 나눴다. 이들은 일본 장수를 죽이기로 결의하고 한밤중에 다시 만나자고 약속하였다. 홀로 숙소로 돌아간 계월향은 일본 장수와 대화를 나누며 밤이 되기를 기다렸다. 시간이 흐르자 장수는 의자에 앉은 채 잠들었고, 계월향은 조심스레 문을 열고 나갔다. 그런 뒤 약속 장소로 나가 김경서를 데리고 숙소로 돌아갔다. 일본 장수는 여전히 잠들어 있었다. 계월향은 “저놈이에요”라고 소리쳤고, 김경서는 칼을 뽑아들었다. 평양성 왜군의 핵심 장수가 쓰러지는 순간이었다.  두 사람은 숙소를 빠져나왔다. 김경서는 상부에 보고하기 위해 적장의 목을 들고 나왔다. 계월향과 함께 성벽을 향해 달리던 김경서는 성벽이 임박한 지점에서 갑자기 어처구니없는 행동을 하였다. 몸을 돌려 계월향을 찌른 것이다. 나중에 그는 “두 사람 다 성벽을 넘기 힘들어서 계월향을 죽였다”고 말하였다. 조선 장군을 적장 앞에까지 안내하는 위험을 무릅쓴 계월향은 이렇게 억울한 죽임을 당하며 세상을 떠났다. 시인 한용운은 〈계월향에게〉에서 “사람은 반드시 다하지 못한 한을 끼치고 가게 되는 것이다. 그대는 남은 한이 있는가 없는가, 있다면 그 한은 무엇인가”라며 계월향을 위로하였다. 『평양지』에 따르면, 그날 밤의 사건을 계기로 왜군은 사기가 저하되었다. 이 상태에서 조·명 연합군이 평양성을 공격하였고, 왜군은 성을 잃고 남하하게 되었다. 이로써 전세가 역전되었고, 이때부터는 조선군이 일본군을 압박하였다. 전세의 변화가 계월향의 용기 있는 행동에서 비롯되었으니, 평양성 수복에 기여한 그의 공로를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진주의 논개1593년 2월 초에 조선군과 함께 평양성을 수복한 뒤로 명나라 군대는 기세가 올랐다. 하지만 1개월도 안 되어 벌어진 경기도 벽제관 전투에서 패배하자 이들은 소극적으로 대응하기 시작하였다. 어떻게든 빨리 전쟁을 끝내는 데만 급급하였다. 전세가 조선에 유리한데도 명나라군은 왜군의 휴전회담 제의를 받아들였다. 이로 인해 전황이 소강 국면에 접어든 상태에서 양력 7월 27일(음력 6월 29일) 진주성이 왜군에 함락되면서 논개가 순국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경상도 동남부로 밀려나 있었던 왜군이 휴전회담이 시작된 마당에 진주성 점령에 총력을 기울인 것은 휴전회담에서 유리한 입장을 확보함과 동시에 전라도로 가는 길목을 차지해 곡창지대를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진주성 함락으로 인한 조선 측의 인명 피해는 6만 명을 넘었다. 전쟁 중에 광해군을 보좌하였던 어우당 유몽인은 『어우야담』에서 “성이 짓밟히자 군사는 패하고 백성은 거의 다 죽었다”고 말하였다. 진주성은 참혹하게 파괴되었고 왜군은 백성들을 겁탈하였다. 이 와중에도 논개는 평정심을 유지하였다. “논개는 얼굴과 매무새를 아리땁게 꾸몄다”고 『어우야담』에 기록되어 있다. 진주성이 함락된 그날 논개는 진주시를 관통하는 남강으로 걸어갔다. 남강변에 촉석루가 있었고 그 누각 아래에 바위가 있었다. 훗날 의암으로 불리게 된 바위였다. 조선 후기에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최진한은 조정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그 바위는 강 언덕과 떨어져 있는데 위는 두 사람이 상을 놓고 둘러앉을 만하고 아래는 깊디깊은 물결 속입니다”라고 말하였다. 강 언덕에서 건너뛰어야 의암에 발을 디딜 수 있었다. 아름답게 꾸민 논개는 몸을 날려 의암으로 건너갔다. 바위 위에는 논개뿐이었다. 이를 보고 강 언덕 왜군이 술렁거렸다. 하지만 쉽게 접근하지 못하였다. 논개 곁으로 가려면 강물 위로 몸을 날려야 하였기 때문이다. alt의병투쟁에 참여한 행주대첩 당시의 여성들(행주산성 벽화) 적장을 사로잡다이때 적장 한 명이 의암으로 건너뛰었다. 이 장수가 제3군단 사령관인 가토 기요마사라는 말도 있었지만, 가토는 임진왜란이 끝나고 12년 뒤에 죽었다. 이때 전쟁 도중에 죽은 사람은 가토의 부하인 게야무라 로쿠스케였다. “여러 왜병들이 논개를 바라보고 좋아하였지만 모두들 감히 가까이 오지 못하였는데, 한 장군이 홀로 나서서 다가왔다”고 『어우야담』은 말한다. 게야무라가 건너오자 논개는 미소를 지었고, 게야무라는 더 가까이 다가갔다. 『어우야담』은 “논개가 웃으면서 맞이하니 왜장도 그를 꾀면서 끌어당겼다”고 묘사한다. 게야무라가 끌어당기자 논개도 그를 끌어안았다. 그런 뒤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논개는 물속에도 상대를 꽉 끌어안은 것으로 보인다. 일본 병사들이 게야무라를 건지려고 시도하였지만 실패한 까닭은 논개가 단단히 끌어안고 가라앉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순국은 전세에 영향을 미쳤다. 진주 출신 학자인 박태무(1677∼1756)는 『의기전』에서 “왜적은 장수를 잃자 흐트러지고 무너지며 달아났다. 그래서 진주성은 다시 온전할 수 있었다”고 말하였다. 왜군은 진주성을 오래 지키지 못하였다. 이는 그들이 주변 지역을 약탈하느라 군사력을 소모하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논개로 인해 장수를 잃고 당황하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20세기에 진주를 방문한 시인 정지용은 “한 개의 적장을 사로잡는 것은 한 개의 적 군단을 섬멸하는 것이다”라고 썼다. 조선은 온 백성이 하나가 되어 왜적을 몰아냈다. 백성들은 지위와 재산과 신분을 가리지 않고 너도나도 달려들어 이 땅을 지켜냈다. 그런 백성들 중 두 사람이 계월향과 논개다. ]]> Thu, 29 Oct 2020 11:40:39 +0000 47 <![CDATA[시간의 흔적을 따라 서울의 가을 ]]> 글·사진 임운석 여행작가 시간의 흔적을 따라서울의 가을 여행은 공간의 이동이 아니라 시간을 관조하는 것이다. 특히 일상과 여행이 같은 공간에 존재하는 서울이라면 더욱 그렇다. 서울은 백제와 조선의 도읍지였으며 대한민국의 수도다. 한 공간에 고대부터 현대까지 숱한 시간이 켜켜이 쌓였다. 그중에서 북촌과 서촌은 고전을 모던하게 해석한 곳이며 덕수궁과 정동길은 근대화의 토대가 된 곳이다.  alt사계절 푸른 대나무와 어우러진 한옥alt서촌의 명물이 된 대오서점 도심형 한옥 북촌과 도심형 골목 서촌서울은 팔색조 같은 도시다. 잿빛 콘크리트를 한 겹 벗겨내면 그 속에 숨어 있는 자연이 오롯이 드러난다. 어디 자연뿐일까. 익숙한 듯 스쳐 지나간 역사의 조각들은 길바닥에 나뒹구는 은행잎보다 더 많다. 색이 더 바래기 전에 서울의 가을 속으로 들어가 볼 일이다.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에 자리한 북촌은 조선시대 권문세가와 왕족들이 살았던 고급 주택단지였다. 고관대작이 살았던 고래등 같은 저택이 지금처럼 소규모 한옥으로 변신한 것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다. 토지가 분할된 것이다. 북촌 한옥마을에는 여덟 개의 특별한 풍경, 즉 북촌 팔경이 있다. 제1경은 계동 현대사옥 옆 골목을 따라 언덕을 오르면 구중궁궐을 에워싼 돌담이 보인다. 바로 창덕궁이다. 고층 빌딩 숲에 포위된 모습이지만 그 위엄만큼은 여전하다. 창덕궁 돌담길을 따라 걸어가면 제2경인 원서동 공방길에 닿는다. 조선시대 왕실을 돌보던 나인들이 살던 곳으로 지금도 그 맥을 이어 공방이 많다. 제3경은 가회동 11번지 일대로 일명 ‘박물관 길’이라 부른다. 제4경은 가회로를 건너 돈미약국 옆 골목으로 들어서면 가회동 31번지 일대가 한눈에 들어오는 곳이다. 내친김에 가회동 골목을 올려다보면 제4경이고 올라가서 내려다보면 제5경이다. 비탈진 골목에 작은 한옥들이 물결처럼 흐른다. 그 끝 지점에 서울N타워가 아득하다. 이곳이 팔경 중에서 가장 유명한 포토 스폿이다. 제7경과 제8경은 카페거리로 유명한 삼청동길과 이어진다. 서촌은 카페거리로 유명하지만 도심형 골목의 전형을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경복궁 서쪽 영추문을 기준으로 통인동, 통의동 등 13개 동이 서촌에 속한다. 경복궁 영추문 맞은편에 ‘보안여관’은 시인 서정주와 김동리 선생이 기거하면서 한국 최초의 문학 동인지 ‘시인부락’을 만든 곳이다. 화가 이중섭도 자주 드나들었다. 왼쪽 이면도로로 발길을 들이면 서촌의 진면목이 드러난다. 서촌 골목은 미로와 같아서 좁은 골목에 다세대주택과 빌라가 촘촘하게 자리한다.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적산가옥들도 드문드문 눈에 띈다. 이런 이유로 서촌을 ‘시간이 멈춘 동네’라 부른다. 그 틈에 ‘대오서점’이라는 낡은 간판을 단 중고 책을 파는 서점이 있다. 60년 동안 자리를 지켜오다가 몇 해 전부터 카페를 겸하고 있다. alt덕수궁 경내alt가을이 내려앉은 덕수궁 전통과 모던이 공존하는 곳서울의 가을에는 덕수궁 돌담길이 있는 정동길을 빼놓을 수 없다. 연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은 걸어봤을 그 길. 그다지 볼 것이나 즐길 것이 많지 않던 시절엔 보물 같은 장소였다. 가을만 되면 흥얼거리던 이문세의 ‘광화문 연가’도 이 길을 배경으로 지어졌다. 뭇사람들의 추억이 켜켜이 쌓였을 것 같은 그곳엔 우리가 잊고 있었던 역사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덕수궁은 1897년 대한제국 선포와 함께 황궁이 되었다. 당시 이름은 경운궁이었다. 그게 덕수궁이라 불린 건 1907년 순종(1874~1926)이 고종(1852~1919)의 뒤를 이어 황제에 오른 후다. 순종은 ‘덕을 누리며 장수하라’는 뜻을 담은 궁호 ‘덕수궁(德壽宮)’을 고종에게 바쳤다. 고종은 재위 기간 대한제국의 근대화를 위해 빠른 행보를 보였다. 이런 움직임을 대변하는 것이 전통은 유지하고 서양문물은 받아들이자는 ‘구본신참(舊本新參)’이었다. 덕수궁에 서양식 건축물인 석조전, 중명전, 정관헌이 들어선 이유도 이 때문이다. 중화전은 1902년 고종이 처음 지을 때에는 중층의 웅장한 건물이었는데, 화재로 인해 1906년에 재건하면서 단층으로 지었다. 축소된 건물만큼이나 국력도 쇠해 보인다. 지하 1층, 지상 2층 규모인 석조전은 1910년에 고종이 머물 황궁으로 영국인이 설계를 맡았다. 1층은 공적인 공간으로 거실과 접견실 등이 있으며 2층은 황제와 황후의 침실·거실·욕실 등이 있으며 매우 화려한 것이 특징이다. 그렇지만 고종은 말년까지 함녕전에 머물렀기 때문에 안타깝게도 사용하지 못하였다. alt석조전alt중화문 뒤 중화전 모던 스트리트의 명맥을 잇는 정동길근대화의 시작이었던 정동길에는 유난히 ‘최초’가 많다. 배재학당은 1885년 미국 선교사 아펜젤러(1858~1902)가 세운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사립교육기관이다. 배재학당(培材學堂)은 ‘유용한 인재를 기르고 배우는 집’이라는 뜻이다. 한문과 교리문답을 제외한 모든 수업을 영어로 진행한 것도 우리나라 최초다. 이 학교의 교육 목적은 단순한 지식 전달이 아니었다. 자유·진리·평등이란 기독교적 가치를 심어줬다. 이것은 학당훈 ‘욕위대자 당위인역(欲爲大者當爲人役)’를 통해서 알 수 있다. 이건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라는 성경 구절(마 20:28)에서 뜻을 따왔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교육기관인 이화학당도 정동길에 있다. 미국 선교사 메리 스크랜턴(1832~1909)이 1886년에 설립하였다. 이화학당(梨花學堂)이란 교명도 1887년 왕실에서 하사하였다. 이화는 ‘배꽃처럼 순결하고 아름답게 교육하라’는 뜻을 담았다. 이문세의 노래 ‘광화문연가’엔 ‘눈 내린 조그만 교회당’이란 가사가 나오는데 그 교회당은 정동제일교회를 가리킨다. 1885년 한옥으로 시작하였다가 현재의 모습을 갖춘 것은 1897년이다. 당시는 벧엘예배당으로 불렸다. 예배당은 건축 당시 큰 규모로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이국적인 건축양식도 한몫하였다. 민족대표 33인 중 한 분인 이필주 목사와 박동완 전도사가 독립선언문을 등사하다 발각돼 옥고를 치른 곳도 이 교회 지하실이다. 이화여고 앞 좁은 골목길을 따라가면 중명전에 닿는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된 비운의 장소다. 2년 후 전 세계에 대한제국이 자주독립국임을 알리려 헤이그 특사를 파견한 장소도 여기다. 캐나다대사관 옆 오르막길 끄트머리에는 옛 러시아공사관이 있다. 을미사변 당시 명성황후(1851~1895)가 일본 낭인에게 죽임을 당하자 고종이 세자와 더불어 1년간 피신하였던 곳이다. 고층 빌딩 사이로 고색창연한 한옥이 얼굴을 내미는 서울에서 깊어가는 가을을 좀 더 여유롭게 즐기길 바란다. alt정동제일교회]]> Thu, 29 Oct 2020 11:41:12 +0000 47 <![CDATA[폭탄 투척 의거 나석주 ]]> alt]]> Tue, 01 Dec 2020 15:49:09 +0000 48 <![CDATA[식민지 불법 수탈을 없애고자 목숨을 던지다 ]]> 글 은예린 역사작가식민지 불법 수탈을 없애고자목숨을 던지다나석주 일제강점기 잡지 『별건곤』 제39호(1931)에는 ‘조선 사람은 몇몇 부자를 제외하고 나면 똥 가래가 찢어지게 가난하다’라며 슬픈 현실을 토로하였다.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을 강탈한 일제는 표면적으로 “조선 민중은 직접 짐의 위무 아래에서 그 강복(康福)을 증진할 것”이라고 약속하였다. 그러나 식민지배 20년이 지난 후 우리 백성들의 삶은 처참할 정도로 가난해졌다.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조선식산은행일제 식민통치는 자신들이 필요한 물자와 자원을 조선에서 수탈해가는 포악한 정책이었다. 그들의 가렴주구(苛斂誅求)보다 더욱 잔혹한 통치 체제로 조선인들은 굶주림에 허덕일 수밖에 없었다. 조선인을 힘들게 하였던 대표적인 기관인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조선식산은행을 떠올려 보자. 1908년 일본이 한국의 토지와 자원을 독점하여 수탈할 목적으로 설립한 대표적인 국책회사가 바로 동양척식주식회사이다. 이는 영국의 동인도회사를 모델로 모방한 식민지 수탈 기관이었다. 이 회사는 조선의 토지를 전매한 후 5할 이상의 소작료와 춘궁기 양곡을 빌려주고 2할 이상의 이자를 받는 등 조선인들을 가난의 구렁텅이로 내몰아간 전형적인 불합리한 제도였다. 계속된 불법적이고 가혹한 수탈로 조선인들은 집단으로 조국을 등지고 해외로 이주하는 비극으로 이어졌다. 더욱이 조선총독부의 산업 정책을 금융 측면에서 뒷받침하였던 핵심 기관 중 하나인 특수은행은 조선식산은행이었다. 조선인들을 착취하는 근본적인 원인을 제공한 두 기관을 뿌리 뽑기 위해 폭탄을 던져 결렬한 투쟁 끝에 자결한 인물이 바로 나석주였다. 조선인들의 고혈을 짜내는 배출구 두 곳을 파괴하기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불태운 젊은 사나이의 결심은 목숨을 던진 독립운동이었다. alt나석주 나석주의 인생 항로와 의열투쟁의열단 단원인 나석주는 1892년 황해도 재령에서 아버지 나병헌과 어머니 김해 김씨 사이에 외아들로 태어났다. 황해도 재령은 을사늑약 이전부터 근대교육에 의한 민족의식 앙양에 앞장섰던 지역이었다. 대한협회 해주지회는 강습소와 야학교 설립을 주요한 활동 영역으로 결의하고 시행에 노력하였다. 또한 학구(學區)의 기준을 정한 후 이를 군청과 관찰부에 보고하는 등 민족운동을 주도하였다. 군이나 면 단위로 조직된 민회·민의소·농무회 등도 주민 부담에 의한 사립학교 설립에 노력하였다. 민간의 지식 계발은 새로운 변화에 부응할 수 있는 지름길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노력은 의무교육 일환으로 사립학교 설립에 의한 민족교육을 시행하는 결정적인 계기였다. 대한제국기 최대 비밀결사체인 신민회의 서북지역 책임자인 백범 김구는 황해도 안악에서 양산학교를 운영하였다. 하기 방학을 이용한 사범강습소는 전국적인 주목을 받았다. 이곳에서 김구와의 운명적인 만남은 그의 인생 항로를 결정하는 ‘방향타’였다. 서당에서 한문을 배운 후 양산학교에서 굳건한 민족정신과 독립정신을 불태우는 등 독립운동가로서 성장할 수 있는 버팀목이었다. 이러한 교육을 받았던 나석주는 민족을 위한 살신성인의 자세로 독립운동의 뜻을 다져나갔다. 그는 1913년 21세가 되던 해에 중국 동북지역으로 건너가 항일운동을 하던 중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귀국하여 독립운동을 도모하다가 1919년 3·1운동 시위 주도로 체포되었다.3·1운동이 시작되면서 청년 나석주는 독립운동사에 큰 업적을 남긴 장엄한 활동을 기획하게 된다. 군자금 마련을 위하여 6인조 강도로 변장해 당시 황해도 봉산군 사리원의 부호 최병항의 집에 찾아갔다. 복면을 쓰고 정중히 절을 하며 “저희는 강도가 아니라 조국 독립을 위해 군자금을 마련하려 찾아온 젊은이들입니다”라고 하였다. 최 부자는 나석주인 것을 직감하고 군자금을 전해준 뒤 강도가 들었다고 일본 경찰에 신고하는 연기를 완벽하게 해내며 그 상황을 무사히 마무리하였다. 이렇게 나석주는 김덕영·최호준·최세욱·박정손·이시태 등과 6인조 강도로 활약하며 일제의 감시망을 피해 군자금을 상하이로 보내었다. 결국 6인조 연쇄강도사건은 영구 미제로 남게 된다. 이후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군자금을 모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보내는 등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그러나 일본 경찰의 감시가 심해지자 1920년 상하이로 망명한다. 나석주는 상하이에서 당시 임시정부 경무국장이며 자신의 스승인 김구를 다시 만난다. 김구의 경호를 맡아 활동하기 시작하며 스승의 지도를 받아 독립운동에 계속 참여한다. 또 이동휘가 세운 무관학교 등에서 전술전략을 연마한다. 그러던 중 유자명의 소개로 김원봉을 만나 의열단에 입단하였다. alt조선식산은행 본점 동양척식주식회사 폭파 주도1926년 나석주의 인생에 가장 결정적인 만남이 이루어졌다. 바로 유림대표로서 독립운동을 주도하던 김창숙과의 만남이었다. 그해 5월 김창숙과 김구는 텐진에서 국내외 정세를 토론하며 독립운동의 방향을 심각하게 모색하고 있었다. 즉 두 사람은 일제 침략자들과 친일 부호들을 제거하여 가난에 허덕이는 동포들을 구제하고 민족정신을 일깨워야 한다는 목표로 새로운 전략을 제시한다. 김구는 이화익과 나석주 두 청년을 천거하였으나 최종적으로 결국 나석주가 결정되었다. 김창숙은 의열투쟁에 나선 나석주에게 다음과 같은 당부를 하였다. “민족의 고혈을 빨고 있는 식산은행과 동양척식주식회사가 그대의 손에 폭파되는 날 일제의 간담이 서늘할 것이며, 잠자고 있는 조선의 민족혼이 불길처럼 다시 타오를 것이오. 대의를 위한 무운(武運)을 비는 바이오.”1926년 12월 26일 인천항에 35세의 중국 산동성 출신의 마중덕이란 남자가 상륙한다. 중국인으로 둔갑한 사나이는 나석주였다. 그가 민족혼을 일깨우려 단신으로 서울로 향하는 길은 오직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을 투척하기 위한 희망뿐이었다. 그는 중국인 전용 여관에 머무르며 동태를 살폈다. 먼저 식량과 자원을 수탈한 조선식산은행에 폭탄을 투척하였으나 폭탄이 터지지 않고 불발되었다. 일제는 폭탄을 던진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여 오히려 불행 중 다행이었다. 나석주는 다음 목표인 동양척식주식회사를 습격하였다. 동양척식주식회사를 폭파할 결심으로 많은 일본인을 향해 권총을 발사하고 폭탄을 투척하였으나 또다시 불발되고 말았다. 결국 일본 경찰의 추격을 받으며 황금정(현재 을지로 1가) 쪽에서 결렬한 총격전을 펼치던 중 자신이 지닌 총으로 자결을 선택하였다. 나석주는 일제 경찰이 다가오는 중에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뜻을 전하고 장렬하게 스스로 생을 마감하였다. “나는 조국의 자유를 위해 투쟁하였다. 2,000만 민중아, 분투하여 쉬지 말라!” 이는 군중을 향해 조국 독립의 염원을 전달한 처절하고도 담대한 의사의 외침이었다. 당시 상황에 대하여 『동아일보』(1927. 1. 13.)는 다음과 같은 기사를 내보냈다. “동척 사옥 내부와 동문 밖, 그리고 황금정 2정목 길거리 등 사건 현장에는 핏자국이 낭자한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참상을 연출하였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기마경관과 무장경관들이 삽시간에 황금정 일대를 에워쌌다. 실내와 길 위에 피를 흘리며 신음하고 있는 피해자들을 들것과 자동차에 실어 잇따라 병원으로 옮기는 광경은 전쟁터와 같은 아수라장이었다. 다바타 경부보는 총알이 심장을 관통해 병원으로 옮기는 도중 자동차 안에서 절명하였고, 머리에 총을 맞고 문밖 돌계단 위에 쓰러져 있던 수위 마쓰모토와 가슴에 총을 맞고 길 건너편 나카니시 자전거포 앞에 쓰러져 있던 시계점 점원 기무라는 총독부병원으로 옮겨 치료하였으나 끝내 절명해 사망자는 도합 3명이었다.”  alt나석주 의거지(동양척식주식회사 터)에 건립된 표지석과 동상 사망 직전에도 조국의 광복을 염원그 상황에서 경찰은 중국옷 입은 범인을 조선총독부병원 외과 수술실로 옮겼다. 범인이 자기 가슴에 쏜 3발의 총탄 중 2발은 관통하였고, 1발은 폐에 박혔다. 출혈이 심해 목숨이 붙어 있는 것이 기적이었지만, 일제는 마지막까지 집요하게 그 진상을 조사하려 혈안이 되었다. 그러나 범인의 정체를 타국에서 들어온 ‘테러리스트’라고 막연히 추측할 뿐이었다. 결국 목숨이 끊어지는 상황에서 일제 경찰의 추궁 끝에 입을 열었다고 한다. 당시 상황을 『삼천리』(1931년 7월 호)에서는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내가 나석주다, 공범은 없다”라는 말밖에는 도무지 입을 열지 않다가 그다지 고민하는 빛도 없이 오래지 않아 절명하였다.나석주 의사는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지고 자결하였던 김상옥처럼 1920년대 의열투쟁의 상징적 인물이었다. 1962년에는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고, 서울 명동 현재 외환은행 본점이며 옛날 동양척식주식회사였던 자리에 그의 늠름한 모습의 동상이 건립되었다. 나석주 의거는 수많은 애국지사가 조국의 독립을 위해 바친 피와 땀, 숭고한 애국정신 등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은 희생과 봉사로 계승되었다. alt나석주 의거 보도 기사 (『동아일보』 1927. 1. 13.)]]> Tue, 01 Dec 2020 15:18:40 +0000 48 <![CDATA[진정한 독립의 길 ]]> 글 이계형 국민대학교 교양대학 교수진정한 독립의 길 우리 민족이 일제의 식민지에서 벗어난 지도 70년이 훌쩍 넘었다. 식민지 기간이 35년인 점을 고려하더라도 두 배 넘게 흘렀다. 그런데 아직도 일제 잔재가 남아 있다. 그 가운데 일본어도 한몫한다. 이를 청산하려는 노력을 게을리한 것도 아닌 데 말이다. 광복 이후 일본어 퇴출하기광복 당시만 하더라도 몸에 밴 일본어는 쉽사리 청산되지 않았다. 거리 여기저기에서 ‘김상(さん)’, ‘이상(さん)’과 같은 호칭은 물론 ‘먼저 실례(失禮)한다’와 같은 일본식 표현이 곳곳에서 들려왔다. 학교에서 출석을 부를 때 “하이”라고 했다가 “네”라고 고쳐 대답하는 학생들이 적지 않았다. 이에 우리말을 다시 찾는 일이 시급한 문제였다. 일본식 간판, 일본식 이름, 일본식 말투를 하루속히 없앨 방도를 찾자는 호소도 있었다. 때에 맞춰 초등·중등 교과서 용어부터 한글로 바꾸기로 하여 ‘산술’을 ‘셈본’으로, ‘평균’을 ‘고른 수’로, ‘직경’과 ‘반경’을 ‘지름’과 ‘반지름’으로 고쳐 부르자 불만과 이견들이 표출되기도 하였다. 이런 가운데 『우리말 도로 찾기』 책자가 출판되기도 하였다. 내용은 ‘벤또(辨當)-도시락’, ‘혼다데(ほんだて)-책꽂이’, ‘가감[加減, かげん]-더하고 빼기’, ‘간스메[缶詰、かんづめ)]-통조림’, ‘후미끼리(ふみきり)-건널목’ 등이다. 이런 노력 덕분에 한국 사회 깊숙이 자리하고 있던 일본어는 점차 일상생활에서 사그라졌다. 그렇다고 완전히 해소된 것은 아니었다. 얼마 전 어느 국회의원이 “지금 겐세이 놓으신 거 아닙니까?”, “이렇게 동료 의원 질의에 야지 놓는 의원은 퇴출해 달라”, “국민 혈세로 막 이렇게 뿜빠이 해서 이래도 되는 겁니까?”라고 하여 공분을 사기도 하였다. 국회의원이 공식 석상에서 일본어를 사용한 것에 국민들이 불쾌감을 느낀 것이다. 이런 일제 찌꺼기 용어들은 1930~1940년대 일제강점기에 쓰였던 말이다. 그러나 현대 일본어에서도 사라진 말이고, 노년층이 아니면 좀처럼 사용되지 않는 데다 대부분 비속어나 은어로만 사용되고 있어 공석에서는 퇴출해야 할 용어이다.우리 일상에서 알게 모르게 일본어가 마치 우리말처럼 쓰이는 예도 적지 않다. 이빠이, 기스, 꼬봉, 가라오케, 오야붕, 와사비, 나가리, 다꽝, 와리바시, 요지, 쓰메키리, 빠께스. 다라이, 빠꾸, 오라이, 스끼다시, 앙꼬, 다마내기, 히야시, 오뎅 등 셀 수 없이 많다. 이외에도 일본식 한자를 사용하는 예도 허다하다. 가봉, 견적, 낙서, 내역, 노견, 선착장, 차압, 구좌, 매점, 납득, 흑판, 순번 등이 대표적이다. 일본어인 줄 모르고 쓰는 경우다.  일본어 찌꺼기 청산일본어 찌꺼기 청산의 어려움에 대한 고민은 고려시대 원 간섭기 공민왕의 고민과도 닮았다. 고려는 100여 년 가까이 원나라의 정치적 간섭을 받으면서 자연스럽게 몽골 풍습이 유행하게 되었다. 변발(變髮)과 호복(胡服)은 당시의 대표적인 몽골 풍습이었다. 공민왕은 개혁정책의 일환으로 이러한 몽골풍을 없애고자 하였다. 당시 신하가 “우리나라의 산줄기는 백두산에서 뻗어 지리산에서 마칩니다. 그 산세가 물을 뿌리로 하고 나무를 줄기로 한 땅에 뻗어 있습니다. 물은 흑색이고 나무는 청색이므로 흑색은 부모가 되고 청색은 몸체가 됩니다. 풍속이 땅의 이치에 잘 따르면 창성하고, 땅의 이치를 거스르면 재앙을 입습니다. 풍속이란 군신과 백성들이 사용하는 의복과 모자로 나타납니다. 지금부터 문무백관들은 검은 옷을 입고 푸른 갓을 쓰게 하고 승려들은 검은 두건과 큰 관을 쓰게 하며, 여자들은 검은 깁옷을 입게 하여 땅의 순리에 따르는 풍속으로 삼으십시오”라고 건의하자 공민왕이 그대로 따랐다. 이는 변발을 풀고 몽골 옷을 벗으라는 명령이었다. 그렇다고 몽골 찌꺼기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몽골의 언어와 풍속 일부는 지금까지 내려오는 것도 있다. 700년이 다 되어 가는데도 말이다. 가령 ‘장사치’, ‘벼슬아치’ 등 사람을 가리키는 ‘치’라는 언어, 임금의 음식상을 가리키는 ‘수라’는 몽골어에서 비롯되었다. 오늘날 애용되고 있는 ‘만두’, ‘설렁탕’, ‘소주’와 같은 단어도 그렇다. 조선시대 영조 대에는 몽골 풍습이었던 부녀자들의 가체(加?)가 유행하자 이를 금지하고 족두리로 대신하도록 명을 내리기도 하였다. 공민왕이 우리 생활 속 말과 옷차림을 단속하였던 것은 침탈당한 역사로부터 진정한 독립을 하기 위한 노력이었으며, 400여 년이 지나서도 영조는 그러한 정신을 계승하였다. 어쩌면 일제로부터의 진정한 의미의 독립은 공민왕과 영조의 노력처럼 우리의 삶 속에 깊이 뿌리박혀 있는 침탈자들의 문화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우리말 속에 쉬운 것부터 바꿔나갔으면 하는 마음에 국립국어연구원에서 제시한 ‘꼭 가려 써야 할 일본어 투 용어 50개’를 제시한다. 꼭 가려 써야 할 일본어 투 용어 alt]]> Tue, 01 Dec 2020 15:53:29 +0000 48 <![CDATA[식민지 교육과 민족차별에 맞서 싸운 학생 독립운동가 윤창하 ]]> 글 독립기념관 전시부식민지 교육과 민족차별에 맞서 싸운 학생 독립운동가 윤창하 alt 윤창하(尹敞夏) 1908. 4. 9. ~ 1984. 12. 29. 전라남도 해남 건국훈장 독립장(1963) 식민지 교육에 맞서 동맹휴학에 참가하다윤창하는 1908년 4월 전라남도 해남군에서 태어났다. 현산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1926년 광주고등보통학교(이하 광주고보)에 입학하였다. 그가 3학년에 재학 중이던 1928년, 항일선언서를 작성하여 배포한 광주고보 5학년생 이경채가 일경에 붙잡혀 퇴학당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이에 반발한 광주고보 학생들은 ‘조선인 본위의 교육 실현’, ‘민족 차별 교사 거부’ 등을 요구하며 동맹휴학에 돌입하였다. 이때 윤창하도 3학년 학생들과 동맹휴학에 참여해 식민지 반대 투쟁에 앞장섰다.  alt광주학생독립운동 사건 공판 보도 기사(『동아일보』 1930. 2. 20. 동아일보사 제공)①광주지방법원 1층 법정②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 400여 명을 수용한 무덕전③광주고등보통학교 전경④현재 170여 학생이 수용되어 있는 광주형무소 alt윤창하 애국지사증(1963) 민족 차별에 맞서 학생 독립운동을 이끌다일제에 차별받는 민족의 현실을 탐구하고 독립운동의 방안을 고민하던 윤창하는 학생들과 독서모임을 조직하였다. 1929년 6월 여러 학교의 독서모임이 통합되어 독서회 중앙부가 결성되자 회계사무를 담당하는 재정부 위원에 선임되었다. 또한 광주고보 독서회의 조사선전부 위원 겸 소그룹 대표를 맡아 사회과학 연구 모임을 이끌었다. 그러던 중 1929년 10월 30일 나주역에서 한·일 학생 충돌을 계기로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시작되었다. 이는 3·1운동 이후 전국으로 확산되어 대규모로 전개된 대중운동이었다. 당시 독서회의 간부로 활동하며 시위에 참여한 윤창하는 일경에 붙잡힌 후 2년 4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 후유증으로 고생하다가 1984년 77세를 일기로 타계하였다. 정부는 윤창하의 공훈을 기려 1963년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alt윤창하와 부인(1968)alt]]> Tue, 01 Dec 2020 15:51:54 +0000 48 <![CDATA[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편찬한 최초의 역사서 『한일관계사료집』 ]]> 글 유완식 독립기념관 자료부 학예연구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편찬한 최초의 역사서 『한일관계사료집』 alt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사료편찬회' 위원들(1919)『한일관계사료집』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민주공화정〉을 표방한 이래 편찬한 최초이자 유일한 역사서이다. 이 자료는 3·1운동에 대하여 조선총독부의 영문판 기관지인 「Annual Reports on Reforms and Progress in Chosen」의 왜곡 보도에 대응하여 3·1운동의 실상을 세계에 정확히 알리고 독립의 역사적 당위성을 주장하기 위해서 1919년 9월 국제연맹에 제출할 목적으로 편찬되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차원에서 독립운동사를 정리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은 1919년 5월 12일 제4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국무위원 조완구(趙琬九)에 의해 처음 제기되었다. 국무위원 조완구는 시정 방침 연설에서 "장래 방침에는 3월 1일부터 진행한 역사서를 편찬할 것"을 제기하였다. 그리고 제5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안창호가 국제연맹회의에 제출할 안건의 중요성을 재차 강조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한일관계사료집』을 편찬하기 위해 1919년 7월 정부령으로 국무원 내에 ?임시사료편찬회’를 설치하였다. '임시사료편찬회'는 임시정부의 주요 인사가 참여하여  총 33명으로 구성되었다. 총재에는 당시 임시정부 내무총장 안창호(安昌浩), 주임에 독립신문사 사장 이광수(李光洙), 간사에 김홍서(金弘敍)를 임명하였다. '임시사료편찬회'는 7월 초에 활동을 시작하여 사료의 수집·정리·집필·인쇄를 거쳐 9월 23일에 『한일관계사료집』 전 4권 100질을 간행한 후 국무원으로 이관하였다. 각 권은 다음과 같이 구성되었다. 제1권은 편찬 목적과 함께 5개의 장으로 고대부터 경술국치에 이르는 역사를 편년 순으로 정리하였다. 제2권은 7개의 장으로 한국이 일본에 병합되거나 지배를 받을 수 없다는 역사적 당위성을 규명하는 데 초점을 두었다. 제3권은 6개의 장과 3개의 편으로 구성되었으며, 강제병탄 이후 3·1운동 발발 직전까지 자행된 일제 탄압과 식민지 지배 실상을 구체적인 사례와 자료를 근거로 서술하였다. 제4권은 7개의 장과 별부(別附)로 구성되었으며 3·1운동의 원인·경과·결과를 망라한 3·1운동사를 정리하였다.당시 등사한 『한일관계사료집』 100질 중 현재 완질로 전하는 것은 독립기념관 소장본이 유일하며 2018년 5월 8일 등록문화재 제711호로 지정되었다. 『한일관계사료집』은 편찬 과정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이광수가 서언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오탈자 문제와 체제의 혼란스러움, 서술 내용의 오류 등 문제도 적지 않았다. 또한 국제연맹에 제출하기 위하여 편찬한 것임에도 영문본은 확인할 수 없다. 국제연맹이 1919년 9월에서 이듬해 1월로 설립이 미루어져 국한문본조차도 제대로 전달되었는지도 확인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료를 수집·정리하여 일제의 침략과 지배로 단절되었던 역사서를 편찬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또 3·1운동에 대한 최초의 실증적 정리가 이루어진 역사서로서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와 김병조의 『한국독립운동사략 상편』 편찬의 기초 사료가 되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가진다. alt한일관계사료집]]> Wed, 02 Dec 2020 10:49:56 +0000 48 <![CDATA[조국의 자유를 위하여 ]]> 조국의 자유를 위하여  1926년 12월 28일, 찬바람이 매서운 경성 거리. 의열단원 나석주는 조선식산은행 앞에 서있었다. 은행은 연말이라 일본인 고객들로 붐볐다. 그는 폭탄을 창구 앞으로 던진 후 그곳을 빠져나왔다. 웅성웅성 소란스러웠으나, 기대한 폭발음은 들리지 않았다. 서둘러 인근에 있는 동양척식주식회사로 이동하였다.현관에서 제지하는 일본인 수위를 사살한 후 2층으로 올라가 총을 난사하면서 남은 폭탄을 던졌다. 그러나 이 소련제 폭탄 역시, 불발이었다. 재빠르게 그곳을 빠져나온 나석주는  총격전을 벌이며 을지로 쪽으로 달렸다. 그러나 이내 일경의 포위망이 좁혀져왔고 이제 결단해야 할 순간임을 깨달았다.그는 가슴에 스페인제 권총을 겨누었다.  그리고 외쳤다.“나는 그대들의 자유와 행복을 위해 희생한다.  2,000만 민중이여, 분투하여 쉬지 말라!”세 발의 총성이 울렸고, 그는 순국하였다. 자유와 행복의 밀알을 남긴 채. ]]> Tue, 01 Dec 2020 15:16:43 +0000 48 <![CDATA[미주 한인 여성독립운동 단체의 결성 ]]> 글 홍선표 나라역사연구소 소장미주 한인 여성독립운동 단체의 결성 Ⅳ. 3·1운동 이후 재미 한인 사회의 변화 ⑦ 3·1운동 발발 직후 독립운동의 뜨거운 열기는 남녀노소 구분 없이 전 미주 한인사회로 확산되었다. 미주 한인 여성들도 조직적인 활동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독립운동 단체들을 결성해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북미 한인 여성들의 단체 결성미국 본토에서 결성된 최초의 여성 단체는 장인환·전명운 의거 직후인 1908년 3월 말경 샌프란시스코에서 결성된 상항 한국부인회다. 대동보국회의 김미리사, 장경 부인, 문경호 부인, 이민식 부인 등이 공립협회 소속의 여성들과 함께 결성하였다. 설립 목적은 도덕 실천, 국민 자격 확충, 자선사업에 두었다. 이를 위하여 한인 아동에 대한 한글교육과 한인사회의 단결을 도모하는 데 앞장섰다. 장인환·전명운 의거를 계기로 공립협회와 대동보국회가 통합된 힘으로 항일구국운동을 전개할 때 구국활동에 적극 동참하기 위하여 대동보국회와 공립협회 소속의 여성들이 만든 것이 한국부인회다. 따라서 한국부인회는 특정 단체의 주의(主義)를 대변한다거나 일방의 정치적 신념에 치우치지 않는 여성단체로 출발하였다. 한국부인회는 1911년 4월 샌프란시스코 내 고아들을 돕는 활동을 펼친 것 외 1919년까지 뚜렷한 활동을 보이지 않았다.  북미 한인사회에 여성 단체의 결성을 다시 촉구한 때는 1914년 7월이다. 『신한민보』에 게재한 주수근 여사의 유서 〈외양에 나온 대한 부인의 직분〉에 따르면 한인 여성들은 첫째, 남자를 도덕적으로 인도하고, 둘째, 자녀를 조국정신으로 교육하며, 셋째, 부인회의 조직이 있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여성단체의 필요성을 제기할 정도로 그동안 재미 한인 여성들의 활동은 미약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이 있었기 때문인지 확실하지 않으나 1914년 새크라멘토에서 대한부인회를 조직하기 시작하였다. 새크라멘토 대한부인회는 1917년 3월 맨티카에서 한국부인전도회가 발기될 때 적극 지원하였다. 한편 1917년 11월 로스앤젤레스의 한인 여성들은 대한부인친애회를 발기하고 그 해 12월 20일 조직을 완성하였다. 설립 취지는 “정의를 돈수하며 지덕을 계발한다” 하여 여성들의 수양에 목적을 두었다.  대한여자애국단의 결성1919년 3월 9일 3·1운동 소식이 미주 한인사회에 전파되자 전 미주 한인들의 독립 열망은 한층 고조되었다.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는 독립의연금 모금운동을 더욱 활성화하는 한편 선전외교활동에도 박차를 가하였다. 한인 여성들은 3·1운동 당시 만세시위에 참가한 소녀가 일본군의 군도에 팔이 잘렸다는 소문(The Washington Post 1919년 3월 15일자 기사)에 큰 충격을 받고 비분강개하며 독립의 성공을 위하여 헌신할 것을 다짐하였다. 때마침 중앙총회장 안창호가 3월 13일부터 23일까지 독립의연금 모금활동을 위하여 캘리포니아 각 지역을 순방할 때 독립을 이루기 위하여 한인 여성들에게 ‘부인애국단’의 이름으로 활동하면 좋겠다고 제안하였다. 3·1운동 직후 미국 캘리포니아와 멕시코 메리다에서 독립운동을 표방한 여성 단체들이 잇달아 결성되었다. 다뉴바의 한인 여성들은 3월 23일부터 30일까지 단체 설립을 논의한 후 신한부인회(회장 강원신)를 결성하였다. 멕시코 메리다의 한인 여성들은 6월 15일 첫 모임을 갖고 대한부인애국동맹단(단장 김신경)을 결성하였다. 6월 23일 대한부인애국동맹단은 임시의장 김마리안나의 명의로 「공고」 제1호를 공포하고, 독립의 대사업을 성공하는 그날까지 힘을 다해 돕기로 결의하였다. 한편 일찍이 대한부인친애회를 결성한 로스앤젤레스의 한인 여성들은 3·1운동 이후 나아갈 구체적인 독립운동의 방침을 제정하였다. 즉 1919년 4월 1일부터 일본 물화의 배척, 독립의연금 납부, 일주일에 두 번(화·금) 고기 없는 날 실시, 자기 손으로 의복 세척, 저축한 돈을 독립군에 응원하는 것으로 의결하였다. 각지에서 여성 단체들의 결성과 활동이 활발해지자 중앙총회는 1919년 4월과 7월 두 차례에 걸쳐 『신한민보』를 통해 한인 여성 단체들이 우선 단체 이름이라도 일치해 활동하면 좋겠다는 견해를 밝혔다. 그러면서 일전에 안창호가 제안한 ‘부인애국단’의 이름을 재차 제안하였다. 또 각지에 분산되어 활동하기보다 중앙기관을 만들어 활동할 것과 하와이의 여성 단체와의 교류도 제안하였다. 1919년 8월 2일 샌프란시스코, 새크라멘토, 다뉴바, 로스앤젤레스의 여성 대표들은 대동단결의 취지 하에 대한여자애국단을 결성하기로 하고 중앙총회의 인준을 요청하였다. 8월 5일 중앙총회의 공식 인준을 받은 대한여자애국단은 그 해 9월 말 각 지부를 통할하는 총부(초대 총단장 김혜원)를 조직하고 북미 한인사회를 대표하는 여성독립운동 단체로 입지를 다졌다. alt하와이 대한부인구제회(1932. 2. 22.) 하와이 한인 여성 단체와 대한부인구제회 결성하와이 한인사회에 여성 단체의 이름이 처음으로 지면에 드러난 때는 1909년 12월부터 1910년 3월까지 안중근 의사의 재판을 돕기 위하여 전 하와이 한인들이 의연금을 모금할 때다. 이때 신명부인회는 68.60달러, 교육부인회는 10달러를 의연하였다. 신명부인회는 오아후섬 호놀룰루에서 1900년대 후반 경 결성된 것으로 보이고, 가와이섬 골로아에 지방회를 결성할 정도로 활발하였다. 부인교육회도 신명부인회와 비슷한 시기에 오아후섬에서 결성되었으나 세부 지역은 미상이다.두 여성 단체가 결성된 이후 1913년 4월 19일 하와이 호놀룰루에 대한인부인회가 설립되었다. 기존의 여성 단체들을 통합해 만든 것으로 보이는 대한인부인회는 하와이 각 지역에 지부를 설립하였다. 국어교육 장려, 일제 용품 배척, 교회와 사회단체 후원, 재난동포의 구제활동 등을 전개하였다.  1919년 국내 3·1운동의 소식이 하와이 한인사회에 전파되자 3월 15일 대한인부인회 주최로 41명의 여성들이 모인 가운데 부인공동회를 개최하고 대한인부인적십자회(회장 송매리)를 설립하였다. 그리고 당일 구휼금으로 238.98달러를 모금하였는데, 이는 3·1운동으로 인해 핍박받고 있는 국내 한인들을 돕기 위한 것이었다. 1919년 3월 29일 대한공화국정부가 수립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하와이 여성들은 4월 1일 제2차 부인공동회를 개최하고 대동단결의 기치 하에 대한부인국민구제회를 조직하기로 의결하였다. 설립 목적은 독립운동으로 고통당하는 국내의 동족을 구원하고 새로 수립된 임시정부를 협조하는 데 두었다. 4월 4일 공식 임원(초대 회장 손마리아)을 발표하였고 참가한 회원 수는 260여 명에 달하였다. 대한부인국민구제회는 1919년 6월 대한부인구제회로 이름을 변경하고 3·1 독립선언서를 ‘대한독립선언서’란 이름으로 제작하여 장당 35센트에 판매하였다. 3·1독립운동의 의미를 되새기고 판매한 수익금을 독립의연금과 구휼금으로 사용하기 위해서였다. 같은 해 11월 국내 동포 구휼금 1,000달러를 모금하여 본국에 송금한 대한부인구제회는 이후 하와이 한인사회의 대표적인 여성독립운동 단체로 발전하였다. 하지만 1930년 7월 동지회가 호놀룰루에서 개최한 동지미포대회를 계기로 동지회와 하와이 교민단 간의 분쟁이 일어난 후 대한부인구제회는 교민단측(후에 대한인국민회측) 대한부인구제회와 동지회측 대한부인구제회로 양분되었다. ]]> Tue, 01 Dec 2020 16:27:02 +0000 48 <![CDATA[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버팀목 김붕준·노영재 부부 ]]> 글 김형목 사단법인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이사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버팀목 김붕준·노영재 부부 김붕준 선생은 수많은 독립운동에 가담하였지만 6·25전쟁 중 납북되어 상대적으로 많이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부인 노영재는 1921년 상하이로 망명한 뒤 25년간 중국 각지를 전전하며 임시정부 요인들의 의식주 문제를 해결하는 등 독립운동 뒷바라지에 힘썼다. 김붕준과 노영재 부부의 집안은 장남 김덕목, 큰딸 김효숙과 사위 송면수, 둘째 딸 김정숙과 사위 고시복 등 7명이 독립운동에 헌신한 가문이다. 100년 전 기억을 되살리다지난 2019년은 3·1독립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돌을 맞은 해이다. 이를 기념하는 다양한 행사·전시회와 학술회의 개최는 한류열풍과 더불어 한민족의 저력을 지구촌에 널리 알리는 계기였다. 필자에게 주목을 끈 특별전시회는 단연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개최한 〈대한 독립 그날이 오면〉이다.2부 전시실에는 임시정부 유지에 온몸을 던진 김붕준·노영재 부부의 단아한 유품이 있었다. 힘든 생활 속에서 사용한 트렁크 2점과 태극기였다. 다른 독립운동가들과 마찬가지로 고단한 인생 역정은 트렁크를 통해 단편적이나마 엿볼 수 있었다. 손때를 물씬 풍기는 트렁크 옆에는 임시정부 요인들이 중국에서 입었던 중국 복식과 양복을 재현하여 생동감을 더하였다. 임시의정원에서 사용한 태극기도 대단히 인상적이었다. 이들 부부는 바느질로 정성을 기울여 태극기를 만들었다. 부부가 한 땀 한 땀 독립의 그날을 꿈꾼 흔적이 여기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멀고도 머나먼 당시의 역사가 다가왔다. alt김붕준 어록비(독립기념관 경내) 시대적인 소명의식을 자각하다김붕준은 1888년 9월 27일 평안남도 용강군 오신면 구룡리 용동에서 태어났다. 부친 김의현(金義鉉)과 모친 김씨 사이에 3남 2녀 중 셋째였다. 본관은 의성, 자는 군석(君錫), 호는 당헌(棠軒), 이명은 김기원(金起元)이다. 1904년을 전후로 의성 김씨 집성촌인 용동에 기독교는 1904년 전래되었다. 예수 재림교회 제7안식교회가 한국에 최초 세워진 곳은 바로 이곳이었다. 가족들의 안식교 입교는 김붕준의 의식 세계를 크게 변화시켰다.14세까지 한학을 공부하며 친구들과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면서 사냥 등으로 소일하는 비교적 여유로운 생활을 보냈다. 전통교육은 훗날 여유만만한 대인관계로 자신을 지탱하는 에너지원이었다. 을사늑약 이후 일제 침략으로 사회적인 불안은 확산되었다. 시세 변화에 부응하려는 의지는 1908년 보성중학교 농림과 입학으로 이어졌다. 재학 중에는 대한제국기 최대 비밀결사체인 신민회와 청년학우회에 가입하여 민족운동 대열에 과감히 뛰어들었다. 1911년에는 승동교회에서 목사 한석진 등과 승동학교 운영에 참여하면서 무사히 학업을 끝마쳤다. 졸업 후 대동강 지류인 동창천 하류 대안 갈대밭 개간과 동시에 수로를 개설하는 등 농업 기반 조성에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이는 신민회와 청년학우회의 이상촌건설운동 일환이었다. 신민회는 국권수호운동으로 민족자본 육성과 아울러 모범적인 농촌 개발에 착수하였다. 강제병탄을 전후로 이상촌 건설운동은 해외 독립운동기지건설운동으로 전환되었다. 지사들과 신민회원들은 중국 동북지역으로 망명길에 올랐다. 이들은 서간도 유허현에 독립군 양성을 위한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였다. 반면 김붕준은 국내에 남아 자신의 전공을 살려 간척과 농지 개간사업에 매진하였다. 이처럼 시대적인 소명의식을 인식한 의협심이 강한 청년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대동단결로 한인사회 버팀목이 되다일제의 무단통치는 3·1운동으로 폭발되었다. 김붕준은 일제의 야만적인 만행을 폭로하는 데 앞장섰다. 신변의 위협을 느낀 그는 상하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가하였다. 이듬해 임시정부 군무부원과 임시의정원 의원과 비서장을 맡았다. 1921년 안창호와 함께 흥사단 원동위원부를 창설하는 등 국외 독립운동 세력과 정보 교류에 누구보다 적극적이었다. 1928년 상하이 대한인교민회 제5대 단장을 맡는 등 한인사회 대동단결에 힘썼다. 1930년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 경영을 맡아 『독립운동사』 편찬에도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특히 인성학교 교장에 취임하여 한인 자제들의 독립의식과 항일정신 고취에 노력하였다. 민족 정체성을 일깨우려는 훈화는 학생들에게 조국 광복에 대한 열망을 증폭시키는 자극제였다. 1935년 한국국민당 간부로 활약하면서 1938년 흥사단 원동위원장을 거쳐 이듬해 임시정부 제15대 임시의정원 의장을 지냈다. 김붕준은 자신보다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분위기를 조성하는 인물이었다. 1940년에는 한국독립단 위원, 1943년부터 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활동하다가 광복을 맞아 1945년 11월 요인들과 함께 환국하였다. alt 한국독립당 중앙집행 위원들 노영재의 후원이 독립운동에 매진하는 밑거름되다임시정부는 연통제와 교통국을 통하여 은밀히 선전원과 특파원을 국내로 파견하여 부족한 독립자금을 모금하였다. 김붕준 가족은 이들에게 은신처를 제공하다가 특파원이 일경에 체포됨으로 절박한 순간을 맞기도 하였다. 그때마다 지혜를 발휘하여 난관을 모면해 나갔다.당시 독립자금을 모금하여 임시정부로 보냈던 대한민국애국부인회장 김마리아는 고문으로 거의 죽음에 이르렀다. 임시정부는 김마리아를 상하이로 탈출시킬 계획을 세웠다. 이때 도인권과 김붕준 가족은 그녀 탈출에 함께하였다. 힘든 과정에도 전혀 망설이지 않았다. 일행은 인천을 출발하여 무사히 상하이 황푸강 부두에 상륙할 수 있었다.가족은 프랑스조계 보강리에 살고 있었다. 이곳은 대한교육회 본부 사무소로 흥사단원인 박석홍이 동신공사라는 간판을 내걸고 인삼과 해산물 등을 판매하고 있었다. 부인 노영재는 바느질 솜씨가 탁월하여 넥타이 등 다양한 제품을 만들어 황푸탄 선착장에서 판매하여 생활비에 보탰다. 이윤 중 일부는 임시정부 요인들 식사 대접에 사용할 만큼 가정살이를 도맡았다. 곤궁할 때에는 야채시장에 직접 가서 배추 시래기를 주어와 반찬을 만들어 먹었다. 비록 경제적으로 어려웠으나 부인의 살림살이는 독립운동에 매진할 수 있는 든든한 밑거름이었다.  alt김붕준 임시정부 유지에 혼신의 힘을 다하다국민적인 여망에 순항하던 임시정부는 국제정세 변화로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외교론에 치중된 활동은 파리강화회의에서 한계를 드러내고 말았다. 더욱이 독립운동 노선을 둘러싼 내분은 너무나 심각한 상황에 직면하였다. 이를 수습하려고 개최된 국민대표회의마저 뚜렷한 대안도 없이 결렬되고 말았다. 임시정부는 하나의 독립운동 단체에 지나지 않는 사실상 ‘식물정부’였다. 김붕준을 비롯하여 흥사단 원동임시위원부원들은 한국유일독립당 상하이촉성회와 같은 5개 촉성회를 조직하였다. 이어 한국독립당관내촉성회 연합회를 결성한 이후 다음 단계인 주비회 조직에 앞장섰다. 부단한 노력에도 1929년 유일독립당 상하이지부 해산을 시작으로 관내 유일독립당운동은 유야무야되었다. 그럼에도 한국독립당의 통일전선운동은 임시정부 유지를 위한 활동으로 이어졌다.한편 1930년 7월에는 임시의정원 내에 상임위원회 조직이 처음으로 출범하였다. 상임위원회는 임시정부 세입·세출의 결산서를 검토하는 회계 검사원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윤봉길 의거가 일어난 날에 안창호는 프랑스조계 경관에 곧바로 체포되었다. 일제 영사관경찰은 임시정부 청사, 교민단사, 임시정부 요인들 집을 급습·수색하였다. 아들 김덕목도 체포되어 말할 수 없는 고초를 겪는 등 아픔을 맛보았다. 1932년 11월에는 광저우에 한국독립당 광둥지부장으로 한인 청년들에게 유학을 알선하였다. 특히 황푸군관학교와 중산대학 입학 주선, 학비면제, 생활비 보조 등 편의를 제공하였다. 아들·딸은 물론 후일 큰 사위가 된 송면수 등은 중산대학에 입학하였다. 더불어 중국 남부지역 독립운동 거점 강화와 중국인들과 통일전선 구축을 자임하고 나섰다.임시정부가 1940년 충칭으로 이전하자, 김붕준은 최우선 과제로 독립운동계 통합임을 인식·실천하는 데 앞장섰다. 자신과 뜻을 같이하는 당원들을 이끌고 한국독립당통일동지회를 결성하고 조선민족혁명당 개편을 전제로 조선민족혁명당으로 합병하였다. 조선의용대 본부와 화중·강남지구 잔류 병력도 중국 군사위원회 요구와 임시의정원 결의로 한국광복군 지대로 개편하면서 통합되었다. 한편 1934년 중국 한광사에서 최초 전기인『윤봉길전』이 중국어로 출간되었다. 김붕준은 김기원이라는 이름으로 서문을 썼다. 서문에서 “윤봉길 의거는 한국이 나라를 되찾고 중국이 망국에서 구해지고 동양평화를 이루는 길”이었음을 공언하였다. 그는 한중 국제적인 연대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alt상하이 인성학교 학생과 교직원 온 가족이 독립운동에 나서다 부인 노영재는 25년간을 중국 각지를 전전하며 온갖 고초를 무릅쓰고 임시정부 요인들과 독립투사들 의식주 문제를 해결하는 등 뒷바라지에 힘썼다. 와중에도 한국혁명여성동맹의 결성과 민족혁명당에 가입해 활동하였다. 아들 김덕목은 일찍이 상하이로 건너가 흥사단에 가입하여 한중 우호 증진과 항일의식 고취에 노력하였다. 중산대학에 재학하다가 중앙군관학교에서 군사훈련을 받고 중국군에 배속되어 항일전에도 참전하였다. 중국군 상위로 일본군 정보 수집에 전념하는 한편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참모로서 활동하였다.장녀인 김효숙은 1919년 어머니와 함께 중국으로 망명하여 상하이 인성학교를 거쳐 난징 중산대학을 졸업하였다. 동생 김정숙 등과 학생전시복무단을 조직하여 선전공작에 앞장섰다.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에 가입하여 대일선무공작과 한국혁명여성동맹을 조직하는 한편 한인 아동교육에 남다른 노력을 기울였다. 한국혁명여성동맹 부회장과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에 피선되었다. 큰사위 송면수는 중산대학을 졸업한 후 한국청년전지공작대를 조직하여 항일전에 참전하였다. 자신이 직접 각본을 쓴 〈국경의 밤〉, 〈상병의 벗〉, 〈전야〉 등 항일연극을 공연하는 등 문화선전 활동을 주도하였다. 이는 한중 인민들에게 항일의식을 고취하는 일환이었다. 특히 이범석이 이끄는 한국광복군 제2지대의 정훈조장으로 미국정보처(OSS)에서 교육훈련을 받았다. 국내정진군 황해도 반장으로 임명되어 국내진공을 준비하던 중 광복을 맞았다. 김정숙은 김붕준 막내딸로 중산대학 재학 중 학생전시복무단을 조직하는 등 항일의식 고취에 앞장섰다. 한국독립당에 가입한 후 한국혁명여성동맹을 조직하여 상임위원 겸 선전부장으로 활동하였다. 한국광복군에 입대하여 대적심리공작을 담당하는 한편 이후 임시정부 교통부 비서, 의정원 비서, 법무부 비서 겸 총무과장 등을 맡았다.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작전처 심리작전연구실 보좌관으로 전단 작성, 전략 방송, 원고 작성 등을 수행하였다. 1945년 11월까지 임시정부 국무위원의 주화대표단 비서로 활동하다가 귀국하였다.김정숙 남편인 고시복은 일본으로 건너가 쥬쿄상업학교(中京商業學校)를 졸업한 후 1931년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였다. 한인애국단에 가입하여 비밀 단원으로 국내외를 연결하면서 군자금 모집, 일제밀정 암살, 기밀문서 수발 등을 수행하였다. 중앙육군군관학교 제10기를 졸업하고 중국군 9사단에서 복무하던 중일전쟁 당시 쉬저우(徐州)·난커우(南口) 등지의 전투에 참전하였다. 1940년 광복군 총사령부 전령 장교로 임명되어 중국 각지를 돌며 수십 명의 청년을 모집하는 등 광복군 병사 모집에 힘을 쏟았다. 이후 임시정부 군무부원과 내무부 총무과장으로 활동하였다. alt한국혁명여성동맹 창립 기념(기강, 1940. 6. 17.) 민족국가 건설에 매진하다김붕준은 귀국 이후 비상국민회의를 발기하는 등 자주적인 독립국가 건설에 앞장섰다. 1946년 12월 남조선과도정부 입법의원의 관선의원으로 김규식·여운형·원세훈·최동오·안재홍 등과 6인합작의원에 선출되어 헌법·선거법 기초위원장을 역임하였다. 좌우 합작위원회 대표로서 민족통일운동 추진에 나섰다.1948년에는 민족자주연맹 상임위원과 선전국장으로 남북협상에 관여하였다. 5·10선거에 서울특별시 성동구, 1950년 5·30선거에서도 성동 을구에서 입후보하였으나 낙선되었다. 와중에 6·25전쟁이 발발하여 7월 27일 인민군에 납북된 뒤 9월에 사망하였다. 좌우합작에 의한 통일된 독립국가 건설은 물거품처럼 사라지는 안타까운 순간이었다. ]]> Tue, 01 Dec 2020 16:26:05 +0000 48 <![CDATA[나폴레옹 3세와의 전쟁 병인양요 ]]> 글 김종성 역사작가나폴레옹 3세와의 전쟁 병인양요 19세기에 조선을 탐낸 나라는 일본·청나라·러시아뿐만이 아니었다. 이들의 각축을 한 발짝 떨어져 지켜본 영국·미국·프랑스도 한때는 군대를 보내 조선을 위협하였다. 그중 1866년에 프랑스가 일으킨 병인양요는 조선인들이 민관을 가리지 않고 강화·김포로 나가 총력 저항을 펼친 전쟁이었다. 프랑스의 식민지 확장 정책병인양요 이전인 1846년과 1847년에도 프랑스 함대가 무력시위를 벌인 적이 있다. 천주교 박해에 대한 항의 차원의 시위였지만, 이때는 1866년만큼 공격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1866년에는 상대를 굴복시킨다는 명확한 목표로 조선을 침공하였다. 1840년대와 1860년대에 프랑스의 태도가 달랐던 것은 나폴레옹의 조카인 나폴레옹 3세와 관련이 있다. 1789년 혁명으로 1792년에 공화정으로 바뀌었다가 1804년 나폴레옹 황제 즉위와 함께 제정으로 전환된 프랑스는 1815년 나폴레옹 몰락과 함께 왕정으로 완전히 복귀하였다. 하지만 1848년 2월, 혁명으로 왕정이 무너지면서 공화정이 재차 회복(제2공화정)되었다. 이때 대통령이 된 인물이 나폴레옹 3세다. 황제가 된 나폴레옹 3세가 적극 추진한 정책은 해외 식민지의 확장이었고, 그의 시선이 머문 곳 중 한 곳이 조선이었다. 1856년에는 인도차이나 사령부에 조선 식민지화에 필요한 정보 수집을 명령한 일도 있었다.  프랑스가 조선에 관심을 갖게 된 데는 정세 변화도 큰 몫을 하였다. 1840년 제1차 아편전쟁 이래 수세적 입장에 놓인 청나라에서 민중의 반외세 투쟁인 태평천국운동(1851~1864)이 발생하여 중국 동남부 일부가 점령되었다. 1856년에 발발한 제2차 아편전쟁에서도 서양열강이 청나라를 제한적으로 굴복시키는 데 그친 것이 영향을 끼쳤다. 두 사건의 영향으로 1860년대부터 서양열강은 중국을 직접 공략하기보다는 중국을 빙 둘러싼 티베트-미얀마-베트남-타이완(중국령)-오키나와-조선을 우선적으로 공략하였다. 빙 둘러싼 동맹국이나 변경이 청나라의 울타리 역할을 하고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1866년에 조선에서 병인양요와 더불어 미국에 의한 제너럴셔먼호 사건이 발생하고, 1871년에 미국에 의한 신미양요가 발생한 데는 이러한 정세 변화도 중요하게 작용하였다.  alt정족산성 전투(강화역사관) 병인양요 발발조선에 대한 프랑스의 관심이 고조되는 상태에서 병인년에 벌어진 천주교 박해가 전쟁에 불을 붙이는 촉매제가 되었다. 병인박해로 불리는 이 사건은 역대 최대의 천주교 탄압 사건으로 비화되면서 프랑스 선교사와 조선인 신도들의 대거 희생을 초래하였다. 이때 탈출해 7월 7일(양력) 산둥성 즈푸에 도착한 리델 신부에 의해 사건 전모가 알려짐에 따라, 베이징 동쪽 텐진에 주둔 중이던 로즈 제독이 9월 18일 전함 3척을 이끌고 즈푸를 출발하게 되었다. 병인양요는 이렇게 발발하였다. 그전인 7월 13일에 청나라 총리각국사무아문(외교부) 수석대신인 공친왕에게 보낸 “조선 국왕이 우리 프랑스인을 체포한 날은 그 치세의 종말을 고하는 날”이라며 “며칠 안에 우리 군대가 조선을 정복하기 위해 진군할 것”이라는 서한을 통해 사실상의 선전포고를 간접적으로 전달한 프랑스 군대는 인천 앞바다와 양화진을 거쳐 한강에 침투하였다. 항행 중에 이들은 한편으로는 측량을 하고 한편으로는 위협을 가하였다. 조선은 전통적 관행에 따라 이양선에 음식물을 제공하였지만, 프랑스군은 지금의 서울 강서구에 있었던 염창항에서 공격을 가해 조선 수군에 큰 타격을 입혔다. 이에 맞서 조선의 방어 태세가 공고해지는 속에서 프랑스군은 9월 27일 서강(한강의 양화진-마포 구간)에서 뱃머리를 돌렸다. 10월 1일, 프랑스군은 영종도와 육지 사이의 작약도를 출발해 즈푸항으로 귀환하였다.   alt양헌수 초상화(강화역사관) 돌아온 프랑스군불과 열흘 뒤인 10월 11일, 로즈 제독의 군대는 즈푸항을 재출발하였다. 제2차 침공에 동원된 병력은 제1차의 곱절을 넘었다. 군함은 7척으로 늘어났고, 병력도 1500명 수준이 되었다. 배가된 전력을 바탕으로 프랑스군은 10월 16일 강화도 점령에 성공하였다. 한양으로 통하는 수상 길목을 장악한 것이다. 그런 강화해협 동쪽의 통진부를 점령하면서 압박의 강도를 높여갔다.화력이 우세한 프랑스군이 한양을 향해 목을 조여 오는 위기 상황에서 가슴 뭉클한 일이 벌어졌다. 일반 백성들이 정부의 요청에 호응하여 전투에 자원한 것이다. 각도 백성들이 의병·승군·포수군·보부상부대의 일원으로 전장에 뛰어들었다. 이로 인해 11월 1일까지 한강 양화나루 지역에 의병 4천 명이 배치될 수 있었다. 포수군 270여 명도 김포에 배치되었다. 승군들도 양주목사의 지휘 하에 남한산성과 북한산성에 포진하였다. 보부상 부대를 비롯한 다수의 백성들도 한양 사수를 위해 나섰다. 이렇게 긴장이 팽팽해지는 가운데, 로즈 제독은 조선 정부에 요구 조건을 제시하였다. 선교사 학살에 대한 책임을 물어 삼정승을 처벌하고, 불평등한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자는 것이었다. 프랑스군은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조선을 개방시키는 데 일차적 관심을 보였다. 프랑스가 심리적 압박을 가하는 상황에서 김포 쪽 문수산성에서 조선군이 뜻밖의 승리를 거뒀다. 이로 인해 조선 진영의 사기가 오르면서 양헌수가 이끄는 관군 부대가 인상적인 승리를 거뒀다. 이것이 전쟁의 전체 판도를 바꿔놓게 되었다.  alt병인양요 유적지인 강화포수전첩기념비 호랑이굴에 잠입한 조선군강화도가 프랑스군에 점령된 상황에서 양헌수 부대는 대담한 작전에 뛰어들었다. 호랑이굴에 잠입하기로 한 것이다. 양헌수는 강화도 남부 요새인 정족산성을 장악하면 적군을 손바닥 안에 넣을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그는 프랑스군 몰래 강화도로 들어가 정족산성을 점거하는 작전을 구상하였다. 약 500명의 병력을 3진으로 나눈 그는 강화해협 도하작전을 벌여 정족산성까지 무사히 잠입하는 데 성공하였다. 첩보를 입수한 로즈 제독은 병력 150명을 파견해 산성 탈환을 시도하였다. 프랑스군은 남문과 동문을 공략하는 작전을 수립하였다. 그래서 그쪽으로 프랑스 병력이 집중되었다. 이 상황을 양헌수는 이미 계산에 넣고 있었다. 프랑스군이 접근하기 전에 남문과 동문 쪽에 병력을 매복시켰던 것이다. 이런 만반의 준비를 갖춘 상태에서 양헌수 부대는 프랑스군이 다가오기만을 기다렸다. 곳곳에 매복한 조선 포수들은 프랑스군의 접근을 숨죽이며 지켜봤다. 프랑스군이 사정거리에 들어올 때까지 방아쇠를 당기지 않았다. 그러던 중 동문 쪽에서 총성이 울리고 프랑스군 1명이 쓰러졌다. 이를 신호탄으로 해서 동문과 남문의 조선군이 일제 사격을 가하였다. 예상치 못한 매복 공격에 부상자가 속출하자 프랑스군은 결국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전력상 열세에 놓인 조선군이 지형적 특성을 활용해 상대를 막아낸 결과였다. 이 전투는 프랑스군의 사기를 꺾는 데 기여하였다. 11월 18일 프랑스군은 완전히 철수하였다. 나폴레옹 3세의 군대가 조선에서 퇴각한 것이다.  병인양요로 불리는 이 사건은 의병·포수·승병·보부상들이 관군과 협력하여 프랑스군의 한양 진격을 막고 그들을 강화도에서 쫓아낸 전쟁이었다. 우리 땅을 우리 스스로 지킨다는 조선인들의 의지가 우수한 화력을 앞세운 유럽 강대국을 물리친 사건이었다.  병인양요는 많은 상처를 남겼다. 프랑스군의 침략은 막아냈지만, 강화도는 대대적인 약탈의 상흔을 안게 되었다. 강화도에 보관 중이던 외규장각 도서들과 은궤 887.55kg 등을 프랑스군과 함께 떠나보내야 하였다. ]]> Tue, 01 Dec 2020 16:28:06 +0000 48 <![CDATA[겨울 속으로 향한다 삼척 ]]> 글·사진 임운석 여행작가겨울 속으로 향한다삼척 겨울은 자연의 속내를 들여다보기 좋은 계절이다. 어디 자연뿐일까. 탁 트인 바다를 달려 바다를 마주하면 일상에서 발견하지 못했던 나를 만날 수도 있다. 그 바람을 안고 강원도 삼척으로 향한다. 그곳은 바다와 나란히 달리는 해안도로와 수백 년 동안 시인 묵객들이 풍월을 읊었던 누각, 척박한 겨울을 이겨낸 선조들의 옛 가옥이 있다. alt새천년도로에 있는 쉼터 탁 트인 바다와 함께 달리다삼척항에서 증산해변까지 약 5km의 드라이브 구간을 ‘새천년도로’라 부른다. 이 구간을 달려본 사람들은 이곳을 동해안 최고의 드라이브 코스로 손꼽는다. 검푸른 바다와 갯바위에 부딪혀 부서지는 하얀 파도, 푸른 송림이 어우러져 가다 서기를 반복할 수밖에 없다. 도로는 바다와 맞닿을 정도로 구불구불 이어진다. 마치 바다가 살아있는 듯하다. 또 바람이 강한 날에는 도로 위로 솟구는 파도에 탄성과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다. 도로 중간에는 주차장과 휴게시설이 마련되어 있어 안전하게 바다를 감상할 수 있다. 새천년도로가 시작하는 증산해변은 동해시 추암해변과 이웃해 있다. 감동적인 해돋이는 물론이고 기기묘묘한 기암괴석이 수석 전시장을 방불케 한다. 운이 좋다면 장엄한 해돋이의 감동도 챙겨볼 수 있으니 가능한 일출 시각에 맞춰 찾아보길 권한다. 추암해변을 지나 증산해변을 거쳐 삼척해변에 이르면 겨울 바다의 고즈넉한 풍광을 즐길 수 있다. 호젓하게 바다를 거닐어 보는 것만으로도 일상의 상념들을 내려놓을 수 있을 것 같다. 다시 차를 몰아 작은후진해변을 지나 비치조각공원에 닿는다. 10여 점의 조각 작품이 전시 중이다. 새천년 해안유원지에는 시선을 압도할만한 큰 탑이 있다. 바로 소망의 탑이다. 한 해를 마무리하며 성취한 것과 아직 진행 중인 것, 그리고 아쉽게 포기해야 했던 일들을 정리해도 좋겠다.새천년도로는 야경 드라이브도 꽤 운치가 있다. 검푸른 빛 바다와 육지의 조명과 궤적을 남기며 달리는 차량 행렬이 볼만하다. 시선을 바다로 돌리면 수평선을 수놓는 오징어 배들의 불빛이 장관이다. 바다와 하늘의 경계를 알려주기라도 하듯 경이롭기까지 하다. alt새천년도로의 야경 절벽 위에 선 누각, 죽서루대관령의 동쪽을 관동이라 부른다. 그곳에서 경치 좋은 곳 여덟 곳을 골라 관동팔경이라 부른다. 고성의 청간정, 강릉의 경포대, 삼척의 죽서루 등이 대표적이다. 그 가운데 삼척의 죽서루는 관동팔경 중에서 유일하게 강을 끼고 있다. 죽서루 앞에 서면 건축 전문가가 아니라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특징이 있다. 누각을 받치는 기둥이다.들쑥날쑥 하나같이 똑같은 높이가 없다. 평평하지 않은 천연 암반 위에 누각을 세우면서 17개의 기둥 중 9개는 자연 암반을 기초로, 나머지는 돌로 만든 기초 위에 세워지었다. 기술이 부족한 탓이 아니다. 옛 선조들은 자연을 훼손하지 않기 위해 ‘그랭이질’이라 불리는 전통 건축양식으로 지은 것이다. 울퉁불퉁한 주춧돌 위에 기둥을 세우며 돌을 깎아내는 대신 나무 기둥의 밑동을 잘라냈다. 돌과 나무를 접착제나 못을 사용하지 않고 연결하였다. 그랭이질이 제대로 된 기둥 위에 널판을 얹으면 그 위로 걸어 다녀도 무너지지 않았다고 한다. 또 2층짜리 누각인데도 계단 없이 자연 암반을 이용하여 드나들도록 설계됐다. 기둥이 17개 홀수인 이유도 암벽 사이로 드나들기 편하게 한쪽은 기둥이 3개, 다른 쪽은 4개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자연주의 전통 건축의 진수라 하지 않을 수 없다.누각에 오르면 풍경이 장쾌하다. 기둥 사이는 벽이 없어 바람이 쉼 없이 오가며 잔잔한 곡을 연주하듯 소리를 읊어댄다. 마치 자연의 합주곡을 듣는 듯하다. 오십천과 어우러져 절벽에 우뚝 솟은 죽서루에는 어떤 이들이 머물렀을까. 고려와 조선 시대 최고의 시인과 묵객이 줄줄이 찾아와 시와 그림을 나누었다. 누각 안에 걸려있는 수많은 현판이 그들이 남기고 간 흔적이다. 그중 조선 가사문학의 대표작 〈관동별곡〉을 지은 정철(1536~1593)의 시를 빼놓을 수 없다. 그는 45세에 강원도 관찰사로 부임해 와서 내금강과 외금강, 관동팔경을 유람한 뒤 명작을 남겼다. 진주관 죽서루 오심천 내린 물이  태백산 그림자를 동해로 담아 가니  차라리 한강의 목멱에 대고 싶구나  왕정이 유한하고 풍경이 싫지 않으니  그윽한 회포도 많기도 하구나  나그네의 설움도 둘 데 없다 alt삼척해변의 포토존alt소망의 탑 강원도의 겨울나기, 너와집삼척에서는 얼마 남지 않은 너와집을 볼 수 있다. 너와집은 환경에 순응한 독특한 가옥 양식으로 전나무, 소나무 등을 나뭇결대로 쪼갠 뒤 기와처럼 지붕을 이어 지은 집이다. 너와를 올리다 보면 너와와 너와 사이에 틈이 생기기 마련인데, 이것이 오히려 환기와 연기 배출은 물론이고 보온 효과도 있다고 한다. 현재 너와집을 볼 수 있는 곳은 삼척시 도계읍 신리. 이곳에 너와집 3채가 국가민속문화재 제33호에 지정되어 있다. 도로와 인접한 곳에 너와집을 체험할 수 있도록 너와마을이 조성되어 있다. 너와집에서 특별한 하룻밤을 보내는 것도 좋은 추억이 될 것이다. 마을에서는 화전민이 신고 다녔던 설피 체험도 할 수 있다. 설피는 신 바닥에 덧대어 신는 것으로 이것을 신으면 눈에 빠지거나 미끄러질 염려가 없다. 너와집 내부에는 ‘코클’과 ‘화티’가 설치되어 있다. 코클은 일종의 벽난로 같은 것으로 난방은 물론 조명으로도 사용한다. 방 모서리 바닥에서 50cm 남짓한 높이에 설치한다. 화티는 아궁이에서 땐 불을 담아두는 곳으로 코클처럼 조명과 난방 역할을 한다. 화티에 담아두는 불꽃을 ‘두둥불’이라 한다. 화력이 좋고 오래 타는 관솔을 주로 사용한다. 관솔은 송진이 엉긴 소나무 가지나 옹이로 화력이 세고 오래 타서 불이 귀했던 화전민들에게 절대 꺼뜨리지 말아야 하는 불씨였다. 너와집은 놀랍게도 집 안에 외양간이 있다. 날씨가 춥고 들짐승이 자주 출몰하는 산간지역에서 가축을 보호하려는 의도다. 너와집은 얼핏 보면 매우 허술해 보인다. 하지만 겨울철 눈이 많이 올 때는 벌어진 너와의 틈을 눈이 덮음으로써 외부 공기를 차단해 훈훈하다고 한다. 군불을 피울 때 나는 연기 덕분에 눈이 서서히 녹아서 집이 무너질 염려가 없으며 연기에 훈연 된 너와는 벌레가 잘 꾀지 않아 잘 썩지 않는다. 그래서 너와는 7~8년에 한 번씩만 교체해 주어도 거뜬하다. 너와집은 미완성의 집처럼 보이지만 2% 부족한 것을 자연이 채워주는 현명한 집이다. alt죽서루alt당대 최고의 시인 묵객들이 찾아 글을 남긴 죽서루 alt눈이 내려앉은 너와alt겨울의 너와집 ]]> Tue, 01 Dec 2020 16:29:00 +0000 48 <![CDATA[항일무장투쟁, 그 출발점은? ]]> 일제를 몰아내고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항일무장투쟁·독립전쟁 그 출발점은?우리 민족은 3·1운동 이후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을 경험하고 조직적인 무장투쟁의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독립을 위한 확실한 길은 일제와 독립전쟁을 전개하여 승리하는 것이었다. 이후 만주·간도·연해주 등지에서 항일무장투쟁을 위한 수많은 독립전쟁 단체들이 조직되었으며, 체계적인 군사 훈련을 실시하면서 국내에 진입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독립전쟁을 전개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왔다.”홍범도 선생은 그동안 준비해온 독립전쟁을 감행하기로 결심하였다.1919년 8월, 노령의 ‘대한국민의회 군무부’ 소속 군대를 인솔해 그 해 9월 간도에 도착하였다. 여기에서 인원을 지원받아‘대한독립군’을 편성한 뒤 본격적인 항일무장투쟁에 나섰다.이후 1920년 초반, 최진동의 ‘군무도독부’와 연합해 대규모 국내진공작전을 펼쳤다. 대대적인 기습을 받은 일제는 대한독립군을 추격하였으나, 이마저도 참패를 당하게 된다. 일제는 다시 약 250명 병력의 ‘월강추격대’를 편성한 뒤 1920년 6월 만주 봉오동으로 진군해왔다. 그렇게 봉오동전투의 서막이 올랐다.]]> Thu, 07 Jan 2021 11:37:41 +0000 49 <![CDATA[20세기 전반기 한민족의 항일무장투쟁-독립전쟁 ]]> 글 장세윤(성균관대 동아시아역사연구소 수석연구원)20세기 전반기 한민족의항일무장투쟁-독립전쟁 2020년은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일명 청산리독립전쟁, 청산리대첩)로 대표되는 ‘독립전쟁’ 100주년이 되는 해였다. 그러나 본격적인 항일무장투쟁에 대한 연구는 이제 시작이라고 할 만큼 해결해야 할 과제가 산적해 있다. 1910년 전후부터 독립사상의 큰 조류는 일제와의 독립전쟁을 전개하여 일제를 몰아내고 민족의 해방과 나라의 독립을 회복해야 한다는 ‘독립전쟁론’이었다. 이에 ‘독립전쟁’ 101주년을 맞이하는 시점에 20세기 전반에 전개되었던 한민족의 항일무장투쟁, 독립전쟁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alt대한독립군 홍범도 유고문(1919. 11.) alt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발행한 대한민력 달력(1920)항일무장투쟁의 주요 흐름과 단체1910년대 일제의 한국 지배는 무력 수단을 동원한 폭압적 무단통치 방식이었다. 한민족의 구국운동인 의병전쟁(1895~1910)을 무력으로 진압하는 데 성공한 일제는 강점 직전인 1910년 8월 25일 「집회 취체(取締)에 관한 건」을 공포하여 한민족의 기본권을 완전히 부정하였다. 이 시기 일제의 식민지 지배정책을 대표하는 것은 토지조사사업이었는데, 이는 한국을 식민지 지배체제로 전환시키기 위한 총력적 침략정책이었다.한편 1910년 12월 이른바 ‘안악사건’과 1911년 1월 ‘데라우치 조선총독 암살 미수사건’ 등을 조작하며 독립운동을 탄압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폭압적 무단통치에도 국내외에서 한민족의 독립운동은 계속되었다. 독립운동의 체제 정비와 만주(중국 동북지방)와 러시아 극동 연해주 등에서 해외 독립군기지 개척운동이 전개되었고, 일제강점기 최대의 독립운동인 3·1운동으로 결실을 맺었다. 또 중국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세워졌다.  1920년대 일제의 식민지 통치는 한민족의 계층 분화를 촉진하고 민족 내부의 갈등을 증폭시켰다. 특히 1920년 6월과 10월에 중국 연변지역(북간도)에서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 등 ‘독립전쟁’이 전개되었다. 또 만주 지린에서 김원봉 등의 의열단이 창립되어 1930년대 중반까지 국내외에서 치열한 의열투쟁(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이후 1920년대 중후반 사회주의 사상이 확산되고, 계급적으로 각성한 노동자·농민들이 민족해방운동의 주체로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로써 다양한 이념과 방법론에 따라 독립운동의 대중적 전선 확대와 적극적 대일항쟁이 전개되었다. 한편 1920년대 중반부터는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 사이에 협동전선 구축을 위한 노력이 나타났는데, 민족유일당운동과 신간회운동이 그 사례이다. 1929년 11월에는 전국적 항일운동인 광주학생독립운동이 발발하였다. 1930년대 일제의 식민지 통치방식의 변화, 즉 군국주의적 지배의 강화와 중국 동북지방 침략은 한국인들의 독립운동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일제의 만주 침략으로 이 지역에서 한국인들이 중국인들과 함께 힘을 합쳐 일본의 침략에 항거하게 되었다. 민족주의 계열의 한국독립군과 조선혁명군, 중국공산당 계열의 동북항일연합군 내 한인들의 활동이 바로 대표적 사례이다.그러나 1932년 초 일제의 조종을 받는 ‘만주국’ 성립 이후 만주지방에서는 일제의 탄압이 강화되면서 이곳에서 활동하던 한국 독립운동가들이 중국 본토(관내 지방)로 이동하게 되었다. 또한 1932년 상하이에서의 윤봉길 의거는 침체된 중국 관내 지방 독립운동을 활성화하는 계기가 되었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고난의 유랑길에 올랐다. 국내에서는 신간회 해체 이후 독립운동의 중심이 학생운동과 노동자·농민운동으로 계승되었으며, 적색 노농조합운동이 격화되었다.1937년 중일전쟁을 도발한 일제는 1938년 ‘국가총동원법’을 제정하여 전시동원체제로 돌입하고, 전시 수탈을 강화하였다. 이 시기 황민화 정책은 1944년 징병제 실시 이후 절정에 달했다. 이러한 일제의 전쟁 동원과 극심한 탄압으로 한국인들은 매우 큰 고통을 겪어야 했으며, 고유의 전통과 정신문화를 유린당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도 한민족은 중국과 러시아 연해주, 미주지역 등에서 독립운동을 끈질기게 지속하여 결국 제2차 세계대전 종전 및 일본의 패망과 함께 독립을 되찾을 수 있었다. 이 무렵 활동했던 주요 독립운동 세력은 중국 본토의 대한민국임시정부와 한국광복군, 중국공산당과 함께 활동했던 화북조선독립동맹, 러시아 연해주의 동북항일연군 교도려(소련 적군 제88여단) 내 한인들, 국내의 조선건국동맹 등이 있었다. 이들 조직은 나름대로 일제의 패망을 예견하고 한민족의 독립과 무장투쟁, 근대적 민족국가 수립을 구상하고 있었다.  alt청산리독립전쟁 때 독립군이 사용한 태극기와 무기류 alt청산리독립전쟁 당시 정규군 복장에 러시아제 소총을 휴대한 독립군의 모습(김재홍 제공)독립전쟁의 의미와 시사점독립운동이란 식민지 상태로 전락한 식민지 피압박 약소민족이 자주국가의 수립과 자립경제의 실현을 위하여 제국주의 종주국의 지배와 침략 상태를 전복하기 위해 노력·투쟁하는 근대의 민족저항운동을 말한다. 독립운동은 피압박·피지배 약소민족이 현실에서 모순되고 있는 식민지 종주국의 지배와 침략, 수탈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전개하는 다양한 형태의 저항운동을 총칭하는 개념이다. 따라서 기본적으로 모순에 찬 현실을 변혁하기 위한 현실변혁운동으로서의 조직적 무력투쟁은 물론, 여러 가지 사회운동이나 농민·노동·문화운동 등 다양한 대중운동이나 조직운동의 형태로 전개되기도 한다. 특히 무장투쟁은 가장 어려우면서도 가장 효과적인 독립운동의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세계사적으로 볼 때 피압박 약소민족 스스로 독립운동을 통해서 독립한 나라는 18세기 말 이후에는 거의 없었다고 할 만큼 어려운 것이라고 할 수 있다.우리 민족은 세계 각지에서 치열하게 독립운동을 전개하여 직·간접적으로 독립을 쟁취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과 의미가 제대로 평가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시각은 하루빨리 시정되어야 할 것이다.이제 한국 사회에서 우리 선열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헌신하며 치열하게 앞장섰던 만주 독립전쟁이나 의열단의 무장투쟁 등에 관한 이야기는 과거의 기억으로 점차 잊혀가고 있는 것 같다. 어떤 면에서는 장엄하고 비장한, 어쩌면 슬프고도 아름다운 독립전쟁의 거대한 서사시, 한편의 멋진 대하드라마와 같은 ‘무궁무진한 이야기의 보고’가 희미해져가고 있는 것이다. 이 장대한 한편의 서사극에 등장한 영웅들이 있는가 하면, 아무런 이름도 명예도 가족도 남기지 못하고 이름 없이 스러져간 무명의 의사·열사·지사·용사들은 또 얼마나 많았는가? 우리는 잊힌 단체와 인물, 크고 작은 독립운동(사건), 특히 의인과 영웅, 열사, 지사들을 더 많이 찾아 알리고 기억하며 기념할 필요가 있다.오늘날 엄청난 국제화와 세계화의 흐름 속에서 자주와 독립, 그리고 주체적 관점과 실천의지의 소중한 가치를 재인식하는 경우가 많다. 도저히 불가능할 것으로 판단되는 매우 어려운 조건을 무릅쓰고 결사 항전의 각오로 ‘무에서 유를 창조한 백절불굴의 투쟁정신과 독립정신’은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여전히 소중한 가치와 삶의 자세로 귀중한 의미를 가질 수 있다고 믿는다.]]> Thu, 07 Jan 2021 11:50:00 +0000 49 <![CDATA[잊힌 독립운동가 고평 독립군 참모와 지휘관 그리고 납북 ]]> 글 장세윤(성균관대 동아시아역사연구소 수석연구원)잊힌 독립운동가 고평독립군 참모와 지휘관 그리고 납북 일제강점기에 자신은 물론 온 집안이 항일독립운동에 투신하여 분골쇄신하며 자유와 평등, 정의와 공공선을 실현하기 위해 희생했음에도 전혀 알려지지 않은 인물들이 많다. 이에 무명의 독립운동가를 소개하여 우리에게 주는 의미를 되새겨보고자 한다. alt재판관 고평 반민특위 판결문(1949. 4. 19.)고평의 생애와 독립운동고평(高平, 본명 고인석)은  1884년에 전라북도 부안군의 장흥 고씨 전통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장흥 고씨는 임진왜란 때 의병장 고경명과 그의 두 아들이 순절하면서 크게 명성을 떨쳤다. 고평은 8세 때 전라남도 담양군 창평면 고씨 지파의 종가로 입양되어 8년 동안 한학(漢學)을 수학하였다. 그 후 서울로 가서 보광학교와 관립 법관양성소를 졸업하고 춘천 지방법원의 검사로 한 달간 근무하고 사임한 뒤 고향 부안으로 돌아왔다.1911년 7월 신흥 민족종교로 세력을 확장하고 있던 대종교에 입교하여 주요 직책을 맡았는데, 1907년 장흥 고씨 일족인 고광순 의병장 등의 순절, 대종교 조직과의 연계가 만주지역(중국동북지역) 독립운동에 투신하는 주요 계기가 되었다. 고평은 1913년 4월 대종교 동도본사의 전강 직책을 맡아 대종교 신도들이 이주하던 중국 지린성 왕청현으로 이주하여 독립운동에 종사하게 되었다. 특히 그는 대종교 세력을 대표하여 러시아 연해주와 중국 연변(북간도)을 왕래하면서 연변 지역의 3·1운동이라 할 수 있는 ‘룽징(龍井) 3·13 반일시위운동’의 기획에 참가하여 연변지역 항일독립운동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가 노력한 결과 1919년 3월 13일 연변지역의 룽징(龍井)에서는 3만여 명의 한인들이 대거 참가한 ‘3·13 반일시위운동’이 전개되었다.또 1919년에는 연변지역에서 항일무장투쟁 조직인 ‘의군부’가 조직되었을 때 참모장 직책을 맡았는데, 이듬해 8월 하순 항일독립전쟁에 앞장섰다. 1920년 6월의 봉오동전투와 그해 10월의 청산리전투 시기에도 독립군 부대의 무기 구입과 운반, 각 부대의 연합과 후원에 크게 기여하였다. 1923년에 역시 연변지역에서 1923년 5월 조직된 고려혁명군 독립군 부대의 참모장을 맡아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이후 그는 1920년대 북만주 지방에서 조직된 독립운동 조직이자 한인 교민 자치조직인 신민부의 과장을 맡아 북만주 지역의 독립운동과 한인 교민 자치운동에 기여하였다.만주지역 독립운동이 어려워진 1930년대와 1940년대 전반기에는 중국 관내(關內) 지역으로 이동하여 중국 국민당정부 관련 조직의 참모장이나 군법처장 등 법관을 맡아 한·중 연대 항일투쟁에 기여하였다. 1945년 4월 귀국하여 대종교 간부로 활동하는 한편, 1949년 후반기에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재판관으로 활동하며 친일 민족반역자의 심판에 앞장섰다.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는 1950년 6·25전쟁 때 납북된 뒤 잊히고 말았다. 앞으로 관련 자료를 더 발굴·수집하여 그의 생애를 새롭게 조명할 필요가 있다. alt고평과 대종교 요인들(1946. 6. 16.)고평의 독립군 부대 통합 노력고평은 대한제국이 멸망한 3년 뒤인 1913년, 4월 30세 때 부모와 처자를 멀리하고 낯선 만주(북간도)·연해주로 건나갔다. 이후 목숨을 걸고 싸우는 항일무장투쟁에 헌신하여 거의 10여 년을 투쟁하였다. 해외 무장독립운동에 가담하여 험난한 장년기를 보냈다. 특히 중국 연변지역의 3·1운동이라 할 수 있는 룽징(龍井)의 3·13 반일시위운동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그리고 별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1920년 6월의 봉오동전투 당시 홍범도의 대한독립군과 군무도독부의 최진동 진영을 중개하여 대규모의 독립군 연합부대를 형성한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의 중개와 독립군 연합부대 형성 노력의 결과로 유명한 독립군의 ‘봉오동전투(봉오동대첩)’ 승첩을 가능하게 했던 것이다. 또 1920년 10월 하순 김좌진·홍범도·안무 등 독립군 연합부대가 청산리 일대에서 대규모 일본군을 격파하는 ‘청산리전투(일명 청산리대첩)’를 수행 중일 때 연변 동부지방인 훈춘(琿春) 일대에서 치열한 독립전쟁을 벌인 사실도 높이 평가할 만 하다.1945년 8월 광복 당시 그는 62세의 고령이었다. 그는 주로 대종교 활동과 반민특위 재판관으로 활동하며 사실상 제2의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그는 서울 중구에서 거주했는데, 1950년 여름 6·25전쟁 동안에 피난하지 못한 채 서울에 남아 있다가 북한군에게 납북되고 말았다. 그때 이미 67세였으니, 지금 생존해 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는 명가의 후손으로 편안히 살 수 있었지만, 험난한 삶을 살다가 납북되어 최후를 알 수 없는 상황이다. 이와 관련하여 같은 장흥 고씨 일족인 전북 부안군 청림리 출신의 고광설(高光契, 일명 고광계) 역시 고향인 전북 및 호남지방, 함경남도와 중국 동북지방을 왕래하며 대한광복단 교통원으로 활동한 사실이 최근에 밝혀졌다. 따라서 호남지방 장흥 고씨 일족의 의병항쟁과 그 이후의 공화주의 지향 독립운동을 연계하여 조사할 필요성도 있어 보인다. alt고평 특무대 편성 신문기사 (『동아일보』 1923. 4. 30.)특무대 사단 편성 대장 고평 이하의 새로운 활동 · 의열단장과 운동방침을 협의“종래 중국과 노령에 접한 지방인 니콜리스크와 보크라치나야 등지를 근거로 삼고 고평이란 사람이 중심이 되어 전성환, 허승완, 최태순, 기타의 동지로 더불어 조선독립군 특무대를 조직하여 4년 동안 각처에서 활동하는 중이더니 대장 고평은 금년 음력 이월 중에 동지와 같이 함경남북도 방면에서 비밀리에 들어와 여러 가지 상황을 조사하고 돌아간 후 그전에는 여러 대대로 편성하였던 특무대 독립군을 이번에 사단으로 편성을 고치고 규모를 늘리기로 결정하고 방금 계획을 진행 중인데, 금년도 경비 삼십육만 원 중 이십오만 원은 모처의 원조로 얻게 되었으나, 십일만 원이 오히려 부족하므로 이것을 구처하기 위하여 방금 고심 중이라 하며, 대장 고평은 사단 편성 후 독립운동의 방침을 협의하기 위하여 의열단장 김원봉과 만나보고자 모 방면으로 향하였는데, 오월 상순에 다시 돌아와서 즉시 한편으로는 부족한 군자금을 모집하고 한편으로는 사단 편성을 시작하리라더라(장춘).”고평이 중국 관내 무장투쟁 조직인 의열단과 연계하여 항일무장투쟁을 적극 강화하려는 시도를 보여주는 『동아일보』 1923년 4월 30일자 기사다. 기사를 보면 고평이 널리 군자금을 모집하여 사단급 독립군을 편성하기 위하여 멀리 중국 남방에 있는 김원봉을 만나러 가는 등 동분서주하였던 사실을 알 수 있다. 다만 실제 이 기사의 내용대로 실현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Thu, 07 Jan 2021 13:22:00 +0000 49 <![CDATA[노사학파 유학자들 호남 최초로 의병을 일으키다 기우만·박원영·김익중 ]]> 글 독립기념관 전시부노사학파 유학자들 호남 최초로 의병을 일으키다기우만·박원영·김익중 alt기우만의 초상화(1916) alt기우만이 작성한 상소문 「을미소」(1895)_한국고전번역원 제공노사학파 유학자들, 호남의병으로 활약하다1895년 명성황후가 일제에 의해 시해당하고 단발령이 내려지자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전라도에서는 노사학파를 이끌던 기우만이 1896년 호남 최초로 의병을 일으켰다. 1907년 광무황제 강제 퇴위와 대한제국 군대 강제 해산 등 일제의 침탈이 더욱 가속화되자 호남의병은 기삼연의 주도로 ‘호남창의회맹소(湖南倡義會盟所)’라는 의병연합부대를 결성하여 조직적이고 치열한 의병항쟁을 이어나갔다.노사학파를 이끈 기우만, 호남 최초의 의병을 일으키다기우만은 1846년 전라남도 장성에서 태어났다. 그는 할아버지 노사 기정진의 학문을 이어받아 노사학파를 이끌었다.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이 일어나자 기우만은 전라도 각 고을에 격문을 보내 의병을 모집하고, 1896년 음력 2월 7일 호남 최초로 장성의병을 일으켰다. 그러자 기삼연, 김익중, 박원영 등 노사학파 문인들과 담양의 고광순 등이 의병에 참여했고, 이 때 기우만은 의병대장으로 추대되었다. 기우만을 중심으로 한 호남의병은 음력 2월 30일 서울로 진격하고자 광주향교에 집결하여 ‘광산회맹(光山會盟)’을 추진하던 중 고종의 명으로 해산하였다. 기우만은 의병에서 물러난 후에도 상소운동을 전개하였고, 일제의 감시를 받아 여러 차례 체포되었다. 1909년 「호남의사열전(湖南義士列傳)」을 집필해 의병에 참가했던 호남 의사들의 행적을 후세에 남겼다. alt박원영이 순국한 광주향교 alt기우만이 남긴 「호남의사열전」 중 김익중 전기_국립문화재연구소 제공호남의병으로 순국한 박원영과 김익중박원영은 전라남도 광주에서 태어났다. 그는 기정진의 제자로 기우만의 장성의병에 참가하였다. 박원영은 광주향교의 재임*을 맡아 광주향교를 끝까지 지키다가 의병을 진압하러 온 진위대**에 의해 체포·처형되었다. 기우만은 박원영의 순국 이후 그를 추모하며 제문(祭文)을 지었다.김익중은 전라남도 장성 출신으로 기정진의 제자이다. 그는 1896년 장성의병으로 활동하며 포수들을 의병에 합류하도록 권하였다. 1907년 장성에서 결성된 의병연합부대인 ‘호남창의회맹소’에서 종사(從事)라는 직책을 맡아 의병항쟁에 앞장서다가, 11월 고창읍성에서 일본군경의 습격을 받아 순국하였다. alt호남의병에 대한 일제의 전투기록인 『전남폭도사』(1913) alt호남의병이 사용했다고 알려진 죽창, 화승총 등의 무기국모의 원수를 설욕하지 못하고가슴을 치며 탄식하는 자들은 군주의치욕에 죽지 못하였다.(중략)통문이 이른 즉시 마땅히 날짜를지정하여 각각 소관 주군에서는 의를향한 민병을 소집하라.1896년 음력 1월,기우만이 호남 최초로 봉기한 장성의병의 시작을 알린 격문alt]]> Thu, 07 Jan 2021 13:42:16 +0000 49 <![CDATA[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임청각 주인 이상룡과 김우락 부부 ]]> 글 김형목(사단법인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이사)노블레스 오블리주를실천한 임청각 주인이상룡과 김우락 부부 이상룡은 나라가 망하자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펼치기로 결심한다. 그의 부인 김우락도 남편의 뜻을 따라 망명 준비에 나섰다. 이상룡은 이듬해 정월 명절을 쇠고 만주로 걸음을 옮겼다. 망명 사실이 드러날 것을 우려한 그는 홀로 길을 나섰다. 예상한 대로 그가 떠난 뒤 가족들은 일본 경찰의 감시를 받았다. 그렇게 이상룡 일가가 모두 서간도에 모이기까지는 꼬박 3개월이 걸렸다. alt석주 이상룡임청각 일가를 새롭게 조명하자임청각은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건축물 중 하나로, 선비문화 하면 임청각을 떠올릴 만큼 친근하게 다가온다. 중종 14년(1519)에 지은 임청각 공간은 사당과 별당형인 군자정, 본채인 안채·중채·사랑채·행랑채 등이 주위의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조화로운 배치로 신비함과 아늑함을 풍긴다. 외형과 달리 일제는 집 앞으로 중앙선 철도를 만들었다. 이때 집의 부속 건물 등이 헐려 나가 현재는 60여 칸만 남아 있다. 온전히 보존되지 않아 아쉬움은 있으나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이곳 주인들은 만주벌과 중국 관내 지역에서 조국 광복을 위해 고단한 삶을 마다하지 않았다. 독립운동 성지인 임청각은 이상룡과 김우락 부부를 포함해 이상동, 이봉희, 이준형, 이형국, 이운형, 이광민, 이병화, 허은 등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하였다. 시대적인 소명에 온 가족이 몸을 던지는 눈물겨운 삶에도 서로에게 의지하고 배려하였다.임청각의 주인인 종손 이항증은 “남들은 대단한 독립운동가 집안이라고 하지만 정작 나는 고아원에서 자랐다. 광복 후 친일파를 제대로 청산했다면 독립운동가 후손들이 고아원을 전전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뒤늦게나마 임청각에 대한 대통령과 국민적 관심에 감사할 따름이다. 내가 살아있는 동안 일제에 의해 철저히 망가지고 훼손된 독립운동가의 본거지인 임청각이 다시 제 모습을 찾게 되었으면 한다”고 전하였다. alt보물 제182호로 지정된 민족의 성지 임청각이상룡, 망명길에 오르다이상룡은 1858년 11월 24일 경북 안동군 부내면 신세동(현 안동시 법흥동) 임청각에서 아버지 이승목(李承穆)과 어머니 안동 권씨 사이에서 3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고성, 자는 만초(萬初), 호는 석주(石洲), 다른 이름은 계원(啓元)이다. 한학을 수학하다가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선산이 있는 도곡마을로 들어갔다. 이곳에서 군사학을 연구하고 무기를 고안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11월 단발령 반포, 을사늑약에 반발하여 두 차례에 걸쳐 의병운동에 참여하였다.그는 두 번의 의병운동을 일으켰으나 성공하지 못하자 새로운 국권 회복을 모색하였다. 유인식·김동삼 등과 근대교육기관인 협동학교 운영은 시대 변화에 부응하려는 일환이었다. 대한협회의 안동지회 조직도 마찬가지였다. 나라가 망하자 국사 저술에 몰두하는 한편 만주를 무대로 국권 회복을 위한 독립군기지 건설 계획을 세웠다. 남아 있을 가족에게 뒷일을 부탁하고 집안에서 거느리던 노비를 해방시켰다. 이어 만주를 향해 출발하여 목적지인 서간도 삼원보 추가가에 도착하였다. 독립군기지 개척으로 독립전쟁을 이끌다이곳에서 먼저와 있던 신민회 회원 이동녕과 이회영 등과 독립군기지 개척에 앞장섰다. 자치기관인 경학사와 부민단을 설립하고 사장과 단장도 각각 맡았다. 경학사 지도부와 함께 한인 2세들 교육과 독립군 양성을 위한 신흥강습소를 설립하였다. 수천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백서농장 병영도 마련하였다. 한인 청년들은 이곳에서 인근 야산을 개발해 농사를 짓고 군사훈련에 참여하는 등 독립전쟁을 준비하였다.국내 3·1운동에 자극을 받아 한인사회 지도자들과 합의하여 서간도 독립군기지를 체계적으로 이끌어 갈 한족회를 조직하였다. 이어 대한민국임시정부 산하의 군사기관인 서로군정서를 조직하였다. 서로군정서는 북로군정서와 함께 임시정부 산하 양대 군사기관이 되었다.신흥무관학교를 통해 독립군 병사를 충당함과 함께 무기 확보에도 전력을 기울였다. 서로군정서가 독립군단 체계를 갖추자 본격적인 무장활동을 개시하여 일제 경찰서와 면사무소 등을 습격하였다. 일제 추격에 서로군정서를 비롯한 독립군단을 일본군이 쫓아오자 이들을 상대로 벌인 전투가 바로 청산리전투였다. alt임청각 사랑채임시정부 국무령으로 취임하다1925년 5월에는 임시정부 내무총장 이유필과 법무총장 오영선이 만주로 왔다. 이들은 북만주 신민부와 정의부의 대표들을 만나 임시정부 지원을 요청하였다. 그리고 정의부에서 천거하는 인물을 임시정부의 초대 국무령에 선임하자는 안을 제시하였고, 이에 임시정부가 있는 상하이로 갔다. 임시정부 인사들과 협의를 마치고 9월 24일 삼일당에서 임시정부 국무령에 취임하였다. 각계 인사들과 협의해 이탁 등 9명을 국무위원으로 임명하였다. 만주에서 무장투쟁 경험을 갖춘 인물들이 임시정부의 주축이 되었다. 그런데 이들 대부분은 취임을 거부하였다. 중앙의회가 정의부 인물을 의회의 의결을 거치지 않고 행정위원회 독단으로 임시정부의 국무위원으로 천거를 문제로 삼았다. 이런 일이 벌어지자 자신이 치밀하지 못하였음을 반성하고, 1926년 2월 만주로 돌아오고 말았다. ‘괴뢰 만주국’ 설립 이후 일제의 마수가 점차 강화·확대되었다. 젊은 동지들의 힘을 의지해 각지를 전전하던 중 1932년 5월 12일 만 74세의 나이로 지린성 쉬란현 소고전자에서 운명하였다. “국토를 회복하기 전까지는 내 유골을 고국에 싣고 가지 말고 우선 이곳에 묻어 두고서 기다려라”라는 유언에 따라 소고전자에 가묘를 썼다. 석주의 유해는 1990년 10월 중국에서 대전의 국립현충원으로 이장되었다가, 1996년 5월 서울 동작구의 국립현충원 임시정부 요인 묘역에 안장되었다.“석주 선생이 보여주셨던 지행합일의 의지와 포용적 태도, 변화를 거듭했던 탄력적인 모습은 우리에게 큰 울림을 줍니다. 더구나 선생은 그 길을 혼자 가신 것이 아니라 만주의 한인 동포들을 아우르며 가셨습니다. 선생의 위대성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라는 평가는 삶의 여정을 그대로 보여주는 자화상이다.김우락, 일가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다김우락은 경북 안동 임하면 천전리 즉 내앞마을의 의성김씨 집성촌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김진린과 어머니 박씨 사이에 4남 3녀 중 맏딸로 태어났다. 내앞마을은 33명의 독립유공자를 낳은 독립운동 성지임에 틀림없다. 중심인물인 김우락의 오빠 백하 김대락은 사재를 털어 국권회복운동에 참가하였다. 1911년 가족 전체를 이끌고 만주로 망명한 뒤 이상룡 일가와 함께 경학사 등을 조직한 독립운동가다. 김대락에게는 김효락, 김소락, 김정락 3명의 남동생과 김우락, 김순락, 김락 등 3명의 여동생이 있었다. 김우락은 명망 있는 부잣집 가문 출신의 남편인 이상룡과 혼인하여 99칸 저택인 임청각의 안주인이 되었다. 일제 침략이 없었더라면 훌륭한 저택의 마나님으로 남부러울 것이 없이 살았을 터였다. 운명은 국망을 전후로 완전히 달라졌다. 대한제국기 최대 비밀결사의 신민회원이었던 남편이 중국으로 망명을 떠날 때 비통한 심정을 다음과 같이 읊었다.“삭풍은 칼보다 날카로워 나의 살을 에는데 살은 깎이어도 오히려 참을 수 있고 창자는 끊어져도 차라리 슬프지 않다. 그러나 이미 내 저택을 빼앗고 또다시 나의 처자를 해치려 하니 내 머리는 자를 수 있지만 무릎 꿇어 종이 되게 할 수는 없다.”망명길을 떠난 남편의 뒤를 따라 가시밭길로 뛰어들어야 하는 운명이었다. 낯선 이국땅으로 망명을 감행한 남편과 함께 김우락은 독립운동의 최일선에 나섰다.내방가사로 독립운동가들 심정을 노래하다안동의 양반 가문 출신인 김우락은 영남규방가사로 험난한 망명생활 등을 표현하였다. 사선을 넘는 와중에도 ‘해도교거사’, ‘정화가’, ‘정화답가’, ‘조선별서’, ‘간운사’ 등 주옥같은 가사를 남겼다. 지사는 ‘간운사’에서 독립운동에 더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하는 아쉬움을 토로하였다. “이 몸이 남자라면 세계 각국 두루 놀아 천하 사업 다할 것을 무용(無用)한 여자라 애달프다’라고 읊었다. 시대적인 제약으로 직접 독립운동에 나서지 못하는 자신을 책망하는 구절이기도 하다. 반면 독립운동은 자신 스스로가 헤쳐 나가야 할 사회적인 책무임을 강하게 암시한다. 슬프다 우리 한국이 좋은 호강산을헌신같이 버리고서그 어디로 가잔 말고통곡이야 천운이여강산아 잘 있거라다시 와서 반기리라. 김우락 「해도교거사(海島僑居辭)」중일가는 99칸 대저택인 임청각 등 재산을 처분하고 만주로 건너가 신흥무관학교 등을 세워 조국 독립에 온몸을 내던졌다. 그런 만큼 김우락의 삶이 평탄했을 리가 없다. 아들 이준형은 만주와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펼치다 자결하였다. 손자 이병화는 만주에서 무장투쟁에 힘썼다. 독립운동가의 여동생이자 부인, 어머니이자 할머니로서 인생 여정은 항상 긴장된 나날이었다. 남성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은 이처럼 후방기지 역할을 한 공동체가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독립운동을 위해 독립운동 자금은 물론 먹고사는 문제와 같은 사소한 일상사를 도맡아 하는 사람도 필요했다. 모든 역할을 여성들이 해냈다.김우락은 결혼 후 남편·아들·손자·손부며느리 등 일가친척이 모두 독립운동에 투신하는 상황을 맞았다. 군자금을 마련하고 연락책이 되기를 자원한 다른 독립운동가처럼 의복을 만들고 회합 장소를 제공하는 믿음직한 지원자였다. 배고픔을 이겨내면서 남편의 독립운동을 지원한 여성들의 헌신은 조력자 차원을 넘어 동지이자 동반자로서 길이었다.김우락은 1932년 6월에 남편이 지린성에서 숨지자 남편을 만주 땅에 묻고 가족들과 고국으로 돌아왔다. 꿈에도 그리던 고국에서 이듬해 4월에 81세의 일기로 한 많은 삶의 대단원을 내렸다. alt경학사 취지서]]> Thu, 07 Jan 2021 13:50:05 +0000 49 <![CDATA[<공립신보>와 「뎐씨 애국가」 일제강점기 해외 동포들이 써 내려간 항일 민족 시가 ]]> 글 김동수(백제예술대학교 명예교수·시인)<공립신보>와 「뎐씨 애국가」일제강점기 해외 동포들이 써 내려간항일 민족 시가 일제강점기에 상하이, 만주, 블라디보스토크, 미주 등해외에서 발표된 망명 인사들의 항일 민족 시가들이 무관심 속에 방치되어 있다. 이 시가들은 1996년 필자가 미국 U. C. 버클리대학 동아시아 도서관(East Asian Library)에서 수집·정리한 자료들이다. 당시 국내에서 발간된 친일 문학들과 사뭇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어 새로운 인식의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해본다.  alt1.샌프란시스코에서 발간된 공립신보2.하와이에서 발간된 태평양주보3.소련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발간된 선봉4.친일파 스티븐스를 저격한 전명운해외 동포들의 항일 문학미국 캘리포니아주에 있는 U. C. 버클리대학에는 한국학에 관한 자료가 많이 소장되어 있다. 특히 그곳 동아시아 도서관에는 학계에 아직 소개되지 않은 희귀한 고전문학 자료가 아사미(Asami) 문고를 비롯한 한국학 자료실에 다량 수집되어 있다. 그중에는 일제강점기 당시 미주를 비롯한 해외 동포들의 문학작품들이 존재한다. 샌프란시스코와 하와이에서 발간된 <공립신보→신한민보>(1905-1986)와 <태평양주보>(1930~),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발간된 <대동공보>(1908-1910)와 <선봉> (1923-1937), 중국 상하이와 만주 북간도 등지에서 발간된 30여 종에 달하는 신문·잡지 등에 실린 아직 알려져 있지 않는 항일민족 시가들이 1,000여 편이나 있다.    물론 이 중 일부는 국내 문학과 비교해 작품의 완성도 측면에서 미흡한 데가 있기도 하다. 하지만 한 시대의 문학을 평가함에 있어선 작품의 예술적 가치 못지않게 그 시대를 관류하고 있는 시대정신 또한 중요하다고 본다. 이런 측면에서 지난날 한민족이 참혹한 일제의 압제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의연하게 일제와 맞서 싸웠다는 자랑스러운 참모습을 후세에 남길 수 있을 것이다.미국에서 탄생한 <공립신보→신한민보><공립신보(共立新報)>는 1905년 11월 20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재미교포 단체인 ‘공립협회’가 발간한 신문이다. 당시 우리 교포들은 하와이와 캘리포니아에서 주로 사탕수수와 파인애플, 감귤 농장의 노동자로 취업하면서 어려운 이민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때 미국으로 유학을 왔던 안창호가 한국 노동자들의 참혹한 삶의 현장을 목격하고 교포들의 권익 보호와 계몽의 필요성을 절감한 나머지 1905년 4월 샌프란시스코에서 공립협회를 창립하고, 11월 샌프란시스코 퍼시픽가에 회관을 설립하면서 교포신문을 발간하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인쇄 시설을 갖추지 못하여 매주 1회씩 발행하였으나, 이후 성금을 각출하여 1907년 4월 26일(제2권 1호)에 활자 인쇄로 신문을 발행하였다. <공립신보>의 간행 취지는 아래 논설에서 밝히고 있다. 이후 <공립신보>의 성격은 국내 ‘신민회’에서 발간한 항일 민족 기관지인 〈대한매일신보>의 해외 대변지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하였다. 그러던 1909년 2월 10일부터 공립협회가 다른 여러 교민 단체들과 ‘대한인국민회’로 통합되면서 <신한민보(新韓民報)>라는 이름으로 제호를 바꾸고 국민회의 기관지가 되었다.광무 11년(1907년) 4월 26일에 활자로 제2권 제1호를 출간하여 면목이 일층 새로워 보이는 점 군자의 마음을 신선케 하니 어찌 본보의 행복이 아니리오. 이에 다시 강개한 말로 제위 동포에게 고하노니, 이제 국세를 돌아보건대 모든 권리를 다 외인에게 빼앗긴 바 되어 국민의 생명과 재산이 어육의 박활을 당하니 신민된 자 누가 통탄치 아니하리오. 오늘부터 새 활판에 새로 출간하는 새 신문을 새로 보고 새 지식을 발달하며 새 사상을 활발하며 동종상보하는 마음을 일백 번 꺾여도 돌리지 말며 일만 번 죽어도 뉘우치지 말고 용맹 있게 전진하여 우리의 국권을 회복하고 자유의 복 누리기를 천만 축수하노라. <공립신보> 제2권 1호. 1907년 4월 26일자 논설 「뎐씨 애국가」와 스티븐스 저격 사건‘뎐씨 애국가’는 1908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발간된 교포신문 <공립신보>에 실린 시가이다. 이 작품은 1908년 3월 유학차 미국에 온 전명운이 샌프란시스코에서 조선총독부 외교고문이며 일제의 앞잡이 스티븐스를 저격한 후 어깨에 총상을 입고 병상에서 쓴 애국가이다.   전명운은 1884년(고종 21) 평안도 출신으로 블라디보스토크에 건너갔다가 1905년 하와이로 이주한 뒤 이듬해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였다. 그는 학비와 생활비를 모으기 위해 철도 공사장과 알래스카 어장에서 막노동을 하였다. 그러면서도 조국 독립에 관심이 많아 안창호가 조직한 ‘공립협회’에 가입하였다.그러던 1908년 3월 20일 일제의 앞잡이 스티븐스가 샌프란시스코 기자회견에서 “일본의 지배는 조선에 유리하며, 오히려 조선의 농민들과 백성들이 원하고 있다”라며 일본을 찬양하는 발언을 하였다. 이에 격분한 전명운이 1908년 3월 23일 스티븐스를 찾아가 방아쇠를 당겼으나 불발되자 격투를 벌였다. 그때 장인환이 나타나 권총 세 발을 발사해 복부를 관통시켰다. 전명운과 장인환의 의거는 조선인의 울분과 기개 그리고 그 부당성을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미주 지역에서 숨죽이고 있던 8,000여 한인들의 애국심과 국권 회복 운동에 불을 지피는 전환점이 되었다.어화 우리 동포들아 / 일심 애국 힘을 써셔四千년의 신성동방 / 신세계에 빗내보셰사농공샹 동력하면 / 대한뎨국 자연부강자유독립하고 보면 / 세계상에 뎨일일셰닛지말아 닛지말아 / 충군애국 닛지말아일심하셰 일심하세 / 나라위해 일심하셰건곤감리 태극기를 / 디구샹에 놉히날려만세만세 만만세로 / 대한독립 어셔하셰「뎐씨 애국가」 1908. 4. 1. ]]> Thu, 07 Jan 2021 14:04:38 +0000 49 <![CDATA[독립운동 현충 시설의 앱 개발 필요성 ]]> 글 이계형(국민대학교 교양대학 교수)독립운동 현충 시설의 앱 개발 필요성 공군 장교였던 정상규 중위가 2015년 ‘독립운동가’ 스마트폰 앱을 사비로 개발하여 일반인들에게 독립운동가의 업적과 이름을 알리면서 세인들의 주목을 받았다. 그는 작가로 왕성한 활동을 하면서 잊힌 독립운동가를 발굴하고 이를 책으로 엮어내기도 했다. 그런데 이 같은 독립운동가 관련 내용이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사이트 ‘독립유공자 공훈록’에 정리되어 있음에도 국민들이 편리하게 접근하지 못한 면이 있다. 이제 한 걸음 앞서 ‘독립운동 사적지 앱’을 개발해야 할 때다. 물어물어 가는 독립운동 사적지2019년 11월 경 『충남독립운동사』 3·1운동 부분(홍성·서산·태안)을 집필하면서 관련 유적지를 촬영하기 위해 홍성과 서산 몇 곳을 찾았다. 학교나 행정기관 등 특정 장소에 있는 사적지는 쉽게 찾을 수 있었지만, 홍성군 내에 있는 ‘장곡 3·1운동기념비’, 홍동면 3·1공원 내 ‘기미독립운동기념비’, 금마면 철마산 3·1공원 내 ‘기미독립운동기념비’ 등지를 찾는 데 무진 애를 먹었다. 매년 삼일절에 이곳에서 여러 행사가 치러지기 때문에 인터넷에는 관련 뉴스나 사진들이 올라와 있지만 위치에 대한 정보는 찾기 어려웠다. 장소를 충분히 조사하지 않았던 나의 부주의함도 있겠지만, 답사 전 참고했던 책에 나와 있는 사적지의 주소와 사적지명 모두 내비게이션을 통해 검색되지 않았다. 마을 주민들에게 사진을 보여주고 설명한 뒤에서야 어렵사리 사적지를 찾아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국가보훈처 현충 시설 정보 서비스(http://mfis.mpva.go.kr)에 이와 관련한 정보가 있었다. 그런데 이런 정보를 미리 알았던들 도움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세 곳 모두 국가보훈처로부터 공식 현충 시설로 지정된 곳들이지만, 국가보훈처에 기록된 주소지로는 세 곳 중 어느 한 곳도 검색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독립운동 현충 시설이란 독립운동이 일어났던 장소 혹은 독립유공자의 공훈을 기리고자 세운 기념비·추모비·비석·탑 등과 조형물·상징물을 비롯하여 기념관·전시관·생가·사당 등을 말한다. 이러한 현충 시설들 가운데 2020년 12월 현재 국가보훈처에 등록된 것은 모두 947개로 증가 추세이다. 많은 현충 시설을 설치한 것은 역사적인 장소와 인물을 기억하고 숭고한 독립정신을 후대에 전하여 뜻을 기리고자 하기 위함이다. 이처럼 국가보훈처가 독립운동 관련 사적지 및 현충 시설의 체계적 관리를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일반인들의 현충 시설 인지도나 관심도는 매우 낮은 실정이다. 그러한 시설물이 역사교육을 위해 필요하다는 인식이 높은데도 말이다. 이를 위해서는 현충 시설 정보 서비스가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어야 한다. alt충청남도 홍성군 3·1공원 내 기미독립운동기념비현충 시설에 대한 접근성 높이기실질적인 정보 서비스를 고민하며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독립운동 현충 시설에 좀 더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앱을 개발하는 것이다. 이를 실행하는 일이 그렇게 어려운 문제는 아닐 것이다. 이미 국가보훈처가 운영하는 현충 시설 정보 서비스를 조금 개선하면 될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우선 개선해야 할 몇 가지를 지적하고자 한다.첫째, 시설물의 실제 이름과 시설명이 다른 경우가 있는데 이를 하나로 통일해야 한다. 예를 들어 국내 독립운동 현충 시설 가운데 맨 위에 있는 ‘(고창군)독립운동 파리장서 기념비’를 살펴보자. 기본 정보의 시설명은 ‘(고창군)독립운동 파리장서 기념비’로 되어 있지만, 실제 기념비에는 ‘한국유림독립운동파리장서비’로 새겨 있다. 서울·대구·전북 정읍 등지에도 같은 성격의 ‘독립운동 파리장서 기념비’기념비가 있는데, 이곳들의 시설명은 비문 그대로 ‘한국유림독립운동파리장서비’이다. 고창의 경우 현충 시설의 형태나 종류(기념비)에 따라 시설명을 정했기에 불거진 문제이다.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이런 예는 적지 않다. 그렇다고 내비게이션에 모두 검색되는 것도 아니다. 이곳을 찾아가려면 어떤 키워드로 검색해야 할 것인가. ‘파리장서’를 입력하면 경남 거창군 거창읍의 침류정(조선시대 관아) 하나만 검색되는데 여기에 ‘파리장서비’가 있기 때문이다. 다른 지역의 ‘한국유림독립운동파리장서 비’의 위치는 검색되지 않는다. 둘째, 주소지를 정확하게 확인해야 한다. 도로명 주소를 우선하되 예전 기록에 번지로 나와 있는 경우가 많아 번지 주소도 함께 적어야 한다. 셋째, 제공하는 사진은 크고 화질이 높은 것으로 교체해야 한다. 현재 현충 시설 서비스에 등록된 사진 중에는 너무 작거나 화질이 떨어져 내용물을 알아볼 수가 없는 경우가 많다. 넷째, 시설물의 역사적인 의미뿐만 아니라 시설물 설치의 시기·주체·위치(장소)·조성 과정 등의 정보도 제공해야 한다. 다섯째, 내비게이션 업체와 협력 관계를 통해 누구나 쉽게 독립운동 사적지를 찾을 수 있도록 위치 서비스를 해야 한다. 여섯째, 현충 시설뿐만 아니라 독립운동 사적지도 이에 포함해야 한다. 사적지의 경우 기념석이나 표지석 하나 세워지지 않은 곳이 적지 않지만, 독립운동의 현장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기 때문이다. 스마트폰을 통해 세상의 모든 정보와 지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세상이다. 독립운동 현충 시설 앱은 현재의 우리를 과거의 역사 현장으로 안내하는 가장 빠르고 정확한 타임머신이 될 것이다. 이 앱을 통해 학생들뿐만 아니라 일반인들도 쉽게 사적지를 둘러보고 독립운동의 의미를 깨닫고, 독립운동 답사 투어가 활성화되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해본다.]]> Thu, 07 Jan 2021 14:17:50 +0000 49 <![CDATA[마땅히 세상에 알려야 할 진실 만화로 기록하다 ‘열여섯 살이었지’ ]]> 글 편집실마땅히 세상에 알려야 할 진실 만화로 기록하다‘열여섯 살이었지’한국만화박물관은 만화가 기록한 진실 <열여섯 살이었지>를 전시 중이다. 여성의 존엄성을 무참히 짓밟은 일제의 반인도적 성범죄를 국내외에 알리고, 문제 해결을 위한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해 기획된 이번 전시는 3월 28일까지 진행된다. 방문이 어려울 경우 한국어·영어·중국어·독일어로 제작된 온라인 전시를 관람할 수 있다. alt 생각하는 것 만으로도 분노가 차고 마주하는 순간 울분을 토해내는,그 참혹한 역사적 진실 앞에서 요동치는 가슴을 움켜잡고 차오르는 감정을 억누르며 처절한 슬픔을 삼켜내야 했다.여전히 부정 당하고 있는 역사적 사실. 그것은 여전히 살아 숨 쉬는 생생한 증언이며, 아무리 억눌러도 누그러지지 않는 아우성이다.  이번 전시의 기획 취지에 대해 설명해주세요.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삶을 주제로 다룬 만화·애니메이션 작품을 소개하는 <열여섯 살이었지>를 통해, 보다 많은 사람이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쉽게 다가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위안부’라는 이름으로 여성의 존엄성을 무참히 짓밟았던 일제의 반인도적 성범죄를 국내외에 알리고, 많은 사람의 이해와 공감대를 형성하고자 전시를 기획하게 되었습니다. 전시 첫 번째 섹션에서 이옥선 할머니의 피해 증언을 들을 수 있는데요. 할머님에 대해 말씀해주세요.당시 16세였던 이옥선(1927~) 할머니는 심부름을 다녀오던 길에 낯선 남자 2명에게 납치당하셨어요. 그 뒤 중국 연길 위안소로 끌려가 3년간 일본군 위안부 생활을 강제당하셨습니다. 광복 후에도 고향인 부산으로 돌아오지 못한 채 중국에서 힘든 삶을 사셨습니다. 그러던 중 1997년 위안부 할머니들의 ‘고향 찾기 프로그램’을 통해 55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오셨고, 지금은 나눔의 집에서 생활하고 계십니다. 이옥선 할머니에 대한 더 자세한 이야기는 김금숙 작가의 만화 <풀>에서 만나볼 수 있습니다. 과거에는 보수적인 사회적 시선으로 인해 할머님들이 아픈 경험을 밝히지 못했다고 들었습니다. 요즘은 할머님들이 어떻게 느끼고 계실까요.현재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중 열여섯 분만 생존해 계신 상황이고, 모두 고령이십니다. 그중 여섯 분은 사진을 공개하셨지만, 나머지 열 분은 공개를 어려워하셔서 만화 초상으로 대신하였습니다. 여전히 어렵고 힘든 일이라고 생각됩니다.이번 전시에 김금숙 작가, 김용회 작가, 김준기 감독이 참여하셨습니다. 만화를 제작하는 과정에서 겪은 어려움이 있나요?작가들 모두 취재 과정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심지어 외부 지원으로 제작한 어느 작품의 경우 지원 기관에서 왜곡된 사실로 작품을 만들어달라고 요청해서 곤혹스러웠던 적도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주요 외교 문제 중 하나인 만큼 신경 써야 할 것들이 많았습니다.코로나19로 인해 증강현실이라는 플랫폼을 활용했는데요. 온라인 전시에 대한 참여도는 어떠한가요?현재 약 2만 명의 접속자 수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중에는 단순 클릭도 있지만, 그렇게라도 전시를 접함으로써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우리 모두의 문제라는 인식을 가졌으면 합니다. 온라인 전시의 경우 오프라인 전시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라 다른 점은 없지만, 첫 번째 섹션에 있는 대형 만화월 공간은 직접 봤을 때 더 큰 공감을 얻을 수 있습니다. 전시를 관람하며 눈물을 보이는 분들이 많은 것도 감동이 배가되는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SNS와 유튜브 등을 통해 홍보하고 있는 만큼 해외에 계신 분들도 많은 관심 주시면 좋겠습니다.이번 전시를 어떤 마음가짐으로대하면 좋을까요?우리 ‘딸들’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대하면 좋겠습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여성의 인권을 무참히 침해한 비인간적인 사례입니다. 다시는 이러한 끔찍한 범죄가 일어나지 않도록 여성 인권과 평화에 대한 가치를 되새겨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alt살아있는 증언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옥선(1927~) 할머니의 삶을 만화로 재현한 김금숙 작가의 <풀> 34쪽을 대형월로 제작한 공간이다. 먹과 붓으로 입체감 있게 구현된 작품은 관람객으로 하여금 마치 할머니의 삶 속으로 직접 걸어 들어가는 듯한 체험을 유도한다. alt만화가 그린 진실일제강점기 위안부 강제 동원 과정과 끌려간 순분 언니의 피해 사실을 묘사한 이무기 작가의 <곱게 자란 자식>, 피해자로 등장하는 홍춘이 할머니의 아픔과 용기를 그린 김용회 작가의 <다시 피는 꽃>,  김금숙 작가의 <풀> 원화와 콘티가 전시되어 있으며 이옥선 할머니의 인터뷰 음성을 들을 수 있다. 이를 통해 처참하게 유린당한 일제강점기 당시의 피해자와 80년이 지나 여성인권운동가로 다시 피어난 피해자의 삶을 엿볼 수 있다.alt부정할 수 없는 역사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설명 및 주요 사건을 사진 및 영상 자료들과 함께 전시해 위안부 피해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제대로 인식하고 공감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문제 해결을 위한 수요 시위 등 활동 내용도 소개한다. alt우리의 기록이곳은 영상기록, 창작기록, 공감기록, 미래세대의 기록으로 구분되어 있다. 영상기록에서는 김준기 작가의 애니메이션 <소녀이야기>, <소녀에게>, <김학순 할머니 증언 영상>, <피해 할머니 증언 영상>이 재생되어 당시의 참혹했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창작기록에서는 일본군 위안부 만화 10종을 열람할 수 있고, 공감기록은 관람객들이 직접 메시지를 작성하는 공간이다. 미래세대의 기록에는 학생들이 그린 만화 작품 4점이 전시되어 있어 또 다른 공감을 선사한다.alt사라지지 않는 진실전시 마지막 공간에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 사진과 만화 초상이 전시되어 있다. 우리는 이를 통해 진실은 결코 끝나지도 또 사라지지도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Thu, 07 Jan 2021 14:28:37 +0000 49 <![CDATA[인류 역사 속에 등장한 변종 바이러스 ]]> 글 김서형(러시아 빅히스토리 유라시아센터 연구교수)인류 역사 속에 등장한 변종 바이러스 지금 전 세계는 치명적인 유행성 전염병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바로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이하 코로나19) 때문으로, 이는 2019년 12월에 중국 후베이성(湖北省) 우한(武漢)에서 발생해 현재까지220개 국가로 확산되었다. 사실 코로나바이러스는 기존에도 호흡기 감염증 원인의 30%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미 우리 가까이에 존재하고 있었던 코로나바이러스가 왜 이토록 급속히 확산되면서치명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일지 살펴보자. alt1918년 인플루엔자가 유행했을 때 마스크를 착용한 시민들의 모습세기에 걸친 변종 바이러스의 역사2020년 12월 중순까지 코로나19 확진자는 7천만 명 이상, 사망자는 160만 명 이상으로 집계되었다. 코로나19가 이처럼 전 세계적으로 유행하고 있는 까닭에 대해 많은 전문가들은 새로운 유형의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변종 바이러스의 경우 일상적으로 발생하는 호흡기 감염증과는 달리 치명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변종 바이러스가 인류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쳤던 것은 비단 코로나19뿐만은 아니다. 지난 2002년 11월에 중국 광둥성(廣東省) 허위엔(河源)에서 처음 발견된 이후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어 유행했던 전염병, 사스(SARS)가 있었다. 사스는 38도 이상의 고열과 함께 폐렴이나 호흡 곤란을 유발하였다. 세계보건기구(WHO)에 따르면 당시 8,096명의 사람들이 사스에 감염되었고, 이 가운데 744명이 사망하였다. 치사율이 약 9~10%인 셈이었는데, 사스의 원인은 코로나바이러스의 변종인 사스-코로나바이러스(SARS-CoV) 때문이었다. 이후 2012년 9월에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발생했던 중동호흡기증후군, 이른바 메르스(MERS)의 원인도 변종 코로나바이러스였다. 메르스는 비말을 통해 감염되었으며, 주로 급성 호흡기 질환을 동반하였다. 특히 합병증으로 폐렴이나 급성신부전이 발생하는 경우가 많았다. 역설적이게도 당시 우리나라의 감염자 및 사망자 수가 세계 2위였으며, 치사율은 20% 이상이었다. 그러나 20세기의 가장 치명적인 유행성 전염병은 바로 1918년에 나타난 인플루엔자였다. 전 세계적으로 약 5억 명이 감염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는 당시 세계 인구의 약 1/3에 해당하는 수치였다. 이로 인해 미국에서만 65만 명, 전 세계적으로 6천만 명 이상이 사망하였다. 당시 인플루엔자가 만연했을 때 미국은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 중이었는데, 인플루엔자가 처음 발생한 곳이나 급속하게 확산된 곳 대부분이 군대였다고 전해진다. 특히 영유아기나 노인층의 사망률이 높은 인플루엔자와 달리 30~40대의 사망률이 높았던 것이 특징이다. 이토록 치명적이었던 1918년 인플루엔자는 바로 인플루엔자 A형의 아형 H1N1이 변이를 일으켜서 발생한 것으로 전해진다. alt흑사병이 유행했을 때 유럽 의사 복장을 표현한 1656년의 판화파울 퓌르스트 <17세기 로마의 부리 의사> 오래전부터 시작된 마스크 착용1918년 가을 무렵 인플루엔자가 다시 유행하기 시작하자, 미국의 주정부와 시정부는 예방이 가장 중요하다고 판단하였다. 인플루엔자를 예방하기 위한 첫 번째 조치는 바로 마스크 착용이었다. 미국 공중보건국이나 적십자에서는 거즈로 만든 마스크를 의료진과 시민들에게 무료로 나누어 주고 착용을 권고하였다. 치명적인 유행성 전염병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일부 지역에서는 의무적으로 마스크를 착용하게 하였다.그러던 중 1918년 10월 23일, 샌프란시스코 시보건국은 일명 ‘마스크 조례(Mask Ordinance)’를 제정하였다. 이는 샌프란시스코 시민들이 공공장소에 있을 때 식사 시간을 제외하고는 늘 마스크를 착용하도록 한 것이다. 당시 많은 의사들이 마스크만 제대로 착용한다면 인플루엔자를 통제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사실 유행성 전염병이 발생했을 때 마스크를 착용한 역사는 20세기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시작은 인류 역사상 가장 치명적인 유행성 전염병 중 하나로 알려진 흑사병 때부터다. 14세기 중반 유럽에 등장했던 흑사병은 원래 중국 운남성(云南省)에서 빈번하게 발생하던 풍토병이었다. 당시 몽골제국은 운남성을 정복하기 위해 군대를 보냈고, 군대가 되돌아오면서 전염병이 자연스럽게 제국 내부로 옮겨지게 되었다. 이후 활발한 정복전쟁으로 인해 유럽으로까지 확산된 것이다. 당시 유럽에서는 흑사병의 원인을 알지 못했고, 치료 방법도 많지 않았다. 에메랄드 가루를 물에 타서 마시거나 흑사병으로 부어오른 부위에 생닭을 문지르는 등의 비과학적인 치료법이 만연하였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당시 의사들은 긴 가운을 입고 모자와 장갑을 착용하였다. 그리고 새부리 모양의 마스크를 쓰고, 그 속에 향신료나 식초를 묻힌 헝겊을 넣었다. 치명적인 전염병으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알고 보니 인류는 지금으로부터 한 세기 전에 코로나19와 같은 경험을 겪은 것이다. 흑사병이나 인플루엔자를 극복하는 과정을 통해 우리는 마스크 착용이 상당한 도움이 되었던 역사적 경험을 분명하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 변종 바이러스는 현재까지도 인류에게 치명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변종 바이러스를 통제하는 그날까지 마스크 착용과 같은 기본을 지켜가며 슬기롭게 이 상황을 헤쳐 나가야 할 것이다. ]]> Thu, 07 Jan 2021 14:37:53 +0000 49 <![CDATA[독자퀴즈 ]]> alt]]> Thu, 07 Jan 2021 17:29:00 +0000 49 <![CDATA[오래된 이야기와 그 시절 추억을 좇다 대구광역시 ]]> 글·사진 김초록 여행칼럼니스트오래된 이야기와 그 시절 추억을 좇다대구광역시어느 도시든 그곳만의 특색이 있게 마련이다. 우리나라에서 3번째로 큰 도시, 대구의 진면목은 저 아스라한 역사에 있다. 골목마다 숨은 유서 깊은 이야기와 전통은 우리가 미처 알지도, 보지도 못했던 것들로 호기심을 자극한다. alt 눈으로 보고 코로 맡는 한의약 역사‘한의약의 역사’로 자리매김한 대구약령시, 약령시장(藥令市場)은 350년(효종 9년 개설) 전통을 자랑한다. 이른바 ‘약전골목’으로 불리는 이곳은 경매를 통해 한약재 값이 매겨지는 전국 유일의 한약재 도매시장으로, 현재 한약방·한의원·약업사(한약도매상)·인삼전문점·탕제원 따위의 한방 관련 업소 350여 개가 빼곡히 늘어서 있다. 골목길에 들어서면 탕제원에서 풍기는 한약 달이는 냄새가 은은하게 풍겨온다. 매년 5월에 열리는 약령시한방문화축제는 약령시의 자랑거리다. 1978년 제1회 달구벌 축제 행사의 일환으로 개최되었던 개장행사를 현대적으로 승화시킨 전통 한의약 축제다. ‘즐거운 힐링 한방랜드 약령시로 놀러 오이소!’라는 슬로건으로 열리는 축제는 볼거리, 체험거리가 다양하게 준비돼 있다. 매월 1,6일에 열리는 한약재도매시장엔 당귀·구절초·산수유·천궁 등 전국 각지에서 온 국산 한약재 1백여 종이 경매에 나온다. 대부분 자연산 약초들로 중간 상인들이 시골장터나 산지에서 모아 갖고 온다. 가격은 시중보다 20~30% 저렴한 편이다.이밖에도 약령시장 한편에 있는 대구약령시한의약박물관에서는 1910년대 약전골목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희귀약재뿐 아니라, 옛 한방 의료기구 및 한방 관련 고서적 등 한의학 문화를 두루 살펴볼 수 있다. 대구약령시: 대구시 중구 남성로 51-1 / 053-257-0545대구약령시한의약박물관:대구시 중구 달구벌대로 415길 49 / 053-253-4729 / dgom.daegu.go.kr         alt 대구약령시 골목 alt약령시한방문화축제 모습(약령시한의약박물관 제공)alt약령시한의약박물관 alt 옛 이야기 간직한 골목에서약령시 옆 서성로 일대는 이른바 ‘진골목’으로 불린다. ‘역사가 긴 골목’이라는 뜻이다. 근대 초기 달성서씨 부자들을 비롯해 이름만 대면 알만한 사업가·정치인·문인 등 당시 대구의 명망가들이 많이 살던 동네였다고 한다. 촘촘히 이어진 길에는 고풍스런 한옥이 있는가 하면 빛을 받아 번쩍이는 건물들이 줄지어 있어 과거와 현대가 사이좋게 어우러져 있다. 특히 현존하는 대구 최고(最古)의 양옥 건물 정소아과의원, 1982년 개업해 지금도 영업 중인 미도다방 등은 근대 시절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진골목 한쪽에는 대구경북 최초의 개신교 교회인 대구제일교회가 있다. 1893년 설립돼 오늘에 이르고 있는 이곳은 뾰족하게 솟은 두 개의 첨탑과 회색 화강암 외벽이 인상적이다. 푸른 담쟁이로 덮인 붉은 예배당 벽은 마치 예술작품처럼 고풍스럽다. 이웃하고 있는 화교협회 건물에는 시황제·공자·당태종 등의 벽화가 그려져 있다. 1925년 서병국이 지은 저택의 일부였던 이곳은 80여 년이라는 시간이 무색하게도 균형미를 유지하고 있다. 진골목은 독립운동가 이상화와 서상돈이 살던 곳이기도 하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는 저항시로 우리에게 친숙한 이상화는 이곳에서 타계하기 전 4년 동안 지냈다. 고택에는 석류나무 한 그루와 우물이 당시 모습 그대로 지키고 있고, 검은색 중절모를 쓰고 뒷짐을 지고 선 그의 벽화가 눈길을 끈다. 이상화 고택 맞은편에는 서상돈 고택이 있다. 서상돈은 민족독립과 국권회복을 위해 1907년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한 인물이다. ‘남자는 금연을 하고 여자는 은비녀를 뽑아 일본에 국채를 갚자’며 대구에서 시작된 국채보상운동은 전국적인 규모로 확대되었다.대구제일교회: 대구시 중구 국채보상로 102길 50 / 053-253-2615이상화 고택·서상돈 고택: 대구시 중구 서성로 6-1         alt대구제일교회alt서상돈 고택 alt 한 계단 한 계단 독립 의지가 서린 곳진골목은 90개의 계단이 차곡차곡 놓인 3·1만세운동길로 이어진다. 1919년 1천여 명의 학생들이 이곳에서 만세운동을 벌였다. 계단 꼭대기에 이르면 ‘푸른 담쟁이넝쿨이 무성한’ 청라언덕으로 이어진다. 일제강점기 미국 선교사들이 이곳에 사택을 지을 때마다 구해다 심은 청라(靑蘿)가 자라 건물을 감싸 오르게 되어 이름 붙었다고 전해진다.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지는/ 청라언덕 위에 백합 필 적에/ 나는 흰나리 꽃 향내 맡으며/ 너를 위해 노래 노래 부른다….가곡 ‘동무생각’에 등장하는 청라언덕이 바로 이곳이다. 이 곡을 작곡한 박태준은 1910년대 대구 계성학교에서 수학했는데, 학창시절 청라언덕에서 가까운 신명여자학교에 다니는 한 학생을 좋아했다고 한다. 그 여학생에 대한 그리움을 담아 지은 곡이 ‘동무생각’이라던가. 박태준은 일제의 탄압에 맞선 작곡가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평양 숭실전문학교 문학부에 다닐 무렵 3·1운동에 동참했다가 일경을 피해 대구까지 피신한 바 있으며, 활발한 음악활동을 했던 1945년에는 일본 헌병대에 체포돼 부산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광복 후에는 한국오라토리오 합창단을 창단해 헨델의 ‘메시아’를 초연하는 등 우리나라 음악 발전은 물론 서양음악의 토대를 닦았다.‘동무 생각’의 무대인 동산동, 나지막한 청라언덕에는 지은 지 100년이 넘는 3채의 선교사 사택과 그들의 묘비가 있는 은혜정원이 있다. 다시 3·1만세운동길 계단을 내려오면 프랑스인이 설계했다는 계산성당(사적 제290호)이 보인다. 경상도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인 계산성당은 서울 명동성당, 전주 전동성당과 함께 우리나라 3대 성당으로 꼽힌다. 영남 최초의 고딕양식으로 지어졌으며, 박정희 전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가 결혼식을 올린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청라언덕: 대구시 중구 달성로 56계산성당: 대구시 중구 서성로 10 / 053-254-2300 / www.kyesan.org alt3·1만세운동길alt계산성당 alt 음악과 추억이 있는 거리진골목에서 차량으로 약 10분 이내에 떨어져 있는 신천(新川)대로 둑방길은 김광석거리로 통한다. 방천시장까지 길이 300여 미터에 불과한 짧은 거리지만, 주말이면 음악과 예술을 사랑하는 젊은이들이 대거 모여든다. 1980~90년대를 대표하는 김광석의 노래는 그가 떠난 지 20년이 지난 지금도 많은 청춘과 그 시절의 추억을 안고 있는 세대들의 감성을 어루만지고 있다. 허름한 골목길 한편에는 통기타를 들고 환한 웃음을 짓는 그의 벽화가 잔잔한 그리움처럼 있다. 김광석 동상과 더불어 담벼락에 그려진 대형만화, 시인 정훈교의 시 ‘벽화에 세들어 사는 남자’ 등 시선을 이끄는 대로 발걸음이 닿는다. 운이 좋으면 작은 야외 공연장에서 음악회를 구경할 수도 있다.         alt김광석거리alt김광석 동상 alt 400년 전통을 자랑하는 마을둔산동에는 경주최씨 집성촌인 옻골마을이 있다. 팔공산 자락이 부드럽게 감싸 안고 있는 아늑한 전통마을이다. 조선 1616년(광해군 8년) 대암공 최동집이 이곳에 터를 잡은 것을 시작으로, 현재 14대 종손 최진돈(62세)씨까지 400년 가까이 그 역사를 이어오고 있다. 마을 입구에는 학자수(學者樹) 또는 출세수(出世樹)로 불리는 수령 350년의 회화나무 두 그루가 올곧게 지키고 있어 운치를 더한다. 정겨운 돌담길로 둘러진 경주최씨 백불고택(百弗古宅)은 一자형 사랑채와 ㄷ자형 안채로 이루어져 양반가옥의 전형을 보여준다. 조선시대 주택으로선 대구 관내에서 가장 오래됐다. 풍수지리설과 음양오행설에 따라 지은 건물로 기둥 하나에도 유교적 세계관이 녹아 있다. 대문채 옆에 자리 잡은 수구당(數咎堂)은 백불암(百弗庵) 최흥원이 제자를 가르쳤던 곳으로, 최흥원의 호(號)를 따서 이름 붙었다. 최동집과 최흥원의 별묘와 가묘 등이 모셔진 보본당(報本堂)은 백불고택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로 꼽힌다. 예부터 종가의 면모를 갖추려면 조상을 모시는 사당과 종택이 현존하며 종손·종부·지손·문중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이런 점에서 백불고택은 모든 조건을 충족한다고 할 수 있다. 옻골마을에서 차량으로 약 20분 거리 떨어진 불로동 고분군도 가볼만한다. 넓은 땅위에 봉긋 솟은 200여 기의 고분(古墳)들은 초기 철기시대(서기 4-5세기)에 만들어진 것들로, 이 지역 토착 세력의 분묘로 알려져 있거니와 대구 분지의 옛 모습을 파악할 수 있어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경주최씨 종택: 대구 동구 옻골로 195-5불로동 고분군: 대구 불로동 335         alt 경주최씨 백불고택 alt 불로동 고분군 alt 대구는 무엇보다 ‘골목’이 매력적인 곳이다. 어린 시절 동네 골목을 누비고 다녔듯이 구불구불 이어진 길을 따라 이곳저곳 기웃거려 보자. 길목마다 마치 소중하게 간직한 보물처럼 오래된 이야기와 그 시절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추억을 마주칠 수 있다.                      김초록여행칼럼니스트 겸 수필가. 현재 『월간 비타민』, 『건설경제신문』, 『서울우유』, 『냉동공조신문』에 객원기자로 활동 중이다. 여행 저서로는 『여름 이야기』, 『7가지 테마가 있는 여행』 등이 있다. ]]> Tue, 02 May 2017 11:31:38 +0000 5 <![CDATA[독립기념관과 문화예술 ]]> 독립기념관은 우리 역사의 이해를 높이고, 나라사랑 정신을 드높이기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공연, 전시를 비롯하여 국민 참여를 도모하는 대회 및 공모전 등을 통해 독립기념관을 널리 알리고 관람객에게 친근하게 다가감으로써, 역사교육의 장을 넘어 복합문화공간으로 거듭나고 있다. alt]]> Tue, 02 May 2017 10:40:09 +0000 5 <![CDATA[전쟁의 참혹함 속 희생된 소녀들의 이야기 영화 <귀향> ]]> 글 편집실전쟁의 참혹함 속 희생된 소녀들의 이야기영화 <귀향>감독: 조정래주연: 강하나, 최리개봉일: 2016년 2월 24일우리가 역사, 특히 일제강점기 나라를 잃었던 시기를 잊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과거를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함이요, 또한 그 아픔이 채 다 아물지 않았기 때문이다. 위안부 문제를 다룬 영화 <귀향>은 전쟁의 참혹함 속에서 스러져간 소녀들의 삶을 주목하며 말한다. 아직 우리의 아픔은 끝나지 않았다고.                      Q. 위안부는 언제 세상에 알려졌을까?영화의 시작에는 위안부 피해자로서 상처를 감추고 살아가는 노쇠한 여인 영옥이 등장한다. 때는 1991년, 실제로 ‘위안부’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른 시기다. 그해 8월 14일 위안부 피해자 고 김학순씨의 공개증언으로 위안부 피해 사실이 세상에 처음 알려졌다. 김학순씨를 비롯한 위안부 피해자 3명은 도쿄지방법원에 일본 정부의 보상을 요구하는 소송을 청구하였고, 이로써 본격 위안부 문제가 시작되었다. 2013년 이후 8월 14일은 세계 일본군 위안부 기림일로 정해져, 매년 이날이면 전세계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기억하는 각종 집회와 문화행사가 개최된다.         alt위안부 피해자 김학순씨alt위안부 피해 공개증언 모습(1991년 8월 14일)                         Q. 소녀들은 어떻게 위안부에 동원되었나?경남 거창 한디기골, 전쟁과 상관없이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는 듯했던 이곳에도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어느 날 14살 소녀 정민의 집에 일본군이 찾아온 것. 정민은 영문도 모른 채 끌려가 다른 여자아이들과 함께 기차에 실려 알 수 없는 곳으로 향한다. 위안부는 일제강점기 일제가 자행한 강제인력수탈 중 하나로 일본군 성노예다. 당시 한국을 비롯한 많은 피지배국 여자들이 ‘돈을 많이 벌 수 있게 해주겠다’는 거짓 꾐과 강제연행을 통해 위안부에 동원되었다. 이 같은 사실은 피해자와 몇몇의 양심 있는 가해자의 증언 위주로 밝혀지다가, 학자들이 발굴해낸 군문서와 당시 일본군의 회고록, 관련 전범재판 기록 등 문서화된 증거를 통해 더욱 분명히 확인되었다.         altalt                        Q. 영화 속 정민이 마주한 참혹한 삶은 모두 역사적 사실일까?중국의 한 일본군부대에 도착한 정민과 소녀들은 이곳에서 육체적·정신적 폭력을 받으며 지옥과도 같은 나날을 보낸다.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죽은 친구들의 시신은 그대로 길가에 던져지거나, 불에 태워졌다.조정래 감독은 <귀향> 개봉 당시, 위안부 피해 여성 강일출씨의 그림 ‘태워지는 처녀들’을 보고 영화를 제작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그림 속에는 한 무리의 여성들이 불에 타고 있다. 강일출씨는 위안부에 있던 당시 그림에서처럼 일본군의 소각명령에 목숨을 잃을 뻔 했다가 가까스로 위기를 넘기고 살아남았다고 증언했다. 영화 속 그려진 위안부 모습은 이처럼 위안부 피해자들의 증언을 충실하게 반영한 것으로, 일제가 자행한 지독한 인권유린의 참상을 고발한다.         altalt강일출씨의 작품 ‘태워지는 처녀들’                         Q. 고국에 돌아오게 된 여성들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영옥은 정신대 피해자 신청을 하러 동사무소를 찾았지만 끝내 용기를 내지 못하고 돌아선다. 그때, 그녀의 뒤에서 한 직원의 말이 들려온다. “미치지 않고서야 누가 그런 거를 신고해.” 그러자 영옥은 뒤돌아 울분을 토한다. “내가 그 미친년이다!” <귀향>은 위안부 소녀들이 넋이나마 돌아오길 바라는 ‘귀향(鬼鄕)’이란 의미다. 일제강점기 우리나라에서 일본군에 끌려간 위안부 소녀는 20여만 명, 그중 살아 돌아온 사람은 238명, 현재는 단 38명만이 남았다. 그러나 그나마 그리운 고국으로 돌아온 이들이 마주해야 했던 또 다른 상처는 바로 사람들의 손가락질과 편견이었다. 위안부 문제가 뒤늦게 밝혀진 이유는 다만 일본의 역사 왜곡 행태에만 있지 않다. 상처를 감싸 안아주어야 할 우리 조국이 오히려 그들을 외면했기 때문이다. 일제의 만행으로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겪어야 했던 이들, 그 상처가 하루 빨리 치유될 수 있도록 우리 모두 함께 노력해야 할 것이다.         altalt위안부 문제 해결을 염원하기 위해 세운 평화의 소녀상 ]]> Tue, 02 May 2017 11:40:21 +0000 5 <![CDATA[어린이의 영원한 벗 ]]> 글 학예실어린이의 영원한 벗방정환(方定煥, 1899. 11. 9~1931. 7. 23)독립기념관은 국가보훈처·광복회와 공동으로 방정환을 5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alt 재주 많은 문화 청년방정환은 1899년 서울의 야주개(현 당주동)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집안은 천도교의 핵심인물인 권병덕과 왕래를 자주하며 친분을 쌓았다. 그는 10대 시절에 권병덕이 주관하는 일종의 토론모임인 소년입지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총대장 역할을 맡기도 하였다.1913년 선린상고에 입학했으나 중퇴한 후 토지조사국의 말단으로 취직하였다. 그러던 1917년 천도교주인 손병희의 딸 손용화와 결혼하였고, 이후 사회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청년운동단체인 경성청년구락부를 조직하여 잡지 『신청년』을 창간한 방정환은 직접 연극대본을 써서 무대에 올리기도 했으며 최초의 영화잡지 『녹성』 발간에 참여하는 등 활발한 문화예술 활동을 벌였다.1919년 3·1운동 당시에는 <조선독립신문>을 비밀리에 출판하여 배부하였는데, 이것이 발각되어 일경에 체포돼 고초를 겪었다. 이후 일제의 감시를 피해 일본 유학을 떠나 도요대학(東洋大學)에서 철학 및 예술을 공부하는 한편, 동시에 천도교 잡지 『개벽』의 도쿄특파원으로 활동하면서 천도교청년회 동경지회의 설립을 추진하는 등 언론인이자 독립운동가의 길을 걸었다.         alt방정환alt잡지 『개벽』 폐간 항의 모습(1926년)alt영화잡지 『녹성』 창간호(한국방정환재단 제공) 어린이운동의 선구자1920년대 방정환은 어린이문화단체인 색동회 창립에 참여하면서 본격적으로 어린이운동에 뛰어들었다. 도쿄에 유학 중인 방정환을 비롯해 정순철, 손진태 등 8인이 모여 색동회를 조직하였으며, 천도교소년회 창립일인 5월 1일을 어린이날로 제정하였다. 또한 1923년에 창간한 아동잡지 『어린이』는 방정환이 사망하기 직전까지 편집과 발행을 담당하여 어린이운동을 확산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1925년 신년호의 경우, 발간 일주일 만에 매진되어 3판까지 발행될 정도로 큰 인기를 끌었다. 방정환은 소파(小波), 몽중인(夢中人), 북극성 등 다양한 필명으로 『어린이』에 기고하였다. 방정환은 타계 직전까지 동화 집필과 구연에 몰두하다가, 1931년 신장염과 고혈압으로 쓰러져 33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현재 서울시 망우리공원에 그의 묘소가 있다. 정부는 방정환의 공적을 기리어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alt색동회 창립구성원alt색동회 마크가 그려진 어린이날 포스터 alt 『어린이』에 실린 방정환의 기고문         alt방정환 캐리커처(1920년대, 한국방정환재단 제공)alt방정환 묘비(서울 망우리공원) ]]> Tue, 02 May 2017 11:35:10 +0000 5 <![CDATA[하나, 이병희, 항일투쟁의 역정 둘, 인력거꾼과 기생 ]]> [우리가 몰랐던 이야기 하나]글 김성은 대구한의대학교 기초교양대학 교수이병희, 노동운동에서 독립운동까지항일투쟁의 역정이병희는 국내에서 일본의 차별에 맞서 ‘항일 파업투쟁의 선봉’으로서 노동 파업을 주도하다가 검거되어 옥살이를 했다. 중국으로 건너가서는 이육사와 함께 독립운동을 하다 투옥되었고, 감옥에서 사망한 이육사의 시신을 손수 수습했던 여성 독립운동가다. alt이병희(동아일보 1938년 5월 24일자)  alt이병희 수형기록카드alt             가정환경의 영향으로 독립운동에 일찍 투신하다이병희의 조부 이원식은 동창학교를 설립해 민족교육을 이끈 민족운동 1세대다. 아버지 이경식은 1925년 9월 대구에서 조직된 비밀결사 암살단 단원으로 활동하였는데, 1927년 ‘장진홍 사건’으로 알려진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거사’에 연루되어 중국으로 망명, 외몽고 지역에서 활동하는 등 항일투쟁과 독립운동을 이어갔다. 노동운동가 이효정은 이병희의 조카다. 이병희가 고모였으나 나이는 이효정보다 5살 더 어렸다. 이밖에도 어머니는 독립운동을 하다 검거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하는 등 독립운동가 집안에서 태어나고 성장한 이병희는 집안 분위기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학교를 당장 그만두어라. 한 살이라도 더 먹기 전에 직접 일제와 싸워야 한다.” 백부 이원근을 비롯한 집안 어른들의 이 같은 권유로 그는 학교를 그만두고 노동현장에 투신하게 되었다.항일노동운동의 선봉에 서다1933년 16세에 다니던 경성여자상업학교를 그만둔 이병희는 서울에 있는 종연방적주식회사 여공으로 취업해 노동현장에서 투쟁을 전개하는 한편, 이곳에서 여성노동자 600여 명을 이끌고 파업을 주도했다. 후에 그녀는 “일제가 운영하던 공장은 초등학교 정도의 교육을 받은 여성들만 직공으로 받았는데, 파업을 통한 여공들의 저항은 대단했다”고 당시의 상황을 회고했다. 1936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때의 나이는 겨우 19세로, 항일노동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구속되어 죽음보다 더한 고문을 받았다.서대문형무소 여옥사 유적지에서 이병희를 비롯한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고난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던 5,000여 명의 애국지사들은 이곳에서 말할 수 없는 고초를 겪었다. 특히 여성 독립운동가들은 더 힘든 고문을 당했으니, 바로 성고문이었다. 이병희는 "차라리 죽여 달라”고 했을 정도로 가혹하고 참아내기 힘든 고통이었다고 회고한 바 있다.이병희는 조선공산당 재건 기초공작으로 인한 치안유지법 위반(朝鮮共産黨 再建設 京城準備그룹事件)이란 죄명으로 징역을 언도받았다. 서대문형무소에서 2년 4개월 동안 옥고를 치르고 1939년 4월 출소하였다. 이듬해인 1940년 아버지 이경식이 활동하던 중국으로 건너가 베이징(北京)에서 10촌 할아버지뻘인 육사 이원록을 만나 독립운동을 이어갔다. 또한 이육사는 의열단에 가입해 무장독립운동을 하고 있었는데, 이병희는 여기서 베이징과 연안, 만주를 넘나들며 군자금을 모금하거나 전달하고 동지들 간의 연락·문서 전달 등의 임무를 수행했다. 옥중에서 겪은 고통에도 항일독립운동에 매진한 ‘의지의 여성 독립투사’였던 것이다. 이육사의 시신을 거둔 이병희이병희는 1943년 여름 다시 체포되었다. 어릴 적부터 아버지 이경식을 쫓아다녔던 일본 순사는 그녀에게 “네가 자라 적이 되었구나”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병희는 베이징감옥에 수감되었다. 한국인 간수를 통해 이육사도 수감된 사실을 알았다. 이육사는 1943년 7월 체포되어 베이징감옥에 수감돼 17차례에 걸친 투옥과 감방생활로 폐결핵에 걸려 생명을 잃어가고 있었다. 이병희는 “개죽음을 당하기보다는 한 사람이라도 살아남아야 한다”는 동지들의 충고를 받아들여 결혼을 조건으로 홀로 풀려났다가, 곧 육사가 옥사(1944년 1월 16일)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이병희는 “선을 본 남자(조인찬, 남편)에게 결혼을 승낙하기로 한 날이었는데 육사의 유해를 수습하느라 이리저리 뛰다가 남편을 밤 10시까지 기다리게 했다.” “화장한 육사의 유해를 밥상 위에 올려놓고 결혼을 승낙했다”고 회고하였다. 결혼식 날에는 육사의 유해를 조국으로 보내는 절차를 밟느라 파혼의 위기에 몰리기도 했으나, 다행히 남편의 이해로 뒤늦게 결혼식을 올릴 수 있었다. 이병희는 육사의 주검을 수습하고 그의 유고시집을 챙겨 1946년 『육사시집』 발간을 이끌었다. 오늘날 우리가 이육사의 시집을 볼 수 있는 것은 그녀의 노고 덕분이다.  광복 이후 1948년 귀국한 그녀는 생전에 “독립운동은 남성들의 역할도 컸지만 여성들이 기여한 부분도 적지 않으니 언젠가는 사람들이 여성들의 독립운동을 알아줄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 2008년 KBS 휴먼다큐 <사미인곡>에서는 독립운동가 이병희의 삶을 조명한 바 있다. 그녀는 광복 51주년을 맞은 1996년 77세 되던 해에 독립운동의 공로를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으며, 2012년 95세로 생을 마감했다.                    [우리가 몰랐던 이야기 둘]글 신현배 역사칼럼니스트독립투사를 도와준 인력거꾼과 기생일제강점기에 인력거꾼은 사회적으로 천대받는 직업이었다. 승객들에게 업신여김을 당하기 일쑤였고, 인력거 삯으로 받은 돈을 인력거 업주와 나눠야 했기 때문에 열심히 일해도 가난을 면치 못했다. 한국인 업주의 경우에는 번 돈을 5대 5로 나누어야 했기에 인력거꾼이 정작 손에 쥐는 돈은 얼마 되지 않았다. 게다가 비싼 인력거를 도둑맞기라도 하는 날에는 인력거 값을 물어주느라 거리로 나앉기도 했다. alt 인력거꾼들이 직접 세운 학교인력거꾼들은 어려운 삶을 살았지만 자식들에게 자신의 천한 직업과 가난을 물려주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3천여 명의 인력거꾼이 모여 자녀들이 다닐 학교를 세우기로 하고, 1924년 경성차부협회를 만들었다. ‘우리 자녀는 우리가 가르치자’며 매월 50전씩 회비를 걷어 학교 건립 자금을 모으기로 한 것이다.1925년 5월 1일 이들은 서울 수송동에 셋집을 얻어 드디어 학교를 세웠다. 이 학교가 바로 대동학원이다. 4개 학급 60여 명의 학생을 모아 보통학교 교육을 시작한 이곳은 점점 학생 수가 늘어났다. 그리하여 2년 뒤에는 봉익동의 일본인 집을 빌려 학교 건물로 사용했다.그러나 얼마 못 가 학교가 경영난에 빠지게 되면서 월세 45원을 내지 못해 문을 닫아야 할 형편에 이르렀다. 이러한 사정이 알려지자, 평소 인력거를 가장 많이 이용하던 기생들이 발 벗고 나섰다. 서울의 한성 권번·조선 권번·대정 권번·한남 권번·대동 권번에 속한 기생 700여 명은 ‘학교 후원 연주회’를 다섯 차례나 열어, 그 수익금과 자신들이 번 돈 3,300여 원을 내놓았다. 이 돈으로 대동학원은 1927년 9월 광희문 밖 신당리의 건물을 사서 이사해 정상화될 수 있었다. 가깝게 지낸 인력거꾼과 기생기생은 잔치나 술자리에서 노래와 춤, 악기 연주로 흥을 돋우는 일을 하던 젊은 여성을 일컫는 말이다. 조선시대에는 ‘관기’라고 하여 관청에 속해 있었다. 1909년 관기 제도가 폐지되자 기생조합이 생겨났다. 조합에 소속된 기생들은 요릿집에서 부르면 요릿집으로 직접 가서 손님을 접대하기 시작했다.기생조합은 1914년 일본식인 ‘권번’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권번에서는 기생들에게 노래와 춤을 가르치고 요릿집에 기생 명단인 ‘초일기’를 보내 손님들이 기생을 부를 수 있도록 해 요릿집 출입을 도왔다. 손님이 기생을 지명하면 요릿집 종업원은 권번에 전화를 걸어 그 기생을 불러 달라고 하고, 권번에서는 인력거를 기생집에 보내 기생을 요릿집으로 데려가게 했다. 예약도 가능했는데, 일류 명기를 부르려면 일주일 전에 예약해야 했다.이러한 배경으로 기생들은 늘 인력거를 타고 다녔다. 그들은 등받이에 기대지 않은 채 꼿꼿이 앉아, 가야금 등을 발판에 세워 한 손으로 잡고 갔다. 기생들은 자신들을 과시하고 선전하기 위해 일부러 인력거 포장을 젖히고 다녔다. 반면 가정집 부인들은 기생으로 오인 받을까 봐 꼭 포장을 씌우고 다녔다.인력거꾼들은 기생을 자주 태우고 다니면서 자연스레 그들의 수입이 좋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인력거꾼 가운데는 자기 딸을 권번으로 보내 기생으로 만든 사람도 많았다. 그러다 보니 인력거꾼은 손님인 기생에게 존댓말을 쓰지 않고, 기생은 인력거꾼을 정중히 대하며 아버지라고 불렀다고 한다.일제강점기 독립투사를 돕다한번은 일류 요릿집 명월관을 드나들던 기생 현산옥이 자신의 집에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잠입한 독립투사를 숨겨준 일이 있었다. 그녀는 명월관 인력거꾼을 시켜 독립투사가 다른 사람들과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도록 도왔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인력거꾼이 현산옥의 집에 와서 쪽지를 전하자 이를 목격한 일본인 형사가 뒤따라와 캐물었다. “웬 쪽지냐?” 인력거꾼과 기생은 미리 약속한 대로 이렇게 대답했다. “문 밖 놀이에 나오라는 기별 쪽지예요.” 그러나 일본인 형사는 그 말을 믿지 않고 집 안으로 들어가 방문을 벌컥 열었다. 방 안에는 현산옥의 어머니가 이불을 덮은 채 누워 있었다. “무슨 일이에요?” 어머니가 깜짝 놀라 묻자 일본인 형사는 미안하다며 사과하고 돌아갔다. 그 때 독립투사는 재빨리 현산옥 어머니와 같은 이불 속에 누워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이처럼 인력거꾼·기생 중에는 일제강점기에 독립투사를 도와준 사람이 적지 않았다.                      신현배역사와 전통문화에 대해 관심이 많은 역사칼럼니스트. 저서로는 역사 이야기 『엉뚱 별난 한국사』, 『엉뚱 별난 세계사』, 『2000년 서울 이야기』, 『세계사로 배우는 법 이야기』, 전통문화 이야기 『소중한 우리 문화 지식 여행』 시리즈 등이 있다. ]]> Tue, 02 May 2017 11:06:24 +0000 5 <![CDATA[민족의 시대정신을 예술로 승화하다 ]]> 글 심용환 역사N교육연구소 소장민족의 시대정신을 예술로 승화하다20세기 초반, 대한제국 말기에 들어서면서 근대 문화예술은 점차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언문일치 형식의 문장이 발전하면서 최초의 신소설로 인정되는 『혈의누』(이인직)·『자유종』(이해조)·『금수회의록』(안국선) 같은 작품들이 등장했으며,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사설극장 원각사(圓覺社, 1908)는 <은세계>, <치악산> 등을 통해 신극(新劇)운동의 중심지로 떠올랐다.                      어려울수록 더욱 화려하게 꽃핀 문화예술일제강점기 억압 속에서도 문화예술은 꾸준히 발전했다. 1910년대는 2인 문단 시대로 신체시(新體詩)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발표한 최남선과 소설 『무정』을 쓴 이광수의 시대가 열린다. 이후 1920년대에는 『창조』·『백조』·『폐허』 같은 문학잡지, 즉 동인지가 발간되기 시작하면서 문학가 김동인, 염상섭 등을 통해 장르의 다양화, 주제의식의 고도화를 이루었다. 1925년 결성된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동맹 카프(KAPF)는 순수문학 혹은 퇴폐주의 경향이 아닌 현실주의 문학활동, 저항적인 사회주의 문학활동을 본격화했다. 동시에 이상화·한용운·김소월 등의 탁월한 시인·문학가들이 등장하면서 1920년대는 한국 문학에 있어 첫 번째 황금기였다.이 시기 일본에서는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연극단체 토월회(土月會)가 결성되고,  6·10만세운동이 일어난 1926년에는 나운규의 무성영화 <아리랑>이 큰 인기를 끌었다. 나운규는 제작·연출·감독뿐 아니라 주연배우의 역할까지 맡으면서 한국 영화사의 중요한 획을 그었다. 중국 유학생들의 이야기들도 주목할 만하다. 의대생이었다가 문학에 눈을 돌린 김광주는 『밤이 깊어갈 때』, 『북평서 온 영감』 등 굵직한 소설을 발표했고, 김명수는 소설 『두 전차(電車) 인스펙터』로 당선되는 등 한국 문학계에서 크게 활약했다. 한편 영화계에서는 배우 김염이 중국에서 영화 황제로 칭송받으며 큰 인기를 누렸다. 당시 이규환·이경손·한창섭 등 많은 영화계 인재들이 난징(南京)과 상하이(上海) 등지에서 활발히 활동했고, 전창근은 중국에서 제작한 <양자강>을 국내에 소개해 주목을 받았다.         alt잡지 『창조』alt한용운alt님의 침묵 alt김염alt영화 <아리랑>                    눈부신 성취와 동시에 친일이라는 얼룩이 지다1930년대 일제의 극악한 식민지 수탈로 우리 농촌은 극도로 피폐해졌다. 이에 언론사가 주축이 되어 대대적인 농촌계몽운동이 일어났는데, <동아일보>의 브나로드운동과 <조선일보>의 문자보급운동이 그것이었다. 1935년 동아일보사 공모에 당선되었던 심훈의 『상록수』는 브나로드운동에 참여한 원산여고 출신 여성 농촌운동가 최용신을 모델로 한 소설로 큰 주목을 받았다. 심훈은 소설뿐 아니라 ‘그날이 오면’ 등 시문학에서도 두각을 드러내는가 하면, 영화감독으로 활동하는 등 문화예술계 다방면으로 재능을 뽐냈다. 문학뿐 아니라 음악 분야는 안익태의 ‘코리아 환상곡’, 홍난파의 ‘봉선화’, 연극 분야는 유치진의 희곡 <토막> 등 다양한 장르에서 문화예술적 성과가 이루어지는 등 일제강점기라는 암울한 시대적 상황에도 불구하고 식민지 한국 예술인들은 매우 역동적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문화예술계에 큰 획을 그은 인물들 가운데는 이광수·최남선·김동인·안익태·홍난파·유치진 등 친일행적으로 그 성취가 빛바랜 경우도 많았다. 특히 1937년 이후 중일전쟁이 본격화되면서 상당수의 예술인들이 친일활동에 나서면서 문화예술 분야 전반이 침체기에 빠져들었다.         alt심훈alt소설 『상록수』alt브나로드운동 포스터(<동아일보> 1932년 7월 17일자)                        부끄러움을 노래한 청년과 그가 머문 시대유명한 문인들이 친일활동으로 스스로의 명예를 더럽히던 시기 윤동주의 등장은 그들을 부끄럽게 만들기 충분했다. 올해로 탄생 100주년을 맞은 윤동주는 광복을 보기 불과 여섯 달 남겨 두고 생을 마감하였으나 짧은 생애 동안 한국 문학사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 만주 명동촌의 부유한 가정에서 나고 자란 그는 문학청년으로 내적 성숙을 거듭하였다. 20살이 되던 해 중일전쟁이 일어나면서, 꽃다운 청춘은 동아시아는 전쟁의 광풍으로 휘말려 들어갔다. 그 속에서 윤동주가 써내려간 시 역시 방황을 거듭했다. 윤동주의 고뇌는 비단 그만의 것이 아니었다. 망국의 현실 가운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는 당대를 지냈던 많은 청춘과 지식인들에게 숙명과도 같은 질문이었다. 당시 민족주의자들은 수양을, 사회주의자들은 보다 저돌적으로 강력한 실천성을 추구하며 세상을 바꾸고자 했다. 일제는 이에 대응하여 모범청년상을 내세우며 식민지 사회에 순응하고 순종하는 청년들을 기르고자 했다. 이렇듯 윤동주의 문학적 성취는 당시의 교육 정책과 맞물려 혼란스러워했던 청년상과 맞닿아 있다.         alt윤동주alt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독립운동가이자 문화인으로서 살았던 김규식예술가는 아니지만 문화예술 분야에서 활발한 교류를 하며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을 실천했던 인물도 있다. 김규식이 대표적인 예다. 1919년 신한청년당 대표로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했던 그는 임시정부 외무총장을 맡아 다방면에서 활약을 펼쳤다. 민족유일당운동·민족혁명당 참여 등 독립운동계의 통합을 위한 활동에 집중했다. 이처럼 같은 민족주의자 내부에서 발생하는 이견 차이를 좁히는 역할을 도맡았다. 사회주의 운동을 어떻게 볼 것이며, 사회주의가 지적하는 사회경제적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에 대해 그는 대부분 개방적인 자세를 견지하고, 사회주의 진영과의 소통이나 합작은 물론 중국 혁명세력과 다양한 협력을 이끌었던 점은 주목할 만한 행적이다. 한편 김규식의 인생에서 놓칠 수 없는 또 하나의 부분은 그가 탁월한 언어학자였으며 문화예술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영어·프랑스어·독일어·러시아어·중국어·일본어까지 6개 국어에 능통했던 그는 세계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여러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또한 『엘리자베스 시대의 연극 입문(1940, Introduction to ElizaBethan Drama)』, 『실용 영문 작법(1944, Hints on English Composition Writing)』, 『실용영문 1,2(1945, Practical English)』 등의 책을 집필했으며 중국 근대 비극시 ‘완용사(婉容詞)’를 영어로 번역하기도 했다.         alt김규식alt파리강화회담에 참석한 김규식(앞줄 오른쪽 끝) 사실 독립운동과 문화예술은 쉽게 연결시킬 수 있는 주제가 아니다. 시대의 아픔을 딛고 민족을 계몽하는 위대한 작품들을 탄생시키는 한편, 일제에 투항하거나 친일 부역행위를 하는 등 스스로 명예를 실추시켰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한 부끄러운 행위를 인정하고, 그것을 바로잡고자 더욱 치열하게 작품활동에 전념했던 바람직한 예술인들이 있었기에 오늘날의 대한민국 문화예술이 있다는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심용환성균관대학교 사범대학에서 역사교육학을 전공했다. 현재 팟캐스트 <진짜 역사 가짜 역사>를 통해 재미있고 올바른 역사 이야기를 전파하고 있으며, CBS와 공동으로 <심용환의 근현대사 똑바로 보기>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저서로는 『헌법의 상상력』, 『심용환의 역사토크』, 『단박에 한국사』 등이 있다. ]]> Tue, 02 May 2017 11:22:26 +0000 5 <![CDATA[‘어린이’라는 싹에 희망을 비추다 ]]> 글 이성주 역사칼럼니스트‘어린이’라는 싹에 희망을 비추다“어린이는 어른보다 한 시대 더 새로운 사람입니다. 어린이의 뜻을 가볍게 보지 마십시오.”소파(小波) 방정환이라고 하면, 대개 ‘어린이라는 존칭어를 만든 사람’, ‘어린이날을 만든 사람’ 정도로만 알려져 있다. 그러나 어린이 인권 신장과 교육에 일생을 바친 방정환은 타고난 이야기꾼이자, 작가, 출판인이었으며 또한 독립운동가였다. 타고난 재능으로 혁신적인 사상을 발휘하다▲보성전문학교 법과 입학 ▲3·1운동 참가 ▲일본 도요대학 철학과 입학 ▲마해송 등과 함께 ‘색동회’ 조직 ▲어린이날 제정을 비롯해 어린이 인권 신장과 교육활동에 투신 ▲1931년 7월 23일 33세로 사망 방정환을 말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인물이 한 명 있으니, 바로 장인 손병희다. 천도교 3대 교주이자 3·1운동을 이끈 민족대표 중 한 사람인 손병희는 가세가 기울어 어렵게 지내던 방정환을 자신의 딸과 혼인시켰고, 그가 자신의 꿈을 키워나갈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주었다. 그러한 인연에 영향을 받아서일까, 방정환은 3·1 운동 당시 <독립신문>을 제작·배포하다가 일경에 체포된 적이 있다. 혹독한 고문을 당했지만, 다행히도 체포 직전 등사기를 우물에 버려 ‘증거불충분’으로 석방되었다. 이후 일본 유학을 떠난 그는 새로운 학문을 만나게 되었는데, 바로 아동문학과 아동심리학이다. 당시 유교사회인 조선에서는 장유유서(長幼有序)를 덕목으로 내세우며 어린아이를 쉽게 괄시하고 천대하곤 했다. 방정환은 이런 문화를 타파해야 한다고 역설하며 어린이문화단체 ‘색동회’를 조직, 어린이날을 제정하였다. 방정환이 내놓은 아동 권리 존중의 기치는 비단 우리나라에서뿐 아니라 세계 최초라는 점에서 더욱 놀랄 만하다. 국제연맹에서 제네바선언을 통해 내놓은 아동권리선언은 1924년에 등장했다.방정환은 재주가 많은 사람이었다. 손으로는 유려한 글 솜씨를 뽐내고, 목소리로는 사람들의 귀를 즐겁게 해줬다. 타고난 말재주는 특히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동화구연에서 크게 빛났다. 방정환이 출연한다고만 하면 동화구연장은 아이들로 넘쳐났다. 그는 매년 70회, 통산 1천회 이상 무대에 올랐는데, 그의 말 한마디에 따라 장안은 웃음바다가 되기도, 때론 울음바다가 되기도 했다.그러나 우리가 더욱 주목해야 하는 점은 그가 가진 천부적인 재능보단 그것을 통해 발휘된 그의 혁신적인 사상이다.“제발 월급쟁이나 시어미 있는 데는 연애 아니라 아무거래도 가지를 말아요. 사람이 썩어요 썩어!”방정환이 쓴 ‘여학생과 결혼하면’이란 글의 한 대목이다. 여성의 시선으로 써내려간 것으로, 직설적인 표현으로 당대 여성의 입장을 대변했다. 일제강점기에 양성평등이라니, 시대를 앞서 나가도 너무 앞서나간 게 아닌가? 하긴 ‘어린이’란 단어를 만들고, 누구도 주목하지 않은 아동인권을 위해 목소리를 높이는 등의 행보만으로도 미루어 짐작하건대 방정환은 단연 진보적인 지식인이었다. 이처럼 그의 다재다능함은 선구자적인 면모를 효과적으로 발휘하는 좋은 그릇이 되었다.싹을 위하는 나무, 싹을 짓밟는 나무방정환이 살아생전 어린이를 그토록 귀하게 여겼던 이유는 무엇일까? 단순히 어른이 보호하고 귀하게 여겨야 할 아이들이라서가 아니다.“나라와 민족의 장래를 위해 어린이에게 10년을 투자하라.”방정환은 민족의 장래가 곧 어린이들의 손에 달려있다고 생각했다. 어린이라는 ‘싹’을 위해야 민족이라는 ‘나무’가 잘 자라난다고 믿은 것이다. 비록 국권은 빼앗겼으나 장차 우리의 미래가 될 어린이들을 잘 키워내면 언제고 이 아이들이 민족의 독립을 쟁취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싹을 위하는 나무는 잘 커가고, 싹을 짓밟는 나무는 죽어 버립니다.”위의 가르침으로 방정환은 민족과 독립의 희망이 어린이에게 있음을 강조한다. 싹을 잘 키워 나무로 만들기까지는 분명 시간이 걸리지만, 정성 들여 싹을키운 나무는 튼튼하고 건강하게 성장한다. 방정환은 느리지만 확신에 찬 자신의 발걸음을 믿었으며, 숨을 거두기 불과 며칠 전 부인에게 이러한 말을 전했다.“부인, 내 호가 왜 소파(小派)인지 아시오? 나는 여태 어린이들 가슴에 잔물결을 일으키는 일을 했소. 이 물결은 날이 갈수록 커질 것이오, 훗날에 큰 물결 대파가 되어 출렁일 테니 부인은 오래오래 살아서 그 물결을 꼭 지켜봐주시오.”5월 5일 어린이날이 다가온다. 우리 어른들은 지금 우리나라의 미래인 어린이의 가슴에 잔물결을 일으키고 있을까. 어린이를 위해 노래와 이야기를 만들고, 그들 앞에서 이야기와 노래를 들려주던 방정환. 오늘날 하루 종일 학교와 학원 책상에만 붙들려 있는 어린이들을 보면, 그는 뭐라고 말할까. 어린이의 행복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오히려 어린이를 옥죄고 있다고 타박하지는 않을는지.                      이성주시나리오 작가 겸 역사칼럼니스트. 대중과 함께 호흡하는 글쓰기를 목표로 『조선의 민낯』, 『왕들의 부부싸움』과 같은 역사서를 출간한 바 있다. 최근에는 국제정치와 관련된 연구 및 집필에 열중하고 있다. 『전쟁으로 보는 국제정치』 시리즈 1, 2, 3권을 출간 중이다. ]]> Tue, 02 May 2017 10:25:34 +0000 5 <![CDATA[아침을 깨우는 소리 ]]> 아침을 깨우는 소리왁자지껄 울려 퍼지는 웃음소리가 청아하게아침을 깨웁니다.천진한 미소는 만개하고들뜬 발걸음은 하늘로 솟을 듯통통 뛰어오릅니다.지칠 줄도 모르고멀리서 한달음에 달려오는어린이들, 우리의 새싹들이 바로 오늘의 주인공입니다.]]> Tue, 02 May 2017 10:19:08 +0000 5 <![CDATA[창사(長沙)에서 만난 인연의 안내를 받다 ]]> 글 김주용 독립기념관 선임연구위원창사(長沙)에서 만난 인연의 안내를 받다김구가 치료 받았던 상아의원은 현재 후난대학 병원으로 사용되고 있다. 우리 답사단이 그곳을 찾았을 땐 김구가 수술을 받았던 건물이 한창 내부수리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상아의원에서의 아쉬움을 뒤로하고 남목청에서 자동차에 실려 상아의원에 도착한 후 의사가 나를 진단해 보고는 가망이 없다고 선언하여, 입원 수속도 할 필요 없이 문간에서 명이 다하기를 기다릴 뿐이었다. 그러다가 한두 시간 내지 세 시간 내 목숨이 연장되는 것을 본 의사는 네 시간 동안만 생명이 연장되면 방법이 있을 듯 하다고 하다가 급기야 우등병실에 입원시켜 치료에 착수하였던 것이다.『백범일지』에 나오는 대목이다. 심지어 안중근의 셋째 동생 안공근은 김구의 피살 소식을 듣고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한달음에 달려와 김구의 큰아들 김인과 함께 창사(長沙)로 돌아오기까지 했다. 백범의 어머니는 자신의 아들이 사경을 헤매었다는 소식을 듣고도 의연하게 대처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상아의원 촬영을 마치고 후난농업대학(湖南農業大學)에서 중국의 육종학을 위해 헌신한 독립운동가 유자명의 아들 유전휘(柳展輝) 교수를 만나기 위해 길을 재촉했다. 이선자 부관장이 예약한 후난성(湖南省)의 정통 음식점에 가니 유전휘 부부와 그의 딸이 우리 일행을 반갑게 맞아 주었다. 놀랍게도 딸은 우리말을 능숙하게 했다. 한국에서 유학한 덕분이라고 한다. 유 교수는 아버지의 나라에서 온 손님들에게 내일 부친과 관련된 사적지를 함께 가봤으면 한다며 조심스럽게 의견을 냈다. 우리는 이번 답사 장소 중에도 관련 사적지가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고 저녁으로 매운 후난요리 샹차이(湘菜)를 깔끔하게 비웠다. alt옛 상아의원(1915년)alt현 상아의원alt김구 가족사진(1934년, 왼쪽 장남 인, 오른쪽 차남 신, 가운데 어머니 곽낙원 여사) 유자명이 몸담았던 후난농업대학을 찾다아침 8시에 숙소를 나와 유자명이 말년을 보냈다던 후난농업대학으로 향했다. 대학 앞에는 벌써 유전휘 교수가 마중을 나와 있었다. 그는 후난농업대학교 관계자들이 기다리고 있다며 우리를 대외협력처 회의실로 안내했다. 9시 정각, 한국의 답사단 4명을 비롯하여 중국측에서는 타오동차이 통전부장, 양즈지엔 국제교류합작처장 등 5명과 유전휘 교수, 이선자 중경임시정부청사 부관장 등 11명이 간략한 좌담회를 가졌다. 이 자리에서는 유자명 전시관을 보다 확장하여 후대의 귀감으로 삼겠다는 후난농업대학 관계자의 굳은 의지가 엿보이는 의미 있는 대화가 오갔다. 좌담회가 끝나고 유 교수의 안내를 따라 유자명 전시관으로 향했다. 2013년 유자명의 제자들이 모금하여 유자명이 후난농업대학 근무 당시 거주했던 집에 전시관을 만들었는데, 총 5개 부분으로 전시 구성을 해놓았다. 도착해보니 창사 문물보호단위로 등록되었음을 알리는 표지석이 일행을 맞아주었다.유전휘 교수는 자기 아버지의 활동에 대해 이야기했다. 물론 부친에게 들은 이야기이지만 경청할 만한 것은 분명했다. 1930년 후반 유자명의 활동은 주로 재중국한인혁명세력의 통일운동에 모아졌다. 당시 난징(南京)에서는 김원봉의 조선민족혁명당과 김규광의 해방동맹, 최창익의 전위동맹 등이 각 조직의 통일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한 결과 1937년 조선민족전선연맹을 결성하였다. 이 단체에는 위의 3개 단체 외에 유자명의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도 참가하였다. 이후 한커우(漢口)로 이동하여 일본 조계지에 거처를 정하고 활동했는데, 이때 김약산·박정애·김규광·두군혜·최창익·허정숙·이춘암·이영준·문정일 등이 활약하였다. 유자명은 1944년 4월 임시정부 제5차 개언에 앞서 조소앙 등과 7인 헌법기초위원을 맡았다. 이때를 제외하고는 표면에 나서서 활동하기보다 작전의 배후 참모로서 역할을 하였다. 광복 후 1950년 귀국을 결심했으나 6·25전쟁 발발로 돌아가지 못하였고, 이에 중국의 후난농업대학에서 교수생활을 하며 농학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유전휘 교수는 설명을 통해 이것이 자신이 중국에 있게 된 이유라고 재차 강조했다.전시관을 둘러보고 후난농업대학 내에 설치된 유자명 동상을 촬영하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2013년 후난농업대학 제2교학관과 제3교학관 사이의 공터에 세워진 유자명 동상에는 ‘한국의 국제적 전우이며, 충청북도 충주에서 태어난 후난농업대학 교수이자, 저명한 원예학자였던 독립운동가’라고 새겨져 있다. 다만 동상에는 그의 고향인 충주가 중주라고 잘못 각자되어 있었다. 타국에서 농업인으로 삶을 마감했던 위대한 국제적 인물 유자명은 그렇게 후난농업대학에서 그 정신을 유지하고 있었다.         alt 조선민족전선연맹 터 전경         alt후난농업대학 내 유자명 동상alt유자명 가족사진alt후난농업대학에서 실습강의를 하고 있는 유자명 alt유자명 전시관alt유자명 전시관 내부             시간은 벌써 11시를 넘기고 있었다. 유전휘 교수를 통해 후난농업대학에서 한국인 방문단과 조촐한 점심식사를 함께하고 싶다는 의견을 전해왔다. 우리 일행은 흔쾌히 응했다. 학교 교내 식당에 마련된 자리에는 아주 특별한 포도주가 있었다. 바로 유자명이 개발한 포도로 만든 포도주였던 것이다. 간단한 시음과 함께 한중우호가 이곳에서도 강하게 싹트고 있음을 다시 한 번 느꼈다. 흐뭇한 점심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다음 목적지인 독립운동단체 한중호조사(韓中互助社)를 향해 길을 나섰다.다음호에 계속 ]]> Tue, 02 May 2017 13:10:02 +0000 5 <![CDATA[행복한 인생의 답은 오늘에 있다 ]]> 글 장근영 심리학자행복한 인생의 답은 오늘에 있다미래의 안녕을 위해 현재의 행복을 미루자는 건 옛말이다. 한 번 사는 인생 후회 없이 살고 싶다면 외쳐라. YOLO! 당신은 오늘을 사는가, 내일을 사는가. alt 재 주목 받는 YOLO의 가치‘인생은 한번 뿐(You Only Live Once)’. YOLO의 기원은 상당히 오래되었다. 괴테가 1774년에 쓴 희곡 <클라비고>에도 ‘세상에서 한 번 뿐인 인생’이라는 문구가 등장하며, 1800년대 요한 스트라우스 2세가 작곡한 왈츠의 제목 중에도 역시 같은 문구가 있다. 물론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진 라틴어 경구 ‘너도 반드시 죽는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Memento mori)’도 결국 같은 맥락이다. 21세기 들어서 이 단어는 트위터나 그래피티 같은 청년문화와 예술을 통해 점점 많이 알려지다가, 드레이크(Drake)라는 랩퍼의 노래 ‘the Motto’에서 인용되며 한 집단의 가치관을 대표하는 문장으로 자리 잡았다. 그런 면에서 이 문구는 ‘#해시태그’ 라는 칼럼의 취지와도 아주 잘 맞는다. YOLO는 실제로 트위터 사용자들이 많이 사용하는 해시태그 중의 하나이니 말이다.당장의 쾌락과 당장의 용기 사이어떤 사람들은 이런 태도를 불안한 눈으로 본다. 앞서 인용한 라틴어 경구 ‘메멘토 모리’가 ‘그러니까 지금을 즐겨라(Carpe diem)’라는 결론으로 이어지듯, YOLO도 지금 당장의 즐거움이나 쾌락에만 매달려서 미래에 대한 준비나 타인과 사회에 대한 책임을 방기할 것이라고 우려하는 것이다. 그런 걱정에는 그럴듯한 근거도 있다. 심리학자들에 따르면 인간과 인간 사이의 신뢰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지속성에 대한 믿음이 필요하다. 예컨대 사람들은 지금 내가 만나는 사람을 앞으로도 계속 만나야 한다고 생각할 때, 그 사람과의 약속을 지켜야 할 필요를 느낀다. 만약 영영 다시 볼 일이 없는 사람이라면, 그와의 약속을 지키기보다는 지금 당장 나에게 이익이 많은 쪽을 선택하고 싶어진다. 사회나 세상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일 수 있다. 한 번만 사는 세상이라면, 도덕적으로 옳고 그름을 따지거나 윤리의식을 갖고 참고 살아가기보다는 그저 지금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사는 게 최선이 아니겠나. 내세나 윤회에 대한 종교적인 신념이 사람들을 더 도덕적으로 만든다는 종교인들의 주장도 같은 맥락이다. 현세에서 죄를 저질러가며 즐긴 쾌락의 대가를 내세에서 치러야 한다는 믿음이 있다면 우리는 좀 더 조심스럽고 윤리적으로 살아가지 않겠느냐는 것이다.하지만 인류의 역사를 돌이켜 보면 이런 우려는 불필요해 보인다. 인생이 한 번뿐이라는 생각이 과감한 도전과 모험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에 헌신하기 위해서는 나라와 후손의 미래에 대한 걱정도 필요했겠지만, 한 번뿐인 인생을 조국 독립을 위해 던지자는 과감함 역시 반드시 필요했을 것이다. 우리가 용기를 내기 위해서는 자신감이나 든든한 지원도 필요하지만, 어차피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인생인데 잃을 것이 뭐가 있겠느냐는 미련 없는 태도도 중요하다. 그렇게 용기를 얻은 많은 사람들이 정의를 위해 싸우고 세상을 혁신과 발전으로 이끌어갔다.인생을 좌우하는 건 과거도 미래도 아니다YOLO라는 단어가 알려진 과정이나 배경 탓에, 이것이 주로 젊은이들의 태도나 가치관을 대표한다고들 생각한다. 하지만 반드시 그래야 할 이유는 없다. 삶의 유한성을 가장 절실하게 느끼는 사람들은 젊은이들이 아니라 인생의 반환점을 돌아선 중년 이후의 성인들이기 때문이다. ‘반환점’이란 지금까지 지나온 거리보다 앞으로 남은 거리가 더 짧아지기 시작하는 경계선이다. 그동안은 앞길이 구만리 같고 끝이 없을 것 같던 인생이었지만, 반환점 이후부터는 조금씩 그 결말이 보이기 시작한다. 같은 직장에서 비슷한 일을 하는 선배들이나 앞서가는 동료들이 예측의 근거가 된다. 구체적인 미래가 그려지기 시작하면, 질문 하나가 떠오른다. “이것이 진정 내가 원하는 내 인생의 마무리인가?” 이 질문에 ‘그렇다’는 답을 할 수 없다면, 나의 인생은 지금 심각한 위기에 처한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질문을 직면하는 것 자체를 꺼린다. 그랬다가는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현실을 마주해야 할까봐 두렵기 때문이리라. YOLO의 힘은 그 확고부동한 진실성에 있다. 우리에게 인생이 단 한번뿐이라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명확한 사실이 아닌가. 조만간 평균수명 100세 시대가 온다고 하지만, 우리들 각자의 앞일은 아무도 모르는 법이다.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고 과거는 이미 지나간 것이라면 우리가 ‘현재’를 지내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따라서 인생을 제대로 산다는 건 바로 지금 현재에 충실하게 산다는 이야기이리라. 지금 하고 싶은 일, 그리고 지금 해야 하는 일을 놓치지 않고 최선을 다해 달성하려는 자세, 그것이 YOLO의 결론이 아닐까. alt                         장근영심리학자 겸 칼럼니스트. 연세대학교 심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국책연구소인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에서 활동하며 대학에선 매체심리학·발달심리학 등을 강의하고 있다. 저서로는 『심리학 오디세이』, 『팝콘심리학』 등이 있다.       ]]> Tue, 02 May 2017 13:01:30 +0000 5 <![CDATA[들어가며 항일무장투쟁, 그 출발점은?]]> 우리 민족은 3·1운동 이후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을 경험하고 조직적인 무장투쟁의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독립을 위한 확실한 길은 일제와 독립전쟁을 전개하여 승리하는 것이었다. 이후 만주·간도·연해주 등지에서 항일무장투쟁을 위한 수많은 독립전쟁 단체들이 조직되었으며, 체계적인 군사 훈련을 실시하면서 국내에 진입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독립전쟁을 전개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왔다.”홍범도 선생은 그동안 준비해온 독립전쟁을 감행하기로 결심하였다.1919년 8월, 노령의 ‘대한국민의회 군무부’ 소속 군대를 인솔해 그 해 9월 간도에 도착하였다. 여기에서 인원을 지원받아 ‘대한독립군’을 편성한 뒤 본격적인 항일무장투쟁에 나섰다.이후 1920년 초반, 최진동의 ‘군무도독부’와 연합해 대규모 국내진공작전을 펼쳤다. 대대적인 기습을 받은 일제는 대한독립군을 추격하였으나, 이마저도 참패를 당하게 된다. 일제는 다시 약 250명 병력의 ‘월강추격대’를 편성한 뒤 1920년 6월 만주 봉오동으로 진군해왔다. 그렇게 봉오동전투의 서막이 올랐다.]]> Tue, 02 Feb 2021 09:29:07 +0000 50 <![CDATA[톺아보기 20세기 전반기 한민족의 항일무장투쟁-독립전쟁]]> 글 장세윤(성균관대 동아시아역사연구소 수석연구원) 2020년은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일명 청산리독립전쟁, 청산리대첩)로 대표되는 ‘독립전쟁’ 100주년이 되는 해였다. 그러나 본격적인 항일무장투쟁에 대한 연구는 이제 시작이라고 할 만큼 해결해야 할 과제가 산적해 있다. 1910년 전후부터 독립사상의 큰 조류는 일제와의 독립전쟁을 전개하여 일제를 몰아내고 민족의 해방과 나라의 독립을 회복해야 한다는 ‘독립전쟁론’이었다. 이에 ‘독립전쟁’ 101주년을 맞이하는 시점에 20세기 전반에 전개되었던 한민족의 항일무장투쟁, 독립전쟁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항일무장투쟁의 주요 흐름과 단체 1910년대 일제의 한국 지배는 무력 수단을 동원한 폭압적 무단통치 방식이었다. 한민족의 구국운동인 의병전쟁(1895~1910)을 무력으로 진압하는 데 성공한 일제는 강점 직전인 1910년 8월 25일 「집회 취체(取締)에 관한 건」을 공포하여 한민족의 기본권을 완전히 부정하였다. 이 시기 일제의 식민지 지배정책을 대표하는 것은 토지조사사업이었는데, 이는 한국을 식민지 지배체제로 전환시키기 위한 총력적 침략정책이었다.한편 1910년 12월 이른바 ‘안악사건’과 1911년 1월 ‘데라우치 조선총독 암살 미수사건’ 등을 조작하며 독립운동을 탄압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폭압적 무단통치에도 국내외에서 한민족의 독립운동은 계속되었다. 독립운동의 체제 정비와 만주(중국 동북지방)와 러시아 극동 연해주 등에서 해외 독립군기지 개척운동이 전개되었고, 일제강점기 최대의 독립운동인 3·1운동으로 결실을 맺었다. 또 중국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세워졌다.1920년대 일제의 식민지 통치는 한민족의 계층 분화를 촉진하고 민족 내부의 갈등을 증폭시켰다. 특히 1920년 6월과 10월에 중국 연변지역(북간도)에서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 등 ‘독립전쟁’이 전개되었다. 또 만주 지린에서 김원봉 등의 의열단이 창립되어 1930년대 중반까지 국내외에서 치열한 의열투쟁(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이후 1920년대 중후반 사회주의 사상이 확산되고, 계급적으로 각성한 노동자·농민들이 민족해방운동의 주체로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로써 다양한 이념과 방법론에 따라 독립운동의 대중적 전선 확대와 적극적 대일항쟁이 전개되었다. 한편 1920년대 중반부터는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 사이에 협동전선 구축을 위한 노력이 나타났는데, 민족유일당운동과 신간회운동이 그 사례이다. 1929년 11월에는 전국적 항일운동인 광주학생독립운동이 발발하였다. 1930년대 일제의 식민지 통치방식의 변화, 즉 군국주의적 지배의 강화와 중국 동북지방 침략은 한국인들의 독립운동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일제의 만주 침략으로 이 지역에서 한국인들이 중국인들과 함께 힘을 합쳐 일본의 침략에 항거하게 되었다. 민족주의 계열의 한국독립군과 조선혁명군, 중국공산당 계열의 동북항일연합군 내 한인들의 활동이 바로 대표적 사례이다.그러나 1932년 초 일제의 조종을 받는 ‘만주국’ 성립 이후 만주지방에서는 일제의 탄압이 강화되면서 이곳에서 활동하던 한국 독립운동가들이 중국 본토(관내 지방)로 이동하게 되었다. 또한 1932년 상하이에서의 윤봉길 의거는 침체된 중국 관내 지방 독립운동을 활성화하는 계기가 되었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고난의 유랑길에 올랐다. 국내에서는 신간회 해체 이후 독립운동의 중심이 학생운동과 노동자·농민운동으로 계승되었으며, 적색 노농조합운동이 격화되었다.1937년 중일전쟁을 도발한 일제는 1938년 ‘국가총동원법’을 제정하여 전시동원체제로 돌입하고, 전시 수탈을 강화하였다. 이 시기 황민화 정책은 1944년 징병제 실시 이후 절정에 달했다. 이러한 일제의 전쟁 동원과 극심한 탄압으로 한국인들은 매우 큰 고통을 겪어야 했으며, 고유의 전통과 정신문화를 유린당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도 한민족은 중국과 러시아 연해주, 미주지역 등에서 독립운동을 끈질기게 지속하여 결국 제2차 세계대전 종전 및 일본의 패망과 함께 독립을 되찾을 수 있었다. 이 무렵 활동했던 주요 독립운동 세력은 중국 본토의 대한민국임시정부와 한국광복군, 중국공산당과 함께 활동했던 화북조선독립동맹, 러시아 연해주의 동북항일연군 교도려(소련 적군 제88여단) 내 한인들, 국내의 조선건국동맹 등이 있었다. 이들 조직은 나름대로 일제의 패망을 예견하고 한민족의 독립과 무장투쟁, 근대적 민족국가 수립을 구상하고 있었다. alt대한독립군 홍범도 유고문(1919. 11.)독립전쟁의 의미와 시사점독립운동이란 식민지 상태로 전락한 식민지 피압박 약소민족이 자주국가의 수립과 자립경제의 실현을 위하여 제국주의 종주국의 지배와 침략 상태를 전복하기 위해 노력·투쟁하는 근대의 민족저항운동을 말한다. 독립운동은 피압박·피지배 약소민족이 현실에서 모순되고 있는 식민지 종주국의 지배와 침략, 수탈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전개하는 다양한 형태의 저항운동을 총칭하는 개념이다. 따라서 기본적으로 모순에 찬 현실을 변혁하기 위한 현실변혁운동으로서의 조직적 무력투쟁은 물론, 여러 가지 사회운동이나 농민·노동·문화운동 등 다양한 대중운동이나 조직운동의 형태로 전개되기도 한다. 특히 무장투쟁은 가장 어려우면서도 가장 효과적인 독립운동의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세계사적으로 볼 때 피압박 약소민족 스스로 독립운동을 통해서 독립한 나라는 18세기 말 이후에는 거의 없었다고 할 만큼 어려운 것이라고 할 수 있다.우리 민족은 세계 각지에서 치열하게 독립운동을 전개하여 직·간접적으로 독립을 쟁취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과 의미가 제대로 평가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시각은 하루빨리 시정되어야 할 것이다.이제 한국 사회에서 우리 선열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헌신하며 치열하게 앞장섰던 만주 독립전쟁이나 의열단의 무장투쟁 등에 관한 이야기는 과거의 기억으로 점차 잊혀가고 있는 것 같다. 어떤 면에서는 장엄하고 비장한, 어쩌면 슬프고도 아름다운 독립전쟁의 거대한 서사시, 한편의 멋진 대하드라마와 같은 ‘무궁무진한 이야기의 보고’가 희미해져가고 있는 것이다. 이 장대한 한편의 서사극에 등장한 영웅들이 있는가 하면, 아무런 이름도 명예도 가족도 남기지 못하고 이름 없이 스러져간 무명의 의사·열사·지사·용사들은 또 얼마나 많았는가? 우리는 잊힌 단체와 인물, 크고 작은 독립운동(사건), 특히 의인과 영웅, 열사, 지사들을 더 많이 찾아 알리고 기억하며 기념할 필요가 있다.오늘날 엄청난 국제화와 세계화의 흐름 속에서 자주와 독립, 그리고 주체적 관점과 실천의지의 소중한 가치를 재인식하는 경우가 많다. 도저히 불가능할 것으로 판단되는 매우 어려운 조건을 무릅쓰고 결사 항전의 각오로 ‘무에서 유를 창조한 백절불굴의 투쟁정신과 독립정신’은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여전히 소중한 가치와 삶의 자세로 귀중한 의미를 가질 수 있다고 믿는다. ]]> Tue, 02 Feb 2021 09:43:52 +0000 50 <![CDATA[만나보기 잊힌 독립운동가 고평 독립군 참모와 지휘관 그리고 납북]]> 글 장세윤(성균관대 동아시아역사연구소 수석연구원) 일제강점기에 자신은 물론 온 집안이 항일독립운동에 투신하여 분골쇄신하며 자유와 평등, 정의와 공공선을 실현하기 위해 희생했음에도 전혀 알려지지 않은 인물들이 많다. 이에 무명의 독립운동가를 소개하여 우리에게 주는 의미를 되새겨보고자 한다. alt고평(高平, 본명 고인석)그는 대종교에 입교하여 중국 연변(북간도)으로 망명하였다. 이후 만주 독립군인 의군부와 고려혁명군, 독립운동 기관인 신민부에서 항일무장투쟁의 주역과 조역으로 활동하였다. 귀국 후에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재판관으로 활동했으나, 6·25전쟁 이후 납북되어 최후를 알 수 없게 되었다.고평의 생애와 독립운동 고평(高平, 본명 고인석)은  1884년에 전라북도 부안군의 장흥 고씨 전통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장흥 고씨는 임진왜란 때 의병장 고경명과 그의 두 아들이 순절하면서 크게 명성을 떨쳤다. 고평은 8세 때 전라남도 담양군 창평면 고씨 지파의 종가로 입양되어 8년 동안 한학(漢學)을 수학하였다. 그 후 서울로 가서 보광학교와 관립 법관양성소를 졸업하고 춘천 지방법원의 검사로 한 달간 근무하고 사임한 뒤 고향 부안으로 돌아왔다.1911년 7월 신흥 민족종교로 세력을 확장하고 있던 대종교에 입교하여 주요 직책을 맡았는데, 1907년 장흥 고씨 일족인 고광순 의병장 등의 순절, 대종교 조직과의 연계가 만주지역(중국동북지역) 독립운동에 투신하는 주요 계기가 되었다. 고평은 1913년 4월 대종교 동도본사의 전강 직책을 맡아 대종교 신도들이 이주하던 중국 지린성 왕청현으로 이주하여 독립운동에 종사하게 되었다. 특히 그는 대종교 세력을 대표하여 러시아 연해주와 중국 연변(북간도)을 왕래하면서 연변 지역의 3·1운동이라 할 수 있는 ‘룽징(龍井) 3·13 반일시위운동’의 기획에 참가하여 연변지역 항일독립운동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가 노력한 결과 1919년 3월 13일 연변지역의 룽징(龍井)에서는 3만여 명의 한인들이 대거 참가한 ‘3·13 반일시위운동’이 전개되었다.또 1919년에는 연변지역에서 항일무장투쟁 조직인 ‘의군부’가 조직되었을 때 참모장 직책을 맡았는데, 이듬해 8월 하순 항일독립전쟁에 앞장섰다. 1920년 6월의 봉오동전투와 그해 10월의 청산리전투 시기에도 독립군 부대의 무기 구입과 운반, 각 부대의 연합과 후원에 크게 기여하였다. 1923년에 역시 연변지역에서 1923년 5월 조직된 고려혁명군 독립군 부대의 참모장을 맡아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이후 그는 1920년대 북만주 지방에서 조직된 독립운동 조직이자 한인 교민 자치조직인 신민부의 과장을 맡아 북만주 지역의 독립운동과 한인 교민 자치운동에 기여하였다.만주지역 독립운동이 어려워진 1930년대와 1940년대 전반기에는 중국 관내(關內) 지역으로 이동하여 중국 국민당정부 관련 조직의 참모장이나 군법처장 등 법관을 맡아 한·중 연대 항일투쟁에 기여하였다. 1945년 4월 귀국하여 대종교 간부로 활동하는 한편, 1949년 후반기에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재판관으로 활동하며 친일 민족반역자의 심판에 앞장섰다.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는 1950년 6·25전쟁 때 납북된 뒤 잊히고 말았다. 앞으로 관련 자료를 더 발굴·수집하여 그의 생애를 새롭게 조명할 필요가 있다. alt재판관 고평 반민특위 판결문(1949. 4. 19.)고평의 독립군 부대 통합 노력고평은 대한제국이 멸망한 3년 뒤인 1913년, 4월 30세 때 부모와 처자를 멀리하고 낯선 만주(북간도)·연해주로 건나갔다. 이후 목숨을 걸고 싸우는 항일무장투쟁에 헌신하여 거의 10여 년을 투쟁하였다. 해외 무장독립운동에 가담하여 험난한 장년기를 보냈다. 특히 중국 연변지역의 3·1운동이라 할 수 있는 룽징(龍井)의 3·13 반일시위운동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그리고 별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1920년 6월의 봉오동전투 당시 홍범도의 대한독립군과 군무도독부의 최진동 진영을 중개하여 대규모의 독립군 연합부대를 형성한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의 중개와 독립군 연합부대 형성 노력의 결과로 유명한 독립군의 ‘봉오동전투(봉오동대첩)’ 승첩을 가능하게 했던 것이다. 또 1920년 10월 하순 김좌진·홍범도·안무 등 독립군 연합부대가 청산리 일대에서 대규모 일본군을 격파하는 ‘청산리전투(일명 청산리대첩)’를 수행 중일 때 연변 동부지방인 훈춘(琿春) 일대에서 치열한 독립전쟁을 벌인 사실도 높이 평가할 만 하다.1945년 8월 광복 당시 그는 62세의 고령이었다. 그는 주로 대종교 활동과 반민특위 재판관으로 활동하며 사실상 제2의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그는 서울 중구에서 거주했는데, 1950년 여름 6·25전쟁 동안에 피난하지 못한 채 서울에 남아 있다가 북한군에게 납북되고 말았다. 그때 이미 67세였으니, 지금 생존해 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는 명가의 후손으로 편안히 살 수 있었지만, 험난한 삶을 살다가 납북되어 최후를 알 수 없는 상황이다. 이와 관련하여 같은 장흥 고씨 일족인 전북 부안군 청림리 출신의 고광설(高光契, 일명 고광계) 역시 고향인 전북 및 호남지방, 함경남도와 중국 동북지방을 왕래하며 대한광복단 교통원으로 활동한 사실이 최근에 밝혀졌다. 따라서 호남지방 장흥 고씨 일족의 의병항쟁과 그 이후의 공화주의 지향 독립운동을 연계하여 조사할 필요성도 있어 보인다. alt고평 특무대 편성 신문기사 (『동아일보』 1923. 4. 30.)특무대 사단 편성 대장 고평 이하의 새로운 활동 · 의열단장과 운동방침을 협의“종래 중국과 노령에 접한 지방인 니콜리스크와 보크라치나야 등지를 근거로 삼고 고평이란 사람이 중심이 되어 전성환, 허승완, 최태순, 기타의 동지로 더불어 조선독립군 특무대를 조직하여 4년 동안 각처에서 활동하는 중이더니 대장 고평은 금년 음력 이월 중에 동지와 같이 함경남북도 방면에서 비밀리에 들어와 여러 가지 상황을 조사하고 돌아간 후 그전에는 여러 대대로 편성하였던 특무대 독립군을 이번에 사단으로 편성을 고치고 규모를 늘리기로 결정하고 방금 계획을 진행 중인데, 금년도 경비 삼십육만 원 중 이십오만 원은 모처의 원조로 얻게 되었으나, 십일만 원이 오히려 부족하므로 이것을 구처하기 위하여 방금 고심 중이라 하며, 대장 고평은 사단 편성 후 독립운동의 방침을 협의하기 위하여 의열단장 김원봉과 만나보고자 모 방면으로 향하였는데, 오월 상순에 다시 돌아와서 즉시 한편으로는 부족한 군자금을 모집하고 한편으로는 사단 편성을 시작하리라더라(장춘).”고평이 중국 관내 무장투쟁 조직인 의열단과 연계하여 항일무장투쟁을 적극 강화하려는 시도를 보여주는 『동아일보』 1923년 4월 30일자 기사다. 기사를 보면 고평이 널리 군자금을 모집하여 사단급 독립군을 편성하기 위하여 멀리 중국 남방에 있는 김원봉을 만나러 가는 등 동분서주하였던 사실을 알 수 있다. 다만 실제 이 기사의 내용대로 실현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Tue, 02 Feb 2021 15:51:22 +0000 50 <![CDATA[이달의 독립운동가 노사학파 유학자들 호남 최초로 의병을 일으키다 기우만·박원영·김익중]]> 글 독립기념관 전시부노사학파 유학자들, 호남의병으로 활약하다1895년 명성황후가 일제에 의해 시해당하고 단발령이 내려지자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전라도에서는 노사학파를 이끌던 기우만이 1896년 호남 최초로 의병을 일으켰다. 1907년 광무황제 강제 퇴위와 대한제국 군대 강제 해산 등 일제의 침탈이 더욱 가속화되자 호남의병은 기삼연의 주도로 ‘호남창의회맹소(湖南倡義會盟所)’라는 의병연합부대를 결성하여 조직적이고 치열한 의병항쟁을 이어나갔다.노사학파를 이끈 기우만, 호남 최초의 의병을 일으키다기우만은 1846년 전라남도 장성에서 태어났다. 그는 할아버지 노사 기정진의 학문을 이어받아 노사학파를 이끌었다.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이 일어나자 기우만은 전라도 각 고을에 격문을 보내 의병을 모집하고, 1896년 음력 2월 7일 호남 최초로 장성의병을 일으켰다. 그러자 기삼연, 김익중, 박원영 등 노사학파 문인들과 담양의 고광순 등이 의병에 참여했고, 이 때 기우만은 의병대장으로 추대되었다. 기우만을 중심으로 한 호남의병은 음력 2월 30일 서울로 진격하고자 광주향교에 집결하여 ‘광산회맹(光山會盟)’을 추진하던 중 고종의 명으로 해산하였다. 기우만은 의병에서 물러난 후에도 상소운동을 전개하였고, 일제의 감시를 받아 여러 차례 체포되었다. 1909년 「호남의사열전(湖南義士列傳)」을 집필해 의병에 참가했던 호남 의사들의 행적을 후세에 남겼다.alt기우만의 초상화(1916) alt기우만이 작성한 상소문 「을미소」(1895)_한국고전번역원 제공호남의병으로 순국한 박원영과 김익중박원영은 전라남도 광주에서 태어났다. 그는 기정진의 제자로 기우만의 장성의병에 참가하였다. 박원영은 광주향교의 재임*을 맡아 광주향교를 끝까지 지키다가 의병을 진압하러 온 진위대**에 의해 체포·처형되었다. 기우만은 박원영의 순국 이후 그를 추모하며 제문(祭文)을 지었다.김익중은 전라남도 장성 출신으로 기정진의 제자이다. 그는 1896년 장성의병으로 활동하며 포수들을 의병에 합류하도록 권하였다. 1907년 장성에서 결성된 의병연합부대인 ‘호남창의회맹소’에서 종사(從事)라는 직책을 맡아 의병항쟁에 앞장서다가, 11월 고창읍성에서 일본군경의 습격을 받아 순국하였다.  alt박원영이 순국한 광주향교 alt 기우만이 남긴 「호남의사열전」 중 김익중 전기_국립문화재연구소 제공국모의 원수를 설욕하지 못하고가슴을 치며 탄식하는 자들은 군주의치욕에 죽지 못하였다.(중략)통문이 이른 즉시 마땅히 날짜를지정하여 각각 소관 주군에서는 의를향한 민병을 소집하라.1896년 음력 1월,기우만이 호남 최초로 봉기한 장성의병의 시작을 알린 격문 alt호남의병에 대한 일제의 전투기록인 『전남폭도사』(1913) alt호남의병이 사용했다고 알려진 죽창, 화승총 등의 무기alt]]> Tue, 02 Feb 2021 16:18:24 +0000 50 <![CDATA[아름다운 인연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임청각 주인 이상룡과 김우락 부부]]> 글 김형목(사단법인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이사) 이상룡은 나라가 망하자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펼치기로 결심한다. 그의 부인 김우락도 남편의 뜻을 따라 망명 준비에 나섰다. 이상룡은 이듬해 정월 명절을 쇠고 만주로 걸음을 옮겼다. 망명 사실이 드러날 것을 우려한 그는 홀로 길을 나섰다. 예상한 대로 그가 떠난 뒤 가족들은 일본 경찰의 감시를 받았다. 그렇게 이상룡 일가가 모두 서간도에 모이기까지는 꼬박 3개월이 걸렸다. 임청각 일가를 새롭게 조명하자임청각은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건축물 중 하나로, 선비문화 하면 임청각을 떠올릴 만큼 친근하게 다가온다. 중종 14년(1519)에 지은 임청각 공간은 사당과 별당형인 군자정, 본채인 안채·중채·사랑채·행랑채 등이 주위의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조화로운 배치로 신비함과 아늑함을 풍긴다. 외형과 달리 일제는 집 앞으로 중앙선 철도를 만들었다. 이때 집의 부속 건물 등이 헐려 나가 현재는 60여 칸만 남아 있다. 온전히 보존되지 않아 아쉬움은 있으나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이곳 주인들은 만주벌과 중국 관내 지역에서 조국 광복을 위해 고단한 삶을 마다하지 않았다. 독립운동 성지인 임청각은 이상룡과 김우락 부부를 포함해 이상동, 이봉희, 이준형, 이형국, 이운형, 이광민, 이병화, 허은 등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하였다. 시대적인 소명에 온 가족이 몸을 던지는 눈물겨운 삶에도 서로에게 의지하고 배려하였다.임청각의 주인인 종손 이항증은 “남들은 대단한 독립운동가 집안이라고 하지만 정작 나는 고아원에서 자랐다. 광복 후 친일파를 제대로 청산했다면 독립운동가 후손들이 고아원을 전전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뒤늦게나마 임청각에 대한 대통령과 국민적 관심에 감사할 따름이다. 내가 살아있는 동안 일제에 의해 철저히 망가지고 훼손된 독립운동가의 본거지인 임청각이 다시 제 모습을 찾게 되었으면 한다”고 전하였다.alt석주 이상룡이상룡, 망명길에 오르다이상룡은 1858년 11월 24일 경북 안동군 부내면 신세동(현 안동시 법흥동) 임청각에서 아버지 이승목(李承穆)과 어머니 안동 권씨 사이에서 3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고성, 자는 만초(萬初), 호는 석주(石洲), 다른 이름은 계원(啓元)이다. 한학을 수학하다가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선산이 있는 도곡마을로 들어갔다. 이곳에서 군사학을 연구하고 무기를 고안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11월 단발령 반포, 을사늑약에 반발하여 두 차례에 걸쳐 의병운동에 참여하였다.그는 두 번의 의병운동을 일으켰으나 성공하지 못하자 새로운 국권 회복을 모색하였다. 유인식·김동삼 등과 근대교육기관인 협동학교 운영은 시대 변화에 부응하려는 일환이었다. 대한협회의 안동지회 조직도 마찬가지였다. 나라가 망하자 국사 저술에 몰두하는 한편 만주를 무대로 국권 회복을 위한 독립군기지 건설 계획을 세웠다. 남아 있을 가족에게 뒷일을 부탁하고 집안에서 거느리던 노비를 해방시켰다. 이어 만주를 향해 출발하여 목적지인 서간도 삼원보 추가가에 도착하였다. 독립군기지 개척으로 독립전쟁을 이끌다이곳에서 먼저와 있던 신민회 회원 이동녕과 이회영 등과 독립군기지 개척에 앞장섰다. 자치기관인 경학사와 부민단을 설립하고 사장과 단장도 각각 맡았다. 경학사 지도부와 함께 한인 2세들 교육과 독립군 양성을 위한 신흥강습소를 설립하였다. 수천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백서농장 병영도 마련하였다. 한인 청년들은 이곳에서 인근 야산을 개발해 농사를 짓고 군사훈련에 참여하는 등 독립전쟁을 준비하였다.국내 3·1운동에 자극을 받아 한인사회 지도자들과 합의하여 서간도 독립군기지를 체계적으로 이끌어 갈 한족회를 조직하였다. 이어 대한민국임시정부 산하의 군사기관인 서로군정서를 조직하였다. 서로군정서는 북로군정서와 함께 임시정부 산하 양대 군사기관이 되었다.신흥무관학교를 통해 독립군 병사를 충당함과 함께 무기 확보에도 전력을 기울였다. 서로군정서가 독립군단 체계를 갖추자 본격적인 무장활동을 개시하여 일제 경찰서와 면사무소 등을 습격하였다. 일제 추격에 서로군정서를 비롯한 독립군단을 일본군이 쫓아오자 이들을 상대로 벌인 전투가 바로 청산리전투였다. alt임청각 사랑채임시정부 국무령으로 취임하다1925년 5월에는 임시정부 내무총장 이유필과 법무총장 오영선이 만주로 왔다. 이들은 북만주 신민부와 정의부의 대표들을 만나 임시정부 지원을 요청하였다. 그리고 정의부에서 천거하는 인물을 임시정부의 초대 국무령에 선임하자는 안을 제시하였고, 이에 임시정부가 있는 상하이로 갔다. 임시정부 인사들과 협의를 마치고 9월 24일 삼일당에서 임시정부 국무령에 취임하였다. 각계 인사들과 협의해 이탁 등 9명을 국무위원으로 임명하였다. 만주에서 무장투쟁 경험을 갖춘 인물들이 임시정부의 주축이 되었다. 그런데 이들 대부분은 취임을 거부하였다. 중앙의회가 정의부 인물을 의회의 의결을 거치지 않고 행정위원회 독단으로 임시정부의 국무위원으로 천거를 문제로 삼았다. 이런 일이 벌어지자 자신이 치밀하지 못하였음을 반성하고, 1926년 2월 만주로 돌아오고 말았다. ‘괴뢰 만주국’ 설립 이후 일제의 마수가 점차 강화·확대되었다. 젊은 동지들의 힘을 의지해 각지를 전전하던 중 1932년 5월 12일 만 74세의 나이로 지린성 쉬란현 소고전자에서 운명하였다. “국토를 회복하기 전까지는 내 유골을 고국에 싣고 가지 말고 우선 이곳에 묻어 두고서 기다려라”라는 유언에 따라 소고전자에 가묘를 썼다. 석주의 유해는 1990년 10월 중국에서 대전의 국립현충원으로 이장되었다가, 1996년 5월 서울 동작구의 국립현충원 임시정부 요인 묘역에 안장되었다.“석주 선생이 보여주셨던 지행합일의 의지와 포용적 태도, 변화를 거듭했던 탄력적인 모습은 우리에게 큰 울림을 줍니다. 더구나 선생은 그 길을 혼자 가신 것이 아니라 만주의 한인 동포들을 아우르며 가셨습니다. 선생의 위대성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라는 평가는 삶의 여정을 그대로 보여주는 자화상이다.김우락, 일가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다김우락은 경북 안동 임하면 천전리 즉 내앞마을의 의성김씨 집성촌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김진린과 어머니 박씨 사이에 4남 3녀 중 맏딸로 태어났다. 내앞마을은 33명의 독립유공자를 낳은 독립운동 성지임에 틀림없다. 중심인물인 김우락의 오빠 백하 김대락은 사재를 털어 국권회복운동에 참가하였다. 1911년 가족 전체를 이끌고 만주로 망명한 뒤 이상룡 일가와 함께 경학사 등을 조직한 독립운동가다. 김대락에게는 김효락, 김소락, 김정락 3명의 남동생과 김우락, 김순락, 김락 등 3명의 여동생이 있었다. 김우락은 명망 있는 부잣집 가문 출신의 남편인 이상룡과 혼인하여 99칸 저택인 임청각의 안주인이 되었다. 일제 침략이 없었더라면 훌륭한 저택의 마나님으로 남부러울 것이 없이 살았을 터였다. 운명은 국망을 전후로 완전히 달라졌다. 대한제국기 최대 비밀결사의 신민회원이었던 남편이 중국으로 망명을 떠날 때 비통한 심정을 다음과 같이 읊었다.“삭풍은 칼보다 날카로워 나의 살을 에는데 살은 깎이어도 오히려 참을 수 있고 창자는 끊어져도 차라리 슬프지 않다. 그러나 이미 내 저택을 빼앗고 또다시 나의 처자를 해치려 하니 내 머리는 자를 수 있지만 무릎 꿇어 종이 되게 할 수는 없다.”망명길을 떠난 남편의 뒤를 따라 가시밭길로 뛰어들어야 하는 운명이었다. 낯선 이국땅으로 망명을 감행한 남편과 함께 김우락은 독립운동의 최일선에 나섰다.내방가사로 독립운동가들 심정을 노래하다안동의 양반 가문 출신인 김우락은 영남규방가사로 험난한 망명생활 등을 표현하였다. 사선을 넘는 와중에도 ‘해도교거사’, ‘정화가’, ‘정화답가’, ‘조선별서’, ‘간운사’ 등 주옥같은 가사를 남겼다. 지사는 ‘간운사’에서 독립운동에 더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하는 아쉬움을 토로하였다. “이 몸이 남자라면 세계 각국 두루 놀아 천하 사업 다할 것을 무용(無用)한 여자라 애달프다’라고 읊었다. 시대적인 제약으로 직접 독립운동에 나서지 못하는 자신을 책망하는 구절이기도 하다. 반면 독립운동은 자신 스스로가 헤쳐 나가야 할 사회적인 책무임을 강하게 암시한다. 슬프다 우리 한국이 좋은 호강산을헌신같이 버리고서그 어디로 가잔 말고통곡이야 천운이여강산아 잘 있거라다시 와서 반기리라. 김우락 「해도교거사(海島僑居辭)」 중일가는 99칸 대저택인 임청각 등 재산을 처분하고 만주로 건너가 신흥무관학교 등을 세워 조국 독립에 온몸을 내던졌다. 그런 만큼 김우락의 삶이 평탄했을 리가 없다. 아들 이준형은 만주와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펼치다 자결하였다. 손자 이병화는 만주에서 무장투쟁에 힘썼다. 독립운동가의 여동생이자 부인, 어머니이자 할머니로서 인생 여정은 항상 긴장된 나날이었다. 남성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은 이처럼 후방기지 역할을 한 공동체가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독립운동을 위해 독립운동 자금은 물론 먹고사는 문제와 같은 사소한 일상사를 도맡아 하는 사람도 필요했다. 모든 역할을 여성들이 해냈다.김우락은 결혼 후 남편·아들·손자·손부며느리 등 일가친척이 모두 독립운동에 투신하는 상황을 맞았다. 군자금을 마련하고 연락책이 되기를 자원한 다른 독립운동가처럼 의복을 만들고 회합 장소를 제공하는 믿음직한 지원자였다. 배고픔을 이겨내면서 남편의 독립운동을 지원한 여성들의 헌신은 조력자 차원을 넘어 동지이자 동반자로서 길이었다.김우락은 1932년 6월에 남편이 지린성에서 숨지자 남편을 만주 땅에 묻고 가족들과 고국으로 돌아왔다. 꿈에도 그리던 고국에서 이듬해 4월에 81세의 일기로 한 많은 삶의 대단원을 내렸다. alt경학사 취지서]]> Tue, 02 Feb 2021 16:39:04 +0000 50 <![CDATA[인문학관 일제강점기 해외 동포들이 써 내려간 항일 민족시가 공립신보와 뎐씨 애국가]]> 글 김동수(백제예술대학교 명예교수·시인) 일제강점기에 상하이, 만주, 블라디보스토크, 미주 등해외에서 발표된 망명 인사들의 항일 민족 시가들이 무관심 속에 방치되어 있다. 이 시가들은 1996년 필자가 미국 U. C. 버클리대학 동아시아 도서관(East Asian Library)에서 수집·정리한 자료들이다. 당시 국내에서 발간된 친일 문학들과 사뭇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어 새로운 인식의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해본다.  alt1.샌프란시스코에서 발간된 공립신보2.하와이에서 발간된 태평양주보3.소련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발간된 선봉4.친일파 스티븐스를 저격한 전명운해외 동포들의 항일 문학미국 캘리포니아주에 있는 U. C. 버클리대학에는 한국학에 관한 자료가 많이 소장되어 있다. 특히 그곳 동아시아 도서관에는 학계에 아직 소개되지 않은 희귀한 고전문학 자료가 아사미(Asami) 문고를 비롯한 한국학 자료실에 다량 수집되어 있다. 그중에는 일제강점기 당시 미주를 비롯한 해외 동포들의 문학작품들이 존재한다. 샌프란시스코와 하와이에서 발간된 <공립신보→신한민보>(1905-1986)와 <태평양주보>(1930~),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발간된 <대동공보>(1908-1910)와 <선봉> (1923-1937), 중국 상하이와 만주 북간도 등지에서 발간된 30여 종에 달하는 신문·잡지 등에 실린 아직 알려져 있지 않는 항일민족 시가들이 1,000여 편이나 있다.    물론 이 중 일부는 국내 문학과 비교해 작품의 완성도 측면에서 미흡한 데가 있기도 하다. 하지만 한 시대의 문학을 평가함에 있어선 작품의 예술적 가치 못지않게 그 시대를 관류하고 있는 시대정신 또한 중요하다고 본다. 이런 측면에서 지난날 한민족이 참혹한 일제의 압제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의연하게 일제와 맞서 싸웠다는 자랑스러운 참모습을 후세에 남길 수 있을 것이다.미국에서 탄생한 <공립신보→신한민보><공립신보(共立新報)>는 1905년 11월 20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재미교포 단체인 ‘공립협회’가 발간한 신문이다. 당시 우리 교포들은 하와이와 캘리포니아에서 주로 사탕수수와 파인애플, 감귤 농장의 노동자로 취업하면서 어려운 이민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때 미국으로 유학을 왔던 안창호가 한국 노동자들의 참혹한 삶의 현장을 목격하고 교포들의 권익 보호와 계몽의 필요성을 절감한 나머지 1905년 4월 샌프란시스코에서 공립협회를 창립하고, 11월 샌프란시스코 퍼시픽가에 회관을 설립하면서 교포신문을 발간하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인쇄 시설을 갖추지 못하여 매주 1회씩 발행하였으나, 이후 성금을 각출하여 1907년 4월 26일(제2권 1호)에 활자 인쇄로 신문을 발행하였다. <공립신보>의 간행 취지는 아래 논설에서 밝히고 있다. 이후 <공립신보>의 성격은 국내 ‘신민회’에서 발간한 항일 민족 기관지인 〈대한매일신보>의 해외 대변지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하였다. 그러던 1909년 2월 10일부터 공립협회가 다른 여러 교민 단체들과 ‘대한인국민회’로 통합되면서 <신한민보(新韓民報)>라는 이름으로 제호를 바꾸고 국민회의 기관지가 되었다.광무 11년(1907년) 4월 26일에 활자로 제2권 제1호를 출간하여 면목이 일층 새로워 보이는 점 군자의 마음을 신선케 하니 어찌 본보의 행복이 아니리오. 이에 다시 강개한 말로 제위 동포에게 고하노니, 이제 국세를 돌아보건대 모든 권리를 다 외인에게 빼앗긴 바 되어 국민의 생명과 재산이 어육의 박활을 당하니 신민된 자 누가 통탄치 아니하리오. 오늘부터 새 활판에 새로 출간하는 새 신문을 새로 보고 새 지식을 발달하며 새 사상을 활발하며 동종상보하는 마음을 일백 번 꺾여도 돌리지 말며 일만 번 죽어도 뉘우치지 말고 용맹 있게 전진하여 우리의 국권을 회복하고 자유의 복 누리기를 천만 축수하노라.<공립신보> 제2권 1호. 1907년 4월 26일자 논설「뎐씨 애국가」와 스티븐스 저격 사건‘뎐씨 애국가’는 1908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발간된 교포신문 <공립신보>에 실린 시가이다. 이 작품은 1908년 3월 유학차 미국에 온 전명운이 샌프란시스코에서 조선총독부 외교고문이며 일제의 앞잡이 스티븐스를 저격한 후 어깨에 총상을 입고 병상에서 쓴 애국가이다.   전명운은 1884년(고종 21) 평안도 출신으로 블라디보스토크에 건너갔다가 1905년 하와이로 이주한 뒤 이듬해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였다. 그는 학비와 생활비를 모으기 위해 철도 공사장과 알래스카 어장에서 막노동을 하였다. 그러면서도 조국 독립에 관심이 많아 안창호가 조직한 ‘공립협회’에 가입하였다.그러던 1908년 3월 20일 일제의 앞잡이 스티븐스가 샌프란시스코 기자회견에서 “일본의 지배는 조선에 유리하며, 오히려 조선의 농민들과 백성들이 원하고 있다”라며 일본을 찬양하는 발언을 하였다. 이에 격분한 전명운이 1908년 3월 23일 스티븐스를 찾아가 방아쇠를 당겼으나 불발되자 격투를 벌였다. 그때 장인환이 나타나 권총 세 발을 발사해 복부를 관통시켰다. 전명운과 장인환의 의거는 조선인의 울분과 기개 그리고 그 부당성을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미주 지역에서 숨죽이고 있던 8,000여 한인들의 애국심과 국권 회복 운동에 불을 지피는 전환점이 되었다.어화 우리 동포들아 / 일심 애국 힘을 써셔四千년의 신성동방 / 신세계에 빗내보셰사농공샹 동력하면 / 대한뎨국 자연부강자유독립하고 보면 / 세계상에 뎨일일셰닛지말아 닛지말아 / 충군애국 닛지말아일심하셰 일심하세 / 나라위해 일심하셰건곤감리 태극기를 / 디구샹에 놉히날려만세만세 만만세로 / 대한독립 어셔하셰「뎐씨 애국가」 1908. 4. 1. ]]> Wed, 03 Feb 2021 11:42:25 +0000 50 <![CDATA[끝나지 않은 독립운동 독립운동 현충 시설의 앱 개발 필요성]]> 글 이계형(국민대학교 교양대학 교수) 공군 장교였던 정상규 중위가 2015년 ‘독립운동가’ 스마트폰 앱을 사비로 개발하여 일반인들에게 독립운동가의 업적과 이름을 알리면서 세인들의 주목을 받았다. 그는 작가로 왕성한 활동을 하면서 잊힌 독립운동가를 발굴하고 이를 책으로 엮어내기도 했다. 그런데 이 같은 독립운동가 관련 내용이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사이트 ‘독립유공자 공훈록’에 정리되어 있음에도 국민들이 편리하게 접근하지 못한 면이 있다. 이제 한 걸음 앞서 ‘독립운동 사적지 앱’을 개발해야 할 때다. 물어물어 가는 독립운동 사적지2019년 11월 경 『충남독립운동사』 3·1운동 부분(홍성·서산·태안)을 집필하면서 관련 유적지를 촬영하기 위해 홍성과 서산 몇 곳을 찾았다. 학교나 행정기관 등 특정 장소에 있는 사적지는 쉽게 찾을 수 있었지만, 홍성군 내에 있는 ‘장곡 3·1운동기념비’, 홍동면 3·1공원 내 ‘기미독립운동기념비’, 금마면 철마산 3·1공원 내 ‘기미독립운동기념비’ 등지를 찾는 데 무진 애를 먹었다. 매년 삼일절에 이곳에서 여러 행사가 치러지기 때문에 인터넷에는 관련 뉴스나 사진들이 올라와 있지만 위치에 대한 정보는 찾기 어려웠다. 장소를 충분히 조사하지 않았던 나의 부주의함도 있겠지만, 답사 전 참고했던 책에 나와 있는 사적지의 주소와 사적지명 모두 내비게이션을 통해 검색되지 않았다. 마을 주민들에게 사진을 보여주고 설명한 뒤에서야 어렵사리 사적지를 찾아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국가보훈처 현충 시설 정보 서비스(http://mfis.mpva.go.kr)에 이와 관련한 정보가 있었다. 그런데 이런 정보를 미리 알았던들 도움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세 곳 모두 국가보훈처로부터 공식 현충 시설로 지정된 곳들이지만, 국가보훈처에 기록된 주소지로는 세 곳 중 어느 한 곳도 검색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독립운동 현충 시설이란 독립운동이 일어났던 장소 혹은 독립유공자의 공훈을 기리고자 세운 기념비·추모비·비석·탑 등과 조형물·상징물을 비롯하여 기념관·전시관·생가·사당 등을 말한다. 이러한 현충 시설들 가운데 2020년 12월 현재 국가보훈처에 등록된 것은 모두 947개로 증가 추세이다. 많은 현충 시설을 설치한 것은 역사적인 장소와 인물을 기억하고 숭고한 독립정신을 후대에 전하여 뜻을 기리고자 하기 위함이다. 이처럼 국가보훈처가 독립운동 관련 사적지 및 현충 시설의 체계적 관리를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일반인들의 현충 시설 인지도나 관심도는 매우 낮은 실정이다. 그러한 시설물이 역사교육을 위해 필요하다는 인식이 높은데도 말이다. 이를 위해서는 현충 시설 정보 서비스가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어야 한다.   alt현충 시설에 대한 접근성 높이기실질적인 정보 서비스를 고민하며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독립운동 현충 시설에 좀 더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앱을 개발하는 것이다. 이를 실행하는 일이 그렇게 어려운 문제는 아닐 것이다. 이미 국가보훈처가 운영하는 현충 시설 정보 서비스를 조금 개선하면 될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우선 개선해야 할 몇 가지를 지적하고자 한다.첫째, 시설물의 실제 이름과 시설명이 다른 경우가 있는데 이를 하나로 통일해야 한다. 예를 들어 국내 독립운동 현충 시설 가운데 맨 위에 있는 ‘(고창군)독립운동 파리장서 기념비’를 살펴보자. 기본 정보의 시설명은 ‘(고창군)독립운동 파리장서 기념비’로 되어 있지만, 실제 기념비에는 ‘한국유림독립운동파리장서비’로 새겨 있다. 서울·대구·전북 정읍 등지에도 같은 성격의 ‘독립운동 파리장서 기념비’기념비가 있는데, 이곳들의 시설명은 비문 그대로 ‘한국유림독립운동파리장서비’이다. 고창의 경우 현충 시설의 형태나 종류(기념비)에 따라 시설명을 정했기에 불거진 문제이다.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이런 예는 적지 않다. 그렇다고 내비게이션에 모두 검색되는 것도 아니다. 이곳을 찾아가려면 어떤 키워드로 검색해야 할 것인가. ‘파리장서’를 입력하면 경남 거창군 거창읍의 침류정(조선시대 관아) 하나만 검색되는데 여기에 ‘파리장서비’가 있기 때문이다. 다른 지역의 ‘한국유림독립운동파리장서 비’의 위치는 검색되지 않는다. 둘째, 주소지를 정확하게 확인해야 한다. 도로명 주소를 우선하되 예전 기록에 번지로 나와 있는 경우가 많아 번지 주소도 함께 적어야 한다. 셋째, 제공하는 사진은 크고 화질이 높은 것으로 교체해야 한다. 현재 현충 시설 서비스에 등록된 사진 중에는 너무 작거나 화질이 떨어져 내용물을 알아볼 수가 없는 경우가 많다. 넷째, 시설물의 역사적인 의미뿐만 아니라 시설물 설치의 시기·주체·위치(장소)·조성 과정 등의 정보도 제공해야 한다. 다섯째, 내비게이션 업체와 협력 관계를 통해 누구나 쉽게 독립운동 사적지를 찾을 수 있도록 위치 서비스를 해야 한다. 여섯째, 현충 시설뿐만 아니라 독립운동 사적지도 이에 포함해야 한다. 사적지의 경우 기념석이나 표지석 하나 세워지지 않은 곳이 적지 않지만, 독립운동의 현장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기 때문이다. 스마트폰을 통해 세상의 모든 정보와 지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세상이다. 독립운동 현충 시설 앱은 현재의 우리를 과거의 역사 현장으로 안내하는 가장 빠르고 정확한 타임머신이 될 것이다. 이 앱을 통해 학생들뿐만 아니라 일반인들도 쉽게 사적지를 둘러보고 독립운동의 의미를 깨닫고, 독립운동 답사 투어가 활성화되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해본다. alt충청남도 홍성군 3·1공원 내 기미독립운동기념비]]> Wed, 03 Feb 2021 11:53:00 +0000 50 <![CDATA[독립의 발자취 마땅히 세상에 알려야 할 진실 만화로 기록하다 ‘열여섯 살이었지’]]> 글 편집실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분노가 차고마주하는 순간 울분을 토해내는,그 참혹한 역사적 진실 앞에서요동치는 가슴을 움켜잡고 차오르는 감정을 억누르며처절한 슬픔을 삼켜내야 했다. 여전히 부정당하고 있는 역사적 사실. 그것은 여전히 살아 숨 쉬는생생한 증언이며, 아무리 억눌러도누그러지지 않는 아우성이다.alt 한국만화박물관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삶을 생생히 전달하는, 만화가 기록한 진실 <열여섯 살이었지>를 전시 중이다.한국만화박물관 최은영 큐레이터를 통해 이번 전시의 뒷이야기에 대해 들어본다. 이번 전시의 기획 취지에 대해 설명해주세요.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삶을 주제로 다룬 만화·애니메이션 작품을 소개하는 <열여섯 살이었지>를 통해, 보다 많은 사람이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쉽게 다가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위안부’라는 이름으로 여성의 존엄성을 무참히 짓밟았던 일제의 반인도적 성범죄를 국내외에 알리고, 많은 사람의 이해와 공감대를 형성하고자 전시를 기획하게 되었습니다. 전시 첫 번째 섹션에서 이옥선 할머니의 피해 증언을 들을 수 있는데요, 할머님에 대해 말씀해주세요.당시 16세였던 이옥선(1927~) 할머니는 심부름을 다녀오던 길에 낯선 남자 2명에게 납치당하셨어요. 그 뒤 중국 연길 위안소로 끌려가 3년간 일본군 위안부 생활을 강제당하셨습니다. 광복 후에도 고향인 부산으로 돌아오지 못한 채 중국에서 힘든 삶을 사셨습니다. 그러던 중 1997년 위안부 할머니들의 ‘고향 찾기 프로그램’을 통해 55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오셨고, 지금은 나눔의 집에서 생활하고 계십니다. 이옥선 할머니에 대한 더 자세한 이야기는 김금숙 작가의 만화 <풀>에서 만나볼 수 있습니다. 과거에는 보수적인 사회적 시선으로 인해 할머님들이 아픈 경험을 밝히지 못했다고 들었습니다. 요즘은 할머님들이 어떻게 느끼고 계실까요.현재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중 열여섯 분만 생존해 계신 상황이고, 모두 고령이십니다. 그중 여섯 분은 사진을 공개하셨지만, 나머지 열 분은 공개를 어려워하셔서 만화 초상으로 대신하였습니다. 여전히 어렵고 힘든 일이라고 생각됩니다.이번 전시에 김금숙 작가, 김용회 작가, 김준기 감독이 참여하셨습니다. 만화를 제작하는 과정에서 겪은 어려움이 있나요?작가들 모두 취재 과정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심지어 외부 지원으로 제작한 어느 작품의 경우 지원 기관에서 왜곡된 사실로 작품을 만들어달라고 요청해서 곤혹스러웠던 적도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주요 외교 문제 중 하나인 만큼 신경 써야 할 것들이 많았습니다.코로나19로 인해 증강현실이라는 플랫폼을 활용했는데요. 온라인 전시에 대한 참여도는 어떠한가요?현재 약 2만 명의 접속자 수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중에는 단순 클릭도 있지만, 그렇게라도 전시를 접함으로써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우리 모두의 문제라는 인식을 가졌으면 합니다. 온라인 전시의 경우 오프라인 전시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라 다른 점은 없지만, 첫 번째 섹션에 있는 대형 만화월 공간은 직접 봤을 때 더 큰 공감을 얻을 수 있습니다. 전시를 관람하며 눈물을 보이는 분들이 많은 것도 감동이 배가되는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SNS와 유튜브 등을 통해 홍보하고 있는 만큼 해외에 계신 분들도 많은 관심 주시면 좋겠습니다.이번 전시를 어떤 마음가짐으로 대하면 좋을까요?우리 ‘딸들’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대하면 좋겠습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여성의 인권을 무참히 침해한 비인간적인 사례입니다. 다시는 이러한 끔찍한 범죄가 일어나지 않도록 여성 인권과 평화에 대한 가치를 되새겨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한국만화박물관은 만화가 기록한 진실 <열여섯 살이었지>를 전시 중이다. 여성의 존엄성을 무참히 짓밟은 일제의 반인도적 성범죄를 국내외에 알리고, 문제 해결을 위한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해 기획된 이번 전시는 3월 28일까지 진행된다. 방문이 어려울 경우 한국어·영어·중국어·독일어로 제작된 온라인 전시를 관람할 수 있다. 온라인 전시한국만화박물관 홈페이지 전시 장소한국만화박물관 제1·2기획전시실관람 시간10:00 ~ 18:00 / 월요일 휴무발권 시간10:00 ~ 17:00 / 일일 인원 마감 시까지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한 사회적 거리두기 격상으로인하여 입장 정원이 280명으로 제한됩니다.(유료 입장 230명, 일반 열람실 및 무료 입장 50명)alt살아있는 증언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옥선(1927~) 할머니의 삶을 만화로 재현한 김금숙 작가의 <풀> 34쪽을 대형월로 제작한 공간이다. 먹과 붓으로 입체감 있게 구현된 작품은 관람객으로 하여금 마치 할머니의 삶 속으로 직접 걸어 들어가는 듯한 체험을 유도한다. alt만화가 그린 진실일제강점기 위안부 강제 동원 과정과 끌려간 순분 언니의 피해 사실을 묘사한 이무기 작가의 <곱게 자란 자식>, 피해자로 등장하는 홍춘이 할머니의 아픔과 용기를 그린 김용회 작가의 <다시 피는 꽃>,  김금숙 작가의 <풀> 원화와 콘티가 전시되어 있으며 이옥선 할머니의 인터뷰 음성을 들을 수 있다. 이를 통해 처참하게 유린당한 일제강점기 당시의 피해자와 80년이 지나 여성인권운동가로 다시 피어난 피해자의 삶을 엿볼 수 있다.alt부정할 수 없는 역사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설명 및 주요 사건을 사진 및 영상 자료들과 함께 전시해 위안부 피해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제대로 인식하고 공감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문제 해결을 위한 수요 시위 등 활동 내용도 소개한다. alt우리의 기록이곳은 영상기록, 창작기록, 공감기록, 미래세대의 기록으로 구분되어 있다. 영상기록에서는 김준기 작가의 애니메이션 <소녀이야기>, <소녀에게>, <김학순 할머니 증언 영상>, <피해 할머니 증언 영상>이 재생되어 당시의 참혹했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창작기록에서는 일본군 위안부 만화 10종을 열람할 수 있고, 공감기록은 관람객들이 직접 메시지를 작성하는 공간이다. 미래세대의 기록에는 학생들이 그린 만화 작품 4점이 전시되어 있어 또 다른 공감을 선사한다.alt사라지지 않는 진실전시 마지막 공간에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 사진과 만화 초상이 전시되어 있다. 우리는 이를 통해 진실은 결코 끝나지도 또 사라지지도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Wed, 03 Feb 2021 13:08:49 +0000 50 <![CDATA[세계 산책 인류 역사 속에 등장한 변종 바이러스]]> 글 김서형(러시아 빅히스토리 유라시아센터 연구교수) 지금 전 세계는 치명적인 유행성 전염병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바로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이하 코로나19) 때문으로, 이는 2019년 12월에 중국 후베이성(湖北省) 우한(武漢)에서 발생해 현재까지220개 국가로 확산되었다. 사실 코로나바이러스는 기존에도 호흡기 감염증 원인의 30%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미 우리 가까이에 존재하고 있었던 코로나 바이러스가 왜 이토록 급속히 확산되면서치명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일지 살펴보자. 세기에 걸친 변종 바이러스의 역사2020년 12월 중순까지 코로나19 확진자는 7천만 명 이상, 사망자는 160만 명 이상으로 집계되었다. 코로나19가 이처럼 전 세계적으로 유행하고 있는 까닭에 대해 많은 전문가들은 새로운 유형의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변종 바이러스의 경우 일상적으로 발생하는 호흡기 감염증과는 달리 치명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변종 바이러스가 인류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쳤던 것은 비단 코로나19뿐만은 아니다. 지난 2002년 11월에 중국 광둥성(廣東省) 허위엔(河源)에서 처음 발견된 이후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어 유행했던 전염병, 사스(SARS)가 있었다. 사스는 38도 이상의 고열과 함께 폐렴이나 호흡 곤란을 유발하였다. 세계보건기구(WHO)에 따르면 당시 8,096명의 사람들이 사스에 감염되었고, 이 가운데 744명이 사망하였다. 치사율이 약 9~10%인 셈이었는데, 사스의 원인은 코로나바이러스의 변종인 사스-코로나바이러스(SARS-CoV) 때문이었다. 이후 2012년 9월에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발생했던 중동호흡기증후군, 이른바 메르스(MERS)의 원인도 변종 코로나바이러스였다. 메르스는 비말을 통해 감염되었으며, 주로 급성 호흡기 질환을 동반하였다. 특히 합병증으로 폐렴이나 급성신부전이 발생하는 경우가 많았다. 역설적이게도 당시 우리나라의 감염자 및 사망자 수가 세계 2위였으며, 치사율은 20% 이상이었다. 그러나 20세기의 가장 치명적인 유행성 전염병은 바로 1918년에 나타난 인플루엔자였다. 전 세계적으로 약 5억 명이 감염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는 당시 세계 인구의 약 1/3에 해당하는 수치였다. 이로 인해 미국에서만 65만 명, 전 세계적으로 6천만 명 이상이 사망하였다. 당시 인플루엔자가 만연했을 때 미국은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 중이었는데, 인플루엔자가 처음 발생한 곳이나 급속하게 확산된 곳 대부분이 군대였다고 전해진다. 특히 영유아기나 노인층의 사망률이 높은 인플루엔자와 달리 30~40대의 사망률이 높았던 것이 특징이다. 이토록 치명적이었던 1918년 인플루엔자는 바로 인플루엔자 A형의 아형 H1N1이 변이를 일으켜서 발생한 것으로 전해진다. alt1918년 인플루엔자가 유행했을 때 마스크를 착용한 시민들의 모습오래전부터 시작된 마스크 착용1918년 가을 무렵 인플루엔자가 다시 유행하기 시작하자, 미국의 주정부와 시정부는 예방이 가장 중요하다고 판단하였다. 인플루엔자를 예방하기 위한 첫 번째 조치는 바로 마스크 착용이었다. 미국 공중보건국이나 적십자에서는 거즈로 만든 마스크를 의료진과 시민들에게 무료로 나누어 주고 착용을 권고하였다. 치명적인 유행성 전염병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일부 지역에서는 의무적으로 마스크를 착용하게 하였다.그러던 중 1918년 10월 23일, 샌프란시스코 시보건국은 일명 ‘마스크 조례(Mask Ordinance)’를 제정하였다. 이는 샌프란시스코 시민들이 공공장소에 있을 때 식사 시간을 제외하고는 늘 마스크를 착용하도록 한 것이다. 당시 많은 의사들이 마스크만 제대로 착용한다면 인플루엔자를 통제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사실 유행성 전염병이 발생했을 때 마스크를 착용한 역사는 20세기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시작은 인류 역사상 가장 치명적인 유행성 전염병 중 하나로 알려진 흑사병 때부터다. 14세기 중반 유럽에 등장했던 흑사병은 원래 중국 운남성(云南省)에서 빈번하게 발생하던 풍토병이었다. 당시 몽골제국은 운남성을 정복하기 위해 군대를 보냈고, 군대가 되돌아오면서 전염병이 자연스럽게 제국 내부로 옮겨지게 되었다. 이후 활발한 정복전쟁으로 인해 유럽으로까지 확산된 것이다. 당시 유럽에서는 흑사병의 원인을 알지 못했고, 치료 방법도 많지 않았다. 에메랄드 가루를 물에 타서 마시거나 흑사병으로 부어오른 부위에 생닭을 문지르는 등의 비과학적인 치료법이 만연하였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당시 의사들은 긴 가운을 입고 모자와 장갑을 착용하였다. 그리고 새부리 모양의 마스크를 쓰고, 그 속에 향신료나 식초를 묻힌 헝겊을 넣었다. 치명적인 전염병으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알고 보니 인류는 지금으로부터 한 세기 전에 코로나19와 같은 경험을 겪은 것이다. 흑사병이나 인플루엔자를 극복하는 과정을 통해 우리는 마스크 착용이 상당한 도움이 되었던 역사적 경험을 분명하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 변종 바이러스는 현재까지도 인류에게 치명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변종 바이러스를 통제하는 그날까지 마스크 착용과 같은 기본을 지켜가며 슬기롭게 이 상황을 헤쳐 나가야 할 것이다.  alt흑사병이 유행했을 때 유럽 의사 복장을 표현한 1656년의 판화파울 퓌르스트 <17세기 로마의 부리 의사>]]> Wed, 03 Feb 2021 13:28:30 +0000 50 <![CDATA[기념관 소식 독립운동가의 활동과 생애를 다룬 『한국독립운동인명사전』 1~2권 발간 외]]> 독립운동가의 활동과 생애를 다룬 『한국독립운동인명사전』 1~2권 발간alt독립기념관은 2020년 12월 『한국독립운동인명사전』 1~2권을 발간하였다. 『한국독립운동인명사전』은 독립운동가 전문사전으로 2018년까지 서훈을 받은 모든 독립유공자 수록을 목표로 하는 방대한 작업으로 그동안 독립운동가임에도 전혀 주목받지 못했던 사람들의 일대기까지도 조명함으로써 기존의 백과사전이나 인물사전과는 큰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한국독립운동인명사전』 1~2권에는 2018년까지 국가로부터 서훈을 받은 독립유공자 가운데 ‘가재연’부터 ‘김기준’까지 1,203명이 수록되었다. 또한 120여 명의 한국근대사 전공자들이 집필자로 참여한 것으로 독립운동에 대한 사회 전반의 인식 수준뿐만 아니라 그동안 축적된 학계의 한국독립운동사 연구 성과를 반영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학계의 최신 자료 및 연구 성과까지 반영하여 원고를 작성하고 있고, 각 독립운동가의 독립운동 활동뿐 아니라 전 생애에 걸친 일대기를 빠짐없이 서술함으로써 공훈록이 가진 한계를 보완하고 있다.독립기념관은 이미 『한국독립운동사사전(총론)』(전 2권, 1996)과 『한국독립운동사사전(운동·단체편)』(전 5권, 2004)을 간행하여 한국독립운동사의 대중화에 기여하였다. 그 후속편으로 『한국독립운동사사전(인명편)』을 기획하던 중 2015년 광복 70주년을 맞이하여 ‘한국독립운동인명사전 편찬위원회’를 발족시킴으로써 본격적으로 『한국독립운동인명사전』 편찬사업을 시작하였다. 2019년에는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념하여 3·1운동 민족대표 33인을 비롯해서 임시정부 주요 관계자들의 일대기를 수록한 『한국독립운동인명사전(특별판)』(전 3권)을 간행하여 좋은 평가를 받았다.독립기념관은 이번에 발간된 『한국독립운동인명사전』 1~2권을 시작으로 2024년까지 총 25권을 편찬할 계획이다. 이를 통해 그동안 주목받지 못했던 수많은 독립운동가의 생애와 활동을 담아내어 다양한 독립운동 활동을 알리고, 점차 잊혀가고 있던 수많은 독립운동가가 보여준 나라를 위한 헌신을 다시 살펴봄으로써 우리 국민이 독립운동의 가치와 정신을 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문의: 학술사업부 홍동현 연구위원 ☎041-560-0408조선말 큰사전 원고 국가지정문화재 ‘보물’ 승격 alt독립기념관이 소장하고 있는 국가등록문화재 제524-2호로 등록된 ‘조선말 큰사전 원고’가 2020년 12월 22일 국가지정문화재 보물 제2086호로 승격 지정되었다.조선말 큰사전 원고란 조선어학회(한글학회 전신)에서 1929 ~1942년경까지 약 13년 동안 작성한 사전 원고의 필사본 교정지 총 14책을 말한다. 독립기념관은 이중 5책을 소장하고 있으며, 나머지는 (사)한글학회(8책), 개인(1책) 등이 소장하고 있다. 조선말 큰사전 원고 14책은 오랜 기간 동안 다수의 학자들이 참여해 오랜 기간 집필·수정·교열 작업을 거친 중요한 자료로 우리말 통일사업의 출발점이자 결과물로 역사적 가치가 매우 높은 유물이다. 이 유물은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의 증거물로 일본 경찰에 압수되었다가, 1945년 9월 8일 경성역(지금의 서울역) 조선통운 창고에서 우연히 발견되었다. 1957년 큰사전(6권)은 이 원고를 바탕으로 완성되었다.1929년 10월 31일, 이념을 불문하고 사회운동가·교육자·어문학자·출판인·자본가 등 108명이 조선어사전편찬회를 결성해 사전 편찬 사업을 시작한 결과물이다. 각지의 민초(民草)들은 지역별 사투리와 우리말 자료를 모아 학회로 보내오는 등 계층과 신분을 뛰어넘어 일제의 우리말 탄압에 맞선 전민족적인 움직임이 그 밑거름이 되었다. 이는 선조들의 우리말 사랑과 민족 독립의 염원이 담겨있었다는 점에서 매우 큰 의의를 찾을 수 있다.조선말 큰사전 원고는 일제강점 아래에서도 독립을 준비했던 뚜렷한 증거물이자 언어생활의 변천을 알려주는 생생한 자료다. 국어의 정립이 우리 민족의 힘으로 체계적으로 이루어졌음을 보여주는 실체이다. 때문에 한국문화사와 독립운동사의 매우 중요한 자료라는 점에서 역사·학술 가치가 높아 보물로 지정되었다.이준식 독립기념관 관장은 “국가등록문화재였던 『조선말 큰사전 원고』의 보물 승격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자칫 사장될 위기에 처했던 『조선말 큰사전 원고』가 다시 빛을 볼 수 있었던 것은 일제강점기 조선어 말살 정책에 맞서 한글을 보존하고자 했던 한글학자의 염원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밝혔다.문의: 자료부 유완식 학예연구관 ☎041-560-0291학술연구총서 제1권 『3·1운동과 국제사회』 발간 alt독립기념관은 작년 12월 26일 학술연구총서의 제1권 『3·1운동과 국제사회』를 발간하였다. 학술연구총서는 새로운 관점과 방법론이 필요한 한국 독립운동사연구의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기 위한 작업의 일환이다. 특히 3·1운동은 한국 근현대사에서 한국인의 주체적인 선택으로 획기적인 사회 변화를 이끈 거대한 진보의 본보기일 뿐 아니라, 한국 사회에서 대중 민주주의가 본격적으로 출발한 역사적 체험 공간이었다. 즉 민족의 독립이 한국 민주주의 발전의 기본 전제임을 체험한 사건이기도 하였다. 학술연구총서 제1권 『3·1운동과 국제사회』는 3·1운동 전후, 반식민지 민족혁명운동을 바라본 국제사회의 움직임과 인식, 그리고 이에 대한 주체의 능동적 대응을 이해하고자 구성하였다. 이를 위해 제1부 3·1운동 전후 국제회의와 한국 독립운동, 제2부 국제정세의 변동과 해외 한인의 3·1운동, 제3부 타자의 눈으로 바라본 3·1운동으로 구성되었다. 또 이 기획은 3·1운동 100주년과 광복절을 기념하여 2017년부터 2019년까지 세 차례에 걸쳐 독립기념관에서 개최한 국제학술회의에 기초한 것이기도 하다. 학술연구총서는 대학 도서관 및 공공 도서관에 배포되며, 2021년도에는 학술연구총서 제2권으로 봉오동·청산리전투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개최되었던 두 차례의 학술대회의 발표문을 정리하여 발간할 예정이다.문의: 학술연구부 이현희 연구원 ☎041-560-0402한국방송통신전파진흥원과 업무협약 체결독립운동 가치 확산을 위한 우수 방송 콘텐츠 제작·보급 alt독립기념관은 작년 12월 10일 한국방송통신전파진흥원(원장 정한근, 이하 KCA)과 우수 방송 콘텐츠 제작 및 보급 확산을 위한 업무협약을 체결하였다. 이번 협약을 통해 양 기관은 ▲방송 콘텐츠 제작을 위한 역사 정보 교류 ▲국민들의 독립운동 가치 확산을 위한 우수 방송 콘텐츠 제작 및 보급 ▲방송콘텐츠 <기억·록, 100년을 탐험하다> 제공 및 독립기념관 내 상영 등을 추진할 예정이다. <기억·록, 100년을 탐험하다>는 KCA가 2019년에 제작지원한 프로그램으로 취약 계층을 위한 수어방송을 추가로 제작하여 독립기념관에서 일부 상영될 예정이다.문의: 혁신평가부 신선미 계장 ☎041-560-0683청소년 독립운동사 교육사업 추진독립기념관-청소년활동진흥원, 인사교류 협약 alt독립기념관과 청소년활동진흥원은 작년 11월 30일 청소년의 성장 지원을 위한 공동의 사업을 추진하기 위해 인사교류 협약식을 가졌다. 이번 협약을 통해 양 기관의 역량을 강화하고, 독립기념관의 특화된 독립운동사 콘텐츠와 청소년활동진흥원의 청소년 교육 운영 노하우를 접목하여 대한민국을 이끌어갈 미래의 주역인 청소년을 위한 특화된 독립운동사 교육 콘텐츠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이준식 독립기념관 관장은 이번 인사교류를 통해 “양 기관의 우수한 인력 교류와 운영 노하우 전파를 통해 실질적인 성과를 얻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며 “앞으로도 독립기념관은 사회적 가치 달성을 위하여 적극 노력할 것”이라고 밝혔다.문의: 전략기획부 고다현 차장 ☎041-560-0222독립기념관,부패방지경영시스템 인증 획득 alt독립기념관은 작년 12월 29일 ITS인증원으로부터 부패방지경영시스템 국제표준 인증(ISO 37001)을 획득하였다. 본 인증은 국제표준화기구(ISO)가 제정한 인증으로 국제표준 요구 사항에 부합하는 부패방지경영시스템 구축 여부를 다각도로 심사하여 이를 통과한 기관에 부여된다.독립기념관은 코로나19 확산으로 악화된 경영 여건 속에서도 ▲부패방지경영시스템 운영지침 및 프로세스 제정 ▲부패방지 경영 방침 수립 및 공유 ▲경영진 및 실무자 대상 집중적인 부패방지 교육 훈련 ▲전사적인 부패리스크 평가 및 모니터링 ▲내부 심사 및 경영 검토 등 체계적인 부패방지경영시스템 구축을 위한 아낌없는 노력을 경주해왔다.이준식 독립기념관 관장은 “그동안 우리 사회에 부패가 발생하면 부패를 저지른 사람을 탓해왔지만, 어떤 사람이 어느 자리에 있더라도 부패가 발생하지 않도록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며 “부패방지경영시스템이 지속적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체계적으로 관리하여 국민에게 신뢰받는 독립기념관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문의: 감사부 이선화 과장 ☎041-560-0211]]> Thu, 04 Feb 2021 10:35:03 +0000 50 <![CDATA[독자 이벤트 ]]>  alt alt아이콘 클릭하면 퀴즈 정답을 보낼 수 있습니다.]]> Wed, 03 Feb 2021 13:36:51 +0000 50 <![CDATA[들어가며 일제강점기 독립운동 자금은 어떻게 마련되었나?]]>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 이후전 재산을 팔아 만주로 망명한 이회영 선생.당시 처분한 재산이 소 13,000마리 값,현재 시세로 600억 원에 이르는 재산을 독립운동에 바쳤다.일제에 국권을 뺏긴 이듬해인 1911년 1월,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전답과 99칸짜리 임청각을 처분한 이상룡 선생. 그렇게 마련된 독립운동 자금은 만주의 독립운동 기지인 경학사와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는 데 쓰였다.1920년 이후 국내 군자금을 모아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전달하는 밀사 역할을 했던 정정화 선생.그는 자금 조달을 위해 일제의 철통같은 감시를 뚫고  위험천만한 국내 잠입을 무려 여섯 번이나 감행하였다.그들 모두, 그 누구의 강요도 없이 독립군의 곤궁한 처지를 알고 자진하여 독립운동 자금 마련에 앞장섰다.그것은 나라의 국권 회복을 위하였음이며,나라 없이는 목숨도 부(富)도 중요치 않았던 터이다.우리는 압록강을 가로질러 쪽배를 띄웠다. 칠흑 같은 어둠 속 어디에선가 왜경이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노려보고 있을 것만 같았다.밤의 강 소리는 사람을 위협한다. 차라리 짐승의 포효라면 방향이라도 알고 달아나기라도 하련만, 한밤중의 강바람 소리는 달랐다.전혀 으르릉 거리지 않으면서도 사방에서 사람을 옥죄고 들었다.쪽배가 압록강의 중국 쪽 언저리에 닿았을 때 나는 제풀에 지쳐 기진맥진해 있었다.정정화〈장강일기〉중에서]]> Wed, 03 Feb 2021 15:27:50 +0000 51 <![CDATA[톺아보기 독립지사들의 동력이 되어준 독립운동 자금]]> 글 이동언(선인역사문화연구소 연구소장) 한민족은 일제의 탄압과 핍박에도 굴하지 않고 줄기차게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과정에서 경제적인 여력 없이는 독립운동을 추진하기가 어려웠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 자금은 국채보상운동 의연금, 군자금, 독립운동 자금 등 다양한 형태로 모금되고 지원되었다. 또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임시정부 운영과 독립운동 단체 지원을 위해 독립공채를 발행하기도 하였다. alt일제의 침략을 막기 위한 국채보상운동 의연금우리 역사를 살펴보면 전 국민이 하나가 되어 민족적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한 예가 많다. 그중 의미 있는 기록으로 1907년 1월 29일 대구에서 발의되어 전개된 국채보상운동이 있다.1907년 일본의 국채 1,300만 원을 상환하지 못하면 조선의 강토는 필경 일본의 영유가 되고 마는 절박한 상황이었다. 당시 대한제국 정부의 재정은 세입 총액 1,318만 9,336만 원, 세출 총액은 1,395만 523원이었다. 당시 국채 1,300만 원은 대한제국 정부 예산에 달하는 금액이었다. 1,300만 원의 국채를 상환하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에 전 국민이 하나 되어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하였다. 국채보상운동은 전 국민이 힘을 합하여 일본에 진 빚 1,300만 원을 갚아 일제 침략으로부터 주권을 지키자는 국권수호운동이었다.국채보상운동은 대구에서 발의되었다. 1907년 1월 29일 대구광문사 문회(文會) 특별회에서 회원 서상돈(徐相敦)과 김광제(金光濟) 등이 발의하여 시작되었다. 먼저 대구광문사 사장 김광제가 발기 연설을 하였다. 서상돈의 발의에 참석한 대구광문사 문회 특별회 회원들은 만장일치로 찬동하고 김광제가 발기 연설을 마친 후 당장 실시할 것을 주창하였다. 이어 자신의 연죽과 연갑을 버리고 3개월 치 담뱃값 60전과 의연금으로 10원을 내자 모두들 동참하여 2천여 원이 모금되었다. 국채보상 발기문과 국채보상운동 취지서를 보면, 전 국민이 3개월 동안 담배를 끊어 일본의 국채 1,300만 원을 갚자고 구체적 방법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담배는 당시 한국에 이주해온 일본 상인들이 폭리를 취하는 대표 상품 가운데 하나였기 때문이다. 국채보상운동은 당시 『대한매일신보』·『황성신문』·『만세보』·『제국신문』 등 언론의 지원을 받아 연일 보도되었고, 범국민운동으로 확산될 수 있었다. 당시 신문을 보면 국채보상 의연금 명단이 신문 지면을 메우고 있다. 국채보상운동은 신분·계급·성별·직업·종교·사상 등 모든 것을 뛰어넘어 국민 모두가 자발적으로 참여하였다. 특히 여성들의 참여가 많았고, 그들은 반지나 비녀 등의 패물을 국채보상 의연금으로 내어놓았다.국권 회복을 위한 군자금과 독립운동 자금 오늘날 ‘군자금’과 ‘독립운동 자금’ 용어는 서로 혼용해서 쓰이고 있다. 군자금의 사전적 의미는 ‘군대의 운영과 군사 행동에 필요한 모든 자금’으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한 독립군의 자금을 말한다. 독립운동 자금의 경우 ‘독립운동을 위한 모든 자금’을 뜻하며 포괄적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일제 측 보고서를 보면 군자금을 모집하다 체포되거나 발각된 개인이나 단체가 많이 있었다. 하지만 군자금이나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는 일은 비밀리에 추진되었기 때문에 이를 입증하는 자료나 문서가 남아있지 않은 실정이다. 남아있는 자료 중 군자금의 경우 1921년 1월 서로군정서에서 군자금을 낸 이종식에게 발행한 영수증이 있다. 그밖에는 독립운동가들의 회고록이나 증언을 통해 언급되고 있는 정도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이후에는 국내뿐만 아니라 국외에서도 개인이나 단체를 통해 독립운동 자금을 상하이로 보내왔다. 미주를 비롯하여 중국, 러시아 등지에 사는 동포들도 푼푼이 모은 돈을 보냈다. 특히 하와이와 멕시코 등지로 이주한 한인 노동자들은 사탕수수밭에서 힘들게 번 돈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보내주었다.  alt대구민의소에서 발행한 국채담보금(국채보상헌금) 영수증(왼쪽) / 국채보상운동 100주년 기념비(오른쪽)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독립공채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후 임시정부의 존립을 위해 인력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재정적 부분이었다. 임시정부는 재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상하이에 도착하는 인사들이 가진 자금과 국내에서 보내온 자금으로 간신히 버텨오다가, 안창호가 부임하면서 미국에서 가져온 자금을 투입해 임시정부 운영에 힘을 쏟았다. 그러면서 임시정부는 안정적인 방안을 찾아갔다. 대내적으로는 인구세와 애국금을 모집하고, 대외적으로는 외국에 공채를 발행하는 것이었다. 1919년 9월 재정제도와 운영체계를 마련해 주로 인구세를 조세수입으로 애국금을 조세 이외의 주 수입원으로 삼았다. 이 중에서 애국금은 1920년 4월부터 독립공채로 대신하게 되었다.  독립공채는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에서 1920년 4월 17일부터 판매한다고 공포하였다. 최초의 독립공채는 1919년 8월에 이미 발행하였고, 1919년 9월 1일 구미위원부 위원장 김규식과 이승만 명의로 공채를 공식 발행해 판매하였다. 상하이에서는 원화표시 채권을, 미주에서는 달러표시 채권을 발행하였다. 원화채권 액면가는 100원, 500원, 1000원 3종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재무총장 이시영 직인이 찍혀있고 발행 금리는 연 5%였다. 독립공채 원금은 우리나라가 독립한 뒤 5~30년 이내 수시로 상환하기로 하였다. 달러채권은 액면가가 10$, 25$, 50$, 100$, 1000$ 등 5종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 이승만 명의로 발행하였고, 발행 금리는 연 6%였다. 독립공채는 국내 비밀 행정조직인 교통국과 연통제를 통해 모집되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활동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alt서로군정서에 군자금을 낸 이종식에게 발행한 군자금 영수증(1921. 1.)승려들의 독립운동 자금 지원승려들은 독립운동 자금 지원을 통해 불교계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연결하여 불교의 민족의식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유입시키려고 노력하였다. 또한 불교계 자금을 대한민국 임시정부 독립운동 자금으로 전환시키려고 하였다. 대표적인 예로 범어사의 김상호·김상헌·김석두가 원로인 이담해·오성월·김경산·오리산 등이 모금해 준 독립운동 자금을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전달하였다. 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이담해·오성월·김경산을 대한민국 임시정부 고문으로 추대하였다. 더불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하고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한 인물로 항일승려 백초월을 들 수 있다. 백초월은 3·1운동 직후 서울로 와서 중앙학림에 독립운동단체인 민단본부를 결성하였다. 그는 중앙학림 학인이었던 정병헌·신상완·백성욱을 천은사·화엄사·쌍계사 등의 승려들에게 파견하여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게 하였다. 백초월은 모금된 독립운동 자금을 불교계 루트를 통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전달하였다.1919년 5월 해인사 승려인 김봉율·박달준·강재호·송복만·손덕주·박덕윤·이창욱·김장윤, 그리고 대흥사 승려인 박영희는 3·1운동 당시 만세시위를 주도한 이후 중국으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고 독립운동 자금 모금을 위해 국내로 잠입하여 활동하였다. 이들은 남만주 서로군정서 영수증을 소지하고 김룡사·고운사·범어사 등지에서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였다. 그 외 김상헌은 상하이를 배경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1919년 8월 독립운동 자금 모금 임무를 띠고 국내로 잠입하여 철원애국단을 조직하고 함경남도 지역에서 모금한 독립운동 자금을 대한민국 임시정부 안창호에게 송금하기도 하였다. 또한 함흥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던 이범대는 독립운동 자금 모집과 동지 포섭을 위해 해동불교청년회를 결성하여 만주의 대한독립단과 연계하여 활동하였다. 통도사 주지 김구하는 1919~1920년 사이 상하이 임시정부의 안창호 국무총리(5,000원), 혁신공보 백초월(2,000원), 이종욱에게 군자금(3,000원) 등 총 13,000원의 독립운동 자금을 제공하였다. alt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발행한 독립공채 1000원(왼쪽) / 구미위원부에서 발행한 독립공채 100달러(오른쪽)백초월(白初月)은 승려로 있는 몸인데 불구하고, 항상 불온사상을 품고 국권 회복을 몽상하여 은근히 그때가 오기를 기다리던 중, 금년 봄 소요(騷擾) 발발한 이래 해외 동포는 조국의 부흥을 위하여 혹은 러시아, 또는 중국 영토에서 독립군을 일으키고, 또 중국 상하이 임시정부를 조직하는 등 오직 독립운동에 활약하고 있으며 선내(鮮內)에 있어서도 예수교 및  천도교들은 매우 이에 원조를 하고 있으나, 다만 불교도(佛敎徒)만은 이에 무관심하고 있음을 크게 유감지사로 생각하여, 금년 4월 경성에 들어와 시내 각처에 잠재하면서 우선 불온  문서를 간행하여 인심을 교란시킬 계획으로 한국민단본부(韓國民團本部)라는 단체를 경성 중앙학림(中央學林) 내에 설치하여 스스로 민단부장(民團部長)이 되어 자금과 부원 모집에 분주하였으며….(생략)김정명, 「독립운동 자금 모집자 검거의 건」 1919. 12. 5. ]]> Wed, 03 Feb 2021 15:39:43 +0000 51 <![CDATA[만나보기 백산 안희제 독립운동 자금의 거점을 세우다]]> 글 이동언(선인역사문화연구소 연구소장) 독립운동을 전개할 때 무엇보다도 절실하고 중요한 것은 독립운동 자금이었다. 독립운동가 안희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운영 자금의 60%를 조달했다고 할 정도로 독립운동 자금 조달에 있어 전설적인 인물이다. 배가 고파서 우는 어린아이에게 젖을 물리는 심정으로 위험과 역경 속에서도 독립운동 자금의 젖줄이 되고자 한 안희제의 독립운동을 통해 그의 구국 이념과 나라사랑 정신을 되새겨 보고자 한다. alt백산 안희제독립운동가들을 묵묵히 뒷바라지하는 데 평생을 바친 백산 안희제. 그는 영민한 독립운동가였고, 민족자본의 중요성을 잘 알았다. 자금이 있어야 독립군을 운영하며 총·칼 등의 무기도 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일제는 무단통치·문화통치·민족말살정책 등 탄압의 강도를 높여갔고, 그때마다 그는 교육·무역·언론 등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항거하였다.안희제의 생애와 독립운동안희제(安熙濟)는 1885년 8월 4일 경상남도 의령군 부림면 입산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한학을 수학하다가 러일전쟁과 을사조약 강제 체결로 국운이 기울자 상경하여 보성전문·양정의숙 등에서 신학문을 접하고 국권 회복을 위한 계몽운동에 투신하였다. 민중계몽을 위해서 교육이 급선무라고 판단한 그는 고향인 경남 의령을 중심으로 의신·창남학교를 설립하여 신교육에 전념하고, 윤상은과 함께 구포에 구명학교를 설립하여 자신이 직접 교장으로 근무하기도 하였다. 또 교남학우회를 조직하여 임원으로 활동했으며, 1909년 10월에는 비밀결사단체인 대동청년단을 결성하였다. 1910년 일제의 강점으로 국내에서의 활동이 어렵게 되자, 1911년 러시아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지원할 것을 결심한다. 이후 여러 독립운동 지도자들과 국권 회복을 위한 대책을 협의하고 독립운동 단체도 방문한 뒤 중국을 거쳐 1914년 9월 국내로 귀국해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일제강점 이후 대다수의 독립운동가들이 국내에서의 활동이 불가능해 국외로 망명하여 국내와 연락할 방안이 필요하였다. 이에 안희제는 국내의 연락망과 재정기지 건설을 구체화하기 위하여 백산상회를 설립하였고, 이후 백산무역주식회사로 확대·개편하였다. 남형우·최준·윤상은·박상진·서상일 등 영남지역의 청년 지사들과 함께했으나, 일제의 감시망을 피해 지속적인 활동을 전개하기란 쉽지 않았다. 일제의 지목을 받게 된 안희제는 이를 피하기 위해 여러 분야에 걸쳐 광범위한 활동을 전개하게 된다. 장차 독립운동을 전개할 인재를 양성하기 위하여 백산상회 관계자들과 함께 기미육영회를 조직하여 해외 유학생을 파견하였다. 또 중외일보를 통해 언론 투쟁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일제의 탄압과 감시로 더 이상 국내 활동이 어렵게 되자 안희제는 중국으로의 망명을 결심하고, 1933년 발해의 고도인 영안현 동경성에서 독립운동기지건설 계획을 구체화하기 위해 발해농장 경영에 착수하였다. 그 후 대종교 총본사가 동경성으로 옮겨오자 대종교에 이미 입교한 그는 대종교서적간행회 회장·천진전건축주비회 총무부장 등을 맡아 대종교 교세 확장을 통해 독립운동 세력을 규합하려 하였다. 그렇게 국권 회복에 힘쓰던 그는 일제의 탄압을 받아 임오교변*을 당하고 1943년 8월 3일 순국하였다. alt 1914년 부산 중구 동광동에 설립한 백산상회독림운동의 거점 ‘백산상회’ 설립안희제는 1910년 국내에서의 독립운동이 어렵게 되자 중국으로 망명하여 북간도와 연해주 등지에서 신채호·김동삼·이동휘·안창호·이갑 등 독립운동 지도자들을 만나 국권 회복을 위한 방략을 논의하였다. 당시 국외 독립운동 지도자들은 국내와 연락이 요구되었다. 국외에서의 항일투쟁과 독립운동기지 건설을 위해서는 국내의 비밀연락망 구축과 독립운동 자금이 절실했기 때문이다. 안희제는 국외 독립운동 지도자들과 독립운동 방략을 협의한 결과, 국내 독립운동 기지 구축과 독립운동 자금 조달을 맡기로 하였다. 안희제는 귀국길에 상하이에서 김구 선생을 만났다. 이때 김구는 안희제에게 국내 정세에 대해 물었다. 안희제는 “국내의 기강은 해이하고 변절자가 많아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없으며, 애국사상이 있다는 사람도 『정감록(鄭鑑錄)』의 ‘양백지간(兩白之間)에 가활만인(可活萬人)’만 안일하게 찾고 앉았다”라고 대답하며 “세상 사람들이 말끝마다 양백지간 운운한다”라고 하자, 김구는 안희제의 손을 잡으며 “양백지간은 바로 우리 둘이다”라고 하면서 ‘우리 두 사람이 장차 이 나라와 민족을 구하자”고 말했다고 한다.그렇게 3년여간의 망명생활을 마친 안희제는 1914년 9월 귀국하였다. 그는 고향의 전답 2,000마지기를 팔아 부산에 백산상회(白山商會)를 설립하였다. 상회의 명칭은 그의 호 ‘백산(白山)’에서 땄다. 백산상회의 설립 목적은 국외에서 전개되는 독립운동을 지원하기 위한 국내 연락망과 독립운동 자금 조달을 위한 독립운동 기지로 삼기 위함이었다. 백산상회는 설립 초기에 곡물·면포·해산물 등을 판매하는 소규모 개인상회였으나, 1917년 경기 호황에 힘입어 합자회사 백산상회로 확대·개편하였다. 1919년 5월에는 백산무역주식회사로 발전하였다. 백산무역주식회사의 발기인은 안희제·최준(崔俊)·윤현태(尹顯泰) 3인으로, 자본금은 100만 원이었다. 백산무역주식회사는 국내에 서울·대구·원산·인천 등 18개소, 중국에 안동·봉천·길림 등 3개소에 지점 및 연락사무소를 설치하였다.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는 연통제·교통국·지방선전부 등을 설치하여 국내와 연계하여 활동하였다. 국내의 독립운동가들은 연통제 조직을 통해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하고 『독립신문』 보급을 시도하였으며, 안희제는 이를 위해 국내 독립운동기지로 백산상회를 설립·운영하였다. 지금은 백산무역주식회사가 있던 자리에 백산기념관이 세워졌고, 용두산공원에는 안희제 흉상이 자리해 있다. alt백산무역주식회사가 있던 자리에 세워진 백산기념관(왼쪽) / 부산 용두산공원 광장에 위치한 안희제 흉상(오른쪽) alt백산상회 신문 광고“지금 우리의 사회는 모든 일을 창조할 때이다. 계림팔도를 통하여 기성(旣成)의 인재를 찾는 것은 하늘에서 혜성을 찾는 것과도 같다. 이것은 마치 수명의 장공(匠工)을 갖고 수만간(數萬間)의 거택(巨宅)을 영조하려는 것과 무엇이 다를 것인가. 인재 양성의 필요는 어느 시대와 어느 사회인들 급하지 않으리오만, 오늘날과 같이 급하고 절실한 때는 또 없다. 지역은 비록 작으나 국민은 2천만이다. 박옥잠룡(璞玉潛龍)이 어찌 없을쏘냐. 역사는 반만년이다. 국민을 교육하고 인재를 양성하는 일이 어찌 급하다고 하지 않을 것인가.”1919년 11월 독립운동의 인재 양성을 위해 조직한 기미육영회의 취지문 중에서]]> Wed, 03 Feb 2021 15:58:53 +0000 51 <![CDATA[이달의 독립운동가 대구사범학교 청년들, 항일 비밀결사 다혁당을 이끌며 독립역량을 키우다 권쾌복·배학보·유흥수]]> 글 독립기념관 전시부alt(왼쪽부터)권쾌복(權快福): 1921~2009, 경상북도 칠곡, 건국훈장 독립장(1963) 배학보(裵鶴甫): 1920~1992, 경상북도 성주, 건국훈장 애국장(1991)유흥수(柳興洙): 1921~2016, 충청남도 서산, 건국훈장 독립장(1963)대구사범학교 청년들,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독립을 준비하다일제강점기 대구사범학교 학생들은 일제의 대륙침략이 확대되던 1930년대 후반부터 다양한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학생운동을 전개하였다. 그중 대구사범학교 9기생 학생들을 주축으로 1941년 2월 결성된 항일 비밀결사 ‘다혁당(조직 80주년)’은 새로운 독립국가 건설을 위한 역량을 키워나갔다. 일제 말 다혁당을 비롯한 대구사범학교 청년들의 비밀결사 운동은 일제의 패망을 예견하고 독립을 준비해나갔던 청년들의 뜻깊은 항쟁이었다.백의단을 결성하여 민족의식을 키워나가다권쾌복, 배학보, 유흥수는 1937년 대구사범학교 심상과* 9기생으로 입학하였다. 1939년 7월 민족차별에 저항하여 일어난 왜관사건**으로 선배들이 대거 퇴학당하자 세 선생은 비밀결사 ‘백의단(白衣團)’을 결성하고 정세를 논의하는 모임을 가졌다. 비록 백의단 활동은 오래 지속되지 못하였으나 후일 학생들이 비밀결사 조직을 통해 항일운동을 전개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이후 대구사범학교 8기생을 주축으로 1940년 문예부, 1941년 연구회 등 비밀결사가 조직되었다. 그러나 8기생들의 졸업으로 유지가 어려워지자 세 선생은 동기생들을 규합하여 새로운 비밀결사로 ‘다혁당’***을 조직하였다.*심상과(尋常科): 대구사범학교 5학년 교육 과정으로, 졸업 후 2종 훈도(초등학교 교사) 자격증 부여**왜관사건: 1939년 7월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에서 경부선 철로 공사에 강제동원된 대구사범학교 학생들이 일본인 학생들과의 차별에 반발하여 일본인 교사에 저항한 사건***다혁당(茶革黨): ‘영웅은 다색(茶色, 검은빛을 띤 주홍색)을 좋아한다’는 뜻의 ‘다’와 혁명의 ‘혁’을 조합한 명칭 alt1930년대 대구사범학교_경북대학교 대학기록관 제공 alt대구사범학교 학생들의 조회 풍경_대구향토역사관 제공 alt『왜관학생사건』_대한민국역사박물관 제공(왼쪽) / 학창시절의 유흥수 선생(오른쪽) alt『반딧불』(1940. 1.)항일 비밀결사 다혁당을 이끌다1941년 2월 15일, 대구사범학교 학생 17명은 유흥수의 하숙집에 모여 항일 비밀결사 다혁당을 결성하였다. 다혁당은 당수-부당수 아래 총무·문예·예술·운동 분야의 4개 부서를 두었고 학생들의 실력 양성을 통해 독립 이후 새로운 국가 건설에 힘을 보태고자 하였다. 권쾌복은 백의단 활동 경험으로 당수를 맡았고 배학보는 부당수, 유흥수는 문예창작부 책임을 맡아 다혁당 지도부로서 활동을 이끌어나갔다.다혁당은 한글로 된 역사·문화서적을 읽는 토론회를 비롯하여  독립을 준비하며 군사훈련을 실시하였다. 또한 야학을 통한 문맹퇴치운동을 전개하였으며, 후배들을 지도해 민족의식을 일깨우는 데 앞장섰다. 그러나 결성 5개월여 만에 일경에 발각되어 세 선생을 비롯한 관련자들이 일제히 검거되면서 다혁당의 활동은 중단되었다. 다혁당을 조직하여 활약한 세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정부는 1963년 독립장(권쾌복, 유흥수), 1991년 애국장(배학보)을 수여하였다. (다혁당)은 강한 조직이다, 정말 생사를 같이 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그렇게 생각했어요. 거기 있는 당수나 부당수는백의단 때 단장·부단장과 한 가지입니다.『독립유공자증언자료집』 1. 권쾌복 선생 증언 중 alt「대구사범학교사건 예심종결서」(1943. 2. 8.)alt]]> Wed, 03 Feb 2021 16:14:12 +0000 51 <![CDATA[아름다운 인연 교육자에서 독립운동가로 거듭난 이애라와 이규갑 부부]]> 글 김형목(사단법인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이사) 이애라는 이화학당을 졸업하고 20세가 되던 해 독립운동가 이규갑을 만나 결혼하게 된다. 그 후 남편 이규갑과 함께 공주 영명학교와 평양 정의여학교에서 3년간 교편을 잡고 행복한 신혼을 보낸다. 이후 3·1 운동이 일어나면서 임시정부 수립에 기여하고, 1920년에는 애국부인회에 참여하여 모금운동도 벌이게 된다. 어린 딸을 업고 뛰면서까지 독립운동에 헌신한 그의 삶을 들여다본다.  alt국민대회 선포문(1919. 4.)조국 독립의 정당성을 담대하게 말하다때는 바야흐로 3·1운동 만세 소리가 삼천리 방방곡곡에 울려 퍼진 후 열기가 점차 숨 고르기를 하던 시절이었다.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으로 국민이 주인인 민주공화제가 시작되었다. 국내에서 항일활동이 불가능해진 이애라는 먼저 러시아로 망명한 남편 이규갑을 찾아 나섰다. 중간 기착지인 웅기항에는 그녀를 체포하기 위한 삼엄한 경계망이 펼쳐지고 있었다. 일제 헌병과 경찰 등의 눈초리는 날카롭게 움직였다. 검문검색에 혈안이었던 요시다는 방금 도착한 그녀를 보자마자 한국인 헌병보조원에게 곧바로 포박을 명령하였다. 갑자기 웅기항에는 서슬 퍼런 불호령이 침묵을 깨뜨렸다. “내 몸에 손대지 마라! 순순히 걸어가겠다! 포승줄도 하지 마라! 지은 죄도 없고 도망치지도 않을 것인데 그게 무슨 필요가 있느냐!” 순간 헌병보조원은 당황하여 어쩔 줄 몰랐다. 이어 “우리 국모를 능욕해 돌아가시게 하고 우리 황제의 자리를 빼앗는 왜놈들의 개·돼지가 되어 무슨 짓을 하는 것이냐! 너희는 대한제국의 백성이 아니냐? 신라의 개·돼지는 될지언정 왜놈의 신하는 되지 않겠다며 참수당한 박제상을 모르느냐!” 어느 누구도 감히 흉내조차 할 수 없는 일갈이었다.이애라 인생 항로가 진한 감동으로 다가오다본관은 전주, 고향은 충남 아산이다. 1891년 1월 서울에서 기독교인 이춘식(李春植)의 셋째 딸로 태어났다. 본래 이름은 이심숙(李心淑)이나 우리에게 이애라와 이애일라로 알려진 신여성이었다. ‘애라(愛羅)’는 서양 이름 애나(Anna)로 성모 마리아의 어머니 이름이다. 여기에서 그녀의 깊은 신앙심의 일면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화학당 중등과를 졸업하고 모교 교사로 재직하던 충남 공주 영명여학교 교장 사애리시와 이화학당장의 중매로 이규갑(李奎甲)을 만나 결혼하였다. 당시 이규갑은 공주 영명학교 교사로 재직하면서 청소년들에게 민족의식을 일깨우는 데 열정적이었다.영명여학교에서 교편생활을 계속하면서 남편과 함께 여자야학교를 운영하는 등 근대교육 보급에 남다른 열성을 보였다. 이들 부부에게 근대교육 보급은 곧 식민지배에서 벗어나는 지름길로 인식되었다. 영명학교와 영명여학교 교사와 졸업생·재학생은 공주지역 3·1운동 주역으로 성장하였다. 남편이 평양기독병원의 전도사와 기성상업학교 교장으로 일하게 되면서 1918년 평양의 정진소학교와 정의여학교로 근거지를 옮겼다. 여학생들에게 다정다감한 어머니로서 모범을 보였다. 이듬해 서울에서 공주와 평양 소식을 접한 부부는 만감이 교차하는 가운데 분주한 나날이었다. 1919년 1월 말경 3·1만세운동이 일어나기 직전 동지들의 연락이 있자, 남편은 직장을 그만두고 상경하였다. 이애라도 1남 2녀 중 막내딸만 안고 서울에 올라와 남편 독립운동을 도왔다. 3·1운동에 참여하였다가 경찰서에 구금되었다. 석방이 되자 곧바로 동지들과 합류하여 독립지사와 가족들 후원을 위한 모금활동을 전개하였다. alt이애라         슬픔을 항일운동으로 승화시키다3·1운동이 요동치던 어느 날 어린 딸아이를 업고 아현동 언니 집으로 가던 도중에 일제 헌병을 만났다. 아이는 백일이 갓 지난 상태였다. 헌병은 아이를 빼앗아 길에 내동댕이쳐서 즉사시켰다. 아이의 비명소리를 들으면서 체포되는 참담한 고통과 아픔을 겪어야만 하는 처량한 운명이었다. 이때 뒤에 있던 유득신이 아기를 안았으나 이미 숨진 상태였다. 청천벽력이란 이러한 상황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닌가. 유득신은 말없이 시체를 거두어 아현성결교회 공동묘지에 고이 묻었다. 남편 망명 이후 계속된 체포와 고문에도 이애라는 수원·공주·아산 등지를 순회하면서 독립운동 자금 모금과 항일의식 고취에 전념하였다. 경찰은 이애라를 연행하여 온갖 고문을 하면서 남편의 행방을 추궁하였다. 석방된 후 생계를 위해 천안 양대여학교 교사로 취직하였다. 일제 경찰은 아무런 이유도 없이 걸핏하면 연행하는 등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다. 이른바 ‘불령선인’으로 낙인찍혀 생존마저 위협받는 상황으로 내몰렸다. ‘창살 없는 감옥’과 같은 지옥에서 벗어나 독립운동에 전념하는 남편을 도우고자 러시아로 망명을 결심하게 된다. 야간도주를 하여 웅기에 도착하였으나 다시 붙잡혔다. 다행히 조카가 지혜를 발휘하여 병보석으로 풀려날 수 있었다.의사인 조카는 경찰이 방심한 틈을 타서 비밀리에 선편을 주선하여 이애라를 블라디보스토크로 피신시켰다. 목적지에 도착한 후 아이들은 큰아버지에게 보내고 자신은 병원에 입원하였다. 고문 후유증은 예상보다 심각하였다. 소식을 들은 남편은 한걸음에 달려왔다. “이제는 어디 가지 마오. 내가 두 무릎으로 걸어서라도 당신을 도우리라.” 하며 반가움에 눈물을 흘렸다. 얼마나 소망하던 만남이었던가. 기쁨도 잠시 안타깝게도 만난 며칠 만에 이애라는 머나먼 이국땅에서 순국하고 말았다. 남편은 부인의 죽음 앞에서 올바른 인생 항로를 개척하리라 다짐을 거듭한다. 이윤옥 시인은 불꽃같은 이애라 인생역정을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다. 이 시는 그녀가 살다간 31년이라는 짧은 삶을 너무도 구구절절하고 생생하게 묘사하였다. “여성은 미약하나 어머니는 강하다”라는 여성독립운동가의 굳센 의지를 여기에서 다시 한번 공감한다. 어린 핏덩이 내동댕이친 왜놈에 굴하지 않던, 이애라월선리 산마루에 드리운 붉은 저녁노을충혼탑에 어리는 소나무 그림자가 길고 깁니다.어린 핏덩이 업고 삼일만세 뒷바라지하다왜놈에 아기 빼앗겨 살해되고 차디찬 옥중에서 부르던 조국의 노래식지 않은 그 열기  평양으로 원산으로 블라디보스토크로 뛰어다니며암흑의 조국에 빛으로 나투신 이여  어이타 스물일곱 그 아까운 나이에왜놈의 모진 고문 끝내 못 이기고  생의 긴 실타래를 놓으셨나요.어이타 그 주검 그리던 고국으로 오지 못하고구만리 이역  이름 모를 들판에서 헤매고 계시나요.오늘도 월선리 선영엔  십일월의 찬바람만 휑하니 지나갑니다.애국지사의 혼을 보아라. alt이규갑 묘비          이규갑은 누구인가 1887년 11월 5일 충청남도 아산에서 충무공 이순신의 9세손인 이도희(李道熙)와 박안라의 차남으로 출생하였다. 한성사범학교를 졸업할 당시까지만 해도 독립운동에 별 뜻이 없었다. 교사가 되고 싶었던 소년이 항일운동에 뛰어든 건 홍주의병이 일어났을 때이다. 어머니 요구로 그는 의병들의 식량을 운반하는 일을 하면서 대의를 깨우쳤다. 나라를 잃으면 개인의 그 어떤 소망도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자각한 순간이었다. 이후 감리교 협성신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 와세다대학에서 유학하였다. 귀국하여 영명학교 교사와 교감으로 근무하면서 이애라와 인연을 맺었다.평양에서 전도사와 교장으로 재직 중 1월 평양 지역 대표로 상경하여 3·1운동 준비에 참여하였다. 만세운동이 국내외로 들불처럼 확산되는 열기 속에서 이규갑은 임시정부 수립에 박차를 가하였다. 임시정부 수립은 시대적인 소명이자 필연적이라고 인식하는 분위기였다. 이규갑이 1919년과 1920년대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을 할 수 있었던 데에는 아내 도움이 절대적이었다. 그는 한남수·김사국·홍면희 등과 임시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국민대회 소집을 위해 노력하였다. 이들은 3월 1일 직후부터 ‘비밀독립운동본부’를 조직하여 임시정부 수립과 국민대회 개최를 위한 준비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이애라는 이들과 연락하는 동시에 은신처를 제공하였다. 4월 2일 인천만국공원에서 개최된 회의에 전국13도 대표의 한 사람으로 참석하여 한성임시정부를 조직하고 평정관(評政官)에 선출되었다. 이규갑은 이애라가 투옥 중이던 4월 중순에 상하이로 망명하였다.그는 임시정부에 직접 참여하지 않고 한인청년회와 대한청년단 등에 가담하여 간접적으로 임시정부를 지원하였다. 5월 이후에는 임시의정원 충청도의원, 청원법률심사위원회 위원, 대한적십자회 회원 등으로 활동하였다. 러시아로 근거지를 옮겨 지청천·오광선·이민화 등과 독립군사관학교를 운영하는 등 장차 다가올 독립전쟁에 대비하고 있었다. 이어 헤이룽장성 삼일학교의 교사로 근무하며 애국청년혈성단을 조직하는 한편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목회자로서 선교활동과 교육사업에 종사하였다. 이는 한인사회 청소년들에 민족정체성을 각성시키는 커다란 자극제였다.1927년 가족과 함께 귀국하여 1929년 4월 신간회 경동지회 설립을 주도하고 집행위원장에 선출되었는데, 신간회가 해소되자 목회활동에 전념하였다. 해방 이후 건국준비위원회 재무부장과 조선감리회 유지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되어 감리교회 재건운동을 선도하였다. 이후 정계에 투신하여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 대한국민당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되어 최고위원과 문교사회분과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1952년 순국선열유가족 조사위원장, 1956년 충국열사기념사업회 회장, 1959년 대한기독교반공위원회 위원장 등을 지냈다. 이규갑의 다음 회고는 촉촉하게 내리는 빗물처럼 심금을 울린다. “나는 문중의 죄인이다. 나로 인하여 내 처가 죽고 자식이 죽고 친족 7명이 죽었다. 나 때문에 문중에서 왜적에게 죽은 사람만도 9명이나 되니 선영에 그런 작죄(作罪)가 있겠는가. 또한 나는 내 신체에 대한 죄인이다. 양친에게서 받은 소중한 내 몸을 무수히 학대하였다. 왜적에게 잡혀 감옥행을 한 것만도 33회나 된다. 끔찍한 고문도 많이 당하고 매도 많이 맞아서 노구는 성한 데라고는 없다. 이 또한 불효요 불경이니 나는 내 몸에 죄인이다.”교육자로서 신앙인으로 이들의 삶은 너무나 숭고하고 위대하다. 특히 가시밭길을 걸어간 이애라 인생 항로는 암울한 오늘을 밝히는 한줄기 아름답고 영롱한 빛이 되어 다가온다. 시대적인 소명의식에 충실한 인생역정이 새로운 희망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기를 바란다. alt이규갑과 이애라의 충국순의비 비문        ‘선생은 품성이 현숙, 효순하여 범사에 관후하였다. 이화학당을 졸업하고 양육사업에 종사하다가 서기 1919년 3·1독립만세 때에 애국부인회를 지도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서울·평양·공주에서 옥중생활을 하였다. 서울에서 일본 헌병은 부인의 품에 안긴 아이를 빼앗아 타살하고 부인을 체포·연행하였다.그 후에 부군 이규갑이 독립운동을 하는 시베리아로 밀행하다가 함경북도 승가항에서 왜적에게 체포되어 가혹한 고문을 받고 순국하다.’충국순의비 비문 중에서]]> Wed, 03 Feb 2021 16:42:05 +0000 51 <![CDATA[인문학관 일제강점기 해외 동포들이 써 내려간 항일 민족시가 「단가」와「아히들 노래」]]> 글 김동수(백제예술대학교 명예교수·시인) 일제강점기 상하이, 만주, 블라디보스토크, 미주 등 해외에서 발표된 망명인사들의 항일 민족시가들이 우리의 무관심 속에 방치되어 있다. 아래 소개할 시가들은 1907년부터 샌프란시스코에서 발간한 『공립신보』(1909년 『신한민보』로 통합)에 게재된 작품들이다. 당시 언론통제 아래 친일 문학으로 변질되어 가고 있던 국내 문학과는 다르게, 해외 동포들의 망명문학에서는 민족사의 정맥을 지켜 민족혼을 불태우고 있었다.  일제는 1904년 한일협약 이후 우리의 황실에 경무고문을 파견하여 유생들의 벽보에서부터 신문의 원고를 사전에 검열했고, 이로써 반일 감정을 미연에 방지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때 미국에서 발간된 한인들의 『공립신보』는 우리나라 근대사에 있어서 당시 한민족의 참상과 독립 의지를 널리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사료이다. 해외 동포들은 한결같이 4·4조의 가사체를 통해 식민치하에 시달리고 있는 고국 동포들의 실상과 광복의 염원을 표출하고 있었다. 4·4조 형식은 이들이 1903년부터 1905년 사이 미국 하와이로 이민을 오기 직전 고국에서 이미 익숙하게 사용하고 있던 문체였다. 해외로 망명한 애국 인사들은 4문체를 통해 이주 한인들에게 조국이 처한 현실 인식과 국권 회복을 위한 염원을 호소하고 있었다. 그런데 잘 보면 모두 작자 이름이 가명으로 표기되어 있다. 당시 국내에 비해서는 표현이 자유로운 편이었지만, 감시의 손길은 멀리 떨어진 미국에까지 뻗쳐 있었다고 한다. 일제는 샌프란시스코 주재 일본 영사관과 또 교포 사이에 밀정을 심어 반일 성향 민족주의자나 애국인사들의 동태를 일일이 탐지하고 있었다.아국미국 됴하하나 / 우리나라 이아니라 어느때나 성공하여 / 깃붐으로 도라갈고 어서밧비 속량하고 / 고향산천 만나보세 죽엇스면 죽엇지오 / 덕국노예 못되겟네「단가(短歌)」, 1909. 7. 7. 당시 우리 동포들은 선진 문명국에 대한 동경을 품고 유학과 경제적 자립을 위해 이역만리 미국까지 떠나갔지만, 그곳에서 마주한 현실은 약속과 달랐다. 동포들은 가혹하게도 하와이 사탕수수밭 노동 현장에 내몰리게 되었다. 때문에 이들의 작품에는 고향산천에 대한 그리움과 식민지 노예로 전락되어 유랑하는 망국인의 처참한 상황이 절절하게 담겨져 있다.까닥까닥 게다신고 / 깜실깝실 더기간다어셔오계 동무들아 / 무셔말아 원수놈을 뎌기가는 뎌놈들이 / 멸망한다 우리나라 (중략)하여보셰 하여보와 / 싸홈한번 하여보셰 입에잇는 옥춘당도 / 뎌놈들이 가져왓지 먹지마셰 데놈의것 / 아니먹어 못사는가 지각업는 뎌어른은 / 왜권연을 북북빠라 애해아하 붓그러워 / 더러케도 철이업나 우리들은 자란뒤에 / 대대쟝이 될터이다 사열사격 도라좌편 / 서셔견양 군인들아 만세만세 만만세야 / 태극국기 만만셰야철각생  「아히들 노래」, 1909. 10. 20. 항일 민족시가에는 일제에 대한 적개심과 저항의지가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당시 국내 신문이나 잡지에서는 도저히 찾아볼 수 없는 표현들이 해외 동포의 작품에서는 거침없이 토로되고 있었다. 후반부에 등장한 일본산 사탕인 ‘옥춘당’과 일제 담배 ‘왜권련’에 대한 불매운동을 통해 교포들에게 민족 주체의식을 심어주면서 ‘태극기 만만세’를 외치고 있다.alt깨옥춘(왼쪽)과 옥춘당(오른쪽)]]> Wed, 03 Feb 2021 16:57:48 +0000 51 <![CDATA[끝나지 않은 독립운동 친일인사의 유물·유적을 조사하여 친일 청산 교육의 장으로 만들자]]> 글 이계형(국민대학교 교양대학 교수) 얼마 전 어느 젊은 웹툰 작가가 독립운동가와 그 후손을 비하하는 글을 올려 논란이 일었다. 자신의 페이스북에 “친일파 후손들이 저렇게 열심히 살 동안 독립운동가 후손들은 도대체 뭐 한 걸까” 라는 질문을 던지고서는 자문자답의 글과 함께 ‘친일파 후손의 집’이라 적힌 고급 단독주택과 낡고 허름한 ‘독립운동가 후손의 집’ 사진을 나란히 보여줬다. 올바른 역사 의식을 지닌 사람이라면 친일파를 비판적으로 바라보지 않을까? 친일 인사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 높이기친일파 논란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청장년층에까지 친일을 긍정하는 인식이 확산한 것이 아닌지 우려스럽다. 2019년 ‘신친일파’가 쓴 『반일 종족주의』라는 책이 인기 도서가 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당시는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로 어느 때보다도 독립운동의 의미를 되새겼음에도 말이다. 이런 비판적인 시각에서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친일 문제를 어떻게 이해하도록 할 것인지 다시금 되돌아봐야 한다. 2009년 대통령 직속으로 꾸려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1,005명을 친일파로 최종 선정한 바 있고, 한 해 앞서 비영리 단체 민족문제연구소는 식민지 지배에 협력한 인사 4,389명의 친일 행각과 광복 전후 행적을 담은 『친일인명사전』을 펴냈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친일 인사들을 총정리했다는 데 큰 의미가 있었다. 이후 ‘친일파와 관련한 기념비 등을 철거해야 한다, 국립묘지에 안장된 친일파 묘소를 이장해야 한다, 친일파의 이름을 딴 문학상을 폐지해야 한다’ 등의 주장이 제기되었지만, 실제 이행은 지지부진하였다.그뿐만 아니라 친일 인사들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도 크게 이슈화되지 않았다. 잊을 만하면 불거지는 보수 인사들의 친일 망언과 그에 따른 잠깐의 성토가 있었을 뿐이다. 이는 한두 번이 아니라 그동안 반복되어온 일이다. 친일 화가·음악가·문학가 등의 작품에 대해 여러 번 지적되었지만, 사회적인 여론을 형성하지 못해 흐지부지되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어느 예술가의 생애를 다루는 TV 프로그램만 해도 친일 활동에 대해서는 눈 감아 그의 예술성에 친일 정도는 가볍게 묻혀버린다. 내가 좋아하는 시, 가곡, 소설 작가인데 그 정도는 별것 아니라는 식이다. 그러다 보니 친일파에 대해 무감각해지고, 심지어 이들을 옹호하는 분위기까지 생겨나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럽다.alt김백일 동상 옆에 세워진 김백일 친일행적단죄비친일 인사들의 유물·유적 관리하기이제는 친일 인물들의 행적을 정리하는 수준을 넘어 직접 행동할 때이다. 이를 위해서는 전국적으로 친일파들의 유물과 유적을 조사하고 살아있는 역사 교육의 장소로 활용해야 한다. 무엇보다 청소년 역사교육 차원에서 교육 현장의 친일 잔재를 없애는 일이 선행되어야 한다. 교실에서는 독립운동가의 활동을 기리고 친일을 비판하는데, 여전히 교내에 친일 인사의 동상이나 기념비가 있다면 모순이 아닐 수 없다.그런데도 전국 17개 시·도 교육청 중 광주·전남만이 교내 친일 잔재 청산에 적극적인 듯하다. 이와 대조적으로 부산·대구·세종·강원·충북·경북·경남 교육청은 그러한 사업에 대한 계획조차 없다. 2019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서울 소재 학교 내 친일 잔재 전수조사를 한 것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었지만, 관할 서울시교육청은 이를 바로잡기 위한 조사는커녕 청산 작업을 진행하지 않고 있다. 인천·대전·울산·경기·충남·전북·제주 7개 교육청에서 교육 현장 속 일제 잔재 실태 파악 및 청산 관련 조사나 토론회 등을 실시한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다음으로 친일파와 관련한 기념비·기념탑·동상·기념관·도로명 등의 유물과 유적을 전수 조사하고 목록화해서 관리해야 한다. 이를 이미 시행하는 지자체도 있고 민족문제연구소와 같은 민간단체도 있다. 전라북도는 2020년 ‘친일 잔재 전수조사 및 처리 방안 연구용역’을 진행하였고, 이에 대한 처리 기준을 마련하여 역사교육에 활용할 것이라 한다. 이는 상당히 고무적인 일이지만 이러한 움직임을 보이는 지자체는 그리 많지 않다. 이를 반대하는 측은 친일파들의 행적을 논할 때, ‘공(功)과 과(過)’의 균형을 잡아야 한다는 주장을 내세우곤 한다. 유명인일 경우에는 더욱 민감하다 보니 기념비나 동상 등을 철거하기란 간단치 않다. 몇 년 전부터 민족문제연구소 등 민간단체들이 친일 기념비를 없애기보다는 좀 더 합리적인 방안으로 그 옆에 ‘단죄비(斷罪碑)’를 세우고 있는데, 논란에서 빗겨나갈 하나의 방안으로 보인다. 그 자체도 역사이니 친일 기념비를 역사교육 자료로 활용할 수 있다는 차원에서다. 그렇다손 치더라도 친일파가 제작하거나 건립한 독립운동가 동상과 기념비는 철거되어야 한다. 이는 단죄비를 세우는 것과는 다른 얘기다. 어느 누가 보더라도 논란의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 대한 철거를 주장하는 경우가 많지만 맥없이 흐지부지되기 일쑤였다. 그렇다고 성과가 전연 없던 것도 아니다. 경남 마산시가 2003년 5월 선구자를 작곡한 친일파 조두남을 기리고자 ‘조두남기념관’을 지었으나, 그의 친일 문제가 불거지면서 결국 2004년 7월 ‘마산음악관’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2020년 12월 전북 정읍시는 친일 작가 김경승이 제작한 덕천면 황토현전적지의 전봉준 장군 동상과 부조 시설물을 모두 철거하고 재건립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서울 탑골공원의 3·1 운동사 부조, 서울 남산의 김구 동상 등도 그의 작품이다. 이외에도 강원도 원주 민긍호 의병장의 묘소 근처에는 친일파 정일권 전 육군참모총장의 충혼비 헌시가 버젓이 세워져 있다. 역사의 단죄는 잘못을 처벌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역사의 잘잘못을 가려 친일 행위가 더는 옹호해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청산의 대상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친일 인사들의 유물과 유적을 전수 조사하고 목록화해서 통합·관리하는 것은 그것을 가리는 시작이 될 것이다. alt친일작가 김경승이 제작한 전북 정읍에 위치한 전봉준 동상          ]]> Wed, 03 Feb 2021 17:07:28 +0000 51 <![CDATA[독립의 발자취 민족시인 이상화의 항일정신이 깃든 병풍 10폭에 담긴 이야기]]> 글·정리 편집실 민족시인 이상화와 함께 서화가 서동균 등 일제강점기에 대구를 중심으로 교류하던 예술인들의 이야기를 품은 병풍 한 점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병풍은 그 옛날 이상화 시인이 포해 김정규에게 선물한 것으로, 지금까지 이를 보관 중이던 선생의 아들 김종해 씨가 기증 의사를 밝혔다. 병풍 기증을 도운 대구시 문화예술아카이브팀 임언미 학예연구관에게 관련 이야기를 들어본다.  alt〈금강산 구곡담〉 시를 담은 병풍(대구시 문화예술아카이브팀 제공)        1932년 음력 5월, 민족시인 상화(尙火) 이상화(1901~1943) 선생이 당대 명필 서예가 죽농(竹濃) 서동균(1903~1978) 선생에게 부탁해 〈금강산 구곡담〉을 병풍에 새긴 뒤 포해(抱海) 김정규(1899~1974) 선생에게 선물하였다. 병풍에 새겨진 〈금강산 구곡담〉 시는, 난사 최현구(1829~1900) 선생이 금강산 답사 후에 쓴 내용이다.10폭 병풍의 크기는 폭 400cm, 높이 174cm다.〈금강산 구곡담〉 시가 담긴 10폭 병풍이 어떻게 대구시에 기증되었나요?대구시에서 문화예술아카이브 구축 작업을 하면서 자료 수집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신문에 공개되고, 2020년 9월 말 포해 김정규 선생의 셋째 아들 김종해 씨가 서울 자택에 보관 중이던 병풍에 대한 기증 의사를 밝혀왔습니다. 이에 대구시 문화예술아카이브팀이 김종해 씨 자택을 방문해 서화 전문가에게 분석을 의뢰한 뒤 기증 절차에 들어갔습니다. 김정규 선생의 셋째 아들 김종해 씨는 어떠한 연유로 기증을 결심했나요?1974년 선친인 김정규 선생이 돌아가신 뒤 유품 보관은 김종해 씨 책임이었습니다. 김종해 씨는 선대 어르신의 뜻이 담긴 병풍의 진정한 가치를 후대에도 이어가야 한다는 마음에, 이상화 시인의 후손에게 연락을 시도했지만 여의치 않았습니다. 이후 이상화 시인의 고향인 대구시에서 문화예술아카이브를 구축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기증을 결심했다고 합니다.병풍 기증이 공개된 후 사람들의 반응은 어땠나요? 또 어디에서 만날 수 있는지요.병풍에 대한 사연이 언론에 처음 알려졌을 때, 많은 사람이 기증자 김종해 씨와 병풍에 얽힌 이야기에 관심을 보였습니다. 이에 병풍 공개를 위해 잠시 대구미술관에서 기증행사를 진행했고, 현재는 미술관 수장고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그간 가정집에서 오랜 세월 보관되어 왔던 터라 보존 작업이 필요한 상태이며, 추후에는 미술관 기획전시 등에 활용할 예정입니다.해당 병풍은 근대기 대구 문화 주역들의 사연을 품은 역사적 산물과도 같은데요, 어떠한 의미로 평가되고 있는지 설명해주세요.병풍에는 1932년 서동균이 붓으로 글을 쓰고 이상화가 김정규에게 선물했다는 내용이 적혀있습니다. 국내 서화 작품 중에 이같이 제작 연도와 작품에 얽힌 사연이 뚜렷하게 기록된 것은 드문 사례입니다. 무엇보다 해당 병풍은 일제강점기인 근대기 민족시인 이상화의 나라에 대한 생각을 전반적으로 알려주는 유물이라는 점에서 특히 가치가 있습니다. 거기에 다른 독립운동가들의 이야기가 더해져 높이 평가할 수 있는데요, 1930년대 제작된 일반적인 10폭 병풍보다 이상은 더 가치가 있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이번 기증과 같은 사례가 후대에 어떤 의미를 남길까요?만약 이 병풍이 김종해 씨 집에 계속 머물러있었다면 그에 얽힌 이야기는 세상 밖으로 나오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이상화 선생이 독립운동을 했었고, 서동균 선생이 독립운동을 하다 옥고를 겪었다는 사실은 알려져 있었어도, 두 사람의 친분 관계에 대한 별다른 증거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또 김정규 선생이 가산을 털어서 독립운동 자금을 충당했고, 대구노동공제회 및 신간회 활동 등 독립운동을 하다가 서대문형무소에서 2년이나 옥고를 치른 민족지사였다는 사실도 알려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번 기증을 통해 훗날 우리나라 독립운동사가 더욱 풍성해질 것으로 기대하며, 어떤 역사적 가치를 지닌 물건을 개인이 보관하기보다 대의를 위해 기증되었을 때 그 물건의 가치가 더 깊고 넓어진다는 사실을 알려준 소중한 선례로 남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alt서동균(왼쪽) / 이상화(오른쪽)금강산 구곡담에 담긴 항일의 의미〈금강산 구곡담〉 시를 담은 10폭 병풍은 이상화 시인이 기획하고 죽농 서동균이 행초서로 쓴 서예 작품이다. 병풍에는 이상화 시인의 교유 관계는 물론, 작품 속에 녹여낸 근대기 문화인들의 항일정신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병풍에 담긴 세 사람의 민족정신이상화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로 잘 알려진 민족시인이며, 신간회 대구지회 출판 간사로 있으면서 독립운동 자금 마련을 위한 사건에 연루되어 대구경찰서에 구금된 바 있다. 서동균 또한 근현대기 주요 작가로 서예·사군자·수묵화를  잘했던 서화가이다. 김정규는 1924년 대구에서 대구노동공제회 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고, 일본에 유학 중 독립운동을 주도하였으며 신간회 활동을 이어간 민족지사이다. 이들 세 명의 이야기가 담겨 있는 병풍은 의미 있는 작품이다. 1932년 병풍이 제작될 당시 서동균은 30세, 이상화 32세, 김정규는 34세로 비슷한 또래였다. 서로 교유한 관계였다는 사실은 구체적으로 알려진 바 없다. 단지 이상화가 10폭이나 되는 대작을 부탁할 만큼 서동균과 막역한 사이였고, 이러한 작품을 선물할 만큼 김정규는 이상화가 존중하는 인물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들은 일본에 유학한 경험이 있고 근대국가로 성장한 일본의 발전상을 직접 볼 수 있었다. 무엇보다 그곳에서 차별을 당한 경험이 있기에 조국과 민족의 앞날에 대한 고뇌가 더욱 깊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들은 모두 나라 잃은 암울한 시기에 민족정신을 잃지 않았던 젊은 엘리트들이었다.저항정신을 상징하는 금강산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들은 소규모 국토 순례의 개념으로 금강산 답사를 했다고 전해진다. 금강산을 빼앗긴 국토로 상징화해 시나 그림, 노래 등을 짓곤 하였다. 그중 〈금강산 구곡담〉은 최현구(1829~1900) 시인의 『난사집』에 수록된 시이다. 최현구는 1859년에 내금강 만폭동 계곡을 답사하고 이 시를 지었다고 전해진다. 크고 작은 물줄기가 많은 만폭동에는 이름 붙여진 ‘담’도 많았는데, 대부분이 여덟 곳으로 노래해 ‘만폭동 내팔담’으로 알려져 있다. 최현구는 여기에 백룡담을 추가해 ‘구곡담’이라 칭하였다. 이상화 시인이 병풍에 새길 글귀로 금강산 구곡담을 택한 이유는 아마도, 나라를 빼앗긴 상황에도 의연한 산하를 의지하여 일제에 굴복하지 않는 정신을 지키고 싶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금강산은 그러한 마음의 상징이었을 것이다. 이어 서동균은 금강산 구곡담에 등장하는 9개의 담인 ‘백룡담·흑룡담·비파담·벽파담·분설담·진주담·구담·선담·화룡담’을 제1폭부터 제9폭까지 새겨 넣었다. 매 폭에 두 줄로 칠언절구 시의 본문을 쓰고, 세 번째 줄 중간 부분에 제목을 썼다. 그리고 마지막 제10폭에 서동균이 글씨를 쓰고 이상화 시인이 김정규에게 선물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병풍 제10폭에 적힌  내용우(右) 난사(蘭史) 최현구 선생(崔鉉九先生) 구곡담시(九曲潭詩) 세(歲) 임신(壬申) 중하(仲夏) 후학(後學) 죽농(竹農) 서동균(徐東均) 서위(書爲) 포해(抱海) 김정규 대인(金正奎大仁) 이상화(李尙火) 정(呈)오른쪽은 난사 최현구 선생의 구곡담 시이다. 때는 1932년 음력 5월, 후학 죽농 서동균이 포해 김정규 대인을 위하여 쓰다. 이상화 드림]]> Wed, 03 Feb 2021 17:21:53 +0000 51 <![CDATA[세계 산책 1880년대 코카콜라에는 코카인이 들었다?]]> 글 도현신(역사작가) 전 세계를 통틀어 오래도록 인기가 있는 음료수는 단연 코카콜라라고 꼽을 수 있다. 하루에만 1억 개가 팔린다는 코카콜라는 청바지, 햄버거, 할리우드 영화와 더불어 미국 문화를 전파한 상징물로 자리 잡았다. 인기가 높은 만큼 코카콜라를 둘러싼 소문들도 무성하다. 코카콜라를 둘러싼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자. alt초기 코카콜라를 개발한 약제사 존 펨버턴      코카콜라의 어원이 코카인이다?코카콜라를 둘러싼 소문 중 하나는 코카콜라에 코카인이 들어갔다는 내용이다. 코카콜라의 이름인 ‘코카’가 사실은 마약의 일종인 ‘코카인’에서 온 것이라는 것이다. 이에 코카콜라 본사에서는 “코카콜라에 코카인이 포함되었다는 소문은 유언비어”라고 부인하기도 했다.하지만 놀랍게도 이 소문은 한때 사실이었다. 실제로 코카콜라를 발명한 미국 애틀랜타 출신 약제사인 존 펨버턴은 1886년 5월 “코카인의 원료인 코카잎과 코카나무 열매를 끓인 추출물에 설탕과 탄산수와 카페인을 넣어 코카콜라를 만들었다”고 밝혔다. 코카콜라에 코카인이 들어갔다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발표한 그는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다. 어떻게 된 일이었을까?이유는 간단했다. 1880년대까지만 해도 미국과 유럽 등 서구에서는 코카인의 제조 및 판매가 법으로 금지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1885년 오스트리아의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가 〈코카에 관하여〉라는 논문을 써서 코카인의 효능을 찬양하는 일도 있었다. 그 역시 우울증을 앓을 때마다 코카인을 복용하였다고 한다. 그보다 앞선 1863년에는 코르시카 섬 출신인 프랑스 화학자이자 약사인 엔젤로 마리아니가 코카인을 넣어 만든 포도주인 ‘마리아니 와인’을 만들어 “피로를 풀어주고 기운을 북돋워주는 강장제”라고 홍보하였다. 마리아니 와인은 알코올 도수 10%에 코카인 8.5%가 들어간 적포도주였는데, 이 와인을 한 번 마셔본 사람은 모두 알코올과 코카인이 주는 황홀함에 완전히 중독되었다. 그리하여 마리아니 와인은 순식간에 날개 돋친 듯이 세계 각지로 널리 팔려나갔다. 19세기 무렵, 서구의 유명 인사들 대부분은 한 번씩 마리아니 와인을 마셔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게 마리아니 와인이 인기를 끌자 이것을 모방한 상품들이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그중 하나가 바로 코카콜라였다. 원래 코카콜라는 코카인과 콜라 열매 성분이 포함된 포도주여서 이름도 프렌치 코카 와인이었다. 그런데 마침 애틀랜타에서 술을 팔지 못하는 금주법이 통과되는 바람에, 팸버턴은 포도주를 빼버리고 대신 탄산수에 코카인과 설탕과 카페인을 넣은 다음 이름을 코카콜라로 바꿔서 팔았다. 마시면 시원한 느낌을 주는 코카콜라는 열렬한 인기를 얻었다.존 펨버턴은 1888년 사망을 앞두고 코카콜라에 대한 모든 소유권을 약제사인 에이서 캔들러에게 넘겨주었다. 1892년 에이서 캔들러는 코카콜라 회사를 설립하고, 이때부터 본격적인 코카콜라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19세기 말엽부터 코카인이 사람에게 해로움을 끼친다는 부정적인 여론이 커졌다. 에이서 캔들러는 1903년 코카콜라에서 코카인을 완전히 제거하고, 대신 카페인 함유량을 기존 수치보다 5배나 높인 코카콜라를 만들었다. 이것이 오늘날 전 세계인들이 마시는 코카콜라의 원조가 되었다.  alt마리아니 와인 홍보(왼쪽) / 마리아니 와인 소개(오른쪽)미군에 의해 전 세계로 퍼진 코카콜라1941년 하와이 진주만의 미군 기지가 일본으로부터 공격당한 것을 계기로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였다. 그리고 미군이 세계 각지로 파견되면서 코카콜라도 이들을 따라 지구촌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마침 코카콜라 본사도 제품의 판매와 홍보에 미군을 적극 활용하였다. 전 세계에 주둔한 미군 기지에 코카콜라 자동판매기를 설치하고, 미군을 대상으로 술 대신 알코올 성분이 없는 코카콜라를 마시라고 선전하였다. 미군 장군들도 병사들이 술을 마시고 취해 행패를 부리는 것보다 취할 염려가 없는 코카콜라를 마시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해서 코카콜라의 반입을 환영하였다. 병사들도 주둔지 인근의 더러운 물을 마시고 배탈이 나는 것보다는 정수 처리를 해서 깨끗한 코카콜라를 더 즐겨 마셨다. 1943년 6월 27일 북아프리카 알제리에 주둔한 아이젠하워 장군은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한테 코카콜라 300만 병을 보내달라고 전보를 보냈다. 그렇게 1943년 전 세계의 미군이 마신 코카콜라의 양은 무려 7,500만 병에 달했다. 코카콜라 본사는 1943년 전체 생산량의 3분의 1을 미군에 팔아 5,500만 달러의 수익을 거두었다. 1945년 8월 15일 2차 세계 대전은 미군의 승리로 끝났다. 그리고 전쟁 중에 코카콜라를 마셔본 병사들은 제대한 뒤에도 코카콜라를 잊지 못해 계속 찾았다고 한다. 아울러 전쟁이 끝나고 한국과 일본 등 세계 각지에 주둔한 미군들을 통해 나라 각지에서 코카콜라를 접하게 되었고, 이후 코카콜라는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얻게 되었다.]]> Wed, 03 Feb 2021 17:29:07 +0000 51 <![CDATA[기념관은 지금 독립기념관 뇌 지도 읽기 한국판 뉴딜 성과 창출을 위한 노력]]> 정리 편집실  사진 봉재석 독립기념관의 미래를 위해 언제나 앞장서서 열 일하는 열정 인재들! 이번 호에서는 독립기념관의 미래 전략을 세우는 데 앞장서고 있는 전략기획부를 찾아 2021년 성과 창출을 위한 목표는 무엇이며, 목표를 향한 그들의 핵심 계획들을 들여다본다.  alt전략기획부 박순영독립기념관에서의 한국판 뉴딜이란?코로나19가 불러온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정부에서는 디지털 혁신, 친환경 경제, 안전망 구축을 중심으로 한국판 뉴딜 정책을 수립하였는데요. 독립기념관에 맞는 과제는 무엇일지에 대해 고민한 결과 ‘독립운동사 전시·교육·연구·고객서비스 분야의 디지털 혁신’을 우리만의 한국판 뉴딜로 정의하였습니다.정부 정책을 독립기념관이 따라가야 할 이유라도 있나요?정부 정책에 적극 대응하고 국민들에게 그 수혜가 돌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공공기관으로서 기본 책임이 아닐까 합니다. 또한 코로나19로 사회 전반이 급격하게 변하고 있는 만큼 과거에 머무르기보다는 선제적으로 변화에 대응하는 것이 독립기념관의 장기적인 추진 방향이기도 합니다. 독립기념관에서 추진할 목표는 무엇인가요?독립기념관에서는 국민과 전문가의 의견 수렴을 거쳐 한국판 뉴딜과 관련해 3대 핵심 과제를 선정하였습니다. 3대 핵심 과제는 ‘5GX, AI 등의 혁신기술을 접목한 관람 환경 구축’, ‘독립운동사 전시 및 교육 서비스의 디지털화’, ‘독립운동 정보의 개방 강화’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십시오.의견을 수렴한 결과, 국민들은 디지털이나 비대면 기술 활용을 강조했습니다. 특히 AI 등을 활용한 서비스의 혁신이 중요하다고 꼽았습니다. 전문가의 경우 독립기념관이 보유한 데이터의 개방 강화를 통해 디지털 역사 콘텐츠를 구축하고, 장기적 관점에서 혁신적 기술을 적용한 전시와 고객서비스 인프라를 구축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이러한 의견을 반영해 앞서 말씀드린 3대 핵심과제를 선정하였습니다. alt앞으로 어떤 성과를 예상하시나요?저희는 국민들이 손쉽게 독립운동가 정보를 검색하고, 누구나 독립운동사 교육과 전시를 향유하는 환경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궁극적으로는 디지털 중심의 사업 전환을 통해 61명 이상의 일자리를 창출하는 것이 올해 목표입니다.독립기념관 한국판 뉴딜 과제, 잘 될 수 있을까요?2021년에는 뉴딜 성과 창출을 위한 기반 조성에 집중할 예정입니다. 이 과정에서 가시적 성과가 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뉴딜 과제는 중장기적인 관점에서 수립되었고 연차별로 조금씩 성과를 만들어나간다면 좋은 결과가 있지 않을까 예상합니다.업무를 추진하면서 어렵거나 염려되는 점도 있을 텐데요.한국판 뉴딜 정책은 디지털 기술과 독립기념관 사업의 접목이 핵심인데, 예산과 전문 인력의 투입이 필수적입니다. 하지만 예산과 인력을 한 번에 늘리기는 쉽지 않은 상황이라 각 부서 및 담당자들의 부담이 늘어나는 것 같아 걱정이고, 또 늘 죄송한 마음도 있습니다. 힘든 상황이지만 이러한 부담을 점차적으로 줄여나가는 것이 저희 부서인 전략기획부가 해야 하는 일이라 생각합니다.한국판 뉴딜 중장기 목표altalt]]> Wed, 03 Feb 2021 17:32:12 +0000 51 <![CDATA[독자이벤트 ]]> alt alt아이콘 클릭하면 퀴즈 정답을 보낼 수 있습니다.]]> Wed, 03 Feb 2021 17:10:38 +0000 51 <![CDATA[들어가며 3·1독립선언서 이전에 2·8독립선언서가 있었다?]]> alt①  2·8독립선언에 참여한 뒤 체포되었다가 출옥한 유학생 대표   기념사진(1920. 4.)②  유학생 대표 11인의 서명이 들어간 2·8독립선언서 마지막장우리 겨레는 아득히 뛰어난 문화를 가졌고 반만년 간 국가 생활의 경험을 가진 자라. 비록 많은 세월 전제 정치의 해독과 경우의 불행이 우리 겨레의 오늘로 이르게 하였다 하더라도 정의와 자유를 기초로 한 민주주의 위에 선진국의 본보기를 따라 새로운 국가를 건설한 뒤에는 건국 이래 문화와 정의와 평화를 애호하는 우리 겨레는 반드시 세계의 평화와 인류의 문화에 공헌할지라.이에 우리 겨레는 일본이나 혹은 세계 각국이 우리 겨레에게 민족 자결의 기회를 주기를 요구하며, 만일 그렇지 아니하면 우리 겨레는 생존을 위하여 자유행동을 취하여서 우리 겨레의 독립을 이루기를 선언하노라.2·8독립선언서 중에서1919년 3월 1일 만세운동을 촉발시킨3·1독립선언서 이전에 2·8독립선언서가 있었다?1919년 2월 8일, 도쿄에서 유학 중인 한국인 학생들이 주축이 되어조선독립청년단 명의로 한국의 독립을 선포하며 2·8독립선언서를 발표하였다. 이 사건은 한국의 첫 독립선언서인 무오독립선언서의 영향을 받았으며,이후 3·1독립선언서(기미독립선언서) 작성에 영향을 끼쳤다.1918년 와세다대학에 재학 중이던 이광수는 서울에서 현상윤, 최린과 독립운동을 논의하였다. 그해 11월 도쿄로 돌아와 최팔용과 함께 조선인 유학생들을 규합하여 독립선언을 기획하였다.이광수는 2·8독립선언서를 한국어와 영어 두 가지로 작성하였다. 최팔용은 이광수의 신변을 우려하여 도피할 것을 제안하였고, 이광수는 선언문 작성 후 상하이로 도피한다.1919년 2월 8일 오전, 각국 대사관과 일본 국회의원, 조선총독부, 일본의 신문사에 독립선언문을 발송하였다. 이날 오후 2시, 재일본 동경 조선 YMCA 강당에는 조선 유학생 학우회 총회가 있었다. 회의 때 최팔용은 ‘조선청년독립단’을 결성하려는 긴급동의를 요청하였다. 이윽고 독립선언문이 만장일치로 채택되었고 백관수가 독립선언문을 낭독하자마자, 대회장을 감시하던 일본경찰이 들이닥쳐 60여 명의 유학생을 체포하고 강제 해산시켰다. 주모자였던 최팔용과 백관수를 비롯한 학생 8명이 기소되었지만, 유학생들은 2월 12일과 28일에 도쿄 히비야공원에서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거리 행진을 시도하였다. 이후 2·8독립선언서는 국내로 밀반입되어 3·1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Tue, 02 Mar 2021 11:00:27 +0000 52 <![CDATA[톺아보기 잊지 못할 그날 3·1 독립만세운동의 전후]]> 글 박맹수(원광대학교 교수) 1919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일제의 식민지배에 저항하여 전 민족이 항일독립운동으로 일어났다.합류하는 민중이 수만 명에 달했고, 시가지 곳곳에서 독립을 절규하는 연설이 행해졌다.일제히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태극기를 선두로 시가지를 향한 평화적인 만세시위가 시작되었다. 가혹하게 탄압받으면서도 민중들의 열기는 식을 줄 몰랐던 그날의 현장 속을 들여다본다. alt동학농민운동3·1운동 전사로서의 동학농민혁명고부군수 조병갑의 폭정이 도화선이 되어 일어난 1894년 동학농민혁명은 1년 이상이라는 장기간에 걸쳐 수백만의 민초들이 참여한 가운데 전개되었으며, 동시대에 일어난 세계 민중운동사에서 최대 규모라는 의의를 지니고 있다. 그렇다면 오늘날과 같이 교통과 통신이 발달하지 않은 시대에 어떻게 해서 수백만이 대규모로, 그것도 1년 이상에 걸쳐 장기적인 항쟁을 지속할 수 있었을까? 여기에는 분명히 어떤 이상(理想)이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동학농민군지도자 홍종식의 증언은 그 이상을 추측하도록 하기에 충분하다. 첫째, 입도만 하면 사인여천(事人如天)이라는 주의 하에서 상하귀천 남녀존비 할 것 없이 꼭꼭 맞절을 하며 경어를 쓰며 서로 존경하는 데에서 모두 다 심열성복이 되었고, 둘째 죽이고 밥이고 아침이고 저녁이고 도인(道人)이면 서로 도와주고 서로 먹으라는 데에서 모두 집안 식구같이 일심단결이 되었습니다. - 홍종식, 『70년 사상의 최대 활극 동학란 실화』, 『신인간』 34호, 1929년 4월호.이 증언은 동학농민혁명 당시, 충청남도 서산에서 농민군지도자로 활약한 홍종식(洪鐘植)이라는 인물이 자신이 왜 동학농민혁명에 가담했는지, 그리고 당시 민초들이 왜 다투어 동학에 뛰어들었는지를 후대에 회고한 것이다. 홍종식의 회고 속에는  “사람이 하늘이니 사람 섬기기를 하늘 섬기듯이 하라”는 동학의 평등주의적 이상을 실감 나게 실천하고 있다. 또 먹을 것을 나누고 가난한 자와 부자가 서로 도와주는 동학의 유무상자(有無相資)의 전통, 즉 초기 동학의 평균주의적 이상 아래 민중들이 단결하는 모습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요컨대 동학농민혁명은 신분제 해체를 통한 만민평등의 평등 사회 건설과 가진 자와 못 가진 자가 서로 나누고 돕는 유무상자의 평균 사회를 건설하는 데 있었다. alt3·1운동 당시 시위대에 대응하기 위해 있는 일본 군경동학농민혁명의 급진화와 그 영향 동학농민혁명은 한국사는 물론이고 세계사적으로도 흔치 않은 대사건이었다. 500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민초들의 집단 저항운동이자 조선사회를 변혁하려는 일대의 혁명운동이었다. 동학농민혁명 당시의 희생자는 30만 명에 달한다. 그 가운데 최소 3만 명 이상이 일본군에게 잔혹하게 학살당하였다. 2013년 8월에 동학농민군 학살에 동원된 일본군 병사의 종군일지가 공개된 적이 있다. 그 종군일지에 의하면 일본군은 몽둥이로 때려죽이고, 칼로 찔러 죽이고, 불태워 죽이고, 근대식 소총으로 쏴 죽이는 등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농민군을 학살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동학농민군은 왜 근대식 무기를 휴대하고 근대식 전술훈련을 익힌 일본군 정예부대에게 이렇게까지 비극적인 학살을 당하면서 무력항쟁을 계속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일까? 당시의 동학농민군 최고 지도자였던 전봉준은 체포된 뒤 최후 진술에서 “부득이하여 무장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부득이하여 조선 정부군 및 일본군과 접전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재차 삼차 역설하였다. 가령 고부농민봉기를 일으키기 전에 고부군수와 전라감사에게 합법적인 청원을 통해 부당한 세금을 감해 줄 것을 호소하였지만 모두 거절당해서 부득이하게 봉기를 일으킬 수밖에 없었고, 황토현과 장성 황룡촌 및 전주성 등지에서 조선 정부군과 혈전을 벌인 것도 정부군이 먼저 공격했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접전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공주 우금티에서 일본군과 혈전을 벌인 것도 일본군이 먼저 경복궁을 불법으로 침략했기 때문이라고 강조하였다. 이 같은 전봉준의 진술에 근거해 볼 때, 동학농민군이 무장을 하고 정예부대인 조선 정부군 및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는 등 저항운동이 급진화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합법적인 방법을 통한 문제 해결이 지배층에 의해 모두 좌절되었기 때문임을 알 수 있다. 즉 농민군의 무장투쟁은 부득이한 정당방위였다. 동학농민혁명은 19세기 말 세계사에서 유례없는 최대 규모의 민중운동이었으나 지배층의 무능과 일제의 침략, 기득권 수호에 눈먼 보수 지식인들의 탄압 때문에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동학농민혁명을 계기로 분출되고 조직화되기 시작한 이들의 새 시대를 향한 열망은 결코 끊이지 않았다. 예컨대 동학농민군이 꿈꾼 만민평등의 이상은 지배층을 각성시켜 신분제를 폐지하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다. 또 유무상자(有無相資)로 상징되는 동학의 평균주의적 이상은 「폐정개혁 27개조」로 구체화되어 갑오개혁(1894)과 광무개혁(1896)을 탄생시켰다. 그뿐만 아니라 동학농민혁명 당시 내건 ‘척양척왜(斥洋斥倭)’의 반(反) 침략주의 노선은 한국 근현대 민족·민중운동의 원류로 자리매김하게 되었으며, 동학농민혁명의 이상은 다시 1919년 3·1운동을 통해 한층 승화된 형태로 표출되기에 이르렀다.3·1운동의 발단1919년 1월 22일에 승하한 광무황제의 장례식은 국장(國葬)으로 3월 1일에서 7일까지 거행되었다. 국장 기간 동안 조선인들에게는 일제에 의해 광무황제가 독살되었다는 소문이 널리 퍼져갔다. 이에 전국 각지에서는 애도의 뜻을 표하는 하얀 갓을 쓴 이들이 앞을 다투어 등장하였으며, 망곡식(望哭式)도 전국 각지에서 진행되었다. 전 국토는 눈물바다가 되었고, 국장에 참가하기 위해 경성으로 향하는 이들이 속출하였다. 이 같은 현상의 배경에는 조선왕조로부터 대한제국 시기에 이르기까지 민초들 마음속에 깊게 자리를 하고 있던 일군만민(一君萬民)의 이념이 작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동시에 1910년 국권 피탈 이후 10년에 걸쳐 자행된 일제의 무단통치에 대한 식민지 조선 민중들과 지식인들의 전면적인 반발도 자리하고 있었다. 이상과 같은 역사적 배경 아래에서 천도교, 기독교, 불교 등의 종교지도자는 독립선언을 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33인으로 대표되는 종교지도자들은 독립선언서 말미의 ‘공약 3장’에서 세계만방에 천명(闡明) 하고자 했던 비폭력 평화주의 정신이 훼손될 것을 염려하여, 탑골공원에서 발표하기로 한 독립선언을 취소하고 태화관에 모여 ‘만세삼창’을 한 후 전원 체포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3·1운동은 지도부의 공백 상태 속에서 노동자·농민, 일반 학생들을 중심으로 전개되어 가기 시작했다. alt탑골공원의 독립만세시위 alt덕수궁 대한문 앞 광무황제 장례 행렬3·1운동의 전국적 확산탑골공원에서는 학생과 시민 등으로 독립선언이 이루어졌다. 일제히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태극기를 선두로 시가지를 향한 만세시위가 시작되었다. 합류하는 시위대는 수만 명에 달했고, 시가지 곳곳에서 독립연설이 행해졌다. 시위행진은 가혹하게 탄압받았지만, 운동은 왕성하게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도시 지역에서는 학생과 지식인의 선도적인 역할로 <독립선언서>를 비롯한 각종 인쇄물과 태극기, 독립만세기 등을 제작하였다. 『독립신문』, 『국민신문』 등의 신문과 전단(삐라)이 수없이 배포되었다. 또 납세 거부와 일화 불매, 일본인에 대한 상품 불매와 고용 거부 등이 이루어졌다. 노동자들은 파업을 감행하였고, 학생들은 속속 동맹휴교에 들어갔다. 상인들도 왕조시대의 관행을 따라 ‘철시(撤市)’를 함으로써 독립 의지를 표명하였다. 농촌 지역에서도 학생과 지식인들이 수행한 역할이 적지 않았지만 일반적으로는 농민이 주역이었다. 전국에서 체포된 이들 가운데 55.6%가 농민이었다는 사실이 그것을 웅변한다. 농촌에서는 특히 전통적인 민란 방법에 의한 운동이 전개되었다. 조선 후기에는 양반유생이 민초들에게 추대되어 민란지도자가 되기도 하고 스스로 주도자가 되기도 했는데, 3·1운동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전통적인 양반 거주지로 알려진 동족 마을에서는 일족이 대거 운동에 참가하기도 하였고, 양반 유생이 면장이나 면서기·이장 등을 지휘하여 주민을 동원하기도 하였다. 만세시위 운동은 대부분 장날에 장터에서 시작되었는데, 이것도 전통적인 민란 방법과 동일했다. 지도자의 독립선언에 이은 연설 후에 시위행진이 이루어졌다. 탁주의 취기에 힘입어 참가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시위운동은 적게는 수십 명, 많게는 2만 명에 이르렀는데, 수백 명에서 수천 명 규모가 일반적이었다. 만세시위 집단은 군청이나 면사무소로 쇄도하여 군수나 면장을 끌어내어 ‘독립만세’를 외치도록 강요하는 경우도 있었고, 때로는 경찰서나 주재소를 습격하거나 일본인 상점을 습격하기도 하고, 일본인에게 폭행을 가하기도 했다. 더 나아가서 우편국을 습격한다든지, 전봇대를 넘어뜨리고 교량을 불태우는 등 통신시설을 파괴하여 통신망을 방해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만세시위 운동은 전반적으로 ‘공약 3장’에서 피력한 비폭력 평화주의 운동으로 일관되었다. 3·1운동 당시 피해 상황은 정확하지 않다. 총독부 당국이 가능한 한 축소하여 보고하려는 의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국 상하이에 있으면서 조선에서 나온 각종 정보를 수집하여 기록을 남긴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따르면, 한국 측 피해는 사망자 7,509명, 부상자 15,961명, 체포된 자 46,948명이었다고 한다. 이에 반해 일본 측 피해는 관헌 사망자 8명, 부상자 158명, 파괴된 관공서는 경찰서 및 경관주재소 87개소, 헌병주재소 72개소, 면사무소 77개소, 우편국 15개소, 기타 27개소로, 총 합계 278개소였다.]]> Tue, 02 Mar 2021 15:47:43 +0000 52 <![CDATA[만나보기 민중의 힘으로 퍼져나간 대한독립만세]]> 톺아보기 속 인물 살펴보기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이 이루어졌고 합류하는 민중이 수만 명에 달했다. 도시 지역에서는 학생과 지식인의 선도적인 역할로 시민을 동원하였다. 노동자들은 파업을 감행하였고, 학생들은 속속 동맹휴교에 들어갔다. 상인들은 가게를 닫아버리는 철시 투쟁으로 시위에 동참하였다. 농촌 지역에서는 농민들이 앞장서 시위운동을 이끌었다. 그렇게 모두가 만세시위의 주역들이었다.우리는 오늘 조선이 독립한 나라이며, 조선인이 이 나라의 주인임을 선언한다. 우리는 이를 세계 모든 나라에 알려 인류가 모두 평등하다는 큰 뜻을 분명히 하고, 우리 후손이 민족 스스로 살아갈 정당한 권리를 영원히 누리게 할 것이다. 3·1독립선언서 중 도입부 alt1919년 3월 1일의 민족대표 33인이 독립을 선언한 3·1독립선언서비폭력 만세운동으로의 3·1운동당시의 만세시위 운동은 헌병경찰에게 탄압당한 뒤 무기를 든 항쟁으로 이행하여 갔다. 이런 양상은 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나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때의 양상과 유사하다. 시위에 참여한 이들은 총독부 헌병경찰들이 자행하는 가혹한 폭력에 맞서기 위해 곤봉·각목·나무창 등의 원시적 무기를 소지하거나 자진해서 투석하는 방식을 취하였다. 3·1운동은 전반적으로 평화적 운동이었지만, 가혹한 폭력 앞에 노출되었을 때 이들은 생존과 방어를 위해 최소한의 폭력을 동원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시위대가 상점과 헌병 숙사 등을 습격했지만, 대부분의 경우 물품을 투기하거나 소각할 뿐 절도에 이르지는 않았다. 또 시위는 민란에서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향촌공동체에 의한 동원 방식으로 참여하지 않은 사람은 처벌당하였다. 화톳불 행진과 산상 봉화가 빈번하게 이루어졌는데, 이것도 민란에서 흔히 등장하던 방법이다. 집단으로 산에 올라가 만세를 외치는 경우도 있었는데, 그것은 민란 과정에서 참가자들이 군수나 현감 등 지방관을 비난하는 산호(山呼)의 전통을 계승하는 것이었다. 한편 도시락 지참으로 각지의 만세시위 행진에 참가하거나 운동을 북돋는 ‘만세꾼’도 출현하였다. 시위 선두에는 기생과 소년이 서는 경우도 있었고, 농악과 나팔을 연주하거나 농민답게 큰 깃발이 등장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이미 조선은 독립했다고 착각하는 이들도 적지 않아 시위운동은 마치 축제의 양상을 드러내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사람들은 함께 만세를 외침으로써 조선 사람이라는 일체감에 도취하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한국인은 1910년 일제에게 국권을 강탈당하기 이전부터 집회와 정치활동을 금지당하고 있었다. 열광적인 만세 소리는 지금까지 축적된 불만이 일거에 분출되는 순간이었다.전북지역의 3·1운동 지도자만세시위 운동은 황해도나 평안도, 전라북도와 같이 천도교와 기독교 세력이 강한 지역에서는 서울의 소요와 국장을 목격한 이들이 귀향하여 그 모습을 생생하게 전달함으로써 개시되는 경우가 많았다. 전북지역에서 3·1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대표적인 인물로는 김영원(金榮遠)과 박준승(朴準承)을 들 수 있다. 모두 임실 출신의 천도교인이다. 먼저 김영원은 1894년 동학농민혁명과 1919년 3·1운동에 모두 관여한 인물이다. 임실 지역에는 1889년에 동학이 급속도로 전파되었는데, 이때 김영원도 입교하였다. 1893년에는 보은취회에 참여하였고(『임실교사』), 1894년 3월 무장기포 시에는 임실에서 대접주 최봉성 등과 함께 기포하였다. 동학농민혁명 이후에는 천도교에서 활동하였다. 1906년에는 제자이자 33인 지도자 가운데 1인이었던 박준승과 함께 삼화학교(三和學校)를 설립하여 후진을 양성하였다. 그리고 3·1운동이 일어나자 임실지역의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1919년 3월 2일 정오에 운암면 지천리에 있는 천도교 교구실에서 천도교 전도사인 한준석으로부터 독립선언서 20여 매를 전해 받고, 운암면 내 일대에 게시하였다. 이것이 자극이 되어 3월 12일 임실 장날에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의 정신적 배경이 되었다. 그러나 김영원은 곧바로 체포되어 징역 1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박준승 역시 김영원과 마찬가지로 동학농민혁명과 천도교 그리고 3·1운동에 모두 참여한 인물이다. 1891년에 동학에 입도하여 1897년에 접주가 되었고, 1908년에 수접주(首接主), 1912년에는 전라남도 장성군 천도교 대교구장 겸 전라도 순유위원장을 역임하였다. 3·1운동 당시에는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명이었다. 박준승은 1919년 2월경에 손병희로부터 만세시위 운동에 참여하라는 권유를 받고, 최린·오세창·양한묵 등과 함께 김상규의 집에 모여서 <독립선언서>와 기타 문서의 초안을 검토하고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서 서명하였다. 3월 1일 만세운동 당일에는 손병희 등과 함께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회람하고 만세삼창을 외친 뒤에, 일본경찰에 자진 검거되어 2년간의 옥고를 치렀다. 그 후 고문 후유증으로 1927년에 생을 마감하였다. 정부는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alt전북지역 3·1독립운동에 참여한 김영원(왼쪽) / 전북지역 3·1독립운동에 참여한 박준승(오른쪽)진정한 3·1운동의 주역들3·1운동은 일반적으로 비폭력 운동으로 평가되지만 그러한 평가는 주로 33명의 민족대표를 중심으로 한 평가에 의거한 것이다. 3·1운동을 계기로 중국 상하이에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설립되어 중국을 비롯하여 해외에 산재하던 민족운동가들이 집결하였는데, 세계 여론에 호소하여 독립을 달성하려는 전략이 기축이 되고 있었다. 이후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이 되는 박은식은 그 당시 임시정부 대변인 역할을 수행하였는데, 그는 3·1운동이 얼마나 평화적이었으며 비폭력주의적이었는가를 호소하는 데 힘썼다. 무엇보다 3·1운동은 식민지 조선 역사상 최대의 민중운동으로 평가되고 있다. 여기에 종교가와 지식인의 역할이 적지 않았지만, 어디까지나 도화선을 끌어와 점화한 데 지나지 않는다. 진정한 폭발을 이끌어낸 주역은 노동자와 농민 등이었다. ]]> Tue, 02 Mar 2021 15:49:19 +0000 52 <![CDATA[이달의 독립운동가 독립을 위한 하나 된 외침 당진 대호지·정미 3·1운동 이인정, 송재만, 한운석]]>  글 독립기념관 전시부 3·1운동은 국내외 각지에서 조선인 모두가 참여해 일제의 침략과 식민지배를 부정하고 독립을 선언한 전 민족적인 독립운동이었다. 그중 당진 대호지·정미 3·1운동은 대호지면사무소 직원들이 주도하고 지역 유생을 포함한 군중 1,000여 명이 하나 되어 참여한 만세운동이자, 대호지면에서 정미면까지 면 경계를 넘어 전개되었다는 특징을 지닌다. 여기서 이인정·송재만·한운석은 독립만세운동을 준비하고 실무를 주도하였다. alt(왼쪽부터) 송재만(宋在萬)1891~1951 충청남도 서산건국훈장 애족장(1990)이인정(李寅正)1859~1934 충청남도 서산건국훈장 애족장(1990)한운석(韓雲錫)1884~1950 충청남도 서산건국훈장 애족장(1990)당진 대호지·정미 3·1운동을 위한 준비당진 대호지·정미 3·1운동은 광무황제 국장에 참여하고 돌아온 도호의숙(桃湖義塾) 출신의 대호지 유생들이 서울의 3·1운동을 전하고 대호지면에서의 독립운동을 구상하면서 시작하였다. 대호지면사무소 직원을 중심으로 준비가 진행되는 가운데, 직원 송재만은 ‘도로 보수를 위한 협조 요청’ 공문을 마을구장¹에게 전달하고 마을 주민들이 시위 장소로 모이도록 하였다. 또 도호의숙 훈장 한운석에게 애국가 제작을 요청하였다. 송재만의 제안을 받은 한운석은 독립운동의 필요성에 공감하고 독립의지를 굳건히 하는 내용의 ‘애국가(愛國歌)’를 만들었다. 4월 4일 지역을 넘은 독립만세 행진시위 당일인 4월 4일, 대호지면사무소 앞에 마을 주민 400~ 500여 명이 결집하였다. 면장 이인정은 마을 주민들에게 집합 이유가 사실 도로 수선이 아닌 독립운동을 위함이라 말하고 정미면 천의장터로 나아가자고 연설하였다. 이어 “조선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외치며 군중들을 지휘하였다. 송재만은 전날 광목천 3척으로 제작한 태극기를 흔들며 이인정과 함께 약 7km 정도 떨어진 정미면 천의장터를 향해 만세 행진을 이끌었다. 천의장터에 도착하자 장터에 모인 사람들도 합세하여 약 1,000여 명의 군중들이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1) 구장(區長) 일제강점기 지금의 마을 이장을 불렀던 표현 alt「각지(各地)의 소요(騷擾), 충청남도 서산(瑞山) 천의장에서 소요」, 『매일신보』(1919. 4. 14.)_국립중앙도서관 제공(왼쪽)당진 대호지·정미 3·1운동 참여자 경성복심법원 판결문_국가기록원 제공(오른쪽)여러분을 모이게 한 것은 도로를 수선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조선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모이게 한 것이다.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정미면 천의시장으로 향해 나아가자.4월 4일, 면장 이인정이 대호지면사무소 앞에 모인 군중들에게 했던 연설 중에서「경성복심법원 판결문」(1919. 12. 24.)일제의 비인도적 탄압에 맞선 저항만세군중들의 위세에 눌려 관망하던 일제 경찰은 만세운동을 마치고 귀가하는 민중들의 태극기 탈취를 시도하였다. 여기에 저항하는 군중들에게 당진 경찰서 순사 니미야(二宮)가 권총을 발포하였다. 일제의 비인도적 탄압에 분노한 송재만과 한운석 등은 일제 경찰에 강력히 저항하였다. 일제 경찰은 다음 날인 4월 5일부터 본격적으로 관련자를 탄압하거나 체포하기 시작하였고, 그 과정에서 이인정·송재만·한운석은 일경에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90년 정부는 당진 대호지·정미 3·1운동을 주도한 이인정·송재만·한운석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alt「서산소요범인(瑞山騷擾犯人) 불복항소(不服抗訴), 송재만 등 오십이인」, 『매일신보』(1919. 11. 19.)_국립중앙도서관 제공alt]]> Tue, 02 Mar 2021 15:51:35 +0000 52 <![CDATA[아름다운 인연 파주지역 만세운동에 불을 지핀 임명애와 염규호 부부]]> 글 김형목(사단법인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이사) 식민지배에 저항하는 독립운동은 파주지역에도 번졌다. 1919년 3월 10일 파주 교하리 공립보통학교 운동장에서 100여 명의 학생들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면서 촉발한 가운데 선두로 나선 사람은 구세군신도인 임명애 부교였다. 남편인 염규호 정교는 만세운동의 확산을 결심하며 ‘3월 28일 모두 모여 대한독립만세를 외치자’는 내용의 격문을 배부하였다.  여성독립운동가들이 역사무대에 나오다 서울·평양·정주·원산 등지에서 울려진 3·1만세운동 소식은 철도 연선을 따라 전국 각지로 삽시간에 파급되었다. 서울의 만세 현장에 참여한 학생들이나 광무황제 인산일에 참석하기 위해 상경한 인사들은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각자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들은 만세운동을 지역사회에 알려는 전령사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파주는 서울과 개성의 중간에 위치하여 이러한 소식을 쉽게 접할 수 있었다. 3·1운동을 이야기할 때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이 바로 3·1운동의 아이콘 유관순이다. 하지만 사회적인 민주화 진전과 더불어 여성독립운동가에 대한 발굴이 진전되면서 이와 같은 인식은 점차 변화되고 있다. 역사무대에서 사라지고 우리의 기억에서 오랫동안 잊힌 여성들에 대한 올바른 자리매김은 분명 환영할 일이다. 암울한 현실에도 전혀 흔들리지 않았던 의연한 활약상은 신선한 자극제로 우리에게 성큼성큼 다가온다. alt임명애 수형 사진_서대문형무소역사관 제공(왼쪽) / 염규호 수형 사진_구세군역사박물관 제공(오른쪽)임명애·염규호 부부로서 인연을 맺다 이들 부부에 관한 기록은 매우 소략하여 인생역정을 밝히는 데 많은 한계가 있다. 지금까지 자료를 통해 알 수 있는 부분은 다음과 같다.임명애(林明愛)는 1886년 3월 25일 파주군 와석면 교하리 578번지에서 출생하였다. 남편은 1880년 3월 23일 같은 주소로 기록되어 있다. 이는 판결문에 근거한 것으로 만세운동 당시 상황을 반영한 주소로 판단된다. 손자 증언에 의하면 염규호는 숯 공장을 운영한 사업가였다고 한다. 이들이 언제 결혼을 하였으며 구세군에 입교하였는지도 파악할 수 없다. 구세군의 문산포 중앙영문은 1909년 3월에 개영식을 가졌다. 이 영문은 1934년 폐영되었는데, 1916년 당시 파주군 구세군 전도관은 천현면 법의리, 임진면 문산리, 천현면 법의리 등 세 곳을 운영하였다. 이들은 파주영문 신도로 생각된다.“문산포역에서 한 정거장을 지나 금촌이라 하는 정거장에서 한 7리에 있는 ‘교하’라 하는 구읍이 있는데, 그곳에 기거하는 염규호와 그의 부인은 구세군을 심히 사랑하여 구세군영을 그곳에 설립하기를 심히 원하는지라. 고로 문산포 정교 조춘호와 그의 부인, 서기 이한근과 소관 사관 부위 장기영은 사랑하는 마음으로 재정을 아끼지 아니하고 차비와 식비를 부담하여 2~3일 동안 볼일을 전폐하고 주를 위하여 교하에 가서 염규호와 더불어 열심 전도한 결과에 새로 구원받은 남녀의 수가 십여 명에 달하였는데, 정교 조춘호와 서기 이한근은 그곳에 새로 설립되는 교회를 힘써 돕기로 결심하였다 하니 이는 참 그리스도의  병정이오, 남 사랑하기를 제 몸과 같이하는 사람들이라 하노라.”열성적인 활동과 깊은 신앙심으로 지역사회에 상당한 신망을 받는 인물임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들은 이를 바탕으로 주민들에게 신뢰감을 심어줌으로써 3·1운동 주역으로 거듭 태어날 수 있었다.  alt교하초등학교에 세워진 3·1운동 100주년 기념 임명애 공적 안내판_구세군역사박물관 제공(왼쪽)교하초등학교에 건립된 3·1운동 100주년 기념비_구세군역사박물관 제공(오른쪽)경기도 파주에 독립만세 소리가 울려 퍼지다 러일전쟁을 원활하게 수행하려는 일제는 경의선 부설에 박차를 가하였다. 철도 부설권을 장악한 저들은 파주군·교하군·고양군 등지에서 강제로 역부를 징발하였다. 주민들은 이에 반발하여 저항하는 등 일제 침략에 정면으로 맞섰다. 일제 헌병과 경찰은 마을을 다니며 강제적인 징발을 서슴지 않았다. 특히 임진강 일대를 중심으로 전개되던 의병전쟁을 무자비하게 진압하는 야만성을 그대로 드러내었다. 강제병합 이후에는 토지조사사업과 더불어 특산물인 농산물 중 ‘콩’을 수탈하는 데 혈안이었다. 그런 만큼 항일의식은 더욱 강화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직면하였다. 억압의 굴레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드디어 1919년 3월 10일 교하리 공립보통학교 교정에서 100여 명의 학생들은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를 주도한 인물은 인근에 사는 가정부인 임명애였다. 그녀가 독립만세를 선창하자 학생들은 일제히 호응함으로써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시위 행렬은 운동장을 돌면서 자신들의 정당한 요구를 주민들에게 알렸다. 임명애의 주도로 만세운동을 전개할 수 있었던 배경 중 하나는 구세군에서 운영한 주일학교와 관련성을 추정할 수 있다. 평화적인 시위는 바야흐로 파주지역 독립만세운동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소식은 관내로 파급되는 가운데 주민들 사이에도 조국독립을 위한 항일의식이 점차 확산을 거듭하였다.평화적인 시위가 있은 후 파주지역은 보름 동안 비교적 평온한 분위기로 소강상태였다. 각지에서 전개된 소식은 여러 경로를 통하여 이곳에 전해지고 있었다. 주민들을 동원한 대대적인 만세운동을 위한 ‘준비 단계’였다. 판결문에 따르면, 3월 25일경(실제는 이보다 이른 시기)에 학생 김수덕(16세)과 농민 김선명(24세) 등은 그녀 집을 찾아와 “조선독립운동에 관한 의논을 하고자 하니 방을 빌려 달라”고 요청하였다. 임명애는 남편 염규호와 함께 이들과 효율적인 독립운동을 위한 격문 인쇄·배포가 필수적이라고 판단하여 그렇게 하자고 결정하였다. 곧바로 염규호는 격문의 원고를 작성하였다. “오는 28일 마을주민 일동은 모두 윤환산으로 집합하라. 만약에 불응하면 방화한다”는 내용이었다. 만세시위에 주민들을 참여시키는 강력한 행동 방침이나 마찬가지였다. 김수덕은 등사판을 빌려와 60여 매를 등사하였고 김창실은 와석면 구당리·당하리 등지에 배부하였다. 그런데 일제 경찰과 헌병의 감시는 점점 삼엄하게 다가왔다.만세시위는 격문에 있는 바와 달리 이틀 앞당겨 26일에 전개하였다. 이들 부부를 비롯한 주동자는 700여 명의 주민들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며 가두시위를 벌였다. 그녀는 선두에 서서 이들을 지휘하여 교하면사무소로 향했다. 면사무소에 도착한 시위대는 돌을 던져 유리창을 깨뜨리고 면서기 2명에게 업무 중단을 강력하게 요구하였다. 이를 목격한 주민들은 시위행렬에 가담하여 1,500여 명으로 늘어났다. 시위대를 이끌고 헌병주재소로 향해 나아가자 기세에 눌린 헌병들은 아무 대응도 하지 못한 채 파주헌병분소에 병력을 요청하였다. 지원 병력에 용기를 얻은 저들은 시위대를 향하여 무차별로 발포하여 당하리의 최홍주는 현장에서 사망했다. 시위군중은 일단 해산하였다.이를 계기로 청석면 주민 수백 명도 심학산에 모여 면사무소를 향해 나아갔다. 보통학교 학생들은 태극기를 손에 쥐고 선두에 나섰다. 이들은 면사무소 앞뜰에서 “면장은 나와 만세를 부르라”고 외쳤다. 면장은 처음에 해산을 종용하다가 결국 시위 행렬에 가담하였다.28일 봉일천 장날(공릉장)에는 장꾼과 광탄면 주민 등이 합세한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여기에는 고양군 주민 등도 참여함으로 지역적인 한계를 뛰어넘는 연합시위로 이루어졌다. 일제 헌병은 시위대를 향하여 무차별적인 발포로 현장에서 6명이 사망하고 수십 명이 부상을 당했다. 대규모 만세시위는 피로 얼룩진 역사 현장으로 기억되고 있다.시위를 주도한 임명애 부부를 비롯한 김수덕·김창실 등은 검거되어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으로 임명애는 징역 1년 6개월, 나머지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그녀는 서대문형무소 8호 감방에 수감되어 옥고를 치렀다. 남편도 수감됨으로 부부가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감방에서 투쟁을 멈추지 않다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임명애는 8호 감방에 배정되었다. 여자 감옥인 8호방은 개성지역 3·1운동 주역 어윤희·권애라·심명철, 3·1운동 아이콘 유관순 열사, 수원 기생 김향화 등이 함께 수형생활을 했던 곳이다. 임명애는 당시 만삭의 몸이었다. 출산을 위해 임시 출소하였다가 아이를 낳고 12월에 갓난아이를 품에 안고 재수감되었다. 남편도 1년형으로 복역 중으로 온 가족이 모두 수형생활을 하는 고난의 시절을 보냈다. 혹독한 겨울을 맞이하며 차디찬 감방에서 산후조리는 엄두도 내지 못하였다. 맡 언니 격인 어윤희는 어려운 여건에도 편의를 제공하는 데 헌신을 다하였다. 아이의 기저귀는 물론 산모 건강을 위해 조언과 세심한 보살핌을 잊지 않았다. 이러한 고난 끝에 임명애는 1920년 9월에 만기 출소하면서 먼저 출소한 남편이 있는 파주 교하리 고향에 돌아왔다.수감 중에도 이들은 희망의 끈을 일순간마저 버리지 않았다. 무료한 시간을 달래기 위하여 전통적인 창가를 가사한 노래를 불렀다. 현재 남아 있는 창가는 모두 두 곡으로, 심명철이 생전에 아들 문수일에게 구술하였는데 ‘선죽 교 피다리’와 ‘대한이 살았다’이다. 두 노래는 『선죽교 피다리』(1991, 장수복 저)라는 소책자에 실리면서 본격적으로 대중에게 알려졌다. 진중이 일곱이 진흙 색 일복 입고두 무릎 꿇고 앉아 주님께 기도할 때접시 두 개 콩밥덩이 창문 열고 던져줄 때피눈물로 기도했네 피눈물로 기도했네피눈물로 기도했네- 선죽교 피다리대한이 살았다 대한이 살았다산천이 동하고 바다가 끓는다에헤이 데헤이 에헤이 데헤이대한이 살았다 대한이 살았다- 대한이 살았다선죽교 피다리의 ‘피눈물로 기도했네’라는 부분은 너무나 참기 힘든 옥중생활을 사실적으로 알려준다. 두 번째 가사는 전국에 확산된 3·1운동의 기운을 ‘대한이 살았다’로 독립을 바라는 의지와 염원을 보여준다. 3·1운동 한돌을 맞아 서대문형무소에서 전개된 옥중투쟁은 이러한 사실과 무관하지 않았다.가사는 누가 지었는지 알 수 없으나 권애라가 아닐까 추정한다. 그녀는 음악적인 재능이 아주 뛰어난 신여성이었다. 김향화는 수원을 대표하는 명창으로 창가를 듣고 권애라가 이를 시대 상황에 맞게 정리하지 않았을까 조심스럽게 짐작한다.]]> Tue, 02 Mar 2021 15:53:59 +0000 52 <![CDATA[인문학관 일제강점기 해외 동포들이 써 내려간 항일 민족시가 국민회와 서간도]]> 글 김동수(백제예술대학교 명예교수·시인) 일제강점기 중국 상하이, 만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미주 등지 해외에서 발표된 망명인사들의 항일 민족시가들이 무관심 속에 방치되어 있다. 아래 소개할 시가들은 1907년부터 샌프란시스코에서 발간한 『공립신보』(1909년 『신한민보』로 통합)에 게재된 작품들이다. 당시 언론 통제 아래 친일 문학으로 변질되어 가고 있던 국내 문학과는 다르게, 해외 동포들의 망명문학에서는 민족사의 정맥을 지켜 민족혼을 불태우고 있었다.  미주 독립운동의 거점, 국민회‘국민회’는 1909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조직되었던 독립운동 단체이다. 1908년 장인환과 전명운 등이 통감부의 외교 고문인 친일 미국인 스티븐스를 샌프란시스코에서 권총으로 처단한 사건이 발생하자, 미국에 살고 있던 교포들의 항일 애국열이 고조되었다. 그해 7월에는 박용만·이승만·안창호 등이 콜로라도주 덴버에서 개최한 애국동지대표대회에서 미국에 흩어져 있던 애국 단체를 규합하여 통합 단체를 결성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어 1908년 10월 30일 하와이 ‘합성협회’ 대표 7인과 본토의 ‘공립협회’ 대표 6인이 모여, 1909년 2월 1일 ‘국민회’가 창립되었다. 국민회는 총회와 지방회의 두 종류의 조직체로 구성되었다. 미국 본토에는 북미 지방총회를 두고, 하와이에는 하와이 지방총회를 두었다. 북미 지방총회는 공립협회의 기관지인 『공립신보』를 1909년 2월 10일 『신한민보』로 개칭하였고, 하와이 지방총회는 합성협회 기관지 『합성신보』를 『신한국보』로 고쳐 항일 애국사상과 교포들의 단결심 배양에 힘썼다.국민회는 1910년 2월 다시 ‘대동보국회’와 합동하여 ‘대한인국민회’로 개칭하였다. 1911년에는 샌프란시스코에 중앙총회를 설치하고, 북미·하와이·시베리아·만주 등 4개 지역에 지방총회를 설치하였으며, 이들 각 지방총회 밑에 각기 10여 개의 지방회를 거느리는 큰 단체로 성장하였다. 멕시코·쿠바에도 지방회가 설치되어 재외한인 교포들의 권익을 대변하는 기관으로 활동하였다. 이와 같이 국민회는 교포들의 친목 단결을 도모하는 한편 조국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노력하는 등 1910년대 해외 민족 운동가의 최고 지도 기관으로서 항일운동을 주도해나갔다.관련 축시는 국민회 창립 6주년을 맞이하여 북미 지방에서 보내온 축사이다. 국민회의 창립 목적에 대하여 실업 진발, 교육 장려, 명예 존중, 평등 제창, 독립 광복이라 밝히고 있다.우리회 창립이 / 지금에 육년이라이월 초할우는 / 백셰에 영원 긔념목적이 크도다 / 교육 실업과 평등죵지가 크도다 / 조국의 독립 광복미쥬와 하와이 / 대동단결한 후에멕스코 원동은 / 동셔에 셩셰련락우리의 휘쟝은 / 무궁화 쳔츄무궁사해가 우러러 / 일례로 좃난도다이 회 안이 드면 / 의관을 엇지 보존비노니 샹텬이 / 항상 권고하쇼셔「축사 북미총회」, 1915. 2. 4.  『신한민보』 alt국민회(왼쪽) / 동양척식주식회사 경성지점(오른쪽)독립지사들의 대표 망명지, 서간도서간도(남만주) 지역은 백두산 서쪽의 압록강 지류인 혼강 일대로, 일제의 무리한 수탈에 고향을 등지고 이곳으로 이주하는 조선인이 많았다. 일제의 세력이 깊이 미치지 못했던 이곳도 독립지사들의 망명이 이어지면서, 1909년부터는 일제의 관리·통제를 받기 시작하였다. 아래 시에 등장하는 ‘척식사’는 1908년 일제 통감부가 한국의 토지와 자원을 독점하고 수탈할 목적으로 설립한 ‘동양척식주식회사’를 말한다. 당시 통감부는 조선인들의 땅을 강제로 빼앗아 5할이나 되는 무리한 소작료를 받았는데, 이 때문에 많은 조선인이 고향을 등지고 만주와 연해주 벌판으로 이주할 수밖에 없었다. 경상도에서 쫓겨 온 서간도 벌목군도 ‘열두 겨리 암소는 왜놈이 부리고 / 백목경뎐 답은 척식샤에 갓도다’라며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한편 ‘내가 이곳에 온 사정 심각하니 / 옷밥이 그리워 온 것이 아니로다’ 등의 내용과 작자 미상인 것을 보아, 이 벌목가의 경우 호구지책보다는 독립운동과 관련된 반일 인사에 가까운 것으로 추정해볼 수 있다.독기를 메고 문압에 나서니 / 풀으고 검은 돌이 겹겹이 싸였다. 이돌 뎌돌 순서로 밟으니 / 싸리집신 바닥이 철철 미거진다. 머리 숙이고 심경을 생각하니 / 일보일보에 자연한 심회발한다. 내가 이곳에 온 사정 심각하니 / 옷밥이 그리워 온 것이 아니로다. 경상도 본가를 곰곰이 생각하니 / 량젼옥답에 오곡이 흐즈려졌다. 문압헤 말매든 수양을 싱각하니 / 풀은닙 일만가지 차례로 디럿다. 열두겨리 암소는 왜놈이 부리고 / 백목경뎐답은 척식샤에 갓도다. (후략)「서간도 벌목가-서간도에서 나무 찍는 노래」, 1913. 11. 7.  『신한민보』]]> Tue, 02 Mar 2021 15:55:33 +0000 52 <![CDATA[끝나지 않은 독립운동 삼일절 기념 역사와 3·1정신의 시대정신]]> 글 이계형(국민대학교 교양대학 교수) 올해로 102번째 삼일절을 맞이하였다. 삼일절은 1949년 10월 ‘국경일에 관한 법률’에 따라 국경일로 정해졌다. 이는 제헌절·광복절·개천절·한글날 등 여느 국경일과는 의미가 다르다. 3·1운동은 ‘민족적 재생 운동’이자 ‘민족 부흥의 출발점’이라는 역사적 의미로, 35년간 일제의 식민통치 하에서 전개된 수많은 독립운동 중에서 유일하게 국경일로 기리고 있기 때문이다. 100여 년 동안 이어져 온 삼일절의 의미를 살펴보고, 앞으로 우리가 펼쳐가야 할 시대적 사명도 생각해보자. alt상하이 올림픽 대극장에서 열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3·1독립선언 1주년 기념식3·1운동을 어떻게 기념할 것인가일제강점기에 3월이 되면 국내외 각지에서는 주어진 상황에 따라 크고 작은 3·1운동 기념식이 치러지거나 기념 시위가 전개되었다. 일본에서는 유학생이나 한인들이 시위 형태의 기념행사를 하는가 하면,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대한이 부활한 성일(聖日)’이라며 기념일로 정하여 그날을 축하하였다. 임시정부는 중일전쟁 이후 일본군에게 쫓기는 상황에서도 선상(船上)에서 기념식을 열었다. 그뿐만 아니라 더러는 이념을 달리하면서 경쟁 관계에 있던 독립운동 단체도 삼일절만큼은 그 의미를 함께 새기며 행사를 치르기도 하였다. 하지만 해방 이후 처음 맞는 삼일절에 좌익은 남산에서 우익은 서울운동장에서 각기 기념식을 열었다. 중립적인 태도를 보인 단체는 창경원(현 창경궁)이나 덕수궁에서 삼일절 기념식을 각기 진행하였다. 이는 모스크바삼상회의에 따라 찬탁과 반탁으로 갈려 서로 반목하며 이념 대립을 극복하지 못한 결과였다. 급기야 1947년에는 유혈사태로까지 번졌다. 이는 3·1운동을 어떻게 기념할 것인지를 두고 인식이 달랐기 때문이다. 사회주의 세력은 비폭력적인 3·1운동의 한계점을 지적하며 실천적인 기념 투쟁 방식을 띠었지만, 민족주의 세력은 행사 자체에 더 의미를 두었다. 이는 역사의 정통성을 서로 차지하려는 갈등에서 비롯한 것이기도 하였다.그렇다면,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는 어떻게 삼일절을 기리고 3·1정신을 구현하고자 하였을까? 먼저 정부가 수립된 뒤 몇 차례 헌법이 개정되었지만, 3·1운동은 빠짐없이 전문에 담겼다. 제헌헌법(1948. 7.)에는 “대한민국은 기미 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였다”라고 명시하였다. 5차 개헌(1962. 12.)에서는 “대한국민은 3·1운동의 숭고한 독립정신을 계승한다”는 문구로 바뀌었다. 그 뒤 한동안 변함이 없다가, 6월 항쟁 이후 9차 개헌(1987. 10.)에서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잇는다”고 고쳐 역사의 정통성을 강조하였다. 자구는 조금씩 바뀌었지만, 대한민국 정부가 3·1운동의 정신을 잇는다는 기본정신은 같았다. 하지만 삼일절 행사는 각 정권에 따라 방식이나 규모가 달랐고 표방하는 3·1정신 또한 차이점을 드러냈다.  alt서울운동장에서 거행된 우익의 삼일절 기념대회(1947)(왼쪽) / 남산에서 거행된 좌익의 삼일절 기념대회(1947)(오른쪽)삼일절 기념행사의 변천사1949년 첫 삼일절 행사는 ‘기미독립선언기념일’로 명명되어, 서울운동장에 11만여 명의 군중을 동원한 가운데 중앙청 기념대회가 열렸다. 당시 정부는 삼일절을 계기로 “3·1정신으로 ‘남북통일’을 완수하자”며 전 민족의 총궐기를 주문하였다. 1950년에는 ‘반공통일’이 강조되었고, 한국전쟁 중에는 ‘반공 북진통일’이 제창되었다. 하지만 1959~1960년에는 정치 파동에 정부 차원의 기념행사는 열지 못하였다. 1962년 박정희 군사정권 이후 첫 삼일절에는 독립유공자를 처음으로 포상하기도 하였지만, 기념식은 축소되었고 3·1정신은 ‘조국 근대화’, ‘평화통일’로 귀결되었다. 전두환 정부도 정권을 정당화하기 위해 ‘국민화합’과 ‘민족통일’을 강조하였다.1987년 6월 항쟁 이후에는 권위주의적인 행사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이 일었다. 노태우·김영삼 정권은 이전과 같이 ‘민족통일’을 강조하면서도 ‘자유민주주의’를 부각하였다. 또 3·1정신을 정치·경제 부패와의 전쟁, 노사갈등과 경기침체 극복 등 현실 정치·경제적 과제와 결합하였다. 김대중 정부가 들어선 1998년 이후에는 진보정권과 보수정권이 표방한 삼일절 메시지가 극명하게 갈렸다. 진보정권 하에서는 남북 화해와 한반도 평화, 과거사 청산에 방점이 찍혔지만, 보수정권에서는 대북 제제와 실용적 한일 관계 노선 및 나라 사랑 등에 초점이 맞춰졌다. 그런데 보수정권에서는 3·1정신이 한 발 후퇴했을 뿐 아니라 3·1운동이 정치적 수단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2008년 8월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뒤 광복절·건국절 논쟁이 불거졌을 때, ‘대한민국 3·1회’는 대한민국 건국 60주년 기념행사에 남동순 의사를 참석시켰다. 유관순 열사의 친구로서 3·1운동에 함께 참여했던 남동순 의사를 통해 자신들의 정당성을 내보이려는 의도였다. 2014~2015년 박근혜 정부 때는 “올바른 역사 교과서를 만들겠다”며, 국정 역사 교과서로 회귀하고자 기존 검정 교과서에 유관순 관련 내용이 빠져 있다고 문제 삼기도 하였다. 이는 3·1운동의 절대가치를 정권 유지 차원에서 훼손한 대표적인 사례이다. 3·1운동은 식민통치 10년을 경험한 민중들이 일제 치하에 당당하게 맞선 거국적인 운동이었고, 우리 민족을 하나로 결속시켰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 이에 삼일절에는 진보와 보수 이념을 떠나 하나같이 남북 분단의 현실 앞에서 통일을 말해왔고, 제국주의의 강압적인 식민통치를 비판하며 미래 발전적인 관계를 추구하였다. 이제 102년 전 남녀노소 계층과 신분을 넘어 모두 하나의 목소리로 외쳤던 그날의 만세를 다시 되새기면서, 3·1정신을 남북의 화해와 통일을 넘어 세계 평화로 승화시켜야 나가야 한다.]]> Tue, 02 Mar 2021 15:57:08 +0000 52 <![CDATA[독립의 발자취 별처럼 빛난 여성독립운동가를 찾아서]]> 글·정리 편집실 코로나 바이러스로 힘든 이 시기에 그 옛날 조국 독립을 위해 헌신한 독립운동가들을 떠올려봅니다. 힘들고 고된 독립의 여정을 견디고 견뎌 광복의 결실을 맺을 수 있었던 이유를 찾는다면 언제나 버팀목이 되어준 어머니들 덕분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어려운 시기에 큰 힘이 되어준 대한의 어머니들을 떠올리며 현재를 견뎌내고 있는 대한의 어머니들을 응원합니다. 조국을 위해 모든 것을 내던진 선열들의 숭고한 뜻을 기리기 위해 오늘도 분투를 잊지 않은 이가 있다. 단순 조력자가 아닌 독립투사였던 여성독립운동가를 발굴하고 그들의 삶을 복원하는 것을 일생의 목표로 삼고 있는 한국여성독립운동연구소의 심옥주 소장을 만나본다.여성독립운동가를 발굴하고자 결심한 동기가 있나요?많은 독립운동가들이 그랬듯이 저 또한 이 일이 우연 아닌 필연처럼 다가왔습니다. 유년시절부터 조부모님께 일제강점기와 6·25전쟁 등 한국의 근현대사 이야기를 들으며 시대여성에 대한 관심이 커졌습니다. 저 또한 두 아이의 어머니로서, 대한의 어머니들이 어떤 삶을 살았고 그 영향이 어디로 이어졌는가에 대해 설명할 무언가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여성독립운동가 발굴 작업은 어떤 방식으로 이뤄지나요? 한국여성독립운동연구소에서는 주로 현지를 답사해서 지역의 특성을 조사하고 독립운동가의 활동을 추적함으로써 독립운동사에서 여성의 위치를 파악하고 있습니다. 민간 기관이 정부의 지원 없이 관련 연구와 활동을 이어가는 데는 힘든 점이 많습니다. 그럼에도, 알려지지 않은 여성독립운동가를 발굴하고 알리는 일이 저의 사명이라 생각하고 활동을 이어가고 있습니다.그동안 한국여성독립운동연구의 성과에 대해 말씀해주세요.성과라고 하기엔 부끄럽습니다. 저희는 2009년 3월 1일부터 여성독립운동가 학술세미나 15회를 비롯해 여성독립운동학교 청소년 및 대학생들과 프로젝트 13건, 펀딩 프로젝트 3건, 여성독립운동가 강연 120회, 서적 발간 13권 등의 작업을 이어왔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여성독립운동가의 일생과 활동 특성을 정리한 『여성독립운동가 사전』을 발간한 것입니다. 여성독립운동가들이 제대로 주목받지 못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 때문이라고 생각하시나요?아마도 여성독립운동가에 대한 무관심 때문일 것입니다. 독립운동가들은 성별 구분 없이 국가와 후손을 위해 희생한 분들입니다. 이제는 남성과 여성이라는 경계를 뛰어넘어 독립운동에 헌신한 한국의 어머니들도 기억하고 주목했으면 좋겠습니다. 더불어 민간 차원에서 활동을 이어나갈 수 있도록 정부도 많은 관심을 가져줬으면 하는 바람입니다.아직 알려지지 않은 여성독립운동가가 얼마나 있을까요?지난 2019년 국내 여성독립운동가 유물에 대해 전수조사를 수행한 결과, 1차 조사에서 1,600여 점의 유물이 확인되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알려지지 않은 여성독립운동가가 많이 있습니다. 2020년 국가보훈처 기준으로 독립유공자 중 약 3%만이 여성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장기적으로 발굴 및 조사가 꾸준히 이어질 경우 10%까지 충분히 상향될 수 있다고 내다보고 있습니다. 정부 및 공공기관의 협조 또는 국민들에게 바라는 점이 있다면 말씀해주세요.늘 재정적 한계에 부딪치면서도 손을 놓지 못했던 이유는 이 일을 알려야 한다는 생각에서였습니다. 그런 점에서 지난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때에는 많은 분들에게 알릴 수 있는 기회를 갖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100주년 행사 이후 관심은 급격히 줄어들었습니다. 관련 활동이 지속적으로 이어져 나갈 수 있도록 정부나 공공기관의 협조가 있기를 바라며, 국민들의 꾸준한 응원이 함께하길 기원합니다.3·1운동에 참여한 여성독립운동가 6인 alt왼쪽부터 김영순, 김귀남, 이효덕서울 3·1운동에서 만세를 부른 교사김영순(1892-1986)대한민국애국부인회와 근우회에서 주요 간부로 활동하였다. 1919년 정신여학교의 교사로 재직하던 중 오현주의 제안으로대한민국애국부인회에 가입하였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는 데 힘썼다. 1927년에는 근우회 창립위원회에서 활동하는 등 여성의 독립의식을 고취시키는 데 힘썼다.목포 3·1운동에서 태극기를 운반한 학생김귀남(1904-1990)1919년 4월 8일 목포 3·1운동에서 활약하였다. 당시 목포 정명여학교 재학 시절로, 물동이에 태극기를 담아 운반하면서 만세운동을 준비하였다. 만세운동 이후 잡혀가서 고문을 당하면서도 “한국 사람은 나라를 사랑할 줄 알아요”라며 함께한 교사들을 보호했다고 전해진다. 평남 용강 3·1운동에 참여한 교사이효덕(1895-1978)평양에서 출생해 숭의여학교 교사로 송죽결사대에 참여하였다. 양무학교 교사로 활동하던 중 3·1운동에 참여한 뒤 체포되어 6개월 형을 받았다. 1921년에는 3·1운동 2주년 기념 시위를 주도하였고, 대한기독교여자절제회연합회 등에서 활동하며 사회 계몽운동 및 여성교육 둥 독립운동에 힘썼다. alt왼쪽부터 나은주, 김응수, 김신희황해에서 만세를 외친 소녀나은주(1890-1978)개성 호수돈여학교에서 비밀결사로 활동하였다.개성 3·1운동과 황해도 3·1운동에 참여하였고, 황해도 송정리의 만세 행진을 주도하였다. 4월 3일 300여 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전날 체포된 30여 명의 석방을 요구하며 시위를 주도한 탓에 체포되어 1년 징역형을 받고 평양 모란봉 여감옥에 수감되었다.부산 3·1운동에 뛰어든 학생김응수(1901-1979)1919년 3월 11일 부산의 만세운동은 일신여학교 학생들로부터 시작되었다. 이들은 부산상업학교 고등과 학생들과 비밀리에 연락한 뒤 모였다. 벽장 속에 숨어 태극기 50개를 만들었고, 오후 9시가 되자 준비한 태극기를 들고 좌천동 거리를 누비며 만세를 외쳤다. 현장에서 체포된 이들은 보안법 위반으로 6개월간 투옥되었다. 전주 3·1운동에서 단식투쟁을 벌인 학생김신희(1899-1993)전라북도 전주에서 학생 신분으로 3·1운동에 참여하였다. 1919년 3월 13일과 14일, 만세운동을 주도한 전주 기전학교 학생과 졸업생들은 지하실에서 태극기를 준비하고 선언서를 등사하여 시민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이들은 만세운동의 주도자로 체포되어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개월, 집행유예 3년을 받았다.한국여성독립운동연구소에서 발간한 『여성독립운동가 사전』에는 여성독립운동가들의 일생이 담겨 있다. 그들의 출생과 성장 과정, 독립운동을 하게 된 계기와 생의 마지막까지. 그동안 기록의 부재로 묻혀있던 많은 여성독립운동가를 살펴볼 수 있다.]]> Tue, 02 Mar 2021 15:59:16 +0000 52 <![CDATA[세계 산책 미국의 산업의학을 선도한 여성 앨리스 해밀턴]]> 글 송성수(부산대학교 교양교육원 교수) 앨리스 해밀턴(Alice Hamilton)은 미국 산업의학의 개척자이자 하버드 대학에서 교편을 잡은 최초의 여성이다. 당시 의과대학에 입학한 여성들의 경우 산부인과에 편중되어 공부를 이어가던 반면 그는 다양한 의학 분야의 연구를 이어나갔다. 남성과 여성의 경계를 허물고 본인의 소신을 이어간 앨리스 해밀턴의 삶을 들여다본다. alt앨리스 해밀턴(왼쪽) /  미국 빈민운동의 산실로 불리는 헐 하우스(오른쪽)의사의 길을 선택한 이유앨리스 해밀턴은 1869년 미국 뉴욕의 중산층 집안에서 둘째 딸로 태어났다. 앨리스에게는 언니 한 명과 여동생 두 명이 있었는데, 네 자매의 나이 차이가 6살밖에 되지 않았다. 덕분에 해밀턴 자매는 어렸을 때부터 아주 친하게 지낼 수 있었다. 앨리스의 어머니는 매우 당찬 여성이었다. “이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단다. 한 부류는 ‘누군가 나서서 어떻게든 그 일을 해야 해. 그런데 왜 내가 나서야만 하지?’ 라고 말하는 사람이다. 또 다른 부류는 ‘누군가 나서서 어떻게든 그 일을 해야 해. 그런데 내가 하면 왜 안 되는 거지?’ 하고 말하는 사람이란다.”앨리스 해밀턴은 학창 시절에 큰 두각을 드러내지 못하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자신의 미래에 대해 고민하였다. 당시 여성들에게 열려 있는 직업은 교사·간호사·의사 정도였는데, 해밀턴은 의사가 되기로 결심하였다. “나는 의학을 선택하였다. 의사가 되면 어디에 가든 분명히 쓸모 있는 존재가 될 수 있으리라 확신하였다. 선생님처럼 학교에 얽매이지 않아도 되고, 간호사처럼 상급자의 지시를 받지 않아도 되며, 온갖 부류의 사람들과 여러 가지 삶의 조건을 경험해 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다.” 해밀턴은 1891년 포트웨인 의과대학에 입학하였고, 이듬해에는 미시건 의과대학으로 옮겼다. 1893년에는 보스턴 뉴잉글랜드 병원으로 갔는데, 산부인과만 고집하는 여성 의사들을 만나 배움의 열의가 식고 말았다. 그는 1895년에 다시 미시건 의과대학으로 돌아와 1년간 세균학을 공부한 뒤 이듬해에 독일 유학의 길을 선택하였다. 1897년에 미국으로 돌아온 해밀턴은 시카고에 있는 노스웨스턴 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이어 같은 해에 사회개혁가인 제인 애덤스(Jane Adams, 1931년 노벨 평화상 수상자)가 시카고의 빈민지역에 설립한 헐 하우스(Hull House)에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그 후 해밀턴은 헐 하우스에서 22년 동안이나 무료로 봉사하였다. alt해밀턴 자매들의 어린 시절(왼쪽에서 두번째 앨리스)미국 산업의학의 선구적 연구자1908년, 해밀턴은 자신의 딜레마를 해결할 수 있는 분야를 찾았다. 그것은 ‘산업의학’이었다. 산업의학은 유럽에서 19세기부터 발전해왔지만, 미국에서는 매우 생소한 분야였다. 당시 미국의 사업주와 노동자들은 산업재해나 직업병의 위험성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산업의학 전문가가 거의 없는 미국에서 새로운 영역을 선구적으로 탐험하는 일에 흥미와 보람을 느꼈다. 해밀턴은 성냥 공장들의 청결하지 못한 작업 환경을 고발하여 주목을 받았다. 1910년에는 일리노이 주지사가 해밀턴을 직업병 위원회의 위원장으로 임명하였다. 그녀는 납중독 연구를 특별 과제로 선택하여, 젊은 의사와 의과대학생 그리고 사회봉사자의 도움을 받아 활발히 활동하였다. 그녀는 수많은 공장들을 방문하였고, 노동자 및 그들의 가족들과 직접 대화를 나누었으며, 약국과 병원의 환자 기록을 검토하였다.  당시에 산업의학은 과격한 사회주의나 나약한 감상주의에 빠진 사람들이나 하는 분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해밀턴은 여성의 감수성을 적극 활용하여 산업의학에 대한 이미지를 좋은 방향으로 바꾸어 놓았다. 그것은 남성들의 활동에 반감을 가지면서 여성 특유의 분야만을 고집하는 ‘전투적 페미니즘’과 달랐고, 여성이 남성과 다를 바 없으므로 기존의 분야에서 남성과 동일한 성취를 이루어야 한다는 ‘이상주의적 페미니즘’과도 달랐다. 1919년에 해밀턴은 하버드 대학교 최초의 여성 교수가 되었다. 그녀는 <산업 위생학 저널>의 편집장을 지냈고, 『미국의 산업 독극물』과 『산업 독성학』을 발간하였다. 해밀턴은 애덤스가 사망한 1935년에 교편을 놓고 헐 하우스의 운영을 책임졌다. 하버드 대학교는 보건학 교실에 앨리스 해밀턴 기금을 설립하였고, 미국의 공중위생국은 해밀턴에게 라스카 상을 수여하였다. 의학 연구와 사회 개혁이 조화된 삶을 실천한 해밀턴은 101세까지 장수하였다.]]> Tue, 02 Mar 2021 16:00:37 +0000 52 <![CDATA[기념관은 지금 장애인과 비장애인 모두 즐겁게 지능형 배리어프리 키오스크 서비스 구축]]> 정리 편집실사진 봉재석 독립기념관의 미래를 위해 언제나 앞장서서 열 일하는 열정 인재들!이번 호에서는 독립기념관을 찾는 관람객들, 특히 사회적 약자를 배려해 개발된 지능형 종합안내기기 ‘키오스크(Barrier-free Kiosk)’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길 찾기는 물론 추천 경로를 알려주고 열차 발매까지 가능한 배리어프리 키오스크, 모두 잘 알고 사용하면 좋겠습니다. alt 콘텐츠 기획 및 운영, 홍보문화부 임현주 독립기념관에서 진행한 ‘지능형 키오스크 배리어프리 서비스 구축 사업’에 대해 소개해 주세요. ‘지능형 키오스크 배리어프리 서비스 구축 사업’은 비장애인뿐만 아니라 장애인 및 고령층, 어린이를 포함한 모두가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는 키오스크를 개발하고 실증하는 사업입니다. 독립기념관은 민간기업과 함께 협업하여 2020년 한국지능정보화진흥원의 ‘사회 현안 해결 지능정보화 공모사업’에 참여했고, 독립기념관의 관람 정보 및 동선 안내를 위한 콘텐츠를 제공하는 배리어프리 키오스크를 관내에 10대 구축하였습니다. ‘배리어프리’라는 단어가 낯선 분들이 계실 텐데요, 어떤 의미인가요? 장애인 및 고령자와 같은 사회적 약자들이 사회생활에 지장이 되는 물리적인 장애물이나 심리적인 장벽을 없애기 위한 운동에서 비롯한 단어입니다. 독립기념관의 배리어프리 키오스크는 사용자 맞춤 높낮이와 기울기 자동 조절, 점자 입출력 장치, 음성 인식 및 음성 안내, 수어 아바타 제공 등 다양한 기능을 통해 누구나 편리하게 기기를 이용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독립기념관에서 이 사업을 기획한 이유에 대해 설명해주시기 바랍니다. 독립기념관은 넓은 부지와 여러 가지 동선을 가지고 있어 관람객들이 혼동을 겪는 일이 많았습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비대면 무인화 서비스인 키오스크를 활용하여 주요 동선에 안내 서비스를 제공하고자 했습니다. 또 정보화 취약 계층인 장애인·고령층을 위한 배려를 더하면서, 민간기업의 ICT 비즈니스 창출로 사회적 가치를 창출하기 위해 사업을 기획하였습니다. 키오스크 기능에 대해 조금 더 자세하게 소개해주세요. 배리어프리형 키오스크는 사용자에게 기기를 이용할 수 있는 환경을 맞춰주는 기능이 있습니다. 사용자의 키에 맞추어 키오스크의 높낮이와 기울기가 자동으로 조절되며, 점자 입출력, AI 스피커를 이용한 음성 인식, 수어 아바타 등의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특화된 기능으로는 독립기념관 내 태극열차 매표, 방문 확인증 출력, 화재 등 위험 발생 시 알림 경광등, 모바일 연동 멀티뷰 등이 있습니다. alt 배리어프리 키오스크를 통해서 더 많은 분들이 독립기념관을 찾으실 것 같은데, 실제로 관람객들의 반응은 어떤가요? 효과 검증 및 실증을 위해 어린이, 고령자, 지체장애인, 시각장애인, 농아인을 독립기념관으로 초청한 뒤 실제로 키오스크를 사용하여 만족도 조사를 거쳤습니다. 조사 결과 장애인 부문 83점, 노약자 부문 98점의 점수를 받았습니다. 더불어 일반 키오스크에 비해 사회적으로 기여하는 가치가 높다고 평가를 받았습니다. 독립기념관을 찾는 분들을 위해 키오스크가 설치된 장소를 알려주세요. 독립기념관에는 총 10대의 배리어프리 키오스크가 있습니다. 주차장 근처 종합안내센터 2대, 겨레의집 고객안내센터 2대, 태극열차 상행과 하행 매표소 2대, 제1·3·4·5 전시관에 4대가 비치되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키오스크를 이용하실 분들에게 당부의 말씀이 있으시다면 해주세요. 이 사업을 진행하는 동안 독립기념관에서 지능정보화 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는 점에 대해 놀랍다는 반응이 많았습니다. 독립기념관은 공공기관으로서 앞으로도 사회에 관심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새로운 분야에 도전하는 모습을 보여드릴 예정입니다. 또한 배리어프리 키오스크는 국내 표준화 과정을 거쳐 전국적으로 확산할 예정입니다. 독립기념관의 배리어프리 키오스크에 대한 많은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alt ① 고객안내센터에 설치되어 있는 키오스크 ② 독립기념관 추천 경로 및 방문확인증 발급 키오스크 화면 ③ 키오스크 실행 장면 ]]> Tue, 02 Mar 2021 16:02:08 +0000 52 <![CDATA[독자이벤트 ]]> alt alt아이콘 클릭하면 퀴즈 정답을 보낼 수 있습니다.]]> Tue, 02 Mar 2021 16:26:41 +0000 52 <![CDATA[들어가며 일제강점기 신문 탄생의 배경은?]]> alt동아일보(1925. 1. 26)(좌) / 1924년 3월 31일 창간되고 1926년 8월 폐간된 일간지 시대일보(우)                 일제 강점기신문 탄생의 배경은?1919년 3·1운동 후 일제는 조선 통치의 방식을 이른바 문화정치로 전환하면서 몇 가지 변화를 보였다. 그중 하나로, 제한적이나마 일간지의 발행을 허용한다는 방침을 정하였다. 10년간 신문 발행과 언론의 자유가 억압당했던 데 대한 반작용으로10여 건이 넘는 신문 발행 신청이 몰렸다. 총독부는 1920년 1월 6일자로 『조선일보』, 『동아일보』, 『시사신문』의 발행을 허용하였다.『시사신문』의 경우 노골적인 친일 논조를 이어가다 독자들의 호응을 받지 못하던 중에 친일 발행인 민원식이 암살당하면서 1921년 2월 폐간되었다. 이후 1924년 3월 31일에 『시대일보』가 새롭게 창간하면서『조선일보』, 『동아일보』와 더불어 3대 민간지가 되었다. 그렇게 1920년에서 1930년대에 이르는 동안한국인이 발행한 민간지 3개가 유지되었으나1940년 8월, 총독부에 의해 강제 폐간되고 말았다. 식민지 조선의 모든 생활상이 기록된 신문은 역사적 가치가 높은 실록이자 동시에 독립운동의 구심점으로 남았다. ]]> Fri, 02 Apr 2021 09:31:31 +0000 53 <![CDATA[톺아보기 삭제·압수·정간의 탄압받은 항일언론]]> 글 정진석(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 일제가 우리나라를 강점했던 35년 기간에 한국인이 발행한 ‘민간신문’이 존속했던 시기는 불과 20년에 지나지 않는다. 1910년대 무단통치 10년과 태평양전쟁을 앞둔 1940년 8월에서 일제의 패망으로 광복의 날을 맞았던 1945년 8월까지, 전쟁 기간 5년 사이에는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하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alt『조선일보』  창간 기념호(1920. 3. 9)(좌) / 『동아일보』 창간호(1920. 4. 1.)     alt천도교 잡지 월간  『개벽』  창간호(1920. 6. 25.)(좌) / 1920년 6월 1일부터 10일간 연재해 일제 통치를 비판한 『조선일보』의 기획기사(우)         3개 민간지와 천도교의『개벽』1920년에 창간된 『조선일보』·『동아일보』와 1924년에 창간되어 1936년 사이에 『시대일보』-『중외일보』-『중앙일보』로 이름이 바뀌면서 명맥을 이었던 또 하나의 신문을 합친 3개 민간지는 어두운 식민지 조선의 모습을 비추어주고 민족의 수난사를 기록으로 남겼다. 이들 일간 신문과 함께 놓쳐서는 안 될 잡지도 있다. 열악한 환경에서 짧은 수명으로 나타났다 사라진 수많은 잡지 가운데 천도교 계열의 『개벽』은 대표적인 항일 민족 언론의 하나였다. 김소월은 「진달래꽃」을 비롯하여 30여 편의 시를 발표했고,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1926. 6.)도 『개벽』에 실렸다. 창간 이후 거의 매호 압수당하는 수난을 겪던 중에 1925년 8월 호가 발행 정지(정간)를 당했다. 해외에 망명하여 독립투쟁을 벌이는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을 특집으로 편집한 내용이 검열에 걸린 것이다. 「이역풍상에 국궁 진체하는 국사! 지사!」라는 제목으로, 독립운동가 12명을 ‘국사(國士)’ 또는 ‘지사’와 같은 극존칭으로 다룬 것이다. 마침내 1926년 8월 일제는 수난의 상처투성이였던 이 잡지에 발행 금지(폐간) 명령을 내렸다. ‘안녕질서를 방해한다’는 이유를 들었지만, 총독부의 누적된 불만과 6·10만세운동 직후 『개벽』의 영향력을 차단하려는 목적이었다. 그렇다면 항일언론은 어떻게 전개되었을까? ‘과연 항일언론이 있기는 했을까’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먼저 던져야 할 정도로 근년에는 언론의 친일적 측면을 강조하는 언론관이 널리 퍼지고 있다. 1930년대 중반 이후 군국주의 환경에서 발행된 지면에서는 친일적인 부분을 확대·강조하면서 항일에 관해서는 외면하는 경향이 일반화되고 있다. 하지만 엄혹한 총독부의 감시와 탄압 속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어떻게 이런 신문을 제작했을지’ 새삼 놀라게 되는 지면도 많았다. 하루하루 지면에 담긴 기사와 논설, 글과 사진, 그림에 이르기까지, 총독부의 입장에서는 항일의 증거이자 일본의 조선 통치를 부인하는 자료들이다. 오히려 항일언론의 실상은 총독부가 기록으로 남긴 방대한 자료와 재판기록에도 고스란히 남아 있는 것이다. 항일 언론에 가한 일제의 탄압들총독부가 발행한 비밀기록 ‘조선의 출판물 개요’는 1925년부터 해마다 연감 형태로 편찬한 언론의 현황과 탄압을 담은 객관적, 체계적, 종합적인 자료이다. 총독부의 『조선출판경찰월보』에는 신문·잡지·단행본 등 출판물의 현황과 통제 내용이 월별로 기록되어 있다. 항일언론의 실상은 역설적이게도 식민통치의 총본산인 총독부가 빈틈없이 남겨두었던 셈이다. 『조선일보』는 1920년 3월 5일에 창간되었는데, 3개월이 지나지 않았던 6월 1일부터 10회에 걸쳐 ‘조선 민중의 민족적 불평, 골수에 심각(深刻, 깊이 아로새겨진)된 대 혈한(血恨, 피어린 원한)의 진수(眞髓)’라는 시리즈를 연재하였다. 사회면 머리에 과감하고 자극적인 제목을 쓰고, 강조할 부분은 본문 활자를 키워서 시각적인 효과를 극대화했던 파격적인 편집이었다. 일본은 “조선 민족 전체를 총과 칼끝으로 주무르려 하였다. 조선 민중은 눈물을 흘리며 벌벌 떨기를 오래 하였다. 우는 어린아이를 달래일 때에 ‘아이고 왜놈 온다’ 하는 것이 오직 한 가지 묘책이었다. (중략) 총과 칼로써 인도와 정의로 삼는 일본의 군국주의는 말할 수 없이 조선민족을 학대하고 조선민족을 멸망케 하려 하였다. 전염병이라도 나서 한꺼번에 다 죽어버리고 일본 사람이 와서 조선을 다 차지할 양으로 조선 사람을 만주에 내여 보낸다.” 이처럼 직설적으로 총독부와 군국 일본의 강압적인 식민지 정책을 송곳으로 찌르듯이 통렬히 비판하니 총독부가 그대로 두고 볼 수 없을 것은 당연했다. 총독부는 마침내 8월 27일자 논설 ‘자연의 화(化)’를 문제 삼아 1주일간의 유기 정간을 명하였다. 걸음마 떼기 시작한 창간 5개월 22일의 어린 신문에 닥친 시련이었다. 그러나 『조선일보』는 굴하지 않았다. 정간이 해제되어 다시 발행한 지 3일 후인 9월 5일자 논설 ‘우열(愚劣)한 총독부 당국자는 하고(何故, 무슨 이유로)로 우리 일보(日報)를 정간시켰나뇨 / 천하의 동정이 오사(吾社, 우리 신문)에 폭주함’이라는 논설로 총독부의 총과 칼에 한 자루 붓으로 정면에서 맞서 싸웠다. 용기와 기개가 돋보이는 논설이었다. 그러나 총독부는 『조선일보』에 ‘무기 정간’이라는 더욱 강한 철퇴를 내리쳤다.『동아일보』도 같은 때에(1920. 9. 25.) 무기정간 처분을 받았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동시에 발행되지 않는 암흑의 기간에 『동아일보』 논설기자 ‘장덕준’은 만주의 무장독립 투쟁을 취재하러 갔다가 일본군에 끌려가서 살해되는 사건이 있었다. 한국 언론 역사상 최초의 순직 기자였다. 총독부의 언론통제는 날이 갈수록 체계적이고 빈틈없는 그물망처럼 촘촘해졌고 처벌의 수위는 가혹했다. 기사를 검열하여 삭제하고, 인쇄된 지면을 압수하는 사례가 빈번하였다.  alt『동아일보』에 실린 브나로드운동 참가자 모집 기사(1931. 7. 24.)          문맹 퇴치를 위한 농촌계몽운동 상황이 악화되자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총독부를 정면에서 비판·공격하는 방식의 초기 항일 논조를 변경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따른 ‘문맹 퇴치 농촌계몽운동’은 일제의 탄압을 피하면서 민족의 역량을 키우자는 전략이었다. 불타는 항일 의지만으로는 식민지 상태를 극복할 수 없으니, 우리가 먼저 깨우치고 문맹을 타파하자는 취지였다. 그래서 ‘글 장님 없애기 운동’이 시작되었고, ‘아는 것이 힘이다. 배워야 산다’라는 구호를 내걸게 되었다. 문맹 퇴치와 농촌계몽운동은 한말의 ‘애국계몽운동’과도 맥이 이어진다. 당시 신문은 나라 잃은 민족에게 교육자이자 정부와 같은 존재였다.『동아일보』는 1928년에 시작할 계획으로 지면에 공포했으나 총독부의 탄압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후 1931년에 ‘브나로드운동(민중 속으로)’이라는 이름으로, 문자 보급과 농촌계몽을 동시에 진행하며 전국 규모의 운동으로 확대·실시하였다. 『조선일보』도 같은 때에 시작하였다. 두 신문이 전국적인 규모로 1934년까지 계속하였으나 총독부의 금지로 더 이상 계속할 수 없게 되었다. 이후 문자보급 운동은 국내뿐만 아니라 일본(7곳)과 만주(27곳)에 거주하는 동포들을 대상으로도 전개되었다.만주사변(1931)에 이은 중일전쟁(1937)으로 군국주의 서슬이 푸르던 시기의 언론은 점차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군부의 파쇼 통치 아래 일본 내에서조차 언론이 국가적인 통제 하에 놓인 상태여서 식민지 조선에서 항일 논조를 유지하기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그런 가운데도 1936년 『동아일보』의 일장기 말소는 민족 언론의 저항정신 살아있음을 과시한 사건이었다. 당시 『동아일보』의 이길용 기자는 베를린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한 손기정 선수의 시상식 장면 중 가슴에 그려진 일장기를 지운 뒤 사진을 실었다, 이로 인해 여러 직원이 총독부의 강요로 퇴사했고, 『동아일보』와 자매지 『신동아』와 『신가정』까지 무기정간의 엄중한 시련을 겪게 되었다. 이듬해 6월 1일에야 『동아일보』는 겨우 정간이 해제되었으나, 두 잡지는 일제 기간에 끝내 속간되지 못했다. 수많은 기사 삭제와 압수, 네 차례에 걸친 정간 등 언론인 투옥이라는 수난 속에서 숨이 끊어졌다가 살아나기를 거듭하던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일제 패망 5년 전인 1940년 8월 10일에 폐간의 비운을 맞았다. 20년 동안 발행된 지면은 『조선일보』 69,923호, 『동아일보』 6,819호였다. 그나마 중간에 두 신문 각각 네 차례 정간 기간에는 발행이 중단되었으니 그 기간에도 발행이 계속되었다면 신문의 나이를 뜻하는 지령(紙齡)은 더 많이 쌓였을 것이다. alt1936년 『동아일보』에 실린 일장기가 삭제된 손기정 선수의 사진(좌) / 베를린올림픽 당시 일장기를 달고 시상식에 선 손기정 선수             ]]> Fri, 02 Apr 2021 09:33:15 +0000 53 <![CDATA[만나보기 언론인들의 투옥과 희생]]> 일제 강점기 무수한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지울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많은 영웅들이 있었다.그들이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하면서까지 지키고 싶었던 신념과 가치,무엇으로 대체할 수 없는 그 기록들은 값진 유산으로 남았다. alt『동아일보』 논설위원 장덕준              동포의 학살 참극 취재하려다 순직한 장덕준우리나라 최초의 순직 기자는 『동아일보』의 장덕준(張德俊, 1892~1920)이다. 총독부는 1920년 9월 25일 『동아일보』에 무기 정간 처분을 통보하였다. 9월 24일과 25일자 연속 사설 「제사(祭祀) 문제를 재론하노라」에서 일제가 신념의 중추로 삼는 이른바 3종의 ‘신기(神器)’인 거울, 구슬, 칼 등을 비하함으로써 결국 황실의 존엄을 모독했다는 이유였다. 이 논설만이 아니라 8월 30일부터 9월 25일까지 14회 연재한 「대영(大英)과 인도(印度)」라는 시리즈 기사도 문제였다. 이 연재 글이 20세기 인도에서 영국이 저지른 악정을 논하면서 암암리에 이를 조선과 대비하였다는 사실도 『동아일보』 정간 이유의 하나였다.총독부는 정간 이유에 대해 이렇게 주장하였다. “『동아일보』는 창간 후 여러 차례 발매 금지 처분을 받았으며, 총독부가 주의를 환기했을 뿐 아니라 8월에는 발행인을 소환하여 최후의 경고를 한 바 있었다. 그런데도 로마의 흥망을 논하면서 조선의 부흥을 말하며 이집트의 독립, 아일랜드 독립 문제를 보도하면서 조선의 인심을 자극하고 영국의 반역자를 찬양하여 일본에 대한 반역심을 자극하는 등 하나하나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총독 정치를 부정하여 일반의 오해를 심절(深切)하게 함에 노력하였다.” 『조선일보』는 이보다 먼저 정간 처분을 받아 발행이 중단된 상태였으므로 『동아일보』의 정간으로 두 신문이 동시에 나오지 못하는 상황에 처한 것이다. 이 무렵, 만주의 훈춘(琿春)에서는 일본군이 조선 동포를 무차별 학살한 사건이 일어났다. 청산리에서 독립군에 패한 보복으로 주민 5천여 명을 어른 아이 가리지 않고 학살한다는 소식을 들은 장덕준 기자는 분연히 현지로 달려갔다. 취재를 해도 『동아일보』가 정간 중이었으니 보도할 지면도 없었고, 자신은 폐병에 걸려 혈담까지 토하는 건강 상태였다. 그러나 열정적 성격이었던 그는 단신 죽음의 땅으로 뛰어들었다. 장덕준이 기차를 타고 서울을 떠난 때는 10월 중순이었다. 그는 두만강에 접한 함경북도 회령을 거쳐 간도로 건너갔다. 11월 6일 무사히 간도에 도착했다는 전보가 있은 후에 “빨간 핏덩이만 가지고 나의 동포를 해하는 자가 누구인지 쫓아보니 우리가 상상하던 바와 조금도 틀리지 않았다”라며 살풍경이 일어나 공포의 기운이 가득한 간도 일대에는 죄가 있고 없고 간에 남녀노소가 살육의 난을 당하고 있는 광경 등 일본군의 만행을 취재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이른 아침, 장덕준은 일제 경찰 두세 명에게 불리어 나간 후로 소식이 끊어지고 말았다. 이리하여 그는 우리 언론 사상 첫 순직 기자가 되었다. 나이는 29세, 위험을 무릅쓰고 취재를 나섰다가 참변을 당했으니 기자정신의 표본이었다. 장덕준의 동생은 『동아일보』의 창간 주필인 장덕수였다. 장덕수도 해방 후에 암살당하였으니 두 형제가 비명에 목숨을 잃은 것이다.  alt『동아일보』 사장 및 3·1운동 민족대표 48인 중 한 명인 송진우와 송진우의 일제 감시 대상 인물 카드         민족대표 48인, 『동아일보』 사장 송진우송진우(宋鎭禹, 1890~1945)는 독립운동가, 언론인, 교육자, 정치가로 활동한 민족진영의 거목이었다. 3·1운동 민족대표 48인 중 한 사람으로 투옥되어 2년 6개월 형을 선고받았다. 『동아일보』 창간 당시에는 옥중에 있었으나, 1920년 11월 1일에 석방되어 이듬해 9월 『동아일보』가 주식회사로 발족되면서 사장에 취임했다. 31세의 혈기 넘치는 청년이었다. 이로부터 25년 동안 세 차례에 걸쳐 『동아일보』의 사장 또는 주필을 맡아 민족 언론을 이끄는 실질적인 견인차였으며 민중의 지도자로 활동하였다. 총독부는 기사 삭제, 지면 압수, 정간 처분을 비롯하여 투옥 등 여러 수단을 동원하여 탄압을 자행하였으나, 신문사는 항일 민족진영의 본거지였고 송진우는 그 울타리가 되었다. 『동아일보』 주필을 맡고 있던 1926년 3월에는 소련 국제농민회 본부가 3·1운동 7주년을 맞아 조선 농민들에게 전해 달라고 보내온 전보문을 게재하였는데, 총독부는 이를 빌미로 정간을 통보하였다. 송진우는 재판에 회부하여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개월에 처하여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1936년의 일장기 말소사건도 송진우 사장 때의 일이었다. 1945년 해방 정국의 정계에 투신하여 한국민주당을 창당하고 수석총무로 활약하면서 이해 12월 1일 『동아일보』 복간 사장에 취임했으나, 한 달 후인 12월 31일 서울 원서동 자택에서 괴한의 흉탄에 쓰러졌다. 정부는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alt1924년 『조선일보』 주필에 취임하여 사장까지 역임한 안재홍과 안재홍 일제 주요감시대상 인물카드(1936)        투옥의 연속 안재홍안재홍(安在鴻, 1891~1965)은 일제 강점기의 언론인이자 역사학자이다. 항일운동을 전개하는 동안 필화와 여러 사건에 연루되어 아홉 차례나 투옥되어 모두 7년 3개월에 걸친 복역의 고통을 겪어야 했다. 일제하 최대 민족운동 단체였던 신간회 총무간사를 역임했으며, 광복 후에는 미군정 민정장관, 제2대 국회의원으로 민족의 발전과 통합을 위해 노력하였다. 언론 활동으로는 1924년 3월 31일 최남선이 『시대일보』를 창간했을 때 논설위원과 정치부장을 겸하다가 같은 해 11월 『조선일보』로 옮겨 주필 겸 이사를 맡았다. 1925년 4월에 열린 전조선기자대회에서 부의장에 선출되었고, 1926년 9월부터는 『조선일보』 주필로 발행인을 겸했다. 1928년 1월 21일에 이관구가 집필한 「보석(保釋)지연의 희생, 공산당사건의 실례(實例)를 견(見)하라」는 사설이 문제 되어 금고(禁錮) 4개월 형을 선고받았는데, 곧이어 5월 9일 일본군의 소위 산둥(山東) 출병을 비판한 사설 「제남(濟南)사변의 벽상관(壁上觀)」을 썼다가 『조선일보』는 정간 당하고 안재홍은 금고 8개월의 형을 받았다. 복역 후 1928년 9월 29일에 출옥하여 이듬해 1월에는 『조선일보』 부사장이 되었는데, 이해에 일어난 광주학생사건 진상보고 민중대회 건으로 구속되었다가 기소유예로 풀려났다. 1931년 5월 『조선일보』 사장에 취임했으나, 이듬해 3월에는 만주동포구호 의연금을 유용하였다는 혐의로 영업국장 이승복과 함께 구속되어 옥중에서 『조선일보』 사장직을 사임했다. 1932년 11월에 출옥하여 1935년 5월부터 『조선일보』 객원으로 「민세필담」을 연재하였다. 1936년 6월 중국 남경에 있던 군관학교에 청년 두 사람을 추천하였다는 혐의로 또다시 구속되어 이듬해 2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1938년 5월에는 흥업구락부사건으로 서대문경찰서에 검거되어 3개월 만에 석방되었다. 1942년 12월에는 조선어학회사건으로 함경도 홍원경찰서에 3개월 동안 수감되었다가 석방되었다. 그 후로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거의 칩거 상태에 있다가 광복 후 미 군정기에는 민정장관에 임명되었다가 1946년 2월 26일에는 한성일보를 창간하였다. 1950년에는 제2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나 6·25전쟁 때 납북되었다. alt 항일의지를 담은 작품을 쓰며 언론 활동을 이어간 심훈과 『동아일보』에 실린 심훈의 상록수 공모 당선 기사(1935. 8. 13.)          애국 문인 언론인 심훈 소설가이자 시인으로 더 잘 알려진 심훈(沈熏, 1901~1936) 또한 기억해야 할 언론인이다. 1919년 경성 제일고보(경기중학교) 재학 중 3·1운동에 참가했다가 체포되어 복역하였다. 이후 중국 상하이로 망명했다가 1923년에 귀국하여, 1924년 10월부터 이듬해 5월까지 『동아일보』 기자를 비롯하여 『조선일보』와 중앙일보 기자로 있으면서 소설을 집필하였다. 1935년 농촌계몽소설 「상록수」가 『동아일보』 창간 15주년 기념 현상소설에 당선되자 상금으로 상록학원을 설립하였다. 1936년 8월 10일 새벽 베를린 올림픽에서 손기정 선수가 우승하였다는 소식에 감격하여 호외의 뒷면에다 ‘오오 조선의 남아여’라는 즉흥시를 쓴 것이 마지막 작품이다. 이 시는 8월 11일자 조선중앙일보 조간에 실렸다. 그는 이 즉흥시를 발표한지 얼마 뒤 장티푸스에 걸려 9월 16일에 사망하였다. 대전국립묘지 국가유공자 묘역에 안장된 손기정의 묘비에도 이 시가 새겨져 있다.]]> Fri, 02 Apr 2021 09:37:13 +0000 53 <![CDATA[이달의 독립운동가 미주지역 독립운동의 역량을 하나로 모으다 재미한족연합위원회]]> 글 독립기념관 전시부 alt왼쪽부터 김원용(金元容)1896~1976 서울건국훈장 애국장(1995), 전경무(田耕武)1898~1947평북 정주건국훈장 애국장(1995)심영신(沈永信)1882~1975황해 송화건국훈장 애국장(1997), 민함나(閔함나)1888~1952경기 부평건국훈장 애족장(2019)재미 한인 독립운동의 최고기관이 결성되다재미 한인들은 1941년 4월 19일부터 5월 1일까지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해외한족대회를 개최하여 미주 각지에 흩어져있던 9개 단체를 통합한 재미한족연합위원회를 결성하였다.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집행부를 두고, 하와이에 의사부를 두는 이원체제로 운영된  재미한족연합위원회는 외교활동을 통해 한국 독립의 당위성을 국제사회에 알리고, 독립운동에 필요한 자금을 모금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하는 등 재미 한인 독립운동을 이끌었다. alt해외한족대회 결의안(1941. 4. 29.) alt하와이 호놀룰루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의사부 (1942. 3. 8.)김원용과 전경무, 외교활동을 통해 독립의지를 선전하다재미한족연합위원회는 미국을 비롯한 연합국을 상대로 외교활동을 하며  한국의 독립의지를 선전하였다. 1941년 김원용은 의사부 비서위원이자 영문서기에 선출되어 외교·선전활동에 앞장섰다. 1942년 충칭특파원으로 임명된 전경무는 대미외교 활성화를 위한 자체 외교사무소 설립을 제안하였다.이에 재미한족연합위원회가 동의하면서 1944년 6월 워싱턴에 외교사무소를 설치하였다. 워싱턴 외교사무소에서 김원용은 위원장으로서 사무소의 운영과 한인 사회의 연락망 유지를 담당하였다. 전경무는 선전부장을 맡아 라디오 방송을 통한 한국의 독립의지 선전 및 태극기가 들어간 우표 발행 주도 등 선전활동에 주력하였다. 정부는 김원용·전경무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alt왼쪽부터 전경무가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의사부와 집행부로 보낸 문서(1944. 8. 22.), 태극기 우표(1944. 11. 2.), 태극기 우표(1944. 11. 2.)    심영신과 민함나, 독립운동 지원을 위한 자금모집에 힘쓰다재미한족연합위원회는 외교적 노력과 병행하여 미주 한인사회의 재정 통일을 이루고 독립운동 자금모집에 힘썼다. 1942년 2월 의사부는 독립금 수봉위원회*를 조직하여 독립운동 자금 모금 활동을 전개하였다. 심영신과 민함나는 의사부 의사위원이자 수봉위원에 선임되어 독립금 모금 예약을 담당하였다. 이외에도 1945년 3월 연합부인구제회를 조직하고 민함나는 회장, 심영신은 부회장에 선출되어 국내 동포들에게 구호물품을 보내는 등 지원활동에 힘을 쏟았다. 정부는 심영신·민함나의 공훈을 기리어 1997년 애국장(심영신), 2019년 애족장(민함나)을 추서하였다.* 독립금 수봉위원회 독립금, 혈성금 등의 명칭으로 구미 각지의 외교활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지원 등의 경비를 조달하는 데 필요한 독립운동 자금을 거두어들이는 역할을 하였다. alt심영신 독립금 예약서(1942. 2. 24.)      본 회의 목적은 대한민족의 독립운동과 항일전선을 통일하며 항일 승리를 획득하고 재미 한인단체들을 규합하여 그 역량을 집중하며 일반 운동을 확대 강화함에 있다.「재미한족연합위원회 규정」 제 2조 중에서(1941. 4. 29.) alt]]> Fri, 02 Apr 2021 09:34:05 +0000 53 <![CDATA[아름다운 인연 제암리학살사건에서 순국한 홍원식과 부인 김씨]]> 글 김형목(사단법인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이사) 집단살해 및 대량학살을 뜻하는 제노사이드(genocide)는 원래 ‘인종’, ‘민족’ 등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genos’와 ‘살해’를 뜻하는 라틴어 ‘cide’에서 유래하였다. 세계사적으로 일어난 대표적인 대량학살은 너무나 잘 알려진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의 유대인에 대한 학살사건이다. 안타깝게도 자유에 반하는 집단학살은 아직도 지구촌 곳곳에서 자행되고 있다. alt제암리 방화학살로 파괴된 민가(좌) / 제암리 희생자 유족(우)                한국판 제노사이드의 상징, 제암리학살사건2021년 4월 15일은 제암리학살사건이 일어난 지 102주년을 맞는 가슴 아픈 날이다. 3·1운동 당시 일본 군인이나 경찰은 평화적인 시위에 대해 끔찍한 만행을 서슴지 않았다. 바로 화성시 제암리, 고주리, 수촌리 일대에서 벌어진 비극적인 집단학살이 대표적이다. 이는 일제의 야만적인 식민지배의 민낯을 그대로 보여준다. 세계인들 공분을 자아내는 충격적인 사건에 대해 일본은 현재까지도 잘못된 과거사를 반성하기는커녕 인정조차도 하지 않는 안타까운 현실이다. ‘화성시 만세길’에 얽힌 사연은 역사적인 아픈 기억으로 다가온다. 1982년 8월 4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전동례 할머니의 증언은 그날의 참혹함을 생생하게 살아나게 한다. “마을에서는 아직도 꺼지지 않은 불꽃이 밤하늘을 밝혔으며 곡식 타는 냄새, 시체 타는 냄새가 밤새 바람에 실려 왔고 서까래가 내려앉고 기둥이 쿵쿵 넘어지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 나는 죽어서 하늘나라에 계신 남편과 다시 만날 때까지 몸서리치는 그날의 악몽을 잊지 못할 것이다. 요즘도 채소를 갈기 위해 마당 모퉁이를 뒤엎다 보면 그날 검게 탄 쌀알이 나온다.”화성지역에 독립만세운동이 확산되다화성의 종교계 인사나 유지 등은 서울 만세운동에 참가하고 귀향한 후 주민들에게 소식을 널리 전하였다. 『매일신보』에도 각지에서 전개된 3·1운동에 관한 기사가 보도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수원 읍내에서 시작된 독립만세운동은 3월 중순 화성지역으로 파급되었다. 당시는 대중화 단계에 접어들면서 평화적인 만세운동이 폭력적인 양상으로 점차 전환하는 분위기였다. 거사일은 주민들이 많이 모이는 장날로 결정되었다.3월 31일 정오경에 발안 장터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다. 만세운동은 팔탄면 가재리의 유학자 이정근, 장안면 수촌리의 천도교 지도자 백낙렬, 향남면 제암리의 안정옥(천도교), 고주리의 천도교 지도자 김흥렬 등이 제암리교회 김교철 전도사와 홍원식 교인 등과 함께 준비하였다. 이날 이정근이 장터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함으로 만세운동 신호탄을 알렸다. 장터에 모인 천여 명의 함성은 천지를 진동하였다. 당황한 일제 경찰의 위협 사격과 시위군중의 투석전으로 이어졌다. 시위대는 인근 일본인 소학교에도 불을 질렀다.일본군 수비대는 주재소로 다가서는 군중들에게 칼을 휘두르기 시작하였다. 만세운동을 이끌던 이정근은 현장에서 칼에 맞아 사망하고 부상자도 속출하였다. 홍원식·안종후·안진순·안봉순·김정헌·강태성(제암리 기독교인), 김성렬(천도교인) 등이 수비대에 붙잡혀 고문을 받고 풀려났다. 흥분한 시위군중은 일본인 가옥이나 학교 등을 방화·파괴하였다. 정미업자 사사카(佐佐坂) 등은 3리 밖으로 피신하는 일이 벌어졌다. 사사카는 보복으로 4월 15일 제암리학살사건 당시 일본군의 길 안내를 맡았다. 4월 1일 발안 인근 마을 주민들은 발안장 주변 산에 봉화를 올렸다. 4월 3일 수촌리 이장 백낙렬, 수촌 제암리교회 김교철 전도사, 석포리 이장 차병한, 주곡리 차희식 등을 중심으로 만세운동이 다시 일어났다. 우정면과 장안면 주민 2천여 명은 각각 면사무소를 부수고 화수리경찰관주재소로 몰려가 단숨에 불태웠다. 이를 저지하는 일본인 순사 가와바타(川端豊太郞)를 처단하는 등 극도로 긴장된 상황이었다. 이에 앞서 3월 28일 송산면 만세시위는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시위대를 향해 해산을 종용하던 순사부장 노구치 고조(野口廣三)는 총을 발포하였다. 잠시 정적이 흐른 후 시위군중은 일본순사를 죽이라고 외쳤다. 기세에 억압당한 노구치는 자전거를 타고 남양만 방향으로 도망치다가 돌에 맞아 쓰러졌다. 군중들은 몰려가 돌과 곤봉으로 때려 처단하였다. alt스코필드 박사와 제암리 학살 희생자 유가족          학살만행이 기획되다 일제는 4월 2일에 가장 격렬한 시위가 일어난 수원과 안성 지역에 대한 제1회 검거반을 구성하였다. 이어 4월 9일에 제2회 검거반도 편성하였다. 말이 검거반이지 실상은 격렬한 만세시위에 대한 악의적인 비방과 악랄한 방화·살륙이었다. 4월 14일까지 64개 마을에 대한 무자비한 검거로 약 800명이나 체포되었다. 검거과정에서 사상자 19명이 발생하고 17개소에서 278호가 불태워졌다. 발안 장터와 고주리 만세운동을 주도한 제암리 사람들에 대한 진압은 집단학살로 이어졌다. 4월 13일 육군 보병 제20사단 79연대 아리타 도시오(有田俊夫) 중위가 지휘하는 수비대 11명이 발안에 도착하였다. 저들의 임무는 토벌 작전이 끝난 발안 지역의 치안 유지였다. 그때까지 발안 시위를 주도했던 제암리 주모자들은 체포되지 않았다. 이러한 사실을 안 아리타는 제암리를 토벌할 계획을 세운다. 제암리는 두렁바위로 순흥 안씨가 모여 사는 집성촌으로 일찍부터 천도교의 교세로 민족정신이 고양되었고, 제암리교회를 통해 문맹 퇴치와 신문화운동이 이루어졌다. 4월 15일 오후 2시경에 아리타는 부하를 인솔하고 일본인 순사 1명과 제암리에 살았던 순사보 조희창, 정미소 주인 사사카의 안내로 제암리로 향했다. 아리타는 “만세운동을 진압하며 너무 심한 매질을 한 것을 사과하려고 왔다”고 속이며 주민들 중 15세 이상 남자들을 제암리교회 안에 모이게 하였다. 주민들이 모이자 수비대는 교회 출입구와 창문을 봉쇄하고 일제히 사격한 후 불을 질렀다. 불이 난 것을 보고 달려 온 강태성의 아내 김씨(19세)는 군인에게 살해당했다. 홍원식의 부인 김씨도 군인들의 총을 맞고 현장에서 사망하였다. 저들은 인근 고주리로 가서 시위의 주모자인 천도교 김흥렬 일가 6명도 학살하였다.우정면·장안면의 만세운동으로 수촌리교회와 마을의 피해 소식을 듣고 스코필드 박사(석호필)가 현장을 찾아가던 중 제암리 마을의 참상을 보고 국제사회에 알리게 되었다. 그가 출간한 『끌 수 없는 불꽃(Unquenchable Fire)』은 국제사회에 일제 만행을 알리는 결정적인 증거가 되었다. alt스코필드(석호필, 1889~1970)           의병장으로 활동하다홍원식(洪元植)은 1877년 10월 13일 경기도 화성유수부 공향면 제암동 넘말(현 화성시 향남읍 제암리 넘말)에서 아버지 홍순화(洪淳華)와 어머니 박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제암리에서 한학을 공부한 후 한성부 주둔 대한제국군 시위대 제11대대 군인으로 서소문 병영에서 근무하였다. 정미7조약으로 대한제국군이 해산되자, 정미의병에 참여하여 충남 당진·서산 일대에서 일본군과 맞섰다. 홍원식이 지휘하는 소난지도 의병은 면천성을 공격하여 전과를 올리는 등 활발히 투쟁하였다. 소난지도 의병은 1908년 3월 일본 경찰대의 공격을 받고 소난지도의 해안 끝까지 밀리면서 화력의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1백여 명이 전사하거나 행방불명되는 희생을 치렀다.난지도는 활빈당의 일종인 수적(水賊)의 근거지 중 한 곳이었다. 1905년 이후 의병의 활동이 활발해지고 수적이 의병으로 전환하면서 소난지도는 의병의 근거지로 탈바꿈하였다. 의병들은 소난지도를 중심으로 배를 이용하여 경기도 남양만 일대와 충남 당진 일대를 오가며 맹렬하게 활동하였다. 1908년 들어 당진 일대에 의병 활동이 극렬하였다. 3월 9일에는 의병들이 당진 읍내에 들어와 박사원을 붙잡아 주민들 앞에서 밀정이라 하여 총살시킨 일이 있었다. 홍성경찰분서는 이 보고를 받고 3월 13일 일본인 순사 7명과 한인 순사 8명 등 15명으로 구성된 토벌대를 편성해 아가츠마 다카하치(上妻孝八)의 인솔하에 당진으로 파견하였다. 무려 9시간에 걸친 전투 끝에 탄약이 떨어진 의병대는 동쪽의 해안 끝까지 밀렸으며 그곳에서 36명의 희생자를 냈다. 섬의 북쪽에 있는 동굴 속에 있던 의병 5명도 살해되었다. 바다에 빠지는 등 행방불명된 의병도 50여 명에 달하였다.소난지도에서 일본 토벌대의 의병에 대한 공격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잔인하였다. 심지어는 선원과 부상당한 의병까지 살육하는 학살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소난지도 의병의 피해 소식은 곧장 수원에 있는 의병부대에 전달되었다. 3월 19일 저녁 9시 수원지역 의병이 10척이나 되는 배를 타고 당진군 내맹면 고항포(현 석문면 장고항)에 들어와 밀고자를 색출하였다. 소난지도 의병 항쟁 소식은 『황성신문』에도 보도가 될 만큼 크나큰 사건이었다. 1906년부터 1910년까지 당진이라는 지리적 이점을 최대한 이용하면서 홍원식은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다. 초기에는 아산만을 사이에 두고 당진·서산 지역과 경기도 화성 등지에서 선박으로 이동하면서 수적과 함께 활동하였다. 수적을 의병에 영입함으로써 의병의 전투력은 향상되었다. 의병의 한계인 신분 간의 차이로 인한 문제를 극복하였음을 볼 수 있다. 또한 현지 출신만이 아닌 경기도 출신의 의병들까지 서로 연합하여 활동한 점 역시 주요한 특징이라 할 수 있다.1914년 3월 29일 고향으로 돌아온 홍원식은 기독교 권사가 되어 학교를 세웠다. 제암리교회의 안종후와 천도교인 김성렬(金聖烈) 등과 함께 구국동지회를 결성하였다. 그러다가 일본 헌병 2명이 그를 감찰하러 오자 총으로 쏴 죽이고 몇 년 동안 숨어지냈다.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새로운 독립운동을 계획 중이었다. 3·1운동이 일어나자 지도자로서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다. alt제암리 3·1운동 순국 기념탑             ]]> Fri, 02 Apr 2021 09:38:10 +0000 53 <![CDATA[인문학관 일제강점기 해외 동포들이 써 내려간 항일 민족시가 「학도가」 「죽어도 못 놓아」]]> 글 김동수(백제예술대학교 명예교수·시인) 일제강점기 중국 상하이, 만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미주 등지 해외에서 발표된 망명인사들의 항일 민족시가들이 무관심 속에 방치되어 있다. 아래 소개할 시가들은 1907년부터 샌프란시스코에서 발간한 『공립신보』(1909년 『신한민보』로 통합)에 게재된 작품들이다. 당시 해외 동포들의 망명문학에서는 민족사의 정맥을 지켜 민족혼을 불태우고 있었다.  alt안창호       안창호 선생은 1902년 유학을 위해 도미하였다가, 동포들의 어려운 처지를 보고 공부를 포기하고 교민 지도에 나섰다. 초창기 미국 교민사회의 지도자로서 성장해 ‘공립협회’의 초대 회장이 되어 매월 두 차례 『공립신보』(1909년 『신한민보』로 통합)를 발간하였다. 그러던 1912년 북미, 하와이, 시베리아, 만주 등지 지방총회 대표자가 모여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를 결성하고, 안창호를 초대 중앙총회장으로 선출하였다. 국내가 일제의 지배를 받는 상황에서 해외 교민들이야말로 현실적인 독립운동의 기반이라고 생각하여 한인들의 총 단결을 우선적인 과제로 삼았다.1907년 안창호는 공립협회가 샌프란시스코에 자리를 잡고 항일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하자 국내로 돌아온다. 이후 대한제국기 최대 비밀결사체인 ‘신민회’를 조직해 애국지사들의 구국운동을 총지휘하고, 민족교육의 산실인 평양에 대성학교를 설립하였다.1.대한청년 학생들아 동포형제 사랑하고우리들의 일편단심 독립하기 맹양하세화려하다 우리강산 사랑홉다 우리동포자나깨나 낫지말고 기리보전 하옵세다2.우리들은 땀을흘려 문명부강 하게하고우리들은 피를흘려 자유독립 하여보세두려움을 당할때와 어려움을 만날때에우리들의 용감한맘 일호라도 변치말세3. 우리고난 무름쓰고 수임업시 나아가면못할 일이 무엇인가 일심으로 나아가세이 강산에 우리 동포 영원보젼 하량이면 우리들의 중한 책임 잠시인들 니즐손가4. 닛지마셰 닛지마세 애국졍신 닛지마세샹하귀쳔 물론하고 애국졍신 닛지마세편한때와 즐거운때 애국졍신 닛지마세우리들의 애국셩은 죽더라도 니즐손가(후렴) 학도야 학도야 우리 쥬의는 도덕을 배흐고 학문넓혀서삼쳔리 강산에 됴흔 강토를우리 학생들이 보젼합세다「대한 청년 학도가」  안창호 작사·이성식 작곡,  『신한민보』 1915. 9. 16.「학도가」는 일제강점기 교육을 통한 민족운동의 수단으로 사용한 노래로, 신학문을 익혀 문명개화를 이룩하자는 내용의 노래이다. 안창호는 이를 통해 대한의 청년학생들에게 애국 애족과 자유독립 정신을 ‘죽더라도 일편단심으로 잊지 말라’고 당부하고 있다. 「대한 청년 학도가」를 작곡한 이성식은 평양 숭실학교 음악 교사로 『중등 창가』를 발행하기도 하였다. alt죽어도 못노아   아세아 동편에 돌출한 반도 / 단군이 풍부한 복디로구나에라 노아라 못 놋켓구나 / 이천리 강산을 못놋켓구나품질도 튼튼 의긔도 만흔 / 단군의 혈족이 우리로구나에라 노아라 못 놋켓구나 / 이천만 동포를 못 놋켓구나하나님 하나님 우리 낳으실졔 / 자유와 독립을 안주셧나요에라 노아라 못 놋켓구나 / 대한의 국권을 못 놋켓구나「죽어도 못 놓아」  작자 미상,  『신한민보』 1915. 12. 23.작자 미상의 이 시는 하나님에게 왜 자유와 독립을 안 주셨나 원망하면서 삼천리강산 대한의 국권을 죽어도 못 놓겠다며 국권 수호의 의지를 다지고 있다. ]]> Fri, 02 Apr 2021 09:39:25 +0000 53 <![CDATA[끝나지 않은 독립운동 4·19혁명일에 독립운동가를 생각하다]]> 글 이계형(국민대학교 교양대학 교수) 대한민국헌법 전문은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 이념을 계승하고…”라고 시작한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정신을 계승해야 한다는 것을 헌법에 명시한 것이다. 이에 60여 년 전 우리나라 민주화운동의 첫 신호탄을 쏘아 올린 4월, 독립운동의 숭고한 정신으로 민주화운동을 이어나갔던 인물들을 통해 헌법의 가치를 되새기고자 한다. alt김창숙(좌) / 조아라(우)해방 후 독립운동가들은 다양한 형태의 삶을 살았다. 대부분은 평범한 삶을 이어갔는데, 몇몇은 종교인·교육가·여성운동가 등으로 활동하였고, 어떤 이들은 이승만과 박정희 독재정권에 협력하였지만 이에 항거한 이들도 있었다. 1945년 8월 해방을 맞이한 지 불과 15년 만에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독재정권에 항거하는 민주화운동이 일어났다. 일제의 가혹한 식민통치에 맞서 불태웠던 민족정신이 한국의 민주주의 정신으로 되살아난 것이다. 그 중심에 독립운동가 김창숙·최천택·김성숙·함석헌·양일동·조아라·장준하·계훈제 등이 있었다. 이들의 민주화운동 활약상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아 그분들을 조명하고자 한다. 김창숙(1879~1962)은 3·1운동 당시 유림이 작성한 독립청원서 파리장서(巴里長書)를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하였고, 그 뒤 중국으로 망명하여 서로군정서 군사선전위원장을 거쳐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 부의장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그는 중국 상하이 공공조계지 내 영국인 병원에서 일본 영사관원에게 붙잡혀 본국으로 압송되었고 14년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대전형무소에서 복역 중에 옥중 투쟁과 일본 경찰의 고문에 두 다리가 마비되어 하반신 불구가 된 채로 형 집행정지로 출옥하였다. 이에 ‘김우(金愚) 벽옹(?翁)’이란 별명을 얻었다. ‘어리석은 앉은뱅이 늙은이’란 뜻이다. 그렇지만 그는 창씨개명에 반대하는 등 항일의 자세를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 해방 후 그는 성균관대학을 설립하였고, 김구와 함께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였다. 이승만 정권 때는 독재와 부패를 막기 위한 투쟁을 벌이다가 부산형무소에 40일간 갇혀 폭행을 당하기도 했다. 최천택(1896~1961)은 부산 출신으로 1920년대에 의열단을 지원하고 부산지역 청년회 활동을 주도하였다. 신간회 부산 지회장으로서 활동하면서 수십 차례 구금되어 옥고를 치렀다. 해방 후에는 경남지역 반탁운동을 이끄는가 하면, 4·19혁명 이후에는 진보적인 혁신동지총연맹 최고위원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1961년 5월 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 정권하에서 부산 육군형무소에서 수개월간 구금되기도 하였다. 이후 후유증으로 그는 1961년 11월에 생을 마감하였다. 김성숙(1898~1969)은 대처승으로 3·1운동에 참여한 뒤 중국 베이징으로 유학가 의열단에 가담하는 등 중국 각지를 돌며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해방 후에 환국 한 그는 좌우합작운동을 전개하였고 이승만 정권에 항거하다가 갖은 탄압을 받았다. 그는 이승만을 독부(獨夫)라 불렀는데, 이는 독재자보다 더 포악하고 구제받을 수 없는 가련한 인물이란 뜻이다. 6·25전쟁 중에 김성숙의 세 아들이 중국에서 그를 찾아왔지만, 이승만은 부자 상봉을 허락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아들들을 중국으로 추방해버렸다. 그는 1960년 4·19혁명이 일어나자 ‘참다운 민주혁명’을 내걸고 사회대중당을 창당하여 활동하였지만, 1961년 5·16군사정변 후 이른바 ‘통일사회당사건’으로 10개월간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함석헌(1901~1989)은 3·1운동 당시 전단을 배포하고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1927년 『성서조선(聖書朝鮮)』을 발간하거나 「성서로 본 조선역사」 등을 기고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였고, 1942년 3월 「조와(弔蝸:개구리의 죽음을 슬퍼함)」이라는 글을 발표하여 1년 가까이 옥고를 치렀다. 해방 이후 그는 1945년 11월 ‘신의주학생의거’ 배후 인물로 지목되어 소련군에 고문을 당하였다. 1947년 단신으로 월남하여 종교활동에 전념하면서 『사상계』 주필로서 사회비평 글을 발표하거나 이승만 독재정권을 통렬히 비판하여 투옥되었다. 5·16군사정변 직후부터는 박정희 정권에 정면으로 도전하여 한일협정 반대와 3선 개헌 반대 투쟁 등을 주도하였고, 명동사건(1976), YWCA 위장결혼식 사건(1979)에 연루되어 재판에 회부되는 등 탄압을 받았다. 1980년 7월에는 전두환에 의해 그가 창간한 『씨알의 소리』가 강제 폐간되기도 하였다.양일동(1912~1980)은 1930년 광주학생운동이 서울로 확산하자 중동학교 학생으로 시위에 참여하였다가 퇴학을 당한 후 중국 베이징으로 건너가 무정부주의자가 되었다. 이후 일본으로 옮겨가 반파쇼·반제·반실업(反失業) 등의 활동을 펼치며 <뉴으스> 발행인으로 항일의식을 고취하다가 2년 8개월 동안 투옥되기도 하였다. 해방 후 그는 야당 국회의원으로 활동하면서 이승만 정권에 항거하였으며, 박정희 정권 시기인 1967년에는 「정치정화법」·「반공법」 등의 위반으로 투옥되었고, 1973년 ‘김대중 납치사건’ 때에는 곤욕을 치르기도 하였다.조아라(1912~2003)는 광주 출신으로 1931년 이일학교 교사로 있던 중, 광주학생운동에 참여한 백인청년단사건에 연루되어 1년간 감옥에 갇혔다. 1936년에는 수피아여학교가 신사참배·창씨개명을 거부해 폐교될 때 동창회장이라는 이유로 다시금 1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그는 해방 후에 조선건국준비위원회 광주부인회를 출범시키고 오랫동안 광주 YWCA를 이끌었다. 박정희 정권하에서는 3선 개헌 반대투쟁을 벌였으며,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때는 수습대책위원으로 활동하다 계엄군에 끌려가 생애 세 번째로 옥고를 치렀다. 그는 ‘민주화운동의 대모’, ‘광주의 어머니’로 불린다. 장준하(1918~1975)는 1944년 학병으로 일본군에 징집되어 중국 쑤저우(徐州)에 배속되었으나 탈출해 충칭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찾았고 한국광복군으로 활동하였다. 특히 1945년 8월 국내진공작전인 ‘독수리작전’에 투입되었으나 갑작스러운 일본의 항복에 중단되고 말았다. 해방 후 그는 환국하여 『사상계』를 창간하여 이승만 정권에 저항하는가 하면, 박정희 정권 당시에는 독재정권에 맞서 민주화운동을 전개하여 10여 차례 투옥되기도 하였다. 1975년 8월 17일 경기도 포천군에 있는 약사봉에서 등산하다가 의문의 사고로 사망하였다.계훈제(1921~1999)는 경성제국대학 재학 중 학병징집을 거부한 후 강제징용을 당하여 노역하던 중 비밀리에 ‘민족해방협동당’에 입당하여 독립운동을 펼쳤다. 이후로 그는 평생 자유와 평등을 실천하며 살았다. 해방 후 그는 반탁운동과 남북협상을 지지하는가 하면, 4·19혁명 후에는 교원노조운동에 참여하였고, 5·16군사정변 후 군사독재와 한일회담을 반대하는 투쟁과 자유언론투쟁을 전개하였으며, 제5공화국 시절 내내 민주화 투쟁을 이끌었다. 이분들의 삶은 오롯이 독립운동에서 민주화운동으로 이어졌다. 이제는 통일운동이 그 뒤를 이어야 한다. 얼마 전에 생을 마감한 백기완 선생을 기리며 묵묵히 활동하는 통일운동가들을 응원한다. 이는 역사적 사명이다. 역사는 정의를 실천하는 이들에 의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Fri, 02 Apr 2021 09:45:55 +0000 53 <![CDATA[독립의 발자취 3·1운동을 전 세계에 알린 외국기자의 흔적을 찾아서]]> 글 편집실 1919년 3월 1일 치열했던 독립만세운동의 현장과 제암리학살사건 등 일제의 만행을 세계에 알리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인물이 있다. 일제강점기 미국 연합통신(Associated Press)의 임시특파원으로 3·1운동 독립선언서를 해외에 타전한 앨버트 W. 테일러(Albert Wilder Taylor, 1875~1948)이다. alt딜쿠샤 2021년 alt앨버트 W. 테일러             페르시아어로 ‘기쁜 마음’이라는 뜻의 ‘딜쿠샤(DILKUSHA)’는 일제강점기에 미국 AP통신의 앨버트 W. 테일러 기자가 살았던 가옥으로 1942년 그가 강제 추방된 후 약 80년 만에 서울시가 원형을 복원해 일반에 공개하였다. 딜쿠샤 가옥이란 무엇인가?종로구 행촌동에 위치한 지하 1층과 지상 2층의 붉은 벽돌집 딜쿠샤는 일제강점기에 미국인 앨버트 W. 테일러가 직접 건립해(1923년 착공, 1924년 완공) 살았던 서양식 가옥으로, 테일러의 아내 메리 L. 테일러(Mary Linley Taylor)가 붙인 이름이다. 1942년 앨버트 W. 테일러 부부가 일제에 의해 강제 추방되면서 장기간 방치되었으나, 2017년 8월에 국가등록문화재 제687호로 지정되고 복원 사업이 이루어졌다.  앨버트 W. 테일러를 주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딜쿠샤의 주인 앨버트 W. 테일러는 1897년(고종 33) 조선에 들어와 연합통신 임시특파원으로 활동하며, 3·1운동과 제암리 학살사건을 해외에 보도해 일제의 만행을 국제사회에 알리는 데 공헌하였다. 특히 1919년 아내 메리 L. 테일러가 아들을 출산할 당시 앨버트 W. 테일러는 세브란스 병원 침상에 숨겨져 있던 3·1운동 독립선언서 사본을 발견하고 일제의 눈을 피해 전 세계에 알리게 된다.딜쿠샤 가옥의 원형은 어떻게 복원될 수 있었나?딜쿠샤의 주인 앨버트 W. 테일러가 일제에 의해 강제 추방된 후 딜쿠샤는 약 80년 가까이 방치되어 있었다. 이에 서울시는 딜쿠샤의 원형 복원을 위해 2016년 관계기관과 업무협약을 체결하였다. 이후 2017년부터 본격적으로 학술 연구를 거쳐 2018년 복원 공사에 착수하였으며, 12월 ‘딜쿠샤’ 전시관으로 공사를 완료해 2021년 3월 일반에 공개할 수 있게 되었다. 딜쿠샤 전시관의 유물들은 어떻게 발굴되었나?앨버트 W. 테일러의 손녀인 제니퍼 L. 테일러가 유물 1,026건(3,102점)을 기증해 딜쿠샤 복원과 동시에 전시관으로 완성될 수 있었다. 제니퍼 L. 테일러는 “딜쿠샤를 복원해 전시관으로 개관한 것에 매우 감사드린다. 이번 개관으로 한국의 독립운동에 동참한 서양인 독립유공자가 재조명받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고 전했다.딜쿠샤의 역사적 가치는?딜쿠샤의 복원은 단순히 하나의 가옥에 대한 복원을 넘어서 근대 건축물의 복원이자 국제연대정신의 복원으로서 큰 의미를 갖는다. 3·1운동을 전 세계에 알린 역사적 인물이 우리나라에 남긴 소중한 유적으로, 시민들에게 개방됨으로써 희망과 이상향이라는 딜쿠샤의 뜻 그대로 희망이 있는 역사교육의 장으로 값지게 활용될 것이라 기대해본다.1920년대 서양식 가옥 전시관으로 재탄생하다총면적 623.78㎡의 딜쿠샤 전시관은 지하 1층과 지상 2층 규모로 조성되었다. 내부 1·2층 거실은 테일러 부부의 거주 당시 모습을 그대로 재현하였고, 나머지 공간은 테일러 가족의 한국에서의 생활상과 앨버트 W. 테일러의 언론활동 등을 조명하는 6개의 전시실로 구성하였다. alt1·2층 거실 / 테일러 부부의 1920년대 거주 당시 모습 재현 alt1층 전시실 / 테일러 부부의 생활상 전시 alt2층 전시실 / 앨버트 W. 테일러의 언론활동과 딜쿠샤의 건축 복원 과정 소개          alt건축 기법딜쿠샤는 1920~30년대 국내 서양식 집의 건축기법과 생활양식을 보여주는 대표적 공간으로 벽돌을 세워서 쌓는 프랑스식 ‘공동벽 쌓기(rat-trap bond)’라는 독특한 조적방식이 적용되어 한국 근대 건축사적으로도 의미가 있는 공간이다.‘공동벽 쌓기’란 벽돌을 세워서 쌓아 벽돌의 넓은 면과 마구리가 번갈아 나타나도록 하는 조적 방식으로, 단열·보온·방습·방음에 유용하며 구조적 안정성에서도 효과적이다. alt○ 관람 시간 : 매주 화~일 09:00 ~ 18:00 / 월요일 휴관○ 운영 방식 : 온라인 사전 예약을 통한 해설 관람 1일 4회 진행, 1회당 관람 인원 20명○ 관람 예약 : 서울시 공공서비스 예약(yeyak.seoul.go.kr)○ 위         치 : 종로구 사직로2길 17]]> Fri, 02 Apr 2021 09:46:51 +0000 53 <![CDATA[세계 산책 나라의 흥망을 결정하는 세금]]> 글 안계환 역사작가 교회의 십일조(十一條) 문화는 구약시대 유대인의 관습에서 비롯되었다. 그들은 재산이나 수입의 10분의 1을 바쳤는데,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제사장 멜기세덱에게 전리품의 10분의 1을 바친 것에서 유래하였다. 그의 손자 야곱은 야훼가 주신 모든 것의 10분의 1을 바치겠다고 천명하였고, 이는 성전 봉사를 담당하는 레위인에게 지불된 뒤 제사·제물·성전 보수·빈민 구제·제사장의 생계비로 쓰였다. alt고대도시에서 발굴된 우르크시의 행정문서 점토판                     서양 세금의 원조 10% 룰기독교 교회가 사실상 국가 기능을 담당한 중세시대가 되면서 십일조는 10%의 교회세로 이어졌다. 근세에 이르러 교회세는 폐지되었지만 종교 활동을 위한 기부금으로 자연스럽게 자리 잡았다. 유대인의 문화가 고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에서 시작된 것처럼 10%의 세금 문화도 그곳에서 출발한 것이다. 농업혁명으로 잉여생산물이 생기자 왕·귀족·사제·군인 등 직접 생산에 종사하지 않는 이들의 비용으로 사용되었다. 인류의 가장 오래된 직업은 회계사 또는 세금수납원이라 할 수 있을 듯하다. 수메르 고대도시에서 발굴된 점토판에 의하면 우르크시의 행정문서에 ‘쿠심’이라는 이름이 있는데 그가 세금을 거두었을 것이라 추측되니 말이다. 이집트 신전 벽화에는 세금 징수원을 묘사한 그림이 있고, 나폴레옹 원정군이 발견한 로제타스톤에는 신전에 납부할 기부금과 세금 감면 등에 관한 내용이 등장한다. 로마 공화정에는 직접세가 없었는데 공공에서 필요한 비용이 적었기 때문이다. 집정관 등 행정관은 무보수로 종사했고, 가도나 수로 등 주요 시설들은 리더들이 개인 돈으로 건설하였다. 시민은 소득세를 내지 않는 대신 ‘피의 세금’이라는 병역의무를 졌다. 최소한의 공공경비는 5% 정도로 낮게 매긴 상속세·수출입관세·노예세로 충당하였다. 노예는 2~5%의 매매세가 부과되었으며 노예 해방의 경우에는 5%의 세금을 내야만 했다. 단, 동방에서 수입되는 향신료·보석·진주·비단 등 사치품에 25%의 높은 세율을 매겼다. 속주가 증가하면서 소득에 부과되는 속주세 10%가 탄생했는데 속주민이 보조병으로 군에 입대하면 시민과 같이 면제되었다. 7세기 중엽에 탄생한 이슬람제국에서는 병역의무가 있는 무슬림에게는 10%의 세율로 ‘자카’라는 이름의 재산세가 있었다. 그 외에 금·은·상품화 가능한 동산·재정기구·주식·채권에는 1년간 보유한 가치의 2.5%를 세금으로 냈다. 동서양에 걸친 대제국을 건설한 몽골인도 점령지에서 조공으로 10%만 받았다. 세금을 더 걷어야 할 때에는 세율 인상 대신 토지·농작물·관세 등을 추가해 물렸다. 이처럼 고대와 중세 유목제국에서 10%라는 비교적 낮은 세율을 적용했는데, 이것이 가능했던 건 정부의 규모가 크지 않았고 과중한 세금이 민심이반을 초래한다는 것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alt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좌) / 카를 5세의 후계자 펠리페 2세(우)나라를 망하게 하는 세금유럽 국왕들의 가장 큰 문제는 교회가 10%의 소득세를 먼저 거두어간다는 사실이었다. 무슬림을 몰아내고 통일제국을 건설한 신앙심 깊은 에스파냐의 군주들은 소비세를 생각해냈다. 오늘날에도 유럽 상당수의 국가가 20%를 넘을 정도로 소비세율이 높기로 유명하다. 문제는 이 ‘세금’과 ‘종교’가 에스파냐 몰락의 원인이었다는 사실이다. 로마 황제 카를 5세와 그의 후계자 펠리페 2세는 유럽을 통일하고 제국을 건설하려는 욕심에 영국과 네덜란드 등 개신교 제국과 끊임없이 전쟁을 벌였다. 그러려면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는데, 이 나라의 소비 성향도 지나치게 높았다는 것도 문제였다. 자국에서 쓰는 생활필수품과 식민지에 보낼 물품의 거의 대부분을 수입에 의존하였다. 그래서 아메리카에서 들여온 은은 에스파냐에 머물지 않고 네덜란드 무기상인과 이탈리아나 영국의 은행가들에게 넘어갔다. 이 때문에 펠리페 2세는 1557년과 1575년 두 번의 파산선고를 해야 했다. 그 해결책으로 국왕은 소비세의 세율을 대폭 올렸다. 초기에는 부동산과 일부 상품 거래에만 부과되었고 세율도 5% 정도로 높지 않았다. 징수지역도 국왕이 직접 통치하는 카스티야뿐이었다. 점차 소비세율은 두 배로 올랐고 제국 내로 확대되었다. 덕분에 세수는 증가했지만 지역의 반발을 불러왔다. 대표적인 곳이 네덜란드였다. 당시 네덜란드는 에스파냐의 영토였지만 프로테스탄트 인구가 늘면서 독립 분위기가 무르익던 중이었다. 소비세 세율 인상으로 시작된 네덜란드의 반발은 무장봉기로 이어졌고, 1568년부터 시작해 약 80년간 이어진 독립전쟁 결과 네덜란드가 떨어져 나갔다. 1588년 에스파냐 함대가 영국에 패했고 30년 전쟁에서도 졌다. 1640년에는 포르투갈이 무장봉기를 일으켰으며, 28년 후 에스파냐제국에서 독립하였다.복지국가에는 높은 세율이 필수이렇게 낮은 세율로 유지되던 서유럽 국가들은 어떻게 복지사회를 이룰 수 있었을까? 자본주의 발달과 그에 따른 빈부격차의 문제가 극심하게 부각된 까닭이다. 그 과정에 국가가 개입했고 높은 수입에는 높은 소득세율이 따라왔다. 교회세가 폐지되어 이것이 자연스럽게 국세로 이어진 영향도 컸다. 결국 국가가 많이 거두어 국민들이 골고루 혜택을 누릴 수 있는 방향으로 정비되었다. 물론 그 과정이 순탄할 리는 없었다. 많은 투쟁이 있었고 가진 자들의 저항도 극심하였다. 하지만 다수가 행복하게 사는 사회로 가려면 더 많은 소득을 얻고, 더 많은 재산을 가진 사람이 높은 세금을 부담하는 건 당연한 일이라는 공감대가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Fri, 02 Apr 2021 09:47:39 +0000 53 <![CDATA[기념관은 지금 코로나19 시대, 독립기념관 역사 교육 대면과 비대면을 아우르다]]> 정리 편집실사진 봉재석 언제나 앞장서서 열 일하는 독립기념관 열정 인재들! 이번 호에서는 독립기념관 교육사업을 위해 연구하고 협력하는 교육부 직원들을 만나봅니다.코로나19 상황을 기회로, 더욱 풍부해진 대면 및 비대면 교육 프로그램도 함께 소개합니다.  alt온라인 교육 촬영장에서 만난 홍일교 학예연구사독립기념관 교육사업에 대해 전반적으로 소개 부탁드립니다‘독립운동의 가치 확산’이라는 목표 아래 어린이·청소년·성인 등 대상별 맞춤형 교육, 독립운동사 특성화 교육, 교육 접근성 제고를 위한 온라인 및 소외계층 교육 등을 실시하고 있습니다. 모든 교육은 대상과 특성에 따라 대면과 비대면 방식으로 진행됩니다.코로나19로 인해 그동안 추진하던 대면 교육에 변화가 있는 건가요?맞습니다. 코로나19로 인한 대면 교육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온라인 교육으로 전환하거나 어린이·청소년·가족을 대상으로 새로운 온라인 교육프로그램을 개발하였고, 온라인 교육용 스튜디오를 구축하는 등 비대면 교육을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또한 체험학습 자료와 영상자료를 제작·보급하여 독립기념관을 방문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학교와 가정에서 교육이 가능하도록 하였습니다. 이외에도 사회적 약자 대상 체험학습자료 보급 등을 통해 독립운동 가치 확산에 기여하고 있습니다.교육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학습자료 구상과 개발은 어떻게 진행되나요?먼저 전년도의 교육 결과와 평가자료를 통해 잘 된 점과 개선방안을 확인하고 올해의 교육 계획을 수립합니다. 교육 대상별 주제별 관련 자료를 분석하고 학습목표에 따른 학습방법과 필요 교구재, 교육운영 방법 등을 종합적으로 고민하여 세부교육 계획을 수립하고 그에 따른 학습 자료들을 개발합니다. 코로나19 이후 비대면 교육의 필요성이 커지면서 온라인 학습용 자료를 개발하여 사전 학습 또는 사후 체험으로 진행되기도 합니다. 따라서 단일 프로그램에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병행하거나, 먼저 온라인 영상이나 이론학습 자료를 발송하여 사전 학습을 유도하고 추후 실시간 온라인으로 체험을 진행하기도 하고, 실시간 온라인 학습으로 이론 학습을 하고 추후 자율적 체험학습을 하는 등 다양한 형태로 비대면 교육에 맞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교육사업 중에 성인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한 가지만 소개한다면?성인교육은 교원직무연수, 현충시설 안내해설사 교육, 공보정훈장교 교육 등 대면 교육 중심에서 코로나19 상황에 따라 비대면용 연수 콘텐츠를 개발하여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중 교원 직무연수를 소개하겠습니다. 전년도에 콘텐츠 3편(한국 독립운동의 역사, 애국계몽운동, 의병전쟁)을 개발하였고, 올해부터 온라인으로 교육을 하고 있습니다. 올해 4편을 추가 제작하여 온라인 중심의 연수프로그램으로 운영될 예정입니다. alt독도학교 체험교육 자료 개발을 위해 토론하는 교육부 직원들독립기념관에서만 받을 수 있는 특화 교육에 대해 소개해주세요독립기념관의 특화 교육으로는 독립군체험학교, 독도학교, 임시정부 체험교육(인성학교)이 있습니다. 독립군체험학교는 체험을 통해 독립군의 희생정신과 독립전쟁의 가치 공감 확산을 목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독도학교는 일제강점기 잔재인 일본의 독도영유권 주장에 대응할 수 있는 역사적 기록을 통한 체계적인 교육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올해부터 실시되는 인성학교 교육이 있는데 임시정부가 지향했던 독립·민주·통합·평화의 가치를 민주시민교육과 연계한 교육 프로그램입니다. 이제 독립기념관에서 과거(독립군체험학교), 현재(독도학교), 미래 (인성학교)로 이어지는 독립운동 가치 확산의 특화된 교육을 받으실 수 있습니다. 그밖에 다른 교육활동이 있다면 소개 바랍니다재외동포·외국인·다문화 가정·장애인 등을 대상으로 한 교육과 전국 현충시설 박람회, 충청권 유관기관과의 협력교육(역사한마당, 역사 통일 체험캠프 등)을 통해 독립운동의 가치를 공유할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습니다. 독립기념관 교육프로그램에 많은 관심과 참여 바랍니다.altalt① 독립군체험학교 모습과 어린이 독립군체험학교 교육 자료② 독립기념관 밝은누리관에서 독립군 관련 교육을 진행하는 옥주연 학예연구관]]> Fri, 02 Apr 2021 09:48:33 +0000 53 <![CDATA[독자이벤트 ]]> alt alt아이콘 클릭하면 퀴즈 정답을 보낼 수 있습니다.      ]]> Fri, 09 Apr 2021 13:46:20 +0000 53 <![CDATA[들어가며 일제는 과연 무엇이 두려웠나?]]> ‘음악’이라는 예술이 지배 체제에 의한 제도적 통제에 따르면사회적·정치적 성격을 갖는 의식의 도구가 된다. 음악이 작품으로 소통되어도 궁극적으로 생산되어 수용자에게 공급되는 것은 작품이 아니라 통제된 의식이기 때문이다. 지배 체계가 사회 구성원의 의식 구조를 계획적으로 통제하는 것은 관리된 사회를 만들기 위함이다. 일제는 대중이 부르는 노래 가사의 내용과 그것이 갖는 의식적 영향력을 인식했다. 조선을 보다 편하게 효과적으로 지배하고 싶었던 일제는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의 음악을 통제하였다.]]> Wed, 28 Apr 2021 09:25:43 +0000 54 <![CDATA[톺아보기 조선총독부의 음악 검열과 통제]]> 글 문옥배(공주문화재단 대표이사) 조선총독부는 ‘노래·노래책·음반’ 등의 텍스트와 ‘공연예술인·공연장·공연제작업자·공연현장무대’ 등의 컨덱스트를 동시적으로 통제하였다. 텍스트 통제를 위해서는 사전 및 사후 검열을 하고, 컨덱스트 통제를 위해서는 ‘자격증·허가제·임검(臨監)’ 등의 방식을 취했다. 검열에 걸린 노래·노래책·음반·공연·공연장·공연예술인 등은 조선총독부에 의해 일체의 유통과 공연 행위가 금지되었다. alt일제강점기 인기 음반 윤심덕 사의 찬미(1926)(좌) / 사의 찬미 음반 속지 가사(1926)(우)노래와 노래책의 통제조선총독부는 1909년 2월 23일 「출판법」(법률 제6호)을 공포하였다. 출판법은 발매 반포를 목적으로 발행되는 일체의 문서와 도서를 규제 대상으로 삼고, 원고의 사전 검열과 출판물을 배포하기 전에 납본 검열을 의무 규정으로 둔 이중 통제 장치였다.  이 출판법 제13조에 의하여 1910년 4월 15일에 이성식 저작의 『중등창가(中等唱歌)』와 4월 20일에 이기종 저작의 『악전교과서(樂典敎科書)』가 발매 반포를 금지당하고 차압 조치되었다. 1911년 10월 20일에는 「사립학교규칙」(조선총독부령 제114호)을 발표하여, 사립학교에서 사용할 수 있는 교과서는 조선총독부가 편찬하거나 검정을 마친 것으로 규정하여 학교 창가를 통제하였다. 1939년에는 교가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기 위해 「교가인가제(校歌認可制)」를 시행하였다.1912년 3월 25일에는 「경찰범 처벌규칙」(조선총독부령 제40호)을 공포하였다. 제1조 제20항에는 ‘불온한 노래를 부르거나 반포하는 것’이 불허되었다. 제86항에는 ‘허가를 받지 아니하고 극장 및 기타 흥행장을 개설한 자’는 구류 또는 과태료에 처할 수 있었다. 1925년 4월 21일에는 「치안유지법」(법률 제46호)을 제정하면서 3·1운동 이후 대두된 사회주의운동을 탄압하고, 사회주의운동과 관계된 노래 역시 금지시켰다. 대표적으로 노동운동가인 〈메이데이 노래(May Day Song)〉, 〈우크라이나 혁명가〉, 〈독일 공산당 혁명가〉 등이 금지되었다. 조선총독부는 찬송가도 통제하였다. 1938년 2월 「기독교에 대한 지도대책」을 통하여 ‘찬미가·기도문·설교 등으로서 그 내용이 불온한 것에 대해서는 출판물의 검열 및 임감(臨監) 등에 의해 엄중 단속할 것(제4항)’을 규정하였다. 태평양전쟁이 발발한 후에는 일제 정보국에서 연합군에 참가한 나라의 음악을 ‘적성음악(敵性音樂)’으로 규정해 1943년부터 금지시켰다.음반의 통제조선총독부는 유성기 보급이 확대되고 음반이 대중화되자 음반에 대한 검열제도의 필요성도 느끼게 되었다. 이에 1933년 5월 22일 「축음기레코드취체규칙」(조선총독부령 제47호)을 공포하고 단속을 시행하였다. 축음기레코드취체규칙은 음반의 생산과 유통 등 레코드에 관계된 일체를 통제하고자 한 법령으로, 검열 및 단속 사유는 ‘치안방해’와 ‘풍속괴란’이었다. 치안방해는 사상의 검열이 목적이었고, 풍속괴란은 저속·퇴폐 등 표현의 자유를 구속한 것으로 사회의식 통제가 목적이었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1938년 1월 내무성 검열과는 「레코드 신취체방침」을 발표하여 음반의 통제를 강화했는데, 전쟁이라는 시국을 반영해 전사(戰死)를 애상적으로 노래한 것과 나약한 감정의 노래와 음반을 금지시켰다. 음반의 판매 금지 및 압수 조치는 새롭게 출판되는 음반뿐만 아니라 이미 출반되어 유통되고 있는 모든 음반을 대상으로 이루어졌다. 취체 처분된 음반은 판매 금지뿐만 아니라 압수되었고, 이미 음반을 구입한 자라도 공개적인 음반의 감상 행위가 금지되었다. 곧 사전 및 사후의 이중 검열 체계였다. 또한 음반의 금지는 노래의 금지 조치와 동시에 이루어졌다. 노래의 출판, 교육·공연·가창 등이 금지되면 그 노래가 수록된 음반도 동시에 행정 처분되었다. 노래의 금지는 곡조와 가사의 내용뿐만 아니라 창법의 문제도 검열의 대상으로 삼았다. 문자로 표현된 가사 내용은 문제가 없지만, 노래로 표현될 때 풍기상 문제가 있어 금지된 곡이 있었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대개의 법령들이 일본에서 먼저 제정·시행된 후 조선 상황에 맞게 수정하여 시행된 것에 반해 축음기레코드취체규칙은 일본보다 먼저 제정·시행된 법령이었다. 그만큼 조선에서의 레코드 검열은 일본에서보다 중시되었다. alt일제강점기 최대 레이블이었던 오케레코드에서 운영했던 조선악극단              공연(흥행)의 통제1910년 4월 1일 부산 이사청은 청령 제2호로 「흥행취체규칙」을 공포하여 공연에 관한 통제를 시도하였다. 총 11조로 구성된 규칙은 공연을 하려는 자는 서류를 구비하여 경찰 관리의 인가를 받아야 하고(제1조), 극장이 아닌 곳에서는 공연을 할 수 없었으며(제4조), 경찰관은 공연이 풍속을 문란하게 하거나 공안을 해친다고 인정될 때에는 정지시킬 수 있었다(제9조).음악회·연극·연예 등 공연은 현장에서 내용이 수정될 수 있는 현장물이기에 사전 검열만으로는 통제에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현장을 통제할 수 있는 법령이 필요했고, 1922년 「흥행장 및 흥행취체규칙」이 공포되었다. 현장 판단은 임석경관에 의해 이루어졌고, 임석경관의 통제 권한은 공연 내용을 넘어 공연장 내에서 이루어지는 공연 관계자와 관객의 모든 행동이 대상이었다. 허가받은 공연이더라도 각본·설명서·예인감찰(藝人鑑札) 등을 요구할 수 있었고, 공연 시간을 제한하거나 일시적으로 정지시킬 수 있었다. 곧 공연장 내에서 이뤄지는 모든 것을 감시하고 판단하여 공연을 정지하거나 제한할 수 있는 무소불위의 권한이었다. alt경기도에서 발행한 대중음악가 현경섭의 제344호 기예자 증명서(1944)         공연예술인의 통제1944년 5월 8일 「조선흥행등취체규칙」(조선총독부령 제197호)이 공포됨으로써 예술인에 대한 통제까지 실행되었다. 이 법령의 특징은 ‘기예자증명서제도(技藝子證明書, 기예증)’ 시행에 있었다. 기예증은 공연예술인 허가 증명서로, 기예증을 발행·소유한 사람만이 공연 활동을 할 수 있도록 한 공연예술인 자격증 제도였다. 과거 법령들이 작품과 공연 및 공연장을 통제했다면, 기예증 제도는 공연예술인을 직접적으로 통제하는 장치였다.이 제도는 기예자뿐만 아니라 연출자 및 기획 제작자(흥행자) 할 것 없이 공연에 관련된 모든 예술인이 허가를 받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는 작품과 공연 통제에서 한걸음 나아가 공연의 주체인 예술인 자체를 통제하는 장치였다. 기예증을 받은 예술인들은 전쟁에서의 각종 징집을 제외 조건으로, 일제 정책의 홍보에 적극적으로 동원되거나 이용되었다.통제의 답습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의 음악통제제도는 광복 이후 대한민국의 음악통제제도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통제 방식의 텍스트와 컨덱스트의 동시적 통제, 사전 검열과 사후 검열 방식, 금지 사유 등은 일제강점기 시절의 통제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음반 검열 관련 조치인 문교부의 「레코드제작 조치사항」(1949. 7.)과 「국산레코드 제작 및 외국 수입레코드에 대한 레코드 검열기준」(1955. 10.)은 일제강점기 음반 검열 장치인 「축음기레코드취체규칙」(조선총독부령 제47호, 1933. 5. 22.)의 방식을 적용한 것이다. 예술인 및 공연에 대한 관련 조치인 「극장 및 흥행취체령」(1946. 2.), 「흥행취체에 관한 고시」(1947. 1.), 「무대예술인 자격심사제」(1950. 2.), 「공연단체등록 및 공연신고제」(1950. 2.) 등은 일제강점기의 「조선흥행등취체규칙」(조선총독부령 제197호, 1944. 5. 8.)의 내용을 포괄해 적용한 것이다. 특히 「무대예술인 자격심사제」는 「조선흥행등취체규칙」의 ‘기예자증명서제도’를 그대로 답습한 것이었다. alt기예자 증명서(좌) / 흥행자 증명서(우)]]> Wed, 28 Apr 2021 09:26:47 +0000 54 <![CDATA[만나보기 음악 금서와 금지곡]]> 노래는 시대를 대표하는 말이자 소리의 역사와 같다.대중이 부르고 소통했던 음악이야말로 국민의 슬픔과 희로애락을 반영한다. 일제는 노래를 금지하고 통제하여 조선의 정신을 통제하고 대중의 귀를 막고자 하였다.  alt1939년 12월 1일 ‘치안방해’로 금지된 노래책 「근화창가」(근화사, 1923) 금지처분된 노래책일제강점기 음반·공연의 검열 및 단속 사유는 ‘치안방해’와 ‘풍속괴란’이었다. 치안방해는 사회적 제도와 정부 조직에 대한 비판·계급투쟁 선동·민족의식 선동·내선(內鮮)융화 저해·신사(神社)존엄 모독·국민 사기에 악영향을 미치는 것 등이며, 풍속괴란은 외설스러운 정사(情事)에 대한 설교(說敎)·정교(情交) 묘사·기타 등이었다(축음기레코드 취체상황, 『제73회 제국의회 설명자료』, 조선총독부경무국, 1937).조선총독부가 금지처분한 노래책을 살펴보면 안익태의 애국가, 푸로레다리아동요집, 메데가 등은 제목에서부터 치안방해에 해당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외 노래책은 창가집과 동요집으로 일반적인 노래책이었다. 그럼에도 금서가 된 것을 보면 조선총독부가 금지 기준을 광범위하게 적용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금지처분된 유행가 음반일제강점기 초기의 금지된 노래들은 교과용 노래, 동요, 애국 계몽가, 노동가, 혁명가 등 창가가 주류를 이루었다. 그러나 1930년대 「축음기레코드취체규칙」의 시행 이후에는 유행가들이 금지곡의 주류로 편입되었다. 금지된 유행가의 금지 사유는 ‘치안방해’와 ‘풍속괴란’이었다. 특히 조선총독부가 주목한 치안방해는 조선의 민족적 전통과 정신(혼과 얼)을 담은 노래, 조선 독립을 희망하는 노래, 계급 투쟁을 조장하는 프롤레타리아 노래 등이었다. 조선총독부는 검열을 통해 레코드를 통제하는 한편, 우수레코드 장려정책을 펼쳤다. 1937년 「필름·레코드인정규정」을 제정하여 사회 교화상 필요한 레코드에 대해 조선총독부에 의해 조직된 인정위원회의 검정을 얻어 총독부명으로 ‘인정’ 또는 ‘추천’ 증서를 교부하였다. 인정을 받은 레코드는 대중에게 적극적으로 선전하였다. 곧 조선총독부는 당근과 채찍의 이중 정책을 시행한 것이었다.금지곡〈금주가〉1920년대 조선 기독교계를 중심으로 술·담배·아편 등을 금하자는 금주운동이 전개되었다. 당시 『기독신보』 1930년 4월 30일자 칼럼에서는 금주운동을 단순한 절제운동이 아니라 조선을 살리는 민족운동으로 규정하고 있었다. 이러한 금주운동의 내용을 노래화한 곡이 임배세 작사·작곡의 〈금주가(禁酒歌)〉이다. 이 노래는 장로교와 감리교의 연합찬송가집인 『신정찬송가』(조선예수교서회, 1931)에 수록되어 찬송가로 널리 불렸다. 그러나 조선총독부는 기독교계에서 불린 찬송가인 〈금주가〉를 민족적 내용 때문에 금지 조치하였다. alt〈금주가〉(신정찬송가, 1931)              기예증 시험모든 공연예술인들이 공연 활동을 하려면, 1944년 5월 공포된 「조선흥행등취체규칙」에 따라 봄·가을로 연 2회 시행하는 자격 심사를 거쳐 기예증을 받아야 했다. 음악 기예증 시험은 일제의 음악신체제를 목표로 조선총독부의 관변 음악단체로 조직된 조선음악협회(1941. 1. 25.)가 조선총독부로부터 위임받아 시행하였다. 기예증의 시험 과목은 일본어·전공실기·구술시험 등이었다. 그중 구술시험은 전시체제하에서 사상을 검증하는 과정으로, 아무리 전공실기 기량이 뛰어나도 사상불온으로 낙인찍히면 불합격 처리되었다. 제1회 음악 기예자 자격시험은 1944년 8월 16일과 17일에 실시되었고, 여기에는 800여 명의 음악인이 응시하였다.alt]]> Wed, 28 Apr 2021 09:27:54 +0000 54 <![CDATA[이달의 독립운동가 독립과 여성해방을 꿈꾸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숨은 주역 소녀회]]> 글 독립기념관 전시부alt(왼쪽부터) 장매성(張梅性)1911~1993 전남 광주건국훈장 애족장(1990) / 박옥련(朴玉連)1914~2004 전남 광주건국훈장 애족장(1990) /박현숙(朴賢淑)1914~1981 전남 광주건국훈장 애족장(1990) / 장경례(張慶禮)1913~1997전남 광주건국훈장 애족장(1990)여학생 주도의 비밀결사, 소녀회가 결성되다1920년대 학생들은 일제의 민족 차별 교육 등에 맞서 등교를 거부하며 동맹휴학(이하 맹휴)을 전개하는 한편 독서모임이자 비밀결사인 독서회를 결성하였다. 1928년 4월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이하 광주여고보) 학생들도 맹휴를 전개하고 1928년 11월 초순 독서회인 소녀회(少女會)를 조직하였다. 소녀회는 민족 독립과 자유 쟁취, 여성 해방을 목적으로 매월 사회과학 서적을 학습하며 학생들의 항일의식을 고취시켰다. 또 광주학생독립운동 참여와 백지동맹 전개 등 일제 식민통치에 저항하였다. alt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1927)(좌) / 장매성 가족사진_전남여자고등학교 역사관 제공(우)                  소녀회, 광주학생독립운동에 동참하다 일제의 민족 차별 교육에 저항한 맹휴와 독서회 활동으로 축적된 학생들의 항일의식은 광주학생독립운동으로 이어졌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은 1929년 11월 3일 오전 한·일 학생 간의 충돌로 시작되어 오후부터는 1,000여 명의 학생들이 가세한 1차 가두 시위로 확대되었다.광주학생독립운동 당일 소녀회 회원인 장매성·박옥련·박현숙·장경례는 약국과 가정 등에서 붕대와 구급약을 가져와 부상자들을 치료하고 물과 먹을 것을 나누어 주는 등 시위에 동참하였다. 이때 일제 경찰이 한국인 학생들을 긴급 체포하며 시위를 강경 진압하자 분노한 학생들은 투쟁 본부를 마련하여 2차 시위를 준비하였다. 11월 12일 전개된 2차 시위에서 소녀회 회원 장매성은 시위에 필요한 격문 수천 장을 인쇄하여 힘을 보탰다. 11월 14일에는 소녀회 회원들이 다니는 광주여고보에서 독립가를 합창하고 만세를 외치는 등 항일 투쟁을 이어나갔다. alt(왼쪽부터)「여학생 만세 공판」(『조선일보』 1930. 2. 20.) / 「소녀회 피고」(『매일신보』 1930. 10. 7.) _대한민국신문아카이브 제공 / 광주학생독립운동여학도 기념비 광주광역시기념물 제26호백지동맹으로 일제 식민지 교육에 저항하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을 탄압하고자 조기방학을 했다가 1930년대 초 개학하면서 광주여고보 학생들은 개학과 동시에 시험을 치르게 되었다. 이때 1월 11일 장매성·박옥련·박현숙·장경례 등은 광주학생독립운동 이후 일제에 무차별적으로 검거된 학생들이 석방되어 같이 시험을 치르기 전까지는 시험을 거부한다면서 백지 답안지를 제출하였다.이처럼 백지동맹 등 1930년대 초까지 이어진 소녀회의 활동은 1930년 1월 15일 일제 경찰이 광주학생독립운동 관련자들을 취조하는 과정에서 소녀회 회원들이 검거되면서 중단되었다. 장매성은 징역 2년, 박옥련·박현숙·장경례는 징역 1년,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다. 정부는 소녀회를 결성하여 광주학생독립운동 등에 참여한 공훈을 기리어 1990년 애족장을 수여하였다. alt전남여자고등학교 제2회 명예졸업식 사진(1958. 11. 3.)_전남여자고등학교 역사관 제공            우리는 세 겹으로 압박을 받고 사는 인생임을 너희들은 아느냐! 첫째로 무산자이니 자본계급에게 짓밟히고 둘째로 **이니 사람이나 **에게 **받고 셋째로 여자이니 남자들에게 시달리지 아니하는가.우리가 이렇게 삼중으로 받는 압박을 벗어나서 인간다운 세상을 살자면 사회과학을 연구할 급무가 있지 아니한가.소녀회 결성 당시 장매성의 주장 중에서(1928. 11.)alt]]> Wed, 28 Apr 2021 09:29:09 +0000 54 <![CDATA[아름다운 인연 대한민국 임시정부 파수꾼 엄항섭과 연미당 부부]]> 글 김형목(사단법인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이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공립학교인 인성학교를 졸업한 만 19세의 연미당은 1927년 3월 청년 독립운동가 엄항섭과 결혼하였다. 당시 기혼자였던 엄항섭은 부인과 사별한 후 연미당과 혼인의 연을 맺게 되는데, 이는 연미당의 부친 연병환과 친분관계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들 부부는  항일투쟁이라는 고난과 역경 속에서 동반자로 걸어갈 수 있는 희망봉이었다.  alt엄항섭        3·1운동을 계기로 독립운동에 투신하다  엄항섭은 1898년 9월 1일 경기도 여주군 금사면(현 산북면) 주록리 90번지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엄세영으로 농상공부아문 대신 판중추부사, 경상북도 관찰사 등을 역임하였고, 아버지는 승지 엄주완이다. 어머니 김씨는 김규식의 1남 3녀 중 둘째 딸로 외할아버지는 규장각 제학과 충청도관찰사를 지냈다. 본관은 영월, 호는 일파(一波)이다. 다른 이름은 엄대형·엄일파, 중국 망명 당시에는 ‘예빗엄’이라고도 했다. 형제로는 형 엄승섭과 동생 엄홍섭 등이다. 어린 시절에 성장 과정은 거의 알 수 없다. 보성법률상업학교를 졸업할 즈음에 천지를 진동시킨 3·1운동이 활화산처럼 폭발하였다. 역사적인 현장을 목격하면서 독립운동에 투신하기로 다짐한 후 곧바로 중국 상하이 망명길에 올랐다. 그곳에는 이미 민주공화제를 천명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어 있었다. 여기서 백범 김구와 운명적으로 만났다.1919년 9월 연해주·상하이·서울 등지에 각각 수립된 임시정부가 통합되어 대통령 이승만과 국무총리 이동휘를 중심으로 새롭게 출범했다. 이때 그는 법무부 참사에 임명되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하였다. 그리고 항저우에 있는 지장대학(芝江大學)에 입학하여 중국어·영어·불어 등을 공부하였다. 이는 훗날 다양한 외교활동을 펼치는 든든한 밑거름으로 작용했다. alt엄항섭과 연미당 결혼식(1927)         임시정부 파수꾼으로서 활동하다1922년 졸업과 동시에 중국 상하이로 돌아왔을 때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부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항일투쟁 방법론을 둘러싼 극심한 반목과 갈등은 수습하기 힘든 상황에 이르렀다. 그야말로 조직 조차 유지하기 힘든 형국이었다. 더욱이 경제적인 곤궁으로 청사 집세는 물론, 임정 요인들의 끼니마저 걱정해야 하는 극한에 달하였다. 반드시 임시정부를 유지시켜야 한다고 결심한 그는 프랑스 조계의 공무국에 취직하여 요인들의 끼니를 해결하는 데 앞장섰다. 나아가 일본 영사관으로부터 임시정부를 보호하는 역할을 자임하고 나섰다. 이는 단순한 생계를 해결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일본 영사관 정보를 수집하려는 의도와 무관하지 않았다. 김구는 스승과 같은 존재였다. 1926년 12월 국무령에 취임한 김구는 임시정부 활성화 방안으로 헌법 개정에 착수하였다. 엄항섭은 헌법개정 기초위원으로 참여하여 국무위원제를 채택하는 데 일익을 담당하였다. 김구가 자싱(嘉興)으로 피신해 있을 때도 곁에서 보좌하였다. 일제는 어마어마한 현상금을 내걸고 김구의 체포에 혈안이었다. 중국인이나 한국인도 이에 현혹될 수 있는 위급한 순간을 맞았다. 그는 곁에서 혼신의 힘을 다해 보호하는 방패막이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다. 난징에서 김구가 중국 국민당 총수 장제스를 만나러 갈 때도 수행하는 등 한중 연대를 더욱 견고하게 만들었다. 한편 민족유일당운동이 좌절된 후 정당 결성은 확산되는 분위기였다. 광주학생운동은 이러한 흐름을 더욱 촉진시키는 결정적인 계기였다. 정당 난립으로 임시정부는 무정부 상태를 맞는 가운데 정당통일운동이 전개되었다. 엄항섭은 여기에 참여하지 않고 이를 수습하는 데 노력하였다. 외곽단체로 한국국민당청년단이나 한국청년전위당 등을 결성하는 동시에 『한민(韓民)』과 『한청(韓靑)』 등을 발행하여 청년들에게 독립운동 노선과 지도 이념을 교육·선전하였다. 많은 파란을 겪으면서 임시정부는 1940년 9월 충칭에 안착하였다. 첫째 과업은 임시정부 군대인 한국광복군 창설이었다. 가릉빈관에서 성대한 광복군총사령부성립전례식이 거행되었다. 중국국민당을 비롯하여 외국사절 등 200여 명이나 참석하였다. 엄항섭은 행사를 주관하였다. 그는 광복군 활동상을 미주 한인사회에 알리면서 재정적인 지원을 호소하였다. 1944년에는 임시정부 선전부장을 맡아 이념을 초월해 항일무장 대오를 견결하게 만들었다. 임시정부가 난관을 극복하면서 존립할 수 있었던 이면에는 엄항섭의 헌신적인 활동이 있었다. 열정적인 활동은 임시정부를 유지·존립시키는 원천이었다. 그의 활동은 크게 드러나지 않았으나 맡겨진 소임에 최선을 다했다. 정파나 이념을 초월한 진지한 태도는 대동단결을 도모하는 밑거름이었다. 그에 대한 ‘임시정부의 파수꾼’이나 ‘젊은 일꾼’이라는 표현은 결코 과장된 미사여구가 아니다.  alt대한민국 임시정부 선전부 초대회에서 엄항섭              제2의 독립운동에 나서다 광복 후 엄항섭은 임시정부 요인과 함께 환국했다. 국내에서도 이전처럼 임시정부와 함께 활동하며 김구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하지만 미군정하에서 임시정부 이름으로 활동할 공간은 너무나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단독정부 수립이 추진되자 이를 반대하며 남북협상에 동참하였다. 남북에 이념과 체제가 다른 정부가 수립됨으로 결국 한민족은 적대적인 관계로 돌변하고 말았다. 더욱이 스승처럼 모시던 김구가 흉탄에 서거하면서 통일에 대한 희망도 사라졌다. 김구 선생의 평생 동반자였던 엄항섭은 장례식 때 추모사를 읽고 마지막 작별을 고하였다. 엄항섭은 가슴 깊숙이 용솟음치는 슬픔을 느꼈다.김구 선생 추모사 중에서선생님! 선생님! 선생님은 가셨는데 무슨 말씀 하오리까. 우리들은 다만 통곡할 뿐입니다. 선생님! 선생님! 민족을 걱정하시던 선생님의 말씀을 저녁마다 듣자왔는데, 오늘 저녁부터는 뉘게 가서 이 말씀을 듣자오리까. 선생님! 선생님! 민족을 걱정하시던 선생님의 얼굴을 아침마다 뵈었는데, 내일 아침부터는 어데 가서 그 얼굴을 뵈오리까. 선생님은 가신대도 우리는 선생님을 붙들고 보내고 싶지 아니합니다. 임정 요인으로 환국한 엄항섭은 조완구와 함께 김구를 측근에서 보좌하였다. 그는 문장에 뛰어나서 김구 명의로 발표하는 성명서나 국민에게 발표하는 호소문을 대부분 기초했다. 엄항섭은 평양 모란봉극장에서 열린 남북조선제정당 사회단체 대표자연석회의에 참석하는 등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노력하다가 한국전쟁 중 납북되었다. 1956년 7월에는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결성대회에서 주석단의 1인으로 참석하여 상무위원 11인과 집행위원 29인 중 1인으로 선임되었다. 이후 ‘반당·반혁명 행위’ 혐의로 체포되어 1962년 7월 30일 숨을 거두어 평양 신미리 애국열사능에 묻혔다. alt연미당 가족사진        연미당은 든든한 동지였다엄항섭이 임시정부의 숨은 일꾼으로 활동한 배경에는 부인 연미당(본명 연충효, 延忠孝)을 빼놓을 수 없다. 부부의 인연을 맺어 준 사람은 바로 석오 이동녕이었다. 연미당은 연병환의 딸로 1908년 7월 만주 룽징에서 태어나 일찍부터 독립운동에 관심을 가졌다. 그는 난징 부근 여학교에서 교육을 받으며 독립운동가들과 빈번하게 접촉했다. 비록 나이는 많았지만 묵묵히 자기 역할을 수행하는 엄항섭의 인간적인 모습에 매료되었다. 부모들도 두 사람의 결합을 반대하지 않았다. 임시정부 안사람의 역할은 다양하고 막중하였다. 남편의 내조는 물론 가족들에 대한 생계 책임과 자녀의 교육문제도 고스란히 그의 몫이었다. 1930년 중국 상하이에서 이념적인 대립으로 임시정부가 파행의 위기에 직면했을 때 한인여자청년동맹 창립에 참여하였다. 이 단체는 한국독립당이나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을 측면에서 지원하였다. 교민들 단합을 위하여 활동하는 한편 3·1절 기념행사와 8·29국치기념일 등 각종 기념행사가 원활하게 추진될 수 있도록 주선하였다.윤봉길 의거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상하이를 떠나 충칭에 정착할 때까지 ‘물 위에 뜬’ 정부였다. 남편은 중국 정부와 연락 임무를 맡아 가정을 돌볼 틈이 전혀 없었다. 연미당은 임정 가족을 돌보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특히 폐결핵에 걸려 각혈을 하는 이동녕을 극진히 간호하였다. 힘든 상황에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억척스러운 그의 모습은 남편에게 커다란 용기를 불어넣는 에너지원이었다. 1936년부터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활동하면서 남편을 지원하는 데 소홀하지 않았다. 일제 침략으로 난징에서 창사로 이동한 3·1절 기념식에서 연설하는 등 여성들 분발을 촉구하였다. 당시 중국인 내빈들도 한중 연대를 강조하는 분위기였다. 연미당은 중국 창사에 있는 남목청에서 3당 통일회의가 열리고 있을 때 이운한의 저격을 받아 중상을 입은 김구를 정성으로 간호하였다. 또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원이 되어 선전과 홍보활동에 주력하였다. 충칭에서는 한국애국부인회 조직부장으로서 반일의식을 고취하는 방송을 담당하였다.독립운동 중에도 옷 세탁과 삯바느질로 돈을 벌어 능력이 닿는 대로 임시정부 지원에 앞장섰다. 필요한 자금을 염출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였다. 국내진공작전을 추진할 때 광복군 모집에 열성을 다했다. 환국을 준비하면서 한국은 반드시 독립국가가 되어야 한다는 ‘자유한국인대회 선언문’을 발표하였다. 남편이 먼저 귀국해 이별을 맞는 순간에도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귀국을 준비하는 동포들의 안전에 많이 노력하였다.딸 엄기선도 독립투사로서 키웠다. 중국 방송을 통해 임시정부의 활동상과 일본군의 만행을 동맹국과 국내외 동포들에게 알리는 데 매진하였다. 또한 포로수용소에 수용된 한국 국적을 가진 사병들을 위문하여 광복군으로 합류를 권유하였다. 일제의 패망을 예견하는 선전공작에 진력하는 등 독립군의 사기 진작에도 열성적이었다. 연미당 가족은 월북 가족으로 오해받으며 고난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연미당은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도 자녀들을 훌륭하게 성장시켰다. 경제적 어려움과 과로로 갑자기 찾아온 중풍으로 오랜 세월을 병마와 싸우다가 73세에 사망하였다. 이처럼 가족의 삶은 우리 근현대사의 굴곡을 고스란히 담고 있으며, 조국 광복을 향한 인생역정은 가슴 벅찬 감동으로 성큼 다가온다. 국립대전현충원과 평양 애국열사릉에 안장된 이들 부부가 다시 만날 수 있기를 기원한다.]]> Wed, 28 Apr 2021 09:31:02 +0000 54 <![CDATA[인문학관 일제강점기 해외 동포들이 써 내려간 항일 민족시가 「하나님께 슬픈 사정함」·「애가」]]> 글 김동수(백제예술대학교 명예교수·시인) 일제강점기 중국 상하이, 만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미주 등지 해외에서 발표된 망명인사들의 항일 민족시가들이 무관심 속에 방치되어 있다. 아래 소개할 시가들은 1908년부터 샌프란시스코에서 발간한 『대도』에 게재된 작품들이다. 당시 해외 동포들의 망명문학에서는 국내 식민지 종속 문학과는 달리 한민족의 진정한 목소리와 시대상을 엿볼 수 있다. 『대도』와 양주삼의 발행 축사『대도(大道)』는 1908년 12월 21일부터 1912년 7월까지 샌프란시스코(桑港) 한인 감리교회당에서 발행한 48면 내외의 조그마한 월간 종합지로서 미주 한인사(韓人史)에서 최초로 발행되었던 교회보(敎會報)이다. 『대도』의 창간호에는 양주삼 주필의 발행 축사, 종교론, 성경공부 등과 이승만의 「감사일 유감」, 정재관의 「인생의 가치」 등이 실려 있다. 양주삼 주필은 창간호 축사에서 “공기라 하는 것이 인민생활에 긴요 막심하야, 만일 사람이 이삼 분 동안만 먹지 못하여도 즉시 생명이 끊어질 터이라 하나, 하나님의 도(道)는 사람의 육신과 영혼에 관계됨이 공기보다 천만 배나 더 밀접긴요하야, 하나님의 말씀 대도(大道)를 우리 한인에게 광포함을 표명함이라, 하나님의 진리에 따라 죄악을 벗고 자유인민이 되는 게 이 월보의 목적”이라 밝히고 있다.비나이다 전능한데 / 도우소서 대한민죡 / 좁지않은 삼쳔리에 / 오십의인 없나잇까다만열명 되드래도 / 살려주마 하셨으니 / 점고하오 우리들을 / 눈물씻고 고대하오우리정상 보시려면 / 너무심히 벌주시네 / 동양서양 같은천주 / 하후하박 이같은고무쇼불릉 하옵시니 / 우리소원 일우쇼서 / 다만청구 하는것은 / 자유독립 이뿐이오이럿타시 호소할때 / 정신차려 생각하니 / 하나님의 말씀소리 / 귀에은근 들리는듯예수께서 손을들어 / 독립문을 가르치며 / 저것보라 대한고아 / 무부무모 가련하다동원춘몽 너의부형 / 모래위에 지은집이 / 동풍셰우 못이겨서 / 그만그뿐 씨러짓지자비하신 하나님이 / 너희들을 경계하사 / 과거사를 생각하고 / 목적더욱 굿게하야만세반석 됴흔터에 / 고대광실 새로짓고 / 자유행복 누리도록 / 마련하야 두셧스니락심말고 힘만써라 / 나의한말 실신없다 / 할넬루야 할넬루야 / 쳐분대로 하오리다「하나님께 슬픈 사정함」 철각생, 『대도』 제1권 8호(1909. 8. 20.)영국 런던 철각생(가명)이 보내온 시 「하나님께 슬픈 사정함」에서는 민족의 설움을 하소연하고 있다. 한일병합 1년 전 이미 국권을 잃어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는 대한의 고아가 되어 무소불능하신 하나님께 “우리도 자유와 행복을 누리도록 해 달라”고 호소하고 있다.이 세상에 애통할 일이 많고 / 피눈물 날일이 많으나나라 잃고 멸망에 듬과 같이 / 애통한 일 또 없고나이 세상에 수리되는 일 많고 / 천대 받는 일 많으나독립자유 뺏기고 종됨같이 / 부끄런 일 또 없고나우리에게 어려운 일이 많고 / 참 죽을 일 쌓였으나이천만 우리민족 단결하면 / 빼앗긴 것 못 찾을까이 세상에 쾌락한 일이 많고 / 영광스런 일 많으나압제와 많은 고생 다 이기고 / 자유함만 못하도다이 세샹에 귀중한 것 많으나 / 자유 생명 제일일세자유 업는 백성은 생불여사 / 죽기로써 속박 끊게락수힘 적으나 락하불식엔 / 금석도 능히 두르네우리힘 적으나 용진불식엔 / 강한 압제 물려치리젼능한데 우리를 도우시면 / 단긔유죡 중흥컸네자비하신 천부께 비나이다 / 구원하심 비나이다  오 조선민죡들아 맹셩하라 / 사망면케 맹셩하라오 조선민죡들아 맴셩하라 / 속박 끊케 용진하라「애가(哀歌)」, 『대도』 제2권 10호(1910. 10. 30.)『대도』는 종교 잡지였으나 당시의 본국 상황을 엿볼 수 있는 각종 자료가 수록되어 있었다. 1910년 한일병합을 전후해서는 식민지로 전락한 본국의 정세를 자세히 보도하여 격렬한 배일(排日) 언론을 전개하였다. 그중에는 「합방조약 배척문」, 「한국을 위한 기도」, 「합방을 반대하는 선언서」, 「애가(哀歌)」 등 국권 상실에 따른 울분과 조국 독립운동에 나설 것을 호소하는 등 항일 논조가 많았다. 「애가」에서는 우리 민족이 단결하면 빼앗긴 걸 못 찾을 리 없다며 민족 단결과 광복 의지를 다지고 있다.]]> Wed, 28 Apr 2021 09:32:06 +0000 54 <![CDATA[끝나지 않은 독립운동 한국민족운동이었던 어린이날]]> 글 이계형(국민대학교 교양대학 교수) 2021년 올해 99회 어린이날을 맞아 100주년을 앞두고 있다. 요즘은 ‘어린이날’ 하면 ‘5월 5일’, ‘공휴일’, ‘선물’, ‘놀이동산’ 등을 먼저 떠올린다. 1960년대 이전에 태어난 사람들은 창경원(현 창경궁), 장충체육관, 효창운동장 등의 추억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어린이날이 일제강점기에 시작되었고 민족운동 차원에서 행사가 치러졌음을 아는 이는 드물다. alt조선소년총연맹이 주관한 어린이날 포스터(1928. 5. 6.)          소년운동으로 전개된 어린이날어린이날은 1921년 진주 등지에서 3·1운동 이후 어린이들에게 민족정신을 일깨워 주고자 소년회가 조직되면서 비롯되었다. 이어 설립된 천도교소년회가 1922년 5월 1일을 ‘어린이날’이라 정하고 첫 행사를 열었다. 인간 평등을 꿈꾼 동학을 이은 천도교가 앞장서고 교주 손병희의 사위인 방정환이 주도하였다. 당시에는 ‘어린이’를 부모의 소유쯤으로 여겼는데, ‘10년 후 조선을 여(慮)하라’는 어린이날의 취지는 당시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후 1923년에 40여 단체가 합심하여 조직한 ‘조선소년운동협회’가 공식적으로 행사를 추진하였다. 서울뿐만 아니라 전국에서 행사가 개최되었고 몇 군데는 기행렬(깃발을 들고 행진)을 벌였다. 어린이날 행사가 소년운동의 하나가 되었다. 1924년부터는 포스터가 제작되었고 행사가 더 풍성했으며 지방의 개최 수도 늘어났다. 다만, ‘5월 1일’ 행사가 메이데이와 겹치면서 일제 경찰이 어린이 행사를 불허 혹은 중지하곤 했다. 그런 가운데서도 1925년에는 조선여자청년회·여자기독청년회·조선여자교육협회도 행사에 동참하면서 7천 개의 고무풍선이 하늘을 메우는 등 더욱 활기를 띠었다. 이때 처음으로 당시 유행하였던 야구가(野球歌) 곡조에 노랫말을 입힌 ‘어린이 노래’가 제창되었다. 첫 구절이 “기쁘구나, 오늘날 5월 1일은 우리들 어린이의 기쁜 날일세”라고 시작하는데 오늘날과 사뭇 다르다.그런데 1926년 무산소년운동을 표방한 오월회도 별도의 행사를 추진하면서 주관 단체가 양분되고 말았다. 비록 순종이 승하하는 바람에 집회가 금지되어 두 단체의 대립은 격화되지 않았지만, 변화의 바람이 일기 시작하였다. 오월회는 “우리는 항상 조선 어린이인 것을 잊지 맙시다” 등의 표어를 내걸었고, “어른 대접과 똑같이 어린이를 대접합시다. 그래야 우리는 살아나게 됩니다”라며 사뭇 다른 주장을 펼쳤다.1927년에 두 단체가 별도로 어린이날 행사를 진행하였다. 어린이 5천여 명이 참여한 가운데 축하 비행이 있었고 라디오 프로그램도 특별 편성되었다. 5월 3일에는 우천으로 연기된 기행렬이 처음으로 이루어졌다. 어린이들은 악대의 뒤를 따라 ‘어린이 노래’를 부르며 서울 시내를 행진하였다. 이날 개최된 메이데이 행사와 섞일 것을 염려한 일본 기마경관대가 기행렬을 따랐고 정복·사복 경찰들이 감시하였다. 두 단체는 사회적인 비판과 더불어 신간회의 창설과 맞물려 1927년 10월 ‘조선소년연합회’로 통합하였다. 아울러 행사 날짜를 메이데이를 피해 5월 첫 번째 일요일로 변경하고 ‘현실에 주의하여 장래를 준비하고자’ 운동 방향의 대전환을 통해 소년운동의 민중화를 꾀하였다. 얼마 뒤 조선소년연합회는 조선소년총연맹으로 바뀌었고 ‘어린이날 노래’도 몇 구절 수정하였다. 이를 기회로 소년운동을 직간접적으로 돕는 잡지가 생겼고 동화집·동요집 등이 쏟아졌다.조선소년총연맹이 주관한 1928년 5월 6일 어린이날 행사는 예년과 달리 각 가정에 복등(福燈)이, 길거리에 축등(祝燈)이 내걸렸다. 이날 비가 오는 와중에도 2천여 명 참가한 가운데 수송공립보통학교 운동장에서 기념식이 치러졌다. 식후에 어린이들은 행사장을 출발하여 안국동을 지나 종로로 기행렬에 나섰으나 비로 중단하였다. 단성사는 이를 활동사진으로 남겼다. 그런데 불쑥 종로경찰서 고등계 형사들이 나타나더니 ‘새 조선을 건설하자’라는 깃발을 압수하여 분위기를 싸하게 만들었다. 이는 일제가 이를 경계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일제의 회유와 탄압일제는 ‘어린이날’ 행사가 소년운동 차원에서 전개되자 이를 방해하기 위해 1928년 5월 5일을 ‘아동애호일’로 정하여 맞불을 놓았다. 일본은 이날을 단옷날이라 하여 남자아이를 위한 어린이날(코도모노히)로 기리는데 식민지 조선에도 이를 시행한 것이다. 일제는 친일 단체를 동원하여 대대적인 행사를 벌이는가 하면 무료 건강상담소 설치, 창경원 무료 개방 등을 통해 어린이들의 참여를 유도하였다. 그런데도 1920년 후반 소년단체가 500여 개에 달할 정도로 영향력이 커지자 일제는 위기감을 느끼고 소년운동 통제에 나섰다. 1929년 어린이날 행사는 3·1운동 10주년을 맞이한 해였고 ‘아동애호일’과 겹쳤다. 일본 경찰은 10만 장의 선전지를 압수하고 행사 당일 식사·축사·답사도 중지시켰으며, 지방에서는 관련자들을 감금, 구속까지 하였다. 일제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1930년에 어린이날준비위원회는 보다 더 준비를 철저히 하여 당일 새벽에 나팔을 불어 어린이날임을 알리는가 하면 ‘행복은 어린이부터’, ‘잘 살려면 어린이를 위하라’ 등의 표어주(標語柱)를 설치하였고 사진 촬영 반값, 무료 건강진단 병원 확대 등을 통해 어린이들이 사상 최대인 1만 2천여 명이 모였다. 이때 제대로 된 기행렬이 펼쳐져 행사장 수송보통학교를 출발하여 청진동→→종로→안국동4가→공평동→남대문통→황금정→조선은행→남대문통→태평통→경성부청을 거쳐 광화문통 광장에서 해산하였다. 1931년부터는 ‘전선어린이날중앙연합준비회’가 주관하면서 사회주의 성향을 강하게 내포되어 실천운동 차원에서 어린이날 행사가 치러졌다. 이날 ‘조선의 희망 어린이의 경절(慶節)’이란 깃발이 휘날렸고, 학대 방지·입학난에 따른 의무교육 실시·조혼 폐지·문맹 퇴치 등의 결의문이 채택되었다. 어린이날 창설 10주년을 맞은 1932년에는 ‘어린이 문제를 잊으면 내일이 없고 내일이 없으면 살길이 없다’라는 표어도 남달랐다. 당시는 옥외집회에서 종교적인 것을 제하고는 어린이날 행사가 유일하였기 때문에 이를 최대한 이용한 것이다. 1933년에 일제의 회유책과 탄압에 소년운동 단체가 82%가 줄었지만, 미주·중국·일본 등지의 한인들이 어린이날 선전물을 청구하였고 행사를 지원하는 민간단체가 늘어났으며 아동보호 차원의 사회입법 필요성을 제기하기도 하였다. 예전에는 소년운동 차원에서 어린이날 행사가 개최되었는데, 이제는 어린이날을 통해 소년운동을 불러일으키고자 하였다. 그럴수록 일제의 탄압은 거세져 1934년에 잡지 『어린이』를 폐간하였고, 5월 2일부터 8일까지 ‘아동애호주간’으로 정하여 어린이날 행사를 원천 차단하고자 하였다. 이런 상황에서도 1937년 5월 2일에 열린 어린이날 행사일에 어린이들은 일본 국가 합창을 거부하며 소극적인 저항을 펼쳤다. 이후 일제는 어린이날을 없애버렸다. 중일전쟁 이후 전시체제기에 접어들자 일제는 ‘아동애호주간’을 국민총력연맹에게 관리토록 하고 조선신궁에서 아동건강애호제를 거행하거나 이에 참배한 6세 미만의 아동에게 어기수(몸에 지니는 부적)를 배부하였다. 더욱이 1943년 4월 일제는 ‘건아(健兒)는 건병(健兵)의 초석, 어린이는 흥아(興亞)의 꽃’이라며 만 14세 미만 어린이를 대상으로 육군학교소년병을 모집하였다. 이들 중 몇몇은 ‘가미카제 특공대’가 되었다. 일제는 ‘아동애호’라는 그럴듯한 포장으로 조선의 아동을 전쟁의 방패막이로 삼았다. 광복 이듬해인 1946년에 잡지 『어린이』가 다시 발행되었고, 그해 5월 5일 광복 후 첫 어린이날 행사장에 오늘날 ‘어린이 노래’가 울려 퍼졌다. 이어 “우리는 왜족에게 짓밟혀 말하는 벙어리요 집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 집과 우리글을 찾기로 맹세합니다”라는 선서문이 낭독되었다. 이후 어린이날은 국가적 행사가 되었고, 1975년 법정공휴일로 지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Wed, 28 Apr 2021 09:32:55 +0000 54 <![CDATA[독립의 발자취 독립운동 역사의 길이 되다]]> 글 편집실 용인에 위치한 근현대사미술관담다가 3·1운동 102주년을 기념해 3·1운동과 독립운동 특별기획전을 마련하였다. 전시에는 19명의 작가가 참여해 다양한 기법으로 애국지사와 독립운동을 표현해냈다.  alt우리가 만세를 부른다고 당장 독립이 되는 것은 아니오. 그러나 겨레의 가슴에 독립정신을 일깨워 주어야 하기 때문에 이번 기회에 꼭 만세를 불러야 하겠소.3·1운동을 앞둔 의암 손병희의 다짐이번 특별기획전은 어떻게 마련되었나?근현대사미술관담다는 그림을 통해 역사를 이야기하고자 한다. 올해는 3·1운동 102주년을 맞아 ‘3·1만세운동과 독립운동 특별기획전-용인, 자유와 평화를 담다’라는 주제로 특별전시를 마련해 6월 30일까지 이어갈 예정이다. 다양한 시각적 표현과 함께 3·1운동과 독립운동을 살펴볼 수 있어 아이들에게는 신선하면서도 흥미로운 교육의 장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특별기획전에서는 어떠한 작품들을 관람할 수 있나?이번 전시에는 용인 작가를 포함해 총 19명의 작가들이 참여했다. 안경진 작가는 ‘하나’라는 주제로 한반도의 상생을 그림자로 표현했으며, 이종희 작가는 ‘소녀상’, 이영선 작가는 ‘대한민국’, 정희경 작가는 ‘빛의 속삭임’을 표현했다. 이 외에도 손정순 작가의 ‘항일의 횃불’, 신상철 작가의 ‘기억의 흔적’, 이은정 작가 ‘항일의 혼 오광선’, 이보름 작가의 ‘정정산지사-우리의 어머니’, 구진아 작가의 ‘염원’ 등 다양한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이번 전시와 관련한 특별한 에피소드가 있다면?그래피터 아티스트 레오다브 작가는 이번 특별전에서 애국지사를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해내려고 노력했다. 이는 어린이들이 애국지사를 친근하게 느낄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는 지난 2013년 특정 역사 교과서가 편향됐다는 논란이 불거질 당시 역사 왜곡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했다. ‘내 자녀와 내가 서로 다른 역사를 배우게 되면 어떻게 될까’라는 걱정이 앞섰고, 이후 독립운동가와 근현대사에서 주목받았던 인물을 벽에 그리는 작업을 시작하면서 창의적 활동을 이어와 눈길을 끌었다. 작가들은 어떤 기준으로 작품의 주제를 선정하고 어떻게 준비했나?미술관에서 ‘3·1운동과 독립운동 특별전-용인, 자유와 평화를 담다’를 기획한 뒤 참여할 화가들에게 신청을 받은 후 주제에 맞는 화가들을 선정한 뒤 작품 준비에 들어갔다.이번 특별전 외에 준비된 다른 작품은?현재 미술관 제1전시관에서 목포홍일고등학교 미술 동문회 화가들이 준비한 ‘붓 소리 초대전’이 전시되고 있으며, 제2전시관에서는 정희경 작가 초대전 ‘속삭이는 빛’이 전시되고 있다. ‘3·1만세운동과 독립운동 특별전’이 종료된 이후에는 ‘동학, 자유와 평등을 담다’ 주제로 전시가 열릴 계획이다.alt백범 김구와 유관순 그리고 안중근독립운동가를 친근한 모습으로 표현하고자 한 레오다브 작가의 작품에는 ‘김구’ 선생이 한복과 산타클로스 옷을 입고 활짝 웃고 있다. 또 ‘유관순의 질문’에는 교복을 입은 유관순 열사가 한 손에 세월호를 상징하는 노란 리본을, 다른 한 손에는 위안부를 상징하는 나비를 들고 있다. 또 ‘안중근 의사의 손’은 관람자들과 하이파이브를 할 수 있게끔 의도된 것이다.alt역사의 흐름, 길배삼수 작가의 ‘수여선의 흔적’에서는 일제가 수원과 여주를 오가며 식량을 수탈한 흔적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조이숙 작가의 ‘길’은 당시 독립군이 다녔을 법한 광교산의 소나무 길을 표현하고 있다. 박태화 작가의 ‘용인의 어제와 오늘’은 어두웠던 과거의 용인과 발전 및 번영을 이어온 현재 용인의 모습을 추상적으로 담고 있다. 양형규 작가의 ‘길’은 거대한 역사의 흐름을 인간의 발자취로 표현하였다.용인의 독립운동가레오다브 작가의 ‘spirit-2021’은 김혁 장군의 초상화이다. 용인 출신의 김혁 장군은 1919년 3월 30일 용인지역 기흥만세운동 당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고, 이후 만주로 이주해 무장독립투쟁으로 활약하였다. 또한 신민부의 중앙집행위원장, 북로군정서, 대한통의부 의용군, 대한독립군정서에서 활동하였으며, 성동사관학교를 설립해 독립군의 중견 간부를 양성하는 데 주력하였다. alt부부 독립운동가의 삶이보름 작가의 ‘정정산 지사-우리의 어머니’와 이은정 작가의 ‘항일의 혼 오광선’에서는 정정선과 오광선을 담아냈다. 오광선과 정정산은 부부 독립운동가로, 용인에서 3·1만세운동을 한 후 무장투쟁을 위해 만주로 떠난 오광선을 찾으러 부인 정정산이 두 딸을 데리고 만주로 가게 된다. 정정산은 만주에서 광복군들에게 밥을 해 먹이며 지내는데, 정정산의 밥을 먹어보지 않은 광복군이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오광선은 서로군정서 제1대대 중대장, 신흥무관학교 교관, 한국독립당 의용군 중대장 등으로 활약하였으며, 1933년 지청천 장군과 함께 수분하 대전자에서 일본군을 대파한 독립운동가이다. alt그림자로 전하는 진실, 우리는 하나구진아 작가는 ‘염원’에서 대한민국의 상징인 태극기의 소중함을 작품에 담았으며, 안경진 작가의 작품 ‘하나’는 한반도의 상생을 그림자로 표현하고 있다. ‘하나’를 살펴보면 외줄에 매달린 두 사람이 아슬아슬하게 부둥켜안고 있는데, 어느 한 사람이 떨어지면 다른 한 사람까지 떨어질 수 있는 위험이 느껴진다. 이는 곧 일제강점기 암흑기에 우리의 처지 또는 분단된 민족의 현실을 표현한 것이며, 우리는 한민족이라는 외침을 그림자를 통해 알 수 있다. 소감마지막 코너에는 관람자들이 소감을 적을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당신들 덕분에 행복합니다”, “나라를 위한 희생, 우리가 이어가겠습니다” 등 우리 후손이 독립운동가들에게 전하는 감사의 글들이 빼곡히 적혀 있다.  관람 시간 : 매주 화~일 10:00 ~ 18:00 / 월요일 휴관전시 관람 : 5인 이하로 입장, 사전 예약전시 해설 : 오전 11시, 오후 2시, 오후4시전시 기간 : 6월 30일까지위         치 :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강남동로140번길 1-6 문         의 : 031-283-7222 ]]> Wed, 28 Apr 2021 09:33:50 +0000 54 <![CDATA[세계 산책 영국의 명예혁명]]> 글 이병택(동북아역사재단) 1980년 5월 18일은 광주와 전라남도 일원에서는 신군부의 집권 음모를 규탄하고 민주주의 실현을 요구하며 민중항쟁이 전개된 날이다. 이와 관련해 영국 의회의 기초와 대중의 원칙을 확고히 수립하게 된 민주화 과정을 살펴본다. 이는 1600년대 영국에서 일어난 명예혁명 과정이며, 왕정의 절대적인 완력 정치에 대한 영국인의 저항을 담고 있다. alt청교도혁명에 의해 폐위된 후 처형당한 찰스 1세          영국 왕정의 복원영국의 민주화 과정은 약 80년간 진행되었다. 영국의 민주화 과정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왕의 목을 치거나 혹은 기존 질서를 무너뜨리는 행위만으로는 민주화를 달성할 수 없다는 점이다. 달리 말해 새로운 질서에 대한 정치적 타협 없이는 혼란이 계속될 수 있다는 것이다. 국왕과 인민의 갈등은 1603년 잉글랜드의 국왕 제임스 1세 때부터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이후 1649년 제임스 1세의 왕위 계승자인 찰스 1세가 의회와의 전쟁에서 패하고 ‘청교도혁명’으로 폐위되는데, 이 사건은 영국의 민주화에 불꽃을 지피게 된다.왕정이 망하자 영국인들은 공화정을 실험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공화정의 실험은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사회를 묶어주던 정치적·종교적 권위가 모두 해체되고 난 뒤, 그것을 대체할 새로운 권위가 수립되지 못했던 이유였다. 이때 혼란한 정국을 틈타 찰스 1세를 참수하고 군대를 장악하고 있던 올리버 크롬웰의 1인 통치 시대가 열리게 된다. 그러나 크롬웰의 완력과 정치적 수완은 시간이 갈수록 그 효력이 떨어졌고, 그의 제한되지 않은 권력은 국왕의 권력 이상으로 질서 없고 제멋대로였다. 그렇게 그가 죽고 난 뒤 영국인들은 다시 과거의 왕정을 복원하고자 하였다. 1660년 영국인들은 찰스 1세의 아들 찰스 2세를 왕위에 복위시켰다. 그러나 왕정의 복원이 영국인들의 정치적 생활을 안정시키고 통합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이러한 정치적 성향 차이로 인해 마침내 첨예하게 대립하는 두 당파가 형성되었다. 복종을 강조하는 토리파(Tory)와 자유를 강조하는 휘그파(Whig)는 정국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엎치락뒤치락 싸움을 이어갔다. 당파 간의 싸움이 치열해지자 휘그파는 ‘교황의 음모’와 같이 허무맹랑한 사건을 조작해 사람들의 공포심을 자극했고, 무고한 사람들을 억압하고 처형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다 휘그파의 지나침과 과격한 행동에 대해 민중이 등을 돌리면서 휘그파는 괴멸 상태에 이르게 된다. 1685년 찰스 2세의 임종 직후 제임스 2세가 왕위에 등극하였다. 그는 형이었던 찰스 2세의 적통 계승자로 왕위에 올랐다. 제임스 2세는 가톨릭 신자라는 위험성을 안고 있었지만, 의회나 국교회 측의 큰 소란 없이 순조롭게 즉위하였다. 왕위 자격 논란에서 자유로워진 제임스 2세의 입지는 탄탄대로에 놓인 것처럼 보였다.  alt명예혁명으로 폐위된 제임스 2세            절대주의와 명예혁명1686년 이후 제임스 2세는 자신이 의도한 정책에 거의 병적으로 집착하며 비타협의 자세를 취했다. 제임스 2세가 인민의 권리와 법을 계속해서 잠식하는 가운데, 1687년과 1688년에 재차 포고된 ‘제2차 관용령’은 제임스 2세가 급격하게 몰락하게 되는 결정적인 사건이 된다. 이 관용령은 모든 종교·비종교인들에게 종교의 자유를 보장한다는 내용이었는데, 당시 숨어 지내던 가톨릭 세력들에게는 자유를 주는 셈이었다. 로마 가톨릭에 적용되어 온 형법상의 효력을 무효화시키는 이 법령은 영국인의 종교에 대한 충분한 존중을 결여한 결정으로, 의회와 국민의 반발을 사게 된다. 더욱이 제임스 2세는 관용령 포고문을 국교회 성직자들에게 낭독하도록 명령하였다. 영국법의 효력을 정지시키고 국왕대권(suspending power)을 이루고자 하는 포고문을 성직자들에게 낭독하게 하는 것은 모욕이나 같은 것이었다. 성직자들이 순응할 경우 국민에게 지탄을 받을 수도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성직자들은 인민의 존중을 붙잡고 가기로 결심한다. 그래서 6명의 주교 명의로 왕에게 관용령 포고문 낭독을 고집하지 말도록 요청하는 일종의 청원서를 보낸다. 제임스 2세는 이런 그들을 감옥에 가두고 재판에 회부한다. 주교들의 변호인단은 다음과 같은 논지를 전개하였고, 배심원들은 몇 시간 숙고한 끝에 무죄를 판결하였다. 법이 정한 한도 내에서 백성은 청원에 의해 특정한 사항에 대한 그들의 고통을 국왕에게 전달하도록 허용된다. 양심에 반하는 경우에 적극적인 복종은 정부가 바랄 사항이 아니다. 백성의 순응과 복종의 위대한 잣대는 법인 것이다. 복종할 수 없는 명령이 내려질 경우 음침하고 반항적인 침묵을 택하는 것보다 거부의 이유를 제시하는 것이 더 존중받을만하다. 모두의 긴밀한 관심사인 공적인 조치에 대해서는 요청받지 않더라도 나름의 견해를 드러내는 것은 백성의 의무를 저버리는 것이 아니다. 주교들은 순응 아니면 청원에 의해 자신들의 가부를 밝혀야 했다. 그리고 법의 효력을 정지하는 국왕대권을 부정하는 것은 선동이 아니다. 법을 따르는 제한적인 정부에서 그러한 국왕대권은 없었고 있을 수도 없다. 그러한 국왕대권이 실제로 있다 하더라도 지금까지 온 나라 사람들 앞에서 번번이 반박되었다. 누구도 그러한 국왕대권의 부정을 범죄로 처벌하자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는다. 더욱이 주교들은 청원서에 있는 불복종을 인민들 앞에서 호소한 것도 아니고 국왕 전하께 몰래 전달하였다.이후 제임스 2세는 만 3년 10개월 권좌에 머물렀는데, 이 종교 관용령을 기점으로 국교회는 집단적인 반발을 일으켰고 국민들의 반감은 고조되고 있었다. 그러던 중 1688년 6월 의회에서는 토리파과 휘그파의 정당 지도자가 협의한 끝에 제임스 2세의 사위인 네덜란드 총독 윌리엄 오렌지공에게 영국의 자유와 권리를 위해 군대를 끌고 오도록 초청장을 보냈다. 윌리엄공이 군대를 이끌고 진격하자 국내에 있던 귀족들도 이에 합세하였고, 사태가 심각해지자 제임스 2세는 국외로 망명하게 된다. 그렇게 제임스 2세는 1688년 12월 공식 폐위되었고, 명예혁명은 무혈혁명이란 영예를 갖게 되었다. 인민에 의해서 제임스 2세를 폐위시키고 그의 아들까지도 왕위 승계에서 배제하는 선례는 정부의 대중적 원칙을 확고하게 수립하는 결정적 사건으로 남게 되었다.]]> Wed, 28 Apr 2021 09:34:29 +0000 54 <![CDATA[기념관은 지금 여성독립운동가 시리즈 발간]]> 정리 편집실사진 봉재석 우리가 알고 있는 독립운동가들은 대부분 남자다. 그들이 독립운동에 헌신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여성들의 적극적인 조력이 있었다. 또 여성들은 일제의 식민지 통치에 저항하고 사회운동, 무장투쟁에 직접 참여하였다. 여성들의 독립운동은 광복 및 대한민국 건국의 밑거름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여성들의 독립을 위한 노력은 남성들의 활동에 비해 평가받지 못해왔다. 우리가 알지 못했던 독립운동의 심지로 자리했던 여성 독립운동가들을 살펴봐야 할 때다. 언제나 앞장서서 열 일하는 독립기념관 열정 인재들! 이번 호에서는 한국독립운동사를 체계적으로 연구하고 발굴하는 학술연구부를 찾아갑니다.alt학술연구부 남기현         여성독립운동가 시리즈 발간 사업을 간략히 소개한다면?여성독립운동가 시리즈 발간은 2019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한국사 연구단체, 역사단체 스타트업 기업과 연계하여 총 5개년 계획으로 추진되었습니다. 매년 4명의 필자가 4명의 여성독립운동가를 선정해 교양서를 발간하고 대중강연을 진행하고 있습니다.독립기념관에서 여성독립운동가 발굴에 앞장서는 계기는?일제의 식민지 통치에서 벗어나고 대한민국이 성립하는 과정을 살펴보면 여성의 역할이 매우 컸음을 알 수 있습니다. 독립운동가의 아내로서 또 어머니로서 적극 후원하였습니다. 일부 여성은 식민지라는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사회활동과 무장투쟁 등에 참여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활동은 그동안 주목되지 않았습니다. 한국독립운동사 이해를 증진시키고 연구 영역을 확장하기 위해서는 여성독립운동가들에 대해 살펴보아야 합니다.남성 독립운동가와 여성 독립운동가의 다른 점이 있다면?남성독립운동가들의 외형적 활동에 반해 여성독립운동가들은 안살림을 맡아야 하는 입장에서 제약이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당시 사회적인 통념도 남성에 비해 여성을 제약하는 환경이기도 했습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여성독립운동가의 삶을 살펴보면 남성독립운동가 이상으로 현실을 성찰하고 행동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앞에서 말씀하신 대중강연에 대해 말씀해주신다면?여성독립운동가 시리즈를 발간함과 동시에 필자들이 직접 시민강좌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교양서 발간과 함께 시민강좌를 통해 여성독립운동가에 대한 국민의 관심을 증대시키고, 연구성과의 대중화를 도모하고 있습니다.altalt시민강좌를 진행하며 어려운 점은?여성독립운동가에 관한 책자 발간과 동시에 시민강좌를 진행하다 보면 여러 가지 고려해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여성독립운동가에 대한 연구를 확장하기 위해 학계 여러 사람들에게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점, 알려지지 않은 여성독립운동가를 조명하기 위한 학계와의 협업, 연구성과의 대중화를 위해 협업기관 선정과 지역사회와의 연계를 생각해야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 관·학계·대중·지역사회를 잇는 사업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여성독립운동가 시리즈 발간과 대중강연에 특별한 의미를 둔다면?말씀드렸듯이 여성독립운동가 시리즈 발간은 그동안 남성 중심으로 진행된 한국독립운동사 연구 영역을 확장한다는 데 의의가 있습니다. 학계와 협업하고 그 연구성과를 교양서로 발간하여 대중들에게 알리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지역사회와의 연계도 고려하고 강연을 통해 대중과 호흡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마지막으로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대한민국이 성립되기까지는 많은 분의 노력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독립을 위해 헌신한 독립운동가들의 삶을 기억하고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에 한국독립운동사의 연구 영역을 확대하고, 대중들에게 그 성과를 알리는 데 주된 목적이 있는 여성독립운동가 시리즈 발간과 대중강연에 특별한 관심을 부탁드립니다.alt① 회의 중인 학술연구부 김항기, 남기현, 구병준 연구원② 발간된 『여성독립운동가』 소개③ 2020년 독립기념관 교양강좌 전단지※ 2021년 대중강연(시민강좌)은 7월과 10월 예정]]> Wed, 28 Apr 2021 09:35:17 +0000 54 <![CDATA[독자이벤트 이번 호 '독립기념관'을 읽고 빈칸을 채워주세요. 꼼꼼히 읽다 보면 정답에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alt alt아이콘 클릭하면 퀴즈 정답을 보낼 수 있습니다.  ]]> Wed, 28 Apr 2021 09:39:48 +0000 54 <![CDATA[들어가며 의학생들의 역사적 사명]]> alt인간의 건강 상태와 질병이 발생하는 데에는 사회적 요인들이 매우 밀접하게 작용하곤 한다. 역사의 엄혹한 시기마다 의학생들이 분연히 일어났던 이유는 근대의학의 도입 초부터 바람직한 전통이 마련되었기 때문이다.그 시절 일제의 침략으로 가중된 수탈과 빈곤, 차별과 억압 등을 이겨내고자 투쟁한 것  또한 당시 의학생과 의사들에게 요구되는 주요한 과제였다. 의료인들은 그러한 시대적 과제를 의연히 감당하였다. 그렇게 오늘에 이르러보건의료에서 소외되는 사람이 없고평화로 번영하는 한반도를 만드는 것이야말로 이 시대 의학도들의 당연한 의무가 되었다. 그것이 선배들의 혁명운동을 계승하는 후학들의 마땅한 도리일 것이다.]]> Fri, 28 May 2021 10:04:17 +0000 55 <![CDATA[톺아보기 관립의학교 학생과 의사들의 항일독립운동]]> 글 황상익(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명예교수) 19세기 의학의 교황이라고 일컫는 독일의 루돌프 피르호는 말하였다. “의학은 사회과학으로서 또 인간학으로서, 사람들을 고통에 빠트리는 요인을 밝혀내고 해결해야 할 책무가 있다. 의사는 빈민과 약자들의 대리인이자 변호인이다.” 진정한 의사라면 인간의 건강을 해치고 질병 발생을 유발하는 정치·경제·사회·문화적 조건들을 개선하는 데 앞장서는 것이야말로 당연한 일이다. alt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의과대학인 의학교와 교장 지석영         일제에 의한 근대의료 보급의 실상일제가 강점기 동안 한국에 근대의료를 보급한 것은 철저히 일본인들을 위한 것이었고, 한국인들에게 돌아간 혜택은 매우 미미하였다. 부당한 경비와 수혜를 견주어보면 한국인들로서는 터무니없이 손해나는 일이었다. 한마디로 가난한 한국인들을 수탈하여 일본인들의 건강을 돌본 셈이었다.일제는 자신들이 처음으로 조선에 근대의료를 도입한 양 강변했지만, 조선은 이미 1870년대 후반부터 근대서양식 의료를 독자적으로 도입하기 시작했었다. 근대의료 도입 이전에 일제의 식민지가 된 타이완과는 뚜렷이 다른 점이다. 지석영 등 선각적 지식인들의 노력으로 시작된 우두 보급이 머지않아 국가사업으로 확대되었고, 1885년 근대식 국립병원인 제중원을 설립하고 서양인 의사들을 고용해 운영하였으며, 1899년에는 여러 차례의 좌절 끝에 최초의 근대식 의과대학인 의학교를 세워 의사들을 양성하기 시작하였다. 외세 침탈이라는 험난한 역경 속에서도 의료의 자주적 근대화를 향한 노력은 지속되고 있었던 것이다.일제는 을사늑약 직후 통감부를 설치하였다. 대한제국 정부의 보건의료 권한을 강탈하기 위하여 통감 ‘이토 히로부미’의 진두지휘로 대한의원을 설립하였다. 일본인들로만 구성된 창설준비위원회는 법령 제정부터 건축까지 모든 일을 도맡아 하였다. 그리고 창설위원들은 대한의원이 설립되자마자 핵심부서의 책임자로 임명되어 대한의원뿐만 아니라 대한제국의 의료를 장악하였다. 대한의원 건립 비용은 당시 대한제국 정부 1년 총예산의 2%에 해당하는 40만 원의 거액으로 대부분 일본차관이었다. 그 시기는 일본에 진 빚 때문에라도 나라가 패망한다고 민간에서 국채보상운동을 벌이던 때였다. 그러한 민중들의 애국운동을 능멸하듯이 이완용 등 매국노 대신들은 일제를 위해 보상운동 총 모금액의 2배가 넘는 새로운 일본차관을 얻었다. 그렇게 세워진 대한의원의 의사를 비롯한 직원도 환자도 대부분 일본인이었다.이토 히로부미가 대한의원을 세운 데에는 또 다른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일제는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서유럽 식민지들과는 달리 한반도를 일본인들이 실제로 많이 거주하는 곳, 글자 그대로 ‘식민지’로 만들려 하였다. 그러려면 일본인들이 별 걱정 없이 이주할 여건을 만들어야 했고, 무엇보다도 일본인들을 위한 최신식 병원을 세워야 했다. 노회한 이토 히로부미는 대한제국 정부가 거액의 일본차관을 들여와 일본인 이주자와 식민통치를 위한 최상급 의료기관을 짓게 함으로써 거뜬히 문제를 해결하였다. 그러면서도 겉으로 내건 명분은 ‘대한제국의 의료 발달’과 ‘문명개화’였다. 이러한 기만적 통치로 한국인들은 의료에서 오히려 점점 더 소외되어 갔다.alt1885년에 세워져 1886년에 구리개(을지로)로 옮긴 뒤의 제중원(좌) / 『황성신문』 국문연구회 조직 기사(1907. 2. 6.)(우)       의학교 교원들과 학생들의 항일운동한국근대의학의 원류인 의학교는 1899년부터 1907년까지 불과 8년 동안 존속한 학교지만, 1870년대 이래 의학의 자주적 근대화를 지향한 선각자들과 민중의 열망이 함축되어 있다. 그러했기에 정의를 사랑하고 불의에 저항하는 전통이 세워질 수 있었다.1907년은 민족의 운명을 가름한 중차대한 시기였다. 일제의 침탈이 더욱 거세지던 이때 정재홍 의사의 의거가 일어났다. 정재홍은 이토 히로부미를 살해하려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자 자결하였다. 정재홍이 분사한 다음날부터 의연금 모집 운동이 벌어졌다. 겉으로는 정재홍의 유족에게 성금을 모아주는 것이었지만 일제에 대한 저항 운동이었다. 따라서 발기인으로 이름을 올리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모금의 발기인 14명 가운데 의학교의 핵심 멤버들인 김익남, 지석영, 유병필 등 의료인이 4명이나 되었다.한편 최초의 한글단체인 국문연구회는 지석영의 주도로 1907년 2월 1일에 창설되었다. 국문연구회에는 윤효정, 박은식, 이종일, 양기탁 등 애국계몽운동의 지도자 다수가 참여하였다. 사무실은 의학교에 두었으며 실무 역할은 지석영, 전용규 등 의학교 교원과 주시경이 담당하였다. 요컨대 의학교는 한글 연구의 산실이기도 하였다.대한제국 황제마저 갈아치우는 절대 권력자 이토 히로부미는 의학교와 한국 민중들의 자주적 의료 근대화 노력을 짓밟으며 대한의원을 설립하였다. 그렇다고 의학생들의 자주독립의식과 기개가 꺾인 것은 아니었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지 두 달 뒤인 1909년 12월 22일 이재명 의사가 친일 매국노 이완용의 척살을 시도했지만 중상을 입히는 데 그쳐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하지만 이 의거로 한민족의 의지를 만방에 드러내었고, 매국노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다는 점에서는 목적을 십분 달성하였다.당시 대한의원 부속의학교 학생 오복원은 자금 조달을 맡고, 김용문은 이완용의 동정 파악을 하는 등 이재명의 거사에 함께하였다. 의거에 대한 일제의 보복으로 이재명 의사는 1910년 9월 30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했고, 오복원은 징역 10년, 김용문은 징역 7년형을 받았다. 통감부의 첩보 자료에는 당시 블라디보스토크와 하얼빈 거주 동포들의 반응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이재명은 조국의 수도, 그것도 일본인 순사와 헌병이 배치되어 있는 곳에서 큰일을 이루었으므로 처음부터 생환을 기대하지 않은 결사의 행동이었다. 그 용맹함이 안중근보다 훨씬 높으니 안중근을 뛰어넘는 일등공신이 나왔다고 칭찬하고 있다.”3·1운동과 의학생들의 활약1919년은 거족적인 3·1운동이 일어난 해이고, 투쟁의 소중한 결실로 대한민국이 건립된 해이다. 3·1운동에서 학생들의 역할은 대단히 중요하였다.실제로 만세시위를 주도하고 운동을 거족적으로 확대·발전시킨 것은 민족 대표들이 아니라 학생들이었다. 그중에서도 의학교의 전통을 이어받는다고 자임하는 경성의학전문학교(이하 경성의전) 학생들의 역할이 가장 뚜렷했고, 그에 따라 체포·투옥·퇴학당한 사람도 가장 많았다.1919년 말 경성의전 학생들의 상황을 보면 조선인 재학생이 141명이었고 퇴학생은 79명으로, 전체 학생 220명 중 무려 36%가 학교를 그만두었다. 경성의전 퇴학생들의 이후 행적은 일부만 알려졌을 뿐이다.이미륵(본명 이의경)은 중국 상하이로 망명해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다 독일로 유학을 가서 생물학박사가 되었다. 학위를 받은 뒤에는 주로 문필생활을 하여 『압록강은 흐른다』 등의 작품을 독일어로 발표하였다. 한위건 역시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다 한때 귀국해 동아일보 정치부장을 지내기도 했으며, 1930년대에는 주로 중국에서 사회주의 계열의 활동을 벌였다. 나창헌은 체포되었지만 병보석 중 탈출한 뒤 중국에 망명해 독립운동과 의료활동을 벌였다.이처럼 의학생들은 큰 희생을 치르면서 역사와 의학 앞에 떳떳할 수 있었다. 그 뒤 어떤 이들은 조국과 민족과 인간 해방 투쟁에 헌신하였다. 투쟁에 직접 뛰어들지 않은 사람들도 의사의 사회적 책무를 잊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랬기에 광복 이후 길지 않은 기간 동안 한국사회와 한국의학이 비약적인 발전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alt1왼쪽부터 오복원, 이재명, 김용문 2지석영이 편찬한 근대 의학적 지식을 국문으로 담아낸 『신학신설』3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의사 김익남의 동상4이완용 모살 미수 사건 판결문에 명기된 가담자들(1910. 5. 18.)]]> Fri, 28 May 2021 10:06:05 +0000 55 <![CDATA[만나보기 독립운동에 앞장선 의학도들 김형기와 유상규]]> 글 황상익(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명예교수) 3·1운동은 당시 많은 사람들의 삶과 사상 및 활동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하물며 20대 초반에 이 역사적·거족적 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던 김형기와 유상규에게 3·1운동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을 것은 새삼 물을 필요도 없을 터이다. alt안창호 뒤로 유상규, 전재순, 김복형(오른쪽부터)         alt김형기         의술 펼쳐 독립운동 지원한 3·1운동의 주역 김형기김형기는 3·1운동 당시 졸업을 눈앞에 둔 경성의학전문학교 4학년 학생이었다. 당시 입학은 4월 초, 졸업은 3월 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는 학생운동이 준비되던 초기부터 경성의전 대표로 참여하였고, 3월 1일 당일에도 시위를 이끌다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이후 김형기는 일제와 언론매체 등에 의해 전체 학생들의 대표로 간주되었으며, 징역 1년형을 받았지만 실제로는 1년 6개월 동안 수형생활을 하고 1920년 8월 30일에 석방되었다. 그는 3·1운동에 관련된 학생으로는 가장 오래 옥고를 치렀다.감옥에서 풀려난 뒤 복학을 허락받은 그는 1921년 3월경 졸업시험을 치른 뒤 졸업을 하고 의사면허를 취득해서 총독부의원에서 1년가량 수련을 받았다. 이후 1928년에 부산에서 동산의원을 열어 크게 성공을 거두었다. 그리고 의료 활동을 통해 모은 재산으로 의열단 등 독립운동 단체를 지원하였다. 김형기는 1930년 봄 비밀결사 사건에 연루되어 다시 한번 체포되었다. 사건 관계자들이 김약수, 채규항, 김단야 등 조선공산당에서 활동했던 사람들인 것으로 보아 공산당 계열의 결사체로 추측된다. 동아일보 1930년 4월 2일자 기사 ‘경기도 경찰부에 검거된 모 비밀결사 사건’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기미운동 당시에 의학전문학교 대표로 맹렬한 활동을 하다가 검거되어 복역하고 나온 후에 동래 울산 기장 등지에서 병원을 내고 있다가 최근에는 부산으로 옮기어 동산의원이라는 병원을 차리고 일반의 환영을 받던 김형기.” alt김형기의 서대문형무소 수형카드(좌) / 김형기 이하 의사 209명이 체포되었다는  『독립신문』 기사(1919. 9. 16.)(우)이 사건의 주역인 김약수는 광복 이후 보수적인 한민당에 관여하는 등 좌익 활동과는 손을 끊었고, 1948년 제헌의원 선거에 출마했을 때 김형기가 적극 후원한 것으로 보아 광복 이후 김형기의 정치노선도 짐작할 수 있다. 국회부의장으로 선출된 김약수는 반민특위 강제 해체 무렵 이른바 국회프락치 사건에 연루되어 투옥되었다가 6·25 때 북으로 가게 되었다.광복 이후 김형기는 계속 의사생활을 하는 한편 정치·사회·언론 활동에 적극적으로 모습을 드러내었다. 정치적으로는 일제강점기 재정적으로 도왔던 의열단 김원봉과 노선을 함께해 민족혁명당(1947년 인민공화당으로 개칭) 부산경남지역 책임자로 활동하였다. 남로당과는 거리를 두었으며, 공안당국에서도 김형기를 크게 주시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1949년 12월 부산지역에 보도연맹이 결성되었을 때는 남지구연맹 간사로 이름을 올렸고, 6·25전쟁 초기인 1950년 8월 9일 정치공작으로 악명 높던 부산지구 특무대(본부장 김창룡)에 체포되어 얼마 뒤 학살된 것으로 추정된다. 극심한 공포 분위기 속에서 사체조차 찾지 못한 가운데, 한참 뒤 후손들이 시신 없는 허묘(虛墓)만 세웠을 뿐이다.최천택을 비롯하여 김형기의 측근 인물들도 일제강점기 독립투쟁에 헌신했고, 의열단과 가까운 사람이 많았다. 김형기의 사위 박일형은 의열단 단장 김원봉의 부인인 박차정의 숙부이기도 했다. 이들 역시 대부분 일제강점기에 이어 해방된 조국에서도 심한 고초를 겪었다.김형기의 사망 일시와 장소 등은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는데,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의 2009년 보고서 중 ‘부산·사천국민보도연맹 사건’을 보면 사망의 경위와 성격을 짐작할 수 있다. 즉 진실화해위원회는 부산·사천 사건을 국가에 의한 불법적 집단학살사건으로 결정했는데, 김형기도 그 학살 때 목숨을 빼앗긴 것으로 판단된다. 김형기는 천만다행으로 1990년 3·1운동 유공자로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음으로써 억울함을 부분적으로나마 풀었지만, 정확한 사망 경위 등은 새로 구성된 진실화해위원회에서 규명해야 할 과제이다. alt유상규           안창호의 영원한 측근 유상규3·1운동 당시 유상규의 활동을 알려주는 문서 등 직접적인 기록은 없고 경성의전 동급생인 소설가 이미륵의 『압록강은 흐른다』를 통해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짐작건대, 유상규는 학생지도부의 결정과 지시사항을 경성의전 학생들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하였다. 체포되지는 않았지만 학교에서 퇴학당하고 곧 중국 상하이로 망명한 것으로 보인다. 안창호는 1920년 2월 27일자 일기에 “내가 이곳에 온 처음부터 두 청년(유상규, 김복형)이 나를 도왔으니”라고 적었다. 기록이 맞는다면 유상규는 안창호가 상하이에 도착한 1919년 5월 25일 이전부터 상하이에서 활동하고 있었으며, 그 무렵부터 안창호의 최측근으로 활동한 것이다. 유상규는 안창호를 상하이에서 처음 만난 때부터 1923년 6월까지 4년 동안 안창호가 가장 신임하는 사람이었으며, 이런 신뢰는 두 사람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이어졌다. 또한 유상규는 흥사단의 입단 허락을 받아 예비단우 과정을 거친 뒤 1920년 9월 9일 단우가 되었다.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20년경부터 노선 대립과 계파 간의 갈등을 겪은 끝에 결국 분열하고 만다. 안창호의 주도로 1923년 1월 국민대표회의를 열어 분열을 극복하려 했지만 오히려 더 심한 갈등만을 남기게 되었고, 안창호 계열도 상하이를 떠나게 된다. 이때 유상규는 조선으로 돌아가 의학 공부를 마치라는 안창호의 권유를 받아들여 일본에서 8개월 동안의 노동자 생활을 경험한 뒤 경성의전에 복학하여 1927년에 졸업을 하고 의사면허를 받았다.유상규는 졸업 후 총독부의원 외과에서 1년 8개월 동안 수련 생활을 하고, 1928년 11월 경성의전 부속병원이 개원하자 입학 동기이기도 한 백인제의 조수가 되었다. 백인제 역시 3·1운동으로 옥고를 치르고 퇴학당했으며 후에 백병원을 설립하게 된다. 그리고 1932년부터는 외과 강사로 백인제 외과교실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1930년부터는 경성제국대학 약리학 교실에서 박사과정을 시작하였고, 바야흐로 학위 취득을 눈앞에 둔 상황이었다. 그러던 1936년 7월 중순 감염증에 걸린 유상규는 백인제의 극진한 치료에도 불구하고 아까운 생을 마감한다. 7월 20일 경복궁 앞 소격동의 경성의전 부속병원에서 엄수된 장례식은 공식적인 학교장은 아니었지만 수많은 조객들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되었다. 안창호는 아들 같은 제자이자 동반자인 유상규의 마지막을 배웅하기 위해 연락을 받은 즉시 평양에서 달려왔다.유상규는 여러 잡지와 신문에 많은 글을 발표한 덕분에 그의 다양한 관심, 개방적인 사고, 계몽운동가로서의 열정을 확인할 수 있다. 의사로서의 유상규의 활약도 중요하지만, 흥사단과 동우회 활동도 결코 빼놓을 수 없다. 이 활동들은 물론 안창호와의 만남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안창호와 유상규에게는 각각 많은 동지와 친우들이 있었지만 그 둘은 20년이라는 나이 차이를 뛰어넘는 각별한 사이였다.1938년 3월, 안창호의 마지막 유언은 자신을 망우리 공동묘지의 유상규 곁에 묻어달라는 것이었다. 유상규와 안창호는 세상을 떠난 뒤에도 안창호의 시신이 도산공원으로 이장된 1973년까지 나란히 누워 사제의 정과 동지의 의리를 나누었다. alt(왼쪽부터) 안창호와 유상규, 흥사단 원동임시위원부 창립 기념(1920) / 백인제와 유상규 / 안창호의 유언, 『삼천리』 제10권 제5호(1938. 5. 1.)          ]]> Fri, 28 May 2021 10:06:59 +0000 55 <![CDATA[이달의 독립운동가 민족이 단결하여 제2의 만세운동을 전개하다 6·10만세운동]]> 글 독립기념관 전시부alt(왼쪽부터)권오설(權五卨) / 1897~1930 / 경북 안동 / 건국훈장 독립장(2005)이선호(李先鎬) / 1904~1950 / 경북 안동 / 건국훈장 애국장(1991)박래원(朴來源) / 1902~1982 / 서울 / 건국훈장 애족장(2005)이동환(李東煥) / 1901~1982 / 전북 정읍 / 건국훈장 애족장(1990) alt융희황제 장례 행렬           3·1운동을 기반으로 6·10만세운동이 일어나다6·10만세운동은 융희황제(순종)의 승하*를 계기로 조선공산당과 천도교 세력, 학생 조직이 연합하여 전개한 제2의 만세운동이다. 거사 전 일제 경찰에게 발각되어 전국으로 확산되지는 못하였지만 학생들은 융희황제 인산** 당일 일제 경찰의 경비망을 뚫고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올해 95주년을 맞은 6·10만세운동은 3·1운동의 역사적 기반 위에서 거행된 제2의 만세운동으로, 학생이 독립운동의 주체로 성장하였고, 정치 이념을 초월한 민족 통합을 이룬 독립운동이었다.  alt「격문을 배포하려다가 검거되어」(『조선일보』 1926. 6. 10.)                      권오설과 박래원, 이념을 초월하여 만세운동을 준비하다  6·10만세운동을 계획한 조선공산당은 천도교계를 유력한 제휴 세력으로 간주하며 만세운동의 전국적 확산 방안을 모색하였다. 두 세력의 연결은 조선공산당의 권오설과 천도교청년동맹 간부 박래원을 통해 이루어졌다. 권오설은 6·10만세운동 계획의 총 책임을 맡아 제휴 세력에게 임무를 부여하고 「격고문」 등을 작성하였다. 그리고 그는 천도교계로 경성인쇄직공청년동맹 회원인 박래원에게 격문 인쇄 및 전국배포를 부탁하였다. 박래원은 부여받은 임무를 천도교 인사들에게 적극적으로 알려 격문 5만여 장을 인쇄하는 등 천도교계의 6·10만세운동 동참을 이끌었다.그러나 거사 4일 전에 숨겨 놓은 격문이 일제 경찰에 의해 발각되면서 권오설과 박래원은 각각 징역 5년형과 3년형을 언도받았다. 정부는 권오설·박래원의 공훈을 기리어 2005년 독립장(권오설), 애족장(박래원)을 추서하였다. alt권오설 철제관_권대용 기증-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 제공(좌) / 권오설, 박래원 구류 연장 통보문(1927,  박명도 제공)(중앙) / 6·10만세운동을 진압하는 일제 경찰 (1926. 6. 10.)(우)이선호와 이동환, 학생들이 나서 독립만세를 외치다 권오설로부터 인산 당일 만세운동 시작의 임무를 부여받은 조선학생과학연구회는 6·10만세운동의 계획이 발각된 상황에서도 서울에서의 만세운동을 계획대로 추진하였다. 조선학생과학연구회 간부 이선호는 거사 당일 융희황제의 장례 행렬이 종로 3가 단성사 앞을 통과할 때 태극기와 격문 등을 배포하고 독립만세를 선창하는 등 시위를 선도하였다. 한편 독자적으로 만세운동을 계획하던 통동계*** 이동환은 각 학교에 선언문을 배포하며 시위 동참을 권유하고 거사 당일 오전 단성사 앞에서 이선호 등과 힘을 합쳐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당일 오후 일제 경찰이 시위를 강경 진압하면서 이선호·이동환은 현장에서 붙잡혀 각각 징역 1년형을 언도받았다. 정부는 이선호·이동환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 애국장(이선호), 1990년 애족장(이동환)을 추서하였다.*  승하(昇遐) : 임금이나 존귀한 사람이 세상을 떠남을 높여 이르는 말** 인산(因山) : 대한제국 황제 직계 가족의 장례***통동계 : 중앙고등보통학교와 중동학교 등 서울 지역의 각 학교 학생들이 중심된 독립운동 단체자유를 부르짖으면 반드시 자유가 온다는 굳은 신념 아래서 자유를 얻기 위하여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경성지방법원 판사 심문에 대한 이선호의 답변 중에서(1926. 11. 2.) alt 「거사가 양심이니 진술도 양심대로」(『동아일보』 1926. 11. 4.)_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alt]]> Fri, 28 May 2021 10:07:54 +0000 55 <![CDATA[아름다운 인연 사진신부로 인연을 맺어 미주지역 항일운동을 주도한 차인재와 임치호 부부]]> 글 김형목(사단법인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이사) 차인재는 수원 삼일여학교 출신으로 이화학당을 나와 교사 생활을 하다가 돌연 미국으로 건너가 임치호와 결혼을 한 뒤 함께 독립운동을 이어갔다. 이들 부부는 미국에서 상점 등을 경영하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독립자금을 지원하였으며, 동시에 차인재는 대한여자애국단, 임치호는 대한인국민회 등에 가입하여 왕성한 독립운동을 펼쳐 나갔다. alt차인재, 임치호 가족        구국민단 교제부장으로 민족문제에 고민하다 차인재(차우르다, 임인재)는 1895년 4월 26일 경기도 수원군 북부면 북수동(현 수원시 팔달구 북수동)에서 태어났다. 수원지역 대표적인 여성교육기관인 삼일여학교를 1910년 3월 2일 제1회로 졸업하였다. 최초의 여류 화가 나혜석과 동생 나지석, 박충애와 홍보배 등이 동기동창생이다. 학교는 북감리교 여선교회 스크랜튼(M.F Scranton) 선교사에 의해 보시동 수원읍 교회(현 종로감리교회)의 초가집에서 3명의 ‘삼일소학당’으로 개교하였다. 전도부인 이경숙과 유지들의 활약으로 1년 만에 재학생이 20여 명으로 늘어났다. 교장으로 부임한 밀러는 스크랜튼 대부인의 적극적인 후원과 미국 여선교부의 재정적 지원을 받아 현재 학교 부지인 수원천로 350(매향동)에 이전하였다. 교장은 낙후된 학교 시설을 개선하고 4년제 삼일여학교로 정식 설립 인가를 받았다. 박충애의 어머니이자 교사인 김몌례는 민족의식 함양과 사회 구성원으로서 책무를 일깨웠다.  차인재는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하여 졸업한 뒤 모교 교사로 근무하면서 여성교육 보급에 열성적이었다. 3·1운동 이후 수원지역 민족운동은 새로운 방향으로 전개되기에 이르렀다. 1920년 6월에는 휘문고등보통학교 학생 박선태, 이종상(일명 이득수)을 중심으로 비밀결사체인 구국민단이 조직되었다. 목적은 크게 2대 목표로 삼았다. 첫째, 한일강제병탄에 반대하여 조선을 일본 제국 통치하에서 이탈시켜 독립국가를 조직한다. 둘째, 독립운동을 하다가 수감되어 있는 사람의 가족을 구조한다는 내용이었다.임원진은 단장 박선태, 부단장 이종상, 구제부장 이선경(경기고녀), 서무부장 임효정(일명 임순남, 이화여고보), 재무부장 최문순(이화여교보), 교제부장 차인재 등이 맡았다. 특히 이 단체를 조직할 때 이선경·임효정·최문순을 소개한 사람이 바로 차인재였다. 이들은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보내온 『독립신문』, 『대한민보』, 『창가집』, 「경고문」  등을 수원지역에 배포하면서 동지 규합에 나섰다. 이들 대부분은 학교 기숙사나 하숙을 하는 서울 유학생이었다. 주말마다 서울에서 고향 수원으로 돌아와 금요일 밤마다 삼일학교에서 모여 장래에 대한 운동 방침을 의논하였다. alt이화학당 시절 차인재(아래 첫번째)            미국에 정착하면서 민족의식을 일깨우다구국민단에서 활동하던 차인재는 1920년 7월 말 갑자기 미국으로 이주하였다. 이유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아마 결혼과 무관하지 않으리라 짐작된다. 8월에는 화성 영흥도 출신인 임치호와 결혼하면서 남편 성을 따라 임인재(林仁載)로 성을 바꾸었다. 이는 일찍이 개신교 신자로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현실이었다.  1921년 4월 7일자 『신한민보』에서 초기 생활을 어렴풋이나마 찾아볼 수 있다. 〈임치호씨 부인 교육 열심〉이라는 제목으로 차인재는 캘리포니아 맥스웰에 살았다. 교포 자녀들의 민족의식을 일깨우기 위해 ‘국어(조선어)학교 교실’을 만들었다. 삼일여학교 교사로서 소중한 경험은 한글 교육을 매진할 수 있는 에너지원이었다. 이러한 분위기는 교포사회에 널리 확산될 수 있는 계기로 작용하였다.한글 교육과 관련하여 외손녀 윤패트리셔(한국명 윤자영) 증언은 의미하는 바가 크다. “외할머니는 매우 억척스러운 분이셨어요. 외할머니는 새크라멘토에서 식료품 가게를 하셨는데, 새벽부터 밤까지 초인적인 일을 하시며 돈을 버셨지요. 그렇게 번 돈을 조국의 독립운동 자금으로 내셨어요. 제가 여덟 살 무렵에 한글교실에 다녔는데 이는 외할머니의 영향이었습니다. 외할머니는 제가 대학을 졸업할 무렵 돌아가셨습니다.”한편 1924년 대한인국민회 맥스웰지방회 학무위원으로 선정되었고, 이후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하였다. 이 단체는 1908년 장인환·전명운에 의한 친일 미국인 스티븐스 저격 의거를 계기로 재미 한인단체 통합운동의 결과였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공립협회와 하와이의 한인합성협회를 통합하여 1909년 2월 국민회를 조직하였다.이듬해 2월 대동보국회가 국민회에 흡수됨으로써 대한인국민회가 출범하였다. 대한인국민회는 해외 한인을 총망라한 단체로 구성하기 위하여 미주에는 북미지방총회, 하와이에는 하와이지방총회, 멕시코에도 멕시코지방회를 조직하였다. 멕시코지방회는 국민회 북미총회 산하로 조직되었다. 국민회가 대한인국민회로 변화되자 대한인국민회 지방총회로서 자리매김하였다. 나아가 시베리아지방총회도 설치하고 치타·이르쿠츠크·수청 등 16개 지방회를 조직하였다. 만주지방총회도 설립하여 8개 처에 지방회를 구성하였다. 북미·하와이·시베리아·만주 등 각 지방총회의 대표자회의를 소집하여 샌프란시스코에서 중앙총회를 정비하고 임원을 선임하였다. 기관지로 『신한민보』를 발간하여 국내외에 배포함으로써 항일의식을 고취하였다. 광복 때까지 해외 한민족의 독립운동을 주도한 중심적인 단체로 자리매김하였다. alt미주 흥사단에서 활동하던 차인재(왼쪽에서 세번째)            미주 한인사회 지도자로 활약하다1933년 대한여자애국단 로스앤젤레스지부 부단장으로 선정되었다. 이 단체는 1919년 5월 18일 세크라멘토 한인부인회와 다뉴바 신한부인회의 연합 발기로 “미주 안에 있는 몇 개의 부인회가 합해 하나의 통일된 단체를 만들어 조국광복에 대한 부녀자들의 운동을 강화하자”는 통고문을 발표하였다. 이후 각 지방 부인회 대표자들이 모여 합동 결의안을 채택함으로 대한여자애국단이 탄생하였다. 목적은 “대한 여자를 단결하고 문명 준칙과 도덕원리에 기인해 개인으로부터 가정에, 가정으로부터 사회로의 개량을 힘쓰며 대한 독립의 기초적 역량을 준비함”에 두었다.주요 사업은 독립운동의 후원으로 외교선전, 군사운동, 대한민국 임시정부(500달러 송금) 등에 후원금을 전달하였다. 한인 자녀들 민족정체성을 일깨우기 위한 한글교육과 대한인국민회를 후원하였다. 구제사업으로 국내에 한재와 수재가 있을 경우 구제금을 보냈다. 해방 후에는 재미한인전후구제회와 함께 구제품을 수합해 본국에 보내는 일에 적극적이었다.1934년 8월에는 흥사단에 입단하였다. 1935년부터 로스앤젤레스 삼일국어학교 재정모금 수전위원이 되어 학교 유지에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대한여자애국단 로스앤젤레스지부 서기와 재무와 로스앤젤레스여자청년회 서기로 활동하였다. 이듬해에는 애국단 로스앤젤레스지부 서기로 선임되어 1942년까지 활동하였다. 1939년 6월에는 국민회 로스앤젤레스지방회 집행위원과 총무로 선임되었다. 1941년 로스앤젤레스 지방회 집행위원 겸 교육위원으로 선임되어 2년간 활동하였다. 이듬해에 대한여자애국단 총부 위원, 다음해에는 대한인국민회 로스앤젤레스지방회 집행위원 겸 총무로 선임되었다.1944년 애국단 로스앤젤레스지부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그해 1월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집행부가 주최한 임시회의에 애국단 대표로 참석하였다. 그해 4월에는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집행부 선전과장, 1944년 9월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집행부 제6차 회의에 참석하여 주미외교위원부 개조 문제를 논의하였다. 재미한족연합위원회에서 주미외교위원부 개조를 위한 전체 대표회를 개최하자, 대한여자애국단 총부 대표로 참석하였다. 1945년에는 대한여자애국단 로스앤젤레스지부 위원, 로스앤젤레스지방회 총무, 연합위원회 군자금 모집위원으로 선임되었다.차인재는 국민회를 은퇴한 뒤 말년을 로스앤젤레스에서 보내다가 1971년 4월 7일에 사망하였다. 정부는 2018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alt차인재, 임치호 부부 무덤(로즈데일리)         미국에서 자수성가하여 독립운동에 투신한 임치호임치호는 경기도 남양군 대부면 영흥도(현 화성시 영흥도)에서 1880년 태어났다. 20대에 미국으로 이민을 가서 공립협회에서 1906년 12월 샌프란시스코지방회, 1907년 12월경 솔트레이크시티지방회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이듬해 3월 공립협회가 기관지 『공립신보』를 1인당 10부씩 한국에 발송하자는 제의에 동참하는 한편, 식자기계 구입을 위해 금화 75원을 쾌척하였다. 같은 해 7월 핸포드지방회를 설립하였고, 10월에는 아세아실업주식회사 발기인이 되었다. 아세아실업주식회사는 공립협회가 블라디보스토크 등 원동지역에 독립군 기지 개척을 위해 자본을 모집하기 위해 설립한 회사다. 1909년 2월에 공립협회가 하와이 한인합성협회와 통합을 이루고 국민회가 창립되면서 태동실업주식회사로 회사명을 바꾸었다. 이 회사는 정재관·이상설·김성무 등을 원동지역으로 파견하였다. 봉밀산지역은 중국과 러시아의 국경지역으로서 항카호(興凱湖) 근처에 위치하여 수자원이 풍부한 곳이었다. 투자금으로 가옥 건설과 도로 설비와 농업경영에 필요한 농기구 등을 마련하였다. 토지 개척사업은 현지 중국인으로부터 임대한 토지와 필요한 용구를 갖추고 농업경작에 착수했으나 마적의 행패가 심하여 안정을 얻을 수 없었다. 개인 사유지가 아닌 국유지를 구매하였고 한편 귀화하지 않은 한인들은 토지 소유권을 얻을 수 없게 되어 실패로 돌아갔다.1909년 12월 와이오밍주 그린리버에 거주하며 그곳 한인들과 국민회 임시 파출소를 설립하고 사무원이 되었다. 파출소는 지방회보다 작은 단위의 조직으로 솔트레이크시트지방회 산하에 소속되었다. 1911년 6월 네브라스카주 헤이스팅스의 한인소년병학교의 하기 군사훈련에 참여하였다. 1918년 대한인국민회 기관지 『신한민보』 식자기계채 청장 동맹자를 모집하자, 그해 5월 6회 동맹자로 가입하였다.1920년 7월 캘리포니아주 윌로우스에 한인비행가양성소를 설립하고 양성소 간사로 활동하였다. 레드우드비행학교에 오림하·이용선·이초·한장호·이용근·장병훈 등 6명의 단우가 입교하였다. 5만 달러를 후원한 김종림(총재), 신광희(재무), 강영문(서기), 곽림대(감독) 등이 주축이 되어 윌로우스한인비행가양성소를 창립하였다. 최능익·이초·임초 등은 조종사 훈련을 받았고, 임치호·마춘봉·이암 등이 간사로 봉사하였다. 이 비행학교는 1921년 4월에 문을 닫았으나 30여 명의 조종사를 배출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이용근을 한국독립군 육군 비행병 참의(소위)로 임관하였다. 1920년 8월에는 차인재와 결혼한 후 이듬해 맥스웰지방회, 1923년에는 동 지방회 법무, 다음 해 재무로 활동하였다.1932년 5월 대한인국민회에서 상하이사변 임시위원부를 설치하고 각지에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자, 남부 캘리포니아주 수전위원으로 선정되어 모금운동에 앞장섰다. 1934년 흥사단에 입단하여 제281단우가 되었다. 1935년과 1936년 2년 연속 로스앤젤레스지방회 회장으로 선출되자 3.1절 기념식을 주관하였다. 로스앤젤레스 삼일국어학교 임원으로 선임되었다. 1936년 5월 국민회 주최로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재미한인사회 발전책 간담회에 남가주 대표로 참석하여 한인 1세 노인의 구제, 2세 청년의 단결과 교양, 대한민국 임시정부 후원 등을 논의하였다. 1937년 동 지방회 집행위원, 1940년 학무위원이 되었다. 1940년 6월 동 지방회 교육위원으로 삼일국어학교 하령회에 참석하여 2세들의 한글교육에 노력하는 동시에 1942년에는 동 지방회 감찰위원으로 활동하였다. 대한인국민회 총회 간부로도 일하였다. 1941년 총회 중앙집행위원 겸 교육위원으로 선정되었고, 1942년 후보집행위원, 1943년 중앙집행위원 겸 구제위원, 1945년 중앙감찰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05년부터 1945년까지 수십 차례에 걸쳐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하였다. 정부는 2017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Fri, 28 May 2021 10:09:23 +0000 55 <![CDATA[인문학관 독립운동과 광복군의 대일 선전포고 『국민보』,『태평양주보』]]> 글 김동수(백제예술대학교 명예교수·시인) 『국민보(國民報)』는 1913년 하와이에서 한글로 발행된 신문 가운데 가장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며 독립운동과 문맹 퇴치 및 교민의 계몽활동에 크게 공헌하였다. 『태평양주보(The Korean Pacific Weekly)』는 1913년에 창립된 하와이 동지회의 기관지로서 임시정부 소식이나 조국의 독립, 고국의 소식 등을 보도하여 하와이 한인들의 독립운동에 기여하였다. 광복 이후까지 살아남은 신문『국민보』는 1913년 8월 1일에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한인 독립운동가들이 발행한 신문이다. 이 신문은 당시 미국 최대의 한인단체였던 대한인국민회 하와이 지방총회 기관지 역할을 하였다. 처음에는 홍종표가 주간이었으나 박용만이 뒤를 이었고, 한때는 이승만도 제작에 참여하였다. 신문은 독립운동과 문맹 퇴치 및 조국과 교포 소식, 지식 보급, 교민 계몽 활동에 크게 공헌하였다. 이 신문에는 1918~1919년 당시 프랑스에서 활동한 파리강화회 독립운동가들이 작성한 문서와 이들의 활동상을 담은 기사들이 담겨 있기도 하다.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하와이에서 영어 이외의 모든 외국어 신문의 발행이 금지되었고, 1941년 12월 10일 문을 닫아야 했다. 그러던 1944년 2월 9일부터는 『국민보』가 다시 복간되면서 영문 1면을 추가하였다. 독립운동가들이 중국과 러시아 등지에서 발행한 신문이 이어지지 못하고 폐간되는 반면, 『국민보』는 광복 이후 1968년 12월 25일까지 발행되어 하와이 한인사회와 독립운동을 파악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아래 시에서 지은이 현순은 “독립운동을 할 당시 중국 상하이를 떠나 유럽으로 가다가 배 위에서 시를 한 수를 지었다. 나는 하와이에 다시 온 후에 미미교회를 넘고 단합회를 건너 애국단을 거치고 동맹단을 지나서 혁명당을 밟아가는 것은 오직 머리 돌려 광복하는 가을을 보고자 하는 붉은 마음으로 봉사할 따름이다”라고 시에 대한 해설을 덧붙였다. 이어서 “큰 것을 무서워하지 말고 적은 것을 없이 여기지 말자는 김구 선생의 말씀을 기억하자”며 동포들에게 애국심을 북돋아 주었다.넓고 넓은 푸른 바다 / 외로운 배 따라 비와 바람 무롭 쓰고 / 서주로 향하다산을 넘고 물을 넘어 / 무삼 연고인가 머리 돌려 광복 가을 / 오즉 보고 지고「혁명」 현순 지음, 『국민보』 1828호(1944. 6. 7.)alt대한인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의 기관지『국민보』(1913)(좌) /『국민보(國民報)』(우)             주권 회복을 위해 발행된 잡지 1913년 9월 하와이에서 시사교양의 증진과 독립된 주권 회복을 도모하기 위하여 발행한 국문으로 된 『태평양잡지』를 제호와 체제를 바꾸어 1930년 12월 13일부터 주간으로 발행하였다. 그러던 중 1942년 1월 21일 하와이에서 외국어신문의 발행을 금지하면서 한때 정간을 당하였다. 이어 『국민보』와 합동으로 『국민보-태평양주보』라는 제호로 발간하다가, 1944년 2월 2일 다시 『국민보』와 분리하여『태평양주보』로 제호를 바꾸었다. 광복 전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소식이나 조국의 독립 문제 등을 크게 다루었다. 1  태산 같은 항공모함 / 비행기를 가득 실고 /     신비의 길로 둥실둥실 / 태평양 넘나노나2  만리 창공 구름을 차고 / 천지진동 울려들어 /     번개가 치나려 치니 / 폭탄의 비 불바다 3  황실 군부 적의 마굴 / 동경 신호 나고야 /     군수 공장 그 심장을 / 깨뜨릴사 적의 멸망후렴 용감하다 정의 용사 / 오늘은 승리 일로 판쳐 /     최후 승리를 노래하세 / 내일은 어메리칸「동경의 폭격」 조선 농부, 태평양주보』 1720호(1942. 4. 22.)『태평양주보』는 1941년 12월 8일 일본의 하와이 진주만 습격으로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전쟁 중 미군의 전승 기록을 주로 실었다. 그 뒤에는 교민들의 생활에 필요한 정보와 고국의 소식 등을 보도하였다. 이 시에서도 일본이 홍콩과 필리핀, 싱가포르를 공격하고 이어 태평양까지 점령하자 이에 맞서 미국이 처음으로 일본 도쿄를 폭격한 장쾌한 장면을 그리고 있다.1  전진 전진 나가자 우리혁명 군사야 / 기다리던 시기      돌아 왔도다. 창검을 빗켜 들고 용맹하게 나가셔 / 대한 독립 자유 위해 싸우자.2  전진 전진 나가자 우리 혁명 군사야 /     탄환이 빗발같이 퍼부어도 북소리와 발맞추고     태극기를 따라서 / 최후 일인 일각까지 싸우자후렴 밤새도록 접전하던 혈성 / 대외 걸음이 저벅 저벅올 때에 휘날리는 깃발은 / 우리 태극 국기가 분명하다.「혁명군가」 안정송, 『태평양주보』 1813호(1944. 2. 23.) 한국 광복군은 태평양전쟁이 발발한 뒤 1941년 12월 9일에 대일선전포고를 정식으로 선언하였다. 1944년 8월 광복 직전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지시를 받아 한미합동 작전으로 태평양전쟁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이때 대한민국의 독립과 자유를 위해 최후 일인 일각까지 싸우자고 태평양전쟁에 참여한 애국동지들에게 격려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이후 광복군은 한반도에 지하군을 조직하여 파괴 공작을 진행시킨다는 계획을 수립하는 한편, 중국에 파견되어 있던 미국전략사무국(OSS)과도 협약을 맺고 특무 공작 훈련을 실시하면서 미얀마에서 영국군과 함께 공동 작전을 벌이기도 하였다. alt『태평양주보(The Korean Pacific Weekly)』(좌) / 한국광복군 제2지대 대원과 미국 전략사무국(OSS) 대원(1945)(우)          ]]> Fri, 28 May 2021 10:10:42 +0000 55 <![CDATA[끝나지 않은 독립운동 6·25전쟁 또 하나의 아픔 조선의용군 참전]]> 글 이계형(국민대학교 교양대학 교수) 일제의 식민통치 하에서 꿈에도 그리던 광복을 35년 만에 맞이하였다. 그런데 외세의 억압에서 벗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이번에는 우리 민족끼리의 다툼이 벌어졌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았지만, 이내 38선에 가로막혀 남북으로 나뉘었고 얼마 뒤 각기 다른 정부가 세워졌나 싶었는데, 2년도 채 안 돼 전쟁이 일어났다. 후삼국이 통일하던 시기에 벌어진 민족 간 다툼 이후 천여 년 만의 일이었다.  일본군과 항전하던 조선의용군6·25전쟁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많은 것을 잃었다. 광복 이후 몇 안 되었던 산업 기반이 무너졌고 많은 사람이 희생되었으며 적지 않은 고아와 미망인이 생겨났다. 어떤 이는 일제강점기에 일본군으로 끌려갔다가 6·25전쟁이 터지자 인민군으로 입대하였고, 그 뒤 미군에 포로가 되었는데 종전 후에 국군이 되기도 했다. 참으로 얄궂은 운명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이보다 더 큰 아픔은 1938년 10월 일본군과 일전을 치르기 위해 결성한 조선의용대의 일부가 6·25전쟁 당시 북한군으로 참전하여 동족을 향해 총부리를 겨눈 것이다. 조선의용대는 의열단을 이끌었던 김원봉에 의해 창설한 독립군 부대였다. 처음에는 200여 명에 불과하였는데, 1940년 초에는 300명을 넘어서기도 했다. 그 뒤 조선의용대는 중일전쟁이 확전하면서 많은 활동을 펼쳤는데, 이후 두 갈래의 노선으로 나누어졌다. 대다수는 1941년 6월 중국공산당이 활동하던 화북 팔로군 지역으로 북상했고, 80여 명의 잔여 대원들만이 김원봉을 따라 충칭 임시정부의 한국광복군에 편입하였다. 화북행을 택한 대원들은 장제스가 이끄는 국민당군의 후방 지원 역할보다는 일본군과 직접 싸우고자 만주로 향하고자 한 것이다. 김두봉·한빈·윤세주·박효삼 등이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북상한 조선의용대는 중국공산당 팔로군 산하에 합류하였고, 지대장 박효삼의 지휘로 타이항산(太行山, 태항산) 일대에서 일본군과 여러 차례 교전하였다. 이때 김원봉의 절친이자 동지였던 윤세주가 타이항산 전투에서 희생되어 지금 중국의 하북성 한단시 진기로예 열사능원에 안장되어 있다. 그는 일본군에 포위된 팔로군의 탈출로를 확보하기 위해 일본군과 일전을 치르다 전사하였다. 오늘날에도 조선의용대가 활동하였던 화북 일대에는 조선의용대의 여러 유적이 남아 있으며 조선의용군열사기념관이 이를 기리고 있다. 그 뒤 조선의용대는 1942년 7월 김두봉이 이끄는 조선독립동맹과 연합하여 조선의용군으로 개편하였다. 조선의용군은 중국공산당과 공동전선을 결성하여 항일전에 참가하고, 무장 부대를 확충하여 대중을 조직하였다. 이외에도 동방 피압박 민족해방운동 및 일본의 반전운동을 펼치기로 하였다. 얼마 뒤 조선독립동맹이 중국공산당의 근거지인 옌안으로 이동하자, 1944년 초 팔로군과 함께 타이항산 곳곳에서 일본군과 항전하던 조선의용군도 그 뒤를 따랐다. 이때 많은 한인 청년들이 모여들어 1945년 5월에 조선의용군 총수는 850여 명에 달했다.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패망한 뒤 한 달쯤 지나 팔로군으로 편성된 동북 정진군이 만주로 이동할 때 조선의용군도 이들과 함께 옌안을 떠났다. 그들 중 일부는 북한으로 들어가 소련군에 의해 무장해제의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 북한으로 들어간 조선독립동맹은 김두봉·한빈 등을 중심으로 조선신민당으로 개편해 활동하였다. 이들은 북한 내에서 옌안(延安, 연안)파를 형성하였다. alt막탄섬 마리바고 지역에 자리한 리조트동족을 상대로 전쟁에 나서다한편 만주에 머무른 조선의용군은 그곳에서 동포들을 모병해 부대를 증강하고 중국의 제2차 국공내전에 참가하였다. 국민당의 장제스와 공산당의 마오쩌둥이 화평교섭회담을 갖기도 하였지만, 두 세력은 치열한 내전을 벌이게 되었다. 1947년 말부터는 민중들의 지지를 얻지 못한 국민당은 공산당에 밀리게 되었고 이를 기회로 중공군은 총반격을 개시하였다. 이때 조선의용군 제1지대는 동북인민해방군 보병 제166사단으로, 제3지대는 인민해방군 제4야전군 보병 제164사단으로, 제5지대는 동북한일연군 교도려와 합치며 인민해방군 중남군구 독립 제15사단이 되었다. 이들의 주 임무는 만주 주둔 국민당 군대를 소탕하는 것이었는데 이를 통해 적지 않은 공적과 경험을 쌓았다. 또한 이들은 농번기에 김매기나 밭갈이를 돕거나 가을에는 추수를 거두는 등 농민들을 돕기도 하였다. 1948년 11월 중국공산당은 국민당군이 주둔하고 있던 선양(瀋陽, 심양)을 함락한 뒤에 만주의 주력 부대를 이끌고 산해관을 넘어 관내로 이동하였다. 이때 남침 야욕을 가졌던 김일성은 마오쩌둥에게 조선인 부대의 인도를 요청했고 대원들 또한 귀국을 원했다. 이에 1949년 5월 중국공산당은 이를 약속했고, 6·25전쟁 발발 1년 전인 그해 7월 조선의용군과 국공내전에 참전하였던 조선군을 포함한 만주 조선인 부대 6만여 명이 북한으로 입국하였다. 이들 가운데는 조국이 38선을 사이에 두고 갈라져 있는 현실을 엄중하게 받아들였고, 조국으로 돌아가 ‘조선 해방’을 꿈꾸기도 하였다. 이들은 조선인으로서의 국적을 회복하고 조선노동당 당적을 갖게 되었으며, 조선인민군 제6, 5, 12사단으로 편제되어 북한군의 근간이 되었다. 1950년 6월 25일, 아침 38선에서 남침한 보병 21개 연대 가운데 47%인 10개 연대가 만주의 조선인 부대였다. 이들은 중국의 국공내전 당시 공산군의 선두에 서서 돌격로를 개척하고 전투의 대세를 결정할 정도로 전투 경험과 전투력이 상당했다. 이들이 없었다면 김일성이 남침하지 못했을 것이라 하기도 한다. 이들 가운데 김원봉이 조직한 조선의용대 출신 200여 명이 참전하였다는 사실은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가장 안타까운 일 가운데 하나로 기록되어 있다. 이들은 일본군을 토벌하는 독립군으로 활동하다가 중국공산당 편에서 국민당과 싸웠으며 마지막에는 동족을 상대로 전쟁에 나섰으니 역사의 큰 희생물이 되고 말았다. 우리는 이들을 비난하기에 앞서 6·25전쟁의 또 하나의 아픔으로 기억해야 할 것이다.  alt막탄섬 마리바고 지역에 자리한 리조트]]> Fri, 28 May 2021 10:11:39 +0000 55 <![CDATA[독립의 발자취 6·25 참전용사의 헌신을 기억하다]]> 글 편집실 최근 사진작가 라미가 한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해 UN군 참전용사 사진을 찍게 된 배경을 밝힌 바 있다. 그간의 활동을 주목받게 된 그는 이후 활발한 전시 활동을 하고 있으며, 현재 부산에 위치한 유엔평화기념관에서 참전용사 사진 특별전을 개최하고 있다. alt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한 기쁨도 잠시한민족은 남과 북으로 분단되는 아픔을 겪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1950년 6월 25일 우리 민족은 서로의 가슴에 총구를 겨누는 동족상잔의 비극을 마주하고야 말았다.숱한 세월 목숨 바쳐 독립을 일궈낸 이 땅의 선조들이 애달파할 일이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한국전쟁 71주년을 맞았다. 여전히 남과 북은 분단 상태지만, 대한민국은 건재하다. 그리고 건재한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나라를 지켜준 분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하는 이가 있다.6·25 참전용사들의 업적을 사진으로 기록하는 사람, 사진작가 라미. 그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말한다.역사의 자취를, 선조들의 흔적을 잊지 말자고.이번 사진전은 어떻게 마련되었나요?참전용사 사진전(Searching for Korean War Veterans)’이 4월 22일 개막하였습니다. 이번 특별전은 대한민국의 자유와 평화를 지키기 위해 1950년 6월 25일부터 1953년 7월 27일 동안 한국전쟁(the Korean War)에 참전한 국군 및 UN군 참전용사에게 감사함을 전하기 위해 기획되었습니다. 더불어 그들의 모습과 이야기가 잊히지 않도록 기록하는 데 의의가 있습니다.   라미 작가가 참전용사 촬영을 하게 된 배경은 무엇인가요?2016년에 군복 사진전을 개최한 적이 있습니다. 당시 해병대 참전용사 분이 오셔서 엄청난 자부심을 보이셨는데, 남의 나라에서 싸웠는데 어떻게 그러한 자부심이 생겼을까 궁금해졌습니다. 이후 2017년부터 본격적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한 여러 나라의 용사들을 찾아다니며 사진을 찍고 액자로 만들어주는 일을 해오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용사들이 고령이기 때문에 돌아가시기 전에 사진을 찍어야 한다는 생각에, 사비로 미국과 영국을 40여 차례 방문해 사진을 찍기도 했습니다.참전용사들의 반응은 어떠한가요?그들은 오래전 자신들이 참전했던 나라의 젊은이가 찾아와 인사를 전하는 것에 대해 고마워합니다. 그리고 진짜 영웅은 그때 전쟁에서 죽은 전우라고 이야기하는데, 사진 속 용사들의 모습을 보면 모두가 영웅임을 느낄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자신들이 한국에서 싸웠다는 사실 하나만 기억해 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번 전시에 대한 라미 작가의 소감에 대해 말씀해주세요.이번 사진전을 통해서 더 많은 국민에게 한국전쟁 참전용사의 자긍심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또한 그들이 감내한 희생에 대한 기록이 다음 세대를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고 느꼈습니다. 우리가 그 의미를 아직 잊지 않았다는 메시지를 참전용사들에게 전달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마지막으로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있다면요.저희는 이번 전시를 통해 UN군 참전용사 본연의 모습을 통해 그들이 지키고자 했던 자유·평화·수호 의지와 신념을 기록하였습니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용사 모두가 영웅이었으며, 그 의미를 다시 한번 기억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나아가 이 모든 기록이 다음 세대에게 전달되기를 희망합니다. 앞으로 국민 여러분의 꾸준한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alt육군 HD 오병하어쩔 수 없이 전쟁을 겪은 우리는 괜찮다.다만 우리가 겪은 전쟁을, 다음 세대는 절대로 경험하지 않았으면 희망한다.나의 소망이 다음 세대에 조금이라도 전달되기를 바란다. 미육군 중위 래리 키너드1997년에 이들과 한국을 처음 방문했을 때, 나의 인생에 가장 놀랍고 가슴 울리는 순간이었다. 다시 방문한 서울 그 어디에도 무너진 건물도, 배고픔에 구걸하는 아이들도 없었다.그제야 나는 한국전쟁이 비긴 것이 아니라 이긴 전쟁이고그 수많은 희생과 노력이 헛된 것이 아니었음을 알았다. 미 육군 티니 잭슨난 한국전쟁 참전용사다. 그게 내 인생의 가장 큰 명예다.I am a Korean War Veteran. It is my honor in my life.영연방 영국군 스미스 시드니대한민국의 자유와 민주주의 밑거름은 나와 내 동료들이었다고 생각하고 그것이 자랑스럽다.I think the foundation of freedom and democracy in Korea was me andmy colleagues, and I am proud of it.영연방 영국군 윅커 피터진정한 영웅은 그때 그곳에서 돌아오지 못한 전우들이다. The real heroes are the comrades who never got back from there.영연방 영국군 로이 잉겔튼내가 한 봉사가 헛된 것이 아니라 내가 한 일이 잘한 일이고 내가 한 일이 옳았다는 것을 느낀다.I feel that my service was not in vain, I feel that what I did was good and what I did was right.관람 시간 : 매주 화~일 10:00 ~ 18:00 / 월요일 휴관전시 기간 : 10월 29일까지전시 관람 : 유엔평화기념관 1층 기획전시실, 무료 관람]]> Fri, 28 May 2021 10:12:21 +0000 55 <![CDATA[세계 산책 무기를 통해 본 전쟁의 역사]]> 글 이내주(육군사관학교 명예교수)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류는 전쟁의 역사를 지나왔다. 특히 우리나라는 과거 수많은 외침을 당해 왔고, 6·25전쟁이라는 동족상잔의 아픔도 경험하였다. 사람들은 승전(勝戰)해서 상대방에게 내 의지를 강요하거나 필요시 적의 영토나 소유물을 빼앗기 위해 전쟁을 벌인다. 이때 상대보다 우수한 장비로 무장하고, 이를 효과적으로 운용하는 쪽이 이길 확률이 높다. 그렇다면 역사적으로 무기는 어떻게 발전해 왔을까? alt사리사를 들고 전진하는 그리스 팔랑크스 병사들               사람과 동물의 힘으로 무기를 사용하다13세기경 화약이 전장에 등장하기 이전에 인류가 사용한 전쟁의 도구는 일명 근력무기로, 창·칼·방패와 같은 보병무기가 주류였다. 서양 고대 그리스 시대의 주무기는 마케도니아군이 사용한 ‘사리사’라고 불린 길이 약 3~5m의 긴 창이었다. 이것이 로마시대에는 ‘글래디우스’라는 약 70cm의 짧은 검으로 대체되었다. 병사들은 왼손에 방패를 들고 자신과 바로 옆의 동료를 보호하고, 오른손에는 핵심 무기를 움켜지고 전투에 참여하였다.근력무기가 최대의 효과를 발휘하기 위해서는 대형을 이루어 팀플레이로 대응해야 했다. 그리스인들은 중무장한 보병들이 사각형의 대형(일명 팔랑크스)을 이루어 긴 창을 앞으로 내민 채 적군을 향해 전진하는 방식으로 전투를 벌였다. 로마인들의 경우 근본적으로는 그리스의 것을 수용했으나, 이를 작은 규모의 다양한 사각형 대형으로 세분화해 융통성 있게 운용하였다. 주무기가 장창이 아닌 단검이기 때문에 팔랑크스 내 병사들의 간격을 보다 넓게 유지하는 것이 무기의 기능을 극대화할 수 있었다. 이러한 실용적인 군대 편성 및 효율적 운용을 토대로 로마제국은 고대 서양세계를 장기간 제패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장기간 천하무적이던 (서)로마제국의 위세도 4세기 이래 시들기 시작했고, 마침내 476년 게르만족에 의해 멸망하였다. 이후 전장의 주력도 점차 보병에서 기병으로 바뀌었다. 우리가 흔히 중세라고 부르는 5~14세기에 유럽의 전장을 지배한 것은 바로 말 등에 올라탄 기사 계급이었다. 그런데 처음부터 인간이 말 등에 올라탄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는 영화 〈십계〉에 등장하는 것처럼 말이 끄는 수레를 타고서 전투를 벌였다. 그러다 꾸준한 종자 개량을 통해 말의 몸집이 커지면서 드디어 중앙아시아 스텝 지역 유목민들이 승마에 성공하였다. 주무기가 무엇이었든지 간에 기병의 주 역할은 기동력 발휘였다. 그래서 알렉산드로스 대왕이래 기병은 전투 대형 편성 시 중앙에 있는 보병부대의 좌·우측에 배치되었다. 사령관은 접전이 개시되기 이전에 기병부대로 하여금 적군의 측방이나 특히 후방을 기습 공격하도록 명령하였다. 이는 주력 부대 간의 격돌 이전에 적군을 교란시키려는 의도였다. 그런데 10세기경 서양에서 도입한 석궁(기계식 활)이 가공할 살상력을 발휘하자, 이에 대응하기 위해 기병들은 무거운 철제 갑옷과 투구를 착용해 방어력을 높였다. 기병의 본래 기능인 기동성은 점차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물론 보병 병사에 비해 갑옷과 투구로 중무장한 중세 기사는 여전히 전력상 압도적인 우세를 점했으나, 서서히 그 위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alt초창기 화승총을 발사하고 있는 병사            화약의 힘으로 사람을 죽이다그러던 중 중세 기사군을 몰락하게 만든 것이 화약 무기였다. 원래 화약은 중국에서 발명되어 12세기경 이슬람 세계를 통해 서양으로 전래되었다. 이후 14~15세기에 소총과 대포가 본격적으로 진가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소총의 경우 초기에는 손으로 든 채 화약에 불을 붙여서 탄환을 발사하는 형태였다. 그러다가 개머리판을 어깨에 고정한 채 방아쇠를 당겨서 화승(火繩)이라는 불심지로 화약에 불을 붙여 발사하는 화승총이 발명되어 사용되었다. 기사 한 명을 양성하기 위해서는 값비싼 말과 장비를 구비해야 하는 등 엄청난 비용이 들었지만, 소총수의 경우 며칠 동안만 훈련하면 사격 요령을 터득할 수 있었다. 이후 서양에서는 사격을 빠르고 효율적으로 행할 수 있는 방향으로 소총을 개발해 왔다. 이른바 격발(擊發) 장치 개량에 심혈을 기울였다. 초창기 소총의 경우 재장전에 걸리는 시간이 너무 길다는 점이 최대 난제로 꼽혔기 때문이다. 17세기에 이르면 심지로 점화하던 방식에서 방아쇠를 당기면 물려있는 황철광이 금속판을 강타해서 발생한 불꽃이 점화화약에 불을 붙이는 일명 수석식(燧石式) 소총으로 발전하였다. 무엇보다도 우천 시에 사용 불능이던 화승총의 단점을 보완하고 발화를 수월하게 함으로써 사격 속도를 향상시킬 수 있었다.이러한 발전에도 불구하고 수석식 소총 역시 사거리가 짧았고 명중률도 형편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최대 효과를 얻기 위해서는 횡대로 늘어선 병사들이 적군을 향해 일정한 거리까지 행진한 후 동시에 사격을 가해야만 했다. 우리가 영화에서 보듯이 어깨에 소총을 걸친 양측 병사들이 가급적 근거리까지 접근해서 사격하는 방식이 거의 19세기 초중반까지 이어졌다. 따라서 평소 엄정한 부대 훈련이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총탄이 난무하는 상황에서도 일정한 대형을 유지한 채 전진하기 위해서는 고도의 기율과 군기가 유지되어야 했다. 19세기 초반 이래 유럽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은 무기 발달에 획기적인 전환점을 가져다주었다. 이때 단단한 철과 양질의 화약이 발명되면서 소총과 대포의 사거리 및 살상률이 현저히 높아졌다. 19세기 후반기에 이르자, 총구 장전식에서 벗어나 오늘날처럼 탄창으로 장전하는 후장식 강선총은 물론 연속 사격이 가능한 맥심 기관총까지 등장하였다. 이로써 전장에서 밀집대형은 어느새 자취를 감추고 산개대형이 대세가 됐다. 산업화는 기술발전을 통한 화약무기의 혁신적 개량과 대량생산을 초래하였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영향은 살상용 무기보다도 철도로 대표되는 일종의 비(非) 살상용 간접 무기를 통해서였다. 그 자체로는 무해(無害)한 철도가 대규모 병력과 군수물자를 빠르게 전장으로 운송할 수 있는 수단으로 주목을 받았기 때문이다. 20세기 초반에 이르면서 바야흐로 ‘철도 시간표’ 전쟁이라고 불리는 불길한 조짐이 무르익고 있었다.아니나 다를까, 인류는 20세기에 접어들어 두 차례나 세계대전이라는 참상을 겼었다. 결국에는 핵무기마저 등장해 세상을 무언의 공포로 몰아넣고 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컴퓨터에 기초한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고성능 화약무기는 물론 정밀유도무기나 로봇무기 등이 발명되어, 이른바 네트워크 전쟁이 수행되고 있는 현실이다. ]]> Fri, 28 May 2021 10:12:55 +0000 55 <![CDATA[기념관은 지금 독립기념관 시설·안전·환경 관리를 위한 노력]]> 정리 편집실사진 봉재석 연간 180만 명의 관람객이 방문하는 독립기념관 120여만 평의 넓은 부지에 85개 동의 시설물은 어떻게 관리되고 있을까? 관람객이 쾌적하고 안전한 관람환경을 누릴 수 있도록 각 분야별로 맡은 업무에 대하여 유지보수 관리 및 신규 시설물을 계획하고 실현해 나가는 데 큰 자부심과 느낀다는 시설관리자들을 만나본다. alt안전환경관리에 앞장서는 직원들(공상웅, 권순범, 원유나, 강길서, 황병규)               안전환경팀의 역할은?저희가 하는 일은 안전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사업주가 실시하는 조직적인 조치입니다. 사업장에서 안전사고 예방을 위해 기계설비 등의 불완전한 상태 및 작업자의 불안전한 상태를 제거하고, 작업장 안전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안전교육 및 안전사고의 원인 및 재발방지 대책 등을 교육·실천하는 일을 유지하는 것입니다.독립기념관에서 관람객들이 주로 이용하는 시설물은 몇 개가 있나요?독립기념관에는 겨레의집과 7개 전시관 등 총 85개 동의 시설물이 있습니다. 그중에서 관람객들이 주로 이용하는 곳은 겨레의집, 전시관(1~7관), 입체영상관, 겨레마루 등이 있습니다. 교육적 활용 등으로 이용할 수 있는 곳은 겨레누리관 강당이나 밝은누리관, 독립군체험학교 등입니다.독립기념관은 다수가 이용하는 곳으로, 재난 안전 분야에서 주요 목표나 노력은?국민과 근로자의 소중한 생명과 안전을 보호하는 것이 기본 목표입니다. 재난관리 책임기관으로서 Plan(계획) - Do(실행) - Check(확인) - Adjust(조정) 선순환 과정을 통하여 지속적인 개선이 이루어지도록 체계적인 안전보건활동을 관리·운영 중에 있습니다. 소프트웨어 부분에서는 전사적 안전기본계획 아래 안전보건관리규정을 현실화하였고, 안전 분야를 내부 평가 체계에 반영하였습니다. 하드웨어 부분으로 재난 및 안전보건 전반에 관한 사항을 자문하고 심의하는 안전경영위원회를 구성·운영하고 있습니다. 그 외로 재난 발생을 대비하여 외부 전문기관과 재난 협업·공동 대응체계를 구축하였으며 안전한 관람 및 근로환경을 위해 위험성평가를 진행하여 사전에 유해 위험요인을 도출하고 개선하고 있습니다. alt코로나19 예방 관리 / 권순범               관람객 안전사고 예방을 위한 활동이 있다면요?매년 위험성평가를 통해 사업장 내 위험 유해 요인을 발굴하고 개선하는 사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2020년도 위험성평가 결과의 경우를 예로 들면, 264건의 위험요인을 발굴하여 131건의 고위험과 133건의 저위험 요인을 개선 완료하였습니다. 특히 지난해 사고 발생 가능성이 높은 사례들을 사전에 발굴하여 차단하자는 의미로 임직원을 대상으로 ‘2020 아차사고 발굴 공모’를 시행하여 안전사고 예방을 위해 노력한 사례가 있습니다.코로나19 예방을 위한 노력에 대해 말씀해주세요.코로나 장기화에 대비하여 코로나19 감염병 예방은 물론 대확산 방지를 위해 최선을 다해왔습니다. 정부의 다중이용시설 지침 아래 코로나19 대응 비상대책반을 편성해 현장점검은 물론, 안전관리 현장조치 행동 매뉴얼에 따른 원활한 비상근무 체계와 코로나 발생 시 각 직원의 업무분장을 세분화하여 위기대응체계를 갖추었습니다. 독립기념관은 연간 180만 명 정도의 관람객이 방문하는 기관의 특성을 고려하여 방문객 등록에 있어서도 안심콜, QR코드, 수기명부 등으로 다양화하여 불편을 최소화하였고 각 실내 전시관마다 얼굴인식 체온측정기를 설치하고 건축물 면적별로 입장인원을 제한하여 사회적 거리두기를 실시하고 있습니다. 철저한 방역과 코로나19 확산 예방 노력을 통해 5월 현재까지 관람객 코로나19 확산 제로화를 실현하였고, 앞으로도 코로나가 종식될 때까지 노력하겠습니다. alt(왼쪽부터) 온실가스 감축 관리 / 강길서,  전력 시설물 안전 점검 / 박정복        기계 분야 강길서모든 관람객이 쾌적하고 위생적인 환경에서 전시관을 관람할 수 있도록 냉난방, 환기, 급배수, 위생설비 등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기계 노후장비의 지속적인 개선과 신재생에너지(지열) 도입으로 에너지 절약에 따른 온실가스 감축에도 적극 앞장서고 있습니다.전기 분야 박정복관람객이 편리하고 쾌적하게 이용할 수 있는 환경 조성을 목표로 전기안전사고 제로화 달성을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전시관 관람 및 주변 경관시설 이용에 대한 안정적인 전력 공급과 노후시설에 대한 주기적인 교체 및 체계적인 시설물 유지관리로 매년 안전사고 제로화를 달리고 있습니다.조경 분야 정승수관람객들이 자연을 통해 새로운 활력의 에너지를 얻을 수 있도록 국민의 공원으로 발돋움함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자연과 인간이 공존하는 복합문화공간으로 마치 숲속에 들어온 것처럼 친환경적인 관람시설로 만들어 가고자 합니다. alt(왼쪽부터) 45미터 상공 동력동 구조물 안전 점검 / 국중권, 재난 예방관리 / 황병규          건축 분야 국중권독립기념관 시설물 중 겨레의 집, 7개동 전시관, MR영상관, 겨레누리관 외 건축물 75개 동의 안전한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구조정밀안전진단, 구조 보수·보강 등 관리하고 있습니다.방재 분야 황병규소방·방범·방송·통신분야를 관리하며, 화재로 인한 재난 발생을 사전에 예방·대비하고 화재 시 신속하고 효율적으로 대응·복구함으로써 인명 및 재산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항상 노력하고 있습니다.토목 분야 송현석독립기념관 경내에서 주변 개발, 지구단위계획 변경 등 토목공사의 타당성조사, 체계적인 설계, 시공·감리 토목시설의 전반적인 유지관리 등을 목적으로 하고 있습니다.의무 분야 원유나임·직원의 보건 관리와 관람객에 대한 안전 및 의료 활동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직원 건강증진을 위한 보건활동 등 임직원 보건의식 제고와 근로자의 건강관리 능력개발 지원 등을 통해 직업 관련 질병 및 생활습관 질병 등을 예방하고 감소시켜 건강하고 활력 있는 조직문화를 구현하고자 합니다.]]> Fri, 28 May 2021 10:13:36 +0000 55 <![CDATA[독자 이벤트 ]]> alt alt아이콘 클릭하면 퀴즈 정답을 보낼 수 있습니다.      ]]> Fri, 28 May 2021 10:17:58 +0000 55 <![CDATA[들어가며 일제강점기 스포츠 정책]]> alt일제는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무단통치정책을 이른바 문화통치정책으로 전환하면서 스포츠에도 정책을 반영하였다. 표면적으로는 스포츠의 활성화를 주장했으나 속뜻은 따로 있었다. 일제는 운동 경기의 과열화를 조성하고, 자신들이 만든 조선체육협회 주최 하에 각종 대회를 열어 조선의 스포츠 활동을 권력 장치로 활용하고자 하였다. 일제가 강조한 체력 관리는 전쟁 수행을 위한 도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Tue, 29 Jun 2021 10:19:30 +0000 56 <![CDATA[톺아보기 땀으로 쓴 스포츠 역사]]> 글 손 환(중앙대학교 교수) 일제는 식민지 정책을 수행하기 위해 한국인의 스포츠 활동을 통제 수단으로 이용하였다. 스포츠 활동의 통제는 한국인에게 규율을 적용한 집단적 훈련을 통해 신체 활동의 효율을 높이는 데 있었다. 일제는 식민지 통치를 위한 권력 장치로서 한국인의 스포츠 활동을 ‘순종하는 신체’로 만들고자 하였다.  alt1936년 베를린올림픽대회 마라톤 시상식, 일장기를 가린 손기정과 동메달 남승룡일제의 스포츠 활동 탄압1910년 8월 경술국치 이후 실시된 일제의 무단통치정책은 언론, 집회, 결사의 자유를 금지시켰을 뿐만 아니라 한국인의 스포츠 활동을 통제하였다. 이로 인해 스포츠 활동의 대부분을 일제가 장악하면서 학교, 교육단체, 공공기관을 중심으로 탁구·테니스·스키·럭비·골프 등 각종 스포츠가 도입되었다. 이어 스포츠 단체가 주최하는 각종 경기대회와 강습회 등을 통해 사회에 보급되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난 후에 일제는 이른바 무단통치정책을 문화통치정책으로 바꾸었는데, 그 일환으로 스포츠 활동을 권력 장치로 활용하여 우리 민족을 보다 효율적으로 지배하려 하였다. 1937년에는 중일전쟁을 일으켜 한국을 대륙 침략의 거점으로 삼고, 1941년에는 제2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되는 태평양전쟁을 일으키며 민족말살정책을 감행하였다. 일제는 체력 관리라는 명목으로 한국인에게 스포츠 활동을 장려하였으나, 실상은 전시체제하 체력을 증강시키기 위함이었다. 이로써 스포츠 활동은 본래의 기능에서 벗어나 일제의 군국주의적 전쟁 수행을 위한 도구로 전락하고 말았다. alt제3회 조선육상경기대회 안내 책자(좌) / 제3회 조선육상경기대회 상장(1928)(우)한국 스포츠계를 이끈 조선체육회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일제는 무단통치에서 ‘문화통치’로 정책으로 바꾸게 된다. 이러한 통치정책의 전환은 스포츠계에 활성화를 가져왔다. 기존에 금지한 언론, 집회, 결사의 자유를 부분적으로 허용하면서 스포츠 활동도 활발히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그중에서도 조선체육회(현, 대한체육회)의 설립과 활동이 대표적이다. 조선체육회는 변봉현 기자(동아일보)의 논설인 「체육기관의 필요를 논함」을 통해 한국의 청년들 모두가 스포츠 단체 설립에 힘을 모아 운동가를 양성하고 스포츠를 장려해야 한다고 밝혔다. 그리고 스포츠 단체의 설립을 위한 구체적인 조건으로 스포츠를 좋아하는 운동가와 유지인사의 단결, 스포츠 단체의 설립에 필요한 재정의 원조와 후원을 강조하였다. 이렇게 조선체육회는 1920년 7월 13일 한국 청년에게 운동 사상을 고취하고 체육의 장려를 목적으로 중앙예배당에서 창립총회를 개최하였다. 조선체육회는 창립 취지서의 발표와 규칙의 제정, 임원의 선정 등을 통해 조직의 체제를 갖추고 전 조선야구대회를 비롯해 각종 경기대회의 개최, 체육 연구 활동, 운동용구 판매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조선체육회가 설립되고 나서 처음으로 개최한 경기대회는 동아일보사의 후원을 받아 배재고보 운동장에서 열린 제1회 전 조선야구대회였다. 이때 전국의 젊은이들이 한자리에 모여 운동정신을 발휘하며 스포츠계의 신기원을 이루었는데, 이는 오늘날 매년 개최되고 있는 전국체육대회의 효시로서 한국 스포츠사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후 조선체육회는 해마다 축구·정구·육상 등의 종목을 늘리면서 각 종목별 전 조선경기대회를 개최하였다. 1929년에는 조선체육회 창립 10주년을 기념해 전 조선경기대회를 개최했으며, 1934년에는 창립 15주년을 맞이해 전 조선종합경기대회를 개최하며 스포츠계를 이끌어나갔다.그러나 1937년 7월 일제가 중일전쟁을 일으켜 전시체제에 돌입하자 조선총독부는 통치정책을 민족말살정책으로 전환하고 우리의 스포츠 단체와 활동을 전면적으로 통제하고 탄압하였다. 이로 인해 한국의 스포츠 발전을 위해 많은 기여를 한 조선체육회는 1938년 일제의 스포츠 단체인 조선체육협회에 흡수되어 강제로 해산당하고 말았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되자 조선체육회는 그해 11월 7년 만에 재건되었으며, 1948년 8월 15일 정부 수립 후 명칭을 대한체육회로 바꾸고 한국 스포츠계의 총본산으로 그 역할을 다하며 현재에 이르고 있다.민족주의적 스포츠 활동조국 없는 마라토너, 비운의 스타, 일장기말소사건 등으로 잘 알려져 있는 손기정은 한국 마라톤계의 영웅이자 한국 육상계의 영웅이다. 손기정은 1936년 베를린올림픽대회 마라톤에서 당시 인간의 한계라고 하는 2시간 30분대의 벽을 돌파하고 올림픽 신기록을 수립하며 당당히 우승을 차지하였다. 이때 손기정과 더불어 남승룡은 동메달을 획득하였다. 손기정의 우승과 남승룡의 동메달 획득은 일제강점기 식민지 통치를 받고 있던 우리 민족에게 울분을 토로하고 민족의식을 일깨워주는 계기를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한국인의 우수성과 저력을 전 세계에 과시하였다.손기정의 우승에 대해 당시 국내의 언론사에서는 호외를 발행하며 대대적으로 보도했는데, 손기정이 인류 최대의 영예인 올림픽대회 마라톤에서 각국의 선수를 물리치고 우승을 차지해 민족의 영예와 자신감을 심어주었다고 하였다. 손기정의 우승이 전해지자 전국 각지에서 축전이 쇄도하고 학자금 보장, 기념탑 및 체육관 건립, 동상 건립, 구두 제공, 축하 공연 등이 행해졌다.   한편 손기정은 현지에서 사람들에게 사인을 요청받았을 때 국명을 ‘JAPAN’이 아니라 ‘KOREA’로, 이름도 ‘孫基禎’이 아니라 한글로 ‘손긔졍’이라고 해주었다. 이것은 올림픽대회 후보 선발전에서 국가없는 서러움을 느끼며 분개한 데서 비롯된 것이었다. 손기정은 아무리 좋은 성적을 내더라도 시상대에서 우리의 국가(國歌)를 들을 수 없다는 현실을 생각하며, 스스로 한국인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 행동하였다. 손기정의 우승은 당시 미국과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고 있던 민족 지도자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또한 손기정은 올림픽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 최초의 한국인으로서 일제강점기 식민지 통치를 받고 있던 우리 국민에게 민족의식을 일깨워주고 무한한 긍지와 자부심을 심어주었다. 베를린올림픽대회 금메달 획득 후 75년이 지난 2011년, 손기정은 한국 스포츠의 발전에 많은 공헌을 한 체육인들 중에서도 모든 체육인의 귀감이 되고 국민의 존경을 받는 인물로 평가받아 대한체육회의 스포츠 영웅에 선정되었다. 그리고 손기정 탄생 100주년을 맞이한 2012년에는 베를린올림픽대회 우승으로 받은 금메달, 우승 상장, 월계관이 체육사·민족사적 가치가 크다고 평가 받아 문화재로 등록되었다. alt제17회 조선종합경기대회 메달(1936)(좌) / 손기정 금메달(우)빼앗긴 들에서 민중의 스포츠 활동우리 민족 고유의 씨름은 민족정신 고양을 위한 스포츠로서 민중의 지지를 받아 주로 장터나 강변의 모래사장에서 거행되었다. 당시 씨름의 모습을 보면, 고양군 뚝섬에 수천 명의 구경꾼이 모인 가운데 마을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였다. 씨름은 전통적으로 국민들 사이에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었다.     씨름은 3·1운동 후 민중스포츠로서 정착하였다. 『동아일보』에 따르면, 씨름은 민중스포츠의 일종으로서 국민의 보건에 중대한 효과를 보이고 민중에게 질서와 훈련을 가르쳤다고 한다. 또한 씨름은 취미를 겸해 유용한 스포츠라는 것도 강조하였다. 이처럼 씨름은 민중의 오락으로서, 신체를 단련하는 경기로서 행해졌다.그리고 당시 한국의 스포츠는 엘리트스포츠에 치우쳐 있어 스포츠의 민중화를 도모하기 위한 일환으로 민중보건체육법이 등장하기도 했다. 민중보건체육법은 조선체육연구회가 민중의 보건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언제, 어디서, 누구나 손쉽게 할 수 있도록 덴마크의 닐스 북 체조를 연구해 한국인에게 적합한 내용으로 만들었는데, 그 결실이 『정말체조법』의 발행이었다. 조선체육연구회는 전국적으로 활동을 전개하면서 민중보건체육법의 보급에 앞장서며 스포츠의 민중화를 위해 많은 역할을 수행하였다.alt『정말체조법』, 삼천리사(1932)]]> Tue, 29 Jun 2021 10:20:03 +0000 56 <![CDATA[만나보기 한국 스포츠의 선구자 여운형]]> 글 손 환(중앙대학교 교수) “피는 물보다 진하다”라는 말은 1941년 여운형이 일본 고마신사를 방문했을 때 민족정신을 일깨우기 위해 남긴 글이다. 여운형은 국가와 민족을 위해 자신의 일생을 바치며 헌신한 독립운동가이자 정치가였으며 스포츠맨이었다. 일제강점기에 그는 운동선수로서, 각종 스포츠 단체의 임원으로서, 언론사 사장으로서 각종 경기대회를 개최하였다. 더불어 일장기말소사건을 주도했으며, 광복 후에는 한국의 정체성 확립을 위해 자주 국가로서 올림픽대회에 참가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alt여운형한국의 스포츠맨 여운형여운형은 1914년 중국 난징의 진링대학에 입학해 국내에서 익혔던 운동 실력을 발휘하였다. 야구와 육상 선수로 활동하며 교내외에 이름을 떨치고 학비를 면제받았다. 여운형의 운동 실력은 상당한 수준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실력을 인정받은 여운형은 수료 후 푸단대학에서 학생들에게 체육을 지도하였다. 한편 중국체육회의 종신회원이 되어 축구부를 이끌고 동남아시아에 원정을 가기도 했는데, 필리핀에서 연설을 한 것이 문제가 되어 미국 관헌에게 여행권을 빼앗긴 적이 있었다. 당시 일본 영사관에서 체포하려고 하자 비밀리에 중국 상하이로 돌아와야만 했다. 그러나 여운형은 상하이 대마로 경마장에서 열린 규슈제국대학과 상하이 구락부의 야구경기를 구경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고 말았다. 이 일로 3년의 형기를 마치고 1932년 석방된 여운형은 자택에서 몸을 추스른 후 1933년 2월 조선중앙일보사 사장에 취임하였다.  사장에 취임한 여운형은 그해 3월 조선연무관 고문을 시작으로 각종 스포츠 단체의 고문 및 이사장, 회장, 이사로 추대되었다. 언론사 사장으로서 사회적인 위치도 있지만, 평소 스포츠에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조선여자체육장려회 고문, 경성축구단 이사장, 조선체육회 이사, 1934년에는 조선축구협회 회장, 조선농구협회 회장, 서울육상경기연맹 회장, 1935년에는 조선유도유단자회 고문, 동양권투회 회장, 스포츠여성구락부 고문, 1936년에는 고려탁구연맹 회장에 추대되었다. 여운형은 각종 경기대회를 개최하고 강연을 하며 한국의 스포츠 발전을 위해 많은 공헌을 했다. 특히 조선축구협회 회장 시절에는 베를린올림픽대회 축구 대표 선발에 한국인 선수를 차별하는 부당한 처사에 정면으로 맞서 항의를 한 일화가 있다.    alt『중앙일보』(1936. 8. 13.)여운형과 일장기말소사건1936년 8월 9일 베를린올림픽대회 마라톤에서 손기정이 우승하자 조선중앙일보사 사장이었던 여운형은 라디오를 통해 소식을 듣고 감격하며 즉시 호외를 발행하라고 지시하였다. 그러고 나서 8월 13일자 『조선중앙일보』에 손기정 가슴에 일장기가 지워진 채 보도되었는데, 이것이 일장기말소사건의 첫 보도였다. 이 보도 내용을 보면 “머리에 빛나는 월계관, 손에 굳게 잡힌 견묘목, 올림픽 최고 영예의 표창을 받은 손 선수”라고 되어 있다.그런데 당시 신문의 사진 상태가 좋지 않아서인지 일장기가 지워져 있던 것을 모른 채 조선총독부의 검열에서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이어서 『동아일보』가 8월 25일자 신문에 손기정 가슴의 일장기를 지우고 보도했는데, 이것이 우리들이 알고 있는 그 유명한 일장기말소사건이다. 『동아일보』의 보도로 경기도 경찰부가 일장기말소사건의 수사에 착수하면서 『조선중앙일보』의 일장기말소 건도 같이 조사를 받게 되었다.당시 『조선중앙일보』에 일장기를 지우고 게재했던 유해붕 기자는 조선의 유사 이래 처음으로 세계를 제패한 손기정의 우승을 대대적으로 보도해 우리 민족의 자부심과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고자 했다. 당시 여운형 사장도 “붓대가 꺾어질 때까지 마음껏 민족의식을 주입할 것이며 그놈들의 주의를 들을 필요는 없다”고 격려해주었다. 그리고 “일장기 말소에 대해 우월감을 가진 일은 없었으며, 조선인이라면 누구나 일장기를 말소했을 것”이라고 회고했다. 이로 인해 여운형은 사표를 제출하였고 『조선중앙일보』는 9월 4일 자진 휴간을 했으나, 결국 폐간되는 비운을 맞게 되었다.여운형과 올림픽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함께 광복을 맞이한 한국은 조선체육회의 재건을 위해 조선체육동지회를 설립하였다. 조선체육동지회는 1945년 9월 27일 일제강점기 조선체육회를 비롯한 각 스포츠 단체의 임원과 올림픽대회에 출전한 엘리트선수 등 스포츠계의 권위자를 총망라해 이상백을 위원장으로 추대하고 새로운 스포츠 활동을 하기 위해 조직된 단체였다. 조선체육동지회는 그해 11월 12일 YMCA에서 총회를 열고 만장일치로 여운형을 조선체육회 회장에 추대하였다.조선체육회 회장에 취임한 여운형은 1946년 10월 16일 서울운동장에서 조선올림픽대회를 개최하였다. 이 대회에서 여운형은 1948년 런던올림픽대회를 앞두고 한국의 젊은 선수가 모든 역량을 발휘하는 무대에서 최선을 다해 좋은 기록을 남겨야 한다고 전했다. 그리고 ‘조선올림픽의 노래’를 제정·발표하고 이날을 축복하는 동시에 노래의 보급을 위해 악보 3만 장을 일반 관람객에게 나누어주었다. 또한 1947년 보스턴마라톤대회에서 서윤복이 우승을 차지하자 그의 위대한 공적을 찬양하기 위해 우승 축하회를 개최하였다. 이 자리에서 여운형은 “그동안 나라 잃은 서러움이 있었으나 앞으로 우리 민족의 의기와 기백을 살려 하나가 되어 전진하자”고 말하며, 다가올 올림픽대회에서도 우리의 우수성을 전 세계에 과시하고자 하였다.한편 조선체육회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전 반드시 런던올림픽대회에 참가하기 위한 대책 마련에 몰두하였다. 이유는 런던올림픽대회가 신생 독립국인 한국을 국제사회에 알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1947년 5월 9일 조선체육회 산하단체가 YMCA에 모여 여운형, 유억겸, 전경무, 이상백, 정범환, 하경덕, 이병학, 이법용, 민원식 등을 조선올림픽위원으로 선출하고, 5월 12일 제1차 위원회를 개최해 위원장과 부위원장은 조선체육회 회장과 부회장이 겸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렇게 해서 당시 조선체육회 회장인 여운형이 초대 조선올림픽위원회(현, 대한올림픽위원회) 위원장에 취임하게 되었다. 그러나 여운형은 한국이 ‘KOREA’라는 국호로 런던올림픽대회에 참가하는 모습을 보지도 못하고 1947년 7월 19일 괴한의 습격을 받아 62세의 나이로 안타깝게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alt1948년 런던올림픽(좌) / 런던올림픽 대한민국 선수단스포츠 조선의 건설여운형은 스포츠 조선의 건설을 위해 엘리트스포츠뿐만 아니라 생활스포츠의 보급, 그리고 스포츠계에 만연하고 있는 승리 지상주의의 정화, 스포츠의 과학적 지도와 조직의 필요성 등 한국 스포츠계가 안고 있는 문제점을 지적하고 그 해결 방안을 제안했다. 또한 심신일원론적 입장에서 스포츠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스포츠 활동은 위생과 장수는 물론 판단력·책임감·단결력을 키워주는 역할을 한다고 했다. 그밖에 여성 스포츠의 필요성과 경기에서의 페어플레이 정신도 강조하였다. 여운형은 어린 시절 몸이 허약해 병이 많았으나 철봉운동을 통해 많은 효과를 보며 건강을 유지했는데, 본인의 경험을 기반으로 철봉운동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국민들의 건강을 위해 국민체육에 활용할 것을 주장하기도 했다. 또한 일제강점기 세계 정상에 선 서정권의 선전을 계기로 권투조선의 기상을 전 세계에 알리며 한국인의 저력을 보여주자고 했다. 이러한 그의 생각은 광복 후에도 볼 수 있는데, 보스턴마라톤대회에서 서윤복이 우승하자 전 민족적으로 환영한다고 하면서 이번 기회에 전 민족이 하나로 뭉쳐 한국인의 우수성을 발휘하자고 역설하였다. alt『현대철봉운동법』, 한성도서주식회사(1934)]]> Tue, 29 Jun 2021 10:20:57 +0000 56 <![CDATA[이달의 독립운동가 죽음을 각오하고 호가장전투에서 끝까지 싸운 조선의용대 화북지대 대원들]]> 글 독립기념관 전시부alt(좌측부터)손일봉(孫一峯)                  최철호(崔鐵鎬)                    박철동(朴喆東)                     이정순(李正淳)1912~1941                        1915~1941                          1915~1941                           1918~1941평안북도 의주                     충청남도 대전                       충청북도                                 평안북도 벽동건국훈장 애국장(1993)     건국훈장 애국장(1993)        건국훈장 애국장(1993)         건국훈장 애국장(1993)80년 전 조선의용대 화북지대가 결성되다조선의용대는 1938년 10월 중국 호남성 무한에서 성립된 군사조직으로, 중일전쟁 때 중국군을 도와 일본군을 상대로 대적 선전공작 등을 전개하였다. 그러다가 전투공작 강화를 위해 주력 부대가 황하(黃河)를 건너 북상하면서 1941년 7월 하북(河北) 지역의 팔로군 근거지인 태항산에서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를 결성하였다. 화북지대 대원들은 일제의 패망 때까지 중국 팔로군과 연대하여 무장선전활동을 전개하는 등 한중연대를 강화하였고, 호가장전투 등을 통해 항일 의지를 널리 알렸다.  alt조선의용대 성립 기념(1938. 10. 10.)(좌) / 호가장 전투지(2017)(우)                호가장전투에서 용맹분투하여 적군을 격파하다조선의용대 화북지대는 무장선전대를 3개 대로 나누어 편성하고 활동구역에 따라 무장선전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던 중 1941년 12월 민중대회 개최를 위해 중국 하북성 원씨현 호가장 마을에서 숙영하던 화북지대 제2대원들이 일본군 등에게 포위당하였다.이때 제2대 분대장 손일봉과 대원 최철호·박철동·이정순은 죽음을 각오하고 후위대*에 자원하여 다른 대원들이 추격에서 완전히 벗어날 때까지 사격하며 끝까지 싸웠다. 후위대의 헌신으로 화북지대 대원들은 포위망을 돌파할 수 있었지만, 후위대로 남은 이들은 일본군의 집중 포화 끝에 결국 전사하였다.*  후위대주력 부대의 뒤쪽을 보호하는 부대 alt「호가장전투」, 『신천지』 1권  2호(1946)_국립중앙도서관 제공(좌) / 『조선의용대』 제42기(1942. 4. 1.)_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제공(우)            항일전선의 귀감이 된 순국 4열사를 추도하다손일봉·최철호·박철동·이정순 대원의 숭고한 희생은 각계에서 추도되었다. 중국 팔로군 총사령관 주덕(朱德)은 1942년 9월 중국 연안에서 거행된 추도회에서 화북지대 대원의 희생을 칭송하였고, 한국광복군 제1지대에서도 1942년 12월 순국 1주년 기념 대회를 거행하였다. 또 4열사의 헌신을 잊지 않던 조선의용군 대원들은 일제 패망 후 귀국 중 순국 4열사 묘역을 참배하여 경의를 표하였다. 이처럼 불굴의 희생정신으로 많은 이들의 귀감이 된 손일봉·최철호·박철동·이정순의 공훈을 기리어 정부는 1993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alt「조선혁명군 희생 동지 추도 특간」, 『해방일보』(1942. 9. 20.)(좌) / 호가장전투 순국 4열사 묘역(2017)(우)             자유를 위해 희생된 투사들의 생명은 영원할 것이다.그들의 전투 정신은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싸우는 중국과 한국 국민들의 마음속에 살아있을 것이다.중국 팔로군 총사령관 주덕의 추도문 중에서(1942)alt]]> Tue, 29 Jun 2021 10:25:02 +0000 56 <![CDATA[아름다운 인연 한중 국제연대의 중요성을 온몸으로 실천한 김성숙과 두쥔훼이]]> 글 김형목(사단법인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이사) 김성숙과 두쥔훼이는 1929년 중국 상하이에서 결혼하였다. 부부는 1935년 12월 12일 중국 좌익작가 연맹 및 문화계 인사들과 함께 「상해 문화계 구국운동 선언」을 발표하고 함께 선언서에 서명하였으며, 중국 여성계의 항일구국운동에도 참여하였다.  부부는 국적을 초월해 일제 침략을 타도하려는 한·중 연합 항일투쟁의 모범적인 사례로 평가받고 있다. alt김성숙(좌) / 김성숙 환국 후 임정요인과 함께(경교장, 1945. 12. 3.)(우)         ‘붉은 승려’ 김성숙으로 알려지다김성숙은 1898년 3월 10일(음력) 평북 철산군 서림면 강암동에서 김문환(金文煥)과 임천 조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명이 김성암인 성숙은 승려가 되면서 얻은 법명이다. 본관은 상산으로 호는 운암, 법명은 태허·성숙, 다른 이름으로 충창·창숙·성암 등이 있다. 서당에서 한문을 배운 뒤 학교에 입학했으나 강제 합병 후 식민지교육에 반감을 느끼고 중퇴하였다. 1916년 봄에는 ‘독립군 양성 요람지’인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하려고 집을 나섰으나 일본군의 삼엄한 경비로 실패하였다. 다시 집으로 돌아갈 수도 없어 고민에 빠져 있던 중 함경남도 원산 서강사에서 신원 스님을 만나 출가를 결심하였다. 경기도 양평 용문사에서 사미계를 받고 남양주 봉선사에서 월초 스님을 은사로 비구계를 받았다. 그는 김산(본명 장지락)의 사상적 스승으로서 ‘금강산의 붉은 승려’ 김충창이란 이름으로 『아리랑』에 등장한다.3·1운동의 불길이 타오르자 경기도 양주와 포천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돼 옥고를 치른 후 불교 개혁운동과 조선노동공제회·무산자동맹회 등에서 활동하였다. 그는 불교뿐만 아니라 철학과 사회과학 서적을 두루 읽는 한편 월초 스님과 가깝던 손병희·한용운·김법린 등과 교류하였다. 문필로 한인사회에 민족의식을 일깨우다 1923년 초 김봉환 등 5명과 베이징으로 망명하여 민국대학 정치경제학과에 재학하면서 사회주의에 관한 지식과 이론을 앞세워 존재감을 확보해갔다. 재학 중 공산주의 잡지 『혁명』, 베이징불교유학생회 기관지 『황야』, 고려유학생회 기관지 『해외순보』 등의 발간을 주도하며 필명을 날리고 의열단에도 가입하였다. 일제의 감시망이 좁혀오자 1925년 활동무대를 광저우로 옮겼다. 이듬해 중산대에 입학해 김원봉·김산 등과 유월한국혁명동지회를 조직하고 기관지 『혁명운동』 주필을 맡았다.이곳에서 중국인 여학생 두쥔훼이(杜君慧)와 운명적 사랑에 빠졌다. 한국에 부인과 1남 1녀를 둔 상태였으나, 1929년 중국 상하이에서 결혼하였다. 1938년 김원봉 등과 조선의용대를 창설하고 1940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였다. 임시정부는 김구 등 우파가 주도하고 있었으나 조국 해방을 위해서는 민족 단결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태평양전쟁 발발 즈음에 모든 독립운동단체를 임시정부와 광복군의 통일지휘 하에 집중시킬 것을 주장하였다. 선전위원, 외교위원, 내무차장을 거쳐 국무위원에 뽑혔다. 한중문화협회 이사와 한국구제총회 감사도 맡는 등 한중 연대에 남다른 노력을 기울였다.통일정부 수립에 매진하다일본의 무조건 항복 소식에 김성숙은 감격의 눈물을 흘리면서도 “임정과 민족의 앞길은 먹구름 같은 외세에 가로막혀 캄캄하게 됐다”고 우려하였다. 1945년 12월에는 부인과 세 아들을 중국에 남겨둔 채 미군 수송기를 타고 귀국하였다. 환국 후에는 여운형·김규식 등과 좌우 합작운동에 참여했으나 남북연석회의에는 불참하였다. 6·25 때는 미처 피란하지 못하고 서울에 남았다가 남로당 간부의 협조 요청을 거절하였다. 이후 혁신계 인사들과 함께 반독재 투쟁을 전개하다가 이승만 정권의 탄압을 받았다.4·19혁명 후 사회대중당에 참가해 정치활동을 재개했으나 5·16 군사정변으로 투옥되었다. 중립화 평화통일론을 주장해 북한을 이롭게 하였다는 혐의였다. 독립유공자 표창 소식을 듣고 김성숙은 “우리나라가 아직도 독립되지 못하고 외국 세력 하에서 신음하고 있으므로 독립운동을 계속해야 한다. 아직은 논공행상할 때가 아니다”라는 말을 남겼다. 이후 통일사회당·신한당·신민당 등에 몸담고 반독재 노선을 걷다가 1969년 4월 12일 71세를 일기로 별세하였다. 장례식은 서울 조계사에서 사회장으로 치러졌고 경기도 파주에 묻혔다가 2004년 국립서울현충원 임시정부 묘역으로 이장하였다. 2008년 4월에는 이달의 독립운동가에 선정되었다. alt두쥔훼이           중국 신여성 두쥔훼이로 거듭나다두쥔훼이는 1904년경 중국 광둥성 광저우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과자점 점원으로 부유하지는 않았으나 어느 정도 경제력을 가졌다. 어려서부터 책 읽기를 너무나 좋아하였다. 특히 역사적인 인물들을 존경하면서 이들의 인생역정은 자신의 롤모델로 삼을 만큼 자신감에 차 있었다. 어린 시절에 어머니와 함께 집 앞에서 우연히 혁명가들이 청나라 군인들에 의해 끌려가는 현장을 목격하였다. 어머니는 이러한 광경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저 혁명가들은 다 훌륭한 분들이야. 피 흘리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진짜 사나이들이란다.”7세에는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멸망하고 중화민국이 탄생하는 역사적인 순간을 맞았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삼촌의 변발을 잘랐을 만큼 시세 변화에 부응하였다. 이후 아버지를 도우면서 틈틈이 학업에 정진하였다. 시대 변화에 따라 광둥대는 처음으로 여학생 입학을 결정하였다. 곧바로 입학시험에 응시해 합격함으로 광둥성 최초의 여대생이 되었다. 재학 중 외국인 한 청년으로부터 일본어 과외를 받았다. 주인공은 바로 김성숙이었다. alt‘자유롭고 행복한 새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분투하자’는 김성숙의 유묵(1945)(좌) / 김성숙, 두쥔훼이 가족과 박건웅       운명적인 만남으로 혁명동지가 되다님 웨일즈의 『아리랑』 주인공 김산은 이들 만남을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김성숙은 1927년 늦여름부터 두쥔훼이를 열렬히 사랑하였다. 그는 매일같이 두쥔훼이를 데리고 ‘72열사의 광장’이 있는 공원을 찾았다. 친구들은 그가 ‘연애병’을 버리고 공산주의 활동에 전념하기를 충고했으나 소귀에 경 읽기였다. 그녀도 이방인 김성숙을 열렬히 사랑하여 오히려 두 사람의 애정은 더욱 깊어졌다. 중산대학에 재학 중 김성숙에게 일본어를 배우면서 혁명사상 등에 큰 영향을 받아 혁명에 투신하는 결정적인 계기였다.광저우 폭동에 참여해 연결책 지도원인 김성숙은 두쥔훼이의 집에 찾아와 친필로 쓴 한국어 공책을 주면서 안전한 곳에 보관해달라고 했다. 주요 내용은 광저우 폭동에 대한 상세한 경과 보고서였다. 아울러 대학 기숙사 안에서 위기에 처한 학우들에게 피신하라는 전언을 부탁하였다. 두쥔훼이는 김성숙을 도와주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그와 함께 길을 떠났다. 두 사람은 기숙사로 가는 도중에 유혈이 낭자하고 시체가 즐비한 끔찍한 광경을 목격하였다. 두쥔훼이는 커다란 충격과 아울러 당국의 가혹한 탄압에 분노를 느꼈다. 무사히 기숙사에 도착하여 학우들을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켰다. 1928년 초에 두쥔훼이는 일본으로 유학을 가기로 결심한 후 도쿄에 이르렀다. 그녀는 그곳에서 3개월간 학업에 전념하였다가 6월에 귀국해 상하이에서 중국 공산당에 입당하였다. 그녀는 김성숙과 함께 좌익작가연맹에 가입해 마르크스, 레닌주의를 선전하고 국민당 정부의 부패상을 비판하였다. 두 사람은 『사회과학사전』과 『교육사』를 함께 번역하였다. 일본인들이 레닌의 『국가와 혁명』에 기반을 두고 집필한 『국가와 계급』을 번역하는 등 사회주의이념 확산에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1929년에 두 사람은 마침내 결혼하여 3명의 아들 두간(金杜甘)·두젠(金杜建)·두렌(金杜連) 등을 두었다. 이후 그녀는 김성숙과 함께 중국창작비평위원회에 가입했고, 1935년 12월 12일 중국좌익작가연맹 및 문화계 인사들과 일제의 화북 지역 침탈을 성토하는 내용의 「상하이 문화계 구국공동선언」을 발표하고 남편과 함께 서명서에 서명하였다. 또한 그녀는 상하이 여성구국회에 가입해 중국 여성계의 항일구국운동에도 참여하였다. 독립운동에 전념하는 남편을 따라가며 가정을 보살피던 두쥔훼이는 1943년부터 대한민국 임시정부 외무부 부원과 외무부 외사과 과원으로 선임되었다. 그녀는 외무부 정보과 과원과 안정근이 회장을 맡고 있던 한국구제총회의 이사로 활동하였다. 광복을 눈앞에 둔 1945년 7월 미국에서 발행되는 잡지 『독립』 기고문에서 ‘조선의 딸’을 자처하고 “나는 늘 조선 부녀들의 일을 나의 일로 생각하고 어떻게 해야 우리 조선 부녀 동포들이 전 민족의 해방을 위해 공헌할 수 있을 것인가 늘 생각하고 있다”며 절절한 독립의 염원을 토로한 바 있다. 이처럼 한국 독립운동가들과 교류하며 한중 우호를 다지는 등 지속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한편 그녀는 ‘트로츠키파’와 일본의 스파이로 몰려 고초를 겪은 김산과 가깝다는 이유로 1936년부터 10년간 공산당 당적을 박탈당하는 시련도 겪었다. 당적은 저우언라이(周恩來) 부인인 덩잉차오(鄧潁超) 도움으로 다행히 회복될 수 있었다.국경을 초월한 인생항로가 다시 조명되기를두쥔훼이는 광복 이후 한국으로 가는 교통편을 마련하지 못해 남편이 홀로 한국으로 떠나는 걸 지켜봐야 하는 운명이었다. 결국 세 아들을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아버지와 생이별한 중국의 세 아들은 어머니 성을 따라 호적에 올렸다. 첫째 두간은 광둥성교향악단 지휘자로 이름을 날린 음악가다. 줄리아드음악원 출신의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두닝우(杜寧武)가 그의 아들이다. 둘째 두젠은 화가이자 베이징중앙미술대 교수이고, 셋째 두롄은 국가발전개혁위원회 고문을 맡았다. 1950년대에 아들들은 아버지를 찾아 인천에 들어왔지만, 자유당 정권은 그들을 인천 월미도에 있는 수용소에 감금하였다가 중국으로 추방하였다. 김성숙은 이 일로 실의와 좌절에 빠져 동지들과 만나 밤을 새워가며 폭주를 한 탓에 건강이 몹시 악화되었다.두쥔훼이는 이후 육재학교(育才学校) 주임 교사로서 인재 육성에 앞장섰다. 1949년 2월에 베이징으로 가서 제1차 전국여성대표대회와 9월에 제1회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에 참석하였다.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후엔 베이징여2중학교 교장을 맡았다. 베이징 제6중학교 당지부 서기 겸 교장을 역임했고, 중공 제8차 전국대표대회에 참석하였다. 그녀는 1981년에 고향에서 사망하였다. 정부는 2016년 두쥔훼이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아들은 “어머니의 머릿속에는 조선의 일과 중국의 일은 같은 것이라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동북아 지역의 조선민족과 중화민족은 공동의 운명이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조선(한국)과 중국이 결합해 공동으로 투쟁하는 것은 역사적 필연이었습니다”라고 회고하였다. 운암김성숙기념사업회는 애틋한 사랑이 싹튼 중국 중산대에 김성숙·두쥔훼이 기념관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 아련한 두 분 인생역정이 한중 선린우호에 새로운 전기로 되기를 바란다.]]> Tue, 29 Jun 2021 10:25:47 +0000 56 <![CDATA[인문학관 미국 LA에서 발간된 『독립』]]> 글 김동수(백제예술대학교 명예교수·시인)alt미국에서 발행된 주간 신문 『독립』순국한 광복군 영전에 바치는 글1943년 9월 5일 미국 LA에서 창간된 『독립』은 ‘조선민족혁명당’ 미주 지부에서 발행한 주간 신문이다. 국문 2페이지와 영문 2페이지로 구성되었으며, 그 논조가 좌경의 편견을 고집하는 경향이 있었다. 광복이 되고 남과 북이 나뉜 후에는 자유진영을 비난하며 북선의 공산진영을 찬양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성향 때문에 미국 정부의 주목을 받다가 결국 1955년 12월 발행을 끝으로 폐간되었다. 그중에서도 1943년 창립 당시 순국한 광복군과 조선 열사의 영전에 헌정한 시의 일부를 소개한다.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중국 각지에 흩어져 독립운동을 하고 있던 우리의 애국단체들이 중국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1940년 9월 17일 중국 충칭에서 광복군을 조직하였다. 이후 1943년 중일전쟁이 한창이던 시절, 광복군이 중국군과 합세하여 일본군을 상대로 대일전선에서 투쟁하다 많은 광복군이 전사하기에 이른다. 이때 광복군의 영전에 바치는 헌시인 우청의 「순국한 조선열사의 영(靈) 앞에」가 탄생하였다. 여기에는 당시 국내 문학에서는 발표될 수 없었던 민족의 비참한 실상이 여실히 나타나 있다. 친애하는 전우들은 죽었다영용한 동지들은 죽었다그대들은 중국 반침략 싸움터 위에서 죽었고그대들은 반 파시스즘 투쟁 중에서 죽었다그대들의 죽음은 우리의 광영을 증가했고 우리의 조국 조선의 광영을 증가했다 우리는 자유 없는 국토상의 자유 없는 사람이다우리의 조국은 이미 이방 사람에게 침범되었고 우리의 부모는 이방 사람의 압박을 받을 대로 다 받아왔고 우리의 재산은 적인의 재산으로 변하였고 우리가 갈고 씨를 심은 밭에서는 적의 식량이 나고 우리의 여아는 적에게 빼앗겨 처첩이 되고 우리의 도로 위에는 적의 말 발굽소리가 진동한다「순국한 조선열사의 영(靈) 앞에」 일부, 『독립』(1943. 10. 27.) 민충정공의 순국 38주년 헌시같은 해 1943년 11월 『독립신문』에는 충정공 민영환의 순국 38주년을 맞아 그의 충절을 추모하는 헌시인 「민충정공이 가신지 38주년을 맞으면서」가 발표되었다. 민영환은 1905년 을사조약을 반대하다가 이를 막지 못하자 죽음으로써 항거한 대한제국 애국지사다. 민영환은 생전에 친일파 관료들과 외로운 싸움을 이어가며 국체를 수호하려 노력했지만, 결국 친일 내각에 의해 지금의 부총리 격인 의정대신에서 한직인 시종무관장으로 좌천당했다. 이후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이 체결됐다는 소식을 듣고 머물고 있던 여주에서 급하게 상경하였다. 지금의 총리 격인 의정대신이던 조병세와 함께 늑약에 반대하는 신하들을 규합해 을사오적을 처벌하라는 공동 상소를 올렸다. 하지만 조병세는 일본 헌병대에 의해 체포되고 대신들은 강제 해산 당했다. 황명 거역죄라는 명목으로 견책을 당한 민영환은 이미 대세가 기울어진 것을 개탄하고, 11월 30일 유서를 남기고 자결하였다. 민영환의 자결 소식이 전해지자 조병세를 비롯한 많은 인사가 스스로 목숨을 끊어 일제 침략에 거하였다.당시 민영환은 세 통의 유서를 남기고 자결하였는데, 한 통은 국민에게 각성을 요망하는 내용이었고, 다른 한 통은 재경 외국사절들에게 일본의 침략을 바로 보고 한국을 구해줄 것을 바라는 내용이었다. 또 다른 한통은 광무황제에게 올리는 글이었다.2천만 동포에게 각성을 요망한 유서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살기를 바라는 자는 반드시 죽고, 죽기를 각오한 자는 삶을 얻나니. 동포들이여, 죽을 각오로 나라를 지켜내라.” 그의 죽음은 의병투쟁과 구국계몽운동의 기폭제가 되었으며, 훗날 항일운동을 격화시키는 동력으로 작용하기도 하였다.공이여 한 번 가시매나라도 백성도 갈 곳을 몰라거치른 빈 땅 위에 깊은 한숨 떨리고 피눈물은 아롱져흘린 피 사십 년 아직도 뜨거워뿌려준 그 정신 피와 같이 뜨노라홍윤식 「민충정공이 가신지 38주년을 맞으면서」 『독립』(1943. 11. 4.) alt민영환         민영환의 유서 오호라, 나라의 수치와 백성의 욕됨이 여기까지 이르렀으니, 우리인민은 장차 생존 경쟁 가운데에서 모두 진멸당하려 하는도다. 대저 살기를 바라는 자는 반드시 죽고 죽기를 각오하는 자는 삶을 얻나나니, 여러분이 어찌 헤아리지 못하겠는가? 영환은 다만 한 번 죽음으로써 우러러 황은皇恩에 보답하고, 우리 이천만 동포 형제에게 사죄하고자 하노라. 영환은 죽되 죽지 아니하고, 구천에서도 기필코 여러분을 돕기를 기약하니, 바라건대 우리 동포 형제들은 천만 배 더욱 분발하고 기운을 내어 뜻과 기개를 굳건히 하며 학문에 힘쓰고, 마음으로 단결하고 힘을 합쳐서 우리의 자유 독립을 회복한다면, 죽은 자는 마땅히 저 어두운 저승에서나마 기뻐 웃으리로다. 오호라, 조금도 실망하지 말지어다. 우리 대한제국 이천만 동포에게 이별을 고하노라. alt민영환이 명함에 남긴 유서            ]]> Tue, 29 Jun 2021 10:26:31 +0000 56 <![CDATA[끝나지 않은 독립운동 태극기는 어떻게 만들어졌고 되새겨야 할까]]> 글 이계형(국민대학교 교양대학 교수) 한 국가의 국호·국기·국가·연호 등은 한 민족·국가·정부·국민의 모든 것을 상징하는 것이고, 그 시대성과 정치 내용 형태 등을 집약적으로 표현할 뿐 아니라 국민의 일상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대외적인 영향도 적지 않다. 대한제국 이후 일제강점기를 거쳐 광복을 맞아 민주주의 국가가 탄생하였지만, 제헌국회에서는 국호만을 결정하였을 뿐 국기·국가·연호 등은 명확히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국가의 상징성이 가장 큰 국기는 어떻게 만들어져 지금에 이르게 되었을까? alt태극 8괘도              국기의 탄생 배경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국기의 의미를 알게 된 것은 1875년 운요호 사건 때문이었다. 당시 조선군 수비병 35명이 전사하였고 일본군은 2명의 경상자만 발생했음에도 일본은 전권대사를 파견하여 책임을 추궁하였다. 일본은 “우리는 대일본제국의 국기인 일장기를 달고 조선을 방문하였는데 귀국 수병들이 무차별 포격을 하였다”며 트집을 잡았다. 이에 조선은 “우리는 일장기가 무엇이며 국기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우리나라 수병들에게 가르친 적도 없다”고 항변하였다. 사실 일본은 메이지 유신 직후에 부산 왜관을 통해 일장기 사본을 조선에 보내 준 바 있었으나 그 의미를 몰라 무시해버렸다. 국기 문제는 조일 간 강화도 회담이 진행되는 와중에 다시 제기되었다. 일본이 조선에 속히 국기를 만들어 보내 줄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이때 조선은 국기 사용에 대한 의미를 알게 되었지만, 국기가 국제 외교에서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하는 정도에 그쳤다. 그 뒤 1880년 청의 외교관 황쭌센(黃遵憲)은 조선의 국기로서 ‘용이 그려진 깃발(용기, 龍旗)’를 제안하였다. 이는 청의 국기였던 ‘대청황룡기’를 본떠 만들도록 한 것이다. 하지만 외국과의 교류가 없었던 조선은 그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여 국기 도안 문제는 더 논의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1882년 5월 조미조약 체결 당시에 미국은 성조기를 걸었으나 조선은 마땅한 것이 없어 급히 ‘태극도형기(흰 바탕에 청홍 태극 문양)’를 만들어 사용하였다. 이의 바탕색은 백성의 옷, 홍색은 왕의 옷, 파랑은 신하의 옷을 상징했다고 한다. 이에 청 외교관 마젠중(馬建忠)은 태극도형기와 일본 국기가 너무 닮아 멀리서 보면 식별이 어렵다며, 조선국은 ‘대청황룡기’를 사용하되 속국답게 용의 발톱 한 개를 줄이고 청운(靑雲)을 홍운(紅雲)으로 그려서 사용하도록 권하였다. 이를 담당했던 김홍집은 그의 제안을 정중히 사양하고 ‘태극 8괘도’ 도안을 내놓았다. 이는 그 후 조선 국기의 근거가 되었다. 여기에 고종의 홍룡포를 하늘의 태양(太陽)에다 배치하고 신하의 관복인 파란색을 태음(太陰)으로 삼은 태극 문양을 추가하였다. 1882년 여름, 임오군란 이후 수신사 박영효가 일본 여객선 메이지마루(明治丸)를 타고 현해탄을 건너는 중에 영국인 선장의 조언을 받아 대각선에 있는 4괘만 남기고 나머지는 없앤 국기를 만들었다. 박영효는 이 국기를 일본에 도착한 뒤에 처음으로 숙소인 니시무라 여관에 내걸었다. 이때 각국의 외교관들이 박영효가 묵고 있는 숙소로 찾아와 조선 국기를 그려갔다고 한다. 1883년 1월 고종은 이를 조선 국기라 공식 인정하고 전국에 알렸다. 그 뒤 대한제국이 성립한 이후에 ‘태극기’로 불리기 시작하였다. alt1882년 박영효가 제작한 최초의 원형 태극기(좌) / 1949년 10월 문교부가  공표한 대한민국 국기(우)     태극기의 변천사그러나 1910년 8월 경술국치로 인해 대한제국이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면서 더는 태극기를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나라 잃은 국민들의 마음속에 단 하루도 태극기를 내린 적이 없었다. 때문에 1919년 3·1운동 당시 전국 각지에서 만세운동을 벌이면서, 제각기 모양은 다르지만 손에 손에 태극기를 들고 나섰다. 태극기는 35년 동안 일제의 압제를 당하였던 한국인들에게 나라를 되찾을 수 있다는 희망이었다. 독립운동가들은 언제나 태극기를 내걸고 독립을 염원하였고, 태극기를 통해 독립된 나라를 꿈꾸었다. 마침내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하자 국민들은 모두가 한뜻으로 태극기를 그려서 들고 나와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비록 모양은 제각각이었지만 모두의 한마음을 담은 태극기였다. 그해 12월 환국 직후 임시정부 내무부장 신익희가 태극기의 양식과 만드는 법을 알렸지만, 역시 통일되지 못하여 행사마다 다른 모양의 태극기가 사용되곤 했다. 그러다가 1948년 7월 제헌국회에서 헌법을 제정하면서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하자는 데 일단 의견 일치를 봤는데, 헌법에 태극기를 국기로 정하는 내용을 포함하자는 의견은 부결되었다. 그래서였는지 그해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국민 축하식’ 당시 두 개의 태극기가 다르게 내걸리는 불상사도 일어났다. 또 그때까지만 해도 태극기를 사용했던 북한이 그해 9월 인공기로 바꿨다. 이때 『한성일보』 사설란에 “각양각색으로 혼동 난용(亂用) 되고 있는 것은 자못 민족적으로 치욕스러운 일이다”라면서 “8괘의 방위 등이 안정되지 못한 폐”가 있다며 정부의 시정을 촉구하였다. 이러한 혼란을 바로잡기 위해 1949년 1월, 해가 바뀐 뒤에서야 국회 내에 국기제정위원회가 구성되었다. 다만, 이는 국기를 바꾸자는 것이 아니라 태극기의 색채와 위치를 통일하는 데 있었다. 이에 국기시정위원회(國旗是正委員會)로 개칭되어 열린 회의에서 새로운 국기의 제정은 통일 이후로 미루기로 하고 태극기의 표준을 세우기로 하였다. 몇 개월 동안 여러 의견을 논의한 끝에 당시의 국기를 그대로 사용하기로 하였다. 다만 감(坎)과 리(離)의 위치를 서로 바꾸고 깃봉의 연꽃 봉우리를 금빛 무궁화 봉오리로 변경하였다. 이를 토대로 1949년 10월에 비로소 정부가 현재 모습의 태극기를 정식 국기로 제정하였다.태극기는 한말 왕조 체제에서 만들어졌지만, 독립운동 당시에도 국가의 상징으로 존엄하게 여기고 숭앙(崇仰)하였다. 3·1운동 때나 해방 직후 ‘독립 만세’를 외치면서 태극기를 들고 나왔던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이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어도 태극기가 우리나라의 국기로 자리매김하였고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이처럼 태극기에는 고난과 희망의 역사가 담겨있다.]]> Tue, 29 Jun 2021 10:27:08 +0000 56 <![CDATA[독립의 발자취 독립운동가의 후손을 찾아서]]> 글 편집실 독립운동의 흔적을 쫓고 독립운동가의 후손을 찾아사진으로 기록하는 사람이 있다. 우연처럼 시작된 운명 같은 일, 김동우 사진작가는 ‘아무도 기록하지 않으면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는 생각에서 이 일을 시작했다. 기억을 찾아 나선 어느 사진작가의 이야기를 따라가 본다. alt사진작가 활동은 언제부터 시작했나요?대학 시절 신문방송학을 전공한 뒤 신문기자 일을 업으로 삼다가, 지난 2012년 회사를 관두게 되었습니다. 이후 세계 일주를 하자는 마음으로 여행을 떠났고, 그 과정에서 사진 에세이를 쓰고 싶어졌습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사진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고, 대학원에서 사진 공부를 하면서 다큐멘터리에 관심이 생겼습니다. 어떤 테마로 작업을 해볼까 고민하다가 다시 여행을 떠나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독립운동가 이야기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2017년 긴 여행을 떠났을 때의 일입니다. 당시 인도에 갔을 때 우연히 ‘인면전구공작대’라는 광복군 활동에 대해 알게 되었는데, 홍범도 장군의 묘소가 카자흐스탄에 있는 것처럼 인도 어딘가에 있을 광복군의 흔적을 찾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 와중에 독립운동에 대해 더 깊게 알아보고 발굴해내고 싶은 요동이 일었습니다. 사실 교과서에 담긴 이야기만으로는 알 수 없는 수많은 독립 이야기가 있는데, 외부에 알려진 자료는 극히 드물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세계 각지에 묻혀 아직도 알려지지 않은 독립운동가들의 이야기를 발굴하기 위해 ‘몽우리돌을 찾아서’라는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어떤 방법으로 독립운동가 후손을 찾으셨는지 궁금합니다먼저 2017~2018년에 네덜란드, 러시아, 멕시코, 미국, 우즈베키스탄, 중국, 카자흐스탄, 쿠바 등지로 1차 작업을 떠났습니다. 국가기관에서는 개인 정보 유출 등의 이유로 후손들의 명단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때문에 독립운동가 후손들을 찾기 위해서는 일일이 발로 뛰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턱없이 부족한 자료만으로는 그분들을 찾아내기 어려웠습니다.  먼저 각 지역의 언어 장벽을 해결하기 위해 통역사를 섭외했고, 이후 한인회나 후손회 조직을 찾아 나섰습니다. 현지 선교사의 도움을 받거나 대사관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하기도 했습니다. 한 나라에서 한 달 이상을 머무른 적도 있습니다. 섭외 되는 동안에는 시간을 내 사적지를 찍었고, 약속이 잡히면 독립운동가 후손들을 인터뷰하였습니다. 결코 녹록지 않은 시간이었습니다. 독립운동가 후손을 찾는 일만큼 힘든 일이 또 있었나요?개인 경비로 작업비를 충당한다는 부분에서 애로사항이 많았습니다. 2017년 여행을 떠날 당시에는 부동산을 정리하고 갔습니다. 그래도 이제는 개인적으로 십시일반 경비를 보태주시는 몇몇 분들도 생겼습니다. 2020년에는 국가보훈처에서 보훈문화상 상금을 지원받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갈 길은 멀고, 경비는 여전히 걱정되는 부분입니다. 안창호 선생의 후손을 만나셨는데, 그에 대해 말씀해주세요미국에서 안창호 선생의 막내아들을 만났는데, 먼저 이러한 작업 활동에 놀라워하셨습니다. 실제로 아버지를 만난 적이 없는 그분은 어머니와 형에게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자랐습니다. 가족들은 독립운동가의 가족이란 이유로 오랜 시간 고통을 겪었지만, 단 한 번도 불평불만을 토로한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아버지의 시대적 사명을 함께 짊어지고 가는 것’ 그것이 가족들의 사명이었다고 전했습니다. alt쿠바, 이윤상의 후손 까르데나스(좌) / 멕시코, 김익주의 후손 다빗 킴(우)                  사진을 반투명으로 찍는 이유가 궁금합니다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이 1905년부터 이민을 가기 시작하여, 현재 7세대까지 이어져왔습니다. 어느덧 한국의 정체성을 요구할 수 없을 만큼 세대가 교체되었고, 후손들의 기억도 흐릿해지고 있는 상황입니다. 멕시코에 김익주 선생의 묘소가 남아있다는 것을 알고 그곳에 찾아갔을 때 버려진 듯한 현장 분위기에 안타까움을 느낀 적이 있습니다. 이러한 연사 인식을 사진에 표현하고 싶어 후손들의 모습을 흐릿하게 찍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에는 기억을 보존해야 한다는 중의적 의미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국내에 살고 있는 우리마저 기억을 이어가지 못한다면 세계 각지에 흩뿌려진 독립의 흔적은 결코 지켜낼 수 없습니다.현재 어떤 작업을 진행 중인가요?〈몽우리돌을 찾아서〉라는 프로젝트를 시작하고, 2019년 2월에 1차 전시회를 개최하였습니다. 이어 2020년 봉오동전투 100주년을 맞이해 전투가 벌어졌던 현장에 관해 기록하고 싶었는데, 코로나19로 인해 잠정 연기된 상태입니다. 그리고 현재는 부산시의 예산을 지원받아 국내 작업을 진행 중이며, 부산 및 경남지역 해안가에 남겨진 사적지들을 조사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올해 8월이면 부산도서관에서 〈관심 없는 풍경〉이란 주제로 특별기획전시가 열릴 예정입니다. 이후 기회가 된다면 다른 지역의 사적지도 다양하게 기록하고 싶습니다.이 일을 하면서 안타깝게 느낀 점이 있나요?독립운동의 흔적을 쫓다 보면 방치되어 있는 사적지와 건물을 마주하게 됩니다. 생뚱맞은 장소에 세워져 있는 독립운동가 흉상과 기념비도 봤습니다. 산이나 변두리 길가 등 인적이 뜸한 장소에 형식적으로 세워지는 기념비가 얼마나 많은 사람의 눈에 띌지 의문입니다. 그리고 일제강점기 건축물이라고 해서 무조건 없애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방식으로 보존하고 활용하여 교육 자료로 쓰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무작정 없애고 방치하다가 후세에 남겨질 역사 자료가 없어질까 염려됩니다. 마지막으로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다면요사진으로 기록하면서 느낀 점이 있습니다. 역사는 기억해야 할 사명이라는 것입니다. 이 시대에 우리는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기록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지금이라도 발굴하고 보존할 가치가 있으며, 후손들에게 남겨야 할 것입니다. 저는 개개인의 인물을 찾아 나서는 것이 아닙니다. 시대를 잇는 기록자라는 생각으로 작업을 이어가고 싶습니다. alt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 홍범도 묘지                   ]]> Tue, 29 Jun 2021 10:29:36 +0000 56 <![CDATA[세계 산책 미국의 독립혁명]]> 글 김형곤(건양대학교 교수) 올해 7월 4일은 미국이 독립한 지 245년이 되는 해다. 1776년 식민지 아메리카는 종주국인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였다. 아메리카 식민지인들이 자유와 평등을 획득하기 위해 절대주의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했다는 의미에서 미국의 독립은 분명한 ‘혁명’이었다. 그러나 혁명이기 이전에 ‘전쟁’이기도 하였다. 자유와 평등을 획득하기 위한 것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재산을 지키기 위한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alt헨리 펠함이 조각하고 폴 리비어가 판화한 보스턴 대학살          영국의 아메리카 식민지 착취영국 절대주의가 꽃 폈던 엘리자베스1세 이후 개척되기 시작한 아메리카 식민지는 그동안 본국과 동등하고 충실한 영국인으로 성장해왔다. 하지만 유럽 절대주의 국가 간에 7년 전쟁을 치르며 영국의 통치방식이 바뀌기 시작했다. 동등하고 충실한 동반 성장이 아니라 본국을 위한 수탈과 착취의 대상으로 식민지를 취급하였다. 당시 아메리카 식민지의 경제 구조는 본국인 영국에 종속되어 있었다. 제조업이 거의 발달하지 못했고 소비시장 역시 영국과 유럽 대륙에 종속된 상태였다. 식민지인들은 생산된 원재료 담배·사탕수수·대구 등을 영국 상인에게 위탁 판매해 필요한 상품을 샀다. 식민지인들은 생산된 잎담배를 영국 상인에게 보내 최상 등급을 받아 필요한 상품을 많이 사는 것이야말로 명예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영국 상인들의 농간은 심해지고 원재료에 최하 등급을 매기기 일쑤였다. 식민지인들의 빚은 늘어만 갔고, 자신들의 재산이 영국 상인들에게 빼앗긴다고 생각하였다. 그런 중에 식민지인들의 도움을 받아 프랑스·인디언 동맹 전쟁에서 영국이 승리했음에도, 차별과 착취는 더욱 본격화되었다. 영국 정부는 식민지를 보호한다는 이유로 전쟁 비용을 식민지인들이 내야 한다는 구실을 내세웠고, 각종 세금을 만들어 부과하였다. 이제는 영국 상인뿐만 아니라 영국 정부에서도 식민지인들의 재산을 빼앗아가려 하였다. 1765년에는 ‘인지세법’을 만들어 각종 문서에 일정 한도의 돈을 부과하였다. 하지만 영국 의회에 대표를 보내지 않는 식민지인들로서는 참으로 황당한 세금이 아닐 수가 없었다. 매사추세츠 과격파 중 한 사람인 새뮤얼 애덤스는 인지세법의 시행을 방해하였다. 버지니아의 패트릭 헨리는 식민지인에 대한 과세권은 오직 식민지의회에만 있다고 하는 결의안을 채택하고, 버지니아·뉴욕·매사추세츠 등의 식민지의회 지도자들이 모여 인지세법의 폐기를 주장하였다. 결국 영국 정부는 식민지인들의 거센 반발에 부딪혀 인지세법을 폐기하였으나, 이듬해 또 다른 법인 ‘타운센드법’을 만들었다. 이제 식민지로 수입되는 종이·유리·페인트·납·차(tea)에 관세를 부과하고, 세금 집행을 감독한다는 명분으로 영국군을 식민지에 주둔하도록 하였다. 그러던 1770년 3월, 보스턴 항구에 주둔한 영국군과 주민들 사이에 사소한 다툼 끝에 식민지인 5명이 죽는 이른바 ‘보스턴 학살’이 발생하였다. 당시 보스턴 인구는 총 1만여 명이었는데 장례식에 무려 1만 명 이상이 참석해 죽은 이들을 숭고한 애국자로 찬양하였다. 이 사건 이후 영국 정부는 보스턴에서 군대를 철수시키고 차에 대한 세금만 남기고 타운센드법을 폐기하였다.  alt델라웨어강을 건너는 워싱턴, 엠마누엘 로이체 작(1851)              끊임없는 반격 그리고 독립식민지인들은 비로소 어떻게 해야 자신들의 재산을 지키고 영국 정부의 간섭을 배제할 수 있는지 알게 되었다. 그들은 ’통신위원회’를 만들어 식민지 간에 연락을 취했고, 영국 상품의 불매운동과 영국군 방해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던 중 ‘보스턴 차사건’이 발생하였다. 당시 영국의 동인도회사는 부도의 어려움을 겪고 있었는데, 식민지 인도에서 값싸고 질이 좋은 차를 대량으로 생산하여 아메리카 식민지인들에게 독점으로 판매하고 있었다. 식민지인들은 영국과 경쟁 중인 네덜란드의 차를 밀수하여 애용하고 있었는데, 영국군의 방해로 비싼 영국 차를 억지로 사야만 했다. 이에 1773년 12월 식민지인 150명이 정박해 있던 동인도회사 배에 올라가 차를 모두 바다로 던져버린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 이후 영국 정부는 식민지에 대한 단순한 경제적 이익을 얻는 데서 나아가 식민지를 본격적으로 지배하기 시작하였다. 1774년에 영국 정부는 ‘매사추세츠 정부법’을 만들어 식민지의회를 무력하게 만들었다. 이어 ‘재판 운영법’으로 식민지인들의 자유와 인신을 구속하고, ‘군대 주둔법’으로 법 집행을 관리·감독하도록 하였다. 도저히 참을 수 없게 되자, 13개 식민지 대표들은 대책을 논의하였다. 이들은 몇 번에 걸쳐 식민지 차별정책을 금지하는 ‘청원’을 보냈지만 아무런 효과가 없자,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한 전쟁을 결의하였다. 독립군 총사령관으로 워싱턴이 선출되었고, 민병대 1만 8천 명이 긴급 소집되었다. 이들은 세계 최강의 해병대를 가진 영국군과 악랄하기로 소문난 독일 용병 3만 3천 명을 상대로 싸워야 했다. 전쟁 초기, 워싱턴이 이끄는 독립군은 뉴욕전투를 비롯하여 무려 33번의 전투에서 연전연패하였다. 하지만 워싱턴은 패배로부터 절망하지 않고 무엇인가를 배웠다. 영국군은 바다와 강에서 최강이라는 것, 그들은 이른바 라인 베틀을 전투 방식으로 고집하고 있다는 것, 전쟁의 끝은 사령관인 자신을 잡아야만 끝난다는 것, 그리고 귀족 중심의 오만한 군대라는 것 등이었다. 1776년 12월 크리스마스 저녁, 워싱턴은 3천 명으로 줄어든 독립군을 이끌고 꽁꽁 언 델라웨어강 도강 작전을 통해 영국군을 상대로 첫 승리를 기록하였다. 곧바로 워싱턴은 파지 계곡 등의 산악지역으로 숨어 게릴라전을 펼쳤다. 필라델피아와 뉴욕 등 식민지 주요 도시들이 영국군에 점령당하는 어려움을 겪었지만, 새로운 민병대의 보충과 프랑스의 도움 등으로 1781년 요크타운 전투에서 대대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워싱턴은 모든 권력을 가진 군인으로서 왕이나 황제가 될 수 있었음에도, 대륙회의에 자신의 칼과 총을 반납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시간이 흐른 후 인류 최초의 공화국이 탄생하였다.]]> Tue, 29 Jun 2021 10:30:41 +0000 56 <![CDATA[기념관은 지금 독립기념관 디지털 홍보의 꽃 유튜브]]> 정리 편집실사진 봉재석 갑작스러운 코로나19로 독립기념관 겨레의 큰 마당에 북적이던 사람들과의 접촉이 끊기리라고는 의심해본 적이 없다. 편안함을 추구하는 인간의 심중은 어느덧 디지털과 한 몸이 되었다. 대면의 소통이 끊긴 자리에서 유튜브로 인사하는 독립기념관 꿈돌이를 소개한다. alt교류협력부 콘텐츠 구축 김병훈              독립기념관 유튜브를 간단히 소개한다면?‘얘들아’, ‘가고 싶은 독립기념관’, ‘재미있는 독립운동사’, ‘어렵지 않아, 바로 여기’ 등 독립기념관 유튜브는 독립기념관과 관련된 다양한 정보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독립기념관에서 추진하는 다양한 사업들을 재가공해 소개하고, 독립운동사와 관련된 주제를 흥미롭고 재미있는 콘텐츠로 여러분을 만나려고 합니다. 댓글로 많은 응원 부탁드립니다.유튜브를 시작한 이유는?독립기념관은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사를 다양한 형태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기존에 제작된 것 이외에도 새로 발굴해낼 수 있는 콘텐츠들이 무궁무진합니다. 이런 좋은 콘텐츠를 거리의 제약 없이 더 빠르게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요즘 학생들은 궁금한 게 있으면 네이버나 구글 같은 포털 사이트에서 검색을 하는 게 아니라 유튜브로 검색해본다고 합니다. 그만큼 직관적으로 정보를 받아들일 수 있는 영상 콘텐츠의 중요도가 높아졌다는 반증이기도 하죠. 독립기념관에서 만들어지는 수많은 콘텐츠를 잘 알릴 수 있는 최적의 플랫폼이 유튜브이기 때문에 운영을 시작하였습니다.그동안 보람 있었던 경험은?제작한 영상이 좋은 반응을 얻을 때입니다. 특히 댓글이 많이 달렸을 때 가장 힘이 납니다. 댓글을 남기려면 로그인을 해야 하고 채널을 검색해서 들어와야 하며, 영상을 끝까지 감상하고 본인의 소감을 남겨야 합니다. 우리가 평소에 자각하지 못하지만 구독자들이 댓글 한 줄 남기려면 번거로운 과정들을 거쳐야 합니다. 그만큼의 수고를 들여 만든 유튜브 영상이 재미있었다는 댓글이 달릴 때 가장 뿌듯합니다.alt촬영과 편집 등 제반 업무가 만만치 않은데 힘들지는 않은가요?당연히 힘듭니다. 영상을 기획하고 촬영하고 편집하는 건 물리적인 시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작업입니다. 특히 제가 독립운동사 전공이 아니기 때문에 역사와 관련된 기획을 할 때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독립운동사에 전문 지식을 지닌 직원들이 발 벗고 나서서 도와주고, 재미있게 시청해주고, 새로운 시도를 적극적으로 지지해줘서 아직까지는 즐거움이 더 앞서고 있습니다. alt독립기념관에 새로 설치된 야외 쉼터 ‘길가온’ 소개유튜브 운영에 목표와 추구하는 방향이 있다면?공공기관에서 구독자 100만 명 달성이라는 기록을 세우면 좋겠습니다. 사실 특정 구독자 수가 목표인 것은 아닙니다. 독립기념관은 독립운동사를 다루는 기관 중 가장 규모도 크고 역사가 깊은 곳이라는 자부심이 있기 때문에 유튜브 또한 활성화되어 독립운동사를 올바로 알리는 좋은 길잡이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독립운동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너무 무겁고 어려운 주제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좀 더 가볍게, 더 많은 사람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주제로, 끼 많은 독립기념관 직원들이 적극적으로 수면 위로 올라올 수 있는 계기를 만들고 싶습니다. alt콘텐츠 기획·촬영·편집을 소화하는 일등 일꾼 김병훈(좌) / 독립기념관 유튜브에 업로드된 영상(우)             ]]> Tue, 29 Jun 2021 10:31:41 +0000 56 <![CDATA[독자이벤트 이번 호 독립기념관을 읽고 빈칸을 채워주세요. 꼼꼼히 읽다 보면 정답에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altalt아이콘 클릭하면 퀴즈 정답을 보낼 수 있습니다.]]> Tue, 29 Jun 2021 14:43:07 +0000 56 <![CDATA[들어가며 태극기가 바람에 펄럭입니다]]> 건곤 감리 청홍백 건곤 감리 청홍백태극기가 바람에 펄럭입니다.저 하늘높이 외로이 서서 오늘도 쉬지 않고비가와도 꿋꿋하게 바람에도 씩씩하게오늘도 힘차게 펄럭이며 힘을 내라고여름더위 참아내고 겨울추위 이겨내고 용기 내라고저 하늘높이 외로이 서서 내일도 쉬지 않고 펄럭이겠지.손에 들고 흔들며 우리 모두 하나 되어나라사랑하는 마음 온 땅에 넘치네.아름다운 태극기 펄럭입니다.태극기가 바람에 펄럭입니다.3·1운동 100주년 창작곡 〈태극기가 바람에 펄럭입니다〉 ]]> Tue, 27 Jul 2021 10:23:32 +0000 57 <![CDATA[톺아보기 태극기의 유래와 독립운동에 미친 영향]]> 글 송명호(전 문화재청 근대문화재전문위원) 일제는 태극기 게양 자리에 일장기를 게양하고 태극기 유래까지 조작하여 말살하려 했지만 태극기를 통해 국권을 회복하려는 정신력과 독립운동의 원동력은 꺾지 못했다. 오히려 국권을 상실해 분노한 대한의 국민들에게 정신적 지주로 승화하여 독립운동의 원동력으로 작용하였다. alt                                 감은사지 금당 석재에 새겨진 태극 문양(왼쪽) / 경복궁 근정전 계단의 태극석(중앙) / 신덕왕후 묘 병풍석 태극 문양(오른쪽)태극기의 시초지구촌의 나라 국기는 올림픽 참가 기준으로 206개이다. 세계의 국기들을 살펴보면 공통적으로 삼색 줄과 십자형 밑그림에 별·달·해를 넣어 제작하고 있어, 한데 모아 놓으면 비슷비슷하고 어느 나라 국기인지 구별하기가 쉽지 않다. 반면 우리나라 국기는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하고 유일한 태극 문양과 4괘로 구성되어 있어서 세계의 국기들 가운데서도 눈에 확 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국기인 태극기는 언제 만들어졌을까? 태극기가 처음으로 제작되어 그 모습을 세상에 알린 것은 1882년 9월 25일이었다. 1882년 7월 23일에 발생한 임오군란을 긴급히 수습하기 위해 고종은 박영효를 특명전권대신 겸 수신사로 임명하고 일본으로 파견하였다. 이때 고종은 국기를 미처 준비하지 못하였으니 운송하는 배 안에서 태극 문양과 건곤감리의 4괘를 갖춘 국기를 만들어 사용하라고 지시하였다. 이 같은 사실을 일제의 중앙지 신문 『시사신보』는 10월 2일자에 크게 보도하였다. 그 기사 내용을 보면 이렇다.조선이 국기를 만들려고 하자 청나라에서 마건충을 사신으로 보내 청룡기를 국기로 만들어 사용할 것을 간섭하였다. 그러나 고종은 절대로 청나라 것을 따라 하지 않겠다 선언하였고, 태극 문양에 4괘를 그려 국기를 만들도록 지시하였다.고종의 지시에 따라 박영효는 국기를 처음으로 만드는 일이라서 일본이 제공한 메이지마루호를 타고 가던 중 함께 간 서광범, 김옥균, 김만식, 영국 영사 아스톤, 선장 제임스와 논의해 태극기를 만들었다. 맨 처음에 논의할 때는 태극 문양에 8괘를 배치하려고 했는데, 그렇게 되면 너무 복잡하다는 반대 의견이 있어 고종이 지시한 대로 건곤감리 4괘만을 채택하기로 하였다. 이렇게 최초의 태극기가 탄생하였고, 9월 25일 고베에 도착한 일행이 니시무라야 숙소에 게양하였다. 박영효가 수신사로 일본에 머무른 동안에 일본, 영국, 미국, 벨기에, 청나라, 프랑스, 네덜란드, 스페인, 이탈리아 등 외국의 공사들은 “태극기 모양이 너무 독특하고 예뻐서 크게 감탄하였다”며 그 모양을 그려갈 정도였다고 한다.박영효 수신사가 임무를 무사히 마치고 귀국한 후 1883년 3월 6일(음력 1월 27일)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현 외교부)에서 “국기를 이미 제정하였으니 팔도(八道)와 사도(四都)에 알리어 사용할 것”을 건의하였고, 이는 곧 받아들여져 공포되었다. 여기서 ‘국기를 이미 제정하였다’는 뜻은 고종의 지시에 의해 박영효 수신사가 1882년 9월에 만들어 사용했던 것을 말한다.  alt청나라의 삼각 황룡기, 청나라는 조선에게 황룡기를 변형해 국기로 사용할 것을 제안하였다.(왼쪽) / 태극기 말살을 위한 조선총독부 칙령 19호(오른쪽)        태극기 말살 정책태극기가 국기로 정해지고 국민들에게 널리 보급되기도 전, 1910년 8월 29일 일제가 대한제국의 통치권을 강탈한 경술국치로 태극기도 함께 말살되기 시작하였다. 조선총독부는 1912년 칙령 19호에 의해 일장기를 대대적으로 보급하고, 휴일이나 기념일에 일장기를 게양하도록 함으로써 태극기를 말살하려 들었다. 황실에 망신을 줄 요량으로 황실 축제일에도 일장기를 게양하도록 하고 대한제국의 존재를 없애려 하였다. 1927년에는 국기게양설비신설 명령을 보내 전국의 형무소와 관공서에 높이 18미터 국기게양탑을 설치하도록 하였다. 관공서와 학교는 말할 것도 없었고, 전국 곳곳에 일장기를 게양하도록 하여 태극기의 흔적을 완전히 지우려 하였다. 심지어 깊은 산속 사찰에까지 일장기를 보급해 게양하도록 강요했다. 국민들 기억 속에 태극기 모양은 점차 희미해져 갔다. 사정이 그렇다 보니 일제의 눈을 피해 몰래 만든 태극기의 문양이 만드는 사람에 따라 각기 다른 모양이었다.그러다 광복이 된 후 1949년에 이르러 태극기는 대한민국의 정식 국기로 선정되었다. 그런데 와중에 태극기가 48종류나 등장해 어느 모양이 진짜인지 고르는데 애를 먹었다. 태극 문양의 배열과 4괘의 위치, 색깔과 크기가 모두 달랐다. 태극기를 처음 만들었을 때는 분명히 하나였을 텐데 그 지경이 된 것은 일제 36년 동안의 태극기 말살 정책 때문이었다. 결국 국기시정위원회를 구성하여 48종류 중에 하나를 선정하였고, 수차례 논의를 거쳐 1949년 10월 15일에 현재와 같은 태극기를 국기로 채택하였다.일제의 태극기 음모론한때 ‘태극 문양의 태극기가 중국 것이다’라고 헛소문이 퍼진 적이 있는데, 이는 일제가 퍼뜨린 태극기 음모론 때문이었다. 태극 문양의 기원은 신라 682의 경주 용당리에 감은사(현재는 감은사지)의 금당 석재에 새겨진 신비의 문양이란 것이 그것을 증명해주고 있다. 감은사 태극 문양은 음양의 머리에 눈이 없는 것으로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의 궁궐 계단과 왕릉의 병풍석에 새겨 위엄을 높여 왔다. 지금도 경기도 양주시 회암동의 회암사지와 경복궁 근정전 계단, 창경궁의 명정전 계단, 동구릉의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 정자각 계단과 여러 왕릉의 병풍석에 또렷이 남아 있다. 그것이 유래가 되어 태극기의 중심 도안으로 활용되었던 것이다. 반면에 중국의 태극 문양은 기원과 문헌조차 분명하지 않을뿐더러, 모양에서도 우리나라 태극 문양과는 달리 음양의 머리에 눈이 박혀 있어서 우리의 것과 확실히 구분된다. 청나라 이홍장이 쓴 문서 『통상장성안휘편』의 대청국속고려국기를 보고 만든 것이라고 소문을 퍼뜨렸으나 그것은 1886년의 일로써 우리나라가 처음으로 국기를 제정·반포했던 1883년 3월 6일보다 훨씬 지나서 생긴 일이기 때문에 앞뒤가 맞지 않는 내용이었다. 독립운동의 정신적 지주태극기는 일제의 모진 말살과 음모론에도 굴하지 않고 국권을 상실한 시대에 살았던 국민들에게 정신적 지주로 승화하여 독립운동의 원동력이 되었다. 1919년 3월 1일 만세운동을 계기로 17세 태극기 소녀 유관순 열사의 처참한 순국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과 일제 강점기 36년 동안 국내는 물론 상하이에서 미국에서 만주에서 항일운동의 힘과 격려와 교훈이 되었다. 수많은 애국지사와 광복군이 일제와 싸우다가 목숨을 잃은 순간까지도 당당하게 “대한독립만세”를 외칠 수 있었던 것은 태극기 정신 때문이었다. 이러한 태극기 정신은 일제강점기 36년 동안 모진 말살에도 흔들리지 않고 결국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마주하게 하였다. alt(왼쪽부터) 박영효가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태극기(1882)가장 오래된 데니 태극기(1890)임시의정원 태극기(1919~1949)]]> Tue, 27 Jul 2021 10:25:14 +0000 57 <![CDATA[만나보기 태극기 속 다섯 영웅]]> 글 송명호(전 문화재청 근대문화재전문위원) 지금껏 이어져온 태극기 변천사를 살펴보면 각기 다른 모양일지라도 저마다의 역사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 가운데서도 현재 가장 오래된 태극기를 기증한 인물 데니와 대한제국 때부터 일제강점기 동안 항일운동의 상징이었던 네 점의 태극기와 관련 인물들을 소개한다. alt데니와 데니 태극기(국가등록 제382호)데니와 데니 태극기태극기를 말할 때 결코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데니 태극기’이다. 그도 그럴 것이 1882년 9월에 제작해 사용하였다는 최초의 태극기 실물이 아직 발견되지 않은 지금으로선 가장 오래된 것이기 때문이다.  미국인 데니(O.N. Denny, 1838~1900)는 외교 고문으로 1886년부터 1890년까지 업무를 수행하였다. 1886년 5월 3일 청나라 간섭에도 굴하지 않고 프랑스와 통상조약, 러시아육로통상조약 체결, 거문도 무단 점령 영국 극동함대 철수 등 많은 외교적 활동을 하였다. 또한 『청한론』을 발행하여 조선의 통치에 대해서 사사건건 간섭한 청나라를 신랄하게 비난하였다. 1890년 데니가 4년 동안의 임기를 마치고 귀국길에 오르자 고종은 태극기를 만들어 선물하였는데, 이를 데니의 후손이 1981년 대한민국 정부에 기증한 것이다. 1882년 박영효가 처음으로 만들어 사용했다는 태극기로부터 불과 7여 년 정도밖에 지나지 않은 것으로 볼 때 최초의 태극기도 데니 태극기처럼 생기지 않았을까 짐작할 수 있는 대목으로, 매우 중요하고 가치가 큰 태극기이다. 데니 태극기는 국가등록문화재 제382호이다.  alt고광순 초상화(왼쪽) / 불원복 태극기(국가등록 제394호)(오른쪽)고광순 의병대장과 불원복 태극기고광순(1848~1907) 의병장은 전남 담양 출신으로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순절했던 고경명 의병장의 12세 손이다.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명성황후 시해자를 처단하기 위해 각 읍에 격문을 띄우고 의병을 불러 모아 서울로 가던 중 조정에서 파견한 선유사(宣諭使)의 권고로 애석하게도 의병을 해산하고 말았다. 그렇다고 의병 활동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1905년부터는 을사늑약 무효를 주장하며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1906년 4월 최익현 선생이 순창에서 의병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갔으나 최익현 선생이 이미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된 뒤였다. 1907년 1월에는 독자적으로 담양군 창평에서 부대를 조직하여 항일의병활동을 시작하였다. 비장한 각오로 지리산 연곡사에 본영을 차리고 항일의병 장기전에 돌입하면서 ‘멀지 않아 나라를 되찾는다’는 의미의 ‘불원복(不遠復) 태극기’를 만들어 부대 입구에 게양했다. 의병들은 그 태극기를 보면서 반드시 일제를 몰아내고야 말겠다는 각오를 다졌다. 이 첩보를 입수한 일제는 1907년 10월 15일 군경 합동 중포대대를 이끌고 야간에 연곡사를 급습하였다. 고광순 의병대는 치열하게 대항했으나, 의병의 무기로는 일제의 대포를 제압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일제 중포대대는 연곡사를 점점 조이면서 불을 질렀다. 고광순 의병대는 불길을 피할 수가 없었다. 다음날 새벽 모두 불길에 처참하게 순절하고 말았다. 시신은 인근 마을 사람이 임시로 묻어두었는데, 며칠 후 매천 황현이 수습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고광순 의병장은 일제의 한을 품고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남긴 의병활동의 정신적 지주였던 불원복 태극기는 국가등록문화재 제394호로 등록되었다. alt배설과 배설 태극기(국가등록 제483호)배설과 배설 태극기영국인 베델(1872~1907)은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1904년 3월 데일리메일의 특파원 자격으로 대한제국에 왔다. 베델은 영국 공사의 안내로 광무황제를 알현하였는데, 특별한 환대와 함께 ‘배설(裵說)’이란 이름을 하사받았다. 이때부터 배설이란 이름을 썼고 일제의 침략을 낱낱이 취재하여 본국 신문을 통해 신랄하게 비난하였다.그해 7월 18일 양기탁과 함께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하였다. 언론을 통해 대한제국을 집어 삼키려는 일제의 만행을 널리 알리기 위해서였다. 태극기를 손수 만들어 영국기와 함께 나란히 사장실에 게양하였다. 1905년 11월 17일 학부대신 이완용, 상공부대신 권중현, 내부대신 이지용, 외무대신 박제순, 군부대신 이근택 등 을사5적은 대한제국의 외교권 박탈과 조선통감부 설치를 담은 을사늑약에 찬성 표를 던졌지만, 배설은 이를 무효라고 주장하며 세계 언론에 전달하였다. 배설의 언론 활동은 일제가 볼 때 눈에 가시일 수밖에 없었다. 일제는 영국 정부에 배설의 언론 활동이 동맹국으로써 해를 끼친다고 압력을 넣었고, 서울에 설치된 영국 총영사관이 재판하도록 설득해 옥고를 치르게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배설이 국채보상운동 의연금을 횡령하여 호의호식한다는 가짜 뉴스를 퍼뜨려 만신창이가 되도록 스트레스를 주었다. 이것도 모자라 온갖 무자비한 강압으로 배설과 양기탁을 대한매일신보사에서 물러나게 한 후 통감부 산하 언론기관으로 만들었다. 배설은 옥고를 치르고 일제의 온갖 음모에 스트레스를 받다 못해 1909년 5월 1일 순절하였다. 장례식 날 양화진 외국인 묘지로 가는 운구 행렬에는 흰옷을 입은 조문객 1,000여 명이 구름처럼 뒤를 따르며 통곡하였다. 1968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고, 신문사에 게양했던 태극기는 국가등록문화재 제483호로 등록되었다.  alt김구와 김구 서명문 태극기(국가등록 제388호)김구와 서명문 태극기김구(1876~1949)의 임시정부 국무회의 주석 시절이었다. 1941년 광복운동을 돕던 벨기에 신부 매우사(미우스 오그)가 미국을 간다고 하니, 독립운동자금을 호소한 글을 태극기 바탕에 친필로 쓰고 서명해서 주었다. 그 내용은 이러했다.“매우사 신부에게 부탁하오.당신은 우리의 광복운동을 성심으로 돕는 터이니 이번 행차에 어느 곳에서나 우리 한인을 만나는 대로이하 기구의 말을 전하여 주시오. 망국의 설움을 면하려거든 자유와 행복을 누리려거든 정력·인력·물력을 광복군에 바쳐서 강노말세인 원수 일제를 타도하고 조국의 독립을 완성하자.”절박했던 임시정부의 독립자금 사정과 일제를 타도하여 독립국가를 세우자는 김구 주석의 애국정신이 글자마다 눈물겹다. 이 태극기는 안창호의 부인 이혜련에게 전달되었다가 독립기념관에 기증되었다. 국가등록문화재 제388호이다. alt백초월과 진관사 소장 태극기(국가등록 제458호)백초월과 진관사 소장 태극기스님 백초월(1878~1944)은 1919년 11월에 의친왕과 함께 제2의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다.1920년 무렵 진관사에서 수도를 하던 백초월은 마냥 이렇게만 있을 수 없다면서 항일운동을  결심하고, 일장기의 빨강 동그라미 위에 붓으로 덧칠한 태극기를 칠성각 벽체 속에 숨겨 놓고 홀연히 떠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일장기에 덧칠하여 태극기를 그린 것은 반드시 일본을 딛고 일어서겠다는 비장한 각오의 의미였다. 백초월은 1999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고, 그때의 태극기는 2009년 5월 칠성각 보수 작업 중에 발견되어 국가등록문화재 제458호로 등록되었다.]]> Tue, 27 Jul 2021 10:26:36 +0000 57 <![CDATA[이달의 독립운동가 일장기 말소로 표현한 마라톤 우승의 감격 민족의 자부심을 일깨우다 ]]> 글 독립기념관 전시부alt(왼쪽부터)여운형(呂運亨) / 1885~1947 / 경기도 양평 / 건국훈장 대통령장(2005), 대한민국장(2008)송진우(宋鎭禹) / 1890~1945 / 전라남도 담양 / 건국훈장 독립장(1963)이길용(李吉用) / 1899~미상 / 서울 / 건국훈장 애국장(1990)올림픽 마라톤 우승자 손기정의 가슴에서 일장기를 지우다1936년 8월 제11회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경기에서 손기정이 올림픽 신기록을 세우며 우승하였다. 『동아일보』와 『조선중앙일보』 등 한글 신문은 세계 대회에서 당당히 우승한 ‘한국인’ 손기정을 강조하며 우승 시상식 속 유니폼에 새겨진 일장기를 지운 사진을 신문에 게재하였다. 이 때문에 신문이 정간되거나 관련 인사가 면직되었다. 올해 85주년을 맞은 이른바 ‘일장기 말소사건’은 일제의 언론 탄압이 거세지는 시점에 민족의 자부심을 고취시켰으며 언론의 항일정신을 보여주었다. *말소기록되어 있는 사실 따위를 지워 없애 버림 alt결승선을 통과하는 손기정(1936. 8. 9.)(왼쪽) / 손기정이 친구에게 보낸 엽서(1936. 12. 8.)_ 손기정기념관 제공(오른쪽)최초의 일장기 말소기사를 보도한 『조선중앙일보』 사장 여운형, 민족 여론을 대변하다한글 신문들은 손기정의 승리를 한국인이 이룬 쾌거로 간주하여 민족 자부심을 높이는 사설과 기사를 게재하였다. 그 가운데 『조선중앙일보』는 1936년 8월 13일, 신문 가운데 최초로 일장기를 지운 사진과 함께 손기정 마라톤 우승 기사를 게재하여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고 단결을 유도하였다. 한편 8월 25일자 『동아일보』 일장기 말소 기사가 일제에 의해 검열되면서 『조선중앙일보』 기사도 수사되어 신문 정간 위기를 맞이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조선중앙일보』 사장 여운형은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기사 보도를 지지하며 언론인으로서 민족 여론 대변에 힘썼다. 정부는 여운형의 공훈을 기리어 2005년 대통령장·2008년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alt「머리에 빛나는 월계관, 손에 굳게 잡힌 견묘목」, 『조선중앙일보』 (1936. 8. 13.)_국사편찬위원회 제공(왼쪽)「영예의 우리 손군」, 『동아일보』 (1936. 8. 25.)_국사편찬위원회 제공(가운데)『동아일보 기자 취조 보고서』(1936. 8. 28.)_국사편찬위원회 제공(오른쪽)『동아일보』 기자 이길용과 사장 송진우, 일장기 말소기사 보도로 민족의식을 드높이다『동아일보』도 손기정의 올림픽 마라톤 우승을 맞아 일장기 말소 기사 보도로 민족적 기쁨을 표현하였다. 『동아일보』 체육부 기자 이길용은 1936년 8월 25일 올림픽 활동사진 상영회 광고를 위해 올림픽 마라톤 시상식에 선 손기정 유니폼에서 일장기를 지우고 사진을 흐릿하게 발행하는 등 일장기 말소를 주도하였다. 『동아일보』 사장 송진우는 일장기 말소사건 직후 일제로부터 무기정간 통보를 받자 모든 책임을 지고 사장직에서 면직되었다. 일장기 말소기사로 민족의식을 드높인 이길용·송진우의 공훈을 기리어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길용), 1963년 독립장(송진우)을 추서하였다. alt‘양정 환영의 밤’ 행사에 참가한 손기정과 여운형(1934)_손기정기념관 제공제군은 비록 가슴에는 일장기를 달고 가지만 등에는 한반도를 짊어지고 간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베를린 올림픽 출전 선수 환송식에서한 여운형의 환송사(1936)alt]]> Tue, 27 Jul 2021 10:29:43 +0000 57 <![CDATA[아름다운 인연 역사를 통해 민족정신과 독립정신을 일깨운 신채호와 박자혜 부부]]> 글 김형목(사단법인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이사) 1920년 봄 옌징대학 의예과에 다니던 박자혜는 이회영의 부인 이은숙의 중매로 중국 상하이와 베이징 등지를 돌아다니며 독립운동을 하고 있던 신채호를 처음 만났다. 둘은 열다섯이라는 나이 차가 있었지만, 박자혜는 신채호의 인물됨과 독립을 향한 큰 뜻에 감명받아 결혼을 결심하게 된다. alt 단재 신채호          주체적인 사관에 입각한 근대역사학 토대를 마련하다단재 신채호에 대한 평가는 매우 다양하다. 언론인, 역사학자, 계몽활동가, 독립운동가, 아나키스트 등으로 성격 규정은 이러한 사실을 방증한다. 단재야말로 ‘과학적 역사학’을 주장하며 우리 근대역사학을 수립한 역사가가 아닐까. 그에게 역사 연구는 학문적인 영역을 넘어 침잠되는 민족의식을 일깨우는 시대적인 소명의식에서 비롯되었다. 신채호는 수많은 독립투사들 중 박은식·안재홍·정인보·문일평 등과 함께 붓으로써 대쪽 같던 민족적인 절개를 지킨 실천적인 지식인이었다. 정치한 고증과 현장 답사로 생생하고 주체적인 민족사관 정립은 한국사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킨 첫걸음이었다. “역사는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다”라는 결론은 우리 역사에 대한 강한 자부심과 냉철한 역사인식과 무관하지 않다. 나아가 8·15광복은 독립군의 항전과 더불어 독립정신을 고취한 선각자가 있었기에 가능했다.언론을 통한 계몽운동에 앞장서다1880년 12월 8일(음력 11월 7일)에 충남 대덕군 산내면(현 대전광역시 중구 어남동)에서 출생하였다. 본관은 고령, 필명 금협산인·무애생, 호는 단재·일편단생·단생 등이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8세에 본향인 충북 청원군 낭성면 귀래리로 이사하였다. 16세에 풍양 조씨와 결혼하여 아들을 두었으나 요절하였다. 신기선의 추천으로 성균관에 들어가 성균관 박사로서 뛰어난 지적 능력을 발휘해 명성이 자자했다. 그는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 논설위원과 주필을 맡아 언론인으로서 계몽운동에 앞장섰다. 일제 침략에 대한 비판적인 논조는 식민당국자들을 당혹스럽게 만드는 가시와 같았다. 많은 영웅전과 역사 논문을 통한 민족의식 앙양은 자신의 책무로 인식하고 실천하였다. 신민회와 국채보상운동 등에 참여하는 동시에 1908년 한글로 된 『가정잡지』를 발행하였다. 또한 『대한협회회보』와 『기호흥학회월보』 등에 논설을 발표하는 한편 일진회 성토에 앞장섰다. 독립운동가로서 본격적인 활동에 나서다1910년 4월 신민회 동지들과 협의 후 중국 칭다오로 망명하여 그곳에서 안창호·이갑 등과 향후 독립운동 방안을 협의하였다. 이어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권업신문』에 많은 역사 관련 글을 남겼다. 신문이 강제 폐간되자 중국 동북지역(만주)과 백두산 등 한민족의 고대 활동 무대를 답사했다. 사적지를 돌아보던 단재는 고구려에 대한 역사를 기록해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한 역사서도 발간하였다. 돈이 없어 일본인이 파는 광개토대왕비 탁본을 가격만 물어보고 사지 못한 일화는 심금을 울린다.1915년 중국 상하이로 활동 근거지를 옮겨 신한청년회 조직에 참가하면서 박달학원의 설립·운영에도 힘썼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해 의정원 의원과 전원위원회 위원장 등을 역임하였다. 한성 임정 정통론과 이승만 배척운동 등 내분으로 사퇴하고 주간지 『신대한』을 창간해 임시정부 기관지인 『독립신문』과 맞서기도 하였다.단재의 애국에 대한 일념은 이승만을 이완용보다 더 큰 역적으로 인식한 대목에서도 엿볼 수 있다. “이완용 등 이른바 을사오적은 있는 나라를 팔아먹었지만, 이승만은 아직 우리나라를 찾기도 전에 있지도 않은 나라를 팔아먹은 자란 말이오”라고 외치며 임시정부를 박차고 나와 외로이 독립투쟁에 전념하였다.이후 비밀결사 대동청년단 단장, 신대한청년동맹 부단주 등에 피선되었다. 1923년에는 민중의 직접 폭력혁명으로 독립 쟁취가 가능하다는 「조선혁명선언」을 기초함으로 독립운동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임시정부 창조파의 주동적인 역할을 하다가 다시 베이징으로 옮겨 다물단을 지도하였다. 와중에 중국과 본국의 신문에 논설과 역사 논문을 발표하였다.무정부주의를 신봉하여 무정부주의 동방동맹에 가입해 1928년 잡지 『탈환』 발간에 앞장섰다. 동지들과 협의한 뒤 외국환을 입수해 자금을 조달하고자 타이완으로 가던 중 지룽항에서 체포되어 10년형을 선고받았다. 뤼순감옥에서 복역 중에 1936년 2월에 갑자기 옥사하였다. 신채호의 유골은 뤼순감옥에서 순국한 뒤 화장된 채 서울에 도착하였다. 이후 청주로 운구되어 고향인 귀래리 옛 집터에 암장되었다. 1941년에야 한용운과 오세창 등이 묘표비를 세웠고, 2008년 5월에 영당 뒤 현재 위치에 묘역이 조성되었다.단재는 독립투쟁을 전개하는 동안 “독립이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쟁취하는 것이다”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이는 그의 역사 연구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고조선과 묘청의 난 등을 새롭게 해석하는 단초를 제공하였다. 단재는 우리 역사에서 주체적이지 못한 역사적인 사실을 비판하였다. 외세 의존적이고 굴종적인 인식에 대한 비판은 다음 글에서 엿볼 수 있다.“석가가 들어오면 조선의 석가가 되지 않고 석가의 조선이 되며, 공자가 들어오면 조선의 공자가 되지 않고 공자의 조선이 되며, 무슨 주의가 들어와도 조선의 주의가 되지 않고 주의 조선이 되려한다. 그리하여 도덕과 주의를 위하여 조선은 있고 조선을 위하는 도덕과 주의는 없다.”  alt단재 신채호 어록비(독립기념관 경내)       ‘아기나인’에서 간호부가 변신하다박자혜는 1895년 12월 11일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수유리(현 서울특별시 도봉구 수유동)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중인 출신의 박원순이다. 일찍이 어머니가 사망하여 어린 나이에 궁궐의 견습 나인으로 입궁해 10여 년 동안 궁중생활을 하였고, 일제의 강점으로 대한제국이 망하면서 궁에서 나오게 되었다. 1911년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 기예과에 입학·졸업하고 조선총독부의원 부속 의학강습소 간호부과를 입학·졸업하였다.조선총독부 부속병원의 조산원으로 근무하던 중 1919년 3·1운동이 일어났다. 이필주 목사와 연락을 취하면서 이 병원 조산원과 간호원들로 조직된 간우회 회원들과 함께 유인물을 배포하였다. 병원에 부상 환자들이 줄을 잇자 치료하는 과정에서 민족적인 울분을 느끼는 동시에 야만적인 탄압에 몸서리를 쳤다. 3월 10일에는 비밀리에 간우회원들을 규합해 만세시위운동을 주도하였다. 이어 같은 병원 동료들과 열변가인 김형익 등의 한국인 의사를 규합하고 시내 국·공립 병원 직원들의 동조를 얻어 태업을 주도하다가 일본경찰에 체포되었다. 병원장의 신병인도로 다행히 풀려났으나, 이로 인해 국내에서 활동이 어렵게 되자 중국으로 떠났다. 일제의 감시보고서인 『사찰휘보』는 박자혜를 다음과 같이 평했다. ‘평소 과격한 언동을 하는 언변이 능한 자’, ‘조선총독부 의원 간호부를 대상으로 독립만세를 외치게 한 주동자’로 주목하고 있었다. alt『동아일보』에 실린 산파소 경영난 기사(1928)     단재와 부부이자 동지로서 인연을 맺다박자혜는 베이징에서 옌징대학(현 베이징대학 전신) 의예과에 입학하였다. 1920년 봄에 15세 연상인 독립운동가 신채호와 결혼하였다. 단재와의 만남에 대해 훗날 이렇게 회고했다. “검푸르던 북경의 하늘빛도 나날이 옅어져 가고 만화방초가 음산한 북국의 산과 들을 장식해주는 봄 4월이었습니다. 나는 연경대학에 재학 중이고 당신은 무슨 일로 상하이에서 북경으로 오셨는지 모르나 어쨌든 나와 당신은 한평생을 같이 하자는 약속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중매로 인연을 맺어준 사람은 베이징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이회영의 부인인 이은숙 여사였다. 이듬해 아들을 낳고 다시 1922년 둘째를 임신했으나, 경제적 궁핍으로 아들과 함께 귀국하였다. 또한 베이징·톈진 등지의 독립운동가와 국내 인사들과 연락 임무도 있었다. 박자혜는 서울 인사동에 ‘박자혜 산파’를 개원하여 생계를 모색하였다. 대부분의 여성들은 출산을 산파에게 의존하지 않았기 때문에 생활이 매우 궁핍하였다. 결국 산파소는  일제의 감시와 방해로 사실상 문을 닫고 말았다. 『동아일보』에는 산파소 경영난에 대한 기사가 실리기도 했다. “열 달이 가야 한 사람의 손님도 찾아오지 않아 산파소 간판을 달아 놓은 것이 도리어 남에게 부끄러울 지경이다. 그러니 아궁이에 불 때는 날이 한 달이면 사오일이라. (중략) 산파소 간판이 걸린 초가집 대문을 넘어 문턱에 들어서자 부엌도 마루도 없는 한 칸 방에 박자혜가 앉아있었다. 부인의 얼굴을 차마 바라보기 어려웠다.”풀 장사나 참외 장사 등 노점상도 마다하지 않았다. 어머니로서 자녀를 기르고, 동지로서 중국에 있는 단재의 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 국내 지사들과 연락하거나 해외에서 밀입국해 활동하는 독립운동가들도 도왔다. 1924년 정의부가 결성된 후에 군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정의부 요원이 국내로 파견되었을 때 보천교 북(北)방주 한규숙을 중개하였다. 1926년 12월에는 나석주의 동양척식주식회사 폭탄 투척을 안내하는 등 독립지사들의 연락과 편의를 제공하였다. 이듬해 신채호와 베이징에서 재회해 셋째 아들을 출산하였다.1928년 신채호가 일경에게 체포되니 책과 옷 등을 구입해 보내주며 옥바라지를 하였다. 때로는 뤼순감옥에 있는 단재에게 하소연 섞인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정 할 수 없으면 고아원에 아이들을 보내라”는 단재의 답장이 돌아왔다. 그리고 단재는 “『국조보감』과 서양역사책을 사서 보내달라”고 요청하였다. 책값이 50원에 달하는 거금으로 여사는 안재홍에게 부탁했으나 사서 보내지 못했다. 이후 편지는 거의 오지 않았다. 1934년 『신가정』 기자는 ‘부군은 옥중에, 신산(辛酸)한 새해맞이, 신채호 부인 박자혜 여사 방문기’에서 당시 곤궁한 상황을 담담하게 밝혔다.1936년 신채호가 옥사한 뒤 첫째 아들 신수범은 일제의 감시와 탄압에 견디지 못하고 경성실업학교를 중퇴하고 해외로 떠났다. 셋째 아들 신두범은 1942년 영양실조로 사망하였다. 홀로 셋방에 살던 박자혜는 유일한 희망이었던 조국의 독립도 보지 못한 채 평생의 회한을 뒤로하고 1943년 10월 16일에 병고로 세상을 떠났다. 쓸쓸히 병사한 뒤 화장되어 한강에 뿌려졌다. 단재의 고혼이 외롭게 돌아와 고향에 깃들었듯이 박자혜의 삶과 죽음 역시 그러했다. 단재의 묘소에는 부인의 위패만 묻혀있을 뿐이다.]]> Tue, 27 Jul 2021 10:30:35 +0000 57 <![CDATA[인문학관 지지 않는 별 항일 시인 윤동주]]> 글 김동수(백제예술대학교 명예교수·시인) 일제강점기 한국의 문학은 국내문학과 해외망명문학 등으로 나뉘는데, 그중 국내문학은 조선총독부의 언론 탄압과 감시에 의해 서서히 친일문학으로 변질되어 갔다. 그런 와중에도 윤동주는 순결과 자기희생의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식민지 현실을 누구보다도 괴로워하였다. alt                       윤동주, 송몽규가 명동소학교 시절 만든 문예지 『새명동』 복간호(왼쪽) / 윤동주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초판본(1948)(오른쪽)어려서부터 고국에 대한 향수를 안고윤동주의 증조부인 윤재옥은 함경북도 종성에서 살다가 명동촌으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 이때 윤동주의 아버지 윤영석이 독립지사인 김약연의 누이동생 김용과 결혼해 1917년 12월 30일 윤동주를 낳았다. 할아버지는 기독교 장로였고, 아버지는 명동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윤동주는 1925년 8세의 나이에 명동소학교에 입학하였다. 윤동주의 일생에서 소학교 시절은 가장 중요한 시기였다. 그는 큰 기와집과 깊은 우물, 뽕나무밭과 과수원, 가랑나무가 우거진 기슭에 교회당이 있는 아름다운 환경 속에서 자랐다. 그의 생애 28년 중 감수성이 가장 예민한 소년 시절을 명동에서 보내며 기독교 신앙을 키워갔다. 그러기에 윤동주 시의 출발은 종교적 신앙에서 오는 순결한 동심과 거기에 비치는 동포들의 궁핍한 삶에 대한 연민의 정에서부터 비롯되었다. 소학교 4학년 담임교사였던 한준명 목사는 “동주는 어린 시절 공부를 잘하는 편이었어요. 어쩌다 문답을 하면서 대답이 막힐 때면 눈물이 핑 돌았던 기억이 나요”라며 “동주 할아버지가 그 동네에서 제일 부자였고 밭이 많았어요. 말을 기르고 있어 외출할 때는 그걸 타고 다녔지요”라고 회고했다. 윤동주는 고종사촌인 송몽규와 함께 서울에서 발간한 월간 『아이생활』과 『어린이』라는 잡지를 읽었다. 5학년이 되면서 송몽규와 함께 원고를 모아 『새명동』이란 신문 형식의 등사판 문예지를 만들어 동요 및 동시 등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그러다 1932년 윤동주의 교육을 위해 가족들은 룽징으로 터전을 옮겼고, 그의 나이 14세에 캐나다 선교부가 설립한 미션스쿨인 은진중학교에 입학하였다. 이때 그는 밤늦게까지 교내 잡지를 만드느라 등사 글씨를 쓰기도 하였고, 손수 재봉질을 하여 옷을 고쳐 나팔바지를 만들어 입기도 하였다. alt릿쿄대학 시절, 송몽규(앞줄 가운데)와 윤동주(뒷줄 오른쪽)광명의 제단에 타오른 촛불 하나 1934년  은진중학교 3학년 시절(17세)이었다. 그해 12월 고종사촌인 송몽규가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자, 이에 크게 자극을 받은 윤동주는 ‘대기는 만성’이라는 각오로 다시 시를 쓰기 시작하였다. 그때 쓴 첫 작품이 「초 한 대」였다. 윤동주와 소학교·중학교 동기인 문익환 목사는 이렇게 회고했다. “은진중학교가 있는 언덕 일대는 일본 순경이나 중국 관원들도 마음대로 출입할 수 없는 치외법권 지대여서 우리는 그곳에서 태극기를 휘두르며 애국가를 마음껏 부를 수 있었고 무척 신났었다. 그러다 동주가 시를 쓰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어둠이 빛을 이겨본 적이 없다(요한 1:15)’는 복음서의 말씀대로 역사를 바로 보는 눈이 열렸다.” 1935년 18세 되던 해에 윤동주는 5년제 중학교로 편입하기 위해 평양에 있는 숭실중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는 이곳에서 2학기(7개월)라는 짧은 시간을 보냈지만, 고향을 떠난 뒤 겪은 객지 생활의 외로움과 고뇌를 담아 15편의 주옥같은 시를 만들어냈다. 그러던 1936년 숭실중학교에서 신사참배를 강요하자 이를 거부하고 룽징으로 다시 돌아와 광명학원 중학부에 편입했다. 이때 북간도 옌지에서 발행하던 『가톨릭 소년』지에 용주(龍舟)라는 필명으로 「병아리」, 「빗자루」 등 30여 편의 동요·동시를 발표하였다. 1938년 광명학원 중학부 5학년을 졸업하고 4월에 송몽규와 함께 다시 서울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해 『조선일보』와 『소년』에 산문과 동요를 발표하였다. 그 유명한 「별 헤는 밤」과 「서시」도 이때 탄생한 것이다. 윤동주의 28년 생애에서 이 4년간의 연희전문학교 시절이 가장 풍요로우면서도 자유로웠던 시기였다. 윤동주는 “연희전문학교가 민족적인 정서를 살리기에 가장 알맞은 배움터였다”고 술회하기도 했다. 연희전문학교 시절 후배인 장덕순 교수에 의하면 “그는 얌전하고 말이 적은 외유내강형의 성격이었으나, 지조와 의지는 감히 누구도 어쩌지 못하게 강하였다”고 한다. 윤동주는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고 1942년 2월 도쿄 릿쿄대학교 영문과에 입학해 한 학기를 마치고, 그해 가을 교토의 도시샤대학교 영문과로 다시 전학하는 등 만 3년을 일본에서 살았다. 그러던 1943년 독립운동 혐의를 받고 송몽규와 함께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후쿠오카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윤동주는 모진 고문을 받다 1945년 2월 16일 28세의 나이로 옥사하였다.]]> Tue, 27 Jul 2021 10:32:53 +0000 57 <![CDATA[끝나지 않은 독립운동 우리나라 국호 ‘대한민국’의 탄생 과정과 의미]]> 글 이계형(국민대학교 교양대학 교수) ‘대한민국’ 국민 중, 우리나라 국호가 어떻게 해서 탄생했고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아는 이가 드물다. 8월 15일 정부 수립 73주년을 맞아 국호의 탄생 과정과 그 의미를 되새기고자 한다. 먼저 대한민국의 국호가 대한제국에서 비롯되었으니 그때부터 살펴보도록 한다. 국호의 유래와 변천사근대 이전의 조선은 중국의 천자와 대등한 위치에 있지 못했다. 갑신정변(1884), 갑오개혁(1894) 당시 조선은 국왕의 지위를 황제로 높이고자, 국호를 ‘대조선왕국’에서 ‘대조선제국’으로 바꾸려 하였지만 실패하였다. 그러다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패하면서 수백 년 동안 이어져 온 중국과의 사대 관계의 고리가 끊어져 기회가 찾아왔다. 이를 계기로 1896년 1월 조선은 독자적으로 ‘건양’ 연호를 사용하고 국왕을 ‘황제’로 격상시키려 했으나 아관파천으로 중단되었다. 1897년 2월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에서 경운궁으로 환궁한 뒤부터 개화파·수구파 할 것 없이 ‘칭제 건원’을 상소하였다. 이에 힘입어 1897년 8월 연호를 ‘광무’로 고치고 ‘칭제’ 작업을 본격화하면서 국호 문제가 논의되기 시작했다. 고종은 단군과 기자 이래로 강토가 나뉘어 서로 자웅을 다투다가 마한·진한·변한이 통합했다며, 국호를 ‘조선’에서 ‘한(韓)’으로 고쳐 대한(大韓)으로 정하도록 했다. 그 뒤 1897년 10월 12일, 고종은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고, 다음날 ‘대한제국(大韓帝國)’을 국호로 공식 선포하였다. 당시 ‘대(大)’는 ‘크다’, ‘전부’, ‘모두’라는 뜻으로 관용 접두사로 사용되었고, ‘제국’은 국가의 통치 형태를 말하는 것이니 실제 국호는 ‘한’이었다.하지만 1910년 8월, 대한제국은 10여 년 만에 망하였다. 주권을 일제에 넘겨주고 말았다. 그로부터 9년이 흘러 3·1운동이 전국을 뒤흔들었고, 한성을 비롯해 중국 상하이와 연해주 등지에 임시정부가 세워졌지만 이내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통합하였다. 이때 국호가 ‘제(帝)’에서 ‘민(民)’으로 한 자만 바뀌었다. 황제국에서 주권재민의 공화제로 탈바꿈한 것이다. 이후 27년 동안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굴곡이 있었지만, 한민족 구성원들에게 독립의 희망을 심어주었다. 35년 동안 일제의 강압적인 식민통치에서 벗어나 꿈에 그리던 광복을 맞았지만,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한반도의 주인공이 되지 못하였다. 한반도는 미소 간의 냉전으로 남북으로 갈렸고, 남쪽은 미군에 북쪽은 소련군에 점령당하였다. 미군정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김구를 비롯한 요인들은 개인 자격으로 귀국하였다. 김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이라는 직함으로 활동하면서 통일운동을 전개하였지만, 남북 분단이 현실화되어 가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통성은 점점 힘을 잃고 말았다. 1945년 12월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신탁통치 발표 이후 한반도는 미소 냉전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었다. 찬탁과 반탁으로 남과 북이 극명하게 갈렸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고자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렸지만, 양자 간의 견해차만 확인했을 뿐 아무런 성과도 없이 끝났다. 결국 1948년 2월 한반도 문제는 UN으로 넘어갔고 소총회에서 남한만의 단독선거 시행이 결의되자 김구는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함’을 발표하여 분단을 막아보고자 하였지만 허사였다.alt                                                (왼쪽부터) 대한제국의 ‘대한국새’,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임시의정원인’, 대한민국의 ‘국새’국호 ‘대한민국’의 탄생1948년 5월 남한 만의 총선거가 시행되어 제헌국회가 출범하면서 독립 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준비 작업에 들어갔다. 이때 제정된 헌법의 제1장 총강에서 가장 주목되는 점이 국호 문제였다. 이를 두고 헌법기초위원회 위원들 간에 격론이 벌어졌다. 자손만대에 전할 존엄한 국체의 표상이었기에 신중에 신중을 기한 것이다. 결국 표결로서 ‘대한민국’으로 결정되었다. 당시 ‘대한민국’ 17표, ‘고려공화국’ 7표, ‘조선공화국’ 2표, ‘한국’ 1표였다. ‘대한’으로 결정한 것에 대해 “삼일운동 이후 우리 민족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라는 이름으로 광복 운동을 계속하였다. 또 개원식을 거행할 때 의장 식사에도 ‘대한’이라는 명칭을 사용한 것”을 이유로 들었다. “일본으로부터 배상을 받아오려면 과거의 ‘대한국’이라는 국호래야 청구할 수 있다”는 주장도 주효하였다. “대한으로 망했으니 대한으로 흥해야 한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있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국회의원 상당수는 고려공화국을 선호하였다. 이들은 새 국가를 상징하는 국호로는 ‘고려’가 타당하다며 세계에서 ‘코리아’로 알려진 점을 가장 큰 이유로 내세웠다.본회의에서 ‘대한민국’을 국호로 사용하는 것에 여러 의원의 찬반 토론이 이어졌다. 대한민국의 국호 사용을 지지하면서 만약 다른 국호를 사용한다면 임시정부의 요인들이 ‘대한’의 간판을 들고 나올 것이고 그러면 분열과 혼란이 야기될 것이라 우려하는 국회의원도 있었다. 헌법 1조에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고 한 것에 ‘민국’과 ‘민주공화국’이 중복되는 것이라며 이의를 제기하기도 하였다. 결국 본회의에서 원안대로 ‘대한민국’ 국호로 최종 결정되었다. 다만, 대외적으로 대한민국은 여전히 ‘KOREA’를 사용하기로 하였다. 이에 김구는 “대한민국 국호를 어떠한 사람이 계승한다고 할지라도 세계 각국에서 승인을 받을 만한 조건을 갖춰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그 조건이란 임시정부가 이를 이양한다고 하더라도 남북총선거를 통한 남북통일 정부가 아닌 이상 반쪽 정부로서는 계승할 근거가 없다며 부정적인 견해를 내비쳤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해방 3년 만인 1948년 8월 15일 독립 국가인 대한민국 정부가 탄생하였고, 북한에서는 그해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다. 대한민국의 역사는 전제 왕권 사회에서 비롯되었지만, 일제의 식민지를 경험하면서 민주공화제로 바뀌어 유지되었고, 광복 이후 독립 국가의 국호로 정해져 지금에 이르고 있다. 오늘날 대한민국은 세계 속에서 당당하게 이름을 드높이고 있다. 최근에는 세계로부터 지원을 받아야 했던 개발도상국 지위에서 선진국 그룹으로 격상되었다. 이제 대한민국은 주체적으로 역사를 새롭게 쓰면서 세계를 주도하는 일원으로서 맡은 바 책임과 의무를 다해야 할 것이다. ]]> Tue, 27 Jul 2021 10:34:12 +0000 57 <![CDATA[독립의 발자취 수원 산루리의 독립 영웅을 추모하며]]> 글 편집실 수원박물관은 개관 이래로 수원 출신 독립운동가들의 행적을 밝혀 독립유공자로 추서하는 데 힘써왔다. 올해는 독립운동가 이선경이 수원 구국민단 사건으로 체포되어 순국한 지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이선경을 비롯해 독립을 위해 투신한 여러 독립운동가들의 생을 살펴보고, 현재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맞바꾼 숭고한 희생임을 기억하도록 하자. 전 시 : 수원 산루리의 독립영웅들기 간 : 2021. 10. 3. 까지장 소 : 수원박물관 1층 기획전시실문 의 : 031-228-4150참 고 : 코로나19 방역 지침에 따라 시간대별 관람 인원 제한, 매주 월요일 휴관alt팔달문 밖 시장이번 테마전을 기획하게 된 취지에 대해 말씀해주세요.올해는 수원 구국민단으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 이선경이 체포되어 온갖 고문을 당한 끝에 순국한 지 100년이 되는 해입니다. 이번 전시는 이선경을 비롯한 산루리 출신의 독립영웅들을 함께 조명하기 위해 기획되었습니다. 이번 테마전에서는 독립운동가들의 사진 및 관련 유물·자료 등 100여 점을 공개하여 산루리와 신작로 일대 등 일제강점기 당시 수원의 모습을 보여주고, 그곳에서 독립운동을 펼친 독립운동가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번 전시를 통해 독립영웅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수원 중에서도 산루리가 대표 지역이 된 이유가 있나요?수원 산루리(현 중동·영동·교동 일대)는 수원화성의 팔달문 밖에 있던 마을로, 일제의 식민지배가 시작되면서 수원에서 가장 먼저 침탈을 받은 지역입니다. 따라서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살았고 실제 활동했던 곳이기도 합니다. 산루리 지역 사람들은 일제의 수탈과 폭압적인 행동에 분연히 일어나 각자의 방식으로 독립운동에 나섰습니다. 그야말로 수원 독립운동의 산실이라 표현해도 무리가 아닐 것입니다.산루리의 역사에 대해서도 알 수 있나요?그렇습니다. 이번 전시에서는 1910년대와 1920년대 사진을 비교해보면서 일제 침탈의 근거지가 되었던 산루리의 아픈 역사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산루리는 오늘날 수원 중동과 교동을 비롯한 팔달문 밖 서남쪽 지역으로 일제강점기 시절 이름입니다. 조선시대 ‘산루동’으로 이름 붙었던 마을의 역사 자료부터, 일제강점기에 수원역부터 향교에 이르는 산루리 일대가 개발되어가는 모습, 산루리에서 만들어진 술병 등 유물도 함께 소개하고 있습니다.이선경 외에 다른 독립운동가들을 살펴볼 수 있나요?일제의 무고한 침탈을 목격하며 자란 청년들은 나라 잃은 슬픔을 독립운동으로 승화시켰습니다. 민족대표 48인으로 선정된 독립운동가 김세환부터, 1930년 수원소년동맹으로 활동했던 독립운동가 김장성에 이르기까지, 산루리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들이 많습니다. 현재 서훈을 받은 산루리 독립운동가는 10여 명 정도입니다. 앞으로도 독립운동가 발굴에 박차를 가하고 적극적으로 그들의 업적을 알리고자 합니다.마지막으로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다면요.1920년 9월 유관순이 순국하고 난 지 7개월이 지나, 1921년 4월 21일에는 이선경이 순국하였습니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유관순 열사의 이름을 모르는 이가 없지만, 그 외의 여성독립운동가들에 대해서는 많이 모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선경 또한 경기여고를 퇴학당한 상태였고, 구류 8개월 만에 석방되어 집에서 순국하였기 때문에 널리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아직 밝혀지지 않은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의 흔적은 모두 함께 찾아 나서야 할 일입니다. 뚜렷한 역사적 궤적을 보여주는 순국열사들을 기억하고, 그들의 뜨거운 조국애를 널리 현창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alt1이선경 2산루리 전경3구국민단사건 판결문(1921)4『동아일보』 구국민단의 공판 기사(1921)5김세환 6김장성 일제감시대상 인물카드이선경, 19세의 나이로 외로이 순국하다수원 중동, 영동, 교동 등 팔달문 밖 마을을 조선시대에는 ‘산루동’이라고 불렀다. 또한 수원화성 화양루 아래에 있는 마을이라고 해서 ‘다락골’로도 불리는 평화로운 마을이었다. 하지만 일제의 식민지배와 함께 수원의 전통마을은 그들의 편의대로 재편되면서 ‘산루리’가 되었다. 일제의 침략과 수탈에 시달리며 살아온 산루리 사람들은 일제에 대항하기 위해 각자의 방법으로 독립운동에 나섰다. 이선경 역시 그중 한 명이었다.이선경은 산루리에서 태어나 수원 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이어 숙명여학교, 경기여자보통학교를 입학해서 서울로 통학을 하였다. 이때 서울로 통학하면서 만난 동네 학생 박성태, 최문순 등과 함께 ‘구국민단’을 결성하고 독립운동을 이어갔다. 박성태가 단장을 맡고, 이선경, 최문순, 임효정 등의 여학생들이 함께했다. 구국민단은 1920년 중국 상하이에서 발행하던 『독립신문』과 『애국창가』를 마을에 배포함으로써 독립의식을 고취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이와 함께 체포된 독립운동가들의 가족을 구호하는 것도 목표로 세웠다. 그러던 중 이선경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적십자 간호부가 되기 위해 중국 상하이로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드디어 독립자금을 마련해 임시정부로 떠나려고 경성에 머물러있던 찰나에 일제로부터 발각되어 8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이선경이 당시 투옥된 곳은 악명 높은 서대문 형무소의 여감방이었다. 이곳은 유관순도 갇혀있었던 곳으로 혹독한 고문을 당했던 곳이다. 이선경도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1921년 4월 1일자 ‘구국민단 공판’이라는 기사에 의하면, 다른 구국민단 단원들이 재판받고 있을 때 이선경만 혼자 궐석재판을 받았다는 내용도 있다. 이는 법정에 출석하지 못할 정도로 몸 상태가 안 좋았을 거라고 추론이 가능하다. 실제로 이선경이 죽음의 문턱에 이르게 되자 일제는 급하게 그를 석방하였다. 서대문 형무소를 나온 이선경은 수원에 있는 오빠 이완성의 집에서 치료를 받았지만 석방 9일 만에 순국하였다. 1921년 4월 21일, 그의 나이 만 19세였다.3·1운동을 기폭제로 들불처럼 번진 독립운동일제의 식민지배에 억눌려 있던 수원 사람들의 분노는 3·1운동을 기폭제로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3·1운동 이후에도 학생들의 비밀결사 조직, 각종 사회단체들의 저항과 노동자 및 농민들의 투쟁이 이어졌다. 민족대표 48인 중 한 명으로 수원의 3·1운동을 주도한 김세환, 김세환을 도와 3·1운동을 이끌고 수원 신간회 및 사회운동을 이끌었던 김노적, 구국민단 단장으로 활약한 박선태, 수원 곳곳에 격문을 붙여 조국의 독립의지를 고취시킨 김장성, 사회주의 독립운동으로 세 번이나 검거되었던 차계영, 총독 암살을 계획한 조득렬, 1902년 미국으로 이민하여 미주 독립운동에 나선 이병억 등 수많은 산루리의 독립운동가들이 일제의 폭거에 굴하지 않고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Tue, 27 Jul 2021 10:36:27 +0000 57 <![CDATA[세계 산책 자유·평등을 향한 끝없는 투쟁 프랑스 혁명]]> 글 김대보(원광대학교 역사문화학부 교수) 1789년에 일어난 프랑스 혁명은 자유와 평등을 얻기 위해 일으킨 투쟁이었다. 혁명 당시 그리고 혁명 이후에도 자유와 평등을 위한 투쟁은 끊이지 않았다. 프랑스 혁명은 이러한 끝없는 투쟁과 함께 자유와 평등을 향한 인간의 무한한 희망을 탄생시켰다. alt자크 루이 다비드, 〈테니스코트의 서약〉(1791)        재정 위기와 프랑스 혁명의 시작프랑스 혁명 전 프랑스가 안고 있던 가장 큰 문제는 재정 위기였다. 프랑스는 17세기뿐 아니라 18세기까지 전쟁에 많은 돈을 쏟았고, 혁명 전 마지막으로 참전한 미국의 독립전쟁은 재정 적자를 더욱 심화시켰다. 미국 독립혁명 이후 더욱 악화된 재정 적자는 조세 제도의 개혁 없이 증세만으로는 개선될 수 없었다. 1787년, 루이16세는 면세 혜택을 누리던 두 특권 신분인 성직자와 귀족들에게도 세금을 부과하는 개혁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면세 특권을 포기할 수 없었던 성직자와 귀족은 루이16세에게 저항하기 시작했다. 1788년 한발 물러난 루이16세는 재정 및 조세 제도 개혁을 위해 1614년 이래 열리지 않았던 총신분회(삼부회)를 1789년 5월에 개최하기로 결정하였다. 1789년 5월 5일 총신분회가 개최되었고, 제1신분인 성직자와 제2신분인 귀족 그리고 제3신분인 평민 대표가 모였다. 그러나 세 신분의 대표들은 격렬한 대립을 보였다. 제1신분과 제2신분은 분리 심의와 신분별 투표를 주장했고, 제3신분은 공동 심의와 인원별 투표를 주장하였다. 그러던 중 부르주아를 중심으로 한 평민 대표들은 자신들의 주장에 무관심으로 일관하던 성직자와 귀족 대표를 제외한 채 국민의 대표를 자처하며 6월 17일에 ‘국민의회’를 결성하였다. 루이16세와 성직자 및 귀족 대표들은 회의장을 봉쇄하여 평민 대표들의 결집을 방해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평민 대표들은 6월 20일 베르사유 궁전 앞의 정구장으로 장소를 옮겨, 앞으로 헌법을 제정하고 이 헌법을 굳건한 기반 위에 올려놓을 때까지 절대 해산하지 않기로 결의하였다. 이렇게 평민 대표들이 주도하는 개혁이 진행 중일 때, 시민들은 여전히 배가 고팠지만 자신들의 목소리를 온전히 낼 수 없었다. 자신들의 처지를 개선시켜달라는 요구를 하면서 튈르리 궁전 앞에서 시위를 하던 파리 시민들에게 궁전수비대가 발포를 했고, 시민들은 무장을 결심하였다. 앵발리드에서 무기를 챙긴 시민들은 7월 14일에 바스티유 요새를 습격했고, 무력 충돌 끝에 요새를 함락시켰다. 이제 시민들은 혁명의 주요 동력으로서 국민의회가 결코 가볍게 볼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이제 국민의회는 프랑스를 쇄신하기 위한 작업에 박차를 가했다. 구체제의 특권을 폐지했고(8. 4~11.),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8. 26.)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약 2년 동안 준비한 끝에 1791년 프랑스에 첫 번째 헌법을 안겨주었다.프랑스 혁명의 위기국민의회가 이어가던 프랑스의 쇄신에는 장애물이 있었다. 구체제의 재정 위기에서 시작된 적자 문제를 여전히 해결하지 못하고 있었다. 국유 재산을 매각하기도 했지만 부족한 재정을 채우기에는 부족했다. 결국 ‘아시냐’라는 화폐를 발행했지만 화폐 가치 하락과 물가 상승을 불러왔다. 여기에 외국의 위협과 전쟁이 현실로 다가왔다. 왕실의 권력을 되찾고 싶었던 루이 16세는 외국 군대를 동원해서라도 혁명을 진압하려고 하였고, 1791년 6월 오스트리아 군대를 이용해 파리를 탈출하려고 시도하였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이후 오스트리아가 프랑스를 공격할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싹텄고, 1792년 4월 프랑스는 오스트리아에 선전포고를 했다. 그러나 프랑스는 계속 패배했고,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시민들은 우왕좌왕하던 의회에 자신들의 힘을 다시 한번 보여주었다. 1792년 8월 10일 튈르리 궁전을 습격한 뒤 의회를 압박하여 왕권을 정지시켰다. 그리고 9월 21일 새롭게 구성된 의회가 프랑스 공화국을 선포하였다. 이어 1793년 1월 21일 루이16세가 처형당하고, 10월에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가 처형당했다. 유럽의 여러 국가들이 프랑스 국왕이 처형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프랑스에 맞서기 시작했다. 위기에 처한 프랑스를 지키기 위해 의회는 1793년에 두 차례에 걸친 대규모 징집령을 내리면서 전쟁에 모든 힘을 쏟았다. 그리고 1793년 가을, 혁명의 적들에게 공포를 보여주어 위기에 처한 프랑스와 혁명을 구해야 한다는 논리로 ‘공포정’을 등장시켰다. 국가적 위기 상황 속에서 반혁명 혐의자들을 단두대에서 처형시키기도 했고, 예외적인 제도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그러나 혐의자들에 대한 가혹한 법과 민중운동에 대한 억압 등은 공포정치 반대파들의 피로도를 높였다. 결국 1794년 7월 27일, 당시 정국을 이끌고 있던 로베스피에르와 그의 일파가 처형당하게 되는 테르미도르 반동이 일어났다. 이후 국민공회는 1년 동안의 준비 끝에 1795년 새로운 헌법을 제정하고 총재정부를 탄생시켰다.총재정부는 정치와 경제의 안정을 꾀했지만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테르미도르 이후 통제 경제의 폐지는 가파른 물가 인상을 불러왔다. 총재정부는 1796년에 화폐개혁을 단행했지만 재정 적자는 여전히 지속되었고, 정복전쟁을 통한 수입에 의존해야 했다. 정치적으로도 총재정부는 선거 결과를 뒤집기 위한 쿠데타를 일으키는 등 안정과 거리가 멀었다.1798년부터 1799년까지, 프랑스는 다시 결성된 대프랑스 동맹군과 전쟁을 치러야 했다. 프랑스군은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었지만, 여러 정파 사이의 갈등 때문에 정치적 불안정은 계속되었다. 그해 11월 9일, 당시 최고 권력자 가운데 한 명이었던 시에예스는 헌법을 개정하여 정치적 불안정을 해결하기 위해 이집트에서 급히 돌아온 나폴레옹을 끌어들여 쿠데타를 일으켰다(브뤼메르 18일의 쿠데타). 이로써 통령정부가 탄생했고, 프랑스 혁명은 막을 내렸다.  alt루이16세의 처형, 작자 미상(1793)(왼쪽) / 프랑수아 부쇼의 〈500인위원회에서 보나파르트 장군〉(1840)(오른쪽)프랑스 혁명이 남긴 것프랑스 혁명은 구체제에서 억압받고 있던 프랑스인들이 자유와 평등을 얻기 위해 일으킨 투쟁이었다. 물론 보편적인 자유와 평등은 프랑스 혁명이 단기간에 성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프랑스 혁명이 진행되고 있는 동안에도 정치적 권리를 가지지 못한 사람들,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있던 사람들은 끊임없이 싸워야만 했다. 그리고 프랑스 혁명 이후에도 자유와 평등을 위한 인류의 노력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프랑스 혁명이 우리에게 남긴 것은 혁명의 진행 과정에서 만들어진 제도나 체제가 아니라, 자유와 평등을 향한 인간의 끝없는 투쟁과 무한한 희망을 탄생시켰다는 것이다.]]> Tue, 27 Jul 2021 10:38:40 +0000 57 <![CDATA[기념관은 지금 울릉도·독도를 만나다]]> 정리 편집실 2021년 독립기념관에서 실시하는 울릉도·독도 답사 교육은 코로나-19 확산 방지 여부에 따라 일정이 불투명해지곤 했다. 하지만 독도 입성의 행운은 코로나-19가 아니라도 쉽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죽하면 3대가 덕을 쌓아야 발을 디딜 수 있다는 말이 생겨났겠는가. 이번 울릉도·독도 답사 참가 대학생들은 3대가 덕을 잘 쌓은 것이 틀림없다. 대한민국 역사를 올바로 견인해갈 젊은 미래 역군들의 울릉도·독도 가는 길을 따라가 본다. alt독립기념관의 대학생 울릉도·독도 답사 취지는?일본은 독도에 대한 영유권을 끊임없이 반복해 주장하며 국제적인 영토분쟁지역으로 이슈화되기를 원합니다. 일본의 제국주의 침략 행위에 대한 반성이 전혀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독립기념관은 미래에 교사와 역사학자를 꿈꾸는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독도에 대한 이해와 역사인식의 확산, 올바른 영토주권 의식을 제고하기 위하여 울릉도·독도 답사를 기획하였습니다.울릉도·독도 답사 대상자 선별은 어떻게 진행되었나?답사 대상은 미래에 역사학자가 되거나 역사 교사 또는 초등학교에서 사회 과목을 가르칠 수 있는 일반 대학교 역사학 또는 역사교육과 재학 중인 학생과 교육대학교 재학생입니다. 참가 신청자들에게 참가 동기와 답사지 중 가장 관심 있는 곳과 그 이유, 그리고 답사 경험의 장래 활용 계획을 담은 답사 참가 신청서를 받아서 인적 사항은 블라인드 처리 후 심사하였습니다. 심사 기준은 답사 참가 의지·진정성, 답사지에 대한 관심도, 활용 계획 및 기념 방법의 구체성·참신성·적용 가능성 등으로 하였습니다. 그 결과 38명의 답사 대상자를 선별할 수 있었습니다. alt답사 전 교육 alt이소민 울릉군문화관광해설사울릉도에서 만난 사람 이소민 울릉군문화관광해설사울릉도를 간략히 설명한다면?동해에는 다른 섬들이 없죠. 망망대해 한가운데 꽃으로 피어난 울릉도는 ‘동해의 수련화’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또 육지와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오염이 적은 곳이기도 합니다. 울릉도에 천연기념물이 있다면?울릉도에는 귀목들이 많습니다. 그중에서도 울릉도 천연기념물 제50호로 지정된 솔송나무가 있습니다. 일제는 울릉도 솔송나무를 많이 벌목해갔죠. 주목나무가 살아 1,000년 죽어 1,000년이라고 하듯이 울릉도 솔송나무는 못이 들어가지 않는 철목으로 불립니다. 일제는 솔송나무 대신 삼나무를 심어놓았는데 삼나무는 물러서 당시 가구 용이나 마룻바닥 용도로 사용되었습니다.우리 땅 독도를 지키는 방법은?울릉도 개발이 난개발이 아니라 보존을 위한 개발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조금 불편해도 좋은 곳으로 개발을 한다면 전 세계의 명물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울릉도 자체가 물탱크입니다. 전 세계의 어떤 섬을 살펴봐도 이렇게 물이 풍부하고 울창한 숲은 없습니다. 조금은 불편하지만 그 불편을 즐기러 오는 곳, 자연 그대로에서 치유하고자 하는 마음의 피난처로 생각하고 울릉도를 방문했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마음이 모이면 독도는 저절로 지켜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alt장마로 인해 답사가 어렵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비는 우리에게 물이랑을 일으키며 먼바다로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주었습니다. 혼자였다면 보이지 않았을 울릉도·독도의 아름다움과 다양한 가치를 함께 나눌 수 있어서 더욱 소중한 선물이었습니다.이홍주(서울여자대학교) alt이어폰 고장으로 해설을 못 듣고 있던 내게 이어폰 한쪽을 나눠준 친구. 그런 나에게 자신의 수신기를 내어주고 독도의 역사를 자세히 가르쳐 주신 선생님들. 지금도 생생한, 독도에 발을 내디딘 사람들의 표정. 이번 답사에서 저는 울릉도와 독도뿐만이 아닌 지켜야 할 역사의 한순간을 함께 거닌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박수현(영남대학교) alt출발 전 걱정이 무색할 만큼 우리의 발길을 허락해준 울릉도와 독도는 아름다웠습니다. 함께한 역사를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인연, 3박 4일 동안의 울릉도·독도 곳곳에서의 추억을 바탕으로, 역사와 학생을 사랑하는 교사가 되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류호준(총신대학교) alt누구나 갈 수 있지만 쉽게 갈 수 없는 자랑스러운 우리 땅 독도를 밟을 수 있게 되어 영광이었습니다. 독립기념관은 앞으로도 독도 답사를 통해 미래를 책임질 수많은 학생들이 독도가 왜 우리 땅인지 알려주는 올바른 지표가 되어 주십시오.고해욱(전남대학교) alt비록 답사 내내 비가 내렸지만 유쾌한 답사원들 덕분에 웃으며 즐거웠습니다. 모두가 덕을 많이 쌓은 덕분에 그토록 염원하던 독도에 발을 디뎌도 보고, 제 눈과 마음에도 가득 담았습니다. 3박 4일 동안 꿈을 꾼 것 같고 아직도 여운이 남아있습니다. 평생 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이상훈(경북대학교) alt답사 전에는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이 독도 땅이라고 생각했지만, 답사 후에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땅뿐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독도에는 우리 역사와 문화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었고, 이를 지키기 위한 노력들이 있었습니다. 저에게 있어 독도는 민족의 애환이 느껴지는 곳이었습니다.최지원(국민대학교) alt유화로 그린 독도에 직접 가보고 싶다는 버킷리스트에서 시작된 답사였습니다. 독도에 처음 가면 눈물이 핑 돈다고 해서 정말 그럴까 싶었는데 진짜였습니다. 우리나라 최동단 독도를 지키고 있는 분들을 직접 마주한 것만큼 와닿는 감동은 없는 것 같습니다. “독도야, 너는 우리 땅이 데이”라는 사투리 섞인 다른 관광객의 말을 듣고 난 뒤 눈물이 맺혔고, 그 눈물은 답사 내내 마르지 않았습니다.장재은(한국교원대학교) alt안 좋은 날씨지만 북동풍이 불면 접안이 가능할지 모른다는 기대감을 안고 떠난 독도. 때마침 동풍이 불고 있다는 안내방송이 어찌나 반가웠는지. 무언가에 홀린 듯 처음 마주한 독도는 우리나라 주권이 미치는 영토라는 점에서 한 번, 울릉도의 부속 도서인 독도를 수호하는 독도경비대에 두 번, 아름다운 독도의 자연환경에 세 번 놀라는 순간이었습니다.윤수현(서울여자대학교) alt이번 답사에서의 만남은 반가움의 연속이었습니다. 울릉도에서 문화관광해설사 선생님을 뵙고 그 반가움은 배가 되었습니다. 울릉도의 기막히게 아름다운 자연은 식물 하나 바위 하나에 담겨 역사를 품은 채 파도처럼 가슴으로 밀려들었습니다. 3박 4일이라는 기간이 아쉬움으로 남았지만, 언젠가 우리 모두 반갑게 역사의 길 위에서 다시 만나길 기대합니다.김주언(동아대학교)]]> Tue, 27 Jul 2021 10:40:00 +0000 57 <![CDATA[독자 이벤트 이번 호 독립기념관을 읽고 빈칸을 채워주세요. 꼼꼼히 읽다 보면 정답에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altalt아이콘 클릭하면 퀴즈 정답을 보낼 수 있습니다.]]> Tue, 27 Jul 2021 10:42:05 +0000 57 <![CDATA[들어가며 언어가 있어야 국가도 존재한다]]> 민족정신오늘날 우리가 당연하게 사용하고 있는 언어 한글.일제강점기에는 사용하고 싶어도 대놓고 사용할 수 없었던 우리의 말과 글.그래서 목숨을 걸고 지켜내야만 했던 우리의 언어.손에 쥘 수도 없고 보이지도 않는 그것을 우리 선조들은 목숨까지 내걸고 지켜냈습니다.그것은 단지 나라의 소유물이 아닌 민족의 정신이자 신념이었습니다.‘언어가 있어야 나라도 있다’는 말처럼언어와 말은 민족을 계승하고 지켜낸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Mon, 30 Aug 2021 10:34:36 +0000 58 <![CDATA[톺아보기 일제의 우리말 탄압·말살과 일본어 상용 정책]]> 글 신용하(서울대학교 명예교수) 민족은 무엇보다도 ‘언어공동체’이다. 우리 민족은 구성원들이 한국어를 공동으로 사용하며, 민족의식을 갖고 있을 때 성립된다. alt일제의 한국어 말살 정책 전말일제강점기에 일제는 우리 민족의식을 소멸시키기 위해 ‘한국어 말살과 한국문자 말살 정책’을 강행하였다. 일제는 한국인에게 한국어 대신 일본어를 배우게 해서 일본인으로 만들려고 하였다. 한국어와 민족의 문화 및 역사를 소멸시키면 민족의식이 소멸되고 일본의 노예와 같은 예속 천민층으로 전락하리라 믿었다.일제는 1910년부터 일본어를 ‘국어’로 여기도록 강요하고 한국어를 박해하다가, 1930년대에 들어서는 모든 한국인들의 일상에서 한국어 사용을 엄금하고 일본어만 전용하도록 강제하였다. 한국어 말살과 일본어 전용은 어릴 때부터 철저히 강제해야 효과가 크다고 하면서, 국민학교 1학년 담임교사는 반드시 일본인 교사만을 배치하도록 조치하였다. 그리하여 철모르는 국민학교 학생들이 부지불식간에 한국어를 사용하는 경우에는 매질을 하고 벌금을 물리거나 벌을 주었다. 일제는 한국어로 된 신문과 잡지 또한 모두 탄압하여 폐간시켰다. 그러다가 1919년 3·1운동이 퍼져나가자 할 수 없이 한국어 신문·잡지의 발행을 일부만 허용하였다. 바로 이 시기에 한국인 선각자들의 활동으로 한국어 연구와 발전이 추진되고, 한국어로 된 문학·예술이 번영해서 한국어와 한글을 지키고 발전시키는 데 성과를 내었다. 그러나 1930년대에 들어서 일제는 다시 한국어 신문·잡지의 폐간 정책을 강행하였고, 1940년대에는 모든 한국어 신문들을 폐간시켰다. 그러나 한국인들의 저항도 매우 강력하였다. 이로 인해 한국어 말살과 일본어 전용정책이 잘 진행되지 않자 일제는 ‘씨를 없애야 한다’며, 1942년 한글학자들의 모임인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를 강제로 해산시키고 회원은 물론 학자들까지 체포하여 투옥하였다.학생들에게 일본어 집중 교육일제는 “한국인의 황국신민화 정책의 첫째 과제는 철저한 일본어 교육”이라고 강조하였다. 따라서 교육의 중심을 한국어 대신 일본어 집중 교육 강화에 두었다. 특히 국민학교 저학년 교육은 거의 ‘일본어’ 교육이었다. 일제는 일본어 교육 안에 일본의 역사·문화·도덕 등의 내용을 넣어 한국의 어린 학생들을 일제의 신민으로 만들고 일제 숭배 사상을 주입시키려고 하였다. 예컨대 1939년 총독부에서 발행한 『소학국어(일본어) 독본』 권 11을 보면 총 28개 단원 가운데 71.4%인 20개 단원이 일제의 역사, 도덕, 문화, 군국주의와 무사도(武士道)를 선전하는 내용이었다.    학교에서의 일본어 전용과 상용의 철저화는 전국의 학교에서 매우 억압적이고 폭력적인 방법으로 시행되었다. 국민학교에서는 매주 초에 ‘국어표(일본어표)’라는 딱지를 학생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서로서로 감시하게 하다가 무의식중에 한국어를 한마디라도 사용하면 딱지를 한 장씩 뺏게 하여, 주말이 되면 표를 많이 빼앗긴 학생에게 체벌을 가하였다. 이 밖에도 한국 학생들이 한국어를 사용하는 정도에 따라 구타·벌금·정학·퇴학·낙제 등 온갖 수모를 주었다. alt                                                                      조선어학회 표준어 사정위원 기념 사진(1935)(좌) /  『소학국어 독본』 표지(우)공장·상점에 일본어 강습소 강제 설치일제의 일본어 상용 강제 정책은 학교 밖 일상에도 강행되었다. 1938년 일제는 중일전쟁 도발 1주년을 기하여 ‘국가총동원령’을 내리고, ‘국민총력조선연맹’이라는 친일단체를 조직하여 일본어 강습 등 전쟁동원체제운동을 전개하였다. 일제는 1938년부터 전국에 일본어 강습소를 설치하고, 매년 10만 명씩 4개년에 40만 명의 일본어 보급 수료 계획을 수립하였다. 일본어 강습소는 각종 단체·공장·상점 등 직장 단위로 전국 각지에 설치되었다. 이어 조선총독부는 전국 각도에 통첩을 보냈다. 공장·상점 등 직장 단위로 직장시설을 이용하여 각기 일본어 강습소를 설치하도록 강요하고, 학습 진도를 검사하여 성적에 따라 근무 평가에 반영하도록 하였으며 우수자는 상을 주라고 지시하였다. 일제 자료에 의하면, 1938년에 일본 말 강습회가 3,660개소에서 열렸고 21,373명이 일본 말을 수강하였다. 그리하여 1943년까지 일본 말 강습 총 수료자는 누계 670만 7,627명이라고 선전하였다.특히 일제는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을 도발한 뒤에 한국 청년들의 일본군 징병을 전제로 1942년 11월 1일 ‘조선청년특별연성소령(朝鮮靑年特別鍊成所令)’을 공포하고, 전국의 각 부·읍·면에 훈련연성소를 설치하였다. 연성 기간은 약 1년으로 총 교육 시간 600시간 가운데 400시간이 학과 수업, 200시간이 교련 수업이었다. 학과 시간의 중점은 일본 문화와 함께 일본 어 습득을 목표로 하였다.  alt일제의 신문 검열로 인해 여백으로 발행된 신문(좌) / ‘훌륭한 군인 양성을 위해 일본어를 생활화하자’는 전단(우)실패로 돌아간 한국어 말살정책이처럼 일제는 한국인 모두를 대상으로 일본어 상용정책을 펼쳤다. 관공서는 물론 전국의 상점·극장·운동장 등에서도 오직 일본어만 사용하고 방송하도록 하였다. 우체국에서 일본어를 사용하지 않는 우편물은 접수를 거절하였다. 철도·운수·교통·통신에서도 일본어를 사용하지 않으면 매표와 통화를 금지시켰다. 각 가정에서도 한국어를 사용하지 말고 일본어를 상용하도록 강요하였다. 한국어 말살과 일본어 상용을 전 일상생활에 강제한 것이었다. 일제 측 자료에 의하면, 1932년 당시 한국 인구 20,205,591명 가운데 일본어를 할 수 있는 한국인은 약 1,578,131명에 불과했다. 즉 총인구의 7.8%만이 일본어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일제가 일본어 강제 강습을 전국적으로 시행한 후인 1943년에도 일본어를 사용할 수 있는 한국인이 22.15%로 늘어나긴 했으나 여전히 낮은 비율이었다. 1944년 통계는 구할 수 없지만, 일제강점기 말기까지도 약 78%의 한국인은 한국어 밖에 할 줄 몰랐다고 전해진다. 일제의 한국어 말살정책과 일본어 상용정책은 일제의 강제 집행에도 불구하고 크게 실패한 것이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한국인들이 내 나라말을 하지 못하는 고통 속에 살도록 탄압당한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일제의 한국어 말살정책은 민족 구성의 본질적 요소인 민족 언어를 완전히 말살하여 한국인을 일본의 영구한 예속민으로 만들려고 획책한 잔인무도한 식민지 정책이었다.  alt]]> Mon, 30 Aug 2021 10:35:48 +0000 58 <![CDATA[만나보기 조선어학회 사건과 우리말 지키기 투쟁]]> 글 신용하(서울대학교 명예교수) alt조선어학회 사건 수난 동지회(1946)조선어학회의 탄생일제의 우리말과 우리글(한글) 말살 정책에 대항하여 학자들은 개인 또는 조선어연구회 등 단체를 조직하였고, 민족의 언어를 지키기 위해 투쟁하였다. 학생들은 조선어연구회 회원들과 민족 신문의 지원을 받으며 여름과 겨울 방학 때 계몽운동과 야학을 통해 동포들에게 한글을 가르쳐서 우리말과 우리글 지키기에 동참하였다. 조선어연구회는 1931년 1월 10일 명칭을 ‘조선어학회’로 바꾸어 계속 완강하게 활동하였다. 조선어연구회 회원들의 활동으로는 ① 전국 순회 계몽 강연 ② 가갸날(한글날)의 제정(1926) ③『한글』 잡지의 발간(1927) ④ 조선어 철자법(한글 맞춤법) 통일안 제정(1930~1933) ⑤ 조선어 표준말 사정 완성(1934~1936) ⑥ 외래어 표기법 통일안 제정(1931~1940) ⑦ 『조선말 큰사전』 편찬 사업 진행 등이 대표적이었다. 조선어연구회 회원들은 단체 활동과 함께 개별적으로도 한글을 연구·저술하여 등사하거나 간행하기도 하였다. 1920년대 전후의 대표작들은 다음과 같다.1. 주시경, 『말의 소리』, 신문관, 1914.2. 김두봉, 『조선말본』, 새글집, 1916. 3. 안확, 『조선문법』, 회동서관, 1917.4. 최재익, 『조선어의 선생』, 대판옥호서점, 1918. 5. 이규영, 『한글적새』(전6권), 미간행, 1919. 6. 이규영, 『현금조선문전』, 신문관, 1920.7. 강매, 『조선어문법제요』, 광익서관, 1921. 8. 김두봉, 『깁더 조선말본』, 상해, 1922.9. 권덕규, 『조선어문경위』, 광문사, 1923. 10. 이규방, 『신찬조선어법』, 이문당(以文堂), 1923.  11. 이진환, 『조선문직해』, 덕흥서림, 1924. 12. 이상춘, 『조선어문법』, 개성영남서관, 1925.13. 최현배, 『우리말본』, 연희전문학교출판부, 1929.14. 장지영, 『조선어철자법강좌』, 활문사, 1930.  alt『조선말큰사전』 표지와 내지 alt조선어학회 기관지  『한글』조선어학회 사건 조작한글 운동은 일제의 각종 음험한 탄압을 받는 와중에도 뚜렷한 민족의식을 갖고 민족 보전과 독립을 위한 투쟁으로 실행되었다. 이러한 활동에도 일제는 3·1운동의 영향으로 만주 등지에서 한국 독립군의 무장투쟁에 맞서고 있던 터라 탄압할 역량이 부족하였다. 때문에 한국어·한글 연구에는 간악한 검열·억압만 이어가며 투옥은 하지 못하였다.이후 일제는 ‘조선어학회 사건’을 조작하였다. 일제는 중앙에서부터 조선어학회를 탄압하면 한국인의 반발과 저항이 클 것을 염려하여, 우연히 지방에서 발각된 독립운동 사건으로 보이게 하려고 획책하였다. 이것은 일제의 중앙경시국이 조선어학회 기관지인 『한글』을 지방의 홍원경찰서의 내사보다 2개월 앞서 1942년 3월에 폐간시킨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1942년 5월 함경남도 홍원읍에서 한 일본인 형사가 불심검문에 불손한 태도를 보이는 백(白) 모 청년의 가택을 수색하게 되는데, 그 서적들 가운데 청년의 조카 백영옥(白永玉)의 일기장을 발견하여 조선인 형사 야스다(安田正黙)에게 조사하게 하였다. 그 일기장 2년 전 일기에 “국어(일본어)를 상용하는 학생을 처벌하였다”는 문구가 있었는데, 이것이 문제가 되었다. 일제가 다수 여학생들을 일주일 동안이나 구류하여 고문하면서 조사한 결과 이 문구는 백영옥이 반일감정에서 써넣은 것이었고, 실제로 일본어를 상용한 학생을 처벌한 교사는 없었다. 그러나 일제 형사는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은근히 불어넣은 교사로 공민 및 체육교사 김학준(金學俊)과 조선어 및 영어교사 정태진(丁泰鎭)을 주목하였다.정태진은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컬럼비아대학교에서 교육학을 전공한 후 귀국하여 영생여중학교에서 조선어와 영어를 가르쳤다. 이 과목이 폐지되자 그는 수학 및 수신을 담당하다가 2년 전 서울 조선어학회에서 조선말큰사전 편찬사업을 하고 있었다. 일제는 김학준은 문제 삼지 않았다. 조선어학회를 탄압하기 위해 1942년 9월 5일 정태진을 체포하였다. 일제는 잔혹한 고문을 가한 결과 ‘조선어학회가 민족주의자 집단임에 동의’하는 정태진의 자백을 받아냈다고 한 뒤 공작을 시작하였다. 일제는 1942년 10월 1일 홍원경찰서 형사대로 우선 조선말큰사전 편찬 작업을 하고 있던 이극로, 정인승, 이윤재, 최현배, 이희승, 장지영, 김윤경, 권승욱, 한징, 이중화, 이석린 등 11명을 체포하였다. 뒤이어 1942년 10월 21일 이만규, 이강래, 김선기, 이병기, 정열모, 김법린, 이우식 등 7명을 체포하였다. 그리고 12월 23일 3차로 윤병호, 서승효, 김양수, 장현식, 이인, 이은상, 정인섭, 안재홍 등 8명을 체포하였다. 이어서 1943년 3월 5~6일에 김도연과 서민호를 체포했으며, 3월 31일과 4월 1일에는 신윤국과 김종철을 체포하였다.  alt                                                                         왼쪽부터, 정태진(1903~1952) / 이윤재(1888~1943) / 한징(1886~1942)조선어학회 해체와 갖은 고문일제는 조선어학회를 불온단체로 불법화하여 강제 해산시켰을 뿐만 아니라, 10년간 각고 끝에 만든 『조선말큰사전』 원고 3만 2천 장(400자 원고지)과 20만 장에 달하는 어휘 카드를 모두 압수하여 한국어 사전 편찬을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게 만들었다.체포한 조선어학회 회원들에게는 잔혹한 고문을 가하였다. 조선어학회가 민족주의자 집단이었음은 이미 모든 한국인이 알고 있던 사실이었으므로, 일제는 더욱 독립운동에 관여한 것으로 꾸미려고 획책하였다. 일제는 학자들을 목총으로 구타하고, 두 팔을 등 뒤로 묶어서 천정에 매달고 돌리는 비행기고문을 가하기도 했으며, 불에 달군 쇠꼬챙이와 끓는 물의 고문을 가하기도 하였다. 일제는 이윤재 등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인 김두봉을 만나 자금을 제공했다는 둥, 김두봉을 통하여 사전 편찬 사업을 위장하고 조선의 독립을 추진했다는 둥, 이극로를 대통령으로 정인승을 내무장관으로 하여 국내 임시정부를 수립하려 했다는 둥 갖가지 자백을 하라고 강요하였다.일제는 체포한 조선어학회 회원들 가운데 이극로, 이윤재, 최현배, 이희승, 정인승, 정태진, 김양수, 김도연, 이우식, 이중화, 김법린, 이인, 한징, 정열모, 장지영, 장현식 등 16명을 기소하였다. 기소 후에도 재판을 하지 않고 감방에 투옥하여 고문과 심문을 거듭하던 중에 이윤재(1943. 12)와 한징(1944. 2)이 옥사하였다. 다른 이들의 경우 1945년 1월 16일 함흥지방법원에서 판결을 언도받았다. 일제가 조선어학회 회원들에게 적용한 죄목은 ‘치안유지법 위반’이었다. 일제에 의해 체형을 언도받은 5인 가운데서 정태진을 제외한 이극로, 최현배, 이희승, 정인승 등 4인은 이 판결에 불복하여 항소했으나, 일제는 1945년 8월 13일 이를 기각하였다. 그리고 이틀 후 광복을 맞으며 이들은 약 3년의 옥고를 치르고 자유의 몸이 되었다.]]> Mon, 30 Aug 2021 10:36:31 +0000 58 <![CDATA[이달의 독립운동가 한국 독립운동을 지원하며 부상자 치료에 힘쓴 의료선교사들]]> 글 독립기념관 전시부 alt(왼쪽부터)올리버 알 에비슨 (Oliver R. Avison)           로버트 그리어슨(Robert Grierson)               스탠리 에이치 마틴 (Stanley H. Martin)1860~1956                                                    1868~1965                                                       1870~1941       건국훈장 독립장(1952)                                 건국훈장 독립장(1968)                                     건국훈장 독립장(1968)  alt                                                           에비슨의 수술 장면 유리건판 필름(1904)(좌) /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교장 시절 에비슨(1919)(우)에비슨, 세브란스병원을 중심으로 3·1운동을 지원하다에비슨은 1892년 미국 북장로회 의료선교사로 부임하여 제중원 원장으로 일하며 고종 시의*를 겸하였다. 이후 세브란스병원과 연희전문학교를 각각 설립·운영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일제의 무력 탄압으로 다친 부상자들을 치료하고 일제 헌병경찰로부터 환자들을 적극 보호하였다. 더불어 에비슨은 조선총독부가 선교사를 통해 3·1운동을 진압하고자 마련한 회합에서 일제 만행을 규탄하고 시정**을 촉구하는 한편, 미국으로 귀국하는 선교사에게 3·1운동의 실상을 알리는 자료를 보내 한국인 대변에 힘썼다. 정부는 에비슨의 공훈을 기리어 195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 시의(侍醫) 임금과 왕족의 진료를 맡은 의사**시정(是正) 잘못된 것을 바로잡음그리어슨, 제동병원을 중심으로 성진지역 3·1운동을 후원하다그리어슨은 1898년 캐나다장로회 선교사로 내한하여 1902년 함경도 성진에 제동병원을 세우고 의료선교를 하였다. 1909년에는 독립운동가 이동휘에게 교회 직책을 부여하여 그가 일제 감시를 피해 독립운동을 지속할 수 있도록 도왔다. 1919년 성진지역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그는 자신의 집을 독립운동가들의 집회 장소로 제공하고 설교를 통해 독립의지를 북돋았다. 또한 만세운동 중 발생한 부상자들을 제동병원에서 정성껏 치료하는 등 성진지역 3·1운동을 적극 후원하였다. 정부는 그리어슨의 공훈을 기리어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alt그리어슨과 성진 제동병원 직원(좌) / 룽징지역의 제창병원 이관 기념(우)마틴, 제창병원을 중심으로 룽징지역 3·1운동을 지지하다마틴은 1916년 캐나다장로회 선교회 소속으로 중국 북간도 룽징지부에 부임하여 1918년 제창병원을 설립하고 의료 활동을 하였다. 1919년 3월 13일 룽징지역 한인들이 만세운동 전개 중 부상을 당하자 마틴은 수십 명에 달하는 사상자를 정성껏 치료하고 합동 장례를 치르는 등 룽징지역 3·1운동을 지지하였다. 더 나아가 마틴은 1920년 10월 일제가 한인이 거주하던 장암동에서 야만적으로 자행한 학살 방화 현장을 방문하여 기록으로 남기고, 보고서를 발간하여 국제사회에 일제 만행을 폭로하는데 기여하였다. 정부는 마틴의 공훈을 기리어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alt대한국민회에서 마틴에게 수여한 메달(1920. 2.)_동은의학박물관 제공(좌) /「제동병원」, 『동아일보』(1921. 3. 17.)(우)한국인들의 힘(독립운동)으로 한국인의 머리 위를 가로지른 먹구름(일제 식민지배)은 사라질 것이다.성진지역 3·1운동과 관련해 추궁하는 일제 경찰에게 그리어슨이 한 대답(1919. 3. 23.)alt]]> Mon, 30 Aug 2021 10:37:19 +0000 58 <![CDATA[아름다운 인연 한국광복군 총사령관 지청천과 동지 윤용자]]> 글 김형목(사단법인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이사) 김좌진, 홍범도와 함께 청산리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던 지청천 장군은 후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한국광복군 총사령관을 역임하게 된다. 군인 신분으로서 오랜 시간을 전쟁터에서 보낸 그의 옆에는 묵묵히 가정과 가족을 지킨 아내 윤용자가 있었다. 부부는 인생의 동반자이자 독립운동 동지로서 자녀들까지 훌륭한 독립운동가로 키워냈다.    alt지청천           “나라의 흥하고 망함은 국민 모두의 책임이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국민 모두 힘을 모아 생존을 침해하는 적과 맞서 싸워야 한다. 독립은 남이 주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 싸워 찾아야 하는 것이다. 힘을 모으자. 살길은 하나다.”조국 독립을 위해 성씨와 이름까지 바꾸다지청천은 1888년 1월 25일(양력 3. 7.) 서울 삼청동 30번지에서 아버지 재선과 어머니 경주 이씨 사이에 외동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충주로 조선 후기 이래 무관을 배출한 가문이었다. 아명은 수봉, 본명은 지석규와 지대형이나 후일 이청천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만주로 망명하면서 일제의 추적을 따돌리기 위해 이름을 바꾸었다. 어머니의 성씨와 같이 흔한 이씨로 고쳤다. 이름 중 ‘청’은 조국 독립을 위해 푸른 하늘에 맹세하려는 뜻이고, ‘천’은 하늘의 대공무사(大公無私) 함을 본받을 것을 맹서하였다. 백산이라는 호는 훗날 독립군 동지들이 지어준 것으로 백두산처럼 우뚝 서서 영원히 조국을 지키려는 의미였다.신흥무관학교 교성대장으로 독립군 양성에 매진하다다섯 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열 살이 되던 해에 근대교육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 어머니는 엄격한 훈육으로 참된 인생의 가치를 일깨워주었다. 배재학당 재학 중에는 황성기독교청년회의 비밀 회합에서 “무장을 갖추고 조국을 되찾자”고 절규할 정도로 열혈 청년으로 성장하였다.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하였으나, 폐교된 후 근대적 군사 지식을 쌓아 구국의 간성이 되려는 일념으로 일본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갔다.일제의 강제병합 이후 재학생들은 비분강개하는 분위기였다. 그는 “우리가 굴욕을 무릅쓰고 일본까지 온 이유가 무엇이오? 근대적인 군사교육을 받아 장차 나라의 중추가 되기 위함이었소. 그러나 나라가 멸망한 지금은 좀 더 침착해지고 냉정해질 필요가 있소. 우리가 일본에서 적국의 군사전술과 훈련 방식을 익혀 훗날 항일전의 유용한 도구로 사용한다면 그보다 더 현명한 투쟁 방법이 어디 있겠소”라고 설득하였다. 일본군 소위로 임관된 후 지휘관으로서 독일과 일본의 ‘청도대회전’에 참전하였다. 조국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전쟁이었기에 심리적인 동요가 적지 않았다. 거대한 3·1운동 발발은 자신을 뒤돌아보는 결정적인 순간이었다. 망명 기회를 노리던 그는 일본육사 선배인 김광서(후일 김경천)와 함께 중국 동북지역으로 탈출하였다. 망명 후 신흥무관학교 교관과 교성대장으로서 독립군 양성에 열정적이었다. 이들 졸업생과 서로군정서 병력을 이끌고 독립군 연합부대와 청산리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주역으로서 명성과 신망을 받았다. 이리하여 경천 김광서, 동천 신팔균과 함께 ‘만주 3천(滿洲三天)’으로 이름을 떨치는 계기였다. 독립전쟁의 금자탑이라는 승리의 기쁨도 잠시였다. 일제의 추격에 연해주로 이동한 대한독립군단은 ‘자유시참변’으로 결국 만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alt                                                                                                      한국광복군 사령관 시절 지청천과 김구무장단체 통일과 한중 연대에 앞장서다일제의 만주 침략이 본격화되자 그가 이끈 한국독립군이 많은 승리를 거두었다. 사기도 충천하여 일본군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천하무적 독립군으로 거듭나고 있었다. 중국군과 연합하여 많은 무기류와 군수품 등을 노획한 ‘대전자령전투’는 독립전쟁 ‘3대첩’ 중 하나로 이를 주도한 인물이 바로 지청천이었다. 하지만 괴뢰 만주국 수립 이후 일제에 의한 만주지배의 공고화, 한·중 연합군의 내분 등으로 중국 관내지역으로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윤봉길 의거 이후 중국군관학교 안에 한인특별반 개설에 즈음하여 그는 교관으로 초빙되었다. 오광선을 비롯한 한국독립군은 베이징을 거쳐 뤼양군관학교 한인특별반 교관으로 부임했다. 한인특별반의 총책임자로서 군사훈련을 지도하는 한편 교무위원으로 중국군과 교섭에도 열성적이었다. 교육과장인 중국인은 그와 일본육사 동기생이었기에 교육 내용과 운영 전반을 원만하게 조정할 수 있었다. 특히 만주지역의 항일 무장투쟁 세력과 지속적인 연계는 주로 만주의 반만 항일군과 제휴로 나타났다. 동시에 중국 관내지역의 독립운동 정당 결성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재만 한국독립당 대표와 한국혁명당 대표들은 ‘토지와 대생산 기구의 국유’ 등을 지향하는 신한독립당을 결성하였다. 청년군사간부특별훈련반 총책임자로서 청년들 훈련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또한 독립운동 진영의 단결과 통일에 입각한 민족혁명당 탄생도 주도하였다. 그의 소망과 달리 운영 방향을 둘러싼 갈등으로 결국 민족혁명당을 탈당하고 말았다. alt지청천 애국시 어록비한국광복군을 연합군 일원으로 대일전에 나서다충칭에 정착한 임시정부는 그를 군사위원회 군무장에 임명하였다. 임시정부는 독자적인 군사조직인 한국광복군의 창설에 역량을 집중하였다. 총사령관에 임명된 그를 비롯하여 참모장 이범석, 참모 채원개·이복원·이준식·김학규·공진원 등이 선임되었다. 마침내 1940년 9월 17일, 충칭 가릉빈관에서는 한국광복군총사령부 성립전례식을 거행하였다. “헌기(獻旗)를 마치자 총사령관은 늠름한 기상과 장엄한 태도로써 정면을 향하여 다시 축립하였다. 그는 간곡하고도 겸손하며 견결하고 비장한 어조로써 간명한 열변을 토하여 청중을 감동시켰다. 그가 말하기를 비록 자기의 재덕은 중임을 맡기에 부족하나, 각계의 호의를 보답하며 군인의 천직을 다하기 위하야 국궁진췌(鞠躬盡瘁)하야 사이후이(死而後已) 하겠다고 하였다.”그는 총사령부 예하에 독립여단 성격의 지대를 조직하였다. 총사령부 인원과 군사특파단원을 중심으로 3개 지대를 편성하는 한편 한국청년전지공작대를 5지대로 편제하였다. 각 지대를 중심으로 병력 충원을 독려하는 가운데 아들 지달수와 딸 지복영도 여기에 참여시켰다. 이러한 노력으로 광복 직전 700여 명에나 달하는 등 비로소 한국광복군은 임시정부의 국군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이를 바탕으로 연합군과 공동작전을 추진하는 등 한국광복군이 연합군의 일원으로 대일전쟁을 수행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그는 “현 단계에서 우리의 가장 절박한 임무는 국제 지위를 획득하는 것”임을 역설하였다. 시안의 광복군 2지대와 푸양의 3지대 대원들이 3개월간 훈련을 받아 1945년 8월 4일에 제1기생 훈련을 마쳤다. 김구와 함께 미국 전략첩보국(OSS) 책임자인 도노반 소장을 만나 국내진공작전에 합의했다. 원대한 계획은 갑작스러운 일제의 일방적인 항복으로 무산되었다.일제 패망 후 그는 한인 청년들을 광복군에 편입시켜 상하이·한커우·베이징·항저우·난징·광저우 등지에 잠편지대를 편성하며 광복군의 조직을 확대하였다. 중국정부가 확군 활동을 저지함에 따라 1946년 5월 광복군 해산을 선언하고 주화대표단 일원으로 이듬해에 귀국하였다.정치인으로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참여하다지청천은 귀국 후 ‘청년운동이야말로 조국 통일의 유일한 길’이라며 청년 단체 통합에 노력을 기울였다. 대동청년단은 군사적 역량을 중시하며 결집력이 강한 단체였다. 이는 자신의 굳건한 정치적 기반이었다. 이 단체는 5·10총선거에서 13명의 국회의원을 배출하였으며, 자신은 서울 성동구에서 전국 최다 득표로 당선되었다. 이후 대한민국 정부의 무임소장관, 국회 외무·국방위원장, 민주국민당 대표최고위원, 대한적십자사 중앙집행위원, 대한군인유가족회 회장, 반공통일연맹 최고위원, 자유당 원내 대표최고위원 등을 역임하였다.그는 망명한 이래 1947년 4월 귀국할 때까지 해외에서 풍찬노숙하며 독립전쟁에 일생을 불살랐다. 신흥무관학교 교관, 한국독립군 총사령관, 대한민국임시정부 군무부장, 그리고 한국광복군 총사령관 지청천, 그는 항일무장투쟁으로 조국 독립을 실천한 진정한 군인이었다. 1957년 1월 15일 자택에서 급서하여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alt한국혁명여성동맹 창립 기념운명적인 만남으로 독립운동가의 아내가 되다1890년 4월 30일 아버지 윤원기와 어머니 조씨 사이에 여자 4형제 중 둘째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독선생을 모시고 여자들을 공부시킬 만큼 상당히 개방적인 분위기 속에서 자랐다. 18세에 지청천과 결혼하여 인연을 맺었다. 첫날밤에 합환주(合歡酒)를 마신 지청천은 아내와 합방을 하는 자리에서 이런 말을 하였다.“나는 어머니의 명에 따라 그대를 아내로 맞았지만 이미 세운 뜻이 있어 아내와 더불어 안락한 생활을 누릴 수 있는 몸이 아니오. 나는 이미 군인의 길로 들어서서 나라와 겨레를 위망에서 튼튼히 지키려고 결심하였으니, 언제 죽을지 모르는 몸이오. 그러니 내가 그대에게 바라는 바는 나와 뜻을 같이하겠다면, 고생을 마다 않고 늙으신 어머니를 나 대신 잘 모셔주며 만약에 혈육이 생긴다면 잘 교육시켜 주는 일이오. 만일 이것이 나의 무리한 요구라고 생각한다면 나에게 시집오지 않아도 좋소. 당신의 생각은 어떻소? 뜻을 분명히 해 주시오.”아무리 중매결혼이라지만 꿈 많은 꽃다운 신부가 결혼 초야에 신랑으로부터 들어야 했던 말이라고는 미처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자신도 모르게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영원한 동지로서 독립운동을 지원하다3·1운동 열기가 식어가던 어느 날, 남편 지청천은 아들과 딸을 남겨둔 채로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윤용자는 시어머니 봉양과 자식들 양육에 분주한 나날을 보냈다. 남편의 독립운동을 지원하기 위하여 가족들을 데리고 중국 동북지역으로 이동하였다. 일제의 감시와 낯선 이곳에서 생활은 그리 녹록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독립군의 식사와 의복을 제공하는 등 독립운동가의 아내로서 역할에 충실하였다.        1930년대 중반에는 중국 관내지역으로 생활근거지를 옮겼다. 남편은 독립군 양성에 전념하느라 가정의 경제는 오로지 그녀의 몫이었다. 와중에도 임시정부의 각종 행사를 지원하는 한편 한국국민당 당원으로서 여권 신장에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김병인, 오건해, 이헌경, 김수현, 이숙진 등과 한국혁명여성동맹을 조직하는 등 임시정부 군사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특히 아들 지달수와 딸인 지복영을 한국광복군으로 입대시켰다. 이들은 총사령관 자녀로서 각자가 맡은 임무에 충실하여 ‘그 아버지에 그 아들과 딸’이라는 칭송을 받았다.          광복 후 2년이나 지나 늦깎이로 귀국하여 동지로서 남편의 정치활동을 도왔다. 1964년 2월 3일 사망한 뒤 남편과 함께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정부는 2017년에야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가시밭길에도 부부가 묵묵히 걸어간 길은 오직 조국 광복에 있음을 뒤돌아보게 한다.]]> Mon, 30 Aug 2021 10:38:00 +0000 58 <![CDATA[인문학관 『찬미가』 와 「거국가」]]> 글 김동수(백제예술대학교 명예교수·시인)윤치호의 『찬미가』윤치호는 1865년(고종 2년) 충남 아산 출생으로, 개화당이었던 아버지 윤웅렬의 영향으로 대한제국과 일제강점기에 개화 계몽 운동에 힘썼다. 그는 1881년 16세에 조사시찰단의 일원이었던 어윤중의 수행원으로 일본에 건너갔다. 그때 시찰단의 일부는 일본에 남아 신학문을 공부하였는데 윤치호도 도시샤학교에 입학하여 2년간 서양학문을 익혔다. 당시 근대화된 일본의 현실을 체험한 그는 조국의 근대화가 필요함을 절감하고, 이후 중국 상하이와 미국에서 근대 교육을 받았다. 그러던 중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관직을 사퇴한 뒤, 1906년에 장지연·윤효정 등과 대한자강회를 조직하였고 회장으로 추대되어 교육사업에 힘썼다. 1907년에는 안창호, 양기탁, 이동휘 등과 함께 신민회를 설립하여 국민 계몽운동에 헌신하였다. 이후 1908년 안창호 등이 주도한 평양 대성학교 교장과 대한 기독교 청년회 연맹(YMCA)의 이사와 부회장 및 세계 주일학교 한국지회의 회장에 선임되어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구국운동을 전개하였다. 윤치호의 신앙사상을 단적으로 나타낸 것은 1908년 그가 편집 발행한 『찬미가』가 있다. 15장으로 구성되어 있는 『찬미가』에는 그가 작사한 「애국가」 세 편이 들어 있다.윤치호는 1911년 일제가 민족 지도자를 말살하기 위해 날조한 ‘105인 사건’으로 체포되어 6년형을 선고받고 수감되었다가 3년 만에 석방되었다. 출옥 후에는 YMCA의 총무와 회장으로 활동하였고, 연희 전문학교·이화 여자전문학교 이사와 송도 고등보통학교와 연희 전문학교의 교장 등을 역임하였다. 하지만 1920년부터 친일 단체와 모임에 깊이 관여하면서 조선총독부 일간지인 『매일신보』에 일본 제국주의를 찬양하고 중일전쟁에 청년들이 자원입대할 것을 호소하기도 하였다.alt찬미가           동해물과 백두산이 말으고 달토록 하나님이 보호하사 우리 대한 만세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히 보전하세.윤치호의 『찬미가』 제14장 1절안창호의 「거국가」그런가 하면 안창호는 조국이 독립 하려면 먼저 선진국을 보고 배워야 한다는 생각에 1902년 부인과 함께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가 24세 때 중학교에 입학하였다. 1904년에는 신학강습소에서 신학을 공부하였고, 1905년에는 공립협회를 조직하여 민족 독립과 계몽에 힘써 『공립신문』을 발행하기도 하였다.1907년 안창호는 공립협회가 샌프란시스코에 자리를 잡고 애국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하게 되자 국내로 돌아온다. 이후 비밀결사체인 ‘신민회’를 조직해 애국지사들의 구국운동을 총지휘하고, 교육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여겨 평양에 대성학교를 설립하였다. 그러던 1909년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암살사건의 거사가 일어나자 일본 헌병대는 이것이 신민회의 짓이라 생각하였다. 이어 대성학교 교정에 있던 안창호를 즉각 체포하여 서울로 호송한 뒤 용산 일본 헌병대에 감금하였다. 이어 각처에서 신민회 중심인물들을 검거하였다. 몇 달 후에 석방되었으나 일본의 탄압은 날로 심해졌고, 1910년 안창호는 앞날의 승리를 약속하면서 「거국가」를 남기고 망명길에 올랐다.국권 상실 전 조국을 떠나며 당시의 심회를 읊은 이 노래는 「거국행」,「한반도 작별가」라고도 불린다. 1절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이별에 대한 고국에의 위무를, 2절에서는 복받치는 울분을 누르며 독립 의지를 다짐하고 있다. 3절에서는 한결같은 조국애의 기약을, 4절에서는 귀국할 때까지 조국의 안녕과 광명의 그날을 기약하는 염원을 담았다. 거국가는 『대한매일신보(1910. 5.)』에 소개되었고, 이후 국외 동포 사회로 번져 나가 미주 『신한민보(1915. 11.)』에도 소개되었다. 이 노래가 민족 사립학교에서 애창되자 조선총독부에서는 일제 반항을 장려하는 노래로 지목하고 부르지 못하게 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이 시가는 역사적 상황과 시대의 회한을 토로한 민족 지도자의 표현으로 우리 민족에게 큰 힘을 주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값지다. alt거국가          1.간다 간다 나는 간다 너를 두고 나는 간다.잠시 뜻을 얻었노라 까불대는 이 시운이나의 등을 내밀어서 너를 떠나가게 하니 이로부터 여러 해를 너를 보지 못할지나.그동안에 나는 오직 너를 위해 일할지니 나간다고 설워마라 나의 사랑 한반도야.4.간다 간다 나는 간다 너를 두고 나는 간다.지금 이별할 대에는 빈주먹을 들고가나후일 상봉할 때에는 기를 들고 올터이니눈물흘린 이 이별이 기쁜 환영 되리로다.악폭풍우 심한 이 때 부대부대 잘있거라훗날 다시 만나보자 나의 사랑 한반도야.안창호의 「거국가」 1절과 4절(2·3절 생략)]]> Mon, 30 Aug 2021 10:38:40 +0000 58 <![CDATA[끝나지 않은 독립운동 애국가 다시금 논의할 때]]> 글 이계형(국민대학교 교양대학 교수) 우리나라에서 끝나지 않은 논쟁 중 하나가 애국가이다. 누가 작사하였는지 불명확하고, 친일파가 작곡한 곡을 계속 사용해야 하는지를 두고 말도 많다. 애국가는 정식 국가(國歌)는 아니지만, 태극기와 마찬가지로 대한민국을 상징한다. 이에 국내외를 막론하고 공식적인 국가 행사에서는 반드시 태극기가 게양되고 애국가가 울려 퍼진다. 그런데도 애국가는 여전히 논쟁 중이다.  한 나라의 국가(國歌)우리나라를 상징하는 국호와 국기는 전근대 시기와 연결되어 있다. 근대국가로 탈바꿈해 가던 시기에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여 근대화 과정이 왜곡되면서 빚어진 결과다. 일제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던 독립운동 당시 전 국민의 동의를 얻지 못한 채 대한제국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바뀌었고, 국기는 여전히 태극기가 내걸렸다. 광복 후 1948년 8월 자주독립 국가가 탄생하면서 국호는 ‘대한민국’으로, 국기는 ‘태극기’로 인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애국가’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은 과정을 거쳤다. 한 나라의 국가(國歌)에는 국민 정서와 역사 또는 가치관 등이 담겨 조국(祖國)에 대한 국민의 자부심, 애국심, 국민의 결속과 용기를 고취한다. 그렇다면 세계를 대표하는 나라들의 국가는 어떤지 살펴보자. 혁명을 거쳐 근대국가로 변모한 프랑스의 국가는 ‘라 마르세예즈(la Marseillaise)’라고 하는데, 이는 프랑스혁명 당시 파리의 튈르리 궁전을 습격하여 프랑스 왕정을 끝낸 마르세유 군대의 이름을 따온 것이다. 영국은 여전히 입헌군주제를 유지하고 있기에 ‘God Save the Queen’이라는 군주를 축원하는 내용의 국가를 사용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인 일본과 독일은 색다르다. 일본은 패전 후 국가가 없어졌는데 1999년에 ‘기미가요(君が代)’를 다시 국가로 정했다. 이는 천황과 제국주의의 번영을 기원하는 내용을 담고 있어 여러 논란과 반대가 있었지만, 그럼에도 국가로 자리 잡았다. 독일 역시 패전 후 국가를 부르지 못하게 되었다. ‘모든 것 위에 군림하는 독일(Deutschland über Alles)’이라는 의미의 독일 국가는 1952년 1절과 2절을 부르지 않는 조건으로 ‘독일인의 노래’라는 이름으로 부활했다.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미국은 어떠한가? ‘성조기여 영원하라(The Star Spangled Banner)’는 미국의 국가는 국기이면서 미국 정신의 상징인 ‘성조기’를 강조한다. 이는 독립전쟁 당시 영국의 바이킹 후예들이 승리의 노래로 불렀다고 하는 ‘천국의 아나크레온에게(to anacreon in heaven)’라는 곡조에 침략이 아닌 방어의 미덕을 찬양하는 노랫말을 붙였다. 우리나라의 경우 관습적으로 ‘애국가’를 국가라 부른다. 이를 풀어쓰자면 ‘나라를 사랑하는 노래’라는 뜻이다. 애국가는 1894년 이후 만들어진 창가 제목 중 하나였다. 1896년 무렵에는 그 수가 10여 종이나 됐고, 『독립신문』에 그와 관련한 가사가 게재되기도 했다. 다만 어떤 곡조였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그 뒤 고종 재위 40주년을 맞아 1902년 왕립군악대 교사였던 독일인 에케르트가 작곡한 애국가가 공식 국가로 지정되었다. 하지만 이후에도 여러 애국가가 학교에서 불리자 1904년에 학부가 나서서 그것이 유일한 ‘국가’라면서 학생들에게 가르치게 하였고, 이후 행사 때마다 애국가를 합창하곤 하였다. 당시 애국가는 “샹뎨여 우리나라를 도으쇼셔”로 시작하였다.  alt안창호(1878~1938)(좌) /  윤치호(1866~1945)(우)애국가에 대한 논쟁지금의 애국가는 작사자가 ‘윤치호냐, 안창호냐’를 두고 논쟁이 격렬하다. 끝내 결론을 내지 못해 현재 작사자 미상이다. 그런데도 이를 굳이 정리하자면 대한제국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1907년 10월 30일자 『대한매일신보』에 ‘무궁화가’라는 제목의 가사가 실렸는데, 첫 구절은 성자신손오백년(聖子神孫五百年)으로 시작한다. 후렴은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로 오늘날과 같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으로 시작하는 애국가가 스코틀랜드 민요 ‘올드 랭 사인(Auld Lang Syne)’의 곡조에 맞춰 불렸다.          이는 경술국치 이후 애국가로 지칭되었고, 국가처럼 대한민국 임시정부 등 독립운동 단체의 독립운동가들이 부르곤 하였다. 그러다 안익태가 1936년 작곡한 ‘코리아 판타지’(Korea Fantasy)를 재미 한인들이 애국가의 곡조로 사용할 수 있도록 임시정부에 요청하였고, 1941년 2월 국무회의는 이를 가결하였다. 그 뒤 임시정부 행사 때 정식 곡으로 채택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광복 직후에 기존 애국가가 많이 불렸는데, 한쪽에서는 독립 국가로서 새로운 국가를 제정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간간이 들려왔다. 곡조가 이별 곡이고, 기독교 찬송가의 가사가 포함되었다는 이유에서다. 그런 가운데 『자유신문』 1945년 11월 21일자에 「우리 애국가, 장중 활발하게 새 곡조로 부르자」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재미 한인들이 이별 곡인 ‘올드 랭 사인(Auld Lang Syne)’ 곡조의 애국가는 광복된 마당에 더는 적당하지 않다며, ‘코리아 판타지’ 곡조로 바꿔 부르자는 내용이었다.        이후 “애국가는 이 곡조로 부릅시다”라는 운동이 전개되는가 하면, 음악가협회·문학동맹 공동 주최로 ‘애국가 현상모집’ 행사가 열리기도 했고, 애국가는 국가와 다르다며 새롭게 국가를 제정해야 한다는 주장도 거듭 제기되었다. 조선아동문화협회는 윤석중 작사의 새로운 애국가를 발표하고는 작곡을 환영한다는 광고를 내보내기까지 하였다. 이에 가사는 하나인데 곡조가 두 개인 애국가가 불려 혼란을 초래하였다. 이러한 문제는 점차 개선되어 안익태 곡으로 정리되어 갔다.        이후 1948년 8월 정부가 수립되었는데도 ‘국가’에 관한 헌법 조항이 없다는 점이 문제로 부각되었다. 제헌국회에서 ‘국가에 관한 건의안’이 발의되었지만, 통일 이후에 국가를 제정하자는 주장에 그만 보류되었다. 그럴지라도 당시에 ‘국가를 애국가로 대신한다’라거나 ‘남북통일 이후 국가를 제정한다’라는 내용의 문구가 명문화하였다면 이후 불필요한 논란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결국 정권이 바뀔 때마다 ‘국가’ 문제가 꾸준히 제기되었고 흐지부지되기를 반복하였다. 2017년에는 “대한민국 국가를 애국가로 명시화 하자”는 법안이 제기되었고, 2020년에는 작곡가 안익태의 ‘친일·친나치 행적’을 문제 삼아 애국가를 폐기하자는 주장까지 거론되었다.        한 나라의 상징 가운데 하나인 ‘국가(國歌)’는 그 나라의 운명과 같이한다. 어느덧 광복 후 정부가 수립된 지 70년이 훌쩍 넘었다. 대한민국은 꾸준히 민주화와 경제성장을 이룩하여 개발도상국에서 선진국 그룹으로 격상하였다. 이제 격에 맞는 헌법 개정과 아울러 ‘국가’ 문제도 매듭짓기를 바란다.]]> Mon, 30 Aug 2021 10:39:18 +0000 58 <![CDATA[독립의 발자취 유관순의 스승 김란사의 일생 〈네가 선택한 삶이 아름답기를〉]]> 글 편집실  광복 76주년을 맞이하여 독립운동가 김란사를 조명하는 특별전 〈네가 선택한 삶이 아름답기를〉이 서울교육박물관에서 개최되고 있다. 이번 특별전에서는 이화학당에서 유관순 등 여러 학생에게 독립의식을 심어주고 평생을 독립운동에 헌신한 교육자 김란사(金蘭史)의 생을 만나볼 수 있다. alt그라피티로 재현한 김란사         독립운동가 김란사에 대해 짧게 설명해주세요 김란사는 150년 전 부유하고 안정된 집에서 태어났지만, 그 안락함을 마다하고 역사의 소용돌이로 들어가 새로운 길을 개척하며 살아간 독립운동가입니다. 그는 신교육에 눈을 떠 우리나라 최초로 미국 문학사를 취득하고, 모교인 이화학당에서 학생들에게 독립의식을 심어주는 등 여성교육을 위해 평생을 헌신하였으나 널리 알려지진 않았습니다. 이번 테마전 기획 취지에 대해 말씀해주세요이번 김란사 특별전은 역사 속으로 사라진 김란사의 생애가 헛되지 않았음을 세상에 알리고자 기획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술 작품을 통해 독립운동가의 삶을 재조명하는 뜻깊은 일에 26명의 작가들이 함께해주었습니다. 회화, 조소, 그라피티, 사진, 모형, 보석, 모바일 작품 등 작가들이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작품을 선보이고, 그것을 본 관람객들이 독립운동가의 삶에 대해 알아가며 책에서 느낄 수 없는 또 다른 감동을 경험하기를 기대합니다.작가들이 작품에 참여한 과정이 궁금한데요이번 특별전에 참여한 작가들은 ‘불굴의 의지로 나라를 지킨 독립운동가들을 왜 지금에 와서 기억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을 나눴습니다. 이어 김란사 지사의 일생을 충분히 소화하고 이해한 뒤에 새롭고 과감한 시선으로 해석한 작품을 선보였습니다. 작품을 구상하고 창작하는 지난 1년의 시간이 모두 작가들의 재능 기부로 이뤄졌으며, 역사 속에 잠들어 있던 위대한 여성독립운동가를 지상 위로 이끌어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여성독립운동가 김란사를 충분히 이해하고 작품에 임해준 작가들의 노력과 헌신에 감사드립니다.전시 작품 중 에피소드가 있다면 설명해주세요전시 작품 중 박미화 작가의 작품 〈김란사〉는 민화풍의 색감으로 눈길을 사로잡는데요. 작품에는 깃털이 달린 붉은 서양 모자, 미국 유학시절에 아끼던 소품, 한국 최초의 여학사로서 썼던 학사모, 유학시절 공부했던 책 등이 표현되어 있어 의미가 있습니다. 박미화 작가는 김란사의 일생을 어떻게 표현할까 고민하다가 책가도(冊架圖)를 떠올렸다고 합니다. 그는 “책가도는 책가(책장)를 배경으로 책·문방구류·장식품 등을 그려 넣은 그림입니다. 조선시대 문인들의 독서생활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 착안해 각 책장 속에 김란사를 표현할 수 있는 것들을 그려 넣었다"고 설명했습니다.마지막으로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다면요전시는 2021년 8월부터 시작해 2022년 3월 30일까지 운영할 계획입니다. 이번 특별전을 통해 조국을 위해 희생한 독립운동가 김란사의 생애와 활동을 알리고, 전시관 외부에 조성된 〈독립운동가의 길〉도 함께 감상할 수 있습니다. 보다 많은 국민이 역사적 의미를 지닌 독립운동가를 만나는 계기를 마련하고, 진정한 나라 사랑의 의미를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alt박미화 작가의 〈김란사〉기 간 : 2022. 3. 30. 까지장 소 : 정독도서관(서울교육박물관)문 의 : 02-2011-5782배움을 갈망한 신여성김 란 사 alt김란사(좌) / 게이오대학 대조선인 일본 유학생 친목회 사진(1886)(우)지식만이 살 길이다1872년 평양 안주 출신의 김란사는 풍족한 집안에서 태어나 별다른 어려움 없이 성장하였다. 언제나 정신이 물질보다 중요하다는 신념으로 살아온 김란사는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포기하지 않고 극복하는 집념의 소유자였다.      1893년 21세에 경무청에서 일하는 하상기와 결혼하고 나서 1년 뒤 동학농민운동·갑오개혁·청일전쟁 등 나라 안팎으로 어수선하던 때에 위태로운 나라를 살리기 위해서는 여성도 배워야 한다는 생각을 하였다. 이를 실천하고자 이화학당을 찾아가지만 번번이 거절당하고 만다. 당시 학당의 규칙대로라면 결혼한 여성은 입학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학당장을 찾아가 자신 또한 조선의 여성이니 당연히 입학할 자격이 있다고 끈질기게 설득하고, 자신은 다른 학생들과 달리 학비를 부담할 것이며 귀부인이라고 해서 특별대우를 바라지 않으며 어린 학생들과 같은 곳에서 생활할 것을 다짐한 뒤 입학할 수 있었다. alt정동교회 파이프 오르간 설치 기념 예배 후여성교육 발전에 힘쓰다이후 1895년 일본 게이오대학교에서 1년간 유학한 뒤, 1897년에는 더 넓은 세상을 배우기 위해 미국으로 떠났다. 워싱턴에 있는 하워드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한 뒤, 오하이오주에 있는 웨슬리안대학교에서 문학을 공부하였다. 김란사가 계속 공부를 하려는 이유는 분명하였다. 이 나라 저 나라에서 넘보는 우리 조국을 지키기 위해서는 현대적 교육만이 살길이라고 판단해서였다.       1906년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뒤에는 다수의 여학교를 세우고 여성교육 발전에 힘썼다. 1907년에는 모교인 이화학당 교사로 지내면서 이문회를 조직하여 수많은 제자의 민족의식을 드높이는 교육에 전념하였다. 이후 김란사를 따르던 학생들은 3·1운동의 주역이 되었다.   alt 파이프 오르간 모금을 위해 안창호에게 보낸 편지        임무 수행 중 순국하다고종의 신임을 얻은 김란사는 1919년 1월 중요한 임무를 맡게 된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는 강화회의에 참석해 ‘미국과 조선이 다른 나라로부터 침략 받으면 서로 도와준다’는 내용이 담긴 외교 문서를 외국 대표들에게 전하고 조선의 독립을 주장하고 돌아오는 것이었다. 그러던 중 1월 22일 고종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면서 이 계획이 잠시 중단되었지만, 2월 8일 일본 도쿄에서 유학생들이 독립선언문을 읽는 사건을 계기로 파리강화회의 참석이 비밀리에 추진되었다.     김란사는 3·1운동이 일어나고 며칠 뒤 파리로 가기 전 중국 베이징에서 비밀결사대와 만나기로 하고 베이징으로 떠났다. 그리고 3월 10일 베이징 교포가 마련한 자리에서 식사를 하고 나서 갑자기 사망하였다. 김란사는 순국한 지 70여 년 만에 공적을 인정받아 1995년에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고, 2018년에는 국립현충원에 위패가 안장되었다.]]> Mon, 30 Aug 2021 10:40:10 +0000 58 <![CDATA[세계 산책 식민지배에 맞선 베트남의 투쟁]]> 글 정재현(목포대학교 사학과 교수) 1945년 9월 2일 호찌민은 베트남민주공화국의 독립을 선포하였다. 이는 80여 년에 걸친 프랑스의 식민 지배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베트남인들의 열망을 담은 외침이었다. 베트남 독립운동은 한국의 독립운동과도 인연이 깊다. 베트남이 주권을 빼앗기는 과정을 서술한 『월남망국사』는 출간된 이듬해인 1906년 우리나라에 소개되면서 한국 지식인들에게 경종을 울렸다. 또한 1919년에는 제1차 세계대전 종전 회담이 열리고 있던 파리를 찾은 김규식 등의 한국 독립운동가들이 호찌민과 만나서 교류하기도 하였다.   alt프랑스 당국에 체포된 베트남국민당의 지도자 응우옌타이혹(1930)             독립운동의 시작베트남은 19세기 후반에 프랑스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먼저 남부 지역이 1858~1867년에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었고, 북부와 중부 지역은 1883년에 체결된 보호조약을 통해서 프랑스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식민지배에 대한 베트남인들의 저항은 프랑스의 식민지 정복이 시작되는 것과 동시에 터져 나왔다. 1885년 7월 5일 섭정 대신인 똔텃투옛은 어린 함응이 황제를 데리고 몰래 궁을 빠져나가서 황제의 이름으로 프랑스의 침략에 저항하자고 호소하는 근왕령을 반포하였다. 이에 각지에서 관리, 유생, 지주 등이 호응하여 농민들을 이끌고 무장 저항운동을 펼쳤다. 근왕운동이라 불리는 이 운동의 목표는 한국의 위정척사운동처럼, 외세의 침략을 몰아내고 과거의 정치·사회 질서로 돌아가는 데 있었다. 근왕운동은 프랑스의 식민 지배가 정착하는 것을 끈질기게 방해했지만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1900년 이후 새로운 세대의 독립운동가들이 택한 방법은 그들의 선배인 근왕운동의 지도자들과는 사뭇 달랐다. 그들은 조국의 독립과 함께 사회의 변화를 모색하였고, 베트남 사회가 바뀌지 않는다면 독립을 이루는 것도 불가능하리라 생각했다. 이러한 흐름을 대표하는 두 인물은 판보이쩌우와 판쩌우찐이었다. 둘 다 어려서 유학을 공부했지만, 중국에서 건너온 ‘신서(新書)’를 통해 서양의 지식을 배웠다. 이들은 군주에 대한 충성이 아니라 식민지배에 저항했다는 점에서 베트남 최초의 근대적 민족주의자라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 둘의 행보와 사상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판보이쩌우는 무장 투쟁을 통해서만 독립이 가능하리라 보았고, 이를 위해서라면 전통적 지배 세력과도 손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반대로 판쩌우찐은 독립이라는 장기적 목표 아래에서 먼저 베트남 사회를 개혁하고 민족의 역량을 키우는 데 역점을 두었으며, 이를 위해서 당장은 식민당국과도 협력하고자 했다. 그렇지만 이러한 두 가지 노선 모두 프랑스 당국의 탄압을 받아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독립운동의 급진화1920~1930년대 베트남의 젊은이들은 어려서부터 식민당국이 세운 학교에서 공부를 해서 프랑스 문화에 익숙한 세대였다. 하지만 프랑스인과 동등한 기회를 부여받지 못하고, 억압적인 통치로 일관하는 식민지배의 현실에 크게 실망하였다. 더군다나 당시에 폭발적으로 증가한 베트남어 신문들이 이들의 민족의식을 북돋웠다. 이러한 상황에서 전보다 더 급진적인 경향의 독립운동이 출현하였다.     1927년에는 교사와 학생, 언론인이 중심이 되어 베트남의 독립과 공화정의 건설을 열망하는 베트남국민당이 결성되었다. 국민당 지도부는 일단 자신들의 주도하에 봉기가 시작되면 민중이 합세하리라 기대하면서 1930년 2월 베트남 북부의 옌바이라는 도시에서 봉기를 일으켰다. 그러나 이는 민중 봉기로 이어지지 못한 채 실패로 막을 내렸다. 국민당 지도부 대부분은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프랑스 식민당국은 옌바이 사건에 경악했다. 그러나 그 뒤에 식민당국이 취한 정책은 개혁으로 베트남인들의 마음을 돌려놓으려는 것이 아니라, 더 가혹한 탄압으로 독립운동의 성장을 막으려는 것이었다. 이는 더 많은 이들을 독립운동에 투신하도록 할 뿐이었다. 나아가 옌바이 사건은 비공산주의 계열의 독립운동을 와해하고 공산당 세력이 확산하는 발판이 되었다.     베트남의 공산주의 운동은 호찌민으로부터 시작되었다. 1910년대 말부터 1920년대 초까지 파리에 머물던 시절에 공산주의 사상을 처음으로 접한 그는 소련과 국제 공산주의 운동이 식민지 해방 운동에 힘을 실어줄 수 있는 유일한 세력이라고 생각했다. 1925년부터 호찌민은 베트남에서 멀지 않은 중국 남부의 광저우에 거처를 마련하고, 혁명 운동에 투신할 이들을 모집하는 데 주력하였다. 공산주의 사상이 점차 베트남에 확산하면서 1930년에는 인도차이나공산당이 결성되었다.     1930~1931년에 베트남 중부 지역에서는 대규모 농민 봉기가 일어났고, 공산당 당원들이 이에 깊숙이 개입하였다. 식민당국은 공중 폭격까지 하면서 봉기를 무자비하게 진압하였으며, 수많은 공산주의자를 체포하거나 처형하였다. 처형을 면한 이들은 남부의 외딴섬에 있는 수용소에 감금되었다. 그렇지만 역설적으로 이곳은 전국에서 온 독립운동가들이 유대감과 독립에 대한 의지를 다지는 ‘혁명의 학교’가 되었다. alt보응우옌지압 장군(좌)과 호찌민(우)(1945)           베트남의 독립견고한 듯 보였던 프랑스의 지배가 휘청이게 된 것은 제2차 세계대전부터였다. 1940년 6월 일본군이 베트남에 진주하였다. 일본에 협력하는 대가로 유지되던 프랑스의 베트남 지배는 1945년 3월 일본이 베트남의 모든 프랑스 관리와 군인을 체포하고, 친일 괴뢰 국가를 수립함으로써 종식되었다.       한편 호찌민과 공산당원들은 베트남 북부의 산악 지역에서 베트남의 진정한 독립을 획득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이들은 공산주의에 적대적인 이들을 아우르기 위해 1941년에 베트남 독립동맹(비엣민)을 결성하였으며, 그 뒤로는 비엣민의 이름으로 모든 활동을 펼쳤다. 1945년 8월 15일에 일본이 항복을 선언하자 비엣민은 8월 혁명이라 불리는 전국적 봉기를 일으켜서 재빨리 권력을 장악하고 9월 2일 독립을 선언하였다. 그렇지만 이는 1954년까지 계속될 기나긴 독립전쟁의 시작에 불과했다.식민지의 독립을 허용할 생각이 없었던 프랑스는 대규모 병력을 보내서 베트남을 재침공하였다. 그리하여 시작된 인도차이나 전쟁은 1954년 3~5월에 펼쳐진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비엣민 군대가 프랑스군에 참패를 안긴 뒤에야 종식되었다.      베트남 독립운동의 역사는 단순히 식민지배에 맞선 투쟁의 역사만이 아니다. 베트남의 독립을 열망하고 이를 위해서 목숨까지 내던진 사람들 중에서도 독립을 달성하는 방법과 독립 후 베트남의 미래에 대해서 서로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공존하였다. 이들 사이에 벌어진 갈등은 식민지배를 몰아낸 뒤에도 사라지지 않았다.      ]]> Mon, 30 Aug 2021 10:41:24 +0000 58 <![CDATA[기념관은 지금 역사 체험의 새 장을 펼치다 첨단 기술의 향연 MR독립영상관]]> 정리 편집실  사진 봉재석 독립기념관은 실감형 체험 전시에 대한 국민 요구에 부응하고자 최신 ICT 기술과 독립기념관의 특화된 역사 콘텐츠를 융합해, 2019년 국내 최초로 4DX, VR, MR 등 복합 영상 상영이 가능한 MR독립영상관 조성을 완료하였다. 2020년부터는 SKT와 5개년 간 MOU를 체결하여 독립기념관 경내 외 전역에 5GX 기반 독립운동사 실감형 콘텐츠 개발 사업으로 확대해 추진 중이다.  alt독립기념관을 이끌어 가는 당신이 자랑스럽습니다. 오늘도 앞장서서 묵묵히 열 일하는 열정 인재들! 이번 호에서는 8월에 정식 개관한 MR독립영상관을 위해 노력한 인재들을 만나봅니다. MR독립영상관이 개관하기까지 콘텐츠 개발부터 안전한 영상관 운영 준비 등 불철주야 노력이 이뤄진 현장입니다.MR독립영상관을 소개해주세요먼저 MR(Mixed Reality)이라는 용어는 현실 세계와 가상 세계를 넘나든다는 뜻의 혼합현실을 의미하며, MR독립영상관은 4차 산업기술인 4DX, AR, VR 등의 최신 기술을 활용한 콘텐츠 체험이 가능한 복합 영상체험관입니다. 이곳에서는 독립운동사를 오감을 자극하는 3차원 증강현실과 4차원 가상현실을 통해 과거-현재-미래의 역사를 직·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습니다.MR독립영상관에서 선보이는 첨단 기술은?MR독립영상관은 삼성전자와 SK텔레콤 등 ICT 기술 최선두 주자인 기업들과 MOU를 통해 공동으로 진행한 사업입니다. 세계적 기술력과 독립기념관만의 전문적인 독립운동사 콘텐츠가 만나 최신 ICT 기술과 5GX를 기반으로 한 시청각적 몰입감, 생생한 역사 교육 및 체험을 통해 역사를 보고 배우고 느끼는 새로운 체험전시문화의 장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말씀드리자면 MR독립영상관 4DX관에서는 삼성전자의 독보적 기술인 Onyx 3D 시네마 LED 스크린과 객체 기반 오디오 DTS:X 음향 시스템을 국내 최초로 도입해 실감 나는 4DX를 감상할 수 있습니다. 또한 SKT의 자체 개발 영상 이미지 복원 솔루션 기술인 슈퍼노바 기술을 적용한 마법사진관, 어린이 코딩교육을 위해 개발한 NUGU 알버트 코팅로봇, 실시간 촬영 영상을 3D 애니메이션 영상으로 구현하는 MR 콘텐츠 등 최신 ICT 기술로 구현한 다양한 콘텐츠를 만날 수 있습니다. altMR독립영상관 콘텐츠 개발과 운영 인재들 허진희, 신선주, 김서하, 임중열4D와 MR 등 용어의 뜻은?2D는 평면, 3D는 입체 애니메이션, 4D는 3D 입체영상을 보다 실감적으로 느끼기 위해 3D 안경과 모션 체어(의자 진동 또는 움직임), 바람·물 등의 감각을 자극하는 다양한 효과들이 합해지는 영상 기법이라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리고 AR(증강현실)은 디지털 제작 이미지 등의 콘텐츠가 현실 세계 위에 합성되어 보이는 형식, VR(가상현실)은 헤드셋 등의 장비를 쓰면 디지털화된 가상의 세계에 있는 듯 느끼게 만드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MR(혼합현실)은 현실 세계의 콘텐츠와 가상 세계 콘텐츠가 공존하며 인터랙션 하는 다양한 기술을 혼합하여 구현하는 방식입니다. 이러한 기술들로 인해 디지털 콘텐츠들이 진짜 현실처럼 느낄 수 있도록 발전해가고 있으므로 향후에는 더욱 생생한 역사 체험이 가능할 것으로 기대합니다. alt4DX 영상 시스템 점검다양한 콘텐츠를 효율적으로 관람하는 방법은?MR독립영상관은 기존의 입체영상관과 다르게 공간을 분할하고 확장해 다양한 영상 체험을 동시에 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입장 대기 시간에 VR(2편)과 MR(1편) 영상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4DX 영상을 관람한 후에는 신규 조성한 콘텐츠 체험존(제7관)으로 이동해서 마법사진관(1편)과 알버트 코딩로봇 체험(2편)을 진행하면 됩니다. alt                           절벽 모형에 카메라가 달린 모니터가 이동하며 실시간으로 촬영되는 영상 위에 가상의 독립전쟁 애니메이션을 볼 수 있는 MR영상 체험존콘텐츠 개발부터 개관까지 어려웠던 점과 극복 과정은?콘텐츠를 개발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점은, 첨단 기술력을 콘텐츠화하여 상설 전시가 가능하도록 안정화·상용화·일반화할 수 있도록 구현시키는 것이었습니다. 또 관람객들의 디지털콘텐츠 문화 소비 수준이 높아진 상황에서 한정된 예산과 주어진 시간 안에 기대치에 상응할 수 있는 신규 콘텐츠를 개발해야 하는 현실적인 어려움에 직면했습니다. 이러한 점을 극복하고자 독보적 ICT 기술을 보유한 삼성전자, SKT 등과 공동 투자로 사업을 진행하였고, 최신 기술의 역사체험 콘텐츠들을 개발할 수 있었습니다.그런데 MR독립영상관 오픈을 앞두고 2020년 코로나19 상황에 직면하면서 장기 휴관과 임시운영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기간 동안 발열 체크, 입장 인원 관리 시스템을 신속히 보완하고, 안전점검과 현장 소독 등 방역관리 시스템을 구축하여 이번 76주년 광복절을 맞이해 성공적으로 정식 개관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직은 코로나 확산 방지를 위해 체험에 참여하는 인원을 제한적으로 운영하고 있으나, 코로나19가 하루빨리 종식되어 저희가 준비한 다양한 콘텐츠를 마음껏 체험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alt슈퍼노바 기술을 통해 고화질로 복원된 독립운동 관련 사진에 관람객 모습을 합성하여 전시하고, 메일로 전송해 직접 소장할 수 있는 마법사진관 체험존(제7관 내) 콘텐츠 개발이 매년 이루어지는 것 같은데, 향후 계획은?2024년까지 SKT와 실감형 콘텐츠 개발 공동 투자 사업이 진행됨에 따라, 올해는 역사 왜곡을 주제로 4DX 영상 및 실감형 인터랙티브 미디어 등 새로운 콘텐츠 개발을 진행 중입니다. 향후에는 독립기념관 전역을 대상으로 5GX 망 구축, 야외 전시물 연계 미디어파사드 및 AR 체험, 자율 주행 AR-VR 체험 버스 등 단계적으로 5GX MEC 기반의 최신 디지털 기술을 도입하고 독립기념관을 역사 테마 에코뮤지엄으로 활성화할 계획입니다. altMR독립영상관 내 4DX영상관(좌) / 알버트 코딩로봇 체험(제7관 내)(우)]]> Mon, 30 Aug 2021 10:44:09 +0000 58 <![CDATA[독자 이벤트 이번 호 독립기념관을 읽고 빈칸을 채워주세요. 꼼꼼히 읽다 보면 정답에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alt alt아이콘 클릭하면 퀴즈 정답을 보낼 수 있습니다.        ]]> Mon, 30 Aug 2021 10:47:14 +0000 58 <![CDATA[들어가며 사명]]> 일제강점기 항일변호사들은 법을 수단으로 독립운동을 변호하였다.식민지 법정에서 독립운동가를 변호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었으며그것은 유효한 독립운동의 일환이었다.당시 독립운동을 변호한 변호사들의 신념은 다음 회고록에 잘 나타나 있다.“기미년(1919) 독립운동은 하루아침에 일어나 갑자기 만세를 부른 것이 아니다. 독립지사들이 일제의 감시를 피해 다니며 경향 각지의 뜻있는 이들을 규합하여 일으킨 것이다. (중략) 나는 우리에게 실력이 없음을 통감했다. 개인과 개인의 관계가 그러하거늘 인정사정없는 나라와 나라의 관계, 민족과 민족의 관계는 어떠하겠는가, 우리 자신의 힘이 없이는 아무리 외쳐도 독립이 될 리가 없다. (중략) 내가 두 번째 응시한 변호사 시험에는 일본 전국에서 4천 명이 모였는데, 합격자는 70명이었다. 이 가운데 한국인 합격자는 나 혼자였다. (중략) 내 나이가 만으로 27세인데 그때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하면 시보를 거쳐 변호사가 되지만, 일본 변호사시험 합격자는 즉시 변호사로 개업할 수가 있던 터라 나는 시험 합격만으로 곧장 우리나라 독립운동을 위해 법정에 섰다.”이인, 『애산여적』 4집, 38~42면 중에서]]> Wed, 29 Sep 2021 09:59:39 +0000 59 <![CDATA[톺아보기 항일변호사로 추앙받는 사람들]]> 글 심희기(연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일제강점기 항일변호사들은 변호사 지위를 이용하여 피고가 된 독립운동가의 독립운동을 적극 변론하였다. 또 무죄를 역설하고 조선 독립의 대의를 역설하면서 법정을 투쟁의 장으로 바꾸어 놓았으며, 법정에서의 갈등은 조선 사회에 전파되면서 독립운동을 확산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alt일제강점기 재판 모습일제강점기 변호사들의 활동일제강점기 항일변호사들의 변론 중점은 피고인인 독립운동가들의 행위를 일제의 본국법과 조선총독부가 발령한 제령(식민지 법령)에 비추어 정당성을 논증해야 하는 일이었다. 때문에 일제의 성문법 체제 바탕 위에서 그 법령들의 치밀한 해석론을 펼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 알게 모르게 식민통치의 정당성을 인정하게 되므로 식민지 법정에서 독립을 변호하는 일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거나,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굴욕적인 것이 아니냐는 자조나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예를 들어 “일제의 법률을 전공하여 변호사 자격증을 딴 이들이 일본어로 진행되는 법정에서 일제 법률에 따라 어떻게 일제의 식민지배를 부정하는 독립운동을 변호할 수 있었겠는가”라고 물으면 어떻게 답할 것인가? 그에 대한 답변은 다음과 같이 가능할 것이다. 일제 법률이 무조건 조선 민족을 억압하는 측면만을 가진 것이 아니다. 완전하지는 않지만 법 안에 부분적으로 검찰·경찰·법원의 권력 남용을 억제하는 법리가 있어, 항일변호사들이 잘 활용하기만 하면 독립운동가 이익에 도움이 되는 변호 활동을 전개할 수 있었다.       한편 변호사에게는 다음과 같은 특권 및 지위가 있어 독립운동가들에게 편의를 제공할 수 있었다. 일제의 법률을 전공하여 자격증을 땄다는 사실로 인해 일제하의 변호사는 경찰도 함부로 폭행이나 구금을 하기 어려운 존재였다. 변호사가 문제 지역을 방문할 때는 그 지역의 행정관청은 물론 경찰도 그 방문을 봉쇄하기가 쉽지 않았다. 또 변호사에게는 일반 사회운동가들에게 허용되지 않는 관청과의 접촉도 가능하였다. 따라서 항일변호사들은 피고인에 대한 요식적 변호 행위로 끝내지 않고, 변호사 지위를 이용하여 피고인들의 독립운동을 적극 변론할 수 있었다. 또 무죄를 역설하고 조선 독립의 대의를 역설하면서 법정을 투쟁의 장으로 바꾸어 놓았다. 법정에서의 갈등은 언론을 통해 생중계하듯이 조선 사회에 전파되면서 독립운동을 확산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alt1949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특별재판부 재판장을 맡은 김병로(좌) / 경성법학전문학교(우)소수 항일변호사들의 선택일제강점기에 법학교육을 받기 위해서는 경제적으로 재력이 있는 가정에서 태어나야 했다. 더불어 변호사 자격을 취득해야 판사·검사로 임용될 수 있었으며, 변호사로 개업하면 높은 수임료를 받아 윤택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런 유리한 지위를 획득했으면서도 굳이 가시밭길을 택한 소수의 변호사들이 있었으니, 사람들은 그들을 항일변호사, 사상변호사, 무료변호사 등으로 불렀다.      이 소수의 항일변호사들은 식민지 법정에서 법정투쟁 등으로 나라의 독립을 변호하였다. 때로는 독립운동가들과 같이 호흡하고 연대하며 전개한 이들의 법정 변론이 독립운동의 파장을 증폭시켜 일제를 당혹하게 만들기도 하였다. 항일변호사들은 일제의 탄압을 받아 변호사 자격을 박탈당하거나 감옥에 갇혀 옥고를 치르기도 했지만 대부분 끝까지 변절하지 않았다. 항일변호사 중에는 일제 국적을 가진 변호사도 있었다. 조선판 쉰들러라고도 할 수 있는 일제의 양심적 변호사들이 있다면 그들의 활동도 조명해야 할 것이다.     항일변호사들의 경우 민족주의 사건은 물론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사건의 피고인들을 변호하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항일변호사들은 사건 의뢰인이 좌파든 우파든 그들의 주장에 공감하여 법정투쟁에 나섰다. 대체로 사회주의 운동가들과 교류하면서도 사회주의 사상에 경도되지는 않았다.      이로 인해 항일변호사들은 좌·우 모두에게 인정받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고, 점차 민족 지도자로 성장하여 광복 이후 새로운 국가건설운동에서도 핵심 세력으로 참여할 수 있었다. 우리는 항일변호사들의 이러한 개방성과 유연성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alt신간회 울산지회 창립 1주년 기념대표적인 항일변호사들일제강점기 항일변호사로는 흔히 세 사람이 언급되고 있다. 이들은 긍인 허헌(許憲)(1885~1951), 가인 김병로(金炳魯)(1887~1964), 애산 이인(李仁)(1896~1979)이다. 그 외에 두 사람을 더 추가한다면 근암 권승렬(權承烈)(1895~1980)과 일본인 변호사 후세 다츠지(布施辰治)를 들 수 있다.      허헌은 3·1운동 재판에서 관할 문제를 놓고 이른바 공소불수리론을 전개하여 경성지방법원에서 공소불수리 판결을 얻어 낸 것으로 유명하다. 이 판결은 항소심에서 파기되었지만 기선을 제압한 결과 조선독립선언을 한 33인 등이 예상보다 가벼운 선고를 받게 된 계기로 작용하였다.      김병로와 이인은 국내에 잠입해 일제와 투쟁을 벌인 의열단원들과 독립운동을 이유로 경찰에게 무지막지한 고문을 당한 평북 희천군 주민과 대구·경북의 독립운동가들의 사건을 변호하면서 변호사로서의 성가를 날렸다. 이들은 경성조선인변호사회를 출범시키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하였으며, 별도로 형사공동연구회라는 조직을 만들어 항일변론운동에 조직력을 제공하였다.1920년대 후반부에는 좌우 합작을 도모한 신간회 활동을 이어나갔다. 허헌과 김병로는 신간회의 핵심 간부로 참여하면서 국내 수많은 민중운동을 도우며 민족의 권익 보호에 앞장섰다. 또한 광주학생항일운동의 진상을 전국적으로 알리는 민중대회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그들 자신이 투옥되는 고난을 치렀다. 세 사람은 조선공산당, 고려혁명당 등 1920년대 후반의 주요 사상사건의 변호에도 뛰어들어 피고인들과 연대하여 공판 투쟁을 전개하였다. 김창숙, 여운형, 안창호 등 해외의 저명한 독립운동 지도자들이 조선으로 압송되어 재판을 받게 되었을 때에도 공판에 관여하였다. 이들은 처음에 변호 활동에 주력하였지만, 때로는 그들과 깊이 연대하여 1930년 이후에는 변호사 등록 취소나 정직 처분을 받기도 하였다. 허헌과 이인은 투옥되어 고문을 받았으며, 김병로는 향촌으로 은둔하는 생활을 하면서 항일변호사로서의 절개를 잃지 않았다.     이들 세 사람 외에도 안병찬, 이면우, 김태영, 권승렬, 이창휘, 윤태영 등의 조선인 변호사들이 함께 활동하였다. 허헌, 김병로, 이인, 권승렬 모두 친일 협력의 경력이 전혀 없는 인물들이다. 해방 공간에서 대부분의 항일변호사들은 사법부의 주요 요직에 임명되었는데, 이에 대하여 좌우 어느 쪽에서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한편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된 후세 다츠지의 경우 광복 이후에도 재일 동포의 민족적 변론에 헌신하는 등 변호사로서 몸소 인권과 평등의 실천을 보여준 대표적인 인물이다. alt왼쪽부터 김병로, 권승렬, 후세 다츠지]]> Wed, 29 Sep 2021 10:00:39 +0000 59 <![CDATA[만나보기 항일변호사 허헌과 이인의 활약상]]> 글 심희기(연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alt허헌(좌) / 허헌의 일제 주요감시대상 인물카드(우)허헌의 공소불수리론3·1 만세운동 사건의 예심판사는 피의자들의 행위를 내란죄에 해당하는 사건이라고 판단하였다. 당시 형사법제에 따르면 내란죄 피고사건은 조선의 최고 법원인 조선고등법원의 관할에 속하는 사건으로, 조선고등법원에서 내란죄의 유죄·무죄 여부를 심리하게 되었다. 그런데 조선고등법원은 피고인들의 의도에 대해 ‘폭력을 수반하는 폭동’을 일으키려는 게 아니라 비폭력·평화적 시위를 도모하였기에 이 사건을 내란죄 위반 사건이 아니라고 판단하였다. 따라서 고등법원의 관할 사건이 아니라고 판단한 다음 제1심 관할은 경성지방법원에 있다고 지정하였다. 그러자 검사는 경성지방법원에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독립선언과 만세 사건 피의자들을 기소하였다.      여기서 유명한 허헌의 공소불수리론이 나오게 된다. 피고인들의 변호인으로 선임된 허헌은 조선고등법원 특별형사부의 결정서에 “그 주문(主文)에서 단지 경성지방법원을 관할 재판소로 지정한다고 기재했을 뿐이고 사건을 경성지방법원에 송치한다는 결정이 없으므로, 경성지방법원은 본 사건을 수리해서는 안 된다”는 취지로 주장하였다.      이러한 허헌의 주장은 변호인의 법적인 의견일 뿐이지 재판부가 변호인의 의견에 구속되는 것은 아니었다. 이 사건의 검사는 조선고등법원의 주문만 볼 것이 아니라 주문을 이유(理由)와 함께 고찰해야 한다며, 그렇게 보면 주문의 관할 지정에 당연히 송치 결정이 포함되는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재판부가 어떤 의견을 따를 것인지 초미의 관심사가 되었고, 검사의 의견이 채택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였다.      그러나 재판부는 ① 사건 ‘지정’ 결정은 사건 ‘이송’ 결정이 아니고, ② ‘지정’한다는 문언에 ‘이송’ 한다는 의미는 포함되지 않으며, ③ 이유에 ‘송치’한다는 내용이 있다고 하여 주문상 ‘지정’의 의미를 변경할 수 없고, ④ 공소불수리 결정을 하게 되면 중대 안건의 진행에 지장을 초래한다는 검사의 주장도 형사정책상 취할 주장이 아니며, ⑤ 상급 재판소(조선고등법원)의 결정이라고 하더라도 하급심이 이에 구속되지 않고 별도로 해석할 수 있음은 재판권의 독립의 문제이므로 변호인이 주장한 ‘공소불수리 결정’이 타당하다고 판단하였다. 재판부는 거의 전폭적으로 허헌의 주장을 수용한 것이다.      이 결정의 파장은 막대하였다. 이 사건과 연계되어 진행된 사건은 총 10건에 달했는데 이 사건들이 모두 공소불수리 결정이 난 것이다. 물론 검사는 제1심 결정에 불복하여 항소하였다. 예상대로 항소심은 제1심 결정을 파기하고 본안심리를 진행하여 피고인들에게 유죄 판결을 선고하였다. 이 같은 허헌의 변론 활동으로 인해 3·1운동으로 공판에 회부된 33인과 전국의 많은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형벌의 수위가 당초 예상보다 이례적으로 낮아지게 되었다. 피고인이었던 독립운동가들은 고등법원에의 상고를 포기하여 항소심 재판이 확정되었다.    해당 사건의 판결 이후 불과 한 달 뒤에 이루어진 판사·검사 인사에서 공소불수리 재판을 한 판사는 대구복심법원으로 좌천되었고, 반면에 경성지방법원에 관할권이 있다고 주장하여 항소심에서 자신의 의견을 관철시킨 검사는 검사장으로 승진하였다.    alt이인(좌) / 제1경성변호사회 창립 기념에서 이인(우)이인과 조선어학회 사건1942년 10월 일제가 조선어학회 회원 및 관련 인물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체포하여 재판에 회부한 조선어학회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에서 이인은 단순한 변호인이 아니라 피의자·피고인의 지위에 서게 된다. 한말에 일어났던 한글운동이 3·1운동 후 다시 일어나면서 1921년 12월 조선어연구회(뒤에 조선어학회로 이름 변경)가 창립되었다. 1929년 10월에는 조선어사전편찬회가 조직되었다. 일제는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킨 후 중국 침략을 목전에 두고 조선민족사상을 꺾고 나아가 조선 민족을 말살하기 위해 조선어 교육을 단계적으로 폐지하였다. 1941년에는 조선 사상범 예방구금령을 공포하여 독립운동가를 언제든지 검거할 수 있는 길을 터놓았다.      조선어학회는 사전의 편찬을 서둘러 1942년 4월에 그 일부를 출판사에 넘겨 인쇄하였다. 이런 시대적 배경 속에서 함흥 영생고등여학교 학생 박영옥이 기차 안에서 친구들과 한국말로 대화하다가 조선인 경찰관에게 발각되어 신문을 받게 되었다. 일본 경찰은 신문 결과 여학생들에게 민족주의 감화를 준 사람이 서울에서 사전 편찬을 하고 있는 정태진임을 파악하였다. 같은 해 9월 5일에 정태진을 연행해 신문하여 조선어학회가 민족주의 단체로서 독립운동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는 자백을 받아냈다. 이 자백을 단서로 하여 일제는 3·1운동 후 부활한 한글운동을 폐지하고 조선민족 노예화에 방해가 되는 단체를 해산시켰으며, 나아가 조선 최고의 지식인들을 모두 체포할 수 있는 꼬투리를 잡게 되었다. 피의자들을 신문한 홍원경찰서에서는 사전 편찬에 직접 가담했거나 재정적 보조를 한 사람들 및 기타 협력한 33명을 모두 치안유지법상의 내란죄로 몰았다.      그중 이인은 경성에서 체포되었다. 이인은 조선어학회의 자매기관이라 할 만한 조선기념도서출판관을 발기하는 데 앞장섰기 때문이다. 조선어학회 관련 피고인은 모두 33명이었고, 구속된 인원은 29인이었다. 이인에 대한 취급은 특이했다. 경성에서 체포된 다른 인사들은 함북 홍원경찰서로 끌려갔는데, 이인만 함남 함흥경찰서로 유치되었다. 아마도 항일변호사를 다른 사람들과 함께 유치하면 무슨 말썽을 빚을지 모른다는 생각에서 함흥에 격리시킨 것으로 추정된다. 이인은 이 시절에 겪은 고문을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내가 당한 고문은 견디기 어렵다는 아사가제라는 것과 비행기 태우기가 있었다. 사지를 묶은 사이로 목총을 가로질러 꿰 넣은 다음 목총 양 끝을 천장에 매달아 놓아 비틀고 저며들게 하는 것이 비행기 타기요, 두 다리를 뻗게 한 채 앉혀놓고 목총을 두 다리 사이에 넣어 비틀어대는 것이 아사가제라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중에 더욱 괴로운 것이 아사가제이니, 나는 이로 인해 평생 보행이 부자유스러울 만큼 다리가 상했다.”이인, 『반세기의 증언』 중에서 alt『반세기의 증언』 표지(좌) / ‘제2차 의열단사건’의 변론을 맡은 이인, 『동아일보』 (1923. 4. 12.)(우)공판 후 피고인들에게는 “고유 언어는 민족의식을 양성하는 것이므로 조선어학회의 사전 편찬은 조선민족정신을 유지하는 민족운동의 형태”라는 함흥지방재판소의 예심종결 결정문에 따라 치안유지법상의 내란죄가 적용되었다. 이들에 대한 함흥지방재판소의 재판은 1944년 12월부터 1945년 1월까지 9회에 걸쳐 계속되었다.]]> Wed, 29 Sep 2021 10:02:21 +0000 59 <![CDATA[이달의 독립운동가 일제강점기 한글을 수호하여 민족정신을 되살린 조선어학회 회원들]]> 글 독립기념관 전시부  alt왼쪽부터장지영(張志暎)                                  김윤경(金允經)                                        권덕규(權悳奎)1887~1976                                        1894~1969                                              1891~1950서울건국훈장 애국장(1990)              경기도 광주건국훈장 애국장(1990)        경기도 김포건국훈장 애국장(2019)일제강점기 한글 연구로 민족정신을 일깨우다1908년 주시경이 조직한 국어연구학회를 계승한 조선어연구회는 1921년 우리말·글 사용에 대한 일제의 억압에 맞서 한글을 지키고 연구하기 위해 창립되었다. 조선어연구회는 1931년 조선어학회로 조직을 개편한 후에도 전국의 우리말 어휘 수집을 지속하는 한편, 「한글 맞춤법 통일안」 등을 제정하고 『조선말 큰사전』 편찬에 힘썼다. 일제의 민족말살 정책 시기에도 지속된 조선어학회의 활동과 한글 연구는 한글에 민족정신이 담겨 있다는 굳은 신념으로 전개한 뜻깊은 독립운동이었다. alt『한글 마춤법 통일안』(1933. 10. 29.)(좌) / 조선말 큰사전 원고(보물 제2086호, 1929~1942)(우)한글 맞춤법 연구와 보급에 앞장서다                  장지영·김윤경·권덕규는 1921년 12월 창립된 조선어연구회에서 조선총독부의 일방적인 맞춤법 규정에 맞서 한국인 독자적인 한글 맞춤법 제정에 힘썼다. 이들은 조선어사전편찬회 위원으로 활동하며 수차례의 토의 끝에 한글 문법과 성음(聲音)을 규정한 「한글 맞춤법 통일안」 원안(原案)을 제정하는 등 한글 맞춤법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이들은 맞춤법 제정 뿐 아니라 보급에도 앞장섰다. 장지영은 1928년 조선일보의 문맹퇴치운동을 주관하여 농촌지역 한글 보급을 주도하고, 김윤경·권덕규는 1931년 동아일보에서 주최한 조선어강습회에서 한글관련 전국 순회강연을 하는 등 한글 보급을 통한 민족의식 고취에 힘썼다. alt「제1회 조선어 강습회」, 『동아일보』(1931. 7. 25.)_국사편찬위원회 제공(좌) / 조선어학회 사건 수난동지회(1946. 6. 12.)(우)한글 연구 성과를 사전으로 집대성하다1931년 조선어연구회를 조선어학회로 개편한 회원들은 한글 사전 편찬에 박차를 가하였다. 장지영·김윤경·권덕규는 맞춤법 제정위원과 표준어 사정위원 등으로 활동하며 1933년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완성하고 1935년 「사정*한 조선어 표준말 모음」과 1940년 「외래어 표기법 통일안」을 차례로 확정하는 등 사전 편찬의 기초 작업을 마쳤다.     이를 바탕으로 『조선말 큰사전』 편찬에 힘쓰던 중 1942년 일제가 한글 연구 탄압을 목적으로 일으킨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사전 편찬은 잠정 중단되었다. 하지만 광복 후 재건된 조선어학회가 『조선말 큰사전』 편찬을 이어나가면서 1957년 『조선말 큰사전』은 완간(完刊)될 수 있었다. 일제 탄압에 맞서 한글 지키기에 앞장선 세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정부는 1990년 장지영·김윤경에게 애국장, 2019년 권덕규에게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사정(査正)조사하거나 심사하여 결정**조선어학회 사건일제가 1942년 10월 치안유지법을 적용해 조선어학회를 강제 해산시키고, 조선어학회 회원 30여 명을 탄압 alt말모이 원고(보물 제2085호, 1914)_국립한글박물관 제공(좌) / 『한글 원본』(국가등록문화재 제484-2호, 1930. 7. 10.)_조선일보 사료관 소장(우)민족혼이 담겨 있는 우리말과 글이 없어지게 된다면, 우리의 자주독립은 영영 소망이 없게 될 것이다.김윤경이 집필한『조선문자급어학사(朝鮮文字及語學史)』 중에서(1938)alt]]> Wed, 29 Sep 2021 10:03:31 +0000 59 <![CDATA[아름다운 인연 영원한 독립군 신팔균과 자결한 부인 임수명]]> 글 김형목(사단법인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이사) 신팔균과 임수명은 1912년 신팔균이 경찰의 눈을 피해 환자로 위장하여 병원에 입원해있는 동안 환자와 간호사로 만나 1914년 결혼하였다. 결혼 후 임수명은 신팔균을 도와 군자금 조달 등의 역할을 맡았다. 이들 부부는 국내외적으로 독립운동 활동을 하면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함께한 운명공동체였다.  alt신팔균대한제국 군인으로서 구국 간성이 되다  동천 신팔균은 김경천(본명 김경서), 지청천(본명 지석규)과 함께 ‘남만주 삼천’, ‘군인계의 삼천’으로 불릴 만큼 독립전쟁사에서 뛰어난 활약을 보였다. 그가 참여하거나 주도한 서로군정서, 신흥무관학교, 대한통의부에서 무장투쟁을 견인하였다. 베이징에서는 김동삼·박용만 등과 함께 창조파 일원으로 활약하는 등 무장투쟁노선으로 일관한 참된 군인이었다.     신팔균은 1882년 5월 19일 서울 정동에서 출생하였다. 자는 윤수, 호는 동천이다. 본관은 평산이며, 본향은 충북 진천군 이곡면 노곡리(현 진천군 이월면 노은리)이다. 그의 가문은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전통적인 무반이었다. 고조부 홍주는 무과에 급제한 후 순조대에 훈련대장을 지냈다. 증조부 의직도 무과에 급제하여 부사를 지냈으나 일찍 사망하였다. 할아버지 신헌은 개혁적 관료로서 강화도조약 체결 당시 전권대신이었다. 특히 국방 문제 등에 자신의 의견을 적극 개진하였다. 그는 어느 문인 학자에 못지않은 경세가로 글씨와 문장에 능통하였다. 아버지 석희는 한성부 판윤과 경무사, 중추원 일등의관 등을 역임하였다. 신팔균은 삼 형제 중 장남으로 동생 가균과 필균이 있었다. 가균은 그와 함께 육군무관학교를 졸업한 후 민영환의 부관으로 근무하다가 군대해산 직후에 해직되었다. 이처럼 무인적 배경 속에서 성장한 그가 군인의 길을 걷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1900년 10월 무관학교에 입학한 신팔균은 1903년 9월 보병과를 졸업하였다. 당시 입학 규정은 까다로워 입학생 대부분이 정부 유력자 친족이거나 지배층 자제 등이었다. 일부는 근대교육을 수학하거나 관료 생활을 하다가 입학하는 등 선망의 대상으로 떠올랐다. 재학 중인 1902년 7월 6일 육군 참위(현 소위)에 임관되어 이듬해 3월 견습을 거쳐 시위대에 정식으로 배속되었다. 군대 해산 직전 보병 부위로 승진하고 보병 제7대대 부관에 보임되어 근위대에 배속되었다. 군대 해산에도 그는 해임되지 않고 부위로 근무하는 가운데 2년 뒤에는 정위로 승진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가문의 배경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짐작된다.  alt신팔균의 육군무관학교 졸업증서사립보명학교와 대동청년당원으로 계몽운동에 나서다군인으로 재직하던 중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되는 현실을 직접 목격하였다. 국권 회복을 위한 실천력이 요구되는 결정적인 순간을 맞았다. 당시 사립학교 설립에 의한 교육구국운동이 들불처럼 전국 방방곡곡으로 확산되는 분위기였다. 그가 낙향하기 이전 동생인 필균은 친척인 신재균과 같이 사립보명학교를 운영하고 있었다. 이 학교는 1897년에 신욱이 설립하였으나 동생이 문중을 기반으로 인수하였다.       주요 교과목은 한문·국어·역사·지리 등으로 민족정신 함양과 항일의식 고취에 중점을 두었다. 교사는 신팔균을 비롯하여 동생 가균·필균과 생질 이조영 등으로 사실상 ‘문중학교’로서 성격을 지닌다. 그는 고택에 머물며 강당 고개에 있는 학교를 왕래하며 학생들의 사기 진작에 노력을 기울였다. 재정이 충분하지 못하여 학부로부터 정식 인가는 받지 못하였다. 음성에 거주하는 친구 송달용에게 보낸 편지는 이와 같은 상황을 그대로 보여준다.    “어제 올린 편지에 말씀드린 것 잘 보셨을 것으로 믿거니와 날마다 고대고대하건대 끝내 아무런 회답 말씀이 없어 못내 의심스럽습니다. 김 주사가 이번에 욕을 본 것은 나 때문인 탓도 없지 않습니다. 또 30원 때문에 발등에 떨어진 급한 일을 면하지 못하여 심히 미안하오나 이제 다시 급히 아뢰오니 그렇게 이해해 주시는 위에 30원을 전보환으로 붙여주시면 우선 시급한 사세를 면할 것 같습니다. 예사로이 생각지 마시기를 간절히 빌면서 남은 말씀은 답장 오기를 서서 기다리옵니다. 다 쓰지 못합니다.”     한편 이때를 전후하여 대동청년당(단)원으로 비밀결사에 참여하였다. 이 단체는 보성중학교 교장 박중화를 중심으로 서울 남형우의 집에서 조직되었다. 목적은 신민회의 구국운동을 실천하는 데 있었다. 당원들은 연계를 통해 구국을 위한 사상과 방략을 근대교육을 통하여 널리 확산시키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다. 이들 중 상당수는 대종교인으로 훗날 만주에서 무장투쟁을 전개할 수 있는 든든한 밑거름으로 작용했다. 다만 단원으로서 구체적인 활동상은 거의 파악되지 않는다.  alt대한제국 장교 시절 신팔균과 동지들항일투쟁을 위한 기반 구축에 나서다  강제 병합 이후 일제는 신팔균을 집요하게 감시하거나 회유하는 등 국내에서 활동은 사실상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중국으로 망명을 결심한 배경은 이러한 상황과 무관하지 않았다. 그는 두 번째 부인인 임수명을 만나 결혼한 전후인 1914년경에 중국 안둥(현 단둥시)을 거쳐 베이징으로 활동 근거지를 옮겼다.    그는 베이징과 남만주를 왕래하며 항일운동을 펼쳤다. 3·1운동 이후 북경고려공산당에 가입·활동하면서 이후 최진 등과 군인구락부를 조직해 활동하였다. 1922년 8월에는 경신대참변 당시 발생한 한국인 고아들의 교육을 위한 자치기관 성격을 지닌 한교교육회를 만들었다. 이는 군사통일회 개최에 즈음하여 만주에서 참여한 황학수 등과 합의하여 이세영(일명 이천민)을 회장으로 만든 단체였다. 목적은 교민의 자녀를 항일투사로 육성하는 데 있었다. 회원은 ‘대한 민족’으로 품행 단정하고 상당한 지식이 있는 사람으로 한정하였다. 집의학교를 설립하여 구체적인 교육활동을 전개하였으나 경비 부족으로 1년 만에 폐교되고 말았다.      이듬해에는 박용만·최동오 등과 북경한인구락부 조직에 참여하였다. 이 단체는 한인들의 교육·오락·구제사업 등 베이징 한인들을 대상으로 사회사업을 병행하였다. 1924년 7월에는 원세훈과 신숙 등이 합세하여 북경한교동지회로 개칭하였다. 또한 한중호조사에도 간여하는 등 베이징 한인사회 대동단결 도모에 헌신적이었다. 1923년 1월부터 6월까지 개최된 국민대표회의는 임시회의·정식회의·비밀회의 등 74회나 개최되었다. 그는 김동삼 등과 임시정부의 외교론과 실력양성 노선을 비판하면서 무장투쟁노선에 입각한 임정개조론을 주장하였다. 창조파는 임시헌법을 새로 제정하고 국민위원회를 조직하는 등 신정부를 지향하고 있었다. 신팔균은 군무위원장으로 선출되어 5개 군구(軍區)를 관할하는 책임자가 되었다. 그는 창조파의 주요 인물로서 연해주와 만주 지역 무장부대를 총지휘하는 역할을 맡았다. 베이징에서 다양한 활동과 함께 중국과 연대를 모색하는 등 한인사회 지도자로서 부각되었다.   대한통의부 총사령관으로 대동단결을 모색하다 대한통의부는 남만주의 무장투쟁 세력과 전덕원 등 의병 계열 세력을 기반으로 성립된 단체였다. 일제의 침략이 가속화되는 가운데 무장단체 사이에는 협력과 알력은 지속되고 있었다. 이 단체 지휘부는 1924년 1월 중앙의회에서 위원장제로 개편했다. 베이징으로 사람을 보내어 신팔균에게 위원장 취임을 요청하자 이를 수락하였다. 군사위원장에 취임한 그는 대대적인 군대 개편과 군사훈련에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다. 사관 자격을 갖춘 군인을 양성하기 위한 ‘사관 학원’으로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서로군정서나 신흥무관학교에서 경험은 커다란 도움이 되었으리라 짐작된다.  1924년 7월 2일, 남만주 흥경현 이도구에서 군사훈련 중, 일제의 사주를 받은 중국 지방군의 습격을 받았다. 갑작스러운 습격에 신팔균은 진두지휘하면서 안전지대로 병력을 후퇴시키던 중에 총상을 입었다. 부하들이 피신시키려 하자 거부하고 부상병부터 후송시키도록 명령 후 다시 전투를 지휘하던 중 총탄이 흉부를 관통하는 치명상을 입고 쓰러졌다. 중대장 김하석이 그를 업고 탈출하였으나 결국 운명하게 되었다. 최후 순간에도 그는 “일제와 싸우다 죽어야 하는데, 무관한 중국 사람과 싸우다 죽는구나”라며 억울해했다. alt신팔균 부인 절명 보도 기사남편의 순국 소식에 가족과 함께 절명하다임수명은 1912년 서울에서 간호원으로 일하던 중에 일제 경찰에 쫓겨 환자로 위장한 신팔균을 만나 1914년에 결혼하였다. 남편과 같이 중국으로 망명한 후 베이징에서 1917년과 1919년 각각 아들을 출산하여 양육하였다. 또한 비밀문서 전달, 군자금 모금, 독립군 후원 등 독립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한 독립투사였다.      신팔균이 순국하던 시점에 부인은 만삭의 몸으로 베이징에 있었다. 순국 소식을 알면 뒷일이 염려되어 동료들과 동지들이 강권하여 귀국시켰다. 그렇게 막내딸을 출산하고 남편을 기다리던 그녀에게 청천벽력 같은 남편의 순국 소식이 전해졌다. 이때 셋째 아들까지 병사하면서 받은 충격에 삶의 기력을 잃었다. 임수명은 갓난아이와 함께 음독하여 열녀처럼 남편의 뒤를 따랐다. 슬픔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이후에도 아들이 사망하는 등 일제 강점으로 일가족 모두가 희생되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비참한 상황으로 이어졌다. 임수명의 죽음에 대한 아래 신문 기사는 진한 메시지를 던져준다. “더구나 자기 남편은 그리운 조국을 벗어나 거치런 만주 뜰에 비상한 죽엄을 하고 어린 자식을 둔 외로운 홀어미가 원한과 간난 중에서 이 세상을 살라 하나 자기의 몸을 의탁한 남편이 이 세상을 떠난 이상에는 좁쌀만한 몸을 의지할 곳이 없고 차라리 멀리 황천으로 따라가 외로운 혼끼리 서로 위로하고 서로 의지하는 것이 쾌하겠다는 것이 이런 종막을 짓게 된 것이다. 남편이 민족을 위하여 죽고 아내는 남편을 따라 죽는 이 사실을 들을 때에 우리는 또다시 뜨거운 동정이 없지 못할 것이다.”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다신팔균은 부유한 명문가에서 태어나 기울어가는 국운을 지키고 빼앗긴 조국을 되찾기 위해 목숨을 걸고 항일투쟁에 나섰다. 군인으로서 가정의 안위와 개인의 영달을 버리고 독립을 위해 싸우다가 총탄을 맞고 장렬히 순국하였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독립군의 산증인으로 다가온다.     독립운동가 중에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실천한 인물이 적지 않았다. 안중근·이회영·이상룡 일가는 대표적인 가문이다. 이들은 국망에 즈음하여 국권 회복과 조국 독립을 위해 존귀한 목숨까지 민족 제단에 바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자신뿐만 아니라 부인이 독립운동을 하다가 남편 사망 소식을 듣고 순국한 경우도 있었다. 바로 신팔균과 임수명 부부와 가족이 대표적인 경우로 심금을 울린다.]]> Wed, 29 Sep 2021 10:06:20 +0000 59 <![CDATA[인문학관 겨레의 스승 주시경]]> 글 백낙천(배재대학교 인문사회대학장) 주시경은 국내외적으로 격랑이 휘몰아쳤던 개화기에 일생 동안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고 국학자, 교육운동가, 독립운동가, 개화사상가로서 시대를 선도했던 진정한 위인이었다. 특히 자국어에 대한 분명한 의식을 가지고 민족의 언어와 민족의 혼을 일깨우고 평생을 우리말 연구와 보급에 힘쓴 애국 계몽운동가요 국어학자이다. 오늘날 국어 연구의 학문적 성과가 축적되고 국어 문법의 체계가 확립될 수 있었던 것은 주시경의 우리말 연구에 대한 헌신에서 비롯되었다.  alt주시경민족 계몽에 헌신하다1873년 대원군의 실권(失權) 후, 이른바 운양호사건이 빌미가 되어 1876년 조선은 개항을 요구하는 일본에 의해 강화도조약을 맺게 되었다. 이에 부산·원산·인천이 차례로 개항되었으며, 국내 정치 상황은 개화 세력과 수구 세력이 맞서는 혼란스러운 정국이었다. 조선의 국운은 그야말로 풍전등화와 같은 상황으로 치달아 국권이 흔들리고 민족의 자존심이 훼손되는 등 어지러운 상황에 직면했다. 한편 강화도조약이 조선의 자발적 개항이 아닌 일본의 외압에 의한 후속 조치이기는 했지만, 역설적으로 조선은 국제무대에 눈을 돌리는 출발점이 되었으며 서양에 문호가 개방되고 신문명이 들어오는 계기가 되었다. 즉 조선은 강화도조약을 계기로 개항과 자주라는 역설적인 시대적 과제를 떠안게 되었고, 조선의 근대화는 서구화와 동일시되는 엄청난 변화의 소용돌이에 직면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주시경은 1876년 황해도 봉산에서 1녀 4남 중 셋째로 태어났다. 본관은 상주(尙州)로서 백운동서원을 세운 유학자 주세붕의 후손으로 어릴 때 이름은 상호(相鎬)였다. 주시경의 호기심 가득한 총기와 열정은 『청춘』에 실린 선생의 어린 시절에 그대로 나타난다. 주시경이 8세 때 산과 맞닿아 있는 하늘을 보고 ‘그 하늘을 만져 보고야 말겠다’는 일념으로 덜렁봉이라는 산에 올랐는데, 다른 아이들은 산허리에 있는 풀초에 정신이 팔렸지만 주시경은 기어이 산 정상에 올라갔다는 내용이다. 이는 그의 비범함을 그대로 보여주는 일례로, 주시경이 황무지와 다름없던 국어 연구에 일생을 매진할 수 있었던 끈기와 도전이 어디에서 연유했는지를 알 수 있는 떡잎 같은 일화이다.    이후 주시경은 갑오개혁이 일어나기 1년 전인 1893년에 배재학당 교사였던 박세양과 정인덕 등에게 신학문을 배우면서 새로운 학문에 눈을 뜨게 되었다. 이어 1894년 19세에 큰 뜻을 품고 배재학당 특별과에 입학해 학문에 매진하였다. 1900년 6월 25세 나이에 배재학당을 졸업한 뒤 평생을 국어 연구에 몰두하고 조국의 독립과 민족의 계몽을 위해 헌신하였다. 그러나 조국의 독립을 위한 더 큰 계획을 눈앞에 두고 1914년 7월 27일 선생의 나이 불과 39세에 안타깝게도 생을 마감하였다. 국어·국문 연구에 매진하다주시경은 배재학당 재학 5년 동안 영문법을 공부하면서 언어의 특징과 공통성을 깨우치고 언어학의 이론을 정립하면서 국어 문법의 기틀을 세워야겠다고 다짐하였다. 이는 1906년에 쓴 『대한국어문법』에 고백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아래 인용 글은 주시경이 세계 각국의 언어를 관찰하면서 영문법의 기틀 위에서 국어 문법에 대한 독창적인 관점을 펼칠 것이라는 계획을 밝힌 것이다.    영어 알파벳과 일어 가나를 조금 배우고 유구, 만주, 몽골, 티베트, 거란, 인도, 페르시아, 아랍, 이집트, 히브리 글자들과 세계 각국의 글자들을 구해 보기도 하고 또 영어 문법을 조금 배운 것은 다 국문 연구에 유익할까 하는 것인데…….     주시경의 학문은 크게 보아 문자론과 맞춤법, 음성학과 문법론, 사전 편찬의 노력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 세 분야에서 주시경의 업적은 우리말의 기틀을 바로잡아 올바른 어문 생활을 교육해야겠다는 일념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주시경의 이러한 노력은 『대한국어문법』(1906), 『국어문전음학』(1908), 『국어문법』(1910), 『말의 소리』(1914) 등의 저서에 잘 나타나 있다. 국어 문법의 규범적 기틀을 세우고 실용의 방편을 마련하는 데 일관된 입장을 견지했다고 할 수 있다.      주시경은 배재학당 수학 시절 이미 우리말과 우리글에 대한 깊은 식견과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1896년 5월 국어학 관련 첫 공식적인 학회라고 할 수 있는 ‘국문동식회(國文同式會)’를 독립신문사 내에서 결성해 주도적인 활동을 펼쳤다. ‘국문동식’이란 오늘날의 맞춤법을 의미하며, 이곳에서 한글 맞춤법의 틀을 잡고 국문 전용을 주장하였으며 말모이(사전)를 편찬하는 등 국어와 국문에 대한 학문적 연구뿐만 아니라 실천적 국어 연구를 하는 지식인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그뿐만 아니라 주시경은 당시 배재학당의 교사였던 서재필 박사가 주도한 협성회(協成會)에 참여하였는데, 이곳은 매주 토요일 시국 토론회와 연설회를 개최했던 곳이다. 주시경은 협성회 활동을 통해 애국계몽사상을 고취시켜 나갔는데 이것이 그의 인생관 형성에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또한 서재필 박사가 주축이 되어 결성된 ‘독립협회’의 주요 인물이었으며, 나아가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신문인 『독립신문』의 회계 겸 교보원으로 일하게 되었다. 그리고 『독립신문』에 공식적으로 주시경의 첫 논문이라고 할 수 있는「국문론」을 두 차례 발표하면서 한글 전용의 이론을 주장하였다. 이는 1896년 『독립신문』이 최초의 한글 신문으로 발행되는 데 누구보다 주시경의 역할이 지대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1898년에 주시경은 『독립신문』에 네 차례 발표한 내용을 엮어 국어 연구에 기념비가 되는 명저인 『국어문법』의 초고에 해당하는 내용을 완성하였다. 이후 내용 보완을 거쳐 1910년에 국어 문법서의 기념비적인 저서인 『국어문법』을 간행하였다.  alt최초의 한글 신문 『독립신문』 초판후학 양성을 통한 한글 연구 활성화주시경은 우리나라 국어 연구에 있어 상징적 원형으로서의 존재감을 갖는다. 그가 제시한 국어 문법의 기본적인 체계와 이론은 독창적일 뿐만 아니라, 언어학적으로도 보편타당하고 설득력 있는 학문적 업적이라고 할 수 있다.      더욱이 주시경은 상동교회 청년학원에서 우리나라 최초로 정규 교과목으로 국어문법을 가르치면서 수많은 후학을 길러냈다. 이중 훗날 우리말 연구에 업적을 낸 대표 제자들로는 이규영, 이병기, 권덕규, 신명균, 최현배, 김두봉, 정열모 등을 들 수 있다. 이 중 남한과 북한에서 우리말 연구와 어문 정책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인물로는 최현배와 김두봉이 있다. 주시경이 이들의 스승이라는 점에서 그는 진정한 의미의 우리말 연구와 어문 정책 수립에 있어 지존자라고 할 수 있다.    한편, 한글이 음소문자의 단계를 넘어 자질문자의 특징을 갖는 것으로 그 우수성이 세계에 알려져 있다. 이렇게 되기까지는 주시경의 한글 보급과 교육이라는 실천적 계몽 운동이 밑거름이 되었다. 이러한 실천적 활동은 그의 철저한 애국 계몽사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나라의 혼란 속에서도 주시경은 자국어에 대한 분명한 의식을 가지고 민족의 언어와 혼을 일깨우고 평생을 우리말 연구와 보급을 위해 헌신했던 겨레의 스승이었다.]]> Wed, 29 Sep 2021 10:11:29 +0000 59 <![CDATA[끝나지 않은 독립운동 무궁화가 국화(國花)가 되기까지]]> 글 이계형(국민대학교 교양대학 교수) 우리나라 상징물 가운데 가장 소외된 것이 무궁화가 아닌가 한다. 태극기와 애국가는 대내외 행사에서 게양되고 울려 퍼지지만 국화인 무궁화는 상대적으로 덜하다. 그만큼 관심도 적다, 누군가는 진딧물이 많고 꽃도 그리 예쁘지 않다고 하고 어떤 이는 이를 폄훼, 왜곡하는 책자를 출간한 적도 있다. ‘무궁화’의 의미와 역사를 안다면 인식이 달라지지 않을까. alt남궁억(좌) / 남궁억이 고안한 무궁화 자수 본에 수를 놓은 자수 지도(우)무궁화는 언제부터 나라의 상징이었나오늘날 무궁화(無窮花)로 불리기 전 이 땅에는 오래전부터 근(槿), 근화(槿花)가 있었고, 중국에 전해지는 가장 오래된 지리서 『산해경(山海經)』에는 “군자국(君子國)은 대인국(大人國) 북쪽에 있다. 사람들은 의관을 갖추고 칼을 차며 짐승을 주식으로 한다. (중략) 근(槿)이라는 풀이 자라는데, 아침에 났다가 저녁에 죽는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지는 꽃이라 신기하게 여긴 모양이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나라는 ‘근역(槿域)’이란 별칭을 갖게 되었고, 신라 혹은 고려시대에는 ‘근화향(槿花鄕)’으로 부르기도 했다. 1910년 9월 경술국치 이후 자결 순국한 황현은 절명시에 “근화세계이침륜(槿花世界已沈淪, 이 땅은 이미 망했구나)”이라며 침통해 했다.      그렇다면 ‘무궁화’로 불린 것은 언제부터일까? 1896년 11월 독립문 정초식 당시 배재학당 학생들이 불렀다는 애국가 후렴구에 “무궁화 삼천리 화려 강산”이 회자되면서 ‘무궁화’가 대중화된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때 처음으로 ‘무궁화’가 등장한 것은 아니다.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1241)에 ‘무궁(無窮)’ 및 ‘무궁(無宮)’이란 표현이 있고, 조선 초 의약서인 『향약집성방』(1433)에 ‘無窮花木’(무궁화목)으로, 최세진이 지은 『사성통해(四聲通解)』(1517)과 『훈몽자회』(1527), 그리고 허준의 『동의보감』(1613)에도 ‘무궁화’로 기록되어 있다.      무궁화는 새벽녘에 피기 시작하여 오후가 되면 오그라들었다가 해 질 무렵에 떨어지지만, 다음 날 아침이면 다른 가지에서 새 꽃이 핀다. 이러길 무더운 여름 8월부터 10월까지 100일 동안 한 그루에서 무려 3천 송이가 피고 지니 ‘무궁화’란 이름이 제격이 아닐 수 없다, ‘일편단심’, ‘영원’, ‘은근과 끈기’라는 꽃말은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 때문인지 일제강점기에 ‘무궁화’는 탄압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이를 기렸던 이들도 고초를 겪어야 했다. 반대로 독립운동가들은 이를 조국 독립의 표상(表象)으로 내세웠다.       무궁화가 우리나라 상징으로 등장한 것은 대한제국 시기이다. 으레 대한제국 문장하면 오얏꽃을 떠올리겠지만, 무궁화 문양 또한 폭넓게 사용되었다. 1892년 인천전환국에서 제조한 5냥 은화에 무궁화 가지 도안이 사용된 이후 1905년까지 이어졌고, 1900년에는 훈장(자응장)과 외교관·문관 대례복에 무궁화 문양이 전면적으로 새겨졌다. 1902년에 제정된 ‘대한제국 애국가’의 인쇄물 표지 중앙에 태극을, 주위에는 네 송이의 무궁화를 그려 넣었다. 통감부가 들어선 뒤 친임관(황제가 직접 임명장을 주는 최고 고등관)과 칙임관(정1~종2품 최고관리)의 대례복 모자, 소매, 등, 허리에 각각 무궁화 한 송이씩이 새겨졌는데 감춰졌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무궁화를 국화로 인식하여 ‘무궁화가’가 널리 퍼지면서 일제강점기에 ‘무궁화’는 우리 민족의 희망을 상징했다.  민족의 염원이 담긴 무궁화가 되기까지1919년 3·1운동 이후 무궁화 강산, 무궁화 삼천리 동산 등이 널리 혼용되었고 다시금 근화, 근역 등의 용어가 회자되었다. 「무궁화」 잡지가 등장하기도 하였다. 이에 일제는 1920년대 후반부터 ‘무궁’이란 말을 트집 잡아 민족운동의 일환이라면서 출판물을 불허하거나 기사를 삭제토록 하였다. 무궁화 보급 운동을 벌였던 남궁억은 1933년 11월 무궁화 십자당 사건으로 피체되었다가 고령에 석방되었지만 이내 고문 여독으로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한편,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3·1운동을 배경으로 한 창작극 ‘무궁화의 노래’를 공연하였고, ‘무궁화 애국가’를 공식 행사에 불렀으며, 광복군 장교의 군복에 무궁화를 새기고 색깔로 계급을 구분하기도 하였다.     광복 후 무궁화는 민족정신으로 되살아났다. 1946년 1월 경찰 복장의 견장, 모장(帽章), 단추 등은 무궁화로 바뀌었고, 법관의 의장 역시 무궁화 가지에 13도를 상징하여 열세 송이의 무궁화가 달렸다. 이외에도 담배 이름이나 우표, 엽서, 지폐에도 무궁화 도안을 사용하였다. 그해 4월 광복 후 첫 식목일에 전국적으로 무궁화를 심었다.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는 급행열차 이름이 ‘무궁화호’로 바뀌었고, 태극기 깃봉에 무궁화 봉오리를 제작토록 하는가 하면, 대한민국 중앙정부 공무원의 휘장을 무궁화로 정하였다. 1950년 4월에는 은색 봉황새와 금색 무궁화가 새겨진 대통령기를 만들었다.     오늘날에도 무궁화는 외국에 보내는 공문서와 국가적 중요 문서, 기타 시설물, 물자 등에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휘장으로, 나라 문장으로 사용하고 있다. 대통령의 관저, 집무실 등과 대통령이 탑승하는 항공기·기차·자동차 등에 사용하는 대통령 표장 중심 부분에 무궁화가 자리 잡고 있다. 우리나라 가장 높은 등급의 훈장 명칭이 ‘무궁화대훈장’일 뿐 아니라 훈장 도안도 무궁화로 장식되어 있고, 대통령·국무총리 표창장과 그 외 각종 상장도 무궁화 도안이 들어 있다. 국회기·법원기 등에도 무궁화 도안 중심부에 기관 명칭이 새겨 있고, 국회의원·지방의회 의원 배지, 장·차관 등의 배지도 무궁화를 기본 도안으로 하고 있으며, 군인·경찰의 계급장 및 모자챙 그리고 모표 등에도 무궁화가 있다. 정부에서 주관하는 국경일 등 각종 행사에 무궁화를 장식하며, 독립운동가의 묘소나 독립운동 사적지에도 무궁화를 심었다. 무궁화를 ‘국화’로 공식적으로 채택하지 않았지만, ‘국화’로서 인정한 셈이다.    무궁화는 하루 동안만 피지만, 다른 가지에서 또 다른 가지에서 매일 다시 꽃이 피어나는 것을 보면 참으로 굴곡진 우리 역사와 많이 닮아있다. 광복 후 유행한 〈귀국선〉의 노랫말에 “돌아오네 돌아오네 고국산천 찾아서 / 얼마나 그렸던가 무궁화 꽃을 / 얼마나 외쳤던가 태극 깃발을 / 갈매기야 웃어라 파도야 춤춰라 / 귀국선 뱃머리에 희망도 크다”라며 귀국 동포들의 감격스러운 심정이 담겼는데, 여기서도 애타게 그리던 조국 광복과 염원이 무궁화로 표현되었다. 당시 광복된 조국을 그리던 애달픈 심정은 아닐지라도 ‘무궁화’의 역사를 통해 그 의미를 새롭게 다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Wed, 29 Sep 2021 10:12:17 +0000 59 <![CDATA[독립의 발자취 일제강점기 문예인들의 삶]]> 글 편집실사진 제공 국립현대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은 지난 2월 기획전 <미술이 문학을 만났을 때>를 개최하고, 관련 내용을 도록으로 발간하였다. 여기에는 일제강점기 1930~1940년대를 중심으로 문학과 미술의 상호 관계가 잘 나타나 있다. 본지는 도록의 내용을 재구성하여, 일제강점기 시인과 화가의 교유를 보여주는 작품과 자료 일부를 소개하고자 한다.  alt이번 기획을 하게 된 취지에 대해 말씀해주세요과거 문학과 미술은 원래 한 몸처럼 동거했습니다. 시화일률(詩畫一律), 시와 그림이 한 몸과 다름없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전통은 20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살아 있었습니다. 시인과 화가들은 함께 어울리며 예술을 공유했습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시인과 화가의 동석은 드물어졌습니다. 전문화 시대라고 하지만 사실 통섭과 융합이라는 말이 더욱 절실한 시기입니다. 과거의 융합을 되돌아보며 현대를 되짚어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기획전과 도서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해주세요.전체 콘셉트는 미술과 문학의 만남입니다. 전시를 위해서는 140여 점의 작품과 자료 200여 점, 그리고 각종 시각자료 300여 점을 준비했습니다. 여기에는 새롭게 선보이는 발굴 자료도 있고, 새로운 시각에서 소개한 자료도 있습니다. 당시 어둡고 힘겨운 시대를 살면서 창작가들이야말로 어떻게 시대를 끌어안고 작업했는지 다양한 모습으로 만나볼 수 있습니다.이번 자료를 준비하며 어려웠던 점이 있다면요?관련 미술 작품을 찾는 데 꽤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또 유존작의 희소성은 아무리 흥미로운 주제라 해도 전시 구성을 어렵게 합니다. 그래도 문헌 자료 등 입체적 조명을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alt백석 글, 정현웅 그림,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여성』 제3권 제3호, 조선일보사(1938. 3.)(좌) / 『삼사문학』 제3호, 표지: 정현웅, 삼사문학사(1935. 3.)(우)소개된 작가들은 어떤 인물들인가요?1930~1940년대 한국의 문예인들 사이에서 문학가와 미술가의 공동작업은 셀 수 없이 자주 일어났던 일입니다. 이상과 구본웅, 김기림과 이여성, 백석과 정현웅, 이태준과 김용준, 김광균과 최재덕, 구상과 이중섭 등은 시대의 전위에 함께 서 있었습니다. 이들은 상호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작가 세계를 구축하였습니다. 특히 백석 시인이 특정인을 거명하면서 쓴 시, 그 시 속의 주인공인 정현웅이 백석의 초상화를 그리면서 예술적 동행을 한 점도 눈여겨볼만합니다. 당시 시대적 상황에 대해 설명 부탁드립니다.일제강점기 지식인들이 일본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조선에서 할 수 있었던 일은 일간지와 잡지사 기자였습니다. 그만큼 선택할 수 있는 직업이 극히 제한적이었는데, 이러한 사정은 작가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어쩔 수 없는 시대의 한계가 많은 문예인을 신문사에 붙잡아 두었던 것입니다. 이들이 함께 꾸민 신문사 학예면은 해당 신문사의 지적 깊이를 증명해 주는 징표였을 뿐만 아니라, 미적으로도 완벽하게 아름다워야 할 하나의 ‘작품’으로 인식되어 갔습니다. 이와 더불어 신문의 판매 부수를 책임졌던 신문소설의 파급력 또한 대단한 수준이었습니다. alt『문장(文章)』 창간호, 문장사(1939. 2.)(좌) 『문장(文章)』 제3권 제3호, 문장사(1941. 3.)(우)시인과 화가의 합작 ‘화문(畵文)’문인과 화가의 결합은 신문사들이 자매지로 함께 발간했던 잡지 『여성』, 『조광』, 『신동아』, 『중앙』 등에서 더욱 빛을 발하였다. 이 잡지들에서는 경쟁적으로 문인과 화가들을 ‘매칭’하여, ‘화문(畵文)’이라는 아름다운 장르를 발전시켰는데, 백석과 정현웅, 정지용과 이순석, 김광섭과 김규택 등의 조합이 빚은 아름다운 합작품은 대중들에게 굉장한 호소력을 지녔을 터다.     ‘화문’은 문자 텍스트와 도상 텍스트의 혼종 장르로, 도상 및 이미지(畵, 寫)와 글(文, 詩)의 이종혼종이 일반적인 것이었으나, 경우에 따라 ‘화-문-사진’ 등의 삼중 결합도 가능하였다. 양식적 차원에서 ‘문’과 ‘화’가 혼종된 장르임을 암시하는 ‘화문행각(畵文行脚)’, ‘화문점철(畵文點綴)’, ‘시화순례(詩畵巡禮)’ 등의 용어가 매체에 따라 사용하기도 하고, ‘이인행각’, ‘이중행각’ 등의 명칭이 붙여지기도 한다.      소재(주제) 차원에서 ‘근교삼제(近郊三題)’, ‘춘교칠제(春郊七題)’ 등이 사용되거나, 텍스트의 성격 및 참여 필자 수를 보여주는 명칭과 기획 주제를 암시하는 명칭이 결합된, ‘춘교이인행각(春秋二人行脚)’, ‘신추화문첩(新秋畵文帖)’, ‘강교화첩(江郊畵帖)’ 등의 명칭이 쓰이기도 했다.조선중앙일보 폐간 후 발행된 『문장』그러나 1936년 8월 손기정의 일장기 말소 사건으로 조선중앙일보가 폐간을 맞았고, 1940년 8월 군국주의가 극단으로 치달으면서 우리말 사용마저 제약을 받기 시작하였다. 이 시점에 이르러서는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마저 폐간되고 말았다.     이후 개인이 사비를 털어 발행된 문예지 『문장』이 마지막 불꽃을 피웠다. 1939년 2월에 창간된 문예 종합지 『문장』은 김연만 발행으로, 이태준·정지용이 운영 및 편집을 맡고, 김용준과 길진섭이 권두화와 표지화를 맡아 잡지를 발간하였다. 당시 민족말살정책이 시행되고 있었음에도 특정 사상과 이념에 치우치지 않고 민족 고전 발굴에 힘썼으며 한글 및 어문학과 관련된 학술 연구 논문도 꾸준히 발표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육사를 비롯해 이광수, 김동인, 이효석 등 최고의 소설가와 시인들의 작품을 수록하였으며, 현재까지도 회자되는 수많은 시와 소설을 등단시켰다. 그뿐만 아니라 김용준, 길진섭, 김환기의 아름다운 표지화와 삽화를 선사함으로써 일제 말기 문예인들의 최후 보루가 되었다.    당대 최고의 문예 종합지였던 『문장』은 안타깝게도 일제에 의해 1941년 4월에 강제 폐간되었다. 이후 1948년 10월 정지용이 속간하였으나 1호 만에 종간되었다.    ]]> Wed, 29 Sep 2021 10:13:02 +0000 59 <![CDATA[세계 산책 아일랜드 독립을 위한 문예부흥운동]]> 글 신현호(백석대학교 어문학부 교수) 아일랜드 문예부흥운동(Irish Literary Revival)은 19세기 후반기부터 20세기 초까지 약 60년에 걸쳐 전개되었다. 아일랜드 작가들을 중심으로 당시 영국 식민지 통치하에 있는 아일랜드의 민족정신을 고양시키고, 아일랜드 전통인 켈트(Celt) 문화를 부흥시켜 문화적 정체성 확립과 아일랜드 독립정신을 고취하려고 했던 활동이다. alt아일랜드 지도아일랜드 문예부흥운동의 형성 과정   19세기 중반 이후 영국 식민지 통치하에 있던 아일랜드는 독립운동을 격렬하게 전개하면서 혼란을 겪고 있었다. 당시 영국의 지배 문화로부터 벗어나려 한 아일랜드인의 정체성 찾기는 19세기 중엽 이후 강화되다가 문예부흥운동으로 구체화되었다.      아일랜드 문예부흥은 일반적으로 1885년부터 1940년 동안 전개된 것으로 평가된다. 아일랜드 문예부흥의 움직임은 19세기에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라 18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18세기에 일어났던 미국의 독립전쟁과 프랑스 혁명이 아일랜드의 정세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이는 아일랜드 자치정부 수립에 대한 열망을 자극해 1791년 ‘아일랜드 연합’이라는 단체를 설립하게 하였다. 이 단체를 주도한 민족주의 혁명가인 ‘울프 톤(Theobald Wolfe Tone)’과 동료들은 민족 정체성의 개념을 확립하고자 노력하였다. 이들의 목표는 아일랜드 국민 전체를 통일하는 것, 과거 모든 불화의 기억을 지워버리는 것, 개신교·가톨릭·영국 국교도 등 모든 종파를 아일랜드 사람이라는 공통의 이름으로 대체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1840년대를 전후하여 전개된 ‘청년아일랜드운동’은 문학을 통해 아일랜드인들에게 민족정신을 불어넣고 민족의 독립과 고대 아일랜드 문화의 부활을 추구하였다. 1893년에 결성된 ‘게일 연맹’은 아일랜드 고유 언어인 게일어 부활을 주도하였으며 아일랜드 민요 보급에 노력하였다.       민족운동의 초석이 된 문예부흥운동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끼친 것은 민족주의자 ‘파넬(Charles Stuart Parnell)’의 실각으로 인한 아일랜드의 정치적 진공 상태였다. 아일랜드 자치를 추진하던 급진적 공화주의자들은 파넬의 실각으로 인해 사분오열되었고, 이로 인해 정치적 환멸감이 확산되고 있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예이츠(William Butler Yeats)’를 중심으로 한 아일랜드 작가와 지식인들은 문화운동을 통해 아일랜드 국민을 하나로 통합하기에 좋은 상황이라고 판단하고, 문예부흥운동을 역동적으로 펼쳐나가기 시작했다.     결국 영국의 오랜 식민통치로 인해 인종·종교·문화·언어 등이 심하게 분열된 아일랜드를 통합하고 아일랜드의 정체성을 확립하려 했던 문예부흥운동은 영국으로부터의 정치적 독립운동에 기여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아일랜드의 문예 및 문화 전반의 양상을 변화시키는 데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alt아일랜드의 시인,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1911)(좌) / 문예부흥운동의 거점이었던 애비극장(우)아일랜드문예부흥운동의 혼란과 영향  아일랜드는 수 세기 동안 반복된 이민족의 침입과 수탈의 아픔을 겪어왔으며, 1169년부터 영국의 정복과 지배를 받게 되었다. 수백 년에 걸친 식민지 지배 과정에서 토착문화와 외래문화와의 갈등, 식민지 종주국인 영국과 피식민지 아일랜드 문화 간의 갈등, 친영국계 개신교 문화와 민족주의적인 가톨릭 문화와의 갈등이 계속되었다. 영국은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는 방편으로 자신들의 문화를 이식하면서 토착민과 토착문화를 파괴하였다. 영국식 교육 제도를 수립하고 전통적인 켈트문화를 폄하하면서 고유 언어인 겔릭어(gaelic)를 영어로 대체하고, 새로운 가치와 역사를 심었다. 그 결과 아일랜드의 문화나 아일랜드 민족의 감수성은 특수성을 가지지 못하고, 지배국인 영국의 문화와 혼합돼 존재하게 되었다.      19세기 초에 들어서면서 아일랜드인들은 반(反) 영국운동을 펼치며 영국의 오랜 식민통치와 지배 문화로부터 벗어나려 하였다. 이러한 노력은 무력을 동반한 시위와 저항 그리고 예술 활동을 통한 아일랜드 정체성 추구 등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다. 19세기 후반에 시작된 문예부흥운동은 영국계 아일랜드 작가들이 주축이 되어 아일랜드의 언어와 전통을 부활시키고 영국으로부터의 문화적 독립을 이끌어 아일랜드의 독립을 실현하고자 하였다.     문예부흥운동은 특정한 종교나 계층 및 정치적 입장을 지지하지 않으며 단절되었던 자신들의 전통을 재구성함으로써 아일랜드의 정체성을 찾으려 하였다. 고대 켈트족의 신화와 전설, 민담 등 아일랜드적인 소재와 언어적 리듬을 되살려 아일랜드 고유의 민족문학을 구축하고, 게일어를 보급·확산하며, 아일랜드 국토와 경치에 대한 찬미를 통해 이상적인 아일랜드를  창조하였다. 문예부흥운동가들은 종교 및 인종의 분열이 없던 켈트시대로 거슬러 올라감으로써 고대 아일랜드의 신화를 발굴하고, 중세 시대의 문인들에 의해서 기록된 켈트 문학을 번역하고 소개하였으며, ‘애비극장’과 같은 문예극장을 설립해 희극운동을 펼쳤다. 또한 ‘쿠알라출판사’를 만들어 아일랜드 고유의 신화나 아름다운 전통문학을 유럽 현대문학의 형식과 결부시킨 작품을 민중들에게 전파하였다.       그러나 당시 상황은 문화의 융합이 아닌 두 문화의 충돌을 야기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아일랜드가 1922년 영국으로부터 자치권을 부여받고 자유국가로 탄생된 이후, 문예부흥운동가들의 업적은 다수의 가톨릭계 국수적 민족주의자들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공격의 원인 중 하나는 문예부흥운동가들이 영국 피가 섞인 ‘앵글로 아이리시’ 특권 계층으로 아일랜드의 정서를 경험하지 않은 계층으로서, 토착문화인 게일어에 대한 지식 없이 아일랜드 정체성을 확립하려 했고, 게일어가 아닌 영어를 사용하여 아일랜드 문화를 새롭게 창조하려 했다는 것이다. 결국 ‘토착 아일랜드인’들과 ‘영국계 아일랜드인’ 간의 민족 정체성 개념이 큰 차이를 보이며 문예부흥운동은 쇠퇴하고 말았다.       아일랜드 문예부흥운동의 쇠퇴는 문예부흥운동가들이 아일랜드의 참혹한 현실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데서 생긴 결과였다. 그럼에도 문예부흥운동은 식민지 상황에서 역사에 대한 인식을 고취해 민족의 자긍심을 일깨우려고 했고, 정치적인 투쟁이 아니라 아일랜드 고유의 문화 복원과 창출을 통해 식민지 상황을 극복하고자 한 점에 있어 의의를 갖는다. 문예부흥운동은 많은 현대 아일랜드 작가들에게 중요한 영향을 미쳤으며, 이들의 문학정신은 아일랜드에 국한되지 않고 20세기 세계문학 전개에도 커다란 시사점을 주었다.        이어 1921년 아일랜드가 독립된 이후 오늘날까지도 아일랜드 정체성 회복 운동은 계속되고 있다. 학교에서는 아일랜드 고유어를 복원하기 위해 아일랜드 고유어를 중점적으로 가르치고 있으며, 도로 안내나 지명 표기 및 공식 문건에 아일랜드어가 병기되고 있다. 아일랜드 고유의 스포츠인 아일랜드식 하키 헐링, 겔릭축구, 카모기 등도 강조하고 있다.]]> Wed, 29 Sep 2021 10:15:03 +0000 59 <![CDATA[기념관은 지금 독립운동사의 의미와 가치를 발굴하다 독립기념관 자료 수집 및 분석]]> 정리 편집실  사진 봉재석 독립기념관을 이끌어 가는 당신이 자랑스럽습니다. 오늘도 앞장서서 묵묵히 열 일하는 열정 인재들! 독립기념관에는 약 10만여 점의 독립운동사 관련 자료가 소장되어 있습니다. 이번 호에는 독립운동사 자료를 수집하고 분석하는 주인공들을 만나봅니다. alt자료 수집·분석 담당 연구원들(오세호, 정욱재, 진주완, 윤소영)자료 수집 방법에 대해 알려주세요자료 수집 방법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국민들의 자발적인 자료 기증입니다. 현재 독립기념관에는 약 10만 여점의 자료를 소장하고 있는데, 상당 부분은 우리 국민이 자발적으로 기증하여 주신 것입니다. 두 번째는 자료가 있을 만한 국내외 소장자를 찾아서 직접 방문하여 수집하는 것이고, 세 번째로는 일정한 대가를 지불하고 자료를 구입하는 것입니다. 국내·외의 고서적·고유물 관련 사이트에 독립운동 관련 중요한 자료들이 판매되고 있습니다. 이런 자료들의 경우 자료수집위원회의 심의를 통해 가치가 있다고 판단한 자료들을 선택하여 구입하고 있습니다. 자료를 조사·수집하는 과정에서 어려움이 있다면요?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 수없이 발생하곤 합니다. 자료 기증 의사를 밝혔다가도 마음을 바꾸는 경우가 있고, 처음부터 자료 기증에 대한 마음의 문을 열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때로는 자료 소장자께서 기증의 대가를 요청하는 경우도 있어, 자료 수집 과정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예측하기 어렵습니다.어려운 상황들은 어떻게 극복하나요?자료 수집은 소장자와 라포(Rapport, 서로 신뢰하며 감정적으로 친근감을 느끼는 관계)를 형성하며 마음을 열어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료 수집 현장에서 예기치 않은 상황이 발생할 수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자료를 소장한 분들의 마음을 열고 다가가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험난한 과정을 겪으신 여러 가족들의 역사, 그리고 당시 국내와 해외 지역에서 하루하루의 귀한 시간들이 담겨 있는 소중한 역사 자료들을 수집하는 것만으로도 보람이 있으니 극복이라고 할 것은 없습니다. alt수집된 자료 분석 작업(좌) /  월남 이상재 선생의 후손인 이상구씨가 기증한 월남 선생의 친필 연설문 초고(우)자료 분석이란 무엇인지 쉽게 설명해주세요자료 분석은 한마디로 ‘수수께끼를 풀어가는 과정’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수집한 역사 자료들이 갖고 있는 궁금증을 하나씩 풀어가며 자료에 숨을 불어 넣는 과정이 아닐까 합니다. 문서와 편지, 사진·영상 자료, 의복류와 책상과 같은 가구류 등 다양한 형태의 자료들이 갖고 있는 역사를 다양한 방법을 통해 추론하고 이를 증명할 수 있는 근거 자료들과 비교·대조를 통해 역사적 의미를 복원하는 과정입니다. 자료 생성 당시를 알 수 있는 다른 자료의 내용을 비교하고, 자료 기증자로부터 확보한 자료의 소장 경위와 내용, 그리고 여러 연구 성과들을 종합하여 수수께끼를 풀어나가는 것처럼 차례차례 자료가 갖고 있는 역사를 복원해 가는 과정이죠. 이렇게 분석을 통해 새로운 숨을 불어 넣은 자료는 자료 공개 행사 등을 통해 자료가 가지고 있는 역사와 의미를 국민과 함께 나누게 됩니다. 그리고 분석된 자료는 또다시 연구와 전시, 교육 등의 다양한 방법으로 국민들과 다시 만나게 됩니다. alt자료 수집 현장조사(우련 이병욱 선생 관련)(좌) / 기증자료 목록 작업(우)자료 분석 과정도 중요한데, 갖춰야 할 사항이 있나요?먼저 세 가지 역량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일제강점기 및 독립운동사에 대한 이해입니다. 독립운동사 자료 대부분이 광복 이전에 만들어졌기 때문에 일제강점기 및 독립운동 전반을 이해하고 있어야만 합니다. 둘째는 자료의 내용을 해석할 수 있는 언어적 역량입니다. 독립기념관에서 수집하는 자료 대부분은 한문·일문·옛 한글 자료이며, 필기체로 쓰여 있어 수집하고자 하는 대상 자료 내용을 해독할 언어 역량이 필요합니다. 셋째는 자료의 정확한 가치를 파악할 수 있어야 합니다. 원본인지 사본인지, 정확한 생산연도가 언제인지, 독립기념관이나 타 기관에 동일한 자료가 있는지, 도난품은 아닌지 등 고려 사항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료를 대하는 태도입니다. 자료를 소중하고 무겁게 다뤄야 하며, 자료의 의미와 가치를 널리 알릴 수 있을지 고민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앞으로의 자료 수집 방향에 대해 말씀해주세요현재 독립기념관이 소장하고 있는 자료의 대부분은 고서적 등 문서류입니다. 지금 국민은 당시 생활상 등 독립운동 이면의 내용에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국민의 요구에 맞게 문서류 편중에서 벗어나 영상과 사진 같은 이미지 자료와 독립운동가들이 사용하던 안경 및 책상 등과 같은 박물류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Wed, 29 Sep 2021 10:15:44 +0000 59 <![CDATA[독자 이벤트 이번 호 독립기념관을 읽고 빈칸을 채워주세요. 꼼꼼히 읽다 보면 정답에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alt alt아이콘 클릭하면 퀴즈 정답을 보낼 수 있습니다.           ]]> Wed, 29 Sep 2021 10:17:29 +0000 59 <![CDATA[힐링과 휴식 그리고 지울 수 없는 역사 강원도 홍천 ]]> 글·사진 김초록 여행칼럼니스트 힐링과 휴식 그리고 지울 수 없는 역사강원도 홍천‘꿈에 그린 전원도시’ 산 높고 골 깊은 강원도 홍천은 우리나라 지자체 중 가장 넓은 땅을 보유한 고장이면서 나라꽃 무궁화가 군화(郡花)여서 이곳의 의미와 역사를 다시금 돌아보게 한다. 대부분이 산과 계곡, 강으로 이루어진 홍천은 어딜 가나 비경이 널려 있는데, 곳곳에서 나라사랑의 정신도 엿볼 수 있다. alt 홍천강 줄기를 따라가자홍천은 땅이 워낙 넓은 까닭에 웬만큼 둘러보려면 최소 2박 3일은 잡아야 한다. 경기도 양평을 지나 홍천군 서면 소재지로 접어들면 그림 같은 강변 정경이 펼쳐진다. 밤골·모곡밤벌·수산·개야·마곡·노일 등 홍천강 줄기의 강변 유원지는 피서객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는 휴식처다. 특히 그 주변엔 무궁화마을(서면 밤범길)과 팔봉돌배마을(서면 오도치길) 등 농촌체험마을이 들어서 있어서 도시민들이 다양한 농촌생활에 푹 빠져볼 수 있다.홍천강 위쪽에는 팔봉산이 우뚝 솟아 있다. 해발 327m의 나지막한 산이지만 여덟 개의 봉우리가 치맛자락처럼 이어져 있는 모습이 기개가 대단하다. 한국의 100대 명산에 들 만큼 일찍이 등산객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팔봉산의 인기는 그 자체의 멋도 있지만 바로 아래 흐르는 홍천강 덕이 크다. 등산과 물놀이를 함께 즐길 수 있어 가족 단위의 여행객들이 즐겨 찾는다. 홍천강의 자랑인 넓고 고운 백사장은 마치 해변에 온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근래 들어 붐을 이루고 있는 오토캠핑장도 마련돼 있는데 비취빛 강물과 파란 하늘을 벗 삼아 색다른 정취에 빠져볼 수 있다. 노일강변유원지: 강원도 홍천군 서면 팔봉리 산59-1팔봉산 등산로 매표소: 강원도 홍천군 서면 한치골길팔봉참살이마을 오토캠핑장: 강원도 홍천군 서면 도오치길8 / 033-435-1481         alt 노일강변 유원지 alt 나라사랑을 몸소 실천했던 남궁억과 강재구모곡밤벌유원지 한쪽엔 독립운동가 남궁억의 묘역과 기념관이 있다. 한서 남궁억은 서울 정동에서 태어나 일제강점기 <황성신문>을 창간하여 언론인으로서 민중계몽을 위해 힘쓰고, 현산학교를 설립해 구국교육에 노력하는 등 교육자로서도 나라사랑 정신을 몸소 실천한 인물이다.특히 서재필, 이상재 등과 함께 독립협회를 창립하고 1933년 11월엔 독립운동 비밀결사대인 ‘십자당’을 조직해 활동하는 등 독립운동에 직접적으로 투신하는 한편,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 등 1백여 곡의 애국가요를 직접 지어 보급하기도 했다. 한편 남궁억의 자취는 연봉리에 위치한 무궁화공원에도 남아 있다. 이곳엔 남궁억 선생 시비를 비롯해 충혼탑, 3·1만세탑, 홍천지구 전투 전적비, 반공 희생자 위령탑 등이 세워져 있으며 무궁화공원 안쪽에 자리한 향토사료관에서는 남궁억을 기리는 흉상과 무궁화에 대한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읍내에서 자동차로 15분 거리 떨어진 북방면 성동로엔 강재구 소령의 추모탑이 서있다. 1965년 10월 4일 월남전에 참가하기 위한 마지막 훈련 중 강재구 소령은 한 부하 병사가 실수로 던진 수류탄을 자신의 몸으로 막아 다른 병사들의 생명을 구했다. 추모탑 옆에는 그가 장렬하게 산화한 장소에 기념비와 기념관을 마련하여 살신성인의 정신을 기리고 있다. 기념관엔 그가 생전에 기록한 비망록·신상명세서·유도·약혼녀에게 보낸 편지 등 125점의 유품이 전시돼 있다. 매년 10월 4일이면 고인의 유족과 육사 동기생들이 찾아와 숭고한 넋을 추모하고 있다.한서남궁억기념관: 강원도 홍천군 서면 한서로 667 / 033-430-4488무궁화공원: 강원도 홍천군 홍천읍 연봉리 / 033-430-2768강재구공원기념관: 강원도 홍천군 북방면 성동로 275         alt 한서남궁억기념관 alt남궁억 기념비alt강재구 소령 추모탑 alt 공작산 생태숲과 산소길이번에 갈 곳은 공작산 자락에 포근히 안긴 천년고찰 수타사다. 공작산은 조선시대부터 왕릉(세조의 비 정희왕후의 태실)이 자리를 잡으면서 왕실의 숲으로 보호받은 영험한 곳이다. 드물게 평지에 자리한 수타사는 신라 성덕왕 때 창건된 고찰로, 경내에 월인석보(보물 제745호)를 포함한 많은 문화재가 남아 있다. 수타사 옆으로 흐르는 계곡물은 더위를 씻어준다. 바위를 타고 흘러내리는 물소리가 우렁차다.수타사 옆으로 난 공작산 생태숲 산소길은 사철 내내 방문객들의 발길이 이어진다. 숲을 스치는 바람 소리며 청아한 새소리는 기분이 절로 좋아지고 피톤치드를 맘껏 들이키자면 심신이 편안해진다. 산소길을 걷다 보면 첫 번째 비경인 출렁다리를 만날 수 있다. 다리 밑에는 움푹 파인 ‘귕소’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귕’은 이곳 말로 소나 말이 여물을 먹는 통을 말하는데, 연못(沼)의 모양이 귕을 닮아 붙은 이름이다. 출렁이는 다리를 건너 조금 더 걸어가면 두 번째 비경, 용담이 나타난다. 용이 승천했다는 연못으로, 그 위에는 펑퍼짐한 너럭바위가 앉아있다.산소길은 노천리까지 이어지는데 오밀조밀한 길을 따라가다 보면 하늘을 찌를 듯한 잣나무와 마가목, 매끈한 자태의 은사시나무, 아름드리 소나무, 쓰디쓴 열매를 맺는 소태나무, 옛날 도로변에 거리 측량을 위해 심었다는 오리나무와 시무나무 등 사연도 갖가지인 나무들을 눈에 담는 재미가 있다. 산소길은 모두 4개 코스로 나뉘는데, 수타사를 둘러보고 생태숲-출렁다리-귕소-용담-수타사로 돌아오는 코스가 가장 일반적이다. 총2km에 어른 걸음으로 1시간, 천천히 걸으면 2시간 정도 소요된다. 지친 몸과 마음을 힐링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길이다.수타사: 강원도 홍천군 동면 덕치리 9 / 033-436-6611 / www.sutasa.org alt 공작산 생태숲 alt 내린천의 출발점인 살둔마을 읍내에서 인제 방향인 서석면을 지나 내면 쪽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자연이 만들어낸 절경을 두루 감상할 수 있다. 미약골은 400리를 흐르는 홍천강 발원지로 원시림의 계곡을 따라가노라면 촛대바위·암석폭포·용천수 등 때 묻지 않은 자연생태계가 반긴다. 인제와 접한 내면계곡은 무주구천동을 10개쯤 모아놓은 것 같은 풍광을 자아낸다. 오대산·계방산·응복산 등 깊은 골짜기에서 흘러내린 시리도록 찬 물은 계방천·자운천·조항천·내린천으로 만나고 다시 갈리면서 수많은 여울과 폭포, 소를 이룬다. 내면계곡은 긴 물줄기의 마지막 단계로 알 만한 사람들 사이에서는 무릉도원으로 통하는 곳이다. 열목어·금강모치·꺽지·쉬리·참종개·갈겨니 등 크고 작은 민물고기가 바위 사이를 헤집고 다니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내면 율전리 살둔마을. 강원도에서도 가장 강원도답다는 이곳은 산줄기 물줄기가 첩첩이 돌아가는 산중이다. 내린천이 시작되는 첫 마을로 현재 10가구가 산밭을 일구며 살아가고 있다. 1985년에 지은 귀틀집 모양의 살둔산장은 한국의 100대 산장에 꼽힌다. 산악인 윤두선(故윤보선 대통령 동생)씨가 월정사 복원 작업에 참여한 도목수에게 부탁해 지었다고 하는데, 그 모습이 예사롭지 않다. 산장 바로 옆 계곡은 내린천의 상류 지점으로 풍광이 수려하다.살둔마을에서 멀지 않은 곳에는 미산계곡·모래소계곡·미천골·명개리계곡·칡소폭포·삼봉약수가 있는 삼봉자연휴양림이 있다. 내면 명계리에서 양양(서면 갈천리)으로 넘어가는 구룡령 옛길(명승 제26호)도 걸어볼만 하다. 예부터 영동 지방 사람들이 한양으로 갈 때 많이 이용했던 길이다.살둔 정보화마을: 강원도 홍천군 내면 율전리 183 / 070-7793-0366살둔산장: 강원도 홍천군 내면 율전리 212 / 033-435-5984 / www.saldun.co.kr alt내린천alt살둔계곡 alt 근대 한국의 굵직한 역사를 안고 있는 곳내면에서 돌아 나와 내촌면 쪽으로 올라가면 홍천의 또 다른 역사와 조우하게 된다. 내촌면·서석면·화촌면 일대는 동학농민군 최후의 항전지면서, 일제강점기에는 치열한 만세운동의 현장, 한국전쟁 때는 수많은 병사들이 피 흘린 곳이다.6·25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5월 16일부터 20일까지 국군 5사단과 중공군 27사단은 이곳 물걸리 일대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근접 전투로 수많은 국군 장병들이 포연과 함께 사라져간 구국의 현장인 것이다. 국방부는 지난 2011년 물걸리 일대에서 ‘6·25 전사자 유해 발굴 사업’을 실시, 전사자 유해 182구와 유품 1107점을 발굴해 국립현충원에 안장하였다.물걸리 동창마을에 있는 기미만세공원은 1919년 4월 1일, 일제 탄압에 맞서 만세운동을 하다 이곳에서 순직한 8열사를 추모하기 위해 조성되었다. 기미만세상·비문·팔렬각 등 세워진 조형물들은 3·1운동의 고귀한 정신을 어렴풋이나마 되새겨보도록 하고 있다. 한편 공원 한쪽엔 통일신라시대의 절터가 남아 있다. 그곳에는 3층석탑(보물 제545호)이 단아하면서도 미려한 자태로 홀로 덩그러니 자리를 지키고 있다.이밖에도 산 높고 골 깊은 내촌과 두촌엔 한여름 무더위를 씻겨줄 명소들이 많이 있다. 가리산을 비롯해 용소계곡·물골안강변·화상대강변·눌언동강변·수하리캠핑장·가령폭포 등은 자동차로 쉽게 접근할 수 있으니 함께 둘러보면 좋다.기미만세공원: 강원도 홍천군 내촌면 물걸리 592 / 033-430-4441         alt 기미만세운동기념비 alt기미만세상alt가령폭포                         김초록여행칼럼니스트 겸 수필가. 현재 『월간 비타민』, 『건설경제신문』, 『서울우유』, 『냉동공조신문』에 객원기자로 활동 중이다. 여행 저서로는 『여름 이야기』, 『7가지 테마가 있는 여행』 등이 있다. ]]> Thu, 01 Jun 2017 16:39:03 +0000 6 <![CDATA[독립기념관과 주요 시설물 ]]> 독립기념관에는 순국선열들의 희생과 헌신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시설들이 곳곳에 자리 잡고 있다. 전시관뿐만 아니라 공원·숲·조형물 등 다양한 시설을 통해 우리 역사를 알리고 화합과 발전이라는 미래지향적 가치를 내세우고 있으며, 이로써 관람객들에게 다채로운 볼거리와 쾌적한 환경을 제공하고 있다. alt]]> Thu, 01 Jun 2017 14:44:14 +0000 6 <![CDATA[암울했던 시기, 희망의 홈런을 날리다 영화 <YMCA 야구단> ]]> 글 편집실암울했던 시기, 희망의 홈런을 날리다영화 <YMCA 야구단>감독: 김현석주연: 송강호, 김혜수개봉일: 2002년 10월 3일1900년대 초 일제의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한 시기, 암울한 분위기 속에서 민중들의 가슴을 뛰게 만든 것은 다름 아닌 스포츠, 특히 ‘야구’였다. 영화 <YMCA 야구단>은 초기 한국 야구의 발전과정을 코믹하게 다루는 동시에, 일제강점기 속에서 야구로 희망을 꿈꿨던 이들의 모습을 담았다.                         Q. 우리나라 야구의 역사는 언제부터였을까?영화의 배경은 갑오개혁으로 신분제와 과거제도가 막 폐지된 조선의 한양이다. 글공부보다는 운동에 관심이 많았던 호창(송강호)은 야구를 하는 신여성 정림(김혜수)과 우연히 만나게 되면서 ‘신문물의 상징’인 야구의 매력에 푹 빠졌고, 급기야 조선 최초의 야구단에 몸담게 된다.<YMCA 야구단>은 실제로 존재했던 황성YMCA야구단을 소재로 하고 있다. 세계적인 기독교 평신도 운동단체인 기독교청년회, YMCA(Young Men's Christian Association)는 우리나라에 야구를 비롯해 농구·스케이트·배구 등 주요 현대 스포츠 종목을 처음 들여오면서 한국 근대화 여정에 큰 역할을 했다.          alt                         Q. 그 시절 우리나라 야구의 인기는 어땠나?YMCA야구단은 연전연승을 기록하며 최강의 팀으로 자리 잡는다. 그러나 그 무렵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일본군에게 연습장을 빼앗길 처지에 놓인다. 이때 투수 대현(김주혁)은 일본 유학 때 알고 지낸 일본인 장교와 조우하고, 이를 계기로 일본군 성남구락부와 경기를 하게 된다.선교사 질레트의 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매달 6~9회의 야구 경기가 치러지고 심지어 12월 한겨울에도 경기를 치를 정도로 한국 야구의 인기는 대단했다. 황성YMCA야구단은 국내에 있는 일본팀과 미국 선교사팀을 연파하며 국내 야구를 평정했다. 특히 일본과의 경기는 시대적 상황과 맞물려 비장한 각오로 임할 수밖에 없었다. 1912년에는 최초로 일본 원정에 나서 야구 명문인 와세다대학팀과 친선경기를 가진 바 있는데, 당시 일본 언론들은 우리 야구단의 모습을 ‘전쟁터에 나가는 병사와 같았다’고 묘사했다. altalt황성YMCA야구단 경기 모습(이길용기념사업회)                         Q. 실제 우리나라 최초의 야구선수는 누구인가?독립운동가 여운형은 우리나라 1세대 야구선수이자 체육인이다. 그의 체육계 활동은 1912년 황성YMCA야구단에서 주장을 맡은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1919년 3·1운동 직후 중국으로 망명해 독립운동을 하면서도 상하이한인체육회를 조직하는가 하면, 푸단대학교(复旦大學校) 명예교수로서 체육부를 담당해 대학 축구팀을 이끌고 싱가포르와 필리핀을 순방하는 등 체육에 대한 애정이 컸다. 일경에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된 뒤 1932년 가출옥해서는 조선체육회 이사, 서울육상경기연맹 회장 등 각종 체육단체 임원을 맡았다. 여운형은 한국 스포츠계에 수많은 족적을 남기며 오늘날 한국 스포츠 발전에 큰 기여를 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alt여운형(몽양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                         Q. 국민의 독립의식을 고취시키는 데 기여한 야구?서울YMCA는 한말 개화파 청년들과 미국 선교사들을 주축으로 1903년 10월 28일 설립된 황성기독교청년회가 모태다. 이후 을사늑약이 체결되었던 1905년 선교사 질레트(P.L.Gillett)의 지도로 황성YMCA야구단이 결성되었다. 황성YMCA가 주축이 되어 활발하게 전개된 체육활동은 청년들의 능력 배양과 함께 일제에 대한 저항의 표현으로 인식되었다. 이에 일제는 105인 사건 등으로 탄압을 시작해 1913년 황성YMCA를 해체시켰다. 그러나 체육 및 교육활동으로 고취된 독립의식은 1919년 2·8 독립선언과 3·1운동으로 이어졌다. 이처럼 야구를 포함한 스포츠는 나라가 힘없던 시기, 우리 민족의 가슴 속 꺼져가는 희망의 불씨를 지펴주었다.          alt     ]]> Thu, 01 Jun 2017 16:58:37 +0000 6 <![CDATA[일제강점기 참상을 알린 참된 언론인 ]]> 글 학예실일제강점기 참상을 알린 참된 언론인장덕준(張德俊, 1892. 6. 25~1920)독립기념관은 국가보훈처·광복회와 공동으로 장덕준을 6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언론인으로서 일제강점의 현실을 알리기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았던 그는 최초의 순직기자다. alt <동아일보> 창간에 참여추송(秋松) 장덕준은 1892년 6월 황해도 재령군 북률면 나무리의 한 빈농 집안에서 태어났다. <동아일보> 창간 당시 주필이자 후에 정치가로 활동했던 장덕수가 그의 동생이다. 장덕준은 명신중학교에 진학하여 1911년 졸업하였으며 그 후 모교 교사로 2년간 재직하였다. 1914년에는 평양일일신문사에 입사하여 조만식 등 평양의 명사들과 만남을 가졌다. 이듬해 1915년에는 일본 유학을 떠나 세이소쿠(正則)예비학교에서 공부하였다. 동시에 재동경조선인유학생학우회 평의원으로 활동하면서 유학생들이 발행한 잡지 『학지광(學之光)』에 기고하기도 하였다. 장덕준은 이 시기 요시노 사쿠조(吉野作造)와 같은 자유주의 지식인과 교류하였고, 주변 유학생들에게 신문 발간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귀국 후 신문을 발행하겠다는 의지를 내비쳤다.한편 3·1운동 이후 민간신문 발행에 대한 논의가 급물살을 타면서 그는 <동아일보> 창간에 적극 참여하였다. 1920년 4월 창간 당시 논설주간은 장덕준의 동생인 장덕수였고, 장덕준은 논설반원·통신부장·조사부장을 겸하였다. 그는 창간 다음날인 1920년 4월 2일부터 13일까지 ‘조선소요에 대한 일본 여론을 비평함’이라는 논설을 실어 3·1운동을 왜곡한 일본 여론을 비판하였다.         alt장덕준 초상화(1964년, 한국신문편집인협회 제작, 국가보훈처 제공)alt장덕준(1920년, 국가보훈처 제공) alt<동아일보> 창간호(1920년 4월 1일자)    alt<동아일보>에 실린 장덕준 기고문(1920년)             사생결단의 기자 정신장덕준은 지병인 폐결핵으로 건강이 좋지 않았지만, 전방위적인 활동을 펼치며 <동아일보> 기자 생활을 계속해나갔다. 특히 1920년 여름에는 동아시아를 방문하는 미국의원단을 취재하기 위해 베이징으로 특파되었다. 그는 이곳에서 안창호와 함께 미국 하원 외교위원장 포터를 만나 한국의 실정을 설명하였고, 의원단장인 스몰을 인터뷰해 기사로 실었다.한편 같은 해 10월 <동아일보>가 조선총독부로부터 무기정간 처분을 당한 가운데, 간도에서는 청산리대첩에서 독립군에 패한 일본군이 그 보복으로 한국 동포를 무차별 학살한 간도참변이 일어났다. 당시 장덕준은 폐결핵으로 혈담을 토하는 상태였지만 취재를 위해 혈혈단신 만주로 떠났다. 그러나 “빨간 핏덩이만 가지고 나의 동포를 해하는 자가 누구이냐고 쫓아와보니 우리가 상상하던 바와 조금도 틀리지 않는다”고 첫 소식을 보내온 뒤로 곧 실종되고 말았다. 당시 나이 29세였다.장덕준이 실종된지 10년이 지난 1930년 4월 1일, <동아일보>는 창간 10주년을 기념하며 그의 죽음을 인정하고 순직자로서 추도식을 거행하였다. 당시 한 기자는 “의에 대한 용기, 봉공(奉公)의 정신, 이 두 가지 귀한 교훈을 우리에게 끼친 데 대해서 나는 씨를 과거의 모든 의인보다도 별달리 사모코저 하는 것이다”라고 그를 추모했다. 정부는 장덕준의 공적을 기리어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alt장덕준의 미국의원단장 인터뷰 기사(<동아일보> 1920년 8월 24일자)alt서울에 방문한 미국의원단(<동아일보> 1920년 8월 24일자) alt간도참변 당시 학살당한 한국 동포들alt장덕준 추도식 ]]> Thu, 01 Jun 2017 16:32:59 +0000 6 <![CDATA[하나,남편과 함께 자정순국한 권성(權姓) 둘,을축년 대홍수는 일제 때문에 일어났다? ]]> [우리가 몰랐던 이야기 하나]글 강윤정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 학예연구부장남편과 함께 자정순국한 권성(權姓)2016년 11월까지 독립유공자로 서훈된 여성은 모두 288명(외국인 포함)이다. 전체 독립유공자 가운데 2% 남짓이니 수적으로는 결코 많지 않다. 그러나 여성이 오랜 세월 ‘집안’만을 돌보며, 기록물 생산에서 배제되었던 것을 감안한다면 그 의미는 적지 않다. alt 권성이 태어난 닭실마을 전경         주목 받지 못한 독립운동가 권성여성들은 의병항쟁으로 포문을 연 뒤, 민족을 위해 세운 뜻을 꺾지 않고 꾸준히 일제에 항거했다. 그 본격적인 첫 장인 국채보상운동을 시작으로 근대교육운동, 3·1운동, 의열투쟁, 만주지역 항일무장투쟁 지원, 한국광복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방법으로 항일투쟁을 펼쳤다. 특히 만주로 망명한 여성들은 인고의 세월을 견디며, 조국 광복의 밑거름이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큰 조명을 받지 못하는 여성들이 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남편 이명우와 함께 자정(自靖)순국한 권성(權姓)이다. 권성은 1868년 경북 봉화군 봉화읍 유곡리 닭실마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안동권씨 권양하, 어머니는 풍산김씨 김중태의 딸이다. 권성은 어린 시절 소남(小男)으로 불렸는데, 뒷날 제적등본에 ‘권씨성 부인’이라는 뜻을 가진 ‘권성’으로 적히는 바람에 권성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그는 어려서부터 기교를 부리거나 모난 행동을 하지 않았고, 언행을 조심하여 삼가는 사람이었다.성장하여 17세가 되던 1885년 안동시 예안면 부포리의 이명우와 혼인하였다. 남편은 그녀보다 4살이나 아래였다. 권성은 전통사회의 부덕을 좇아 시부모님을 극진히 모셨고, 제사와 손님맞이에도 공경과 정성을 다했다. 1894년에는 남편 이명우가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성균진사가 되는 경사를 맞이하기도 했다. 이때 부부가 문중 잔치에 초대되었는데, 그 자리에서 법도 있는 모습을 보여 사람들에게 많은 칭송을 받았다고 한다.망국의 아픔과 부모 잃은 슬픔을 겪다그러나 기쁨도 잠시, 이듬해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나라의 운명은 바람 앞 등불처럼 점점 위태로워졌다. 이를 애통하게 여기며 세월을 보내던 남편 이명우는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문을 닫고 칩거에 들어갔다. 1910년 나라가 끝내 망했다는 소식과 함께 이만도를 비롯한 척사유림의 자정순국 소식을 전해 듣고는 근심과 분노로 건강이 점점 나빠졌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권성은 “상황(上皇; 광무황제)은 아직 무탈하시고, 양친이 살아계시는데 병에 시달려서야 될 일입니까”라며 그를 만류하였다. 이명우는 아내의 말에 따라 때를 기다리기로 마음을 바꾸었다.1912년 봄, 권성은 가족과 함께 속리산 아래 충북 보은군 마로면 갈평리로 이사하였다. 남편이 일상을 버리고 은둔 자정(自靖)하겠다는 뜻을 세우고 고향을 떠났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나라를 지키지 못한 죄인으로 여긴 것이 그 이유였다. 이사한지 3년 만인 1915년 시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3년 상(喪)을 마치고, 시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계룡산 아래 봉서리(현 대전 유성구 송정동)로 다시 옮겨 갔다. 1918년 11월 5일 시어머니마저 숨을 거두고 머지않아 1919년 1월 21일 광무황제가 승하하자, 남편 이명우는 머리를 풀고 미음을 먹으며 상을 치렀다. 아침저녁으로 황제가 있는 곳을 향해 망곡(望哭)하며 지냈다고 한다.남편과 함께 목숨으로 의(義)를 따르다1920년 12월 20일(음력), 드디어 광무황제의 상기(喪期)가 끝나는 날이 다가왔다. 남편 이명우는 마침내 자결하리라 결단을 내렸다. 이를 지켜봐온 권성도 남편을 따르기로 마음먹었다. 자결 하루 전인 12월 19일 저녁, 권성 부부는 자식들을 물리고 유서를 썼다.이렇게 각각 유서를 남긴 두 사람은 독을 마시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이명우가 선택한 길이 ‘충의(忠義)의 길’이었다면 부인 권성의 길 또한 ‘의(義)의 길’이었다. 권성은 ‘충의의 길’과 ‘의부의 길’이 다르지 않다고 여겼다. 이러한 그의 생각은 유서에 고스란히 드러난다.얘들아 너희들을 슬하에 두어 주옥같이 여겨 사랑한 마음 비할 데 없더니, 장래 재미를 보지 못하고 이제 아주 오랜 세월 동안 영원히 헤어지니 너의 어린 생각에 원통할 듯 하지만 인륜대의에 어찌하겠느냐? (중략) 너의 시아버지께서 충성과 절의를 지키셔서 목숨을 다하시니 내 어찌 쫓지 아니하겠느냐? 인륜대의에 작은 사정을 다 생각하지 못한다.- 며느리에게 남긴 유서 중 -권성의 자정순국과 유서는 많은 의의를 가진다. 남편과 함께 자정순국한 유일한 사례이자, 여성이 한글 유서를 남긴 사례 또한 흔치 않다는 점이다. 권성의 죽음은 직접적인 항일투쟁으로 자리매김할 수는 없다 할지라도, 남편의 올곧은 뜻을 함께 좇은 것이니 분명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alt 권성의 유서                         [우리가 몰랐던 이야기 둘]글 신현배 역사칼럼니스트을축년 대홍수는 일제 때문에 일어났다?우리나라는 옛날부터 홍수가 끊이지 않았다. 역사책을 찾아보면 『삼국사기』에 40여 회, 『고려사』에 104회, 『조선왕조실록』·『승정원일기』에 176회 등 총 300여 회의 홍수 기록이 있다. 현대에 와서도 홍수는 어김없이 우리나라를 휩쓸었는데, 그 피해 규모를 봤을 때 우리 역사상 가장 큰 홍수로 손꼽히는 것은 을축년 대홍수다. alt을축년 대홍수 모습alt을축년 대홍수 기념비 대홍수로 물에 잠긴 한반도1925년 7월부터 두 달 사이에 네 차례에 걸쳐 큰 홍수가 전국적으로 발생했다. 한강·임진강·낙동강·금강·만경강·청천강·대동강·압록강·영산강·섬진강 등 전국의 모든 강이 범람하고 논밭과 마을이 물에 잠겼다. 한반도를 강타한 이 대홍수는 피해 규모 또한 엄청났다. 최종 집계된 결과에 따르면 사망자 647명·가옥 유실 6,363호·가옥 붕괴 1만7,045호·가옥 침수 4만6,813호에 이르렀다. 농경지 피해도 유실된 논이 3만2,183단보·밭이 6만7,554단보였다. 피해액은 1억3백만 원으로, 조선총독부 1년 예산의 58%에 달했다. 당시 일본 국왕은 대홍수 소식을 듣고 식민통치에 위협을 느꼈는지 위문 사절을 보내오기도 했다.조선총독부는 대홍수가 일어나기 전 한강개수계획을 세워, 1초당 2만t의 물을 처리하도록 하겠다고 발표했다. 따라서 한강 수위가 그리 상승하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했다. 하지만 그 예측은 빗나가고 말았다. 을축년 대홍수 때 한강 인도교에 1초당 3만2천361t의 물이 흘러내렸고, 예상보다 높아진 12.74m의 최고 수위를 기록한 것이다.을축년 대홍수에서 가장 피해를 많이 입은 곳은 한강을 끼고 있는 서울이었다. 집중호우로 영등포와 용산 제방이 무너지고 한강이 넘쳐 일대가 물에 잠겼다. 용산 철도청 관사는 1층 천장까지 물이 찼고, 경부선 철도 운행은 중단되었다. 뚝섬과 마포 지역도 완전 침수되었고 범람한 물이 서울역 앞까지 들이닥쳤다.한강변인 송파·잠실·신천·풍납동 일대는 말할 것도 없었다. 송파진 마을은 몽땅 물에 떠내려가 거처를 잃은 주민들이 지금의 송파 1동 한양아파트 일대로 이주했다. 이들은 혹독한 물난리를 겪은 뒤 다시는 그런 재난이 일어나지 않도록 후세에 경각심을 주고자, 1926년 7월 15일 송파리에 소재했던 광주군 중대면사무소에 ‘을축년 대홍수 기념비’를 세웠다. 이 기념비는 현재 송파 근린공원에 옮겨져 그날의 재난을 증언하고 있다.물난리 속에 벌어졌던 몇 가지 일화당시 두 번째 홍수와 관련해서는 몇 가지 일화가 있다. 영등포에 있던 경성방직공장은 집중호우가 시작되자 7월 15일부터 홍수에 대비해 공장 입구에 모래가마니를 쌓아 둑을 만들었다. 혹시 모를 대피상황을 위해 한강변에 뗏목을 준비해 놓고, 물이 찰 때 잘 찾아갈 수 있도록 공장에서 뗏목이 있는 곳까지 굵은 밧줄을 길게 연결해 놓았다.장대비는 좀처럼 그치지 않았다. 하늘에 구멍이 뚫린 듯 다음 날에도 무서운 기세로 쏟아졌다. 결국 한강이 넘쳐 공장 입구에 쌓아둔 둑을 넘고 들어왔다.7월 17일, 1공장 1층 천장까지 물이 차올랐다. “홍수가 났다. 이제 직원들을 대피시키자.” 공장 2층에 있던 직원들은 공장장의 지시로 대피 준비를 했다. 그런데 그때 영등포경찰서에서 일본인 순사가 찾아와 말했다.“상부의 지시다. 이 공장의 뗏목을 우리가 징발하겠다.”알고 보니 영등포경찰서에서 유치장이 물에 잠기자, 구류자들을 급히 옮기는 데 뗏목이 필요했던 것이었다. 결국 직원들은 뗏목을 빼앗기고 꼼짝없이 공장 2층에 갇혀 다음날까지 공포의 밤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을축년 대홍수 때 지금의 서울 강남구의 봉은사에서도 물난리로 떠내려 오는 사람들을 구하고자 나섰다. 절의 주지인 청호 스님은 절 뒤편 언덕에 올랐다가 물에 빠져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고는 뱃사공을 불러 말했다. “배를 띄워 저 사람들을 구해 주시오. 한 사람당 10원씩 주겠소.” 당시 근로자의 하루 품삯이 2원이었으니, 10원이면 아주 큰돈이었다. 뱃사공은 위험을 무릅쓰고 강에 배를 띄워 사람들을 구해 주었다. 이 소문은 금세 뱃사공들 사이에 퍼졌다. 몰려온 뱃사공들이 물에 빠진 사람들을 구하기 시작했고, 모두 708명의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1925년 서울에 대홍수가 난 것은 일제가 한강 제방을 제대로 관리하지 않은데다, 한강 중·상류 지역의 나무들을 마구 베어냈기 때문이다. 산에 나무가 없으면 홍수에 취약해지고, 산사태로 인해 하천에 흙이 쌓이면 집중호우 때 쉽게 범람해 제방이 붕괴된다.을축년 대홍수는 많은 인명과 재산 피해를 안겼지만 뜻밖의 선물을 주기도 했다. 홍수가 휩쓸고 지나간 뒤 우리나라의 중요한 신석기 유적 가운데 하나인 암사동 선사유적지와 백제의 옛 도읍으로 추정되는 풍납토성이 여러 유물과 함께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홍수로 우연히 발견된 이 유적들은 신석기시대와 백제시대의 비밀을 밝히는 획기적인 유적들로 평가되고 있다.               신현배역사와 전통문화에 대해 관심이 많은 역사칼럼니스트. 저서로는 역사 이야기 『엉뚱 별난 한국사』, 『엉뚱 별난 세계사』, 『2000년 서울 이야기』, 『세계사로 배우는 법 이야기』, 전통문화 이야기 『소중한 우리 문화 지식 여행』 시리즈 등이 있다. ]]> Thu, 01 Jun 2017 16:44:37 +0000 6 <![CDATA[민족이 머문 장소, 역사가 깃든 건물 ]]> 글 심용환 역사N교육연구소 소장민족이 머문 장소, 역사가 깃든 건물사람이 머물던 공간과 사람의 손을 거쳐 탄생된 작품들은 역사적 사건을 거쳐 더욱 특별한 의미를 부여받기도 한다. 일제강점기 36년, 억압 받은 시간만큼 그 시련을 이겨내고자 했던 노력 또한 길었다. 광복을 이룬지 그보다 더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기억되는 중요한 장소, 중요한 시설들이 있다.                         개화의 상징이 된 경인미술관인사동에 있는 경인미술관은 원래 박영효의 생가였다. 1884년 갑신정변을 일으켰던 급진개화파들은 이 집에 모여 급진적인 변혁을 꿈꾸었다. 박영효는 강병 양성에 노력을 기울였고, 그의 동지 김옥균 역시 일본에 유학생을 파견하며 자력갱생을 위한 산업 부흥에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번번이 민씨 척족들에 의해 여러 개혁 정책들이 무마되는 가운데 결국 갑신정변을 모의하기에 이르렀다. 김옥균, 홍영식 등 대표적인 급진개화파들의 집 또한 경인미술관 근처에 있었기 때문에 이들은 이곳에 모여 정사를 의논하며 정변을 꿈꿨다. 흥선대원군이 살았던 운현궁이 쇄국의 상징이었듯, 경인미술관은 한국 근대사에서 개화를 상징하는 곳이었다.  alt 경인미술관                         변절하기 전 친일파의 흔적, 독립문서재필 등은 1896년 일본에 적대적이며 주로 친미·친러 계열이 주를 이루었던 관료들과 연합하여 독립신문을 발간하고 독립협회를 창설했다. 초기 독립협회는 주로 언론활동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이며 독립문 역시 이때 만들어졌다. 청나라 사신을 맞이하던 영은문 대신 자주독립을 내외에 표방하는 독립문을 세웠으며 독립관, 독립공원도 들어섰다.독립문에 새겨진 ‘독립문’이란 세 글자는 친일파로 악명을 떨친 이완용의 친필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당시까지만 해도 이완용은 의기를 가지고 적극적으로 활동하던 대표적인 정동파 관료였다. 그러나 독립협회 활동으로 좌천된 이후 일제가 득세하는 가운데 친일파를 상징하는 인물이 되었다. 독립문은 1979년 성산대로 공사로 인해 원래 자리에서 수십 미터 이전하는 등 수모를 겪기도 했다.          alt독립문alt독립문 옛 모습                        열강의 소용돌이 속에서 완성된 석조전덕수궁에는 르네상스 양식의 건물인 석조전이 들어서 있다. 1900년에 착공해 1910년 완공된 건물인데 기둥 모양은 이오니아식, 실내는 로코코식을 차용하는 등 당시에는 웅대한 규모를 자랑하는 건물이었다. 주변에는 러시아 공사관을 비롯하여 서양 열강들의 공사관이 즐비했기 때문에 일제의 위협을 받던 고종의 입장에서 덕수궁을 중건, 개축하는 과정은 각별한 의미를 지닐 수밖에 없었다.석조전의 경우 고종의 광무개혁을 상징하는 건물일 수 있었으나, 지어지던 시기가 고통스러운 망국의 과정이었기 때문에 석조전을 향한 시선이 마냥 낭만적일 수만은 없었다. 1904년에는 러일전쟁이 일어났고, 1905년에는 덕수궁 중명전에서 을사늑약이 체결되었다. 무엇보다 석조전은 1910년 조선이 강제병탄된 해에 완공되면서 본래 건물의 의미가 퇴색되었다. 광복 이후 1945년 12월에는 이곳에서 한국의 임시정부 수립을 원조하기 위해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리기도 했다. alt 석조전                        가슴 벅찼던 만세 현장을 간직한 탑골공원한국 독립운동사를 다루는 데 있어 빠트릴 수 없는 역사적 공간은 탑골공원이다. 3·1운동 당시 민족대표들이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식을 거행할 때, 탑골공원 앞에서는 서울 시민을 비롯한 무수한 민중들이 모여 있었고 특히 학생대표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태화관에서 민족대표들의 독립선언식이 끝나자, 학생들은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크게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고 이로써 3·1만세운동이 시작되었다. 4개월간 전국적으로 수백만 명이 참여한 만세운동의 진원지는 바로 탑골공원이었다.한때 파고다공원으로도 불렸던 탑골공원은 본디 절터로, 지금도 공원 안에는 원각사지 10층 석탑이 남아있다. 석탑 바로 옆에 나란히 있는 팔각정은 3·1운동 당시 학생대표가 독립선언문을 낭독하면서 가슴 벅찼던 역사적 순간을 간직한 뜻 깊은 장소가 되었다.  alt탑골공원alt제35회 3·1절 기념식                         선열들의 희생이 여전히 생생한 서대문형무소독립운동사가 선열들의 숭고한 희생으로 기록되었다는 점을 생각했을 때 그 역사를 복기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장소라 하면 서대문형무소를 꼽아도 무리가 없다.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이곳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 갔기 때문이다. 을사늑약 이후 일제는 조선을 통치하기 위한 수단으로 통감부를 만들었다. 1908년 통감부가 의병탄압을 위해 형무소 시설을 확충하면서 서대문형무소의 비극적인 역사가 시작되었다. 유관순과 여성 독립운동가들이 갇혔던 지하 여자감옥, 강우규가 처형당한 사형장은 현재 모두 서대문형무소에 그대로 남아 있어 그날의 아픔을 전하고 있다. 이밖에도 서울진공작전을 이끌었던 13도연합의병 총대장 이인영 또한 이곳에서 순국했으며, 안창호는 서대문형무소에서 잔혹한 고문을 당해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몸이 상한 채 출옥하여 머지않아 숨을 거두었다. 약 3천 명 정도 수용이 가능한 서대문형무소는 광복 이후에도 서울교도소, 서울구치소 등의 이름으로 기능해왔다. 1950년대 대표적인 정치인 조봉암이 이곳에 수감되는 등 오랜 독재정권 기간 동안 수많은 민주인사들이 투옥 당하고 고문 받았던 곳이기도 하다.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하던 시설이 민주인사들을 억압하는 상징물로 존속되었던 것이다.무너져가는 나라를 어떻게든 세워보려고 깊이 고민했던 장소, 망국의 현실에서 독립을 위해 피땀 흘린 장소가 있는가 하면, 치욕을 감내하며 고통을 견뎌야 했던 분노 어린 장소 또한 있다. 물론 이런 곳은 대부분 광복 이후 해체되긴 했지만 일제의 간악한 만행이 노골적으로 드러났던 곳인 만큼 그 의의가 있다. alt서대문형무소alt서대문형무소 내부                         을씨년스러운 흔적만 남은 조선총독부일제가 남기고 간 시설 중에 가장 오랜 기간 존속했던 시설로 ‘조선총독부’ 청사를 꼽을 수 있다. 대규모 건축 시설이 부족하던 상황에서 서울 중심지에 지어진 조선총독부는 이후 중앙청, 국립중앙박물관 등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다가 김영삼 정부가 들어서자 1995년 역사바로세우기 작업을 통해 완전히 철거되었다.조선총독부는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일본’의 일(日)자 모양으로 지어졌다. 무엇보다 조선의 법궁이자 흥선대원군에 의해 중건된 경복궁의 일부를 철거한 후 바로 앞에 비스듬하게 지어졌다는 점이 의미심장하다. 일제는 조선총독부를 지으면서 광화문을 옮겼고, 1937년 경복궁 북쪽에 총독 관저를 신설했다. 지형상 두 건축물은 모두 서울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고, 경복궁을 가로막거나 내려 보고 있는 구조로 이루어져 있었다. 현재 독립기념관에는 조선총독부의 철거 부재로 조성한 공원이 있다. 역사교육의 자료로서 부재를 활용하나, 홀대하는 방식으로 전시되어 일제 잔재의 청산과 극복이라는 의미를 부여했다.         alt철거 전 조선총독부alt조선총독부 철거부재 전시공원                         독립운동가들이 거쳐간 곳 임청각경북 안동에 위치한 임청각은 조선 중기에 만들어진 고택이자 고성이씨 종택으로 유명한 곳이다. 때문에 독립운동사와는 거리가 있어 보이지만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이상룡의 생가이자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곳으로서 밀접한 관련이 있다.이상룡은 유학자로서 의병항쟁을 통해 역사의 전면에 나섰던 인물이다. 시작은 조선왕조의 부흥을 목표로 하였으나, 이후 애국계몽운동을 이끌고 해외독립운동기지 건설에 앞장섰다. 계몽운동과 무장투쟁을 병행하는 등 한민족 대동단결을 위해 만주 등지에서 풍찬노숙도 마다하지 않았고, 명망성과 실천성으로 마침내 대한민국임시정부 초대 국무령 자리에 이르게 되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민주공화정’을 추구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상룡이 정신적으로 얼마나 환골탈태의 과정을 거쳤는지를 가늠해볼 수 있다.         alt 임청각            이외에도 우리 민족이 머문 장소에 많은 시설물이 세워졌고, 그것들은 역사적 사건을 거쳐 특별한 의미를 부여받았다. 때문에 독립운동사는 한반도의 수많은 지역과 시설을 가치 있게 만들었다. 독립운동사가 새로운 문화를 만든 것이다.                심용환성균관대학교 사범대학에서 역사교육학을 전공했다. 현재 팟캐스트 <진짜 역사 가짜 역사>를 통해 재미있고 올바른 역사 이야기를 전파하고 있으며, CBS와 공동으로 <심용환의 근현대사 똑바로 보기>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저서로는 『헌법의 상상력』, 『심용환의 역사토크』, 『단박에 한국사』 등이 있다. ]]> Fri, 02 Jun 2017 15:14:13 +0000 6 <![CDATA[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 글 이성주 역사칼럼니스트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함석헌을 설명하는 수식어는 많다. 언론인, 민중운동가, 문필가, 사상가 등…. 그중에서도 꼽을만한 표현이 있다면, 단연 ‘겨레의 사상가’가 아닐까 싶다.“모든 것의 밑이 뜻이요 모든 것의 끝이 뜻이다. 뜻 품으면 사람, 뜻 없으면 사람 아니. 뜻 깨달으면 얼, 못 깨달으면 흙….”1958년 함석헌이 잡지 『사상계(思想界)』에 기고한 글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의 한 구절이다. 아직 6·25 한국전쟁의 상흔이 채 아물지 않은 시기, 전쟁이란 고통이 육체뿐만 아니라 마음에도 깊게 생채기를 낸 그 시절에 함석헌은 전쟁을 이끈 이들은 물론 전쟁에 관여한 모든 사람들을 비판했다. 민족의 혼을 지키기 위해 싸운 사상가▲1901년 평안북도 용천(龍川) 출생 ▲기독교계 덕일소학교와 양시 공립보통학교 졸업 후 관립 평양 고등보통학교 입학 ▲3·1운동 참가 ▲민족교육의 요람인 오산학교로 편입 ▲동경고등사범학교 입학 ▲1927년 무교회주의적 기독교 동인지 『성서조선(聖書朝鮮)』 창간에 참여 ▲1940년 계우회 사건으로 구속 ▲1942년 성서조선 사건으로 재구속 ▲1958년 『사상계』에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기고. 구속 이후 권위주의 정부를 향해 날선 비판을 이어감 ▲1970년 잡지 『씨알의 소리』 발간 ▲1989년 2월 4일 별세함석헌을 말할 때 빠지지 않고 거론되는 『성서조선(聖書朝鮮)』은 기존의 교회 제도에 반대하는 무교회주의를 표방하는 이들이 한데 모여 만든 기독교 동인지다. 함석헌은 여기에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 역사’를 기고하여 식민사관으로 왜곡된 조선의 역사를 신랄하게 논파하고, 진짜 역사를 가르치려 애썼다. 이러한 행보는 중일전쟁 이후 심화된 일본의 민족주의 말살정책 앞에서 더욱 빛을 발했다.조선어와 조선 역사를 가르칠 수 없게 되자, 함석헌은 미련 없이 오산학교 교사 자리를 사임했다. 그리고 평양 근교의 송산농사학원(松山農士學院)을 인수하여 이곳에서 국어와 역사를 가르쳤다. 이런 그를 일제가 가만히 놔뒀을 리 만무했다. 함석헌은 일제강점기에 무려 4번이나 투옥되었는데, 당시의 엄혹했던 시절을 이렇게 정의했다. “나의 유일한 범죄는 내가 한국인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한국인이었기에 조선의 말과 역사를 지키려 했고, 조선의 사상을 끝까지 파고들어 우리 민족의 얼을 찾으려 애썼다. 그러나 그 결과는 여러 차례 이어진 옥고였다.생각하는 국민이 역사를 바로 세운다광복 이후 찾아온 권위주의 정부 시절을 보낸 함석헌은 칼날 위를 걷는 삶을 보냈다고 할 수 있다.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위해 사회에 목소리 내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그가 주장하는 ‘옳음’이 상식과 세상의 진리에 부합했음은 물론이다. 그는 어떤 권위보다 민주주의를 사랑했고, 투철한 신념으로 이 땅의 민중을 위해 움직인 실천적 사상가다.우리의 역사적 숙제는 이 한 점에 맺힌다. 깊은 종교를 낳자는 것. 생각하는 민족이 되자는 것. 철학하는 백성이 되자는 것.‘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의 한 대목이다. 여기서 우리는 함석헌이 우리 민족, 우리 국가, 우리 삶을 대하는 자세를 주목해야 한다. 그는 우리나라의 역사적 숙제를 세 마디로 정리했는데, 바로 통일정신, 독립정신 그리고 신앙정신이다. 그리고 그 해결책을 하나로 정리했다. 바로 철학하는 백성, 생각하는 민족이 되자는 것이다.철학의 핵심은 ‘회의(懷疑)’다. 철학의 시작을 알린 소크라테스는 끊임없이 ‘왜’라고 물음으로써 스스로 깨우치게 했다. 의심이 곧 철학이다. 함석헌은 우리 국민이 늘 의심하고 생각함으로써 계몽해야 역사를 바로 세울 수 있다고 말한 것이다.프랑스의 소설가 볼 부르제는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고 말한 바 있다. 스스로를 돌아보자. 생각하고 있는가. 그리고 생각하는 대로 살고 있는가. 사는 게 팍팍하다는 변명으로 타성에 젖어 살고 있지는 않은지. 미디어와 인터넷이 제공하는 편리한 정보에 길들어가고, 의심할 줄 모른 채 그저 누군가 이끄는 대로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경술국치는 끝났지만 오늘날 그 치욕에서 완전히 해방되지 못한 것은 우리가 스스로 생각하는 걸 포기했기 때문일지 모른다. 의심과 생각 없이 흘려보낸 시간들은 오늘에 이르러, 나라를 잃고 국민의 주권을 잃었던 지난날의 모멸을 다시금 느끼게 하고 있다. 이대로라면 망국의 위기가 다시 그림자를 드리울지도 모를 일이다.끝없이 의심하고, 늘 생각하자. 스스로 판단하고 깨우치자. 그래야 우리 역사의 주인이 흔들리지 않는다.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는 함석헌의 말은 60년 전 그날도, 그리고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이성주시나리오 작가 겸 역사칼럼니스트. 대중과 함께 호흡하는 글쓰기를 목표로 『조선의 민낯』, 『왕들의 부부싸움』과 같은 역사서를 출간한 바 있다. 최근에는 국제정치와 관련된 연구 및 집필에 열중하고 있다. 『전쟁으로 보는 국제정치』 시리즈 1, 2, 3권을 출간 중이다. ]]> Thu, 01 Jun 2017 13:44:15 +0000 6 <![CDATA[평화의 무게를 생각하며 ]]> 평화의 무게를 생각하며거센 풍파와 소용돌이가 언제 있었냐는 듯태양은 눈부시고 세상엔 고요함만이 남았습니다.호국영령들은 말이 없고그때의 굳은 의지가 담긴 태극기만 나부끼는데다만 우리는 인고의 세월을 짐작하고두 손에 쥐어진 영광을 생각할 뿐입니다.기억하겠습니다.풍파에 맞서고 소용돌이를 견뎌마침내 오늘의 평화를 가져온 이들을 ]]> Thu, 01 Jun 2017 11:29:15 +0000 6 <![CDATA[한중호조사, 항일을 합작하다 ]]> 글 김주용 독립기념관 선임연구위원한중호조사, 항일을 합작하다다음으로 창사(長沙) 한중호조사(韓中互助社)로 발길을 돌렸다. 창사시 중산로에 위치한 한중호조사 터는 예전 후난(湖南) 자수대학 교실로 사용된 선산학사라고 한다. 이에 대해서는 좀더 자료의 고증이 필요하다. 창사 한중호조사의 역사<독립신문> 1921년 3월 26일자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외교부로부터 한국 독립운동의 선전 임무를 담당하고 있던 황영희가 창사시 관민들과 함께 *한중호조사를 만들었다는 사실이 크게 보도되었다. 뿐만 아니라 <신한민보> 1921년 5월 19일자 기사에도 창사시에 한중호조사가 조직되었다는 소식이 크게 실렸다.창사 한중호조사는 호조사 중에서도 마오쩌둥(毛澤東)이 참여해 발족한 곳으로 한중호조사 중 가장 일찍 설립되어 다른 호조사의 모범이 되었다. 1921년 3월 17일(실제로는 3월 14일)에 설립되었으며, 설립대회에서 명칭·취지·입사조건·조직구도·경비 출처 등의 내용을 포함한 ‘호조사 약칙’을 통과시켰다. ‘한중 양국 국민 간의 감정을 깊이 하고 양국 국민의 사업을 발전’한다는 취지 아래 ‘한중 양국 국민으로서 남녀·종교를 막론하고 본사의 취지에 동의하며, 2명 이상의 회원들의 소개가 있으면 바로 가입할 수 있다’고 규정하였다. 창사 한중호조사의 활동은 양국 국민의 상호이해를 증진시키고 서로 단결하여 제국주의, 특히 일본제국주의에 대해 투쟁하는 업무를 전개하는 데 있어 일정한 사회적 토대와 사상적 토대를 닦았다.그러나 한중호조사는 계획대로 목표를 달성하지는 못했다. 그 원인은 한국의 선전 목적이 반일독립운동에 있기 때문이었다. 즉, 당시 우리측 목적은 후난성(湖南省)에서 망국의 아픔을 강연하고 반일주의를 선전하며 반일 선전내용을 게재한 신문이나 잡지를 배포하는 것이었다. 종합적으로 볼 때 한국 독립운동에 대한 중국인들의 지지와 지원을 얻어 일본에 함께 대항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당시 중국 측 인사들은 사상운동에 더욱 비중을 두고 있었다. 이들은 새로운 사상의 전파를 통해 민중을 일으키는 것을 중시하였다. 한국 독립운동의 정신을 배우는 동시에 한국 지사들의 항일투쟁에 동정과 지지를 표했던 것이다. 이렇듯 양국 지도자들의 행동과 사상에는 일정한 차이가 있었으나, 교류를 지속하고 우호관계를 유지하면서 양국의 입장은 점차 적극적인 항일로 일치하게 되었다. 이로써 중국 국민정부에서 한국 독립운동을 인적·물적으로 지원하는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뿌연 창사 날씨를 등에 업고 우리 일행은 선산학사를 방문했다. 후난자수대학 옛터, 장사시문물고고연구소 정문을 지나 선산학사로 향했다. 내부에는 창사 한중호조사의 옛터라는 사실을 알리는 동판이나 표지석을 전혀 찾아볼 수 없어 이곳이 학교 건물의 일부였다는 것 외에 한중호조사와 관련해서 달리 알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다음 목적지인 지도에서 서원북리를 찾았다. * 한중호조사: 1921년 중국(중화민국) 각지에서 한국 독립운동가들과 중국 민간인들 간에 한중전선·한국독립지원·반제국주의 활동 등을 목적으로 결성된 민간단체 alt 창사 한중호조사 결성지         alt창사 한중호조사 결성지 내부alt선산학사 아직도 찾지 못한 창사 대한민국임시정부청사 터1937년 중일전쟁 이후 중국 국민정부의 수도인 난징(南京)은 더 이상 안전하지 않았다. 난징과 전장(鎮江)을 오가면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임시정부는 후난성(湖南省) 창사로 그 청사를 옮기게 되었다. 김구는 『백범일지』에서 임시정부가 창사로 옮기게 된 이유와 당시 생활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100여 명의 남녀노유와 청년을 이끌고 사람과 땅이 생소한 후난성 창사에 간 이유는, 단지 다수 식구를 가진 처지에 이곳이 곡식 값이 극히 싼 곳인데다, 장래 홍콩을 통하여 해외와 통신을 계속할 계획 때문이었다. 창사에 선발대를 보내놓고 안심하지 못하였으나 뒤미처 창사에 도착하자 천우신조로 이전부터 친한 장즈중(張治中) 장군이 후난성 주석으로 취임하여, 만사가 순탄하였고 신변도 잘 보호받았다. 우리의 선전 등 공작도 유력하게 진전되었고, 경제방면으로는 이미 난징에서부터 중국 중앙에서 주는 매월 다소의 보조와 그 외 미국 한인교포의 원조도 있었다. 또한 물가가 싼 탓으로 다수 식구의 생활이 고등난민의 자격을 보유케 되었다. 내가 본국을 떠나 상하이에 도착한 후 우리 사람을 만나 초면에 인사할 때 외에는 본성명을 내놓고 인사를 못하고 매번 변성명 생활을 계속하였으나, 창사에 도착한 후로는 기탄없이 김구로 행세하였다.창사에 임시정부가 체류한 기간은 대략 1937년 12월부터 다음해 7월까지로 보고 있다. 김구는 자신의 본명을 밝힐 정도로 대외적인 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해나갔다. 정정화의 『장강일기』에는 그의 가족이 창사에 합류한 시점을 1938년 2월로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임시정부 관계자들이 전장에서 창사로 한 번에 이동한 것이 아니라 선발대·본진·후발대로 나누어 이동했기 때문이다.우리는 임시정부청사가 자리 잡았던 창사시 카이푸취(開福區) 서원북리(西園北里)로 향했다. 난무팅(南木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서원북리에는 옛 모습을 간직한 집들이 간혹 보였다. 2002년 조사 당시 독립기념관 답사단이 임시정부청사로 추정한 서원북리 6호는 현재로서는 정확한 대한민국임시정부청사라고 할 수 없다. 문헌자료나 회고록 등에도 보이지 않고 현지 주민들도 이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다만 광복군 신순호 여사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건물은 여러 가족들이 거주할 만큼 규모가 컸으며 8호 2층을 임시정부청사로 사용했고, 16호는 청년공작대 사무실로 사용하였다. 하지만 현지 전문가들은 신순호 여사의 증언에 의문을 제기했고, 아직까지 이렇다 할 만한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기념판 또는 동판 부착은 엄두도 못 내고 있는 실정이다. alt서원북리(西園北里)alt서원북리 대한민국임시정부청사 옛터 추정지 alt서원북리 거리 전경alt정정화 가족사진alt정정화의 『장강일기』 임공재 학예사는 서원북리 전체를 촬영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입구에는 선명하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서원북리가 일행을 이끌었다. 골목으로 들어가 나이 많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임시정부청사의 위치를 탐문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예전에 한국인이 있었다는 것만 알고 있다”는 말이었다. 이곳 골목 입구에 동판을 부착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만 개진한 채, 우리 일행은 발길을 돌려 후베이성(湖北省) 우한(武漢)으로 향했다.다음호에 계속 ]]> Thu, 01 Jun 2017 16:53:27 +0000 6 <![CDATA[날개 잃은 교권 vs 학생 인권 침해, 해법은? ]]> 글 이현수 일상심리 전문작가, 자유기고가날개 잃은 교권 vs 학생 인권 침해, 해법은?고등학교 선생님인 A씨(34)는 출근이 두렵다. 존경하는 선생님과 즐겁게 보낸 학창시절 추억으로 교편을 잡았으나 최근의 학교는 기대와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거친 언동과 살벌한 눈빛, 모멸감을 주는 행동을 서슴지 않는 학생들을 마주해야 하는 매일이 곤욕스럽다. 학생이 교사를 때렸다는 뉴스의 주인공이 내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등골이 서늘하다.사랑과 배움으로 가득해야 할 교실이 폭력으로 얼룩지고 있다. 교사의 지나친 학생 체벌은 물론, 학생의 교권 침해도 끊임없이 발생하고 있다. 폭력으로 물든 학교, 선생도 학생도 불행해2015년, 경기도 이천의 한 고등학교에서 찍힌 한 동영상이 인터넷에 떠돌며 큰 파장을 일으켰다. 영상 속에는 학생들이 빗자루로 교사를 십여 차례 때리면서 욕하고 침을 뱉는 장면이 담겨있었다. 교권 침해는 날로 심각해지는 추세다. 2016년 1월, 교육부는 지난 5년간 교권 침해 사례가 무려 2만6천여 건에 달한다고 발표했다. 이는 매년 학교 3곳 중 1곳에서 교권 침해 사건이 발생했다는 뜻이다. 여기에는 기간제 교사가 당한 침해 사실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비정규직이라는 지위 때문에 신고가 어려운 탓이다.1) 비정규직 교사의 피해까지 포함하면, 학교 안에서 벌어지는 교권 침해가 매우 심각한 상태임을 알 수 있다.학생 인권 역시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학생 22명을 죽도로 폭행한 교사가 전파를 탔다. 신체적 체벌과 함께 “너희는 쓰레기 같은 놈들이다” 등 폭언41을 일삼는 모습은 경악할 만했다. 전국에서 처음으로 학생인권조례가 제정된 경기도에서도 초·중·고 학생의 15%가 일 년에 1~2회 이상 직·간접 체벌을 받았다고 응답했다.2) 특히 이를 관리 감독해야 하는 교육청이 업무 진행을 미루거나 발생 현황을 파악하지 않는 경우도 많아,3) 학생 인권 침해도 교권 침해와 마찬가지로 인지조차 하지 못한 사례가 많을 것으로 짐작된다.교권과 학생 인권은 일견 반비례나 제로섬 관계처럼 보이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교권은 다음 세대를 길러내기 위해 국가로부터 위임받은 권리로, 인권 보장에 기반한 헌법의 정신을 계승한다. 때문에 교권은 학생에게 신체적 체벌이나 모독을 가할 권리를 포함하지 않는다. 학생 인권 역시 마찬가지이다. 학생의 인권 보장이 교사에게 폭력을 허락한다는 뜻은 아니다. 두 권리와 가장 극명한 대척점에 있는 것은 ‘폭력’이다. 학생 인권, 체벌 당연시 여기는 인식 전환해야흔히 체벌에 대해 “사랑의 매”, “맞으면서 크는 거지”라고들 말한다. 이는 우리나라의 낮은 인권 감수성을 반영하는 말이다. 폭력이 청소년에게 끼치는 악영향은 생각 이상이다. 미국 하버드대와 일본 구마모토대가 발표한 ‘체벌이 뇌에 직접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관한 연구’를 참조해 보자. 4~15세 사이에 손바닥으로 치거나 회초리로 엉덩이를 때리는 체벌을 한 달에 한 번꼴로 3년 이상 받은 남녀를 조사했는데, 체벌을 받은 이들의 뇌용적은 그렇지 않은 이들에 비해 뇌용적이 80%에 불과했다. 의욕이나 집중력, 주의력을 관장하는 전두엽 부분도 무려 19%나 작았다.4) 또 한편으로 스웨덴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폭력은 두뇌는 물론 신체 건강까지 악화시키는 것으로 드러났다.5)이처럼 신체적 체벌은 학생의 정신적·신체적 건강을 악화시키는 치명적인 계기가 될 수 있다. 올바른 지도는 체벌이 아닌 대화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상담과 격려 혹은 제재가 필요할 경우 벌점제 등으로 지도하는 것이 좋다.교사 인권, 법령 재정비 및 엄격한 적용 필요독일이나 서유럽·영국·미국 역시 중증의 교권 침해에 직면하고 있다. 매년 수십 명의 교사가 학생에게 총으로 저격당해 다치거나 목숨을 잃는다. 이를 근절하기 위해 미국에서는 1980년대 이후 무관용 정책(Zero tolerance policy)을 시행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의 가장 큰 계기는 1999년 학생 2명의 무차별 총기난사로 동료학생과 교사 13명이 숨진 컬럼바인고교 총격사건 때문이다. 이후 미국에서는 교실 안전을 위협하는 행위를 적극 처벌한다. 물론 폭력 및 중범죄와 관련 없는 단순 실수에는 관용이 필요하다는 자성의 목소리도 있어 방법상의 개선이 필요하지만, 이 덕분에 학교 내 안전 확보가 가능해졌고, 폭력 비율도 현저히 감소했다. 교권 침해를 줄이기 위해서는 근거 법안 마련과 이를 엄격하게 실행하는 단호한 태도가 필요하다. 2016년 2월 서울행정법원은 강제 전학당한 중학생이 낸 불복 소송에서 원고 승소 판결했는데, 교권 침해를 이유로 학생을 강제 전학시키는 규정은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기존 교권보호법은 근거 규정이 부족해 사실상 교권 침해 방지에 도움이 되고 있지 않은 상태다. 다행히 정부는 현행 교권보호법의 실효성이 미비함을 인지하고 법안 개선을 추진 중이다. 교권을 침해한 학생을 강제 전학시키고, 해당 학생 부모가 특별교육을 거부할 경우 과태료를 부과하는 것이 개정 법안의 골자다. 법안이 마련되면 이를 원칙대로 적용하여, 폭행과 협박을 당한 교원의 사기 저하와 학생들의 학습권 침해를 방지해야 한다.우리나라에는 스승을 국부나 부모님으로 간주할 정도로 제자가 스승을 존경하고 스승과 제자가 함께 도우며 성장했던 아름다운 문화가 있었다. 세한도에 얽힌 추사 김정희와 제자 이상적의 미담이나, 거문고 악사 김성기와 왕세기 간의 신분을 뛰어넘은 교감은 후손인 우리의 현재를 부끄럽게 한다. 선생과 학생이 행복한 학교, 참된 스승과 제자가 되는 데는 어느 한 쪽이 아닌 모두의 노력이 필요하다. * 각주1) 일반 교사가 교권 침해를 당했을 경우, 학교운영위원회를 통해 학생을 징계할 수 있지만, 기간제 교사의 경우 문제가 발생하면 그대로 채용이 중단되는 경향이 있다. 이 때문에 신고는 물론 통계를 내기도 쉽지 않다.(기간제 교사 차별을 방관하는 학교, 2017.03.16., 시사인)2) 인천일보,2017년 1월 31일, 등잔 및 어두운 ‘학생인권조례’3) 성균관에는 ‘스캔들’ 대신 ‘체벌’있었다: 과학으로 파헤쳐 본 체벌의 효과(사이언스 타임즈, 이성규, 2010.10.29.)4)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 사이에 사회적으로 고립되거나 폭력에 노출되는 경우, 심혈관계 조절 및 체지방 축적, 지질대사, 포도당 대사, 염증, 내분비대사 등의 신체건강 지표들이 악화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Hard times during adolescence point to health problem later in life, 2011.10.27., Gustafsson)5) 현재 미국에서는 처벌로 인한 낙인 효과와 이에 따른 부작용을 완화하기 위해 폭력의 정도에 따라 처벌을 달리하는 등급징계제도와 조기반응모형을 고려하고 있다. ]]> Thu, 01 Jun 2017 15:04:39 +0000 6 <![CDATA[들어가며 교육과 훈련이야말로 성장의 밑거름이다]]> 교육과 훈련이야말로 성장의 밑거름이다경술국치 전후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보다 체계적이고 강력한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서간도 및 북간도와 연해주지역으로 이주하였습니다. 이주 후에는 가장 먼저 교육기관을 설립하는 데 주력하였습니다. 교육이 새로운 인재를 창출할 수 있다는 인식의 발현이었습니다. 설립된 기관은 서간도지역의 신흥무관학교, 북간도지역의 서전서숙·창동학교·명동학교·정동학교,연해주지역의 계동학교·한민학교가 대표적입니다.그렇게 세워진 민족학교는 1910년대 군관학교의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해내고,1920년대 무장독립투쟁의 현장을 누볐던 인재들을 길러냈습니다.]]> Wed, 27 Oct 2021 11:17:24 +0000 60 <![CDATA[톺아보기 1910년대 만주지역 독립운동과 신흥무관학교]]> 글 김주용(원광대 한중관계연구원 교수) 일반 사람들에게 독립군이란 고난과 열정의 화신으로 인식되어 왔다. 독립운동은 조국을 위해 나를 버리는 길이다. 그만큼 독립군에게는 고된 삶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도 독립군은 중단 없이 맥을 이었고, 그 전통은 광복 때까지 지속되었다. 만주에 민족학교를 세우다독립운동가들이 독립운동을 이어가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조직과 비용이었다. 자금과 인적 자원은 독립군 조직을 지탱하는 두 축이자 키워드와 같았다. 특히 만주지역의 독립운동 단체가 추동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인적 자원을 확보하고, 이와 병행해서 군자금을 모집해야 했다.     만주지역의 독립군 단체는 냉정히 말하면 비정규군이라고 할 수 있다. 비정규군의 인적 자원은 정규군에 비해 열악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인력 수급도 부정기적이기 때문에 언제나 대안이 필요했다. 하지만 이 또한 용이하지 않았다. 이러한 점에서 독립운동가들이 세운 민족학교는 1920년대 무장독립투쟁의 현장을 누볐던 인재들을 1910년대 착실하게 키워냈던 군관학교의 역할을 가장 훌륭하게 수행했다고 할 수 있다.  alt옥수수 창고에서 시작한 신흥강습소 옛 터(좌) / 합니하 신흥무관학교 터(우)신흥무관학교 문을 열다1911년 6월 유하현 삼원포 추가가에서 토착민들의 옥수수 창고를 빌려 시작된 ‘신흥강습소’는, 신민회의 ‘신’ 자와 다시 일어나는 구국투쟁이라는 의미의 ‘흥’ 자를 합한 것으로 나라를 새로 일어나게 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초기 신흥강습소 학생은 40여 명이었다. 추가가 신흥무관학교 교장은 이철영과 이동녕이었으며, 본과 또는 원반과 군사학을 전수하는 특별반으로 나누어졌다. 신흥무관학교는 이회영 등 6형제와 안동의 이상룡, 김동삼 등을 비롯한 명망가들에 의해 설립되었다. 이들은 사회 지도층으로서 모든 기득권과 영예를 포기하고 전 재산을 바쳐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였다. 이 사실은 한국인의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전형으로 사람들에게 회자되고 있다.      신흥강습소는 만주지역 독립운동의 전초기지가 되었다. 이와 더불어 신흥강습소는 날로 늘어나는 학생을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보다 넓은 공간이 필요했다. 그래서 마련된 곳이 바로 합니하였다. 1912년 7월, 천연의 요새인 합니하에서 낙성식을 거행한 신흥무관학교는 군사훈련과 중등교육 과정을 가르칠 수 있는 시설을 갖춘 학교였다. 신흥무관학교 설립 비용은 고종 때 영의정이었던 이유원의 양자인 이석영이 부담하였다. 신흥무관학교는 요새지로써 군사훈련에 더없이 적합한 곳이었다. 학교 소재지는 광화에서 남쪽으로 3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큰 병영사가 세워졌고 각 학년별로 널찍한 강당과 교무실이 있었으며, 생활관 내부에는 사무실·숙직실·편집실·식당 등이 갖추어졌고, 낭하에는 총가가 설치되었다. 교사로는 여준, 김창환 등이 활동하였다. 당시 생도는 100여 명이었으며, 졸업생도 한기에 수십 명씩 배출하였다. 신흥무관학교 중등 과정은 3년이 기한이었고, 군사과는 1년 과정이었다. 신흥무관학교는 군사교육 훈련에서 기존 사관학교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었다. 주로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 출신들이 교관을 담당하였으며, 기본 교육 과정은 대한제국기와 비슷했다.      여기서 잠시 대한제국기 육군무관학교의 교과목과 군사 훈련 상황을 1기생 황학수의 눈을 통해 살펴보자. 술과로는 각개 훈련과 기초훈련, 체육을 중시하였다. 신흥무관학교에서는 군사시설과 무장을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훈련을 받을 수밖에 없어 도수훈련과 체력단련, 야간 강행군 등 훈련에 집중했다. 신흥무관학교 출신인 원병상의 일기에 나타난 고된 일과를 보면 신흥무관학교 학생들의 조국애가 얼마나 강렬한지 다시 한번 느낄 수 있다. 이들의 당시 식사는 중국인들이 창고에서 수년간 보관하고 있던 좁쌀로 만든 밥이었다. 꺼칠한 좁쌀밥과 반찬이라고는 콩장밖에 없었던 것을 보면 신흥무관학교 학생들의 식생활을 가늠해볼 수 있다.새벽 6시에 기상나팔 소리 또-또-따. 잠든 생도들의 귓전을 울리면서 각 내무반의 생도들은 일제히 일어나 신변 환경을 정리하고 3분 이내에 복장을 단정히 하고, 각반 치고 검사장에 뛰어나가 인원 검사를 받은 다음 보건 체조를 한다. 눈바람이 살을 도리는 듯한 혹한에 아침마다 윤기섭 교감이 초모자를 쓰고 홑옷 입고 나와서 점검하고 체조를 시키면서도, 그 활기찬 목소리에 그 늠름한 기상과 뜨거운 정성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이 체조가 끝나고 청소와 세면을 마치면 각 내무반 별로 취식 나팔 소리에 따라 식탁에 나가 둘러앉는다.원병상의 일기 중에서 alt(좌측부터) 이회영 이상룡 김동삼 근대적 군사지식 보급과 신흥교우보를 발행하다신흥무관학교에서는 더 강하게 조직하고 단련하기 위한 외곽단체 ‘신흥학우단’을 창단하였다. 본래는 1913년 5월 6일에 합니하 신흥무관학교에서 신흥교우단(학우단)으로 출발하였다. 신흥교우단은 조직 후 기관지 『신흥교우보』를 발행했다. 기관지 발행은 독립운동 단체들이 한국인들에게 독립운동이 지속적으로 전개되고 있음을 널리 홍보하는 데 필수적 요소였다. 이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독립신문』을 발행하였던 사실, 권업회에서 『권업신문』을 발행한 사실 등에서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그동안 『신흥교우보』는 신흥무관학교 출신 학생들로 조직된 신흥교우단에서 발행했다고 알려졌을 뿐 그 실체를 확인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2010년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에서는 미주지역 자료 기증을 펼칠 때 지금까지 실체가 확인되지 않고 있던 신흥교우보를 미국 교포로부터 기증받았다. 『신흥교우보』 제2호가 세상에 나오면서 몇 가지 추측으로만 여겨졌던 새로운 사실들을 확인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신흥교우단의 규칙 기초위원에는 이규준과 강일수가 피선되어, 규칙의 초안을 만들고 강령을 정했다. 각종 간행물을 통해 혁명 이념의 선전과 독립사상을 고취한다는 취지 아래 기관지를 발행하기로 결정했다. 그것이 바로 『신흥교우보』의 발행으로 이어졌다. 5월 10일 제1회 임시총회에서 해마다 2회 기관지를 발행하기로 결정한 규정은, 5월 25일 개최된 제2회 임시총회에서 연 4회 발행하기로 개정되었다.     한편 신흥교우단은 새로운 조직 체계를 운영하기 위해 1913년 8월 14일 제1회 정기총회를 개최하였다. 이어 운동부·조사부·토론부·재정부를 두었으며, 운동부원 2명을 선정하고 편집부원 2명을 가선한 뒤 편집부 회계 1인과 교정원 2인을 선정하였다. 그리고 토요일마다 교우단의 발전을 위해 토론회가 열렸으며, 학술 이론과 투쟁의식에 대한 웅변도 할 수 있었다. 또 선열의 시범과 단시 및 단가 등을 낭독하고 애창하였다. 이들이 뜨겁게 외쳤던 선열의 시범과 단시 및 단가는 합니하의 골짜기에 우렁차게 메아리쳤다.     이처럼 신흥교우단은 만주지역에서 한인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자위체로서 기능을 담당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아동들에게 초등교육을, 청년들에게는 군사교육과 민족교육을 실시하였다. 그 힘의 원천은 바로 『신흥교우보』를 통한 선전활동에 있었다. 서간도지역 한인독립운동의 구심점이자 생활 터전인 삼원포에서 출발한 신흥무관학교의 졸업생들로 조직된 신흥교우단. 이들은 혁명 이념의 선전과 학술 연구와 정신 연마를 고취시키고 일선 투사들의 투지를 앙양하기 위하여 단보 발행에 노력하였다. 자신을 희생하면서 조국의 독립을 찾기 위해 신흥무관학교에서 활동했던 이들의 활동을 11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기억하는 것이야말로 역사에 대한 책무이자 예의일 것이다. alt백서농장(좌) / 신흥무관학교 교사 및 학생들의 영농 장면(1915)(우)신흥교우단의 강령다물의 원동력인 모교의 정신을 후인에게 전수하자.겨레의 활력소인 모교의 전통을 올바르게 자손만대에 살린다.선열 단우의 최후 유촉을 정중히 받들어 힘써 실행한다. 신흥교우단 선열의 시범나는 국토를 찾고자 이몸을 바쳤노라.나는 겨레를 살리려 생명을 바쳤노라.나는 조국을 광복하고자 세사를 잊었노라.나는 뒤의 일을 겨레에게 맡기노라.너는 나를 따라 국가와 겨레를 지켜라. alt『신흥교우보』]]> Wed, 27 Oct 2021 11:18:22 +0000 60 <![CDATA[만나보기 신흥무관학교를 세우고 지킨 사람들]]> 글 김주용(원광대 한중관계연구원 교수)alt대한제국 군대(좌) / 일본군에 의해 무장해제를 당하고 있는 대한제국군(우)대한제국 군인들, 신흥무관학교 교관이 되다독립운동은 어느 특정 개인의 추동력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수많은 개개인이 모여 각자의 신념을 펼친 곳이 독립운동의 공간이기도 하다. 다양한 인물들 속에서 대한제국기 군인들이 독립운동계에 투신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이들 가운데는 일본 육사를 거쳐 자신의 영달을 포기하고 독립운동에 열정을 불태운 이도 있다. 노백린, 이갑, 유동렬, 지청천 등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 출신들 가운데 독립운동의 가시밭길을 걸은 이들도 상당수 있다. 신규식, 황학수, 김혁, 김창환, 신팔균, 이장녕, 이관직 등이 대표적이다.     오늘날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와 같은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는 근대식 군사학교였다. 생도(학생)들은 초급 교관이 될 수 있도록 교육을 받았으며, 교과목은 전술학, 군제학, 병기학, 축성학, 지형학, 위생학, 마학, 외국어학 등이었다. 그 밖에 교관의 덕목과 자질을 함양시키는 체력단련 등에 집중하였다. 새로운 시도를 통해 군사적 강화를 목적으로 탄생된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는 교과목에서 알 수 있듯이 조선시대의 그것과는 다른 근대적인 ‘세례’를 받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의 인생이 결코 순탄치만은 않았다. 러일전쟁 후 한반도에서 독점적 특권을 확보한 일제는 을사늑약을 통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고문정치를 통해 전방위로 대한제국을 압박하였다. 그 결정판이 1907년 7월 이루어진 ‘정미조약’이었다. 육군무관학교 출신들에게 군대 해산이란 또 다른 선택의 길에 내몰리게 하는 것이었다. 민족적 자각을 일깨우는 계기가 되었다. 군대 해산은 육군무관학교 출신들이 새로운 결정을 할 수밖에 없는 선택의 길이었다. 이장녕과 같이 낙향하면서 만주로 망명한 경우도 있으며, 1909년까지 군대에 남아 있었던 신팔균도 있었다. 이들의 공통점은 민족교육기관을 거쳐 독립군의 지도자로 성장하였다는 데 있다.이장녕, 신흥무관학교 교관이 되다이장녕은 1881년 5월 20일 충남 목천면에서 부 이병삼과 고령 안동 권씨 사이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 3기생으로 입학해 졸업한 후, 1903년 3월 25일 육군 참위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다음 해 친위대 제1대대 견습으로 본격적인 군인의 길을 걷게 되었지만, 1907년 군대 해산으로 군복을 벗고 낙향하였다.      이후 그의 8촌 형 석오 이동녕과 협의해 신민회의 해외 독립운동 기지 건설이라는 큰 명제 하에서 집안의 이주를 주도하였다. 1907년 11월 20일 고향 천안 목천을 떠나 일가족이 만주로 이동해 유하현에 자리를 잡았다. 김대락의 『백하일기』에는 이장녕의 부친 이병삼이 김대락 일가를 물심양면으로 도운 장면이 여러 차례 등장한다. 『백하일기』 1911년 2월 13일자를 보면 다음과 같다.사온 소 한 마리가 일꾼도 없고 짚과 겨도 없어서 전혀 기를 대책이 없는지라, 부득이 염치를 무릅쓰고 이병삼의 집으로 보냈다. 이형이 전에 집 아이에게 나를 위해 대신 길러주겠다는 약속을 했기 때문이다. 이형이 이리저리 돌보았고 염려해줌이 지극하여 사람을 감동하게 한다.『백하일기』에 이병삼이 처음 등장한 시기는 1911년 2월 9일부터이다. 김대락은 이병삼을 많이 의지한 것 같다. 그가 찾아오면 반갑게 해후하였으며, 이병삼의 집에서 소를 잡아 나누어 준 일들이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장녕이 김대락의 아들 월송 김형식에게 보낸 편지를 이병삼이 전달하려고 김대락의 집을 방문하기도 했다. 이처럼 이병삼은 김대락과 대소사를 함께 의논했던 것 같다. 이장녕은 신흥무관학교의 교관 및 학도단장을 거쳐 교장 대리까지 역임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일제의 시베리아 출병 등으로 국제 정세가 긴박하게 변화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장녕은 조성환, 이동녕 등과 함께 만주지역 독립운동 세력의 단결을 도모하였다. alt신팔균(좌) / 이동녕(우)청산리대첩에 참여하다이장녕은 1919년 4월 한족회가 조직된 후 군정서를 설치하면서 부관으로 활동하였다. 이장녕이 군인 출신이었기 때문에, 그 직책도 군사와 연관되어 있었다. 그가 군정서의 간부 역할을 역임하면서 신흥무관학교의 교장 역할도 동시에 수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서일이 총재로 있었던 북로군정서에서 무관학교인 사관연성소를 세웠는데, 이때 필요한 인물을 서로군정서에 요청하였다. 그때 선발된 인물이 이장녕이었다. 이우석의 『수기』에 의하면 이장녕은 신흥무관학교 졸업생이었던 백종렬과 강화린을 대동하고 대한군정서를 향해 떠났다. 그 시기가 1920년 4월이다. 이우석의 『수기』에는 이장녕이 서간도에서 북간도로 파견된 경로가 표현되어 있다.신흥학교 졸업생 중 백종열, 강화린 두 청년은 북로군정서 사관연성소 교관으로 같이 가게 되었다. 나는 연성소에 들어가려고 같이 가는 길인데 군사학 책자 30여권을 짊어지고 간다. 일행 6명은 화전현을 거쳐 안도현 지경을 들어섰다. 송화강을 따라 산으로 산으로 들어간다. 그야말로 신비의 백두산을 오른다.대한군정서 사관연성소는 1920년 3월에 개교하여 그해 8월에 1기생 속성 과정이 완료되었다. 따라서 이장녕은 늦어도 제1기생 졸업 이전에 도착했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서로군정서와의 연결은 신흥무관학교 관계자들과 교유가 있었던 김좌진을 통해 이루어졌다. 대한군정서의 참모장을 맡았던 이장녕은 먼저 군사훈련과 무기 수급에 전력을 다했다. 군대를 무장하지 않은 채 일제와 겨룰 수 없다는 판단 아래. 이장녕은 무기 구입을 위해 연해주로 직접 갔다. 체코제 무기를 안전하게 구입하여 대한군정서 대원들을 무장시킨 이장녕은 왕청현 십리평에 세워진 사관연성소의 교관을 맡으면서 실전에 대비한 군사훈련을 실시하였다. 이처럼 대한군정서에는 참모장 이장녕, 학도단장 박영희, 종군장교 김훈 등 서로군정서 출신들이 충원되었다. 사관연성소에서는 군사학, 총검술 등을 교수하였으며, 축성교범 등의 교재도 인쇄하여 사용하였다.청산리전투에서 이장녕은 대한군정서 대원들의 제복을 직접 제작했는데,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 제복에 근거해서 만들었다고 한다. 또한 전투에서 이장녕은 서일과 함께 대민업무와 군수 및 정보 수집 업무를 담당했다. 따라서 이장녕은 청산리전투에서 민간과 군수를 맡아 최전방에서 싸우는 전투부대의 후방을 든든하게 맡았다. alt    (좌측 위부터 아래 순으로) 대한군정서 사관연성소 졸업식(1919. 9. 9) / 신민부에서 이장녕이 참의원으로 선임되었다는 기사, 『독립신문』(1925. 5. 5.) / 청산리대첩비그가 남긴 유산이장녕은 1880년대 초반에 출생해서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를 거쳐 육군 장교로 복무하다가 나라가 망해 가는 과정을 호국의 최첨병인 군대에서 목도하였다. 하지만 1911년 중국 유하현에 설립된 신흥무관학교 교관으로 군인의 길을 계속 걸었다. 1920년 청산리대첩에서 승리의 주역이 김좌진과 홍범도라면, 숨은 주역은 이장녕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서로군정서의 교관으로 있던 이장녕이 대한군정서에 파견되면서 두 단체의 긴밀한 관계가 더욱 돈독해졌으며, 이것이 청산리대첩의 승리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군인의 길을 계속 이어가던 이장녕은 1920년대에도 독립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하였다. 물론 독립운동 단체를 조직하는 데 필요한 인적 자원의 수급 차원에서 이장녕은 진정한 군인이면서 민족학교의 교장이었다. 그러다가 만주사변 다음 해인 1932년 1월, 중국 마적의 피습을 받고 순국하면서 독립운동 역시 멈추었다. 그의 두 아들 가운데 큰아들 이의복은 독립운동가였으며, 둘째 아들은 한국전쟁에 참전하였다. 대를 이어서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위해 헌신한 그의 가문은 진정한 애국 가문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다.]]> Wed, 27 Oct 2021 11:19:16 +0000 60 <![CDATA[이달의 독립운동가 을사늑약에 죽음으로 항거한 순국지사들]]> 글 독립기념관 전시부 alt alt『을사늑약 전문』(1905. 11. 17.)(좌) / 을사늑약 체결 기념사진(1905)(우)을사늑약 반대운동이 전국에서 일어나다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는 대한제국을 보호국화하려는 목적으로 1905년 11월 을사늑약을 강제하여 대한제국 외교권을 박탈하였다. 을사늑약은 고종황제의 날인 없이 국제법을 무시한 상태에서 강제 조인된 불법 조약이었다. 을사늑약 체결 소식이 전해지자 한국인들은 반대 상소를 올리거나 자결 순국하는 등 거세게 반대하였다. 특히 이때 거행된 자결 순국은 자신의 목숨으로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강렬히 규탄한 항일 의거였다.  alt 「병사 김봉학 순국」, 『대한매일신보』(1905. 12. 5.)_ 대한민국신문아카이브 제공(좌) / 홍만식 가족사진_한국 국학진흥원 제공(우)대한제국 고관 홍만식과 군인 김봉학, 자결로서 을사늑약에 적극 항거하다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각계각층의 인사들은 자결로서 적극 항거하였다. 대한제국 전직 고관 홍만식은 1884년 갑신정변 이후 20여 년간 세상을 등지고 살았다. 그러던 중 을사늑약 체결 소식을 전해 듣자 이를 통탄하며 1905년 11월 음독 순국하여 을사늑약 반대 의지를 알렸다.      대한제국군 진위대 소속 군인 김봉학은 1905년 초대 통감으로 이토 히로부미가 서울에 입경하자 그를 처단하여 군인의 의무를 다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처단 계획이 사전 누설로 실패하자 1905년 자결 순국하여 을사늑약 강제 체결에 적극 항거하였다. 두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정부는 1962년 홍만식·김봉학에게 독립장을 각각 추서하였다.  alt「이건석 유서」, 『황성신문』(1906. 5. 17.)_대한민국신문아카이브 제공(좌) / 고종황제가 이상철의 충의를 가상히 여겨 내린 조령 (1905. 12. 4.)(우)대한제국 관료 이상철과 이건석, 자신을 바처 일제에 맞서다대한제국 관료였던 이상철은 을사늑약 체결 이전부터 일제의 강압적인 국권 피탈을 규탄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 불법 체결 후 민영환 등이 울분을 참지 못하여 자결 순국했다는 소식을 듣자 그들의 뒤를 이어 음독 순국으로 을사늑약 반대 의사를 분명히 하였다.     이건석은 1905년 유생들과 함께 13도유약소를 결성하여 을사늑약 폐기와 매국노 처단 등을 요청하는 상소운동을 전개하던 중 일제 사령부에 의해 투옥되었다. 일제의 회유에도 옥중 투쟁을 이어나가다 1906년 순국하였다. 정부는 두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이상철에게 독립장, 1963년 이건석에게 독립장을 추서하였다.내가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하는 것은 매국역적들을 죽이지 못하고 우리 국권을 찾기 못했기 때문이다.이건석이 아들 이응수에게 전하는 유서 중에서(1905)alt]]> Wed, 27 Oct 2021 11:20:04 +0000 60 <![CDATA[아름다운 인연 의병전쟁, 독립군, 한국광복군 가족을 탄생시킨 오광선과 정현숙]]> 글 김형목(사단법인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이사) 아버지, 부부, 두 딸들, 그리고 맏사위까지 3대가 독립전쟁에 뛰어들었다. 이를 이끈 주인공은 용인시 해주 오씨 일가의 오광선과 정현숙(본명 정정산) 부부이다. 40여 년에 걸친 가족사는 세계사에서도 찾아보기 드문 독립투쟁사로서 자랑스러운 한국사의 한 페이지를 차지한다. 이들은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아닌 너무도 평범한 한국인이었다. alt오광선과 정현숙 부부조국 광복 염원은 오씨 일가의 일상사였다 오광선은 1896년 5월 14일 용인군 원삼면 죽능리 어현(일명 느리재)에서 아버지 오인수와 어머니 이남천 사이에서 4남매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해주로 초명은 성묵(性黙)이다. 아버지는 경기도와 강원도 일대를 무대로 사냥에서 뛰어난 솜씨를 발휘하였다. 을사늑약 이후 용인과 죽산 등지에서 의병부대 중군장으로 활약한 ‘구국간성’이었다. 전투 중 부상을 입어 몰래 고향으로 돌아왔다가 매국노 송병준 아들이 이끄는 자위단에 체포되었다. 이때 아버지 분신과 같은 애견(愛犬)의 처참한 죽음이 오광선에게 조국 독립에 투신하기로 결심하는 결정적인 계기였다.어려운 경제 사정에도 배움에 대한 열망은 강렬했다. 오광선은 여준(呂準)이 고향에 설립한 삼악학교에 입학하였다. 아버지가 옥살이하는 동안 그는 소학과 및 고등과를 차례로 졸업하였다. 아버지가 출옥하자 큰아버지는 서둘러 결혼시켰다. 신부는 산 넘어 사는 이동면 화산리 출신의 14세 정현숙(본명 정정산)이었다. 신흥무관학교과 청산리전투에서 존재감을 알리다독립운동에 투신할 뜻을 품은 오광선은 달콤한 신혼생활에 안주하지 않았다. 서울로 올라가 상동청년학원에 입학하였다. 이곳은 서간도 룽징에서 서전서숙을 설립한 뒤 오산학교에 재직한 여준이 학감을 지낸 대표적인 민족사학이었는데, 105인사건 이후 간악한 일제의 탄압으로 폐교되고 말았다. 오광선은 은사인 장지영의 소개로 잠시 한약국 급사로 일하다가 중국으로 망명했다.베이징에 무사히 도착한 오광선 일행은 신규식의 도움으로 중국 보정군관학교에 입학하였다. 이때 광선으로 이름을 바꾸었는데, 조선의 광복을 되찾겠다는 의미였다. 폭탄 제조법은 물론 특수훈련을 받다가 중국 내전으로 중도에 그만두었다. 방황을 거듭하다가 ‘독립군 양성의 요람지’인 신흥무관학교로 향했다. 펑톈(奉天, 선양의 옛 명칭)에 잠시 머무는 동안에 한인 동포들 도움으로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교장 여준의 주선으로 무관학교에 입학한 오광선은 1918년 수석으로 졸업하였다. 일본군에서 탈출한 지청천이 신흥무관학교 교육훈련대장에 취임한 후 오광선도 교관을 맡았다. 3·1운동 이후 서로군정서와 대한군정서(일명 북로군정서)는 긴밀한 관계로 발전하였다. 연합부대는 청산리전투에서 대승리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오광선은 서로군정서의 중대장, 대대장, 별동대장, 경비대장으로 각종 전투에서 활약하였다.    자유시참변 이후 지청천과 채영·오광선 등 간부급 82명은 중범자로 분류되어 이르쿠츠크 군형무소에 수용되었다. 수형생활은 춥고 배고팠을 뿐만 아니라 가혹한 민족 차별과 전향을 강요당했다. 오광선은 야음을 틈타 칼바람과 배고픔을 이겨내고 탈출에 성공하였다. 곧바로 그 참상을 국제사회에 알려 독립군의 무사 귀환을 이끌어내는 성과를 거두었다.alt삼악학교 터독립군 양성과 독립전쟁으로 민족 해방에 나서다1930년대 초반 만주의 정세는 일본군의 침략 노골화로 매우 불안하였다. 위기에 대응한 재만 한인 세력의 대동단결과 무장투쟁 역량 강화는 우선적인 과제였다. 지청천과 홍진 등의 한국독립당 결성은 이러한 시대 상황과 맞물려 있었다. 오광선은 군사부 위원이자 의용군 중대장으로 활동하였다. 길림구국군과 합류하여 항일 공동작전을 펼쳐 쌍성보·경박호·대전자령 전투 등에서 커다란 승리를 거두었다.     일제 관동군과 ‘괴뢰정부’ 만주국 압박, 중국자위군과 갈등 등으로 동북지역에서 독립전쟁 수행은 어려움에 처했다. 한편 윤봉길 의거 이후 중국국민당은 임시정부 지원에 적극적이었다. 1934년 중앙육군군관학교 뤄양분교에 한인특별반이 편성되었다. 총책임자인 지청천은 오광선을 교관으로 초빙하여 군사훈련을 맡겼다. 한인반은 갈등과 불신 등으로 2기생을 배출하고 이듬해 중단되고 말았다.      이후 오광선은 김구 주석의 지시에 따라 베이징에서 비밀공작대를 조직하였다. 주요 임무는 중국 동북지역에 독립전쟁기지를 재건할 목적이었다. 1936년부터 베이징에 금은방을 개업하여 비밀리 활동에 나섰다. 톈진에서 난징으로 이동한 가족들은 임시정부의 요인들 가족과 합류하였다. 베이징에서 첩보활동에 매진하던 오광선은 관동군 참모장인 도이하라(土肥源) 중장 암살을 준비하던 중 근거지가 노출되고 말았다. “김구 선생님이 우리 아버지한테 비밀공작 사명을 맡겼어. 청년 몇 명 데리고 가서 비밀공작을 하라고…. 아버지는 북경서 금은방을 했는데, 어떤 한국인 스파이한테 걸려서 별안간 다들 자는데 한밤중에 우당탕 쳐들어와 담을 넘어서 잠옷 바람에 다 걸렸대요. 고문형을 받아서 일본 순사들이 가시로 막 찌르고 고문해서 정신을 몇 번 까무러쳤대요. 그래도 중국 낙양군관학교만 나왔다고. 끝끝내 다른 얘기를 안 했대요. 여기 ‘오원지(吳原之)’는 중국 사람으로 행세한 거잖아요. 신흥무관학교 나왔다고 하면, 죽이지 뭐 한국 사람인데….”혹독한 3년간 감옥생활을 마친 후 오광선은 다시 망명해 하얼빈 인근에서 항일 빨치산들과 만나 활동하였다. 그는 만주 여러 곳에서 지하활동을 꾀하다가 일제의 패망 소식을 들었다.한국광복군 국내지대장과 국군의 뿌리가 되다곧바로 상하이로 건너가 한국광복군 총사령관 지청천을 만나자 그를 국내지대장으로 임명하였다. 임무는 미군정 당국과 협의해 한국광복군을 정식 군대로서 인정과 국군 자격으로 입국이었다. 미군정 하지 중장과 담판하였으나 임시정부와 광복군을 인정하지 않았다.      혼란한 정국 속에서 지청천의 대동청년단 조직에도 가담하였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육군사관학교 8기생 특별반으로 입교하여 육군 대령으로 임관되었다. 한국전쟁을 겪고 전주지구위수사령관을 지낸 후 준장으로 예편하였다. 청우회 등 국군 권익을 위해 활동하다가 1967년 서울시 이문동 셋방에서 사망했다. alt한국혁명여성동맹 창립기념 사진(기강, 1940. 6. 17.)아낙네로서 가정 살림을 도맡다1900년 경기도 용인군 이동면에서 고명한 딸로 태어난 정현숙은 엄격한 환경에서 자랐다. 부모님 결정에 따라 이웃 마을에 사는 오광선과 부부가 되었다. 강고한 인습이 남아 있는 현실에서 삼종지도(三從之道)를 운명처럼 받아들이는 연약한 아낙네에 불과했다. 결혼생활에 대한 달콤한 기대와 달리 빈곤한 시집살이는 고스란히 그녀의 몫이었다. 남편은 이듬해 새로운 변화에 부응하고자 상경하였다. 이후 항일운동에 투신하고자 홀연히 중국으로 망명길을 떠났다. 남편의 무소식에 집안 분위기는 항상 싸늘했다. 시부모 봉양과 가정 대소사는 고스란히 그녀의 몫이었다. 밤낮을 가리지 않는 노력에도 생활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만주벌 독립군의 어머니로서 자리매김하다신흥무관학교 교관으로 재임하던 오광선은 부인에게 편지를 보냈다. 오랜 기다림과 반가운 소식에 가족들은 흥분으로 가득했다. 시아버지를 모시고 기차를 타고 중간에 내려 도보로 한 달을 걸어 목적지 합니하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때부터 눈물겨운 독립운동가들을 뒷바라지를 해야 하는 운명이었다. 이 무렵 자신과 가족들 안전을 위해 ‘현숙’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후 액목현으로 생활 근거지를 옮겼으나 마적단의 습격과 추위, 배고픔과 질병에 시달려야 했다. 그런 속에서도 정현숙은 오희영과 오희옥 자매를 낳았다. 정현숙 일가는 이곳에서 화전을 일구고 옥수수와 조를 심어 어려운 살림을 이어갔다. 쌀을 구할 수 있을 때는 1년에 오직 한 번 설날이었다. 남편은 불쑥 학생이나 부하 등을 데려와 밥을 먹였다. 가족들 끼니조차 챙기기 힘든 상황에도 이들에게 식사를 제공해야만 했다. 헌신적인 뒷바라지로 정현숙은 ‘만주벌 독립군의 어머니’라는 애칭을 얻었다.  alt용인 해주오씨 기적비오희영·오희옥 자매를 당당한 여성광복군으로 키우다이후 남편을 따라 중국 관내지역으로 근거지를 옮겨 항일운동에 앞장섰다. 남편은 베이징에서 비밀공작대로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신의주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임시정부 요인들은 이들 가족에게 특별한 관심을 보였다.    부모님의 독립운동을 지켜보던 딸들도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에 가담하여 임무를 충실하게 수행하였다. 오희영은 먼저 한국광복군에 입대하여 초모공작 등에서 활약하였다. 동생 희옥도 공립중학교 3학년 다니다가 가장 어린 나이로 한국광복군에 지원하였다. 맏딸은 일본군에 맞서면서 선전활동과 초모공작에 투입되었다가 김구 주석의 사무실 비서 겸 선전부 선전원으로 활동하였다. 당시 주석의 경호업무를 맡고 있던 신송식과 결혼하였다.     정현숙은 한국혁명여성동맹에 가입하여 독립운동가 자녀들에게 역사·한글·창가 등을 통해 민족의식을 일깨웠다. 한국독립당 당원으로 임시정부에 뒷바라지에도 적극적이었다. 만주벌판의 차디찬 칼바람과 중국 관내 등지에서 30여 년에 걸친 유랑생활은 오직 자유로운 독립국가를 건설하려는 의욕으로 감내할 수 있었다. 진정한 삶의 가치는 무엇인지 곱씹어 보자정현숙 일가의 삶은 기나긴 이별과 짧은 만남의 연속이었다. 광복으로 가족들은 오랜만에 극적으로 상봉할 수 있었다. 청빈하고 강직한 남편은 단독주택 한 채도 소유하지 못했다. 국외에서 떠돌이 생활과 별반 나아지지 않는 현실이었다. 1974년 광복절에 즈음하여 방문한 기자에게 정현숙은 평화로운 남북통일에 대한 희망을 내비쳤다. 이미 큰 딸 오희영이 사망한 지 6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이젠 오래 살았으니, 더 바랄 것이 없군요. 소원이 있다면 남북통일이라고나 할까요?”     정부는 1962년 오광선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시작으로 큰사위와 큰딸, 그리고 둘째 딸 등을 독립유공자로 인정했다. 작은 딸 오희옥이 독립유공자로서 인정받은 5년이나 지난 시점에 해주 오씨 집안에 3대 독립운동을 지탱한 정현숙에게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워킹맘’에 대한 가혹한 평가는 여기에서 엿볼 수 있다.    애틋한 가족사는 우리에게 감동이자 무거운 압박감으로 다가온다. 세계사 속에 우뚝 선 오늘날 대한민국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 풍요 속의 빈곤에 따른 계층과 지역 사이의 대립 갈등은 상상을 초월할 만큼 심각하다. 오씨 일가의 ‘시대 소명’에 충실한 인생 항로에서 우리 자신들을 되돌아보는 기회로 삼아보자.]]> Wed, 27 Oct 2021 11:20:54 +0000 60 <![CDATA[인문학관 시대의 등불, 만해 한용운]]> 글 백낙천(배재대학교 인문사회대학장) 만해 한용운은 식민지 현실에 정면으로 응전하면서 개인과 시대 그리고 역사의 총체적 의미를 끊임없이 반문하며 치열하게 시대를 겪어냈다. 그는 민족혼을 일깨운 선각자였으며, 빛나는 모국어를 노래한 위대한 시인이었다. 그의 삶이 끝난 후에도 풍란화 매운 향내를 고고하게 발하면서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돌고 있다.   alt서대문형무소 한용운 수감기록표불교 혁신과 조국 독립에 앞장서다시인이자 독립운동가요, 선승인 한용운은 1879년 8월 29일 충청남도 홍성군에서 태어났으며, 6세부터 서당에서 10년간 한학을 공부하였다. 1894년 그의 나이 16세 되던 해에 동학농민운동과 갑오개혁이 일어나자 넓은 세계에 대한 동경과 생활 방편으로, 1896년에 설악산 오세암에 입산해 불경을 공부하였다. 이때 중국의 양계초 사상에 심취하기도 하였다. 1901년 고향으로 돌아와 2년 가까이 은신하며 지내다가, 1905년 강원도 백담사로 출가해 승려가 되었다. 동시에 다른 세계에 관심이 깊어 만주와 시베리아 등 여러 곳을 다니면서 불교와 동양 철학을 공부하였다.      특히 1910년에 국권이 상실되자 국치의 슬픔을 안은 채 만주로 떠났고, 그곳에서 독립군 훈련장을 다니며 독립정신과 민족혼을 심어주는 데 전력하였다. 그러다가 1911년에 박한영 등과 승려대회를 개최하여, 당시에 만연한 친일 불교의 그릇된 일들을 폭로하였다. 1913년에는 조선 불교의 침제와 은둔주의를 비판한 『조선불교유신론』을 저술하여 불교의 유신뿐만 아니라 구태의연한 현실 안주에 만연한 사회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이 책에서 만해는 자아의 발견, 평등주의, 구세주의를 기본으로 하여 불교의 실천적·사상적 활동을 확대해 갈 것을 주장하였다. 1917년경부터 항일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한 한용운은 1918년 『유심』이라는 불교 잡지를 간행해 불교 포교와 민족정신을 고취시켜 나갔다. 그리고 1919년 3·1운동 때는 백용성 등과 함께 불교 지성을 대표해 참여하였으며, ‘기미독립선언서’ 작성에 주도적인 책임을 다하고자 하였다. 또 독립선언서 끝부분에 행동 강령인 ‘공약 3장’을 작성하여 추가하기도 하였다. 1920년에는 3·1운동 주동자로 잡혀 3년간 감옥 생활을 하였는데, 그곳에서 그의 독립사상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조선 독립 이유서』를 집필하였다. 출옥 후에는 일본 경찰의 감시에도 불구하고 조선 독립의 정당성을 설파하였다. 그리고 1927년에는 항일 단체인 신간회 결성에 주도적으로 참여해 중앙집행위원과 경성 지회장을 겸직하면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이후 한용운은 1938년 불교계 항일 비밀 결사 단체인 ‘만당 사건’이 일어난 뒤 배후자로 검거되어 고초를 겪기도 하였다. 그 후에도 일제의 황국신민화 및 창씨개명에 결연하게 맞서 투쟁하다가, 1944년 6월 29일 성북동 심우장에서 중풍으로 쓰러져 생을 마감하였다. alt『님의 침묵』 표지(좌) / 『님의 침묵』의 서시이자 표제시(우)『님의 침묵』으로 빛나는 문학의 향기한용운은 『창조』 동인지보다 한해 앞선 1918년에 『유심』지에 두세 편의 작품을 발표하였다. 그 후에도 장편 소설 『흑풍』과 『후회』 등을 신문에 연재하고 한시 및 시조 등 여러 작품을 남겼다. 무엇보다도 1926년에 간행된 『님의 침묵』은 한국 근대시의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한국 문학사에 빛을 발하였다. 당시 시인들 중 일부는 일본을 통해 서양의 근대 문학에 접근하면서 낭만이나 감상 또는 관념에 매달려 자아 상실과 역사의식이 결여된 상태로 현실에 안주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한용운은 이들과 달리 자생적 근대화의 투철한 인식을 가지고 종교와 예술의 접점에서 치열한 역사의식을 구현하였다. 또한 문학적으로도 은유와 역설을 탁월하게 구사하여 시의 형식적 면모와 완결성을 제대로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시적 언어의 사용 기법에서도 발전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시집 『님의 침묵』은 한용운이 1925년 내설악 백담사에서 쓰기 시작한 것으로, 1926년 화동서관에서 초간본을 발행하였다. 시집에 수록된 시는 민족 독립에 대한 강한 신념과 희망을 형상화하였다. 『님의 침묵』의 구성은 ‘서문, 목차, 시집 본문, 독자에게’ 형식으로 구성되었는데, 이는 타고르(R. Tagore)의 시집 『원정』을 참조한 것으로 파악된다. 그 이유로는 한용운이 『유심』지에 타고르의 글을 적극적으로 소개한 바 있으며, 『님의 침묵』 안에 ‘타고르의 시를 읽고’라는 시가 포함되어 있을 정도로 타고르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시집 본문에는 ‘님의 침묵’을 비롯하여, ‘알 수 없어요’, ‘복종’, ‘나룻배와 행인’ 등 모두 88편의 시가 대체로 기(이별의 시편), 승(슬픔과 고통의 시편), 전(슬픔의 희망으로의 전환 시편), 결(만남을 향한 시편)이라는 극적 구성을 취한 연작시 형태로 배열되어 있다.       그중 첫 번째 시 ‘님의 침묵’은 조국을 상실한 시대를 임이 없는 시대로 규정하면서, 그 임이 반드시 돌아온다는 믿음을 종교적인 바탕 위에서 노래하고 있다. 이 시에서 전체적으로는 기(임과의 이별), 승(이별 후의 고통과 슬픔), 전(슬픔의 희망으로의 극복), 결(영원한 사랑)이라는 전개 과정을 지니고 있다. ‘님의 침묵’의 끝부분을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9행에서는 임을 상실한 것은 객관적 사실이지만 마음속으로는 임을 보내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삶에 있어서 헤어짐과 만남의 역동성이며 결국 이 둘은 하나라는 역설적 진리를 담으면서, 이별의 슬픔을 극복하고 새로운 만남을 예비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 10행에서 임은 침묵하고 있으나 진리의 음성을 끝없이 갈구하고 이를 영원한 사랑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더욱이 이 시에서는 밝음과 어둠, 슬픔과 희망 등의 상호 모순되는 시어를 대응시켜 상반되는 이미지를 합치시켰다. 또 아름다운 우리말 구사, 고도의 상징적 표현을 통해 서정성의 깊이를 한층 더하고 있다.       이렇듯 인간 능력의 한계를 자각하는 모습에서 더욱 비장하고 아름다운 감동을 줄 수 있는 것은, 한용운 자신이 치열한 삶을 살면서 시대정신을 일깨워 위대한 성취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한용운의 문학은 불교 사상과 독립 정신이 예술적으로 탁월하게 결합했다는 데서 자유와 평등사상을 담아내고 있으며, 민족의식으로 집약된 불교적 세계관과 투철한 독립의식은 한용운 문학의 뿌리이자 정수라고 할 수 있다.     한용운은 일제에 굴복하지 않고 서릿발 같은 지조와 절개를 지키면서 저항 정신을 문학적으로 승화시켰다. 그런 점에서 시대를 뛰어넘어 미학적 완성을 보여준 그의 시혼은 민족의 정신사적 중요한 자산으로 우리들 마음속에 깊이 간직될 것이다.]]> Wed, 27 Oct 2021 11:21:28 +0000 60 <![CDATA[끝나지 않은 독립운동 북한에 묻혀 있는 남측 독립운동가의 유해를 모셔야 할 때]]> 글 이계형(국민대학교 교양대학 교수) 2006년 10월 1일, 한 장의 사진이 사람들의 가슴을 먹먹하게 한 적이 있다. 70세를 훌쩍 넘긴 이가 어머니의 영정을 들고 방북하여, 56년 만에 아버지 무덤 앞에 큰절을 올리는 사진이다. 2005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념사업회를 창립한 김자동 선생의 이야기이다.   alt김의한과 정정화, 김자동북한의 현충원, 혁명열사릉과 애국열사릉김자동의 아버지는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부친 김가진과 함께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여 해방될 때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 한국독립당, 한국광복군 등에서 활약한 김의한이다. 어머니는 ‘한국의 잔 다르크’, ‘임시정부의 안 살림꾼’, ‘여성 독립투사’, ‘임시정부의 맏며느리’ 등의 수식어가 따라붙는 정정화이다. 이들에게 무슨 사연이 있었던 걸까?      북한에도 우리의 현충원과 같은 현충 시설이 있다. 하나는 혁명열사릉이고 다른 하나는 애국열사릉이다. 둘 다 평양에 있지만, 묻혀 있는 분들이 언제 그리고 어떤 활동을 하였는지에 따라 안장된 장소가 구분된다.      혁명열사릉은 김일성의 발기로 북한의 조선로동당 창건 30돌을 맞는 1975년 10월 대성산 주작봉 마루에 조성되었다. 이곳에는 김일성과 함께 항일 빨치산 활동을 했거나 그와 직·간접적으로 연계를 맺었던 200여 명의 ‘항일혁명열사’들이 안장되어 있다.     애국열사릉은 1986년 9월 신미리에 자리 잡았다. 당시 각지에 흩어져 있던 190위를 그곳에 모셨는데 항일투쟁을 비롯하여 북한 정권 수립과 그 이후 사회주의 건설, 통일사업, 당·국가·군대, 과학·교육·보건·문학예술·출판 보도 등 여러 부문 공로자들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다. 이는 혁명열사릉보다는 격이 떨어진다. 혁명열사릉에는 해당 인물의 비문 위에 동상이 세워져 있는 반면 애국열사릉에는 비문 위에 사진이 새겨져 있는 것도 그러한 이유다. 애국열사릉에 안장된 독립운동가두 개의 열사릉 가운데 독립운동과 관련한 것은 애국열사릉이다. 화강암 기단 위에 150㎝ 정도 높이로 세워진 비석의 전면 상단에는 사진을 새기고 하단은 검은 글씨로 고인의 이름과 생전의 약력, 생몰 연월일을 순서대로 새겨놓았다. 이름 뒤의 호칭은 동지, 선생으로 구분하였다. 몰년 뒤에는 대부분 ‘서거’라 표기하였는데 간혹 ‘희생’, ‘전사’ 등도 있다. ‘희생’은 남한에서 활동하다 죽은 인사들의 경우, ‘전사’는 빨치산 활동을 하다가 죽은 경우이다. 따라서 전자는 가묘인 경우가 많다.     독립운동가의 경우 약력에 ‘반일애국지사’, ‘애국지사’, ‘항일혁명렬사’ 등으로 표기되어 있다. 그중 ‘반일애국지사’는 만주에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고 간접적으로 김일성과 관련성이 있는 인사들이다. 이들 가운데는 김보안(이명 김준택)·장철호·강제하 등은 국가보훈처로부터 독립장을 받았다. 1930년대 조선의용군을 이끌며 혁혁한 전공을 일군 양세봉(1962, 독립장)의 무덤도 이곳에 있는데 ‘독립군사령’으로 표기되어 있다.      ‘애국지사’는 6·25전쟁 당시 납북된 인사들로 최동오·윤기섭·조완구·오하영·류동열·김규식 등이다. 당시 납북된 엄항섭과 조소앙은 각기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상무위원, 최고위원으로 표기되어 있다. 이들의 호칭은 최동오(동지)를 제외하고는 ‘선생’으로 되어 있다. 이외의 인사 중에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을 전개한 박문규·백남운·이극로·이영·허헌·홍명희 등도 모셔져 있는데, 월북하였다 하여 우리 정부로부터는 독립운동가로 인정받지 못하였다. 북한에서 이들은 ‘동지’ 칭호를 받았다.       ‘항일혁명렬사’는 김일성이 1932년 4월 25일 노동자·농민·청년 학생을 주축으로 창건했다는 조선인민혁명군에서 활동한 인물들이다. 이들은 ‘동지’라는 호칭을 부여받았다.  alt애국열사릉에 있는 엄항섭 묘비(좌) / 애국열사릉에 있는 조소앙 묘비(우)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그런데 납북된 독립운동가 중에는 ‘애국열사릉’에 안장되지 못한 인사도 있다. 그 가운데 한 분이 앞서 언급한 김의한이다. 그는 평양시 룡성구역 특설 묘역에 있는 ‘재북 인사의 묘’에 안장되어 있다. 그곳에는 남한에서 정계·실업계·사회계·학계 등에서 명망이 높았던 62명이 묻혀 있는데, 전쟁 시기에 납북 또는 자진 월북한 사람들이다.     이들 대부분은 1956년 7월 결성된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에서 활동하였다. 독립운동가로는 김의한을 비롯하여 안재홍·정인보·원세훈·박열·명제세·김상덕·장연송·장현식 등이 묻혀 있는데, 이들은 납북하였지만 우리 정부로부터 건국훈장을 받았다. 다만, 독립운동가이자 제헌국회에서 부의장까지 지낸 김약수는 월북하였다는 이유로 건국훈장을 받지 못하고 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조선의용대를 창설하였던 김원봉과 김두봉 등은 연안파로 분류되어 1958년 숙청되었는데, 그들의 유해가 어디에 있는지조차 확인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1920년 6월 봉오동전투를 승리로 이끈 홍범도 장군(1868∼1943)의 유해가 2021년 8월 15일, 서거 78년 만에 카자흐스탄에서 고국으로 돌아왔다. 그의 유해를 실은 한국군 특별수송기가 한국방공식별구역에 진입하자 공군 전투기 6대가 엄호 비행을 하였다. 많은 국민에게 남다른 감명을 주기에 충분했고 가슴 뭉클한 장면이었다.      북한과 협상을 통해 납북된 독립운동가들의 유해만이라도 남한에 있는 가족들 품으로 모셔와야 할 것이다. 당장 어렵다면 최소한 애국열사릉에 모셔져 있는 독립운동가의 현황을 꼼꼼히 살펴서 이들과 관련한 생몰년이라도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 백과사전이나 독립운동 관련 책자에 생몰년이 다르게 기록되어 있거나 미상으로 처리된 경우도 적지 않다. 이는 독립운동가들에게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는 일일 것이다. ]]> Wed, 27 Oct 2021 11:22:24 +0000 60 <![CDATA[독립의 발자취 강제동원의 역사와 피해자의 목소리를 기억하라]]> 글 편집실 민족문제연구소와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의 공동 주최로 〈피해자의 목소리를 기억하라, 강제동원의 역사를 전시하라〉가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개최되었다. 이번 전시는 일본이 지워버린 강제동원·강제노동의 역사를 피해자들의 목소리로 증언하고자 하였다.   alt전시장조선인들의 강제동원에 대해 설명해주세요 하시마섬이라고도 불리는 군함도는 품질 좋은 석탄 공급원으로 일본의 근대화와 산업화를 이끈 곳입니다. 그러나 탄광산업으로 번영을 누린 군함도에는 강제징용된 조선인들의 희생이 서려있습니다. 정부 조사에 따르면, 1939~1945년 사이 하시마탄광에 1,000명이 넘는 조선인이 동원되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화장(火葬) 관련 문서로 확인된 사망자는 50명이며, 그중 절반 이상이 사고사였습니다. 조선인들은 그런 위험한 작업 환경에서 하루 12시간 동안 채굴 작업에 동원되어 강제노역을 견뎌야 했습니다. 강제동원에 대한 일본의 태도는 어떤가요?징용 피해자에 대한 일본의 사과나 반성은 단 한번도 없었습니다. 심지어 군함도를 산업혁명의 유산으로 부각시켜 세계문화유산으로 신청하였고, 2015년 7월 군함도 등 메이지시대 산업유산 시설 23곳에 대한 세계문화유산 등재가 결정되었습니다. 다만, 등재가 결정되었을 때 세계유산위는 “각 시설에 전체 역사를 이해할 수 있는 해석 전략을 마련하라”고 일본에 권고하였습니다. 당시 일본도 군함도 등에서 강제동원이 있었다는 사실을 포함한 전체 역사를 알리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6년이 지난 지금까지 일본은 진실을 감추었습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이 점을 지적하는 결정문을 채택하였습니다.이번 기획전 취지에 대해 말씀해주세요 강제동원 피해자 19명의 증언을 담은 〈피해자의 목소리를 기억하라, 강제동원의 역사를 전시하라〉 전시는 피해자들의 생생한 목소리로 일본의 산업유산 시설이 지워버린 강제동원·강제노동의 역사를 증언하고,  일본에 ‘전체 역사를 알게 하라’는 2015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의 권고 이행을 촉구하는 메시지를 담았습니다. 일본이 국제사회와의 약속을 이행하여 국제적으로 군함도에서의 인권 침해, 강제 노역 등 역사적 사실을 바로 알리기를 바랍니다.전시에서 눈여겨볼만한 내용이 있다면요?전시 특징은 강제동원 피해자의 생생한 증언 영상을 중심으로 구성된 것입니다. 증언 영상은 한국과 일본의 시민단체 및 정부기관이 수집·소장해 온 구술 기록들입니다. 특히 이번 전시를 통해 증언하는 모든 피해자들은 군함도 등 유네스코 일본 산업유산 시설에서 강제노동을 당한 분들입니다. 또한 중국인과 연합군 포로도 강제노동에 동원된 사실을 함께 조명하고 있습니다.증언 영상 가운데 일본 ‘오카 마사하루 기념 나가사키평화자료관’이 제공한 고(故) 서정우 씨의 영상은 국내 최초로 공개된 자료이며, 2021년 봄에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구술채록 사업으로 촬영된 강제동원 피해 생존자 4명의 증언 영상 또한 처음으로 공개되었습니다.마지막으로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다면요이번 프로젝트를 통해 일제강점기의 아픈 역사가 아직도 청산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면 합니다. 일제 식민지 피해에 대한 사실을 제대로 알고, 피해자의 인권 회복을 위한 노력이 지금도 필요한 이유를 일본의 산업유산을 둘러싼 문제가 보여주고 있습니다. 일본은 여전히 식민지배를 부정하고 강제동원·강제노동의 역사를 지우려 하고 있습니다. 독립운동가들의 숭고한 희생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과거의 잘못을 지우려고만 하는 일본의 역사 왜곡에 대해 한 번쯤 돌아봤으면 합니다. 19명의 증언으로 소환된 강제동원전시는 크게 2부로 나눠진다. 먼저 제1부 ‘피해자의 목소리를 기억하라’에서는 증언 영상을 중심으로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여정을 크게 4개의 파트로 구성하였다. alt제1부 Part.1 ‘가라면 가는 거지’, Part.2 ‘갇혀서 일하는 신세야’(좌) / 제1부 Part.3 ‘살아도 사는 게 아니야’(우)Part.1 ‘가라면 가는 거지’에서는 식민지 조선 청년의 강제동원 실상을 살펴본다. 식민지에서의 민중들, 그중에서도 가장 하층에 자리했던 소작농과 남의 집 살이를 전전하던 식민지 조선 청년들의 삶을 조명해본다. 또 이들을 대상으로 한 강제동원의 실상을 사료와 함께 이해할 수 있다.Part.2 ‘갇혀서 일하는 신세야’에서는 강제노동 현장의 가혹한 일상을 되짚어 본다. 탄광, 제철소, 조선소 등지에서 고된 작업에 시달렸던 조선인들. 그들이 경험한 부실한 식사와 질병 등 열악한 처우를 견뎌야 했던 노동 환경을 보여준다.Part.3 ‘살아도 사는 게 아니야’는 반인권적인 처우와 사건·사고 등을 다루고 있다.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겪었던 구타와 가혹행위 등 반인권적인 처우 등을 살펴볼 수 있다. 여기에는 조선인과 더불어 강제노동으로 고통받은 중국인 및 연합군 포로들의 이야기도 포함된다.Part.4 ‘다 같은 노예 신세였어’에서는 중국인 피해자와 연합군 포로의 강제노동 실태 등이 피해자들의 증언 영상을 중심으로 전시된다. 일본 ‘나가사키 중국인 강제 연행의 진상을 조사하는 모임’이 제공한 강제노동 중국인 포로들의 증언 영상과 POW(prisoner of war)연구회가 제공한 연합군 포로의 강제노동 실태도 함께 전시된다. 일본 산업유산 시설의 강제노동이 조선인뿐만 아니라 중국인 포로, 미국·네덜란드·호주 등 연합국 사람들에게도 가해진 전시 폭력이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제2부 ‘강제동원의 역사를 전시하라’에서는 유네스코 일본 산업유산의 등재 논란과 현재 강제동원·강제노동의 역사를 부정하는 산업유산정보센터의 문제점을 다루었다.  alt제2부 ‘강제동원의 역사를 전시하라’(좌) / 프롤로그 ‘차마 하지 못한 이야기’(우)      지난 2015년 제39차 세계유산위원회 총회가 열린 독일 본 현지에서 민족문제연구소가 일본 산업유산의 침략사적 기원과 강제노동의 실태를 세계에 알리기 위해 개최한 〈부정적 세계유산과 미래가치〉 특별전 확장판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이에 독일 아우슈비츠수용소, 영국 국제노예박물관 등과 같은 ‘부정적 세계유산(Negative Heritage)’이 어떤 방식으로 후대에 교훈을 전하고 있는지 소개하면서 일본 산업유산의 역사 부정 실태를 꼬집고 있다.]]> Wed, 27 Oct 2021 11:23:06 +0000 60 <![CDATA[세계 산책 근대 러시아의 대동란 시대]]> 글 류한수(상명대학교 역사콘텐츠학과 교수) 모든 나라의 역사에 위기가 없지 않겠지만, 러시아는 유난스레 격심한 위기를 여러 차례 헤치며 나아가야 했다. 한반도가 임진왜란과 양대 호란을 겪던 시절, 러시아도 외세의 침입과 내부 분열로 나라가 곧 망할 위험에 빠져 허덕이고 있었다. 러시아 역사가들은 위태롭기 짝이 없던 이 시기를 ‘대동란 시대’라고 일컫는다. 러시아가 앓았던 심한 몸살과도 같았던 대동란 시대의 전모를 들춰보고자 한다.  alt러시아 화가 일리야 레핀 작, 〈1581년 11월 16일 이반 뇌제와 그의 아들〉         이반 뇌제의 정신 이상과 왕조의 단절두 세기에 걸친 몽골의 지배에서 벗어난 러시아를 16세기 동유럽에서 강하게 키워낸 군주가 이반 4세였다. 러시아에 남은 몽골 세력을 마저 제압하고 영토를 넓힌 이반 4세는 자신감에 차서 러시아 군주의 칭호를 대공에서 차르로 바꾸었다. 그는 치세 말기에 귀족과 반대파를 잔혹하게 억압하는 등 공포 분위기를 조성한 탓에 ‘뇌제(雷帝)’, 즉 ‘끔찍한 차르’라는 별명을 얻었다. 말년에 정신 이상에 시달리던 이반 4세가 1581년 11월 16일에 맏아들 이반을 쇠몽둥이로 쳐 죽이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는 20대 후반의 아들 표도르와 두 살이 안 된 늦둥이 드미트리를 남기고 1584년에 숨을 거두었다.     이후 아들 표도르가 차르로 즉위했지만, 워낙 허약하고 착하기만 해서 실권은 처남인 보리스 고두노프에게로 넘어갔다. 수완 좋은 고두노프가 권력을 거머쥐고 있던 시기에 큰일이 일어났다. 이반 4세의 늦둥이 아들 드미트리가 1591년 5월 15일에 집 안뜰에서 목이 베인 채 싸늘히 식은 주검으로 발견된 것이다. 열 살이었던 드미트리가 칼을 가지고 놀다 간질 발작이 일어나서 스스로 칼로 목을 찔렀다는 것이 공식 조사 결과였지만, 고두노프가 야심을 품고 제위 계승 후보자인 드미트리를 미리 제거했다는 소문이 퍼졌다. 이 와중에 표도르가 1598년에 숨졌고, 고두노프가 뒤를 이어 차르의 자리에 올랐다. 700년 넘게 이어지며 혈통의 측면에서 군주의 권위를 떠받쳐온 정당성의 원천인 류리크 왕가의 계보가 끊기는 순간이었다.     고두노프는 뛰어난 위정자였지만, 한반도에서 임진왜란이 끝나던 해에 시작된 그의 치세는 불운의 연속이었다. 1601년에 가뭄이 들었고, 1602년과 1603년에는 흉작이 이어졌다. 돌림병까지 겹쳐 민심이 흉흉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이때 “자기가 사실은 1591년에 죽지 않고 살아남은 이반 4세의 아들 드미트리”라고 주장하는 이가 나타났다. 이 ‘가짜 드미트리’는 동유럽의 강국이자 가톨릭 국가인 폴란드로 가서 “자기를 러시아의 군주로 만들어주면 러시아의 국교를 정교회에서 가톨릭으로 바꾸겠다”고 약속했다. 가짜 드미트리는 폴란드 세력을 등에 업고 1604년 10월에 러시아를 침공하였다. 이듬해 4월에 차르 고두노프가 숨졌고, 두 달 뒤에 가짜 드미트리가 러시아의 수도 모스크바에 입성했다. alt모스크바 시 붉은 광장의 동상, 국민군을 이끌고 러시아를 구해낸 두 지도자 미닌과 포쟈르스키          위기의 연속, 제2·3의 가짜 드미트리러시아의 최고 권력자가 된 가짜 드미트리는 곧바로 러시아의 민심을 잃었다. 그와 함께 온 폴란드 군인들은 툭하면 모스크바 시민과 충돌하였다. 더욱이 가짜 드미트리는 1606년 5월에 폴란드 여인 마리나 므니제치와 결혼식을 올렸다. 종교가 곧 민족의 정체성이던 시절에 가톨릭 신자를 국모로 모셔야 할 신세였다. 이를 참지 못한 러시아 정교회와 모스크바 시민이 봉기하여 가짜 드미트리를 죽이고 붉은 광장에서 그의 주검을 불태웠다. 그리고 봉기자들이 드미트리 주검의 재를 대포알에 담아 폴란드 쪽으로 쏘았다는 말이 있다.     그렇게 가짜 드미트리는 사라졌다. 그런데 1607년 8월에 두 번째 가짜 드미트리가 나타나서 모스크바를 노렸다. 그는 모스크바 가까이 있는 투시노 마을에 근거지를 두고 별도의 조정을 꾸렸다. 이 내분을 틈타 북유럽의 강호였던 스웨덴이 끼어들었고, 폴란드의 국왕은 아예 스스로 러시아의 차르가 되겠다고 나섰다. 1610년에 러시아 서부와 모스크바는 폴란드의 손아귀에 있었고, 러시아 북부는 스웨덴 차지가 될 참이었다. ‘투시노의 도적’이라고 불리던 두 번째 가짜 드미트리는 그렇게 난동을 부리다 12월에 부하 손에 목숨을 잃었다.     나라의 운명이 바람 앞의 촛불이던 이때, 정교회의 게르모겐 모스크바 총주교가 러시아의 여러 도시에 격문을 돌렸다. 그는 군대를 일으켜 이교도 폴란드인을 물리치고 모스크바를 구해달라고 호소하였다. 이에 호응해서 결성된 러시아 ‘국민군’이 모스크바로 다가왔지만, 온갖 세력으로 이루어진 군대인지라 내분이 일어났고 모스크바의 폴란드 군대는 시가지를 불태우며 버텼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세 번째 가짜 드미트리까지 나타나서 혼란이 가중되었다. 한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위기의 연속이었다.대동란의 종식과 새 황조의 시작바로 이때 위기를 극복하는 러시아의 놀라운 능력이 발휘되었다. 러시아 남부의 도시 니즈니 노브고로드에서 미닌이라는 평민이 시민들을 설득해 군자금을 모으는 한편, 귀족인 포자르스키 공을 설득해서 거사에 끌어들였다. 정교회의 지지를 받는 두 번째 국민군이 결성되었다. 제2차 국민군이 1612년 9월에 모스크바에 이르렀고, 세찬 싸움 끝에 모스크바 도심에서 버티던 폴란드 군대를 쳐부쉈다. 러시아가 내분을 이겨내고 외세를 몰아내는 순간이었다.이듬해 초에는 특별 의회가 열렸다. 러시아의 성직자, 귀족, 시민, 농민 등 500명을 웃도는 각계각층의 대표들이 류리크 계보의 마지막 차르였던 표도르 1세의 친척인 16세 귀족 소년 미하일 로마노프를 새 차르로 추대하였다. 7월 21일에 즉위식이 거행되었고, 300년 넘게 지속될 로마노프 황실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러시아는 류리크 계보가 끊긴 1598년과 로마노프 황조가 세워진 1613년 사이의 15년 남짓한 ‘대동란 시기’에 금방이라도 나라가 허물어질 듯한 위기를 딛고 일어섰다. 그 뒤 두 세기 안에 러시아는 표트르 대제(재위 1682~1725년)와 예카테리나 대제(재위 1762~1796년)를 거쳐 유럽의 열강으로 발돋움했다. 용수철처럼 움츠렸다 되튀는 러시아의 특성이 보란 듯이 나타난 러시아 근대사의 한 페이지였다.]]> Wed, 27 Oct 2021 11:23:43 +0000 60 <![CDATA[기념관은 지금 독립운동사 아카이브 컨트롤타워로 발돋움하다]]> 정리 편집실  사진 봉재석 독립기념관을 이끌어 가는 당신이 자랑스럽습니다. 오늘도 앞장서서 묵묵히 열 일하는 열정 인재들! 독립기념관에는 약 10만여 점의 독립운동사 관련 자료가 소장되어 있습니다. 이번 호에는 독립운동 가치 확장을 위해 독립운동사의 체계적인 보존·관리에 최선을 다하는 현장을 둘러봅니다.  alt독립기념관 내 자료 관리에 대해 설명해주세요1983년 8월 15일 독립기념관 기공식을 시작으로 전 국민적 전시자료 수집운동을 전개했습니다. 그해 12월, 1만 2,106점에 달하는 자료 수집의 성과를 이루었습니다. 이후 부족한 자료를 발굴하고 관리하기 위해 장기적인 방침을 세우고 제2차 자료 수집 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독립기념관은 소장된 방대한 자료들의 보존·관리에 힘써 아카이브 중심 기관으로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도약하고 있습니다.자료 관리 업무에 대해 소개해주세요외침을 극복하고 민족의 자주와 독립을 지켜온 우리 민족의 국난극복사와 국가발전사에 관한 자료를 수집하고, 수집된 자료를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관리를 통해 민족의 소중한 유산으로 영구히 보존하는 업무입니다. 독립기념관은 국내·외 독립운동사 자료 수집 및 아카이브 중심 기관으로서 선도적 역할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alt자료 수장고 내부수집된 자료는 어떻게 보관되고 있나요?수집된 자료는 분석 및 분류 과정을 거쳐 자료명, 수량, 유형, 재질, 재원, 생산자 등 제반 사항을 ‘소장 자료 관리 프로그램’에 입력해 자료로 등록합니다. 등록된 자료는 자료 멸균기를 통한 소독 처리를 거쳐 그 유형에 따라 서가, 모빌렉, 문서함, 옷장 등의 다양한 집기장에 보관·관리하고 있습니다.자료의 소독 처리 등 보존 처리 과정에서 어려운 점은?독립기념관에 소장되어 있는 자료는 근현대 시기에 생산된 문서나 전적류가 많습니다. 이 자료들은 대체로 ‘산성지’라고 불리는 일제강점기부터 1980년대 이전 생산된 종이로 제작되었습니다. 산성지는 시간이 지나면서 빠르게 훼손되는 특징을 가지고 있어서 적절한 보존 환경을 조성하고 보존 처리하는 과정이 필수적입니다. 산성화되어 만지기만 해도 바스러지는 상태의 자료들을 복원할 때에는 작은 실수로 인해 귀중한 자료가 손상될 수 있다는 생각에 큰 부담감과 자부심을 동시에 느낍니다. alt소장 자료들 중에 역사·문화적으로 가치가 있는 중요 자료 지정 제도란?독립기념관에서는 매년 문화재청과 국가기록원의 협의를 통해 보물, 등록문화재, 국가지정기록물, 유네스코세계기록유산 지정 사업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1987년 개관 이후부터 현재까지 보물 6점, 등록문화재 86점, 국가지정기록물 53점, 유네스코세계기록유산 3점 등이 중요 자료로 지정되었습니다. 특히 2021년에는 김구 서명문 태극기가 보물로 지정 예고되어 있어 독립기념관의 위상을 높이고 소장 자료의 역사적 가치를 공인받는 성과를 거두었습니다.독립기념관 소장 자료 이용 방법은?독립기념관에서는 독립운동사, 일제 침략사, 생활사 등 약 10만여 점의 자료를 소장하고 있습니다. 개인 및 단체의 경우 직접 방문 및 독립기념관에서 운영 중인 ‘한국독립운동정보시스템’ 웹 사이트를 통해 목록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또 이를 통해 학술·연구, 전시, 교육, 홍보, 출판 등 다양한 목적으로 자료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향후 계획에 대해 알려주세요최근 정보화산업이 빠르게 변화하고 공공지식 개방에 대한 요구가 증가함에 따라 새로운 자료 이용 환경에 대한 변화가 필요해졌습니다. 이에 따라 독립기념관에서는 소장 자료 이용 활성화를 위해 이용자가 쉽게 자료에 접근하여 활용할 수 있도록 이용 환경을 개선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특히 주제별 콘텐츠 구축 시 홈페이지 국민투표를 통해 국민의 요구를 분석·선정함으로써 이용자의 만족도를 극대화하고 있습니다. 향후 독립기념관은 독립운동사 기반의 아카이브 기능 강화 및 활성화를 통하여 독립운동 연구 확산 및  독립정신 확산 기반을 구축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alt① 보존처리 전 손상된 자료 → ② 자료 손상 상태 검사 → ③ 자료 보존처리 과정 → ④ 자료 스캔 과정]]> Wed, 27 Oct 2021 11:24:22 +0000 60 <![CDATA[독자 이벤트 이번 호 독립기념관을 읽고 빈칸을 채워주세요. 꼼꼼히 읽다 보면 정답에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 alt alt아이콘 클릭하면 퀴즈 정답을 보낼 수 있습니다.]]> Wed, 27 Oct 2021 11:27:07 +0000 60 <![CDATA[들어가며 이름에 담긴 독립의 역사]]> 1876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난 김구 선생의 본관은 안동(安東),어릴 때 불리던 아명은 창암(昌巖)이었습니다.18세가 되던 해, 모든 이가 평등하다는 동학사상에 심취하여이름을 창수(昌洙)로 바꾸게 됩니다.성인이 된 창수는 치하포사건으로 감옥에 갇혀 갖은 고초를 당하고,2년 뒤 탈옥에 성공한 후 신분 위장을 위해 두호(斗昊)라는 가명을 썼습니다.이후 공주 마곡사에서 잠시 승려로 생활하며 원종(圓宗)이라는 법명을 얻고1년간의 승려 생활을 마치고 환속 후에는 두래(斗來)라는 가명을 사용했습니다.1900년 여름에는 심심산골인 김천 성태영 집에서 ‘김구(金龜)’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게 됩니다. 다양한 활동을 이어가던 김구는 1911년 1월 안악사건으로 투옥되어 15년 징역형을 선고받고, 1915년 가출옥하는데 이때 이름을 거북 구(龜)에서 아홉 구(九)로 바꾸었습니다.  김구는 중국 상하이에서 임시정부 국무령에 올라 본격적인 항일운동을 준비하는데, 1931년 12월 28일에는 도쿄 이봉창 의사에게 백정선(白貞善)이라는 가명으로 돈을 송금했습니다. 이봉창·윤봉길 의거 후에는 장진구(張震球) 혹은 장진(張震)으로 행세하였고, 1938년 그의 나이 63세가 되어서야 본명 김구(金九)를 드러내놓고 사용했습니다.]]> Mon, 29 Nov 2021 09:49:59 +0000 61 <![CDATA[톺아보기 김구, 거북이 되어 연꽃 아래 잠행하다]]> 글 도진순(창원대학교 사학과 교수) ‘명전자성(名詮自性)’이란 말이 있다. 이름에 본성과 실상이 드러난다는 의미이다. 백범(白凡) 김구(金九)는 한국인 누구에게나 익숙한 명호(名號)가 되었는데, 이것은 그가 1914년(39세) 감옥에서 석방 이후 새로운 활동을 대비해서 지은 최종 명호이다. 그의 이전 이름은 김구(金龜), 즉 거북이었다. 이 이름의 사연에 대해 살펴본다.  alt1920년대 김구심산유곡의 성태영가에서 고금의 역사를 토론하며백범의 파란만장한 삶을 대변하듯 그에게는 여러 가지 이름이 있었다. 1876년 태어난 이후 아명은 김창암(金昌巖), 1893년(18세) 동학에 입도 이후 김창수(金昌洙), 치하포사건으로 투옥되었다가 1898년(23세) 탈옥한 이후 삼남에 잠적하면서 사용한 가명 김두호(金斗昊), 마곡사에서 승려가 되며 얻은 법명 원종(圓宗) 등이 있다.       1900년(25세) 환속한 김창수는 무주와 김천의 심산유곡에서 특이한 산중 생활을 하게 된다. 그가 무주·김천에 이르는 과정은 『백범일지』에서 가장 흥미진진한 대목 중 하나이다. 접선은 강화도에서 시작된다. 탈옥한 지 근 2년이 되는 1900년 2월, 김창수는 김두래(金斗來)로 변명하고 강화도에서 가서 훈장 노릇을 서너달 하다, 유완무(柳完茂)의 비밀조직원 이춘백(李春伯)을 만난다. 두 사람은 동행하여 한양에서 유완무를 상봉한다. 유완무는 김창수에게 편지 한 통과 노자를 주면서 충청도 연산의 이천경(李天敬)에게 보내고, 이천경은 한 달 이후 편지를 주면서 전북 무주의 이시발(李時發)에게 보내고, 이시발도 편지 한 장을 주며 경상도 김천의 성태영(成泰英)에게 보낸다. 이 성태영의 집에서 김창수는 또 한 달여 기간을 머물게 된다. 성태영의 집은 매우 부유했고, 탈옥 청년 김창수는 푸르른 산촌에서 고금의 역사를 토론하면서 여유작작하게 생활하였다. 성태영의 (중략) 사랑에 들어가니 수청방(守廳房) 상노방(床奴房)에 하인이 수십 명이고, 사랑에 앉은 사람들도 거의가 귀족의 풍채와 태도를 가진 자들이었다. 주인 태영이 이시발의 편지를 보고 환영하여 상객으로 대우하니, 상노 등이 더욱 존경하는 태도로 나를 대하였다. 성태영의 자는 능하(能河)요, 호는 일주(一舟)이다. 그와 함께 산에 올라 나물 캐고 물가에 가서 고기 구경하는 등 여유로운 생활을 해가며 고금의 역사를 토론하면서 또 한 달여를 지냈다.  - 『주해 백범일지』 중에서『백범일지』에는 성태영의 집이 ‘지례군(知禮郡) 천곡(川谷)’에 있다고 되어 있지만, 천곡은 월곡(月谷)의 착오이다. 이곳은 현재 경북 김천시 부항면 월곡 마을이며, 우리말로 ‘달이실’이라고 한다. 산 중에 있는 아름답고 작은 이 마을에는 한가운데 계천이 남북으로 흐르는데, 마을의 동북 지점에 성태영의 집이 있었다. 성태영의 집은 명문대가였지만 현재는 없어졌고, 후손들도 이 마을에 살고 있지 않다. 그러나 그의 집터에 들어선 새로운 집의 입구에는 〈백범 김구선생 은거지〉라는 표지석이 서 있다.  alt성태영(좌) / 김천 달이실 백범 김구의 은거지(우)김구(金龜)의 탄생1900년 5~6월 강화를 떠난 지 3개월 정도 지난 8월경 어느 날, 유완무가 성태영의 집에 와서 김창수와 3자가 회동하였다. 이때 유완무와 성태영이 김창수의 이름을 김구(金龜)로 바꾸고, 호를 연하(蓮下)로 지어주었다. 이름을 고치고 호를 얻는 것은 의미심장하고 중요한 결정이다. 개명의 이유는 김창수란 이름이 치하포 사건과 인천감옥 탈옥 사건의 범인으로 등재되어 앞으로 새로운 비밀 활동을 하는데 사용하기 불편했기 때문일 것이다. 창수(昌洙)라는 이름이 쓰기 매우 불편하다 하여 성태영과 유완무가 이름을 고쳐 지어주었다. 이름은 김구(金龜)라 하고, 호는 연하(蓮下), 자는 연상(蓮上)으로 행세하기로 하였다.  - 『주해 백범일지』 중에서 그런데 새 이름이 왜 하필이면 ‘거북 구(龜)’인가? 이 점이 궁금하여 2017년 4월 7일 성태영의 집이 있었던 월곡에 찾아갔다. 심심산중의 이 마을에는 백범 관련 기념비가 세 군데나 있었다. ① 마을 입구 ‘월곡숲 공원’에는 〈백범 김구선생 은거 기념비〉가 있으며, ② 마을회관 앞에는 마을의 수호신인 두꺼비상이 연꽃 위에 앉아 있는데, 그 아래 안내문에도 백범이 언급되어 있으며, ③ 성태영의 집터에는 앞서 본 〈백범 김구선생 은거지〉라는 안내석이 있다. 그중 마을회관 앞 두꺼비상 아래에 있는 〈월곡 마을의 유래와 자랑〉은 아래와 같다. 월곡 또는 달이실이라는 마을 지명은 마을 중앙을 관류하는 하천변에 떠오르는 달을 쳐다보는 두꺼비 형상의 바위가 있음으로 해서 얻은 지명인데, 예부터 마을 주민들은 바위가 마을의 안위를 지켜주는 수호신이라 하여 신령시 했다. (중략) 특히 달이실 마을은 민족의 등불이신 백범 김구 선생이 22세 되던 해인 1896년 우리 마을 성태영의 집에 한 달간 머무르신 자랑스러운 마을이다.  alt왼쪽부터 백범 김구 선생 은거지 표지석, 월곡마을의 수호신인 연꽃 위 두꺼비상, 도로 밑에 묻히고 남은 거북바위 앞부분백범이 월곡에 머문 시기는 위 안내문에 있는 ‘22세 되던 해 1896년’이 아니라, ‘25세 되던 1900년’이다. 안내문에서 연꽃 위에 있는 동물은 ‘두꺼비’지만, ‘달을 쳐다보는 두꺼비 형상의 바위’가 〈월곡마을 보물지도〉(안내판)에는 ‘거북바위’로 표기되어 있다. 즉 달을 바라보는 거북 형상의 바위가 이 마을의 수호신이라는 것이다. 이 거북바위가 성태영의 집 바로 앞개울가에 있다. 현재 안타깝게도 대부분 도로 밑으로 들어갔지만, 머리 등 앞부분 일부는 남아 있다.     1900년 유완무와 그의 조직원들은 치하포 사건을 일으켰다 탈옥한 청년 김창수를 오랫동안 이리저리 시험해보고, 8월 경 심심산촌 달이실의 지사 성태영의 집에서 김창수를 조직원으로 포섭하면서 새로운 이름을 지어주었다. 그것이 거북이, 즉 ‘구(龜)’였다. 거북바위가 달이실 마을을 지키듯이 무너지는 나라를 지키는 귀한 인물(조직원)이 되기를 기대하면서 개명한 것으로 생각된다. 거북이, 연꽃 아래 거닐다달이실 성태영의 집에서 김구(金龜)로 개명과 더불어 호를 연하(蓮下), 자를 연상(蓮上)으로 정했다. 백범은 상민 출신이어서 호나 자가 없었으니, 이것이 그의 인생에서 최초의 호와 자이다. 그의 자와 호에 연꽃이 등장해서 마곡사 승려 생활 등 불교와 관련이 있는 것인 양 추정하는 경우도 있지만, 사실은 반대에 가깝다. 즉 유완무 그룹의 항일 비밀결사와 연결되는 것이다. 연꽃 또는 연잎 위에 있는 거북은 지극한 상서로움을 상징한다. 이에 대해서 『사기(史記)』의 기록이나 이백의 시도 있지만,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국보 제96호와 보물 452호의 주자(注子)가 바로 연꽃 위에 앉은 거북의 상서로운 모습이다. 달이실의 거북바위 앞에도 연잎 또는 연꽃 모양의 바위가 있으며, 마을회관의 두꺼비상도 연꽃 위에 있다.연잎이나 연꽃 위의 거북은 지극히 상서로운 것이지만, 난세에는 거북이 잡힐 수가 있다. 『장자』에 “거북은 죽어서 뼈를 남기어 귀중하게 되기보다, 살아서 진흙 속에 꼬리를 끌고 다니기를 바란다”는 구절이 나온다. 즉 난세에는 거북이가 연잎 아래 진흙 속에 꼬리를 끌면서 잠행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반일 지사 유학자인 이남규(李南珪)는 난세를 맞이하여 오르길 꺼리는 거북을 시로 노래한 바 있다.   玄龜出丹水 단수에 사는 현묘한 거북은 老骨靈以通 늙은 귀각(龜殼, 老骨)이 영통하다네 蓮葉堪棲托 연잎 위에도 오를 수 있지만 但恐遇寒風 차가운 바람을 만날까 그것이 두려워라   1900년 여름 어느 날, 유완무와 성태영이 탈옥수 김창수의 이름을 구(龜), 호를 연하(蓮下)로 지어주었던 것은 김구가 난세인 풍진세상에서 연꽃 밑을 잠행하지만, 언젠가는 연꽃 위에 올라오는 거북이 되기를 염원한 것으로 보인다. 김창수는 이날부터 김구(金龜)-연하(蓮下)로 호명되다가, 1914년 인천 옥중에서 이름을 구(九)로, 호를 백범(白凡)으로 바꾸게 된다. 그러니까 25~38세 청장년기를 김구(金龜)라는 이름으로 결혼도 하고, 항일 애국계몽운동을 왕성하게 전개하였다. 1909년(34세) 백범은 안중근 의거 직후 잠시 체포되었는데, 그때 그는 일제가 작성한 『김구(金龜)』라는 100여 쪽의 책자를 본 적이 있다고 소개한 바 있다. 이렇게 일제는 연꽃 아래를 잠행하던 거북이 김구(金龜)를 추적하고 있었고, 드디어 1911년 1월 안악사건으로 김구를 체포하여 15년형을 선고하였다. 일제의 그물망에 걸린 거북이 김구(金龜)는 감옥에서 김구(金九)로 바뀌어 세상에 나오게 된다.]]> Mon, 29 Nov 2021 10:13:03 +0000 61 <![CDATA[만나보기 김구와 충무공의 어색한 만남]]> 글 도진순(창원대학교 사학과 교수) 누군가를 기린다는 것, 무엇을 기념한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그것은 무엇보다 기억하는 주체들의 수준과 함량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alt김구 친필 충무공 이순신 시비 전면(창원시 진해 남원로터리)alt 충무공 이순신 시비 후면의 비명바다와 산에 맹세하노니경남 창원시 진해의 남원로터리에는 〈서해어룡동(誓海魚龍動) 맹산초목지(盟山草木知)〉라는 김구의 친필로 된 ‘충무공 이순신 시비’가 있다. 바다와 산 그리고 대자연과 소통하면서 맹세하고 다짐하는 이 웅혼한 구절은 충무공 이순신의 유명한 시구(詩句)이다. (서해어룡동: 誓海魚龍動) 바다에 다짐하니 어룡이 움직이고(맹산초목지: 盟山草木知) 산에 맹세하니 초목이 알더라.김구는 항일독립운동의 전선에서, 해방 이후 험난한 정국에서 이 구절을 애송하면서 자주 휘호로 남겼다. 특히 1936년 8월 27일 자신의 회갑일에 이 시구를 쓴 휘호가 세 건이나 남아 있다. 당시 김구는 일제의 추적을 피해 중국의 여자 뱃사공 주아이바오(朱愛寶)와 함께 난징(南京)의 회청교(淮淸橋) 부근에 숨어 살면서, 장제스(將介石)를 만나 독립운동의 용으로 부상하고 있었다. 이 잠룡(潛龍)의 둥지에서 자신의 회갑을 맞이하여 쓴 휘호가 바로 ‘서해맹산’ 휘호였다. 그것도 3건이나.     1945년 환국 이후에도 김구는 여러 번 충무공의 ‘서해맹산’을 휘호로 남겼다. 간략하게 조사한 바에 의하면 김구가 쓴 이 휘호는 14건이나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돌에 새진 비로는 진해 남원로터리 것이 유일하니 귀중하지 않을 수 없다. 오래된 오류, 1946년과 1947년창원시에서는 2017년 남원로터리의 이 시비 일대를 대대적으로 정비하였다. 안내판도 대리석으로 새롭게 마련하였는데, 그 내용은 이전과 그대로이다. 그런데 유감천만으로 안내판은 처음(①)과 끝(②)이 맞지 않다.   ①이 시비는 광복 이듬해인 1946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이었던 김구가 진해를 방문하여 해안경비대 장병들을 격려하고 조국 광복을 기뻐하면서 남긴 친필 시를 화강암에 새겨 만든 비석이다.(중략)②비석 측면에는 ‘大韓民國二十九年八月十五日(1947년 8월 15일) 金九謹題’라고 음각되어 있다.안내판의 처음에는 김구가 1946년 진해를 방문했을 때 남긴 친필 시를 새긴 것이라 하였지만, 마지막에서는 비석 측면에 1947년 8월 15일 쓴 것이라고 김구 친필로 새겨져 있다고 소개하였다. 즉 비석에 김구의 친필로 1947년 8월 15일에 쓴 것이라 새겨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안내판에는 1946년에 써 준 것이라 우기면서 안내를 시작하는 것이다.    이 오류는 예전의 안내판도 그러하였으니, 수십 년간 교정되지 않고 있다. 이런 억지는 어떤 내용의 휘호를 한 번만 쓰는 것처럼 생각하는 무지와 깊은 관련이 있다. 자신이 좋아하던 내용을 여러 번 휘호로 쓸 수 있고, 김구 역시 그러했다. 1946년 9월 15일 김구가 진해를 방문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며, 당시 이 시구를 휘호로 써서 사람들에게도 주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과 별개로 이 시비는 1947년 8월 15일에 쓴 것이라고 비석 측면에 김구 친필로 새겨져 있다.      alt김구의 친필 충무공 이순신 시비에서 훼손된 부분선양하는 비명과 깨진 비신진해 남원로터리의 안내판에서 결정적으로 잘못된 것은 시비의 이름이다. 이전의 안내판도, 2017년 새로 만든 안내석도 시비의 이름이 ‘백범 김구 친필 시비’이다. 2017년 정비하면서 아예 ‘백범 김구 선생 친필 시비’라고 크게 강조하여 비의 뒷면에 붙여 놓았다. 무엇이 문제인가? 이 비의 이름에서 핵심은 충무공 이순신의 시구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핵심인 충무공은 유실되고, ‘백범 김구 친필’만 강조되어 마치 김구의 시인 것처럼 보인다. 이런 식의 작명이면, 바로 옆 진해 북원로터리의 이순신 장군 동상에는 앞면에 이승만 대통령의 친필 ‘충무공(忠武公) 이순신상(李舜臣像)’ 7자가 있으니 ‘충무공 동상’이라 하지 않고 ‘이승만 친필 동상’이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충무공 이순신을 통해서 이승만이나 김구가 통합되는 것이 아니라, 글씨를 쓴 김구만 제목에 부상시켜 당파적 싸움을 자초할 수 있다.       사실 이 시비는 이승만과 김구를 빙자한 당파 싸움으로 심각하게 훼손된  상처가 생생하게 남아 있다. 현재 세워진 비는 깨어진 원 비석 2조각과 시멘트로 보완한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맹세할 서(誓)’ 자 부분은 돌이 깨어졌지만 원글자이고, 시멘트로 보완한 ‘바다 해(海)’ 자의 물수변은 원글자의 획이 아니다. 그 전말을 정리하면, ① 김구가 1947년 8월 15일 써 준 이 시비는 원래 현재의 남원로터리가 아니라 북원로터리 광장에 세워졌다. ② 1949년 6월 26일 백범 암살 이후 이승만에 충성스러운 어떤 해군 장성이 북원 광장에서 시비를 뽑아서 진해역 근방에 버렸다고 한다. 이때 비가 파손되었고, 진해역 창고에 보관되었다. ③ 1952년 4월 13일, 북원로터리에서 충무공 동상이 세워졌다. 이 동상의 전면에는 ‘이승만(李承晩) 근서(謹書)’, ‘충무공(忠武公) 이순신상(李舜臣像)’이 새겨졌다. ④ 1960년 4·19 또는 5·16 이후 깨어진 충무공 시비가 수습되어 현재의 남원로터리로 옮겨져 세워졌다. 이때 깨어진 조각을 붙이고, 없는 부분은 시멘트로 보완하였다. 반면 북원로터리의 이순신 동상 전면의 글씨 중에서 ‘이승만(李承晩) 근서(謹書)’ 5자는 제거되었다.그러니까 이 시비에서 깨진 ‘誓海’ 부분은, 충무공 이순신이 유실되고 이승만과 김구로 대표되는 역사 기억의 충돌을 볼 수 있는 귀중하고도 슬픈 자화상이다. 2017년 남원로터리의 시비를 대대적으로 정비하면서, 충무공은 유실되고 ‘백범 김구 친필 시비’라는 이름표를 붙인 것 역시 깨어진 상처와 같이 슬픈 자화상이다. 훼손시키며 깨어진 상처나 선양하면서 붙인 비명이나 편향적이기는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alt백범 친필 유묵 '붕정만리'(1947. 元旦:음 1. 1.)(좌) / 진해 남원로터리의 백범 친필 ‘붕정만리’(우)붕정만리(鵬程萬里)와 독립정신(獨立萬歲)2017년 창원시에서 〈백범 친필 시비〉를 정비하면서 까만 오석에 〈백범 김구 연보〉와 〈어록〉, 그리고 김구 친필의 다른 휘호를 새겨 시비 주변에 배치하였다. 〈연보〉와 〈어록〉에도 여러 문제가 있지만, 지면의 제약으로 여기서는 김구의 친필 휘호 〈독립만세(獨立萬歲)〉와 〈붕정만리(鵬程萬里)〉만 언급하고자 한다.     왜 하필이면 〈독립만세〉와 〈붕정만리〉를 선택하였을까? 유추컨대, 김구 하면 일제로부터 독립운동의 상징이니 〈독립만세〉를,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하였으니 〈붕정만리〉를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붕정만리〉의 원본을 추적하면 김구가 1947년 원단(元旦), 즉 음력 1월 1일, 양력 1월 22일에 쓴 것이다. 당시 김구는 이승만과 긴밀한 반탁 연대로 정부수립운동을 추진하였다. 이승만이 도미 외교를 통해서 정부 수립을, 김구는 국내에서 2차 미소공동위원회를 반대하는 반탁운동을 적극 추진하였다. 1946년 11월 30일 창덕궁 인정전에서는 각계각층의 유지들이 모인 이승만 환송회가 개최되었으며, ‘백발노구로 만리붕정으로 도미하게 된 이승만의 장거’를 기원하는 성명서도 발표되었다.      이와 같이 당시 우파에서는 이승만의 도미 원정을 ‘붕정만리’라 찬양하였다. 그리하여 김구의 〈붕정만리〉 휘호는 이승만과의 반탁 연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독보적 의의가 있다. 이승만은 중국을 경유하여 1947년 4월 21일 김포공항으로 귀국하는데, 당시 김구는 ‘이박사환국환영준비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었다.     남원로터리에 새겨진 〈독립만세〉의 원본을 추적해보면 1947년 6월 23일 쓴 것이다. 이날은 단오절이자 미소공동위원회 참여 단체의 등록 마감일이었으며, 보스턴 마라톤대회에서 우승한 서윤복 선수가 귀국하는 날이었다. 이승만과 김구가 연대한 반탁 진영은 서윤복 선수 환영 국민대회를 이용하여 반탁운동을 전개하였으니, 이날에 쓴 〈독립정신〉의 ‘독립’은 일제로부터 독립이 아니라 반탁·반소·반좌파의 독립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요컨대 1947년 전반기 김구의 〈붕정만리〉와 〈독립정신〉은 이승만과의 반탁 연대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유묵이다. 김구의 많은 유묵 중에서 이 두 유묵을 선택하여 돌에 새긴 것은 과연 적절한 것인가? 시비 제목에서는 김구만 강조하더니, 시비를 호위하는 김구의 다른 휘호는 하필이면 이승만과 연대의 상징이라 덧칠한 화장같이 어색하다. alt진해 남원로터리의 백범 친필 ‘독립만세’(좌) / 백범 친필 유묵 '독립만세'(1947. 6. 23.)(우)]]> Mon, 29 Nov 2021 10:23:27 +0000 61 <![CDATA[이달의 독립운동가 연해주 한인사회를 이끌며 독립의 역량을 모으다]]> 글 독립기념관 전시부alt alt권업회 임원록(1911. 12. 19.)(좌) / 「신한촌 전경」, 『권업신문』(1914)(우)러시아 연해주 신한촌에서 권업회가 조직되다한인의 러시아 이주는 1860년대 한국과 지리적으로 인접한 연해주 전 지역으로 점차 확대되었다. 1910년 대한제국 멸망 소식이 전해지자 재러 한인들은 성명회를 조직하여 강제병탄의 부당함과 독립 의지를 알렸고, 성명회 해산 후에는 조국 독립의 장기적인 방략 모색을 위해 1911년 12월 권업회를 조직하였다. 권업회는 한인의 권익 보호와 민족의식 고취에 앞장선 연해주 한인사회의 대표기관이었다. 권업회 부의장 이종호, 권업회 재정을 후원하고 독립군 양성에 힘쓰다  1907년 사립 보성학교 경영 등을 통한 인재 양성에 힘쓰며 국권 회복을 위한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던 이종호는 러시아 연해주로 옮겨와 1911년 권업회 의사부 부의장으로 활약하였다. 특히 권업회 운영 및 『권업신문』 발간에 필요한 비용 대부분을 기부하는 등 권업회의 중요한 재정적 후원자였다. 1914년 권업회가 해산되자 중국 왕칭현으로 이동하여 대전학교를 건립하는 등 독립군 간부 양성에 힘을 쏟았다. 정부는 공훈을 기리어 1962년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alt왼쪽부터『권업신문』 (1912. 5.), 성명회 취지서(1910. 8. 23.), 『해조신문』 창간호(1908. 2. 26.)권업회 총재 김학만, 연해주 한인사회 발전에 힘쓰다19세기 초기 러시아로 이주하여 정착한 김학만은 1907년부터 계동학교, 명동학교 등 한인학교 설립과 운영을 적극 후원하는 등 이주 한인의 권익 신장에 힘썼다. 1910년 한인거류민회 회장으로 당선되었고 일제의 강제병탄에 맞서 성명회가 조직되자 이에 가담하여 취지서를 발표하였다. 1911년에는 권업회 총재로 활동하며 독립운동 기지 개척을 위한 한흥동 건설사업을 적극 추진하였다. 권업회 해산 후에는 1919년 대한노인동맹단원으로 활약하는 등 조국 독립에 앞장섰다. 정부는 공훈을 기리어 2012년 애국장을 추서하였다.권업회 총재 최봉준, 재러한인 민족의식 고취에 앞장서다초기에 러시아로 이주하여 군납업 등으로 자본을 모은 최봉준은 러시아 한인사회 발전을 위해 재정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1908년 러시아 최초 한글신문인 『해조신문』을 창간하여 한인들의 민족의식 고취에 앞장서며 연해주 한인학교 후원에도 힘을 쏟았다. 1911년 권업회에서 총재가 된 그는 『권업신문』 간행을 지원하고, 연추 지방지회에서 의사원으로 활약하였다. 권업회 해산 후에는 1917년 고려족중앙총회 기관지인 「청구신보」 창간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정부는 공훈을 기리어 1996년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alt러시아 한인 배우리가 이미 부모지국을 버리고 남의 나라 땅에 머물러 산 즉, 우리에게 있는 권리를 보전하고 우리가 행할 의무를 더욱 힘쓰면 우리의 사업이 날로 흥왕하고일제 수탈의 현실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최봉준의 『해조신문』 발간사 중(1908)alt]]> Mon, 29 Nov 2021 10:30:22 +0000 61 <![CDATA[아름다운 인연 독립운동 동지로서 서로를 배려한 오영선과 이의순]]> 글 김형목(사단법인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이사) 오영선은 일찍이 구한말  육군무관학교를 나온 우국 장교로 항일 운동에 직접 참가, 임시정부 군무부장이라는 요직까지 오른 영도자이다. 그의 부인 이의순은 이동휘의 딸로 우리나라 여성 애국 운동의 선각자이기도 했다.『명수산문록』중 alt이의순과 오영선 가족사진근대교육으로 민족의식에 충만하다오영선은 중추원 의관을 지낸 오평묵과 고씨 부인의 장남으로 1886년 4월 13일에 태어났다. 본적은 경기도 고양군 한지면 이태원리(현 서울특별시 용산구 이태원)이다. 호는 기윤, 다른 이름은 윤길이다. 별명으로 석농(石濃, 石農)을 사용했다.      오영선은 독립운동 중 이동휘의 둘째 딸 이의순을 만나 혼인하였다. 이의순은 중국 동북지역 명동촌의 명동여학교와 블라디보스토크 한인촌 삼일여학교 등지에서 민족교육에 힘쓰고, 상하이 한인애국부인회에서 활동한 여성독립운동가이다. 그녀의 집안은 할아버지 이승교(일명 이발), 아버지 이동휘, 언니 이인순과 형부 정창빈 등 삼대에 걸쳐 독립운동에 투신한 독립운동 명문가이다. 특히 장인 이동휘는 강화진위대장을 사임한 후 강화도를 중심으로 의무교육을 실시한 대한제국기를 대표하는 교육운동가였다. 중국 동북지역과 러시아 연해주 지역에서 민족 지도자로서 임시정부 초대 국무총리까지 역임했다.  배재학당에서 근대교육 수혜는 올바른 역사의식을 형성하는 자양분이 되었다. 과외활동을 통한 민권·자유·평등 등에 대한 관심은 훗날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든든한 정신적인 지주였다. 오영선은 개성 보창학교(보창학교지교)에서 3년 정도 교편을 잡았다. 이동휘가 설립한 보창학교(전신 육영학교)는 강화도 내는 물론 경기도 개성·장단, 황해도 금천·풍덕 등지에 지교를 설립하는 등 민족교육의 요람지로 자리매김했다.  구국간성이 되고자 교사를 사직한 후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진학하였다. 육군무관학교에 진학하였을 무렵에 군대가 강제로 해산되는 등 학교의 존폐 문제가 대두되었다. 학교가 문을 닫자 일본 도쿄수리학교로 유학을 떠나게 되었다. 2년 후 중퇴하고 선교사 그리어슨(Grierson, R.)이 설립한 함경도 성진의 협신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당시 이동휘는 함경도 각지에서 교회와 사립학교 설립에 매진하고 있었다. 이러한 인연은 장인과 사위라는 가족 관계로 발전하는 중요한 계기였다. 민족교육 시행에 앞장서다이동휘가 북간도로 망명할 무렵 ‘이동휘의 교육생’인 추종자 30여 명도 행동을 같이 했다. 오영선은 삼국전도회와 간민교육회 등에서 설립한 광성학교·동림무관학교·북일중학교에 근무하였다. 관련 인물들은 기독교를 통한 신문화·신사상을 수용하면서 외국 선교사들의 치외법권을 활용하려는 의도였다.광성학교는 중학과와 법률정치과를 두고, 부속으로 여자 야학과와 소학과를 운영하였다. 계봉우는 역사와 지리, 문경은 군사교육과 체육, 윤해와 김립은 법률과 정치를 담당하였다. 개교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법률정치과와 중학과가 폐지되었으나, 사범속성과를 설치하여 졸업생을 배출했다. 당시 상황을 계봉우는 자서전에서 “교사 오영선은 명민하고 넘치는 맛이 있었으며”라고 언급하였다.      1914년 4월에는 이동휘가 나자구에 설립한 동림무관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중국 동북지역은 물론 국내, 연해주 등지에서 유학오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이 무관학교는 군사훈련과 반일 민족독립사상 교양을 기본 목표로 삼았다. 일제 압력으로 폐교될 무렵에는 중국 훈춘현 대황구로 이동하여 북일중학교를 설립하였다. 그는 수학·물리·화학을 가르쳤다. 중국 지방정부와 일제 탄압으로 학교가 폐교되자 활동 무대를 연해주로 옮겼다.  alt오영선 ‘신년의 신각오’, 『독립신문』(1922. 1. 1.)한민족 대동단결을 외치다신한촌의 자치기구인 신한촌민회의 의사부원, 1919년에는 대한국민의회 군사부장으로 활동하였다. 동년 8월 29일에 개최된 ‘병합기념일’에서는 박은식·이발·이의순 등과 함께 연설했다. 한편 임시정부 조직문제와 파리강화회의 대표 파견문제에 대한 회의에도 참석했다. 회의에 참석한 인물은 오영선을 비롯하여 이동휘·김립·윤해·계봉우 등이었다. 회의 결과는 윤해와 고창일이 대한국민의회의 신임장을 가지고 파리강화회의에 파견되었다. 이동휘가 임시정부 국무총리로 취임하자 중국 상하이로 갔다.   오영선은 『독립신문』 신년사 기고문에서 향후 독립운동 방향을 제시했다. 신년의 새로운 각오로 공과 사를 분간할 것, 책임감을 가질 것, 개인의 욕망을 억제할 것, 감정에 따르지 말고 이성적일 것, 타인의 단점이나 결점을 들추지 않을 것, 사물의 진상을 알기 전에 경솔히 평판하지 말 것, 동지의 언사나 행동을 선의로 대할 것 등 이상 7가지였다. 그는 개인들 사이에 화합·믿음·선의를 강조하였다. 이는 당시 독립운동계가 처한 임시정부의 승인, 개조 분쟁 등으로 통합 임시정부가 와해된 상태인 상황과 무관하지 않았다. 오영선은 임시의정원에서 벌어진 국민대표회의 개최 문제에 대해 찬성 측에서 활동하였다. 그는 분열된 임시정부의 문제를 극복하고자 갈등만 계속되는 상황을 매우 우려했다. 국민대표회의가 결렬된 이후 개조파와 창조파는 여전히 반목하는 긴장된 관계였다.      한편 이때를 전후로 오영선은 이동휘와 노선을 달리하기 시작하였다. 김립이 이동휘에게 러시아에서 가져온 자금을 공산당과 관련하여 사용하자고 주장한 반면 오영선·이의순 부부는 김립의 의견에 반대했다. 줄곧 이동휘 계열과 함께 활동하던 오영선이 상하이에 머무르며 다양한 계열의 독립운동가를 만난 사실은 이를 방증한다. 안공근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이동휘의 행동에 대해 “모든 한국인에게 수치가 되고 있다”라고 격한 감정을 드러내었다.        1924년 박은식이 새로운 내각을 꾸리면서 오영선은 12월 17일자로 법무총장을 맡게 되었다. 그는 재임 중 헌법을 개정하기도 하였다. 이듬해 5월에는 임시정부 대표로 이유필과 함께 정의부에 파견되었다. 정의부 중앙행정위원회 위원들을 만나 여러 안을 제시하며 참여를 호소하였다. 몇 가지 사항에 합의하였으나 정의부는 중앙행정위원회와 중앙의회 사이에 의견 충돌이 벌어졌다.      분열과 갈등으로 혼란스러운 독립운동계의 문제를 타개하기 위해 좌우세력이 통일된 전 민족적 대당결성이 추진되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독립운동촉진회를 조직하여 대동단결을 주장하였다. 군무를 맡는 군무장과 이동녕 주석하에 외무를 담당했다.        오명선은 임시정부 외곽단체에서도 활동했다. 대한적십자회는 회장 손정도와 부회장 안정근, 재무원 이유필 등으로 회원은 80여 명이었다. 대한적십자회는 청연서를 신문에 게재해 훈춘사건 등으로 피해 입은 한인사회를 구제하기 위해 의연금 지원을 여러 차례 호소했다. 이사장인 손정도가 만주로 떠나자 그의 후임자로 계속 활동을 이어나갔다.      비슷한 시기에 오영선은 한국노병회에서도 설립 초반부터 활동에 참여하였다. 이 단체는 10년 안에 1만 명의 노병 양성과 100만 원의 자금 모집을 목적으로 삼았다. 다른 활동은 교민단 학무위원으로 활동이다. 교민단은 처음에 자치기관으로 시작하여, 상하이 동포사회의 일반적인 행정 업무가 대부분이었다. 임시정부가 수립된 후에는 임시정부의 지방행정기관과 독립운동 지원 기관으로서 양면적인 기능을 수행했다.       활발하게 활동하던 오영선은 1931년 12월 24일에 신병으로 출석하지 못해 의정원 의원 자격을 상실하였다. 『백범일지』에서는 당시 상황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회고했다. alt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설립한 대한적십자회(1920)대가족 중에 빠진 식구들이 여럿 있으니 슬프고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먼저 상해의 오영선, 이의순-이동휘의 딸- 부부와 그 자녀들이다. 오영선 군은 몸이 불편하여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바람에 대가족에 합류하지 못했다. 몇 년 전에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으나 그때는 이미 상해가 완전히 적에게 함락되어서 어떻게 손쓸 방법이 없었다(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역임한 오영선은 1939년 3월에 사망했고, 이의순은 1945년 5월에 사망했다).급기야 오영선은 임시정부가 항저우로 이동할 때 함께 하지 못하고 상하이에 남아 있다가 지병으로 사망하였다. 정부는 임시정부의 통합을 주도한 오영선의 공훈을 기려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삼대에 걸친 독립운동가 집안에서 태어나다  이의순은 함경남도 단천군 파도면 대성리에서 아버지 이동휘와 어머니 강정혜 사이에 둘째 딸로 태어났다. 본관은 하빈(현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이다.      언니 이인순은 독립운동하는 아버지를 지원하다가 블라디보스토크에 정착하였다. 이인순은 3·1만세운동이 일어났던 11월에 유행하던 장티푸스에 걸려 숨을 거두고 말았다. 아버지를 도와 독립의 선봉장을 자임한 신여성이 열악한 환경으로 27세에 요절한 것이다. 그녀가 숨진 이후 아들 정광우마저 5세의 어린 나이로 역시 장티푸스로 숨졌다. 불행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모자의 죽음을 지켜보았던 남편 정창빈은 이듬해에 1월 27일에 자살하였다.    그들의 죽음을 안타까워한 동포사회는 1920년 1월 17일 낮 2시 상하이 대한애국부인회 주최로 이인순과 김란사(일명 하란사)·김경희 등의 추도식을 열었다. 이때 내빈으로 참석한 안창호·김립·윤현진 등 30여 명은 여성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연해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숨진 이인순의 추도식을 상하이에서 개최한 사실은 그녀의 존재감을 그대로 보여준다. alt임시정부 국무원 기념사진(1919)한인사회 민족의식을 일깨우며 여권 신장에 노력하다  아버지가 강화진위대장으로 부임하자 이의순은 가족과 함께 서울로 이사하였다. 개방적인 집안 분위기로 일찍이 정신여학교에서 근대교육 수혜를 받았다. 일제 강점 이후 가족을 따라 중국 동북지역으로 건너가 국자가에 정착했다. 지린성 허륭현 명동촌에 있는 민족교육의 요람지인 명동학교 교사로 재직하였다. 이의순은 교사로서 정신태·우봉운 등과 함께 학생들의 민족의식 고취에 힘썼다.     이의순은 인근 마을에서 야학을 운영하는 한편 부흥사경회를 개최하는 등 한인 여성들 자부심을 일깨웠다.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주해 신한촌 삼일여학교 교사로 재직하였다. 3·1운동 이후 8월 29일 국치기념일 행사를 부부가 주관했다. 이의순은 “우리는 여자라고 하지만 대한민족이라면 일반적으로 남자와 동등한 권리를 가진 이상 어찌 안이하게 좌시할 수 있겠는가. 국내에서는 많은 여학생이 피를 흘렸는데 해외에 있는 여자들도 어찌 수수방관하고 집안의 안락을 욕심내며 행복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나는 원수의 총칼 아래서 국가를 위해 생명을 바칠 것을 우리들의 행복이라고 믿는다.”라며 여성도 남성과 같이 독립운동에 헌신하자고 호소했다.       채성하의 장녀 채계복과 함께 상하이 애국부인회를 조직하여 회장으로 활동하였다. 이 조직은 남성들이 임시정부를 수립할 때 여성들도 적극적으로 가담하여 독립운동 분위기를 조성하여야 한다는 취지로 결성되었다. 나아가 여권을 신장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또한 독립전쟁에서 활동할 간호부 양성을 위하여 적십자회 조직에도 분투하였다. 그녀는 여동생 예순, 러시아지역 독립운동가 채성하의 딸 계복·계화, 간도애국부인회장 우봉운 등과 함께 대한적십자회에서 활동했다. 특히 채계복은 정신여학교 후배로 러시아 대한적십자회 간호부로서 우리 여성들이 미국적십자사에서 간호 기술을 습득하도록 주선하는 등 적극적이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평소 알고 지내던 동림무관학교를 설립한 오영선과 결혼했다. 아버지가 임시정부와 결별한 뒤에도 계속 상하이에 남아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의순은 1930년 8월 11일 인성학교 교장 김두봉의 부인 조봉원 등과 함께 기존의 여성단체 조직인 상하이 한인부인회를 개조하여 급진적인 상하이 한인여성동맹 조직에 앞장섰다. 그러나 한인사회 여성운동 분열을 일으킬 수 있다는 우려 등으로 상하이 여자청년회를 조직하려는 창립대회 준비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홍커우의거 이후 임시정부는 1940년 충칭에 안착할 때까지 ‘물 위에 떠다니는 이동 정부’였다. 이의순은 남편병간호와 자녀 양육을 하다가 1945년 사망했다. 정부는 공적을 기려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Mon, 29 Nov 2021 10:41:39 +0000 61 <![CDATA[인문학관 광야에서 목 놓아 조국을 노래한 시인 이육사]]> 글 백낙천(배재대학교 인문사회대학장) 이육사는 조국 상실의 시대를 불길처럼 맹렬하게 살면서 강렬한 민족의식을 실천한 독립운동가요, 시대의 아픔을 노래한 민족 시인이었다. 또한 조국 광복의 염원을 초인적 극복 의지를 통해 표현하고, 시련이 오히려 강철처럼 단단한 신념이 된다는 것을 무지개 역설을 통해 형상화한 애국지사였다.  alt이육사저항의 삶을 살다시인이자 독립운동가인 이육사는 1904년 5월 18일 경북 안동 도산면 퇴계 이황 선생을 모신 도산서원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6형제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본명은 원록 또는 원삼이다. 이육사는 퇴계 14대 손으로서 전통적인 유학자의 절개와 가풍을 지닌 집안 배경 속에서 성장하였다. 어렸을 때는 보문의숙이라는 신식 학교를 운영했던 할아버지 이중직으로부터 전통 한학을 배웠다.      12세인 1915년에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가세가 기울어지자 가족들은 대구로 이사하였다. 이곳에서 이육사는 서화가로 명성을 떨치던 서병오 선생에게 그림을 배우기도 하였다. 그리고 17세 때인 1921년에는 영천 출신 안용락의 딸 안일양과 결혼한 후 처가에서 가까운 백학학원에서 1년 동안 공부했는데, 이때 원삼이란 이름을 사용했다. 이후 이육사는 1923년부터 9개월 동안 백학학원에서 교편을 잡기도 했다.     1923년 말 일본 유학길에 올라 1년 정도 공부하고 귀국한 이육사는 1925년에 독립운동가 서상일 선생이 민족 계몽운동을 위해 세운 교육 기관인 조양회관의 신문화 강좌에 활발하게 참여하면서 청년들과 시국을 논하였다. 1925년에는 형 원기, 동생 원일과 함께 대구에서 의열단에 가입하였다.       그러던 1927년 10월 18일 조선은행 대구 지점 폭파 사건이 일어났고, 수사가 미궁에 빠지자 일본 경찰은 대구에서 활동하던 애국지사들을 무차별적으로 체포하였다. 사건에 연루되었던 이육사는 형 원기, 동생 원일과 함께 대구형무소에 투옥되어 1년 7개월 동안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1929년 11월부터 시작된 광주학생운동은 점차 확산되었고, 1930년 1월 대구에서도 동맹 휴업과 일제의 만행을 성토하는 이른바 대구격문사건이 일어나자, 일제는 당시 대구청년연맹 간부였던 이육사를 체포하였다. 그는 이후로도 일생 동안 무려 17번의 옥고를 겪었다.      이렇듯 이육사는 일찍부터 각종 독립운동 단체에 가담하여 항일 투쟁을 전개하였다. 이후 중국을 오가면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1943년 가을 잠시 서울에 왔을 때 일본 경찰에 붙잡혀 베이징으로 압송되었다. 1944년 1월에는 끝내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하고 베이징의 일제 영사관 감옥에서 쓸쓸히 생을 마감하였다. 이후 이육사의 유해는 의열단 단원이자 친척인 이병희가 수습하여 화장했고, 연락을 받은 동생 이원창이 유골을 서울로 가져와 미아리 공동묘지에 안장했다가, 1960년에 고향으로 이장되어 영면에 들었다.     사실 육사라는 이름은 수감 번호에서 유래한 것인데,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었을 때 이육사의 수인번호가 264번이었다. 이에 일제 식민지 지배라는 조국의 식민지 통치 역사를 뒤엎겠다는 의지를 담아 ‘죽일 육(戮)’, ‘역사 사(史)’를 사용한 ‘육사(戮史)’로 바꾸었다. 그러나 이 이름이 너무 혁명적이고 노골적이라 일제의 눈총을 받을 것을 염려한 집안 어른의 조언으로 평평한 산꼭대기를 뜻하는 ‘육(陸)’ 자로 바꿨으며, 이후 자신의 아호를 ‘육사(陸史)’로 하여 작품 활동을 하였다. alt『육사 시집』, 서울출판사(1946)문학으로 일제에 맞서다이육사는 생애 후반에 총칼 대신 문학으로 일제에 저항하였다. 중국을 오가며 항일운동을 하던 그는 1933년 7월 잠시 국내에 들어온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해 9월 ‘육사(陸史)’라는 필명으로는 처음으로 정인보 선생이 주도한 잡지 『신조선』에 시 ‘황혼’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감시와 중국에서의 독립운동 행적으로 또다시 체포되는 등 고초를 겪어야 했다. 일제의 집요한 감시 속에서 이육사의 저항 정신은 매섭게 불타올랐으며, 조국 독립의 헌신적 열정과 인고의 극복 의지를 문학으로 승화시켰다.   1935년부터는 『신조선』에 7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는데, 이후 시조, 소설, 수필, 평론 등 많은 작품을 발표하였다. 1946년에는 유고를 정리하여 서울출판사에서 시집 『육사 시집』이 나왔다.      이육사의 시는 식민지 치하에 민족이 처한 현실을 비분강개하는 소재와 주제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특히 광복의 희망과 민족의 새로운 역사를 광야에서 목 놓아 부르고 있는데, 5연으로 구성된 시 ‘광야’의 4연과 5연을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4연에서는 마치 한시의 한 가락을 연상시키는 높고도 매운 품격을 보여주고, 5연에서는 변형된 자화상인 초인을 통해 도도한 기상과 강인한 독립의 의지를 표현하고 있다.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특히 그의 대표 작품이라 할 수 있는 ‘절정’은 불굴의 지사적 기개와 고도의 상징이 시적 언어의 절제미로 극대화되어 있다. 시 ‘절정’은 전체적으로 일제 치하에서의 고통의 극한을 보여주고 있는데, 3연에서 일제의 억압과 시련이라는 현실적 극한 상황에 대한 파악을 제시한 다음, 4연에서 현실적 공간에서 초월적 공간으로 비상하는 시적 전환을 이루고 있다. 시 ‘절정’의 마지막 4연은 다음과 같다. 즉, ‘겨울’과 ‘강철’로 상징되는 일제 치하의 극한 상황과 단단한 저항 정신이 ‘무지개’라는 역설적 초극 의지로 승화되어 꿈과 희망을 암시하고 있다. 가히 식민지 시절 독립 투쟁과 저항 정신의 극점을 보여주는 저항시의 백미라고 하겠다.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이육사가 남긴 시는 총 36편뿐이다. 그럼에도 그에게 있어 시란, 일제에 저항하고 상실된 조국을 되찾기 위해 기꺼이 고난을 감수하고 초인적 기개를 형상화하여 마침내 그 염원을 달성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진정한 저항시의 표상이라고 할 수 있다.]]> Mon, 29 Nov 2021 10:49:21 +0000 61 <![CDATA[끝나지 않은 독립운동 독립공채, 얼마나 상환되었는가]]> 글 이계형(국민대학교 교양대학 교수) 독립공채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부족한 재정을 메우고자 발행한 채권을 말한다. 독립운동에 필요한 재정은 중국 상하이에 주재한 동포에게 인구세(人口稅)를 부과하거나 국내외 각지에서 오는 군자금으로 충당하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아 궁여지책에서 비롯된 것이 독립공채였다. 임시정부가 1920년 4월부터 이를 시행하였으니 지금으로부터 100년이 넘었다. 발행 당시엔 독립 후 5년에서 30년 이내에 원리금을 갚겠다고 하였는데, 독립한 지 70여 년이 넘은 지금까지 얼마나 상환되었을까? alt1919년 9월 1일 구미위원회가 발행한 50달러 독립공채 1호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독립공채 발행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독립운동 자금을 모으고자 중국 상하이와 미주에서 두 종류의 독립공채를 발행하였다. 전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발행한 원화 표시 채권, 후자는 미주 구미위원부에서 발행한 달러 표시 채권이었다. 원화 채권 액면가는 100원, 500원, 1천 원 등 3종으로 임시정부 초대 재무총장 이시영의 직인이 찍혀 있고 발행금리는 연 5%였다. 달러화 채권은 이승만 임정 초대 대통령 이름으로 발행되었는데 10달러, 25달러, 50달러, 100달러, 1천 달러 등 5종이었고 금리는 연 6%였다. 상환 시 연 단위 복리 이자를 적용키로 했다.      그러나 독립공채를 얼마나 발행했는지, 누가 이를 구매하였는지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주권을 잃은 식민지국의 채권이 국제시장에서 유통될 리 만무했다. 그렇다면 우리 민족 구성원이 대부분 이를 구매했을 테지만, 독립한 후 상환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에 선뜻 나서기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누군가는 독립을 염원하며 기꺼이 이를 구매하였다.      광복 후 1949년 6월 22일자 『경향신문』에 처음으로 ‘독립공채’와 관련한 기사가 보도되었다. 그런데 기사 제목은 “지난날의 독립운동은 이렇게 했다”였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들어섰고, 게다가 발행 주체인 이승만이 다시금 대통령이 되었으나 독립공채를 상환하겠다는 기사가 아니었다. 신문 기사는 25년 전 발행한 독립공채 채권이 발견되었다며, 전북 옥구군(현 군산시) 대야면 산월리에 사는 임영선이 임시정부 요인으로부터 공채를 매입했던 일화를 소개하는 내용이었다. 그 뒤 이승만은 1949년 12월 기자회견에서 독립공채를 가진 자에게 변제하겠다고 언급하였지만, 그것은 주미대사를 통해 외국인에 한한 것이었다. 이것이 실제 얼마큼 이뤄졌는지도 알지 못한다.    독립공채 상환과 관련해서는 『동아일보』 1950년 6월 10일자에 처음 거론되었다. 서울 종로구 명륜동에 사는 안 모 씨(62세)의 남편이 미국에서 구입한 100달러 독립공채를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해 간직해 오다가 재무부를 찾아가 상환해달라고 요청하였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재무부 직원은 법적인 근거가 없다며 그를 돌려보냈다고 한다. 그때 상환되었다면 25만 원 이상이었다고 하니 지금 가치로 환산하면 15억 원이 넘는 큰 금액이었다. 그러나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관련 법 제정은 이뤄지지 않았다. 그 뒤 1953년 1월 구미위원부에서 1919년에 발행한 공채에만 6개월 내로 신고서를 작성하여 외무부 통상국에 제출하면 상환해준다는 방침이 정했을 뿐이다. 임시정부가 발행한 것에 대한 상환은 제외된 셈이었다.  alt1919년 12월 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재무총장 이시영이 발행한 1천 원 독립공채독립공채 상환에 대한 조치1962년 1월 전북 군산의 이병주가 일제강점기 때 땅속에 묻어뒀던 독립공채 1천 원권 3장을 상환해달라고 하면서 변화를 맞는 듯했다. 이는 작고한 아버지 이인식이 40여 년 전 일본 경찰의 눈초리를 피해 간직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발행한 독립공채였다. 이인식은 가산(家産) 1만 석을 팔아 8천 원의 독립공채를 매입하였는데, 3장은 병 속에 넣어 선산에 파묻었지만, 5장은 일본 경찰의 가택수색 당시 발각될 위기에 처하자 화장실에서 찢어버렸다 한다. 남은 3장으로 공채 상환을 청구한 것이다. 그 돈으로 선친의 묘소에 비석이라도 세울 요량이었다. 하지만 5·16 군사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박정희 정권은 ‘임정 공채에 관한 임시특례법’을 만들 것처럼 하고서는 끝내 외면했다. 그 뒤로도 간간이 독립공채를 상환해달라고 요청하는 사례가 있었지만, 근거법이 없어 거절당하기 일쑤였다.     1983년 12월 ‘독립공채 상환에 관한 특별조치법안’이 국회를 통과하면서 비로소 1984년 7월부터 상환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이를 위해 ‘독립공채상환위원회’도 신설되었다. 다만, 특별조치법은 남한에 거주하는 사람이 1984~1987년 이내에 신고한 독립공채에만 상환하도록 규정했다. 그 뒤 1990년대 국교를 맺은 러시아·중국 등 54개국을 고려해 신고 기간을 연장하고(1994~1997년), 중국의 연변방송, 흑룡강신문, 길림신문 등에 ‘독립공채 찾기’라는 광고도 냈다.     하지만 신고 건수가 예상보다 적어 기간을 2000년까지로 늘렸다. 그런데도 그 수는 크게 늘지 않았다. 그만큼 세월이 많이 흘러 당사자들이 작고하였으며, 그동안 분실한 것 또한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후손들 가운데는 독립공채에 관해 전연 모르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간혹 신문에 ‘독립 염원 공채-편지 74년 만에 햇빛’이라는 기사가 실리곤 했다. 하지만 결과는 1차(1984∼1987년) 33건에 4천229만 원, 2차(1994~1997년) 1건에 564만 원, 3차(1998~2000년) 23건에 2억 9천448만 원으로 모두 57건에 3억 4,000여만 원에 불과했다.    신고 기간인 2000년 12월 31일부로 끝난 뒤로는 상환 문의조차 뜸해졌고, 2009년에는 독립공채상환위원회도 없어졌다. 다만 ‘특별조치법’ 조항 가운데 “군사분계선 이북 지역에 거주하거나 미수교국(未修交國)에 거주함으로 인하여 그 신고 기간 내에 신고할 수 없는 자에 대한 신고 기간은 따로 대통령령으로 정한다”는 규정에 독립공채 상환은 아직도 유효하다.     비록 대한민국 정부가 독립하면 5년에서 30년 이내에 갚겠다던 약속은 제대로 지키지 못했지만, 북한 주민들이 가진 독립공채에 대해서 ‘독립하면 상환한다’는 약속을 지킬 수 있기를 바라본다. 그리고 2022년 새해 임인년(壬寅年)을 앞두고 남북한 간에 종전 선언만이라도 이뤄져 가능성이 실현되기를 기대해본다.]]> Mon, 29 Nov 2021 10:55:03 +0000 61 <![CDATA[독립의 발자취 시공간을 뛰어넘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기록]]> 글 편집실 일본군 ‘위안부’ 문제 역사와 피해자의 일생, 피해 증언을 생생히 전달하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시간과 공간, 그리고 증언〉 기획 전시가 대구 희움역사관에서 12월 31일까지 개최된다. 특히 이번 전시는 국내외 많은 인원이 관람할 수 있도록 온라인에서 한국어·영어·일본어 등 3개 언어로 동시에 제공된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alt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말씀해주세요위안부 문제는 1991년 김학순 할머니의 공개 증언을 통해 사회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했습니다. 이전 증언들이 이산가족 상봉 등에 의해 이뤄졌다면 김학순 할머니는 일본의 전쟁범죄를 고발하겠다는 강한 의지가 있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습니다. 그 배경에는 한국 사회의 인권 의식 성장이 있습니다. 전쟁으로 인해 여성들이 겪은 폭력을 알리면서 일본의 전쟁범죄에 대한 사과 요구와 함께 여성 인권에 대한 인식도 한층 성장하게 된 것입니다. 일본군 위안부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중국·대만·인도네시아·네덜란드 등 세계적 문제이기도 합니다. 국가주의적·민족주의적 관점에서만 들여다볼 게 아니라 여성에 대한 국가폭력 문제로 바라봤으면 합니다.전시에 대해 짧게 설명해주세요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첫 번째 공개 증언이 있고, 30여 년이 흘렀습니다. 그리고 아직도 힘겹게 살아가고 있는 위안부 피해 생존자들의 생애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50여 년간 피해자들의 가슴에 응어리진 기억과 뒤엉킨 생애를 풀어낼수록 그 고통은 헤아리기 힘든 정도였습니다. 그들은 지옥 같은 삶 속에서도 스스로를 다잡기 위해 노력했던 몸부림과 집념을 잊지 않고 밝혀주었습니다. 이번 전시의 특징이 있다면요?이번 전시는 피해자 삶과 증언에 영원성을 부여하고 전시 관람의 문턱을 낮추기 위해 다양한 기술력을 동원하였습니다. 특별히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생애를 추적·정리하고 그들의 삶과 증언을 시공간의 연결을 통해 입체적으로 구현하였으며, 가상현실(VR)과 인공지능(AI) 등으로 콘텐츠화해 생생한 느낌을 전달받을 수 있도록 했습니다. 특히 3개 국어로 제공하는 온라인 전시는 특별 누리집을 통해 국내·외 어디서나 언어의 불편함 없이 관람할 수 있도록 했으며, 가상현실(VR) 기술을 적용해 전시장의 현장감 또한 생동감 있게 전달할 계획입니다.이번 기획전이 특별한 이유는요?이번 전시는 차츰 희미해져가는 피해자들의 시공간과 증언을 그대로 담았다는 데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며 잊힐 수 있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아픔을 생생하게 전달하고, 앞으로 오래도록 기억해나갈 계기를 마련하고 싶었습니다. 사실 과거에 비해 생존 피해자들의 증언은 늘어났지만, 한편 많은 분들이 세상을 떠나기도 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피해자의 증언을 부정하는 수정주의자들도 나타났습니다. 일본의 지속적인 방해에도 불구하고 국내 및 국제사회의 이해를 돕고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사람들의 다양한 노력이 이어지고 있는데, 서로 다른 시간과 다양한 공간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들도 소개하고 싶었습니다. 피해자들의 증언이 희미해지는 지금, 그들의 목소리에 다시금 귀 기울여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위안부 문제에 대한 인식이 어떻게 바뀌어야 할까요?위안부 문제는 평화, 사회적 정의, 여성 인권 등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위안부 문제에는 진보와 보수의 구분이 없어야 하며, 과거를 이야기하며 그들의 고통을 재현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변하는 상황에 대해 인식을 가져야 합니다. 미래세대는 이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을 통해 스스로 역사적 교훈을 해석하고 사회적 정의를 실현해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나아가 세계시민의 일원으로서 위안부 문제에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가르치고 올바른 역사의식을 가질 수 있도록 이끌어야 합니다.마지막으로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다면요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은 슬픈 과거 속에서도 자신을 지켜온 분들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번 전시를 통해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생애와 사라지지 않는 증언을 여실히 느꼈으면 합니다. 아울러 그들의 목소리를 영원히 남길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을 생각하는 기회로 다가가길 바라며, 보편적인 여성인권 문제까지 고민해보는 시간이 되기를 희망합니다.영원히 기억될 피해자 할머니의 생생한 증언전시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과거·현재·미래’ 주제로 구성되었다. 역사적 사료, 사진, 연표, VR·AI 기술로 구현한 피해자의 증언 등 다양한 위안부 문제 관련 자료들이 전시된다. 특히 고(故) 문옥주 할머니의 생전 인터뷰 기사가 실린 신문과 대중에게 공개되지 않았던 피해 증언도 포함되어 있다. alt1. 역사의 벽/ 일본군 위안부 운동 및 위안부 제도와 관련 있는 다양한 역사적 사실, 특히 개별 사건 중 큰 의미가 있고 많은 사회적 반향을 일으킨 사건을 중심으로 소개하고 있다. 먼저 피해자 할머니와 다양한 국내외 시민단체들의 동향을 소개한다. 동시에 피해자의 법적 구제 및 명예 회복과 피해 사실을 알리기 위한 노력, 국제사회에서 있었던 주요 사건을 정리함으로써 과거부터 지금까지의 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 보다 현실감 있는 사실을 소개하고자 프로젝션을 이용한 기법을 활용해서 관람객들이 지난 30년을 좀 더 실감 나게 느낄 수 있도록 했다. alt2. 증언의 벽/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실제 증언을 사진과 영상으로 접할 수 있다. 80여 년 전, 인생이 짓밟힌 그날부터 오늘까지 피해자들의 용기가 담긴 외침을 들을 수 있다. 피해자들은 기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목이 메어오지만, 그럼에도 그 길고 괴로웠던 날들을 세상을 향해 상세히 외치고 있다. 그렇기에 피해자 할머니들의 증언은 더욱 귀하고 감사하다. 6가지 주제로 이야기하고 있는 피해자들의 활동과 증언을 관심 있게 보고 듣고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할머니들에게는 큰 힘이 될 것이다. alt3. 노래를 사랑한 할머니들/ 이곳에서는 위안부 피해자의 노래(음성)를 들을 수 있다. 때로는 위안부 피해자 노래가 간접적인 증언 자료가 되기도 한다. 노래 가사에는 그들의 기억이 드러나기도 하고, 그들이 겪었던 공간과 시간이 투영되어 나타난다. 고(故) 문옥주 할머니는 증언을 기록해준 모리카와 씨와의 교감을 위해서인지 많은 노래를 증언하였는데, 할머니가 기억해낸 노래는 모리카와 씨의 증언집에 소개되어 있다. 여기에는 할머니가 강제 연행된 여러 전장과 국가의 리듬도 포함되어 있다.alt4. 얼굴의 계단/ ‘얼굴의 계단’은 10여 개 국가의 위안부 피해자와 그들의 활동 및 국내외 피해자 지원 단체, 다양한 후원자의 얼굴을 담은 400여 장의 사진을 모은 조형물이다. 이들은 모두 위안부 문제 해결이라는 같은 목표를 위해 각기 다른 시대와 다른 장소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힘써온 동지들과 같다. 이 낱장의 사진에는 각기 다른 장소의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alt5. 할머니의 방/ 이곳은 할머니들의 가장 사적인 공간이다. 가상현실(VR) 기술을 통해 피해자 할머니들이 살아온 공간과 사연이 깃든 의미 있는 물건들을 소개한다. 또 이들의 아픔을 공감하며 여성인권운동가로서 일어선 피해자의 일상을 들여다보고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였다. 대부분의 할머니들은 임대주택에 거주했기 때문에 돌아가신 후에는 그 공간이 쉽게 휘발되어 남지 않은 상황이다. 현재 생존해있는 할머니의 방을 조심스럽게 소개하면서 그곳에 담긴 이야기를 최대한 담으려 노력하였다. 또한 고(故) 문옥주 할머니의 증언을 바탕으로 할머니들이 거쳐 가신 역사적 장소들을 짚어보고, 피해자가 살아온 시간과 공간을 입체적으로 연결해보았다.alt6. 영원한 증언/ 영원한 증언에서는 생존 피해자 할머니와 대화를 주고받을 수 있는 실감·체험형 증언 콘텐츠를 만들어, 시대와 장소를 넘어 피해자와 함께 공유하고 연대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였다. 일본군 위안부 생존자들의 녹화된 증언과 인공지능(AI) 기술을 활용하여 할머니들과 방문객이 직접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전시 프로젝트이다. 이곳에서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인 이용수 할머니와 이옥선 할머니를 만나볼 수 있다. 시범 전시를 통해 대화 과정에서 오류를 수정하고 한국과 미국 등에도 전시할 예정이다.]]> Mon, 29 Nov 2021 11:30:22 +0000 61 <![CDATA[세계 산책 라틴아메리카 독립투쟁의 빛과 그림자]]> 글 박구병(아주대학교 사학과 교수) 18세기 말 페루와 아이티의 선례에 이어 19세기 초에 본격적으로 전개된 라틴아메리카 여러 지역의 독립투쟁은 지배 세력인 페닌술라르에 대한 크리오요의 도전이었다. 대부분 신생 공화국의 수립으로 이어진 라틴아메리카의 독립투쟁은 18세기 말 미국의 독립혁명이나 19세기 초 유럽의 자유주의 혁명과 유사한 궤적의 변혁 운동이었다. alt멕시코의 미겔 이달고라틴아메리카 독립투쟁의 원인라틴아메리카는 다른 제3세계 지역에 비해 식민화뿐 아니라 탈식민화의 시기가 무척 일렀다. 베네딕트 앤더슨이 『상상된 공동체』에서 적절히 정리한 대로, 19세기 초에 본격적으로 전개된 라틴아메리카 여러 지역의 독립투쟁은 ‘크리오요(criollo, 아메리카 태생의 백인) 민족주의’의 표명이었다. 3세기에 걸친 식민 시대에 아메리카에서는 페닌술라르(peninsular, 이베리아 반도 출신의 백인)와 크리오요 사이의 구분이 점차 뚜렷해졌다. 1570년 무렵 페닌술라르는 에스파냐령 아메리카에 거주하던 약 12만 명의 백인 중 절반 이상을 차지했지만, 19세기 초에는 약 320만 명에 이르는 백인 중 15만 명에 지나지 않았다. 페닌술라르가 식민지 정부와 군대, 교회의 요직을 독점한 반면, 부왕(식민지의 최고 행정 책임자)으로 임명된 약 170명 중 크리오요는 4명뿐이었고 전체 주교들의 15퍼센트 정도였다. 이런 크리오요의 배제나 식민 권력의 비대칭적 배분이 에스파냐령 아메리카 독립투쟁의 주된 원인이었다.무시당하고 잊힌 아이티의 흑인 봉기사실 원주민들의 저항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1780~1783년 페루 부왕령에서 원주민 호세 가브리엘 콘도르칸키(투팍 아마루 2세)가 마지막 잉카 투팍 아마루의 계승을 표방하면서 약 8만 명의 추종자들을 모았지만, 그 저항은 크리오요의 지지를 이끌어내지 못하고 식민 당국에 의해 진압되었다. 한편 1791년부터 프랑스의 식민지 생도맹그(현재 아이티)에서 일어난 흑인 혁명은 크리오요의 지지가 없었음에도 아메리카에서 미국에 이어 두 번째로 독립의 위업을 달성했다. 사탕수수 재배의 중심지이자 프랑스의 금고로 간주된 생도맹그에서 노예 출신의 흑인 지도자 투생 루베르튀르가 프랑스 혁명과 유럽의 전쟁을 틈타 독립투쟁을 이끌었을 때, 다른 지역의 크리오요들은 이를 과격한 흑인 폭동으로 치부했다. 그리하여 1804년 아이티라는 이름의 새로운 독립 국가가 선포되었지만, 오랫동안 외교적 승인 없이 그 존재는 무시당했다. 생도맹그의 흑인 봉기나 프랑스 혁명의 급진화가 크리오요 독립투사들에게 두려움을 불러일으켰다면, 미국 혁명은 저항의 지도자들이 적절하게 통제한 모범적 사례로 받아들여졌다. 누에바 에스파냐(현재 멕시코)와 페루뿐 아니라 노예제 문제가 심각했던 누에바 그라나다(현재 베네수엘라와 콜롬비아)의 크리오요 유력자들은 독립투쟁이 정치적 차원을 넘어 과격한 사회적 소요와 인종적 대립으로 확산될지 모른다고 우려했기 때문에 원주민이나 유색인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부담스러워했다. 특히 페루의 크리오요들은 식민 시대의 막바지 단계까지 그런 도전에 직면하기보다 질서와 위계서열을 보증하는 에스파냐 식민 당국의 지배를 감수하려는 경향을 보였다. 이런 배경 속에서 페닌술라르에 맞서는 크리오요의 독립투쟁은 점차 유색인들이 에스파냐인들의 권력을 차지하지 못하도록 예방하는 보수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1780년대 페루와 1790년대  생도맹그처럼 아래로부터의 봉기가 재현되지 않을까 염려하면서 누에바 그라나다의 프란시스코 데 미란다는 1799년에 독립투쟁의 전략을 이렇게 정리했다. “우리 앞에는 미국 혁명과 프랑스 대혁명이라는 두 가지 사례가 있다. 이제 첫 번째를 신중하게 모방하고, 조심스럽게 두 번째를 피해 가자.” 하지만 미란다의 바람은 여지없이 무너졌고 누에바 그라나다는 1810년부터 10년 넘게 엄청난 유혈 충돌에 휩싸였다.크리오요 주도의 보수적 독립투쟁누에바 에스파냐의 사례 또한 이런 전반적인 흐름을 잘 보여주었다. 1810년 9월 16일 ‘돌로레스의 함성’을 이끈 크리오요 사제 미겔 이달고는 에스파냐인들의 재산 몰수와 원주민 공납 폐지를 요구했다. 오늘날까지 멕시코의 상징으로 남아 있는 갈색 피부의 과달루페 성모상을 앞세우고 독립투쟁의 신호탄을 쏘아 올린 이달고의 봉기는 1811년 3월 그의 처형으로 막을 내렸고 적지 않은 원주민 지지자들이 흩어졌다. 곧 메스티소(혼혈인) 사제 호세 마리아 모렐로스가 등장해 식민 당국에 대한 항거를 이어갔지만, 그 역시 크리오요들의 지원을 받지 못한 채 1815년에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이렇게 아래로부터의 저항이 좌절되고 몇 해 동안 식민 당국의 반(反)혁명이 지속된 뒤 독립투쟁의 주도권은 아구스틴 데 이투르비데에게 넘어갔다. 원래 크리오요 출신 군 장교로서 이달고의 봉기를 진압하는 데 가담했던 이투르비데는 식민 당국의 약화를 틈타 식민지 민병대를 지휘하고 1821년 2월 왕정의 수립, 가톨릭의 국교 지정, 에스파냐인과 아메리카인의 동등한 대우를 내세우면서 독립을 선포했다. 그 과정과 요구 사항은 이달고와 모렐로스의 독립투쟁에 비해 온건하고 제한적이었지만, 독립 후 새로운 정치 체제의 수립을 둘러싸고 크리오요 사이에 충돌이 발생했다. 1822년 아구스틴 1세로 즉위한 이투르비데는 공화정 지지자들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혀 이듬해 폐위되고 처형당했다. 공화정 지지자들은 미국 헌법과 에스파냐의 1812년 자유주의적 헌법을 참고해 1824년 새로운 헌법을 공포하고 연방 공화국을 출범시켰다.     정치적 분리를 이뤄낸 각 지역의 독립투쟁은 경제적 기반을 뒤흔들 만큼 엄청난 손실과 희생을 초래했다. 광산과 대농장들의 생산량은 독립투쟁 이전과 비교할 때 3분의 1에 지나지 않았다. 특히 에스파냐의 통치 역량과 인적·물적 자원이 집중되어 있던 누에바 에스파냐의 독립투쟁은 원주민들의 저항에서 비롯되어 10년 동안 전체 인구의 10퍼센트에 해당하는 약 60만 명의 사망자를 낳았다. 미국의 경우 1789년 연방 공화국의 출범 이후 20여 년 동안 유럽의 전쟁과 그에 따른 자국 생산품의 수요 증대에 힘입어 경제적 이득을 누릴 수 있었지만, 유럽이 정치적 안정기에 접어든 1820년대에 독립하게 된 라틴아메리카 국가들로서는 그와 유사한 기회를 포착할 수 없었다. 더욱이 원주민이나 유색인(메스티소, 흑인 노예와 자유민)들을 배제한 채 크리오요 유력자들이 주도한 라틴아메리카의 탈식민화는 국가의 독립이라기보다 걸출한 개인과 집단의 독립처럼 여겨졌다. 공식적인 독립 이후에도 19세기 말까지 여러 지역에서 군사력과 경제력을 보유한 크리오요 사이에 갈등이 끊이질 않았다. 이런 갈등이 정치적 혼란과 외세의 개입을 유발하는 동안 식민 시대와 다를 바 없이 군대, 교회, 대농장 체제라는 권력의 기반이 유지되었기 때문에 원주민이나 유색인들에게 독립 후 체제는 ‘새로운 노새에 올라탄 똑같은 기수’처럼 보일 뿐이었다. 결국 라틴아메리카 독립투쟁의 특성은 보수적 성향의 크리오요 민족주의의 표명과 원주민이나 유색인들의 배제로 요약할 수 있다. 아울러 18세기 말~19세기 초 라틴아메리카 독립투쟁의 배경과 전개 양상을 대서양 세계의 혁명과 연결시켜 이해해야 한다. 사실 라틴아메리카 여러 지역의 독립투쟁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이베리아 반도 침입이 촉발한 에스파냐의 정치적 위기와 맞물려 있었다. 대부분 신생 공화국의 수립으로 이어진 라틴아메리카의 독립투쟁은 18세기 말 미국의 독립 혁명이나 19세기 초 유럽의 자유주의 혁명과 유사한 궤적의 변혁 운동이었다. 따라서 라틴아메리카의 독립투쟁은 대서양 양안의 연계와 동조(同調)의 역사 속에서 파악되어야 할 것이다.]]> Mon, 29 Nov 2021 15:16:49 +0000 61 <![CDATA[기념관은 지금 독립운동가와 후손들을 응원합니다]]> 정리 편집실  사진 봉재석 독립기념관을 이끌어 가는 당신이 자랑스럽습니다. 오늘도 앞장서서 묵묵히 열 일하는 열정 인재들! 오늘 우리가 푸른 하늘 아래에서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것은 선열들이 흘린 피와 땀 덕분입니다. 이번 호에서는 독립운동가와 그 후손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할 수 있도록 앞장서 응원 캠페인을 시작한 주인공을 만나봅니다. alt‘독립 잇다’ 캠페인에 대해 설명해주세요 독립기념관은 광복 76주년을 맞이하여 독립운동가들의 노력과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해 ‘독립 잇다! 응원 챌린지’를 시작하였습니다. 독립운동가들이 일제의 잔혹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목숨을 바쳤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하여 선대의 사진과 자료를 몰래 태워야만 했던 독립운동가 후손들의 삶은 어땠을까요? 독립기념관은 독립운동가 후손들이 일상생활 속에서 더 많은 예우와 혜택을 누릴 수 있도록 독립 잇다! 캠페인을 기획·추진하고 있습니다.  ‘독립 잇다’ 캠페인을 추진하게 된 계기가 있나요?2021년 어느 날 한 통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귀가 밝지 못하고 말씀도 어려운 80대 할아버지였습니다. 당신의 부친께서 독립운동을 펼치다가 만주에서 돌아가셨는데, 일제의 감시를 피해 부친의 사진과 관련 자료를 모두 불태워야만 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약 10년 전 다행히 부친의 독립운동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 자료를 구했으나, 직접 해석할 수도 없고 누구에게 의뢰해야 할지도 모른 채 가지고만 있었다고 합니다. 이 모든 것이 집안이 가난해 배우지 못한 자신의 탓이라고 한탄하시며, 죽기 전에 꼭 자료에 어떤 내용이 담겨 있는지 알고 싶다고 하소연하셨습니다. 안타까운 사연을 듣고 자료를 직접 해석해 본 결과 놀랍게도 자료 속에는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이 대구의 관공서를 파괴하는 의열투쟁을 추진하다가 피체된 사실이 담겨 있었습니다. 할아버지께 자료 내용과 독립운동가 서훈 신청 방법을 자세히 알려드리며 “감사하다”는 말을 수십 번 들었습니다. 하지만 마음 한편에 답답함은 해소되지 않았습니다. 배우지 못한 자신의 탓이라던 어르신의 이야기에서 알 수 있듯이, 독립운동가들은 자신의 목숨과 재산을 나라 되찾기에 바쳤고, 그 후손들은 제대로 된 경제생활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광복이 되었지만 상대적 빈곤은 계속되었고, 제대로 된 교육도 받을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안타까운 사연이 많은데 독립운동가 후손들을 조금이나마 도울 수 있는 방법은 없을지, 우리가 독립운동가들의 노력과 희생을 일상생활에서 되새길 수 있다면 어떨까 하는 고민을 하게 되었습니다.       할아버지와의 인연 이후 독립유공자와 그 후손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을 주는 방법을 어떻게 마련해야 할까? 하는 화두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독립기념관 인근에 있는 공무원연금공단 상록리조트 관계자에게 코로나 위기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기관 사정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 아이디어가 떠올라 독립유공자들에게 할인 혜택 제공을 제안하였습니다. 상록리조트 입장에서도 새로운 수요자 창출을 통한 코로나 위기 극복 방안이 되겠다며 동의하였습니다. 이후 양 기관의 협력이 급물살을 탔습니다. 4월 9일 공공기관 최초로 독립유공자 예우 사업 공동 추진을 위한 MOU를 체결하였고, 독립유공자와 독립운동사 자료를 기증해주신 분들의 가족이 상록리조트 천안점과 수안보점을 이용하시면 50% 상당의 할인 혜택을 제공하기로 합의하였습니다.        독립유공자와 독립운동사 자료 기증자들의 예우를 위한 최초의 MOU를 체결하면서 확신이 생겼습니다. 대한민국에는 독립유공자의 희생정신을 함께 기리고자 하는 기관과 기업들이 있다는 것과 이 사업을 통해 코로나 위기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기관과 기업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는 것을. 이후 독립유공자 예우 사업을 함께할 의향이 있는지 여러 기업에 문의하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때로는 절망도 하였지만, 함께할 의사가 있다는 기업들이 하나 둘 등장하면서 희망을 보았고, 독립 잇다! 캠페인을 추진하게 되었습니다.  alt할아버지의 사연이 담겨 있던 일제의 보고 문서 「폭탄 습격을 계획한 불령선인 검거에 관한 건」(1920. 2. 25.)현재까지 어느 정도 성과가 있었나요?독립 잇다! 캠페인은 광복 76주년을 맞이한 올해 8월 15일부터 시작해 12월 15일까지 4개월간 추진합니다. 캠페인은 두 가지 도전으로 진행됩니다. 하나는 〈국민의 도전〉으로 독립운동가와 후손들을 응원하는 ‘함성 채우기’입니다. 다른 하나는 〈독립기념관의 도전〉으로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이 일상생활에서 더 많은 예우와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민간기업을 대상으로 ‘후원사를 유치’하는 것입니다.        독립운동가와 후손들을 응원하는 함성 채우기 도전은 캠페인이 제대로 홍보되지 않아 국민들의 참여가 활발하게 이뤄지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비록 소수일지라도 참가자들의 진정한 응원으로 독립운동가와 그 후손들이 큰 힘을 얻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독립운동가 후손들의 일상생활 속 예우 확산을 위한 후원사 유치는 공무원연금공단 상록리조트, 천재교육, 프로스펙스, 민행 24, 코어웍스, 앤씰, 젬, 젬마커뮤니케이션스와 MOU를 체결하는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독립기념관은 향후 국가보훈처 및 광복회와 협의를 거친 후 2022년 1월부터 후원사들이 약속한 각종 여가시설 이용료 할인, 생활 물품 구매 시 할인, 창업 지원 등의 혜택을 제공할 예정입니다.  진행을 하며 아쉬웠던 부분은요?독립 잇다 캠페인 운영을 위한 대국민 홍보와 후원사 유치 과정이 이렇게나 복잡하고 어려운 것인지 몰랐습니다. 많은 시행착오를 겪어야만 했습니다. 더구나 캠페인 기획과 운영을 거의 한 사람이 담당하다 보니 체계적으로 진행할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독립 잇다 캠페인에 보다 많은 국민들이 참여하지 못한 것 같아 아쉽습니다.  앞으로 바라는 점이 있다면요?앞으로도 저는 주 업무 이외에도 독립운동가 후손들의 예우 확산을 위한 노력을 함께 해 나갈 예정입니다. 아울러 우리가 독립운동의 역사적 사실을 기억하고 일깨울 수 있도록 소중한 자료를 기증해주신 자료기증자들의 예우 확산에도 노력하겠습니다. 우리 국민이 현재와 같은 자유와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것은 일제의 가혹한 식민통치에 맞서 독립운동으로 나라를 되찾았기에 가능했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 속에는 우리가 상상하기도 어려운 독립운동가들의 노력과 희생이 있었다는 것도, 독립운동가의 후손이라는 자부심 하나로 모진 감시와 고통을 이겨내 온 분들이 있었다는 사실도 기억해 주셨으면 합니다.         향후 계획에 대해 알려주세요독립운동가 후손들이 후원사가 제공하는 각종 혜택을 손쉽게 받을 수 있도록 모바일 플랫폼(앱) 개발을 추진해보려고 합니다. 모바일 플랫폼 개발이 완료되면 독립유공자·자료기증자들과 그 후손들이 현재 살고 있는 지역 주변에서 받을 수 있는 각종 혜택을 손쉽게 확인하고 이용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후에도 계속될 후원사 유치에도 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합니다. 또 규모가 큰 기업들뿐만 아니라 소규모 가게를 운영하는 업체까지도 후원사로 동참해주시리라 생각합니다. 일방적인 후원이 아니라 독립운동가 후손들은 할인 혜택을 받으면서, 중ㆍ소상공인들은 판매 촉진의 효과를 누릴 수 있으리라 기대하고 있습니다.     캠페인 참여 방법     01 독립기념관 홈페이지 → ‘독립 잇다!’ 캠페인 배너 클릭 → 독립 잇다 영상 보기02 독립유공자 및 후원 응원 영상 촬영하기(20초 이내) 03 인스타그램에 필수 해시태그와 함께 전체 공개로 게시하기 ※필수 해시태그: #독립기념관 #독립잇다04 게시 완료 후 인스타그램 게시물에 [참여 완료] 댓글 작성 및 링크 공유하기 alt독립기념관과 공무원 연금공단 상록리조트 MOU 체결(좌) / 독립 잇다 캠페인 포스터(우)]]> Mon, 29 Nov 2021 15:23:31 +0000 61 <![CDATA[독자 이벤트 이번 호 독립기념관을 읽고 빈칸을 채워주세요. 꼼꼼히 읽다 보면 정답에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alt alt               아이콘 클릭하면 퀴즈 정답을 보낼 수 있습니다.]]> Mon, 29 Nov 2021 15:30:47 +0000 61 <![CDATA[들어가며 여성 독립운동]]> alt대한독립여자선언서슬푸고 억울하다 우리 대한 동포시여 우리나라 이 반만년 문명 역사와 이천만 신성민족으로 삼천리 강토를 족히 자존할 만하거늘 침략적 야심으로 세계의 공법 공리를 무시하는 저 일본이추세적 만성으로 조국의 흥망 이해를 불고하는 역적을 협동하야 압박 수단으로 형식에 불과한 합방을 성립하고 제반 음독한 정치 하에 우리 이천만 형제자매가 노예와 희생이 되어 천고에 씻지 못할 수욕을 받고 모진 목숨이 죽지 못하야 스스로 멸망할 함정에 가처서 하로가 일년 갓흔 지리한 세월이 십여 년을 지나스니 그동안 무한한 고통은 다 말할 것 업시 우리 동포의 마음속에 품은 비수로써 징거할 바로다(중략)우리도 이러한 급한 때를 당하야 겁나의 구습을 파괴하고 용감한 정신을 분발하야 이러한 여러 선생을 본바다 의리의 전신갑주를 입고 신력의 방패와 열성의 비수를 잡고 유진무퇴하는 신을 신고 일심으로 이러나면지극히 자비하신 하나님이 하감하시고 우리나라 충혼 열백이 명명 중에 도으시고 세계 만국의 공논이 업지 아니할 거시니 우리는 아모 자저할 것 업스며 두려 할 것도 업도다 사라서 독립기 하에 활발한 신국민이 되어 보고 죽어서 구천지하에 이러한 여러 선생을 조차 수괴함이 업시 즐겁게 묘시는 거시 우리의 제일 의무가 아닌가간장에서 솟는 눈물과 충곡에서 나오는 단심으로써 우리 사랑하는 대한 동포에게 엎드려 고하오니 동포 동포여 때는 두 번 이르지 안이하고 일은 지나면 못하나니 속히 분발할지어다 동포 동포시여「대한독립여자선언서」(1919)간도에 있는 애국부인회가 우리나라 독립을 선언한 글.]]> Mon, 03 Jan 2022 09:52:34 +0000 62 <![CDATA[톺아보기 여성독립운동가의 활동 저평가된 역사 기록은 잠들어 있다]]> 글 심옥주(한국여성독립운동연구소 소장) 억겁의 시간이 쌓여 역사가 된다. 역사학은 접근하는 시각에 따라 달리 해석된다. 하나는 사상사학(思想史學)이고 또 하나는 현상사학(現象史學)이다. 이 두 시각이 혼재하지 않고서는 역사 흐름과 그 궤를 파악하기 힘든 분야가 있다. 자료의 부족, 후손의 부재, 지역 연구의 한계 등 제한된 연구 환경을 뚫고 뿜어 나오는 역사의 줄기, 결코 외면할 수 없는 이야기가 바로 한국 어머니의 역사일 것이다.   alt한국혁명여성동맹 창립총회 기념사진(1940. 6. 17. 중국 충칭)아무리 여자인들 나라 사랑 모를소냐쪽진 머리의 여성들이 밥 짓는 부뚜막을 벗어나 붓을 들고 전쟁터로 함께 나섰다. 여성들은 역사의 질곡 속에서 국가가 위급한 상황에 처하면 자발적으로 나섰다. 임진왜란의 행주산성에서 부녀자와 관군이 혼연일체가 되어 왜군을 물리친 사례나,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단발령이 시행되자 친일 내각을 타도하기 위해 일어난 의병운동에서 격분의 힘을 보태었던 여성의병운동에서도 알 수 있다. (중략) 아무리 유순한 백성이라 한들 가만히 보고만 있을 줄 알았단 말이냐 (중략) 만약 너희 놈들이 우리 임금님, 우리 안사람들을 괴롭히면 우리 조선의 안사람들도 가만히 보고만 있을 줄 아느냐. 우리 안사람도 의병을 할 것이다.  ‘안사람 의병단체’를 이끌었던 윤희순과 춘천 지역 부녀자 30여 명은 군자금 모금과 의병활동에 참여했다. 1907년 정미의병이 전개되자 부녀자들은 놋쇠와 구리를 구입하여 무기와 탄약을 제조·공급했고, 정보 수집 활동, 병기 제작, 군사 훈련, 부상자 치료, 군자금 모금 등에 나섰다. 저마다 국민개병이라는 구국의식은 의병 가사와 국경을 넘은 독립운동으로 이어졌다. 만주와 연해주 및 간도 지역에서 살을 파고드는 차가운 바람을 함께 견디며 3대에 걸쳐 독립정신을 이어온 힘, 그 가운데 여성의 희생과 치열함이 있다.       같은 해 국채 1,300만 원으로 국가 경제가 일본에 예속되는 급박한 상황에서 여성들은 ‘경고아 부인동포라’는 격문을 공고하고 국가 위기를 알렸다. 1907년 2월 23일 대구 남일동패물폐지부인회의 알림은 전국 여성의 의연활동에 불을 지폈다. 양반가 부인부터 기독교 여성·부실·교사·여학생·기생·상인·기녀·여승·농민 부인·상인 부인 등이 참여했다. 전국에서 조직된 여성국채보상운동 단체는 공식 단체 29개, 비공식 단체 17개로 여성 구국 의지를 실천할 수 있는 사회 통로가 열린 셈이었다.  alt(좌측부터) 박에스더, 차미리사, 김란사1세대 여성 지식인, 독립운동에 뛰어들다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된 뒤, 해외 외교관은 부인과 가족을 동반하고 입국했다. 1885년 언더우드를 비롯한 아펜젤러·톰슨·마틴 등 선교사 가족의 입국은 한국 사회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최초 여성교육기관인 ‘이화학당’이 설립되었고, 남대문 근처 상동교회에 쓰개치마를 쓴 여성들이 교회 야학당으로 향했다. 그렇게 서양 여선교사와 한국 여성들은 함께 사회 장벽을 무너뜨렸다. 종교 앞에 남녀 구분의 경계가 허물어지면서 인간 존중의 시각이 스며들었다. 또 교육의 기회 앞에서 신분과 나이, 혼인의 경계를 초월한 행렬이 이어졌다.        문명 진보와 개화, 사회 변화를 꿈꾸던 여성들은 남녀동권의 물음을 제기하는 1세대 여성 지식인으로 성장했다. 선교사의 지원으로 초기 미국 유학길에 올랐던 신여성은 사회 각 분야에 길을 열었다. 박에스더·차미리사·김란사를 비롯하여 세계 일주에 나섰던 나혜석 등은 1세대 신여성이었고 부인들이었다.       ‘섭섭이’에서 ‘미리사(Millisa)’로 불린 차미리사도 중국에 이어 미국 유학에 나섰다. 1908년 5월 27일 상항 즉, 샌프란시스코에서 발족된 최초 재미한인 여성단체 ‘한국부인회’는 1919년 ‘대한여자애국단’ 조직의 초석이 되었다. 김란사는 1900년 미국 오하이오주 웨슬리언대학에서 문학사를 취득하고, 이화학당 총교사로 부임하여 학생들에게 애국정신의 불을 지폈다. 그렇게 1세대 여성 지식인들은 독립운동의 길로 뛰어들었다.  교육을 통해 독립의 꽃이 되다대한제국기 학부차관은 1909년 장로교와 감리교에서 대학교 1교, 신학교 각 2교, 남녀 중학교 19교, 남녀 소학교 783교, 소학생 110,040명으로 증가하는 한국 교육의 현상에 주목했다. 유독 눈길을 끄는 것은 평양·서울·인천·부산을 시작으로 전국으로 확산된 여학교 설립이다. 1920년 이전에 사립 여학교는 90여 개교에 달했고, 공립여학교는 10개교가 설립되었다. 교육을 받는 여학생들의 등장은 사회에 진출하는 신여성과 의식 있는 여성 지식인의 증가를 의미했다.        1919년 3·1운동 전개 과정에서 여성의 참여 수는 확연히 증가했다. 2·8독립선언에 참여한 여성 유학생의 귀국과 함께 급물살을 탄 만세운동 준비는 교사와 학생들의 결사 의지 실천으로 이어졌다. 3월 1일 거사를 앞두고 종로 청년회관에는 시국강연회가 이어졌고, 비밀 연락을 받은 남녀 중학생들이 발길을 옮겼다.  어제는 조선의 독립운동이 시작된 날입니다. 남학생들이 크게 운동하고 있는데 우리 여자들이 그대로 바라만 보고 있을 수 없습니다. 여학생들도 운동을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남녀 구별이나 노소 구분 없이 혼연일체가 된 만세운동에서 여학생들은 평양 숭의여학교 송죽결사대·개성 호수돈여학교 호수돈비밀결사대·이화학당 이문회·공주회 등 비밀결사대 조직으로 응답했다. 여성 해방을 주장한 여학교·여학당·여자야학회·부인야학·부인강습회 등의 일원들은 만세 현장에 몸을 실었고, 그 행렬은 국내에서 해외로 이어졌다. alt1. 여성독립운동가 김배세, 신마리아, 박에스더 alt2. 신마리아의 학생 지도용 원고 및 기록물(좌) / 3. 신의경의 서대문형무소 옥중 편지(우)여성독립운동가의 활동, 유물을 통해 기억하다일제강점기는 국권 및 인권 침탈의 역사였다. 침탈 역사의 무게에 저항 대열에 섰던 여성들 그리고 삼대에 걸쳐 독립운동의 길에 나섰던 여성독립운동가들의 유물이 남아있다.      먼저 1909년 신마리아·김배세·박에스더 세 자매의 사진이다.(사진 1) 1세대 신여성이었던 세 자매가 평양 기홀병원에서 함께 찍은 사진이 교회에서 발견되었다. 서울 정동의 가난한 선비 김흥택이 선교사 아펜젤러의 집에서 일을 하면서 자녀들도 기독교의 길에 들어섰다. 신마리아는 정신여학교에 진학하여 교사로 애국계몽의 불씨를 일구었고, 박에스더는 한국 최초 근대여성병원 보구여관의 여의사로 부임했다. 그녀 곁에서 꿈을 키웠던 김배세는 세브란스 간호원 양성학교의 최초 학생, 한국 최초의 간호사로 이름을 알렸다. 이들의 도전은 독립을 향한 불씨가 되었다.      이어 1916년 여성독립운동가 신의경의 모친 신마리아의 학생 지도용 원고와 여성 교육에 힘썼던 기록물, 함께 남겨진 그녀의 사진은 독립정신이 다음 세대로 계승되었다는 것을 확인시켜준다.(사진 2)     더불어 1919년 대한민국애국부인회 간부였던 신의경은 여성 단체 검거 과정에서 형무소에 투옥되었는데, 옥중에서 조모와 모친에게 쓴 편지가 100년이 지나도록 당시 상황을 선명히 전해주고 있다.(사진 3)     이들 외에도 국내 여성 독립운동 관련 유물과 자료들은 기념관과 종교 시설을 중심으로 잘 보존되고 있지만 그 면면의 가치는 주목받지 못하고 있다. 독립을 향한 여성의 몸짓이 기록, 서신, 문서, 선언서로 남겨져 역사의 기록으로 남겨져 있다는 것. 저평가된 그들의 기록물이 아직도 곳곳에 남아 있음을 기억하자.]]> Mon, 03 Jan 2022 10:03:27 +0000 62 <![CDATA[만나보기 대한의 애국부인들 3·1운동을 향해 집결하다]]> 글 심옥주(한국여성독립운동연구소 소장) 제국에서 민국으로 가는 길목에서 일제강점기는 근대화의 조류를 투쟁의 물결로 바꾸는 치명타였다. 전국에서 만세의 물결을 이루었던 3·1운동은 만세 시위 과정에서 여성들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전국의 교사와 여학생이 비밀결사대를 조직하고 지역 여성과 기생, 부인들도 독립운동에 당당히 뛰어들었다. 이처럼 독립운동을 실천하고 독립자금을 지원하기 위해 국내외 애국부인들은 부인회 단체를 조직하여 결사 활동을 했는데, 이를 애국부인회(大韓愛國婦人會)라고 불렀다.    alt대한독립여자선언서애국부인, 대한독립여자선언서를 발표하다일본 경찰은 한인 여성의 애국활동에 일찍이 주목했다. 1907년 국채보상운동 과정에서 전국에서 의연금 모금 활동을 펼치기 위해 여성 단체 46개가 조직되었다. 양반가 여성부터 유지 부인·부실·기생·개화 여성·기독교 여성·일반 부인·여승·여학생 등 끝이 없는 여성 구국 행렬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1919년이 되어 3·1운동 과정에서 애국부인들은 선언서를 발표하여 독립운동 참여를 공식화했다.        순 한글로 작성된 선언서 「대한독립여자선언서」는 시국을 걱정한 미국 및 러시아에 거주하는 애국부인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작성한 8명의 선언서로, 제작 시기는 1919년 2월로 추정된다. 김인종·김숙경·김옥경·고순경·김숙원·최영자·박봉희·이정숙 등의 서명과 함께 일본 침략의 부당성과 불합리성, 국가 위기에서 여성의 역할, 동포의 분발을 호소하는 내용을 담았다. 일반인이 쉽게 공감하도록 순 한글로 작성되었으며, 주 배포 대상은 여성이었다.         일본 외무성 기록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上海地方 1」에는 ‘4월 8일 러시아로부터 길림성 연길현 국자가(局子街)에 송부된 대한독립여자선언서 1,000매를 국자가에서 간도에 배포하고 있다’는 보고 내용과 같이, 일본은 한인 여성의 애국활동을 주시하였다.   애국부인 단체, 3·1운동에서 모이고 분투하다3·1운동을 기점으로 한인 여성들은 애국단체의 필요성을 자각했다. 3·1만세운동 이후 형무소에 투옥되는 애국지사의 행렬에 망연자실하기도 잠시였다. 형무소에서 자행되는 일제의 잔악한 고문과 형벌을 버텨내고 있는 수감자와 재감자를 바라보며, 구국 의지를 모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1919년 서울에서 조직된 혈성단애국부인회(血誠團愛國婦人會)는 3·1운동 직후, 형무소에 수감된 여성 수감자 및 재감자를 지원하고 그들 가족의 생활을 구제할 목적으로 조직되었다. 이들은 수감된 이들의 사식 및 필수품을 차입하고 그 가족들의 생활을 구제하기 위해 모금 활동을 펼쳤다.       같은 시기에 조직된 대조선독립애국부인회(大朝鮮獨立愛國婦人會)는 부인 단체 결집의 필요성과 독립운동 자금 조달의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경성여고보 출신 김원경의 주도로 최숙자·임득산·임창준·김원경·백성현·김희옥·김희열·경하순 등이 참여했다. 이들은 독립자금을 모금하기 위해 자수품을 만들어 판매 대금으로 헌납하는 등 모금 활동에 나섰다. 대한애국부인, 전국 13도에 지부를 설치하다1919년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을 앞두고 부인 대표를 파견해달라는 연락을 받은 애국부인단체는 혈성단부인회와 대조선독립부인회를 통합하여 ‘대한민국애국부인회(大韓民國愛國婦人會)’로 명칭하였다. 대한민국애국부인회는 전국 13도 도청에 도지부를 설치하고 임원을 선출했다. 총재 오현관·부총재 김희열·회장 오현주·부회장 최숙자·평의원 이정숙·서기 김희옥·고문 이병철·지방통신원 장선희·해외통신원 경하순 등이 임원이다. 지방의 도·부·군에 지부를 설치하고 지부장을 선임했다.     이들은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국내 독립운동가의 연락을 도모하고, 해외 망명지사와 그 가족들 간의 연락을 취하는 연락책 역할, 회원의 의무금과 독립자금 모금 활동, 해외 독립운동가 가족의 구제 활동, 비상시 전위부대로 활약하고 국내외 밀사 및 독립운동가를 연결하는 역할을 했다. 하지만 초기 회장이었던 오현주의 밀고로 조직원들이 체포되어 끔찍한 수난을 당했다. alt평양 대한애국부인회 사건, 『동아일보』(1921. 2. 27.)평양 대한애국부인회 100여 명, 비밀결사를 조직하다1920년 11월 『대련신문』에 실린 「대한부인결사체포(大韓婦人結社逮捕)」 기사에는, ‘평양에서 100여 명에 달하는 여성들이 비밀 결사인 대한애국부인회를 설립하고 임시정부에 군자금 2,000여 원을 모집해서 보냈는데, 대부분의 여성들을 일망타진하여 체포했다’는 기사가 실렸다.     대한애국부인회는 평양 일대에서 장로파 애국부인회와 감리파 애국부인회가 통합된 조직이다. 장로파 애국부인회는 1919년 6월 한영신의 발기로 조직되었다. 회비 및 군자금을 모집하고 모집된 금액을 임시정부로 보내거나 독립운동 단체를 후원하는 활동을 했다. 감리파의 애국부인회는 박승일·이성실·손진실·최순덕 등이 임시정부를 지원할 목적으로 조직한 단체였다. 하와이 대한부인구제회, 선언서를 배포하다1919년 3월 15일 하와이 각 지방의 여성 대표 41명은 호놀룰루 국민회 총회관에 모여 ‘대한부인구제회’를 결성했다. 초대 회장은 손마리아를 비롯하여 김마주리·김보배·김유실·김복순·송마다·백인숙·정혜린·안득은·정마터 등으로, 같은 해 11월 ‘대한부인구제회 장정’을 만들었다. 이들은 61×79cm 크기의 대한독립선언서 포스터 3,000장을 컬러로 제작·판매하였다. 이후 그 수익금은 3·1운동 과정에서 피해를 입은 애국지사 가족들을 지원하는 명목으로 쓰였다.  alt하와이 대한부인구제회 증서(좌) / 대한독립선언서 포스터(우)미국 대한여자애국단, 독립의연금을 모금하다1919년 3·1만세운동 소식에 미국 본토에서 신한부인회와 새크라멘토 한인부인회가 연합하여 북미지역 부인회 통합운동이 촉발되었다. 동년 8월 5일에는 다뉴바 신한부인회, 로스앤젤레스 부인친애회, 새크라멘토 한인부인회, 샌프란시스코 한국부인회, 윌로우스 지방부인회 등 네 곳의 단체 대표자들이 다뉴바에 모여 합동을 결의하고 결성된 조직이 ‘대한여자애국단’이다. 한인 여성들은 의연금을 모금하여 중앙총회로 50~400달러를 보냈고 ‘부인애국단’으로 기부 행렬은 줄을 이었다. 1919년 3월 24일부터 7월 31일까지 약 150명의 여성들이 독립운동자금을 기부했고, 이후 모금된 독립의연금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국내로 보내졌다.  alt대한여자애국단 창설 17주년 기념(1936)(좌) / 대한여자애국단 쿠바 마탄사스 지부(1938)(우)멕시코·쿠바로 이어진 대한여자애국단1919년 6월 23일 한인 여성 34명이 모여 대한여자애국단 지부 성격의 멕시코 대한부인애국단이 조직되었고, 1938년 쿠바에도 대한여자애국단 지부가 만들어졌다. 마탄사스, 하바나, 메리다, 까르데나스에 각 지부가 조직되면서 독립자금 모금 활동이 전개되었다. 쿠바에서 조직된 대한여자애국단 지부 가운데 마탄사스 지부는 ‘묵규 여자애국단 마탄사스(맛단시스)’ 강연회를 열어 회원 간의 정보 교류와 독립의식을 고취시키는 활동을 이어나갔다. 애국부인의 독립정신이 국내외를 넘나들다1919년 국내외 조직된 애국부인 단체는 13개에 이른다. 이들은 독립운동을 지원하고 결사 활동, 사상 활동, 보호 활동 등 목적을 분명히 하였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자발적으로 조직되었고 순행적으로 독립운동을 시작했다. 전국 곳곳에서 조직된 애국부인 단체는 국내를 넘어 하와이, 미주 본토, 중국, 만주, 멕시코 등으로 국경을 넘어섰고, 애국 실천은 끝이 없었다.]]> Mon, 03 Jan 2022 10:12:17 +0000 62 <![CDATA[이달의 독립운동가 일제강점기 항일운동에 앞장선 제주 하도리 해녀들]]> 글 독립기념관 전시부alt제주해녀항일운동의 주역, 하도리 해녀들19세기 중엽부터 일본인 어부는 제주도 연안으로 들어와 해산물을 남획하는 등 해녀들의 어로활동을 방해하였다. 이에 해녀들이 극심한 피해를 호소하자 1920년 제주 유지*들은 해녀들의 권익 보호를 위해 해녀어업조합을 설립하였다. 그러나 1930년대 일본인 제주도사가 조합장을 겸임하면서 조합의 성격이 점차 어용화**되자 하도리 해녀들은 1932년 제주해녀항일운동을 주도하였다. 제주해녀항일운동은 여성들이 전개한 제주 최대 규모의 항일투쟁이자 어민항쟁이었다. *  유지(有志)마을이나 지역에서 명망 있고 영향력을 가진 사람** 어용화(御用化)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권력 기관 등에 영합하여 행동함 alt하도보통학교 야학강습소 제1회 졸업 기념사진(1931)_국가보훈처 제공(좌) / 제주해녀항일운동기념비(우)해녀회로 단결한 하도리 해녀들, 해녀어업조합의 횡포에 맞서다      하도보통학교 야학강습소에서 민족교육을 받으며 일제 식민지 지배의 부당함을 인식하게 된 부춘화·김옥련·부덕량은 이때 키운 항일 의식을 바탕으로 제주해녀항일운동을 주도하였다. 이들은 해녀회를 조직하여 1931년 6월부터 채취한 생산물의 가격을 강제로 낮추고 해산물 채취 금지 협박 등을 진행한 해녀어업조합을 규탄하는 항의서를 제출하고, 주변 마을 해녀들을 규합하는 활동 등에 앞장섰다. 활동이 점차 조직화되면서 1931년 12월 부춘화·김옥련·부덕량 등은 해녀 대표로 선출되어 직접 투쟁을 계획하였다. alt「가련한 해녀의 운명」, 『동아일보』 (1920. 4. 22.)(좌) / 「18개조 요구하며 300여 명 해녀 시위」 『조선일보』 (1932. 1. 14.)(우) alt제주해녀항일운동이 전개된 세화5일장터(좌) / 「해녀 삼백여 명, 다쿠지 제주도시에게 항의」, 『조선신문』 (1932. 1. 16.)(우)10,000여 명의 제주 해녀들, 일제에 맞서 직접 투쟁을 전개하다1932년 1월 7일 1차 시위운동을 전개한 하도리 해녀들은 해녀어업조합의 착취를 성토하며 구좌면사무소로 행진 후 면장에게 요구 조건 해결을 약속받고 해산하였다. 그러나 약속이 지켜지지 않자 새로 부임한 제주도사의 순시***가 있던 1월 12일, 제주 곳곳의 해녀 10,000여 명이 세화리 오일장에 결집하여 2차 시위를 전개하였다. 해녀들은 독립만세를 외치며 제주도사를 포위한 후 직접 협상하여 ‘일본 상인 배척’ 등 요구 조건을 약속받았다. 그러나 며칠 뒤 일제는 해녀들을 체포하기 시작하였고, 그 과정에서 부춘화·김옥련·부덕량은 일제 경찰에 붙잡혀 미결수로 6개월간 옥고를 치루었다. 정부는 공훈을 기리어 2003년 부춘화·김옥련에게 건국포장, 2005년 부덕량에게 건국포장을 추서·수여하였다.***순시(巡視)돌아다니면서 사정을 살핌우리 민족이 힘이 없어 일제에게 압박받고 해녀들이 착취당하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어. 그 뿐이야.제주해녀항일운동 참여 동기에 대한 김옥련의 증언 중alt]]> Mon, 03 Jan 2022 10:20:42 +0000 62 <![CDATA[독립운동 사적지 제주 해녀 항쟁 시위 현장]]> 정리 편집실   alt 부춘화·김옥련·부덕량 흉상 제주도해녀조합 수탈에 대항한 제주 해녀들 1932년 1월 7일 부춘화(25세)·김옥련(23세)·부덕량(22세) 등이 주도하여 벌인 1차 시위가 세화 오일장에서 이루어졌다. 이후 구좌면 해녀조합 지부장(구좌면장 겸임)이 해녀 대표들의 요구사항을 접수하고, 1월 12일 구좌면을 방문하는 제주도사에게 알려 해결해주겠다는 약속을 했다.        이에 1월 12일 구좌면 종달리·하도리·세화리 해녀들과 정의면 오조리 해녀 등 700여 명이 연두막동산에 집결하여 약속 이행을 촉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연두막동산에 집결한 해녀들은 호미와 빗창을 휘두르고 만세를 부르며 세화 오일장으로 행진하였다. 세화 오일장에 도착한 해녀들은 제주도해녀조합에 대한 불평과 함께 죽음으로써 항쟁하자는 다짐을 했다.      구좌면과 정의면 각 리별로 20여 명의 해녀 대표를 선출하고 요구 조건을 결정할 즈음, 정찰 중이던 해녀로부터 구좌면사무소를 방문했던 제주도사가 막 돌아가려고 한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이윽고 시위대는 즉시 그곳으로 몰려가 차를 타려고 하는 제주도사를 포위했다. 해녀 대표와 제주도사의 면담 결과, 제주도사는 해녀들의 요구를 일부 수용하겠다고 약속했다. 이에 따라 지정 판매 폐지, 경쟁 입찰에 의한 공동판매 부활, 미성년자와 40세 이상 해녀조합비 면제 등의 요구사항이 관철되었다. 이날 연두막동산에 집결하여 이루어진 해녀 시위는 규모가 가장 컸던 만큼 제주도사와의 담판을 통해 요구 조건을 일부나마 관철시킬 수 있었다. alt 연두막동산 1932년 1월 12일 제주도 구좌면과 정의면 지역 해녀들이 제주도해녀조합의 수탈에 대항하며 일으킨 2차 제주 해녀 항쟁 참가자들이 집결해 시위를 벌였던 곳이다. 현재 제주해녀항쟁 기념공원이 조성되어 있으며, 해녀박물관이 건립되어 있다. 또 1998년 8월 15일 건립한 ‘제주해녀항일운동기념탑’이 세워져 있다. 기념탑 우측에는 ‘부춘화·김옥련·부덕량’ 3인의 흉상이 세워져 있다. 주소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구좌읍 해녀박물관길 26  위치 고증 : 『조선일보』 1932년 1월 24일자에 ‘세화경찰관주재소 동쪽 2정쯤 되는 네거리에 종달, 오조 해녀 대략 300명과 하도 해녀 대략 300명, 세화 해녀 40명이 일시에 동남북으로 모여’라고 보도하고 있는데, 세화경찰관주재소 동쪽 2정쯤 되는 네거리가 현재 연두막동산에 해당된다. alt 부춘화의 집 1932년 1월 제주 해녀 항쟁 당시 해녀 대표로 구좌지역 해녀들의 권익 향상과 생존권 투쟁에 선도적 역할을 했던 부춘화가 살았던 곳으로, 하도리마을 내 도로변에 위치하고 있다. 현재 지붕과 문 등이 개량되었다. 주소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구좌읍 문주란로 26  위치 고증 : 제주 구좌읍사무소를 방문하여 토지대장을 확인하고, 위치를 확정하였다. alt 세화오일장 터  1932년 1월 7일 제주도 구좌면 세화리 오일장에 모인 구좌면 하도리·연평리(우도)·세화리 해녀들이 제주도 해녀조합의 횡포에 대항해 해녀들에 대한 처우 개선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인 곳이다. 현재 과거 장터의 모습은 없어지고 공터로 변해있다. 주소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구좌읍 세화리 1457-1 위치 고증 : 『조선일보』 1932년 1월 24일자 기사에 관련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현재 ‘세화오일장 터’ 표지석을 통해 위치를 확인하였다. ]]> Mon, 03 Jan 2022 10:26:39 +0000 62 <![CDATA[아름다운 인연 독립운동 명문가를 일군 신건식과 오건해]]> 글 김형목(사단법인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이사) 신건식과 오건해는 중매로 결혼하였으며, 신건식이 먼저 상하이로 망명 후 독립운동에 매진하였다. 오건해는 1926년경 딸 신순호를 데리고 중국으로 건너가 신건식과 함께했다. 부부는 그들 자신이 독립운동가였을 뿐만 아니라, 딸 신순호와 사위 박영준, 형 신규식과 조카 신형호, 사돈 박찬익까지 모두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alt가족사진(오건해, 딸 신순호, 신건식)개화기에 중앙정계로 진출하다신건식은 1889년 2월 13일 충청도 문의군 동면 인차리(현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가덕면 인차2길 4-24)에서 신용우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다른 이름은 환(桓)·두흥(斗興) 등이며 호는 삼강(三岡)이다. 본관은 고령(高靈)으로 고려시대 검교군기감(檢校軍器監)을 지낸 신성용을 시조로 하고 있다. 조선 초기 중앙무대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그의 가문은 조선 중기에 청주로 낙향하여 재지사족으로서 확고한 지위를 형성했다. 지리적으로 상당산(上黨山) 동쪽에 위치하여 흔히 산동(山東) 신씨라고도 한다. 집안은 남인 계열로 영조대의 무신란 이후 중앙 관직에 나아가지 못했다. 고종이 즉위한 뒤 흥선대원군에 의한 과감한 인재 등용으로 재기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이러한 상황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중앙에 출사한 문중 인사들은 개화에 빨리 적응하는 등 문중에 신문화를 확산시켰다. 산동 문중의 유능한 청년들은 신학문 수학과 중앙정계에 대한 진출을 꿈꾸며 서울로 올라갔다. 대표적인 인물은 신규식(申圭植, 1879~1922)·신채호(申采浩, 1880~1936)·신흥우(申興雨, 1883~1959) 등이었다. 둘째 형 신규식은 고향에 문동학원·덕남사숙·산동학당 등을 설립하여 민족의식을 일깨웠다. 1908년에는 문중 내 근대교육을 지향하는 영천학계를 조직하는 등 민족교육을 위한 든든한 밑거름을 만들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신건식도 YMCA에서 운영하는 외국어학교를 졸업하고 근대적인 사고를 갖춘 개화인사로 성장하게 되었다.       형 신규식은 상하이에 독립운동 기반을 닦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둥지를 틀 수 있도록 만들었다. 초기 임시정부를 이끈 인물이며, 동생 신동식도 향리에 남아 임시정부 충청북도 조사원으로 활동하였다. 문중에서 배출한 독립유공자만 해도 12명에 달하니 가히 독립운동의 산실이라고 할 수 있다. alt박달학원에서 신성모·신규식·신건식상하이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뛰어들다신건식은 형 신규식을 따라 상하이로 망명하여 저장성 항저우 의약전문학교를 졸업했다. 그는 형이 주도하던 동제사와 대동보국단에 참여하였다. 동제사는 신규식을 비롯해 일찍이 상하이로 진출하여 근거지를 확보한 박은식·김규식·신채호·홍명희·조소앙·문일평·조성환 등이 민족운동을 위해 결성한 독립운동 단체이다. 동제사는 최전성기에 300여 명의 회원을 확보할 정도로 상하이 지역 독립운동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이 단체는 ‘동주공제(同丹共濟)’ 즉 ‘한마음으로 같은 배를 타고 피안(彼岸)에 도달하자’는 뜻으로, 표면적으로 우리 동포들의 상부상조를 위한 조직임을 내걸었다. 실제로는 국권 회복 곧 독립국가 건설이 궁극적인 목표였다.      동제사는 상하이에 본부를 두고 중국 내 각 지역, 구미와 일본 등지에 지사를 설치하여 동포 청년들의 민족교육에 심혈을 기울였다. 국내에서 망명해 오는 청년들에게 강습소를 마련하여 중국어를 가르쳤다. 또한 중국이나 구미 등지로 유학을 주선하는 등 인재 양성에 노력하였다. 하지만 언어 문제로 이 사업을 진행하기 어렵게 되자 상하이 프랑스 조계 내 명덕리에 박달학원을 설립하였다. 신건식은 박달학원에 참여하여 민족교육에 앞장섰다. 박달학원은 독립운동의 중추가 될 젊은 인재 양성에 혼신을 기울였다. 실제로 졸업생들은 항일운동의 선봉에서 맹활약했다. 1915년에는 신규식과 박은식 등이 결성한 대동보국단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대동보국단은 ‘완전 평등’의 이상 세계를 이룩하려는 동양의 전통적 사상인 대동사상과 박은식이 창건한 대동교가 기본 이념이었다. 대동보국단에서 활동은 대종교 신자로서 인연이 크게 작용했다. 일제 탄압으로 대종교 총본사가 중국 동북지역으로 이전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상하이에 서도본사(西道本司)를 설치하는 데 일익을 담당하였다. 그는 형 신규식, 조완구·박찬익 등과 대종교 교회를 세워 민족주체성 확립에 앞장섰다. 단군이 지상에 내려온 지 216년 만에 하늘로 올라간 일을 기념하는 날인 3월 15일 어천절(御天節)을 기념하는 행사도 거행했다. 대종교와 관련된 행사는 민족정신 보존과 항일운동 등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상하이에서 형과 같이 한 활동은 향후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위한 준비 기간이었다. alt신건식 체포 기사, 『매일신보』(1921. 11. 6.)중국군 장교에서 임시정부 요인이 되다신건식은 1921년 정보 수집과 군자금 모집을 위하여 국내로 몰래 들어와 임시정부와 연락을 취했다. 상하이로 다시 돌아가던 중 신의주에서 미행하던 일본 경찰에 붙잡혀 신의주감옥으로 압송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그는 신병 치료를 이유로 낸 병보석이 허가되자, 서울에 머물며 동지들과 상하이로 탈출을 협의하였다. 그러나 상하이 망명 도중 다시 체포되어 청주로 압송되었다. 1년 뒤 석방된 그는 3개월간 치료 후 마침내 다시 망명하는 데 성공했다. 곧바로 저장성 육군형무소 군의관으로 임명되어 근무하게 되었다. 이듬해에는 중국군 중교(중령)로서 항저우 군의학교 외과 주임에 임명되자 조국의 독립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전력을 다하였다.     1937년 중일전쟁이 터지고 중국 대륙이 전화에 휩싸이자, 임시정부는 안정적인 근거지가 필요하였다. 신건식은 딸 신순호와 함께 배를 타고 우창으로 이동하였다가 다시 기차를 타고 후난성 창사로 이동하였다. 1940년 충칭에 도착한 그는 시내에서 30km 떨어진 투차오(土橋) 한인촌에서 부인·딸 등과 함께 모처럼 단란한 가정을 꾸렸다.     그는 1939년 임시의정원 제31회 회의에서 충청도 대표의원으로 선임된 이후 1945년 광복될 때까지 입법 활동을 통하여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지원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1941년에는 임시정부 재무부원으로 부족한 재정 문제 해결에도 진력하였다. 2년 후에는 임시정부 재무부 차장에 임명되었다. 특히 그해 열린 제35회 임시의정원에서 상임위원회 분과위원 제3과(재정예산결산)위원으로 맡은 일에 충실했다. 1945년 열린 제38회 임시의정원에서도 상임위원회 제3과(예산결산)위원으로 활동했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임시정부 요인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한국독립당에서 1944년 3월 감찰위원에 선임되기도 하였다. 이렇듯 1945년까지 임시정부의 재정 확충과 항일 독립운동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alt신건식과 사돈 박찬익독립운동가들의 삶을 보살피다오건해(吳健海, 1894. 2. 29~1963. 12. 25)는 중매로 신건식과 부부가 되었다. 고향에서 어른들을 모시고 생활하다가 1926년경에야 남편이 있는 중국으로 이주하였다. 중국에서 활동하는 독립운동가들이 안정적으로 생활할 수 있도록 뒷바라지를 맡았다. 특히 1938년에는 ‘남목청사건’으로 총상을 입은 김구를 지극 정성으로 간호하였다. 이동녕과 사돈인 박찬익 등 임시정부 요인들 살림살이도 성심성의로 돌봤다.     아울러 한국혁명여성동맹 설립을 주도하였다. 이 단체는 1940년 6월 16일 충칭에서 결성되어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을 지원하고 한국인 청소년들에게 민족의식을 일깨우는 등 조국 독립을 앞당기고자 노력했다. 1942년에는 한국독립당 활동에 의욕적으로 참가했다. 이들 부부는 자신들이 독립운동가로서뿐만 아니라 딸 신순호와 사위 박영준, 형 신규식과 조카 신형호, 사돈 박찬익이 모두 독립운동가로서 활동할 수 있도록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alt신건식의 묘딸과 사위가 독립운동의 맥을 잇다신건식과 오건해 부부의 독립운동 정신은 외동딸인 신순호에게로 이어졌다. 그녀는 7세에 일선(逸仙)소학교에 입학해 공부하면서 윤봉길 의사 추도식을 참관했다. 중국인 교장의 “수억 중국인이 못했던 일을 2천 명의 한국 사람이 했다”는 추도사를 듣고 크게 감명을 받았다.      신순호는 후일 독립운동가인 박영준의 아내가 되었다. 박영준은 임시정부 법무부장 등의 요직을 두루 역임한 박찬익의 아들이다. 신순호는 박영준과 함께 한국광복진선 청년공작대 일원으로 활동하다가 결혼하여 부부의 인연을 맺었다. 이들의 인연은 박영준이 17세 때 아버지를 찾아 상하이로 온 후 신순호의 집에 한동안 머물면서 시작되었다. 박찬익이 가족과 떨어져 투병 중일 때 신순호와 그녀의 어머니가 보살펴 줄 정도로 집안끼리도 매우 가까운 관계였다.           윤봉길의 훙커우공원의거 직후 임시정부는 상하이를 떠나 여러 지역을 거쳐 마침내 충칭에 도착하였다. 8년여에 걸친 오랜 피난생활에서 벗어난 임시정부는 충칭에 정착하면서 정부의 조직과 체제를 재정비하였다. 무장 조직인 한국광복군의 창설이 추진되기 시작한 것도 이때였다. 임시정부는 광복군을 창설하기 위해 당시 만주 독립군 출신 군사 간부들과 중국의 육군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중국군에 복무하고 있는 한인 장교들을 소집하여 총사령부를 구성하였다. 1940년 9월 17일 충칭의 가릉빈관에서 한국광복군총사령부 성립전례식이 거행되었다. 총사령부에는 여성대원들도 있었다. 신순호를 포함하여 오광심·김정숙·지복영·조순옥·민영주 등 6명이 광복군의 창설요원이었다.          여성광복군은 한인들을 대상으로 병력을 모집하는 초모활동과 광복군의 활동상을 대내외에 알리는 데 앞장섰다. 국내외 동포들의 참여와 지원을 촉구하는 선전활동에 주력했다. 그녀는 광복군 총사령부 심리작전연구실에 배속되어 방송 원고를 작성하거나 충칭의 국제방송국에서 대적 심리전인 선전 활동을 담당하였다.        사위인 박영준은 아버지 박찬익과 함께 부자 독립운동가로 유명하다. 박영준은 1940년 9월 한국광복군이 창설되자 제3지대에 배속되어 지대장인 김학규를 도왔다. 1945년에는 제3지대의 제1구대장 겸 훈련 총대장을 맡는 등 독립투쟁의 최전선에서 활동하였다.      정부는 공적을 기려 신건식에게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 오건해에게 2017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그의 묘소는 당초 고향인 가덕 인차리에 마련되었으나, 2004년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으로 이장되었다.]]> Mon, 03 Jan 2022 10:35:55 +0000 62 <![CDATA[끝나지 않은 독립운동 ‘신정’이란 말을 쓰면 안 되는 이유]]> 글 이계형(국민대학교 교양대학 교수) 2022년 새해가 밝았다. ‘검은 호랑이의 해’라고 한다. 달력을 보면 1월 1일은 하나같이 ‘신정’이라 쓰여 있다. 한국민속대백과사전에는 ‘신정’을 “태양력에 따른 설날로 전통적인 세시풍속인 음력설을 대체하기 위하여 도입된 명절”이라 풀이하고 있다. 신정이 음력설을 대체하는 양력 명절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정의가 올바른지 생각해 볼 문제이다.  음력설의 기원우리가 양력을 사용하게 된 것은, 음력 1895년 11월 17일을 1896년 1월 1일로 하면서부터이다. 이런 의미에서 연호를 ‘건양(建陽)’이라 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이후 우리의 오랜 전통인 명절 설은 어떻게 되었을까?      양력을 사용하기 전 우리는 으레 ‘음력 1월 1일’을 세수(歲首), 원단(元旦), 원조(元朝), 원일(元日)이라 하여, 새 옷으로 갈아입고 조상님께 차례를 지냈으며 일가친척이나 웃어른들께 세배를 하였다. 이렇듯 국가에서 양력을 사용하기로 정했지만, 수천 년 내려온 우리 민족의 중요한 세시풍속 설을 바꾸지는 못했다. 더욱이 당시 사람들은 양력보다 음력을 일상생활에서 사용하였다. 다만 양력 1월 1일은 새해 첫날이라 해서 ‘세수’, ‘원단’이라 바뀌었다.     이런 가운데 『독립신문』 1899년 2월 15일자에 “대한 신민들이 양력으로 이왕 과셰들을 하고 또 음력으로 과셰들을 하니 한 세계에 두 번 과셰한다는 말은 과연 남이 붓그럽도다”라고 하여 이중과세(二重過歲)의 문제점을 지적하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음력설을 폐지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1906년 통감부가 들어서면서 일제의 입김이 거세지고 일본처럼 양력설을 과세하려는 움직임들이 나타났으며, 양력과 음력으로 ‘세수’를 구분하였다. 일부는 일본이 메이지 유신 이후 음력보다는 양력 1월 1일을 ‘오쇼가츠(お正月)’라 하여 명절로 바꿨는데, 이를 따르려는 분위기도 있었다. 천도교에서 창간한 신문 『만세보』는 1907년 1월 2일부터 사흘간 휴간했지만, 그해 2월 13일 ‘음력 세수’를 맞이하여 각 중앙 부처와 학교 및 점포는 국기를 게양하고 신년을 축하하였으며, 관리들은 경운궁 중화전에 나아 고종에게 하례하였다. 이후 며칠간 관청은 휴무하였고 학교는 휴학하였다. 하지만 1909년에 들어서면서 『대한매일신보』도 1월 2일부터 사흘 동안 휴간하였고 관공서는 음력 설 휴가를 일절 금지하였다. 그렇다 해도 1910년 음력설을 맞아 황족(皇族)들은 창덕궁의 순종 황제를, 경운궁의 고종 황제를 문안하였고 서민들 역시 그날을 즐겼다. 그런데 1910년 8월 경술국치 이후 처음 맞는 1911년 새해 첫날을 ‘원조’, ‘원단’이라고 하면서도, 조선총독부는 음력설에 대해 구정(舊正)이라 칭하며 폄훼하였다. 그렇다고 구정이란 말이 일반적으로 회자한 것은 아니었다. 이후 음력설은 ‘음력세수(陰曆歲首)’, ‘조선의 원단’, ‘구력 정월’, ‘구 원일’, ‘구력 원일(元日)’ 등으로 불렸다. 『동아일보』나 『조선일보』는 ‘음력 신정’이라 쓰기도 하였다.      일제는 191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의 설을 통제하려 하지 않았다. 일제의 기관지 『매일신보』는 음력설에 설빔을 입은 아이들의 모습이나 당시 풍경 사진을 싣고 ‘음력 정월 초하룻날’이라 소개하였다. 학교나 관공서는 며칠 동안 휴학·휴무하기도 하였다. 이날 사람들은 조상에게 차례를 올리고 떡국을 즐겨 먹었으며 세배하러 다니는가 하면 전국적으로 널뛰기 및 척사(擲柶; 윷놀이) 대회 등이 개최되었다.  음력설을 지켜낸 역사이런 분위기 속에서 1920년대에 들어서 음력설은 ‘구습이고 미개민족에 한한 일’이라며 이를 폐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심심찮게 등장하였고, 세계 공통의 양력을 쓰자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1926년에는 ‘구력 정월을 폐지하자’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예전과 달리 음력 설날 관공서의 휴무는 폐지되었고 학생들 수업은 단축수업으로 대체되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도 한국인들에게는 음력설이 진짜 설이었다. 1925년 1월 1일자 신문에 ‘서울 북촌의 신정은 자못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의 느낌이 있다. ‘양력을 공용한 지 이미 수십 년 되었지만, 양력의 관념은 아직도 뇌리에 없다’는 기사가 실리기도 하였다. 여전히 음력설에 맞춰 신춘음악대회·신춘가극대회가 열리는가 하면, 극장에 새로운 영화가 내걸렸고 축구 대회까지 개최되었다. 이에 신정은 공생활(公生活)의 ‘설’이오, 구정은 사생활의 ‘설’이라는 말까지 나돌았다.           하지만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친일 단체를 중심으로 ‘중요한 민족적 또는 민속적 기념일을 모두 태양력으로 환산·개정하여 단일 신년의 지킴을 철저히 기할 것’이라는 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신생활 차원에서 단일신년(單一新年)을 내세우며 신력을 채용하고 구력을 폐지하자는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심지어 ‘의식이 저열한 대다수 민중은 오직 통치적 위력 앞에서만 궤좌(跪坐; 무릎을 꿇음)’한다며 일제에 강압적인 탄압을 요구하거나, 조선민력(朝鮮民曆)을 폐지하고 음력 사용을 금지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제기되었다.           일제는 1937년 7월 중일전쟁을 일으켜 군국주의를 확장해 나가면서 본격적으로 음력설을 탄압하였다. 1938년 1월 지방 군수에게 통첩 후 지방의 5만여 단체를 총동원하여 차례 및 세배 등을 양력 1월 1일에 실행토록 엄중히 단속하도록 했다. 그동안 음력설에 행하던 취인(取引) 결제도 신정에 하도록 강제하였다. 더욱이 그동안 관행처럼 행해졌던 학교나 관청의 조퇴를 엄금하였을 뿐만 아니라 음력설에 맞춰 인력을 동원하여 부역을 시켰다. 1940년 전북 임실군 둔남면에서는 면직원을 총출동시켜 설 떡을 하지 못하도록 단속하기도 하였다. 급기야 일제가 태평양전쟁으로 군국주의 전쟁을 확대해 가는 과정에서 1942년 2월에 조선총독부 차원에서 조직된 친일단체 국민총력조선연맹(國民總力朝鮮聯盟)이 음력설을 폐지하기에 이르렀다.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뒤에도 이러한 기조는 유지되었다. 신정은 1월 1일부터 1월 3일까지 휴일로 정하였고, 1985년에 이르러서야 ‘구정’을 ‘민속의 날’로 바꿔 하루 공휴일로 지정했을 뿐이다. 그나마 설이 제자리를 찾는데 시간이 오래 걸린 것은 국민 대다수가 음력설을 지내는 상황에서도 정부가 이중과세를 지적하며 반대했기 때문이다. 그 뒤 1989년 1월에 하루만 쉬던 음력설을 사흘 연휴로 개정하면서 명칭이 ‘설날’로 바뀌었고, 1999년부터 1월 1일은 하루만 쉬도록 했다.      우리가 수천 년 동안 이어온 음력설의 풍습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엄혹했던 일제강점기에도 ‘우리 설’을 고집스럽고 꿋꿋하게 지켜냈기 때문이다. 다만, 임인년(壬寅年) 새해 달력 첫날 ‘신정’이란 용어가 못내 아쉽다. 우리의 음력설은 지켜냈는데, 일제의 ‘신정’은 아직 청산하지 못했으니 말이다. 2023년 첫날에는 ‘세수’, ‘원단’ 등 우리의 용어로 바뀌기를 희망하며, 올 한 해 검은 호랑이의 용맹한 기상으로 포효했으면 한다. ]]> Mon, 03 Jan 2022 10:41:05 +0000 62 <![CDATA[독립의 발자취 그 시절 동포의 흔적을 따라서]]> 글 편집실 독립운동의 흔적을 좇아, 그 시절 독립운동이 가열하게 이루어지던 지역으로 떠난 이가 있다. 독립운동을 위해 살던 곳을 떠나 지역을 이동하고 또 그곳에서 평생을 일구었던 사람들. 그리고 그들의 후손, 그 후손의 후손을 찾아 사진으로 기록해온 사람이 있다. 역사에 관심을 갖던 중 필연처럼 시작하게 된 일, 역사적 사료 수집을 위해 끊임없이 달려온 류은규 사진작가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alt류은규 사진작가독립운동가의 후손을 찾아 나선 계기는 무엇인가요?고등학교 때부터 사진 공부를 시작해 어언 40년이 넘은 것 같네요. 학창 시절부터 역사에 대한 관심이 많았던 터라, 사진을 전공한 뒤에는 역사 관련 다큐멘터리를 촬영하기 시작했습니다. 1982년도 춘천교도소 촬영을 시작으로, 1993년에는 중국으로 떠나게 되었습니다. 독립운동에 대한 궁금증으로부터 시작된 호기심은 ‘독립운동가들의 후손은 어떻게 살고 있나’, ‘아직 생존해계신 분들은 있을까’ 등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렇게 역사 공부를 새로 하게 되었고. 이후 28년간 중국을 오가며 관련 사진을 찍고 있습니다.독립투사들에 초점을 두었던 촬영 초반에 대해 말씀해주세요처음 항일독립투사들의 흔적과 마주했을 때 다양한 경험을 했습니다. 독립운동에 대해서는 이미 학교에서 많이 배웠지만, 교과서만으로는 알 수 없었던 부분도 알게 되었습니다. 독립운동가와 그 후손들은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해야 한다는 이유로, 또 끊임없는 친일파들의 감시로 인해 숨어 살다 보니 광복된 지도 몰랐다고 했습니다. 다시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 수 없는 현실에 처해 있던 사람들이 많았던 것입니다. 우리가 몰랐던 역사에 대해서 누군가는 기록해놔야 된다고 생각했고, 사진작가인 내가 그 책임을 맡기로 다짐했습니다.  alt흑룡강성 평방 안무장군 동생 안긍설특별히 중국 동포의 이야기를 시작하게 된 계기가 있나요?우리들은 물론 오늘날 중국에 거주하는 동포마저도 그들 선조에 대해 잘 모르고 있는 실정입니다. 중국에 건너갔을 때 재중동포에게 “당신들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들은 어디에서부터 이주해 여기에 정착하셨습니까”라고 물어봤지만, 그네들은 모른다고 답하기 일쑤였습니다. 현지에서 역사 교육을 받고 있는 학생들마저도 같은 물음에 제대로 답하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현실을 마주하고 나서 ‘내가 그 뿌리를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했고, 그 옛날 사진들을 찾아 나서기 시작했습니다.중국 동포들의 생활상을 수집하며 느낀 점이 있다면요?자료를 찾아 헤매던 초반에는 “한국 사람이 왜 이런 일을 하는지 모르겠다”며 이해받지 못한 사례도 수두룩했습니다. ‘돈벌이를 위한 수단’이라는 등 목적이 있을 것이라는 오해를 받다 보니 자료를 수집하는 과정도 수월하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10~20년이 지나니 진실을 알아주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차츰 이해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서로 간에 믿음이 생기다 보니 이제는 오해 대신 마음을 열고 이야기해주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alt흑룡강성 하동 김규식 딸 김현태(좌) / 흑룡강성 하얼빈 소래 김중건 딸 김정란(우)구체적으로 어떠한 방법으로 자료 수집 활동을 하시나요? 현지에서 독립운동가 후손들의 사진을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자료 수집 초반에는 개인적으로 가정에 방문해서 구하기도 했으나 시간이 많이 걸리는 등 애로사항이 있었습니다. 이후에는 사진관에서 직접 필름을 구할 수 있게 되어 시간을 아낄 수 있었습니다. 예로부터 사진관은 모든 생활상들이 기록되어 있는 곳으로, 그곳에서 돈을 지불하고 필름을 사거나 은퇴할 준비를 하는 분들에게 자료를 제공받기도 했습니다. 이후에는 검증을 받는 게 어려운 부분이었습니다. 역사적인 부분은 역사학자들과 함께 풀어냈고, 1995년부터 2000년대까지는 민족연구소 객원연구원으로 있으면서 직접 검증을 하기도 했습니다.중국에서 활동하면서 힘든 점은 무엇이었나요?일단 방대하게 넓은 지역에서 활동해야 한다는 점이었습니다. 또 관광비자만으로는 중국에 오래 있기 힘들어 중국 내 대학교에서 교수 일을 하며 활동을 이어왔습니다. 1993년부터 2000년까지는 하얼빈에서, 2000년대부터는 길림성 연변대학교에 있으면서 약 5만 장이라는 광범위한 자료를 모을 수 있었습니다. 2009년부터는 한국에 들어와 1년에 3~4개월 정도만 중국에 있었으며, 현재는 코로나 때문에 국내에 머무르면서, 그간 구해놓은 필름들을 정리하는 시간을 갖고 있습니다. alt1956년 밀산(좌) / 1935년 룡정(우)최근 개최한 간도사진관 전시 취지에 대해 설명해주세요이번에 전시한 〈간도사진관〉의 사진들을 보면 독립운동 모습과 더불어 동포들의 생활상이나 대학운동 모습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저는 중국 동포에 대한 이야기를 비단 과거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현재 우리와 함께하고 있는 동포로서의 의미도 전달하고 싶었습니다. 실상 아직까지는 서로에 대한 오해와 갈등이 현재하고 있습니다. 서로를 바라보는 정체성과 대하는 자세는 물론 호칭에 대한 마찰 등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졌으면 하는 바람에서였습니다.앞으로 계획에 대해 말씀해주세요과거 민족의 발자취를 콘셉트로 전시를 개최했다면, 최근에는 동포들의 순수한 생활상을 소개하려 합니다. 이번 〈간도사진관〉 또한 사회학적으로 재해석한 부분에 대한 기대가 컸던 만큼 반응도 좋았습니다. 앞으로도 스토리텔링 하고자 하는 자료가 많은 만큼, 시간을 갖고 120년에 대한 역사를 풀어내고자 합니다. 저의 모든 활동은 결코 유명해지고자 하는 바람으로 시작한 일이 아닙니다. 결국에는 이 모든 활동들이 사료적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훗날의 기록을 위해 꾸준히 작업하는 것뿐, 저의 모든 활동은 나중을 위한 과정들입니다. 마지막으로 대중들에게 던지는 메시지가 있다면요?현재 우리 사회는 중국 동포(조선족)를 멸시하는 분위기가 짙습니다. 사실 한국은 세계적으로 이민이 많은 나라에 속합니다. 일제강점기 시절 독립운동을 위해 이주한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중에서도 제일 많이 이동했던 지역이 중국입니다. 당시 그곳에서의 독립운동이 있었기에 나라의 독립도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민족의 이주 역사를 정치적으로 해석하지만 말고, 우리네 삶의 일부로 이해해보면 어떨까 하는 바람입니다.]]> Mon, 03 Jan 2022 10:50:16 +0000 62 <![CDATA[세계 산책 미국의 원조 ‘건국의 아버지’ 토마스 페인]]> 글 김봉중(전남대학교 사학과 교수) 1776년 7월 4일 독립선언문 공표와 함께, 북아메리카 식민지는 본격적으로 독립전쟁에 돌입했다. 7년간의 전쟁에서 승리하며 미합중국은 근대 최초의 공화정을 수립했다. 미국인들은 독립의 영웅을 ‘건국의 아버지들’로 추앙한다. 독립으로 가는 길에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진정한 건국의 아버지는 누구일까? alt토마스 페인독립선언문 선포일이 미국 최대의 국경일독립기념일은 미국 최대의 국경일이다. 매년 7월 4일 미국인들은 독립기념일 축제로 온 나라가 들썩인다. 전날 밤 불꽃놀이로 포문을 열고, 당일에는 퍼레이드 등 각종 이벤트가 열린다. 큰 도시 작은 도시 할 것 없이 미국 전체가 축제에 휩싸인다. 독립기념일은 오랜 식민지배에서 벗어나게 된 것을 기념하는 것으로 보통 유럽의 식민 지배를 받은 나라들로 아프리카와 아시아, 남아메리카에 집중되어 있다.       그렇다면 미국은 왜 독립기념일을 국가 최대의 국경일로 지킬까? 현재 미국의 위상을 생각할 때 독립기념일이 왜 미국 최대의 국경일인지 조금 의아하다. 영국 식민 지배 하의 북아메리카 상황은 훗날의 다른 식민지배와 비교하면 그렇게 암울하지 않았다. 당시에는 대부분이 영국에서 건너온 사람들이었으며, 그들은 영국의 신민이라는 데에 자부심이 컸다. 우여곡절 끝에 아메리카 식민지는 모국과의 독립전쟁을 치르게 되었고, 전쟁의 승리로 1783년 9월 3일 파리조약에서 독립을 승인받았다. 이날은 일종의 승전 기념일이며 해방 기념일이다. 그로부터 6년 후인 1789년 4월 30일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이 취임하면서 미합중국이 공식적으로 출범했다. 미국인이 아닌, 미국 건국의 아버지여느 굵직한 역사적 사건처럼 역사가들은 미국 독립혁명의 기원에 관심이 높다. 크게는 사건과 인물이 그 중심에 있다. 사건에 대해서는 역사가들 사이에 큰 이견이 없다. 1773년 보스턴차사건(Boston Tea Party)이 결정적이었다. 소수의 ‘독립투사’들이 보스턴 항에 정박해 있던 동인도회사 선박에 잠입해서 상당량의 차 꾸러미를 바다에 던져버렸다. 영국의회는 발끈했다. 그동안 북아메리카 상황을 관망하면서 비교적 온건하고도 유연하게 대처하던 영국 의회는 더 이상 사태를 좌시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식민지인들에 본때를 보여주고자 했다. 그런데 그것이 화근이 되었다. 식민지인들도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되고, 곳곳에서 독립을 외치게 되었다.      독립으로 가는 길목에 누가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했는가에 대해서는 누구도 쉽게 결론을 내리기 어렵다. 보통 미국인들은 ‘건국의 아버지들(Founding Fathers)’로 불리는 인물의 묶음으로 독립의 영웅을 기린다. 대통령을 지냈던 조지 워싱턴, 존 애덤스, 토마스 제퍼슨, 제임스 매디슨을 비롯해서 알렉산더 해밀턴, 벤자민 프랭클린, 존 제이, 사무엘 애덤스와 같은 인물들이다.       하지만 독립의 노정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로는 토마스 페인(Thomas Paine)을 꼽을 수 있다. 토마스 페인은 1776년 7월 4일 독립선언문이 공표되기 불가 2년 전에 미국으로 건너왔다. 미국은 보스턴차사건의 후폭풍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일련의 ‘강제법’으로 식민지인들에게 본때를 보이려는 영국 의회와 식민지인들과의 갈등은 극단으로 치닫고 있었다. 영국과의 타협을 거부하며 완전한 독립을 외치는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1774년 9월 초에 최초의 대륙회의가 소집되었다. 13개의 식민지 대표들이 모여서 사태 해결을 모색하기 위함이었다. 토마스 페인이 미국에 도착하기 전 불과 한 달 전의 상황이었다.        토마스 페인은 영국에서 별로 알려지지 않는 인물이었다. 신분도 미천했고, 이런저런 사업에 뛰어들었지만 재미를 보지 못했다. 하급 관료를 지내기도 했지만 이렇다 할 주목을 받지 못했으며,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 하지만 토마스 페인은 자기가 믿는 것에 대한 의견을 진솔하게 피력하는 것에 주저하지 않았으며, 미국으로 건너오기 2년 전, 그가 몸담고 있었던 세무 공무원들의 임금을 올려줘야 한다는 소책자를 출판하기도 했다. 그는 영국의 신분제와 전제왕권에 불만이었으며, 계몽사상에 근거한 평등한 사회가 시대의 소명이라고 믿었다. 상식과 독립의 당위성미국으로 건너오자마자 그는 곧바로 신문을 통해서 그의 사상을 설파하기 시작했다. 당시 미국은 독립이냐 영국과의 타협이냐를 놓고 어수선한 상황이었다. 토마스 페인은 완전한 독립을 주장했다. 그는 미국이야말로 자유와 평등의 원칙을 세울 수 있는 최적의 국가이기에, 영국의 전제정권에서 벗어나 공화국을 세워야 하는 시대적 부름에 응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또한 미국이 독립해서 중립국으로 유럽의 강국들과 자유롭게 외교 및 상업적 교류를 하는 것이 미국의 이익을 위해서도 바람직하다고 강조했다. 이것이 바로 1776년 1월에 ‘상식(Common Sense)’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한 페인의 팸플릿이다.      ‘상식’의 영향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47쪽짜리 이 팸플릿은 거리에서나 주막에서 주요한 얘깃거리가 되었다. 남부 조지아의 사바나에서부터 북쪽 뉴햄프셔의 포츠머스에 이르기까지 ‘상식’의 메시지는 순식간에 북아메리카 전체로 확산되었다. 불과 몇 달 만에 무려 50만 권이 팔렸다. 당시로는 엄청난 판매 부수였다. 미국 역사상 인구 대비 최대 판매량이었다.       무엇보다도 ‘건국의 아버지들’에게 ‘상식’의 영향은 절대적이었다. 이들 대다수는 모국 영국과 독립전쟁을 치른다는 것에 부정적이거나 부담감이 컸다. 그들은 여전히 영국 의회가 한발 물러서서 협상 테이블로 나와 줄 것을 고대했다. 그런데 ‘상식’은 그들의 마음을 바꿔놓고 말았다. 완전한 독립을 선택하는 것이 그들의 숙명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 결국 7월 4일 독립선언문이 공표되었다. 존 애덤스는 “토마스 페인의 펜이 없었다면 조지 워싱턴의 칼은 무의미한 것”이라고 했다.       어느 역사가가 얘기했듯이 미국인들은 ‘토마스 페인의 자식’이라고 할 수 있다. 7년간의 독립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미국이 독립할 수 있었지만, 독립으로 가야 하는 미국의 숙명을 역설했던 토마스 페인의 사상이 미국을 진정한 독립국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토마스 페인의 사상은 그 시대에만 머물러있지 않았다. “미국은 전제정권에 찌든 유럽과 다르다. 달라야 한다. 자유와 평등에 근거한 공화국 건설이 미국의 숙명”임을 외친 토마스 페인의 사상은 독립 이후에도 오랫동안 미국인들의 정신에 남아있었다. 적어도 대통령을 비롯한 지도자들에게 절대적인 원칙이 되었다.      미국의 독립기념일은 누구로부터 독립한 날이 아니라 무엇을 위해 독립했는가를 상기하는 국경일이다. 우리나라의 독립선언서도 특정 국가와 민족에 대한 사사로운 감정이 아니라 평등을 비롯한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주창했다. 그런데 그날이 우리의 최대 국경일로 지켜지지 않아서 안타깝다. 이제 대한민국도 우리의 미래, 특히 통일 한국의 미래를 위해서 우리가 추구해야 할 정체성을 상기해야 한다. 그 시작점이 3·1절에 대한 자부심이다.]]> Mon, 03 Jan 2022 10:55:06 +0000 62 <![CDATA[신년사 희망과 꿈, 독립정신이 가득한 새해가 되시길 기원합니다]]> 사진 봉재석 독립기념관을 찾아주시고 사랑해주시는 국민 여러분께 감사 인사를 올립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늘 건강하시고, 하시는 일마다 모두 잘 되길 기원합니다.  alt한시준 독립기념관장지난해 독립기념관을 찾아주신 관람객이 112만 명이 넘었습니다. 예년에 비하면 크게 줄어든 것이긴 하지만, 코로나 상황을 감안하면 많은 분들께서 독립기념관을 찾아주셨습니다. 독립기념관은 국민 여러분들께서 마음 편안하게 찾아오실 수 있는 곳이고, 일제의 침략을 이겨낸 민족의 자부심과 긍지, 그리고 희망과 꿈을 가질 수 있는 곳입니다.       독립운동가들은 희망과 꿈을 먹고 살았습니다. 새해를 맞을 때마다 ‘올해는 독립을 이룰 수 있다’는 희망과 꿈을 가졌습니다. 새해를 맞으며 가졌던 희망과 꿈이 그해에 실현되지 않았어도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또다시 새해를 맞으면, 올해는 반드시 독립을 이루겠다는 다짐을 하며 독립에 대한 희망과 꿈을 키웠습니다. 35년에 걸친 일제의 잔혹한 식민지 지배를 버텨낼 수 있었던 것, 온갖 어려운 여건하에서도 독립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할 수 있었던 것, 그것을 가능하게 만든 것은 희망과 꿈이었습니다.      역사는 과거를 이해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과거에 있었던 역사적 경험을 통해 미래를 열어나갈 지혜를 얻는 것이 역사입니다. 독립기념관은 독립운동의 역사를 연구, 전시, 교육하는 곳입니다. 독립운동 역사를 통해 우리 민족의 역사를 발전시켜나갈 수 있는 지혜를 얻을 수 있는 곳이 독립기념관입니다. 독립기념관에 오시면 독립운동가들이 가졌던 희망과 꿈, 그리고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든 독립정신을 느낄 수 있습니다.      독립이라는 희망과 꿈을 가지고 살았지만, 이를 실현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계란으로 바위 치기’나 다름없는 것이 독립운동이었습니다. 계란으로 바위를 부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렇지만 독립운동가들은 계란을 가지고 바위를 부순다며 대들고 도전했습니다. 그런데 기적과 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바위인 일제는 패망했고, 독립을 쟁취한 것입니다. 불가능한 것에 도전하여 가능을 창조해낸 것, 그것이 독립정신입니다.      2022년 새해에 커다란 희망과 꿈을 가지시길 바랍니다. 희망과 꿈에 대해 남들이 불가능하다고 해도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마시고 도전하십시오. 독립운동가들은 계란을 가지고 바위를 부순 기적과 같은 일을 이루어냈습니다. 그러한 독립정신이 살아 있는 곳, 그곳이 독립기념관입니다. 독립기념관을 통해 희망과 꿈을 키우시고, 독립정신의 기운을 받아 불가능한 일을 가능으로 만들어내는 성과를 거두는 한 해가 되시길 기원합니다.]]> Mon, 03 Jan 2022 09:48:56 +0000 62 <![CDATA[독자이벤트 이번 호 독립기념관을 읽고 빈칸을 채워주세요. 꼼꼼히 읽다 보면 정답에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alt alt아이콘 클릭하면 퀴즈 정답을 보낼 수 있습니다.]]> Mon, 03 Jan 2022 11:18:13 +0000 62 <![CDATA[들어가며 2·8독립선언]]> alt 1919년 2월 8일 일본 도쿄에서  한인 유학생들이 발표한 독립선언서의 마지막 장으로  조선청년독립단 대표 11인의 서명이 들어있다. 1919년 2월 8일 일본에 유학 중이던 한국인 학생들이  한국의 독립을 요구하는 선언서와 결의문을 선포하였다. 한국병합이 한국민의 뜻에 반하는 것인 만큼  일본은 한국을 독립시킬 것,  미국과 영국은 일본의 한국병합을 솔선 승인한 죄가 있으므로  속죄의 의무를 질 것, 이에 응하지 않을 때는  우리 민족이 생존을 위해 자유행동을 취해 독립을 달성할 것  등을 결의문에서 선언했다. 2·8독립선언은 도쿄 조선청년독립단 일원인 최팔용·윤창석·김도연· 이종근·이광수·송계백·김철수·최근우·백관수·김상덕·서춘 등이 주동하였다.  이들은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한국 유학생 대회를 열고,  최팔용이 사회를 맡아 독립선언식을 주도하였다.  이후 만장일치로 가결하여 일본의회에 청원서를 제출하려 했지만  일본 경찰의 제지로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2·8독립선언은  국내 민족 지도자 및 학생들에게 알려져 3·1운동을 일으키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 Thu, 27 Jan 2022 15:16:07 +0000 63 <![CDATA[톺아보기 3·1운동의 서막을 연 2·8독립선언]]> 글 박걸순(충북대학교 교수) 일제강점기에 일본은 식민지 본국으로서 재일 조선인에게는 생존의 땅이자 투쟁의 심장부였다. 재일 조선인은 만주나 노령 또는 미주로 건너간 동포들과 이주 목적은 물론 출신 지역과 경제적 상황 등에서 많은 차이가 있었다. 1919년 2월 8일, 일본에 유학 중이던 조선인 학생들이 도쿄 한복판에서 독립을 요구하는 선언서와 결의문을 선포하였다. 이른바 2·8독립선언이 지금으로부터 103년 전에 결행된 것이다. alt 2·8독립선언의 주역들 민족 지성으로서 재일 유학생 한국 근대사에서 학생은 중산층으로서 민족지성의 대표였다. 국내의 열악한 고등교육 상황은 외국 유학을 촉발하였고, 먼저 근대를 수용한 일본이야말로 가장 선호하는 대상지였다. 유학생 도일의 역사는 1881년 유길준이 경응의숙(慶應義塾)에, 윤치호가 동인사(同人社)에 입학하며 시작하였다. 이후 1904년 러일전쟁 이후 유학생이 급증하여, 1909년 최고조에 달하다가, 1910년대 전반기에 줄어드는 양상을 보였다. 경술국치로 인한 항일의식의 고조와 일제의 유학 억제 정책 때문이었다. 그러나 유학생들의 도일은 1942년 윤동주가 「참회록(懺悔錄)」을 짓고 도일했듯이 일제 말기까지 계속되었다.        최초의 조선인 유학생 단체는 1895년 4월 결성된 대조선일본유학생친목회, 같은 해 9월 결성된 제국청년회였다. 단체의 목적은 대부분 관비 유학생이 주축이었고, 학생 수도 많지 않을 때여서 유학생의 친목 도모 위주였다. 재일 유학생 최초의 반일 활동은, 1905년 12월 교장의 조선인 유학생 비하 발언에 분개하여 도쿄부립제1중학교 유학생들이 일으킨 ‘동맹휴교’였다. 이는 을사늑약 직후 정치적 분위기와 유학생의 동향을 알려준다.을사늑약을 전후로 자비 유학생이 증가하여 여러 대학에 재학생이 늘어났다. 그러자 한국 정부는 1907년 ‘유학생 규정’을 만들고 감독관을 파견하기도 하였다. 이 시기 유학생 단체는 초기와는 다른 성향을 보인다. 태극학회와 대한유학생회 등 단체는 을사늑약 이후 망국으로 치닫는 조국 현실에 직면하여 반일의 기운이 더욱 높아갔다. 1907년 3월 발생한 이른바 ‘와세다대학 모의국회사건’은 식민지화 과정에 있던 대한제국을 두고 한일 학생 간 인식 충돌의 양상을 잘 보여준다. 이 사건은 이토 히로부미 통감이 개입할 정도로 일제를 긴장하게 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주춤했던 일본 유학생의 증가는 1910년대 중반 이후 다시 늘어나는 경향을 보인다. 식민지 지배하의 열악한 고등교육 환경은 기초 학문과 순수 학문 연마를 갈망하던 지성인에게 일본 유학을 선택하게 하였던 것이다.      1910년대 재일 유학생들은 이전 유학생들과는 의식이 달랐다. 단순한 근대 신학문 수용에 머무르지 않고, 자신들이 수행해야 할 민족적 책무를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유학생학우회 등의 단체를 조직하였고, 『학지광(學之光)』 같은 기관지를 발행하며 각종 모임을 통해 결속을 다졌다. 상당수 유학생들은 일제의 요시찰 대상으로 감시를 당하는 처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사회를 풍미한 ‘대정데모크라시’나 ‘아나키즘’과 같은 신사조의 영향을 받으며 민족운동의 전위부대로 성장하고 있었다.        alt 대조선 일본 유학생 친목회(1896. 1. 6.)(좌) / 태극학회의 『태극학보』 1호(우) 2·8독립선언의 전개 1919년 1월 6일, 200여 명의 유학생들이 도쿄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 모여 웅변대회를 개최하였다. 당시 일제는 재도쿄조선기독교청년회, 학우회, 조선학회 등 3개 유학생 단체를 ‘주의를 요하는 배일 단체’로 지목하고 있었는데, 이날의 모임은 학우회가 주관하였다. 연사로 나선 윤창석·김상덕·전영택 등은 현재 정세가 독립운동을 하기에 적당한 시기이며, 해외 동포들도 실행에 나섰으니 유학생들도 나서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유학생들은 토론 끝에 독립선언을 위한 임시 실행위원을 선임하였다. 실행위원은 일부가 교체되었고, 최종적으로 최팔용·이종근·김도연·송계백·이광수·최근우·김철수·김상덕·백관수·서춘·윤창석 등 11인으로 확정되었다. 이들은 조선청년독립단을 결성하고 독립선언서 등을 작성하기로 결의하였다.         그해 1월 말, 송계백이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국내로 들어와 최린과 현상윤을 만났다. 2월 초에 상하이로 건너간 이광수는 영국·미국·프랑스 3국에 독립선언을 타전하고, 『차이나 프레스』 등에 게재하였다. 독립선언서는 백관수의 지도로 10여 명의 학생이 펜으로 작성하여 등사하였다. 송계백이 국내에서 활자를 갖고 왔으나 여의치 않았기에 등사한 것이다. 조선민족대회소집청원서는 최팔용이 인쇄소에 부탁하여 1,000부를 인쇄하였다. 운동 자금은 정노식이 전답을 팔아 장만한 돈을 송계백을 통해 보내왔다. 국내에서 최남선을 통해 2월 8일 독립선언을 결행하는 것이 너무 빠르다는 의견 제시가 있었으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유학생들이 정기총회 날짜에 맞추고자 한 자체 판단에 의해서였다.         일제는 유학생들의 심상치 않은 움직임을 감지하고 윤창석 등을 소환하여 조사하였다. 그러나 독립선언은 2월 8일 오후 2시에 결행되었다. 학우회 임원선거를 명목으로 도쿄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 600여 명의 학생들이 모였다. 회장 백남규가 개회를 선언하고 사회를 맡은 최팔용이 대회 명칭을 ‘조선독립청년단대회’로 바꾸어 역사적인 ‘2·8독립선언’을 거행하였다.         순서에 의해 백관수가 독립선언문을, 김도연이 결의문을 낭독하였다. 이때 청년회관을 포위하고 있던 정·사복 일본 경찰이 주도 학생을 체포하기 시작하면서 학생들과 난투극이 벌어졌다. 그러나 실행위원 11명 중 상하이로 건너간 이광수와 피신한 최근우를 제외한 9명 등 27명의 학생이 체포되었다. 이들은 출판법 제26조 위반으로 도쿄지방재판소에 기소되어 금고 7개월 반에서 9개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alt 재도쿄유학생학우회 육상운동회(1917. 4. 8.) 독립선언의 선구 「선언서」 독립운동은 다양한 형태로 전개되었다. 격문과 독립선언서, 청원서 등을 작성하여 조선총독부와 일본 정부와 의회, 서구 열강 국가에 보내는 것도 중요한 방법론이었다. 1919년은 독립선언의 해였다. 의병전쟁 이래 여러 형태의 격문과 선언의 발표가 있었으나, 독립을 공식적이고 본격적으로 선언한 시초는 2·8독립선언서였다.        독립선언은 여러 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었다. 서울에서 민족 대표 명의로 발표된 선언서, 노령 대한국민의회의 선언서, 간도거류조선민족대표 명의의 독립선언포고문, 길림에서 39인 명의로 발표된 대한독립선언서 등이 그것이다. 이들 중 가장 선구적이고 순수 학생에 의해 진행되었다는 점에서 재일유학생들의 선언서는 의미가 크다.         2·8독립선언서는 이광수가 기초하였다. 조선청년독립단 대표 11명 명의로 발표된 선언서는 시작과 말미에서 ‘독립을 기성하기를 선언’하였다. 다른 지역에서 발표된 독립선언서류가 ‘독립을 선언’한 반면, 재일유학생들의 선언서는 독립을 꼭 이룰 것을 선언한 점에서 차별적이다. 즉, 당장 독립을 이룰 수는 없더라도 반드시 이뤄내고야 만다는 젊은 지성의 현실주의에 기초한 각오를 표출하고 있는 것이다.  이 선언서는 일제에 의한 강제병합의 사기성과 폭력성을 부각시키고 10년간의 학정을 소상하게 고발하고 있다. 일제가 우리나라를 침략하며 내세웠던 동양평화론의 관점에서도 식민통치를 비판하였다. 즉, 러시아와 중국이 우리에 대한 야욕을 포기하였고, 국제연맹이 생겼으므로 강제병합 ‘최대 이유’가 소멸되었으니, 우리 민족은 정당한 방법으로 자유를 추구하겠다고 한 것이다. 그리고 만일 일본이 응하지 않으면 우리 민족은 생존의 권리를 위하여 ‘최후의 1인까지’ 영원한 ‘혈전’을 펼치겠다고 선포하였다.선언서는 본문에 이어 ①독립 주장, ②조선민족대회 소집 요구, ③민족자결주의 적용 요구, ④영원한 혈전 선포 등 4개 항의 결의문을 덧붙였다. 말미에 결의문을 덧붙이는 형태는 이후 다른 지역 독립선언서의 선행적 예시가 되었다. alt 도쿄의 조선유학생학우회의 기관지 『학지광』(좌) / 2·8독립선언 장소, 도쿄 YMCA(우) 2·8독립선언의 의의 1919년 2월 8일, 적의 심장부인 도쿄에서 유학생들이 결행한 독립선언의 역사적 의의는 매우 크다.             첫째 2·8독립선언은 거족적인 3·1운동의 서막이었고, 국내외 동포사회의 독립선언을 선도하였다. 유학생들은 국내의 종교 지도자는 물론 상하이 독립운동 세력과 연계하며 독립운동을 추동한 것이다.          둘째, 유학생들의 독립선언은 이후 재일 한인운동의 기폭제 역할을 하였다. 1920년대부터는 유학생과 노동자가 연대하며 단순한 지식층의 문필활동을 뛰어넘어 사회운동과 대중운동으로 발전해 갔다.        셋째, 유학생의 독립선언은 학생독립운동사에서 새 장을 열었다. 이전에도 몇몇 학생 단체가 있었으나, 친목 단체에 지나지 않았다. 또한 일부 학생들의 항일운동이 있었으나, 일시적이거나 비조직적이었다. 재일유학생들의 과감하고 진보적 활동은 학생층을 독립운동의 전위부대로 성장케 하여 3·1운동과 광주학생독립운동으로 발전하도록 하였다. ]]> Thu, 27 Jan 2022 15:16:48 +0000 63 <![CDATA[만나보기 2·8독립선언의 주역들, 그 후]]> 글 박걸순(충북대학교 교수) 2·8독립선언은 재일 유학생으로 구성된 조선청년독립단 대표 11명에 의해 주도되었다. 이른바 유학생 대표 가운데 실행위원으로 선임된 11명의 향후 추이는 한국 근현대사의 축약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11명 가운데 최팔용·송계백·김상덕은 독립장, 윤창석·김도연·이종근·김철수는 애국장에 서훈되었으니 7명은 독립유공자이다. 서춘은 서훈되었다가 취소되었고, 이광수·최근우·백관수는 아예 서훈되지 못하였다. 2·8독립선언 이후 이들의 역사적 평가가 갈라진 이유는 무엇일까?   alt 2·8독립선언으로 체포되었다가 출옥 후 촬영한 기념사진(하단 좌측부터 최팔용·백관수·송계백·서춘) 요절한 최팔용과 송계백 2·8독립선언을 주도한 유학생 가운데 최팔용은 운동의 준비를 총괄하였고, 송계백은 국내에 다녀오는 등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최팔용과 송계백은 와세다대학교에 재학 중이었다. 당시 일본 경찰은 감시 대상(요시찰) 조선인을 갑호와 을호로 나눠 감시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모두 감시 대상 갑호였다.         1919년 1월, 실행위원이 선임되자 일제의 감시와 미행이 더욱 심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2·8독립선언의 주도적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일본 경찰을 따돌리는 기지를 발휘했기 때문이다. 1919년 1월 중순 청년회관에서 열린 회의에서 최팔용과 송계백은 운동에 대해 소극적으로 발언함으로써 일제의 경계를 느슨하게 유도하였다고 한다. 이날 강경 발언을 한 윤창석과 김상덕 등에게는 밀정이 따라붙었다고 하니, 발언 내용이 일제에 누설될 것을 알고 전술적으로 취한 언동이었다.       최팔용은 학우회 기관지인 『학지광』의 편집국장을 맡으며, 재일 유학생 운동을 주도하고 있었다. 2·8독립선언 당일에는 사회로서 대회 명칭을 조선독립청년단대회로 개칭하고, 독립선언식을 주도하였다. 이날 붙잡힌 그는 1년간의 금고형을 선고받고 고초를 치른 뒤 함경남도 홍원으로 귀향하였다. 고향에서 정양하다가 서울로 이사하였으나, 일경의 삼엄한 감시 속에 생활하다가 1922년 32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송계백은 1월 하순 완성된 선언서를 모자 속 안감에 숨겨서 국내로 들어와 보성중학교 재학 당시 은사였던 최린을 만났다. 그가 모자 속에서 독립선언서를 꺼내 건네자 최린은 청년들의 불타는 애국심에 눈물을 흘렸다. 그는 송진우도 만나 선언서를 전하고 유학생들의 독립운동 계획을 알렸다. 이때 송계백은 선언서 인쇄를 위해 서울에서 활자를 구입하여 일본으로 가져갔다는 비화도 전해진다. 물론 여의치 않아 선언서를 인쇄하지 못해 활자를 활용하지는 못하였으나, 그가 정노식으로부터 받아 온 돈은 긴요한 운동자금으로 사용되었다. 2월 8일 붙잡힌 그는  7개월 보름의 금고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24세의 젊은 나이에 옥중 순국하였다. alt (좌측부터) 최팔용, 송계백, 김상덕 반민특위에서 만난 김상덕과 이광수 2·8독립선언의 주역 가운데 김상덕과 이광수는 1949년 ‘반민특위’에서 해후하였다. 2·8독립선언으로부터 꼭 30년 만의 일이다. 그런데 김상덕은 반민특위의 위원장이었고, 이광수는 반민족행위자의 처지였으니 역사의 아이러니한 광경이었을 것이다.김상덕은 2·8독립선언으로 붙잡혀 7개월 보름 동안 옥고를 치르고 상하이로 가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였다. 1926년부터는 만주로 건너가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회 만주총국 책임자 등 다양한 활동을 하였다. 1933년 다시 관내로 이동하여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는데, 조선민족혁명당과 조선의용대에 참여하며 줄곧 김원봉과 행보를 함께 하였다. 광복을 맞이할 때까지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활약하며, 광복 후 조국 건설의 청사진을 마련하는 한편 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서 활동도 병행하였다. 이 시기 그에게 있어서 지상 과제는 조국의 독립이었고, 그 길은 통합을 통해 혁명을 추구한 노선이었다.         광복 이후 귀국하여 1946년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이 되었고, 1948년 고향 고령에서 출마하여 제헌의원으로 당선되어 헌법기초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48년 친일파를 처벌하는 반민족행위처벌법이 제정되고 반민특위가 구성될 때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그가 이 중책을 맡을 수 있었던 까닭은 2·8독립선언 이후 독립운동으로 초지일관한 전력이 높이 평가되었기 때문이다.         김상덕은 반민특위 위원장으로서 친일파의 공적이 되어 암살  1호 대상이었다. 반민특위 활동은 친일파 청산 의지가 없었던 이승만 정권의 방해와 친일파의 준동으로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끝나고 말았다. 그는 6·25 때 납북되었고, 그 자식들은 ‘빨갱이’의 멍에를 쓴 채 어려운 생활을 해야만 했다. 1990년에서야 서훈된 것은 분단과 이념의 대립이 빚은 어두운 우리 현대사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이광수는 2·8독립선언서의 기초를 담당하고, 영문과 일문 번역도 담당하였다. 1월 하순경 선언서 작성을 마치고 최팔용의 권유로 상하이로 건너갔다. 이후 신한청년당에 가입하였고,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조직되자 참여하여 임시사료편찬위원회 주임과 『독립신문』 사장으로 활동하였다. 1921년 귀국하였다가 일본 경찰에 붙잡혔으나, 곧 불기소 처분되었다. 이로 인해 ‘밀정’ 의혹을 받기도 하였다. 1922년 『개벽』지에 조선 민족에 대한 전면적 개조 필요성을 강조한 「민족개조론」의 발표는 변절의 신호탄이었고, 1938년 이른바 수양동우회사건으로 전향을 선언하며 노골적 친일의 길을 걸었다.         1949년 2월 이광수는 박흥식에 이어 반민특위 제2호 구속자가 되었다. 그러나 3월 병보석으로 출감하였고, 8월 불기소처분을 받았다. 그는 자서전 『나의 고백』에서 자신은 민족을 위해 부득이 표면상의 친일을 한 것이라고 변명하였다. 끝까지 친일반민족 행위에 대한 반성은 하지 않았다.         반민특위 법정에서 김상덕과 이광수가 대면하여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에 대한 여부는 확인할 수 없다. 김상덕은 이승만이 파격적으로 위원장 관사를 방문하여 친일파 처리를 적당히 해달라는 요구를 단호히 거절하였다. 그러나 2·8독립선언 당시의 동지인 이광수가 구속된 것에 대해서는 마음 아파했다고 한다. 정작 그가 마음 아파했던 것은 처절하게 훼절한 이광수 개인이 아니라, 식민지 삶을 강요당했던 민족의 불행한 현실이었을 것이다. alt (좌측부터) 이광수, 백관수, 최근우, 서춘 친일 행적 논란자들 2·8독립선언의 주역 가운데 백관수와 최근우는 독립유공자로 서훈되지 못하였다. 두 사람 모두 실행위원으로 선임되었고, 일본 경찰의 감시 대상 을호였다.     백관수는 독립선언서 작성에 관여하였다. 일설에는 선언서 문체를 근거로 백관수가 기초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으나, 백관수는 자신이 두세 번 수정했다고 밝힌 바 있으므로 이광수가 기초하고 백관수가 수정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또한 그는 선언서의 인쇄를 위해 YMCA 등사기를 사용하도록 조치하였다. 2월 8일 독립선언식장에서는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며 선언식을 주도하였다. 이로 인해 붙잡혀 1년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1925년 메이지대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조선일보 상무취체역 겸 영업국장이 되었고, 1927년 신간회 결성에도 참여하였다. 1937년에는 동아일보 사장이 되었고, 1940년 폐간에 항의하다가 구금당하기도 하였다. 광복 후 1948년 제헌국회의원에 당선되었고 초대 법제사법위원장을 지냈다. 그러나 6·25 때 납북되었고, 1961년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다.        최근우는 2·8독립선언 때 실행위원으로 선임되었으나, 도피하여 체포를 면하였다. 그는 2월 28일 후쿠오카현 모지항을 출발하여 상하이로 가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고, 임시의정원 의원이 되었다. 같은 해 11월 여운형이 일본에 갈 때 수행원으로 동행하였다. 1921년 유럽으로 건너가 공부하였고 1928년 귀국하여 사회운동을 펼쳤다. 광복 후 건국준비위원회 총무부장으로 활동하였고, 1947년 근로인민당 창당에 참여하였다. 1960년 사회당을 결성하였으나, 1961년 5·16 군사정변 직후 체포되어 8월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하였다.          이들이 독립유공자로 서훈되지 못한 것은 일제 말기의 친일 행적 때문이다. 백관수는 1937년 이후 시국강연반 강사, 국민정신총동원 경성연맹 상담역, 조선병지원제도 축하회의 발기인으로 참가하는 등의 행적이 문제가 되었다. 최근우는 친일 단체인 만주국 협화회 참여 행적이 문제가 되었다. 이광수와 함께 친일 행적으로 인해 3명이 서훈되지 못한 것이다.     그런가 하면 이른 시기인 1963년 독립장이 추서되었으나, 나중에 친일 행적이 드러나 서훈이 취소된 사례도 있다. 서춘이 그 장본인이다. 그는 2·8독립선언으로 붙잡혀 9개월 금고형 처분을 받고 출옥 후 교토제국대학교를 졸업하고 1926년 귀국하였다. 1930년대 후반 이후 『매일신보』 등 각종 친일 단체에 참가하여 반민족 행위를 자행하였다. 결국 1996년 서훈이 취소되었고,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되었으며, 2004년에는 대전현충원에 있던 묘도 이장하였다.     2·8독립선언의 주역들! 당시 그들의 민족적 의기는 일치하여 역사적인 순간을 일궈냈으나, 이후 행보는 같지 않았다. 그들의 다른 삶은 어떤 것이 정의로운 삶이며 민족적 양심과 합치하는가를 곱씹어 생각하게 한다. ]]> Thu, 27 Jan 2022 15:17:20 +0000 63 <![CDATA[이달의 독립운동가 민족 대표 48인으로 3·1운동에 참가하고 신간회에 헌신한 강기덕]]> 글 독립기념관 전시부 alt 「금일 공판 시작되는 독립당 수령 48인」, 『동아일보』(1920. 7. 12.) 학생단 대표로 3·1운동을 이끌다 1886년 함경남도 원산에서 태어난 강기덕은 1919년 보성법률상업학교 학생 대표로 3·1운동에 앞장섰다. 학생들에게 독립선언서와 격문을 배포하여 3·1운동을 준비하고, 1919년 3월 5일 남대문역에서 인력거를 타고 대한독립만세 등을 외치며 시위를 이끌었다. 그러나 일제 경찰들이 만세운동을 탄압하면서 현장에서 붙잡혀 서대문형무소에서 첫 번째 옥고를 치렀다. 고향 원산·덕원 일대에서 청년운동을 전개하다 출옥 후 고향으로 돌아온 강기덕은 원산·덕원지역 청년운동의 지도자로서 활동하였다. 1923년 1월 원산교풍회*를 조직하여 폐습** 철폐에 앞장서고, 8월에는 함남도민대회를 개최하여 지역민의 열악한 생활환경 개선에 힘썼다. 1926년에는 덕원청년동맹 창립에 적극 참여하여 농촌문화 향상을 위한 순회강연을 진행하였다. 그러던 중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일제 경찰에 붙잡혀 다시 한번 옥고를 치러야 했다. *  원산교풍회(元山矯風會):1923년 강기덕 등 원산 지도자들이 관혼상제로 인한 사치 배격 등을 내세우며  조직한 단체  ** 폐습(弊習):폐해가 많은 풍습 alt                            (좌측부터)「어제 만기 출옥한 강기덕 씨」『동아일보』(1921. 11. 10.) /「소위 치안 방해로 6개월 징역」, 『신한민보』(1926. 11. 11.) /                                                                           강기덕 일제감시대상 인물카드(1926)_국사편찬위원회 제공 신간회에서 민족협동전선 운동에 참여하다 8개월간 옥고를 치르고 나온 강기덕은 1927년 창립된 신간회에 참여하여 원산지회 설립 준비위원 등을 맡아 힘을 보탰다. 함남기자연맹에도 소속되어 언론 자유를 위해 힘쓰다 또다시 옥고를 치러야 했지만, 출옥 후 1930년 신간회 원산지회 회장에 선임되었다. 1931년에는 중앙집행위원장을 맡아 신간회 활동을 이끌었다. 신간회 해소 후 1933년 원산노동조합의 재건을 적극 추진하며 독립운동을 계속해 나가던 중 네 번째 옥고를 치렀다. 이처럼 거듭된 옥고에도 불구하고 독립운동에 헌신한 그의 공훈을 기리어 정부는 1990년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alt 신간회 원산지회 회원들(좌) / 신간회 강령(1927)(우)   “百轉百起(백전백기)” 백번 넘어져도 백번 일어난다 강기덕 「百轉百起」, 『삼천리』(1935. 9. 1.) alt ]]> Thu, 27 Jan 2022 15:17:57 +0000 63 <![CDATA[독립운동 사적지 민족협동전선 신간회의 민족운동 현장]]> 정리 편집실 해외 민족유일당운동과 짝을 이뤄 출범한 신간회(新幹會)는 비타협적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의 제휴로 성립한 좌우합작의 민족협동 전선이자, 국내·외 약 140개 지회에 39,000여 명의 회원을 확보한 일제하 최대 규모의 민족운동 단체였다.민족협동전선 신간회 결성은 1926년 12월 홍명희와 조선일보사 간부 신석우·안재홍의 회합을 통해 그 전기를 마련하였다. 이후 홍명희·권동진·신석우 등은 1927년 1월 19일 조선일보계·기독교계·천도교 구파·불교계·사회주의계 인사들을 망라하여 발기인을 구성하고, 일제의 자치론을 앞세운 민족분열 공작에 맞서 ‘정치·경제적 각성’·‘공고한 단결’·‘기회주의의 일체 부인’ 등을 3대 강령으로 발표하였다.             여기에 제3차 조선공산당의 표현단체였던 정우회가 2월 1일 통일된 정치전선의 조직을 제창하며 해체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서울청년회 신파와 물산장려회 계열의 좌우합작으로 발족한 조선민흥회 또한 2월 11일 신간회와의 합동을 결의함에 따라, 2월 15일 종로 중앙YMCA회관에서 개최된 신간회 창립대회는 명실상부한 민족협동전선의 출범을 의미하게 되었다.       신간회 본부는 창립 직후부터 일제의 탄압에 부딪쳐 당초 목표했던 민족적 정치투쟁을 벌이지 못했으나, 지회 차원에서 지역 사회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하며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신간회 창립본부 터 alt 신간회 창립본부 터 진입로(좌) / 신간회 창립본부 터 정면(우) 주소 : 서울시 종로구 수표로18길 6-8  위치 고증 : 조지훈의 글에 ‘신간회 회관은 지금 관수동(현재 국일관 부근) 이갑수 저택 사랑채를 얻어 회무를 집행하였고, 그 후에는 종로3가 현 파출소 뒤편으로 옮겼다가, 허헌이 위원장이 된 후로는 종로2가 덕원빌딩 2층으로 이전하였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를 1927년 경성부 관내 지적목록을 통해 추적해 보면 李用洙(李甲洙의 오기로 보임)의 소유지로 나오는 관수동 143번지, 대지 413평의 저택이 그 장소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1912년 지적원도와 토지조사부를 통해 그 위치를 확인하였다. 신간회는 1927년 2월 창립대회 이후 일제의 집회 불허로 정기 전체 대회조차 열 수 없는 처지가 되어 본부 차원의 이렇다 할 활동을 펼칠 수 없었다.    1929년 6월 복대표대회를 개최하여 기존의 회장-간사제를 중앙집행위원제로 개편하고, 중앙집행위원장에 허헌을 선임하였다. 복대표대회를 통해 창립 당시에 간부 다수가 교체되고 사회주의자들이 본부 간부진으로 대거 진출한 가운데, 출범한 허헌 집행부는 광주학생운동에 호응하여 민중대회를 계획하는 등 합법 단체라는 한계로 유보되었던 당초의 ‘민족적 정치투쟁’을 모색하였다.              이 무렵 회관은 탑골공원 앞 큰길 건너편에 위치한 덕원빌딩 2층이었는데, 1929년 12월 광주학생운동 진상 보고를 위한 민중대회를 준비하던 중 허헌을 비롯한 간부 44명이 일제에 의해 구속되면서 커다란 타격을 받았다.               이후 새로 구성된 김병로 집행부가 합법운동 노선을 고수하자, 때마침 코민테른의 방침이 좌편향의 계급 노선으로 선회하는 속에서 지회를 중심으로 해소론이 확산되어 1931년 5월 전체 대회에서 신간회의 해소를 결의하기에 이르렀다. 이로써 신간회 운동은 비록 4년여 만에 중단되고 말았지만, 3·1운동 이후 민족운동이 부르주아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로 분화된 이래 처음으로 전개된 민족협동 전선 운동이었다는 점에서 커다란 파장을 일으켰다. 신간회 본부 터 alt 신간회 본부 터(좌) / 신간회 본부 터 표지석(우) 주소 : 서울시 종로구 종로 104  위치 고증 : 『경성편람』 사회단체 편에 해당 주소지가 기록되어 있다. 1912년 경성부 종로2정목 지적원도와 토지조사부를 통해 옛 45번지가 현 48번지로 편입된 것을 확인하였다. ]]> Thu, 27 Jan 2022 15:18:38 +0000 63 <![CDATA[아름다운 인연 미주지역 독립운동을 이끈 김성권과 강혜원 부부]]> 글 김형목(사단법인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이사) 1913년 12월 9일 강혜원과 김성권은 결혼했다. 결혼 이후 강혜원은 남편의 성을 따서 김혜원으로 불렸다. 남편 김성권은 상점 서기 등으로 일하고 강혜원은 바느질로 생업을 이어가는 동시에 독립운동 활동의 폭을 점차 넓혀나갔다. 강혜원은 1982년 5월 31일 사망해 로스앤젤레스에 묻혔으나, 2016년 김성권의 유해와 함께 봉환돼 대전현충원에 안치되었다. alt 결혼사진 하와이 노동 이민에서 미주 본토로 근거지를 옮기다 강혜원은 1885년 11월 21일 평양부에서 아버지 강익보와 어머니 황마리아 사이에서 2남 1녀 중 맏딸로 태어났다. 불행하게도 아버지는 가정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술과 기생들에 둘러싸여 지내는 난봉꾼과 같은 존재였다. 어머니는 자식들의 장래를 위하여 미국으로 이민을 결심한다. 남동생 강영승 부부와 어머니 등 가족과 함께 1905년 5월 도릭선편을 타고 하와이로 이민을 갔다. 이후 가파올라 사탕수수농장과 에와 사탕수수농장에서 일했다. 노동과 병행하여 하와이 마노아벨리(Manoa Valley) 여학교를 다니며 향학열을 불태웠다.         1912년에는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한 후 북미 중가주 롬폭(Lompoc)에 거주하는 김성권과 약혼을 하고, 1913년 10월에 북미 캘리포니아(California)로 이주해 목사 이대위 의 주례로 12월 9일 결혼한 뒤 다뉴바(Dinuba)에 정착하였다. 이후로 남편의 성을 따서 김혜원(SARA Kim)으로 불렸다. 다른 이름은 김혜원(金惠源, 金惠園, 金惠媛), 김혜숙(金惠淑) 등이 있다. 김성권과 사이에는 3형제를 두었다.        결혼 후 다뉴바에 정착한 동생 강영승의 아내이자 자신의 올케인 강원신과 함께 포도농장에서 일했다. 그러면서 독립운동에 관심을 가져 1919년 3월 2일 다뉴바 지방에서 강원신·한성선·김경애 등과 함께 신한부인회(新韓婦人會)를 결성하였다. 현지 한인 부녀자들의 민족정신 고취와 미주 항일민족운동단체인 대한인국민회의 민족해방운동을 적극적으로 후원했다. 또한 5월 18일에는 미주 각 지역에 산재한 한인부인회의 운동역량을 집중 강화하기 위해 새크라멘토의 한인부인회와 합동발기문을 선언함으로써 각 지역 부인회의 통합을 촉진시켰다.        8월 2일에 강혜원은 다뉴바의 한인장로교회에서 미주 내 각 여성단체인 다뉴바 신한부인회, 로스앤젤레스 부인회친애회, 새크라멘토 한인부인회, 샌프란시스코 한인부인회, 윌로우스 부인회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부인회 합동발기대회를 개최하였다. 그 결과 미주 한인사회의 통일운동기관인 대한여자애국단을 창설했다. 그녀는 대한여자애국단 초대 총단장으로 선임되었다. 동지들과 함께 매월 3달러의 단비를 수합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송금하여 외교·선전·군사활동을 지원하였다. 국내에 각종 구호금을 수합하여 송금하기도 했다.   alt 대한여자애국단 총단장으로 임시정부를 지원하다 그녀가 대한여자애국단 총단장으로서 1924년까지 직무를 수행하며 송금한 금액 내역은 다음과 같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1,000달러, 임시정부 공복위로금으로 500달러, 상하이 독립신문사에 300달러, 구미위원부에 군축선전비로 500달러, 신한민보사 식자기 구입비 500달러, 간도 동포 기근구제금 67달러, 중국 장제스 부인인 쑹메이링(宋美齡)의 군사위로금으로 370달러, 멕시코 한인 동포의 하바나 이주비용으로 동정금 40달러, 쿠바 마탄사스 지역 한인구제금 55달러, 수재민 구제금 368달러, 본국 수재민 구제금 172달러, 본국 소년갱생운동 55달러, 황은순고아원 58달러,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적십자사에 570달러, 로스앤젤레스 출정군인무도회 194달러 등 총 46,298달러에 달하는 거금이었다.       1922년에는 흥사단에 입단하여 단원이 되었다. 1930년 이후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하여 대한여자애국단의 사업과 흥사단, 대한인국민회의 민족운동을 후원했다. 1940년에는 대한여자애국단 제8대 총단장으로 선임되어 임시정부와 국민회의 재정을 원조했다. 또한 미주 내 한인 동포 자녀들을 대상으로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데 앞장섰다. 한편 중일전쟁 발발 후 쑹메이링에게 중국군 솜옷 지원 의연금을 보냈다. 광복군 후원금을 모금해 임시정부에 송금하는 한편 미국 전시공채를 매입하는 등 양국 사이의 우호적인 관계 유지에도 노력했다.         대한여자애국단 총단장으로 임시정부를 지원하다 1942년 5월 조선의용대가 임시정부 산하 광복군으로 흡수 통합하자, 그녀는 남편 김성권과 함께 민족혁명당 미주총지부를 결성하는 등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1944년 대한여자애국단 참석 대표로 재미한족연합위원회에 가담하여 임시정부 지원 모금과 재정 지원 확보에 남다른 관심을 쏟았다. 광복 이후 로스앤젤레스에서 말년을 보내다가 1982년 5월 31일 96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그녀의 유해는 로스앤젤레스 로즈데일 공동묘지에 묻혔다가, 2016년 11월 16일 순국한 지 56년만(강혜원은 34년)에 고국으로 돌아와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강혜원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한인들의 민족의식을 일깨우다 김성권은 경북 경주에서 출생하여 1904년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 노동자로 이민길에 올랐다. 오하우 에와 농장에서 어려운 생계에도 1906년 5월부터 1년간 기관지 『친목회보』 주필로 필봉을 휘날렸다. 에와 친목회는 1905년 5월 3일 농장에서 일하던 한인 10여 명이 모여 만든 독립운동 단체였다. 20세기 초에 하와이로 이주한 김성권을 비롯한 정원명·윤병구·이만춘·김규섭·강영소 등은 주요 인물들이었다. 창립 1주년에 즈음하여 기관지를 발행하는 한편 군자금을 모으기 시작했다. 김규섭은 재정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당시 하와이 지역의 한인들은 기독교인·학생·전직 군인·머슴·노동자 등이 혼합된 집단으로 65%가 문맹자였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문맹 퇴치와 한인들의 단결만이 국권 회복에 밑거름이 된다고 역설하였다. 회원 결속과 국권 회복을 위한 계몽활동을 병행했다.          1907년 3월부터 하와이 한인단체 통합운동을 주도적으로 전개하였다. 같은 해 9월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하와이 24개 한인단체 합동발기대회를 열고, 하와이 한인의 통일기관인 한인합성협회를 창립하는 산파역을 맡았다. 1908년 2월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하여 안창호 등이 이끄는 공립협회 찬성원으로 가입했다. 한편 하와이 한인합성협회 대표 자격으로 1908년 7월 덴버에서 박용만 등이 개최한 애국동지대표회(愛國同志代表會)에 참석하는 등 이듬해   2월에는 미주한인의 최고 통일기관인 국민회를 탄생시켰다.그는 1931년부터 1938년에 도산 안창호가 설립한 민족운동 단체 흥사단의 이사장을 지냈다. 조선민족혁명당 미주총지부 기관지 『독립(1943년)』을 창간하는 등 광복 때까지 민족운동에 힘썼다. 같은 해 10월 6일 조선민족혁명당 미주지부의 주최로 김성권·변준호·최능익·박상엽 등 18명이 발기하여 독립신문사를 만들어 국문과 영문 4면으로 발간하였다. 국문기사는 순한글로 사진식자 조판을 했다. 제4면은 영문판으로 매주 수요일 발행하는 주간지였다. 논조는 공산주의 선전에 주력하였으며, 조국이 남북으로 분단되자 우리나라와 자유진영을 비난하고 북한과 공산진영에 찬사를 보냈다. 창간 이래 1955년까지 12년 동안 계속 발행되다 미국 정부의 주목을 받아 폐간되고 말았다. 정부는 독립운동 공적을 기리어 2002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alt 3·1운동 1주년 기념식(다뉴바) 하와이 사탕수수농장에 둥지를 틀다 한국인에게 하와이는 어떠한 이미지로 다가올까? 세계적인 휴양지로서 와이키키(Waikiki, 용솟음치는 물) 해변의 수정처럼 고운 백사장을 연상하리라. 각국에서 모여든 비키니 차림의 미녀들, 황홀한 밤 풍경 등은 낭만과 환상이 어울려진 가장 아름다운 섬이라고 말하지 않을까? 하지만 외형과 달리 이면에는 한민족의 한숨과 내일을 향한 꿈이 공존하는 역사적 무대였다.        하와이와 한국인의 공식적인 첫 만남은 190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대한제국은 서구 열강과 일제의 무자비한 침략에 저항은 고사하고 무기력한 ‘만신창이’였다. 이에 비례하여 민초들은 초근목피로 겨우 생명을 유지하는 안타까운 현실이었다. 이보다 열악한 사람들은 정든 고향을 등지고 중국 동북지역이나 러시아 연해주 등지로 떠났다. 이때 ‘지상천국’ 하와이에서 노동이민을 모집한다는 소식이 신문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절박한 심정과 금의환향하리라는 부푼 희망을 안고 머나먼 미지로 향한 사람은 102명이나 되었다.           황마리아는 1905년 4월 장성한 딸과 아들을 동반한 가족이민 대열에 섰다. 딸 강혜원은 19세, 아들 강영승은 17세였다. 당시 가족이민은 매우 드문 경우였다. 노동이민자 대부분은 독신으로 한국 이민사에서 ‘사진신부’라는 존재가 등장하는 주요한 배경이었다. 이국땅에서 낯선 자연환경과 농장주와 언어마저 제대로 소통되지 않아 불편함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꿈에도 상상하지 못한 사탕수수 노동자로서 고달픈 삶이 시작되었다.        온종일 농장에서 노동을 해도 만성적인 빈곤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일상사였다. 열악한 생활환경은 사무치도록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향수를 자아냈다. 애틋한 감정은 친지들의 안부와 더불어 독립국가가 왜 중요한 지를 절감하는 현실로 다가왔다. 황마리아는 불평하는 대신 묵묵히 적응하면서 자녀들에게 민족의식을 일깨우는 등 자녀 교육에 매달렸다. alt 대한여자애국단 원로 대한부인구제회 회장으로 국내외 독립운동을 지원하다 1910년 9월에는 일제의 강제병합 소식을 접했다. “왜놈이나 쪽발이”라고 멸시하던 일본놈들의 세상이 한반도에 시작되는 천인공노할 현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돌아가야 할 조국은 역사 무대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다. 한인사회 권익을 위해 조직되었던 각종 계몽단체는 조국 광복을 향한 발걸음을 내딛는 순간을 맞았다. 한인 여성들도 이러한 분위기에 호응하려는 움직임이 감지되고 있었다. 황마리아는 1913년 4월 호놀룰루에서 대한인부인회를 조직하여 회장에 취임했다. 상호부조를 위한 여성단체도 곳곳에서 조직되는 등 사회 구성원으로서 자기 역할에 충실하고자 노력했다.          1919년 3·1만세운동 소식은 곧바로 한인사회에 전해졌다. 가뭄에 단비와도 같은 희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황마리아는 곧바로 하와이 각 지방의 여성 대표를 소집하여 공동대회를 열었다. 회원들은 3월 29일 제2차 대회에서 향후 행동 방침을 결의하였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독립운동 후원을 목적으로 하와이 각 지방의 한인 부녀를 규합하고 부녀사회의 운동 역량을 집중한다. 둘째, 독립운동에 대해 부녀자로서 할 수 있는 모든 사업에 봉사한다. 우선적으로 독립운동 후원금 모집과 재난 동포 구제에 노력한다. 셋째, 독립운동과 외교 선전에 대한 후원 방침에 대한인국민회 지도 방침에 따른다. 이 결의안에 따라 4월 1일 대한부인구제회가 조직되었다.  여성독립운동가 육성에 앞장서다 황마리아의 활동 중 주목할 부분은 조국 광복에 투신할 여성독립운동가 양성이었다. 심영신, 딸 강혜원, 전수산, 박신애, 며느리 강원신 등은 하와이를 대표하는 여성운동가들이다. 이들은 황마리아 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한편 많은 영향을 받고 성장한 이민 1.5~2세대였다. 아낙네의 가치관에 안주하거나 험난한 파도에도 전혀 굴하지 않은 당당한 한국 근대사 주인공으로 자기 역할에 충실했다. 이들은 미주한인사회를 주도하는 동시에 ‘민족 정체성’ 정립을 위해 한글 교육에도 힘썼다. 오늘날 한인사회는 이들의 노력으로 든든한 기반을 구축하는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2017년 3월 황마리아는 독립운동 공적이 확인되어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딸이나 사위, 며느리보다 늦게 서훈되어 아쉬움도 있으나 그나마 다행이다. 아직도 많은 여성독립운동가들은 역사 무대에 등장하지 못하고 있다. ]]> Thu, 27 Jan 2022 15:19:53 +0000 63 <![CDATA[끝나지 않은 독립운동 그 많던 초등학교 내 봉안전은 어떻게 되었는가?]]> 글 이계형(국민대학교 교양대학 교수) 몇 해 전 일제강점기에 초등학교 교사를 지냈던 분을 인터뷰한 적이 있다. 광복 직후 마을 청년들이 교내 봉안전을 때려 부수자, 이를 본 학생이 달려와 청년들을 말려달라고 했다고 한다. 등교할 때 반드시 봉안전에 절을 하라고 교사가 학생들에게 시켰기 때문이다. 교사는 학생에게 마을 청년을 말릴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할 수 없었고, 결국 교사직을 그만뒀다고 한다. 그 얘기를 잊고 있었는데, 며칠 전 전주 지역 답사를 하던 중 전주초등학교 내 ‘독립기념비’를 보고 새삼 그분의 말이 떠올랐다. 더욱이 광복 직후인 1945년 11월 15일에 봉안전을 헐고 그 기단 위에 ‘독립기념비’를 세웠다는 데 남다른 감회를 가졌다.  일제강점기 봉안정이란 봉안전은 일본어로 ‘호안덴(ほうあんでん)’이라 하는데, 일본 제국과 그 식민지의 학교에 일왕·왕후의 초상과 ‘교육칙어’를 넣어두던 구조물이다. ‘교육칙어’는 1890년 10월 일본의 메이지 왕이 ‘천황제’에 기반을 둔 교육 방침을 공표한 칙어로써, 천황의 신격화와 일본 국민의 정신적 규범으로 작용하였다. 그런데 일제는 식민지 한국에도 이를 교육 전반의 기본 규범으로 정하고, 1912년까지 대부분의 공립보통학교에 사본을 교부하였다.          그러다가 1936년 8월 제7대 조선 총독으로 미나미 지로가 부임하면서 내선일체, 황국신민화 정책이 본격화되었다. 이후 신사참배, 국기 게양 행사, 황국신민서사 제정, 창씨개명, 궁성요배 등이 강요되었다. 학교에서는 조선어를 선택 과목으로 만들더니 아예 교과 과정에서 제외되었으며, 봉안전 설치와 더불어 교육칙어뿐만 아니라 일왕의 사진도 이에 보관토록 하면서 격이 달라졌다. 이후 교육칙어는 우상화되었고, 일왕 사진을 지키다 목숨을 잃은 교사도 있었다. 봉안전 안전을 위해 교원의 숙직, 당직 규정이 강화되기도 했다. 그런 만큼 봉안전은 학생과 교사에게 모두 위압적인 존재였다. 이러한 봉안전 건립에 친일파들은 건설비를 기부하기도 했다.            봉안전은 대개 교문 주변이나 교실로 들어가는 중간 어딘가에 단을 쌓아 높게 설치되었다. 이에 학생들은 등하교 할 때 반드시 봉안전 앞을 지나가야 했고, 그때마다 90도로 허리를 굽혀 절하는 최경례를 하고 손뼉을 두 번 치도록 강요받았다. 이는 점차 학생들의 일상이 되어 갔다. 이외에도 패망 이전까지 일본 제국의 4대 공휴일(1월 1일, 기원절, 신무천황제, 천장절)에 각 학교의 교직원과 학생은 봉안전 앞에 줄을 서서 최경례를 올리고, ‘기미가요’를 부르도록 하는 등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교육칙어를 봉독하였다.    alt 전주초등학교 내 봉안전 기단 위에 세워진 독립기념비 일제 잔재만으로 여겨야 할까 일제 말에 국민학교를 다녔던 분들은 7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봉안전 앞에서 최경례를 하고 이를 어기면 매우 혼났다는 기억을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다. 어린 학생들에게 얼마나 강요된 굴종이었는지 가늠케 한다.         고인이 된 이규태 기자의 칼럼을 통해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광복되던 날 봉안전이 부서지고 교실에서 일왕 사진이 뜯겼는데, 이를 청소하는 것이 당번이었던 그에게 맡겨졌다 한다. 하지만 이는 단순한 사진이 아니라 그 이상의 주력(呪力)이 붙어 있다고 여겼기 때문에 이를 구기거나 찢거나 하면 신명(神明)의 노여움에 해코지를 당할 것이라는 두려움에 떨었다 한다. 결국 어린 마음에 사진을 어찌하지 못하고 책갈피 속에 넣었는데, 허리가 아프다는 일왕의 꿈까지 꿀 정도였다. 이후 어머니에게 그러한 사실을 고백하고 태워 땅에 묻어버렸는데, 그 신명이 뒤통수를 잡아끄는 착각이 들어 지레 겁을 먹고는 큰절을 하고 도망쳤다는 것이다. 이는 어린 학생들에게 일왕이 초인간적으로 군림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 할 것이다. 이와 다른 일화도 있다. 1941년 4월 동래중학교 5학년에 재학 중이던 배종훈은 부산학생항일의거(노다이 사건)로 동기생 임규호가 퇴학을 당하자, 이에 불만을 품고 봉안전 정면 문 앞에 용변을 봤다. 평소 일제의 봉안전 참배에 불만을 품고 있던 차였다. 다음 날 학교는 발칵 뒤집혔고, 그는 일본 경찰에 구속돼 불경죄로 1년 6개월의 실형까지 살아야 했다. 2019년 그는 독립운동가로 인정을 받았다.           1945년 8월 일제가 패망한 뒤 그해 12월 15일, 연합군 최고사령부의 ‘신도지령’에 따라 봉안전 폐지가 결정되었다. 일왕의 초상화는 소각되었고 구조물은 대부분 해체되었다. 일본에서도 1946년 4월 봉안전 폐지가 결정되었다. 그런데 이보다 앞서 광복 직후 1945년 8월 16일부터 8일 동안 파괴·방화된 신사와 봉안전이 136건에 달했다는 기사도 있다. 일제 식민통치의 제일선이었던 경찰관서 습격(149건) 다음으로 많았다.        광복 직전 공립국민학교와 중등학교를 포함해 4천 개교였음을 참작한다면, 수백 개의 학교에 봉안전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광복 직후 모두 철거되었고, 현재 봉안전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은 몇 곳에 불과하다. 목포에 있던 봉안전은 1996년 8월 철거되었고 터만 남았다. 이외에 앞서 언급한 전주초등학교와 전주풍남초등학교에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그런데 이를 일제 잔재라고만 여겨, 간혹 신문에 ‘버젓이 남아 있다’라는 투로 보도되곤 한다. 철거되어야만 할 대상으로밖에 인식하지 못한 결과다. 어린 학생들에게 일제의 잔악상을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역사 교육의 현장이라는 다른 시선으로 바라봐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곳에 ‘봉안전’이 있었던 곳이며, 왜 이를 설치했고 철거했는지를 분명하게 알리는 안내문을 우선 설치해야 한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는 말을 다시금 되새겨야 하기 때문이다. ]]> Thu, 27 Jan 2022 15:19:14 +0000 63 <![CDATA[독립의 발자취 자인 지역 만세운동을 주도한 근대 서화가 희재 황기식]]> 글 편집실 황기식은 경북을 대표하는 향토사학자이자 근대 서화가이다. 사실 그는 1919년 고등학생 신분으로 고향 경산 자인에서 만세운동을 이끈 당사자이기도 하다. 향토사학자와 서화가라는 명성에 가려져 그가 펼친 독립운동에 관한 이야기는 그동안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작고 50주기를 맞이하여 그의 삶을 조명하는 〈경산의 근대 서화가, 희재 황기식〉 전시가 경산 삼성현역사문화관에서 펼쳐지고 있다. 이번 특별전을 기획한 황종현 학예사가 전하는 민족의 얼을 지키고자 한 황기식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본다.   alt 황기식 Q. 황기식 선생에 대해 소개해주세요 1905년 경산 자인에서 태어난 황기식은 사군자·화훼·산수·기명절지·풍속 등의 그림에 능통한 근대 서화가입니다. 또한 서성(書聖)으로 불리는 왕희지(王羲之)가 연상되는 ‘희재(羲齋)’를 아호로 삼은 그는 뛰어난 서예 작품을 남긴 서예가이기도 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1932년 자인의 산천·역사·문화·행정 등을 집대성한 『자인현읍지(慈仁縣邑誌)』를 편찬한 향토사학자입니다. 이렇듯 황기식의 업적은 다방면으로 인정받아왔지만, 안타깝게도 독립운동에 헌신한 흔적은 널리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1919년 당시 고등학생 2학년이었던 그는 3·1운동이 일어나자 선배들에게 전달받은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고향인 자인으로 가져와 이른바 3·18자인만세운동을 주도하였습니다. 이후 경찰에 발각되어 대구형무소에 보름 동안 수감되어 옥고를 겪은 독립운동가입니다. Q. 전시를 기획한 취지에 대해 설명해주세요 지난해 황기식의 작고 50주기를 맞아 민족운동가, 향토사학자, 서학자 등으로 치열한 삶을 영위한 그의 업적과 정신을 기리는 기회가 되길 바라며 전시를 기획하였습니다. 이번 특별전은 크게 3개 주제로 나눠 ‘독립운동가 황기식’, ‘향토사학자 황기식’, ‘근대 서화가 황기식’으로 구성하였습니다. 또 그의 작품과 유품 180여 점을 통해 관람객들에게 황기식이라는 인물을 알리는 데 큰 목적을 두었습니다. 특히 그의 독립운동 사실을 뒷받침하는 형사사건부와 집행원부를 함께 소개해 감동을 선사하고자 하였습니다. 이렇듯 역사적 인물을 발굴하고 조명하는 것이 공립박물관의 사명이라 생각합니다. Q. 선생의 작품을 접한 관람객들의 반응은 어떠한가요? 황기식의 대표작인 ‘기명절지도’와 ‘금강산도’, ‘사군자’, ‘풍속화’ 등이 처음으로 고향에서 전시되어 관람객들의 호응을 이끌고 있습니다. 특히 디지털 미디어아트로 재탄생한 금강산도는 분단 시기에 금강산을 그리며 우리 민족의 얼을 지키고자 한 그의 바람이 잘 드러나 깊은 감동을 선사합니다. 더불어 1956년 5월 남북통일을 기원하며 만들어 사용했던 태극기를 마주한 관람객들의 표정은 남달랐습니다. 태극기는 우리의 고난과 희망의 역사를 품고 있어서인지, 민족에 대한 자긍심과 광복을 위해 희생한 선열들의 숭고한 정신을 다시 한번 되새기는 계기를 마련해 주고 있습니다. alt 기명절지도(器皿折枝圖)_황준명 소장 Q. 전시를 준비하면서 어려움은 없었나요? 이번 전시는 황기식의 막내딸인 황인혜, 손자 황준명 씨를 비롯한 유가족과 김영태 소헌미술관장 등 개인 소장자들의 도움으로 이뤄질 수 있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미술사학, 한문학, 국문학, 역사학, 문화인류학 등 다양한 분야의 학자들이 황기식의 삶과 작품을 연구하여 소중한 원고를 작성해주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적극적으로 협조해 주셔서 큰 어려움 없이 전시를 준비하였습니다. 또한 이번 특별전을 계기로 손자 황준명 씨는 삼성현역사문화관에 황기식의 작품과 유품 129점을 기증해주었습니다. 그는 할아버지의 작품이 고향 자인이 훤히 보이는 삼성현역사문화관에 소장되기를 희망했습니다. Q. 마지막으로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다면요 1969년 4월 대구 공화회관에서 개최된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황기식의 전시회 기록을 살펴보면, 당시 방명록 표지에 ‘군현필지(群賢畢至)’라는 글이 쓰여 있습니다. ‘여러 현인들이 모두 모였다’는 뜻을 가진 이 글귀는 왕희지의 대표작인 『난정서(蘭亭序)』에서 가져왔습니다. 이는 전시회에 많은 문인들이 찾아와 주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붙인 것입니다. 이후 반세기가 흐른 지금 그가 사랑한 고향 자인이 한눈에 내다보이는 삼성현역사문화관에서 두 번째 전시회가 열리고 있습니다. 그의 작품을 감상하려 모인 관람객들을 보며 이제야 그의 간절한 바람이 이루어진 것 같아 감회가 새롭습니다. 아울러 선생처럼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수많은 독립운동가의 흔적을 찾아 그들의 역사적 자취를 기억하는 일이 꾸준히 시행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황기식(黃基式, 1905~1971) 한평생 조국애를 그리다 고향 자인에서 펼친 3·18자인만세운동 황기식은 1918년 대구고등보통학교(현 경북고)에 입학하였다. 이듬해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대구고보, 계성학교(현 계성고), 신명학교(현 신명고) 학생들과 함께 적극적으로 동참하였다. 선배들에게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받아 고향 자인으로 운반하여, 자신의 집 앞 개울가 홰나무 아래에 사람들을 모아 놓고 이른바 ‘3·18자인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이 사건이 빌미가 되어 1919년 3월 20일 경찰에 체포되어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었다. 다행히 4월 4일 대구지검이 ‘기소유예 불기소’ 처분을 내려 석방되었다. 이 만세운동으로 인해 황기식은 대구고보에서 퇴학을 당했으며, 1924년 서울 동광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이후 자인청년회를 조직하여 1927년 청소년을 대상으로 야학교를 열어 계몽운동을 펼쳤다. alt  대구고보 시절 황기식(1919)(좌) /『자인현읍지(慈仁縣邑誌)』(1932)_박의순 소장 제공(우) 기록으로 역사를 지킨 『자인현읍지』  수원고등농림학교(현 서울대 농대)에 진학한 황기식은 일본 경찰의 감시로 인해 고향 자인으로 돌아와 한학과 서화 등 전통 학문을 익혔다. 한학을 공부한 결과 중 하나가 바로 『자인현읍지』이다. 『자인현읍지』는 1932년 황기식이 대구소천인쇄소에서 신활자로 출판한 것으로, 각 고을의 산천·역사·문화·경제·정치·행정·군사 등을 기록한 지리지를 말한다. 1915년 변상묵이 조선시대에 만들어져 전해오던 ‘자인현읍지’와 ‘읍사례(邑事例)’를 기초로 새롭게 편찬하고자 하였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1932년 신활자로 간행한 것이다. 내가 살고 있는 곳의 연혁·지리·인문이 사라지지 않도록 보존한다면 훗날 광복이 되었을 때 우리 역사를 다시 이어갈 수 있으리라는 마음에서였다. 당시 20대였던 황기식은 국망의 시기에 고향을 기록함으로써 역사를 지킨 것이다. 그리고 현재 『자인현읍지』는 매우 선구적이고 충실한 한국 근대기의 지방지로 평가받고 있다. alt 금강산도(金剛山圖)_리홍재 소장(좌) / 청년 황기식(우) 민족의 긍지를 심어준 〈금강산도〉   근현대기 경북·대구 작가로서는 드물게 금강산을 그렸다는 점에서 그의 작품은 의미를 지닌다. 금강산은 예나 지금이나 민족 예술의 한 원천이다. 다만 20세기 후반 분단이라는 비극적 상황과 비민주적인 사회구조 속에서 금강산 그림은 제대로 발전할 수 없었다. 그가 금강산을 그린 1950~1960년대는 과거의 기억을 토대로 금강산을 추억할 뿐이었다. 황기식의 〈금강산도〉는 사생이 아닌 모작(摹作)이다. 모(摹), 임(臨), 방(倣)은 고전을 손으로 깨달아 추체험하는 학습이자 법고창신의 한 방식이다. 그는 분단 시기에 자기만의 방식으로 금강산을 그림으로써 국토의 통일을 염원했다. 〈경산의 근대 서화가, 희재 황기식 전(展)〉 2022. 8. 28(일) 까지 *장소 : 경상북도 경산시 남산면 삼성현공원로 59 *문의 : 053-804-7320 ]]> Thu, 27 Jan 2022 15:20:29 +0000 63 <![CDATA[세계 산책 완전 독립을 선언한 인도 초대 총리 자와할랄 네루]]> 글 박금표(한국외국어대학교 인도연구소 교수) 인도의 민족주의 운동은 영연방 내의 자치국 지위 획득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그러나 1929년 이후 영국 지배를 몰아내고 완전 독립을 추구하는 것으로 목표가 전환되었다. 이러한 목표 전환의 중심에 있었던 인물이 자와할랄 네루이다. 간디와 함께 인도 독립의 쌍두마차로 불린 네루. 그가 그린 독립 인도의 청사진은 어떠했으며, 독립운동을 어떻게 이끌었을까?   alt 자와할랄 네루 독립운동을 이끈 쌍두마차인도의 독립운동은 누가 이끌었을까? 이 질문에 대해 ‘간디’라고 답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인도의 독립운동을 이끈 다른 인물들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인도의 독립운동에는 여러 노선이 있었다. 비폭력 투쟁을 주장한 사람들, 군대를 양성하여 영국과 전쟁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들, 영국의 지배를 그대로 두고 자치권을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들, 그리고 종교에 따라 국가를 분리해 독립해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들이 있었다. 이러한 주장들이 서로 대립했을 때 통합의 리더십을 발휘한 인물이 ‘자와할랄 네루(Jawaharlal Nehru)’였다. 간디는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철저한 비폭력주의자였다. 간디가 주도한 로울라트법안 반대 투쟁, 소금행진, 큇인디아(Quit India) 운동 등에서 작은 폭력이라도 발생하면 즉각 투쟁을 중단시켰다. 그리고 투쟁이 중단된 사이 조직은 와해되고,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구속되었다. 이런 상황이 발생하면서 간디의 투쟁에 합류했던 여러 노선의 사람들 사이에서 불만이 고조되었다. 그러나 간디가 독립운동의 시작과 중지를 선언하면, 간디에 맞서거나 설득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오직 네루만이 간디를 설득할 수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네루의 설득으로 간디가 비폭력 주장에서 물러선 적은 없다. 단지 간디는 투쟁의 일선에서 물러나겠다는 선언을 했을 뿐이다. 또한 네루는 좌파와 우파 사이에서, 보수와 진보 사이에서, 종파 갈등에서 중재력을 발휘하였다. 간디가 주도한 독립투쟁의 준비와 진행, 폭력 발생으로 간디가 물러난 공백을 해결하는 일은 모두 네루의 몫이었다.       네루가 없었다면 간디의 투쟁은 실현 단계에 접어들지 못했을 것이며, 폭력 발생에 대한 대처 역시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간디와 네루는 인도의 독립운동을 이끈 쌍두마차로 인식되고 있다.  완전 독립을 추구한 독립결의안영국은 인도를 지배하면서 여러 차례 인도통치법을 개정하였다. 인도통치법 개정을 통해 영국은 식민지 인도에 의회제도를 도입했고, 참정권을 확대하기도 했다. 한편 인도의 민족주의 운동을 주도한 인도국민회의는 1885년 12월 28일에 창립된 이래 매년 12월 말에 개최하는 연차총회를 통해 민족주의 운동의 방향성을 제시했다.         인도 총독 ‘어윈(Lord Irwin)’은 인도통치법 개정 논의가 진행되던 1929년 10월 31일에 “인도통치법 개정의 목표는 자치권 부여”라고 발표했다. 영국의 발표에 대해 1929년 12월 29일에 개최된 인도국민회의 연차총회에서는 네루를 의장으로 선출하고 독립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이때 의장이 된 네루는 “전국 각지에서 영국에 대항하는 투쟁을 모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몰래 숨어서 하는 시간은 지났습니다. 우리는 이제 이 나라를 외국 지배에서 해방시키기 위해 공개적으로 논의합니다. 동지 여러분, 남녀 동포 여러분 모두 이에 참여합시다. 비록 여러분들에게 주어지는 보상이 고통, 투옥 심지어는 죽음일지라도 여러분들은 인도를 위해, 지금의 속박으로부터 인류의 자유를 위해 한몫을 했다는 만족감을 얻게 될 것입니다”라고 연설하며 1930년 1월 26일을 독립일로 선포하였다.           이로써 인도는 자치를 얻기 위해 투쟁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 독립(Purna Swaraj)을 추구한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밝혔다. 네루가 결의안을 발표하고 참석자들이 완전 독립에 매진할 것임을 서약한 것은, 인도에서 영국을 완전히 몰아내자는 독립운동의 신호탄이 되었다.  alt 어린이들의 복지를 강조한 네루 탄생일을 인도의 어린이날로 지정(11. 14.) 준비된 독립 인도의 청사진인도는 1757년에 영국의 반식민지가 되었고, 1858년에 영국 여왕이 인도를 다스리는 완전한 식민지가 되었다. 200년 가까이 영국의 지배를 받던 인도는 독립에 이르기까지 셀 수 없는 투쟁과 피를 흘렸으며, 마침내 1947년 8월 15일에 독립을 맞이하게 되었다. 1947년 8월 15일 자정을 기해 독립하게 된 국회의사당에서 역사적인 독립식을 개최하였다. 이 자리에서 네루는 “오래전 우리는 운명과 약속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우리의 맹세를 이행할 순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온 세상이 고요히 잠들어 있을 자정이 되면 인도는 생명과 자유로 깨어날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유례가 없는 그 순간에 오랫동안 억눌려온 국가의 혼이 되살아날 것입니다”라는 연설을 하고, 인도의 독립을 위해 죽어간 수많은 영령들을 기렸다. 네루의 독립 기념 연설은 ‘운명과의 밀회(Tryst With Destiny)’라는 제목으로 널리 알려졌다.      아시아의 많은 식민지들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립했으나, 독립 이후의 정치·사회는 그리 안정적이지 못했다. 반면 인도의 경우 독립을 이끈 네루가 집권함으로써 이미 독립 인도의 청사진이 구체적으로 마련되어 있었다. 덕분에 독립 이후 75년이 된 지금까지 인도의 헌정질서가 무너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네루는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 경제적으로는 국가 주도의 사회주의 계획경제, 외교적으로는 비동맹, 종교적으로는 다양성을 포용하는 세속국가를 근간으로 하는 청사진을 마련했다. 1951년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시작으로 국가 기간산업과 농업 생산량 증대를 위한 정책으로 경제적 안정을 추구했다. 한편으로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동서 냉전 체제로 신생 독립 국가들이 강대국의 지원을 받기 위해 공산주의, 민주주의 진영의 강대국에 의존함으로써 실질적인 국가 독립성이 보장되기 어려운 상황에 처했다. 그러나 네루는 “우리나라 독립성에 대한 어떠한 침해도 허용하지 않을 것”이라는 강한 의지를 천명하며, 어떤 진영에도 속하지 않는 비동맹을 외교의 근간으로 삼았다. 이러한 네루의 청사진을 바탕으로 인도는 비동맹에 동조하는 제3세계 국가의 중심이 되었다.            인도의 독립운동을 주도한 것은 간디였다. 하지만 네루가 있었기에 독립 이전부터 독립 이후의 인도에 대한 청사진을 만들 수 있었고, 준비된 상태에서 독립을 맞이할 수 있었다. 독립 후 네루는 그가 죽을 때까지 17년 동안 인도 총리로서 인도의 헌정질서에 혼란 없이 인도의 정치를 안정시켰다. 물론 그에 대한 평가는 긍정적·부정적 측면을 모두 갖고 있다. 그럼에도 식민지배하에서 독립한 대부분의 국가들이 군사 쿠데타 혹은 내전을 겪으며 헌정질서가 붕괴되었던 것과는 달리 인도의 헌정질서가 75년 동안 유지되었던 것은, 간디와 함께 독립운동을 이끈 쌍두마차의 역할을 하는 한편 인도의 미래를 위한 청사진을 마련했던 네루 덕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 Thu, 27 Jan 2022 15:21:00 +0000 63 <![CDATA[기념관은 지금 독립기념관 고객홍보부 청년 인턴들의 하루]]> 정리 편집실 지난해 11월, 독립기념관에서 5개월 동안 함께 할 청년 인턴들이 임용되었다. 그 후 어느덧 두 달이 지나고 새해가 밝았다. 이번 호에서는 고객홍보부에 발령받은 청년 인턴 5명의 하루를 따라가 본다. AM 08:30 독립기념관 관사 앞 하루가 시작되면 독립기념관 내에 있는 관사에서부터 사무실까지 이동해야 한다. 날씨가 따뜻해졌기 때문에 평소보다 발걸음이 가볍다. 출근은 어떻게 하나요? 주로 다른 인턴들과 함께 사무실까지 걸어갑니다. 가끔 관사에 거주하는 직원분이 차로 태워주시곤 하는데, 이 기회를 빌려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걸어가게 되면 고객홍보부 사무실이 있는 겨레누리관까지 약 20분 정도 걸립니다. 겨레누리관에 도착해서 출근 지문을 찍고, 우편함에 있는 고객홍보부 우편물을 챙깁니다. 부서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체온 측정을 하고, 따뜻한 커피나 차로 하루를 시작합니다.  일과를 시작하는 마음가짐은 어떤가요? 그날의 일정과 업무량을 확인하고, 하루를 잘 마무리하겠다는 마음으로 자리에 앉습니다. 최근에는 정확성을 필요로 하는 데이터 작업을 하고 있어서, 실수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하면서 업무에 임하고 있습니다. 물론 점심 메뉴를 먼저 고민할 때도 있습니다. alt PM 12:10 겨레누리관 앞 오전 업무를 마무리하고 점심 식사 후 독립기념관 경내를 산책하며 사무실에 복귀한다. 점심 식사는 어떻게 하나요? 점심은 주로 동기들과 구내식당을 이용하는데, 가끔 독립기념관 인근 맛집에서 식사를 하기도 합니다. 직원분들이 추천해주는 맛집을 알아두고 인턴끼리 공유하며 맛집 탐방을 하는 재미도 있습니다. 벌써 인근 맛집을 섭렵한 것 같아 뿌듯함도 느낍니다.  alt PM 03:30 고객홍보부 사무실 개인별 배정 업무를 마치고 공통 업무로 할당된 기관지 구성을 위한 회의 시간이 되어 움직이는 청년 인턴들. 이전 회의 내용을 바탕으로 피드백을 주고받으며 열띤 토론을 이어나간다. 어떤 업무를 하고 있나요? 고객홍보부는 고객 업무 파트와 홍보 업무 파트로 나뉘는데, 저희는 각 사수의 업무를 보조하는 형식으로 업무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전시관을 방문하며 고객서비스를 위한 안내 키오스크가 잘 작동하는지 확인하고, 사무실에서 고객 만족을 위한 포스터를 제작합니다. 독립기념관 캠핑장에서 고객 만족을 위한 이벤트를 진행하기도 하고, 독립기념관 홍보를 위한 기획안도 작성합니다. 개개인의 업무는 서로 다르지만, 단풍나무숲길 후원 행사나 삼일절 행사와 같이 큰 규모의 행사를 같이 준비하기도 합니다. 또 월간지의 한 섹션을 기획하는 등 다양한 주제로 의견을 주고받으며 함께 일하고 있습니다. alt PM 04:30 겨레누리관 앞 산책로 회의를 마치고 바깥공기를 쐬며 잠시 휴식 시간을 갖는 청년 인턴들. 커피를 마시며 한숨을 돌린다. alt 일하다가 지치진 않나요? 일하며 지치거나 기분 전환이 필요하면 경내 산책을 하곤 합니다. 겨레누리관 바로 옆에는 새로 조성중인 진달래꽃 동산과 통일염원의 동산이 있어 한 번씩 바람을 쐬러 나가는데, 자연과 어우러진 이 장소를 걸으면 마음이 편해지곤 합니다. 또한 독립기념관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단풍나무숲길을 산책하거나 태극기 한마당과 백련못에서 기념사진을 남기기도 합니다. 일하다가 지칠 때는 이런 곳들을 산책하며, 더욱 업무에 집중할 수 있는 힘을 얻기도 합니다.  alt PM 07:00 퇴근하는 길 바쁜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향하는 청년 인턴들. 몰아치는 업무에 지칠 법도 한데, 전혀 피곤한 내색이 없다.  바쁜 하루를 보낸 소감이 어떤가요? 퇴근하는 시간은 역시 기분이 좋습니다. 직장인이 유일하게 느낄 수 있는 행복한 시간이 아닐까 합니다. 열심히 일하고, 하루를 슬기롭게 보냈다는 긍정적인 생각을 하고 하루를 마무리하는 편입니다. 새로운 경험으로 보람찬 하루를 보낸 것 같아 만족스러운 느낌이 듭니다. 남은 기간 동안 다짐이나 마음가짐이 있나요? 업무적인 면으로 더 다양한 것을 배우고 싶습니다. 독립기념관의 청년 인턴으로서 홍보 업무를 수행하며 다양한 기관 및 정부 부처와 소통하는 등의 공적인 업무를 해봤다는 보람이 있고, 고객 관리 업무를 수행하면서 관람객을 맞이하는 행사를 진행하거나 기획할 수 있어서 업무적으로 넓은 시야를 가지게 된 것 같습니다. 특히 3월에는 독립기념관에서 가장 크게 열리는 삼일절 행사가 예정되어 있는데, 행사 기획부터 관람객 유치까지 많은 업무를 해보고 싶습니다. 남은 인턴 생활도 초심을 잃지 않고 열심히 일하며, 동기·부서원들과 함께 화목하게 지내고 싶습니다. ]]> Thu, 27 Jan 2022 15:21:35 +0000 63 <![CDATA[독자 참여 이번 호 「독립기념관」을 읽고 빈칸을 채워주세요. 꼼꼼히 읽다 보면 정답에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altalt아이콘을 클릭하면 퀴즈 정답을 보낼 수 있습니다.]]> Thu, 27 Jan 2022 15:22:21 +0000 63 <![CDATA[들어가며 황포탄의거 100주년]]> 1922년 3월 28일,지금부터 100년 전 쾅! 중국 상하이 황포탄 지역에 굉음이 퍼졌다. 여객선에서 내리던 일본군 육군대장이자 남작인 다나카 기이치를 향해 총탄 네 발이 연속으로 날아들었고, 뒤이어 폭탄도 투척되었다. 총을 든 자는 의열단원 김익상과 그의 동지 오성륜, 이종암이었다. 총탄은 간발의 차이로 다나카를 빗나갔고.  애석하게도 미국인 스나이더 부인이 총상을 입고 사망하였다. 비록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지만, 이들의 항일투쟁은 조선총독부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다. 소문은 경성을 넘고 한국을 건너, 세계 곡곡으로 퍼져나갔고 꺼져가던 독립의지에 다시금 불씨를 지폈다. 2022년 3월, 10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조국을 위하여 목숨까지 바치며  조선총독부에 대항한 김익상의 의열투쟁 정신을 다시 한번 새겨보아야 할 때이다. 김익상을 비롯한 의열투쟁에 앞섰던 의열단원들은 정의로운 폭력으로 빼앗긴 나라와 자유를 되찾기 위하여 고군분투하였다.  이는 신채호가 강령한 『조선혁명선언』에 잘 드러난다. 민중은 우리 혁명의 대본영이다. 폭력은 우리 혁명의 유일한 무기이다.    우리는 민중 속에 가서 민중과 손을 잡고     끊임없는 폭력·암살·파괴·폭동으로써       강도 일본의 통치를 타도하고, 우리 생활에 불합리한 일체 제도를 개조하여 인류로써 인류를 압박치 못하며, 사회로써 사회를 박탈치 못하는 이상적 조선을 건설할지니라        신채호가 강령한 『조선혁명선언』(1923) 중 의열투쟁은 우리민족의 울분과 억압된 자의식을 표출한 효과적인 항일독립운동 방략 가운데 하나였다. 이런 점에서 의열투쟁은 테러와 다르다.  테러는 개인이나 집단의 사사로운 이익을 위하고  공격 대상을 불특정 다수로 삼아 선량한 시민을 희생시키지만,  의열투쟁은 응징 대상을 침략의 중심부인 일제기관과 핵심인물로 특정하였다.  의열투쟁은 죽음을 무릅쓰고 인류에게  자유와 정의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민족의 대의를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두었다. ]]> Mon, 28 Feb 2022 10:49:36 +0000 64 <![CDATA[톺아보기 상하이 황포탄에서 일제 침략의 거두를 응징하다]]> 글 장세윤(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역사연구소 수석연구원)   1922년 3월 28일, 김익상은 의열단의 일원으로 일본군 육군대장이자 남작인 다나카 기이치 사살을 결행하였다. 중국 상하이 황포탄에서 동지 오성륜, 이종암과 함께 순차적으로 다나카를 저격하였으나 결과는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황포탄의거는 성패 여부를 떠나서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항일정신’ 그 자체에 의의가 있다. 지금부터 100년 전 독립의지가 담긴 총성이 울려 퍼진 장소, 황포탄으로 들어가본다. alt 김익상 치밀한 거사 계획의 시작 김익상(金益相)은 1920년 중국 베이징에서 인생의 큰 분수령이 된 의열단 단장 김원봉(金元鳳)을 만나 의열단에 가입하였다. 1919년 11월 창단한 의열투쟁 독립운동 조직인 의열단은 이 시기 본격적으로 ‘암살·파괴’투쟁을 추진하고 있었다. 이후 김익상은 1921년 9월 11일 국내로 잠입하였고, 다음 날 12일 오전 10시 20분경 전기시설 수리를 하러 온 것처럼 가장하고 남산 기슭에 있는 조선총독부 청사로 들어갔다. 전광석화처럼 빠른 동작으로 먼저 2층에 있는 비서과(秘書課)에 폭탄을 던지고, 이어 회계과에 폭탄을 던졌다. 비서과에 던진 폭탄은 폭발하지 않았지만, 회계과에 던진 폭탄은 큰소리와 함께 폭발하여 여러 명의 일본 헌병들이 놀라 뛰어올라왔다. 김익상은 이들에게 “2층으로 올라가면 위험하다”라는 말을 남기고 태연하게 조선총독부 청사를 빠져나왔다.이후 베이징으로 돌아간 김익상은 1922년 2월 3일 상하이로 가서 김원봉을 만나 다시 거사 계획을 협의하였다. 이때 김원봉의 소개로 동지 오성륜(吳成崙)을 만났다. 그때 마침 ‘일본군 육군대장이자 남작(男爵)인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가 필리핀을 방문한 뒤 3월 28일 상하이에 도착한다’는 보도가 났다. 정보를 입수한 의열단은 다나카를 사살하여 한국인의 독립운동을 온 천하에 알릴 것을 결정하고 치밀한 거사 계획을 세웠다. 다나카는 1920년 10월 일본 당국이 조작한 ‘훈춘(琿春)사건’과 한인 무장세력 탄압을 이유로 중국 연변(북간도) 지방에 침공하여 수많은 한인 동포들을 학살한 ‘간도 대학살(일명 경신참변, 혹은 간도참변)’ 당시 육군대신(육군상)을 맡고 있었다. 또한 1919년 3·1운동의 무력탄압과 이른바 ‘간도지방 불령선인(不逞鮮人) 초토(剿討)계획’의 수립과 실현을 통해 독립운동을 탄압하고 많은 한인들의 학살에 관여하여 책임이 있는 인물이었다.              의열단원들은 ‘다나카를 누가 처단할 것인가’를 의논하였고, 김익상은 물론 의열단 동지인 오성륜, 이종암(李鍾巖) 등이 ‘다나카를 처단하겠다’고 나섰다. 논의 끝에 결국 ‘명사수’로 알려진 오성륜이 제1선에서, 김익상이 제2선에서, 이종암이 제3선에서 권총과 폭탄(수류탄)을 준비하여 차례대로 다나카를 저격하기로 계획하였다. 특히 김익상은 이미 ‘조선총독부청사 투탄의거’라는 큰일을 결행했기에 김원봉은 이번 거사 기회를 오성륜에게 먼저 주기로 하였다. alt 김익상의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좌) / 육군 중장 시절의 다나카 기이치(임경석 제공)(우) 황포탄에 울려 퍼진 총성 김익상·오성륜·이종암 이 세 사람은 거사를 실행하기 위하여 1922년 3월 27일 아침 6시 상하이 황포탄(黃浦灘) 부두에 나가 현장을 점검하며 기회를 엿보았다. 하루를 기다린 끝에 3월 28일 오후 3시 30분, 다나카 일행이 탄 고급 여객선이 황포탄 세관부두로 접안하였다. 여러 여객과 함께 걸어 나오는 다나카를 본 오성륜이 먼저 권총으로 2발의 총탄을 발사하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다나카를 앞서 걷던 미국인 스나이더 부인이 총탄에 맞고 말았다. 놀란 다나카가 황급히 대기 중인 자동차로 도망치자 두 번째로 김익상이 권총으로 2발을 쏘았지만, 모자만 꿰뚫고 지나가 버렸다. 김익상은 이어서 다나카에게 폭탄(수류탄)을 던졌으나 폭발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뒤에 있던 이종암이 다나카가 탄 자동차에 폭탄을 던졌지만, 그것을 본 영국 경찰이 폭탄을 강물 속으로 차버리는 바람에 거사는 성공하지 못하였다.           의거 직후 세 사람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힘껏 도주하였다. 그러나 얼마 가지 못해서 오성륜은 현장 부근 쓰촨로(四川路)에서 체포되었고, 김익상 역시 추격하던 영국 경찰이 쏜 총탄에 손과 발을 맞아 중국 순경에 붙잡혔다. 이종암만 안전하게 피신할 수 있었다. 김익상은 피신 중에 중국 순경이 달려들자 하늘을 향해 총을 쏴서, 무고한 희생을 막겠다는 의열투쟁의 정신과 자세를 보여주었다. 법정투쟁 그 이후 경찰에 붙잡힌 김익상과 오성륜은 일본총영사관에 구금된 뒤 가혹한 심문을 받았다. 김익상과 오성륜은 상하이 일본총영사관 감옥에 분리되어 수감되었다. 그러나 5월 2일 새벽 2시경 오성륜은 함께 있던 일본인 죄수 다무라 주이치(田村忠一)의 도움을 받아 기적적으로 감옥을 탈출하여 상하이 외곽으로 피신하였다. 이에 당황한 상하이 일본총영사관은 ‘5만 원’이라는 그 당시 기준으로 거액의 현상금을 걸고 오성륜 체포에 혈안이 되었지만, 끝내 오성륜을 잡지 못하였다. 일본 당국은 김익상을 곧바로 일본 나가사키(長崎)로 압송하였는데, 오성륜의 탈옥에 놀라고 사건의 파장을 염려하여 서두른 것이었다.            김익상은 나가사키지방재판소에서 무기징역을, 나가사키공소원(長崎控訴院)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1924년에 무기징역으로 감형되고, 다시 여러 번 징역이 감형되어 1936년 8월 2일 가고시마감옥에서 출옥하였다. 출옥 후 얼마 지나지않아 일제 경찰에 연행된 김익상은 현재까지 종적이 묘연하다. 또한 탈옥한 오성륜은 러시아 유학을 한 뒤 1926년 다시 중국으로 돌아가 중국혁명운동과 한국독립운동에 참가하여 항일투쟁을 지속하였다. 그러나 만주지역에서 동북항일연군의 고위 간부로 활동하다가 1941년 1월 말 만주국 토벌대에 체포되어 투항, 변절하고 말았다. 반면 이종암은 중국과 고향인 대구 일대를 왕래하면서 계속해서 의열단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이종암은 1925년 11월 5일 경북 달성군 달성면(현 대구시 달성) 소재 이기양(李起陽)의 산장에서 일제 경찰에 잡히고 말았다. 결국 그는 1926년 12월 2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13년형을 선도받고 이후 감형되어 1930년 5월 28일 대구형무소에서 출옥하였지만 병고로 순국하고 말았다.              한편 황포탄의거로 불행하게 아내를 잃은 미국인 스나이더는 이후 김익상과 오성륜 등이 조국독립과 민족해방을 위하여 분투하는 투사임을 알고 일본사법당국에 ‘김익상 등을 관대하게 처리해달라’는 진정서를 제출하기도 하였다.  alt (좌측부터) 김익상·오성륜의 다나카 기이치 사살 시도를 다룬 기사, 『동아일보』(1922.4.7.) / 오성륜 / 이종암 황포탄의거의 의미와 평가 조선총독부 고등법원 검사국은 1933년 4월에 소위 ‘조선암살사건표’를 작성하여 치안 당국과 관계자들에게 배포하여 경각심을 촉구하였다. 이 표를 보면 일제강점기의 대표적 항일 의열투쟁 사건 8종이 집약되어 있다. 1909년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처단’, 윤봉길 의사의 ‘상하이 훙커우(虹口)공원의거’, 강우규 의사의 ‘사이토(齋藤實)총독 폭탄투척’ 등과 함께 주요 사건으로 김익상 의사 등의 ‘다나카 육군대장 저격사건’을 들고 있다. 그만큼 황포탄의거가 당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음을 알려주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실제로 황포탄의거는 한·중·일은 물론 구미 각국에도 널리 알려지는 등 한국인들의 치열한 독립운동을 알리는 효과를 거두기도 하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황포탄의거 직후 ‘자신들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성명을 발표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체포된 김익상이 일본 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자 임시정부 외교총장 조소앙은 일본 정부의 우치다(內田康哉) 외무대신에게 강력한 항의서한을 전달하였다. 주요 내용은 ‘이번에 김익상을 사형에 처할지라도 이후에 또 무수한 김익상이 생겨날 것’이라는 전언이었다. 실제로 조소앙의 서한대로 한국인들의 저항은 그치지 않았고, 중국 상하이 등지에서 의열투쟁은 계속되었다. ]]> Mon, 28 Feb 2022 10:50:25 +0000 64 <![CDATA[만나보기 황포탄의거 그 후 남겨진 사람들]]> 글 장세윤(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역사연구소 수석연구원)   황포탄의거 이후 일제 경찰에 체포된 김익상은 오랜 세월 옥고를 치렀다. 김익상이 살아 돌아오기만 손꼽아 기다린 아내 송씨, 동생 김준상은 일제의 감시, 굶주림과 싸워야만 했다. 한편 오성륜의 오발로 일본군 육군대장 대신 총을 맞은 미국인 스나이더 부인의 남편은 아내를 잃은 슬픔을 감내해야 했다. 우리가 그동안 조명하지 못한 황포탄의거 이후 남겨진 사람들과 희생자들의 이야기에 주목해본다. alt 김준상의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  힘겨운 삶을 이어나간 김익상의 가족들 김익상 체포 이후 아내 송씨, 딸, 동생 김준상(金俊相) 등 그의 가족들은 고통을 묵묵히 감당하였다. 동생 김준상은 황포탄의거 이전에 거행된 조선총독부의거를 도왔다는 혐의로 일제경찰에 끌려가 고초를 겪었다. 이후 일제 감시와 생활고에 시달린 김준상은 1925년 6월 6일 스스로 세상을 등졌다. 김익상의 동갑내기 아내 송씨는 어린 딸과 연전 세상을 떠난 김익상 형의 아들을 홀로 키우다가 재가하였다. 황포탄의거 이후 4년이 지난 1926년 2월 13일, 음력 설날을 맞이하여 동아일보 기자가 서울 용산 부근의 이태원리(현 이태원동)에 살고 있던 아내 송씨를 만나 인터뷰를 진행하였다.  alt 김익상 아내 송씨(좌) / 김준상의 극단적 선택을 보도한 기사, 『동아일보』(1926.6.9.)(우) “마침 어린 딸 ‘점석(7세)’에게 새 옷을 갈아입히고 앉았던 송씨는 찾아간 기자를 향하여 “어느 때나 생각이 안나겠습니까마는 설을 당하면….” 하고 말을 끝맺지 못하고 치마고름으로 눈물을 씻더니 다시 말을 계속하여 “그래도 언제나 나오리라는 말이나 있어야지요? 모진 목숨으로 나혼자 살면 무엇해요? 생각하면 가슴만 막힙니다.” 하고 한숨을 짓더니 철모르고 웃는 어린 딸의 옷깃을 어루만지며 “생전에 만나볼 것 같지 않아요. 어린 딸이나 알뜰히 키울랍니다.” 하고는 다시금 살아가는 형편 이야기를 한다. “애 아버지가 칠년 전에 집을 나간 뒤로는 작년 여름에 돌아간 작은 시아주버니(김익상 동생 김준상)가 집안살림을 하였습니다마는 지금 나혼자 어린 조카(김익상 형의 아들) 기복이가 연병정(練兵町) 저울회사에서 벌어오는 것을 가지고 올케(김준상 아내)를 데리고 네 식구가 그럭저럭 살아갑니다. 이 생각 저 생각 할수록 가슴만 아프고 감옥에 있는 애 아버지 생각뿐이에요. 설이라고 우리집은 이 모양입니다. 감옥에 있는 이를 생각하면 먹는 것도….” 말끝을 떨며 어린 딸을 안고 기자를 문밖까지 보내주었다.”  김익상 아내 송씨 인터뷰 중,『동아일보』(1926.2.17.) 인터뷰 내용을 보면 송씨는 김익상의 형과 동생이 생활고와 일제 당국의 탄압으로 잇달아 사망하거나 자살하여 어린 조카 김기복이 벌어오는 생활비로 매우 어렵게 살아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때문에 송씨는 결국 재가하여 김익상과는 이별을 고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역사의 빛이 아니라 그늘 속에서 숨죽여 삼켜야 했던 가족들의 사연은 매우 비극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오성륜과 대조적인 행적을 펼친 박영자 오성륜의 아내는 박영자로 알려졌다. 1910년생으로 추정되는 박영자는 일찍 중국 동북지방(만주)에서 조선공산당 만주조직원으로 활동한 아버지의 영향으로 1930년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박영자의 부모는 1930년대에 일제 탄압으로 희생되었다. 그는 경북 안동 출신의 항일투사 김노숙의 친밀한 전우로서 1931년에 중국공산당 반석현(磐石縣)위원회에서 부녀회 사업을 맡았다. 이후 중국공산당 계열의 동북인민혁명군 독립사 사령부, 동북항일연군 제2군 군부에서 활동하였다. 또한 중국인 양정우(楊靖宇)가 이끄는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사령부에서 남자들과 동등하게 싸우는 전투원으로 항일투쟁을 벌였다. 박영자는 인자하고 쾌활한 성격과 더불어 전투 때는 매우 용감하게 싸워 동지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일본군과 괴뢰 만주국군 등의 탄압으로 1940년 전후 시기 만주 항일세력이 거의 괴멸되고 말았다. 그는 중국인 조아범(曺亞範)이 이끄는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제2방면군 사령부에서 활동하다가 1941년 4월 경 백두산 부근의 몽강현(?江縣)에서 경찰에 체포되었다. 그는 이미 투항한 남편 오성륜 등의 귀순 요구에도 불구하고 이를 거절한 끝에 결국 목이 잘리는 잔인한 방법으로 피살되고 말았다. 말년에 일제에 투항하고 변절하여 일본 당국과 괴뢰 만주국 당국에 협조한 남편 오성륜의 행적과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박영자는 마치 영화 ‘암살’의 주인공과 같은 용감하고 장렬한 전사의 늠름한 기개와 불굴의 용기를 보여주었다. 한편 이종암의 아내는 서희안으로 알려졌는데, 이종암이 약관의 나이에 독립운동에 투신하고, 국내외 각지를 누비느라고 슬하에 자녀도 없었다. 안타깝게도 서희안의 행적은 잘 알 수 없다. 항일독립투사를 지지한 스나이더 황포탄의거 당시 미국인 스나이더 부인이 오성륜의 오발에 맞아 사망하는 유감천만한 일이 발생하였다. 미국 인디애나주 인디애나폴리스 부근의 브라질 마을에 거주하였던 그는 상하이에서 남편 스나이더와 함께 신혼여행을 즐기는 중이었다. 한순간에 아내를 잃은 스나이더는 황포탄의거를 거행한 김익상, 오성륜, 이종암에 분노하였다. 그러나 이들이 조국독립과 민족해방을 위하여 분투하는 투사임을 안 스나이더는 일본사법당국에 ‘김익상 등을 관대하게 처리해달라’는 진정서를 제출하였다. 그리고 황포탄의거 후 얼마 지나지 않은 1922년 4월 어느 날, 상하이 일본총영사관 감옥에 갇혀 엄중한 심문을 받던 김익상과 오성륜을 면회하였고, 오히려 이들의 노고를 위로하는 놀라운 모습을 보였다.       상하이에서 활동하고 있던 항일 여성운동가들의 모임인 대한애국부인회는 스나이더 부인의 죽음에 깊은 애도의 뜻을 표하였다. 이를 위해 ‘비단’에 영문으로 ‘스나이더 부인의 죽음을 도상(悼想)하노라’라는 문구를 수놓은 ‘자수(일종의 만장[輓章])’와 조의를 담은 ‘위문서간’을 남편 스나이더에게 전달하였다. 이에 스나이더는 1922년 4월 10일 대한애국부인회 회장 김순애에게 편지를 보내 인사를 전하였다. alt 스나이더 부인(좌) / 스나이더 편지 내용을 보도한 『독립신문』(1922.6.3.) “그 아름답고 기이한 예물을 당신들이 손으로 만들어 사랑과 동정의 기념품으로 주었으니, 나는 내 마음에 있는 것을 당신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이 편지 쓸 임무를 맡았습니다. 내가 이 물건을 가져다가 내 집 가장 잘 보이는 곳에 두어 죽은 그의 많은 친구들로 하여금 그것을 볼 때마다, 당신들이 그처럼 꽃다운 예물을 ‘스나이더’에게 준 것을 기억할 것으로 확신합니다. 고상하고 또 빛나는 귀 회의 결의를 나는 늘 기억하여 잊지 않으려 하고, 또 이를 세상에 드러내려 하는 동시에 귀 애국부인회에 대하여 감사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상하이에 있는 다른 많은 친구(다 나에게 초면이었음)들의 말은 도리어 내 마음을 눌리게 할 뿐이었으나, 당신들이 나에게 한 일은 나의 찢어진 마음에 큰 감격을 주었습니다. 나의 심정과 감상을 귀 회의 모든 회원들에게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내가 귀 회의 여러 직원들을 만나 보지 못한 것을 매우 유감으로 생각하고, 또한 그들을 만나볼 기회를 잃은 것을 대단히 후회합니다. 나는 당신들에게 거듭 감사하며, 아울러 일반 회원들에게 향하는 나의 심정이 어떠한 것을 당신들의 심정이 스스로 해석할 줄로 믿습니다.” 스나이더가 대한애국부인회 회장 김순애에게 보낸 편지, 『독립신문』(1922.6.3.)     불의의 총격으로 희생된 부인의 죽음으로 충격과 슬픔에 휩싸였음에도 불구하고, 스나이더는 한국인들의 독립운동에 대한 동정과 이해를 표시하며 매우 정중하고 너그러운 신사의 아량을 보여주었다. 한편 대한애국부인회의 현명한 대처는 독립운동사에서 찬란한 빛을 발하였다. ]]> Mon, 28 Feb 2022 10:50:56 +0000 64 <![CDATA[이달의 독립운동가 군산 3·1운동을 이끈 사람들]]> 글 독립기념관 전시부   alt 군산 3·1운동을 주도한 교사들 ‘이두열·고석주’ 1919년 2월 말 서울에서 유학 중이던 군산영명학교(현 군산제일고등학교) 졸업생을 통해 3·1운동 계획을 들은 영명학교 교사 이두열, 멜볼딘여학교(현 군산영광여자고등학교) 교사 고석주는 동료 교사, 학생들과 함께 3월 6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독립선언서와 태극기, 각종 문서들을 비밀리에 준비하였다. 그러나 거사 전 3월 4일 새벽 발각되어 일제 경찰에 이두열과 고석주 등이 연행되었다. 체포를 면한 다른 사람들은 거사를 하루 앞당긴 3월 5일 군산 3·1운동을 전개하였고, 일제는 헌병대까지 동원하여 이를 저지하였다. 이두열과 고석주는 각각 3년과 1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정부는 이들의 공적을 기리며 1990년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alt 군산 영명학교 학교 건물 (1910년대) 3·1운동 참여를 저지한 식민지 교육에 항거한 노동자 ‘김수남’  군산에서 노동자로 일하던 김수남은 3·1운동을 계속해 나갈 것을 준비하며, 노동자, 학생들에게 참여할 것을 권유하였다. 그러나 군산공립보통학교 일본인 교장과 교사들의 방해로 학생들이 참여하지 못하자 김수남은 3월 23일 군산공립보통학교에 불을 지르며 식민지 교육에 대한 저항의지를 표출하였다. 이로 인해 일제 경찰에 체포된 김수남은 징역 10년을 선고받았다. 정부는 김수남의 공적을 기리며 1990년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alt 김수남 판결문 (1919.07.12.)_국가보훈처 제공(좌) / 군산공립보통학교 학교 건물 (1910년대)(우) alt 군산 3·1운동 참가자 재판 결과를 보도한 『매일신보』 (1919.04.16.) 미국에서 3·1운동을 증언한 영명학교 교장 ‘윌리엄 린튼’   1912년 군산영명학교의 교사로 부임하여 1917년 교장으로 임명된 윌리엄 린튼은 군산 3·1운동의 전개과정과 일제의 탄압을 목격하였다. 1919년 봄, 안식년을 맞아 미국으로 돌아간 그는 애틀랜타에서 열린 남장로교 평신도 대회에 참석하여 일제의 식민지 지배와 한국인의 저항을 증언하였으며, 지역신문인 『애틀랜타 저널The Atlanta Journal』에 한국의 상황을 기고하였다. 1930년대 후반 전주 신흥학교 교장으로 재임하던 중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를 거부한 윌리엄 린튼은 1940년 일제에 의해 강제 추방되었다. 정부는 그의 공적을 기리어 2010년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alt 『애틀랜타 저널The Atlanta Journal』에 실린 린튼의 기고문 (1919.05.)(좌) /  전주 신흥학교 폐교 청원 소식을 보도한 『동아일보』 (1937.09.09.) _국사편찬위원회 제공(우) alt ]]> Mon, 28 Feb 2022 10:51:34 +0000 64 <![CDATA[독립운동 사적지 전북 군산 3·1운동 만세 현장]]> 정리 편집실   전북 군산에서의 독립만세시위는 1919년 3월 5일에 기독교계 사립학교인 영명학교(永明學校) 교사와 학생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영명학교 졸업생이자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학생인 김병수(金炳洙)가 2월 26일 독립선언서 100장을 가지고 와 영명학교 교사 이두열(李斗悅)·박연세(朴淵世)·송정헌(宋正憲)·고석주(高錫柱)·김수영(金洙榮) 등에게 전하였고, 이들은 학교 기숙사에서 선언서 3천5백 장을 더 인쇄하여 기독교 신자들에게 돌리고 널리 인근 지방까지 나누어 주었다. 이어 이두열·이준명(李俊明)·김성은(金聖恩) 등은 영명학교 학생 김영후(金永厚)·송기옥(宋基玉) 등에게 지시하여 기숙사 2층에서 독립선언서를 등사하고 태극기를 준비하도록 하였다. 3월 6일 장날을 이용하여 시위를 벌이기로 계획하였으나 3월 5일 거사계획이 발각되어 새벽 군산경찰서의 무장 경찰 수십 명이 주모자인 이두열·박연세를 체포하였다. 이에 교사 김윤실(金潤實)과 영명학교 학생들은 석방시위를 벌이기로 결의하고, 같은 날 오전 8시경 학교 교정에 모였다가 미리 준비해둔 3천 5백장의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꺼내들고 만세를 부르며 군산 시내로 행진하였다.           보통학교 학생과 많은 교인들이 행렬에 참여하여 시위대열은 500명으로 증가하였고, 평화동·영동을 거쳐 본정 큰 거리를 지나 경찰서에 이르렀을 때에는 1,000여 명에 이르렀다. 이들은 군산경찰서 앞에서 구속된 영명학교 교사들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이에 당황한 일제 경찰들은 이를 막기 위해 재향군인까지 출동시키고 이리(현 익산)주재 헌병대에 지원을 요청하여 만세시위대를 탄압하였다. 이 시위로 인하여 영명학교 교사 이두열은 징역 3년형을, 김수영·박연세는 징역 2년 6월형을, 고석주·김성은·양기준(梁基俊)·유한종(劉漢鍾)·임종우(林鍾祐)·김영상(金永祥)·문재봉(文在鳳) 및 학생 유복섭(劉複燮)·고준상(高俊相)·홍천경(洪天敬) 등 30여 명은 징역 1년 6월형 내지 징역 6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당시 체포된 사람은 90여 명에 이른다. 군산경찰서는 노동·농민운동을 비롯한 사회운동가 및 독립운동가를 체포·구금한 탄압 장소이기도 하다. 영명학교 3·1운동 발원지 영명학교는 1903년 2월 미국 남장로선교사 전킨(전위렴, W.M.Junkin)에 의해 설립되었다. 1952년 군산영명학교로, 1975년 군산제일고등학교와 군산제일중학교로 분리되었으며, 1977년 군산시 조촌동으로 이전하였다. alt 군산 영명중학교(1910년대) 주소 : 전라북도 군산시 영명길 6  위치 고증 :『신한민보』 1919년 7월 12일 자, 『동아일보』 1920년 9월 23일 자 및 「이두열 등 37인 판결문」 등에 관련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구암동 자치센터 관계자 및 구암교회 원로들의 증언을 토대로 위치를 확인하였다. 현재는 멸실되어 세풍아파트 105동·107동 일대가 영명학교가 있던 자리이며, 세풍아파트 앞 진입로는 영명학교 이름을 따 영명로라고 이름 지었다. 구암교회 3·1운동 근거지 1919년 3월 5일 옥구군 구암리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시위의 중심 역할을 한 곳이다. 구암교회를 모체로 구암유치원·알락소학교(현 구암초등학교)·영명학교(현 제일중·고등학교)·멜볼딘여학교(현 영광중·고등학교) 등의 학교가 선교사들에 의해 세워졌으며 모두 3·1운동에 참여하였다. 구암교회는 1893년에 궁멀교회라는 이름으로 설립되었고, ‘ㄱ’자형 건물이었으나 멸실되고 당시의 위치에 1959년 현재의 건물이 신축되었다.  alt 군산 구암교회 옛 모습(좌) / 군산3·1운동역사영상관(우) 주소 : 전라북도 군산시 영명길 15  위치 고증 :「이두열 등 37인 판결문」 및  『삼일운동비사』 등에 관련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이곳에 항일정신을 기념하고자 3·1운동 기념관을 설립하고 관련사진 및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다. 군산경찰서 터 1919년 3월 5일 전개된 옥구군의 독립만세시위지이자 노동·농민운동을 비롯한 사회운동가 및 항일독립운동가들을 체포·구금한 탄압 장소이다. alt 옛 군산경찰서 건물(좌) / 옛 군산경찰서 터 3·1운동만세시위지(우) 주소 : 전북 군산시 중앙로1가 17-1  위치 고증 :『독립운동사』 3권과 「이두열 등 37인 판결문」 등에 관련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군산부구획확장지도」를 참고하여 위치를 확인하였다. 군산경찰서는 1910년에 신축되었고, 1922년 9월에 증축되었으나 현재는 멸실되어 옛 건물은 사라지고 공영주차장으로 이용되고 있다. ]]> Mon, 28 Feb 2022 10:52:06 +0000 64 <![CDATA[아름다운 인연 민족주의 역사가 장도빈과 실천적 여성운동가 김숙자]]> 글 김형목(사단법인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이사) 김숙자는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재학 시절 3·1운동이 일어나자 탑골공원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친 독립운동가이다. 이후 고향인 평안북도 영변으로 돌아가 교사로 근무하며 학생들에게 독립사상을 고취시킨 그는 항일언론인이자 국사학자로 활동하며 날카로운 논설로 일제에 맞선 장도빈과 1920년 7월 결혼하였다. 두 사람은 민족의 존엄을 세우기 위해 각자의 자리에서 분연히 투쟁하였다. alt 김숙자와 장도빈 ‘대한독립만세’를 소리 높혀 외치다 3·1운동 100주년을 계기로 여성독립운동사 연구가 가속화되어 잘 알려지지 않은 여성 인물과 사료들이 발굴되고 있다. 그 일환으로 우리 역사무대에 새롭게 등장한 대표적인 인물이 있다. 바로 항일언론인이자 국사학자로 널리 알려진 장도빈의 아내 김숙자다. 1894년 태어난 김숙자는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재학 중에 동료 60여 명을 이끌고 만세운동에 참여한 독립운동가이다. 경성여고보는 1908년 한국 최초로 설립된 관립 여학교인 한성고등여학교의 후신으로, 1910년대 당시 조선총독부가 직할하던 유일한 여자고등보통학교였다. 경성여고보 시절 25세 만학도였던 그는 리더십을 발휘하여 학우들 사이에서 단연 군계일학이었다.          당시 YMCA 간사였던 박희도에게 독립운동 소식을 전해 들은 그는 본과생 최은희, 이양전과 사범과생 최정숙, 강평국, 고수선, 이선경 등과 함께 취침 시간을 이용하여 태극기를 만들었다. 1919년 3월 1일 오전 담장을 넘어 날아온 독립선언서가 운동장에 뿌려졌고 학교는 초비상이 걸렸다. 긴급 교직원회의가 열리고 학생들은 귀가를 봉쇄당한 채 외출이 금지되었다. 오후 2시 경성여고보에서 500여 미터 떨어진 탑골공원에 퍼진 만세소리는 천지를 진동하였다. 이에 경성여고보 전교생들은 학교대문을 부수고 쏟아져 나와 ‘대한독립만세’를 소리 높혀 외쳤다. 이날 32명의 경성여고보생들이 일제 경찰에 연행되었다.그러나 김숙자는 굴하지 않고 3월 5일 펼쳐진 남대문역(현 서울역) 2차 시위에 다시 참가하였다. 경성여고보 기숙생 전원 70여 명은 이날 새벽 사감의 눈을 피해 기숙사를 빠져나와 시위에 참여하였다. 이때 경성여고보생들은 ‘일편단심’을 의미하는 빨간 머리띠를 수천 개 만들어 경성고보생들에게 전달하여 학교에서 사용하도록 하였다. 두 차례에 걸친 경성여고보생 만세시위는 당시 장안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 실천적 여성운동가로서 역사무대에 등장하다 조선총독부는 경성여고보 전교생이 1차 만세시위에 참가한 사실에 경악하였고, 3월 10일을 기하여 경성지역에 임시휴교령을 내렸다. 신민화 교육이 실패했음을 보여준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향후 있을 학생운동을 막으려는 조치였으나 오히려 만세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김숙자는 고향인 평안북도 영변으로 돌아가 비밀결사체인 대한애국부인회 평북조직책으로 활약하다가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체포될 당시 그는 임신 7개월이었다. 『매일신보』 1921년 6월 24일자 ‘여자 정치범 검거, 독립운동의 거괴(巨魁) 김숙자’라는 기사에서 활약상을 엿볼 수 있다. 이 기사에는 ‘김숙자는 독립운동 군자금을 비밀리 모집하다가 체포되었다’라는 내용이 담겨있다.         한편 김숙자는 독립운동가 집안 출신의 재원이었다. 아버지 김준찬은 광복군 사건으로 투옥한 독립운동가였다. 남동생 김응원은 임시정부의 국내 조직인 연통제 책임자로 활약하면서 의열단에서 활동해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김숙자는 석방된 이후에도 YWCA를 통한 여성운동활동가로서 여성지위향상과 양성평등권을 위한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alt 김숙자 체포 기사, 『매일신보』 (1921.6.24.) 소양과 도리를 바탕으로 학문에 전념하다 김숙자의 남편 장도빈은 1888년 10월 22일 평안남도 중화군 상원면 신읍리에서 장봉구(張鳳九)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결성이며, 호는 산운(汕耘)이다. 그는 할아버지 장제국(張濟國)의 높은 교육열로 인해 어릴 때부터 엄격한 전통교육을 받았다. 이는 사대부로서 소양을 쌓는 동시에 훗날 국학연구에 진력할 수 있는 중요한 지적 토양분이 되었다. 도빈의 총명함과 비범한 재주에 놀란 주위 사람들은 그를 신동이라 불렀다. 5세에 한시를 지을 만큼 학문적인 능력이 탁월하였고, 1893년 백일장에서 발군의 실력을 발휘한 그는 유생들 사이 단연 돋보이는 존재로 이르렀다. 더불어 학문적 능력뿐만 아니라 인간으로서 올바른 도리와 소양을 강조한 할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고자 노력하였다.       도빈이 수학에 전념하는 동안 국내·외 정세는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삼남지방에서 시작된 동학농민혁명의 불길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고, 그의 고향에도 개화 바람이 불기 시작하였다. 특히 개신교는 선교사업의 일환으로 의료사업과 근대교육을 전국 각지에 보급하기 위한 노력을 하였고, 정부도 부국강병을 위한 시무책으로 근대교육 시행을 거듭 천명하였다. 근대교육 수혜로 현실을 직시하다 1903년 15세가 된 도빈은 변화하는 시대 분위기에 부응하고자 먼저 평양감사를 찾아갔다. 감사는 그를 격려하며 한성사범학교 입학 권유와 동시에 추천서를 써주었고, 그 길로 상경한 도빈은 한성사범학교 입학시험에 응시하여 합격하였다. 신학문에 대한 그의 열정은 향학열을 고취시키는 요인이 되었고, 재학 중 상동청년학원 교사로 활동하며 우리나라 역사학에 열중하였다. 1907년 4월 경북 성주공립보통학교 부교원 판임관 7급으로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은 그는 풍전등화 같은 위기의식을 느끼며 학문에 몰두하는 한편 국권회복방책을 강구하였다. 국채보상운동 동참은 국권수호를 위한 일환이었다. 도빈은 서우학회 기관지에 기고문을 투고하는 등 근대교육에 대한 높은 관심을 보였다. 대한매일신보사 기자 겸 논설위원으로도 활약한 그는 보성법률전문학교 야간부에 입학하여 법률을 공부하는 등 분주한 나날을 보냈다.      단재의 독립정신과 역사의식에 감화되어 한국고대사 연구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그가 쓴 논설은 민족문화의 우수성, 민족의 독립문제, 교육의 중요성 등을 주요 내용으로 다루었고 그에 따른  적절한 방향성도 제시하였다. 도빈은 ‘역사상 우수한 문화를 지닌 국가는 번성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더불어 대한제국 부흥을 위한 요인으로 신의심 공고, 영혼 중시, 단결심 환기, 모험심 진작, 인종의 확장 등을 제시하였다. 웅대한 고대역사 무대를 답사하다 도빈은 국망 이후 국권회복을 위한 활동을 모색하다가 1912년 망명길에 올랐다. 북간도를 대표하는 민족교육기관인 명동학교에서 짧은 기간 교사로 재직한 그는 연해주로 이동하여 독립운동가 이상설, 정재관, 이갑 등과 교류하였다. 이듬해 겨울 도빈은 도산 안창호에게 미국행 초청 편지와 여비를 받았으나 신경쇠약 증세로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북간도와 연해주지역에서 펼친 교육과 언론 활동은 도빈이 세계사적 흐름을 이해하는 데 든든한 밑거름이었다. 고구려와 발해 등의 유적지 답사는 한국고대사에 대한 관심을 고취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신병 치료를 위해 귀국한 그는 국사 연구에 몰두하여 1916년 최초 저서인 『국사』를 출간하였다. 이는 자신의 역사인식을 정리하는 이정표적인 역작이었다. 그는 민족교육의 산실인 평안북도 정주 오산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당시 가장 중요한 문제는 학생들에게 올바른 민족정신을 심어줄 민족교육이었다. alt 『국사』(1916)_국립한글박물관 제공 출판활동과 역사대중화에 앞장서다 3·1운동 이후 상경한 도빈은 문화계몽운동 일환으로 한성도서주식회사를 설립하여 운영하였다. 그는 출판부장으로 잡지 『서울』과 『학생계』 의 편집주간을 맡으며 실질적인 운영을 이끌었다. 한성도서주식회사는 ‘우리의 진보와 문화의 증장(增長)을 위하여 시종 노력하기를 자임하노라’라는 목표로 출발하였다. 『조선지광』 발행도 그와 같은 의도에서 비롯되었다. 출판을 통한 민족정신 앙양은 그의 초지일관된 의지였다. 이와 더불어 역사연구도 병행하였다. 식민사가들의 한국사 왜곡과 날조는 그를 더욱 자극하였고, 관심분야인 한국고대사 중 특히 단군조선에 집중하였다. 그는 고대 조선인의 민족혼을 내세우며, 『삼국사기』에 인용된 『고기』를 역사서로 해석하는 등 단군실재론을 강조하였다.  초기 대표적인 저서는 『국사』를 비롯하여 『국사년표』(1917), 『조선역사요령』(1923), 『조선위인전』(1925), 『조선영웅전』(1925), 『조선사대전』(1928), 『조선역사사화』(1932) 등이었다. 이와 병행하여 신문과 잡지 등에도 역사 관련 글을 기고하며 역사대중화에 나섰다. 그는 민족문화 발달과 문무쌍전에 의한 국력신장을 극찬하는 등 식민지하 왜곡된 한국사 복원에 노력하였다. 이는 만주사변 이후 식민지배정책 강화에 맞서 민족정신을 일깨우려는 한 방편이었다. 1931년부터 『동아일보』가 대대적으로 선전하고 전개한 조선고적보존운동은 이러한 배경에서 출발하였다. 1932년 9월 도빈은 『조선사』 연재를 위해 사적지 답사를 떠났다. 수원, 공주, 부여, 경주 등지를 답사하며 사라져가는 역사현장을 안타까운 심정을 시로 표현하기도 하였다. 또한 ‘한국 통사에 대한 관심은 타율적인 식민주의사관을 극복하고 주체적인 민족주의사관 정립에 있다’고 전하였다. 현재까지 알려진 그의 저서는 62종과 유고 4종 등으로 근대 역사학자 중 가장 많은 역사서를 남겼다. 주된 관심사는 오로지 역사에 나타난 애국심 여부였다. 후세를 위한 한국사 연구와 교육에 매진하다 광복 직후 도빈은 자주적인 독립국가 수립에 매진하였다. 대한국민총회와 대한독립애국금헌성회 참여 등은 역사발전의 원동력이 세계문화의 수용과 교육식산의 발전이라는 자신의 진화론을 관철하려는 소박한 소망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자주적인 대한민국정부 수립을 위한 활동의 일환으로 『민중일보』를 창간하는 한편 우익 진영 세력 결집에 나섰다. 전국문인협회 참여도 이러한 의도 속에서 이루어졌다.       도빈은 건국실천원양성소와 육군사관학교에 출강하여 올바른 민족혼을 알리기 위한 국사교육 보급에도 앞장섰다. 초대 단국대학 학장으로서 민족대학 설립을 위해 혼신을 기울였다. 특히 ‘민족혼을 부활시키는 일이야말로 식민지잔재를 청산하여 진정한 조국광복의 위업을 달성하는 시초’라고 고지하였다. 순국열사봉건회 활동에 적극적인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그는 홍명희, 정인보, 조소앙, 조완구 등과 선열전기편찬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선열들에 대한 추모사업은 안중근의거와 3·1운동을 소재로 한 연극으로 이어졌다. 또한 이준열사추념기념대회 발기인으로 참여하며 민족혼을 일깨우는데 노력한 도빈은 선열들의 훌륭한 발자취를 기록하고자 한국사료연구회 조직에도 앞장섰다.      광복과 전쟁 이후 공사다망한 환경에도 그의 국사연구는 지속되었다. 단군성적호유회 고문직 수락은 자신의 기나긴 한국사연구를 후세에게 올바르게 전하려는 의도였다. 어쩌면 단군은 갖은 압박과 고난에도 자신을 스스로 지키는 수호신이었는지도 모른다. 이처럼 도빈에게 한국사 연구와 교육은 미래지향적인 한민족 운명을 일깨우는 길라잡이였다. 정부는 장도빈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alt 『민중일보』(1945.9.24)_대한민국역사박물관 제공 ]]> Mon, 28 Feb 2022 10:52:53 +0000 64 <![CDATA[끝나지 않은 독립운동 삼일절을 맞아 그려보는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의 내일]]> 글 이계형(국민대학교 교양대학 교수) 1908년 10월 문을 연 서대문형무소는 1987년 11월 폐쇄될 때까지 80년간 감옥으로 사용되었다. 이후 과거의 역사를 교훈으로 삼고 독립운동가와 민주화운동가의 신념을 기리기 위해 1998년 11월 서대문형무소역사관으로 개관하였다.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은 그 존재만으로도 가치가 충분하지만, 삼일절을 맞아 과거와 현재를 되짚어보고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고자 한다. 항일의 역사를 몸소 겪은 장소 서대문형무소는 1908년 경성감옥, 1912년 서대문감옥, 1923년 서대문형무소, 1945년 서울형무소, 1961년 서울교도소, 1967년 서울구치소로 이름이 여러 차례 바뀌었다. 1987년 11월 서울구치소가 경기도 의왕시로 이전한 뒤 역사성과 보존 가치를 고려하여 보안과 청사, 제9~12옥사, 공작사, 한센병사, 사형장 등만 남겨두고 나머지 시설은 모두 철거되었다. 바로 다음 해인 1988년 2월 국가사적으로 지정(제324호)되었고,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1998년 11월 지금의 역사관으로 새롭게 문을 열었다.       서대문형무소는 일제강점기 당시 동양 최대 감옥이라는 불명예스러운 타이틀에 걸맞게 94,000여 명을 수용하였다. 한 연구에 따르면, 남아 있는 4,800여 명의 서대문형무소 수형기록카드를 분석한 결과 87.73%가 소위 사상범으로 분류되어 치안유지법, 보안법, 소요, 출판법 위반 등의 혐의로 수감되었다고 한다. 수형기록카드가 남아있지 않은 독립운동가를 제외하고도 4,200여 명에 달하는 독립운동가의 숫자를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은 실로 엄청나다. 이들의 형량은 1~4년 사이가 52.65%였고, 10년 이상의 장기수들과 치안유지법으로 인한 사형수도 적지 않았다. 서대문형무소의 사형수만 별도로 보면, 1908년부터 1945년까지 관보를 통해 확인한 숫자가 모두 493명이었다. 이 수치는 전국 형무소 가운데 이곳에서 가장 많은 사형집행이 이루어졌음을 말해준다. 그중에는 의병, 의열투쟁, 무장 항쟁 등의 활동을 펼치다 순국한 독립운동가도 포함되어 있다. 이들 가운데 독립유공자로 서훈을 받은 인물이 92명(18,7%)인데, 서훈을 받지 못한 독립운동가들까지 합하면 130여 명에 달한다는 연구 논문도 있다.    3·1운동에 국한하면 1919~1920년 사이에만 1,013명이 수감되었다. 이들은 학생, 종교인, 교사 등 지식층은 물론이고 상인, 자영업자, 노동자 등 70여 종에 이를 정도로 직업이 다양하고  연령대도 고른 분포를 보였다. 이를 통해 3·1운동이 전 계층이 참여한 민족운동이었음을 거듭 확인할 수 있다. 3·1운동 수감자들은 일제로부터 정치사상범으로 취급당하여 99% 이상이 6개월 이상의 형량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이에 따라 삼일절 하면 떠오르는 곳이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이 되었고, 개관을 앞둔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이 역사관 인근에 건립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한국 근현대사의 산교육장 일제에 맞선 투쟁의 역사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서대문형무소는 국가 사적지임에도 불구하고 국가가 지정한 항일·독립운동 등록문화재 가운데 유일하게 역사관으로 재탄생한 장소이다. 이후 한국 근현대사의 산교육장으로 활용된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은 현재는 외국인과 국외 거주하는 독립운동가 후손들이 한국을 방문할 때 꼭 들리는 장소로 자리 잡았다. 또한 정치인들의 발길도 꾸준히 이어지는데, 2019년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 후 첫 삼일절 경축식을 이곳에서 개최하기도 하였다.        이외에도 이곳은 일본 정치인들이 과거에 대한 반성과 사죄의 의미로 찾는 장소이기도 하다. 2001년 10월 15일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가 방문하였고, 2015년 8월 광복 70주년을 앞두고 하토야마 전 총리가 역사관 내 추모비 앞에 무릎 꿇고 사죄하였다. 2017년 8월에는 일본 공명당 중·참의원들이 추모비를 찾아 헌화하였고, ‘독립운동가의 고통에 공감하고, 역사를 직시하겠다’는 말을 남겼다. 한편 2019년 7월에는 역사관에서 일본의 수출규제 조치에 규탄대회를 열고 일본제품 불매 운동을 벌이기도 하였다.서대문형무소역사관은 실내뿐만 아니라 야외전시장을 활용하여 다양한 행사나 특별전시를 열고 있다. 또한 4개 국어 도슨트 서비스, 근현대사 및 독립운동사 강좌, 청소년 대상 강좌 및 체험학습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여 관람객을 맞는다. 이러한 노력으로 인해 개관한 이래 내·외국인을 합하여 한 해 평균 70만 명을 웃돌던 관람객 수가 2019년에만 100만 명을 넘었다. 2021년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가 선정한 ‘한국 관광 100선’에 포함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이는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의 위상을 가늠해 볼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러나 아쉬운 부분도 있다. 1945년 8월 광복 이래로 민주화를 위해 헌신한 수많은 사람들이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 수감되었고 사형을 당한 이들도 적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립운동에만 치우친 면이 없지 않아 절반의 역사만 보존하고 있다는 비판의 목소리도 있다. 그렇다고 민주화운동에 관련된 전시가 전연 없는 것은 아니다. 2020년부터 매년 5·18민주화운동 서울기념식이 치러졌고, 장준하 선생 탄생 100주년(2018.8), 부마민주항쟁 40주년(2019.7) 등의 행사가 개최되는가 하면 매년 8월에는 8·15서대문독립민주축제가 열리고 있다. alt 1936년 서대문형무소 배치도이며, 표시한 부분이 현재 서대문형무소역사관 부지이다. 독립재단으로 격상해야 할 역사관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이 발전적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을 같이 기리는 역사의 장소로 거듭나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몇 가지를 고려해야 한다. 먼저 지금의 소규모 조직으로는 박물관의 순수 기능인 전시와 연구를 병행하기 힘들기 때문에 이를 확충하는 것이 우선이다. 무엇보다 많은 관람객을 수용하고 민주화운동까지 전시를 확대하기 위해서는 과거 서대문형무소를 복원해야 한다. 현재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의 대지면적은 28,112㎡로 본래 면적의 3분의 1에 불과하다. 복원하려는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원형복원의 명분인 최초 도면이 없다는 이유로 부근 주민들이 경제적 이익 보호과 개발 논리를 내세웠다. 그러던 차에 2009년 1월 국가기록원에서 서대문형무소 1936년대 도면을 우연히 발견하면서 복원에 대한 주장이 탄력을 받았다. 2009년 1월 말 문화재위원회가 서대문구청의 종합복원계획을 조건부로 가결하였고, 서대문구청은 전체 3단계 복원정비안을 다듬었다. 그러나 복원 비용 마련을 두고 뾰족한 대안이 없어 차일피일 미뤄졌고, 2021년 이후에서야 구치감과 부속창고 등이 선별적으로 복원이 추진되고 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은 독립재단으로 격상되어야 한다. 현재 역사관은 서대문구도시관리공단에서 운영하고 있는데, 역사적 가치나 위상에 맞지 않을뿐더러 막대한 재정을 충당하는 것도 한계가 있다.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을 세계적인 문화유산으로 등재하고 독립운동뿐만 아니라 민주화운동까지 아우르는 손색없는 박물관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통 큰 결단이 필요하다. ]]> Mon, 28 Feb 2022 10:53:34 +0000 64 <![CDATA[독립의 발자취 영화 〈보드랍게〉감독 박문칠]]> 글 편집실 소리 없이 끌려간 소녀와 소리 내어 비극을 외친 할머니. 단편적인 두 가지 모습에 가려져 외면당한 역사가 있다. 전시 성폭력 피해자에서 전후 성매매 대상자로, 그리고 기지촌 생활까지 이어진 故 김순악 선생의 삶이다. 행여 누가 볼까 웅크리기 바빴던 그의 어두운 시간에 조명을 비춘 이가 있다. 최근 개봉한 영화 〈보드랍게〉감독 박문칠이다. alt박문칠 영화감독Q. 영화 〈보드랍게〉는 어떤 질문으로 출발하였나요?그동안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다룬 영화들은 주로 위안소 피해 사실을 밝힌 이후 투사가 된 모습에만 집중하였습니다. 그러나 광복 이후 이들이 수십 년간 침묵할 수밖에 없었던 ‘그 사이의 시간’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관심이 저조하였어요. 아무도 이들의 이야기를 귀담아듣지 않을 때 ‘이들이 어떤 마음으로 살아왔고 어떻게 생존했는지’ 궁금해졌습니다. 전시 성폭력이 전후 성매매로, 그리고 기지촌 생활로 이어진 현실은 그동안 ‘위안부’ 담론에서 누락되고 간과된 고리였기에 이때의 이야기를 담고 싶었습니다. Q. 주인공 故 김순악 선생을 소개해 주세요.1928년 경북 경산의 한 소작농 집안에서 태어난 김순악 선생은 16세 때 ‘공장에 취직시켜준다’는 말에 속아 만주를 거쳐 중국 장자커우(張家口) 시골마을에서 성폭력을 당한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입니다. 광복 이후 극적으로 한국에 돌아왔지만, 유곽과 술집 그리고 미군 기지촌에 팔려나가 원치 않은 ‘색시 장사’를 하였습니다. 이후 두 아들을 홀로 키운 선생은 식모살이를 전전하며 생계를 유지하였습니다. 2000년 즈음 ‘정신대할머니와함께하는시민모임’을 만난 선생은 ‘위안부 운동’에 나서며 새로운 삶을 맞이하였고, 말년에는 압화공예 작가로 활동하기도 하였어요. ‘내가 죽어도 내게 일어났던 일은 잊지 말아 달라’고 유언한 선생은 2010년 1월 하늘의 별이 되었습니다. alt영화 〈보드랍게〉 장면들Q. 유독 선생의 사연을 주목하게 된 계기가 있나요?아카이브 영상에서 만난 끼와 흥이 넘치는 선생의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에둘러서 이야기하는 법이 없는, 직설적인 화법을 가진 ‘깡패할매(영화 속 표현)’같은 캐릭터에 매료되었어요. 물론 한국 현대사의 질곡을 온몸으로 겪은 사연이 너무도 안타깝고 가슴 아프게 다가왔지요. 그렇기에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이 삶을 알려야겠다’라는 절실함이 들기도 하였습니다. 더불어 우리는 흔히 ‘위안부’라는 하나의 범주 안에 피해자들을 묶고는 합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한 분 한 분의 캐릭터와 삶의 여정은 너무나 다릅니다. 이제는 ‘위안부 피해자들을 하나로 묶기보다는 각자 다른 사연과 이야기를 세밀하게 다루면 좋겠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Q. 선생의 생애를 여러 여성이 낭독하는 방식이 인상적입니다.많은 사람들은 ‘위안부’ 이슈를 과거지사로 생각합니다. 혹은 이미 모든 쟁점들을 알고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이 문제에 대해 더 알아보겠다’라는 생각을 하지 못하지요. 이렇듯 ‘고정된 테두리 안에 갇혀 있는 ‘위안부’ 문제를 어떻게 하면 그 너머로 확장시킬 수 있을 것인가?’ 또한 ‘어떻게 하면 이 문제를 오늘날 우리의 현실과 마주하게 할 것인가’에 대해서 고민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동시대 젊은 여성의 얼굴과 목소리로 과거 증언을 낭독하면 어떨까’하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들의 젊은 목소리로 ‘위안부’의 삶을 낭독하면 새로운 마주침, 새로운 깨달음, 새로운 감각이 생길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alt영화 〈보드랍게〉 장면들Q. 낭독에 빗대어 강조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었나요?영화의 처음과 마지막에 선생이 살면서 들었던 여러 호칭을 여러 여성의 목소리로 낭독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누구나 살면서 다양한 이름과 정체성을 갖고 살아갑니다. 선생도 ‘위안부’ 피해자일 뿐만 아니라 다양한 정체성을 안고 살아간 ‘한 사람임’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오프닝에서는 선생의 다양한 호칭을 들은 관객들이 ‘인간 김순악’에 대한 궁금증을 갖기를 바랐고, 영화 말미에서는 똑같은 음성을 들은 관객들이 처음과는 다른 느낌을 갖기를 바랐습니다. ‘각 호칭이 갖는 삶의 무게가 남다르게 느껴질 수 있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하였습니다. Q. ‘보드랍게’라는 제목에는 무슨 의미가 담겨있나요?영화 속 선생의 구술 중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옵니다. “‘그랬구나, 하이고 참, 애 묵었다.’ 이렇게 보드랍게 이야기하는 사람이 없어.” 워낙 굴곡진 삶을 살아왔기에 ‘평생을 남들이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봐주고 환대해주기를 바라셨구나’라는 생각에 가슴이 아팠습니다. 피해 당사자뿐만 아니라 지금도 우리 곁에 존재하는 사회적 약자들이 당하는 차별과 폭력에 대해 우리 사회가 얼마나 귀 기울이고 환대하고 있는지 묻고 싶어서 제목을 ‘보드랍게’로 정하였습니다. alt영화 속 김순악 선생의 삶을 재현한 이재임 작가의 애니메이션Q. 제21회 ‘전주국제영화제 다큐멘터리상’과 제12회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아름다운기러기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수상 후 가장 먼저 영화의 주인공인 선생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하늘에서 덩실덩실 춤을 추며 기뻐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어 기쁘고 보람이 있었어요. 또한 이번 작품은 그동안 제가 해왔던 작업과는 여러모로 달라서 관람객에게 어떻게 다가갈까 걱정을 많이 하였는데, 상을 받고 나니 ‘제가 했던 고민들이 틀리지는 않았구나’라고 스스로 위안 받았습니다.Q. 관객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나요?〈보드랍게〉는 과거 ‘위안부’를 다룬 영화와는 달리 ‘새로운 문제의식을 던지고 있다’라고 감히 말씀드리고 싶어요. 많은 분들이 김순악 선생의 삶을 통하여 오늘날 우리의 현실을 되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위안부를 다룬 영화는 보기 힘들다’라고 지레 생각하기 쉬운데, 선생의 매력에 푹 빠져들다 보면 웃음과 감동 그리고 공감과 위로 모두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Q. 남겨진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남겨진 자들에게는 ‘피해 생존자들의 삶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그리고 ‘그분들이 남긴 증언들은 어떻게 들을 것인가?’와 같은 숙제가 남겨져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랫동안 우리 사회는 당사자들의 증언과 투쟁에 많이 의존해왔습니다. 하지만 피해 생존자분들은 이미 우리에게 수많은 증언과 자료들을 남겨주었습니다. 이제는 그 말들을 우리 사회가 올바르게 새겨듣고, 새롭게 해석하고, 현실에 적용시켜보는 일이 남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숙제를 미리 수행하는 심정으로 〈보드랍게〉를 제작하였습니다. 앞으로도 피해 생존자들의 말과 삶을 다양하게 해석하는 좋은 작품들과 뜻깊은 대화들이 이어지기를 바랍니다.]]> Mon, 28 Feb 2022 10:54:39 +0000 64 <![CDATA[세계 산책 필리핀 독립운동의 뿌리 호세 리살 Jose Rizal]]> 글 소병국(한국외국어대학교 말레이·인도네시아어과 교수) 1899년 미국이 스페인을 대신해 필리핀을 차지하기 위해 전쟁을 벌였다. 이 전쟁에서 당시 필리핀 전체 인구의 대략 7분의 1에 해당하는 100만 명의 병사와 민간인이 희생되었다. 이는 독립을 향한 필리핀인의 강력한 열망이 분출된 것인데, 그들의 희생 이전에 필리핀 독립운동에 불씨를 지핀 호세 리살의 헌신을 기억해야한다. 3G 획득을 위한 식민지 지배 1525년 스페인은 루손 섬 상륙을 시작으로 필리핀 군도에 본격적으로 진출하였다. 북부의 루손 섬과 중부의 비사야스 군도에는 인구와 영향권 차원에서 외래인의 침투에 조직적으로 대항할 만한 규모를 갖춘 국가가 형성되어 있지 않았다. 따라서 스페인은 이 지역에 용이하게 침투할 수 있었으며, 동남아시아에 진출한 다른 유럽 세력들보다 250~300년 앞선 16세기 후반에 식민지 국가를 건설하는데 성공하였다.         스페인이 동방으로 진출해 획득하고자 한 것은 ‘3G(Gold 부의 획득·God 기독교 복음 전파·Glory 왕의 영예)’였다. 1543년 당시 스페인 왕 펠리페 2세(재위 1556~1598)의 이름을 따 점령 지역을 ‘Filipinas(필리핀)’라 명명한 것으로 왕의 영예는 충분히 실현되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필리핀을 인구 수천만 명의 가톨릭 국가로 만들었으니 포르투갈·네덜란드·영국 등 다른 경쟁국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기독교 복음 전파에 큰 성공을 거두었다. 한편 3G 목표 중 부의 획득에 대한 전망은 밝지 않았다. 필리핀 군도에서는 향료(정향·육두구·메이스)가 나지 않았고 남아메리카 페루의 은처럼 값나가는 자원도 없었기 때문이다.  계몽 지식인층 일루스트라도스의 탄생 스페인 식민 정부는 부의 획득을 위해 중국과의 교역을 시도하였다. 북부 필리핀은 지리적으로 도서부 동남아시아에서 중국과 가장 인접한 지역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다른 유럽 세력의 견제와 남부 중국 해안에 들끓던 해적들이 큰 장애였다. 대안으로 떠오른 것이 남아메리카 제국과 아시아 제국의 물자를 아카풀코와 마닐라에서 교환하는 ‘갈레온 무역’이었다. 식민 지배 초기 스페인이 높은 수익이 보장되는 투자 대상이었던 갈레온 무역에 집중하는 동안, 식민지 개발 사업은 뒷전으로 밀려났다. 그러나 1810~1820년대 스페인 남아메리카 식민지들이 서서히 독립하기 시작하였고, 그 여파로 갈레온 무역은 18세기 말 사양길에 접어들었다. 수입원이 필요해진 식민 정부는 국제 시장을 겨냥한 황금 작물 재배에 집중하였다. 스페인은 필리핀을 점령한 지 200여 년이 흐른 뒤에나 식민지 개발 사업에 뛰어든 것이다.        아시엔다(대농장)가 개발되면서 필리핀 사회에 계층 분화도 시작되었다. 처음 대농장에 투자할 수 있었던 사회 계층은 세 부류였다. 토지를 매입해 보유한 국왕령 출신 스페인인, 교회, 그리고 중국인과 현지인 혼혈인(중국계 메스티소) 상업 자본가들이었다. 그러나 이들 대부분은 대농장을 직접 경영할 수 없는 부재(不在) 지주였다. 이러한 가운데 지주에게서 토지를 임차한 후 그것을 다시 농민에게 임대하는 임대차농이 등장하였다. 그리고 임대차 농업을 통해 부를 축적해서 토지를 사들여, 대규모 환금작물 농장을 직접 경영하는 재지(在地) 지주층이 새로이 형성되었다. 이들 새 지주층은 교육에 열성적으로 투자하여 마닐라뿐 아니라 스페인을 비롯한 유럽 각지로 자녀를 유학 보내었다. 스페인의 식민지 개발 사업은 필리핀 민족주의 운동의 주체가 된 계몽 지식인층인 이른바 ‘일루스트라도스’가 탄생하는 계기를 마련한 셈이 되었다. 새롭게 정의한 운명 공동체 필리피노 19세기 후반, 많은 수가 중국계 메스티소 가문 출신인 일루스트라도스는 스페인에서 태어나 필리핀 지배 세력으로 군림하는 페닌술라레스의 억압과 차별에 맞서 정치·농업·교육의 개혁 등을 요구하는 이른바 ‘프로파간다(청원)운동’을 펼치기 시작하였다. 이는 ‘필리핀을 스페인의 종복이 아닌 가족으로 대해주기를 요청하는 운동’이라는 의미를 내포하였다. 중국계 메스티소의 후손으로 태어나 필리핀 독립운동을 지도한 ‘호세 리살(Jose Rizal)’은 대표적인 프로파간다주의자 중 한 사람이다. 이 운동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리살이 ‘필리피노(필리핀인)’라는 운명 공동체의 개념을 정리했다는 것이다. 필리피노는 본래 필리핀에서 태어난 스페인 혈통의 사람들을 가리키는 용어로 여기에는 일부 스페인계 메스티소도 포함되었다. 그러나 리살은 인디오, 중국계 메스티소 그리고 스페인계 메스티소 모두를 필리피노로 묶었다. 즉 그는 필리피노라는 명칭을 필리핀과 운명을 함께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부여한 것이다. 식민지 지배 모순을 알린 저술 활동 1882년 의사가 되기 위해 필리핀에서 스페인으로 유학을 간 리살은 1887년 스물다섯 살이 되던 해 『놀리 메 땅헤레Noli Me Tangere』라는 소설을 출간하였다. ‘놀리 메 땅헤레’는 본래 ‘나를 만지지 말라’는 뜻으로 성경의 요한복음 20장 17절에 나오는 구절인데, 후에 ‘악성 궤양’, ‘종양’ 등으로 의미가 바뀌었다. 이 때문에 소설의 제목이 ‘암(cancer)’으로도 번역되기도 하였다. 리살은 식민지 시대 스페인 사제들의 악행을 도려내야 할 질병에 비유한 것이다. 식민지 지배의 모순을 날카롭게 비판한 이 소설은 당시 스페인의 문화계와 마드리드의 지식인층, 학생들 사이에서 급속도로 확산되었고, 스페인의 식민 지배에 대한 비판 여론이 스페인에서 나오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결국 그의 서적은 스페인에서 불온서적이 되었으며, 리살은 스페인 정부의 추방령에 따라 퇴학당한 후 필리핀으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  alt 호세 리살 Jose Rizal (1861-1896) 필리핀 혁명의 시발점 고향으로 돌아온 리살은 1892년 필리핀 독립운동의 지도 기관인 필리핀 연맹을 결성하여 스페인 식민통치를 비판하고 민족의 자각과 해방의 기운을 촉진시켰다. 그러나 그는 독립활동에 주목한 스페인 총독부에 의해 체포되어 민다나오 섬 다피탄으로 유배되고 말았다. 이후 무장 투쟁론자들의 배후로 지목된 리살은 1896년 마닐라 북쪽 산티아고 요새에서 공개 처형되었다. 그의 죽음은 온건한 프로파간다 운동의 종식을 의미하는 한편, 식민 압제에 대한 급진적인 저항 행동을 부르는 자극제가 되었다.          이로써 필리핀 혁명이 뿌리내리기 시작했다. 이 시발점은 필리핀 혁명의 아버지로 불리는 안드레스 보니파시오가 주도하는 혁명운동으로 나타났다. 프로파간다운동의 구성원으로 활동하면서 리살의 영향을 받은 그는 1892년 7월 7일 중부 루손에서 ‘가장 위대하고 숭고한 자손 연합(까띠뿌난)’이라는 비밀 결사를 조직하여 무장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는 곧 중부 루손의 소작인과 농업 노동자들이 합세하여 대대적인 대중 봉기로 발전하였다.            현재 리살이 처형당한 장소에는 그의 업적을 기리는 ‘리살 공원(Rizal Park)’이 세워졌고, 공원 한쪽에는 그의 처형 장면을 재현해 놓은 동상들이 설치되었다. 또한 그가 수감된 산티아고 요새 감옥 근처에는 ‘호세 리살 기념관’이 설립되었다. alt 필리핀 리살 공원에 세워진 호세 리살 동상 ]]> Mon, 28 Feb 2022 10:55:16 +0000 64 <![CDATA[기념관은 지금 반갑습니다 환영합니다 독립기념관입니다]]> 정리 편집실    사진 이소연 “어서 오세요.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독립기념관에 들어서면 상냥한 목소리가 입장객을 맞이한다. 바로 주차료내는곳과 종합안내센터에서 근무하는 이들의 음성이다. 독립기념관에 방문한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것이 무엇인지,  토씨 하나 놓칠세라 이들의 귀는 늘 쫑긋 서있다. 매일 수많은 입장객들을 응대하느라 정작 자신의 이야기는 뒷전으로 미뤘을 것이니, 이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본다. alt (좌측부터) 안희수, 김현숙, 윤정숙 방문 차량 대상으로 주차요금을 정산하는 김현숙입니다 차량으로 독립기념관 입구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만나는 사람, 바로 주차료내는곳에서 근무하는 김현숙 씨이다. 이곳은 독립기념관의 첫 인상을 결정짓는 곳으로 늘 경쾌한 환영인사와 정중한 안내가 필요하다. 계절에 아랑곳하지 않고 창문을 활짝 열어 우리를 맞이하는 그의 원동력이 궁금하다.   alt 하루의 시작이 궁금합니다. 주차료내는곳은 전시관보다 한 시간 먼저 관람객을 맞이하기 때문에 아침 8시부터 근무를 시작합니다. 입장객의 안전을 위해 차량이 들어오는 입구에 장애물이 없는지부터 확인하고 창문을 활짝 열어 입장객을 맞이할 준비를 합니다.  업무의 장점은 무엇인가요? 퇴근 후 집까지 이어지는 업무가 아니라, 매일 새롭게 시작하는듯한 마음으로 업무를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업무 특성상 다른 사람보다 한 시간을 앞당겨서 퇴근하는데, 일과 육아를 병행하는 저에겐 시간적 여유가 있다는 점이 가장 좋아요. 기억에 남는 입장객이 있나요? 입장객들이 “고생이 많으시네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며 짧게라도 인사를 건네실 때 기운이 납니다. 반면에 주차비 지불에 대한 불만과 업무와는 관련 없는 불쾌한 질문을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로 인해 속상할 때가 있지만 그렇지 않은 분들에게 다시 위안을 받고 힘을 내고는 합니다.   항상 미소를 잃지 않는 원동력이 있나요? 이곳은 독립기념관을 차량으로 방문하시는 분들의 첫 관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입장객들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드리기 위해 제 자리에서 최선을 다할 뿐이지요. 독립기념관의 최전방이라는 소명의식으로 업무에 임하고 있습니다. 입장객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나요? 단순히 요금만 징수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맞게 대처하며 고객과 소통하고 싶습니다. 친절한 직원에서 더 나아가 독립기념관과 이용객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열심히 근무하겠습니다. 입장객들의 편리함을 위한 종합안내센터 윤정숙, 안희수입니다 독립기념관을 둘러보다 보면 여러 궁금증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때 가장 먼저 찾는 건물이 바로 종합안내센터이다. 독립기념관 현장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민원을 응대하는 곳인 만큼 심신이 지칠 만도 하지만, 이곳에서 근무하는 윤정숙, 안희수 씨 입가에는 언제나 미소가 묻어있다. 입장객들의 따뜻한 말 한마디에 힘을 얻는다는 이들을 만나본다. alt 안내센터의 하루는 어떻게 시작되나요? 윤. 근무 자리를 깨끗이 정돈하며 입장객들을 맞이할 준비를 해요. 오늘은 어떤 문의와 일들이 펼쳐질지 궁금해하기도 하고, 방문하는 입장객들이 다치거나 사고를 당하는 경우가 발생하지 않기를 바라고는 합니다.  주로 어떤 문의가 많이 들어오나요? 안. 현재는 국군 병사 휴가 프로그램 문의가 가장 많아요. 프로그램을 마치면 휴가증에 인증 도장을 받아야하는데, 그 도장을 찍어주는 업무를 이곳에서 하고 있어요. 이 때문에 종합안내센터는 언제나 많은 군인들로 북적입니다.윤. 다만 가끔 안타까운 상황도 생겨요. 군인들이 최소 머물러야 하는 시간이 정해져있어서 접수시간에 제약이 있는데, 그 시간이 지나서 방문한 군인들을 보면 도와줄 수 있는 것이 없어서 안타까울 뿐입니다. 매일 여러 사람을 응대하면 지치지 않나요? 윤. 독립기념관을 둘러보시고 돌아가실 때 많은 분들이 이곳 종합안내센터를 찾아 불만을 토로하십니다. 다만 저희 센터에서 해결할 수 없는 민원을 요구하시면 곤란하고 답답할 때가 있습니다. 또한 야외 산책길과 안내센터 앞에 설치된 분수대에서 여름철 어린이 안전사고가 가끔 발생하기라도 하면 제 가슴도 같이 철렁 내려앉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디서 힘을 얻나요? 안. 입장객들의 따뜻한 한마디에 힘을 얻지요. 예전에 제가 안내한 일정대로 관람을 마친 군인이 다시 센터로 돌아오더니 저를 보며 “저 왔어요!”라고 외치더라고요. 해맑게 웃으며 저를 반기던 청년의 얼굴이 아직도 눈에 선해요. 제 업무를 수행했을 뿐인데, 그보다 더 고마워하는 입장객들을 대할 때면 뿌듯한 마음이 듭니다. 윤. 맞아요. 저도 그런 경험이 있는데요. 아이가 벌에 쏘여 상비해둔 연고로 간단하게 처치를 해주었을 뿐인데, 아이의 부모님이 음료수를 건네주시면서 연신 감사인사를 전하더라고요. 아이만 아프지 않다면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제가 감사했습니다. 코로나 이후 달라진 부분이 있을 텐데요. 안. 코로나19 이전에는 센터가 발 디딜 틈조차 없이 많은 입장객들로 가득 찼었어요. 그때는 쉴 틈 없이 응대하느라 목이 아플 정도였답니다. 하지만 코로나 이후엔 발이 많이 끊겼어요. 웅성웅성, 왁자지껄하던 사람들의 소리가 그립기도 합니다.  하루빨리 모든 환경이 제자리를 찾아서 예전처럼 많은 입장객들을 만나고 싶어요. 종합안내센터를 찾는 이용객들이 자주 묻는 질문 1. 국군휴가 보상프로그램 확인증을 받고 싶어요! 모바일앱 이용 발급순서 ‘현충시설 기념관 안내’ 앱 다운로드 → 독립기념관 선택 → ‘국군 휴가 인증’ 메뉴 선택 → 휴가자 정보 등록 → 독립기념관 방문 → 모바일앱을 실행하여 전시관 관람 및 퀴즈 풀이 → 확인증 발급(종합안내센터 방문 필요 없음) 종합안내센터 방문 접수시간 하절기(3월-10월) 09:30-16:20 동절기(11월-2월) 09:30-15:20 2. 현재 대면 전시해설이 이용 가능한가요? 현재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해 대면 전시해설을 잠정 중단하고, 온라인 해설 서비스를 제공 중입니다. 온라인에서 다양한 해설 서비스를 이용해보시기 바랍니다. 추후 코로나19 방역대책 완화에 따라 대면 전시해설이 재개될 예정입니다. 재개 후 사전 온라인 예약을 하시면 전문 해설사의 전시관 해설을 들으며 관람할 수 있습니다. 예약은 홈페이지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종합안내센터 안희수 추천 장소, <백련못 산책길> alt 독립기념관 정문에서 겨레의탑을 지나면 만나게 되는 백련못은 흑성산에서 흘러내린 50,000톤 물이 모인 곳으로 약 26,446㎡의 면적에 아름다운 휴식공간이 조성되어 있어 산책하기에 최적의 장소입니다. 따스해진 3월 가족 나들이는 물론 연인과 함께 걷기에 최고의 장소로 추천합니다. 종합안내센터 윤정숙 추천 맛집, <산집> alt 독립기념관에서 8km 떨어진 곳에 자리한 〈산집〉에서 푸짐한 오리능이백숙으로 맛과 건강을 함께 챙겨보는 건 어떨까요? 어릴 적 할머니 집에 놀러간듯 정겨운 분위기 속에서 즐거운 시간 보내시길 바랍니다. 상호명 : 산집 대표메뉴 : 오리능이백숙 주소 : 천안시 동남구 수신면 수신로 737-12 문의 : 041-551-3174 ]]> Mon, 28 Feb 2022 10:55:52 +0000 64 <![CDATA[독자참여 이번 호 「독립기념관」을 읽고 빈칸을 채워주세요. 꼼꼼히 읽다 보면 정답에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altalt아이콘을 클릭하면 퀴즈 정답을 보낼 수 있습니다.]]> Mon, 28 Feb 2022 10:56:52 +0000 64 <![CDATA[들어가며 서대문형무소를 왜 기억해야 할까?]]> alt 현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옥사 외관 일제강점기 일제는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근대감옥을 짓는다. 1908년 경성감옥이라는 이름으로 개소한 이래 서대문감옥(1912년), 서대문형무소(1923년)로 운영되어 일제 식민지배에 맞선 항일 독립운동가들이 이곳에 갇혀 처참히 고문당하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 갔다. 광복 후에는 서울형무소(1945년), 서울교도소(1961년), 서울구치소(1967년)로 운영되어 독재정권과 군사정권에 저항했던 민주화운동가들이 이곳에 갇혔다.  이곳은 1919년 3·1운동 이후  기준 수용인원의 6배 이상에 해당하는 3,075명이 동시에 수감되기도 하였다. 당시 ‘들어가면 살아 돌아오기 힘든 곳’으로 인식된 이곳은 ‘생지옥’이라 불리며 두려움과 공포의 상징이었다. 하지만 식민지배에 맞선 항일 독립운동가들은 굴복하지 않았다. 그들은 고통 속에도 만세를 외치고 또 외쳤다. 죽음의 두려움도 나라를 되찾고자 하는 의지를 이기지 못하였다. 몸은 가두어도 꿈은 가두지 못한 것이다. 경성감옥으로 시작해 서울구치소까지 수많은 이름을 가진 이곳은 우리 근현대사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운 시련의 현장이다. 봉오리 같은 젊음이 꺾이면서도 조국의 광복을 부르짖던 이들의 치열한 삶의 기록을 잊지 말아야 한다. ]]> Wed, 30 Mar 2022 10:24:21 +0000 65 <![CDATA[톺아보기 자유와 평화를 향한 80년]]> 글 박경목(서대문형무소역사관 관장) 1908년 10월 경성감옥으로 문을 열어 1987년 11월까지 80년간 사용된 서대문형무소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들이 투옥되어 갖은 고문과 형벌을 받고, 광복 후 민주화운동 인사들이 수감되었던 역사의 현장이다. 제국주의, 독재정권, 군사정권을 거치면서 그들의 권력유지를 위한 감시와 통제 수단으로 이용되었지만 그 안에 갇힌 사람들의 자유와 평화를 향한 투쟁의 상징이기도 하다. 서대문형무소역사관으로 개편된 현재 일제식민통치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사적지로 손꼽히고 있다. 경성감옥으로 문을 열다 1907년 한일신협약(일명 정미조약)으로 사법권을 장악한 일제는 감옥 제도 전반을 일제의 감옥법에 맞추어 재구성하였다. 일제인 사법 관리들이 진출하여 감옥도 그들에 의해 운영되었다. 이 시기 감옥 재편의 핵심 사안은 전통시대의 유형(流刑)을 자유형(自由刑)으로 전환하는 것이었다. 기존 경무청 소관의 감옥서(監獄署)를 법부 소관의 감옥(監獄)으로 바꾸고, 자유형을 집행할 수 있는 근대식 감옥 설치를 추진하였다.        1907년부터 서울 현저동 일대에 13,000㎡의 부지를 조성하고 수용인원 500여 명 규모의 감옥을 신축하여 1908년 10월 21일 개소하였다. 경성감옥, 다시 말하여 식민지 근대감옥의 이식이었다. 이후 서대문감옥, 서대문형무소 그리고 광복 후 서울형무소, 서울교도소, 서울구치소로 이름을 달리하며 1987년 11월까지 감옥으로 사용되었다. 유형이 이루어지던 시기 전국에 있는 감옥의 총 수용인원이 약 500여 명 남짓이었는데, 경성감옥은 한 곳에 500명을 수용한 대규모 시설이었기에 대한제국기 한국인에게 큰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더구나 보이지 않는 담장 안에 갇힌 수감자에게 어떤 일이 벌어질지 전혀 알 수 없는 공포의 공간이었다. alt 경성감옥(1908년)(좌) / 서대문감옥(1920년대 초반 추정)(우) 일제에 항거한 3·1운동 강제병합 직후 1910년 12월 말 경성감옥의 수감인원은 2,000명을 넘었다. 기준 수용인원의 4배 이상에 달하는 숫자였다. 항일 의병(義兵)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과 수감이 원인이었다. 1912년 9월 마포 공덕동에 새로운 감옥을 설치하였으나 늘어나는 수감인원에 비해 시설은 턱없이 부족하였다. 일제가 지향했던 식민지적 ‘치안과 사회질서’를 유지하는데 항일 독립운동세력이 난항이었던 것이다. 이때 서대문감옥으로 이름을 바꾸고 1913년부터 확장을 계획하기 시작하여 1915년부터 독방옥사 1개동과 잡거방옥사 2개동, 여옥사 1개동이 신축되었다.        그러나 1919년 3·1운동 여파로 조선총독부의 감옥 운영은 혼란에 빠졌다. 기존 감옥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수감인원이 폭증하였다. 그해 말 3,075명이 갇혀 옥사 외에 공장이나 강당 등 부속 공간에도 수감자들로 가득 찼다. 당시 소장이었던 가키하라 타쿠로(柿原塚郞)는 그때의 상황을 “죄수들이 파옥을 감행한다면 실로 막기 어려운 상태였다.”고 훗날 실토하였다. 이렇듯 3·1운동은 서대문감옥이 확장되는 계기가 되었다. 기존의 목조 옥사와 청사는 1920년대 초반부터 붉은 조적식 건물로 전면 신축되기 시작하여 1929년까지 옥사 9개동, 중앙간수소 2개동, 청사 1개동, 취사장 1개동 및 공장 등 견고한 시설 기반이 마련되었다. 그 사이 1923년 서대문형무소로 이름이 바뀌었다. 배고픔에 시달린 옥살이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인 이승훈(李昇薰)은 옥살이 경험 중 가장 힘들었던 것을 ‘먹는 것’으로 꼽았다. ‘메주덩어리처럼 말라비틀어진 콩밥을 잘못 씹다가는 우두둑 이빨이 부러질 정도로 밥에 돌이 많이 섞여 큰 고통이었다’고 술회하였다. 밥을 씹지 못하고 삼켜야 했던 수감자들은 위장병에 시달리기 일쑤였다. 이마저도 밥의 양을 ‘죄질’에 따라 9개 등급으로 나누어 차별 배급하였다. 일반범은 대개 1~3·4등급, 정치사상범은 4·5등급 이하를 배급받았다. 양을 구분하는 방법은 이른바 ‘가다(かた : 型)’로 밥을 찍어내는 것이다. 1936년 식량배급규정에 의하면 한 끼당 1등급은 400그램, 9등급은 200그램이었다. 정치사상범으로 취급받은 항일 독립운동가들은 주로 4등급(300그램)·5등급(270그램) 이하를 배급받았다. 늘 배고픔에 시달릴 수밖에 없는 양이었다.   남화한인청년동맹 소속으로 흑색공포단을 조직하고 친일파 이용로(李容魯)를 처단하여 수감된 이규창(李圭昌)에 의하면 1930년대 후반에는 ’국이라고 나오는 것이 소금국이었다’고 한다. 이것을 계속 먹다가는 탈수증에 걸려 목숨까지도 위태롭게 된다. 감옥 환경에 적응한 장기수들은 적당히 조절해서 먹는데, 새로 들어온 수감자들은 허기를 때우기 위해 소금국을 마구 먹다가 탈수증으로 심지어 죽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그의 눈에 비친 감옥의 배고픔은 ‘고매한 지식인도 본능적 욕구에 충실’하게 만드는 지독한 괴로움이었다. alt 이승훈 수형기록카드(좌) / 이규창 수형기록카드(우) 전국 최대 규모의 감옥 일제는 본국의 체제 강화를 위해 1925년 4월 치안유지법을 실시하였고, 식민지 한국에도 그해 5월 적용하였다. ‘국체(國體)를 변혁 또는 사유재산제도를 부인할 목적으로 결사를 조직한 자, 가입한 자’에 대한 처벌법으로 일제 자국에서 사회주의자·공산주의자에게 적용되었던 것이 한국에서는 광범위하게 적용되었다. 항일 독립운동이 그들의 눈에는 ‘국체의 변혁’이었기 때문이다. 이 법률에 의해 1920년대 중후반부터 이른바 ‘사상범(思想犯)’이 양산되기 시작되었다.            사상범 검거 숫자는 1930년대에 이르러 사회문제화 될 정도로 증가하였다. 당시 신문에 사상범의 증가에 따른 감옥의 부족과 열악한 환경이 연일 보도되었고, 특히 조선총독부는 사상범에 의한 ‘사상의 감염 방지’에 안간힘을 썼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편으로 서대문, 함흥, 대전 3개소의 감옥에 사상범 전용 구치감(拘置監)을 짓기로 하였다. 그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것은 서대문형무소에 지어진 경성구치감이다. 약 4년여 공사 끝에 6개동의 옥사 및 청사, 영치창고, 기관실 등을 갖춘 600명 수용의 대규모 구치감이 1935년 6월 완공되었다. 이로써 확장에 확장을 거듭한 서대문형무소는 수용인원 3,000여 명, 근무인력 300여 명의 일제강점기 전국 최대 규모의 감옥으로 운영되었다. alt 서대문형무소 배치도(1930년대 후반)(좌) / 심훈이 서대문감옥에서 어머니께 보낸 편지(1919.8.) (우) 몸은 가두어도 꿈은 가두지 못하다 1919년 3월 서울 남대문 시위에 참여해 수감된 심훈(沈熏)은 그해 8월 서대문감옥에서 어머니께 편지를 보냈다.   어머님! … 방 속에는 똥통이 끓습니다. 밤이면 가뜩이나 다리도 뻗어 보지 못하는데 빈대, 벼룩이 다투어 가며 진물을 살살 뜯습니다. 그래서 한 달 동안이나 쪼그리고 앉은 채 날밤을 새웠습니다. 그렇건만 대단히 이상한 일이지 않겠습니까? 생지옥 속에 있으면서 하나도 괴로워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누구의 눈초리에나 뉘우침과 슬픈 빛은 보이지 않고, 도리어 그 눈들은 샛별과 같이 빛나고 있습니다 …  한 여름 감방 안 온도는 30℃를 훌쩍 넘는다. 약 3.3평 남짓의 감방에 20여 명 내외가 수감되어 사람의 열기는 온도를 더욱 높인다. 그야말로 ‘초열(焦熱), 지옥의 철창’이었다. 더구나 화장실이 없어, 용변을 처리하는 일명 ‘똥통’에서 풍기는 악취와 가스는 상상하기 힘든 고통이었다. 이 ‘생지옥’에서도 그들은 꿈과 희망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그 꿈은 오히려 더욱 커졌다. 그 눈들은 ‘샛별처럼’ 빛나며 ‘그날이 오면’을 꿈꾸었으니 말이다. ]]> Wed, 30 Mar 2022 10:32:13 +0000 65 <![CDATA[만나보기 군자금을 모집하다, 형무소에 수감되다]]> 글 박경목(서대문형무소역사관 관장)   1929년 4월 천마산 마치고개에서 ‘권총 강도사건’이 발생하였다. 3인조 강도의 범죄 대상은 일제 우편수송차량이었다. 차를 세워 돈을 빼앗고, 신고하지 못하도록 자동차를 파손한 뒤 운전수를 인질 삼아 산으로 도피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단순한 ‘강도’가 아니었다. 이들의 목적은 군자금을 모아 무관학교를 세우고 독립군을 양성하여 일제와의 전면전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끝내 체포된 이들은 서대문형무소에서 고된 옥고를 치렀다. alt (좌측부터) 최양옥(1893~1983), 김정련(1895~1968), 이선구(1902~미상) 우편수송차량 습격 의거 1929년 4월 18일 오전, 춘천을 출발해 서울로 향하던 경성우편국 소속의 ‘제7호’ 우편수송차량이 오후 1시 40분경 경기도 양주군 화도면과 미금면의 경계지점인 천마산(天摩山) 인근 마치고개(磨峙嶺)(현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에 다다랐다. 가파른 고갯길을 내려가며 서행하던 중 어떤 사람들이 차를 멈춰 세웠다. 차가 멈추자 두 사람이 뛰어올라 운전사 김영배(金泳培)를 총으로 위협하여 결박한 뒤 조수석에 앉혔다. 차량은 금곡방면으로 향했고 마침 서울에서 출발해 이곳을 지나던 오성(五星)자동차 소속의 ‘경(京) 제447호’ 차량을 발견하자 정면 출동하여 정지시키고, 이어 춘천에서 출발해 서울로 향하던 선일(鮮一)자동차 소속 ‘경 제502호’ 차량을 정지시켜 엔진 부위를 파괴하였다.        차량을 습격한 이들은 최양옥(崔養玉), 김정련(金正連), 이선구(李善九) 세 사람이었다. 이선구가 운전을 맡고 최양옥과 김정련은 우편수송차량의 짐칸에 실린 붉은색 우편물 주머니를 뒤졌으나 현금은 없었다. 정지시킨 두 차량의 승객들에게 “독립운동을 하는 상하이 공명단원으로 군자금을 모집하려고 이와 같이 하는 것이다”라고 설명하고 약 53원의 현금을 징수하였다. 그리고 승객과 운전사들에게 ‘조선독립만세’, ‘공명단 만세’를 외치게 한 후 인근 천마산으로 유유히 사라졌다. 사건 발생 50여 분 후인 오후 2시 30분경이었다. 세 사람의 의거는 전국을 들썩이게 했다. 일제 경찰은 무장경관을 곳곳에 배치해 검문검색을 강화하고, 신문기자들은 사건의 내막과 ‘범인’의 정체를 기사화하기 위해 동분서주하였다. 서울 시내에서는 ‘호외!’라는 외침과 ‘권총 든 청년이 시내에 잠입했다’는 이야기로 어수선하였다. 사건 발생 당일 동아일보사에서는 ‘범인계통은 상하이 공명단’, ‘권총은 모젤식, 네발을 발사’라는 제목의 저녁 호외를 발행하였다. 이어 각종 신문에는 ‘양주대도(楊州大道)에 권총단 돌현(突現), 우편자동차를 습격’ 등의 제목으로 관련 기사를 연일 보도하였다. alt                                                   최양옥, 김정련, 이선구가 탈취한 우편수송차량(위)과 선일자동차 소속 차량(아래),『동아일보』(1929. 4. 18.)(좌) /                                                                        최양옥 체포 당시(위), 김정련(아래 왼쪽), 이선구(아래  오른쪽), 『동아일보』(1929. 4. 22.)(우) 일제 경찰의 대대적 검거작전 현장을 벗어나 천마산으로 들어간 세 사람은 일제 경찰의 추적을 따돌리며 암굴에 피해있었다. 일제 경찰은 ‘범인’검거에 혈안이 되어 서울 시내에 무장경관을 배치하여 검문검색을 강화하는 한편 천마산 일대를 샅샅이 수색하였다. 포위망이 점차 좁혀 오자 4월 19일 저녁 8시경 세 사람은 급히 도피하였다. 이때 김정련은 일행과 떨어져 다음 날 20일 새벽 00시 20분경 양주군 화도면 녹촌리 배봉산 인근에서 총격전 끝에 체포되고 말았다. 최양옥과 이선구는 양주군 와부면 덕소리까지 나와 배를 타고 남한강을 따라 구리 수석리에 상륙하여 아차산(峨嵯山)에서 잠시 숨을 돌렸다. 그리고 당일 오전 9시 30분경 망우리 고개에서 내선(內鮮)자동차 소속 ‘경 제408호’ 차량을 빼앗아 타고 서울시내로 잠입하였다. 서울에서 두 사람은 경찰의 감시망을 피하기 위해 흩어졌다.  이선구는 4월 20일 오후 11시 20분경 후사를 부탁하려고 황금정 1정목(현 을지로) 이명구(李命求)의 집에 들렀다가 잠복해있던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최양옥은 체부동 118번지 박인서(朴寅緖)의 집에 머무르고 있던 친척 최상하(崔尙夏) 방에 은거하였으나 정보를 탐지한 경찰에 의해 21일 오전 5시 30분경 체포되었다. 최양옥의 체포과정은 일제 경찰 100여 명이 동원된 대대적인 검거 작전이었다. 그가 체부동에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종로경찰서에서는 무장경관을 동원하여 4월 21일 새벽 박인서의 집을 겹겹이 포위하였다. 5시 30분경 날이 밝자 사복형사대가 담을 넘어 잠입하여 잠자고 있던 최양옥을 급습했던 것이다.          긴박했던 체포 순간에도 최양옥은 의연하고 대담했다. 조선일보 기사(1929. 4. 21)에 의하면 ‘태연자약하게 침착한 태도로 조금도 반항하지 않고, 옷을 입은 후 담배 한 개를 붙여 물고 … 유유히 걸어 나와’ 그를 둘러싼 수십 명의 신문기자들에게 ‘신문기자 제군! 공명단(共明團)을 몰라서 ‘명(明)’자를 ‘울 명(鳴)’자로 쓰느냐’고 호통을 치고 ‘빙글빙글 웃는 얼굴로 유유히 호송자동차에 올랐다’고 한다. 당시 신문기자는 처음에 ‘밝을 명(明)’자로 기사를 썼다가 경찰당국에서 ‘울 명(鳴)’으로 발표하자 이후 그대로 ‘共鳴團’이라고 썼다고 한다. 지금 공명단의 한자를 ‘共鳴團’으로 표기하는 사유이다. alt 「공명단(共明團)도 모르나」,『조선일보』(1929. 4. 21.)   일제와의 전면전을 계획한 공명단 최양옥, 김정련, 이선구는 대한독립공명단(大韓獨立共鳴團) 단원이었다. 공명단은 1928년 음력 6~9월경 중국 산시성(山西省) 타이위안(太原)에서 신덕영(申德永), 최양옥, 안창남(安昌男) 등의 주도로 결성되었다. 신덕영은 1919년 국내에서 조직된 조선민족대동단의 일원으로 전남 광주 일대에서 군자금을 모집한 인물이다. 이때 최양옥과 김정련도 대동단에 합류해 군자금모집 활동을 하였다. 이 일로 세 사람은 체포되어 1921년 12월 13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신덕영은 징역 8년, 최양옥은 7년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김정련은 5월 31일 광주지방법원에서 무죄로 방면되었다. 이후 출옥한 이들이 중국에서 다시 만나 독립운동을 재기한 것이다. 안창남은 산시성 군벌 염석산(閻石山) 부대에서 항공중장을 지내고 산서비행학교 교장을 지낸 인물로, 1929년 최양옥과 김정련이 국내로 잠입할 때 군자금 600원을 지원하였다. 이선구는 신의주부청(新義州府廳) 자동차 운전사로 일하다가 1928년 7월 사자생(寫字生: 필사를 전문으로 하는 사람)으로 잠깐 일했던 김정련과 친분을 쌓았다.  이러한 인연으로 최양옥이 김정련을, 김정련이 이선구를 공명단 단원으로 가입시켜 뜻을 함께 하였다. 이들은 150만 원의 자금을 마련하여 중국에 무관학교를 세우고, 75,000여 명의 독립군을 양성하여 일제와 전면전을 벌이고자 했다. 이를 위해 우선 군자금 모집에 주력하고자 국내로 잠입하여 고액의 현금이 실렸을 것으로 추정되는 우편수송차량을 탈취한 것이다. alt (좌측부터) 최양옥 수형기록카드, 김정련 수형기록카드, 이선구 수형기록카드 지옥의 철창에 수감되다 세 사람은 서대문형무소에 미결수로 수감되었고 1929년 12월 13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최양옥은 징역 10년, 김정련은 8년, 이선구는 5년을 선고받았다. 이후 12월 14일 최양옥은 경성형무소로 이감되었고, 두 사람은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이선구는 1933년 10월 24일 병고로 가출옥하였으나 이후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최양옥은 1939년 12월 13일, 김정련은 1935년 5월 19일 출옥하였다. 이들이 수감된 1930년대 서대문형무소는 ‘옴 감옥’, ‘초열, 지옥의 철창’으로 불리는 그야말로 ‘생지옥’이었다. 비좁은 감방에 피부병과 각종 질병, 더위와 추위, 배고픔으로 하루하루를 이겨내기 힘든 나날을 보내야 했다.           김정련은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었다. 그가 수감된 신감 4동(현 9옥사) 6호 감방 옆 7호 감방에 1932년 4월에 일어난 윤봉길(尹奉吉) 의거에 연루된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가 수감되었다. 그에게 감옥 내 암호 통신법인 이른바 ‘타벽통보법(打壁通報法)’을 알려주다 간수에게 발각될 위기에 처하자 ‘미친 척’하며 대들어 위기를 모면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러한 기지로 안창호는 무사하였지만 김정련은 ‘지옥의 계호계(戒護係)’로 끌려가 ‘도살장으로 끌고 가는 돼지모양’으로 결박당한 채 ‘뼈가 으스러지게’ 두들겨 맞았다. 그러면서도 ‘도산 선생을 생각하고 오히려 기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고 한다. ]]> Wed, 30 Mar 2022 10:42:27 +0000 65 <![CDATA[이달의 독립운동가 신민회 일원으로 애국 계몽운동에 헌신한 안태국]]> 글 독립기념관 전시부 신민회 평안남도 총감으로서 애국계몽운동에 힘쓰다 안태국은 1877년 평안남도 중화군에서 태어나 청년기에 평양으로 이주, 상회를 운영하며 기독교를 접하고 개화사상을 형성하였다. 1907년 2월 안창호, 양기탁 등이 주축이 되어 국권회복을 위한 비밀결사 단체로 신민회가 창립된 후 안창호의 권유로 9월경 창립회원으로 가입하고, 평안남도 지역 신민회를 이끄는 총감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신민회 해산때까지 평안남도 총감뿐 아니라 서우학회 등에 가입해 계몽강연에 참여하고 신민회의 기관지 역할을 하는 대한매일신보 평양지사장, 태극서관 주임, 대성학교 후원회장격인 찬무원, 청년학우회 중앙총무 역할 등 신민회 활동에 적극 동참하며 애국계몽운동에 앞장섰다.  alt 태극서관 광고,『황성신문』(1908.07.31.)_대한민국신문아카이브 제공 신민회의 주요 간부로 여러 차례 옥고를 치르다 1909년 10월 안중근 의거 후 일제의 탄압이 거세지자 신민회는 총감독 양기탁의 집에서 전국 간부회의를 열고 국외 독립군 기지 건설을 계획하였다. 평안남도 총감인 안태국은 1910년 12월 간부회의 참석 후 평양으로 돌아와 군자금과 이주민 모집을 실행하였다. 그러던 중 일제가 ‘안명근 사건’*을 구실로 신민회 간부를 체포하면서 안태국도 붙잡혀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신민회의 존재를 알게 된 일제가 이른바 ‘데라우치 총독 암살음모 사건’**을 조작하고 전국의 신민회 인사 600~700명을 체포하였다. 당시 옥중에 있던 안태국도 신민회 회원으로 지목되어 가혹한 고문을 당했다. 그는 일제의 사건 날조를 폭로하였으나 결국 6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이어나가야 했다.  *안명근 사건안중근의 사촌동생인 안명근이 서간도에 무관학교를 설립하기 위해 군자금을 모집하다가  황해도 신천에서 붙잡히자 일제가 이를 조작하여 황해도 일대 민족운동가 160여 명을 체포한 사건(이른바 ‘안악사건’) **데라우치 총독 암살음모 사건안명근의 군자금 모금 활동을 ‘데라우치 총독 암살 모의’로 날조하여  신민회 회원 105명을 집단으로 기소한 사건(이른바 ‘105인 사건’) alt 「梁 一派 또 압송」,『매일신보』(1911.04.15.)_대한민국신문아카이브 제공 alt                           일제 경찰에 의해 압송되는 신민회 회원들(1911)(좌) / 안태국 변호인이 제출한 입증신청서(1912.12.18.)_국사편찬위원회 제공(우) 국외 한인의 상황을 살피며 독립운동을 전개하다 투옥 5년 만인 1915년 감옥에서 풀려난 안태국은 고문으로 상한 몸을 추스른 후 1916년 가족들과 함께 중국 북간도 훈춘(琿春)으로 이주하여 독립운동을 이어갔다. 그는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훈춘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는 한편, 동지들과 한민회를 결성하고 ‘한민회군’이라는 이름의 독립군을 창설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던 안창호의 초청을 받아 1920년 3월 상하이에 도착한 그는 러시아령 연해주 동포들과 독립운동 상황을 임시정부에 보고하였다. 임시정부 내 요직을 고사한 안태국은 동포들을 대동단결시켜 독립운동 발전에 헌신할 뜻을 밝히고 특파원으로 파견될 예정이었으나 장티푸스에 걸려 1920년 4월 서거하였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alt 「안태국 선생의 長逝」,『독립신문』(1920.04.13.)_대한민국역사박물관 제공(좌) / 안태국 빈소(1920.04.11.)(우) alt ]]> Wed, 30 Mar 2022 10:48:32 +0000 65 <![CDATA[독립운동 사적지 항일비밀결사 신민회의 서울 근거지]]> 정리 편집실 애국계몽운동을 무장투쟁으로 연결시킨 신민회 신민회는 한말의 대표적인 애국계몽운동 단체로, 1907년에 안창호의 발기에 의해 양기탁·전덕기·이동휘·이동녕 등 7인의 창건위원 및 노백린·이승훈·이시영·이회영·이상재·김구·신채호 등이 중심인물이 되어 조직되었다. 신민회는 1910년 '한일강제병합'을 전후하여서 '절대독립'에 의거하여 이전의 애국계몽운동을 무장투쟁으로 연결시키는 역할을 한 중심단체였다. 1911년 황해도 일대에서 일제히 검거되어 지하 단체이던 신민회의 모습이 드러나게 되었고, 검거된 수백 명의 애국 계몽 운동가들 가운데 105명에게 실형이 선고되면서 해체되었다. ‘상동파’ 애국지사들의 거점 상동교회 상동교회는 스크랜턴(W. B. Scranton) 목사가 서울 남대문로에 세운 교회다. 스크랜턴은 1885년 미국북감리회 최초의 의료 선교사로 내한하여 정동교회 근처에 병원을 세우고 환자들을 무료 진료하다가, 1889년 남대문 근처 지금의 교회 자리를 사들여 의료선교를 시작하였다. 1893년에는 병원과 교회를 분리해 길 건너편 달성궁(현 한국은행 자리) 안에 있는 한옥에 독립된 예배당을 마련했는데, 이 병원이 제중원에 흡수된 뒤 1902년 현재 자리에 신식 벽돌 예배당을 짓고 다시 이전하였다. 상동교회가 민족운동의 거점이 되기 시작한 것은 전덕기를 비롯한 44명의 청년들이 중심이 되어 1897년 9월 교회 안에 엡윗청년회를 창립하면서였다. 독립협회운동의 일선 행동대로 활약했던 상동청년회는 1905년 을사늑약 반대투쟁을 주도하며 ‘상동파’라 불리는 애국지사들의 거점으로 자리를 잡았다. 을사늑약 소식을 접한 김구, 이준 등 경향 각지의 애국지사들이 전덕기가 시무하던 상동교회에 모여 조직적인 반대투쟁을 전개한 것이다. 최남선의 회고에 따르면, 당시 상동교회 뒷방에는 전덕기를 비롯해 이회영·이동녕·이준 등 우국지사들이 수시로 모여 국사를 도모했다고 하는데, 안창호가 귀국한 지 2개월 만인 1907년 4월 무렵 신민회를 조직할 수 있었던 것도 ‘상동파’와 같은 모임이 뒷받침되어서였다. 옛 상동교회 한말 ‘상동파’로 불린 애국지사들의 거점으로 비밀결사 신민회의 서울 근거지 가운데 하나였던 곳으로 멸실되었다. alt 경성부시가강계도, 1914(좌) / 옛 상동교회(우) 현 상동교회 현재 건물은 1974년 구 벽돌 예배당을 철거하고 신축한 것이다. 7층부터 교회로 사용되고 있으며, 건물 내부에 새로나 백화점이 있었으나, 1998년 폐점하고, 현재는 새로나 쇼핑으로 남아있다. alt 현 상동교회 정면(좌) / 현 상동교회 입구(우) 주소서울특별시 중구 남대문로 30  위치 고증「경성부시가강계도」(1914)에 현 남대문로 변에 ‘교회(敎會)’라는 글자가 보인다.  ]]> Wed, 30 Mar 2022 10:53:27 +0000 65 <![CDATA[아름다운 인연 든든한 동지이자 후원자 이혜련과 안창호]]> 글 김형목(사단법인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이사) 안창호의 아내로 널리 알려진 이혜련은 남편의 후원자를 자처하며 미주지역 여성독립운동을 이끈 주인공이다. 그는 독립운동가의 아내이자 동지 나아가 한 가정의 가장까지 도맡으며 고단한 삶을 이어갔다. 누구의 ‘아내’가 아닌 조국 독립을 위해 앞장선 ‘독립운동가’ 이혜련의 활약에 주목해본다. 부부가 되어 힘을 합치다 이혜련(李惠鍊)은 1884년 4월 21일 평안남도 강서군 보림면 화학리에서 이석관(李錫觀)의 2남 2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도산(島山) 안창호(安昌鎬)는 1878년 11월 9일 강서군 초리면 봉상도(일명 도롱섬)에서 안흥국(安興國)과 황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아버지가 사망하여 할아버지의 보살핌 속에서 성장한 그는 한학을 공부하였다. 이후 상경한 도산은 구세학당에 입학하여 근대교육을 받았다. 그는 1897년 할아버지가 정해준 약혼자 혜련과 여동생 안신호를 데리고 서울로 가서 정신여학교에 입학시켰고 이후 고향 인근에 점진학교를 운영하는 등 근대교육 보급과 민중 계몽에 나섰다.            혜련이 정신여학교를 졸업하자 두 사람은 1902년 9월 3일 밀러(F.S. Miller) 목사의 주례로 제중원에서 결혼하였고, 다음날 부부는 인천을 출발하여 미국으로 장도에 올랐다. 이는 부부로서는 한국 최초 미국 이민이었다. 하지만 혜련은 광복을 맞을 때까지 고국 땅을 밟을 수 없었다. 혜련의 본관은 안성(安城)이나, 미국식 호칭방식에 따라 안혜련·헬렌 안(Helen Ahn)·이헬렌 등의 이름을 사용하였다. 어려운 미국생활에서 한인 단결의 절실함을 느낀 도산은 샌프란시스코에서 ‘한인친목회’를 결성한 후 리버사이드에서 ‘노동주선소’를 조직하였다. 1905년에는 공립협회와 1907년에는 대한신민회 등을 결성하는 등 오로지 조국 독립을 위해 매진하였다.  alt 이혜련, 안창호 부부의 가족사진 남편의 후원자를 자처하다 미주에 정착한 도산은 공립협회를 결성하고 초대회장으로 취임하여 한인사회의 각성과 대동단결에 전력을 기울였다. 기관지 『공립신보』 발행은 이러한 목적을 관철하려는 일환이었다. 도산이 미주와 중국·러시아 등지를 오가며 독립운동을 전개할 때 혜련은 공립협회와 이를 계승한 대한인신민회를 지원하였다. 당시 일과 학업을 병행한 혜련은 도산의 많은 지지자와 동지 등을 대접하는 일을 결코 소홀히 할 수 없었기에 학업을 중단하고 말았다. 이때부터 혜련의 ‘내조’는 독립운동 참여를 알리는 신호탄이나 마찬가지였다.        미주에서 한인사회의 구심체를 마련한 도산은 대한인신민회 통상장정과 취지서를 가지고 1907년 2월 고국으로 돌아갔다. 당시 혜련은 “당신은 애국자요 영걸의 인물로서 국가에 속한 사람이니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일할 수 있는 대로 마음 놓고 활동하시오.”라며 용기를 주었다. 이후 도산은 이갑 등 옛 동지들과 대한제국기 최대 비밀결사인 신민회를 조직하였고, 이어 평양에 민족교육기관인 대성학교와 민족기업을 설립하였다. 또한 서북학회와 청년학우회를 창립하는 등 한민족 정체성과 자긍심을 일깨우는데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혜련은 남편이 없는 미주에서 독립운동단체를 유지하는 동시에 한인사회를 지도하였다. 대한인국민회를 후원하기 위해 의연금·국민의무금·특별의연금 등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였다. 가족 생계비는 물론 나아가 독립운동을 하는 남편을 지원하는 것도 혜련의 몫이었다. 그는 백인 집의 청소, 빨래, 요리 등 집안일을 하며 생계를 이어갔고 첫째 안필립과 함께 과일가게를 운영하며 가사를 책임졌다. 당시 도산은 억척스러운 아내의 삶을 위로하며 편지를 보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나는 항상 몸이 나라 일에 매여서 가사를 돌보지 못함으로 식구가 오랫동안 헤어져 있는 것도 염려하거니와 내가 스스로 집을 위하여 돈을 벌지 못함으로 장차 아이들 교육할 힘이 없을까 염려하나이다. 우리가 한때 세상에 나서 나라를 위하여 고생하고 죽는 것은 조금도 염려할 것 없거니와 하느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어린 자식을 교육하지 못하면 또 직책을 잃음이라. 장차 무슨 재정으로 아이를 키울지 염려함을 마지아니하나이다. 하여간 그대는 크게 주의하여 아이 듣는 데는 해로운 말도 말고 어떻게 하면 양심을 잘 기를까? 몸이 강건하여 마음이 유익하고 몸에 유리하도록 잘 기르시오.” 도산은 남편과 아버지로서 ‘자기역할’을 다하지 못하는 미안함을 토로한 것이다. 이는 당시 독립운동가들 대부분이 공유하는 인식이리라 짐작된다.     alt 이혜련(1913)(좌) / 이혜련과 첫째 안필립(1907)(우) 한인사회에 횃불을 밝히다 1913년 도산은 로스앤젤레스에서 ‘흥사단’을 창립하였다. 부부는 흥사단의 일은 물론 가정도 소홀하지 않으려 단소 건물 1층 한구석에 가족이 머물 공간을 마련하였다. 혜련은 매일같이 드나드는 손님과 동지들의 식비 마련을 위해 밤낮으로 청소하고, 세탁하고, 바느질하고, 요리하여 돈을 벌어야 했다. 뛰어난 음식 솜씨와 바느질 솜씨로 일감을 얻어 남편의 든든한 후원자를 자처하였다. 부부는 생활의 곤궁함에도 한국 고유문화를 간직하고 2세들의 민족정체성 유지에 노력하였다. 한인 자녀들에게 한글을 잊지 않도록 곳곳에 한글강습소를 운영하였다. 흥사단과 대한인국민회는 각 지방회마다 국어교육을 의무교육으로 정하고, 『초등국민독본』과 『국어독본』 등의 책자 발행·보급에 앞장섰다. 한글과 한국사는 한인들의 자긍심을 일깨우는 원천으로 인식·실천하였다. 한편 혜련은 도산의 동지 이갑이 러시아에서 중병으로 고생 할 때에는 미국 초빙을 주선하였다. 이마저 여의치 않자 시베리아에서 치료받게 하는 등 1천 달러를 보내주기도 하였다. 삯바느질과 빨래를 하며 틈틈이 모은 돈을 남편의 동지를 위해 담대하게 내놓은 것이다. 돈을 받은 이갑은 감사함에 소리 내어 울었다고 한다. 1917년 도산은 멕시코 교민사회를 방문하여 한인들이 거주하는 곳곳을 돌면서 각종 악습 폐지, 한인회관 건축, 국어학교 설립, 경찰소 조직, 실업회사 설립 등 한인들 권익옹호에 나섰다. 멕시코에서 돌아온 그는 국내 3·1운동 소식을 들었다. 대한인국민회 총회장이었던 그는 희소식을 미주와 멕시코 한인사회에 널리 알렸다.        로스앤젤레스에서 부인친애회를 조직한 혜련은 독립의연금 모금에 솔선수범하였다. 후일 미주의 여성단체가 통합된 후에는 대한여자애국단 로스앤젤레스지부에서 국민 의무금, 국민회 보조금, 특별 의연금 등의 모금 활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미국 적십자사 로스앤젤레스 지부 회원으로서 전시 지원 활동을 펼치며, 재미한인사회의 ‘대모’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였다. 1926년 도산이 다시 상하이로 떠나며 남긴 송별사에서 “나는 평생을 통해 당신에게 치마 한 감, 저고리 한 채를 사줘 보지도 못한 부족한 남편이요.(중략) 나는 너희들이 소학에 다니고 중학을 졸업하는 동안에도 연필 한 자루 공책 한 권 사줘 본 적이 없는 부족한 애비다.”라고 전하며 당시 참석한 모든 이들을 숙연하게 만들었다. 남편 대신 5남매를 키우며 살아온 혜련의 억척같은 삶이 눈에 선하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alt 멕시코 한인사회 순방할 당시 안창호(1918) 한국독립운동 사료를 정리하다 윤봉길의 훙커우 의거로 상하이에서 체포된 도산은 국내로 송환되어 서대문감옥과 대전감옥에 수감되었다. 1937년에는 일제가 ‘수양동우회 사건’을 조작하여 도산을 다시 체포하였다. 하지만 조국 독립을 향한 그의 열정은 굳건하였다. 중일전쟁 때 부상병 돕기 운동, 일화배척운동, 광복군 후원금 보내기 운동 등을 통해 대일항전에 앞장섰지만, 1938년 고문 후유증으로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 혜련이 속한 대한여자애국단은 중일전쟁에 즈음하여 재난민과 부상병 등을 돕기 위하여 약품과 붕대 등을 모집하였다. 또한 중국군에게 겨울옷을 보내기 위한 난민 구제 의연금을 모집하여 쑹메이링(宋美齡)에게 보냈다. 더불어 일화배척운동에도 열성적으로 참가하였다. 1940년 중국에서 한국광복군 창설 소식이 전해오자 대한여자애국단은 1940년 10월 총부 임원회를 개최하여 광복군 후원금 500달러를 임시정부 재무총장 이시영 앞으로 송금하였다.  한편 혜련은 고단한 삶 가운데에서도 도산과 관련된 신문기사·메모지·편지·저작·연설문·사진·기차표·뱃표·여권 등을 모으고 정리하였다. 이러한 사료의 중요성을 인지한 그는 특히 남편의 편지를 보물처럼 여겼다. 그는 남편뿐만 아니라 다른 독립운동가의 유물도 소중하게 여겼다. 이에 김구 주석은 1942년 혜련에게 태극기 보관을 부탁하기도 하였다. 이후 독립운동에 관한 사료와 유물 등을 독립기념관에 기증하며 독립운동은 물론 미주 한인사회의 생활상 복원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도산과 함께 안장되다 1946년 1월 6일 혜련은 대한인국민회 총회관에서 열린 신년도 첫 총회임원회에서 대한여자애국단 제6대 총단장에 선출되었다. 쿠바에 거주하는 동포들이 노동정지를 당하고 극심한 생활난으로 구제를 요청해오자 각 지부별 구제금 모금에 나서 121달러를 지원하였다. 6·25전쟁 동안에도 적십자와 피난민을 돕기 위해 한국구제회(Korea Relief Society)를 조직하였다. 그는 전쟁 중에 있는 고국으로 옷가지·약품·담요 등의 갖가지 구호품을 보냈다.       1962년 정부는 도산에게 건국공로훈장을 추서하였다. 1963년 혜련은 61년만에 고국을 방문하여 남편의 훈장을 전달받았고, 1969년 4월 21일 86세의 생일날에 사망하고 말았다. 1973년 11월 10일에는 도산 탄생 95주년과 흥사단 창당 60주년을 맞아 서울시 강남구 신사동 도산공원이 조성·개관하였다. 이에 혜련의 유해는 망우리 묘소에서 이장한 도산의 유해와 함께 공원 내 묘지에 안장되었다. 2008년 정부는 그의 공을 기리어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alt 안창호의 건국공로훈장을 전달받는 이혜련(1963)  ]]> Wed, 30 Mar 2022 11:02:11 +0000 65 <![CDATA[끝나지 않은 독립운동 광복회, 더 큰 자리매김을 바라며]]> 글 이계형(국민대학교 교양대학 교수) 대한민국 독립운동가와 그 후손·유족들이 구성한 단체로 ‘민족정기 선양 및 회원간 친목’을 목적으로 한 광복회는 높은 윤리와 도덕성을 바탕으로 운영되어야 한다. 최근 광복회의 논란을 보며 그동안의 역사를 회고하고 새 출발을 바라는 마음에서 몇 가지 제안하고자 한다.  첫발을 내딛다 1962년 삼일절을 맞아 처음으로 독립유공자 204명에게 건국훈장을 서훈하고 같은 해 4월 ‘독립유공자 및 월남귀순자 특별원호법’이 제정되었다. 이어 1963년 삼일절에 744명이 건국훈장·대통령표창을 받으면서 이를 계기로 1964년 4월 상호단합과 친목도모를 위해 중구 을지로 2가에 광복구락부가 조직됐다. 그 후 민족대표33인유족회·대한민국순국선열유족회 등 독립유공자·유족을 모아 사단법인 광복회가 1965년 2월 탄생했다. 이때 초대 회장은 33인유족회를 이끌던 이갑성이 맡아 여러 독립유공자 단체를 하나로 통합했다. 다만 화학적으로 결합하지 못하고 물리적 통합에 그친 것이 분란의 씨앗이 되고 말았다. 1966년 4월 제1차 정기총회에서 정관을 개정하여 회장, 부회장(4명), 이사(20명)와 회원 중에서 선출한 대의원(32명)을 두되, 과반은 독립유공자로 채우기로 했다.       그러나 내부 분란으로 그해 8월 광복절 행사는 광복회와 그 산하단체인 순국선열유족회가 별도로 치렀다. 급기야 1967년 2월 광복회원 40여 명이 광복회 회장단과 집행부를 불신임하면서 회장이 사표를 제출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이런 사달은 연금인상 문제, 독립유공자 처우 문제, ‘순국선열’ 문구누락 등이 원인이었다. 이에 이갑성이 회장으로 재선되었고 정부는 대일청구권 자금을 지원하여 독립유공자·유족에게 생계보조금을 지급하고, 유자녀 장학사업을 시작했고 광복회는 안정을 찾아갔다. 이후 1970년 10월 이화익이 제2대 회장, 1971년 2월 조시원이 제3대 회장에 올랐다.  논란의 불씨가 되다 1973년 3월 사단법인 광복회가 공법으로 전환하면서 원호처(현 국가보훈처)의 감독을 받게 되었다. 그런데 회장 선출 권한을 가진 대의원을 사실상 회장이 임명하는 것으로 광복회 정관이 고쳐지면서 논란의 불씨가 되었다. 1973년 5월 공법으로 전환된 후 처음 열린 정기총회에서 제4대 회장으로 안춘생이, 이어 1976년 5월 제5대 회장으로 박시창이 선출되어 1977년 3월 여의도에 광복회관을 착공했다. 1977년 5월 제6대 회장에 선출된 김홍일은 광복회관 공사를 차질 없이 추진하여 1978년 11월 광복회의 여의도 시대를 열었다. 1979년 6월 제7대 회장에 재선되었지만, 1980년 8월 사망하면서 자동 면직되었다.   1980년 9월 제8대 회장으로 김상길이, 1984년 9월 제9대 회장으로 유석현이, 이어 1988년 6월 제10대 회장으로 이강훈이 취임했다. 그는 1990년 제11대 회장에 재선되어 4년 동안 많은 일을 해냈고, 1987년 6월 항쟁 이후 민주주의가 꽃을 피우던 시기였던 만큼 임시정부의 역사적 의미를 강화하고자 했다. 이에 독립유공자 훈급 재조정 및 친일척결과 통일문제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1992년 9월 김승곤이 제12대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김영삼 정부의 ‘역사바로세우기’에 맞춰 독립유공자 중 친일파를 가려 수훈을 삭탈토록 했으며, 호주승계인이 없는 독립유공자의 자녀가 연금을 받도록 하여 유족 범위를 넓혔다.  분란과 파행을 겪다 1996년 5월 문민정부 출범 후 첫 회장 선거를 앞두고 광복회에 분란이 터졌다. 전 회장이 대의원을 선출하는 정관에 불만을 가진 회원들이 정기총회장에 난입하여 서로 멱살을 잡는 장면이 연출되었다. 이에 정관을 개정하기로 하였지만 총회는 이를 상정하지 않은 채 폐회되었고, 이후 가까스로 갈등을 봉합하여 13대를 ‘임시체제’로 꾸리기로 했다. 1996년 9월 권쾌복이 제13대 회장에 선출되었다. 그의 임기는 1년 7개월이었고, 취임 후 7개월 이내에 정관을 개정해야 하는 임무를 떠맡았다. 그러나 임기만료에 맞춰 신임회장 선출과정에서 갈등이 나타났다. 회장단·고문단 연석회의에서 선정한 대의원선출위원 12명 중 7명을 회장 권한으로 바꾸고, 이에 선출된 대의원들이 1998년 5월 권쾌복을 제14대 회장으로 다시 선출한 것이 문제가 되었다. 결국 국가보훈처가 선거를 무효로 하고 정상화추진위원회를 구성하는 등 파행을 겪었다.         1999년 1월 전국대의원 임시총회에서 윤경빈이 제14대 회장에 선출되었다. 그는 정관을 개정하여 건국포상자·대통령표창자에게 회원자격을 부여했다. 이후 2002년 6월 제15대 회장으로 장철이 선출되었는데, 취임 후 언론매체 인터뷰에서 ‘국민화합을 깨뜨리는 친일파 청산 중단’을 언급하여 사퇴압박을 받았다. 이를 기회로 지명직 대의원들의 간접선거로 회장이 선출되는 비민주적 방식을 지적했다. 광복회원 중에서 대의원 80명을 뽑아 선거하는데, 그중 30명을 현 회장이 임명하였기에 연임 혹은 후임 선정에 유리했다. 이에 회장 직선제 선출방식이 제시되었지만, 현실적으로 각 지부장만이라도 직선으로 선출하자는 목소리가 나오기도 했다. 장철 회장은 6개월 만에 자리에서 물러났고 그러한 제안들은 묻히고 말았다. 변화의 물결이 일다 2003년 2월 제16대 회장으로 선출된 김우전은 독립유공자 복지회관 건립, 영주귀국 독립유공자 정착금 확대 등의 업적을 남겼다. 이어 2005년 6월 김국주가 제17대 회장에 선출되었다. 재임 동안 안동지회를 시작으로 전국에 지회를 설립했고, 그동안 문제점으로 지적된 대의원 선출 방식을 바꿔 회원들이 직접 뽑도록 했다. 이를 계기로 2008년 6월 김영일이 제18대 회장에 선출되었고, 그는 40억 원을 들여 광복회관을 리모델링했지만 안타깝게도 임기 1년여를 남겨놓고 별세했다.           2011년 6월 처음으로 독립유공자 유족 박유철이 제19대 회장에 선출되었다. 그런 만큼 회장 선출 분란도 어느 때보다 커졌다. 그는 광복회 영속성을 위해 법을 개정하여 회원 수를 늘려 질적·양적 성장을 도모할 수 있게 했다. 그러나 임기가 끝날 무렵 구설수에 휩쓸렸다. 그의 재임을 반대하는 일부 광복회 회원들은 항의 농성을 벌였고, 그들은 애국지사 후손들의 생활자금으로 쓰기로 했던 친일재산 환수 금액으로 광복회관을 신축하려한 점을 거세게 반발했다. 이런 가운데 2015년 5월 총회가 열렸지만, 광복회관 앞에서 회원 간의 충돌이 계속되어 경찰이 출동하여 정문을 봉쇄한 가운데 선거가 치러져 연임에 성공했다. 그는 450억 원을 들여 2019년 2월 광복회관을 개관했다.            2019년 6월 박유철 회장의 연임을 반대한 유족 김원웅이 제21대 회장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그는 2020년 8월 광복절 기념사에서 이승만과 친일파의 결탁, 국립묘지 친일파 파묘, 미군정과 백선엽을 비난하면서 논란이 크게 일었고, 야당까지 나서 반발하면서 정치권으로 문제가 확산되었다. 또한 선친의 독립운동 이력이 허위라는 주장까지 나돌았다. 더불어 국회 카페 운영 비리 의혹 등이 그의 발목을 잡았고, 결국 취임 2년 8개월 만에 2022년 2월 스스로 사퇴했다.  새 모습으로 거듭나기 위해서 광복회는 60년 가까운 세월 동안 900여 명에서 시작하여 8,300여 명으로 회원이 증가했고, 민족통일·민족정기 선양, 순국선열과 독립유공자의 희생정신 승화, 유족지원에 힘써왔다. 이는 변함없는 국민 지지와 정부 지원받으며 선열의 고귀한 희생을 헛되이 하지 않으려는 회원들의 노력 덕분에 가능했다. 그렇지만 광복회장 선출을 둘러싼 분란은 대한국인들에게 실망감을 안겨줬을 뿐만 아니라 외면당할 위기에까지 처했다.       오는 2022년 5월에 예정된 선거에서 당선될 회장은 광복회가 본연의 길로 나갈 수 있도록 지도력을 발휘하고 선열의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특히 회장 선출 방식의 고질적인 문제점으로 지적된 간선제를 회원 직선제로 바꿔야 하고, 젊고 유능한 유족 참여를 확대하여 혁신적으로 탈바꿈해야 한다. 실추된 신뢰 회복을 이루어 모든 국민으로부터 존경받는 단체로 거듭나길 기원한다.  ]]> Wed, 30 Mar 2022 11:06:17 +0000 65 <![CDATA[독립의 발자취 소망이 녹녹히 서린 숲속으로]]> 글 편집실 일제강점기 민족적 비운을 소재로 삼아 강렬한 저항 의지를 나타냈던 시인이자 독립운동가이육사의 삶과 작품을 만날 수 있는 전시가 서울 종암동에 자리한 문화공간이육사에서 펼쳐지고 있다. 이번 전시를 기획한 신유진 님의 해설을 따라 〈시가 내린 숲〉을 거닐어본다. alt 문화공간이육사 기획전 〈시가 내린 숲〉 Q. 〈시가 내린 숲〉을 어떻게 기획하였나요? 현재 코로나로 지친 많은 이들에게 진정한 감상과 휴식의 기회를 마련하고 싶었습니다. 이에 1943년 1월 1일 이육사가 절친한 문인 신석초와 눈 내린 숲을 거닐며 독립의 꿈을 이루기 위해 중국 베이징으로 향할 계획을 고백하는 장면을 모티브로 삼아 상상의 숲을 재현하였습니다. 엄혹한 시대적 상황을 즉시하고 고난을 극복하고자 했던 이육사의 단단한 마음이 많은 이들에게 전해지길 기대하였습니다. 이번 전시에 선정된 다섯 편의 작품과 시적 배경을 재해석한 공간 연출이 어우러져 색다른 체험을 경험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기획하였습니다.  Q. 선정된 다섯 편의 작품을 소개해주세요. 이육사의 작품 가운데 ‘저항시의 백미’로 꼽히는 「절정」, 「꽃」과 같은 대표작을 비롯하여 「황혼」, 「파초」, 「비올가 바란 마음」처럼 널리 알려지지 않은 작품을 함께 만나볼 수 있습니다.  선정된 5편의 시는 당시 이육사가 처해 있던 상황 속에서 느꼈을 내면을 뛰어나게 형상화한 작품입니다. 이처럼 고통스러운 현실을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와 따뜻한 인간애가 담긴 이육사의 작품들을 현대미술, 음향예술 등 다양한 영역의 예술가들이 재해석하여 오감으로 체험할 수 있습니다. Q. 눈여겨볼 만한 점이 있다면요? 입구부터 펼쳐진 「황혼」 속 시어인 ‘커텐’을 직접 헤치고 나아가는 행위를 통해 새로운 감정을 느낄 수 있습니다. 또한 ‘석고를 입힌 벽면’에 새겨진 ‘앙상한 나뭇가지’를 마주하면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삶이 연상되기도 합니다. 이처럼 여러 장치를 통하여 다양한 감각을 깨우는 이번 전시는  마치 그 시절, 그 숲속에 있는 듯한 느낌을 선사합니다.  Q. 이번 전시를 통해 기대하는 바가 있나요. 현대 예술가들과 함께 이육사의 문학세계를 새롭게 경험할 수 있는 감상의 장을 마련하고, 독립운동가의 강인한 투지 너머에 있는 이육사의 탁월한 문학적 감성을 감각적으로 그려내고자 하였습니다. 눈으로 보는 감상형 전시가 아닌 체험형 전시를 제공하여 관람객들이 이육사의 마음을 직·간접적으로 느껴보길 바랍니다. 어둡고 긴 코로나 시대 속에서 희망의 빛을 엿볼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Q. 관람객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나요. 현재 여러분의 삶은 어느 계절의 숲에 머물러 있나요? 암울한 시대를 살아간 이육사는 끝내 추운 겨울을 견뎌내고 따뜻한 봄이 올 것을 강조하였습니다. 이번 전시를 통해 계절의 소리가 눈 밟는 소리에서 시냇물이 흐르는 소리로 이어지듯이 ‘누구에게나 결국 봄은 찾아온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습니다.  Q. 향후 계획과 목표가 궁금합니다. 문화공간이육사는 누구에게나 열린 공간으로 이육사의 독립운동 정신과 문학적 감성을 느끼고 공유하는 곳으로 자리매김하고자 합니다. 앞으로도 이육사의 삶과 작품에 깃든 정신을 기리는 것과 함께, 지역 문화유산을 주제로 다양한 프로그램이 기획·운영될 것입니다. 1943년 1월 1일, 큰 눈이 내려 서울은 온통 새하얀 눈 속에 파묻혀 있었다. 아침 일찍 이육사는 절친한 시인 신석초를 재촉하여 답설(踏雪)에 나섰다. 두 사람은 청량리에서 홍릉 쪽으로 은세계와 같은 눈길을 걸어어느새 지금의 홍릉수목원에 다다랐다. 울창한 숲은 온통 눈꽃이 피어 가지들이 용사로 늘어졌고,길 양쪽에 잘 매만져진 화초 위로 화사한 햇빛이 깔려 금방이라도 햇싹이 돋을 것 같다.〈시가 내린 숲〉은 이육사가 신석초와 함께 거닐던 숲을 재해석하였다. 다섯 편의 작품 해석과 함께, 시적 배경을 재현한 공간 연출이 어우러져 관람객에게 색다른 체험을 선사한다. 「황혼」, 『신조선』, 1935.6 이육사는 일제 경찰에 수차례 체포되며 얻은 병환으로 요양을 반복하였다. 이에 「황혼」 속 시어인 ‘커텐’을 활용하여 부드러운 황혼의 심상을 전시공간에 담았다. 관람객들은 전시실 입구부터 ‘황혼의 커텐’을 헤치고 나아가는 촉각을 체험할 수 있다.  alt 「황혼」, 『신조선』, 1935.6 「절정」, 『문장』, 1940.1, 「절정」, 『문장』, 1940.1 석고를 입힌 벽면에 직접 앙상한 나뭇가지를 새김으로써 한겨울 추위에 홀로 선 겨울나무를 표현하였다. 관객으로 하여금 1943년 1월 1일 이육사와 신석초가 눈 쌓인 홍릉수목원에서 산책하는 모습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을 안긴다. 냉혹한 현실에 참담한 심정을 가장 절제된 언어로 표현한 「절정」, 「파초」를 형상화한 것이다. alt 「절정」, 『문장』, 1940.1, 「절정」, 『문장』, 1940.1 「비올가 바란 마음」, 1942.8 이육사는 1936년 8월 4일 경주 옥룡암에서 충남 서천군 화양면에 있는 신석초에게 엽서를 썼다. “전서(前書)는 보셨을 듯/ 하도 답 안 오니 또 적소/ 웃고 보사요.”라는 서두로 보아 한 통 이상의 편지를 썼을 것이다. 그때의 장면을 상상으로 재현한 곳으로 이육사가 처해 있던 상황 속에서 느꼈을 내면을 형상화하였다. alt 「비올가 바란 마음」, 1942.8 「꽃」, 『자유신문』, 1945.12 「꽃」 속의 ‘비 한 방울 나리쟎는’ 동방의 그때는 식민지 조국의 엄혹한 현실을, ‘꽃’은 독립의 열망을 상징한다. 이에 ‘바람결 따라 타오르는 꽃성(城)’에 비유한 조국의 광복을 공간에 표현하여, 희망찬 미래에 대한 확신을 드러내었다. alt 「꽃」, 『자유신문』, 1945.12 ]]> Wed, 30 Mar 2022 11:17:44 +0000 65 <![CDATA[세계 산책 멕시코 공화국의 기초를 놓은 호세 마리아 모렐로스]]> 글 최해성(고려대학교 스페인·라틴아메리카연구소 연구교수)   멕시코 ‘독립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미겔 이달고의 민중저항은 식민통치의 악습 폐지를 외쳤으나 ‘독립’ 요구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처음으로 멕시코라는 국명을 사용해 독립을 선언하고 헌법 제정을 시도한 사람은 이달고의 제자 호세 마리아 모렐로스였다. 국민주권과 대의제에 기초한 공화국 멕시코의 탄생은 모렐로스가 지휘한 독립운동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alt 미초아칸대학에 세워진 모렐로스 동상 멕시코 독립운동을 이끈 스승과 제자 2019년 멕시코 중앙은행은 새로운 도안의 화폐를 발행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화폐 디자인이 바뀔 때마다 그 안에 담길 인물에도 변화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화폐 도안에서 한 번도 제외된 적이 없는 인물들이 있었으니, 이달고와 모렐로스이다. 스승 이달고가 점화한 독립운동의 작은 불꽃은 제자 모렐로스에 의해 거대한 횃불로 타올랐다.          일반적으로 라틴아메리카의 독립을 다룰 때는 대부분의 국가들이 비슷한 과정을 거쳐 독립을 달성했으리라 여기기 쉽다. 그러나 시몬 볼리바르와 산 마르틴을 중심으로 한 치열한 전쟁을 통해 독립을 쟁취한 남미의 국가들과 달리 멕시코는 복잡한 과정을 걸쳐, 마지막에는 스페인군과 반란군의 지휘관이 협정을 통해 독립을 완성했다. 남미지역의 독립전쟁이 처음부터 크리오요(아메리카 대륙에서 태어난 백인 계층)를 중심으로 전개됐다면, 멕시코의 독립운동은 1810년 농민·노동자 등이 중심이 된 대중봉기를 통해 발화되었다.             이후 멕시코는 10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여러 단계를 거치며 독립의 결실을 거두게 된다. 대체로 멕시코의 독립과정은 4단계로 구분한다. 이달고가 이끈 대중봉기의 시기(1810년 9월~1811년 7월), 이달고의 처형 이후 모렐로스에 의해 추진된 조직적인 독립전쟁과 제도화 시기(1811년 7월~1815년 12월), 모렐로스의 처형 이후 산발적으로 전개된 독립운동 시기, 끝으로 1821년 반란군 지도자와 스페인 장교가 합의를 통해 실질적인 독립을 이루는 시기로 나눈다. 독립의 기운을 싹트게 했다는 의미에서 이달고의 선구적 행동에 주목이 집중되고 있지만, 전투성과 면에서나 독립운동의 체계화 면에서 더욱 큰 의미를 지닌 단계는 모렐로스가 이끈 제2기였다. 국민주권의 기초를 놓다 1810년 9월 멕시코 중북부의 작은 도시 돌로레스에서 대중봉기를 일으킨 이달고는 추후 합류한 모렐로스를 설득하여 멕시코 남부 항구도시 아카풀코 점령의 책무를 맡긴다. 20여 명의 병사들과 남하하기 시작한 모렐로스는 ‘게릴라 전’을 통해 스페인군에 타격을 입히는 동시에 새로운 세력을 규합하여 아카풀코에 근접하였을 때에는 700명이 넘는 병력을 보유하게 되었다. 전술적으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 모렐로스는 이달고의 처형 이후 독립운동의 지도자로 부상한다.          독립운동의 제도화와 정치적 구심점의 필요성을 느낀 그는 ‘아메리카 최고 국민위원회’ 등 독립 열망을 하나로 모을 기구들을 구성하고 헌법의 기초가 될 사상을 담금질한다. 1812년 칠판싱고(Chilpancingo)에서 개최된 의회에서 모렐로스는 「국민의 감정(Sentimiento de la Nacion)」이라는 제목의 유명한 선언문을 낭독한다. 선언문에서 그는 아메리카의 독립을 천명하고 주권은 민중에게서 직접 나온다는 획기적인 사상을 정립하였다. 이러한 정신을 토대로 1814년 멕시코 역사상 최초의 헌법이라 할 수 있는 아파칭간(Apatzingan) 헌법을 제정했다. 비록 현실에 적용되지는 못했지만, 민중 주권의 개념을 도입한 이 헌법은 대의제를 바탕으로한 멕시코 공화국의 기초를 놓았다고 할 수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1821년 멕시코가 실질적인 독립을 달성하였을 때 채택한 정체(政體)는 입헌군주제였다. 그러나 이 체제는 오래가지 못했다. 불과 3년 뒤 민중 주권의 열망은 군주제를 무너뜨리고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공화제를 수립하였다.        앞서 언급한 칠판싱고 의회에서 모렐로스는 총사령관에 추대되었으나 계속 직위를 사양하다가 마지못해 수락하였다. 그는 자신에게 붙여지는 칭호가 부담스러워 ‘국민의 충복(Siervo de la Nacion)’이라는 별칭을 붙여 달라고 요청했다. 이후에도 모렐로스는 계속하여 군사작전을 지휘하였으나 1815년 11월 스페인군에게 패배한 후 체포되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라틴아메리카 독립의 완성 오늘날 라틴아메리카의 역사 서술은 무엇보다 독립이 식민체제의 신분적 위계질서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에 초점을 맞춘다. 특히 소수의 백인 지배층과 다수의 원주민, 아프리카계 예속민 사이의 관계에 독립이 어떤 충격을 가했는지 검토한다. 식민체제의 신분질서는 독립된 아메리카에서 매우 더딘 과정을 거쳐 극복되었기 때문에 학계의 역사학자들은 ‘독립의 성과가 실망스럽다는 점’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십여 개의 국가가 거의 동시에 수립됨으로써 당시 아메리카 대륙은 미국 독립 과정에서 볼 수 없었던 매우 중대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분명 미국의 독립은 옛 유럽 식민지에 건설된 새로운 공화국이라는 하나의 본보기가 되었고 아메리카 대륙의 많은 독립운동가들을 고무시켰다. 그러나 단 하나의 사건이 세계적 조류(潮流)를 형성하기는 어려웠다. 반면, 한 세대가 지난 뒤 아메리카 지역에 대거 수립된 국민국가들은 하나의 큰 흐름을 만들었고 미래의 비식민화를 위한 원형(原型)을 제시했다. 20세기 중반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아프리카와 아시아에서 유럽의 식민통치가 종식되었을 때, 라틴아메리카의 성공적인 비식민화는 계속된 논란에도 불구하고 이미 세계사에서 기정사실로 인정된 상태였다. 아메리카인들의 성공은 20세기 후반에 급격히 증가한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신생 국가들에도 입헌 공화주의 유형이 통용될 수 있다는 점을 보증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렇듯 모렐로스가 기초를 놓은 멕시코 공화제는 라틴아메리카 공화주의의 완성을 가져왔고, 시간의 흐름과 더불어 세계적인 공화주의의 흐름으로 이어졌다. ]]> Wed, 30 Mar 2022 11:22:14 +0000 65 <![CDATA[기념관은 지금 안전과 청결은 우리가 책임집니다]]> 정리 편집실  사진 이소연 독립기념관에는 우리가 눈여겨보지 않은 곳에서 묵묵히 일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이번 호에는 관내의 안전과 청결을 위해 애쓰는 분들이 궁금합니다. 사무처가 있는 겨레누리관에서 경비업무를 하는 김운한님과 미화업무를 하는 송은주님을 만나봅니다.   alt 송은주, 김운한 독립기념관에서 근무하게 된 동기가 있나요. 김운한. 2011년 어느 날, 흑성산 산행을 위해 독립기념관을 찾았는데 그때 ‘민족의 얼이 깃든 독립기념관에서 근무를 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스쳤습니다. 나라사랑을 실천하는 독립기념관의 일원이 될 수 있다면, 비교적 낮은 위치에서도 자부심을 가지고 일할 수 있다는 마음이 생기더군요. 마치 운명의 이끌림 같은 것이 있었나 봅니다. 송은주.미화업무는 나이를 먹어서도 일할 수 있는 안정적인 직업군이라고 생각하여 고용노동부에서 지원하는 일자리창출사업을 통해 교육을 받은 후 입사하게 되었습니다. 다만 주변에서 청소노동이 업무강도가 높다 하여 걱정하였는데, 독립기념관은 근무조건과 작업환경이 잘 갖추어져 있어 만족하며 즐겁게 일하고 있습니다. 김선생님은 12년째 근무하고 계신데, 그 비결이 궁금합니다. 김운한.경비업무의 중요한 덕목은 성실함과 꼼꼼함인 것 같습니다. 먼저 ‘모두의 안전’을 위하여 관장님을 비롯한 전 직원분들의 성함과 얼굴을 인식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관내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일들을 전체적으로 파악하고 있어야 합니다. 독립기념관을 보호하는 임무를 수행하므로 철저한 책임의식이 필요한 것이지요. 또한 어떤 상황에서도 의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자기통제력, 위급상황 시 신속하게 대처할 수 있는 신속함과 판단력, 위기대처능력 등을 잃지 않도록 꾸준히 관리·노력하고 있습니다. alt 주변에서 두 분 칭찬이 자자합니다. 송은주.김선생님은 오래 근무하신 만큼 구석구석 모르는 게 없으신 분입니다. 근무를 하다 도움이 필요하거나 궁금한 사항이 생기면 항상 김선생님께 먼저 여쭤봐요. 그럴 때마다 귀찮은 내색 없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도와주십니다. 무엇이든 ‘그냥, 대충’하는 법이 없는 김선생님의 모습에서 삶의 자세나 태도를 배우고는 합니다. 김운한.송여사님은 독립기념관의 ‘숨은 일꾼’이십니다. 평일에도 묵묵히 열심히 하시지만, 비교적 여유가 있는 주말이면 쉬엄쉬엄할 수도 있는데 결코 게으름을 피우지 않으셔요. 송여사님 역시 ‘그냥, 대충’하는 법이 없는 성실한 분이지요. 제가 웃으며 ‘잠깐 쉬면서 하세요.’라고 말할 때가 있을 정도랍니다. 안전과 청결관리는 뗄 수 없는 사이잖아요. 송은주.건물안전을 위해서는 일차적으로 환경위생을 확보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청소가 미비해서 경비업무에 피해가 가지 않을까’ 신경쓰며 업무에 임합니다. 그리고 김선생님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청소업무에 많이 협조해주십니다. 이를테면 혼자 들기 버거운 쓰레기를 들고 나갈 때, 김선생님은 뛰어나와 문을 대신 열어주세요. 작은 배려이지만 함께 근무하는 동료로서 늘 감사하답니다.  김운한.더군다나 송여사님과는 근무조가 같아서 서로 도우며 일하고 있습니다. 가끔 커피 한 잔 나누며 업무의 고충을 털어놓는 든든한 존재이지요. alt 고충을 느낄 때는 언제인가요. 김운한.경비업무는 24시간 격일제로 근무하기에 장기간 근무하다보면 신체적·정신적 피로가 쌓여요. 그렇기에 평소 체력관리가 중요합니다. 또한 가끔 무리한 요구를 하는 방문객들을 현명하게 대처하는 지혜도 필요하지요. 업무 특성상 매사에 조심해야하고 늘 예스맨이 되어야 하기에 아주 가끔은 힘이 부칠 때도 있지만, 나를 찾고 필요해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에 감사함과 뿌듯함을 느낍니다.   송은주.직원들이 출근하는 오전 9시까지 오전 청소를 마무리해야 하기에 출근시간이 이른 편이에요. 보통 오전 6시 30분쯤 출근해서 바로 근무를 시작하는데, 성격상 ‘대충’ 할 수가 없어서 구석구석 청소하다보면 오전 마무리시간이 금방 찾아와요. 시간·여건상의 이유로 청소가 미비한 곳이 있을 수 있는데, 그런 부분을 직원분이나 방문객들이 먼저 발견했을 때 가장 안타까워요. 혹시 청소가 미비한 곳을 발견하시면 언제든 말씀해주세요. 모든 분들의 편의를 위하여 즉각 개선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보람은 언제 느끼나요. 송은주.미화업무는 이른바 단순노동으로 잡념 없이 일할 수 있는 점이 가장 좋습니다. 무엇보다 건물을 깨끗이 정돈하고 나면 제 기분까지 덩달아 상쾌해져요. 저의 작은 노력으로 쾌적한 근무 환경을 만든다는 것에 큰 보람을 느낍니다. 또한 오며가며 만나는 분들이 ‘고생한다, 수고한다’는 인사를 건네시면 감사하고 뿌듯합니다. 김운한.저도 사람들이 건네는 다정한 한 마디에 힘을 얻습니다. 경비업무는 독립기념관을 불법침입·도난·화재 등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모든 방문객들의 시간·목적 등을 확인·기록하는 일은 물론이며, 박물관에 배송된 신문·우편·택배 등도 분실되지 않도록 꼼꼼하게 체크하여 분리하고, 팩스로 들어온 문서관리도 합니다. 이에 안전하게 우편물 등을 받은 직원들이 ‘덕분에 감사하다’고 인사를 건넬 때 ‘독립기념관에 보탬이 되는 일을 하고 있구나’라는 생각에 보람을 느낍니다.  마지막으로 하실 말씀이 있나요. 송은주.제가 말수가 적어서 무뚝뚝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으니 제 손길이 필요할 때 언제든 편하게 다가와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쓰레기 수거를 위해 사무실을 돌다 보면 청소하는 입장에서 버릴 물건인지 아닌지 헷갈리는 경우가 종종 있어요. 그렇기에 버릴 물건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게 표시해주시면 수거하기 훨씬 수월할 것 같습니다. 끝으로 제가 화분을 깨거나 물건을 떨어트리는 실수를 가끔 하는데, 그럴 때마다 너그럽게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더욱 쾌적한 환경을 위해 부지런히 움직이겠습니다. 김운한.방문하는 모든 분들에게 경비로서 기본적으로 묻는 것들이 몇 가지 있는데요. 안전상 묻는 질문이오니 그 의도를 곡해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어디서 어떤 목적으로 누구를 만나기 위해 이곳을 찾아왔는지 알아야 하는 것이 경비의 본분이지 않습니까. 오히려 독립기념관 내부를 아무런 절차 없이 외부인이 자유롭게 들락날락하면, 모든 분들이 보안상 문제가 많다고 느끼실 겁니다. 그런 점에서 귀찮으시더라도 방문객분들의 협조를 부탁드립니다. ]]> Wed, 30 Mar 2022 11:37:00 +0000 65 <![CDATA[독자참여 이번 호 「독립기념관」을 읽고 빈칸을 채워주세요. 꼼꼼히 읽다 보면 정답에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altalt아이콘을 클릭하면 퀴즈 정답을 보낼 수 있습니다.]]> Wed, 30 Mar 2022 11:38:55 +0000 65 <![CDATA[들어가며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반복된다]]> 일제의 조선인 강제동원일본제국주의는 그들의 침략전쟁을 실행하기 위해 조선인을 대상으로 인적·물적 동원을 자행하였다.일제 통치기관이 정책적·조직적·집단적·폭력적·계획적으로 수행하였기에 식민지배를 받던 조선인들은 거부할 수 없었다. 남녀노소할 것 없이 전쟁터, 탄광, 공장 등으로 끌려간 수많은 조선인들은 열악한 환경 속에서 가혹한 고통에 시달려야 했고, 많은 이들이 끝내 목숨을 잃기도 하였다.일제의 만행에 조선인들이 순순히 응한 것만은 아니었다. 위험을 무릅쓰고 개인적 혹은 집단적으로 탈출을 감행하였고,파업, 태업, 투쟁 등의 다양한 방식으로 끊임없이 저항하였다.이와 같은 사실은 수많은 사료와 증언들이 입증하고 있다.그로부터 70여 년이 흘렀다.떠올릴 때마다 마디마디가 아린 이 역사는 진정한 광복을 맞지 못하였다.피해자들은 한없이 괴로움을 호소하고 있지만 가해자들은 부단히 강제성을 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누군가는 세월이 약이라 이른다.그러나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반복된다.아직도 현재 진행 중인 고통과 수난의 역사를 끝맺기 위한‘기억 투쟁’이 계속되어야 할 이유다. ]]> Thu, 28 Apr 2022 13:32:23 +0000 66 <![CDATA[톺아보기 일제강제동원,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 글 정혜경(일제강제동원·평화연구회 대표연구위원) 일제 침략전쟁에 희생된 수많은 조선인들은 영문도 모른 채 전쟁터, 군수공장, 탄광 등으로 끌려갔다. 그들은 원치 않은 총을 들어야 했고, 밤낮없이 고달픈 노역에 시달렸다. 가해자들은 그들이 저지른 만행을 묻으려 하지만, 이미 수많은 사료와 증언들이 피해사실을 입증하고 있다. 70여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일제강제동원의 역사는 여전히 현재 진행 중이다. alt 강제징용에 동원된 노무자들 일제강제동원의 개념 일제강제동원이란 일본제국주의가 아시아태평양전쟁(1931~1945)을 벌이기 위해 실행한 인적·물적 동원을 말한다. 강제동원은 일본 본토와 남사할린, 식민지(조선, 타이완), 점령지(중국 관내, 중서부 태평양, 중국 동북부 지역인 만주, 동남아시아) 등 일제가 지배한 거의 모든 지역에서 자행되었다. 본격적인 강제동원은 일제가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킨 후, 국가총동원법(법률 제55호, 1938년 4월 1일 제정)을 만들면서 자행되었다. 국가총동원법은 모든 지배지역에 있는 인력과 물자, 자금을 전쟁에 총동원할 수 있는 광범위한 권한을 의회 동의 없이도 일제에 위임할 수 있도록 한 전시제 기본법이다. 일제는 국가총동원법을 모법(母法)으로 하여 국민징용령 등 각종 통제법령을 시행하였다.  alt 조선총독부의 「징용자명부」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한 노무자 한국의 현행법(법률 제12132호.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 강제동원희생자 등 지원에 관한 특별법)에서 규정한 일제강제동원 피해자는 ‘군인과 군무원, 노무자, 위안부’ 등이다. 이 가운데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한 피해자는 노무자이다. 일제는 모집(1938.5~1945.6), 국민징용(1939.10~1945.6), 관알선(1942.2?1945.6)이라는 세 가지 방식으로 동원하였다. 일제는 이를 ‘동원경로’라고 하였다. 동원경로는 일제 국가권력이 공권력으로 집행하였다. 노무자를 선정하는 일부터 기차와 배에 태워 보내기까지 모두 도·군·면의 직원(노무계와 면서기)과 이장, 경찰이 맡았다. 특히 노무자 인솔과 수송은 관할경찰서의 몫이었다. 1943년 3월 19일 일제 메이지광업(주) 소속 탄광으로 한인 105명을 보낸 책임자는 황해도 봉산군 사리원 경찰서장이었다. 피해자 가운데 노무자가 많았던 이유는 전쟁에 필요한 군수물자를 만드는 등 민간인의 노동력이 절실하게 필요했기 때문이다.  7,804,376명의 피해자 전시 강제동원은 몇몇 사람들의 개인적인 일이 아니라 일본 국가권력이 정책적·조직적·집단적·폭력적·계획적으로 수행한 공식 업무였다. 그러므로 법과 제도에 따라 행정체계를 갖추고 조직적으로 동원하였다. 개인이 아니라 통치기관(일제 정부 기관, 조선총독부, 남양청 등)이 주관하였기에 식민지 및 점령지의 민중들은 거부할 수 없었다. 국가총동원법 제33조에는 ‘명령에 불복(不服) 또는 기피할 경우는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5천원 이하의 벌금’ 규정도 있었다. 국무총리 소속 대일항쟁기 강제동원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위원회(이하 위원회, 2015년 12월 폐지)가 산출한 인력 동원 피해 규모는 7,804,376명이다. 이 숫자는 중복해서 계산된 인원이 포함되어있다. 피해자 1인이 여러 차례 동원되기도 했기 때문이다. 실제 동원인원은 약 200만 명 정도로 추산한다. 저항에 나선 조선인들 일제의 강제동원에 조선인들이 순순히 응한 것만은 아니었다.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반대투쟁을 전개하였고, 개인적 혹은 집단적으로 탈출을 감행하였다. 또한 민족차별과 열악한 노동환경·노동조건하에서 파업, 태업 등 다양한 방식으로 노동쟁의를 전개하기도 하였다. 일제의 강제동원에 대한 조선인들의 저항은 민족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차원에서 전개되었다. 대표적인 강제동원 거부사건으로 ‘대왕산 죽창의거’를 들 수 있다. 1944년 7월 15일 안창률(安昌律)·김명돌(金命乭)·박재천(朴在千)을 포함한 청년 29명은 일제의 징병과 노역에 저항하기 위해 대왕산(大旺山)에 진지를 구축하기로 결의하였다. 7월 25일 밤 29명 전원은 대왕산 진지에 모여 의거대를 조직하여 주재소를 공격하기로 계획하였다. 이후 그들을 잡으러 온 일제 경찰을 죽창(竹槍)과 투석(投石)으로 맞서 물리쳤다. 그러나 8월 10일경 식량을 조달하기 위해 산에서 내려왔다가 모두 체포되고 말았고, 이후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광복을 맞아 풀려났다. alt 김명돌(좌) / 박재천(우) 강제성 부정을 고수하는 일본 “… 1940년대 일부 지역에서 그들의 의지에 반하여 가혹한 조건하에서 일하도록 강요당한 많은 한국인들과 다른 사람들이 있었고,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일본 정부 또한 요구 정책을 시행했다. …” 2015년 7월 5일, 독일에서 열린 제39회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사토 구니(佐藤地) 주 유네스코 일본대사의 공식 발언이다. 이 발언은 일본 최초로 국제기구에서 아시아태평양전쟁의 강제동원을 공식 인정한 사례이다. 그런데 일본 정부는 이 발언 직후부터 줄곧 철저하게 ‘강제성 부정’을 고수하고 있다. 사토 구니 대사의 발언 직후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외무상(현재 총리)은 기자들에게 ‘강제가 아니라 일하게 되었다‘는 자발적 노동 의미로 번역하였다. 취업의 의미라는 것이다. 이 같은 입장은 현재까지 이어져 유네스코 세계위원회 권고에 따라 2020년 6월 일본이 도쿄에 설치한 일본산업유산정보센터는 역사 왜곡의 장으로 자리 잡았다. 국제적으로 입증된 위법성 이러한 역사 왜곡과 부정은 일본 정부 입장에 국한하지 않는다. 2019년에 국내 출간한 『반일종족주의』에서도 볼 수 있다. 이들은 입을 모아 한인 강제동원은 없었다고 강변한다. 그렇다면 이들의 주장대로 한인 강제동원은 강제가 아니었는가. 국제노동기구(ILO)와 국제법이 강제였다고 입증하고 있다. 1997년과 2002년에 일본변호사연합회는 보고서를 통해 일본이 자행한 한인에 대한 전시노무동원이 국제법과 국제노동기구(ILO)의 규약을 위반했으므로 일본 정부가 책임져야 한다고 결정하였다. 근거는 세 가지였다. 첫째, 강제노동에 관한 조약 위반(ILO 제29호 조약), 둘째, 노예조약 및 국제관습법으로서 노예제의 금지 위반(국제연맹 규약 제22조 5항), 셋째, 인도에 대한 죄에 위반하는 행위(뉘른베르크(Nuremberg) 국제군사재판소 조례 및 극동군사재판소 조례에서 처음 실정화된 전쟁범죄)였다.         1919년에 창설된 국제노동기구(ILO)는 1930년 강제 또는 의무 노동에 관한 협약(일명 강제노동협약)(29호)을 채택하였고, 1932년 일제는 강제노동협약을 비준하였다. 이 협약에 따르면, 일제는 제1조 제1항에 따라 ‘가능한 한 조속히 모든 형태의 강제 또는 의무 노동 사용을 억제할’ 법적 의무를 져야 했다. 그 외 제13조, 제14조 제1항과 3항, 제15조 제1항, 제17조, 제21조, 제25조 규정도 있다. 일제의 한인 강제동원은 강제노동협약의 규정을 광범위하고 체계적으로 위반한 행위였다. 그런데도 일본정부는 강제노동협약 제2조 제2항(전쟁, 지진, 화재 등 긴급한 경우는 제외)을 들어 합법적이었다고 강변하였다. 그러나 ILO는 1997년에 조약(협약) 및 권고 적용 전문가위원회(CEACR)에서 일본은 제2조 제2항을 위반했다고 결정하였다. 이 조항은 ‘돌발적 우발적이어서 즉시 대응조치를 할 수 없는 경우를 의미’하는데, 일본의 침략전쟁은 돌발적이거나 우발적이 아니라 계획적이었기 때문이다. 나아가 ILO의 CEACR는 1999년 제87차 ILO 총회(ILC)에서 일본 당국의 전시노무동원에 관한 소견을 공표하였다. “이같이 개탄스러운 조건으로 일본의 사부문 산업에서 일할 노동자를 대량 징용한 것은 강제노동협약 위반”이라는 내용이었다. 이같이 일제의 한인 전시노무노동의 위법성은 국제법과 국제기구에서 이미 입증되었다. 그들이 주장하는 강제성 부정론에 귀 기울일 필요가 없다. ]]> Thu, 28 Apr 2022 13:44:00 +0000 66 <![CDATA[만나보기 비극의 아이들, 그 참혹한 증언]]> 글 정혜경(일제강제동원·평화연구회 대표연구위원)   강제동원의 피해는 어른들만의 비극이 아니었다. 일제는 어린 아이들까지 동원하여 탄광, 공장 등으로 끌고갔다. 반인권적 행위를 저지른 것이다. 아이들은 열악한 환경 속에서 연약한 몸으로 가혹한 노역에 시달려야 했고, 끝내 목숨을 잃기도 하였다. alt 강제징용에 동원된 소녀들 남녀노소 가리지 않은 착취 일제는 아시아태평양전쟁을 일으킨 후 다양하고 방대한 규모의 물자를 ‘공출’이라는 이름으로 빼앗아갔다. 미곡부터 광물·목재·소금에 이르렀다. 한반도 전역에서 숟가락과 놋그릇을 징발해 인천 부평의 육군조병창 주물공장에서 녹여서 무기도 만들었다. 그런데 공출은 물자만이 아니었다. 물자와 함께 사람도 공출(供出)하였다. 많은 한인이 노역에 시달렸다. 주로 장정들을 동원했으나 노인과 아이들, 여성들도 있었다.  이 가운데 어린이 사례를 살펴보자. 당국은 일본, 남사할린, 중서부태평양, 한반도의 탄광과 광산, 군수공장, 토목건축공사장, 집단농장으로 어린이들을 내몰았다. 그렇다면 몇 살부터 어린이로 보아야 할까. 사전을 보면, 아동은 ‘보통 만 6세 이상 13세 미만’이다.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에서 아동은 ‘만 14세 미만’이다. 초등학교를 갓 졸업한 나이이다. 일제는 이들을 강제로 동원하기 위해 법을 만들었는데, 법에는 동원 나이(모두 만 나이)가 적혀 있다. 각종 규정을 보면, 시기가 지나면서 점점 동원 나이가 어려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나마 규정대로 동원한 것도 아니었다. 실제로는 더 어린아이들을 동원하였다. 동원 실적을 위해 법을 위반한 것이다.* 동원 방식도 다양하였다. 이장이나 면서기가 동원하기도 하였고, 교사가 회유하기도 하였으며, 길거리 납치도 서슴치 않았다. 안타깝게도 아직은 일제가 얼마나 많은 아이들을 동원했는지 파악할 수 없다. 정부에 신고한 피해자 사례만 알 수 있을 뿐이다.  * 일제가 어린이를 강제로 동원하기 위해 만든 각종 규정 1국민근로보국대 실시요강(1938년 6월) : 20세~40세 남녀 2국민근로보국협력령(1941년 11월) : 14세 이상~40세 미만 남성, 14세 이상~25세 미만 여성 3노무조정령(1941년 12월) : 14세 이상~40세 미만 남성, 14세 이상~25세 미만 여성  4국민근로보국협력령 개정(1944년 11월) : 14세 이상~60세 미만 남성, 14세 이상~40세 미만의 배우자 없는 여성 5여자정신근로령(1944년 8월) : 12세 이상~40세 미만 여성 6국민근로동원령(1945년 4월) : 12세 이상~60세 미만 남성, 만 12세 이상~만 40세 미만 여성 alt 일제가 만 14세 이상 20세 이하의 청소년들을 동원한다는 내용의 기사, 『매일신보』(1941.5.2)(좌) / 조선여자근로정신대원들(1945. 10.19) 극심한 공포감에 시달린 소녀들 일제는 여성노무동원의 법적근거를 명확히 하고 동원연령 확대와 강제력 강화를 위해 1944년 8월 23일 여자정신근로령을 공포하였다. 이 규정에 의한 조선총독부의 ‘알선지도’에 따라 10대 초·중반 여학생들이 교장과 담임교사의 지원종용과 감언이설에 속아 강제동원 되었다. 조선여자근로정신대는 1944년 4월경부터 조선이나 일본, 만주 등의 공장으로 동원되었다. 지금까지 밝혀진 동원지로 후지코시강제공업(주) 도야마공장, 미쓰비시중공업(주) 나고야 항공기제작소, 도쿄아시아토방적(주) 누마즈공장 등이 있다. 12~16세 어린 소녀를 동원하여 군대식 노동규율과 장시간 노동을 강행하였다. 그 결과 소녀들은 크고 작은 노동재해는 물론, 지진과 공습으로 인한 극심한 공포감과 굶주림에 시달렸다. 끝내 탈출을 감행하다 붙잡힌 소녀들에겐 가혹한 폭력이 가해졌다. 발가벗겨 기숙사마다 데리고 다니며 망신을 주고, 감독들이 집단 성폭행한 뒤 공창에 팔아넘기는 사례도 있었다. 강제노역에 동원된 아이들의 증언 야나기모토 비행장 건설 공사장에는 열세 살 소녀 정자가 있었다. 1931년 8월 경남 함양에서 태어난 정자는 세 살 때 가족이 일본으로 이주해 나라현 야마베군에 있는 학교에 다니다가 1944년 7월 근로보국대로 끌려갔다. 비행장에서 모래를 이고 자루에 담거나, 흙을 나르는 일을 하였다. 여름 내내 힘든 일을 하는 딸이 안쓰러운 아버지는 “학교에 다니지 않으면 일하러 가지 않아도 될 것 아니냐”며 학교를 중퇴하도록 했다. 그런데 일제는 며칠 후 이번에는 정신대로 시즈오카조선소에 가라고 통보하였다. 아버지는 “시즈오카가 너무 멀다”며 손을 써서 오사카에 있는 비행기부품공장으로 가도록 하였다. 하루 12시간씩 하는 공장일은 힘들고 위험하였다. 공장에서 정자는 기계에 넘어져 얼굴에 흉터가 남고 한쪽 귀가 들리지 않게 되었다. 전쟁은 소녀에게 장애를 남겼다. 한편 1924년 4월 강원도 춘천에서 태어난 소년 봉제는 1940년 10월 오사카에 있는 해군시설부 직속 도크공사장과 나라현 덴리시에 있는 해군 야나기모토 비행장 건설 공사장에 끌려갔다. 만 열네 살 때였다. 어린 나이에 해군공사장으로 가게 된 이유는 읍에 나갔다가 중앙시장 부근에서 붙잡혔기 때문이다. 소년은 순사에게 잡힌 후 가족에게 알리지도 못하고 해동여관에서 하룻밤을 자고 이튿날 일본으로 떠났다. ‘중앙로 1가, 지금 강원은행 지점 옆’, 70년이 되도록 잊을 수 없는 해동여관 자리다. alt 항공기 제조공장에 동원된 소녀들(좌) / 나고야 항공기 제작소에 동원된 소녀들(우) 창살 없는 감옥, 하시마 유네스코 세계유산의 하나인 군함도라고 불리는 하시마도 조선의 아이들을 동원한 노역장이었다. 일본의 우익과 한국의 역사부정론자(『반일종족주의』 필자들)는 지금도 “하시마에 소년 광부는 없었다”며 세계 시민들에게 거짓을 유포하고 있다. 그러나 소년 탄부는 존재하였다. 1929년 11월 전북 익산에서 태어난 최장섭은 1943년 하시마에 끌려갔다. 3남 5녀의 식구들은 가난했지만 불행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불행이 닥친 것은 큰형이 당국의 동원에 응하지 않고 몸을 숨겨 반역자 집안이 되면서 부터다. 면 노무계인 윤가는 1943년 1월 28일 엄동설한에, 열세 살 소년을 데리고 익산군청으로 갔다. 장섭을 본 군수가 “왜 많은 사람 가운데 어린애를 보내려느냐”고 하자, 윤가는 “형이 동원에 응하지 않았으므로 대신 일본에 충성을 다하고자 보내는 것”이라 하였다. 장섭은 하시마에 도착해 파도가 방파제 주변 옹벽에 부딪치는 것을 보고 ‘저기야말로 창살 없는 감옥’이라고 생각하였다. 해저 천 미터 이상 내려가는 갱 안의 모습은 상상할 수 없었다. 도착한 다음날 오후부터 소년은 2년 5개월간 탄부로 살았다. alt 군함도라 불리는 하시마(좌) / 세상으로 통하는 창구, 하시마(2017.11.촬영)_ 역사문화콘텐츠 공간 제공(우) 사망원인도 알 수 없는 어린이 사망자 각종 노역장에서 어린이 사망자는 속출하였다. 탄광산과 토목건축공사장이 가장 심했다. 1931년 2월 경북 영양군에서 태어난 세창은 1943년 7월 중천가곡광산에 동원되었다. 겨우 열한 살밖에 되지 않았던 소년은 광산에 들어간 지 한 달 만에 갱이 무너지면서 기계에 깔려 목숨을 잃었다. 절망한 부모는 사망신고도 하지 않았다. 부모보다 일찍 세상을 뜬 자식은 불효자 중에 가장 큰 불효자인데, 부모보다 먼저 사망신고를 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같이 일본 당국은 조선의 아이들을 강제노역장으로 동원했다. 그렇다면 일본 아이들도 동원했을까. 그렇지 않았다. 당국이 법 규정을 어겨가며 동원한 것은 조선의 아이들이었다. ]]> Thu, 28 Apr 2022 13:52:51 +0000 66 <![CDATA[이달의 독립운동가 여성운동과 민족해방에 앞장선 박원희·김영순·조복금]]> 글 독립기념관 전시부 alt 여성독립운동가들이 단결하여 근우회를 조직하다 1927년 5월 27일 ‘조선 여성의 공고한 단결과 지위 향상’을 목적으로 근우회 창립대회가 열렸다. 근우회는 창립 이후 국내외에 60여 개의 지회를 점차적으로 설치하고 강연과 야학 등을 통해 여성의식을 향상시켰다. 1929년 광주학생항일운동과 관련된 여학생들의 항일운동을 지원했고, 기관지 『근우槿友』를 발간하며 여성 계몽에 앞장섰다.  alt 근우회 발회식(1927.06.17.)(좌) / 근우회 강령 및 규약 근우회 조직에 앞장선 박원희와 김영순 근우회 조직에 앞장선 박원희와 김영순은 근우회 창립 이전부터 여성 계몽과 민족해방을 위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박원희는 1926년 중앙여자청년동맹 등을 조직하고, 강연 등을 하며 계몽운동에 앞장섰다. 김영순은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하고 애국지사들을 돕기 위해 조직된 대한민국애국부인회에 가입하여 서기로 활동하였다. 이때 독립자금을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보낸 일이 발각되어 1920년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각각의 여성단체에서 활동하던 박원희와 김영순은 1927년 5월 27일 YMCA강당에서 열린 창립총회에서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두 사람은 근우회 각 부서 사업과 임원, 발회식 일정과 장소, 지회 설치 등을 결의하였다. 두 사람은 부인교양을 위한 강연활동을 전개하며 여성 단결과 지위 향상에 앞장섰다. 정부는 이들의 공훈을 기리어 박원희(2000년)와 김영순(1990년)에게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alt 「조선여자교육의 현상과 근본정신」,『동아일보』(1927.07.08.)_국사편찬위원회 제공 (좌) /  대한민국애국부인회 사건으로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었던 동지들 사진(1번 김영순) 근우회 경상남도 하동지회에서 활동한 조복금 근우회 경남 하동지회는 1928년 7월 1일 결성되었다. 국내외 60여개의 지회 가운데 하동지회는 부인 야학을 개설한 몇 안 되는 지회 가운데 하나였다. 하동청년동맹 여자지부에서 활동하던 조복금은 하동지회 결성에 참여하여 서무재정부를 맡는 등 임원으로 활동하였다. 이후 전국대회 대의원과 하동지회 1주년 기념강연회 강사로 선출되었다.           조복금은 근우회 해산 이후 경상도 일대에서 노동운동 등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1932년 공산주의자협의회 전단을 출판·배포한 혐의로 붙잡혔고, 1933년에는 전북·전남·경남 등지의 사회주의 비밀 결사 조직과 관계되기도(일명 전북교원비사사건 全北敎員秘社事件) 하였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2018년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alt 「근우회 하동지회 설립」, 『중외일보』(1928.07.05.)_국사편찬위원회 제공(좌) /  「전북교원비사秘社 날로 확대」, 『동아일보』(1933.09.13.)_ 국사편찬위원회 제공(우) alt ]]> Thu, 28 Apr 2022 14:00:13 +0000 66 <![CDATA[독립운동 사적지 일제강점기 여성운동 대표 단체 활동 현장]]> 정리 편집실   우리나라 최초의 사회주의 여성단체,조선여성동우회 조선여성동우회는 1924년 5월 박원희·주세죽·허정숙·정종명·우봉운·정칠성 등 사회주의계열 여성들이 중심이 되어, 신사회 건설 및 여성해방운동에 나설 일꾼 양성과 훈련을 목적으로 창립한 여성사회운동 단체이다. 조선여성동우회에는 서울청년회 영수(領柚) 김사국의 처 박원희와 화요회계 박헌영의 처 주세죽, 임원근의 처 허정숙 등이 포진하여 외형상 당시 사회주의 운동분파를 망라하였는데, 조선공산당의 창립을 주도하는 과정에서 주세죽·허정숙 등 화요회계가 우세를 점하게 되고 서울청년회계 박원희파의 세력이 밀려나게 되었다.      조선여성동우회는 창립 이래 일제 경찰의 간섭으로 적극적인 활동을 펼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우리나라 최초의 사회주의 여성단체로서 여성사회운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1927년 5월 조선YWCA 계열과 함께 여성운동의 협동전선으로 근우회(槿友會)를 결성하여 그 운동을 주도해 나갔다. 조선여성동우회는 창립 직후 관철동, 와룡동, 안국동, 관훈동 등지를 전전하다가 1925년 4월 10일 낙원동 173번지 화요회 회관 자리를 물려받아 자리를 잡고 근우회 결성을 이끌어냈다. alt 조선여성동우회 회관 터 정면 1924년 5월부터 1927년 5월 근우회가 창립될 무렵까지 조선여성동우회의 회관이 있었던 곳이다. 현재 음식점 ‘종로집’이 들어선 상가건물이 자리하고 있다. 주소서울특별시 종로구 수표로 116  위치 고증『동아일보』 1925년 4월 13일자에 조선여성동우회가 관훈동 번지에서 낙원동 173번지 전 화요회 자리로 회관을 이전한 기사가 나오고, 1927년 5월 6일자에 다시 원동 121번지로 사무소를 이전한 기사가 나온다. 1912년 경성부 낙원동 지적원도와 토지조사부를 통해 위치를 확인하였다. 일제강점기 여성운동의 총본영,근우회 근우회는 민족협동전선 신간회의 창립에 발맞춰 조선YWCA와 조선여성동우회 등 민족주의계와 종교계, 사회주의계의 여성운동가를 망라해 여성의 단결과 지위향상을 내걸고 1927년 5월 출범한 여성운동의 총본영이다. 근우회는 처음부터 위원회 체제를 채택해 중앙집행위원회가 본부 구실을 하였다. 1927년 5월 27일 창립총회에서 선출된 중앙집행위원은 정칠성·정종명·이현경 등 사회주의계 9인과 김활란·유각경 등 민족주의계 8인, 그리고 최은희 등 중립계 4인이었다.     근우회는 창립 이후 전국에 지회를 조직하는 한편 부녀자를 대상으로 한 야학의 설립과 강연회 등을 통해 문맹퇴치와 여성계몽에 주력하였는데, 1928년 7월 임시전국대회를 계기로 사회주의계열이 주도권을 장악하면서부터는 이념 중심의 활동이 주종을 이루었다. 그러나 1930년 이후 활동이 눈에 띄게 침체되어 신간회 해소론의 대두와 더불어 1931년 해소의 길을 걸었다. 해소될 때까지 국내·외에 70여 개의 지회가 조직되어 활동을 펼쳤다. alt 근우회 회관 터 센트로폴리스 빌딩 1927년 신간회 창립에 발맞춰 여성운동의 총본영으로 출범한 근우회의 회관이 있었던 곳이다. 공평동 일대는 재개발로 인해 많은 번지가 사라지고 통합되었다. 근우회 터는 현재 ‘종로 센트로폴리스 빌딩’에 있는 ‘공평도시유적전시관’에서 그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 주소서울특별시 종로구 우정국로 26 위치 고증『동아일보』 1927년 9월 26일자에 인사동 중앙예배당 임시사무소(조선 YWCA회관)에서 공평동 43번지로 근우회 회관을 이전한 기사가 있고, 종로경찰서장 명의의 「근우회본부 통문우송의 건」(1930.5.10.)에도 주소지가 공평동 43번지로 기록되어 있다. 1912년 경성부 공평동 지적원도와 토지조사부를 통해 번지를 확인하였다. ]]> Thu, 28 Apr 2022 14:09:45 +0000 66 <![CDATA[ 아름다운 인연 여성·민족해방운동의 선구자 박원희와 김사국]]> 글 김형목(사단법인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이사)   박원희와 김사국은 부부이자 사상적 동지였다. 여성해방과 민족해방이 곧 조국광복을 실현하는 지름길이라 믿은 두 사람은 생을 다 바쳐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노동자·농민·청년·여성 등 기층민중을 위한 민족교육과 사회주의운동의 통일·단결에 노력을 기울였다. alt 박원희와 김사국 민족독립 방안을 모색하다 김사국(金思國)은 1892년 11월 9일 충남 연산(현 논산시) 출신으로 아버지 김경수(金慶秀)와 어머니 순흥 안씨 안국당(安國堂)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연안, 호는 해광(解光)이다. 아버지의 사망 이후 13세 때 어머니와 동생 김사민(金思民)과 함께 외가로 생활근거지를 옮겼고, 금강산 유점사(楡岾寺)에서 한학을 배우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1907년 공부를 위해 경성(현 서울)으로 간 그는 보성학교(현 보성고등학교)에 입학하여 학업을 마친 뒤 1908년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피혁회사에 다니며 고학을 이어갔고, 그해 4월 한국유학생들의 연합단체인 대한흥학회(大韓興學會)에 가입하고 기관지 『대한흥학보』 출판부원으로 활동하였다. 한일병합이 선포된 뒤 귀국한 사국은 한성중학교에 입학하여 학문을 이어갔다. 이후 1918년 6월 남만주 철령·개원과 연해주 등지를 돌며 문창범·윤해·이동휘 등과 교류하며 민족독립 방안을 모색하였다.     1919년 3·1운동 직전 경성으로 돌아온 사국은 한성정부 수립을 위한 ‘조선국민대회’를 주도하다 일경에게 체포되었다. 이른바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서대문형무소에서 1년 6개월 징역형을 살았다. 1920년 9월 6일 출옥 후 동생 김사민이 간사로 활동하던 조선노동대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고, 서울청년회 결성에 참여하면서 사회주의 운동을 전개하였다. 사국은 조선청년회연합회 기관지 『아성(我聲)』에 신사조 관련 글을 여러 편 기고하기도 하였다. 또한 일제 식민지 노예교육에 맞서 조직된 조선교육개선회 위원이 된 사국은 조선불교청년회를 비롯하여 각 지역 청년회와 조선노동대회 등의 초청으로 강연활동을 활발하게 펼쳐나갔다. 부부가 되어 사회주의운동을 실천하다1921년 7월 사국은 여성 사회주의운동가 박원희(朴元熙, 본명 박연희)와 결혼하였다. 두 사람은 “우리는 굳센 용사가 되어 잘못된 사회를 바로 잡을 세다.”라는 맹세를 하고 일본 도쿄로 유학을 떠났다. 사국은 『5·1신보』 발기에 참여하였고, 더불어 미나미센주(南千住) 교외에서 김사민·박상훈·임봉순·정남태 등과 사회혁명당을 조직하였다. 이들은 도쿄 중앙청년회관에서 반도고학생 친목회 주최로 「현대적 경제조직의 결함」을 강연하고 흑도회 결성에도 참여하였다. 또한 사국은 무산자동지회와 김약수 등 12인과 ‘동우회선언’을 발표하였다. 이후 귀국한 사국은 잡지 『학생계』 속간 기념강연회에서 「학생에게 소(訴)하노라」라는 주제로 강연을 펼쳤고, 인쇄직공친목회 주최 강연회에서 「노동운동의 의의」라는 주제로 노동운동이 지닌 의미를 강조하였다. 또한 1922년 4월 조선청년회연합회 제3회 정기총회에서 ‘사기공산당사건’에 관련된 상해파 고려공산당 국내부 간부이자 조선노동공제회와 조선청년회연합회 간부인 최팔용·오상근·장덕수 등에 대한 불신임안을 제출했으나 거부당하였다. 이에 서울청년회를 이끌고 조선청년회연합회를 탈퇴하였고, 그해 6월 서울청년회 임시총회에서 장덕수·김명식 등 상해파 고려공산당 당원 5인을 제명하였다.        1922년 8월 사국은 ‘니가타현 조선인학살문제’를 조사하기 위해 일본으로 파견되어 천도교회관에서 진상조사를 보고하였다. 조선노동대회 주최 강연회에서 「민족적 단결과 계급적 단결」을 주제로 강연하다가 일경에 의해 중지되기도 하였다. 이후 이영·김영만·임봉순 등 15명과 함께 서울청년회 내부 ‘공산주의그룹’을 창립하고 이어 자유노동조합 발기총회에 참가하였다. 사국은 ‘신생활사 필화사건’이 발생하자 만주로 활동근거지를 옮겼다. 고려공산동맹의 승인을 위해 블라디보스토크의 코민테른집행위원회 원동부에 파견되어 이젤손 등을 만났으나 특별한 성과를 얻지 못하였다. 1923년 3월 김정기·방한민 등과 함께 북간도(北間島) 룽징(龍井)에 사회주의 교육기관인 동양학원을 설립하였다. 그러나 8월 일제의 ‘동양학원탄압사건’으로 중국 관헌에 의해 50여 명의 학생이 체포되면서 동양학원은 폐교당하였다. 이에 굴하지 않은 사국은 영고탑(寧古塔)으로 가서 대동학원을 설립하는 등 사회주의 선전과 교육운동에 종사하였다.  사회주의운동의 선구자, 숨을 거두다 1924년 5월 폐결핵이 걸린 몸으로 귀국한 사국은 통일된 조선공산당 조직을 위한 ‘13인회’ 결성에 힘을 기울였다. 이어 북풍회·화요회·신흥청년동맹을 방문하여 ‘전조선사회주의운동자대회’의 개최를 제창하였다. 1924년 12월 사회주의자동맹 집행위원, 1925년 4월 전조선노농대회 준비위원 등으로 활동을 이어갔으나 폐결핵이 악화되어 활동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사국은 1926년 5월 8일 종로구 가회동 북악청년회관에서 35세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정우회·전진회·조선노동당·조선청년총동맹·조선형평사 등 40여 단체의 조선사회운동단체연합 장의위원회가 만들어져 사회운동연합장으로 영결식이 치러졌다. 사국의 시신은 경기도 고양군 한지면(현 서울시 성동구 금호동) 수철리공동묘지에 묻혔으나 이후 망우리공동묘지로 이장되었다. 정부는 그의 공을 기리어 2002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고, 사국의 유해는 망우리공동묘지를 떠나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 alt 「김사국씨 영면」, 『동아일보』(1926.5.10.) 여성운동의 선구자, 눈을 감다 여성운동의 선구자, 눈을 감다 원희는 사국의 사후에도 활동을 굳세게 이어나갔지만 병고로 인하여 1928년 1월 5일 홀연히 눈을 감았다. 사국이 세상을 떠난 지 채 2년이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유일한 혈육인 네 살배기 딸 사건을 홀로 남겨두고 30세 나이에 세상을 떠나며 “일들 잘 보오.”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는 생애 마지막 순간에도 자신이 못다 이룬 여성해방·민족해방의 꿈을 동지들이 이어가길 바란 것이다. 1928년 1월 10일에 치러진 그의 장례는 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34개 사회단체연합장으로 거행되어 여론의 주목을 받았다. 장례식에는 1,000여 명의 각계 인사가 참여하였고, 영구에는 ‘조선 여성운동 선구자’라는 명정이 덮어졌다. 정부는 200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고, 원희의 유해는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열사묘에 사국의 유해와 함께 합장되었다. alt 여성교육 필요성에 관한 박원희의 기고글,『동아일보』(1927.6.1.) 여성운동의 선구자, 눈을 감다 여성운동의 선구자, 눈을 감다 원희는 사국의 사후에도 활동을 굳세게 이어나갔지만 병고로 인하여 1928년 1월 5일 홀연히 눈을 감았다. 사국이 세상을 떠난 지 채 2년이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유일한 혈육인 네 살배기 딸 사건을 홀로 남겨두고 30세 나이에 세상을 떠나며 “일들 잘 보오.”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는 생애 마지막 순간에도 자신이 못다 이룬 여성해방·민족해방의 꿈을 동지들이 이어가길 바란 것이다. 1928년 1월 10일에 치러진 그의 장례는 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34개 사회단체연합장으로 거행되어 여론의 주목을 받았다. 장례식에는 1,000여 명의 각계 인사가 참여하였고, 영구에는 ‘조선 여성운동 선구자’라는 명정이 덮어졌다. 정부는 200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고, 원희의 유해는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열사묘에 사국의 유해와 함께 합장되었다. ]]> Thu, 28 Apr 2022 14:19:38 +0000 66 <![CDATA[끝나지 않은 독립운동 일본의 끝없는 역사 왜곡,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글 이계형(국민대학교 교양대학 교수) 얼마 전 중소벤처기업부 장관 후보자가 IT보안 전문업체 (주)테르텐 대표로 재직할 당시 일본의 역사를 왜곡한 교과서 출판업체와 디지털 교과서 서비스를 계약한 것이 확인되었다. 후보자 측은 ‘세계 여러 업체 가운데 하나일 뿐이며, 거래 규모도 적었기에 문젯거리가 될 게 없다’는 태도를 보였다. 이를 계기로 일본이 역사 교과서를 어떻게 왜곡해 왔으며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생각해보고자 한다. 진실을 감추기 위한 공작 일본 역사 교과서 왜곡 문제는 1953년에 처음 제기되었다. 당시 일본은 ‘이케다-로버트슨’ 회담을 계기로 재군비와 자위대를 창설하였는데, 이를 기회로 우익은 좌파 세력 견제 차원에서 제2차 세계대전 이전 상황을 비교적 진솔하게 기술한 교과서를 문제 삼았다. 이후 문부과학성이 교과서 조사관 제도를 신설하여 검정을 강화하면서 교과서에서 자신들의 역사적 가해 사실을 감췄다. 그 뒤 1982년 일본의 ‘교과서 문제’가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에서 국제적 문제로 대두하였다. 1980년 중의원·참의원 선거에서 과반의석을 차지한 자민당은 역사 교과서 문제를 들고나왔다. 자민당이 교과서에 애국심에 관한 기술이 빠졌고 지나치게 좌경화되었다며 비판하자, 보수언론이 이에 가세하여 애국심을 강조하는 기사를 쏟아냈고 관련 책들이 서점에 깔렸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문부과학성은 사회 교과서에 평화헌법, 자위대, 북방영토, 미일 안보협력 등을 포함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더 나아가 문부과학성은 그해 6월 검정 교과서 집필자들에게 ‘침략’ 용어 대신 ‘진출(進出)’이란 표현을 권고하였다.  더욱 노골화된 역사 왜곡 그동안 일본에 과거 역사에 대한 ‘사죄’를 요구해왔던 한국 정부는 이를 심각한 역사 왜곡으로 받아들였다. 특히 한국 정부가 문제 삼았던 부분은 기존 교과서와 달리 3·1운동을 ‘폭동’으로 기술하여 일본의 가혹한 탄압을 합법화하려 한 점이다. 이외에도 일본의 ‘토지 수탈’을 ‘토지 소유권을 잃었다’라고 하거나 ‘강제로 신사참배를 하게 되었다’를 ‘신사참배를 장려하였다’, ‘한국어 사용이 금지되었다’를 ‘한국어와 일본어가 동시에 사용되었다’로 수정하고, ‘강제징용, 강제징병’ 표현에서 ‘강제’ 용어 등을 삭제하고자 한 점을 지적하였다. 우리가 35년 동안 일제의 식민지 지배 속에서 수탈·차별·강요·회유·민족말살·착취 등을 당해야 했던 역사적 사실을 기억하고 있고, 이는 객관적인 인식과 판단하에 기술되어야 함에도 일본 정부가 이를 의도적으로 왜곡하려 한 것이다. 반일 감정을 불러온 일본의 처사 교과서를 둘러싼 한일 양국 정부의 갈등은 한국 내 반일 감정으로 표출되었고 연일 한국 언론은 일본 비판 기사로 도배되었다. 또한 반일 집회와 각 단체의 성명이 이어졌으며 일본 상품 불매 운동도 전개되었다. 중국뿐만 아니라 북한, 대만, 동남아 국가들도 이에 가세하여 일본을 강력하게 비판하였다. 이때 전국민적인 모금 운동을 벌여 ‘독립기념관’ 건립에 나섰다는 것은 익히 아는 바일 것이다. 중국도 베이징 중일전쟁 발발터에 '중국인민항일전쟁기념관'을 세워 일본의 역사 왜곡에 맞대응했다. 그런데 일본 정부는 오히려 내정간섭이라며 반발하고 되레 한국 측 교과서에 일본과 관련한 내용이 잘못 기술된 것이라며 물타기를 시도하였다. 이러한 파동은 일본 정부가 ‘이웃한 아시아 국가와 근현대사의 역사적 사실을 다루는 데 있어 국제이해와 협조를 구한다[근린제국조항]’라는 검정기준을 신설하면서 일단락되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1986년 일본 우익단체 ‘일본을 지키는 국민회의’가 『신편 일본사』를 집필하고 검정을 신청하면서 다시금 교과서 파동이 불거졌다. 이는 문부과학성 검정을 통과했으나 한국과 중국의 거센 반발에 부딪혔고 결국 총리 지시로 네 차례나 직권 수정한 뒤에서야 통과되었다.  ‘강제 연행’과 ‘일본군 위안부’ 표현 사라져 그렇다고 교과서 왜곡 문제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강화되었다. 1995년 일본 내 보수우익은 ‘자학 사관’을 비판하면서 전쟁을 미화하려는 움직임까지 일었다. 이런 상황에서 1997년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 결성되었다. 이들은 문부과학성에 일본군 ‘위안부’ 관련 역사기술을 삭제할 것을 주장하는가 하면(1999년), 자신들이 쓴 교과서를 검정 신청했다(2000년 4월). 여느 교과서보다도 과거 일본의 아시아 침략과 가해 사실을 미화 왜곡하고 축소 또는 삭제한 내용이 많아 큰 파문이 일었다. 이로써 한국 측의 반일 감정은 고조되었고, 한일 양국의 관계는 급속히 냉각되었다. 문부과학성은 200여 개 항의 수정지시를 내렸으나, 2001년 4월 일부만 수정한 채 검정을 통과하였다. 비록 문제된 교과서의 채택률은 0.1%에 불과하였지만, 2002년도부터 정식으로 중학교 역사 교과서로 사용됐다. 이를 계기로 2002년에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가 설치되어 6년간 소기의 성과는 거뒀지만, 2011년 3월 이후부터는 활동이 중단된 상태이다.      2006년 9월 아베 내각이 시작되면서 일본 정부는 ‘교육기본법’을 개정하여 ‘애국심 교육 강화’ 조항을 삽입하였고, 이에 따라 다시금 교과서 왜곡 문제가 불거졌다. 문부과학성은 이를 근거로 2008년 7월 중학교 학습지도요령 해설서 개정판에 독도 영유권 명기를 공식 발표하였고, 이는 2009년 12월 고교 학습지도요령 해설서에도 담겼다. 연장선에서 2010년 3월 독도 영유권 주장을 강화한 초등학교 교과서와  2011년 중학교 사회과 교과서가 검정을 통과하였다. 2016년에는 ‘다케시마(독도)는 일본의 영토’, ‘한국이 불법 점거하고 있다’라는 고교 사회과 교과서가 검정을 통과하였다. 최근에는 2023년부터 일본 고등학교 2학년 이상 학생이 사용할 교과서에서 일제강점기 조선인 ‘강제 연행’과 ‘일본군 위안부’라는 표현이 아예 삭제되었다. 이에 더하여 일본의 보수우익단체인 ‘역사인식문제연구회’는 ‘강제동원’·‘일본군 위안부’·‘사도광산’ 등과 관련하여 수정주의 역사관을 확산하여 자신들의 역사를 감추는 데 앞장서고 있다. 이 단체는 일본의 역사교육과 언론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는 인사들로 꾸려진 조직이다.  역사 왜곡 대응에 필요한 우리의 자세 이에 대해 한국의 대응은 1970년대에 학자들의 개별적인 노력이 있었는데, 1980년대 이후부터는 역사 관련 정부 기관, 학술단체, 연구자들이 일본 교과서 분석과 아울러 대응 방안을 모색하기도 하였고 공동역사교과서를 펴내기도 하였다. 역사분쟁의 모델로서 ‘독일-프랑스’, ‘독일-폴란드’의 사례를 참고해 볼 필요가 있다는 대안도 제시되었다. 그런데 일본 역사 교과서 왜곡 문제는 다른 국가와 차원을 달리한다. 그동안 행태를 보면 극우단체가 앞장서고 자민당이 힘을 보태 분위기를 띄운 뒤에 정부가 이를 받아들여 교과서에 반영하는 형태가 반복되고 있다. 즉 일본 정부의 우경화와 역사 교과서 왜곡 문제가 맞물려 있다. 역사교육은 자라나는 세대에게 올바른 역사관을 가르쳐 일본제국주의의 군국주의를 경계토록 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것이 인류 평화를 실현하는 출발점이자 보편적인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또한 지난날의 반성을 통한 미래지향적인 한일관계를 발전시키는 지름길이기도 하다. 새롭게 출범하는 정부가 한일관계를 복원한다고 나서고 있는데, 이에 앞서 올바른 역사의 합일을 이루는 것을 우선해야 할 것이다. 참다운 동반자 관계 회복은 신뢰를 바탕으로 올바른 역사교육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 Thu, 28 Apr 2022 14:32:02 +0000 66 <![CDATA[독립의 발자취 일제가 남긴 상흔을 기록하다]]> 글 편집실   일제 수탈의 흔적과 식민지배가 남긴 상흔의 역사를 사진으로 기록하는 이가 있다. 흩어져있던 궤적을 집대성해 우리 앞에 담담히 펼쳐놓은 그의 작품을 마주하고 있노라면 끝난 줄만 알았던 뼈아픈 역사가 현재 진행형으로 덜컥 다가온다. alt 전재홍 사진작가 Q. 일제가 남긴 상흔들에 언제, 어떻게 관심을 갖게 되었나요. 1990년대 당시 충남 논산 강경읍에 있는 일식 목조주택을 촬영하였습니다. 시간이 지나 그곳을 다시 방문하였는데, 그 건물이 흔적 없이 사라졌더라고요. 그제야 헐린 건물이 일제강점기 경제수탈의 근원지였던 동양척식주식회사 강경지점이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1908년 일제는 조선의 토지와 자원을 빼앗기 위해 경성에 동양척식주식회사를 창립하였고, 1910년 9월 15일 강경지점을 설립하였습니다. 강경지점은 전북과 충남 지역의 국유지와 개간지를 확보하여 일본인에게 저렴한 가격으로 매각함으로써 조선의 소작인을 더욱 열악한 처지로 내몰았지요. 이러한 일제 수탈의 흔적이 남은 건물이나 장소들이 대부분 철거되었거나 혹은 본래 상태와 달라졌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는데, 상당수가 여전히 잔존한다는 사실을 알고 난 뒤 외면할 수 없어서 사진으로 기록하기 시작하였습니다. alt 일제 수탈지 전북 김제평야,〈제국의 평야〉 (1999년 촬영) Q. 특히 일제 ‘건축물’에 주목하였는데 그 이유가 궁금합니다. 점차 사라지는 상흔에 관심을 갖게 된 이후, 먼저 일제강점기 쌀과 농지의 수탈거점이었던 호남평야를 찾아갔습니다. 1930년대 일본인 구마모토 리헤이는 호남평야의 수많은 농지를 매입하여 자신의 왕국을 조성하였습니다. 구마모토가 소유했던 군산농장을 시작으로, 전북 익산·전주·김제·정읍·완주에 산재한 일본인 농장과 주택 등을 기록하였습니다. 이후 일제강점기 교통시설인 철도급수탑에 주목하였습니다. 급수탑은 단순한 콘크리트 덩어리가 아니라 일제가 우리를 장기간 교묘하게 통치하는데 사용한 구조물입니다. 일제는 철도라는 ‘침략 하이웨이’를 이용하여 동아시아를 광기의 무대로 삼은 것이지요. 디젤기관차 등장 후 1967년 8월 31일 운행을 중단한 급수탑은 현재 전국에 스무 군데 남아있습니다. 이렇듯 아직 우리 삶 속에 남아있는 일제 잔재를 모른 채 묻어둘 수 없어서 〈제국의 평야〉, 〈제국의 바벨탑〉이라는 주제로 연작해 나갔습니다. Q. 이후 피사체를 ‘일제 강제동원 생존 피해자’로 돌린 계기가 있었나요. 대한민국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옛 신사(神社) 건물을 담기 위해 2003년 전남 고흥 소록도를 방문했습니다. 그곳에서 일제강점기 당시 한센병을 앓다가 일제 경찰에게 끌려와 강제노역을 당한 장기진씨를 만났습니다. 그는 일제강점기 군수물자였던 가마니를 짜다가 동상에 걸려 두 손이 잘리고, 건물과 도로 건설에 필요한 벽돌을 만들다 파상풍에 걸려 두 다리를 잃은 사연을 들려주었어요. 그뿐만 아니라 신사참배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단종(斷種)을 당한 이야기까지 듣게 되었지요. 그의 육신은 일제 식민통치가 남긴 고통을 온몸으로 대변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피해사실을 침묵할 수 없어서 인물을 통해 과거의 상흔을 추적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후 〈제국의 휴먼〉이라는 주제로 일제에 의해 ‘강제노역·이주를 당한 사람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등을 앵글에 담았습니다. alt 일제 강제입원·노역 및 단종(斷種) 피해자 故 장기진,〈제국의 휴먼〉(2003년 촬영) Q. 촬영 장소와 인물을 섭외하는 과정이 순탄치 않았을 텐데요. 20년 전부터 한국뿐만 아니라 일본·러시아 연해주·중국 길림성 등지를 돌며 일제에 의한 피해 현장을 낱낱이 기록하였습니다. 특히 낯선 타국에서 촬영지를 답사하고 인물을 섭외하는 과정은 많은 기다림과 인내가 필요하지요. 기획부터 섭외, 이동, 촬영, 후작업 등을 홀로 하기 때문에 철저한 조사 후에도 경로를 찾을 수 없을 때는 국내외 지인의 도움을 받아 촬영을 마쳤습니다. ‘731부대 생존 피해자’ 촬영은 중국 연변지역에 사는 지인이 박물관 관계자를 연결해줘서 성사될 수 있었고, ‘남경대학살 생존 피해자’를 섭외할 때는 남경시청에 공문을 보낸 후 허가를 받고 진행하였습니다. Q. 상처를 입은 피해자를 마주하는 일은 늘 조심스러울 것 같은데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이 모여계신 경기도 광주 ‘나눔의 집’을 찾은 적이 있는데, 대부분 카메라 앞에 서는 것을 꺼려하셨고 결국 문필기, 이옥선 할머니 두 분만 촬영에 응해주셨습니다. 그때 ‘오랜 세월도 가슴 속 상처를 아물게 하지는 못한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고 이후 피해자들의 기억을 기록하는 일에 대한 필요성과 의무감을 갖고 작업에 더욱 몰입할 수 있었습니다.  alt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故 문필기, 〈제국의 휴먼〉(2006년 촬영) Q. 지난 2월 〈제국의 휴먼〉으로 제3회 FNK 작가상을 수상하였는데 소감이 어떠한가요. 다큐멘터리 사진가로 산다는 것은 참으로 지난한 일입니다. 상업적인 활동보다는 ‘순수 사진’에 집중해왔기에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고, 성과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때도 있었지요. 투자한 자본과 시간, 정성에 비해 물질적 소득을 얻지 못하는 상황에서 신념과 소명의식을 잃지 않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래서 이번 수상이 더욱 반가웠어요. 꿋꿋하게 버텨온 시간을 격려해주는 것 같았습니다.  Q. 최근 개최된 전시에 대해 소개해주세요. 전남 화순에 있는 소아르갤러리의 초대를 받아 〈제국의 휴먼〉이라는 이름으로 개최된 이번 전시는 일본제국이 일으킨 침략과 전쟁에서 생존한 사람들을 직접 찾아가 촬영한 사진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특히 이번 전시에서는 가로 600cm·세로 240cm의 대작으로 제작한 ‘히로시마 원폭에 피폭된 사망자 위패’ 사진을 만나볼 수 있습니다. 전시에 관한 자세한 사항은 소아르갤러리(061.371.8585)에 문의하시면 됩니다. Q. 관람객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나요. 오랜 시간 다큐멘터리 작업을 지속하며 느낀 점은 과거와 같은 역사는 다시 재발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라는 말이 있듯이 일제강점기가 남긴 뼈아픈 사실을 기억하고 다시는 이 같은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일상이 수많은 이들의 희생을 통해 얻어졌다는 사실을 결코 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alt 일제 강제이주 및 한국전쟁 참전 피해자 전광운,〈제국의 휴먼〉 (2006년 촬영) Q. 향후 계획이 궁금합니다.  오지금까지 기록해온 〈제국의 휴먼〉, 〈제국의 평야〉, 〈제국의 바벨탑〉 연작은 일종의 일본식민지 피해에 대한 보고서였습니다. 앞으로도 이 작업을 이어 나가며, 일제강점기·한국전쟁·분단의 역사 등을 거치며 대립된 이데올로기의 흔적도 다뤄볼 예정입니다. 광복 이후부터 한국전쟁 초반까지 이 땅에서 벌어진 이념의 대학살, 즉 제노사이드에 대한 작업을 현재 진행하고 있습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 Thu, 28 Apr 2022 14:42:06 +0000 66 <![CDATA[ 세계 산책 미얀마의 영원한 독립영웅 아웅산]]> 글 김성원(부산외국어대학교 미얀마어과 교수) 아웅산은 영국 식민지배와 일제 침탈을 물리치고 미얀마의 독립을 이끌었지만 1947년 7월 19일 정치적 반대파의 저격으로 32세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하였다. 눈감는 순간까지 미얀마의 독립을 위해 고전한 그의 활약상과 투쟁정신은 오늘날까지 많은 이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alt 애국운동을 이끌던 당시 아웅산(1937) 불교 중심으로 전개한 민족주의운동 버마(1989년 미얀마로 개칭)는 19세기 중반부터 영국의 식민지배를 받았다. 영국은 분할통치를 통해 버마를 인도의 1개 주로 편입시켰고, 인도 출신과 소수민족 출신을 고용하여 버마인들을 억압하게 하였다. 이에 반발한 버마인들은 영국의 식민지배에 저항하는 독립운동을 펼치기 시작하였다. 불교와 뗄 수 없는 역사와 문화를 가진 버마인들은 독립 및 민족주의운동 또한 불교를 중심으로 전개하였다. 1906년 결성된 불교청년회(Young Men’s Buddhist Association: YMBA)는 불교학교를 운영하여 불교적 덕목에 따른 도덕성을 강조하고 민족성을 일깨우는 작업을 시행하였다. 이들은 버마의 자치권을 요구하는 비폭력투쟁에 나섰지만 이에 대한 영국의 반응은 냉랭하였다. 이후 1916년 영국인이 신발을 신은 채로 불교사원에 들어간 이른바 ‘신발착화사건’이 일어났다. 버마인들은 영국의 무엄한 태도에 강한 반발을 하였고, 이 사건은 버마의 민족의식과 애국운동을 자극하는 기폭제가 되었다. 대학가로 번진 애국운동 1920년대 들어 애국운동은 대학가로 번졌고, 학생들은 학문의 자유와 대학정관 개정 등을 요구하며 시위를 전개하였다. 학생지도자들은 ‘민족학교’를 세워 학생들을 적극적으로 유치하여 민족교육에 힘썼다. 1930년대 들어 민족학교를 거쳐 양곤대학교에 입학한 학생들은 버마의 전통의상을 입고 등교하고, 독립염원이 담긴 노래를 부르는 등 대대적인 애국운동을 전개하였다. 당시 양곤대학교 학생이었던 아웅산(AungSan)은 전면에 나서 학생들을 이끌었다. 아웅산은 독립을 이루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주인 의식’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겨 이름 앞에 ‘주인’을 뜻하는 ‘따킨(Thakin)’이라는 단어를 붙여 불렀다. alt 양곤대학교 총학생회 위원회, 앞줄 왼쪽에서 세 번째 아웅산(1936)(좌) / 런던 방문 당시 애틀리 수상과 아웅산(1947.1.)(우) 검은 속내를 감춘 일본과의 연합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아웅산 일행은 이때를 독립을 쟁취할 절호의 기회로 삼았다. 이들은 당시 동남아에 세력을 넓히고 있던 일본에 도움을 요청하였고, 일본은 검은 속내를 감추고 버마의 독립을 돕기로 약속하였다. 아웅산은 일본의 지원으로 ‘30인 지사’와 비밀리에 중국 하이난 섬으로 가서 버마독립군(Burmese Liberation Army)을 양성하였다. 이때 아웅산은 이름 앞에 호칭을 붙이는 버마의 관습에 따라 ‘장군’이란 뜻의 ‘보족(Bogyoke)’을 이름 앞에 붙였고, 이러한 이유로 현재까지 ‘아웅산 장군’이라 불리고 있다. 훈련을 마친 아웅산 일행은 1941년 일본군과 함께 버마로 들어왔다. 이들은 버마인들의 지지를 받아 수많은 신병을 확보하였고, 일본과 연합하여 영국에 대항하는 전쟁에 돌입하였다. 결국 싱가포르 전선이 붕괴되자 영국군이 인도로 후퇴하였다. 그러나 전세가 우세해진 일본은 곧바로 본색을 드러내며 버마 지배를 노골화하였다. 제공권을 장악한 일본은 버마 곳곳을 무차별적으로 폭격하였다. 현재 양곤 타욱짠국립묘지에 안장된 27,000여구 유해가 당시 참상을 대변하고 있다. 일본은 버마 남부를 순식간에 장악하였고, 아웅산의 독립군도 즉시 해체시켰다. 이후 군사정부를 조직한 일본은 버마의 기성 정치인 바모 박사를 수장으로 내세워 버마를 관리하기 시작하였다. 독립을 이끈 반파시스트인민자유동맹 일본의 처사에 분개한 아웅산은 1942년 5월 버마 북부에 있는 왕도 만달레이마저 일본의 공격으로 초토화되자 비밀리에 영국과 접촉하였다. 영국은 버마에 대한 지지를 약속하였고, 아웅산은 그 즉시 10,000여 명의 군인을 모아 버마애국군(Patriotic Burmese Forces)을 결성하여 일본에 총구를 겨누었다. 이내 양곤을 탈환하는 데 성공한 아웅산은 버마인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독립 실현을 눈앞에 두게 되었다. 이에 고무된 아웅산은 1944년 8월 항일정치단체 반파시스트인민자유동맹(Anti-Fascist People's Freedom League: 이하 AFPFL라 칭함)을 조직하였다. 그러나 1945년 10월 영국은 전쟁파괴로 황폐해진 버마를 다시 착취하기 시작하였다. 영국의 태도에 반발한 AFPFL은 비협조운동을 선언하고 완전한 자치권을 가진 임시정부를 요구하였다. 이들은 영국의 노동당 정부와 교섭을 이어갔고, 1947년 1월 27일 런던에서 만난 애틀리 수상과 아웅산은 버마 독립에 관한 합의에 이르렀다. 목숨을 바쳐 이뤄낸 독립 한편 아웅산과 함께 런던으로 간 우소는 합의서 서명을 거부하였다. 식민정부에서 고위직을 맡았던 그는 영국 우익 정치가들과 연대하여 AFPFL에 대항하는 새로운 정당을 결성하였다. 1947년 4월에 열린 버마 제헌의회 선거에서 아웅산이 이끈 AFPFL이 255석 중 248석을 차지하며 압승을 거뒀다. 이후 6월 제헌의회가 출범하였고, 영국 총독의 협력하에 아웅산이 이끌던 집행위원회는 독립을 향한 실무 작업을 원활히 진행하였다. 하지만 선거 결과에 불만을 품은 우소는 저격병을 동원하여 7월 19일 회의장에서 아웅산을 살해하였다. 당시 아웅산의 나이 32세였다. 그가 세상을 떠난 이후 AFPFL은 독립 준비를 서둘렀다. 9월 버마 제헌의회는 만장일치로 새 헌법을 채택하였고, 아웅산의 동지였던 우누가 임시 대통령과 수상에 선출되었다. 11월 영국의회는 ‘버마독립법’을 통과시켰고, 1948년 1월 4일 마침내 버마족과 소수민족이 함께하는 독립공화국 버마연방(Union of Burma)이 탄생하였다. 오늘날 미얀마는 모든 종족을 아울러 하나의 국가로 만들기로 결의한 1948년 1월 4일을 독립기념일로 기념하고 있다. 그 발자취를 따라가 보면 중심에는 아웅산이 있다. 영국의 식민지배와 일제 침탈을 물리친 활약상을 보여준 그는 미얀마의 독립영웅이자 국부(國父)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 Thu, 28 Apr 2022 14:47:04 +0000 66 <![CDATA[기념관은 지금 독립기념관의 과거와 미래를 사진으로 잇는 사람]]> 정리 편집실    사진 이소연 사진으로 남은 독립운동사의 기록을 또렷이 빛나게 만드는 사람이 있다. 자료부에서 사진 업무를 맡고 있는 임공재씨다. 독립기념관 아카이빙의 꽃이라 불리는 사진자료 대부분은그의 손에서 탄생하였다. 오늘만큼은 사진기록자가 아닌 주인공이 되어 카메라 앞에 선 그를 만나본다. alt임공재사진실 업무에 대해 간략히 소개 바랍니다.독립운동 관련 사진자료(필름자료·디지털사진자료 등)를 영구히 보존하도록 체계적으로 등록·관리하고 있으며, 아카이빙에 필요한 유물, 사적지, 중요행사 등을 직접 촬영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확보한 사진자료들을 독립기념관의 전시·연구·교육·홍보 등에 활용하도록 지원하고 있습니다. 또한 지금은 잠시 발간이 보류되었지만, 독립기념관 해당분야 전문 학예연구관, 연구위원들의 전폭적 지원으로 독립기념관만의 특성화된 소장자료를 전자사진집으로 발간하여, 소중한 자료의 기증과 발굴 동기를 부여하는 데 힘쓰고 있습니다.독립기념관에 근무하게 된 동기가 있나요.대학에서 사진학(다큐멘터리)을 전공하여 기록사진을 중심으로 촬영하다 보니 자연스레 우리나라가 겪어온 고단했던 근현대사의 기록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관심사가 업무까지 이어지게 되었고 지금의 순간이 내일의 중요한 역사로서 가치를 가질 수 있도록 매진하다 보니 나름의 노력으로 채워진 시간이 벌써 20년이 넘게 흘렀네요. alt홀로 근무하고 계신데 힘든 점은 없나요.초반에는 방해받지 않고 오롯이 작업에만 몰입할 수 있어서 좋았어요. 또 나름의 방식으로 아카이브를 하나씩 쌓아가는 작업도 굉장히 흥미로웠습니다. 물론 그때나 지금이나 마음가짐은 마찬가지예요. 다만 혼자 걸어온 20년 세월만큼 들여다봐야 할 자료와 작업들이 같이 쌓이더군요. 하루를 바쁘게 움직여도 계속 정리해야 할 자료들이 늘어날 때에는 일이 주는 기쁨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버거울 때가 종종 있습니다.유물 촬영은 꽤 까다로운 작업일 것 같아요.유물 촬영은 일반적인 제품 촬영과는 달리 조심하고 신경 써야 할 점들이 많습니다. 유물은 오랜 세월을 거쳐 온 만큼 미세한 충격에도 치명적일 수 있는 유약한 강도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색감, 질감, 입체감 등 유물의 상태를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하여 빛의 질과 양에 대하여 신경을 써야 하지요. 여러모로 까다로운 작업인 만큼 유물촬영 의뢰자와 충분한 논의가 필요하고, 촬영 중에도 계속 의견을 나눠야합니다. alt기념·행사 촬영도 만만치 않을 것 같은데요.행사 촬영은 행사 성격과 장소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야 그 행사의 취지와 목적에 따라서 선택된 그 장소가 가진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전체 시나리오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해요. 시나리오 안에는 그 행사의 상징 장면이 될 내용이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여러 해 반복된 행사는 대략의 시나리오를 알고 있기 때문에 사진가가 개입할 수 있는 틈이 보일 때가 있는데 저는 그런 행동을 철저히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행사 촬영에서의 사진가는 철저히 그림자가 되어야지만 그날의 기억을 온전히 기록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특히 기억에 남는 촬영 현장이 있나요.이렇게 말하면 진부하게 들릴 수 있겠지만 저는 카메라를 들고 촬영하는 모든 순간을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기록자는 현장과 상황을 구분하여 무게를 달리 주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며 사진을 대해왔어요. 얼핏 보기에는 작은 이벤트라 생각할 수 있지만, 제게는 행사 규모와는 구별 없이 모두 의미 있는 현장입니다. 제가 찍는 순간들이 모여서 기록물이 되고, 독립기념관의 사료가 되고, 나아가 국가의 역사가 되기 때문이지요. alt향후 계획이 궁금합니다.독립기념관은 기본적으로 현충시설이며, 박물관의 역할도 함께 수행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발 빠르게 발전하는 시스템에 맞게 유물을 다루는 업무를 고도화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필름자료의 훼손을 막기 위해 필름자료 및 디지털 사진자료의 데이터를 보다 체계적으로 구축하여야 합니다. 저 역시 유물을 영구히 존속시키는 방법에 대해 꾸준히 고민하고 실천할 예정입니다. alt마지막으로 전자사진집도 소개해주세요.2008년부터 2015년까지 발간한 7권의 소장자료 사진집을 2017년부터 2020년까지 4권을 전자사진집으로 개정·발간하였습니다. 나머지 3권은 현재 사업을 이어가지 못하여 아쉬움이 크지만 발간할 수 있도록 노력할 예정입니다. 또한 신규 소장자료 전자사진집 발간 및 모바일 기반의 전자사진집 발간도 지속적인 노력을 통하여 발간을 이어 나아갈 수 있도록 할 예정입니다. 이를 통해 국민들이 독립기념관 소장자료를 손쉽게 활용할 수 있도록 자료 접근성을 확대함으로써 독립운동 가치의 제고 및 사회적 가치 창출에 노력할 예정입니다. 또한 독립기념관은 국내에서 독립운동사 사적지 사진을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는 기관입니다. 다양한 사적지 사진과 전자사진집은 독립기념관 홈페이지에서 확인하실 수 있으니 많은 이용 바랍니다.]]> Thu, 28 Apr 2022 14:57:54 +0000 66 <![CDATA[독자참여 이번 호 「독립기념관」을 읽고 빈칸을 채워주세요. 꼼꼼히 읽다 보면 정답에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alt alt아이콘을 클릭하면 퀴즈 정답을 보낼 수 있습니다.]]> Thu, 28 Apr 2022 15:01:29 +0000 66 <![CDATA[들어가며 2,300만 민족의 마음과 힘을 하나로]]> 우리는 일찍이 민족과 국제평화를 위하여 1919년 3월 1일 우리의 독립을 선언하였다.         우리는 역사적 복벽주의(復辟主義)를 반복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우리들의 국권과 자유를 회복하려 함에 있다.            우리는 결코 일본 전민족에 대한 적대가 아니요,          다만 일본 제국주의의 야만적 통치로부터 탈퇴하고자 함에 있다.         우리들의 독립의 요구는 실로 정의의 결정으로 평화의 표상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국자본주의를 횡포한 일본 정부는 학살·고문·징역·교수 등 악형으로써          우리를 대하면서 경비·군비·이민·자본을 더욱 늘려왔다.         그들의 억압정책과 착취방법은 완전하게, 그리고 철저하게 우리들의 생존권 전부를 박탈하였다.         그리하여 우리들의 피와 눈물과 통곡소리는 삼천리를 가득 메웠고,          멀리는 동경·신사·남북만주 내지는 전 세계에 울려 퍼졌다. 슬프도다.         2,300만 형제자매들이여, 오늘에 있어 융희황제(순종)에 대해 궁검을 사이에 두고          통곡한다는 것이 과연 어떠한 감동에서 나온 것인가.          사선에 함몰된 비애로써 우리 모두 울어보자.         그러나 눈물로써 사선을 탈출할 수 없으므로, 정의의 결합을 한층 강고히 하여          평화적 요구를 더욱더 강력하게 하자.          2,300만 민족의 마음과 힘이 하나가 되면 광폭한 총검도 무서울 것이 못 된다.         권오설이 작성한 6·10만세운동 「격고문」(1926) ]]> Mon, 30 May 2022 13:14:52 +0000 67 <![CDATA[톺아보기 민족협동전선의 첫발 6·10만세운동]]> 글 김성민(전 국민대학교 전임연구교수) 1926년 순종의 승하를 계기로 일어난 6·10만세운동은 1919년 3·1운동, 1929년 광주학생운동과 더불어 일제강점기 3대 민족운동으로 평가된다. 3·1운동을 겪은 일제의 철저한 탄압으로 만세시위가 크게 일어나지는 못하였지만, 국내외 민족운동에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민족협동전선을 형성하여 국외 독립운동 활성화에 영향을 미쳤고, 신간회 설립의 밑거름이 되었으며, 국내 학생독립운동에도 변화의 계기를 마련하는 등 독립운동사에 값진 열매를 맺었다. alt 순종의 인산(장례) 광경(1926.6.10.) alt 권오설과 이선호 순종의 승하를 계기로 만세시위를 추진하다       6·10만세운동은 1926년 6월 10일 순종(융희황제)의 인산(장례)을 계기로 서울을 중심으로 전개된 만세시위운동이었다. 순종은 1926년 4월 25일 승하했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였던 순종의 승하는 우리 민족에게 망국의 통한을 다시 한번 상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전국적으로 망곡(望哭, 장례에 몸소 가지 못하고 그쪽을 향하여 슬피 욺)과 봉도(奉悼, 존경받는 인물의 업적과 공덕을 기리며 애도의 뜻을 나타냄) 등 추모의 물결이 일었다. 이러한 민족적 울분을 독립운동의 기회로 삼아 먼저 시위운동을 추진한 것은 사회주의계열의 인사들이었다. 중국 상하이에 근거를 둔 조선공산당 임시상해부의 김단야 등은 국내외의 독립운동 세력과 연계하여 3·1운동과 같은 ‘제2의 만세시위운동’을 추진했다. 국내에서는 조선공산당 임시상해부와 연결된 고려공산청년회의 주도로 천도교, 조선노농총동맹과 학생 사상단체인 조선학생과학연구회 등이 시위운동에 참여했다. 이들은 만세시위운동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조직적 연대를 이루며 역할을 분담하였다. 만세시위 계획의 전체적인 구상은 조선공산당 임시상해부에서 주도하였다. 국내에서는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인 권오설을 중심으로 ‘6·10투쟁특별위원회’라는 지도부가 만들어졌으며, 천도교는 유력한 조직기반을 바탕으로 격문 인쇄 및 지방 연락을 맡았다. 조선학생과학연구회 소속 학생들은 만세운동의 선봉을 맡기로 하였다. 당초 지도부인 ‘6·10투쟁특별위원회’는 서울뿐 아니라 전국 각처에서 만세운동을 벌인다는 계획을 세웠다. 서울에서는 학생들이 앞장서 일으키고, 지방에서는 망곡과 봉도에 참가하는 대중들을 결집해 만세운동을 벌인다는 구상이었다. 이에 따라 5월 말까지 만세운동에 사용할 ‘격고문’ 외 4종의 격문 5만여 매를 인쇄하는 등 준비를 갖추어 갔다. 그러나 불행히도 만세시위 계획은 거사 직전인 6월 6일 발각되고 말았다. 당시 격문의 인쇄를 천도교 측에서 맡았는데, 우연히 일경의 감시망에 걸려 천도교 총부에 감추어 두었던 격문이 발각된 것이다. 결국 천도교와 개벽사 등의 관련 인사 80여 명이 체포된 것을 비롯해 각 사회단체 인사 2백여 명이 일시에 체포되어 거사계획이 좌절될 위기에 처하였다.       이렇듯 긴박한 상황에서도 학생들에 의해 만세운동 계획은 비밀리에 진행되었다. 원래 만세운동 당일 사용할 격문을 지휘부와 천도교 측에서 제공키로 했었다. 그러나 사전 발각으로 차질을 빚자 조선학생과학연구회의 학생들은 사직동에 자리한 이석훈의 하숙집과 연희전문학교 뒷동산에서 급히 격문 1만여 매를 인쇄하는 등 독자적으로 거사를 준비해갔다. 그리고 만세운동 하루 전에는 학생들이 일제의 검거망을 피해가며 각 학교와 지방에 격문과 전단을 배포할 수 있었다.             한편 이와는 별도로 학생들만의 독자적인 만세시위 계획도 추진되었다. 중앙고보의 박용규, 이동환과 중동학교의 김재문, 황정환, 곽대형 등은 순종의 인산을 계기로 3·1운동 때와 같이 전민족적 만세시위운동을 계획하였다. 이들이 거사를 준비하던 곳이 통동이어서 이들을 흔히 ‘통동계’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들은 일제의 감시를 피해 ‘조선민족대표’ 명의의 격문을 작성하여 5천여 매를 인쇄하였다. 6월 8~9일 시내 각 학교와 전국 주요 학교에 격문을 발송하면서 인산 당일의 거사를 추진해갔다. 이 과정에서 조선학생과학연구회의 이선호와 중앙고보의 동급생인 이동환, 박용규 등이 양측의 연락을 담당하면서 양측의 연대 투쟁이 가능하게 되었다. alt 순종의 인산(장례)을 보도한 기사, 『동아일보』 (1926.6.10.)(위) / 권오설과 6·10만세운동 관련 기사,『동아일보』(1926.6.19.)(아래) 일제의 삼엄한 경계를 뚫고 폭발한 만세시위 6월 10일 순종의 장례 행렬은 오전 8시 창덕궁에서 발인하여 시내를 거쳐 금곡 유릉으로 향할 예정이었다. 연도에는 순종의 마지막 길을 애도하기 위해 30여만 명에 달하는 인파가 운집했다. 7년 전 3·1운동에 놀랐던 일제는 연도에 기마경찰과 헌병, 사복경찰로 철통같은 경계와 감시를 펼쳤다. 오전 8시 반 종로 3가에서 국장 행렬이 통과한 뒤 중앙고보 학생 이선호의 선창으로 중앙고보 학생 30~40명이 “만세”를 외쳤다. 이를 신호탄으로 조선학생과학연구회와 ‘통동계’의 학생들은 시내 곳곳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학생들은 군중에게 격문을 배포하고 감춰두었던 태극기를 꺼내 흔들며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을지로 부근에서 일어난 시위는 사범학교의 담을 무너트릴 정도로 격렬했다. 동대문 앞 시위현장에서는 일제 기마병의 말발굽에 치여 70~80여 명의 군중이 부상을 당하기도 하였다. 창신동 입구에서는 혈서로 쓴 ‘독립만세’가 적힌 태극기를 흔들며 홍종현이 단독으로 만세시위를 벌였다. 홍종현은 만세시위를 결행하기 위해 경북 의성에서 상경하여 태극기를 준비한 열혈의사였다.        그러나 일반 군중은 일제 기마병과 군경의 삼엄한 경계로 인해 별다른 호응을 보이지 못하였다. 오후 2시경까지 9개 곳에서 계속된 이날의 만세운동은 대부분 학생들에 의해 전개되었다. 1,000여 명의 학생이 만세시위에 참가하였으며 현장에서 일경에 체포된 학생만 2백10여 명에 달했다. 연희전문학교 43명, 세브란스의전 8명, 중앙고보 58명, 보성전문학교 7명, 그밖에 중동학교, 양정고보, 배재고보, 송도고보 학생 등이었다. 이 중 53명이 검사국으로 넘겨져 11명이 주모자로 기소되었다.      지방에서는 6월 10일 전북 고창에서 고창보통학교(초등학교) 학생들이 만세시위를 벌였으며, 인천 만국공원에서도 청년 수십 명의 시위가 있었다. 전국 곳곳에서 봉도식이 열렸고, 많은 이들이 통곡하는 망곡을 했다. 봉도를 금지하는 학교 당국에 항의하여 학생들이 동맹휴학을 단행하는 경우도 많았다. 지방의 학생들이나 일반인들이 봉도와 망곡, 동맹휴학 등으로 일제에 항거 의지를 표시한 것이다.       또한 인산 당일의 시위를 목격한 배재고보 학생 문창모를 중심으로 협성학교, 피어선 성경학원, 기독교청년학원 등 기독교계통 학생들이 제2차 만세시위운동을 계획하였다. 인산 당일의 운동이 일반 민중의 호응을 크게 얻지 못한 것에 자극되어 대규모 만세시위운동을 추진한 것이다. 이들은 피어선 성경학원 기숙사에 모여 격문 수만 매를 인쇄하는 등 거사를 추진하였다. 그러나 사전에 발각되어 실행에 옮기지 못한 채 관련자들이 체포되고 말았다.  alt 철저한 경계와 감시를 펼친 일제 기마경찰들(좌) / 1926년 11월 2일 열린 6·10만세운동의 첫 공판,『동아일보』 (1926.9.28.)(우) 독립운동의 새로운 진로를 제시하다 6·10만세운동은 1919년 3·1운동, 1929년 광주학생운동과 더불어 일제강점기 3대 민족운동으로 평가된다. 시위 규모 면에서는 3·1운동이나 광주학생운동에 비해 크지 않았으며, 주로 국장 당일의 짧은 기간 서울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는 외향상의 차이를 보인다. 이는 일제의 사전 경계가 극심했기 때문이었다. 3·1운동에 놀란 일제는 순종이 승하하자 전국 각처에서 1만여 명의 군대를 집결시켜 서울 시내를 포위하고 무장시위를 감행하는 등 비상경계 태세에 돌입하였다. 3·1운동의 진원지였던 탑골공원에는 중무장의 기관총 소대를 배치하며 공포감을 배가시켰다. 인산 당일에는 인도에 기마경찰, 헌병, 정사복 경관 등을 총검으로 무장시켜 물샐틈없는 경계를 펼쳤다. 그 때문에 일반 민중의 시위참여가 쉽지 않았다. 6·10만세운동은 이러한 일제의 경계와 감시망을 뚫고 일어난 만세시위운동이었다. 6·10만세운동은 3·1운동의 경험 위에서 일어난 것이었지만, 운동의 주체와 이념적인 측면에서 큰 차별성을 보인다. 3·1운동 당시 종교지도자들이 종교이념을 초월하여 민족적 결합을 이루었다면, 6·10만세운동 때에는 사회, 정치적 이념을 초월하여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이 연합하여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가 연대함으로써 민족협동전선을 이룩해 갔던 것이다.        6·10만세운동은 일제의 철저한 탄압으로 만세시위가 크게 일어나지는 못하였지만, 국내외 민족운동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6·10만세운동의 민족협동전선 형성은 중국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계의 민족대당 결성운동을 활성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도산 안창호는 7월 16일 상하이에서 열린 연설회에서 6·10만세운동의 정신을 계승 발전시키기 위해 민족적 통일기관을 조직하자고 역설하였다. 민족적 통일기관이란 주의와 이념을 초월하여 민족적 ‘대혁명당’을 조직하자는 것이었다. 7월 8일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령 홍진은 시정방침의 3대 강령에서 ‘민족대당’의 조직을 천명하였다. 이후 중국 관내지역 곳곳에 ‘민족대당’ 결성을 준비하는 조직들이 생겨났다. 만주에서도 ‘민족유일당운동’이 일어나면서 독립군 단체의 통합을 촉진하였다. 이러한 좌·우익의 합작 움직임은 국내에서 1927년 2월 민족협동전선체인 신간회가 결성되는 데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6·10만세운동은 국내 학생독립운동에도 변화의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6·10만세운동 이전까지 학생운동 조직은 지방으로 확산되지 못하고 서울에 한정되어 있었다. 6·10만세운동에서 학생이 독자적인 민족운동 주체로 부상하면서 이후 학생운동 조직이 지방으로 급속히 확산되었다. 학생운동 조직이 전국 각처에서 결성되었으며 학생들의 동맹휴학도 식민지교육의 타파를 주장하는 등 민족적 성격을 강화해갔다. 1929년 광주학생운동이 전국적 민족운동으로 확산될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학생운동 역량의 성장 위에 가능했다. 6·10만세운동은 이후 학생운동의 질적 성장에 기반이 된 것이다. 이처럼 6·10만세운동은 그 자체의 규모보다도 이후 민족운동의 질적 변화에 큰 계기를 형성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 Mon, 30 May 2022 13:16:02 +0000 67 <![CDATA[만나보기 6·10만세운동의 세 갈래]]> 글 김성민(전 국민대학교 전임연구교수) 6·10만세운동은 크게 세 갈래로 나뉘어 전개되었다. 첫째는 조선공산당계열의 만세시위 계획, 둘째는 조선학생과학연구회 학생을 중심으로 전개한 만세시위, 셋째는 민족주의 성향의 ‘통동계’가 추진한 만세시위다. 이와 같은 만세시위는 3·1운동 이후 침체된 민족운동에 새로운 활기를 안겨주었고, 민족독립운동사의 꺼지지 않는 횃불 역할을 하였다. alt 조선공산당계열 만세시위 격문 인쇄지, 감고당 민창식 집터 alt 박래원(좌) / 민창식(우) 조선공산당계열의 시위 계획 조선공산당계열의 시위 계획조선공산당 임시상해부는 성립 직후인 1926년 2월경 중국 국민당 방식과 같은 한국 민족혁명 세력의 통합조직을 구상하고 있었다. 당시 중국에서는 국민당이 만주 군벌들을 토벌하기 위해 중국공산당과 손을 잡은 ‘국공합작’이 진행 중이었다. 이러한 중국 내 정세는 민족운동계에도 좌우 연합의 필요성을 제기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를 위해 임시상해부는 국내 조선공산당을 통해 동년 3월 천도교 측과의 민족협동전선을 모색하기도 했다. 조선공산당 측은 이를 보다 힘있게 추진하기 위해 메이데이(5월1일)를 기해 국내에서 대중시위운동을 계획하였다. 이때 순종이 승하하자 조선공산당 임시상해부와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 권오설은 메이데이 기념시위 계획을 철회하고 순종 인산일에 대중적 시위를 일으키는 방향으로 운동방침을 수정하였다. 이의 실행을 맡은 고려공산청년회는 ‘6·10투쟁위원회’라는 지도부를 설치하고 대중시위를 전민족적 운동으로 발전시키고자 사회주의, 민족주의, 종교계, 청년계, 학생계의 혁명적 인사들을 망라한 전민족적 지도기관으로 ‘대한독립당’ 조직을 구상하였다. 이를 위해 조선공산당은 천도교 진영 및 조선노농총동맹 등과 교섭을 추진하였다.         한편 천도교 구파는 최린 등의 천도교 신파를 중심으로 자치론이 고개를 들자 이를 비판하면서 사회주의 세력까지 포함하여 일제에 비타협적인 세력을 망라한 민족적 조직을 구상하였다. 이의 일환으로 1926년 3월 초에는 2차 조선공산당 책임비서인 강달영과 민족협동전선을 협의하기도 하였다. 그 때문에 6·10만세운동 추진과정에서 천도교 구파와 조선공산당은 자연스럽게 결합될 수 있었다. 이들은 6·10만세운동의 지도 기관으로 각 항일운동 세력의 협동전선체인 ‘대한독립당’을 결성하고, 이 명의로 격고문을 작성 배포하면서 만세시위운동을 추진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이에 따라 권오설은 당시 천도교청년동맹 간부로서 노농총동맹의 상무위원이던 박래원과 역할을 분담하여 격문 원고와 자금은 자신이 책임지고, 박래원은 격문 인쇄와 지방 연락을 담당하도록 하였다. 박래원은 노농총동맹과 인쇄직공조합에 관여하던 민창식 등과 함께 만세운동에 사용할 격고문 외 4종의 격문 5만여 매를 인쇄한 뒤 이를 천도교 총부 구내에 숨겨놓았다. 그러나 격고문이 발각되어 천도교 구파와 고려공산청년회 추진인사들이 체포됨에 따라 이러한 계획은 좌절되고 말았다. 천도교는 전국적 조직기반을 보유하고 있었으므로 격문을 지방의 58개 도시에 배부하고 전국을 철도선에 의해 4개 지역으로 나누어 각기 책임자를 파견하여 만세운동을 확산시킬 계획이었다. 이러한 활동은 주로 천도교 구파의 천도교청년동맹을 통해 추진되었다. 그러나 상하이에서 보내기로 했던 거사자금이 도착하지 않아 기다리던 중 계획이 발각되어 실천에 옮기지 못하였다.  alt 조선학생과학연구회 간부들 (왼쪽부터 박두종, 박하균, 이천진, 이선호, 이병립) 조선학생과학연구회 학생들의 시위 추진 조선학생과학연구회는 1925년 9월 창립되었다. 사회주의계열 학생들과 진보적 민족의식을 지닌 학생들이 참여하였다. 당초의 명칭은 ‘학생사회과학연구회’였으나 일제가 ‘사회과학’이라는 용어를 금지함에 따라 ‘조선학생과학연구회’라고 변경하였다. 당시 ‘사회과학’이라는 단어는 사회주의를 뜻하는 용어로 일반적으로 통용되었다. 따라서 조선학생과학연구회는 ‘사회주의의 연구와 보급을 목적으로 하는 학생사상단체‘를 의미했다. 강령으로 「과학연구와 과학사항의 보급을 기함, 조선학생의 사상통일과 상호단결을 도모함, 인간본위 교육의 실현과 조선학생의 당면한 문제의 해결을 기함」을 제시하였다.      조선학생과학연구회는 서울 소재 중등 이상의 학교에 재학하는 학생들로 구성되었다. 6·10만세운동 당시 회원이 5백여 명에 달하였다. 사회주의를 연구하는 학생 사상단체였으나 회원들이 모두 사회주의자는 아니었다. 초기 간부진은 사회주의 단체에 가입한 학생과 민족주의적 성향의 학생이 혼재되어 있었다. 사회주의계열 학생들의 경우 제2차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인 권오설의 강력한 지도 아래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 진보적 민족의식을 지닌 학생들은 민족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편으로 ‘사회주의 사상 연구와 보급’에 공감하였고, 조선학생과학연구회를 통해 사회의식을 제고해 갔다.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회의 지도력이 일정하게 관철되고는 있었지만, 조선학생과학연구회의 초기 조직은 조선공산당의 산하단체라기보다 민족, 계급문제에 관심있는 학생들의 연합체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다.          순종이 승하하자 5월 3일 권오설이 이병립에게 인산 당일 가두 행렬에서의 만세 선창과 격문 살포를 지시하면서 조선학생과학연구회의 만세시위계획이 본격화되었다. 이병립은 고려공산청년회의 간부이자 조선학생과학연구회의 간부이기도 했다. 이병립 등 조선학생과학연구회의 간부들은 5월 20일 각 학교 학생대표들을 소집하여 거사방법 등을 협의하였다. 이 자리에서 이병립, 이선호, 이천진, 박두종, 박하균 등이 준비 책임자로 선임되었다. 이후 학생 동원 등을 준비하던 중 6월 6일 고려공산청년회와 천도교 측의 격문이 발각되어 주요 인사들이 체포되자, 이들은 독자적으로 거사를 추진해갔다. 이병립의 주도하에 6월 8일부터 태극기 200여 매와 깃발을 만들고, 격문을 기초하여 인산인 전날 격문 1만여 매를 인쇄하였다. 이로써 6월 10일 인산 당일의 만세시위를 예정대로 단행할 수 있었다. alt 김재문(좌)과 ‘통동계’ 학생들이 만세시위 격문을 인쇄했다는 기사, 『동아일보』 (1927.3. 26.)(우) ‘통동계’ 학생들의 시위 추진 이른바 ‘통동계’는 6·10만세운동 추진세력 중에서 조선학생과학연구회와는 별도의 고등보통학교(지금의 고등학교) 학생들을 말한다. 중앙고보의 박용규, 이동환과 중동학교의 김재문, 황정환, 곽대형 등의 학생들로서 뚜렷한 조직체를 만들지 않은 상태에서 독자적으로 만세시위를 계획, 준비하여 거사에 참여하였다. 지방에서 서울에 유학한 학생들로서 평소에 교우관계가 있었던 이들은 하숙집 등을 거점으로 거사를 추진하였다. 이들의 하숙집이 통동에 있어서 흔히 ‘통동계’ 학생들로 불린다. 이중 박용규는 조선학생과학연구회 회원이기도 했다. 조직적 기반을 바탕으로 결집한 세력은 아니었으나, 밀접한 인적교류와 고양된 민족의식을 바탕으로 만세운동을 계획하게 된 것이다. 이들은 서울의 각 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동지 규합에 나섰다. 일주일 만에 50여 명의 동지를 규합하여 5월 23일 축구시합을 위장하여 모임을 가졌다. 이때 이동환은 총독부를 비롯한 일제기관과 일본인 집단거주지인 충정로 일대 폭파 등의 강력한 투쟁방법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이는 일동의 동의를 얻지 못한 채 해산하고 말았다.          이후 주도 학생 5명은 다시 논의를 거듭하여 인산일을 기해 만세시위를 벌이기로 뜻을 모았다. 생활비와 학자금으로 거사 물품을 구입한 후 5월 29일 통동 김재문의 하숙집에서 격문을 작성하였다. 5월 31일까지 박용규의 하숙에서 ‘조선민중아! 우리의 철천지 원수는 자본제국주의 일본이다. 2천만 동포야!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자! 만세, 만세, 조선독립 만세!’라는 격문 5천여 매를 인쇄하였다. 각자 1천여 매의 격문을 맡아 동지들에게 배포하는 한편 6월 8일과 9일에는 시내 각 학교와 전국 주요 학교에 발송하였다. 이 과정에서 조선학생과학연구회의 이선호와 중앙고보 동급생인 박용규, 이동환 등이 양측에서 연락을 담당하면서 연대투쟁이 가능하게 되었다. ‘통동계’ 학생들의 만세시위는 학생이 주체가 되어 자체적으로 대중적인 만세시위운동을 추진하여 성공시켰다는 점에서 학생운동의 또 다른 성장을 보여준다는 데 그 의의가 있다. ]]> Mon, 30 May 2022 13:17:04 +0000 67 <![CDATA[이달의 독립운동가 한인애국단 단원이 되어 의열투쟁에 나선 이덕주·최흥식·안경근]]> 글 독립기념관 전시부 alt 한인애국단 단장 김구와 청년 단원들(윗줄 왼쪽부터 최흥식, 유상근, 미상, 아랫줄 김구)_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제공(좌) /  이덕주가 한인애국단에 입단하며 작성한 이력서_국립중앙박물관 제공(우) 대한민국 임시정부, 한인애국단을 결성하다 1930년대 일제의 침략전쟁에 맞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31년 말 국무회의에서 특무대를 통해 ‘의열투쟁’을 전개한다는 방침을 정하였다. 단체 조직·운영의 전권을 위임받은 김구는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을 결성하고 청년들을 단원으로 모아 일련의 특공작전을 계획·준비하였다. 단장 김구와 청년 단원들로 구성된 한인애국단은 이봉창의 도쿄 의거를 시작으로 윤봉길의 상하이 의거 등 1932년 1월부터 5월까지 도쿄(東京), 상하이(上海), 다롄(大連) 등지에서 일제 침략기구 및 침략자 처단 의거를 결행하였다.  alt 왼쪽부터 이덕주가 김정애(김구로 추정)에게 보낸 편지_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최흥식이 곽윤(김구의 다른 이름)에게 보낸 편지_국립중앙박물관 제공,  「대련작탄사건의 추억」, 『한민』 제3호 (1936.5.25.) 이덕주와 최흥식, 일제 침략자 처단 의거에 나서다 이덕주는 황해도 신천(信川)에서 태어나 과수업, 재목상 등을 하다가 20세 때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였다. 대한교민단(大韓僑民團)에서 의경대원 등으로 활동하며 김구와 교류하다가 한인애국단에 입단하였다. 1932년 3월 김구에게 의거 자금과 무기 등을 받고 조선총독 처단을 위해 국내로 파견되었다. 그는 자신의 고향인 신천에서 같은 임무 수행을 위해 파견된 유진식(兪鎭軾)과 함께 의거를 준비하던 중 일경에 피체되어 옥고를 치렀다.  최흥식은 서울에서 태어나 인쇄소 견습생 등으로 일하며 생계를 이어가다 20세 때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1932년 이봉창 의거 등을 접한 후 한인애국단에 입단한 그는 일제 고위관료 처단을 위해 다롄으로 향했다. 그는 5월 ‘만주국’ 수립 문제 조사를 위해 파견된 국제연맹조사단을 접견하는 일제 고위관료 처단을 준비하다가 김구에게 보내는 편지가 발각돼 유상근(柳相根)과 함께 피체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일제 침략자 처단 의거에 나선 한인애국단원들의 공훈을 기려 이덕주(1990)와 최흥식(1991)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alt 임시정부가 군사위원회를 조직하고 안경근 등 6인을 상무위원으로 임명한다는 내용의 기사, 『한민』 제15호 (1937.7.30.)(좌) /  난징 한국특무대독립군 본부 터 일대(우) 안경근, 한인애국단원의 뜻을 이어 나가다 안경근은 황해도 신천에서 태어나 1921년 중국 상하이 망명 후 윈난육군강무학교(雲南陸軍講武學校)에서 수학하였고 1926년 황푸군관학교(黃埔軍官學校) 5기생 교관으로 활동하였다. 1931년 말 한인애국단이 결성되자 단원이 된 그는 1932년 4월 윤봉길의 상하이 의거의 결실로 1934년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 뤄양(洛陽) 분교 내에 한인특별반이 설립되자 생도계를 맡았고, 한국특무대독립군(韓國特務隊獨立軍)에서는 조사부원을 담당해 군사인재 양성에 힘썼다. 또한 1937년 임시정부 군사위원회 상무위원으로 임명되는 등 임시정부 활동도 이어 나갔다. 정부는 한인애국단원들의 뜻을 이어받아 독립운동을 전개한 안경근의 공훈을 기려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alt ]]> Mon, 30 May 2022 13:17:45 +0000 67 <![CDATA[독립운동 사적지 한인애국단의 난징 특무활동 전개 현장]]> 정리 편집실   상하이에서 조직된 한인애국단 한인애국단은 1930년대 초 중국 상하이에서 결성되었다.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대외적으로 침체와 위기에 처해 있었다. 이러한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임시정부는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특무활동을 전개했고, 이를 통해 임시정부는 독립운동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 한인애국단은 김구가 이끌었고, 간부는 김석(金晳)·안공근(安恭根)·이수봉(李秀峰) 등이 맡았으며, 단원으로는 윤봉길(尹奉吉)·이봉창(李奉昌)·최흥식(崔興植)·유상근(柳相根)·이덕주(李德柱)·유진만(兪鎭萬)·김의한(金毅漢) 등이 참여했다. 임시정부는 일제의 거물 정치인이나 관료를 처단해 일제에 큰 충격을 줌으로써 대외침략을 중단시키는 효과를 노렸다. 김구는 일왕을 처단하기 위해 1931년 12월 16일 이봉창 대원을 극비리에 도쿄로 잠입시켜 일왕 히로히토에게 수류탄을 던지는 의거를 감행하였다. 이밖에 1932년 4월에 윤봉길의 상하이 홍커우 공원 의거, 이덕주·유진만의 조선총독 처단 시도, 최흥식·유상근의 일본 고관 처단 시도가 이어졌다. 한인애국단의 존재에 위협을 느낀 일제는 임시정부 요인 및 한인애국단원 체포에 혈안이 됐다. 결국 항저우로 이동해 임시정부판공처를 설치한 김구는 의열투쟁보다는 군대 양성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한인애국단원의 일부를 난징군관학교에 입학시키는 등 군사력 확보에 매진하였다. 난징에서 추진한 다양한 특무활동 김구는 난징에 정착한 후에 중앙육군군관학교(中央陸軍軍官學校) 뤄양분교(洛陽分校)에 한인특별반(韓人特別班)을 설립하여 군사간부를 양성했고, 이들을 중심으로 특수활동을 전개하는 ‘특무기구’를 조직하였다. 난징지역에서 활동했던 한인애국단원은 안공근과 안경근 등 6인으로 유엽가(柳葉街) 56호에 거주하였다. 이곳에는 중앙육군군관학교 입학 준비생 7명도 함께 기거했다. 한인애국단은 1934년 9월 거점을 목장영(木匠營) 고안리(高安里) 1호로 옮겼다. 고안리 1호는 붉은 벽돌로 만들어진 3층 건물이었고, 임대료는 한달에 35원을 지불하였다. 1층은 학생들을 위한 장소였고, 2층은 양동오(梁東五)와 이마석(李摩石), 3층에 노태연(盧泰然)이 거주했다. 1934년 12월 말 한인애국단은 고안리 1호에서 특무활동 전개를 목적으로 하는 ‘결사’를 조직했다. 한국특무대독립군(韓國特務隊獨立軍)이 바로 그것이다. 한인특별반 입교생을 중심으로 조직된 한국특무대독립군은 군사적 성격을 갖는 일종의 특무활동을 위한 기구였다. 단원은 한인애국단 간부들을 중심으로 한인특별반 입교생들이 주요 구성원이었다. 1935년 10월 3명의 대원이 일경에 체포되는 과정에서 조직이 탄로되었고 결국 1936년 1월 해산되고 말았다. alt 목장영 일대 난징 한국특무대독립군 본부 터(목장영) 한인애국단 및 한국특무대독립군이 거주했던 장소이다. 현재 난징에서는 고안리라는 지명이 사용되지 않는다. 당시 지도를 통해 고안리 1호를 확인했으나, 새로운 건물이 신축되어 있어 명확한 장소 비정이 어렵다. 빌라 단지로 변모된 블록 전체를 비정할 필요성이 있다. 주소중국 난징시 진화구 목장영소구 일대  ]]> Mon, 30 May 2022 13:18:19 +0000 67 <![CDATA[아름다운 인연 독립전쟁의 영웅 홍범도와 의병활동을 지원한 단양 이씨]]> 글 김형목(사단법인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이사)   홍범도는 단양 이씨와 인연을 맺고 미래를 약속했다. 이씨는 일제의 고문에 시달려 눈감는 순간까지도 남편의 의병활동을 지원했으며, 홀로 두 아들을 책임졌다. 홍범도가 일본군과 전투에서 여러 번 승리를 거둘 수 있던 배경에는 이씨의 숭고하며 위대한 희생이 있었다. alt 1921년 극동피압박민족대회 당시 홍범도(ХОН НЕМ-до는 홍범도의 러시아 이름) 우여곡절을 겪은 청년 홍범도 홍범도는 1868년 8월 평안남도 평양 보통문 안에 있는 문열사에서 가난한 농부 홍윤식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남양, 호는 여천(汝千)이다. 영양실조에 걸린 어머니는 그가 태어나자마자 사망했고, 젖동냥하던 아버지마저 그의 나이 9세 무렵 세상을 등졌다. 가난의 대물림으로 꼴머슴과 떠돌이 생활의 연속이었다. 불우한 생활에서 벗어나고자 나팔수로 입대했으나, 이마저도 만만치 않아 다른 길을 찾았다. 물론 군에서 배운 군사훈련과 사격술은 훗날 독립전사로서 발돋움하는 든든한 밑거름이 되었다. 이후 황해도 수안 제지공장에서 일하며 생계를 이어갔지만, 임금 문제로 주인과 갈등이 겪고 다시 유랑생활을 시작하였다. 우여곡절 끝에 금강산 신계사에서 승려가 된 홍범도는 그곳에서 이순신 장군과 승려의병장 서산대사·사명대사의 삶을 배우며 항일의식을 일깨웠다. 이때 첫 번째 부인 단양 이씨를 만나 인연을 맺었지만, 두 사람은 뜻하지 않게 헤어졌다. 이후 홍범도는 광산노동자로 일했으며, 북청에 정착하여 소작농과 산포수로서 값진 수입을 올렸다. 이씨와 첫아들 양순을 7년 만에 만난 홍범도는 가족과 함께 생활하며 평온함과 안정감을 찾았고, 이 무렵 둘째 아들 용환이 태어났다. alt 홍범도 게릴라 전법으로 수십 차례 승리를 거두다 러일전쟁이 발발할 즈음, 항일투쟁 물결 또한 크게 일었다. 홍범도는 포수조직인 엽인계(獵人契)를 이끄는 포연대장(捕捐隊長)으로 추대되었다. 포연대장은 관리들과 교섭하여 포획물의 양을 정하고 이를 세금으로 납부하는 직책이었다. 홍범도는 관청에서 포수에게 부과하는 가혹한 세금의 부담을 덜기 위해 분투하였다. 지방관리들은 그를 위협하고 매수하려 했지만 끝내 세금을 낮추는 데 성공하였고, 이를 통해 동료들의 신망을 얻었다. 1907년에 일제는 군대해산 이후 총포 및 화약류 단속법을 공포하였다. 일제의 국경수비대는 백두산 일대 포수들의 무기를 회수하거나 활동을 방해하는 데 혈안이었다. 그해 11월 홍범도는 태양욱·차도선 등과 함께 의병부대를 조직하여 포수들을 집결시켰다. 이들은 후치령을 근거지로 일본군을 공격하고 우편마차를 탈취하였다. 일본군을 유인하여 섬멸하거나 군용화물차를 습격하는 등 갑산·혜산진·삼수·북청 일대를 교란하였다. 의병 1,000여 명을 모아 군량도감 등 부대의 진용을 갖추고 격문과 포고문을 돌리면서 게릴라 전법으로 수십 차례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일제는 대규모 병력을 동원했으나 맞대응이 어려워지자 회유와 귀순공작에 열을 올렸다. alt 홍범도부대가 사용한 수류탄과 탄환 비극적인 상황에도 멈추지 않은 항일투쟁 차도선이 귀순공작에 넘어가고, 태양욱이 함정에 걸려 체포당하자 일제는 끊임없이 홍범도의 귀순공작을 벌였다. 1908년에 들어 일본군 북청수비구 사령부는 홍범도 귀순공작의 한 방법으로 그의 가족을 잡아들였다. 일제는 이씨에게 귀순을 강요하고 남편에게 귀순을 권유하는 편지를 쓰라고 압박하였다. 그녀는 일제의 요구에 침묵으로 일관하며 응하지 않다가 모진 고문에 시달려 끝내 사망하고 말았다. 첫째 양순은 아버지를 따라 전투에 참여했다가 전사하였고, 둘째 용환은 살인범으로 몰려 고문을 받은 뒤 폐병으로 목숨을 잃고 말았다. 이러한 비극적인 상황에도 홍범도는 흔들리지 않고 반일투쟁의 고삐를 놓지 않았다. 당시 그가 고심한 문제는 원활한 탄약 공급이었다. 무기가 턱없이 부족했던 의병들은 강력한 일본군의 공격에 견디지 못하고 흩어지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는 청나라와 러시아의 탄약 지원 교섭에 나서기 위해 동지들과 압록강을 건너 중국 동북지역과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의 신한촌을 찾았다. 일제는 삼수·갑산 일대에서 의병활동이 사라지자 밀정을 풀어 그의 행방을 쫓았다. 그를 체포하려는 일제수비대가 연해주 일대에 파견되었지만 역부족이었다. 연해주에서 군비를 마련할 수 없다고 판단한 홍범도는 고국으로 돌아왔고, 동지들을 함께 북청·갑산·혜산 일대에서 항일활동을 전개하였다. 경술국치 직전에 홍범도는 창바이현 일대에 근거지를 두고 둔전을 일구며 군량미를 공급하였다. 또한 연해주·만주 그리고 국내 의병진과 연계를 모색하였지만, 탄약 고갈로 의병활동이 거의 불가능해지자 의병부대를 해산하였다. 이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 정착한 후 노동회(勞動會)를 조직하고 군자금을 비축하며 때를 기다렸다. 이때부터 독립군을 창건할 때까지 국경 일대에서 게릴라전이 10여 년 동안 전개되었다. alt 봉오동전투 현황도(1920.6.) 대승리를 이룬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 1919년에 일어난 3·1운동은 국내뿐만 아니라 국외 항일운동단체에도 커다란 영향력을 끼쳤다. 룽징·훈춘·창바이현 등지에서 대대적인 만세시위와 더불어 일제 식민통치기관을 습격하는 등 분위기를 반전시켰다. 창바이현에서는 천도교도들이 일본헌병대를 습격하였다. 홍범도는 안도현 명월진에서 의병출신들과 한국청년 및 산포수 등을 모아서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을 창설하여 사령관으로 추대되었다. 그는 독립군을 이끌고 혜산진·갑산의 일본군을 습격하였다. 이어 백두산에 근거지를 두고 두만강 연안인 자성·강계·만포진·회령 등지에 있는 일본군과 경찰관서를 공격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일본군은 대대병력으로 홍범도부대가 주둔하는 봉오동(현 투먼시 봉오동저수지 골짜기)을 전면 공격하였다. 당시 독립군은 400여 명, 일본군은 남양수비대 병력을 포함해 300여 명이었다. 1920년 6월 7일 네 시간에 걸친 치열한 전투 끝에 피가 냇물을 이루자 정적을 되찾았다. 홍범도부대는 일본군 157명을 사살하며 대승리를 거두었고, 독립군의 손실은 전사 4명, 중상 1명에 지나지 않았다. 이것이 유명한 ‘봉오동전투’이다. 봉오동전투는 청산리전투의 승리를 알리는 서막에 불과하였다. 이후 변화되는 정세를 직감한 홍범도는 새로운 국면에 대처하기 위해 김좌진·안무·최진동 등 군사지도자들과 합동작전을 모색하였다. 1920년 북로군정서에서는 러시아로 사람을 보내 멘셰비키 당국과 교섭하여 기관총 등 다량의 무기를 구입하였다. 당시 홍범도는 직속부대원 300명을 거느리고 있었다. 마침내 1920년 10월 21일 백운평전투를 시작으로 청산리와 어랑촌 일대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독립군은 뛰어난 전술로 우수한 화기를 지닌 일본군을 농락하였다. 6일 동안의 혈전 끝에 일본군이 크게 패배하였다. 일본군의 피해는 연대장 1명, 대대장 2명을 포함, 전사자 1,254명이었다. 부상자까지 합하면 인명피해가 3천여 명에 달하였다. 독립군의 전사자는 200여 명이었다. 이것이 바로 ‘청산리전투’이다. alt 크즐오르다 홍범도 묘역 전경 비장군(飛將軍, 용맹한 장수)으로 불리다 승리의 기쁨도 잠시, 독립군은 일제의 공격을 피해 중국과 러시아의 국경도시인 헤이허로 이동하였다. 당시 레닌의 적군은 한국독립군에게 협조적이었으나 일본군이 침공 및 항의를 하자 태도가 달라졌다. 볼셰비키는 일본군이 철수조건으로 한국독립군의 해산을 내걸자, 대한독립군단의 무장해제를 요구하였다. 적군은 강제로 독립군의 무장을 해제하였고, 반대하는 독립군을 공격하여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이로써 모든 꿈이 산산조각이 나면서 내부 갈등이 유발되었지만, 홍범도는 중립을 지켰다. 이후 김좌진·지청천 등은 다시 중국 동북지역으로 되돌아갔고, 그는 러시아 연해주에 새로운 활동근거지를 마련하였다. 레닌을 직접 만나 지원을 요청했으며, 고려공산당에 가입하여 극동인민대표회의에 김규식·여운형 등과 함께 한국대표로 참석하기도 했다.  1937년 스탈린은 연해주 일대에 거주하는 한국인을 모두 카자흐스탄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홍범도는 그곳으로 이주하여 소비에트 정부로부터 연금을 받으며 재혼한 아내와 여생을 꾸려 나갔다. 그는 집단농장 관리와 극장의 경비를 맡으며 세월을 보냈다. 평생 별호를 짓지 않았으나 민중은 비장군(飛將軍, 용맹한 장수)으로 불렀다. 그는 1943년 10월 25일 중앙아시아의 크즐오르다에서 유명을 달리하였다. 그의 묘 앞에 동상을 세우고 그 아래 사적을 기록해두었고, 고려인 동포들은 그의 기일이나 설날이면 어김없이 묘소를 찾아 참배하는 등 독립정신을 높이 기렸다. 유해는 지난해 광복절을 맞아 국내로 봉환되었다. 정부는 홍범도에게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2021년 단양 이씨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Mon, 30 May 2022 13:19:11 +0000 67 <![CDATA[끝나지 않은 독립운동 일제 강제동원 피해, 오직 사과·배상만이 해결책]]> 글 이계형(국민대학교 교양대학 교수)   국가적 차원에서도, 개인적 차원에서도 일제 조선인 강제동원(징용·징병 등)에 따른 피해 문제는 여전히 미해결 과제로 남았다. 이번 호에는 광복 이후 현재까지 이루어진 일제 강제동원 피해 배상 소송 과정을 짚어보며, 역사적 의미와 함께 현주소를 살피고자 한다. 광복 직후 이뤄진 피해보상요구 운동 식민지 조선에서 강제동원이 이뤄진 것은 중일전쟁이 장기화되면서다. 일제는 군수물자와 노동력을 국가 차원에서 통제·동원하기 위해 1938년 4월 1일 ‘국가총동원법’을 공포했다. 이를 근거로 1939년 7월 7일 ‘국민징용령’을 제정하여 이를 조선 등 식민지에 자행했다. 그 뒤 태평양전쟁을 도발한 일제는 징용 적용 범위를 확대해갔다. 대상은 만 16~40세 청년이었으며, 조선뿐만 아니라 일본·사할린·태평양 군도 등으로 동원하였다. 끌려간 청년들은 탄광·군수공장·비행장·건설공사장 등에서 1일 12시간 이상 노역해야 했고, 끝내 많은 이들이 희생되기도 했다. 광복 직후 한국정부 수립 이전에 강제동원 피해자들은 일본을 상대로 직접적인 보상 요구 운동을 벌였다. 또한 희생자 유족들 중심의 동인회, 태평양동지회 등 단체를 조직하여 국회에 ‘대일강제노무자 미제임금 채무이행 요구’를 촉구하는 한편, 미군정청의 전쟁피해조사에 협력하여 피해신고 등의 형태로 피해보상을 요구했다. 그러나 냉전 격화와 한국전쟁 발발, 반공이 우선시되는 상황 속에서 또 다른 희생과 피해가 발생하면서 그러한 움직임은 점점 힘을 잃어갔다. ‘현실 타협’한 한일 청구권 협정 1965년 6월 22일 한일협정이 이루어졌지만, 두 나라 사이의 과거사 문제와 한국정부의 대일청구권 또는 대일민간청구권 문제를 덮은 채 체결되었다. 양국은 ‘청구권’의 의미를 대일협상 과정에서 몇 단계에 걸쳐 변질시켜 ‘청구권’의 합당성을 애매하게 처리하였고, 이를 자의적으로 해석할 여지만 남기고 말았다. 박정희 정권은 일본정부가 처음부터 안건 상정을 거부한 국가청구권을 유보하는 대신에 민간청구권을 중심으로 일본과 타협한 것이다. 이는 월권이자 위법으로 헌법을 짓밟는 행위였다. 일본 재판부는 이를 근거로 민간청구권 소송을 기각하였다.1966년 2월 19일 한국정부는 ‘민간청구권은 청구권 자금 중에서 보상한다’는 법을 제정하고, 1975년 7월부터 1977년 6월까지 군인·군속·피징용 사망자 유족 8,552명을 대상으로 1인당 30만 원씩 총액 25억 6,560만 원을 지급했다. 그러나 신청 절차가 까다로워 증거 불충분 및 자료 미비 등으로 신고를 거부당하거나 보상에서 제외된 대상자가 적지 않았다. 피해자들은 신체적·정신적 후유증에 시달리면서 사회적인 편견과 빈곤 속에서 살아가야 했다. 1980년대 말 정치적인 민주화를 이룩하고 냉전체제가 붕괴하면서 피해자들은 피해에 대한 치유와 배상을 큰 목소리로 요구하게 되었고, 1990년 10월 희생자와 유가족 22명이 일본 도쿄지방법원을 상대로 공식 사과와 배상을 요구하는 소송을 냈다. 1991년 1월에는 한국을 방문한 일본총리에게 공식 사과와 피해 배상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인 사람이 할복자살을 기도하기도 하였다.  소송의 물꼬를 트다 1991년 8월 ‘위안부’ 피해자 김학순이 피해 사실을 증언하고 인간 존엄 회복과 일본정부의 책임을 추궁하면서 큰 변화가 일었다. 당시 일본정부는 ‘개인의 청구권이 소멸하지 않았다’라는 입장으로 선회했지만, 소송 결과는 참담했다. 한국인들의 소송과 관련하여 1990년대 제기된 29건의 판결 중 승소한 것은 1심 판결 단 하나뿐이었다. 그것도 ‘위안부’ 원고들의 청구 중 일부만 받아들였다. 그 뒤 1999년 7월 미국 캘리포니아의회가 ‘제2차 세계대전 강제노동 피해자 또는 그 상속인’은 시효 규정의 적용을 받지 않고, 2010년 12월 31일까지 강제노동으로부터 ‘이익을 얻은 모든 자 또는 그 이익 승계자를 상대로 배상을 청구하기 위한 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는 법률을 제정하면서 물꼬가 터졌다. 이를 근거로 피해자들은 미국에서 일본정부와 기업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고, 2000년 5월에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부산지방법원에 소송을 제기하였다. 이를 기회로 소송이 활발하게 이뤄졌지만, 어떤 경우에는 1심 제소 후 3심 판결까지 무려 12년 11개월이 걸리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고령의 피해자들은 사망하는 경우가 다반사였지만, 그렇다고 승소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잇달아 패소 또 패소 2001년 3월 27일 일본 오사카 지방재판소는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일본징용기업 신일본제철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청구소송에서 원고들의 청구를 기각했다. 지방재판소는 원고들이 노동자 모집을 보고 스스로 지원하였기에 강제연행이라 볼 수 없고, 피고 신일본제철의 노동자 모집은 ‘국민징용령’에 따른 것이라며 징용의 불법성을 부인했다. 또한 신일본제철 주식회사는 구 일본제철과 별개의 법인이므로 그에 대한 채무를 승계하지 않았고, 설사 승계했다고 하더라도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과 일본의 재산권조치법에 의해 채무가 소멸됐다고 판단했다. 이에 원고들이 불복하여 오사카 고등재판소에 항소했지만, 2002년 11월 19일 항소기각 판결을 선고받았고, 2003년 10월 9일 일본 최고재판소가 이를 기각하면서 원고패소판결이 확정되었다. 이후 피해자들은 앞선 청구이유로 2005년 2월 28일 서울중앙지방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신일본제철이 구 일본제철과 법인격이 동일하다거나 구 일본제철이 채무를 승계했다고 볼 수 없다’는 일본 재판부의 입장을 받아들였다. 다만 ‘청구권이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으로 인해 소멸했다고 볼 수는 없다’면서도 ‘위자료 청구권의 시효가 지났다’며 원고들의 청구를 기각했다. 2012년 5월 24일 대법원은 이 같은 판결을 파기·환송했다. 광복 60년이 지난 후에 이루어진 일본 측 회사에 대한 손해배상을 인정한 것은 과거 청산으로 가는 첫발을 의미했다. 이후 2018년 10월 30일 전원합의체 판결로 ‘신일본제철의 상고를 기각하고 원고들에게 각 위자료 1억 원을 지급하라’는 원심을 확정하였다. 이를 ‘대상판결’이라 한다. 이에 일본정부는 ‘대상판결이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과 국제법을 위반했다’고 비판하며 보복 조치의 일환으로 반도체 소재 품목의 한국 수출 규제를 발표하고, 한국을 일본의 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하였다. 이는 한국 내에서 일본산 제품 불매운동으로 번졌다.  피해자들의 눈물, 언제 그칠 수 있을까 2021년 6월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와 유족 85명이 일본기업 16곳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에서 서울중앙지법은 ‘일본기업을 상대로 소송을 낼 수 없다’라며 대상판결과 배치되는 이례적인 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1965년 한국정부가 일본의 자금지원을 대가로 대일청구권을 포기한 ‘청구권협정’의 문언과 체결 경위 등을 볼 때, 강제징용 피해자도 협정의 적용 대상이 된다고 판단한 것이다. 재판부는 또 ‘자유민주주의라는 헌법적 가치를 공유하는 서방 세력의 대표 국가들 중 하나인 일본과의 관계가 훼손되고, 이는 결국 한미동맹으로 우리 안보와 직결된 미합중국과의 관계 훼손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라거나 ‘청구권협정으로 얻은 외화는 이른바 한강의 기적에 크게 기여했다‘라는 등의 일방적인 정치·외교적 가치 판단을 판결에 개입시킨 꼴이었다. 이는 사법부가 피해자들에게 좌절감을 안긴 판결이었다. 일제강점기 강제징용과 관련한 일본 측의 배상은 단순한 재정적 지원 보상이 아니다. 일제 군국주의의 과거 청산이며 일본의 진정한 사죄의 한 단면이다. 나라 없는 국민으로서 강제징용을 당해야만 했던 그들의 눈물을 닦아줘야 한다. 이는 국가가 당연히 해야 할 책무이다. 일제강점기 강제징용자들에 대한 배상은 일본으로부터 사과를 받아내는 또 다른 방식이기도 하다. ]]> Mon, 30 May 2022 13:19:54 +0000 67 <![CDATA[독립의 발자취 항일과 친일, 백년 전 그들의 선택]]> 글 편집실   일제강점기 독립투쟁 또는 친일을 선택한 인물들을 재조명해보고, 역사의 갈림길에서 상반된 선택을 내린 이들을 통해 국가와 민족의 의미를 돌아볼 수 있는 〈항일과 친일, 백년 전 그들의 선택〉 전시가 현재 경기도박물관에서 개최되고 있다. 이번 전시를 기획한 경기도박물관 박본수 학예연구사에게 전시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본다. alt 매켄지가 양평에서 찍은 의병 사진(1907) Q. 〈항일과 친일, 백년 전 그들의 선택〉 전시를 소개해주세요. 이번 전시는 경기도 31개 시군의 항일독립운동과 친일파에 대해서 조명하는 특별전으로, 한말부터 일제강점기까지 경기도에서 펼쳐진 의병활동과 3·1만세운동의 장소 및 인물을 기리고, 나라를 팔아 부귀영화를 얻은 친일파 및 일제잔재에 대한 기억을 환기시킴으로써 역사의 엄중함과 국가·공동체의 중요성을 재인식하고자 기획한 전시입니다. Q. 항일과 친일의 역사에 대해 설명바랍니다. 19세기 말부터 본격적으로 진행된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을 받아 1910년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습니다. 한국인에게 일제강점기는 잊을 수 없는 아픔이며 지울 수 없는 상처이지요. 일본의 침략과 국권 강탈에 협조하는 친일파들이 있었고, 시간이 흘러 일본 제국주의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더욱 늘어났습니다. 그렇지만 일제의 침략과 식민지배에 저항하는 사람은 더 많았습니다. 19세기 말부터 시작된 의병전쟁과 계몽운동은 사람들의 가슴을 뜨겁게 하였고, 3·1만세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이후 국내외의 항일운동과 무장 독립전쟁이 본격화되었습니다. 근대 이후 한국은 수십 년간 식민지라는 암울한 터널을 지났지만, 치열한 독립운동이 있었기에 부끄럽지 않고 초라하지 않은 역사가 되었습니다. Q. 이번 전시는 어떻게 마련되었나요? 이번 전시는 경기도의회가 지난해 5월 20일 제정한 ‘경기도 일제 잔재 청산에 관한 조례’에 따라 기획한 전시입니다. 또 최근 수년간 경기도와 경기문화재단(경기문화재연구원, 지역문화교육본부, 경기도박물관)이 수행한 여러 사업의 결과물과 국사편찬위원회의 일제감시대상카드, 국가보훈처의 독립운동현충시설 자료, 문화재청의 자료 등을 정리하여 소개합니다. 조병세, 김병엽, 박찬익 관련 유물 등 그간 경기도박물관이 기증받은 근대 및 독립운동 관련 유물이 이번 전시의 토대가 되고 있으며, 대외적으로는 민족문제연구소(식민지역사박물관)의 후원과 함께 안성3.1운동기념관, 제암리 3.1운동순국기념관 등 경기도의 항일독립운동 관련 유관 기관 및 단체, 개인 소장가 등 여러 곳으로부터 유물과 자료, 이미지와 영상물 협조를 받아 전시를 열게 되었습니다. Q. 눈여겨 볼 자료를 소개해주세요. 1906년부터 1907년까지 2년간 한국에 머물면서 의병전쟁 지역을 답사한 영국 일간지 『데일리 메일(Daily Mail)』기자 출신 매켄지(Frederick Arthur Mackenzie, 1869~1931)는 1907년 11월 7일과 8일 삼산리 전투가 벌어진 직후 기록을 남겼습니다. 또한 1908년 『대한제국의 비극』을 출간하여 자신이 목격한 일제의 만행과 의병들의 저항을 전 세계에 알렸습니다. 그가 찍은 의병 사진은 오늘날 역사 교과서에 실리게 되었고, 이 사진은 2018년 방영한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의 기록이 없었다면 우리는 의병의 실체를 글로만 배웠을 것입니다. 이번 전시에서 매켄지의 저서와 사진을 직접 만나보시길 바랍니다. Q.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도 눈길을 끄는데요. 전시장에는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가 제작한 주홍 작가의 샌드 애니메이션 〈도마 안중근〉을 비롯하여 모두 8개의 영상물이 상영되고, 민족문제연구소가 간행한 『친일인명사전』과 지역사연구소·식민지역사박물관이 발간한 『우리 지역 일제잔재를 찾아라』의 PC 검색 코너, 경기일보의 기획기사 ‘경기도의 독립운동가를 만나다’ 등을 QR코드로 확인하는 코너 등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문화재청이 최근 국가 보물로 지정한 ‘데니 태극기’ 등 3종의 태극기를 소개합니다. 포토존은 1942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의정원(현재의 국회) 사진을 활용하였으며, 체험존은 ‘소망나무에 메시지 달기’, ‘태극 바람개비 만들기’, ‘나라사랑 태극기 만들기’ 등이 있습니다. Q. 관람객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나요? 그간 역사연구기관이나 독립운동기념관에서 친일을 일부 소재로 삼아 소개한 전시는 있었지만, 전시의 대표 주제로 선정한 건 이번이 최초입니다. 이번 전시를 통해 ‘백년 전 깊은 절망에 빠졌던 사람들, 그래도 희망을 잃지 않고 스스로 가시밭길을 걸었던 사람들은 과연 지금의 대한민국을 예측했을까?’라는 물음표를 새겨보시길 바라며, 또한 ‘백년 전 우리는, 나라면 과연 어떤 선택을 했을까?’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보는 기회가 되길 바랍니다.  이번 전시의 주요 전시품은 한말부터 일제강점기까지의 서화·판화·유화·사진·신문·도서·엽서·영상물 등 200여 점이며, 제1부 ‘대한제국의 비극, 그들의 선택’, 제2부 ‘항쟁과 학살, 그날 그곳을 기리다’, 제3부 ‘친일(親日)과 일제잔재(日帝殘滓)’, 제4부 ‘유물로 만나는 경기도의 독립운동가’ 등 모두 4부로 구성하였다. alt 제1부 ‘대한제국의 비극, 그들의 선택’ 한말과 대한제국기에 펼쳐지는 일본제국주의 국권침탈의 모습을 그린 임오군란(1882), 청일전쟁(1894), 러일전쟁(1904), 정미의병(1907) 관련 유물과 죽음으로 일제에 항거한 순국열사 조병세, 최익현, 민영환, 이한응의 유품을 소개한다. 또한 무장독립항쟁을 위해 전 재산을 팔아 만주로 망명한 이석영 6형제에 관한 영상물, 지조를 지키는 마음을 표현한 윤용구, 안중식, 오세창, 한용운의 서화 등을 전시한다. alt 제2부 ‘항쟁과 학살, 그날 그곳을 기리다’ 3·1독립만세운동과 화성 제암리 학살 관련 유물과 자료를 전시한다. 국내외에서 전개된 3·1독립만세운동은 총 1,692회에 최대 100만여 명이 참여한 대규모 민족운동이었다. 경기도는 다른 지역에 비해 지속적이고 격렬한 만세운동이 총 367회 전개되었으며, 참여인원도 17~20만여 명에 달하였다. 이에 4월 15일 일본군이 지금의 화성시 제암리에서 주민들을 집단 학살한 만행사건이 일어났다. 전시실에 걸린 대형 유화 〈제암리 뒷동산 만세소리〉(1983년, 김태 작)와 영상물 〈4월의 어느 날〉(2분 50초)은 화성 제암리3·1운동순국기념관에서 제공한 것이다. alt 제3부‘친일과 일제잔재’ 경기도의 대표적 친일파 10명(이완용, 송병준, 박제순, 이재곤, 박영효, 박필병, 민원식, 홍사익, 조희창, 홍난파)과 송병준·송종헌 부자의 공덕비 및 팔굉일우(八紘一宇, 세계를 천황 아래에 하나의 집으로 만든다) 관련 자료와 탁본을 전시한다.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는 친일파를 ‘을사늑약(1905) 전후부터 광복(1945)까지 일제의 국권침탈, 식민통치,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함으로써 한민족을 비롯한 여러 민족에게 신체적, 물리적, 정신적으로 직간접적 피해를 끼친 자로서 활동 흔적이 뚜렷한 사람’이라고 정의하였다. 일제잔재는 ‘일제의 침략전쟁과 식민통치 기간에 일본제국주의의 영향 아래 생산되거나 정착하였음에도 광복 이후 청산되지 못한 유무형의 부정적 유산’, 친일잔재는 ‘친일 논리의 영향을 받은 유무형의 유산’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alt 제4부 ‘유물로 만나는 경기도의 독립운동가’ 경기도 출신 중 주요한 독립운동가 류근·박찬익·신익희·안재홍·엄항섭·여운형·조성환·조소앙 등의 유물을 전시한다. 특히 여주박물관이 소장한 조성환 유품, 경기도박물관이 기증받은 파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박찬익 일가의 유품, 평택의 민세안재홍기념사업회가 소장한 안재홍 유품 등이 전시된다. ]]> Mon, 30 May 2022 13:20:28 +0000 67 <![CDATA[세계 산책 알제리의 정신적 지주 압델 카데르]]> 글 임기대(부산외국어대학교 아프리카연구센터장)   1830년부터 1962년까지 프랑스 식민지배에 대항한 알제리 국민 모두가 독립영웅이라 할 수 있지만, 그중 국민을 하나로 묶으며 오늘날 알제리의 정체성을 형성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이가 있다. 알제리의 정신적 지주라 일컫는 압델 카데르이다.   alt 알제리 수도 알제에 세워진 압델 카데르 기마상 식민지배에 대항한 알제리 북아프리카에 자리한 알제리는 프랑스의 식민지배를 132년(1830~1962) 동안 받은 국가이다. 당시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모로코, 튀니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가혹한 식민지배를 받았다. 독립 과정 또한 치열했다. 프랑스를 상대로 한 ‘알제리 독립전쟁’(1954~1962)에는 국민 대다수가 참여하여 알제리의 민족성과 단결성을 보여주었다. 8년간 걸친 전쟁에서 수많은 알제리인이 희생되었지만, 이 전쟁으로 알제리는 비로소 프랑스로부터 독립을 쟁취하였다. 프랑스의 침략에 대한 알제리의 항쟁은 ‘알제리 전쟁’이 처음이 아니었다. 항쟁의 역사는 1830년 프랑스가 알제리를 처음 침공했을 때부터 수십 년 동안 지속되었다. 당시 식민지배에 대항한 대다수의 국민 모두를 독립영웅이라 할 수 있지만, 그중 알제리의 정체성 확립에 중요한 역할을 한 압델 카데르(1808~1883)는 현재까지도 알제리의 ‘정신적 지주’로 칭송받는다. 그는 전통 이슬람 교육과 근대 이슬람 국가 건설의 중요성을 역설했으며, 최후까지 프랑스에 맞서면서도 유럽에 이슬람을 전파하고자 했다. alt 압델 카데르의 초상화(위)와 동상(아래) 압델 카데르 그는 누구인가 압델 카데르는 알제리 서부 마스카라(Mascara) 근처의 작은 마을에서 출생했다. 이 지역은 이베리아반도에서 유입된 안달루시아 문화의 흔적이 많은 곳이다. 이곳의 대도시 틀렘센과 오랑 등지에서 성장한 그는 아버지로부터 독실한 이슬람식 교육(종교, 철학, 신학)을 받았다. 압델 카데르에게 독서와 함께 천짜기를 가르친 어머니 랄라 조라 또한 지도자의 덕목으로 솔선수범을 강조하며, ‘종교적 인간은 사치가 없고, 늘 검소하게 살아야 한다’고 내세웠다. 그녀의 교육관은 오늘날 알제리 여성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1827년 압델 카데르는 오스만 터키 지배하에 있던 알제리를 잠시 벗어나 아버지와 메카 순례를 떠났고, 그때 방문한 이집트에서 알제리의 근대화를 꿈꿨다. 하지만 프랑스는 ‘알제리 총독과 프랑스 외교관 사이의 마찰’을 빌미로 1830년 알제리 침공을 시작했다. 그는 아버지가 오랑시의 항전 지도자로 나서는 것을 보며 24세 젊은 나이에 에미르(Emir, 군사령관)에 추대되었다. 주요 부족들이 그의 신앙심과 전투 역량, 통솔력을 인정하고 따랐기 때문이다. 초기 식민 과정에서 프랑스의 약탈과 파괴는 걷잡을 수 없이 잔인했다. 이에 대항할 알제리의 인력과 무기는 한없이 부족했고, 압델 카데르는 최고의 전법으로 ‘매복’과 ‘게릴라전’을 모색하여 실행했다. 그의 활약으로 프랑스는 1836년 휴전을 제안했고, 압델 카데르는 알제리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땅 지배권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1842년 당시 프랑스 본국에서 온 새 총독은 ‘아랍인은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고 천명했고, ‘그렇지 않을 경우 알제리를 초토화하겠다’고 선언했다. 이를 위해 프랑스는 알제리인을 정규군 등에 징집했고, 프랑스군의 앞잡이로 활용했다. 프랑스가 공언한 무자비한 탄압 작전이 먹혀들었으며, 그 결과 프랑스가 처음 침공했을 당시 300만 명이었던 알제리 인구는 1872년 200만 명으로 줄었다. 민간인 희생자는 물론 전사자, 전염병, 기근 등이 상황을 악화시켰고, 압델 카데르는 결국 패장이 되었다. 프랑스는 프랑스군의 앞잡이를 활용하여 알제리인을 강제로 체포했고, 이에 따라 저항이 거셌던 카빌리 지역의 알제리인들 마저 프랑스에 투항하고 말았다. 더 이상 버틸 힘이 없던 압델 카데르 또한 1847년 12월 23일 프랑스에 항복했다. 3명의 부인과 자녀들, 일부 부하 97명과 함께 프랑스의 포(Pau) 지방에 수감된 압델 카데르는 이후 르와르(Loire) 지역의 앙부와즈성으로 옮겨졌다. 이후 시리아의 다마스쿠스로 옮겨진 그는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알제리 독립전쟁’에 미친 영향 1830년부터 식민지배를 받은 알제리인들은 프랑스의 수탈로 더욱 궁핍하고 비참한 생활을 이어갔다. 1867년~1868년의 대기근으로 민중의 삶은 더 처참해졌고, 카빌리에서 봉기까지 발생했다. 오랑에서도 같은 식의 저항이 이어졌다. 하지만 독립운동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정치운동으로 방향을 틀면서 1926년 ‘북아프리카의 별’이라는 단체가 알제리 최초의 민족운동 조직체로 탄생했다. 이 단체는 압델 카데르의 손자 하즈 알리 압델 카데르를 중심으로 활동했고, 압델 카데르의 정신을 이어받고자 했다. ‘북아프리카의 별’은 프랑스 파리에서 결성되었다. 알제리 엘리트와 파리 이민 노동자가 하나가 되어 투쟁한 민족운동이었으며, 알제리 독립뿐만 아니라 북아프리카의 통일을 염두에 둔 운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이들은 압델 카데르의 이슬람운동이 민족운동과 함께 할 수 있음을 주장했고, 마침내 8년간의 ‘알제리 독립전쟁’으로 이어지는 지렛대 역할을 했다.        1962년 독립 후 알제리 정부는 압델 카데르의 유해를 시리아에서 알제리로 이장했다. 그는 단순히 반(反)프랑스 독립운동을 이끈 인물이 아니라 독립국가 알제리인의 자부심이자 상징이 되었다. 현재 수도 알제의 번화가에는 압델 카데르의 기마상이 자리하고 있다. 이곳은 과거 프랑스의 식민지배 당시 프랑스 장군 동상이 있었던 장소이다. 알제리의 아픈 상처를 간직한 이곳에 세워진 그의 기마상은 알제리의 상징이자 곧 자부심이다. 알제리의 영원한 심장 독립 이후에도 알제리는 여러 우여곡절을 겪었다. 1989년, 사회주의에서 다당제와 자본주의를 도입했다. 하지만 유가하락과 경제파탄, 사회주의 세력에 대한 분노는 1990년대 이슬람주의자들이 득세하는 결과를 만들었다. 이때 새롭게 출범한 부테플리카(1937~2021) 대통령 또한 부패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알제리인의 저항에 직면했다. 독립전쟁 세대들과 부패 정치인에 분노한 국민들은 ‘히락’(Hirak), 즉 ‘민중시위’를 2019년부터 현재까지 이어오고 있다. 남녀노소가 참여한 ‘히락’은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잠시 주춤하고 있지만, 여전히 ‘알제리 국민이 어떻게 싸워 이룬 독립인지’를 묻고 있다. 압델 카데르의 후예, 아프리카에서 가장 자존심이 강한 국가, 이슬람과 자유를 독립정신으로 이어온 알제리의 심장에는 늘 압델 카데르가 있다. ]]> Mon, 30 May 2022 13:21:02 +0000 67 <![CDATA[기념관은 지금 최초의 한미동맹을 기억하다]]> 정리 편집실    사진 이소연   독립기념관 전시부 김송이 학예연구사는 한미수교 140주년을 기념하여 〈미국과 함께 한 독립운동〉 특별기획전을 기획했다. 이번 전시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한국과 미국이 함께 대일항전을 전개한 사실을 알리기 위한 자리이며, 특별히 미국 OSS장교 클라이드 사전트(Clyde B. Sargent)의 아들이 소장한 사진들을 수집하여 처음 공개했다. 김송이 학예연구사가 들려주는 한미동맹에 관한 이야기에 귀 기울여보자. alt 김송이 학예연구사 전시를 개최하며 〈미국과 함께 한 독립운동〉 특별기획전은 한미수교 140주년을 기념하는 전시입니다. 이번 전시에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한미 군사합작에 참여하였던 OSS 장교, 클라이드 사전트의 소장사진이 처음으로 공개됩니다. 한국광복군은 중국에서 활동하고 있던 미국 OSS와 독수리작전을, 워싱턴 OSS 본부는 한국인 비밀요원들과 냅코작전을 계획하였습니다. 미주 한인들은 미군으로 참전하거나 한인경위대를 조직하였고 전시공채 구입 등 적극적으로 미국의 전쟁을 도왔습니다. 한국의 독립운동은 미국과 함께하였고,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한미동맹이 시작되었음을 이번 전시를 통해 확인해보시기 바랍니다.  한국광복군과 OSS, 군사합작과 독수리작전 1941년 12월 일제의 하와이 진주만 기습 공격 이후, 일제는 한미 공동의 적이 되었습니다. 1945년 중국에서 활동 중인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군인 한국광복군은 연합군과 함께 대일항전에 참전하고자 했고, 미국의 전략첩보기구인 OSS는 일제가 점령하고 있던 한반도에 대한 적후방 공작에 한국인들을 활용하고자 했습니다. 광복군과 OSS의 이해관계가 맞물려 양측의 군사합작이 이루어졌고, ‘독수리작전’이라는 작전명으로 계획되었습니다. 이는 한미수교 이래 처음으로 맺어진 한미동맹이었습니다.  미국의 대일항전에 참전한 한국인들 1941년 12월 미국이 일제와 전쟁을 시작하자, 한국인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미국의 대일항전에 참여하였습니다. 미국의 승리가 곧 조국의 독립으로 이어진다는 희망 때문이었습니다. 이들은 OSS가 추진하는 냅코작전²에 참여하였고, 미군에 입대하여 직접 대일작전에 참전하기도 했습니다. 또 한인경위대(맹호군)를 조직하고 전쟁비용을 마련하는 ‘전시공채’를 매입하여 미국의 대일항전을 돕기도 했습니다.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데에는 한국인들의 기여도 적지 않았습니다. 최초로 공개한 한국광복군 OSS훈련 사진 2021년 독립기념관은 독수리작전 미국 측 책임자였던 클라이드 사전트의 아들, 로버트 사전트(Robert Sargent)로부터 독수리작전의 실상을 알 수 있는 사진을 입수하였습니다. 이것은 전시기획을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고 이를 위해 작년 9월부터 전시를 준비할 수 있었습니다. 로버트 사전트가 제공한 사진 48점 중에는 한국광복군의 OSS 훈련 실상이 확인되는 사진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특히 무선전신(통신)과 사격 훈련 모습이 공개되었는데, 헤드셋을 끼고 모스부호기계를 누르는 모습과 미국 교관의 시범을 보면서 총기훈련을 받는 모습입니다. 그간 광복군과 OSS 간 공동작전에 대한 사진이 7점에 불과했는데, 이번에 최초로 공개되는 사진들을 통해 독수리작전의 실상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alt 최초 공개한 한국광복군 OSS  사격훈련사진(좌) / 최초 공개한 한국광복군 OSS 무선통신 훈련사진(우) 학예사가 추천하는 관람 포인트 한국광복군 제2지대 이범석과 관련된 사진들, 한국광복군 제3지대원 김우전과 OSS 중국전구의 클래랜스 윔스(Clarence N. Weems)가 힘을 합쳐 완성한 한글암호표, 한국광복군 OSS훈련 당시 사용한 동종의 총기(스프링필드 소총, 톰슨 기관단총), 미군에 입대한 안창호 자녀들의 사진, 한인경위대(맹호군) 사진 등에 주목하여 관람하시길 바랍니다. 또한 전시장 내에는 독수리작전과 냅코작전 등의 OSS비밀문서 내용을 확인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국문과 영문으로 적힌 문서를 직접 꺼내어 읽어보는 체험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alt 전시를 준비하며 한국광복군과 미국 OSS 간 군사합작인 독수리작전이나 미국 OSS본부가 추진한 냅코작전은 모두 일급비밀이었습니다. 전시는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실질적인 유물을 보여줘야 하는데, 남아 있는 유물이 없는 상황에서 관람객들에게 이를 어떻게 전달할까 고민을 많이 하였습니다. 기억나는 점은 한국광복군 OSS훈련과정에서 사용했던 총기가 이번에 최초로 공개된 사진을 통해서 확인되었는데, 마침 동종의 총기류가 전쟁기념관에 소장된 것을 확인하고 대여하여 전시할 수 있었습니다. 이 지면을 빌려 협조해 준 전쟁기념관에 감사드립니다.  관람객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 올해 한미수교 140주년을 맞아 한미동맹은 제2차 세계대전 때 이미 시작되었고, 한국의 독립운동은 연합국인 미국과 함께하였음을 이번 전시를 통해 알 수 있었으면 합니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한국독립운동이 조국 독립을 넘어 인류의 자유와 평화를 지향하였기 때문이라는 점을 되새겼으면 합니다. ]]> Mon, 30 May 2022 13:21:39 +0000 67 <![CDATA[독자참여 이번 호 「독립기념관」을 읽고 빈칸을 채워주세요. 꼼꼼히 읽다 보면 정답에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alt alt아이콘을 클릭하면 퀴즈 정답을 보낼 수 있습니다.]]> Mon, 30 May 2022 13:22:42 +0000 67 <![CDATA[들어가며 우리의 자유와 평화는 결코 거저 얻어진 것이 아니다]]> alt 관동대학살을 묘사한 <잃어버린 역사>_신제남(1991) 우리의 자유와 평화는 결코 거저 얻어진 것이 아니다 누군가의 고결한 피와 눈물이 거름이 되었고 누군가의 무고한 희생이 있었기에 오늘의 나 그리고 우리가 가능했다 제노사이드(Genocide), 이른바 대량학살은         단지 많은 인간을 죽인다는 것이 아니라           어떤 집단의 멸종을 목적으로 한 대량 살육행위를 가리킨다.          일본 제국주의가 1894년 전후 시기부터 1945년 8월 15일 광복까지         한인을 대상으로 약 55년간 한반도 곳곳에서 자행한 대량·집단학살이 그 전형적인 예이다.          일제가 자행한 한인학살의 대표적 사례로는       1894년 동학농민운동 시기 벌어진 농민군학살,        1895년~1900년대 초 의병전쟁 시기 곳곳에서 자행된 의병학살,         1919년 3·1운동 당시 무고한 주민들이 희생당한 제암리학살,        1920년 중국 연변·남만주 서간도지역에서 자행된 간도학살(또는 간도참변·경신참변),          1923년 일본 관동대지진 발생 후 수천 명이 살상당한 관동대학살 등을 들 수 있다.        이외에도 일제가 패망하기 직전·직후에 저지른 중국 하이난섬 대규모 조선인 학살사건이나         사할린 미즈호 학살사건·카미시스카 학살사건·오키나와 구메지마 학살사건 등과 같이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여러 학살사건이 있다.       일제의 학살로 희생당한 한인은 약 8백만 명에 이르며        일제강점기였던 1910년부터 1945년에 희생된 한인들만 약 5백만 명에 이른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러한 학살사건 대부분은 불문에 부쳐졌고        지금껏 진상이 명확히 드러나지 않은 사실로 존재하고 있다.        참변의 실상을 널리 알리는 것과 진상규명이 시급한 실정이다.    ]]> Thu, 30 Jun 2022 09:50:51 +0000 68 <![CDATA[톺아보기 일제가 자행한 한인학살, 그 만행의 진상을 파헤치다]]> 글 장세윤(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역사연구소 수석연구원) 우리 민족이 일제의 식민지에서 벗어난 지 77년이 되어가지만, 일제강점기 혹은 독립전쟁기에 자행된 일제 당국이나 군경·민간인에 의한 ‘한인(조선인) 학살’ 만행의 진상은 아직도 제대로 규명되지 않고 있다. 심지어 최근에는 일부 외국인이나 한국인 학자들에 의해왜곡된 주장까지 나오고 있다. 일제가 자행한 한인학살에 대한 진실 규명이 절실히 필요한 상황이다. alt 관동대지진 당시 한인학살을 묘사한 가와메 테이지 그림   일본군이 자행한 근대시기 첫 한인학살 1894년 전후 시기부터 1945년 8월 15일 일본 제국주의 침략세력의 패망 전후 시기까지 약 55년간 일제 침략세력은 국내외 각지에서 한인학살 만행을 벌였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 1895년~1900년대 초 의병전쟁, 1919년 3·1운동, 1920년 10~12월 중국 연변·남만주 서간도지역의 간도참변(경신참변), 1920년 러시아 연해주 4월 참변, 1923년 9월 일본의 관동대지진 등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근대시기 일본군의 첫 한인학살은 1875년 9월 일본 군함 운요호(雲揚號)가 벌인 조선 연해 강화도 등 강화해협에 대한 불법측량과 침입에서 비롯되었다. 9월 20일 운요호는 강화도 초지진에서 조선군이 공격하자 초지진에 포격을 가한 뒤 이어 영종도에도 포격을 가하고 일본군 22명을 영종도에 상륙시켜 조선군과 전투를 벌였다. 조선군이 근대식 대포와 소총으로 무장한 일본군을 상대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일본군은 수비하던 조선군 35명을 죽이고 다수의 포와 화승총 등을 약탈하였다. 또한 일본군은 철수하면서 영종도에 설치된 영종진의 공공건물과 민가에 방화하여 큰 피해를 입혔다. 이는 한국근대사상 일본군 한인학살의 효시였다. alt 관동대지진 당시 파괴된 동경 은좌거리(일본제작 사진엽서)(좌) / 운요호(우) 무자비하게 시행된 동학농민군 학살 신영우 교수(전 충북대)는 『1894년 일본군의 동학농민군 학살』 논문에서 일본군 보고문서 『주한일본공사관기록』과 관군 기록 『순무선봉진등록』 등을 근거로 ‘일본군 책임 아래 2만 명에서 5만 명까지 이르는 많은 동학농민군이 학살되었다’고 추정하였다. 실제로 일본군 남부병참감 이토 스케요시 중좌는 동학농민군 탄압의 실질적 주역인 미나미 고시로 소좌에게 1894년 11월 19일 다음과 같이 지시하였다.               ① 동학당은 현재 충청도 충주·괴산 및 청주 지방에 군집해 있고 그 여당(餘黨)은 전라·충청 양도 소재 각지에 출몰한다는 보고가 있으니, 그 근거지를 찾아서 이를 초절(剿絶, 무력으로 모조리 끊어 없앰)할 것.        ② 조선정부의 요청에 따라 후비보병 제19대대는 다음 항에서 가리키는 3로로 나누어 진군하고, 조선군과 협력해서 연도(沿道)에 소재하는 동학당의 무리를 격파, 그 화근을 초멸(剿滅, 무력으로 모조리 없애버림)해서 재흥(再興)의 후환을 남기지 않음을 요함. (중략) 다만 이번에 동학당 진압을 위해 전후로 파견된 조선군 각 부대의 진퇴와 군수품 조달은 모두 우리 사관(士官: 장교)의 명령에 따라 하게하되, 우리 군법을 준수케 할 것이며 만일 위배하는 자가 있으면 군율에 따라 처분될 것이라고 조선정부로부터 조선군 각 부대장에게 이미 시달되어 있으니, 세 갈래 길로 이미 출발했거나, 또는 장차 출발할 조선군의 진퇴는 모두 우리 사관으로부터 지휘·명령을 받아야 할 것임.      이처럼 동학농민군의 탄압은 일본군 주도로 조선군을 철저하게 ‘초절’·‘초멸’한다는 방침으로 무자비하게 시행되었다. 당시 동학농민군 탄압의 선봉장이었던 미나미 고시로는 후일 보고서에서 “많은 동학당을 죽이는 방침을 취하고 있다. 다소 살벌하지만, 훗날 다시 일어날 가능성을 제거하기 위해 명령에 따르고 있다.”라고 실토하였다.       alt 미나미 고시로가 동학농민군 학살 집행 내용을 기록한 「동학당정토(東學黨征討) 경력서」 _박용규 제공 군사적 침략을 위해 감행된 의병 학살 1904년 러일전쟁을 계기로 일제는 한반도에 대한 군사적 침략을 감행하였다. 이는 종전에 개항장을 중심으로 한 부분적 군대 파견과는 달리 한반도에 대한 전면적 군사지배의 실행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일본군보다는 오히려 관군을 상대로 싸워야 했던 전기의병 때와 달리 러일전쟁 이후의 의병들은 일본군과 전면전을 벌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1906년 중반 충청남도 홍주의병의 봉기는 일본군과 대규모 접전을 벌인 대표적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일본군은 1906년 5월 19일 1,200여 명의 의병들이 점령한 충청남도 홍주성(지금의 홍성)을 5월 31일 새벽에 기습하여 빼앗았다. 이를 홍주성전투라 부른다. 이후 일본군은 6월 7~9일 경까지 무자비한 의병 수색과 탄압을 자행하였다. 이 과정에서 의병 300명이 학살된 것으로 파악된다. 홍주성전투 직후 부임한 군수 윤시영의 일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있다.  “의병 시신 83구를 매장했고, 또 목이 잘린 시신 15구를 찾아내 6월 8일 매장하였다. 사상자가 몇백 명인지 알 수 없으며, 사방 수십리 지경 안에는 인적이 끊기고 잡힌 사람이 160여 명인데, 모두 차례로 죽임을 당했다는 것을 들으니 심히 참혹하였다.” 또한, 이 전투에 참가한 의병장 유준근은 후일 『마도일기(馬島日記)』에서 ‘의병 300여 명이 전사했다’고 기록하였다.        alt 〈홍주성 수복〉 민족기록화_장리석(1975) 군사적 침략을 위해 감행된 의병 학살 1904년 러일전쟁 발발 이후 일본군의 의병 학살은 대체로 3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 첫 번째는 러일전쟁 이후부터 1908년 상반기까지이다. 1906년 5월부터 의병 학살이 시작되어 1908년 6월까지 약 2년간 통계상으로는 의병 11,419명이 학살된 것으로 파악된다. 특히 1907년 8월 군대해산 직후 의병전쟁이 격화하면서 일본군의 학살에 비례하여 의병들의 희생이 컸던 것으로 분석된다. 두 번째는 1908년 하반기 이후부터 1910년 8월 대한제국의 멸망 전후 시기이다. 1909년 9월부터 2개월간 일본군은 주로 호남지역을 대상으로 소위 ‘남한대토벌작전’이란 대규모 탄압을 전개하여 의병과 민간인들에게 큰 피해를 주었다. 세 번째는 1910년 일제강점기 이후로 일본군 수비대가 종전의 분대 중심에서 소대·중대 중심으로 배치되고, ‘토벌’보다는 ‘일상적 감시체제’로 전환되는 단계이다. 1910년대에 헌병경찰제도가 시행되면서 식민지 무단통치 체제가 확립되어 갔던 것이다.          일본군과 지속적·대규모 전투가 이루어져 많은 의병 희생자가 나온 시기는 1907년 8월 이후의 후기의병 시기로, 이때 일본군이 집중적으로 의병 학살을 자행하였다. 일본군이 나중에 정리한 『조선폭도토벌지』 통계를 보면 1906년부터 1911년까지 의병 17,779명이 희생된 데 반해 일본군측 피해는 136명에 불과하였다. 특히 이 통계를 보면 1907년부터 1909년까지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희생된 사망자(전사자)와 부상자 숫자를 비교해보면 부상자보다 사망자 숫자가 훨씬 많은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는 일반적 전투나 전쟁 사상자 숫자와 비교해보면 매우 비정상적인 것으로, 일본군이 의병들을 학살했음을 실증하는 통계이다. 이 밖에도 너무나 많은 학살과 만행 사례가 있지만, 지속적이며 장기적 차원에서의 조사·연구·교육은 아직 미흡한 상황이다.   alt 서울 마포에서 자행된 일본군의 김성삼·이춘근·안순서 의병 학살(1904.9.21)(좌) / 평남 성천에서 체포된 최후의 조선의병장 채응언(1915.7)(우) 넋을 달래기 위하여 남아있는 과제 우리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일제 당국과 군경·민간인들에 의한 한인학살과 살상 등의 만행을 잘 알지 못하고 있다. 특히 ‘사할린 미즈호 마을’과 ‘가미시스카 경찰서의 학살사건’, ‘오키나와의 구메지마 학살사건’ 등은 1945년 8월 15일 이후 발생했다는 점에서 우리를 더욱 충격에 빠뜨리며, 가슴을 아프게 한다. 이렇듯 일본 점령지와 한인 강제동원 지역 등에서 더 많은 학살 사례를 조사·규명하여 억울하게 숨져간 한인들의 넋을 달래야 할 것이다. 지난 2019년 8월 초에 방송된 KBS-1TV의 특집다큐 〈사할린, 광복은 오지 않았다〉를 취재한 이정훈 기자는 당시 취재의 어려움을 이야기하면서, “정부의 공식 보고서조차 오류가 있다”고 하였다. “당초 사할린 미즈호 마을 학살사건 희생자는 27명으로 알려졌는데, 소련군 재판기록을 확인해보니 35명가량 된다”고 밝혔다. 앞으로 진정한 한일우호관계의 회복을 위해서는 과거 일본 제국주의 침략세력의 한국 및 한국인에 대한 침탈과 각종 만행의 피해에 대한 객관적 사실 정립과 올바른 역사인식의 확산·제고가 필요하다. 특히 일본 우익세력의 학살만행 부정을 비판할 필요가 있다. 또 추후 국내외의 새로운 자료를 발굴·활용하여 일본 제국주의의 한국침략과 강점기간에 자행된 대학살을 세계적·보편적 관점인 ‘제노사이드(Genocide, 대량학살)’의 관점에서 체계화하고 그 진상을 널리 전파할 필요가 있다.  ]]> Thu, 30 Jun 2022 10:17:36 +0000 68 <![CDATA[만나보기 장암동 학살의 참혹한 진상을 국제사회에 고발하다]]> 글 장세윤(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역사연구소 수석연구원) 일본군은 1920년 8월 소위 ‘간도지방 불령선인(不逞鮮人) 초토(剿討)계획’을 세우고 같은 해 10월 ‘훈춘사건’을 조작하여 소위 ‘간도출병’을 단행하였다. 이에 맞서 독립군의 ‘청산리 독립전쟁’이 전개되었다. 독립군에게 큰 피해를 입은 일본군은 결국 독립군 추적에 실패하고 난 뒤 1921년 5월까지 북간도 및 서간도 지방에서 대대적 학살만행을 저질렀다. 이를 ‘간도학살(경신참변, 간도참변)’이라고 한다. 당시 일제가 자행한 간도학살을 직접 목격한 의료선교사 스탠리 마틴은 한인들의 피해 상황을 조사·촬영한 뒤 일제의 만행을 국제사회에 폭로하였다. alt 스탠리 마틴(좌) / 간도학살에 희생된 동포들을 위한 합동 장례식(우) 일본군이 저지른 천인공노할 만행 강덕상·가지무라 히데키 편, 『현대사자료 28(조선 4)』(도쿄 미스즈서방, 1972)에는 ‘1920년 가을 중국 연변지역(북간도)에 출동한 일본군 제28여단이 이 지역에서 조선인 522명을 죽이고 조선인 가옥 534채를 불태웠는데, 재산 피해액은 66,850엔(원)으로 추정된다’는 통계를 낸 기록이 실려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보다 훨씬 많은 인명 및 재산 피해가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이처럼 일본 군경의 천인공노할 만행에 의한 참혹한 탄압사례는 헤아릴 수조차 없다. 독립운동 후원이나 주도 혐의자를 총살하거나 전투 중이거나 도주한 자를 사살하였고, 군자금 모집이나 독립운동 혐의자를 참살(목을 베는 것) 및 자살(총칼로 찔러 죽이는 것)하였다. 또한 타살·고문·생매장·방화·약탈·강간 등 극히 잔인한 방법이 모두 동원되었다. 연길현 구사하에서 피난간 창동학교 교사 정기선을 체포하여 얼굴가죽을 벗겨내고 눈알을 빼서 서씨집 가족과 함께 묶은 뒤 집에 가두어놓고 불을 질러 태워 죽인 사례만 보아도 일제가 얼마나 참혹한 방법으로 우리 민족을 탄압하였는지 알 수 있다. alt 대대적 한인학살이 벌어졌던 장암동(좌) / 일제의 간도학살 만행을 보도한 미국 신문기사 『시카고 데일리』(1920.12.11.)(우) 장암동 학살을 알린 스탠리 마틴 이 무렵 ‘제2의 제암리 학살사건’이라 할 수 있는 장암동 학살사건이 일어나 많은 내외국인을 놀라게 하였다. 1919년 3·1운동 당시 수원 제암리 학살사건 현장을 직접 답사·조사하고 사진을 찍어 국내외에 널리 알린 스코필드 박사가 있었듯이, 1920년 10월 말의 중국 길림성 용정 장암동 학살사건 역시 당시 연변지역에서 의료선교사로 활동하고 있던 스탠리 마틴(Stanley H. Martin, 1890~1941)에 의해 진상의 일부가 국내외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캐나다인 장로교 선교사였던 마틴은 장암동참변 현장을 목격한 뒤 다음과 같이 기록하여 참혹한 진상을 널리 알렸다. “10월 31일, 우리들은 찬랍파위촌(瓚拉巴威村, 장암동을 가리킴)에 사실을 알아보러 갔다. 목격자 증언에 따르면 (10월) 29일 새벽에 무장한 (일본군) 보병 한 부대는 이 기독교 마을을 포위하고 산적한 밀짚 위에 방화하며, 남자라면 노인과 어린이를 가리지 않고 집밖으로 끌어내어 다 사살하고, 채 죽지 않은 자는 불속에 집어넣고, 집안에서 울면서 이 비참한 광경을 보는 사자(死者)의 어머니와 처자의 가옥을 또 불질러 전 마을이 불타고 말았다. (중략) 잿더미 속에는 시체가 즐비하여서 우리들은 이 잿더미를 헤치고 노인의 시신을 보았는데, 몸에는 총탄자국이 여러군데 있고 몸은 벌써 다 타버리고 간신히 목만 붙어 있었다. 우리는 사진을 몇장 찍고 다른 데로 갔는데, 방화한 지 36시간이 지났는데도 시체타는 악취가 나고 지붕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중략) 내가 알고 있는 36개 촌에서만 피살자가 모두 140명이었다.” 이 사건 직후 일제 군부는 외국인 선교사들의 참상 폭로와 국내외 각지 전파를 우려하여, 중국 지방 관헌이나 연변의 용정지역에 있는 선교사들에게 일본군의 학살을 변명하는 각서를 보내거나 무마하는 후안무치한 조치를 단행하는 등 진상을 은폐하고 왜곡하기에 급급한 추태를 보였다.  그러한 내용은 「사이토 대좌에게 보내는 길림독군공서 공함 제288호」 및 「미즈마치 대좌가 용정촌 외국인 선교사에게 보내는 각서」, 『조선군사령부 간도출병사』에 상세히 수록되어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외무부는 1920년 10월 9일부터 11월 30일까지 중국 동북의 북간도와 서간도 일대에서 피살 3,469명(이 중 북간도 2,626명, 서간도 843명), 피체 170명·강간 71명·민가 전소 3,209건·학교 전소 36건·교회당 전소 36건·곡물 전소 5만 4,045석의 피해가 있었다고 집계하여 발표하였다(『독립신문』 87호, 1920.12.18). 그러나 일본군은 사살 494명·체포 707명으로 축소보고 했다. 한편 중국 당국은 피살 324명·재산피해 100만 원가량으로 조사하였다. 결국 일제 군경은 이러한 만행으로 한인사회를 초토화하여 독립운동의 근거지를 없애는 데 일시적으로 성공한 듯 했다. 간도학살 후 일제의 무력탄압이 강화되면서 친일세력이 확산되고 일제 측의 한인 지배정책이 강화되는 결과를 초래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후 한인들의 저항과 민족운동은 줄기차게 지속되어 일본 제국주의 세력을 괴롭혔다.  alt 당시 용정에 있던 푸트(W.R.Foote)  목사가 장암동 학살의 참변을 외부에  알리는 영문 편지(1920.10.30.)(좌) / 제창병원에서 진료 중인 스탠리 마틴(우) 스탠리 마틴의 업적을 기리다 스탠리 마틴은 캐나다 뉴펀들랜드의 세인트존스시에서 태어났다. 1916년 6월 온타리오에 있는 퀸즈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캐나다 장로회 소속 선교사로 한국에 파송되었다. 같은 해 중국 길림성 용정에서 제창(濟昌)병원 원장으로 의료선교 활동을 시작했다. 1919년 3월 13일 용정에서 펼쳐진 독립만세운동으로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자 이들을 제창병원으로 옮겨 치료하고, 희생자들을 위해 장례를 치러줬다. 또 병원 및 부속 건물을 독립운동가들의 피신처 및 독립운동 선전물 인쇄장소 등으로 제공했다. 1920년 10월 말 북간도 간도학살 피해 지역을 방문해 한인들의 피해 상황을 조사·촬영했으며, 희생자 유족을 위로하는 예배를 열고 조의금을 전달했다. 더불어 보고서를 작성해서 캐나다 토론토시 장로교 전도본부에 전달하고, 토론토 그로브지에 보도하게 하는 등 일본제국주의 세력의 살상행위 등 만행을 국제사회에 폭로하였다.            1927년 3월까지 제창병원장으로 재직하다가 서울 세브란스의전 흉부내과(호흡기 내과) 교수로 임용되었다. 1928년 최동·이용설 교수와 함께 한국 최초의 항결핵회를 조직하고 회장으로 활동하며 결핵 치료와 계몽활동에 노력했다.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이듬해에 캐나다로 돌아간 후 1941년 심근경색으로 타계했다. 그의 외아들 역시 한국전쟁에 참전했다가 1950년 9월 전사하고 말았다. 딸 마가렛 무어 역시 휴전 직후 남편과 함께 한국에 와서 1984년 귀국할 때까지 극작가 겸 연출가로 선교와 계몽에 많은 공을 세웠다. 1968년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을 기리며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alt 학살 현장에 세워진장안동 참안 유지 기념비 일제 만행의 잔혹성과 야만성을 어떻게 해석·평가할 것인가 일제의 각종 만행과 학살을 단순히 일본인들의 잔인한 민족성으로 봐야하는가, 아니면 전쟁 상황이라는 특수한 상황 혹은 일본인들의 한인에 대한 차별적 인식이나 인종적 편견, 전통적으로 지속되어 오던 조선·조선인 멸시관 등으로 봐야할까. 일제 당국과 조선총독부의 차별·억압·수탈정책, 1931년 9월의 만주사변(9·18사변)과 중국 동북지방 침략, 1937년 중일전쟁 도발, 1941년 12월의 아시아태평양전쟁 도발 등으로 연속되는 전쟁 상황 즉 특수한 상황이라는 외부적·국제적 요인을 고려할 수 있지만, 다른 요인은 없었을까.         미국의 저명한 문화인류학자 루스 베네딕트는 『국화와 칼 - 일본문화의 틀』(을유문화사, 2019)에서 일본인의 민족성을 위계서열 의식, 은혜와 보은, 그리고 의리에 대한 독특한 도덕 체계, 죄와 악에 대한 의식이 결여된 대신 수치심을 기본으로 하는 일본의 문화 체계로 설명하였다. 손에는 아름다운 국화, 허리에는 차가운 칼을 찬 이중성의 일본인으로 결론지었다. 물론 이러한 미국학자의 평가를 우리가 그대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지만, 일제의 한인학살 만행 등을 다각도로 조명하고 그 배경과 원인을 규명하기 위해서는 참고할 만한 의견이다.              앞으로 일제강점기 및 그 전후시기에 자행된 일본 군경 및 기관·단체·민간인 차원에서의 다양한 한인학살 관련 자료 발굴 및 증언 채록을 해야하며, 한국정부 및 민간차원에서의 적극적 조사·연구·교육이 필요하다. 또 한·중·일·러·미국 등 여러 나라들의 국제적 연대와 협력을 모색해야하며, 학계의 공동연구 및 협력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희생자 추모 기념사업을 추진하는 등 다양한 대책을 적극 추진할 필요가 있다. ]]> Thu, 30 Jun 2022 10:24:23 +0000 68 <![CDATA[이달의 독립운동가 중국 상하이의 최초 한국인 독립운동 단체 ‘동제사’에 참여한 김갑·민제호·한흥교]]> 글 독립기념관 전시부 alt alt 당시 상하이의 와이탄(外滩) 전경 신규식을 중심으로 조직된 동제사 1910년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자, 독립운동가들은 국외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이어 나갔다. 1912년 중국 상하이에서 신규식을 중심으로 박은식·신채호·조소앙·김규식 등은 독립운동 뜻을 함께하며 동제사(同濟社)를 조직하였다. 상하이 최초 독립운동단체 동제사는 중국혁명인사들과 교류하며 신아동제사(新亞同濟社)를 결성하기도 하고, 상하이의 한국유학생들을 위해 박달학원(博達學院)을 세워 청년교육에 앞장섰다. 이후 동제사에서 활동했던 독립운동가들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이후에는 임시정부의 여러 직책을 역임하거나 지원하면서 독립운동을 이어 나갔다.  alt 신규식(좌) / 「동제사 창립 취지문」 _1914 독립기념관 소장(우)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에 헌신한 김갑 김갑은 1889년 부산 동래에서 출생하였고 본명은 김진원(金瑨源)이다. 경상도 지역의 첫 비밀결사인 대동청년단에 참여하였던 그는 상하이로 망명 후 동제사 회원이 되었다. 그리고 1919년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상하이 프랑스 조계에 수립되자,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경상도 대표의원(’19년)·노동총판(’25년)·재무장(’27년) 등을 역임하며 독립운동을 이어 나갔다. 1930년에는 김구·조완구·엄항섭·이시영 등과 함께 한국독립당 창당에 참여하여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그는 1933년 44세의 젊은 나이로 서거하는데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국민장으로 애도하였다. 정부는 김갑의 공적을 기려 1986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alt 김갑(좌) / 김갑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재무장에 선임됨을 알리는 기사, 「임정소식」『신한민보』_1927.12.22(우) 다방면으로 임시정부를 지원한 민제호 민제호는 1890년 서울 종로에서 출생하였고 민우명(閔禹明)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1913년 상하이로 망명한 민제호는 동제사에 참여하였다. 1919년 4월 제2회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선출된 그는 임시정부 운영자금을 위해 경기도 모집위원으로 참여하였다. 1919년부터 1929년까지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원을 지내며 대한적십자회·상하이 대한인 거류민단을 통해 임시정부를 지원하였다. 1932년 윤봉길 의거 이후 일제의 탄압을 피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같이 피신하였다. 그러던 중 병을 얻어 1932년 42세의 나이로 항저우에서 서거하였다. 정부는 민제호의 공적을 기려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alt 민제호가 참여한 대한적십자회 관련 기사,『신한민보』 _1920.4.16(좌) / 민제호가 참여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관련 기사, 「선언문」 『신한민보』 _1921.4.21(우) 의료활동으로 독립운동을 펼친 한흥교 한흥교는 1885년 부산에서 출생하였고 한진산(韓震山, 韓辰山) 또는 한생(恨生)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그는 일본 오카야마(岡山) 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후 1911년 상하이로 망명하였다. 신해혁명에 적극 참여하던 한흥교는 중화민국 육군 군의정(軍醫正)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또한 1912년 신규식·조성환 등과 함께 동제사 조직에 참여하면서 한국 독립운동가들의 의료를 도맡았다. 1935년부터 광복될 때까지 산시성 타이위안에서 대동병원을 운영하며 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 광복 후 고국으로 돌아와 의료활동을 이어 나간 그는 1967년 82세로 서거하였다. 정부는 한흥교의 공적을 기려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alt 한흥교가 중국 신해혁명에서 세운 공로로 받은 훈장_1911 한종수 소장 / 중국육군 군의 시절 한흥교 _한종수 소장 한흥교 가족사진(오른쪽 한흥교)_독립기념관 소장 alt ]]> Thu, 30 Jun 2022 10:32:08 +0000 68 <![CDATA[독립운동 사적지 동제사를 결성한 신규식의 독립운동 현장]]> 정리 편집실 중국 상하이 독립운동단체의 효시 동제사 동제사(同濟社)는 1912년 7월 4일, 신규식이 중국 상하이에서 조직한 최초의 한국 독립운동 단체이다. 신규식은 육군무관 출신으로 국내에서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다가 1911년 3월에 상하이로 망명 후 동제사를 결성하였다. 신규식은 신해혁명에 희망을 걸고 있었다. 이후 많은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이 독립을 갈망하며 중국혁명운동의 근거지인 상하이지역으로 모여들었다. 신규식은 국내에서 계몽운동을 전개하여 명성을 떨쳤던 박은식이 만주를 거쳐 상하이로 오자 그와 더불어 애국지사를 결집하여 민족운동을 추진할 단체결성을 추진하였다.        동제사라는 명칭은 ‘동주공제(同舟共濟)’를 줄인 말로 ‘모두 한마음 한뜻으로 같은 배를 타고 피안(彼岸)에 도달하자’라는 것을 의미한다. 진정한 설립 목표는 국권회복에 두었다. 본부는 상하이에 두었으며, 베이징·톈진·만주 등 중국지역과 미주·일본에 지사를 두었다. 상하이로 망명하는 독립지사와 이주하는 동포 수가 증가함에 따라 조직은 점차 확대되어 명실상부한 독립운동단체로 성장하였다. 동제사는 1919년 상하이 임시정부가 수립되기 전까지 중국 내 독립지사들의 구심체 역할을 하였다. 신규식이 순국한 1922년 9월 이후의 활동은 알려지지 않았다. alt 신규식의 상하이 거주지 1911년 신규식이 상하이 망명 후 거주 및 활동했던 건물이다.(2016년 촬영)  주소 : 상하이 황푸구 남창로 100롱 5호  동제사를 함께 이끈 신규식과 신건식 신규식은 1880년 2월 22일 충북 문의군 동면 계산리에서 태어났다. 1900년 9월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하여 전술학·군제학·병기학 등 다양한 신학문을 접하였다. 육군무관학교를 졸업한 뒤 1902년 7월 육군보병참위에 임관되어 문무를 겸비하고 근대문물과 사상을 습득하였다. 1905년 일제에 의한 을사늑결 소식에 의병을 일으켰으나 실패하고 음독자결을 시도하였고, 이 사건으로 오른쪽 시신경이 마비되고 말았다. 이후 1910년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자 재차 음독자결을 시도했으나, 대종교 종사 나철에 의해 목숨을 건졌다. 이듬해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여 신정(申檉)으로 개명하고 쑨원(孫文)이 이끄는 중국동맹회(中國同盟會)에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가맹한 뒤 10월 무창의거에 참가하여 신해혁명에 공헌하였다. 1912년에는 동제사를 조직하여 이사장이 된 그는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설립되자 법무총장으로, 그 후 다시 총리대리로 외무총장을 겸직하였다. 이후 1922년 3월에 모두 사직하고 병으로 요양하다가 9월 25일 사망하였다. 신건식은 신규식의 10살 아래 동생으로 동제사에 가입한 이래 지속해서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1921년 국내에서 군자금을 모집하다가 압록강에서 헌병에게 체포되어 모진 고문으로 불구의 몸이 되었다. 1922년 병보석으로 신의주감옥에서 출소한 후 상하이로 탈출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했다. alt 신규식·신건식 집터당시 주소는 '충북 문의군 동면 계산리'로 기록되어 있다. 현재 신건호(인차2리 거주, 63세)의 증언에 의해 청원군 가덕면 인차리로 위치를 확정하였다.주소 : 충북 청주시 가덕면 인차리 132  위치고증 : 「신규식 공적조서」와 「신건식 공적조서」에 기록된 본적지를 통해 위치를 확인하였다.  ]]> Thu, 30 Jun 2022 10:36:59 +0000 68 <![CDATA[아름다운 인연 유관순 일가의 ‘대들보’ 조화벽과 영원한 ‘자유인’ 유우석]]> 글 김형목(사단법인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이사)   1919년 4월 4일부터 9일까지 이어진 양양 만세운동은 강원도 내에서 최대 규모로 펼쳐진 치열하고도 격렬했던 만세운동으로 기억된다. 당시 조화벽은 독립선언서 필사본을 버선 속에 감춰 양양지역 청년지도자들에게 전달하였고 이로써 양양 장터에서 독립을 외치는 만세함성이 크게 울려 퍼질 수 있었다. 훗날 유관순의 오빠 유우석과 결혼하여 평생 독립운동과 백성교육에 헌신한 그의 뜨거웠던 발자취를 따라가 본다. alt 조화벽과 유우석 조화벽, 식민지배의 모순을 인식하다 조화벽은 1895년 강원도 양양 감리교회 전도사 조영순과 어머니 전미흠 사이에 무남독녀로 태어났다. 감리교회는 1901년 10월 하디(R.A.Hardie) 선교사에 의해 강원도에 최초로 설립되었다. 영동지역은 전통적으로 유림세력이 주류를 이루었으나 화벽은 개신교 전래에 의한 부모님의 영향으로 일찍부터 남녀동등권을 인식하였다. 곧 개방적인 가정생활과 엄격한 신앙생활은 전통적인 가치관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밑거름이었다. 부모님은 신학문을 배우려는 그를 선교사들에 의해 여성교육이 일찍이 이루어지던 함경도 원산으로 유학을 보냈다.           성경학원과 루씨여학교에서 배운 다양한 교과목은 식민지배의 모순을 인식하게 하였다. 루씨여학교는 감리교 선교사들이 세운 이화·배화·숭의·호수돈여학교 등과 함께 기독교계를 대표하는 명문사립학교였다. 당시 중등교육을 받은 여학생은 매우 희소한 여성지식인 집단이었다. 일제강점기 농촌계몽운동을 담은 심훈 『상록수』의 주인공 최용신을 묘사한 내용이 이러한 사실을 방증한다. 화벽은 개성 호수돈여학교 보통과와 고등과에서 수학하던 중 3월 3일 개성지역 만세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이는 자신의 인생항로를 바꾸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양양 만세운동에 불을 지피다 조화벽은 호수돈여학교 비밀결사대 활동을 시작으로 항일운동에 직접 참여했다. 주요 구성원은 그를 비롯한 조숙경·김정숙·이경지 등이었다. 화벽은 그중 어윤희·권애라와 함께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는 한편 태극기 등을 기숙사 기도실에서 만들었다. 이들은 기도회를 마치고 삼삼오오 모여 거리에 나섰다. 시위대는 ‘찬미가’와 ‘독립가’를 부르며 독립만세를 외쳤고, 시민들도 가세하여 시위군중은 1,000여 명으로 늘어났다. 현장과 기숙사 등에서 체포된 이들은 일제 헌병대에 끌려가 상상을 초월한 고문을 받았다. 다행히 군수와 학교 당국의 설득으로 여학생 대부분은 석방되었다. 이에 조선총독부는 만세운동을 저지하고자 중등학교에 휴교령을 내렸고, 많은 학생들은 귀향하게 되었다. 이는 오히려 3·1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결정적인 계기로 이어졌다.   독립선언서 필사본을 버선에 넣은 화벽은 원산을 거쳐 양양 대포항을 통해 고향으로 돌아갔다. 일제경찰은 그를 관사로 끌고 가서 심문하였으나 그의 소지품에서 다행히 독립선언서가 발견되지 않았다. 화벽은 독립선언서를 교인 김필선에게 전달하였고, 이는 양양 만세운동의 불씨가 되었다. 양양지역 만세운동은 유교세력과 기독교세력·현산학교·양양보통학교 졸업생 등이 주축이었다. 농민들은 농악대를 앞세우고 주민들 참여를 독려하였다. 화벽은 목사와 교회 청년들과 여러 차례 회합을 통하여 다양한 세력의 중재·통합을 성사시켰다. 군수와 일제경찰은 이러한 분위기를 감지하고 경계와 감시를 강화하였다. 4월 4일 양양 장날에 장꾼을 가장한 주민들은 장터로 모여들었다. 이후 9일까지 치열한 만세시위가 전개된 후 5월 9일까지 군내로 확산되었다. 유관순 일가와 인연을 맺다 검거선풍이 강화되는 가운데 피신한 화벽은 그해 가을 호수돈여학교 졸업 후 공주 영명여학교 교사가 되었다. 여기에서 천안 아우내장터 만세운동의 주역인 유관순과 그의 오빠인 유우석을 만나 영원한 만남을 시작하였다. 화벽은 당시 공주 영명여학교 교감이었던 황인식 집에 같이 살고 있던 유관순 동생 인석과 관석을 보살피는 한편 훗날 유우석의 옥바라지도 정성을 다했다. 1923년 조화벽과 유우석은 백년가약을 맺어 부부로 탄생하였고, 이리하여 양양의 조화벽과 천안의 유관순은 올케와 시누이로 인연을 맺었다. 결혼 후 화벽은 호수돈여학교를 거쳐 원산 진성여학교 교사로 부임하여 활동근거지를 원산으로 옮겼다.           1932년 고향 양양으로 다시 돌아간 화벽은 남편과 함께 문맹퇴치를 위해 양양교회에서 운영하던 정명학원 교사로 활동하였다. 일제가 강제로 폐교시킨 1944년까지 무산 청소년들에게 새로운 배움터를 제공했다. 식민지 노예교육에 맞선 교육활동은 학생들에게 자존감을 높이는 든든한 기반이었다. 또한 양양부인상회 발기인 모임에서 이사로 참여하는 등 사회활동을 지속한 그는 이때 중풍으로 전신마비가 된 어머니를 12년간 지극정성으로 모시며 삼 형제를 길렀다.  alt 공주 영명학교 기숙사 터 유우석, 공주 만세운동에 나서다 유우석은 1899년 아우내장터 만세운동 주역인 유중권과 이소제 사이에 3남 2녀 중 장남으로 천안군 동면 용두리에서 태어났다. 다른 이름은 준석·관옥으로 유관순의 오빠이다. 그는 감리교회가 운영하던 장명학교를 졸업한 후 교사 김구응의 주선으로 공주 영명학교에 재학 중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영명학교는 영명여학교와 더불어 충남지역을 대표하는 기독교계 사립학교였다. 공주에서는 3월 12일과 15일에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이에 자극받은 영명학교 교사 김관회·이규상·현언동, 졸업생 김사현, 재학생 오익표·안성호, 목사 현석칠·안창호 등은 3월 24일 밤 영명학교 사택에 모였다. 이들은 4월 1일의 공주읍 장날을 이용해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이때 우석은 학생대표로서 3월 30일 영명학교 조수 김수철의 집에서 노명우·강윤·윤봉균 등과 만나 독립만세운동 계획에 대해 논의하였다. 이튿날 이들과 함께 기숙사에서 독립선언서 1,000여 매를 등사하고 대형 태극기 4개를 만들었다.           4월 1일 오후 2시 우석은 학생들과 함께 장터에서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군중에게 나누어 주고 선두에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만세소리가 천지를 진동하며 읍내로 파급되자 여학생들도 동참하는 등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일제 기마경찰은 군중을 강제로 해산시키려는 기세였다. 우석은 노명우와 함께 말고삐를 잡아채 일제경찰을 끌어내려 발길로 걷어차 실신시켰고, 현장을 본 다른 일제경찰은 우석을 칼로 후려쳤다. 간수들은 시위 당시에 입은 부상으로 법정에 걸어갈 수 없던 우석을 인력거에 태워 법정에 세웠다. 공주검사국으로 송치된 그는 이때 동생 유관순을 잠시 만나기도 했다. 이후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6월 형·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고 풀려났다. alt 경성법학전문학교 전경(1911) 사회운동과 사상운동을 병행하다 유우석은 출옥 후 배재학당에 편입하였고 이어 경성법학전문학교에 입학하여 재학 중 조국수호회를 조직해 활동하다가 구금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퇴학당하여 학업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화벽과 결혼 후 활동근거지를 강원도 양양과 함경도 원산 등지로 옮긴 그는 1926년 이향·조시원·김연창·한하연 등과 비밀결사체인 본능아연맹을 만들어 사상운동에 나섰다. 당시 공산주의 계열의 북풍회·화요회 등 각 분파는 세력 확장에 열중하고 있었다. 이주하·김삼룡·강기덕·장기욱 등이 원산과 서울을 빈번히 왕래함으로 일촉즉발할 분위기였다. 충돌의 도화선은 본능아연맹과 원산청년회 사이에 경리장부사건, 원산여자청년회에서 개최한 강연회 내용 등에서 비롯되었다. 본능아연맹의 공격을 받은 서수학이 중상을 입고 응급치료를 받다가 사망했다. 우석은 상해치사 혐의로 구속되어 함흥지방법원에서 3년 형을 선고받았고, 1928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정당방위로 판명되어 무죄가 선고되었다. 장기욱이 고소한 상해죄부분은 유죄가 인정되어 벌금 30원의 판결을 받았다. 이후에도 원산청년당 추진을 저지하려는 본능아연맹과 여러 차례의 연쇄적 충돌로 일제경찰의 개입을 초래하였다. 그는 이후 양양·강릉 등지 영동지역을 연합한 설악회를 조직해 항일운동을 전개하다가 구속되었다. 조국광복을 향한 열정은 파란만장한 인생역정으로 이어졌으나 조금도 굴복하지 않았다. 우석은 여성권익 옹호를 위한 활동에도 나섰고, 노동자 권익 향상에도 참여하는 등 사회운동에도 적극적이었다. 또한 해상상구회 부회장으로 해상승조원의 자구책을 위한 여러 방안을 모색하였으며, 원산의 대표적인 석산유치원이 경영난에 직면하자 후원회원으로서 활동했다. 이는 어린이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는 분위기를 반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부부가 함께 민주주의 수호에 앞장서다 광복 후에도 부부는 긴장을 놓을 수 없었다. 일본군에 징집된 아들 유제충이 돌아오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더욱이 광복은 이들이 바라는 방향과 달리 진행되었다. 미국과 소련은 한반도 지도를 펼쳐놓고 38선을 그었고, 양양도 두 토막이 나고 말았다. 이는 분단체제 고착과 더불어 이념적인 갈등을 증폭시켰다. 부부는 소련군의 박해를 받다가 결국 월남하여 서울에서 건국사업에 나섰다.        우석은 대한노동총연맹 위원장·전국혁명자총연맹 중앙집행위원·통일독립운동자 중앙협의회 간사·유도회청년회 총본부장·순국선열유족회 회장·독립노동당 부위원장 등을 맡았다. 자유롭고 통일된 대한민국 건설을 바라는 그의 심정과 달리 남북분단은 우리의 가장 비극적인 한국전쟁으로 귀결되고 말았다. 유유우석은 통일운동과 민주화운동을 전개하다가 1968년 5월 28일 사망했고, 동지들은 예총회관 광장에서 사회장을 거행했다. 정부는 그의 공을 기려 1982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조화벽 역시 건국사업을 위한 사회활동을 이어갔다. 임영신·박마리아 등과 함께 여성 권익옹호에 앞장섰다. 전쟁 중 막내아들 유제인을 폐렴으로 잃은 이후 서울 성북구 정릉 미아중앙교회에서 여선교회 회장으로 봉사하다가 1975년 9월 5일 사망했다. 며느리 김정애(전 3·1여성동지회장)는 “정신보다 물질에 대한 갈급증으로 목 타는 세상에서 참사람이자 참어른인 조화벽이라는 존재가 새삼 그립다.”고 회상했다. 정부는 그의 공을 기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오늘날 조화벽은 춘천의 윤희순, 철원의 곽진근과 함께 강원도의 3대 여성독립운동가로 꼽힌다. ]]> Thu, 30 Jun 2022 10:44:45 +0000 68 <![CDATA[끝나지 않은 독립운동 사도 광산, ‘군함도’의 전철을 밟을 것인가]]> 글 이계형(국민대학교 교양대학 교수) 요즘 그 어느 때보다도 ‘미래지향적’인 한일 관계를 강조하는 분위기다. 언뜻 보기에는 매우 긍정적이지만, 이면에는 일본의 과거사 문제를 덮자는 의도가 있어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곤란하다. 일본은 과거 제국주의시기에 저지른 잘못에 대해 지금껏 어떠한 사과나 반성조차 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7년 전 일본이 하시마 탄광(일명 군함도)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한 것이 바로 그 일례이다.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지옥섬 2015년 7월 5일 일본 내 ‘근대산업시설’과 ‘메이지산업혁명: 철강·조선·석탄 산업’ 관련 23곳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서구권에서 시작된 산업화가 비서구권 국가로 성공적으로 이전한 최초의 사례라는 점이 인정받은 것이다. 그런데 거기에는 일제시기 대표적인 전범기업인 미쓰비시중공업이 운영하던 나가사키조선소·다카시마 탄광·하시마 탄광· 미이케 탄광·미이케항구·야하타제철소 등이 포함된 것이 문제였다. 이 중 일부는 일본 정부가 강제동원이 없었다고 주장하는 역사 왜곡의 장소이자, 한인들의 강제노동 피해 현장이었다.       유독 시선을 끄는 곳은 하시마(端島) 탄광이었다. 하시마는 나가사키 반도에서 서쪽으로 약 4.5㎞ 떨어져 있으며, 큰 야구장 두 개를 합친 정도밖에 안 되는 작은 섬이다. 회색빛 섬의 모습이 1944년 완성된 해군 전함 ‘도사(土佐)’와 닮았다고 해서 군함도(軍艦島)라는 별칭을 갖게 되었다. 1810년 석탄이 발견되고 미쓰비시 회사가 1890년에 매입하여 석탄을 채굴하면서 하시마 탄광이 비롯되었다. 태평양전쟁 당시 이곳에 끌려간 많은 한인과 전쟁 포로들은 지하 1,000m 아래 경사진 좁은 곳에서, 서로의 몸을 고무줄로 묶은 채, 제대로 된 화장실도 없이 온도 40도가 넘는 곳에서, 하루 12~18시간의 강제노역을 해야만 했다. 당시 하시마를 일컬어 ‘지옥섬’, ‘감옥섬’이라 불렀다. 우리 정부의 늑장 대처가 가져온 결과 일본 정부가 하시마 탄광 건축물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하려 한다는 소식이 우리나라에 처음 알려진 것은 2008년 8월경이었다. 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가 나가사키시가 하시마 건축물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하고자 하며 근대화유산연구회를 발족했다는 사실을 전했다. 하지만 당시 우리 정부는 물론 언론도 이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러다 일본 정부가 2009년 5월 1일 하시마를 세계문화유산 잠정목록에 올린 뒤 2010년 3월에서야 우리 언론은 주목하기 시작했다. 이때 1980년대 ‘나가사키 재일조선인의 인권을 지키는 모임’이 하시마 탄광에서 한인 120여 명이 희생되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는 것과 소설가 한수산이 이를 취재하여 일본어로 『군함도』라는 소설을 발표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소설 『군함도』는 2016년에서야 한국어로 번역·출판되었고 2017년 7월 영화로 만들어졌다. 이처럼 우리 언론이 주목했을 때는 이미 나가사키시가 하시마를 관광상품으로 판매 중이었다. 그런데 상품안내서 어디에도 ‘태평양전쟁 당시 한인 등이 처참히 희생되었다’는 내용은 없었다. 당시 국내 언론은 ‘하시마 탄광의 세계문화유산 등재 자체를 반대하기보다는 하시마의 역사와 그곳 사람들의 삶과 죽음을 좀 더 고민하며 성찰해야 한다는 점’을 지적하는 정도였다. KBS-1TV는 〈역사스페셜〉 프로그램에 ‘지옥의 땅, 군함도’라는 방송을 내보냈고, 간혹 일간지에 하시마 탄광에 끌려갔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실렸지만 사실을 전달하는 정도에 그쳤다.  이후 2012년 7월 일본 정부가 하시마 탄광 등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하겠다는 구체적인 계획을 발표하자, 그제야 우리 언론은 비난 기사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우리 정부도 ‘사망 기록을 통해 본 하시마 탄광 강제동원 조선인 사망자 피해실태 기초조사’를 실시하여 2012년 12월 보고서를 공개했다. 이런 가운데 아베 내각은 2013년 9월 하시마 탄광을 비롯한 조선소와 부두 등 일본근대화의 산업 유산을 세계문화유산 후보로 공식 결정하고 유네스코에 제출했다. 물론 일본 정부는 강제징용자나 이들에 대한 가혹행위·노동착취·임금체불 등과 관련한 내용은 거론조차 하지 않았다. 한국 정부는 이에 발발하며 ‘이웃 국가의 아픔과 관련 있는 시설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하려는 것이 인류 보편적인 가치를 기리는 세계문화유산의 취지에 맞지 않는다’라는 점을 강조하며 철회를 요구했지만, 뒷북을 친 거나 마찬가지였다.  등재를 놓고 펼친 치열한 외교전 이후 우리 정부와 일본 정부는 유네스코를 무대로 치열한 외교전이 펼쳐졌다. 하지만 우리의 준비와 대응은 미흡했고 안일했다. 더욱이 일본이 10년 동안 준비하였고 유네스코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상황에서 외교를 통한 대응은 역부족이었다. 이에 우리는 철회 요구 전략을 바꿔 ‘조선인 강제징용 사실을 반영하여 등재하라’고 요구하고 나섰다. 이러한 노력에 힘입어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는 등재기간을 1850년부터 1910년까지로 한정하지 말고 전체 역사에 담을 것을 요구하였다. 그 결과 2015년 7월 제39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일본 근대산업시설의 등재가 최종 결정되었지만, 등재 결정문에 각주 형식으로 ‘강제징용’ 사실이 명시되었다. 이를 두고 우리 정부는 전방위 외교 노력이 이뤄낸 값진 성과이고 일본이 조선인 강제노역을 인정한 것이라며 자화자찬했다. 하지만 일본 정부가 ‘조선인 강제 노동을 인정한 것이 아니다’라고 반박하면서 합의는 무색해지고 말았다. 또한 하시마에 마련된 전시관에는 강제동원 사실 자체를 부정하는 증언들로 채워졌다.  일본 정부가 2017년 12월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 제출한 ‘보전상황보고서’에는 ‘강제징용’이란 내용은 없었고, ‘제2차 세계대전 기간과 그 후에 일본 산업을 지원한 한국인이 많았다‘라는 상당히 왜곡된 내용이 기술되었을 뿐이었다. 이는 일본 정부가 한국인의 강제 동원을 부정하며 배상을 거부하는 것과 맥을 같이한다. 2018년 6월 개막한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일본 측에 강제노역 등의 역사를 분명하게 알릴 것을 촉구했으나, 일본 정부의 태도는 여전히 바뀌지 않았다. 이에 2021년 7월에 열린 제44차 세계유산위원회는 일본 정부에 강한 유감을 표하며 이례적으로 경고하였다.  일본, 사도광산 ‘꼼수’ 등재 추진 2022년 1월 일본 정부는 니가타현 사도(佐渡) 광산을 세계유산 단독후보로 전격 추천했다. 일본 문화청 문화심의위원회가 사도 광산을 일본의 세계유산 후보로 선정한 지 꼭 한 달 만이었다. 수법도 하시마 탄광 때와 비슷하게 논란을 피하고자 1860년대 이전인 에도시대 무렵으로 시기를 한정했다. 2019년 7월 우리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판결에 따른 보복 조치로 일본 정부가 수출규제를 단행하여 한일 간에 갈등이 가시지 않았는데도 굳이 이를 추진했다는 것에 일본의 의도가 있어 보인다.   일본이 사도 광산을 문화유산 잠정목록에 올려놓은 것은 2010년 11월로 10년이나 더 된 일이었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우리 정부와의 갈등을 우려했는지 2017년·2018년·2019년 세 번 모두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추진을 위한 단일후보에서 탈락시켰다. 2019년에 한국에서 흥행한 ‘군함도’ 영화가 한몫했던 듯싶다. 2020년에는 ‘코로나19’로 인해 등록 추진이 보류되었다.그런데 2021년 12월 일본 문화심의회는 사도 광산 유적을 단일 후보로 선정하였다. 이때 한국 정부뿐만 아니라 일본 시민단체 ‘강제동원 진상규명 네트워크’도 일제강점기 당시 최소 1,141명의 한국인이 사도 광산에서 노역했다는 일본 정부의 공식문서를 발표하기도 했다. 한국 각계각층에서 즉각 철회를 촉구했으나, 아베 전 총리를 비롯한 일본 극우의 입장을 받아들인 일본 정부는 2022년 1월 28일 사도 광산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에 단수 추천하였다. 과거를 교훈삼아 등재 막아야 다시금 한일 간에 ‘역사전쟁’이 시작되었다. 우리 정부는 그동안 일본 측의 사도 광산 세계문화유산 등재 움직임을 예의주시해왔고, 일본지역 탄광·광산의 한국인 강제동원 실태를 조사했으며 관련 연구도 축적하였기에 예전처럼 당하지 않으리란 자신감이 있는 모양새다. 더욱이 당사국 간 합의, 즉 한국이 사도 광산의 세계유산 등재를 찬성하지 않으면 유네스코 심사를 통과하기 어렵다는 관측도 지배적이다. 그렇지만 세계유산위원회 위원국인 일본의 외교력은 만만치 않다. 우리 국민이 모두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고 정부는 외교적인 노력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다시는 ‘군함도’의 전철을 밟을 수 없다.  ]]> Thu, 30 Jun 2022 10:49:59 +0000 68 <![CDATA[ 독립의 발자취 종교인을 넘어 사상가이자 혁명가로서 시대를 이끌다]]> 글 편집실   올해는 동학농민운동과 3·1운동을 이끈 의암 손병희 선생이 순국한 지 100주기가 된 해이다. 이를 맞이하여 그의 업적과 정신을 기리는 추모 특별전이 현재 근현대사기념관에서 펼쳐지고 있다. 이번 전시를 기획한 근현대사기념관 정햇살 학예사에게 전시에 관한 궁금한 이야기를 묻고 들었다.  alt 의암 손병희 사진 Q. 먼저 근현대사기념관을 소개해주세요. 서울 강북구에 자리한 근현대사기념관은 헌법정신의 요체인 자유·평등·민주의 이념이 단순히 외래의 소산이 아니라 선열들이 피땀 흘려 체득하고 축적해 온 소중한 가치임을 감동이 있는 서사로 전달함으로써, ‘독립운동가들이 꿈꾼 나라’ 그리고 ’사월혁명의 투사들이 소원했던 나라’가 바로 대한민국의 미래상임을 널리 알리고자 2016년 설립되었습니다. Q. 이번 전시의 기획 취지가 궁금합니다. 동학농민운동과 3·1운동을 이끈 민족지도자 의암 손병희 선생 순국 100주기를 맞아 선생의 독립운동 업적과 정신을 조명하는 뜻깊은 자리를 마련하였습니다. 선생의 일생을 조명하는 이번 전시는 종교인을 넘어 사상가이자 혁명가로서 시대를 이끌었던 선생의 참뜻을 다시 한번 되새겨보는 소중한 기회가 되길 바라며 기획하였습니다. 이번 전시는 서울시 강북구와 천도교중앙총부가 공동주최하고 국가보훈처와 동학혁명정신선양사업단 후원으로 민족문제연구소와 근현대사기념관이 주관하여 개최하였습니다.  Q. 의암 손병희 선생의 업적을 소개해주세요. 손병희 선생은 호서동학군 통령으로서 동학농민운동을 이끌었으며, 3·1운동의 정신적 지주로서 독립운동의 초석을 놓았습니다. 동학을 이어받아 천도교의 기반을 닦고 교리와 조직을 체계화하였으며, 나아가 언론·출판·교육을 통해 민족혼을 일깨우는 데 앞장섰습니다. 엄혹한 시대에 일신의 안일함보다는 조국과 민족의 장래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던진 선생의 업적은 현재까지 우리 후손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alt 1손병희가 49일 수련회를 개최할 때 사용한 가마솥과 독 2손병희의 낙관 3손병희의 장례식 사진 Q. 이번 전시에서 특별히 주목해야할 유물이 있나요? 이번 전시에서는 손병희 선생이 독립운동에 대비하여 봉황각에서 7회에 걸친 49일 수련회를 할 때 사용한 가마솥과 독을 비롯한 선생의 명함·낙관 등 다수의 귀한 유품과 선생의 가족사진·장례식사진 등을 공개합니다. 또한 천도교중앙총부가 소장한 동학·천도교 경전·동학 농민군 포고문·고시 등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외에도 민족문제연구소·독립기념관·고려대 박물관·동덕여대박물관 등이 소장한 3·1운동 당시의 각종 선언문과 사진 그리고 보성전문학교·동덕여학교 관련 사진과 문서 등 흥미 있는 자료들이 함께 전시됩니다. Q. 전시와 연계된 강좌도 눈길을 끄는데요. 이번 전시와 연계하여 〈3·1운동을 이끈 민족지도자, 의암 손병희〉를 주제로 무료 특별강좌를 개설했습니다. 일반 시민과 학생을 대상으로 한 이번 강좌는 7월 16일까지 매주 토요일(총 5회)마다 근현대사기념관 2층 강의실에서 진행하고 있습니다. 강좌 신청은 근현대사기념관 홈페이지(www.mhmh.or.kr)와 전화(02-903-7580)로 문의하시면 됩니다. 역사에 관심이 있는 분들의 참여를 기다리며, 더불어 이번 강좌뿐만 아니라 답사와 순회전시도 준비 중이오니 많은 기대 바랍니다. Q. 관람객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나요? 오늘날 대한민국의 번영은 손병희 선생을 비롯한 수많은 애국선열의 숭고한 희생과 헌신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이번 전시를 통해 독립을 위해 노력했던 손병희 선생의 피와 땀의 의미를 다시 한번 되새기는 계기가 되길 바라며, 선열들의 고귀한 유지를 받드는 소중한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전시는 9월 30일까지 진행되오니 많은 관심 바랍니다. 손병희(孫秉熙, 1861∼1922) 순국 100주기, 그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며 alt 손병희(좌) / 천도교 간부들을 연성·수련시키기 위해 설립한 봉황각(우) 동학농민운동을 이끌다 손병희는 1861년 4월 8일 충북 청원군에서 아버지 손두흥과 어머니 경주 최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22세 때 동학에 입도하여 1894년 9월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호서동학군 통령으로 임명되어 전봉준과 함께 농민군을 이끌었다. 공주를 점령하기 위해 치른 이인전투에서는 승리하였으나 일본군의 개입으로 우금치전투에서 패배하였다. 이후 최시형으로부터 의암(義菴)이라는 도호를 받은 그는 1897년 12월 24일 동학의 종통을 이어받아 동학 3대 교조가 되었다. 교조가 된 후 전국을 돌아다니며 동학 재건에 노력하였다. 하지만 동학농민운동 실패 후 동학에 대한 탄압이 수그러들지 않자 세계사정을 살피고 동학교단 재건 구상을 위해 외유를 계획하였다. alt 일본 망명시절 동지들과 찍은 사진, 앞줄 오른쪽 두 번째 손병희 (1905)(좌) / 국내 최초의 대판형 신문 기관지 『만세보』(우) 천도교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펼치다 일본으로 망명 후 국정혁신과 사회개혁을 주장하는 갑진개혁운동을 추진하고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하였다. 1906년 1월 귀국 후에는 천도교를 근대적 종단으로 쇄신 발전시켰다. 또한 일본에서 귀국할 때 인쇄시설을 들여와 천도교중앙총부 내에 인쇄소를 설치하여 출판언론운동과 민족교육운동에 힘썼다. 국내 최초의 대판형 신문인 기관지 『만세보』를 창간하는 한편 민족혼을 일깨우고 독립정신을 함양시키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 교육임을 깨닫고 경영난에 처한 보성학교와 동덕여학교 등을 인수하여 운영하기도 하였다. 이후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국권 회복에 대한 결의를 다지며 천도교단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준비해 나갔다.  alt 3·1독립선언서(좌) / 임종 전 손병희(우) 독립정신을 일깨우고 잠들다 1919년 민족대표 33인의 지도자로 3·1운동을 주도한 그는 “이번 거사는 조선의 신성한 유업을 계승하고 아래로 자손만대의 복락을 작흥하는 민족적 과업이다. 이 성스러운 과업은 제현의 충의에 의지하여 반드시 성취될 줄 믿어 의심치 않는다”라고 강조하며, 3·1운동이 성공적으로 전개하도록 당부하였다. 3월 1일 오후 2시 태화관에서 독립선언 기념식을 거행한 뒤 일제경찰에 체포된 그는 서대문감옥에서 투옥 중 병보석으로 출옥하여 치료받다가 1922년 5월 19일 만 61세의 나이로 운명하였다. 그의 유해는 서울 우이동에 있는 봉황각 옆에 안장되었으며, 1962년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로를 기리어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 Thu, 30 Jun 2022 11:01:56 +0000 68 <![CDATA[세계 산책 남아메리카의 해방자 시몬 볼리바르]]> 글 이재학(고려대학교 서어서문학과 교수)   19세기 초 남아메리카의 독립운동을 지도했던 시몬 볼리바르는 짧은 생애동안 베네수엘라를 비롯해 콜롬비아·에콰도르·페루·볼리비아를 스페인 식민통치에서 해방시켰다. 국명·화폐단위·지형·공항 등에 ‘볼리비아’라는 이름이 붙은 것만 보아도 남미인들에게 볼리바르가 어떤 의미인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alt 시몬 볼리바르 라틴아메리카 독립의 배경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1702-1713)의 결과 스페인의 왕위는 프랑스 부르봉 왕가의 차지로 돌아갔다. 부르봉 왕가는 낙후된 스페인을 개혁하고자 계몽 전제주의 아래 기존의 시스템을 혁신하는 강력한 개혁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다른 유럽 국가들에 빼앗긴 아메리카 식민지에 대한 시장 장악력을 되찾고자한 부르봉 왕가의 노력은 스페인의 취약한 산업기반으로 인하여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이후 카를로스 4세(재위 1788-1808)의 무능, 마리아 루이사 왕비와 그녀의 애인 고도이 재상에 의한 국정농단은 아들 페르난도 7세가 주도하는 반란으로 이어졌다. 나폴레옹 군대의 침공으로 어수선한 틈을 타 1808년에 페르난도 7세가 부왕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르자, 나폴레옹은 이를 빌미로 스페인 국왕을 폐위시킨 후 자신의 형인 조제프 보나파르트를 스페인의 왕위에 앉혔다. 이에 자신의 왕위를 빼앗긴 페르난도 7세는 아메리카 식민지에 도움을 청하며 대폭적인 자치를 약속하였다. 그러나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 실패 후인 1813년 12월 스페인 왕위를 되찾은 페르난도 7세는 식민지인들과의 약속을 헌신짝같이 저버리고 강력한 보수주의자로 돌아서며 왕권을 강화시켰다. 그가 식민지에 대한 세금을 대폭 올림과 동시에 식민지 크리오요(criollo)* 엘리트들에게 약속했던 자치권에 대한 약속을 이행하지 않자 독립에 대한 열망이 커지게 된다. *크리오요(criollo)스페인의 식민지배를 받던 아메리카에서 태어난 백인들은 ‘크리오요(criollo)’로 불렸으며, 스페인에서 태어난 사람들인 ‘페닌술라르(peninsular)’와 계급적으로 구분되었다. 이들 크리오요들은 스페인계 아메리카의 경제권을 장악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치권력에서는 철저히 배제되었다. 페닌술라르와는 달리 ‘2등 시민’의 대우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라틴아메리카 인종의 대부분을 구성하는 메스티조(mestizo), 인디오, 흑인 등의 ‘갈색인(pardo)’들과 자신들을 구분하며 스페인 본국과 유대감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유대인 추방 이후 상공업 기반이 붕괴된 식민 모국 스페인은 스페인계 아메리카의 대농장, 광산 등에서 생산되는 수출품들의 최종 목적지가 될 수 없었다. 또한 식민지에서 소비되는 대부분 수입품의 생산지도 스페인이 아닌 영국과 프랑스 등의 다른 서유럽 국가들이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스페인 왕실이 식민지와 다른 유럽 국가들 간의 직교역을 철저히 금지하자, 식민지의 경제권을 장악한 크리오요 엘리트들의 반발은 커질 수밖에 없었다.  시몬 볼리바르와 남아메리카의 해방 스페인계 아메리카의 독립은 크게 멕시코와 남아메리카로 분리되어 진행되었다. 이중 남아메리카 북부지역의 독립을 이끈 것은 ‘해방자(el libertador)’로 불린 시몬 볼리바르(Simon Bolivar)였다. 부유한 크리오요 엘리트 출신인 그는 1783년에 베네수엘라의 카라카스(Caracas)에서 태어났으며, 스승인 자유주의자 시몬 로드리게스(Simon Rodriguez)를 통해 장 자크 루소와 몽테스키외 등 프랑스 계몽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았다. 이후 프랑스와 미국 여행을 통해 혁명과 공화국 건설의 열망에 사로잡힌 그는 베네수엘라에 귀국한 해인 1807년부터 남아메리카 독립운동에 인생을 바치게 된다. 스페인계 아메리카의 대표적 지식인 중의 한 명인 안드레스 베요(Andrés Bello)와 또다른 혁명가인 프란시스코 데 미란다(Francisco de Miranda)의 합류로 힘을 받은 볼리바르는 1811년에 베네수엘라의 독립을 선언하는 것에는 성공하였다. 그러나 스페인으로부터의 독립을 원하지 않는 크리오요 엘리트들과 페닌술라르 등이 왕당파를 결성하여 강력하게 저항하자 결국 국외로 망명을 떠나게 된다. 이후 콜롬비아의 항구도시 카르타헤나(Cartagena)에 잠입한 그는 군대를 재결성한 후, 불과 5백명의 병력을 이끌고 안데스 산맥을 넘어 베네수엘라로 진군하였다. 스페인 국왕 페르난도 7세의 식민지에 대한 약속 불이행과 폭정에 대한 반발로 이전과는 달리 많은 크리오요들이 식민지의 독립을 지지하게 된 상황에서 볼리바르의 군대는 1814년, 카라카스에 입성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폴레옹 몰락 이후 재편된 스페인 군대가 아메리카 식민지에 투입되자 또다시 눈물을 머금고 국외로 망명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이후 자메이카와 아이티를 거쳐 다시 베네수엘라로 잠입한 그는 베네수엘라 평원지대 야노스(llanos)의 목부들인 ‘야네로(llanero)’들의 지지를 이끌어내는데 성공하였다. 또한 나폴레옹 전쟁의 승리 이후 여력이 생긴 영국이 베네수엘라에 지원군을 파견하고, 독립 이후의 이권을 노리는 영국 상인들이 볼리바르를 재정적으로 지원하자 그의 군대는 이전과는 다르게 강력해졌다. 우여곡절 끝에 그는 1819년, 누에바 그라나다(Nueva Granada)의 수도 보고타(Bogota) 근처 보야카(Boyaca) 평원에서 스페인 군대를 격파한 후 콜롬비아를 해방시켰다. 이후 베네수엘라와 에콰도르를 차례로 해방시킨 볼리바르는 1821년에 그란 콜롬비아(Gran Colombia) 공화국을 수립하였다. 독립의 결과 볼리바르는 1822년 7월 에콰도르 항구 도시 과야킬에서 남쪽의 아르헨티나·칠레·페루를 해방시킨 산 마르틴(San Martin)과 역사적인 만남을 가졌다. ‘과야킬 회담’이라 일컫는 만남 이후 신생 독립국에서의 군주제 실시를 주장한 산 마르틴은 모든 직위를 내려놓고 유럽으로 망명을 떠나게 된다. 이후 볼리바르는 자신이 해방시킨 알토 페루(Alto Perú)와 그란 콜롬비아의 통합을 추진하였으나 실패하고, 알토 페루는 그의 이름을 따라 ‘볼리비아(Bolivia) 공화국’으로 독립하였다. ‘하나의 아메리카’를 꿈꾸며 강력한 중앙집권적 공화국을 수립하기 위해 그란 콜롬비아의 독재자로 취임한 볼리바르의 이상은 필연적으로 대농장을 소유한 크리오요 엘리트들의 이익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거대한 꿈은 시대적 한계로 인해 이루어지지 못했고, 강력한 저항에 부딪힌 그는 결국 모든 직위를 내려놓고 1830년 5월 8일, 수도 보고타를 쓸쓸히 떠나게 된다. 볼리바르는 같은 해 12월, 47세의 나이로 쓸쓸히 사망하였고, 그란 콜롬비아는 완전히 해체되었다. ‘하나의 아메리카’를 꿈꿨던 그의 이상은 오늘날의 콜롬비아, 베네수엘라, 에콰도르, 파나마, 페루, 볼리비아 등으로 산산조각이 나있다. 또한 라틴아메리카의 분열은 미국의 개입을 가져온다고 걱정한 그의 예언은 현실이 되고야 말았다. 21세기 현재까지도 크리오요 엘리트들의 후손들이 국가의 정치와 경제를 장악하고 있는 반면, 대다수의 메스티조와 인디오들은 여전히 소외된 채 주변인으로서의 삶을 영위하고 있다. ]]> Thu, 30 Jun 2022 11:05:56 +0000 68 <![CDATA[기념관은 지금 사진 속에 담긴 저마다의 소망]]> 정리 편집실    사진 이소연   최근 독립기념관은 〈내가 찍은 봄〉이라는 주제로 사진 공모전을 실시하였다. 이번 공모전을 기획한 고객홍보부 이세연씨는 “길고 어두웠던 팬데믹을 거쳐 서서히 기지개를 켜는 시기인 만큼 이번 공모전에 기대하는 바가 컸다”고 전한다. 봄처럼 화사한 미소를 가진 그에게 공모전에 관한 이모저모를 들어보고, 심사를 거쳐 수상한 작품들도 함께 만나보자. alt 고객홍보부 이세연씨 봄과 일상의 소중함을 선사하다 2022년 〈내가 찍은 봄〉 사진 공모전은 여러모로 기대하는 바가 컸습니다. 지난 2년간 팬데믹 상황에서 개최했던 사진 공모전은 코로나19 거리두기 지침으로 인하여 촬영할 때 다소 제약이 있어 아쉬움이 많았어요. 그래서인지 접수기간 동안 거리두기 지침이 완화되어 예상보다 많은 분들이 응모를 해주셔서 기쁘고 감사했습니다. 또한 이번 공모전은 ‘만물이 상생하는 봄’을 주제로 했기에 저뿐만 아니라 참가자분들이 계절과 일상의 소중함을 다시금 깨닫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응모작 총 424점, 수상작 15점 이번 공모전은 총 424점의 응모작을 심사하였고, 시의성·심미성·완성도 등 기준에 맞는 작품 15점(금상1·은상2·동상2·가작10)을 수상작으로 선정하였습니다. 심사는 독립기념관 내 부서별로 각 한 명씩 이루어진 ‘홈페이지 운영위원회’가 모여 토의 형식으로 진행하였습니다. 특히 〈내가 찍은 봄〉이라는 주제에 맞게 독립기념관 속 봄을 오롯이 담았는지 검토했으며, 독립기념관이 대개 가족 단위로 방문하는 장소인 만큼 독립기념관 곳곳에서 화목한 시간을 보내는 가족들의 모습이 담긴 사진에 초점을 두었습니다. 한편 과거와 달리 근래 응모작들은 드론을 이용한 항공촬영이 증가하여 다양한 구도에서 찍은 독립기념관을 볼 수 있어 흥미로웠습니다. 독립기념관 사진 공모전의 역사 2006년 제16회 ‘나라사랑 국가상징 큰잔치 행사’가 행정자치부 후원으로 독립기념관에서 처음 실시되었습니다. 당시 ‘나라꽃 무궁화 큰잔치 글짓기 그림그리기 대회’로 시작하였는데, 2008년 제18회부터는 국가상징 선양사업의 일환으로 국가상징물(무궁화, 태극기, 애국가)을 주제로 ‘나라사랑 국가상징 큰잔치’로 명칭을 변경하고 사진공모전을 포함시켜 2011년까지 실시하였습니다. 이후 2012년 개관 25주년 기념 ‘추억의 사진’ 공모전을 시작으로, 국가상징물 이외에도 관람객을 대상으로 ‘디지털카메라사진’ 공모전을 열었습니다. 한편 홈페이지·SNS 등 이미지 홍보의 중요성이 커짐에 따라 ‘인증샷 이벤트’와 같은 방법도 함께 모색해왔습니다. 이후 아름다운 독립기념관 풍경을 알리기 위하여 ‘봄·여름·가을·겨울’을 주제로 한 공모전이 현재까지 실시되고 있습니다. 앞으로의 계획 우선 이번 공모전에 응모해주신 많은 분들에게 감사드리며, 수상하신 분들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독립기념관은 앞으로도 다양한 주제와 형식을 고안하여 사진 공모전을 꾸준히 실시할 예정입니다. 사진 공모전 이외에도 독립기념관이 실시하는 많은 이벤트에도 적극적인 관심과 참여를 부탁드립니다. 2022 독립기념관 사진 공모전 〈내가 찍은 봄〉 수상작 공개 독립기념관은 지난 3월 23일부터 5월 31일까지 〈내가 찍은 봄〉이라는 주제로 한 사진을 공모하였다. 이번 공모전은 총 424점이 응모했으며, 그중 시의성·심미성·완성도 등에 적합한 15점(금상1·은상2·동상2·가작10)을 수상작으로 선정하였다. 이번 호에는 독립기념관 속 봄의 아름다움과 싱그러움을 드러낸 금상·은상·동상 수상 작품을 소개한다. alt ]]> Thu, 30 Jun 2022 11:20:11 +0000 68 <![CDATA[독자참여 이번 호 「독립기념관」을 읽고 빈칸을 채워주세요. 꼼꼼히 읽다 보면 정답에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alt alt아이콘을 클릭하면 퀴즈 정답을 보낼 수 있습니다.]]> Thu, 30 Jun 2022 11:27:25 +0000 68 <![CDATA[들어가며 답은 역사 속에 있다]]> alt 대한민국 임시정부  환국기념사진(1945.11. 3. 연화지청사) 1945년 8월 15일 광복의 기쁨도 잠시, 한반도는 미국과 소련에 의해 분할 점령되었다. 1948년 8월 15일 정부가 수립되기 전까지 독립을 위해 싸웠던 지도자들은 다시 힘겨운 싸움을 이어가야 했다. 동시대를 살았지만 다른 꿈을 꾼 이들은 각자가 지향하는 국가를 만들기 위해 뜨겁게 뭉치고 격렬히 흩어졌다.이들이 그토록 만들고자 한 정치적·경제적·사회적 민주주의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좌우합작의 끈을 끝까지 놓지 않았던 여운형이 암살되지 않았더라면, 신민주국가를 수립하고자 했던 김구가 암살되지 않았더라면, 오늘날 우리는 어떠한 모습일까?혹자는 ‘역사에서 가능성을 따져보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말한다. 이미 지나간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광복 후 77년이나 흘렀지만 남북 분단과 좌우 갈등이 여전한 오늘날, 지나온 역사 속에서 중요한 힌트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이미 지나간 일을 돌이켜보면 우리가 놓친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지 않을까.광복 후 3년의 세월은 어느 때보다 많은 것을 꿈꿀 수 있었고 어느 때보다 많은 것을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의 역사’였다. 그 시간을 들여다보며 현재 우리의 출발점과 도착점을 확인하고, 그 과정에서 우리가 선택한 것과 선택하지 않은 것을 찾아내고, 더 나은 미래의 가능성을 꿈꿔야 한다. 답은 역사 속에 있다. ]]> Wed, 27 Jul 2022 13:06:36 +0000 69 <![CDATA[톺아보기 광복 후 3년, 건국을 위한 최후의 결전]]> 글 조한성(민족문제연구소 선임연구원)   1945년 8월 15일 조선은 꿈에 그리던 광복을 맞았다. 그러나 그 기쁨도 잠시, 한반도는 미국과 소련에 의해 분할 점령되었다.이에 따라 일제라는 공동의 적을 위해 싸웠던 사람들은 새로운 싸움을 시작해야 했다. 그것은 민족의 독립을 완성하고 민족통일국가를 수립하기 위한 최후의 싸움이었다.  alt 광복을 맞아 마포형무소에서 출옥한 애국지사와 환호하는 시민들 우리가 원했던 민주주의는? 건국을 향한 최후의 결전은 대체로 세 가지 지향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 진행됐다. 첫째는 자유민주주의국가를 수립하고자 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서방사회의 중심 국가였던 미국과 영국을 모델로 삼았다. 이승만과 김구·송진우가 대표적인 지도자이다. 둘째는 인민민주주의국가를 수립하고자 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공산주의의 종주국 소련을 모델로 삼았다. 김일성과 박헌영이 여기에 해당한다. 셋째는 미국식 민주주의와 소련식 민주주의를 절충한 제3의 국가를 수립하고자 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미국식 민주주의와 소련식 민주주의의 장단점을 모두 고려하고자 했다. 그들에겐 미소 양국이 한반도를 분할 점령하고 있다는 현실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이런 현실에서 민족통일국가를 수립하는 유일한 방법은 어느 한쪽의 편에 서는 것이 아니라 양쪽 모두에 친선을 표시하며 등거리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여운형과 김규식이 여기에 해당하는 지도자이다. 광복 직후 가장 먼저 두각을 나타낸 사람은 여운형이었다. 그는 안재홍과 함께 건국준비위원회(이하 건준)를 만들어 조선의 치안을 맡으며 건국을 위한 사업을 주도했다. 경성중앙방송을 통한 안재홍의 대국민연설은 억눌렸던 한국인의 정치참여 욕구를 촉발했다. 광복된 지 2주 만에 전국 145개소에 건준 지부가 설치될 정도였다. 건준은 우익과 좌익 세력이 함께 참여한 정치조직으로 광복 직후 큰 힘을 발휘했다. 하지만 여운형은 한 가지 실수를 했다. 미군이 진주하기 직전 협상력을 높이겠다는 생각으로 건준을 조선인민공화국(이하 인공)으로 전환하고 건준 지부를 지방인민위원회로 개편한 것이다. 그러나 9월 8일 한국에 진주한 미군은 인공을 아예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미군정을 수립하고 미군정을 남한의 유일 정부로 천명하며 직접 통치에 나섰다.  alt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으로서 군중 앞에서 단결을 호소하는 여운형(1945.8.16.)(좌) / 신탁통치 반대 전국대회의에서 연설하는 김구(우) 한국인의 자치능력을 인정하지 않았던 미국 미국 정부는 애초부터 한국인의 자치능력을 전혀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연합국에 의한 장기간의 신탁통치를 통해서 한국인의 자치능력을 키우고 서서히 자신의 정치경제체제를 닮은 신국가를 건설하겠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한국인을 몰라도 너무 몰라서 나온 정책이었다. 좌·우 할 것 없이 한국인 대부분이 즉각적인 독립을 원하고 있었고, 건준·인공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한국인들은 이미 충분한 자치능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남한 현지의 미군정은 본국 정부의 신탁통치정책을 폐기하고 남한 정계를 우익 중심으로 재편하여 우익이 주도하는 과도정부 수립정책으로 변경하고자 했다. 통일정부의 수립은 그 이후 남북에 구성된 각각의 과도정부 간 협상으로 충분히 가능하다는 생각이었다. 이것은 남한에 먼저 과도정부의 수립을 목표로 한다는 점에서 분단을 고착화할 가능성이 높은 위험한 정책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에도 미군정은 모스크바3상회의 결의안에 신탁통치안이 들어가는 것을 막지 못했다.  미군정은 신탁통치안에 대한 한국인들의 반발을 정치공작으로 돌파하고자 했다. 남한 언론들이 오보하도록 하여 마치 소련이 신탁통치안을 주장한 것 인양 대대적으로 보도케 한 것이다. 여기에 이미 신탁통치안이 미국 정부의 고유 정책임을 잘 알고 있었던 우익 정치세력들이 이제야 새롭게 알게 된 것 인양 뛰어들어 판을 키웠다. 남한사회는 반소·반공에 입각한 신탁통치반대운동으로 들끓었다. 이를 통해 미군정은 남한 정계를 우익 중심으로 재편하고자 했고, 우익 정치세력들은 자신들의 세력 확대에 적극 활용했다.  신탁통치반대운동으로 심화된 남북·좌우의 갈등 소련군사령부는 큰 충격을 받았다. 모스크바3상회의에서 소련은 미국의 장기적인 신탁통치안에 맞서 먼저 조선임시정부를 조직할 것과 되도록 신탁통치는 짧게 할 것을 주장하여 관철시켰다. 그런데 이런 사실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고 오히려 자신들이 먼저 신탁통치를 주장한 것처럼 선전되자 크게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소련군은 민공연립노선에 입각하여 조만식을 수반으로 하는 조선임시정부의 수립을 바랐다. 물론 최종적인 목표는 자신들을 적대하지 않는 친소정부의 수립이었다. 하지만 남한의 신탁통치반대운동으로 그들은 경직되기 시작했다.   소련군은 신탁통치반대운동을 계기로 반소적 태도를 보인 조만식을 고려호텔에 연금하고 신탁통치반대운동에 참여한 남북의 모든 우익인사들을 반민주주의자로 비난했다. 그들은 더 이상 민공연립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남북의 주요 우익 인사들이 대부분 신탁통치반대운동에 참여하였으므로 이것은 사실상 민공연립노선의 폐기를 의미했다. 이때부터 북한의 공산주의자들 사이에선 ‘민주기지론’이 널리 퍼졌다. 북한에 먼저 혁명의 근거지를 만들어 장차 한반도 전체로 혁명을 전파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민주기지론은 북한에 먼저 권력기구를 만들자는 것이었으므로 곧바로 분단정부의 수립 논리로 전환될 수 있었다.  결국 미군정과 소련군은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일을 했다. 미군정은 남한에 과도정부를 지향하는 민주의원을 조직했고, 소련군은 북한에 중앙정권기관을 지향하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세우고 토지개혁을 실시했다. 그렇게 미소가 남북에 각각의 기반을 다진 후에 모스크바결의안에 입각한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이하 미소공위)가 열렸다. 미국은 모스크바결의안에 그대로 따르는 것은 자신들에게 불리하다고 판단하고 되도록 3상회의 결의안을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변형시키기를 원했다. 그들은 민주의원을 미소공위의 협의대표기구로 삼고 북한의 대표기구와 협상하여 임시정부를 구성하고자 했다. 반면 소련은 모스크바결의안을 수정 불가능한 최종 결정이라 생각했다. 그들은 모스크바결의안을 어떤 변형도 없이 그대로 실천하기를 원했다. 서로의 생각이 이리 다르니 협상이 잘 될 리 없었다. 결국 미소공위는 무기한 휴회에 들어가고 말았다.  미소공위의 휴회는 분단의 고착화를 의미했다. 영구분단의 위기에 직면하자 여운형과 김규식은 좌우합작운동을 벌여 남북좌우의 통일을 통한 민족통일정부의 수립을 도모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이때부터 단독정부 수립을 외치기 시작했다. 미소공위의 휴회 이후 미군정은 좌익 탄압을 본격화하는 한편 좌우합작운동을 적극 지원하면서 부실한 민주의원을 남조선과도입법의원으로 대체했다. 이를 바탕으로 미군정은 남조선과도정부의 수립을 선포했다. 소련군도 미소공위 휴회 이후 북한 체제를 공고히 하는 데 최선을 다했다. 중요산업 국유화 등 사회개혁을 단행하는 한편 보안간부 훈련대대부라는 위장 명칭으로 정규군대의 창설을 위한 최고참모부를 설치했다. 그리고 각 단위 선거를 거쳐 1947년 2월 그동안의 ‘임시’라는 명칭을 떼고 정식으로 북조선인민위원회를 조직했다.   이렇듯 미소 양국이 각각의 체제를 더욱 공고히 한 후 제2차 미소공위가 열렸다. 양측의 갈등이 최고조에 달한 상태에서 제2차 미소공위가 잘 될 리는 만무했다. 이미 미소의 갈등은 한반도에서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 차원에서 벌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7월 19일 여운형의 암살은 제2차 미소공위의 결렬을 암시하는 것과 같았다. alt 미소공동위원회 개막(1946)(좌) / 좌우합작위원회 기념사진(1947.12.10.)(우) 분단의 길 끝에 찾아온 전쟁 제2차 미소공위가 결렬된 후 미국은 한국 문제를 UN에 이관했다. 유엔 감시하 인구 비례에 의한 총선거를 통해 신정부를 수립한다는 방침이었다. 여기에 소련이 찬성할 리 없었으니 사실상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 방안이었다. 미국이 굳이 UN에 한반도 문제를 이관한 것은 천년이 넘도록 단일국가였던 한국을 분단시켰다는 책임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법이었다. 김구와 김규식을 비롯하여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며 끝까지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남북협상을 시도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1948년 5·10선거를 통해 국회를 구성하고 7월 17일 헌법 제정을 거쳐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됐다. 북한 역시 미리 헌법 제정 등 제반 준비를 해놓았다가 남한 정부 수립 이후인 8월 25일 총선거를 통해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을 선출하고 9월 2일 최고인민회의를 개막해 헌법을 공식 채택하고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했다. 이로써 한반도에는 두 개의 정부가 들어섰다. 두 정부는 스스로를 중앙정부라고 규정하면서 상대방을 불법적인 정부로 매도했다. 대한민국은 한반도 전체를 영토로 한다고 선언했고, 북한은 서울을 수도로 규정했다. 이와 함께 기나긴 체제 경쟁이 시작됐다. 양측의 경쟁은 이내 극단적인 대결로 치달았다. 정부 수립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북한은 ‘국토완정’을 주장했고, 남측은 서슴없이 ‘북진통일’을 주장했다. 두 개의 정부가 수립되는 순간 수많은 사람이 예견했듯 한반도에는 ‘내전 같은 국제전쟁’이자 ‘외전 같은 동족전쟁’의 기운이 만연했다. 그렇게 누구나 예측할 수 있는 전쟁이었지만 끝내 우리는 그 전쟁을 피하지 못했다. alt 대한민국 정부수립 기념행사(1948.8.15., 중앙청)(좌) / 5·10선거(1948)(우) ]]> Wed, 27 Jul 2022 13:13:40 +0000 69 <![CDATA[만나보기 남북·좌우의 통일을 원했던 사람들]]> 글 조한성(민족문제연구소 선임연구원) 남북·좌우의 갈등으로 한반도에 두 개의 정부가 수립되는 과정에서도 자신의 생을 던져 민족을 구원하고자 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광복 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 전까지 각자가 꿈꾸는 신국가를 만들기 위해 뜨겁게 뭉치고 격렬히 싸웠다. 그들이 생전에 남긴 연설 내용을 들여다보며 그들에게 민족은 어떤 의미였으며, 어떤 민족을 만들고자 했는지 되짚어본다.   alt (왼쪽부터) 여운형, 김규식, 김구 일사불란의 단결로 나아가자 조선신민당 지도자였던 백남운의 말을 빌리면 광복 후 우리 민족은 ‘민족국가 수립’과 ‘사회혁명 완수’라는 이중의 과제를 동시에 수행해야 했고, 이를 위해서는 좌우가 함께하는 좌우연립정부를 수립해야 했다. 하지만 미국과 소련으로 대표되는 세계자본주의와 세계공산주의의 대립이 시작되던 광복 후 3년의 역사에서 민족 지도자들은 서로 다른 길을 선택했다. 대표적 민족 지도자 중 한 명이었던 여운형은 우리 민족의 자치 능력을 증명하는 조선건국준비위원회와 조선인민공화국 등을 조직하고 4당회담과 좌우합작위원회 등을 통해 좌우의 역량을 모으고자 했다.         “해방의 날은 왔다. 이제 민족해방의 제일보를 내딛게 되었으니 지난날의 아프고 쓰리던 것은 이 자리에서 다 잊어버리고 이 땅에 합리적이고 이상적인 낙원을 건설하자. 개인적 영웅주의는 모두 버리고 끝까지 집단적으로 일사불란의 단결로 나아가자.”          1945년 8월 16일, 광복을 맞이하여 경성에 모여든 군중 앞에서 여운형은 이같이 발언하였다. 아무리 미소 양국의 규정력이 강했다고 하더라도 우리 민족이 좌우로 나뉘지 않았다면 분단을 막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광복 후 여운형의 첫 일성은 그런 점에서 새롭게 다가온다. 우리가 개인적 영웅주의를 모두 버리고 일사불란의 단결로 나아갔다면 우리 민족은 정말로 분단되지 않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지만 단결만이 분열을 막을 수 있는 해법이라는 것을 여운형만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승만도 기회가 될 때마다 단결을 외쳤다.        “나는 항상 우리 민족의 자유를 얻고자 애써왔으며 어떻게 하면 자유롭게 여러 나라 사람들과 함께 살아갈 수 있을까를 생각하고 오늘까지 싸워온 것입니다. (…) 그러므로 우리는 이 자유를 얻기 위하여 정당의 분열과 40년간 일본제국주의의 탄압으로 찌들어온 당파적 정신을 털어버리고 우리의 주의·주장을 버리고 오직 통일되어야만 하겠습니다.”          하지만 이승만의 통일은 여운형의 것과는 달랐다. 그는 오로지 자신의 깃발 아래 통일되기를 원했다. 설사 그것이 또 다른 분열을 의미한다고 해도 그랬다. alt 건국준비위원회 시절 연설 중인 여운형 통일국가 건설에 끝까지 노력하자  “우리 같은 지도자층이 없었던들 조선의 통일은 벌써 성공하였을 것이다. (…) 모스크바3상회의 결정을 자세히 모르고 덮어놓고 피로 싸운다는 것은 너무 경솔한 짓이다. 3상회의는 단순한 조선 문제만이 아니고 전 세계적 문제이므로 개중에 지지할 점도 있고 배척할 점도 있다. 덮어놓고 지지한다는 것도 너무 지나친 처사이다. (…) (지도자들이) ‘탁치’라는 문제를 정확히 파악치 못하고 대중을 어지럽게 하는 것은 큰 과오다. 과거에는 정당 싸움으로 민중을 두 갈래로 분립시켰던 것을 이번엔 탁치를 이용하여 민족을 재분열시킨 것은 중대한 과실이다.”       신탁통치파동이 남북·좌우의 갈등을 촉발했을 때 여운형은 자신을 포함하여 소위 지도자라는 사람들이 갈등을 유발하는 행태에 대해 이렇게 한탄했다. 갈라치기를 통한 지지세력의 확보라는 방법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남북·좌우의 갈등은 점점 심각해졌지만 여운형과 함께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남북·좌우의 통일을 위해 힘썼던 사람도 있다. 바로 충칭임시정부의 부주석이었던 김규식이었다.        “우리가 통일된 민주독립국가를 건설하는 데 설혹 제2, 제3의 진로가 있다 하더라도 대전 이래 모든 국제공약과 국제관계를 고찰한다면 모스크바3상회의의 결과로 된 미소공위에 의하여 우리의 목적을 달함이 가장 편하고 빠른 길이라고 하겠다. (…) 우리는 미소공위가 우리 국가 건설에 전폭적 협력을 절실히 하기를 바라는 동시에 미소 양 대국 간에 소소한 고집과 논란이 있더라도 그것을 배제하고 급속한 기한 내에 우리로 하여금 번영한 통일국가를 건설하는 데 전력 매진하도록 하여줄 것을 심신(深信)하며 우리는 좌우와 남북이 일치단결하여 천재일우의 이 호기회를 놓치지 말고 3천만 겨레가 한 가지로 결심하고 노력하기를 바라고 믿는다.” 이처럼 김규식은 미소공위가 재개되자 미소 양국이 소소한 고집과 논란이 있더라도 참고 통일국가 건설에 끝까지 노력해줄 것과 남북·좌우가 일치단결하여 이 기회를 놓치지 말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그러나 미소공위가 다시 공전되자 그는 이렇게 한탄했다.      “마샬, 몰로토프 양 외상이 절충을 거듭하여 재개된 미소공위가 금차에도 협의 대상 문제로 정돈상태에 빠졌다는 것은 작년의 휴막(休幕)을 재연하는 것이 아닌가? (…) 만일에 금번 공위가 성공을 한다면 차라리 한인이 갈망하는 독립만이라도 승인하고 정부는 한인의 손으로 수립케 하였어야 할 것이며 한국을 원조한다면 연합국이 적당한 협정 하에 얼마든지 원조할 수 있지 않겠는가? 우리 민족이 완전 자주독립의 즉시 실현을 바라본 마음은 3,000만 동포가 다 같이 일일천추(一日千秋)와 같다. 그리고 민주조국 재건에 있어 연합국의 원조를 바란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어떤 사전을 보더라도 탁치가 곧 원조나 협력이라는 정의는 없느니 만치 유독 한국에 대하여만 한인이 증오하는 탁치란 명사를 쓸 필요는 무엇이었는가?”      신탁통치문제가 처음부터 끝까지 남북·좌우의 통일을 방해하는 요인이 되자 유독 왜 한국에서만 그 말을 써서 문제를 야기한 것이냐고 한탄하는 말이다. 하지만 김규식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김구와 함께 단독정부의 수립을 반대하며 흔히 남북협상이라 부르는 남북요인회담에 나서 마지막까지 남북·좌우의 통일을 위해 노력했다. alt 남조선과도입법의원 개원식에서 연설 중인 김규식(1946.12, 중앙청) 전쟁을 막기 위하여 “나의 유일한 염원은 삼천만 동포와 손을 잡고 통일조국, 독립된 조국의 건설을 위하여 공동 분투하는 것뿐이다. 이 육신을 조국이 수요(需要)한다면 당장에라도 제단에 바치겠다.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의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 나는 내 생전에 38 이북에 가고 싶다. 그쪽 동포들도 제 집을 찾아가는 것을 보고서 죽고 싶다. (…) 삼천만 동포 자매 형제여! (…) 바라건대 나의 애달픈 고충을 명찰(明察)하고 명일(明日)의 건전한 조국을 위하여 한 번 더 심환(深患)하라.”    김구가 38선을 넘기 전에 발표한 글이다. 뒤늦은 선택이었지만 그런데도 그는 김규식과 함께 북한에 가서 김일성과 마주 앉았다. 김일성은 이 만남을 끝까지 북한 정권 수립의 정당성 확보를 위해 활용하려고 했지만, 김구·김규식은 남북·좌우의 통일을 위한 마지막 시도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목적은 이것이었다. 당시 지각이 있는 자라면 누구나 예측할 수 있었던 전쟁, 그 전쟁을 막는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남북요인회담 후 발표된 공동성명서 제2항에는 이렇게 쓰여있다. ‘외군 철군 후 내전이 발생할 수 없음을 약속할 것.’ 그러나 김일성은 끝내 그 약속을 깨고 말았다.  alt 남북협상 회의에서 축사하는 김구(1948. 4. 22. 평양 모란봉극장) 광복 후 3년 그리고 광복 후 77년  광복을 맞은 한반도의 허리가 끊긴 것은 그로부터 3년이 지난 1948년이었다. 당시 남한과 북한은 외세의 분할점령 끝에 하나의 정부가 아닌 각각의 정부를 수립했다. 여기엔 이념 대결이 치열했던 시대적 배경과 함께 ‘지도자’로 추앙받은 이들의 엇갈린 운명이 크게 작용했다. 광복 후 3년은 결코 머나먼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다. 지금 우리의 현실과 닿아있는 밀접한 역사다. 씁쓸함이 느껴지더라도 알아야 할, 그리고 앞날의 발전을 위해 반성할 부분은 반성해야 할 엄정한 역사다. 우리가 역사를 알아야 하는 이유는 굳이 설명이 필요 없다. 특히 근현대사를 아는 것은 지금 우리 사회를 이해하고, 발전시키는 데 가장 중요한 밑거름이 된다.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이 어떤 과정을 거쳐 세워졌는지, 그 과정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졌는지 아는 것은 너무나 중요한 일이다. ]]> Wed, 27 Jul 2022 15:13:49 +0000 69 <![CDATA[이달의 독립운동가 대한통의부의 일원으로 독립운동 단체 통합에 나선 강제하·이웅해·백남준·최명수]]> 글 독립기념관 전시부   alt 남만주 지역 통합 독립운동 단체인 통의부가 결성되다 1920년 전후 중국 동북지역(만주)을 거점으로 결성된 한인 독립군 단체가 일제를 상대로 독립전쟁에 나서 승리를 거두자 일제는 이른바 ‘경신참변(庚申慘變)’을 자행하며 한인사회와 독립군 기지를 초토화하였다. 참변을 극복하고자 모인 남만주의 독립운동 단체 대표들은 남만한족통일회의(南滿韓族統一會議)를 열고 1922년 8월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를 결성하였다. 통의부는 중앙조직 구성과 의용군 편성을 통해 교육·산업 진흥 등 한인 자치와 무장투쟁 등 군사활동을 전개하며 남만주 지역 통합 독립운동 단체로서 활동을 이어나갔다.  alt 경신참변으로 목숨을 잃은 동포들을 위한 합동장례식(좌) / 대한통의부 훈련 광경(우) alt 남만주 독립운동 단체의 통합을 알리는 기사,『독립신문』 (1922.9.30.) 강제하와 이웅해, 통의부에서 남만주 한인사회와 독립군 생계유지에 힘을 쏟다 강제하는 1891년 평안북도 창성군에서 태어나 1919년 창성지역 3·1운동을 주도하다 남만주로 망명하였다. 대한독립청년단을 결성해 단장 등으로 활동한 그는 1922년 8월 결성된 통의부에 가담하고 권업부장·재무부장 등을 맡아 남만주 한인사회와 독립군 생계유지에 힘을 쏟았다. 이후 정의부 중앙위원·조선혁명당 중앙위원을 역임하며 남만주 지역 세력 통합에 매진하였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이웅해는 1878년 함경남도 상기천면에서 태어나 의병으로 활동하다 경술국치 후 서간도로 망명하였다. 1919년 대한독립군사법부장을 역임했으며 1922년 남만한족통일회의에 대한독립군 대표로 참가해 통의부를 탄생시켰다. 통의부 결성 후에는 민사부장으로 호구조사·구휼·징병활동 등을 수행하며 이주 한인과 독립군 생존을 책임졌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201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alt 군정 생활보다 민정을 우선하겠다는 내용이 담긴 「대한통의부 포고문」(좌) / 대한통의부 발행 어음 (1924)(우) 백남준과 최명수, 통의부와 정의부에서 활동하며 남만주 독립운동 단체 통합에 힘쓰다 백남준은 1885년 평안북도 운산에서 태어나 신민회* 회원으로 활동 중 이른바 ‘데라우치 암살사건’에 연루되었다가 남만주로 망명하였다. 1920년 결성된 광복군총영 군사 겸 참모부장으로 활동한 그는 1922년 남만한족통일회의에 광복군총영 대표로 참가해 통의부 탄생에 기여하였다. 1923년부터 통의부 중앙행정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였고 이후 정의부 검판장·임시의정원 의원 등을 역임하였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2014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최명수는 1881년 12월 충청북도 청원에서 태어나 경술국치 후 서간도로 망명하였고, 신민회 인사들과 함께 한인 단체인 부민단·한족회 등에서 검무국장 등 직책을 맡아 활동하였다. 1922년 8월 통의부가 결성되자 이곳에서도 검무국장을 맡았고, 통의부에 이어 1924년 남만주 통합 독립운동 단체로 탄생한 정의부 결성과 조직 운영에도 적극 동참하였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신민회 : 1907년 안창호, 양기탁, 이동녕이 국권 회복을 목적으로 조직한 대한제국기 비밀결사단체 alt 남만주 통합 독립운동 단체로 결성된 정의부 청사 터 모습(좌) / 대한통의부가 입법기관 형태의 중앙의회를 두었다는 내용의 기사, 『독립신문』 (1924.3.1.)(우) alt ]]> Wed, 27 Jul 2022 15:22:39 +0000 69 <![CDATA[독립운동 사적지 대한통의부를 이끈 김동삼과 신팔균의 독립운동 현장]]> 정리 편집실 대통합을 꿈꾼 대한통의부 총재 김동삼 김동삼은 1878년 경북 안동시 임하면 천전리에서 태어났다. 1907년 협동학교를 설립하고 신민회·대동청년단에서 애국계몽운동을 펼쳤으며, 대한제국이 멸망하자 만주로 망명했다. 1911년 삼원보에 정착하여 경학사 사장 이상룡을 도와 독립운동기지 건설에 힘을 쏟았다. 1914년 백서농장의 장주가 되었으며, 1919년 서로군정서 참모장에 취임했다. 1922년 6월 서간도 일대 간도참변으로 무너진 동포사회와 독립군을 추슬러 남만통일회를 주도하고 대한통군부를 탄생시켰다. 8월 30일 대한통군부가 대한통의부로 확대·개편되자 총장이 되어 이를 이끌었다. 1923년 1월 상하이 국민대표회의에 서로군정서 대표로 참여한 그는 이 회의에서 의장으로 선출되어 독립운동단체 통합에 힘썼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후 정의부와 민족 유일당운동촉성회를 이끌며 독립운동단체의 통일에 힘을 기울였다.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북만주에서 활동을 모색하던 중 1931년 10월 하얼빈 일본총영사관에 체포되었다. 평양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서울 서대문형무소로 옮겨져 옥고를 치르는 동안 몸은 병들었지만, 의지와 기개는 꺾이지 않았다. 독립운동가로서 감옥에서 최후를 맞는 것이 ‘과분한 죽음’이라고 여긴 그는 1937년 4월 13일 옥중에 순국했다. 1962년 정부는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김동삼 생가 터 대한통의부 총재로 활약한 김동삼이 태어난 곳으로, 현재는 외형이 많이 바뀌었으나 일부 구조는 그대로이다. 주소 : 경북 안동시 임하면 내앞길 7-7 alt 김동삼 생가 터 입구(위) / 김동삼 생가 터 전경(아래) 무장투쟁에 앞장선 대한통의부 사령장 신팔균 신팔균은 1882년 충북 진천에서 전형적인 무관 집안의 후예로 출생했다. 1904년 육군무관학교를 졸업하고 시위대 장교로서 왕실 안위를 책임졌다. 1907년 8월 군대가 강제로 해산되었으나 군직에 종사하고 있었다. 1909년 고향인 충북 진천군 이곡면 노곡리(현 이월면 노원리) 강당고개에 있는 보명학교 강사로 자주 출근하여 후진양성에 힘썼으며, 1909년 대동청년단에 가입하여 활동했다. 1910년 국권이 강탈당하자 동생 신가균과 신필균에게 보명학교 운영을 맡겼다. 이후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전념했다. 1918년 만주의 지도자로서 동지 38인과 함께 「대한독립선언서」를 발표하기도 했다. 1919년 3·1운동 후 서로군정서에 참여하고 독립군 양성에 전력을 기울였고, 1920년 12월 밀산에서 만들어진 대한독립군에 참가했다. 1922년 대한통의부가 조직되자 이에 참여했으며, 1924년 대한통의부 사령관에 취임하여 무장투쟁에 앞장섰다. 대한통의부 부대의 전투력 향상을 위해 훈련하던 중 중국군의 습격을 받아 1924년 7월 2일 전사했다. 1963년 정부는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신팔균 순국지_홍승수고 절벽바위 대한통의부 사령관 신팔균이 순국한 곳으로, 이 일대는 현재 왕청문 홍승저수지로 변하였다. 주소 : 요녕성 신빈현 왕청문 홍승수고 절벽바위 alt 대한통의부가 머물렀던 이도구 마을(2011)(위) / 신팔균 순국지 _홍승수고 절벽바위(2011)(아래) ]]> Wed, 27 Jul 2022 15:28:55 +0000 69 <![CDATA[아름다운 인연 국경을 초월한 항일투쟁 이숙진·조성환 부부]]> 글 김형목(사단법인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이사)   옛 유교에서는 부위부강(夫爲婦綱) 즉 남편은 아내의 벼리(뼈대)라 했다. 그러나 독립운동사를 보면 우리나라 독립운동의 벼리는 아내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남편의 가시밭길을 동행한 아내들의 행적을 알 수 있는 자료는 빙산의 일각 뿐이다. 임시정부 군사정책을 이끈 조성환의 행적은 다수 확인되지만, 그를 묵묵히 도왔던 이숙진의 기록은 그리 많지 않다. 온전한 추적은 어렵지만, 국가보훈처 공훈록 등에서 알 수 있는 행적을 살펴본다. alt 이숙진·조성환 부부 국권회복운동에 나서다 조성환은 1875년 7월 9일 경기도 여주군 보통리에서 조병희(曺秉熹)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대대로 관직을 지낸 가문에서 태어났으며 부친도 진사였다. 본관은 창녕, 호는 청사(晴蓑)로 이명은 조욱(曺煜·曺旭)이다. 25세가 되던 해 1900년 11월,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 2기생으로 입학했다. 육군무관학교는 장교를 양성하는 교육기관일 뿐 아니라 외국어를 비롯한 신학문을 접할 수 있는 최고학부였다. 신규식·서상팔 등 동기생과 노백린·김희선 등 교관과의 만남은 훗날 독립운동에 참여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한편 일제와 결탁한 세력은 권력을 악용하고 군부를 부패시키고 있었다. 육군무관학교 졸업을 앞둔 조성환은 “썩은 군대는 곧 나라를 망치게 한다. 속히 썩은 자들은 이 땅에서 영원히 추방시켜야 한다.”라며 부패한 군부를 숙청하려다 발각되어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뒤 3년 만에 참위로 임관되었으나 군대해산 때까지 군적만 유지할 뿐이었다. 이때 상동청년회에서 국권회복 활동을 시작한 그는 1907년 안창호·양기탁 등과 비밀결사인 신민회를 조직하여 항일구국운동에 투신했다. 이후 평양 기명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안중근이 만주로 갈 때 도움을 주기도 했다. 독립운동기지 건설을 모색하다 1908년 1월 조성환는 연해주로 가서 최재형을 만나 독립운동기지 건설을 논의했다. 이후 베이징으로 망명하여 이곳을 중심으로 국내를 비롯해 만주·러시아·미주 등지의 독립운동가들과 연계했고, 한편으로는 중국 인사와 교류하며 청년 인재를 양성하는 일에 몰두했다. 이때부터 조욱이란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1911년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이를 독립운동을 고무할 기회로 여겨 신규식과 함께 난징으로 건너가 공화혁명에 참여했다. 이를 계기로 한국과 중국의 호조기관인 동제사를 상하이에 조직했다. 그러나 가쓰라 다로 일본수상의 암살음모 혐의로 일제 경찰에 붙잡혀 1년간 유배생활에 처하였다. 유형에서 풀려나자 곧바로 베이징으로 가서 신규식 등과 신한혁명당을 조직했고, 중국 동북지역과 연해주 등지에서 대한민족의 자립을 천명한 「대동단결선언」에 참여했다. 아울러 중국 당국과 교섭하여 헤이룽장성(黑龍江省)에 둔전병제 실시를 위해 노력했다. 러시아혁명 즈음 독립운동을 펼칠 기회가 왔다고 판단하여 독립군 양성을 위해 연해주로 갔으나 동료들과 의견을 일치시키지 못하였다. 군사정책을 도모하다 1919년 3·1운동 이후 임시정부 수립을 요구하는 여론이 끓어오르자 조성환을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들은 상하이에 모였다. 4월 10일에 열린 제1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대한민국이라는 국호와 연호를 결정하고 「대한민국임시헌장」을 통과시켰다. 최초로 민주공화정을 표방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조성환은 군무차장에 선출되어 군사정책을 맡았다.        임시정부의 군사정책이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자 독립군을 길러내기 위하여 러시아 니콜리스크로 갔다. 그곳에서 박용만을 만나 대한국민군을 편성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자고 뜻을 모았으나 끝내 이루지 못했다. 이후 대한정의단에 합류하여 대한군정부를 수립한 후 중국 당국과 적절한 관계 유지에 힘을 기울였다. 대한군정부는 대한군정서로 이름을 바꾸고 임시정부 소속으로 편제되면서 독립군을 길러내는 데 힘을 쏟았다. 조성환은 총재 서일과 재무부장 계화 등과 함께 러시아로 가서 니콜리스크의 체코슬로바키아 군단과 무기 구입 계약을 맺었다. 이는 청산리대첩을 승리로 이끄는 원동력이 되었다.        이후 일본군은 한인사회를 초토화한 경신참변을 일으켰다. 이에 대한군정서를 비롯한 많은 독립군단체는 러시아 정부의 지원을 기대하며 러시아로 이동할 계획을 세웠다. 조성환은 김좌진·홍범도와 부총재를 맡아 조직을 이를 이끌었다. 동포들이 많이 거주한 이르쿠츠크에서 군관학교 운영과 러시아 내전에 참여한 그는 군자금 모집을 위해 상하이로 이동했고, 이 때문에 자유시참변을 피할 수 있었다. 상하이를 중심으로 홍콩과 광둥을 오가며 독립운동 자금 마련에 노력한 그는 이후 베이징에 머물면서 자유시참변 당시 만주로 흩어져 되돌아온 독립군을 다시 모으는 방법을 고민했다. 이세영·박용만·황학수 등과 독립군 조직 통합과 군사 양성 방법을 논의했다. 북경군사통일회의가 바로 여기에서 형성된 것이다. 독립운동단체 통합에 나서다 1922년 가을 북만주로 가서 무장대를 조직하는 한편 대종교를 적극 후원했다. 독립군이 안정적으로 활동하려면 동포사회부터 안정되는 것이 우선이기 때문이었다. 각지를 방문한 결과 대한독립군단을 결성하였으나 대통합에 이르지 못하고 말았다. 그러나 군사 모집과 사관학교 설립에 착수하고, 만주 각지에 군자금을 모으는 등 군정서 재건사업을 활발히 펼쳤다. 남만주에서 전만통일회의주비회가 탄생하자 1925년 독립운동단체를 통합한 신민부를 탄생시켰다.        아울러 좌우로 나뉜 독립운동단체를 하나의 ‘정당’으로 통합하여 국가를 움직이는 이당치국 체제를 구현하려는 민족유일당운동을 주도했다. 안창호가 주도한 이 운동은 베이징의 좌파 세력과 힘을 합쳐 대독립당조직북경촉성회를 창립하는 등 첫 성과를 올렸다. 여기에서 의장으로 선출된 조성환은 원세훈 등과 공동으로 선언서와 간장(簡章)을 기초한 후 집행위원 겸 대표로서 대당 결성을 위한 활동을 이끌었다. 그는 민족유일당운동이 독립운동계 통합만이 아니라 만주 이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기회라고 판단하였다. 북경촉성회 창립 직후 입적간민회를 조직하여 한인들이 중국 국적을 갖고 안정적 정착을 함으로써 독립군 활동 기반을 다지도록 하였다. 한편 이 무렵 일제가 미쓰야협정으로 대종교 포교금지령을 내리자 박찬익과 더불어 외교를 펼쳐 이를 해결했다. alt 조성환 고택(여주시 대신면) 임시정부 군사정책을 이끌다 1929년 민족유일당운동에서 좌파가 이탈하자 조성환은 우파 인물들과 함께 한국독립당을 결성했다. 임시의정원 경기도의원으로 선출되었으나 베이징에 머물면서 한국독립당 북경지부 간사로 활약했다. 임시정부가 상하이에서 항저우로 이동하던 시기에 국무위원으로 선출된 그는 임시정부 강화를 위한 방안을 논의했다. 한편 1935년 독립운동 노선을 둘러싼 갈등으로 다수 인물이 조선민족혁명당을 창당하여 임시정부를 떠났다. 임시정부를 고수한 조성환은 그해 11월 이시영·양우조 등과 한국국민당을 결성하여 당을 지도·감독했다. 이어 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군사 업무를 총괄하는 군무장에 선임되었고, 이때부터 줄곧 국무위원으로서 군사업무를 총괄했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즈음하여 임시정부는 군대 창설 계획에 서둘렀다. 임시정부는 독립운동 방략을 군사인재 양성·군사통일기관 설치·특무사업 실행 등으로 정하였다. 조성환은 군무장이자 군사위원회 책임자로서 군사특파단 주임에 선임되었고, 한인 청년들을 모으기 위해 산시성 시안으로 갔다. 1940년 충칭에 정착한 임시정부는 ‘당군’이 아니라 ‘국군’으로 한국광복군을 창설하고 대한제국군과 독립군을 계승했음을 천명하였다. 헌법 개정에 따라 정부 각료 명칭이 변경되자 군무장에서 군무부장에 취임했다. 광복군이 성립한 지 두 달 만에 총사령부는 시안으로 전진 배치되었고, 군사특파단과 모병된 인원으로 제1·2·3지대를 편성한 후 아나키스트 계열의 한국청년전지공작대를 제5지대로 합류시켰다. 한편 중국국민당 정부는 「한국광복군 9개 행동준승」을 내놓고 광복군의 작전지휘권을 비롯하여 인사권까지 예속시켰다. 이에 조성환은 군무부장으로서 “광복군이 중국에 예속된다면, 광복군은 도리어 우리 독립운동을 말살하는 기관일 뿐이다.”라며 반발했다. 그 결과 중국 군사위원회으로부터 한국광복군 통수권을 되찾아오게 되었고, 곧이어 조성환은 군무부장 자리를 내놓고 무임소 국무위원이 되었다. 1935년 이후 지청천에게 넘긴 10개월을 제외하면 오로지 군정업무만 9년 동안 맡았다. alt 이숙진·조성환 부부 국경을 초월해 부부의 연을 맺다 조성환은 중국인 이숙진과 부부의 연을 맺었다. 조성환의 첫째 부인 조순구는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국내로 귀국했다. 조성환과 이숙진이 어떻게 만났는지 구체적인 상황은 알 수 없다. 1900년생으로 조성환과 25살이나 차이가 나는 이숙진은 조성환이 군사정책을 추진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이숙진이 임시정부 요인들과 같이 찍은 사진을 보면 아내로서 자리를 지킨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이숙진은 중일전쟁 이후 임시정부가 독립전쟁을 추진하는데 국민당정부와 교섭의 통역 등을 자원하였다. 임시정부 외곽단체 활동 등은 물론 한국혁명여성동맹 활동에도 남다른 관심을 가졌다. 민족정체성을 일깨우려는 3·1유치원 등에 대한 지원은 이를 방증한다. 조성환은 독립운동에 헌신하느라 바쁜 와중에도 자식들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다. 하지만 그의 유일한 혈육인 딸 연경은 1931년에 사망했고, 양자인 규식도 1942년 사망했다. 이후 이숙진은 남편의 독립운동에 방해되지 않기 위해 자식을 두지 않았다. 이는 국경을 초월한 나라사랑 정신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광복 후 건국사업에 동참하다 조성환은 1945년 12월 2일 환국한 이후 대한민국군사후원회 총재·간도협회 고문·성균관 부총재 등을 역임하였다. 또한 독립촉성국민회 위원장과 반탁독립투쟁위원회 부위원장으로 활동하면서 남은 삶을 오로지 나라를 반듯하게 만드는 데 쏟아부었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지 두 달이 지난 1948년 10월 7일 마지막으로 머물던 종로 6가 낙산장에서 사망하여 효창공원 임시정부 요인 묘역에 묻혔다. 이숙진은 남편의 활동을 든든히 지원했으나 자신의 공과는 전혀 드러내지 않았다. 정부는 조성환에게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 이숙진에게 2017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국경을 초월한 이들의 항일역정은 우리의 심금을 울린다. ]]> Wed, 27 Jul 2022 15:36:59 +0000 69 <![CDATA[ 끝나지 않은 독립운동 ‘평화의 소녀상’을 지키는 것은 인간존엄과 여성인권을 지키는 일]]> 글 이계형(국민대학교 교양대학 교수)   “위안부는 전시 성폭력 피해자가 아니다.” 지난 7월 독일 베를린시 미테구를 방문하여 ‘평화의 소녀상’ 철거를 주장한 이른바 ‘위안부사기청산연대’ 소속의 한국 극보수 인사들이 내뱉은 말이다. 이들은 ‘평화의 소녀상’은 한일관계뿐만 아니라 국제관계도 악화시키는 원흉이며, 소녀상 설치는 아무런 이익도 낳지 않고, 오히려 갈등과 증오만 부추긴다고 주장하였다. 과연 그들의 주장이 옳은지 그리고 정의로운 일이었는지 묻고자 한다. 진실의 민낯이 드러나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불거진 것은 1990년대부터이다. 광복 후 45년 만이니 늦어도 한참 늦은 셈이다. 그런데 이를 되짚어보면 그럴 만도 하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은 지긋지긋한 전쟁에서 겨우 벗어나 꿈에 그리던 고향을 찾았지만, ‘일본군과 놀다 온 더러운 여자’라는 오해와 편견에 그저 모든 것을 가슴에 묻은 채 고향을 떠나 타지에서 살아가야 했다. 그들 가운데 철저히 버림받아 갈 곳도, 할 수 있는 일도 없어 기구하게도 주한미군 위안부가 된 이들도 있었다. 겨우 10대 후반부터 20대 초반 나이었으니 산목숨 그렇게 살아가야 했을 것이다.          1990년 11월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제기해 오던 37개 여성단체가 연합한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가 조직된 후 1991년 8월 14일 김학순 할머니가 자신이 위안부 피해자였다며 이를 최초로 공개 증언하면서 만천하에 진실의 민낯이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이후 국내는 물론 필리핀·네덜란드 등 세계 각지에서 증언이 잇따랐다. 이를 기려 2012년 12월 ‘제11차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아시아연대회의’에서 ‘8월 14일’을 ‘세계 위안부의 날’로 지정하였고, 우리나라 정부는 2018년 이날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로 정하고 국가기념일로 지정하였다.  미국에 건립된 ‘위안부 피해자 기림비’ 공개 증언 이후 1992년 1월 일본대사관 앞에서 수요집회가 시작되었고, 1993년 8월 일본의 고노 관방장관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강제성뿐만 아니라 일본군이 직간접적으로 관여했다며 사과하였다(이른바 고노 담화). 그뿐만 아니라 유엔인권위원회는 보고서에 일본군 ‘위안부’를 ‘성노예’로 정의하였고 이후 통용되었다. 이는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이 자신들이 당한 끔찍한 ‘성노예’ 경험을 미국의 여러 대학과 단체에서 증언하면서 미국인들을 움직인 결과였다. 그들은 일본군의 포악한 성폭력에 여성의 인권이 무참히 짓밟혔다는 사실에 공감하며 피해 할머니들의 호소에 동참하였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피해 할머니들이 고령화하여 더는 공개 증언이 어렵게 되면서 2010년대부터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하였다. 이때 처음으로 2010년 10월 미국 뉴저지주 팰리세이드파크시 도서관 내에 ‘위안부 피해자 기림비(‘Comfort Women’ memoria)’가 세워졌다. 하지만 그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일본 정부는 거세게 반발하였고 집요하게 이를 막았다. 한때는 시의회 통과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목소리도 전해졌다. 그럴수록 한인뿐 아니라 중국인·일본인·유대인 단체가 연대하였고, 결국 시 당국은 기림비가 미국 시민들의 주도로 세워졌다는 이유로 일본 측 요구를 거절하면서 첫 결실을 보게 되었다.  팰리세이드파크시는 그러한 문제를 한일 간 다툼에 따른 정치적인 목적이 아닌 여성의 인권 문제라는 교육적 가치로 판단하였다. 그런 만큼 동판에는 ‘1930년대부터 1945년까지 일본 제국주의 정부 군대에 납치된 20만 명 이상의 여성과 소녀들을 기린다’라는 문구와 함께 ‘인류에 대한 두려운 범죄를 절대 잊지 말자’라는 다짐이 새겨졌다. 이후 이 문구가 새겨진 여러 기림비가 뉴욕 낫소(Nassau) 카운티 시내 아이젠하워 공원(2012.6), 뉴저지주 버겐카운티 트리니티 에피스코팔 교회(2013.3), 버지니아주 페어팩스 카운티 정부청사(2014.5) 등에도 건립되었다. 이를 통해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군의 성노예와 인신매매로 희생된 여성들을 기리고 전 세계에서 일어나는 인신매매와 인권 유린을 상기시키고자 한 것이다. 전쟁이 일어나는 어느 국가든지 여전히 반복되는 문제라는 데 공감하고 정치적인 접근이 아닌 여성의 인권과 존엄의 시각에서 문제의 심각성을 바라보았다.  전 세계에 세워진 ‘평화의 소녀상’ 2011년 12월 14일 수요집회 1,000회(20년)를 맞아 ‘평화의 소녀상(이하 소녀상)’이 일본대사관 앞에 처음 제작·설치됐다. 이후 소녀상은 국내뿐 아니라 전 세계로 확산되었다. 2013년 7월 미국 캘리포니아 글렌데일 시립 중앙도서관 앞에 처음으로 세워졌다. 그곳은 19세기 말 20세기 초 아르메니아인 백만여 명이 희생된 곳인 만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고통에 공감하여 국경을 넘는 기억의 연대가 만들어낸 것이다. 이어 미시간주의 사우스필드의 한인문화회관(2014.8.)과 캐나다 토론토시 한인회관(2015.11) 앞에 소녀상이 세워졌다. 이를 기회로 한국 정부는 일본에 압박 강도를 높여나갔다. 특히 독일 메르켈 총리뿐 아니라 영국 여왕 등 세계 각국의 정상들에게 일본군 ‘위안부’ 관련 만행을 알려 일본을 압박하였다. 이에 일본 측에서 먼저 협상을 제안해 왔다. 그러한 결과로 2015년 12월 박근혜 정부와 일본 아베 내각 간에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최종적·불가역적으로 종결되었음이 선포되었다. 이는 일본 정부가 ‘위안부’의 강제성과 법적 책임을 인정하지 않은 것이었기에 피해자들은 물론 국내의 반발은 거셌다. 더욱이 기림비(소녀상 포함) 철거와 성노예 삭제 등의 이면 합의가 있었다는 데 비판 여론이 격화하였다. 이는 되레 미국 이외에도 호주, 독일까지도 소녀상 건립이 확산하는 계기가 되었다. 호주 시드니 애쉬필드 교회(2016.8), 독일 남부 레겐스부르크시 인근 비젠트(2017.3), 조지아주 브록헤이분 블랙번 매번공원(2017.6), 뉴욕 맨해튼 뉴욕한인회관(2017.10) 등이 대표적인 곳이다. 소녀상은 아니지만 ‘위안부’ 동상이 상하이 한중평화의 상(2016.10)과 샌프란시스코 세인트 메리스 스퀘어공원(2017.9) 등지에 세워졌다. 특히 스퀘어공원 동상은 샌프란시스코 지역에 거주하는 한국·중국·필리핀·네덜란드 등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 위안부 피해를 본 13개 국가의 커뮤니티들이 연합해 건립한 것이다. 샌프란시스코시가 자매결연을 한 일본 오사카시와 절연하면서까지 얻어낸 성과였다. 더욱이 샌프란시스코 시의회가 ‘위안부 기림비 건립과 전 세계 여성과 소녀에 대한 인신매매 중단에 대해 지역사회에 교육할 것을 촉구’하는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통과한 뒤의 결과여서 의미가 컸다. 이 동상은 2019년 8월 일제의 정신적 침략을 상징하는 남산 조선신궁 터 부근에도 건립되어 의미를 더했다. 동판에는 ‘(침묵을 깨고 용감하게 증언한) 이들은 성폭력을 전쟁의 전략으로 이용하는 것은 정부에 책임을 물어야 하는 반인륜 범죄에 해당한다는 세계적인 선언을 끌어냈다. 이 여성들과 전 세계에 걸친 성폭력 및 성을 목적으로 한 인신매매 근절 노력에 이 기림비를 바친다’라고 쓰여 있다.  여성 인권과 존엄을 상징하다 2021년 2월 램지어 하버드대 로스쿨 교수가 “위안부는 전쟁의 피해자가 아닌 자발적인 성 노동자, 매춘부였다”라고 막말을 하여 떠들썩했다. 또한 국내 유력 보수 일간지는 2021년 10월 ‘한일 관계가 파탄 나면 더 좋다. (…) 위안부 문제는 현 집권 세력에 가성비 좋은 국내 정치용 비즈니스가 됐다. (…) 일본은 반격에 나섰고 미국도 주춤했다’라며 악의적이고 왜곡된 보도를 쏟아냈다. 이러한 연속선상에서 국내의 극보수 단체가 독일에서 ‘소녀상’ 철거를 주장하였다.        기림비와 소녀상은 오늘날 전 세계인들이 주목하여 전시 성범죄 희생자들의 고통을 기억하는 공간이자 여성 인권과 존엄·평화를 염원하는 대상이 되었다. 소녀상은 더는 한일 간의 외교 문제가 아니며 국내의 좌우 이념 문제가 아니다. 한때 국가가 없어 그들을 지켜주지 못했다. 그러한 민족이 독립하여 새로운 국가를 세웠다면 그들을 보듬어 안아야 하고, 그렇게 만든 상대 국가에 사죄와 용서를 받아내는 것이 마땅한 일이다.  ]]> Wed, 27 Jul 2022 16:14:47 +0000 69 <![CDATA[독립의 발자취 한자리에서 만나는 고국 품으로 돌아온 우리 문화재]]> 글 편집실   구한말 서구열강의 침탈과 일제강점기 그리고 한국전쟁 등 질곡의 역사를 겪으며 우리나라 밖으로 흩어졌던 문화재들이 다시 우리 품으로 돌아와 관람객을 맞이하고 있다. 이번 전시를 기획한 국립고궁박물관 신재근 학예사의 안내를 따라 나라 밖 문화재와 그 가치를 되살리기 위해 노력해온 사람들의 여정을 함께 되짚어본다.  alt 1. 2018년 독일 상트오틸리엔 수도원이 반환한 〈면피갑〉 2. 2022년 미국에서 환수한 〈백자동채통형병〉 3. 2021년 일본에서 환수한 〈나전 매화, 새, 대나무 상자〉 4. 2022년 미국에서 환수한 〈열성어필〉 Q.〈나라 밖 문화재의 여정〉전시를 개최한 계기는? 올해는 해외에 흩어져있는 우리 문화재에 대한 조사·연구·환수·활용을 맡고 있는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 설립된 지 10년째 되는 해입니다. 그동안 재단의 노력으로 국외에 있던 적지 않은 우리 문화재가 국내로 돌아왔는데, 그동안의 문화재 환수 노력의 성과를 알리고 그 결과물을 전시하는 자리를 마련하였습니다. 이번 전시는 나라 밖과 안으로 우리 문화재가 지나온 여정을 함께 되짚어보는 자리입니다. 이는 나라 밖 문화재의 가치를 되살리기 위해 노력해온 사람들의 여정이기도 합니다.  Q. 우리 문화재가 어떠한 경로로 국외로 흩어지게 되었나요?  우리 문화재가 나라 밖으로 나가게 된 사정은 다양합니다. 구한말 서구열강의 침탈·일제강점·한국전쟁으로 이어지는 국가적 혼란기를 겪으며 우리 문화재가 불법적이거나 부당한 방법으로 유출되기도 했습니다. 조선의 왕실 문화유산을 비롯해 국가 운영과 관련된 문화유산들이 도난과 약탈에 노출되었습니다. 반면에 적법한 구입·기증·외교 선물·수출 교역 등을 통해 나가게 된 문화재도 적지 않았으며, 한국 문화에 대해 관심이 컸던 서양 사람들의 수집도 있었습니다. 그동안 나라 밖으로 떠나게 된 우리 문화재는 현재 214,208점(2022.1.1.기준)으로 아시아·유럽·아메리카 대륙에 걸쳐 25개 나라에 흩어져 있습니다. 하지만 소장 정보가 온전히 공개되지 않는 문화재의 특성을 고려하면 실제 나라 밖 우리 문화재는 알려진 것보다 더 많은 수에 이를 것입니다. Q. 다시 환수하기까지 그 과정이 쉽지 않았을 텐데요.  국외문화재 환수는 국제법상 강제수단이 미비할 뿐 아니라 당사국들 간의 정치·경제·문화적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있어 쉽지 않은 문제입니다. 그런데도 정부와 민간단체 등은 국외문화재에 대한 국민적 관심을 키워왔으며 다양한 방식의 환수 시도와 성과가 있었습니다. 1965년 한일협정을 통해 일본에서 1,432점이 돌아온 것을 시작으로 산발적인 환수 성과들이 있었습니다. 2000년대 들어 프랑스의 〈외규장각 의궤〉를 비롯하여 〈북관대첩비〉와 일본 궁내청 보관 한국 도서 등 중요한 문화재들이 돌아오면서 국외 문화재에 대한 국민적 기대와 관심이 한층 높아지게 되었습니다. 특히 〈겸재 정선 화첩〉, 조선 후기 보병이 입었던 〈면피갑〉 등 독일 상트오틸리엔 수도원의 조건 없는 한국문화재 반환은 나라 밖 문화재를 통해 이어진 아름다운 인연으로 기억되기도 합니다. Q. 이번 전시에서 처음 공개되는 유물이 있나요?  이번 전시에서는 국외에서 환수한 문화재 40여 점을 만나볼 수 있는데, 그중 대중에게 처음 공개되는 유물 3점이 있습니다. 지난해 일본에서 환수한 〈나전 매화, 새, 대나무 상자〉와 올해 3월 미국에서 환수한 〈열성어필〉과 〈백자동채통형병〉입니다. 〈나전 매화, 새, 대나무 상자〉는 조선 후기에 제작된 나전상자로, 제작수준이 높고 보존상태도 양호해 국내에서 전시·연구 등의 활용 가치가 높은 유물로 꼽힙니다. 〈열성어필〉은 조선시대 왕들의 글씨(어필)를 탁본해 엮은 책으로, 1722년에 간행된 이후 3년만인 1725년에 새로운 글씨를 추가해 묶어 형태가 드문 유물입니다. 백자표면을 구리안료로 장식한 병인 〈백자동채통형병〉은 일제강점기 때 한국에서 선교사로 활동했던 스탠리 스미스가 소장했던 것으로, 국외문화재의 반출 사례를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입니다.  Q. 이 밖에도 눈여겨볼 만한 관람 포인트가 있다면?  언론에 한차례 공개됐던 2018년 독일에서 환수한 〈면피갑〉과 2022년 미국에서 환수한 〈독서당계회도〉 등 6점의 유물도 일반 관람객에게는 처음으로 공개됩니다. 또한 덕혜옹주가 어릴 때 입었던 옷인 〈덕혜옹주 당의(예복으로 저고리 위에 덧입는 상의)〉와 〈스란치마(장식용 띠인 스란이 있는 예복용 치마)〉도 전시되는데, 덕혜옹주의 애달픈 사연을 떠올리게 하여 관람객의 시선을 사로잡을 예정입니다. 더불어 문화재 환수 과정을 간접 체험할 수 있는 영상 등 관람객의 이해를 돕기 위한 전시방식에도 공을 들였습니다. Q. 이번 전시를 통해 기대하는 바가 궁금합니다.  우리나라는 광복 이후부터 지금까지 빼앗긴 문화재 반환에 심혈을 기울여 온 국가로 그동안 적지 않은 성과를 내왔고, 10년 전부터는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의 설립으로 반환 사업이 보다 일원화되고 전문화되면서 더 좋은 성과를 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우리가 문화재를 반환 받는 것에 최종 목표를 두고 소유권에만 문화재의 가치를 두지 않았는지 성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번 전시 관람을 통해 문화재를 어떻게 관리하고 연구할 것인지, 장기적으로 문화재를 통해 역사문화 콘텐츠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를 고민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Q. 관람객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나요?  하나의 일이 결과를 맺기까지는 드러나지 않는 많은 노력이 있습니다. 이번에 전시된 유물 자체가 바로 그러한 노력의 결과물입니다. 관람하시는 분들은 전시된 유물들 하나하나를 눈에 담으시면서 돌아온 유물의 가치뿐만 아니라 숨겨진 노력을 조금이라도 생각하여 보시는 자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아울러 해외에 나가 있는 우리의 문화재가 더욱 빛날 수 있도록 응원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다만 여러 여건으로 인하여 그동안 환수되었던 문화재 모두를 보여줄 수 없음을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10년 후에는 좀 더 많은 유물이 전시될 수 있도록 혹은 전시할 수 있는 상황을 꿈꾸어 봅니다. alt 〈나라 밖 문화재의 여정〉 전시는 서울 종로구에 자리한 국립고궁박물관 1층 기획전시실에서 오는 9월 25일까지 이어질 예정이다. 나라 밖에서 고국으로 돌아온 문화재 40여 점을 한자리에서 만나볼 수 있으며, 전시는 1부 ‘나라 밖 문화재’·2부 ‘다시 돌아오기까지’·3부 ‘현지에서’로 구성하였다. 아울러 다시 돌아온 우리 문화재의 가치와 환수경로 등을 상세하게 알 수 있게 전시 공간을 연출하였다. alt 1부 ‘나라 밖 우리 문화재’  : 돌아온 유물을 통해 우리 문화재가 국외로 나간 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 일제가 유출했으나 민간과 정부가 힘을 합쳐 2006년에 환수한 국보 〈오대산사고본 조선왕조실록〉을 볼 수 있다. 또한 보물인 〈국새 황제지보〉·〈국새 유서지보〉·〈국새 준명지보〉는 모두 한국전쟁 때 도난당했다가 미국과 공조로 그 존재를 찾아내면서 2014년 양국 정상회담을 통해 돌아왔다. 가장 최근인 올해 3월 환수한 〈백자동채통형병〉은 미국인 수집가가 반출한 유물로, 국내 소장 사례가 적고 문화재적 가치가 높다. 전시 작품 중 어보와 국새는 관람객이 다각도로 감상할 수 있도록 회전시키기도 하고, 글자가 새겨진 인면(印面)을 올려다볼 수 있도록 입체적으로 전시했다. alt 2부 ‘다시 돌아오기까지’   : 전시 유물을 통해 문화재 환수의 여러 방법을 보여준다. 한·일수교 50주년을 기념해 일본 소장기관에서 기증받아 환수한 〈덕혜옹주 당의〉 및 〈스란치마〉와 한국과 미국의 수사공조로 불법성을 확인하고 국내로 환수한 〈호조태환권 원판〉을 통해서 기관을 통한 기증과 도난문화재의 환수 과정을 상징적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소장자가 자발적으로 기증하는 방식으로 들여온 환수문화재인 〈문인석〉과 〈면피갑〉도 관람할 수 있다. 불법성이 확인되지 않았더라도 국내에 희소하거나 문화재적인 가치가 클 경우 ‘구입’이라는 방식으로도 환수된 문화재도 있다. 〈나전 매화, 새, 대나무 상자〉와 〈열성어필〉이 경매로 구입한 대표적인 유물이다. 이밖에 벽면에 설치된 대형 상호작용(인터렉티브) 영상으로 문화재가 환수되는 여러 과정을 관람객이 직접 생생하게 체험하며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alt 3부 ‘현지에서’  : 해외에 있는 우리 문화재가 국내로 환수되지 않더라도 머물고 있는 현지에서 다양하게 활용될 수 있도록 노력한 그간의 성과를 다뤘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에서 지원했던 해외소재 문화재의 보존처리 과정과 해외에 우리 문화재를 알리는 모습을 영상을 통해 감상할 수 있고, 그동안의 조사연구 성과를 담은 책자도 직접 읽어볼 수 있다. 아울러 전시기획자의 인터뷰 영상을 통해 나라 밖 문화재의 여정을 돕고 있는 생생한 육성을 듣고, 관람객이 자신만의 느낌을 적어 보는 체험을 할 수 있도록 꾸몄다. ]]> Wed, 27 Jul 2022 16:38:30 +0000 69 <![CDATA[세계 산책 아일랜드 자유국가의 탄생을 견인한 마이클 콜린스]]> 글 이민경(가톨릭관동대학교 Verum 교양대학 교수)  “조약은 궁극적인 자유가 아니라 성취할 자유를 제공하는 것이다.” 아일랜드 자유국가의 탄생을 견인한 마이클 콜린스가 남긴 명언이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100주기가 된 해를 맞아 생전에 그가 설파한 ‘자유를 위한 독립투쟁’의 업적을 되돌아보고, 오늘날 우리에게 어떠한 의미를 던져주는지 살펴보자. altIRA 재무장관 시절 마이클 콜린스 사후 100주기를 맞은 마이클 콜린스1996년 영화 〈마이클 콜린스〉가 베니스 국제영화제 황금사자상을 수상하며 세계의 이목을 받았다. 아일랜드 ‘부활절 봉기(Easter Rising)’ 100주년의 해였던 2016년에는 워너브라더스가 이 영화를 ‘아카이브 콜렉션’으로 만들어 콜린스의 독립운동 여정을 전 세계 대중이 쉽게 접할 수 있도록 하였다. 콜린스의 사후 100주기를 맞은 올해, 우리나라를 비롯해 여러 나라에서 그의 업적을 기리는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쿠바 혁명하면 체 게바라를 연상하듯 콜린스가 아일랜드 독립에 막중한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임을 증명하는 움직임들이다. 아일랜드의 신문사 『아이리시 타임즈』가 실시한 ‘독립 밀레니엄 기념 설문조사’에서는 그가 아일랜드공화국의 ‘세기의 인물’로 선정된 바 있다. 그러나 아일랜드 독립에 내재한 ‘분리의 역사’처럼 그에 대한 평가도 양극으로 나뉜다. 콜린스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그를 미국의 링컨과 케네디 대통령이 합쳐진 인물로 여긴다. 아일랜드 남북전쟁에서 아일랜드를 자유국가로 만들었으나 끝내 살해되어 생을 마감했던 영화 같은 삶 때문이다. 반면 콜린스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그를 미국 독립전쟁 당시 대륙군을 배반한 베네딕트 아놀드로 여긴다. 통합된 아일랜드공화국 형성을 방해한 인물이라는 것이다. 양측의 견해가 무엇이든 콜린스가 아일랜드 독립의 역사 중심에 서 있는 인물인 것은 분명하다. 그가 아일랜드 혁명기간(1916-1923)에 맡았던 아일랜드공화국군(IRA: Irish Republican Army) 정보국장·재무장관·임시정부 의장 및 아일랜드 자유국군 총사령관 등과 같은 여러 직책은 이를 대변해주기에 충분하다. 가열찬 투쟁의 계기가 된 ‘부활절 봉기’헨리 8세의 아일랜드에 대한 잉글랜드 국왕의 통치 선언 이후, 아일랜드는 잉글랜드의 정복과 통치의 대상으로 영국의 영향권에 놓였던 수모의 역사를 갖고 있다. 프랑스 대혁명의 영향을 받은 아일랜드공화주의 혁명단체 ‘아일랜드인 연합’은 이러한 억압의 상황에서 벗어나고자 ‘아일랜드 반란(1798)’을 일으키기도 했다. 결국 1800년 합병령에 의해 아일랜드 의회가 해산되었고, 1801년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Ireland)으로 합병되었다. 19세기 동안에도 ‘아일랜드 청년당의 반란(1848)’, ‘페니언 반란(1867)’ 등 산발적인 반란이 있었으나 모두 실패하였다.1차 대전이 발발하여 글래드스턴과 에스퀴스 총리 시기에 추진되던 아일랜드 자치권의 미래가 불투명해지자 아일랜드 독립운동의 시발점이 된 ‘부활절 봉기(1916)’가 일어났다. 우리나라의 3·1운동과 같은 역사성을 갖는 이 봉기는 영국으로부터 독립된 공화국의 수립을 목표로 하였다. 영국군의 압도적인 무력에 의해 진압되었지만, 이 시기까지 이어져 온 영국에 대한 항쟁의 불씨가 더욱 크게 타오르는 계기가 되었다. 콜린스는 이 봉기에 참여한 계기로 독립투쟁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이후 지도부가 처형당하고 그도 체포되어 옥고를 겪었지만, 그에게 포로수용소에서의 시간은 과거 아일랜드에 일어난 봉기들의 실패를 분석하여 부족한 조직의 결점을 파악하고 투옥된 공화주의자들의 집결을 모색하는 기회가 되었다. alt 마이클 콜린스(1890-1922)의 장례식  오랜 투쟁 끝에 이룬 ‘아일랜드-영국 조약’1919년 1월 21일 아일랜드공화국군(이하 IRA)이 왕립 아일랜드 보안대 소속 경찰을 살해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사흘 후, 과거 1916년 ‘부활절 선언문(Easter Proclamation)’이 공포되었던 곳에서 아일랜드 독립전쟁을 알리는 발포가 이루어졌다. 전후 설립된 아일랜드 제헌의회(Rebolutionary Dail)가 아일랜드 독립을 선언하고 IRA에게 전쟁 개시를 명령한 것이다. 이때 콜린스는 IRA 단장으로 첩보와 의용군 조직, 보어인들의 전투 방식을 모사한 게릴라전의 효과적 운영을 맡았다. 콜린스는 2년 반의 게릴라 투쟁 끝에 영국의 로이드 조지 총리를 협상 테이블에 앉게 하였다. 영국 정부와의 평화협상은 ‘아일랜드-영국 조약(1921)’으로 이어지며 새로운 아일랜드 자유국가(Irish Free State)의 탄생을 가져왔다.      그러나 ‘북아일랜드 6개주가 제외된 자치 보장’과 ‘영연방 일원으로서 영국의 군주를 수장으로 삼아야 한다’는 내용이 문제였다. 아일랜드 독립전쟁에 참가했던 IRA의 약 70%가 이 조약에 반대하였고 끝내 아일랜드는 분열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다. 아일랜드 독립을 위해 부활절 봉기에서 함께 싸웠던 데 발레라(Eamon de Valera)를 중심으로 한 반대파와 적이 된 콜린스는 결국 피로 쟁취한 ‘자유국’이란 결과를 가지고도 ‘아일랜드 내전(1922~1923)’의 발발을 막지 못했다. 종국에는 반조약 아일랜드 군대(Anti-treaty Irish Forces)의 매복군에 의해 그가 태어난 코크주 빌나블라 계곡에서 살해당하고 말았다. 이 대립의 여파는 현재까지도 통일아일랜드당(Fine Gael)과 아일랜드공화당(Fianna Fail)의 양대 정당으로 지속되고 있다. 오늘날 재조명되는 콜린스의 업적아일랜드는 데 발레라의 총리 재임 중 북아일랜드 6개주를 제외한 독립 민주주의국가 에이레(Eire, 1937)로 재탄생하였다. 1931년 가입했던 영연방에서는 1949년 탈퇴함으로 진정한 독립국가로 거듭났다. 그러나 이것이 콜린스의 결과물에서 180도 달라진 것일까?       데 발레라의 집권은 콜린스에 대해 불리한 기억을 기록으로 남게 하였다. 그러나 콜린스가 취했던 전술은 이후 혁명가들의 연구대상이 되었고, 이스라엘의 샤미르(Y. Shamir) 총리는 이스라엘 독립전쟁 중 ‘마이클’이란 암호를 사용할 정도로 그를 존경하였다. 영국이 두려워했던 콜린스의 대담함과 집요한 끈기 그리고 투쟁 과정에서의 눈부신 성취들은 현재 아일랜드 독립사에서 기억해야 할 디딤돌로 재조명되고 있다.       대한민국을 일구어낸 수많은 독립투사를 기억의 장으로 모으는 광복절 즈음, 불안전한 휴전의 역사 속에서 우리는 콜린스가 던졌던 “무엇을 얻을 수 있었으리라는 것보다 무엇을 얻었는지를 바라보자.”라는 말을 곱씹어보며 완성된 독립을 위해 갈등과 분리보다는 통합을 향한 행보를 내디뎌야 할 것이다. ]]> Wed, 27 Jul 2022 16:44:10 +0000 69 <![CDATA[기념관은 지금 자세히 알아야 보인다, 독립기념관 속 숨은 역사를 찾아서]]> 정리 편집실    사진 이소연 독립투사들의 얼이 살아 숨 쉬는 독립기념관에는 독립운동사를 기억하고 이를 기념하는 상징물들이 곳곳에 놓여있다. 그중 겨레의탑·태극기한마당·겨레의집은 독립기념관을 찾는 이들이라면 꼭 들리는 장소로 자리 잡았다. 찾아보면 이 밖에도 꼭 한번 둘러보아야 할 곳이 적지 않다. 광복의 달 8월, 독립기념관을 둘러보며 광복의 의미를 되새겨보는 건 어떨까. alt 조선총독부 철거부재 전시공원 일제강점기 착취와 억압의 상징물 조선총독부 철거부재 전시공원 1995년 광복 50주년을 맞이하여 식민잔재의 청산과 민족정기 회복을 위하여 조선총독부 청사를 철거하고 각계의 의견을 수렴하여 철거부재를 독립기념관으로 이전하여 전시공원을 조성하였다. 왜 독립기념관은 조선총독부 건물을 전시했을까 일제는 1910년 대한제국의 국권을 강압으로 빼앗은 후 식민통치기구로서 조선총독부를 설치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 후 남산 왜성대에 설치한 한국통감부 건물을 사용하였으나 1926년 경복궁 건물을 일부 헐고 그 자리(현 광화문)에 조선총독부 건물을 새로 지어 이전하였다. 이후 1945년 8월 15일 패망할 때까지 19년간 식민통치의 상징으로 이 건물을 청사로 활용하였다. 광복 후 조선총독부 건물은 미군정청·대한민국 정부 청사·국립중앙박물관 등으로 사용되었다. 1995년 광복 50주년을 맞이하여 철거부재를 독립기념관으로 이전하여 역사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놓치지 말아야 할 체크포인트 1. 의도된 위치와 배치 조선총독부 철거부재 위치를 해가 지는 곳, 독립기념관의 주 건물인 겨레의집 서쪽에 조성하였다. 이는 일제 식민통치의 몰락과 함께 식민잔재 극복 및 청산을 강조한 것이다. 또한, 철거부재 중 첨탑을 지하 5m 깊이로 반 매장하여 정면에서 봤을 때 우리의 눈높이보다 낮게 배치하였다. 이는 일제강점기 착취와 억압의 상징물을 최대한 ‘홀대하는’ 방식으로 의도한 연출이다. 이곳 반대편 동쪽에는 ‘통일염원의 동산’이 조성되어있다. 2. 화려한 건축 양식 일제의 검은 속내를 철거부재의 크기와 장식 등에서 찾아낼 수 있다. 당시 초대형 건축물이었던 조선총독부 건물은 ‘오래오래 영원토록 조선을 지배하겠다’라는 일제의 속셈을 반영하고 있다. 또한 지붕과 기둥 등에 꾸며진 화려한 장식을 보면 일제가 얼마나 힘을 과시하고 싶어 했는지 엿볼 수 있다. 이 화려하고 높은 조선총독부 건물을 보는 조선인들의 마음이 어떠했을지 헤아려보는 기회를 제공한다. alt 조선총독부 철거부재 전시공원 전경(좌) / 조선총독부 철거부재(우) 선열들의 고귀한 뜻을 기리는 공간 추모의 자리 애국선열들의 고귀한 뜻을 기리고 겨레의 영원한 번영을 다짐하는 공간인 추모의 자리는 독립기념관 상단에 위치하고 있다. 좌우에는 봉화대가 있고, 중앙에는 돌계단과 태극홈(분수대)·벽부조가 자리하고 있다. 돌에 새겨진 조각들은 무엇을 의미할까 추모의 자리 중앙에 자리한 태극홈은 전통적인 한옥의 ‘지붕 선’을 새롭게 응용한 ‘돌 제단’ 형태를 띠고 있다. 태극홈에서 끊임없이 잔잔하게 흐르는 물은 우리 선조들이 못다 이룬 한 맺힌 울분과 맑은 민족정신 그리고 민족의 근원을 상징한다. 태극홈 아래에는 “피땀으로 지켜 이 터전을 물려주신/ 가신 임들의 고마움을 되새겨/ 겨레여 이 나라를 길이 빛내자”라는 글귀가 적혀있다. 아울러 태극홈을 병풍처럼 둘러싼 벽부조와 봉화대는 폭 105m·높이 3∼7m의 크기로 우리 민족의 유구한 역사와 민족의 탄생을 상징하는 조각이 새겨져 있다. 놓치지 말아야 할 체크포인트 1. 105인 층계 추모의 자리에 오르려면 105개의 계단을 올라야한다. 이는 일제의 애국지사 탄압사건인 105인 사건을 상징한다. 105인 사건은 1911년 일제가 독립운동을 탄압하기 위하여 데라우치 마사타케 총독의 암살미수사건을 조작하여 105인의 독립운동가를 감옥에 가둔 사건으로 애국계몽운동 시기의 비밀결사조직인 신민회가 해체되는 원인이 되었다. 소나무로 둘러싸인 105인 층계를 산책하며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친 애국선열들의 정신을 기려보자. 2. 모바일 AR서비스 추모의 자리에 도착하면  AR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자리가 있다. 모바일에서 ‘현충시설 기념관 안내’ 앱을 다운로드하면 야외전시물 AR콘텐츠를 이용할 수 있다. 실제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으며 확인해볼 수 있는 AR서비스 이외에도 텍스트로 보이는 AR서비스도 받아볼 수 있다.  alt 추모의 자리_봉화대(좌) / 모바일 AR서비스 자리(우) alt 105인 층계 짧은 글에 응축된 나라사랑 정신 시·어록비 독립기념관 내 야외 곳곳에는 애국선열들의 시·어록비가 건립되어 있다. 임진왜란 당시 국난을 극복한 이순신을 비롯해 일제침략기 애국선열들의 민족혼과 자주독립의지가 담겨있다.  독립기념관에는 몇 개의 시·어록비가 있을까 현재 독립기념관 내에는 105기의 시·어록비가 있다. 독립기념관은 관련 내규에 따라 독립운동가 후손의 건립신청서를 받아 소정의 선정위원회 및 설치심의위원회를 거쳐 독립운동가 시·어록비 설치를 허가하고 있다. 독립기념관은 설치 장소를 제공하고 관리를 맡으며, 모든 설치비용은 설치 희망자 부담으로 운영하고 있다. 짧은 글에 애국선열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이 웅축되어있는 시·어록비는 우리 청소년에게 나라사랑 정신을 선사하는 소중한 교육의 장이다. 놓치지 말아야 할 체크포인트 1. 8월에 눈 여겨봐도 좋을 시·어록비 8월의 녹음 속에 유독 ‘자주 독립’이라는 큰 글자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한국독립운동을 이끈 김규식과 여운형의 합동 어록비다. 두 사람은 일제강점기에 치열하게 독립운동을 전개했으며, 1946년에 좌우합작운동의 중심에 서서 활동했다. 두 사람의 합동 어록비는 이들이 평생 독립운동의 최고 가치로 강조한 ‘자주’와 ‘독립’을 조각하여 멀리에서도 메시지가 전달될 수 있도록 했다. 그 아래 내용은 독립을 이루기 위해서는 민족의 총체적 의지가 중요함을 역설한 구절을 선택하였다. 어록비의 디자인은 민중화백으로 알려진 임옥상 작가가 맡았으며, 우사 김규식연구회와 ㈔몽양 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가 공동으로 기획하고 성금을 모아 설치하였다. 2. 시·어록비 위치 찾기 독립기념관 홈페이지에서 시·어록비 위치도를 다운로드 받을 수 있다. 현재 독립기념관에는 105기의 어록비가 곳곳에 흩어져 자리하고 있으니, 위치도를 활용하면 슬기로운 관람에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또한 독립기념관 입구에도 시·어록비 안내도가 설치되어있으니 입장할 때 미리 안내도를 사진 찍어 놓는 것도 방법이다.  alt 김규식·여운형 합동 어록비(좌) / 시·어록비(우) ]]> Wed, 27 Jul 2022 16:56:41 +0000 69 <![CDATA[독자참여 이번 호 「독립기념관」을 읽고 빈칸을 채워주세요. 꼼꼼히 읽다 보면 정답에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alt alt아이콘을 클릭하면 퀴즈 정답을 보낼 수 있습니다.]]> Wed, 27 Jul 2022 17:07:31 +0000 69 <![CDATA[천(千)의 얼굴을 가진 국제도시 인천광역시 ]]> 글·사진 김초록 여행칼럼니스트천(千)의 얼굴을 가진 국제도시인천광역시인천은 광대(廣大)한 도시다. 섬을 포함한 땅 넓이도 그렇지만 발전 속도가 예사롭지 않다. 변화가 미덕일 수는 없지만 글로벌 시대에 발맞춰 이곳도 하루가 다르게 변모하고 있다. 천혜의 자연과 전통이 살아 숨 쉬는 동시에 현대의 발전까지 아우르고 있어 다양한 재미를 만나볼 수 있다.            alt          alt 인천 차이나타운         한국 속 작은 중국, 그 속에 우리 역사인천은 지리적으로 중국과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다. 그래서 예부터 중국인들이 유난히 많이 몰려들었다. 인천 도심 한가운데 자리한 차이나타운은 중국의 분위기를 물씬 느낄 수 있는 곳으로 잘 알려져 있다. 개항 이후 모여들기 시작한 화교들은 선린동과 북성동 일대에 상가와 집을 짓고 그들만의 생활문화를 이루며 살아가고 있다. 인천 차이나타운은 한국전쟁 이후 쇠퇴의 길을 걷나 싶더니, 시(市)의 적극적인 활성화 정책으로 다시 빛을 보기 시작했다. 거리 곳곳마다 문전성시를 이루는 중국집부터 삼국지의 명장면인 적벽대전이 그려진 벽화와 공자 동상 등은 중국을 가지 않아도 중국의 다양한 문화를 느낄 수 있으며 기념품 가게도 수두룩하다.차이나타운에서 이어지는 돌계단을 따라 오르면 자유공원으로 이어진다. 인천 도심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대한민국 최초의 서구식 공원으로, 노을과 야경이 아름답기로도 유명하다. 공원에 자리 잡은 맥아더장군상과 한미수교100주년기념탑·석정루·연오정·학익고인돌·충혼탑·홍예문·인천역사자료관·제물포구락부 등은 인천의 파란만장한 역사를 상징한다.1919년 3월 9일 자유공원에서는 기독교 신자와 학생 등 300여 명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다가 강제 해산 당했다. 당시 인천은 일본 도쿄(東京)에서 시작된 2·8독립선언 소식이 국내로 전달되는 통로이기도 했다. 일제의 감시도 그만큼 삼엄해질 수밖에 없었는데, 이런 분위기 속에서도 지역 종교 대표자 20여 명이 한성정부 수립을 선포하기 위해 엄지손가락에 흰 종이나 헝겊을 두르고 이곳 자유공원에서 비밀리에 모임을 가졌었다. 오늘날 이곳은 더위를 피해 그늘을 드리운 벚나무 아래 벤치에 앉아 휴식을 즐기는 사람들로 북적인다.차이나타운 한쪽 주택가에는 독립운동의 역사가 담긴 유적지가 하나 있다. 스무 살의 청년 백범 김구가 1896년 명성황후 시해에 가담한 일본인 장교 쓰치다를 살해한 치하포 사건으로 수감됐다가 탈옥했던 인천감리서 터다. 사형을 선고받고 감리서에서 탈옥한 김구는 다시 서대문감옥에 갇혔다가 3년 뒤 인천감옥으로 이감된다. 당시 감리서는 개항장 사무를 관장하던 기관으로, 원래 동구 화도진에 있던 것을 이듬해 중구 내동으로 옮겼다. 행정·통상·사법 기능을 총괄했던 곳으로 개항장 재판소와 감옥도 갖추고 있었다. 지금은 인천감리서 터임을 알리는 안내판만 남아 있다.김구에게 인천은 제2의 고향과도 같다. 황해도 해주에 살던 그의 부모는 김구를 따라 인천에 터를 잡았다. 그의 부친 김순영은 감옥에 갇힌 아들을 구하기 위해 갖은 애를 썼다. 어머니 곽낙원도 객줏집에서 일을 도우며 옥바라지를 했다고 한다. 김구는 『백범일지』에서 ‘(대한)민국 28년(1946)을 맞이하자 나는 38선 이남 지방순회를 시작했다. 제1차로 인천을 순시했는데, 인천은 의미심장한 역사지대라 할 수 있다’고 설명한 바 있다. 김구는 1945년 11월 말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고국으로 돌아와 지방순회를 하면서 가장 먼저 인천을 찾았다.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한지 햇수로 27년 만이었다. 이렇듯 김구와의 인연이 깊은 까닭일까, 인천대공원 숲속에는 김구와 그의 어머니 곽낙원의 동상이 나란히 서서 아픈 역사의 교훈을 후세에게 알려주고 있다. 차이나타운: 인천광역시 중구 차이나타운로 59번길 12인천자유공원: 인천광역시 중구 자유공원남로 25         alt 자유공원         alt인천감리서 터alt김구와 곽낙원 여사 동상 alt 재래시장에서 출출함 달래고 월미도로차이나타운이 있는 신포동 일대는 재래시장이 발달했다. 신포국제시장은 그 역사가 100년이 넘는다. 시장 골목에 들어서면 매콤하고 달콤한 냄새가 코를 찌른다. 너도 나도 사가려고 길게 줄을 서 기다리는 바삭바삭한 닭강정부터 속이 텅 빈 공갈빵, 화덕에서 구운 만두까지 입맛을 다시게 하는 먹거리가 즐비하다.신포국제시장에서 출출한 배를 채우고 자동차로 10분 거리에 있는 월미도로 건너가 보면, 시원하게 펼쳐진 인천 앞바다와 바이킹 등 아찔한 놀이기구가 있는 월미테마파크, 섬 한편에 자리한 한국이민사박물관 등이 있다. 한국이민사박물관에서는 하와이를 시작으로 멕시코·쿠바·브라질 등으로 이어진 우리나라 이민자들의 애환 어린 역사를 살펴볼 수 있다. 박물관 오른쪽으로 보이는 인천항의 내항은 분주하다. 중국을 오가는 여객선과 대형 화물선, 선적을 기다리는 수많은 자동차와 철제품을 보면 삶의 활력이 솟는다. 내항 안쪽에는 인천항과 갑문의 역사를 일목요연하게 전시한 인천항 갑문홍보관이 있는데, 이곳 5층 전망대에 오르면 갑문과 내항 일대를 바라볼 수 있다.신포국제시장: 인천광역시 중구 우현로 49번길 11-5한국이민사박물관: 인천광역시 중구 월미로 329 / 032-440-4710 / mkeh.incheon.go.kr         alt신포국제시장         alt월미도alt한국이민사박물관 alt 영종도에 우뚝 솟은 백운산영종대교를 건너 인천공항 쪽으로 향하다 보면 왼쪽으로 완만한 산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아침저녁으로 구름과 안개가 짙게 끼고 저녁노을이 비칠 때면 하늘에서 선녀들이 내려와 샘물을 마시며 놀고 간다고 전해지는 백운산이다. 제법 가파른 산길을 따라 정상에 오르면 인천국제공항과 인천 앞바다에 떠 있는 섬들이 그림처럼 다가온다. 송도와 공항을 잇는 인천대교와 신공항고속도로, 영종대교도 한눈에 들어온다. 백운산을 기준으로 북쪽이 운북동, 서쪽이 운서동, 남쪽이 운남동인데 하루가 다르게 고층건물들이 들어서고 있다. 해넘이 시각에 맞춰 오르면 수평선을 물들이며 스러지는 서해 낙조도 볼 수 있다.백운산 허리쯤에는 천년 고찰 용궁사가 자리 잡고 있다. 절 앞마당에는 수령 1,300여 년을 헤아리는 느티나무 한 그루가 그 역사를 짐작케 한다. 용궁사는 신라 문무왕 10년인 670년에 원효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창건 이후 구담사 또는 백운사라 불리다가, 1854년 흥선대원군이 중건하면서 지금의 이름을 얻게 되었다. 이런 사실은 흥선대원군이 쓴 ‘용궁사(龍宮寺)’란 현판에서 잘 드러난다. 현판 글씨 옆에 석파(石坡)라는 대원군의 호와 중건 시기가 함께 적혀있어 대원군이 쓴 현판임을 알 수 있다. 용궁사 뒤편 산길을 넘어가면 약수암이란 작은 암자가 나오는데, 이곳에서 바라보는 바다 전경 또한 일품이다.용궁사: 인천광역시 중구 운남로 199-1         alt 백운산 전망대         alt 용궁사 alt 서해와 한강을 잇는 아라뱃길 따라서경인 아라뱃길은 서해와 한강을 이어주는 길이 18km의 물길이다. 23층 전망대에 올라 아라뱃길과 여객터미널·서해갑문·영종대교 등을 바라보면 가슴이 탁 트인다. 아라뱃길을 제대로 느끼려면 유람선을 타거나 물길과 나란히 달리는 자전거가 좋다. 이곳은 4대강 국토 종주 자전거 길의 시발점이기도 하다. 아라뱃길 옆의 계양구 장기동에도 인천 지역 독립운동의 도화선이 된 상징물이 있다. 1910년대 인천의 대표적인 오일장(3, 8일장)으로 명성이 자자했던 황어장터가 그것이다. 3·1만세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당시 장이 섰던 자리에 기념탑과 기념관을 세웠다. 기념관 내부에는 황어장터 만세운동에 대한 기록들과 기미독립선언서·당시 신문기사·애국지사들의 재판기록들이 전시되어 있다. 황어장터라는 명칭은 옛날 이 일대에서 잉어과의 민물고기인 황어가 많이 잡히고 거래된 데서 유래됐다. 1919년 3월 24일 심혁성 지사의 주도로 계양 주민 600여 명이 일제의 탄압에 항거, 이곳에서 대대적인 만세운동을 전개했다.한편, 인천지역의 독립운동은 이곳 황어장터를 위시해 동구·남구·강화도로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발상지가 된 동구의 공립보통학교(현 창영초등학교)에는 이를 기념하는 석비가 세워져 있다. 강화도는 전국적으로도 손꼽히는 만세운동이 펼쳐졌던 곳으로 강화 출신 독립운동가가 무려 31명에 달한다. 고학년 학생들이 항일 동맹휴학을 일으키고 거리로 나와 독립만세를 외쳤던 창영초등학교 구 교사(校舍)는 고풍스러운 느낌이 물씬 풍긴다. 1922년 붉은 벽돌로 길게 지었는데, 지붕에는 아랫방을 밝게 하기 위해 지붕창이라 부르는 도머(Dormer)창을 두었고 현관과 1층 창문은 반아치로, 2층은 수평아치로 마무리한 것이 초기 근대건축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황어장터 3·1만세운동기념관: 인천광역시 계양구 황어로 126번길 9 / 032-430-7948창영초등학교 구 교사: 인천 동구 금창로 31         alt 아라뱃길 옆 자전거 길 alt황어장터 3·1만세운동 기념탑         alt 창영초등학교 구 교사(校舍)                        김초록여행칼럼니스트 겸 수필가. 현재 『월간 비타민』, 『건설경제신문』, 『서울우유』, 『냉동공조신문』에 객원기자로 활동 중이다. 여행 저서로는 『여름 이야기』, 『7가지 테마가 있는 여행』 등이 있다. ]]> Mon, 03 Jul 2017 17:39:26 +0000 7 <![CDATA[독립기념관과 유물 ]]> 유물은 시대가 남긴 전언이다. 과거의 순간순간이 새겨진 물건들은 오늘에 이르러 우리에게 역사라는 이름으로 말을 건다. 독립기념관은 우리나라의 존립이 흔들리던 시기, 자주(自主)를 향한 우리 민족의 발자취를 간직하고 있는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다. 시대의 전령사로서 국민들의 올바른 역사 인식을 일깨우기 위해 그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alt]]> Mon, 03 Jul 2017 17:56:29 +0000 7 <![CDATA[인류가 낳은 최악의 불행, 전쟁 영화 <마이웨이> ]]> 글 편집실인류가 낳은 최악의 불행, 전쟁영화 <마이웨이>감독: 강제규주연: 장동건, 오다기리 죠, 판빙빙개봉일: 2011년 12월 21일전쟁은 국가 간의 싸움이나, 그로 인한 상흔은 국경을 초월한다. 적으로 만나 동지로 성장한 조선인과 일본인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마이웨이>는 전쟁으로 비롯된 민족의 아픔을 넘어 인류의 불행을 그리고 있다.                        Q. 한국vs일본 경기는 정정당당했을까?1938년 경성. 제2의 손기정을 꿈꾸는 김준식(장동건)은 마침내 올림픽 마라톤 선발전에 나서게 된다. 한 일본 선수의 방해로 경기 중 넘어지면서도 1등으로 들어왔지만, 편파 판정으로 실격되고 만다. 이에 준식은 크게 반발했지만, 오히려 일본군에 강제 징집되고 만다.일제강점기 조선인이 받은 차별은 철저하다 못해 치사하기까지 했다. 위 내용은 1910~1930년대 국민영웅으로 칭송 받은 최고의 자전거 선수 엄복동의 사례와 닮았다. 그는 매번 일본을 제치고 우승해 우리 민족의 큰 자긍심이었다. 한 번은 1920년에 열린 대운동회에서 그가 우승을 눈앞에 두자, 일본인 심판이 해가 저물었다는 터무니없는 이유로 돌연 경기를 중단시켰다. 엄복동은 격분하며 반발했지만 주위에 있던 일본인들이 그에게 달려들어 폭력을 행사했고 결국 경기는 취소되었다. 이처럼 일제의 시기와 질투로 우리 민족은 부당한 대우를 받아야 했다.         altalt엄복동                    Q.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군복을 세 번이나 바꿔 입었다?열강들의 전쟁 속에서 적으로 만난 준식과 타츠오는 나란히 포로가 되어 소련군이 되었다가 거듭되는 전투로 독일과 프랑스 노르망디까지 여러 차례 군복을 바꿔 입게 된다.이 영화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 찍힌 사진 한 장이 계기가 되어 만들어졌다. 사진에는 독일 군복을 입고 미군에게 심문받고 있는 동양인 청년 양경종이 있었다. 그는 1938년 18세에 일본군에 끌려가 관동군에 복무하던 한국인으로, 이듬해 몽골에서 벌어진 노몬한 전투에서 포로가 되어 소련군에 강제 입대했으며, 이후 1943년 우크라이나 하리코프 전투에서는 독일군의 포로가 되어 소련군의 포로부대에 배치되었다. 이후 프랑스 노르망디에서 복무하다 그곳에 상륙한 미군에 투항하게 되었다. 한국에서부터 몽골·소련·독일·프랑스 노르망디까지 1만 2,000km 즉, 지구 반 바퀴에 이르는 전장을 가로지른 그의 파란만장한 여정은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alt    양경종                        Q. 일제를 위해 싸운 조선인이 있었다?일본군으로 징집된 준식은 그로부터 1년 후, 어린 시절부터 줄곧 마라톤 라이벌이었던 타츠오(오다기리 죠)와 재회하게 된다. 일본군 대좌가 된 타츠오는 일부러 준식을 괴롭히고, 여기에 더해 그를 포함한 조선인들을 소련군의 탱크를 폭파시킬 자살특공대로 선발한다.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패색이 짙어진 일본군은 연합군과 전쟁에서 폭탄이 장착된 비행기를 몰고 자살 공격을 할 일본군 특공대를 편성했다. 바로 영화에 등장하는 자살특공대, ‘가미카제(神風)’다. 가미카제에는 실제로 조선 청년들이 더러 포함돼 있었다. 지금까지 신원이 밝혀진 조선인 가미카제는 19명, 어떠한 의도에서든 사실상 ‘천황의 군대’로서 활동한 이들은 지금도 친일파라는 낙인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나 전쟁 미화를 위해 일제의 홍보수단으로 쓰인 전쟁의 피해자이자, 나라 잃은 민족의 처참한 현실이라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다.          alt                          Q. 전쟁의 진정한 피해자는 누구인가?일본군이 소련과의 전쟁에서 패하면서 준식과 타츠오는 나란히 소련의 포로가 된다. 두 사람이 도착한 소련군 포로수용소에는 포로들의 군기반장을 맡고 있는 안종대(김인권)가 있었다. 그는 일본인들에게 당한 수모를 떠올리며 일본인 포로들에게 앙갚음을 고한다. 한편 독일군에게 쫓기던 소련은 포로들을 전쟁에 내몰며 말한다. “소련을 위해 목숨을 바칠 영광을 주겠노라.”제2차 세계대전은 우리 민족은 물론이거니와 일본을 비롯한 수많은 세계인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거듭되는 전쟁 가운데 군림하고 군림 당하는 것이 반복되었고, 그 소용돌이에 휩쓸린 개인은 그저 힘없는 한 인간이자 전쟁의 피해자에 불과했다. 이 영화는 전쟁으로 인한 우리 민족의 설움에 주목하기에 앞서 그로 인한 개개인의 불행을 보여줌으로써 전쟁이 야기한 인류의 참상을 그렸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altalt ]]> Mon, 03 Jul 2017 16:45:42 +0000 7 <![CDATA[아들아, 나라를 위해 떳떳하게 죽으라 ]]> 글 학예실아들아! 나라를 위해 떳떳하게 죽으라조마리아(趙姓女, 1862. 4. 8~1927. 7. 15)독립기념관은 국가보훈처·광복회와 공동으로 조마리아를 7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그녀는 안중근 등을 독립운동가로 길러낸 위대한 어머니이자, 스스로도 조국 독립을 위해 헌신한 독립운동가이다. alt 독립운동가의 어머니조마리아는 황해도 해주군에서 태어났다. 안태훈과 혼인했으며 1897년 뮈텔 주교에게 영세를 받고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서 일생을 살았다. 슬하에 3남 1녀의 자녀를 두었는데 이들 모두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장남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했고, 차남 안정근은 북만주의 독립군단들을 통합해 청산리전투의 기반을 확립하였다. 삼남 안공근은 한인애국단에 참여하였고, 딸 안성녀는 중국에서 독립군 활동을 지원하였다.자녀들이 독립운동에 나설 수 있었던 것은 조마리아의 가르침과 지지 덕분이었다. 1907년 국채보상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안중근은 국채보상기성회 관서지부를 개설하여 의연금 모집에 앞장섰다. 조마리아도 1907년 5월 평안남도 ‘삼화항 은금폐지부인회’의 제2차 의연활동에서 은장도·은가락지·은귀걸이 등 20원 상당의 은제품을 헌납했으며, 다른 이들에게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하도록 독려했다.한편 안중근이 해외망명을 앞두었을 때에는 “집안일은 생각하지 말고 최후까지 남자답게 싸우라”고 격려했다. 1909년 그가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고 사형을 언도 받자,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게 목숨을 구걸하는 것이다. 비겁하게 삶을 구걸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다”라고 마지막 당부의 말을 전하며, 안중근의 사촌 안명근을 통해 수의를 지어 보냈다. 조마리아는 그렇게 자식을 먼저 떠나보내고도 끝까지 의연함을 잃지 않고 남은 가족들과 함께 나라의 독립을 위해 헌신했다.         alt조마리아alt남편 안태훈과 아들 정근, 공근alt조마리아가 지은 수의를 입고 있는 순국 직전의 안중근alt조마리아 의연 소식(대한매일신보 1907년 5월 29일자,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해외망명과 독립운동 지원안중근 의거 후 조마리아는 1910년 러시아로 망명하였다. 처음에는 연해주 크라스키노에 정착했다가 1914년 니콜리스크로 이주하였다. 이곳에서 안정근은 대규모 농장을 개척해 독립운동기지 건설에 필요한 자원을 마련하고자 했으며, 조마리아 역시 자녀들과 함께 독립운동에 매진하였다. 1920년 1월 31일자 『독립신문』 보도에 따르면 그녀는 쉬는 날 없이 동포를 각성시키는 사업에 종사했다고 한다. 또한 그해에 안정근이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하기 위해 상하이로 떠나자, 조마리아도 뒤따라 1922년 상하이로 이주하였다. 그녀는 안중근의 어머니라는 위상과 독립운동에 대한 헌신으로 동포들의 높은 신망을 받았다.1926년 안창호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경제적 위기를 해소하기 위해 ‘임시정부경제후원회’를 창립했다. 후원회는 모든 회원들로부터 법정세금을 받고 매년 1인당 1원 이상의 후원금을 받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조마리아는 임시정부경제후원회의 위원으로 선출되어 후원회를 이끌었고, 어려운 경제적 여건 속에서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조마리아는 1927년 7월 15일 상하이에서 위암으로 별세했다. 정부는 그녀의 공적을 기리어 2008년 8월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alt니콜리스크에서의 조마리아와 가족들의 삶을 전한 기사(독립신문 1920년 1월 31일자)alt임시정부경제후원회 창립총회 기사(동아일보 1926년 7월 28일자)alt조마리아 회갑기념사진(1922년 니콜리스크, 국가보훈처 제공)]]> Mon, 03 Jul 2017 17:06:50 +0000 7 <![CDATA[하나,최초의 전국여성단체 YWCA 설립자, 김필례 둘,콜레라 환자는 얼음 속에 얼려 죽인다? ]]> [우리가 몰랐던 이야기 하나]글 윤정란 서강대학교 연구교수최초의 전국여성단체 YWCA 설립자, 김필례김필례는 1891년 12월 19일 10번째 자녀로 태어나 선교사 언더우드(H. G. Underwood)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개화된 집안 분위기 덕에 일찍이 근대교육의 수혜를 받았다. 김필례를 비롯해 김필순·김순애·김마리아·김염 등 그녀의 가문이 배출한 독립운동가나 민족지도자들은 이러한 사실을 보여준다. 근대교육 수혜로 여성문제를 자각하다김필례는 고향인 황해도 재령 성경학교에서 수학한 후 1907년 6월 정신여학교를 제1회로 졸업했다. 1908년까지 정신여학교 교사로 재직하다가 그해 9월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도쿄(東京)여자학원 중등, 고등부를 마치고 영화(英和)음악전문학교에서 수학했다. 귀국 후 1916년에는 정신여학교, 1918년 결혼 후에는 광주 수피아여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하는 등 여성교육 보급에 앞장섰다.YWCA 설립으로 여성운동을 이끌다YWCA와의 인연은 일본 유학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방학을 맞이해 학교 기숙사에서 지내기가 곤란해진 김필례는 일본 YWCA 기숙사에서 지냈다. 그곳은 성경을 이론으로만 가르치지 않고, 생활 속에서 성경을 실천하고 있었다. 그녀는 귀국하면 반드시 한국에도 이러한 단체를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이 계획을 세우게 된 데는 더 결정적인 이유가 있었으니, 바로 일본 YWCA 총무 가와이 미치코(川井道子)로부터 깊은 감동을 받은 까닭이었다.미치코는 선생에게 곧잘 일본이 폭력수단을 동원해 약속국인 우리나라를 강점하고 있는 행위는 세계인의 규탄을 받아 마땅한 야만행위이며, 일본은 우리나라를 강점해서는 안 된다고 늘 말했다. (중략) 이 단체는 좋은 단체구나 생각하고, 우리나라에도 이런 단체를 꼭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했다.김필례는 귀국 후 YWCA를 조직하려 했으나 큰 호응을 받지 못했다. 1920년 12월 미국 YWCA 세계부가 설립을 돕기 위해 위원단을 파견했으나 성과를 거두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듬해 그녀가 정신여학교 교장 루이스를 찾아가 YWCA 설립의 필요성을 역설하자 교장은 이화학당의 당장 아펜젤러(Alice R. Appenzeller)를 소개해주었고, 그녀로부터 김활란을 소개받음으로써 YWCA 조직에 대한 논의를 가속화시킬 수 있었다.그리하여 1922년 3월 남녀 인사 30여 명이 모여 제1차 발기회가 개최되었다. 준비위원은 회장 유각경, 위원 김미리사·김필례·김살로매·김경숙·방신영 등이었다. 4월에는 베이징(北京) 칭화(淸華)대학에서 세계기독학생대회가 개최되었다. 한국여성 대표로 김활란과 함께 참석한 김필례는 대회 동안 우리나라 YWCA 조직에 필요한 정보 및 지식을 얻고자 했다. 그러나 문제는 한국만의 독립적인 YWCA를 조직하려면 일본 YWCA의 양해를 구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가와이 미치코와의 만남도 쉽지 않았다. 미치코가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감지한 김필례는 비서에게 3·1만세운동 당시 일본의 만행을 세계 각국 대표들에게 폭로하겠다고 위협했다.“나를 일부러 만나지 않으려고 하는 태도에 난 불쾌감과 모멸감을 느껴요. 그렇다면 좋습니다. 가와이 총무와 의논 없이 대회 의장을 통하여 수원 제암리교회 사건을 세계 각국 대표들에게 폭로하겠소. 잔인무도한 일본의 만행을 만천하에 알리려는 거요.”떠드는 소리에 가와이가 밖으로 나오자, 그녀는 가와이에게 세계 YWCA 가입 시 독립된 대표권이 있는 조선 YWCA로서 가입할 수 있도록 협조를 요청했고 긍정적인 대답을 받아냈다.귀국 후 김필례는 지방조직을 위해 전국 순회강연을 다녔는데, 1922년 11월부터 40여 일간 전국 17개 지역을 찾아다녔다. 이를 배경으로 1923년 8월에는 5개 도시와 11개 학교 대표 70여 명이 모여 YWCA를 설립했다. YWCA는 국제적인 문화교류와 친선·금주금연운동·생활개선운동·공창폐지운동·물산장려운동·지방여성 및 여학생을 위한 기숙사 설치·농촌계몽·사회사업 등 여성의 지위 향상을 위한 다양한 활동을 전개해나갔다. 이어 1924년 5월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세계 YWCA 임원회에서는 조선 YWCA가 회원국으로 승인됐다. YWCA는 1923년 설립된 이후 세계 회원국들과 세계적인 관계망을 통해 한국 여성의 지위 향상뿐 아니라 한국의 문제를 세계에 알리고 지지를 얻어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김필례는 여성교육운동에 계속 매진했다. 정신여학교 교무 주임으로 재직하다가 1925년 다시 미국 유학을 가 각종 여성운동 관련 대회에 참석하는 등 세계사적 안목을 넓혔다. 귀국해서도 인도 마이쏠 세계기독교학생대회 대표로 참여하는 한편 여성교육에 헌신했다.지구촌 문제는 국제적인 연대와 지원으로 해결하자김필례는 광복 이후에도 여성 대표로서 계속 활약하면서 1950년 4월부터 1959년까지 대한예수교장로회 여전도대회 회장을 지냈다. 1950년 7월부터 1951년 7월까지 미국 오우션 클럽 세계연합장로회 여전도회 4년대회에 한국대표로 참가, 미국 19개주를 순회하며 강연하기도 했다. 1961년 7월부터 정신여자중고등학교 명예교장·정신학원 이사·정신학원 이사장 등을 지냈고, 1972년에는 공로를 인정받아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여받았다. 김필례는 국제적인 연대와 지원만이 갈등과 증오로 팽배한 현실모순을 타개할 수 있다는 점을 YWCA 활동에서 체득하고, 실천한 선각자였다. 묵묵히 ‘자기소임’에 충실한 그녀의 인생 여정은 오늘날 대한민국을 만든 진정한 밀알이었다. alt김필례alt김필례 가족사진alt조선 YWCA 제2회 하령회                      [우리가 몰랐던 이야기 둘]글 신현배 역사칼럼니스트콜레라 환자는 얼음 속에 얼려 죽인다?1920년 서울에는 콜레라가 유행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다. 그해 8월 16일 오후 6시, 종로 4가 파출소 앞에서 일본 순사 몇 명이 조선 사람 한 명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alt 병원에 데려가려는 일본 순사를 거부한 이유“멀쩡한 사람을 왜 붙잡아가는 거야? 난 들것이 싫어. 날 병원에 데려가려면 같이 걸어가.”“환자를 걷게 할 수는 없다. 어서 들것에 타라.”조선 사람은 인의동에 사는 최영택이라는 사람으로, 콜레라 환자로 확인되어 일본 순사들이 그를 들것에 실어 순화병원으로 데려가려던 것이었다. 당시에는 콜레라 환자가 생기면 병원으로 끌고 가 격리 수용했다. 그러나 최영택은 들것에 실려 가지 않겠다고 버티고 있었다. 그가 일본 순사들과 옥신각신하는 동안 주변에는 소문을 듣고 모여든 사람들이 600~700여 명에 이르렀다.“멀쩡한 조선 사람을 왜 병원에 끌고 가려 하느냐?”“병원에 가면 죽는다. 열이 많이 나는 콜레라 환자라면서, 열을 식힌다고 얼음 속에 넣어 얼려 죽인단 말이야. 이제까지 죽인 사람이 수백 명이 넘어.”흥분한 사람들이 소리치며 일본 순사들을 향해 돌을 던지자, 겁을 집어먹은 순사들은 최영택을 집으로 돌려보냈다. 그러나 동대문 경찰서에서는 콜레라 환자를 가정집에 둘 수 없다며, 이튿날 오후에 다시 일본 순사들을 보내 최영택을 병원으로 끌고 가려 했다. 그는 절대로 병원에 가지 않겠다고 버텼지만, 일본 순사들은 그를 강제로 결박한 뒤 순화병원으로 연행했다.최영택이 광화문 네거리에 다다랐을 때였다. 수천 명의 군중이 모여들어 일본 순사에게 돌을 던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순사들을 쫓아버리고는 최영택을 탈취하여 세브란스병원에 데려다 주었다. 진짜 콜레라에 걸렸는지 진찰을 받게 하려던 것이다. 하지만 검사 결과가 나오려면 일주일은 기다려야 했다. 결국 최영택은 그날 밤 순화병원으로 옮겨졌다.당시 조선 사람들은 일본 순사들이 돌림병 환자를 끌고 가, 순화병원에서 얼음 속에 얼려 죽인다고 믿었다. 더욱이 콜레라는 일본 사람들이 갖고 들어온 병이라 생각해 반감을 가졌던 터라, 일본 순사에게 끌려가는 조선 사람을 보면 군중들이 모여들어 거세게 항의하고 돌까지 던졌던 것이다.         alt 질병과 관련된 터무니없는 소문들사람들은 우리나라를 침략한 일본 사람들을 증오하고 있었기에, 한말에는 우두(牛痘)가 일본에서 건너왔다고 해서 우두를 맞으면 소처럼 미련하고 온순해진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일본이 조선 민족을 소처럼 만들려고 살을 찢고 우두를 놓는다는 것이다. 어른들은 이 사실을 알고 우두를 맞으려 하지 않기에, 일본 사람들은 철부지 아이들에게만 우두를 놓는다는 얘기가 퍼졌다.한편, 콜레라가 크게 유행한 것은 1895년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콜레라에 걸려 떼죽음을 당했다. 당시 쥐가 콜레라를 전염시킨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사람들은 쥐 귀신이 사람 몸속에 들어와 콜레라를 일으킨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병이 나으려면 몸속에 있는 쥐 귀신을 쫓아내야 한다고 여겨, 대문에 고양이 그림을 붙여 놓았다. 쥐 귀신이 고양이 그림을 보고 무서워 달아나라고 말이다. 때로는 고양이 귀신 대신 고양이 가죽을 대문에 걸어 놓기도 했다.이런 원시적인 민간요법은 학질 환자에게도 사용되었다. 몸에 붙은 학질 귀신을 놀라게 해야 떨어져 나간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학질 환자를 절벽 위에 앉혀 놓고 갑자기 뒤에서 등을 쳐 놀라게 하는 것이 치료의 일환이었다. 1925년 7월 8일에는 왜관에서 학질 환자를 기차가 지나가는 철교 밑에 새끼줄로 매달아 놓은 사건도 있었다. 기차가 달려오는 것을 보고 놀라서 학질 귀신이 떨어지라고 말이다.이렇듯 당시에는 질병과 관련해서 터무니없는 소문들이 널리 퍼져, 근거 없는 치료법이 흔하게 이루어지곤 했었다. alt 신현배역사와 전통문화에 대해 관심이 많은 역사칼럼니스트. 저서로는 역사 이야기 『엉뚱 별난 한국사』, 『엉뚱 별난 세계사』, 『2000년 서울 이야기』, 『세계사로 배우는 법 이야기』, 전통문화 이야기 『소중한 우리 문화 지식 여행』 시리즈 등이 있다. ]]> Mon, 03 Jul 2017 17:29:41 +0000 7 <![CDATA[독립운동과 유물, 유품 ]]> 글 심용환 역사N교육연구소 소장독립운동과 유물, 유품우리나라는 오랜 역사와 찬란한 문명을 일구어왔다. 고려시대 상감청자부터 각종 석탑과 불화, 조선 선비들의 서예화부터 화원 김홍도 등의 풍속화까지 한반도 전체를 문화재 창고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외국인들이 탐낸 것들도 많았다. 우리나라에 있던 수많은 문화재는 임진왜란·병자호란 등 외세의 침략에 의한 전란으로 소실되거나 어느 틈엔가 유실되는 사례가 많았다.                       외세에 시달렸던 우리나라 유물1) 외규장각 도서일제강점기 36년을 거치면서 수십만 점의 유물이 해외로 반출된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특히 1866년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군이 강화도를 침략하던 중에 약탈한 ‘외규장각 도서’는 한국과 프랑스 사이 외교 문제가 되기도 했다. 1975년 박병선 박사가 프랑스 현지에서 외규장각 도서를 발견하면서 반환운동이 본격화되었다. 1993년 김영삼 정부 당시 프랑스는 고속철도사업권을 두고 독일과 경쟁하였는데, 사업권 획득을 위해 방한한 미테랑 대통령이 외규장각 도서 일부를 반납하며 전체 반환을 약속했다. 그러나 오랫동안 성사되지 못하다가 2011년에야 비로소 대여 형식으로 영구 반환되었다.2) 직지심체요절기구한 운명을 가진 문화재는 한두 점이 아니다.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본인 ‘직지심체요절’의 경우, 1911년 골동품 수집가 앙리 베베르(Henry Vever)를 통해 구매됐다가 그가 죽으면서 프랑스 국립박물관에 기증되었다. 매매와 기증의 과정을 거쳐 박물관이 소장했기 때문에 반환을 위한 법적 주장을 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         alt인조장렬왕후존숭도감의궤, 반환된 외규장각 의궤 중 하나alt직지심체요절           3) 조선왕조실록과 팔만대장경‘조선왕조실록 오대산사고본(국보 제151-3호)’의 경우도 참으로 기구하다. 원래는 강원도 평창 월정사 오대산사고에 788책이 보관되어 있었으나, 1913년 조선총독부가 도쿄대 부속도서관으로 무단 반출했다. 문제는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화재가 발생해 책 대부분이 소실되었다는 점이다. 결국 2006년 남아있는 실록이 일본으로부터 반환되기는 했지만 현재는 관리 문제를 두고 여러 어려움을 겪고 있다.‘팔만대장경’도 조선왕조실록과 비슷한 운명이 될 뻔하였다. 일찍이 조선시대부터 팔만대장경의 가치를 알아보고 호시탐탐 노리던 일본은 일제강점기 당시 팔만대장경을 가장 가치 있는 반출 품목 가운데 하나로 꼽았다. 하지만 해인사 승려들의 극렬한 저항과 운반 및 관리 문제 등으로 인해 결국 반출을 포기했다.경복궁 복원사업이 본격화되기 전 199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궁궐 안뜰에 석탑을 비롯한 불교 유물들이 늘어서 있던 때가 있었다. 생각해 보면 참으로 이상한 모양이다. 유교 국가의 궁궐에 불교 유물이 있다니 말이다. 실은 일제가 조직적으로 조선의 문화재를 유출시키면서 임시 보관소로 궁궐을 활용한 까닭이었다. 또한 광복 이후 유물을 보관할 만한 제대로 된 시설이 없었기에 다시 궁궐을 활용한 이유도 있었다.         alt조선왕조실록 오대산사고본alt해인사에 보관된 팔만대장경                     독립운동가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유품1) 이상설유물 가운데 일제강점기 시절 독립운동가들의 손길이 닿은 유품들은 특히 기억해봄직하다.이상설은 대한제국의 신하로, 을사늑약 반대 상소를 수차례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자결시도까지 했던 인물이다. 하지만 실패하고 이후 만주와 연해주에서 독립운동의 조직적 기반을 만드는 데 주력했다. 만주에 서전서숙이라는 교육기관을 세우고 이준·이위종과 함께 헤이그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해 조선의 주권을 지키고자 치열한 투쟁을 벌였고, 이후 연해주에서 수립된 대한광복군정부의 정통령을 역임하기도 했다. 독립기념관은 2007년 이상설과 그의 부친 이용우의 호패를 수집해 세상에 공개했다. 이상설과 관련된 극히 드문 유품이 세상에 공개된 것이다.2) 안중근안중근의 경우에는 뤼순 감옥에서 남긴 서예 작품이 인상적이다. 1909년 안중근은 하얼빈 역에서 을사늑약을 주도해 조선을 보호국으로 만든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했다. 7발이 들어가는 권총을 소지한 채 역에서 대기하던 그는 이토 히로부미가 나타나자 3발을 급소에 명중시키고 남은 4발로 남은 일행들을 저격했다. 지금도 하얼빈 역을 가면 당시의 저격 장소와 이토 히로부미가 쓰러진 위치가 표시되어 있다.안중근이 거사를 위해 하얼빈 역을 선택한 데는 이유가 있다. 중국 영토임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의 관할 지역이었다는 점이다. 이토 히로부미 암살에 성공한 후 러시아 군경에게 체포되면 러시아 법정에서 투쟁을 벌일 계획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러시아와 일본은 밀통하여 불법적으로 안중근을 일본 관할 지역인 뤼순으로 넘겼다. 결국 계획과는 다르게 뤼순감호소에 수감된 채 법정 투쟁을 벌이게 된 그는 이 기간 동안 50여 점의 유묵을 남긴다. 1910년 2월 14일 사형언도일부터 3월 26일 순국 직전까지 쓰여진 유묵은 안중근의 유일한 유품이다. 그간 뤼순감옥박물관에 보존되다가 예술의전당 등에서 <안중근 서예전>이란 이름으로 국내에 공개되기도 하였다.3) 윤봉길다행히도 윤봉길의 유품은 비교적 꽤 많이 보존되어 있다. 보물 제568호로 지정된 13종 68점이 그것인데, 충청남도 충의사, 국립중앙박물관 등에 분산 보관되어 있다. 특히 충의사에 소장된 10종의 유품은 중국 홍커우공원 의거 당시의 소지품이어서 더욱 각별한 의미가 있다. 그중 회중시계는 의거 직전 윤봉길이 김구와 마지막 작별을 나눌 때 바꾸어 가졌던 물건이다. 윤봉길의 유품은 지갑·화폐·인장뿐 아니라 『월진회창립취지서(月進會創立趣旨書)』, 『농민독본(農民讀本)』 등도 있는데, 특히 『농민독본』은 그가 농촌부흥운동을 위해 노력했음을 확인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기도 하다. alt이상설 호패alt안중근 유묵alt『농민독본』          4) 안창호평안도와 미주를 기반으로 활동했던 독립운동가 안창호는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세우는 데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국민대표회의가 실패로 돌아가고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위기에 빠지자 미국에서 체류하며 이승만의 탄핵과 개헌을 추진하였고, 동시에 샌프란시스코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재정을 지원했다. 1926년에는 거금 2만 원을 들고 상하이로 귀환해 원세훈 등과 대동단결했다. 또한 한편으로는 민족주의자이자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주도하던 김구·이동녕 등의 협조를 구하고, 홍남표·정백 등이 활약하고 있는 사회주의 진영을 설득해 1920년대 민족유일당 운동을 추진해 나갔다.세계를 아울렀던 안창호의 활발한 독립운동은 현재 도산안창호기념관에 소장된 그의 일기와 여권을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느낄 수 있다. 얼마 전 MBC 예능프로그램 <무한도전>에서는 그의 후손들을 직접 만나 독립운동 당시 안창호가 사용했던 가방이 전파를 타기도 했다. 이밖에 김구가 보낸 태극기·독립운동가들의 편지·서적·도산일기·한문성경·태극기 등의 유품이 유가족의 기증을 통해 독립기념관에서 전시되고 있다.5) 김구김구는 광복 이후 서울로 귀환하여 경교장에서 활동했는데, 덕분에 최후의 유품들이 잘 보존되어 있다. 안두희가 쏜 총탄에 맞아 숨질 때 입었던 피 묻은 한복(혈의)을 비롯해 임시정부인사들과 회의를 하던 공간과 평소 쓰던 집기들까지 체계적으로 보존된 상태이다. 유품 가운데 특히 인상적인 것은 ‘속옷 밀서’다. 1948년 북한 내 민족진영의 비밀조직원들이 김구·이승만 등에게 민주조선인민공화국을 수립하려는 북한의 동향을 보고한 문서로서, 속옷에는 빼곡히 내용이 적혀있고 인장까지 찍혀있다. 속옷 밀서는 광복 이후 우리나라 정세가 결코 녹록치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다. alt도산안창호기념관(국가보훈처 제공)alt김구의 혈의, 속옷 밀서         오래된 물건이 그 자체로 값어치를 띄지는 않는다. 중요한 것은 물건이 가진 이야기다. 물건을 사용한 사람, 그리고 거기에 얽힌 이야기가 오래된 물건을 의미 있는 ‘유물’로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유물을 통해 보다 생생하게 독립운동사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                           심용환성균관대학교 사범대학에서 역사교육학을 전공했다. 현재 팟캐스트 <진짜 역사 가짜 역사>를 통해 재미있고 올바른 역사 이야기를 전파하고 있으며, CBS와 공동으로 <심용환의 근현대사 똑바로 보기>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저서로는 『헌법의 상상력』, 『심용환의 역사토크』, 『단박에 한국사』 등이 있다. ]]> Mon, 03 Jul 2017 17:43:43 +0000 7 <![CDATA[사랑을 말한 아나키스트 ]]> 글 이성주 역사칼럼니스트사랑을 말한 아나키스트“나는 박열을 사랑했다. 사랑받고 있는 것은 타인이 아니다. 사랑하는 타인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이다. 즉, 그것은 자아의 확대라 할 수 있다.”- 도쿄 지방 재판소 12차 예심 中 가네코 후미코의 발언 -박열(朴烈) 열사와 가네코 후미코(金子 文子)의 사랑에 대해선 많이 알려져 있다. 일제는 관동대지진과 이후 벌어진 관동대학살로 비등해진 여론을 돌리기 위해 박열과 그의 연인 가네코 후미코를 일왕 암살 모의 혐의로 검거해 사건을 날조하고, 이들에게 사형 선고를 내린다. 이후 무기징역으로 감형됐지만, 가네코 후미코는 자결하고, 박열은 22년 2개월이란 긴 수감생활 끝에 광복을 이룬 조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불우한 인생, 필생의 동지를 만나다▲1903년 가나가와 현 요코하마 시 출생 ▲양친의 양육 거부로 호적에 오르지 못한 채 1912년 충북 청주의 고모집에 의탁 ▲3·1운동을 목격한 뒤 독립의지 확인 및 공감 ▲1922년 박열과 동거 시작 ▲1926년 일왕 암살 모의 사건으로 사형 판결. 이후 무기징역으로 감형 받았으나 옥중 자살가네코 후미코의 삶은 한 마디로 박복(薄福)했다. 부모는 그녀를 버렸고, 친척집을 전전할 때마다 돌아온 건 학대였다. 이런 환경이 조선인을 이해하는 단초가 되어 3·1운동을 통해 공감으로 이어졌고, 종국에 가서는 아나키즘(Anarchism)으로 발전했다. 이때 그녀에게 다가온 이가 바로 박열이었다.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운명이었다.나는 개새끼로소이다/ 하늘을 보고 짖는/ 달을 보고 짖는/ 보잘것없는 나는/ 개새끼로소이다/ 높은 양반의 가랑이에서 뜨거운 것이 쏟아져 내가 목욕을 할 때/ 나도 그의 다리에다/ 뜨거운 줄기를 뿜어대는/ 나는 개새끼로소이다.어느 날 일본 유학생들이 펴낸 잡지 『조선청년』에 실린 박열의 시 ‘개새끼’는 가네코 후미코에게 강렬한 감동을 안겨주었다. 서로의 사상이 통한 두 사람은 급속도로 가까워졌고, 곧 한 지붕 아래서 생활하게 된다. 여기서 주목해봐야 할 것이 이들의 동거서약이다. 첫째, 동지로서 동거한다.둘째, 운동 활동에서는 가네코가 여성이라는 생각을 갖지 않는다.셋째, 한쪽의 사상이 타락해서 권력자와 손잡는 일이 생길 경우 즉시 공동생활을 그만둔다.사르트르와 보부아르의 계약결혼을 능가하는 동거서약 내용이다. 신념에 충실한 삶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이상적인 신념과 사랑의 양립이라고 해야 할까?사랑을 좇아 모든 것을 내걸다“나는 박열을 알고 있다. 박열을 사랑하고 있다. 그가 갖고 있는 모든 과실과 모든 결점을 넘어 나는 그를 사랑한다. 나는 지금 그가 나에게 저지른 모든 과오를 무조건 받아들인다.”재판을 받던 당시 가네코 후미코가 남긴 증언이다. 사랑이란 건 사랑하는 이의 결점까지도 사랑하는 것이다. 그녀는 박열을 사랑했다. 그녀의 사랑은 ‘사랑받고 있는 것은 타인이 아니다. 사랑하는 타인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이다’라는 발언에 이르러 확신이 된다. 사랑하는 이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이라는 통찰. 고작 23살의 나이에 얻은 성취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예리한 직관이다.언제부터인가 우리는 계산된 사랑을 하기 시작했다. 완벽한 사랑이란 부모자식 간의 사랑밖에 없다면서, 타인과의 사랑에 계산기를 들이민다.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약자라고도 말한다. 그러나 진정한 사랑이란 자신을 온전히 내 던져 사랑하는 타인 속에서 진정한 나를 발견하는 행위가 아닐까?가네코 후미코는 그녀가 말한 사랑을 하기 위해 어떠한 삶의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 그 해답도 분명히 갖고 있었다.“내 생명이 지상에 붙어있는 한, 지금이란 때에 가장 하고 싶은 일을 좇아서 행동할 것이다.”어디서 많이 본 듯한 문구가 아닌가? 한때 우리나라를 휩쓸었던 자기계발서에 자주 등장했던 문장이 보인다. 박열과 함께 일왕 암살 모의 죄목. 즉, 국사범(國事犯)으로 분류됐던 가네코 후미코에게는 공식적으로 7번의 전향 권유가 있었다. 그러나 그때마다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지금이란 때에 가장 하고 싶은 일을 좇겠다’는 그녀의 말은 전향을 회유하는 재판장에게 내뱉은 말이었다. 자기계발서에서 흔히 말하는 ‘지금 이 순간, 자신이 가장 하고픈 일을 하라’는 말과는 가슴에 와닿는 무게가 사뭇 다르다. 전향하지 않으면 사형에 처하게 될 상황에서 지금 이 순간 자신이 하고픈 일이 사랑과 신념을 지키겠다니, 이러한 선택을 과연 아무나 할 수 있을까. 말 그대로 ‘목숨을 건 사랑’이다.사람들은 흔히 나보다 더 많이 날 아끼고 좋아하는 사람을 사랑하라고 말한다. 누가 더 많이 애착을 갖는지 재고 따지며 하는 사랑을 ‘사랑’이라 말할 수 있을까. 쉽게 만나고, 쉽게 헤어지는 요즘 세태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타인에게서 나를 발견하게 하는, 그런 사랑이 아닐까. 가네코 후미코의 삶과 그녀가 남긴 말을 통해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다시 한 번 고민해 봤으면 한다.                     이성주시나리오 작가 겸 역사칼럼니스트. 대중과 함께 호흡하는 글쓰기를 목표로 『조선의 민낯』, 『왕들의 부부싸움』과 같은 역사서를 출간한 바 있다. 최근에는 국제정치와 관련된 연구 및 집필에 열중하고 있다. 『전쟁으로 보는 국제정치』 시리즈 1, 2, 3권을 출간 중이다. ]]> Mon, 03 Jul 2017 14:13:24 +0000 7 <![CDATA[소박한 행복 ]]> 소박한 행복쨍하게 내리쬐는 햇살이 유난히도 견디기 힘든 오늘싱그러운 녹음 속 보물처럼 숨겨진오두막이 반갑습니다.시원한 그늘 아래서 더위는 한 김 식어가고이따금 불어오는 바람에흐르는 땀방울은 기분 좋게 말라갑니다. 작은 오두막이 선물한 소박한 행복자꾸만 머물다 가고 싶습니다. ]]> Mon, 03 Jul 2017 13:35:08 +0000 7 <![CDATA[무더위 속에서 영광의 시간을 찾다 ]]> 글 김주용 독립기념관 선임연구위원무더위 속에서 영광의 시간을 찾다후난성(湖南省) 창사(長沙)에서의 일정을 마무리한 우리는 다음날 아침 창사 남역에서 우한(武漢)까지 가는 고속열차에 올랐다. 350km로 달리는 고속열차는 한 시간 반 만에 우리 일행을 후베이성(湖北省) 우한에 무사히 안착시켰다.             한여름 더위가 유명한 우한에서의 첫 답사우한(武漢)은 충칭(重慶)·난징(南京)과 함께 3대 화로로 알려진, 중국에서 가장 더운 지역 중 하나다. 이번 우한 답사에서는 조선의용대 결성 경축 장소와 창설 장소를 찾는 데 집중했다. 몇 해 전 흥행한 영화 <암살>의 주인공들이 바로 의열단원들이며, 이들이 성장해서 조직한 군대가 바로 조선의용대이다. 중국 국민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성립된 조선의용대 창설이 내년이면 80주년을 맞이한다.일행은 재빨리 짐을 내려 준비된 승합차로 향했다. 선하게 생긴 중국인 기사가 반갑게 맞아 준다. 차는 우한 답사의 첫 번째 목적지인 여황피로(黎黃陂路)의 조선의용대 결성 경축 장소로 향했다.         alt조선의용대 결성 경축 장소alt조선의용대 결성 경축 장소 거리 표지석 조선의용대의 탄생 배경1937년 7월 7일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독립운동가들은 이때를 한국이 독립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인식하였다. 이에 따라 독자적으로 활동하고 있던 각 단체들 사이에 연합전선 문제가 대두되었다. 결국에는 민족주의진영의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와 사회주의 성향의 조선민족전선연맹이 형성되었다. 그 중 한커우(漢口)에서 결성된 조선민족전선은 무장부대의 조직과 대일항전 참여를 목표로 하였다. 조선민족전선은 1938년 7월 중앙군사학교 성자분교 졸업생들이 민족전선 본부가 있는 한커우로 합류해오면서 본격적으로 무장부대 조직에 착수하여 1938년 7월 7일 중국군사위원회에 조선의용군 조직을 정식으로 건의하였다. 이 제안은 장제스의 재가를 거쳐 모든 항일세력의 연합을 전제로 하고, 규모상의 문제로 무장부대를 ‘군(軍)’보다는 ‘대(隊)’로 할 것과 조직될 무장부대를 군사위원회 정치부 관할에 둔다는 조건으로 승인되었다.1938년 10월 2일 한국 및 중국 양측 대표들은 회의를 개최하여 조선의용대 지도위원회를 조직하였다. 이 지도위원회는 군의 명칭·조직 인선·편제·활동경비 등을 결정했으며, 건립 후에는 의용대를 지도하는 기구로 작용했다. 지도위원회 위원으로는 중국 군사위원회 정치부 측 인원 4명과 조선민족전선 산하 단체의 대표 김원봉·김성숙·김학무·류자명 등 4명이 선정되었다. 이러한 결과 조선민족전선은 그해 10월 10일 한커우(중화)기독교청년회관에서 일본군에 맞서 싸울 군사조직으로 조선의용대를 조직하였다. 조선의용대는 1942년 한국광복군에 편입될 때까지 중국군 ‘6개 전구 남북 13개 성 전지’에 배속되어, 주로 일본군 포로 심문이나 대일본군 반전 선전, 대중국민 항전 선전활동을 전개하였다. 조선의용대의 발대식은 1938년 10월 10일 중화민국 쌍십절(雙十節)에 거행되었다. alt조선의용대 대원들alt조선의용대 창설 당시 김원봉 역사적인 순간을 짐작하다발대식 당시 관련 자료는 서류로 전해진 것이 없다. 다만 발대식에서 찍은 기념사진에는 ‘ㅈㅗㅅㅓㄴㅇㅡㅣㅇㅛㅇㄷㅐ’라는 한글자모와 ‘KOREAN VOLUNTEERS(조선의용대)’라고 영문으로 쓰인 대기(隊旗), 그 뒤로 대장 김원봉의 모습이 보였다. 사진 속 인물은 90명으로, 군복을 입은 대원이 74명이고, 양복 또는 중산복(中山服)을 입은 자가 14명이다. 긴치마를 입은 여성 2명도 눈에 띄었다.대원이었던 김학철의 회고에 의하면, 이 사진은 1/4 정도가 잘려나간 까닭에 대원 30여 명의 모습이 누락되었다고 한다. 대장 김원봉을 중심으로 맨 앞줄 왼쪽에 이집중·윤세주·김규광·최창익 등 10명이 나란히 섰다. 발대식에는 조선의용대 결성에 직접 관여한 정치부 부장 천성(陳誠)과 비서장 허쭝한(賀衷寒)은 물론, 특수공헌을 한 왕판성(王芃生)·아오야마(靑山和夫) 같은 인물들도 당연히 참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정치부 부부장 저우언라이(周恩來)와 정치부 제3청 청장 궈마뤄(郭沫若)도 발대식에 참석하여 연설했다고 한다.조선의용대는 중국 국민정부 군사위원회 정치부에 예속되어, 중국항일전쟁의 수요에 따라 활동하였다. 대원들은 국민혁명군 복장으로 차려입고, 왼쪽 앞가슴에 장방형 휘장을 부착하였다. 휘장 가운데에는 한글·한문·영문으로 ‘조선의용대’, 휘장의 왼쪽에는 이름이, 오른쪽에는 직함이 새겨져 있었다.         alt조선의용대 결성 기념사진(1938년 10월 10일)         조선의용대 결성을 축하했던 그때 그 장소조선의용대가 결성된 지 3일 후인 10월 13일 저녁, 한커우(漢口)기독교청년회 강당에서 조선의용대 결성을 경축하기 위한 오락대회가 개최되었다. 7백여 명의 관중이 참석한 가운데, ‘민족해방가’, ‘자유의 빛’, ‘아리랑’을 비롯한 노래와 <쇠>, <두만강변> 등의 연극이 공연되었다.1912년에 결성된 한커우기독교청년회(한커우YMCA)는 1920년대 한커우의 삼교가에 있었다. 후베이성 당안관의 『우한시 교회 개황』에 따르면 한커우에 위치한 기독교청년회 중 남청년회가 여황피로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기재되어 있다.1938년 우한시 지도와 우한기독교청년회에서 편찬한 『1911-2011 YMCA 우한기독교청년회 역사 회고』를 보면 1938년 한커우기독교청년회의 위치는 지금의 여황피로와 중산대도 1090호가 교차하는 ‘적승명패세계(廸昇名牌世界)’라는 백화점 건물임을 알 수 있다. 즉 ‘적승명패세계’라는 백화점 건물이 당시 조선의용대 창설 선전을 위해 유예대회를 개최한 장소임을 입증해준다. 1938년 10월 14일 『신화일보』에 조선의용대 창설 소식, 김원봉의 연설, 유예대회에서 연출한 내용이 자세히 보도되었다. 조선의용대가 한커우의 YMCA에서 창립식을 가졌다고 해서 현재 한커우의 여황피로 10호에 자리를 잡은 YMCA와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다. 현재 기독교청년회 건물은 본래 미국해군청년회가 있던 자리인데, 한커우기독교청년회가 1945년 이후에 그 자리로 옮긴 것이다.         alt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 선언문(한민호외 1937년 8월 7일)             일행이 여황피로를 찾았을 때는 오후로 막 접어들 때였다. 날은 뜨거웠다. 여황피로는 옛 건물들이 많아 이른바 가두박물관으로도 불린다. 조선의용대 결성 경축 장소를 찾았다는 희열도 잠시, 우리는 이곳에 조선의용대의 ‘기록의 역사’가 없음을 확인하고 시무룩해졌다. 좌표 30.53634N, 114.30341E. 공간을 확보하지 못하면 ‘시간의 역사’도 온전할 수 없다는 작은 진리를 가슴에 안고 무한 국민정부 청사를 찾아 나섰다.다음호에 계속 ]]> Mon, 03 Jul 2017 17:01:47 +0000 7 <![CDATA[북유럽에서 불어온 행복의 바람, 휘게 ]]> 글 장근영 심리학자북유럽에서 불어온 행복의 바람, 휘게휘게(Hygge), 행복한 만족감을 느끼게 해주는 아늑함과 편안함, 그리고 친근함을 뜻하는 덴마크, 노르웨이의 단어다. 이 자체는 그 지역에서 아주 오래 전부터 사용해온 일상어지만, 영국이 ‘브렉시트(Brexit)’ 다음으로 2016년을 정의하는 단어로 휘게를 선정했을 정도로 최근 부각되는 단어이기도 하다. 척박한 환경 속에서 탄생한 단어현지 사람들이 휘게라는 단어를 통해 떠올리는 가장 전형적인 이미지는 자기 집에서 촛불을 켜놓고 혼자 혹은 소수의 친한 친지들과 따듯한 음식이나 맥주를 즐기며 소소한 퍼즐을 풀거나 하는 아기자기한 시간이다. 그러나 이 단어의 기원을 살펴보면 이것이 느긋함이나 편안한 환경에서 나온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휘게는 노르웨이어로 말 그대로의 행복 혹은 웰빙을 뜻한다. 하지만 많은 학자들은 이 단어가 ‘안아주다’라는 뜻의 ‘허그(Hug)’가 기원이 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허그라는 단어는 옛날에는 종종 휘가(Hygga)라는 단어와 혼용되곤 했다는데, 휘가의 뜻은 ‘위로해주다’이다. 그리고 이 단어의 기원은 멀리 게르만족의 고대어인 휘간(Hugyan)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뜻은 ‘생각해주다’ 혹은 ‘배려해주다’이다. 그러니까 이러한 기원을 종합적으로 봤을 때 휘게는 ‘나를 생각해주는 사람들이 나를 위로해주기 위해 안아준 따듯한 포옹’에서 비롯된 말이다.만약 내가 사는 사회가 늘 편안하고 따듯하며 나에게 우호적이라면, 굳이 집에 들어가서 누군가의 포옹으로 위로 받을 필요가 있었을까? 덴마크의 자연 환경은 온화함과는 거리가 멀다. 섬나라여서 비바람이 몰아치는 겨울이 계절의 절반을 차지한다. 한편 수질이 나빠서 식수가 귀하고, 가뜩이나 척박한 토질은 19세기 잇따른 전쟁으로 그나마 남아있던 비옥한 농토마저 황폐해졌다. 이러한 시련 탓에 덴마크 인들은 생존하기 위해 밖으로는 스칸디나비아 반도를 점령해 괜찮은 영토와 자원을 확보하고, 안으로는 작은 것에 만족하는 금욕주의적 삶을 체화해왔다. 이 시절 그들의 생활상은 영화 <바베트의 만찬>에서 엿볼 수 있다. 영화에서 맛없고 거친 음식에 만족하며 지내던 덴마크인 들은 생전 처음 보는 프랑스 왕실요리를 두고 놀라움을 넘어 공포심까지 느꼈다.지금도 덴마크의 상황은 완벽하다고 말하기 어렵다. 빈부격차는 상위 20%의 국민이 국가 전체 부의 99%를 보유해서 세계 최대 수준이고, 가계부채 역시 세후 가처분 소득의 300%를 웃돌고 GDP 대비 123%에 달해 세계 최대 수준이다. 소득대비 세율 역시 평균 48% 이상으로 최고 수준을 기록하고 있다.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난 소박한 자기만족『덴마크 사람들처럼』의 저자 말레네 뤼달(Malene Rydahl)은 덴마크가 생존하기 만만치 않은 환경에도 불구하고, 1973년 국가별 행복지수 조사를 실시한 이래 계속 세계행복지수 1위를 유지하는 비결이 바로 이 휘게의 정신에 있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휘게의 특징은 화려함이나 호화스러움의 정반대를 지향한다는 점이다. 핵심은 간결하고 소박한 자기만족이다. 불필요한 요소를 최소한으로 줄이고 만족의 핵심만을 추구한다는 점은 미니멀리즘과도 일맥상통하는 태도다.우리가 화려하고 호화스러운 무언가를 원하는 이유는 온전히 나만의 만족을 위해서가 아니다. 남들에게 드러내고 인정받기 위해서, 타인의 시선을 끌어 모으기 위해서, 그리고 사람들의 부러움을 얻기 위해 화려함을 추구하는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내 감정’을 말하지 않고 ‘국민정서’를 먼저 말하는 것처럼, 욕망의 대상 역시도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남들이 원하는 것을 달성하려고 드는 셈이다.이렇게 남의 눈으로 자신을 보는 태도는 소유물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자기 자신의 평가에서도 그렇다. 한국이 인구대비 성형수술 비율이 세계 최고인 것도, 학부모들이 자신은 결코 해본 적이 없는 무자비한 입시공부를 자녀들에게 강요하고 자녀의 학업성취를 마치 자신의 성취인 것처럼 받아들이는 사고방식도 결국 자기 평가를 타인의 시선에 의존하는 데서 비롯된 결과물이다. 진짜 문제는 이렇게 만들어지는 대중의 욕망이 자가발전으로 더욱 커지고 있다는 사실이다.그 결과, 아무리 물질적인 성취를 이루어도 정작 스스로는 행복을 느끼지 못하고 불안감에 시달린다. 각종 미디어에서는 휘게가 마치 새로운 삶의 지혜인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지금 우리나라에도 이미 이와 같은 태도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주어진 일에 충실하며, 적은 수입에 맞는 소비생활을 이어가며 작은 것에 만족하는 사람들은 주변에 늘 있어왔다.지금 한국 사회는 조금 더 나은 사회를 향한 변화를 꿈꾸는 중이다. 그 변화의 목표는 모두가 물질적으로 부유하고 화려하게 살면서 남들의 부러움을 사는 삶이 아니다.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 조금 더 공평하게 이익을 나누고, 사회안전망을 든든히 하기 위해 지금까지 누리던 내 몫을 일부 포기하는 것을 감수하는 삶을 지향한다. 우리가 이러한 변화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불어오는 휘게의 바람이 의미하는 게 무엇인지 진지하게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alt 장근영심리학자 겸 칼럼니스트. 연세대학교 심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국책연구소인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에서 활동하며 대학에선 매체심리학·발달심리학 등을 강의하고 있다. 저서로는 『심리학 오디세이』, 『팝콘심리학』 등이 있다. ]]> Mon, 03 Jul 2017 16:36:29 +0000 7 <![CDATA[들어가며 112년 전, 치욕의 그날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 1910년 8월 29일,대한제국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과 일제 한국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는 ‘대한제국의통치권을 일본에 넘긴다’는 ‘한국병합조약’을 강제 체결하고 공포한다.이 조약으로 끝내 국권을 피탈 당한 한국은 35년간 일제의 식민지배를 받았다.일제의 ‘한국병합’은 한순간에 실행된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에 걸쳐 진행되었다.이는 한국에 대한 다른 열강의 이권에도 영향을 주었는데, 열강은 왜 개입하지 않았을까. 자국의 불평등조약 개정에 열심이던 일제가 왜 한국에는 불평등조약을 강요하고 식민지화했을까. 오늘날 일본의 우익은 왜 ‘한국병합’이 강제 체결도 아니고 침략도 아니라는 주장을 펼치는가. 이것이 국익이라는 명분으로 모두 설명될 수 있을까. 일제가 어떠한 과정을 거쳐 한국을 ‘병합’했는가에 대한 지속적인 고찰이 필요하다. ]]> Wed, 31 Aug 2022 10:28:50 +0000 70 <![CDATA[톺아보기 일제는 ‘어떻게’ 한국을 강제 병탄했을까]]> 글 한성민(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원 연구교수) 한국에 대한 일제의 침략은 러일전쟁과 함께 본격화되었다. 일제는 침략의 주요 수단으로 군사력을 이용하면서도, 결정적인 국면에서는 강제 조약을 체결하는 방식으로 한국의 국권을 침탈하였다. 「한일의정서」를 시작으로 「‘한국병합’에 관한 조약」에 이르기까지 일제는 일관되게 조약 체결 방식을 고집했다.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여 한국 침략에 대한 경쟁자는 모두 사라졌고, 사실상 한반도를 군사적으로 점령한 상태였다. 그럼에도 일제는 강제 병합까지 왜 5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했을까. 또 왜 굳이 조약 체결의 형식을 고집했을까. alt 「‘한국병합’에 관한 조약, 전권위임장」 (1910) 일제가 ‘조약’을 채택하게 한 「포츠머스조약」 주권국가였던 한국을 식민지로 만드는 것은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일제는 한국과 관련된 열강과의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기존의 한일관계를 재조정해야 했다. 또한 한국정부의 기능을 일제가 담당해야 했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병합’은 결코 당시 일제의 특정한 정치인이나 정치세력이 독자적으로 추진할 수 없었고, 일본사회의 전반적인 동의와 지지 아래 국가적 역량을 최대한 투입하여 추진해야 했다. 또한 한국사회의 반발을 최소화하면서 일제의 의도에 맞는 통치체제 준비에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따라서 일제는 점진적인 ‘한국병합’ 방식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일제는 러일전쟁의 막바지인 1905년 7월 미국과 「가츠라-태프트 밀약」, 8월 영국과 「제2차 영일동맹」, 9월 러시아와 「포츠머스조약」을 체결하여 한국에 대한 ‘보호·지도 및 감독’의 권리를 승인받았다. 이후 일제의 한국 침략이 강화되었으나, 이것이 즉각적인 한국의 국권상실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포츠머스조약」의 협상과정에서 러시아는 일제가 한국의 주권을 침해할 만한 조치를 할 경우 반드시 한국정부와 합의해야 한다는 단서조항을 달았고, 그것에 영국과 미국 등 열강도 동의했다. 이는 러일전쟁 후 일제의 즉각적인 ‘한국병합’을 불가능하게 만들었고, 불법을 동원하더라도 반드시 조약 체결의 방식을 채택하게 한 주요 원인이 되었다.  alt 일제와 러시아의 「포츠머스조약」 체결 모습 (1905) 「을사늑약」부터 「한일신협약」으로 한국의 내정권을 장악하다 「포츠머스조약」이 체결된 뒤, 특파대사로 한국에 온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한국의 외교권 박탈을 규정한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했다. 이후 일제는 한국에 통감부를 설치하고 이토를 초대 통감으로 임명하였다. 통감은 한국의 외교를 대리하는 동시에 한국에서 일제를 대표했다. 따라서 이토는 한국의 내정에 참여할 권한이 없었으나, 한국 고위관료들과의 회의기구인 시정개선협의회를 통해 내정에 깊숙이 간섭하였다. 이 시기는 일제가 한국의 통치권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한, 한국정부와 통감부가 병립하는 이중권력 구조였다.            광무황제는 「을사늑약」의 불법성을 국제사회에 알리기 위해 1907년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이상설·이준·이위종 등을 특사로 파견했다. 이 회의는 주권국가 간에 국제문제를 다루는 자리였다. 만약 한국이 참가할 수 있다면, 그 자체로 국제사회에서 독립국으로 공인받는 계기였고 외교권을 박탈한 「을사늑약」도 무효가 되는 것을 의미했다. 하지만 반대로 한국이 참가하지 못한다면, 오히려 한국에 대한 일제의 보호권이 국제사회에서 공인받는 계기가 되는 것이기도 했다. 일제는 한국의 특사파견 움직임을 사전에 파악하고 있었으나 저지하지 않았다. 헤이그에서 한국특사단의 활동에 대해서도 직접적인 방해를 하지 않고 방관하였다. 여기에는 2가지 중요한 정치적 의도가 있었다.        첫째 일제는 한국특사단의 공개적인 반일활동을 허용할 정도로 자유롭고 문명적으로 지도하기 때문에 서구 열강처럼 식민통치능력이 있다는 점을 내보이려는 의도였다. 둘째 이 사건을 빌미로 한국에 대한 지배권을 한층 강화하려는 의도였다. 이러한 일제의 의도는 일정하게 달성되었다. 헤이그에서 회의 참가를 거부당한 한국특사단은 한국에 대한 일제의 침략 내용을 폭로했으나, 열강의 특별한 문제제기는 없었다. 이것은 일제의 한국정책에 대한 열강의 암묵적 동의를 의미했다. 이후 일제는 침략을 더욱 강화하여 1907년 7월 광무황제를 강제 퇴위시키고, 「한일신협약」을 체결하여 한국의 내정권을 장악하였다. 뒤이어 한국군대의 해산·사법권 및 경찰권의 위임·일본인 차관(次官)의 채용 등을 규정한 「비밀각서」를 체결하였다. 이로써 통감은 명실공히 한국의 국정을 총괄하는 최고 통치자가 되었고, 국정의 주요 사항은 통감 주도하에 한국정부의 관료들이 참석하는 시정개선협의회에서 결정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한국의 국방과 치안도 일본군으로 대체되었다.  alt (위)「을사늑약」 전문 (1905) / (아래 좌)「한일신협약」 전문 / (아래 우)『대판조일신문』(1907.7.24.) / 왼쪽부터 이준·이상설·이위종 침략의 의미를 완화하기 위해 고안한 용어, ‘한국병합’ 1909년 3월 그동안 한국정책을 책임졌던 이토가 통감직의 사임을 표명하자, 일제의 내각총리대신 가쓰라 다로(桂太郞)와 외무대신 고무라 쥬타로(小村壽太郞)는 4월 초 이토를 찾아가 ‘한국병합’에 대해 동의받았다. 이때부터 일제는 한국 식민지화에 대해 ‘병합’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는 당시 일제 외무성의 정무국장 구라치 데쓰키치(倉知鐵吉)가 ‘합방’·‘합병’과 달리 양국의 대등한 통합이 아니면서도, ‘병탄’과 달리 침략의 의미를 완화하기 위해 고안한 용어였다.    이후 일본정부는 7월 6일 내각회의에서 ‘한국병합’ 방침을 공식적으로 확정하였다. 당시 각의에서 통과된 「대한정책의 기본방침」은 ‘① 적당한 시기에 한국병합을 단행할 것, ② 병합의 시기가 도래할 때까지 병합의 방침에 기초하여 충분히 보호의 실권을 장악할 것’이었다. 이와 함께 그 실행지침으로「대한시설대강」을 통과시켰다. 주요 내용은 일제의 군사력과 경찰력을 바탕으로 일제 관리들이 한국의 주요 시설 및 기관을 장악하여 권한을 확대하고, 많은 일본인을 이주시켜 통치의 근거를 견고하게 한다는 것이었다. alt 일진회 회장 이용구 일제의 큰 그림을 위한 ‘합방청원운동’ 진압 일제는 이 시기까지도 ‘한국병합’의 구체적인 실행 시기를 결정할 수 없었다. 「포츠머스조약」의 단서조항으로 인해 열강이 개입할 수 있는 여지가 있기 때문이었다. 의병은 한국사회에서 일제의 침략에 맞선 거의 마지막 저항세력이었다. 1909년 9월~10월의 이른바 ‘남한폭도 대토벌작전’을 통해 의병과 같은 조직적인 저항세력이 사라졌음을 확인한 이토는 중국 동북지역시찰에 나섰다. 그 목적은 러시아의 재무대신 코코프쵸프(V. N. Kokovtsov)를 만나 중국 동북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하려는 미국에 대한 공동대응과 ‘한국병합’에 대한 러시아의 양해를 구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이토는 10월 26일 하얼빈에 도착하자마자 안중근에게 사살당했다. 이로써 일제의 의도는 일단 좌절되었으나 사건의 여파는 상당했다. 일본 내에서는 즉각 한국을 ‘병합’해야 한다는 여론이 비등했고, 한국의 친일단체 일진회는 12월 「합방청원서」를 발표했다.          하지만 이것은 일제가 바라던 것이 아니었다. 당시 일본사회에서 분출되고 있던 ‘한국병합안’은 일제가 생각하고 있던 ‘한국은 완전히 폐멸되어 일본의 일부가 된다’는 ‘병합안’과 일치하지 않았고, 일진회의 ‘합방청원운동’은 한국인들의 반발을 초래하고 있었다. 게다가 ‘한국병합’에 대해 열강의 승인을 받지 못한 상황에서 이토 사망으로 한국문제가 국제적 관심사로 부상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한국병합’이 좌절될 수 있다는 위기의식을 갖게 된 일본수상 가쓰라는 곧바로 열강을 향해 “당분간 이토의 한국정책은 변함없이 유지될 것이다”라고 발표했다. 이와 함께 일제는 한국에 대한 국제적 관심을 차단하기 위해 안중 근에 대한 재판을 신속하게 진행하고, 소네 아라스케(曾?荒助) 통감은 일진회의 ‘합방청원운동’을 진압했다. alt (좌)이완용 / (우)「‘한국병합’에 관한 조약」, 『조선총독부 관보』(1910.8.29.) 「한국병합에 관한 조약」 으로 막을 내린 대한제국 역사 ‘한국병합’의 여건은 1910년에 접어들어 마련되었다. 중국 동북지역에 미국의 개입이 강화되자 4월 러시아는 일제와 공동대응을 협의하는 과정에서 ‘한국병합’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5월에는 열강의 대표국가 영국도 동일한 의사를 밝혔다. 러시아와 영국이 ‘한국병합’을 양해하자 일제는 곧바로 ‘한국병합’ 실행을 결정하고, 5월 30일 ‘병합’의 책임자로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를 육군대신 겸임의 제3대 통감에 임명하였다. 이 직후 데라우치는 일제 각 부처 실무책임자들을 모아 병합준비위원회를 조직하여 ‘한국병합’의 구체적인 실행안을 만들도록 했다.       병합준비위원회는 ‘한국병합’은 조약을 체결하여 실행하고, 한국에서 당분간 일본헌법을 실행하지 않으며, 총독에게 입법·행정·사법의 전권을 부여한다는 등 모두 22개 항목의 「병합실행방법세목」을 입안하였다. 일제는 이것을  7월 8일 각의에서 통과시켰다. 이후 ‘한국병합’은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그것은 무력을 동원한 데라우치의 강압과 이완용 등 일부 친일관료들의 협조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7월 23일 서울에 도착한 데라우치는 곧바로 위수령을 내려 한국에서 모든 정치집회와 연설회를 금지시키고 무력시위로 공포분위기를 조성했다. 그 후 8월 16일부터 한국의 전권위원인 내각총리대신 이완용과 남산의 통감관저에서 ‘한국병합’ 실행을 위한 협상을 시작했다. 일제가 제시한 ‘한국병합안’을 이완용이 대부분 그대로 수용했기 때문에 협상기간은 불과 1주일도 걸리지 않았다.    협상과정에서 이완용이 수정을 요구한 사안은 단 2가지였다. ‘병합’ 후에도 ‘한국’이라는 국호와 한국 황실에 대해 ‘왕’으로 존칭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데라우치는 ‘한국’의 명칭 사용은 국제사회에서 혼동할 소지가 있다는 이유로 거부하고, 황실의 존칭에 대해서는 한국의 민심을 자극할 수 있다는 이완용의 의견을 수용하였다. 이에 광무황제는 ‘이태왕’, 융희황제는 ‘이왕’, 황태자는 ‘영친왕’의 존칭을 사용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이것으로 담판은 종결되었다.   무장한 일본군이 궁궐을 완벽하게 포위하고, 한성의 전역에서 삼엄한 경계망을 전개한 가운데, 8월 22일 창덕궁에서 대한제국의 마지막 어전회의가 열렸다. 조약을 체결하여 ‘병합’을 실행한다는 일제의 방침에 따른 형식적인 어전회의였다. 이미 모든 실권을 잃은 융희황제의 재가를 받자마자 이완용은 데라우치와 「한국병합에 관한 조약」을 체결하였다. 그리고 1주일 뒤인 8월 29일 ‘한국병합’이 공식적으로 발표되었다. 이것으로 대한제국의 역사는 끝났고, 한국은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을 때까지 일제의 식민통치를 받았다. 지금부터 112년 전, 1910년 8월 29일은 나라의 주권을 빼앗긴 치욕의 날이지만 이 뼈아픈 역사가 다시는 반복되지 않도록 되새겨야 한다.  ]]> Wed, 31 Aug 2022 10:37:48 +0000 70 <![CDATA[만나보기 단 3발의 총성으로 ‘한국병합’을 응징하다]]> 글 한성민(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원 연구교수) 대한의군 참모중장이었던 안중근이 일제 최고 국가원로였던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의거가 일어났다. 그의 총구는 사람만을 겨눈 것이 아니라 ‘한국병합’을 준비하던 일제를 겨냥하였다. 하지만 일부에서는 ‘한국병합’의 명분을 찾던 일제에 빌미를 주었다는 인식이 여전히 존재한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그의 저격이 정말 ‘한국병합’의 빌미를 제공한 것일까? alt 안중근 동아시아에 울려 퍼진 총성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30분경 중국 동청철도의 하얼빈역. 플랫폼에 질서정연하게 도열한 러시아군 의장대와 흥분된 기대감 속에 운집한 환영객들 앞으로 특별열차가 멈춰 섰다. 왜소한 체구에 수염을 길게 기른 동양계 노신사가 만면에 웃음을 띠고 수행원들과 함께 걸어 나오자 의장대의 팡파르보다 환영객들의 함성이 먼저 터졌다. 그 순간 총성이 울렸고 함성은 비명으로 바뀌었다. 대한의군 참모중장 안중근이 일제 최고 국가원로이자, 초대 한국통감을 역임하는 등 일본의 한국침략 과정에서 중심적 역할을 수행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했다.        이 의거가 당시 동아시아 사회에 준 충격은 대단하였다. 러시아 및 일본 관헌이 총출동하고 많은 인파가 모인 공개적인 장소에서 조국의 독립을 염원하는 한국인 청년이 단신으로 일본의 대정치가를 저격했다는 사건 자체도 매우 강렬하였으나 당시 동아시아 국제정치에서 이토가 차지하는 비중으로 인하여 관련 국가들의 이목이 쏠릴 수밖에 없었다. alt 이토 히로부미(좌) /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 사살 후 러시아 관헌에게 체포되는 장면을 묘사한 기록화(우) 조선의 명사수 일제 우두머리를 저격하다 안중근은 1879년 황해도 해주에서 향반 안태훈과 조마리아의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글공부와 사냥을 즐기는 소년으로 성장하여 명사수로 소문났다. 그의 사격실력이 처음 사회적으로 발휘된 것은 1894년 갑오농민전쟁에서였다. 농민들의 저항에 부정적이었던 다른 양반과 마찬가지로 안태훈은 민병대를 조직하여 농민군 진압에 나섰고, 안중근은 16세의 나이로 선봉대에 참여하였다. 하지만 3년 후 천주교에 입문하면서 안중근은 문명개화론적 세계관을 형성하는 한편, 국권상실의 위기로 치닫는 상황에서 국권회복을 고민하게 되었다.            특히 1905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박탈당한 조국의 현실에 직면하여 안중근은 국권을 지키기 위해서는 민족의 실력양성이 급선무라고 판단하였다. 1906년 평안도에 삼흥학교와 돈의학교를 설립하고, 국채보상운동과 서북학회 참여 등 적극적인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광무황제 강제 퇴위와 군대해산 등 한국의 식민지화는 더욱 가속되었다. 이 같은 현실에서 안중근은 애국계몽운동의 한계를 인식하고, 국외로 망명하여 무장독립투쟁을 모색하였다. 1908년 러시아 연해주에서 의병을 조직하여 일본군에 대항하였다.      1909년 3월 안중근은 12명의 동지와 함께 비밀조직 단지회를 조직하고,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와 매국노 이완용을 3년 내에 사살할 것을 맹세하였다. 실행의 기회는 바로 그해에 찾아왔다. 이토가 러시아의 재무대신과 회담하기 위해 하얼빈에 온다는 소식이 신문에 보도되었다. 이에 안중근은 10월 26일 이토가 하얼빈에 도착하자마자 의거를 거행하였다. alt 안중근 관련 총기 만국공법에 따라 살인범이 아닌 전쟁포로로 대우하라 사건 직후부터 지금까지 한국에서는 안중근을 한국의 독립의지를 세계에 알리고 침략의 원흉을 사살한 민족의 영웅으로 인식한다. 반면 일본에서는 근대 일본을 이끈 대정치가를 저격한 테러리스트라는 인식이 강하다. 그런데 관심을 저격사건에서 그것이 끼친 영향으로 돌리면 한일 간에 묘한 공통점도 나타난다. 안중근의 이토 저격이 ‘한국병합’ 실행의 계기가 되었다고 파악하는 흐름이 있다는 점이다. 일본에서는 평소 ‘한국병합’에 반대하고 한국에 대해 보호육성정책을 펴던 이토를 한국인이 사살했기 때문에 이를 계기로 일본은 급격하게 ‘한국병합’을 결정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에 대해 한국에서는 이토가 ‘한국병합’을 반대한 것이 아니라 그 주역이었다고 반박하면서도, 이 사건은 ‘한국병합’의 명분을 찾던 일본에게 그 빌미를 준 것으로 파악하는 인식이 일부에서 여전히 존재한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당시 일제는 통감부에 의한 한국보호통치를 일본의 문명적 시혜이며, 이를 통해 한국은 점차 문명화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한국인들의 전반적인 동의 속에서 보호통치가 행해지고 있다고 국제사회에 홍보하고 있었다. 일본 정부 내부에서는 이미 1909년 7월 6일 각의에서 ‘한국병합’을 결정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무리 없이 실행하기 위해 한국 내에서는 반일세력 제거를 위한 ‘의병대토벌작전’을 전개하면서 외부적으로는 다른 열강과의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있었다. 이토의 만주시찰은 중국 동북지역에서 철도를 매개로 예상되는 미국과 러시아의 결합을 사전에 저지하고, ‘한국병합’에 대한 러시아의 승인을 목적으로 삼았다. 바로 이러한 때에 안중근이 한국침략의 중심인물인 이토를 저격했다.            이것은 단순한 충동이 아니라 뚜렷한 계획하에 실행되었다. 그는 의병 참모중장의 자격으로, 독립전쟁의 일환으로 이토를 사살함과 동시에 재판 투쟁을 통해 일제의 허울 좋은 동양평화론의 실체를 전 세계에 폭로하고 한국 독립의 정당성을 세계 여론에 호소하고자 했다. 이 때문에 안중근은 체포된 직후 자신을 만국공법에 따라 일반 살인범으로 대우하지 말고, 전쟁포로로 대우할 것을 요구하고, 이토의 죄상을 15개조로 논리적으로 제시하였다. alt 『안중근사건 공판 속기록』(1910.5.13.)(좌) / 사형 집행 직전 촬영한 안중근 사진 (1910.3.26.)(우) 사건의 파문을 최소화하기 위한 일제의 계략 ‘한국병합’을 계획하고 있던 일제는 이 사건의 여파가 확대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사건이 부각되면 우선 한국에서 안중근은 민족의 영웅으로 추앙될 수 있고, 제2나 제3의 안중근이 나올 수 있는 문제였다. 그 결과 ‘의병대토벌작전’ 이래 감소추세에 있던 한국의 의병투쟁이 격화될 위험이 있었다. 일본 내에서는 ‘한국병합’에 대한 민간의 강경 여론이 자극받게 될 것이고, 이것은 일본정부가 조심스럽게 준비하던 ‘병합’ 계획에 차질을 빚을 수 있는 문제였다. 또 열강의 이목이 쏠린 가운데 일본의 한국침략 문제가 국제적으로 주목받게 될 상황이었다. 이렇게 되면 그동안 일본정부가 치밀하게 준비해 온 ‘한국병합’은 한국의 전면적인 반발이나 다른 열강의 개입으로 좌절되거나 일본의 강경 여론에 밀려 일본정부의 의도와는 다른 방향에서 민간 주도의 병합이 추진될 수도 있는 문제였다. 따라서 일본은 안중근에 의한 하얼빈 의거의 파장이 되도록 축소되기를 원했다.            일제는 사건의 파문을 최소화하기 위해 안중근에 대해 불법적인 정치재판을 전개하였다. 사건 직후 한국인 안중근은 러시아 헌병에 체포되어 수사받은 뒤 사건 당일 일본 관헌에 넘겨졌고, 일본의 법정에서 일본법률에 의해 살인범으로 사형을 받아 1910년 3월 26일 순국하였다. 이것은 당시 일제가 한국에 강제하여 체결한 조약마저도 위반하고, ‘사법권 독립’의 조항도 침해한 총체적인 불법재판이었다. 이토 사살은 곧 일제의 ‘한국병합’에 대한 응징 안중근의 이토 사살은 한국침략의 중심인물인 이토를 제거한 것이지만, 단지 이토 개인에 대한 응징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재판에서 관동도독부의 사법부는 안중근에게 무죄 석방의 조건을 내걸고 “개인적으로 이토를 오해하여 저격했다”는 진술을 집요하게 요구했다. 안중근 의거의 파장으로 우려되는 한국 내에서의 반일운동 고양, 국제정세를 모르고 강경해지는 일제의 ‘한국병합’ 여론, 그리고 일제의 한국에 대한 허구적인 문명통치론에 대한 열강의 개입을 불식시키는 최상의 방법이었다. 그러나 일제는 안중근으로부터 원하는 대답을 들을 수 없었다. 안중근은 오히려 “이토에게 개인적인 원한은 없고, 오해하지도 않는다. 개인적으로 살인을 꾀한 범죄인이 아니라 대한국 의병 참모중장으로 하얼빈에 와서 전쟁을 개시, 습격 후 포로로 잡힌 것이다”라고 답변했다. 즉 안중근은 일본 제국주의의 법정에서 이토 개인에 대한 응징을 넘어 제국주의 일본의 한국침략정책에 대한 응징임을 명확히 했다. 그의 총구는 이토 한사람만을 겨눈 것이 아니라, 제국주의 일본의 한국침략정책을 겨눈 것으로, 안중근 의거는 ‘한국병합’을 준비하고 있던 일본정부에 직접적인 타격을 준 투쟁이었다.  ]]> Wed, 31 Aug 2022 10:44:50 +0000 70 <![CDATA[이달의 독립운동가 한인합성협회를 결성하며 미주 한인사회의 독립운동을 이끈 안원규·정원명]]> 글 독립기념관 전시부   alt 한인합성협회, 하와이 한인단체를 최초로 통합하다 1905년 일제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탈한 을사늑약을 전후하여 국내·외 각지에서는 국권회복운동이 전개되었다. 1907년 하와이 한인들은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각 지방에서 조직된 20여 개 단체를 통합하여 호놀롤루에서 한인합성협회(韓人合成協會)를 결성하였다. 하와이 한인단체를 최초로 통합한 한인합성협회는 지회를 설립하고 기관지 『한인합성신보(韓人合成新報)』를 발간하는 등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였다. 1908년 장인환·전명운 의거 후 미주 한인사회 통합운동이 전개된 결과 한인합성협회는 1909년 미국 본토의 공립협회(公立協會)와 국민회를 설립하였다. 1910년에는 대동보국회(大同保國會)의 참여로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로 확대되어 미주 한인사회를 대표하는 단체로 자리매김하였다. alt 하와이 호놀롤루에 위치한 한인합성협회 회관(좌) / 하와이 한인합성협회 장정_도산안창호선생기념사업회 제공 안원규, 미주 한인사회 지도부로 독립운동을 이끌다 안원규는 1878년 경기도 파주에서 태어났다. 1903년 하와이로 이주한 후 잡화점·양복점 등을 운영하며 생활하였다. 1907년 하와이 한인단체 통합을 위하여 한인합성협회를 결성하여 부회장을 지냈고 1909년 국민회 조직에도 앞장섰다. 1910년 대한인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 총회장에 임명되었고 1921년 대한인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가 대한인교민단으로 개편되자 부단장이 되었다. 1928년 대한민족통일촉성회에 참여하며 하와이 한인사회 통합운동을 주도하였다. 1941년 해외한족대회 개최 결과 결성된 미주지역 독립운동 연합단체인 재미한족연합위원회에서는 의사부 위원이 되어 외교 및 선전 활동에도 주력하였다. 한국독립당 하와이 총지부에 참여하며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하였다. 정부는 안원규의 공훈을 기려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alt 『독립금공고서』 (1941)(좌) / 안원규 가족사진(우) 정원명, 미주 한인사회의 단결을 위하여 헌신하다 정원명은 1881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1904년 하와이에 이주한 그는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며 1905년 에와친목회를 조직,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였다. 1907년 하와이 한인단체 통합을 위하여 한인합성협회를 결성하고 1909년 대한인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 총회장을 역임하였다. 1910년 대동공진단 단장,대한인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 대표원·참의장 등을 지냈다. 그는 1925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후원회를 조직하고 기관지 『단산시보(檀山時報)』를 발행하여 한인 동포들의 독립의지를 고취하였다. 1928년 대한민족통일촉성회 집행위원에 선출된 그는 하와이 한인사회 단결을 위해 헌신하였다. 1936년 하와이 대한인국민회 참의원 등을 지냈고 임시정부의 군사활동을 후원하는 찬무회 회원으로도 활동하였다. 정부는 정원명의 공훈을 기려 2014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alt 안창호와 정원명 (1906)(좌) / 대한인국민회 부과금 및 독립금 장부 (1921)(우) alt ]]> Wed, 31 Aug 2022 10:50:37 +0000 70 <![CDATA[독립운동 사적지 국권회복을 위한 하와이 통합단체, 한인합성협회 독립운동 현장]]> 정리 편집실   alt 현 한인합성협회 회관 터 한인합성협회는 1907년 9월 2일 하와이 각지에 있는 24개 한인단체 대표 30여 명이 호놀룰루에서 합동발기대회를 개최하여 만든 통합단체이다. 한인합성협회의 합동결의안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조국의 국권 광복운동을 후원하며 재류동포의 안녕을 보장하며 교육사업을 증진하기 위해 우리들의 힘을 모아서 단결한다. 둘째, 하와이 각 지방에 분립된 단체들을 결합하여 통일기관을 설립하고 그 명칭을 한인합성협회라 하며 호놀룰루에 총회를 설립하고 각 지방에 있던 단체들을 일체 폐지한 후 한인합성협회 지방회를 설립한다. 셋째, 한인합성협회 총회는 시찰위원을 각 지방에 파송하여 아직까지 합동에 참가하지 않은 단체나 개인들에게 합동의 의사를 설명하게 한다. 넷째, 한인합성협회 총회는 기관신문을 발행하되 그 명칭을 한인합성신보라 하며 기왕에 각 단체가 발행하던 회보들을 합성신보에 부합하여 실력을 집중하고 언론일치를 도모함이다. 이 내용을 보면 한인합성협회 설립 목적은 조국의 국권회복과 재류동포의 안녕보장·교육장려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단체는 호놀룰루 릴리하가에 중앙회관을 설치하고, 47개 지방에 지회를 설립하는 등 크게 발전하였다. 또한 1909년 1월 25일 전흥협회까지 통합되면서 하와이 내 명실상부한 통합단체로서의 위상을 갖추었다. 이러한 한인합성협회는 1909년 2월 1일 미주 본토의 공립협회와 통합하여 국민회를 탄생시키면서 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로 계승되었다.  alt 옛 한인합성협회 회관 건물 주소   하와이주 오아후섬 호놀룰루 누우아누 스트리트 1038위치 고증   한인합성협회의 회관 사진이 실린『The Koreans in Hawaii:A Pictorical History, 1903-2002』(Roberta Chang, University of Hawaii, 2003, p.63)에는 회관의 위치가 밀러 스트리트에 세 들어 있었다고 한다. ]]> Wed, 31 Aug 2022 10:53:32 +0000 70 <![CDATA[아름다운 인연 독립운동 재정지원을 도운 김형순과 한덕세 부부]]> 글 김형목(사단법인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이사) 미국인 선교사 존스 목사의 중매로 부부의 연을 맺은 김형순과 한덕세는 미주 이민 후 한인생활을 안정시키고 한인사회를 규합하려는 노력을 적극적으로 펼쳤다. 무엇보다 독립을 위해서는 재정이 뒷받침되어야 한다고 인식한 두 사람은 사업으로 이룬 수익의 상당 부분을 독립운동과 동포사업 등에 아낌없이 지원하였다.   alt 김형순(좌) / 한덕세(우) 김형순, 유창한 영어 실력으로 새로운 삶을 개척하다  김형순(Harry S. Kim)은 1886년 5월 4일 경상남도 통영군에서 태어났다. 김해김씨 삼현파로 아버지는 개화파의 일원으로 정치개혁에 참여하였다. 갑신정변이 ‘삼일천하’로 실패하면서 관련자들이 피살되거나 국외로 망명되자 그의 아버지는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숨어 살다가 통영에서 김형순을 낳았다. 그는 6살 무렵 1891년 이모 이에스더가 살던 인천으로 보내졌다. 철도 들기 전에 자신의 의지와 달리 고향을 떠나야 하는 운명이었다. 그럼에도 비관하거나 한탄하지 않는 의연함을 잃지 않았다.   인천 내리교회에서 미국인 선교사 존스(趙元時, George Heber Jones) 목사에게 세례를 받고 영어와 서양학문을 배웠다. 존스의 도움으로 배재학당의 아펜젤러 목사에게 보내져 장학생으로 공부하였다. 교과목 중 외국 역사와 지리 등은 지적 호기심을 크게 자극했다. 재학 중 협성회와 만민공동회 참여를 통하여 국제적인 감각을 익혔다. 특히 YMCA 총무 이상재와 만남은 신실한 신앙인으로 거듭나는 정신적인 유산이었다.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후 인천세관에서 1년간 근무하면서 국제정세에도 나름대로 안목을 가질 수 있었다. 인천과 서울에서 학교생활과 사회생활은 자연스럽게 자신의 향후 진로와 민족문제에 관심을 돋보였다.  alt 미국인 존스 목사 미주 이주한인의 권익을 옹호하다 20세기에 접어들면서 대한제국은 지배질서 문란으로 많은 모순을 드러내었다. 생존권을 위협받는 민중은 정든 고향을 버리고 중국 동북지역이나 러시아 연해주 등지로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아 떠났다. 1902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공식적인 ‘디아스포라’인 이민이 시작되었다. 김형순은 하와이 이민을 위해 신설된 수민원(綬民院)의 영어 통역관 모집에 합격하였고, 하와이 사탕수수농장 한인노동자들의 통역관 및 인솔책임자로 임명받았다. 그는 우리나라 최초의 이민선을 타고 마우이(Maui)섬 사탕수수농장에 도착하였다. 현지 생활은 음식물이나 관습 등이 고향과는 너무 달라 많은 불편함이 뒤따랐다. 사탕수수농장에서 볼드윈(Baldwin) 지배인 밑에서 약 6년간 통역을 하면서 이주한인 권익을 옹호하는 활동을 펼쳤다. 또한 민족정체성을 일깨우기 위한 국어학교와 한인단체 활동을 지원하였다.          1909년경 통역을 그만두고 귀국길에 올랐다. 귀국 후 존스 목사의 중매로 당시 이화학당 성악과 출신이었던 한덕세와 인연을 맺어 결혼하였다. 미주에서 돌아온 그에 대한 일제의 감시와 탄압은 ‘창살 없는 감옥’이나 마찬가지였다. 그의 바람과 달리 생활조차 힘든 상황에 직면했다. 결국 중국 상하이를 거쳐 1913년 8월 샌프란시스코로 향하였다. 나성고등학교(Los Angeles High School)에 입학하여 고학으로 학교를 마쳤다. 재학 중 노동과 부인의 음악교습으로 약간의 자본을 축적할 수 있었다. 1916년 봄에는 로스앤젤레스에서 북쪽으로 210마일 떨어진 중가주의 과일 농장지대인 리들리에 정착하여 묘목상회를 설립하였다. 털 없는 복숭아 넥타린(Nectarine)을 개발하여 과일 육종전문가인 프레드 앤더슨(Fred Anderson)에게 복숭아 특허품의 묘목전매권을 얻었다. 신종 넥타린 상표는 미국 전역으로 보급되었다. 일시에 엄청난 소득을 올리는 등 한인으로 드물게 ‘백만장자’로 우뚝 섰다. 그의 사업 성공은 한인들의 선망이자 지도자로서 면모를 일신하는 등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더욱이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미군납으로 더 많은 돈을 벌게 되었다. alt  김형제상회 옛 모습(좌) / 리들리 김형순 자택(우) 사업가로서 독립운동 지원에 앞장서다  사업이 확장되면서 김형순은 새로운 동업자인 김호(金乎, 본명 김정진)를 만났다. 이들은 의기투합하여 ‘김형제상회(Kim Brothers Company)’를 설립했다. 지분은 김형순 50%, 그의 부인 한덕세 25%, 김호 25%였다. 이들은 한인생활을 안정시키고 한인사회를 규합하며 독립운동을 활발하게 펼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재정이 뒷받침되어야 한다고 인식했다. 사업으로 번 돈의 상당 부분을 독립운동과 동포사업을 위한 기부에 열성적이었다. 이를 토대로 한인사회를 발전시키는 한편 대한인국민회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마침내 이곳에 미주 본토에서 처음으로 ‘한인타운’이 형성되었다.   국내에서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미주 본토 각지에서는 공동회가 조직되어 적극적인 독립운동 지원사업에 나섰다. 중가주에서도 한인공동회(韓人共同會)가 열렸다. 한인사회에 신망이 높았던 김형순은 김호와 공동대표를 맡았다. 재미한인들 역량을 결집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3개조 결의안 제안하였다. ① 상하이 한교전체대회의 결정에 호응해 임시정부를 후원하며, ② 후원금을 수합해 임시정부로 보내며, ③ 재미한인의 총역량을 집중해 재미한교연합회를 조직한다. 이러한 제의에 미주한인단체는 ‘임시정부로 집중하자’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대한인국민회를 중심으로 미주 한인사회의 지도력을 인정받은 김형순과 김호는 1940년대에도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9개 독립운동단체를 통합한 재미한족연합위원회는 미주지역 민족적인 역량을 결집한 역사적인 성과물이나 마찬가지였다.      광복 이후에도 김형순은 사업을 계속하면서 1950년 1월 2일부터 1960년까지 북미국민회의 중앙집행위원장을 10년간 지냈다. 더불어 경기도 평택군 이북면에 ‘꽃동산애육원’을 설립하여 전쟁고아들을 돌보았다. 가난한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원하는 등 인재양성에도 남다른 관심을 기울였다. 이화여대와 건국대 등에도 꾸준히 장학금을 보냈다. 1957년 5월 중가주 리들리에서 조국과 민족의 장래를 위해 김호·김원용 등 실업가들과 한인재단(Korean Foundation)을 설립하였다. 1977년 1월 25일 91세로 사망하자 장례식은 대한인국민회장으로 치러졌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2011년에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사업가로서 독립운동 지원에 앞장서다 한덕세, 독립운동 자금모집과 재정지원 활동을 펼치다 한덕세(다른 이름 김덕세, Daisy)는 1896년(일설에는 1894년) 12월 28일에 전북 정읍에서 태어났다. 개신교 신자로서 근대교육 수혜로 이화학당에서 성악을 전공한 신여성이었다. 김형순과 부부의 인연을 맺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은 독립운동을 위해 상하이로 떠난 후 1913년 활동무대를 미국으로 옮겼다. 1917년경에야 로스앤젤레스에 안착한 김형순은 한덕세와 가족들을 불려들었다. 리버사이드와 피닉스를 거쳐 중가주 리들리에 정착한 부부는 리들리한인민숙과 리들리한인직업소개소를 설립하였다. 이는 미주에 최초 ‘한인타운’이 형성되는 밑거름이 되었다. 한덕세는 김형순의 사업을 돕고자 가사도우미나 어린이보살핌 등 힘든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음악강습소 운영을 하며 피아노와 성악 레슨은 문전성시를 이루었으며, 상당한 수입원이 되었다. 그의 헌신적인 활동은 김형순의 사업에 재정적 원천이 되었다.         한덕세는 1919년 캘리포니아를 중심으로 대한인국민회와 대한여자애국단 단원과 사무장 등으로 활동하였다. 광복을 맞이할 때까지 기념행사나 한인들 모임이 있을 때마다 축가를 도맡아 부르기도 했다. 1920년에는 이화학당 은사인 김호를 만났는데, 이 인연은 훗날 김형제상회라는 사업을 성공시켜 한인들에게 대단한 관심과 주목을 받았다. 이들의 인연은 1968년 김호가 사망할 때까지 이어졌다. 그는 은사 부인이 미국으로 올 때까지 선생을 보살피는 따듯한 인간애를 발휘하였다. 또한 미주이민사에서 여성들의 역할에 주목하면서 한덕세는  ‘리들리 독립운동그룹 5인’이나 ‘리들리 5김’ 중 한 사람으로 기록되기도 하였다. 한덕세는 1977년 5월 5일 사망하여 같은 해 1월 먼저 별세한 남편 김형순이 묻힌 리들리 공동묘지에 합장되었다. 정부는 그의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하여 2014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한편 ‘김형제상회’ 가옥에서 시작된 리들리한인교회는 한인사회 생활공동체의 구심점이었다. 2003년 미주이민 100주년부터 이 교회에서 중가주 한인역사연구회·한미재단·애국선열유족회 등의 연합으로 매년 애국선열추모대회를 개최한다. 교회 바로 앞 공터는 김형순이 갈 곳 없는 노인과 노동자·한인 유학생들의 숙식을 해결해주기 위해 건립했던 한인노동자 기숙사와 양로원이 자리하고 있다. 2010년 11월 13일 한국의 독립문 원형을 4분의 1로 축소한 독립문과 광장에 애국지사 10인(이승만·안창호·윤병구·이재수·김종림·김호·한시대·김형순·송철·김용중)의 기념비를 세웠다. ]]> Wed, 31 Aug 2022 11:01:05 +0000 70 <![CDATA[끝나지 않은 독립운동 일본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 무엇이 문제인가]]> 글 이계형(국민대학교 교양대학 교수)  8월 15일, 한국·중국·일본 등은 제각기 이날을 기념한다. 지금으로부터 77년 전 1945년 8월 15일을 달리 기억하기 때문이다. 한국은 일제의 식민지에서 해방되었다고 하여 ‘광복절’이라 하고, 일본과 전쟁 중이었던 중국은 ‘승전일’이라고 하는데, 정작 이러한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일본은 패전국임에도 불구하고 ‘종전일’이라 한다. 그런데 이날 유독 뉴스에서 일본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 문제가 보도되는데, 그 이유와 무엇이 문제인지 짚어보고자 한다. 기시다 총리는 공물, 각료는 참배지난 2022년 8월 15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야스쿠니 신사에 공물(供物)의 일종인 다마구시(玉ぐし, 비쭈기나무 가지에 베 또는 흰 종이 오리를 단 것) 대금을 봉납했다. 그는 총리가 아닌 ‘자유민주당 총재’ 명의로, 이를 사비로 부담했다. 이와 달리 각료 중 일부는 직접 신사를 방문해 참배했다. 이러한 행태는 2012년 12월 이후 계속되고 있는데, 한국과 중국의 비난을 피하려는 꼼수에 불과하다. 일본 총리가 야스쿠니 신사에 대금을 봉납하는 간접적인 참배가 직접 참배와 다를 게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일본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경계해야 하는가? 도쿄 중심가에 있는 야스쿠니 신사는 일본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신사(神社)란 일본 왕실의 조상이나 신대(神代)의 신 또는 국가에 큰 공로가 있는 사람을 ‘신’으로 모신 사당을 말한다. 처음에는 메이지유신 직후인 1869년 막부군과의 싸움에서 죽은 자들의 영혼을 ‘일본의 신’으로 추앙하고자 세운 ‘쇼콘샤(招魂社)’였다. 그 뒤 1879년 ‘평화로운 나라(靖國)’라는 지금의 이름으로 바뀌었고, 청일전쟁·러일전쟁·만주사변 당시 죽은 일본군 위패를 그곳에 봉안하였다.      이후 일본이 군국주의의 길로 나간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전사자들의 영령을 위해 제사하고 일본 왕이 참배하면서 특별한 공간으로 변모하였다. 이로써 야스쿠니 신사는 일본인들에게 일본 왕 숭배와 군국주의를 고무·침투시키는 절대적인 공간이 되었다. 이에 ‘일본 왕을 위해 죽는다면 신이 되어 국민의 예배를 받을 수 있다’는 인식을 심어주었고, 일본의 젊은이들이 ‘야스쿠니에서 만나자’라는 약속을 하고 전쟁터로 나갈 정도였다.  야스쿠니 신사는 곧 일본 군국주의의 상징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 패전 후에 이를 경계한 연합군총사령부의 명령에 야스쿠니 신사는 종교시설로 전락하였다. 심지어는 1946년 11월 3일 공포한 일본 헌법 제20조(정교의 분리)에 ‘국가나 그 기관은 어떤 종교적 활동도 하면 안 된다.’, 제89조에 ‘종교단체에 대한 공금지출 금지’라고 명문화하였다. 그런데도 그곳에 합사한 숫자는 이전보다 훨씬 늘어나 군인·민간인 등 246만 6천여 명이나 되었고, 히로히토 일왕은 패전 이후에도 그곳을 찾아 참배했다. 그러다가 자민당은 1960년대 말부터 야스쿠니 신사를 관립으로 복귀시키고 총리와 각료의 참배를 공식화하는 법률을 제정하고자 하였으나, 헌법 위배 논란에 좌절되었다. 이후 1975년 패전일에 미키 총리를 시작으로, 1978년 후쿠다 총리 역시 ‘사적인 참배’를 전제로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하고는 공물료 역시 사비로 냈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 역시 총리가 신사 참배하는 것은 헌법의 정교분리 원칙에 어긋난다는 논쟁을 피하려는 궁여지책에서 나온 것이지만, 이때에도 헌법 위반 논란이 크게 일었다. 이때부터 일본의 우경화가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1979년 4월 도조 히데키(東條英機)를 비롯한 A급 전범 14명이 합사되었다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 이때 오히라 총리가 참배했다는 게 더 큰 문제였다. 이러한 행위는 이들을 전범으로 규정한 극동군사재판 판결을 부인하고 침략 책임을 부정하는 것이었기에 한국과 중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로부터 맹비난을 받았다. A급 전범이란, 극동군사재판부가 1948년 11월 ‘평화에 대한 죄(crimes against peace)’로 판결한 25명을 말한다. 실제로 전쟁을 기획하고 주도한 인물들이었다. 그 가운데 사형을 당한 7명과 옥중에서 사망한 7명을 ‘쇼와 시대의 순난자’라고 하여 이들 14명을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했다. 야스쿠니 신사가 ‘일본 군국주의의 상징’으로 불리는 이유다. 하지만 히로히토 일왕은 전범의 합사를 반대하며 야스쿠니 신사를 찾지 않았고 이는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위법성을 부인하고 되풀이된 참배일본의 우익 정치인들은 한국·중국 등 주변국의 비판과 우려에도 불구하고 매년 봄·가을 제사와 태평양전쟁 패전일에 맞춰 이곳을 집단으로 참배한다. 패전일에는 일반인 추모객들이 더욱 몰려드는데, 특히 일본 극우세력들은 욱일기를 들고나와 군국주의 시절을 찬양하며 행진하기도 한다. 패전 40주년이었던 1985년 나카소네 총리가 최초로 야스쿠니 신사에 공식 참배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일본 정부는 이는 헌법에 금지된 정부의 종교활동에 해당하지 않는다며 억지를 부렸다. 이후 중국의 첫 거센 비난에 총리들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는 중단되었고, A급 전범 14명을 신사에서 제외하자는 여론도 일었지만 신사 측의 반대로 무산됐다.  이때 오사카와 교토 시민 6명이 ‘나카소네의 공식 참배가 헌법의 정교분리 규정에 어긋난다’며 국가와 나카소네를 상대로 600만 엔의 국가배상청구소송을 냈다. 오사카 지법과 고법이 각기 1989년과 1992년에 모두 원고의 청구를 기각했으나, 고법은 판결문에서 ‘공비에서 3만 엔을 지출한 이 공식 참배는 헌법 20조·89조에 위반한 혐의가 짙다’라고 적시해 시선을 끌었다. 반면 센다이 고법은 1991년 야스쿠니 소송에서 공식 참배가 헌법의 정교분리 원칙에 저촉된다는 판결을 내려 위법성을 명확히 했다. 그런데도 11년 만인 1996년 7월 히시모토 총리가 전격적으로 야스쿠니 신사를 찾아 파문을 일으켰다. 한국과 중국 등의 반발과 비난이 거세게 일 것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말이다. 이후 몇 년간 잠잠하더니 2001년 8월 13일, 패전일 이틀 전에 고이즈미 총리가 다시금 신사에 참배하였다. 이는 주변국의 ‘직접적 비난’을 피하려는 속임수에 불과했다. 당시에도 남북한과 주변국의 비난은 거셌고 자민당의 지지기반인 우익들도 그리 반기지 않았다. 그런데 고이즈미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재임 기간 내내 패전일을 피해 참배하였고, 2006년 8월에는 당일에 참배하기까지 했다. 이로써 한일·중일 관계 모두 급속도로 냉각되었고, 헌법 20조 위반 판결이 나왔지만, ‘사적인 것’이라며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주변국의 반대·자국 내 반발 여론·히로히토 일왕의 반대에도 굴하지 않았다. 세계 평화를 위해 참배 중단해야고이즈미에 이어 총리가 된 아베는 1차 집권 당시(2006.9~2007.9)에는 참배를 자제했다. 그러다 제2차 집권 이후부터 태도가 달라졌다. 일본 부총리와 각료들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와 한국의 일본 수산물 금지 조치 및 일본의 WTO 제소 등으로 한일 간에 관계가 극도로 악화한 가운데, 2013년 12월 아베 총리가 7년 만에 다시 야스쿠니 신사를 찾아 참배하였다. 그러고선 그는 지난 총리 재직 당시 신사 참배를 하지 않은 것에 ‘통한’이라고 하거나, ‘신사는 미국 국민이 전사자를 추모하는 알링턴 국립묘지와 같다’라는 망언도 서슴지 않아 국제적인 비웃음을 샀다. 뿔난 국내 여론에 기름을 끼얹는 격이었다. 이에 한국·중국 등은 물론 미국으로부터도 비판을 받자 그 뒤론 주요 행사 때 공물을 보내는 것으로 참배를 대신했다. 이는 현재까지도 이어져 오고 있다. 지금껏 한국 정부는 일본 총리가 직접 참배하거나 공물을 보낼 때와 각료들이 참배할 때 깊은 실망과 유감을 표하곤 했다. 그런데 2022년 8월 광복절 77주년을 맞아 대통령실은 일본 각료들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2차 세계대전 패전을 한 일본 입장에서 ‘멈출 수 없는 관습’이라고 말해 논란을 일으켰다. 그러한 안일한 이해는 한일관계에 전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일본 정부나 우익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는 한일관계를 뛰어넘는 문제이기에 그렇다. 이는 ‘군국주의 망령을 부르는 범죄’이기에 세계 평화를 위해서 극히 경계해야 할 것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 Wed, 31 Aug 2022 11:04:48 +0000 70 <![CDATA[독립의 발자취 왜곡된 기록, 감춰진 진실… 그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이름을 추적하다]]> 글 편집실 올해 세계 일본군 ‘위안부’ 기림의 날이 제정된 지 10회차가 되었다. 뜻깊은 시기에 이를 기릴만한 영화 한 편이 최근 개봉하였다. ‘위안부’ 역사를 지우려는 세력에 맞서 진실의 조각을 맞춰가는 르포무비 〈코코순이〉다. 연출을 맡은 이석재 감독은 말한다. ‘위안부’ 역사 왜곡이 어떻게 발생했고, 일본 극우세력 등이 이를 어떻게 악용했는지 감춰진 진실을 파헤치겠노라고. alt 영화〈코코순이〉포스터 Q. 영화 〈코코순이〉를 소개해주세요.  1942년 5월, 조선군사령부의 제안으로 일명 파파상·마마상 부부가 취업을 빌미로 조선인 여성 20명을 부산·대만·싱가포르를 거쳐 미얀마 미치나에 자리한 ‘위안부’ 수용소로 보냈습니다. 1944년 8월, 연합군에 붙잡힌 20명의 조선인 ‘위안부’는 통역도 없이 일어와 영어로 심문받은 후 인도 각지로 흩어졌습니다. 미얀마 미치나 지역에서 포로가 된 조선인 ‘위안부’의 심문 내용을 정리한 미 전시정보국 49번 심문보고서(Office of War Information, 이하 OWI) 부록에는 ‘조선인 ‘위안부’는 돈벌이에 나선 매춘부’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이에 관하여 당시 연합군 포로심문관이었던 아쿠네 겐지로와 인터뷰를 진행하여 OWI 49번 심문보고서가 얼마나 노골적인 편견과 거짓으로 가득한지 밝혀냈습니다. 더불어 20명의 조선인 ‘위안부’ 중 유일하게 기록되어있는 단 하나의 이름, ‘코코순이’의 자취를 더듬어나갔습니다. 이처럼 영화는 OWI 49번 심문보고서가 과거부터 현재까지 왜곡된 역사를 전파하는 데 어떻게 사용되어왔는지, 그리고 왜 ‘코코순이’를 기억해야 하는지 전달하고 있습니다. alt 이석재 감독 Q. OWI 49번 심문보고서에 대해 자세히 설명 바랍니다.  OWI 49번 심문보고서는 연합군 번역통역부(ATIS)의 제120호 조사보고서와 함께 연합군 기록에 있어 가장 중요한 자료 중 하나입니다. OWI 심리전팀이 생산한 이 비밀문서는 미얀마 미치나 지역에서 포로가 된 조선인 ‘위안부’의 심문 내용을 정리한 것으로, 20명이나 되는 ‘위안부’가 한 번에 포로가 되어 심문보고서까지 남긴 경우로는 유일한 사례입니다. 이 보고서에는 조선인 ‘위안부’는 매춘부라는 등의 거짓 내용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현재 일본 정부가 책임을 거부하는 근거로 사용하고 있으며,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매춘부로 매도하는 일본 극우단체와 관련인들의 근거가 되고 있습니다. 이 보고서의 작성자를 살펴보면 문서의 신빙성을 검토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미국 정부기관의 책임하에 작성되었지만, 이 보고서를 만든 알렉스 요리치는 일본계 미국인이었습니다. 게다가 요리치는 20명의 조선인 여성이 매춘부가 아닌 ‘위안부’였다는 증거를 보고서 곳곳에 흘렸습니다. 그는 조선인 여성들이 ‘부상병들을 치료하고 돈을 많이 벌게 해준다’는 말에 속아 미얀마로 오게 됐노라고 서술했습니다. 이는 오늘날 ‘위안부’ 문제의 쟁점 중 하나인 ‘자발적 참여 여부’에 관해 요리치가 적절한 증언을 해준 것입니다.  Q. 이 밖에도 보고서의 신빙성을 흔드는 근거가 있나요?  요리치는 ‘위안부’가 일본군의 통제를 받은 사실도 노출했는데요. 일본군이 가는 곳마다 ‘위안부’가 있었으며 일본군의 규정이 이들에게도 적용됐다고 설명했습니다. 일본 정부가 극구 부인했던 ‘일본군의 관여’ 사실을 은연중에 실토한 셈이죠. 이에 따라 이 보고서는 ‘위안부’ 피해를 부정하는 쪽이 아니라 긍정하는 쪽으로 얼마든지 활용할 수 있는 자료이며, 일본 극우세력의 주장을 배척하는 데도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또한 보고서 내용 중 사기·기망에 의한 강제연행과 일본군 개입의 실상은 일본의 국가범죄를 입증하는 데도 유용합니다.  Q. ‘코코순이’의 행적을 따라가는 과정 또한 쉽지 않았을 텐데요. 1942년 5월, 일본군의 강제동원으로 미얀마 미치나로 끌려간 조선인 ’위안부’ 20명은 1944년 8월, 연합군에 체포되어 조사받았지만 이후 행적은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그 행적을 찾기 위해 우선 기록으로만 존재했던 미치나 위안소 현장을 확인하였습니다. 이후 20명의 귀국 경로를 확인하기 위해 미치나와 인도 등을 여러 차례 방문해 현장 답사하였고, 여러 증언을 확보하여 귀국 행적 파악에 들어갔습니다. 영국 국립문서보관소와 스위스 국제적십자위원회 등을 찾아 미공개 자료를 발굴하여 이름과 출신 지역을 바탕으로 실제 강제동원되었을 한 명의 존재, ‘코코순이’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alt 영화 속 장면들 Q. ‘위안부’ 문제에 주목하는 이유가 있나요?  역사와 기억에서 지워진 수많은 ‘코코순이’들의 존재를 상기시키고, 먼 이국땅에서 고통을 겪어야 했던 그들의 운명을 조명하고 싶었습니다. 전쟁이 끝나면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 마땅한데, 돌아오지 못한 분들이 계신다는 이야기를 듣고 외면할 수 없었지요. 일본군에 의해 강제동원된 조선인 ’위안부’는 약 20만 명으로 추산하지만, 우리나라 정부에 등록된 ‘위안부’는 240명뿐이고 현재 생존자는 11명에 불과합니다. 지금이라도 기억하지 않으면 영원히 사라질지도 모릅니다. 이것이 제가 다시 한번 여전히 해결되지 못한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꺼내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Q. 최근 독일 베를린에서 특별상영회를 가졌는데….  지난 8월 4일, 독일 베를린 특별상영회가 소니센터 아세날 극장에서 열렸습니다. 유럽에서 최초로 소녀상을 세운 나라이자 최근 평화의 소녀상 이슈로 국제적인 관심을 집중시킨 독일에서 열렸기에 그 의미가 남달랐는데요. 이날 상영회에는 베를린에 사는 한국인과 유학생을 비롯해 일본군 ’위안부’ 및 한일문제에 관심있는 관객과 취재진 등 약 60여 명이 참석했습니다. 상영 후에 간담회를 가졌는데, 1992년부터 독일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 활동을 해온 여성은 “이전의 다른 영화들과 달리, 감정적인 접근이 아닌 논리적이고 실증적인 문제 제기가 젊은 세대와 독일 사회에 ‘위안부’ 문제를 알리는데 더욱 효과적일 것”이라며 호응했습니다. 또 역사학자라고 밝힌 독일인 남성은 “OWI 49번 심문보고서가 제대로 된 통역도 없이 허술하게 작성된 것임을 드러내는 이름인 ‘코코순이’를 영화의 제목으로 한 것이 인상적이었다”고 소감을 전하기도 했습니다. alt 독일 베를린 특별상영회 Q. 가수 이효리의 참여도 눈길을 사로잡는데요.  영화 엔딩에 가수 이효리가 작사·작곡·노래한 〈날 잊지 말아요〉가 삽입되었는데요. 이 노래는 2013년 일본군 ’위안부’ 피해 여성을 위한 프로젝트 앨범에 수록된 곡으로, 이효리의 따뜻한 목소리와 시적인 가사가 긴 여운을 선사합니다. 또한 영화 〈겨울왕국〉의 ‘안나’와 드라마 〈유미의 세포들〉의 ‘감성세포’를 비롯해 다양한 작품에 참여한 박지윤 성우가 내레이션으로 합류해 신뢰를 더했습니다. 이 밖에도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와 〈스카이캐슬〉 등의 OST에 참여한 박정은 음악감독 등이 참여하여 영화의 완성도를 높였습니다. Q. 관객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다면?  거짓에 속아 ‘위안부’로 강제동원되어 이역만리 먼 타국 땅에서 고통을 겪고 끝내는 고향에 돌아오지 못한 수많은 ‘코코순이’들의 눈물과 회환은 여전히 치유되지 못한 채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이것은 과거만의 아픔이 아니라 현재의 아픔인 것이지요. 어떤 기록이라도 남겨놓아야 이분들의 아픔이 우리에게서 잊히지 않는다는 마음으로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올해는 미 하원의 ‘일본군 ‘위안부’ 사죄 결의안(HR121)’ 통과 15주년과 ‘세계 일본군 ‘위안부’ 기림일’ 공식 제정 10회차가 되는 해입니다. 뜻깊은 시기에 개봉하는 만큼 많은 분이 영화 〈코코순이〉 의미를 되새겨보셨으면 합니다. ]]> Wed, 31 Aug 2022 11:11:24 +0000 70 <![CDATA[세계 산책 우크라이나 민족의 역사관을 확립한 미하일로 흐루셰우스키]]> 글 홍석우(한국외대 우크라이나어과 교수)   2022년 2월 24일에 시작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전쟁은 서로 양립할 수 없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역사기술의 충돌이다. 러시아의 역사 서술에 따르면, 러시아인과 우크라이나인은 단일 민족이며 우크라이나의 영토는 근본적으로 러시아 땅이다. 이러한 서사에 근거하여 푸틴은 우크라이나의 주권적 실체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고 있다. 그는 우크라이나의 정체성과 주권을 부정하면서 일명 ‘특수군사작전’을 펼치며 우크라이나 영토를 러시아에 통합하려 하고 있다. 반면 우크라이나인들은 독자적·민족주의적 역사기술에 입각해 러시아의 주장을 전면 부정하고 있는데, 과연 우크라이나인들의 주장의 근거는 무엇인가? 여기서 우크라이나 역사기술의 틀과 내용을 완성한 미하일로 흐루셰우시키(Mykhailo Khrushevsky, 1866-1934)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그의 사상과 역할을 통해 우리는 20세기 초 발생한 우크라이나의 독립과 현재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alt 미하일로 흐루셰우스키 미하일로 흐루셰우스키, 그는 누구인가 미하일로 흐루셰우스키에게는 많은 호칭이 따라 붙는다.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와 역사학의 아버지·위대한 역사가이자 독립운동가 등으로 불린다. 또한 20세기 초 우크라이나의 독립을 이끈 중앙라다(의회)의 초대 의장이며 우크라이나 민족공화국(Ukrainian National Republic, 1917-20)을 세우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위대한 지도자였다.    그는 역사가로서 방대한 자료에 근거하여 우크라이나인들이 기나긴 역사 속에서 독자적 정체성을 발전시켜왔으며, 특정한 영토범위 내에서 민족을 건설해 왔음을 증명하려 했다. 이러한 역사기술 작업을 통해 그는 당시 주류 역사관으로 받아들여졌던 러시아제국의 공식적 민족담론에 대담한 도전장을 제시했다. 흐루셰우스키는 모스크바공국과 러시아국가의 기원을 키이우 루스에 두는 전통적인 러시아적 역사관에 반대하며, 키이우 국가와 이 국가의 법제 및 문화는 우크라이나-루스 민족의 창조물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과거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인들이 거주하던 영역 및 공간의 차이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삶의 방식·가치관·정치적 지향성의 차이를 발생시켰고, 결국 두 민족의 정체성 차이를 발생시켰다고 보았다. 우크라이나인의 독특한 정체성과 목적론적 사고 흐루셰우스키는 우크라이나인들의 독특한 정체성을 구성하는 ‘우크라이나적 요소’로 키이우  루스로부터 이어지는 역사의 연속성 이외에 우크라이나어와 정교·코자크를 강조했다. 우크라이나 역사와 러시아 역사의 전개를 별개의 것으로 보았을 뿐만 아니라 우크라이나어가 러시아어의 방언이 아닌 독자적 언어라는 주장을 펼쳤다. 언어는 민족의 혼과 정신을 전달하는 매체로 두 민족의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요소이기도 하다. 이와 더불어 정교(회)는 민족정신의 근간을 이루는 요소로 리투아니아·폴란드·러시아 등 외세에 의해 지배되는 상황에서 우크라이나인들에게 정신적 위안과 민족적 소속감을 가져다주는 존재였다. 흐루셰우스키는 키이우 루스 시기 도입된 정교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정교회는 우크라이나 민족성의 유일한 대표자였고, 민족적 깃발이었으며 동시에 민족문화의 가장 견고한 지주였다. (중략) 정교회가 붕괴하면 민족의 삶 전체가 최종적으로 무너진다.” 이처럼 흐루셰우스는 우크라이나인들을 키이우 루스의 정당한 계승자로 설명한 것이다.         그가 강조한 또 다른 우크라이나 정체성의 구성 요소는 바로 우크라이나의 전사그룹 코자크*이다. 코자크는 키이우 루스의 멸망과 함께 우크라이나의 통치귀족층·엘리트그룹이 사라진 우크라이나 사회에서 타민족의 공격으로부터 자신의 농민 가족공동체를 보호하기 위해 형성된 군사공동체이다. 흐루셰우스는 코자크를 우크라이나 민족성의 근간으로 우크라이나의 통일과 독립을 이끌 주역으로 여겼다. 흐루셰우스키의 코자크에 대한 집착과 강조를 혹자는 19~20세기 널리 펴져있던 인민주의의 영향으로 보는 경향도 있으나, 코자크가 구성한 사회의 수평적 구조와 민주주의적 성격이 당시 러시아 사회의 중앙집권적·전제적 성격과 대비되는 것을 볼 때 왜 흐루셰우스키가 코자크에 주목했는지 이해할 수 있다. 즉, 그는 코자크를 통해 미래 우크라이나인들이 지향할 평등하고 민주적인 국가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흐루셰우스키에게 있어 자유·평등·민주주의가 통용되는 사회와 민족국가의 건설은 바로 우크라이나인들에게 부여된 역사적 숙명이며 목적으로 이해되었던 것이다.  *코자크 키이우 루스의 멸망과 함께 우크라이나의 통치귀족층·엘리트그룹이 사라진 우크라이나 사회에서 타민족의 공격으로부터 자신의 농민 가족공동체를 보호하기 위해 형성된 군사공동체 우크라이나의 독립과 그 의미 1917년 두 번의 러시아혁명으로 제정러시아가 붕괴되면서 우크라이나의 독립은 현실로 다가왔고 미하일로 흐루셰우스키는 우크라이나 중앙라다의 초대 의장으로서 정치선언문을 발표해 우크라이나 독립의 정당성과 당위성을 천명했다. 그가 제4차 유니버설(1918.1.22)을 통해 선포한 독립선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크라이나인) 여러분의 힘과 의지로 우크라이나 땅에 자유로운 민족공화국이 탄생했습니다. 고생하는 대중들의 자유와 권리를 옹호하고자 했던 조상들의 오랜 꿈이 실현됐습니다. (중략) 지금부터 우크라이나 민족공화국은 누구에게도 종속되지 않는 독립적이고 자유로우며 주권을 가진 우크라이나 국민의 국가입니다. 우리는 러시아·폴란드·오스트리아·루마니아·터키 등 모든 이웃 국가들과 평화롭고 우호적인 삶을 살고자 합니다. 그러나 그들 중 누구도 독립한 우크라이나 공화국의 삶을 방해할 권리가 없습니다. 권력은 우크라이나 국민들에게만 속할 것(입니다).”   비록 계속되는 백군·적(볼셰비키)군과의 전쟁 그리고 폴란드를 비롯한 주변 국가들의 압력으로 어렵게 탄생한 우크라이나 민족공화국은 단명하였지만, 자유와 평등이 보장되는 민주주의와 독립에 대한 정치사상적 전통과 열망은 사라지지 않고 70년간의 소비에트 시기에도 지속되었다. 결국 1991년 소비에트 사회주의체제의 붕괴와 우크라이나의 독립은 우연적이며 새롭게 발생한 것이 아니라, 흐루셰우스키가 주장한 바와 같이 오랜 세월 우크라이나인들이 추구해온 자유 민주주의에 대한 정치적 열망과 목표가 완수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2004년 오렌지혁명·2014년 마이단 저항과 존엄성혁명·2014년부터 이어온 우크라이나동부전쟁 그리고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전쟁에서 일관되게 우크라이나인들이 요구하는 것은 러시아로부터의 독립·주권보장·자유민주주의의 실현이다. 이는 바로 흐루셰우스키가 우크라이나 역사기술 작업을 통해 주장해 온 우크라이나인들의 역사적 사명과 목표와도 일치한다. ]]> Wed, 31 Aug 2022 11:20:28 +0000 70 <![CDATA[기념관은 지금 다 함께 누리는 광복의 기쁨 독립기념관 현장 속으로]]> 정리 편집실    사진 이소연 지난 8월 15일, 제77주년 광복절을 맞아 전국에서 2만 명이 넘는 관람객들이 독립기념관을 찾았다.이번 광복절 행사는 순국선열의 나라사랑 정신과 광복의 기쁨을 다채로운 문화행사에 빗대어 기려 관람객들의 호응을 끌어냈다. 뜨거웠던 햇살보다 더 열정적이었던 현장 속으로 지금 들어가 본다. alt 사전 신청한 100가족과 함께 광복절 의미를 되새기다 경축식에는 한시준 독립기념관장, 문진석·이정문 국회의원, 독립운동가 윌리엄 린튼의 후손 인요한 연세대 교수, 독립유공자 후손 등과 함께 온라인 사전 신청을 통해 모집한 100가족이 참여해 자리를 빛내주었다. 한시준 관장은 “우리 민족에게 광복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 역사에서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가 광복으로 되살아났기 때문이다. 이러한 광복의 기쁨을 독립기념관과 함께 되새기길 바란다”고 밝혔다. 경축식에 참가한 이들은 기립하여 ‘대한독립만세’를 크게 외치며 광복의 기쁨을 다시 되새겼다. 다채로운 공연으로 눈과 귀를 사로잡다 경축식에 이어 사물놀이를 시작으로 마술공연(최현우)·태권도 퍼포먼스(K-타이거즈)·난타 공연 등이 이어져 관람객의 환호를 끌어냈다. 특히 뮤지컬 갈라쇼는 광복을 위해 희생한 독립운동가들을 기억하는 시간을 제공하였다. <애국가>를 열창하여 감동을 선사한 박정현은 “소중한 광복절 행사에 참여하게 되어 영광이다”라고 소감을 밝혔다. 관람객들은 “희로애락이 담긴 공연에 한시라도 눈을 뗄 수 없었다”라며, “순국선열들의 희생으로 현재 광복의 기쁨을 누릴 수 있어 감사하다”고 전했다. alt 유익한 강좌와 특별해설로 독립운동사를 전하다 우리나라 독립운동사를 돌아보는 강좌와 특별해설도 마련되었다. <독립기념관장과 함께 듣는 광복군의 노래>에서는 한시준 관장의 인사말과 함께 반혜성(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연구교수)가 ‘독립운동사 속 항일노래’를 주제로 일제강점기 민족의 저력을 확인하는 시간을 선사하였다. 또한 <태극기가 들려주는 독립운동 이야기>, <독립과 가배>의 특별해설도 진행되었다. 이 밖에도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들이 광복 후 귀국 시 탔던 탑승 체험등도 가족 관람객들에게 인기 만점이었다. 온 가족 모두 독립운동을 체험하다 광복군 사격 체험·광복군 의상 체험·태극기 열쇠고리 만들기 등 관람객들이 직접 체험해보는 각종 부대행사도 인기를 끌었다. 특히 광복군 사격 체험은 당시 모델을 재현한 모조총을 실제로 만져 볼 수 있어 전 연령에 호응을 얻었다. 또한 광복군 의상 체 험도 많은 이의 관심을 끌었는데, 관람객들은 고증을 통해 제작 한 광복군복을 직접 입어보고 사진을 남겼다. 태극기 만들기 체험을 한 어린이는 “처음으로 직접 태극기를 그려봤다”며, “내가 만든 태극기를 가질 수 있어서 기쁘다”고 소감을 전했다. alt 관람객 인터뷰 무더운 더위 속에도 미소를 잃지 않으며 가족과 연인과 함께 광복의 기쁨을 나누던 관람객들을 만나본다. alt 김대연 (23세·서울) “군 복무 중 휴가를 나왔는데 때마침 독립기념관에서 제77주년 광복절 행사를 한다는 소식에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내려 참여했습니다. 어릴 적 부모님의 손을 잡고 독립기념관을 방문했던 기억이 있는데요. 그때는 사실 광복의 의미를 깊숙이 이해하지 못했어요. 나라를 지키는 군인이 되어 독립기념관을 다시 방문해보니 순국선열의 나라사랑 정신을 되새기게 되었습니다. 또한  이번 광복절을 계기로 독립운동사에 대해 더욱 관심을 갖겠노라 다짐했습니다.” alt 한승원 (30세·서울), 엘로디(28세·프랑스) “최근 한국에 방문한 프랑스인 여자친구와 함께 제77주년 광복절 행사를 찾았습니다. 아직은 우리나라 역사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여자친구에게 광복절을 소개할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어요. 입구부터 보이는 웅장한 겨레의탑을 보며 우리나라의 투철한 민족정신에 관해 이야기 나눴고, 특히 광복군 의상체험은 여자친구와 군복을 나란히 입고 기념사진을 남길 수 있어 좋았습니다. 앞으로 독립기념관이 외국인들이 필수로 찾는 한국을 대표하는 랜드마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alt 강성아 가족 (39세·천안) “천안에 거주하는데 가까운 곳에 독립기념관이 있어 좋아요. 양질의 전시와 교육프로그램은 물론이고, 아이들이 놀기 좋은 야외 공간이 잘 마련되어 있어 평소 가족들과 자주 방문합니다. 광복절을 맞아 경축식에 참가할 가족을 사전 모집한다는 소식을 듣고 서둘러 신청했는데요. 아이들에게 광복절에 대해 쉽게 설명해줄 기회를 선사한 것 같아 보람됩니다. 또한 온 가족이 즐길 수 있는 공연 등이 마련되어 있어 즐겁게 관람하였습니다. alt 황병대 가족 (47세·서울) “여름휴가 기간에 맞춰 가족과 함께 제77주년 광복절 행사에 참여했습니다. 평소 아이가 우리나라 역사에 관한 동영상을 많이 찾아보는데, 이번 기회에 우리 문화와 역사를 재미있게 접하고 또 스스로 배워가는 모습을 보며 흐뭇했습니다. 특히 경축식에서 진행된 순국선열을 위한 묵념과 애국가 제창은 아이에게 애국심을 갖게하는 기회를 선사했습니다. 이번 광복절 행사 참여로 여름휴가를 보람차게 보낼 수 있었습니다. ]]> Wed, 31 Aug 2022 11:28:41 +0000 70 <![CDATA[독자참여 이번 호 「독립기념관」을 읽고 빈칸을 채워주세요. 꼼꼼히 읽다 보면 정답에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alt alt 아이콘을 클릭하면 퀴즈 정답을 보낼 수 있습니다. ]]> Wed, 31 Aug 2022 11:32:34 +0000 70 <![CDATA[들어가며 나라를 구하는데 남녀가 따로 있나]]> alt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성립 전례식 기념사진 (1940.9.17.) 1940년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성립 전례식 기념사진 속에는 군복을 입은 4명의 여성이 있다.  바로 오광심·조순옥·김정숙·지복영이다. 이들은 한국광복군 소속으로 남성들과 동일하게 군사훈련을 받았고,  목숨 건 독립전쟁을 펼쳤다. 하지만 이들의 활약에 대해서는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온몸을 던져 항일투쟁에 임했지만,  광복군 중 여성이 포함되었다는 사실조차 생소할 따름이다. 누구의 딸, 누구의 아내가 아닌 광복군으로서 빼앗긴 조국을 되찾기 위해  당당히 헌신한 이들의 삶을 재조명해야 한다. ]]> Fri, 30 Sep 2022 15:05:26 +0000 71 <![CDATA[톺아보기 독립전쟁에 뛰어든 여성 독립군]]> 글 김정인(춘천교육대학교 사회과교육과 교수) 오늘날 여성 독립운동가에 대한 관심이 점차 늘어나고는 있지만, 항일 전선에 직접 나서서 싸웠던 여성들의 활동은 아직 발굴조차 되지 못한 것들이 많다. 전시 현장 한가운데에서 목숨을 던지며 투쟁했던 여성 독립군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그동안 우리가 몰랐던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면면을 확인해본다. alt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성립 전례식에서 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오광심, 조순옥, 지복영, 김정숙(1940.9.17.) 독립군으로서의 여성이라는 주체 1910년 대한제국이 망하고 일본의 식민지가 되어 조선총독부가 들어섬과 동시에 사실상 독립을 목표로 한 무장투쟁, 즉 독립전쟁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독립전쟁의 공간은 한반도에 국한되지 않고 확장되었다. 1910년 당시에는 의병이 무장투쟁을 이끌었으나, 일본 제국주의의 패망이 가까이 올 무렵에는 한국광복군·조선의용군·동북항일연군 등 체계적인 군사조직을 갖춘 무장세력들이 국외에서 독립전쟁을 벌였다. 독립전쟁이라는 차원에서 보면 국내 곳곳에서 산재해 싸운 의병에 이어 국외에 독립운동 기지를 마련하고 독립군을 양성하며 국내진공작전을 펼친 만주의 독립군 부대, 그리고 중국의 국민당 정부와 공산당 정부와 연대해 독자적인 군사 조직을 꾸리기까지 진화를 거듭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바로 그 독립전쟁의 주역을 우리는 독립군이라 부른다.        일제시기 수많은 젊은이들이 자기 발로 독립군 부대를 찾아갔다. 그런데 우리가 독립군, 즉 총을 든 전사로 떠올리는 이미지는 단연 남성이다. 독립군만이 아니라 독립운동 주체의 이미지 역시 남성이 독점하고 있다. 여성 독립운동가에 대해 본격적으로 주목하기 시작한 것은 최근에서의 일이다. 그럼에도 여성 독립운동가로 호명되지만, 분명 존재했던 ‘여성’ 독립군을 독립군이라 호명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최근 한국광복군에서 활약했던 여성 독립군에 대한 연구가 그래도 활발한 편인데, 이 연구들에서 빠지지 않고 강조하는 것은 가족관계다. 대부분 독립운동 지도자의 가족이라는 것이다. 당시 여성의 현실적 조건을 볼 때 누구의 딸, 누구의 부인이라는 것이 독립전쟁에 투신한 중요한 배경일 수는 있다. 문제는 이처럼 여성 독립군에 접근할 때 남성 독립군과 달리 그의 활약 자체보다 독립운동에 뛰어든 배경에 더 많은 관심을 보인다는 것이다. 반면, 여성 독립군의 독립군 조직 안에서의 삶과 활약에 대해서는 크게 주목하지 않는다. 이러한 전도된 인식을 벗어나 여성으로서의 독립군이 아니라 독립군으로서의 여성이라는 관점에서 한국광복군에서 활약한 여성 광복군, 조선의용대·군에서 활약한 여성 의용대원·군, 만주 유격대에서 활약한 여성 유격대원의 궤적을 좇아가보자. 그들은 여성 ‘독립군’이었다. 여성 광복군의 선전과 초모 활동 1940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산하에 한국광복군(이하 광복군)이 창설되었다. 1945년 4월 임시정부 군무부장의 보고에 의하면 총사령부와 3개 지대를 포함해 광복군 총수는 339명이었다. 해방 무렵에는 700여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하고, 현재 정부로부터 서훈을 받은 여성 광복군은 31명이다. 여성 광복군 김효숙의 증언에 따르면, 각 지대 별로 30여 명의 여성 광복군이 있었다고 한다.          광복군 총사령부에서 여성 광복군 오광심·지복영·조순옥 등은 선전조에 속해 활동했다. 선전조는 주로 한국어·일본어·중국어로 된 전단과 벽보를 작성해 살포하는 활동을 벌였다. 또한 한국어와 중국어로 기관지인 『광복(光復)』을 발행했다. 지복영은 한글 원고 정리를, 오광심과 조순옥은 발송을 맡았다. 광복군이 심리작전연구실을 설치하고 대적(對敵) 라디오 방송을 할 때도 여성 광복군인 김정숙·엄기선·연미당·민영주·지복영 등이 참여해 활약했다. 그들은 일본군에 편성된 한인 청년들에게 염전사상(전쟁의 장기화로 대중들이 전쟁에 대한 피로감과 지도자들에 대한 불신을 느끼는 현상)을 고취시키는 내용의 방송을 보냈다.광복군이 병력 확보를 위해 벌인 초모(의병이나 군대에 지망하는 사람을 모집함) 활동에서도 여성 광복군이 활약했다. 오광심·지복영·오희영은 함께 최전선에서 사기 저하를 목적으로 일본군 진영에 전단지를 투하하고 방송으로 일본군에 편성된 한인 청년들의 탈출을 독려하는 활동을 했다. 또한 일본군 포로의 심문 과정에서 정보를 수집해 미군에게 폭격지점을 알려주기도 했다. 나아가 일본군 점령지역으로 들어가서 한인들을 포섭함으로써 광복군의 자원으로 편입시키고 이를 중심으로 광복군의 지하 거점을 구축했다. 국내로 잠입해서 광복군의 향후 활동을 위한 국내 거점을 마련하는 일도 했다. 1944년 시저우에서 탈출한 학병인 장준하와 김준엽을 충칭까지 인솔한 사람이 바로 오희영이었다. 백옥순은 광복군 제2지대 소속으로 특수훈련을 받고 국내에 잠입해 군자금을 모금하고 독립운동가들과 접선했다. alt                                                                                                     오광심(좌) / 지복영(우) 여성 의용대·군의 무장선전활동 1938월 10월 10일 무한에서 김원봉이 이끄는 조선의용대(이하 의용대)가 창립했다. 의용대원들은 중일전쟁의 최전방에 진출해 선전전을 감행했다. 1939년 의용대는 부녀복무단을 창설했다. 부녀복무단 단장은 박차정이, 부단장은 장수연이 맡았다. 1940년 2월에 작성된 조선의용대 편성에 따르면, 부녀복무단원은 박차정 단장을 포함해 장수연·이화림·한태은·김위·전월순 등 22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1940년 의용대원 다수가 충칭으로 이동하려는 김원봉과 갈라서며 타이항산으로 향할 때 당시 부녀복무단 부단장을 맡고 있던 이화림도 동참했다. 타이항산에서 조선의용대 화북지대가 결성될 때, 이화림을 비롯해 문정원·장수연·조명숙·권혁 등이 여성 의용대원으로 활약했다. 이들은 화북지대가 적극적인 무장선전활동을 벌이자 이에 가담했다. 이화림의 경우 왕자인이 이끄는 부대에 속해 무장선전활동을 펼쳤다. 화북지대는 일본군의 통신선과 교통로를 파괴하는 활동을 하며, 전단을 살포하거나 함화선전을 펼쳤다. 함화란 큰 목소리로 적군을 설득하는 선전활동을 말한다. 이화림이 속한 화북지대 제3대도 일본군에 대한 함화를 전개했다. 이에 대해 일본군은 기관총 사격으로 응수했다고 한다. 화북지대는 무장선전 활동만이 아니라 일본군과 직접 10여 차례의 전투를 치렀다. 왕자인이 이끄는 무장선전대원으로서 이화림은 읍성전투가 벌어진 현장에 있었다. 1942년 화북지대가 무정을 대장으로 하는 조선의용군으로 개편될 때, 이화림은 부녀국 대장으로 활동하면서 무장선전활동을 이어 나갔다. alt 조선의용대 성립 기념(1938.10.10, 중국 한구)(좌) / 박차정(우) 여성 유격대원의 최전선 전투 활동 1930년대 이후 중국과 일본 간의 최대 격전지는 만주였다. 만주 한인들은 중국인과의 적극적인 연대하에 항일전쟁에 함께 뛰어들었다. 여성들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항일유격전이 한창이던 1933년 화룡·연길·왕청·훈춘 4개 현에서 무장투쟁에 뛰어든 적위대와 별동대의 여성은 343명이었다. 유격대원 420명 가운데 여성대원은 69명에 달했다. 그런데 『연변 인민의 항일투쟁』에는 무장투쟁으로 희생한 이들의 명단이 나온다. 성별로 보면 남성이 1,096명, 여자가 138명이다. 여성이 전체의 11%가량을 차지한다. 한국광복군이나 조선의용대·군으로 싸운 여성들과 달리, 총을 들고 직접 유격전에 참여한 숫자가 많았던 만큼 희생이 컸다.        여장군으로 이름을 날리던 이경희는 18세가 되던 해인 1932년 돌격대에 들어가 군사훈련을 받고 이듬해부터 소총을 들고 전투에 참여했다. 1933년부터는 용정유격대 소속으로 일본 경찰관서를 습격하거나 전투에 기습조로 투입되어 활동했다. 1934년에는 다시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에 속해 노도구 전투, 처장즈 전투 등에 참가했다. 1935년 안두현에서 일본군의 군용열차를 습격할 때는 습격조에 참가해 명사수로 이름을 날리고 군수물자를 노획하는 공을 세웠다. 1936년부터는 장백현을 넘어 국내진공작전을 펼치던 중 이듬해에 일본군의 총에 맞아 전사했다. ]]> Fri, 30 Sep 2022 15:13:12 +0000 71 <![CDATA[만나보기 여성 독립군의 고단한 삶, 높은 긍지]]> 글 김정인(춘천교육대학교 사회과교육과 교수)   여성 독립군은 누구도 성차별을 피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럼에도 여성 독립군은 그것을 이겨내고자 했다. 그들의 긍지는 드높았다. alt 이화림 성차별을 딛고 전사로! 남녀 구분 없는 독립군 활동이 평등한 조직 문화 속에서 이루어졌을까. 의용대원으로 활약했던 김학철은 1994년에 한국에서 출판된 산문집 『누구와 함께 지난날의 꿈을 이야기하랴』에서 여성 의용대원 이화림을 성차별적으로 대했던 사실을 솔직하게 고백한 바 있다. 김학철이 이화림을 처음 만난 것은 1936년 난징에서였다. 이화림은 자신을 “미세스 리”, “ 아주머니”, “누님”이라고 부르는 그에게 “화림 동무”라고 부를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그때까지 김학철은 여자를 동무라고 불러본 적이 없었다. 김학철이 “여자다운 맛”이 없다고 본 이화림을 다시 만난 것은 조선의용대원으로 활동할 때였다. 그런데 조선의용대원 일부가 뤄양으로 이동할 때 이화림이 동참하자 아무도 그녀를 환영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화림은 남성 의용대원들의 빨래를 해주는 등 호의를 베풀고도 냉대를 받기 일쑤였다. 하지만 김학철이 보기에 이화림은 이러한 성차별을 아랑곳하지 않았다. 남성 의용대원들은 타이항산으로 이동하면서 이화림을 떨궈 놓고 갔다. 하지만 몇 달 후 이화림은 일본군의 봉쇄선을 뚫고 타이항산에 들어왔고 남성 동지들은 “저게 또 따라왔네?” 라고 하며 키득거렸다. 이화림에 대한 남성 동지들의 배격은 계속되었다. 다시 의용군을 편성할 때 이화림을 데려가겠다는 사람이 없어 그녀는 “개밥에 도토리 꼴”이 되고 말았다. 김학철은 이화림이 1944년 타이항산에서 옌안의 의학 전문학교로 가게 된 것도 일종의 배척을 당한 것으로 회상했다. 그리고 이화림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이화림은 일생을 두고 혁명에 충직하였다. 여성의 몸으로 수없이 많은 간난신고를 겪었고 또 그 간난신고를 하나하나 다 이겨내었다. 그녀는 쩍말없는 여전사였다. 정직하고 강의한 여류혁명가였다. 하건만 그녀의 사사로운 생활은 계속 고적하고 처량하기만 하였다. … 이화림은 동지들의 테두리 안에서 수십 년 동안 옳은 평가를 받지 못하고 살아왔다. 그 옳은 평가를 하지 않은 사람들 가운데는 - 유감천만하게 나 - 이 김학철도 들어있다.”    이처럼 이화림에 대한 배척은 비단 그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독립전쟁에 뛰어든 여성이라면 이화림과 같은 성차별을 받으며 그것을 감내했을 가능성이 있다.  한편 여성 독립군이 일상에서 감내해야 했던 성차별은 역시 성역할에 따른 구별짓기였다. 만주에서 유격대에 들어간 여성 유격대원의 경우 자원하지 않으면 대부분 작식대와 재봉대에 배속되었다. 여기서 작식대란 때맞추어 군인에게 식사를 제공하는 일과 함께 식량이 없을 때 이를 구해야 하는 역할을 하는 조직을 가리킨다. 재봉대는 주로 군복 제조를 맡았다. 여장군이라 불리던 이경희도 전투가 끝나면 곧바로 작식대원을 도와 식사를 준비하는 일을 해야했다. 그는 군용열차 습격전에서 명사수로서 공을 세우고 표창을 받았지만, 군복을 동복으로 갈아입어야 할 10월에 되자 여성 대원들을 총 동원해 재봉하는 일에 나서야 했다. 여성 의용군을 이끌었던 이화림 역시 여성 의용군들과 식량 마련을 위해 매일 나물을 채취했다. alt (왼쪽부터) 노년시절 이화림 / 부상을 입은 대원을 응급처치하는 이화림 / 왼쪽부터 여성 광복군 조순옥, 오광심, 지복영 여성 독립군으로서의 높은 긍지 이처럼 독립전쟁에서 활약한 여성 독립군들은 성역할에 따른 구분 짓기를 일상으로 겪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왜 독립전쟁에 뛰어들었을까? 여성 의용대원 박차정은 1938년에 조선민족전선연맹 기관지인 『조선민족전선』을 통해 조국의 자유, 동아시아 평화, 인류 정의를 위한 독립전쟁, 즉 항일항전에 여성들이 적극 나설 것을 촉구했다.         “이제 중국의 전면적 항일전쟁이 시작된 이후 우리들은  1차적으로 중국의 항전이 중국 민족생존의 방위전임을 의식하고 또 이 전쟁은 동양 피압박 민족해방 전쟁이며 우리 조선 민족이 명료한 조국 자유를 취할 수 있는 기회를 만난 지금 중국 동북에 거주하는 부녀 동포는 모두 중한 항일 연군에 참가하여 명료한 투쟁을 진행하고 있다. 우리 혁명 부녀들은 일치단결하여 신성 위대한 민족 해방 전쟁에 참여하여 조국의 자유 투쟁을 위해 투쟁하며 동아 화평을 위해 싸우자. 나아가 인류 정의를 위해 싸우자.”        여성 광복군으로서 광복군 총사령부 선전조로 활약했던 지복영과 오광심은 광복군 기관지인 『광복(光復)』에 글을 남겼다. 지복영은 「한국여성동지들아 활약하자」라는 글에서 여성들이 한국인으로서 독립운동에 적극 뛰어들어 과거의 비인간적인 생활을 불살라 버릴 것을 호소했다. “중화(中華)의 여아들도 이중삼중의 압박을 벗어나려고 날아드는 침략자의 총알을 두려워함이 없이 가슴을 내밀고 태항산 심곡을 황하 연안으로 대륙의 동서남북을 뛰어다니며 침략자를 향하여 (피)압박자를 향하여 고함치며 싸우고 있지 않는가. … 2천 3백만 민족의 반수를 차지한 여성동포들은 조국을 광복하고 신국가를 건설하는 데 차생역군인 것을 범한국사람은 다 깊이 깨달아야 할 것이다. 이중삼중의 압박에 눌리어 신음하던 자매들! 어서 빨리 일어나서 이 민족해방운동의 뜨거운 용로 속으로 뛰어오라 과거의 비인간적인 생활을 여기서 불살라 버리고 앞날의 참된 삶을 맞이하자.”        여성 광복군 오광심은 더욱 적극적으로 “총과 폭탄을 들고 전선에 뛰어 나갈 것”을 호소했다. 그것은 민족의 자유와 여성의 평등 그리고 “여성 자신의 권리와 임무를 위함”이었다.         “우리가 남녀평등을 아무리 부르짖지만은 또는 여권을 찾아보자는 구호가 운소(雲?)에 높았지만, 원래 이런 혁명적 임무를 지지 못하면서 어찌 권리를 말할 수 있으리오. 평등과 권리를 찾으려면 먼저 자체의 분투와 능력이 있고 국가와 사회의 임무를 남자와 같이 부책하고야 될 것입니다. 여자가 남자의 부속물, 완농물, 기생충 등의 치욕되는 명사는 어느 남자가 준 것이 아니라 우리 여성들이 자취한 것이라 합니다. 동성동지들! 말로 평등과 권리를 부르짖지 말고 실제 노력과 행동을 함으로써 그를 쟁취합시다. … 우리 여성 자신의 권리와 임무를 위하여 이 위대한 광복군 사업에 용감히 참가합시다. 그리고 총과 폭탄을 들고 전선에 뛰어 나아가서 우리 역성의 피가 압록 두만강?연안에 흘리며 선혈 위에 민족의 자유화가 피고 여성의 평등열매를 맺게 합시다.”          그런데 오광심의 회고에 따르면 광복군에서도 역시 성역할에 따라 여성 광복군이 하는 일이 남성 광복군보다 많았다.        “여자대원이 하는 일이라.… 취사, 통신, 정보수금, 모금 등 남자대원에 비해 더욱 많았습니다. 원시적인 생활이다시피 거친 생활이었기 때문에 모두 고생이 많았지만, 여군의 부담은 더 컸었고 남자군인과 여군, 장교와 사병의 구별 없이 똑같이 일했습니다.”        이처럼 광복군, 의용대·군, 유격대로 활약했던 여성 독립군들의 독립전쟁에서조차 일상적인 성역할에서 벗어나지 못한 점은 공통적이었다. 또한 김학철의 회고에 드러났듯이 여성 독립군은 누구도 성차별을 피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럼에도 여성 독립군은 그것을 이겨내고자 했다. 그들의 긍지는 드높았다. 민족의 자유와 여성의 평등을 위해 총과 폭탄을 들고 전선에 뛰어들었다.  alt 한국광복군 기관지 『광복(光復)』 ]]> Fri, 30 Sep 2022 15:18:37 +0000 71 <![CDATA[이달의 독립운동가 재일 유학생을 결집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한 이옥·유원우]]> 글 독립기념관 전시부   alt alt    『학지광』 12호 (1917) 1914년 4월에 창간되어 문예·학술·교육·사회·경제 등 다양한 분야의 글을 실었다.(좌) / 재동경조선유학생학우회 육상운동회 (1917.4.8.)(우) 재일 한인의 구심점, 재동경조선유학생학우회 일제강점기 고등교육의 기회가 흔치 않았던 한국인들은 배움에 대한 열망을 품고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대조선인일본유학생친목회가 1895년에 설립된 이후 다양한 유학생 단체가 생겨났으나 1910년 강제병합에 저항하며 다수의 유학생이 한국으로 돌아가면서 활동이 정체되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 1912년 재동경조선유학생학우회(在東京朝鮮留學生學友會)가 출신지방별 유학생 친목회의 연합체로 설립되어 동경 지역 유학생을 망라하는 대표조직으로 성장하였다. 기관지 『학지광(學之光)』 발행 및 운동회·강연회·웅변회 개최 등의 활동을 통해 재일 한인을 결집시키는 구심점이 되었으며, 특히 1919년에는 2·8독립선언을 주도해 3·1운동의 기폭제를 마련했다. 1931년 2월 스스로 해체를 선언할 때까지 유학생단체를 넘어 독립운동단체로서 일본 지역에서 활발히 활동하였다.  alt (왼쪽부터) 신간회 경성지회 발회식 (1927) / 「이옥씨 영면 삼십사세를 일기로」,『동아일보』 (1928.12.26.) /  「재경조선인 상황」 (1924.5) 조선총독부 경무국에서 작성한 것으로 ‘사상노동운동’ 관련 주요인물로 이옥(학우회 조선노동동맹회 간부)이 언급되어  있다.  이옥, 재일유학생 운동을 주도하다 이옥은 1895년 경상북도 안동에서 태어났다. 1919년 3·1운동 이후 안동 지역의 유력가 및 학교·종교 등을 조사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보고하는 조사원으로 활동했다. 1920년 일본 와세다대학 정치경제과에 입학하였고, 이듬해 재동경조선유학생학우회의 서무부장과 총무로 활동하였다. 1923년 관동대지진 당시에는 유학생들의 피해상황을 조사·지원하기 위해 서울에 꾸려진 동경지방이재조선인구제회 상무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유학생 조직 재건을 위해 힘썼다. 일제는 동경 지역 독립운동을 주도하는 인물 중 하나로 이옥을 지목, 요시찰인물 ‘을호’로 지정하여 감시와 경계를 계속하였다. 1924년 대학 졸업 후에는 국내로 돌아와 시대일보사 이사·신간회 발기인 등으로 활동하였다. 정부는 이옥의 공훈을 기려 2009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alt 「신간회 동경지회 성명서」 (1928. 4. 11) 일제에 대항해 치안유지법 철폐, 언론출판결사의 자유 등을 요구하는 성명서이다.(좌) /  「협동조 강연 공주에서 성황」,『동아일보』 (1927.7.30.) 공주에서 개최된 협동조합운동사 강연에 대한 기사로,  유원우는 ‘협동조합의 이론과 실제’라는 연설을 했다는 내용이 언급되어 있다.(우) 유원우, 재일 독립운동단체 통합에 앞장서다 유원우는 1901년 경상북도 상주에서 태어났다. 1927년 일본 와세다대학 정치경제과 재학 중 재동경조선인단체협의회 실행위원과 신간회 동경지회 초대총무간사로 선임되어 재일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을 위해 노력했다. 당시 동경 지역에는 재동경조선유학생학우회를 비롯해 노동·청년·여성 등 다양한 분야의 한인단체가 있었는데, 이 단체들의 연합체로 재동경조선인단체협의회가 탄생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신간회 동경지회가 조직될 수 있었다. 1929년에는 학우회 대표로 피선되어 일본 전국에 신간회 조직을 확대하려다가 일제에 붙잡혔다. 한편 유원우는 농촌 지역의 개선을 위한 협동조합 설립에도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1926년 유학생들이 조직한 협동조합운동사의 재무부 위원을 맡았고, 협동조합의 내용을 알리는 국내 순회강연에 참여했다. 정부는 유원우의 공훈을 기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alt ]]> Fri, 30 Sep 2022 15:25:26 +0000 71 <![CDATA[독립운동 사적지 안중근 의거와 순국 현장]]> 정리 편집실   alt 하얼빈역 (2019년)(좌) / 하얼빈역 내 안중근기념관(우)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하얼빈역 하얼빈(哈爾濱)역은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처단한 곳이다.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여 일제의 침략성을 경고하고 저지하고자 했다. 이 의거가 조국과 겨레의 원수를 갚고 동양평화를 유지하는 일이라고 판단한 것이었다.           의거의 목표가 된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의 유력한 정치가였다. 그는 1905년 을사늑약의 원흉이었고, 대한제국을 식민화하기 위해 설치된 통감부의 초대 통감을 맡았다. 이후 일본으로 돌아가 만주와 몽골 등 대륙침략을 실현하기 위해 경쟁국인 러시아와 협상하고자 하얼빈으로 향했다. 안중근은 의거를 결심하고 우덕순(禹德淳)과 함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차를 타고 출발하여 1909년 10월 22일 하얼빈에 도착했다. 중간에 러시아어 통역을 맡은 유동하(劉東夏)가 합류했다. 이곳에서 조도선(曺道先)과 함께 세부적인 계획을 논의하였고, 다음날에는 안중근·우덕순·조도선 세 사람은 의거 장소 중 하나로 계획한 채가구(蔡家溝)역을 답사하였다. 논의 후 우덕순과 조도선은 채가구 역에서, 안중근은 하얼빈에서 의거를 준비하기로 결정했다.            의거 당일인 10월 26일이 되자 유동하를 돌려보내고 단신으로 하얼빈역 내 찻집에서 이토 히로부미가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오전 9시경 하얼빈역에 열차가 멈추고 이토 히로부미가 내렸다. 안중근은 그를 환영하기 위한 의장대 뒤에서 기회를 기다렸다. 그리고 열 걸음 정도 거리가 되었을 때 앞으로 나아가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했다. 안중근 의거는 일제의 침략정책과 한민족의 독립에 대한 열망을 세계에 알리는 동시에 독립운동을 크게 고양시켰다. 안중근 의거지 하얼빈역(안중근기념관)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역에서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했던 곳이다. 하얼빈역 내에는 안중근기념관이 있다. 주소헤이룽장성 하얼빈시 하얼빈역 구내 alt 뤼순일아감옥구지 건물 안중근이 수감·순국한 뤼순일아감옥구지 러시아 군인에게 체포된 안중근은 재판관할권이 일본에 있다는 명분으로 하얼빈 일본 총영사관으로 인도되었다. 이후 1909년 11월 3일 중국 뤼순감옥으로 이송되었다. 이는 안중근 재판을 뤼순에 있는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으로 지정하기 위한 조치였다. 결국 일제는 1910년 2월 14일 안중근에게 사형을 언도하였고, 3월 26일 뤼순 감옥에서 집행되었다.        안중근은 순국하기 전까지 뤼순감옥에서 자신의 항일 논리를 강화하고 동양평화론을 정립하며 짧은 생애를 정리하는 데 시간을 보냈다. 자신의 생애와 종교사상이 담긴 『안응칠역사』의 집필을 완료하였고, 평화사상이 집약된 『동양평화론』의 중요 부분을 집필하였다.         뤼순일아감옥은 1902년 러시아가 건립했으며, 1907년 요동을 점령한 일본이 이를 확장하였다. 감옥의 총 부지면적은 226,000㎡이며, 275개의 감방에 총 2,0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 감옥의 담장 밖으로는 수형자들이 강제 노동했던 가마터·임업장·과수원·채소밭 등이 있다. 한국과 중국의 애국지사들이 이곳에 감금되었고, 이들 중 일부는 사형에 처해졌다.           광복 후 오랫동안 방치되었다가, 뤼순 정부의 노력으로 1971년 7월 ‘진열관’이란 이름으로 일반에게 공개되었다. 진열관의 총면적은 26,000㎡, 전시 면적은 7,484㎡이다. 전시는 뤼순감옥 구지의 현장 보존, 일제와 러시아의 침략 관련 유물, 뤼순감옥에 수형되었던 애국지사들에 관한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한편 2000년 7월에는 안중근이 사형되었던 위치를 찾아내고, 그곳에 안중근의 동상과 관련 자료를 모아 ‘안중근 전시관’을 별도로 만들었다.           뤼순일아감옥은 1988년 전국 중점 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었으며, 2005년에는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과 약소민족의 인권 유린의 역사적 증거로 삼고자 전국 애국주의 교육시범 기지로 지정되었다. 2013년 독립기념관의 협조로 한국인 관람객들을 위해 한글과 중국어가 병기된 전시 패널 설명문을 설치하였다. 2017년 국제열사전시실을 새롭게 전시하고 안중근추모실을 정비하였다. 안중근 수감·순국지 뤼순일아감옥구지박물관안중근과 신채호가 수감되어 순국한 장소이자 이들의 활동을 기념하는 전시관이 있는 곳이다.주소라오닝성 다롄시 뤼순커우구 향양가 139호 ]]> Fri, 30 Sep 2022 15:28:43 +0000 71 <![CDATA[아름다운 인연 여성과 민족의 정체성을 일깨운 차경신·박재형 부부]]> 글 김형목(사단법인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이사)   개신교였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남녀평등·자유·권리 등의 소중함을 일찍 깨우친 차경신은 교사로서 여성과 민족의식을 일깨우는데 남다른 노력을 기울였다. 로스앤젤레스에서 한인들의 권익옹호를 도모하던 박재형과 1924년 부부의 연을 맺은 그는 조국광복의 날까지 독립운동을 위한 군자금 조달과 여성교육 등에 큰 몫을 담당했다. alt 박재형과 차경신(1920년대 후반, LA) 차경신, 교사로서 여성의 자존감을 일깨우다 차경신은 평안북도 선천군 수청면 가물남에서 1892년 2월 4일에 태어났다. 미곡상을 하던 아버지 차기원과 어머니 박신원 사이에 여섯 딸 중 맏딸이었다. 본관은 연안인데, 이곳은 일찍부터 개신교가 전래되어 활동이 가장 왕성하던 지역이었다. 당시 부계혈통을 중시하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아들을 낳지 못한 그의 어머니는 정신적 고통을 받던 중 남녀평등관에 심취하여 독실한 개신교인으로 다시 태어났다. 이러한 어머니의 영향으로 어릴 적 개신교에 입교한 후 전통적인 여성관에서 벗어나 남녀평등·자유와 권리의 소중함을 인식하며 성장할 수 있었다.      차경신은 16세에 캐나다 장로교 선교사 푸트(W. R. Foote, 富斗一) 등이 설립한 보성여학교에 입학하였다. 이 시기 성경·한문·역사·지리·과학·윤리·산술 등 다양한 교과목을 접하며, 시세 변화에 부응하는 길이 무엇인지를 고민하는 순간을 맞았다. 또한 이곳에서 강기일·오순애·김신의·김성무 등과 인연을 맺었고, 이들은 훗날 독립운동을 함께한 동지가 되었다. 졸업 후 강계 명신여학교 교사로 재직했다. 이 학교는 3·1운동 당시 만세운동을 주도한 민족교육의 산실이었다. 그는 4년간의 교사생활을 청산한 후 배움에 대한 갈망으로 서울 정신여학교에 입학하였고, 재학 중 식민지배라는 현실에 절감하여 민족문제를 고민하였다. 또한 기숙사의 엄격한 공동체 생활은 여학생들에게 여성과 민족에 대한 의식을 싹트게 하였다. 졸업 후 함흥 영생여학교와 원산 진성여학교 교사로 재직하면서 주체적인 여성의식과 민족의식을 일깨우는 데 남다른 노력을 기울였다.  alt 젊은 시절 차경신 김마리아와 운명적인 만남을 가지다 1918년 배움의 갈증을 풀기 위해 일본 요코하마여자신학교로 유학을 떠났다. 이 시기 인생 항로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김마리아와 운명적인 만남을 가졌다. 한국유학생들은 조선청년독립단을 조직하여 마침내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유학생학우회 총회를 구실로 2·8독립선언을 결행했다. 김마리아는 그를 찾아와 ‘독립선언서’를 국내로 반입할 계획을 논의했다. 김마리아는 도쿄유학생 대표로, 차경신은 요코하마유학생 대표로 각각 귀국을 결정하였다. 이들은 일본 옷띠인 오비 속에 독립선언서 10여 장을 숨기고 귀국길에 올랐다. 일제의 삼엄한 감시에도 ‘아버지 사망’을 구실로 내세우는 지혜를 발휘하여 무사히 국내에 돌아왔다.        이들은 신한청년단 서병호와 김순애 등을 만나 독립운동을 위한 여성단체 조직을 논의하였다. 차경신은 이들을 통해 독립운동 주역들과 교류할 수 있는 인적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이어 서울에서 정신여학교장 루이스와 함태영 등도 만났고, 평양에서 김경희를 만나 만세운동 전반을 논의한 후 고향 선천으로 내려갔다. 그는 신한청년당 당원 50여 명을 규합하는 동시에 신성학교·보성여학교 교사와 읍내교회 지도자 등을 만나 향후 독립운동을 논의했다. 조직적인 만세운동을 위해 부인회와 청년단도 조직하였다. 태극기를 만들고 독립선언서를 등사한 선천3·1운동을 주도하여 여성들의 ‘자기존재성’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어머니와 보성여학교 동기생 강기일·김강석·오순애 등의 참여로 그는 천군만마를 얻은 듯 든든한 지원군을 얻게 되었다. 이후 부상자 돌봄과 구속된 독립운동가들의 뒷바라지에도 매달렸다. alt 차경신이 작성한 대한여자애국단의 재정과 사업내역 문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자금 조달에 힘쓰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김마리아와 함께 대한애국부인회를 조직하였다. 이를 통해 모금한 독립운동자금은 임시정부에 보내어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대한청년단연합회의 총무 겸 재무 역할에도 열성적이었다. 그러나 독립운동자금 모금과 연락망 구축은 열의와 달리 그리 오래 지속될 수 없었다. 그럼에도 ‘조국광복’ 대변자처럼 묵묵히 앞장선 그는 동생 차경순의 남편 선우혁이 교통차장인 점을 빌려 자금모금과 연락망을 구축해 나갔다. 또한 3·1운동 1주년쯤 신성학교와 보성여학교 학생들이 주도한 만세시위에도 참여해 이들을 격려했다.         차경신은 일제 감시와 탄압으로 대한청년단연합회 활동이 어렵게 되자 8월 상하이로 망명하였다. 임시정부의 비밀요원으로서 특히 안창호를 도와 국내를 오가며 독립운동자금 모금에 열성적이었다. 한편 대한애국부인회 사건으로 복역 후 병보석으로 풀려난 김마리아가 상하이로 망명하자, 그와 함께 면려청년회를 조직하는 등 신앙을 통해 교민사회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향촌부인회 등을 통하여 국내 항일여성단체와 연락망을 구축하여 여성들이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발판을 만들었다. 회원은 각기 4원의 회비를 납부하여 그중 1원은 향촌부인회 비용으로, 나머지는 임시정부에 보냈다. 차경신은 자금조달의 일익을 담당하다가 1921년 몸이 쇠약해져 홍십자병원에 입원하기도 하였다. alt 왼쪽부터 김마리아, 안창호, 차경신(1924년경) 미주 한인사회에 민족정체성을 강조하다 1924년 1월 김마리아 권유로 미국으로 건너간 차경신은 샌프란시스코 국어학교와 교회주일학교 교사를 맡았다. 대한여자애국단이 개최한 환영회장에서 ‘배우고 싶어도 배우지 못하는 한국의 현실’ 등에 대해 연설했다. 그의 열성적인 활동은 한인사회 여성지도자로서 면모를 일신하는 계기가 되었다. 샌프란시스코 대한여자애국단 단장으로 활약하면서 특히 민족의식을 강조했다. 또한 흥사단에 입단하였으며, 대한인국민회 회원으로 독립운동 지원을 계속하였다. 한편 샌프란시스코에 국어학교를 설립하여 초대교장으로 교포 자녀들의 한글교육에 힘썼다. 이는 한국인으로서 민족정체성을 고취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다.  1931년 로스앤젤레스 국어학교 교장직을 사면하고, 샌프란시스코 대한애국부인회 총본부를 로스앤젤레스로 옮겼다. 1933년부터 7년간 대한여자애국단 총단장으로 지회 확대에 노력하였다. 그는 ‘애국단에 대한 감상과 희망’이라는 연설을 통해 여성들의 적극적인 항일투쟁 참여를 강조했다. 또한 임시정부·독립신문사·광복위로금·구미위원부 군축선전비 지원 등 독립운동에 열성을 쏟았다. 만주동포구제금·국내 수재의연금·고아원 지원 등 구호사업을 위해 힘썼다. 한편, 그는 평생 관절염과 신경통에 시달렸으나 전혀 개의치 않았다. 여성도 스스로 삶의 주체이며 인격체라는 사실을 일깨우며, 여성의 정치의식과 자유민주주의 의식 고양에 온 정성과 힘을 다했다.      광복 후에도 대한여자애국단 총부 재무위원과 로스엔젤레스지부 서기를 맡아 활발히 활동하였다. 1960년 자유당의 부정부패를 규탄하기 위한 민주정권수립촉구 민중대회에 이화목·임메불·강영복 등과 함께 대한여자애국단 대표로 참석하였다. 1978년 9월 28일 차경신은 ‘보성여학교에 장학금 5천 달러를 기부한다’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93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박재형, 한인사회 권익옹호와 단결에 앞장서다 박재형은 평안남도 증산군에서 1889년경에 태어났다. 고향에서 한학을 수학한 후 1905년 5월 고향을 떠나 하와이에 이민하였다. 이후 미주 본토로 생활근거지를 옮겨 1910년 11월 30일 시카고에서 대한인국민회 산하 지방회가 설립되자 가입·활동하는 등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나섰다. 이듬해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하여 광복 때까지 대한인국민회 로스앤젤레스지방회(이하 지방회)에서 활동하였다. 지방회에서 평의원과 서기 겸 대의원, 로스앤젤레스 한인학생기숙소 발기인,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 법무 겸 자치규정수정위원 등을 맡았다. 이를 통하여 한인사회 권익옹호와 단결을 도모하는 데 앞장섰다.이후 지방회 부회장 겸 재무로 선임되자 지방총회 법무를 사임하였다. 이어 지방회 총무 겸 학무·재무와 법무위원·총무 겸 서기를 역임하며 다양한 활동을 통해 한인사회 지도자로 부각되었다. 3·1운동 이후 임원 총사퇴로 임원을 재선정할 때는 학무위원으로 선임되었다. 이어 국민회 산하 로스앤젤레스 파출소 위원, 국내 한인 구제를 위한 구제금 모집 지방위원, 구미위원부 로스앤젤레스 지방위원으로 활약했다. 또한 중국 동북지역 동포들의 참상에 구휼금을 보내는 등 한인사회와 소통에도 남다른 노력을 기울였다. 1924년 11월 황성택 등 5인과 함께 로스앤젤레스에 국어학교 설립을 위한 실행위원과 교섭위원을 맡았다. 이듬해 로스앤젤레스 조국동포 기근구제회 재무로서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다. 지방회 재무·구제원·나성국어학교 교육위원·한인아동교육기관 기성 발기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이 시기 안창호의 소개로 차경신과 부부의 연을 맺었다. 그는 독립운동으로 몸이 쇠약해진 부인을 회피하지 않고 정성을 다하여 돌보았다.   1930년 지방회 회장에 취임한 박재형은 광주학생운동 후원을 위해 로스앤젤레스한인공동회를 조직하고 재무위원이 되어 후원금을 모집하였다. 이어 1932년 상해사변 임시위원부 수전위원, 1933년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 특연을 위한 청연위원, 1936년 재미한인사회 발전책 실행위원, 1943년 재미한족연합위원회 대표 등을 지냈다. 그의 다양한 활동은 미주 한인사회의 대동단결을 도모하는 밑거름이었다. 박재형은 1967년 7월 운명하였고,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2017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Fri, 30 Sep 2022 15:34:21 +0000 71 <![CDATA[끝나지 않은 독립운동 중국 하이난섬의 일제 강제징용 희생자 유해 봉환 못 하는가, 안 하는가?]]> 글 이계형(국민대학교 교양대학 교수)   그림 같은 해변·기암괴석·야자수…, 남국 정취가 물씬 풍기는 열대지대로 ‘동양의 하와이’로 불리는 중국 하이난섬. 이러한 찬사와 달리 그곳에는 일제강점기에 강제징용된 한인들의 유해가 방치되어 있다. 이번 호는 여전히 ‘역사의 냉대’를 받는 그들의 얘기를 하고자 한다.  ‘천인갱’이라 불리는 조선인 천 명이 묻힌 곳 중일전쟁이 한참이던 1939년 2월, 일제는 남방 침략의 거점을 만들고자 하이난을 점령하였다. 그 뒤 일제는 중국·홍콩·타이완 등지의 사람들뿐만 아니라 한인들을 강제동원하여 비행장·항만 등을 건설해 군사기지를 만들고, 철광석 등의 자원을 약탈하였다. 또한 일제가 설치한 일본군 위안소에 적지 않은 한인 여성들이 끌려왔다. 이후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1943년 봄부터 패망 직전까지 한인 2천여 명을 하이난으로 끌고 왔다. 전쟁에서 다급해진 일제는 자원착취를 강화하고자, 서대문형무소 등 전국 12곳(평양·신의주 등 북한 수형자 1,100명 포함)의 감옥 수형자들까지 ‘남방파견보국대(조선보국대)’라는 이름으로 동원한 것이다. 일제는 “하이난에 가면 형량을 감해준다”, “높은 월급을 준다”라면서 그들을 속였다.   이들은 발목에 족쇄를 찬 채 10명 혹은 20명씩 한 개조를 이뤄 일본군의 총칼 아래 석록광산·전독광산 등에서 강제노역에 시달렸다. 일본군은 그들이 조금이라도 불복하면 매질하였고, 도망치다 붙잡혀온 이들은 고문에 생죽음을 당하기도 했다. 매일 고된 노역이 끝나면 그들을 군영에 감금시켰고 굶주림과 질병으로 죽으면 모두 한곳에 매장했다. 특히 일제가 패망 직후 하이난 싼야시(三亞市) 애현 지역에 고립된 일본군은 한인 징용자 1,200여 명을 난딩촌(南丁村) 기슭에 끌고 가서 총알을 아낀다며 이들을 칼로 무자비하게 학살하고 그곳에 집단매장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일본군이 물러간 뒤, 그곳 주민들 사이에 종종 귀신을 보았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이들 대부분은 여족(黎族)임에도 그들의 원혼을 달래주고자 마을 이름을 ‘조선촌(朝鮮村)’으로 고쳐 불렀다. 1975년에 이곳은 ‘삼라촌’으로 바뀌었지만, 촌민들은 여전히 ‘조선촌’이라 부른다. 마을 입구에는 ‘조선촌 천인갱(朝鮮族 千人坑; 조선인 천 명이 묻힌 곳)’이란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이외에도 그들의 작업장이었던 석록광산·전독광산 근처에는 중국 정부가 세운 ‘만인갱(萬人坑)’이란 표지판과 이들을 추모하는 기념비가 여럿 세워져 있다.  광복 후 50년이 지나서야 알려진 참상 이들의 참상이 국내에 알려진 것은 광복 후 50년이 지나서였다. 1995년 하이난성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는 싼야시 주민 중 70세 이상 노인 50여 명을 구술 조사한 뒤에 「철제하적성풍혈우(鐵蹄下的腥風血雨; 말발굽 아래서 일어난 피바람과 같은 혈우)」라는 자료를 발간하였고, 그로부터 3년이 지난 1998년 3월 그 자료가 국내에 전해지면서 비로소 그러한 사실이 알려졌다. 1998년 8월, 석록광산에서 5년간 강제노역에 시달렸던 장달옹(당시 태평양전쟁 강제연행 한국생존자협의회 미주 회장) 씨가 KBS-2TV <해남도에 묻힌 조선 혼> 프로그램에 출연해 당시의 참상을 생생하게 증언했다. 너무나도 충격적인 사실은 세간의 이목을 끌었다.               그런데 정부가 아닌 하이난에서 망고사업을 하던 서재홍 씨가 1999년 9월 1일, 싼야시 정부의 허가를 받아 그곳에 ‘일구시기수박해조선동포사망추모비(日寇時期受迫害朝鮮同胞死亡追慕碑; 일제시기 박해를 받아 숨진 조선동포 추모비)’와 비문을 세웠다. 또한 그는 삼라촌민위원회와 ‘천인갱’ 주변 땅 3만3천㎡를 30년 도급 계약을 맺었다. 2001년 1월 그는 한국에서 유해 발굴 전문가 등을 초청하여 두 달 남짓 유해를 발굴한 결과, 한인 유해 109구를 수습했다. 일부 유해의 손목에는 철사로 만든 수갑이 채워져 있었고, 두개골에는 굵은 쇠못이 박혀 있었다. 그 가운데 104개 유골은 화장하여 단지에 넣어 보관실에 진열하고, 비교적 보존이 잘된 유해 5구는 유리관에 넣어 보관하였다. 이는 2001년 3월 MBC <하이난 섬의 대학살> 프로그램을 통해 그대로 전해졌다.   민간에서 시작한 희생자 유골 봉환 추진 하지만 하이난섬의 ‘천인갱’은 정부와 국민의 관심에서 멀어져갔다. 그러다 서재홍 씨가 자금난으로 5년간 토지사용료를 내지 못하면서 도급 계약이 취소되었다. 이때 하이난 집단학살에 관심을 보인 것은 ‘기슈 광산의 진실을 밝히는 모임’(이하 ‘모임’)이었다. 이 모임은 1997년 9월 일본의 양심적인 학자·시민들이 결성한 단체인데, 1998년 6월 하이난을 방문하여 참상을 확인하였다. 이후 모임은 2002년 4월 김대중 대통령에게, 2003년 5월에는 노무현 대통령에게 하이난 학살의 진상규명과 유해 봉환 등을 요청했지만 별다른 답변을 듣지 못했다. 또한 이들은 2004년 9월 일본 정부에도 진상규명을 요청했지만 소용없었다.      그 후 2003년 3월 ‘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고 이를 근거로 2004년 11월 위원회가 공식 출범하자, ‘모임’은 위원회에 공동 발굴과 진상규명을 제안했다. 당시 ‘천인갱’ 일대가 중국의 개발업자에게 넘어갈 위기에 처했기 때문이다. 2005년 1월 정부가 일본·중국·동남아 등지의 강제동원 희생자들의 유골 봉환을 위해 일본 측에 실태조사를 제의했지만 소용없었다. 이런 가운데 ‘모임’은 이를 더는 방치하면 안 된다고 판단하여 2006년 5월 독자적으로 발굴을 시도하였다. 이를 통해 진상을 밝히고 한국 측의 전면적 발굴을 촉구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위원회가 실태조사를 통해 2006년 「조선보국대 진상조사보고서」를 작성하여 113명의 피해자를 확인하는 정도에 그쳤다. 그러다가 발굴은 하이난성 정부에 의해 중단되었고, 2008년 여름 ‘조선촌’을 횡단하는 고속도로 건설이 시작되면서 ‘천인갱’ 주변은 파헤쳐지고 말았다. 이 무렵 한국 정부가 추모비 건립을 검토하였지만 실행되지 못했다.  진상규명과 유해 발굴·봉환은 국가의 책무 그 뒤 또다시 하이난은 잊혔다. 2012년 8월 대한민국 예비역 영관장교연합회가 「중국 해남도 조선촌 천인갱의 진실을 알린다」라는 책자를 발간하고, 2015년 8월 KBS 1TV에서 ‘천인갱, 70년의 기다림’ 프로그램이 방송한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정부 차원에서 하이난에 대한 추가 진상조사 없이 2015년 12월 위원회는 해산됐다. 그 사이에 ‘천인갱’ 부지는 예전보다 20분의 1에 불과한 1천6백㎡로 쪼그라들었고 근처에는 고속도로와 고속철도가 들어섰으며, 코앞까지 초고층 아파트가 들어섰다. 그나마 남아 있던 ‘천인갱’ 주변의 담장은 곳곳이 허물어졌고 현지 주민이 몰래 버린 관들이 쌓였으며, 추모관 바로 옆에는 돼지우리가 지어져 심한 악취까지 진동했다. 더욱이 유골함 절반은 텅 비었고 유리관에 모셔져 있던 유골 5구는 모두 사라졌다.       이런 중에 2018년 국내의 중소 부동산 시행업체 ‘다담’ 회사가 발 벗고 나섰다. 다담은 재단법인 ‘천인갱’을 설립하고 그나마 남아 있던 '천인갱'을 보존하고자 토지이용료를 지급하는 한편, ‘하이난천인갱희생자추모회’를 조직하여 진상규명과 유해 발굴·봉환 등에 애쓰고 있다. 위원회 사업을 넘겨받은 행정안전부 산하 과거사 관련 업무지원단은 진상조사 기능이 없다며 유해 발굴은 민간단체에 떠넘기고, “진상조사가 안 된 강제징용피해자 유해는 정부가 나서서 수습할 수 없다”라는 주장만 반복한다. 민간 차원에서 추진 중이던 발굴·유해 봉환은 현재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중단된 상태다.          일제강점기 국외로 강제동원된 인원 125만여 명 중 20만여 명이 돌아오지 못했다. 지금까지 위패라도 돌아온 경우는 1만 2,000여 명으로 6%에 불과하고 이마저도 대부분은 민간단체가 봉환해온 것이다. ‘천인갱’은 한인 강제징용피해자의 집단매장지로 유일한 곳이지만, 그곳 개발붐에 언제 사라질지 모를 일이다. 이제 더는 미룰 수 없다.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으면 진상규명과 유해 발굴·봉환 등 그 어느 것도 이뤄질 수 없다. 나라 없는 식민지인으로 머나먼 타지에 끌려와 학살당한 원혼들을 달래는 일은 우리 후손들의 몫이자 국가의 존재 이유이다.  ]]> Fri, 30 Sep 2022 15:37:47 +0000 71 <![CDATA[독립의 발자취 일제는 무엇을 숨기려 했는가?]]> 글 권기준(대한민국역사박물관 전시운영과 학예연구사)   alt 전시 포스터 전시를 소개하며 일제는 조선을 강점한 뒤 일부 제외한 신문을 모두 폐간하였다가 3·1운동을 계기로 다시 신문을 허가한다. 1920년에 창간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대표적이다. 하지만 조건이 붙었다. 신문지법에 의해 신문지는 발행하기 전, 관청에 납부해야 했다. 이렇게 납부된 신문이 질서를 방해하거나 풍속을 혼란케 한다고 보일 때는 그 발매 및 반포를 금지할 수 있다. 즉, 검열이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은 광복절 77주년을 맞아 일제의 신문 검열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볼 수 있는 자료를 선보인다. 『중외일보』는 비교적 늦은 1926년에 창간되었으나,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다음으로 가장 검열을 많이 받은 신문이다. 그럼에도 이 자료가 중요한 이유는 유일하게 검열 전후의 모습이 모두 남아있기 때문이다. 전시장에는 모든 기사가 온전하나 적나라한 빨간색의 검열 흔적이 남아있는 신문과, 그 결과 기사가 삭제되어 빈 공간만 남은 신문이 나란히 놓여있다. 이 둘을 보면 일제의 신문 검열과정을 추측하고 복원해볼 수 있다.         나아가 당시 언론인은 일제가 지시한 검열 사항을 항상 그대로 따르지만은 않았다. 지시한 사항을 모두 따르지 않고 소극적으로 검열할 때도 있었고, 인쇄를 멈추라는 지시가 있어도 이를 무시하고 계속 윤전기를 돌렸다. 그러고는 윤전기를 세웠다고 새빨간 거짓 보고를 하였다. 이러한 당시 식민 통치 및 검열에 저항했던 언론인의 여러 노력을 관람객 및 독자 분들이 기억하기를 바란다. 나아가 이 모든 내용의 핵심인 언론 자유의 중요성을 생각해보기를 바란다. 총독부의 신문 검열 일제강점기 당시 상황을 엿볼 수 있는 재미있는 일화가 하나 있다.      어느 날 오후 총독부 경무국 도서과*. 검열자는 한자 한구도 소홀히 하지 않고 눈에 불을 켠다. 신문에 빨간 줄이 그어진다. 이윽고 경기도 경찰부에 전화를 건다. “○○기사가 있는 ××신문 왕실 모독으로 차압되었으니 수배해주십시오” 관할 경찰은 해당 신문사로 출동하여 인쇄한 신문지를 전부 압수한다. 편집국은 이 소란을 보고는 경무국에 전화를 건다. “오늘의 기사는 어디가 나빴습니까?” “제1면 ○○기사 전부입니다” 신문사는 문제의 기사를 삭제하고 더불어 그 신문 번호를 없애 호외를 낸다.   * 恒緑, 「朝鮮に於ける出版物の考察」, 『警務彙報』 296 (1930.12.), 40쪽 재구성 여기 신문이 한 부가 있다. 전시 중인 1926년 12월 18일자 『중외일보』 제34호. 이 신문을 보면 앞의 일화를 더욱 명확히 이해할 수 있다. 오른쪽 위에 중외일보라고 크게 신문 이름이 있다. 그리고 그 옆에 세로로 ‘差お’라 쓰여 있다. 이는 차압(差押), 즉 압수라는 뜻이다. 검열자가 빨간 줄로 그은 것을 바탕으로 무슨 기사가 문제였는지 알 수 있다. 가장 큰 표시로는 「순백(純白)한 포금(布錦)에 덥히신 폐하(陛下)」인데, 쉽게 풀면 ‘새하얀 이불에 덥히신 폐하’라는 뜻이다. 제목만 봐도 이 기사가 왜 검열 대상이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일본 왕실의 기밀 정보인 일왕의 건강 위독을 누설했기 때문이다. alt 1926년 12월 18일자 『중외일보』 검열본(좌)과 삭제본(우)_검열본(좌)에는 중외일보라는 제목 옆에  압수라는 뜻의 차압이 빨간색으로 쓰여있다. 검열 대상이 된 19개 항목의 기사 이외에도 일제가 어떤 기사를 검열했는지는 쉽게 추측해볼 수 있다. 일본의 조선 통치에 방해가 되는 기사 그리고 일본을 욕보이는 기사일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검열당국이 무엇을 검열할 것인지에 대해 자세히 정리해놓았다는 점이다. 1928년부터는 업무량이 더욱 늘어 매뉴얼이 필요했는지, ‘간행물행정처분표준’에 사례를 모아서 정리하였다. 이듬해에는 ‘조선문 간행물 행정처분 예’라고 이름을 바꾸어 정리하였다.**  이 기준에 따르면 기사는 19개 항목 중 하나에라도 해당하면 검열 대상이 되었는데 대표적인 예로는 다음과 같다. 1.(일본) 황실의 존엄을 모독하는 기사 2.국헌을 교란코자 하는 기사  … 6.형사 피고인 범죄인 또는 사형자를 구호하거나 또는 범죄를 선동하는 기사 7.(일본) 제국을 모욕하거나 또는 저주하는 기사 … 9. 조선통치를 부인하는 기사 10. 조선통치를 방해하는 기사 11. 사유재산제도를 부인하는 기사 12. 계급투쟁 기타 쟁의를 선동하는 기사 … 16. 외설, 난륜, 잔인, 기타 풍속을 해칠 기사 … ** 정진석, 『조선총독부의 언론검열과 탄압』 (커뮤니케이션북스, 2008), 177쪽. 위와 같은 기준에서 검열·압수된 신문의 운명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압수된 신문은 원칙적으로 출판·배포할 수 없다. 즉 제34호 신문지는 이제 세상에 빛을 못 보게 된 셈이다. 하지만 신문사가 여기서 일을 그만둘 수는 없다. 취재한 수고는 물론이거니와 그 당시도 신문의 최대 수입원이었던 광고비를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언론인이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려는 시도에 굴복해 신문을 포기할 수는 없다. 그리하여 신문지는 앞선 일화에서 말하듯 문제의 기사를 삭제하고, 신문 번호를 없애 호외를 낸다. alt 1926년 12월 18일자 『중외일보』 검열본 제호 옆에 압수 표시와 호외(號外)라고 쓰인 한자를 확인할 수 있다.  해당 신문은 검열 받은 뒤에 기사를 삭제하고 낸 호외 역시 압수를 당하였음을 알 수 있다. alt 1926년 12월 18일자 『중외일보』 검열본(위)과 삭제본(아래)를 보면 상단에 '제34호'가 삭제되었다. 문제 부분만 도려내고 호외로 발행 흔히들 “호외요! 호외!”라고 외치는 신문팔이 소년의 모습을 그릴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호외란 무엇인가? 말 그대로 정해진 신문 호수 외의 신문을 일컫는다. 그렇기에 옛 신문사들은 정규 신문에 싣지 못한 중요 속보를 호외로 내보낸 셈이다. 1920~30년대 신문들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정규 호의 신문은 압수되어 없어졌기 때문에, 그 신문의 문제 부분만 삭제하고 나머지는 호외로 발행하였다.      기사가 삭제된 신문을 보면 무슨 말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기사가 사라진 중외일보 글씨 오른쪽을 보면, 호외(號外)라고 쓰인 한자를 확인할 수 있다. 심지어 여기서는 검열로 압수당해 호외로 낸 신문에도 압수 표시가 있다. 일본 당국의 검열은 한 번에서 그치지 않고 끊임없이 이어졌던 것이다. 또한 검열 표시가 있던 신문지의 왼쪽 가장 상단에는 있던 ‘제34호’ 글씨도 잊지 않고 삭제하였다. 소극적이긴 하지만 이것이 일제 당국에 대항한 당시 언론인들의 저항이었던 셈이다.그뿐만 아니라 여러 기사들은 삭제되지 않고 그대로 남기기도 했다. 빨간 줄이 그어졌지만 기어코 내보낸 기사들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 기사들을 삭제하지 않은 속사정을 구체적으로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이상한 것은 일왕의 건강 문제로 총독부가 기사를 삭제했음에도, 「폐하 용태 급변으로 양 전하 안뜰로 들어가시다」라는 제목의 기사로 일왕의 건강 문제를 여전히 노출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역사를 공부하면서 느끼는 재미 중 하나는 이런 것이지 않을까 싶다. 여기서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사료는 많은 것을 말해주지만, 말하지 않는 것도 많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도 한 번 추측해보며 또 다른 흥미를 느껴보길 바란다.  alt 1927년 3월 1일자 『중외일보』 검열본(좌)과 삭제본(우)을 보면 태화관 사진이 삭제되었다. 사진 한 장으로 삭제 처분 받은 기사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이 소장한 『중외일보』 중 검열 전과 후 버전이 모두 있는 것은 총 16개 호, 27개 기사이다. 이 중에서 특이하게 사진 한 장으로만 삭제 처분 받은 기사가 있다.새 봄을 맞는 태화관. 사진의 제목만으로도 검열 사유를 짐작할 수 있다. 태화관은 3·1 운동 당시 민족 대표 33인이 독립선언서를 발표한 곳이다. 이곳에서 3·1 운동을 시작했으니 독립운동의 상징과도 같은 셈이다. 1927년 3월 1일자 신문을 만든 편집자는 사진을 통해 8년 전의 뜨거웠던 독립운동의 열기를 다시 기억하고자 했을 것이고, 총독부 검열관도 그 의도를 충분히 파악했을 것이다. 이처럼 정치·사회 소식을 전하는 기사뿐만 아니라 사진 혹은 만화·문학·여행기 등도 검열관의 눈을 피할 수 없었다. alt 〈일제는 무엇을 숨기려 했는가?〉 전시장 모습 역사를 읽는 즐거움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은 올해부터 로비 공간을 이용하여 시의성 있는 중요 소장품을 몇 점 공개하고 있다. 『중외일보』 검열본을 공개하는 이번 전시에서는 공간 한계 상 27개 기사를 모두 실물로 선보일 수는 없지만, 온라인 공간에 원문과 현대어 풀이를 모두 공개하였다. 역사에 관심 있는 독자 여러분들도 직접 찾아 읽으며 역사를 해석하는 즐거움을 맛보기 바란다. 교과서에서 말해주지 않는 1926~27년 당시 사회 분위기를 알 수 있는 것은 덤이다. ]]> Fri, 30 Sep 2022 15:48:55 +0000 71 <![CDATA[세계 산책 튀니지 독립과 건국의 아버지 하비브 부르기바]]> 글 임기대(부산외국어대학교 프랑스어권아프리카연구소장)   오늘날 아랍국가 중 서구식 민주주의를 실행하는 국가라고 한다면 단연 튀니지이다. 튀니지의 서구식 민주주의는 하루아침에 일궈낸 것이 아닌 오랜 독립운동을 통해 얻은 것으로, 이 중심에는 하비브 부르기바라는 인물이 있다. 그는 내부적으로는 온건한 경제개혁을 실행했으며, 대외적으로는 이스라엘을 포함한 아랍 제국과의 우호관계를 유지하려 노력하였다. 이러한 그의 독립운동 노선은 오늘날까지 유지되고 있는 튀니지의 국가 정체성과도 부합한다. alt 하비브 부르기바(1903~2000)(좌) / 부르기바가 발간한 민족주의 일간지,『락시옹 튀니지엔느(L’Action Tunisienne)』(우) 하비브 부르기바, 그는 누구인가 하비브 부르기바는 1903년 튀니지 모나스티르(Monastir)에서 출생했으며, 튀니스와 파리에서 법학을 공부했다. 1930년대는 식민지 국가의 유학생들이 프랑스에서 자신들의 정체성 찾기 운동을 한 시기였는데, 부르기바 또한 이 시기 분위기에 영향을 받아 민족주의 일간지 『락시옹 튀니지엔느(L’Action Tunisienne)』를 발간해 식민지배자들의 착취 메커니즘을 고발하는 한편 민족주의를 지지하면서 튀니지인의 국가 독립을 주장하였다. 부르기바는 이를 위해 간혹 투쟁도 불사했고, 프랑스 당국의 검열과 항의 투쟁에 대한 진압으로 투옥되기도 했다. 1945년 이집트 카이로에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진두지휘했지만, 또다시 체포되어 구금되었다가 1954년에 풀려났다. 이후 1955년 프랑스가 튀니지의 독립을 약속하면서 부르기바 또한 귀국하여 이듬해 튀니지왕국의 총리가 되었으며, 1957년 튀니지공화국을 선언함과 동시에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1975년 종신 대통령으로 취임했지만, 1987년 11월 총리이자 ‘아랍의 봄’의 주역이었던 벤 알리(Ben Ali)가 무혈쿠데타를 일으키면서 해임되었다. 실용주의적 접근으로 주도한 독립운동 부르기바는 갓 서른 살이 넘은 1934년부터 튀니지 독립운동의 구심점이 되었다. 그는 독립운동이 실용주의적 접근 속에서 이뤄져야 한다는 믿음을 가졌다. 또한 독립운동이 일부 엘리트층의 전유물이 아닌 전 국민의 운동이 되어야 함을 강조했다. 동시에 당시 세계 흐름을 주시하면서 아랍이슬람주의를 고수하면서도 최대한 서구사상에 다가서려 했다. 1934년까지 대(對)프랑스 독립투쟁을 주도했던 데스투르당(Destour, 헌법자유당)이 활약상을 보이지 않자 탈퇴하여 신(新)테스투르당(Neo-Destour, 신헌법자유당)을 창설했고 서기장에 선출되었다. 이때 그가 발간한 『락시옹 튀니지엔느』는 당의 기관지 역할을 했다. 부르기바는 당의 조직을 전국적인 조직으로 발전시켰고, 프랑스 식민당국의 무력탄압에 대비하였다. 독립운동을 할 수 있는 중간 간부를 대거 육성함으로써 체포나 추방으로 생긴 공백을 극복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에는 프랑스의 나치 협력체제인 비쉬(Vichy) 정부에 억류되어 회유를 협박받았지만, 끝내 굴하지 않고 연합군 편에 섰다. 이 선택은 훗날 프랑스로부터 수월하게 독립할 수 있는 발판이 되었다. 무력이 아닌 협상으로 쟁취한 독립 전쟁 후 부르기바는 중동국가와 미국·유럽 국가들을 돌며 튀니지 독립의 당위성을 호소했다. 이때 다른 한편에서는 아랍주의에 기반한 독립운동가들이 극단적 투쟁을 이어가고 있었고, 프랑스는 무력제재로 이에 대응하고 있었다. 또한 프랑스의 무력개입을 떠나 튀니지 독립운동가들 간의 내부투쟁도 본격화되었는데, 서구식의 세속주의냐 아랍민족주의냐 하는 노선을 두고 독립 전부터 대립해온 것이 오늘날까지 튀니지 사회에 내재해있는 구조적 문제가 되고 있다. 결국 프랑스는 온건주의자이자 서구식 개혁주의에 많은 관심을 보인 부르기바와 독립 관련 협상을 진행했다. 1955년 4월 부르기바는 에드가 포르(Edgar Faure, 1908~1988) 총리와 협상을 통해 외교와 국방을 제외한 튀니지 전역에서 군대를 철수시킨다는 협정을 끌어냈다. 이듬해인 1956년 3월 20일 프랑스는 결국 튀니지의 독립을 승인했다. 이는 인접국가인 알제리가 전쟁을 통해 독립을 쟁취한 것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이처럼 부르기바는 독립운동을 하는 데 있어 무력보다 최대한 협상을 통한 독립 쟁취를 추구했다는 점에서 오늘날까지도 튀니지의 탁월한 지도자로 인정받고 있다. 같은 해 군주제를 포기하면서 부르기바는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이와 동시에 이슬람교를 국교로 삼았지만, 일부다처제를 폐지하고 이혼을 억제하는 친여성정책을 펼쳤으며 노동생산성에 타격을 입히는 것으로 논란이 있던 라마단(Ramadan)을 폐지하고자 했다. 독립 후에도 프랑스와 맞서 싸우다 독립 후 아랍이슬람 국가에서 그가 선택한 노선은 대개 이슬람주의자에게는 받아들이기 힘든 조치였다. 독립운동을 통해 아무리 명망이 높아졌다고 해도 아랍국가에서 그의 정책은 쿠데타의 위험을 안고 살 수밖에 없었다. 이에 그는 경제발전을 이루면서도 군사 쿠데타 위협을 제거하기 위해 최소한의 군사력을 유지하고자 노력했다. 총예산의 25% 이상을 교육과 농업에 투자했고, 국방비 지출은 10%를 넘지 않게 했다. 인접국가 알제리와 모로코가 지금까지도 아프리카 전체에서 1, 2위를 다툴 정도로 군비를 지출하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유목민의 정착을 지원했고, 서구식 행정 원칙에 따라 지역 행정 구도를 완성했다. 프랑스와는 온건주의에 입각한 태도를 보였지만 때론 적대적인 관계에 있기도 했다. 1961년 부르기바 대통령은 프랑스 군 기지가 있던 비제르트(Bizerte)에서 철군을 요구했다. 프랑스 정부가 이에 응하지 않자 군사력이 든든하지는 않았지만 곧바로 비제르트를 공격했다. 2년 동안 1,000명의 사망자를 내면서 결국 비제르트를 자국 내 편입시키면서 국민들을 열광케 했다. 1964년에는 국민들의 굳건한 지지 속에서 프랑스인 소유 농지 국유화를 성공적으로 실행하였다. 그가 이룬 오늘날의 튀니지와 부르기비즘 튀니지 국민들은 독립운동 당시부터 주장한 부르기바의 실용주의 노선을 따르며 오늘날 튀니지가 다른 어떤 아랍국가보다 서구화되고 실용주의 국가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낀다. 튀니지라는 국가에 대한 체제 정비와 개혁 정치에 돌입하며 세속주의 이슬람국가를 건설하려 한 그를 일컬어 튀니지의 ‘케말 파샤’(튀르키예 대통령)라고도 부른다. 그가 추구한 독립운동 노선은 이후 ‘부르기비즘’(Bourguibism)으로 불리면서 튀니지 현대화에 기여했다. 부르기바의 이름을 딴 ‘부르기비즘’은 튀니지 현대 정치에 있어 중요한 요소로 터키의 ‘케말주의’와 흡사하며 튀니지 제1야당의 ‘칼브 투네스’(튀니지의 심장)의 이념이기도 하다. 부르기비즘은 독립에 대한 강한 의지와 민족주의를 기반으로 하여, 경제발전과 강력한 세속주의·복지국가건설·근대화를 주장하며 유럽과 아랍을 잇는 가교 역할을 하겠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이는 튀니지가 오늘날까지 추구하고 있는 사상이기도 하며, 아랍이슬람 국가이면서 서구와의 관계를 돈독히 하는 배경이 되고 있다. 이처럼 부르기바의 국가관과 독립운동관은 독립운동 과정부터 국가건설 과정에서 잘 드러나는데, 이는 오늘날의 튀니지를 이해할 때 빠트릴 수 없는 요소가 되었다. ]]> Fri, 30 Sep 2022 15:58:08 +0000 71 <![CDATA[기념관은 지금 만 오천여 명의 독립운동가를 하나의 사전에 담다]]> 정리 편집실    사진 이소연   독립운동가들 한 사람, 한 사람의 발자취를 복원하고 모아서 사전을 만드는 사람들이 있다. 독립기념관 학술사업부 인명사전편찬팀이다. 이들은 2020년 발간한 『한국독립운동인명사전』 1~2권에 이어 최근 9월 5~7권까지 발간하여, 이로써 현재까지 총 4,244명(1~7권)의 독립유공자들을 인명사전에 담았다. 이번 호에는 인명사전편찬팀을 찾아가 평소 인명사전에 관한 궁금했던 이야기와 앞으로의 계획을 들어본다. alt (왼쪽부터) 김주성, 이재호, 정민준, 김국화, 최우석, 임동현, 구병준, 김인아, 차현지, 조성진 인명사전편찬팀을 소개해주세요.  2015년 광복 70주년을 계기로, 2018년까지 정부로부터 서훈을 받은 독립유공자 15,178명의 생애와 활동을 『한국독립운동인명사전』으로 발간하고 있습니다. 인명사전편찬팀은 현재 독립운동 분야를 전공한 총 10명의 연구원들로 구성되어, 2024년 완간을 목표로 진행 중입니다. 2019년에는 특별판(3권)을 발간하고 2020년 1,2권 발간을 시작으로, 최근 9월 제7권까지 발간을 진행하였습니다.  최근 발간된 5~7권에는 어떤 인물들이 수록되었나요? 지난 9월에 발간한 『한국독립운동인명사전』 5~7권에는 2018년까지 정부로부터 서훈된 독립유공자 가운데 ‘김연배’부터 ‘남재정’까지 1,814명의 활동과 생애를 수록하였습니다. 이로써 현재까지 총 4,244명(1~7권)의 독립유공자가 인명사전에 담기게 되었습니다. 특히‘청산리전투의 지휘관’ 김좌진 장군, ‘유림계열 지도자’ 김창숙 선생, ‘동양척식 투탄 의거의 주인공’ 나석주 의사, ‘만주 독립군의 어머니’ 남자현 선생 등 여러 독립운동가의 삶과 활동을 다루었습니다. 이를 위해 120여 명의 한국 근·현대사 전공자들이 집필자로 참여하여 독립운동가 한분 한분의 삶의 역정과 활동을 사실 그대로 기록함과 동시에 그동안 독립기념관에서 수집한 사진과 다양한 자료들을 함께 제공하여 입체적으로 내용을 이해할 수 있도록 구성하였습니다. alt 편찬 과정 중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점이 있다면? 사전이 나오기까지 원고 집필, 교정·교열, 검수 등의 과정을 여러 차례 거칩니다. 그중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점은 원고의 객관성인데요. 인명사전이니 만큼 주관적인 가치 판단 없이 자료를 객관적으로 대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러한 과정에서 집필자와 검수자의 의견이 출동할 때가 있는데, 그때는 여러 연구원들이 교차 검증을 하면서 객관성을 확보해나갑니다. alt 의미있는 작업인 만큼 어려움도 있을 것 같은데요.  독립유공자들 중에는 자료가 충분한 분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기록이 부족한 분들이 많습니다. 그중에는 이름 한 줄과 공적 한 줄 정도만 남아있는 분들도 있습니다. 게다가 비밀결사조직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들은 말 그대로 ‘비밀’조직이었기에 자료를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러한 분들은 수많은 조사를 통해서 최대한 많은 이야기를 복원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인명사전을 PC·모바일에서 이용할 수 있나요? 인명사전은 독립기념관 홈페이지에서 웹사전으로 만나 볼 수 있는데요. 지난 1919년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발간한 특별판 3권과 1~4권도 다음 카카오사전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alt 『한국독립운동인명사전』은 현재 1~7권과 특별판(3권)까지 편찬하였으며, 2024년까지 총 25권을 편찬할 계획이다. 다른 검색사이트와 차별되는 점이 있다면? 일반 검색사이트에서 독립운동가를 검색해보면 출처를 알 수 없고 게다가 상당한 오류까지 포함된 정보를 습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인명사전을 이용하면 객관적 사실에 기반한 정확한 정보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일반 검색사이트에서는 알 수 없는 지금껏 주목받지 못한 독립운동가들의 일대기를 찾아볼 수 있으니 많은 이용과 관심 부탁드립니다. 앞으로의 계획과 전하고 싶은 바가 궁금합니다. 올해 연말까지 8~9권 발간 목표로 작업을 진행 중이며, 2024년까지 총 25권을 편찬할 계획입니다. 또한 웹사전뿐만 아니라 앞으로 대중들이 인명사전을 더욱 쉽고 편하게 접하도록 다양한 매체를 통해 홍보하겠습니다. ]]> Fri, 30 Sep 2022 16:03:58 +0000 71 <![CDATA[독자참여 ]]> alt alt alt alt 아이콘을 클릭하면 퀴즈 정답을 보낼 수 있습니다. ]]> Fri, 30 Sep 2022 16:12:12 +0000 71 <![CDATA[들어가며 한국독립운동사 관점에서 바라본 태평양회의]]> alt 태평양회의(1921.11.12.~1922.2.6.) 제1차 세계대전 후 1921년 11월 12일부터 1922년 2월 6일까지 열국(列國) 간 해군 군비 축소와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현안을 논의하기 위해 미국에서 ‘워싱턴 회의’가 개최되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비롯한 당대의 한국인들은 이 회의를  ‘태평양회의’라고 불렀다. 이를 계기로 전통적 대륙 국가관을 탈피하여 새롭게 ‘태평양’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한편, 회의에 초대받지 못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태평양회의를 민족자결주의에 근거한 외교독립운동의 마지막 기회로 인식하였다. 이를 위해 홍진을 중심으로 대태평양회의외교후원회, 안창호를 중심으로 외교연구회를 조직하여 자금 모금을 하는 등 한국문제가 회의 의제로 선정되도록 다각적으로 노력하였다.  국내에서는 사회지도급 인사들이 연명으로 날인하여 한국의 독립을 청원하는  「한국인민치태평양회의서」를 대표단에 보내 활동을 뒷받침했고, 반도고학생친목회를 중심으로 임시정부를 후원하는 등 세계 평화와 한국의 자주독립을 위해 많은 노력들이 이어졌다.     이러한 간절한 바람에도 미국정부는 한국대표단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결국 의제에서 한국문제는 완전히 제외되고 말았다. 파리강화회의에 이어 태평양회의에서도 성과를 얻지 못한 임시정부 요인들은 자책하였지만, 좌절하지는 않았다. 비록 외교를 통한 독립에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다시 전열을 가다듬어 일제를 상대로 다양한 독립운동을 지속하였다. 그 결과 1945년 마침내 꿈에 그리던 광복을 맞이하게 되었다.       ]]> Fri, 28 Oct 2022 09:20:51 +0000 72 <![CDATA[톺아보기 태평양회의, 대한독립의 사활을 걸다]]> 글 박성순(단국대학교 사학과 교수) 1921년 11월 12일부터 1922년 2월 6일까지 미국 주도하에 영국·프랑스·이탈리아·일본·중국 등 9개국 대표단이 참가하여, 해군 군비 축소와 동아시아·태평양 지역의 현안들을 논의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이 회의에서 한국문제가 주요 의제로 다루어지리라 전망하고 적극적인 외교활동을 전개하기로 결정하였다. 임시정부는 이 회의를  ‘절실하고 중대한 생사의 문제’로 받아들였다. alt 태평양회의 한국대표단 (구미위원부 앞, 1921.11) ‘태평양회의’로 불린 ‘워싱턴회의’의 의미   1921년 11월 12일부터 1922년 2월 6일까지 미국에서 워싱턴회의가 개최되었다. 이 회의는 워싱턴 해군회의(Washington Naval Conference), 해군 감축에 관한 국제회의(International Conference on Naval Limitation) 또는 이를 줄인 워싱턴 군축회의 등으로도 지칭된다. 그런데 유독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비롯한 당대의 한국인들은 이 회의를 모두 ‘태평양회의’라고 불렀다. 거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 워싱턴회의를 계기로 종래 중국 중심의 세계질서관인 전통적 대륙 국가관을 탈피하여 새롭게 ‘태평양’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1920년대 국내 신문과 잡지에는 ‘태평양’이라는 지명이 빈출하였는데, 이는 당시 한국인들의 세계관이 중국에서 벗어나 미국 중심의 세계관으로 전이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한 단면이다.       태평양회의는 미국의 주도하에 영국·프랑스·이탈리아·일본·중국·벨기에·네덜란드·포르투갈 등 9개국 대표단이 참가하여 해군 군비 축소와 아울러 동아시아·태평양 지역의 현안들을 논의하였다. 임시정부는 이 회의에서 한국문제가 주요 의제로 다루어질 것이라는 전망을 갖고 적극적인 외교활동을 전개하기로 하였다. 임시정부는 이 회의를 ‘절실하고 중대한 생사의 문제’로 받아들였다.  게다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새로운 강자로 떠오른 일본을 기존의 열강들이 어떻게 제어할 것인가도 독립운동가들에게는 초미의 관심사가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종결된 후 유럽 열강은 미증유의 전쟁 참화로 쇠락의 길로 접어든 반면 미국과 일본이 새롭게 부상했다. 특히 일본이 ‘5대 강국’의 반열에 끼면서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의 세력균형을 전면 재조정해야 할 필요성이 대두하였다. 이에 미국 대통령 하딩(Warren G. Harding)이 군축문제와 동아시아·태평양 지역의 제반 문제를 포괄적으로 다룰 국제회의를 관련국들에 제의하여 태평양회의가 개최된 것이다.  alt 태평양회의(1921.11.12.~1922.2.6.)(좌) / 당시 미국 대통령 하딩(Warren G. Harding)(우) 만주지방 한인과 중국인들의 호응 서간도 독립운동세력들 또한 미국 워싱턴에서 태평양회의가 개최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연래의 희망 달성은 바로 이 기회에 있다고 여겼다. 각지의 독립운동가들과 마찬가지로 성과를 높이기 위해서 장정 모집·자금 모집·무기 수집에 힘쓰는 등 급히 활동을 개시했다. 그중에는 국내 진입을 주장하면서 중국 관병 같은 복장에 정예한 총기를 휴대하고 대열을 지어 한만 국경지역에 출몰함으로써 일제를 긴장시켰다. 임강현(臨江縣) 오지 화개산(花開山)에서는 태평양회의 당일 그곳 거류 한인들이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콴뎬(宽甸)지방의 독립운동가들은 반일인쇄물을 반포하여 배일(排日)기세를 높였다. 북간도 방면에서도 태평양회의 개최 보도가 전해지자 1921년 9월경 돈화현(敦化縣)에 있던 이홍래(李鴻來)와 연해주 방면에 있던 최경천(崔慶天) 일파가 활발하게 부하들을 간도지방에 잠입시켰다. 그리고 그곳에서 태평양회의에서 한국독립을 요구해야 한다는 여론을 고조시켰다. 그곳의 한인들도 이를 믿고 자금거출에 응했고, 대표자는 상하이 임시정부를 내왕하였다. 그 바람에 평소 친일파로 분류되던 자들도 태평양회의 외교운동의 성공 여부를 반신반의하며 지켜볼 정도였다.           중국인들도 한인들의 태평양회의 참가를 후원하였다. 광둥(廣東) 중한협회(中韓協會)에서 기금을 조성한 것이다. 일제는 광둥 지방 중국 관민이 모두 한국독립운동을 성원함으로써 태평양회의에서 일본의 주장을 견제하려는 저의가 있다고 파악하였다. 태평양회의에 참여하는 한인들에 대한 중국인들의 원조는 물론 임시정부 요인들이 노력한 결과였다. 임시정부는 당시 국무총리대리 겸 외무총장을 겸임하던 신규식의 명의로 중국 각계 요인들에게 글을 보냈다. 태평양회의에 참여하는 중국 대표들에게도 한국의 독립문제를 의안으로 제출해 주기를 바라고, 이것이 당금 중국이 한국을 원조할 가장 시급한 문제라는 점을 피력하였다.     alt 「워싱턴회의에 보내는 한국의 호소문」일부(좌) / 신규식(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대응 임시정부는 미국에서 활동할 한국대표단원으로서 미국에서 구미위원부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던 이승만과 서재필·정한경을 각각 단장·부단장·서기로 임명하였다. 이승만과 서재필은 워싱턴에서 미국의 중요인물을 방문하여 동 회의에서 한국문제가 유리하게 토론되도록 운동하였다. 태평양회의에 출석할 미국위원에게는 한국독립 승인문제를 솔선하여 제출하고, 동시에 한국대표로 하여금 동 회의 석상에서 한국의 사정을 직접 설명할 기회가 있도록 주선하였다. 일반 인사들에게는 한국이 당연히 독립할 이유를 설명하고, 원조할 이유가 있음을 설명하였다. 임시정부에서는 이러한 사실을 국내에도 알려 국내 유력자나 반일세력들이 이에 호응하도록 유도하였다. 1921년 8월 30일 태평양회의에 제출할 「我 대한민국의 요구 서류」가 임시정부 국무회의에서 작성 통과되었다. 그러나 정부가 작성한 이 서류의 실체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전혀 없다. 한편 국내에서는 사회지도급 인사들이 연명으로 날인하여 한국의 독립을 청원하는 문서를 작성하였다. 그렇게 만들어진 「한국인민치태평양회의서(韓國人民致太平洋會議書)」는 황족대표 1명, 귀족대표 2명을 포함하는 단체대표 101명과 전국 지역대표 271명 등 총 372명이 서명하고 인감을 찍었다.           9월 하순에 작성이 완료된 이 문서는 상하이 임시정부에 비밀리에 전달되었다. 임시정부는 이 문서를 다시 태평양회의에 한국대표로 파견된 한국대표단에게 발송하였다. 한국대표단은 1922년 1월 2일 태평양회의 사무총장에게 「한국인민치태평양회의서」를 보냈다. 정한경은 ‘워싱턴군축회의 한국대표단 서기’의 이름으로 이 문서를 태평양회의 사무총장에게 보내면서, 한국 전국 8도 및 260개 지역 출신의 공식적인 권한을 위임받은 대표들의 서명을 받아 작성된 문서라는 점을 확인해 주었다. 이 문서의 중요한 내용은 한국이 중국·러시아·일본 사이에 개재한 동양의 중심으로 한국의 문제가 곧 세계의 문제가 되므로 금번 태평양회의 의안도 한국을 중요시 아니 할 수 없다는 점, 한국문제를 최선하게 해결하지 못하면 동양의 평화는 보전할 수 없고 동시에 태평양회의 목적인 세계평화를 성취할 수 없다는 점, 일본의 한국 합병은 본래 한국민족의 의사가 아니었다는 점, 동시에 (상하이에 있는) 한국정부를 완전히 한국정부로 성명하고 열국에게 한국에서 파견하는 위원의 출석권을 요구하며 열국이 일본의 무력정책을 방지하여 세계평화와 한국의 자주독립을 위해 노력하기를 기원한다는 점 등으로 구성되었다. alt 「한국인민치태평양회의서」일부(좌) / 태평양회의 참석을 위해 미국에 도착한 정한경(왼쪽)과 이승만(오른쪽)(우) ]]> Fri, 28 Oct 2022 09:27:23 +0000 72 <![CDATA[만나보기 반도고학생친목회를 중심으로 임시정부를 후원하다]]> 글 박성순(단국대학교 사학과 교수)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파리강화회의 이후 개최되는 태평양회의를 한국독립운동을 위한 절호의 기회로 활용하고자 총력을 기울였다. 태평양회의에 한국독립을 청원하는 「한국인민치태평양회의서」를 전달하거나, 임시정부 국내 운동거점 조직인 반도고학생친목회를 중심으로 태평양회의를 후원하는 등 많은 노력이 이뤄졌다. 반도고학생친목회를 중심으로 임시정부를 후원한 장형의 활약상을 조망해본다. alt 장형 대태평양회의외교후원회와 반도고학생친목회의 결성임시정부의 태평양회의 대책 중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진 것은 경비 조달 문제였다. 파리강화회의 때 준비 부족으로 재정의 곤란을 겪었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임시정부는 1921년 8월 13일 상하이에서 대태평양회의외교후원회(對太平洋會議外交後援會)를 발족시켰다. 재무차장 이유필(李裕弼)은 외교후원회가 설립되어 재정후원자가 벌써 수백 명에 이르렀다고 발표하였으나, 현실에서는 경비문제가 아직도 심각하다는 점을 토로하였다.  같은 날 국내 서울에서는 장형(이명 장세담)을 총재로 하는 반도고학생친목회(半島苦學生親睦會)가 조직되었다. 장형은 신민회 활동 시기부터 양기탁·유동열·김구·이시영 같은 신민회 요인들에게 독립운동 자금을 제공하였고, 1910년대 초반에는 국내에서 망명하는 청년들을 신흥무관학교로 인도하는 특무공작을 수행했던 독립운동가였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만주의 독립군 부대들이 등장했을 때도 이들에게도 군자금을 제공하였다. 그러던 중 상하이에서 대태평양회의외교후원회가 설립되던 같은 날짜에 국내에서 반도고학생친목회를 조직한 것이다.  alt 이유필(좌) / 반도고학생친목회 조직 사실을 보도한 『동아일보』 기사 (1921.8. 20.)(우) 상공진흥회가 조직한 반도고학생친목회반도고학생친목회는 고학생 단체를 표방하였으나, 실제로는 상공진흥회라는 단체의 인물들이 특수한 목적을 위해서 별도로 조직한 임시 기구였다. 상공진흥회 본부회장 역시 장형이었다. 상공진흥회는 명칭상 경제인 모임을 표방하였으나, 그 구성 인물들은 거의 대부분 독립운동가·교육운동가·청년운동가·언론인 등 독립운동과 민족운동에 종사하는 사람들이었다. 장형은 반도고학생친목회를 별도로 조직한 후 총재직을 겸직하였다.         특히 상공진흥회 인물들 중에는 임시정부와 각별한 관계에 있는 사람들이 섞여 있었다. 본부회장 장형은 물론이었고, 선천지회의 이영찬은 임시정부에서 교통부를 설립했을 때 교통부위원으로 활동했던 인물이었다. 그밖에 상공진흥회에는 독립군자금을 모집하던 인물들도 여러 명 포진해 있었다. 상공진흥회는 연통제가 실시되던 당시에 국내 각지에 연락거점을 설치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태평양회의 후원 조직이 필요해짐에 따라서 별도로 조직한 단체가 반도고학생친목회였다. 고학생 단체를 표방한 것은 문화정치의 영향으로 청년단체의 설립과 활동이 비교적 용이했기 때문이다.       임시정부가 당시 국내 각계 인사들의 서명을 받아 한국독립을 청원하는 문서인 「한국인민치태평양회의서」를 번역해서 워싱턴에 있는 태평양회의 주최 측에 전달하였을 때 반도고학생친목회 측에서는 총재 장세담·부회장 김시규·고문 김준의 이름으로 이 문서에 서명 날인하였다. 장형의 반도고학생친목회가 임시정부에서 추진하던 태평양회의 후원사업과 관련되어 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alt 여운홍(좌) / 『한국인민치태평양회의서』 일부_하단에 반도고학생친목회 대표 장세담(장형의 이명)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다.(우) 독립운동 자금 조달에 공헌한 장형과 여운홍임시정부의 대태평양회의외교후원회에서는 태평양회의에 대한 국내에서 여론 환기와 소용 경비 마련을 위해서 서무간사 여운홍을 국내로 파견하였다. 여운홍이 국내로 들어와 함께 활동한 조직은 바로 반도고학생친목회였다. 여운홍은 이 단체의 고문과 연사로서 활동하면서 반도고학생친목회의 활동에 깊숙이 관여하였다. 반도고학생친목회는 전국 순회강연을 하면서 계몽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각 지방의 민족·언론운동, 종교단체 대표, 실업가 등을 만나는 별도의 시간을 가졌다. 이 모임에는 총재 장형과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파견된 여운홍이 항상 함께 하였다. 이 자리에서 장형과 여운홍은 자신들이 전국을 순회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강연회장에서 모집되는 동정금 외에 별도의 재정 지원을 요청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여운홍의 국내 파견 목적이 바로 태평양회의의 소용경비를 모집하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장형은 임시정부가 1919년 말 안둥 이륭양행(怡隆洋行) 2층에 안동교통사무국을 설치한 이후에도 여기에서 활동하던 오동진에게 독립운동 자금을 제공하였다. 오동진은 안동교통사무국 세력의 근간인 대한청년단연합회를 이끌면서 교통국 업무를 수행하였다. 대한청년단연합회는 1920년 총무 김승만을 상하이로 파견하여 8,040원의 독립운동 자금을 임시정부에 전달하였다.        그리고 장형은 임시정부 재무부 참사 송병조에게도 독립운동 자금을 전달하였다. 임시정부는 1919년 11월 이륭양행에 재무부 파주소(派駐所, 일명 안동파주소)를 설치하여 송병조에게 안동파주소의 업무를 맡겼다. 업무는 주로 임시정부에 공급할 특별성금인 애국금과 공채금을 관리하는 것이었다. 당시 장형은 송병조를 통해서 임시정부 재무총장인 이시영에게 독립운동 자금을 전달하였다. 이와 같이 임시정부에 대한 군자금 지원 활동을 꾸준히 지속해 왔던 장형은 반도고학생친목회를 조직하여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국내에 파견된 여운홍과 함께 태평양회의 원조 임무를 수행한 것이다. 그런 자금 조달 능력이 훗날 광복을 맞은 조국에서 김구가 장형을 건국실천원양성소의 이사장으로 선임했던 배경 중 하나가 되었으리라 짐작된다. alt 태평양회의(1921.11.12.~1922.2.6.) 태평양회의 참가 노력의 의미결과적으로 태평양회의를 위한 임시정부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태평양회의에서 한국대표단은 회의에 출석하지 못했고, 한국문제의 상정 또한 실패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태평양지역에 대한 미국의 입지를 강화해주었고, 일본의 지위도 크게 상승시켜 서방 열강들로부터 동아시아의 강대국으로 공인받는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큰 기대를 걸었던 태평양회의 참가 노력이 파행으로 끝남으로써 임시대통령 이승만의 입지는 완전히 위축되었고 임시정부의 기능도 사실상 무력화되었다. 이에 따라 반도고학생친목회 고문으로 활동하던 여운홍도 더 이상 상하이로 귀환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태평양회의가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중국에서 이를 후원하던 중한협회의 활동이 사실상 중단되었던 것처럼, 국내에서 활동하던 반도고학생친목회도 자동 해소의 과정을 밟았다.       태평양회의 결과 워싱턴체제(Washington Treaty System)라는 국제질서가 탄생하였다. 그러므로 동아시아·태평양 지역에 관한 한 태평양회의는 1919년의 파리강화회의보다도 훨씬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 그렇지만 이 체제는 1930년대 초반 일본의 만주침략과 국제연맹 탈퇴로 파국을 맞이했다. 일제는 더 나아가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을 일으켜 세계를 전쟁의 공포 속으로 몰아갔다. 한국인들은 비록 태평양회의를 통한 외교독립에 성공하지 못했지만, 다시 전열을 가다듬어 일제를 상대로 한 다양한 독립운동을 지속하였다. 그 결과 1945년 마침내 꿈에도 그리던 광복을 맞이하게 되었다. ]]> Fri, 28 Oct 2022 09:33:06 +0000 72 <![CDATA[이달의 독립운동가 좌우를 넘어 민족유일당 운동을 이끈 박건병·강경선·배천택]]> 글 독립기념관 전시부   alt 민족유일당운동으로 전민족이 단결한 독립운동을 촉구하다 1920년대 중반, 국내외에서는 전민족이 단결한 정당을 조직하고 이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자는 민족유일당운동이 일어났다. 민족유일당운동은 1926년 안창호가 대독립당 결성의 필요성을 제기하며 확산되었다. 1926년 10월 베이징에서의 대독립당조직북경촉성회 결성을 시작으로 1927년부터 상하이·광둥·우한·난징 등지에서 잇따라 촉성회가 성립되었다. 그리고 1927년 11월 상하이에서 각지의 촉성회를 연결하여 유일당 조직을 주비할 모임을 결성하기 위해 5개 촉성회 단체가 연합한 한국독립당관내촉성회연합회가 결성되었다. 박건병·강경선·배천택은 베이징과 상하이 등지에서 민족유일당운동에 적극 동참하며 촉성회 성립과 활동을 주도하였다. alt 「오늘 우리의 혁명」, 『독립신문』 (1926.9.3.) _대한민국역사박물관 제공(좌)1926년 7월 8일 삼일당에서 개최한 연설회에서 안창호가 연설한 임시정부 유지와 혁명당 조직 촉구에 대한 내용이 게재되었다.박건병 사망기사, 『동아일보』 (1932.1.31.)(우)박건병의 북경한교동지회 기관지 주간 활동, 교육계 활동 등의 약력이 소개되었다. 박건병, 베이징에서 민족유일당운동을 이끌다 박건병은 1892년 강원도 김화에서 태어났다. 대한독립애국단 철원군단에서 활동하고 임시의정원 강원도 의원을 역임하였다. 이후 베이징으로 건너가 1920년 북경군사통일촉성회에 합류하였고 1923년 베이징 대표로 국민대표회의에 참석했으며 북경한교동지회(北京韓僑同志會)에서도 활동하였다. 관내지역에서 민족유일당운동이 시작되자 1926년 북경촉성회 결성에 참가하여 집행위원으로 활약하였고, 1927년 한국독립당 관내촉성회연합회 결성 때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정부는 박건병의 공훈을 기려 199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alt 한국유일독립당상해촉성회 선언서 (1927)_전주역사박물관 제공(좌)1927년 3월 결성된 한국유일독립당 상해촉성회의 선언문과 집행위원 명단이 담겨 있다.국민대표회의 개조파 성명서 (1923)(우) 강경선, 상하이를 거점으로 임시정부와 민족유일당운동을 지원하다 강경선은 1891년 평북 정주에서 태어났다. 상하이를 근거지로 활동하며 상해대한인거류민단(上海大韓人居留民團) 간사와 대한적십자회 상의원 등을 역임하였다. 1923년 국민대표회의에 참가하였고 이후 인성학교 교감, 임시의정원 평안도 의원, 임시정부 경제후원회 활동 등을 통해 임시정부의 운영과 지원을 위해 노력하였다. 관내지역 민족유일당운동에 동참하여 1927년 상하이지역에서 한국유일독립당 촉성회를 결성할 때 25명 중 한 명의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정부는 강경선의 공훈을 기려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alt 대독립당조직 북경촉성회에 관한 건 (1926.11.2.) 배천택, 베이징에서 무장투쟁과 유일당 결성을 주창하다 배천택은 1892년 경북 대구에서 태어났다. 1919년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에 동참했으며 1920년 북경군사통일촉성회 결성에 참여하였다. 1923년 1월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되자 서로군정서 대표로 참석하였다. 이후 베이징으로 돌아와 북경한교동지회에 참여하며 실행위원으로 활약하였다. 1926년 북경촉성회를 조직할 때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어 창립선언서와 간장(簡章)을 기초하였다. 1927년 한국독립당 관내촉성회연합회 결성에 참여하여 집행위원이자 상무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정부는 배천택의 공훈을 기려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alt ]]> Fri, 28 Oct 2022 09:38:27 +0000 72 <![CDATA[독립운동 사적지 만주지역 독립단체 통합을 위한 박건병의 독립운동 현장]]> 정리 편집실   만주지역 독립단체 통합에 나선 박건병 박건병(朴健秉, 1892~1932)은 1919년 8월 철원군 동송면 관우리 도피안사에서 김상덕 등과 함께 대한민국 임시정부 활동을 지원할 목적으로 대한독립애국단의 강원도 도단인 철원애국단을 조직하고, 학무과장으로 활동하였다. 같은 해 10월 철원면 사요리 우시장에서 군중에게 독립만세시위에 참가하도록 권유하는 등 주도적인 활동을 전개했다. 이후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임시정부에 참가하여 1920년 1월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강원도 대표의원에 선출되었다. 1921년 4월 각 독립단체의 통합을 위해 베이징에서 개최된 군사통일주비회(軍事統一籌備會)에서 국민대표회의 주비위원으로 선임되었으며, 1923년 1월 상하이에서 개최된 국민대표회의에 창조파의 일원으로 활동하였다. 1926년 10월 한국독립유일당 북경촉성회에서 장건상 등과 함께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고, 1927년 11월 상하이·난징·광둥·우한 지역 대표들이 모여 결성한 한국독립당관내촉성연합회에 참가하여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28년 5월 전민족유일당조직회에 참석하여 만주지역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을 위해 활동하였다.  alt 박건병 생가 터(생가 터 뒤에 보이는 건물은 화지5리 마을회관이다.) 박건병 생가 터 철원애국단·대한민국 임시의정원·한국독립유일당 북경촉성회 등에 참여하여 활동한 박건병의 생가가 있었던 곳으로 집터는 남아있지 않다. 주소 강원 철원군 철원읍 화지리 458-1 독립단체 통합을 위해 개최된 군사통일주비회 1921년 4월 24일 베이징에서 활동하던 이회영·신채호·박용만·신숙 등의 주도하에 군사통일주비회가 개최되었다. 군사통일주비회에는 국내의 국민공회·조선청년단·광복단·노동당·통일당, 노령의 대한국민의회, 하와이의 국민군과 국민단, 북간도의 군정서 등 대표들이 참석하였다. 이 회의에서 청산리대첩 이후 독립군부대의 정비 및 대오의 통일문제, 그리고 독립군부대의 지휘권 문제가 논의되었다. 독립군의 통할문제를 논의한 외에, 이 회의에서는 임시정부의 불신임 결의안을 통과시키기도 하였다. 그러나 1921년 5월 국민대표회 개최문제가 대두되면서, 군사통일주비회 활동은 더 이상 진전되지 못하였다. alt 군사통일주비회가 개최되었던 삼패자화원의 옛터 군사통일주비회 개최지 1921년 4월 24일 해외 독립운동 세력을 통할하려는 통일기관의 설치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군사통일주비회를 개최한 곳으로 이곳은 현재 재개발로 베이징동물원이 들어서 옛 모습은 찾아 볼 수 없다. 베이징동물원 정문 서쪽이 그 지점으로 추정된다. 주소 중국 베이징 서직문외대가(西直門外大街) 137호 ]]> Fri, 28 Oct 2022 09:44:05 +0000 72 <![CDATA[아름다운 인연 독립전장에서 꽃피운 사랑 한국광복군 신순호·박영준 부부]]> 글 김형목(사단법인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이사)   박찬익의 아들 박영준과 신건식의 딸 신순호는 아버지에 이어 독립운동에 나섰다. 이들은 한국광복군으로서 항일전선에 투신하며 사랑을 키워갔다. 두 사람의 결혼식에는 백범 김구가 주례를 맡았고, 민필호·조완구·김원봉·김성숙 등 각 당 대표들이 축사를 맡았다. 독립운동가들이 나라 잃은 설움도 잠시 잊고 하나가 되어 기뻐했던 순간이었다. alt 신순호·박영준의 결혼식 사진 박영준, 아버지 박찬익의 권유로 독립운동에 나서다 박영준은 1915년 11월 1일 중국 룽징에서 독립유공자 박찬익의 4남 2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박찬익은 관립상공학교와 수원농림학교 재학 중 국권회복을 위한 모임을 주도하다가 퇴학당한 후 대한제국기 최대비밀결사인 신민회에서 활동하였다. 이때 대종교에 입교한 후 중국 동북지역으로 망명하여 서일 등과 중광단을 조직하여 항일무장세력을 결성했다. 이들은 중국과 교섭하여 총 300정과 수류탄 150발 등을 확보함으로써 무장단체로 정비할 수 있었다.    박찬익의 원만한 대인관계와 탁월한 외교적 감각은 훗날 임시정부의 외교정책을 이끄는 든든한 밑거름이었다. 독립군 양성의 요람지인 신흥무관학교에서도 중국어와 한국 역사를 가르치며 민족의식과 항일의식 고취에 열정을 불태웠다. 대한독립의군부 창설과 대한독립선언서 발표에도 참가하는 등 중국 동북지역 항일운동을 이끄는 선각자로서 위치할 수 있었다.               상하이 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 수립에 참여하여 임시정부 후원회 의원과 임시의정원 의원 등을 맡았다. 신규식이 서거한 이후로 외무부 외사국장과 외무차장으로 임시정부의 ‘외교창구’ 역할을 자임하고 나섰다. 또한 중국과 외교 협상뿐만 아니라 독립운동가들의 석방에도 적극적이었다. 이봉창과 윤봉길 의거 이후 안공근과 엄항섭 등과 함께 대중국 외교교섭을 진두지휘하였다. 김구와 장제스의 회담 성사는 물론 한국인 청년들의 중국 군관학교에서 군사훈련을 받을 수 있는 밑그림을 마련한 주인공이 바로 박찬익이다. alt 중국 군관학교 졸업생(1941, 아래 줄 가운데 박영준) 한국광복군으로 항일전선에 투신하다 박찬익이 독립운동에 전념한 탓에 박영준은 아버지의 얼굴을 거의 보지 못한 채 자랐다. 1930년경 상하이로 가서 아버지를 만난 그는 민족문제를 함께 고민하며 항일의식에 관심을 기울였다. 이때 박영준은 아버지 권유로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일제의 동향을 분석한 보고서나 서신 전달 등이 그가 맡은 첫 번째 임무였다. 본격적인 독립운동은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에 가담하면서 시작되었다. 항일연극과 강연·음악공연·전단 배포 등을 펼치며 반전의식과 항일의식 고취 및 초모공작에도 적극적이었다. 한편 임시정부의 인재양성 계획에 따라 중국중앙군관학교 특별훈련반에 입교하여 1941년 12월 졸업하기도 했다. 중앙군관학교에 재학 중이었던 1940년 9월 충칭에서 한국광복군 전례식이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그는 광복군 제3지대에 배속되어 지대장인 김학규의 부관으로 주어진 임무에 충실하였다. 대원들과 함께 일본군에 강제로 징집되었던 한국인 병사들을 초모하는데 진력을 기울였다. 다수 학병·지원병·징집병을 포섭하여 이들을 충칭 총사령부로 보내어 한국광복군에 배치시켰다.          1942년 4월부터는 상위(上尉)를 맡아 충칭에 있는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서무과에서 근무하였다. 이후 임시정부 한인청년회 문화부장과 총사령부 서무과장 등을 맡았다. 이때 독립운동가 신건식의 딸인 신순호와 만나 열애 끝에 결혼했다. 그녀의 적극적인 성격과 부상을 당한 자신의 병수발에 크게 감동을 받았다. 1944년 6월에는 이시영 재무장으로부터 위임장을 받고 임시정부 재무부 이재과장(理財科長)으로서 능력을 발휘하였다. 1945년 3월부터는 광복군 제3지대 제1구대장 겸 제3지대 훈련총대장으로 활약했다. 8월에는 개봉 지구로 파견되어 다양한 군사활동과 첩보활동을 전개하였다.           이후 중국 동북지역으로 가서 주화대표단 동북 총판사처 외무주임으로 근무하면서 한인 권익옹호를 위한 자위대를 조직하였다. 광복 후에도 한국인을 보호하며 이들이 조국으로 무사히 귀환할 수 있도록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1948년에야 귀국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이러한 배경에서 말미암았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국군 소령으로 임관되어 장교로서 참전하였고, 초대 정훈감을 지냈다. 이후 한국전력사장에 임명된 후 군직을 퇴직하여 광복군 동지회장·서울증권사장·백범기념사업회장을 역임하다가 2000년 3월 27일 경기도 성남시에서 영면하였다. 그의 유해는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하였다. 정부는 그의 공로를 기려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신순호, 아버지 신건식의 영향으로 독립운동과 마주하다 신순호는 1922년 1월 22일 충청북도 청주군 가덕면(현 청주시 상당구 가덕면) 인차리에서 독립유공자 아버지 신건식과 어머니 오건해 사이에서 외동딸로 태어났다. 아버지 신건식은 상하이 독립운동 기반을 마련한 형 신규식을 따라 상하이로 망명하여 항저우 의약전문학교에서 공부하였다. 의학교에서 수학은 후일 그가 중국군 의무장교로 활동하는 기반이 되었다.        신건식은 1939년 10월 개원한 제31회 의정원 회의에서 충청도의원으로 당선되면서 본격적으로 임시정부에 참여하였다. 양묵·손일민과 상임위원에 당선되어 이듬해 이동녕의 국장 복상위원회가 서무·의식·공사 3개조로 편성되었을 때 최동오 등과 서무조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41년과 1942년 10월 개최된 33회·34회 의정원 회의에도 충청도의원으로 참석하였다.         신순호는 4세 때 어머니와 함께 상하이로 망명하여 아버지와 처음 만났다. 근대교육을 받으며 국제정세 등에도 많은 관심을 가졌고, 집안 분위기와 주위 환경으로 자연스럽게 독립운동과 마주하게 되었다.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에 입대하여 한중 연대에 의한 항일운동에 나섰다. 또한 한국광복군 창립에 오광심·김정숙·조순옥과 함께 여성독립군으로 참가하였다.  alt 신순호·박영준의 결혼증서 전쟁 속에서 사랑을 꽃피우다 신순호와 박영준의 인연은 시작부터 특별하였다. 박영준이 아버지를 찾아 상하이로 건너갔을 당시 기거하던 곳이 신순호의 아버지 신건식 집이었다. 한편, 윤봉길의 상하이의거 직후 임시정부는 전시 상황에 따라 여러 지역을 거쳐 마침내 충칭에 도착하였는데, ‘만리장정’을 헤쳐온 임시정부 가족들은 토교에서 ‘한층 안정적인 생활’을 할 수 있었다. 8년여에 걸친 오랜 이동생활에서 벗어난 임시정부는 정착 후 정부의 조직과 체제를 재정비하였다. 한국광복군 창설이 추진되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때였다. 광복군 창설을 위해 중국 동북지역(만주) 독립군 출신 군사 간부들과 중국의 육군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중국군에 복무하던 한인청년들을 소집하여 총사령부를 구성하였다.         1940년 9월 17일 충칭의 가릉빈관에서 한국광복군총사령부 성립전례식이 거행되었다. 총사령부에는 여성대원들도 있었다. 신순호를 포함하여 오광심·김정숙·지복영·조순옥·민영주 등은 창설요원이었다. 여성광복군은 한인들을 대상으로 병력을 모집하는 초모활동과 광복군의 활동상을 대내외에 알리는데 앞장섰다. 국내·외 동포들의 참여와 지원을 촉구하는 선전활동에 주력했다. 신순호는 광복군 총사령부 심리작전연구실에 배속되어 방송 원고를 작성하거나 충칭의 국제방송국에서 방송을 통한 선전활동을 맡았다. 이 시기 신순호와 박영준은 연인으로 발전하여 사랑을 꽃피웠다.              1943년 12월 12일 충칭 오사야항 임시정부 강당에는 두 사람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임시정부의 요인들과 많은 동포 등이 모였다. 외무부장인 조소앙의 사회로 결혼식은 시작되었다. 백범 김구는 주례를 맡고, 민필호·조완구·김원봉·김성숙 등 각 당 대표들은 축사를 맡았다. 단상에 오른 박찬익은 떨리는 음성으로 “가정을 가져서 다섯이나 되는 자식을 두었지만 자식 놈의 결혼식에 참석해 보기는 오늘이 처음이고 또 마지막이 됩니다.”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박영준은 만주에 두고 온 어머니와 형제를 떠올리며 눈물을 흘렸다. 조국을 떠나 머나먼 땅에서 힘겹게 살아가던 두 독립운동가의 결혼식은 잔악한 통치에 맞서 저항했던 독립운동가들에게 커다란 희망이었다. 박영준은 훗날 자서전에서 자신의 결혼식 날을 “나라 잃은 설움도 잠시 잊고 모든 사람이 하나가 되어 기뻐했던 순간”이라고 회고하였다. alt 주화대표단 귀국기념사진(위 줄 오른쪽에서 세 번째 신순호) 광복 후 동포들의 귀국을 위해 힘쓰다 신순호는 박영준과 부부이자 동지로서 독립운동을 이어가다 광복을 맞이하였다. 하지만 곧바로 귀국할 수 없었다. 한인동포의 귀국 문제를 중국과 외교적으로 처리하기 위해 남편과 아버지 신건식·시아버지 박찬익이 난징에 설치한 주화대표단의 임무를 맡았기 때문이었다. 신순호는 이들과 함께 난징에서 독립운동의 마지막 단계였던 교민의 귀국 문제를 성실하게 처리한 후 1948년 4월에서야 귀국할 수 있었다.        그는 귀국 후 남편을 따라 이곳저곳에서 생활하다가 2009년 7월 30일에 경기도 성남시에서 영면하였다. 정부는 그의 공로를 기려 1977년 건국포장에 이어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하였다. 유해는 남편 박영준과 함께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되었다. ]]> Fri, 28 Oct 2022 09:49:46 +0000 72 <![CDATA[끝나지 않은 독립운동 해외의 한국사 왜곡 문제, 어제오늘의 문제가 아니다]]> 글 이계형(국민대학교 교양대학 교수)   2022년 10월, 국내 언론 매체를 통해 미국 하버드대 경영대학원이 “필수교재에 ‘한국사’에 대한 왜곡된 내용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수정에 대해 긍정적인 검토를 하겠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런데 지난 9월경 이와 관련한 내용이 처음 보도되었을 때보다 국내 반응은 뜨뜻미지근했다. 오히려 그러한 일이 있었는지조차 잊은 것이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 정도이다. 그러다 보니 해외의 한국사 왜곡 문제가 지금껏 반복되어 온 것이 아닌가 싶다.  미국 하버드대 경영대학원 교재에 담긴한국사 왜곡 내용 사건의 발단은 이러했다. 2022년 9월 12일 국내 한 방송매체가 “하버드 경영대학원 필수교재에 한국사 왜곡 내용이 담겨 있다”고 처음 알렸다. 이와 관련하여 한국 근대사와 관련한 부분만을 살펴보면, “일본의 지배 덕분에 한국이 발전했다.”, “일제 35년 동안 (…) 한국은 크게 산업화했으며 교통과 전력이 발전했다. 교육, 행정, 경제 체계도 근대화했다.”,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을 체결하면서 당시 우리나라 예산의 1.5배에 달하는 금액을 한국에 지급했고 문제를 다 해결했다.” 등의 내용으로 일제의 한국 식민 통치를 정당화하고 있다. 이는 일본이 주장하는 식민지근대화론을 아무런 비판 없이 수용한 것이며, 더욱이 일제의 강제징용이나 일본군 위안부 관련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없다.      이에 국내 여러 언론사가 앞다투어 이를 비판하는 기사를 쏟아냈다. 전 세계에서 모인 다양한 국적의 하버드대 경영대학원 1학년 학생들이 반드시 들어야 하는 필수과목의 교재일 뿐만 아니라 영어 교재인 만큼 전 세계적으로 파급력이 크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한 뉴스는 온라인상에 확산하였고, 특히 사이버외교사절단 반크(Voluntary Agency Network of Korea)는 하버드 경영대학원을 포함한 6곳(교과서 집필진·교과서 출판사·학교 온라인 지원센터·교육센터 등)에 시정을 요구하는 항의 서한을 발송했다. 또한 하버드대 한인학생회도 움직였다. 한인학생회는 항의 서한을 학교 측에 보내는가 하면 온라인 국제청원사이트에 항의서를 올렸고 교내 신문사와 교수들의 지지 서명을 받았다. 골자는 내년 1월 새 학기가 시작되기 전까지 수정을 요청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 한 달이 채 되기 전에 하버드대 경영대 교수이자 교재 <코리아>의 공동 집필자인 포레스트 라인하트 교수가 문제를 제기한 반크 측에 “우리는 학생들이 사용하는 교과서에 피드백을 받는 것에 관심이 있고, 당신이 제시한 문제에 대해서도 아주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다”라고 밝혔다. 이렇게 해서 일단락된 듯하지만, 되짚어 보면 문제가 된 교재는 이미 2015년 출간되었고 그 직후부터 한인 학생들이 문제를 제기했음에도 7년이 지나서야 내용 수정에 들어간 것이다. 그 이유는 하버드대 내 일본 측 후원을 받는 재팬재단연구소가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한국인 학자가 집필진에 참여하지 못했다는 데 있었다.  어제오늘의 문제가 아닌 한국사 왜곡 문제 그런데 해외 교과서의 한국사 관련 왜곡 문제는 오래전부터 있어 온 일이다. 1975년에 정부가 외국에서의 잘못된 한국관 교육이 국력 신장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 판단하여 이를 시정하려는 시도가 처음으로 이뤄졌다. 이를 전담할 ‘한국관시정사업추진위원회’가 설치되어 세계 여러 나라의 교과서를 수집·분석하였으며, 왜곡된 부분에 대해서는 시정을 요청하기도 하였다. 한 예로 1970년대 미국의 고교 교과서에서는 한국사를 거의 다루지 않거나, 일부에서는 한국인을 ‘자치 능력이 없어 외국 통치에 익숙한 국민’이라고 하는 등 왜곡 문제가 예상했던 것보다 심각했다. 특히 일본 교과서에 문제점이 가장 많았는데, 일본의 한반도 진출을 미화하거나 한국 고유의 역사문화를 인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해방 전에 일본이 한국 산업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라는 왜곡도 서슴지 않았다.            이후 해외 교과서 관련 업무는 1980년 한국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이 담당하다가, 1981년 한국교육개발원에 담당하여 해외 교과서 수집 및 분석 작업을 추진하였다. 하지만 정부는 해외 교과서 등의 한국사 왜곡 관련하여 문제가 발생하여 여론이 들끓을 때만 반짝 관심을 보이는 것을 되풀이했다. 1982년 일본의 역사 교과서 파동 이후 관심 대상 범위를 미주·유럽·아시아 등으로 확대하여 교과서를 분석하였는데 한국사 왜곡 문제는 여전했다. 대부분 교과서에 한국 역사가 일본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기술되어 있거나, 한국이 일본의 문화권 내에 있다고 하거나 남한이 북한보다 공업발전이 뒤떨어져 있다거나, 남북한의 명칭을 혼동해서 사용하였다.              1980년대와 1990년대 신문 기사를 보면, 해방된 지 45년이 지났고 86아시안게임·88서울올림픽을 치른 뒤였지만 여전히 ‘외국 교과서 한국 오기 투성이, 미·일·스페인 등 잡지도 마찬가지’, ‘외국 교과서 한국 왜곡 많다, 정보 부족, 일본 자료 인용 탓’, ‘외국 교과서 한국 왜곡 극심, 일본 것 베껴 역사문화 열등국으로’, ‘외국 교과서 한국 기술 왜곡 오류 많다’, ‘동남아·중동 교과서 한국 관련 왜곡 심각’, ‘외국 교과서 한국사 왜곡 여전’, ‘한국사 왜곡 방치할 텐가’ 등의 제목이 반복되었다.  해외의 한국사 왜곡 문제에 대한 대응 방안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비영리 민간단체 사이버외교사절단 반크(1999.1. 설립)나 정부도 여러 관련 산하기관이 조직되어 다각적으로 대응하면서 그러한 문제점들은 크게 줄어들었다. 반크는 전 세계 교과서·지도·웹사이트·박물관·미술관 등에 한국사·영토·문화 등과 관련된 오류를 제보 받아 이를 시정하는 데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1991년 12월에 출범한 한국국제교류재단(KF)은 꾸준히 해외 인사 초청, 해외 한국학 관련 도서관 지원, 국외 한국 연구 지원, 외국의 주요 국제교류기관과의 교류·협력 활동을 펼치고 있다. 2008년 2월 출범한 해외문화홍보원(Korean Culture and Information Service)은 한국과 관련한 잘못된 정보를 효율적으로 바로잡는 활동을 펼치고 있으며, 한국학중앙연구원은 해외 한국학 연구 및 교육 거점 지원과 세계적 수준의 우수 연구 및 번역 지원 그리고 한국학 교육 인프라가 취약한 해외 대학의 한국학 교육 환경 구축 프로그램을 지원하고 있다. 또한 해외의 한국학 교육기관은 2022년 11월 현재 107개국 1,408곳에 달한다.            그런데도 하버드대 경영대학원 교재와 관련한 문제가 불거졌다는 것은 아직도 미흡한 구석이 남아 있다는 점을 방증해준다. 전 세계에서 발행되는 교과서나 잡지 등에서 왜곡된 한국사를 완벽하게 찾아내 시정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고 본다. 그렇다면 이번 기회를 통해 이에 대응하는데 구조적인 문제점이 없는지를 종합적으로 점검하고 문제점을 개선해야만 할 것이다. 교재는 가치관을 형성해 가는 청소년들에게 큰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이에 몇 가지 방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현재 가장 큰 문제점은 한국사를 전공하는 외국인 학자가 매우 부족하다는 점이므로, 전 세계 외국인 학자를 모니터링하여 부족한 분야의 한국학 연구자를 적극적으로 발굴 및 양성해야 한다. 또한 그들에게 연구비를 적극적으로 지원하여 지속해서 해당국에 논문과 저서를 발표토록 해야 한다. 물론 국내 한국사 관련 학자의 해외 학술지 논문 발표나 저술 지원도 적극적으로 고려해야 하고, 해외 파견도 활성화해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국내 역사 관련 학술지를 해외 주요 도서관에 배포하는 것도 지원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논문의 영문 초록 수준을 끌어올려야 하지만, 제각각인 한국사 관련 영어 용어를 통일하기 위한 사전 편찬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 Fri, 28 Oct 2022 09:52:45 +0000 72 <![CDATA[독립의 발자취 근대 한글, 예술로 다시 피어나다]]> 글 편집실 2016년 〈훈민정음과 한글디자인〉, 2017년 〈소리×글자: 한글디자인〉, 2019년 〈한글디자인: 형태의 전환〉에 이어, 올해 4회째 열리는 한글실험프로젝트 〈근대 한글 연구소〉에서는 근대 시기 한글 자료를 예술의 관점에서 재해석한 작품을 만나볼 수 있다. 이번 특별전은 2023년 1월 29일(일)까지 국립한글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펼쳐질 예정이다. 올 가을 패션·음악·영상 등 예술로 피어난 한글을 만나러 떠나보자.   alt 한HAN글文 (이화영) 한글디자인 창작의 장으로 박물관의 역할 확장 한글실험프로젝트는 예술 및 산업 콘텐츠로서의 한글의 가치를 조명하는 기획특별전입니다. 국립한글박물관은 이번 전시를 통해 한글디자인 창작의 장으로 박물관의 역할을 확장하고, 박물관 소장 자료를 예술 창작의 소재로 활용하며, 한글문화의 지평을 확대하고자 합니다. 2016년 〈훈민정음과 한글디자인〉, 2017년 〈소리×글자: 한글디자인〉, 2019년 〈한글디자인: 형태의 전환〉에 이어, 올해 4회 째 열리는 한글실험프로젝트 〈근대 한글 연구소〉에서는 근대 시기 한글 자료를 예술의 관점에서 재해석했습니다. alt 지석영이 편찬한 외국어 교재 『아학편』(소리글자 한글의 장점을 살려 한·중·일·영 4개 국어의 발음을 정밀하게 표기한 외국어 학습서이다.) 근대, 한글이 쓰이는 방법에 큰 변화가 일어난 시기 1876년 개항 이후, 한국 사회는 근대 문물과 제도를 도입하며 큰 변화를 겪었습니다. 전통과 새로운 문화가 만나 서로 영향을 주고받기도 했던 이때, 한글도 변화와 발전을 모색하게 됩니다. 1894년 고종이 한글을 공식 문자로 선포한 ‘국문선포’로 인해 한글은 창제 이후 약 450년 만에 나라의 공식 문자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이 같은 변화는 한글이 공식 문자로서 역할을 할 수 있는 제도적 정리와 한글 교육에 대한 사회적 요구를 불러일으키며 한글 연구를 빠르게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후 한글 연구자들에 의해 가로 쓰기, 띄어쓰기, 한글 전용 글쓰기 등 한글 사용에 관한 여러 의견이 제시되었고, 출판물 인쇄에 사용하는 한글 납활자도 활발히 생산되었으며 각종 서적에 특색 있는 한글디자인이 적용되기 시작했습니다.  예술 창작의 원천이 된 근대 한글 전시 작품의 제작 바탕이 된 국립한글박물관의 소장 자료는 주시경 선생이 남긴 최초의 우리말 사전 원고 『말모이』와 국어 문법서 『말의 소리』, 지석영이 편찬한 외국어 교재 『아학편』, 프랑스인 선교사가 편찬한 한국어 문법서 『한어문전』, 한글 띄어쓰기를 선구적으로 적용한 『독립신문』 등입니다. 『독립신문』을 비롯한 근대 신문은 지식 보급과 민족의식 고취에 큰 역할을 했습니다. 한글의 큰 스승 주시경과 그의 제자들은 국어 연구와 한글 보급으로 국권 침탈이라는 위기 상황을 극복하려 했습니다. 이번 전시에 참여한 작가들은 근대 시기 한글의 변화상을 현재의 시각으로 재해석하는 실험을 진행했습니다. 시각, 공예, 패션, 음악, 영상 분야의 19명 4팀의 작가가 4개의 연구실에서 연구 결과를 공개합니다. 한글의 무한한 가능성과 확장성을 함께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alt 주시경이 편찬한 최초의 우리말 사전 『말모이』(주시경 선생과 그의 제자들이 만든 우리나라 최초의 국어사전 원고이다.) 다양한 분야와 협업을 통한 한글문화 외연 확장 시각 분야 6명과 1팀, 제품·공예 분야 7명, 패션 분야 4명, 리서치프로젝트 2팀, 음악 분야 1명과 1팀, 영상 분야 1명 등 다양한 분야의 작가와 협업을 진행해 한글문화의 외연을 더욱 확장했습니다. 음악 분야는 처음으로 한글실험프로젝트와 협업을 시도했습니다. 국악 아카펠라그룹 토리스는 판소리 〈흥부가〉 중 ‘제비노정기’*를 불렀으며, 작곡가 김백찬은 근대 한글 연구자 주시경을 기리는 노래를 작사·작곡했습니다. 한편 ‘한글공작소’라는 이름의 전시 기록 공간도 마련되어 관람객이 작품 제작 과정을 살펴보고 창작의 여정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제비노정기판소리 〈흥부가〉 중 흥부에게 은혜를 입은 제비가 강남에 갔다가 이듬해 봄, 박씨를 물고 흥부네 집으로 날아오는 여정을 주제로 한 소리 대목이다. 한글에서 위기를 극복하는 힘 발견 코로나19 유행으로 사회 각 영역에서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현재, 거리두기와 비대면 방식 확산으로 인한 소통 단절의 우려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기에 한글은 소통을 활성화시키고 확대시켜 위기 극복에 힘이 될 수 있습니다. 외부 세계와의 연결 통로이자 격동기에 민족 역량을 결집하는 동력으로 작용했던 근대 시기 한글의 변화상을 살펴보며, 위기를 극복하는 지혜를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4회 한글실험프로젝트는 국립한글박물관의 전시가 종료된 후, 국내·외를 순회하며 한글의 문자적·미적 가치를 쉽고 직관적으로 널리 알릴 예정입니다. <근대 한글 연구소>展 속 4개의 연구실과 전시작품 전시는 ‘근대 한글 연구소’라는 공간을 설정하여 4개의 연구실로 구성하였고,  전시 제작 바탕이 된  자료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작품을 만나볼 수 있다. alt 5개의 기역/ 아야어여오 (유정민) ① 동서말글연구실 개항 이후 우리나라에 들어온 서양인들은 선교·외교 활동을 목적으로 한국어를 배우기 위한 사전과 학습서를 만들었다. 한글의 자음자와 모음자를 배열한 표를 만들어 자신의 저서에 소개하기도 했다. 우리나라에는 서양의 문물과 함께 생소한 외국의 인명과 지명, 서양의 말과 글이 들어왔다. 다산 정약용이 지은 아동용 한자 학습서를 지석영이 새롭게 편찬한 『아학편(兒學編)』(1908) 등에서 영어 발음을 한글로 표기하기 위한 여러 방법이 시도되었다. alt 어느 날의 조각_선반 01/ 어느 날의 조각_선반 02 (윤새롬) ② 한글맵시연구실 근대 시기에는 한글을 어떤 모양으로 조합하고 배열할 것인지 다양한 시도가 이어졌다. 한글 연구자들의 노력으로 철자법이 확립되어 가고, 세로로 띄어쓰기 없이 글을 쓰던 방식에도 큰 변화가 일어났다. 주시경(周時經, 1876~1914)은 한글을 가로로 쓰는 동시에, 자음자와 모음자를 따로 적는 가로 풀어쓰기를 시도했다. 『신정심상소학』(1896)은 띄어 읽어야 하는 곳에 둥근 점(°)을 표시하여 책 읽는 편의를 더했고, 『독립신문』(1896)은 창간호부터 빈칸 띄어쓰기가 선구적으로 적용되었다.  alt 효 (김혜림) ③ 우리소리실험실 판소리는 조선 후기부터 방각본 또는 필사본 형태의 소설로 유통되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 이른바 고소설로 불리는 이야기들은 1910년대에 들어 연활자본으로 재탄생하였다. 춘향전은 ‘옥중가인(獄中佳人)’, 별주부전은 ‘토의 간(兎의 肝)’ 등으로 제목이 바뀌거나 삽화가 들어가고 희곡으로 편집되기도 하며 다양한 종류로 출판되었다. 입에서 입으로 전하던 우리의 소리가 한글 연활자로 인쇄되어 대량 생산됨에 따라 더 많은 대중이 향유할 수 있었다. alt 얽힌 (이성동) ④ 한글출판연구실 19세기 말부터 도입된 신식 인쇄 기술로 신문, 잡지 등 다양한 출판물이 발달하면서 한글 보급도 활기를 띠었다. 저렴한 비용으로 대량 생산된 한글 출판물은 대중문화를 이끄는 새로운 힘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신문은 한글과 한자를 함께 쓰는 것, 한글만을 쓰는 것으로 나뉘어 여러 종류가 발행됨으로써 많은 독자층이 생겨났다. 잡지 등은 한글을 활용한 특색 있는 제목과 표지 그림으로 눈길을 사로잡았다. 그 중에서도 ‘딱지본’ 혹은 구활자본으로 불리는 독서물은 쉬운 문장으로 쓴 큰 글씨, 재미있는 내용과 저렴한 가격으로 대중의 사랑을 받으며 한글 전파에 기여했다. ]]> Fri, 28 Oct 2022 10:01:39 +0000 72 <![CDATA[세계 산책 인도네시아 혁명으로 독립을 쟁취한 수까르노]]> 글 소병국(한국외국어대학교 말레이·인도네시아어과 교수) 네덜란드의 식민지배를 받았던 인도네시아는 1945년 8월 17일 마침내 독립을 이루어냈다. 그 중심에는 인도네시아의 ‘독립의 아버지’라 불리는 수까르노가 있다. 그는 인도네시아의 통합을 도모하고 식민 당국과 협력하지 않으며, 대중운동을 통해 독립을 달성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alt 수까르노(Sukarno, 1901~1970) 인도네시아국민당을 출범해 투쟁을 이끌다 1901년 탄생한 수까르노는 1916년 마자꺼르따의 유럽식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수라바야에서 유럽식 중등학교를 다니는 동안 스마운·무쏘 등 당시 저명한 정치인들과 접촉하면서 사회주의와 반식민주의 이념의 영향을 받았다. 1921년 반둥공과대학 입학 후 다우어스 데커르·찝또 망운꾸수모와 함께 일종의 정치 토론 모임인 반둥스터디클럽을 결성했다. 1926년 반둥공과대학에서 공학사 학위를 취득한 직후부터 반식민지 운동에 가담했다.        1928년 5월 수까르노의 주도로 반둥에서 인도네시아국민당(이하 PNI)이 출범했다. PNI는 인도네시아 통합을 도모하고 식민 당국과 협력하지 않으며, 대중운동을 통해 인도네시아 민족주의를 고양해 독립을 달성하는 것을 투쟁의 목표로 정했다. 이러한 기류는 같은 해 10월 28일 개최된 제3차 인도네시아 청년회의에서 역사적인 숨빠 뻐무다(Sumpa Pemuda, ‘하나의 국가, 인도네시아 국가; 하나의 민족, 인도네시아 민족; 하나의 언어, 인도네시아어’란 슬로건을 채택한 청년의 맹세) 선언으로 이어졌다.     이 선언과 더불어 1929년 말까지 PNI의 당원이 급속히 증가해 그 수가 1만 명에 달하자, 이에 놀란 식민 당국은 수까르노를 비롯해 PNI 지도자 8명을 체포했다. 지도력 공백이 생긴 PNI는 1931년 4월 해산되었다. 그해 12월 석방된 수까르노는 1932년 8월 해산된 PNI 회원들이 새롭게 결성한 인도네시아당(Partindo)의 당수가 되었다. 이후 반식민지 투쟁을 위한 조직 재건에 힘을 쏟은 그는 1933년 8월 다시 체포되어 동부 인도네시아 플로레스섬의 감옥으로 끌려갔다. 이처럼 식민 정부의 강력한 탄압으로 1934년 말까지 수까르노를 비롯한 반식민주의 지도자들 대부분이 구금되었다. 그 결과 태평양전쟁이 발발할 때까지 반식민주의 민족주의 운동은 거의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alt 독립선언문을 낭독하는 수까르노(1945.8.17.) 수까르노의 독립 선언 태평양전쟁의 전운이 동남아시아 전역을 덮친 가운데 일본은 1942년 3월 8일까지 인도네시아 군도를 점령했다. 이로써 자바전쟁(1825∼1830) 이후 100여 년 동안 지속된 네덜란드의 식민지배가 일시에 종식되었다. 한편 일제하에서 인도네시아의 독립운동은 새로운 전기를 맞이했다. 1943년 초부터 전세가 일본에게 불리하게 전개되자, 일본 군정은 각종 기유군(의용군) 조직을 만들어 대중동원에 힘을 쏟았다. 전쟁이 끝날 무렵, 그들의 수는 자바에서 3만 7000명, 발리에서 1600명, 그리고 수마뜨라에서 2만 명에 달했다. 이 집단들은 전쟁 직후 1945년 11월 수디르만 장군의 휘하에 창립되어 인도네시아 독립 쟁취에 크게 기여한 인도네시아국군(TNI)의 근간이 되었다.      1944년 9월 7일 일본 수상은 “전쟁 패배 위기에 직면해 인도네시아 독립운동지도자들의 협력을 얻기 위한 마지막 수단으로 독립이 임박했다.”고 공개 선언했다. 이에 따라 1945년 3월 인도네시아독립준비위원회(이하 BPUPKI)를 설립되었고, 5월 말 그 첫 번째 회합이 수까르노를 포함해 62명의 독립운동지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자까르따에서 열렸다. 열띤 토론 끝에 자바의 무슬림들과 이외 인도네시아 군도에 거주하는 비무슬림들과의 국민통합을 고려해 이슬람 국가가 아닌 세속 국가를 세우기로 합의했을 뿐만 아니라, 대통령 중심제와 단일 공화국을 근간으로 하는 인도네시아 최초의 헌법인 ‘45년 헌법(UUD 45)’을 입안했다. 그해 8월 6일 수까르노를 의장으로 한 독립 준비 실무위원회가 자까르따에서 발족했다. 그러던 중 8월 15일 일본이 갑작스럽게 연합군에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연합군의 재진주가 임박한 가운데 독립운동지도자들은 독립 선포에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일본의 후원 하에 진행되던 독립 계획과 선포를 연합군이 부정할까봐 우려했기 때문이다. 수까르노는 일단의 급진적인 청년의 제의를 전격적으로 수용해 8월 17일 자신의 집 앞에서 “인도네시아 국민은 이 선언서로써 인도네시아 독립을 선언한다.”는 독립선언문을 낭독했다. 이로써 수까르노 대통령이 이끄는 공화국 정부는 독립을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걸어야 했다. 혁명을 통해 독립을 쟁취한 수까르노 전후 인도네시아의 재식민지화를 노리는 네덜란드의 복귀가 임박하자, 공화국 정부의 지도자들은 국가의 미래를 위한 대책 마련을 시작했다. 몇몇 지도자들은 전쟁 중에 독립을 위해 일본과 협력한 수까르노의 전력을 문제 삼았다. 결국 샤흐리르를 수상으로 한 새로운 내각이 구성되었다. 이는 인도네시아공화국이 투쟁보다는 협상을 위해 친네덜란드 인사를 전면에 내세웠음을 의미했다. 대통령이었던 수까르노는 독립이라는 대의를 위해 뒤로 물러나는 쉽지 않은 결단을 내렸다.          협상과 교전이 반복된 가운데 인도네시아공화국 세력이 수세에 몰렸고, 냉전 중에 공화국 지도자들의 사회주의 성향을 의심한 서방 세계의 지지도 미온적인 가운데, 1948년 세계적으로 공산주의 약진이 선명해졌다. 내전 중인 중국에서 공산당군이 국민당군을 압도하기 시작한 데다 소련의 베를린 봉쇄 등이 서구 자유주의 진영을 긴장케 했다. 그러는 동안 외교적으로 인도네시아 혁명의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1948년 8월 인도네시아공산당(이하 PKI)을 초창기에 이끌다가 1927년 미낭까바우 봉기 후 소련으로 망명했던 무쏘가 모스크바의 지령을 받고 인도네시아로 돌아왔다. 그의 주도하에 9월 18일 PKI 지지자들이 동부 자바의 마디운을 점령하고 인도네시아사회주의공화국을 선포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혁명의 일선에 다시 선 수까르노는 공산주의자들을 강하게 비난하면서, 실리왕 사단을 마디운으로 급파해 치열한 전투 끝에 PKI 반란을 진압했다. 소위 ‘마디운 쿠데타’ 진압을 기점으로 미국을 포함한 자유주의 진영은 수까르노의 이념적 성향에 대한 의심을 거두고 인도네시아 혁명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기 시작했다.  1948년 12월 네덜란드는 인도네시아공화국 정부의 전복을 위해 대대적인 군사행동을 감행했고, 순식간에 인도네시아공화국 수도인 욕야까르따를 점령했다. 이 무렵 국제사회 분위기가 인도네시아공화국 정부에게 우호적이었고, 유엔은 정전과 1950년 7월 1일까지 인도네시아의 독립을 보장할 것을 네덜란드에 강력하게 요구했다. 더욱이 미국은 네덜란드에 대한 원조를 연기하고, 마셜플랜에서 네덜란드를 제외하겠다고 압박했다. 결국 1949년 8월 23일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개최된 원탁회의를 따라, 12월 27일 수까르노와 하따를 각각 초대 대통령과 부통령으로 한 인도네시아연방공화국이 출범했다. 인도네시아의 혁명은 무장투쟁과 냉전의 와중에 외교적 노력의 결합으로 가능했다. 세계의 공산화를 우려하던 미국의 반식민주의는 반공산주의와 강하게 결합되었고, 이것이 마디운 쿠데타를 계기로 인도네시아 혁명에 촉진제 구실을 했다. 하지만 우호적인 외부 환경이 조성되었다 해도 인도네시아 내부에 혁명을 이끌 동력이 부재했다면 그 효과가 미진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수까르노가 이끄는 인도네시아공화국 정부를 중심으로 한 모든 혁명세력의 결집과 외교적 노력의 결합이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큰 나라 인도네시아를 탄생케 한 것이다. ]]> Fri, 28 Oct 2022 10:06:06 +0000 72 <![CDATA[기념관은 지금 국민 모두가 꿈꾼 ‘새로운 나라’로]]> 정리 편집실    사진 이소연   지난 9월 17일, 독립기념관 제6관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주제로 하여 ‘새로운나라’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문을 열었다. 국민 눈높이에 맞는 전시를 제공하고, 트렌드에 맞춘 참여형 전시물 확충을 위해 준비·노력한 전시부 신선주 학예연구관과 정현희·허미애 학예연구사를 만나 제6관에 대한 이모저모를 물었다. alt 왼쪽부터 전시부 허미애 학예연구사, 정현희 학예연구사, 신선주 학예연구관 재개관한 제6관 ‘새로운나라’를 소개해주세요.  제6관 ‘새로운나라’의 총 전시면적은 2,534㎡(약 768평)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이하 임시정부)를 단일 주제로 하여 1919년 임시정부의 탄생과 활동을 시간과 공간의 흐름에 따라 소개합니다. 전시공간은 총 6부로 구성하였으며, 이를 통해 국가와 정부의 역할을 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독립운동 최고기관으로서 국민주권과 민주공화제를 발전시켜 나라를 되찾는 성과를 거두었음을 알리고자 하였습니다. 또한 광복 후 임시정부를 계승·재건한 대한민국 정부 수립으로, 임시정부의 역사가 지금껏 이어지고 있음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제6관을 새롭게 교체한 계기가 있나요? 독립기념관은 1987년 개관 이래 지금까지 국민 눈높이에 맞는 전시를 제공하고자 지속적으로 상설전시관 교체 사업을 진행해왔습니다. 총 6개 상설전시관 중 2관·3관·4관에 대한 전시교체를 완료하였고, 지난 9월 17일 네 번째 순서로 제6관을 재개관하였습니다. alt 김구 서명문 태극기(1941년, 독립기념관 소장, 보물)_김구가 한국광복군 지원을 당부하는 글을 적어 미국으로 향하는 미우스(Charles Meeus) 신부에게 준 태극기이다.  특별히 공개된 자료도 궁금합니다. 제6관 ‘새로운나라’에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관련한 200점의 자료가 전시되고 있습니다. 보물로 지정된 〈김구 서명문 태극기〉를 비롯하여, 임시정부가 편찬한 역사서 『조일관계사료집』, 한국광복군 기관지 『광복』 등 독립기념관 소장 임시정부 관련 자료가 다수 공개되었습니다. 이와 함께 전보·애국금 공채 등 20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념하여 미국 LA 대한인국민회에서 독립기념관에 대여형식으로 이관한 자료들도 만나볼 수 있습니다. alt 추천하는 관람 포인트가 있다면?  어린이·청소년들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활동을 보다 재밌고 생동감 있게 배우고 느낄 수 있도록 최신기술을 접목한 전시물과 모형 등도 함께 전시하였습니다. 임시정부가 어떠한 공간에서 어떻게 활동을 이어 나갔는지 생생한 현장감을 느낄 수 있도록 상하이 프랑스조계와 임시정부의 충칭 연화지 청사 등을 모형으로 재현하였습니다. 임시정부의 충칭 연화지 청사 모형은 태블릿 PC를 활용하여 AR콘텐츠로 둘러보실 수 있습니다. 딥페이크 기술 접목 영상과 함께 원동민족혁명단체대표회 개막식 영상(1922), 임시정부 요인 환국 영상(1945) 등 당대의 영상자료와 김구·이승만·조소앙 등 그동안 사진으로만 보았던 독립운동 당시 영상과 독립운동가의 음성자료도 만나볼 수 있습니다.  alt 마지막 에필로그도 눈길을 사로잡는데요.  전시의 마지막 에필로그는 ‘우리가 그려갈 미래’라는 주제로 한 국민 그림공모 당선작 77점으로 만들었습니다. 올해 광복 77주년을 맞아 SKT와 공동으로 ‘독립운동으로 되찾은 나라를 모두 함께 그려나가자’는 테마로 국민들이 바라는 ‘꿈꾸는 미래’를 제안받았고, 체험 전시물로 재탄생하였습니다. 이는 독립운동 과정에서 국민이 주인이 된 나라를 세웠고, 독립운동으로 되찾은 나라의 미래를 그려 나갈 사람도 바로 국민임을 알리기 위한 것입니다. 또한, 모두를 위한 전시를 위해 유니버설디자인 적용은 물론, 청각 약자를 위한 히어링루프 설치도 새로운 6관의 자랑입니다. 관람객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와 앞으로의 계획이 궁금합니다. 제6관은 국민의 의견을 반영하고 국민과 함께 만든 전시관입니다. 독립기념관은 새로 조성될 제6관에서 더 자세히 알아보고 싶은 전시물을 국민들에게 묻고 의견을 모아 이번 전시에 반영하였습니다. 국민들이 선정한 자료는 특별히 자세한 설명을 더 해 자료의 의미와 가치를 보다 충분히 전달할 수 있도록 전시하였으니 유익한 관람하시길 바랍니다. 한편, 독립기념관은 앞으로도 평화와 공감이라는 제3차 전시교체의 대주제 아래 최신 연구성과와 첨단 전시기법을 반영하여 순차적으로 전시교체를 진행하고 재개관할 예정이며, 이를 통해 독립운동의 역사를 바르게 알리고, 국민들의 마음에 남는 ‘마인드마크’ 전시관을 만드는 데 노력을 아끼지 않을 것입니다. ]]> Fri, 28 Oct 2022 10:12:52 +0000 72 <![CDATA[독자참여 월간 『독립기념관』 설문조사와 퀴즈 및 웹진 방문 이벤트에 참여해보세요!]]>   alt alt alt alt alt ]]> Fri, 28 Oct 2022 10:17:41 +0000 72 <![CDATA[들어가며 학생들이 쏘아올린 작은 공]]> alt 성진회 회원 사진 1929년 11월 이 땅에 뜨거운 함성이 또다시 울려 퍼졌다. 3·1만세운동 이후 약 10년 만의 일이었다. 다시 한반도를 독립 열망으로 채운 이들은 다름 아닌 10대 학생들이었다. 사건의 발단은 1929년 10월 말 나주역에서 시작되었다. 통학 중이었던 한국인 학생과 일본인 학생이 ‘충돌’하였고, 이에 일본 경찰이 개입하여 일본인 학생의 편을 들며 한국인 학생을 엄하게 다스렸다. 광주지역 학생들은 이전부터 성진회·독서회·소녀회 등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식민지 교육 반대와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광주에서 시작된 항일운동은 목포·나주를 거쳐 서울까지 퍼지면서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3백여 개 이상의 학교가 참가하였고, 참가한 학생 수는 무려 5만 4천여 명이었다. 나비의 날갯짓이 커다란 태풍을 만들어내듯이, 학생들의 작은 외침이 꺼져가는 민족의식과 독립운동의 불씨를 되살렸다. 나라 없는 시대에 태어난 그들이 끝까지 외친 것은 ‘조선독립만세’였다. 가져보지 못해 더욱 사무쳤던, 그래서 더욱 간절히 되찾아야만 했던 조국이었다. ]]> Thu, 01 Dec 2022 09:52:10 +0000 73 <![CDATA[ 톺아보기 ‘지역’에서 ‘중앙’으로 확산된 광주학생독립운동]]> 글 류시현(광주교육대학교 교수) 일제에 대항하는 저항을 민족운동 혹은 독립운동이라고 일컫는다. 3·1운동(1919년), 6·10만세운동(1926년), 광주학생독립운동(1929년)은 3대 민족운동으로 평가되고 있다. 다른 두 민족운동이 중앙(서울)에서 시작해서 지방으로 확산된 것과 달리, 광주학생독립운동은 광주에서 시작되어 전국적인 규모로 확산되었다. 아울러 두 운동이 전국단위의 ‘민족’이 참여한 것에 비해, 광주학생독립운동은 ‘학생’ 중심으로 이루어진 점에 차이가 있다. alt 광주시내에서 시위를 벌이는 학생들 모습(1929) 사건의 발단이 된 나주역 ‘충돌’ 광주학생독립운동은 1929년 10월 말 나주역에서 한국인 학생과 일본인 학생의 ‘충돌’이 계기가 되었다. 광주에서 나주로 통학하는 학생들의 하교 길인 나주역 개찰구에서 광주중학교에 다니는 일본인 학생이 광주여고보 박기옥 등 여학생을 밀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에 박기옥의 사촌동생이자 광주고보 2학년생인 박준채가 이들과 언쟁하고 격투를 벌였다. 나주역의 일본인 경찰이 이에 개입해서 일본인 학생의 편을 들고 박준채의 따귀를 때렸다. 이 사건 직후 국내 언론이 강조한 일본인 남학생이 조선인 여학생을 대상으로 한 ‘희롱적 언동’과 일본인 경찰의 민족적 차별 등의 요소는 광주학생시위로 전개·확산되는 데 중요한 변수로 작용했다. 반면 일제는 나주역 사건을 사소한 ‘말다툼’으로 축소하거나 일본 경찰의 폭행을 ‘낭설’이라고 규정함으로써 민족적 차별에 관한 공분 확산을 차단하고자 했다.  alt 왼쪽부터 광주여고보 박기옥(오른쪽), 광주고보 박준채, 당시 나주역 모습 두 차례 광주학생시위가 일어나다 일제강점기 ‘한국인 학생’이라는 신분·계층은 다양한 의미의 존재였다. 일제 권력은 식민지 한국인 학생을 식민권력에 대항했기 때문에 감시·통제해야 할 대상으로 간주했으며, 다른 한편으로 학교를 다닐 수 있는 정도의 경제적 여유를 지닌 학부형의 사회 신분 때문에 탄압의 강도를 높일 수 없었다. 또한 민족운동진영에서도 ‘학생’은 새로운 ‘주역’으로 기대감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보호되고 지도받아야 할 존재로 규정되었다. 반면 당대 학생들은 스스로 독립·해방과 같은 민족적 과제 해결의 주체로 성장했다. 한편 광주는 전라남도의 교육 중심지였다. 한국인 중등교육기관으로 광주고등보통학교·광주농업학교·전남사범학교·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가 있었으며, 일본인 중등 교육기관으로 광주중학교가 있었다. 이러한 중등 교육기관이 공존하고 있는 곳은 전국에서도 서울을 제외하고, 광주와 대구·부산·평양·신의주 정도였다. 광주지역 학생들은 일본인 학생을 보호하고, 한국인 학생에게 물리적 폭력을 행사한 일본 경찰의 차별적 대처뿐만 아니라 한국인 여학생에 관한 일본인 남자 중학생의 희롱이라는 사안에 함께 분노했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의 도화선 역할을 담당했던 광주학생시위는 1929년 11월 3일과 12일에 걸쳐 두 차례 일어났다. 11월 3일 1차 광주학생시위의 추이를 살펴보면, 그날 오전 광주시내에서 일본인 중학생과 광주고보생의 물리적 충돌이 일어났다. 이후 광주중학교 기숙사생 백 수십여 명이 현장에 왔고, 광주고보 기숙사에 살고 있는 학생들과 대치하다가 경찰, 학교 직원, 소방서원의 제지로 각각 학교로 되돌아갔다. 이날 오전에 있었던 대립은 계획적이고, 조직적인 시위운동의 모습은 아니었다. 우발적인 충돌에서 조직적인 시위로의 전환은 어떻게 이루어졌을까? 이날 오후 광주고보생의 모임에서 즉시 광주중학교를 ‘습격’할 것인가 아니면 광주 시내에서 일반시민을 대상으로  시위행진을 진행할 것인가 여부가 논의되면서 광주학생시위의 본격적인 모습이 갖춰졌다.  ‘격양된 분위기’와 조직적 시위운동의 주장 사이의 대립에서 독서회 회원들의 활동이 주목된다. 이들의 강한 조직력과 실천력이 발휘된 순간이었다. 독서회 회원들은 시위운동을 적극 주장했으며, 또한 시내 중심지에서의 시위에 선두로 참가함으로써 ‘격양된 분위기’를 조직적인 시위로 전환시켰다. 이 과정에서 전남사범학교 학생과 광주여고보의 일부 학생들이 1929년 11월 12일 2차 시위 대열에 참가했다. 조직과 학생운동의 결합이었다. 학생들의 배후에는 장재성, 장석천 등 사회단체 참여 인물이 있었다. 이들을 통해 광주학생시위의 확산과 서울 지역과 연대가 모색되었다. 1차 시위와 달리 2차 시위는 학생뿐만 아니라 시민을 대상으로 전개되었다. 2차 시위에서는 4종의 격문이 제작·배포되었는데, 학생들에게 “용감히 싸워라 학생대중이여! … 우리들의 승리는 오직 우리들의 단결과 희생적 투쟁에 있다!”라며 단결을 강조하였다. 반면 일반 시민을 대상으로 한 격문에서는 “검거자의 석방” 주장과 함께 “언론·집회·결사·출판의 자유를 획득하자”는 등 식민지배에 대한 저항의 성격이 강하게 표명되었다. 이렇듯 11월 12일의 2차 광주학생시위는 이후 전개될 전국단위의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전형적인 패턴이 내포되었다. alt 광주학생독립운동 관련 기사(『중외일보』, 1929.11.5.) 광주에서 전국적 학생독립운동으로 확산 1929년 11월의 광주학생시위는 1930년 3월까지 전국적으로 일어난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전체 성격과 지향점이 형성되었다. 반면 일제는 한국인에 대해서 강제탄압과 언론통제에 영향을 끼쳤다. 언론이 통제된 상황에서 광주학생에 동조하는 시위는 1929년 11월 19일 처음으로 일어났다. 이러한 과정에서 학생이라는 연대의식이 중요한 계기로 작용했다. 목포상업학교 독서회원은 진상조사를 위해 광주로 왔고, 장재성은 이들에게 연대 투쟁을 부탁했다. 목포공립상업학교는 11월 19일 시위를 시작으로 같은 학생 신분이라는 공감대를 이루며 점차 광주학생시위는 전국 단위의 광주학생독립운동으로 확대되어 갔다. 일제의 광주지역 학생 탄압의 강도가 높아지면서, 공분은 확산되었다. 1929년 12월에 들어가면서 광주학생시위는 연대의식 속에서 전국적인 광주학생독립운동으로 확대되었다. 같은 달 서울 등의 주요 도시에서 시위가 일어났다. 1930년 1월부터 3월까지 이어진 광주학생독립운동에는 북으로는 함북 회령, 남으로는 전남 제주까지 전국 280여 개 학교가 참여했다. alt 광주학생독립운동 당시 뿌려진「격문」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의의 광주학생독립운동은 1929년 10월 말 나주역 사건에서 시작되어 같은 해 11월 광주지역에서 2차례의 학생·시민 시위를 거쳐 1930년 3월까지 전개된 일제에 저항한 민족운동이었다. 광주에서 시작되었지만, 학생들의 요구 사항은 광주만의 현상이 아니었다. ‘식민지 교육 철폐’라는 정치적 요구가 이 운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켰다. 한편 광주라는 공간은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출발점에서 그 역할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1929년 11월 3일과 11일의 2차례의 광주학생시위는 민족적 과제를 운동의 방향으로 설정함으로써 추후 전개될 광주학생독립운동의 기본적인 모델을 제시했다. 또한 광주학생독립운동이란 전국적인 시위과정에서 항상 ‘광주 구속학생의 탈환과 석방’의 내용이 빠지지 않았던 것은 연대의식의 발로였다. 광주학생시위와 광주학생독립운동은 3·1운동과 6·10만세운동의 연장선상에 그 역사적 의미가 부여되었다. 당시 민족운동진영에서는 광주학생독립운동을 통해 3·1운동과 같은 민족적 연대의 경험을 재현하고자 기대했다. 실제로 광주학생독립운동의 경험은 1930년대와 1940년대 학생운동으로 이어졌다. 특히 전시체제기에 비밀결사운동으로 계승되었다. 그리고 광복 후 학생들의 정치적 참여 의식은 4·19혁명 등으로 이어져 한국 민주주의 발전의 중요한 한 축을 이루었다. ]]> Thu, 01 Dec 2022 10:20:02 +0000 73 <![CDATA[만나보기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주역 장재성·장매성 남매]]> 글 류시현(광주교육대학교 교수) 특정 지역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건에는 특정 인물의 활동이 존재하기 때문에 가능하다. 1894년 1월의 고부항쟁이 한 예이다. 조병갑의 학정이 그 원인이라고 하지만, 비슷한 탐관오리는 전국에 많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고부인가? ‘전봉준과 농민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전의 민란과 달리 고부항쟁은 지역의 경제적 문제를 서울의 정치적 문제로 확장해서 해결하고자 했고, 이러한 움직임은 동학농민운동으로 이어졌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주역 가운데는 장재성·장매성 남매가 있었다.   alt 장재성·장매성 남매 사진 장재성과 독서회중앙회 장재성은 1908년, 장매성은 1911년 광주에서 태어났다. 회계공무원이었던 아버지 장원용과 어머니 최예언 사이에서 태어나 두 사람은 안정되고 유복한 가정에서 자랐다. 장재성은 운동도 잘해서 학교 야구팀의 주전 선수로 활동하기도 했다. 1926년 11월 당시 광주고보 5학년이었던 장재성은 광주고보생·농고생과 함께 ‘성진회(醒進會)’라는 비밀조직을 만들었다. ‘성진’은 깨어서 나간다는 뜻으로, 식민지 청년으로서 현실을 각성하고 새로운 길로 나아가고자 하는 모임이었다. 이 비밀조직이 바로 광주학생독립운동이란 물줄기의 ‘저수지’였다. 성진회는 매월 2회 토요일에 정기집회를 열기로 하고 경비로는 매월 10전씩을 거두기로 했다. 총무는 왕재일, 회계는 장재성, 서기는 박인생이 맡았다. 하지만 성진회는 활동 5개월만인 1927년 3월 자진 해산했다.  이후 성진회 회원들은 학교별로 독서회를 만드는 등의 활동에 들어갔다.1927년 초 일본 도쿄로 유학을 떠났던 장재성은 1929년 6월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했다. 돌아온 장재성은 ‘조직적 단결을 통한 사회주의의 연구와 실행’을 위해 독서회중앙부를 결성했다. 회합은 일주일에 한 번씩 갖고, 각 학교별 조직을 서두르기로 했다. 광주 시내에는 ‘장재성 빵집’, ‘김기권의 문방구’가 거점으로 활용되었다. 독서회중앙부는 장재성이 책임비서를 맡았고 조사선전부, 조직교양부, 출판부, 재정부 등의 부서를 두었다. 각 학교별로도 독서회중앙부와 유사한 독서회를 결성해 중앙부와 연락이 통하도록 했다. 이에 따라 광주고보, 광주농업학교, 전남사범학교에서 독서회가 결성되었다. 광주여고보에서는 장재성의 누이동생 장매성을 중심으로 한 독서회가 결성되었다. alt 성진회 회원사진(좌), 장재성 빵집 기사(『중외일보』, 1930.1.15.)(우) 맹휴(동맹휴학)의 시대와 여학생의 비밀결사 민족적 독립운동인 3·1운동에서 특히 주목받은 것은 학생의 등장이었다. 학생들은 거리 시위뿐만 아니라 동맹휴학을 통해 일제에 저항했다. 1920년대 들어가면서 동맹휴학은 학생운동이 학교와 사회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는 일반적인 운동방식으로 자리잡아갔다. 학생운동이 학교당국을 대상으로 한 것을 넘어서 일제에 저항하는 데까지 나아간 것이다.1927년과 1928년에 걸쳐 전국 곳곳에서 동맹휴학이 일어날 때 전라남도 광주에서도 치열한 맹휴가 일어났다. 광주고보와 광주농업학교, 그리고 여학교인 광주여고보에서 맹휴가 잇달았다. 1928년 4월 광주여고보에서 일어났던 맹휴를 경험한 장매성 등의 여학생들은 사회과학을 공부할 필요성을 느꼈다. 같은 해 11월 광주여고보에서는 독서회가 조직되었는데, 소녀회라고 도 불렸다.장매성은 이 자리에서 한국인 여학생은 일제강점기에 남성, 자본가 계급,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3중의 압박’을 받는 존재이기에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참여한 여학생들은 이 말에 모두 찬성하면서 소녀회가 탄생한 것이다. 소녀회원들은 매월 10전씩의 회비를 내어 사회과학 잡지와 서적을 구입해 읽고 토론했다. 이들은 여성 해방, 민족 해방, 계급 해방을 지향하고자 했다. alt 광주고보 맹휴 보도(『매일신보』, 1928.6.28.)(좌), 광주소녀회사건 보도(『매일신보』 1930.10.1.)(우)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이끌다 11월 3일 시내에서 일본 학생들과 격투를 벌인 뒤 흥분해있는 학생들에게 장재성은 “우리의 투쟁 대상은 일본 중학생이 아니라 일본 제국주의다”라고 말했다. 광주학생시위가 학생에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정치적인 문제임을 천명한 그의 주장은 광주학생들의 시위 참여에 강력한 추동력이 되었다. 장재성은 독서회중앙부의 조직을 통해 학생을 동원하고 격문을 배포하였다. 또한 장석천 등과 함께 학생투쟁지도본부를 결성하고 광주학생을 지도하는 책임을 맡았다. 또한 서울에서 내려온 신간회를 비롯한 사회운동 단체에게 연대와 지원을 요청했다. 11월 12일 시위가 준비되었다. 장매성은 흥학관의 등사판으로 수천 장의 격문을 인쇄하는 일을 맡았다. 흥학관은 당시 광주지역 사회단체와 사상단체의 사무실이 자리한 건물이었다. 이 인쇄물들은 11월 12일 시위날에 배포되었다. 이날 장재성을 비롯한 투쟁본부 간부 대부분이 체포되었다. 한편 광주여고보 학생들은 교문에서 제지당해 11월 12일 시위에는 동참하지 못했다. 광주여고보 학생들은 이틀 후인 11월 14일에 본격적인 시위를 전개했다. 아침부터 교내에서 시위를 벌이고 오후 7시 경에는 교정에서 독립가를 합창하며 만세를 외치고 사감실에 투석을 해 유리창을 파괴했다.  1930년 1월에는 시위에 참여했던 학생들이 석방되기 전까지 시험에 응하지 말자고 한 백지동맹에 나섰다.1930년 1월 15일 서울에서 여학생연합시위가 일어난 날, 광주에서는 광주여고보 학생 12명이 경찰에 검거되었다. 광주여고보 당국은 백지동맹사건과 학생 12명 검거 사건이 일어나자 강경 대응했다. 곧바로 백지동맹 관련자 및 소녀회 관련자에게 무기정학을 처분하거나 퇴학을 종용했다. 소녀회 관련자 11명은 검거된 지 무려 9개월 만인 1930년 9월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재판이 시작되었다. 검사는 장매성에게 징역 2년을 구형했다. 재판 당시 장매성은 늑막염을 앓고 있었는데, 보석이 허락되지 않았다. 광주학생독립운동으로 장재성은 1931년 6월에 징역 4년을 선고받았다. 장매성은 같은 해 10월 6일 열린 1심 공판에서 검사의 구형대로 징역 2년의 실형을 받았다. 장매성은 1년 2개월 14일의 옥고를 치르고 1932년 1월 22일에 가출옥했고, 장재성은 1934년 4월 만기 출옥했다. 장재성은 출옥 후 일본으로 가서 니혼대학(日本大學) 상경과를 졸업했다. 1936년 6월에는 재동경조선인유학생연합회 결성에 참가하여 활동했다. 귀국 후 광주학생독립운동 참가자들과 함께 비밀리에 조직을 모색하던 중 1938년 2월 재차 검거되었다. 한편 장매성은 1938년에 광주고보생으로서 독서회 사건으로 검거되었던 정석규와 결혼했다. 장재성은 광복 직후에는 건국준비위원회 광주지부 위원, 전남지부 조직부장을 역임했다. 1945년 12월에는 광주청년동맹을 조직하고 의장이 되었다. 1946년 2월 민주주의민족전선 결성대회에 전남 대표로 참석했으며, 같은 해 3월에는 민주주의민족전선 전남지부 결성준비회의 총무부에서 활동했다. 1948년 검거되어 징역 7년을 선고받았다. 광주형무소에서 수감생활 중 6·25전쟁이 일어났고, 이때 처형당해 43세의 삶을 마감했다.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소녀회 관계자인 장매성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하였다. 반면 장재성은 광복 이후의 활동과 행적 때문에 국가공훈자로 선정되지 못하고 있다. 역사에서 ‘도화선’의 역할을 하는 인물이 있다. 고부항쟁과 동학농민운동에 ‘전봉준과 농민들’이 있었듯이 광주학생독립운동에 ‘장재성과 장매성 남매 및 많은 한국인 학생들’이 있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alt 장재성(아래 줄 왼쪽)·장매성(위 줄 가운데) 가족 사진 ]]> Thu, 01 Dec 2022 10:44:09 +0000 73 <![CDATA[이달의 독립운동가 일제의 침략에 대항한 정미의병 의병장 김상태·신태식·김동신]]>  글 독립기념관 전시부 alt 일제의 침략에 맞서 정미의병을 일으키다 1907년 일제가 헤이그특사 파견을 빌미로 강제로 광무황제를 퇴위시키고 대한제국 군대를 강제 해산시키자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해산 군인들이 의병에 참여하면서 전략과 전술이 향상되고, 의병부대 사이에 연합이 모색되어 이인영을 중심으로 결성된 13도 창의군이 서울진공작전을 추진하였다. 각지에서 이어진 의병 항쟁은 일제의 강경진압, 특히 ‘남한대토벌작전’ 이후 국내에서 사실상 활동이 불가능해졌다. 하지만 일부 의병들은 국외로 이주하여 독립군으로 활동하며 일제에 대한 저항을 지속하였다. alt 『Le Petit Journal』에 실린 해산군인과 일본군과의 전투장면(1907.8.4.)(좌), 구한말 의병부대 (1907.8.)(우)  김상태, 경북을 중심으로 이강년과 함께 활약하다 김상태는 1862년 충청북도 단양에서 태어났다. 1895년 을미사변, 단발령에 항거하여 경상북도 문경에서 이강년 의병부대의 중군장으로 을미의병에 참여하였다. 1907년 광무황제의 강제 퇴위와 대한제국 군대 해산에 맞서 의병 재기를 준비하며 중군장으로서 이강년과 함께 의병을 이끌었다. 1908년 이강년 의병장이 체포·순국하자 김상태는 의병의 전열을 정비하고 일본군과 항전을 이어나갔다. 700~900여 명의 의병을 이끌던 그는 1911년 일제에 붙잡혀 사형을 언도받고 옥중 순국하였다. 정부는 김상태의 공훈을 기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alt 속오작대도(束伍作隊圖)(좌), 의병항쟁을 전개하다 일제에 붙잡혀 옥고를 치른 김상태(우) 신태식, 의병에 참여하고 독립군 자금 모금운동을 전개하다  신태식은 1864년 경상북도 문경에서 태어났다. 1985년 을미의병에 합세하여 밀정 처단 활동 등을 하였다. 1907년 정미의병이 봉기하자 도대장으로 문경에서 이강년, 평해에서 신돌석 의병부대와 연합을 추진하고, 제천·원주·홍천 등지에서 일본군과 맞서 승리를 거두었다. 1909년 다친 몸으로 일본군과 교전하던 중 총상을 입고 붙잡혀 10여 년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1920년 비밀결사인 의용단을 결성하여 독립운동 자금을 모아 서로군정서를 지원하였다. 1922년 일제에 의용단 조직이 발각되어 1년간 옥고를 치렀지만 1932년 병으로 서거하기 전까지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정부는 신태식의 공훈을 기려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alt 창의가 김동신, 충청도·경상도·전라도를 넘나들며 활동하다 김동신은 1871년경 전라북도 장수에서 태어났다. 의원(醫員)으로 생활하던 중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되자 1906년 민종식·최익현이 이끄는 의병부대에 참여하고자 뜻을 밝혔다. 하지만 일제의 탄압으로 의병부대가 와해되자 1907년 내장산 일대에서 의병을 규합하였다. 삼남의병대장으로 칭하며 충청·경상·전라도로 활동을 넓혔고 1,000여 명이 넘는 부대를 이끌며 일제에 맞서 승리를 거듭하였다. 그러다가 잠시 고향에 머물던 중 일제에 붙잡혀 종신형을 선고 받고 1910년까지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김동신의 공훈을 기려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alt 충청·경상·전라지역에서 의병을 이끈 김동신(좌), 김동신 간찰(우) alt ]]> Thu, 01 Dec 2022 14:23:01 +0000 73 <![CDATA[독립운동 사적지 조선독립운동후원의용단을 이끈 신태식의 독립운동 현장]]> 정리 편집실 의병 항쟁에서 활약한 신태식 신태식(申泰植, 1864-1932)은 1895년 단발령을 계기로 의병을 일으켰다. 이후 1907년 8월 3일 단양에서 의병 수백 명을 모집하여 도대장에 취임하고, 울진·평해·영양·영덕·영월·제천·원주·홍천·철원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그의 휘하 장졸로서는 도선봉에 김세영·좌선봉에 강창근·중군에 유제칠·참모에 엄해윤·영솔에 조수안·별포에 김운선 등이 있었다. 작전 전개에서 이강년 의병부대와 합세하여 혁혁한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1908년 9월 홍주 전투에서 물러나 횡성으로 퇴각할 때 적탄에 맞아 어깨에 부상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양주 산안 전투에 참전하여 일본군을 사로잡아 총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12월 14일 영평 전투에서 왼쪽 다리에 총상을 입고 일본군에게 붙잡혔다. 그는 1909년 2월 교수형을 선고받았으나, 상고하여 10년으로 감형되었다.  alt 갈평전투지 전경(좌), 갈평전투지 경모각(우) 이강년의병 갈평전투지 1907년 9월 이강년이 이끄는 의병부대가 전투를 벌인 곳이다. 이 전투에서 신태식 부대와 이인영 부대가 이강년의 주력 부대와 연합하여 큰 승전을 이뤄냈다. 이곳에는 현재 1967년에 세운 기념비와 1973년에 세운 경모각이 있다. 주소 경북 문경시 문경읍 갈평리 산 127-2 조선독립운동후원의용단 조직 1918년 1월에 출옥한 신태식은 조선독립운동후원의용단을 조직하여 군자금 모집활동을 펼쳤다. 조선독립운동후원의용단은 1920년 3월 경상도 지역을 중심으로 조직된 독립운동단체이다. 1919년 5월 서간도의 무장항일운동단체는 서로군정서를 결성하였다. 서로군정서의 재정은 한인의 헌금으로 유지되었는데, 경상도 지방에서 재정 후원을 위한 비밀결사로서 조직된 것이 조선독립후원의용단이었다. 신태식은 경상북도 단장을 맡아 동지 규합 및 군자금 모집 등의 활동을 벌였으나 이듬해 기밀이 드러나 붙잡히고 말았다. 신태식은 1922년 12월 대구감옥에 수감되었다가 1923년 12월 징역 1년을 언도받았다. 1924년 6월 출옥 후에도 항일투쟁을 펼치다 1932년 69세로 서거하였다.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alt 신태식 생가 전경(좌), 신태식 생가 정면(우) 신태식 생가 「신태식 판결문」과 「이응수 등 판결문」에 관련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신태식의 집은 일제에 의해 일부 소실되었고, 홍수 피해 등으로 사라졌던 것을 새롭게 복원하였다. 오늘날 경상북도기념물 제153호로 지정되었다. 주소 경북 문경시 가은읍 섬안길 7-2 (민지리 186) ]]> Thu, 01 Dec 2022 10:55:55 +0000 73 <![CDATA[아름다운 인연 미주지역 독립운동 통합에 온몸을 던진 한시대·박영숙 부부]]> 글 김형목(사단법인 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이사) 일찍이 하와이로 건너간 한시대는 사업가로서 성공을 거두면서 활발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대한인국민회와 재미한족연합위원회 활동을 통해 재미 한인사회를 통합하였으며, 평생을 임시정부 후원 및 외교·선전 사업에 주력하였다. 그와 부부의 연을 맺은 박영숙 또한 신한부인회 서기를 시작으로 대한여자애국단 딜라노 지부 재무를 맡는 등 광복을 위한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alt 박영숙·한시대 한시대, 아버지를 따라 민족의식에 눈뜨다 한시대는 1889년 9월 황해도 해주에서 아버지 한준상과 어머니 문성선 사이에 2남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한준상은 국민회 창립 직후 새크라멘토지방회 총무로 활동하고, 대한인국민회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에 앞장선 인물이었다. 한시대는 1903년 부모를 따라 하와이로 건너갔다. 그는 호놀룰루 한인기숙학교에 입학한 후 밀스(Mills)학교로 전학하였다. 밀스학교는 1892년 중국인을 위해 호놀룰루 시내에 설립된 학교였으나 당시 재학생 중에는 한인 학생들이 많았다. 그는 일찍이 하와이로 이주하여 하와이 호놀룰루 한인기숙학교를 다니던 박영숙과 인연을 맺고 약혼하였다. 1913년 7월 두 사람은 함께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갔고, 한시대는 로웰고등학교 4학년에 편입 후 그해 12월 졸업하였다. 사업가로 성공하여 민족운동을 지원하다 이후 박영숙과 결혼한 그는 멘티카에서 사탕무농장을 경영하였다. 농장 규모는 150에이커로, 당시 멘티카에서 농사를 짓던 한인들 가운데 두 번째로 넓은 땅이었다. 사탕무농장을 시작으로 다뉴바와 딜라노에서 포도와 채소 농장을 경영하여 마침내 한가(韓家)회사를 일구어냈다. 그는 멘티카에서 아버지를 도와 대한인국민회 멘티카지방회를 설립하며 민족운동에 첫 발을 내딛었다. 아버지는 초대 회장, 그는 법무원에 선임되어 부자가 함께 활동하였고, 이는 온 가족이 민족운동에 투신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생활근거지를 다뉴바로 옮겨 농장 경영과 함께 노동주선인으로 생활하였다. 이 시기 대한인국민회 다뉴바지방회는 통상회를 개최하고 한시대를 회장으로 선임하였다. 이듬해 한시대는 다뉴바지방회 회장 이순기와 함께 다뉴바의 대의원으로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 대의원회에 참석하여 한인사회 발전책을 제안하였다. 한편, 대한인국민회의 재정 모금활동은 제1차 세계대전 종결 직후부터 시작되었으나 3·1운동 이후 본격화되었고, 107,792달러 61센트에 달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1918년 당시 농장이나 철도 노동 등의 임금 수준은 월 30∼60달러에 불과했고, 대한인국민회 1년 예산이 1만 달러였던 것을 감안하면 엄청난 거금이었다. 참여자도 1,652명으로 이는 미주한인 절반가량에 해당하는 숫자였다.이뿐만 아니라 독립의연금을 모금할 때 한시대는 온 가족과 함께 참여하였다. 아버지 20달러, 어머니 20달러, 한시대 550.85달러, 부인 박영순 20달러, 큰아들 15달러, 둘째 아들 15달러, 동생 25달러 등 총 665.85달러였다. 또한 구미위원부의 외교활동을 돕기 위해 김호·사병순과 함께 1,750달러를 전달하였으며, 워싱턴회의를 대비한 외교활동비를 모금할 때도 특별외교비를 지원하였다.한시대는 다뉴바에서 국민대표회기성회를 결성할 때 국민대표회의 개최를 적극 지지하였다. 당시 미주 한인사회에서는 국민대표회 소집 문제를 둘러싸고 찬반양론이 일어났다. 다뉴바 한인들은 국민대표회 개최를 지지하였고, 이때 한시대는 부인 박영순과 그의 부모와 함께 참가하였다. alt 중가주 딜라노의 한시대 농장 민족교육에 힘을 기울이다 통합운동에서 한시대가 수행한 가장 의미 있는 일은 하와이의 대한인국민회와 동지회를 결집한 해외한족대회 개최였다. 이는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결집하여 통일된 독립운동을 전개하자는 취지였다. 주요 내용은 독립 전선의 통일, 임시정부 봉대, 외교운동을 위한 주미외교위원부 설치, 미국 국방공작의 원조, 독립금으로 재정통일,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설치 등이었다. 이로써 미주한인사회는 하와이와 북미의 모든 한인 단체들이 통일된 독립운동을 추진할 수 있었다.태평양전쟁 발발에 한시대는 중앙집행위원장의 이름으로 특별 포고를 발표했다. “미국은 반드시 일제를 이길 것이고, 이렇게 되면 한국 광복의 기회가 도래하므로 미주한인들은 미국을 돕는데 노력할 것”을 당부하였다. 1943년에는 대한인국민회 중앙집행위원장과 집행부위원장으로 재미한족연합위원회를 이끌었다. 한국독립문제가 국제 열강으로부터 주목을 받고 충칭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활발히 독립운동을 전개할 때 재미한인사회를 주도하였다. 동시에 신한민보사장으로 언론 발전에 이바지했다.이승만과 주미외교위원부 개조를 둘러싼 논쟁이 일자 임시정부의 훈령에 따라 재미한인 전체대표대회를 개최하였다. 전체대표대회의 결과마저 무시되자 마침내 임시정부와 결별한 후 워싱턴사무소를 외교활동의 거점으로 삼고 독자노선을 추진하였다. 1945년 4월 샌프란시스코회의가 개최되자 한시대는 국제회의 대비를 위한 방안으로 해외한족대회를 개최하였다. 그는 해외한족대표단 단장을 맡아 샌프란시스코회의에 대비한 선전외교활동을 추진했다. 이 단체는 임시정부대표단(단장 이승만)과 대립하여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alt 재미한족연합위원회 기념사진(대한인국민총회 건물 앞, 1942) alt 샌프란시스코회의에 대한 한국대표단의 성명서 박영숙, 시어머니와 함께 독립운동에 나서다 박영숙은 1891년 7월 20일 경기도 강화군에서 태어났다. 그는 일찍이 하와이로 이주하여 호놀룰루 한인기숙학교를 다녔다. 유학을 목적으로 약혼자 한시대와 함께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여 중학교에 입학하였다. 졸업 직후 1914년 9월 한시대와 부부의 연을 맺은 그는 미국식으로 남편 성을 따라 한영숙(韓英淑, 韓英菽, Louisa P.Hahn)이 되었다. 그는 시어머니 문성선이 강원신·한성실 등과 신한부인회를 조직할 때 함께 참여해 서기로 선정되었다. 이어 다뉴바에서 신한부인회와 새크라멘토의 한인부인회 통합이 결정되었다. 북미지역 여성단체를 통합하여 대한여자애국단을 창설할 때는 신한부인회를 대표하여 합동 발기자로 참여했으며, 총부위원으로서 1924년까지 활동하였다. 또한 남편과 함께 대한인국민회 다뉴바지방회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미주지역 여성운동을 이끌다 박영숙은 안에서는 자녀 양육과 남편 내조에 힘썼고, 밖에서는 여성운동에 매진하였다. 대한인국민회 딜라노지방회가 조직되자, 9년 동안 남편과 함께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대한인국민회 창립기념식, 3·1기념식, 故 안도산 선생 추도식 등에서 노래와 사회 등을 맡아 행사와 기념식을 빛냈다. 또한 흥사단 단우로 입단하여 활발한 활동을 펼쳐 미주지역 여성들에게 자존감을 일깨웠다.그뿐만 아니라 대한인국민회 기관지 『신한민보』의 식자기계 의연 모집위원회 수전위원을 맡은 그는 한국광복군이 창설되자 딜라노지방 대한여자애국단 단원들과 함께 500달러를 임시정부로 보냈다. 이를 계기로 딜라노에 정식으로 대한여자애국단 지부를 조직하고 재무로 선정되어 1942년까지 활동하였다. 대한여자애국단 딜라노지부 단장으로서 주미외교위원부 개조를 위한 전체 대표회와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전체대표회에 대한여자애국단 대표로 참석했다. 이처럼 3·1운동부터 광복 때까지 여러 차례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하거나 여권 신장에 온몸을 던졌다. 그의 일생역정은 한시대 일가의 ‘대들보’로 평가해도 절대 과장이 아니다. 한영숙은 노년까지 딜라노에서 조용히 지내다가 1965년경 사망하였다. 정부는 미주지역 독립운동 통합을 이끌며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공훈을 기려 한시대에게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2017년 한영숙에게 건국포장을 각각 추서하였다. alt 한시대·박영숙의 가족 사진 (1948) ]]> Thu, 01 Dec 2022 11:25:10 +0000 73 <![CDATA[끝나지 않은 독립운동 욱일기(旭日旗), 일본 군국주의의 망령이다]]> 글 이계형(국민대학교 교양대학 교수) ‘욱일기’는 일본 국기인 일장기의 둥그런 붉은 태양 문양 주위에 아침 햇살처럼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광선을 형상화한 것을 이른다. 이를 욱광(旭光)이라고 한다. 지난달 일본 해상자위대 창설 70주년을 맞아 열린 관함식에서 우리 군함의 군인들이 욱일기 모양의 해상자위대기에 경례하여 논란이 일었다. 얼마 전에는 2022 카타르 월드컵 경기에서 일본인이 욱일기를 관중 단상에 내걸려고 시도했다가 철거되기도 했다. 이렇듯 욱일기가 한국뿐만 아니라 중국·동남아시아 국가들로부터 왜 외면받고 비난받는 것일까?  에도시대부터 시작된 욱일기의 역사 욱일기의 역사는 대강 이렇다. 지금의 욱일기로 정형화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에도시대(1603년)부터 일본의 전통적인 상징으로 사용되어왔다고 한다. 욱광은 일본 일족(一族)의 가문 문장이나 민간에서 출산·명절·축하·기원의 뜻으로 사용됐던 것이었다. 그러다가 1870년 5월 메이지유신 때 육군을 창설하면서 욱일기를 군기로 채택했고, 1889년 10월 해군도 이에 따랐다. 차이점은 전자는 원이 중앙에 있지만, 후자는 약간 왼쪽으로 치우쳐 있다. 이때 군기는 16조 욱일기(十六?旭日旗)였다. 이는 일왕 가문의 국화꽃이 16장인 것과 관련성이 깊다고 한다. 이는 1945년 8월 일제가 항복할 때까지 사용되었다.욱일기가 문제가 되었던 것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제가 아시아 각국을 침략할 때 육군과 해군에서 욱일기를 전면에 내걸어 일제 군국주의와 제국주의를 상징하는 깃발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1942년부터 3년 동안 일제에 점령되었던 말레이시아를 한 예로 들어보자. 당시 페낭섬의 일본 해군기지에 독일 U보트가 파견되었는데, 독일 승무원들을 위한 일본 해군의 환영식이 열렸다. 이때 욱일기가 독일 나치의 상징인 하켄크로이츠와 나란히 걸렸다. 이를 통해 욱일기를 전범기로 이해하게 되었다.1945년 8월 일제가 패망하면서 일본군은 해체되었고 이에 욱일기는 자연히 사용이 중지되었다. 이후 1954년 7월 자위대가 창설되며 욱일기가 다시 쓰이기 시작했다. 일본 해상자위대는 붉은 16줄 무늬 욱일기를 군기로 제정했고[자위함기], 육상자위대는 이를 약간 변형한 8줄 무늬 욱일기를 채택했다[자위대기]. 이와 달리 항공자위대는 단순한 붉은 원을 상징으로 사용한다. 자위대는 방어를 위해서만 무력을 보유, 행사할 수 있게 되었기에 그들이 욱일기를 다시 사용한다고 하여 한국을 비롯한 일제에 침략당한 국가는 이를 크게 문제 삼지 않았다. 일본 우익의 군국주의 망령이 되살아나다 그런데 1990년대부터 일본 안팎으로 “일본의 노인 세대가 어린 세대에게 지나간 역사를 가르치려고 하지 않는다”라는 비판과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일본이 ‘패전국 콤플렉스’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움직임 속에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고이즈미 정권부터 우경화 흐름이 엿보이기 시작하면서 이웃 나라들과 마찰을 빚었다. 우익 사관의 일본 역사 교과서가 채택되는가 하면, 아베 정권이 들어선 2012년부터는 욱일기를 들고 길거리를 행진하는 극우 시위대가 나타났다. 더욱이 욱일기를 단 일본자위대의 국제적 활동이 예전과 달리 활발해졌으며, 2015년에는 이보다 한발 더 나아가 자위대의 ‘집단적 자위권’ 행사가 가능해졌다. 이로써 자위대는 일본이 직접 공격을 당하지 않더라도 안전이 위협받거나 국제사회의 평화가 위태롭다고 판단될 땐 세계 어디서든 교전이 가능해졌다. 이처럼 일본 우익의 군국주의 망령이 되살아나면서 욱일기를 사용해 일본제국이나 일본군 혹은 일본의 전쟁 범죄를 찬양하거나 미화, 선동하는 예도 종종 있다. 이와 더불어 상업용 욱일기가 많은 제품과 디자인, 의류, 포스터, 맥주 캔, 밴드, 만화(Fantastic Four / Iron Man: Big in Japan, June 2006), 애니메이션, 영화, 비디오 게임(E. Honda의 Street Fighter II 무대) 등에 사용되고 있다. 이외에도 일본 내에서는 축제와 이벤트뿐만 아니라 선박의 장식용 깃발로 사용된다. 또한 비일본계 축구 선수들의 스포츠 경기에도, 심지어 주일미군부대 마크의 상당수가 욱일기를 쓰고 있다. 국내에서 국외로 확산된 욱일기에 대한 비판 여론 이와 달리 국내에서는 욱일기에 대한 비판 여론이 확산하고 있다. 2013년에 국회에서 욱일기를 공식적으로 금지하는 법안이 발의되기도 했다. 이런 가운데서도 국내 연예인들이 욱일기가 그려진 옷을 입고 방송 출연하여 세간의 비판을 받기 일쑤였다. 2016년 8월 그룹 소녀시대 멤버 티파니가 광복절 전날 욱일기 이모티콘을 올려 네티즌들의 공분을 사기도 했다. 이는 국내에서 머물지 않고 국외로 확산하였다. 2009년에 ‘나이키 에어조던 12’ 신발 깔창에 욱일기 문양이 있다고 하여 불매운동이 일어났다. 국제축구연맹 FIFA는 공식 주간지 표지에 게재했던 욱일기 디자인을 일장기로 바꾸었다. 2019년 8월에는 PSV가 도안 리츠의 이적을 기념하며 욱일기 콘셉트의 포스터를 올렸다가 항의를 받고 이를 수정하였다. 하지만 2018년 러시아 월드컵 당시 욱일기가 등장하여 논란을 빚었는데도, 이번 카타르 올림픽에도 일본인들이 여전히 욱일기가 들고나와 논란을 초래하였다.  욱일기=하켄크로이츠, 욱일기=군국주의 망령 욱일기 사용 논란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아니 오히려 한일 양국 간에 논란으로 확산하는 모양새다. 우리 정부는 2018년 10월 제주도에서 개최한 해군 관함식에 참가하는 모든 국가에 자국 국기와 대한민국 국기만 배에 전시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일본은 일본의 법에 근거하여 ‘태양기 게양’을 의무화해야 한다면서 관함식에서 철수하였다. 그 뒤 2019년 10월 일본에서 개최한 자국 관함식에 우리 해군을 아예 초청하지 않았다. 2020년 도쿄 올림픽에서 이순신 장군 메시지 인용 현수막(‘신에게는 아직 5천만 국민들의 응원과 지지가 남아 있사옵니다’)은 철거됐지만, IOC가 욱일기 사용 금지 요청을 거부하면서 논란이 일었다. 이와 달리 2022년 10월 열린 일본 해상자위대 국제관함식에 우리 해군이 참가하여 일본 해상자위함기에 경례하였다고 하여 비난 여론이 일기도 하였다. 우리 정부 측의 해명은 “일본 자위대 깃발과 욱일기는 다르다”였다.한국인들이 욱일기에 대해 너무 과민하게 반등한다는 얘기도 있다. 욱일기는 해상자위대의 자위함 깃발로서 세계 각국에서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데, 유독 한국에서만 ‘전범기’ 등의 용어까지 만들었다며 비난한다. 하지만 ‘욱일기=하켄크로이츠’, ‘욱일기=군국주의 망령’이라는 공식을 잊어서는 안 된다. 도쿄 야스쿠니 신사에서 해군복 차림에 어깨총을 한 일본인 노병(老兵)이 욱일기를 앞세우고 밴드 소리에 맞춰 행진하는 한 경계를 늦출 수는 없다. alt 말레이시아 페낭섬에서의 일제 욱일기와 독일 나치 하켄크로이츠 ]]> Thu, 01 Dec 2022 11:37:22 +0000 73 <![CDATA[독립의 발자취 그 시대를 웃고 울린 베스트셀러 ‘딱지본’]]> 글 편집실 한국학중앙연구원은 완판본문화관과 함께 마련한 <이야기책 딱지본> 특별전을 통해 1900년대 초 대중적 출판물이었던 딱지본 소설을 공개했다. 이번 전시는 오는 12월 30일까지 한국학중앙연구원 내 자리한 한국학도서관 1층 로비에서 개최된다. 찬바람 부는 겨울, 옛 감성이 가득한 전시를 보며 온기를 더해보는 것은 어떨까. alt 이야기책 ‘딱지본’이란?딱지본은 1900년대 초 신식 활판 인쇄기로 찍어 발간한 책을 말하는데, 고전소설과 신소설 같은 소설류가 대부분이다. 대중을 겨냥하여 표지 디자인이 화려하고, 활자는 비교적 크며, 50장 내외 짧은 분량으로 비교적 값이 저렴했다. 이때 알록달록 화려한 색감으로 이루어진 표지가 마치 아이들이 가지고 놀던 딱지처럼 화려하다고 해서 ‘딱지본’이라고 불렸다. 당시 국수 한 그릇 정도의 저렴한 가격이었다고 해서 ‘육전소설’이라고도 불렸다. alt 왼쪽부터『구운몽』, 『홍길동전』 딱지본 표지(좌), 전시된『홍길동전』 딱지본(우) 그 시대를 휩쓴 베스트셀러1935년 조사에 따르면 ‘춘향전’은 연간 7만권, 심청전이 6만권, 홍길동전이 4만5000권 팔렸다고 한다. 요즘 기준으로 봐도 베스트셀러에 오를 만한 판매량이다. 다수 전문가들은 딱지본이 책읽기의 대중화·근대화에 결정적 계기를 가져 왔다고 평가한다. 대량 생산된 값싼 책이 대중에게 퍼지면서 문자문화가 확산되고, 책과 독서에 대한 탈(脫)신비화가 진행된 것이다. 딱지본 = 구활자본 소설근대 이전의 책들은 제작하는 방식에 따라 필사본/방각본/구활자본 등으로 나뉘었는데, 20세기 초반 신식 활판 인쇄기가 도입되면서 딱지본은 주로 납활자로 인쇄되었다. 이와 동시에 이른바 ‘신소설’로 불리는 장르의 소설책들이 출간됨에 따라 고전소설과 신소설들이 납활자로 인쇄되었고, 이에 따라 딱지본의 또 다른 이름은 ‘구활자본 소설’이다. ·방각본 : 목판에 새긴 판본으로 찍어낸 책  ·필사본 : 인쇄하지 않고 손으로 글을 베껴쓴 책  ·구활자본: 활판 인쇄기(납활자)로 인쇄한 책 고전소설의 출판 방식을 한눈에이번 전시는 대중적 출판물인 딱지본 소설의 가치를 알리고 그 의미를 재조명하기 위해 마련됐다. 특히, 손으로 직접 베껴 쓴 ‘필사본’과 목판에 새겨 인쇄한 ‘방각본’을 거쳐 활자로 인쇄한 ‘딱지본’까지 당시 제작된 방각본 목판과 대중 소설을 직접 눈으로 보며 고전소설 출판 방식의 변천을 한눈에 확인할 수 있는 점이 이번 전시의 가장 큰 매력이라 할 수 있다. 전시에는 춘향전, 홍길동전, 이해조의 신소설 구마검 등 한국학도서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딱지본 46점과 완판본문화관이 소장하고 있는 방각본, 필사본 등 14점 등 총 60점의 작품이 선보인다. 이번 특별전의 관람 포인트이번 전시에서 주목할 점은 책표지 그림이다. 딱지본의 표지는 작품의 내용 가운데서 흥미로운 장면을 채색 그림으로 표현해 독자의 시선을 끌도록 인쇄되어 있다. 표지 전면에 소설 속 인물·공간 등을 배치하여 독자의 시선을 머물게 하는 그림은 상업적인 책표지 디자인의 시작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alt 『춘향전』, 『흥부전』 딱지본 표지(좌), 전시된 『춘향전』 딱지본(우) 관람객에게 전하는 말안병우 한국학중앙연구원장은 “이번 특별전은 현재 대중문화로 자리 잡은 소설 읽기의 역사적 변화를 근대 베스트셀러였던 딱지본 소설을 중심으로 직접 확인할 소중한 기회”라며 “한국학도서관에 소장된 방대한 근대자료를 지속해서 연구·수집하고 공유해 한국 문학의 우수성을 알리고 보존하는 데 더욱 노력을 기울이겠다”고 강조했다. 〈이야기책 딱지본〉 전시 속으로   첫머리, 딱지본이 대중문화에 미친 영향 전시의 ‘첫머리’는 근대 신문 및 작가의 회고록 등 다양한 기록물을 통해 딱지본이 대중문화에 미친 영향을 소개한다. 부녀자와 노동자, 농민 등 당시 독해력이 부족했던 사람들에게 읽을거리에 대한 허기를 채워 준 조선시대 도서대여점 세책점(貰冊店)과 소설을 전문적으로 읽어주던 전기수(傳奇?) 등의 기록이 테마별로 구성된다. 제1부, 딱지본 탄생의 의미 ‘제1부’는 딱지본이 판매를 목적으로 민간에서 간행한 필사본·방각본 소설에 이어 독자들에게 대량 유통된 기원과 문화적 파급력을 살펴본다. 완판본문화관에 소장된 필사본, 방각본(목판본), 딱지본 표지를 세긴 목판 등을 전시해 딱지본 탄생의 의미를 재조명한다. alt 제1부 제2·3부, 고소설 딱지본과 신소설 딱지본 ‘제2부’와 ‘제3부’는 한국학도서관에 소장된 딱지본을 고소설과 신소설로 구분해 전시한다. 세책점에서 대여해주는 도서를 초고로 활용한 고소설 딱지본과 신소설 대표 작가 이해조의 작품 등 다양한 애정 신소설이 선보인다. 끝으로 전시 관람후기를 남길 수 있는 QR코드와 방명록도 비치되어있다.  alt 제2부(좌), 제3부(우) ]]> Thu, 01 Dec 2022 13:32:39 +0000 73 <![CDATA[세계 산책 아이슬란드 독립운동의 ‘최고 지도자’ 욘 시구르손]]> 글 김기수(前 한국외국어대학교 스칸디나비아어과 강사) 욘 시구르손은 20세기 초 아이슬란드가 덴마크로부터 자결권과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앞장서 독립운동을 이끌었다. 현재 아이슬란드는 욘 시구르손의 탄생일인 6월 17일을 건국기념일로 지정하고 있을 만큼, 아이슬란드인에게 그는 남다른 의미를 지닌다. 자유와 독립을 억압하는 일체의 것들에 반대했던 그의 정신이 오늘날의 아이슬란드인 삶 속에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다. alt 욘 시구르손(1811.6 .17.~1879.12.7.) 북대서양의 외딴섬 아이슬란드와 지배국 덴마크 북대서양 한 가운데, 그린란드와 유럽 사이에 위치한 섬나라 아이슬란드는 대한민국과 비슷한 면적(약 10만㎢)에 인구는 약 37만 명 정도인 작은 나라이다. 800년대 중반 이후 바이킹으로 불렸던 북유럽 출신 주민들에 의해 본격적으로 개척되기 시작하였고, 잠시 독립적인 상태로 지내다 노르웨이를 거쳐 14세기 후반부터는 덴마크의 지배를 받게 된다. 그러나 두 나라 사이가 너무 멀고 덴마크 입장에서는 아이슬란드가 큰 이익을 주지도 못했기에 아이슬란드는 나름의 자치권한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를 대표하는 것이 930년경 시작되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민주적 의회로 평가되는 알팅(Althing 또는 Alþingi)으로, 이는 아이슬란드인들의 자부심이라 할 만하였다.그러나 17세기 중반 이후 덴마크 왕이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하면서 아이슬란드의 자치가 점차 약화되고, 두 나라 사이의 교역을 덴마크가 독점하면서 아이슬란드의 불만이 점차 쌓여갔다. 아울러 화산섬 아이슬란드의 잦은 천재지변은 그나마도 취약한 생존환경을 더욱 힘들게 했는데, 일례로 1783년 라키산(Laki)의 화산 폭발로 목초지 대부분이 소실되고 가축의 80%와 주민의 20%가 희생되는 대참사가 발생하기도 하였다. 여기에 1800년 덴마크 왕이 알팅의 기능까지 완전히 정지시키면서, 아이슬란드인들의 정체성 자체에도 심각한 위기가 닥치고 만다. 지배국 덴마크 역시 나폴레옹 전쟁(1803~1815)에서 나폴레옹의 편에 섰던 것에 대한 과실로 인해 이전까지 지배하고 있던 노르웨이의 지배권을 스웨덴에 넘겨주게 되는 심각한 실패(1814)와 영향력 상실에 직면해 있었다.  독립운동의 파도에 올라선 아이슬란드와 욘 시구르손 이렇듯 아이슬란드 내부의 어려운 현실과 지배국 덴마크의 쇠락에 더해 유럽 전역에서 프랑스대혁명 이후 크게 성장하던 민족주의 운동은 당연히 많은 아이슬란드인들에게 덴마크와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할 필요성을 제기하게 된다. 즉 덴마크 국내는 물론 아이슬란드에서도 기존 세력관계에 대한 불만과 그에 대한 개혁을 열망하는 목소리가 힘을 얻게 되었다. 이에 1830년대부터 아이슬란드의 자치권 확대와 독립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학자와 언론인 등 지식인 계층을 중심으로 본격적으로 제기되기 시작하였다. 이후 20세기 초까지 아이슬란드가 덴마크로부터 자결권과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쏟은 전체적 노력을 ‘아이슬란드 독립운동(Sjalfstæðisbaratta Islendinga)’이라 말한다. 이중 가장 주목할 만한 사람이 바로 ‘현대 아이슬란드의 아버지’로 평가되는 욘 시구르손이다. 아이슬란드 서부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욘 시구르손은 1833년 덴마크로 넘어가 수도 코펜하겐 대학에서 역사학과 문헌학을 공부하였다. 대학 졸업 전부터 그는 아이슬란드 역사 및 다양한 영웅담과 전설에 관한 귀중한 필사본 연구소에서 근무하면서 자연스레 관련 분야 최고의 전문가로 성장하게 된다. 이후에도 덴마크와 스웨덴 등지에서도 다양한 연구 활동을 전개하는 한편 학술지 발간을 통해 아이슬란드 고유의 역사와 정체성, 자치, 각종 행정 처리에 관한 견해를 지속해서 피력하게 된다. 자연스레 코펜하겐에 있던 그의 집은 덴마크에 거주하던 아이슬란드인들의 중심지로 기능하기도 하였다. 우리 모두는 거부한다! 욘 시구르손은 그간의 연구 및 정치활동의 경험을 통해 아이슬란드의 오랜 영토와 사람, 언어에 기초한 자유로웠던 시절의 회복과 국가 건설이라는 방향을 정립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생각이 아이슬란드 민족주의의 토대를 이룬다. 아이슬란드의 자결권 증진 및 새로운 입법 요구가 지속되자 덴마크 왕이 아이슬란드 관련 현안 자문위원으로 욘 시구르손을 선임하게 되면서, 욘 시구르손은 자신의 견해를 현실 정치에 본격적으로 반영하기 시작한다. 그가 이끄는 민족주의와 독립운동 과정에서 아이슬란드의 자부심 알팅이 1843년 복원되었으며, 1851년 아이슬란드의 자결권을 제한하고자 하는 덴마크 의회의 입법도 실패로 돌아간다. 이때 그는 아이슬란드인을 대표하여 해당 시도에 대해 “우리(아이슬란드인) 모두는 거부한다!”고 선언하여 향후 아이슬란드 독립운동에서 가장 중요한 계기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노력이 축적되어 1854년에는 아이슬란드 교역의 자유, 나아가 1874년에는 아이슬란드가 예산 집행과 헌법을 제정할 수 있는 권리를 획득하는 성과를 거두게 되었다. 이러한 성과와 영향력으로 많은 아이슬란드인들은 그를 ‘(알팅의) 의장 욘’ 또는 ‘지도자 욘’이라 칭하기도 하였다. 이런 정치적 측면에서의 활동 못지않게 그는 현재까지도 고대 북유럽 영웅담과 신화, 어학, 아이슬란드 역사, 법률, 고문서 등과 관련해 가장 왕성한 학문적 활동을 한 아이슬란드 학자로 평가될 정도 학자 본연의 활동에도 충실했던 사람이었다. 한편으로 아이슬란드인에 대한 차별 철폐, 농업과 어업기술의 현대화에도 크게 기여하면서 그는 아이슬란드 자치와 독립의 상징적 인물로 더욱 각인될 수 있었다. 즉 일생에 걸쳐 소박하고 청렴하였으며, 사람을 아끼는 한편 본인의 본래 직업(학자)에도 충실했던 인간적 면모 또한 이 사람을 아이슬란드 독립운동의 최고 지도자로 꼽기에 충분한 이유라 할 것이다.  완성된 아이슬란드의 독립 욘 시구르손은 1879년 사망하여 생전에 아이슬란드 독립을 목격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의 사후에도 아이슬란드 독립운동은 지속되어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1918년 12월 아이슬란드는 연합국 형태로 덴마크 왕이 다스리는 독립된 주권 국가(외교와 국방은 덴마크가 처리)로 드디어 독립을 쟁취하게 된다. 독일이 덴마크를 점령하고 있던 제2차 세계대전 말기 1944년 6월 덴마크 왕과의 관계도 완전히 단절하고 공화국으로 완전한 독립을 이룬다.  비록 욘 시구르손의 생전 공식적 독립을 이루지는 못했으나, 자신들의 역사와 사람, 언어에 대한 사랑에 기초한 민족적(국민적) 각성과 공감대 형성을 통해 평화적 방법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며, 향후 주변국과의 안정적 관계를 구축하는 것이 아이슬란드와 같은 소국이 독립을 쟁취하는 데 있어 필수불가결한 조건이라는 그의 사상은 이후의 아이슬란드 독립운동 과정에서도 변함없이 유지되었다. 아울러 현재 아이슬란드의 건국기념일이 욘 시구르손의 탄생일인 6월 17일에 기념될 뿐만 아니라 아이슬란드 지폐(500 ISK)와 각종 우표에도 그의 초상이 새겨진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욘 시구르손은 자유와 독립을 억압하는 일체의 것들에 단호히 반대하는 그의 정신과 함께 오늘날까지 자주독립국 아이슬란드인들의 삶 속에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다. alt 6월 17일 아이슬란드 국회 욘 시구르손 동상 앞에서 거행되는 건국기념일 행사 ]]> Thu, 01 Dec 2022 13:51:20 +0000 73 <![CDATA[기념관은 지금 묻혀있던 독립운동가를 다시 깨우다]]> 정리 편집실    사진 이소연 독립기념관은 2018년부터 독립운동 관련 자료를 분석하여 새롭게 독립운동가를 찾아내고, 독립운동 공적 및 사후 행적을 중심으로 발굴보고서를 작성하여 국가보훈처에 포상 추천을 하고 있다. 이는 국가와 국민을 위해 희생한 분들을 존중하고 기억하는 정부의 의지와 국민적 관심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번 호에는 독립운동가 자료발굴TF팀을 찾아가 그간의 성과와 앞으로의 계획을 들어본다. alt 왼쪽부터 독립운동가 자료발굴TF팀 이병례, 윤경섭, 이형대, 김철영, 유필규, 김건실, 김현진, 김도희  독립기념관에서 추진하는 독립운동가 자료발굴 사업에 대해 소개해주세요. 독립운동가 자료발굴 사업은 독립기념관에서 2018년부터 주도적으로 추진하고 있으며 독립운동가 발굴 및 포상 확대로 독립정신을 선양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습니다. 또한, 국내외 소재 관련 자료를 수집하고 분석하여 독립유공자 포상 확대에 일조하고, 알려지지 않은 독립운동가를 발굴하여 가치 확산 및 연구 기반 확대에 기여하고자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2022년에는 독립운동가 발굴 및 포상 추천, 독립운동 참가자 기초조사, 독립운동 관련 국외수집자료 번역, 국외지역 포상추천 자료수집 확대를 위한 전문가 회의 등을 실시했습니다. alt 포상 추천이 적합하다고 확정하기까지 어떤 과정을 거치나요? 포상 추천에 적합한지 판단하기 위해서는 자료를 통해 인물의 행적을 꼼꼼히 살펴보는 것이 기본이자 가장 중요한 과정입니다. 저희 팀에서 살펴보는 자료는 법원 판결문, 신문 조서 등의 행형 기록, 관공서 기록물과 개인 기록물, 조선총독부 관보를 비롯한 각종 신문, 당시에 발행되었던 잡지, 이후에 출간된 단행본, 논문 등이 있습니다. 이처럼 포상 추천하려는 인물에 대해 모든 자료를 찾아내고 부적절한 활동은 없었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독립운동가를 새롭게 발굴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아 보입니다. 새로운 독립운동 자료를 찾아내기까지 지난한 과정을 밟아야 합니다. 어떤 자료를 어떻게 수집할 지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아울러 지역 전문가를 통해 어느 지역에 어떤 자료가 있으며 역사적인 가치는 어떠한지 고견을 듣기도 합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현지 출장이나 유관기관과 협조하여 관련 자료를 수집합니다. 그동안 코로나 상황으로 현지 출장이 어려웠는데, 2023년에는 포상 추천을 위한 자료수집이 활성화되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alt 지난한 과정인 만큼, 뿌듯함도 클 것 같은데요. 포상 추천하기까지 모든 과정이 쉽지 않지만, 독립운동가들은 일제의 감시망을 피하고자 여러 개의 이름을 사용했고 동명이인도 많기 때문에 독립운동가로서 적합성을 판단하는 데 많은 시간이 소요됩니다. 이러한 경우에는 수많은 자료를 검토해야 하는데 주소지, 나이 등을 교차 검증하여 동명인 여부를 판단하고 친일 행적 여부도 확인합니다. 그러다 보면 한 사람을 찾아내는데 상당한 시일이 소요됩니다. 수많은 자료·시간과 싸워야 하지만 발굴보고서 작성을 마치고 나면 뿌듯한 마음이 듭니다. 그간의 실적에 대해서도 궁금합니다. 독립운동가 자료발굴TF팀에서 포상 추천한 독립운동가는 매년 증가하고 있습니다. 2018년에는 361명, 2019년 382명, 2020년에는 414명, 2021년 451명, 2022년에는 10월 기준으로 460명을 국가보훈처에 추천하였습니다. 향후에도 발굴되지 않은 독립운동가를 찾아 유공자로 인정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발굴한 독립운동가를 월간 「독립기념관」에 소개할 의향이 있나요?  우리 팀에서 찾아내어 포상된 독립운동가를 국민들에게 소개한다면 많은 긍정적인 효과가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먼저, 독립운동가에 대한 인식 변화입니다. 독립운동은 비범한 사람들의 전유물이 아니라, 평범한 ‘장삼이사’들의 피와 땀으로 이룩한 것임을 보여줌으로써 현재의 우리도 영웅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해줍니다. 다음으로 독립기념관에 대한 이해도 증진할 수 있습니다. 국민들이 독립기념관에서 독립운동가를 어떻게 찾아내고 어떤 과정을 거쳐 포상되는지 알 수 있다면 국민들과 독립기념관 간의 거리도 가까워질 것입니다. 더불어 독립기념관이 현재에 안주하지 않고 독립운동가를 찾아내기 위해 지속해서 노력하고 있음을 널리 알릴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이번 인터뷰가 그 첫걸음이 되기를 바랍니다. alt 독립운동가 자료발굴 총서 시리즈 Tip. 2023년 1월호부터 독립운동가 자료발굴TF팀이 발굴한 독립운동가를 소개할 예정이오니 독자분들의 많은 기대와 관심바랍니다. ]]> Thu, 01 Dec 2022 14:11:31 +0000 73 <![CDATA[독자참여 월간 『독립기념관』 퀴즈 및 웹진 방문 이벤트에 참여해보세요!]]> altaltalt]]> Thu, 01 Dec 2022 14:59:53 +0000 73 <![CDATA[어제의 오늘 원산 노동자 총파업]]> 어제의 오늘원산 노동자 총파업 정리 편집실 alt 일제강점기 가장 큰 규모의 조직적 투쟁인 원산 노동자 총파업이 시작된 날은  1929년 1월 13일입니다. ]]> Mon, 09 Jan 2023 18:38:42 +0000 74 <![CDATA[들여다보기 일제강점기 최대 규모 조직적 투쟁, 원산 노동자 총파업]]> 들여다보기일제강점기 최대 규모의 조직적 투쟁,원산 노동자 총파업 글 김경일 (사회학·한국중앙연구원 명예교수) 원산 노동자 총파업은 1929년 1월 13일부터 4월 6일까지 함경남도 원산 지역에서 원산노동연합회 산하 노동조합원 2,200여 명이 참여한 일제강점기 최대 규모의 파업이었다. alt 원산 노동자 총파업 당시 사진 (1929) 총파업의 발단  1928년 9월 라이징 선(Rising Sun) 석유회사가 운영한 문평제유공장에서 일본인 감독 코다마가 한국인 노동자를 구타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노동자들은 코다마의 파면을 포함한 5개 항의 요구조건을 내걸고 20일간 파업했다. 회사 측은 노동자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3개월 안에 해결할 것을 약속했지만 이행되지 않았다. 1929년 1월 문평제유노동조합은 다시 파업을 결의했다. 이때부터 원산노동연합회가 파업을 이끌었다. 원산노동연합회는 최저임금제 확립·8시간 노동·감독관 파면·대우 개선 등을 요구하였다. 이에 원산 지역 일본인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을 해고시키거나 탄압하는 데 앞장섰으며, 일제 경찰들은 노동운동가들을 구속하였다. 원산노동연합회는 이에 굴하지 않고 생활고를 견디며 약 3개월간 파업을 이어갔다. 해륙노동조합·운반노동조합 등 원산 지역 노동조합은 속속히 파업에 가담하였고, 전국 각지에서 성금이 들어왔다. 그러나 일제의 노골적이며 기습적인 탄압이 심해지면서  결국 4월 6일 원산노동연합회는 파업을 종결하고 말았다. alt 원산노동연합회 모습, 『조선일보』, (1929.2.8.) 일본 제국주의가 내던진 일대의 결전  1929년의 원산 노동자 총파업(이하 총파업)은 그 규모나 지속성, 그리고 노동자들의 단결성과 투쟁에서 일제강점기를 대표하는 운동으로 기억되고 있다. 헌병대나 군대의 무력시위를 포함한 일제와 고용주의 막강한 공세에도 불구하고,  80여 일을 넘는 오랜 시간을 지속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한국 노동운동사에서 주목할만한 사건으로 기록된다.총파업은 일본 제국주의가 1930년대 이후 대륙침략과 태평양전쟁을 준비·감행하기 위하여 조선인 기층민에 내던진 탄압에 대한 일대 결전이었다. 총파업과 더불어 일제 경찰은 표면에서는 중립을 가장하면서도 파업 초기부터 모든 집회를 금지하였으며 전단이나 포스터 등은 출판법 위반으로 배포나 게시를 금지했다. 비상경비태세로 들어간 경찰은 의협단이나 소방대원·재향군인 등을 시내 요소요소에 배치했으며 영흥과 고원·안변 등 인근에서 응원경찰관들이 총 끝에 칼을 꽂고 골목마다 삼엄한 경계를 펼쳤다. 총파업이 발발하자마자 ‘내한(耐寒)훈련’이라는 이름으로 일본군 제19사단 함흥보병대 73·74연대 300명과 400명의 재향군인 및 1,000명의 소방대원이 창검과 철포로 무장하고 시가를 행진하여 계엄령을 방불케 하는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다. 총파업을 주도한 지도부의 주요 인물들이 사라지기도 했는데 나중에 이들은 지역 헌병대에 수감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일본인이 발행하는 원산매일신문이나 함남시사신보와 국수회(國粹會)·의협단·청년단·자위단 등의 일본인 민간단체도 이에 적극 가담했다. 이처럼 총파업에 대해 전방위 탄압을 가한 것은 조선인 노동자 세력 증대에 대한 일제 자본의 견제와 더불어 제국주의 전쟁을 눈앞에 둔 일제의 전략적 필요 때문이었다. 이에 대하여 오랜 시간 동안 조직의 힘을 키워온 노동자들은 규찰대를 조직하여 파업깨기꾼을 경계하고 일제의 역선전에 대항하여 성명서와 입장문을 발표하면서 스스로의 규율과 질서를 유지하고자 했다. 총파업은 조선은 말할 것도 없고 동아시아 차원에서의 국제적 응원과 지지를 받았다. 전국 각지에서 위문원과 조사원이 속속 원산에 도착했으며, 국내외에서 격전과 격문이 빗발처럼 날아들었다. 결과적으로는 승리하지 못했지만, 총파업은 당시 유례없는 노동운동이자 민족해방운동이었다. alt 일본 노동자의 원산 노동자 총파업 응원 성명서 (1929) 두 가지 성격과 그 의의  총파업은 두 가지 성격을 지니고 있다. 일본 제국주의 침략 정책에 반대하는 민족운동과 더불어 자본과 고용주에 반대하는 계급운동이 그것이다. 노동자들에 의한 민족운동의 일환이라는 점에서 식민지 노동운동은 그 자체가 민족해방투쟁일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그것은 반일민족해방투쟁이나 반제민족해방투쟁, 혹은 항일투쟁사로서의 성격을 갖는다. 계급의 시각에서 총파업은 식민지 민중 내부에서 각 사회 계급의 편성과 역할에 주목하면서 특히 민족 부르주아지가 민족해방운동에서 지니는 의미를 강조한다. 총파업이 보인 민족적 성격은 명확하다. 1927년 6월 파업에서 내부 분열로 패배를 경험한 바 있던 자본가 진영은 총파업의 처음부터 조선인 중소자본가를 배제시켰다. 총파업과 관련된 상공회의소 임원이나 쟁의위원에는 절대로 조선인을 가입시키지 않았기 때문에 조선인 임원이나 운송업자, 회조업자(回漕業者, 해상운송업자) 및 하주 등은 이미 총파업에 대한 대응이 민족적 의식에 기반하고 있다는 의구심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런가 하면 원산경찰서의 조선인 간부가 헌병대의 압력으로 교체되었으며 시가지의 일본인들은 조선인에 의한 폭동의 발발을 우려하여 자경단을 조직하여 야경에 들어가기도 했다. 이와 아울러 총파업에서는 중소자본과 대자본 사이에 이해관계의 충돌이 나타났는데 대자본은 일본인이, 중소자본의 대부분은 조선인이라는 점에서 자본의 구분은 동시에 일본인과 조선인이라는 민족 표지와 겹치는 동시에 제국주의·매판자본과 민족자본 사이의 대립을 의미하기도 했다.투쟁 양상에 대한 평가라는 점에서 총파업은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의 이중성격을 갖는다. 한편으로 총파업은 단순한 경제투쟁의 차원을 넘어선 정치투쟁의 양상을 보였으며 이는 주로 노동계급의 역량에 의한 것이었다고 보는 의견이 있다. 비록 경제투쟁의 성격이 있었다 하더라도 반제투쟁의 성격과 요구조건의 적극성, 운동의 추진력 및 당시의 정세 등에서 정치투쟁으로 발전하는 일련의 요인을 내포한다는 점에서 단순한 경제투쟁이라기보다는 정치투쟁과 경제투쟁이 결합된 반제투쟁으로 보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총파업이 일본인 감독의 민족 차별과 노동자들의 생존 요구에서 발단했다는 점에 주목하여 조합주의적이고 경제적 성격을 주목하기도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총파업은 ‘한국 근대사상 가장 큰 민족투쟁’, 혹은 ‘완전한 민족항쟁’의 시각에서 이해되기도 한다. alt 원산 노동자 총파업 응원 대연설회 전단 일치된 단결과 연대의 힘  총파업은 단순히 노동운동의 영역에 한정되지 않고 민족독립운동·민족해방운동 부문에 지속하는 영향을 미쳤다. 식민지 노동운동과 민족해방운동에서는 강력한 전국 조직의 필요에서 산별 노조의 건설이 시작되었으며 이는 광복 이후에 일정한 결실을 맺었다. 합법운동에서 비합법운동의 정치투쟁을 지향하는 민족해방운동을 추동한 사실도 중요하다. 아울러 식민지 반제투쟁에서 민족개량주의가 지니는 기회주의의 본질이 폭로되었다든지, 노농동맹의 결성이나 노동계급의 국제 연대가 강화되었다는 점도 지적되어 왔다. 비합법운동에서 정치투쟁의 문제는 총파업이 일제의 정치적 개입과 탄압에 의한 것이었는데도 총파업의 지도부가 합법 방식으로 일관함으로써 결과적으로 패배했다는 인식에서 제기되었다. 이러한 점에서 식민지에서 노동운동은 합법과 비합법, 또는 반합법의 모든 활동 양식을 최대한으로 동원한 강력한 반제 정치투쟁의 지향을 보였다. 산별 노조의 건설을 위한 노력은 지역연합체로서 원산노동연합회가 지니는 조직의 결함과 한계에 대한 반성에서 비롯되었다. 자본의 전국 조직과 식민통치자의 전국적 비호를 받는 일본 자본가들을 타도하기 위해서는 전국 차원에서의 조직과 지도가 요구된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총파업 과정에서 노동자들은 일치된 단결과 연대를 통하여 노동계급에 고유한 자율성과 주도성, 일제의 억압에도 절대 꺾이지 않는 투쟁성과 강인성, 그리고 미래에 대한 낙관의 신념을 보여주었다. 총파업의 기저에 있던 노동계급의 이러한 의식과 활동이 막대한 자본과 일제의 정치 공세에 대항하여 80여 일이라는 오랜 기간을 싸울 수 있게 한 기본 동력이 되었다. ]]> Wed, 11 Jan 2023 16:12:19 +0000 74 <![CDATA[한 눈에 보기 원산 노동자 총파업의 80여 일간 여정]]> 한 눈에 보기원산 노동자 총파업의 80여 일간 여정 정리 편집실   alt ]]> Wed, 11 Jan 2023 16:15:47 +0000 74 <![CDATA[이달의 독립운동가 안현경·이원순]]> 이달의 독립운동가하와이 한인사회와 독립운동을 이끈 두 명의 지도자 안현경·이원순 글 독립기념관 전시부 alt   하와이로 이주한 한인들 2023년은 하와이 이민도착 120주년이 되는 해이다. 대한제국 첫 공식이민단은 1902년 12월 제물포항을 출발하여 1903년 1월 하와이 호놀룰루 항에 도착하였다. 하와이에 도착한 한인들은 곳곳에 산재한 30여 곳의 사탕수수 농장 및 커피 농장으로 흩어져 노동을 하였고, 점차 하와이의 한인들은 더 나은 삶을 위해 미국 본토로 건너가는 경우가 많아졌다. 하와이와 미주지역에 거주하는 한인들은 단체를 설립하여 친목과 자치를 도모하는 한편, 독립운동 자금 모금과 출판·외교·선전활동을 펼치며 조국의 독립을 위해 힘을 모았다. alt 하와이 이민선 갤릭호(좌), 대한제국 발행 여행권 (1903.10.5.)(우) alt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는 한인들 대한인국민회 하와이 지방총회를 이끈 안현경 안현경은 1881년 서울에서 태어나 1905년 노동이민으로 하와이에 건너갔다. 1909년 대한인국민회 하와이 와히아와(Wahiawa) 지방회장, 1917~1918년까지 대한인국민회 하와이 지방총회장으로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1913년 이승만이 하와이에 도착하자 그를 지원하였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후 상하이로 건너가 임시의정원 상임위원회 및 정무조사특별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20년 하와이로 다시 돌아와 다음해 이승만과 대한인동지회를 조직하고, 1922년 대한인교민단에서 총무 및 기관지 『국민보』의 주필을 맡아 구미위원부의 외교활동을 지원하였다. 이후 1941년 동지회원 이원순과 미주 독립운동 단체의 연합을 추진하여 재미한족연합위원회를 발족하고 재무부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alt 안현경(좌), 대한인국민회 공문(1919.1.18.)(우) alt 해외한족대회 결의안 (1941.4.29.) 재미한족연합회의 한 축을 이끈 이원순 이원순은 1893년 서울에서 태어나 1914년 상하이를 거쳐 하와이로 이주하였다. 1919년 박용만이 이끄는 대조선독립단에 가입하여 박용만의 비서로 활동하며 독립운동 자금 모금과 출판·외교활동을 전개하였다. 1928년 대한인동지회에 참여하여 기관지 『태평양주보』의 주필을 맡았으며, 1934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미 제2행서 재무위원에 임명되어 독립운동 자금을 모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하였다. 1941년 미주 한인 단체들의 통합운동의 결과 설립된 재미한족연합위원회의 의사부 위원으로 선출되어 재미한족연합회를 이끌었다. 이후 1943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미외교위원부의 위원으로 임명되어 대미외교, 선전활동에도 힘썼다. 정부는 1991년 그의 공훈을 기려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alt 재미한족연합위원회 대표 (1942.4.25.) 사진의 가운데에 이원순(좌), 주미외교위원 임명장 (1943.7.19.)(우) alt 선임장 (1934.4.18.) alt ]]> Wed, 11 Jan 2023 16:39:32 +0000 74 <![CDATA[끝나지 않은 독립운동 2023년 생존 애국지사]]> 끝나지 않은 독립운동생존 애국지사님들, 새해 문안 인사드립니다 글 이계형 (국민대학교 교양대학 교수)   2023년 1월 현재 생존한 애국지사는 모두 10명 정도다. 애국지사란 ‘독립운동을 위해 일제에 항거한 사실이 있는 분’들을 뜻한다. 생존 애국지사들은 해마다  그 숫자를 달리하는 만큼 계묘년 새해를 맞아 그분들의 독립운동을 살펴 독립정신을 되새기고 건강을 기원하고자 한다. 광복군 출신의 오성규·김영관·오상근·오희옥 현존 지사들의 평균 나이는 99.1세이고 가장 나이가 적으신 분이 오희옥·이석규 지사로 97세이고, 가장 연장자는 102세 권중혁·이하전 지사이다. 오성규 지사는 올해 100세이다. 먼저 이분들의 독립운동을 간략히 살피려 한다. 현존 지사 10명 가운데 광복군 출신이 4명으로 가장 많다. 오성규(1923~)·김영관(1924~)·오상근(1924~)·오희옥(1926~) 등이다. 오성규 지사는 일본 도쿄 네리마에 살고 있다. 그는 평북 선천 출신으로 1938년경 신성중학 재학 중 16살에 중국으로 건너가 만주 펑톈 소재 동광중학을 중심으로 비밀조직망을 조직 및 항일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던 중 일제에 조직이 탄로 나자 동지들과 함께 베이징으로 탈출하였고, 이후 중국 안후이성 푸양의 광복군 제3지대에 입대하였다. 1945년 5월 ‘독수리 작전’을 수행할 미국 OSS(전략정보처) 교육훈련 대원으로 선발되어, 그해 7월 초부터 푸양시 리황에서 훈련을 받았다. 하지만 그해 8월 일제가 항복하면서 수포가 되었다. 광복 후 중국 내 교민 보호와 선무공작을 위해 상해지구 특파단원으로 활동하였다. 김영관·오상근 지사는 1924년생으로 1944년 만 20세로 징병 대상이었는데 광복군에 투신하는 과정은 다르다. 오상근 지사의 실제 1923년생이었다고 한다. 김영관 지사는 경기도 포천 출신으로 고교 졸업을 앞두고 징병을 피하고자 경성사범학교에 진학하였지만 강제 징병 되었다. 일제는 태평양전쟁에서 전세가 불리해지자, 1943년 3월 ‘징병제’를 공포하고, 이듬해 신체검사 후 1944년 9월 4만 5천여 명을 현역병으로 입대시켰다. 그중 한 명이었던 그는 중국 저장성 동양에 주둔 중인 일본군에 배속되었다. 평소 임시정부의 존재를 알고 있던 그는 동료들과 함께 그해 11월(혹은 12월)에 목숨 건 탈출을 감행하였다. 당시 임시정부가 있던 충칭은 너무 멀어 중국 장시성의 중국 중앙군 제3전구 충의구군국 총지휘부에 입대하였고, 3개월 뒤 고생 끝에 그곳 상라오에 있던 광복군 제1지대 2구대 징모 제3분처에 합류하여 광복 때까지 활동하였다.오상근 지사는 충북 진천 출신으로 1942년 조선육군특별지원병으로 일본군에 입대하여 1943년 9월경 중국 광시성 구이린의 일본 이라시 부대에 배치되었다. 지원병이라고 하지만, 강압으로 마지못해 지원한 경우였다. 그는 1944년 1월 인근에서 광복군이 활동 중이라는 소식을 듣고 동료들과 함께 일본군 부대에서 탈출했다. 하지만 중국인에게 일본군 간첩으로 오인되어 감옥에서 고초를 겪기도 했다. 천신만고 끝에 그해 12월 임시정부가 있던 충칭에 도착하였고, 이내 광복군 총사령부 토교대에 배속되어 임시정부 요인들과 가족의 신변을 경호하였다.오희옥 지사는 경기도 용인 출신으로 유일한 여성이다. 독립운동가 오광선의 차녀로 14세이던 1939년 4월 중국 류저우에서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에 입대하여 일본군의 정보수집, 초모와 연극·무용 등을 통한 한국인 사병의 위무활동을 펼쳤다. 1941년 1월 광복군 제5지대에 편입하였고, 1944년에는 한국독립당 당원으로 활동하였다. alt 일제가 징병을 미화하고자 선전용으로 발행한 엽서_독립기념관 소장(좌), 중국 창사에서 열렸던 제19주년 삼일절 기념공연 기념사진 (1938.3.1.)_앞줄 오른쪽에서 8번째가 오희옥(우)  학생운동을 펼친 이하전·지익표·이석규 이하전(1921~)·지익표(1925~)·이석규(1926~) 지사 등은 태평양전쟁 시기 학생운동을 펼쳤다. 이하전 지사는 미국에 거주하는데 평양 출신이다. 숭인상업학교 재학 중 일본인의 차별대우와 억압에서 벗어날 방도를 궁리하다가 1938년 10월경 오영빈·김구섭 등과 함께 비밀결사 독서회를 조직, 활동하였다. 이후 그는 모임을 축산계로 개칭하고 월례회를 개최하였으며 ‘오등의 서사’라는 결의문을 작성하여 항일의식을 다졌다. 졸업 후 그는 일본 도쿄로 유학하여 1941년 1월 법정대학 예과에 재학 중에도 비밀결사 운동을 계속하다가 경찰에 붙잡혀 고향으로 압송되었고, 그해 12월 평양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 6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지익표 지사는 전남 완도 출신으로 1942년 여수공립수산학교 4학년 재학 중 동향인 김민석·오영섭 등과 독서회를 조직하고 민족정신을 함양했다. 당시 일본인 교사들의 한민족 모욕 발언으로 한국 학생들의 원성이 자자했다. 이에 그는 1942년 11월 선배들과 함께 일본인 교사들의 민족 차별적 언행 시정 촉구와 추방·모국어 허용 등을 요구했고, 이를 거부하면 징병 거부 투쟁을 벌이겠다고 공언하였다. 이에 그는 체포되어 그해 12월 광주검사국에 송치되었지만, 1943년 1월 기소유예로 풀려났다. 이석규 지사는 전북 출신으로 1943년 3월 광주사범학교 재학 중 동급생 17명과 함께 무등독서회를 조직하였다. 그는 이를 통해 민족의식을 함양하였고 연합군의 한반도 상륙 시에 봉기할 것 등을 강령으로 내걸었다. 그러던 중 1945년 회원이 붙잡혀 거사 계획이 탄로 나는 바람에 체포되었다. 그 결과 그해 5월 퇴학당하였고 10개월가량 옥고를 치르다가 광복 후 석방되었다. 광복을 맞아 출옥한 이일남·강태선·권중혁 이일남(1925~) 지사는 충남 금산 출신으로 1942년 6월 전주사범학교 재학 중 일본인 교장의 노골적인 민족차별에 분개하여 비밀결사 ‘우리회’를 조직하여 민족정신을 고취하였다. 이후 1943년 12월 만주에 거점을 마련하고자 그곳으로 떠나 독립군과 접선을 시도하였지만, 별다른 결실을 얻지 못하고 1944년 12월에 귀국하였다. 귀국 후 그는 독립 자금을 마련하고자 1945년 1월에 충남 금산사방관리소 인부로 취업하였다가 일본 헌병에 발각되어 붙잡혔다. 그는 전주지방법원에서 징역형을 선고를 받아 7개월 동안 옥고를 치르다가 광복 후 출옥하였다. 강태선(1924~) 지사는 제주 출신으로 여느 지사들과 달리 일본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1942년 6월 오사카(大阪)로 건너가 신문 배달을 하며 중학교 입학을 준비하던 중 한국인 차별대우에 민족의식을 갖게 되었다. 그해 8월경 그는 같은 처지에 있던 동지들과 독립운동 방안을 협의하였다. 일제가 곧 패망할 것이라며 일제히 봉기하면 독립할 것으로 판단하였고, 일제의 동화정책에 강력히 저항하고자 하였다. 이를 추진하고자 여러 번 협의하고 동지 규합에 힘쓰다가 1944년 6월 경찰에 붙잡혔다. 그해 8월 오사카지방재판소에서 징역 2년 6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8·15광복을 맞아 출옥하였다.이와 달리 권중혁 지사는 경북 출신으로 보성전문학교 재학 중 학병으로 강제 징병되었다가 일본군에서 탈출하였지만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일제는 1943년 강제 징병을 시행하고서는 1944년대학이나 전문학교 학생들까지 징병해갔다. 이들을 ‘학도특별지원병’(학병)이라 한다. 학병은 1944년 1월 20일에 끌려갔는데 그 역시 대구 24부대에 모집된 600여 명과 함께 입대하였다. 이들 대부분은 중국 화북으로 보내졌지만 그를 포함한 27명은 남았다. 그해 8월 그는 몇몇 동지들과 함께 부대 하수구를 통해 탈출에 성공하여 대구 팔공산에 숨어 지내다가 이를 탐지한 일본 군경에 체포되고 말았다. 그해 12월 일본군 임시군법회의에서 징역 4년을 선고받아 일본 기타큐슈의 고쿠라육군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1945년 8월 광복을 맞아 출옥하였다. 독립운동이란 최고선을 실천한 역사의 증인들 예전 생존 애국지사들은 삼일절 기념식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거나 광복절에는 만세 삼창을 선창하였다. 이들 가운데는 광복회장을 맡아 왕성하게 활동하기도 하였다. 요즘에는 거동이 불편한 지사들이 많아져 대외 활동이 어렵게 되면서는 지방자치단체장이나 지방보훈처장 등이 직접 찾아가 건강을 살피거나 위문품을 전달하곤 한다. 2021년 8월에 국가보훈처가 생존 애국지사들의 초상화를 제작하여 선물하였다. 생존 애국지사들은 우리나라가 엄혹한 상황에 부닥쳤을 때 ‘독립운동’이란 최고선을 실천한 역사의 증인들이다. 2023년 1월 현재 독립유공자 1만 7,588명 가운데 10분이라도 생존해 계시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그들을 기억하고 기념하며 기리는 것은 그분들이 지키고 일구려 하였던 독립 국가에 사는 우리의 몫이다. 새해를 맞아 애국지사님들의 만수무강을 빌어본다.  ]]> Wed, 11 Jan 2023 16:50:58 +0000 74 <![CDATA[어제와 오늘을 잇는 사람 화가 윤석남]]> 어제와 오늘을 잇는 사람붓끝으로 되살린허스토리(Herstory)화가 윤석남 글 편집실사진 학고재 제공 항일투쟁의 현장에는 수많은 여성독립운동가가 있었지만, 우리에게 알려진 인물은 몇몇에 불과하다.  여기 역사 속 잊힌 여성독립운동가를 초상화로 되살리는 사람이 있다. 여성주의 미술의 대모라 불리는 화가 윤석남이다. alt 윤석남 프로필 1939년 만주에서 태어난 그는 40대에 뉴욕 프랫 인스티튜트 그래픽 센터와 아트 스튜던트 리그에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1997년 국무총리상, 2015년 제29회 김세중 조각상, 2019년 국민훈장 모란장, 2022년 제23회 이인성미술상 등을 수상하였다.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일본 후쿠오카미술관, 런던 테이트 컬렉션 등 주요 미술기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림을 시작한 지 40년이 훌쩍 지났다. 그림을 시작하고 지금까지 그림의 주제가 주변의 이야기에서 객관적인 삶의 이야기로 넓어졌다. 기법도 유화·아크릴을 사용하는 서양화에서 10년 전부터 한국화 쪽으로 바뀌었다. 변화 과정을 세세히 설명할 수 없지만, 10여 년 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윤두서의 자화상을 본 게 인생의 전환점이 됐다. 정확한 날짜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 작품을 처음 접했을 때의 충격은 지금도 가슴이 두근두근할 만큼 생생하다. 그 순간 ‘모든 것을 버리고 한국화를 해야겠다’라고 다짐했다. 한국화 중에서도 여성주의적 성찰을 화두로초상화에 집중했다. 서양화 기법에서 한국화 기법으로 방향을 전환한 계기가 윤두서 초상이었으므로 처음부터 초상화에 집중했다. 그런데 조선시대 초상화를 공부하다 보니, 조선왕조 500년 동안 그려진 초상화들의 주인공 대부분이 남성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여성이 주인공인 작품은 찾기가 어려웠다. 그 사실이 참 울컥했다. 그리하여 주변 친구들의 초상부터 그리기 시작했다. 역사 속 발자취를 남긴 여성 중에서도여성독립운동가를 조명하고 있다.  2019년 가을, 초상들로 개인전을 하면서 다음 초상화는 무엇으로 할까 고민했다. 남성이 주인공인 수많은 초상화와 달리 여성 초상화는 없던 것이 떠올랐다. 조선이 망할 무렵의 작품 두 점이 있었으나 그것도 주인공 이름은 알려지지 않은 것이었다. 그때의 쓰라린 자각이 새삼스럽게 가슴을 때렸다. 그러다 일제강점기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여성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때부터 다음 전시는 ‘여성독립운동가’로 하겠다고 마음먹었고, 역사가 충분히 주목하지 않은 그들의 삶과 이야기를 화폭에 기록하기 시작했다. 여성독립운동가들은 사진이나 자료 등이많이 남아있지 않는데, 고충은 없나. 그나마 남겨진 사진에 기초해 초상화를 그려나간다. 사실 사진과 자료가 충분하지 않아 작업을 하는 내내 걱정과 막막함이 크다. 어찌 됐든 내 창작이 보태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계속 그림 속 인물들과 대화한다. ‘미안합니다’, ‘제가 잘못 그릴 수도 있어요’라고 빌고 또 빈다. 100년 전 여성들의 투쟁사가 나를 무겁게 눌러 괴로울 때도 있다. 그때마다 그들의 정신에 의지해 꿋꿋하게 버티고 있다. 한 번도 자신의 삶을 후회하거나 한탄하지 않았던 사람들, 강인하고 올곧은 그들의 정신에 기대어 작품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작품 속 인물들의 손이 유독 크고 거칠다. 화가가 손으로 붓을 잡고 그림을 그리듯 손은 그 사람의 생애를 가장 잘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손은 살아온 삶을 정직하게 드러내는 신체 부위다. 그래서 독립투사들의 손을 마냥 하얗고 곱게 그릴 수 없었다. 자립적인 그들의 삶을 대변하기 위해 크고 투박하게 그렸다. 이 투박한 손이 여느 작고 고운 손보다 더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특별히 애착이 가는 인물이나 작품이 있나. 모든 여성독립운동가를 존경하지만, 특히 김마리아의 삶이 유독 가슴에 와닿는다. 그는 2·8독립선언과 3·1운동에 적극 가담한 일로 체포돼 심한 고문을 받아 고질병을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결코 독립정신을 잃지 않았다. 그는 늘 당당했고 두려움이 없었다. 그래서 그림 속 그의 몸짓이 진취적일 수밖에 없다. 칠판 앞에서 당찬 얼굴로 팔을 쭉 뻗고 독립에 대해 교육하는 모습을 표현했는데, 독립에 대한 열망과 한국인으로서의 당당함을 여실히 담아내려고 했다. ‘제주 여성독립운동가’를 주제로 한특별기획전이 열리고 있다. 〈제주 여성독립운동가〉 특별기획전이 현재 제주 설문대여성문화센터에서 열리고 있다. 제주 여성의 독립운동을 재조명하고자 마련되었으며, 올해 3월 7일까지 진행된다. 이번 특별전에는 강평국·김시숙·고수선·최정숙·김옥련·부춘화 등 6인의 제주여성 독립운동가의 초상화가 전시된다. 이들은 일제강점기라는 격랑의 시기에 식민통치와 가부장적 사회구조, 척박한 자연환경에 맞서 ‘여성교육’을 통해 ‘여성의식’을 뿌리내리고 확장시켰다. 이번 전시를 통해 세상에 맞서 우뚝 선 제주 여성독립운동가의 삶을 만나고, 동시에 우리 안에 도저한 강물로 흐르는 여성 주체와 만나는 또 다른 계기가 되길 바란다. 여성독립운동가 100인을 그린다는 목표는아직 변함이 없나. 앞으로도 조명할 인물이 많다. 역사 속 여성독립운동가들의 기록을 그림으로 복원해내는 작업을 꾸준히 이어 나갈 것이다. 여성독립운동가 100인의 초상을 완성하겠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 여든이 훌쩍 넘은 지금, 체력이 언제까지 따라줄지 모르겠지만(웃음) 힘닿는 데까지 해보겠다. alt 김마리아 초상(좌), 한지 위에 분채, 210 x 94cm (2020) 일제의 고문으로 한쪽 가슴을 잃어 섶의 길이가 다른 저고리를 지어 입었던 김마리아는 뼛속에 고름이 생기는 병을 앓았다.  그림 속 김마리아는 평화를 상징하는 손가락 포즈를 취하며 눈부시게 웃고 있다. 박자혜 초상(우), 한지 위에 분채, 210 x 94cm (2020) 붉은 천으로 감싼 남편의 유골함, 마디마디 힘을 준 손가락, 검은 상복. 그의 눈빛은 깊은 슬픔 속에서도 지지 않겠다는 의지로 이글거린다.  박자혜는 단재 신채호의 부인이자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여성 독립운동가다. ]]> Wed, 11 Jan 2023 17:10:46 +0000 74 <![CDATA[기념관이 발굴한 독립운동가 이창하]]> 기념관이 발굴한 독립운동가만세운동의 불길 속에서 조선인의 살 길을 찾고자 한이창하 글 독립기념관 독립운동 자료발굴 TF팀   독립기념관은 2018년부터 독립운동가를 발굴하여 국가보훈처에 유공자로 포상 추천하고 있다.  국가와 국민을 위해 희생한 분을 존중하고 기억하는 정부의 의지와 국민적 관심을 담은 것이다. 2023년 매월 독립기념관이 발굴한 독립운동가를 소개한다. 이창하 (李昌河) 본적 및 주소 : 함경남도 이원군 동면 대평리 6 생몰 : 1888.12.8 ~ 미상 이명 : 이오림(李五林) 포상추천 : 2018년 3월 포상 : 2021년 3.1절 계기 훈격 : 건국훈장 애족장 운동방면 : 3.1운동, 국내항일, 만주방면 만세운동의 불길 속에서 독립만세를 외치다 이창하는 1888년 12월 8일 함경남도 이원군 동면 대평리에서 태어났다. 당시 대부분의 조선 민중이 그러했듯 그 역시 농업으로 생계를 유지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식민지 조국의 현실은 그를 평범한 농민으로 살아가게 내버려 두지 않았다.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시작된 만세운동의 ‘불길’은 이창하가 살고 있던 이원군까지 번졌다. 5일 누군가 이원군의 기독교도와 천도교도 앞으로 독립선언서를 발송한 사실이 일본 관헌에 발각됐다. 독립선언서는 모조리 압수되었으나 이원군에 퍼진 독립만세운동에 관한 소문은 가라앉지 않았다. 이틀 뒤 박용해라는 인물이 천도교 이원교구장 김병준을 찾아와 손병희 등이 서울에서 조선의 독립을 선언했다고 전하며 독립선언서를 전달했다. 김병준은 이원군의 천도교 원로들을 소집해 논의한 끝에 천도교의 대기도일(大祈禱日)인 10일 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결정했다. alt 일제강점기에 촬영한 이원군 대평리 산성 전경_국립중앙박물관 제공 “나의 행위는 조선민족으로서 정의와 인도에 따른의사표현이지 범죄가 아니다” 3월 10일 오전 11시 30분경 천도교도와 주민 등 700여 명은 「조선민족독립단」이라는 깃발 아래 모여 독립만세를 외치며 읍내를 행진했다. 천도교도로서 계획 단계부터 참여했던 이창하는 선두에서 군중을 지휘했다. 장터에서 시작된 시위행렬은 이원공립보통학교, 군청을 지나 헌병주재소 앞에 머무르며 독립만세를 외치다가 다시 장터로 이동한 후 해산하였다. 이창하는 거주지인 동면에서도 만세운동을 일으키고자 계획하고 마을 구장을 통해 주민들에게 통지서를 보내는 한편, 주민 한 사람 한 사람을 직접 만나 시위 참여를 권유하였다. 17일 용암리 시장에 모인 주민 200여 명은 독립만세를 외치며 헌병주재소와 면사무소를 향해 행진하였다. 이번에는 ‘독립만세’만을 외친 것이 아니었다. 납입한 세금을 돌려달라는 구호가 새롭게 등장했다. 이제 만세운동은 일제 행정에 대한 저항의 성격을 띠기 시작한 것이다. 20일 오후 3시경 이원읍 헌병주재소 앞에는 이원군 전 지역에서 주민 1,500여 명이 모였다. 이들은 만세운동에 참여했다가 검거되어 주재소에 유치 중인 주민들을 풀어줄 것을 요구했다. 분위기는 점점 험악해졌고 군중은 갇혀있는 이웃들을 강제로라도 빼내고자 육탄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에 헌병대는 무력으로 대응하였다. 결국 이 과정에서 주민 1명이 사망하고 8명이 부상당하는 참사가 벌어졌다. 이후 헌병대는 만세운동의 주도자를 샅샅이 색출하였는데 22일 이창하도 검거되었다. 그는 1919년 6월 2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고 공소했으나, 8월 18일 경성복심법원에서 동일한 형을 받았다. 이창하는 “나의 행위는 조선민족으로서 정의(正義)와 인도(人道)에 따른 의사표현이지 범죄가 아니다”라며 판결에 불복하고 상고하였다. 그러나 10월 25일 고등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되면서 판결이 확정되었다. 그는 함흥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감형되어 1920년 4월 27일 출옥하였다. alt 「이원소요범인 판결」, 『매일신보』 (1919.8.22) ‘조선인의 살 길’을 고민하고, 기자로 활동하다 출옥 후 이창하는 주민에 대한 계몽활동에 주력하였다. 1923년 이원청년연합회에서 주최한 순회강연에 연사로 참여하여 이원군 각지를 돌아다니며 ‘우리들의 불평’, ‘사회와 나’, ‘조선인의 살 길’ 등의 제목으로 강연을 하였다. 제목에서 드러나듯 그는 3·1운동 이후 한국인이 나아가야 할 바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이창하는 1925년 6월 시대일보 이원지국이 설립되자 기자로서 언론활동을 시작했다. 시대일보는 조선일보, 동아일보와 함께 한국인이 발행한 대표적 민간신문으로, 편집장은 독립선언서 초안을 작성한 최남선이었다. 청년연합회의 강연활동이나, 기자로서의 언론활동은 3·1운동으로 쟁취한 문화정치의 합법적 활동 공간을 활용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문화정치의 기만성과 합법적 활동의 한계를 곧 깨닫게 되었다. 불의한 학교 당국에 항의하다 고초를 겪다 1924년 조선총독 사이토가 국경을 시찰하던 도중 이원군을 방문했는데, 이원공립보통학교 교장은 조선인 여학생 3명을 불러 총독에게 차를 따르게 했다. 교육자인 교장이 여학생을 접대부로 동원했다는 사실에 지역사회는 분노로 들끓었다. 이원청년연합회에서는 이창하 등 3명을 대표위원으로 선정하여 학교 당국에 항의했다. 이창하는 교장을 문책하고 향후 이와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하겠다는 사과문을 쓰게 했다. 이로써 불미스러운 사태가 수습되는가 싶었으나, 이원경찰서에서는 이창하 등이 교장을 협박했다며 구류 5일에 처하였다. 이창하를 비롯한 청년연합회에서 이에 대해 강하게 저항했으나, 형량은 오히려 구류 10일로 늘었다. 사법권의 객관적 집행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처사였다. 이후 한동안 국내에서 이창하의 행적은 찾기 어렵다. 이 무렵 그는 불혹에 가까운 나이였고, 잘못도 없이 구류에 처해졌던 경험으로 인해 상심이 컸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그는 결코 포기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새로운 공간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alt 「한국혁명당 이창하 징역 2년」, 『중외일보』 (1929.9.27) 새로운 공간에서 독립운동의 꿈을 이어 고향으로 돌아오다 1929년 음력 6월 3일 이창하는 평북경찰부에 체포되어 신의주검사국으로 압송됐다. 경찰조사에 따르면, 그는 이미 1917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철혈광복단(鐵血光復團)에 가입했다고 한다. 철혈광복단의 성립 시기나 그의 가입 시기에 대해 이론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1916년 용정촌으로 이주한 누이동생을 이창하가 방문한 적이 있다는 사실로 미루어 보아 그곳에서 독립운동단체와 관계를 맺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국내활동에 실망한 그에게 해외 독립운동 지사들과 접촉했던 경험은 새로운 활동을 모색하는 데에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이창하는 1929년 음력 4월 누이동생을 방문하고자 용정촌에 갔다가 한국혁명당 북만총국 부장인 황욱을 만났다. 당시 황욱은 그 해 9월 경성에서 열릴 조선박람회를 기하여 일제에 타격을 가하기 위한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한국혁명당 연락부 위원으로 선임된 이창하는 황욱의 명령에 따라 고향인 이원군으로 파견되어 독립운동자금 모집과 연락기관 조직을 위해 기회를 엿보던 중 안타깝게도 밀정의 밀고로 체포됐다. 이로 인해 그는 1929년 9월 21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받고 평양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1931년 10월 21일에 출옥하였다. 옥고를 치른 이후에도 이어진 고단한 독립운동가의 삶 두 번의 옥고를 치른 이창하는 일제에 의해 요주의 인물로 분류되어 함남 지역에서 독립운동과 관련된 일만 일어나면 검거되어 조사를 받았다. 1933년에도 북청군을 중심으로 벌어진 사상범 검거 선풍으로 선생은 또 다시 검거되었다가 보석으로 풀려났다. 이후 그의 행적은 공식 자료에서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1984년 발행된 『이원군지』에는 선생의 마지막 모습에 대해 이렇게 기록되었다. ‘심한 고문의 후유증으로 정신병자가 되어 갖은 천대를 받다가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하고 향리에서 병사(病死)했다.’ ]]> Wed, 11 Jan 2023 17:24:19 +0000 74 <![CDATA[사(史)적인 여행 대정읍성과 알뜨르비행장]]> 사(史)적인 여행조금 낯선 제주도 풍경, 대정읍성과 알뜨르비행장 글·사진 박광일 (역사여행작가·여행이야기 대표)   겨울이면 따뜻한 곳이 그리워진다. 여러 곳이 있겠지만 대게 첫손에 꼽는 곳이 제주도이다. 이달에 소개할 여행지 대정읍성과 알뜨르비행장은 ‘여행 정보’에서는 잘 찾아볼 수 없지만, 제주의 역사와 자연의 본모습을 찾아볼 수 있는 의미 있는 장소이다.  아이들 겨울방학이나 휴가에 맞춰 제주도를 찾을 때 한 번쯤 들려보면 보다 풍성한 여행이 될 것이다. alt 대정현을 둘러싼 성, 대정읍성 첫 장소는 제주도 서남부에 있는 ‘대정읍성’ 일대다. 읍성이란 이름에서 육지의 낙안읍성이나 해미읍성처럼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성곽임을 짐작할 수 있다. 실제로 대정읍성은 약 5백 미터 정도의 성벽이 남아있는데, 조선시대 태종 때 처음 읍성을 쌓았을 때는 전체 둘레가 약 1천 6백 미터 정도였다고 한다. 여기에 이렇게 큰 규모의 읍성을 쌓은 이유는 대정현이 제주도의 중심이 되는 마을 가운데 한 곳이기 때문이었다. 현재 제주도는 북쪽의 제주시와 남쪽의 서귀포시로 두 개의 행정구역으로 나뉘어 있다. 하지만 조선시대에는 지금과는 달랐다. 대체로 지금의 제주시는 제주목으로, 지금의 서귀포시는 동쪽의 정의현·서쪽의 대정현으로 총 세 개 행정구역으로 나뉘어 있었다. 이 대정현을 둘러싼 성이 바로 대정읍성이다. 이처럼 대정현은 조선시대의 제주 3대 고을 가운데 한 곳이었다. alt 대정읍성 성곽(좌), 대정읍성 향교(우) alt 대정현에서만 볼 수 있는 돌하르방 제주목·정의현과 더불어 대정현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 있다. 바로 돌하르방 이다. 지금은 여러 곳에 흩어져 있지만 대정읍성 동문 터에 가면 4구의 돌하르방이 있다. 여기 돌하르방은 널리 알려진 것과 다른 모습이라 진짜인지 의심하게 된다. 키는 작고 얼굴은 둥글둥글한 것이 권위감보다는 친근감을 준다. 원래 제주도의 돌하르방은 제주읍성·정의읍성·대정읍성 세 읍성의 수호신 역할을 하던 것으로 성문 앞에 세웠는데 동네마다 모습이 다르다. 보통 우리에게 익숙한 키가 크고 우락부락한 모습을 한 돌하르방은 제주목, 곧 제주읍성의 돌하르방이다. 그러므로 역사 유물로서 돌하르방의 구경을 하기 위해 대정읍성을 찾는 것만으로도 보람은 있다. 대정읍성 주소 제주 서귀포시 대정읍 추사로38번길 19-26 추사 김정희 유배지, 추사관 대정읍성을 찾는 진짜 목적은 ‘추사관’으로 부르는 곳을 가기 위해서다. 이곳은 조선시대 학자이며 명필로 유명한 김정희의 일생과 업적을 살필 수 있는 기념관이며 박물관이다. 김정희는 청의 여러 학자와 학문을 논하면서 명성이 높았지만, 정치 다툼에 연루되며 제주도로 귀양을 오게 되었다. 이때 제주도의 세 곳에서 머물렀는데, 처음 유배를 와서 머물렀던 곳이 지금 제주 추사관이 있는 곳이다. 유배는 당사자에게는 고통스럽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지금이야 여행의 목적으로 제주도를 찾고, 그것을 SNS에 공유하는 것만으로도 부러움을 사지만 예전에는 달랐다. 육지에서 멀리 떨어졌고, 기후도 물도 달라서 생활하기 힘든 곳이었다. 그러한 귀양살이 속에서 유일하게 넉넉한 것은 시간뿐이었다. 김정희는 그 고난의 시간 속에서 무언가를 성취해냈다. 바로 〈추사체〉이다. 〈추사체〉는 김정희가 제주도에 머물던 9년 사이에 완성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이 시기에 또 하나의 명작을 완성하니, 그 유명한 〈세한도〉이다. 이렇듯 제주 추사관은 김정희의 삶과 작품을 조명하기 위해 생겨난 기념관 겸 박물관이다. 한편 제주 추사관은 조금은 특별한 구조로 지어졌다. 지상은 조그마한 창고처럼 지었으며 지하를 넓게 박물관으로 조성하였다. 이러한 구조의 배경은 바로 〈세한도〉 그림에 나오는 자그마한 서재를 표현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주 추사관은 멀리서 보면 그저 평범한 창고 건물처럼 보이기도 한다.〈세한도〉의 ‘세한’은 ‘날씨가 차가워진 뒤에 비로소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들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라는 뜻이다. 보통 어떤 사람이 승승장구할 때는 주변에 사람이 많은 듯 보이지만, 막상 어려운 때를 당하면 주변 사람들이 사라지고 때로는 아무도 없을 때가 있다. 그러므로 자신이 어려울 때 옆에서 도와주는 친구는 한겨울의 소나무와 잣나무 같은 존재이다. 김정희에게 그런 사람이 몇 명 있었는데, 그 가운데 한 명이 제자인 역관 이상적이었다. 이상적은 해마다 스승을 위해 중국의 귀한 책을 구해다 주었다. 여기에 보답하고자 김정희가 제자에게 그려준 것이 바로 〈세한도〉이다. 별다른 배경도 없는 곳에 자그마한 서재가 있고, 그 옆에 제주의 곰솔, 그리고 노송이 있는 단아한 그림이다. 이상적은 스승에게 이 그림을 받은 뒤, 청으로 가서 유명 학자 16명에게 그림에 대한 감상을 시와 글로 받았다. 여기에 한국 학자들이 또 시와 글을 붙인 〈세한도〉는 한국과 중국 학자가 교류한 것을 보여주는 중요한 역사 자료이다.  alt 김정희 유배지(좌), 추사관 내부(우) alt 〈세한도〉의 담긴 사연 〈세한도〉는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치며 일제강점기에 청과 한국의 근대 학문을 연구하던 경성제국대 일본인 교수 후지츠카 치카시가 소장하게 되었다. 1944년 후지츠카는 〈세한도〉 등을 들고 일본으로 돌아갔고, 이때 한국인 서예가 손재형은 일본으로 건너가 후지츠카에게 〈세한도〉는 한국에 남겨두어야 할 보물이라며 설득했다. 결국 후지츠카는 아무런 대가 없이 〈세한도〉를 손재형에게 넘겨주었다. 그리고 지금 제주 추사관에는 그 영인본이, 진품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보관·전시되고 있다. 어쩌면 하나의 문화재일 뿐인 〈세한도〉에는 한국과 중국, 그리고 일본을 잇는 사연이 담겨있다.  추사관 주소 제주 서귀포시 대정읍 추사로 44 문의 064-710-6865 * 매주 월요일 휴무 일제강점기의 상흔,알뜨르비행장 추사관 다음 살펴볼 장소는 대정의 또 다른 공간인 알뜨르비행장이다. 알뜨르는 제주 말로 ‘아래 벌판’이란 뜻이다. 태평양이 훤히 보이는 제주도에서도 보기 드문 넓은 공간이다. 과거 일제는 이 벌판에 비행장을 만들었다. 20만 평 규모로 1936년 1차 완성을 하고, 다시 1937년 이후 2차 확장공사를 해서 80만 평에 이르렀다. 일제가 이곳에 비행장을 만든 이유는 일본 규슈 지역에서 중국 난징 일대를 비행기로 폭격할 때 중간에 거쳐서 갈 곳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즉 평화로운 섬 제주에 전쟁 시설을 만든 것이다. 비행장에는 20개의 격납고를 건설했고, 지금도 19개가 남아있다. 또한 지하에 만든 벙커 시설도 있으며 인근에는 대공포 기지의 흔적도 볼 수 있다. 알뜨르비행장에서는 전쟁을 대비했던 일제강점기의 낯선 제주도를 만나게 된다. 물론 이러한 과정에서 제주도 사람의 희생이 있었을 것이니 그런 부분도 가슴 아프게 다가온다. 멀리 산방산 앞에 점점이 들어선 격납고를 보면 무언가 과거의 전쟁 폐허 속으로 들어가는 느낌이 든다. 알뜨르비행장을 통해 제주도의 일제강점기 역사로 들어갈 수 있어, 이곳은 한 시대로 들어가는 역사의 관문 역할을 한다. 지금 알뜨르비행장의 대부분 영역은 밭으로 쓰이고 있다. 농작물이 자라는 땅에서 격납고는 창고가 되었다. 흥미로운 변화가 아닐 수 없다. 우리가 역사 속 전쟁, 그리고 수탈의 역사를 살피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이러한 역사의 변화를 만들기 위한 힘을 얻기 위해서 아닐까. alt 알뜨르비행장 전경 알뜨르비행장 주소 제주 서귀포시 대정읍 상모리 ]]> Wed, 11 Jan 2023 18:27:25 +0000 74 <![CDATA[기념관 소식 『한국독립운동인명사전』 8~9권 발간]]> 기념관 소식『한국독립운동인명사전』 8~9권 발간 ☎ 학술사업부 김주성 연구원 (041-560-0425)   독립기념관은 『한국독립운동인명사전』(8~9권)을 발간했다.  『한국독립운동인명사전』(8~9권)에는 2018년까지 정부로부터 서훈된 독립유공자 중 ‘남재호’부터 ‘박제선’까지(가나다순) 1,219명의 애국적 생애가 수록되어 있다.대표적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총장’ 노백린, ‘1920년 평안남도 경찰부 폭파의거의 주역’ 문일민, ‘을사늑약에 저항하여 순국한’ 민영환, ‘미주 한인사회의 지도자’ 박용만 등 독립운동가들의 삶이 역사적으로 복원되었고, 그들의 활동을 통해 강고한 독립정신을 엿볼 수 있다.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인명사전 웹사전 (http://search.i815.or.kr/dictionary/main.do)과 다음카카오사전(http://100.daum.net/book/791/list)에서 확인할 수 있다. alt 『한국독립운동인명사전』 8~9권 ]]> Wed, 11 Jan 2023 19:16:00 +0000 74 <![CDATA[기념관 소식 보건복지부 주관 지역사회공헌인정제 2년 연속 선정]]> 기념관 소식보건복지부 주관 지역사회공헌인정제 2년 연속 선정 ☎ 경영지원부 유병임 차장 (041-560-0235)   독립기념관은 보건복지부와 한국사회복지협의회와 공동주관하는 ‘2022 지역사회공헌인정제’ 인정기관으로 2년 연속 선정됐다. 2019년 시작된 지역사회공헌인정제는 보건복지부와 한국사회복지협의회가 공동주관하는 제도로, 지역사회와 파트너십을 맺고 꾸준히 사회적 가치를 창출한 기관과 기업을 인정하는 제도다. ESG에 따라 환경·사회·지배구조의 3개 영역, 7개 분야, 25개 지표로 엄격히 심사한다. 독립기념관은 국가와 지역에 기여하기 위한 다양한 형태의 사회공헌 활동을 추진하여 그 성과를 인정받았다.한국철도공사 협업으로 공동 순회전시 개최, 지역 푸드뱅크와 협업한 이머전시 푸드팩 사업을 통한 독립유공자 후손 및 취약계층 지원, 교육기부 활동 및 교구재 보급을 통한 교육 격차 해소, 지역 내 사회적 경제 단체 등과 함께 상생 판매전 개최 등 기관 역량을 활용한 다양한 사회공헌 활동을 추진했다. alt 지역사회공헌인정 기념 사진 ]]> Wed, 11 Jan 2023 19:23:48 +0000 74 <![CDATA[기념관 소식 탄소중립·녹색성장을 위한 공동 선언]]> 기념관 소식탄소중립·녹색성장을 위한 공동 선언 ☎ 혁신평가부 김우성 주임 (041-560-0684)   독립기념관은 12월 15일, 기후위기 대응과 탄소중립 실현을 위해 문화·관람분야 혁신 네트워크 소속으로 〈탄소중립과 녹생성장의 모범기관으로 도약하기 위한 상호 협력 실천 서약〉 공동 선언을 했다. 문화·관람분야 혁신네트워크는 독립기념관, 국립낙동강생물자원관, 국립생태원, 국립아시아문화전당재단, 국립해양생물자원관, 한국수목원정원관리원으로 구성되어 협력을 통해 기관의 혁신 경쟁력을 제고하고 사회적 책임 실현 선도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독립기념관 한시준 관장은 “환경문제 대응을 위해 여러 공공기관이 힘을 합칠 수 있어 매우 뜻깊게 생각한다. 앞으로도 독립기념관이 가진 역량을 적극 활용하여 사회적 책임을 다하고 기관간의 연대를 강화하겠다”라고 밝혔다. alt 아래 줄 가운데 한시준 독립기념관장  ]]> Thu, 12 Jan 2023 09:34:56 +0000 74 <![CDATA[#월간독립기념관 독자 이벤트가 새롭게 바뀌었습니다!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참여 바랍니다.]]> #월간독립기념관독자 이벤트가 새롭게 바뀌었습니다!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참여 바랍니다.   alt ]]> Wed, 11 Jan 2023 19:53:58 +0000 74 <![CDATA[신년사 독립정신을 기리어 희망과 꿈을 실현하는 한 해가 되길 바랍니다]]> 신년사독립정신을 기리어 희망과 꿈을 실현하는 한 해가 되길 바랍니다 글 한시준 독립기념관장 독립운동사와 독립정신을 널리 알려, 국민들에게 긍지와 자부심을 불러일으키고, 국가발전의 정신적 원동력을 만들어 낼 것입니다.    alt 한시준 독립기념관장 2023년이라는 새해를 맞습니다. 새해를 맞이하는 것은 새로운 세상을 만나는 기쁨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미래에 대한 희망과 꿈을 갖게 합니다. 삶을 이끌어주는 것은 희망과 꿈입니다. 힘겹고 어려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 더 나은 삶을 가꿀 수 있다는 꿈을 가지고 새해를 맞이합니다. 희망과 꿈을 모두 이루시는 한 해가 되길 기원합니다.  희망과 꿈은 새로운 세상을 열어가는, 또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가는 원동력입니다.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고 식민지 지배를 받게 되었을 때, 우리 민족은 독립을 이루겠다는 희망과 꿈을 가졌습니다. 독립운동가들이 온갖 어려움과 고통을 견뎌내며 독립운동을 전개할 수 있었던 것도 독립에 대한 희망과 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독립을 이루겠다는 희망과 꿈은 결실을 맺었습니다. 우리 민족은 독립을 이루어냈고, 새로운 세상과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였습니다.  새로운 세상과 새로운 역사를 창조해낸 독립운동가들의 정신적 힘을 지키고 널리 알리는 곳이 독립기념관입니다. 객관적으로 보면, 우리 민족이 일제를 물리치고 독립을 쟁취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계란을 가지고 바위를 부수겠다고 대든 것이 독립운동이었습니다. 계란으로 바위를 부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결국 바위는 부서졌고 우리 민족은 독립을 쟁취하였습니다. 불가능한 것을 가능한 것으로 만들어낸 것이 독립정신이고, 그 독립정신을 지켜내고 뿜어내는 곳이 독립기념관입니다.  독립정신을 지키고 널리 알리는 것과 더불어, 독립기념관은 또 다른 희망과 꿈을 갖고 있습니다. 한국의 독립운동과 독립기념관이 세계에서 대표적이라는 사실을 알리고자 하는 것이 그 하나입니다. 20세기 전반기 제국주의가 팽창할 때, 지구상의 약 80%에 달하는 국가와 민족들이 나라를 빼앗기고 식민지지배를 받았습니다. 이들이 모두 독립운동을 전개했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모두 독립하였습니다. 그렇지만 한국과 같이 끈질기고 격렬하게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던 나라는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또 독립운동을 전개했던 역사를 연구· 전시· 교육하는 기념관을 건립한 나라도 한국이 대표적입니다. 한국의 독립운동과 독립기념관은 세계에 자랑할만한 역사이고 자산입니다.  〈연합국과 함께 한 독립운동〉 전시관을 건립하려는 꿈도 추진하고 있습니다. 독립운동은 중국·미국·영국 등 일제와 싸우고 있던 연합국과 함께했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일제는 한국만 침략한 것이 아니라 중국을 비롯하여 동남아시아의 여러 나라들, 그리고 미국과 영국의 식민지도 침략했습니다. 일제의 침략을 받은 나라들이 모두 일본과 싸웠습니다. 한국의 독립운동은 일제와 싸우고 있던 중국·미국·영국 등 연합국과 함께했고, 그 결과 일제를 패망시키고 독립을 쟁취했습니다. 독립운동은 우리 혼자만 한 것이 아니라, 연합국과 함께 일제와 싸웠다는 사실, 그 결과 일제를 패망시키고 독립을 쟁취하였다는 사실을 널리 알리고자 합니다.   외국인들이 독립기념관을 찾아오게 한다는 꿈도 갖고 있습니다. 그동안 독립기념관을 찾아오는 외국인들은 많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볼 수 있는, 즉 그들의 역사와 관련된 내용들이 많지 않은 것이 큰 이유였다고 생각합니다. 외국인들이 독립기념관에서 그들의 역사와 관련된 내용을 볼 수 있게 만들어 나갈 것입니다. 지난해부터 중국·미국·영국과 함께 한 독립운동 특별전시회를 열고 있는데, 많은 외국인들이 찾아옵니다. 2025년이면 〈연합국과 함께 한 독립운동〉 전시관이 건립됩니다. 여기에 한국의 독립운동을 도왔던 중국·일본·미국·프랑스·영국 등 외국인들에 대한 것도 전시하려고 합니다. 독립기념관을 찾는 외국인들이 크게 늘어날 것이라 기대합니다.   독립운동사 교육연수원을 설립하여, 국민들을 대상으로 독립운동에 대한 교육을 확대하려는 계획도 갖고 있습니다. 독립운동은 나라를 빼앗기고 식민지지배를 받았지만, 이를 극복하고 이겨낸 자랑스러운 역사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독립운동은 계란을 가지고 바위를 부순 역사이고, 불가능에 도전하여 가능을 창조한 독립정신이란 자산을 남겨놓았습니다. 식민지지배로 가혹한 수탈을 당하고 6·25전쟁으로 폐허가 되었지만, 우리는 ‘한강의 기적’으로 불리는 놀라운 발전을 이루어냈습니다. 독립정신이 그 힘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독립운동사와 독립정신을 널리 알려, 국민들에게 긍지와 자부심을 불러일으키고, 국가발전의 정신적 원동력을 만들어 낼 것입니다.  과거는 미래를 창조하는 힘입니다. 역사는 과거의 경험을 통해 미래를 열어나갈 지혜를 얻는 지름길입니다. 우리는 일제의 가혹한 식민통치를 이겨낸 역사적 경험이 있고, 독립정신을 기반으로 한강의 기적을 이룬 역사를 창조하였습니다. 미국은 영국의 식민지였지만, 영국을 능가하는 나라로 발전하였습니다. 일본의 식민지지배를 당했던 한국도 일본을 앞서는 나라로 발전할 수 있습니다. 독립기념관이 그 원동력을 생산하는 곳이라 여기시고, 독립기념관을 통해 그러한 희망과 꿈을 가지시길 바랍니다. ]]> Wed, 11 Jan 2023 18:56:57 +0000 74 <![CDATA[기념관 줌인 한 눈에 보는 2023년 독립기념관]]> 기념관 줌인한 눈에 보는 2023년 독립기념관 정리 편집실   alt   ]]> Thu, 12 Jan 2023 10:11:22 +0000 74 <![CDATA[기념관 소식 NEWS]]> 기념관 소식NEWS   alt ]]> Thu, 12 Jan 2023 09:28:04 +0000 74 <![CDATA[#월간독립기념관 독자 이벤트]]> #월간독립기념관독자 이벤트가 새롭게 바뀌었습니다!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참여 바랍니다.   alt ]]> Wed, 11 Jan 2023 21:47:02 +0000 74 <![CDATA[어제의 오늘 잊지 말아야 할 2월의 역사]]> 어제의 오늘잊지 말아야 할 2월의 역사   정리 편집실   alt   한국 최초의 비행학교인  윌로우스 한인비행사양성소 설립이 추진된 날은  1920년 2월 20일입니다.   ]]> Wed, 01 Feb 2023 13:42:42 +0000 75 <![CDATA[들여다보기 한국 최초의 비행학교, 윌로우스 한인비행사양성소]]> 들여다보기한국 최초의 비행학교,윌로우스 한인비행사양성소   글 임종현 (헤리티지 스마트 컨설팅 그룹 대표) 1920년 2월 20일, 항일 독립전쟁을 위한 비행사 양성을 목적으로 윌로우스 한인비행사양성소 설립이 추진되었다.  1910년 국권을 침탈한 뒤 한반도를 식민지화한 일본제국주의에 맞서  체계적인 교육 과정을 통해 전투비행사를 양성하고자 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항일 항공전략이었다.   alt 한인비행사양성소 교육생들 (1920) 설립 배경 및 목적  1920년 2월 20일, 미국 북부 캘리포니아주 글렌 카운티의 수도인 윌로스(Willows)시에서 약 6마일(약 9.6 킬로미터) 떨어진 40에이커 규모(약 48,967평)의 부지에서 윌로우스 한인비행사양성소 설립이 추진되었다. 1916년 하와이로 망명해 독립군 양성을 주도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총장 노백린 장군(1875~1926)의 지도력과 북미 캘리포니아주 한인 재력가 김종림·이재수·신광희 등의 적극적인 후원, 미주 한인들의 조국 독립에 대한 의지가 결합된 것이었다. 한인비행사양성소는 시대사적으로 제1차 세계대전(1914~1918)을 경험하면서 공군력의 중요성에 관한 인식과 함께, 국내적으로 1919년 3·1운동의 소식이 미주에 전해진 직후인 5월 ‘청년혈성단’이 조직되면서 시작되었다. 청년혈성단 발기인 23명 중 이용근·이용선·이초·장병훈·한장호 등 5명이 비행술을 배우기 위해 미국인이 운영하는 캘리포니아 레드우드 비행학교(Redwood Aviation School)에 입학했고, 졸업 후 한인비행사양성소에 교관으로 참여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20년을 ‘독립전쟁의 해’로 선포하고, ‘비행기대 편성’을 정부의 당면 방침으로 정하며, 미국 샌프란시스코 대한인국민회와 흥사단원들에게 재정적 도움을 요청하였다. 군단 창설의 임무를 위임받은 대한인국민회와 노백린 장군은 비행훈련을 지도할 교관을 초빙하고 비행학교의 실상을 파악하기 위해 1920년 2월 5일에 레드우드 비행학교를 방문하였다. 당시 레드우드 비행학교에 재학 중인 오림하·이용선·이초·한장호·이용근·장병훈 등을 만나 비행학교 창설과 운영에 관한 의견을 나누었으며, 미주 한인 재력가들을 적극적으로 설득하여 비행학교 설립을 추진할 수 있었다.  alt 군무총장 노백린 장군 (왼쪽에서 네번째)과 캘리포니아 레드우드 비행학교의 한인 연습생들   설립 과정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의 비행군단 결성과 비행사 양성 학교설립을 위한 재정 대부분은 당시 콜루사(Colusa)와 글렌(Glenn) 카운티 일대에서 쌀농사로 큰 부를 일군 재력가 김종림(Chong-lim kim, 1886~1973)이 담당했다. 김종림은 1913년에 도산 안창호가 주도하여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결성한 흥사단의 8도 대표 중 함경도 대표로 참여하였고, 공립협회로부터 대한인국민회·대한인동지회 북미총회에 이르기까지 재미 한인사회에서 구국운동과 독립운동에 헌신한 인물이다. 그는 콜루사 카운티 소재 프린스턴(Princeton)시 은행의 직원이자 동업자였던 포스터 포터(Foster M. Porter)가 샌프란시스코 출신 부동산 개발업자인 필립 크로스(Philip B. Cross)에게 임대한 1,520에이커 규모의 농지 중 일부인 40에이커의 땅을 비행 훈련장으로 확보하였다. 김종림은 비행학교의 운영과 유지를 위해 초기 투자금 2만 달러와 매월 3천 달러를 지원하였으며, 교육용 비행기 3대의 구매, 활주로 건설, 가솔린 탱크와 천막 설치 등 모든 경비 일체를 담당하였다. 비행 훈련장에 있던 시설 중 교사 건물은 글렌 카운티의 이탈리아-스위스계 이주 가정의 자녀들을 수용하기 위해 1914년에 신설된 퀸트 공립학교(Quint School)였으며, 1919년 이후 비어 있었던 것을 김종림과 아내인 앨리스 백(Alice Paik)의 노력으로 글렌 카운티 교육청 및 퀸트 지구 교육 위원회의 승인을 얻어 임차할 수 있었다. alt 김종림과 윌로스 시 정착 시절 가족사진 (뒷줄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앨리스 백·김종림·장녀 코리아·장모) 한인비행사양성소의 기능과 활동 당초 공군 군단으로 출범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공군력을 키우고자 설립되었지만, 비행학교 설립을 둘러싸고 글렌 카운티 지역 내 백인사회를 중심으로 반발 여론이 일자, ‘한인비행학교(Korean Aviation School)’라는 명칭을 내세웠다. 설립 직후인 1920년 2월 20일 미주에 거주하고 있던 24명의 재미 한국인 청년들이 교육생으로 지원했으며, 1920년 6월 무렵부터 연습용 비행기 2대를 마련하고(이후 1대가 추가됨) 당시 레드우드 비행학교 교관으로 활약하던 헨리 브라이언트(Henry Bryant)를 교관으로 채용하면서 본격적인 비행훈련을 시작하였다. 1920년 7월 5일에 200여 명의 한인이 모인 가운데 ‘대한인비행가양성소’ 라는 이름으로 성대한 개교식을 개최하였으며, 개교식 다음 날인 7월 6일부터 지원자 중 15명의 교육생이 비행술 연습을 시작했다. 캘리포니아 레드우드 비행학교에서 훈련받고 있던 우병옥·오림하·이용식·이초 등 4명은 7월 7일 졸업생이 되자마자 비행사양성소의 훈련 교관으로 임명되었다. 김종림·이재수·신광희 등 북미 캘리포니아 한인들은 개교한 비행학교의 조직적인 운영을 뒷받침하기 위해 7월 25일에 존립 기한을 2년으로 하는 ‘비행가양성사’라는 회사를 설립했다. 학교 운영비의 대부분은 회사의 총재로 추대된 김종림의 도움을 받았고, 사원으로 참여한 이들이 월례금 10달러씩을 기부하였다. 교육생들에게는 150달러의 학비가 부과되었으나 대부분은 김종림의 농장에서 직접 노동하며 받은 임금으로 학비를 충당하였다. 한인비행사양성소가 운영된 1년 남짓한 기간 중 총 19명의 학생이 비행교육을 받았으며, 글렌 카운티 지역의 명소로 알려지면서 샌프란시스코 연합영상 뉴스 회사(Associated Screen News Co.)가 제작하는 시사 영화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1920년 11월 초부터 12월까지 글렌 카운티 일대에 내린 기록적인 폭우로 인해 수확을 앞둔 대부분의 벼가 물에 잠기면서, 김종림을 비롯한 글렌 카운티 지역의 한인 농장 대부분이 심각한 경제적 손실을 입었다. 이에 따라 비행학교의 운영도 어렵게 되었다.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에서는 비행학교에 대한 지원을 최대한 협조하기로 결의하는 등 학교를 유지하고자 다방면의 노력을 하였으나 경제난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1921년 4월 중순 이후 문을 닫게 되었다. alt 한인비행사양성소(옛 퀸트 교사) 건물과 부대시설(좌), 한인비행사양성소 비행장과 활주로(우) 의의 및 평가  한인비행사양성소는 1910년 국권을 침탈한 뒤 한반도를 식민지화한 일본제국주의에 맞서 체계적인 교육 과정을 통해 전투비행사를 양성하고자 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항일 항공전략이었다. 더불어 낯선 미국 땅에 정착한 한인 이민자들의 조국 독립에 대한 열망이 만나 실현되었던 역동적인 항일 투쟁의 역사를 간직한 대한민국의 소중한 국외 사적이다.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1903년에 라이트 형제가 최초의 고정익 항공기를 활용한 인류 최초의 동력 비행에 성공한 지 불과 17년 후에 설립되었다는 점에서 임시정부와 재미 한인 독립운동가들의 선구자적 혜안을 보여주는 자랑스러운 유산이기도 하다. 또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1921년 7월 18일 자로 한인비행사양성소의 생도였던 박희성과 이용근을 육군비행병 참위(소위)로 임관시켰다는 점에서 대한민국 공군의 효시로 평가할 수 있다. 소재국인 미국에서도 이민사·농업사·항공사 연구 등 다양한 분야에서 역사적 중요성을 인정받아 한인 역사 유물 중 유일하게 ‘국가역사기념물’로 등재될 가능성이 있는 잠정자산으로 분류되었고, 캘리포니아주의 아시아계 미국인 관련 유산에도 ‘중요 한인 유산’으로 언급되었다. 현재 남아있는 한인비행사양성소 관련 유적은 임차해 사용한 퀸트 교사(校舍)가 유일하며, 이 건물은 1924년 무렵 글렌 카운티 874번 필지로 옮겨 일부를 개조한 후 이탈리아 이민자인 베나마티 가(家)의 살림집으로 사용되다가, 외관의 일부를 보수하여 현재 창고로 전용 중이다. 한미 양국에 걸친 윌로우스 한인비행사양성소의 다면적 가치와 역사적·문화적 상징성을 고려할 때, 정부 간 긴밀한 상호 협력을 통해 현실적인 보존과 관리 방안이 시급히 모색되어야 할 것이다. alt 한인비행사양성소 설립지 (현 글렌 카운티 1043번 부지) ]]> Wed, 01 Feb 2023 14:26:38 +0000 75 <![CDATA[한눈에 보기 키워드로 보는 윌로우스 한인비행사양성소]]> 한눈에 보기키워드로 보는 윌로우스 한인비행사양성소   정리 편집실 alt   ]]> Wed, 01 Feb 2023 14:29:48 +0000 75 <![CDATA[이달의 독립운동가 송몽규·안창남·김필순]]> 이달의 독립운동가청년 독립운동가송몽규·안창남·김필순   글 독립기념관 전시부 alt   청년들의 독립운동 송몽규, 안창남, 김필순은 각각 인문학, 과학기술, 의학 분야에서 고등교육을 받은 당대의 청년이었다. 송몽규는 연희전문학교, 교토제국대학에 입학하여 재일 한인유학생들의 독립의식고취를 위해 힘썼으며, 일본 유학을 통해 비행사로 활동하였던 안창남은 중국으로 건너가 항일무장투쟁에 참여하였다. 김필순은 세브란스병원 의학교를 졸업한 후 중국에서 독립운동기지 건설을 위해 노력하였다. 청년들은 식민지의 암울한 현실에서 자신들이 습득한 지식을 조국의 독립을 위한 방법을 마련하는데 헌신하였지만 독립된 조국을 보지 못하고 안타깝게 젊은 나이에 순국하였다. 청년들의 힘을 모아 독립을 이루고자 했던 송몽규 송몽규는 1917년 중국 룽징(龍井)에서 태어났다. 1935년 난징(南京)에서 김구가 설립한 학생훈련소에 입소하고자 고향을 떠났으며, 지난(濟南)에서 독립운동을 펼치던 중 1936년 4월 일경에 붙잡혀 옥고를 치렀다. 1938년 연희전문학교에 입학 후 학생단체 문우회의 기관지 『문우』의 편집을 맡아 일제의 ‘조선어’ 사용 금지 정책에도 한글로 된 시(詩)를 실어 우리글을 지키고자 하였다. 1942년 교토(京都)제국대학 사학과에 선과생(選科生)으로 입학하였고, 재일한인 유학생과 교류하며 조국 독립 방안을 모색하였다. 일제는 ‘징병제를 독립 수단’으로 삼고자 했다는 이유로 붙잡아 1944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선고하였고 송몽규는 1945년 옥중 순국하였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alt 『문우』 (1941)_연세대학교 윤동주 기념관 제공(좌), 교토제국대학 시절 송몽규(앞줄 가운데, 1942)(우) 비행을 통한 항일 무장투쟁에 나선 안창남 안창남은 1901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1921년 오구리(小栗) 비행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인으로서는 처음 비행사 면허를 취득하였으며 다음해 고국방문 비행에 성공하였다. 1923년 관동대지진 당시 한국인들이 학살당하는 것을 보고 비행 기술을 독립운동에 활용하고자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중국군과 협력하여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고 비행사 양성에 힘썼다. 1928년에 대한독립공명단을 조직하여 군자금을 모아 비행학교 등 무관학교를 설립하고자 했으나 1930년 4월 산시(山西)항공학교에서 비행 훈련 중 기체 고장으로 추락하여 순국하였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200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alt 일본 잡지에 실린 안창남 모습(좌), 「안창남군의 부산착발」『동아일보』 (1922.12.6.)(우) 독립운동기지 건설에 앞장선 의사 김필순 김필순은 1878년 황해도 장연군에서 태어났다. 1908년 세브란스병원 의학교를 제1회로 졸업하고 의술개업인허장(醫術開業認許狀)을 받은 후 세브란스의학교와 간호원양성소의 교수로 활동하며 후진 양성에 앞장섰다. 1907년 미국에서 귀국한 안창호를 지원하고 신민회 활동에 참여하였으며, 1911년 일제가 ‘데라우치 총독 암살 미수 사건’을 조작하여 독립운동을 탄압하자 중국 동북지역(만주) 퉁화현으로 이주하여 독립운동기지 건설에 힘썼다. 1916년 일제의 간섭을 피해 내몽골 치치하얼로 옮겨 진료소를 개설하고 의료 활동에 종사하고 독립운동기지에 애쓰던 그는 1919년 8월 갑작스럽게 순국하였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7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alt 세브란스병원의학교 1회 졸업식 사진 (1908)_연세대학교 동은의학박물관 제공(좌), 김필순이 안창호에게 보낸 편지 (1912.3.11.)(우) alt   ]]> Wed, 01 Feb 2023 15:16:40 +0000 75 <![CDATA[끝나지 않은 독립운동 ‘안중근’ 영웅인가, 테러범인가]]> 끝나지 않은 독립운동‘안중근’영웅인가, 테러범인가   글 이계형 (국민대학교 교양대학 교수) 최근 영화 <영웅>이 개봉하였다. 이는 2009년 10월 26일 LG아트센터에서 안중근 의사 의거 100주년을 기념해 초연한 국내 창작 뮤지컬 <영웅>을 영화화한 것이다. 뮤지컬 <영웅>은 2022년 12월까지 9회 공연하였고, 2011년 8월 뉴욕과 2015년 2월 하얼빈 등 해외에서도 두 번이나 공연하였다. 또한 공연 때마다 매진 행진을 이어갔고, 관객들에게 찬사를 받으며 최우수 작품상 등을 수상하였다. 이러한 인기에 힘입어 영화 또한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선사했다. 그런데 일본 우익 성향의 온라인에서는 안중근을 ‘테러리스트’, ‘살인자’로 간주하며, ‘911테러’를 예찬한 영화라는 악평을 쏟아졌다. 이렇듯 한일 간에 안중근 평가가 극명하게 갈리는데, 그 흐름을 역사 속에서 쫓아가고자 한다. alt 박영선 화백의 안중근 의거 민족기록화 (1976) 줄곧 ‘영웅’으로 숭앙(崇仰)된 것은 아니었다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당시에 친일파들은 고종 황제에게 “일본으로 건너가 사죄해야 하고 주범·공모자를 극형에 처해야 한다”는 주장을 서슴지 않았다. 실제 대한제국 황실과 정부는 일본에 조문단을 파견하였고, 일부는 ‘국민사죄단’을 보내기도 하였다. 당시 민중들이 안중근의 거사를 일제의 만행에 대한 보복으로 여겨 크게 환영하였던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이토가 총에 맞아 죽었다는 소식은 삽시간에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일본 내에서는 한국의 대은인인 이토를 사살한 것은 은혜를 원수로 갚은 행위라고 하거나, 여러 신문은 이토의 죽음에 ‘조난(遭難)’·‘춘사(椿事)’라고 하여 안타까움을 표시했지만, 안중근을 ‘흉도(凶徒)’·‘흉한(兇漢)’·‘흉행자(兇行者)’ 등이라 보도했다. 일제는 안중근을 살인마로 몰아갔다. 안중근은 재판 과정 내내 “나는 대한민국의 군인으로 이토를 살해한 것이다”라고 강조했지만, 일제는 ‘살인자’로 몰아가기 위해 증거를 조작하는 한편 그를 끊임없이 회유하였다. 더욱이 일제는 ‘이토공 암살자 안중근’이라고 적힌 사진엽서를 발행하여 이를 기정사실로 하였다. 당시 천주교계는 ‘살인’이라는 종교적 죄악과 애국적 헌신이란 두 가지 사실에 직면하여 신자였던 안중근에 대해 “안중근을 순교자로 볼 수 없다”라며 ‘살인자’로 낙인찍었다. 이에 안중근은 평신도 자격이 박탈되었고, 그로부터 83년이 흐른 1993년에서야 자격이 복권되었다. 의거 직후 일본인들의 가장 큰 관심은 ‘왜, 안중근이 이토를 죽였냐’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개인적인 원한’으로 신문에 보도되었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히 설명할 수 없었다. 재판이 진행되면서 안중근의 입을 통해 “이토를 처단한 이유가 쓰러져 가는 대한제국을 위해, 동양평화를 위해 그랬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일부 신문에는 개인적 원한이 아닌 ‘대의(大義)’라는 표현이 등장하기도 하였다. 이는 안중근이 1910년 2월 14일 사형선고를 받은 직후부터 3월 26일 순국할 때까지 뤼순 감옥의 헌병이나 간수들이 그에게 200여 점의 휘호를 받아 간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alt 안중근 엽서 사진 사진 맨 아래 ‘이토 공을 암살한 안중근. 한인은 예로부터 암살 맹약을 하고 무명지를 절단하는 풍습이 있는데 그 손을 촬영한 것’이라고 적혀있다. 민족운동이 본격화된 이후부터 칭송되다 비록 안중근이 이토를 처단하였지만, 일제에 국권을 빼앗겨 한반도는 식민지로 전락하였다. 이후 민족운동이 본격화하는데 이때 주목받은 인물이 안중근이었다. 국내뿐만 아니라 연해주·상하이·미주 등지에서 안중근 관련 전기가 쏟아졌으며, 그를 추도하는 행사가 열렸고 유족에게 국외 정착을 위한 모금 운동이 전개되기도 하였다. 또한 그를 기리고자 <안중근 의가(義歌)>가 불렸고, 1916년 사립학교 한영서원 교사들이 만든 『애국창가집』 에 안중근은 곽재우·이순신·최익현 등과 더불어 실려 영웅의 모범으로 칭송되었다. 이 노래를 가르친 교사가 체포되어 곤욕을 치르기도 하였다. 더욱이 1928년에는 상하이로 망명한 한인 영화인들이 안중근에 관한 <애국혼>이라는 무성영화를 제작·상영하기도 하였다. 1931년에는 출판사 삼중당을 설립한 서재수가 『하얼빈 역두의 총성』 을 펴내 큰 관심을 끌었다.  광복 이후에는 어떻게 기억하고 기념했을까 첫 기념사업은 1945년 12월 11일 장충단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을 비롯하여 각계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추진하게 된 ‘안중근 동상 건립’이었다.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박문사(博文寺) 안(현 장충동 신라호텔 자리)의 이토 히로부미의 동상을 헐고 안중근 동상을 세우자는 것이었다. 이에 ‘의사안중근동상건립기성회’를 조직하였지만, 동상 건립은 광복 후 혼란 속에 차일피일 미뤄졌고, 6·25전쟁에 관심 밖으로 밀려났다. 휴전 이후에는 기금 문제와 설치 장소를 두고 난항을 거듭하다가 1959년 5월 남산 기슭 왜성대 옛터(현 숭의학원)에 동상이 제막되었다.이와 함께 안중근 관련한 많은 책이 출판되었는가 하면, 1946년 1월 수도극장에서 <안중근 사기(김춘광, 청춘극장)> 연극이 첫 공연하였고, 그해 5월에는 이를 이구영 감독이 35mm 무성영화 <의사 안중근>으로 제작·상영하였다. 이를 광고하는 어구 중에서 “이 영화를 통하여 우리 겨레는 무엇을 찾을 것인가?”라고 되물었다. 이외에도 연극단체는 <안중근의 최후>, <윤봉길 의사> 등을 공연하였다. 1959년 4월에는 <고종황제와 의사 안중근>이 두 번째 영화로 만들어져 큰 인기를 끌었다. 이후 1972년 2월 <의사 안중근> 영화가 상영되었고, 그해 10월에는 안중근 유묵이 보물로 지정되었다. 이외에도 여러 방송국에서 특별기획으로 안중근 관련 프로그램을 제작·편성하였다. 특히 1998년 9월 SBS가 북한에서 1979년 제작한 ‘안중근 이등박문 쏘다’라는 극영화를 방송하기도 하였다.추도 열기도 뜨거웠다. 의거일인 10월 26일과 순국일인 3월 26일로 기념식이 행해졌고, 1946년 3월 안중근선생기념사업협회가 결성되었고 이후 이를 주관하였다. 이때 광복 후 첫 추도회가 서울운동장을 비롯하여 전국적으로 치러졌는데 이날 ‘안중근의사추념가’도 불렸다. 추도 관련 기사에는 “대의(大義)는 영생한다”, “이등박문을 저격하여 세계에 백의민족의 기개와 울분 용맹과 담력을 보여주신 선생”이라는 글귀가 달렸다. 1947년 3월 명동성당에서는, 한국천주교 전체의 입장은 아니었지만, 추도 미사가 열렸고 이는 간헐적으로 이어졌다. alt 영화 <고종황제와 의사 안중근> 포스터 (1959년) 일본은 안중근을 어떤 시각으로 바라봤을까 패망 직후 일본 교과서에는 안중근 관련한 내용이 없었는데, 얼마 뒤부터 이토가 조선인에 의해 살해당했다고 기술하여, 이름을 밝히지는 않았지만 사실상 안중근을 ‘암살자’로 규정하였다. 이를 계기로 일본이 한국을 합병했다는 식으로 역사를 왜곡하였다. ‘한일병합조약’은 이토의 죽음과 상관없이 예정대로 진행됐음에도 말이다. 이는 1970년대까지도 이어졌고 더욱 확대되었다. 1980년대 초, 재일 한인 교포들이 남산 안중근의사기념관에 들렸을 때 “안중근이 우리 민족에 박해를 가한 이토를 저격한 애국지사”라고 설명하자, 한 교포가 “나쁜 사람 아닌가”라고 소리쳤다는 우스갯소리도 그냥 나온 게 아니다. 1982년 일본 교과서 파동 이후에도 여전히 안중근을 거론하지 않거나, ‘암살자’로 표기하였다. 또는 ‘이를 계기로’ 일본이 한국을 ‘병합’하였다는 식으로 기술하였다. 1990년대 이후, ‘계기로’라는 용어는 사라졌고 간혹 안중근을 ‘민족운동가’로 언급하였지만 ‘암살’ 혹은 ‘사살’이라는 단어가 혼용되었다. 그런데 일본 우익의 망언은 1990년대 중반 이후부터 강화되었다. 1982년 마쓰노 유끼야스(松野幸泰) 일본 국토청 장관은 “한국 교과서에 이토를 ‘원흉’이라고 부르고 암살자인 안중근을 ‘영웅’시한다”라고 비난하였고, 1995년 3월 종전50주년국민위원회 회장 오쿠보(奧野誠亮)는 “이토를 암살한 안중근은 한국에서 독립투사로 신격화되고 있지만, 일본 측면에서 보면 살인자에 불과하다”라는 망언을 일삼았다. 더욱이 2000년대 일본 내 우익이 기세를 부리면서는 그러한 경향이 더 두드러졌다. 2005년 출판된 만화 『혐한류』에는 ‘한국을 이해했던 이토 히로부미를 멍청한 테러로 죽게 했다’는 궤변을 내놓거나,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 의사를 ‘어리석은 테러리스트’라고 묘사해 반일 감정을 자극하였다. 일본 전 총리를 지낸 스가 요시히데는 2014년 중국에 안중근기념관이 개관하자, 안중근을 “일본의 초대 총리를 살해, 사형판결을 받은 테러리스트”라고 말해 일본 우익 세력의 찬사를 받기도 했다. 안중근과 이토 히로부미는 아주 상반된 삶을 살았다. 이토를 언급하지 않고 일본의 근대사를 설명할 수 없듯이, 한국의 안중근을 빼놓고 1900년대 후반의 민족운동을 언급하는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안중근을 ‘영웅’시 하기보다는 안중근이라는 개인을 통해 당시의 사회와 국제관계 속에서 반제국주의운동을 부각하고, 아울러 그의 의거가 ‘동양평화’를 위한 ‘인류 보편의 가치’를 구현하고자 하였다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alt 일본 만화 『혐한류』 표지 일본에서 2005년 발매되어 시리즈 누계 100만 부의 판매고를 올린 만화 『혐한류』 표지다.  이 만화는 ‘한국을 이해했던 이토 히로부미를 멍청한 테러로 죽게 했다’고 궤변을 내놓거나,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 의사를 ‘어리석은 테러리스트’라고 묘사해 반일 감정을 자극하였다.   ]]> Wed, 01 Feb 2023 15:39:34 +0000 75 <![CDATA[어제와 오늘을 잇는 사람 배우 정성화]]> 어제와 오늘을 잇는 사람‘인간’ 안중근으로14년간의 열연배우 정성화   글 편집실  사진 파크위드엔터테인먼트 제공 2009년 초연 이후 현재까지 대중의 사랑을 꾸준히 받는 뮤지컬 <영웅>이 최근 영화로 재탄생하였다. 무대에서 무려 14년간 안중근을 연기한 배우 정성화가 영화에서도 안중근 역을 맡아 그의 삶을 누구보다 묵직하게 담아냈다.  alt   정성화 프로필 출생 :  1975년 1월 2일  수상 :  2017년 제1회 한국뮤지컬어워즈 남우 주연상, 2020년 제11회 대한민국 대중문화예술상 문화체육관광부장관 표창 외 다수 뮤지컬 :  <라카지>, <영웅>, <맨오브라만차>, <레미제라블>, <킹키부츠>, <미세스 다웃파이어> 외 다수 영화 :  <위험한 상견례>, <댄싱 퀸>, <탐정 홍길동 : 사라진 마을>,  <영웅> 외 다수 무려 14년을 ‘안중근’으로 살아왔다. 2009년 뮤지컬 <영웅> 초연 이후 이번 시즌까지 총 8번 안중근 역으로 참여하였다. 무려 14년이라는 시간 동안 한 번도 허투루 하지 않았다. 철저한 자료조사를 통해 ‘인간’ 안중근에 가까이 다가가려고 노력했다. 그를 연기할 때 ‘비범함’ 뒤에 숨은 ‘평범함’을 꼭 표현하고자 했다. 특별한 모습이 아닌 ‘인간’ 안중근을 보여주고 싶기 때문이다. 한 가정의 일원으로서, 천주교 신자로서, 그리고 누군가의 동료로서의 다양한 면모를 최대한 담백하게 담아내려 지금껏 노력해왔다. 뮤지컬 <영웅>이 새 시즌을 시작했다. 뮤지컬 <영웅>이 2월 28일까지 서울 LG아트센터에서 공연될 예정이다. 이번 시즌을 준비하며 ‘어떻게 하면 노래 속에서 감정을더욱 섬세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에 대해 고민했다. 영화를 찍으면서 느꼈던 감정들을 무대 위에서 어떻게 구현할 수 있을지 고심했다. 뮤지컬 <영웅>으로 무대에서 관객들을 오랜만에 만날 생각을 하니 설레고 떨린다. 이 감정이 관객분들에게 오롯이 느껴지기를 바란다.  뮤지컬 <영웅>이 롱런하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대한민국 역사상 중요한 인물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안중근’을 연기하는 작품이라 관심을 받기도 하지만, 무대 연출과 음악·안무 등 뮤지컬적인 요소들이 잘 갖춰져 있기에 14년간 변함없이 사랑받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매 시즌을 거듭할 때마다 현대의 입맛에 맞게 발전하려고 노력한 점들 때문에 지금껏 롱런할 수 있었다. 프랑스 뮤지컬 <레미제라블>은 30년이 넘도록 전 세계인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영웅>도 그런 작품이 되길 바라며 앞으로도 꾸준히 발전해나갈 것이다. alt 뮤지컬 <영웅> 중 <영웅>이 최근 영화로 재탄생하였다. 오리지널 뮤지컬이 영화화된다는 것은 뮤지컬을 하는 사람들이라면 모두 꿈꾸는 일이다. 그것을 실제로 이룰 수 있다는 것 자체로 감격적이었다. 촬영 내내 구름 위를 떠다니는 느낌이었다. 이왕이면 관객들 마음에도 쏙 들 수 있게 최선을 다하겠다는 다짐도 했다. 결과물을 보니 그동안 노력했던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윤제균 감독님은 ‘세계 어디 내놔도 부끄럽지 않은 작품을 만들자’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그런 작품이 나온 것 같아서 뿌듯하고 영광스러웠다. 죽음을 앞둔 안중근을 표현하기 위해 14㎏을 감량했다고. 과거 영화에서는 주연이 아니라 조연이나 단역을 주로 맡았다. 영화 <영웅>은 내가 처음 주연을 맡은 작품이다. 게다가 뮤지컬에 이어 안중근 역을 맡게 되었으니 각오가 남달랐다. 안중근의 모습에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살을 빼기로 결심했다. 무리한 체중 감량으로 기력이 떨어지는 바람에 아찔한 순간도 경험했다. 공연 당시 <장부가>를 부르며 고음을 지를 때 깜빡 기절한 적이 있다. 다행히 관객들은 모른 채 커튼콜까지 마쳤지만, 무대 뒤는 그야말로 난리였다. 이후 무대에서 <장부가>를 부를 때면 또다시 기절할까봐 조마조마했다.  alt 뮤지컬 <영웅> 중(좌), 영화 <영웅> 스틸컷(우) 정성화에게 ‘안중근’은 어떤 존재일까. 안중근은 내게 햇빛 같은 존재이다. 그 덕택에 지금의 내가, 그리고 우리가 이 땅의 빛을 느끼며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를 연기할 때마다 막중한 책임감을 느낀다. 관객에게 안중근을 오롯이 전달하는 것이 나의 책무이자 의무이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오해 없이 의도를 전달할 것인가’에 대해서 끊임없이 연구하고 고민한다. 안중근이 뤼순감옥에서 쓴 ‘고막고어자시(孤莫孤於自恃, 스스로 잘난 체할수록 외로워진다는 뜻)’라는 글을 곱씹어보면, 마치 내게 하는 말처럼 들린다. 그를 떠올리며 항상 겸손한 마음으로 임해야겠다는 다짐을 한다. 안중근은 한곳에 머무르지 않았다. 나라의 독립을 위해 상하이·만주·다롄 등을 오가며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았다. 나의 배우 생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안중근처럼 현실에 안주하거나 머물러 있지 않고 계속 도전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관객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관객분들을 마주하는 순간은 언제나 감동적이다. 특히 할아버지·할머니가 손자·손녀와 함께 뮤지컬을 관람하며 이야기에 공감하는 모습을 보면 공연하는 사람으로서 참 행복하다. 동시에 관객분들이 이 작품에서 ‘나라’라는 상징을 다시금 되새긴다는 것 자체만으로 뿌듯하고 보람을 느낀다.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정성화가 표현하는 안중근을 보러오는 관객분들을 위해 자만하지 않고 열심히 고민하고 노력하겠다. 항상 과분한 관심과 사랑을 주셔서 감사하다고 말하고 싶다. ]]> Wed, 01 Feb 2023 15:41:15 +0000 75 <![CDATA[기념관이 발굴한 독립운동가 정두흠]]> 기념관이 발굴한 독립운동가국가의 원수를 갚지 못하고 살아있는 것은 불충,호남의 자결순국지사정두흠   글 독립기념관 독립운동가 자료발굴TF팀 독립기념관은 2018년부터 독립운동가를 발굴하여 국가보훈처에 유공자로 포상 추천하고 있다. 국가와 국민을 위해 희생한 분을 존중하고 기억하는 정부의 의지와 국민적 관심을 담은 것이다.  2023년 매월 독립기념관이 발굴한 독립운동가를 소개한다. 정두흠 (鄭斗欽) 본적 및 주소 : 전라남도 장흥군 유치면 운월리 119 생몰 : 1832.10.28(음) ~ 1910.10.25(음) 자·호 : 응칠(應七)·운암(雲巖) 포상추천 : 2021년 12월 포상 : 2022년 11월 순국선열의 날 계기 훈격 : 건국훈장 애국장 운동방면 : 의열투쟁(경술국치 자결순국) alt 정두흠 초상 ‘상소에 미친’ 강직한 관리 정두흠은 1832년 전라남도 장흥군 유치면 운월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타고난 성품이 온후하고 충효와 학문이 세상의 모범이 될 만하다는 평을 받았다. 여러 차례 과거에 등과했으나 벼슬에 뜻이 없어 고향에서 학문에 몰두했다. 48세에 이르러서야 집안의 권고로 관직에 나아가 가주서·성균관 전적·사간원 정언·부사과·사헌부 지평 등 여러 관직을 두루 거쳤다. 출사는 늦었지만 13년간 주요 관직에 근무하며 고종을 모시는 신하로서 각별한 사랑을 받았다. 구한말 일제와 서구의 국권침탈이 가속화되면서 조정과 나라가 격랑 속에 휘말리자, 참된 정사를 주청하는 간언을 빈번하게 올렸다. 빈번한 상소에 스스로도 자신을 ‘상소에 미친 사람(疏狂)’이라고 할 정도였다. 외세의 국토침범을 우려한 반(反)개화·매관 폐단의 혁파·직언의 확대 등을 요청하며 만언소를 올리기도 했는데, 이로 인해 여러 번 체직되기도 했다. 더 이상 자신의 간언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1892년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대신 고향집 뒤에 망화대(望華臺)를 짓고 매일 여기에 올라 북쪽을 향해 네 번 절하며 망국의 현실을 개탄했다. alt 망화대비 (전남 장흥군 유치면 운월리, 1920년 건립) 충절을 애도하고 시대를 개탄하다 정두흠이 낙향해 있던 시기는 한국근대사의 대 격변기였다. 동학혁명·갑오개혁·을미사변 등 큰 파란이 있을 때마다 그는 울분에 찬 심경을 시가로 남겼다. 일국의 국모가 시해된 을미사변의 경우에는 극심한 충격으로 침식하지 못해 크게 앓아누웠다.1904년 2월 한일의정서,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연이어 강제 체결되면서 대한제국은 사실상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했다. 을미년(1895년)에 이어 전국에서 또 다시 의병이 일어나자, 그는 거의를 독려하는 한편 자신이 노쇠하여 동참하지 못함을 한탄하기도 했다. 일제의 행태에 대한 분노는 순국투쟁으로 이어졌다. 1905년의 두 달도 채 남지 않은 기간 동안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10여 명의 애국지사가 자결로 일제에 항거했다. 그는 민영환·조병세·송병선·홍만식·김봉학 등의 자결 소식을 접하고 이들의 충절을 애도하는 만시를 지었다. 특히 민영환은 사헌부 재임 시 교유했던 인물이었기 때문에 그 충격이 더욱 깊었다. 이듬해인 1906년에는 면암 최익현의 거의 소식에 “지금부터는 감히 우리나라에 사람이 없다고 기롱(欺弄)하지 못할 것”이라 하였는데 대마도에 끌려간 최익현이 순국하여 시신을 운구해 온다는 소식에 “황천길을 함께 가지 못함이 한스럽다”고 하며 오열했다. 무슨 면목으로 저 하늘의 해와 달을 대할 것인가 1910년 경술국치의 소식을 들은 정두흠은 “하늘에 두 개의 해가 없으며 나라에 두 임금이 없다. 신하 된 사람이 국가의 원수를 갚지 못하고 살아있으니 불충의 죄를 면할 수 없다. 무슨 면목으로 고개를 들어 저 하늘의 해를 볼 것인가. 살아서 설 곳은 없고 죽어서 갈 땅만 있다”고 통곡하며 식음을 전폐했다. 문을 걸어 닫고 하늘을 보지 않은 지 한 달여가 지났을 때 자식들을 불러 “조정의 일이 이 같은데 내가 어찌 하루라도 구차히 살겠는가. 내 마땅히 관을 수레에 싣고 대궐 문밖에서 통곡하며 죽을 것이다. 너희들은 속히 채비를 갖추라”고 했으나 자식들은 차마 시행할 수 없어 눈물만 흘렸다. 뜻대로 되지 않자, 그는 스스로 독약을 삼키고 뜰에 떨어져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그가 음독한 사실을 미처 알지 못한 자식들이 울부짖으며 백방으로 조치했으나 가망이 없었다. 시간이 흐른 뒤, 1911년 10월 그의 소기(小朞)를 마친 부인 한씨가 자식과 조카들에게 울면서 말하길, “당시 약을 드실 때 사실 나는 알고 있었다.”라고 하며 그제야 그가 음독 자결했다는 사실을 알렸다. 부인 역시 음독 자결로써 그의 뒤를 따랐다. 손명사(損命詞)와 처변삼사(處變三事) 정두흠은 절명시인 「손명사」를 남겨 자신의 죽음이 대의를 지키기 위한 선택임을 밝혔다. 이는 당시 항일의병전쟁을 선도하던 화서학파의 행동강령이기도 했다. 그는 관직에 나가기 전, 화서 이항로의 문하에서 김평묵·유중교와 함께 수학했다. 화서학파는 개화정책과 외세 침탈에 대처하기 위해 1895년 제천의 장담이라는 곳에서 강습례와 향음례를 대규모로 개최했다. 이 자리에서 유인석을 비롯한 수백 명의 유학자들이 숙고한 끝에 ‘거의소청(擧義掃淸)·거지수구(去之守舊)·자정치명(自靖致命)’의 ‘처변삼사’를 향후 행동방안으로 결의했다. 즉, 의병 거의[거의소청]·대의를 위한 망명[거지수구]·순절[자정치명]은 각각 처신은 달라 보이나 동일한 이치이므로 각자 자신에게 적합한 방안을 선택하기로 한 것이다. 후일 처변삼사는 항일의병전쟁의 준거이자 한말 선비들의 기본적 행동강령이 되었다. 그는 팔순을 바라보는 노쇠한 자신의 처지에 가장 치열하게 일제에 항거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객이 와서 전하길 나라가 없어졌다 하기에 미칠 듯한 심사에 눈물 흘리며 처참해지네 발꿈치 들고 어찌 청산의 흙을 밟으랴 문 걸어 닫고 대낮 하늘의 해를 보지 않네 황제를 업고 죽은 육수부의 정충에 부끄럽고  진나라 물리친 제나라 노중련의 대의를 생각하네 나라가 망함은 용납이 어렵고 구제할 수 없는 죄이니 이 몸 죽어 선현을 따르는 것만 못하리라 「손명사」 중에서 alt 정두흠의 절명시 「손명사」 경술국치에 항거한 호남의 자결순국 지사 3인  “나라의 조정에서 임금을 가까이 모신 신하로 물러나 시골에서 늙어가다가 나라가 없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혹은 칼로 찔러, 혹은 약을 먹고, 혹은 단식하여 죽은 자가 호남에 세 사람이 있다. 장헌 정재건, 시랑 장태수, 한 사람은 공이다. … 나는 서산의 고사리를 캐고 동해의 물을 가져다 그의 묘에 올리고자 한다.” 호남의 대표적인 의병장 기우만은 1912년 정두흠 묘갈명 서언에 이렇게 남겼다. 1910년 한 해 동안 전국에서 40여 명에 달하는 지사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정두흠의 자결을 전후하여 호남에서는 9월 4일 전남 곡성의 정재건이 칼로 자결했고, 11월 27일 전북 김제의 장태수가 단식으로 순절했다. 두 분은 1991년과 1962년에 각각 독립유공자로 추서되었으나, 당대에는 고귀한 순절로 애도되었던 정두흠의 자결은 일제강점기를 지나면서 백 년의 세월 속에 묻혀버렸다. 천만다행으로 장흥문화원과 홍순석 교수가 그의 시문집 『운암집(雲巖集)』을 번역·출판하는 과정에서 행적과 결의가 다시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다. 만시지탄(晩時之歎)이나 정두흠은 2022년 11월 순절 102주년 만에 드디어 자결순국지사로서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alt 『운암집(雲巖集)』    ]]> Wed, 01 Feb 2023 15:52:09 +0000 75 <![CDATA[사(史)적인 여행 성북동에서 만난 사람들]]> 사(史)적인 여행저마다 품고 있는 옛이야기,성북동에서 만난 사람들   글·사진 박광일 (역사여행작가·여행이야기 대표) 서울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한양도성 안쪽만큼은 아니더라도, 성북동은 오랜 내력을 가진 동네답게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는 곳이다. 그 이야기 중심에는 여러 사람이 있고, 그 흔적 또한 많이 남아있다.  저마다 품고 있는 옛이야기를 따라 성북동을 걸어 본다. alt 수연산방 오래된 마을, 성북동의 내력 한양도성 북쪽에 있다고 해서 붙은 이름, ‘성북’은 동네 이름이었지만 지금은 지역 이름이기도 하다. 서울의 성북구란 이름이 성북동에서 비롯되었다. 오래된 마을, 성북동의 내력은 조금 특이하다. 경치는 아름답지만 논과 밭이 없으니 사람이 터를 잡고 살기는 어려운 곳이었는데, 조선시대 영조 때 한양을 지키기 위해 지금의 성북동 일대에 군사들을 주둔하도록 했다. 나라에서는 군인과 가족들이 살아갈 방안을 만들어 주었으니 맑은 개울(성북천)에 면포를 빨아 널어 하얗게 만드는 일, 그리고 궁궐에서 필요로 하는 메주를 쑤는 일을 맡겼다. 이렇게 최소한의 생존 기반이 생겨나자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수입을 늘리기 위해 좁은 땅에 과실나무를 심었다. 복숭아며, 자두를 심었으니 봄이면 울긋불긋한 꽃으로 계곡 전체가 빛이 났을 것이다. 그러자 한양 사람들은 성북동에 놀러와 경치를 즐겼고 그 명성은 널리 퍼져나갔다. 서울, 곧 한양에 살며 성북동에 별장을 짓는 사람도 있었고, 서울에 살기 어려웠던 사람이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아 성북동으로 오기도 했다. 이러한 성북동은 근대 이후 영역을 확장한 서울로 편입되기도 했고, 또 행정구역 개편으로 경기도가 되기도 했으며, 지금은 서울의 성북구 성북동이 되었다.  alt 성북동 성곽 야경 한국의 미·한국의 멋,최순우 옛집 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역을 나오면 곧 성북동으로 가는 큰 길이 있다. 이 길을 따라 조금만 걸어가면 왼쪽 골목 안에 고즈넉한 한옥 한 채가 수리를 위해 분주하다. 성북동에서 처음 살펴볼 곳이니, 바로 ‘최순우 옛집’이다. 집의 주인이었던 최순우(1916~1984)는 미술사학자로서 한국의 미를 널리 알린 것으로 유명하다. 요즘에는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란 책으로 일반인에게 널리 알려지기도 했다. 최순우는 개성 출신의 미술사학자로 한국전쟁 당시 문화재를 부산으로 피난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하기도 했으며, 우리나라 문화재의 국외 전시인 <국외 한국미술 5천 년>을 기획하기도 했다. 이 집은 최순우가 1976년부터 84년까지 살던 집으로, 이 일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도시형 한옥이다. 원래 이 집은 1930년대에 지은 한옥으로, 최순우가 이 집을 사들인 뒤 건축가의 도움으로 조금 모양을 바꾸었다고 한다. 전체 구조가 ㅁ자로 된 집 안채에는 사랑방·안방 등이 있고 일자형의 바깥채는 사무실로 썼다고 한다. 사랑채에 걸린 ‘두문즉시심산’이 적힌 현판은 ‘문을 닫으면 곧 이곳이 깊은 산이다’라는 뜻으로, 집이란 어떤 존재인지를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그리고 ‘오수당’이라고 붙은 현판은 ‘낮잠 자는 집’이라는 뜻으로, 집이란 그 사람에게 가장 편안한 공간이 되어야 함을 보여준다. 최순우가 이곳, 성북동으로 옮겨 온 계기는 성북동에 있는 간송미술관의 전형필과의 인연 때문이다. 평소 전형필을 존경하며 따르던 최순우는 종로의 집을 허물게 되자 성북동으로 이사했다고 한다. 그런데 작고 후 1990년 재개발되며 이 집이 헐리게 되자 가족들이 보존에 대한 의사를 밝혀 한국내셔널트러스트가 참여하면서 2004년부터 <혜곡 최순우 기념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alt 최순우 옛집 alt 수연산방전경(좌), 수연산방(우) 소설가 이태준의 집, 수연산방 최순우 기념관에서 성북동 안쪽으로 조금 더 걸어가면 고풍스러운 한옥, ‘수연산방’이 나온다. 지금은 전통찻집으로 운영되고 있지만, 이곳은 원래 문학가 이태준의 집이다. 이태준 작가는 철원에서 태어난 뒤 연해주와 도쿄 등을 다녀온 뒤 귀국해서 잡지사인 개벽사, 그리고 신문사인 『조선중앙일보』 기자로 활동하기도 했다. 이처럼 서울 생활이 이어지자 1932년에 현재 위치에 땅도 사고 집도 지었다. 당시 이태준이 남긴 기록을 보면 전차가 다니던 동소문 역에서 20분 정도 걸어오면 성북동에 도착했다고 한다. 성북동 주변에는 복숭아밭과 포도밭이 있어서 분위기도 좋았다고 하니 그런 모습을 상상하며 집과 그 주변을 살펴보면 좋을 것 같다. 이태준은 수연산방에 머물며 ‘9인회’를 결성하고 작품활동을 했으며 장편소설 중에는 <황진이>, <왕자 호동> 등이 있다.  최순우 옛집 주소 & 문의 서울 성북구 성북로15길 9  |  02-3675-3402 * 3월까지 보수공사로 휴관 중 도심 속 사찰,길상사 성북동에서 가장 유명한 곳으로 꼽히는 곳이 아마 ‘길상사’일 것이다. 그 내력이며, 절의 모습은 다른 절과 비교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많은 사람의 관심을 끌고 있다. 성북동 길을 따라 선잠단지를 지나 약간 숨이 차다고 생각할 때쯤 길상사에 도착한다. 한성대입구역에서 마을버스를 타고 바로 올 수도 있다.길상사의 독특함은 들어가는 순간 절 경내의 전각 배치에서 느낄 수 있다. 극락전은 대체로 다른 절의 모습과 비슷한데 뒤쪽에 있는 요사채며 스님들이 수행하는 전각은 다른 절과 다른 모습이다. 일정한 가람배치에 따라 있어야 하는 천왕문이나 불이문 등은 찾아볼 수가 없다. 이때 관심을 가지고 살펴볼 곳이 있으니 그 가운데 한 곳이 바로 ‘사당’이라고 한자로 쓴 건물이다. 건물의 이름도 독특한 편이니 다른 절이라면 ‘○○사’라고 붙였을 것이다. 이 사당에서 기리는 인물은 사당 앞 조그마한 공적비의 주인공인 김영한(법명 길상화)이다. 김영한은 원래 이 길상사 공간의 주인이었으니 그때는 절이 아닌 요정이었다. 당시 이름은 ‘대원각’이었다. 대원각의 주인인 김영한은 성공한 기생이었고 기명은 ‘진향’이었다고 한다. 그런 김영한이 문득 ‘무소유’를 실천하던 법정스님의 설법을 듣게 되면서 대원각을 스님에게 시주할 생각을 하게 되었고 또 실현된 것이다. 이렇게 요정 대원각은 깨달음을 구하는 절인 ‘길상사’가 되었다. 그런데 김영한이 이러한 생각을 하게 된 데에는 자신의 독특한 경험이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젊은 시절 시인 백석과 인연이 있던 김영한은 ‘대원각의 값어치를 백석의 시 한 줄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표현했다고 한다. alt 길상사(좌), 길상사 공덕비(우) alt 길상사 관음보살상 성모상을 닮은 관음보살상 관음보살은 불교에서 중생을 구제하는 보살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존재이다. 중성적인 존재였는데 중국 송나라 이후 여성적인 모습으로 많이 묘사되었다. 길상사 관음보살상을 살펴보면 천주교 성당의 성모상을 닮았다. 실제로 혜화동성당의 성모상과 닮았다. 두 작품을 만든 조각가 최종태 교수는 천주교 신자로 알려져 있는데, 젊은 시절 성당에 세울 성모상에 대해 고민하는 과정에서 불교의 반가사유상을 보며 새로운 방향을 찾았다고 한다. 그러한 가운데 평소 김수환 추기경과 교류하던 법정스님의 요청으로 길상사에 관음보살상 조각 요청을 받아들인 것이다. 평소 최종태 교수는 ‘땅에는 나라도 종교도 따로따로 있지만, 하늘로 가면 경계가 없다’는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길상사 주소 & 문의 서울 성북구 선잠로5길 68  |  02-3672-5945 만해 한용운의 거처, 심우장 길상사를 떠나 한양도성 성벽 가까운 곳으로 난 길을 따라 올라가면, 누군가 앉아있는 모습의 조각을 만날 수 있다. 바로 만해 한용운의 동상이다. 그 동상 옆으로 난 골목으로 올라가면 한용운이 만년을 보낸 집, ‘심우장’이 있다. 원래 심우, 곧 소를 찾는다는 것은 불교의 수행 방법 가운데 하나로 자신의 본성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절에 가면 건물에 심우의 모습을 10개의 그림으로 그린 ‘십우도’도 볼 수 있다.한용운은 「님의 침묵」을 지은 시인으로,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이었으며 신간회·불교 청년 비밀결사를 이끌었던 독립운동가이다. 한용운이 성북동으로 옮겨온 시기는 일제의 탄압이 거세지던 시기였다. ‘수양동우회’ 사건을 비롯해 여러 사건을 조작해 종교인을 탄압하던 1933년, 성북동으로 옮겨온 것이다. 원래 이 집은 다른 스님이 초당을 지으려고 마련한 공간이었는데, 여기에 그는 가지고 있던 돈과 지인에게 빌린 돈으로 집을 지었다고 한다. 한편, 이곳은 조선총독부를 뒤로 둔 북향집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심우장은 한용운의 거처이자 사무실이었으며, 1937년에는 일송 김동삼의 장례를 치러주기도 했다. 그는 여기서 1944년 입적할 때까지 머물렀다. alt 심우장 전경(좌), 심우장 내부(우) 심우장 주소 서울 성북구 성북로29길 24   ]]> Wed, 01 Feb 2023 16:04:28 +0000 75 <![CDATA[이벤트 공지 행운의 주인공이 되어보세요!]]> 이벤트 공지행운의 주인공이 되어보세요! alt ]]> Wed, 01 Feb 2023 16:48:37 +0000 75 <![CDATA[이달의 기념관 불굴의 민족정신을 되새기며 제1전시관 ‘겨레의뿌리’]]> 이달의 기념관불굴의 민족정신을 되새기며제1전시관 ‘겨레의뿌리’   글 편집실사진 이소연 독립기념관은 주제별로 총 7개의 전시관을 운영하여 우리 민족의 역사와 일제강점기 국난극복사를 알리고 있다. 그중 이달에 소개할 제1전시관 ‘겨레의뿌리’는 선사시대부터 조선시대 후기까지 우리 민족의 유구한 역사와 찬란한 문화, 그리고 불굴의 의지와 대외 항쟁에 대해 전시하고 있다. 총 4개 존으로 구성된 전시관 약 50만 년 전, 한반도에 구석기 문화가 시작된 후 신석기와 청동기 시대를 거쳐 우리 민족은 유구한 역사를 이어 오면서 한민족만의 독자적인 문화를 발전시켜 왔다. 수많은 외침이 있었으나 단결된 힘으로 국난을 슬기롭게 극복하여 찬란한 문화의 꽃을 피웠다. 제1전시관 ‘겨레의뿌리’는 전시 면적 3,478㎡로, ‘우리 겨레의 터전과 뿌리’부터  ‘자랑스러운 우리문화와 민족 기상’,  ‘불굴의 의지와 대외항쟁’,  ‘살아나는 민족정신’까지총 4개 존으로 구성되어 수천 년 동안 이어져 온 우리 겨레의 무궁한 역사를 알리고 있다. alt   시대별 특징을 살린 입체적 전시물 제1전시관은 고구려 광개토대왕릉비·백제 무령왕릉·신라 황룡사·고려 팔만대장경 등 시대별 특징적인 문화유산을 모형으로 전시하고, 우리 겨레의 오랜 역사와 독자적인 문화를 보여주기 위해 대형 유리월에 시대별 특징적인 실물자료를 총집결하여 전시한다.우리 겨레의 대외 항쟁사를 고구려의 살수대첩·고려의 귀주대첩을 묘사한 세밀한 모형과 배경영상을 중심으로 전시하고, 조선시대 세계 최초의 철갑선인 거북선 모형을 절개하여 배안에서의 전투장면을 볼 수 있도록 한 점도 눈에 띈다. alt   놓치지 말아야 할 관람 포인트 1 해상무역의 중심 ‘신라방’ 모형신라방은 남북국시대 중국 동부 해안지역에 살던 신라인의 집단 거주지역이다. 8세기 중엽 이후 신라와 당나라의 교류가 전개되는 과정에서 형성되었고, 행정기구인 ‘신라소’와 사찰인 ‘신라원’ 등도 있었다. 전시관 한곳에 대형 유리월이 둘러싼 공간이 시선을 사로잡는데, 이곳에 신라방의 각 구역과 기능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모형이 마련되어 있다.  alt   놓치지 말아야 할 관람 포인트 2 이순신 장군의 ‘거북선’ 모형거북선은 조선시대 수군의 대표적 전투선인 판옥선을 바탕으로 개발된 거북 모양의 철갑선이다.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은 거북선과 판옥선을 이용하여 수많은 해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전시관 한곳에 마련된 웅장한 거북선 모형물 앞에서 기념사진을 남겨보자. alt   ]]> Wed, 01 Feb 2023 16:30:35 +0000 75 <![CDATA[이달의 관람객 제1전시관 겨레의뿌리 관람객 인터뷰]]> 이달의 관람객제1전시관 겨레의뿌리 관람객 인터뷰   글 편집실사진 이소연 겨울철에는 방학을 맞아 아이들의 손을 잡고 방문한 가족단위의 관람객이 많다. 호기심 가득한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제1전시관을 둘러보던 관람객들을 만나 본다.   alt   석진우·석정민 형제 (11살·8살, 용인) “동생이랑 엄마·아빠 손을 잡고 독립기념관에 놀러 왔어요. 예전에도 엄마가 데리고 왔었다는 데 그땐 너무 어릴 때라 기억이 안 나요(웃음). 제1전시관을 관람하기 전에 MR 독립영상관에서 상영하는 애니메이션을 보고 왔는데, 영상 속에서 본 유물을 실제로 보게 되어 신기하고 재밌었어요. 동생은 옛날 군인들이 쓰던 칼이 신기했대요. 장난감 칼만 보다가 실제로 쓰인 칼을 보니 엄청 날카로워 보였어요. 제1전시관 말고 다른 전시관도 빨리 보러 가고 싶어요.”         alt   정미혜 님 가족 (경주) “우리 역사에 관심 많은 중학생 아들과 유적지를 찾아다니는 여행을 하는 중이에요. 역사와 관련된 중요한 장소들이 많지만, 선사시대부터 광복까지 시간순으로 관람할 수 있는 독립기념관을 빠트릴 수 없었습니다. 독립기념관을 제1전시관부터 순서대로 관람하는 중인데, 평면적이고 나열적인 전시가 아닌 입체적이고 직접 체험할 수 있는 전시라는 점이 참 흥미롭네요. 또한, 학창 시절 수학여행 코스였던 독립기념관을 아들과 다시 찾으니 감회가 새로웠습니다.”         alt   이승택·권수범 님 (20대, 의정부/인천) “독립기념관은 대한민국 국군장병이라면 한 번쯤 방문해야 할 명소이죠. 휴가 중에 방문·관람하면 추후 휴가 시 1일 보상 휴가를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저희 또한 그러한 이유로 독립기념관에 방문하였는데요. 이번 방문을 계기로 우리 역사와 독립운동사에 더욱 관심을 갖겠노라 다짐했습니다. 제1전시관부터 차근차근 둘러보며 우리 겨레의 뿌리에 관해 다시 한번 깊이 배웠습니다. 부대에 복귀하여 오늘 보고 배운 것들을 장병들에게 널리 전해주려고 합니다.”         alt   안원빈 님 가족 (남양주) “아이들 방학을 맞아 부모님 댁에 방문했는데, 근처에 독립기념관이 있어 나들이 삼아 3대가 함께 방문했습니다. 단순히 아이들 교육에 도움을 주고자 방문하였는데, 생각보다 규모가 크고 여러 종류의 유물들이 다양하게 전시되어 있어서 아이들뿐만 아니라 저와 부모님도 즐겁게 관람하였습니다. 아이들이 아직 어려서 내용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이 쉽지 않았지만, 거북선이나 기마 같은 모형들이 곳곳에 배치되어 있어 흥미로웠습니다. 앞으로 부모님 댁을 찾을 때, 독립기념관에 자주 방문할 예정입니다.”   ]]> Wed, 01 Feb 2023 16:33:19 +0000 75 <![CDATA[#월간독립기념관 지난 호 인스타그램 독자 후기 발표]]> #월간독립기념관지난 호 인스타그램 독자 후기를 발표합니다!   ※ 당첨자 5명에게 모바일 커피쿠폰(아메리카노)을 전달할 예정입니다. 참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alt   ]]> Wed, 01 Feb 2023 16:42:17 +0000 75 <![CDATA[기념관 소식 독립기념관 관람 & 국군병사 휴가 보상 프로그램 안내]]> 기념관 소식독립기념관 관람 & 국군병사 휴가 보상 프로그램 안내   alt   ]]> Wed, 01 Feb 2023 16:45:14 +0000 75 <![CDATA[어제의 오늘 잊지 말아야 할 3월의 역사]]> 어제의 오늘잊지 말아야 할 3월의 역사   정리 편집실   alt 평안북도 의주 3·1운동 과정에서 벌어진 참사, ‘의주학살사건’이 일어난 날은 1919년 3월 30일입니다. ]]> Thu, 02 Mar 2023 13:22:08 +0000 76 <![CDATA[들여다보기 1919년 3월 30일 ‘의주학살사건’의 전말과 의의]]> 들여다보기1919년 3월 30일’의주학살사건’의 전말과 의의   글 이용철(충북대학교 박사)   ‘의주학살사건’은 1919년 3월 30일, 평안북도 의주군 영산시장에서 약 3,000~4,000명이 참여한  의주지역 최대 규모의 시위가 일어나자 일제가 야만적 탄압으로 만세 군중 15명을 살상한 사건이다.  의주지역의 3·1운동을 대표하는 사례이며, 한국인의 독립 의지를 극명하게 표출했다는 점에서  전체 3·1운동사를 통틀어서도 괄목할 만한 사건 중 하나이다. 사건의 배경 1919년 일어난 3·1운동은 일제강점기 민족 최대의 독립운동으로서 국내외 요인이 결합하여 발생한 대사건이었다. 한국인은 대한제국기(1897~1910) 때부터 애국계몽운동과 의병항쟁을 통해 일본의 침략에 맞서왔고, 1910년 경술국치로 나라를 빼앗긴 뒤에도 각종 비밀결사 활동을 통해 국권을 회복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리고 이런 노력과 열망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인 1918년, 미국 대통령 윌슨이 민족자결주의를 선언하자 더욱 커지게 되었다. 민족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는 민족자결주의가 승전국(일본)의 식민지였던 한국에게 적용될 수 있는가는 둘째치고, 국내의 천도교·기독교·불교 지도자들이 중심이 되어 대대적인 독립운동을 계획·추진하게 되었다. 그 결과 1919년 3월 1일, 경성(서울) 태화관에 손병희를 필두로 하는 민족대표 33인 중 29인이 모여 독립을 선언한 가운데, 같은 시각 파고다공원(탑골공원)에서도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운동에 나서면서 3·1운동이 본격화하였다. 이후 3·1운동은 「독립선언서」 전파와 함께 전국으로 급격하게 확산되었다. 한편 ‘의주학살사건’이 일어난 평안북도 의주는 한강 이북 3·1운동의 중심지였다. 의주 역시 서울과 마찬가지로 3월 1일만세운동이 시작되었는데, 이는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이었던 유여대 목사가 의주지역의 3·1운동을 사전에 준비하였기 때문이다. 유여대는 2월 10일 선천군 평양노회에서 이승훈·양전백 등과 만나 3·1운동 참여를 논의했고, 같은 달 17~18일경 정명채·김두칠 등과 의주군 3·1운동을 준비하였다. 그 결과 3월 1일 오후 2시, 의주면 읍내 기독교 교회당에서 의주지역의 3·1운동이 시작되었다. 이후 의주에서는 ‘의주학살사건’이 발생한 3월 30일 전까지 무려 27회의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다. alt 「영산시(永山市)에 이사(異事)」, 『독립신문』 (1920.4.20.)(좌), 「소요사건(騷擾事件)의 후보(後報), 평안북도 의주(義州), 의주 영산에서, 중상자 육 칠명」,『매일신보』 (1919.4.5.)(우) 사건의 전말 1919년 3월 30일 정오 12시경, 고령삭면 구창동에 위치한 영산시장에서 장날을 맞아 약 3,000~4,000명이 참여한 의주지역 최대 규모의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최초 운동은 천도교인과 기독교인의 연대 속에서 시작되었는데, 일제는 운동을 조기에 종식하고자 재빨리 탄압에 나섰다. 영산시장 내 헌병주재소 헌병 2명과 헌병보조원 3명을 2개 조로 나눠 투입, 만세 군중의 진압에 나선 것이다. 이미 3·1운동이 시작된 지 한 달째에 접어든 가운데 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크게 확산되고 있었기 때문에 취해진 조치였다. 하지만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한 군중은 이에 굴복하지 않고, 일제 헌병과 보조원을 포위한 가운데 만세운동을 지속하였다. 이 과정에서 헌병 한 명이 총을 쏘면서 시위대를 위협했지만, 군중들은 돌을 던지며 맞섰고 헌병의 총을 빼앗는 데 성공하였다. 이때 총성을 듣고 또 다른 헌병이 달려왔으나 처지는 다르지 않았다. 이들도 만세운동에 참여한 시위대와의 몸싸움 속에서 총을 빼앗겼다. 두 명의 헌병이 몸싸움 끝에 총기를 빼앗기고 부상을 입자 남은 헌병보조원 3명은 잔혹한 탄압을 시도했다. 무려 60여발의 실탄을 시위대에게 난사한 뒤 앞서 부상을 당한 헌병 2명을 데리고 주재소로 물러났다. 일제의 만행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이들은 이후 탄약 상자를 갖고 주재소 뒤편으로 도망쳤는데, 이 과정에서도 군중을 향해 총을 난사하였다. 만세운동에 참여한 군중은 일제 헌병·헌병보조원의 무차별 사격으로 큰 피해를 입었지만, 그럼에도 꿋꿋하게 만세운동을 하면서 독립의지를 만방에 떨쳤다. 이 과정에서 주재소와 헌병보조원 숙소에 돌을 던져 문과 창문 등 집기를 파괴하고, 병기고에 보관 중이던 총기 등도 압수하였다. 이후 치열했던 만세운동은 일제의 탄압 병력이 추가로 파견되면서 오후 7시 30분경을 기해 점차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이날의 독립만세운동으로 시위대 측에서는 7명이 총에 맞아 순국하였는데, 「영산시(永山市)에 이사(異事)」, 『독립신문』 (1920.4.20.) 기사에 실린 순국자 5명의 이름을 보면 장인국·김석운·황수정·허창준·백성아 등의 이름이 확인된다. 일제는 이들 사망자를 포함한 사상자를 최대 15명으로 집계하였고, 기타 41명의 참여자를 체포하였는데 이들 중 공판에 부쳐진 6인은 구체적인 신상을 알 수 있다. 이들은 모두 고령삭면에 거주하는 농민들이었는데, 보안법위반과 소요죄 등의 죄목으로 길게는 징역 3년부터 짧게는 징역 6개월의 형을 선고받았다.체포된 이들 중에는 공판 과정에서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고 저항을 이어간 인물이 있었다. 박병수가 대표적인데 그는 일제의 한국 침략과 강제 병합을 비판했으며, 파리강화회의에서 민족자결주의가 선포된 것에 고무되어 한국의 독립을 염원하던 중 3·1운동에 참여하여 기쁘게 만세를 불렀다고 하면서 독립만세운동에 대한 참여를 정당화하였다. alt   의주 3·1운동의 성격과 역사적 의의 ‘의주학살사건’이 발생한 영산시장 만세운동의 성격과 역사적 의의는 다음과 같다. 먼저 만세운동은 장날을 맞아 시장에서 일어났고, 그로 인해 4,000명 이상의 대규모 군중이 만세운동에 동참할 수 있었다. 실제 3·1운동과 관련하여 대규모 시위는 대개 장날 시장에서 일어났는데, 이는 영산시장 3·1운동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와 함께 천도교인과 기독교인이 만세운동을 주도했다는 점 역시 주목할 부분이다. 참고로 의주는 3·1운동 당시 전국에서 기독교와 천도교세가 가장 강력한 곳 중 하나였는데, 바로 이 점이 일제의 학살에도 많은 군중이 결집할 수 있도록 했던 원동력이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만세운동이 일어난 시점도 중요하다. 3월 말에서 4월 초는 전국적으로 3·1운동이 가장 활성화된 시점으로, 2,000명 이상 참여한 대규모 시위가 가장 많이 발생하던 때였다. 의주군 역시 3월 1일부터 만세운동이 일어나긴 했지만 3월 중순을 지나면서 만세운동의 발생 빈도가 줄고 있었는데, 3월 말에 가면서 전국적 추세에 부합하여 4,000명 이상이 참여하는 최대 규모의 만세운동으로 승화되었고, 이 과정에서 ‘의주학살사건’이 발생했다. 결국 ‘의주학살사건’은 의주지역의 3·1운동을 주도한 기독교·천도교계 인사들이 장날을 맞아 영산시장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였고, 이것이 대규모 시위로 촉발된 가운데 일제의 거센 탄압 속에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음에도 굴하지 않고 한국인의 독립 의지를 떨친 평안도의 대표적 독립만세운동이었던 셈이다. 특히 의주는 기록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최소 40회 이상의 독립만세운동이 있었던 곳으로 단일지역으로는 전국에서 가장 많은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난 곳이기도 했다. 따라서 의주에서 발생한 ‘의주학살사건’의 의미는 남다를 수밖에 없다. 더욱이 ‘의주학살사건’과 같은 지역의 대표적 만세운동들이 모여 만들어진 3·1운동의 거대한 역사적 물결이 일제강점기 해외 독립운동의 구심체이자 대한민국의 전신으로서 상징성을 갖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귀결되었다는 점을 상기해보면, ‘의주학살사건’이 갖는 역사적 의미는 결코 작지 않다. ]]> Thu, 02 Mar 2023 13:33:28 +0000 76 <![CDATA[한눈에 보기 키워드로 보는 ‘의주학살사건’]]> 한눈에 보기키워드로 보는 ‘의주학살사건’   정리 편집실   alt   ]]> Thu, 02 Mar 2023 13:36:56 +0000 76 <![CDATA[이달의 독립운동가 개성·파주의 3·1운동을 이끈 여성 독립운동가들]]> 이달의 독립운동가개성·파주의 3·1운동을 이끈여성 독립운동가들   글 독립기념관 전시부   alt     개성 3·1운동의 불씨를 살린 ‘신여성’ 권애라 권애라는 1897년 경기도 강화군에서 태어나 개성에서 자랐다. 호수돈여학교에서 초중등과정을 마치고, 서울 이화학당 유치사범과를 졸업했다. 1919년 당시 호수돈여학교 부설 유치원교사로 활동하던 권애라는 개성 북부교회 지하에 보관되어 있던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나와 개성 시내에 배포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에 징역 6개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른 후 여성교육과 자주독립을 주제로 연설하며 ‘신여성’으로서 활동을 이어나갔다. 1922년에는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인민대표대회에 한국 대표로 참여하기도 했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90년 애국장을 추서했다. alt 3·1운동에 참여한 여성들 『오사카아사히신문大阪朝日新聞』 (1919.3.5.) 개성 3·1운동 확산의 공로자 신관빈 신관빈은 1885년 황해도 봉산군에서 태어났다. 호수돈여학교를 졸업했고 1919년 당시 호수돈여학교 기숙사 사감이자 북부교회 전도부인으로 활동했다. 1919년 3월 1일 권애라, 심영식과 함께 개성 시내에서 독립선언서를 전하며 많은 이들이 만세운동에 참여할 수 있도록 독려했다. 이튿날 교회에서 일경에 붙잡힌 신관빈은 징역 1년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동아일보』와의 인터뷰를 통해 참혹한 옥중 생활에 대한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2011년 애족장을 추서했다. alt 서대문형무소 여옥사 8호실_서대문형무소역사관 제공(좌), 호수돈여학교 강당 전경(1920년대)_호수돈여자고등학교 제공(우) 신체 한계를 극복하고 3·1운동의 선두에 나선 심영식 심영식은 1887년 개성에서 태어났으며, 어린 시절 열병을 앓은 뒤 시력을 잃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평양맹아학교, 호수돈여학교 등에서 공부했으며 1919년에는 전도부인*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1919년 3월 1일 호수돈여학교 출신 여성들과 함께 독립선언서 배포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고, 3월 초 개성 시내 만세운동에 참여했다가 일경에 붙잡혔다. 옥고를 치르던 중 일경에게 뺨을 맞아 한쪽 고막이 터져 평생 후유증에 시달렸다고 한다. 출옥 후 1920년에는 3·1운동 1주년 기념 만세운동을 준비하다가 또다시 일경에 붙잡혀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90년 애족장을 추서했다. * 전도부인(Bible Women)  :  한국의 언어와 풍속에 익숙하지 못한 선교사들을 대신해서 자신들이 이해한 복음을 전파하는 역할을 했던 한국여성을 지칭한다. alt  「독립운동에 관한 건」 (1919.3.4.)_국사편찬위원회 제공(좌), 「출옥자의 감상」『동아일보』 (1920.4.18.)_국사편찬위원회 제공(우) 최초의 파주 3·1운동을 이끈 전도부인 임명애 임명애는 1886년 경기도 파주군에서 태어났다. 1919년 당시 구세군* 전도부인으로 활동했던 임명애는 남편 염규호와 함께 독실한 신자였다. 1919년 3월 10일 임명애는 교하리 공립보통학교 운동장에 모인 학생들과 함께 파주의 첫 만세운동을 이끌었고, 3월 26일에는 주민들과 함께 면사무소로 행진했다. 이후 임명애는 만삭의 몸으로 여옥사 8호실에 수감되었다가 출산을 위해 잠시 출소한 이후 갓난아이와 함께 재수감되었다. 이때 여옥사 8호실 동지들이 그들을 보살폈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90년 애족장을 추서했다.  * 구세군  :  1865년 감리교 목사였던 윌리엄 부스(William Booth)가 런던에 설립한 그리스도 교파로 1908년 한국에 전파되었다. alt 임명애(좌)·염규호(우)의 수형기록카드_국사편차위원회 제공 alt   ]]> Thu, 02 Mar 2023 13:52:12 +0000 76 <![CDATA[끝나지 않은 독립운동 국내 독립운동 사적지, 대한민국 문화재로 가치를 승화시켜야 한다]]> 끝나지 않은 독립운동국내 독립운동 사적지, 대한민국 문화재로 가치를 승화시켜야 한다   글 이계형 (국민대학교 교양대학 교수)   얼마 전 미국 로스앤젤레스(LA) 한인타운 인근 카탈리나에 위치한 흥사단의 옛 본부 건물(단소, 團所)이 현지 한인사회와 단체, 우리 정부의 노력으로 대한민국의 품에 안기게 됐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 건물은 중국계 개발회사가 인수해 철거 위기에 놓였던 상태였다. 국가보훈처가 국외에 소재한 독립운동 사적지 보존을 위해 부동산을 매입한 것이 처음이라고도 한다.  이는 매우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를 기회로 국내 독립운동 사적지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이를 문화재로 인식해야 한다는 발상의 전환을 기대하면서 나름의 방안을 제언하고자 한다.  alt 흥사단 대회 사진(1950) 사진 속 건물이 1929년부터 1970년 말까지 로스앤젤레스(LA) 카탈리나 지역에 자리하여 흥사단 본부로 사용했던 건물이다. 국내 독립운동 관련 문화재 현황  사전적 의미에서 ‘문화재’란 고고학·역사학·예술·과학·종교·민속·생활양식 등에서 문화적 가치가 있다고 인정되는 인류 문화 활동의 소산을 일컫는다. 우리나라의 문화재는 ‘문화재보호법’에 의해 보호를 받고 있다. 이를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가치가 높은 문화재를 엄격한 규제를 통해 항구적으로 보존하고자 주체에 따라 국가지정문화재와 시·도지정문화재로 나뉜다. ‘국가지정문화재’는 국보·보물·사적·명승·천연기념물·국가무형문화재·국가민속문화재로 분류된다.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되면 문화재 외곽경계로부터 500m 이내의 시설물·건축물 설치는 사전에 문화재청의 허가를 받아야 할 정도로 엄격히 보존하고 있다.  그런데 국가지정문화재 가운데 독립운동 관련한 국보는 한 점도 없다. 보물은 2,891건 가운데 11건에 불과하다. 안동 임청각이 1963년 1월 보물로 지정된 이후 10년 가까이 지나 윤봉길 유품·안중근 유묵(1972.8.) 등이 이에 포함되었고,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에 들어서도 백범일지(1997.6.), 황현 초상(2006.12.), 최익현 초상(2007.2.) 등이 선정되는 정도에 머물렀다. 최근에는 등록문화재였던 말모이 원고·조선말 큰사전 원고(2020.12.), 김구 서명문 태극기(2021.10.), 진관사 태극기(2021.10.), 이봉창 의사 선서문(2022.12.) 등이 보물로 승격·지정되었다.  사적은 총 540건 중에서 8건이다. 예산 윤봉길 의사 유적과 천안 유관순 열사 유적은 비교적 이른 1972년 10월에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하지만 이후에는 크게 늘지 않았다. 1990년대 이후 탑골공원(1991.10.), 홍성 홍주의사총(2001.8.), 화순 쌍산 항일의병 유적(2007.8.), 만해 한용운심우장(2019.4.) 등이 사적으로 평가받았고, 경교장은 서울시유형문화재에서 2005년 6월에, 이화장은 서울시기념물에서 2009년 4월에 사적으로 승격되었다.이렇듯 국가지정문화재는 전통 시대에 편중되어 있고 근대 관련, 특히 독립운동 분야의 보물, 사적은 매우 적다. 이는 구조적인 문제에서 비롯된 것으로 봐야 한다. 일단 광복 이후 한참 뒤에 제정된 ‘문화재보호법’에 기인한다. 1961년 5·16군사정변으로 국회에서 계류 중이던 문화재법안은 그해 10월 문화재 관리국이 발족하면서 다시 논의되기 시작하였고 1962년 1월에서야 ‘문화재보호법’이 공포되었다. 당시 초점은 삼국시대·고려·조선 시기에 한정하여 문화재 복원, 정비 등에 집중되었다. 한국독립운동이 근대 시기에 전개되었기에 그와 관련한 유적이나 유물이 문화재로 가치를 인정받기 어려웠을 것이다. 다음으로는 한국독립운동사 연구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관련 연구 없이 한국 문화유산의 가치를 자리매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연구 흐름은 1960년대부터 본격화하여 1970~1980년대 들어서 비로소 연구 제1세대가 형성되었고, 1980년대 사회주의운동까지 확대되었으며 1990년대에 제2세대 연구자들이 활발하게 연구되었다. 그런 만큼 한국 독립운동 관련하여 사적지, 문화적 가치 등은 뒤늦게 주목받았다. 그 결과 도시 개발과 인식 부족에서 적지 않은 독립운동 관련 사적지가 사라져갔다.  그러다가 2000년대 들어서면서 근대 시기 문화유산 또한 언젠가는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될 수 있기에 이를 도외시 할 수는 없다는 경각심을 갖게 되었다. 이에 뒤늦게나마 2001년에 등록문화재 관련 법안이 마련되었다. 이런 제도의 도입은 독립운동과 관련한 사적지를 보존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이는 ‘문화재보호법’에 의해 보호되는 국보·보물·사적 등의 지정 문화재와 달리 훼손 위기에 처한 근현대 문화유산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그 결과 예전보다 독립운동과 관련한 문화재가 늘어났다. 제도가 시행한 지 7년 뒤에 2008년 8월 태극기 목판·남상락 자수 태극기·대한민국만세 태극기·한국광복군 서명문 태극기·불원복(不遠復) 태극기·대한민국임시의정원 태극기 등이 등록문화재로 선정된 이래 2022년 10월까지 100개 가까이 된다. 이에는 독립운동(가) 유물과 더불어 북한산 기슭에 묻혀 있는 이준·손병희·이시영·안창호·김창숙·한용운·신익희·여운형, 망우리의 오세창·문일평·방정환·오기만·서광조·서동일·오재영·유상규 등의 묘소가 포함되었다. 이는 전통 시대 역사적 인물들 묘소가 지방기념물로 지정된 것과 차이를 보인다. 이와 더불어 유일하게 비교적 원형을 잘 보존된 예천 윤우식 생가(2013.10.)가 등록문화재로 선정되었다. alt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제497호 이화장(문화재청) 독립운동 관련 지방문화재 현황 지방문화재는 지방자치단체가 담당하는데, ‘시·도지정문화재’와 ‘문화재자료’로 구분한다. 시·도지정문화재 중에 독립운동관련해서는 지방 유형문화재와 기념물이 이에 해당한다. 문화재자료는 시·도지사가국가 또는 시·도 지정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은 문화재 중에서 향토 문화와 보존상 필요하다고 인정한 것을 말한다. 독립운동과 관련한 지방유형문화재는 그리 많지 않다. 확인한 바로는 전체 4,033건 가운데 8건에 불과하다. 대개 독립운동가 초상이나 유물이고 사적지로서는 탑골공원 내 팔각정이나 승동교회 정도이다. 상대적으로 기념물은 1,759건 가운데 26건으로 많다. 이에는 유인석·민영환·최익현 묘소나 광주학생운동발상지·나주역사·임병찬창의유적지·제주 무오법정사항일운동발상지·아우내3·1운동 사적지 등이 포함되었는데, 여기서 세 분의 묘소가 왜 등록문화재가 되지 못했는지 의아하다.  기념물 대부분은 독립운동가의 생가지이다. 안재홍·신익희·이강년·신돌석·김창숙·박열·신채호·최현배·이병기·이석용·백정기·이동녕·이상재·이종일·김좌진·한용운·손병희 등이 그러한데, 생가지가 지방기념물로 지정되었다가 이를 복원하는 절차를 밟았다. 그런데 이와 달리 박상진·송진우·김한종·안희제·문양목 등의 생가지(터)는 기념물이 되지 못하고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었는지 의문이다.이와 함께 서울의 경우에 한정하는 것이지만, 기념 표석이 있다. 서울시가 아시안게임(1986)과 서울올림픽(1988)을 맞아 1985년부터 현전하지 않는 역사적 장소, 또는 역사적 의미가 있는 사건이 발생한 공간에 역사문화유적 표석(標石)을 설치해 오고 있다. 이들 가운데 국가지정문화재 사적이나 서울시유형문화재로 지정된 것을 제외하면, 2022년 현재 335건 가운데 독립운동 관련하여 50개로 확인된다. 주목되는 부분은 1993년 이후 서울 시내 3·1운동 유적지(보신각 앞·세브란스병원·중앙학림·마포종점·종로YMCA·유심사 터·상춘원 터·승동교회 등)에 집중적으로 세워졌다.  다음으로는 독립운동가의 집터이다. 김경천·김창숙·노백린·민영환·손병희·송진우·심훈·베델·여운형·용성스님·이동녕·이범진·이봉창·이상재·이준·이회영·지청천 등이 이에 해당한다. 이는 서울이 개발되면서 자연스럽게 소멸하였고 복원할 수도 없는 상황이다.이외에도 독립운동과 관련하여 6·10독립만세운동 선창 터·김익상 의사 의거 터·나석주 의사 의거 기념터·대한민국임시정부서울연통부지·독립선언문 배부 터·박자혜 산파 터·보성사 터·부민관 폭파 의거 터·서북학회 터·송학선 의사 의거 터·시위병영 터·신간회 본부 터·이충순 자결 터·정미의병 발원 터·조선건국동맹 터·조선어학회 터·진단학회 창립 터·찬양회와 순성여학교 설립 결의 터·한성정부 유적지 등에 기념 표석이 세워졌다. 기념 표석이 세워진 곳은 독립운동사에 의미 있는 곳이지만, 터만 남아 있다고 하여 그런지 문화재에 포함하고 있지 않다. 하지만 전통 시대 역사적 인물들의 집터도 지방 유형문화재로 지정되거나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독립운동가들의 집터가 기념물로 지정되기도 하였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남는다. 이런 점에서 독립운동 관련 문화재 지정은 전통 시대와의 형평성 문제, 역사적으로 볼 때 문화재 가치 기준을 새롭게 정립해야 한다. alt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제465호 경교장(서울시)(좌), 김좌진 장군 생가지 1989년 12월  충청남도 기념물로 지정된 후 1991년 복원(독립기념관)(우) 독립운동 사적지, 문화재 지정을 위한 방안 이를 해결할 방안으로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가 추진하고 있는 국내 독립운동 사적지 조사를 활용할 필요가 있다.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는 2007년부터 2009년까지 국내 독립운동과 관련하여 처음으로 종합적인 실태를 조사하였다. 서울(1,783)을 비롯하여2007년에 경기 남부(143), 인천·경기 북부(106), 충북(155), 2008년에 대전·충남(157), 2009년에 강원도(91), 전북(123), 광주·전남(168), 대구·경북(181), 부산·울산·경남(214), 제주도(40) 등 17개 지역의 독립운동 사적지 조사가 이뤄졌다. 모두 3,161건이었다.  조사 내용에는 근대 사적지와 일제 통치기관도 포함한 것이지만, 대개는 독립운동 관련 사적지인 만큼 의미가 크다. 그런데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역사적 가치가 큼에도 문화재에 포함되지 않은 곳이 적지 않다. 사적지 조사 의견란을 보면, 대부분 기념 표석(비)이나 안내판 설치와 홍보 필요성을 제기하고 있지만, 이후 이에 대한 적절한 대응 방침이나 결과에 관심을 두고 있지 않다. 이는 독립운동 관련 사적지를 문화재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기에 그런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를 위해서 국내 독립운동 사적지 전체를 성격별로 나누고 기존에 문화재로 지정된 것을 확인한 뒤 역사적 가치가 이에 뒤지지 않는데도 제외된 것을 별도로 구분해야 한다.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형평성에 벗어난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사적지가 적극적으로 문화재로 선정될 수 있도록 면밀히 분석하고 역사적 가치를 부여해야 한다. 이를 토대로 관계기관과의 긴밀한 의사소통을 통해 사적지가 문화재로 선정될 수 있도록 각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더는 독립운동 사적지가 없어지지 않고 국가지정문화재 또는 지방문화재로 등재되어 국가적인 차원에서 제대로 관리되어야 한다. 독립운동 사적지는 흔적만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암울했던 우리의 역사 속에서 배태된 것인 만큼, 100년 뒤에는 매우 가치 있는 문화재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 Thu, 02 Mar 2023 14:05:05 +0000 76 <![CDATA[어제와 오늘을 잇는 사람 한 세기에 걸친 재일조선인의 삶을 조명한 이민진 작가]]> 어제와 오늘을 잇는 사람한 세기에 걸친재일조선인의 삶을 조명한이민진 작가   글 편집실사진 인플루엔셜 제공   소설 『파친코』는 4대에 걸친 재일조선인 가족의 이야기를 그린 세계적인 베스트셀러다. 한국계 미국인 작가 이민진이 2017년 처음 출간한 이 소설은 그해 전미도서상 최종 후보에 오르는 등 주목받았다.  한국에서는 2022년 개정판이 출간되었다. alt   이민진 출생 : 1968년 서울 수상 : 대한민국 만해문예대상, 제2회 부천 디아스포라 문학상, 삼성행복대상 여성창조상 등 대표작 :『백만장자를 위한 공짜 음식』, 『파친코』 등 『파친코』는 2017년 한 번, 2022년에 또 한 번 주목받았다.  2017년 처음 출간한 『파친코』 지난 해 4월 기존 출판사와 계약이 종료되면서 절판됐다. 이후 2022년 새로운 번역과 디자인으로 재출간했다. 새 출판사를 결정할 때 번역이 가장 중요한 부분 중 하나였다.  원작의 의도를 충실히 살린 개정판이 마음에 든다. 또한 종이책뿐만 아니라 오디오북으로도 만나볼 수 있다. 오디오북은 효과음과 BGM, 캐릭터들의 특성을 살린 국내 최고 성우들의 목소리로 작품의 매력을 극대화했다.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는 오디오북을 통해 원작의 감동을 온전히 느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미국 사회에서 먼저 호응을 얻었다.  평소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사회적 사실주의를 표방한 19세기 영미 문학을 즐겨 읽으며 글쓰기 훈련을 했다. 내 글이 스타일적인 측면에서 영미 문학에 가깝기 때문에 미국 독자들의 호응을 먼저 얻은 것 같다. 2017년 처음 책을 출간했을 때 ‘북토크’에 참여한 사람들 대부분이 미국 독자였다. 한국인과 아시아인은 보이지도 않았다. ‘한국인들이 날 싫어하나?’라는 생각도 했다(웃음). 그런데 최근 3년 사이 한국 독자가 부쩍 많이 늘었다. 세계 여러 나라에서 책이 읽히고 있지만, 한국 독자들이 『파친코』에 보여주는 관심은 더욱 특별하게 느껴진다. 실제 이야기가 글의 소재가 되었다고. 나는 일곱 살 때 미국으로 건너갔다. 예일대에서 역사학을 공부하던 열아홉 살 무렵, 한 특강에서 따돌림으로 자살한 재일교포 소년의 이야기를 들었다. 소년의 중학교 졸업앨범에는 ‘네가 있던 곳으로 돌아가라.’ ‘너한테 김치 냄새가 난다.’ ‘난 네가 너무 싫다.’ 등이 쓰여 있었다고 한다. 그 사연이 너무 충격적이어서 오랜 시간 뇌리에 박혀 있었다. 이후 소설을 쓰고자 다짐했을 때 자연스럽게 재일교포와 관련된 자료부터 찾아보았다. 그렇게 『파친코』가 시작되었다. 내 인생을 소비할 만한 주제를 발견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작가가 되려고 변호사를 그만뒀다. 언제부터 그런 꿈을 가졌나. 내가 학생이던 시절에는 한국계 미국인 여성이 미국 사회에서 작가가 된다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었기 때문에 ‘작가가 돼야겠다’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러다 성인이 되어 변호사로 일하던 중 간염에 시달리게 되었는데 불현듯 ‘시간이 얼마 없을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의미 있는 일을 해야겠다’라고 결심했고, 앞만 보고 달리던 삶을 정리하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alt 부천 디아스포라 문학상 수상 당시 촬영 사진 “역사는 우리를 저버렸지만, 그래도 상관없다.”라는 첫 문장이 인상적이다. 내 소설들의 모든 첫 문장은 책 전체를 드러내는 ‘주제문’이다. 초고 단계에서 마음에 드는 첫 문장을 쓴 경우는 거의 없다. 그래서 첫 문장을 위해서 책을 수없이 고쳐 쓴다. 몇 번의 퇴고를 거치면서 조금씩 첫 문장이 두각을 드러낸다. 수많은 시간을 고군분투한 후에야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가 명확해지고 내가 가진 질문에 대한 답이 떠오른다. 『파친코』의 첫 문장도 그렇게 탄생했다. 재일조선인의 삶을 오롯이 전하기 위해 어떠한 노력을 했나. ‘자이니치’라고 불리는 재일조선인의 역사와 사회·법·인류학에 대해 최대한 많이 배우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문헌 연구만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이후 일본계 미국인 남편과 함께 4년간 일본에 머물며 수많은 재일조선인을 직접 인터뷰했다. 기자처럼 기록하고, 학자처럼 논문을 쓰는 작업 형식을 취했다. 재일조선인만의 역사를 존중하고 싶었기 때문에 소설을 쓰려면 더 많은 숙제를 해야 했다. 『파친코』를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나. 부족한 것을 바로잡고 싶었다. 한국이 어떻게 일본의 식민지가 됐는지를, 재일조선인을 전 세계가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재일조선인들은 지금도 모욕당하고 있고, 지저분하며 부도덕하다는 비난을 받는다.  이런 편견을 옹호할 수는 없었다. 억압받고 어려움이 있으면 우리는 반항할 수 있다. 불평등 앞에서 저항할 수 있고, 낙심해도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걸 알았으면 좋겠다. 세상엔 불공평한 게 너무 많지만 계속 나아가고 전진해야 한다. 집필 중인 다음 소설도 기대된다. 한국인들에게 교육이 어떤 의미인지를 다룬 소설을 집필 중이다. 전 세계에 있는 수십 개의 학원을 방문하고 많은 사람을 인터뷰했다. 교육은 사회적 지위, 부와 떼어놓을 수 없는데 교육이 사람들을 억압할 수 있는 요인이 될 수도 있다. 소설 제목 역시 교육기관 ‘학원’을 뜻하는 영어 단어 ‘Academy’가 아닌 ‘Hagwon’이다. 전 세계 사람들이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 일본 단어 ‘파친코’를 그대로 소설 제목으로 사용한 것과 마찬가지다. 한국인을 이해하려면 전 세계인들이 학원 개념을 알아야 해서 우리말 단어를 고집한 것이다. 찰스 디킨스를 읽을 때는 영국인의, 헤밍웨이를 읽을 때는 미국인의 마음을 경험한다. 우린 항상 책 속 주인공이 되곤 하지 않나. 전 세계 독자들이 ‘파친코’를 읽으며 한국인이 되어 봤으면 좋겠다. alt 2022년 출간된 『파친코』 개정판(인플루엔셜)   ]]> Thu, 02 Mar 2023 14:19:17 +0000 76 <![CDATA[기념관이 발굴한 독립운동가 국민의 일원으로서 발 벗고 나선 3·1운동 현장을 발굴하다]]> 기념관이 발굴한 독립운동가국민의 일원으로서 발 벗고 나선 3·1운동 현장을 발굴하다   글 독립기념관 독립운동가 자료발굴TF팀   독립기념관은 2018년부터 독립운동가를 발굴하여 국가보훈처에 유공자로 포상·추천하고 있다. 국가와 국민을 위해 희생한 분을 존중하고 기억하는 정부의 의지와 국민적 관심을 담은 것이다.  2023년 매월 독립기념관이 발굴한 독립운동가를 소개한다. 김두순(金斗淳)  황해도 서흥군 도면 송화리 2021년 대통령표창(2019년 포상추천) 유병관(劉秉寬)  황해도 서흥군 도면 송화리 2021년 대통령표창(2019년 포상추천) 김두성(金斗星)  황해도 서흥군 도면 송화리 2022년 애족장(2022년 포상추천) 김원보(金元甫) 황해도 서흥군 도면 송화리 2022년 대통령표창(2020년 포상추천) 민응식(閔應植)  황해도 서흥군 도면 송화리 2022년 대통령표창(2022년 포상추천) 원용팔(元用八)   황해도 서흥군 소사면 방곡리 2022년 대통령표창(2020년 포상추천) 전종철(全宗喆)   황해도 서흥군 도면 두무리 2022년 대통령표창(2020년 포상추천) 100여 년 전 송화리 주민들이 만세시위에 참가하기 위해 이 길을 따라 능리 장터로 갔으리라. alt 송화리(현 성매리)와 능리(현 문화리)를 연결하는 도로_조선향토대백과 제공 한국독립운동의 시작, 3·1운동의 도화선 3월 1일 오후 2시 서울 종로 태화관에서는 ‘민족대표’로 서명한 33인 가운데 29인이 참석하여 독립선언식을 가졌다. 같은 시각 탑골공원에 모인 학생들은 별도로 독립선언식을 열었다. 선언식을 마친 뒤 29인의 대표는 그 자리에서 바로 경찰에 연행되었으나, 학생들은 서울 시가지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했다. 민족대표로 서명한 이들은 모두 종교 지도자들로 독립선언식을 갖는 데 머물러 대중들을 시위현장에서 지도하는 데까지 나아가지는 못했다. 민족대표는 선언서를 발표하여 만세시위를 촉발함으로써 주어진 역할을 자임한 반면, 그들의 영향력은 3월 1일, 3·1운동의 도화선에 점화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선언서 발표로 만세시위의 대중화와 확산에 미친 영향은 3월 1일 이후에도 지속되었다. 민중들의 마음을 울린 독립선언서에 담긴 민족자결주의 3월 상순 독립선언서는 기독교·천도교 출신의 종교인·청년·학생이 중심이 되어 경기도·황해도·평안도·함경남도의 지방 도시로 퍼져나갔다. 3월 이후 독립선언서를 접한 민중들은 그 속에 담긴 자유·평등·인도를 내포한 민족자결주의를 받아들이기 시작하였다. 먼저 종교인·청년·학생의 활동을 통해 민중 자신들이 선언문에 담긴 이념을 이해하며 시위에 참여하였다. 독립선언서에 담긴 사상은 나라를 잃은 민중들이 가슴으로 이해하여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외치며 움직이기에 충분하였다. 3·1운동이 대중화단계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민족자결주의도 일반 대중사이에 그 수용의 폭을 확대하여 나갔던 것이다. 민중들이 독립선언서에 담긴 사상을 이해하였다는 실마리를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바로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을 통해서 그들이 만세시위에 어떠한 신념을 지니고 참여하였는지 알 수 있다. 황해도 민중들에게도 닿은 독립선언서의 이념 3·1운동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민족자결주의는 온 나라에 퍼졌다. 그 중 특히 황해도 지역 만세시위 참가자의 고등법원 판결문에는 민족자결주의를 수용한 만세시위 참가자들의 면모가 자세히 드러난다. 그들의 상고취지서를 살펴보면, 모두 만세시위에 참가한 것은 민족자결주의에 의거한 것이라 하며 시위의 정당함을 주장하고 있다. 1919년 3월 10일 황해 서흥군 도면 능리시장에서 만세시위를 외치다 체포된 송화리 주민의 판결문을 살펴보자. 판결문에 드러난 독립운동 참가자들의 직업은 농민, 서당·학교 교사 등 매우 다양하게 나타난다. 농민 민응식은 “파리평화회의에서는 어느 민족을 막론하고 민족자결로 독립을 승인한다는 취지 (중략) 또한 누군가로부터 독립선언서를 빌려 읽어 보았는데 독립의 기운이 조선에 이르렀다고 믿어 나도 조선 2천만 민족의 한 사람으로서 (중략) 만세를 불렀을 뿐”이라고 시위 참여 동기를 밝혔다. 서당 교사 전종철은 “파리회의에서 독립을 원하는 민족은 독립을 허락한다고 하여 (중략) 사람의 본분을 지킨 것에 불과하니 나는 죄가 없다”라고 주장하였다. alt 민응식의 상고취의 절치부심의 송화리 주민들, 다시 일어나다 그러나 송화리 주민들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3월 10일 김두순·전종철 등은 송화리 서당 앞마당에 부근 주민들을 모아서 만세시위의 취지를 설명하고 능리로 진출하였고, 소사면 방곡리의 서당 교사도 학생들을 격려하여 함께 능리 장터로 나왔다. 오후 4시경 능리 장터에 모인 주민들은 김원보·유병관 등을 따라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행진을 시작하였고 길가에 늘어선 주민들에게 독립선언서를 나눠주며 시위에 참가할 것을 권유하였다. 한편 민응식 등은 능리로 나가는 도중, 도면 면사무소 앞에 모인 또 다른 주민들과 함께 만세시위를 벌였다. 2백여 명에 달하는 시위대는 도면사무소 앞마당, 능리헌병주재소 등으로 옮겨 다니며 시위를 벌이다가 일본군 보병부대와 헌병의 무력 진압에 의해 해산되었다. 그날의 독립만세 소리와 태극기 휘날림은 2백여 명이 넘는 주민들이 함께 만들어나간 것이다. alt 고등법원 판결문_국가기록원 제공 독립운동 참가자 발굴의 중요 공적, 판결문 타 지역에서도 관헌자료·신문자료를 비추어 보아 민족자결주의에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으나, 황해도는 더욱 그들의 동기를 직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이 눈에 띌만하다. 황해도 서흥군의 시위현장에서 볼 수 있듯이 판결문은 만세시위에 참여한 일개인의 동기와 지역의 시위현황을 오늘날 가늠할 수 있게 한다. 판결문은 독립운동가의 인적정보, 행형, 시위현황을 알 수 있게 해주어 새로운 독립운동가를 발굴하는데 중요한 사료가 된다. 서흥군 관할 법원은 해주지방법원과 평양복심법원이므로 분단으로 인해 안타깝게도 1심과 2심의 판결문은 확인할 수 없으나 상고(上告)한 일부 참가자들의 고등법원 판결문이 위와 같이 남아있다. 천만다행으로 이 지역의 시위상황을 재구성하여 묻혀있던 3·1운동 참가자들을 발굴할 수 있었다. 이를 통해 독립운동가 자료발굴TF팀은 기존에 포상되지 못했던 열 분을 새롭게 발굴하였다. 그 결과 김두순·유병관은 2021년 대통령표창, 김두성은 2022년 애족장, 민응식·김원보·전종철·원용팔은 2022년 대통령표창에 서훈되었고 나머지 세 분은 공적심사를 기다리고 있다.   ]]> Thu, 02 Mar 2023 14:34:27 +0000 76 <![CDATA[사(史)적인 여행 전북 익산]]> 사(史)적인 여행3·1운동의 흔적과일제 침탈의 역사를 찾아서전북 익산   글·사진 박광일 (역사여행작가·여행이야기 대표)   익산을 걷다 보면 일제강점기 우리 민족이 어떠한 피해를 보았으며 또 무엇 때문에 일제에 저항했는지 짐작할 수 있게 된다. 무엇보다 당시 일본인이 운영했던 농장의 모습을 보게 되면, 그동안 관심을 덜 받았던 농촌에 남은 일제강점기 침탈의 흔적과 역사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alt 익산 미륵사지  일제강점기 교통의 중심지, 익산역 널리 알려진 것처럼 익산은 백제 때 무왕이 미륵사지와 왕궁리에 궁궐을 지으며 유명한 곳이 되었다. 그때는 ‘금마’로 불렀다. 백제 멸망 후 한적한 곳이 된 이곳은 고려 말에 고려 여인으로 원나라 황후가 된 기황후의 외가라 하여 ‘익주’로 높여 불렀으며 여기에서 익산이란 이름이 탄생했다. 이러한 익산에 다시 큰 변화를 일으킨 사건이 있었으니, 바로 1899년 군사 개항이다.군산이 개항되자 많은 일본인이 모여들었으며, 곧 군산과 가까운 익산으로 옮겨간 일본인이 생겨났다. 일본인이 모여든 익산은 일제강점기에 큰 변화를 보였으니, 여기에는 철도의 영향이 컸다. 1914년 호남선이 놓이며 ‘익산역’이 처음 등장했다. 대전에서 출발해 목포로 가는 철도인 호남선은 인근에 있는 전주 대신 익산을 지나갔고, 이후 익산에서 출발해 여수까지 가는 전라선이 1937년 완성되었다. 또한 천안에서 익산을 잇는 장항선, 익산에서 군산까지 놓인 호남선 지선으로 일제강점기 익산역은 교통의 중심지가 되었다. 일제강점기, 한국인보다 일본인이 많았던 익산 일제강점기에 전라도 일대의 철도가 익산을 중심으로 발달한 이유 중 하나가 일찍부터 이 지역에 일본인이 많이 살았으며, 특히 일본인 농장주가 많았던 것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1915년 기준으로 익산 인구를 보면 일본인이 2,053명으로 한국인 1,367명보다 많았다. 아무리 일제강점기라고 해도 일본인이 한국인보다 많은 지역은 극히 드물었다. 나아가 익산에 거주한 일본인들 가운데 상당수가 엄청난 규모의 농장을 가지고 있었으니, 일본인 농장주의 주장이 영향을 끼쳤다. 실제로 일본인 농장주 다수가 철도 유치를 위해 노력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처럼 익산은 일제강점기 내내 일본인의 영향력이 컸다는 점에서 일본풍 거리가 만들어졌으니 익산역 건너편에서 그 모습의 일부를 찾아볼 수 있다. 익산역 주소 & 문의 전북 익산시 익산대로 153  |  1544-7788 alt 익산근대역사관 건물 옛 건물이 들려주는 익산 이야기,익산근대역사관 익산역 건너에 ‘익산 근대역사거리’가 있다. 일제강점기에 이 거리는 ‘영정통’, 일본어로는 ‘사카에마치도리’였다. 번화한 일본 분위기의 거리였는데, 지금은 그 중심에 ‘익산근대역사관’이 있다. 이 건물은 옛 삼산의원 건물로, 굳이 찾으려고 하지 않아도 금방 눈에 띈다. 2층으로 된 이 건물은 창문이 커다란 아치 모양이며 하얀 장식과 붉은 벽돌이 인상적이다. 참고로 옛 삼산의원의 ‘삼산’은 이 병원의 원장이었던 김병수의 호다. 김병수는 군산의 3·1운동, 즉 1919년 3월 5일 군산 장날에 펼쳐진 만세운동을 일으키는 데 큰 역할을 한 인물이다. 군산의 영명학교 졸업생인 김병수는 당시 세브란스 의전 학생이었는데, 민족대표 중 한 명인 이갑성을 통해 3·1운동 소식을 군산에 전하고 독립선언서 95장을 영명학교 교사인 박연세에게 전달하였다. 이후 의사로 활동하던 시절, 익산에 병원을 낸 것이다. 익산근대역사관은 독립운동의 중심에 있던 인물이 활동하던 공간에서 일제강점기 익산 지역에서 일어난 일제의 수탈 역사를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또한 다른 지역의 역사관에서 쉽게 볼 수 없는 일제강점기 일본인 농장주에 관한 자료는 놀라움을 준다. 수십만 평에서 수백만 평에 이르는 농장의 규모는 쉽게 상상하기 어렵다. 익산근대역사관 주소 & 문의 & 이용안내 전북 익산시 중앙로 12-151  |  0507-1349-3545  |  평 일/주말 10시~18시  |  무료  * 월요일 휴관 alt 옛 익옥수리조합건물 일제 수탈 도구로 이용된 수리시설,익옥수리조합 익산근대역사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익옥수리조합’ 사무실도 살펴보자. 붉은 벽돌로 지은 2층 건물로 지금은 익산 지역의 문화유산과 관련된 업무를 보는 사무실로 사용되고 있다.‘수리조합’은 우리에게 비교적 낯선 내용이지만, 반드시 알아야 할 역사이다. 일제강점기 여러 수리조합의 조합원이 바로 일본인 농장주였다. 일본인들은 비교적 저렴한 한국의 토지를 사들여 대규모의 농장을 만들고자 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안정적인 농사를 짓기 위한 대규모 수리시설이 필요했다.당시 이 지역에서 가장 크게 펼쳐진 수리시설 관련 건축물은 ‘운암제’라는 댐이다. 또한 유명한 수리시설 ‘황등제’도 있다. 이들 수리시설은 규모가 크다는 점에서 조선총독부나 혹은 관공서가 지었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수리조합이 주도해서 지은 것이다. 여러 수리조합 가운데 하나인 익옥수리조합에서 쓰던 건물이 남아 있는 것이다. 1920년에 생긴 익옥수리조합을 주도한 인물은 일본인 후지이 간타로다. 이 사람은 일명 ‘수리왕’으로 알려지기도 했는데 앞에서 살펴본 황등제를 비롯해 대아저수지 등 여러 관개시설 공사를 주도했다. 참고로 익옥수리조합의 일본인농장주들이 소유한 토지를 합치면 모두 3천 만 평에 이르렀다. 수리시설은 과연 한국인 농민에게 도움이 됐을까? 수리조합에 소속된 농장에서 농사를 짓는 한국인 농민들은 수리시설에 들어간 비용을 세금처럼 내야 했다. 그러므로 수리조합의 이익은 농장주에게 돌아갔지만 피해나 비용 부담은 한국인 농민에게 돌아갔다. 더 나아가 수리조합 수리시설을 만드는 과정에서 강이나 하천을 막아서 쓰다 보니 원래 있던 강에서 물을 대서 쓰던 다른 한국 농민에게 피해를 주기도 했다. 익옥수리조합 주소 전북 익산시 평동로1길 28-4 alt 3·1독립운동 4·4만세 기념공원(좌), 오하시 농장의 사무실 건물(우) 익산 3·1운동의 흔적, 4·4만세 기념공원 자, 이제 익산의 3·1운동의 흔적을 살펴보자. 이곳을 가기 위해서는 익산의 한복상점이 있는 거리를 지나야 한다. 이 거리를 지나면 ‘솜리 근대역사문화공간’에 도착한다. 이곳의 중심에는 ‘4·4만세 기념공원’이 있다.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익산의 가장 큰 만세운동은 1919년 4월 4일 일어났다. 그전에도 천도교와 기독교인이 중심이 되어 익산 곳곳에서 만세운동이 있었지만, 남부시장 장날이었던 4월 4일에 가장 큰 규모의 만세운동이 펼쳐졌다. 문용기의 지휘로 시작된 이날의 만세운동은 남전교회·도남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300여 명이 참여했다. 시간이 지나며 시위대 규모는 점점 커졌는데, 거의 1천여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런데 만세운동을 하던 시위대를 무력으로 진압하는 사람 중에는 일본 헌병이나 소방관뿐 아니라 일본인 농장의 관리인도 포함되어 있었다. 심지어 이들은 갈고리까지 동원하며 시위에 참여한 사람들을 잔인하게 공격했다. 결국 이 과정에서 문용기를 포함한 6명이 순국하였고, 20여 명이 크게 다쳤다. 이때 문용기는 부상을 입고 목숨을 잃는 순간에도 “시민 여러분, 나는 죽어서도 우리 대한의 독립과 신정부의 건설을 위해 온몸을 바쳐 기도하겠소. 여러분을 대한민국의 신국민 되도록 죽어서도 이 땅을 지키겠소.”라고 호소했다. 지금 4·4만세 기념공원에는 문용기의 동상과 뜨거운 마음을 기리는 순국열사비가 세워져 있다.  일제 수탈의 상징인 일본인 오하시의 농장 4·4만세 기념공원 앞에 번듯한 일본식 건물이 있는데, 이는 일제강점기 때 ‘오하시’라는 일본인의 사택이었다. 또한 기념공원 뒤에도 그가 사무실로 사용한 건물이 있다. 오하시는 익산에서 유명한 농장주였다. 그래서 “익산의 오하시인가, 오하시의 익산인가.”라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익산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은 다른 지역과 달리 농장이 시위대의 목표였다. 그만큼 농장은 이 지역 사람들에게 원한이 깊었던 곳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오하시 농장은 단순한 회사가 아닌 수탈의 상징이며 식민지 권력을 대표하는 기관이었다. 4·4만세 기념공원 주소 & 문의 전북 익산시 주현동 105-7  |  02-3672-5945   ]]> Thu, 02 Mar 2023 14:53:30 +0000 76 <![CDATA[이벤트 공지 행운의 주인공이 되어보세요!]]> 이벤트 공지행운의 주인공이 되어보세요!   alt   ]]> Thu, 02 Mar 2023 15:39:23 +0000 76 <![CDATA[이달의 기념관 3·1정신을 되새기며 제3관 ‘겨레의함성’]]> 이달의 기념관3·1정신을 되새기며제3관 ‘겨레의함성’   글 편집실사진 이소연   독립기념관 제3관 ‘겨레의함성’은 3·1운동과 대중투쟁에 참여했던 민중의 모습을 통해 우리 모두가 역사의 주인공임을 확인할 수 있는 전시관이다.한마음 한뜻이 되어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던 역사적 순간으로 들어가 보자. 총 4부로 구성된 전시관 제3관 ‘겨레의함성’은 △항일 독립운동을 위해 힘을 모으다 △우리 겨레 최대의 독립운동을 일으키다 △다양한 독립운동의 주체로 우뚝 서다 △민중, 독립을 꿈꾸다 등 총 4부로 구성된다. 1부 ‘항일 독립운동을 위해 힘을 모으다’에서는 1910년 8월 29일 국권피탈 이후,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의 새로운 활로를 찾기 위한 노력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가 마련되어 있다. 2부 ‘우리 겨레 최대의 독립운동을 일으키다’에서는  3·1운동의 진행 과정을 살펴보며, <파리위원부 소식지>, <2·8독립선언서>, <3·1독립선언서(보성사판)> 등 중요 역사 자료를 만나볼 수 있다. alt   시대별 특징을 살린 입체적 전시물 3부 ‘다양한 독립운동의 주체로 우뚝 서다’에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과정과 함께 1920년대 이후 노동운동·농민운동·여성운동 등의 전개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다양한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끝으로 4부 ‘민중, 독립을 꿈꾸다’에서는 독립운동에 참여했던 민중의 목소리를 들어보고 우리의 목소리를 담아볼 수 있는 체험공간이 마련되어있다. 한편 제3관을 관람하는 내내  ‘대한독립만세’의 외침을 들을 수 있는데, 이 음향은 3·1운동 100주년 기념 <국민과 함께하는 ‘대한독립만세’ 100명의 국민참여단>을 모집하여 100명의 시민 목소리로 녹음된 것이다.  alt   놓치지 말아야 할 관람 포인트 1 독립정신이 담겨있는 3·1독립선언서1부에서 2부로 가는 왼편 한 공간에 3·1정신이 오롯이 담겨있는 3·1독립선언서가 전시되어있다. 이는 1919년 3월 1일 서울 태화관에서 조선민족대표 33인의 명의로 발표한 독립선언서이다. 천도교 인쇄소인 보성사에서 인쇄된 것으로 본문, 공약 3장, 조선민족대표 33인 명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alt   놓치지 말아야 할 관람 포인트 2 목소리가 빛으로 변하는 체험형 전시4부에서 남녀노소 불구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던 여러 민중의 모습을 담긴 동상을 만나 볼 수 있다. 이 동상들 사이에 스피커가 놓여있는데, 스피커 버튼을 누르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면 그 목소리가 빛으로 변해 공간을 색으로 물들이는 모습을 체험할 수 있다. alt   ]]> Thu, 02 Mar 2023 15:13:09 +0000 76 <![CDATA[이달의 관람객 제3관 ‘겨레의함성’ 관람객 인터뷰]]> 이달의 관람객제3관 ‘겨레의함성’ 관람객 인터뷰   글 편집실사진 이소연   다가온 삼일절을 맞아 제3관 ‘겨레의함성’에는 많은 관람객의 발걸음이 이어졌다. 친구 또는 가족과 함께, 자유와 평화라는 3·1정신을 되새기던 관람객들을 만나 본다.  alt   강건우·강은우·김다인 님 (13세·9세·8세, 서울) “우리 역사에 관심이 많은 저를 위해 엄마아빠가 독립기념관에 데리고 와주셨어요. 기대했던 것보다 전시관이 크고 넓어서 놀랬고 신기한 전시품들이 많아서 시간 가는 줄 몰랐답니다. 그리고 동생들과 사진도 남기고 독립기념관 월간지에도 나올 수 있어서 기뻐요. 전시관을 둘러보며 이름이 잘 알려지지 않은 독립운동가들이 많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는데, 그분들이 있었기에 지금 우리가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alt   황선아·브라이언 님 (36세·38세, 천안) “미국인 남편에게 우리 역사를 공유하기 위해 독립기념관을 찾았어요. 일제가 우리의 국권을 강탈하고, 우리 민족을 탄압했다는 사실을 몰랐던 남편은 전시를 둘러보는 내내 눈이 동그래졌어요. 또한 일제에 맞서 독립운동을 벌이며 나라를 되찾기 위해 노력했던 우리 민족의 모습에 감명받았다고 합니다. 저 역시 많은 분의 눈물과 노력으로 되찾은 우리나라를 더욱 사랑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오늘을 계기로 남편과 우리나라에 대해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alt   박상복 님 (46세, 서울) “아이에게 우리 역사와 3·1운동에 대해 들려주고자 방문했습니다. 올해 4학년이 된 아이가 오롯이 이해하기에는 다소 어려운 자료들이 많았지만, 우리 선조들이 어떤 마음으로 나라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희생했는지 조금이나마 전달된 것 같아 보람됩니다. 제3전시관을 둘러보며 아이에게 “저 시대에 태어났다면 독립운동을 할 수 있었을까?”라고 조심스레 물어봤는데, 잠시도 망설이지 않고 “난 했을 거야!”라고 자신 있게 답하더라고요. 때 묻지 않은 아이의 모습에 저를 되돌아보기도 했습니다.”         alt   박민선 님 (26세, 서울) “천안에 사는 친구의 추천으로 독립기념관을 처음 방문하였는데, 생각보다 큰 규모에 놀랐습니다. 게다가 트렌드에 맞는 체험형 전시들이 많아서 자칫 지루할 수 있는 내용들을 흥미롭게 관람할 수 있었어요. 특히 다가오는 삼일절을 맞아 3·1운동의 시작과 전개 과정, 역사적 의미 등을 다시금 자세히 살펴보는 좋은 기회가 되었습니다. 전시자료 중 감옥에 갇힌 사람들의 사진들과 유품 등을 보며 마음이 뭉클하기도 했는데요. 유익한 시간을 선사해준 친구에게 새삼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어요.”   ]]> Thu, 02 Mar 2023 15:17:49 +0000 76 <![CDATA[#월간독립기념관 지난 호 독자 후기 이벤트 당첨자 발표]]> #월간독립기념관지난 호 독자 후기 이벤트 당첨자 발표   ※ 당첨자 5명에게 모바일 커피쿠폰(아메리카노)을 전달할 예정입니다. 참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alt   ]]> Thu, 02 Mar 2023 15:35:22 +0000 76 <![CDATA[기념관 소식 독립기념관 관람 & 국군병사 휴가 보상 프로그램 안내]]> 기념관 소식독립기념관 관람 &국군병사 휴가 보상 프로그램 안내   alt   ]]> Thu, 02 Mar 2023 15:37:43 +0000 76 <![CDATA[어제의 오늘 잊지 말아야 할 4월의 역사]]> 어제의 오늘잊지 말아야 할 4월의 역사'형평사 창립'   정리 편집실           alt   사회적 편견과 차별 폐지를 위해 백정들과 지식인들이 모여 형평사를 창립한 날은 1923년 4월 25일입니다.   ]]> Thu, 30 Mar 2023 15:50:38 +0000 77 <![CDATA[들여다보기 형평운동, 출발 100년을 맞이하여]]> 들여다보기형평운동, 출발 100년을 맞이하여   글 조미은 (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역사연구소 책임연구원)   조선시대 백정은 가축을 도살하거나 가죽 따위를 만들어 파는 천민 계층이었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신분 제도가 철폐되며 백정이라는 신분은 제도상에서 더는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사회적 차별은 여전히 존재했다. 이는 일제강점기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1923년 4월, 드디어 백정들이 형평사를 창립하여 ‘형평’을 외치기 시작했다. 바로 형평운동의 출발이었다. alt 형평사 제6회 정기대회(1928년) 포스터 100년 전 4월, 옛 백정들은 왜 형평사를 조직해야 했나 1894년 갑오개혁으로 조선에서 신분 제도가 철폐됨에 따라 백정이라는 신분도 제도상으로는 더는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1896년 <호구조사규칙>이 반포되면서 ‘옛 백정(이하 백정)’들도 조선인 일반인(이하 일반인)과 같이 호적에 이름이 실리게 되었다. 그러나 백정과 승려에 대해서는 일반인과 다른 별도의 호적이 만들어졌다. 심지어 백정은 호적의 직업란에 ‘도한(屠漢/屠汗)’ 또는 ‘농업(백정)’이라고 기록되어 그들의 옛 신분이 그대로 드러났다. ‘도한’은 백정에 관한 다른 호칭 중 하나이며, ‘농업(백정)’은 농업에 종사하는 백정을 말한다. 일제강점기에도 호적에 붉은 글자로 ‘도한(屠漢)’이라고 표시하였으며, 보통학교 입학원서에도 그들의 신분을 써넣게 하였다. 이처럼 백정에 대한 신분 차별은 갑오개혁 이후에도 관공서에서조차 계속되었으며, 일제강점기에도 마찬가지였다. 일반인들 또한 일상생활에서 호칭을 비롯하여 백정을 차별하던 관습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alt <울산군 도한(屠汗) 무술(戊戌) 호적표>(좌)와 내용 중 ‘직업 도한(屠汗)’ 부분(우)_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alt 경상남도 고성 백정 가옥과 가죽을 다듬는 작업 모습(1914)_국립중앙도서관 소장(좌),「형평사 발기회」, 『동아일보』(1923.3.28.)(우) 백정들이 겪는 차별 문제는 경제활동에서도 발생하였다. 소·돼지·닭 등으로 생산하는 다양한 축산 식품, 구두·가방 등 가죽으로 만드는 온갖 장신구들은 모두 오늘날 우리나라에서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선호도가 매우 높은 식품 또는 장신구에 해당한다. 경제적으로도 그만큼 비싼 가격의 식료품이며 몸치장 용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것들은 수백 년 동안 백정들만이 하던 일, 즉 ‘도축업과 관련(이하 도축 관련업)’이 있다. 일반인들은 백정의 신분을 천하게 여겼을 뿐 아니라 그들의 직업인 도축 관련업도 천하게 여기고 꺼렸었다. 그 때문에 도축 관련업은 백정들만의 '세전업(世傳業)', 즉 '대를 이은 전문적인 직업'이었다. 그들은 소나 돼지 등을 도축하고 해체하였으며, 고기를 판매하거나 가죽 제품을 만들고 파는 일 등 도축에서 판매까지 모든 과정의 일을 하였다.1876년 개항 이후 외국으로부터 근대적 또는 자본주의적 시장경제의 영향을 받게 되면서, 일반인들도 도축 관련업이 지닌 경제적 가치를 인식하고 그 일에 참여하게 된다. 또한 조선에 사는 재조선 일본인(이하 일본인)과 거류민단·학교조합 등 일본인 단체도 도축장을 경영하는 등 도축 관련업에 종사하였다. 심지어 일반인과 일본인이 연합하여 수육판매조합을 조직하는 등 백정들의 경제활동과 경쟁하거나 그들을 위협하였다. 백정들이 부당하게 겪는 경제적 가해 또는 침해 등에 대하여 문제를 제기할 때면, 일반인들은 “감히 천한 백정들이 대든다.”라고 하며 신분적 모욕을 주며 반박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역사적이고 시대적인 변화 속에서 사람들이 편의에 따라 취했던 이기적이고 이중적인 태도를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일반인들뿐만 아니라 일본인들까지 도축 관련업에 대해서는 경제적 가치를 인식하고 종사하려고 하면서도, 백정에 대해서는 여전히 차별하며 천하게 여겼다. 일제강점기에 백정들이 당한 차별이나 모욕은 사실상 그 이전보다 훨씬 심해졌다. 조선인뿐만 아니라 식민자인 일제 또는 일본인까지 가세함으로써 ‘신분적 차별’과 ‘경제적 침탈’이라는 중첩된 피해를 겪어야 했다. 그러던 중 학교 입학 거절 등 자녀들의 교육 문제가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어, 1923년 4월 인권 평등과 회복을 부르짖으며 형평사를 조직하기에 이르렀다. 자녀 교육 문제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류의 가장 주요한 과제이다. 백정들도 자녀들에 대한 교육적 차별 문제는 절대 참을 수 없는 것이었다. 다음은 1923년 경상남도 진주에서 형평사를 창립할 때 발기인 일동이 발표한 <형평사 주지(衡平社 主旨)> 내용이다. 공평은 사회의 근본이오, 애정은 인류의 본량(本良)이라.  그러므로 아등(我等)은 계급을 타파하며 모욕적 칭호를 폐지하며 교육을 장려하여 우리도 참사람 되기를 기(期)함이 본사의 주지니라.  금(今) 아(我) 우리 조선의 백정은 여하(如何)한 지위와 여하한 압박에 처(處)하였는가?  과거 회상하면 종일 통곡의 혈루(血淚)를 금할 길 없어 이에 지위와 조건 문제 등을 제기할 여가도 없이 목전의 압박을 절규함이 우리의 실정이라,  이 문제를 선결(先決)함이 우리의 급무로 인정할 것은 적확(的確)한지라.  비(卑)하며, 빈(貧)하며, 열(劣)하며, 약(弱)하며, 천(賤)하며, 굴(屈)하는 자 누구인가? 희(噫)라! 우리 백정이 아닌가?  그런데 여차한 비극에 대하여 사회의 태도는 여하한가? 소위 지식계급에서 압박과 멸시만 하였도다. 이 사회에서 백정의 연혁을 아는가? 모르는가?  결코 천대받을 우리가 아닌가 하노라. 직업에 차별이 있다 하면 금수의 목숨을 뺏는 자가 우리뿐이 아닌가 하노라.  본사(本社)는 시대의 요구보다 사회의 실정에 응하여 창립되었을 뿐 아니라 우리도 조선 민족 이천만의 분자(分子)이며  갑오년 유월부터 칙령으로 백정의 칭호를 없이하고 평민된 우리이라.  애정으로써 상호부조하여 생활의 안정을 도모하며 공동의 존영(尊榮)을 기하고자 자(玆)에 사십만이 단결하여 본사의 목적된 바 그 주지를 선명히 표방하고자 하노라. alt 1925년 형평사 기념일 행사 관련 기사, 「최대 원한이 차별」, 『동아일보』 (1925.4.26.)(우) 형평운동은 ‘백정’들만 참여했는가 형평사에서 규정한 형평사원의 자격은 “조선인은 하인(何人)을 불문(不問)한다.”였다. 형평운동의 목적인 ‘계급 타파, 모욕적 칭호 폐지, 교육 장려, 상호 친목’ 등에 뜻을 같이하는 조선인이면 누구든지 함께할 수 있었다. 형평사 창립 준비 때부터 백정들뿐만 아니라 백정 출신이 아닌 지역의 사회운동가 또는 지식인들도 형평운동을 사회개혁 운동 중의 하나로 중요하게 인식하고 적극 참여·협조했다. 1923년 4월25일 발기총회부터는 형평사의 공식적인 간부로 활동하기도 했다.  강상호·신현수·천석구 등은 백정 마을 사람들이 모욕적인 삶을 한탄하며 "우리 아이들은 ‘백정’으로 천대받게 할 수 없다.”라고 애절하게 호소하는 것을 들었다. 그리하여 차별 문제를 타파하기 위해 형평사를 창립하는 데 백정들과 함께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강상호와 이동구는 독립유공자이다. 강상호는 진주의 3·1운동을 주도하여 징역을 살았으며, 이동구는 1926년 만주 지린(吉林)에서 고려혁명당을 결성하고 독립운동을 벌이다가 일본 경찰에 검거되어 4년 7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이처럼 다양한 분야의 사회운동가들이 형평운동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적극적으로 협조했다.  최근까지 진주에서 남성당한약방을 운영하던 김장하는 형평운동기념사업회 초대 이사장을 역임하는 등 형평운동의 정신을 기리고 확산하는 데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사회운동가들이 형평운동에 참여하면서 협력·지원했던 정신을 오늘날에도 잘 계승하고 있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2023년 1월 형평운동 100주년을 맞아 그를 인터뷰한 『한겨레신문』에서는 “되짚어보면 지난 세월 형평운동은 한약업사 김장하에게로 이어지고 있었다. 김장하는 ‘새로운 차별’에 맞서 수많은 사람을 키워냈고 골고루 건강한 지역사회 건설을 위해 구석구석 씨앗을 심고 물을 길어왔다. 없는 이에게 기회를 줬고 소외된 곳과 아낌없이 연대했다. ‘김장하식’ 차별 철폐였고 권력에 대한 저항이었다.”라고 보도하였다. 사회운동가 중에서 신문사나 잡지사 등 지역과 중앙의 언론계에 있으면서 형평운동에 참여한 활동도 매우 중요하였다. 진주의 강상호·신현수, 마산의 여해(呂海), 예산의 김성준(金成俊), 이리(현 익산)의 조정희(趙正熙), 천안 입장의 박호군(朴好君), 정읍의 최중진(崔重珍), 천안의 김현덕(金顯悳), 홍성의 이한용(李漢容) 등이 그에 해당한다. 이들은 형평사 관련 내용을 신문이나 잡지 등 언론을 통해 보도·게재함으로써 형평운동을 전국적으로 빨리 알리고 확산하는 데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alt   형평사는 어떤 활동을 했는가  첫째, 차별철폐 활동이다. 옛 백정들 또는 형평사원들은 관공서뿐만 아니라 경제·교육·사회 등 삶의 모든 분야에서 일어난 차별사건, 반형평운동 등에 저항하며, 인권 회복·인권 평등을 위한 반차별운동을 펼쳤다. 둘째, 경제 활동이다. 그들의 오랜 종사업에 관하여 일반 조선인과 일제 또는 재조선 일본인으로부터 경영권을 지키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또한 도수장 및 피혁 건조장 운영, 형평사원 생산품 공동판매, 피혁회사 등 각종 회사설립, 산업별 조합조직, 대외무역 참여 등과 같이 그들의 오랜 전통적 사업을 근대적 사업으로 발전시키려고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셋째, 교육 활동이다. 교육 대상은 아이들·청년·여성 등 다양했으며, 야학·강습소·복습회 등을 운영하거나 순회 강연·사원 훈련 등을 실시하였다. 특히 형평사원 자녀들에게는 자체 교육기관을 중심으로 한 교육 실시, 학비 보조, 외국 유학 등 최대한의 교육 기회를 주고자 하였다. 형평사원들에게는 문맹 퇴치를 비롯한 각종 교양교육을 실시하였다. 또한 형평사원이 아닌 가난한 일반인 자녀들에 대한 교육에도 적극 관심을 두고 활동하였다.넷째, 형평사원 복지·후원 활동이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원들을 돕거나 형평운동 과정에서 경제적 신체적 피해를 보아 생활이 곤란한 사원 가족을 후원하는 것 등을 들 수 있다. 마지막으로 다른 사회 운동이나 단체와 연대한 사회적 활동이다. 일제강점기 조선이 처했던 민족적·사회적·시대적인 다양한 문제 또는 과제와 관련하여 노동·농민·사상·소년·여성·종교·청년·학생운동 등 많은 분야의 사회운동이나 단체들과 교섭·연대하며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기회주의 및 파벌주의 등 사회의 부정적인 면에 대한 배척 운동, 재만 동포구제(구호) 활동 등 해외 동포 관련 활동, 금주운동, 각종 사상운동, 그리고 일본 수평사(水平社)와 교섭 등이 있다. 독립운동과 형평운동과의 관계 형평운동이 목표했던 ‘신분 또는 차별로부터의 해방’, ‘참사람이 되는 것’ 등이 지닌 정신적 사상적 성격은 일제강점기 조선인의 독립운동과도 밀접하게 관련되었다. 당시 조선 또는 조선인의 목표가 ‘일제에 의한 피지배라는 상황으로부터 독립하는 것’, 즉 ‘일제로부터의 해방운동’이었기 때문이다. 형평운동과 독립운동은 ‘누구 또는 무엇으로부터 해방하느냐’하는 그 대상에서 차별성이 있을 뿐이었다. 독립운동의 대상은 일제와 일본인이었으며 형평운동은 그에 더하여 백정을 차별하던 조선인 일반인이었다. 형평운동 초기부터 신문 등에서는 형평운동이 지닌 해방운동의 성격이 민족적 해방운동과 관련이 있다거나 연장선에 있다는 것 등을 보도하였다. 다음은 그와 관련한 『동아일보』기사 또는 사설 사례들이다. 1. ··· 형평사 운동이 단순한 그 계급에만 그 효력이 정한(定限)될 것이 아니라. 기력이 쇠퇴(衰退)해가는 조선인 전부의 해방운동에 일대(一大) 경종···  2. ··· 시대적 요구에 응하여 형평사 운동의 발전을 보고 해방운동의 발전으로 그 가치를 시인하고 ···  3. ··· 소작인의 해방, 부인의 해방과 같이 백정의 해방도 민족의 해방운동에 한가지 길이다. 4. ···요(要)컨대 문제는 대국(大局)으로 보아서, 조선인 전체가 형평사원과 같은 운명을 가진 것을 자각치 아니하면 아니 될 것이다. 그러므로 형평운동은 어느 의미로 보아서 조선인해방운동의 전위(前衛)가 될 것이다. 형평운동을 조선 민족해방운동의 상징적인 모델 중 하나로 여기고, 그러한 인식을 조선 사회에 확산시키려고 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네 번째 사설은 일제에 압수되었다. 형평운동과 민족해방운동의 상징적 관계를 매우 간결하고도 분명하게 서술하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형평사 일부 지도자들 가운데서도 고려혁명당이나 신간회 등 독립운동 단체들과 긴밀한 관계를 갖고 있었다. 고려혁명당은 1926년 만주에서 조직된 독립운동정당이며, 신간회는 1927년 민족주의 좌파와 사회주의자들이 연합하여 창립한 민족협동전선으로 민족해방운동을 전개하였다. 일제는 1932년 말부터 전국에서 100여 명의 형평 운동자들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검거하였다. 이 사건은 1933년 형평청년전위동맹사건으로 보도되었다. 일제는 형평 청년들이 형평운동의 해소를 부르짖고 적화운동을 위해 비밀결사를 조직했다고 하였다. 피 검거자 중 서광훈 등 13명은 치안유지법으로 구속되었다. 형평청년전위동맹이라는 단체가 실제로 존재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형평사원 중 주요 인물들이 장기간 검거·투옥됨으로써, 형평운동은 1931년 형평사의 해소 논쟁에 이어 커다란 타격을 받아 크게 위축되었다. 1935년 4월 제13회 전국대회에서 형평사 이름은 대동사(大同社)로 바뀌었다. 형평운동을 시작할 때의 인권해방이라는 목표도 퇴색하였다. 단지 백정 계급의 경제적 이익단체로 변하였으며, 일제의 파쇼적인 정책과 맞물려 그에 영합하고 융화하는 단체로 전락하고야 말았다. 오늘날까지도 ‘형평운동’은 계속되고… 1923년의 <형평사 주지>에는 ‘공평은 사회의 근본’, ‘계급을 타파’, ‘평민된 우리’라는 내용이 있다. 사회의 근본은 공평하며, 형평사의 목적은 백정에 대한 계급적 차별을 타파하여 다른 국민과 동등한 평민으로 살아가기 위한 것임을 밝힌 것이다. <대한민국헌법> 전문을 보면 ‘모든 사회적 폐습과 불의를 타파하며’, ‘모든 영역에 있어서 각인의 기회를 균등히 하고’, ‘국민 생활의 균등한 향상을 기하고’라고 되어 있다. 또한 2001년 출범한 국가인권위원회는 <국가인권위원회법> 제1조에서 설립 목적이 ‘모든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보호하고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실현’이라고 하였다. <형평사 주지>에서 밝혔던 공평, 계급 타파, ‘백정도 일반 평민과 같은 존재 즉 다른 평민과 동등함’ 등이 오늘날의 <대한민국헌법>과 <국가인권위원회법>에서도 각 ‘개인’의 균등, 사회적 폐습과 불의 타파,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 보호 등의 정신으로 강조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930년 <조선형평사 제8회 정기대회> 포스터에는 형평 즉 균형을 상징하는 저울을 팔로 치켜세워 들고 있는 그림이 있다. 현재 대법원을 상징하는 로고와 대법원 건물 출입문 위에 있는 정의의 여신상에서도 형평사 포스터와 비슷한 모습으로 저울을 들고 있다. 우리나라 최고 법원으로서 형평성 즉 형평 정신이 가장 중요함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음을 나타낸다. 이처럼 형평운동이 지닌 정신은 지금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가장 주요한 삶의 기본 바탕이 되고 있다. “도심에 내건 현수막, 일반은 ‘불법’ 정치인은 ‘합법’ 형평성 논란”,   “공정과 형평, 가치 중심으로 시정 운영”,   “유치원·어린이집 교육비 지원 형평성 논란” …. 최근 신문 기사의 제목이나 내용에서 ‘형평’이라는 단어를 포함하고 있는 사례들이다. 삶의 모든 분야에서 형평성이 깨지면 불만이나 불평 제기, 시위·분쟁·재판 등 다양한 형태로 형평을 유지하거나 회복하기 위한 활동, 즉 ‘형평운동’이 필연적으로 일어난다. 그러한 양상은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민주주의가 발달한 사회일수록 더 발생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회에서도 형평성의 균열이 너무 심할 때는 마찬가지로 전개된다. 한국 역사상 그와 같이 중요한 ‘형평’ 정신을 목적으로 조직까지 만들어 운동을 벌인 것은 형평사와 형평운동이 맨 처음이고 유일하다. 그것도 수백 년 동안 가장 천대받던, 가장 낮은 자들에 해당하였던 백정들에 의한 것이었다.  이처럼 매 순간 우리 사회는 사적으로나 공적으로 ‘공정과 형평’을 주장하고 형평을 중요시하면서도 형평이라는 단어에 운동을 합성한 ‘형평운동’이라고 하는 용어에는 매우 낯설어한다. ‘형평사’에 관해서는 더욱 그렇다. 일제강점기라는 민족적 국가적인 위기의 상황 속에서 게다가 가장 소외된 위치에서 차별까지 받고 살던 옛 백정들은 형평사를 조직하여 인권 평등을 주장하고 실천하기 위해 형평운동을 펼쳐나갔다. 그리고 백정 출신이 아닌 사회운동가들도 그에 공감하고 적극적으로 동참했다. 형평운동 출발 100주년을 맞아 그러한 선각자들께 커다란 존경의 마음을 전하며, 우리 역사의 훌륭한 본보기로 더 널리 알려지기를 희망한다. alt 형평사 제8회 정기대회 포스터(좌), 대법원 출입문 위에 있는 정의의 여신상(우)   ]]> Thu, 30 Mar 2023 16:13:02 +0000 77 <![CDATA[이달의 독립운동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외교활동을 책임진 청년들 이희경·나용균·황기환]]> 이달의 독립운동가대한민국 임시정부의외교활동을 책임진 청년들이희경·나용균·황기환 글 독립기념관 전시부   alt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외교활동 1919년 4월 11일 3·1운동의 결실로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독립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하며 국제적인 외교활동에 힘썼다. 국제회의에 대표를 파견하여 한국독립문제를 국제사회의 주요 사안으로 부각시키는가 하면, 각국 정부 및 주요 인사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노력했다. 이희경, 나용균, 황기환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외교부문에서 활약하며 한국에 대한 일제의 탄압과 한인들의 독립의지를 국제사회에 알렸다.  alt 하비로霞飛路 321호에 위치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 (1919)(좌), 『구주의 우리사업』 (1920)_국립중앙박물관 제공(우) 미국과 중국을 오가며 독립운동을 지원한 이희경 이희경은 1889년 평안남도 순천에서 태어났다. 1905년에 미국으로 건너가 의학을 전공하고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11년에는 대한인국민회 시카고지방회 총무로 활동하며 지방회의 자치제도 마련을 위해 노력했다. 1919년 4월 상하이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평안도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같은 해 대한적십자회 회장으로 추대되었고 1920년 스위스에서 개최된 세계적십자회 총회에 간도참변의 실상을 알리기도 했다. 1921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특별 전권대표로 모스크바에 파견되어 러시아 정부와 교류하고 자금지원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했다. 1923년 독일에 머물며 의학 공부에 매진하던 이희경은 이듬해 미국으로 건너가 어려운 처지의 한인 유학생을 위한 지원금 모금에 힘썼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68년 독립장을 추서했다. alt 대한적십자회 제1기 간호원 사진 (1919.8.)_대한적십자사회 제공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발전을 위해 활동한 나용균 나용균은 1895년 전라북도 정읍에서 태어났다. 일본 도쿄에서 유학 중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여 2·8독립선언서 발표를 지원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후에는 임시의정원 전라도 의원, 법제위원 등을 역임하며 임시정부 관제 및 헌법 개정을 위해 힘썼다. 1922년 1월에는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원동민족혁명단체대표회에 한국대표로 참가하여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는 외교활동을 전개했다. 또한 같은 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발전을 위해 국민대표회주비위원회가 결성되자 나용균은 위원으로 선출되어 독립운동의 조직적 통합을 논의하기 위한 국민대표회의 소집을 주장했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 애국장을 추서했다. alt 국민대표회주비위원회 선언(1922.5.10.) 한국의 독립의지를 알린 외교관, 황기환 황기환은 1886년 평안남도 순천에서 태어났고, 1904년 미국으로 건너가 영문 이름 Earl.K.WHANG으로 활동했다. 1905년에 공립협회 레드랜드 지회 부회장으로 활약하였고, 1917년 미국이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자 자원병으로 입대했다. 1919년 파리강화회의 당시 한국의 독립의지를 알리기 위해 조직된 파리위원부의 서기장으로 활동했고, 같은 해 10월 프랑스 인권옹호회에 참석해 한국독립 문제를 논의하였다. 1920년 9월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런던위원부 위원으로 임명되어 영국과 프랑스를 오가며 외교활동을 전개했다. 황기환은 영국 언론인 맥켄지(Frederick A. Mckenzie)와 함께 ‘대영제국 한국친우회’ 결정을 주도하여 한국 내 실정을 알리고 지지를 이끌어내는 성과를 올렸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 애국장을 추서했다. alt 파리위원부 사진(1919)(좌), 「일본으로부터의 해방을 위한 한국민의 청원서」 (1921.6.)(우) alt   ]]> Thu, 30 Mar 2023 17:12:25 +0000 77 <![CDATA[끝나지 않은 독립운동 ‘전통 시대 사적지 안내 자료’에 독립운동 내용을 포함해야 한다]]> 끝나지 않은 독립운동‘전통 시대 사적지 안내 자료’에 독립운동 내용을 포함해야 한다   글 이계형 (국민대학교 교양대학 교수)   독립운동사적지는 대개 3·1운동 시위지, 의병·의열 활동지, 단체나 행사 개최 건물 혹은 독립운동가 가옥 등이다. 그런 만큼 전통 시대 사적지에서 전개된 독립운동은 그리 많지 않다. 전체 1,457곳 가운데 표에서 보듯이 843곳에 불과하다. 그런데 이는 사찰, 서원, 향교 등으로 대개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었고, 많은 사람이 찾기에 그곳에서 어떻게 독립운동이 전개되었는지를 알리면  의미가 클 것이지만 그렇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인식에서 전통 시대 사적지에 설치된 안내판이나 백과사전에 독립운동 관련 내용이 포함되어 있는지를 살펴 문제점을 지적하고 개선 방안을 모색하고자 한다.    alt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가 발간한 <국내 항일독립운동사적지 조사보고서(서울)> 국내 독립운동사적지 조사의 목적과 현황  국내 독립운동사적지의 목적과 현황 조사를 주도한 것은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이하 연구소)이다. 연구소는 2007년부터 2010년까지 4개년 계획으로 사상 처음으로 국내 독립운동사적지를 일제 조사하였고, 이를 <국내 항일독립운동사적지 조사보고서>라는 이름으로 모두 11권(서울, 경기 남부, 인천·경기 북부, 충청남도, 대전·충남, 강원도, 전라북도, 광주·전남, 대구·경북·부산·울산·경남, 제주도)을 간행하였다.  국내 독립운동사적지가 광복 이후 60여 년의 세월이 흐르는 과정에서 급속히 진행된 산업화, 도시화로 인해 역사 자취가 멸실, 훼손되었거나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는 위기의식을 갖게 되었다. 이에 조사를 통해 독립운동사적지 실태를 정확히 파악하여 체계적으로 보존·관리·활용하고자 했다. 나아가 독립운동사적지를 각급 학교 학생들의 현장 교육이나 국민의 문화관광과 연계하여 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독립운동의 역사적 의미를 깨닫도록 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독립운동사적지 조사는 다음과 같은 원칙을 가지고 진행되었다. 첫째, 대상 시기는 1895년 민비 시해와 단발령을 계기로 일어난 의병운동을 시작으로 1945년 8월 광복 때까지였다. 둘째, 내용적 범위는 독립운동의 현장, 독립운동가 집 또는 집터뿐만 아니라 일제 식민지 통치기관 또는 이와 관련된 장소 등도 포함하였다. 그 결과 서울 201곳, 경기 남부 143곳, 인천·경기 북부 106곳, 충북 155곳, 대전·충남 157곳, 강원도 91곳, 전북 123곳, 광주·전남 168곳, 대구·경북 181곳, 부산·울산·경남 214곳, 제주도 40곳 등 모두 1,579곳이었다. 이후 추가 조사를 통해 사적지는 늘어났다. 이 가운데 전통 시대 사적지에서 독립운동이 일어난 곳은 모두 83곳이 확인되었다. 이를 도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나름대로 독립운동사적지와 관련한 내용이 안내판이나 백과사전에 실렸는지를 확인하여 이를 ‘O, X’로 표시하였다. 그중에 별도로 설치된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 혹은 경기도 항일독립운동 유적지 안내판은 ‘*’ 표시를 하였다. ‘△’ 표시는 관련 내용이 있는데 소략한 경우이다. 단, 틀린 부분도 있을 것이지만 글 의도를 전달하는 데 큰 문제가 없을 것으로 생각한다. alt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개선 방안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대부분 전통 시대 사적지는 의병과 관련한 사찰·서원·향교 등이 많다. 그런데 전체 83곳 중 32곳에만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고, 28곳이 백과사전에 관련 내용이 실려 있다. 간혹 백과사전에 실렸는데 안내판에 없거나 안내판에는 있지만, 백과사전에 있는 예도 있다. 이는 안내판을 제작하거나 백과사전을 집필할 때 독립운동에 대해 소홀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독립기념관이 지방의 전통 시대 사적지를 관리하는 지자체와 업무협약서를 체결하여 상호 정보를 교환할 필요가 있다. 백과사전류는 이를 담당하는 기관에 지속적인 수정, 보완 요청을 하여 독립운동 관련 내용을 추가하면 될 듯하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곳을 찾는 국민이 독립운동의 현장에서 그 의미를 새롭게 느낄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alt 경북 성주 백세각 전경과 ‘제1차 유림단 의거 회의지’에 세워진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 안내판_성주문화관광 제공   ]]> Thu, 30 Mar 2023 17:28:08 +0000 77 <![CDATA[어제와 오늘을 잇는 사람 일제 수탈의 상징, 복합문화공간으로 재탄생하다 함선재 헤레디움 관장]]> 어제와 오늘을 잇는 사람일제 수탈의 상징,복합문화공간으로 재탄생하다함선재 헤레디움 관장   글 편집실사진 헤레디움 제공 일제강점기 대표적인 경제 수탈 기관이었던 동양척식주식회사 대전지점 건물이 아픈역사를 뒤로하고, 건립 100년 만에 시민을 위한 복합문화공간으로 거듭났다. 지난 해 12월, 준공을 마친 헤레디움은 최근 아카이브 전시를 선보였다. 함선재 헤레디움 관장을 만나 건립과 전시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본다. alt 함선재 헤레디움 관장 아픈 역사를 가진 건축물이 복합문화공간으로 탈바꿈했다. 동양척식주식회사 대전지점은 일제의 침략과 식민지 수탈의 역사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건물이다. 이를 통해 미래 세대가 아픈 과거를 기억하고 더 나은 역사를 만들 수 있도록 살아있는 교육을 제공한다는 점이 복원의 주요 목적이었다. 건축사 측면에서도 전체적인 건축물의 형식이나 남아있는 외관을 통해 우리나라 근대 건축의 과도기적 모습과 발전 양상을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가치가 있다. 이처럼 동양척식주식회사 대전지점은 구도심에서 사라져가는 역사와 장소성, 그리고 시대성을 대표하는 건축물로써 그 보존과 활용에 큰 의의가 있다. alt 헤레디움(옛 동양척식주식회사 대전지점) 건물 전경 동양척식주식회사 대전지점 건물의 변천사가 궁금하다.  1922년 일제강점기, 대전 인동에 조선의 토지와 자원 수탈을 위해 동양척식주식회사 대전지점이 지어졌다. 이 건물은 광복 후 대전 체신청과 전신전화국 등으로 사용되었다. 이후에는 민간에 매각되어 상업시설로 쓰였다. 2004년 9월 4일 근대 건축물로서 가치를 인정받아 등록문화재 제98호로 지정되었지만, 여전히 상업시설로 이용되어 건물이 훼손된 부분이 많았다. 이후 CNCITY마음에너지재단에서 2019년부터 2년여간 보수 및 복원 작업을 하였고, 지난해 12월 역사적 가치와 상징적 의미를 되새긴 복합문화공간으로 재탄생하였다. 근대건축물의 활용에 관해 고민이 컸을 텐데…. 우리에게 가르침을 주는 역사라고 해서 늘 희망적인 것은 아니다. 나라를 빼앗기고, 이름조차 숨겨야 했던 아픈 시간도 기억해야 하는 소중한 역사이다. 이 아픈 역사를 증명하는 기록 중 하나가 바로 동양척식주식회사이다. 동양척식주식회사는 현재 대전·목포·부산의 세 지점만 남아있다. 그중 헤레디움으로 거듭난 대전지점이 새로운 세대가 미래를 설계하고 가치를 재창조하는 장이 되었으면 한다. 또한 창의적인 영감과 다양한 형태의 예술적 표현을 선보이는 복합문화공간으로 지역사회에 공헌하고자 한다. 변형보다는 복원에 집중했다고. 문화재를 훼손하지 않기 위해 원형의 규모와 모습을 최대한 그대로 복원하려고  노력했다. 건물 내부는 그대로 복원했고 외부 역시 파손된 부분 보수 외에 원형 그대로 살렸다. 약 2년간의 복원 및 리모델링 작업을 통해 최첨단 시설을 갖춘 쾌적한 환경이 조성됐으며, 연주회 등 아트홀로서도 널리 활용될 수 있게 되었다. 더불어 미술품 전시도 가능할 정도의 총 100여 평 규모로 구축해 개방감을 주었다.  alt 1층 전시 전경(좌), 2층 전시 전경(우) 아카이브 전시 <인동 100년: 역사가 되다>를 개최했다. 지난 3월 16일 아카이브 전시를 개최했다. <인동 100년: 역사가 되다>라는 주제로 열린 이번 전시는 동양척식주식회사 대전지점이 가진 역사성과 장소성을 기록하기 위해 역사 아카이브 형태로 기획되었다. 이번 전시에서는 약 200점이 넘는 사진 자료를 선보인다. 건물 보수, 복원 과정을 담은 사진작가의 기록도 백미다. 건물이 지닌 100년간의 이야기와 건축사적 가치 등도 엿볼 수 있다. 전시는 오는 6월 30일까지 열리며 오전 11시부터 오후 7시까지 무료 개관한다. 휴무일은 월요일과 화요일이다. 한편, 이번 전시기간 동안 성인과 어린이 대상 전시 연계 교육 프로그램, 클래식 음악 프로그램 등을 함께 선보인다. 모든 프로그램은 헤레디움 공식 홈페이지에서 예매할 수 있다.  전시를 개최한 ‘3월 16일’의 의미도 크다. 『대전 100년사』에서는 대전지역의 첫 3·1만세운동이 1919년 3월 16일에 일어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대전 인동시장에서 일어난 여러 번의 만세운동은 대전지역에서도 손꼽히는 대규모 운동이었다. 헤레디움의 첫 전시 개막일은 바로 인동시장 만세운동을 기념한 날짜이다. 헤레디움은 일제 수탈의 아픈 역사와 자주적인 독립운동을 기억함으로써 예술을 통한 인간성 회복과 평화 실천을 꾀하고자 한다. 만세운동을 기념하며 문을 연 이번 전시에서는 인동 만세운동의 역사뿐만 아니라, 동양척식주식회사 대전지점 건물이 지닌 100년간의 이야기와 건축사적 가치 그리고 복원의 과정을 함께 소개한다. 이번 전시를 통해 기대하는 바가 있다면? <인동 100년: 역사가 되다> 전시는 동양척식주식회사를 중심으로 행해진 일제 침탈의 역사뿐만 아니라 인동의 근대와 현재를 바라볼 기회가 될 것이다. 인동 일대는 대전의 초기 도시형성기부터 1932년 충남도청이 대전천 서쪽으로 이전하기 전까지 대전의 중심 지역이었다. 당시 인동이 조선인들이 모였던 상권이라면, 원동은 이주한 일본인들의 상권과 이를 보호하기 위한 공공기관이 설치되었던 지역이다. 동양척식주식회사 대전지점은 바로 이 경계선상에 설치된 것이다. 광복과 한국전쟁 이후에도 인동은 대전 상공업의 중심지였다. 1990년대까지 경제와 문화, 주거의 중심지였으나 현재는 주상복합 시설 등이 들어서면서 그 흔적이 일부만 남아있다. 우리는 역사를 통해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에서 왔는지, 어디에 속하는 지를 배운다. 그리고 과거의 기록에서 교훈을 얻고 미래를 위해 더 나은 결정을 내릴 수도 있다. 이번 전시를 통해 관람객들이 ‘물려받은 유산’이라는 헤레디움의 이름을 깊이 이해하길 바란다.  alt 기간2023.3.16.~6.30. 관람오전 11시~오후 7시 (월, 화 휴무) * 해설사 프로그램 매시 정각에 진행 관람료무료 주소대전시 동구 대전로 735문의070-8803-1922   ]]> Fri, 31 Mar 2023 09:57:31 +0000 77 <![CDATA[기념관이 발굴한 독립운동가 3·1운동의 경험으로 학생운동의 주도자로 성장한, 박하균]]> 기념관이 발굴한 독립운동가3·1운동의 경험으로 학생운동의 주도자로 성장한박하균   글 독립기념관 독립운동가 자료발굴TF팀 독립기념관은 2018년부터 독립운동가를 발굴하여 국가보훈처에 유공자로 포상 추천하고 있다.  국가와 국민을 위해 희생한 분을 존중하고 기억하는 정부의 의지와 국민적 관심을 담은 것이다.  2023년 매월 독립기념관이 발굴한 독립운동가를 소개한다. 박하균(朴河均) 본적 및 주소 : 함경남도 홍원군 보청면 신평리 23 생몰 : 1902. 10. 26. ~ 미상 이명 : 박하균(朴河鈞), 박하구(朴河鉤), 박하조(朴河釣) 포상추천 : 2019년 포상 : 2020년 광복절 계기 훈격 : 건국훈장 애족장운동 방면 : 3·1운동, 국내항일 alt 박하균의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1919)3·1운동으로 일제에 피체되었을 때의 사진 1919년 3월 함흥의 만세시위 물결, 거기에 그가 있었다 1919년 3월 3일 함경도 제일의 도시 함흥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의 기운은 심상치 않았다. 대도시인 만큼 만세시위는 농민과 학생·종교인 등 1,000여 명의 군중이 참가한 대규모 시위였고, 그 양상 또한 격렬했다. 기독교 전도사 조영신은 순사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계속 만세를 부르다가 입이 찢겨졌고, 흰 머리가 성성한 농민 이명봉은 집 옥상에 올라가 태극기를 흔들며 목이 터져라 만세를 외쳤다. 바로 그 현장에는 겨우 17세 소년, 박하균도 있었다.  박하균은 고향 홍원을 떠나 함흥으로 와서 기독교 계열 사립학교인 영생학교 1학년에 다니고 있던 학생이었다. 그는 고향 사람이자 학교 선배인 곽선죽의 권유로 동료 학생들과 함께 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 이날의 만세시위는 일본 경찰과 헌병대의 무력 진압으로 많은 부상자가 나왔고, 수백 명이 검거되면서 끝이 났다. 당시 박하균은 단순참가자로 분류되어 기소유예로 석방되었다. 그러나 교직원과 학생 대부분이 검거된 영생학교는 무기한 휴교에 들어갔고, 박하균은 홍원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위협적인 수단을 사용하더라도 우리의 목적을 중지시킬 수 없다” 고향에 돌아와서도 함흥에서 겪은 만세시위 경험은 박하균의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홍원에서도 만세시위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중심지에서 다소 먼 곳에 있던 고향 보청면은 상대적으로 평화로웠다. 그는 이 ‘평화로움’을 깨뜨리고자 결심하고 함흥에서 읽었던 독립선언서를 떠올리며 만세시위를 독려하는 글을 작성하고 장터 곳곳에 붙였다. 이어 4월 8일 보통학교 학생들과 함께 경찰관 주재소, 일본인이 경영하는 상점 앞으로 몰려가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박하균은 시위의 주모자로 체포되어 8월 11일 경성복심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았다. 그는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이듬해 4월 11일 출옥하였는데, 그의 상고 취의는 17세 소년의 발언이라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당당했다. “아무리 위협적 수단을 사용하더라도 우리의 목적을 중지시킬 수 없다. 고통을 받는 만큼 우리 민족은 고통을 이겨내고, 마침내 정의의 뜨거운 피가 솟구칠 것이다.  (중략) 자유, 평등, 인애(仁愛)를 무시한 일본제국정부여. 우리 민족에게 유죄 판결을 내리려면 먼저 자유와 평등사상을 유죄로 벌하라.  삼천리강산을 식민지로 만들려면 그 주인인 2천만 생령(生靈)을 한 사람도 남기지 말고 멸살하라.” 출옥 후 함흥 영생학교로 돌아온 박하균은 함흥기독청년회에 가입하는 한편, 여름방학을 이용하여 함경남도 각지를 순회하며 강연활동을 하였다. 그리고 한 단계 더 성장하기 위해 1925년 서울의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하였다.  조선학생과학연구회 활동과 6·10만세운동 3·1운동 이후 민족적 과제는 민족운동을 스스로 전개, 발전시키기 위한 힘을 만드는 것이었다. 특히 3·1운동 과정에서 전위적 역할을 담당한 학생계층은 교육, 계몽운동을 통해 민족의 역량을 높이는 한편, 스스로를 운동의 주체로 인식하고 다양한 학생단체를 조직하기 시작하였다. 대표적인 것이 1925년 설립된 조선학생과학연구회였다. 조선학생과학연구회 간부는 중앙고등보통학교와 연희전문학교 재학생이 중심이 되었는데, 박하균은 1926년 4월 제1회 정기총회에서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조선학생과학연구회는 학생도서관 설립 운동, 과학문제 강연회와 강좌 개최, 지방 하기대학과 농촌강좌 설치 운동을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당시 지성계를 풍미하던 사회주의 사상을 통해 민족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흐름을 중심으로 한 학생운동을 주도하고 있었다.  1926년 4월 26일 세검정으로 야유회를 가던 조선학생과학연구회는 순종의 승하 소식을 접하였다. 이들은 고종 인산일을 계기로 일어났던 3·1운동을 떠올리고, 순종의 인산일에 만세시위를 일으키고자 계획하였다. 5월 20일 서울지역 각 학교 학생대표들이 모여 거사 방법, 자금 조달 등에 대해 협의하였고, 박하균은 준비 책임자로 선출되었다. 거사는 조선공산당 학생부 소속이자, 조선학생과학연구회 주요 간부 이병립을 통해 조선공산당의 지침을 전달 받는 방식으로 구체화 되었다. 그러나 거사를 앞둔 6월 6일 조선공산당 지도부가 일제에 체포되면서 결국 학생들이 독자적으로 추진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박하균을 중심으로 한 학생들은 서대문 밖 소나무 숲에서 태극기와 ‘조선독립만세’라고 쓴 깃발을 제작하는 한편, 명함 인쇄기를 구하여 격문 수만 장을 인쇄하였다. 그리고 각 학교별로 시위 구역을 분담하고 태극기와 격문을 배부하는 등 모든 시위 준비를 마쳤다. 6월 10일 오전 8시 순종의 어가행렬이 창덕궁을 출발하여 관수동을 지날 무렵, 수표교 부근에서 박하균이 격문을 날리며 조선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인근에 모여 있던 연희전문학교 학생들이 호응하였고, 뒤이어 중앙고보, 기독교청년학관 학생들이 만세를 불렀다. 이날 서울 시내 8개소에서 대거 천여 명의 학생이 시위에 참가하였다. 이때의 만세시위를 우리는 6·10만세운동이라고 부르고 있다.  alt 박하균의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1927.4.2.)6·10만세운동으로 검거되었을 때의 사진 우리가 기억해야 할 학생운동의 주도자 박하균 만세시위에 참가한 사람 중에서 모두 53명이 검거되었다. 이 중에서 주도자 11명 중 10명은 1심 재판에서 집행유예로 석방되었다. 그러나 박하균은 유일하게 징역 1년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판결문에 따르면, 박하균을 제외한 피고들은 전과가 없고 대부분 학생이므로 형 집행을 유예한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는 그가 1919년 만세시위에 참여하여 당시 ‘보안법’ 위반 전과가 있기 때문이기도 하였겠으나 이번 거사에서 그가 그만큼 핵심적 역할을 했다는 증거이기도 할 것이다.  결국 박하균은 함흥형무소에서 1년의 옥고를 치르고 1927년 9월 20일에 출옥하였다. 출옥 후 고향으로 돌아와 홍원청년동맹, 홍원학우회 등 청년단체에서 활발하게 활동을 이어가던 박하균은 1932년 5월 서울 송현동에서 신흥서점을 운영하다가 다시 일제 경찰에 검거되었다. 죄명은 출판법 위반. 총독부에서 발매 금지 처분을 내린 서적을 판매하여 사회의 “안녕과 질서를 해쳤다.”라는 이유였다. 이로 인해 박하균은 금고 5월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세 번째 옥고를 치르고 1932년 10월 3일 출옥하였다. 1919년 함흥 만세시위 단순 참가자에서 그치지 않고, 지방 만세시위의 주도자로 활약하였으며, 다시 저항적 민족운동의 중심인 학생조직의 간부이자 1926년 6·10만세시위의 중심인물로 성장한 박하균. 1920년대 민족운동의 현장에는 항상 그가 있었다. alt 1926년 11월 2일 6·10만세사건 1심 공판 광경, 『동아일보』 (1926.11.3.)     ]]> Fri, 31 Mar 2023 10:06:43 +0000 77 <![CDATA[사(史)적인 여행 우리나라의 교류와 항쟁의 역사가 깃든 충남 예산]]> 사(史)적인 여행우리나라의 교류와 항쟁의 역사가 깃든 충남 예산   글·사진 박광일 (역사여행작가·여행이야기 대표) 부드러운 곡선의 산이 길게 이어지고 넓게 펼쳐진 들판을 적시는 강과 개천이 흐르는 땅, 충남 예산. 이곳은 삽교천이 지나고 예당호가 있으며 수덕사로 유명하다. 이러한 예산의 푸근한 모습과는 달리 이 땅에서 만나는 역사는 뜨겁다.  그 뜨거움의 원인은 이 지역 역사를 만들어낸 사람들의 욕망과 열정, 그리고 애국심이다. 그러한 역사의 현장으로 들어가 보자. alt 추사고택 추사 김정희의 옛집, 추사고택 처음 살펴볼 곳은 추사고택이다. 추사고택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추사 김정희의 옛집이다. 김정희는 ‘추사체’라는 글씨, <세한도>와 같은 그림, 금석학 등에 능했던 인물이다. 무엇보다 24살 젊은 나이에 청에 다녀온 이후 중국 학자들과 교류하면서 동아시아 지성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는 평가를 받는 인물이다. 추사고택의 사랑채와 안채는 원래 있던 것이고 문간채와 영당이라고 부르는 사당은 1970년대에 복원한 것인데, 양반 가옥 그리고 한옥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정갈한 한옥인 추사고택에서 눈에 띄는 것은 사랑채 앞에 있는 ‘석년’이란 글씨가 있는 돌기둥이다. 이 돌기둥은 그림자를 통해 시간을 알 수 있는 해시계의 역할을 했다. 추사고택 옆에는 자그마한 무덤이 하나 있으니 바로 김정희와 두 부인의 합장묘다. 김정희는 첫째 부인 한산이씨와 사별한 뒤 둘째 부인 예안이씨와 혼인을 했다. 김정희는 영광의 시기를 뒤로 하고 말년에는 정치에 휘말리며 어려움을 겪어서 북청, 그리고 제주도로 유배를 가기도 했다. 유배에서 풀려난 뒤 아버지의 무덤이 있는 과천에서 짧은 여생을 보냈는데, 이때 스스로 ‘과로(果老)’ 곧 과천의 노인이란 뜻의 호를 쓰기도 했다. 그리고 1856년 과천에서 생을 마감했다. 1937년, 지금의 추사고택 옆으로 무덤을 옮겨오며 부인과 합장을 해서 지금의 무덤을 만든 것이다. 곧 추사고택은 김정희가 태어난 곳이며, 또 죽은 뒤에 머문 곳이기도 하다.  주소 & 문의 충남 예산군 신암면 추사고택로 261 | 041-339-8248 alt 화순옹주 홍문(좌), 백송공원(우) 효심보다 컸던 옹주의 절개,화순옹주 홍문 추사고택은 충청도 53개 고을의 도움을 받아 지어졌다고 알려져 있다. 이는 김정희의 가문이 예사롭지 않은 것과 관련이 있다. 그러한 내력을 살피기 위해서는 추사고택 옆으로 난 산책로로 걸어가야 한다. 바로 화순옹주 홍문(열녀문)을 찾아가기 위해서다. 화순옹주는 영조가 정빈이씨 사이에서 얻은 둘째 딸이다. 첫째 딸은 영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세상을 떠났으니 화순옹주는 영조에게 첫째 딸과 다름없는 존재였다. 그런 딸이 당시 명문가인 경주김씨 가문의 김한신과 혼인한 것이다. 기록에 따르면 김한신은 총명하며 인물도 출중했다고 한다. 이야기 속 주인공 김한신은 바로 김정희의 증조부다. 조선시대에는 왕실의 공주나 옹주가 혼인하는 것을 ‘하가(下嫁)’ 곧 ‘내려서 혼인한다.’라는 표현을 썼다. 아무리 명문가라고 하더라도 왕실보다 격이 낮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영조는 부마가 된 김한신을 월성위로 봉하고 고향인 예산에 땅을 내려주었는데, 이때 예산에 지금의 고택을 지었으니 왕실과 연결된 집이라 충청도의 여러 고을에서 도움을 준 것이다.동갑내기였던 김한신과 화순옹주의 사랑은 각별했다. 혼인한 지 16년이 되던 해, 김한신이 38살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자 화순옹주 역시 그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음식을 입에 대지 못했다. 이때 김한신과 화순옹주가 살던 곳은 한양의 적선방 일대였다. 화순옹주가 일주일 동안 음식을 먹지 않는다는 소식을 들은 영조는 급하게 거둥하여 화순옹주를 만나서 음식을 먹도록 명을 내렸지만, 화순옹주는 계속 식음을 전폐하다가 14일 만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러한 화순옹주의 모습은 조선시대 기준으로 ‘열녀’이다. 그러나 영조는 화순옹주, 곧 김한신 가문에 열녀문을 내리지는 않았다. 아마도 영조는 자신의 명을 어긴 옹주에 대한 아쉬움, 그리고 다른 6명의 옹주를 염두에 두었을 것 때문이리라. 한참 뒤, 정조 때 지금의 열녀문을 내리고 제사를 지내도록 했다. 이때 열녀문과 함께 사당을 지었는데, 사당은 불에 타서 사라지고 문만 남아있다. 참고로 화순옹주는 조선 왕실의 유일한 열녀이다. 주소 충남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 797 김한신과 화순옹주의 합장묘와 백송공원 추사고택에서 화순옹주의 열녀문, 홍문(紅門)으로 가는 길에 조그마한 무덤 하나가 있다. 바로 김한신과 화순옹주의 합장 무덤이다. 화순옹주 홍문 옆으로는 다시 백송공원이 있다. 이곳에는 김정희의 고조부가 되는 김흥경의 무덤이 있어, 청에서 가져온 백송을 이곳에 심었다고 한다. 청과 인연이 깊었던 인물, 김정희를 생각하게 하는 공간이다. alt 남연군묘 효심보다 컸던 옹주의 절개,화순옹주 홍문 다음으로 만날 곳은 추사고택과 달리 조금은 복잡하면서 소란스러운 느낌을 주는 곳이다. 바로 가야산 자락에 있는 무덤, 명당으로 알려진 남연군의 묘다. 흥선대원군이 ‘흥선군’이던 시절인 1844년, 원래 연천에 있던 아버지 남연군의 무덤을 예산으로 옮겨온 것이다. 흥선군은 형제들과 상의해 당대 최고의 지관을 통해 좋은 무덤 자리를 찾았다고 한다. 이때 지관은 가야산 동쪽에 2대에 걸쳐 천자가 나오는 땅과 광천 오서산에 만대의 영화를 누리는 땅을 알려주었는데, 흥선군은 황제가 나오는 땅을 선택했다.그렇지만 무덤을 만드는 과정에는 난관이 있었다. 무덤을 쓰려는 자리에 가야사란 큰 절이 있었으니 절을 허물고 승려를 내쫓아야만 했다.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이때 인근의 상하리 미륵은 가야사 쪽을 바라보고 있던 고개를 돌렸다고 한다. 그리고 관을 쓰려고 하는 자리에 바위가 많아 도끼로 바위를 내리치자 비로소 공간이 생겨났다고 한다. 이러한 내력을 지닌 남연군의 묘는 풍수를 잘 모르는 사람이 보아도 명당의 분위기가 느껴진다. 무덤 뒤로 가야산 석문봉이 주산이 되고 오른쪽과 왼쪽에 옥양봉, 원효봉이 있고 앞쪽에는 봉수산이 안산 역할을 하고 있다. 실제로 무덤을 쓰고 나서 흥선대원군의 둘째 아들이 고종이 되었고,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하며 고종과 순종이 황제로 즉위했으니 지관의 말은 맞았다고 할 수 있다. 주소 & 문의 충남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 산5-28 | 041-339-8930 독일인 오페르트가 남연군의 묘를 파헤치려던 사건 1868년, 유대계 독일 상인 오페르트가 남연군의 묘를 도굴하려고 했던 사건이 있었다. 일명 ‘오페르트 도굴 사건’이다. 오페르트는 남연군의 묘를 도굴하기 전, 조선과 통상을 위해 두 번에 걸쳐 아산만을 탐사하고 해미의 현감을 만나기도 했다. 그러나 통상 요구가 실패하자 다른 방법을 썼다. 당시 권력자인 흥선대원군을 협박할 방법으로 남연군의 묘를 도굴하기로 한 것이다. 다행히 수만 근의 석회를 부어 만든 무덤은 단단했으며, 마을 주민이 저항하면서 실패로 돌아갔다. 이 사건을 통해 1866년 시작된 병인박해로 인해 서양을 오랑캐로 여기며 척화를 내세운 흥선대원군의 야망과 당시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alt 매헌윤봉길의사기념관 애국정신이 깃든, 매헌윤봉길의사기념관 마지막으로 예산의 뜨거운 열정, 애국을 느낄 수 있는 곳을 살펴보자. 바로 윤봉길의 옛집과 기념관, 그리고 사당이다. 1932년 윤봉길이 상하이 훙커우공원에서 벌인 의거는 독립운동의 방향과 수준을 바꾸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1932년 이전까지 독립운동은 여러 면에서 어려움이 있었으니 대체로 다른 나라가 한국과 한국의 독립운동에 관심이 없었던 것과 관련이 있다. 우리의 독립운동은 외면받았고, 나라 잃은 한국인들은 중국에서 차가운 시선을 받기 일쑤였다. 더 나아가 중국과 중국인은 일제의 식민지라는 이유로 독립운동을 벌이는 한국인을 일본인과 같이 보거나 혹은 일본인의 간첩으로 보기도 했다. 당시 독립운동가가 중국에서 활동할 때 어떠한 어려움을 겪었을지 짐작할 수 있다. 이런 가운데 일본이 대대적인 병력을 동원해 중국 상하이를 침략했다. 승기를 잡은 일본군은 일왕의 생일을 축하하는 행사를 상하이의 공원에서 벌일 계획을 세웠다. 패전을 눈앞에 둔 중국인으로서는 참담함을 느낄만한 상황이었다. 이때 한인애국단 단원인 윤봉길이 일본군 행사장에 폭탄을 던진 것이다. 이 의거로 상하이 주둔 일본군 사령관 시라카와가 사망하며 일본군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충격을 받은 일본은 급히 중국과 휴전을 진행할 정도였다. 이후 중국의 국민당 정부와 중국인은 한국과 한국의 독립운동가를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졌다. 그리고 두 나라의 협력이 이뤄지기 시작했다. 한 청년의 희생과 열정이 독립운동의 역사를 바꾼 것이다. 그 청년 독립운동가, 윤봉길 의사의 고향이 바로 예산이다. 지금 윤봉길 의사 기념관 건너에는 윤봉길 의사가 어렸을 때 살았던 광현당, 그리고 청년 시절까지 시간을 보낸 저한당이 있다. 특히 저한당은 ‘한국을 구한다.’라는 뜻이니 독립운동에 투신하기 이전에 이미 큰 뜻을 품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생가 영역을 둘러본 뒤 윤봉길 의사의 일생과 독립운동을 기리는 기념관을 참관하고 나면 자연스럽게 사당, 충의사로 발길이 이어진다. 향을 피우며 뜨거운 애국심으로 삶 전체를 던진 윤봉길 의사를 기려보는 것은 어떨까. 주소 & 문의 & 관람 시간 & 관람료 충남 예산군 덕산면 덕산온천로 183-5 | 041-339-8238 | 3월~10월 09:00~18:00,  11월~2월 09:00~17:00 | 무료   ]]> Fri, 31 Mar 2023 11:00:32 +0000 77 <![CDATA[이벤트 공지 행운의 주인공이 되어보세요!]]> 이벤트 공지행운의 주인공이 되어보세요!   alt   ]]> Fri, 31 Mar 2023 11:45:00 +0000 77 <![CDATA[이달의 기념관 다시 한번, 1919 제104주년 3·1절 기념행사 속으로]]> 이달의 기념관다시 한번, 1919제104주년 3·1절 기념행사 속으로   글 편집실사진 이소연 지난 3월 1일, 독립기념관은 다양하고 풍성한 공연과 행사로 ‘제104주년 삼일절’을 기념했다. 4년 만에 대면으로 진행된 이날 기념행사에는 쌀쌀한 날씨 속에도 관람객 수천 명이 모여 독립운동 정신을 일깨웠다.  1919년 전국에 울려 퍼진 ‘대한독립만세’ 함성이 다시 울려 퍼진 그날의 현장으로 들어가 본다. alt   온 국민이 참여하고 기념한 3·1절 기념식 지난 3월 1일, 독립기념관은 제104주년 3·1절 기념행사를 개최했다. 오전 10시 겨레의집 겨레의큰마당에서 열린 기념식에는 한시준 독립기념관장, 독립유공자 후손과 가족, 독립운동 역사가 담긴 자료를 기증한 기증자를 비롯해 온라인으로 사전 모집한 100가족 등이 참석하였다.  한시준 독립기념관장은 “1900년대 식민 지배를 받은 나라가 168개지만, 이 가운데 맨손으로 맞서 싸우고 독립을 선언한 나라는 거의 없다.”라며 “특히 독립기념관을 건립해 독립운동을 연구하고 전시하는 나라는 대한민국이 유일하다.”라고 말했다. 더불어 “국민이 참여하고 함께 만들어내는 기념행사를 통해 3·1운동의 역사적 의의를 되새기는 뜻깊은 기회가 되길 바란다.”라고 밝혔다. alt   눈과 발을 사로잡은 다채로운 공연 정오에는 같은 장소에서 ‘3·1 만세운동 재현 행사’가 펼쳐졌다. 특히 이 행사는 사전에 대국민 신청을 통해 모인 명예 독립운동가 1,919명이 참여해 의미를 더했다. 이어 진행된 공연들은 시민들의 눈과 발을 사로잡았다. 극단 ‘우금치’는 겨레의큰마당에서 일제의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독립운동을 이어간 선조들의 삶을 마당극으로 풀어냈다. 관람객들은 태극기를 손에 꼭 쥔 채 공연에 몰입하였고, 일제에 밟혀도 일어나는 민초의 강인한 모습에 환호를 보냈다. 또한 천안시립 ‘흥타령’ 풍물단 공연, 유튜브 채널 ‘웃는아이’팀의 합창 및 뮤지컬, 육군 의장대 공연 등 다채로운 공연이 이어졌다. 4년 만에 대면으로 진행된 이날 기념행사에는 온 국민이 즐길 수 있는 의미 있는 공연을 선보여 관람객들의 호응을 이끌었다. alt   풍성한 체험 프로그램과 뜻깊은 전시 관람객들은 풍성한 체험 프로그램과 전시를 만끽하며 3·1절의 의미를 되새겼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들이 광복 후 귀국 시 탔던 C-47 수송 비행기 탑승 체험, 태극기 주제의 특별 전시해설, 광복군 의상 체험, 통일염원의 동산 타종 체험, 태극기 바람개비 만들기 등 독립운동 테마 체험행사도 진행됐다.한편 특별기획전시실에서는 <상자 속 모두의 보물> 전시를 개최해 최근 3년간 기증된 주요 자료 70점을 선보였다. 또한 제4관 ‘평화누리’에서는 실감형 영상 콘텐츠 ‘평화의 울림’도 최초 공개했다. 무궁화, 호랑이, 빛을 모티브로 천장과 바닥까지 이어지는 4면 프로젝션 맵핑 기반 인터랙티브 영상 콘텐츠를 통해 모두가 독립운동의 의미와 가치를 느끼도록 했다.    ]]> Fri, 31 Mar 2023 11:16:07 +0000 77 <![CDATA[이달의 관람객 제104주년 3·1절 기념행사 관람객 인터뷰]]> 이달의 관람객제104주년 3·1절 기념행사 관람객 인터뷰 글 편집실사진 이소연     alt   이도영·전지원·전지율 님(12세·12세·11세, 대전)우리나라를 지킨 독립운동가들이 정말 대단하고 멋있다고 생각해요. 특히 기념식 마지막에 다 함께 외친 만세 삼창이 감동적이었어요! alt   윤영재 님 (45세, 천안)천안에 살아서 독립기념관을 자주 찾는 편인데, 3·1절 기념식은 처음 참여해봅니다. 찬 바람이 불어 코끝은 빨개졌지만, 아이들과 함께 독립선언서를 읽어보며 3·1절의 의미를 되새긴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alt   한규민 님 (16세, 평택)3·1절을 기념하기 위해 지역아동센터의 선생님 그리고 친구들과 함께 방문했어요. 날씨는 추웠지만, 춤과 노래를 함께 따라 할 수 있는 공연이 많아서 즐겁게 관람했습니다.  alt   류현승 님 (9세, 수원)엄마 아빠와 함께 다양한 행사에 참여하고 타종까지 직접 체험해볼 수 있어서 재미있었어요. 독립기념관에 사람들이 엄청 많아서 깜짝 놀랐지만, 대한민국이 정말 자랑스러운 하루였어요!   ]]> Fri, 31 Mar 2023 11:28:55 +0000 77 <![CDATA[#월간독립기념관 지난 호 독자 후기 이벤트 당첨자 발표]]> #월간독립기념관지난 호 독자 후기 이벤트당첨자 발표   ※ 당첨자 5명에게 모바일 커피쿠폰(아메리카노)을 전달할 예정입니다. 참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alt   ]]> Fri, 31 Mar 2023 11:36:13 +0000 77 <![CDATA[기념관 소식 독립기념관, 주한 미군기지 내 기획전시 최초 개최]]> 기념관 소식독립기념관, 주한 미군기지 내 기획전시 최초 개최   alt   ]]> Fri, 31 Mar 2023 11:41:11 +0000 77 <![CDATA[어제의 오늘 잊지 말아야 할 5월의 역사]]> 어제의 오늘잊지 말아야 할 5월의 역사   정리 편집실   alt   일제가 전쟁에 필요한 모든 자원을  강제로 동원할 수 있도록 규정한 국가총동원법을 시행한 날은 1938년 5월 5일입니다.   ]]> Fri, 28 Apr 2023 13:58:07 +0000 78 <![CDATA[들여다보기 1938년 5월 5일, 일제의 국가총동원법 시행]]> 들여다보기1938년 5월 5일, 일제의 국가총동원법 시행   글 한혜인(아시아평화와역사연구소 연구위원)   민족 말살 통치가 한창이던 1930년대 말, 일제는 전시체제 아래 국가가 모든 자원을 강제로 동원할 수 있도록 규정한 국가총동원법을 공포한다. 이에 따라 징용·징병·학도병 등의 인적 수탈은 물론 식량 공출·배급 등의 물적 수탈 등을 강제적으로 시행하였고, 조선인들은 전쟁의 소모품으로 희생되고 말았다. alt 조선총독부 관보 제3371호_국가총동원법 공포 제정 : 거짓과 외압,  그리고 ‘위헌론’에 휩싸였던 국가총동원법 일본 육군성은 만주사변 이후 중일전쟁이 장기화 되면서, 당시 일본경제로서는 중국에서 일본군에 의해 소비되는 수요를 평시의 경제상황으로는 채우지 못하게 되면서 국가총동원법을 구상하게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승전국은 국력을 군수(軍需)에 쏟아붓는 ‘총력전 체제’로 변환했고, 일본도 1918년 시베리아 침략을 계기로 총력전 체제의 일환인 군수공장동원법을 제정했다. 하지만 이 군수공업동원법의 적용은 전시(戰時)에 국한했기 때문에 중국침략을 ‘사변’으로 칭하던 일본정부는 본 법으로는 동원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육군성은 전시체제를 확립하기 위해 총동원법 제정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육군성의 요구를 받아들인 일본정부는 1937년 11월 기본방침을 각의로 결정하고, 비밀리에 국가총동원법안을 마련하여 1938년 2월 법안을 제시했다(제73회 제국의회). 법률심의단계에서 의회는 국가총동원법의 적용을 전시에 국한할 것을 주장하면서, 제1조에 있는 ‘전시에 준하는 사변’을 삭제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일본정부는 “지나사변(중일전쟁)에는 발동할 의지는 없고, 더 큰 전쟁을 예상해서 준비한 것”이라고 답변했지만, 법률 통과 후 바로 발동되었기 때문에 결국 거짓 답변이 되었다.이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본 국가총동원법안이 법률로 규정할 사항을 칙령으로 위임한 것이었다. 이에 대해 의회는 입법권을 침해한다는 이유로 위헌임을 주장하면서 반대했고, 일본의 경제계에서도 사유재산의 제한은 위헌이라고 주장하면서 반대했다. 하지만 일본정부와 육군성의 압력으로 법률은 1938년 3월 24일 무수정으로 통과되었고, 일왕의 재가(裁可)를 거쳐 4월 1일 관보 제3371호인 법률 제55호로 공포되었다. 시행 : ‘칙령’으로 운용한  국가총동원법 국가총동원법은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 구조를 국가적 통제구조로, 정치적으로는 세부 법령을 칙령으로 대신하여 정부의 명령권을 최대한 증대시켜, 의회의 권능을 약화시키고 국민의 자유를 최대한 제한하는 법안이었다. 본 법의 시행기일은 부칙 제1항에 따라 칙령으로 정하여 국가총동원법 시행기일에 관한 건(1938년 5월 4일 칙령 제315호, 관보 제3397호)에 의해 5월 5일부터 시행되었다. 조선에는 국가총동원법을 조선, 타이완 및 사할린(樺太) 시행의 건(1938년 5월 4일 칙령 제316호 관보 제3397호)에 의해 5월 5일 시행되었다.국가총동원법의 구성은 제1조부터 제3조가 ‘총칙규정’이며, 제4조부터 제20조는 통제의 골자가 되는 ‘전시(戰時)규정’, 제21조부터 제31조까지 평시부터 국가총동원의 준비를 위해 마련된 ‘평시(平時)규정’으로 되어 있다. 제1조는 국가총동원의 개념, 제2조는 총동원 물자, 제3조는 총동원 업무를 규정하고 있다. ‘전시규정’인 제4조부터 제20조까지는 국민의 징용(제4조), 국민의 협력(제5조) 등 강제적 징용뿐만 아니라 협력까지도 강요했다. 노무통제(제6조) 및 노동쟁의 제한 및 금지(제7조) 등 노동의 자율권도 박탈했고, 물자·무역·자금·금융도 모두 통제했다(제8조에서 제13조까지). 광업권, 사광권(砂鑛權), 물 사용, 각종 권리, 사업설비의 신설·확장·관리, 물가통제(제14조에서 제19조) 등 경제활동을 국가가 관장했다. 그리고 언론통제(제20조)까지 가능하게 했다. ‘평시규정’으로는 국민등록제도(제21조), 기술자 양성·사업 등을 규정했고, 제32조와 제49조는 벌칙까지 규정했다. 다만 이 국가총동원법 자체에는 법률적으로 통제의 구체적 내용이 명시되어 있지 않고, 세부 법령은 칙령에 의해 만들어졌다. 이는 국민의 합의 없이 즉, 의회의 의결을 거치지 않고 일왕의 명령으로 국가총동원법이 운용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전시노무동원 : 국가총동원법에 근거한 국민징용령 국가총동원법의 발령과 함께 군수의 충족, 생산력확충계획의 수행, 수출의 진흥, 국민생활에 필요한 필수품 확보 등을 위해 1939년 7월부터 매년 노무동원계획이 수립되었다. 노무동원 계획은 국가총동원법의 ‘평시조항’인 제21조 국민등록제도와 제24조 사업계획의 설정 조항을 근거로 칙령 제5호 국민직업능력신고령과 칙령 제493호 총동원업무사업주계획령을 발령해 계획적으로 매년 노무동원자수를 결정하고 할당했다. 1939년 113만 9천명, 1940년 154만 명, 1941년 252만 명 등 매년 지속적으로 늘어났다. 이때 탄광·광산·토목업 등에는 조선인 노동자수가 계획되었다. 1942년에는 국민동원계획으로 바꾸고, 미혼여성·학생·일반노동자에도 조선인노동자가 계획되었고, 1943년에는 전쟁포로와 수형자도 동원수에 계획되었다. 1944년에는 454만 명이 계획되는 등 지속적으로 계획수가 늘었다. 수립된 노동자수를 동원하기 위해서 일본정부는 국가총동원법의 제4조와 제6조를 근거로 칙령 제451호로 국민징용령(1939.7.7.)을 공포하고, 7월 15일에 시행했다. 이 국민징용령은 1939년 10월 1일 조선에도 시행되었다. 일본정부는 국민징용령은 그만큼 국가의 책임과 부담이 커지는 것이었기 때문에 되도록 적용하지 않으려고 했다. 국민징용령 제2조가 ‘징용은 별도의 사유가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 직업 소개소의 직업소개 그 외 모집의 방법에 의해 소요 인원을 얻을 수 없을 경우에 한해서 이것을 시행하는 것으로 한다’로 규정하고, 특히 식민지민 조선인에게는 ‘집단모집’이나 ‘관알선’과 같은 식민지 권력을 최대한 이용하면서도 국가의 책임을 면책하려는 방식으로 운용하였다. 하지만 미국과의 개전 등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전쟁이 확산되어 법령이 폐지되는 1945년 3월 6일까지 총 10번을 개정하면서 징용령의 적용범위를 넓혀갔고, 1944년 8월 조선에서도 전면적인 징용령을 내렸다. 국민징용령 외에도 국가총동원법 제5조 ‘정부는 전시기 국가총동원 상 필요할 때는 칙령이 정하는 바에 따라 제국신민 및 제국법인 그 외 단체로 하여금 국가 또는 지방공공단체가 행하는 총동원 업무에 협력하게 할 수 있다’를 근거로 각종 보국대·정신근로대·학도근로대 등을 조성하여, 강제적으로 ‘협력’을 강요하기도 했다.  alt 칙령 제451호_국민징용령의 일왕 제가 서류 최연소 A급 전범자 사토 켄료(佐藤賢了)와 국가총동원법 국가총동원법안 심의 시, 1938년 3월 3일 중의원 국가총동원법위원회에서 의원들이 본 법이 위헌적이라는 이유로 격렬하게 반대할 때 사토 켄료(佐藤賢了, 이하 사토)는 42세로 젊은 나이에 군무과 국내반장으로 법안의 정신, 자신의 신념 등을 장시간 연설하였다. 이에 사토의 육군사관학교 교관이기도 했던 입헌정우회의 미와와키 쵸키치(宮脇長吉)가 토론이 아니라는 이유로 그의 연설을 막으려 하자 사토는 “입 닥쳐”라고 소리쳤고, 결국 회의는 파행으로 끝났다. 하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군의 압력이 강렬하다는 것을 의회가 깨닫고 점차반대의 의견을 접어갔다. A급 전범으로 잡힌 사토는 스가모감옥 복역 중에 본 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국가총동원법 제정 시 내가 일으킨 사건은 내 젊음과 미숙함 때문에 일어난 과실 (중략) 개인의 과실이 아니라,  나를 통해 군부가 의원을 위협하고 침묵하게 하여 국가총동원법을 강권으로 밀어붙여 군부정치의 지배권 확립한 것처럼 곡해되었다.  도쿄재판에서도 그런 인상을 받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실제는 정반대로 나의 설명을 방해하는 것을 막은 것이다. 오직 의원의 질문에 진지하게 대답하려고 한 것뿐이다.”  전쟁수행을 위한 국가총동원법을 통과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한 사토는 마지막까지 온 국민과 식민지인들을 전쟁의 수단으로 몰아넣었다.   ]]> Fri, 28 Apr 2023 14:08:34 +0000 78 <![CDATA[한눈에 보기 국가총동원법(1938~1946) 공포부터 폐지까지]]> 한눈에 보기국가총동원법(1938~1946)공포부터 폐지까지   정리 편집실   alt  ]]> Fri, 28 Apr 2023 14:13:08 +0000 78 <![CDATA[이달의 독립운동가 일본 제국에 맞서 한국 독립을 지원한 일본인들 가네코 후미코·후세 다쓰지]]> 이달의 독립운동가일본 제국에 맞서한국 독립을 지원한 일본인들가네코 후미코·후세 다쓰지   글 독립기념관 전시부   alt   관동대지진과 재일 한인 탄압 1923년 9월 1일 일본 도쿄(東京)를 비롯한 관동(關東) 일대에 대지진이 발생했다. 혼란한 와중에 ‘조선인이 방화하거나 우물에 독약을 풀었다’는 등의 유언비어가 확산되었다. 이 과정에서 재일 한인 6,600여 명이 자경단(自警團) 등에 의해 학살되었고, 일본군경에 의해 한인들이 무작위로 붙잡혔다. 일본정부는 관동대학살에 대한 비판을 돌리고자 가네코 후미코와 박열의 일왕 및 요인 처단 계획을 ‘대역사건’으로 부풀려 두 사람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적극적인 법정투쟁으로 맞섰으며 후세 다쓰지는 두 사람의 변론을 맡아 지원했다. 가네코 후미코와 후세 다쓰지는 일본인임에도 한국 독립운동에 헌신한 공로를 인정받아 건국훈장을 추서받았다. alt 재일 한인을 학살하는 자경단(좌), 「1만의 희생자!!!」『독립신문』(1923.12.5.)_연세대학교 학술문화처 도서관 소장(우) 박열과 함께 반제국주의 투쟁을 전개한 일본인 여성,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 가네코 후미코는 1903년 일본 요코하마(橫浜)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부모의 학대를 받다가 9살 때 한국의 고모부 집으로 보내졌다. 1919년 3월 충북 청주군의 3·1운동을 목격하고 한국인의 처지에 깊이 공감했다. 일본으로 돌아와 1922년 박열과 만났으며 흑우회(黑友會)와 불령사(不逞社) 등의 아나키스트 단체에 참여해 한국인들의 독립운동을 지지하는 글 등을 발표했다. 관동대지진 당시 일경에게 붙잡혀 심문받던 중 일왕 및 요인 처단 계획이 드러나자 자신의 사상과 실천 계획을 상세히 밝혔다. 가네코 후미코는 1차 공판에서 박열과 함께 한복을 입고 등장하는 등 법정투쟁을 전개했으며 1926년 3월 25일 사형선고를 받았다. 일제는 회유목적으로 형(刑)을 줄이는 은사령(恩赦令)을 내렸지만 그녀는 문서를 찢어버리는 방식으로 저항했고 1926년 7월 옥중에서 사망했다. 정부는 그녀의 공훈을 기리어 2018년 애국장을 추서했다. alt 『후토이센진(太ぃ鮮人)』 제2호 (1922.12.)_박열의사기념관 제공 alt 한복을 착용한 채 공판을 받는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국제사진정보』5권 4호 (1926.4.) 한국의 독립운동을 지지한 일본인 변호사, 후세 다쓰지(布施辰治) 후세 다쓰지는 1879년 일본 미야기현(宮城縣)에서 태어나 1899년 도쿄 메이지법률학교에 입학해 1903년 변호사가 되었다. 1919년 2·8독립선언으로 붙잡힌 재일 한인 유학생 을 변호한 것을 시작으로 지속적으로 한국 독립운동을 지지했다. 1923년 관동대지진 당시 재일 한인 학살의 진상을 조사했으나 일제의 방해로 조사결과를 발표할 수 없었다. 1924년 일본 왕궁에 폭탄을 던졌던 의열단원 김지섭을 변호했고, 1926년 법정투쟁을 벌이던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변론을 맡아 일제 식민지배의 부당성을 비판하기도 했다. 또한 옥중에서 가네코 후미코가 사망하자 가매장된 그녀의 유해를 되찾는 데 노력했다. 이후 1926년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지주층을 상대로 한 전남 나주군 농민들의 토지반환 투쟁을 도와 한국 농민의 입장을 대변했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일본인에게는 최초로 2004년 애족장을 추서했다. alt 후세 다쓰지 변호사가 김희섭에게 보낸 서한 (1925.1.18.) alt 「한사람의 일본인으로서 전 조선 형제에 사죄」 『시대일보』 (1926.3.6.)_국립중앙도서관 제공 alt   ]]> Fri, 28 Apr 2023 14:39:12 +0000 78 <![CDATA[끝나지 않은 독립운동 일본 초등학교 교과서 ‘독도’왜곡에 강력히 대처할 것을 촉구한다]]> 끝나지 않은 독립운동일본 초등학교 교과서‘독도’왜곡에 강력히 대처할 것을 촉구한다   글 이계형 (국민대학교 교양대학 교수)   일본 역사 교과서의 왜곡 문제는 한국사 전반에 해당하지만, 일제강점기에 국한한다면 주된 내용은 일본이 과거사에 반성하지 않는 ‘침략’, 일본군 ‘위안부’, 강제징용 등이다. 이와 달리 교과서 왜곡 문제 가운데 하나인 ‘독도’는 광복 이후 영토주권과 관련한 것이다.  그런데 최근 한일 관계를 둘러싼 여러 갈등이 촉발하는 가운데 일본 초등학교 사회 교과서의 독도 왜곡 문제가 불거졌다.  이를 기회로 그동안 일본 초등학교 교과서에 독도와 관련한 내용이 어떻게 왜곡 기술되어 왔는지를 살피고, 문제점을 짚어 정부의 강력한 대응을 촉구하고자 한다.   샌프란시스코 조약으로 촉발된 독도 문제  한일 간 독도 문제는 1951년 9월 연합국과 일본이 샌프란시스코 조약을 조인하면서 비롯됐다. 미국 주도의 연합국이 일본이 권리를 포기해야 하는 한반도 섬 중에서 ‘독도’를 포함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독도가 엄연한 한국 영토였음에도 말이다. 이러한 문제점을 개선하고자 1952년 1월 대한민국 정부는 ‘인접 해양 주권에 관한 대통령 선언(평화선)’을 발표하여 독도를 그 안에 포함하였다. 이후 일본 측의 항의와 불법 침범 등이 잇따르자 1953년 4월 울릉도 주민이 중심이 되어 독도의용수비대가 결성되었고, 이어 독도 영토비 건립과 영토 표지·무인 등대 등을 설치하며 실효적 지배를 강화하였다. 일본 측의 거듭된 국제사법재판소 결정 위임 요구에도 한국정부는 독도가 명명히 우리의 영토인데 이를 위임하는 것은 옳지 않다며 거부했다. 그런데도 일본은 오늘날까지도 그러한 주장을 계속해 오고 있다.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 당시에도 독도 문제가 거론되었지만, 협정에는 포함되지 않았다. 이후에도 일본 측의 독도 도발이 계속되자 한국정부는 독도에 헬리콥터 착륙장(1981), 레이다 기지(1993), 500톤급 선박 접안 시설(1997), 유인 등대(1998) 등을 설치하며 실효 지배를 더욱 강화하였다. 2000년에는 울릉군 의회가 독도의 행정구역을 ‘울릉읍 도동리 산 42-76번지’에서 ‘독도리 산 1-37번지’로 변경하였다. 2005년에는 일본 시마네현 의회가 1905년 ‘독도’를 일본 시마네현에 편입·고시된 2월 22일을 ‘다케시마의 날’로 정하자, 이에 맞서 경상북도 의회는 고종이 1900년 칙령으로 독도를 울릉도 부속 섬으로 공포한‘10월 25일’을 ‘독도의 날’로 제정하였다. 2000년대 이후 일본 내 극우세력이 강경해지면서 독도를 두고 양국 간 갈등이 더욱 고조되었다. 더욱이 2006년 아베 정권하에서 ‘교육기본법’이 개정되고 이에 기초하여 2008년 ‘학습지도요령’, ‘학습지도요령해설’이 개정되면서 독도를 포함한 영토 교육이 중학교 교육 현장에서 강화되었다. 2008년 2월, 일본정부는 ‘다케시마’를 자신들의 영유권이라 주장하는 책자를 발간·배포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해 7월에는 중학교 사회 교과서(지리) ‘학습지도요령해설’에 ‘다케시마’를 일본 영토로 표기하고 2012년부터 ‘다케시마는 일본 고유의 영토’라는 내용으로 교육할 것을 명시했다. 그런데 이때까지만 해도 초등학교 사회 교과서에서는 독도 관련 내용은 수록되지 않았다. 다만, 러시아와 영토분쟁을 일으키고 있는 남쿠릴열도(북방 4개 도서)는 일본의 경계를 표시하도록 규정하였다. alt 1952년 당시 평화선 및 어업보호수역 지도에 독도가 포함되어 있다. 일본 문부과학성의 학습지도요령 개정 일본 교과서 편찬 과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교과서는 발행자의 편집, 문부과학성의 검정, 교육위원회의 채택 등의 과정을 거쳐 교육 현장에서 사용된다. 그전에 일본 문부과학성은 ‘학습지도요령’을 고시하여 초중고 학생들에게 가르쳐야 할 최저한도의 학습 내용과 목표 등을 제시하는데 보통 10년 단위로 개정했다. 이는 교과서 내용에 반영되며 법적 구속력이 있어 교육 현장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 ‘학습지도요령해설’은 각급 학교에서 실제로 가르쳐야 하는 내용과 세부 사항을 담고 있다. 이는 ‘학습지도요령’의 하위 개념으로 법적 구속력은 없지만, 교과서 검정 때 상당히 큰 영향을 준다. 그런데 일본 사회과 ‘학습지도요령’은 이례적으로 2008년 3월 이후 여러 차례 개정되었고, 그에 따라 ‘학습지도요령해설’ 또한 개정이 빈번하였다. 이후 2010년 검정을 통과한 일본 초등학교 5학년 사회 교과서에 ‘학습지도요령해설’에도 없는 독도와 관련한 내용이 실렸다. 교과서에는 기존과 달리 지도상에 독도를 ‘죽도’라고 표기하고 이를 자국의 영토로 포함하였다. 그 무렵 2011년에 개정한 한국 초등학교 5·6학년 사회과에 독도 관련 내용이 처음 구체적으로 기술되었다. 더욱이 2011년 검정을 통과한 일본 중학교 역사 교과서에는 ‘다케시마’ 사진이 실렸고, “한국과 영유를 둘러싸고 대립하며 미해결 문제”라는 왜곡된 내용을 담았다. 특히나 중학교 지리와 공민 교과서 중에는 독도가 자신들의 ‘고유 영토’라거나 한국이 ‘불법’ 점거하고 있다고까지 기술하기도 했다. 갈수록 더욱 강화되는 일본의 독도 왜곡 2014년 1월 일본 문부과학성의 검정 방침이 바뀌면서 독도 왜곡이 더욱 강화되었다. 새로운 검정기준은 영토 교육과 관련하여, ‘정부 견해를 근거로 독도가 일본 고유 영토인데 한국이 불법점거하고 있다’라는 내용으로 서술하도록 하여 모든 교과서가 바뀌었다. 이에 2014년 일본 중고등학교 ‘학습지도요령해설’에 ‘독도’와 관련하여 왜곡된 내용이 더 자세하게 담겼다. 이를 살펴보면, 기존 중고등학교 지리 교과서에만 한정됐던 독도 관련 내용이 중학교 역사와 공민까지 확대되었고, 고등학교 일본사·현대사회·정치경제 등도 포함되었다. 이와 함께 “죽도가 일본의 고유 영토이다.”, “죽도를 국제법적 정당한 근거에 기반하여 일본 영토로 편입했다.”, “한국이 죽도를 불법 점거하고 있다.”, “(일본은 독도 문제를) 평화적인 수단에 의해 해결하려 노력하고 있다.”라는 등 왜곡된 내용으로 채워졌다. 초등학교 검정 교과서 역시 지도상에 독도를 ‘죽도(竹島)’ 혹은 ‘죽도(시마네현)’로 표기하거나 울릉도와 독도 사이에 경계선을 두어 일본 영토임을 강조하였다. 교과서에 따라서는 독도를 ‘일본 고유의 영토’, ‘일본의 영토’라고 기술하였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몇몇 교과서는 한국이 독도를 ‘불법점거’하고 있다는 내용을 기술하지 않았다. 그런데 2017년부터 일본 초등학교 사회과 ‘학습지도요령’에 ‘독도’를 자신들의 영토라는 것을 언급하라고 명기되었다. ‘학습지도요령해설서’에는 ‘한 번도 다른 나라의 영토가 된 적이 없다는 의미’에서 ‘일본 고유의 영토’를 강조토록 했다. 이에 2019년 3월 검정 통과한 일본 초등학교(4~6학년) 모든 사회 교과서에 독도 관련 내용이 실렸다. 이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검정을 통과한 초등학교의 모든 사회 교과서에는 독도가 자신들의 영토임을 강조하였다. 예전과 같이 4학년 교과서에는 울릉도와 독도 사이에 경계선을 두어 일본 영토임이 강조되었다. 하지만 5·6학년 교과서에는 그전과 달리 ‘일본 고유의 영토’라는 점이 분명하게 표현되고, “한국이 불법 점거하고 있다.”라고 하여 왜곡 정도가 강화되었다. 또한 이전과 달리 독도에 내용이 양적으로 늘어났고 지도와 사진 등도 많이 수록됐다. 그뿐만 아니라 “한국의 다케시마 불법 점령에 일본이 계속 항의하고 있다.”라며 아베정권의 정치적인 입장까지도 교과서에 담았다. alt ‘독도는 일본땅’이라고 표기한 일본의 2011년도 초등 5·6학년 사회 교과서다. 왜곡된 독도 교육, 강력한 대응책 강구해야 최근 2023년 3월 일본정부가 발표한 초등학교 교과서 검정 심사 결과에 따르면, 학년을 낮춰 초등학교 3학년 교과서에도 ‘다케시마’로 표기한 지도를 담는다고 한다. 이로써 일본 초등학교 학생은 어릴 때부터 사회 교과서에서 배운 내용을 토대로, 중·고등학교에서 지리·역사·공민 등에서 반복적으로 왜곡된 영토 교육을 받게 되었다. 이를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이와 관련하여 2년 전에 제작된 일본 영토·주권전시관 유튜브 채널 영상이 이를 말해준다.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일본의 한 어린이가 학교에서 ‘독도는 일본 땅’이라 배웠다면서 “북방영토라든가 다케시마라든가, 일본인데도 갈 수 없는 장소가 있대. 어째서인지 알아?”라고 질문한다. 아이의 어머니는 ‘독도가 일본 땅’이라 주장하는 고문서와 고지도 등이 전시되어 있는 일본 국립영토·주권전시관을 찾는다. 그곳에는 “북방영토·다케시마·센카쿠열도는 일본 고유한 영토로, 다른 나라 일부였던 적이 없다.”라는 설명문이 있다. 이어 어린이가 “언젠가 그곳에 가보고 싶네.”라고 하자, 어머니는 “너희 시대에는 꼭 갈 수 있게 될 거야.”라고 답한다. 일본의 ‘독도’ 야욕은 갈수록 교묘히 진화하고 확대·재생산되고 있다. 이에 대해 한국정부가 성명을 내어 일본의 독도 관련한 부당한 기술에 유감을 표했지만, 이로는 부족하다. 일본정부가 초등학교 3학년부터 왜곡된 독도 교육을 한다는 것은 일본 제국주의 시기에 버금갈 정도로 ‘영토 팽창’의 야욕을 드러낸 것이다. 이는 미래를 짊어지고 갈 세대들에게 과거 ‘침략’ 야욕을 심어주는 격이다. 이것이 우리가 경계해야 할 부분이다. 정부는 일본에 독도 왜곡 교육을 당장 멈출 것을 촉구해야 한다.   ]]> Fri, 28 Apr 2023 14:48:21 +0000 78 <![CDATA[어제와 오늘을 잇는 사람 10년째 독립운동가의 얼굴을 화폭에 담아내는 주환선 작가]]> 어제와 오늘을 잇는 사람10년째독립운동가의 얼굴을 화폭에 담아내는주환선 작가   글 편집실 사진 주환선 제공 나라를 위해 온몸을 던진 독립운동가들의 얼굴을 화폭에 담고 있는 사람이 있다. 유화와 일러스트 위주로 10년째 작품 활동을 펼치고 있는 주환선 작가다.  잘 알려지지 않은 독립운동가들의 얼굴을 담아낸 그의 작품을 마주하고 있노라면 어느덧 독립운동가에 대한 존경심에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alt 주환선 작가 독립운동가 초상화를그리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어린 시절부터 역사와 그림에 관심이 많았다. 대학에서 시각디자인을 전공한 후 일본 도쿄에 5년가량 머무르며 그래픽디자인 분야를 공부했다. 2013년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뒤 우연히 안중근 의사 다큐멘터리를 보게 되었고, 그림으로 남겨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다. 가장 아프고 치욕스러웠던 시대의 영웅들을 작품으로써 한자리에 모으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10년이라는 세월 동안 독립운동가 초상화 작업을 꿋꿋하게 이어오고 있다. alt  나를 마주보다 시리즈 <안중근>, 유화 지금껏 몇 명의 독립운동가를 그렸나. 안중근 의사를 시작으로 현재 유화 약 25점, 일러스트 약 150점을 작업했다. 유화는 김구나 안창호와 같이 많이 알려진 인물 위주로 작업하고 있고, 반면 일러스트는 여러 인물을 알리고 싶은 목표가 있어서 비교적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 위주로 작업하고 있다. 최근에는 일본의 부당함을 알리고 있는 일본인들의 일러스트 작업을 진행 중이다. 유화 속 인물에는 눈을 그리지 않는다. 특별한 의도나 이유가 있나. 흔히 눈을 마음의 창이라고 한다. 또한 초상화에서 가장 중요한 작업이 눈의 완성이기도 하다. 하지만 모든 독립운동가의 눈을 묘사할 때 자꾸만 붓이 헛도는 느낌을 받았다. 명확히 표현해야 하는 부분을 터치하지 못하고 주변만 계속 맴돌았다. 그렇게 며칠 동안 진도를 나가지 못하고 그대로 멈춰 있었다. 그때 ‘아, 이게 부끄러운 마음 때문이었구나.’라고 깨달았다.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제대로 잘 알지 못해서 또는 현재 편한 일상을 누리고 있는 스스로가 부끄러워서 감히 눈을 마주치지 못했던 것이다. 이 같은 이유로 독립운동가들의 눈을 그리지 못한 채 뭉그러트리는 방식으로 표현하게 되었다. 눈이 없는 독립운동가를 마주한관람객들의 반응은 어떠한가? 신기해하거나 의아해하기도 하고, 눈이 그려지지 않은 독립운동가들로 둘러싸인 전시장 한가운데 서 있으면 괜히 으스스한 기분이 든다고도 한다. 의도를 알고서야 감동받는 분들이 대부분이다. 한편 독립운동가의 사진을 찾아서 그림과 비교해보며 인물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는 관람객을 만날 때 보람을 느끼기도 한다. alt  나를 마주보다 시리즈 <백정기>, 유화(좌) / 나를 마주보다 시리즈 <두군혜>, 유화(우) 작업을 이어 오며 어려운 점이나고충도 많았을 것 같다. 전업 작가이기 때문에 그림으로 수익을 만들어야 하는데, 독립운동가의 초상화는 판매로 잘 이어지지 않아서 금전적인 문제로 힘들 때가 있다. 작업 면에서는 임시정부 주요 인물이 아닌 무명의 독립운동가들은 남아있는 문헌이나 사진 자료가 많지 않아서 고충이 있을 때가 있다. 게다가 인물의 스토리와 정보를 먼저 공부한 후에 본격적인 작업에 돌입해야 하기에 다른 작품에 비해 작업 기간이 오래 걸리는 것도 어려움 중에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꿋꿋하게 한길을 걷고 있는데,그 원동력이 무엇인가? 작업 초반에는 일종의 고집 같은 것이 있었다. ‘나라도 독립운동가를 널리 알려야지’, ‘그림으로 무언가를 보여줘야지’ 등과 같은 패기와 포부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러한 패기보다는 많이 알려지지 않은 무명의 독립운동가들을 알리고 싶다는 사명감이 있다. 우리나라의 위대한 항쟁의 역사를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도 알리고 싶다는 흔들리지 않는 뚝심 하나로 지금껏 걸어왔다. alt 주환선 작가가 그린 독립운동가 일러스트 현재까지 완성한 작품 중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이 있다면? 물론 모든 독립운동가를 좋아하고 존경하지만, 구파 백정기 의사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부끄럽지만, 구파 백정기 의사를 작업하기 전까지 그가 어떤 인물인지 전혀 몰랐다. 효창공원 3의사의 묘 중 하나가 그의 묘라는 것도 작업을 시작하면서 처음 알게 되었다. 이는 교과서나 일상에서 그의 이름이 크게 불리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아나키스트 계열의 인물이라 잘 알려지지 않게 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의 일대기를 살펴보면 그 누구보다 맹렬히 항거했던 흔적들을 찾아볼 수 있고, 그의 사진을 보면 특유의 강인함을 한 눈에 알 수 있다. 작가로서 작품의 비주얼적인 면에서나 스토리에서나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이다. 앞으로의 계획이나궁극적인 목표가 궁금하다. 현재는 유화보다는 일러스트 작업에 집중하고 있다. 내년에 가족과 함께 미국에 갈 예정인데, 그곳에서도 꾸준히 독립운동가 초상화 작업을 이어갈 것이다. 특히 일제강점기 당시 한국을 도운 미국 선교사들 위주로 전시를 열어볼까 계획 중이다. 최종 목표는 독립운동가 1만 7,644명을 벽면에 가득 채우는 전시회를 여는 것이다. 매일 슬픈 마음으로 독립운동가들을 애도하면서 살 수는 없지만, 더 많이 그리고 더 오래 기억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앞으로도 작품 활동에 매진하겠다.   ]]> Fri, 28 Apr 2023 15:13:07 +0000 78 <![CDATA[기념관이 발굴한 독립운동가 마가렛 샌드먼 데이비스]]> 기념관이 발굴한 독립운동가일제강점기 부산일신여학교 학생들의 등불이자 정신적 지주마가렛 샌드먼 데이비스   글 독립기념관 독립운동가 자료발굴TF팀   독립기념관은 2018년부터 독립운동가를 발굴하여 국가보훈처에 유공자로 포상 추천하고 있다. 국가와 국민을 위해 희생한 분을 존중하고 기억하는 정부의 의지와 국민적 관심을 담은 것이다.  2023년 매월 독립기념관이 발굴한 독립운동가를 소개한다. 마가렛 샌드먼 데이비스(Margaret S. Davis) 국적 : 호주 본적(출생지) : 호주 빅토리아 크랜본 생몰 : 1887~1963 이명 : 대마가례(代馬嘉禮) 포상추천 : 2021년 11월 포상 : 2022년 3·1절 계기 훈격 : 건국훈장 애국장 운동방면 : 3·1운동   alt 마가렛 샌드먼 데이비스, 『동래학원 100년사 1895~1995』 한국선교를 결심하고 부산진 일신여학교 학생들에게항일정신을 불어넣다 마가렛 샌드먼 데이비스(이하 마가렛)는 1887년 호주 빅토리아 크랜본(Cranbourne)에서 태어났으며 장로교 목사 존 데이비스(J. Davies)의 딸이다. 독실한 장로교 집안에서 엄격한 신앙교육을 받았던 마가렛이 한국선교를 결심하게 된 배경에는 숙부 헨리 데이비스(H. Davies)가 있었다. 호주장로교회의 파송에 따라 1889년 10월 서울에 도착한 헨리 데이비스는 선교에 매진하다가 급성폐렴에 걸려 한국에 온 지 6개월 만에 부산에서 사망하였다. 마가렛은 숙부의 순교정신을 이어받아 1910년 호주장로교 선교사가 되어 부산에 도착하였고, 1914년 부산진 일신여학교(현 동래여자중·고등학교, 이하 일신여학교) 교장으로 부임하여 자신의 사상을 학생들에게 전파하였다. 일신여학교는 이사벨라 멘지스(Isabella B. Menzies)에 의해 1895년 설립된 부산지역을 대표하는 여학교였다.마가렛의 신앙정신은 일제 치하에서 억압받는 학생들에게 큰 희망을 주었다. 마가렛은 일제의 악랄한 행위를 비난하며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라고 일신여학교 학생들에게 가르쳤다. 그에게 한국선교는 학생들에게 교리를 전파하는 것뿐 아니라 항일정신을 심어주는 것이었다.  일신여학교 3·1만세시위의 주역으로 활약하고 학생들을 지원하다 얼마 후 마가렛의 항일정신이 본격적으로 표출될 기회가 찾아왔다. 1919년 3·1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자 3월 11일 일신여학교 교사와 학생들도 부산 좌천동 거리에서 동조 시위를 벌였는데 여기에 마가렛도 참가하였다. 마가렛은 학생들과 함께 미리 준비한 태극기를 주민들에게 나누어 주면서 “부르시오! 만세를 부르시오”라며 시위에 동참하기를 권유하였다. 시위에 참여한 군중은 어느새 300~400명으로 늘어났다. 마가렛은 학생뿐 아니라 일반 민중들에게까지 애국심을 고취시켜 부산 지역에서의 3·1운동이 확대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2시간 이상 격렬하게 진행되던 만세운동은 일제 군경에게 무참히 짓밟혔다. 시위 당일 마가렛은 교사와 학생들과 함께 보안법 위반으로 검거되었다. 3월 13일 불기소 처분을 받아 석방되었지만, 이후에도 시위와 관련하여 경찰의 혹독한 신문을 받아야 했다. 이러한 상황에도 마가렛은 만세운동으로 인해 구금된 교사와 학생들에게 사식(私食)을 제공함으로써 공판이 끝날 때까지 그들에 대한 물질적·정신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alt 일신여학교 3·1운동 주역들, 『동래학원 100년사 1895~1995』 민족교육을 확대하고자 동래일신여학교를 설립하다 만세시위가 끝난 이후 일신여학교 학생들에 대한 마가렛의 애정과 노력은 더욱 뜨거워졌다. 그는 일신여학교를 중등학교로 발전시켜 여학생들에게 민족교육의 기회를 확대하고자 하였다. 일신여학교는 개인사택 공간을 활용하여 작은 규모로 경영되고 있었다. 이에 그는 호주선교사연합회의 후원금을 얻어 1924년 12월 학교 부지를 매입하였고, 1925년 6월 일신여학교의 고등과를 동래로 이전하여 동래일신여학교를 탄생시켰다. 수십 명에 불과하던 입학생은 200명으로 늘어났다. 학교 창립 낙성식에서 마가렛은 “일신여학교가 고등보통학교로 승격된 데에는 주민들의 협조가 기여한 바가 크다”고 축사하였다. 지역주민의 협조가 어떠했는지 자료를 통해 밝혀지지 않았지만, 중등학교 설립에 대한 대중들의 열의가 대단했음은 분명하다. 이를 통해 마가렛은 민족교육가로서 학생과 일반인에게까지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alt 동래일신여학교 낙성식, 『조선일보』 (1925.6.28.)(좌), 일신여학교 전경(우) 학생들을 독립투사로 양성하고 한민족의 정체성을 일깨우기 위해 한국어 교육을 중시하다 동래일신여학교 설립 이후 마가렛은 한국어·역사·지리 등을 주요 교과목에 반영시켜 한국 여학생의 민족의식을 함양하였다. 이 학교 출신자 중 대표적인 인물 박차정은 중국 대륙에서 독립군 여전사로 활약했다. 마가렛은 식민지 교육정책으로 민중들이 한글을 배우지 못하는 사실을 매우 안타까워했다. 때마침 1929년 여름부터 언론계를 중심으로 문자보급운동이 일어나자, 마가렛은 학생들에게 운동의 주체가 되어 대중들에게 한글을 가르쳐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그의 교육관은 학생들을 미래의 독립투사로 성장시키고 대중들에게 민족정기를 일깨워주기 충분하였다.  신사참배 강요에 저항하며 신앙의 양심과 학생들을 지켜내다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일깨워주던 마가렛은 1930년대 후반에 이르러 큰 위기를 맞았다. 총독부는 일선 학교에도 신사참배를 강요하였고 이에 응하지 않으면 폐교시키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동래일신여학교도 이런 압박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1939년 1월 22일 마가렛은 신사참배 반대 입장을 밝히면서 신앙의 양심을 지키는 쪽을 택했다. 그러면서도 일제와 타협하지 않고 학교의 명맥을 유지할 방안을 모색하였다.고심 끝에 1939년 12월 부산지역 유지 오태환(吳泰煥) 등이 설립한 구산학원에 일신여학교의 경영권을 넘겼다. 폐교 직전에 학교를 존속시키기 위한 최선의 선택이었다. 그리고 1940년 3월까지 학교에 남아서 인수인계를 마친 후 그해 6월 호주로 돌아갔다. 그가 일생동안 바쳐왔던 신념인 신앙의 양심과 학생들 모두를 지켜낸 것이다. 귀국 후 마가렛은 1960년 2월까지 『더 미셔너리 크로니컬(The Missionary Chronicle)』 의 편집을 맡다가 1963년 호주 멜버른에서 숨을 거두었다.이처럼 한민족을 위해 헌신했던 마가렛은 그 공적을 인정받아 2022년 3월 1일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되었다. alt 일신여학교 만세운동기념비   ]]> Fri, 28 Apr 2023 15:16:18 +0000 78 <![CDATA[사(史)적인 여행 아이와 함께 거니는 사적지 나들이 서울 북촌]]> 사(史)적인 여행가정의 달 5월,아이와 함께 거니는 사적지 나들이 서울 북촌   글·사진 박광일 (역사여행작가·여행이야기 대표)   조선왕조 초기부터 명문대가가 자리 잡았던 북촌은 현재까지 600여 년의 역사와 함께 수많은 인물의 흔적들이 켜켜이 쌓인 곳이기도 하다. 보통 북촌이라고 하면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 한옥이 많은 마을을 가리키지만, 넓은 의미로 인사동 일대까지 포함하기도 한다.  화창한 날씨 덕에 나들이하기 좋은 5월, 가족과 함께 ‘어린이날’의 의미를 살펴보며 우리 역사와 문화도 함께 둘러볼 수 있는 ‘북촌’ 일대를 거닐어 보는 건 어떨까. alt 천도교중앙대교당  3·1운동의 발판, 천도교중앙대교당 북촌에서 처음 살펴볼 곳은 바로 ‘천도교중앙대교당’이다. 인사동 옆 경운동에 있는 이 건물은 이국적인 외관으로 쉽게 눈에 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동학에서 이름을 바꾼 천도교의 교당이다. 일제강점기 우리의 국권을 빼앗은 일제는 일본 고유의 종교인 신토, 그리고 불교와 기독교를 제외하고는 종교로 인정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당시 큰 세력이었던 민족종교, 곧 대종교나 천도교는 어려움에 빠지게 되었다.천도교는 어려움을 해결할 방법 가운데 하나로 새로운 모습의 교당을 짓기로 했다. 이를 위해 1918년 천도교 교인들은 성금을 모으기 시작했고, 1918년 12월 본격적인 교당 건축 공사에 들어갔다. 하지만 1919년 3월 1일 만세운동이 일어났을 때 공사는 잠시 중단되었다. 이후 3·1운동의 열기가 잠잠해진 뒤 다시 공사를 시작하여 1921년 2월 28일 지금의 건물을 완성하였다. 완공된 시기를 보면 천도교중앙대교당은 현재 102살이나 된 건물이다. 천도교중앙대교당은 3·1운동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3·1운동 당시 천도교 독립운동자금의 상당 부분이 대교당을 짓기 위해 모은 자금에서 나왔다. 교인들이 모은 성금 가운데 일부는 교당을 짓는 것에, 또 다른 일부는 독립운동자금으로 활용되었다. 그런 점에서 천도교중앙대교당은 독립운동의 공이 있는 건물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천도교중앙대교당을 5월에 꼭 한번 찾아야 할 이유는 바로 ‘세계어린이운동발상지’ 기념비가 있기 때문이다. 이곳은 우리나라의 어린이날, 더 나아가서 세계에서 가장 먼저 ‘어린이 운동’이 시작된 장소이다. 국제연합에서 ‘국제아동인권선언’을 발표한 해가 1924년인데, 우리나라에서 처음 어린이날을 기념한 해는 1922년이니 2년이나 빨랐다. 어린이날을 만든 인물은 소파 방정환이다. 그 역시 천도교와 깊은 관련이 있다. 방정환은 천도교 3대 교주이자 3·1운동을 이끈 민족대표 중 한 사람인 손병희의 사위였으며, 천도교 안에서 이뤄지고 있던 어린이 권리에 대한 운동을 바탕으로 어린이날을 만들었다. 당시 어린이는 ‘애녀석’, ‘어린애’ 등으로 불리는 처지였다. ‘어린이’라는 말을 처음으로 쓴 방정환은 ‘늙은이’나 ‘젊은이’의 호칭과 동격으로 어린이들도 인격을 지닌 존재로서 높여 부르고자 한 것이다. 이러한 주장을 실천에 옮기기 위해 1920년 천도교에서 ‘진주소년회’가 조직된 것을 참고하여, 1921년 ‘천도교소년회’를 만들었다. 그리고 1922년 천도교소년회는 어린이날을 5월 1일로 정하고 행사까지 열었고 그 중심에는 방정환이 있었다. 방정환은 어린이날을 제정한 것 말고도 동화구연 행사, 동화집 『사랑의 선물』 발간, 잡지 『어린이』 발간, 색동회 구성 등 어린이와 관련된 일을 하다가 1931년 33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방정환의 무덤은 ‘망우리 역사문화공원’에 있다. 방정환이 죽음을 앞두고 주변 사람들에게 부탁한 유언은 “어린이를 잘 부탁한다.”는 것이었다. ‘세계어린이운동발상지’의 표석 앞에서 어린이날의 의미와 방정환의 삶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는 건 어떨까. 주소 서울특별시 종로구 삼일대로 457 * 연중개방 alt 세계어린이운동발상지기념비  한양 골목길 속으로, 공평도시유적전시관 우리나라 어린이 운동의 역사를 살펴보았다면 다음으로는 이 일대의 역사 유적을 살펴보자. 많은 곳 중에 이번에 찾아볼 곳은 조금 독특한 이름을 가진 ‘공평도시유적전시관’이다. 이 전시관은 다른 곳의 유적이 아닌 바로 이곳 ‘공평동’에서 발견된 ‘도시유적’을 그대로 전시관으로 만든 곳이다.2015년 공평1·2·4지구 도시환경정비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조선 한양에서 근대 경성에 이르는 역사도시 서울의 골목길과 건물터가 온전하게 발굴되었다. 서울시는 도시유적을 원래 위치에 전면적으로 보존하고자 하나의 원칙을 정하였다. 바로 발굴 과정에서 유적이 나오면 유적은 전시관으로 조성하고 그 전시관보다 조금 더 넓은 면적의 건물을 지을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유적도 보호하고 건물을 짓는 사람에게 보상이 될 수 있도록 정한 규칙이다. 그리하여 공평도시유적전시관은 2018년 9월 12일 개관하였다. 도심환경정비사업에서 발굴되는 매장문화재를 최대한 ‘원 위치 전면 보존’한다는 ‘공평동 룰’을 적용한 첫 사례이기도 하다.이러한 이유로 공평도시유적전시관은 다른 박물관과 달리 대형 건물 지하로 내려가야 한다. 그리고 내려가서 보면 생각보다 큰 규모에 놀라는 경우가 종종 있다. 참고로 서울의 지층은 약 1미터 정도이며 100년의 역사가 담겨있다. 예를 들어 1미터 지하에는 100년 전 역사가, 2미터 지하에는 200년 전 역사가 담겨있는 것이다. 공평도시유적전시관 유적은 4~5미터 지하에 있는데 16~17세기, 곧 임진왜란 이후 대규모로 재건축이 일어난 시기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이처럼 공평도시유적전시관은 널리 알려진 박물관은 아니지만 인사동 일대, 서울을 탐험하는 느낌으로 가족과 함께 들러볼 수 있는 곳이다.  주소 & 관람 시간 & 관람료 & 문의 서울시 종로구 우정국로 26, 센트로폴리스빌딩 지하1층 |  오전 9시~오후 6시 | 무료 | 02-724-0135 * 매주 월요일 정기휴관 alt 공평도시유적전시관 세종의 마지막 숨결이 깃든, 서울공예박물관 마지막으로 살펴볼 곳은 최근에 생긴 ‘서울공예박물관’이다. 2017년까지 학교 등으로 사용된 이 건물은 새롭게 정비하여 2021년 7월 박물관으로 문을 열었다. 여느 박물관과 다른 외관과 공간 배치를 보여주는 이곳은 내력 또한 흥미롭다.서울공예박물관 터는 조선시대 때 세종의 막내아들 영응대군의 집이 있던 곳이다. 당시 세종은 영응대군에게 큰 집을 지어주었는데, 그 이유는 세종이 궁궐을 나갈 일이 있으면 영응대군의 집에 머물려고 했던 것과 관련이 있다. 실제로 세종은 말년에 병이 깊어지자, 영응대군 집으로 옮겨가 승하하였다. 이처럼 서울공예박물관은 세종의 마지막 숨결이 남은 곳이기도 하다. 이후 영응대군의 집은 조선 왕실의 왕자와 공주 집으로 쓰이다가 조선 후기에는 ‘별궁’으로 활용했다. 별궁은 궁궐에서 가례를 치를 때 왕비나 세자빈이 잠시 머무는 곳으로 여기에 찾아온 왕이나 세자와 함께 궁궐에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다시 궁중 나인의 거처로 쓰이다가 이 자리에 학교가 들어섰다. 마지막에 들어선 학교는 1945년에 개교한 풍문여고였다.서울공예박물관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공예박물관’인데, 서울시에서 풍문여고 건물 5개 동을 리모델링하여 건축한 한국 최초의 공립 공예박물관이다. 이제까지 공예품은 다른 전시관에서 늘 조연이었다면 여기에서는 주연이다. 더 나아가 공예품뿐 아니라 그런 작품을 만든 장인에 대해 관심을 가질 수 있다는 점에서 다른 박물관과 차이가 난다. 예를 들어 조선시대 국가에 소속된 장인 ‘경공장’, ‘외공장’과 함께 다양한 공예품을 만든 장인에 대한 내력을 보거나 혹은 생각할 수 있게 되는 곳이다. 주소 & 관람 시간 & 관람료 & 문의 서울시 종로구 율곡로 3길 4 |  오전 10시~오후 6시 | 무료 | 02-6450-7000 * 매주 월요일 정기휴관 alt 서울공예박물관 전경(좌), 서울공예박물관(우)   ]]> Fri, 28 Apr 2023 15:34:06 +0000 78 <![CDATA[이벤트 공지 행운의 주인공이 되어보세요!]]> 이벤트 공지행운의 주인공이 되어보세요!     alt     ]]> Fri, 28 Apr 2023 16:25:36 +0000 78 <![CDATA[이달의 기념관 독립기념관 2023 기증자료 특별전 <상자 속 모두의 보물>]]> 이달의 기념관독립기념관 2023 기증자료 특별전 <상자 속 모두의 보물>   글 편집실사진 이소연   독립기념관은 기증자료에 담긴 역사적 의미를 알리고 자료 기증의 고귀한 뜻을 전하기 위하여 매년 ‘기증자료 특별전’을 개최한다.  ‘상자 속 모두의 보물’이라는 제목으로 개최하는 이번 특별전은 최근 3년간 독립기념관에 기증된 18명의 주요 자료 70점이 전시되었다.  제7관 내 특별기획전시실Ⅰ에서 펼쳐진 특별전 현장 속으로 들어가 본다. 최근 3년간 기증된 자료 중 주요 70점 전시 독립기념관은 1982년 건립추진위원회 시기부터 현재까지 총 1,705명(개인·단체)의 기증자로부터 소중한 자료를 기증받았다. 이에 자료 기증자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기증받은 자료를 국민과 함께 나누기 위해 매년 기증자료 특별전을 개최하고 있다. 이번 특별전에서는 2020년부터 2022년까지 최근 3년간 자료를 기증한 18명의 주요 기증자료 70점이 전시되었다. 상당수는 독립운동을 비롯하여 독립운동 시기 당대의 역사를 생생하게 엿볼 수 있는 희귀자료이다.한시준 독립기념관장은 “3·1절 104주년을 맞아 개최되는 이번 기증자료 특별전을 통해 기증자료에 담긴 역사적 의미를 살펴보고 기증자분들의 고귀한 뜻도 함께 느껴보는 자리가 되길 기대한다.”라고 밝혔다. 아울러 “그동안 소중히 간직해 온 ‘보물’과도 같은 자료를 독립기념관에 기증해주신 기증자분들께 다시 한번 감사드린다.”라고 강조하였다. alt 전시 개막식 모습(좌), 개막식 후 전시를 둘러보고 있는 기증자들의 모습(우) 총 3부로 구성된 기증자료 특별전 전시는 1부 ‘대대로 전한 가보’, 2부 ‘찾아 모은 수집품’, 3부는 ‘추억이 담긴 유품’으로 구성되었다. 1부 ‘대대로 전한 가보’는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이 선대로부터 물려받아 집안의 가보(家寶)로 소중히 보관해 온 기증자료로 구성되었다. 기증자들은 수백 점 이상 대량 기증을 통해 소장품에 담긴 선대의 독립정신을 국민과 함께 나누고자 했다. 2부 ‘찾아 모은 수집품’은 세계 곳곳에 흩어진 한국사 관련 자료들을 찾아 나선 수집가들의 기증품으로 구성되었다. 그들의 노력으로 일제의 역사 왜곡 자료부터 독립운동가들의 남긴 기록까지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역사의 흔적이 모였다. 3부 ‘추억이 담긴 유품’은 후손들이 고이 간직해온 선대가 남긴 사진과 생활 유품 등 시대의 모습을 생생히 볼 수 있는 자료로 구성되었다. 독립운동가의 친필 일기, 안경과 교과서 등 선친의 손때 묻은 유품들은 후손들의 소중한 추억이자 독립운동가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자료이다. 전시장에 설치된 기증자 인터뷰 영상 ‘기증자께 묻다’를 통해 기증자들의 소중한 마음을 살펴볼 수 있다. alt   alt 한성감옥 도서대출대장(이공규 기증)(좌), 지청천 친필일기(이준식 기증)(우) 주요 전시자료 살펴보기 주요 전시자료는 한말 유학자로서 의병운동을 전개한 곽한소(郭漢紹, 1882~1927)가 스승 최익현의 순국부터 장례까지의 과정을 담은 『면암선생 대마도 반구일기(勉菴先生對馬島返柩日記)』(곽노권 기증), 이상재(李商在, 1850~1927)가 한성감옥에서 운영한도서실의 대출 장부인 『한성감옥 도서대출대장』(이공규 기증),이충순(李忠純, 1877~1907)의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 졸업증서(이주연 기증), 한국광복군 총사령관 등을 지낸 지청천(池靑天, 1888~1957)이 광복 이후 집필한 친필일기(이준식 기증) 등이다.한편 전시장 한쪽에는 소중히 간직해 온 자료를 기증한 기증자들에게 ‘감사 편지’를 남겨보는 장소가 마련되어 있다. 또한 리플릿 속 메모지를 활용해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가보·수집품·유품에 대한 이야기를 적어보며 나만의 소중한 물건에 대해 생각을 정리해보는 시간을 가져볼 수 있다. alt    전시기간2023.3.1.(수) ~ 5.14.(일) | 장소 독립기념관 특별기획전시실Ⅰ(제7관 내) | 내용 2020~2022년 기증자별 주요 기증자료 70점 소개  ]]> Fri, 28 Apr 2023 16:01:38 +0000 78 <![CDATA[이달의 관람객 독립기념관 2023 기증자료 특별전 <상자 속 모두의 보물> 관람객 인터뷰]]> 이달의 관람객2023 기증자료 특별전 <상자 속 모두의 보물>관람객 인터뷰   글 편집실사진 이소연   alt   독립운동가 이충순 선생 후손,기증자 이용기 님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3대째 자료를 보관·관리해오며, 전문적인 식견이 없었던 터라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기증한 자료가 안전하고 올바르게 보관된 것을 보니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친 선대의 유품을  제대로 보관하지 못한 것에 대한 죄스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제는 세상 밖으로 나와 국민들과 공유할 수 있어서 감개무량하며, 늦었지만 기증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alt   제7관 관람안내 자원봉사자,장윤정 님 원본 자료인 만큼 반짝이는 눈빛으로 전시품을 하나하나 집중해서 관람하시는 관람객들이 많아요. 특히 외국인 관람객들이 우리 역사에 대해 흥미를 갖고 관람하는 모습을 볼 때면 더욱 뿌듯하더라고요.  기증자분들이 어렵게 기증해주신 소중한 자료인 만큼 관람객분들도 소중하게 여기고 다루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alt   관람객, 김청미 님 독립운동시기 역사가 담긴 자료를 실물로 보게 되어 흥미로웠습니다. 이 전시는 가문의 보물이자 개인의 수집품이기도 한 귀중한 자료를 흔쾌히 기증해주신 기증자분들 덕분에 이루어졌다고 생각해요.  이 자리를 빌려 중요한 역사 자료를 국민 품으로 돌려주신 기증자분들에게 감사하다고 전하고 싶습니다.   ]]> Fri, 28 Apr 2023 16:11:19 +0000 78 <![CDATA[#월간독립기념관 지난 호 독자 후기 이벤트 당첨자 발표]]> #월간독립기념관지난 호 독자 후기 이벤트 당첨자 발표     ※ 당첨자 5명에게 모바일 커피쿠폰(아메리카노)을 전달할 예정입니다. 참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alt     ]]> Fri, 28 Apr 2023 16:17:39 +0000 78 <![CDATA[기념관 소식 독립기념관, 제78회 식목일 행사 실시]]> 기념관 소식독립기념관, 제78회 탄소중립 실현을 위한 식목일 행사 실시     alt     ]]> Fri, 28 Apr 2023 16:22:25 +0000 78 <![CDATA[어제의 오늘 잊지 말아야 할 6월의 역사]]> 어제의 오늘잊지 말아야 할 6월의 역사   정리 편집실   alt   헤이그 특사를 파견하여을사늑약의 부당함을 호소하였던 제2차 헤이그 만국평화회의가 열린 날은 1907년 6월 15일입니다.     ]]> Wed, 07 Jun 2023 14:18:42 +0000 79 <![CDATA[들여다보기 헤이그의 또 다른 특사 헐버트(Homer Bezaleel Hulbert)]]> 들여다보기헤이그의 또 다른 특사헐버트(Homer Bezaleel Hulbert)   글 이민원(대한민국역사와미래 연구위원장)   서울에 자리한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의 한 묘비에는 이런 문구가 새겨져 있다.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 이 무덤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헤이그의 또 다른 특사였던 헐버트(Homer Bezaleel Hulbert, 1863~1949)이다.  그는 한국인의 기질과 한국문화를 한국인보다 더 잘 이해하고 높이 평가하였으며, 한국의 독립을 위해 반세기 동안 헌신한 외국인이었다.   alt 『사민필지』 초판본 표지_배재학당역사박물관 제공(좌), 한국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 헐버트(왼쪽에서 두 번째)(우) 헐버트, 그는 누구인가 헐버트는 미국의 명문가에 태어나 다트머스대학(Dartmouth College)을 졸업하고 유니언신학대학(Union Theological College)에서 수학하였으며, 평생 정의와 인간 사랑을 실천한 기독교인이었다. 그런 그가 19세기 말 아시아의 가난한 나라 조선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서양에 문호를 개방하고 근대화 정책을 추진하던 조선 조정의 부름에 따른 것이었다. 그는 육영공원과 배재학당에서 이승만 등 청년학도에게 영어와 수학 같은 근대 서양 학문을 가르치며, 순 한글 교과서인 『사민필지』 등을 저술한 근대교육의 선구자였다. 한편 그는 금속활자·거북선·훈민정음 등 한국의 전통문화와 한글의 우수성을 간파하고 널리 알린 한국학 전문가였으며, 일본제국의 왜곡에 맞서 한국인과 한국문화를 옹호하고 한국의 독립을 도운 한국인의 스승이자 외국인 독립운동가이기도 했다.그러나 헐버트가 대한제국 광무황제의 고문이자 헤이그 특사였던 이상설·이준·이위종의 활동을 결정적으로 도와 한국을 국제무대에 알리고, 일본제국이 강탈한 외교권 회복에 앞장섰던 특사였다는 사실은 일반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다.   alt 헐버트(Homer Bezaleel Hulbert, 1863~1949)(좌), 광무황제가 헐버트에게 내린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특사증(우) 헤이그 특사로 발탁된 3인과 헐버트 일제는 러일전쟁 이후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1905년 광무황제를 핍박하여 ‘을사보호조약’을 강제 체결하였다. 그러나 이 조약에는 광무황제의 서명이 없었고, 이토 히로부미가 조정의 대신들을 협박하여 강제로 서명하게 한 불법 문서였다. 이에 광무황제는 국제법을 근거로 이 조약이 무효임을 널리 알려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회복하고자 하였다. 정의와 평화를 구호로 소집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는 한국의 사정을 알리고 열강의 지원을 구하기에 좋은 기회로 포착되었다. 헤이그 만국평화회의는 제정시대의 러시아황제 니콜라이 2세의 제안으로 1899년과 1907년 두 차례에 걸쳐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렸다. 국제법 창시자인 그로티우스의 모국이란 점이 회의 장소로서 우선적으로 고려되었다. 1899년 5월 18일~7월 29일 열린 제1차 회의 당시는 26개국 대표들이 군비축소와 중재 문제를 논의했으며, 중재재판소 설립에 합의를 보았다. 1907년 6월 15일~10월 18일 열린 제2차 회의 때는 40여 개 나라에서 외교관과 군인 등이 대표로 참석하여 전쟁법규의 제정 등을 논하였고, 대한제국은 제2차 회의에 특사를 파견하였다. 광무황제가 국제사회에 알리고자 한 내용은 분명했다. 일제가 황제와 대신들을 협박하고 강제하여 외교권을 불법 탈취하였으므로 국제법을 위배한 일본을 성토하며, 한국의 외교권 회복을 열망한다는 것이었다. 광무황제는 이상설·이준·이위종 등 3인의 특사 외에 별도의 외국인 특사 헐버트를 발탁하여 중요한 사명을 부여하였다. 하나는 한국이 일본의 압제를 받은 상황과 한국은 일본의 보호를 받지 않는다는 뜻을 밝히고 각국의 지원을 요청하는 것, 다른 하나는 장기적 목표로서 해외 한인들의 결집과 단체 구성을 독려하여 한국의 주권수호를 위해 노력하는 일이었다. 헐버트와 3인의 특사는 헤이그에서 각국의 언론과 대표를 향하여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을사보호조약은 그 자체가 불법이고 성립되지 않았다”, “일본은 한국에서 많은 불법을 저질러 왔고 한국에 야만적인 행동을 통해 토지 등을 강탈하고 있다”, “각국은 자유와 정의에 입각해 일본의 불법을 성토하고 한국의 주권수호를 도와 달라” 등이 그것이다.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린 헐버트의 활약 헐버트는 각국의 대표와 언론인·평화운동가 등을 접촉하여 이상설 등의 해외활동을 적극 지원하는 한편, 유럽과 미국에서는 국제 언론과 미국 정부를 상대로 활동하였다. 그중 하나가 『뉴욕 헤럴드』 기자와의 회견이다. 그는 ‘황제는 조약에 결코 서명하지 않았다’, ‘한일조약은 결코 조인된 적이 없다’는 제목으로 일본이 한국을 침략하는 이유, 일본의 각종 불법 행위, 한국의 절망 등을 전하면서 미국의 일본에 대한 우호 정책을 맹렬히 비판하였다. 그 외에도 헐버트는 일본 제국이 일진회 등을 통해 한국민을 분열시키고 있고, 군사적 필요를 가장하여 토지 가격의 8분의 1 가격으로 토지를 점탈했으며, 모르핀과 주사·아편·도박 등으로 한국인들을 황폐화시키고 있다는 것 등을 적나라하게 폭로하였다. 그러나 당시는 약육강식이 횡행하던 제국주의 시대였다. 한국의 뜻이 국제사회에서 받아들여지기란 매우 어려운 시대였다. 영국·미국·러시아 등 서양 강대국과 일본의 외면으로 헤이그에서의 사명은 끝내 달성되지 못했다. 그에 앞서 민영환·한규설 등이 이승만과 헐버트를 통해 루스벨트 대통령을 접촉해 펼치려던 지원요청도 그런 배경에서 실패하였다. 광무황제와 헐버트도 이런 결과를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광무황제는 헐버트 등에게 헤이그에서의 활동 외에 별도 사명을 부여하였다. 국제사회에 한국의 입장을 분명하게 알려 한국의 혼이 살아 있음을 알림과 동시에 국내와 국외 한국인들의 단결을 통해 국권수복을 도모하려는 장기적 목표였다. 실제로 헤이그를 떠난 이상설·이위종은 그런 목표를 수행하다가 1919년 전후 러시아에서 한 많은 생을 마감하였다.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외국인 또 한 사람의 특사인 헐버트는 미국에서 저술과 강연 활동을 하며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한국의 사정을 미국에 소개하였다. 이 모두 헤이그 특사 파견 당시 부여받은 사명의 연장이었다. 1945년 일본이 항복하고 마침내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당시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은 1949년 광복절에 참석할 외국인 귀빈으로서 헐버트를 우선적으로 초청하였다. 그러나 노령에 오랜 항해로 쌓인 여독이 겹쳐 그는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병원에 입원하였다. 문병을 간 이승만과 병상에 누워있던 헐버트는 두 손을 부여잡고 한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로부터 며칠 뒤 헐버트는 운명하였다. 반 백년 이어진 헐버트의 헤이그 특사 사명은 그렇게 종결되었다.가난하고 취약했던 대한제국, 모두가 그 약소국을 조롱하고 매도하던 시대에 헐버트는 한국문화와 한국인의 장점을 꿰뚫어 보고 평생 한국을 돕고 격려했다. 그는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고맙고도 정의로운 세계인이었다.     ]]> Wed, 07 Jun 2023 14:46:44 +0000 79 <![CDATA[한눈에 보기 키워드로 보는 ‘헤이그 특사 파견’]]> 한눈에 보기키워드로 보는 ‘헤이그 특사 파견’  정리 편집실  alt  ]]> Wed, 07 Jun 2023 14:49:08 +0000 79 <![CDATA[이달의 독립운동가 나라를 구하기 위해 궐기한 의병들 오덕홍·김일언·정래의]]> 이달의 독립운동가나라를 구하기 위해 궐기한 의병들오덕홍·김일언·정래의   글 독립기념관 전시부   alt   일제의 침략에 끝까지 저항한 호남의병과 산남의진 1907년 7월 일제는 헤이그특사파견을 구실로 광무황제를 강제퇴위 시키고 정미7조약을 강요하며 대한제국 군대마저 강제 해산시켰다. 군대 해산 이후 해산군인이 의진에 합류하면서 각 지역의 의병들은 부대 간 연합과 연계를 추진했다. 그 결과 의진 규모가 확대되면서 전국 각지에서 본격적인 의병전쟁이 전개되었다. 그중 전라도에서는 기삼연(奇參衍)을 비롯한 호남 서부지역 양반 유생들이 1907년 10월 호남창의회맹소(湖南倡義會盟所)를 결성해 항쟁을 이어나갔다. 경상도에서는 정환직(鄭煥直)이 광무황제의 밀지를 받아 1906년 3월 산남의진(山南義陣)을 결성한 이후 1908년 8월 해산될 때까지 치열한 의병투쟁이 지속되었다. 오덕홍은 호남의병, 김일언·정래의는 산남의진에 참여해 활약했다. alt 의병 신표(信標)(좌), 의병이 사용한 화승총(우) 나주에서 활동한 유격의병장 오덕홍 오덕홍은 1885년 전남 나주에서 태어났다. 전라도에서는 호남창의회맹소가 해산된 이후에도 1908년 전해산(全海山)이 대동창의단(大東倡義團)을 결성해 일본군의 탄압에 지속적으로 항쟁했다. 오덕홍은 1909년 일제의 이른바 ‘남한대토벌작전’*으로 호남의병의 세력이 위축되자 나주에서 독자적으로 의병을 결성했다. 그는 30여 명의 유격부대를 이끌고 일본군을 기습 공격하거나 밀고 행위자를 처단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던 중 1909년 9월 23일 나주군 아계면 일동에서 일본군에 붙잡혀 순국했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7년 애족장을 추서했다.  * 남한대토벌작전   : 일제가 의병들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히자 이를 완전히 탄압하기 위해 1909년 9월 1일부터 실시한 작전 alt 일본군에 피체된 호남 의병장들 (1909) 산포수로 이름을 떨친 산남의진 우포장 김일언 김일언은 1907년 4월 산남의진에 우포장(右砲將)으로 선임되어 일본군과의 교전과정에서 활약했다. 그는 산남의진이 8월 18일 경북 청하군 죽장면에서 일본군과 교전할 당시 일본군 척후병(斥候兵) 1명을 사살하였고, 8월 24일에는 일본군 영천수비대 1명을 처단했다. 같은 달 29일 입암전투에서는 조암으로 이동해 매복하는 등 작전을 수행했지만 교전 끝에 정용기 의병장을 비롯한 산남의진의 주요 병력이 전사했다. 이후 김일언은 산남의진의 3대 의병장 최세윤(崔世允)을 보필하여 소규모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2010년 애족장을 추서했다. alt 『진중일지』_LH토지주택박물관 소장 의병정신을 이어나간 산남의진 우익장 정래의 정래의는 1872년 경북 영일군에서 태어났다. 그는 1907년 산남의진의 우익장(右翼將)으로 임명되며 의병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정환직, 최세윤 의병장 하에서 좌익장, 참모장으로 임명되어 경북 흥해·영해·청하군 등지에서 활동했다. 정래의는 1908년 8월 산남의진이 해산된 이후에도 산남의진 생존자 모임인 참동계를 조직하여 항일운동을 이어나가려 했지만 밀정의 밀고로 일경에 붙잡혔다. 그는 고문을 당하는 등 고초를 겪다가 1927년 10월 기소중지로 풀려났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2022년 건국포장을 추서했다. alt 산남의진의 4차 결성지였던 거동사(巨洞寺)(좌), 정래의 집행원부 (1927)_국가기록원 제공(우) alt   ]]> Wed, 07 Jun 2023 15:06:30 +0000 79 <![CDATA[끝나지 않은 독립운동 독립운동가 ‘회고록’, 한국독립운동사의 중요한 사료이다]]> 끝나지 않은 독립운동독립운동가 ‘회고록’,한국독립운동사의 중요한 사료이다   글 이계형 (국민대학교 교양대학 교수)   독립운동가의 ‘회고록’은 개인 기록이기 전에 우리의 귀중한 자산이다. 비록 ‘회고록’이 주관적인 해석이나 감정에 몰입되어 역사적 사실을 왜곡할 수도 있는 부분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공식적인 사료에서 찾아볼 수 없는 생생한 역사의 증언을 담고 있기에 그 자체로 가치가 충분하다.  이에 필자가 확보한 500여 건의 ‘회고록’ 목록을 분석하여 문제점을 지적하고 개선방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독립운동가의 생생한 증언이 담긴 회고록 한국의 독립운동은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중반까지 끊임없이 전개된 항일투쟁일 뿐만 아니라 민족문제를 해결하고 궁극적으로는 근대 민족국가를 만드는 과정이었다. 그러한 움직임은 국내뿐만 아니라 국외에서도 전개되었고, 시기와 역사적 상황, 주도한 계층의 성격에 따라 방법을 달리했다. 19세기 후반부터 경술국치 이전까지는 동학농민운동, 의병, 계몽운동, 비밀결사(신민회), 순국, 5적 처단(의열활동), 국채보상운동 등이 펼쳐졌고, 경술국치 이후 광복을 맞은 20세기 중반까지는 만세운동, 실력양성운동, 무장투쟁, 의열투쟁, 학생운동, 외교운동, 노동쟁의, 소작쟁의 등 다양한 방법을 통해 각계각층의 인사들이 국내외에서 활발하게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이를 한국독립운동사라고 하는데, 학술적으로 연구하여 역사적 가치로 자리매김하는 작업의 결과물 역시 한국독립운동사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를 주도했거나 적극적으로 참여한 사람들이다. 우리는 이들을 독립운동가라 한다. 이에는 계층과 계급이 없었고 오로지 하나의 염원, ‘독립’밖에 없었다. 50여 년간 독립운동에 참가한 사람들은 500만 명이 넘었다고 한다. 다만 아쉽게도 2023년 6월 현재 대한민국 정부가 인정하는 독립유공자는 17,748명에 불과하다. 그 가운데 생존하신 분은 10명도 채 안 된다.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해’ 목숨을 바쳐가면서까지 독립한 나라를 만들고자 했던 그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유물일 수도 있고 생가, 활동지 등도 있지만, 회고록도 있다. 회고록이란, 자서전, 구술자료, 신문기고 글, 수기(手記) 등을 일컫는다. 수기의 경우는 일기의 형식도 있고 영문으로 작성한 것도 있다.모든 역사는 사료가 없이는 써질 수 없듯이 한국독립운동사 역시 마찬가지이다. 사료는 역사 연구에 필수 불가결하기 때문이다. 역사가들은 자신이 연구하는 분야의 사건, 인물 등의 실증을 밝히기 위해서는 기존 사료를 재해석하거나 새로운 사료를 발굴해야 한다. 물론 역사가에게는 사료가 객관적인지, 위서(僞書)인지를 가려낼 줄 아는 혜안도 있어야 한다. 그 결과 역사가 풍부해지고 새로운 재해석도 가능해진다. 이런 과정을 통해 과거 역사가 불편부당하게 복원되어야 한다.한국독립운동사 사료는 그 어느 시기의 역사보다도 훨씬 많은 사료가 존재한다. 한국독립운동 자료는 단체·기관이나 개인 등이 당대에 작성한 문서·책자·신문·잡지·보고서·개인 일기·문집 등 다양하고, 국내뿐 아니라 미국·일본·중국·러시아 등 전 세계에 흩어져 있다. 이에 더하여 독립운동가들이 자신의 독립운동을 글로 쓴 회고록(자서전 포함)으로 혹은 살아생전에 제작한 증언집이 있다. 이러한 회고록의 경우 대개 2차 자료에 분류하기도 하지만, 많은 연구자가 이를 인용할 뿐만 아니라 일반인이 애독하기도 한다. 회고록은 자기 경험을 기록한 것으로 어디에서도 알 수 없는 내용들이 담겨 있기에 그렇다. 또한 회고록은 생생하고 흥미로운 내용들로 꾸며져 있어 일반인들도 비교적 쉽게 읽을 수 있고, 독립운동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다만 아쉬운 점은 일반 대중이 애독하는 회고록이 편중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는 일반인들이 많은 독립운동가 회고록의 존재 가치를 모르기도 하고, 이를 손쉽게 구할 수 없다는 이유가 크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alt 좌측부터 김구의 아들 김신(金信)이 편집하여 1947년 12월 15일 발행한 『백범일지(白凡逸志)』의 1948년 3월 1일 재판본 표지, 1971년 여성동아 편집부가 3·1운동 관련한 여성들의 기고문을 엮은 『기미년 횃불을 든 여인들: 아아 삼월』의 표지, 1958년 이함덕이 필사한 『홍범도 일지』 중 한 페이지 독립운동 분야별 회고록 살펴보기 이에 개략적이지만 독립운동 분야별로 회고록을 살펴보고자 한다. 회고록 가운데 가장 널리 읽히는 것은 단연 『백범일지(白凡逸志)』이다. 1947년 12월 국사원에서 처음 출판된 이후 지금까지도 세대를 달리하면서 많은 이들이 찾고 있다. 그의 파란만장한 생애가 『백범일지』에 진솔하고 감동적으로 담겨 있고, 김구가 27년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이끌어온 우직함과 자신의 전 생애를 조국과 민족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다음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이 망명 기록인 이상룡의 『서사록(西徙錄)』과 김대락의 『서정록(西征錄)』 등이라 생각한다. 이는 서간도 망명객의 한(恨)과 독립의 염원이 그대로 전해져 감동을 준다. 이어 계봉우의 『꿈속의 꿈』은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로 강제 이주를 당한 후 자신의 생애를 회고하며 쓴 것으로 개인 일상과 독립운동에 관하여 생생한 기록을 담고 있다. 회고록 가운데 가장 많은 것은 역시 3·1운동이다. 이와 관련하여 김광섭의 『나의 옥중기』, 박영준의 『한강 물 다시 흐르고』 등과 같이 책으로 출판된 것도 있지만, 대부분은 독립운동가들이 일제강점기 혹은 광복 이후 신문이나 잡지에 당시 상황이나 활동 등을 기고한 글들이다. 특히 1971년 여성동아 편집부가 그러한 글들을 엮어 『기미년 횃불을 든 여인들: 아아 삼월』이란 책자를 펴냈는데, 권애라·김순애·김신의·김영순·나용균·박인덕·박현숙·이신애·신의경·이효덕·채혜수·최매지·황신덕 등의 글이 실려 있다. 또한 1977년에 정음사가 펴낸 『일제하 옥중회고록』 1~5권에는 정환직·신덕순·안중근·한용운·양근환 등 60여 명의 글이 수록되어 있다. 다음으로는 광복군들의 회고록이나 구술자료가 많다. 이는 이들이 광복 후에도 비교적 오랫동안 생존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권기옥·김광언·김국주·김문택·김영관·김준엽·김학규·김홍일·김효숙·노영재·박금녀·박기성·박영만·박영준·박해근·신정숙·우재룡·안병무·오희영·이범석·이자해·장기영·장준하·조경한·지청천·최덕신·태륜기·황갑수·황학수 등의 회고록이 있다. 자세한 책명은 지면 관계로 생략한다. 광복군과 마찬가지로 중국 관내에서 활동하였던 조선의용군 관련 회고록도 있다. 대표적으로 김학철의 『최후의 분대장』·『항전별곡』·『격정시대』·『나의 길』·『태항산록』을 비롯하여 김사량의 『노마만리(駑馬萬里)』, 신상초의 『탈출: 어느 자유주의자의 수기』, 엄영식의 『탈출: 죽어서야 찾은 자유』 등이 있다. 의병 관련 회고록이 그다음을 차지한다. 김용구·노응규·문석봉·문위세·민용호·박주대·서상렬·신덕균·심남일·안규홍·양한위·여중룡·유준근·이강년·이긍연·이면재·이석용·이정규·이조승·임병찬·전기홍·정운경·조희제·채기중 등과 필자 미상의 의병 기록이 있다. 그런데 이들 중에는 원문을 활자화하거나 영인하여 출판한 예도 있지만, 대부분은 출판·번역되지 않은 경우가 많아 실제 이를 접할 수 있는 대상은 지극히 한정되어 있다. 비교적 쉽게 접할 수 있고 어렵지 않아 일반인들에게 인기가 높은 것은 여성독립운동가들의 회고록이다. 상대적으로 회고록 숫자는 적지만, 여성으로서 독립운동 당시의 일상이나 활동을 세밀하게 그린 이유에서다. 대표적으로 이은숙의 『서간도시종기』, 이화림의 『진리의 향도 따라』, 이해동의 『남중록』, 정정화의 『녹두꽃: 장강일기』, 지복영의 『민들레의 비상』, 최선화의 『제시의 일기』, 한도신의 『꿈갓흔 옛날 피압흔 니야기』, 허은의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 등이 손꼽힌다. 이들 회고록은 서명을 바꾸거나 출판사를 달리하여 개정판을 내며 오랫동안 생명력을 유지해 오고 있다. 이주 한인들이 기반이 되어 독립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된 만주·연해주·미주 지역의 회고록도 적지 않다. 만주의 경우 강우건·강상진(대한군비단)·최봉설(15만 원 탈취사건)·이우석(청산리전투·신흥무관학교) 등의 수기, 정이형의 『회고록』, 홍범도의 『홍범도 일지』, 김학현의 『빨찌산 수기』, 강근(강회원)의 『나의 회상기』 등이 수집되어 자료집으로 간행되었다. 하지만 1930년대 만주에서 활동하였던 독립운동가들의 회고록은 중국 내에서 적지 않게 출판되었지만,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해 국내에 소개된 경우는 드물다. 연해주와 관련해서는 이인섭의 『망명자의 수기』, 김규면의 『노병김규면비망록』, 박노순의 『늙은 빨찌산들 회상기 초집』, 최고려의 『최니꼴라이 자서전』, 황운정의 『자서전』 등이 자료집으로 간행되었다. 미주의 경우는 현순의 『현순자사(玄楯自史)』, 곽임대의 『못잊어 화려강산』, 최봉윤의 『떠도는 영혼의 노래:민족통일의 꿈을 안고』, Easurk Emsen Charr(차의석)의 『The Golden Mountain(금산)』 등이 대표적이다. 이외에 차경수의 『호박꽃 나라사랑: 대한여자애국단 총무 차경신과 그의 가족 이야기』 등과 같이 한인 이주와 삶을 기록한 회고록이 있다. 그런데 이들 대부분은 영문으로 출판되어 쉽게 접근하지 못하는 문제점이 있다. 이외에도 광주학생운동(강석원·노동훈·박준채·이기홍·이석태·장매성·정동수·정우채·최순덕·최은희 등), 2·8학생운동(김도연·백관수·변희용·여운홍 등), 6·10만세운동(박내원·박용규·이동환·이지탁·이천진·조두원·최형연·특백생 등), 한글운동(이극로·이희승·장지영·정인승·최현배 등), 1940년대 학생운동(심재영·이기을·함석헌 등) 등과 관련한 회고록이 있다. 회고록 전수 조사를 추진하고, 새로운 회고록 자료를 발굴해야 500여 건의 회고록을 검토하여 나름 분야별로 정리하였지만, 전부 담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경향성은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한다. 이와 관련하여 먼저 독립운동 관련 기관에 제의하고자 하는 것은 회고록의 전수 조사를 추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 생존 독립유공자가 10명이 채 안 되고 대부분 고령이기에 더는 회고록이 제작되기는 힘들다고 한다면, 모든 회고록을 집대성하고 이를 DB화하여 서지 사항 함께 역사적 가치를 평가해야 한다. 이후 이를 토대로 활용 방안을 세워야 한다. 이와 함께 새로운 회고록 자료를 발굴해야 하고, 오래전에 출판한 회고록의 경우연구자나 일반인이 쉽게 구할 수 없다면 재출판도 고려해야 한다. 일제강점기 혹은 광복 이후 신문이나 잡지에 기고한독립운동가의 글을 한데 모아 책자로 출판해야 하며, 한문이나 영어로 집필된 회고록의 번역 작업도 병행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독립유공자 중에는 외국인도 70여 명에 달하는데, 이들의 회고록도 수집하여 한국독립운동을 어떻게 지원했고 어떤 활동을 하였는지도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   ]]> Wed, 07 Jun 2023 15:19:15 +0000 79 <![CDATA[어제와 오늘을 잇는 사람 20년 차 사이버 외교관 ‘반크’박기태 단장]]> 어제와 오늘을 잇는 사람20년 차 사이버 외교관‘반크’ 박기태 단장   글 편집실사진 반크 제공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나라를 대표해 세계 곳곳에 한국을 알리는 외교관으로 활동할 수 있는 곳이 있다.  어린이부터 어르신까지 15만 명에 달하는 회원이 활동하는 민간 사이버 외교사절단 ‘반크’이다.  20년 넘게 반크를 이끄는 박기태 단장을 만나 그 원동력이 무엇인지 들어본다. alt ‘반크’ 박기태 단장 반크를 창립한 지 20년이 넘었다. 그 출발을 돌이켜본다면? 대학생이던 1999년, 외국 학생들과 교류하고 싶어 ‘펜팔’ 사이트를 열었다. 2002년 월드컵을 계기로 한국에 관심이 생긴 외국인들과 소통할 기회가 점점 늘었고, 그러다 우리나라를 둘러싼 역사 왜곡이 심각한 수준임을 알게 되었다. 수많은 외국인이 독도가 일본 땅으로 표기된 지도를 보며 자랐고, 중국의 역사 왜곡으로 잘못된 한국 역사를 배우고 있는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 그 계기로 많은 사람이 나라를 위해 스스로 움직일 수 있는 단체를 만들기로 결심했고, 그게 바로 반크의 시작이었다. 사이버 외교사절단으로 알려진 반크는어떤 단체인가? 반크는 ‘VOLUNTARY AGENCY NETWORK OF KOREA’의 영어 약자로, 1999년 1월 온라인상에서 전 세계 외국인에게 한국을 알리기 위해 설립된 사이버 외교사절단이다. 현재 국내외 15만 명의 회원이 활동하고 있는 비정부기구(NGO)이며 비영리단체이다. 반크는 설립 이후 ‘사이버 외교관’을 양성하여 한국을 바르게 알리는 디지털 외교 활동을 전개해 왔으며, 한국을 넘어 국제 문제에 능동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지구촌 빈곤·환경·인권·물 부족·질병 오염 등에 대한 변화와 실질적 해결을 이끌어내기 위해 노력해 왔다. 또한 해외 어학연수와 교환학생 등으로 전 세계 곳곳에 출국하는 한국의 청소년과 청년들을 ‘글로벌 한국홍보대사’로 양성하여 70억 세계인에게 한국을 적극적으로 알려 나가는 활동을 전개하고 있으며, 전 세계 750만 재외동포를 대상으로 ‘글로벌 재외동포 한국 홍보대사’를 양성해 민족 정체성 교육과 한국의 국가 이미지 제고에 앞장서고 있다. 그동안 우리나라를 바로 알리기 위해 다양한 활동을 펼쳐왔다. 반크는 민간 외교단체로서 해외에 제대로 된 대한민국을 알리는 일을 해왔다. 대표적인 예로 김치의 근원을 중국이라 표기한 구글 영문 사이트 검색 결과를 한국으로 시정하고, 홈페이지 내 일본 지도에 울릉도·독도를 표기한 세계보건기구(WHO)에 반년간 항의하여 200개국의 지도를 바꾸기도 했다. 이 밖에도 지난 20여 년간 내셔널 지오그래픽·구글· 영국 BBC 등 세계적인 기관에 독도·동해 표기와 역사 오류 시정 등 700여 건의 성과를 냈다.  반크 창립 전, 세계지도 제작자 대부분은 한반도 동쪽 바다 위에 ‘일본해’라는 이름을 적었다. 1999년 기준으로 지도에 ‘동해’가 단독으로 표기되거나 ‘일본해’와 병기되어있는 사례는 약 3%에 불과했다. 지금은 세계지도 중 약 40%에 ‘동해’라는 이름이 표기되어 있다. 이는 정부만의 역할이 아닌 대한민국 국민 누구나 민간 외교관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사례이다. alt 반크가 제작해 배포한 독립운동가 디지털 포스터 반크를 왜곡하는 해외 언론 탓에 고충이 크다고…. 2020년 6월 일본에서 영향력이 큰 ‘야후 재팬(YAHOO! JAPAN)’ 포털 사이트 메인에 반크 활동을 소개하는 기사가 등장했다. 해당 기사에는 하루 만에 1,132개의 댓글이 달리는 등 일본인들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그런데 그 기사에는 “반크가 한국 정부로부터 연간 20억엔, 즉 한국돈으로 200억 이상의 예산을 받으며 100여 명의 연구원을 두고 있다”고 소개했고, 심지어 반크 대표는 한국 정부가 임명한 장관급(?)이라고 소개하였다. 그러면서 반크의 활동 목적을 일본을 전 세계로부터 고립시키고 국제적으로 깎아내리는 것이라고 규정했다. 중국 또한 반크를 왜곡하고 있다.  중국 관영매체 환구시보는 한중 간 발생한 김치 기원 논쟁에 대해 이 사건의 파동을 일으킨 것은 반크라고 하였으며, 특히 반크가 김치 논쟁뿐만 아니라 구글에 ‘중국 춘제(Chinese New Year)’를 ‘음력 새해(Lunar New Year)’로 수정해 달라고 요구했다고 소개하였다.특히 환구시보는 반크가 활동을 위해 납부하는 회비나 주 수입원, 행사 등에 대해 상세히 소개하며, “(이들이) 한국 사회 내 중국에 대한 많은 편견을 끌어모으고 있다”고 주장했다. 김치를 중국 문화로 편입하려는 중국의 ‘김치 공정’에 대항해 한국 전통 음식인 김치의 기원을 알리고 있는 우리의 정당한 대응에 중국의 관영매체가 반크를 공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꿋꿋하게 한길을 걸어가고 있는데, 그 원동력이 무엇인가? 100년 전 독립운동가들은 목숨을 걸고 한국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싸웠고, 독립을 향한 한국인의 의지와 목소리를 전 세계에 알리고자 했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 바쳐 싸운 선조들이야말로 진정한 우리 역사의 한류스타이고, 이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발전과 번영 그리고 세계를 뒤흔든 한류가 가능했다. 그들의 정신을 기리고 교훈 삼아 지금껏 활동하고 있다. alt 반크와 연합뉴스가 공동으로 주최한 2023 국가브랜드업 전시회 전경 역사 왜곡 문제가 끊임없다. 우리는 어떤 노력을 해야 할까? 역사 왜곡 문제에 분노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국민이 주연배우로 참여할 수 있도록 정부가 지원해줘야 한다. 정부는 ‘나를 따르라’고 외치지만 말고, 방법을 제시해 주거나 민간에서 좋은 아이디어가 나오면 적극적으로 지지해주면 된다. 싸울 총도 없는데 무조건 따르라고 하면 누구도 따라가지 않을 것이다.  디지털 시대에 싸울 총은 카드뉴스, 글로벌 청원, 포스터, 동영상 등이다. 스마트폰만 있으면 전 세계 어디로도 공유가 가능하다. 조선시대에 의병이 일어났듯이 국민 한 명, 한 명이 참여할 수 있어야 하고 이러한 모습이 전 세계까지 알려져야 한다. 역사 왜곡은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반크도 민간단체로서 사이버외교관과 한국홍보대사를 꾸준히 양성하는 데 중점을 둘 것이다. 반크가 꿈꾸는 궁극적인 목표가 궁금하다. 우리의 꿈은 오직 하나이다. 모든 한국인과 전 세계 750만 재외동포가 하나가 되어 국제사회의 지지와 협력 속에 통일 한국을 성취해 나가고, 통일 한국이 아시아의 중심 그리고 동북아의 관문 더 나아가 전 세계 모든 이들과 꿈과 우정을 나누는 가슴 뛰는 나라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아시아 평화를 위협하는 일련의 일들이 일어나고 아시아에 대한 혐오범죄가 흔하게 벌어지고 있는 지금, 우리는 안중근 의사가 추구한 이상향을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안중근 의사는 어느 한 나라가 주도권을 갖는 것이 아닌 한국·중국·일본 세 나라가 협력하여 나아가야 한다고 했다. 앞으로도 반크는 한국이 세계 속에 우뚝 설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 목표는 늘 한결같지만, 실천은 계속 진화해가고 있다.   ]]> Wed, 07 Jun 2023 15:37:00 +0000 79 <![CDATA[기념관이 발굴한 독립운동가 독립운동의 주체가 된 여학생들]]> 기념관이 발굴한 독립운동가독립운동의 주체가 된 여학생들   글 독립기념관 독립운동가 자료발굴TF팀   독립기념관은 2018년부터 독립운동가를 발굴하여 국가보훈부에 유공자로 포상 추천하고 있다. 국가와 국민을 위해 희생한 분을 존중하고 기억하는 정부의 의지와 국민적 관심을 담은 것이다.  2023년 매월 독립기념관이 발굴한 독립운동가를 소개한다. alt   필운대에 울려 퍼진 여학생들의 독립만세 소리 1920년 3월 1일 새벽, 인왕산 남쪽 기슭에 위치한 필운대에서 독립만세 소리가 울려 퍼졌다. 기숙사 생활을 하던 강원도 양양 출신의 김경화, 서울 출신의 이수희가 중심이 된 배화여학교 학생들의 3·1운동 기념 만세시위였다. 동틀 무렵 두 사람은 빨래를 널러 가는 척하고 학교 뒷산 필운대로 올라갔다. 배화여학교 건물 뒤에 있는 필운대는 조선시대 문신 백사 이항복의 집터 부근 바위로 서울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두 사람이 올라가자, 사전에 계획된 것처럼 다른 학생들도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언덕에는 40여 명이나 되는 학생들이 모여 들었다. 학생들은 서울 시내를 내려다보며 일제히 태극기를 흔들고 “대한 독립 만세”를 소리 높여 외쳤다. 여학생들의 독립만세 소리는 고요한 새벽 정적을 깨고 멀리 퍼져 나갔다. 3·1운동의 기억, 기념하기 배화여학교는 1898년 미국 남감리회 선교부 조세핀 캠벨(Josephine Eaton Peel Campbell) 선교사가 설립한 미션계 사립학교(그리스도교 계통의 선교를 목적으로 설립된 학교)이다. 1910년부터 배화학당 혹은 배화여학교로 불리다가 1926년에 배화여자고등보통학교로 승격되었다. 현재 종로구 필운동에 위치한 배화여자고등학교의 전신이다. 계몽운동가 남궁억이 1910년부터 8년간 교사로 재직하며 학생들에게 민족의식과 독립사상 고취에 힘을 기울인 학교이기도 하다. 이러한 영향을 받아 3·1운동 당시 배화여학교 학생들도 만세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학생대표를 중심으로 선언문을 등사하여 준비하고, 전교생을 동원시킬 연락망도 조직했다. 나라를 찾기까지 끊임없이 만세를 부르겠다는 굳은 각오였다. 학교 당국에 알려져서 실제 운동으로 이어지지는 못했으나 배화여학생들의 항일정신은 다음 해 기념일 투쟁으로 이어졌다.일제시기 독립운동가들은 ‘기념일 투쟁’을 통해 과거의 역사를 새롭게 해석하고 재현하여 역사적 전통을 만들어갔다. 그 최초의 사건이 3·1운동이다. 3·1운동에서 수많은 사람이 희생당했지만, 그 정신은 기억과 기념으로 재현되어 역사화 되었다. 상하이 임시정부는 1920년 3월 1일 독립선언 1주기 기념식을 거행하여 희생자를 기리고 독립운동의 투지를 다졌다. 국내 활동가들뿐만 아니라 일본과 미주 등 독립운동 단체가 있는 곳은 어디서나 3·1운동을 기념했다. 3·1운동에서 주축이 되었던 학생들도 독립운동의 불씨를 살리려는 의지로 기념식을 거행했다.  혹독한 취조, 멀리 미국까지 알려지다 배화여학교 학생들의 만세소리가 이어지자, 관할 종로경찰서에서 즉각 출동했다. 경찰은 시위 학생 전원을 학교 기도실에 가둬 놓고 한 명씩 불러내 심문을 시작했다. 신문기사는 당시 상황에 대해 ‘경찰은 선동 주모자를 극력 탐색 중이고 엄중히 취조를 계속하고 있다’라고 썼다. 주모자 색출을 위해 학생들을 어떻게 다루었을지 짐작이 가는 표현이다. 그러나 협박과 위협 속에서도 학생들은 단 한 명도 경찰의 심문에 굴복하지 않았다. 학생들이 조사에 응하지 않자 결국 경찰은 상대적으로 나이가 많고, 특히 ‘반항적인’ 학생을 중심으로 총 24명을 연행했다.학생들은 오랜 시간 혹독한 취조를 받은 후 검사국으로 넘겨졌다. 사람들은 어린 여학생들이 포승줄에 묶여 서대문감옥으로 이송되는 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보았고, 어떤 사람들은 만세를 불러 호응해주기도 했다. 24명의 학생 전원이 구속 기소되었는데, 당시 이렇게 많은 여학생이 무더기로 구속된 것은 흔치 않은 일이었다. 배화여학교 학생들의 재판 소식은 장안에 화제가 되어 『매일신보』 등 여러 언론에서 대서특필되었고 멀리 미주지역 신문인 『신한민보』에도 관련 기사가 실렸다.  alt 『매일신보』 (1920.3.8) 징역형을 선고받은 어린 여학생들 배화여학교 학생 24명의 판결은 4월 5일 이루어졌다. 이들의 판결문에는 “만세를 고창하여 3·1독립운동에 찬성한다는 의사를 표현하려고 시위운동을 벌였다”라고 쓰여 있다. 3·1운동 정신을 다시 환기하고 이어가겠다는 의지가 분명히 드러난다. 구속 기소된 학생은 서울 출신 4명을 포함하여 강원, 황해, 경기 등 각지에서 올라와 학업에 정진하던 학생들이었다. 운동을 주도했던 김경화가 만 18세로 가장 나이가 많고, 대부분은 15~16세였으며 만 14세인 학생도 3명이 있었다. 지금의 중학생 정도인 어린 여학생들이 만세시위에 참여하여 엄혹한 경찰 심문과 힘겨운 감옥생활을 겪게 된 것이다. 학생 24명은 징역 6개월 내지 1년을 선고받고 집행유예로 석방되었다. 경찰은 주모 학생을 퇴학 처분하고 엄중히 처벌할 것을 학교 측에 요구했으며, 당시 교장이었던 스미스(Bertha A.Smith)는 그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여성의식의 성장, 확산된 항일정신 다른 사회운동 분야도 그렇지만 여성들의 정치의식은 3·1운동 전과 후로 나뉠 만큼 3·1운동을 계기로 크게 성장했다. 3·1운동에 농민, 노동자, 지방 유생, 종교인 등 모든 계층이 참여했지만, 특히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학생층이었다. 도쿄 재일한국유학생의 2·8독립선언은 3·1운동의 기폭제였다. 또한 학생들은 3·1운동의 계획 단계부터 참여하여 만세운동을 촉발시키고 대중화하는데 선도적 역할을 했다. 근대교육을 받고 성장한 여학생들 역시 만세운동 과정에서 대단히 용감한 활동을 보여주었다. 3·1운동의 상징으로 언급되는 유관순 열사를 비롯하여 각 학교 여학생들이 시위운동에 참여했다. 이 경험을 통해 여성들은 근대적인 국가관과 민족관을 인식하면서 독립운동과 사회운동의 주체로 성장하게 되었다. 배화여학교 학생들의 ‘3·1운동 기념일’ 투쟁은 3·1운동의 연장선에서 여성들이 독립운동의 주역으로 성장하는 과정을 보여준 대표적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여성 독립운동가 발굴의 의미 2023년 현재 독립유공자로 포상된 17,748명 중 여성은 639명에 불과하다. 여성들의 활동은 드러나지 않는 경우가 많을 뿐 아니라 활동 이후 행적을 확인하기 어렵기 때문에 포상에서 제외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고자 독립운동가 자료발굴TF팀은 여성 독립운동가를 한 명이라도 더 발굴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그 일환으로 ‘3·1운동 기념일’ 투쟁으로 구속된 배화여학교 학생 24명을 발굴하여 포상 추천하였으며, 그 중 19명에게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 Wed, 07 Jun 2023 15:44:10 +0000 79 <![CDATA[사(史)적인 여행 한국의 독립을 도운 이방인의 발자취 서울 ‘행촌동’ 일대]]> 사(史)적인 여행한국의 독립을 도운 이방인의 발자취 서울 ‘행촌동’ 일대   글·사진 박광일 (역사여행작가·여행이야기 대표)   한양도성 서쪽에 자리한 종로구 행촌동 일대에는 이방인들의 흥미로운 이야기가 곳곳에 숨어있다. 머나먼 낯선 땅에서 그들이 무엇을, 어떻게, 왜 지키고자 했는지 그 발자취를 따라가 본다.   독립선언서를 세계에 알린 앨버트의 가옥, 딜쿠샤 외국인 독립운동가의 흔적을 처음 찾아볼 곳은 행촌동이다. 이곳의 옛 명칭은 은행동으로, 권율 장군 집터를 지키고 있는 은행나무 덕분에 이러한 이름이 붙었다. 이후 일제강점기에 동명이 통폐합되었는데, 이때 은행동과 근처의 신촌동이 합쳐지면서 지금의 행촌동이 되었다.  권율 장군 집터 옆에는 붉은 벽돌로 지은 서양식 2층 가옥이 있다. 바로 ‘딜쿠샤’이다. 약 80년 가까이 방치되었던 딜쿠샤는 2006년이 되어서야 그 내력이 밝혀졌다. 딜쿠샤(DILKUSHA)는 페르시아어로 ‘기쁜 마음’이라는 뜻으로, 앨버트 W. 테일러(이하 앨버트)와 메리 L. 테일러(이하 메리) 부부가 살던 집의 이름이다. 앨버트 부부는 1923년 공사를 시작하여, 1924년 딜쿠샤를 완공하였다. 1942년 일제가 테일러 부부를 추방한 후 딜쿠샤는 동생 윌리엄 W. 테일러가 잠시 관리하였다. 이후 딜쿠샤는 개인을 거쳐 국가가 소유하게 되었지만, 오랜 기간 방치되어 본모습을 잃게 되었다.  그러던 중 2006년 앨버트의 아들인 브루스 T. 테일러가 66년 만에 자신이 어린 시절에 살던 딜쿠샤를 방문하였고, 딜쿠샤는 그렇게 다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2018년 건물의 원형을 복원하는 공사를 시작하였고, 2021년 당시의 모습을 구현하여 전시관을 개관하였다. 딜쿠샤의 사연은 단지 한국에 머물렀던 외국인 가족의 이야기에 그치지 않는다. 딜쿠샤의 주인이었던 앨버트는 1897년 조선에 들어와 연합통신 임시특파원으로 활동하며, 3·1운동과 제암리학살사건을 해외에 보도해 일제의 만행을 국제사회에 알리는 데 공헌하였다.  특히 1919년 아내 메리가 아들을 출산할 당시 앨버트는 세브란스 병원 침상에 숨겨져 있던 독립선언서 사본을 발견하고 일제의 눈을 피해 전 세계에 알렸다. 앨버트는 동생을 통해 구두 뒤축에 독립선언서를 숨겨,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선언서를 전달하도록 했다. 이는 당시 한국인의 독립에 대한 열망을 널리 알려야 했던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다.  1942년 일제는 우리나라에 머물던 외국인을 추방했고, 앨버트 가족도 이를 피할 수 없었다. 일제의 추방령을 거부하다가 서대문형무소에 갇히기도 했던 앨버트는 싱가포르를 거쳐 미국 캘리포니아로 돌아갔다. 이후 1948년 캘리포니아에서 생을 마감한 그는 “자신의 유해를 한국에 묻어 달라”고 유언하였고, 이에 따라 그의 유해는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 안장되었다. alt 딜쿠샤 외관(좌), 딜쿠샤 내부(우) 주소 & 관람시간 & 문의 & 관람료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로2길 17  |  오전 9시~오후 6시  |  070-4126-8853  |  무료 * 매주 월요일 정기휴관 한국의 독립과 언론 자유를 위해 활약한, 어니스트 베델 집터 딜쿠샤 근처에서 우리나라에서 언론인으로 활동했던 또 다른 인물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바로 ‘어니스트 베델 집터’이다. 딜쿠샤에서 시내 쪽으로 나오면 한양도성의 성벽을 따라 펼쳐진 길이 있는데, 이 길을 걷다 보면 이국풍의 붉은 벽돌집 한 채를 만날 수 있다. 바로 ‘홍난파 가옥’이다. 이 가옥 앞으로 난 계단을 오르면 월암근린공원에 자리한 베델의 집터를 알려주는 표석을 찾을 수 있다.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특파원으로 내한한 베델은 양기탁 등 한국 독립운동가들의 손을 잡고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하였다. 그가 발행인으로 내세워진 것은 일제의 검열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일본과 영국은 동맹국이었기 때문에 일제는 영국인이었던 베델을 쉽게 검열하지 못하였다. 베델은 『대한매일신보』를 통해 을사늑약의 무효를 주장하였으며, 『코리아 데일리 뉴스』를 발행하여 『황성신문』에 실렸던 장지연의〈시일야방성대곡(일본의 을사늑약 강요를 비판한 기사)〉을 영어로 싣기도 했다. 또한 광무황제의 친서를 영국 『트리뷴』에 게재하는 등 나라 안팎에 일본의 침략행위를 폭로하는 언론 활동을 벌였다. 『대한매일신보』와 관련하여 중요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국채보상운동이다. 일제는 한국의 재정을 잠식하고 경제적 영역에서 영향력을 높이기 위해 몇 차례에 걸쳐 차관을 제공하였다. 이에 많은 한국인은 경제적 침탈에서 벗어나는 것이 일제 침탈에서 벗어나는 방법이라고 여기며 국채보상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이 과정에서 언론의 역할이 컸다. 국채보상운동의 취지와 관련된 기사를 싣거나 의연금 납부에 대한 여러 사연을 담은 기사를 게재하며, 의연금을 수탁하는 기관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하였다. 이후 일제의 압박에 의해 국채보상운동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10여 년 뒤 3·1운동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이처럼 베델과 『대한매일신보』의 영향력이 커지자, 일제 통감부는 이전부터 영국에 요구해 온 ‘베델 추방령’을 강하게 요청하였다. 이에 따라 열린 여러 번의 재판으로 베델은 정신적·신체적으로 피폐해졌고, 결국 1909년 37살의 젊은 나이로 숨을 거두고 말았다. 베델의 유해 역시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 안장되었다. 일제는 장지연이 쓴 베델의 비석에 새겨진 비문을 지우고 훼손하는 만행을 저질렀는데, 최근에 다시 복구하여 세워졌다. alt 어니스트 베델 집터 주소 서울특별시 종로구 송월동 1-2 희생과 저항정신을 몸소 보여준, 스코필드기념관 베델의 집터가 있는 곳에서 서대문 쪽으로 걷다 보면 ‘돈의문박물관마을’이 있다. 돈의문박물관마을은 서울의 근현대 모습을 몸소 체험할 수 있는 역사·문화 공간이다. 조선시대부터 현재까지 돈의문 일대의 역사와 문화를 전시한 공간을 비롯하여, 7080세대가 어릴 적 이용했던 학교 앞 분식점이나 만화방 등 추억을 소환할 수 있는 장소가 많다. 특히 각각의 집과 건축물은 여러 주제를 가진 전시관 혹은 체험 공간으로 쓰이고 있는데, 그 가운데 한 곳에 ‘스코필드기념관’이 있다.  스코필드는 1916년 캐나다장로회 소속 선교사로 한국이 일제의 억압 아래 있던 시기에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교수로 한국에 왔다. 그는 1919년 3·1독립운동 모습을 사진에 담아 이를 해외에 알려 34번째 민족대표로 불렸으며, 화성 제암리·수촌리 마을에서 자행된 학살현장을 직접 방문한 후 보고서를 작성해 일본의 비인도적인 행위를 해외에 폭로하기도 하였다. 일제의 불의에 맞서다 캐나다로 돌아간 스코필드 박사는 1958년 다시 한국에 돌아와 3·1만세운동 정신을 강조하며 독재 정부를 비판하고, 한국 사회의 부패와 부정과 맞서 싸웠다. 이후 스코필드는 한국의 가난한 학생들과 고아들을 돌보는 데 남은 일생을 바쳤고, 1968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을 받았다. 스코필드는 1970년 4월 12일 “내가 죽거든 한국 땅에 묻어주오”라는 유언을 남기고 영면하여 국립 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스코필드기념관은 그리 넓지 않지만, 스코필드가 한국 독립을 위해 펼쳤던 주요한 활동을 한 눈에 살펴볼 수 있는 공간이다. 민족대표 이갑성에게 요청을 받고 3·1운동 모습을 사진으로 기록한 일, 제암리학살사건을 취재하고 사진으로 남긴 일 등 스코필드의 희생과 저항정신을 만나볼 수 있다. 스코필드가 강조한 3·1정신은 오늘날 부패와 불의에 대한 저항정신, 정신적 독립과 진정한 자유의 의미, 사회적 약자와 빈자들에 대한 배려 등의 의미를 되새기는 출발점을 제공해 줄 것이다. alt 스코필드기념관(좌), 돈의문박물관마을전경_돈의문박물관마을 제공(우) 주소 & 관람시간 & 문의 & 관람료  서울특별시 종로구 새문안로 35-40  |  오전 10시~오후 19시  |  02-739-6994  |  무료 * 매주 월요일 정기휴관   ]]> Wed, 07 Jun 2023 16:03:09 +0000 79 <![CDATA[이벤트 공지 행운의 주인공이 되어보세요!]]> 이벤트 공지행운의 주인공이 되어보세요!   alt   ]]> Wed, 07 Jun 2023 16:37:14 +0000 79 <![CDATA[이달의 기념관 독립기념관 교육프로그램 ‘찾아라 독립군!’ 현장 속으로]]> 이달의 기념관독립기념관 교육프로그램‘찾아라 독립군!’ 현장 속으로   글 편집실사진 이소연   독립기념관은 민족 정체성을 확립하고 올바른 국가관을 갖도록 다채로운 교육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어린이·가족·청소년 교육, 일반인·전문가 교육, 재외동포·외국인·문화다양성 교육 등 다양한 대상을 위한 교육을 제공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중 지난 5월 5일부터 7일까지 진행한 ‘찾아라 독립군!’ 현장을 찾아 참여한 가족들의 소감을 들어보았다.   태블릿PC를 활용한 체험교육, 찾아라 독립군! 지난 5월 5일부터 7일까지, 독립기념관은 어린이·가족 관람객을 대상으로 전시관을 유익하게 살펴볼 수 있는 ‘찾아라 독립군!’ 교육프로그램을 실시하였다. ‘찾아라 독립군!’은 독립군을 주제로 태블릿PC를 활용하여 제5관(나라되찾기)의 주요 자료를 살펴보며 문제를 해결하는 프로그램으로 당일 무료 접수로 이루어졌다. 먼저 참가신청서를 작성한 참가자들은 체험활동 교구인 태블릿PC를 무료로 대여받고 제5관을 자유롭게 둘러보며 조국 독립을 위해 항일무장투쟁을 펼친 독립군에 대해 알아보고 그와 관련된 문제를 적극적으로 풀어나갔다. 미션 완료 후 태블릿PC를 반납한 참여자들에게는 소정의 기념품인 한국광복군 배지를 지급하였다.독립기념관 관계자는 “아이들뿐만 아니라 가족 모두에게 의미 있는 시간이 되었길 바란다”며, “이 밖에도 다채로운 교육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으니 많은 참여 바란다”고 전했다. alt   항일무장투쟁 속으로, 제5관 ‘나라되찾기’ 제5관 ‘나라되찾기’는 일제강점기 조국독립을 되찾기 위해 국내외 각지에서 전개된 항일무장투쟁을 주제로 하는 전시관이다. 1910년 전후 시기부터 중국 만주 지역 등에서 일제와 무장투쟁을 벌인 독립군의 활동, 개인 또는 단체를 이루어 일제의 침략기관과 주요 인물을 처단한 의열투쟁, 그리고 중국 관내에서 결성된 조선의용대와 한국광복군의 활동 등을 살펴볼 수 있다.전시관은 ‘광복을 위한 항일무장투쟁’, ‘항일투쟁의 깃발을 드높인 독립군단’, ‘피 끓는 애국지사들의 의열투쟁’, ‘광복 직전 해외 무장투쟁’, ‘겨레의 불꽃’과 같이 총 5개 존으로 나누어져 있다. 꼭 봐야 할 주요 자료로는 독립군이 일본군을 상대로 승리를 이끈 봉오동전투와 청산리 전투를 재현한 모형과 광복 직후 한국광복군 제3지대 2구대 대원들이 조국의 완전 독립을 염원하는 글귀와 서명을 남긴 태극기 등이 있다. alt   어린이와 가족을 위한 공휴일·주말 교육프로그램 ‘찾아라 독립군!’ 외에도 독립기념관은 어린이·가족 관람객을 대상으로 공휴일과 주말에 즐길 수 있는 다양한 교육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전시 연계 활동 ‘발견! 대한민국 임시정부 이야기’, 어린이와 가족을 위한 강의 및 체험교육 ‘토요역사체험’ 등 매월 새로운 교육을 만날 수 있다. 독립기념관 관계자는 “앞으로도 어린이·가족 관람객들이 공휴일을 활용해 독립기념관에서 유익한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프로그램을 계속 확대할 예정이다”라고 밝혔다. alt   ]]> Wed, 07 Jun 2023 16:17:29 +0000 79 <![CDATA[이달의 관람객 독립기념관 교육프로그램 ‘찾아라 독립군!’ 관람객 인터뷰]]> 이달의 관람객독립기념관 교육프로그램‘찾아라 독립군!’ 관람객 인터뷰   글 편집실사진 이소연   alt   참가자 임윤지, 임윤서 님 나라를 위해 희생하신 윤봉길 의사, 안중근 의사, 김상옥 의사 등 멋진 영웅들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되었고, 한국사를 배울 때 많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앞으로도 독립기념관에 자주 오고 싶어요! alt   독립기념관 교육서포터즈 ‘독립알리샘’ 김혜숙 님 안내가 끝나면 “감사합니다”라고 크게 인사하는 아이들을 보며 힘을 얻었습니다.  특히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궁금한 역사에 대해 물어보는 아이들을 만날 때면 ‘우리나라의 미래가 밝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alt   참가자 이수근, 이승원 가족 엄마 아빠와 함께 문제도 풀고 역사도 배우는 즐거운 시간이었어요.  처음 들어본 이름과 이야기가 많아서 어려울 줄 알았는데, 태블릿PC를 꼼꼼히 읽다 보니 쉽고 재미있었어요! 특히 청산리전투가 인상적이었답니다.   ]]> Wed, 07 Jun 2023 16:24:29 +0000 79 <![CDATA[#월간독립기념관 지난 호 독자 후기 이벤트 당첨자 발표]]> #월간독립기념관지난 호 독자 후기 이벤트당첨자 발표   ※ 당첨자 5명에게 모바일 커피쿠폰(아메리카노)을 전달할 예정입니다. 참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alt   ]]> Wed, 07 Jun 2023 16:31:37 +0000 79 <![CDATA[몸과 마음으로 만나는 청주의 역사와 자연 충청북도 청주시 ]]> 글 · 사진 김초록 여행칼럼니스트몸과 마음으로 만나는 청주의 역사와 자연충청북도 청주시청주는 충청도의 중심지다. 청원군과 통합되면서 새롭게 주목받고 있는 청주는 어디서나 쉽게 오갈 수 있는 교통 요지로, 땅길(중부고속도로·경부고속도로·청주상주고속도로), 하늘길(청주공항), 철길(청주역·오송역)이 고루 발달해 있어 하루만에도 다녀올 수 있다. alt 시민들의 휴식처인 가로수길과 무심천고속도로에서 빠져나와 청주의 관문인 가로수길로 들어선다. 길 양쪽으로 싱그러운 플라타너스(양버즘나무)들이 쭉쭉 늘어선 이 길은 경부고속도로 청주 나들목에서 가경천 죽천교까지 뻗어 있다. 훤칠한 키와 굵은 둥치의 나무들이 차창 밖으로 휙휙 지나간다. 우리나라 가로수길 중 가장 아름답다는 플라타너스 터널은 종종 달력 사진이나 광고에 등장해 눈길을 끌기도 하는데 전망대에서 바라보면 운치와 멋이 한층 살아난다.청주 시가지를 가로지르는 무심천도 가로수길 못지않게 아름답다. 사철 독특한 색깔로 옷을 갈아입는 곳으로 청주시민들의 휴식처요, 자연학습장이다. 생태 복원으로 다시 살아난 무심천엔 물고기가 눈에 띄게 늘었고, 철따라 들꽃이 피어나는가 하면 겨울엔 철새들의 날갯짓이 장관을 이룬다. 무심천은 청원에서 발원해 남서쪽으로 흘러 남일면 상대리에서 북쪽으로 방향을 튼다. 그 다음 청주시내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미호천에 합류, 다시 금강을 거쳐 서해에 이르기까지 전체 길이 34.5km의 생태하천이다.         alt 플라타너스 가로수길 alt 무심천 alt 걷는 재미가 있는 상당산성 둘레길청주 시가지를 굽어보는 상당산성은 백제시대의 상당현(上黨縣)에서 유래된 곳이다. 벽면을 수직으로 잇고 그 안쪽에 토사를 쌓아 올린, 이른바 ‘내탁공법’으로 축조했다. 동·서·남쪽에 문루를 갖춘 3개의 문이 있고, 2개의 암문(비상구)인 동암문·남안문, 치성(雉城) 3개소, 수구(水口) 3개소가 있다. 상당산성의 정문인 공남문은 그 형태가 무지개처럼 생겼는데, 문 안으로 들어가 문루에 서면 들판이 한눈에 들어온다. 상당산성에서는 통일신라시대와 조선시대 것들로 추정되는 건물 터·기와·토기·자기 조각 등 빛바랜 유물들이 대량 발굴되기도 했다. 산성을 휘 돌아볼 수 있는 둘레길은 남문 주차장에서 시작해 남암문-서문-동암문-동문-동장대-남문으로 돌아온다. 산과 들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며 천천히 걷노라면 저절로 힐링이 된다.상당산성: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산성동         alt 상당산성 둘레길 alt 세계가 인정한 유산, 직지와 인쇄기술청주는 ‘직지(直指)’의 고장이기도 하다. ‘직지인심견성성불(直指人心見性成佛)’에서 따온 직지는 사람의 마음을 바르게 볼 때 그 마음의 본성을 깨닫게 된다는 뜻이 숨어 있다. 금속활자의 발명은 지난 천 년 동안 일어난 사건 중 가장 위대하다는 평을 얻고 있다.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본인 직지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건 그 뛰어난 가치를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옛 연당리 마을(운천동)에 들어선 청주 고인쇄박물관과 흥덕사지는 금속활자의 우수성과 역사적 배경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곳이다. 고인쇄박물관에 들어서면 직지의 제작과 인쇄과정을 모형으로 볼 수 있고, 국내외 인쇄문화의 발달사도 자세하게 살필 수 있다. 고인쇄박물관이 소장하고 많은 유물 중 직지를 인쇄할 때 썼던 『자비도량참법집해(慈悲道場懺法集解)』 『신편산학계몽(新編算學啓蒙)』 『노자권재구』 등 3종 6점은 보물로 지정돼 있다.청주 고인쇄박물관 :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직지대로 713 / 043-201-4266 / jikjiworld.cheongju.go.kr alt청주 고인쇄박물관 alt 사철 수려한 대청호를 따라가면서 보라이번에는 중부 내륙의 생명수인 대청호(대전과 청주의 첫 글자를 따서 붙인 이름)로 간다. 푸른 물을 가득 담고 있는 대청호를 바라보면 마음이 맑아진다. 옥빛 물과 쪽빛 하늘 그리고 여기저기 피어나는 들꽃의 조화가 참으로 아름답다. 대청호는 금강의 한가운데 댐을 막아 만들어진 거대한 호수로, 중부권에서는 충주호 다음으로 크다. 수많은 철새와 물고기들의 보금자리이자 온갖 들꽃이 피어나는 자연학습장으로 긴 세월 한결같이 보존되어 왔다. 대청호 풍경은 현도면 하석리 산자락에 올라앉은 현암사에서 보아야 제대로 즐길 수 있다. 신라 때 세워진 자그마한 현암사에 가려면 가파른 철계단을 10분 정도 힘겹게 올라가야 하지만 암자에 발을 딛는 순간, 시원한 절경이 펼쳐진다.현암사를 지나 문의면 쪽으로 10분쯤 달리면 왼쪽 양성산 자락으로 문의문화재단지가 보인다. 1979년 대청댐 건설로 수몰될 뻔했던 문화재를 한데 모아 옮겨놓은 곳으로, 급속한 산업화로 인해 사라져 가고 있는 우리 고유의 전통문화를 느낄 수 있는 역사교육장이다. 단지 안에서 바라보는 대청호 전경도 멋스럽다.현암사: 충청북도 청주시 서원구 현도면 대청호반로 151 문의문화재단지: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문의면 대청호반로 721 / 043-201-0915 / www.cheongjutour.com/cheongjutour/tour/tour04/ alt 대청호 alt 오랜 전설을 간직한 옥화9경문의에서 청주의 동쪽인 미원면으로 가면 9개의 절승이 기다리고 있다. 이름하여 옥화9경이다. 달천을 따라 펼쳐지는 절승마다 주저리주저리 얽힌 전설이 재미있다. 제1경인 청석굴은 구석기시대의 주거지로, 옛날 굴 안에서 용이 나왔다는 전설을 갖고 있다. 사람 한 명이 겨우 지나갈 정도로 비좁은 굴천장에선 얼음처럼 차가운 물이 뚝뚝 떨어진다.제2경은 달천변에 있는 용소(龍沼)다. 어느 날 이곳을 지나가던 한 여인이 깊은 연못에 살던 용이 하늘로 올라가는 모습을 보고 말았는데, 이를 눈치 챈 용이 그만 떨어져 이무기가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움푹 파인 암벽 아래로 흐르는 물은 달천 중에서도 수심이 가장 깊다. 여름철이면 용소 인근 달천은 발을 담그고 노는 피서객들로 제법 붐빈다. 용소를 지나 조금 더 내려가면 제3경 천경대·제4경 옥화대·제5경 금봉을 차례로 만날 수 있다. 제6경 금관숲은 수령 3백년은 됨직한 상수리나무들이 울창하게 숲 그늘을 드리우고 있어 한여름 더위를 피하기 그만이다. 이밖에도 제7경 가마소뿔·제8경 신선봉·제9경 박대소까지 9개의 경치를 다 채우는 재미를 느껴보는 것도 좋겠다.청석굴: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미원면 운암리용소: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미원면 옥화리         alt 제1경 청석굴 alt 제2경 용소 alt 애국지사를 많이 배출한 고장청주는 손병희·신채호·권병덕·한봉수 등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을 배출했다. 우암산 자락에 있는 삼일공원과 문의문화재단지에서는 애국애족을 몸소 실천했던 청주지역 선열들의 동상을 세워 넋을 기리고 있다. 일제강점기 민족대표 33인에 뽑힌 손병희는 3·1운동을 주도했다. 동학혁명 때는 10만 민중을 이끌고 관군과 싸웠으며 이후 천도교의 지도자로 제3세 교주를 지내기도 했다. 그가 태어나고 자란 북이면 금암리에는 생가를 중심으로 그의 영정을 봉안한 영당과 기념관이 마련돼 있다. 권병덕 또한 손병희와 함께 독립만세운동에 동참했던 인물이다. 그 역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태화관에서 진행된 독립선언식에 참여할 정도로 애국혼이 투철했다. 그는 독립선언 직후 일본 경찰에 잡혀 2년형을 언도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언론인으로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신채호를 모신 사당엔 그의 영정을 봉안한 단재영각(丹齋影閣)이 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신채호는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의 주필로 활약하면서 민족혼을 지키기 위해 힘썼다. 사당 뒤쪽에 그의 묘소가 있고, 청주예술의전당에서 동상을 볼 수 있다.내수읍 학평리에는 의병장 한봉수의 묘소와 사당이 있다. 17세부터 명포수로 이름을 떨쳤다는 한봉수는 일본군 헌병 중위 시마자키 등 3명을 사살했는가 하면, 노획한 무기로 3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미원·진천·횡성·장호원 등지로 진출해 큰 공을 세웠다. 삼일공원에는 한봉수 동상이, 중앙공원에는 송공비가 세워져 있다. 다 언급할 수는 없지만 이밖에도 실력양성운동·계몽운동·만세운동을 적극적으로 펼친 애국지사들이 많다는 점은 무엇보다 청주의 크나큰 자긍심일 것이다. 청주를 빛낸 독립운동가들은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귀감이 되고 있으니 말이다.삼일공원: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수동 159-1         alt삼일공원에 있는 독립운동가 동상alt단재영각(丹齋影閣) alt 한봉수 사당                     김초록여행칼럼니스트 겸 수필가. 현재 『월간 비타민』, 『건설경제신문』, 『서울우유』, 『냉동공조신문』에 객원기자로 활동 중이다. 여행 저서로는 『여름 이야기』, 『7가지 테마가 있는 여행』 등이 있다. ]]> Wed, 02 Aug 2017 16:14:05 +0000 8 <![CDATA[숫자로 보는 독립기념관 ]]> 국민의 성금으로 세워진 독립기념관. 개관 30주년이 되기까지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루며 명실상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국민교육기관으로 자리매김했다. 독립기념관이 이루어온 과거와 현재를 숫자를 통해 한눈에 담았다. alt]]> Wed, 02 Aug 2017 11:01:55 +0000 8 <![CDATA[우리의 울림은 계속되어야 한다 영화 <소리굽쇠> ]]> 글 편집실우리의 울림은 계속되어야 한다영화 <소리굽쇠>감독: 추상록주연: 조안, 이옥희, 김민상개봉일: 2014년 10월 30일지난 7월 23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중 한 분인 김군자 할머니가 별세하였다. 이로써 정부에 등록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가운데 생존자는 37명으로 줄었다. 이러한 가운데 위안부 문제는 여전히 그 해결이 순탄치 않다. 국내 최초로 위안부 피해자를 소재로 다룬 극영화 <소리굽쇠>를 통해 그들이 감내해야 했던 고난을 다시금 되새겨보자.                     Q. 마음의 상처는 시간이 지나면 다 나을까?중국 땅에서 외롭게 손녀 향옥과 살아가는 할머니 귀임은 방직공장에 취직시켜준다는 일본군의 말에 속아 어린 나이에 중국으로 끌려와 일본군 위안부로 지내야 했던 아픔을 안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광복된 이후에도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귀임은 수십 년이 흘러서도 밤마다 일본군이 횡포를 부렸던 그때의 악몽에 시달린다.2015년 여성가족부가 위안부 피해자 17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조사 결과, 15명(88.2%)이 PTSD 위험군으로 분류됐다. 또한 절반가량(47.1%)이 “지금도 위안부와 관련된 악몽을 꾼다”고 답했으며, 위안부 때의 기억을 떠올리면 심장이 뛰거나 진땀이 나는 등의 신체적 반응과 불면증을 호소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이는 위안부 피해자들의 아픔이 지나가버린 과거가 아닌, ‘현재진행형’이라는 점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altalt          Q. 귀임의 인생과 닮은 할머니들을 본 향옥의 마음은 어땠을까?과거의 아픔 속에 머물러 있는 할머니가 안타까웠던 향옥은 할머니를 고향으로 꼭 모셔오겠다고 다짐한다. 그리하여 도착한 한국에서 향옥은 위안부 관련 학술 세미나에 참석하게 되고, 전시관에서 자신의 할머니와 같은 슬픔을 간직한 피해자 할머니들의 사진을 마주한다. “위안소에서 하루 40여 명을 상대했고, 죽지 않을 만큼 맞았다.” 생전 故김군자 할머니의 증언이다. 17살의 나이로 중국 지린성 훈춘 위안소로 강제 동원되었다는 김군자 할머니는 탈출에 번번이 실패하고 그때마다 심한 폭행을 당해 평생 한쪽 귀가 들리지 않았다. 3년간의 위안부 생활 동안 7차례나 자살을 기도했다. 현재 남아 있는 위안부 피해자들의 평균 나이 91세. 일본 정부의 사과는 요원해 보이는 가운데, 이대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것은 아닌지 조급한 마음이다.         altalt           Q. 위안부 피해, 이제 과거의 일이다?어느 날 중국에 남아있는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귀국을 돕겠다며 한국에서 사람들이 찾아왔다. 그러나 귀임 할머니는 기뻐하기는커녕 오히려 서글퍼진다. “중국 땅에서 소외받고 서러우셨던 거 조금이라도 보상받으셔야죠.” “어떻게 보상해? 내 청춘을 돌려주겠소?”시간은 되돌릴 수 없다. 악몽 같았던 기억 또한 없던 일이 될 수는 없다. 그러나 상처 위에 약을 바를 수는 있고, 아픔이 다시 반복되는 것을 막을 수는 있다. 그들이 계속해서 자신들이 받았던 상처와 마주하기를 멈추지 않는 것은 아직 정당한 사과를 받지 않았기에 눈 감을 수 없음이요, 자신들이 나서지 않으면 언제고 이 끔찍한 비극이 반복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altalt            Q. 소리굽쇠가 가진 의미는 무엇일까? 잠깐이나마 행복했던 한때. 교회에서 피아노를 치고 있는 어린 귀임에게 소년 영준이 다가온다. 영준은 피아노 음을 조율하기 위해 들고 있던 소리굽쇠를 귀임에게 보여주는데…. “하나만 울렸는데 같이 다른 것도 진동하지? 소리굽쇠끼리는 같이 울거든.” 세월이 흘러 백발이 성성해진 귀임은 소중히 간직해온 소리굽쇠를 손녀 향옥에게 건넨다. 두 갈래로 된 쇠막대인 소리굽쇠는 한쪽이 울리면 다른 한쪽도 같이 공명하는 음향 측정기구다. 소리굽쇠가 가진 ‘공명’의 특징은 곧 ‘공감’을 뜻한다. 감당할 수 없는 고통에 숨죽여 울 수밖에 없었던 이들의 울음에 같이 우는 것, 용기 내어 꺼낸 목소리에 함께 외치는 것. 위안부 피해자들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첫발은 바로 공감이다. 70여 년의 세월이 흘러서도 멈추지 못한 그 울림에 우리의 공명은 계속되어야 한다. ]]> Thu, 03 Aug 2017 10:56:20 +0000 8 <![CDATA[‘신출귀몰한 농민의병장, 김수민’ ]]> 글 학예실신출귀몰한 농민의병장김수민(金秀敏, 1867~1909.12.17)독립기념관은 국가보훈처·광복회와 공동으로 김수민을 8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그는 뛰어난 전술로 일제의 눈을 피해 활발하게 독립운동을 펼쳤던 대표적인 농민의병장이다. alt 농민의병장 김수민의 독립운동일찍이 동학농민운동에 참여하여 반일투쟁을 경험한 김수민은 1907년 고종황제의 강제퇴위와 대한제국 군대 해산을 계기로 의병활동에 나섰다. 그해 9월 2일 자신이 거주하고 있던 장단군 북면 솔랑리에서 인근의 산포수와 농민들을 중심으로 300여 명의 의병을 모집하였다. 의병부대는 개성군 대흥산 창고에 보관 중이던 정부 소유의 대포 30문과 소포 150문을 빼앗아 무장하였고, 이후 병력을 장단군 덕음동으로 이동시켜 그곳을 거점으로 군량을 비축하였다. 또한 김수민은 보부상들을 정보대(情報隊)로 이용하여 주변뿐만 아니라 먼 지역 일본군 정보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의병들의 보호와 전투력 향상을 위해 복장을 송백(松柏)의 위장색으로 염색하도록 하였다. 군수품을 보급하는 데 있어서는 어려운 농민들에게 도움을 요구하지 않고, 부자들의 쌀과 옷을 징발하였다. 의병부대를 이동시킬 때도 농민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하여 그들을 보호하고자 하였다. 의병부대의 조직과 무장을 강화한 김수민은 경기 장단·마전 지역을 중심으로 700명의 의병을 지휘하여 1907년 10월 고랑포(高浪浦) 헌병분파소를, 11월에는 풍덕군 영비포(領非浦) 헌병분파소를 공격하여 불태웠다. 1908년 초에는 서울진공작전에 참여하기 위해 13도창의대진소 연합의병에 가담하였다. 하지만 1908년 2월 서울진공작전이 좌절되자, 이후 김수민은 의병부대를 이끌고 장단군 방면으로 되돌아와 유격전을 기본 전술로 하는 의병부대로 재편성하였다. 1908년 4월 20~30명의 유격대를 이끌고 구화장(九化場) 헌병분파소를 공격했으며, 10월에는 근거지를 점차 남쪽으로 이동시켜 강화도를 기습 공격하는 등 활발한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큰 피해를 입은 일본군은 그해 11월 대대적인 의병탄압작전을 펼쳤고, 이로 인해 김수민이 지휘하는 의병부대의 활동은 전에 비해 침체되었다.         alt 일제가 고종황제를 강제퇴위시킨 양위조칙 반포에 관한 기사(대한매일신보 1907년 7월 19일)         alt대한제국군 해산에 항거한 1대대장 박승환의 자결순국으로 분개한 대한제국군이 일본군을 공격하는 장면을 그린 기록화  alt동학농민군 백산봉기 기록화(1894년) 새로운 항일투쟁의 시도와 순국 김수민은 일본군 정세를 보다 정확하게 파악하고, 총기 및 군수품을 구입하기 위해 서울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경부(京部) 이화령(梨花寧)과 북부(北部) 제동(齊洞)에 거주하며 인력거꾼(車夫)으로 위장하여 활동하면서 자신이 이끌던 의병부대의 지휘를 동생이자 선봉장이었던 김백수에게 담당케 하였다. 그러나 활동상황이 일본경찰에 포착되어 김수민은 1909년 8월 12일 오후 1시 부하 2명과 함께 붙잡히게 되었다. 체포 후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고 10월 14일 교수형이 결정되어 그해 12월 17일 순국하였다. 정부는 김수민의 공적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alt13도창의대진소 서울진공작전 모형alt김수민이 활약했던 강화도 남문 alt김수민을 비롯한 의병장들의 항쟁을 기록한 『정미의요창의록(丁未義邀彰義錄)』alt김수민 판결문(1909년 10월 14일) ]]> Thu, 03 Aug 2017 10:54:57 +0000 8 <![CDATA[‘신사참배 거부’의 격랑에 몸을 던진 여교사, 김두석 ]]> [우리가 몰랐던 이야기]글 심옥주 한국여성독립운동사연구소장‘신사참배 거부’의 격랑에 몸을 던진 여교사, 김두석김두석은 1915년 11월 경남 마산 성호동에서 독실한 기독교 교인인 부친 김규태와 모친 허영 사이에 태어났다. 일찍이 종교와 근대교육의 영향을 받은 그녀는 일제의 식민정책에 대해 비난하기를 마다하지 않았던 당당한 여성독립운동가였다. alt김두석alt신사참배 모습 신사참배는 국가의식인가, 우상숭배인가암흑의 시대, 평양의 신학교는 하나둘 문을 닫기 시작했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에 참석하는 이들은 예비검속을 받았다. 익숙한 이름의 주기철·송영길·채정민·이기선·한상동·주남선 목사 등이 예비검속을 통과하지 못할 경우 총회는 결렬될 위기였다.살벌했던 1938년 9월. 북장로교 선교사들은 신사참배에 반대하다가 추방당하고 말았다. 신앙의 순수성이 위배당하자, 이들은 만주·미국·캐나다·중국으로 발길을 돌렸다. 어려움은 계속됐다. 직장마저 쫓겨났고, 평양신학교는 폐교 결정을 내렸다. 그리고 신사참배에 반대하는 이들은 검속되어 형무소로 보내졌다. 조선에 대한 역사침탈을 넘어 조선인을 향한 정신침탈 그 자체였던 것이다.궁성요배(宮城遥拝)는 신사참배 수준을 넘는 동방요배(궁성요배)의 강요였다. 신사참배를 강제 국가의식으로 받아들인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이제는 일본 천황을 향해 충성을 맹세하고 큰절과 예배를 강요했다. 기미가요 제창·일장기 게양·충성 맹세 등 일제의 잔학한 횡포는 전국에 불어 닥쳤다. 교인들은 교회를 떠나 산과 토굴로 향했다. 산속, 집에서 철야기도, 금식기도를 하며 순교자의 길도 마다하지 않았다. 시대의 풍랑 속에 수많은 종교인들은 무기 없는 저항을 반복해야만 하는 운명이었다.고향 지역의 종교와 사회 인식에 영향을 받아 성장하다마산은 주기철, 한상동 목사 등 유명한 종교인들이 활발하게 활동했던 지역이다. 그 영향으로 지역 일대에는 남녀평등과 인간존중에 무게를 두고, 근대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사회인식이 확산되어 있었다. 자녀교육에 관심이 많았던 아버지와 유달리 일찍이 호기심이 강하고 공부에 대한 열정이 넘쳤던 김두석을 눈여겨 보던 교장은 그녀를 호주 선교사들이 운영하는 부산 동래일신여학교에 추천해 진학하게 했다. 1930년 3월 23일자 『동아일보』에는 의신여학교 우등 졸업생으로 언급된 김두석의 기사가 실렸다.1899년 마산포 개항 이후, 김두석은 경남의 해상상업중심지로 떠오른 마산과 해양관문인 부산을 오가며 문물 교류·종교 유입·한일상권 경쟁 등 시대변화를 고스란히 느끼며 성장했다. 또한 농촌지역을 중심으로 전개된 브나로드운동을 통해 민족의 현실을 직시하는 계기를 맞았다.김두석은 상급학교 진학을 꿈꾸었으나 경제적 한계에 부딪혀, 졸업 후 마산 의신학교에서 교편을 잡게 되었다. alt김두석이 의신여학교 우등졸업생으로 소개된 기사(동아일보 1930년 3월 23일자 기사) alt브나로드운동 관련 기사(동아일보 1932년 8월 4일자 기사) 신사참배 강요에 당당히 맞서다1937년 9월 조선총독부는 각 학교에 고시를 내렸다. 신사참배는 국가의 의식이니 각 교육기관에서는 교장과 교사들 인솔하에 전교 학생들이 신사에서 참배하도록 강요했다. 마산 의신학교에서 교사로 있던 김두석도 동일한 현실에 직면해 있었다. 교사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맞닥뜨린 신사참배 강요 명령은 김두석을 암흑의 소용돌이로 내몰았다. 교육계와 종교계는 즉각 반발하며 신사참배에 대한 반대의사를 표명했다. 평양의 숭실학교·숭실전문학교·숭의여학교 등이 뜻을 함께한 가운데 그녀도 신사참배 거부에 합류했다.“저는 신사참배를 할 수 없습니다.”“왜 못한다는 거지?”“우상숭배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제일 미워하시는 죄가 우상숭배의 죄입니다.”“그렇다면 내일부터 학교일을 그만두게.”경찰서 출두명령을 받고 연행되기를 수차례, 결국 5년간 몸담았던 학교에 사직서를 내고 말았다.비록 죽을지언정 의지를 꺾지 않다1939년 4월 주기철 목사의 가석방 이후, 김두석은 평양 여자신학원에 입학하였다. 기숙사는 새벽이면 일제의 감시를 벗어난 설교가 비밀리에 진행되었다. 의욕은 자유로운 설교와 독립을 향한 순수한 마음으로 가득찼으나, 긴장과 안도의 한숨이 반복되었다. 기숙사의 비밀수업은 사복경찰의 끈질긴 추적으로 좌절되기 일쑤였지만, 김두석의 신사참배 거부의지는 더욱 완강해졌다. 그리하여 1940년 5월 17일부터 1941년 7월 30일까지 신사참배 거부와 일제의 식민정책에 반대한 것으로 5회에 걸친 구금과 28일간의 수감생활을 겪었다. 그러나 이후에도 그녀의 굳은 의지는 꺾일 줄 몰랐다. 신사참배와 일본비판문제로 다시 체포된 그녀는 치안유지법 위반이란 죄목으로 1944년 9월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또 다시 옥고를 치렀다. 숨 막히는 감옥과 고문현장을 오가며 여간수의 채찍과 조롱, 모욕을 온전히 감내해야 했던 김두석의 젊은 날은 눈물과 땀으로 얼룩진 인생역정을 기록했다.학창시절 김두석의 동료였던 공덕귀(윤보선 전 대통령 영부인)는 “일제의 끈질긴 조롱과 모욕이 치욕스러웠지만 그래도 내 나라, 내 민족의 교도소에 있었다”는 그녀의 말을 듣고 가슴이 뭉클했었다고 전한 바 있다. 암울한 시기, 신사참배를 당당히 거부하고 ‘옳고 정당한 것이 무엇인가’를 몸소 실천한 김두석! 온건(穩健)한 나라사랑 정신이 역사의 한 자락에서 전진하고 있었음을 확인시켜준 그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신현배역사와 전통문화에 대해 관심이 많은 역사칼럼니스트. 저서로는 역사 이야기 『엉뚱 별난 한국사』, 『엉뚱 별난 세계사』, 『2000년 서울 이야기』, 『세계사로 배우는 법 이야기』, 전통문화 이야기 『소중한 우리 문화 지식 여행』 시리즈 등이 있다. ]]> Thu, 03 Aug 2017 10:54:05 +0000 8 <![CDATA[독립운동사를 간직한 대한민국 기념일 ]]> 글 심용환 역사N교육연구소 소장독립운동사를 간직한 대한민국 기념일우리나라는 우여곡절이 많았던 지난 역사를 잊지 않고 기억하기 위해 제정된 기념일이 있다. 이중에는 설날과 추석 같은 민족의 대명절이나 크리스마스, 부처님 오신 날같이 종교적인 목적으로 정해진 국경일도 있지만 상당수는 독립운동사와 맥을 같이 한다.                 3, 4월: 독립만세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삼일절은 3·1운동을 기념하는 날로서 가장 대표적인 국경일 중 하나다. 1919년 3·1운동은 약 4개월간 250만 명 이상이 참여한 우리 역사 최대 규모의 민족운동이었다. 3·1운동의 여파로 인해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었으며, 이로써 독립운동사의 가장 중요한 기폭제로 작용하였다. 3·1운동은 독립운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역사이다.4월 13일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기념일이다. 3·1운동의 여파로 8개의 정부가 선포되었고 그 중 3개가 구체화되었다. 서울을 기반으로 한 한성정부·연해주의 대한국민의회·상하이임시정부가 만들어지는데, 이 세 정부가 통합하여 구성된 것이 오늘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대한민국임시정부다. 임시정부의 경우 여러 부침을 겪었지만 끝까지 생존하여 민족 독립운동사를 대표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특히 상하이 시절과 막바지 충칭에서의 시절은 임시정부의 전성기이기도 하다. 오늘날 4월 13일은 이러한 임시정부의 역사를 되새기는 날이 되었다.         alt제35회 삼일절 기념식alt제6차 임시의정원 폐원식 기념사진(1919년 9월 17일)             5월: 어린이 인권 의식의 탄생5월 5일 어린이날이라고 하면 천도교의 소년운동과 방정환을 떠올릴 수 있다. 어린이에 대한 인권 의식이 미약했던 시절, 방정환은 이를 정면으로 문제 삼으면서 한국의 어린이 인권 의식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3·1운동을 계기로 어린이들에게 민족정신을 고취하고자 했던 방정환은 1923년 일본유학생 모임인 색동회를 조직하여 어린이날을 만들었다. 또한 어린이날 외에도 천도교도로서 다양한 소년단체를 만들어 독립운동을 고취시키는 등 소년운동의 역사를 개척했다는 데서 방정환의 행적은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6월: 난세에 탄생한 영웅들6월 1일 의병의 날에서 의병은 독립운동사의 범주를 넘어 임진왜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임진왜란 최초의 의병장인 곽재우의 생일을 양력으로 환산한 날이 6월 1일이다. 당시 의령지방에서 궐기한 곽재우는 자신의 가산(家産)을 투자하여 경상도 의병투쟁에서 혁혁한 전과를 올리며 육지전에서의 전세회복에 큰 역할을 하였다. 곽재우뿐만 아니라 수많은 의병이 국난의 위기 가운데 등장하였으며, 이 전통은 구한말 외세의 침략 가운데 재현된다. 을미사변과 단발령에 반발하며 을미의병(1895)이 일어났고 을사늑약에 반발하여 을사의병(1905)이 일어났다. 또한 정미7조약과 군대해산 등에 자극받아 정미의병(1907)이 일어났다. 의병의 날은 이러한 의병의 전통을 잊지 않겠다는 다짐의 날이다. 6월은 호국보훈의 달이다. 이러한 의미가 부여된 것은 무엇보다 6월 6일 국토방위에 목숨을 바친 이들을 기리는 날인 현충일과 동족상잔의 비극을 기억하기 위한 6·25전쟁일이 있기 때문이다. 한반도라는 지리적 특성상 수많은 전란과 외세의 침략을 겪어야 했던 우리나라였기에 무엇보다 6월이 가진 역사적 의미는 특별하다.   alt방정환alt의병장 곽재우alt의병 모습            11월: 나이가 무관했던 독립운동 열사들11월 3일은 학생독립운동기념일로, 1929년 광주학생항일운동의 항일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법으로 지정한 날이다. 학생 간 갈등으로 시작된 광주학생운동은 학생들의 민족의식과 신간회의 적극적인 지원 등으로 전국적인 민족운동으로 발전해 나갔다. 특히 학생들이 주도했기에 ‘조선인을 위한 교육’을 요구하는 등 운동의 성격이 여타 독립운동과는 차별되는 부분이 있었다. 원래는 학생의 날로 불렸다가 2006년 이후 학생들의 자율적인 역량과 애국심 함양을 강조하는 의미를 담아 학생독립운동기념일로 재탄생하였다. 한편 같은 달 11월 17일 국권회복을 위해 헌신한 순국선열의 독립정신과 희생정신을 후세에 길이 전하고자 제정된 순국선열의 날은 제정 과정이 독특하다. 1939년 11월 21일,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제31회 임시총회에서 결정된 날이기 때문이다. 지청천 등 6인의 제안에 따라 망국일인 11월 17일을 순국선열공동기념일로 제정하였다. 대한제국은 사라졌지만, 독립운동사라는 새로운 정통성을 바탕으로 새로운 민족사가 전개되기를 염원한 날인 것이다.         alt광주학생독립운동 30주년 및 제7회 학생의 날 기념식(국가기록원 제공)alt제1회 광복선열추도회(1957년, 국가기록원 제공)         8월: 광복의 의미와 대한민국정부 수립1945년 8월 15일은 일본이 미국에 항복한 날, 보다 정확히 이야기하면 일왕이 항복을 선언한 날이다. 이와 동시에 우리나라와 중국 그리고 동남아시아 지역의 일본 식민지 혹은 점령지역은 ‘해방’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러나 해방에 대한 기억은 국가·지역·민족별로 다르다. 타이완이나 우리나라 같은 경우는 식민지배 기간이 길었고, 중국은 약 15년간 전쟁 중인 상태였으며, 동남아시아 역시 지역별로 처한 상황이 천차만별이었기 때문이다. 8월 15일. 일본의 항복 소식은 빠르게 전파되었다.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옥중에 있던 이희승은 해방 당일 오후 1시 한국인 의무관이 항복 사실을 알려주어 같이 만세를 불렀다고 한다. 아직까지 남아있는 당시 사진들이 보여주듯 시민들은 만세를 부르며 거리로 쏟아져 나왔고, 청년들은 동네에 있는 신사나 봉안전 같은 일제의 강요로 세워진 시설물을 파괴하면서 기쁨을 만끽했다. 농촌의 경우 하루가 지난 16일에 해방 소식이 알려졌고, 17일이 되어서야 전국적으로 이 사실이 알려졌다. 다만 해방 후에도 한동안 조선총독부가 치안을 장악한 상태였기 때문에 경성·평양·대전·충청·홍성·진남포·원산·해주 등지에서 민중대회와 만세시위가 일어나기도 했다.안타깝게도 해방 이후 수년간 8월 15일은 감격보다는 좌우익의 분열과 갈등, 자파(自派)의 세력 과시를 부리는 날로 악용되었다. 미군정의 입장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종전 기념일로, 1946년 미군정청은 8·15해방기념위원회를 조직하여 서울역 광장에서 성대한 기념식을 열었다. 흥미로운 점은 플랜카드 게양 방식이나 축하 퍼레이드를 위한 꽃전차 같은 것들이 일제강점기 때 만들어진 방식과 같았다는 사실이다. 이는 35년간의 지배로 인한 문화적 영향이 컸던 탓이다. 1948년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면서부터 8월 15일은 ‘광복절’이라는 국경일이 된다. 그 전까지는 ‘해방절’, ‘해방 몇 주년 기념’ 등으로 불렸는데, 1949년 10월 국경일 제정에 관한 법률 제53호가 공포되면서 용어가 정리되었다. 이때 비로소 삼일절·제헌절·광복절·개천절 등 4대 국경일이 제도화되었다. 개천절의 경우 단군신화와 관련된 내용이지만, 대종교가 독립투쟁을 위해 치열하게 투쟁했으며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어천절(御天節)이라는 이름으로 공식 기념식을 거행했다는 점, 그리고 헌법 전문에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유구한 역사와 문화’라고 명문화한 점, 무엇보다 신생국가 대한민국이 한민족의 역사적 정통성을 계승했다고 주장한 점 등을 고려하면 국경일로 지정된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흥미로운 점은 1945년 8월 15일이 광복절이라면 1948년 8월 15일은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된 날이라는 사실이다. 광복 이후 3년간의 진통 끝에 1948년 5월 10일 최초의 국회의원 선거를 치르며 제헌국회가 구성되었다. 다시 10인의 헌법위원회를 조직하여 제헌헌법 초안을 마련하였고, 국회 심의를 통해 7월 17일에 제헌헌법이 확정되었다. 이후 제헌헌법에 의거하여 국회간접선거를 통해 대통령 이승만, 부통령 이시영이 뽑혀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된 날이 바로 8월 15일인 것이다. 따라서 광복절은 일제강점으로의 해방과 대한민국정부 수립이라는 의미가 담겨 매우 각별한 국경일이 되었다.         alt해방 소식을 듣고 거리에 나와 만세를 부르는 국민들alt광복 1주년 기념식에서 축사하는 김구(1946년 8월 15일, 김구재단 제공)alt대한민국정부 수립 기념식(1948년 8월 15일)            삼일절과 광복절은 남한뿐 아니라 북한에 있어서도 뜻깊은 날로 여겨진다. 때문에 이날은 대통령에 의해 중요한 대북 메시지가 발표된다든지, 남북관계 개선을 위한 굵직한 정책이 발표되곤 한다. 우리 독립운동사에 가장 중요한 날이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한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는 형편이다. 이처럼 기념일, 특히 이러한 역사를 간직한 국경일에는 그저 편히 쉬는 날쯤으로 여기기보다는 그 날들이 지닌 의미를 생각해보는 것이 참으로 유익할 것이다.                  심용환성균관대학교 사범대학에서 역사교육학을 전공했다. 현재 팟캐스트 <진짜 역사 가짜 역사>를 통해 재미있고 올바른 역사 이야기를 전파하고 있으며, CBS와 공동으로 <심용환의 근현대사 똑바로 보기>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저서로는 『헌법의 상상력』, 『심용환의 역사토크』, 『단박에 한국사』 등이 있다. ]]> Wed, 02 Aug 2017 14:54:14 +0000 8 <![CDATA[대의를 위한 작은 일상의 가치 ]]> 글 이성주 역사칼럼니스트대의를 위한 작은 일상의 가치일제강점기 오욕의 35년 동안 대한독립을 위해 투신했던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있다. 채 밝혀지지 않은 선열들을 찾기 위한 노력이 이어지고 있지만, 그중 ‘여성’ 독립운동가를 찾기란 난망한 일이다. 남성 위주의 역사 서술과 ‘일상의 유지’를 홀대한 이유 때문이다. 독립운동 속 일상을 유지할 수 있었던 힘“항일투사 집안에서 태어나 항일투사 집으로 시집간 것도 다 운명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나라의 운명 때문에 한 개인의 운명도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허은 여사의 회고 中 -구한말 의병장이었던 왕산(旺山) 허위 집안의 손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초대국무령(대통령)인 이상룡의 손자며느리이자, 청성진 경찰주재소 습격사건으로 유명한 이병화의 아내. 항일투사 집에 태어나 항일투사 집안의 남자에게 시집간 허은은 태생부터 독립운동의 길이 주어졌던 여인이었다.▲1907년 경북 선산군 구미면 출생 ▲1915년 가족과 함께 독립운동을 위해 서간도로 이주 ▲1922년 이병화와 결혼 ▲1932년 시할머니 김우락과 시부모를 모시고 안동 임청각으로 귀향 ▲1952년 6·25전쟁 중 남편 사망 ▲1997년 90세 일기로 세상을 떠남독립투사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이런 의문이 들 때가 있다. “그들도 누군가의 자식이자, 배우자, 부모일 텐데 그 일상은 어떻게 유지되었을까?” 사람이라면 모름지기 밥을 먹고, 옷을 입고, 생활을 유지하기 위한 일상생활이 있다. 그렇다면 독립운동가는 ‘일상의 삶’을 어떻게 유지했을까? 바로 그들의 어머니, 아내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허은이 바로 대표적인 예이다.“집에는 항상 손님이 많았는데 땟거리는 부족했다. 삼시세끼가 녹록치 않았다. 점심 준비를 위해 어느 땐 중국인에게서 밀을 사다가 마당의 땡볕에 앉아서 맷돌로 가루를 내어 반죽해서 국수를 해먹었는데 고명거리가 없어 간장과 파만 넣었다.”허은의 시가는 이상룡의 집이다. 시할아버지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초대국무령이었고, 그의 손자이자 허은의 남편이었던 이병화는 대한통의부, 한족노동당 등의 간부로 활동했다. 집에는 손님이 끊이지 않았는데, 대부분 독립운동가들이었다. 허은의 회고록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를 보면 그녀가 감내해야 했던 경제적 궁핍과 곤궁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허은을 비롯해 많은 여성들이 독립운동을 하는 가족들을 위해 밥을 짓고, 옷을 꿰맸다. 가뜩이나 부족한 살림 가운데 배고픔과 고난은 나날이 심해졌다.화려한 성공 뒤 묵묵히 일상을 지탱해준 존재“시집온 다음해에 한 번은 감기가 들었으나 누워서 쉴 수가 없었다. 무리를 했던지 부뚜막에서 죽 솥으로 쓰러지는 걸 마침 시고모부가 보시고는 얼른 부추겨 떠메고 방에 눕혔는데 다음날도 못 일어났다. 그때가 열일곱 때였다.”“나도 옷을 숱하게 만들었다. 그중에도 김동삼, 김형식 어른들께 손수 옷을 지어 드린 것은 지금도 감개무량하다.”공기조차 얼어붙게 만든다는 서간도의 모진 추위를 견디며 허은은 독립운동가들의 끼니 걱정과 입을 옷이 부족하다는 압박감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냈다. 99칸에 달하는 임청각 종택의 안주인이 만주 허허벌판으로 달려가 몸이 부서져라 밥을 하고, 옷을 지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만은 일절 없었다. 허은은 앞으로의 인생을 예고하듯 험난했던 신행(新行)길을 떠올리며 조국의 운명과 자신을 등치시켰다.“이천팔백 리 먼 길은 내 시집가는 길이요. 앞으로 전개될 인생길의 험난함을 예고하는 길이기도 했다. 조국의 운명이 순탄했으면 그리되었겠는가?”독립운동가들은 몸소 한평생 인생을 걸고 지켜나가야 할 신념과 대의(大義)를 말했다. 그러나 영웅이기 이전에 우리와 같은 평범한 인간이었고, 그렇기에 기본적인 일상의 삶을 영위해 나가야 했다. 일상이 유지되고, 이로써 그들이 독립운동에 매진할 수 있었던 것은 허은과 같은 어머니, 아내, 딸의 존재가 있었기에 가능했다.사람들은 주로 성공 그 자체와 그것을 이룬 주인공에만 스포트라이트를 비추지만, 그 뒤에는 일상을 지켜준 숨은 조력자들이 있다. 목표를 달성하고 어떠한 성과를 얻기까지, 특히 그것이 가진 가치와 결과물이 클수록 주변의 도움과 헌신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은 종종 과소평가되곤 한다. ‘일상의 유지’는 성공을 향해 달려갈 수 있는 바탕이다. 우리의 일상은 그냥 돌아가지 않는다. 자칫 간과하기 쉬운 반복적인 생활에는 그만큼 꾸준하고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래야 삶이 유지된다.독립기념관이 개관 30주년을 맞이했다. 30년이면 이립(而立)의 나이다. 그동안 뜻을 세우고, 그 뜻을 채워나가기 위해 노력했다면, 이제는 내가 밟고 서 있는 땅이 어떻게 이루어졌고 두발로 서기까지 음지에서 이를 지탱해 준 ‘작지만 없어선 안 될 존재’들을 돌아보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일상의 유지를 벗어난 삶은 존재할 수 없다. 묵묵히 일상을 지탱해주었던 많은 이들의 삶이 우리가 이룬 성취와 맞먹는 중요한 일이란 사실을 잊지 말자.                       이성주시나리오 작가 겸 역사칼럼니스트. 대중과 함께 호흡하는 글쓰기를 목표로 『조선의 민낯』, 『왕들의 부부싸움』과 같은 역사서를 출간한 바 있다. 최근에는 국제정치와 관련된 연구 및 집필에 열중하고 있다. 『전쟁으로 보는 국제정치』 시리즈 1, 2, 3권을 출간 중이다. ]]> Wed, 02 Aug 2017 10:33:38 +0000 8 <![CDATA[함께한, 그리고 함께할 ]]> 함께한, 그리고 함께할민족의 뿌리를 튼튼하게나라의 근간을 올바르게한 사람 한 사람의 간절한 바람을 담아 세워진국민의 벗 독립기념관,그 어깨에 짊어진 무게를 다시금 실감합니다.개관 30주년국민과 함께한, 그리고 함께할 시간 동안처음의 마음가짐을 잊지 않겠습니다. ]]> Wed, 02 Aug 2017 09:39:09 +0000 8 <![CDATA[한국인에게 ‘독립’ 희망을 심어준 장보어링 ]]> 글 양지선 단국대학교 연구교수한국인에게 ‘독립’ 희망을 심어준 장보어링(張伯苓)장보어링(張伯苓)은 중국의 톈진(天津)에 난카이(南開)중학과 난카이대학을 설립하고 교장을 역임한 인물이다. 그는 중국근대사에서 최고의 구국교육운동가로 평가받고 있으며, 저우언라이(周恩來)와 그의 부인 덩잉차오(鄧穎超)는 장보어링의 제자로 유명하다. 중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지도자 저우언라이는 스승 장보어링의 생애를 ‘진보와 애국’으로 정의한 바 있다.                   중국 애국지사 육성에 공헌하다장보어링은 또한 근대 활극(活劇)의 창시자이자 올림픽 선구자로 평가되기도 한다. 연극과 운동은 학생들에게 정서함양과 상무정신을 고취시키는 유효한 방안 중 하나였다. 곧 부국강병의 필요성을 스스로 느끼는 동시에, 이를 위한 실천력을 배가시키는 요인이었다. 장보어링의 절친한 친구는 그에 대해 “동시대 중국의 걸출한 인물들과 비교하면 그들의 기교 있는 삶의 방식과는 비교할 수 없는 단순한 사람이지만, 매우 근면 성실하고 학생들에게도 친절해 성공을 거두었다”고 평가했다.교육활동을 통해 한국인과 인연을 맺다1876년 허베이성(河北省) 톈진에서 태어난 장보어링은 열강의 침략 속에 북양 대신 리훙장(李鴻章)이 설립한 배이양수학당(北洋水學堂)에 입학해 1894년 가장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이후 군사구국의 이상을 실현하려는 신념으로 웨이하이웨이(威海衛)로 향하였다. 이곳에서 국기가 세 번 바뀌는 사건을 경험하게 되는데, 이를 계기로 해군만으로는 구국이 불가능함을 깨닫고 근대학교를 세워 강건한 국민을 배양하고자 결심하였다.톈진으로 돌아온 장보어링은 교육운동가 옌시우(嚴修) 등의 도움으로 1904년과 1919년 난카이중학과 난카이대학 등을 차례로 설립했다. 이때 자신이 세운 난카이중학에서 처음으로 한인 유학생들과 조우하였다. 난카이중학 조선인 기숙사감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박용태와 만나게 되면서 한국의 식민지 현실을 알게 되었다. 장보어링은 단순히 동정에만 그치지 않고 다양한 방면에서 한국독립운동 세력에 도움을 주고자 노력했다. alt장보어링(張伯苓)alt미국 콜롬비아 명예박사 학위 수료(1946년)alt저우언라이(周恩來)와 부인 덩잉차오(鄧穎超)            한인 유학생들의 스승을 자임하다1919년 3·1운동 발발 이후 많은 청년학생들이 피체를 피하기 위해 혹은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해외 유학을 선택하였다. 적지 않은 인원이 톈진으로 유학하여 장보어링이 세운 학교에서 수학하였다.한인 학생들은 유학생이라는 신분을 이용해 중국의 혁명활동에 직접 참여하거나 톈진지역의 한국독립운동 세력과 함께 활동을 전개하였다. 하지만 신변의 위험으로 경제적 활동은 사실상 어려웠다. 그런 만큼 학생들의 생활비와 학비 마련 또한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들이 유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교장인 장보어링의 특별한 배려 덕분이었다.이회영의 아들 이규창은 학비가 부족해 입학하지 못할 처지에 놓이자, 직접 장보어링을 찾아갔다. 사정을 들은 그는 이규창의 입학과 학비문제를 해결해주는 등 경제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열심히 공부해 한국의 독립에 이바지하라는 격려 또한 잊지 않았다. 당시 이규창은 재학 중 한겨울에 바지 솜을 두루마기 안에 덧대어 겨우 추위를 면하고는 멀리 떨어져 있는 학교까지 도보로 통학하였다. 체육시간에 이를 본 중국인 학생들이 이규창에게 ‘망국노(亡國奴)’라고 놀리자, 장보어링은 “이규호는 부친과 대일투쟁을 전개하기 위해 중국에 온 사람”이며, “오히려 그의 행동을 배워야 할 것”이라고 꾸짖었다.한인 학생들에 대한 그의 격려와 지지는 난카이대학 내 독립운동단체 조직으로 이어졌다. 1920년 박용태는 대학 내에 학생회를 조직하여 3·1운동기념 전단을 배포하는 등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1930년에는 대학 내의 한인학우회(韓人學友會)를 한인 학생들에게 직접 소개해, 이를 기반으로 한국독립청년당이 조직되었다. 한국독립청년당은 ‘중한호조친밀(中韓互助親密)로 제국주의 타도’라는 목표를 내걸었다. 이처럼 교내에서 항일단체를 조직·활동한다는 것은 교장의 지지와 승인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한인 독립운동 세력에 재정적인 지원을 도모하다장보어링은 한인 학생들뿐만 아니라 톈진지역에서 활동하는 한국독립운동 세력과도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주로 재정을 지원하거나 활동에 도움이 되는 유력인물 혹은 단체를 소개해 주었다. 톈진지역 최초의 한인독립운동단체 불변단(不變團)은 유력한 중국인과 미국인의 원조를 받았다. 불변단은 텐진지역에서 상하이 신한청년단이 발행한 기관지 『신한청년(新韓靑年)』을 배포하는 임무를 맡았다. 중국기독교청년회 15주년 대회에서도 이를 배포할 수 있도록 지원하였다. 중국에서 가장 먼저 설립된 톈진기독교청년회의 동사장이 바로 장보어링이었다. 톈진지역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장보어링의 지원은 독립운동가들의 생활방면 등 세세한 부분에까지 미쳤다. 유기석은 허베이성에 농장을 설립해 만주지역의 한인들을 이주시키기로 마음먹고 자금 마련을 위해 장보어링을 찾았다. 여러 이유로 농장 설립을 그만둘 수밖에 없는 환경 속에서 그는 유기석을 이스바오사(益世報社) 사장 류쥔칭(劉俊卿)에게 소개하였다. 당시 박용태는 이스바오사 사장이 장보어링의 소개편지를 무시하지는 못할 것이라며 유기석을 안심시켰다. 그의 경제적인 지원이 톈진지역에서 어떠한 비중과 의미를 가졌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alt난카이대학 전교생 단체사진alt신한청년(新韓靑年) 창간호             대한민국임시정부 지원에 나서다박용태를 통해 김구와 안창호 등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던 것은 한중연대를 논의·모색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임시정부의 외무위원과 내무차장 등을 역임한 현순(玄楯)은 ‘조선과 가까운 친구들’이라는 메모에서 톈진지역 인사로 장보어링을 꼽았다.한편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20년 8월 13일 백영엽과 황진남을 톈진에 파견한다. 파견 목적은 장보어링을 방문하고 한국의 독립운동을 새롭게 모색하기 위함이었다. 상의하고자 했던 주요 의제는 미국의원단과 면회 문제였다. 기독교인으로서 미국선교사들과 가깝게 지내던 그에게 의원단과의 면담 주선을 요청하였다. 이처럼 장보어링의 소개와 지원은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장보어링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들 가운데 특히 노동국 총판이던 안창호와 오랜 시간 교류하였다. 두 사람 모두 기독교신자로서 청년 교육에 대해 공통되는 관심사가 많았다. 안창호는 톈진에 갈 때마다 그를 찾았다. 난카이대학 학생회 부회장을 맡았던 이만근에 따르면, 안창호는 대학을 방문해 한인들과 대화를 나누거나 강연한 뒤에는 항상 총장을 방문했다고 한다. 두 사람은 한중이 합동하여 일본을 저지할 방도와 중국에 있는 한국 청년들의 교육에 대해 오랜 시간 의견을 나누었다. 그 결과, 미래 한중연대의 토대가 될 인재양성을 위해 한인 학생들의 난카이대학 입학이 추진되었다. 그리하여 1921년 10월 『아리랑』의 주인공인 김산 등 한인 학생 5명이 이 대학에 장학생으로 입학하였다.돈독한 한중연대로 침략세력에 맞서다1938년 3월 10일 오랜 지우(知友)이자 동지인 안창호가 서거하였다. 장보어링은 전시 중임에도 4월 17일 충칭시(重慶市) 상회에서 거행한 추도회에 직접 중국 측 대표로 참석해 추도사를 낭독하였다.안창호를 개인적으로 알고 있고 교제를 하여 왔는데, 안창호는 조선에서 위대한 인물로서, 본인이 이룩한 조선독립운동상의 사적은 그 역사상에 찬연하게 빛나고 있습니다. (중략) 그분은 사망하였으나 그의 정신은 아직도 친구의 동포인 조선 사람의 뇌리에 빛나고 있으므로 조선인 여러분은 계속하여 안선생의 유지를 이어받아 어디까지나 조선독립이 완성될 때까지 만전의 노력을 발휘하여 주기 바랍니다. 그 수단으로서는 특히 조선 사람을 경시하는 것은 아니나, 조선은 지역적으로 협소한 만큼 그 민족의 수도 적으므로, 유감없는 결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역사상 또는 현재의 정세로 보아 방대하고 심원한 유력 중화민족과 충분한 협조를 하여 유종의 미를 거두도록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장보어링은 깊은 애도를 표하며 안창호의 유지를 이어받아 독립운동에 만전을 다할 것을 부탁하고, 부족한 독립운동의 역량을 중국과 연대를 통해 해결하자고 제의하였다. alt안창호와 황진남(1919년)alt장보어링 유훈(遺訓)            한인들에 대한 장보어링의 지원은 한중연대의 일환에서 이루어졌다. 한국독립운동에 대한 지지와 성원은 대부분 간접적인 방식들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그의 도움은 오랫동안 다양한 방면에까지 미쳐 한인들에게 큰 힘이 되었다. 가장 힘든 때에 끊임없이 손을 내밀어준 그에게 이제라도 고마움을 전해야 하는 이유다. ]]> Thu, 03 Aug 2017 10:55:33 +0000 8 <![CDATA[결혼 후 당면하게 되는 또 하나의 과제 고부갈등&장서갈등 ]]> 결혼 3년차 여성입니다. 시어머니는 결혼 전부터 저를 못마땅해 하셨어요. “이것도 혼수라고 해왔느냐”, “친정에서 도대체 뭘 배웠느냐” 등 핀잔과 면박을서슴지 않으셨지요. 가족이 되면 나아질 줄 알았는데,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얼마 전에는 “아들을 친구 딸과 결혼시켰어야 했다”는 막말까지 들었어요. 결국 남편에게 폭언을 막아주든지, 인연을 끊든지, 아니면 이혼하자고 선포했습니다. 더는 못 참겠어요!                장모님과 함께 산 지 6개월 된 남성입니다. 맞벌이 부부라 육아는 장모님의 도움을 받고 있는데요, 시도 때도 없는 간섭에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왜 일찍 퇴근 안하고 우리 딸 혼자 고생시키나?” “주말에 누워만 있지 말고 운동도 좀 하고 집안일을 돕게.” 연일 훈계가 이어집니다. 아내는 어머니가 매사 잔걱정이 많으시니 이해하라면서도 “사실 엄마 말이 틀린 것은 없잖아”라고 덧붙입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글 이현수 일상심리 전문작가, 자유기고가결혼 후 당면하게 되는 또 하나의 과제고부갈등&장서갈등‘결혼은 개인과 개인의 만남이 아닌 집안과 집안의 만남’이라는 말이 있다. 이 처럼 결혼생활에 있어 어느 정도 양가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데, 이 과정에서 고부갈등과 장서갈등이 빈번하게 일어나 주된 사회문제로 꼽힌다. 오래된 난제 고부갈등, 새롭게 떠오르는 장서갈등행복하기 위해 한 결혼이건만, 가족 간 갈등으로 싸움이 지속되어 끝내는 결별하는 일이 잦다. 고부갈등은 ‘지구가 멸망하는 날까지 살아남는 두 가지 중 하나’라는 농담까지 있을 정도로 좀체 풀기 힘든 난제로 꼽힌다. 최근에는 시어머니가 SNS를 통해 ‘아이 옷이 낡았다’, ‘프로필 사진이 유부녀답지 않다’는 등 댓글을 달아 온라인상에서까지 간섭이 이어진다는 사례도 늘고 있다.고부갈등은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주로 발생하는데, 가장 큰 원인은 유교적 전통에 있다. 유교사회에서 결혼의 주목적은 ‘대’를 이을 아들을 낳는 것이었다. 부부관계나 바깥출입이 자유롭지 않았던 여자에게, 아들과의 끈끈한 관계는 신분 보장의 수단이자 최후의 심리적 보루였다. 이러한 문화적 전통이 남아있는 가운데, 아들이 새로운 가정을 꾸리는 일이 어머니로서는 사회적 지위와 심리 건강의 위협으로 느껴질 수 있다.한편 장모와 사위 간 장서(丈壻)갈등도 만만치 않다. 한 조사에 따르면, 남성들이 이혼을 결심한 이유 1위가 ‘처가의 간섭’으로 나타났다.1)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조사에서도 최근 1년간 가족갈등을 경험했다고 답변한 사람들 가운데 장서갈등을 포함한 세대갈등이 37.5%로 가장 많았다.2) 최근 맞벌이 부부 증가로 가사·육아 부담을 처가의 도움으로 해결하는 경우가 늘면서, 장서갈등이 대두되고 있다. 잡코리아의 조사 결과, 기혼 직장인 10명 중 6명이 맞벌이를 하고 있다고 답했고, 이들 중 자녀의 보육을 처가에 맡기는 경우는 35.2%를 차지했다.3) 자녀를 맡기려면 자연히 처가와 같이 또는 가까운 위치에 거주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가정경제 운용이나 가사·자녀계획·기타 대소사 등 장모의 개입이 생기면서 갈등이 커진다.고부갈등은 남자, 장서갈등은 여자의 도움이 필요하다아들이자 남편으로서 고부갈등 해결을 위해 남자가 할 일은 어머니의 독립심을 키워주는 것이다. 자식이 부모 곁을 떠나 결혼할 때 느끼는 외로움은 부모로서 자연스러운 감정이다. 그러나 이것이 심해져 보상심리나 집착, 며느리에 대한 질투로 이어지게 될 경우, 고부갈등의 씨앗이 된다. 결혼을 했다고 해서 어머니와의 관계를 뚝 끊어버린다면 문제를 더욱 악화시킬 수 있다. 모자관계를 친밀하게 유지하면서 어머니가 아들의 결혼으로 인한 심리적, 물리적 거리감을 천천히 받아들이도록 해야 한다. 또 새로운 취미를 권하거나 지인 및 친구들과의 만남을 권장하여 부모자식 간 관계 이외에 새로운 사회 관계망을 만들 수 있도록 돕자.시댁과의 갈등에서 아내가 호소하는 괴로움 중 하나는 남편이 보이는 편파적인 태도·평가하려는 자세·무관심이다. 이는 장서갈등에서도 똑같이 작용된다. 부당한 대우로 힘들어하는 남편 앞에서 친정의 편을 드는 것은 배려 없는 태도이자 갈등을 키우는 도화선임을 기억해야 한다. 장서갈등에 옳고 그름의 잣대를 들이대지 말고 상대의 입장에서 이해하도록 노력하고 공감하자. 또 하나 필요한 대처는 ‘친정의 간섭에 선 긋기’다. 어머니가 사위에게 도를 넘는 행동과 발언을 할 때는 “그런 행동은 우리 부부가 해결할 문제니, 삼가 달라”고 분명히 강조하자.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 어릴 때부터 자신을 위해 희생을 마다하지 않았던 어머니에게 선을 긋거나, 이제는 우리의 자녀까지도 돌봐주며 헌신하시는 어머니로부터 하루아침에 독립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결혼이란 내가 태어난 가정에서 벗어나 새로운 가정을 꾸리는 일. 이전의 삶과는 달라질 수밖에 없고, 달라야 한다. 시댁·친정과의 관계를 확실하게 정리하지 않으면 갈등의 골이 깊어지고, 소중한 배우자와 나 사이에 금이 갈 수 있음을 유념하자.1) 결혼정보업체 비에나래와 재혼전문사이트 온리유의 공동조사 참고, ‘내가 일찌감치 이혼한 이유… 처가간섭, 부정행위 못 참아’(2011.11.21, 한국경제)2) ‘백년손님은 무슨…. 장서갈등시대’(2015.11.16, 헤럴드경제)3) ‘기혼직장인, 몸은 처월드 마음은 시월드’(2016.5.18, The business) 이현수일상심리 전문작가 겸 자유기고가. 매일경제·고용노동부·한국무역보험공사·서울신용보증재단·삼성생명·현대모비스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전문가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 Wed, 02 Aug 2017 11:14:05 +0000 8 <![CDATA[어제의 오늘 잊지 말아야 할 7월의 역사]]> 어제의 오늘잊지 말아야 할 7월의 역사   정리 편집실   alt   한국독립운동에 큰 영향을 미친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날은 1914년 7월 28일입니다. ]]> Thu, 29 Jun 2023 11:51:24 +0000 80 <![CDATA[들여다보기 제1차 세계대전과 한국독립운동]]> 들여다보기제1차 세계대전과 한국독립운동파리강화회의 대표 파견과 3·1운동의 태동   글 장세윤(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역사연구소 수석연구원)   한국독립운동사에 있어 제1차 세계대전의 영향은 결코 작지 않다.  1918년 11월 11일 제1차 세계대전이 막을 내리고 파리강화회의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게 되자, 한인들은 대표를 파견하여 한국문제를 의제화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를 계기로 1919년 2·8독립선언과 3·1운동이 추진되었고, 그 결과 대한민국 임시정부까지 탄생하게 되었다. alt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출정하는 프랑스군 제1차 세계대전 전후의 국제정세와 한국독립운동 1910년대 일본의 한국 지배는 헌병경찰 제도와 식민지 조선 주둔 일본군인 ‘조선군’ 등 무력 수단을 동원한 폭압적 무단통치 방식이었다. 조선총독부는 1910년 12월 이른바 ‘안악(安岳)사건’과 1911년 1월 ‘데라우치(寺內) 조선총독 암살 미수사건’ 등을 조작하며 한민족의 독립운동을 탄압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폭압적 통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은 계속되어 독립운동의 기반 및 체제정비, 만주(중국동북지방)와 러시아 극동 연해주 등 해외 독립군기지 개척운동이 전개되었다. 또 일본 식민지 시기 최대의 항일독립운동인 3·1운동이 거족적으로 전개되어 각종 민족운동이 고양되고, 중국 상하이(上海)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세워졌다.제1차 세계대전은 1914년 7월 28일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에 대해 선전포고하면서 시작되었는데, 1918년 11월 11일 독일이 항복함으로써 끝난 세계적 규모의 전쟁이었다. 이 전쟁은 영국·프랑스·러시아·미국 등의 연합국(협상국)과 독일·오스트리아-헝가리·터키(현 튀르키예) 등의 동맹국 양 진영이 식민지 등의 이권을 둘러싸고 싸운 제국주의전쟁이었다. 일본은 이 와중에 중국 등 아시아와 태평양지역에서 이권을 차지하기 위해 서둘러 연합국에 가담하여 참전하였다. 당초 열강은 일본의 전쟁 참여를 저지하고 중국 영토를 중립화하려고 했다. 하지만 일본 정부의 적극적 참전 의지와 홍콩을 보호하기 위해 일본의 군사력이 필요했던 영국의 요구에 따라 일본이 독일에 선전포고하면서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였다. 결국 일본은 영국·러시아·프랑스·이탈리아로부터 중국 산둥성(山東省)의 독일 이권과 적도(赤道) 이북 태평양지역의 독일 식민지 등을 차지한다는 약속을 받아냈다.이처럼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고 일본이 참전하게 되자 독립운동 진영에서는 한 때 일본의 적대국인 독일에 대한 기대를 갖기도 했다. 1915년 3월 상하이에서 결성된 신한혁명당은 독일의 보호하에 ‘중한의방조약(中韓誼邦條約)’체결을 추진하기도 했다. 그러나 미국의 참전을 계기로 독일의 패색이 짙어졌다. 제1차 세계대전 초기에 중립을 지키던 미국은 1917년 4월 독일에, 12월에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에 선전포고함으로써 연합국의 일원으로 참전하였다. 연합국의 승세가 뚜렷해진 가운데 1918년 1월 8일 미국 대통령 윌슨(Thomas Woodrow Wilson, 1856~1924)은 의회의 신년연설에서 14개 항의 평화교섭 조건을 발표하였다. 주요 내용은 민족자결, 비밀외교의 타파와 공해(公海) 자유의 강조, 법에 의한 지배 등으로 요약될 수 있다. 특히 14개 항목 가운데 다섯번째 항목인 ‘식민지 요구의 공평한 조정’, 열번째 항목인 ‘오스트리아-헝가리 내 여러 민족의 자결’ 조항이 후일 ‘민족자결주의’ 개념으로 확대되어 널리 전파되기에 이르렀다. 제1차 세계대전은 윌슨이 제안한 14개 항목을 독일이 수락함으로써 마침내 1918년 11월 11일 종식되었다. 우리에게 중요한 사실은 일본이 승전국의 일원이 됨으로써 사실상 ‘독립’의 가능성이 멀어졌다는 점이라고 할 수 있다. alt 미국 28대 대통령 윌슨(좌), 의회의 신년연설에서 14개 조항의 평화교섭 조건을 발표하는 윌슨 대통령(우) 레닌의 평화선언과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그런데 1917년 러시아 사회주의혁명과 제1차 세계대전의 종결로 과거 제정(帝政) 러시아 영역에서 핀란드, 에스토니아·리투아니아·라트비아(이하 발트 3국), 폴란드 등 신생국가가 탄생하였다. 특히 러시아 볼셰비키(Bolsheviki) 정권의 등장은 매우 주목되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더욱이 레닌(V.I.Lenin)의 볼셰비키정권은 혁명 직후인 1917년 11월에 이른바 ‘평화선언(평화에 관한 법령)’을 발표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병합(즉 외국 영토의 점령, 외국 국민의 강제적인 합병)이 없는, 그리고 배상이 없는 즉각적 평화”를 제창하였다. 병합이란 유럽이나 세계 어디에서나 주민의 의사에 반하여 강대한 국가에 통합된 것을 의미하는데, ‘정의와 민주주의’에 따라 폐지되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비록 ‘민족자결원칙’이란 용어는 사용하고 있지 않지만, 이 원칙의 구체적 내용을 강조하였다. 레닌의 ‘평화선언’은 이어서 비밀외교의 타파와 공개외교 원칙을 천명하였다. ‘레닌의 계기(Lenin’s moment)’라고도 평가되는데, 이는 제1차 세계대전 종결에 즈음하여 세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그러나 그동안 우리는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만 주목하거나 강조하고, 이러한 ‘레닌의 계기(평화선언)’는 별로 관심을 갖지 못했다. 이러한 동향은 독립운동가들이 사회주의운동에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1918년 1월 8일 윌슨이 ‘14개 항목’을 내용으로 한 연두교서를 발표하게 된 직접적 계기도 바로 소비에트 정권의 ‘평화선언’이었다. 연두교서의 앞부분은 ‘평화선언’에 대한 격찬으로 분식되었다. 윌슨은 이 평화선언에 기초해서 유럽의 일반적 평화 원칙을 천명했는데, 사실 그는 소비에트 정권의 선전을 과대평가한 것이었다(김용구, 「베르사유 체제의 역사적 의의와 한반도」, 『3·1운동과 1919년의 세계사적 의의』, 동북아역사재단, 2010). 그러나 이 두 사건은 폴란드의 독립과 한국의 독립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alt 미주 한인  발행 『신한민보』에 실린 「민족자결주의에 대하여」 논설(1919.1.23.) 열강의 민족자결주의 적용과  해석을 비판하는 내용이다. alt 군중 앞에서 연설하는 레닌 열강의 국제회의와 약소국(약소민족)의 비애 제1차 세계대전의 전후 처리를 위해 1919년 1월부터 6월까지 프랑스 파리의 베르사유에서 30여 국가의 대표들이 참여한 가운데 파리강화(講和)회의(일명 파리평화회의)가 열렸다. 회의의 원칙은 휴전협정 체결의 전제조건으로 독일정부가 수락한 윌슨의 ‘14개 항목’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베르사유조약은 1919년 6월 28일 서명되었다. 베르사유 조약은 31개 연합국과 독일이 베르사유궁전에서 맺은 조약으로 주로 독일의 식민지와 배상금을 요구하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이 조약으로 일본은 적도 이북 태평양지역의 독일 식민지에 대한 위임통치권과 중국 산둥반도(靑島)의 독일 이권을 차지했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14개 조항의 평화교섭 조건에 들어 있었다. 그러나 선언적 의미만 지닌 것에 불과한 이 원칙에 세계의 약소민족들이 민감한 반응을 보이자, 윌슨은 파리강화회의에 임박해서야 그 적용 범위를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및 터키에 속했던 주민과 영토, 그리고 독일제국 지배하에 있던 식민지’로 한정시키는 방침을 정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한 국제연맹 규약에서는 ‘민족자결주의’라는 용어 자체를 삭제하였다(이윤상, 『3·1운동의 배경과 독립선언』, 독립기념관, 2009). 이러한 원칙에 따라 패전국인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과 러시아가 지배하고 있던 헝가리·체코슬라바키아·유고슬라비아·폴란드·핀란드·발트 3국 등이 독립했다. 그러나 영국·프랑스·일본 등 승전국 식민지에는 적용되지 않았다.이처럼 윌슨의 의도, 그리고 파리강화회의는 식민지·반식민지 약소국(약소민족)의 기대와는 애초부터 거리가 먼 것이었다. alt 파리강화회의 개회식(1919.1.18.) 무에서 유를 창조한 한국인들파리강화회의 대표 파견과 3·1운동의 전개 1919년은 제1차 세계대전이 종결된 직후로 베르사유조약을 통해 새로운 세계질서가 성립되는 해였다. 특히 한국인들의 대규모 3·1독립운동 전개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 중국의 5·4운동과 일본의 다이쇼(大正) 데모크라시 등 동아시아의 정세는 급격한 변동을 치렀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당시 중요한 이념적 지표가 되었다. 아일랜드, 발트 3국, 이집트, 베트남, 한국(조선) 등 7개의 약소민족은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승전국의 식민지이거나, 승전국의 이해와 직접 관련이 없는 약소민족이었다. 이들 약소민족은 그러한 사실에 굴복하지 않고 파리강화회의를 상대로 청원 활동을 펼쳤다. 이들이 내세운 명분은 약소민족의 진정한 민족자결을 위한 국제사회 정의의 실현이었다. 이들 약소민족의 청원은 패전국의 식민지 처리라는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나 파리강화회의 원칙에서 벗어나 있었다. 그 때문에 이들의 청원은 파리강화회의에서 원천적으로 배제됐다. 그러나 이들 약소민족들은 파리강화회의에 ‘청원’하는 것에만 기대를 걸지 않았다.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는 한편, 국제사회에 자국의 독립 문제를 꾸준히 제기했다. 영국을 상대로 독립전쟁을 벌인 아일랜드와 이집트, 러시아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한 발트 3국, 일본을 상대로 한 한국, 프랑스 지배로부터 정치적 자유를 확대하려는 베트남 등 모두가 그러했다. 하지만 열강이 주도한 파리강화회의는 승전국의 이해관계를 대변했다. 아시아 일본의 식민지였던 한국(조선)은 국제사회에서도 관심 밖의 일이었다. 1919년 3·1운동과 만주·연해주 무장투쟁 등 한국인들의 거센 저항에도 불구하고, 국제사회의 지지를 바탕으로 일본의 식민지 지배는 더욱 공고해졌다.그러나 파리강화회의 이후 한국 등 약소민족들은 부침을 거듭하기도 했지만, 승전국이 주도하는 국제사회의 ‘정의’에 구걸하지 않고, 나름의 새로운 이상과 목표를 향해 다각적 방략을 추구하였다. 파리강화회의의 제1차 세계대전 전후 처리는 결국 제2차 세계대전의 불씨를 남겼을 뿐 아니라, 1990년대 이후 복잡하게 얽힌 동유럽 민족분쟁의 단초를 제공하는 오류였다고 평가되고 있다(장석흥,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한 승전국 식민지의 청원서와 그 성격」, 『한국학논총』 55, 2021). 제1차 세계대전은 세계의 판도를 바꿀 정도로 큰 사건이었고, 식민지 ‘조선’과 해외 한국인들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다. 3·1운동을 계기로 식민지 ‘조선’ 지배의 중심세력이 일본 군인에서 관료로 바뀌었고, 소위 ‘문화정치’를 표방하며 일본 정치와 식민지 조선의 결합이 강화되었다. 특히 김규식 등 파리강화회의 대표 파견을 전후하여 여운형 등 신한청년당을 중심으로 도쿄의 2·8독립선언과 국내 3·1운동이 추진되었다. 이는 여운형·장덕수·이광수·선우혁·김철·서병호·김순애 등 밀사들의 국내외 파견 활동과 독립운동 고취, 그리고 한국인들의 주체적 독립운동 전개(3·1운동)로 뒷받침되었다. 그 결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는 한편, 국내외에서 각종 민족운동이 고조된 것은 제1차 세계대전이 한국독립운동에 끼친 지대한 영향이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alt 파리강화회의에 파견된 대표단(앞줄 왼쪽 첫 번째 여운홍·맨 오른쪽 김규식, 뒷줄 왼쪽 두 번째 이관용·세 번째 조소앙·맨 오른쪽 황기환)(좌) 여운형이 "일본 핍박상황 등을 윌슨에게 전해달라"고 윌슨의 특사 크레인(Charles Crane)에게 보낸 편지_정병준 제공이 편지와 청원서는 사실상 3·1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다.(우)   ]]> Thu, 29 Jun 2023 12:00:06 +0000 80 <![CDATA[이달의 독립운동가 마지막 의열투쟁, 부민관폭파의거의 주인공 강윤국·유만수]]> 이달의 독립운동가마지막 의열투쟁,부민관폭파의거의 주인공강윤국·유만수   글 독립기념관 전시부   alt   광복 전 마지막 의열투쟁, 부민관폭파의거 1945년 7월 24일 조선총독, 정무총감, 친일파 박춘금 등이 참석한 가운데 경성 부민관에서 개최된 아시아민족분격대회(亞細亞民族憤激大會) 장에서 폭탄이 터졌다. 아시아민족분격대회는 박춘금 등 친일세력이 일본인과 함께 한인들을 태평양전쟁에 강제동원하기 위해 연 어용집회였다. 일본에서 함께 공장 노동자로 일하며 동지애를 쌓았던 유만수와 강윤국은 1945년 초순 대한애국청년당(大韓愛國靑年黨)을 조직하고 아시아민족분격대회 개최에 맞춰서 부민관에 폭탄을 던지는 의거를 실행했다. 한인 청년들이 거행한 부민관폭파의거는 일제의 식민지 지배 기간 중 전개된 마지막 의열투쟁으로서 광복 직전까지 이어졌던 한인의 독립의지를 보여준 의거였다. alt 부민관 전경(좌), 「연사신청답지 아세아민족분격대회」『매일신보』(1945.7.18.)_국립중앙도서관 소장(우) 아시아민족분격대회 저지를 위해 의거를 계획한, 청년 강윤국 강윤국은 1926년 서울 중림동의 중산층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보통학교를 졸업한 이후 일본강관주식회사(日本鋼管株式會社)에서 견습공을 모집한다는 공고를 보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에서 생활하던 그는 독립이 머지않았음을 깨닫고 독립운동에 투신할 결심을 하며 1942년 경 귀국했다. 이후에 유만수 등 일본강관주식회사 기숙사에서 함께 생활하던 동지들이 귀국하자 독립운동의 뜻을 펼쳤다.강윤국은 1945년 초순에 결성된 대한애국청년당에 참여해 친일파를 처단하고, 일제 식민통치 기관을 파괴하기로 결의했다. 그는 부민관폭파의거 계획단계에서 자신의 아버지가 운영하는 국수공장에 자주 오던 헌병 장교에게서 권총을 탈취하여 의거 당일,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일본 헌병과 경찰을 저격하는 역할을 맡기도 했다. 이들의 의거로 아시아민족분격대회 현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이후 박춘금과 일제는 현상금을 내걸어 수색에 나섰지만, 강윤국은 경기도 화성의 야학당에 피신하여 항일거사를 또다시 계획하던 중 광복을 맞이했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 애국장을 수여했다. alt 「일본강관공장 공원 모집 공고」『매일신보』 (1944.6.17.)_국립중앙도서관 제공(좌), 부민관폭파의거를 거행한 강윤국, 조문기, 유만수(우) 대한애국청년당을 조직하여 부민관폭파의거를 주도한, 청년 유만수 유만수는 1921년 경기도 안성군에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겪은 민족차별 경험을 지켜보며 독립운동에 뜻을 두게 되었다. 독립운동에 참여할 기회를 모색하던 중 훈련공 모집 공고를 보고 1942년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강관주식회사 가와사키(川崎) 공장에 배치된 유만수는 그곳에서 독립운동을 함께할 동지들을 만났다. 1943년 5월 회사 측이 민족차별적 내용을 담은 책자를 유포하자 유만수는 한인 노무자들을 결속하여 파업을 주도했다. 이후 피신해 일본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 서상한(徐相漢)과 만나 강제징용 당한 한인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내는 일을 돕기도 했다. 귀국한 그는 박춘금 등 친일파 세력들을 처단하기로 뜻을 모아 조문기, 강윤국 등 일본강관주식회사 동료들과 함께 1945년 초순 대한애국청년당을 조직했다. 유만수는 대한애국청년당의 임시의장으로 추대되어 부민관폭파의거를 추진했고, 의거 때 사용할 다이너마이트를 구하기 위해 수색변전소 작업장에 취직했다. 유만수는 매일 소량의 다이너마이트를 반출해 2개의 폭탄을 완성했다. 의거 당일 겉옷에 폭탄을 숨겨 부민관으로 들어간 그는 무대 연단 밑 등에 폭탄을 설치했다. 의거 이후 유만수는 일경을 피해 지리산에 몸을 숨기고 있다가 광복을 맞았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 애국장을 추서했다. alt 사립 안청학교 재학시절 유만수의 통지표(좌), 「부민관에 정의 폭탄 복면 벗은 삼청년용사」『자유신문』 (1945.11.13)_국립중앙도서관 제공(우) alt   ]]> Thu, 29 Jun 2023 12:22:56 +0000 80 <![CDATA[끝나지 않은 독립운동 100년 전, 순국한 독립운동가를 기리며]]> 끝나지 않은 독립운동100년 전 순국한 독립운동가를 기리며   글 이계형 (국민대학교 교양대학 교수)   100년 전, 1923년 독립운동계는 다사다난한 한 해를 보냈다. 새해 벽두부터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세력별·출신별·독립운동 노선별로 갈등이 최고조에 달하여 갈 길을 잃어 그 문제를 해결할 방안으로 국민대표회의를 개최하였고,  그쯤 신채호가 ‘조선혁명선언’을 발표하였다. 임시정부는 결국 그해 6월 창조파·개조파·옹호파로 분열하였고,  9월에는 일본 간토대지진에 한국인 6천여 명이 학살당하는 끔찍한 사건도 일어났다.  이러한 시기에 많은 독립운동가가 삶을 마감했다. 올해 100년을 맞아 여러 독립운동 관련 행사가 개최되고 있지만, 순국 100년을 맞은 그들에 대해서는 이렇다 할 언급도 없다.  이런 안타까움에 비록 그들의 활동을 자세히 언급할 수 없지만, 이름이라도 밝혀 그들의 ‘독립 정신’을 기리고자 한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1923년 한 해 동안 순국한 독립운동가는 159명으로 확인된다. 공훈전자사료관 상에 있는 독립유공자 공적정보를 토대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가장 많은 운동계열은 만주 방면이 74명, 다음으로 3·1운동 43명, 국내 항일 15명, 노령 방면 11명, 의병 9명, 의열 활동·미주·일본 방면 각 2명, 임시정부 1명 순이다. 운동계열별로 순국 독립운동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만주 방면 관련, 순국 독립운동가 먼저 만주 방면의 순국 독립운동가들은 대종교 교주 김교헌을 비롯하여, 만주에서 친일파를 처단한 원해룡·최경호, 독립군을 지원한 김학응·김일서·정신보·강희경·김병호·나선도·오정준·최경민·남성일 등과 국내진공작전 시 일본군·중국군과 교전 중 전사하거나 급습에 피살된 독립군들이다. 독립군 가운데 통의부 계영기·정덕곡·김성복·이근택·김용희·김성옥·김상준 등은 1923년 10월 13일 한날 일본군과 중국군에 몰살하기도 하였다. 그들 중에는 활동 중 피체되어 피살·익살되거나 국내 형무소에서 사형당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독립군 특성상 청장년층이 대부분이었기에 평균수명이 34.8세로 짧고 출생 연도가 확인되지 않은 경우도 39명으로 과반이 넘는다. 게다가 대부분 후손이 확인되지 않고 있다. 특히 안타까운 것은 독립군끼리 알력 다툼이나 의견충돌로 1923년 8월과 10월 두 차례에 걸쳐 많은 이가 희생된 점이다.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alt   3·1운동 관련, 순국 독립운동가 3·1운동 관련 독립운동가는 43명으로, 대부분 옥고를 치렀다. 최고령자는 72세 김재명이고, 최연소자는 24세 김용언, 여성으로는 임봉선·박두천 등 2명이다. 이들의 평균수명은 40.1세로, 1920년대 평균수명 48세보다 적다. 그 이유는 신문 과정에서 고문·탄압 혹은 옥고로 천명을 다하지 못한 것이다. 이 가운데 전북 임실면 둔남면에서 3·1운동을 주도하였던 이태우·이주의, 경남 김해군 장유면의 이강석·조용우, 경북 의성군 비안면의 박영화·배도근 등은 같은 날에 순국하였다. 이 역시 고문 후유증에 그리된 것으로 생각된다.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alt   국내 항일과 노령 방면 관련, 순국 독립운동가 국내 항일은 국내에서 군자금 모집 활동 중 피체되어 사형당한 김도원(평북 선천·29세)·서의배(황해서흥·26세)·조창선(황해 평산·27세), 일본 군경과 교전 중 전사한 양창을(평북 희천·천마대·24세), 옥고를 치른 이필발(경북 영양·34세)·이명균(경북 김천·61세)·이승조(충남 논산·33세) 등이 있다. 또한 만주에서 국내에 들어와 활동하던 독립군을 지원하여 일본 군경에 피살 순국한 안형관(평북 위원·나이 미상)·홍기진(평북 위원·나이 미상)·김창하(평북 창성·나이 미상)·나채홍(평북 자성·40세) 등이 있다.  이외에 1923년 순국한 독립운동가의 활동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이승흡(평북 선천·나이 미상)은 평북 수청면사무소 방화로, 이강진(전북 임실·28세)은 조선독립대동단 활동으로, 권병주(충남 부여·38세)는 태을교 신도로서 국권회복 운동을 전개하다 옥고를 치렀다. 이석렬(전북 고창·40세)은 임시정부 연통제 고문,1923년 독립선언문 인쇄·살포 등의 활동을 펼쳤다. 이중각(충북 청원·29세)은 잡지 발간이나 강연회 등을 통해 독립 사상을 고취하다가 피체되어 옥고를 치렀고, 의열단 운동을 벌이다 피체되어 모진 고문으로 인한 정신 장애로 자결하였다. 러시아의 노령 방면의 독립운동가로는 그곳에서 활동하다가 적군(赤軍)에 피체되어 이르크츠크 감옥에서 옥사한 채국성(33세)·이다물(32세)·김학(30세)·김표돌(28세)·김연준(28세)·김완욱(28세)·김제문(28세)·이와실리(27세)·손병렬(25세) 등이 있다. 이들 후손 역시 확인되고 있지 않다. 신우여(함북 경흥·42세)는 고려혁명군 연해주총지부의 서부사령관으로 활동하였고, 박종근(함남 이원·34세)는 연해주 대표로 국민대표회의에 참석·활동하였다. 의병 출신과 의열 활동 관련, 순국 독립운동가 의병 출신의 독립운동가는 옥사한 이상수(경남 사천·51세), 옥고를 치른 맹선섭(충북 보은·58세)·유환기(전북 용담·48세), 유배를 간 나성일(강원 영월·72세)·최익진(경북 칠곡·64세)·장경춘(충북 음성·44세), 의병 활동이 확인된 최석우(경북 영일·72세)·천낙구(경기 양평·65세)·안기환(전남 화순·67세) 등이다. 의병 성격상 최연소가 44세이고 평균 60세로 나이가 많은 편이다.  의열 활동의 독립운동가는 의열단원으로 활동한 서상락(경북 달성·31세)과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 후 자결한 김상옥(서울 동대문구·35세) 등이 있다.  미주 방면의 독립운동가는 대한인국민회 로스앤젤레스지방회에서 활동한 염세우(강원 김화·51세), 미국에 거주하면서 파리강화회의에 파견되었고 영국 런던에서 임시정부 외교원으로 활동한 황기환(평남 순천·38세) 등이 있다. 일본 방면에서는 오사카에서 조선인친목회를 조직하고 국내·상하이·러시아 베르흐네우진스크 등지에서 활동한 정태신(32세)이 유일하다. 마지막으로 김인전(충남 서천)은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재무예결위원·정무조사특별위원(군사)·전원위원장(全院委員長)·국무원 학무차장·의정원 의장 등을 맡아 활동하던 중 48세로 과로사하였다. 1923년 한 해 동안 159명은 국내외를 막론하고 다양한 방법을 통해 독립운동을 펼치다 순국하였다. 그들은 독립운동의 경중에 따라 독립유공자 포상 등급이 다르지만, 목숨을 아끼지 않았던 것은 오직 ‘독립’이라는 염원이 간절했기 때문이다. 100년이 지난 지금 그들이 그토록 원했던 ‘독립’한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누구라도 그들의 ‘독립 정신’만큼은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더불어 이름도 남김없이 떠나간 수 없이 많은 독립운동가들에 대해서도 고개숙여 명복을 빌어본다. ]]> Thu, 29 Jun 2023 12:36:18 +0000 80 <![CDATA[어제와 오늘을 잇는 사람 <206: 사라지지 않는> 허철녕 영화감독]]> 어제와 오늘을 잇는 사람70년 전, 역사 속에 묻힌 진실을 발굴하다허철녕 영화감독   글 편집실 역사 속에 묻힌 기억을 찾아 나선 사람들이 있다.  한국전쟁 당시 한반도 전역에서 자행된 민간인 학살 사건의 유해를 발굴하는 시민 발굴단이다.  최근 이들의 숭고한 여정을 기록한 영화 <206: 사라지지 않는>이 개봉했다.  이들은 왜 이토록 치열하며, 허철녕 감독은 왜 이들을 주목하였을까. alt 허철녕 영화감독 <206: 사라지지 않는>, 제목부터 궁금증을 자아낸다. 한국전쟁 정전 7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그 당시 자행된 민간인 학살 사건은 여전히 정확한 피해 규모도 희생자 수도 알 수 없는 상황이다. 그들의 시간은 70년 전에 멈춰있다. 이들의 유해를 자발적으로 찾아 나선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 발굴 공동조사단’(이하 시민 발굴단)은 나이도 사는 곳도 직업도 제각각이지만, 오직 하나 공통된 목표가 있다. 인체를 구성하는 206개의 뼈를 가족의 품으로 돌려주는 것이다. <206: 사라지지 않는>은 뼛조각마저 온전하게 찾을 수 없는 학살 희생자들의 비극을 담은 제목이다. 시민 발굴단은 어떻게 유해 발굴 작업을 시작하게 되었나? 한국전쟁 이전 일제로부터 독립한 시점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1945년 일제 치하로부터 독립했지만, 분단 정부가 수립되며 이념 갈등이 시작되었다. 분단 상태는 고착화되며, 1948년 제주4·3사건이 발생한다. 1950년 6월 한국전쟁으로 이념 갈등이 심화되며, 국가 간의 싸움을 넘어 국가 내 민간인 학살이 한반도 전역에 자행된다. 1960년 4·19혁명 이후‘양민학살사건 진상조사특별위원회’가 구성되는 등 민간인 학살 희생자 유족들의 노력으로 학살 현장 실태조사에 돌입했지만, 1년 뒤 정부는 한국전쟁유족회를 이적단체로 규정하고 유해발굴을 중단시킨다.  오랜 노력 끝에 2005년 제1기 진실화해위원회가 출범하게 된다. 40여 년 만에 민간인 학살 진상 조사와 유해 발굴이 시작되었지만, 5년 만에 해체되고 만다. 이 같은 이유로 2014년 시민 발굴단, 즉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이 결성된다. 묵묵히 유해발굴을 이어간 이들의 노력으로 지난 2020년에는 제2기 진실화해위원회가 재출범하는 결실을 맺기도 했다. 시민 발굴단의 상당수는 제1기 진실화해위원회 전직 조사관 출신이며, 대부분 미완의 과제로 남겨두었던 한국전쟁기 민간인 학살 문제에 대한 책임감으로 비롯되었다. 여기에 유족들과 자원봉사자 등이 자발적으로 합류하여 유해 발굴은 현재도 진행되고 있다. alt 영화 <206: 사라지지 않는> 스틸컷 이들의 활동에 주목하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2005년, <밀양, 반가운 손님(2014)> 제작 당시 밀양 송전탑 반대운동을 주도한 故 김말해 할머니(이하 할머니)를 만났다. 당시 90세를 넘긴 나이에도 불구하고, 765,000kV의 거대한 송전탑과 맞서 싸운 할머니 투쟁의 시작은 한국전쟁이었다. 할머니의 남편은 한국전쟁 때 보도연맹원으로 몰려 학살당했고, 이로 인해 할머니는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슬픔을 홀로 감내해야만 했다.  이후 SNS에서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민간인 학살터에서 유해발굴을 한다는 소식을 접했다. 운명인가 싶었다. 처음 자원봉사자로 발굴단에 합류했을 때, 단원 중 한 분이 내 직업이 영화감독이란 것을 알고 발굴 과정 기록을 요청했다. 영화화까지는 말씀하지 않으셨지만, 단원분들이 흔쾌히 허락해 주셔서 2018년부터 본격적으로 영화화 작업을 시작했다.  발굴 작업을 함께하며 안타까운 순간을 마주할 때가 많았을 텐데…. 시민 발굴단이 공인된 단체라기보다 자발적으로 집결한 결사체에 가까워서 유의미한 활동을 하고 있음에도 비용과 인력의 한계를 늘 겪는다. 몇 년 전, 경남 진주에서 30구가 넘는 유해가 발굴된 적이 있다. 그런데 발굴 도중 발굴단이 갑자기 터를 파란 천으로 덮는 것이었다. 그 이유를 물어보니 “더 조사하는 게 맞지만, 돈과 인력이 부족한 상황에 우리의 역할은 여기까지”라고 답하더라. 발굴이 이루어졌음에도 다시 복토(復土) 할 수밖에 없는 과정이 참 안타깝고 가슴 아팠다. 이 현실을 대중들이 꼭 알아야 하지 않나 싶어 끝까지 영화를 완성하고 싶었다. 특별히 기억에 남거나 인상적인 장면이 있다면? 영화가 4년 동안 담은 6곳의 유해 발굴 현장 가운데, 가장 참혹한 곳은 충남 아산시 배방읍 설화산이었다. 3일 동안 땅을 파도 파도 흔적을 찾기 힘들었는데, 철수하기 직전 유해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 유해들의 80% 이상이 여성이었고, 어린이들의 유해도 60구 가까이 나왔다. 특히 이곳에서는 인체 뼈 가운데 부식이 빨리 된다는 늑골, 그것도 어린아이들의 늑골이 다수 출토되었다. 조사 결과, 마지막 순간까지 엄마들이 아이들을 끌어안고 죽음을 맞이했던 것이 그 원인으로 분석됐다. 2018년 5월 열린 유해안치식에서 80일간 헌신적으로 발굴 작업을 함께 했지만, 아버지의 유해를 끝내 찾지 못한 유족 김광욱 씨의 눈물과,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정의인지 잘 모르겠다. 아버님의 유해를 찾아드리지 못해 죄송할 따름이다”라고 흐느낀 시민 발굴단을 이끄는 박선주 충북대 명예교수의 말에서 끝나지 않는 비극의 실타래를 푸는 과정은 이념과 명분이 아닌, 피해 유족들의 고통을 보살피는 데서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alt 영화 <206: 사라지지 않는> 스틸컷 밀양 송전탑 투쟁을 다룬 <밀양, 반가운 손님>과 <말해의 사계절>, 그리고 이번 영화까지. 폭력의 역사를 꾸준히 탐구한다. 폭력의 역사를 다루려고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관심사를 다루다 보니 자연스레 그래왔다. 세월호 사건 이후 백상현 교수가 <속지 않는 자들이 방황한다>라는 제목의 책을 냈다. 그 책의 제목이 딱 나와 시민 발굴단의 마음이라고 생각한다.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유해를 발굴하는 과정은 방황의 과정이지만, 거대 권력이 방황하는 이들과 연대하며 은폐한 폭력이 무엇인지 계속해서 발언해 나갈 것이다. 관객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있다면? <206: 사라지지 않는>은 어떤 비극을 고발하는 영화가 아니라 아픔과 화해하고 치유하는 영화이다. 아픔을 치유하려면 그 아픔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것이 우선인 것처럼, 그 아픔을 향해 땅을 파고, 또 파서 진실을 발굴해야 한다. 우리는 아픈 과거를 두고 아프다고만 할 것이 아니라 아픔을 치유하고 서로 끌어안아야 한다. 서로 용서하고, 화해하고, 끌어안을 수 있을 때 미래로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alt 영화 <206: 사라지지 않는> 포스터   ]]> Thu, 29 Jun 2023 12:59:21 +0000 80 <![CDATA[기념관이 발굴한 독립운동가 백두산을 넘나들던 독립군 상등병, 정갑선]]> 기념관이 발굴한 독립운동가백두산을 넘나들던 독립군 상등병정갑선   글 독립기념관 독립운동가 자료발굴TF팀   독립기념관은 2018년부터 독립운동가를 발굴하여 국가보훈부에 유공자로 포상 추천하고 있다. 국가와 국민을 위해 희생한 분을 존중하고 기억하는 정부의 의지와 국민적 관심을 담은 것이다.  2023년 매월 독립기념관이 발굴한 독립운동가를 소개한다. 정갑선(鄭甲善) 본적(출생지) : 함경남도 갑산군 장평면 동부리 75 생몰 : 1902. 1. 4. ~ 미상 이명 : 정태성(鄭泰成) 포상추천 : 2019년  포상 : 2020년 순국선열의 날 계기 훈격 : 건국훈장 애국장 운동방면 : 3·1운동, 만주방면 광정단 세 용사의 대승리 1922년 6월 14일 자정 무렵 함경남도 갑산군 동인면 함정포리에 총성이 울려 퍼졌다. 광정단(匡正團) 소속의 독립군 김병수(金炳洙), 정갑선(鄭甲善), 한성조(韓成祚) 세 사람이 함정포 경찰주재소를 공격한 것이다. 이들은 함정포주재소에 숙직 중인 이 지역 조선인들에게 악명 높은 일본인 순사 에구치(江口薰)를 사살하고 4명에게 중상을 입혔으며, 주재소에 보관 중이던 5연발 장총 5자루와 탄환 200발, 권총 1자루, 허리에 차는 칼[佩刀] 2자루, 시계 1개 등을 노획하였다. 그리고 주재소와 동인면사무소 건물을 불태우고, 공문서 일체를 소각하였다. 단 세 사람의 전과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의 대승리였다. alt  「세용사의 대승리」『독립신문』 (1922.08.01.)  만세운동을 주도하다가 태형에 처해지다 정갑선은 1902년 1월 4일 함경남도 갑산군 장평면 동부리에서 부친 정용암(鄭龍岩), 모친 윤용수(尹龍洙)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갑산은 예로부터 ‘사형을 가까스로 면한 중죄인의 유배지’ 중 하나로 유명할 만큼 산세가 험하고 척박한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서울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데다 교통과 통신이 불편한 산간벽지인 이곳에도 1919년 3월 만세운동의 소식이 들려왔다. 갑산주민 200여 명은 3월 15일 장평면 서부리 천도교구당에 모여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읍내 곳곳을 행진하다가 급기야 군청을 공격하였다. 이 소식을 접한 일본군 혜산진수비대에서는 병력을 파견하여 군중을 강제해산시키고, 주모자 25명을 갑산헌병분대로 끌고 가 모진 고문을 하였다. 당시 갑산헌병분대가 있는 동부리에 살고 있던 정갑선은 하루 종일 헌병분대에서 새어 나오는 비명을 들으며 울분을 삼켰다. 이에 4월 10일 자신의 모교인 갑산공립보통학교 기숙사에 친구, 후배 10여 명을 모이게 하였다. ‘조선의 독립을 위해 만세운동이 이대로 끝나서는 안 된다’고 역설하며 마을 어른들의 뜻을 이어 다시 만세운동을 일으키자고 권유했다. 그러나 이들의 계획은 실제 행동으로 옮겨지기 전 발각되었다. 정갑선은 6월 18일 함흥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의 죄명으로 회초리[笞] 90대에 처해졌다. 일제에 의해 16세 이상, 60세 이하의 조선인 남자에게만 언도되던 회초리 형벌, 즉 태형(笞刑)은 하루에 30대까지만 제한하여 집행할 정도로 가혹한 전근대적 형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백만에 달하는 만세시위 참가자들을 감옥에 모두 수용할 수 없던 조선총독부는 태형을 남발했다. 그 결과 수만 명이 태형에 처해졌고, 그중 절반 이상이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정갑선이 태형의 여독에서 가까스로 회복할 무렵 또 다른 시련이 닥쳤다. 그를 간병하던 모친이 돌아가신 것이다. 그는 육체적, 정신적 고통에 시달렸지만 포기하지 않고 새로운 길을 모색하였다.  단군 자손 우리 소년. 국치민욕을 네 아느냐? 백두산에 칼을 갈고 두만강에 말을 먹여 앞으로 가! 하는 소리에 전승고를 울려라 - [복수가]의 일부 시간이 지나자 3·1만세시위의 열기는 점차 가라앉았다. 그러나 독립에 대한 의지는 민족운동의 열정을 경험한 수많은 사람이 모여 더욱 높아져 갔다. 일부는 국내에서 비밀리에 활동을 시작했고, 또 다른 일부는 국경을 넘어 만주로 들어갔다. 이미 만주로 건너가 터전을 잡아 형성된 한인사회를 근거로 하여 항일무장투쟁 단체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이들 무장단체는 접경지인 함경남도를 주된 활동무대로 하여 독립운동자금을 구하거나 일제 관공서를 공격하였다. 이들의 기세가 어찌나 맹렬했던지 당시 갑산군수 윤자록이 ‘독립군의 협박장을 받고 두려워하여 식음을 전폐하고 잠도 못 자더니 미친 사람처럼 헛소리하게 됐다’는 소문도 퍼졌다. 뜻있는 젊은 청년들은 앞다투어 만주로 건너가기 시작했다. 정갑선은 1921년 10월 중국 장백현으로 건너가 조선독립군비단(朝鮮獨立軍備團)에 입단하였다. 군비단은 일본의 침략주의에 대항하여 최후일각까지 투쟁할 것을 목적으로 하여 우선 조선청년들을 모집하여 군사훈련을 가르쳐 군사력을 증강시키는 한편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고 무기를 구입하기 위한 활동을 전개했다. 정갑선은 군사훈련을 받는 한편 신정학교(新正學校)에서 한문교사로 근무하며 조선인 아동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같은 해 12월 그는 갑산군 동인면 조선인 부호의 집을 습격하여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는 첫 임무를 완수하며 독립군으로서의 면모를 갖춰갔다.  alt 장백현 17도구 군비단 활동지 독립군 상등병 정갑선의 활약 1922년 군비단은 인근 지역에서 활동하던 대진단(大震團), 태극단(太極團) 등과 통합하여 광정단(匡正團)으로 발전하였다. 광정단의 상등병이 된 정갑선은 동지들과 함께 갑산군으로 침투하였다. 6월 12일 갑산군 동인면에서 조선인 부호 김하룡, 오형준에게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고, 15일 함정포주재소와 동인면사무소를 공격하여 앞서 서술한 바와 같은 전과를 올렸다. 같은 날 쉴 틈도 없이 갑산 최고의 부호 김의봉의 집을 습격하였다. 독립군이 조선인 부호를 공격한다는 소문을 들은 김의봉은 일본인 순사 4명을 동원하여 자기 집을 지키게 하였는데, 정갑선과 그의 동료들은 교전을 벌여 그들을 모두 사살하고 무사히 귀환하였다. 7월 28일 정갑선은 30여 명의 대규모 병력과 함께 함경남도 혜산군의 포태주재소를 공격하였다. 이들은 3분대로 나뉘어 각지에서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한 후 돌아가던 길이었다. 근거지를 오랫동안 떠나있던 탓에 짚신이 다 해져서 거친 산길을 이동하기 어려웠던 그들은 27일 오후 4시경 한 명을 민가로 보내 짚신을 구하게 하였는데 그만 일본 순사에게 발각되고 말았다. 포태주재소에서는 인근 경찰서의 지원을 받아 대대적 수색작전을 펼쳤다. 이로 인해 주재소 경비가 허술해졌다는 정보를 접한 단원들은 지름길을 통해 주재소를 역공격하여 남아있던 순사 3명 중 두 명을 사살하였다. 그리고 총소리를 듣고 돌아온 수색대와 3시간에 걸쳐 교전을 벌였다. 순사들이 발사한 탄환이 400발에 달할 정도로 격렬한 전투였다. 이 과정에서 안타깝게도 단원 한 명이 순국하였으나 나머지는 총 5자루와 탄환 3천여 발의 전리품을 가지고 무사히 돌아갔다. 정갑선은 이후로도 삼수군 호인면 영성주재소를 공격하고 인근 전봇대 30여 개를 도끼로 찍어 일본군의 통신망을 단절시키는 등 국경을 넘나들며 활발히 활동하였으나, 1924년 피체되어 함흥지방법원에서 징역 12년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두 번의 감형을 거쳐 1930년 11월 27일 출옥한 정갑선은 노부 혼자 남아있는 고향 갑산으로 돌아갔다. alt  「포태산에서 대격전」『동아일보』 (1922.07.30.)(좌), 「국민단원 정갑선 12년을 불복공소」『시대일보』 (1924.10.28.)(우) 무명 독립군의 발자취를 찾아서 이름도 없이 잊힌 독립군이 너무도 많다. 다행히도 정갑선의 경우 『함흥지방법원 이시카와 검사의 3.1운동 관련자 조사자료』에서 만세운동 행적을, 「가출옥관계서류」를 통해 군비단과 광정단에서의 활동 내용을 확인하여 그 치열했던 삶을 복원할 수 있었다. 독립운동가 자료발굴TF팀은 2019년 정갑선을 포상 추천하였고, 그 결과 202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 Thu, 29 Jun 2023 13:01:54 +0000 80 <![CDATA[사(史)적인 여행 휴가지에서 만나는 역사, 강원도 강릉]]> 사(史)적인 여행휴가지에서 만나는 역사강원도 강릉   글·사진 박광일 (역사여행작가·여행이야기 대표)   강릉이라 하면, 시원한 바다와 푸르른 풍경 덕에 대표적인 ‘여름철 휴가지’로 꼽힌다. 이 뿐만 아니라 강릉은 선사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깊고 다양한 역사를 품고 있는 고장으로, 굵직한 역사를 간직한 문화유산이 많이 남아 있는 곳이다.  올여름, 탁 트인 바닷길을 따라 강원도 강릉으로 시간여행을 떠나보는 건 어떨까. alt 오죽헌(좌), 경포생태저류지(우) 신사임당과 율곡 이이가 태어난, 오죽헌 첫 번째로 살펴볼 곳은 강릉의 대표적인 사적지 ‘오죽헌’이다. 오죽헌은 신사임당과 율곡 이이가 태어난 곳으로, 조선시대 오래된 살림집 모습이 남아있는 곳이다. 이 주변에는 검은 대나무인 ‘오죽’이 있어, 그 이름의 내력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오죽헌은 원래 이이의 이종사촌인 권화의 호(號)이다. 조선 전기만 하더라도 부모는 재산을 딸에게 물려주기도 했는데, 이이가 태어날 때 이 집은 외할머니인 용인 이씨 소유였다. 이후 용인 이씨는 셋째 딸인 신사임당에게는 서울 집을, 넷째 딸에게는 강릉 집을 물려주었는데, 넷째 사위가 권처균의 아버지 권화이다. 그리고 권처균이 이 집을 물려받았을 때, 아버지에서 아들로 재산을 상속하는 풍습으로 바뀌었다. 이때 권처균은 집 주위에 검은 대나무가 무성한 것을 보고 자신의 호를 오죽헌(烏竹軒)이라 지었고, 이것이 후에 집 이름이 되었다.그러므로 신사임당과 이이가 태어났던 시절, 이 집의 이름은 오죽헌이 아니었다. 이처럼 오죽헌은 신사임당과 이이의 내력을 살펴볼 수 있는 곳이자, 동시에 조선시대 상속제도의 변화를 살펴볼 수 있는 흥미로운 곳이다. 더불어 조선전기 주택과 구조적 가치를 살펴볼 수 있는 유서 깊은 곳이기도 하다.오죽헌은 원래 별당 건물이었는데, 최근에는 오죽헌 옆에 사랑채와 안채를 복원하였다. 또한 이 주위에는 이이를 기리기 위한 사당인 문성사와 시립박물관 등도 있어 강릉의 역사와 문화 이야기를 한눈에 살펴보기 좋다.  Tip 1. 메타세쿼이아 나무를 따라 펼쳐진 산책로 오죽헌을 나와 큰 도로를 건너면 넓은 들판이 펼쳐지는데, 바로 경포생태저류지이다. 특히 이곳에는 메타세쿼이아 나무가 양옆으로 줄지어 서 있는 길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도보로 30~40분 소요되는 이 길 끝에는 경포호가 있고, 길 끝에서 뒤를 돌아보면 멀리 백두대간의 거창한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경포 일대 자연의 아름다움을 온전하게 느낄 수 있는 이곳에서 평소 느끼지 못했던 여유로움을 만끽해 보자.  오죽헌 주소 & 관람시간 & 문의 강원특별자치도 강릉시 율곡로 3139번길 24  |  오전 9시~오후 6시  |  033-660-3301~3308 * 연중무휴 alt 강릉3·1운동기념공원(좌), 가시연습지(우) 그날의 뜨거웠던 열기를 되새기며, 강릉3·1운동기념공원 이번에 살펴볼 곳은 경포호에 자리한 ‘강릉3·1운동기념공원’이다. 이곳은 1919년 강릉지역에서 일어난 3·1운동을 기념하기 위한 공원이다. 강릉에서는 1919년 여러 번의 만세운동이 펼쳐졌다. 이 지역에서 만세운동이 처음 일어난 날은 장날인 4월 2일이었다. 강릉감리교회 신도들과 강릉고보학생, 유도진흥동지회와 강릉청년회가 주도하였으나 아쉽게도 이들의 움직임이 일본 경찰에게 사전에 발각되었다. 이 같은 이유로 시위는 예상보다 작은 규모로 진행되었다. 장날이었던 것을 고려해 보면, 100여 명이 나선 이날의 시위는 소규모라고 할 수 있다.그러나 이 만세운동 이후 4일과 5일, 7일과 8일 남대천과 강릉시내 등 강릉 여러 곳에서 큰 규모의 시위가 일어났다. 처음부터 조직적으로 일어난 만세운동은 아니었지만, 자연스럽게 강릉지역 곳곳으로 퍼져나간 것이다.강릉3·1운동기념공원에는 이때 참여했던 10여 명의 독립운동가 흉상이 세워져 있다. 이들의 이름과 활동 기록을 살펴보며, 잠시 그날의 뜨거웠던 열기를 상상해 보자. Tip 2. 한여름에만 볼 수 있는 가시연꽃 경포호 옆으로 가시연습지가 조성되어 있다. 멸종위기종이기도 했던 가시연은 잎 모양이 가시가 돋은 것처럼 울퉁불퉁해 독특하다. 경포호 옆 습지를 조성하는 가운데, 진흙 속에 잠겨있던 씨앗이 발아가 되어 가시연이 자라기 시작했다고 한다. 특히 가시연은 한여름에만 볼 수 있는 꽃이라고 하니, 여름철에 강릉에 들린다면 한번쯤 찾아보기를 바란다.  강릉3·1운동기념공원 주소 & 관람시간 & 문의 강원특별자치도 강릉시 저동 645  |  오전 9시~오후 8시  |  033-660-2018 * 연중무휴 alt 허균·허난설헌기념공원(좌), 『난설헌집』(우) 조선의 여성 시인을 기리며, 허균·허난설헌기념공원 경포호에서 작은 개울을 건너 숲으로 들어가면 ‘허균·허난설헌기념공원’이 나온다. 이곳은 조선시대 만들어진 최초의 한글 소설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과 최고의 여류 문인으로 인정받는 허난설헌을 기념하기 위한 문학 공원으로, 두 남매가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다. 허난설헌은 4남매 중 셋째였다. 위로는 허성과 허봉, 아래로는 허균을 두었다. 허난설헌의 ‘난설헌’은 호로, 이름은 초희, 그리고 자는 경번이다. 초희와 경번은 스스로 지은 이름과 자(이름 대신 친한 사람이 부름)로, 중국 초나라 장왕의 현명한 아내로 이름난 번희와 관련이 있는 이름이다. 초희는 ‘초나라의 번희’, 경번은 ‘번희를 생각한다’는 의미이다. 보통 조선시대 여성이 성씨만 남아있는 것과 달리, 허난설헌은 이름과 자를 스스로 지었다는 점에서 자신감이 넘쳤던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한편 허난설헌은 결혼할 때도 남편을 직접 고르겠다고 고집을 피우기도 했다. 그는 의병장 김성립과 결혼하였는데, 이후 점점 활기를 잃어갔다. 남편과의 관계와 시댁살이가 편치 않았으며, 어린 자식 둘을 병으로 잃은 것이 그 이유였다. 결국 그는 27살 젊은 나이로 요절하고 말았다. 허난설헌은 고단한 생활 속에도 사회의 부조리를 꼬집는 시와 여성의 당당함을 드러낸 시를 쓰기도 했다. 또한 강릉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덕에 그의 시에는 강릉이 종종 등장한다. 그의 작품을 살펴보며 그 속에 등장하는 강릉을 찾아보는 것도 또 하나의 재미이다.  Tip 3. 관동팔경(關東八景) 제1경, 경포대 허균·허난설헌기념공원에 왔으면 가까운 곳에 자리한 경포대를 지나칠 수 없다. 이곳은 경포에 위치한 누각으로 관동팔경 가운데 제1경으로 꼽힌다. 관동팔경은 모두 대관령 동쪽 8곳의 명승지를 뜻한다. 시기에 따라 약간의 변화가 있었으나 지금은 강릉의 경포대를 비롯해 울진의 망양정과 월송정, 삼척의 죽서루, 양양의 낙산사, 고성의 청간정과 삼일포, 통천의 총석정을 가리킨다. 경포대는 고려 충숙왕 때 처음 생겼으며, 조선 중종 때 지금 자리에 누각을 옮겨지었다. 500년이 흐른 만큼 수많은 사람이 경포대를 찾았는데, 그중 명나라 사신이었던 주지번도 있었다. 주지번을 경포대로 안내한 사람은 허난설헌의 동생 허균이었다. 허균은 누이의 시를 모은 『난설헌집』을 주지번에게 선물하였고, 이 시집은 중국에서 발간되어 큰 인기를 얻었다. 이후 일본에서도 시집이 출간되어 인기를 얻었고, 허난설헌은 동아시아의 유명한 시인이 되었다.  허균·허난설헌기념공원 주소 & 관람시간 & 문의 강원특별자치도 강릉시 저동 645  |  오전 9시~오후 8시  |  033-660-2018 * 연중무휴   ]]> Thu, 29 Jun 2023 13:27:28 +0000 80 <![CDATA[이벤트 공지 행운의 주인공이 되어보세요!]]> 이벤트 공지행운의 주인공이 되어보세요!   alt   ]]> Thu, 29 Jun 2023 13:49:10 +0000 80 <![CDATA[이달의 기념관 2023 독립기념관 특별기획전 <한국독립운동과 국제회의> 개막]]> 이달의 기념관2023 독립기념관 특별기획전<한국독립운동과 국제회의>   글 편집실사진 이소연   독립기념관은 최근 <한국독립운동과 국제회의>라는 주제로 특별기획전시를 개최하였다. 이번 전시는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 주요 국제회의를 주제로 그 역사적 의미를 재조명하고자 마련하였다.  초대받지 못한 국제회의 무대 속에서도 끊임없이 독립을 호소했던 열사들의 모습을 오는 8월 20일까지 만나볼 수 있다. alt 전시 개막(테이프 커팅) 모습(좌), 참석 내빈 전시 관람 모습(우) 귀중한 내빈들이 자리를 빛낸 개막식 독립기념관은 지난 6월 15일 제7관 내 특별기획전시실Ⅱ에서 <한국독립운동과 국제회의> 특별기획전 개막식을 개최하였다. 이번 개막식에는 제2차 만국평화회의 대표단을 파견하는 데 있어 지대한 공헌을 한 우당 이회영의 손자 이종찬 광복회장과 반도고학생친목회를 중심으로 태평양회의를 후원한 범정 장형의 후손 장지석 단국대학교 교수 등이 참석해 의미를 더했다.먼저 국민의례와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에 대한 묵념을 시작으로 개회사 및 축사, 테이프 커팅, 전시 관람 순서로 개막식이 진행되었다.  한시준 독립기념관장은 개회사를 통해 “독립운동 시기 전 세계 각지에서 전개되었던 국제회의는 한국의 독립을 호소할 수 있는 기회로써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며, “오늘날 K-문화를 널리 알리려고 노력하는 것처럼, 이번 전시를 통해 한국을 세계에 처음 알린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을 잊지 않아야 한다”고 밝혔다. alt   시간순으로 총 3부로 구성된 전시 <한국독립운동과 국제회의>는 1907년 제2차 만국평화회의부터 1945년 샌프란시스코회의까지 주요 국제회의를 대상으로 시간 순서에 따라 크게 3부로 구성하였다. 1부 ‘국제평화 모색을 위한 국제회의에 을사늑약의 불법성을 알리다’는 1905년 11월 일제와의 을사늑약 강제 체결로 대한제국이 외교권을 빼앗긴 뒤,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해 국제사회에 한국문제를 호소했던 활동들을 소개한다. 2부 ‘국제질서 재편을 위한 국제회의에 한국독립을 호소하다’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질서가 재편되는 상황에서 전후 문제 처리를 위해 열린 파리강화회의와 워싱턴회의 등에 대표단을 파견해 한국 문제를 국제회의에 상정시켜 독립을 승인받고자 했던 활동들을 소개한다. 3부 ‘일제의 침략전쟁에 맞서 국제회의에서 한국독립을 보장받다’는 1931년 일제의 동북 지방 침략을 규탄하기 위해 열린 제네바 국제연맹회의에 파견된 대표단의 활동을 살펴본다. 이어 1941년 태평양전쟁 이후 일제의 침략전쟁이 확대되자 전후처리와 국제평화 논의를 위해 열린 카이로회의와 샌프란시스코회의에서 한국의 독립을 보장받고자 했던 활동 등을 소개한다. alt 2019년 네덜란드에서 원본이 최초로 발견·공개된 스위스 루체른에서 열린 만국사회주의자 대회 결의문 총 56점 중 눈여겨봐야 할 주요 자료 이번 전시에는 워싱턴회의 한국대표단에서 작성한 추가 호소문을 비롯해 각종 청원서와 각국 대표·언론인 등을 상대로 외교·선전 활동을 전개하거나 그들을 지지한 사람들이 남긴 문건 자료 52점과 영상자료 4점 등 총 56점이 전시된다.  눈여겨볼만한 자료는 2019년 미국 LA 대한인국민회에서 대여한 희귀자료 13점 등이다. 이 가운데 루체른 만국사회주의당 대회에서 발표되었던 선언문과 임시헌장이 전시되었는데, 이 자료는 네덜란드에서 공개가 되었으나 독립기념관에서는 처음 전시된다. 또한 지난 4월, 서거 100년 만에 유해가 국내로 봉환된 황기환이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장 대리 백일규와 주고받은 편지와 공문 2점도 전시되어 있다. 문건 자료 외에도 주요 국제회의 장면 등 당대에 촬영된 영상 자료 4점도 함께 관람할 수 있다. 그중 1921년 11월 열린 워싱턴회의 참석을 위해 8월 중순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이승만과 일행의 모습이 담긴 희귀 영상도 만나볼 수 있다. [이달의 관람객] 2023 독립기념관 특별기획전 <한국독립운동과 국제회의> 관람객 인터뷰 alt 한시준 독립기념관장 독립운동 가운데 세계적으로 자랑할 만한 것들이 많습니다.  그중 하나가 국제회의인데, 세계열강들이 모여 회의할 때마다 우리는 대표를 파견하고 참석하여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동안 참석하지 못했다, 성과가 없었다 등의 이유로 소홀히 여겨왔습니다.  그렇기에 이번에 처음으로 독립운동 시기 개최된 국제회의를 주제로 전시를 열게 되어  감회가 새롭습니다.  이번 전시를 통해 독립은 그냥 주어진 것이 아니라 독립운동을 통해 이룬 성과임을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alt 이종찬 광복회장 독립기념관에서 독립운동 시기 개최된 국제회의를 주제로 특별전시를 마련한 것은 대단히 뜻깊은 일입니다.  우리나라 독립운동은 몇 가지 노선이 있었습니다.  무장독립투쟁, 외교노선, 또 하나는 자체 능력을 향상하는 노선이었는데, 우리가 외교노선에 대해 비교적 소홀히 다뤄왔던 게 사실입니다.  이번 특별전이 한국독립운동에서 국제회의를 통한 외교노선이 얼마나 중요했는가를 일깨워 주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alt 조은경 독립기념관 전시부장 일제를 상대로 다양한 독립운동을 전개해 온 한국인들은 외교활동의 일환으로서 국제회의에 대표들을 파견해  일제의 만행을 고발하고 한국의 자유와 독립의 정당성을 국제사회에 알리고자 했습니다.  성패와 상관없이 국제회의가 열릴 때마다 직간접적으로 참석하며 국제사회에 한국의 독립과 자유를 호소하고자 했던 독립운동가의 활동을 살펴보고,  그들의 헌신을 기억하는 자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 Thu, 29 Jun 2023 13:33:25 +0000 80 <![CDATA[기념관 소식 독립기념관, 재난 대비 초기대응 역량 강화 노력]]> 기념관 소식독립기념관, 재난 대비 초기대응 역량 강화 노력   alt   ]]> Thu, 29 Jun 2023 13:46:26 +0000 80 <![CDATA[#월간독립기념관 지난 호 독자 후기 이벤트 당첨자 발표]]> #월간독립기념관지난 호 독자 후기 이벤트당첨자 발표  ※ 당첨자 5명에게 모바일 커피쿠폰(아메리카노)을 전달할 예정입니다. 참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alt  ]]> Thu, 29 Jun 2023 13:44:12 +0000 80 <![CDATA[어제의 오늘 잊지 말아야 할 8월의 역사]]> 어제의 오늘잊지 말아야 할 8월의 역사   정리 편집실   alt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일제의 강제적 한국병탄을 저지하기 위해 성명회가 결성된 날은 1910년 8월 23일입니다.   ]]> Wed, 02 Aug 2023 16:35:00 +0000 81 <![CDATA[들여다보기 한인 애국자 8,624명, 일제의 강제적 ‘한국병탄 반대’를 외치다]]> 들여다보기한인 애국자 8,624명, 일제의 강제적 ‘한국병탄 반대’를 외치다   글 주미희(한국외국어대학교 사학과)   1910년 8월 23일, 한국을 병탄하려는 일제의 움직임이 더욱 명확해지자 블라디보스토크를 중심으로 한 시베리아 지방의 애국 동포들은 이를 저지하기 위해 성명회를 결성하였다. 성명회는 한인 애국자 8,624명의 이름이 적혀있는 선언서와 각종 격문 등을 인쇄·반포하며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해외 독립운동의 근거지, 러시아 연해주 두만강을 경계로 인접한 러시아 연해주 지역은 1860년대 이래 생계를 위해 이주해 간 함경도 농민들과 영세 농민들이 황무지를 개간하고 한인 마을들을 개척한 곳이었다. 3·1운동 이전까지 민족의 자유와 독립을 가져다 줄 근거지로서 국내외 동포들의 희망과 기대를 받은 지역이었다. 국내외의 이름 있는 민족운동가라면 한 번쯤은 거쳐야만 했고, 블라디보스토크의 신한촌은 ‘원동(遠東) 한인의 서울’로 불렸다.  연해주 지역에서 독립운동이 본격화된 것은 1906년이었다. 을사늑약 이후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후일을 기약하며 연해주로 이동해 민족운동의 새로운 길을 모색하였다. 러시아 한인사회의 지도자 최재형과 전 러시아공사 이범진의 아들이자 헤이그 특사였던 이위종이 이범윤·안중근·엄인섭·김기룡 등과 함께 의병부대를 조직하여 벌인 국내진공작전, 안중근의 하얼빈 거사 등은 연해주 한인사회의 인적·물적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alt 러시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 전경 (1900년대) 한국병탄 반대운동의 시작 1910년 일제에 의한 ‘한국병탄 반대운동’은 당시 가장 유력한 해외 항일운동 근거지였던 연해주와 미국 캘리포니아주 그리고 미국령 하와이의 한인사회에서 전개되었다. 그중 러시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의 한인들은 신문 보도를 통하여 일제에 의한 한국병탄 소식을 접하였다. 한인 민족운동가들은 국가주권의 상실이라는 절박한 상황 앞에서 일치단결하였다. 1910년 6월 21일 유인석·이상설·이범윤 등을 중심으로 연해주의 의병 계열인사 150명이 블라디보스토크 아무르만의 맞은 편 암밤비(Ambambi) 지역의 자피거우(Zapigou)에 집결하여, 유인석을 도총재로 ‘13도의군(十三道義軍)’을 결성하였다.  13도의군의 목표는 연해주의 항일 의병부대들이 국내로 진공하여 국내 의병부대들과 연합을 통해 일본군과 최후의 결전을 치르는 것이었다. 홍범도·이진룡·우병열·이남기 등의 의병장들과 안창호·이종호·이갑 등의 애국계몽운동가들이 대거 참여하였다. 13도의군 도총재인 유인석과 이상설은 광무황제에게 상소를 올렸다. 13도의군 창설 소식을 전하며 군비를 원조해 줄 것과 연해주로 파천(播遷)하여 망명정부를 수립할 것을 요청하였다. 13도의군은 블라디보스토크 주재 일본총영사관에 대표를 파견하여 일제에 의한 한국병탄을 항의하였다. 또한 한국병탄 취소를 촉구하는 한인 500명의 서명이 담긴 항의서한을 일왕(日王)에게 전달하였다. 그렇지만 1910년 8월 한국병탄으로 국내진공작전은 좌절되었다.   1910년 8월 성명회 결성 1910년 8월 초에 들어서면서 블라디보스토크에는 외신을 타고 일제의 한국병탄 소식이 전해지고 있었다. 8월 23일 블라디보스토크의 신문 『달레카야 오크라이나(Dalekaia Okraina)』에 한국병탄을 알리는 비통한 기사가 실렸다. “한일병합은 22일 조약의 조인을 마치고 24일 각국에 통고를 보내며, 29일과 30일 이틀간에 일반에게 발표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한인 200여 명이 블라디보스토크의 한인촌 개척리에 위치한 한민학교에 집결하였다. 특사 파견이나 13도의군의 정비만으로는 국망(國亡)의 현실을 타개할 근본적인 대응책으로 부족했다. 다음날 새벽까지 700여 명이 모인 이 회의에서 성명회(聲明會)가 결성되었다.  성명(聲明)이란 ‘성피지죄 명아지원(聲彼之罪 明我之寃)’, 즉 ‘적의 죄상을 성토하고, 우리의 억울함을 밝힌다.’라는 의미이다. 성명회의 목적은 “대한의 국민 된 사람은 대한의 광복을 죽기로 맹세하고 성취한다.”는 것이었다. 유인석·이범윤·김학만·차석보·김좌두·김치보 등 6인의 명의로 된 취지서가 작성되었다. 일본 정부에는 ‘국제공약에의 배신’을 질타하는 공한을 보내고, 대한제국과 외교관계를 맺은 각국 정부에게는 ‘병탄무효’를 선언하는 전문과 선언서를 보내기로 결의하였다. alt 유인석 영정(좌), 이상설(우) 성명회의 주요활동 8월 26일 성명회는 구미열강에게 일제에 의한 강제적 ‘한국병탄 무효’ 선언서를 발표하였다. 이상설이 기초한 선언서의 전문은 ‘대한일반인민총대 유인석(大韓一般人民總代 柳麟錫)’ 명의의 한문으로 작성되었다. 중국에는 한문으로, 미국·러시아·독일·영국·오스트리아-헝가리·벨기에·이탈리아 등의 구미 각국에는 러시아어와 불어로 번역하여 발송하였다. 각국의 신문사 등 유력한 언론기관에도 한국병탄 무효를 선언하는 한인의 결의문을 보내어 게재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와 함께 러시아 한인들에게 국권회복 운동에 참여할 것을 호소하였다. 부녀자·청년 등 1천여 명으로 구성된 결사대가 블라디보스토크 일본인 거주지에 들어가 한국병탄 무효 시위를 벌이기도 하였다. 국권회복을 목표로 국내진공작전을 수행할 무장부대를 조직하기 위한 자금 모금도 이루어졌다. 8월 한 달 동안 연해주 한 곳에서만 7만 루블이 넘는 성금이 모아졌다. 당시 연해주의 한인 잡역 노동자의 일일 임금이 1루블 이하인 점을 감안하면 실로 엄청난 금액이었다.  미국 워싱턴에 있는 국립문서보관소에는 100여 장에 달하는 성명회 선언서가 보관되어 있다. 이 문서에는 각지 한인 사회지도자 8,624명의 이름이 적혀있다. 선언서는 “한국인의 과업이 아무리 어려운 것이라 할지라도 한국인의 자유에 도달할 때까지 손에 무기를 들고 일본과 투쟁할 것”을 천명하고 있다. 당시 미국 국무장관에 전달된 전문에는 “일본 측의 무자비한 적대행위에 대해 유럽 열강과 미국·중국에 항의를 제기한다. 이미 체결된 조약에 대해 일본 측은 반복적인 위반을 해왔으며, 그것은 유혈적인 양상을 띠고 국법을 위반해 왔고, 정의의 법을 무시해 왔다. 일제의 폭력적인 한국합병은 평화의 위반일 뿐 아니라 미래의 끝없고 휴전 없는 전쟁의 계속을 의미할 뿐이다.”라고 적혀 있다. 성명회의 '한국병탄 반대운동'은 구미 열강들에게 인류의 보편적인 정의와 평화의 가치를 바탕으로 일제에 의한 한국병탄의 불법성을 알리고 한국인들을 지지해 줄 것을 요청하는 절실한 함성이었다. 일제의 탄압과 성명회 해산 1904년 러일전쟁 이후 러시아와 일본은 두 차례의 협약을 맺었다. 목적은 중국 동북지역과 한반도에 있어서 상호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것이었다. 1907년 제1차 러일협약에서 러시아는 외몽고에서 이익을 보장받는 대신 한국에 대한 일본의 지배를 묵인하였다. 1910년 초 러시아와 일본은 미국의 중국 동북지역 진출에 대한 공동전선을 형성하기 위해 제2차 러일협약을 체결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본은 한국합병에 대한 러시아의 동의를 재확인하였다. 일본과 러시아가 외교적으로 가까워져 있는 상황에서 한국인들의 항일운동은 많은 탄압을 받았다. 일본은 우선적으로 한국과 러시아 국경 수비를 강화하는 한편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하는 한인들의 여권발급을 엄격하게 제한하였다. 또한 러시아와 기타 외국에서 국내로 들어오는 한인들에 대해 삼엄한 감시를 하였다. 이와 동시에 일본은 러시아와 중국 정부에게 배일적인 한인 명단을 전달하며 러시아와 중국 영토에서 추방할 것을 요구하였다.  일본과의 관계 개선에 힘쓰던 러시아는 일본의 요구를 받아주었다. 러시아 정부는 연흑룡주 총독 운테르베르게르(P.F. Unterberger)에게 모든 배일운동에 대한 예비단속을 지시하였다. 운테르베르게르 총독은 일제에 의한 강제적 한국병탄 기사를 게재했다는 이유로 한글신문 『대동공보』를 폐간하였다. 8월 말, 총독의 명령을 받은 러시아 관헌들은 한인촌 개척리를 기습해 성명회의 모체라 할 수 있는 13도의군의 주요 인물 및 회의에 참석했던 간부 등 42명의 한인을 체포하였다. 그 중에는 유인석·이상설이 포함돼 있었다. 주요 참여 인사였던 김좌두·안한주·이범윤·이남기·이치권 등 7명은 ‘항일운동의 수괴들’이라 하여 이르쿠츠크로 추방되어 7개월 동안 유폐되었다.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성명회 블라디보스토크 회장 오주혁은 러시아에서 쫓겨나 인천 무의도에서 1년간 유배 생활을 하였다. 그 결과 성명회는 더 이상의 활동을 전개하지 못하고 해체되고 말았다. alt 『대동공보』 성명회 결성의 의의 성명회는 일제에 의한 한국병탄 무효를 선언하고 그 부당성을 국제사회에 호소하였다는 점에서 상징적 의미가 있다. 무엇보다 러시아 연해주 지역뿐만 아니라 북간도의 다양한 독립운동 노선을 가진 8,624명의 한인 애국자들 대부분이 참여하여 각국 정부를 대상으로 일제에 의한 한국병탄을 항의하는 외교적 방략을 모색하였다는 점은 독립운동사에서 커다란 의미를 지닌다. 또한 의병 세력이었던 도총재 유인석을 비롯한 유학자 계열의 한인 지도자들이 서구를 오랑캐가 아닌 외교의 대상으로 인식하는 전환점이 되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성명회는 러시아 한인사회의 단합과 조국 독립에 대한 확고한 신념의 표출이었다. 성명회의 취지서 및 선언서와 각종 격문들의 인쇄와 반포는 간도와 시베리아 지방의 한인들에게까지 독립 활동을 더욱 확대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한 역량은 1911년 연해주 한인들의 자치와 독립운동을 위해 조직된 권업회와 1913년 말 이동휘·이종호·이상설·이동녕 등의 애국지사들이 러일전쟁 10주년에 대비하여 항일독립전쟁을 목표로 조직한 대한광복군정부로 계승되었다.  alt 「권업회 입회청원서」   ]]> Wed, 02 Aug 2023 16:50:49 +0000 81 <![CDATA[한눈에 보기 한눈에 보는 성명회(聲明會)]]> 한눈에 보기한눈에 보는 성명회(聲明會)  정리 편집실  alt  ]]> Wed, 02 Aug 2023 16:54:00 +0000 81 <![CDATA[이달의 독립운동가 ‘간도 15만원 사건’의 주인공들 윤준희·임국정·한상호·김강]]> 이달의 독립운동가‘간도 15만원 사건’의 주인공들윤준희·임국정·한상호·김강   글 독립기념관 전시부   alt   철혈광복단과 ‘간도 15만원 사건’ 1920년 1월 4일 한인 청년들은 조선은행 룽징(龍井)출장소로 향하던 일제 수송대를 상대로 일화 15만원을 탈취해내는 거사에 성공했다. 거사에 가담한 청년은 윤준희, 임국정, 한상호 등으로 이들은 철혈광복단(鐵血光復團) 단원이었다. 북간도 지역 민족학교 출신 청년들이 1918년에 조직한 철혈광복단은 1919년 9월 즈음부터 독립전쟁을 위한 대규모 자금을 마련하고자 ‘간도 15만원 사건’을 면밀히 준비했다. 이들은 조선은행 직원을 설득한 끝에 수송 계획을 알아냈고 1920년 1월 4일 거사에 성공했으며, 북간도 독립운동 단체들과 긴밀히 협의해 독립전쟁에 사용될 군수품 구입을 위해 노력했다.  alt 조선은행 룽징출장소 조선은행 직원을 설득해 의거를 거행한 윤준희 윤준희는 1895년 함경북도 회령군에서 태어났다. 북간도 룽징으로 이주한 그는 서전서숙(瑞甸書塾)에서 수학하고 영신학교(永新學校)에서 교원으로 활동하며 한인교육에 힘썼다. 윤준희는 임국정 등과 함께 청년맹호단(靑年猛虎團)을 조직해 북간도 내 한인 밀정과 친일 협력자들에게 경고문을 살포하고 군자금 모집을 위해 노력했다. ‘간도 15만원 사건’의 거사 계획과정에서 윤준희는 조선은행 회령지점의 서기 전홍섭을 설득해 자금 수송계획을 알아냈고, 거사 성공 후에는 자금 및 서류 관리를 총괄하며 임국정의 무기 구입을 도왔다. 그는 밀정의 밀고로 1월 말 일경에 붙잡혀 사형을 선고받고 1921년 8월 25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했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alt 영신학교 전경(좌), 「간도 청년맹호단의 경고문」 (1919.12.05.)_국사편찬위원회 제공(우) 독립전쟁을 준비하기 위해 무기 구입을 주도한 임국정 임국정은 1896년 함경남도 함흥군에서 태어나 가족들과 함께 일찍이 북간도로 이주했다. 창동학교(昌東學校)를 졸업하고 독립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동림무관학교(東林武官學校)에 입교했다. 그는 1919년 2월 25일 러시아 니콜리스크에서 개최된 전로국내조선인회의에 학생대표로 파견되기도 했다. 1919년 9월 즈음부터 ‘간도 15만원 사건’을 계획한 임국정은 윤준희와 함께 조선은행 회령지점의 서기 전홍섭을 설득했고 거사 성공 후,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와 논의하여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넘어갔다. 그 곳에서 무기 구입을 위해 활동하던 중 밀정의 밀고로 1월 말 일경에 붙잡혀 사형을 선고받고 1921년 8월 25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했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alt 윤준희, 임국정, 한상호, 전홍섭의 판결문_국가기록원 제공 일화 15만원을 약속장소로 운송한 한상호 한상호는 1900년 함경북도 경성군에서 태어나 일찍이 북간도로 이주했다. 명동중학교(明東中學校)에서 신학문을 배웠으며 졸업 후 와룡소학교(臥龍小學校)에 재직하며 한인교육에 힘을 기울였다. 룽징 3·13 만세시위 이후 본격화된 독립전쟁 준비를 위해 한상호는 자신의 집에 있는 송아지를 팔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갔고, 한인 청년들과 함께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1920년 1월 4일 ‘간도 15만원 사건’의 거사 당일에는 탈취한 현금을 약속 장소로 옮기는 역할을 담당했고, 이튿날 자금을 이송하는데 성공했다. 무기 구입을 위해 노력하던 한상호, 윤준희, 임국정은 은신처에 머물다가 일경에 붙잡혀 사형을 선고받고 1921년 8월 25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했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alt 윤준희, 임국정, 한상호, 전홍섭의 판결문_국가기록원 제공 북간도 지역 독립운동단체 간도청년회의 발기인 김강 김강은 평안도에서 태어나 평양 숭실학교(崇實學校)에 재학하던 중 ‘105인 사건’에 관련되어 일경에 붙잡힐 위험에 처하자 1912년 간도로 망명했다. 그는 1913년 한인 자치단체 간민회(墾民會)에서 일본조사부원으로 활동했고, 1919년 11월 간도청년회(間島靑年會)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1920년 9월부터 일제는 중국 동북지역에서 세력을 확장하며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한인들을 탄압하고 독립군을 해산하기 위해 대규모 정규군을 출병시켰다. 이 과정에서 김강은 1920년 11월 13일 ‘간도 15만원 사건’의 관계자라는 죄명으로 일본군에 붙잡혀 피살 순국했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alt 「불령선인 간도청년회 취지서 배포의 건」_국사편찬위원회 제공 alt   ]]> Wed, 02 Aug 2023 17:02:57 +0000 81 <![CDATA[끝나지 않은 독립운동 광복 78주년을 맞아 ‘광복절’을 되새기다]]> 끝나지 않은 독립운동광복 78주년을 맞아‘광복절’을 되새기다   글 이계형 (국민대학교 교양대학 교수)   1946년 8월 15일, 이날은 광복 1주년을 맞이한 날이었다. 당시는 ‘광복절’이 아닌 ‘해방기념일’이었다. 이는 1946년 5월 미군정청이 해방기념일뿐만 아니라 신정일(1.1), 독립기념일(3.1), 추석(음력 8.15), 한글날(음력 10.9), 개천절(음력 10.3), 기독성탄일(12.25) 등을 정식 공휴일로 지정하면서다.  처음 맞은 기념일에 기념식과 음악회가 개최되었고 서울 시내 가장행렬이 진행되었으며 죄수들 가운데 모범수들이 가석방되었다. 지금까지 가석방은 '특별사면' 형태로 이어져 오고 있다.  이날 화두는 38선을 기준으로 남북이 분단된 상황이었고, 미군정의 통치를 받던 때였기에 ‘민족통일’과 ‘자주독립’이었다.  1948년과 1949년 8월 15일에 내걸린 경축 현수막 글귀는 ‘해방기념일’이 아니었다.  1948년 이날은 해방기념일과 대한민국 정부수립일이 겹쳤기에 ‘대한민국정부수립국민축하식’이었고, 1949년은 ‘대한민국독립1주년기념’이었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8월 15일이 ‘광복절’로 바뀌어 기념하게 되었고, 지금껏 그날을 어떤 날로 기념해 오고 있는지를 되새겨보고자 한다.  alt 1946년 8월 15일, 서울 중앙청에서 열린 해방 1주년 기념식 (당시는 ‘광복절’이 아닌 ‘해방기념일’이었다.) 1950년대, 국경일 제정·광복 10주년 등 ‘광복절’이 국경일로 제정된 것은 1949년 10월 1일 대한민국 정부가 ‘국경일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면서다. 이로써 3·1절, 제헌절, 개천절, 한글날과 함께 광복절이 대한민국 5대 국경일로 지정되었다. 이후 정부는 국경일 경축 가사를 현상 모집하였으나, 입상작품이 없어 전문가에게 위촉하여 1950년 4월 정인보 작사, 윤용하 작곡의 광복절 노래를 만들었다. 하지만 그해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기념식은 치러지지 못했다. 광복절 첫 기념식은 1951년 8월 15일 임시수도 부산에 마련된 경남도청 내 국회의사당에서 개최되었다. 당시는 전쟁 중이었기에 ‘남북통일과 완전한 자주독립’을 쟁취하자는 목소리가 컸다.  1952년부터 1955년까지는 중앙청 광장에서 광복절 경축을 겸하여 이승만 대통령취임을 축하하는 기념식이 치러졌다. 경축사에 ‘광복절을 계기로 통일로 진군하자’는 등의 ‘북진통일’이 강조되었다. 1954년 처음으로 경회루에서 경축연이 열렸고 1961년부터 매년 그곳에서 행사가 열리다가 1996년부터 중단되었다. 또한 이때부터 경축 행사가 라디오로 생방송 되었는데, TV로 이를 생중계한 것은 1971년부터다. 1955년에는 광복 10주년을 맞아 서울운동장에서 대대적인 기념식이 개최되었고 ‘제7주년 정부수립기념식’도 같이 치렀다. 1956년부터 1960년까지 한시적으로 광복절 당일 야간통행금지가 해제되었고, 창경궁·덕수궁 등이 무료로 개방되었으며, 광복절 전후로 전국적으로 비상경계령이 내려졌는데 이는 1972년부터 중단되었다. 1959년부터는 보신각에서 타종 행사를 시작하였고, 일본 교포들의 모국 방문이 처음으로 시행되었는데 점차, 중국·미주 등지의 교포들로 확대되었다. 1960~1970년대, 독립유공자 포상·기념물 제막 등 1960년 광복절 행사는 4·19혁명 이후 출범한 제2공화국에서 처음으로 치러졌다. 이때에도 대북 메시지는 ‘북진통일’이었다. 대국민 메시지는 ‘국민 협력’이었다. 1961년 5·16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는 경축사에서 쿠데타의 정당성을 강조하면서 ‘혁명 공약’의 이행을 거듭 천명하였다. 이날 대북 메시지는 예전과 달리 북진통일이 아닌 남북한대표회담이었다. 1962년부터 1979년 박정희 집권 내내 광복절 행사는 시민회관, 서울운동장, 중앙청 광장, 효창공원, 장충동 국립극장, 세종문화회관 등 여러 곳에서 열렸다. 이해부터 행사명이 ‘제○○주년 광복절’로 고정되었고 독립유공자 포상도 이뤄졌다. 1963년 대통령에 취임한 박정희는 경축사에서 주요 현안을 거론하면서 국민에게 이해를 구했다. 1964년에는 경제개발, 빈곤 해방, 승공 통일이 강조되었고, 1965년에는 월남파병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박정희 정권 당시는 광복절을 맞아 탑골공원 3·1독립선언기념탑 등 기념물 제막식이나 남산 1호터널(1970)·3·1고가차도(1971)·지하철 1호선 개통(1974) 등의 준공식을 겸하였다. 1970년부터 박정희 정권의 대북 정책은 ‘평화통일’ 원칙이 강조되었고 남북회담, 남북 이산가족 찾기 등이 포함되었다. 이러한 노력에 힘입어 1971년 9월 판문점 자유의 집과 판문각에 남북적십자회담 상설연락사무소가 설치되었다. 이는 2008년 이후 폐지와 복원을 반복하다가 2018년 남북정상회담을 계기로 남북연락사무소에 흡수되었다. 1972년에는 7·4남북공동성명의 성실한 이행, 이산가족 상봉, 자주통일 등을 경축사에 담았고, 1973년에는 처음으로 남북 동시 유엔 가입이 제안되었다. 이는 그로부터 18년이 지난 1991년 9월 현실화되었다. 1974년에는 ‘평화통일 3대 기본 원칙’을 천명하였으나 육영수 여사가 피격·사망하면서 의미가 퇴색되고 말았다. 이후 박정희는 광복절 행사에 참석하지 않았다. 더욱이 1976년 8월 판문점도끼만행사건으로 인해 대북 관계는 경색되었다. 1980년대, 이산가족 상봉·독립기념관 개관 등 1980년대 전두환 정권은 이전과 달리 이산가족 상봉과 남북정상회담을 추진했다. 또한 일본 내 우익 인사들의 망언, 역사 왜곡 등으로 한일 간에 갈등이 고조될 때는 이를 비판하기도 하였다. 특히 1982년에는 ‘일본역사교과서왜곡사건’이 일어난 직후여서 과거 일제의 침략 행위를 강력히 비판하고 극일(克日)을 위한 국력 신장을 역설하였다. 1983년에는 광복절을 기념하여 독립기념관 기공식이 치러졌고 이산가족 상봉을 북한 측에 촉구하였는데, 이는 1985년 9월 처음으로 이뤄졌다. 이후 이산가족 상봉은 남북 관계가 경색되면서 중단되었다가 2000년 8월에서야 재개되어 2018년 8월까지 모두 21차례 진행되었다. 1987년에는 독립기념관 개관식을 겸했는데, 이후 2004년까지 광복절 행사는 주로 독립기념관에서 개최되었다.  1988년 2월 노태우 정부를 시작으로 제6공화국이 들어섰다. 노태우 정부부터 윤석열 정부가 들어서기 전까지 광복절 경축사의 핵심 내용만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이 시기의 특징은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가 구체화되었고 대일 메시지가 강화되었으며 국정운영·방향 등이 강조되었다. 노태우 정부가 ‘북방정책’을 강력히 추진하였기에 남북 관계는 원만하였다. 이에 1988년 광복절에 다시금 남북정상회담 개최를 촉구하였고 이에 김일성이 수용 의사를 밝히면서 급물살을 탔지만, 여러 이유로 불발되고 말았다. 특히 1973년에 추진하였던 남북한 동시 유엔 가입을 다시 제안하여 1991년 9월 이를 성사시켰다. 1992년에 설악산·금강산 개방도 재차 제안했는데, 이는 꾸준히 추진되어 금강산 관광이 1998년 11월부터 2008년 7월까지 약 10년간 이뤄졌다. 한편, 1992년 5월 북한이 IAEA 사찰을 수용하자, 그해 경축사에서 남북한 경제 협력 문제를 제안했다. alt 독립기념관 개관 경축행사(1987.8.15) 1990~2000년대, 조선총독부 건물 첨탑 철거·진상규명특별위원회 설치 등 1993년에 취임한 김영삼 대통령은 첫 광복절에 ‘제2의 광복’, ‘신한국의 창조’를 천명하였다. 대북 정책으로는 핵무기 개발 의혹 해소, 남북 경제 협력, 이산가족 상호방문·서신교환, 판문점 이산가족 면회소 설치 등이 제안되었다. 1994년 김일성 사망 이후에는 ‘3단계 통일방안’(북한의 개혁개방, 화해 협력, 남북 연합 통일국가 완성)을 제시하는가 하면 남북기본합의서·한반도비핵화공동선언 이행 준수, 비방 중지, 군사적 신뢰 구축 등을 거듭 촉구하였다. 1995년에는 광복절 50주년을 맞아 옛 조선총독부 건물 첨탑 철거 퍼포먼스를 연출하고 정치·경제의 선진화·세계화 등 국정운영 기조를 밝혔다. 특히 그즈음 일본 총리의 과거 식민지 시기에 대한 사죄에 김영삼은 두 나라의 미래지향적 발전을 기대한다고 했다. 하지만, 1996년 일본 장관의 망언, 배타적경제수역(EEZ)의 경계 획정, 독도 영유권 문제 등으로 한일 간의 갈등은 증폭되었다. 1998년에는 김대중 정부로 바뀐 뒤 IMF 극복이 제일 우선이었기에 총체적 개혁과 국민적 운동, ‘제2 건국 운동’을 주창하고 국정과제를 제시하였다. 특히 그해 6월 북한 잠수함 강릉침투사건에도 불구하고 남북 교류 협력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남북상설대화기구 창설 등을 제안하였다. 이후 1999~2002년에는 외환위기 극복, 개혁 과제 등 국정운영 방향을 밝히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하였다. 특히 2000년에는 처음으로 남북정상회담이 개최되었기에 ‘평화와 도약의 한반도 시대’를 열어나가겠다는 의지를 표명하였다.  2003년 출범한 노무현 정부 역시 경축사에서 국정 철학이나 비전을 언급하였다. 2004년에는 과거사 진상 규명을 강조하고 진상규명특별위원회 설치를 제안하였으며, 2005년에는 ‘광복 60주년 기념식’도 병행하면서 ‘화해와 국민통합’을 강조하였다. 2007년에는 6자회담과 남북대화를 통한 한반도의 평화 체제로의 전환을 강조한 가운데 남북정상회담이 열렸다. 대일 관계에는 2003년과 2005년에 일본 우익세력의 망언에 심각한 우려를 표명하고 올바른 역사 인식을 강조하였다.  2008년 이명박 정부가 출범한 후 첫 광복절에 ‘건국 60주년’ 명칭을 사용하는 바람에 큰 논란이 일었다. 이는 박근혜 정부까지 이어졌다. 이날 이명박은 경제성장을 중점에 둔 ‘선진 일류 국가’ 건설을 강조하고 ‘저탄소 녹색성장’이란 미래 비전을 제시하였다. 2009년에는 ‘친서민 중도실용’ 정책 비전과 함께 ‘더 큰 대한민국’이라는 표어를 내걸었다. 2010년에는 ‘공정한 사회’를 핵심 키워드로 제시했고 대북 관련해서 ‘통일 재원 마련’을 위한 공론화를 제안하였다. 이명박 정부 당시 한일 관계가 원만하였지만, 2011년 일본과의 독도 갈등에 “일본은 미래 세대에게 올바른 역사를  가르칠 책임이 있다”라며 비판하기도 하였다. 2013년 대통령에 취임한 박근혜는 첫 광복절 경축사에서 북한에 핵을 버리고 ‘평화의 통일시대’를 열어가고 이산가족 상봉, 비무장지대 세계평화공원 조성, 환경·민생·문화 등 3대 통로 개설 확충 등을 제안했지만, 재임 중 남북 관계는 경색되어 개성공단이 폐쇄되었다. 특히 2015년 12월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불가역적으로 해결했다고 하여 2018년 11월 일본 정부가 출연한 10억 엔으로 화해치유재단이 설립되었지만,2019년 해산되었다.  2017년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뒤 첫 광복절 경축사에서 ‘한반도 평화 정착을 통한 분단 극복이 진정한 광복을 완성하는 것’이라며 북한과의 관계 개선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2018년 남북정상회담 이후 광복절 경축사에 ‘남북이 경제공동체를 이루는 것이 진정한 광복’이라 강조하였다.  2021년 임기 마지막 광복절 경축사에서도 미래 청사진을 제시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배상이나 ‘일본군위안부’ 문제 등으로 인해 임기 내내 한일 간의 갈등이 지속되었다.  “ 4대 국경일 중에 3·1절과 광복절은 일제의 식민 지배와 관련이 깊다.  이에 역대 정권은 광복절을 단순히 일제 식민지로부터의 광복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남북 관계를 비롯하여 국정운영의 비전을 제시하는 기회로 활용하였다.  남북 관계는 1950년대 ‘북진통일론’에서 1960~1970년대에는 ‘평화통일’로 기조를 바꾼 뒤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이러한 통일 원칙이나 많은 제안은 그것을 실현시키는데 시일이 오래 걸렸지만, 하나씩 이뤄지면서 평화통일에 다가서고 있다.  올해 8월 15일 광복절 78주년을 맞아 남북 관계를 개선·발전시키는 통일 방안과 아울러 선진국에 걸맞은 국정 비전을 기대해 본다. ” alt 독립기념관 조선총독부 철거 부재 전시공원    ]]> Wed, 02 Aug 2023 17:13:27 +0000 81 <![CDATA[어제와 오늘을 잇는 사람 40년 간 걸어온 역사가의 길 박환]]> 어제와 오늘을 잇는 사람40년 간 걸어온 역사가의 길박환   글 편집실    1986년부터 한국독립운동사를 연구해 온 박환 수원대 사학과 교수가 최근 정년퇴임을 앞두고 자신의 학문 여정을 돌아보는 전시를 열었다. 박환 교수는 잊힌 러시아지역 한인독립운동사 연구를 개척한 한편, 안중근의사 단지동맹비 등 주요 현충시설물 설치 자문 등 외교 발전에 기여한 한국독립운동사 연구 분야의 대표적인 학자이다. alt 박환 교수 40년 가까이 걸어온 대학교수 생활에 곧 마침표를 찍는다. 곧 떠날 채비를 하니 섭섭함보다는 시원함이 크다(웃음). 역사가의 길을 걸은 지 30여 년의 세월. 독립운동, 그 가운데서 공간적으로는 중국·러시아·중앙아시아·경기도, 시간적으로는 근현대시기에 주로 몰두하였다. 지금도 현장답사의 기억들 하나하나가 생생한데, 어느덧 긴 시간이 흘렀다. 물론 고난과 시련, 어려움도 있었다. 이를 극복하도록 도와주신 주변의 따뜻한 격려와 온정이 항상 있었다. 그저 감사할 뿐이다. 고집스럽게 ‘역사 속 잊힌 존재들’을 탐구해 왔다. 역사학자로서 역사에서 잊힌 인물과 사건을 발굴한 것은 당연한 소명이라 생각한다. 1990년대에 구소련을 누비며 러시아 연해주에서 항일운동을 펼친 최재형의 흔적과 기록을 발굴했고, 2003년에는 경기도 화성 지역의 독립운동가 수형 카드를 입수해 화성 3·1운동을 주도한 36인의 사진을 처음 공개하기도 했다. 또한 인권적 차원에서 접근한 ‘국민 방위군 사건’ 등도 그 예라고 할 수 있다. alt <박환, 역사가의 길> 전시 전경 특히 러시아 연해주나 중국 동북지역과 같은 대륙에서 일어난 한인독립운동사에 집중해 왔다. 첫째로 잘 알려지지 않은 러시아 연해주, 중국 동북지역, 시베리아 등에 대한 호기심과 열망이 작용했다. 특히 러시아 지역의 독립운동사는 그 중요성에 비해 상대적으로 연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데다 그곳에서 전개된 무장투쟁 역시 저평가받고 있는 상황이었다. 특히 이 분야를 전공한 선친이 살아계실 때 이와 관련한 이야기를 많이 들려주셨다. 이러한 배경들이 대륙의 독립운동에 관심을 가지는 데 영향을 미쳤다고 본다. 희미해진 과거를 되짚어 진실을 찾아가는 일은 고난의 연속일 텐데…. 역사학자의 길은 끊임없는 연구와 답사로 요약될 수 있다. 연구가 문헌사료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면, 답사는 사료들의 현장을 직접 목도함으로써 사료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어 주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현장답사를 통하여 비로소 역사가의 논문과 저술이 완성된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가장 오래 의자에 앉아 있어야 하면서도, 가장 오랫동안 바깥으로 돌아다녀야 하는 직업. 이것이 역사학자의 숙명이다. 최근 그간의 연구 성과를 한 자리에 볼 수 있는 전시를 개최했다. 이른 감은 있으나 새로운 출발을 위하여 그동안의 작업을 회고기적 성격으로 정리해보고자 했다. 1991년 처음 펴낸 『만주한인민족운동사연구』부터 최신작 『100년을 이어온 역사가의 길』까지 지금까지 출간한 50여 권을 한자리에 모았다. 지역별로는 중국 동북지역·러시아·중앙아시아·한국을, 시대별로는 구한말부터 한국전쟁기까지 다룬다. 아울러 대학·대학원 시절 썼던 한국사 강의노트와 논문초고, 현장을 답사하면서 남긴 메모, 모스크바 레닌도서관을 이용할 때 썼던 열람증, 2005년부터 2010년까지 회장을 맡았던 한국민족운동사학회의 연구 학술지 ‘한국민족운동사연구’ 자료 등도 만나볼 수 있다. alt 전시 개최 인사말을 전하는 박환 교수 이번 전시에서 4대가 역사가인 가족의 이야기도 만나볼 수 있다고…. 조부 故 박장현 선생께서는 식민시대의 역사학자였고, 선친 故 박영석 선생께서는 건국대 사학과 교수와 국사편찬위원장을 역임했다. 또한 나의 자녀들도 역사학을 공부하고 있다. 이렇듯 조부, 선친에 이어 자녀들까지 4대가 대대로 역사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가족의 이야기를 조심스레 소개하고자 했다. ‘역사 명문가’라는 명예를 이어가는 것이 소원이지만, 간단한 일이 아닌 만큼 무게감과 사명감을 갖고 있다. 시련 속에서도 끊임없는 도전과 노력, 열린 마음만이 살길이 아닌가 한다. 퇴임 후 계획이 궁금하다. 역사를 공부하면서 가장 크게 느낀 감정은 두려움이다. 역사가가 전하는 한 마디마다 그 파급 효과는 어마어마하다. 그만큼 역사에 대해 어떤 주의 주장을 내세운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러한 무거운 책임감은 퇴임 후에도 계속될 것 같다. 앞으로도 소외된 역사를 계속 발굴하고, 더 폭넓은 시선으로 역사를 바라볼 예정이다.아울러 그동안 독립운동사는 애국·민족주의를 토대로 특정 인물의 영웅적인 측면만 강조해 왔다. 대중에게 덜 알려진 독립운동가들이 어디로 이주했고, 어떤 활동을 했는지 살펴보려 한다. 이를 통해 평화 같은 보편적 차원의 인권 문제로 논의를 확장하고 싶다. 어떤 역사가로 기억되고 싶나? 그간의 연구를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대륙의 잊힌 혁명가 발굴과 부활’이 아닐까 싶다. 러시아와 중국 동북지역에서 일어난 독립운동사 연구의 개척자로 기억되고 싶다. 또한 100년 동안 역사를 공부한 집안의 한 사람으로서 역사에 부끄럽지 않은 학자로 평가받기를 기대해 본다. 가능한 일일까? 부끄럽고 두렵다. alt 장소 : 노마만리 김종원영화도서관 주소 : 충남 천안시 서북구 직산읍 마정리 312-1 기간 : 2023년 8월 27일까지 문의 : didas@naver.com   ]]> Wed, 02 Aug 2023 17:25:24 +0000 81 <![CDATA[기념관이 발굴한 독립운동가 남산여관 주인 정순희와 가족들이 선택한 ‘방향’을 가슴에 담다]]> 기념관이 발굴한 독립운동가남산여관 주인 정순희와 가족들이 선택한 ‘방향’을 가슴에 담다   글 독립기념관 독립운동가 자료발굴TF팀   독립기념관은 2018년부터 독립운동가를 발굴하여 국가보훈부에 유공자로 포상 추천하고 있다. 국가와 국민을 위해 희생한 분을 존중하고 기억하는 정부의 의지와 국민적 관심을 담은 것이다.  2023년 매월 독립기념관이 발굴한 독립운동가를 소개한다.   ‘방법’은 달라도 ‘방향’은 하나다 - 근우회에서 활동하다 1927년 2월,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은 ‘독립’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이루고자 신간회를 결성했다. 두 계열은 여성운동에서도 뜻을 함께하여 같은 해 5월 27일에 식민지 시기 최대 여성단체인 근우회를 조직했다. 근우회는 봉건적인 사회로부터 여성을 해방하고 일제로부터 독립하고자 했다. 근우회는 전국에 지회를 두었는데, 매년 전국대회를 개최해 지회의 자치활동을 보고받고 활동 내용을 정비했다. 1929년 7월 3일 근우회 전국대회준비위원회가 열리자 경성지회 소속으로서 각 지회에서 찾아오는 회원을 맞이하는 ‘접대부(接待部)’에서 활동한 인물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정순희(鄭順姬)였다. 정순희의 근우회 활동은 1930년이 되면서 더욱 활발해졌다. 경성지회가 1월 15일부터 직업소개소를 운영하기로 계획하자 이를 담당했고, 이어 2월 19일 전국대회준비위원으로서 경성지회 모임에 참석했다. 3월 17일 집행위원회에서는 조사부 소속으로 편입되어 활동했다. 근우회는 지회를 늘리는 것에 힘썼는데, 4월 15일에 ‘경동(京東)지회’ 신설을 논의하는 회의에 본부 회원으로 참석하기도 했다. 6월 2일 경성지회 집행위원회에서 선전조직부장의 중책을 맡았다. 정순희는 이듬해에도 경성지회의 주요 인사로 활약했으며 지속적으로 왕성하게 활동했다.  alt 근우회 창립총회 『조선일보』 (1927.5.29.)(좌), 근우회 전국대회 『조선일보』 (1929.7.28.)(우) 광주학생운동, 나와 근우회는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1929년 10월 30일, 광주중학교 3학년 일본인 후쿠다 슈조(福田修三) 등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3학년인 박기옥(朴奇玉)을 희롱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사촌동생이자 광주고등보통학교 2학년에 재학하던 박준채(朴準埰)가 이 광경을 목격하고 항의했다. 사태는 일본인 학생들과 조선인 학생들의 충돌로 확대되었다. 경찰이 개입했으나 일본인 학생들을 두둔하며 오히려 조선인 학생들을 구타했다. 이로 인해 11월 3일, 광주 내 여러 학교에서 시위가 발생했고 중등학교에 휴교령이 내려졌다. 이것이 광주학생운동의 시작이었다. 이날 하루에만 시위에 참여했던 조선인 학생 수십 명이 구금되었다.  이 소식은 서울까지 전해졌고 경신학교, 보성고등보통학교, 중앙고등보통학교, 휘문고등보통학교, 협성실업학교 등이 12월 9일부터 이에 호응하는 시위를 시작했다. 정순희를 비롯한 근우회 회원들은 1929년 12월 9일에 종로 공평동에서 학생들이 경찰에 의해 체포되는 상황을 목격했다. 이들은 “여성운동을 자부하는 근우회로서 움직이지 않으면 욕을 먹을 것이다.” 또는 “근우회는 냉정하게 사건의 추이를 방관하는 것이 유리한 계책이다.” 등 다양한 대응 방법을 논의했다. 결국 여학생들의 시위는 근우회에서 주도해야 한다고 의견을 모았으나, 정순희와 함께 본부 위원으로 활동했던 허정숙(許貞淑, 이명 許貞子), 한신광(韓晨光) 등 주요 인사들이 대거 피체되면서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울에서 시위는 계속되었고 정순희의 딸 이순옥(李順玉) 역시 이와 관련된 활동을 준비하다가 징역 7개월을 받았다. alt 정순희의 딸 이순옥 여관 운영으로 독립운동을 지원하다 정순희는 1920년대에 종로 적선동에서 하숙집을, 1929년경에 종로 인사동으로 이사하여 남산여관을 운영했다. 정순희가 언제, 무슨 이유로 고향인 함북 경성을 떠나 서울에 와서 하숙을 시작했는지, 또 무슨 이유로 이사했는지 자료로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그가 운영했던 하숙집과 여관은 여느 평범한 숙박시설만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신문기사에는 정순희의 하숙집과 여관에 관한 기사가 상당수 발견된다. 1925년 10월 형사들이 그의 하숙집을 수색하여 총기를 소지한 청년을 체포하였다. 신문보도에 따르면, 체포된 인물은 3·1운동에 참여한 전력이 있는 이종칠(李鍾七)이라고 하는데, 그가 왜 총기를 소지하고 정순희의 하숙집에 숨어 있었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이후 정순희가 운영했던 남산여관은 더욱 주목할 만하다. 1929년 11월 의열단원 서응호(徐應浩), 윤충식(尹忠植), 김철호(金哲鎬) 등이 체포되었다. 그들은 당시 경성에서 개최된 조선박람회를 계기로 모종의 거사를 계획하였는데, 거점 장소로 활용된 곳이 바로 남산여관이었다. 또한 수감되었던 독립운동가들이 옥고를 치른 후 남산여관에 묵었던 기사도 다수 발견된다. 유남수(柳湳秀)는 경기도 이천 출신으로 조선일보 이천지국 기자였다. 죽마고우인 이수흥(李壽興)은 참의부원으로 1926년 5월에 요인 암살, 군자금 모집을 위해 국내에 잠입했다. 이때 유남수는 이수흥과 형인 유택수(柳澤秀)를 돕던 중, 1926년 11월에 함께 체포되었다. 유택수와 이수흥은 교수형에 처해졌고 유남수는 징역 2년을 받았으나 감형되어 1929년 5월 28일에 출옥했다. 이때, 몸을 추스르기 위해 남산여관에 머무른 사실이 확인된다. 그뿐만 아니라 남산여관은 신간회, 근우회 모임에 참석한 각지 대표들의 숙소로 활용되기도 했다.  1929년 7월과 이듬해 12월 근우회 전국대회와 중앙집행위원회가 열렸고, 1931년 5월에는 신간회 전국대회가 개최되었다. 이때, 지방에서 상경한 대표들이 이곳에 숙박했다. 이를 비롯해 1929년부터 1933년까지 남산여관을 이용했던 독립운동가는 최소 수백 명 이상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처럼 정순희가 운영했던 하숙집과 남산여관은 독립운동가들의 활동 거점이자, 휴식처였던 것이다.하지만 남산여관은 1933년부터 이러한 역할을 수행하지 못했다. 당시 조선공산당재건협의회 사건으로 수배되었던 윤병권(尹炳權)을 남산여관에 숨겨주다 발각되어 정순희는 1932년 10월 29일에 검사국으로 송치되었고, 서대문형무소에서 6개월을 복역하다가 이듬해 7월 23일에 출옥했다. 이후, 남산여관은 독립운동을 논의하거나 출옥한 독립운동가들의 거점으로 활용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격렬한 민족주의자’가 선택한 독립운동으로 더욱 강인해지는 길 정순희의 가족들은 독립운동을 함께 한 동료이기도 했다. 남편인 이정수(李正洙)는 1920년에 러시아 연해주에서 한인사회당 간부로 활동했고, 1924년에는 조선노동당을 창립했던 핵심 인물로 1926년에 2차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옥고를 겪었다. 딸 이순옥은 이화여자전문학교 재학 중 중앙청년동맹에 가입하고, 광주학생운동으로 구속된 학생들의 석방을 촉구하는 시위를 준비하다 징역 7월(집행유예 4년)을 받았다. 당시 경찰신문조서를 살펴보면, 어머니 정순희를 ‘격렬한 민족주의자’로서 ‘부모의 가르침’을 받았다고 표현하고 있으며 본인이 사회운동에 참여하게 된 이유에 대해 ‘조선의 사회운동자들이 우리 집에 많이 출입하여 자연스럽게 사회운동에 흥미를 깨닫게’ 되었다고 했다. 이순옥의 활동은 어머니로부터 지대한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이순옥은 1930년 3월 22일부터 옥고를 치렀으나 공소권을 포기하면서 24일에 출옥했다. 출옥한 이후, 이순옥은 어머니 정순희와 함께 근우회 경성지회에서 활동했고, 중앙청년동맹 집행위원, 대의원으로도 활약했다.  한편, 정순희가 서대문형무소에서 출옥한 이후에 어떤 활동을 했으며 언제 사망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가 지내온 시간과 활동을 돌아보며 기꺼이 독립운동을 선택했던 그와 가족들의 삶과 자세에 대해 곱씹어 보고자 한다. 1929년 2월 16일, 남편인 이정수가 3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딸이자 동료인 이순옥은 광주학생운동 동조 시위에 참여했다가 1930년 1월에 체포되었다. 하지만 정순희는 독립운동에 더욱 활발하게 참여하면서 어려움을 극복하고자 했다. 배우자를 떠나보내고 자식마저 위험에 처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시련에 굴복하여 약해지기보다 한 사람으로서, 독립운동가로서 더욱 강인해지는 길을 선택했던 것이다. 이 모습은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어떤 말보다 강한 울림을 주고, 스스로 돌아볼 수 있게 해준다. alt 정순희의 남편 이정수 『조선일보』 (1929.2.18.)(좌), 이정수의 장례식 『조선일보』 (1929.2.21)(우)   ]]> Wed, 02 Aug 2023 17:36:22 +0000 81 <![CDATA[사(史)적인 여행 이국땅에 깃든 선열의 숨결, 중국 뤼순]]> 사(史)적인 여행이국땅에 깃든 선열의 숨결중국 뤼순   글·사진 박광일 (역사여행작가·여행이야기 대표)   본격적인 휴가철을 맞아 해외여행을 계획하는 이들이 많다. 올여름, 시원한 물놀이를 즐길 수 있는 휴양지도 좋지만 보다 이색적이고 의미 있는 곳으로 떠나보는 건 어떨까.  광복절을 앞두고 우리나라 독립운동가의 숨결이 고스란히 깃든 중국 뤼순을 소개한다.    alt 일아감옥구지 외부(좌), 일아감옥구지 내부(우) 안중근이 수감·순국한, 일아감옥구지 랴오둥반도 서쪽 끝에 있는 항구도시가 뤼순과 다롄이다. 이들은 본래 서로 다른 도시였지만, 지금은 다롄시 안에 뤼순구가 포함되어 있다. 뤼순의 공식 행정구역명은 뤼순커우구(旅順口區)이다. 뤼순에서 가장 눈에 띄는 곳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안중근이 갇혀있던 뤼순감옥과 재판이 이뤄진 관동도독부 법원이다. 뤼순감옥의 공식 이름은 ‘일아감옥구지’이다. ‘일아’에서 일(日)은 일본, 아(俄)는 러시아를 가리킨다. 곧 하나의 감옥이지만 러시아와 일본의 흔적이 남아있는 곳이라서 이렇게 이름을 붙였다. 실제로 감옥의 정면 건물과 내부 옥사 중 중심부는 러시아가 짓고, 이후 증축부는 일본이 지었다. 이후 몇 번의 증축으로 인해 규모가 커졌고, 1934년쯤 지금의 모습이 완성되었다. 안중근이 이곳에 갇혀있던 시기는 1909년 11월에서 1910년 3월까지였다.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뒤 12시간 정도 러시아 헌병의 조사를 받은 안중근은 이후 일본의 총영사관으로 넘겨졌다. 당시 국외 한인에 대한 재판은 서울 곧 한양에서 하거나 혹은 나가사키 지방 재판소에서 진행해야 했다. 그러나 어느 곳에서 재판을 진행하더라도 세계 여러 사람의 이목이 집중된다는 점에서 일본으로서는 부담이 되었다. 재판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일본의 침략과 한국의 독립에 대한 열망이 드러날까 두려웠다. 이 같은 이유로 일본은 최대한 폐쇄적인 공간인 관동도독부, 곧 뤼순의 재판소를 선택했다. 뤼순감옥을 둘러보면 안중근이 갇혀있던 공간이 별도로 표시되어 있다는 점을 눈치챌 수 있다. 당시에도 안중근이 조금은 특별한 존재로 여겨졌음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이는 안중근을 회유하려는 목적도 가지고 있었다. 곧 독립전쟁의 포로, 혹은 정치범으로서 안중근 ‘의사’가 아닌 일반 ‘범죄자’로 만들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회유가 실패로 돌아가자 결국 일본 정부는 지침을 통해 사형을 선고하였다. 다만 아쉬운 부분도 몇 가지 있다. 그 가운데 하나는 안중근이 순국한 장소가 명확하지 않다는 점이다. 단독 건물로 만들어진 사형장은 1930년대에 지은 것이다. 그가 순국할 당시에는 감옥 건물 2층에 사형장이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또 제3의 장소에 사형장이 있었다는 배치도가 발견되기도 해서 현재까지는 학자들에 따라 의견이 나뉘고 있다. 무엇보다 안중근의 유해를 묻은 곳이 밝혀지지 않아 많은 사람이 애를 태우고 있다. 최근에는 뤼순감옥 동쪽에 있는 ‘뤼순감옥구지묘지’, 곧 뤼순감옥에서 죽음을 맞이한 사람의 공동묘지 일대를 유력한 장소로 보고 있기도 하다. alt 관동도독부법원  Tip 1. 안중근의 재판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광동도독부법원’ 안중근의 재판에 대해 조금 더 집중하고자 한다면, 뤼순의 관동도독부법원을 찾으면 좋다. 이 법원 건물은 한동안 병원 건물로 쓰이다가 다시 관동도독부 법원의 모습을 되찾았다. 1층에는 전시 공간이, 2층에는 당시 재판 장소이던 법정의 모습을 그대로 볼 수 있다. 한쪽에 재판 당시 모습을 찍은 사진에서 안중근, 조도선, 유동하 등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또한 법정 옆에 조그마하게 안중근를 기념하는 공간도 있다. 수의를 입고 있는 안중근의 사진과 함께 유묵도 있어서 잠시 묵념을 할 수 있는 장소이다.  Tip 2. 다양한 언어로 적혀진 ‘수형자 규칙’ 뤼순감옥에는 당시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수감되었기 때문에 ‘수형자가 지켜야 할 규칙’ 여러 나라 언어로 적혀있다. 첫 번째는 일본어, 다음으로 한자와 한글, 그리고 중국어로 적혀있다. 이를 통해 뤼순감옥이 가진 성격이 어떠한지 짐작해 볼 수 있다. 한편, 뤼순감옥에서 순국한 독립운동가는 안중근 외에도 신채호 등이 있다. 이러한 점에서 뤼순감옥을 찾는다면 낯선 땅에서 눈 감을 수밖에 없었던 애국선열들의 삶에 대해서도 생각해보는 것이 좋다. 일아감옥구지 주소 라오닝성 다롄시 뤼순커우구 향양가 139호 alt 뤼순역(좌), 백옥산탑(우) 뤼순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뤼순역과 백옥산탑 러시아풍의 건축물로 시선을 사로잡는 뤼순역은 남만주철도가 뤼순까지 연결되었을 때 러시아가 건설했다. 인근에 뤼순항이 있으니 항구와 연결된 중요한 철도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역의 건설 시기는 1900년경으로, 본격적인 운영은 1903년 곧 철도의 완성과 함께 이뤄졌다. 1909년, 안중근 역시 거사 후에 철도를 이용해 이곳에 도착했으니 바로 이 역에도 그의 발자취가 남아있다고 할 수 있다. 뤼순역 뒤로 크고 높은 탑이 눈길을 끈다. 백옥산탑으로 불리는 이곳은 거리가 꽤 떨어져있어 택시로 이동하는 것을 추천한다. 1909년 11월 일본은 러일전쟁 당시 뤼순전투에서 전사한 일본군들을 추모하고자 위령탑을 세웠고, 이를 ‘표충탑’이라고 불렀다. 이후 일본이 패망한 뒤, 이 건축물을 놓고 중국 내에서 논란이 일었다. 중국 처지에서 보면 이 건축물의 목적이 바람직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헐어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으나 그 역시 노력이 많이 들어가니 침략의 표상으로 남겨두고 이름만 ‘백옥산탑’으로 변경하였다. 한편 백옥산탑은 뤼순 일대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곳에 서서 눈앞에 펼쳐진 뤼순항의 전경을 바라보고 있으면, 왜 이곳이 천혜의 요충지인지 쉽게 알 수 있다.    ]]> Wed, 02 Aug 2023 17:45:33 +0000 81 <![CDATA[이벤트 공지 행운의 주인공이 되어보세요!]]> 이벤트 공지행운의 주인공이 되어보세요!   alt  ]]> Wed, 02 Aug 2023 18:05:12 +0000 81 <![CDATA[이달의 기념관 2023 독립기념관 사회공헌활동 ‘어르신을 위한 배식 봉사’]]> 이달의 기념관2023 독립기념관 사회공헌활동‘어르신을 위한 배식 봉사’  글 편집실사진 이소연  독립기념관은 국가와 지역에 기여하기 위한 다양한 형태의 사회공헌활동을 추진하고 있다. 이번에 소개할 활동은 올해 새롭게 시작한 ‘지역사회와 함께 하는 희망 나눔’ 중 어르신들의 점심식사를 위한 경로식당 봉사활동이다. 장마기간이라 습한 기운이 용솟음치는 7월 어느 날, 독립기념관 직원들의 봉사활동 발걸음을 따라 나섰다.    alt alt   지역 복지관 찾아 배식 봉사 나서 이번 지역상생을 위한 봉사활동 장소는 매월 두 번 격주로 찾아가는 천안시종합사회복지관이다. 독립기념관 직원들은 어르신들이 맛있는 점심식사를 드실 수 있도록 서둘러 준비를 시작했다. 위생적인 식사 환경을 위해 바닥을 청소하고 식탁을 소독했으며, 이와 함께 반찬 전처리와 배식 보조를 진행했다. 거동이 불편한 분들을 위해 직접 식사를 가져다드리며 살가운 모습으로 어르신들을 마주했다. 쏟아지는 비 때문인지 배식 수는 150여 남짓이었다.봉사활동에 참가하게 된 직원들은 하나같이 “직장인으로서 자원봉사의 기회를 갖기 어려운 것이 사실인데, 이번 기회를 빌려 지역사회에 봉사하는 기회를 갖게 되어 보람되고 뜻깊다”고 전했다. alt 사회적 약자 대상 순회전시(좌), 온기가득 땔감 봉사(우) alt 지역아동센터 교구재 후원(좌), 고구마 수확 기부(우) 기관 특성을 반영한 사회공헌활동 적극 실천 독립기념관 고유사업부문(재능나눔)과 지역사회 및 취약계층부문(행복·희망나눔)으로 기관 특성을 반영한 맞춤형 3대 사회공헌 전략 체계를 정립하고 적극 실천하고 있다. 지난해 독립기념관에서는 독립운동 가치 확산 및 사회적 약자의 문화향유 증대를 위해 아산시 온생활센터 등 6개 지역에서 17회 순회전시를 개최하여 5,545명이 관람하였고, 특수교육기관 237개 기관(1,040명)의 장애아동을 대상으로 맞춤형 교육을 진행하였으며, 지역아동센터 453개 기관(13,590명) 대상으로 독립운동사 교육 콘텐츠를 제작·지원하였다.또한, 지역 내 독립운동가 후손과 기초생활수급자를 대상으로 긴급구호식품상자를 제작하여 충남지역 70가구에게 제공하였고, 사회적경제기업제품 판매전 및 농축산물 판매전 지원 등 다양한 지역상생 동반성장 활동을 지원하였다. 이처럼 인근지역 사회복지시설을 대상으로 지원 활동을 임직원 모두 자발적인 참여로 시행하고 있다.  2023 독립기념관 사회공헌활동 ‘어르신을 위한 배식 봉사’ 인터뷰 alt   이경원 독립기념관 경영지원부 과장 독립기념관이 공공기관으로서 지역사회공헌을 어떻게 전개하면 좋을지 고민하던 중에 인근 복지관 경로식당 운영에 봉사활동 인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추진하게 되었습니다. 경로식당 봉사활동은 우리 직원들이 지역 어르신들에게 배려와 존경심을 배우고, 어르신들은 젊은이들에게 배려 받아 자존감을 높일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alt   김남희 천안시종합사회복지관 지역조직화팀 대리 우리 복지관과 독립기념관이 상호보완적인 관계로 지역사회에 도움이 필요한 곳에 함께 봉사를 실천하게 되어 기쁘고 감사합니다. 업무 시간을 쪼개어 격주마다 방문하여 봉사한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은 일인데, 오실 때마다 웃음을 잃지 않는 직원분들 모습에 늘 감동 받습니다.  앞으로도 이런 기회가 지속됐으면 합니다.  ]]> Wed, 02 Aug 2023 17:59:42 +0000 81 <![CDATA[#월간독립기념관 지난 호 독자 후기 이벤트 당첨자 발표]]> #월간독립기념관지난 호 독자 후기 이벤트당첨자 발표  ※ 당첨자 5명에게 모바일 커피쿠폰(아메리카노)을 전달할 예정입니다. 참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alt  ]]> Wed, 02 Aug 2023 18:03:16 +0000 81 <![CDATA[어제의 오늘 잊지 말아야 할 9월의 역사]]> 어제의 오늘잊지 말아야 할 9월의 역사   정리 편집실   alt   일제가 만주를 침략하여 동아시아의 갈등·대립·충돌이 격화된 만주사변이 일어난 날은  1931년 9월 18일입니다.   ]]> Fri, 08 Sep 2023 17:05:09 +0000 82 <![CDATA[들여다보기 ‘만주사변’, 동아시아의 국제질서를 뒤흔들다]]> 들여다보기‘만주사변’, 동아시아의 국제질서를 뒤흔들다   글 윤휘탁(한경국립대학교 교수)   ‘9·18사변’, ‘펑톈(奉天)사변’, ‘류탸오후(柳條湖)사건’이라고도 불리는 만주사변은  중·일 간 세력 다툼의 틈바귀에 끼인 한인에게는 엄청난 고통을 주었지만, 한·중 양 민족의 연대투쟁을 잉태한 계기이기도 했다.  주변국의 이해관계와 동아시아의 민족관계를 뒤흔들고 갈등·대립·충돌을 격화시켜 동아시아 국제질서 변동의 기폭제로 작용한 만주사변을 들여다본다.   alt 일본군이 위조한 남만철도 폭파현장 사진   만주사변이 일어나기 전 동아시아의 국제정세는 어떠했을까? ‘만주사변’은 1931년 9월 18일 만주(중국 동북지역)에 주둔한 일본관동군이 펑톈의 중국군 주둔지를 습격하고 만주 각지를 무력으로 점령한 뒤 1932년 3월 만주국을 세운 사건을 가리킨다. 만주사변은 ‘9·18사변’, ‘펑톈(奉天)사변’, ‘류탸오후(柳條湖)사건’이라고도 불린다.  1920년대에 들어 일본은 펑톈군벌인 장쭤린(張作霖) 정부와 협력관계를 유지하면서 중국 내의 권익을 확보하고 있었다.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은 손을 맞잡고 국민혁명군을 조직해 부패한 군벌을 타도하고 중국을 통일하기 위해 1926년부터 국민혁명(北伐)을 개시했다. 수세에 몰린 장쭤린 군벌정부가 펑톈으로 쫓겨 들어오자, 국민혁명군이 만주로 쳐들어올 것을 염려한 일본은 열차에 탄 장쭤린을 폭사시켰다. 펑톈군벌의 지휘권을 승계한 장쉐량(張學良, 장쭤린의 아들)은 1928년 12월 국민혁명군에게 복종을 선언하고 각종 반일 정책을 펼쳤다. 즉 독자적으로 철도를 건설하고 더 값싼 운송비를 내세워 일본의 남만주철도 운영에 타격을 입혔다. 임업·광업·상업 분야의 일본기업의 허가권을 취소하거나 방해했다. 일본인이나 한인에게 토지를 대여하거나 판매하는 자는 처벌했다.  이러한 조치들은 일본관동군에게 위기감을 불러일으켰다. 1929년 세계공황이 발생하자 일본경제는 급격히 악화되어 실업률이 치솟고 각종 쟁의가 빈발하고 사회모순이 폭발하기 시작했다. 일본에서는 만주와 몽골을 점령해 국내의 불만을 밖으로 돌리고 사회적 위기를 극복하자는 목소리가 힘을 얻기 시작했다. 이즈음 장제스(蔣介石) 국민당 정부는 공산당의 소비에트 혁명 근거지에 대한 포위·소탕전을 전개하고 있어서 만주 상황에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다.  1931년 6월 만주 싱안링(興安嶺) 일대에서 군사 조사 활동을 하던 관동군 나카무라 대위 일행이 중국군에게 체포되어 스파이 혐의로 총살되었다. 이 사건은 일본인의 반중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그해 7월 창춘현 부근 완바오산(萬寶山) 촌락 부근에서는 한인 소작농과 중국 농민 사이에 수로 건설을 둘러싸고 충돌이 일어났다. 이때 중국 지린성 정부는 해당 한인들의 추방을 명했다. 이에 창춘에 주둔한 일본영사관 경찰들이 개입해 중국 농민들에게 무력을 행사했다. 당시 한인들은 중국 관민이 만주의 동포들을 박해하고 화교들이 식민지 조선의 상권을 장악하거나 일자리를 빼앗아가는 데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한·중 양 민족을 이간시키려는 의도 하에 식민지 조선의 언론이 ‘완바오산사건’으로 한인 수백 명이 중국인에게 살상당한 것처럼 왜곡 보도하자, 분노한 한인들은 화교들을 대상으로 폭동을 일으켜 수백 명을 살상했다.  나카무라 대위 총살 사건과 완바오산사건은 중·일 간의 적대적 감정을 고조시켰다. 또한 완바오산사건과 화교 배척 폭동사건은 종래에 피압박 민족이라 하여 한인을 동정하던 중국인들의 반한 감정을 고조시켰으며, ‘한인=일본 앞잡이’라는 인식을 중국인에게 각인시켜 주었다. 이것은 만주의 한인에 대한 박해와 보복을 불러일으켰다. 이 과정에서 중국인에 대한 한인의 반발심도 커졌다. 상술한 정세는 일본이 만주를 침략하는 데에 유리하게 작용했고 일본 군국주의 세력의 만주 침략 야욕을 부추겼다.  alt 장쉐량(張學良) 만주사변은 동아시아 국제질서에 어떠한 변화를 가져왔을까? 중·일 간의 적대 감정이 격화되고 일본에서 만주문제를 무력으로 해결하자는 목소리가 솟구치는 상황에서, 1931년 9월 18일 밤 일본관동군은 만주 침략의 명분을 만들기 위해 류탸오후 부근의 남만주철도 일부를 폭파하고 그것을 중국군의 짓이라고 뒤집어씌운 뒤 일본정부의 사전 승인 없이 독단적으로 펑톈의 중국군 주둔지를 습격했다.  당시 공산당 군대 토벌에 여념이 없던 장제스 국민당 정부는 만주의 장쉐량 동북군에게 일본군에 저항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다. 국민당 군대가 일본군보다 훨씬 열악함을 알고 있던 장제스는 섣불리 일본군에 대항하다가 패전하면 자신의 정치적 위신과 권력을 상실할 것을 두려워했다. 그래서 그는 일본의 침략 행위가 부당함을 국제사회에 알려 외교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그는 공산당을 먼저 제압해 자신의 권력 기반을 확고히 다지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여겼다. 중국 공산당에서는 항일 유격대를 조직해 적극 투쟁하도록 지시했다. 중국사회에서는 거국적인 항일투쟁을 요구했고 반일감정이 격화되었다. 만주에서는 중국 동북군 주력이 철수한 상황에서, 동북군 출신의 마뗀산(馬占山)을 비롯한 일부 지휘관들이 동북의용군을 조직해 항일투쟁을 벌였다.  일본관동군은 외무성의 견제에도 불구하고 전선을 확대하면서 만주 각지를 점령하기 시작했다. 이때 조선군사령관의 독단적인 명령으로 조선군 2개 비행중대와 1개 혼성여단이 압록강을 넘어 관동군 지휘 하에 들어갔다. 그 후 일본에서 파견된 1개 혼성여단과 조선군 1개 사단 등도 관동군의 만주 침공에 가세했다. 중국군의 저항이 미미한 가운데 일본군은 1931년 9월부터 1932년 2월까지 펑톈·안둥·창춘·잉커우·지린을 시작으로 치치하얼·진저우·하얼빈 등 만주 전역을 점령한 뒤 1932년 3월 괴뢰 만주국을 수립했다. 일본은 청조의 마지막 황제였던 푸이(溥儀)를 만주국의 수반으로 삼았다. 또한 만주 침략에 대한 국제사회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그해 1월 상하이사변을 일으켰다. 중국은 국제연맹에 대해 일본이 중국영토를 침략해 국제연맹의 규약을 위반했다고 호소했다. 국제연맹은 조사단을 중국으로 보내 만주사변의 발발 원인과 실태를 조사하게 했다. 국제연맹은 조사단의 보고서에 근거해 일본군이 만주를 불법적으로 점령했다고 간주해 일본군의 철수를 요구했다. 이에 반발해 일본은 1933년 국제연맹을 탈퇴했고 국제적으로 고립되었다. 당시 소련은 일본과의 관계를 중시해 불간섭의 중립적 태도를 취했다. 미국은 일본에게 전선을 확대하지 말도록 요구했다.  소련과 미국의 애매한 태도는 일본의 만주 침략을 고무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만주를 점령하고 만주국을 수립한 일본은 중국 침략을 위한 교두보를 확보하게 되었다. 일본사회에서는 그러한 행동을 열렬히 지지했다. 일본은 만주를 둘러싼 강대국들의 권익을 무시하고 만주를 독점함으로써 강대국들의 반발을 자초하고 강대국들의 세력균형과 동아시아의 국제질서를 깨뜨렸다. 결국 그것은 중일전쟁과 아시아·태평양전쟁으로 이어지는 도화선으로 작용했다.  alt 일본군이 위조한 만주철도 사건의 증거(좌), 항일투쟁을 하고 있는 중국동북의용군(우) 만주사변, 한인, 독립운동은 어떠한 연관성을 지녔을까? 빈곤, 만주에 대한 환상, 일본의 국권 탈취와 탄압, 독립운동 등의 이유로, 19세기 말부터 만주국 수립 직후인 1932년까지 만주로 넘어간 한인은 67만여 명에 달했다. 1920년 만주의 한인과 독립군 연합세력은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에서 일본 토벌대에 타격을 가했지만 곧이어 간도로 출병한 일본군에게 무자비한 보복을 당했다. 1925년 조선총독부는 장쭤린 펑톈군벌 정부와 「미쓰야협정(三矢協約)」을 맺고 중국군이 한국독립군을 체포해 일본에 넘겨주도록 했다. 이 협정으로 한국독립운동세력은 큰 피해를 입었다. 일본은 한인이 이주하는 곳마다 한인 보호를 명분으로 일본 영사관과 경찰조직을 배치해 만주에 거점들을 확보해갔다.  이즈음 펑톈군벌 정부와 일부 중국인들은 한인을 일본의 만주침략 앞잡이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한인의 독립운동이 일본을 자극해 중·일 관계를 악화시키고 일본의 만주 간섭을 초래한다고 여겼다. 장쉐량 정부는 한인의 중국 귀화를 강요했고 심지어 한인이 구입한 토지를 불법이라 하여 빼앗거나 이에 저항하는 한인들을 구금했다. 그 결과 만주사변 직후 펑톈감옥에만 구금된 한인이 530명1)에 달할 정도로 많았다.  만주로 건너간 한인들은 중국 관민과 일본 제국주의 세력 사이에 끼여 양쪽 모두로부터 탄압을 받는 동네북 신세가 되었다. 한인 대다수는 중국인 지주에게 토지를 빌려 소작하다 보니 계급적으로 수탈을 당하기도 했다. 게다가 농민이 대다수인 한인들은 치안이 불안한 농촌 벽지에 살다보니 중국인 약탈 집단(토비, 마적)에게 인질로 잡혀가거나 약탈·강간·살상을 당하는 등 많은 고초를 겪고 있었다.  특히 만주사변으로 무정부상태가 초래되자, ‘일본 앞잡이’라 하여 한인들이 중국 패잔병이나 토비들에게 보복당하는 사건들이 빈발했다. 신변 불안을 느낀 수많은 한인들은 치안이 양호한 남만주철도 부속지, 대도시로 피난을 가거나 압록강·두만강을 건너 식민지 조선으로 귀향하기도 했다. 만주사변 시기 한인들은 극도의 공포 속에 생존을 위해 몸부림쳐야 했다.만주사변을 계기로 만주국이 들어서자, 중국 관헌이나 토비들의 한인 박해는 약해졌지만, 한인에 대한 일본 식민당국의 통제와 감시는 강화되었다. 특히 독립운동세력의 운신 폭은 좁아졌다. 그들 중 일부는 중국 관내(關內)로 넘어가 대한민국임시정부나 독립운동 조직에 투신했고, 다른 일부는 독립운동조직을 재편·신설해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했다.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한·중 양 민족 간에는 항일 유대감이 생겨나 연대 투쟁(조선혁명군, 한국독립군)을 벌이거나 공동의 항일무장조직(동북항일연군)을 결성해 항일투쟁 역사에 많은 공을 세웠다. 특히 한·중 양 민족으로 구성된 동북항일연군은 만주국의 치안 숙정공작으로 타격을 받아 1940년 전후로 우수리강을 건너 소련으로 도피해 소련군에 편제되어 후일을 모색했다. 만주사변은 중·일 간 세력 다툼의 틈바귀에 끼인 한인에게는 엄청난 고통을 주었지만, 한·중 양 민족의 연대투쟁을 잉태한 계기이기도 했다. 결국 만주사변은 주변국의 이해관계와 동아시아의 민족관계를 뒤흔들고 갈등·대립·충돌을 격화시켜 동아시아 국제질서 변동의 기폭제로 작용했다.  1) 山口重次, 『消えた帝国 満州』, 毎日新聞社(1967)   ]]> Fri, 08 Sep 2023 17:17:23 +0000 82 <![CDATA[한눈에 보기 키워드로 보는 만주사변 그리고 한인과 독립운동]]> 한눈에 보기키워드로 보는 만주사변 그리고 한인과 독립운동  정리 편집실  alt ]]> Fri, 08 Sep 2023 17:24:26 +0000 82 <![CDATA[이달의 독립운동가 한국광복군에 참여한 청년 독립운동가 이재현·한형석·송면수]]> 이달의 독립운동가한국광복군에 참여한 청년 독립운동가이재현·한형석·송면수   글 독립기념관 전시부   alt   한국청년전지공작대에서 한국광복군으로 중일전쟁 발발 후 항일전선에 본격 가담하기 위해 중국 등지에서 활동하던 한인 청년들은 1939년 11월 충칭(重慶)에서 한국청년전지공작대를 창설했다. 전지공작대는 결성 직후 시안(西安)으로 옮겨져 초모*공작과 선전활동 등을 전개했고, 1940년 9월 17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한국광복군을 창설하자 이듬해 한국광복군으로 편입되었다. 이재현, 한형석, 송면수는 한국청년전지공작대, 광복군으로 활동했는데 각자의 예술적 역량을 발휘해 항일정신을 담은 노래, 연극 등 창작을 통한 선전활동을 전개하며 독립운동을 이어나갔다. * 초모(招募)   : 의병이나 군대에 지망하는 사람을 모집함 alt 한국광복군 제5지대 성립 기념사진 (1941.1.1.)_국사편찬위원회 제공 초모활동을 전개하고 <2지대가>를 작사한 이재현 이재현은 1917년 경기도 시흥에서 태어나 1919년 상하이로 건너갔다. 1936년 이해평(李海平)이라는 이름으로 한국특무대독립군에 입단한 이래, 1938년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를 거쳐 1939년 한국청년전지공작대 공작조장 등을 역임하며 주로 일본군 배후 공작과 한인 병사 모집을 위해 활동했다. 한국광복군 편입 이후에는 제5지대 공작대장으로 임명되었고, 1944년 한국광복군 제2지대에 배속되어 <2지대가>를 작사해 군인들의 사기를 북돋기도 했다. 또한 미국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s, 전략첩보국)와 함께한 국내진공작전에 요원으로 선발되어 훈련받던 중 시안에서 광복을 맞았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 alt 한국청년전지공작대 환송기념 사진 (1939.11.17.)(좌), 미국 OSS 요원들과 한국광복군 (1945.9.30.)(우) <광복군가>를 작곡한 한국광복군 제2지대 선전부장 한형석 한형석은 1910년 부산 동래에서 독립운동가 한흥교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1915년 베이징(北京)으로 가족과 함께 건너갔다. 음악과 연극을 공부하며 1933년 학업을 마친 후 중국군에 입대해 공작대장 등을 역임하다 한국청년전지공작대 창설에 참여, 예술조장으로 활동했다. 1940년 5월에 열린 <아리랑> 공연을 연출해 한인의 항일 의식을 널리 알리는 계기를 마련했다. 전지공작대의 광복군 편입에 따라 광복군에 합류한 그는 1941년 한국광복군 제2지대 선전부장을 역임하며 <광복군가>를 짓고 <압록강 행진곡>을 작곡했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했다. alt 『광복군가집 제1집』(1943.10.)_한종수 제공(좌), 이범석 장군과 제2지대 1구대 대원들(1945)(우) 예술공연을 통해 선전활동을 전개한  한국광복군 제2지대 정훈*조장 송면수 송면수는 1910년 강원도 회양에서 태어나 평양에서 성장하며 학업을 마치고, 잠시 동아일보 기자로 활동하다가 1930년대 초 중국으로 망명했다. 한국국민당계 청년들을 결집해 무장유격대를 결성한 그는 임시정부 요인·가족들과 동행했으며 1938년 연극 <삼일혼(三一魂)> 등을 통해 한인 장병의 사기 진작 등 선전활동을 펼쳤다. 1939년 한국청년전지공작대에 참여하며 항일연극을 통한 선전 활동을 책임졌고 한국광복군에 편입되면서는 제2지대 정훈조장을 역임했다. 1945년 송면수는 OSS훈련을 받았고 국내정진군으로 국내진공을 준비하던 중 두취(杜曲)에서 광복을 맞았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92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 정훈(政訓)   : 군인을 대상으로 한 교양, 이념 교육과 군사 선전, 대외 보도 따위에 관한 일을  통틀어 이르는 말 alt 한국광복군 제2지대 간부들 alt   ]]> Fri, 08 Sep 2023 17:36:44 +0000 82 <![CDATA[끝나지 않은 독립운동 ‘항일문학’은 독립운동이며 ‘항일문학가’는 독립운동가이다]]> 끝나지 않은 독립운동‘항일문학’은 독립운동이며 ‘항일문학가’는 독립운동가이다   글 이계형 (국민대학교 교양대학 교수)   “펜은 칼보다 강하다.” 이는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많이 회자하는 말 가운데 하나다. 이 말은 영국의 작가 에드워드 불워 리턴(Edward Bulwer Lytton)이 1839년에 발표한 역사 희극 <리슐리외 또는 모략>(Richelieu; Or the Conspiracy)에서 처음 사용했다.  희곡 속 리슐리외는 프랑스 국왕 루이 13세(1601~1643) 때 재상으로 활동한 실존 인물이다.  리슐리외는 적을 상대로 무기를 휘두를 수 없게 되자, 침착한 목소리로 하인에게 “펜은 칼보다 강하네. 칼을 치우게. 국가는 칼 없이도 구할 수 있네.”라는 대사를 읊었다고 한다. 일제의 엄혹했던 식민지 시기에 한국의 작가들 역시 시·소설·동요·비평 등을 통해 민족의식을 일깨우거나 식민 통치를 비판하며 저항 의지를 표출했다.  그들 가운데는 독립운동에 직접 뛰어든 이가 많지 않았지만, 저항 의식만큼은 그에 못지않았다.  그들 작품이 한국 문학사에서 ‘항일문학’이라는 유형으로 분류되는 것만으로도 그 가치를 인정받은 것과 마찬가지이다. alt   민족의식 고취에 큰 영향을 끼친 대표적 항일문학가들 ‘항일문학’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대표적인 인물로 한용운(1879~1944)·조명희(1894~1938)·이상화(1901~1943)·심훈(1901~1936)·이육사(1904~1944)·윤동주(1917~1945) 등을 떠올릴 것이다. 그런데 모두가 하나 같이 광복을 맞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한용운은 「님의 침묵」·「님」·「당신을 보았습니다」 등을 통해 국권 회복에 대한 열망과 저항 의지를 담아냈다. 1928년 소련으로 망명한 조명희는 「짓밟힌 고려」를 발표하여 일제에 대한 분노와 적개심을 강렬히 표현하였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시인 이상화는 대구 3·1운동을 주도하였고, 「금강송가」·「역천」·「이별」 등의 저항시들을 쏟아냈다. 하지만 그는 평생의 소원이었던 빼앗긴 들의 봄날을 보지 못했다. 심훈의 대표작인 「그날이 오면」은 3·1운동 기념일에 발표되었지만, 일제의 검열로 세상에 빛을 보지 못하였다가 사후 1949년에서야 유고집으로 공식 발표되었다.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의 C. M. 바우라(C. M. Bowra) 교수는 심훈의 「그날이 오면」을 두고 세계 저항시의 본보기라는 극찬하기도 했다. 윤동주는 지식인으로서 식민지를 살아가야만 했던 자신의 성찰과 양심의 고뇌를 「서시」·「십자가」·「또 다른 고향」 등의 시에 담았다. 독립운동가이자 문학가였던 이들의 작품은 당대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데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탄 사건’(1927)과 ‘대구격문 사건’(1930) 등으로 3년여의 옥고를 치른 이육사는 「광야」·「꽃」·「절정」 등을 통해 민족혼을 고취하는가 하면 독립에 대한 염원과 자신의 굳은 저항 의지를 담아냈다. 국문학자면서 시조 시인이었던 이병기(1891~1968)·이희승(1896~1989) 등은 조선어학회사건으로 옥고를 치렀다. 「성북동 비둘기」의 시인 김광섭(1904~1977)은 중동중학교 교사로 근무하면서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다가 1941년 2월 체포되어 2년 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었을 때, 「벌」이란 작품을 통해 당당한 저항 의지를 드러냈다. alt 『님의 침묵』 재판본(좌), 『그날이 오면』 초판본(우) 중국에서 신문·잡지를 발행하여 일제의 식민 통치를 폭로하다 1919년 3·1운동 이후 독립운동의 주 무대였던 중국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은 『진단』(震壇, 1920), 『천고』(天鼓, 1921), 『광명』(光明, 1921) 등의 신문·잡지를 중국어로 창간했고, 이는 창간하기 시작한 이래로 광복 때까지 계속 늘어나 200여 종이 넘었다. 중국이 서양 열강의 침략으로 반식민지가 된 상황에서 한국의 독립운동계가 그 나라의 지식인들과의 연대와 도움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독립운동가들은 중국어 신문과 잡지를 통해 일제의 식민 통치를 폭로하고 국내 독립운동의 상황을 전하는가 하면 수많은 항일문학 작품을 실었다. 특히 작가 미상의 「조선의용대」라는 시에는 무력 항쟁을 통해 일제를 몰아내겠다는 항일 의지를 알려 중국인들로부터 공감대를 얻어냈다. 조선의용대원 이두산의 「방가」(放歌)는 항일문학의 역작이라 평가받았다. 한국청년전지공작대가 중국 내 선전 활동을 위해 만든 「아리랑」, 「한국용사」, 「국경의 밤」 등의 항일 극의 대본 역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일제의 의해 압수·폐기된 항일문학 작품들 조선총독부는 이미 통감부 시기에 ‘신문지법’(1907.7)과 ‘출판법’(1909.2)을 공포하여 일제강점기 내내 식민지 조선에서 생산한 신문·잡지·출판·음반·연극·영화 등 전 분야에 걸쳐 탄압·통제하였다. 일제는 이를 근거로 한민족의 독립운동은 물론 일제의 식민 통치 비판·내선 융화 저해·민족 상황 비관 등과 관련한 것은 절대 불허하였다. 이에 1920년대 이후 매년 불허가로 차압·삭제 등을 당한 건수는 평균 1,500건에 달할 정도였다. 1928년부터 1941년까지 판매 금지 처분된 책은 2,820여 종에 달했다. 당시 국내에서 발행된 금서는 188종으로 대부분 치안유지법 위반·풍속 사건·출판법 위반 등의 이유에서였다. 특히 민족주의를 고취하는 내용이라든가 사회주의를 선전하는 것은 거의 예외 없이 삭제되었다. 심지어 ‘현재 조선의 사회제도를 저주하여 조선인의 비애를 강조’한 것 또한 그 대상이 되었다. 『빈처』나 『운수 좋은 날』 단편소설로 잘 알려진 현진건(1900~1943)의 단편집 『조선의 얼골』은 1940년 일제에 의해 ‘치안’ 상의 이유로 압수처분을 받았다. 변영로(1898~1961)는 1924년 첫 시집 『조선의 마음』을 발표하였는데, 조선총독부가 내용이 불온하다 하여 시집은 발행과 동시에 압수·폐기 처분되었다. 그는 1940년대 절망감 속에서도 선비적 절개와 지조를 지키면서 여러 작품을 남겼고, 이는 광복 이후에 발표되었다. 일제의 이러한 조치는 『어린이』(1923.3. 창간), 『학생』(1929.3. 창간) 등 청소년 잡지도 예외는 아니었다. 『학생』은 창간한 지 불과 18개월 만에 식민지 지배 정책에 맞서고 민족독립운동을 조장한다고 하여 강제 폐간되었다. 잡지에 발표된 동시·동요 등은 일제의 날 선 검열을 피하고자 비유적·상징적 또는 우회적으로 일제에 항거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대표적인 작가로 강소천·이일래·주요섭·심훈 등을 꼽을 수 있다. 이들은 여러 작품을 통해 청소년들에게 민족혼을 불어넣거나 힘찬 기상을 북돋워 주었다. 동화 작가 마해송(1905~1966)은 창작동화 「토끼와 원숭이」를 『어린이』(1931년 7월호)에 연재하여 조선을 침략한 일제와 주변국 간의 문제를 동물 나라로 의인화하여 묘사하였다가 글이 삭제되거나 원고를 압수당하였다. 그는 광복 이후 이 작품을 완성하였다. alt 『어린이』 창간호(좌), 『학생』 창간호(우) 저항 의지를 다지며 절필·은둔하다 1930년대 말부터는 치욕의 친일문학, 특히 일제가 민족말살정책을 펼치던 시기에 ‘총후(銃後; 전쟁터가 아닌 후방을 뜻함) 문단’이 세상을 온통 까맣게 물들였다. 이러한 친일문학은 국내 한국인들에게 친일을 강요하거나, 일제의 침략 전쟁, 황민화 정책 등을 고무·찬양하는 내용이 일색이었다. 대표적인 작가로 최남선·이광수·주요한·채만식·김동인·서정주·박영희·노천명·백철·유치진 등을 꼽을 수 있다. 이들의 친일 행적에 대해서는 세인(世人)들로부터 역사적·사회적인 비판을 받고 있다. 이와 달리 내선일체·동조동본(同祖同本)·정신대(挺身隊) 징발·신사 참배·일본어 강제 사용·창씨개명·공물 헌납·학병 강제 모집 등에 시달리던 문인 중에는 붓을 꺾거나, 낙향하여 술과 독서로 울분을 풀거나, 언젠가 광복을 고대하며 ‘피로 쓴 글’을 서랍 속에 쌓아두었다. 이를 두고 ‘소극적 저항’이라고 하지만, 그들 나름의 무저항 운동이나 다름 아니었다. 오상순(1894~1963)·홍사용(1900~1947) 등은 낙향 혹은 유랑하며 자신들의 지조를 지켰다. 「모란이 피기까지는」의 시인 김영랑(1903~1950)은 「독(毒)을 품고」라는 저항 시를 쓰고는 고향 강진에 파묻혀 지냈고, 김동리(1913~1995)는 경상도에서 독서로 소일하였으며, 조지훈(1920~1968)·박두진(1916~1998)·박목월(1915~1978) 등은 『청록집(靑鹿集)』에 실을 시 창작에만 전념하였다. 주요섭(1902~1972) 역시 1944년 중국 베이징에서 추방되어 고향인 평양에 칩거하면서 절필하였다. 그는 광복 후 첫 단편소설 「입을 열어 말하라」를 발표하여 일제 말기의 강요당한 침묵을 깨뜨렸다. 김일엽(1896~1971)은 나혜석·김명순 등과 함께 여성 해방론과 자유 연애론을 주장하고, 여성의 의식 계몽을 주장하는 글과 강연을 하다가 1933년 출가한 이후 20여 년 동안 절필하였다. 「파초」로 널리 알려진 김동명(1900~1968)은 민족 언어로 더는 시를 쓸 수 없는 식민지 지식인으로서의 한계에 부딪히자, 1942년 「술 노래」와 「광인」을 끝으로 절필하였다. 소설가 황순원 역시 1940년 「늪」을 발표한 이후 절필하였다. 그의 대표적 작품 중 하나인 「독 짓는 늙은이」는 1942년부터 1945년 사이에 썼지만, 집안 다락방에 감춰두었다가 1950년에서야 발표하였다. 시인 정지용(1902~1950)은 1941년 마지막 시집 『백록담』을 출간하고는 1942년 절필했다.  일제강점기에 적지 않은 시인과 소설가 등이 글로써 일제의 식민 통치에 맞섰고 민족의식을 고취하는가 하면 저항 의지를 다졌다.  이러한 힘을 알고 있던 일제는 이들의 시나 소설을 검열하였고 압수·폐기까지 하였다.  일제 말 조선어 폐지·창씨개명 등 민족말살정책에 호응하여 문학가 대부분이 친일의 길을 걸을 때, 민족주의 작가들은 일제의 탄압 속에서 절필하거나 은둔하였다.  그런데 앞서 언급한 작가 중에 독립유공자로 포상을 받은 이는 한용운·이육사·조명희·윤동주·김광섭·이병기·이희승·김영랑·주요섭·이상화 등 뿐이다.  이들은 ‘항일문학’ 작가로서 공훈을 인정받았다기보다는 3·1운동, 의열 활동, 조선어학회사건 등과 연관되었기 때문이다.  항일문학 작가들의 행동을 ‘소극적 저항’이라고 규정하기도 하지만, 그들이 실지 독립운동에 뛰어들어 옥고를 치르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그 자체로 넓은 범위에서 ‘독립운동’으로 봐야 할 것이다.  그들에게는 펜이 칼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alt (왼쪽부터)조지훈, 박목월, 박두진(좌), 『청록집(靑鹿集)』 초판 (1946)(우) ]]> Fri, 08 Sep 2023 17:49:51 +0000 82 <![CDATA[어제와 오늘을 잇는 사람 개그맨에서 역사학자로 정재환]]> 어제와 오늘을 잇는 사람개그맨에서 역사학자로정재환   글 편집실사진 제공 정재환   대중의 기억 속에 방송인과 사회자로 자리 잡은 정재환. 그가 어느 순간부터 TV에서 자주 보이지 않았다. 최근에는 방송 무대보다 강단에 주로 서기 때문이다.  개그맨으로 방송에 데뷔하여 1980~90년대 방송 사회자로  전성기를 누리고,  현재는 역사학자로서 제2의 삶을 살고 있는 그를 만나 비하인드 스토리를 들어본다. alt 정재환   그동안 TV에서 자주 보이지 않아 근황이 궁금하다. 한글문화연대 공동대표, 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역사연구소 책임연구원으로 일하고 있고, 방송에는 가뭄에 콩 나듯 얼굴을 내밀고 있다. 577돌 한글날을 맞아 새 책 『우리말 비타민』을 출간하기 위해 막바지 점검을 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alt 『우리말 비타민』(출간 예정) 방송을 하다가 어떤 계기로 역사학자가 되었나? 살면서 세 가지 관심사가 있었다. 첫째는 방송, 둘째는 운명적으로 사랑에 빠진 한글, 마지막으로 역사였다. 1990년대에 방송 사회자로 잘 나갔었지만, 그때 당시 스스로 부족한 점을 많이 느꼈고 늘 배움의 갈증이 있었다. “한창 일할 나이에 무슨 공부냐”라는 진지한 충고도 들었지만, 공부가 하고 싶었고 열심히 하다 보니 방송보다는 강단에 더 많이 서게 된 것 같다. alt 제12회 국어책임관·국어문화원 공동연수회 특강 중인 정재환 2000년에 성균관대학교 사학과에 입학해 늦깎이 대학생이 되었다. 그 당시 한글 사랑에 푹 빠져있어서 한글과 역사를 배우기 위해 마흔 살이라는 늦은 나이에 성균관대학교 사학과에 입학했고, 졸업 후 곧바로 석사 공부를 했다. 2005년 당시 SBS <도전! 1000곡>을 진행하면서 공부를 병행했는데, 박사 과정을 시작하면서는 상황이 달라졌다. 공부량이 많아지고 방송도 챙겨야 하다 보니 늘 시간에 쫓겨야만 했고, 방송과 공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당시는 공부를 더 하고 싶었고, 어렵사리 박사학위까지 취득할 수 있었다. 명성을 뒤로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방송에서 잘 나갔는데, 공부를 하는 게 좀 의아했나 보다. 공부에도 때가 있다는 말도 들었지만, 늦었다고 할 수 없는 건 아니다. 무언가를 정말 하고 싶을 때가 가장 좋은 때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때는 이런저런 생각하지 않았고, 우리말글 역사가 궁금해서 열심히 했고, 지금은 우리말글 역사와 의미를 어떻게 하면 두루두루 나눌 수 있을까 궁리 중이다. 한글문화연대라는 단체에 몸을 담고 현재는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한글문화연대는 우리말을 지키고 가꾸고 키우는 활동을 하는 단체다. 1997년쯤 영어를 공용어로 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국제 사회에서 영어가 가진 위상이나 힘을 고려할 때 영어를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는 주장에는 동의할 수 있었지만, 우리말을 버리고 영어를 국어로 하자는 데에는 절대 찬성할 수 없었다. 그때 위기를 느낀 우리말 지킴이들이 모여 한글문화연대를 만들었다.  한글문화연대에서 하는 ‘한글 운동’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 광복 후 전개된 한글 전용 운동, 문맹 퇴치를 위해 한글을 쓰자는 운동, 한글 이름 짓기 운동 등 한글을 적극 사용하면서 사회 발전을 도모하자는 운동이고, 한글을 어떻게 더 키워나갈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운동이다. 한글날은 오랫동안 쉬지 않는 기념일이었고, 그 시기 한글의 의미와 가치는 흐릿해져 가고 있었다. 안 되겠다 싶어 국경일, 공휴일 청원에 나섰고, 2006년에 국경일, 2013년에 공휴일이 되었다. 요즘 한글문화연대는 ‘공공 언어 쉽게 쓰기’에 힘을 쏟고 있다. 쉽고 편안하고 안전한 언어생활을 위해 어려운 ‘노인쉘터(Shelter)’나 ‘KISS & RIDE’ 대신 ‘노인쉼터’와 ‘환승정차구역’을 쓰는 것이 좋다.  alt 2020년 출간한 『나라말이 사라진 날』  방송인으로 살 때와 현재 중에서 어느 때가 더 행복한가. 예나 지금이나 행복하다. 살며 배운 것 중 하나는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할 때 행복하다는 것이다. 지금도 주변에서는 “방송 열심히 했으면 더 잘 나갔을 텐데”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잘 사는 것’의 척도가 돈이나 인기 같은 것이라면 그들의 말이 맞다. 하지만 돈이나 인기 혹은 지위가 잘 살고 못 사는 것을 가르는 기준이 된다면 삶이 너무 슬프지 않을까 생각한다. 현대인들이 역사를 알고 배워야하는 이유를 알려준다면? 영국 역사가 에드워드 카(E.H Carr, 1892-1982)는 ‘역사는 현재와 과거와의 대화다’라고 했다. 과거를 통해 현재를 인식하고 미래를 개안하게 한다는 의미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역사를 안다는 것이 중요하다. 역사를 알아야 현재의 나를 알 수 있고, 미래의 나를 만들어 나갈 수 있다. 결국 꿈을 꿀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역사를 공부하다 보면 중요한 선택의 순간들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때 그 사람은 어떤 선택을 했는지도 알 수 있다. 그런데 그런 순간들이 누구의 삶에나 있다. 그렇기에 역사를 통해 선택할 수 있는 어떤 지혜를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역사를 공부하고자 하는 독자들에게 한 말씀 부탁한다. 너무 진지하고 엄숙하게 역사를 공부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시험을 쳐야 한다면 외워야 할 게 많지만, 그렇지 않다면 친구에게서 재밌는 얘기를 듣는 것처럼 역사를 공부하는 게 좋지 않을까? 역사는 우리 인류가 살아온 이야기고, 이야기는 재밌다. 다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역사는 발전하고 진화한다는 것이다. 앞으로 역사를 통해 인류가 어떻게 발전해 나가야 할지, 또 어떻게 진화해 나가야 할지를 내다볼 수 있다면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   ]]> Fri, 08 Sep 2023 18:10:01 +0000 82 <![CDATA[기념관이 발굴한 독립운동가 은율군수 처단 의거에 참여한, 황윤상]]> 기념관이 발굴한 독립운동가은율군수 처단 의거에 참여한 황윤상   글 독립기념관 독립운동가 자료발굴TF팀   독립기념관은 2018년부터 독립운동가를 발굴하여 국가보훈부에 유공자로 포상 추천하고 있다.  국가와 국민을 위해 희생한 분을 존중하고 기억하는 정부의 의지와 국민적 관심을 담은 것이다.  2023년 매월 독립기념관이 발굴한 독립운동가를 소개한다. alt 암살대원이 은신하던 구월산  “임시정부의 이름으로 너를 처단한다” 1920년 8월 15일 자정 무렵, 황해도 은율군 군수 최병혁은 집 거실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이때 누군가 거칠게 문을 두드리며 군수를 만나게 해달라고 소리를 질렀다. 최병혁은 너무 늦은 시간이라 내일 다시 오라며 방문을 거절했다. 그러나 정체불명의 청년은 담장을 뛰어넘어 거실 가까이 다가와 “임시정부의 명령으로 너를 처단한다”고 하며 군수의 오른쪽 가슴 위를 겨냥하였다. 총성이 울리고 군수 최병혁은 그 자리에서 즉사하였다. 청년은 대한독립단원 이지표였다.같은 시간 다른 대한독립단원 셋은 은율군 참사 고학륜의 집에 들이닥쳤다. 그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으나 명중시키지 못했다. 놀란 고학륜은 뒷문으로 달아나 주재소로 달려갔다. 일본 순사는 청년들을 추적하며 발포하고 몸싸움까지 한 끝에 겨우 한 사람만 붙잡을 수 있었다.이들은 만주 류허현에 근거를 둔 대한독립단(단장 조맹선) 단원들이었다. 대장격인 이명서는 조맹선의 명령에 따라 친일 한국인과 관공리를 암살하고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8월 12일 은율군에 도착한 이들 암살대원은 셋으로 나누어 두 반은 각각 최병혁과 고학륜 암살, 나머지 한 반은 주재소 인근에 잠복하다가 출동하는 일경을 공격하기로 계획하고 실행에 옮겼다. 1920년대 만주의 독립운동단체에서 암살대원을 파견해 친일 성향의 한국인 관공리와 부호를 처단하는 사건은 심심치 않게 일어났다. 이로 인해 서북지역의 일제 통치기관은 치명타를 입었고 친일 한국인의 행동도 위축되었다. 만주와 접경한 평북지역에서는 관공리와 친일 한국인이 경찰의 보호 없이 바깥출입을 하지 못했고, 면장과 면서기들이 사직서를 제출하고 출근하지 않아 면사무소 업무가 중단되는 일도 종종 있었다. 이번 의거의 처단 대상인 은율군수 최병혁은 황해도 해주 출신으로, 1902년 황해도 관찰부 주사로 출사했다. 대한제국기에는 한직을 전전했으나, 경술국치 이후 1911년 황해도 신계군수로 승진했고 1912년 한국병합기념장, 1915년 다이쇼[大正]천황 즉위기념 대례기념장을 서훈받은 대표적 친일파였다. 1917년 은율군수로 부임하여 은율군청년회의 설립을 방해하고 지역 공립보통학교에서 한국인 직원을 배제했을 뿐 아니라 1919년 은율읍에서 일어난 만세운동 때 시위에 참가한 군중을 향해 “천시(天時)도 알지 못하는 망동”이라며 해산을 종용하였다. 그래서 지역 주민들에게 ‘고약한 군수’라는 비난이 자자한 터였다. 은율군수가 독립단원에게 피살되었다는 소식은 일파만파로 퍼져나갔다. 황해도 경찰부에서는 보안과장·고등과장을 현지에 파견하고 신천·안악·장련·송화·장연 등 5개 경찰서 인력을 동원하여 범인의 행적을 쫓았다. 9월 9일 신천군 초리면 구월산 기슭의 민가에 암살대원들이 은신했다는 정보를 접한 수색대는 10일 오전 3시경 그 부근을 포위했다. 3시간에 걸친 공방전 끝에 암살대원 9명 중 이명서·박기수·이지표·주의환·원사현 등 5명이 순국하고, 고두환·김정욱·박중서·민양기 등 4명이 중경상을 입은 채 체포되었다.  대한독립단 황해지단의 지원 조사가 진행되자 사건은 의외로 확대되었다. 최병혁이 암살된 8월 15일 이후 암살대원이 체포된 9월 10일까지 한 달여에 걸친 행적이 밝혀지면서 ‘공범’ 43명이 검거되었다. 이들은 대한독립단 황해지단 단원들이다. 1920년 음력 1월 설립된 황해지단은 본부와 연락을 주고받으며 비밀리에 그 활동을 지원했다. 음력 6월 주요 간부인 정순경이 체포되어 활동이 위축됐으나 이번 은율군수 처단사건을 통해 건재함이 확인되었다. 1920년대 독립군의 주된 활동방식인 게릴라식 활동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국내 주민의 전폭적인 지지와 지원이 필수적이다. 은신처 제공·식량 공급·자금 조달은 기본이고, 길 안내·망보기와 같은 활동 보조뿐 아니라 여차하면 독립군과 함께 직접 전투를 수행하는 역할도 주민들의 몫이었다. 황해지단에서는 단원 변춘식과 박중서를 평북 박천에 파견하여, 압록강을 건너 들어온 암살대원을 맞이하고 은율까지 길을 안내하게 하였다. 8월 12일 그들이 은율에 도착하자 단원 황윤상의 집에서 모임을 갖고 최병혁과 고학륜 처단을 위한 계획을 논의하며 단원 각자가 맡을 역할을 분담하였다.   홍원택: 이지표를 군수의 집까지 안내  김영섭: 원사현·고두환을 고학륜의 집까지 안내  이현규: 이명서·주의환을 주재소 내문까지 안내  박능묵: 민양기·박기수를 안내하여 주재소 인근 잠복할 곳으로 안내  박형진: 암살 수행 이후 집합 장소인 마을 어귀 조밭에서 망보기  정연우: 1920.8.17.~18. 자택에 암살대원 은닉  박창호: 1920.8.19.~21. 자택에 암살대원 은닉  최광국: 1920.8.24.~25. 자택에 암살대원 은닉  이종성: 1920.8.25.~26. 형 이종문의 집에 암살대원 은닉  최관용: 1920.8.27.~28. 자택에 암살대원 은닉  양민석: 1920.8.29.~30. 자택에 암살대원 은닉  강응종: 1920.8.31.~9.1. 자택에 암살대원 은닉  우종서: 1920.9.3.~4. 자택에 암살대원 은닉  노성우: 1920.9.7.~9. 자택에 암살대원 은닉  이항진·이성룡: 독립운동자금 모집 방법 논의  차기순·김영근: 자금 500원을 마련해 연초·짚신·모자 등 물품과 여비 조달  김창현·이만영·김종수·박성행·이승준·최명현·김영조·김종수 등 기타 활동 지원 박중서와 김정욱은 9월 9일 암살대원이 체포될 때 그들과 함께 직접 교전에 참여했다. 특히 박중서는 총상을 입고 반신불수가 되었다. 이들의 활동을 말 한마디, 글 한 줄로 표현하면 소소하게 보일 수 있지만 그들에게는 본인과 가족들의 생존을 담보로 한 결단이었다. 그들의 지원이 없었다면 은율군수 처단은 성공할 수 없었을 것이며, 그것 자체로도 충분히 독립운동이었다. alt 은율군수를 사살한 독립단원 예심 결정, 『동아일보』 (1921.07.20.)(좌), 황윤상 선생의 출옥 기사, 『동아일보』 (1922.07.10.)(우) 한민족 일반의 동감 1921년 8월 19일 해주지방법원에서 이 사건 관련자 중 기소된 30명에 대한 판결 공판이 진행되었다. 암살대원 중 민양기에게 사형, 고두환에게 무기징역, 그들의 행동을 적극 지원한 박중서와 변춘식에게 징역 13년, 김정욱에게 징역 10년, 그 외 황해지단원들에게는 징역 3년에서 징역 1년 6월이 언도되었다. 황해지단원 중 한 사람은 최후 변론에서 이같이 말했다. “조선이 일본에 합병된 이후 총독부의 압박정치에 불만을 가진 이는 나뿐이 아니다. 조선민족 일반이 모두 동감할 것이라 생각한다.” 그들이 생존을 걸고 은율군수 처단에 참여한 심정을 대변한 말이다. 독립운동가 자료발굴TF팀에서는 이 활동의 참여자 중 10명을 포상 추천하고, 2020년 황윤상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황윤상은 대한독립단 황해지단의 일원으로, 1920년 8월 12일 자택에서 암살대원과 다른 지단원들과 함께 은율군수 처단 계획을 논의하였고, 이로 인해 징역 1년 6월을 언도받아 해주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 Fri, 08 Sep 2023 18:21:13 +0000 82 <![CDATA[이벤트 공지 행운의 주인공이 되어보세요!]]> 이벤트 공지행운의 주인공이 되어보세요!   alt   ]]> Fri, 08 Sep 2023 19:11:17 +0000 82 <![CDATA[이달의 기념관Ⅰ 제78주년 광복절 경축 문화행사 ‘심장이 뛴다’ 현장 속으로]]> 이달의 기념관Ⅰ제78주년 광복절 경축 문화행사‘심장이 뛴다’ 현장 속으로   글 편집실사진 이소연   지난 8월 15일, 대한민국의 심장 독립기념관에서 광복을 위해 싸워온 독립투사의 기쁜 마음을 기리고 그 정신을 계승하는 의미의 다양한 문화행사를 진행하였다.  특히 이번 행사는 ‘2023 천안 K-컬처 박람회’도 함께 진행되어 관람객들의 호응을 끌어냈다.    alt 만세삼창을 외치는 한시준 독립기념관장(좌), 만세삼창을 외치는 참가자들(우) 그날의 함성, 하나 된 대한민국 힘쎈 충남으로 ‘제78주년 광복절 경축 문화행사’는 오전 10시 경축식을 시작으로 문을 열었다. 겨레의집에서 진행된 경축식에는 한시준 독립기념관장을 비롯하여 김태흠 충남도지사, 도내 보훈단체 등 주요 기관·단체 대표·관계자 등이 참석했다. ‘그날의 함성, 하나 된 대한민국 힘쎈 충남으로’를 주제로 정한 이번 경축식은 기념사, 유공자 표창, 경축사, 뮤지컬공연, 만세삼창 등의 순으로 약 1시간 동안 진행됐다. 경축식에 참가한 모든 이들은 국권 회복을 위해 노력한 순국선열과 애국지사의 나라사랑 정신 계승을 다짐했다. alt 프로젝트 락의 국악 퍼스먼스 공연(좌), ‘2023 천안 K-컬처’ 박람회 체험 부스(우) 눈과 귀를 사로잡은 공연과 K-컬처 박람회 경축식에 이어 겨레의집 상공에서 공군 특수비행단 ‘블랙이글스’의 축하비행이 펼쳐져 관람객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이후 겨레의큰마당에서는 역사합창단을 시작으로, 국악 퍼포먼스,뮤지컬 ‘영웅’ 갈라쇼, 가수 자우림 등 성대한 공연이 펼쳐졌다. 관람객들은 공연을 즐기며 광복의 기쁨을 다시 되새겼다.한편 천안시와 상호협력으로 추진하여 8월 11일부터 독립기념관에서 열린 ‘2023 천안 K-컬처 박람회’가 5일간의 일정을 마무리하고 이날 막을 내렸다. 이번 박람회에는 5일간 13만여 명의 관람객이 방문하며 흥행에 성공했다. 특히 개관 37년 만에 처음으로 야간에 개장하면서 ‘민족의 성지’ 독립기념관이 민족정신과 한류 문화를 알리는 ‘한류 문화의 성지’로 탈바꿈하는 성과를 거뒀다.  alt 공군 특수비행단 ‘블랙이글스’의 축하비행(좌), 독립기념관을 찾은 어린이 관람객들(우) 광복절에 맞춰 개최한 다양한 전시와 체험행사 광복절을 기념하여 다양한 전시도 개최하였다. 지난 8월 10일, 광복 78주년 및 한영수교 140주년을 맞아 한국 독립운동 속 영국의 발자취를 살펴보는 <한국 독립운동과 영국> 전시를 개최했다. 또한 8월 11일, 세계의 독립운동사를 한자리에서 만나는 <독립기념관, 세계의 독립운동을 공감하다> 교류전시와 미디어 전시를 개막했다.전시 외에도 독립유공자 후손 대상 체험형 역사 프로그램인 <독립유공자 후손 역사기행>, 광복절 특별해설 <대한민국, 빛을 되찾다>,  등 다양한 체험 행사를 마련하며 관람객들의 호응을 끌어냈다.          제78주년 광복절 경축 문화행사‘심장이 뛴다’ 인터뷰 alt   관람객 정재환 님 광복절을 기념하여 우리나라 독립운동과 역사를 상징하는 한국광복군 복장을 입고 방문했습니다.  평소 역사에 관심이 많기도 하고, 비교적 잘 알려지지 않은 광복군 복장을 여러 사람에게 알리고 싶었습니다.  복식이나 무기 등은 모두 고증을 바탕으로 하나하나 직접 찾거나 만들어야 해서 준비기간이 꽤 오래 걸렸지만, 많은 분이 관심을 가져주셔서 뿌듯합니다. alt   국악 퍼포먼스 공연팀 프로젝트 락 하나의 마음을 가진 국민으로서 제78주년 광복절을 기념하는 공연에 참여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해가 쨍쨍한 무더위 속에서 웃음을 잃지 않고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공연을 즐겨주신 관람객들 덕분에 공연을 잘 마칠 수 있었습니다.  저희가 기운을 드리려고 했는데, 오히려 힘을 받고 가는 것 같아서 감사드립니다.  alt   관람객 김성환 님 매년 광복절마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블랙이글스’ 공연을 보려고 방문합니다.  이뿐만 아니라 다양한 체험행사들이 있어 온 가족이 함께 유익한 시간을 보낼 수 있어 좋습니다.  또한 우리 아이들이 독립운동과 광복의 의미를 깨닫게 되는 기회가 되기도 하고요.  올해도 독립기념관에서 가족과  소중한 추억을 만들 수 있어 행복합니다.   ]]> Fri, 08 Sep 2023 18:41:13 +0000 82 <![CDATA[이달의 기념관Ⅱ 일본지역 독립운동 발자취를 따라서]]> 이달의 기념관Ⅱ 일본지역 독립운동 발자취를 따라서   정리 편집실   독립기념관은 2023년 5월부터 8월까지 총 3회에 걸쳐 일본지역 독립운동사적 답사를 교육전문직, 교원직무연수 참여 교사, 충청권 역사동아리 고등학생 대상으로 운영하였다. 일본 도쿄의 관동대지진 조선인학살 추도비와 이봉창, 김지섭 의사의 의거 현장, 가나자와·교토·오사카 등지의 윤봉길 의사 관련 사적지와 윤동주, 정지용 시비 등  답사단과 함께 일본지역 독립운동 발자취를 따라가 본다.   alt 가자나와 윤봉길 암장지적비 세 차례에 거쳐일본 독립운동 사적지 답사 이번 답사에는 총 3개 팀이 참여했다. ‘교육전문직’ 36명은 2023년 5월 17일부터 20일까지, ‘교원직무연수 참여 교사’ 34명은 8월 10일부터 12일까지, 마지막으로 ‘충청권 역사동아리 고등학생’ 28명은 8월 16일부터 19일까지 차례대로 일본지역 독립운동 사적지를 답사하였다.  alt 좌측부터 도쿄 야히로 추도비, 도쿄 요코아미초 공원 추도비, 도쿄 이봉창 의사 순국지(이치가야 형무소 터)  세 차례에 거쳐일본 독립운동 사적지 답사 이번 답사에는 총 3개 팀이 참여했다. ‘교육전문직’ 36명은 2023년 5월 17일부터 20일까지, ‘교원직무연수 참여 교사’ 34명은 8월 10일부터 12일까지, 마지막으로 ‘충청권 역사동아리 고등학생’ 28명은 8월 16일부터 19일까지 차례대로 일본지역 독립운동 사적지를 답사하였다.  alt 도쿄 김지섭 의사 의거지 (니쥬바시) alt 도쿄 2·8독립선언 기념비 및 기념자료실(좌), 교토 윤동주·정지용 시비(도시샤 대학)(우) 답사단 인터뷰 alt   충북여고 학생 이예원 야히로 추도비의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채로 귀중한 생명을 빼앗겼다’는 문구를 보며 우리들과 같이 지극히 평범한 일상을 살던 한국인들이  일제 군경에게 살해당했다는 사실과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사실들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니 정말로 원통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또한 요코아미초 공원 추도비에는 학살의 주체가 명확히 표시되지 않았다는 것이 씁쓸하고도 분했습니다.  더 이상 잊어서는 안 되는 1923년 그날을 우리들은 기록으로, 마음으로 꼭 기억해야 한다고 가슴 깊게 느꼈습니다. alt   대전성모여고 역사교사 김경임 일본 내 사적지를 탐방하면서 당시의 참상과 비극을 직접 마주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한국인 학살을 알리고 일본의 가해를 비판한 후세 다쓰지 변호사의 노력과 현재에도 40여 년 넘게 이 문제를 위해 싸우고 있는 일본 시민단체 봉선화의 활동을 자세히 알 수 있었습니다.  앞으로 후세 다쓰지 변호사와 봉선화 활동을 통해 민족적 문제를 넘어선 인류애의 희망을 볼 수 있음을 꼭 가르치고자 합니다.   ]]> Fri, 08 Sep 2023 19:02:20 +0000 82 <![CDATA[#월간독립기념관 지난 호 독자 후기 이벤트 당첨자 발표]]> #월간독립기념관지난 호 독자 후기 이벤트당첨자 발표   ※ 당첨자 5명에게 모바일 커피쿠폰(아메리카노)을 전달할 예정입니다. 참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alt   ]]> Fri, 08 Sep 2023 19:06:53 +0000 82 <![CDATA[기념관 소식 NEWS]]> 기념관 소식NEWS   alt   ]]> Fri, 08 Sep 2023 19:09:35 +0000 82 <![CDATA[어제의 오늘 잊지 말아야 할 10월의 역사]]> 어제의 오늘잊지 말아야 할 10월의 역사   정리 편집실   alt   군사 양성과 군자금 모집을 위해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가 창립된 날은 1922년 10월 28일입니다.   ]]> Thu, 05 Oct 2023 17:02:08 +0000 83 <![CDATA[들여다보기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의 결성과 활동]]> 들여다보기‘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의 결성과 활동   글 김광재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   1922년 10월 28일 상하이 프랑스조계 샤페이로 바오캉리 24호 조상섭의 집에서 김구·여운형·이유필·손정도 등에 의해 한국노병회가 창립되었다. 이들의 목표는 장차 독립전쟁을 내다보면서 여기에 필요한 군사와 자금을 확보한다는 것이다.  이들이 내세운 구체적인 목표는 10년 안에 1만 명 넘는 노병을 길러내고, 100만원이라는 전쟁비용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alt 한국노병회 회헌, 부 회칙 급 취지서 (1922) 독립운동이 장기화되다 1919년 4월 중국 상하이에서 조직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이하 임시정부)는 3·1운동에서 표출된 민족의 독립에 대한 열망과 의지를 결집시켜 이를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독립운동으로 발전시키고자 하였다. 그해 가을 국내 한성정부와 연해주의 대한국민의회를 통합하여 출범한 임시정부는 교통국과 연통제를 통해 국내에 대한 통치를 시도하고 만주의 독립군 단체들을 지휘하는 등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그런데 임시정부의 정책들은 재정적 뒷받침이 이루어지지 못함으로써 계획 자체로 그치거나 별다른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다. 임시정부의 재정 확보는 주로 연통제와 교통국을 통한 독립자금의 송달 및 인구세, 독립공채 발행과 미주지역 교포들의 성금에 의존하고 있었다. 재정 확보의 주요 루트인 연통제와 교통국의 조직이 일제에 의해 와해됨으로써 임시정부의 재정적 어려움은 가중되었다. 한편 파리강화회의와 워싱턴 태평양회의 및 극동민족대회 등 몇 차례에 걸친 외교적 노력도 모두 강대국의 이해관계로 인하여 별다른 소득 없이 좌절감만 안겨주었다. 게다가 임시정부 중심의 독립운동진영에 이념적 분화와 노선 갈등이 초래되었다.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한 독립운동세력의 외교방략의 한계와 독립운동의 장기화에 따라 임시정부 내외에서 국민대표회의의 소집이 본격화되면서 독립운동진영은 격렬한 변화를 겪게 되었으며 이에 대한 극복책의 하나로 한국노병회가 결성되었다.  한국노병회가 결성되다 1922년 10월 28일 상하이 프랑스조계 샤페이로 바오캉리 24호 조상섭의 집에서 김구·여운형·이유필·손정도 등에 의해 한국노병회(이하 노병회)가 창립되었다. 노병회의 목표는 장차 독립전쟁을 내다보면서 여기에 필요한 군사와 자금을 확보한다는 것이다. 이들이 내세운 구체적인 목표는 10년 안에 1만 명 넘는 노병을 길러내고, 100만원이라는 전쟁비용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말하는 노병은 소련의 노병과는 다르다. 소련에서는 노동자와 병사의 대표 모임이라는 뜻이지만, 노병회의 경우는 한 사람이 노동자이면서 또한 병사라는 말이다. 노병회의 노병은 전통시대의 병농일치제와 오히려 가까운 개념이다. 독립운동에 뜻을 둔 청년들이 군사학교를 다녀 군인으로 성장하고, 또한 스스로 노동자가 되어 생계를 꾸려가다가 장래 전쟁이 일어날 경우 독립군을 구성하고 국내로 공격해 들어간다는 것이 노병회가 세운 계획이다. 대개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베르사이유 체제가 형성됨에 따라 당장 전쟁이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지만, 그러나 머지않아 일제의 도발로 다시 전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고, 그럴 때 독립전쟁을 펼친다는 것이 이들이 내세운 논리의 출발이었다. 노병회는 당장은 현실적으로 이루어지기 힘든 것이지만 장기적으로는 중국과 연합하여 독립군이 동삼성에 집결하여 조선으로 진출한다는 목표를 세워 놓고 있었다. alt 한국노병회 설립 장소 (바오캉리 24호, 조상섭 집 자리)(좌), 김구(우) 군사 인재를 양성하다 노병회는 군사학교를 설립하고 사관자격을 양성할 일, 군사서적을 간행하여 군사지식을 계발할 일, 외국의 군대, 군사학교 및 병공창 등에 소개하여 이에 관한 지식을 수득(修得)케할 일 등을 제시하고 추진하였다. 먼저 중국 군사기관으로 청년을 보내 장교로 육성하는 작업을 펼쳤다. 또 무기 생산공장인 병공창으로도 사람을 보내 기술을 익히게 하였다. 1922년 10월 말 김홍서와 조상섭이 중국의 유력 군벌 가운데 하나였던 펑위샹(馮玉祥)에게 파견되었다. 장차 독립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한인 청년의 군사교육을 교섭하기 위해서였다. 1923년 초에는 김홍서가 중국 군벌 우페이푸(吳佩孚)의 뤄양 병영을 방문하여 한인 군대 양성을 위한 문제를 협의하였다. 일찍이 난징에 유학하여 중국어에 능했던 김홍서는 한중 합작 교섭에 적임자였다. 친한파 군벌 우페이푸는 중국군이 한국을 거쳐 일본에 진공해야 한다고 주장할 정도로 반일적이었는데, 이러한 측면에서 노병회와 우페이푸의 이해가 맞아 떨어진 것이었다. 그러한 교섭 노력이 성과를 거두어 중국 군사교육기관에 한인들을 보내 교육시키게 되었다. 1922년 12월 이동건·김세쟁·성준용 등이 직예성의 한단군사강습소에 파견되어 군사교육을 받았다. 같은 시기 백운서는 베이징 학생단, 주문원과 윤원장은 카이펑 병공국에 파견되어 군사기술을 익혔다. 중국 군사교육기관에 파견된 한인 청년들은 단순한 노병의 요원이 아니라 군사간부요원으로 양성되게 되었다.또한 노병회는 여러 곳에 지부를 설치하고 전비를 모금하였다. 1923년 회원 모집을 위해 북간도에 제1반, 노령에 제2반을 파견하였다. 이유필이 이끈 제1반은 북간도에서 통상회원 120명에 입회금 1,200원, 특별회원 177명에 입회금 354원, 기부금 1,950원을 모집하였다. 남형우가 이끈 제2반은 노령에서 통상회원 140명에 입회금 1,400원, 특별회원 180명에 입회금 360원, 기부금 1,250원을 거두는 성과를 올렸다. 노병회는 1923년 4월 제1차 정기총회에서 군사교육에 필요한 다양한 군사서적을 간행하여 보급하는 사업을 만장일치로 결정하였다. 이를 통해 그때까지 통일되지 못한 각지 독립군의 군기와 군율을 통일하고자 하였다. 이 일은 노병회에서 군사교육 관련업무를 담당하는 교육부장 윤기섭이 맡아서 추진하였는데 한글로 된 『보병조전』이라는 군사훈련교범을 편찬하였다. 보병조전은 노병회의 군사교육에 활용되었으며 1930년대 한인 군사교육에도 교재로 채택되었다. alt 김홍서(좌), 『보병조전』 초안 표지 (1924.05.22.)(우) 광복군의 밑거름이 되다 노병회가 10개년의 사업계획을 제시하고 출범했으나, 그 추진과정에는 많은 어려움이 놓여 있었다. 당초 노병회가 설정한 노병 1만명 양성, 1백만원의 전비를 조성한다는 목표는 객관적인 상황에서 볼 때 달성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초대 이사장이었던 김구가 1925년 이사장직에서 물러나고 이유필이 그 뒤를 이었지만, 독립운동계에 밀어닥친 전반적인 어려움으로 말미암아 목표 달성은 너무나 먼 일이 되었다. 더구나 전쟁비용을 저축해 두었던 은행이 파산하는 바람에 그마저 대부분을 잃게 되었다. 노병회는 창립 당초의 약속대로 10년이 지난 1932년 10월 해체를 선언하였다. 비록 처음 내세운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고 해도 노병회의 활동은 1930년대 중반부터 한국인을 위한 군사훈련기관이 중국의 각종 군사학교에 부설되고 그 결과 상당수의 독립군을 양성할 수 있게 되는 기초가 되었다. 더 나아가 이때 양성된 군사 인재들이 1940년 독립전쟁 방략을 전개하기 위해 창설된 임시정부의 국군 한국광복군의 기틀을 이루었다는 측면에서 큰 의미가 있었다.    ]]> Thu, 05 Oct 2023 17:15:57 +0000 83 <![CDATA[한눈에 보기 키워드로 보는 한국노병회]]> 한눈에 보기키워드로 보는 한국노병회   정리 편집실   alt   ]]> Thu, 05 Oct 2023 17:24:04 +0000 83 <![CDATA[이달의 독립운동가 의열투쟁 최전선에 선 청년들 이종암·엄순봉·이강훈]]> 이달의 독립운동가의열투쟁 최전선에 선 청년들이종암·엄순봉·이강훈   글 독립기념관 전시부   alt   청년, 의열투쟁의 선봉에 서다 일제의 국권 침탈 과정에서부터 독립운동가들은 소수 인원으로 자기희생적 성격의 의열투쟁에 나섰다. 1920년대부터 본격화된 의열투쟁은 일제 식민통치 기관을 파괴하거나 일제 요인 및 친일파를 처단하는 등 특정한 인물이나 기관을 대상으로 진행되었다. 의열투쟁의 이 같은 특징은 한국독립운동사의 특성을 보여주는 것으로 불특정 다수에게 자행하는 무차별적인 테러행위와 확연히 구분되는 것이었다. 이종암, 엄순봉, 이강훈을 포함한 청년들은 의열단(義烈團), 아나키스트 비밀결사인 남화한인청년연맹(南華韓人靑年聯盟)에 소속되어 일제 침략자 처단 의거에 나서는 등 의열투쟁의 선봉에서 활동했다. ‘황포탄 의거’의 주역 이종암 이종암은 1896년 대구에서 태어나 대구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대구은행에 취직했다. 1917년 중국으로 망명한 그는 신흥무관학교에 입학, 1919년 11월 의열단 창단에 참여했다. 창단 직후 의열단 국내 의거를 준비하다가 1920년 국내로 들어온 그는 최수봉(崔壽鳳)의 밀양경찰서 투탄의거를 성공시켰다. 1922년 3월에는 본인이 직접 의거에 나서 의열단원 오성륜, 김익상과 함께 상하이를 방문한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를 상대로 상하이의 황포탄에서 처단 의거를 도모했다. 하지만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피신하던 중 일본 도쿄에서 투탄의거를 결심하고 1925년 국내로 들어와 자금을 마련하다가 대구에서 체포되었다. 1926년 징역 13년형을 선고받고 1930년 가출옥 하였으나 얼마 되지 않아 서거했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alt 상하이 ‘황포탄 의거’ 터(좌), 「법정에 선 이종암은 촬영까지 기피」『동아일보』 (1926.12.11.)_국사편찬위원회 제공(우) 친일파 처단의거에 나선 엄순봉 엄순봉은 1906년 경북 영양군에서 태어났다. 1925년 중국 남만주로 건너가 신민부에서 청년참모로 활동했으며, 한족총연합회 청년부 차장이 되었다. 이후 상하이로 건너가 남화한인청년연맹과 흑색공포단에 가입해 한인사회 내 친일파들과 밀정 처단을 결의했다. 엄순봉은 1933년 5월과 8월, 연이어 친일파 이종홍(李鍾洪)과 옥관빈(玉觀彬)을 처단하는데 성공하였다. 1935년에는 친일단체인 재상해조선인거류민회 부회장 이용로(李容魯)를 처단했으나 붙잡혀 이후 국내로 이송됐다. 그는 사형을 선고받고 1938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중 순국했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alt 「청년수명에게 옥관빈피살」 『조선중앙일보』(1933.8.4.)_국립중앙도서관 제공(좌), 「금일양대사건개정, 상해민회장 사살한 엄순봉 등 공판』(1936.2.5.)_국사편찬위원회 제공(우) ‘육삼정 의거’를 도모한 이강훈 이강훈은 1903년 강원도 김화군에서 태어나 1919년 3월 고향에서 3·1운동에 참여했다. 이듬해 중국으로 넘어가 이동휘의 업무를 보조하고, 김좌진의 밀명을 받아 국내로 잠입해 군자금을 모집하는 등 활동을 전개하다가 남화한인청년연맹에 가입했다. 1933년 3월 주중 일본공사 아리요시 아키라(有吉明)가 중국 정부요인과 고급요리점 ‘육삼정’에서 만날 것이라는 정보를 제보받고 그를 처단하기 위해 청년연맹 맹원인 이강훈은 동료인 백정기, 원심창과 의거에 나섰으나 일본영사관의 역공작으로 거사 직전 일경에 붙잡혔다. 이른바 ‘육삼정 의거’로 이강훈은 징역 15년형을 선고받고 일본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광복 후 출옥했다. 그는 곧장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의사의 유해 발굴을 주도해 한국으로 봉환했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 alt 1933년 ‘육삼정 의거’로 피체될 당시 이강훈(좌), 윤봉길의 유품과 함께 귀국한 이강훈(1946.4.25.)_매헌윤동길의사기념관 제공(우) alt   ]]> Thu, 05 Oct 2023 17:37:41 +0000 83 <![CDATA[끝나지 않은 독립운동 일제강점기 ‘우리 문화재 보호’ 역시 독립운동이었다]]> 끝나지 않은 독립운동일제강점기 ‘우리 문화재 보호’ 역시 독립운동이었다   글 이계형 (국민대학교 교양대학 교수)   10월 9일은 한글날이다. 1940년 『훈민정음 해례본』이 발견되면서 반포일이 9월 상순(10일)이라는 게 밝혀졌고, 이를 양력으로 환산한 10월 9일이 지금의 한글날로 정해졌다. 『훈민정음 해례본』을 매입하여 광복 때까지 소중히 간직한 전형필(1906~1962)의 공이 크다.  ‘해례본’이란 한글이 어떤 원리를 바탕으로, 어떤 과정을 통해 만들어졌는지를 설명한 책을 일컫는다. 이 책자가 발견되기 전까지는 한글 창제에 대한 여러 억측이 난무했다.  일제강점기에는 한글이 한국 고유의 창살 문양에서 유래되어 창제되었다는 설이 회자하였는데,  이후 한글이 계통적·독립적인 동시에 당시 최고 수준의 언어학·음성학적 지식과 철학적인 이론에 의해 창제된 사실이 입증되었다.  이를 기회로 일제강점기에 한국 문화재 보호와 수집에 모든 것을 바친 전형필의 업적을 되돌아보고자 한다. alt 전형필 한글날이 10월 9일인 이유는? ‘한글날’이 처음으로 정해진 것은 1926년 조선어연구회(현 한글학회)가 훈민정음 반포 여덟 회갑(480년)을 기념하여 음력 9월 29일(양력 11월 4일)을 ‘가갸날’(1928년 한글날로 개칭)로 정하면서 비롯되었다. 1446년(세종 28년) 음력 9월 29일 기록에 9월 중 훈민정음이 반포되었다는 사실에 따른 것이다. 그 뒤 1930년대 이를 양력으로 환산하여 10월 29일로 정했다가 다시 10월 28일로 수정했다.  그런데 1940년 경북 안동에서 우연히 『훈민정음 해례본』이 발견되면서 한글날이 새롭게 정해졌다. 1945년 광복 후 처음 맞이한 한글날에는 해례본 서문에 9월 상순에 이를 완성했다는 기록에 근거하여 한글 반포일을 ‘음력 9월 10일’이라 못 박고, 이를 양력으로 환산하여 ‘10월 9일’에 행사가 치러진 이후 지금에 이르고 있다.  alt 『훈민정음 해례본』 암흑시대를 극복하는 유일한 길은 민족 문화재를지키는 것이다 전형필을 소개할 때 ‘문화 독립운동가’라 칭한다. 일제강점기에 그가 우리 문화재는 곧 민족의 자존심이라며 거의 모든 재산으로 이를 사들이고 지키는 데 쏟아부었기 때문이다. 그는 1906년 서울 종로구 광장시장 일대에서 태어났는데, 1929년 24세 때 아버지로부터 800만 평(약 26㎢)의 땅을 상속받아 한국의 40대 부자가 됐다. 전형필의 집안은 증조 때부터 배오개(지금의 종로4가) 중심의 종로 일대 상권을 장악한 10만 석 대부호 가문이었다.  그가 한국 문화재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 것은 휘문고보 재학 중 스승이자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 민족주의자였던 고희동(1886~1965)의 영향이 컸다. 그는 전형필에게 암흑시대를 극복하는 유일한 길은 민족 문화재를 지키는 것이라는 깊은 뜻을 알려줬다. 전형필은 1928년 와세다 대학 법학부 재학 중 방학을 이용하여 귀국했을 때, 고희동의 소개로 오세창(1864~1953)을 만난 뒤로 다시금 민족문화 수호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다. 오세창은 1919년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여, 3년여의 옥고를 치른 후 칩거하면서 서예가·전각가(篆刻家)·서예학과 금석학 역사가로 활동했다.  그에게 ‘간송(澗松)’이란 호를 지어준 것도 오세창이었다. 한겨울에도 얼지 않고 흐르는 물과 그곳에 자리를 지키고 있는 소나무란 뜻이다. 오세창으로부터 서화 골동품의 감식안을 키운 전형필은 학업을 마치고 돌아온 뒤 1934년 서울 성북동의 땅 1만여 평을 사들였다. 우리 문화재를 간직하고 연구할 수 있는 시설을 세우기 위해서였다. 오세창은 그곳이 ‘옛 선잠단지 북쪽에 있는 땅’이라는 이유에서 북단장(北壇莊)이라 이름을 지어주었다. 전형필은 이를 터전 삼아 본격적으로 문화재 수집에 나섰다. 청일전쟁 이후부터 일본인들은 우리의 온갖 문화재들을 마구 도굴·약탈하였다.  이는 일본에 반출되어 일본인 수집가들과 권력층·재벌가들의 수중에 들어갔다. 대표적 사례로 1907년 1월 순종의 가례식에 참석한 일본 궁내대신 다나카 미쓰아키(田中光顯)가 ‘개성 경천사지 10층 석탑’(국보 제86호)을 불법적으로 실어 냈다가 여론의 비난으로 1918년 11월 다시 돌려준 것을 들 수 있다. 그 외에도 많은 우리 문화재가 일본에 반출되었고 일본 각처의 박물관·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대표적인 것이 도쿄국립박물관에 소장된 ‘오구라 컬렉션’이다. 이는 오구라가 일제강점기에 수집한 유물 5천여 점 가운데 일본에 반출된 천여 점가량을 말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전형필은 당시 아시아 최대 고미술 유통업체인 야마나카 상회(山中商會) 측과 경매 입찰 경쟁을 벌였다. 야마나카 상회는 1923~1936년 사이 수십 차례 전람회를 열어 많은 한국 문화재를 빼돌리고는 이를 뉴욕·런던·파리·베이징 등지의 점포를 통해 팔아치웠다. 1934년 이에 가슴 아파하던 전형필은 야마나카 상회가 가지고 있던 혜원 신윤복의 ‘풍속도 화첩 30점’(국보 제135호)을 서울의 8칸짜리 고급 한옥 25채 가격인 2만 5,000원에 매입했다. 1936년에는 ‘청화백자양간진사철채연국초충문병’(국보 제294호)이 경매에 나왔는데, 이를 두고 전형필은 야마나카 상회와 경쟁하였다. 서로 간에 자존심 싸움에 가격은 치솟아 애초 6천 원으로 시작하여 1만4,580원까지 올랐고 끝내 전형필이 이를 낙찰 받았다. alt 동지들과 함께 찍은 사진_우측에서 네번째가 전형필, 다섯번째가 오세창이다. 민족문화의 보존을 통해 민족의 긍지를 되찾다 이외에도 전형필은 적지 않은 한국 문화재를 사들였다. 1935년 일본인에게 ‘청자 상감 운학문 매병’(국보 68호)을 2만 원에 매입했다. 1937년에는 중일전쟁이 터지자 일본에 있던 영국인 존 개스비가 본국으로 귀국하면서 그가 모았던 고려청자 전부를 경매에 부친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전형필은 서둘러 낙찰가 40만 원을 준비하고자 충남 공주에 있던 5천 석지기 땅을 처분하였고 어렵게 ‘청자 상감 포도동자문 매병’ 등 도자기 20점을 40만 원에 매입했다. 또한 그는 일본으로 반출될 뻔한 ‘괴산 팔각당형 부도’를 가까스로 되샀으나 이내 조선총독부에 압수당하자 3년간의 반환청구 소송 끝에 1938년 이를 되찾기도 하였다. 특히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이 최고조에 달했던 1943년에는 『훈민정음 해례본』을 손에 넣었다. 그는 조선총독부가 이를 알까봐 극도의 비밀에 부쳤다가 광복 후에야 이를 세상에 내놓았다. 그는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자 무엇보다도 『훈민정음 해례본』을 먼저 챙겨 피난을 떠났고, 피난 중에 낮에는 품어 다니고 밤에는 베개 삼아 베고 자며 정성으로 이를 지켰다.  이렇듯 그가 수집한 유물은 국보 12점, 보물 10점 등 1만 6,000여 점에 달한다. 그는 한국 문화재가 단순한 물질이 아니라 ‘민족정신’이라 여겼고, ‘독립운동’을 한다는 마음으로 이를 사들여 보존하였다. 그는 1938년 7월, 일제의 민족문화말살 정책이 시작될 무렵 수집품을 관리·전시하고자 서울 성북구에 개인미술관을 세웠다. 이름은 ‘빛나는 보물을 모아둔 집’이란 뜻의 ‘보화각’(현재 간송미술관)이라 지었다. 이곳은 민족문화의 보존을 통해 민족의 긍지를 되찾고,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우리 문화를 건설하기 위한 초석이었다. 민족 문화재의 참다운 수호자였던  ‘전형필’ 그의 업적을 기려 ‘문화 독립운동가’라고 칭하고 있지만, 국가로 서훈을 받은 독립유공자는 아니다. 1962년 서훈 심사가 본격화된 뒤로 기준이 여러 번 바뀌었지만, 기본적으로 수형 기간·활동 기간을 이 주효한 판단 기준이었던 점은 변함없었고 사건이나 독립운동 단체의 지도자 혹은 주요 간부·의병으로 전사 또는 피살된 분, 친일파와 일제 원흉 제거 활동을 벌인 분, 글로써 민족의식을 일깨운 분, 독립지사를 무료로 변호한 법조인 등에 대상이 한정되었기 때문이다.  1980년대 이후 서훈이 정례화하면서 사회주의자를 포함하거나 옥고 기간을 낮추는 등 기준이 이전보다 폭이 넓어졌고, 독립운동의 계열별로 보면 의병·3.1운동·문화운동·국내항일·의열투쟁·학생운동·만주와 노령 방면·임시정부와 중국 방면·광복군·애국계몽운동·미주 방면·일본 방면·외국인 등으로 세분화하였지만, 그는 빠져있다. 그가 평생 많은 재산을 들여 우리의 문화재를 지켜냈지만, 이러한 그의 활동은 독립유공자 서훈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다. 문화예술계 인사의 공적이 좁게 해석되고 상대적으로 낮게 평가된 결과이다. 2023년 9월 현재 문화 활동으로 분류된 독립유공자는 103명(1.58%)에 불과한데 그마저도 ‘옥고(獄苦)’와 ‘단체 활동 여부’가 이를 판가름하였다. 민족문화 보존에 힘쓴 문화예술계 인사들이나 일제로부터 문화재를 지켜낸 전형필의 경우는 그 어디에도 해당하지 않는다. 그는 사후에 대한민국 문화포장(1962)·문화훈장 동백장(1964)·금관문화훈장(2014) 등이 추서되었을 뿐이다. 그런데도 여러 신문과 방송 매체에서 전형필을 소개할 때 빠지지 않는 것 중의 하나가 ‘독립운동가’라는 타이틀이다.  다양한 독립운동가들의 삶을 소개할 때도 그의 이름은 포함되곤 한다. 그에 관한 학술 논문에 “간송(澗松) 전형필(全鎣弼) 선생은 일제강점기 우리 전통문화재의 일본 유출 저지에 앞장서서 매우 귀중한 민족문화 유산들을 수집하여 보존한 보기 드문 유형의 독립운동가였다. 그는 일본인 권력자와 결탁하거나 일부 골동 상인들처럼 자신의 부나 안목을 자랑하기보다는 오로지 민족혼을 지킨다는 뚜렷한 목적의식으로, 막대한 사재를 다 털어 넣은 민족 문화재의 참다운 수호자였다.”라고 기술될 정도이지만, 그는 국가로부터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이제는 미래 지향적이고 다양한 서훈 기준을 마련해 유공자 발굴을 확대해 나가야 한다. 전형필은 엄연한 독립운동가이다.     ]]> Thu, 05 Oct 2023 17:49:28 +0000 83 <![CDATA[어제와 오늘을 잇는 사람 잊고 있던 ‘승리의 역사’로 돌아온 강제규 감독]]> 어제와 오늘을 잇는 사람잊고 있던 ‘승리의 역사’로 돌아온강제규 감독   글 편집실    영화 <쉬리>, <태극기 휘날리며> 등을 연출하며 한국 영화 블록버스터 시대를 연 강제규 감독. 2015년 개봉한 <장수상회> 이후 무려 8년이라는 공백을 깨고, 최근 영화 <1947 보스톤>으로 우리 곁을 찾아왔다.    alt 강제규 감독 <1947 보스톤>을 연출하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특정 선수 한 사람의 일대기를 다룬 이야기였다면 아마 끌리지 않았을 것이다. 성격과 서사가 다른 세 인물이 하나의 목표로 협업하는 것이 매력적이었다. 우리에게 많이 알려진 1936년 베를린올림픽 마라톤대회의 주역 손기정 선수 외에도 잘 알지 못한 역사를 끄집어내서 관객과 공유하는 것이 의미가 있겠다고 생각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2020년개봉 예정이었다고…. 코로나19의 발생으로 계획에 제동이 걸렸다. 설상가상으로 얼마 뒤 연이어 불거진 주연배우들의 구설수로 개봉 가능성은 더욱 묘연했다. 이런 악재로 개봉까지 긴 기다림이 있었으나, 컴퓨터그래픽이나 음향 등 후반작업을 더욱 촘촘히 만질 수 있는 시간을 가졌다고 위안 삼고 있다. 영화는 광복 직후 정부도 수립되지 않았던시기의 설움을 그대로 보여준다. 실제 이야기를 왜곡 없이 전달하되 영화적재미도 더해야 하는 것이 과제였을 듯하다. 이를 위해 방대한 인물 자료를 검토하고 유족들을 만나는 등 고증에 힘썼다. 영화의 속성상 역사적인 사실만 가지고 영화를 구현할 순 없기 때문에 인물을 어디까지 조명하고 어디까지 창작할 것인지 고민이 많았다. 실화이기 때문에 움직일 수 있는 보폭이 적은데 유족들의 요구 사항도 있어서 이를 절충하기 쉽지 않았다. 그래도 그 입장을 알게 되면서 더 공부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어떤 목적을 위해 사실을 과장하고 왜곡하는 게 일종의 나쁜 신파이자 ‘국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것을 최소화하려 노력했다. 이미 손기정·서윤복·남승룡 세 마라토너가 만든 역사 자체가 드라마틱해서 뭘 더 얹을 필요가 없었다. 절대 감동을 강요하지 말자는 게 우선순위였다. alt 영화 <1947 보스톤> 스틸컷 영화의 절정은 1947년 4월 19일 열린제51회 보스턴마라톤대회 장면이다. 마라톤은 재미없다는 선입견을 불식시키기 위해 관객의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그러나 영화적 상상을 하더라도 과도한 설정은 배치하지 않도록 노력했다. 예를 들어 실제 기록을 보면 경기 중 서윤복 선수가 넘어져서 다리에서 피가 흘렀다는 내용이 있는데, 영화에서는 피까지 보이면 오히려 과해 보일 것 같아 일부러 피를 안 바르고 촬영했다. 또한 실제로는 마라톤화 끈이 풀려 서윤복 선수가 레이스에 큰 지장을 받았는데, 이 또한 관객이 작위적인 설정이라고 생각할 것 같아 제외했다. 70여 년 전의 보스턴을 재현하는 것이만만치 않았을 텐데…. 실제 보스턴마라톤대회 코스를 여러 차례 돌아봤지만, 너무 변해버린 집들과 수많은 자동차 등을 해결하는 것이 만만치 않았다. 또한 촬영 시 주요 도로를 통제해야 한다는 현실의 벽에 부딪혔다. 최종적으로 호주 멜버른 근교에서 촬영했다. 라트비아·폴란드·헝가리·우루과이 등을 돌아본 후 찾아낸 곳이었다. 하지만 호주에 입국했을 때 멜버른에 큰 산불이 나서 또 다른 난관에 부딪힐뻔 했지만, 맑은 날씨 덕에 무사히 촬영을 마칠 수 있었다. alt 영화 <1947 보스톤> 촬영 현장 손기정·서윤복·남승룡은 사진이 남아있는인물이기에, 이들을 고스란히 소화할 배우를 찾는 일도 쉽지 않았을 것 같다. 캐스팅은 외적인 일치감이 첫 번째 원칙이었다. 실존 인물과 판이할 경우 관객들이 동화되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하정우·임시완 배우의 일치율이 굉장히 높다고 생각했고, 캐스팅 1순위였다. 실제로 엔딩크레딧에 등장하는 당시 사진을 보면 두 배우의 싱크로율이 꽤 높다는 생각이 든다. <태극기 휘날리며>는 한국전쟁,<마이웨이>는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영화였다. 두 영화 모두 잘 알려지지 않은실존 인물을 다뤘으며, 이번 영화 역시역사 속 인물들의 이야기를 조명했다. <태극기 휘날리며>와 <마이웨이>처럼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한 인물들의 이야기를 다루다 보니, 그분들이 우리에게 거울이 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1947 보스톤>은 되도록 실존 인물들의 원형에 근접될 수 있도록 노력하자는 생각으로 작업했다. 역사적 사실 앞에서 더 겸손하고 겸허하게 최대한의 사실을 그려야겠다고 생각했고, 다시 한번 바른 시선으로 바른 이야기를 전달하고 싶었다. 끝으로 관객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있다면? 거대한 벽을 뚫고 위대한 도전을 해낸 역사의 기록 그리고 우리가 잘 알지 못한 승리의 역사 한 페이지가 잘 전달되길 바라는 마음이다. 어려웠던 시기에 성취했던 위대한 승리를 접한 관객들이 희망과 용기를 얻길 바란다. alt 영화 <1947 보스톤> 포스터 <1947 보스톤>은 1947년 태극마크를 달고 미국 보스턴마라톤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 서윤복 그리고 그를 지도한 손기정과 남승룡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다.  광복의 기쁨도 잠시, 정부도 수립되지 않았던 1947년을 배경으로 한 이번 영화는 불가능한 꿈을 실현하기 위해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달렸던 마라토너들의 뜨거운 이야기를 담았다.  ]]> Thu, 05 Oct 2023 18:03:48 +0000 83 <![CDATA[기념관이 발굴한 독립운동가 일제의 농업수탈에 저항한 자은도 농민들의 처절한 외침을 되새기다]]> 기념관이 발굴한 독립운동가일제의 농업수탈에 저항한 자은도 농민들의 처절한 외침을 되새기다   글 독립기념관 독립운동가 자료발굴TF팀   독립기념관은 2018년부터 독립운동가를 발굴하여 국가보훈부에 유공자로 포상 추천하고 있다.  국가와 국민을 위해 희생한 분을 존중하고 기억하는 정부의 의지와 국민적 관심을 담은 것이다.  2023년 매월 독립기념관이 발굴한 독립운동가를 소개한다. 박덕기 (朴德淇, 1872.06.04.~1940.03.28.) 본적(출생지) : 전남 무안군 자은면 유각리 훈격 : 대통령표창(2023) 서난수(徐蘭洙, 1902. 5. 25.~1973.09.10.) 본적(출생지) : 전남 무안군 자은면 유천리 훈격 : 대통령표창(2023) 성낙표(成樂杓, 1896.11.13.~1933.10.06.) 본적(출생지) : 전남 무안군 자은면 한운리 훈격 : 대통령표창(2021) 양봉이(梁奉伊, 1893.10.25.~1968.01.10.) 본적(출생지) : 전남 무안군 자은면 유각리 훈격 : 대통령표창(2021) 양석암(梁石岩, 1905.12.08.~1984.12.09.) 본적(출생지) : 전남 무안군 자은면 구영리 훈격 : 대통령표창(2021) 우판도(禹判道, 1898.03.13.~1978.03.27.) 본적(출생지) : 전남 무안군 자은면 면전리  훈격 : 대통령표창(2021) 이옥경(李玉京, 1893.06.16.~1950.06.30.) 본적(출생지) : 전남 무안군 자은면 백산리  훈격 : 대통령표창(2023) 자은도 농민들, 소작조건 개선을 요구하다 자은도는 현재 신안군 자은면에 위치하는 섬 중 하나로 1969년부터 신안군에 편입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당시에는 무안군 도서지역에 속하였다. 이곳은 섬이지만 농사가 주된 산업이었기에 지주-소작인의 대립구도가 첨예한 지역이었다. 1920년대 들어 일제가 산미증식계획을 추진하여 대규모로 쌀을 유출해가자 갈등은 더욱 두드러졌다. 이 정책으로 농민들 대다수는 소작농으로 전락하였고, 지주에게 고율의 소작료를 부담해야 했다. 자은도에 거주하던 소작농민들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생산량의 50~60%를 소작료로 납부하는 것 외에도 여러 명목의 공과금을 부담하며 지주들의 경제적 수탈을 감당해 내고 있었다. 이에 그들은 소작조건을 개선하기 위해 1924년 1월 자은소작인회를 결성하고 자은도 지주들을 만나 기존 대비 소작료의 비율을 논 40%, 밭 30%로 낮추고 별도로 생산량의 10%를 농업장려비로 두어 지주와 소작인회의 대표가 보관하다가 필요할 때 사용하기로 합의했다. 일제의 농업경제 침탈로 신음하던 농민들이 드디어 지주들을 상대로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 협정은 자은도 소작농민들에게 실낱같은 희망이었다. alt 자은도 전경_신안군청 제공 계속되는 지주들의 횡포, 자은도 소작농민들의 가슴에 불을 지르다 1925년 8월 문재철(文在喆), 천철호(千哲鎬), 나카지마 세이타로[中島淸太郞] 등 자은도의 핵심 지주들은 섬 지역 지주들의 모임인 다도농담회(多島農談會)를 구성한 후 1924년의 합의를 파기하고 예전대로 소작료를 50%로 징수하겠다고 선언하였다.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소작인들은 1925년 11월 임시총회를 열어 소작료 불납동맹을 단행하겠다고 결의했다. 이에 대해 지주들은 소작인의 재산을 가압류하는 것으로 대응하였다. 12월 24일 지주들의 사주를 받은 일본인 집달리 구시이 시다지[篦伊貞次]와 다도농담회 사무원들은 소작인들의 집에 있는 수십 석의 보리와 곶감 등을 남김없이 가압류하고 소작인의 지장을 위조해 보관증을 작성하였다. 이에 분노한 자은도민 수백 명은 곤봉과 횃불을 들고 가압류 집행을 저지하고자 집달리 일행을 쫓아냈다. 지주들의 횡포가 계속될수록 자은도 소작민들의 저항의식은 격양되었다. 일제 경찰의 무자비한 탄압과 그에 맞선 자은도 주민들 사태가 이렇게 진전되자 일경들까지 가압류 과정에 개입하였다. 1926년 1월 초 전남 경찰부는 담양·장성·나주·광주 등 관할 경찰서에서 경찰 200여 명을 비상소집해 자은도에 파견하였다. 무장한 경찰들은 소작료 불납동맹과 가압류 철폐운동에 참여한 자은소작인회 회원 약 40명을 검거하고 가압류를 집행하였다. 그리고 자은도와 암태도 사이의 교통을 차단시켜 섬 주민들을 불안과 공포에 휩싸이게 하였다.  약 1,500명의 자은도 주민은 경찰대 본부 앞에 모여 자은소작인회 회원들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군중들은 “우리가 소작회 대표다”, “체포하려거든 우리를 체포해라. 죽여 달라”라고 외쳤으나 경찰들의 무력 앞에 무참히 짓밟혀 40여 명의 중경상자가 발생했다. 『시대일보』는 당시 시위현장을 “자은도 일대가 마치 전쟁터와 같은 살벌한 공기로 가득하였으며, 군중들은 사생을 결사하고 뛰어들었다”라고 표현하였다. 그만큼 시위가 격렬하였으며, 식민지 농민들의 처지 또한 매우 절박했음을 말해준다.  이처럼 맹렬한 시위에 당황한 경찰은 지주와 소작인 사이의 중재에 나섰다. 그 결과 1926년 1월 30일 목포경찰서에서 무안군수·목포경찰서장·자은면장의 입회하에 지주 대표 문재철·천철호, 소작인 대표 성운재 등 12명이 협정을 맺었다. 협정조건은 우선 가압류를 해제하고 그 과정에서 발생한 비용은 지주와 소작인이 나눠 부담할 것, 소작료는 50%로 하되 그중 10%를 소작인에게 농업장려비로 교부할 것, 농사개량에 필요한 비용도 지주와 소작인이 공동 부담할 것 등이었다.  농민들이 바라던 40%의 소작료는 아니었다. 하지만 1924년 10월 합의에서는 농업장려비를 소작인과 지주가 공동 관리하기로 했던 것에 비하여 이번에는 농업장려비를 소작인에게 직접 교부하기로 한 것을 고려하면 최종적으로 소작료가 45%로 낮아지는 성과를 거둔 것이다. 일제의 주구역할을 한 지주들의 횡포에 굴하지 않는 자은도 소작인들의 투쟁의지가 빚어낸 결과였다. alt 시대일보(1926.01.20.) 자은도 소작농민운동 참가자들의 숭고한 정신 한편, 이 항쟁에 참가한 농민들 중 31명이 기소되어 1926년 8월 16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유죄판결을 받았다. 판결형량은 징역형(4명)·집행유예(18명)·벌금형(9명) 등 각각 달랐으나 기소 사유인 ‘공무집행 방해죄’는 모두에게 적용되었다. 이것은 자은도 소작농민들이 자신들의 생존권 수호를 위해 일으킨 소작쟁의가 단지 경제적 측면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식민권력을 상대로 한 정치적 의미의 항일운동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이러한 자은도 소작농민들의 숭고한 항일정신을 기리고자 독립운동가 자료발굴TF팀은 이 운동에 참가한 농민들을 발굴하였다. 그 결과 박덕기·서난수·성낙표·양봉이·양석암·우판도·이옥경 등 7명에게 대통령표창이 서훈되었다. 나머지 참가자들의 추가 서훈도 기대해 본다. alt 시대일보(1926.0자은도 소작운동 참가자 양석암_공훈전자사료관 제공1.20.)   ]]> Thu, 05 Oct 2023 18:12:20 +0000 83 <![CDATA[사(史)적인 여행 백제부터 근현대까지 유구한 역사를 간직한 충청남도 공주]]> 사(史)적인 여행백제부터 근현대까지 유구한 역사를 간직한충청남도 공주   글·사진 박광일 (역사여행작가·여행이야기 대표)   ‘공주’하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백제 문화와 역사부터 떠오른다. 하지만 이곳은 조선시대 충청도의 중심지기도 했으며, 예로부터 물길이 좋아 중요한 교통 요충지이자 상업의 중심지였다.  선선한 바람을 따라 걷기 좋은 10월, 공주 곳곳에 숨어있는 사사롭고도 역사적인 이야기를 찾아 나서본다.   alt 포정사 문루 조선시대와 근대의 역사를 한눈에, 제민천 일대 조선시대 공주에는 도청 역할을 하는 충청감영, 시청 역할을 하는 공주 관아가 제민천을 사이에 두고 있었다. 아쉽게도 이러한 옛 모습은 지금은 거의 사라져서 일부 장소에서만 살펴볼 수 있다. 대표적인 곳은 공주대학교 사범대학 부설고등학교 정문 쪽에 자리한 ‘포정사 문루’이다. 이는 옛 충청감영의 정문 역할을 하던 건물로. 1980년 충청남도의 유형문화재 제93호 포정사 및 삼문으로 지정되었다가 2004년 현재 명칭으로 변경되었다. 충청감영에는 50여 채의 건물이 있었으나, 지금은 선화당과 포정사 및 삼문, 부속건물 1채 만이 남아있다. 또한 제민천 일대에는 근대의 공주 모습을 짐작할 수 있는 건물도 있는데, 바로 ‘공주역사영상관’이다. 붉은 벽돌로 지은 2층 건물로, 외관에 장식이 많고 화려하다. 이 건물은 본래 1923년 처음 지어졌고, 당시에는 충남금융조합 건물로 쓰였다. 그러다가 1932년 이후에 공주읍사무소, 그리고 공주시청으로 쓰였다. 지금은 건물의 1층을 전시 공간으로 꾸며 놓았으며, 2층에는 옛 읍사무소 모습을 재현해 놓았다. 공주역사영상관은 근대의 모습이 찾아보기 힘든 공주에서 역사의 흔적을 살펴볼 수 있는 의미 있는 곳이다. alt 공주역사영상관 외관(좌), 공주역사영상관 내부(우) Tip 1. 조선 후기 충청도를 대표하는 도시였던 공주 우리나라의 ‘도’ 이름은 그 지역의 중요한 두 도시 앞 글자를 따서 붙였다. 전라도는 전주와 나주, 경상도는 경주와 상주, 충청도는 충주와 청주에서 온 이름이다. 그런데 임진왜란을 겪으며 충청도 지역에 약간의 변동이 일어났다. 충청도의 감영이 있던 충주를 대신해서 공주에 지금의 도청에 해당하는 감영을 설치한 것이다. 이에 따라 충청도를 ‘공홍도’로 부르기도 했다.  이와 같은 공주의 위상은 조선 후기 내내 이어졌다. 동학농민운동 당시 농민군이 전주를 장악한 뒤 공주로 향했던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 이러한 공주의 모습은 1932년 도청이 대전으로 이전하며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이처럼 근대 역사가 시작하는 시기에 충청도를 대표하는 도시는 공주였다고 할 수 있다. 포정사 문루 주소 충남 공주시 관광단지길 30-8 공주역사영상관 주소 & 관람 시간 충남 공주시 우체국길 8  |  오전 10시~오후 5시 * 매주 월요일 휴관 alt 좌측부터 신홍식 목사 동상, 공주기독교박물관(공주제일교회) 내부, 영명중학교(옛 영명학교)  공주의 선교 역사를 한눈에, 공주기독교박물관 충청도에 포교를 하려던 서양 선교사가 거점으로 삼았던 곳도 바로 공주였다. 이러한 사실을 살펴볼 수 있는 곳이 있는데, 바로 공주 도심에 자리한 ‘공주제일교회’이다. 1898년 스크랜턴 선교사가 공주를 방문한 이후, 1901년부터 공주 지역에 선교가 이뤄졌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초가집을 사서 교회로 삼았고, 몇 번의 증개축을 거쳐 1931년 현재 모습의 교회를 지었다. 한국전쟁 당시 교회의 상층부가 파괴되었지만, 1956년에 현재의 모습으로 재건하였다.  공주제일교회는 현재 공주의 기독교 선교 역사를 보여주는 ‘공주기독교박물관’으로 쓰고 있다. 이 교회의 신도들과 관련된 내용도 있지만, 공주제일교회 선교사가 세운 ‘영명학교’ 학생들이 참여한 3·1운동, 신간회 지부 설립과 관련된 역사, 그리고 광주학생운동에 참여했던 역사 등을 살펴볼 수 있다. 또한 공주제일교회는 민족 대표 33인 가운데 한 명인 신홍식 목사가 담임목사로 있던 곳으로, 충청도 지역 독립운동의 역사와 깊은 관련이 있는 곳이다. 이처럼 공주 기독교박물관은 공주지역 독립운동을 자세히 살펴볼 수 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공주기독교박물관(공주제일교회) 주소 & 관람 시간 충남 공주시 제민1길 18  |  오전 10시~오후 5시 * 매주 월요일 휴관 영명학교 주소  충남 공주시 영명학당2길 33 alt 공주 중학동 구 선교사가옥(좌), 앨리스 샤프 가족 동상(우) Tip 2. 광복군의 훈련을 지원한 프랭크 윌리엄스 공주제일교회에서 활동한 선교사 가운데 우리가 기억했으면 하는 인물이 있다. 바로 선교와 함께 공주 지역 농업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던 프랭크 윌리엄스(Frank Earl Cranston Williams) 선교사이다. 그는 선교를 통한 독립운동 말고도 우리의 독립운동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영명학교의 교장을 맡았던 그는 1940년 일제에 의하여 강제로 추방되었고, 이후 인도 뉴델리 근처에서 인그램 학교를 설립해 교육 선교를 이어갔다.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연합국을 지원하기 위해 인도-미얀마 전선에 광복군 9명을 인면전구 공작대라는 이름으로 투입하기로 결정했다. 이때 광복군들이 영어를 배운 곳이 바로 인그램 학교였다. 프랭크 윌리엄스가 광복군의 훈련을 지원한 것이다.  한편 프랭크 윌리엄스는 ‘우리암’이라는 한국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1907년에 태어난 아들 죠지 윌리엄스에게 ‘우광복’이라는 한국 이름을 지어주었다. 이는 우리나라의 광복을 염원해서 지었을 만큼 한국에 대한 애정이 특별했음을 보여준다. 충청지역 교육사업에 열정을 다한 앨리스 샤프 프랭크 윌리엄스와 같이 활동했던 선교사 가운데 앨리스 샤프(Alice Hammond Sharp)도 꼭 기억해야 할 인물이다. 한국 이름은 사애리시로, 남편과 함께 공주로 부임하였다가 남편은 3년 만에 작고하였고, 이후 홀로 충청도 교육사업에 열정을 다하면서 9개의 여학교를 비롯해 7개의 유치원을 설립하였다. 그가 가르친 제자 가운데 유명한 인물도 여럿 나왔다. 최초의 여성 경찰서장 노마리아가 대표적 인물이다. 유관순 또한 그가 공주 영명여학교에서 2년 동안 가르친 제자이다. 게다가 그는 유관순이 더 나은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서울 이화학당 진학을 이끌었고, 이후 장학금을 받으며 공부할 수 있도록 도왔다.  한편 앨리스 샤프가 머물렀던 선교사 사택은 영명학교, 곧 영명중고등학교 근처에 남아있다. 2층의 단아한 건물로 현재는 보수 공사 중인데, 근처에 그의 활동을 한눈에 볼 수 있는 패널과 기념물이 있다. 공주 중학동 구 선교사가옥 주소 충청남도 공주시 쪽지골길 18-13 앨리스 샤프 가족 동상 주소 충청남도 공주시 쪽지골길 18-13 (선교사가옥 인근)   ]]> Thu, 05 Oct 2023 18:38:10 +0000 83 <![CDATA[이벤트 공지 월간 독립기념관 설문조사 등 다양한 이벤트에 참여해보세요!]]> 이벤트 공지월간 독립기념관 설문조사 등다양한 이벤트에 참여해보세요!   alt alt 설문조사 바로가기 아이콘을 클릭하시면 설문에 참여하실 수 있습니다. alt alt   ]]> Thu, 05 Oct 2023 19:08:32 +0000 83 <![CDATA[이달의 기념관 독립기념관, 전국 5개 KTX역 순회전시 <역무원 이봉창의 독립운동 이야기>]]> 이달의 기념관독립기념관, 전국 5개 KTX역 순회전시 <역무원 이봉창의 독립운동 이야기>   글 편집실사진 이소연   독립기념관은 우리의 일상 속에 독립정신을 확산하고자 유동인구가 많은 용산·강릉·오송·여수엑스포·부산역 등 전국 5개 KTX역에서 순회전시를 개최하였다. 독립운동가 이봉창을 주제로 한 이번 전시는 용산역 역무원으로 일한 평범했던 그의 삶을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한국철도공사와 독립기념관이 함께 개최한 전시 독립기념관은 유관기관과 공동전시 지속개최를 통한 국민 일상 속 독립정신 확산에 기여하고자 한국철도공사와 협력전시를 추진하고 있다. 양 기관은 지난해 ‘이봉창 의사 의거 및 순국 90주년’을 기념해 서울역과 천안아산역에서 <역무원 이봉창의 독립운동 이야기> 전시를 개최한 바 있다. 올해는 해당 전시물을 전국 역사 보급 가능한 경량형 전시물로 새롭게 개발하였으며, 이봉창이 역무원으로 일했던 용산역을 시작으로 강릉·오송·여수엑스포·부산역 등 전국 주요 5대 KTX역에서 차례로 개최하였다.  alt 좌측부터 용산역 전시, 전시 개막 모습, 전시 학예사 해설 alt 강릉역 전시(좌), 오송역 전시(우) 일상 속에서 독립정신을 되새기길 바라며 1932년 1월 8일 일본 도쿄에서 일왕처단 의거를 결행한 이봉창은 유명한 독립운동가이기도 하지만 용산역 역무원으로 성실히 일했던 평범한 청년이기도 했다. 이번 전시에서는 서울을 떠나 오사카로, 상하이로, 마침내는 도쿄로 가 의거를 결행한 이봉창의 발자취를 따라가면서 무엇이 그를 독립운동의 길로 이끌었는지 살펴본다.독립기념관 관계자는 이번 공동전시를 통해 “일상 속에서 국민들이 독립운동사를 접하며 독립정신을 되새기고, 국가와 국민을 위해 희생한 분을 기억·존중하는 기회가 되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일제의 차별과 부당한 대우에 끊임없는 의문을 갖고 ‘독립’이라는 해답을 실천하기 위해 독립운동에 나선 이봉창 의사의 헌신을 다시 한 번 기억하는 자리가 되기를 바란다. alt       alt           전시 관람 소감 독립기념관은 이번 순회전시 관람객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진행하였다. 그중 몇 분의 소감을 짧게 소개한다. alt   용산역 관람객 자주 이용하는 기차역에서 내용이 알찬 전시를 만날 수 있어서 편리하고 유익했습니다.  이번 전시를 통해 이봉창 의사가 역무원이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습니다.  주요 역뿐만 아니라 전국의 많은 역에서 우리가 잘 알지 못했던 독립운동가들의 다양한 이야기를 소개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alt 오송역 관람객 기차를 기다리는 동안 대한민국을 지킨 독립운동가들에 대해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바쁜 일상에서 잠시나마 여유를 찾은 것 같아 좋았습니다.  앞으로도 시민들의 눈높이에 맞춰 접근성이 좋은 전시나 행사를 다양하게 개최해주길 기대하겠습니다. .   ]]> Thu, 05 Oct 2023 18:51:24 +0000 83 <![CDATA[#월간독립기념관 지난 호 독자 후기 이벤트 당첨자 발표]]> #월간독립기념관지난 호 독자 후기 이벤트당첨자 발표   alt   ]]> Thu, 05 Oct 2023 18:55:57 +0000 83 <![CDATA[기념관 소식 NEWS]]> 기념관 소식NEWS   alt  ]]> Thu, 05 Oct 2023 18:59:23 +0000 83 <![CDATA[어제의 오늘 잊지 말아야 할 11월의 역사]]> 어제의 오늘잊지 말아야 할 11월의 역사   정리 편집실   alt   중국 동북지역에서 한인 자치기관이자 무장 독립운동단체인  정의부가 조직된 날은 1924년 11월 24일입니다.   ]]> Thu, 02 Nov 2023 15:20:29 +0000 84 <![CDATA[들여다보기 정의부(正義府), 한인자치활동과 항일무장투쟁을 펼치다]]> 들여다보기정의부(正義府),한인자치활동과 항일무장투쟁을 펼치다   글 박환(역사학자, 고려학술문화재단 이사장)   1924년 11월 24일, 중국 동북지역에서 정의부가 조직되었다. 정의부는 이주 한인사회를 총괄하며 자치·군사·교육·언론 등에서 다양한 활동을 펼쳤고, 1920년대 중·후반 만주지역 독립운동을 주도하였다. alt 정의부 선서문, 『독립신문』 (1925.1.1.) 정의부의 조직과 목적 정의부는 1924년 11월 24일 중국 동북지역인 만주의 화뎬현(樺甸縣)에서 성립된 남만주지역의 대표적인 독립운동 단체이다. 참의부·신민부 등과 함께 3부로 일컬어지며, 1920년대 중·후반 만주지역 독립운동을 주도하였다. 중심인물은 이상룡·김동삼·오동진·지청천·김창환·정이형 등이다. 특히 정의부는 입법·사법·행정의 3권 분립 체제를 갖춘 준정부적 조직으로서 헌법에 준하는 헌장도 제정하여 주목된다. 하얼빈 이남의 40여 개의 현에 거주하는 한인을 기반으로 자치행정을 실시하는 한편, 의용군을 편성하여 항일무장투쟁도 활발히 전개하였다. 정의부의 중앙조직을 상세히 살펴보면, 행정기관은 중앙행정위원회였고 사법기관은 중앙심판원이었다. 그리고 이 조직표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관할 각 지역에서 선출한 약 30명으로 구성된 입법기관인 중앙의회가 있었다. 중앙행정위원회에는 민사·군사·법무·학무·재무·교통·생계·외무 등 8개 부서를 두었다. 아울러 각 부서와는 별도로 독립군을 총괄할 사령부를 조직하여 이를 통해 무장활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효율적으로 한인사회를 운영하고 지원하기 위해 관할 각 지역에 지방조직을 설치하였다. 즉 한인 가구 1,000호를 한 단위로 묶어 총관구를 설치하고, 그 밑에 500호로 지방, 100호로 백가장, 50호로 구, 10호로 십가장을 설치하였다. 이들 각 지방 조직에도 중앙에서와 마찬가지의 입법·사법·행정의 업무가 행해질 수 있는 지방행정위원회나 의회·사판소(심판원이 후에 사판소로 명칭이 바뀜) 등이 설치되었다. alt 류허현 거리 자치활동으로 이상적 농촌건설을 추진하다 정의부는 양기탁·손정도 등을 중심으로 ‘이상적 농촌건설’을 기획하였다. 이 계획은 그 규모가 엄청났던 만큼 자본금이 많이 필요했지만, 그를 조성하지 못해 실행까지는 가지 못하였다. 그러나 정의부의 산업 활동은 이 계획을 기본으로 현실에 맞게 꾸준히 추진되었다. 즉 1925년 3월 정의부는 공농제(公農制) 실시 규정을 발표하였다. 공농제는 공농수익금을 조성해 농구를 구입하여 한인들에게 대여해 주는 한편, 남은 금액은 싼 이자의 농업자금으로 대출해 준다는 제도였다. 이 제도는 1925년 「농촌공회통칙(農村公會通則)」이 마련되면서 보다 효율성을 가지며 한인들의 경제적 안정에 이바지하였다.  군사활동 정의부는 군사학교를 설립하고 사관생도를 양성할 일, 군사국내진입전의 경우 정의부 소속 독립군들은 진입대 규모가 총 10명이든 20명이든 간에 2~3명으로 한 조를 짜, 소규모의 여러 조가 분산되어 국내에 진입하도록 하는 방법을 이용하였다. 파견대의 총규모는 총사령부에서만 알 수 있었고, 같이 파견되는 같은 조들도 전체규모는 알지 못하고 출발하였다. 이들 각 조는 국내에 들어와 사령부에서 지시받은 날짜와 장소대로 도착하면 다른 조들과 합류가 될 수 있는 그런 체제였다. 이는 어느 조가 일제의 감시망에 발각되어 피체되더라도 그 조만 피해를 입는 데 그치게 하기 위함이었다. 한편 정의부의 만주 내 무장활동은 모험대 또는 암살대라는 명칭의 전투부대와 군자금 모집을 목적으로 한 모연대, 그리고 관할지역 한인사회의 자위를 목적으로 한 보안대 등이 편성되어 이루어졌다. 모험대(암살대)와 모연대는 의용군으로 편성한 부대였으나, 보안대는 의용군이 아닌 각 지역의 청장년이 그 지역의 안위를 위해 편성한 지역대였다. 교육활동 정의부가 펼친 또 하나의 주요한 사업으로는 교육활동을 들 수 있다. 정의부는 우리 민족이 식민지하에서 고통받고 끼니를 해결하는 데도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그러한 상황을 이기고 더 나은 현실을 만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교육이라고 생각하였다. 그 때문에 교육의 목적을 단순히 문맹퇴치 또는 인성의 함양에 그칠 것이 아니라 현실을 개척하는 실용적인 재산으로 습득해야 한다고 판단하였다. 이러한 인식에 의해 정의부는 교육의 단계와 구분을 보통·직업·사범 등 세 가지로 구분하고, 보통교육을 다시 단계적으로 소학·중학·여자중학으로 구분하였다. 직업교육은 농업·공업·상업으로 분류되었고, 사범교육은 교원을 양성하기 위한 최상급의 학교였다.  alt 『전우』 3호 일부 (1927년 7월 1일자) 언론활동 정의부가 펼친 또 하나의 주요한 사업은 언론활동이다. 정의부는 중앙조직 또는 각 지방조직에서 펼친 주요사업을 각 관할민들에게 전달하기 위해, 또는 국내와 해외 각지에서 독립운동가들이 전개한 독립운동 사실을 한인들에게 알려 독립정신을 고무시키기 위해 신문·잡지 등을 만들어 배포하였다. 언론매체로는 관보 성격의 『정의부공보』와 『중앙통신』, 『대동민보』, 『신화민보』 등의 신문과 잡지인 『전우』가 있었다. 이 중 중국어로 간행한 『신화민보』는 중국인들에게 배포되었다.『대동민보』의 창간호는 1926년 9월 15일자로 발간되기 시작하였으며, 신문지 4절형 크기의 8면이었다. 편집주간은 박범조[일명 김종범]였다. 창간사에서 창간 목적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① 적의 정책과 죄악의 이면을 폭로한다, ② 민중의 교양지로 한다, ③ 우리 혁명운동의 통일에 노력한다.『전우』는 정의부가 발행한 월간잡지이다. 1927년 1월 1일에 창간되었고, 정의부 중앙조직의 간부인 김이대·박범조·김탁 등이 책임사원으로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창간사에서는 “인류는 유사 이래 지금까지 투쟁으로 일관해 오고 있는데, 그 목적은 투쟁 없는 진정한 자유평등의 신(新)사회를 건설하기 위함이다.”라고 하여 현재 우리 민족이 당하고 있는 불평등하고 부자유적인 현실을 타파하기 위해 우리 민족 모두가 혁명전선에 나아가 투쟁하는 혁명 전사가 되자고 주장하였다. 최근 하버드대학 엔칭도서관이 보관 중인 1927년 7월 1일자 110면 정도 분량의 3호 전문이 박환 교수에 의해 공개되기도 하였다.  정의부의 해체와 국민부로의 발전 남만주의 한인사회를 기반으로 자치활동과 항일무장투쟁을 펼치던 정의부는 1927년 초부터 독립운동계에 일어난 민족유일당운동에 동참해 독립운동 세력을 하나로 통일시키는 데 노력하였다. 하지만 만주의 통일운동은 뜻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1929년 4월 남만주 지역을 중심 근거로 한 국민부, 1928년 12월 북만주 지역을 중심근거지로 한 한국독립당으로 양분되었다. 이에 정의부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은 각자의 노선에 따라 이들 두 단체에 나뉘어 가입함으로써, 정의부는 발전적으로 해체되었다.    ]]> Thu, 02 Nov 2023 15:32:02 +0000 84 <![CDATA[한눈에 보기 한눈에 보는 정의부의 주요 활동]]> 한눈에 보기한눈에 보는 정의부의 주요 활동   정리 편집실   alt   ]]> Thu, 02 Nov 2023 15:48:23 +0000 84 <![CDATA[이달의 독립운동가 학생들의 독립운동, 서상교·최낙철·신기철]]> 이달의 독립운동가학생들의 독립운동서상교·최낙철·신기철   글 독립기념관 전시부   alt   학생, 독립운동의 주체로 나서다 일제의 식민지 지배와 탄압에 맞서 학생들은 1919년 3·1운동, 1926년 6·10만세운동, 1929년 광주학생항일운동 등 주요 독립운동의 중심에 섰다. 학생들은 동맹휴학에 나서거나 항일비밀결사 결성 등을 통해 일제의 차별적인 식민지 교육에도 맞섰다. 1941년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제가 감시와 탄압을 강화하자 학생들은 비밀결사를 조직해 항일투쟁을 이어나갔다. 대표적으로 대구상업학교의 태극단·대구사범학교의 연구회·춘천고등보통학교의 상록회가 있으며, 서상교·최낙철·신기철은 학생비밀결사에서 활동하다가 옥고를 치른 인물이다. 서상교와 대구상업학교 태극단 서상교는 1923년 11월 경북 대구에서 태어나 대구 남산소학교를 졸업하고 대구상업학교에 재학하던 중 1942년 5월 항일비밀결사 태극단(太極團)을 조직했다. 결성 직후 1년여간 비밀리에 단원을 모집, 이듬해 4월 태극단의 조직을 재정비하는 과정에서 서상교는 체육국장으로 선임되었다. 태극단의 단원은 26명으로 대부분 대구상업학교 학생으로 구성되었고 5월 9일 결단식을 개최하며 전국적인 조직망 수립을 통한 독립운동을 준비했다. 그러나 밀고로 인해 1943년 5월 23일 단장이 붙잡히고 곧이어 서상교를 포함한 단원 전원이 체포되었다. 서상교는 당시 학생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1944년 대구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단기 5년 이상 장기 7년의 중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광복을 맞아 출옥했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 alt 유도부 시절의 서상교 (1941)_서보혁·서보현 제공(좌), 출옥 후 서상교의 모습 (1945)_서보혁·서보현 제공(우) 최낙철과 대구사범학교 연구회 최낙철은 1921년 11월 전북 무주에서 태어났고 대구사범학교 5학년에 재학 중 1941년 1월 항일비밀결사 연구회(硏究會)를 조직했다. 연구회는 사범학교의 교과목 중심으로 14부를 편성했고 최낙철이 지리부 책임을 맡았다. 연구회 결성 이후 회원들은 연구성과를 공유하며 민족의식을 고취했고 졸업 후에는 미래 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해 힘쓰기로 결의했다. 최낙철은 졸업 후 함북 나진의 약초공립국민학교에 부임해 교사로 재직 중 대구사범학교의 항일비밀결사 활동이 적발되면서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1943년 11월 대전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5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던 그는 광복을 맞아 출옥했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 alt 『반딧불』 (1940.1.)(좌), 대구사범학교사건 예심종결서(우) 신기철과 춘천고등보통학교의 상록회 신기철은 1922년 1월 강원도 춘천에서 태어나 춘천고등보통학교에 재학했다. 1937년 3월 학생비밀결사 상록회(常綠會)가 결성되었고 이듬해 간부급 회원들의 졸업을 앞두고 1938년 2월 새로운 임원진이 구성되었는데, 신기철은 동료의 권유로 입회해 서적계 책임을 맡았다. 새로운 회원 가입을 위해 활동하던 신기철은 같은해 10월에는 회장직을 겸임했고 학교에서 벌어지는 민족 차별대우를 논의하는 회의를 주도하기도 했다. 1938년, 상록회의 활동이 드러나면서 관련자 137명이 대대적으로 체포되었고 그 중 신기철을 포함한 36명이 검찰에 송치됐다. 신기철은 1939년 12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 6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했다.  alt 신기철의 수형기록카드_국사편찬위원회 제공(좌), 「상록회사건 예심조서」 (1938)_국사편찬위원회 제공(우) alt  ]]> Thu, 02 Nov 2023 16:08:41 +0000 84 <![CDATA[끝나지 않은 독립운동 중국에서 독립운동가 남편과 함께했던 부인들을 위한 서사]]> 끝나지 않은 독립운동중국에서 독립운동가 남편과 함께했던 부인들을 위한 서사   글 이계형 (국민대학교 교양대학 교수)   2023년 10월 현재까지 독립유공자 포상을 받은 여성 독립운동가는 653명이다. 이들 중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했던 남편을 따라 중국으로 망명하여 부군과 독립운동가들을 뒷바라지하거나 직접 독립운동에 동참한 부인들이 적지 않았다.  또한 자료에서 확인할 수는 없지만, 국외에서 남편과 생사고락을 같이했던 부인들도 있었다.  낯설고 물선 타국에서 힘겹게 살았던 부인들을 기억했으면 하는 마음에 그들의 얘기를 하고자 한다.  학생운동, 3·1운동, 국내항일 계열 여성 독립유공자 독립유공자 포상이 이뤄진 1962년 첫해에 유관순·김마리아·남자현·이애라·안경신 등 5명이 처음으로 독립유공자로선정되었고, 이후 2023년 10월 현재까지 독립유공자 포상을 받은 여성 독립운동가는 653명이다. 전체 독립유공자 17,848명 중에서 3.66% 정도이다. 여성 독립유공자 가운데 학생운동, 3·1운동, 국내항일 분야에서 활동했던 이들은 모두 477명으로, 여성 독립유공자 중 73%를 차지할 정도로 그 수가 압도적이다. 이들은 대개 청장년층이었고 근대교육을 받은 인사들이었다. 학생운동의 경우 서훈 기준에 퇴학이 포함되면서 여성 독립유공자가 증가하였다. 3·1운동은 주로 여학생 신분으로 이에 동참하였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른 경우이며, 국내 항일은 소작운동, 청년운동, 노동운동, 대한민국애국부인회·근우회·비밀결사 등에서 활동한 경우이다. alt 좌측부터 엄기선, 조계림, 조용제, 두쥔훼이, 이숙진 대한민국 임시정부 계열 여성 독립유공자 한민국 임시정부(이하 임시정부) 계열 여성 독립유공자는 45명이 확인된다. 그중에 고수선·김순도 등은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중국으로 망명한 뒤 임시정부에서 활동한 경우이고, 곽낙원·이헌경·조마리아 등은 독립운동가 김구·민필호·안중근 등의 모친이다. 김윤경과 지경희 등은 상하이 등지에서 생활하다가 임시정부에서 활동한 경우이고, 안미생[안정근]·엄기선[엄항섭]·조계림[조소앙] 등은 임시정부 요인들의 딸들이며 조용제는 조소앙의 여동생이다. 이들 외 34명의 여성 독립유공자는 부부 독립운동가로 중국 여성인 두쥔훼이와 이숙진도 있다. 어려운 상황에서 탄생한 34쌍의 부부 독립운동가 임시정부가 활동했던 기간을 지역별로 살펴보면, 상하이 시절(1919.4~1932.4)이 가장 긴 13년, 충칭 시기(1940.9~1945.8)가 5년, 그 사이(1932.4~1940.9) 8년 5개월 동안에는 일제의 추적과 중일전쟁으로 인하여 항저우·전장·난징·창사·광저우·류저우·치장 등을 옮겨 다닐 때다. 이러한 시기에 따라 임시정부에 참여했던 인사들의 성향이 달랐다. 1910년 8월 경술국치 전후로 상하이에 망명한 인사들 가운데 1919년 4월 임시정부 설립에 적극적으로 동참한 부류가 있었고, 1919년 3·1운동 이후에는 국내뿐만 아니라 만주·연해주·미주 등지에서 활동하던 인사들이 상하이로 건너와 임시정부에 참여하였다. 1920년대에는 임시정부가 ‘전쟁의 해’를 선포한 뒤 이를 지지한 연해주와 만주의 독립군이 그 산하 군사단체로 변모하였고,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에서 승리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내부의 독립운동 노선을 둘러싼 분열로 임시정부 요인들이 뿔뿔이 흩어졌고 남아 있던 요인들은 재정적 어려움에 극심한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1930년대에는 김구의 한인애국단이 추진한 윤봉길 의거를 계기로 중국 국민당 정부로부터 지원받는 전환점이 되었지만, 임시정부 요인들과 가족은 일제의 포위망을 피해서 중일전쟁 이후에는 일제의 공습을 피해 떠돌아다녀야 했다. 비로소 1940년 임시정부가 충칭에 뿌리를 내리면서 광복군을 창설하는가 하면 여러 단체를 조직하면서 활발한 활동을 재개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34쌍의 부부 독립운동가들이 탄생하였는데, 이를 유형별로 나눠보면 다음과 같다. ① 기혼 남성 독립운동가가 홀로 망명한 뒤에 몇 년 지나 부인이나 가족들이 그곳으로 찾아가 같이 생활하는 경우, ② 청장년 중에 임시정부를 찾아온 뒤에 활동하면서 현지에서 결혼하여 부부 독립운동가 된 경우, ③ 부인과 이혼·사별하거나 상하이 등지에서 혼자 생활을 영위하다가 현지에서 부인을 얻어 생활하는 경우, ④ 1930~1940년대 자녀들이 성장하여 광복군 혹은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면서 집안끼리 혼인하여 부부 독립운동가가 된 경우이다.  중국에서 남편을 뒷바라지한 부인들을 기억하며 이외에도 임시정부 등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남편을 뒷바라지하고 자녀들을 키웠던 부인들도 있었다. 그들에 관한 자료가 부족하여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지만, 짧은 지면이나마 낯선 타국에서 힘겹게 살아내야 했던 부인들의 삶을 되돌아보고 그들도 기억했으면 하는 마음에서 짤막한 서사를 남기고자 한다(남편들 이름의 가나다 순).  alt 왼쪽부터 김구·큰아들 김인·부인 최준례이다. 김구와 최준례 김구와 최준례는 1904년 혼인하였다. 김구가 1919년 4월경 상하이로 망명한 뒤에, 최준례는 1920년 8월 큰아들(김인)을 데리고 상하이로 건너왔다. 그 뒤 1922년 9월 둘째 아들(김신)을 낳았다. 남편은 아이들 얼굴 한 번 들여다볼 틈이 없었고, 양육은 오로지 부인의 몫이었다. 그러던 중 최준례는 1922년 상하이로 떠나오신 시어머니로부터 산후조리를 받아 원기를 회복해 나가던 중 사고를 당하였고, 끝내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한 채 1924년 1월 생을 마감하였다. 김규식과 조은애 김규식과 조은애는 1906년 5월 혼인하였다. 1907년 장남 김진필이 출생했으나 6개월 만에 병으로 사망하였고, 1910년에 차남 김진동이 태어났다. 김규식은 ‘105인 사건’에 국내 활동이 여의치 않자, 부인과 함께 1913년 상하이로 망명하였다. 그해 12월 김규식은 박달학원을 설립하고 한인들에게 영어를 가르쳤으며, 이듬해 제1차 세계대전 발발하자 몽골 울란바토르에 군관학교를 설립하고자 하였으나, 자금을 마련하지 못해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 무렵 1917년 조은애가 사망하였다. 훗날 아들 김진동은 한국광복군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부주석 비서관을 지냈다. 박찬익과 심탄실 박찬익과 심탄실은 1902년 혼인하였다. 박찬익은 경술국치 직후 북간도 룽징으로 혼자 망명하여 간민교육회·중관단을 조직하였고, 1919년에는 조소앙 등과 함께 ‘대한독립선언서’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이때 심탄실은 시모 박봉서와 자식들(4남 2녀)과 함께 룽징으로 건너가 남편의 활동을 도왔다. 이후 상하이에 임시정부가 조직되자 박찬익이 홀로 그곳으로 떠나면서 부부는 떨어져 생활하게 되었다. 한편 셋째 아들 박영준은 임시정부 간부와 광복군 제3지대 구대장을 지냈다.  alt 앞줄 왼쪽부터 신규식의 사위 민필호·외손자 민영수, 뒷줄 왼쪽부터 딸 신창희·부인 조정완·외손녀 민영주이다. 신규식과 조정완 신규식은 한양 조씨 가문의 조정완과 1896년 혼인하였다. 신규식은 1911년 11월 홀로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였는데, 당시 큰딸 신창희(이명 신명호)는 6살이었고 아들 신상호는 임신 중이었다. 1919년 9월 상하이에 통합임시정부가 출범한 후 신규식이 법무 총장으로 임명되었을 당시 부인은 자식들을 데리고 상하이로 망명하였다. 1920년 5월 신창희는 신규식의 휘하에서 일하던 민필호와 결혼하였다. 둘 사이에 태어난 아들 민영수는 광복군으로 활동하였고, 딸 민영주 역시 광복군에서 활동하다가 1945년 학병 출신의 김준엽을 만나 결혼하였다. 그런데 신규식이 1922년 9월 단식 순국하고, 1929년에는 17살이었던 장남 신상호마저 요절하고 말았다. 이후 조정완은 홀로 귀국하였고, 일제의 강압과 생활고로 비참하게 살다가 1945년 생을 마감하였다.  이시영과 반남 박씨 이시영은 김홍집의 딸 경주 김씨와 결혼했지만, 1895년 아들 이규창을 남겨놓고 사별하였다. 그 뒤 이시영은 박승문의 딸 반남 박씨와 재혼하여 이규열·이규웅 두 아들을 낳았다. 이시영과 부인은 1911년 초 6형제와 가족들과 함께 서간도 류허현 삼원포로 망명하여 신흥강습소를 설립·운영하다가 1914년 베이징으로 옮겨갔다. 이때 이규창은 신흥강습소 제1기생으로 졸업한 뒤 신흥학교 교사로 지냈지만, 반남 박씨는 1916년 그곳에서 사망하였다.  조완구와 홍정식 조완구는 1915년 가을 북간도로 망명하였고, 이듬해 부인 홍정식은 시모와 3남매를 이끌고 그곳을 찾았다. 하지만 그해 여름 큰아들이 비적에 의해 살해당하고 말았다. 그 뒤 조완구는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갔다가 1919년 상하이로 건너가 임시정부에 참여하였다. 그 사이 룽징에 있던 모친이 돌아가시자, 홍정식과 두 딸을 데리고 귀국하여 친정 조카 홍명희에게 기탁하였다. 그 뒤 홍정식은 1945년 2월 광복을 불과 몇 개월 남겨놓고 꿈에 그리던 남편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차리석과 강리성 차리석은 1919년 상하이로 망명하였는데, 홀로 지내던 부인 강리성이 두 딸과 함께 1922년 그곳에 함께 찾아왔다. 강리성은 생계를 위해 밥집을 하였고, 이봉창·윤봉길 의사에게 비밀결사 장소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또한 홍커우 의거 이후 임시정부를 따라 유랑하다가 중일전쟁 발발 이후, 1940년경 둘째 딸 차영희만 데리고 평양으로 돌아와 광복을 맞이할 때까지 일제 감시 속에서 힘들게 살아가야 했다. ]]> Thu, 02 Nov 2023 16:12:44 +0000 84 <![CDATA[어제와 오늘을 잇는 사람 잊힌 영웅들을 알리는 이 시대의 독립운동가, 정상규 작가]]> 어제와 오늘을 잇는 사람잊힌 영웅들을 알리는이 시대의 독립운동가정상규 작가   글 편집실 사진제공 정상규   투쟁의 역사 속 서거한 이 나라의 영웅들의 잊힌 이야기를 세상 밖으로 끄집어낸 청년이 있다. 미국 영주권 취득 기회를 포기하고 대한민국 공군에 자원입대하고, ‘독립운동가’ 스마트폰 앱을 개발하거나 책을 집필하여 영웅들의 이야기를 재조명하고 있는 정상규 작가다.   alt 정상규 작가 정상규 작가를 잘 모르는 독자들에게 자기소개 부탁한다. 지난 8년간 독립유공자 지원 비영리단체를 운영해온 독립운동사 전문 역사작가이다. 한국에서는 2015년 ‘독립운동가’라는 스마트폰 앱을 개발하여 잊힌 영웅들을 세상에 알려왔고, 그분들의 후손을 지원해주는 일을 도맡아왔다. 현재는 과거의 독립영웅을 넘어 일반 시민영웅들까지 지원하는 크리스천 기업을 운영하고 있다.  특별히 우리 역사문제에 관심을 두게 된 계기와 누구도 선뜻 도전하지 못하는 길을 걸어가는 이유가 궁금하다. 그 시작은 대학생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NGO를 설립해 사회적·경제적 약자들을 돕는 단체를 운영하며 사회적기업가를 꿈꾸었다. 이후 장교시절에 의열단의 후손이 기초생활수급대상이라는 사실과 폐지를 줍고 다니는 6·25전쟁 영웅을 마주하며, 과거 NGO를 만들었던 때처럼 ‘내가 이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없을까’ 고민했다.  ‘위대한 영웅이 있다’는 말은 ‘그 옆에 위대한 조력자가 있다’는 말과 같다. 이제는 소수의 널리 알려진 영웅이 아닌 그들 옆에 그림자처럼 존재한 분들을 조명해야 할 시대라고 생각한다. 최근 하버드 경영대학원 교재인 『코리아』의우리나라 역사 왜곡 내용이 올바르게수정되었다는 반가운 소식이 전해졌다. 하버드 경영대학원의 일제강점기 역사 왜곡(식민지 근대화론, 동해를 일본해로 표기, 위안부 및 강제징용 관련 고의적 누락)에 관해 하버드대학교 한인회와 케네디스쿨 한인회의 서명을 받아 역사 왜곡의 문제와 교재 수정을 요구하는 성명서를 내었고, JTBC 뉴스룸에 단독 인터뷰가 보도되었다.  이후 하버드대학교 신문인 『크림슨』에 이와 관련한 기고문을 게재하였다. 장차 6개월간의 노력 끝에 하버드 경영대학원이 잘못을 인정하고 새로운 개정 교과서를 내었다.   alt 정상규 작가의 『대전자령 전투, 어느 독립군의 일기』 (2020)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들이 수정되었는지 소개 바란다. 결국 『코리아』 교재에는 동해와 일본해가 함께 병기되었고, 이밖에도 다음과 같은 수정이 이루어졌다 . o 식민지배는 일본의 잘못이 아니다. → 식민지배 당시 끔찍한 강제 노동이 이루어졌다. o 한국 경제와 일본 경제를 통합했다. → 무력으로 일본 제국에 동화시키려 했다. o 더 산업화되고 교통, 전력, 교육, 행정 그리고  금융 시스템까지도 현대화 → 한반도 인프라와 행정 능력, 일부 산업 개선 사실이나, 주로 일본의 이익을 위해 이루어졌다. 뿐만 아니라, 성노예 위안부 내용을 추가하여 일본군의 전쟁 범죄를 명확히 했다. 이제 하버드대학교 경영대학원 학생들은 왜곡된 한국의 역사가 아니라, 보다 중심잡힌 역사를 배우게 되었다.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일들의 연속이었다. 이는 큰 용기와 노력이 필요했지만, 결국 역사적 정의와 인권 문제 앞에 하버드대학교는 7년간 유지해온 교과서를 수정하는 결단을 보여주었다. 이 밖에도 일본이 행한 역사 왜곡을 바로잡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조금 무거운 답변이 될 수 있겠지만, 우리가 오해하면 안 되는 것이 일본과의 국제관계를 일차원적으로 접근하거나 감정적으로 대응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일본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세계 속에서 그들의 외교적 성과·능력을 오랜 시간 인정받아 왔다.  우리는 이러한 부분을 너무 간과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열린 마음으로 배울 점은 배우고, 무엇이 부족한지 검토하며, 민관 거버넌스적 관점에서 미래세대를 위하여 개선할 점에 대해 여러 각도의 검토가 필요하다.  2015년에는 대한민국 공군 장교로복무하던 중 스마트폰 앱 ‘독립운동가’를개발했다. ‘독립운동가’ 스마트폰 앱은 잊힌 영웅들을 제보받아 온라인 공간에 게재하여 그분들의 서거일을 핸드폰 문자 알림(푸시알람)으로 보내주는 앱이다. 영리를 목적으로 하지 않기에, 지금까지 어떠한 광고도 없이 전액 사비로 운영해오고 있다.  이 앱을 개발하던 2015년 당시 한국에는 보훈 관련 스마트폰 앱이 전무했다. 이같은 앱을 기술적으로  개발하는 일은 어렵지 않지만, 누구도 만들지 않은 이유는 수익성이 나지 않기 때문이다. 당시 장교 신분으로서 독립군들의 삶이 공감되었기에, 후배로서 그분들을 예우할 수 있는 앱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벌써 8년이나 되었다. alt 정상규 작가가 2015년 개발한 스마트폰 앱 ‘독립운동가’ 끝으로 앞으로의 계획이나 꿈이궁금합니다.  지금도 일제강점기의 피해자분들과 독립운동가의 후손분들이 하나둘 삶을 마감하여 우리 곁을 떠나고 있다. 시간은 너무나 가혹할 만큼 빠르게 흐르고 있다. 더 늦지 않게 이러한 영웅들이 더 많이 알려지고 존중받는 사회가 된다면, 오늘날처럼 분열과 분쟁이 가득한 사회가 조금씩 변하고 나아지지 않을까?  모든 커다란 변화는 바로 나부터 시작한다고 믿는다. 내가 바뀌면 내 주변이 바뀌고, 그 주변이 바뀌면 지역사회가 바뀌기 시작한다. 앞으로도 그런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할 예정이고, 지금까지 이러한 일들을 비제도권에서 해왔다면 이제는 제도권 내에서 공적인 문제로 대면하려 노력할 것이다. ]]> Thu, 02 Nov 2023 16:46:45 +0000 84 <![CDATA[기념관이 발굴한 독립운동가 「1930년 조선혁명」 선언, 함북 경성농업학교 격문사건의 주역들]]> 기념관이 발굴한 독립운동가「1930년 조선혁명」 선언, 함북 경성농업학교 격문사건의 주역들   글 독립기념관 독립운동가 자료발굴TF팀   김규창 (金奎昌·圭昌, 1909.8.28.~ ?) o 경성농업학교 3학년생 o 본적(출생지) : 함남 정평 부내 봉대 o 훈격 : 건국훈장 애족장(2021)  최창한 (崔昌漢, 1910.7.27.~ ?) o 경성농업학교 3학년생 o 본적(출생지) : 함북 명천 하고 황곡 272 o 훈격 : 건국포장(2021) 최일규 (崔日圭, 1911.12.23.~ ?) o 경성농업학교 2학년생 o 본적(출생지) : 함남 고원 부내 하가남 245 o 훈격 : 건국훈장 애족장(2021)   한창수 (韓昌洙, 1911.12.18.~ ?)  o 경성농업학교 2학년생 o 본적(출생지) : 함북 경성 나남 생구 58  o 훈격 : 건국훈장 애족장(2021)  김성만 (金成萬, 1908.12.3.~ ?)  o 경성청년동맹원 o 본적(출생지) : 함북 경성 나남 미길 10 o 훈격 : 건국훈장 애족장(2021) 한반도의 남단에서 북단까지, 함북 최초·최대 규모의경성학생연합시위 1930년 1월 25일 12시 30분, 함경북도 경성(鏡城)에서 일제의 식민통치에 분노한 학생들의 함성이 터져 나왔다. 경성고등보통학교와 경성공립농업학교 학생 수백 명이 일제의 민족적 차별에 반대하는 항일 격문을 뿌리고 깃발을 흔들며 기습적으로 거리 시위를 감행했다. 시내 가두 행진과 투석, 시위대와 일제 경찰의 충돌로 부상자가 발생하는 등 시위는 격렬하게 진행되었다. 시위에 참가한 인원만 해도 동아일보에서는 5백여 명, 『조선일보』에서는 7백~1천여 명에 이른다고 보도했다. 두 학교 전교생이 시위에 참가한 함북 최초·최대의 광주학생만세운동이었다.나남경찰서는 백 명이 넘는 학생을 현장에서 검거하고, 농업학교 학생 1백여 명을 학교 창고에 가둬버렸다. 현장에서 검거된 학생들은 경성주재소에 끌려가 가혹한 취조를 받았다. 다음날 26일 사건을 담당한 청진지방법원의 마츠키[松岐] 검사가 학생들이 갇혀있는 농업학교를 점검하고 돌아갔다. 경성읍 시민들은 점포를 폐점하고 오전 11시부터 체포된 학생의 석방을 요구하는 시민대회를 개최하며 나남서의 무자비한 검속에 항의했다. 129명의 전교생 대부분이 퇴학 또는 무기정학을 당한 경성농업학교는 등교할 학생이 없어 잠정 휴교에 들어갔다. 광주에서 시작된 학생운동은 최북단인 함경북도에 이르러 가장 활발하고 극렬하게 전개되었다. 함북의 광주학생운동은 비교적 늦은 1930년 1월에 시작됐으나, 전선(全鮮)을 걸쳐 올라오면서 응축된 저항의식이 마그마처럼 폭발했다. 사전 탐지되어 불발된 1월 19일 회령공립상업학교 학생시위 계획을 시작으로 함북에서는 두 달 사이 최소 40여 건의 만세운동 계획과 시위가 있었다. 청진·회령·경성 등 함북 중점 도시의 중등학교에서 비롯된 학생운동은 불과 10여 일 만에 경성의 읍면, 성진·웅기·명천·길주 등지의 보통학교까지 빠르게 확산되었다. 이 같은 전개에는 신간회와 청년동맹과의 연대도 주효했다. 학생조직이 지역사회 단체와 결속함으로써 함북지역 항일 학생운동은 조직적이고 격렬하게 진행되었다. alt 「경성보고 농교생 일시에 만세시위」 『조선일보』 (1930.01.27.)(좌), 「시민대회에서 석방을 요구」 『조선일보』 (1930.01.29.)(우) 동포여 깨어나라! 그리고 강하게 싸워라!「1930년 조선혁명」 선언 1월 25일에 일어난 경성농업학교의 만세 시위는 경성고보 시위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 경성고보 학생들은 경성읍 서문에 집결해 대형 적기(赤旗)를 높이 들고 태극기와 격문을 뿌리며 신남문(新南門)을 지나 농업학교로 향했다. 농업학교에 도착하자 유리창 등에 돌을 던지며 시위에 동참할 것을 요구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경성농업학교 전교생이 만세운동에 호응해 시위대에 합류했다.이날의 만세운동에 앞서 경성농업학교에서도 일제의 민족적 차별에 저항하는 자발적인 움직임이 있었다. 시위가 일어나기 열흘 전인 1월 17일, 경성농업학교 2학년 최일규는 고향 함남 고원에서 경성행 기차를 타고 학교로 돌아가고 있었다. 기차가 영흥역에 정차했을 때 함흥에서 중등학교를 다니는 학생 2명이 승차했다. 이들은 광주에서의 사태에 분개해 일어난 함흥지역 학생시위 정황을 최일규에게 알려주었다. 최일규는 함흥에서 배포된 격문을 얻어 경성으로 돌아왔다. 다음날 나남면 미길정에 사는 동창생 한창수의 집을 찾아간 그는 인근에 거주하는 3학년 김규창도 불러 모았다. 최일규는 자신이 기차에서 들은 함흥 학생들의 만세운동 정황을 이야기하며 한민족의 독립운동에 관한 격문을 보여주었다. “우리 학교에서도 이와 동조하는 만세운동을 일으켜야 하지 않겠냐”고 제의하는 최일규의 말에 한창수와 김규창은 기꺼이 동조했다.의기투합한 이들은 기존 격문을 토대로 학교에 배포할 격문을 새롭게 작성했다. 먼저 「1930년 조선혁명」이라는 제목하에 “민족적 차별을 철폐하라!” “식민지정책에 적극적으로 반항하라!” “체포된 조선인의 무조건 석방을 주장하라!” “동포여 깨어나라, 그리고 강하게 싸워라!” “우리 혁명의 계기를 잃지 마라! 태극의 기치는 우리를 기다린다!” “혁명 만세!” 등의 내용을 원안으로 정했다. 직접 격문을 작성하면 필체 감정을 통해 주모자가 누구인지 금세 드러날 것이 뻔하므로, 평소 친분이 있던 경성청년동맹 나남지부 상무 김성만에게 격문 내용을 대신 써달라고 부탁했다. 김성만은 자신이 당직하던 사무실에서 80매 가량의 격문을 직접 필사했다. 배포 분량이 부족하다고 느낀 이들은 등사기를 빌려 19일 오전 나남면 생구정 김기창의 방에서 120매를 추가로 인쇄해 총 200매의 격문을 준비했다. 최일규는 준비된 200매를 가지고 자신의 하숙집으로 돌아온 뒤 3학년생인 최창한을 불렀다. “지금 광주학생사태로 전국 각지에서 학생들이 맹휴를 단행하고 있는데 우리만 홀로 묵시할 수는 없지 않은가, 우리 학교도 동참해야 한다”라는 최일규의 말에 최창한도 동참하였다. 두 사람은 「1930년 조선혁명」 격문 중 일부를 먼저 교내에 배포하기로 했다. 배포를 맡은 최창한은 그 자리에서 받은 격문 30매와 다음날 추가로 받은 격문 30매를 가지고 20일 저녁 7시 반경 학교에 몰래 들어가 2학년과 3학년 교실에 살포했다. 그로부터 5일 후인 1월 25일 함북지역 최초의 학생만세운동인 경성공보와 경성농업학교의 대규모 만세시위가 벌어졌다. alt 경성농업학교 교사_『함북대관(咸北大觀)』 (1967)(좌), 경성농업학교 실습지_『함북대관(咸北大觀)』 (1967)(우) 함북지역 최초의 광주학생운동 격문사건 경성농업학교 격문사건의 주역 5인은 1930년 2월 27일 청진지방법원에서 ‘대정8년 제령제7호’ 위반으로, 최일규에게는 출판법 위반 죄명이 하나 더 추가되어 모두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최일규·김규창·한창수는 징역 1년, 최창한은 징역 8월, 청년동맹원 김성만은 징역 6월의 무거운 실형이 내려졌다. 이들의 격문과 경성학생연합시위와의 관련성 때문이었다. 「1930년 조선혁명」 격문은 전남 광주학생운동에 공명한 함북 학생들이 직접 작성·배포한 함북지역 최초의 격문이었다. 판결에 불복한 최창한이 복심법원에 항소했으나 결과는 변하지 않았다. 김성만·김규창은 청진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1930년 8월 27일과 1931년 2월 28일 각각 출소했다. 한창수는 김천소년형무소에서 형기의 대부분을 채운 1931년 2월 13일 가출옥했다. 최일규는 체포된 지 1년 2개월이 지난 1931년 3월 29일에야 함흥형무소에서 출소했다.함북 학생운동을 선도했던 경성고보 학생들과 경성농업학교 학생들은 공적을 인정받아 2021년 함께 국가유공자로 추서되었다. 일제의 식민통치와 민족적 차별에 저항하다 갇힌 스무 살 남짓의 청춘들이 90여 년 만에야 비로소 활짝 피어난 순간이다. alt 「경성농교생 복심 판결 최고 8개월」 『동아일보』 (1930.04.08.)   ]]> Thu, 02 Nov 2023 17:02:29 +0000 84 <![CDATA[사(史)적인 여행 살아 숨 쉬는 습지와 역사 전라남도 순천]]> 사(史)적인 여행살아 숨 쉬는 습지와 역사전라남도 순천   글·사진 박광일 (역사여행작가·여행이야기 대표)   날씨가 추워질 때 아름다워지는 곳이 있다. 단풍이 짙어지는 곳이나 혹은 바다와 닿은 자리에 억새와 갈대가 피어나는 곳들이다.  오늘 떠나볼 순천도 그런 곳 가운데 하나다.  여기에 역사 유적, 그리고 독립운동의 흔적을 살펴볼 수 있는 순천으로 떠나본다. alt 낙안읍성                        순천을 대표하는 역사 유적, 낙안읍성 낙안읍성은 1,400미터 정도의 둘레를 돌로 쌓은 성벽으로, ‘낙안’은 좋은 땅이라서 백성들이 살기에 좋다는 의미가 있다. 세 개의 성문이 있는 낙안읍성은 동서를 관통하는 도로를 중심으로 한쪽에는 민가가 있고, 다른 한쪽에는 공공시설인 관청과 향교가 있다. 그러므로 이곳을 자세히 살펴보려면 성벽 위를 걸으며 주변의 풍광도 즐기고. 읍성 안으로 들어와 마을을 구경하는 것이 좋다.  읍성 위를 걷다가 보면 성벽을 지키기 위해 만든 시설도 보인다. 성문 앞에 둥그렇게 성을 쌓아 적의 공격을 막아내기 위한 옹성, 성벽 일부분을 튀어나오게 해서 적의 공격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만든 치성이 있다. 또한 성벽 밖으로 개울이 흐르도록 해서 적의 접근을 막는 해자 역할을 하도록 했다.  한편 낙안읍성도 우리나라의 다른 읍성과 비슷하게 북문이 없다. 중국은 평지에 성을 쌓아서 네 방향 모두에 성문이 있는데, 우리나라는 배산임수 곧 읍성의 북쪽은 언덕이나 산에 기대는 경우가 많아 성문이 없는 경우가 종종 있다. Tip 1. 낙안읍성을 오롯이 즐기는 법 낙안읍성이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는 이유는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읍성과 마을의 모습이 옛 모습 그대로 이어져 왔기 때문이다. 지금도 옛 가옥에는 사람이 살고 있어서 읍성 안의 분위기를 느끼고자 한다면, 민박을 하거나 읍성 안 식당에서 음식을 먹어보는 것을 추천한다.또한 낙안읍성의 성벽 위를 걷다 보면 읍성 안의 모습과 읍성 밖의 모습을 비교해서 볼 수 있다.  특히 서쪽에서 남쪽으로 돌아설 때, 검은색 돌로 쌓은 성벽을 사이에 두고 성안과 밖에 노란색 초가지붕이 펼쳐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게다가 읍성 옆으로 넓게 펼쳐진 들녘의 모습도 한눈에 들어온다. 여기에 서면 이 마을의 이름이 왜 ‘낙안’인지 짐작할 수 있다. Tip 2. 꼭 기억해야 할 인물, 임경업·김빈길 장군 낙안읍성에 왔다면 두 명의 역사 속 인물을 살펴볼 수 있다. 먼저 사당인 충민사에 모셔진 임경업 장군이다. 병자호란시기에 비극적인 삶을 살았던 임경업은 모함으로 억울한 죽음을 맞은 인물이다. 그런 임경업이 낙안군수가 되어 이곳에 잠시 머물 적에 무너진 성벽을 수리하기도 했으며 선정을 베풀었다고 한다. 그를 기리는 충민사는 자연스럽게 마을의 수호신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또 한 명의 인물은 바로 김빈길 장군이다. 낙안 출신의 무인으로서 여러 벼슬을 받은 김빈길은 1397년 조선 건국 직후에 낙안에 읍성을 쌓았다. 왜구에 대비하느라 급히 토성으로 성을 쌓았는데, 30여 년 뒤 세종 때 다시 석성으로 쌓으며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김빈길은 태조 때 왜선 3척을 격파하는 전공을 세웠으며, 전북 사진포에서 왜군을 몰아내다 전사했다. 아쉽게도 왜구를 토벌한 김빈길의 사당은 일제강점기에 사라져 버렸다. 이러한 상황을 아쉽게 여기던 중 여러 사람의 노력으로 최근 그의 동상이 읍성 밖에 생겨났다. 낙안읍성 주소 & 관람시간 & 문의 전남 순천시 낙안면 충민길 30  |  11, 12, 1월 오전 9시~오후 5시 30분  |  061-749-8831 alt 순천만습지 갈대와 갯벌, 철새가 어우러지는, 순천만습지 순천에는 겨울이 되면 빛을 발하는 곳이 있다. 바로 순천만습지이다. 겨울 바다의 차가움과 함께 갈대가 일렁이는 갯벌의 모습은 상당히 이국적인 느낌을 준다. 순천만은 소설가 김승옥의 『무진기행』 배경으로 알려진 곳이다. 소설 속 묘사처럼 갈대와 갯벌 그리고 철새가 어우러지는 곳이다.  무진교를 지나 넓게 펼쳐진 갈대밭 데크길을 따라가다 보면, 데크가 끝나는 지점에서 다시 산으로 올라가는 길이 이어진다. 다소 숨 가쁘게 산을 오르다 보면 용산전망대에 도착하는데, 이곳에서 순천만의 전망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만약 저녁 시간에 간다면, 아름다운 석양을 볼 수 있는 일몰 시각에 맞춰 방문하는 것을 추천한다. 한편 순천만 인근에는 ‘순천만 국가정원’이 있다. 처음부터 함께 방문할 계획이라면, 먼저 순천만 국가정원으로 입장을 하고 이후 순천만을 둘러보는 것이 좋다. 다만 하루가 온전히 걸릴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니 여유를 가지고 각 장소의 입장 마감 시간을 염두에 두자. Tip 3.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순천만습지 순천만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연안습지로, 람사르협약에 등록된 곳이며 2021년에는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되기도 했다. 참고로 세계유산에 등재된 갯벌은 네 곳으로, 순천만 외에 전북 고창, 충남 서천, 전남 신안의 갯벌이다. 이러한 사실을 알고 순천만을 보면 다시 보인다. 단순히 아름다운 풍경 이상의 가치를 가지고 있는 곳이란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리나라 철새 종류의 절반 정도에 해당하는 230여 종이 순천만에서 확인된다. 순천만습지 주소 & 관람시간 & 문의 전남 순천시 순천만길 513-25  |  오전 9시~오후 6시  |  061-749-6052 alt 호남호국기념관 호국영웅을 기리기 위한 공간, 호남호국기념관 순천에 있는 호남호국기념관은 호국영웅을 기리기 위한 공간이다. 모두 세 개의 상설전시실이 있으며, 제1전시실은 <6·25전쟁을 마주하다>, 제2전시실은 <6·25전쟁 속 호남>, 제3전시실은 <호국정신을 기억하다>라는 주제를 가지고 있다.  이곳에서는 호남의 의병 내용을 살펴볼 수 있다. 영화 <암살>을 보면 ‘(대한제국은) 총 한 번 쏘지 못하고 망한 나라’라는 표현이 나온다. 대한제국이 일본과 제대로 싸우지 않았던 것을 이야기하는 것인데, 범위를 넓혀보면 이 말은 틀린 말이다. 관리·선비·평민·천민은 의병의 이름으로 일본에 맞서 치열하게 싸움을 벌였기 때문이다.  특히 호남의 의병이 강하게 저항하였다. 일본은 이른바 ‘남한대토벌작전’이라는 이름으로 군대를 동원해 의병을 학살했다. 지리산 연곡사에서 장렬하게 전사한 고광순 의병장도 그 가운데 한 명이다. ‘불원복’(‘머지않아 되찾겠다’라는 뜻)이라는 세 글자를 쓴 태극기를 남긴 인물이 바로 고광순이다. 이러한 의병장의 저항이 사라질 때 비로소 일제는 우리나라의 국권 침탈을 강행했다. 국권을 빼앗길 당시 총소리가 들리지 않았다고 저항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러한 의병장·의병부대는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독립운동의 역사이다. 호남호국기념관 주소 & 관람시간 & 문의 전남 순천시 원연향길 17  |  오전 9시 30분~오후 6시  |  0507-1398-0630 * 매주 월요일 정기휴무   ]]> Thu, 02 Nov 2023 17:37:17 +0000 84 <![CDATA[이벤트 공지 월간 독립기념관 설문조사 등 다양한 이벤트에 참여해보세요!]]> 이벤트 공지월간 독립기념관 설문조사 등다양한 이벤트에 참여해보세요!   alt   ]]> Thu, 02 Nov 2023 17:59:10 +0000 84 <![CDATA[이달의 기념관 독립기념관 단풍나무숲길 최초 야간 개장 반짝반짝 불빛 아래 낭만적인 가을 산책]]> 이달의 기념관독립기념관 단풍나무숲길 최초 야간 개장반짝반짝 불빛 아래 낭만적인 가을 산책   글 편집실사진 이소연   독립기념관은 10월 27일부터 11월 12일까지 3주간 매주 금·토·일요일 ‘2023 단풍나무숲길 힐링축제’를 연다. 이번 축제에서는 개관 36년 만에 처음으로 단풍나무숲길이 오후 6시부터 9까지 야간에 개장한다.  alt 겨레의탑 미디어파사드(좌), 단풍나무숲길 산책로(우) 독립기념관 단풍나무숲길 최초 야간 개장 독립기념관 ‘단풍나무숲길’은 기념관 외곽을 둘러싼 방화도로를 따라 이어진 약 3.2km 구간을 말한다. 1997년부터 심은 2,200여 그루에 단풍나무가 오랜 시간 성장하여, 매년 이맘때쯤이면 붉은 터널로 변신해 수많은 방문객의 발길을 끈다. 단풍나무숲길은  남녀노소 누구나 쉽고 편안하게 걸으며 가을의 정취를 느낄 수 있다.올해는 10월 27일부터 11월 12일까지 3주간 매주 금·토·일 ‘2023 단풍나무숲길 힐링축제’를 개최한다. 특히 이번 축제는 개관 36년 만에 처음으로 단풍나무숲길에 보안등과 경관조명을 설치하여 야간 개장을 시행한다. ‘마법에 걸린 빛의 숲’을 주제로 조성된 산책로는 1~4구역으로 구분해 구간별 다른 테마로 연출했고, 산책로 곳곳에 다양한 포토존이 마련되어 있다. alt 야외 특별해설(조선총독부 철거 부재 전시공원 이야기)(좌), 셀프 포토부스우) alt 버스킹 공연 낮부터 밤까지 이어지는 다채로운 문화행사 ‘2023단풍나무숲길 힐링축제’ 기간에는 경관조명 외에도 겨레의탑 미디어파사드·가수 유성은 등 버스킹 공연·야외 순회전시·야외 특별해설(조선총독부 철거 부재 전시공원 이야기) 등도 운영하며, 단풍나무숲길 입구 일대에는 먹거리부스와 셀프 포토부스 등도 마련됐다. 한편 방문객을 위한 ‘단풍나무숲길 인증샷 이벤트’도 진행 중이다. 단풍나무숲길에서 찍은 사진을 필수 해시태그 3가지(#독립기념관 #2023단풍나무숲길 #가을여행)를 포함하여 인스타그램 또는 페이스북에 올리면, 추첨을 통해 100명에게 모바일 문화상품권 1만원권을 제공한다. 이 이벤트는 2023.11.19.(일)까지 참여할 수 있다. alt 태극열차(좌), 단풍나무숲길 산책로(우) 독립기념관에서 더 오랜 시간 추억을 남기길 바라며… 한편 2023년 10월 27일 금요일, 독립기념관 단풍나무숲길 입구에서 준공식이 열렸다. 한시준 독립기념관장은 “독립기념관이 엄숙하고 경건한 곳이 아닌, 독립운동을 통해 승리한 것을 기뻐하고 그 힘을 느끼는 곳이 됐으면 좋겠다”며 ”야간에도 개장한 만큼, 더욱 많은 관람객이 찾아 아름다운 자연경관도 보고 우리나라의 독립정신도 느꼈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독립기념관 관계자는 “단풍나무숲길 최초의 야간 개장으로, 자연과 역사가 어우러진 독립기념관에서 더 오랜 시간 추억을 남기길 바란다”고 전했다.   alt   정인혜·김선영 님 (충남 천안) 올가을에 독립기념관 단풍나무숲길이 처음 야간 개장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 기대를 갖고 방문했습니다.  셀프 포토부스에서 추억을 사진으로 남길 수 있어 좋았고, 어릴 적에 탔던 태극열차를 오랜만에 봐서 반가웠습니다.  내년에도 산책로뿐만 아니라 다채로운 체험행사와 먹거리들로 꾸며졌으면 좋겠습니다. alt   최원섭 님 (경기 평택) 아이들과 방문하기 좋을 단풍 명소를 찾던 중 독립기념관 단풍나무숲길을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산책로가 완만하여 아이들이 걷기에 무리가 없고, 기념관 곳곳에 돗자리를 깔고 쉴 수 있는 공간이 많아서 가을의 정취를 여유롭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해맑게 웃는 아이들을 보니, 방문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 Thu, 02 Nov 2023 17:52:07 +0000 84 <![CDATA[#월간독립기념관 2023 설문조사 당첨자 발표 & 지난 호 독자 후기 이벤트 당첨자 발표]]> #월간독립기념관2023 월간『독립기념관』설문조사 당첨자 발표&지난 호 독자 후기이벤트 당첨자 발표   [당첨자 발표] 2023년 월간 『독립기념관』 설문조사 지난 10월 10일부터 31일까지 진행되었던, 2023년도 월간 『독립기념관』 만족도 조사에 참여해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추첨을 통해 선정되신 100명을 아래와 같이 알려드립니다. 감사합니다. o 당첨자: 100명 (11월 둘째 주 휴대폰 발송) o 당첨경품: 커피쿠폰(아메리카노) o 문의: 고객홍보부(041-560-0244) ■ 당첨자 (총 100명, ctrl + F로 찾아보세요)   고*래010-****-8115 고*근010-****-4943 공*민010-****-5739 구*덕010-****-1113 김*은010-****-5452 김*호010-****-8115 김*윤010-****-2706 김*윤010-****-9640 김*진010-****-6025 김*규010-****-2648 김*서010-****-1538 김*경010-****-6531 김*영010-****-0820 김*용010-****-4845 김*하010-****-4780 김*학010-****-3214 김*하010-****-0906 김*영010-****-1777 김*연010-****-5821 김*배010-****-8494 김*인010-****-8338 김*호010-****-0816 김*희010-****-7030 김*원010-****-0322 나*용010-****-5679 남*     010-****-6380 노*섭010-****-7787 노*숙010-****-7117 문*영010-****-8819 문*아010-****-9034 문*훈010-****-1193 박*린010-****-1041 박*성010-****-7891 박*영010-****-1891 박*우010-****-6347 박*미010-****-6888 서*리010-****-3491 서*주010-****-3590 서*걸010-****-1185 성*운010-****-1039 성*우010-****-1953 소*임010-****-5288 송*혜010-****-1990 송*용010-****-9845 신*선010-****-2543 신*식010-****-3094 안*린010-****-5162 안*엽010-****-6931 양*호010-****-9166 여*숙010-****-4289 염*성010-****-8772 오*삭010-****-3605 오*민010-****-9285 우*지010-****-0618 우*희010-****-0111 원*     010-****-4247 유*민010-****-0334 윤*례010-****-7663 윤*협010-****-1889 윤*연010-****-9535 이*미010-****-7560 이*수010-****-4135 이*숙010-****-7159 이*호010-****-1662 이*진010-****-8970 이*진010-****-9051 이*연010-****-9586 이*민010-****-0380 이*현010-****-1001 이*은010-****-2432 이*훈010-****-0409 이*정010-****-3728 임*빈010-****-2132 장*녀010-****-9925 장*민010-****-6019 장*호010-****-9080 장*섭010-****-7845 전*호010-****-5626 전*묵010-****-8598 정*연010-****-1060 정*정010-****-9985 정*빈010-****-0331 조*호010-****-1170 조*준010-****-0891 조*림010-****-8239 차*화010-****-2428 차*용010-****-2864 최*숙010-****-2443 최*식010-****-0365 최*길010-****-4246 최*자010-****-6051 최*수010-****-3540 최*준010-****-5362 최*중010-****-7390 최*민010-****-5094 하*라010-****-8029 한*경010-****-3920 한*선010-****-8990 황*성010-****-7702 황*현010-****-2127                 ※ 당첨자 5명에게 모바일 커피쿠폰(아메리카노)을 전달할 예정입니다. 참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alt   ]]> Thu, 02 Nov 2023 17:56:01 +0000 84 <![CDATA[기념관 소식 NEWS]]> 기념관 소식NEWS   alt  ]]> Thu, 02 Nov 2023 17:57:20 +0000 84 <![CDATA[어제의 오늘 잊지 말아야 할 12월의 역사]]> 어제의 오늘잊지 말아야 할 12월의 역사   정리 편집실   alt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한인자치단체이자 독립운동단체인 ‘권업회’가 조직된 날은 1911년 12월 19일입니다.   ]]> Fri, 01 Dec 2023 15:39:05 +0000 85 <![CDATA[들여다보기 러시아지역 한인 디아스포라와 권업회]]> 들여다보기러시아지역 한인 디아스포라와 권업회   글 윤상원 (전북대학교 사학과 교수)   권업회의 역사적 의미는 러시아에 이주한 한인들을 위해 자치활동만 전개한 것이 아니라, 망명자들이 독립운동을 할 수 있도록 기반을 제공했다는 점이다. 표면단체로서 권업회는 직접 독립운동을 전개할 수 없었지만, 권업회를 배경으로 하여 만들어진 대한광복군정부는 일제강점기 여러 지역에서 설립된 망명정부의 효시가 되었다.   alt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한인마을 개척리 디아스포라와 고려사람 디아스포라는 “특정 민족이 자의적이나 타의적으로 기존에 살던 땅을 떠나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여 집단을 형성하는 것, 또는 그러한 집단”을 일컫는 말이다. 2천 년이 넘는 유대인의 방랑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되기 시작한 디아스포라는 근대 이후 여러 민족의 이주와 정주가 반복되면서 근대세계체제의 한 요소로 자리매김하였다.디아스포라의 가장 큰 특징은 ‘이중 정체성’에 있다.  디아스포라가 된 민족집단은 현지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인정받기 위해 노력하면서 동시에 고유의 민족 정체성을 지켜나가고자 한다. 이주한 시기와 장소·원인과 목적이 저마다 다르기 때문에 각각의 디아스포라들이 각기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고, 때로는 디아스포라 내부에서조차 다양한 흐름이 존재하기도 한다. 하지만 디아스포라 중 일부는 ‘이중 정체성’ 속에서 부유하고 있다. 따라서 디아스포라는 언제나 “나는 누구인가?”라는 화두를 잡고 고뇌하는 존재이다. 현재 재외동포가 750만 명에 이르는 우리 민족 역시 대표적인 디아스포라민족이다. 중국의 조선족(朝鮮族), 러시아와 중앙아시아의 고려사람, 일본의 자이니치(在日) 그리고 미국의 코리안-아메리칸(Korean American)은 한민족 디아스포라의 다른 이름이다. 여느 디아스포라가 그렇듯 한민족 디아스포라도 현지 사회의 어엿한 한 구성원으로 인정받으면서도 한민족으로서 고유성을 지켜나가기 위해 분투하고 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화두를 잡고서…. 한민족 디아스포라들은 저마다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이주한 시기가 다르고 정착한 현지 사회가 다르기 때문이다. 현지 사회의 변화는 디아스포라의 운명을 바꾸어 놓기도 한다. 그런 면에서 차르의 신민에서 소련의 공민으로, 다시 러시아와 중앙아시아 각 공화국의 국민으로 바뀌어간 ‘고려사람’들은 역사의 굴곡만큼 다양한 변화를 겪은 디아스포라라고 할 수 있다. alt 연해주 인근 바다에 떠 있는 한인 화물선(좌),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교외의 한인들 (1890년대 추정)(우) 연해주 한인사회와 권업회 160년에 이르는 ‘고려사람’의 역사는 1860년 베이징조약 체결로 러시아가 연해주를 획득하면서 시작되었다. 조선 후기 기근과 봉건정부의 폭압을 피해 새로운 땅으로 이주한 함경도의 한인들은 연해주 곳곳에 한인마을을 만들면서 초기 한인 디아스포라의 터전을 다졌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에 조국의 독립을 위해 망명한 지사들이 합류하면서 한인사회는 더욱 성장해 갔다. 초기 연해주 한인 디아스포라의 성장을 보여주는 기관이 1911년 12월 19일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서 자치기관으로 조직된 권업회이다. “실업을 권장(勸業)한다”는 명칭에서도 알 수 있듯, 권업회는 러시아에 거주하는 한인들을 위한 경제주의 단체였다. 다른 나라 땅인 연해주에서 한인들이 그 사회의 구성원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은 실력을 갖추어야 했다. 이를 위해 권업회는 한인의 실업을 권장하고, 직업과 일터를 알선하며, 생활의 기반을 다지기 위하여 저축을 장려하고, 상애상신(相愛相信)의 친목을 도모하여 문명의 행동을 도모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이 목표 아래 권업회는 한인들이 거주하는 각지에 지회를 설치하고 회원 모집에 박차를 가했다. 블라디보스토크의 중앙조직 외에 니콜라예프스크(니항)·하바롭스크·이만·우수리스크·수청·연추 등 10여 곳에 지회가 설립되었다. 회원은 1914년 7월에 1만여 명에 이르렀다. 당시 연해주에 거주하던 한인의 수가 10만 명 정도였던 사실을 고려하면, 권업회는 그야말로 한인들의 대기관이었다. 권업회가 주력을 쏟은 사업은 교육과 언론이었다. 권업회는 먼저 블라디보스토크 개척리에서 신한촌으로 옮겨온 계동학교를 개편하여 한민학교로 확장했다. 한민학교는 한인사회에서 민족주의 교육의 중추기관이 되었다. 한민학교 외에도 한인마을이 들어선 곳마다 거의 예외 없이 한인학교가 설립되었다. 교육의 내용은 철저한 민족주의 근대교육이었다. 또한 권업회는 1912년 4월 22일 기관지인 『권업신문』을 창간했다. 『해조신문』(1908), 『대동공보』(1909), 『대양보』(1911)를 잇는 러시아 지역 한인의 대표적 언론이었던 『권업신문』의 발행 목적은 권업회 사업의 홍보를 넘어 항일 민족 언론의 약진을 기함에 있었다. 『권업신문』은 권업회를 통해 연해주 구석구석의 한인마을은 물론 국내와 서북간도·미주 등지의 한인사회에까지 보급되었다.  한글신문을 통해 한인들을 계몽하고, 한인학교를 통해 민족교육을 실시했던 권업회의 활동은 러시아에 거주하는 한민족으로서 ‘이중 정체성’을 해결하고자 했던 연해주 한인 디아스포라의 분투를 잘 보여주고 있다. alt 권업회 임원록 서문(좌), 권업회에서 발행한 기관지 『권업신문』(우) 독립운동기관 권업회와 대한광복군정부 권업회는 비록 표면상으로 경제주의 단체를 표방했지만, 결코 이에 머무르지는 않았다. 권업회가 조직된 시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권업회의 창립을 위한 움직임은 1911년 6월 발기회를 조직하면서 시작되었는데, 일제가 조선을 강점한 지 10개월여가 지난 시점이다.  이전 시기 연해주는 1908년 의병부터 시작해 안중근 의사의 의거 지원 그리고 십삼도의군(十三道義軍)의 편성까지 국외 독립운동의 기지 역할을 했다. 일제가 조선을 강점하자 연해주의 한인들은 성명회(聲明會)를 조직해 ‘합병’의 원천무효와 한민족의 자주권과 독립결의를 주창한 선언서를 발표했다. 선언서 말미에는 연해주와 간도 일대에 거주하던 한인 8,624명의 서명록이 첨부되었다. 하지만 일제의 강력한 항의로 성명회가 해체되고 난 뒤 연해주의 한인 민족운동가들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보다 현실적이고 장기적인 방략을 모색했다. 이에 ‘조국독립’을 최고 이념으로 삼은 러시아지역 한인의 자치결사인 권업회가 조직되었다. 계봉우는 『권업신문』에 게재한 「아령실기(俄領實記)」에서 “회명을 권업이라 함은 왜구의 교섭 상 방해를 피하기 위함이요. 실제 내용은 광복사업의 대기관으로 된 것이다.”라고 밝혔다. 권업회의 주요 사업이었던 교육과 언론 역시 인재양성과 한인 계몽을 통해 독립운동을 지속하려는 시도였다. 『권업신문』의 주필은 당시 연해주에 망명해 있던 신채호를 비롯하여 이상설·김하구 등 독립운동가들이 차례로 맡았다.  권업회에는 연해주 한인사회의 중요 항일민족운동자들이 총망라되어 있었다. 연해주 한인사회의 큰 어른인 최재형과 저명한 의병대장 홍범도가 발기회의 회장과 부회장을 맡았으며, 창립총회에서 헤이그특사 이상설이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당시 연해주에서 파벌을 이루어 대립하고 있던 서북파(평안도파)·북도파(함경도파)·기호파의 인물들도 모두 권업회에 참여했다. 이들은 ‘조국독립’이라는 역사적 사명 앞에 계파를 초월한 단합을 이루어 권업회를 결성했던 것이다. 결국 권업회는 연해주 한인사회의 이익을 증진시키는 ‘권업’(경제) 문제와 독립운동을 강력히 추진하는 ‘항일’(정치) 과제를 결부시키는 전술을 취하여 끝내는 ‘조국독립’을 달성하고자 했다. 권업회는 ‘조국독립’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독립군을 양성하고자 했다. 그러나 남의 나라에서 공공연히 군대를 양성하기는 어려웠다. 따라서 독립군을 주축으로 국내외의 모든 독립운동을 주도할 중추기관으로 조직된 것이 대한광복군정부였다. 대한광복군정부는 권업회의 이면에 존재하는 비밀군사지휘부였다. 이후 각지에서 설립되는 망명정부들의 효시가 된 이 정부가 ‘광복군정부’라고 이름을 정한 이유는 독립군(광복군)을 조직하여 일제와의 독립전쟁을 총괄하는 ‘군사정부’로 스스로의 성격을 규정했기 때문이다. 비록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목적을 이루지 못한 채 해체되고 말았지만, 권업회와 대한광복군정부는 러시아혁명 이후 연해주 한인들이 재개한 항일독립투쟁의 선구적 역할을 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또한 권업회는 ‘이중 정체성’을 가지고 현지 사회의 어엿한 한 구성원으로 인정받으면서도, 한민족으로서 고유성을 지켜나가는 한민족 디아스포라의 전형이었다고 하겠다. alt   ]]> Fri, 01 Dec 2023 15:52:05 +0000 85 <![CDATA[한눈에 보기 키워드로 보는 권업회의 주요 활동]]> 한눈에 보기키워드로 보는 권업회의 주요 활동  정리 편집실  alt  ]]> Fri, 01 Dec 2023 15:57:25 +0000 85 <![CDATA[이달의 독립운동가 민족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헌신한 부부 독립운동가 문일민·안혜순]]> 이달의 독립운동가민족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헌신한  부부 독립운동가문일민·안혜순   글 독립기념관 전시부   alt   부부, 독립운동을 함께 하다 일제강점기 빼앗긴 나라를 되찾고 민족의 자유를 회복하기 위해 한인들은 온 가족이 함께 나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그중에는 부자(父子), 형제(兄弟)뿐 아니라 부부(夫婦)가 독립운동에 나선 경우도 있었다. 이들은 독립운동이 전개되는 곳에서 함께 투쟁하거나 독립운동에 나선 남편을 보좌해 부인이 생계를 유지하고 활동을 뒷받침하는 등 역할을 분담하며 부부이자 동지로서 활약했다. 문일민 가족의 경우, 남편인 문일민은 1920년에 평남도청 투탄 의거를 성공시킨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을 오가며 적극적으로 활동했고, 아내 안혜순은 문일민을 도와 힘든 집안 살림을 꾸리며 생계를 이어 나가는 방식으로 조국 독립을 위한 활동을 함께했다. alt 「부인과 독립운동」, 『독립신문』 (1920.2.17.)_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 제공 평남도청 투탄 의거의 주역이자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시의정원에서 활동한 문일민 문일민은 1894년 12월 평안남도 강서군에서 태어나 1906년 함일학교(咸一學校)에 입학했다. 1919년 3·1운동에 참여하고 중국으로 건너가 같은 해 7월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해 군사훈련을 받았다. 곧이어 대한청년단연합회(大韓靑年團聯合會)에 가입해 별동대 대원으로 활동하던 중 1920년 8월 3일 광복군총영(光復軍總營)의 국내 특공대로 평양으로 잠입, 평남도청 투탄 의거를 성공시켰다. 1924년 중국 윈난강무학교(雲南講武學校)에 입학했고, 1925년 2월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평안남도 의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했다. 이후 병인의용대(丙寅義勇隊)·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 등에 참여해 군사 관련 활동을 전개했으며 1930년에는 흥사단에 가입했다.그는 윤봉길의 상하이 의거 이후에도 임시정부를 떠나지 않았고 피난 과정에서 임시의정원 회의에 참석, 적극적인 의정활동을 전개했다. 임시정부가 충칭에 도착한 후에는 1943년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교통부 총무과장, 이듬해 10월 참모부 참모로 임명되어 활동하던 그는 광복 후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께 환국했다. 1947년 10월 미군정청 앞에서 자주독립을 주장하며 할복 의거를 단행하기도 했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  alt 「평양에 폭탄사건」 『매일신보』 (1920.8.19.)_국립중앙도서관 제공 alt 윈난강무학교 동학록(雲南講武學校 同學錄)에 실린 문일민의 모습(좌), 대한민국 제34회 임시의정원 의원 기념 사진 (1942.10.25.)(우) 살림을 꾸리며 독립운동을 지원한 안혜순 안혜순은 1903년 1월 평안북도 의주군에서 태어났다.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일찍이 중국으로 이주했고 1928년 중국 베이징(北京)에서 문일민과 결혼해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던 상하이에 머물렀다. 1932년 윤봉길의 상하이 의거 준비 과정에서 안혜순은 한인애국단 단장 김구의 요청에 따라 의거에 사용될 빈 도시락을 준비했다고 전해진다. 안혜순은 1935년 2월 상하이 한인애국부인회의 정기총회를 주도했고 이듬해 12월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의뢰로 각종 기념일에 필요한 기념 전단을 인쇄하고 배부하는 일을 수행했다. 안혜순은 겉으로 드러난 독립운동을 한 것은 아니었지만, 남편 문일민을 보좌하기 위해 상하이, 충칭에 머물며 힘겨운 망명생활을 묵묵히 이겨냈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2019년 건국포장을 추서했다. alt 문일민과 두 아들 (1930)(좌), 장년 시절의 안혜순국가보훈부 제공(우) alt   ]]> Fri, 01 Dec 2023 16:09:33 +0000 85 <![CDATA[끝나지 않은 독립운동 하와이 ‘사진 신부’ 여성독립운동가를 기리며]]> 끝나지 않은 독립운동하와이 ‘사진 신부’ 여성독립운동가를 기리며   글 이계형 (국민대학교 교양대학 교수)   근래 독립운동계에서 주목받는 이슈는 여성독립운동가이다. 일제강점기에 여성들은 전근대적인 사회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해서 근대교육을 충분히 받지 못하였고,  사회활동이나 독립적인 경제생활은 엄두도 내지 못하였다. 그런 만큼 여성독립운동가는 남성보다 그 수가 매우 적다.  이러한 제한적인 상황에서도 여성들은 3·1운동과 학생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나 광복군에서 남편과 뜻을 같이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외에도 미주에서 활동한 여성독립운동가들이 적지 않다. 그중에서도 ‘사진 신부(picture bride)’들의 독립운동에 주목하고자 한다.    alt 하와이로 건너간 ‘사진 신부’들 (1910년대) 121년 전, 하와이로 간 한인들 정부로부터 미주지역 독립유공자로 선정된 여성은 2023년 11월 현재 55명이다. 1995년에 박원신(건국훈장 애족장)과 강혜원(건국훈장 애국장)이 처음 포상받은 이후 1997년 2명, 1998년 1명, 2002년 2명, 2008년 1명 등으로 가뭄에 콩 나듯이 하다가, 2014년부터는 매년 이어졌고 적게는 2명, 많게는 11명(2022년)에 달하였다. 그 가운데 23명은 1902년 12월 이후 하와이 이민을 간 노동자들이거나 그 자제들, 미국 유학생, 국내 혹은 상하이에서 독립운동을 펼치다 망명한 이들이다. 이들을 제외한 나머지 32명은 ‘사진 신부’로 보이는데, 58.2%로 절반을 훨씬 넘는다. ‘사진 신부’ 여성독립운동가들을 언급하기 전에 하와이 이민 과정을 간략히 살펴보려 한다. 지금으로부터 121년 전, 이맘때인 1902년 12월 22일 오후 2시 우리나라 첫 이민자 121명이 겐카이마루(玄海丸) 일본 선박을 이용하여 인천항을 출발하였다. 이 배는 목포와 부산을 거쳐 이틀 후인 12월 24일 일본 나가사키항에 정박했다. 신체검사를 통과한 한인 101명(남성 55명, 여성 21명, 아동 25명)만이 12월 29일 미국 상선 갤릭(Gaelic)호로 옮겨 타 이듬해인 1903년 1월 13일 이른 오전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했다. 이들이 한인 최초의 공식 이민자로 기록되었다. 이후 1905년 8월 8일 몽골리아호가 호놀룰루에 도착한 것을 끝으로 모두 65편의 여객선이 오갔고, 그 인원은 7,400여 명에 달했다. 이들은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의 노동자로 고용되었다. 하와이 이민이 중단된 것은 을사늑약 이후 한국을 반식민지로 만들었던 일제가 한인 노동력을 통제하려는 이유도 있었고, 미국 내 한인 증가로 인한 일본인 세력의 위축을 우려한 측면도 있었다. 하와이 이민자 7,400여 명 가운데 성인 남성은 6,300여 명, 여성은 640여 명, 아동은 550여 명이었다. 남편을 따라온 기혼 여성이 420여 명인 반면에 남성 기혼자가 2,800여 명이었기에 대부분 남성은 가족을 고향에 두고 왔거나 미혼자들이었다. 미혼자들은 남녀 모두 20~30대로서 79.98%를 차지할 정도로 많았다. 여성 미혼자들은 대개 부모나 친척을 따라온 경우이다. 그 결과 여러 사회문제가 발생하였다. 독신자 남성이 과반이 넘었기에 도박과 폭행 사건들이 빈번하였고, 무엇보다도 결혼 적령기 남성들 문제도 컸다. 당시 남녀 비율이 10대 1로 매우 불균형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독신 한인 남성들이 하와이 현지에서 타국인과 결혼하는 것은 사실상 거의 불가능하였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방안으로 모색된 것이 ‘사진 신부’였다. alt 하와이 이민선 갤릭호(좌),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는 한인들(우) 주체적으로 자신의 삶을 선택한 ‘사진 신부’들 이와 관련하여 ‘사진 신부’가 이뤄지는 과정부터 살펴보자. 한인 이민이 이뤄지기 전인 19세기 중엽부터 중국인 노동자들이 미 대륙으로 들어오기 시작하였는데, 이와 함께 중국인 성매매 여성의 숫자도 많아졌다. 결국 1882년 미국 연방법 최초로 ‘중국인 차별법(Chinese Exclusion Law)’이 제정되었다. 이후 중국인 노동자의 유입이 중단되었고, 일본인 노동자가 그 자리를 메꿨다. 그런데 이들은 노동 이민이 아닌 미국 내에 정착하려고 하면서 문제가 발생하였다. 이들은 부당한 노동 여건을 파업으로 해결하려고 하였고, 농장주들은 이에 따라 골머리를 앓았다. 또한 미국 본토로 건너간 일본인들이 노동시장을 잠식하여 백인 노동자들로부터 반일 여론도 크게 일었다. 결국 미 정부는 일본인 대신 한인 노동자로 대체하는 한편, 1907년 3월에는 ‘행정명령’으로 일본인의 이민을 제한하였다. 이후 1908년 일본은 미국과의 협상을 통해 인도적 차원의 가족 입국만큼은 허용한다는 단서 조항을 얻어냈다. 이때 일본 남성의 독신자를 위해 고안한 것이 ‘사진 신부’였다. 사진으로만 ‘맞선’을 본 뒤 마음에 들면 혼인신고를 하고 하와이로 입국하는 형식이었다. 1910년 8월 한국이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한 뒤 한인 여성도 같은 방법으로 미국으로 건너갔다.한인 여성의 ‘사진 신부’는 1910년 11월부터 ‘일본인 배척법’에 의해 중단되는 1924년 10월까지 모두 1,056명이 미국으로 이주해 갔다. 이들은 대개 10대 중반부터 20대 초반으로 수동적으로 결혼을 위해 도미(渡美)하기도 했지만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성향을 내보이기도 했다. 그들은 일제의 식민지를 벗어나 새로운 기회를 얻기 위한 의지도 강했고, 도미하여 학업을 이어가려는 욕구도 컸다. 그런데 ‘사진 신부’는 중매쟁이를 통해 하와이의 신랑감과 사진, 서신을 교환하는 것으로만 결혼 여부를 결정해야 했기에 무모한 도전이기도 하였다. 더욱이 남자들은 조금이라도 나은 처를 얻고자 나이를 속이거나 사진을 조작하는 게 다반사였기에 막상 건너온 ‘사진 신부’들은 막다른 현실에 망연자실하기도 하였다. 신부와의 나이 차가 많은 경우도 적지 않았고 신랑의 경제적 여건은 열악하였으며, 일부는 남편의 구타와 학대를 당한 사람도 있었다. 특히, 신부들과 달리 신랑이 무학력자가 많아 문제가 되자, 현지 발행 신문인 『신한민보』는 한인 남성들에게 자신의 여건 및 자격과 맞는 여성과 결혼할 것을 충고하기도 하였다. 이렇듯 여러 병폐가 있었지만, ‘사진 신부’와 더불어 고국에 남겨두고 온 부인들과 자녀들이 하와이로 건너가면서 여성들의 숫자가 늘어나 심한 불균형을 보였던 남녀 비율이 점차 개선되었다. 가정을 일군 여성들은 고달픈 여건 속에서도 자녀들을 낳고 그들을 교육하는가 하면 농장 노동자로서 안정된 삶을 위해 노력하였다. 더욱이 이들은 조국의 현실을 안타깝게 여겨 독립을 위해 여성단체의 일원으로서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는데, 이는 그들이 국내에서 일제의 식민지인으로 살았던 경험이 있었기에 배일 의식이 강했기 때문이다.  alt ‘사진 신부’ 강희근의 일본제국 해외여권 (1917.2.7.)(좌), ‘사진 신부’ 여성독립운동가 김차순(가운데)과 일행(우) 이국땅에서도 조국의 독립을 꿈꾼 ‘사진 신부’ 여성독립운동가 ‘사진 신부’ 여성독립운동가 32명은 강메불·곽명숙·김공도·김덕세·김도연·김복순·김석은·김성례·김영도·김자혜·김차순·문또라·박경애·박금우·박보광·박신애·박정경·박정금·박혜경·박인숙·승정한·심영신·이정송·이제현·이묘옥·이선희·이영옥·이함나·이희경·전수산·천연희·황혜수 등이다(가나다 순). 이들은 하와이로 건너오는 시기가 각기 달라 나이를 판가름하기 어렵지만, 1915년을 기준으로 환산하면 25.3세(생년미상 8명 제외)였다. 나이대가 10대 중반부터 40대 초중반에 걸쳐 있는 것을 보면, 과부들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전체 ‘사진 신부’ 1,056명 가운데 극히 일부이지만, 고단하고 힘든 상황에서도 여성단체를 조직하여 서로 격려하고 상호부조를 하는 한편, 빼앗긴 조국 독립을 위해 독립금과 의연금을 모아 대한민국 임시정부 등 독립운동 단체에 힘을 보탰다. 또한 이들은 식민지 조국의 각종 재난에도 구제금을 보냈으며, 태평양전쟁 중에는 미국에서 발행된 전시공채를 구입하거나, 전쟁으로 희생된 한인들을 위한 구제 활동까지도 벌였다. 그 가운데 강메불[임정수]·김도연[윤응호]·김석은[김홍균]·김성례[이암]·김자혜[김은해]·박정경[박충섭]·승정한[승용환]·이정송[안원규]·이제현[양주은]·이함나[민의식]·이희경[권도인]·한덕세[김형순] 등 12쌍은 부부 독립운동가이다([ ]은 남편 이름). 그런데 통상 부부 독립운동가라면 여성은 남편보다 서훈을 늦게 받거나 훈격이 낮은 데 비하여, 김자혜·이함나·강메불·김성례 등은 남편보다 먼저 서훈을 받거나 같이 받았다. 또한 나머지 20여 명은 독자적으로 활동하였다고 한다면, 그들이 얼마큼 주도적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했는지를 가늠해 볼 수 있다. 그런데 ‘사진 신부’ 여성독립운동가를 비롯하여 미주지역에서 활동하였던 분들과 관련하여 주목하지 않은 점이 있다. 공훈록이나 신문 등에 이들의 이름이 서양식에 따라 남편 성을 따라 기록된 예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가 뒤섞여 있다. 이는 단지 제도에 따른 것이기 때문에 본래 그들의 성으로 바꿔야 한다. 여성독립운동가 중에서 남편의 이름이 확인된 38명 가운데, 본래 자신의 성으로 기록된 것은 강혜원[김성권]·공백순[배의환]·김낙희[백일규]·김노디[손00]·김대순[양희용]·김도연[윤응호]·김정성[차정석]·박금우[정시준]·박영숙[한시대]·심영신[조문칠]·이혜련[안창호]·이희경[권도인]·임배세[김경]·전수산[이동빈]·차보석[황사선]·차인재[임치호]·천연희 등 17명 정도이다([ ]은 남편 이름). 이런 경우에 ‘이명’에 남편 성을 딴 이름이 들어가 있지만, 나머지 21명은 ‘이명’란에 본인의 이름이 표기되어 있다. 아울러 확인되지 않은 분의 경우도 남편을 찾아서 비워 둔 ‘이명’란을 채워야 할 것이다. 이는 우리가 해야 할 최소의 예우가 아닌가 한다.    ]]> Fri, 01 Dec 2023 16:33:30 +0000 85 <![CDATA[어제와 오늘을 잇는 사람 ‘역사의 대중화’를 실천하는 역사 커뮤니케이터 최태성]]> 어제와 오늘을 잇는 사람‘역사의 대중화’를 실천하는역사 커뮤니케이터최태성   글 편집실 사진제공 별★별한국사연구소   균형 잡힌 역사관과 보는 이를 유쾌하게 만드는 특유의 에너지, 강의마다 뭉클한 감동을 선사하는 탁월한 스토리텔링 능력까지. 누적 수강생 700만 명에게 ‘실질적 도움’과 ‘따듯한 응원’을 전해 온 한국사 강사인 동시에,  대중 역사서 집필을 통해 ‘역사의 대중화’를 실천해 온 작가인 최태성에게 ‘역사’란 무엇인지 물었다. 강의하고, 책도 쓰고, 방송도 하느라 눈코 뜰 사이 없을 텐데 늘 활기차 보인다.  분주한 일상을 보내고 있지만, 한국사를 알리는 일은 여전히 즐겁다. 나처럼 역사를 업으로 삼은 사람들 대부분이 낙천적이고 긍정적이다. 우리는 결론적으로 볼 때 ‘역사는 좀 더 나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늘 오늘보다는 내일이 나아질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역사를 알리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고 있다. 바쁜 나날 속에 보람된 순간이 있다면? 수강생들이 “제 인생은 선생님의 강의를 듣기 전과 후로 나뉜다”, “선생님 덕에 역사 공부가 재밌다” 등과 같은 후기를 들려 줄 때 가장 행복하다. 인생의 행복은 돈을 남기는 것도, 명예를 남기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가장 의미 있는 일은 내가 사는 사회에 건강한 가치를 남기는 일이라고 생각하는데, 조금이나마 그런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에 뿌듯하다. alt 강연 스케치 학교 교실에서 20년간 학생들과 호흡하다, 2017년 사교육 업계에 뛰어들었다. 좋은 교사가 되는 것. 오직 그 꿈을 위해 1997년부터 20년간 고등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치면서 EBS 무료 강의를 했다. 어느 순간 ‘교육 사각지대에 있는 학생들에게 양질의 강의를 전하자’라고 생각했고, 고심 끝에 퇴사를 해 2017년 사교육 업계에 뛰어들었다. 역사를 알리는 창구만 있다면 그곳이 내 무대라고 생각한다.   사교육 시장으로 옮긴 뒤에도, 온라인 강의를 무료로 제공해 오고 있다. 기본적으로 ‘교육은 공유돼야 한다’는 것이 나의 철학이다. 또한 ‘역사는 사교육이 아니라 평생교육이라는 체제 안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많은 사람에게 무료로 좋은 콘텐츠를 접할 기회를 주고 싶었다. 현재 EBS와 이투스, 유튜브를 통하여 무료 강의를 제공하고 있다. 각자 접근하기 편한 채널을 이용하면 된다. 교사나 부모가 아이에게 역사를 가르칠 때, 조심해야 하는 부분이 있다면?  사건이나 연도를 무턱대로 암기시키는 것을 조심해야 한다. 강박적으로 암기만 시키는 부모들이 많은데, 이것이 바로 아이들이 역사를 싫어하게 되는 지름길이다. 중요한 것은 역사적 사건과 내 삶의 연결 고리를 찾는 일이다. 내 삶에 자극과 영감을 줄 수 있는 무엇. 그것을 얻는 게 역사 학습의 목표이다. 시간이 흘러 개별적인 사건을 잊는다고 해도, 그 사건에 접근하는 과정에서 느낀 내 삶에 대한 적용성. 이것이 매우 중요하다. 비록 사건과 연도를 외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이런 것들로 인해 진정한 역사를 배우고 성장할 수 있다. 역사 관련 서적을 많이 집필하였는데, 최근 한국사 일력을 출간했다.  과거 오늘과 관련된 역사적 인물·사건·문화유산을 소개하는 『최태성의 365 한국사 일력』을 출간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국가 고조선이 세워진 날부터 2022년 누리호 2차 발사 성공의 날까지 5,000년 한국사를 망라한다. 역사를 알아가는 재미를 알리기 위해 고민을 거듭한 결과로, 하루 한 장을 넘기기만 해도 저절로 역사 지식이 쌓이고, 이야깃거리가 생기며 매일 오늘의 의미를 발견하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alt 『최태성의 365 한국사 일력』(2023.11.) 역사 교육을 대표하는 한 사람으로서, 최태성이 생각하는 역사란 무엇인지 궁금하다. 역사란 ‘사람을 만나는 인문학’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역사를 단순히 암기하는 과목으로 알고 있는데, 그것은 역사의 본질이 아니다. 역사는 과거의 사람을 만나면서 내가 어떻게 살 것인지, 건강한 삶은 무엇인지, 그 삶을 통해 어떻게 행복할 것인지 고민하는 지점을 형성하게 하는 학문이다. 그렇기에 많은 사람이 역사를 단순히 암기과목이 아닌 인문학으로 생각했으면 한다. 이 시대에 우리는 왜 역사를 배워야 할까? 우리는 불확실성의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럼에도 선택을 해야 할 때, 그 답을 알면 좋지 않겠나. 놀랍게도 그 답은 이미 역사의 데이터베이스에 충분히 쌓여있다. 역사는 내가 내린 결론이 나를 행복하게 해줄지에 대한 대답을 희미하게나마 제시해 준다. 우리는 운전할 때 안전하게 잘 가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백미러를 확인하지 않나. 역사를 배우는 이유도 마찬가지이다. 역사를 배운다는 것은 과거를 돌아보며 얻은 지혜로, 지금 내 옆 사람부터 저 미래세대와의 연결까지 가능하게 하는 행위이다. “역사란 ‘사람을 만나는 인문학’다. 역사는 과거의 사람을 만나면서  내가 어떻게 살 것인지, 건강한 삶은 무엇인지, 그 삶을 통해 어떻게 행복할 것인지 고민하는 지점을 형성한다.  그렇기에 많은 사람이 역사를 단순한 암기과목 아닌 인문학으로 생각했으면 한다.”   ]]> Fri, 01 Dec 2023 16:46:59 +0000 85 <![CDATA[기념관이 발굴한 독립운동가 수원의 비밀결사 ‘구국민단’과 ‘여학생들’의 활약]]> 기념관이 발굴한 독립운동가수원의 비밀결사 ‘구국민단’과 ‘여학생들’의 활약   글 독립기념관 독립운동가 자료발굴TF팀   독립기념관은 2018년부터 독립운동가를 발굴하여 국가보훈부에 유공자로 포상 추천하고 있다. 국가와 국민을 위해 희생한 분을 존중하고 기억하는 정부의 의지와 국민적 관심을 담은 것이다.  2023년 매월 독립기념관이 발굴한 독립운동가를 소개한다.   최문순(崔文順) 본적 및 주소 : 경기도 수원군 수원면 남수리 187 생몰 : 1904. ~ 미상 포상 : 2018년 훈격 : 대통령표창 운동방면 : 국내항일 활발히 독립운동이 일어난 수원 일제의 무단통치는 제국주의 역사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는 가혹한 식민지 지배 방식이었다. 1910년대는 폭압적 무단통치 시기였고, 헌병·경찰은 그 전위로써 강압적 수단이었다. 이 시기 일제는 토지조사사업(土地調査事業)을 통해 토지를 수탈하고, 식민지적 농업체계로의 전환을 강요하였다. 수원지역도 서울의 관문으로 영농에 상당히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어 동양척식주식회사의 토지조사사업 대상이었다. 일제가 다수의 토지를 소유함에 따라 수원은 다른 지역에 비해 자작농이 적어 농민들의 불만의 소지가 큰 지역이었다.  1919년 기준 인구학적으로도 3천 명 소수 일본인이 약 14만 명 다수 수원지역의 한국인을 지배하는 형태를 띠고 있어, 만세운동이 더욱 활발히 일어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3·1운동 이후에도 수원지역의 항일운동은 계속되었지만, 만세운동처럼 공개적인 운동은 아니었다. 수원을 중심으로 한 항일세력은 일제의 감시망을 피해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대일투쟁을 전개하였다.  alt 수원권업모범장 건물(좌), 수원권업모범장 전경(우) 그럼에도 멈추지 않은 수원지역의 독립운동 3·1운동 이후 일제의 감시가 강화되자 수원에서는 혈복단(血復團)이라는 비밀결사가 조직되었다. 혈복단은 서울에서 1919년부터 1920년까지 비밀결사로 활동하였던 대한독립애국단(大漢獨立愛國團)이 와해된 후 그 중심인물들이 재결성한 단체이다. 이 단체는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는 한편, 임시정부의 문서와 『독립신문』을 지역 주민에게 배포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함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  수원 혈복단을 결성하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한 것은 이득수(李得壽)와 박선태(朴善泰)였다. 이득수는 경성기독교청년학관 학생으로서 자신의 한문선생이던 차관호를 통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연결되어 있었다. 1919년 9월경 이득수는 휘문고등보통학교 4년생으로 수원에서 서울로 통학하고 있던 박선태를 만났다. 이득수는 상하이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투신하려던 박선태를 설득하여 수원을 중심으로 동지를 규합하고, 『독립신문』과 『대한민보』 등을 배포하고자 혈복단을 조직하였다. 수원의 비밀결사 조직, 구국민단(救國民團) 결성 박선태·이득수 등은 수원지역에 거주하면서 서울로 통학하고 있는 학생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조직을 결성하고자 하였다. 바로 구국민단이 결성되는 순간이다. 여기에 일조한 것이 김보윤(金甫潤)이다.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대한적십자회에 관여하고 있었다. 1919년 12월경 대한적십자회에서는 병원 설립과 간호부 양성을 위해 국내에서 회원을 모집하였는데, 김보윤은 수원지역에서 적십자 회원을 모집할 조직을 만들고자 하였다.  이득수는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여학생들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1920년 6월경 여학생들을 가입시키기 위해 삼일여고 교사인 차인재(車仁載)에게 도움을 요청하여 3명의 여학생을 소개받았다.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3년생인 이선경(李善卿),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 2년생인 임순남(林順男)과 최문순(崔文順)이다. 이들은 모두 수원에 거주한 서울 통학생들로 항일운동의 요람인 수원교회의 교사로서 활동하던 기독교인들이었다. 그중 임순남은 수원 삼일학교 졸업생이었고, 최문순은 수원공립보통학교 졸업생이었다.  alt 수원 서호(좌), 수원 삼일여학교 학생과 교사 (연대 미상)(우) 구국민단에서 활약한 여학생들 조직 선정을 마친 구국민단은 다음과 같은 2대 목표를 설정하였다. 1. 한일합방에 반대하여 조선을 일본제국 통치하에서 이탈케 하여 독립 국가를 조직할 것 2. 독립운동을 하다가 입감되어 있는 사람의 유족을 구조할 것 위와 같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구국민단 단원들은 매주 금요일에 수원 읍내 삼일학교에서 회합하여 『독립신문』의 배포를 담당하기로 서약하였다. 특히 최문순을 포함한 여학생 3명은 기회를 보아 상하이로 가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간호부가 되어 미일전쟁이 발발하였을 때 힘을 다해 독립운동을 도울 것을 맹세하였다. 구국민단의 재무부장을 맡게 된 최문순은 모임이 있을 때마다 당시의 활동 상황을 암호로 기록하여 일기를 작성하였다.  1920년 6월부터 단원들은 『독립신문』과 『애국창가집』을 입수하여 수원 지역 민가에 배포하는 한편 수원 엡윗청년회 등 청년단체, 수원 종로의 감리교회에서 조직한 여보호회(女保護會) 등 여성단체들과 유대관계를 맺고 조직 확대에 힘썼다. 이처럼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던 단원들은 1920년 8월 체포되어 1921년 4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정치범 처벌령’ 위반 죄목으로 최문순 등 여학생들은 징역 1년·집행유예 3년을, 박선태와 이득수는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alt 「수원에서 체포된 구국민단 6명, 꽃 같은 여자가 대부분이다」, 『매일신보』 (1920.8.20.) 비밀결사와 그 후, 교육열을 칭송받다 비록 구국민단 활동의 막을 내렸으나 최문순을 비롯한 여학생들은 출옥 후 그 열정을 교육활동에 쏟았다. 1924년 수원 종로에 있는 기독교 여보호회에서 경영하던 부인야학이 재정상의 문제로 폐교될 상황에 처하였다. 당시 15세 이상의 여성들이 물밀듯 입학하러 왔을 정도로 높았던 교육열이 사그라질 위기였다.  이때 삼일여학교 교사였던 최문순은 김온순(金溫順)·이재순(李載順)과 함께 자진하여 야학 교사로 나섰다. 가까스로 되살아난 부인야학교에는 수업을 듣는 학생이 40명이나 되었으며, 계속해서 입학원서가 들어올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고 한다. 최문순을 포함한 선생들의 교육열을 칭송하는 『동아일보』의 기사처럼 여학생들의 독립운동은 계속되었다.   ]]> Fri, 01 Dec 2023 17:20:33 +0000 85 <![CDATA[사(史)적인 여행 올곧은 충절과 절의가 깃든 경상북도 영주]]> 사(史)적인 여행올곧은 충절과 절의가 깃든경상북도 영주   글·사진 박광일 (역사여행작가·여행이야기 대표)   볼에 스치는 찬바람이 매서운 겨울이 찾아왔지만, 오히려 좋다. 차분하고 한적한 풍경, 호호 불며 먹는 따뜻한 먹거리, 여기에 눈까지 내리면 겨울 여행의 낭만은 배가 된다.  올겨울 추천 여행지는 소백산 자락에 자리한 경상북도 영주다. 선비의 고장이라 불리는 이곳은 유교 문화뿐만 아니라 나라 사랑을 엿볼 수 있는 의미 있는 장소가 가득하다.   alt 부석사 무량수전(좌), 부석사 조사당(우) 고대 사찰 건축의 미(美), 부석사 부석사(浮石寺)는 신라 문무왕 16년(676년)에 의상대사가 창건한 곳으로, 2018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어 역사유적으로서 특별한 가치를 인정받았다. 국보 5점·보물 6점·경상북도 유형문화재 2점을 보유하고 있는 우리나라 대표적 사찰이다. 특히 유명한 책의 제목이 되기도 한 무량수전은 목조 건물로서 자연과 어우러지는 우리나라 건축의 아름다움을 잘 담고 있는 법당이다. 이 건물은 고려시대의 건축물로 주심포 양식과 배흘림기둥이 특징이다. 우리나라의 목조 건물은 대체로 무게가 있는 거대한 지붕 때문에 그 자체로 위엄있어 보이지만, 반면에 다소 갑갑한 느낌을 줄 때도 있다. 그러나 부석사의 무량수전은 지붕을 받치고 있는 곡선 모양의 불룩한 배흘림기둥 덕분에 가뿐하고 경쾌한 느낌을 준다. 더불어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목조 건물 가운데 안동 봉정사 극락전(국보)과 더불어 오래된 건물로서 고대 사찰건축의 구조를 연구하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한편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 바라보는 풍경 또한 압권인데, 소백산맥의 산봉우리가 끊임없이 이어지는 모습은 아름다움을 넘어 장엄함까지 느끼게 한다. 어떻게 이런 멋진 풍광을 찾아냈는지, 이곳을 창건한 의상대사의 안목에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Tip 1. 신비한 설화가 깃든 부석사의 창건 설화 『송고승전(宋高僧傳)』과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부석사의 창건 설화가 수록되어 있다. 의상대사가 당나라에서 유학 후 신라로 귀국할 때 그를 흠모한 여인 선묘가 용으로 변해 이곳까지 따라와서 줄곧 의상대사를 보호했다고 한다. 의상이 절을 지으려 하자 도적떼가 방해했는데, 이때 용이 된 선묘가 큰 바위로 변해 그 무리를 위협해 달아냈다. 마침내 의상대사는 무사히 절을 짓게 되었고, 이후 의상대사는 선묘를 기리기 위해 절의 이름을 ‘부석(浮石)’이라 지었다. 현재 부석사 무량수전 뒤에서는 부석이라 불리는 바위가 있고, 선묘를 기리는 건물인 선묘각이 있다. 이 설화 속 의상대사를 향한 선묘의 마음을, 나라를 지키고자 한 호국의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부석사 주소 & 문의 경북 영주시 부석면 부석사로 345  |  054-633-3464 alt 금성대군 신단(좌), 금성대군 신단(우) 충절과 절의의 상징, 금성대군 신단 부석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소수서원(紹修書院)이 있다. 이곳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으로, 나라에서 편액을 내려 공인한 서원이다. 그 옆에 문화체험을 할 수 있는 선비촌과 소수서원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소수박물관이 있다. 더불어 충절을 상징하는 공간도 근처에 자리 잡고 있는데, 바로 금성대군 신단(神壇)이다. 신단이라고 하면 ‘신을 모시는 제단’으로, 이곳은 ‘금성대군이 신이 되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처럼 불리게 된 사연은 역사 속 비극과 관련이 있다. 과거 문종이 재위 2년 3개월 만에 죽고 12세의 어린 나이로 단종이 즉위하자, 단종의 작은아버지이자 세종의 둘째 아들인 수양대군은 1453년 10월 이른바 계유정난(癸酉靖亂)을 일으켰다. 이 정변으로 수양대군은 스스로 왕위에 올랐고 단종을 이름뿐인 상왕(上王)으로 삼았으며, 곧이어 단종을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하여 영월로 유배까지 보냈다. 이에 단종을 지지하던 세종의 여섯째 아들인 금성대군은 순흥도호부(현 영주 지역)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 이후 1457년 금성대군은 순흥의 여러 선비와 함께 단종복위운동을 추진하였으나, 이러한 계획이 사전에 발각되면서 금성대군과 순흥부사 그리고 이 지역의 선비들은 모두 죽임을 당했다. 당시 순흥도호부 백성들은 금성대군의 충절을 높이 받들어, 그를 기리고 제사를 지낼 단을 쌓았다. 또한 금성대군을 신령처럼 모셔 이 제단에 신단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과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금성대군은 영주 지역민들에게 정신적 지주이자 화신으로 추앙받고 있다. 이 밖에도 오늘날 민속문화제의 일환으로 성대하게 거행되고 있는 ‘두레골 성황제’는 영주 지역민들이 금성대군을 신격화한 또 하나의 사례라 할 수 있다. Tip 2. 피가 흐르다 멈춘 곳, 피끝마을 1457년 금성대군의 단종복위운동이 실패로 돌아가자, 인근 백성들까지 무참하게 죽임을 당했다. 이때 목숨을 잃은 희생자들의 피가 죽계천을 타고 십여 리를 흐르다 영주시 동천면에서 멈추었다는데, 그리하여 동천면은 피끝마을이라는 또 다른 이름으로 불렸다. 이 사건으로 인해 순흥도호부(현 영주지역)는 폐부되어 풍기군과 영천군 그리고 봉화군으로 분할되는 사건을 겪게 되었고, 인근 30리 안에 산 사람이 없다고 할 정도로 처참한 지경에 이르렀다고 한다.  금성대군 신단 주소 & 문의 경북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  |  054-634-3310 alt 대한광복단 추모탑(좌), 대한광복단기념관(우) 독립정신과 업적의 재조명, 대한광복단기념공원                                                                                                                         영주에는 ‘나라를 위하는 마음’을 엿볼 수 있는 또 하나의 장소가 있다. 바로 풍기읍에 자리한 대한광복단기념공원이다. 이 공원은 1913년 풍기에서 조직된 비밀결사 독립운동단체 대한광복단(풍기광복단)의 정신과 업적을 기리기 위해 조성한 공원으로, 국가보훈부가 지정한 현충시설이다. 대한광복단은 의병 출신 독립운동가들과 계몽운동가, 영남 지역의 유림 등 여러 계층이 참여하였던 비밀결사 조직으로, 군자금 모금·민족반역자 응징·일제관헌 습격·친일부호 총살 등의 항쟁을 벌였다.이 공원의 중심에는 성채를 닮은 전시관이 있는데, 제1전시관에서는 민족독립운동과 의열투쟁·경술국치와 무단통치 등, 제2·3전시관에서는 대한광복단, 제4전시관에서는 영주시의 독립운동사 등을 전시하고 있다. 마지막 제5전시관에서는 선열과 함께하는 사진 체험을 할 수 있다. 이 전시관을 차근차근 둘러보면 조금이나마 대한광복단이 목숨을 걸고 독립운동에 나선 이유를 알 수 있다. 이번 호에 소개한 부석사와 금성대군 신단 또한 처한 상황이 다를 뿐 모두 ‘나라를 위하는 마음’이 깃든 소중한 장소이다. Tip 3. 대한광복단을 주도한 채기중의 업적 대한광복단을 주도한 채기중은 80여 명의 모험용사대를 조직해 만주로부터 권총과 탄환을 구입하여 전국에 출몰하면서 부호의 금고를 털어 군자금으로 제공하였다. 또한 채기중은 강병수와 함께 군자금 탈취를 계획하고 강원도 영월군 상동의 일본인이 경영하는 중석광에 광부로 잠입하여 활동하였으며, 친일 부호를 대상으로 군자금 수합의 활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이후 대한광복단은 대구에서 결성된 조선국권회복단의 일부 인사와 합류하여 1915년 7월 15일 대한광복회로 발전하였다. 하지만 경상도의 거물 친일파인 장승원을 처단하는 과정에서 일제에 대한광복회 조직이 발각되어 채기중·박상진 등이 체포되었고, 이들은 1921년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대한광복단기념공원 주소 & 문의  경북 영주시 풍기읍 산법리 산85-13  |  054-635-3606   ]]> Fri, 01 Dec 2023 17:32:33 +0000 85 <![CDATA[이벤트 공지 월간 독립기념관 설문조사 등 다양한 이벤트에 참여해보세요!]]> 이벤트 공지월간 독립기념관 설문조사 등다양한 이벤트에 참여해보세요!   alt alt  ]]> Fri, 01 Dec 2023 17:57:45 +0000 85 <![CDATA[이달의 기념관 후손이 전하는 독립운동가 서상교의 삶과 업적]]> 이달의 기념관후손이 전하는독립운동가 서상교의 삶과 업적   글 독립기념관 전시부사진 이소연   2023년 11월 ‘이달의 독립운동가’에는 학생비밀결사에서 활동하다가 옥고를 치른 서상교·최낙철·신기철이 선정되었다. 독립기념관은 지난 11월 22일, 서상교 후손 서보현 선생을 모시고 후손초청간담회를 개최했고, 서보현 선생은 이 자리를 빌려 부친의 유품을 독립기념관에 기증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하였다.  이날 인터뷰는 서보현 선생이 부친의 유품을 보충 설명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alt     Q. 부친께서 대구상업학교 5학년 재학 중 태극단을 만들어독립운동을 전개하셨는데요. 그 이전의 학창 시절 이야기를들어볼 수 있을까요? A. 부친께서는 생전에 독립운동에 관한 이야기를 잘 들려주지 않으셨어요. 그래도 부친께서 남산소학교를 다니실 때의 성적표가 남아있어서 당시 아버지의 키와 체중 등 신체 측위를 알 수 있었는데요. 여기서 하나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부친의 성적표를 보면 5학년 이후 신체 측위를 적던 ‘란’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황국 신민 맹서’, 이를테면 ‘대일본 제국의 신민이다’, ‘천황에 충성한다’ 같은 내용이 채워져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초등학생들의 성적표에도 그런 내용이 실렸다는 점이 굉장히 마음 아픕니다. Q. 태극단은 활동 시기가 짧았음에도 불구하고, 단원들전원이 붙잡혀 높은 형을 선고받는데요. 당시의 이야기를들어볼 수 있을까요? A. 태극단은 총 26명으로 구성되었고 그 가운데 24명이 대구상업학교, 1명이 경북중학교생, 1명이 대구직업학교생이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대구상업학교에 입학하여 유도부 생활을 하셨어요, 워낙 풍채가 좋으셨거든요. 이후 태극단에서 체육국장으로 선임된 것도 유도부 생활의 영향이 아닌가 싶습니다. 당시 학생운동 단체들은 일제의 삼엄한 감시로 인해서 주로 연구회·독서회로 진행되었는데요. 태극단도 1942년 5월 결성해 1년여간 비밀리에 단원들을 모집하여 1943년 5월 9일 결단식을 했지만, 어떤 자의 밀고로 단원 전체가 붙잡히고 말았습니다. 먼저 이상호 단장이 집 천장에 둔 태극단 관련 문서가 발각되면서 일경에게 붙잡혔고, 이어서 부친이 붙잡히게 되었는데요. 이때 총 9명이 투옥되었는데, 말씀하신 것처럼 높은 형을 선고받았습니다.부친께서는 검사가 단기 4년에 장기 7년형을 선고했는데, 판사가 한술 더 떠서 더 높은 형량인 단기 5년에 장기 7년형을 선고했단 말이에요. 이는 굉장히 이례적인 경우였고, 성인으로 따지면 무기징역형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었습니다. 이상호 단장은 단기 5년에 장기 10년형을 선고받았는데, 이는 사형선고나 마찬가지였습니다. alt 유도부 시절의 서상교 (1941) Q. 광복 후 출옥한 서상교 선생님의 모습이 담긴 사진도제공해주셔서 전시되었는데요. 당시 상황과 더불어광복 이후의 생활도 궁금합니다.  A. 경찰서에 투옥되었을 당시 심한 고문에 시달리셨다고 들었어요. 이상호 단장이 붙잡히고, 며칠 후에 아버지가 붙잡혀 경찰서에 가보니 이상호 단장이 기어다니고 있었다고 해요. 아버지께서는 형무소로 이감된 이후에도 심한 고문을 받으셨는데, 1945년 8월 16일 출옥 후 집으로 돌아오셔서 8월 18일에 찍은 사진을 보면 고문의 흔적이 역력한 모습을 볼 수 있어요. 언뜻 보면 잘 먹어서 퉁퉁해 보일 수 있는데, 심한 고문으로 부은 것입니다. 태극단원 모두가 고문에 시달렸는데 이상호 단장은 1945년 2월 병보석으로 출옥하셨지만 그해 말에 순국하셨고, 다른 분들도 이후에 계속 돌아가셨어요. 아버지도 고문 후유증으로 폐에 이상이 생겨 어머니가 고생을 많이 하셨지요. 아버지께서는 독립운동에 헌신한 공훈을 인정받아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으셨고, 1969년에는 퇴학 처분으로 졸업을 못하신 아버지께 대구상업고등학교가 명예졸업장을 수여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평생의 친구였던 김상길(金相吉, 1926~2018, 1963년 독립장) 지사와 이강훈(李康勳, 1903~2003, 1977년 독립장) 선생 등과 함께 교류하셨습니다. 집에서는 주로 서예를 하시며 시간을 보내셨어요. 글씨를 아주 잘 쓰셨거든요, 힘도 있으셨고요. alt 출옥 후 서상교의 모습 (1945) alt 서상교의 서예 용구(좌), 서상교의 서예 작품(우) Q. 2018년 3월 13일, 부친께서 돌아가신 이후서울현충원 국립묘지에 안장되셨습니다. 묘비석 뒷면에아버지를 대신하여 태극단원의 이름을 새기셨다고요? A. 말씀하신 대로 부친께서는 서울현충원 국립묘지에 안장되셨는데, 제가 살펴보니 이상호 단장만 무후선열제단에 이름이 올라가 있고 다른 분들의 이름은 찾아볼 수가 없더라고요. 그래서 아버지 묘비석 뒷면에 태극단 활동을 함께하신 이준윤(李浚允, 1925~1943, 1991년 애국장), 이원현(李元鉉, 1926~1945, 1991년 애국장), 이상호(李相虎, 1926~1945, 1963년 독립장), 윤삼룡(尹三龍, 1925~1947, 1990년 애족장) 선생의 이름을 새겨드렸습니다. Q. 흔쾌히 후손초청간담회 참석을 결정하시고 자료 기증의사를 밝혀주셨는데요. 끝으로 부친의 자료를 기증해주신소감이 궁금합니다. A. 저는 2018년 4월 1일부터 2021년 4월 1일까지 독립기념관 이사로 활동하였습니다. 당시에도 부친의 유품을 모아 독립기념관에 기증할 의사가 있었지만, 실천하지 못해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이번 2023년 11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전시를 계기로, 아버지의 이력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게 되었고, 여러 곳에서 초청해주셔서 감사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방문하였습니다.독립기념관에서도 ‘이달의 독립운동가’ 전시를 기획하는 과정에서 부친의 자료 관련하여 연락을 주셨는데, 그때 사진 자료 몇 점을 먼저 전달하고 이후 후손초청간담회 때 대다수의 자료를 기증하겠노라고 결정하였습니다. 이렇게 뜻깊은 자리가 마련되어 기쁘고, 이번에 기증한 자료들이 차후 전시 및 연구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니 후손으로서 정말 뿌듯합니다. alt 서상교 후손 서보현 선생   ]]> Fri, 01 Dec 2023 17:45:45 +0000 85 <![CDATA[#월간독립기념관 지난 호 독자 후기 이벤트 당첨자 발표]]> #월간독립기념관지난 호 독자 후기 이벤트당첨자 발표  ※ 당첨자 5명에게 모바일 커피쿠폰(아메리카노)을 전달할 예정입니다. 참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alt  ]]> Fri, 01 Dec 2023 17:51:31 +0000 85 <![CDATA[기념관 소식 NEWS]]> 기념관 소식NEWS   alt alt  ]]> Fri, 01 Dec 2023 17:53:53 +0000 85 <![CDATA[녹음에 묻혀 보내는 휴식 경기도 양평군 ]]> 글·사진 김초록 여행칼럼니스트녹음에 묻혀 보내는 휴식경기도 양평군‘수도권 청정 1번지’, ‘물 맑은 양평’ 홍보 문구에서 보듯 청정도시를 자랑하는 양평의 강·호수·계곡·들·산이 보여주는 천혜의 자연환경은 도시생활에 지친 사람들에게 포근한 쉼터가 돼준다. alt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두물에서양평 여행은 남한강과 북한강이 반갑게 악수하는 두물머리에서 시작하자. 두 물(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 큰 강(한강)을 이루니, 양수리(兩水里)란다. 두물머리는 양수리의 옛 이름이다. 호수처럼 잔잔한 강에는 빈 나룻배가 떠있고, 강변에는 껑충한 느티나무가 이를 가만 바라보고 있다. 갈대가 무성한 작은 섬을 보고 있노라면 오래 잊고 있던 동심이 떠오르는 듯하다. 두물머리는 새벽녘이나 해질녘에 찾으면 더욱 환상적이다. 이른 아침 강가를 휩싸는 물안개와 해질녘 산 능선으로 번지는 노을이 참으로 아름답다.두물머리 한쪽엔 수생식물원인 세미원(洗美苑)이 있다. 비록 인공적으로 만든 정원이지만, 본디 있던 것처럼 자연스럽다. ‘물을 보며 마음을 씻고, 꽃을 보며 마음을 아름답게 한다(觀水洗心 觀花美心)’는 이곳엔 연꽃·수련·부레옥잠 같은 수생식물이 자라는 6개의 커다란 연못과 아기자기한 산책로가 나 있다. 특히 한강물을 끌어들여 연꽃밭을 거쳐 다시 한강으로 흘러 들어가도록 설계해 수도권 주민들의 식수원인 한강물을 정화하는 역할까지 하고 있다.세미원: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양수로 93 / 031-775-1834 / www.semiwon.or.kr alt 세미원         alt 자연을 벗 삼아 쉬어가는 곳두물머리에서 북한강을 따라 서종면에 있는 서후리숲으로 향한다. 사람의 손길을 최소한으로 들여 최대한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살린 이곳은 근래 들어 매스컴에 소개되면서 주말이면 소풍을 온 사람들로 제법 시끌시끌하다. 잔뜩 우거진 잣나무·자작나무·단풍나무 숲은 길동무가 돼주고 청아한 새소리가 귓전을 간질인다. 낮에는 안내소 앞 너른 잔디밭에 앉아 도시락을 까먹으며 두런두런 수다 떨기 그만이고, 밤에는 캡슐펜션에서 까만 밤하늘을 수놓은 별을 바라보며 하룻밤 묵어가면 좋다.길은 서종에서 옥천을 지나 양평시내 쪽으로 뻗어있다. 구불구불 이어진 농다치 고갯길은 저 지리산 횡단도로처럼 아슬아슬하다. 용문산 서쪽 자락인 사나사계곡에 들면 마치 오대산의 한 귀퉁이를 보는 듯하다. 바위 사이로 넘쳐흐르는 계곡물과 크고 작은 소와 담·울창한 수목·그리고 그 위로 보이는 파란 하늘이 경이롭다. 흐르는 물에 발을 담그면 오싹할 정도로 차다. 새소리, 물소리를 들으며 계곡길을 따라 20분쯤 오르면 아담하고 소박한 사나사(舍那寺)가 나타난다. 사나사는 1천1백여 년 전 신라 경명왕 때 세워져 여러 고승들을 배출한 사찰이다. 임진왜란과 6·25전쟁으로 전소되는 아픔을 겪었다가 복원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사나사계곡 깊숙한 곳엔 설매재 자연휴양림이 있다. ‘설매재’란 휴양림 정문으로 들어오는 입구에 있는 고개를 이르는 말로, 한겨울에 눈 속에서 매화꽃이 피었다 하여 이름 붙었다는 이곳은, 자연을 벗 삼아 쉴 수 있는 통나무집·산장·캠핑장·야영장·운동장 등 시설을 고루 갖추고 있다.서후리숲: 경기도 양평군 서종면 거북바위1길 200 / 031-774-2387 / www.seohuri.com사나사: 경기도 양평군 옥천면 용천리 305-1 / 031-772-5182설매재 자연휴양림: 경기도 양평군 옥천면 용천로 510 / 031-774-6959 / www.snrf.co.kr alt서후리숲alt사나사 alt 용문산을 중심에 둔 양평의병의 근거지웅장한 용문산과 천년고찰 용문사는 양평 여행의 하이라이트다. 절집 마당 옆에는 동양 최대를 자랑하는 은행나무가 우뚝 서 있다. 10월 중순경부터 노랗게 물들기 시작하는 이 은행나무는 마의태자가 망국의 한을 품고 금강산으로 가던 중 꽂아놓은 지팡이가 자라 거대한 은행나무가 됐다는 전설이 있다. 용문사와 용문산은 우리 민족이 나라를 잃었을 때 분연히 일어난 ‘양평의병’의 근거지이자, 6·25 당시 대표적 승전지다. 용문사 들머리에 있는 한국민족독립운동발상지·양평의병기념비·용문항일투쟁기념비 등 우리 민족의 항일정신을 기리는 기념비가 그때의 역사를 말해준다. 일제가 대한제국의 황제를 강제 퇴위시키고 군대를 해산시키기 이전부터 청운면 출신인 김백선 장군을 비롯한 포수 500여 명이 의병에 참여해 대일 항전의 기치를 드높였다. 양평의 독립운동은 용문산(사)을 비롯해 용문사계곡 서쪽 기암절벽에 기대선 상원사·용천골의 사나사·양동 양서 서종 일대·읍내의 옛 갈산시장(현 양평 전통시장)·객사터(현 양평경찰서)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양평군은 그 숭고한 뜻을 잊지 말자는 취지로 표석을 설치했다. 용문사·상원사·사나사는 양평의 대표적인 사찰로 그 당시 의병들은 이 산사 등지에 식량과 무기를 비축해 놓고 인근 지역의 관아와 파출소, 우편소 등을 습격해 일제의 기를 꺾어놓았다. 일제는 의병 탄압을 위해 군대를 파견했고, 이에 분노한 의병들은 1907년 8월 24일 일본군과 격전을 벌였다. 양평의 동쪽인 양동에 가면 한말 을미의병을 처음 일으켰던 의병장 안승우·이춘영·이승룡 생가터와 정미의병 때 일본군과의 전투가 벌어졌던 삼산리 전투터, 독립만세운동 기념비가 있는 만세공원, 양동 지역 의병장들을 모신 의병 묘역과 독립유공자묘역·어록비·기념비·추모비 등을 둘러볼 수 있다. 양동면 석산리가 고향인 의병장 안승우는 그 당시 지역 최고 명문가로 알려진 안종응의 아들로 이춘영과 함께 의병을 이끌었다.용문사: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 용문산로 782 / 031-773-3797상원사: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 상원사길 292 / 031-773-4634         alt용문사로 이어지는 숲길alt용문사 은행나무 alt상원사alt양평의병 어록비 alt 양평을 빛낸 독립운동가 여운형남한강변인 경의중앙선 신원역 철길 근처의 묘골엔 독립운동가 몽양 여운형의 생가와 기념관이 있다. 강산이 휘감아 도는 양지바른 터에 아담하게 자리 잡은 영회암(永懷菴)은, 택호에서 보듯 ‘영원히 이름과 명예를 지키라’는 함양 여씨 집안의 가풍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몽양여운형기념관에는 성장 과정부터 민족을 위한 여러 활동 이력, 안타까운 죽음까지 파란만장한 그의 삶을 엿보기에 충분하다. 여운형은 1914년 중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진력을 다하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가던 1918년 11월 상하이에 머물던 무렵, 민족자결주의를 주창했던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Woodrow Wilson)에게 편지를 보내 일제 치하의 우리 민족의 실상을 알리고 도움을 청했다. 1919년 3·1운동 직전에는 신한청년당의 대표로서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했으며, 이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전시장 한편에는 피 묻은 겉옷 상의가 전시돼 있다. 1947년 7월 19일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벌어진 광복 후 12번째 테러 당시, 여운형이 총탄에 맞아 세상을 떠날 때 입고 있던 옷이다. 신원역 출구 맞은편엔 공공미술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여운형 벽화가 그려져 있고, 기념관 길(몽양 어록길)에는 얼굴 조형물을 음각으로 새긴 애오와공원이 있다. 애오와(愛吾窩)는 여운형의 친필로 ‘나의 사랑하는 집’이란 뜻이다.몽양여운형생가기념관: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몽양길 66 / 031-772-2411 / mongyang.go.kr         alt 여운형 생가 alt여운형 유품alt애오와공원 alt 쉼과 힐링이 있는 곳용문산 동쪽 자락에 솟은 중원산은 그 밑으로 깊고 맑은 골짜기를 빚어 폭포와 기암을 둔 중원계곡이 있다. 중원산과 도일봉 사이를 흘러내리는 물줄기가 마치 지리산의 한 귀퉁이를 옮겨놓은 듯 우렁차다. 양평군에는 무엇보다 푸르른 녹음이 빛나는 곳으로, 자연의 정기를 흠뻑 맞을 수 있는 다양한 체험이 있다. 중원산에서 나와 홍천 방면으로 가다가 산음자연휴양림에 들러 다양한 수림 속을 거닐 수 있고, 양평군에서 진행하는 헬스투어 프로그램에 참가하여 맑은 자연 속에서 혈압, 스트레스 지수 등 몸의 변화를 느껴보는 이색 체험도 할 수 있다. 이밖에도 경의중앙선 오빈역 앞 남한강변에 들어서서는 토종 야생화 200여 종을 볼 수 있는 들꽃수목원 등 돌아오는 길까지 자연의 다채로운 면모를 만날 수 있다. 물 맑은 청정지역 양평에서 도시의 묵은 때를 벗기고 청량한 자연을 깊이 들이마시며 심신을 정화해보자.들꽃수목원: 경기도 양평군 양평읍 수목원길 16 / 031-772-1800 / www.nemunimo.co.kr alt 헬스투어 프로그램 소리산 힐링투어 alt 들꽃수목원 ]]> Tue, 05 Sep 2017 11:33:36 +0000 9 <![CDATA[독립기념관과 대중매체 ]]> 독립기념관은 다양한 대중매체를 적극 활용함으로써 국민에게 보다 알찬 정보·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특히 디지털 시대의 흐름에 발 맞춰 온라인 활동을 활성화하는 등 국민과의 쌍방향 소통에 힘쓰고 있다.         alt]]> Tue, 05 Sep 2017 11:32:07 +0000 9 <![CDATA[불량한 조선인, 일본을 발칵 뒤집다 영화 <박열> ]]> 글 편집실불량한 조선인, 일본을 발칵 뒤집다영화 <박열>감독: 이준익주연: 이제훈, 최희서, 김인우개봉일: 2017년 6월 28일박열은 일반 민족운동가들과는 다른 인물이었다. 제도화된 정치조직, 권력을 부정하는 아나키스트였던 그는 자신의 사상과 닮은 가네코 후미코를 만나 평생의 연을 약속하고, 동지로서 함께 격정의 항일활동을 펼친 이상주의자였다.                     Q.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는 어떻게 사랑하게 되었나?일본에서 아나키스트로서 항일활동을 하던 불령선인(不逞鮮人) 박열(이제훈). 인력거꾼으로 밥벌이를 하는 그는 품삯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일본인에게 발로 채이고 무시당하기 일쑤다. 그러던 어느 날 잡지 『조선청년』에 실린 박열의 시를 보고 한 일본 여성이 찾아오는데, 그것이 가네코 후미코(최희서)와의 운명적인 첫 만남이었다.가네코 후미코는 어린 시절 조선에서 지내며 불우한 가정환경과 학대 속에서 자라, 일본 제국주의에 반감을 가져온 인물이었다. 일본으로 돌아와 도쿄의 작은 어묵집에서 일하던 그녀는 아나키스트들과 교류하였는데, 우연히 박열의 유명한 시 ‘개새끼’를 보고 강한 감동을 받아 그를 흠모하게 되었다. 국가와 민족을 떠난 사상의 공감은 사랑으로 이어졌다. 두 사람은 연인으로 발전해 동거하며, 동시에 동지로서 함께 항일활동을 펼쳤다.          alt박열alt가네코 후미코 Q. 재판을 받을 때 전통 옷을 입고 조선말로 답했다?“조선인에게는 영웅, 우리한텐 원수로 적당한 놈을 찾아.” 1923년 관동대지진 이후 조선인 대학살이 일어나자, 내무대신 미즈노(김인우)는 사건을 은폐하기 위한 화젯거리로 ‘불령사’를 지휘하는 박열을 대역죄로 잡아들인다. 영화 속에서 박열은 반말투로 조사에 응하고 법정에서는 조선 전통관복을 입고 등장해 웃음을 안긴다. 그러나 이는 단지 재미를 위한 설정이 아닌 실제 있던 일을 옮긴 것이다. 박열은 공판에 앞서 4가지 조건을 요구했다. 죄인 취급하지 말 것, 재판장과 동등한 좌석을 설치할 것, 조선 관복을 입힐 것, 조선어 사용 등이다. 첫 공판 당시 박열은 전통관복을, 후미코는 치마저고리를 입고 출두해 조선말로 답변하는 초유의 법정투쟁을 벌였다. 두 사람의 기개에 감탄한 일본 재판장이 호의적인 발언을 했다가 파면당하는 웃지 못할 일도 있었다니, 영화 속 호기롭게 재판에 임하는 모습이 분명 과장은 아니다.         alt실제 박열과 후미코의 재판 모습alt<박열> 속 전통 관복을 입은 박열 Q. 옥중에 찍은 괴사진, 얼마나 똑같을까?박열과 후미코가 투옥되어 있을 무렵 ‘괴사진(怪寫眞) 사건’이 일어난다. 옥중에서 찍은 사진이 유출된 것. 사진 속 두 사람은 의자에 껴안고 앉아있었다. 책을 읽고 있는 후미코와 그녀의 가슴 위에 한 손을 올린 채 다른 손으로는 턱을 괴고 카메라를 바라보는 박열. 죽음을 목전에 둔 상황임에도 여유롭고 평안해 보인다. 괴사진 이야기는 <박열>에서도 등장한다. 예심판사 다테마쓰(김준한)는 ‘조선에 계시는 어머니에게 우리 부부의 사진을 보여드리고 싶다’는 박열의 요청을 받아 두 사람만의 자리를 마련해주고 자리를 피한다. 그렇게 찍힌 두 사람의 사진은 실제 사진과 높은 싱크로율을 보여 화제를 낳았다. 당시 일본 야당은 뉘우치는 기색이 없는 대역죄인들을 감옥에서 특별 대우했다며 내각 사퇴를 요구하고 나섰고, 다테마쓰는 사직하였다.         alt박열 부부 사진alt<박열> 속 재연한 사진 Q. 영화 속 등장인물들은 모두 실존 인물이다?<박열>은 ‘이 영화의 모든 내용은 실화입니다’라는 선언으로 시작한다. 이준익 감독은 이 영화에 허구의 인물은 단 한 명도 없으며, 역사학자 야마다 쇼지가 쓴 『가네코 후미코의 평전』, 후세 다쓰지의 『운명의 승리자 박열』 『박열 평전』 『가네코 후미코의 자서전』과 당시의 일본 신문 기사 등을 검토하여 사실에 충실했다고 밝혔다. 비중이 크진 않지만 후세 다쓰지는 실제로 박열을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을 위해 변호를 맡아주었던 변호사이고, 영화 속에서 박열의 재판을 상세히 보도하기 위해 고군분투한 기자 이석은 실제 <조선일보> 특파원이다.역사적 사실을 소재로 하는 영화의 경우, 대개 ‘역사 왜곡’이 쟁점이 되곤 한다. 그러나 지극히 사실에 기반을 둔 영화 <박열>은 왜곡이나 과장 혹은 미화 없이도 관객들의 이목을 집중시킬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alt<박열> 속 변호사 후세 다쓰지alt ]]> Tue, 05 Sep 2017 11:37:08 +0000 9 <![CDATA[만주와 중국을 누비며 활약한 한국광복군 고운기 ]]> 글 학예실만주와 중국 대륙을 누비며 활약한 한국광복군고운기(高雲起, 1907~1943)독립기념관은 국가보훈처·광복회와 공동으로 고운기를 9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의병으로 활동했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은 그는 일찍이 항일정신에 눈을 떠 독립운동에 뛰어든 인물이다. alt 한국독립군으로 북만주에서 활동하다고운기는 1907년 함경남도 문천에서 태어났으며, 본명은 공진원이다. 그의 아버지는 을사늑약 직후 홍범도와 함께 의병을 일으켜 함경도 각지에서 활동한 인물로, 1908년 홍범도가 의병부대를 이끌고 만주로 이동할 때 고운기 역시 함께 망명하였다. 1931년 말 만주의 한국독립당이 창설한 한국독립군 제6중대장으로 임명된 고운기는 쌍성보전투 등에 참가하여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한편 지청천의 명령으로 길림구국군(吉林區國軍) 대표를 만나 한중연합부대 합작을 성사시키기도 했다. 고운기의 노력으로 구성된 한중연합군은 1933년 2월 경박호에서 매복작전을 통해 일본군에게 큰 피해를 주었다. 이후 동경성과 대전자령 등지에서 일본군을 공격하였고, 특히 대전자령전투는 일본군 1개 연대를 섬멸시키는 승리를 거둔 전투였다. alt1932년 쌍성보전투가 일어났던 현장alt중국 지린성을 침공한 일본군(1931년)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 대장으로 활동하다1933년 말 한중연합군이 분열되고 일본군의 공세가 강화되어 북만주에서 활동을 더 이상 지속하기 어려워졌다. 이 무렵 한국독립군 지휘부에 한인 청년들을 군사간부로 양성하기 위해 중국 관내지역으로 이동시키라는 김구의 제의가 전달되었다. 지청천을 비롯한 한국독립군 지휘부가 제의를 받아들인 가운데, 고운기는 1934년 2월 동료들과 함께 뤄양(洛陽)군관학교 한인특별반에 입교하여 1년 2개월 동안 병기학·전술학·통신학 등 각종 군사훈련을 받고 1935년 4월 졸업하였다. 1938년 11월에는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의 대장을 맡아 중국인들을 대상으로 항일의식을 고취시키는 선전활동을 주도하였다. 1939년에 임시의정원 함경도 의원으로 선출되었고, 1940년에는 한국독립당 감찰위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alt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 대원들과 류저우지역 항일단체 대표들(1939년 4월)  alt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성립 전례식(1940년 9월 17일) 한국광복군 지대장으로 활약하다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40년 충칭(重慶)에서 한국광복군을 창설하였다. 9월 17일 개최된 성립전례식에서 고운기는 마지막으로 연단에 올라 항일전선에서 활동하는 대원들에게 보내는 연설문 ‘고중국전방장사서(告中國前方壯士書)’를 낭독하였다. 한국광복군 창설 직후 그는 제2지대장으로 임명되어 시안(西安)을 거쳐 네이멍구(内蒙古)지역인 수원성 포두로 파견되었다. 그곳에서 한인 청년들을 만나 한국광복군으로 가입시켜 총사령부가 있는 시안으로 보내는 초모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활동이 일제에 발각되자, 1942년 다시 충칭으로 돌아왔다.이후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활동하며 한국광복군의 자율적인 활동을 제한하는 ‘9개 준승’ 취소를 위한 활동을 전개하다가 병을 얻어 1943년 37세의 나이로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운기의 공적을 기리어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alt한국독립당 중앙집행위원 기념사진(1940년 5월 16일)alt제34회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기념사진 ]]> Tue, 05 Sep 2017 11:35:37 +0000 9 <![CDATA[하나,위인을 기른 위대한 어머니, 김점순 둘,일제강점기 농민들은 흙을 먹고 살았다? ]]> [우리가 몰랐던 이야기 하나]글 은예린 자유기고가위인을 기른 위대한 어머니, 김점순사람의 이면에는 그의 어머니가 숨은 그림자처럼 자리 잡고 있다. 시대의 흉악범들이 내면에 어머니와의 상처가 숨 쉬고 있어 나쁜 길을 갈 수밖에 없었음을 고백하는 바와 같이, 위대한 인물이 탄생하기까지 역시 어머니의 인품과 교육이 서려 있다. alt김점순 여사alt종로경찰서 투탄 의거 현장 어머니의 가정교육이 인생항로를 결정하다“어머니는 우리의 마음속에 얼을 주고 아버지는 빛을 준다.” 독일 소설가 장 파울(Jean Paul)의 명언을 다시금 더듬어 본다. 어린 시절 알게 모르게 우리의 외형에 가려진 내면의 꿈과 욕망, 의욕은 모두 어머니의 영향임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또 “온갖 실패와 불행을 겪으면서도 인생의 신뢰를 잃지 않는 낙천가는 대개 훌륭한 어머니의 품에서 자라난 사람들”이라고 강조한 앙드레 모루아(Andre Maurois)의 명언도 우리를 겸허하게 만든다. ‘맹모삼천지교’라는 어머니의 자녀교육의 중요성을 숱하게 들었기에, 윤봉길 또한 마지막 순간 두 아들에게 유언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아비가 없어도 어머니의 사랑과 교양으로 동서양 역사상 성공한 인물이 많다.’ 편지에 담긴 그의 가르침은 자식들을 안심시켰다.아들의 의열투쟁을 지원한 어머니 김점순 여사우리 민족에게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결코 짧지 않았던 아픈 시절이 있다. 지울 수 없는 비참한 역사의 한 페이지가 마침내 마감되고, 만세를 부르며 환호하던 시간도 어느덧 세월이 흘러 70년이 훌쩍 지났다. 과거의 그때, 태극기를 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앞장선 영웅들이 있었다. 낯선 타국에서 외교를 통해 민족을 구하고자 희생한 인물들도 많다. 그러나 유관순·안중근·윤봉길 등 우리가 어린 시절부터 교과서를 장식하며 익숙하게 알려진 독립운동가에 비해 생소한 인물들 또한 적지 않다. 그 가운데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해 독립운동사에 새로운 신화를 써내려간 김상옥이 있다. 그리고 그의 나라와 민족을 위하였던 도전과 용기 뒤에는 숨은 조력자이자, 스승이요, 헌신적인 희생을 강조했던 어머니 김점순 여사가 있었다.당시는 남녀가 유별하고 여성은 오직 안사람으로서 역할에만 충실해야 한다는 관념이 강한 시절이었다. 그러나 김점순 여사는 독립운동에는 남녀 구분이 없어야 한다는 일념으로 아들 김상옥의 활동을 지지하고 열성적으로 도와주었다. 나라를 잃고 1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1919년 가을, 암살단을 조직한 아들 김상옥이 일경에 붙잡히게 되자 그녀는 증거 인멸을 위해 인쇄용 등사판을 파괴하는 지혜를 발휘했다. 1921년에는 김상옥이 대한민국임시정부 군자금 모금을 위해 국내 활동 중 체포될 위기에 처하자, 아들을 피신시키기도 했다. 대신 가족과 함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온갖 고초가 뒤따랐다. 이후 1923년 드디어 김상옥이 종로경찰서 폭파를 결심했을 때, 김점순은 거사에 필요한 무기를 준비해 주는 등 아들을 적극적으로 격려하며 독립운동을 후원해 주었다. alt김상옥 묘 앞에서 통곡하는 김점순 여사 신문 기사alt김상옥 사건 관련자들에 대한 공판(1923년 3월 15일) 시대를 앞선 지혜로운 어머니400여 명에 이르는 일경과 지붕 위를 오르내리는 총격전이 오가고, 김상옥은 결국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남은 한 발의 총알을 자신에게 겨누었다. 34살이라는 짧은 생을 살다 간 김상옥은 광복 후 국립묘지 애국지사 묘역에 묻혔다. 1924년 4월 8일자 신문 기사에 실린 ‘죽으려 왜 왔더냐/ 묘전(墓前)에서 통곡하는 김상옥의 친모’라는 제목의 기사는 화제가 되었다. 일제는 ‘범죄 선동’이라는 이유로 이 기사를 삭제해 버렸다.이제 우리는 마로니에 공원에 우뚝 선 김상옥의 동상을 보며 또 다른 얼굴을 떠올려야 한다. 바로 가난하고 힘든 살림 가운데서 아들의 독립운동을 적극 후원하며 자신 역시 애국지사이자 항일 독립운동가로서 삶을 마감한 어머니 김점순 여사의 삶이다.오늘의 모성애를 비추어 보다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해야 할 고위층 어머니들이 아들을 군대에 보내지 않으려 온갖 뇌물이며 지저분한 잔꾀를 부린다거나, 자식의 잘못된 ‘갑질’을 눈감으려 했다는 부끄러운 기사를 접할 때가 심심치 않다. “낮에는 대장간에서 일하고 밤에는 야학을 하는데 시간이 급하여 방에도 못 들어가고 마루에서 한 숟갈 떠먹고 갈 때 그저 ‘체할라 체할라’ 하던 때가 엊그제인데 어쩌다가 이 모양이 되었습니까?”라며 자식에 대한 애틋함을 고백한 바 있는 김점순 여사와 다분히 비교되는 모습이다.주권을 잃은 조국에서 아들의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불안한 상황 가운데 보여준 김점순 여사의 삶은, 풍족하게 지내면서도 병역기피와 고위층의 횡포가 만연한 현대사회를 부끄럽게 만든다. 김점순 여사는 자신의 목숨뿐 아니라 아들의 목숨마저 나라에 바치면서도 무력감에 빠지지 않고 늘 굳세었다. 강한 어머니의 ‘참사랑’을 실천하며 독립운동가로서 평생을 살다 간 높은 정신에 절로 고개를 숙이게 된다.                [우리가 몰랐던 이야기 둘]글 신현배 역사칼럼니스트일제강점기 농민들은 흉년에 흙을 파먹고 살았다?일제강점기 경기도 양평군 양동면 계정리 마을에서 있었던 일이다. 보릿고개가 되어 양식이 똑 떨어진 마을 사람들은 할 수 없이 솔잎을 쪄서 말린 뒤 가루를 내어 떡을 만들어 먹는가 하면, 마 뿌리나 칡뿌리를 캐서 그것으로 가루를 내 국수를 만들어 먹으며 연명했다. alt 마을 사람들의 주린 배를 채워준 하얀 흙그렇게 끼니를 때우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허기가 져서 도무지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을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한 노인이 말했다.“솔잎이나 풀뿌리만 먹어서는 배가 고파 기운을 쓰지 못하오. 변비 증세도 심해지고 말이지. 옛 선조들은 심한 가뭄이 들면 하얀 진흙을 파서 좁쌀 가루를 섞어 떡을 만들어 먹었다네. 맛도 괜찮고 배도 불러 먹을 만하다네. 우리도 흙을 구해 먹는 게 어떻겠나?”“좋습니다. 하얀 진흙은 우리 마을 뒷산에 있어요. 제가 지게를 지고 가서 잔뜩 퍼오겠습니다.”한 젊은이가 자처해 진흙을 지게에 이고 오자, 마을 사람들은 노인이 알려준 대로 진흙에 좁쌀 가루를 섞어 떡을 만들어 먹었다. 그리하여 어려운 보릿고개를 잘 넘길 수 있었다.한편 주재소 순사들은 계정리 마을 사람들이 흙을 먹는다는 소문을 듣고 소스라치게 놀랐다.“뭐라고? 사람이 흙을 먹어? 그러고도 살 수가 있나?”“몸에 해로울 텐데. 일단 흙을 구해 무엇인지 알아내 보자.”순사들은 사람들이 먹는다는 진흙을 구해 경기도 경찰부 위생과로 보내 성분 분석을 의뢰했다. 위생과에서는 전문가를 통해 진흙을 시험해 보고는 이렇게 알려왔다. “하얀 진흙은 경기도 양평뿐만 아니라 함경도와 전라도 등지에서도 나는 흙입니다. 규산 알미늄 성분이 들어 있어 먹어도 몸에 해롭지는 않습니다. 다만 영양가는 전혀 없고, 먹으면 배가 부를 뿐입니다.”먹는 흙의 다양한 쓰임새마을 노인이 말했듯 우리 선조들은 흉년이 닥치면 흙을 파먹었다.‘함경도 화주(지금의 영흥)에는 황납 같은 진득진득한 흙이 있었다. 태종 때 심한 가뭄이 들었는데, 고을 사람들이 이 흙을 파내어 엿처럼 고아 먹었다. 그리하여 흉년을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 이수광의 『지봉유설』 中 -‘헌종 때 평안도에 대기근이 들어 평양의 많은 사람들이 굶어죽어 갔다. 이때 평양 잡약산 아래에는 달지도 쓰지도 않은 흙이 있어, 평양 사람들이 몰려와 떡을 만들어 먹었다. 대기근 뒤에도 이 흙을 먹는 사람들이 더러 있었다. 잡약산 앞을 지나가던 역졸들은 배고파 기운이 없으면 이 흙을 파먹고 기운을 차려 잘도 달려갔다’- 윤유의 『평양속지』 中 -이처럼 조선시대에 흙을 먹었다는 기록은 여럿 있다. 그중에서도 특히 놀라운 이야기는 영남지방에 대기근이 들었을 때의 일이다. 사람들이 쌀가루처럼 하얀 흙을 찾아내 떡을 만들어 먹었는데, 햅쌀이 나올 때가 되자 그 흙이 다 떨어졌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하느님이 백성들을 구하려고 먹을 수 있는 흙을 내려주셨구나”라며 하느님에게 감사 제사를 올렸다고 한다.『지봉유설』에는 이런 내용도 실려 있다. 호랑이가 사냥꾼에게 독 묻은 화살을 맞으면 해독을 하기 위해 푸른 진흙을 먹었다는 사실이다. 또한 쥐도 독약이 섞인 음식을 먹으면 흙탕물을 찾아 마셔 금방 회복되었다고 나와 있다.흙은 사람에게 약으로도 쓰였다. 허준의 『동의보감』에는 이러한 기록이 있다.가마솥 밑에 있는 10년 묵은 황토를 ‘복룡간(伏龍肝)’이라고 부른다. 이 흙을 핥으면 코피가 멎고 혈변, 혈뇨가 그친다. 묵은 집 벽의 흙도 여러 가지 병에 잘 듣는다. 동쪽 벽의 흙은 설사에 잘 듣고, 서쪽 벽의 흙은 토하거나 딸꾹질을 할 때 잘 듣는다. 또한 진흙은 설사에 좋고, 붉은 흙은 귀신들린 병에 효과가 있다.이밖에도 정신병에 걸린 사람에게는 조상 무덤의 썩은 흙을, 상사병에 걸린 사람에게는 사랑하는 사람의 집 마당에 있는 흙을 먹이면 효과가 있다고 믿는 등 먹는 흙과 관련된 재미있는 기록들이 많다.                   신현배역사와 전통문화에 대해 관심이 많은 역사칼럼니스트. 저서로는 역사 이야기 『엉뚱 별난 한국사』, 『엉뚱 별난 세계사』, 『2000년 서울 이야기』, 『세계사로 배우는 법 이야기』, 전통문화 이야기 『소중한 우리 문화 지식 여행』 시리즈 등이 있다. ]]> Tue, 05 Sep 2017 11:34:34 +0000 9 <![CDATA[크게 보고, 자세히 듣고, 널리 말하다 ]]> 글 심용환 역사N교육연구소 소장크게 보고, 자세히 듣고, 널리 말하다개항기부터 일제강점기까지는 근대 문물의 유입으로 생활에 많은 변화가 있었던 기간이다. 1876년 강화도조약을 통한 개항 이후 본격적으로 바다 건너 다양한 문화가 밀려 들어왔으니 말이다. 그중에는 독립운동사에 있어 새로운 눈·코·입의 역할을 해준 대중매체도 있었다.                      근대 문물로 인한 대중매체의 발달고종이 커피를 즐겨 마시던 모습이나 손탁호텔에서 각국의 공사들과 조선의 관료가 어울리는 모습은 모두 근대 문물의 영향을 받은 까닭이었다.근대 문물의 수용은 광범위한 문화적 변화를 일으켰는데, 무엇보다 대중매체의 발달을 촉진하였다. 전화기와 신문을 비롯한 매체가 이 시기 우리 사회에 정착한 가운데 독립운동사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36년 <동아일보>가 베를린올림픽 마라톤대회에서 금메달을 딴 손기정의 사진을 보도할 때 일장기를 삭제했던 ‘일장기 말소 사건’과 1940년대 태평양전쟁 당시 미주 교포들을 중심으로 라디오 단파방송을 통해 독립운동을 고조시켰던 ‘단파방송 수신 사건’ 등이 바로 이러한 예에 속하는 사례다. 근대 문물이 대중매체의 발전을 가져오고, 대중매체는 독립운동을 촉진시키는 매개체로 작용하는 순간을 맞았다.         alt손탁호텔alt손기정 선수 일장기 말소 사건(<동아일보> 1936년 8월 25일자) 김구를 살린 전화기1896년은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전화기가 개통되었던 해다. 경운궁(현 덕수궁)에 설치된 이 전화기의 이름은 텔레폰(Telephone)을 음역한 ‘덕률풍(德律風)’으로, 정확한 명령을 내리거나 행정 집행을 하는 것은 물론이고 명성황후의 무덤인 홍릉에 전화기를 설치하여 안부 전화를 걸었다는 일화까지 있다. 실제로 고종 사후에는 순종이 고종의 능에 전화기를 설치하여 문후 인사를 올렸다고도 한다. 전화기를 둘러싼 가장 유명한 에피소드는 『백범일지』에 담겨있다. 명성황후 시해사건 이후 김구는 치하포에서 일본인 쓰치다를 처단하고 그로 인해 사형선고까지 받은 상황이었다. 이 사실을 승정원의 승지가 듣고 고종에게 보고하자, 어전회의 이후 사형 집행을 중지하라는 전화를 걸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물론 이 내용은 전화기가 설치된 시기와 약간 어긋나기 때문에 오해라는 주장도 있지만, 무엇보다 전화기가 조선 민중의 삶에 직접 들어오기 시작했음을 방증하는 사건이기도 하다.         alt대한제국 당시 자석식 벽걸이 전화기alt궁중에서 사용했던 전화 교환기와 교환수 일제강점기 가장 활동적이었던 대중매체, 신문한말 대중매체로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것은 신문이다. 기차와 신문의 시대였던 그때, 여론을 전달하는 거의 유일한 수단이 바로 신문이었기 때문이다. 한국 최초의 근대 신문은 <한성순보>로, 일본에 수신사로 파견됐던 박영효가 민중 계몽을 위해서는 신문이 필요하다며 고종을 설득해 1883년 발간되었다. 국가에서 발행하는 관보로서 순한문으로 쓴 <한성순보>는 갑신정변으로 안타깝게 1년 만에 발행을 중단했다가, 이후 <한성주보>로 재발행이 되기도 했다. 순보(旬報)라 하면 10일에 한 번, 주보(週報)라 하면 7일에 한 번씩 발행함을 의미한다. 1896년 창간된 <독립신문>은 우리나라 최초의 사설신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독립협회의 기관지 정도로 기억하지만, 시기적으로 따지면 협회 결성보다 신문의 발행이 조금 이르다. 순한글 신문인 <독립신문>은 요즘 기준으로 A4용지 두 장 정도의 분량이었는데, 최초로 띄어쓰기를 시도하고 본격적으로 신문 광고를 싣기도 했다. 친일신문인 <한성신문>과 경쟁하면서 다양한 의제를 제시하였고, 순한글로 실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편하게 읽으면서도 여러 정치·사회적 의제들을 두고 분분히 토론할 수 있는 중요한 기반이 만들어졌다. 발행부수는 최대 3,000부 정도로, 당시 경제상황과 신문을 돌려보는 문화를 고려한다면 그보다 몇 배는 더 많은 사람들이 <독립신문>을 읽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이는 온갖 미디어가 일반화된 오늘날과는 사뭇 다르다.초기 <독립신문>은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았다. 정동파 내각, 즉 친미·친러 내각은 <독립신문>을 이끌던 서재필에게 중추원 고문직과 농상공부 고문직을 겸직케 했다. 농상공부(農商工部)는 신문을 담당하는 부서였다. 또한 1896년 1월에는 신문 창간비 4,400원을 보조했으며 신문사 사옥으로 정부 소유 건물을 제공하기도 했다. 농상공부는 <독립신문>을 관보와 동일한 2종 우편물로 지정하여 운송비를 할인해주었고, 또한 학부와 내부는 산하 학교의 생도들과 지방관들에게 구독을 지시하기도 했다. 궁궐 내부 역시 마찬가지였다. 정부는 관리들의 <한성신보> 구독을 중지시키고 <독립신문> 기자들의 취재활동을 보장해줌으로써 발전을 지원하였다. 정부와 민족지도자 중심의 민족운동이 신문과 결합하여 가장 적극적으로 활용된 것이다.         alt박영효alt<한성순보> 창간호(1883년 10월 31일자)alt<독립신문>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투쟁 수단1919년 3·1운동 이후 결성된 대한민국임시정부 역시 <독립신문>을 발행하였다. 독립협회의 그것과 이름은 같지만 전혀 다른, 문자 그대로 기관지로서 역할을 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프랑스 조계지에서 활동했는데, 프랑스는 폭탄을 제조하거나 물리적 테러 등 과격한 행동에 대해서만 제한했을 뿐 독립운동가들에게 활동 대부분의 자율성을 보장해주었다. 당시 가장 중요한 투쟁 수단 중 하나는 단연 신문이었다. <독립신문>은 1923년 관동대학살에 대해 소상히 보도하여 끔찍했던 학살의 참상을 알렸다. 이처럼 일제의 만행을 고발하는 주요 도구가 되기도 하였고,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독립방략과 비전을 알리는 데 활용했다. 일제는 프랑스와 수차례 교섭에 나서는 등 <독립신문>을 폐간하기 위한 시도를 계속했다. 하지만 프랑스 조계국은 ‘한인들이 인쇄기를 중국인에게 매각하였으므로 압수할 수 없다’며 일제의 요구를 거절해 위기를 무난히 넘길 수 있었다.         alt대한민국임시정부청사alt대한민국임시정부가 발행한 <독립신문> 여성 독립운동가의 주된 활약이 돋보이다신문을 통한 독립활동은 1940년대 충칭(重慶) 임시정부에서도 계속된다. 특히 이 시기에는 여성광복군이 이 업무를 담당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다음은 광복군 제3지대에서 활동했던 지복영의 회고 내용이다.임시정부 헌법이 빈부와 신분의 귀천을 구별하지 않고 특히 남녀평등을 강조한 데 자극받아 미력이나마 일조를 하고 싶어서였지요. 당시 여군에 대한 대접도 좋아 월급도 중국 돈 5원으로 남자들과 큰 차이가 없었습니다. 국내에서 활동했던 여성 독립운동가들은 대개 지식인이었는데, 특히 충칭까지 찾아온 인물 상당수는 끝까지 변절하지 않고 임시정부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그중에는 독립운동가 집안 출신 또한 많았으니, 김정숙·김효숙은 신민회 일원이자 <독립신문>을 운영했던 김붕준의 딸들이었다. 한국광복군은 독립운동을 알리고 광복군 모집을 위한 선전 활동으로 기관지 『광복』을 발간하였다. 이때 원고와 번역 작업에 매진했던 인물이 지복영·오광심·조순옥이다. 일본군의 사기를 떨어뜨리기 위해 편지를 쓰고 비행기로 살포하고 방송을 하는 등 선전활동을 담당하였다.광복군은 남성의 전유물이 아니고 우리 여성도 광복군이 되는 것이니 우리 여성들이 참가하지 아니하면, 마치 사람으로 말하자면 절름발이가 되고, 수레로 말하면 외바퀴 수레가 되어 필경은 전진하지 못하고 쓰러지게 됨으로 우리의 혁명을 위하여, 광복군의 전도를 위하여, 우리 여성 자신의 권리와 임무를 위하여 광복군 대열에 용감히 참가하라. - 한국여성동지들에게 일언(一言)을 드림 中 -이들은 『광복』 창간호에서 ‘한국여성동지들에게 일언(一言)을 드림’, ‘한국여성동지들아 활약하자’ 등을 게재하여 한국 여성들의 광복군 참여를 강하게 호소하였다. 이처럼 일제강점기 대중매체는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주된 활동 수단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alt지복영alt오광심alt한국광복군 기관지 『광복』 신문·잡지·라디오·전화 등 대중매체의 등장은 한국독립운동의 기폭제 역할을 했다. 비록 의지와 다르게 유입된 신문물이었으나, 오히려 이를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는 계기가 되었다.                       심용환성균관대학교 사범대학에서 역사교육학을 전공했다. 현재 팟캐스트 <진짜 역사 가짜 역사>를 통해 재미있고 올바른 역사 이야기를 전파하고 있으며, CBS와 공동으로 <심용환의 근현대사 똑바로 보기>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저서로는 『헌법의 상상력』, 『심용환의 역사토크』, 『단박에 한국사』 등이 있다. ]]> Tue, 05 Sep 2017 11:32:51 +0000 9 <![CDATA[위인을 기른 어머니의 참교육 ]]> 글 이성주 역사칼럼니스트위인을 기른 어머니의 참교육항일 독립운동을 말할 때 백범 김구를 빼놓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그가 한국독립운동의 상징이자, 영원한 민족지도자라는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위인이 탄생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누가 있었을까? 바로 어머니인 곽낙원(郭樂圓) 여사다.             무학(無學), 그러나 자식 교육에 헌신하다“나는 네가 경기감사를 한 것보다 더 기쁘다.”1896년 김구는 일본인 쓰치다(土田壤亮)를 처단한 혐의로 인천형무소에 수감됐다. 명성황후의 원수를 갚겠다는 일념 하나로 일본인을 죽인 그가 조선인으로서는 자랑스러웠겠지만, 부모로서는 걱정되었을 게 분명하다. 그러나 곽낙원은 오히려 벼슬을 한 것보다 더 기쁘다며 아들을 격려하고 힘을 실어주었다. 그만큼 그녀의 의연함은 남달랐다.▲1876년 황해도 해주에서 백범 출산 ▲1896년 아들 김구가 치하포 주막에서 일본인 처단. 옥바라지 시작. 김구 탈주 이후 남편 김순영과 함께 투옥 ▲김구가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하자 살림을 도맡아 독립운동가들을 뒷수발 함 ▲1926년 귀국 ▲김구가 이봉창?윤봉길 의거의 배후로 지목되자 1934년 다시 상하이로 건너감 ▲1939년 81세 일기로 세상을 떠남곽낙원은 글을 배우지 못했다. 글을 배우지 못했기에 자식을 더더욱 엄하게 키웠는지도 모른다. 전형적인 엄모(嚴母)라고 해야 할까? 김구가 조금이라도 잘못하면 가차 없이 매를 들고 호되게 혼냈다. 남편 김순영의 병구완을 위해 밥을 짓는 가마솥까지 팔아야 했던 빈궁한 살림살이였지만, 아들 교육에는 아낌이 없었다. 남의 집 허드렛일까지 도맡아 하며 살뜰히 돈을 모았고, 벼루와 먹을 사 아들에게 쥐어주는 어머니였다.일본의 침략 야욕이 점점 노골적으로 드러나고 급기야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데에 이르자, 이에 분개한 김구는 일본인을 처단한 것을 시작으로 운명의 소용돌이 속으로 들어갔다. 이러한 와중에 곽낙원의 기개와 호탕함이 빛났다. 아들 때문에 옥고를 치러야 했지만, 아들을 다그치기보다 오히려 위로하고 의거(義擧)를 응원했다. 또한 이에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아들과 함께 독립운동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김구가 상하이로 건너가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활동하자, 임시정부의 살림살이를 맡아 ‘독립운동가들의 어머니’로 생활한 것이다.든든한 지원자이자 엄격한 선생님예로부터 가정을 지키고 자녀를 가르침에 있어 부모들은 각각의 역할이 정해져 있었다. 엄부자모(嚴父慈母) 즉, 엄한 아버지와 자애로운 어머니다. 그러나 곽낙원은 ‘엄한 어머니’였다. 실질적으로 가정을 이끌어야 했던 곽낙원은 평생 매섭게 회초리를 들었다. 그녀가 회초리를 거둔 것이 김구의 나이 예순이 다 될 무렵이었다. 그나마도 아들의 체면을 생각한 배려였다.“군관학교를 운영하며 많은 청년들을 거느린다 하니 잘못하는 일이 있더라도 말로 꾸짖고, 회초리를 쓰지 않겠다.”이때가 언제였느냐 하면 이봉창·윤봉길의 의거로 일제가 김구에게 현상금 60만 원을 걸었을 때였다(지금으로 따지면 60억 원에 이르는 거금이다). 장성한 아들, 그것도 많은 독립운동가를 이끄는 지도자에게 회초리를 드는 노모(老母)의 모습이 상상이 가는가?또 한 번은 곽낙원의 생일을 맞아 독립운동가들이 생일잔치를 준비하려던 일이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알아서 먹고 싶은 걸 사먹겠다며 잔치보다는 돈을 달라고 요구했다. 해서 돈을 모아 주었더니, 다음날 음식이 아닌 권총 두 자루를 사와 김구와 동료들에게 건네는 것이었다. 이는 사소한 경조사를 챙길 때가 아니라 조국의 독립에 충실해야 한다는 따끔한 질책이었다. 이처럼 곽낙원은 아들의 든든한 지원자이자, 아들이 택한 길에 따르는 책임감을 상기시키는 엄격한 선생님이었다.그녀가 아들의 앞길에 든든한 지원자가 된 것은 나라의 독립을 위해 ‘마땅히 옳은 일’이기 때문도 있겠지만, 그 이전에 ‘아들이 선택한 길’이기에 믿고 응원했던 게 아닐까. 이른바 극성맞은 자녀 교육이 문제되고 있는 요즘이다. 자식의 앞날에 얼룩 한 점이라도 질까, 작은 실패라도 흠이 될까 전전긍긍한다. 자녀의 미래를 생각해 ‘꽃길’만 걷도록 길을 열어주는 것이 과연 아이에게 좋은 일일까. 진정 자식을 위한다면 고되고 힘들지라도 세운 뜻이 분명한 이상 뒤에서 적극 응원하는 것이 올바른 교육방식일 것이다. 시대를 대표하는 이름, 김구가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 곽낙원의 교육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부모가 아이의 삶을 대신 살아줄 수는 없다. 인생은 자기 자신이 설계해야 하고 그에 따른 책임 또한 스스로 질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 아이들이 자라 부모의 도움 없이도 당당히 자기 삶의 주인이 되는 바람직한 길이다.                     이성주시나리오 작가 겸 역사칼럼니스트. 대중과 함께 호흡하는 글쓰기를 목표로 『조선의 민낯』, 『왕들의 부부싸움』과 같은 역사서를 출간한 바 있다. 최근에는 국제정치와 관련된 연구 및 집필에 열중하고 있다. 『전쟁으로 보는 국제정치』 시리즈 1, 2, 3권을 출간 중이다. ]]> Tue, 05 Sep 2017 10:53:37 +0000 9 <![CDATA[긴 터널의 끝에는 ]]> 긴 터널의 끝에는우거진 넝쿨 틈새로 빛은 반짝이며 부서지고주렁주렁 매달린 조롱박은더욱 깊숙이 나를 안내합니다.저만치 희미하게 보이는 터널의 끝에는어떤 풍경이 기다리고 있을까넝쿨길 끝나는 곳에 다다를 때환해질 세상 밖을 기대하며쉬엄쉬엄 발걸음을 내딛습니다. ]]> Tue, 05 Sep 2017 10:38:53 +0000 9 <![CDATA[한국 최초의 사적지 조사, 그 첫발을 내딛다 ]]> 글 김주용 독립기념관 선임연구위원한국 최초의 사적지 조사, 그 첫발을 내딛다우한(武漢)의 8월은 정말 무덥다. 차는 연강대가(沿江大街)를 따라 북쪽으로 달려 우한 국민정부청사로 향했다. 강안구 중산대로에 들어서자, 마치 1920~30년대 공간에 온 듯한 착각이 들었다. 중산대로를 가로질러 남과 북으로 영국·프랑스·독일 등의 조계지 건물들이 지금도 옛 모습을 간직한 채 도열해 있었다.                        우한 국민정부청사에서 흐릿해진 역사를 만나다서양식 5층 건물의 위용을 자랑하고 있는 우한 국민정부청사 벽면에는 ‘우한혁명정부구지(武漢革命政府旧址)’라는 오석 표지판이 부착되어 있다. 입구에 들어서자 의아했다. 과연 이곳이 청사 건물이 맞나 싶었다. 1층 양쪽에는 커피숍과 상점이 들어서 있으며, 실질적으로는 호텔 대화반점(大華飯店)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호텔 로비를 지나 엘리베이터를 타고 3층으로 올라가자, 비로소 작은 전시실이 우리를 반겼다.1926년 국민혁명군 정부는 광저우(廣州)에서 이곳으로 근거지를 옮겼다. 북벌과 함께 단행된 조처였다. 북벌에는 한인들의 역할도 있었다. 1926년 우창(武昌)을 공격한 국민혁명군 제4군에는 헤이그 특사 이준의 아들 이용이 있었고, 제6군에는 한인 간부 포병영 영장 이검운·부영장 권준·부관 안동만이 대표적인 참가 인물이었다. 이들은 황푸군관학교 졸업생으로, 북벌이 시작되면서 장교로 참전했다. 이 가운데 권준은 의열단 단원으로서 국공합작 초기부터 중국혁명에 참가한 인물이었다. 국민정부는 1927년 3월 10일부터 17일까지 이곳에서 국민당 제2기 3차 전체회의를 개최하여 반제국, 반봉건 투쟁을 지속적으로 전개하자고 결의하였다.국공합작과 북벌의 상징이었던 국민정부청사는 제대로 대접받지 못한 사적지의 전형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건물 외형의 웅장함과는 달리 내부의 전시실은 호텔이 주인이고, 국민정부 시절의 역사가 손님처럼 변해 있었다. 그나마 이곳이 1996년 중국 중점문물단위로 지정·관리되고 있다는 사실에 위안을 삼았다. 청사를 뒤로 하고 우리는 중국의 인민예술가이자 한국의 독립운동가인, 화가 한낙연이 활동했던 우한 국민혁명군 팔로군 판사처(辦事處)를 찾아 나섰다.         alt 우한 국민혁명군 팔로군 판사처 무더위를 뚫고 찾은 우한 국민혁명군 팔로군 판사처오후 4시가 지났는데도 더위는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았다. 중산대로에서 좀 떨어진 장춘가 57호 옆 공터에 차를 세웠다. 어깨에 작은 사다리를 걸친 조성진 연구원은 사우나 같은 더위에 연신 땀을 흘렸다. 임공재 사진작가는 온몸에 촬영 장비를 두르고 있었다.이선자 부관장은 우한 국민혁명군 팔로군 판사처를 찾아 담당자에게 우리가 이곳을 조사하는 이유에 대해 설명했다. 이곳 판사처는 한국에서 처음으로 조사를 나온 사적지로, 걸출한 한인 독립운동가이자 화가였던 한낙연이 활동했던 곳임을 재차 강조하여 마침내 촬영 허락을 받았다. 4층으로 이루어진 건물을 촬영하기 위해 임공재 사진작가와 조성진 연구원은 주변에 더 높은 건물을 찾아 사진 촬영을 시작했다.우한 국민혁명군 팔로군 판사처는 국공합작의 산물이다. 팔로군은 이곳을 통해 업무를 관장했었다. 판사처는 무선통신기를 설치하고 중국 공산당의 지시를 전달하거나 정치·군사정보를 수집하였다. 또 왕래하는 당의 인원을 호송하거나 항일군대를 위한 군수물자를 수집·전달하는 업무도 맡았다. 이곳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한낙연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하지만 중국 옌볜조선족자치주 룽징(龍井)에는 한낙연 공원이 조성되어 있을 만큼 그는 중국 조선족을 대표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alt 우한 국민혁명군 팔로군 판사처 입구        중국의 미술가이자 한국 독립운동가 한낙연한낙연은 중국에서 활동한 미술가이다. 지린성(吉林省) 룽징에서 태어나 1914년 즈음 미술을 공부하기 시작한 그는 룽징에서 3·1운동의 자극을 받아 시위에 참여하였다. 이후 일제의 탄압을 피해 러시아를 거쳐 상하이(上海)로 피신하였고, 1923년 국민대표회의가 열릴 때 창조파와 함께 활동하였다. 1924년 2월에는 경호대 경호위원으로 프랑스 조계 및 공동조계에 거주하는 한인들이 일본인들과 접촉하는 것을 감시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 시기에 상하이미술전문학교에서 미술을 배웠다. 중국 공산당에 가입하고, 1929년 프랑스 리옹에서 미술공부를 하는 동안에도 프랑스 공산당에 입당하여 항일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리하여 1937년 7월에는 『파리만보』 사진기자로 활동하며 일제의 중국침략을 폭로하는 기사를 쓰기도 했다.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면서부터는 우한에서 동북항일구망총회(東北抗日救亡總會)를 조직해 항일운동에 나섰다. 동북항일구망총회는 우한 국민혁명군 팔로군 판사처를 책임지고 있던 저우언라이(周恩來)의 지도하에 있었다. 한낙연은 이 단체에서 발행하는 잡지 『반공(反攻)』의 표지 설계와 미술편집을 담당했으며, 여기에 일제의 만행을 폭로하는 글을 발표했다. 또한 선전사업을 더욱 폭넓게 진행하기 위해 한커우(漢口)의 세관빌딩에 선전용 대형 유화를 걸어놓기도 했다.이외에도 친중 외국 인사들과의 교섭을 통해 중국항전 지원사업 추진에도 나섰다. 우한에서 통일전선사업을 맡고 있던 그는 독립운동가들을 적극 도왔으며, 1938년 우한이 함락되자 그해 9월 충칭(重慶)으로 활동근거지를 옮겼다. 옆 건물에서 사진 촬영을 마치고 온 임공재 사진작가와 조성진 연구원의 얼굴에는 희열과 땀이 뒤범벅되어 있었다. 건물 외부에 부착된 애국교육기지 표지판을 촬영한 임공재 사진작가는 본격적인 내부 촬영에 들어갔다. 한 시간 동안 이어진 촬영을 마치고, 일행은 한국에서 최초로 촬영한 사적지라는 뿌듯함을 공유했다. alt한낙연 부부alt한낙연 유작전(遺作展) 도록 alt 한낙연 동상         창사(長沙)에서 우한에 도착하자마자 두 곳의 사적지를 연일 조사한 우리는 밀려오는 허기를 달래기 위해 후난성의 특색음식인 위토우(鱼头) 요리를 먹기로 했다. 중국의 민물고기로 한국에는 없는 머리 큰 고기, 이른바 50kg 가까이 나가는 용어(鱅魚)라 하는 물고기로 요리한 음식이다. 거칠게 간 생고추를 듬뿍 올려놓고 각종 소스로 끓여낸 요리는 한 점 한 점이 예술이었다. 거하게 저녁을 마친 우리는 다가올 내일의 여정을 위해 숙소로 향했다.다음호에 계속 ]]> Tue, 05 Sep 2017 11:36:22 +0000 9 <![CDATA[청년들의 애잔한 자기위로, 가난한 취향 ]]> 글 장근영 심리학자청년들의 애잔한 자기위로, 가난한 취향얼마 전, SNS에서는 ‘가난한 취향’이 화제였다. 특별한 의미가 없어 보이는 소소한 것에서 재미를 느끼는 ‘소소잼’, 불필요한 것에 자신의 일주일치 용돈을 다 써버리는 정도의 소소한 ‘탕진잼’ 같은 단어들이 그런 가난한 취향의 스펙트럼 안에 들어간다.            ‘가난한 취향’은 ‘소박한 만족’과는 좀 다른 의미다. 소박한 만족은 일상의 작은 것들에 만족하는 자세로, 지난번 주제로 다루었던 ‘휘게’가 대표적이다. 일본에는 비슷한 소박함을 뜻하는 단어로 ‘와비’가 있다. 우리나라의 선비 정신도 결국 물질적 만족보다는 정신적인 만족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이런 소박한 만족과 일맥상통한다. 평소에 일상적으로 누리는 따듯한 차·소박한 음식·평범한 친구들과의 잔잔한 모임에서 행복을 얻을 수 있는 삶의 태도를 담고 있다.반면에 가난한 취향은 평소에 참았던 충동을 사소한 곳에 배출하는 일종의 ‘소박한 카타르시스’에 가깝다. 흔히 가난한 취향의 예로 인용되곤 하는 ‘인형뽑기’를 생각해보라. 인형을 뽑는 동안 느끼는 감정은 뿌듯함이나 행복보다는 짜릿한 흥분이나 순간의 후련함에 가깝다. 그것은 마치 일본의 샐러리맨들이 퇴근 후에 즐기곤 했던 ‘빠칭코’와도 비슷하다. 아니 빠칭코는 환전을 통해 재순환이라도 가능한데, 인형은 그저 집에 쌓아놓을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보다 더 충동적이고 소비적일지도 모른다.요컨대 가난한 취향의 본질은 ‘가난한 낭비’이고 이런 낭비는 ‘감정소비’의 일종이다. 감정소비의 대표적인 예는 충동구매다. 충동구매는 필요해서 물건을 구입하는 합리적 구매의 반대말로, 감정적인 욕구를 해소하기 위해서 불필요한 물건이나 서비스를 구입하거나 소비하는 행동을 말한다. 얼마 전 한 시장조사 기관의 결과에 따르면, 응답자 중 53.4%가 충동구매에 대해 긍정적이었다. 같은 조사에서 소비자 10명 중 3명은 ‘다운된 기분을 풀기 위해 평소라면 구매하지 않았을 제품을 구매한 적이 있다’고 응답했다. 그리고 이런 충동구매 경험은 50대에서는 5명 중 1명에 불과했지만, 30대에서는 42%, 20대에서는 49.2%로 매우 높았다.낭비를 통해 좌절감을 견디다이제 질문을 다시 해보자. 왜 젊은 세대는 지금 ‘가난한 낭비’를 비롯한 온갖 형태의 감정소비를 하고 있는 걸까? 가장 큰 이유는 좌절이다. 이들은 괜찮은 직업을 얻고자 하는 노력이 좌절되기 쉬운 세상에서 살고 있다. 최근까지 청년 고용상황은 계속 악화일로였다. 2015년부터 2016년 사이 월별 청년실업률은 연일 전년 동월대비 최고치를 갱신했다. 전반적인 고용상황이 열악해지면서, 상대적으로 그나마 질적으로 나은 몇몇 직장을 향한 경쟁률은 비현실적인 수준으로 치솟았다. 공무원을 예로 들어보자. 한국고용정보원의 2016년 보고서에 따르면, 25세 이상 29세 이하 청년의 절반 이상(53.9%)이 공무원 시험을 준비해 본 경험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20세에서 24세 사이는 47.9%로 나타났다. 또한 안전행정부의 통계자료에 따르면, 9급 공무원 응시자의 비율은 2009년 13만7천여 명에서 2012년에는 15만7천명 수준으로 증가했으며, 2013년에는 20만4천여 명으로 처음 20만 명을 돌파했다. 그에 따라 9급 공무원 경쟁률은 2013년에 17.6대 1에서 2016년에는 자그마치 54대 1로 크게 뛰었다. 54명 중 53명은 취업의 문에서 좌절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좌절 앞에서 우리는 둘 중 하나의 반응을 택하게 된다. 분노하고 공격하거나, 혹은 그 분노를 꾹꾹 참거나. ‘착하게’ 사회화된 사람들은 대개 두 번째 선택인 참기를 택한다. 문제는 인간의 인내력은 한계가 있다는 점이다. 심리학에서는 인내력을 ‘자기통제력’이라 부르는데, 퀸즈랜드 대학 사회심리학과의 로이 바움마이스터(Roy Baumeister) 교수는 일련의 실험을 통해 이 자기통제력의 총량이 제한되어 있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예를 들어, 눈앞에 맛있는 음식을 보여만 주고 먹지 못하게 함으로써 자기통제력을 소모하게 만든 집단 vs 쉬운 수학문제 같은 것을 풀면서 자기통제력을 온전히 보전한 집단에게 똑같이 어려운 과제를 시키면 첫 번째 집단의 수행이 현저히 낮게 나타난다.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고 해도 자기통제력을 미리 소모하면 그 직후에는 자기통제력을 발휘하지 못해서 할 수 있는 일도 못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감정소비는 자기통제력을 충전하는 역할을 한다.요컨대 가난한 취향, 혹은 가난한 낭비는 나를 끊임없이 좌절시키는 세상에서 버티기 위해 자기통제력을 충전하려는 노력인 셈이다. 물론 개개인 스스로가 그런 소소한 낭비를 합리적 소비로 바꿀 수 있다면 더 좋겠지만, 청년 세대가 이런 식으로 자기감정과 노력을 낭비할 필요가 없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 진짜 우리 사회에 주어진 과제일 것이다.            장근영심리학자 겸 칼럼니스트. 연세대학교 심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국책연구소인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에서 활동하며 대학에선 매체심리학·발달심리학 등을 강의하고 있다. 저서로는 『심리학 오디세이』, 『팝콘심리학』 등이 있다. ]]> Tue, 05 Sep 2017 11:38:02 +0000 9